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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인범 . . . . 46회 일치
'''전인범'''(全仁釩, [[1958년]] [[9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1981년 4월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임관하여 30사단 90연대 15중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이래 9사단 29연대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부 전작권 전환 추진단장, 27사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수전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인범은 [[1958년]] [[9월 6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전주화와 [[외교관]]인 어머니 [[홍숙자]]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ref name="a">이혜민. 20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62&aid=0000009617 “부하들 적진 보내는 날 올까 두려웠다.”] 『新東亞』 통권 684호, 154-163.</ref> 유년 시절의 대부분은 서울에 살았으며, 1965년 부모의 이혼 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모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4년 동안 [[뉴욕]] [[맨해튼]]에서 생활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33122 [오래전 ‘이날’] 11월 20일 양파가 눈물 흘린 98 수능], 《경향신문》, 2017년 11월 20일</ref> 1969년 귀국한 뒤에도 그의 모친은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AFN Korea|AFKN]]을 주로 시청하게 했으며 저녁식사 때만큼은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그 또한 『[[:en:Reader's Digest|리더스 다이제스트]]』, 『[[:en:Newsweek|뉴스위크]]』, 『[[:en:Time (magazine)|타임]]』과 같은 시사 잡지를 빼놓지 않고 읽으며 어릴 때부터 국제관계에 대한 감각을 익혀나갔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미국 TV 프로그램 《[[:en:Combat!|Combat!]]》에 나오는 군인 샌더스 중사를 동경하던 그는 12살 때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군사관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육사 진학을 꿈꾸게 되었다. 그 뒤 [[리라초등학교|리라국민학교]]와 [[대경중학교 (서울)|대경중학교]]를 거쳐 197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813572 [人脈] 경기고등학교 출신 군장성들‥ 문·무겸비 군실세… 뜨는 KY그룹], 《한국경제》, 2005년 6월 26일</ref> 육사 동기생 중 성적이 꼴찌에서 두 번째였으나 영어 시험은 만점을 받았던 그는 1981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86년 30사단 90연대 2대대 중대장 시절에는 육군의 우수 전투중대장에게 주는 [[강재구|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초급 지휘관으로 중대원들의 사격 훈련 중 소총 사격 영점을 못 잡는 병사를 데려다가 실탄을 주고 자신은 표적지 앞에 서서 사격을 하게 해 영점을 잡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ref name="c">[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42447 ‘제설작업 하고, 전역사병에게 경례’ ‘괴짜장군’의 퇴임식], 《서울신문》, 2016년 7월 29일</ref> 군사정권 시절 그가 중대장을 역임한 부대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나면 연세대학교를 점령하는 부대였는데, 그는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군인이 대학생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래서 원래는 데모 때 중대장이 맨 뒤에 서서 진압을 지시하게 돼 있는데 그는 맨 앞으로 나가서 돌 맞더라도 제일 먼저 맞고 죽으려고 했다고 과거를 회고하였다.<ref name="b">[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40702 [단독] 전인범 "내 문제, 문재인에게 부담 안 돼... 아내, 구시대 법에 걸려든 것"],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9일</ref> [[소령]]으로 진급한 뒤에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정책장교 및 군사외교협력장교 보직을 받아 많은 통번역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한미연합사령관 [[:en:Robert W. RisCassi|로버트 리즈카시]] 대장으로부터 [[:en:Commendation Medal#Army|육군표창훈장]](Army Commendation Medal)을 받았다. [[중령]] 때에는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 연습처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장교를 맡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합모의 연습을 기획하고 실행한 공로로 2002년 [[:en:Meritorious Service Medal (United States)|근무공로훈장]](Meritorious Service Medal)을 받았다.
2004년 12월에는 [[:en:Multi-National Force – Iraq|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이 [[이라크 전쟁|이라크전]] 때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다국적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국군이 그 외에는 없어 처음에는 직속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그였다. 그래서 바쁘다는 외국군 장군들 대신 브리핑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고자 노력해 점차 조직을 장악하였다고 밝혔다.<ref name="a"/> 그는 [[:en:United States Armed Forces|미군]]과 [[:en:British Armed Forces|영국군]], [[:en:Australian Defence Force|호주군]] 장교 10여 명을 지휘해 5400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이라크 유권자 1400만 명의 투표를 지원 및 감독하였으며, 3500t에 이르는 선거 관련 물자를 각 투표소에 공급하고 치안 유지를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30323 이라크 총선지원 전인범 대령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 기여에 자부심”], 《서울신문》, 2005년 1월 31일</ref> 선거가 무사히 끝난 뒤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대한민국 국군|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en:Bronze Star Medal|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046950 노 대통령 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연합뉴스》, 2005년 7월 11일</ref><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0706&parent_no=7&bbs_id=BBSMSTR_000000000004 이라크 총선 성공지원 공로, 전인범 육군 대령 美 동성무공훈장 받아], 《국방일보》, 2005년 7월 6일</ref>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인질 구출작전을 지휘하여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임무는 군사협조단 단장으로서 [[:en: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국제안보지원군사령부]]에 파견돼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외국군을 설득할 논리가 부족하니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자고 생각하였다. 우선 [[:en:Swedish Armed Forces|스웨덴군]] 소장에게 ‘사람들 살려야 한다’, ‘사무실이 필요하다’, ‘상황실 출입을 허가해달라’, ‘인터넷, 유선전화, 휴대전화 쓰게 해달라’, ‘숙식 제공해달라’ 등을 부탁했다. 상황실에서는 유학시절에 알고 지낸 [[:en:Bundeswehr|독일군]], 미군을 만나 사람들이 죽고 사는 문제이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ref name="a"/> 이렇게 군사협조단을 통해 수집된 인질 및 탈레반 세력의 동향 첩보 등은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는데 기초자료가 됐고, 특히 인질 억류지역에서 동맹군의 불필요한 군사행동을 억제한 노력은 인질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43352 <軍, 아프간 인질 석방 숨은 공로자>-1,2], 《연합뉴스》, 2007년 9월 2일</ref>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80303&parent_no=8&bbs_id=BBSMSTR_000000000138 아프간 인질석방 공로 군인 '훈·포장' 수여], 《국방일보》, 2008년 3월 3일</ref>
2011년 11월 18일 [[:en:United States Department of Defense|미국 국방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영화 《[[:en:Spider-Man in film|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시사하는 교훈을 언급하였다. 그는 “《[[:en:Spider-Man (2002 film)|스파이더맨 1]]》은 우리에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en:Uncle_Ben#.22With_great_power_comes_great_responsibility.22|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는 것을 가르쳐 주고 《[[:en:Spider-Man 2|스파이더맨 2]]》는 원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음을 알려준다”며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미국인들은 《스파이더맨 1, 2》를 평생 동안 적어도 세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VrILCHQl1M Korean General tells Americans to watch Spiderman 1 & 2], 《USAG-Humphreys》, 2011년 11월 18일</ref> 같은 달 21일 사단장 임기를 마치고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으로 영전했으며, 1년 5개월 뒤인 2013년 4월에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겸 한미연합사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2013년 10월 [[3성 장군|중장]] 진급과 함께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605771 전인범 특전사령관, 美 최고 공로훈장 받아], 《연합뉴스》, 2013년 11월 19일</ref> 2013년 현재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 중 최다 훈장 수상자로 알려져 있다.<ref>[http://www.gunsa.kr/bbs/board.php?bo_table=B01&wr_id=151 대한민국 특전사 사령관 전인범], 《군사저널》, 2013년 12월 31일</ref>
특전사령관 취임 후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협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476150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괴짜 사령관’과 특전사의 환골탈태], 《서울신문》, 2014년 10월 23일</ref> [[:en:Picatinny rail|피카티니 레일]]이나 광학장비와 같이 관행적으로 몰래 사용하던 사제 장비들의 사용을 허용하는 등 기존의 과도한 제재 규정들은 폐지시켰으며, 특히 헬기 사격, 천리행군 인증제 도입과 같이 과거에 하지 않던 실전적 훈련들을 대거 강화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3&aid=0000028778 [한국군 코멘터리] 불굴의 ‘지옥훈련’ 더 독해진 특전사], 《주간경향》, 2014년 12월 17일</ref> 우선 일반 병사보다 3배 정도 총을 더 쏘는 특전사 요원의 사격량을 5배로 늘렸고 전진하면서 사격할 때 탄피받이를 못 쓰게 하였다. 탄피 하나 없어지면 전 부대원이 나서서 찾아야 하는 것이 매우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대신 탄피를 주울 필요가 없도록 전진 사격 훈련시 1명이 뒤따라가게 하여 실제 몇 발을 쏘는지 세게 하였다. 또한 사령관 취임 당시 특전사에 체계적인 체력 증진 프로그램이 없어 특전사에서 35년간 복무했고 체력 단련과 관련해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원사에게 12개 코스의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특전사 요원의 허벅지가 평균 1cm 커졌고 체력 프로그램 시행 후 6개월 뒤 미군 특전사 요원들과 경기를 해 수영을 제외한 나머지 종목을 한국 특전사 요원들이 다 이기게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10074 [Why] "특전사 허벅지 1cm 굵어졌다, 그게 내 자랑"], 《조선일보》, 2016년 9월 10일</ref> 이와 같은 훈련들은 특전사의 실제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108010004329 왜 우릴 특전용사라고 부르는가?], 《아시아투데이》, 2015년 1월 8일</ref><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44947§ion=sc2 육군 특수전사령부 설한지 극복-생존훈련], 《브레이크뉴스》, 2015년 1월 9일</ref> 그리고 긴박한 전장상황에서 오역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한미 연합작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해 전군 최초로 한국군은 영어로, 미군은 한국어로 브리핑하는 제도를 시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500588 특전사 창설 57주년 기념식… 내년 2월 이천시대 개막], 《연합뉴스》, 2014년 4월 1일</ref> 전 사령관은 이러한 자신의 개혁적인 행보에 관해 “모든 3성 장군은 4성 장군이 되고 싶어하고 4성 장군이 되는 게 군인으로서 더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다. 일각에선 내가 부대 훈련을 실전적으로 바꾸고 개혁을 하면서 무리수를 두어 4성 장군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특수전사령관이고 내 임무는 4성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백전백승 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특수전 부대를 만드는 게 나의 사명이다”라고 밝혔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1790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영원한 특전맨이자 진정한 군인의 퇴임], 《뉴데일리》, 2016년 7월 28일</ref> 훗날 그가 사령관을 이임한 뒤 특전사에 부대장비 및 개인물자를 납품하고 연구하는 특전사 출신의 한 예비역 대위는 “우리 군은 지나치게 ‘군복제 규정’에 얽매여 있다.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은 유연한 사고를 가진 지휘관이었다. 그는 “‘군복제 규정’보다 임무와 전술향상이 더 중요하다. 사고를 유연히 하고 우수 장비라면 사제라도 활용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전술장비 및 피복의 사용과 발전을 장려했지만, 그가 교체되면서 이런 유연한 사고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우리 군의 유연한 사고는 지휘관에 따라 들쑥날쑥 하다”며 아쉬움을 소회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286112 [무기와 사회] 한국군 전투복], 《한겨레》, 2015년 8월 19일</ref> 뉴데일리 군사전문기자 태상호는 “전인범 前 특수전사령관 같은 깨어 있는 특수전 지휘관들이 (특수부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지만 특수작전에 대한 군내외부의 중요성 인식 부족과 비대칭 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군(Big Army)만 중요시 하는 풍토로 인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라고 현 한국군에 대해 비판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01915 [컬럼] 프로 대접을 못 받는 한국의 특수부대], 《뉴데일리》, 2016년 2월 22일</ref>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227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이천 특전사서 전역], 《연합뉴스》, 2016년 7월 2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199207 [카드뉴스]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라"], 《조선일보》, 2016년 8월 5일</ref>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en:Vincent K. Brooks|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1938년)|김동진]], [[김태영 (1949년)|김태영]] 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ref>[http://www.huffingtonpost.kr/heebum-hong/story_b_11295018.html 어느 ‘특별한 별’ 이야기 │ 전인범 중장 전역식], 《허핑턴포스트》, 2016년 8월 2일</ref><ref name="c"/>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435078 33년 전 목숨 건 구출… 다시 만난 장군과 중위], 《SBS》, 2016년 7월 28일</ref>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728010013908 전인범 중장 전역식 "부하 잘 보살피면 부하들이 알아서 윗사람 보살핀다"], 《아시아투데이》, 2016년 7월 28일</ref>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o9JyXV5Hyo 전인범 장군 전역사 영상(discharge speech of LTG. INBUM CHUN)], 《YouTube》, 2016년 7월 28일</ref>
2016년 10월부터 [[:en:Brookings Institution|브루킹스 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 방문연구원, [[:en:Paul H. Nitze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1년 동안 활동했다. 미국 연구기관의 연수는 연수자가 주제를 선정해 그 분야를 연구하며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른 연구자들과 공유하는 활동을 하는데, 그는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한국의 핵무장, 한미 군사동맹 강화 방안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111010007259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미국, 북핵 심각하게 평가... 미 공격 초래 상황 가고 있어”], 《아시아투데이》, 2017년 1월 12일</ref> 연수 3개월 동안 프린스턴 대학교 등 학교에서 특강,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 참여, 워싱턴 내의 많은 연구소와 기관 발표, 세미나, 회의에 참석해 미국의 생각을 이해하고 한국의 입장을 미국 전문가들에게 적극 설명하였다고 말했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59&bbs_id=BBSMSTR_000000000138&ntt_writ_date=20170117 ‘한국 안정·동북아 평화=美 국익’ 각인시켜야], 《국방일보》, 2017년 1월 16일</ref> 2017년 1월에는 특전사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2만 6천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사단법인 봉사단체인 특전동지회의 제2대 총재로 취임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3180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제2대 특전동지회 총재 취임], 《뉴데일리》, 2017년 1월 16일</ref> 전 총재는 취임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대한민국 친목단체의 새로운 章을 열겠다”고 다짐하며, “현역 후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고, 회원을 편애하지 않는 모두의 특전동지회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역설했다. 같은 달 [[북한]]의 [[김정은]] [[조선로동당|노동당]] 위원장에게 [[대륙간탄도유도탄|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등의 재고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A4 용지 4장 분량의 영문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ref>[https://www.nknews.org/2017/01/dear-kim-jong-un-an-open-letter-from-a-former-s-korean-lieutenant-general Dear Kim Jong Un: An open letter from a former S. Korean lieutenant general], 《NK NEWS》, 2017년 1월 23일</ref>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이 편지에서 그는 “평화를 추구할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라면서 “가장 필수적인 첫 단계는 공공연한 위협의 회피, 핵과 미사일 실험의 중단, 핵무기 개발부터 인권에 이르기까지 신뢰를 증진시킬 협상에 참여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라고 평화 프로세스를 제안했다.<ref>[https://kr.nknews.org/%EA%B9%80%EC%A0%95%EC%9D%80-%EC%9C%84%EC%9B%90%EC%9E%A5%EB%8B%98%EA%BB%98-%EC%A0%84-%EB%8C%80%ED%95%9C%EB%AF%BC%EA%B5%AD-%EC%9C%A1%EA%B5%B0-%EC%A4%91%EC%9E%A5%EC%9D%98-%EA%B3%B5%EA%B0%9C-%ED%8E%B8/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 편지], 《NK NEWS》, 2017년 1월 25일</ref>
그러나 그의 5·18 발언을 문제 삼은 정치권에서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것까지 싸잡아 공격하며 논란이 불거지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143692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부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 징역 1년 법정구속], 《세계일보》, 2017년 2월 8일</ref>, 그는 광주 항쟁에 대한 표현의 부족으로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4649 文 영입 전인범 자진사퇴 "5·18 발언 백번천번 송구… 미국 돌아가겠다"], 《중앙일보》, 2017년 2월 10일</ref> 그는 “저는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 북핵을 바라보는 엄중함과 심각함, 오랜 동안 지속돼온 혈맹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 이를 통한 더욱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 발전이라는 문 전 대표의 안보관을 알리는 데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멀리서나마 문 전 대표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문재인 후보 측 관계자는 “누를 끼친 데 대한 글을 올리시고 미국에서도 돕겠다고 한 것은 ‘자숙’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하며 “안보, 군사 분야에 대한 자문은 계속 하실 것”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7763546 文측, 전인범 미국行에 '선긋기'… "본인 판단"], 《뉴시스》, 2017년 2월 10일</ref>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청와대 관계자는 “대선 과정에서 공을 들여 영입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라인 구상의 한 축이었는데 그가 중도 하차하면서 인사가 꼬였다”고 발언함으로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그를 중용할 계획이었음을 나타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2&aid=0003172701 한반도 상황 긴박한데… 외교안보 라인 인선은 '설왕설래'], 《세계일보》, 2017년 5월 12일</ref>
2017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발전 방안에 대해 발표하였다. 전인범 중장은 이례적으로 [[예비역]] 한국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현직 육군 최고 수뇌부가 참석하는 이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예비역으로는 유일하게 발표했는데, 현직 미군 주요 지휘관들은 물론 전직 미군 수뇌부들로부터 한·미 군사동맹과 한·미 연합전력 극대화 해법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출신으로 평가받고 있어 이 심포지엄에도 초청되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528010015215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미 군사 혈맹, 한국군 주도적 역할 중요”], 《아시아투데이》, 2017년 5월 28일</ref> 그는 발표문에서 “한미간 긴밀한 연합작전과 지휘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술지휘통제자동화체계(C⁴I)가 기반되어야 하며 양국간 언어장벽의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등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고, “미국이 우리나라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고 우리나라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46579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美 'LANAPC'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 및 발전 방안 발표], 《뉴데일리》, 2017년 5월 26일</ref> 또한 심포지엄이 끝나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발표자들 대부분은 기조연설과 발표문에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rising adversary)’으로 지칭했다”면서 “미국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질주하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292284 "美, 아태 지상군회의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 지칭"], 《연합뉴스》, 2017년 5월 25일</ref>
2018년 6월 예비역 신분인 그의 주도로 국회의원회관에서 특수작전 전술 및 장비 현대화를 위한 세미나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그간 국가 안보전략과 국방 관련 정책 토론회는 많았으나, 일선 전투원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전술 및 장비 관련 세미나가 공개적으로 개최된 적은 없었기에 눈길을 끌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4045225 창끝 전투원들을 위한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 큰 호응], 《파이낸셜뉴스》, 2018년 6월 24일</ref> 세미나에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효율적인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육군의 특전사를 비롯해 수색·특공부대, 해군 및 해병대, 공군의 지상작전 부대의 정예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해외의 사례를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한다”면서 “실전에 맞지 않는 전술 및 장비소요(구매 요청 및 구매)는 과감하게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중장은 세미나 참석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형식과 틀을 깬 어법과 행동으로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해당 세미나는 특수·지상작전연구회, 군사전문지 플래툰 등 민간이 주도한 최초의 개방형 군사 세미나로, 세미나 준비를 해온 특수·지상작전연구회 소속 정진만 아세아항공전문학교 교수는 “당초 100명 미만의 규모로 세미나를 준비했는데 150여 명 이상이 참석했고 상당수 인원이 참석을 원했는데 장소가 비좁아서 받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같은 달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에 임명, 9월에는 그를 단장으로 하는 자유총연맹 대표단이 [[:en:West Potomac Park|웨스트 포토맥 공원]] 내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들어 설 한국전쟁 미군 참전용사 추모벽 건립에 1만 달러를 기증했다.<ref>[http://dckoreannews.com/featured/%ED%95%9C%EA%B5%AD%EC%9E%90%EC%9C%A0%EC%B4%9D%EC%97%B0%EB%A7%B9-%EB%AF%B8%EA%B5%AD-%EC%9B%8C%EC%8B%B1%ED%84%B4%EC%97%90%EC%84%9C-%EB%8F%99%ED%8F%AC%EA%B0%84%EB%8B%B4%ED%9A%8C-%EA%B0%9C%EC%B5%9C/ [한국자유총연맹] 미국 워싱턴에서 동포간담회 개최], 《워싱턴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2일</ref><ref>[http://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32597 한국자유총연맹,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지원금 1만 달러 기탁], 《월드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3일</ref> 그는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추모의 벽이 설치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 차원에서 1만 달러를 즉석에서 마련, 기탁하게 됐다”면서 “한국자유총연맹은 특정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 중립을 지키면서 국가에 이익이 되고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국리민복을 기본 가치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ref>[http://www.koreatimes.com/article/1202198 한국전 참전 ‘추모의 벽 건립’ 1만달러 기증], 《미주한국일보》, 2018년 9월 11일</ref>
* 1981. 4.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37기 학사
* 1993. 육본 참모총장실 군사외교협력장교
* 2004.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MNF-I) 선거지원과장
* 2007. 카불 군사협조단장
* 2013.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겸 한미연합사 부참모장
* 2017.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명예고문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리고 있다.<ref>[http://news.donga.com/People/3/06/20110512/37149041/1 ‘전작권 전환 기여’ 전인범 소장이 받는다], 《동아일보》, 2011년 5월 12일</ref>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 [[유용원]]은 그를 ‘군내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20/2013042000200.html 박지만씨 육사 37기 동기들, 청와대·국정원·軍 요직 올라], 《조선일보》, 2013년 4월 20일</ref> 주한미군사령관 [[:en:Curtis Scaparrotti|커티스 스캐퍼로티]] 대장은 그를 일컬어 ‘가장 절친’이라 칭할 정도로 미군들의 신뢰를 받으며 강력한 한·미 군사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1116010009522 주한미군사령관 "한반도 평화·안정 온힘 쏟겠다"], 《아시아투데이》, 2014년 11월 16일</ref> 미 8군사령관 버나드 샴포 중장 역시 ‘한국 군인 중에서는 가장 오랜 절친이며 항상 올바른 조언을 해 주는 고문(顧問)이자 한미 군사동맹의 미래’라고 강조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208010005247 주한 미8군사령관 "한미 군사동맹 강력하다"], 《아시아투데이》, 2015년 2월 8일</ref>
- 문무왕 . . . . 24회 일치
[[진덕여왕]] 4년([[650년]])<ref group="주">[[진덕여왕]] 4년부터 [[신라]]의 독자 연호가 아닌 [[당나라|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ref>에 [[당나라|당]]에 사신으로 파견돼 [[당 고종|고종]]에게 〈[[한국의 삼국시대 시가#치당태평송|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바쳤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이라는 벼슬을 내렸다.<ref name="삼국사기-65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4년(650)</ref>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으로써 [[병부령]]직에 임명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1">《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661)</ref>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ref name="삼국사기-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이어 [[태종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원년([[661년]]) [[6월]] 상중(喪中)이던 문무왕에게 당은 [[고구려]]를 치는 당군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가 [[백제]] 부흥군(復興軍)을 진압하는데 나서줄 것을 거듭 요청해왔다. 평양으로 먼저 군량을 보내면 웅진으로 통하는 물자 수송로가 끊어질 것이고, 그 수송로가 끊어지면 [[웅진도독부]]의 당군들은 [[백제]]군에게 궤멸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왕은 8월에 직접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대전 계족산성|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1"/>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상주(上州) 총관(摠管) 품일(品日)과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또 함락시키고, [[10월 29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당의 조문 사절을 맞이했다. 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보낸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ref group="주">《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대감(大監) 문천(文泉)이라 표기됨</ref>이 와서 문무왕에게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을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1"/> 왕은 이듬해 1월 [[김유신]]으로 하여금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 군은 이듬해 2월에 무사히 군량을 전달하고 귀환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2">《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662)</ref>
3년([[663년]]) 봄 정월에는 [[서라벌]] 근교의 [[경주 남산신성|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또한 [[경주 부산성|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ref name="삼국사기-663"/> 이보다 앞서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에 험준한 주류성(周留城)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避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ref name="일본서기-662">《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원년(662)</ref> 663년 2월에 [[김흠순|흠순]]과 [[김천존|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목베는 등 [[백제]] 부흥군을 더욱 압박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63"/> 결국 부흥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ref name="일본서기-663">《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2년(663)</ref>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게 한다.{{출처|날짜=2018-06-27}} 한편 여름 4월,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3">《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3년(663)</ref> 6월, [[백제]] 부흥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부흥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고,<ref name="일본서기-663"/> 당에서도 [[웅진도독부]]의 장군 유인궤(劉仁軌)의 요청에 따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40만 군사를 보냈고, 유인궤와 별장(別將) 두상(杜爽), 새로 [[백제]]왕으로 임명된 [[부여융]] 등의 수군은 덕물도(德物島)를 경유해 수로로 곧장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3"/><ref name="의자왕-662">《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제6 唐 高宗 龍朔二年(662)</ref> 문무왕 역시 [[김유신]]과 [[김인문]]·[[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데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ref group="주">문헌에 따라 두량이성(豆良伊城)·두릉윤성(豆陵尹城)·두곶성(豆串城)·윤성(尹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ref>을 함락했다. 문무왕은 [[왜인]]들에게 훈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ref name="김유신-중">《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 중</ref>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의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해 버렸다([[백강구 전투]]).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한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9월 7일<ref group="주">《[[자치통감]]》에는 8일로 표기됨</ref>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ref name="일본서기-663"/><ref name="자치통감-663">《자치통감》 권201 唐紀十七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龍朔 3년(663)</ref> [[웅진도독부]]의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문무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앞서 당은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도독에 임명한 뒤,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문무왕을 향해 "평정을 마친 뒤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던 고종의 칙령을 들며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했다. [[신라]]는 임존성이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출처|날짜=2018-06-27}} 결국 문무왕 4년([[664년]]) 2월에 [[각간]] [[김인문]], [[이찬 (신라 관직)|이찬]] [[천존]](天存)을 보내어 당의 칙사 [[유인원 (당나라)|유인원]](劉仁願)과 새로 웅진도독이 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웅진에서 동맹을 맺었다.<ref name="삼국사기-664">《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664)</ref> [[백제]] 부흥군은 문무왕 4년([[664년]]) 3월에 [[사비산성]](泗沘山城)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ref name="삼국사기-664"/> [[백제 부흥운동|백제 부흥]]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백제를 멸망시킨 문무왕이 처음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은 문무왕 4년([[664년]]) 가을 7월, 왕제 [[김인문]]과 [[김품일]],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 [[김군관]],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 [[김문영]] 등에게 [[일선주|일선]](一善)·[[한산주|한산]]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과 함께 돌사성(突沙城)을 쳐서 멸하면서부터였다.<ref name="삼국사기-664"/>
