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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동음이의)
         '''광주'''는 대한민국에서는 지명으로서의 통상 [[광주광역시]]를 가리키며,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시]]를 지칭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경기도 광주’라고 한다.
         ** 광주시(光州市, 1949년 ~ 1986년)
         * [[광주시 (경기도)|광주시]](廣州市, 2001년 ~ )는 경기도 중동부에 위치한 시이다. 이 곳에는 역사적으로 다음의 행정구역이 있었다.
         * [[광주시]]
  • 김재규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삼성공원묘지에 있다. 묘비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 있었다. 당초 그는 유언으로 묘비에 '의사 김재규 장군 묘'를 쓰라고 했지만 신군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9년에 1월에야 광주/전남 송죽회가 세웠다. 그러나 수십년 전에 박정희 지지자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의사' 와 '장군' 이라는 글씨를 훼손시켰고, 추모비를 굴러 떨어뜨려 금이 가게 만들었다.
         [[경기도]] [[광주시|광주시]] 오포면 삼성공원 묘지에 위치한 김재규의 묘소[* [[http://www.ddanzi.com/index.php?mid=free&bm=hot&document_srl=170935390|묘소 위치를 자세히 설명한 글 링크]]]는 [[10.26 사건]]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변호인단이나[* 당시 변호인단들은 김재규의 인품에 반해 37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김재규를 장군이라 칭하며 추모하고 있다.] 몇몇 민주화 운동가들, 그의 생전 부하들만 찾는 쓸쓸한 묘소였다. 박정희 신드롬이 한창이였을땐 박정희의 추종자들이 찾아와 김재규의 묘비나 제단의 글자를 훼손하거나 심지어 추모비를 산 밑으로 굴려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다.[* 추모비 하단에 금이 가있는 것은 이 때의 흔적이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5531|#]]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높아진 이후 그를 추모하는 젊은이들이 묘소에 김재규의 영정을 갖다놓거나 주변을 꽃다발이나 헌정시 등으로 장식하여 현재는 제법 묘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평가 받은 것과는 별개로 유족들이 왜 훼손된 상태로 묘비를 놔뒀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2013년 당시 김재규 유족과의 인터뷰에서 '훼손된 것도 역사의 일부'라는 취지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760|#]] 그리고 덧붙인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라는 부분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 능창대군
         바로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남양주시]]에 편입)에 처음 장사지냈다가 다시 [[1629년]](인조 6년) [[10월 29일]] [[경기도]] [[광주시|광주군]] (古治面) 근처 혁동(鞘洞) 난지원(卯之原)으로 이장되었다가 후일 다시 회곽관에 담겨 [[광주시|광주군]] 고골 궁안마을 뒷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99년]]에 양증손자이혁의 시신과 함께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인평대군]] 묘역 인근으로 이장되었다.
  • 송대관
         송대관은 1946년 6월 2일에 [[전라남도]] [[광주시|광주]]에서 아버지 송준석과 어머니 국갑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도와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갖은 고초를 겪은 [[송영근 (1897년)|송영근]]이며 1942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실종되어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송대관은 실종된 아버지의 시신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하였다고 전했다.<ref>[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29863 송대관 "3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시신도 못찾았다" 고백] 《TV리포트》</ref>1965년에를 졸업한 송대관은 [[부산광역시|부산]]로 상경하여 오아시스 레코드의 사장인 손진석을 만나 그의 일을 도우면서 가수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고 1967년에 정통 트로트 《인정많은 아저씨》(초원 작사/ 김성유 작곡)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송대관이 데뷔하던 당시에는 [[남진]]과 [[나훈아]]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명으로 전락하였다. 1971년 부르스 느낌이 나는 《세월이 약이겠지요》(송대관 작사/ 신대성 작곡)를 발표하였는데 이 곡이 인지도를 얻으며 방송 출연량이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에 《[[해뜰날 (노래)|해뜰날]]》(송대관 작사/ 신대성 작곡)이 크게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송대관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이 곡은 반복적이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가사와 경쾌한 멜로디가 돋보이며 당시 [[남진]], [[나훈아]], [[하춘화]] 등 대세 가수들을 제치며 인기몰이를 하고 1976년 방송국 가요대상 3개를 수상하고 동시에 가수왕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 이후락(전 국회의원)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7.4 남북 공동 성명]] 15주년 특집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하고 같은해 [[제13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신민주공화당]]을 방문해 낙선한 [[김종필]]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다]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6892|2003년에는 생리현상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이 되었다]].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인생무상-- 그 후 2009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향년 86세 (만 85세).[* 여담으로 이후락이 1973년에 무리하게 납치해서 살해하려 했던 [[김대중]]이 자기가 사망하기 2개월 전에 서거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같은 1924년생이다. --태어난 해도 같고 저 세상에 간 해도 같고 참으로 완전 닭살-- ] [[박정희]] 밑에서 움직이던 동료와 선후배 대부분은 단명했다. [[김재규]]는 대통령 살인범으로 찍혀서 처형되었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형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박종규]]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숨졌다.[* 여기에 언급된 [[박정희]] 정권의 2인자 정치인들 중에선 친인척 지간이기도 한 [[김종필]]을 제외하곤 가장 오래 살았다. 그리고 [[김종필]]을 포함해서 가장 나이가 연상이다.]
  • 이훈(배우)
         || '''출생''' ||<(> 1973년 5월 6일 [[경기도]] [[광주시]] ||
         [[분류:한국 남배우]][[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1973년 출생]][[분류:1994년 데뷔]][[분류:광주시 출신 인물]]
  • 최은희
         [[분류:한국 여배우]][[분류:1926년 출생]][[분류:2018년 사망]][[분류:광주시 출신 인물]][[분류:1947년 데뷔]][[분류:납북자]]
         || '''출생''' ||[[1926년]] [[11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한국]]의 [[배우]] 이자 [[영화감독]]. [[1926년]] [[11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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