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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 . . . 296회 일치
|본관 = [[고령 근씨|고령]]
|혐의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뇌물수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강요·기밀누설 등<br>----<br>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뇌물수수·국고손실)<br>----<br>공직선거법 위반(공천개입)
|죄값 = 2심 징역 25년·벌금 200억 원, 검찰 단독 항소·상고로 상고심 진행중(최순실 및 블랙리스트 관련)<br>----<br>1심 징역 6년, 검찰 단독 항소로 항소심 진행중. (국고손실 유죄. 뇌물수수 무죄.)<br>----<br>징역 2년 확정<ref>https://news.joins.com/article/23164465</ref>(공직선거법 위반,공천개입)
|현황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구속영장에 따라 2019년 4월까지 미결수용자 신분으로 수감 후 상고심이 완료되지 않아 공천개입 실형 2년 집행 중<ref>http://www.nocutnews.co.kr/news/5073073</ref>
재판 보이콧’ 박근혜 “나라 바로 세우는 게 중요” 판흔들기?]</ref> 한편 2017년 11월 3일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했으며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강제출당된 대통령이 되었다.<ref>{{뉴스 인용|저자1=안정원|제목=한국당, '1호 당원' 박근혜 출당조치…'20년 관계' 청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9&oid=001&aid=0009659037|날짜=2017-11-03|확인날짜=2017-11-03|뉴스=[[연합뉴스]]}}</ref>
박근혜는 대기업 관련 범죄·[[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혐의 18개 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국정원]] 특활비 · 공천개입 등 혐의 3개에 대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전자는 2심, 후자는 1심 판결이 나온 상태이다. 2018년 4월 6일 18개 혐의에 대한 1심에서는 혐의 16개에서 일부유죄 및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받았으며,<ref name=":0" /> 2018년 8월 24일 2심에서 징역 25년 및 벌금 200억 원으로 형량이 늘어났다.<ref name=":2" /> 2018년 7월 20일 혐의 3개에 대한 1심에서는 2개가 인정되어 징역 8년 및 추징금 33억 원을 선고받은 상태이다.<ref name=":1">{{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20/0200000000AKR20180720096900004.HTML|제목=박근혜 '국정원 특활비·공천개입' 1심 징역 8년…33억 추징(2보)|성=송진원|이름=|날짜=2018-07-20|뉴스=연합뉴스|출판사=|언어=ko-KR}}</ref> 2개 재판을 합치면 혐의가 총 21개, 형벌은 총 33년형과 벌금 200억 원과 추징금 33억 원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공립보통학교(현재의 [[구미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현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서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재의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여 재직 중이였다.
어머니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재의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봉직한 경력이 있었다. 외조부 육종관은 딸이 과거 혼인 경력이 의심스럽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박정희와의 결혼 결심을 굳힌 육영수가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박정희가 있는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하였다.
박정희는 소령이던 1949년, [[여순 사건]]에 따른 숙군 여파로 육군 [[특무대]](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의 가혹한 고문끝에 [[남조선로동당]] 가입 혐의로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파면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직제에도 없는 문관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가까스로 복직하고 대구사범학교 후배이자 부하 장교인 송재천(육영수의 이재종오빠)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의 재혼에 따른 안정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박근혜가 태어난 무렵이다. 한국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 [[5·16 군사 정변]]에 관한 박근혜의 회고 =====
1961년 5월 15일 오후 10시 경, 거사를 위해 집을 나서려던 육군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에게 부인 육영수가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며 가족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면담을 에둘러 요구하였다. 이에 박 소장은 잠시 방에 들러 숙제를 하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생 박근혜와 곁에서 잠든 장모 [[이경령]]과 3녀 근영, 장남 지만을 훑어본 뒤에 집을 나선다. 이 때 "무슨 숙제입니까?"라는 거사 동지 [[장태화]]의 물음에 박정희는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라고 답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아버지의 기척은 알았으나 자신이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후술하였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는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 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최태민 목사, 저에게 고마운 분 네거티브하려면 뭘 못지어 내나"|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6402|출판사=오마이뉴스|날짜=2007-06-14}}</ref>
2007년 4월 미국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면담을 가진 박근혜
2007년 7월 검증 청문회를 받았다. 이때는 그동안 박근혜가 정계 입문 이후 제기되어 왔던 각종 의혹이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자금 6억 원 수수설 등 일부는 시인했으나 일부는 부정, 비판하였다. 이를 두고 곤란한 질문에는 이리저리 답변을 피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李-朴 청문회 관전평 |url = http://news.donga.com/3//20070720/8468691/1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이준한 |쪽 = |날짜 = 2007-07-20 |확인날짜 = 2013-01-24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928150932/http://news.donga.com/3//20070720/8468691/1 |보존날짜 = 2013-09-28 |깨진링크 = 예 }}</ref> 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다.
폭로전은 경선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당 대회를 3일 앞둔 2007년 8월 17일, 박근혜 경선후보는 "거짓으로 한나라당이 과연 집권할 수 있습니까?"라고 발언하기도 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056525|제목 = 되돌아 본 대선|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07-12-20|확인날짜 = 2013-03-23}}</ref> 이명박 후보측은 도곡동 땅에 대한 검찰 발표가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체 조사와 각 언론사 조사를 종합할 때 10% 이상 차이로 낙승할 거라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058737_5780.html|제목 = |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07-08-17|확인날짜 = 2013-03-23|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927121334/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058737_5780.html|보존날짜 = 2013-09-27|깨진링크 = 예}}</ref> 이와 관련해 진수희 대변인은 "1위 후보가 압승을 해야 경선 후유증이 최소화 된다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15% 격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 그러나 박근혜 후보측은 자체 전수 조사 결과 근소하게나마 앞서기 시작했다면서 각종 의혹으로 이 후보에 불안감을 느낀 당심이 옮겨온다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 당시 세대별 지지율을 보자면, 이명박 후보는 3,40대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은 반면, 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ref name="imnews.imbc.com"/>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명박,박근혜에 2452표차 승리…경선결과 집계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20/2007082000855.html |출판사 = 조선닷컴 |저자 = |쪽 = |날짜 = 2007-08-20 |확인날짜 = 2009-07-07}}</ref>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5336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 - 이동복 "이명박, 박근혜에게 후보 양보하라"<!-- 봇이 따온 제목 -->]</ref>
남북 관계 경색이 지속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근혜는 '대북 특사론'의 유력한 인물로 꼽혔다.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10년 3월 2일에 탈북자들을 위한 지역적응센터, 상담사제도,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설립등을 위해 발의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의안번호 1807771)에 찬성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7/pdf/287za0012b.PDF "제 287회국회-제12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 복수 국적 문제 관련 ====
- 트로피코 4/건물 . . . . 182회 일치
||"거지임"이라고 쓰여있는 듯한 누추한 모습의 건물입니다. 관광객이나 상류층 시민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외딴 곳에 짓도록 합시다.
||음침하고 누추하며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는 건물입니다. 청소년 범죄자 양성의 완벽한 온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공동주택에 거주한다고 딱히 행복해하는 시민들도 없고 관광객들의 항의도 빗발치지만, 그래도 판잣집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공동주택을 대폭 개선한 주거지로서, $1,000의 추가 비용으로 주거 환경을 향상시켜주지만 입주할 수 있는 세대는 줄어듭니다. 시민들을 이곳에 거주하도록 하는건 현명한 방침이지요. 아파트는 주변의 미관을 해치지 않기 때문에 관광지 근처에 건설하셔도 된답니다.||
쇼핑몰은 사치품들을 제공하여 시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여줍니다. 운영 계획에 따라서는 쇼핑을 좋아하는 관광객들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방문자: 트로피코인, 모든 관광객 - 총 12명 수용 가능
* 일반 상점: 시민들과 관광객들 모두가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 시민의 쇼핑몰: 시민들이 시민을 위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끄러운 관광객들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
||은행은 외국인 관광객이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각하께선 이곳에서 국가 예산을 횡령하거나 건물들의 건설 비용을 삭감하실 수 있습니다.||
* 방문자: 성인 관광객 - 16명("외환 은행" 운영 계획 선택시)
* 외환 은행: 해당 은행은 해외 관광객들도 이용할 수 있게 되며, 은행원들의 숙련도에 따라 이용 수수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세관 ===
세관은 수출가와 수입가에 영향을 미치며, 운영 계획에 따라 관광객들에게 부가하는 세금도 정할 수 있습니다.||
* 고졸 남성 5명을 세관원으로 고용 가능
* 관광 수수료: "예비 가방을 가지고 오셨나요? 세금을 내셔야 합니다. 섬 안에서 옷을 입고 싶으신가요? 세금을 내셔야 합니다. 섬 안에서 옷을 안 입고 싶으신가요? 세금을 더 내셔야 합니다." 관광객들은 여객선 선착장에서 최대 120% 의 비용을 더 지불하게 됩니다.
* 관세 횡령: 이 운영 계획에서는 세관원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됩니다. 화물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서류상에서도 말끔히 사라지기도 하고, 파파야가 금덩어리로 변했다가 또 금덩어리가 파파야로 변하기도 합니다. 수출품 하나당 스위스 은행 계좌에 2%가 입금됩니다. 세관원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최저 임금을 $25 이상으로 맞춰둘 필요가 있겠군요.
* 경제 장관 필요
해외에서 건설 비용과 노동자들의 임금을 받아 건물 하나를 건설한다. 건물을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건 아니고, 외국의 제안이 들어오면 해당 제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외국 민간인들이 관리하기 때문에 운영 계획이나 임금을 수정할 수 없지만 임대료를 지불한다.
* 믿음가는 예보: 일기 예보관은 가장 믿을수 있는 정보를 빠르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기본적인 운영 계획입니다.
* 언제나 맑음: 맑은 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일기 예보관은 앞으로 좋은 소식만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관광 평가가 5 증가하며, 이민자들이 2만큼 더 몰려옵니다.
* 언제나 맑은 뒤 흐림: 언제고 맑은 날이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일기 예보관은 앞으로 우천 소식만을 전할 것입니다. 관광 평가가 5 감소하고, 이민자들은 2만큼 뜸하게 섬에 몰려옵니다.
- 전인범 . . . . 142회 일치
|본관 = [[정선 전씨|정선]]<ref>[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55110 12·12 유혈 전두환, 백제 온조왕 개국공신 핏줄], 《스카이데일리》, 2016년 12월 13일</ref>
'''전인범'''(全仁釩, [[1958년]] [[9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1981년 4월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임관하여 30사단 90연대 15중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이래 9사단 29연대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부 전작권 전환 추진단장, 27사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수전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인범은 [[1958년]] [[9월 6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전주화와 [[외교관]]인 어머니 [[홍숙자]]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ref name="a">이혜민. 20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62&aid=0000009617 “부하들 적진 보내는 날 올까 두려웠다.”] 『新東亞』 통권 684호, 154-163.</ref> 유년 시절의 대부분은 서울에 살았으며, 1965년 부모의 이혼 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모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4년 동안 [[뉴욕]] [[맨해튼]]에서 생활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33122 [오래전 ‘이날’] 11월 20일 양파가 눈물 흘린 98 수능], 《경향신문》, 2017년 11월 20일</ref> 1969년 귀국한 뒤에도 그의 모친은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AFN Korea|AFKN]]을 주로 시청하게 했으며 저녁식사 때만큼은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그 또한 『[[:en:Reader's Digest|리더스 다이제스트]]』, 『[[:en:Newsweek|뉴스위크]]』, 『[[:en:Time (magazine)|타임]]』과 같은 시사 잡지를 빼놓지 않고 읽으며 어릴 때부터 국제관계에 대한 감각을 익혀나갔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미국 TV 프로그램 《[[:en:Combat!|Combat!]]》에 나오는 군인 샌더스 중사를 동경하던 그는 12살 때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군사관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육사 진학을 꿈꾸게 되었다. 그 뒤 [[리라초등학교|리라국민학교]]와 [[대경중학교 (서울)|대경중학교]]를 거쳐 197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813572 [人脈] 경기고등학교 출신 군장성들‥ 문·무겸비 군실세… 뜨는 KY그룹], 《한국경제》, 2005년 6월 26일</ref> 육사 동기생 중 성적이 꼴찌에서 두 번째였으나 영어 시험은 만점을 받았던 그는 1981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81년 초임지인 30사단 90연대 15중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 중 1군단장 [[이기백 (1931년)|이기백]] 중장에게 발탁되어 대한민국 육군 최초로 [[중위]] 계급을 달고 3성 장군인 군단장 전속부관을 맡게 되었다. 1983년 10월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당시 이기백 [[4성 장군|대장]]은 [[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합동참모의장]]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을 수행했으며, 전인범 중위 또한 이기백 [[장군]]의 전속부관으로서 아웅 산 묘소 참배에 동행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12/2012101200231.html "아, 가슴 아픈 이 사진... 거기에 내가 있었다"], 《조선일보》, 2012년 10월 12일</ref> 당시 폭탄 테러로 아수라장이 된 묘역에서 추가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든 그는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구출해내어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하였다. 그때 폭발로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은 이기백 대장이 의식이 돌아오자 마자 “각하께선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라고 묻는 모습에 상관과 부하를 저렇게 챙기고 위하는 게 진짜 군인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ref name="a"/>
1986년 30사단 90연대 2대대 중대장 시절에는 육군의 우수 전투중대장에게 주는 [[강재구|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초급 지휘관으로 중대원들의 사격 훈련 중 소총 사격 영점을 못 잡는 병사를 데려다가 실탄을 주고 자신은 표적지 앞에 서서 사격을 하게 해 영점을 잡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ref name="c">[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42447 ‘제설작업 하고, 전역사병에게 경례’ ‘괴짜장군’의 퇴임식], 《서울신문》, 2016년 7월 29일</ref> 군사정권 시절 그가 중대장을 역임한 부대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나면 연세대학교를 점령하는 부대였는데, 그는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군인이 대학생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래서 원래는 데모 때 중대장이 맨 뒤에 서서 진압을 지시하게 돼 있는데 그는 맨 앞으로 나가서 돌 맞더라도 제일 먼저 맞고 죽으려고 했다고 과거를 회고하였다.<ref name="b">[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140702 [단독] 전인범 "내 문제, 문재인에게 부담 안 돼... 아내, 구시대 법에 걸려든 것"],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9일</ref> [[소령]]으로 진급한 뒤에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정책장교 및 군사외교협력장교 보직을 받아 많은 통번역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한미연합사령관 [[:en:Robert W. RisCassi|로버트 리즈카시]] 대장으로부터 [[:en:Commendation Medal#Army|육군표창훈장]](Army Commendation Medal)을 받았다. [[중령]] 때에는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 연습처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장교를 맡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합모의 연습을 기획하고 실행한 공로로 2002년 [[:en:Meritorious Service Medal (United States)|근무공로훈장]](Meritorious Service Medal)을 받았다.