6년([[666년]]) 4월에는 대신 김천존의 아들인 [[나마 (관직)|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인 나마 [[김삼광|삼광]](三光)을 모두 당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6">《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6년(666)</ref> 12월에부터 당은 [[이세적|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현(安陸縣) 사람인 학처준(郝處俊)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는데,<ref name="삼국사기-666"/> 이때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들 사이에 형제 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마침내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남생]]이 아우 [[연남건|남건]]과 [[연남산|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의 성을 거느리고 당에 항복해버리면서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ref name="고구려-666">《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5년(666)</ref> 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정토]]가 24명의 부하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오자, 정토와 그의 부하들에게 옷과 양식, 집을 주어 서울 및 주·부에 안주시키고, 온전한 여덟 성에는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한다.<ref name="삼국사기-666"/>
8년([[668년]]) 2월 [[이세적|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연남건|남건]]이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애썼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ref name="고구려-668">《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ref> 3월에 신라는 북방의 요충지였던 비열홀(比列忽, 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8">《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ref> [[6월 12일]]에{{refn|group=주|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평양으로 간 것이 5월이라고 기록돼 있다.<ref name="삼국사기-671"/>}} 당의 우상(右相)<ref group="주">정확한 관직명은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이다.</ref>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68"/> 이에 유인궤는 약속을 마치고 신라의 선발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인 천강(泉岡)으로 향하고, 문무왕 역시 [[6월 21일]]에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ref name="삼국사기-668"/>
이때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된 대각간 김유신은 풍병(風病)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고,<ref name="김유신-하">《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 하</ref> 일찍이 백제를 치는데 선두로 나섰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지도부의 요직을 맡아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임명된 관직으로 추정한 진격루트는 한성주(한산주)와 비열주(비열홀주) 그리고 하서주(하슬라주) 세 곳으로, 수도 서라벌에서 조직된 군사들은 닷새 후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출처|날짜=2018-06-28}} [[6월 22일]]에 유인원이 신라의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고, 신라군 장수인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8"/> [[6월 27일]]에는 드디어 문무왕 자신이 서라벌을 출발했고, 이틀 뒤에는 여러 도의 총관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당군 총사령관 이적을 만난 신라의 김인문은 고구려의 평양 북쪽 20리 되는 지점인 영류산(嬰留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8"/>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군과 회합할 것을 명했다. 한편 비열성주행군총관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의 벌판에서<ref name="삼국사기-668"/>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남건이 거느리고 온 군사와 충돌했는데, 함께 있던 당의 번병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와중에 김문영의 신라군은 앞으로 나서서 고구려군과 맞서 크게 이겼고, 신라군이 이기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당병은 겨우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한다.{{출처|날짜=2018-06-27}} 이 사천에서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은 훗날 문무왕에 의해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은상으로 받았고, 전사한 한산주소감(漢山州小監) 김상경(金相京)도 그와 준하는 상이 내려졌다. 다만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음에도,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 하여 포상에서는 제외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8"/>
[[9월 21일]]에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해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 98명의 수령(首領)을 이끌고 백기를 들고 항복했고,<ref name="고구려-668"/> 신라군의 대당총관 김인문이 보장왕을 이적 앞에 데려가 꿇어앉히고 그 죄를 세었다.{{출처|날짜=2018-06-27}} [[남건]]은 성문을 닫고 항거하면서, 병력을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9월 26일]] 승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여니 신라의 5백 기병을 필두로 한 군사들이 평양으로 들어가 평양을 함락시켰다.<ref name="고구려-668"/><ref name="삼국사기-671">《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1년(671)</ref> 이때 평양성 함락전에서의 신라군의 활약은 기록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평양을 함락하고 한 달이 지난 뒤에 문무왕이 남한주에서 행한 논공행상 과정이 남아있다. 평양성 외곽에서는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이 평양성 대문에서의 싸움에 세운 공으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천 섬을 받았고, 군사(軍師)인 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에서 전공을 세워 술간(述干) 관등과 벼 1천 섬, 부양(斧壤)의 구기(仇杞)는 평양 남쪽 다리 위에서 높은 공을 세워 마찬가지로 술간 관등과 벼 700섬을 받았다. 평양성 내부에서는 임시[假] 군사(軍師)인 비열홀의 세활(世活)이 평양의 소성(小城)에서 전공을 세워 고간(高干) 관등과 벼 500섬을 받았고, 서당당주(誓幢幢主) 김둔산(金遁山)은 평양 군영에서의 전공이 으뜸이라 하여 사찬 관등과 조 700섬을 받았으며,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고구려의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인 공으로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받았다.<ref name="삼국사기-668"/>
10년([[670년]]) 봄 정월,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한 데 대한 보복 조치였다.<ref name="삼국사기-670">《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0년(670)</ref>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병사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ref group="주">당나라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ref>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당나라가 병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자 백성(白城)<ref group="주">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대</ref>으로 후퇴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6월]]에는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이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검모잠은 [[안승]](보덕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충성을 약속했다.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ref group="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ref>에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의 남은 세력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를 웅진도독부로 보내, 신뢰 차원에서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한편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가져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쳐서 땅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장수들 중 싸우지 않고 퇴각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면직으로 매듭지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같은 달,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12월,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자, 대아찬(大阿湌)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11년([[671년]])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침공하였다. 당의 지휘를 받던 말갈병이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것을 후방에서 쳐서 3백 명을 죽이고, 당군이 백제를 구원하러 올 것에 대비해 대아찬 진공(眞功) 등을 시켜 수군으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또한 6월에 장군인 화랑 죽지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했으며, 당병과 석성(石城)에서 싸워 5,300명을 죽이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7월에 당은 행군총관 설인귀를 신라에 파견했는데, 왕은 사신을 맞아 위로하는 대신 강가의 풀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 어귀에는 무기를 감춰둔 채, 수풀 사이를 오가며 틈을 노려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인귀는 26일에 당이 신라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해주었는데 신라가 그 은혜를 잊고, 고구려를 도와 당을 치고 있다며 항의하는 내용과 함께 마음만 먹으면 당이 신라를 집어삼킬 수도 있음을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 법사 임윤(琳潤)을 시켜 왕에게 보냈다.<ref name="삼국사기-671"/>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신라가 선왕 때로부터 당에 협조하고 여러 번 신라의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는 지경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고를 내어 번번이 당군을 지원했던 사실과 당이 처음 신라와 했던 약속들을 어기고 신라가 점령하여 지배하던 땅을 무단으로 거둬들인 일을 비난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1"/> 같은 날, 백제 수도였던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10월 6일]] 당의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ref name="삼국사기-671"/>
14년([[674년]]) 1월 당에서 숙위하다 귀국한 대나마 덕복(德福)이 가져온 신력(新曆)을 반포했다.<ref name="삼국사기-674">《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4년(674)</ref> 같은 달 문무왕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고 백제령을 지배하에 두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고종은 조서(詔書)로 문무왕의 관작을 깎아 없애려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4"/> 왕의 동생으로 당에 머무르고 있던 우효위원외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그를 귀국시키는 편에 많은 군사를 딸려보내 대규모로 신라를 치려 했다.<ref name="삼국사기-674"/>{{refn|group=주|인문은 이를 간곡히 사양했으나 고종이 들어주지 않았다.<ref name="김인문">《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김인문</ref>}} 문무왕은 8월에 서형산(西兄山) 아래에서 대규모 사열식을 벌이고, 9월에는 영묘사(靈廟寺) 앞길에서 다시 대규모 사열식과 함께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 달에 고구려왕 안승을 다시 [[보덕국|보덕왕]]으로 봉했다.<ref name="삼국사기-674"/>
15년([[675년]])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지급했다.<ref name="삼국사기-675">《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5년(675)</ref> 2월에 당의 장수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린 뒤 돌아가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되었다. 문무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앞서 깎아 없앴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75"/> 이때에는 대부분의 백제령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주와 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에 문무왕은 당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5"/> 과연 가을 9월, 당은 설인귀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신라에 보내 천성(泉城)을 치게 했는데, 이때 당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ref group="주">앞서 문무왕에 의해 처형당한 김진주(金眞珠)의 아들이다.</ref>이 향도(鄕導)로서 당을 도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그러나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그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전마 1천 필까지 신라의 손에 들어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9월 29일]]에는 이근행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자 당군은 말 30,380필과 무수한 병기를 남겨 놓고 도망갔다.<ref name="삼국사기-675"/>{{refn|group=주|다만 이러한 전쟁 와중에도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있었다.<ref name="삼국사기-675"/>}} 나아가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해에 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얻었다고 한다.<ref group="주">하지만 아달성(阿達城)이나 적목성(赤木城)에서는 성을 침공한 말갈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약탈당했으며, 아달성주 소나(素那)나 적목현령 탈기(脫起)가 이때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석현성(石峴城)이 당병에게 함락되었을 때는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고, 칠중성은 당과 거란·말갈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간신히 함락은 면했지만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신라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당은 다시 도림성(道臨城)을 함락시켰다.</ref>
- 박근혜 . . . . 23회 일치
아버지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공립보통학교(현재의 [[구미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서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재직 중이였다.
===== [[5·16 군사 정변]]에 관한 박근혜의 회고 =====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6월 29일에 북한의 천안함에 대한 군사 도발 규탄 및 대응 조치 촉구 결의(의안번호 1808656)의 원안가결에 찬성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91/pdf/291za0008b.PDF "제 291회국회-제8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한편 경선 8일 뒤인 [[2012년]] [[8월 28일]]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유족과 노동자들의 거부와 반대로 무산되었다.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구 [[민주통합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ref name="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8/28/0200000000AKR20120828048951001.HTML?did=1179m 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8월 28일</ref> 그러나 [[이상일]] 대변인은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대결 정책이며<ref>[http://www.ajunews.com/view/20140503193440291 북한 노동신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비난']</ref>하였고 드레스덴 선언에 대해서도 이산가족 상봉이나 지원에 따른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이 북남관계 개선의 선차적인 고리가 아니라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가 최우선이라며 맹비난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0029 북한 국방위 "박근혜 '드레스덴 연설' 공식 비난"]</ref> 또한 8.15경축사에서 제안한 대화 및 협력에 대해서도 금강산 관광객 총살이나 천안함 및 연평도 도발에 대한 사죄없이 5.24 조치 해제 등 대북정책 기조전환을 압박했다.<ref>[http://www.nocutnews.co.kr/news/4074931 北, 朴 8.15 경축사 비난…5.24 조치 해제 촉구]</ref>
==== 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 여론 조작 사건 ====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과 [[국군사이버사령부]]가 직원들을 동원해 [[문재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쓰는 등 박근혜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국가정보원]] 사건'이 불거져 수사를 진행 중이던 [[2012년]] [[12월 16일]], 박근혜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토론 중 당해 사건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이었음에도, 해당 사건의 증거가 없는 것으로 나왔다고 발언하였다. 토론회 직후 대선 3일 전인 [[12월 16일]] 일요일, 서울지방경찰청은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을 단 흔적이 없다고 사전 발표했다. 그러나 대선 이후인 2013년 6월, 검찰은 경찰의 발표와 달리 국정원 직원들이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댓글을 단 사실이 있다고 상반된 발표를 했다.<ref>성혜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2&aid=0000013643 원세훈 '선거법' 적용키로...영장은?],뉴스와이,2013년 6월 7일</ref> 더구나 서울지방경찰청이 거짓 발표를 할 당시 국정원 직원들이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댓글을 단 사실이 있는 것을 이미 확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ref>이윤상,[http://news1.kr/articles/1175796 김용판, 100여페이지 분석자료 폐기…수사방해 분석결과 나오기도 전 보도자료 작성],뉴스1, 2013년 6월 14일</ref>
===== 국군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의혹 추가 폭로 =====
{{참고|국군사이버사령부}}
[[2014년]] [[1월 7일]], 법원이 국회에 제출한 판결문에는 "옥도경 전 사이버사령관은 연 전 사령관이 보직을 마치고 국방부 정책기획관으로 근무할 당시 '내곡에서 온 정보가 있다. 시간 되실 때 전화로 말씀드리겠다'거나 '국정원 국정조사 관련 깊이 생각해보고 대처 바람'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라는 내용이 있어 지도부가 깊이 가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ref>[http://www.nocutnews.co.kr/news/4350737 野 "사이버사령부 댓글 '셀프 재판'…아연실색"]</ref> [[2014년]] [[12월 30일]],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1심 판결에서 '부대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행의 구체적인 내용 전부를 알고 지시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금고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고 현재 국방부 검찰단의 항소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ref>[http://www.vop.co.kr/A00000831970.html 軍사이버사 ‘대선댓글’ 연제욱·옥도경 등 집행유예,선고유예 ]</ref>
|북한의 군사 위협, 박 대통령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피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 의해 촉발된 여권 내 개헌 관련 논란, 북측의 장성급 군사회담 내용 공개
|‘朴대통령 직접 개입 의혹 확산,’ ‘우병우 황제수사 논란’, ‘대규모 촛불집회 예정 보도 확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강행’ 보도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은 임기 초반에는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ref>'진행형' 세월호참사 속 박근혜정부 1년6개월 맞아, 연합뉴스 2014.10.19</ref> 임기 중반으로 가면서도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 한미일과의 군사적 동맹에서 한국이 소외된다는 비판과 함께 외교정책이 중국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ref>美·中 갈등 심화… 박근혜 정부 '3대 외교 정책(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모두 꼬일 수도, 조선일보 2013.12.02</ref><ref>박 대통령 ‘친중 반일’ 이면엔 미·중 사이 줄타기, 경향신문 2013-10-09</ref> 여기에 중국 또한 일본과의 관계회복을 도모하는 쪽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여, 박근혜 정부 들어 동북아에서 한국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45437 유연해지는 중국의 대일 외교, 우리는, SBS뉴스 2015.04.24]</ref><ref>[http://www.hankookilbo.com/v/374aee9c3ef94bacbe98e033f3245f76 말 한마디 못한 채… 한국 외교 속수무책, 한국일보 2015.04.27]</ref>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은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일본의 아베 정권과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철저한 전략적 외교로 실속을 챙기는 가운데 한국만이 외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ref>[http://news.jtbc.joins.com/html/407/NB10872407.html 고도의 외교술로 실속 챙긴 아베…한국외교는 수렁에, JTBC, 2015-04-30]</ref><ref>[http://kr.wsj.com/posts/2015/04/30/%EC%95%84%EB%B2%A0-%EC%B4%9D%EB%A6%AC%EC%9D%98-%EB%8A%A5%EC%88%98%EB%8A%A5%EB%9E%80%ED%95%9C-%EC%99%B8%EA%B5%90%EC%88%A0-%EB%B0%95%EA%B7%BC%ED%98%9C-%EB%8C%80%ED%86%B5%EB%A0%B9-%EC%95%95%EB%B0%95/ 아베 총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 박근혜 대통령 압박, 월스트리트저널, 30. April 2015]</ref><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51959901 박근혜 정부, 미-중 사이 갈팡질팡…아베의 '친미 외교'에 완패] 한국경제 2015-05-19 </ref>
*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 군사 정변]]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朴 "5.16은 구국혁명..유신 역사판단 맡겨야"|url=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01&article_id=0001700646§ion_id=100§ion_id2=265&menu_id=100|출판사=연합뉴스|저자=심인성|날짜=2007-07-19|확인날짜=2007-07-1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41012193019/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보존날짜=2004-10-12|깨진링크=예}}</ref>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민주통합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ref name="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
==== 5·16 군사 정변 발언 ====
박근혜는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에 대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였다.<ref>[http://news.donga.com/3/all/20120716/47794426/1 박근혜 "5·16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동아닷컴》, 2012년 7월 16일 작성]</ref> 이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9%가 박근혜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많은 논란을 낳았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4734.html 5·16 옹호 박근혜 발언 국민 절반이 "동의 못한다"《한겨레》, 2012년 7월 29일 작성]</ref> 논란이 심해지자 8월 7일 한 토론회에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80736231&sid=0106&nid=009<ype=1 한 발 뺀 박근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ref> 역시 이를 두고 정치권의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였다.<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80722081464158 박근혜, "5·16 정상적인건 아니지않나" 해석분분 《아시아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ref> [[5·16 군사 정변]]에 대한 박근혜의 발언에 대하여 5·16을 두고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19933 연좌제 피해자들이 연좌제를 써먹는대서야 《뉴데일리》, 2012년 8월 19일 작성]</ref> 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부적절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출처|날짜=2008-06-16}}
[[5.16 군사 정변]]의 주역이던 [[박정희]]의 차녀였으므로 그가 [[5.16]]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그가 정계에 입문한 [[1998년]] 이후 줄곧 이슈가 되어 왔다.
[[한명숙]] 전 총리는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5.16을 '구국의 혁명'이으로 규정한 데 대해 '망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명숙은 [[2007년]] [[7월 19일]] "그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미화한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는 69만 국군 장병들에 대한 모독이자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민주 영령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son">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569422</ref> [[한명숙]]은 이어 "아직도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분들의 유가족이 서러움과 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며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을 만나 고개를 조아렸던 때가 언제라고 또다시 독재의 유전자를 드러내냐"고 비난하였다.<ref name="son"/> 한 전 총리는 자신은 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유신시절 자신을 고문하고 투옥했던 가해자들을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박 후보의 망언은 이처럼 유신독재의 피해자들이 내미는 용서와 화해의 손을 뿌리치고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잔인한 짓"이라고 언론에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ref name="son"/>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육군 . . . . 22회 일치
== Military Science(군사과학) ==
=== Military Plans(군사 계획) ===
=== Military Statistics(군사 통계) ===
=== Military Directionism(군사 방향주의) ===
* '''Military-Political Decision-making(군사적 정치적 의사 결정)'''
* '''Local Military Government(지방 군사 정부)'''
* '''Military Aviation(군사 항공)'''
* '''군사 항공''' 발명을 발견한 국가와 전쟁 중일시 '''{{{#green +2%}}}'''
* '''군사 항공''' 발명을 발견하지 않았을 시 '''{{{#red -2%}}}'''
* '''군사 항공''' 발명을 발견하지 않았을 시 '''{{{#red -2%}}}'''
* '''군사 항공''' 발명을 발견하지 않았을 시 '''{{{#red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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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항공''' 발명을 발견하지 않았을 시 '''{{{#red -6%}}}'''
* '''군사 항공''' 발명을 발견하지 않았을 시 '''{{{#red -6%}}}'''
* '''군사 항공''' 발명을 발견하지 않았을 시 '''{{{#red -6%}}}'''
* 모든 부대의 군사 전술 능력치 '''{{{#green +25%}}}'''
* 모든 부대의 군사 전술 능력치 '''{{{#green +25%}}}'''
* 모든 부대의 군사 전술 능력치 '''{{{#green +25%}}}'''
* 모든 부대의 군사 전술 능력치 '''{{{#green +25%}}}'''
- 박경석(1933) . . . . 20회 일치
[[대한민국]]의 [[군인]], [[시인(문학)|시인]], [[소설가]]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출신이다.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33년 [[연기군]] 조치원읍 본정(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원리 88번지)에서 출생 하였다. 이후 [[대전고등학교]] 31회로 졸업하고, 17세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꾸며,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17세라는 나이로 인해 자격 미달이 되었지만, 같은 나이의 당시 권력자 [[원용덕]] 장군의 자제 원창희 씨의 육사 입교 압력이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들어오자--완전 개꿀 금수저--, 형평성 문제로 덩달아 박경석 생도도 합격되었다. [[http://blog.daum.net/koreanmarinecorps/17321|국방일보 박정인 장군 회고록에서 발췌한 원창희, 박경석 생도 합격 비화]]
이후, 전장에서 더 많은 위관장교 자원을 필요로 하자 정부는 이들을 신설된 [[육군종합학교]][* 12.12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동 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고 갑종 전우회 대부였던 [[하소곤]]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두환]]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오자복]] 예비역 대장,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 예비역 대장, [[박정희]] 정부에서 경호실장을 지낸 [[차지철]] 예비역 중령 등이 육군 종합학교 출신이다.]에 입교시켜 단기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박경석 소위도 이 때 임관된 초임장교 중 하나였다. 이들은 생도 2기 출신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새로 신설된 제9사단[* 사단장 [[장도영]], --5.16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얼굴마담, 핫바지 노릇했던 그 때 그 사람-- 사단 참모장은 [[박정희]] --5.16 군사정변에서 대통령에 오른 그 분--]의 소대장으로 갔다. 그 1명은 당시 권력자였던,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의 아들 원창희 소위였다. 원창희 소위는 임관과 동시 후방의 육군본부로 배속받았다.[* [[원용덕]] 장군도 최종 보직이 헌병 총사령부 사령관이었고, 아들 [[원창희]] 장군도 헌병의 꽃 헌병감 보직을 마지막으로 육군 준장에서 전역하였다.]
1951년쯤,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기 육사 생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려, 미 8군의 도움으로 육사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중위 신분이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사 생도 복귀를 놓고 논쟁하다가 결국은 새로운 모집 공고에 의한 [[육군사관학교]] 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등이 판을 치던 그 육사 11기생들이 첫 정규 4년제 육사 생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부터 위관, 영관급 등 연간 100명의 장교들이 미국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 군사학 유학을 떠나는데, 여기서 배운 자유진영의 선진 군사학은 귀국 후, 전술 교관으로서 후배 장교들의 군사 지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한국군의 현대화에 있어 양적 팽창에 이어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에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하면서 전승 행진을 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군 위관, 영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은 한국군의 현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 전쟁 전후, 전쟁으로 인한 양적으로 급성장한 한국군은 1950년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으로,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영향도 있었지만, 미국의 선진 교육문화를 배워 온 일부 장교들의 엘리트심 발동으로 5.16이라는 쿠데타를 잉태하기도 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어]]와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도 1950년대 한국군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 도미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965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과 월남의 파병 요청 형식으로 [[조문환]]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주월 한군군]] 군사원조단 비전투부대 [[비둘기부대]]가 파병되었고, 뒤이어 미국의 대 한국 군사원조 약조인 [[브라운 각서]] 체결과 야당의 반대 등 진통 끝에 전투병력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 야당과 여당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월남 파병에 있어 한국군의 처우에 대해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특히나 집권 여당 공화당의 초대 당 의장을 지낸 [[정구영]]변호사는 "이 장관 엄밀히 따지면 호지명의 월맹은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우리가 그들과 총칼을 맞대야 하는거요. 내가 보기엔 그간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 정책의 일로 싸웠고, 지금 미국은 제국주의 위세를 떨치려 월남에서 군사적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도와주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소. 물론 이 장관 말대로 우리는 가난하오. 월남전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다가 피를 뿌리며 돈을 벌기보다는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것이 옳다는 생각이오."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28576|[[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발췌. [[http://gyuraeman.blog.me/110018127454|(대한 군사 원조의 약속인 브라운 각서)]]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를 포함한 경제적 원조와 월남이라는 특수 시장 개척에 한국 기업을 포함한다는 파병의 조건으로 협상하였다.]
