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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지도가 세세해졌다. HOI2에서는 프로빈스 하나였던 [[이오지마]]가 이오지마, 수리바치 산, 모토야마의 세가지 프로빈스로 나뉘었다던가, [[쿠바]]에 [[관타나모 해군기지]]가 추가되었다던가. 하지만 세세해지기만 한 건 아니라서 [[제주]]가 [[광주]]에 통합되었다.
  • 박순 (조선)
         훈구공신들이 흥분하여 박순을 국문하자 혹은 죽이자 주장했고, 지켜보는 자들마다 염려했으나 박순은 태연했다. 훈구대신들의 눈치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즉위에 공이 있었던 임백녕이었으므로, 명종이 박순을 중죄로 다스리려고 하다가 조정과 사림들의 여론 때문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켜 축출시켰다. [[송시열]]의 글에 따르면 박순이 너무도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 지조차 몰랐다 한다. 사단이 난 날 어린 딸이 반갑게 마중나오자, 박순이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자칫하면 너를 다시 못 볼 뻔했구나”고 했다한다. 그 이튿날 파직된 박순은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광주]]로 내려갔다.
         [[1562년]](명종17년), 부친 박우의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1년간 독서 중 명종이 다시 그를 불러 한산(韓山)군수(郡守-정4품 외직)에 임명했다.<ref>《조선왕조실록》 명종 28권, 17년(1562년) 2월 6일 2번째기사</ref> 그는 사림 운동의 연장선에서 그 지방의 사림 육성책으로, 공무가 끝난 후에도 정사(亭舍)로 가 그날그날 커리큘럼을 정하여 강론하고 이웃 고을 선비들과 글을 읽었다. 이것이 점점 소문이 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 박태환 (수영선수)
         '''박태환'''(朴泰桓, [[1989년]] [[9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이다. [[대한민국]]의 수영 역사상 최초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에서의 [[금메달]]과 자유형 200m에서의 [[은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수영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였다. 또한 [[2012년 하계 올림픽]] 자유형 400미터서 실격 판정 번복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은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수영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하다는 자유형 200미터에서도 값진 은메달을 차지하여 [[한국]] 수영 최초로 2회 연속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됐다. 국내에서 성적은 [[전국체육대회]]에서 2005년 [[울산]], 2007년 [[광주]], 2008년 [[전남]] 대회까지 3번의 대회 MVP를 수상하였으며 그동안 2005년 전국체전 4관왕을 비롯 2006년 ~ 2008년까지 3년 연속 5관왕에 올랐다. 또한 2004년《제28회 [[아테네 올림픽]]》수영 국가대표, 2006년《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수영 국가대표, 2008년《제29회 [[베이징 올림픽]]》수영 국가대표, 2010년《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국가대표, 2012년《제30회 [[런던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 2014년《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수영 국가대표, 2016년《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수영 국가대표로 뽑혔다.
         |[[대한민국]] [[광주광역시|광주]]
  • 송익필
         그러나 이산해 등은 기회를 노려 [[건저 문제]]로 서인들을 실각시킨다. 동인은 그가 기축옥사를 날조했다고 의심했고, 송익필은 김장생, [[김은휘]], 조헌, 성혼, 정철, 윤근수, 윤두수 등이 그를 도와 [[충청도]]와 [[전라도]] [[광주]] 등지로 피신시켰다.
  • 양녕대군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인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 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論語)와 대학(大學)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 윤종신
         [[1969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장흥군|장흥]]에서 2남 중 [[광주]]으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잠깐 살다가 5살 무렵 [[대구광역시|대구]] [[중구(대구)|중구]]로 상경, 그 뒤 [[대원 외국어학교]][* 2회 졸업생으로, '대원 외국어학교' 시절이다. 일반 고등학교를 못 가는 사람들이 가던 그 시절 맞다. 대원외고 동창으로 현재 [[메르세데스-벤츠|벤츠]]의 딜러인 한성자동차의 세일즈맨으로 알려진 가수 [[김민우]], 작곡가 [[MGR(음악가)]]이 있다.] [[스페인어]]과 졸업 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88학번으로 입학 후[* 본래 가족들이 독실한 신앙인이 워낙 많아서 어릴 적부터 연세대 신학과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는 것이 원래 꿈이었지만 성적으로 인해 원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로 입학하게 되었고, 때문에 적응을 못해서 1, 2학년 동안 방황을 많이 했다고 한다.] 소리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는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2017 전국투어 콘서트가 결정되었다. 콘서트명은 무려 '''윤종신 좋니?'''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7012241|링크]] 광주 (10월 28일)부터 순차적으로 일정 공개.
  • 은미희
         | 출생지 = {{KOR}}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
         '''은미희'''(Mihee Eun<ref>[https://en.wikipedia.org/wiki/Eun_Mihee Mihee Eun]</ref>, 殷美姬, [[1960년]] [[9월 20일]] ~ )는 [[대한민국]]의 [[소설가]], [[작가]], [[언론인]], [[교수|교육인]]이다.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에서 태어나 3살때 [[광주]]로 이사한 후 줄곳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광주문화방송]] 성우를 거쳐, 《전남매일》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중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96년 단편《누에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99년 단편 《다시 나는 새》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은미희는 아버지 고 은세련 화백과 어머니 김금향씨 사이에서 1남 4녀중 넷째로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고 은세련 화백은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개인전 3회와 황토회 회원으로 그룹전에도 참가한 이력이 있다. 은미희는 부친의 영향으로 초등학교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드러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때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다. 하지만 부친의 반대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서는 그림에 대한 꿈을 접고 전국 백일장대회에 참가해 상을 받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대신 글쓰는것에 꿈을 꾸기 시작한다.