2004년 12월에는 [[:en:Multi-National Force – Iraq|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이 [[이라크 전쟁|이라크전]] 때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다국적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국군이 그 외에는 없어 처음에는 직속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그였다. 그래서 바쁘다는 외국군 장군들 대신 브리핑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고자 노력해 점차 조직을 장악하였다고 밝혔다.<ref name="a"/> 그는 [[:en:United States Armed Forces|미군]]과 [[:en:British Armed Forces|영국군]], [[:en:Australian Defence Force|호주군]] 장교 10여 명을 지휘해 5400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이라크 유권자 1400만 명의 투표를 지원 및 감독하였으며, 3500t에 이르는 선거 관련 물자를 각 투표소에 공급하고 치안 유지를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30323 이라크 총선지원 전인범 대령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 기여에 자부심”], 《서울신문》, 2005년 1월 31일</ref> 선거가 무사히 끝난 뒤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대한민국 국군|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en:Bronze Star Medal|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046950 노 대통령 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연합뉴스》, 2005년 7월 11일</ref><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0706&parent_no=7&bbs_id=BBSMSTR_000000000004 이라크 총선 성공지원 공로, 전인범 육군 대령 美 동성무공훈장 받아], 《국방일보》, 2005년 7월 6일</ref>
2009년 11월 [[2성 장군|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하면서 그는 전역하는 병사들을 위해 전역식을 열어주고 직접 참석해 “군 생활 하느라 고생했는데 내가 줄 건 육군 소장의 경례밖에 없다”며 전역병들에게 부동자세로 경례를 해주었고,<ref>[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95508 [김준범 ‘오늘과 내일’] 박찬주 대장 사태로 돌아본 ‘병사들을 사랑한 장군들’], 《시사위크》, 2017년 8월 14일</ref> 부대를 방문한 군수사령관 앞에서 병사들에게 보급되는 슬리퍼의 열악함을 토로하며 보급에 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사령관 앞에서 슬리퍼를 물고 있기도 하는 등 장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96411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끝없는 미담 “능력과 인품 두루 갖춘 진짜 장군”], 《서울신문》, 2017년 2월 7일</ref> 2011년 5월에는 한·미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en:Legion of Merit|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72160 전인범 육군 27사단장 '美 공로훈장' 수상], 《브레이크뉴스》, 2011년 5월 13일</ref> 그는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합동참모본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단장으로 근무 중 한미가 2007년에 합의한 전작권 전환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면서 150개에 달하는 전환 과제를 계발하고 진행을 감독하며 미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추진, 복잡한 전환 과정을 관리하는 총 책임을 맡은 바 있다. 미국으로부터 이 훈장을 수훈한 외국인으로는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영국 국왕 [[조지 6세]], 소련군 총사령관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등이 있다.
2013년 10월 [[3성 장군|중장]] 진급과 함께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605771 전인범 특전사령관, 美 최고 공로훈장 받아], 《연합뉴스》, 2013년 11월 19일</ref> 2013년 현재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 중 최다 훈장 수상자로 알려져 있다.<ref>[http://www.gunsa.kr/bbs/board.php?bo_table=B01&wr_id=151 대한민국 특전사 사령관 전인범], 《군사저널》, 2013년 12월 31일</ref>
특전사령관 취임 후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협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476150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괴짜 사령관’과 특전사의 환골탈태], 《서울신문》, 2014년 10월 23일</ref> [[:en:Picatinny rail|피카티니 레일]]이나 광학장비와 같이 관행적으로 몰래 사용하던 사제 장비들의 사용을 허용하는 등 기존의 과도한 제재 규정들은 폐지시켰으며, 특히 헬기 사격, 천리행군 인증제 도입과 같이 과거에 하지 않던 실전적 훈련들을 대거 강화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3&aid=0000028778 [한국군 코멘터리] 불굴의 ‘지옥훈련’ 더 독해진 특전사], 《주간경향》, 2014년 12월 17일</ref> 우선 일반 병사보다 3배 정도 총을 더 쏘는 특전사 요원의 사격량을 5배로 늘렸고 전진하면서 사격할 때 탄피받이를 못 쓰게 하였다. 탄피 하나 없어지면 전 부대원이 나서서 찾아야 하는 것이 매우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대신 탄피를 주울 필요가 없도록 전진 사격 훈련시 1명이 뒤따라가게 하여 실제 몇 발을 쏘는지 세게 하였다. 또한 사령관 취임 당시 특전사에 체계적인 체력 증진 프로그램이 없어 특전사에서 35년간 복무했고 체력 단련과 관련해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원사에게 12개 코스의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특전사 요원의 허벅지가 평균 1cm 커졌고 체력 프로그램 시행 후 6개월 뒤 미군 특전사 요원들과 경기를 해 수영을 제외한 나머지 종목을 한국 특전사 요원들이 다 이기게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10074 [Why] "특전사 허벅지 1cm 굵어졌다, 그게 내 자랑"], 《조선일보》, 2016년 9월 10일</ref> 이와 같은 훈련들은 특전사의 실제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108010004329 왜 우릴 특전용사라고 부르는가?], 《아시아투데이》, 2015년 1월 8일</ref><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44947§ion=sc2 육군 특수전사령부 설한지 극복-생존훈련], 《브레이크뉴스》, 2015년 1월 9일</ref> 그리고 긴박한 전장상황에서 오역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한미 연합작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해 전군 최초로 한국군은 영어로, 미군은 한국어로 브리핑하는 제도를 시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500588 특전사 창설 57주년 기념식… 내년 2월 이천시대 개막], 《연합뉴스》, 2014년 4월 1일</ref> 전 사령관은 이러한 자신의 개혁적인 행보에 관해 “모든 3성 장군은 4성 장군이 되고 싶어하고 4성 장군이 되는 게 군인으로서 더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다. 일각에선 내가 부대 훈련을 실전적으로 바꾸고 개혁을 하면서 무리수를 두어 4성 장군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특수전사령관이고 내 임무는 4성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백전백승 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특수전 부대를 만드는 게 나의 사명이다”라고 밝혔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1790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영원한 특전맨이자 진정한 군인의 퇴임], 《뉴데일리》, 2016년 7월 28일</ref> 훗날 그가 사령관을 이임한 뒤 특전사에 부대장비 및 개인물자를 납품하고 연구하는 특전사 출신의 한 예비역 대위는 “우리 군은 지나치게 ‘군복제 규정’에 얽매여 있다.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은 유연한 사고를 가진 지휘관이었다. 그는 “‘군복제 규정’보다 임무와 전술향상이 더 중요하다. 사고를 유연히 하고 우수 장비라면 사제라도 활용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전술장비 및 피복의 사용과 발전을 장려했지만, 그가 교체되면서 이런 유연한 사고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우리 군의 유연한 사고는 지휘관에 따라 들쑥날쑥 하다”며 아쉬움을 소회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286112 [무기와 사회] 한국군 전투복], 《한겨레》, 2015년 8월 19일</ref> 뉴데일리 군사전문기자 태상호는 “전인범 前 특수전사령관 같은 깨어 있는 특수전 지휘관들이 (특수부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지만 특수작전에 대한 군내외부의 중요성 인식 부족과 비대칭 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군(Big Army)만 중요시 하는 풍토로 인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라고 현 한국군에 대해 비판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01915 [컬럼] 프로 대접을 못 받는 한국의 특수부대], 《뉴데일리》, 2016년 2월 22일</ref>
2014년 12월에는 공무 출장 중 터키군 총사령부 재활병원을 방문, [[한국 전쟁|6·25 전쟁]] 참전용사인 알리 젱기스 투르크오울루를 위문하였다. 그는 6·25 전쟁 기간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한 곳으로 꼽히는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에서 터키군 1여단 소속 소대를 이끌었고, 보육원도 운영하며 많은 전쟁고아를 보살폈다. 전인범 중장은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309432 특전사령관, 터키 방문 참전용사 위문], 《연합뉴스》, 2014년 12월 18일</ref>
2015년 4월 5일부터 12일까지는 [[:en: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와 [[:en:United States Army Special Operations Command|미 육군 특수전사령부]]를 직접 방문, 미 통합특전사령관 [[:en:Joseph Votel|조셉 보텔]] [[:en:General (United States)|대장]]과 미 육군 특전사령관 찰스 클리브렌드 [[:en:Lieutenant general (United States)|중장]]을 만나 한·미 연합 특수작전에 대한 실질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저격용 소총과 미군 주력 소총인 [[:en:M4 carbine|M4]], 권총, 산탄총, 박격포, 방탄복 등을 점검하고 체험하는 등 미군 특전사의 장비와 무기를 현장 견학하고 실제 사격도 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413010008491 미군 주력 소총 M4 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아시아투데이》, 2015년 4월 13일</ref> 이와 함께 방미 기간 동안 [[시애틀]]에 있는 6·25 참전 기념공원을 찾아 참전용사비에 헌화하기도 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ZIB7y0ZvFJs 한미연합 특수작전사령부 시애틀 방문 6·25 참전용사비 헌화식], 《KOAM-TV》, 2015년 4월 10일</ref>
2015년 4월 14일 특수전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특전사령관 이임사에서 그는 “우리는 야수의 본능을 잃어가는 동물원의 사자가 아닌 초원을 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용맹함을 간직한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부대 특전사 검은 베레 용사들”이라며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정신이 바로 특전 정신이다. 우리들 특전용사에게 결코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H7RevwSahLk 육군 특수전사령관 이·취임식 - 전인범 25대 특전사령관 이임사], 2015년 4월 14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6467562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천하 호령하는 특전사 명예 지켜달라"], 《뉴시스》, 2015년 4월 16일</ref><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419010011577 특전사는 '적 도발은 곧 파멸 인식' 세계 최강 부대다], 《아시아투데이》, 2015년 4월 19일</ref>
2015년 6월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New Westminster College)의 특별연구원(Distinguished Fellow)으로 선정되었다.<ref>[http://newwestminstercollege.ca/lieutenant-general-in-bum-chun-phd-distinguished-fellow-of-new-westminster-college Lieutenant General In-Bum Chun, BA, MS, MA, PhD, MSM, BSM, LM, NSM], 《New Westminster College》, 2015년 6월 16일</ref>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 총장 로버트 굿윈 3세는 “그는 윤리적 리더십에서 괄목한 성과를 내었고 교육훈련에 평생 동안 헌신해왔다”며 “현 세계의 국가적 안보 위협에 대한 이해는 그가 정부의 국제적, 국가적, 지역 단위 이해관계자들의 민군 상호운용성과 방위협약에 대한 가치 있는 통찰력을 갖추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리더십, 외교와 사이버 보안에 관한 연구의 설계와 전달에 있어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다. 위원회와 나는 그가 우리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새로운 특별연구원이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인범 중장은 특별연구원으로서 학문적 수월성의 최고위 기준에 대한 지원에 공헌해왔고,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과 연구원들의 세계적인 조직망 발전에 헌신해왔다고 알려졌다. 이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 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캐나다 국방참모총장 대장 [[:en:Ray Henault|레이 헤노]] 등이 있으며, 특별연구원으로 선정된 인물 125명 가운데 한국인은 그가 최초이다.