[[재구대대]][* 초대 대대장 [[박경석]] 중령에 이어 정치군인 [[노태우]], [[박희도]] 등이 줄줄이 이 자리에 앉앗다]는 강원도 홍천에서 월남 파병 군사 훈련을 받던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중대원을 살린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준 [[강재구]] 대위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대대이다. [[재구대대]]는 그 이름답게 월남전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세계 만방에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용맹을 빛내었다. 그런 재구대대의 초대 대대장에 박경석 중령이 임명되었다.[[http://cafe.daum.net/pks6464/MnHf/114|재구대대를 포함한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활약상은 파병부대를 지휘한 장군들의 각종 수기에 나와 있지만 박경석 장군의 재구대대장 시절의 회고부분은 월남전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군은 월남 파병에 있어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독자적인 한국의 작전지휘권과 기타 수송분야의 한국업체의 참여를 미국에 정식 요청하였고, 협상 끝에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자체적인 작전지휘권을 얻어냈다. 이에 탄생한 것이 바로 [[http://panzercho.egloos.com/2765059|중대기지전술]]이다. [[주월한국군]] 전투부대는 각 마을마다 중대별로 기지를 세워, 민간인과 월맹군.베트공의 민간 침투를 차단하는 이른바 물과 물고기를 분리한다는 전술을 통해 지역 민간인의 지지를 얻으면서, 전투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수월해졌다. 나중에 이 작전이 성공하자 대만과 기타 자유진영의 군사고문단이 배우고 가는 등 대단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월남전]]에 있어, 초대 [[주월 한군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서도 "장교 이하 모든 장병이 누구하나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갈수 밖에 없었다"[* "나를 지금 억르누고 있는것이 고엽제 문제와 고엽제를 앓고 있는 전우에요.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방문도 하고 격려도 하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월남에 간 것은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간 것이지, 나나 우리 장병들이 가고 싶어서 월남에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국가를 위해서 월남에 갔고, 실지 국가의 경제 발전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면, 그것이 없어더라도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갔다면 국가가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화방송 1993년 정치드라마 [[제 3공화국]] 22회 월남파병 편에서 인터뷰 전문]을 하는 등 국가의 월남파병 장병들의 고엽제 문제와 국가 차원의 보상 문제가 남아있고, 일말의 강제적 파병의 성격을 띄었지만, 용병이다, 돈을 받고 군대를 보낸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한다는 일각의 생각은 매우 잘못되고 편협한 것이다. 분명 [[월남전]]은 우리 스스로 원해서 파병을 결정한 전쟁이 아니었지만, 당시 기성세대가 목숨 걸고 싸워주었기에 그에 상응한 군사원조와 경제적 원조 및 이익을 바탕으로 1970년대 공업화를 이루어 우리 아들, 딸들이 적어도 풍요롭게 사는데 있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주지없는 사실이다.[* 2000년 일부 진보적인 학자라 자처하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 등이 월남전 파병 기간 동안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자 [[채명신]] 장군, [[박경석]]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 등 월남전 참전 원로들이 나서서 이에 반박하는 글과 함께 학살 주장에 무게를 잡는 학자들을 상대로 토론을 제안했다. 동년 한겨례 신문에서 이와 관련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의 신문을 기고하자, [[채명신]]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하여 일어난 내란이며, 5.18 희생자와 시민군들을 광수1, 2로 지칭하며 현재 북한의 고위층과 비슷하다며 개드립을 쳤던 그 지만원 박사가 맞다. 삼만원도 안되시는 그분--이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 나와 이 주장에 반박하며,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 학자들과 토론을 했다. 이와 동으로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http://book.naver.com/search/search.nhn?query=%ED%95%98%EC%96%80%EC%A0%84%EC%9F%81|[[하얀전쟁]]]]의 원작자 [[안정효]] 작가는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로써, 당시 한국군의 학살이 있었다며 자신의 소설에 실화를 밝혔는데, 적과 민간인의 구별과 식별이 어려웠던 현대전 특히 민간인 복장으로 게릴라전이 빈번했던 월남전에서 총기 오발 또는 오폭으로 민간인을 살해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이나, [[유학성]], [[우종림]], [[전성각]]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기술되어 있다. 일단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 논의는 충분한 시간과 자료 수집, 그에 근거한 증언이 더 필요하다. 성급히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이유로 베트남 전쟁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금물이다. 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나라가 타국의 전쟁에 정당한 명분 없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며 민간인 학살 역시 아예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기 때문. 또한 [[라이따이한]] 문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전쟁은 보다 더 신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1972년 10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으로 있던 박경석 대령에게 당시 실세 중에 실세 육군 수경사령관 [[윤필용]] 사령관의 참모장 [[손영길]] 대령이 찾아왔다. 육사 12, 13기 출신의 신참 대령들의 연대장 가용 청탁 쪽지였는데, 박경석 대령은 이 쪽지의 명단의 인물들을 대차게 거절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한달 뒤, 박경석 대령은 거의 확실시 되던 준장 진급에서, 진급에 한참 밀리던 윤필용 사령관의 직속인 김성배 대령 준장 진급자 명단이 바뀌었다. 그후 2번이나 연거푸 준장 진급 누락끝에 진급이 된 박경석 준장의 첫 보직은 [[6사단]] [[부사단장]] 겸 [[DMZ]] 내에서 발견된 땅꿀 특수개척팀장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2300209105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3-09-23&officeId=00020&pageNo=5&printNo=22296&publishType=00010|박경석 장군의 준장 진급 비화]][*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창군 및 초창기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였던 진급문제에 관해서다. 물론 후자에 기술하겠지만, 이 고질적인 진급문제가 [[5.16]]과 [[12.12]] 일어났던 원인이기도 했다. 창군과 한국전쟁으로 군은 양적 성장에 힘입어 장교들의 진급이 빠른편이었다. 소위 달고 몇개월 후에 대위, 소령 더구나 전쟁으로 인해 단숨에 영관급에서 장성으로 진급하는 일이 많았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초고속 진급은 멈춰졌으며, 특히나 [[군사영어학교]] 출신 70여명 대부분이 장성으로 진급했고,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자리를 계속하여 번갈아 앉는 사태가 생겼다.--대표적인 인간들이 [[정일권]]과 [[백선엽]]이다. 이들은 대장 진급 후에 육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 자리를 번갈아 2번씩 그 자리에 앉았다. 이러니 아래 후배 장교들의 불만과 원성이 쌓여갔으며, 특히나, [[육사 5기]]의 대령급과 [[육사 8기]]의 중령급에서 그 불만이 많았다.--특히나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정규 육사 출신들과 단기 육사 및 비육사 출신간의 진급문제가 두드러졌다. 박경석 장군 같은 경우에도 1950넌에 소위 임관후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있었는데. 1955년 갓 소위 임관한 정규 육사 11기생들이 1970년 후반 영관급 대 장성급으로 진급이 역전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이등병에서 장군까지 지낸 [[최갑석]] 장군의 증언과 그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 창작:IDF . . . . 20회 일치
한자어 번역은 "국제방위대". 냉전시기, 자유진영 국가들의 군사협력 공동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로서 탄생하였다.
IDF 군인들은 평소 세계각지에 설치되어 있는 IDF 기지에서 생활하고 훈련과 평시 임무를 맡는다. 가맹국의 출동 요청에 따라서 군사 활동을 시작한다.
IDF 회원국은 자국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IDF에 군사 파병을 요청할 수 있다. 파병을 요청할 수 있는 비상사태는 외국의 침략, 국내의 내전, 대규모 폭동, 대규모 재난 등이다. 회원국의 요청에 따라서 IDF 이사국의 승인 결의와 함께 파병이 이루어진다.
* 군사고문 위원회 : IDF가맹국에서 파견된 장성, 장교로 구성된다. IDF 군과 각국과의 군사 부문에서 협력과 조율을 담당한다.
* 사령부 : IDF 군의 장교들로 구성된다. IDF의 군사 작전 지휘를 담당한다. 제복군인이 중심이 되어 있으며, 문민통제 원칙에 따라서 사무국에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사무국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다.
=== 군사부문 ===
파견 주둔지의 계엄 지역에서 치안 유지, 주요 시설 경비를 담당한다. IDF 군사 부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문으로서, IDF 병력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수의 인원이 평화유지 부대에 복무하고 있다.
경호훈련을 받은 경호요원들로 구성된다. 파견 주둔지에서 요인의 경호를 담당한다. 경호원이므로 다른 군사 부문과는 달리 사복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경호원으로서의 실력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IDF는 독자적으로 군사재판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IDF 가맹 조약에 따라서 각 가맹국 내에서 IDF 병사에 대한 사법권 행사를 인정받고 있다. 민간인 대상 범죄는 사안에 따라서 해당국 사법부에 인도할 수 있다. 군사재판은 불공정하지는 않으나, [[엄벌주의]] 경향이 상당히 강하며, 몇십년 형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몇몇 가맹국에는 IDF 군사 교도소가 설치되어 있어, 유죄 판결을 받은 IDF 병사가 수감되어 있다.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병사는 불명예제대 처분을 받고 본인의 국적국으로 추방된다.
몇몇 국가는 분담금을 기지 부지 대여, 군사 교도소 설치 대여 등의 비용으로 '상쇄'하는 경우도 있다.
=== 군사적 평가 ===
파병을 결의하는 이사국 측에서는 IDF는 파병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권이 짊어지게 될 정치적 부담과 책임을 일종의 공동분담과 국제기구라는 틀을 사용함으로서 희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유효성이 있는 조직이다. 특히, 자국군=자국 국민의 사망으로 인한 부담이 비교적 덜하다는 점에서 강대국들은 IDF를 타국의 군사개입을 쉽게 할 수 있고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다.
소국에서는 자국이 타국의 침략을 받아 점령 등을 당했을 때의 대비책으로 IDF에 가맹하고 있으며, 군사정권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한 몇몇 정부에서는 기존에 독재 정권과 협력하거나 군정을 하던 군부에 대한 경계 의식이 강한 탓에 IDF에 가맹하는 경우도 있다. 내전을 겪었던 나라나, 침략을 받았던 나라에서도 치안유지 병력확보나 보다 나은 안전 보장을 위하여 가맹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측면에서 IDF는 여러 나라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 IDF의 가맹으로 메겨지는 분담금은 실제로 각 국이 자국의 주도로 '쓸만한 군대'를 IDF와 같은 규모로 키우는 비용과 기간을 고려하면 IDF 가맹은 싸고 간편하게 적절한 군사력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IDF는 비교적 저렴한 군사비로 비상시에 "훈련도가 높은 군대"에게 확실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각 국 정부 입장에서는 비교적 경제적인 '군사 보험'으로 여겨지는 셈이다.
선진국 출신자가 사무국, 군간부 등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IDF의 내부 구조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문제의 한가지 원인은 IDF가 자체적으로 사관학교 같은 교육 시설을 갖추지 않아, 지휘관 교육 등 본격적인 군사교육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체적으로는 하사관 교육 이상의 교육 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아, 장교층을 선진국 출신에 의존하는 문제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김재규 . . . . 19회 일치
||<:> '''학력''' ||<:> [[경북대학교|경상북도중등교원양성소]] [br] [[육군사관학교]] 2기 [br] [[육군대학]] [br] [[한양대학교]] [[대학원]]||
해방 후 김천중학교[* 現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現 [[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6.25때 후방에서 보급병과 장교로 근무하느라 전공은 커녕 북한군과 마주친 적조차 없다.]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박정희]]와는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 동기생으로 인연을 맺었는데 고향이 같고(경북 구미) 군에 몸담기 전에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았다. 이후 1954년 9월경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육군참모총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고,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김종오]], [[박병권]], [[민기식]], [[김용배]], [[김계원]], [[이세호]], [[임충식]] 등은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들이 아니다. 다만,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재현]]이 보여준 추태가 워낙 커서 앞의 인물들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계급)|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5.16 군사정변]]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다른 국방부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파견 임명되었다.[* 이 당시 국군 장성들이 하던 비리들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김재규가 비리가 없었다는 것은 그가 참군인이었다는 것의 반증이다.]
위 항소이유서에서 보다시피 '''현재 [[최순실]]이 [[박근혜]]와 함께 기업들에게서 돈을 뜯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40년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돋을 뜯어내었다. 1970년대 아버지가 했던 사기행각을 딸년이 그대로 2016년까지 써먹은 셈이다. 당연히 [[최태민]]의 범죄행각을 비판하는 민원이 빗발쳤으나,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에게 직언을 할 용기를 가진 관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소수만이 직언을 했다 핍박받는 실정이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박선호, 유성옥, 김태원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어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군사정권 전체적인 부분에서 보면, 박정희라는 머리가 따이면서 군사정권의 내실이 붕괴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에서 3선이나 한 인물이었다. 이후 10월 유신을 하면서 완전히 타락한 바람에 잊혀지곤 하지만, 3선을 한 자체로 어떻게든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제거당하고 전두환이 직선제는 경험도 못한 체육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공고함이 확실히 헐렁해졌으며, 독단적으로 전방병력과 특전사를 움직이고, 정치적 정당성도 없던 결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에게 극도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군기무사령부의 후신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김재규의 [[https://v.kakao.com/v/20180807060202827?from=tgt|사진이 붙여진다는 기사가 났다.]]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그 뒤 실제로 5·17 쿠데타를 통해 더욱 폭압적 군사정권인 [[전두환]] 체제가 들어선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기무사의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 이후 고강도 개혁이 시행되며, 기무사의 후신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김재규의 사진이 다시 내걸릴 전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만 사령관실이나 회의실은 사령부 자체가 신설되는만큼 사진 자체를 치우고, 사진은 역사관 같은 곳에 함께 걸릴거라는 모양.
그 시절에 학교 [[스쿨버스]]가 청계고가차도[* 마이크로버스 이상은 통행금지이다.]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는 [[도시전설]]이 있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비슷한 스타일의 [[교복]]은 [[폭풍간지]]였다고. 그런데 10.26 사건 후 학교 부지가 몰수크리. 마침 중경고 근방에는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고등학교]]가 있었고, 한강중 근처에는 [[용강중학교]][* 당시에는 용산여자중학교.]이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 위치를 바꿔버린 것.[* 하필이면 [[한강중학교]]가 이전한 곳에도 근방에 [[남중]]인 오산중학교가 있다. 이것 때문에 현재 한강중에는 여학생이 훨씬 많다.] 그 와중에 교훈이며 교표며 싸그리 갈렸다가 [[1999년]]에 와서야 교훈은 원래대로 환원됐다.
- 정승화(육군) . . . . 15회 일치
|||||||||| [[대한민국 육군]]의 [[제1야전군사령관]] ||
'''[[10.26 사건|파란만장한]] [[12.12 군사반란|현대사]]에 휘말려 [[이등병]]으로 강제 강등 및 예편 당했던 비운의 [[육군참모총장]]'''.
[[대한민국]]의 [[군인]]. [[육군사관학교]] 5기, 최종 계급은 [[대장(계급)|대장]]. [[종교]]는 원래는 [[불교]]였다가 후에 [[천주교]]로 [[개종]]했으며 [[세례명]]은 베드로다.
[[경상북도]] 김천군(현 [[김천시]]) [[봉산면]] 출생이다. 상관을 잘못 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었다.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임관]]한 뒤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하필 강태무/표무원 [[소령]]이 [[월북]]해 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 3사단 백골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보임되어서 참전하였는데 [[군단장]]이 [[유재흥]] 장군이었고 그 전투는 [[현리 전투]]였다. 이 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일도 있었다. 탈출할 때 한 화전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보답으로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5.16 쿠데타]] 때는 방첩대장(현재의 명칭은 [[국군기무사령부|국군기무사령관]])을 역임했다.회고록에 따르면 이후의 원수지간이 되는 노태우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에 있었는데, 방첩대의 특성상 정치 분야에 관여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너무 그 쪽(정치)에 열중하지 마라. 군인이라면 야전에서 일하는게 더욱 군인답지 않겠나'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이 때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들의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였으나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인 [[김재춘]]과 함께 이 사건을 덮기로 하였다. 김재춘은 5.16쿠데타에 가담해서 한때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랐으나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육사 8기생 그룹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서 군부정권 핵심부에서 밀려났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3공화국, 4공화국을 거치면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제7보병사단]][[사단장|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인사국장, [[제3군단]][[군단장|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후에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그가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여하간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한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때 신군부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10.26 사건]] 문서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사건 당일 [[김재규]]는 대통령이 연회가 있으면서도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정 차장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고,[* 다만 뭔가 수상쩍다는 건 느꼈는지 차 안에서 김재규가 "목이 마를 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라." 하면서 준 사탕을 바로 바닥에 버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도 암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대통령이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 변호하였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기소되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에서 대장으로서의 체면을 지키지 않고 온갖 고문을 동반한 수사를 받고, 군사재판의 판결에 의해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불명예 전역]](강제 예편)해야 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최악의 처분이자 수치였으며,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 시 받을 [[화폐|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도 겪었다. 수감기간 중 [[한미연합사|한미연합]][[사령관]] [[존 위컴]] [[장군]]이 [[생일]][[케이크]]와 축하카드를 보내 준 것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정승화는 노태우가 당선되자 조용히 정치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어 전두환 정부에서 강등 조치된 장교들의 계급 환원 처리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육군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된 돈과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는 12.12사태 당시의 피해자로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증언 했다. 1993년에는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육본 헌병감), 하소곤(육본 작전참모부장) 등 12.12 사태 당시 육본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반란 혐의로 고발 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좆논리|모종의 이유를 들어]]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했다. 이것으로 기세등등해진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군본부 측 장군들을 외려 군사반란, [[무고]] 혐의 등으로 역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고 혐의 역시 기각됐다.
* 가족으로은 아내인 신유경 씨와 3남 1녀가 있다. 자녀 중 셋째인 정이열 씨는 아버지처럼 육군사관학교(육사 38기)를 나와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 및 전역했다.
- 진종채 . . . . 15회 일치
1925년 [[경상북도|경북]] [[포항시|포항]]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졸업한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8기로 졸업했다.[* 진종채를 군내 요직에 중용했던 [[박정희]]도 대구사범과 육사를 함께 졸업했다.] [[김종필]], [[김형욱]]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동기다. [[서종철]], [[노재현]], [[윤필용]] 등과 함께 [[전두환]] 등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꼽힌다.[*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에 숙청된 윤필용과 달리 진종채, 서종철, 노재현은 [[10.26 사건]] 때까지 군에 영향력을 행사, 영남 군벌 3인방으로 불렸다.]
대대장 월북 거짓 보고 사건의 여파로 [[1979년]] [[제2작전사령관|제2군사령관]]으로 보직 이동했다. 보안사령관 후임자로 전두환을 적극 추천하였고, 갓 소장에 진급한 전두환이 핵심 요직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이 결정은 나비효과처럼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10.26 사태 후 규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이 됨으로써 전두환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후원자여서 그런지 12.12 군사 반란 이후 세 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고[* 12.12 군사반란 당시 야전군 사령관은 김학원 제1군사령관(중장), 진종채 제2군사령관(대장), [[이건영]] 제3군사령관(중장)이다. 이 중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진종채 제2군사령관을 제외한 제1, 3군사령관은 반란 이후 보직 해임되었다. 그리고 제1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던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이, 제3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핵심 맴버였던 [[유학성]]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임명되었다. ] [[1980년]] [[대장(계급)|대장]]에 진급하였다. 제2군사령관 임기 중이던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의 계엄군의 지휘계통 상에 있었지만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유혈 진압에 있어서 진종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진해화학(1987년 [[한일합섬]]에 인수) 사장을 맡은 것 외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고소되었으나 결국 불기소처분 되었다. 이 때 사위인 조준웅 검사[* 2007년 삼성그룹 특별검사였다.]가 해당 수사팀에 속하였다가 장인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제외되었다.
- 태종무열왕 . . . . 13회 일치
김유신의 주도와 김춘추의 동조로 이루어진 정략적인 측면이 강했던 이 혼인을 통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진지왕계와 옛 금관가야계 귀족간에 정치 ·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지왕계(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을, 금관가야계([[김서현]] · 김유신)는 진지왕계의 정치적 위치를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이러한 상호 이익에 입각해 이루어진 정치적 결탁은 신라의 중고(中古) 왕실의 진골 귀족 내에서 하나의 신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성골]](聖骨)계로 대표되는 기존의 구 귀족집단의 견제와 반발을 받았다. 무열왕은 부계가 진지왕의 자손이고 모계가 진평왕의 자손으로 양쪽 모두가 왕족인 성골에 속했지만, 무열왕 이후 부계만이 왕족인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그를 상징적인 진골 최초의 임금으로 평가한다.{{출처|날짜=2018-06-29}}
이듬해인 [[648년]] 12월에 김춘추는 드디어 아들 [[김문왕|문왕]](文王)과 함께 직접 [[당나라|당]](唐)에 입조하였고<ref>《자치통감》 권199 唐紀十五太宗文武 貞觀 22년(648)</ref> [[당 태종|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자감 (중국)|국학]](國學)을 방문하여 [[석전대제|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에 태종의 호출로 사적으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김춘추는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天朝)를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사온데, 백제가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천병(天兵)을 빌려주시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주시지 못한다면, 우리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요,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태종에게 원병 파병을 호소해, 태종의 허락을 받아냈다.<ref>《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5/진덕왕|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2년(648)]]. “二年... 遣伊湌金春秋及其子文王朝唐 ...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跪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強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翦 除凶惡 則敝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爲左武衛將軍 (2년...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ref>
당에도 즉위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여, 무열왕 즉위년에 [[당 고종|고종]](高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신라왕의 책봉을 받았으며,<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탈취하였음을 전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은 3월,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ref name="신라-655"/> 또한 무열왕 3년([[656년]])에는 {{출처|날짜=2018-06-30|1=신라의 개국 공신인 사로 6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고,}} 당에서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軍主)로 삼았으며, 가을 7월에는 김문왕을 다시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6">《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3년(656)</ref> 귀국한 뒤 문왕은 무열왕 5년([[658년]]) 정월에 부왕으로부터 집사부의 [[중시]](中侍)로 임명되고,<ref name="신라-658">《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5년(658)</ref> 김인문도 무열왕 6년([[659년]]) 여름 4월에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 파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서 당에 파견되는 등,<ref name="신라-659">《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6년(659)</ref>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즉위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해<ref name="신라-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왕권을 보다 전제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열왕 7년([[660년]]) 3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인 당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소정방과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이 인솔한 수륙 13만 군사를 파병하였다. 원병을 요청하러 보낸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신구도행군의 부대총관(副大摠管)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지위가 더해졌다.<ref name="신라-660"/> 무열왕은 바다를 건너온 당군을 영접하기 위해 [[5월 26일]], 대장군 [[김유신]]과 [[김진주 (신라)|김진주]](金眞珠){{.cw}}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ref group="주">신라 10정(十停) 중 하나로, 현재 [[경기도]] [[이천시]]에 있던 부대</ref>에 이르렀고, 21일에 태자 김법민을 보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덕적도|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아, [[7월 10일]]에 백제의 [[사비성]](泗沘城) 앞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당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할 5만 신라군의 지휘는 태자 김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품일|김품일]](金品日)과 [[김흠순|김흠춘]](金欽春) 등이 맡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서 머물렀다.<ref name="신라-660"/>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군 사령관 소정방은 9월 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이끄는 1만 군사만을 사비성에 남아서 지키게 하고, 포로로 잡은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의 왕족과 고위 신료, 1만 2천 명의 백제 백성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신라측 인사로 소정방과 동행한 것은 김인문과 사찬 김유돈(金儒敦), [[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이었으며, 왕자 김인태(金仁泰)가 [[사찬]](沙湌) 일원(日原) · [[급찬]](級湌) 길나(吉那) 등이 신라군 7천 명을 데리고 유인원을 도와 사비성을 수비했다.<ref name="신라-660"/> 당에서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고, 웅진도독으로 왕문도(王文度)를 파견하여 9월 28일에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무열왕을 만나 고종의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는데, 예물을 주는 과정에서 왕문도는 급사(急死)하여 다른 사람이 대신 일을 마쳤다고 한다.<ref name="신라-660"/>
이미 의자왕이 항복한 뒤부터 백제 땅에서는 부흥군들이 일어나 신라 · 당군과 전쟁을 벌였으며, 고구려도 11월 1일에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해 와서 군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백제 부흥군에 대한 공세에 나선 무열왕은 10월 9일에 태자 법민과 함께 여러 군사들을 인솔해 이례성(尒禮城)을 쳐서 18일에 함락시키고 인접한 백제의 20여 성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30일에는 사비성 남쪽 산마루에 있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해 1,500명의 목을 베었다.<ref name="신라-660"/> 11월 5일에는 계탄(雞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해 7일에 함락시키고 7백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22일에 서라벌로 귀환해 논공행상을 벌였는데, 앞서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좌평]](佐平) 충상(忠常) · 상영(常英)에게 [[일길찬]](一吉湌) 관등을 주어 총관(總管)직을 맡기는 등 포로로 잡거나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도 처벌하지 않고 관직을 내리기도 하였다.<ref name="신라-660"/>
백제를 멸망시킨 뒤 무열왕은 변경의 수자리 군사를 폐지하였다.{{출처|날짜=2018-06-30}} 또한 압독주(押督州)를 옮겨 설치하고 도독을 임명하였다.<ref name="신라-661">《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8년(661)</ref>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는 도중 병사하였다.