         1982년 [[방송통신대학]] 진학과 이듬해 [[광주문화방송]] 성우로서의 직업...하지만 그 어느것도 그녀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했고 1990년, 결국엔 모든 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소설쓰기에 매달리게 된다. 은미희의 서른 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6년간의 습작기간을 거쳐 1996년 단편《누에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로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었고, 1999년에는 단편 《다시 나는 새》로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여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2000년 겨울, 4개의 상패를 폐기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quote|''상패는 작가로서의 탄생을 인정해 주는 기념품에 불과 합니다. 주제넘은 얘기지만 문학예술을 점수로 환산 한다는 그 자체가 몹시 싫습니다. 작가는 끝없는 상상력과 체험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건져내야 합니다. 고여있는 물은 썩기 쉽듯 작가들의 정신도 어느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상패를 볼때마다 ‘등단 작가’라는 의식이 머리속에 남아 자칫 나태해질 수도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등단 전의 초심을 갖기 위해 상패를 모조리 버렸죠.''<ref>[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41 남도일보 2001년 2월 15일자, 광주.전남 젊은 주역 50인: 여류소설가 은미희씨]</ref>}}
         소설가로서 활동을 하면서 마치지 못한 공부를 하기위해 1999년 [[광주대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2010년에는 광주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하여 201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2016학년도 [[동신대학교]] 학국어교원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현재 학업에 정진하며 생오지 문예창작대학에서 소설 창작<ref>[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74323.html ‘생오지 문예창작대학’ 광주서 연다]</ref>과 동신대학교 방송연예학과에서 희곡시나리오 창작 등을 가르치며 후학양성과 작품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 1973년 [[광주동산초등학교]] 졸업
         * 1976년 [[광주동명여자중학교]] 졸업
         * 1979년 [[광주동신여자고등학교]] 졸업
         * 1979년 광주 서강정보대학교(현 [[서영대학교]]) 휴학
         * 2003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학사 졸업
         * 2013년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졸업
         * 게스트: SBS 《현장리포트 사람세상 230회》 - <노란장미의 광주일기> (2005년 5월 18일)<ref>[https://www.youtube.com/watch?v=n6dXuYS_9CE Gwangju Story of Yellow-Rose 80518]</ref>
         * [[은미희의 광주산책]], [[광주시보]] 고정 수필 컬럼 연재
         * [[1996년]] - 광남문학상<ref>[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87 광주출신 여류작가 은미희씨 새로운 변신 시도]</ref>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신문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광주대학교 동문]][[분류:광주동신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광주동명여자중학교 동문]][[분류:광주동산초등학교 동문]][[분류:삼성문학상 수상자]][[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행주 은씨]][[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
  • 조비오
         '''조비오'''(본명 : 조철현, 曺喆鉉, [[1937년]] [[4월 1일]] ~ [[2016년]] [[9월 21일]])는 [[대한민국]]의 [[천주교]] [[성직자]]이다.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산군]]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광주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사제로 서품되었다.<ref>안관옥,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85390.html 전두환 광주재판 이끈 고 조비오 신부는 누구?], [[한겨레]], 2019년 3월 11일</ref>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기에 광주시민들이 총탄에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뒤 시민수습위원을 자청했고 [[하나회|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김대중]]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였다. 이후에도 내란 음모 핵심 동조자로 규정되어 감시받는 생활을 하였지만 시국 미사를 집전하는 등 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다.<ref>정회성.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8702660 민주화 증인 조비오 신부 '영면으로']. 연합뉴스. 2016년 9월 23일.</ref><ref>류형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7482682 '5·18의 역사' 고 조비오 신부 마지막 노래 '임 행진곡']. 뉴시스. 2016년 9월 23일.</ref><ref>정대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34548 ‘오월 사제’ 조비오 신부 뜻 잇는 아름다운 기부]. 한겨레. 2016년 9월 23일.</ref>
         조비오 신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증언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전두환]]은 조비오 신부를 악마로 비하하면서 전두환은 조비오신부에 대한 명예훼손혐의로 [[2019년]] [[3월 11일]] [[광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가족으로는 조카 조영대 신부가 있다.
         *~ [[2006년]] 8월 : 천주교 풍암동성당 주임신부, 광주전남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
         *[[2006년]] : 소화자매원 이사장, 광주전남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회교육원 원장신부, 조선대학교 이사장, 아리랑 국제평화재단 이사장
         {{광주 민주화 운동}}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창녕 조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탁광무
         그 뒤 사면되어 중정우사간대부 진현관제학 지제교(中正右司諫大夫進賢館提學知製敎)와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았다. 후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와 광주(光州)에 은거하였다.
         겸부(謙夫) 탁광무(卓光茂)는 [[광주]](光州) 별장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흙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오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그 정자를 경렴(景濂)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대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호의 연꽃을 사랑하는 뜻을 취하여 그를 경앙(景仰)하고 사모하고자 한 것이다.<ref>정도전, 삼봉집 제4권</ref>
         [[분류:생몰년 미상]][[분류:14세기 사람]][[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광산 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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