2016년 5월 [[:en: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USSOCOM medal|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을 받았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4&bbs_id=BBSMSTR_000000000004&ntt_writ_date=20160615 “전인범 장군, 미 특수전 발전에 혁혁한 공로”], 《국방일보》, 2016년 6월 15일</ref> 미 특수전 발전에 공로가 있는 개인에게 수여되는 이 훈장은 1994년 제정된 이후 한국군이 받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미 육군과 해군(해병대), 공군의 특수전사령부를 지휘하는 3군 통합사령부로, 전 중장은 2013년 10월부터 2015년 4월까지 한국 특전사령관 겸 연합특전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연합작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훈장을 받게 되었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훈장 수여 증서를 통해 “연합특전사령관으로서 미 최정예 특수부대와 [[:en:United States Navy SEALs|네이비 실]](SEAL), 특수전 항공자산 등 1000여 명 이상의 미군을 훌륭하게 지휘했으며, 뛰어난 전문지식과 공익을 위한 헌신으로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밝혔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615010007077 [단독]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국군 최초 미군 통합특전사 훈장], 《아시아투데이》, 2016년 6월 15일</ref> 더불어 전 장군의 추진력과 창의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결의와 함께 장기 비전이 대한민국 방어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전 장군의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개인의 추진력은 대한민국과 한미연합사에 큰 기여가 됐다고 전했다.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227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이천 특전사서 전역], 《연합뉴스》, 2016년 7월 2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199207 [카드뉴스]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라"], 《조선일보》, 2016년 8월 5일</ref>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en:Vincent K. Brooks|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1938년)|김동진]], [[김태영 (1949년)|김태영]] 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ref>[http://www.huffingtonpost.kr/heebum-hong/story_b_11295018.html 어느 ‘특별한 별’ 이야기 │ 전인범 중장 전역식], 《허핑턴포스트》, 2016년 8월 2일</ref><ref name="c"/>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435078 33년 전 목숨 건 구출… 다시 만난 장군과 중위], 《SBS》, 2016년 7월 28일</ref>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728010013908 전인범 중장 전역식 "부하 잘 보살피면 부하들이 알아서 윗사람 보살핀다"], 《아시아투데이》, 2016년 7월 28일</ref>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o9JyXV5Hyo 전인범 장군 전역사 영상(discharge speech of LTG. INBUM CHUN)], 《YouTube》, 2016년 7월 28일</ref>
2016년 10월부터 [[:en:Brookings Institution|브루킹스 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 방문연구원, [[:en:Paul H. Nitze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1년 동안 활동했다. 미국 연구기관의 연수는 연수자가 주제를 선정해 그 분야를 연구하며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른 연구자들과 공유하는 활동을 하는데, 그는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한국의 핵무장, 한미 군사동맹 강화 방안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111010007259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미국, 북핵 심각하게 평가... 미 공격 초래 상황 가고 있어”], 《아시아투데이》, 2017년 1월 12일</ref> 연수 3개월 동안 프린스턴 대학교 등 학교에서 특강,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 참여, 워싱턴 내의 많은 연구소와 기관 발표, 세미나, 회의에 참석해 미국의 생각을 이해하고 한국의 입장을 미국 전문가들에게 적극 설명하였다고 말했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59&bbs_id=BBSMSTR_000000000138&ntt_writ_date=20170117 ‘한국 안정·동북아 평화=美 국익’ 각인시켜야], 《국방일보》, 2017년 1월 16일</ref> 2017년 1월에는 특전사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2만 6천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사단법인 봉사단체인 특전동지회의 제2대 총재로 취임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3180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제2대 특전동지회 총재 취임], 《뉴데일리》, 2017년 1월 16일</ref> 전 총재는 취임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대한민국 친목단체의 새로운 章을 열겠다”고 다짐하며, “현역 후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고, 회원을 편애하지 않는 모두의 특전동지회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역설했다. 같은 달 [[북한]]의 [[김정은]] [[조선로동당|노동당]] 위원장에게 [[대륙간탄도유도탄|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등의 재고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A4 용지 4장 분량의 영문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ref>[https://www.nknews.org/2017/01/dear-kim-jong-un-an-open-letter-from-a-former-s-korean-lieutenant-general Dear Kim Jong Un: An open letter from a former S. Korean lieutenant general], 《NK NEWS》, 2017년 1월 23일</ref>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이 편지에서 그는 “평화를 추구할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라면서 “가장 필수적인 첫 단계는 공공연한 위협의 회피, 핵과 미사일 실험의 중단, 핵무기 개발부터 인권에 이르기까지 신뢰를 증진시킬 협상에 참여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라고 평화 프로세스를 제안했다.<ref>[https://kr.nknews.org/%EA%B9%80%EC%A0%95%EC%9D%80-%EC%9C%84%EC%9B%90%EC%9E%A5%EB%8B%98%EA%BB%98-%EC%A0%84-%EB%8C%80%ED%95%9C%EB%AF%BC%EA%B5%AD-%EC%9C%A1%EA%B5%B0-%EC%A4%91%EC%9E%A5%EC%9D%98-%EA%B3%B5%EA%B0%9C-%ED%8E%B8/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 편지], 《NK NEWS》, 2017년 1월 25일</ref>
이에 앞서 그는 2월 4일 문재인 후보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주제로 연 북 콘서트에 국방·안보분야 패널로 참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006981 문재인, 경희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 북 콘서트], 《연합뉴스》, 2017년 2월 4일</ref>, 문 후보를 가리키며 “이분하고 함께하면 우리나라 안보를 든든히 하고 한미 관계를 튼튼히 해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문 전 대표는 빨갱이가 아닌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하며 문재인 캠프 합류 선언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352238 특전사령관 출신 전인범도… 문재인 캠프 ‘전방위 수혈’], 《한겨레》, 2017년 2월 5일</ref> 3성 장군 출신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이 전례 없는 여론의 각광을 받자 조선일보는 “[[송영무]], [[박종헌]] 등 참모총장 출신 4성 장군 두 명을 포함, 장성 10명이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그만큼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3252738 [만물상] 야당으로 간 특전사령관], 《조선일보》, 2017년 2월 7일</ref> 후일 전인범 영입을 기획한 것은 전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작품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ref>박성현. 2017.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089 “[집중분석] 파격인사! 문재인 대통령의 용인술(用人術).”] 『월간중앙』 201707호, 20-25.</ref> 당시 그를 영입하고자 다가온 많은 정치계 인사들에게 그는 군 개혁에 대하여 강하게 호소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그중 유일하게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문재인 후보였기에 안보자문 합류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선 경선 캠프에서 호감형은 아니었다는 그는 문재인 캠프 내의 안보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 복무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무슨 안보자문이냐”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ref>[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02/02/2018020200018.html [컬럼] 특전사 다목적대검 사태를 바라보며... #2], 《뉴데일리》, 2018년 2월 13일</ref> 자문위원 직은 맡았으나 [[더불어민주당]]에는 입당하지 않음을 강조한 그는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와 차이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546436 '文측' 전인범 "사드, 中 경제 압력 굴복 않아야"(종합)], 《뉴스1》, 2017년 2월 6일</ref> 이와 관련해 [[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경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기존 한미 정부 간 합의는 존중한다는 두 가지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동안 한중관계를 고려해 사드 배치 재검토를 주장해온 야권과는 결이 다른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4&aid=0000474843 문재인 캠프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사드 해법’ 제시], 《스포츠경향》, 2017년 2월 7일</ref> 이에 문재인 전 대표도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로 넘겨 국회 비준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서도 “한미간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 쉽게 취소하기 어렵다”며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69&aid=0000186840 “中 경제적 압력 굴복 말고, 美와 사드 합의 존중해야”], 《한국일보》, 2017년 2월 6일</ref> 그의 문재인 캠프 합류에 실망한 일부 보수세력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충분히 분노하시는 마음을 이해합니다”라며 “제가 이번 결심의 결정적 이유는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7만원짜리 특수작전 칼([[:en:Survival knife|서바이벌 칼]])을 부결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조용히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문재인 지지 선언의 이유를 설명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52237 文 캠프 합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페친 5000명 중 28명 이탈했다"], 《조선일보》, 2017년 2월 5일</ref> 친정인 군을 향한 비판에 육군은 공식 브리핑에서 “특전사 장병들이 생존용으로 사용하는 특수작전 칼을 당초 7만원씩에 구입하려고 했으나 더 나은 15만원짜리로 구입하기로 하고 2022년까지 모두 18억500만원을 예산에 편성했다”고 해명했으나, 2017년 예산에는 특수작전 칼 예산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3233 전인범과 육군의 ‘칼 싸움’], 《중앙일보》, 2017년 2월 7일</ref> 육군 관계자는 시범사업으로 구입했다가 나중에 평가에서 합격해야 향후 5년간 18억원으로 칼을 구입하게 된다는 뜻에서 “올해는 시범사업으로 소량만 구입할 예정이며 예산은 5000만원”이라고 재차 해명했다.
2017년 2월 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문재인을 지지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다.<ref name="b"/> 왜 문재인을 돕기로 마음먹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문재인이) 저를 한번 보자고 그래서 궁금해서 만났다. 그 전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만나보니까 좋은 분이고, 지적이더라. 공부하는 분이고. 근데 그날 제가 기분 나쁜 소리도 많이 했다. (- 안보관을 지적했나) 음…. 하여튼 그 기분 나쁜 소리를 다 받아주더라.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설득하는 건 둘째고, 일단 잘 들어줬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편 전인범 중장의 전역식 때 전역사를 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책임자인 정호용을 고마운 선배로 언급한 것에 관해서는 “저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걸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분의 잘못된 부분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분이 굉장히 인간적인 사람이다.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한 거지, 5·18과 관련해 그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뒤이어 5·18에 대해서는 “일선 군인들은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호남 분하고 이야기를 하며 ‘저는 언젠가 광주 5·18묘역에 그때 죽은 군인들이 같이 묻혔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아무도 모르잖나. 지휘 체계가 문란했던 점이 당시 군의 잘못이지 하사들이 무슨 죄가 있나. 특전사가 살인마처럼 비춰지는 건 바뀌었으면 한다. 하여튼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포를 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감옥에도 가고 그런 것 아닌가. 정호용은 그런 책임이 있지만, 제가 이야기했던 건 그분이 인간적으로 부하를 대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을 본받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그의 5·18에 대한 견해에 우파 언론인임에도 5·18을 반공적 민주화 운동으로 높이 평가하는 [[조갑제]]는 “여러 번의 국가적 수사와 조사에서 광주 사태 초기엔 상급 지휘부의 발포 명령 자체가 없었으며 현장 상황이 워낙 급하여 자위적 차원의 대응발포로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다. 물론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발포 명령은 없었다”며 전인범의 발언을 옹호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5656 제목으로 드러나는 동아일보의 末期 증세], 《뉴데일리》, 2017년 2월 10일</ref>
그러나 그의 5·18 발언을 문제 삼은 정치권에서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것까지 싸잡아 공격하며 논란이 불거지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143692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부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 징역 1년 법정구속], 《세계일보》, 2017년 2월 8일</ref>, 그는 광주 항쟁에 대한 표현의 부족으로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4649 文 영입 전인범 자진사퇴 "5·18 발언 백번천번 송구… 미국 돌아가겠다"], 《중앙일보》, 2017년 2월 10일</ref> 그는 “저는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 북핵을 바라보는 엄중함과 심각함, 오랜 동안 지속돼온 혈맹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 이를 통한 더욱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 발전이라는 문 전 대표의 안보관을 알리는 데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멀리서나마 문 전 대표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문재인 후보 측 관계자는 “누를 끼친 데 대한 글을 올리시고 미국에서도 돕겠다고 한 것은 ‘자숙’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하며 “안보, 군사 분야에 대한 자문은 계속 하실 것”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7763546 文측, 전인범 미국行에 '선긋기'… "본인 판단"], 《뉴시스》, 2017년 2월 10일</ref>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청와대 관계자는 “대선 과정에서 공을 들여 영입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라인 구상의 한 축이었는데 그가 중도 하차하면서 인사가 꼬였다”고 발언함으로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그를 중용할 계획이었음을 나타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2&aid=0003172701 한반도 상황 긴박한데… 외교안보 라인 인선은 '설왕설래'], 《세계일보》, 2017년 5월 12일</ref>
2017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발전 방안에 대해 발표하였다. 전인범 중장은 이례적으로 [[예비역]] 한국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현직 육군 최고 수뇌부가 참석하는 이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예비역으로는 유일하게 발표했는데, 현직 미군 주요 지휘관들은 물론 전직 미군 수뇌부들로부터 한·미 군사동맹과 한·미 연합전력 극대화 해법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출신으로 평가받고 있어 이 심포지엄에도 초청되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528010015215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미 군사 혈맹, 한국군 주도적 역할 중요”], 《아시아투데이》, 2017년 5월 28일</ref> 그는 발표문에서 “한미간 긴밀한 연합작전과 지휘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술지휘통제자동화체계(C⁴I)가 기반되어야 하며 양국간 언어장벽의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등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고, “미국이 우리나라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고 우리나라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46579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美 'LANAPC'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 및 발전 방안 발표], 《뉴데일리》, 2017년 5월 26일</ref> 또한 심포지엄이 끝나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발표자들 대부분은 기조연설과 발표문에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rising adversary)’으로 지칭했다”면서 “미국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질주하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292284 "美, 아태 지상군회의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 지칭"], 《연합뉴스》, 2017년 5월 25일</ref>
- 스틸오션/일본 . . . . 140회 일치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587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757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1×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690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803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798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857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8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910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913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6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026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970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6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142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029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8 ||
>순잠3형(巡潛三形, Junsen III)을 기반으로 여덟척의 병형(丙形, Type-C)이 건조되었다. 어뢰 발사관과 어뢰 탑재량은 증가했지만 일본 잠수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수상정찰기가 제거되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갑표적(甲標的, Ko-hyoteki) 모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273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090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6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404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153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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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빈 장씨 . . . . 106회 일치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ref>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9월 28일(임자) 2번째 기사</ref> [[11월 3일]] ([[음력 9월 19일]])<ref>승정원일기 숙종 15년~19년</ref> ~ [[1701년]] [[11월 7일]] ([[음력 10월 8일]])), '''장희빈'''(張禧嬪) 또는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는 조선의 제19대 왕 [[조선 숙종|숙종]]의 [[빈 (지위)|빈(嬪)]]으로, 제20대 왕 [[조선 경종|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조선 숙종|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ref>[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30613_000&aa10no=kh2_je_a_vsu_30613_001&aa15no=&aa20no=&pageno=&imgnum=JE_A_30613_001_000042&imgsize= 《단암만록》]/[[민진원]] 著</ref>,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 (조선)|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 (조선)|장형]]의 계실인 윤씨이다. 역관(驛官) [[장현 (조선)|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은 [[사역원]] 봉사를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하고 집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음률을 즐기다가 장씨가 막 11세가 된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녀보다 19세 연상인 이복 오빠 장희식은 18세의 나이로 1657년 식년시 역과에 장원을 하여 사역원 직장(종7품)이 되었지만 곧 사망하였다. 장희식의 아내 이씨는 절충장군 이천연의 딸이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조선 선조|선조]] 때의 명역관으로, 생전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에 무관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선(善)을 가훈으로 삼아 이 단어를 쓴 종이를 항상 품에 넣고 다녔다고 전한다. 할머니 남포 박씨는 산학 별제 박심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윤성립(尹誠立, 1689년 정경으로 추증)은 일본어 전공의 사역원 첨정(종4품)<ref group="주">사역원 역관의 품작은 정3품 정(正) 1명으로 시작하여 아래로는 종3품 부정(副正) 1명, 종4품 첨정(僉正) 1명으로 내려간다.</ref> 이었으며, 1653년에도 생존했던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다.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로, [[변승업]]의 아버지이자 소설 《허생전》에 변부자로 등장했던 변응성의 사촌누이(백부의 딸)이다. 외삼촌 윤정석은 조선의 부를 장악했던 [[육의전]]의 면포 상인이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1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9일(갑진) 4번째기사</ref><ref group="주">윤정석의 본래 출신이 기록된 《숙종실록》에는 "시인(市人)으로 면포(綿布)를 파는 자"로 기록하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한성에서 면포를 팔 수 있는 건 오직 [[육의전]] 상인 뿐이다.</ref>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공초되었을 때의 기록에 따르면 1680년 장씨가 출궁되어 은평구 친정에서 머물 당시에 담 하나를 두고 이웃에 살았던 만큼 누이인 윤씨와 관계가 매우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언니는 관상감 관원인 김지중에게 출가하여 1691년 당시 관직이 종7품 직장이었다. 오빠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경신년(1680년)에 키가 크고 외모와 무술이 뛰어난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에 재직<ref>《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ref> 하였으며 1683년에는 좌포청 부장으로 있었다.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의 사촌형인 [[장현 (조선)|장현]]은 [[조선 효종|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고 숙종 1년에는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올라 공을 세워도 더이상 품계가 올라갈 수 없어<ref group="주">생전에 정1품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건 [[문관]]에게 한정된다. 《동의보감》의 저자이기도 한 명의관 [[허준]]은 [[광해군]]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제수받았다가 문관의 반발에 의해 취소되었고, 사후에야 비로소 추증됐다.</ref> 자식과 조카가 대신 승봉되어야 했던 거물 역관으로 재산은 국중거부의 명성을 얻을 정도였으며, [[장현 (조선)|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 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희빈 장씨가 아비의 사후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당백부 [[장현 (조선)|장현]]이 [[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였다고 주장하여 현재까지 정설로 알려졌지만, [[경신환국]]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ref group="주"> 궁녀의 통상 입궁 연령은 4세부터 16세이며, 조선시대 여성들의 법적 혼인 연령은 14세~20세이다. 부모가 50세를 넘긴 경우엔 관아의 특별 허가를 받고 12세 이상의 자녀를 혼인시킬 수 있는데 16세기 이후엔 수 차례에 거듭된 외란으로 남성의 숫자가 급감하였고 처녀를 차출하여 청으로 진상하거나 궁녀로 뽑는 분위기로 인해 법금을 어기고 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ref>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희빈 장씨가 [[경신환국]] 당시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궐하였다는 [[인현왕후]]의 주장으로 불거진 것인데, [[경신환국]]과 같은 해 말에 장씨가 강제 출궁이 되었다가 7년 후인 [[1686년]]에 다시 입궁했던 만큼 이미 궁녀인 신분으로 출궁을 당한 후에 [[남인]]과 연계하여 돌아왔다는 것이 오역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조선 효종|효종]] 때 이미 막대한 부를 쌓은 [[장현 (조선)|장현]]도 딸을 궁녀로 입궁시켰으며, [[조선 현종|현종]] 5년에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뽑혔다가 이미 사주가 오간 상대가 있으니 정혼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출궁된 역관 최우의 딸의 전례<ref>현종실록 5년(1664 갑진 / 청 강희(康熙) 3년) 12월 30일(정해) 2번째기사</ref> 도 있는 만큼 희빈 장씨의 가세가 빈궁하여 궁녀가 되었다는 가설은 억측에 불과하다.