- 장기오 (공무원) . . . . 12회 일치
1958년 창설된 특전사의 전신인 공수특전단의 창설멤버로 차지철 대위(포병간부 임관), 전두환 대위(육사 11기), , 장기오 대위(육사 12기), 최세창 중위(육사 13기)와 함께 1958년 미국에 유학하여 특수레인저 코스를 수료하고 한국군 최초로 윙뱃지를 달았던 군인으로 유명하다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12기]] 출신으로 [[하나회]]의 일원이었다.
[[대한민국 육군|육군]] [[3성 장군|중장]] 예편 이후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장관]]을 역임하였고 [[1996년]] 12·12 군사 반란이 [[문민 정부]]에 의하여 사법처리가 확실시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 1997년 12월 22일 12·12 군사 반란 가담자가 사면된 뒤 대한민국과 미국의 범죄인 인도 협정이 발효될 예정을 보이자 [[1998년]] 귀국해 자수했다.
* [[1975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대한민국)|육군 수도사단]] [[연대 (군사)|예하 연대장]](당시 [[대한민국 육군|육군]] [[대령]] 신분).
* [[1976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대한민국)|육군 수도사단]] [[연대 (군사)|예하 연대장]] 재직 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진급.
* [[1978년]]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육군 특전사령부]] [[여단 (군사)|예하 공수여단장]].
* [[1981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대한민국)|육군 수도사단]] [[사단 (군사)|사단장]] 보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2성 장군|소장]] 진급.
* [[1984년]] [[수도군단|육군 수도군단]] [[군단 (군사)|군단장]] 보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3성 장군|중장]] 진급.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12기]] [[공학]]사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분류:인동 장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나회]][[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서울공업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
- 막부 . . . . 11회 일치
고대 중국에서 [[장군]]이 전쟁에 출전할 때, 막(幕)을 치고 부(府, 관서)를 설치하여 군사 행정 업무를 실시했는데 이를 '막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막부 체계를 근거로 하여 [[사무라이]]가 중심이 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이 역시 막부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에서 장군은 [[황제]]에게 여러 권한을 위임받게 되는데, 실질적으로 독자적인 군사행정조직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 부(府)를 설치하게 되면 독자적으로 장군의 부(府)에서 근무하게 될 속관을 뽑아서 임명할 수 있고, 부(府)를 통하여 군사, 사법, 행정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이를 상징하는 부월(생살여탈권) 같은 상징물을 받았다. 막부는 현대로 치면 [[계엄령]] 하의 '계엄사령부'처럼 일정 지역, 시기 동안 제한적으로 전권 통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이러한 부의 개설은 반란의 평정이나 대외 원정 등. 중대한 군사 작전 사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일반적인 행정조직으로서는 대응하기 어려워, 장군이 전권을 행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설치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전장에서 평시 행정조직처럼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중앙 정부에 모든 사안을 보고하고 지시를 따르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
일본의 막부는 원래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 본래 일본 조정은 지금의 긴키 지방에서 큐슈 일대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지금의 간토 지방이나 도호쿠 지방은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하면서 해당 지역 선주민과 싸워 이를 정복하는 군대의 지휘관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삼아 그에게 막부를 열고 해당 지역의 독자적인 군사와 사법권을 부여하던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이 당시는 중국의 사례와 같이 일시적인 군정권에 불과하여 특수한 정권 체계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막부 체계가 나타난 이유는 일단 조정이 군사적으로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 일단 도호쿠 지방까지 정벌이 완료되자, 일본 조정은 막대한 군비가 드는 국군(國軍) 제도를 폐지해버리고, 군사를 수도의 경비대와 [[한반도]]와 가까운 큐슈 다자이후의 경비병 수준으로 축소하였다. [[섬나라]]인 일본은 일단 혼슈 평정이 완료되자 당장 외적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고, 군사력의 필요성이 낮았기 때문에 이 같이 과감한 결단을 내려서 국가의 재정을 아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군대는 [[경찰]]의 역할도 겸비하는 것이었으므로 '군사력 해체'는 곧 '경찰력 해체'와도 같은 것이었다. 국군이 해체되자 일본의 국내 치안은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는데, 각지에서 크고 작은 [[도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헤이안 말기에 각지에서 보이는 [[슈텐동자]] 같은 오니 전설은 이러한 도적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각지의 [[호족]]들은 새로 개척된 농지의 상속권, 소유권이나 농업 용수의 사용 같은 것을 놓고 사적인 다툼을 벌였는데, 이러한 분쟁 역시 치안 악화를 가져왔다.
이 가마쿠라 막부는 겐지 일족이 단절되고 불과 3대만에 외척인 호죠 씨에게 실권을 빼앗긴다. 이후에 [[겐무 신정]] 시기에 [[고다이고 덴노]]에게 호죠 씨 정권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지고 말았으나, 이러한 사례가 선례가 되어 훗날 호죠 씨 정권이 무너진 뒤 조정까지 제압하고 새로운 덴노를 옹립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자신을 가마쿠라 막부를 세웠던 겐지(源氏) 일족임을 자처하며 교토 인근에 막부를 세우고 군사와 정치를 장악하였으니 이것이 '무로마치 막부'이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와 마찬가지로 무로마치 막부도 전국의 무사들을 통솔한다고는 해도 그 장악력은 비교적 느슨하였다.
히데요시 사후에 권력투쟁 끝에 일본의 실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금의 도쿄 지역인 에도에 막부를 세운다. 이 [[에도 막부]]는 이전과는 달리 간토 지역을 독립적으로 장악하고, [[산킨고타이]] 제도를 비롯한 대책을 사용한 덕에 이전의 막부들에 비해 통제력이 매우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 때조차도 각 번의 다이묘들은 해당 지역의 군사와 사법, 행정을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등 여전히 지역분권이 강했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10회 일치
동원령 1단계. 군대가 없고 경찰이나 민병대 같은 준군사조직이 전부인 상태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예시는 현대의 [[코스타리카]].
전쟁을 벌이는 국가와 할 수 있는 행동. 해당 국가만 평화협상에 참가하는 Separate Peace와 해당 국가의 동맹 모두가 평화협상에 참가하는 For the Alliance가 있다. 전황이 좋다면 무장 해제, 군사적 통행권, 괴뢰국화, 영토 요구와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상대가 받아들일 확률이 높아지지만 전황이 나쁘다면 이와 같은 조건을 내걸어야 상대가 받아들인다. 물론 그 정도까지 가면 전에 세이브한 데이터를 불러오자. 평화협상이 체결되면 평화협상으로 변동이 생긴 국토 외의 모든 국토는 전쟁 전 상태로 돌아온다. 또한 평화협상 이후 일정 기간은 선전포고가 불가능하다.
자원, 청사진, 군사 유닛, 프로빈스를 두고 일발적 거래를 제안한다. 프로빈스는 국민지역이 아닌 지역만 거래할 수 있다. 또한 청사진, 군사 유닛, 프로빈스 거래는 동맹국끼리만 가능하다.
* Assume Military Control(군사지휘권 요구)
해상 국가의 군사 통제권을 요구한다.
* Ask for Military Access(군사통행권 요구)
군사 통행권을 요구한다.
해당 국가가 연구한 기술 중 플레이어가 연구하지 않은 기술의 청사진을 훔쳐온다. 플레이어가 채택하지 않은 군사 교리나 아직 연구할 수 없는 기술의 청사진을 훔쳐오기도 한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발리고 강화조약을 맺으면 인도차이나 연방의 소유권을 넘겨 받을 수 있는 디시전이 발동한다. 이러면 미국의 "대일본 최후통첩" 디시전이 해금되는데, 미국은 중일전쟁과 그에 딸린 각종 이벤트 때문에 일본을 싫어할게 뻔하므로 이 디시전을 발동한다.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면 미국의 애완견[* 민주화, 중국 지역을 중화민국에게 반환, 모든 괴뢰국 해방, 한반도가 대한민국으로 독립, 영미와 군사 통행권&불가침 조약 체결, 불만도 +20%, 미국의 괴뢰국화.]으로 전락한다. 인공지능이 잡을 경우 100% 미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게 엠바고 처먹기를 선택하고, 이후 "진주만 공습" 디시전을 갈긴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장관 . . . . 10회 일치
각 국가의 장관진을 차지하는 인물들은 각자 하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당 특성은 여러가지 요소에 보너스를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패널티를 주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내각진 중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제외한 8명을 자기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 있지만, 민간 분야 장관은 불만도가 2%, 군사 분야 장관은 불만도가 1% 올라간다.
>완고한 개혁가는 자신의 정치적 가치와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 체제를 퍼뜨리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할 의지가 있다.
>근엄한 제국주의자는 흔들림 없는 제국주의자다. 그에게는 매력도 천재적인 관리 능력도 없지만 단 한 가지는 가지고 있다. 자신의 국가를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드려는 광신적 열정 만은. 정치적 방법이건 군사적 방법이건, 그는 그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참모는 전직 군인으로, 참모진에서 전략을 강의하던 사람일수도 있다. 이제 그는 언제나 "취미"였던 외교 분야에 자리를 잡았다. 참모는 그의 낡은 군사적 정치 관점을 따르는, 군사력으로 이루어지는 외교에 특화된 인물이다. 그 때문에 참모는 단세포적이고, 상상력이 부족하며 지루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 긍정적인 효과: 군사 통행권 요구 비용 -75
>부패한 도둑 정치가는 능숙한 관리자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썩어빠졌기에, 군사 기금과 군용 보급품은 보통은 그와 친구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버린다.
* Military Entrepreneur(군사 사업가)
>군사 사업가는 전직 군인으로, 대전쟁 당시 싸웠던 인물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전선의 병사들에게 총과 빵을 쥐어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 생각은 그가 과학의 세세한 부분을 놓치기도 한다.
>이론 과학자는 명문대 출신의 늙었지만 유능한 교수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이론과 응용 두 분야의 전문가이다. 하지만 군사적 문제에서 민간 분야가 큰 성과를 보일만한 시간에, 이론 과학자는 힘겹게 우선 순위를 매긴다. 이 때문에 그는 전자공학과 통신 같은 중립적인 분야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가 충분히 괴상한 인물이라면, 비밀 병기는 그의 전문 분야가 될 것이다.
- 유승민(정치인) . . . . 10회 일치
> 경제전문가인데요, 알고보면 군사적 식견이 엄청나다. 군사적 식견과 전략이 대단하신 분이다. 그리고 국방위원장으로서 여, 야에 대한 배려 그리고 균형감각이 뛰어나신 분.
>— 19대 국회 새정치민주연합 [[백군기]] 의원[* 육군 대장출신의 대표적인 민주당계 군사전문가이다]
|| ▲ 유승민 의원실 집무실에 있는 군사장비 모형들.[* 잘 보면 시중에서 파는 [[프라모델]]이 아니라, 해군이 증여한 것으로 보인다.] || ▲ '''KFX 사업'''관련 공군본부 [[국정감사]]를 준비 중인 유승민 의원. 빼곡하게 공부한 흔적이 보인다. ||
그 외에도 6.25 참전 소년소녀병에 대한 보상 법률안을 국회 역사상 처음으로 대표발의 했으며, 입대한 병사들에게 예산이 부족하다던 국방부에서 사관생도들에게는 나이키,아디다스 운동화, 심지어는 축구화 테니스화까지 지급한 행태를 보고 국방부 종합감사를 실시하라고 국방부에 주문했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종합성적 1등의 여생도가 불이익을 받아 남생도로 바뀐 사태를 따져서 결국 그 여생도에게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하였다. 이에 야당 국방위 간사였던 안규백 의원은 '''합리적인 대안을 잘 도출하시는 분이고, 남의 억울함을 못보는 정의로운 분'''이라 유승민 국방위원장을 칭찬한 바 있다.
2017년 현재 [[임종석 UAE 특사 파견 논란]]으로 화제되고 있는 UAE와의 군사협약에 대해서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도 유승민이었다. [[http://www.nocutnews.co.kr/news/772179|''UAE 파병'' 결정, 문서없이 구두로만 이뤄져]] 구두협약으로 파병이 결정된다는 것에 의문을 가졌고, MOU와 관련된 것이 아니냐. 유사시 군사개입을 약속한 것이 아니냐며 당시 2급비밀로 분류된 4건의 문서 공개를 요구했다. 당시 김태영 장관은 UAE가 원하지 않는다며 이를 거부하고 파병과 상관없다고 해명했으나, 실제로 MOU와 파병이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을 이후 인정했다.
한일 군사정보 포괄보호협정(GSOMIA)도 절차상의 하자와 국민동의 미흡을 지적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찬성입장을 보이고, 사드 조기배치 및 추가 2~3포대 설치를 주장했다. 그리고 독자 핵무장은 반대하지만, '공포의 균형'을 근거로 전술핵무기의 재배치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미 [[유럽]]에서 시행되고 있는 NATO식 핵공유를 모티브로 삼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NCND(Neither Confirm Nor Denied) 즉 전술핵무기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는 전략을 사용할 것이라 토론에서 밝혔다.
대선토론부터 시작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난 이후에도, 유승민 후보는 일관되게 사드배치 조기완료와 추가도입을 주장했고, 전략성 모호성이라는 개념과 국회비준 운운하는 문재인정부를 '''사드배치를 왜그리 머뭇거리냐''' '''운동권식 사고로는 국정 망친다''' 고 거세게 비난하였다. 그 이후 북한의 잇다른 ICBM도발과 6차 핵실험이 발생하자 결국 9월 7일 사드배치를 완료하였다. 또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에서도, 유승민 의원은 '잡음이 있긴 했지만 그 자체는 찬성' 의 입장이였다. 2016년 당시 야당이였던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을 배신한 밀약''' 이라고 거세게 비난하였고, 당시 문재인 전 대표도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으나, 2017년 8월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연장되었다.
- 최세창 . . . . 9회 일치
[[1953년]] [[경동고등학교|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57년]]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77년]] 육군 특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으로 보임되었고 [[1979년]]에 일어난 [[12·12 군사 반란]] 당시 [[하나회]]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3공수특전여단을 지휘했다.
[[1980년]] [[5월 20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3공수특전여단에 실탄 배부와 실탄 사용을 지시했으며 나중에 사단장, 육군 제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합동참모의장,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 [[대한민국 국방부]]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모의 참여 주요 임무 종사·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8월 15일 사면됐다.<ref>{{뉴스 인용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3기 졸업
* [[미국 육군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졸업
*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졸업
* [[12·12 군사 반란]]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하나회]][[분류:경동고등학교 동문]][[분류:경주 최씨]][[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
- 스트라테고스 . . . . 8회 일치
스트라테고스란 '군사적 지도자', '군사령관'을 의미한다. 고대로부터 그리스어에서 이는 주로 고위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시대별, 국가별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장군]]'과 비슷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필리포스 2세 이후로 스트라테고스를 특정한 지역에서 왕의 권력을 대리하는 장군-지방장관의 직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례는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받은 헬레니즘 왕국에서도 이어져서, 스트라테고스는 특정 지역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군이자 지방의 행정을 처리하는 장관의 권한을 가진 직위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스테라테고스는 일반적으로 한 '테마'(주州)의 군사-행정 장관의 지위였으며, [[장군]]이나 [[제독]]으로 번역된다. 스테라토게스는 군사직위의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었는데, 아치스테라테고스(archistrategos ,대장군), 프로토스테라테고스(protostrategos , 제1장군)이나 히포스테라테고스(hypostrategos, 하위-장군) 같은 지위가 나타나게 된다.
근대 그리스 왕국, 현대 그리스 공화국에서 스테라테고스(stratigós)는 4성 장군에 해당하는 군사 계급으로서, 그리스 군의 최고 계급이다. 과거에 그리스 왕국에는 이보다 상위계급인 스트라타체스(Stratarches, '군의 지배자' 라는 의미)가 존재하였다. 이는 [[원수]]에 해당하는 군사 계급으로서 국왕이나 왕실 가족 가운데 몇몇 사람에게 주로 부여되었으며, 몇몇 퇴역장성에게 주어지는 명예 지위로 쓰였다. 하지만 그리스 왕정이 폐지된 이후로 이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요원 . . . . 8회 일치
>게이샤는 숙련된 연주자이자 무희이기도 하며, 또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접대 및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 자신들의 기예를 이용합니다. 이들의 재능은 군사적인 일에도 도움될 수 있습니다: 일부 남자들은 약하며, 쉽게 이성을 잃기도 합니다. 또 다른 남자들은 여자에 빠져 배반하기도 합니다.
* 군사첩자
외국에서 데려온 군사 고문. 게이샤에게 약하다.
군사 행정 시 능력 +1, 모병 감독 시 능력 +1
장교 스킬 요구. 군사 행정 시 능력 +1, 이 요원이 배속된 군대에 있는 모든 부대의 탄약&화살 +25%
병참장교 스킬 요구. 군사 행정 시 능력 +1, 행동스킬 실패 시 탈출할 확률 +15%
* 군사고문(Military Advisor) - "소총을 구매하시오, 당신의 적수들이 먼저 구하기 전에 말이오."
훈련교관, 병참장교 스킬 요구. 군사 행정 시 능력 +1, 모병 감독 시 능력 +1, 부대 훈련 시 능력 +1, 이 요원이 배속된 군대에 있는 모든 부대의 유지비 -15%, 모든 외국 베테랑의 행동스킬 비용 -5%, 해군 화력지원의 재충전 시간 -40초
- 트로피코 4/칙령 . . . . 8회 일치
* $500. 경찰, 군경 1인당 년간 $50 소모, 군사 기지 1채당 년간 $500 소모
* 군인 한명당 년간 $50, 군사기지 하나당 $500
* 군사 기지, 국방부 장관 필요
말 그대로 군대를 현대화시킨다. 병사와 장교의 전투 능력이 크게 향상되며, 군사기지에서 제공되는 주거와 의료의 질도 좋아진다.
군대가 쇠약해졌다는 소문을 흘려 반역자들의 공격을 유도한다. 군사력이 안 좋을 때 쓰면 건물 하나가 날아가니 군사력을 잘 가늠하자.
=== 군사 훈련 ===
* 군사 기지 필요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7회 일치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국을 지원하는 디시전.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선택지와 엄청난 양의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고 스페인국 군사통제권도 가져오는 선택지가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스페인국, 이탈리아와의 관계도가 상승하며 영국, 프랑스, 스페인 공화국, 소련과의 관계도가 하락한다. 또한 호전도도 올라간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면 지원군 귀환 이벤트와 함께 몇몇 공군 교리의 청사진을 획득한다.
중화민국의 군사 통제권을 가지는 디시전. 중국의 군사 통제권만을 가질 뿐이지 군사 동맹을 맺는게 아니므로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전쟁 준비가 끝나기 전 중화민국이 일본에게 먹힐까봐 걱정된다면 이 디시전을 고려해보자.
프랑스의 군사 통제권을 가지는 디시전. 프랑스의 군사 통제권만을 가질 뿐이지 군사 동맹을 맺는게 아니므로 독일과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 Victoria II . . . . 7회 일치
* 군사 통행권(Military Access)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의 영토를 자국 군대가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 군사 통행권 취소(Cancel Military Access)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 영토 군사통행권을 반납한다.
* 군사 통행권 주기(Give Military Access)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자국의 영토를 해당 국가 군대가 지나갈 수 있게 할까 요청한다.
* 군대 지휘(Command Units) : 속국의 군사지휘권을 얻는다.
=== 군사와 전투 ===
[[Victoria II/군사와 전투]] 페이지 참조.
- 박세직 . . . . 7회 일치
[[육군사관학교]] 제12기 출신이다. [[박희도]][*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1공수여단장이었으며, 1985년 12월부터 1988년 6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박준병]][*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이었으며, 이후 국군보안사령관과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소속)을 지냈다.]과 함께 [[하나회]] 회원이었다. 그리고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등을 가리켜 '''쓰리 박'''이라고 하였다.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채명신]] 초대 파월사령관이 미군들과 파병 관련 한국 지원 및 작전 구역 설정, 그리고 지휘체계 설정 협상하는 과정을 지원하며 활약하였다. 이후 1976년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고, 1979년 군사정보 참모를 지냈다. 박희도나 박준병과는 달리 하나회였음에도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지 않아서 [[김영삼]] 정권 때 화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 8월 '''박세직 사건'''으로 [[소장(계급)|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였다. 겉으로는 박세직이 육군사관학교 동기의 사업을 도와 준다는 이유로 비리를 저릴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과 [[허화평]], [[허삼수]] 등 측근 세력이 '하나회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박세직을 예편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사건은 1973년 일어난 [[윤필용 사건]]에서처럼 수도경비사령관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보안사령관인 상태에서 보안사령관이 동기생을 수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박세직은 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예편하였다. 후에 박준병은 조사 결과 박세직이 여기저기 “차기 대통령은 나”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 이홍기(군인) . . . . 7회 일치
|||||||||| [[대한민국 육군]]의 [[제3야전군사령관]] ||
||<#ffa500><:> {{{#ffffff '''최종보직'''}}} ||<#ffd700> 제3야전군사령관 ||
[[대한민국]]의 前 [[군인]]. 예비역 대장 [[제3야전군사령관]] 역임했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이냐시오이다.
[[1953년]] [[8월 25일]][* [[음력]]이다.], [[경상북도|경북]] [[김천시|김천]] 출신으로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육군사관학교]] 33기로 입교해 1977년에 임관했다. 2012년 [[제3야전군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이임과 동시에 36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예편했다.
- [[대한민국 육군|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대장
- [[대한민국 육군|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작전처장: 준장
- 허화평 . . . . 7회 일치
1937년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에서 태어났다. [[포항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7기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진영(군인)|김진영]], [[허삼수]]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특히 허삼수와는 단짝이었다. 1979년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대령]])이었다. 말하자면 개국 공신 중의 공신인 셈이다. 1980년 9월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처리 조치로 기소되었다. 이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사면되었다.
군사정권의 인사답게 민주화운동에 시종일관 부정적인 논조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월간조선》은 2012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과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 허 전 수석은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북) || '''무소속''' || '''48,251 (44.2%)''' || '''당선 (1위)''' || '''옥중출마 당선'''[br]1997년 의원직 상실[br](12.12 군사반란 재판) ||
- 전관 . . . . 6회 일치
|근무 = [[대한민국]] [[학생중앙군사학교]]
|지휘 = 대한민국 학생중앙군사학교 교장
2007년 대선 출마 당시 [[새시대참사람연합]]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시 대선 포스터는 '''지키자, 대한민국!'''이라는 로고를 새겨넣고 철모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보병 제9사단장 및 [[학생중앙군사학교]]장을 지낸뒤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문학사
[[분류:194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정선 전씨]][[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 트로피코 4/건물 . . . . 6회 일치
* 군사정부: 군사정부가 반역자가 되려고자 하는 시민들의 의지를 꺾어버립니다.
