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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덕술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 박서양 (1885년)
         [[1924년]] [[12월]] [[구세의원]]에서 무료 환자 3,315명, 유료 환자 6,416명을 진료하였다. [[1927년]] 학교 유지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으나 간도 일본영사관의 탄압을 받았고, 1929년에는 학교 존폐 문제로 기금을 마련 [[숭신소학교]] 유지회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9년]] 숭신소학교 학생들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2월 19일]] 그의 [[숭신소학교]] 학생 120여 명도 [[광주학생운동]]과 [[제2차 서울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연길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20여 명이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 발생하고 박서양의 동생 [[박대양]]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박영희 (1901년)
         [[1928년]] 2월과 7월에 [[조선공산당|공산당 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각각 3차, 4차 공산당 사건이라 불리는데 이 두 차례의 검거 사건으로 모든 사회 운동은 위축되고 만다. 심지어 '민족 단일당'이라고 불리던 [[신간회]]조차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검거로 활력을 잃게 되었다.<ref>그리고 뒷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터짐으로써 신간회는 이후 개량주의자들 난입등으로 점점 균형을 잃어가게 된다.</ref> 그리고 동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나중에 이것을 '12월 테제'라고 한다.
  • 박차정 (독립운동가)
         [[경성부]]로 올라와 [[근우회]]가 결성되자 가입하였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활동<ref name="new22"/>하던 중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ref name="new22"/> [[1930년]]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와 노동자 파업 주동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자, 둘째 오빠 [[박문호 (1907년)|박문호]]가 건너가 있던 [[중국]]으로 망명했다.
  • 정칠성
         귀국 후 [[1927년]]에는 [[신간회]]와 [[근우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여성 계몽 강연 활동과 칼럼, 논설 발표, 편물과 수자수 강사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 선전조직부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 1930년 제2차 경성학생시위사건(일명 근우회사건) 주동 혐의로 투옥당하였다.
         [[파일:동아일보 광주학생운동.jpg|썸네일|160px|right|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광주학생 항일운동 당시의 격문 보도 내용)]]
         * [[광주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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