라는 [[사간원]] 헌납 [[윤빈]]의 비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683년에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직위가 포도부장이었던 기록이 존재하며<ref>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ref> 장씨의 동복 언니는 [[관상감]] 직장이었던 김지중에게 출가한 상태였는데 1701년 [[김지중]]의 증언으로 미루어 김지중이 처가에 왕래하며 장희재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는 만큼 생계가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장씨의 외삼촌 윤정석은 면포를 팔던 시전상인이었는데, 면포(무명)가 국법 상 [[육의전]]만이 매매가 가능한 독점 상품이었던만큼 윤정석이 일개 장삿꾼이 아닌 [[육의전]] 상인이었음을 뜻하며 이는 윤정석이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윤정석은 장희재의 집과 담을 하나 두고 살았을 만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측실이지만 이미 출가를 한 지 4년이나 지난 그녀가 정명공주의 잔치에 노래를 부른 것은 그녀의 명성이나 주인이었던 [[숭선군]]의 주선 때문이었을 것이다.</ref> 을 취객의 희롱에서 도망치게 하였다고 호된 매질을 가한 바 있는데, 좌의정이 포도부장에게 직접 벌을 내린 것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엄연한 무관의 아내를 희롱한 취객에게 죄를 묻지 않고 그녀를 도망치게 한 남편에게 벌을 내린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정이야 어찌됐던 [[민정중]]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매질을 한 것은 사실이니 [[인현왕후]]로선 장씨의 입궁이 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는 궁녀 장씨의 교만함을 훈계하겠다며 아랫사람에게 장씨를 매질토록 시키기도 하였다.<ref group="주">인현왕후전에는 [[인현왕후]]가 장씨를 교화하기 위해 직접 회초리질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f>
김씨의 간택을 전후로 [[서인]]은 천재지변의 원인으로 장씨를 지목<ref group="주">[[인현왕후]]의 가례일에는 지진이 있었으며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초여름에 서리와 눈이 내린 것, 장씨에게 자진의 명이 내린 후부터 여러 달 심각한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했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ref> 하거나 제왕은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장씨를 궁 밖으로 쫓아낼 것을 수차례 종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김창협]]은 "후궁으로서 가까이 사랑할 사람이 간혹 있을 수도 있겠으나 진실로 관어(貫魚: 궁인들의 순서)를 순서대로 할 수 있게 하여 종사(螽斯)의 경사가 있게 하고 미색(美色)에 마음이 현혹될 근심과 치우치게 사랑에 빠져 은총을 열어 준다는 비난을 없게 한다. (중략)"<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9월 13일(갑오) 1번째 기사</ref> 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장씨의 미색에 현혹되지 말고 궁인의 지위 순서로 성총을 내려 후사를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서 승은궁녀인 장씨보다 정궁인 [[인현왕후]]와 당시 유일하게 후궁의 지위를 갖고 있던 [[영빈 김씨|숙의 김씨]]([[김창협]]의 5촌 당질녀이다)에게 사랑을 주어 그들에게서 후사를 보아야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다.<ref group="주">1689년 2월에 [[김창협]]의 아비 [[김수항]]이 [[송시열]]의 상소를 막지 못했다는 죄로 삭탈관직이 된 것에 대해 사관은 [[김창협]]이 장씨를 지목하여 간한 이 발언으로 [[조선 숙종|숙종]]의 노여움을 얻어 보복받은 것이라고 기록했다.</ref>
숙종은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김씨]]에게서 장씨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궁전과 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비밀리에 인부를 불러 장씨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숙종이 직접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만듦<ref group="주">승은궁녀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은 내명부 수장인 중전의 고유권한이었다.</ref> 으로서 인현왕후의 처지를 위해 장씨의 출궁을 종용하던 서인은 더이상 숙종에게 장씨를 출궁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며 하사하기로 한 노비 100명과 전답은 흉년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하도록 하였다.<ref group="주">[[조선 숙종|숙종]]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최초로 관직을 내린 것은 원자 명호를 취소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상소로 인해 [[남인]]이 정계로 돌아온 후이며, 승진이 아닌 부서 이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미루어 장씨가 후궁이 되고도 친정이 혜택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15년 2월 11일 (기유) 원본333책/탈초본17책 (5/26)』</ref>
[[인현왕후]]는 직접적으로 숙종에게 숙원 장씨를 쫓아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는데,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ref>숙종실록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2일(정유) 2번째기사</ref> 또한, '장씨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다'는 주장도 했는데 이는 모두 훗날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되어 폐출되는 이유가 된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조선 경종|경종]])가 탄생하자 [[인현왕후]]가 매우 노여워했으며, 급작스레 주가(主家: 공주의 처소.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 혹은 [[명안공주]] 등을 의미한다)와 더욱 친밀해지고 [[1688년]] 2월, '[[조사석]]이 장씨 친정의 청촉으로 상신에 제배되었다'는 소문을 유포했던 것이 발각되어 유적에서 삭제되고 위리안치된 [[홍치상]]의 방면을 종용했던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ref group="주">[[1688년]] 4월에 발발한 [[기사환국]]의 여파로 [[노론]] 과격파였던 [[김만중]]이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되었는데 소문의 근원지가 [[조선 숙종|숙종]]의 고모인 [[숙안공주]] 들에게서라는 자복이 있자 [[홍치상]]에게 교형이 내려졌다. [[갑술환국]]으로 [[홍치상]]은 다시 복관되었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고 높은 연세인 공주가 집에 있으니, 내가 차라리 떳떳하지 않은 데에 빠지겠다. 특별히 복관(復官)하라'하며 불쾌함을 드러냈으며, 1702년 [[홍치상]]의 아들이 [[홍치상]]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하자 '[[홍치상]]의 지은 죄는 만번 통분할 일인데 아들이 감히 격고하였다'며 분노를 터트렸고 곧 '지은 죄가 낭자한데도 관작이 그대로인 탓이다'하여 복관한 관작을 다시 거두었다.</ref>
그러나 서인의 반응은 싸늘하여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의 상(喪) 중임을 앞세워 숙종의 득남에 축하연은커녕 하례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또한, 다음 달인 11월 12일에는 숙종에게서 입궁하여 장씨의 산후조리를 도우라는 어명을 받고 입궁하는 장씨의 생모 윤씨를 지평 [[이익수]]가 명을 내려 사헌부 관원들이 그녀를 가마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그녀의 하인들을 눈 앞에서 매를 때리고 체포하였다.
덮개가 달린 가마인 옥교를 탈 수 있는 부녀자는 3품 이상인 동반(문관) 당상관의 어미와 처, 딸과 며느리로 국법이 정해져있는데 당하관에 불과한 천한 역관<ref group="주">문관은 역관을 천인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수치스럽다하여 청국행(淸國行)을 기피한 문관을 대행(代行)해온 역관들의 직위와 부귀가 종내에는 문관을 넘어서기에 이르자 역관을 양민으로 분류되는 사노공상 중 최하층인 상인으로 분류하여 역상(譯商)으로 하칭하기도 하였다.</ref> 의 아내인 윤씨가 옥교를 탄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인용문|장 소의의 어미는 곧 당하관(堂下官)인 역관(譯官)의 처(妻)이니, 교자(轎子)를 타는 것도 이미 참람하다고 할 것인데, 교자에 뚜껑이 있는 것은 더욱 <br />참람한 것이니, 법을 지키는 관원이 이를 알면 마땅히 금지할 것입니다.|『숙종실록 14년(1688 무진 / 청 강희(康熙) 27년) 11월 13일(임오) 3번째기사』}}
하지만 이 법은 여인은 얼굴을 공개하고 외출할 수 없다는 조선시대의 사정에 의해 오래전부터 지켜지지 않았고, 이에 서반(무관) 가문의 여인이나 당하관의 처첩은 물론 관직이 없는 양반가의 부녀자나 중인, 양인에 불과한 아속의 처는 물론 환관의 처부와 궁녀, 하물며 천민인 기녀와 침선비도 타고 다녔다. [[명성왕후]] 김씨의 친신 무당이었던 막례(莫禮)도 옥교를 타고 궁을 출입하며 굿을 했었던 만큼 사실은 아들을 생산한 소의 장씨에 대한 반감을 표면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옥교 사건은 그때까지 장씨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조선 숙종|숙종]]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조선 숙종|숙종]]은 같은 당하관의 아내인 귀인 김씨의 어미도 옥교를 타고 수시로 궁에 드나들지만 문제 삼아진 적이 없으며, 장씨의 생모는 후궁이 해산할 때 교자를 타고 입궁할 수 있다는 왕실 규례에 따라 [[조선 숙종|숙종]]의 어명을 받고 입궁한 것이며, 어명을 상징하는 선소동패(宣召銅牌)를 보였음에도 입궁치 못하고 내쫓긴 것은 왕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선포하며 [[이익수]] 및 사헌부 관원을 체포하여 엄형을 내리고 사형할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도 벌을 내릴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조선 숙종|숙종]]의 척신이자 최측근이기도 했던 우의정 [[조사석]]마저 윤씨가 탄 가마가 8인교<ref group="주">옥교에는 2인교, 4인교, 6인교, 8인교 등이 있는데 이후 사치풍조가 만연해져서 12인교도 생겨났다. 임금과 왕후가 타는 가마는 연으로 20명이 들었고, 세자의 연은 16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공주와 옹주가 타는 덩은 8명이 든다. [[조사석]]은 윤씨가 공주와 옹주의 덩보다는 못하지만 8명이 드는 8인교를 탄 것은 부당하다고 고발한 것이다.</ref><ref>《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정연식 저</ref><ref group="주">사람이 드는 가마의 상급은 말이 끄는 가마인데 쌍교와 독교로 나뉜다. 말 두 마리가 앞뒤로 가마를 끄는 쌍교가 상급으로 2품 이상과 승지만이 탈 수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영조시대엔 이미 예사로와진 일이 되어 여인들도 쌍교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숙종시대에도 비슷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생왕자의 외조모이자 왕명을 받고 입궐하던 윤씨가 8인교를 탄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행위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윤씨가 옥교를 탄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ref> 였음을 강조하며 [[영빈 김씨|귀인 김씨]]의 어미는 비교 대상이 아님<ref group="주">귀인 김씨의 어미는 당상관의 아내는 아니지만 판서였던 [[이정영]]의 딸이다. 또한 귀인 김씨의 종조부인 [[김수항]], [[김수흥]]이 정승이었기에 [[조사석]]은 귀인 김씨의 어미는 역관 가문 출신인 윤씨에 비해 옥교를 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ref> 을 주장함으로써 숙종은 서인 대신은 물론 윤씨를 모욕한 하리에게 내린 벌조차도 취소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했다.
[[임해군]]의 동복 동생인 [[광해군]]은 큰 아들이 아니기에 당연히 원자가 아닌 신분으로 세자가 되었다. 후궁 소생이 원자가 될 자격이 없지는 않지만 서른이 되지 않은 [[조선 숙종|숙종]]이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급한 결정이었다.그러나, 부왕인 [[조선 현종|현종]]이 34세에 죽었고, 왕의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대였던 만큼, 30세가 다 되어가도록 후사가 없는 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ref> 하고 있던 서인은 숙종의 선언에 당황했지만 제대로 반대를 하거나 저지를 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 속에 [[조선 숙종|숙종]]은 불과 닷새 후인 1월 15일에 왕자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려 종묘 사직에 고했다. 또한, 숙종은 원자 윤의 생모 소의 장씨를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여 귀인 김씨를 제치고 후궁 1위로 만들었다.<ref group="주">숙종실록에는 15일에 빈으로 책봉된 것으로 기록됐지만 승정원일기에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ref> 앞서 [[조선 숙종|숙종]]이 원자 정호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관직을 내놓고 떠나라는 선언이 있었으며, 이미 종묘 사직에 고한 일을 무르라는 것은 선대 왕들을 한꺼번에 능멸하는 행위이자 신권이 왕권의 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나 다름없기에 [[서인]]은 소극적인 반박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밖에 없었고, 숙종은 이 또한 용서하지 않아 그들을 파직하였다.