=== 군사 기지 ===
||군사 기지는 해당 지역에서 각하의 지배력을 확고히 해줍니다. 또한 병사들에게 양질의 주거 환경과 의료도 제공하지요. 군사 기지는 장교 한 명만으로도 운영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좋다면 군사 기지에서 매년 임대료를 받아낼 수 있습니다.||
- 피우진 . . . . 6회 일치
|| '''약력''' ||<(> [[대한민국 육군|육군]] 제1군사령부 [[여군]]대장[br]육군 제16항공대 부대장[br]육군 제11항공단 본부 부단장[br]육군항공학교 학생대 학생대장[br]국가인권위원회 전문위원 ||
매우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피우진과 같이 군 생활을 한 장병들은 모두 그녀를 '''"매우 훌륭하고 인성도 상당히 좋은 참 군인"'''이라며 칭송했을 정도. 그런데 피우진이 군 생활을 할 당시 [[소령]]이었는데, 하필 자신은 [[소대장]]이 되었다.[* 보통 [[소대장]]은 [[소위]]~[[중위]]가 배치된다.] 게다가 [[중대장]]이라는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남군 [[대위]]였는데 '''이는 명백한 [[성차별]]이다!''' 그나마 해당 남군 대위가 개념이 있어서, 자기보다 직급은 낮아도 계급이 높기 때문에 피우진을 존중해주고 서로 상호존대를 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넘어가기는 했다만.
2008년 5월에 복직한 뒤 육군항공학교 교리발전처장이라는 보직을 받고, 복무하다가 2009년 9월 29일에 육군항공학교에서 만기전역하였다.[* 참고로 구글링해 보면 관련 사진이 나온다. 거기서 어떤 [[준장]]이 피 중령에게 감사장 같은 것을 수여하는데, 그 준장은 [[육군사관학교]] 34기 배명헌 장군이다. 배 장군은 당시 육군항공학교장이었고, 그 후 영전하여 육군항공작전사령관을 거쳐 소장으로 전역한다. 현재 그는 성우회 소속 안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중령]]의 [[연령정년]](53세)이 됐기 때문이다.
대위 시절, 소속 부대의 군사령관(대장)이 '''술자리에 [[여군]]을 보내라는 요구를 했다.''' 당시 피우진은 당연히 이 명령을 거절했다. 처음에는 본인 보고 직접 오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한다. 즉, 휘하 [[여군]]을 술자리 여흥을 위해 부르는 행위가 군 내에 만연했던 것. 부당한 명령이 계속되자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한 가지 꾀를 내는데, 술자리에 보내지는 [[여군]]들에게 사복이 아닌 [[군복]]을 입혀 보내는 것이었다. 군복을 보면 술자리 여흥을 위한 여성이 아니라 휘하의 군인임을 떠올리게 되어, 이들을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에서였던 것. 해당 여군들에게 [[완전군장]]에 총기까지 휴대시켜 실탄까지 지급 한 뒤 회식자리로 보낸다. ~~술이 확 깼겠군~~
이를 통해 피우진이 얼마나 대쪽 같은 인물인지를 깨닫게 되었기에 더 이상 비슷한 성격의 요구가 하달되는 일은 없게 되었으나, 높으신 분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피우진은 결국 중령에서 군 생활을 접게 된다. ~~안 돼~~ 한때는 이것이 루머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실제 실탄 지급을 한 것에 대해 징계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오호라, 그럼 기록에 남은 그 사람이 관련자로구나!~~이때가 1988년 무렵이고, 피우진은 [[제1야전군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1987년 6월부터 89년 4월까지가 [[정호근(군인)|정호근]](後 합참의장 역임)이 1군사령관이고 다음이 [[이진삼]]이다. 또한 88년 7월 소령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88년 대위 시절 사령관은 [[정호근(군인)|정호근]]으로 추측된다.
- 한명회 . . . . 6회 일치
그해 [[10월]]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의병(義兵)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김종서]]와 [[황보 인]]을 제거한다고 하자 실패를 걱정하고 군사들은 우왕좌왕하였다. 그러자 그는 칼을 빼어 들고 큰 소리로 말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한명회의 독려에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날 사병들을 동원하여 비밀리에 매복시키고, 그날 저녁 [[한성부]]를 점령하였다. [[홍윤성]]과 [[홍달손]]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합류, [[김종서]]와 [[황보 인]]의 집을 습격하여 이들 일파를 제거하였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에는 [[김종서 (1383년)|김종서]]와 [[황보인]]의 막강한 권력에 반발하는 뜻에서 한명회를 지지하는 여론도 조성되었다.
==== 군사 활동 ====
그는 평소 자신이 은퇴하여 갈매기를 벗삼겠노라며 [[한성부]] 한복판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그 자신은 은퇴할 수 없었다. [[1471년]](성종 2년) 춘추관영사(春秋館嶺事)에 이르렀다.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동년, 그는 대궐의 동, 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키고 자신이 직접 서영대장이 되어 서영(西營) 군사를 거느렸다.
==== 해임과 군사 활동 ====
[[조선 성종|성종]]이 다시 군신회의를 소집하자 재상들은 모두 추위와 어려움을 이유로 파병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한명회는 그래도 파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논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녕만 도모하기 때문이고, 노신(老臣)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대체(大體)입니다. 군왕의 적개(敵愾)에도 의당 급히 서둘러야지 늦출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라며 굽히지 않았다. 결국 논의가 계속되다가 그의 듯이 관철되어 [[조선 성종|성종]]은 [[의정부]][[좌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가서 정벌하라고 명하여 다시 군사를 파병,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성종은 '경의 강한 계책 덕에 거병하여 성공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며 그를 칭찬하였다.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주요임무 . . . . 5회 일치
핏케언이 있는 군사 기지에 도착한 헤이덤과 찰스 리. 핏케언의 상관인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은 핏케언을 넘기기를 거부한다. 헤이덤은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브래독을 안타까워 한다.
코너는 라파예트 일행이 뚫은 출구 앞에서 라파예트와 만난다. 라파예트는 출구가 조지 요새 근처 군사구역으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하고는 불을 밝혀 신호를 보낸다면 그라스의 함대가 포격을 시작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코너는 라파예트를 지나쳐 출구로 나간다. 터널의 출구는 군사구역 안 우물로 이어져 있었다.
코너는 군사구역에 위치한 탑으로 기어올라 불을 붙인다. 신호를 본 프랑스 함대는 군사구역과 조지 요새에 포격을 시작한다. 이를 확인한 코너는 근처 짚단으로 뛰어내리지만 프랑스 함대의 포격으로 인한 파편에 맞아 큰 부상을 입는다.
- 커맨드 앤 컨커 : 레드 얼럿 2/연합군 . . . . 5회 일치
* 공군사령부
해리어(혹은 보라매)가 주둔하는 건물. 미니맵을 볼 수 있게하는 레이더의 기능도 한다. 공군사령부 하나가 수용할 수 있는 해리어(혹은 보라매)의 양은 네대이다. 해리어(혹은 보라매)가 비행중일 때 공군사령부가 사라지면 착륙할 수 없는 해리어(혹은 보라매)는 추락한다.
공군사령부에 주둔하는 유닛. 지정한 지상 목표로 날아가 미사일을 쏘고 돌아온다. 미사일은 공군사령부에 착륙하고나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달린다.
- Victoria II/개혁 . . . . 4회 일치
==== 군사 개혁 ====
* 해외 훈련 방식: 병사들이 서양인 군사고문에게, 혹은 서양식 방식으로 훈련 받는다.
* 군사 건축
* 군사학교: 장교들은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하기 전에 잘 훈련 받는다.
- 로힝야 . . . . 4회 일치
2016년 10월 9일,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 마웅토 등의 국경 검문소가 무장괴한의 공격을 받아 경찰관 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얀마 군부는 이를 로힝야 무장세력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군사작전으로 반격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수십명~100여명의 사망자가 있었고, [[성폭행]] 사건과, 다수의 난민이 발생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위성사진을 분석하여 진압과정에서 1,200채의 민가가 불에 탄 것으로 분석하였고, 유엔은 난민의 수가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국제위기그룹의 보고서는 로힝야 무장단체가 국제무장세력과 연관이 있으나, 미얀마 내 불교도를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보다는 차별을 끝내고 시민권을 확보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종교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이고 국제 지하드 조직과 연결이 있어 언제나 목표가 바뀔 수 있으며, 미얀마 정부가 군사작전에만 치중하지 말고 로힝야의 고통을 외면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사실상 미얀마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 겸 외교장관에 대해서 비판이 쏟아졌다. 2016년 무장공격과 이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보복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던 그녀가 군사작전이 시작되고 6주가 지나도록 언론을 피하고 "법치에 근거하여 군사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원론적인 해명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에서 아웅산 수치는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다. 수치는 로힝야를 '벵갈리'라고 부르며 이방인 취급을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 보에몽 1세 . . . . 4회 일치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많은 군사적 공적을 세웠으며, 특히 안티오크 공방전에서 안티오크를 영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반년에 걸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안티오크 점령에 성공, 안티오크 공작 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안티오크 시내의 이슬람이나 시리아계 기독교인 다수를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현대까지도''' 지속되는 악명을 쌓았다(…). 안티오크를 획득한 보에몽은 예루살렘 원정에서 이탈하여 안티오크 공국의 기반을 다지는데 전념한다.
안티오크 공작으로서 보에몽은 명목상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독자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대립 관계였다. 주변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여 영토를 늘려나갔는데, 이렇게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다가 결국 이슬람 셀주크계 다니슈메드 왕조(Dânişmendliler)에 포로로 잡히고, 당시 그와 대립하던 알렉시오스 1세에게 이송될뻔했기도 했으나, 군사적 협약을 미끼로 풀려나 다시 공작위를 되찾는다.
거기서 그는 프랑스 왕에게로 가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얻어낸 뒤, 남이탈리아 영주들에게 황제가 십자군을 배신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해 그곳의 영주들이 자신을 돕게 공작을 한뒤, 남부 이탈리아에서 디라키움에 상륙해, 그곳을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가려고 시도한다.[* 이는 그의 아버지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비잔티움 침공을 시도할때 거친 경로와 흡사, 아니 똑같다. ~~그리고 둘다 털렸다.~~]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나가 그의 아버지를 소재로 한 연대기에 '그는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교활하고 위험한 인물이다.'라고 적었듯이, 그의 군사적 능력은 출중한게 확실하다. 한편으로는, 그의 아버지를 닮아 알렉시오스 1세가 십자군의 봉신서약을 요청했을때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이를 뒤통수쳐서 안티오크 공국을 독자적으로 형성한 교활함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매우 안타깝게도 그의 목표이자 야망이었던 비잔티움 제국과 그곳의 지도자인 알렉시오스 1세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고, 결국 그가 그의 야망을 충족시킬만한 상황이 되지못했다.
- 오타쿠 혐오 . . . . 4회 일치
* 군사적 물건 : 군사적 물건, 즉 밀리터리 매니아(소위 [[밀덕]])의 군사적 물건에 대한 관심은 곧 [[전쟁]]에 대한 관심이며, 이는 일반인들에게 '잠재적 전쟁 범죄자'의 징후로 여겨진다. 이들은 때때로 군사적 저술에 과도하게 경도되어 일반인들과 동떨어진 수준의 [[우익]] 성향을 가지거나, 몇몇 경우 [[학살]]을 옹호하거나, [[독빠]]의 경우 [[나치]]에 대한 옹호로 [[주화입마]]하는 경우도 있다.
- 이상백 (1904년) . . . . 4회 일치
[[1957년]] [[한국사회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한국사회학회]]의 1대 회장이 되었으며 2대 회장으로 연임되었다. [[1961년]] [[6월]]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서 조직한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 조카사위: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李相旿)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분류:여행 작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IOC 위원]][[분류:이병도]][[분류:김구]][[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여운형]][[분류:김규식]][[분류:장건상]][[분류:박중양]][[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유교 신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은수(육군) . . . . 4회 일치
||<bgcolor=#808080> '''{{{#FFFFFF 약력}}}''' ||<(>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br][[고등군사법원]] 법원장[br][[육군본부]] 법무실장(육군 준장)[br]고등검찰부장[br]보통군사법원장[br][[군법무관]] 임관[br][[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 ||
1965년에 [[구미시]]에서 태어났으며(당시에는 선산군이었음) 4남매(2남2녀) 중 맏이였다. 오상고를 졸업하였으며[* 이 장군은 원래 의사나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으나 당시 오상고 여자반에 이과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문과를 선택했고, 법대를 나온 고모부의 영향으로 경북대 법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1989년에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한국개발연구원에 연구원으로 1년간 근무하다가[* 이 장군은 대학 4학년 때 사시 1차와 군법무관 1차에 합격하였으나 사시 2차에 떨어지고, 집안형편상 더 이상 고시공부를 할 수 없어 취직을 했다고 한다.] 군법무관 시험에 최종합격하여 1991년에 법무사관 9기로 임관(중위로 임관)했다.[* 대개 임관을 하면 사단 법무참모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군이라 바로 발령받지 못했는데 당시 36사단장이 이은수 중위를 참모로 썼다. 36사단장의 사모님이 간호병과 대령이었기 때문에 여군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한다.] 법무사관 가운데 첫 여군이었다.[* 2012년 기준으로는 군법무관 560명 가운데 52명이 여성이었다.] 당시 임관한 뒤로 10년을 법무사관 중 홍일점으로 지내야 했다고. 2011년에 [[여군]] [[군법무관]]으로는 처음으로 [[준장]]에 올랐다.[* 여군 최초의 [[장성급 장교|장관급 장교]]는 간호 병과 출신 [[양승숙]] 준장이었다. 2014년까지 여군 [[장군]], [[제독]]은 간호 7명, 보병 1명, 법무 1명 등 총 9명(전원 육군)이다.] 법무 병과장인 [[육군본부]] 법무실장에 올랐다.[* 본래는 법무관리관이 병과장으로 육군 소장이 임명되었으나 여러 문제가 일어나 예비역 법무장교 출신 군무원을 임명하는 걸로 바뀌었다.] 같은 해 12월에 [[고등군사법원|고등군사법원장]]으로 옮긴 후 2014년 퇴임하였다.
- 이희근 (1929년) . . . . 4회 일치
*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1기
* 1973년 공군사관학교 교장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공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국방참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전두환]][[분류:백선엽]][[분류:박정희]][[분류:정일권]][[분류:노태우]][[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심대평]][[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임페라토르 . . . . 4회 일치
로마 공화정에서 '군사령관'을 뜻하던 단어,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뜻하는 칭호가 되었다.
본래 '군사령관'을 뜻하는 이 단어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성립시키면서, 군단편성권 등의 군권을 '독점'함으로서 황제가 유일한 '임페라토르'가 됨에 따라 황제권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 기원에 따라서 군사적 의미가 강하여 제국 시기에는 주로 군인이 황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임페라토르는 로마 황제가 가진 여러 칭호 가운데 군사적 권위가 강한 칭호였으며, 후대에 여러 언어에서 '황제'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 정칠성 . . . . 4회 일치
[[1925년]] [[11월]] [[일본]] 정부에서 가상의 적을 대비하여 각급 중고등학교에 군사훈련 및 각종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정칠성은 군사교육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1월 7일]] [[홋카이도]]의 소준고등학교 강당에서 일본내 시민단체, 여성단체, 사회주의 운동단체 및 조선인 유학생단체, 삼월회, 일월회(남성 단체) 공동 주최로 열린 [[군사교육 반대 집회]]에 그는 [[삼월회]]의 대표 자격으로 박경희(朴慶姫)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 2백 명이 급히 투입되어 진압하자, 바로 피신하였다.
- 창원시 . . . . 4회 일치
== 군사 ==
[[창원대로]]가 10km 넘는 길이로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것도 비상시 수도 역할을 하기 위한 활주로 대용이다. 지금은 중앙분리대와 지하차도로 인해 활주로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으나 본 목적이 전시상황에서 비상활주로 역할이니만큼 창원은 [[계룡시]] 못지 않은 비상용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진해구]]는 해방 직후부터 해군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애초부터 해군의 거점 도시로 발달한 곳이다. 지금도 해군 신병들을 교육하는 [[해군제1군사교육단]]과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해군사관학교]]가 진해구에 있다.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해군 . . . . 3회 일치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육군#s-5.3|군사 통계]]''' 기술 연구시 '''{{{#green +2%}}}'''
* '''Military-Political Decision-making(군사적 정치적 의사 결정)'''
* '''Local Military Government(지방 군사 정부)'''
- 롬니아 제국 흥망기 . . . . 3회 일치
* 소피 : 사이파카르의 시녀. 유사시에 전쟁터에서도 수발을 들 경우에 대비해 일정 수준 이상의 군사 기술도 연마했다.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의외로 가차없는 성격이기도 있다.
* 롬니에우스 1세 : 롬니아 제국을 당대에 세운 영걸. 군사와 정치에 두루 통달한 먼치킨으로, 사이파카르의 재능을 높이 사면서도 그 때문에 오히려 안정기에 들어선 제국에 화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의 세력을 빼앗고 변경으로 좌천시킨다. 그러나 사이파카르가 임지로 가던 도중에 사고로 서거하고 만다.
* 레프라프티 : 수군사령관. 실제로는 내륙 지역인 변경주엔 수군이 없지만, 변경주로 좌천된 신분이라 임시로 달게 된 직함.
- 마기/295화 . . . . 3회 일치
[[마기]] 제 295번째 밤. '''군사의 비책'''
연홍명은 가면을 쓴 채 군사로서 황제국에 돌아온다.
* 결국 홍명이 황의 수도로 돌아온다. 가면으로 얼굴을 숨긴 "비밀 군사"로 들어온 건데 하황문 말고는 다 알아보고 있다
- 백승주(정치인) . . . . 3회 일치
[[1961년]] [[3월 20일]]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 장천면에서 태어났다. 구미 오로초, 대구 성광중, 대구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경북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정치학회와 [[한국국방연구원]]에서 근무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국방연구원 산하의 [[북한]]연구실장과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을 지냈다. [[2013년]] [[3월]]에 국방차관으로 선임되었다. 보통 국방차관은 예비역 [[중장]]이나 드물게 재정 전문가가 보임되는데 비해서 순수하게 안보 연구(북한군사 전문)를 해온 [[민간인]]이 선임된 사례는 처음이라 주목을 받았다.역대 최연소 차관이며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거의 독점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몇 안 되는 민간인[* 여기서 민간인은 비장성 출신.] 출신이다. 참고로 병역은 [[중위]]로 마쳤다.[* 아무래도 보직이 보직이다 보니 예비역 병장을 그 자리에 앉히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직업군인 출신이라는 점이 파격적이다.]
1.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0804&yy=2016|불법이지만 단 1달러도 줄 수 없다!]] 국방부 차관 재직당시인 2012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우리나라 국방부와 합참, 육·해·공군이 MS 소프트웨어를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사용료 지급을 요구했다. 윈도 서버 접근 권한인 '사용자 서버 접속 허가'(CAL·Client Access License) 구매 숫자를 훨씬 초과해 윈도 서버에 접속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MS사는 피해 액수가 무려 연 2011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으나, 백승주는 '''라이센스 등록 안하고 접속하는 곳 만큼 등록해놓고 접속 안 하는 곳도 많다! 라이센스 관리를 미숙하게해서 그렇지 플러스 마이너스 따져보면 우린 정당하게(?) 돈 내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 1달러도 못 준다! => 우리가 자체 조사해보니 불법 사용자도 없더라![* 말이 자체 조사지, 군부대와 군시설에 공문 보내서 혹시 불법으로 쓰는 곳 있으면 자백해라 정도 였을 것이다.] => 못 믿겠으면 니네가 니네 비용으로 전수조사해서 증명해라! => 대신 군사기밀을 건드려서는 안되고 당연히 우리는 조사에 협조도 못해준다!!!'''라는 식의 --어거지--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 영천시 . . . . 3회 일치
== 군사 ==
[[제1117공병단]], [[제50보병사단]] 122[[연대(군대)|연대]]와 [[육군3사관학교]] 등의 군사시설이 있어 대구의 위성도시이자 보조 군사도시의 기능을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 라인의 "최후저지선"에 포함되었던 지역으로 곳곳에 추모 동상이 있으며 [[6.25 전쟁]] 추모 행사를 매우 공들여서 하는 편이다.[* 이것은 [[칠곡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칠곡군은 [[다부동 전투]] 때문에 영천보다 더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영천을 잠시 내주고 나서 [[미군]]에서 [[서사모아]]에 '''신한국'''을 건설하고 후퇴하려고 했는데, 어느 국군 장군이 영천만 찾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던 일화가 있다.
- 율리우스 네포스 . . . . 3회 일치
네포스의 출신은 일치하지 않는 사료가 많아서 확실하지 않은데, 달마티아 지역의 로마 귀족 출신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삼촌은 달마티아 총독 마르케리누스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스트라테고스|서로마 제국의 군사장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부하로서 아에티우스가 발렌티아누스 3세에게 암살된 뒤 반란을 일으켜, 달마티아 지방[* 이탈리아 반대편에 있는 아드리아 해 해안 북부.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일대.]을 영지로 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마르케리누스의 통치는 여러 황제들에게 승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네포스는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조카와 결혼하여, 동로마 제국의 권력 중심부에 들어가게 된다.
네포스는 훈 족의 아틸라를 모시던 [[플라비우스 오레스테스]]를 [[스트라테고스|제국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크나큰 실책이었는데, 475년 8월 28일,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했으며, 네포스는 자신의 고향이자 삼촌의 영지였던 달마티아로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오도아케르는 충성의 증거로서, 자신의 지배영역에서 발행되는 금화에서 네포스 황제의 이름과 초상화를 각인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조치였으며 네포스의 통치는 달마티아에 밖에 미치지 못했다. 네포스는 오도아케르를 명목상으로는 부하로 만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탈리아 지배를 되찾기 위한 군사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 이기백(군인) . . . . 3회 일치
[[1931년]] [[충청남도]] 연기군(現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났다. [[전두환]],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는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이다.
[[1983년]] [[6월]] [[김윤호]]의 뒤를 이어 [[합동참모의장]]이 되었다. 합동참모의장으로 있던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버마(現 [[미얀마]])에 갔다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부상을 당하였으나, 다행히 그가 입고 있던 [[장교]] [[정복]]과 정복에 달린 [[훈장(상훈)|훈장]]이 [[방탄복]] 역할을 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수행했던 [[전속부관]] [[전인범]] [[중위]]에 의해 구조되었다. 귀국 후 그 정복을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하여 육군사관학교 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이민호(1987) . . . . 3회 일치
2017년 5월 12일부터 [[포항시]]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에 들어간다. 선복무 후입소 제도를 적용하여 [[포항시]]청에서 일하는 중간에 병무청이 정해 준 날짜에 입소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퇴소한 후 잔여기간 동안 복무를 재개한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는 [[김필]]이 있다. [[장근석]]도 바로 기초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선복무 후입소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날 [[포항시]]청으로 출근한 뒤, 구청 산하의 복지시설로 발령됐다. [[2018년]] [[3월 15일]]에 [[육군훈련소]]에 입소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4월 12일에 수료한 후, 복무를 재개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737235|#]]
- 이열희 (1924년) . . . . 3회 일치
그의 증조부 [[이동진]]과 할아버지 소남 [[이일우]]는 구한말~일제시대의 사업가로 [[우현서루]]를 건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모부 윤홍열은 미군정기 때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역임했으며,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한 군인 출신 사학자 [[박창암]]의 처 이겸희는 그와 6촌간이었다. 고모 이숙경의 며느리는 [[1945년]] [[8.15 광복]] 후 초대 [[대구광역시장|경북 대구시장]]을 지낸 [[허억]]의 딸이었다.
**** 6촌 매부: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장성환 . . . . 3회 일치
*1950년 공군사관학교 2기
[[분류:1920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태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교통부 장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기후 대학 동문]][[분류:도야마 대학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국방연구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장]][[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공군무관]]
- 정종원 . . . . 3회 일치
이후 1947년 조흥은행 취체역(이사)으로 선임된 뒤 1956년부터 516군사혁명 직전인 1961년 4월말까지 조흥은행 행장자리를 지켰다. 정종원은 한때 그의 조카인 해방후 첫 조흥은행장인 정운용과 함께 부친 정재학의 뒤를 이어 조흥은행 대주주의 자리를 유지한 바 있다.
정종원은 공교롭게도 1961년 5.16군사혁명 발발 보름 전 4년 반 동안 이어온 행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후 검찰이 추진한 3.15부정선거자금에 대한 특검에서 수사 대상에 올랐지만 공소조차 진행되지 못한 채 종결됐다.<ref>경향신문 1961년 3월 5일 3면 특검천하 42일 (3)</ref> 그러나 [[군사혁명]] 발발 직후 [[이병철]]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시중 은행 주식을 모두 강제 환수당했다. 이병철은 [[조흥은행]] 70%, [[한일은행]] 60%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ref>경향신문 1961년 10월 15일 1면 대주주소유 오개은에 환수통고</ref>
- 진격의 거인/91화 . . . . 3회 일치
* 월마리아 최종 탈환 작전 개시 이후 4년 뒤의 세계. 마레는 "시조탈환 계획"에 실패, [[애니 레온하트|여성형 거인]]과 [[베르톨트 후버|초대형 거인]]을 잃고 군사력이 약화된다.
* 그때 관측병이 "놈"이 나타났다고 알린다. 그것은 "장갑열차"다. 거기에 달려있는 열차포는 "대거인포"라 불리는 연합의 신병기다. 장갑열차에 총 4문이 장착돼있다. 100mm짜리 철갑포로 보통 거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홉 거인"이라 해도 한 방이면 처리할 수 있는 괴물. 마가트가 우려한 것이 저것이었다. 콜트는 턱과 차력은 재빠른 거인이므로 목덜미를 당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만 마가트는 도박의 여지를 두고 싶지 않다. 만약 당하면 어쩔거냐는 반문에, 콜트는 거인의 힘과 전사를 잃고 거인의 힘을 되찾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가트 대장은 거기에 9년 전 있었던 "시조탈환 계획"의 처참한 실패를 덧붙인다. "여성형 거인" [[애니 레온하트]]와 "초대형 거인" [[베르톨트 후버]]를 잃은 실패 말이다. 이 전력의 상실이 지금의 전쟁을 일으킨 방아쇠가 되었다. 마레의 군사력이 저하됐다고 본 주변국들과 분쟁으로 전쟁이 시작,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팔라디섬 공략은 한없이 뒤로 밀렸다.
* 소위 '편의병'은 현실의 국제법에서도 금지된 것이지만, 일본 우익들은 중국에서 난징 학살 등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변명으로 사용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군은 '편의병 사냥'을 명목으로 도주한 중국군/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현재 일본 우익들은 "편의병은 죽여도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군은 단순히 군복을 벗고 도주했을 뿐. 조직적으로 군복을 벗고 위장 공격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애초에 이러한 '특수작전'을 실행하려면 상당한 사전 준비와 그에 걸맞게 훈련된 특수부대가 필요하다. 군복을 벗어 군사 지휘체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도 자연스럽게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면서 동시에 전투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의병 사냥'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군복을 벗고 도주한 병사를 색출해서 무조건적으로 죽여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 제네바 전투 조약상 이러한 행위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하나, 이는 즉결처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이다. 또한 이때 쓰인 색출기준이란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 자세가 좋은 사람, 구두를 신어 발목이 까진 사람 등으로 자의적이고 조잡해서 청년, 장년을 무차별로 죽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 폴리스 . . . . 3회 일치
폴리스의 특징은 시민 계급이다. 폴리스에서 [[시민]]은 곧 [[전사]]이며, 이들은 [[호플리테스]]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식 중장보병의 구성원으로서, 폴리스가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장보병이 되기 위하여 무장을 갖출 경제력을 보유한 토지 보유자([[지주]])이기도 했다. 이러한 구조는 중세 유럽의 도시 시민들이 [[상인]]이나 [[수공업자]] 계층이었던 것과는 대비를 이루는 점이다.
[[스파르타]]는 군사력으로 원주민을 복속하고 지배하여, 군사적 결합이 강고해지며 폴리스가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소수의 정복자가 다수의 피정복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정복지를 일정한 면적으로 분할하여 농촌을 기반으로 한 생활 기반을 이루었으며, 구성원들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동등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연구진 . . . . 2회 일치
* Zhukovsky Air Force Academy(주코브스키 공군사관학교)
* Scuola di sanita'militare(군사의무학교)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2회 일치
이게임의 주인공 혹은 [* 플레이어가 프랑스가 아닐경우] '''최종보스.''' 오스만 제국은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상대하기 쉬워지지만 프랑스는 그런거 없다. 초반부터 넘쳐나는 땅과 맨파워로 플레이어에게 미친듯한 출혈을 각오하게 하고 조금만 지나면 자체 이념으로 군사기 +20%를 들고나오기에(...) 개깡패가 된다. 문제는 이게 전부다 적일경우라는 것(...). [*물론 동맹으로 쓰기엔 이만한 애가 없다.]
마더 러시아. 국가 전통에 맨파워 증가가 달려있고, 두번째 이념엔 육군 한계증가가 달려있으며, 자체 특성상 미친듯이 동진하며 개발하게 되있으므로 상당한 물량을 볼 수 있다. '''다만,''' 물량만 강력하지 국가 이념에 규율이나 군사기, 병종의 전투력 증가등은 전혀 없어서 질이나 공격적을 안찍으면 폴란드나 스웨덴한테 군대가 아이스크림 마냥 살살 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꼭 이념중에 질이나 공격적은 찍자.그나마 다행인건 리투아니아 개발도 너프가 상당히 뼈아파서, 헝가리정도만 끌여들여도 폴란드를 박살낼 수 있다는것.
- Europa Universalis 4/아나톨리아 . . . . 2회 일치
-초반 병종이 말그대로 깡패다. 다른 국가들이 군사 테크 10렙을 찍어야 겨우 보병에 사격능력치가 들어가지만 아나톨리아계 국가들은 군 4렙때부터 사격능력치가 들어가기 때문. 이때문에 군4렙찍은 오스만은 예니체리버프와 아나톨리아 초반 사기 병종덕에 그 어떤 국가와도 동수에서 우위를 취할 수 있다.
-초반 병종은 정말로 쎄지만 중반부터 힘이 점점 빠진다는게 문제. 거기다가 후반병종은 다른 테크에 비해 가장 약한 병종이기에 이때 군사들은 말그대로 종이 호랑이(...)라 볼 수 있을 정도다.
- USS 피닉스 (CL-46) . . . . 2회 일치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과 분쟁이 있던 [[포클랜드 제도]][* 아르헨티나측은 이 제도를 말비나스 제도(Las Malvinas)라고 부른다.]를 점령한다. 이에 영국이 군사적 대응을 시작하며 [[포클랜드 전쟁]]을 발발한다.
영국의 ~~찌라시~~황색 언론 [[더 선]]은 헤네랄 벨그라노의 피격 사실을 전할때 1면 헤드라인에 "'''잡았다!''': 우리 친구들이 포함을 격침시키고 순양함을 구멍냄"[* GOTCHA!: Our lads sink gunboat and hole cruiser]라고 쓰는 패기를 보였다. 이외에도 더 선은 포클랜드 전쟁 동안 "'''뒈져라 군사정부놈들'''"[* STICK IT UP YOUR JUNTA] 등의 부적절한 헤드라인을 내걸기도 했다.
- Victoria II/POP . . . . 2회 일치
군사 예산에서 돈을 받는다.
군사 예산에서 돈을 받는다.
- Victoria II/정당 . . . . 2회 일치
* 친군사적(Pro Military)
* 반군사적(Anti Military)
- 그루베니아 . . . . 2회 일치
== 군사 ==
[[그루베니아/군사정보]]
- 김민기(가수) . . . . 2회 일치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는데,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 이때 [[허문도]]가 김민기를 회유하기 위해 [[백지수표|흰 종이를 한 장 내밀며, "원하는 액수를 쓰라" 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김민기는 거절.] 대신 틈틈이 찾아와 농사를 도와주던 [[전라북도]] 각지의 연극패와 노래패들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만들어 [[전주시|전주]]에서 근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한살림은 2014년 현재 원주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조합원만 '''41만명'''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생활협동조합]]이다. 조합원들이 친환경-유기농산물를 생산해서 전국에 있는 직영매장에서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나, 해외 언론과 NGO에선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선 최고의 성과로 주목받고 있다.]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 김운용 . . . . 2회 일치
김운용은 연희전문대(현재의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미국 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유학을 다녀오며 익힌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1군사령관 [[송요찬]]의 부관으로 일했다.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의 부관으로 근무하였으며, 경찰의 실탄 요청을 송요찬이 거부하였다고 증언하였다.<ref>이문영,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3473.html “4·19때 경찰이 계엄사령관에 총탄 10만발 빌려달라 요청”], 한겨레신문</ref>
- 김진선(군인) . . . . 2회 일치
||<#2e8b57><:> {{{#ffffff '''최종보직'''}}} ||<#8fbc8f> 제 2군사령관 ||
1939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괴산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9기 출신이었다. [[1993년]] [[제2작전사령관]]([[대장(계급)|대장]])에서 예편하였다. 하나회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병호, 이현부(이상 20기)처럼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다.
-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 . . . . 2회 일치
연합군의 허가와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된 전직 국방군 장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사를 자신들의 시점에서 저술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6월에, 프리츠 할더 육군 참모장이 책임자가 되어 328명의 독일 장교들이 제2차 대전 시기의 군사 서술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저술하였으며, [[독소전쟁]]에 대한 주요 자료 제공을 독점할 수 있었다.
독일군 장성들은 마음껏 자신들의 지휘관으로서 전문적 식견, 군사 기술을 칭송하고, 독일군 장병의 용기와 인내심을 강조했다. 모든 전쟁 범죄의 책임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스에게 돌렸고, 독일 국방군은 "'''어쩔 수 없이''' 나치스에 남용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범죄를 반대하고 억제했다'''."는 자기 변호를 '역사 기록'으로 만들어냈다.
- 로베르 기스카르 . . . . 2회 일치
사실, 기스카르와 비잔티움은 이미 그가 남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기전에 군사동맹의 체결이 논의 된적이 있었다. 1073년에 미하일 7세는 기스카르에게 군사동맹과 함께 로베르의 딸중 가장 아름다운 딸과 황실에서 태어난 황제의 동생[* '제국의 조각상'이라 불릴정도로 아름다운 자였다고 한다.]을 제안한다. 기스카르가 별다른 답을 보이지 않자 미하일은 거기서 더 강화한 제안을 하는데, 미하일의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기스카르의 딸과의 혼인을 제안하면서 그에게 비잔티움의 훈장 44개를 가족 친지들에게 나눠주도록 하고, 매년 금 200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 맥닐의 법칙 . . . . 2회 일치
전염병 창궐은 아메리카 대륙 문명에 치명타를 입혔다. 기존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질병으로 연이어 죽어버리면서 사회 체계가 흐트러졌고, 인구가 줄어들고 사회가 마비되어 유럽인들의 군사적 침공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원주민들에게는 정신적으로도 큰 타격을 줬는데, 유럽인들은 면역으로 멀쩡했지만 원주민들은 면역력 없는 질병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대에 질병은 [[악마]]의 짓으로 여겨졌으며, [[신]]이나 [[종교]]의 중요한 역할이 질병 퇴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다만, 언제나 정복자 측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정복자들이 낯선 땅에서 역병에 시달려서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아프리카]]의 [[에이즈]], [[에볼라]] 같은 질병은 군사적, 의학적으로 우수했던 서구 사회에도 역시 큰 피해를 입히고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다.--아프리카의 피해가 더 크긴 한데--
- 무신 . . . . 2회 일치
문신(文臣)과 대비하여 군사 관련 관직을 맡은 신하들을 뜻한다. 현대의 군인(軍人)에 해당. 열심이 노력하면 무신(武神)도 될 수 있는 사람들.
문신과 무신의 분리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나타나게 되는데, [[과거 제도]]가 나타나면서 문과(文科)와 무과(武科)가 시험 단계에서 분리되면서 문무의 분리가 가속되었다. 문신과 무신은 등용 과정 부터가 달라졌기 때문에 명확하게 별도로 구분되는 '집단'이 된 것이다. 무신은 오직 군사 관직에만 임명되게 되었고, 승진하는 루트도 달라져서 '직업군인'화 되었다. 또한 당나라 이후 중국에서 징병제가 사라지고 모병제가 중심이 되면서 무신의 전문화도 진행되었다.
- 박상돈(정치인) . . . . 2회 일치
1949년 [[충청남도]] 연기군 (현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에서 태어났다. 연기소정초등학교, 천안중학교, [[대전고등학교]][* [[송영무]] 국방부장관과는 동창생이다. 송영무는 해군사관학교를 재수로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 제28기[* 동기생으로 [[김관진(군인)|김관진]], [[김병관(군인)|김병관]], [[박흥렬]]이 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과정을 졸업, 수료하였다.
- 보루토/3화 . . . . 2회 일치
* 사이가 시험관으로 나서 문제를 출제한다. "닌자 군사 기록첩"의 5권을 가지고 문제를 내는데, 그 책은 사라다 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책.
* 닌자 군사 기록첩 5권 같은 책은 처음부터 없었다. 문제는 훼이크였으며 진짜 실격은 먹물풀에 떨어져 "새까맣게"되는 것.
- 원피스/846화 . . . . 2회 일치
* 킹밤은 기어이 두 동강 나고 나미는 아망도에게 몸수색을 당한다. 아망도는 나미의 앞섬에서 로라의 비브르 카드를 찾아낸다. 가렛은 체스병들이 제대로 싸우지 못한 것과 유혹의 숲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 이것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이걸 어떻게 손에 넣었냐고 묻는다. 빅맘의 군사들은 그게 로라를 죽이고 빼앗은 거라고 여긴다. 여기서 로라는 가출소녀 취급. 그렇지만 가족이라는 의식은 있는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언은 남긴게 없냐고 묻는다. 나미는 친구라서 받은 거라고 항변하지만 쉽게 믿어주지 않는다.
상디가 고맙다고 답하며 꼭 샬롯 푸딩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하자 빅맘은 만족스럽게 웃는다. 하지만 "원래 밀집모자 일행이 한 짓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무단침입은 물론 크래커를 쓰러뜨리고 어인섬에서 과자를 가로챈 것까지. 어느 것 하나 빅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게 없다. 하지만 이 정략결혼이 성사돼 제르마의 군사력만 손에 넣는다면 별 일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상디는 그저 동료들이 무사하다는 생각만으로 도망도 치지 않고 순순히 결혼하겠노라 약속한다.
- 윤덕주 (농구인) . . . . 2회 일치
**** 외6촌제부 :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이인 . . . . 2회 일치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 (이름)|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1963년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5년]] 이인은 [[안재홍]]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서울특별시|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집행, 주관하였다. 당시 [[안재홍]]은 자진월북자라는 오해와 편견으로 금기시되었고, 꺼려했다. 그러나 이인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과 함께 [[안재홍]]의 시신없는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군사정권은 그의 의도가 불순함을 의심하여 내사하였으나 혐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에 선임되었다. [[1974년]]에는 [[국토통일원|통일원]] 고문에 재선임되었다.
- 이종근(1923) . . . . 2회 일치
1923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에서 태어났다. 충주농업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다.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이헌일 . . . . 2회 일치
| 기타 이력 = [[한국독립당]] 기초군사행정위원 <br/> [[한국독립당]] 초급행정위원 <br/> [[한국독립당]] 행정연대위원
* 1945년 9월 3일, [[한국독립당]] 기초군사행정위원.
- 진격의 거인/86화 . . . . 2회 일치
* 현대의 군사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서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한 병기들이 거인에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전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 이 시대의 군사력은 신병기들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를 확보하는게 관건이고, 파라디섬은 이 화석연료가 풍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 진격의 거인/89화 . . . . 2회 일치
* 그리샤의 기억에 따르면 마레당국은 이미 엘디아인을 근절시키던가 무지성 거인으로 만들어 군사용으로 쓰던가 양자택일할 생각이다.
>군사전용으로 남길 것인가
- 천장호 . . . . 2회 일치
서울고등학교 20회 동기로는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육군사관학교), 강호문 삼성전자 부회장(서울대), 이민주 에이티넘파트너스 회장(연세대), 유웅석 전 SK건설 사장(서울대), 이종수 SH공사 사장(서울대)등이 있다. 당시의 서울고등학교는 졸업생 대부분이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육군사관학교,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등 최고 명문 학부에 진학하던 시절이었다.
- 칼리파 하프타르 . . . . 2회 일치
[[리비아]]의 [[군인]], 정치 지도자. [[카다피]]의 동료였다가, [[차드]]의 포로가 되었다가, [[CIA]]에 포섭되어 [[미국]]에 가고, 카다피 사후에 리비아로 돌아온 기이한 경력의 인물이다. 2014년 부터 리비아 동부 지역의 군사적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2016년 3월 30일, 임명된지 무려 3개월이나 지나서 국민합의 정부의 총리 세라즈가 튀니지에서 해로로 트리폴리에 들어왔으며 해군기지에 머물고 있다. 세라즈는 리비아 내에서 정치, 군사 지지 기반이 거의 없어, 트리폴리 정부 역시 세라즈의 입성을 반대하면서 공항을 폐쇄할 정도였기 때문.
- 캡틴 아톰 . . . . 2회 일치
DC로 오면서 설정이 대폭 바뀌는데 에너지를 방출 및 흡수하는데다 에너지 파장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쓸 수 있다. 이름이 너새니얼 크리스토퍼 애덤(Nathaniel Christopher Adam)으로 바뀌고, 과학자가 아닌 공군이 되었다. 아담은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하는 대가로 모종의 군사실험에 참여한다. 그런데 모종의 군사실험이...추락한 외계인 우주선을 핵폭탄으로 날리는 것. 아담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는데, 18년 뒤 외계 금속으로 코딩(?)한 신체와 초능력을 가진 채 등장했다. 이후 사형드립협박을 받아 어용관제 히어로(...)가 된다. 미 정부는 모든 기록을 날조하고 캡틴 아톰을 저스티스 리그에 침투시켰는데, 아담은 보기 좋게 즐 때리고(...) 히어로 길을 걷는다.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 . . . 2회 일치
사절의 요구를 들은 메흐메트는 생각해보겠다며 차갑게 대꾸한 이후, 보소포로스 해협의 가장 협소한 지역에 요새를 짓기 시작한다. 이소식을 들은 황제는 경악하면서 사절을 보내 외교적으로 해결을 하려하지만, 술탄은 그들을 쫓아내는것으로 대답을 해줬다. 황제는 그 대응으로 도시내의 튀르크인들을 투옥하는걸로 맞대응했으나, 별 소용없는 행위였고, 결국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당대에 '보코하즈 케센', 그리고 현재는 '루멜리 히사르'라고 불리는 요새가 완공되었고, 이로인해 이곳을 왕래하는 모든 함선들은 요새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이는 이곳을 통해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 상업국가들에게 큰 위협을 줬는데, 단적인 예로 베네치아인 안토니오 리초가 이끄는 함선이 요새의 검문요구를 무시했다가 포격을 받고 침몰했고, 살아남은 선원과 선장모두 사형을 당했다. [* 선장은 특별히 말뚝형에 처해졌다.] 더더욱 급해진 황제는 교회통합을 요청하며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건 겨우 200명정도의 병력뿐이었다.[* 별 수 없는게, 당시 교황령의 군사력은 제국보다 별볼일 없었다.(....) 차라리 모레아 전제국이 훨씬 더 국력이 탄탄했을거다.] 하기야 소피야 성당에선 교회통합을 선언하는 미사가 열렸지만, 해당 미사는 황제와 그 일부 측근들, 일부 통합파 사제들과 교황청에서 온 주교들 일부만 왔을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대통합이 '확실하게' 정교회 전통을 단절시키는 반면 별다른 군사적 보호는 제공하지 않고, 이슬람의 정복은 아직 술탄의 관용에 호소하여 정교회 전통을 유지할 수 있을 가망이 더 크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교황의 삼중관보다 차라리 터키인의 터번을 택하겠다."는 말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 트로피코 4 . . . . 2회 일치
* 1951-1953: 한국전쟁 - 모든 군사 건물의 가격이 절반으로 줄게됨
* 1976-1979: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범죄자 추방 - 매년 범죄자들이 섬에 도착함
- 트로피코 4/진영 . . . . 2회 일치
* 강한 군사력
* 군사기지 건설
- 호민관 . . . . 2회 일치
[[평민]] 집회에서 선출된다. 그 권한은 평민 집회에 법률 안을 상정하거나, 법률 안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 등이다. 또한 '신체불가침권'을 지닌다. 군사적 권한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매우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관직이지만 실질적으로 [[원로원]]의 견제나 현실적 한계 때문에 로마 역사 내내 호민관의 권한 행사는 크게 제약된 경우가 많았다.
현대로 치면 호민관은 거의 [[대통령]]에 준하는 지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나, 군사적 권한 등은 모두 집정관이나 법무관 등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제]]의 강력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의원내각제]] 하의 제한적인 권한을 지닌 대통령에 가깝다.
- 홍성유 . . . . 2회 일치
[[1928년]] [[10월 4일]] [[경성부]]에서 태어나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1951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학사 학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51년 9월 [[갑종장교|육군 갑종사관]] 제10기로 육군 소위 임관하여 [[195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헌병사령부]] [[기관지]] 《[[사정보]]》(司正報) 기자·편집장을 지낸 이후, 1952년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53년]] 국방부 군사잡지 《[[명랑]]》(明朗) [[편집장]]을 거쳐 [[1955년]] [[2월]]에 대한민국 육군 중위 예편하였으며 [[1957년]] 《[[한국일보]]》에 장편소설 《[[비극은 없다]]》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정일권]][[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황부인전 . . . . 2회 일치
이 때, 유비 관우 장비가 서서를 군사로 등용하였는데, 조조가 서서의 어머니의 필적을 위조하여 서서를 데려온다. 서서는 떠나면서 제갈량을 천거하고 조조에게 가는데, 서서의 어머니는 위조편지에 속은 아들을 질책하고 아들의 의기가 꺽이는걸 염려하여 목을 메어 자살한다.
제갈량은 [[삼고초려]]를 받고 뜻을 꺽어 유비 휘하에 들어간다. 조조가 십만 대군을 보내서 신야에 주둔한 유비를 공격하자, 제갈량이 군사로서 계책을 세워 이를 막는다. 조조가 직접 신야를 공격하자, 유비가 신야를 버리고 번성으로 옮기는데 십수만의 백성이 유비를 따른다.
- AT4 . . . . 1회 일치
[[https://news.google.com/newspapers?nid=1955&dat=19961008&id=umUlAAAAIBAJ&sjid=8qYFAAAAIBAJ&pg=2805,4669161&hl=ko|1994년 당시 스칸디나비아 폭주족간 항쟁에 사용된 전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스웨덴 군사시설에서 훔친 AT-4를 상대 폭주족 클럽하우스에 쏴버린 것.
- Crusader Kings 2 . . . . 1회 일치
== 군사 ==
- Crusader Kings 2/궁정 . . . . 1회 일치
군사를 담당하는 직책. 자신의 무력을 국가 능력치에 보태준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기술 . . . . 1회 일치
첩보 활동, 군사 유닛에 대한 정보, 기습 기회 등에 보너스를 주는 연구들. Computers 트리의 부속 연구로 생각하면 될 만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Europa Universalis 4 . . . . 1회 일치
제작사가 와패니즈로 유명하다(...) 일본의 왠만한 다이묘들은 전부다 있으며, 몇몇 다이묘들은 서양에서 유명한 명군들보다 능력치가 높기도 하다. 거기다가 일본한테 붙어있는 사기 전통인 규율[* 쉽게 말해서 공격력+방어력. 규율이 높을수록 한번의 전투로 더 많은 상대군사를 잡을수 있고 더 늦게 패주한다.] 10%는 진짜(...)~~조선하면서 이것때문에 고통을 몇번 받은건지...~~[* 프로이센이 이념을 다열어야 규율 7.5%다. 이쪽은 개신교개종을 반드시 하게되있기에 2.5%추가되서 10%긴 하지만.]