숙종 15년(1689) 2월 1일에 [[인현왕후]]의 외가 친척이기도 한 [[송시열]]이 이미 종묘에 고한 원자 정호를 철회하라는 비판상소를 올리자 [[조선 숙종|숙종]]은 진노하여 [[송시열]]을 치죄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서인]]으로 이루어진 [[승정원]]에서 명을 받들지 않았다. 앞서 [[조선 숙종|숙종]]이 [[김만중]]의 치죄를 명할 당시와 흡사한 배경<ref group="주">[[김만중]]을 추포하여 문초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승정원에서 항명하여 전지를 봉입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은 입직한 승지에게 전지를 쓰라고 명하였지만 붓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되었으며 사관 [[송상기]]는 붓을 빌려주라는 [[조선 숙종|숙종]]의 어명을 거부했다.</ref><ref>숙종실록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9월 11일(병술) 3번째기사</ref> 이었기에 [[조선 숙종|숙종]]은 분개하여 삼사와 [[승정원]], [[사간원]] 등 왕의 최측근 요직에 있던 서인을 파직하고 경신환국 때 실권하여 은신 중이었던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 교체해버린다. 동시에 [[조선 숙종|숙종]]은 2월 2일 장씨의 선조 3대를 정승으로 추증(追贈)했다.<ref group="주">추증은 위로 올라갈수록 한 등급씩 감하는 것이 관례여서 장씨의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張炯)에게 영의정을 증직하면, 조부에게는 종1품 찬성(贊成)을 증직해야 했다. 숙종은 “사체(事體)가 다름이 있으니, 모두 의정(議政)을 증직하라”고 명해 [[장형 (조선)|장형]]은 영의정, 장수(張壽)는 좌의정,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3대가 모두 정승에 증직된 드문 경우였다.</ref> 다음 달 3월엔 그녀의 외조부인 일본어 역관 윤성립을 2품 정경으로 추증하고, 외삼촌인 윤정석에게 사포별제<ref group="주">품계로는 6품에 이르나 녹봉이 없는 무록관이다.</ref> 직을 내려 장씨가 더이상 비천한 역관에 불가한 가문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서인]]이 차지하고 있던 삼사(三事: 삼정승)와 승정원, 사간원의 중앙 최고 요직이 경신년에 조정에서 밀려나 은신 중이었던 [[남인]]으로 교체되자 조정으로 돌아온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은 먼저 원자 윤의 탄생과 [[조선 숙종|숙종]]의 원자가 정해진 것에 대해 경하와 찬사를 올려 [[서인]]과는 극적으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경신년에 [[남인]]에게 대역죄를 씌워 [[경신환국]]을 일으켰던 [[서인]]을 향한 정치 보복의 시작이었다. [[송시열]]에게 유배령을 내리고 [[김수항]] 및 일부 [[서인]]을 조정에서 내쳐버리긴 했지만 분노가 가시지 않았던 [[조선 숙종|숙종]]은 [[남인]]의 부추김으로 [[송시열]]을 최고 유배지인 제주로 유배할 것을 명하고 [[김수항]] 등에게도 진도 유배령을 내렸다. [[민암]]을 위시한 [[남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인과 사헌부·사간원이 합계(合啓)하여 과거의 환국([[경신환국]])을 위해 역모를 날조하여 무고한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 들을 살해하였고 과격한 처벌로 죄없는 [[남인]] 인사를 학살한 [[김석주]]와 [[김익훈]]의 죄를 묻게 하였으며 이들을 옹호하였던 [[송시열]]과 [[남인]] 옥사의 위관으로서 [[남인]] 재상 [[오시수]] 등을 죽게한 [[김수항]]의 가중처벌을 맹렬히 주장하였다.
숙종실록에는 장씨 소생의 왕자가 9월 16일에 사망하였는데 태어난지 열흘이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6월에 이미 [[산실청]]이 설치되었으며 7월 19일 중궁전(장씨)이 해만(解娩: 해산)한 후 약방(藥房)과 정원(政院), 옥당(玉堂)이 대전과 중궁전의 안부를 물었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19일 (무신) 원본342책/탈초본18책 (10/14)</ref> 다음 날인 7월 20일, 중전 장씨의 해만 상태와 산후 기후가 편안하다는 보고가 있으며 2품 이상 관원들이 문안을 올렸다. 22일에는 장씨의 유즙(乳汁: 젖)이 나오지 않아 약을 의논하는 기사가 있다. 7월 26일에는 산실청 의관이 입진하여 중궁전(장씨를 말한다)이 해만(解娩: 해산)한 지 제7일이 되었으니 산실을 철파(撤罷)하겠다는 계를 올렸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26일 (을묘) 원본342책/탈초본18책 (8/13)</ref> 같은 날 [[조선 숙종|숙종]]은 산실청 전(前) [[도제조]]와 [[우의정]] 및 여러 관원과 의관들에게 각 [[말]] 한 필과 안장을 하사하였다. 다음 날 27일에는 산실청 담당 의관이었던 [[김유현]] 등에게 숭록(崇祿: 종1품 문무관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대로 수령(守令)<ref group="주">고려ㆍ조선 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절도사]], [[관찰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따위를 이른다.</ref> 직을 제수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숙종]]이 의관에게 종1품 숭록의 위를 제수할 만큼 대군의 탄생을 각별히 기뻐했음을 알 수 있다.<ref group="주">이 기록 역시 숙종실록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반면에 [[숙빈 최씨]]가 [[조선 영조|영조]]를 출산하자 [[조선 숙종|숙종]]이 [[호산청]] 담당 내시와 [[의관]]에게 말을 하사한 것은 강조하여 기록하였다.</ref> 이러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장씨가 출산한 왕자가 9월 10일 경에 탄생된 것으로 기록한 숙종실록의 기사가 허위임을 증명한다.
대군 성수는 탄생한지 100일이 되지 않은 9월 16일에 돌연 급사하였다.<ref group="주">만일 성수가 정식으로 대군 책봉식을 거친 후에 사망했거나 갑술환국이 발생한 이후에 사망했다면 인현왕후가 복위하여 장씨가 후궁으로 강봉되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법도에 따라 적서 상관없이 자동으로 적처(왕비)에게 입적되는 후계자(왕세자, 원자)와는 달리 그 외 자녀는 생모의 처첩 여부에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장씨를 후궁으로 강봉하려면 성수도 함께 대군에서 군으로 강봉하거나 장씨와 성수를 함께 폐서인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ref> 조정에서 신생대군(新生大君)의 사망에 대한 원인이 논의되었다. 6월부터 산실청이 세워지고 산모인 장씨가 불안한 상태임이 거론되었는데 출산을 하고난 이후에도 장씨의 상태가 불안하다는 기록이 있으며 9월 16일 신생대군이 사망하였을 때에도 상태가 미완하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난산]]이었거나 장씨의 건강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숙종|숙종]]은 조정 백관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고 토로했을 만큼 둘째 아들을 잃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1692년, 전 해(前年)에 조졸한 신생대군방에 절수된 영토와 녹봉을 거둘 것을 주청하는 건의가 반복되어 허가되었다.
- 김재규 . . . . 105회 일치
* 관련 문서: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 [[10.26 사건]]
||<:> '''본관''' ||<:> [[김녕 김씨]] 충의공파 26대손 ||
||<:> '''학력''' ||<:> [[경북대학교|경상북도중등교원양성소]] [br] [[육군사관학교]] 2기 [br] [[육군대학]] [br] [[한양대학교]] [[대학원]]||
||<:> '''종교''' ||<:> [[무종교]] → [[불교]][* [[10.26 사건]]을 일으키고 수감된 이후에 [[불교]]를 믿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5/005000000200505240026025.html|관련 출처]].] ||
||<:> '''약력''' ||<:>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 [br][[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사단장|장]][br][[대한민국 육군]] [[국군기무사령부|보안사령]][[기무사령관|관]][br][[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군단장|장]][br][[1973년]] 제9대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br][[1974년]] 건설부 [[장관]][br][[1976년]] [[중앙정보부]]장 ||
||<:> '''수상''' || ~~[[대한민국 훈장|충무무공훈장]]~~[* 삭선이 그어진 것은 서훈이 취소되었기 때문. [[2006년]] [[3월 21일]] 정부는 서훈을 취소할 수 있게 개정된 상훈법 규정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 및 기업인 174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으며, 10·26사태의 주범인 김재규 또한 그 대상에 포함되어 8개 훈·포장을 박탈당하였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38076|기사]] ] [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천수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삼일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국선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광복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통일장~~[br]~~[[대한민국 훈장|청조근정훈장]]~~[br][[사우디아라비아]] 킹 압둘 아지즈 훈장[* 당시 건설부장관으로서 몸소 중동에 방문해 (한국 기업을 통한) 중동 개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획득했다.] ||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정치가]]이다. 호는 덕산(德山)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고, 사건 다음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되어 이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http://www.youtube.com/watch?v=5YItsPrAcq8|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 現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現 [[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6.25때 후방에서 보급병과 장교로 근무하느라 전공은 커녕 북한군과 마주친 적조차 없다.]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박정희]]와는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 동기생으로 인연을 맺었는데 고향이 같고(경북 구미) 군에 몸담기 전에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았다. 이후 1954년 9월경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과는 악연이 좀 있었다. 윤필용이 [[1.21사태]] 때 [[김신조]]의 모가지 발언을 여과없이 보내는 바람에 윤필용이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장에서 경질되고 김재규가 후임 방첩부대장이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방첩부대를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자신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이 시절 [[재일교포]] 서승 형제 간첩단 사건에 관여한 흑역사가 있다. 이 형제는 방한 전 [[재일교포]] 신분으로 [[북한]]에 방문하고 선물까지 받아온 전력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고문을 동반한 고강도의 조사를 받았는데,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간첩 혐의를 인정하게 되고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훗날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이 건에 대해서는 옹호하지 않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89025|기사]] ] 육군보안사령관이던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표면적인 이유이고 박정희에게 3선까지만 하라는 직언을 해서 좌천됬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군 내부에서 도청하는것이 당시 보안사령부의 일이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장군]]은 삭제되어 있다. 한편 이때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 [[포병]][[대령]]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고, [[10.26 사건]] 당시에도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자리에 있었고, 결국 박정희 암살에도 가담한다. 정말로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육군참모총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고,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김종오]], [[박병권]], [[민기식]], [[김용배]], [[김계원]], [[이세호]], [[임충식]] 등은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들이 아니다. 다만,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재현]]이 보여준 추태가 워낙 커서 앞의 인물들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계급)|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군법무관|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입수한 언론에서 공개한 시점이 2012년 말, 즉 [[18대 대통령 선거]]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2|직전]]이였기 때문에 당시엔 [[찌라시]] 취급을 받으며 묻혀졌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위 항소이유서에서 보다시피 '''현재 [[최순실]]이 [[박근혜]]와 함께 기업들에게서 돈을 뜯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40년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돋을 뜯어내었다. 1970년대 아버지가 했던 사기행각을 딸년이 그대로 2016년까지 써먹은 셈이다. 당연히 [[최태민]]의 범죄행각을 비판하는 민원이 빗발쳤으나,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에게 직언을 할 용기를 가진 관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소수만이 직언을 했다 핍박받는 실정이었다.
위의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나왔듯이, 청와대 내에서 실세 권력이 높았던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 방법이 없어서 김재규에게 직접 하소연했다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당시 [[박근혜]]는 단순한 [[공주]]가 아닌 육영수의 분신이었고, [[육영수 저격 사건|저격 사건]]으로 죽은 영부인의 딸이란 동정표까지 더해져, 당시 노인들은 박근혜만 보면 '''"[[공주]]님 오셨다"'''며 큰 절을 올리며 눈물 흘릴 정도였다.[[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1042107005|#]] 더욱이 마음에 안드는 경찰청장이나 도지사를 호출하여 호통칠 정도로 국정을 농단하는 최태민에게 분노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놓으라고 직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재규의 직언을 듣기는 커녕 박근혜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직에 올리고 최태민을 명예총재직에 올리는 조치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때 느꼈던 절망감이 [[10.26 사건]]의 동기가 되었다고 김재규는 증언하였다.
즉, [[10.26 사태]]를 결심한 동기 중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 [[박근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항소이유 보충서|항소이유보충서]]로 남겼다. 김재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가 지속될 경우 벌어질 잠재적 위험성을 알고 이를 [[/항소이유 보충서|항소이유보충서]]로 남기며 최후의 순간까지 경고 했지만, 그의 우려와 경고는 37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0월 26일날 최씨 일가도 같이 쏴버렸어야 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https://youtu.be/BSqOsrVdY3Y?t=12m31s|당시 실제 육성]]
특히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 울릉군 . . . . 101회 일치
||<bgcolor=#F0F8FF> ▲ 울릉군의 행정, 관광 중심지인 도동 일대 ||
[[경상북도]]의 군.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기초자치단체]]이자 경북 유일의 섬으로만 이뤄진 지자체다. 심지어 멀리 [[동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위치상으로는 오히려 강원도에 가까워 보이지만, 직선거리로 제일 가까운 곳은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이다(130.3km). 다만 울진은 1962년에 [[경상북도]]로 이관되기 전까지는 강원도 소속이었고 울릉도 자체도 1906년까지는 강원도 소속이었다. 그러다가 1906년 13도 분도 후에 뜬금없이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가 1914년에서야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울릉군은 울릉도와 관음도, 죽도 등의 섬들, 그리고 [[독도]]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상 [[울릉도]]가 울릉군의 본토라 볼 수 있다. 면적은 72.87㎢. 육지에서 130km 떨어져 있다. 중심지는 울릉읍이며 관광객으로 항상 붐빈다. 오징어, 호박엿, 울릉약소(울릉한우고기) 등이 유명하다. 독도도 울릉읍에 속해 있다.
[[국회의원]] 선거구는 엉뚱하게 [[포항시]] [[남구(포항)|남구]]와 묶여있다. 그런데 정작 포항에서 울릉도로 들어가는 관문인 포항 구항은 북구에 있다.--신나는 [[월경지]]-- 이는 포항 남구보다 포항 북구 인구가 미묘하게(2~3만 명 정도) 많아서 그렇게 묶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 비례를 생각하면 경상북도의 농촌 선거구에 옮기는게 맞겠지만, 선거운동하기가 힘들어지는 문제가 있다. 배편이 있는 울진군에 엮으면 될 것 같지만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선거구만으로도 벅차다. 네 군 모두 벽지 중의 벽지긴 한데 울진은 그나마 낫다. 다시 [[강원도]]로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지방자치가 본격화된 이후로 행정구역 옮기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쉽진 않다. 행정적으로 경상북도에 속한 이후로 말투도 경상북도 사투리가 발달했다. 거기다 원래 울릉도에 살던 강원도 사람들은 대다수 이미 사망하였거나 외지로 떠났고 현재 울릉군 주민들은 경북 출신들이 대다수. 경계가 애매한 지역들은 양쪽 사이에서 소속감이 애매한 사례가 비일비재한데, 면적도 좁은데다 고립된 섬이라는 특수성까지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경북쪽 정서로 비슷해진 느낌이다.