- Europa Universalis 4/공략/아시아 . . . . 1회 일치
이게임시작지점에서 가장 많은 땅덩어리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높은 총개발도(developement)를 지닌 국가. 상당히 많은 고유시스템을 들고있는데, 고유 팩션인 천조국 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관료, 사원, 환관이 행정, 군사, 외교를 담당하고 있으며, 각 팩션의 영향력이 가장 높을경우 그 팩션이 보너스를 주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유 정부체제인 천조국(Celestial Empire)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기술비용과 안정도 비용을 10%줄여주며, 모든 땅의 수입이 반이된다. 천명이란 시스템으로 반란도를 5줄여준다. 만약에 정통성이 70이하이거나 안정도가 음수가 될경우엔, '천명을 잃음'이 뜨면서 천명의 보너스가 사라지고 반란도가 5상승해 최종적으로 반란도 10이 늘어난다(...) 거기다가 중국계 문화권이 엄청 세분화되어 천명한번 터질경우엔 오나라, 촉나라, 연나라, 제나라등 소국들이 죄다 반란일으키고 독립해 춘추전국시대를 만들기도 한다...~~안습~~ 내적 완결성등 명한테 들어있던 수많은 디버프들이 전부 사라져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여전히 천명이란 고유시스템덕에 빵빵터지는 반군들을 맛볼 수 있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서구화를 하도록 하자
- Victoria II/군사와 전투 . . . . 1회 일치
[[Victoria II]]의 군사와 전투를 소개하는 페이지.
- 경순왕 . . . . 1회 일치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 고경표(배우) . . . . 1회 일치
학교 선배인 [[안재홍(배우)|안재홍]]은 [[학생군사교육단|ROTC]]를 추천받은 적 있다.[* [[꽃보다 청춘]] 아프리카편 감독판 中]
- 고세원 . . . . 1회 일치
고세원은 [[박찬호]] 군대 조교를 했었다고 박찬호와의 인연을 들려줬다. [[1999년]]부터 [[2000년]] [[8월]]까지 충남 공주 육군 32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조교로 복무했고 그때 [[박찬호]]는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해 병역면제 혜택을 받은 후 [[1999년]] [[10월]] 이곳에 입소해 4주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라면 끓일 뜨거운 물로 라면을 포기하고 [[박찬호]]의 허리 찜질을 해 줬다는 얘기도 들려줬다.<ref>{{뉴스 인용|url=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51904|제목=탤런트 고세원 "박찬호 軍조교가 바로 나"|성=|이름=|날짜=2007-10-30|출판사=경인일보|확인날짜=2010-04-20}}</ref>
- 구자춘 . . . . 1회 일치
1961년 [[육군]] [[중령]]으로 6군단 포병 제993대대장으로 있을 때 일어난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데 기여하여, 당시 '혁명 주체세력' 으로 인정받았다.
- 김기철 . . . . 1회 일치
[[5.16 군사정변]] 이후 치러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당(대한민국)|자유민주당]] [[이희승(1913)|이희승]]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중당(1965년)|민중당]]에 몸담았다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재건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다시 신민당에 몸담았다.
- 김동한 (1919년) . . . . 1회 일치
[[분류:1919년 태어남]][[분류:1983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광산 김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분류:대한민국 해군 중령]][[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함세웅]][[분류:신민당]][[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구가톨릭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
- 김부식 . . . . 1회 일치
{{인용문|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 년간 ‘[[묘청의 난]]’보다 지나친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왕의 군사가 반역자를 친 전쟁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니….(중략)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이며 진취적으로 진전했을 것이다.|{{서적 인용|저자=[[신채호]]|장=조선역사상(朝鮮歷史上) 일천년래(一千年來) 제일대사건(第一大事件)|제목=《[[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연도=[[1929년]]}}}}
- 김상중(배우) . . . . 1회 일치
* 홍아모개 역을 맡았던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의 OST를 불렀다. 제목은 익화리의 봄. 작곡은 본 드라마의 대다수 곡의 작곡을 맡았던 안예은이 했다. 중후한 목소리에 큰 기교없이 담백하게 부르는데 노래실력이 상당하다. 향주목에서 왕의 군사들과 대치했을 때 백성들이 떼창한 곡이기도 하다.
- 김성곤 . . . . 1회 일치
[[4.19 혁명]] 후에는 한때 정계를 은퇴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대, 제7대,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종필]]과는 껄끄러운 사이로 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함께 김종필을 견제하였다.
- 김성곤 (1913년) . . . . 1회 일치
[[1958년]]에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소속으로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인해 한때 정계 은퇴하였으며 [[5.16 군사정변]]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이후 [[1959년]] 국민학원(現 [[국민대학교]])를 인수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에 [[대한유도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62년]]에 [[쌍용양회]]를 설립한다. 그 이후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으며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이 되었다. [[1965년]]에는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당무위원이 되었으며 성곡언론문화재단, 성곡학술문화재단을 창립하였다. [[1967년]]에 [[쌍용제지]]를 설립하였으며, 제7대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 김숙자 (1389년) . . . . 1회 일치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 김양 (1953년) . . . . 1회 일치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안동 김씨 (구)]][[분류:김구 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국가보훈처장]][[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김대중]][[분류:문국현]][[분류:창조한국당]][[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국방대학교 교수]][[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
- 김영준(1941) . . . . 1회 일치
국립체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체국]]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969년 [[사법시험]](제10회)에 합격하였고 [[학생군사교육단|ROTC]] 제2기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여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전역하였다. 전역 이후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였다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 김윤환 . . . . 1회 일치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윤환은 당대의 '''[[킹 메이커]]'''(King Maker)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올랐다. [[김영삼]]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舊민정당(군사독재정권) 출신 민정계 인사들을 설득해서 강력한 [[김영삼]]의 지지세력, 일명 신민주계를 규합하여 결국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당시 김윤환은 민정계 인물들에게 '국민들이 군부 출신 민정당 인물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일단 [[김영삼]]을 세워서 정권을 이어가고, 그 다음에 우리(TK+민정계)가 주도하는 보수 정권을 창출하면 된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윤환은 [[전두환]] 밑에서는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옹립해 대선에서 승리했고, [[노태우]] 밑에선 [[김영삼]]을 후계자로 지원해서 역시 대선에서 승리했다.
- 김종호(1933) . . . . 1회 일치
1952년에 [[해군사관학교]] 10기로 입학해 1956년 임관했다. 목성함장과 부산함장을 지냈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함대사령관을 지냈다. 해당 한국함대는 뒤에 명칭이 바뀌어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었다.[* 해작사의 영어 표기도 Naval Operation Command가 아닌 Korea Fleet Command이다. 일본의 경우 작전사령부에 해당하는 함대가 [[자위함대]]로 [[함대]]급 부대인 [[잠수함대]], [[호위함대]], [[항공집단]]의 상위기관이다.] 1986년 2월 1일에 한국함대가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자 초대 작전사령관을 지냈다.
- 나폴레옹: 토탈워/건물 . . . . 1회 일치
==== 군사 건물 ====
- 남명학파 . . . . 1회 일치
이에 따라 이들이 남긴 저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나마 이들의 시초인 조식의 사상을 그의 애제자인 정인홍이 정리한 남명집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그들은 마음을 기본적으로 하나의 지켜야될 '성'으로 보았고, 이것을 공성하려하는 잡념이나 악심들을 막는걸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학문적 특징때문에, 이들은 군사학 역시 해박하게 공부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시기 이들은 의병장으로써 크게 활약했다.
- 대구광역시 . . . . 1회 일치
미국의 대한군사원조(AFAK)를 통한 자재 원조로 지어진 대구시청사 감사식(1955년)
- 마기/303화 . . . . 1회 일치
* 홍명은 '''과거 군사력을 토대로 세계를 통일하고자 했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며 스스로의 꿈을 품고 모두를 이끌어 달라고 당부한다.
- 마기/340화 . . . . 1회 일치
그러자 연백룡은 "왕의 정의 자체가 잘못되었다면?"이라고 반문한다. 옳고 그름은 불변하는 가치가 아니다. 백룡은 황제국의 예를 들며 한때는 군사력에 의한 세력 확장이 전부였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 시대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자신이 황제이던 시기엔 복수가 대의였지만 대상이 사라지자 한계가 드러났다. 백룡은 이제 신드바드에게 다시 묻는다. 정말로 그의 정의가 흔들리지 않을 것인지를. 혹시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선건 아닌가 하는 불안은? 신이 된 그는 그런 불안감에서 해방된 것인가? 백룡은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다며 신드바드에게 대답을 요구한다.
- 마주 . . . . 1회 일치
* [[경마]] 업계에서는 '경주마'의 소유주를 뜻한다. 경마에서 말이 우승하면 수익을 배당 받는다. [[유럽]]에서는 고대로부터 경마의 마주는 [[왕]]이나 [[귀족]]이 맡았는데, 이는 경마가 단순히 [[도박]]이 아니라 소유한 말의 능력을 비교해보고 우수한 말을 육성하여 군사력[* 근대까지 군대에서는 말을 타는 [[기병]]은 주요한 전력이었기 때문이다.]에도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회고위층이 마주가 되었고, 마주는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 모레아 전제국 . . . . 1회 일치
14세기 이후에 비잔티움 제국은 각지의 봉신국에 황제의 동생이나 아들 같은 가까운 황족을 봉하여 행정, 군사, 사법 전권을 행사하며 통치하도록 했다. 전제공의 작위는 종신 보유가 되며, 행정관 임기도 기본적으로 종신이었으나, 전제공의 직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 무라하치부 . . . . 1회 일치
전국시대에는 전국 다이묘에 의한 지배가 강화되고, 에도 시대를 거치면서 총촌의 자체적인 군사력이나 자치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한 무라(村, 촌락)의 경제적, 자치적 기능이 우수하여 전국시대의 영주들 역시 지배 단위를 무라로 삼았다. 무라 내부의 자치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고, 무라의 촌장을 통하여 촌락 단위로 지배[* 예를 들어, [[세금]]이 농민 개개인이 아니라 촌락 단위로 부가되는 등.]를 했던 것이다. 메이지 시대에 근대적인 행정이 도입되었지만 전통적인 농촌 지역 사회의 공동체적 생활양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현대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 문근영 . . . . 1회 일치
극우 군사평론가 [[지만원]]이 문근영의 선행을 빨치산인 그녀의 외조부와 연관지어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논란이 일었다.[[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17|#1]] [[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26|#2]] [[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18|#3]] 여기에 대해 문근영의 선행까지 색깔론으로 보는 것이냐는 비판이 있었고, 지만원은 문근영을 이용하려는 미디어를 비판한 것이라 반박한다. 서울지법은 지만원의 패소로 판결했으나 서울고법에서는 양쪽의 주장을 모두 밝히라는 반론보도로 판결을 내리게 된다.
- 문종 . . . . 1회 일치
문종은 조선 제 5대 국왕이다. 시호에 걸맞게 세종의 문재(文材)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영명한 군주로 세종의 업적 중 일부는 문종이 함께 일군 것이었다. 문종이라는 시호와는 달리 군사적인 부분에도 기여하는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 바키도/135화 . . . . 1회 일치
>오거의 스트리트 파이터 전력. 일국의 군사력에 비할 정도지.
- 박노식(1971) . . . . 1회 일치
|| [[남한산성(영화)|남한산성]] || 군사 1 || ||
- 박술희 . . . . 1회 일치
혜성(현재의 [[당진시|당진]])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고려 태조|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고려 혜종|혜종]]을 정윤(왕태자)로 책봉할 때, [[장화왕후]]가 [[왕건]]의 의중을 박술희에게 전달하게 하여 [[왕무]]가 정윤이 되었으므로, 박술희가 [[왕무]]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35년]]에는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 나주 탈환 작전에 [[홍유]]와 더불어 지원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왕건]]은 그들 대신 [[유금필]]을 파견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고려 태조|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 혜종|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 박준규(1925) . . . . 1회 일치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경북 10선거구) || '''[[민주당(1955년)|민주당]]''' || '''20,835 (71.64%)''' || '''당선 (1위)''' || '''초선''' 1960년 탈당[br]신민당 창당[br]1961.5.16 자격정지[br]([[5.16 군사정변]]) ||
- 백남억 . . . . 1회 일치
[[5.16 군사정변]] 이후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던 박준규, [[김재순]], [[민관식]]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되었다. 이때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당무의원을 지냈다.
- 백작 . . . . 1회 일치
로마 후기 군사관료나 프랑크 왕국 시기 지방관을 뜻하는 '코메스'에서 따온 말이다.
- 북한의 역사왜곡 . . . . 1회 일치
>- 이에 따라 대 살육작전을 현지에서 조종 지휘할 데 대한 임무를 받은 남조선 강점 미군사령관 윅캄(위컴)은 의로운 항쟁자들을 ‘버릇없는 망나니’, 지어는 ‘들쥐’로 모독하면서 ‘공수특전대’ 5개 여단과 보병사단, 기갑부대, 항공대를 비롯한 7만 여명의 방대한 무력과 장갑차, 중포, 군용직승기와 지어는 항공모함전단까지 광주의 평화적 주민들을 살육하는데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 블랙 클로버/86화 . . . . 1회 일치
* 증오의 파나가 다루는 불의 정령 샐러맨더의 힘은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샐러맨더의 갈퀴손이 지나간 자리는 울창했던 숲도 건물도 남아나지 않는다. 정령에 대해 잘하는 바네사 에노테이커도 그 위력에는 경악한다. 원래 샐러맨더는 4대 정령 중에서 가장 공격력이 높고 일국의 군사력에 필적하는 전력으로 평가된다.
- 빅터 차 . . . . 1회 일치
그의 부인은 군인,정치인 김식의 딸이다. 김식은 전남 강진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으며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동기이다. 군에서 소장으로 전역했으며, 11대, 12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으로 당선됐다. 13대에서는 낙선했고, 14대에서는 [[민주자유당]], 15대에서는 [[신한국당]]에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http://ko.pokr.kr/person/1933151 (참조)]] 13대에서 낙선한 이후로 농림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 성시경 . . . . 1회 일치
성시경은 데뷔 이후, 오랜 기간동안 감성적인 [[발라드 (대중 음악)|발라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8년]] [[6월 28일]]에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콘서트 이후, [[7월 1일]] 현역으로 [[강원도 (남)|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102 보충대에 입대하였고, [[제1야전군 (대한민국)|제1야전군사령부]] 군악대 군악병으로 복무한 뒤 [[2010년]] [[5월 17일]]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매년 축가콘서트와 연말콘서트를 진행했으나 2015년을 마지막으로 연말콘서트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MBC FM4U]] 《FM 음악도시 성시경입니다》의 [[디스크 자키|DJ]]를 거쳐서, 현재 [[KBS2]] 《[[배틀 트립]]》, [[tvN]] 《[[모두의 연애]]》, [[OLIVE]], [[tvN]] 《달팽이호텔》 등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 세미스텔스 . . . . 1회 일치
[[분류:군사]]
- 송진현 . . . . 1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특별8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10월 22일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효순·미선양 사망 사건'과 관련해 미군 2명을 소환해 조사했던 [[의정부지방검찰청]]을 상대로 "관련 수사 기록을 공개하라"며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들이 청구한 정보 내역 가운데 피의자 신문 조서 등은 정보공개법상 비공개 대상 정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 대한 미군측 군사재판 원고 사본 등은 원심대로 한미 관계 등을 감안해 공개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며 원심대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65906]</ref>10월 25일에 지난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집회에서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된 송모씨가 "단체협약에 정한 징계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해고한 것은 부당하다"며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소송에서 "노조활동에는 집회참가도 포함되고 따라서 [[집시법]]에 의해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당연해고할 수는 없다”면서도 "집회 도중 자의적인 폭력행위는 조합활동의 일부라고 볼 수 없다"며 "집회에서 폭력을 행사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로 당연해고 사유에 해당한다”며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83535]</ref>
- 신경림(대학교수) . . . . 1회 일치
시인의 1988년작 '[[가난한 사랑 노래]]'의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라는 시귀는 본래 '[[탱크]] 바퀴 굴러가는 소리'였지만 [[대한민국 제5공화국]] 군사정부의 검열을 의식한 출판사의 만류로 수정했다고 한다.
- 신현준(군인) . . . . 1회 일치
[[5.16 군사정변]] 후 해병 중장으로 예편했다. 미국 네바다주립대학에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초대 [[모로코]] 대사, 초대 [[바티칸]] 대사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 심양홍 . . . . 1회 일치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따라서 [[이순재]], [[신영균(배우)|신영균]] 등과 같이 고학력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순재[* 이순재는 심양홍의 서울고 선배며 서울고 출신 탤런트로는 [[박용식]]이 있다.], 신영균, 심양홍 등은 서울대학교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 아스팔트 우파 . . . . 1회 일치
과거에도 대한민국에 우파 정치단체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현존하는 아스팔트 우파와는 크게 관련성이 없다. 제1공화국 시기 [[자유당]]과 연계된 [[이정재]]의 [[화랑동지회]] 등 [[정치깡패]] 부류의 조직이 존재했으나, [[조직폭력배]]로서 처단, 와해되어 현재의 아스팔트 우파들은 이러한 조직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군사정권 시기에 정부에서는 우익성향을 가진 관변단체를 만들었으나, 민주화 이후로 이들은 대부분 몰락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고 현재의 조직들은 이러한 단체들과의 연관성이 모호하다.
- 안동준 . . . . 1회 일치
1919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청주공립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8.15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 영국 요리 . . . . 1회 일치
근대에는 또한 맛 뿐만이 아니라 건강과 영양에 대한 관심도 대두되어, 영국 요리는 건강영양식으로 개량되었다. 건강영양식을 먹은 영국 병사들은 높은 전투력을 발휘하여, 대영제국이 군사적으로 명성을 떨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오다 노부나가 . . . . 1회 일치
당시 기준으로 여러 방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행보를 보인 인물로, 상공업 촉진을 위해 [[관문]]을 철폐하거나 종교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등 선진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군사적으로 최강은 아니었으나 이를 전략적인 밑그림을 통해 역전시켜 다른 다이묘들을 차근히 압도해 나갔다. 한편 성정이 폭급한 부분이 있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왕]]'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으나 사적인 부분에서는 당대 기준으로 오히려 자상한 부분도 보인다.
- 오미코시 . . . . 1회 일치
이 말은 정치, 군사 활동에서 (실권을 가지지 않는) '상징적 인물'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오미코시처럼 여러 사람들이 받들어 올려 상징으로서 사용하지만, 특별히 실권은 가지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 오정근 (1929년) . . . . 1회 일치
[[경성부|일제 강점기 경성부]]에서 출생한 그는 [[대한민국 해병대|해병]] [[중령]]으로 복무하면서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수산청|수산청장]], [[대한민국의 국세청장|국세청장]]을 거쳐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에서 제9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 울진군 . . . . 1회 일치
== 군사 ==
- 원피스/858화 . . . . 1회 일치
* 시폰은 로라가 어째서 결혼상대를 찾아 바다로 나갔는지 경위를 설명해준다. 빅맘은 어떤 이유 때문에 전세계 거인족들과 적대하고 있었다. 지금도 토트랜드에 거인족은 없는건 그때의 일 때문이다. 콜렉터인 빅맘에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딱 한 번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있었다. 엘바프 족의 왕자 "로키"가 로라를 보고 한 눈에 반해서 청혼했기 때문이다.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빅맘과 거인족 간의 원한은 단숨에 해소되는 데다 빅맘은 세계 최강국 엘바프의 강력한 군사력과 거인족 가족이 생긴다.
- 월드 인 컨플릭트/줄거리 . . . . 1회 일치
헬리콥터가 떠날 준비를 시작할 무렵, 올로프스키는 말라셴코를 부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말라셴코가 민병대로 추정되는 인물을 심문하러 근처 농장으로 갔다는 이야기 뿐. 한편, 말라셴코는 병사들에게 무기를 숨긴 민간인들을 처형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말라셴코가 우물쭈물하는 병사들에게 짜증을 내며 자기 손으로 민간인들을 처형하려 할 때, 올로프스키가 난입해 이를 저지한다. 올로프스키는 병사들에게 민간인들을 데리고 나가게 한 후 말라셴코를 추궁한다. 말라셴코는 민간인들이 민병대를 위해 무기와 음식을 숨기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올로프스키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말하자 말라셴코는 명령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해야하냐며 화를 낸다. 이에 올로프스키도 다시 한번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군사재판에 회부해서 소련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받아친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나가버리는 말라셴코. 올로프스키는 이를 보고있던 레베데예프에게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레베데예프는 맞건 틀리건 올로프스키는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라는 이도저도 아닌 대답을 한다. 올로프스키는 레베데예프가 자신의 선택을 했는지 되묻고는, 조만간 선택할 순간이 오게 될 것이라면서 농장을 떠난다.
- 유목민 . . . . 1회 일치
유목민의 대침략을 부르는 원인 가운데 하나. 유목민은 특정한 지역에서 가뭄과 기근이 닥치면 곧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다른 부족을 밀어낸다. 밀려난 부족은 또 다른 부족을 밀어내고, 그 부족은 또 다른 부족을 밀어낸다 이 도미노 현상은 최종적으로 농경민족의 정주국가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면서 끝나는데, 농경민은 도망갈 데가 없기 때문(…).
- 윤천주 . . . . 1회 일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필]] 등과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1963년 초대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과 관련하여 [[6.3 항쟁]]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한 징계에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 윤휘 . . . . 1회 일치
이후 [[조선]] 조정의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군과 [[남한산성]]을 오가면서 화의 교섭을 노력, [[청나라]]군사들을 설득시키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와 [[명나라]]를 여러 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조선]]의 정벌 여론을 무마시키기도 했다. [[1638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책봉[[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국 도중 [[담배]](南草)를 [[가마]]속에 숨겨갖고 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신직에서 파직당했다.
- 윤흔 . . . . 1회 일치
* [http://history.yj21.net/Theme/Theme.asp?BC_ID=b1600 윤양: 여주군사]
- 은혼/602화 . . . . 1회 일치
* 한순간에 괴멸해 버린 군사대국 부레이. 원상은 생전 처음으로 전장을 팽개치고 귀환했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 이갑성 . . . . 1회 일치
[[1960년]] [[4월]] [[이승만]]이 하야하자 야인으로 물러났다가,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과 함께 우익 단체를 지도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혁명을 지지 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이경희 (1880년) . . . . 1회 일치
기호중학교 졸업 후 대구 협성학교와 [[안동 협동학교]]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09년]] [[안창호]], [[윤치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했고, [[1910년]]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군사학교를 조직하려 했으나, [[105인 사건]]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 이기택 . . . . 1회 일치
|| 1997 || 1997년 7.24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경북 포항 북)[* 전임자 [[허화평]] [[12.12 군사반란]]으로 피선거권 상실] ||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 35,137 (28.33%) || 낙선 (2위) || ||
- 이동흡 . . . . 1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선거 전담 재판부인 형사10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3월 22일에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03년 9월 선거구 아파트 조기축구회 창단식에 참석해 고사상에 현금 20만원을 기부하고 같은해 12월 제주도에서 열린 이장단 단합대회에 두차례 참석해 1100만여원 상당의 음식값과 술값을 후배를 통해 지급하여 기소된 [[박혁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 이장단 단합대회에 대해 무죄라고 판단하여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모두 유죄로 인정하면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0519344]</ref> [[민주노동당]]을 공개 지지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2년이 선고된 정용천 전국공무원노조 수석부위원장에 대해 징역6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19351]</ref> [[열린우리당]]을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시스템클럽]]에 게시하여 1심에서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군사평론가 [[지만원]]에 대해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19374]</ref> 3월 29일에 [[백원우]] [[열린우리당]] 의원에 대해 "경선 당시 인쇄물을 배부한 대상은 입당 원서가 지구당이나 중앙당에 제출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진정한 의미의 당원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0521828]</ref>
- 이만섭 . . . . 1회 일치
이만섭은 [[1932년]] [[2월 25일]]에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다. [[1951년]]에 [[연세대학교|연희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한 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주일 특파원과 주미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직후 발탁되어 [[1963년]] 10월에 공화당에 입당, 대선 후보 [[박정희]]의 지지 유세와 찬조연설을 다녔다.<ref name="경향_6310">民主共和黨에入黨 東亞日報李萬燮씨, 《경향신문》, 1963.10.3</ref>
- 이문식(배우) . . . . 1회 일치
사실 그는 '''굉장히 독한 양반이다.''' 일단 고등학교 때 진학하려고 작정했던 학교부터 대학교 중에서는 독하기로 소문난[* [[서경석]]이 수석합격을 해놓고도 견디지 못하고 자퇴한 또는 애초에 마음에 안들지만 안전빵으로 지원해뒀던 그 학교다.] [[육군사관학교]]였고[* 물론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합격은 못했지만.] [[한국항공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다가 1년을 못채우고 중퇴,
- 이방원 . . . . 1회 일치
고려 시절에 과거에도 급제한 등 문재(文材)도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훗날 백전노장이던 부친의 군대를 친정하여 제압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도 있던 나름 먼치킨으로, 정치적으로 노회한 운영을 보여준다. 원경왕후 민씨의 일족이나 세종의 왕후인 소헌왕후 심씨의 일족을 멸족시키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진력하였으나, 숙청 대상을 확실하게 선을 그어 지나친 옥사는 자제하였으며 또한 사관이나 대간의 역할을 긍정하여 균형추를 맞추는 부분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개국 초부터 피바람 불었던 조선 왕조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 이상오 . . . . 1회 일치
[[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구]][[분류:한국독립당]][[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호세이 대학 동문]]
- 이상정 (1897년) . . . . 1회 일치
| 최종 계급 = [[국민혁명군]] 중장([[소장 (군사)|소장]])
- 이성계 . . . . 1회 일치
한국사의 명장 반열에 반드시 낄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과 개인의 무용이 후덜덜했던 인물로, 이러한 업적을 통해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였고, 그 후 명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묵살당하자 최영이 우왕을 달래느라 정벌군을 직접 이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국경지대의 하중도(河中島)인 '위화도'에서 군대를 물려 쿠데타를 단행해 최고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그 후 정몽주 등의 저항을 뿌리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다.