포항시-영일군 통합 전에는 영일군과 같은 선거구에 소속하였다. 꽤 오랫동안 이상득 의원이 의원직을 6번이나 했다가 불출마했는데, 후임 김형태 의원은 성추행 논란을 일으키며 그 당에서 쫓겨나더니 결국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물론 재선 결과 [[새누리당]] 박명재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이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다만, 2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박명재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야당 후보[* 당시 [[민중연합당]] 후보가 출마했다.]와 무소속 후보는 '''울릉도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새누리당 텃밭이라 하지만 다른 후보들의 무관심으로 박명재[* 행정고시를 합격한 관료 출신으로 노무현 정권기에 행정자치부 장관을 하다가 2013년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원 출마하였다.] 의원이 여유있게 몰표를 가져갔다.
[[러일전쟁]] 때는 울릉도 역사 상 드물게 주변국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함대는 울릉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여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 따윈 없고, 일본이 자의적으로 울릉도를 사용했다. 그리고 근해에 침몰한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은 군자금으로 실린 막대한 금괴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765525|관련기사]]
광복과 함께 [[38선]] 이남지역이 되면서 남한령이 되었다. [[6.25 전쟁]], 남북 분단에 이르는 격변기에는 매우 드물게 참화를 비껴갔다. 옛부터 주변에서 별로 간섭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잘 지냈기 때문에 이념 대립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육지와 워낙 거리가 멀리 떨어진지라 6.25 전쟁조차도 바다 건너 불구경이었다.[* 어떤 위키러가 들은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물자를 실은 배가 들어오지 않아 수소문했더니 육지에서 전쟁이 났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넓이가 지나치게 넓어 사람도 많이 몰린 [[제주특별자치도]], 남한보다 [[북한]]에 훨씬 가까운 [[백령도]], [[연평도]]의 안습한 역사와 비교해보자(…). 마찬가지로 육지와 꽤 멀리 떨어진 가거도도 역시 바다 건너 불구경...그러므로 종속국의 역사와 행보가 떨어진 섬이라는 점에서는 [[대만]], [[오키나와]]와도 비슷하다.
또한 항공편이 생긴다면 항공기에게 연료란 돈 폭탄이니 활주로가 완공되어 경비행기가 다닌다면 대구나 [[포항공항]]으로 갈 것이란 전망이 많다.[* 다만 1시간 내외의 단거리 항공노선은 이륙시 드는 연료비가 전체 연료비에 거의 40%에 육박할만큼 비중이 크기 때문에 포항, 대구보다는 김포노선이 추가될 가능성도 크다. 또한 착륙시 활주로 진입과정이 길기 때문에 실제로는 김포노선이든 대구, 포항노선이든 소요시간이라든지 요금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을(10~20분 차이)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김포 제주간 운항시간이 약 1시간 인데 광주나 여수에서도 제주까지 40분은 걸린다.] 게다가 울릉도 경제권이 이미 [[강원도]]가 아닌 [[경상북도]]로 통합되어 있는 데다가[* 울릉도는 천주교 교구도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대교구]] 소속이다. 교구 소속은 만약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강원 쪽으로 옮겨지면 따라서 [[춘천교구]]나 [[원주교구]] 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주민 대다수가 [[경상북도]] 출신이기도 하고 행정구역이 1914년 이래 경상북도가 되었으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섬이라는 특성상 마냥 강한 소속감을 가지긴 쉽지 않다.[* 2013년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김순견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632438|울릉특별자치군 설치법률을 제정하겠다는 주장]]을 한 적도 있다. 2017년에는 강원도에서 [[http://m.mbceg.co.kr/post/44307?|고성특별자치군 주장도 등장]]했다.] 그래도 일단 행정구역 관할구역 설정상 경북지방경찰청 소속이다. [[대한민국 해양경찰청|해경]]의 경우를 보면, 경북 해역 담당인 [[포항해양경찰서]]가 아닌 동해해양경찰서의 관할 구역인데 이건 해경이 애초에 '도' 단위로 관할 구역을 끊을 만큼 조직이 커서 도마다 하나씩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 --물론 동해가 더 가깝기도 하고-- 다른 예로 [[충청남도]] 해안의 경우 평택해경과 태안해경이 분할 관리하며, 이 평택해경은 [[경기도]]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 해안을 아울러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평택해경이 생기기 전에는 태안해경이 전부 담당했다. 부산의 경우 역시 부산해경이 있는데도 부산신항 일대는 창원해경이 담당한다. 점점 조직이 커지면서 점점 관할 구역을 나눠가지는 구조다.
울릉군 육지 치안은 울릉경찰서가 관장하고 있으며 소방서는 없지만 포항 남구를 관할하는 포항남부소방서[* 포항시청에서 관할하는 게 아니고 경상북도청의 경북소방본부에서 예산이 내려오는 형태이다.] 휘하의 울릉119안전센터가 사실상 울릉도 소방을 책임지고 있다. 보건소의 경우 울릉보건의료원이 관장한다.
그 외에도 세무서는 포항세무서가 2009년 울릉도에 세정 업무를 돕기 위해 포항세무서 울릉지서가 울릉군을 관장하며, 일반적인 세정 사무는 포항까지 나가야 하며, 관세 부문은 포항세관이 울릉도를 책임지고 있다. 또한 케이블TV는 [[현대HCN]] 경북방송이 울릉군도 관할하게 된다.
[[울릉군]] 울릉읍에서 제일 큰 마을은 인구 약 5천명의 저동리이며 도동리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도동의 인구는 약 2천 명으로서 [[포항시]]와 묵호항에서 오는 [[선박|배]]가 정박하는 곳이다. 그래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숙박업이나 음식점은 대부분 도동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저동리는 도동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로서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다. 강릉과 후포에서 출항하는 배는 이쪽에 정박하며, 포항에서 출항하는 배의 일부도 저동항에 정박한다. 이쪽은 보통 울릉도민들이 사는 마을로서 옆에 항구가 있으며 주민을 상대로 한 상점과 편의시설들이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일제강점기]] 때 도동이 일본인 마을로 통했다면 저동은 조선인 마을로 통했다는 점. 실제로 도동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축물이 약간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했을때[* 이후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였다.], 묵고 갔다던 당시 울릉군수 관사도 일본식 건물이다.
그밖에 사동이나 남양, 현포, 태하, 천부 등의 조그만 마을들이 있다. 사동은 신항만이 들어선다고. 사동 옆에 울릉도민들의 숙원이라고 하는 [[울릉공항]] 건설이 계획되어 있다. 대부분이 가파른 산인 울릉도에는 1,500m 이상의 활주로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지만 바다에 두꺼운 [[방파제]]를 만들어 이 곳을 활주로로 쓰자는 안이다. 울릉도에 공항이 생기면 [[서울특별시]]나 [[광주광역시]], [[부산광역시]] 같이 먼 거리에 사는 관광객들이 1시간 만에 울릉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긴 하다. 현재는 버스+배로 서울에서 울릉도까지 7시간 가량 걸린다. 허나, 깊은 동해 위에 활주로를 세운다는 건 돈이 많이 들고 날씨가 변덕스러운 울릉도에서 기항이 가능한 일수가 적을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다.
앞으로 울릉도에는 소방서가 신설[* [[http://biz.heraldcorp.com/village/view.php?ud=201608182228226328368_10|2020년까지 울릉소방서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인구가 적다보니 정치적 파워도 그만큼 떨어지므로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11년에 울릉경찰서장이 경정에서 총경(4급 상당)으로 격상되었고, 동해해양경비안전서 울릉해양경비안전센터장도 경감(6급 갑 상당)이 맡고 있기 때문에 기관장 회의라도 하려면 울릉안전센터장이 지방소방경(6급 갑 상당) 정도로 계급~~짬밥~~이 밀리는 느낌도 있다.]되고, 공항이 개설되고 일주도로까지 완공되면 독도 수호, 안전, 교통 흐름 모두 다 개선될 것으로 예측된다.
울릉군의 전화번호는 관용이나 공공기관 등은 790국번을, 일반용은 791국번을 주로 쓴다. 이전에는 국번 없이 무국번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네자릿수 일련번호(보기:☎1234 등)를 [[1987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시외전화를 지자체 단위로 쓰던 시절에는 0566으로 배정되었다가 지금은 054가 되었다.
군 부대도 주둔 중인데, 1982년 도서 방어 임무가 [[대한민국 육군]]에서 [[대한민국 해군]]으로 이관되면서 해군 [[제1함대사령부]] 예하의 [[레이더 사이트|전탐감시부대]]인 [[제118조기경보전대]]가 들어와 있다. 이 부대에는 [[제1해병사단]]에서 전속된 해병대원들도 같이 근무한다. 상시 주둔하진 않으나, 독도나 울릉도 유사시 1함대와 1사단에서 함정 및 해병대 전력을 지원받을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조.
울릉도에서 [[상근예비역]]으로 선발되면 100% 해군 소속이 되며, [[예비군 관리대대|예비군 관리대]]에 배속된다. 예비군 관리대대장은 해병소령이다.
그 외 [[대한민국 공군]]의 319 관제대대와 [[777사령부|보안상 소속을 밝힐 수 없는 부대]] 등이 있다. 실제로 북면 북동쪽에 SEC연구소라는 곳이 있다.
|| '''관외사전투표''' ||<:>30.60%||<:>{{{#C9151E 34.53%}}}||<:>15.86%||<:>11.79%||<:>6.74%||<:>{{{#808080 ▼3.93}}} ||<:>||
- 한규복 (1881년) . . . . 101회 일치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899년]](광무 2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동경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03년]] 귀국, 대한제국 관료로 임용되어 [[탁지부]] [[주사]], [[군부]]와 [[탁지부]]의 [[번역관]] 등을 거쳐 탁지부 [[서기관]], [[주임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토지조사국]] 감사담당관, [[1913년]] [[진주군|진주]][[군수]], 이후 [[동래군|동래]][[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충청남도청]] [[참여관]], [[1924년]] [[경상북도청]] [[참여관]], [[1926년]] [[충청북도]][[도지사]], [[황해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이듬해 재선된 뒤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해방 후에는 정계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곡자]]의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한 뒤, 조사받고 풀려났다. 이후 기업 활동과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인 도지사 경력자 42명 가운데 배경이 되는 엘리트 출신 고위관료 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예]]에 능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나 수상하였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고 자(字)는 덕중(德仲), 호는 온재(溫齋)이다.
그의 집안은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종조부인 [[개국공신]] [[한상경]]<ref>한명회의 할아버지 한상질의 동생으로, 한명회를 양육하였다.</ref>의 후손으로, 유암 [[한계윤]](柳岩 韓繼胤)의 20대손이다. [[한계윤]]은 [[한명회]]와 6촌 형제간이며, 외할아버지는 [[성달생]]으로 [[성승]]과 [[성삼문]]은 각각 외삼촌과 외사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하급 무관을 역임하다가 5대조부터는 증직 벼슬만이 전한다. 한규복의 할아버지 한수익(韓守益)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호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증조부 한도흥(韓道興)은 [[호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조부 한윤기(韓潤琦)는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외할아버지 백우혁(白佑赫)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는 어려서 한성에서 신학문인 [[일본어]]와 [[중국어|한어]](漢語), [[영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3월]] [[을미의숙]](乙未義塾) [[일본어]]학과에 입학, [[1897년]] [[3월]] 을미의숙 일어학과를 마치고 [[관립영어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정3품으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에 선출되었으나 중추원은 곧 해체되었다. [[1899년]](광무 2년) [[3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1902년]]에는 [[와세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본]]의 [[유도]]도장인 [[강도관]](講道館)에 다녔다. 공승화전개(일본 工勝花雷介)의 《비록일본유도(秘錄日本柔道)》의 기사와 일본강도관에 조회한 바에 의하면 [[1902년]] 한규복 등이 [[강도관]]에 입문하여 [[유도]]를 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f>김정행, 《무도론》 (대한미디어, 1997) 129페이지</ref> 그는 [[1902년]] [[8월]]부터 [[유도]]를 배웠다고 한다.<ref>이학래, 《한국유도발달사》 (보경문화사, 1989) 37페이지</ref> 일본의 유도 전승에 자극받은 그는 귀국 후 [[조선]]의 [[유도]] 단체를 지원하는 한편 상소를 올려 [[택견]] 관련 인물과 유파를 찾아 지원해줄 것을 정부에 상주하기도 했다.
==== 대한제국 관료 생활 ====
[[1903년]] [[대한제국]]의 [[탁지부]] 주사가 되었다. [[1904년]](광무 7년) [[9월 27일]] [[대한제국 국군]] [[참모부]] [[번역관]]보(參謀部飜譯官補)가 되고 [[판임관]] 6등(判任官六等)에 임용되었다. [[1905년]](광무 8년) [[3월 21일]] [[군부]] [[번역관]](飜譯官)으로 승진, [[주임관]] 6등(奏任官六等)이 되었다. 이후 [[군부 (대한제국)|군부]], [[탁지부]] 등 여러 부처에서 번역관 벼슬 등을 지내고 [[탁지부]] 서기관과 주임관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5일]] [[경기전]]을 건축하는데 참여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하였다. [[1906년]] 탁지부 번역관으로 옮겼다. 그해 [[1월 19일]] [[순릉]]비각영건과 표석 수립에 감독관으로 참여한 공로로 다시 6품에서 정3품으로 [[가자]], 일약 승진하였다.
[[1906년]] [[3월 31일]] [[탁지부]][[번역관]](度支部繙譯官)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 [[5월 31일]] [[탁지부]] 문서과 수석번역관(度支部首席繙譯官)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 [[1907년]] [[탁지부]][[서기관]] 양지과장(量地課長)을 역임했다. [[1907년]](융희 2년) [[6월 27일]] 탁지부 서기관, 풍지과장으로 재직 중 [[주임관]] 3등으로 승급하였다. [[1907년]] 수석번역관, 이어서 [[탁지부]] [[서기관]](書記官), [[토지조사국]] 서기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3월]] [[탁지부]] [[토지조사국]] [[서기관]], [[주임관]] 2등이 되고, 탁지부 토지조사국 정리과장에 보직되었다.
==== 총독부 관료 생활 ====
[[1910년]] [[10월 6일]]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이후 다시 조선총독부 [[고등관]] 7등에 임용,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1臨時土地調査局) 감사관(監査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장과 정리과장을 거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감사담당관이 되었다. [[1913년]] [[1월]] 총독부 군수가 되어 [[경상남도]] [[진주군|진주]][[군수]] [[고등관]]6등(晉州郡守 高等官6等)이 되고, [[경상남도]][[참여관]]을 겸직하였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을 역임했다. 그밖에 [[농업]] 단체인 [[조선농회]] 경상남도지회에 상의원으로 가입하였다. [[1916년]]과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에 재위촉되었다.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되고, [[1917년]] 진주군수 재직 중 [[고등관]] 5등(高等官5等)으로 승진했다. [[1918년]] [[7월 1일]] [[동래군|동래]][[군수]] 고등관 5등(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발령받았다. [[1921년]] [[2월 12일]]에는 [[충청남도]] 참여관(慶尙北道參與官) 고등관 4등(高等官4等)으로 승진하였다. [[7월 22일]] 다시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30일]]에는 [[만주]]로 출장갔다가 [[10월]]에는 [[동양협회]]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1923년]]초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음악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1일]]에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2월]] [[경상북도]] 참여관 재직 중 [[고등관]] 3등(高等官3等)으로 승진하였다.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1933년]] [[7월 21일]]에는 중추원 시정조사위원회 학예부장이 되었다. [[10월 21일]]에는 소작농심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34년]]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지구위원장(京城府敎化團體聯合會 西部敎化地區委員長)이 되었다. [[1934년]] [[7월 14일]] [[금융]]단체의 연합회인 [[금융조합연합회]] 창립에 참여, 자문상담역<ref>"금조연합회, 자문기관 설치", 조선중앙일보 1934년 07월 22일자 4면</ref>에 위촉되었다. [[7월 21일]] [[금융조합연합회]] [[경기도]]지역 참여에 임명되었다. [[1934년]] 여름 홍수로 [[조선]] 삼남 지방에 수해가 심해지자, 그해 [[8월 30일]] [[조선총독부]]에서 [[치소조사위원회]]를 설치할 때 그는 민간측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규복에게 여러차례 훈장을 수여해 공적을 인정했다.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퇴관할 때에는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
[[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936년]] [[11월 24일]] 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중추원참의인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30여 명의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추진키 위해 위원 8명으로 기성회를 구성하고 [[1937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예정이었다.<ref name="jiji"/>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하고도 관계가 있다 하여 일단 중지시켰다.<ref name="jiji"/>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1937년]] [[1월]]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인용문2|자수 편지<br /><br />천운(天運)이 순환하사 우리 [[대한민국]]이 탄생되니 산천(山川)과 초목이 다시 금빛이 나고 잃었던 자유가 우리 몸에 다시 오니 일반의 환희는 무엇으로 형용하리요. 하물며 일제시대에 허다의 압제를 견디면서 관리생활을 계속한 본인으로서는 더욱더욱 감개무량이외다. 본인은 대한제국시대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조도전 대학早에서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고로 행정관으로 출세하여 민중지도에 노력하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관계(官界)에 투신하여 도지부 서기관으로 재임한 채로 병합을 당하여 임시토지조사국 감사관에 임명되었을 때 본인은 자신처리에 대하여 재삼 고려한 결과 나의 지력과 성력의 한도대로 민중을 지도하는 것이 차라리 유리하다는 견해로 관리생활을 계속하여 [[도지사]]를 역임하고 正4位 勳3등까지 되었으니 가위 고급관리의 지위까지 점진하였다고 하겠으며 30여 년간 관리생활을 하는 중에 민중의 계발을 여하(如何)한 정도로 하였느냐 하면 구체적으로 진술할 재료는 제공치 못하나 다만 양심적으로 민중을 지도하고 또한 민중의 의지를 대표하여 항거할 점은 어디까지든지 항론도 사양치 아니 하였으며 평범한 정치로 민중에 임하고 공정렴근(公正廉謹)으로서 관계일생(官界一生)의 목표로 삼은 것은 천인(天人)이 공인(共認)하는바 옵니다. 그러하니 민중에 대하여 행복이 되고 이익이 된 점을 일일이 수거치는 못하고 다만 장구한 세월의 관리생활을 하였다는 것밖에 남지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변명하오리까. 금일에 지하여는 전일의 양심적으로 민중을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보도, 노력한 점은 무형(無形)으로 돌아가고 다만 관계생활(官界生活)을 하여 일제에 아부한 자로 추인되어 이 점이 기탄불기(慨歎不已)할 뿐더러 관리생활로 일생을 보낸 것이 참회되는 바이며 근신(勤愼)할 뿐이 옵니다. 오직 현명한 당국의 선악을 분별하사 관대한 처분만 바라옵고 감히 소회(所懷)의 일단을 진백(陳白)하나이다.<br><Br>단기 4282년 8월 12일<br />위 인 한규복<br><br>반민행위특별조사위원회 귀중|[[1949년]] [[8월 12일]] 자수 직전에 [[반민특위]]에 보낸 편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당시 한규복은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지냈을 뿐 “양심에 비추어 민족정신을 망각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관비로 유학을 마치고 대한제국 관리로 일하다가 “한일합병과 동시에 다시 왜인에게 아부하여 조선총독정치에 헌신한 유일한 친일분자”로 평가했다.<ref name="neftkin"/> 당시 그를 심문한 이는 위원장 [[이인]] [[변호사]]였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장관 . . . . 86회 일치
게임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에 등장하는 장관들의 종류를 설명하는 페이지.
각 국가의 장관진을 차지하는 인물들은 각자 하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당 특성은 여러가지 요소에 보너스를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패널티를 주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내각진 중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제외한 8명을 자기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 있지만, 민간 분야 장관은 불만도가 2%, 군사 분야 장관은 불만도가 1% 올라간다.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같이 역사적으로 네임밸류가 높은 장관의 경우 유니크한 특성이 달려있기도 하다. 또한 몇몇 장관의 경우에는 해당 자리의 특성이 아닌 다른 자리의 특성을 달고 나오기도 한다.
해당 페이지의 최초 기여자가 한글 패치가 없는 관계로 자체 해석으로 쓰여있다. 다음 아이디 잃어버렸음ㅇㅇ.
>하찮은 비전문가는 어떤 야망이나 정치적 관심사도 없는 인물이다. 사람들이 이 인물을 쫓아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인물이 상당히 무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이 인물보다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근엄한 제국주의자는 흔들림 없는 제국주의자다. 그에게는 매력도 천재적인 관리 능력도 없지만 단 한 가지는 가지고 있다. 자신의 국가를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드려는 광신적 열정 만은. 정치적 방법이건 군사적 방법이건, 그는 그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 긍정적인 효과: 해군 생산 비용 및 시간 -5%, 모든 병력 조직력 회복률 +10%, 지휘관 능력치 효율 +10%,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공격 능력 +10%,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방어 능력 +5%, 지상군 속도 +10%, 지상군 조직력 +10%
* Charming Opportunist(매력적인 낙관론자) - 중화민국의 위안스카이(원세개)
* 부정적인 효과: 공업력 -5%, 불만율 증가량 +5%, 민병 사단 생산 비용 및 시간 +10%, 지휘관 능력치 효율 -10%
* 긍정적인 효과: 소비재 필요량 -5%, 자금 생산량 +10%, 보급품 생산량 +5%, 지휘관 능력치 효율 +10%
* 부정적인 효과: 지휘관 능력치 효율 -5%, 소비재 필요량 +10%, 선전포고에 필요한 적국 호전도 +20%, 자금 생산량 -10%
* 부정적인 효과: 공업력 -15%, 자원 생산량 -10%, 공장 생산 가격 +10%, 국제적 여론조작 당할 확률 +10%, 연구 시간 +5%, 지휘관 능력치 효율 -5%
* 부정적인 효과: 모든 병력 조직력 -10%, 점령지 공업력 -20%, 민주 국가 상대로 동맹 성공률 -10%, 육군 첩보 정확도 -2, 지휘관 능력치 효율 -1%, 전쟁시 호전도가 한달에 0.1씩 증가
* 부정적인 효과: 점령지 공업력 -10%, 민주 국가 상대로 동맹 성공률 -15%, 지휘관 능력치 효율 -5%, 전쟁시 호전도가 한달에 0.2씩 증가
* 긍정적인 효과: 공업력 +10%, 에너지 생산량 +10%, 금속 생산량 +10%, 희귀 자원 생산량 +10%, 지휘관 능력치 효율 +10%, 모든 병력 조직력 회복률 +10%
* 긍정적인 효과: 불만율 증가량 -10%, 인력 증가량 +5%, 지휘관 능력치 효율 +5%, 모든 병력 조직력 회복률 +10%, 민병 사단 생산 시간 -15%, 닫힌 사회 상대로 동맹 성공률 +25%, 육군의 방어 능력 +5%
* 부정적인 효과: 소비재 필요량 +5%, 불만율 증가량 +5%, 모든 병력 조직력 -10%, 모든 병력 조직력 회복률 -10%, 지휘관 능력치 효율 -10%
>야망있는 노조 두목은 변화를 위한 권력을 얻으려고 정치판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여전히 노동자 계층의 사람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환경이 그의 급진주의를 억제하였다. 그는 질긴 협상가지만 관리 기술에서는 미흡함을 보인다. 그의 뒷배경 또한 어떤 경우에서는 골칫거리가 된다.
* 부정적인 효과: 지휘관 능력치 효율 -10%
>순진한 낙천주의자는 능력있는 관리자이자 정치인이다. 하지만 그는 희망적인 생각에 치우쳐 그를 노린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 스틸오션/사령관 . . . . 81회 일치
[[월드 오브 탱크]]의 승무원과 비슷한 개념. 하지만 사령관 없이 플레이 할 수는 있다. 함선 성능에 페널티를 받을 뿐이지.
사령관은 퀘스트 보상으로 받거나 퀘스트를 깨면 주는 메리트로 부스터를 돌려 얻을 수 있다.
각 사령관들은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게임 플레이에 도움을 준다. 특수 능력 중 사람 대가리 같은게 있을텐데, 이건 사령관 포인트, 줄여서 CP를 요구한다는거다. 사령관 포인트는 시간이 지나면 쌓인다. 너무 느리게 쌓이는 것 같다면 함선 커스터마이즈로 깃발을 달자. 캐시템이지만.
사령관들은 능력을 다섯개 가지고 있는데 한번에 전부 해금되는게 아니라 사령관을 배치한 상태로 전투를 벌여 레벨업을 시켜줘야 조금씩 해금된다. 이 레벨업으로 등급을 올릴 수도 있다.
* 주포 관통력 강화 II(Enhanced Main Penetration II) - 주포 관통력 2% 증가.
* 해군 사령관(Naval Commander) - 함장으로 배치시 내구력과 조타 능력 5% 증가.
* 칠면조 사냥꾼(Turkey Hunter) - 포수로 배치했을 때에만 발생. 기관총이 사거리 내 폭격기를 우선적으로 공격함.
* 주포 관통력 강화 II(Enhanced Main Penetration II) - 주포 관통력 2% 증가.
* 대양함대(Ocean Fleet) - 순양함이나 전함에 배치해야만 발동. 주포 관통력과 장갑을 5% 증가.
* 강철의 왈츠(Steel Waltz) - 함포와 어뢰발사관의 회전 속도 8% 증가.
* 약점 인식(Weakness Recognition) - 액티브. 3CP 소모. 15초간 주포 관통력 15% 증가.
* 레이더 강화 II(Enhanced Radar II) - 관측 범위 150m 증가.
* 생나제르의 유령(Phantom of Saint-Nazaire) - 함포 회전 속도, 어뢰발사관 회전 속도, 위장 3% 증가.
* 주포 관통력 강화 II(Enhanced Main Penetration II) - 주포 관통력 2% 증가.
* 기관총 공격력 강화 II(Enhanced MG Attack II) - 기관총 데미지 3% 상승.
* 주포 관통력 강화 II(Enhanced Main Penetration II) - 주포 관통력 2% 증가.
* 선견지명(Foresight) - 액티브. 3CP 소모. 15초간 관측 범위 800m 증가.
* 자부심(Conceit) - 함포 사격시 30% 확률로 발동. 30초간 함포 관통력 10% 증가.
* 레이더 강화 IV(Enhanced Radar IV) - 무전사로 배치시 발동. 관측 범위 450m 증가.
* 강철의 왈츠(Steel Waltz) - 함포와 어뢰발사관의 회전 속도 8% 증가.
- 한명회 . . . . 77회 일치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음력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4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1475년에서 1476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의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ref>7개월만에 출생하여 생애 초기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f>,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한성부]] 출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5페이지</ref>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압구정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년) [[음력 10월 25일]] [[한성부]]에서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에 [[증직]]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와 이초참판 겸 [[예문관]] 직제학 [[이척]](李逖)의 딸인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모친 여주이씨 부인이 수태된 지 7개월만에 태어났다 하여 칠삭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몸이 빈약하여 일찍 죽으리라 생각하고 방치하였으나 어느 늙은 여종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였다. 그러나 종조부 [[한상덕]]은 그의 관상을 보고 '이 아이는 기우(器宇)가 예사롭지 않으니 필경에는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같이 불우한 처지였던 [[권람]](權擥)과 친하게 지냈는데, 둘이 함께 오랫동안 마차에 책과 술을 싣고 전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하고 유람을 다녀오기도 했다. 관례를 치룬 뒤에도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고, 오랫동안 실의의 나날을 보내며 [[권람]]과 더불어 전국을 떠돌며 산천을 주유했다.
==== 음관과 수양대군의 측근 ====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하였다.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 그는 역시 같은 [[경덕궁|경덕궁직]]에 있던 무사 [[홍달손]](洪達孫), [[홍윤성]], [[양정]] 등을 만나 사귀게 되는데, 한명회는 이들 30여 명을 [[조선 세조|수양대군]]에게 적극 천거하여 이들의 인맥을 통해 거사를 일으킬 병력을 모으게 된다.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115페이지</ref>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金宗瑞), [[황보 인]]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자주 만나며 집권 계획을 역설,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추천하여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다.