- 이영 (1494년) . . . . 1회 일치
[[조선 중종|중종]] 때인 1514년(중종 9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절도사, 참판 등을 역임했다. 벼슬에 있으면서 염근(廉謹)하기가 무반(武班)에서 가장 보기 드문 자라는 평을 들었다. 1545년 [[조선 명종|명종]]이 즉위하자 단천 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정평 부사에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평부사 재직시 사적으로도 백성을 범하지 않아 감사가 포장(褒奬)하고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1552년 회령부사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청백리에 뽑혔다. 또한 야인을 회유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군비 확충과 군사훈련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1556년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병조참판과 제주 목사·경상우도 병마절도사·부호군·호군 등을 지냈다.
- 이영훈 (경제학자) . . . . 1회 일치
[[2006년]] [[12월 1일]] 고등학생용 《한국근현대사 대안 교과서》에서 [[4·19혁명]]을 《4·19학생운동》으로, [[5·16군사정변]]을 《5·16혁명》으로 기술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서 4·19민주혁명회, 4·19혁명공로자회, 4·19혁명희생자유족회 회원 30여 명에게 격렬한 항의를 받았으며, 이 교과서는 [[2008년]] [[3월 24일]] 내용을 수정하여 출간하였다. 이 교과서는 이영훈 이외에 [[박효종]] 등의 교수가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 이재학 . . . . 1회 일치
2015년 11월 9일부터 기초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입소하는 관계로 마무리 훈련에 불참했다.
- 이재황(배우) . . . . 1회 일치
|| 2003년 || 우리들의 전쟁[* 첫 영화이자 유일한 영화 작품] || 독립운동가 || 국방홍보원 장병 양성 영화/국제군사영화제 우수상 수상작품 ||
- 이준섭(군인,정치인) . . . . 1회 일치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로 복무하였다. [[5.16 군사정변]] 당시 반란군의 일원으로 [[한강대교]]에 있던 [[헌병]]들을 제압하였다. 이후 해병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였다.
- 이철희(1964) . . . . 1회 일치
전반적으로 온건 합리적인 리버럴 스탠스를 가진 것과는 달리 사관엔 [[이덕일]]류 노론사관을 맹신한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저서 <뭐라도 합시다>와 썰전에서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노론으로, 이는 [[친일]] 단정 [[박정희|군사]] [[전두환|독재]] 세력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 이카르부스 . . . . 1회 일치
1954년에는 [[오스트리아]] 회사 [[자우러]][* 총기 회사 SIG 자우어와의 관련은 없다.]의 [[버스]]를 라이센스 생산한다. 이는 현재 이카르부스의 밥줄이 될 버스 제작의 시초가 되었다. 이카루스는 1961년 군사분야의 산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자동차 회사가 된다.
- 이효상 . . . . 1회 일치
[[1945년]] [[경상북도]] 학무국장에 취임, 1952년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문리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투신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사퇴하였다. 그 뒤 [[영남학원]](嶺南學園)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 임관빈 . . . . 1회 일치
1953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등학교를 28기로 졸업했다. 이후 1976년 육군사관학교 32기로 졸업하여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 장대환 . . . . 1회 일치
* 1979년 3월 ~ 1983년 3월 : 공군대위.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정치학, 경영학 교관, 생도전대 상담교관 전임강사
- 장발 (화가) . . . . 1회 일치
[[1946년]]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으며, [[1961년]]까지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미술계와 미술 교육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형 장면이 [[5·16 군사 정변]]으로 실각한 뒤에는 미국에 머무르면서 여생을 보냈다.
- 정무식(정치인) . . . . 1회 일치
1924년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근무하며 [[육군정보학교]] [[교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중앙정보부]]에서 대구[[대공분실]]장, 제3국장, 정보부장 특별보좌역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정찬성 . . . . 1회 일치
결국 부상의 회복이 늦어지고, 군문제를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2014년 10월 20일부터 2년 간 구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4급 사유는 어깨부상.[*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275&article_id=0000043010|뉴스기사]]] 소집해제일은 2016년 10월 19일.[* 사회복무요원은 기초군사훈련 4주를 포함해 총 24개월을 복무한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355574|#]]
- 정충원 . . . . 1회 일치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재직 중이던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 당시 공습에 대비한 방공 사무를 수행하는 한편 군용 자동차를 징발하고 운전수를 징집하여 [[관동군]]의 군사 작전에 협조했다. 또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차원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검거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 조대연(1888) . . . . 1회 일치
1960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관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 같은 해 12월 치러진 [[196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경질되었다.
- 주윤발 . . . . 1회 일치
* 족보에 의하면 송나라 시대 관직을 지낸 [[주응두]]로 이어지는 가문 출신이라는 그는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 [[오나라]]의 군사 [[주유]](周瑜)의 직계후손이다.<ref>
- 주현미 . . . . 1회 일치
[[화교]] 3세[* 주현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4살에 한국으로 이민와서 자랐으므로 사실상 2세인 것이나 다름없다.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180412 주현미편에서 주현미의 친할아버지는 중국인이고 친할머니는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한 조선인 1세(그 당시에는 [[조선]]이라고 불렀다. 물론 한국인 맞음)인 것으로 추정한다. 주현미의 [[할머니|친할머니]]와 [[어머니]]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현미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부터 이미 한국 문화 방식으로 자랐다고 한다. 따라서 오히려 주현미와 형제들은 처음 화교 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그것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출신으로, [[전라북도]] [[남원시|남원]] 에서 4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하여 자란 [[중국인]][* [[중국]] [[산동성]] 모평현에서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지만, 당시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의 [[정치]] 및 군사적 상황에 의하여 [[대만]] [[국적]]이 되었다.] [[한의사]]였고,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다. 참고로 주현미의 친할머니 역시 [[한국인]]이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따라서 주현미는 굳이 혈통을 따지자면 중국 [[쿼터]](1/4) [[혼혈]]인 셈이다. 대만 국적이었으나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주현미의 동생들은 아직 [[중화민국]] 국적이라 한다.[* 한국화교는 [[타이완 섬]]과는 거리가 먼 [[산둥 성]] 출신들이며 단지 국적을 부여한 나라가 [[중화민국]]이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게 좀 꼬인 건 국부천대 때문. 물론 현재 화인들의 대부분이 귀화를 택하면서 중화민국 국적자는 줄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소화 데레사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 좀 비슷한 케이스인 외성인 출신 대만가수 [[등려군]]도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이다. 등려군 역시 산둥 출신.~~틀린 정보이다 등려군 자신은 타이완 태생 부친은 하북성 모친이 산둥성 출신이다~~]
- 진격의 거인/87화 . . . . 1회 일치
마레 동쪽의 "적대국"이 언급되었는데, 이쪽도 거인의 힘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 마레가 군사력을 원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적대국의 존재 때문. 그 외에도 다양한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엘디아 복권파는 시조 거인의 힘을 앞세워 망명한다는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정말로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글로스는 전인류가 엘디아인을 증오하고 박멸하려 한다고 주장하는데 과장이 섞였더라도 보통 인간의 나라인 이상 엘디아인에 대해서는 비슷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또 시조 거인의 힘이라는 매력적인 힘을 손에 넣는데, 그 주도권을 여전히 엘디아 복권파 손에 남겨놓을지도 의문. 결국 그 적대국에서도 엘디아 복권파의 미래는 밝지 않다.
- 진격의 거인/93화 . . . . 1회 일치
* 전쟁은 끝났지만 마레의 군사적 우위는 끝났고 [[지크 예거]]는 지금에야 말로 시조 거인 탈환을 실현시킬 때라고 강변, 승인을 받아낸다.
- 진격의 거인/95화 . . . . 1회 일치
* 망치의 거인을 가진 타이바 가문이 새로운 떡밥으로 부상하고 있다. 다른 거인들은 마레의 군사병기이자 엘디아인으로서 열악한 처우를 받고 있는데 비해 타이바 가문은 단지 최초의 전향자란 이유로 아무런 불이익도 없을 뿐더러 전쟁터로 내몰리지도 않아, 포르코처럼 반감을 가진 자도 있다. 오히려 그들이 선동역으로 나설 정도면 사실상 엘디아인이 아니라 특별취급 받는 기득권 계층에 가까운 묘사. 전세계적으로 이들만큼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 차동엽 . . . . 1회 일치
차동엽 신부는 해군사관후보생 훈련기간 중 작은 체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성적이 우수하였다. 그래서 동료들이 '차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차영철 . . . . 1회 일치
| 지휘 = [[분대 (군사)|분대장]]
- 창작:왕국 . . . . 1회 일치
== 군사 ==
- 창작:티겔 왕국 . . . . 1회 일치
상티겔 왕국은 달순이 죽고난뒤 한번의 혼란기를 거치는데, 이이유는 그녀의 강력한 전제통치가 사실 그녀의 카리스마가 없으면 불가능할 정도였기때문이다. 숲을 개간하고 숲에 살던 거인들이나 토착 하이에나족든을 격퇴하면서 형성된 군사귀족들을 자신의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누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그녀가 죽고난뒤엔 당연히 그것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고, 그결과 그녀가 죽고 그녀의 세손자들인 달건, 달휴, 달준이[* 달순에게 외동아들이 한명있었긴 했지만 장성후 개척을 손수진행하다 거인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세쌍둥이들만이 계승자였다.] 각자 자기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된다면서 자기편을 선 귀족들을 이끌고 내전을 벌인것. 이를 티겔 왕위계승전쟁이라 부르는데, 달순때 상당수 올려놨던 인구수를 이때 확줄어버려서 이후 50년간은 내정에 힘써아했을정도로 참혹한 전쟁이었다. 아무래도 첫째인 달건이 여러가지면에서 유리했기에[* 단순 정통성뿐만 아니라 개인무력도 가장 강력했으며, 침입한 레잉 왕국(레이먼 제국의 전신인 라이엘기스 대공국의 전신)의 개척자들 50여명을 자기 부하 5명과 함께 격퇴한적도 있는 실력있는 전사이자 전략가였다.] 세가 가장 약했던 막내달준을 항복시키고 둘째 달휴를 공격하러 갔는데, 이때 달휴가 최악의 선택을 해버린것.'''바로 외부세력을 끌어들인것이었다'''. 달휴는 레잉왕국의 왕의 손녀와 결혼하고 그들의 세를 끌어들였으며, 이것때문에 전선이 밀려나 패배직전에 몰린 달건은 하이엔 왕국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순식간에 대륙 중북부의 패자들이 모조리 몰린 개싸움에서 승리한건 첫째였지만, 그결과로 티겔의 거의 모든 도시는 폐허가 되버렸고, 지쳐버린 달건은 모든 통치를 그의 막내동생[* 그가 죽고난뒤엔 달건의 맏아들]에게 맏기고 궁정안에만 틀어박혀있었다. 그가 그나마 유일하다시피 추진한게 있는게 작위상속법을 장자상속제로 만든것(...)~~어지간히 한이 실렸나보다~~ 내전의 결과가 참혹했던 만큼 당사자들의 최후도 비참했는데, 첫째 달건은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내전이 종결되자마자 작위상속법을 바꾸고 히키코모리화, 둘째 달규는 황폐화된 국토에 충격받아 자살. 셋째 달준은 그나마 항복뒤에 정신차리고 형편에서 싸웠으며 전쟁후엔 형대신 나라를 이끌었지만 결국 과로사했다.
- 채현국 . . . . 1회 일치
1961년 당시 중앙방송 연출 1기로 취업을 하지만 군사정권의 나팔수 역할에 지나지 않던 방송국에 환멸을 느껴 3개월만에 방송국을 나오게 된다.
- 최윤동 . . . . 1회 일치
* 중국 운남 육군사관학교 졸업
- 추미애 . . . . 1회 일치
정계 입문 전에는 [[춘천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서 일했다. 판사 시절 추미애는 ‘까칠한 여성 판사’로 통했다고 한다. 당시는 [[군사정권|군부 독재 정권]] 시기였는데, 수사 당국이 공안 정국을 등에 업고 구속영장을 남발할 때 ‘법적’으로 용납이 안 되면 기각하기 일쑤였다.
- 크림 전쟁 . . . . 1회 일치
1853년 7월, 러시아는 오스만 영토였던 [[몰다비아]]와 [[루마니아|왈라키아]]로 군사를 보냈다. 이에 오스만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 킹덤/497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왕분의 의견은 정반대. 그 가능성이 가장 중요한게 아니냐고 딴죽건다. 몽념이 예상한대로 왕분은 비관적인 입장이다. 업 자체도 한단에 버금가는 대도시에 강력한 군사도시가 즐비한 왕도원 안에 위치한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 작전은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하료초도 속으로는 그 평에 맞장구친다.
- 킹덤/499화 . . . . 1회 일치
* 과거 육대장군의 일각이자 군사로서 "지력 하나만으로 육장에 올랐다"고 평해지던 호양. 다른 육장들이 무용을 자랑할 때 그는 오로지 군략만으로 싸웠고 전쟁의 자유를 받가 각개전투했다는 인상이 강한 육장들이 실제론 그가 그려놓은 큰 그림 하에서 움직였다는 이야기도 했다.
- 킹덤/500화 . . . . 1회 일치
* 여기에서 이목이 호출한 호첩이 '왕도의 수호신'이란 별칭을 갖고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 호첩은 10만 군사를 이끌었다가 환의에게 격파당한다(...).
- 킹덤/510화 . . . . 1회 일치
* 하료초는 원래 총대장 [[왕전(킹덤)|왕전]]에게 성의 구조를 보고하러 갈 참이었지만 창인과 대화하느라 늦고 말았다. 허둥지둥 왕전군에 도착해 보니 또다른 소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병사들이 날카로워져서 하료초에게도 경계를 할 정도였는데, 그때 [[양단화]]가 나타나 그녀는 비신대의 군사라고 소개해서 정리된다.
- 킹덤/512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왕전의 다음 행동은 더욱 뜻모를 것이었다. 그는 아광에게 조의 왕도권에 있는 모든 성의 지도를 펼치도록 한다. 커다란 군사 지도가 바닥에 펼쳐진다. 왕전은 말에서 내린 채, 무릎을 뚫고 지도 위로 엎드린다. 그는 아광에게 척후들이 파악한 정보를 일일히 물으며 업성을 관찰했던 것만큼 세심한 눈으로 지도를 훑는다. 부하장수들은 당황스럽지만 그 모습이 뜻하는건 하나 밖에 없다. 왕전은 지금 이 자리에서 업 공략을 위한 새로운 군략을 짜고 있는 것이다.
- 킹덤/514화 . . . . 1회 일치
이신은 학살을 막은 왕전의 지시로 그를 좀 다시 본 것 같지만, 군사인 하료초는 이제 참는게 한계에 달했다. 병량이 있으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이런 소도시를 털어봐야 20만 대군이 먹을 양으로는 턱도 없다. 게다가 여기를 치면서 반나절 넘게 시간을 허비했는데 이는 조군에게 그만큼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 킹덤/525화 . . . . 1회 일치
* 같은 시각 왕분의 핏줄, 총대장 [[왕전(킹덤)|왕전]]도 우익의 싸움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지평선에 이는 흙먼지 속에서 군사들의 배치와 움직임을 꿰뚫어보는 듯 했다. 하지만 전황을 지켜보는 그의 얼굴은 어딘지 불편해 보인다.
- 태영호 . . . . 1회 일치
태영호의 부인 오혜선(50세) 역시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이며, 노동당 군사부장을 지낸 오백룡(19984년 사망)의 친척이다. 오백룡의 아들 오금철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의 친인척으로 알려져 있다. 오혜선 역시 대외무역, 외자유치, 경제특구 업무를 담당하는 대외경제성에서 영어 통역을 담당했으며, [[홍콩]]에서 근무하다 2년 전 [[런던]]에 온 것으로 알려졌다.
- 토탈워: 쇼군 2 . . . . 1회 일치
* 군사 동맹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유닛 . . . . 1회 일치
초슈 번의 유신 지사 타카스키 신사쿠가 조직한 군사 조직. 한국에서는 기병대(奇兵隊)라고도 불린다.
- 토탈워: 쇼군 2/가문 . . . . 1회 일치
현대의 [[히로시마]] 부근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보통. 본거지 아키. 북쪽에 있는 아마코 가문과 전쟁 중. 동쪽에는 깃카와 가문이 있고 서쪽에는 무역 파트너 겸 군사 동맹인 오우치 가문이 있다.
- 토탈워: 쇼군 2/요원 . . . . 1회 일치
* 전략가(Strategist) - "사색과 바둑으로 군사적 지혜를 얻는다."
- 트로피코 4/인물 . . . . 1회 일치
트로피코에 제안을 할 때 군사력으로 위협을 하며 제안한다.
- 페어리 테일/505화 . . . . 1회 일치
* 요정군사의 입장에선 각자 한 명의 병사일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들이다.
- 페이데이 2/적 . . . . 1회 일치
민간군사업체 머키워터의 용병들. 머키워터가 관련된 하이스트 초반에 등장한다. 군인스러운 복장에 페이스가드가 포인트.
- 페이데이 2/하이스트 . . . . 1회 일치
사설군사업체 머키워터 내의 배신자 로크가 의뢰하는 하이스트들.
- 프로라 . . . . 1회 일치
[[나치]]가 집권하던 1936년 당시 "Kraft durch Freude"[* 즐거움을 통한 힘. 기존의 사민당계, 공산당계 노조를 흡수하고 그 자산을 강탈하여 설립한 일종의 어용노조인 '독일노동전선' 산하의 단체로서, 노동자 복지와 레저 분야를 주로 담당하였다.]이라는 기관에 의해 건설을 시작했다. --쓸데없이 커다란걸 좋아하는 나치답게-- 20,000명의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시설로 설계되었다고.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건설이 중단되었다. 이후 프로라는 군사 시설로 사용되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군과 동독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 하정우(영화감독) . . . . 1회 일치
기초군사훈련이 끝나고, 연극 전공자여서 그랬는지 국군 홍보 관리소에 [[자대배치]]를 받게 되는데 군대 동기가 개그맨 [[강성범]]이고, 군대 선임이 [[무한도전]]에도 종종 출연했던 [[최대웅]] 방송작가였다. 복무가 1년 정도 지나 상병이 된 2000년 초에 호주에서 하는 국군공연으로 파병가자고 속인 강성범 때문에[* 원래는 육각수 멤버 [[조성환]]이 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안 가게 되어 아무것도 몰랐던 하정우가 가게 된 거라고..--안습--] 내전 중인 [[동티모르]] 원주민 위문 국군공연단으로 배를 타고 해군들과 함께 3개월 간 파병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가는 데만 17일이 걸렸고 멀미 때문에 상당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대신 원래 긍정적인 성격 탓인지 본인 말로는 가서 [[바나나]]도 많이 먹고, 강성범과 만담 공연도 하면서 평소에 강성범의 [[수다맨]][* 당시 강성범은 제대 후 개그콘서트에서 이 수다맨 코너 + 봉숭아 학당 코너의 연변총각 개그로 개그계 스타로 떠올랐다.] 연습을 돕기도 하는 등 나름 재미있게 적응했다고 한다.
- 하춘화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원로급 가수이다. [[1955년]] [[6월 28일]]생. 하춘화가 대단한 이유는 데뷔년도가 6살 때인 [[1961년]] 인지라, [[2015년]] 기준으로 '''나이는 환갑인데 가수 경력은 55년차'''라는 점이다. 참고로 하춘화가 데뷔한 해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그 해이다. 처음 데뷔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었는데, 엘자 렁히니나 [[다코타 패닝]] 저리가라 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엘자 렁히니와의 차이점은 어른이 되어서 인기가 죽어버린 엘자 렁히니와는 달리 하춘화는 늙어도 인기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서 레전드가 [[조용필]]이라면 여자 가수로서 레전드는 하춘화였던 것이다.
- 하쿠다 켄 . . . . 1회 일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백남준]]의 큰형이자 당시 [[대한민국]] 최대의 섬유 기업 태창방직(방림방적의 전신)의 회장이었던 백남일의 장남으로 '''백건'''(白健)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1960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일가족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태창방직이 [[대한민국]] 정부에 몰수당하게 되자 부모와 일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 귀화하여 이 때 이름을 일본식으로 하쿠다 켄(白田健)으로 개명하고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 한확 . . . . 1회 일치
간이재 한확은 [[1400년]](정종 2년) 녹사를 지내고 [[증직|증]] [[병조판서]]에 추증된 [[한녕]](韓寧)의 손자이며,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를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서성부원군에 추증된 [[한영정]](韓永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는 의성군 양소공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 허위 . . . . 1회 일치
1907년 [[고종(조선)|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 7조약]]으로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으나[* 허위가 이끌던 13도 창의군이 최종적으로 머물었던 길을 그의 호를 따 명명하게 됐는데, 그게 현재의 [[왕산로]]이다.]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2차 진격을 계획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홍명희 . . . . 1회 일치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북한 부총리에 선출되었고, 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대부분 월북 인사들이 숙청당한 것에 비해 홍명희는 성공한 삶을 누렸다고 볼 수 있으며, [[김일성]]·[[김정일]] 부자와도 개인적으로 친하였다. 실제로 김일성은 벽초를 극진히 존경하고 예우했다. 홍명희의 계모는 홍명희를 따라가지 않고 괴산의 집을 지키다가 6.25 전쟁 중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는데 북한군이 후퇴하는 급박한 와중에도 그 시신의 수습을 명령했을 정도였다.
- 홍순언 (1530년) . . . . 1회 일치
그가 [[장안]]에 도착하여 [[조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조국 정벌 음모를 접했음에도 이를 거절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며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명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토벌하려 하는 것은 아니냐며 조선 지원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병부시랑으로 있던 석성의 도움으로 홍수언은 [[명나라]] 군사 5만 명의 파병을 성사시킨다. [[석성]]을 통해 그의 의기를 접하게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선뜻 가겠다고 자청했고,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고 한다.
- 홍학표(배우) . . . . 1회 일치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2005년에 화제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연기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정치드라마에 출연하며 '''군사정부의 실세인 [[장세동]]을 열연'''하였다. 실제 [[장세동]] 배역은 카리스마와 충절로 대변되는 캐릭터라 캐스팅 과정에서 연기자들의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고 하는데, 홍학표는 실제 장세동 배역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극중에서 실제인물과 외모면에서 싱크로율이 높아 최종 낙점'''되었다고 한다.[* 외모뿐이 아니라 목소리까지 비슷하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TlpSgQ_nrVM|이쯤되면 도플갱어급인듯]]] 캐스팅되고나서 실존인물인 [[장세동]] 측근으로부터 만남의 요청을 받아 배우로서 자료수집이 될 것 같아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장세동과의 술자리 대화 내용이야 뭐 자기 좀 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 휴전 . . . . 1회 일치
웹스터 영어사전에 의하면, 휴전(Armistice)은 [[라틴어]] armistitium에서 온 말이며 이는 라틴어로 arma(무기, 군사) 와 -stitium(정지) 을 결합한 것이다.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706년이다.[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armistic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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