{{인용문2|제 친구인 한생(韓生, 한명회)은 뜻이 웅대하여 간국(幹局)이 있고, 둘도 없는 [[국사]](國士)로 적합한 인물이며, 지금의 [[관중 (춘추)|관중]](管仲), [[악의]](樂毅), [[사마중달]], [[제갈공명]]과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께서 [[춘추 시대]] [[오나라]]의 계찰(季札)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시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큰 뜻을 품고 이 세상을 평치(平治)하시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권람의 진언}}
이어 한명회는 모사가들을 시켜 잔존 세력을 숙청한 후, 직접 [[김종서 (1383년)|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에 찾아가 [[김종서 (1383년)|김종서]] 등과 [[황보인]] 일족을 참살케 한 후 군기녹사(軍器錄事)·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 1등관이 되었다.
그 뒤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의금부]][[도사]]를 거쳐,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영의정부사]]가 되면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발탁되었다가 [[1454년]](단종 2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한다.
[[1455년]](단종 3년)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겸[[사재감|판사재감사]](兼判司宰監事) 지예조사(知禮曹事)를 거쳐, 그해 [[6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455년]](세조 즉위) [[6월]] [[조선 세조|세조]]가 [[조선 단종|단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국왕으로 즉위하자 한명회는 다시 [[승정원]][[좌부승지]](左副承旨)에 [[좌익공신|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가 곧이어 그해 가을 [[승정원]][[우승지]]에 올랐다.
[[1456년]] [[5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 (조선)|윤봉]](尹鳳)을 보내서 그에게 특별 선물로 그에게 관복(冠服)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육신]] 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456년]] 초부터 그는 [[정창손]]에게 사위를 설득하게 했는데, 그해 [[6월 2일]], [[사육신]]과 함께 [[조선 세조|세조]] 3부자 척살에 가담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의 가담자들을 폭로함으로써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등을 체포하였다. 바로 이들을 국문한 후 처형하고, 800여 명의 관련자들을 처형했으며, 수천 명을 유배시켰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사형된 후 [[사육신의 의거]]를 진압한 공로로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그해 겨울 [[도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고,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하며 미구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56년]]부터 [[조선 단종|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처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선 세조|세조]]가 듣지 않았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한 뒤,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었다. 그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겨울 [[조선 예종|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奏請)을 위한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의 [[연경]](燕京)에 들어갔다.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ref name="park115"/>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조선 세조|세조]]는 [[평안도]]와 [[함길도]], [[강원도]]의 도체찰사 직은 [[신숙주]]에게 넘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ref name="park115"/> 그는 우선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장순왕후|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공예왕후|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ref name="park116"/>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권람]]은 일찍 요절한 그의 동생 [[한명진]]의 처남이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손자 [[한경침]]을 다시 사위이기도 한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 소생 서녀 [[공신옹주]]와 혼인시켜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권람<ref>권람은 그의 동생 [[한명진]]의 처남이기도 하다.</ref>, 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인척 관계에 의한 요직 장악이라는 크나큰 인사 폐단을 낳아 조선왕조의 기강을 흐트러놓는 원인이 되었다.
[[1463년]](세조 9년)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충훈부]]당상을 겸임하였다. [[1464년]](세조 10년)에 [[평안북도]]의 변방에 성곽을 개보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의주]]의 하류에는 진보(鎭堡)가 설치된 곳이 없으니 만일 [[여진족]]의 침입이라도 있게 되면 외딴 성(城)은 후원(後援)이 없고, 희천(熙川)과 영흥(永興) 사이는 거리가 너무 멀어, 만에 하나 불의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사세가 멀리서 구원하기는 어렵겠으니, 의주 하류에는 새로이 진(후일의 인산진(麟山鎭))을 설치하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는 새 군(훗날의 영원군(寧遠郡))을 두는 것이 이로울 것 같습니다.”라고 건의하여 [[인산진]]과 [[영원군]]을 신설하였다. 바로 [[평안도]]의 성곽 개보수 공사에 파견되어 직접 이를 감독, 관장하고 되돌아왔다.
[[1466년]] [[영의정]]이 되어 영[[예문관]]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藝文館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와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하였으나 병으로 한때 사직하였다. 이후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신제대전 (新制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여 초안을 작성, [[1467년]]초에 《신제대전》 초안을 완성시켰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66회 일치
세계 각국에게 독일은 평화를 바란다고 선전한다. 호전도가 1감소하는 동시에 프랑스, 영국, 소련, 폴란드, 이탈리아, 일본,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불가리아와의 관계도가 5-10 오른다.
독일의 성장을 방해하는 나약한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 자금 100을 소모해 불만도를 2% 감소시킨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영국, 폴란드,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와의 관계도가 50 감소한다.
* 발동 조건: 군수장관이 얄마르 샤흐트, 불만도 7% 미만, 국가 원수나 정부 수반 중 한명이 아돌프 히틀러
오스트리아 내 나치 당원들이 쿠데타를 벌이게 한다. 자금 100을 소모해 불만도를 2% 감소시킨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영국, 폴란드,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와의 관계도가 20 감소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는 10 증가한다.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란트에 군부대를 주둔시킨다. 불만도가 2% 감소하며 자금이 500 증가한다. 동시에 외교 슬라이더도 강경파로 1 이동한다. 호전도가 10 오르며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와의 관계도가 5-15 하락한다. 평화시 공업력이 10% 증가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역시 "전쟁 준비" 이벤트로 평화시 공업력 패널티가 10% 감소한다. 이벤트로 벨기에가 연합국에서 탈퇴한다.
1925년 맺어졌던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한다. 불만도가 0.5% 감소하며 메츠, 콜마르,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오이펜을 영토 분쟁 지역으로 만든다. 호전도가 1 오르며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와의 관계도가 -5 하락한다.
일본과 이탈리아에게 5년간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상호간 정보 교류 및 지원을 제안한다. 당연히 소련과의 관계도가 떨어지며, 정치 슬라이더가 닫힌 사회로 한 칸, 간섭주의로 한 칸 이동한다. 일본의 만주국 승인 및 중국 내 독일 고문관 철수 요구를 들어주면 일본은 자동적으로 반 코민테른 조약에 가입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국을 지원하는 디시전.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선택지와 엄청난 양의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고 스페인국 군사통제권도 가져오는 선택지가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스페인국, 이탈리아와의 관계도가 상승하며 영국, 프랑스, 스페인 공화국, 소련과의 관계도가 하락한다. 또한 호전도도 올라간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면 지원군 귀환 이벤트와 함께 몇몇 공군 교리의 청사진을 획득한다.
* "이탈리아가 강철의 조약에 서명하다" 이벤트 발생. 이후 오스트리아와 관계도 200이거나 오스트리아와 동맹 상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디시전. 오스트리아 국토를 획득하고, 300명의 인력과 지휘관을 습득하고 불만도도 10 내려가지만 호전도가 10 오르며 영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헝가리와의 관계도가 하락한다. 또한 정치 슬라이더가 강경파로 한 칸 이동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시 공업력 패널티가 "전쟁 준비" 이벤트로 10% 감소한다.
* 발동 조건: "오스트리아 안슐루스 선언" 디시전 발동으로부터 최소 150일이 지나야 함.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 관계도, 동맹 관계도 아니어야 함. 독일-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전역에 독일군이 위치해야 함.
뮌헨 조약을 통해 주데텐란트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주데텐란트 지역을 영토 분쟁 지역으로 만드는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해당 지역의 할양을 요구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승인 여부에 상관 없이 영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관계도가 10-20 하락하며 독일의 호전도가 1 증가한다. 정치 슬라이더가 간섭주의로 3칸, 강경파로 1칸 이동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시 공업력 패널티가 "전쟁 준비" 이벤트로 10% 감소한다. 이를 체코슬로바키아가 받아들였을 시, 히틀러의 연설과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이 재생된다.
리투아니아 영토인 클라이페다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디시전. 리투아니아, 소련과의 관계도가 떨어진다.
유럽 내에서 주축군에 가입할 만한 국가를 찾아보는 디시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스페인국, 터키를 주축군에 끌어들이는 디시전이 추가된다. 소련과의 관계도가 -50 하락한다.
* 발동 조건: 요제프 괴벨스를 치안장관으로 임명, 자금 5,000, 다음 두 조건 중 최소 하나가 만족되어야 함
* 발동 조건: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관계도 50 이상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협상을 벌여 캘리포니아 아라비아 스탠다드 오일이 사우디 아라비아 내 석유 자원을 탐사하게 한다.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관계도가 25 상승하며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자금 1을 주는 대신 석유 2를 받아오는 무역 협정을 맺는다. 이후 몇 년 쯤 지나면 사우디로부터 받는 석유의 양이 늘어난다.
소련을 국가로 인정한다. 소련과의 관계도가 10 상승하며 자금 75를 획득하지만 공산주의 반란군을 국가로 인정했기에 불만도 1%가 상승한다.
자금 20을 소모해 아메리카 대륙 국가 모두와 관계도를 50 올리고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또한 미국의 괴뢰국인 니카과라와 아이티를 해방시키며, 불만도가 2% 감소한다.
중화민국이 보유한 은화를 미국 국고의 금화와 교환할 수 있게 해주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보급품 1,500, 석유 250이 빠져나가고 자금 50이 들어온다. 중화민국과의 관계도가 15 증가하고 일본과의 관계도가 10 감소한다. 중화민국에 요격기 한 부대, 공군 지휘관 한 명, 그외 여러가지 등등이 지원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 스틸오션/독일 . . . . 65회 일치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126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405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1/2×2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533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815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3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656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885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1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1×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798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1,966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1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347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025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1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1×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026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086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후면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1×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620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149 m ||
- 문무왕 . . . . 63회 일치
원년([[661년]]) [[6월]] 상중(喪中)이던 문무왕에게 당은 [[고구려]]를 치는 당군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가 [[백제]] 부흥군(復興軍)을 진압하는데 나서줄 것을 거듭 요청해왔다. 평양으로 먼저 군량을 보내면 웅진으로 통하는 물자 수송로가 끊어질 것이고, 그 수송로가 끊어지면 [[웅진도독부]]의 당군들은 [[백제]]군에게 궤멸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왕은 8월에 직접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대전 계족산성|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1"/>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상주(上州) 총관(摠管) 품일(品日)과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또 함락시키고, [[10월 29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당의 조문 사절을 맞이했다. 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보낸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ref group="주">《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대감(大監) 문천(文泉)이라 표기됨</ref>이 와서 문무왕에게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을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1"/> 왕은 이듬해 1월 [[김유신]]으로 하여금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 군은 이듬해 2월에 무사히 군량을 전달하고 귀환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2">《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662)</ref>
2년([[662년]]) 봄 정월에 당은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2월에는 [[탐라국]] 임금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해 와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2"/> 이때 [[신라]]에서는 [[백제]]에 주둔하고 [[고구려]]를 치는 당군의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식량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하느라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고갈되고, 농사 때를 망쳐 백성들이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웅진도독부]]에 있는 당군의 군량 창고에는 쌀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에서는 그 뒤로도 수시로 [[신라]]에 군량을 요구하였다. 3월에 내린 대사면령은 이러한 가운데서 오는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출처|날짜=2018-06-27}} 7월 왕은 왕제(王弟) [[김인문|인문]](仁門)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는 한편,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대산(大山)과 사정(沙井)의 [[백제]] 목책을 깨뜨리고 [[신라]]군과 합세해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열었다. 8월<ref group="주">《[[동사강목]]》에는 7월로 표기됨</ref>에는 [[김흠순|흠순]] 등 19장군을 시켜 내사지성(內斯只城)의 [[백제]] 부흥군을 깨뜨렸고, 대당(大幢) 총관(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南川州) 총관 진흠(眞欽)이 병을 핑계로 한가로이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죄를 물어 처형하고 그 일족까지 멸했다.<ref name="삼국사기-662"/>
3년([[663년]]) 봄 정월에는 [[서라벌]] 근교의 [[경주 남산신성|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또한 [[경주 부산성|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ref name="삼국사기-663"/> 이보다 앞서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에 험준한 주류성(周留城)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避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ref name="일본서기-662">《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원년(662)</ref> 663년 2월에 [[김흠순|흠순]]과 [[김천존|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목베는 등 [[백제]] 부흥군을 더욱 압박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63"/> 결국 부흥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ref name="일본서기-663">《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2년(663)</ref>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게 한다.{{출처|날짜=2018-06-27}} 한편 여름 4월,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3">《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3년(663)</ref> 6월, [[백제]] 부흥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부흥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고,<ref name="일본서기-663"/> 당에서도 [[웅진도독부]]의 장군 유인궤(劉仁軌)의 요청에 따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40만 군사를 보냈고, 유인궤와 별장(別將) 두상(杜爽), 새로 [[백제]]왕으로 임명된 [[부여융]] 등의 수군은 덕물도(德物島)를 경유해 수로로 곧장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3"/><ref name="의자왕-662">《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제6 唐 高宗 龍朔二年(662)</ref> 문무왕 역시 [[김유신]]과 [[김인문]]·[[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데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ref group="주">문헌에 따라 두량이성(豆良伊城)·두릉윤성(豆陵尹城)·두곶성(豆串城)·윤성(尹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ref>을 함락했다. 문무왕은 [[왜인]]들에게 훈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ref name="김유신-중">《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 중</ref>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의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해 버렸다([[백강구 전투]]).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한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9월 7일<ref group="주">《[[자치통감]]》에는 8일로 표기됨</ref>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ref name="일본서기-663"/><ref name="자치통감-663">《자치통감》 권201 唐紀十七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龍朔 3년(663)</ref> [[웅진도독부]]의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문무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앞서 당은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도독에 임명한 뒤,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문무왕을 향해 "평정을 마친 뒤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던 고종의 칙령을 들며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했다. [[신라]]는 임존성이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출처|날짜=2018-06-27}} 결국 문무왕 4년([[664년]]) 2월에 [[각간]] [[김인문]], [[이찬 (신라 관직)|이찬]] [[천존]](天存)을 보내어 당의 칙사 [[유인원 (당나라)|유인원]](劉仁願)과 새로 웅진도독이 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웅진에서 동맹을 맺었다.<ref name="삼국사기-664">《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664)</ref> [[백제]] 부흥군은 문무왕 4년([[664년]]) 3월에 [[사비산성]](泗沘山城)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ref name="삼국사기-664"/> [[백제 부흥운동|백제 부흥]]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백제를 멸망시킨 문무왕이 처음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은 문무왕 4년([[664년]]) 가을 7월, 왕제 [[김인문]]과 [[김품일]],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 [[김군관]],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 [[김문영]] 등에게 [[일선주|일선]](一善)·[[한산주|한산]] 두 주의 군사를 이끌고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과 함께 돌사성(突沙城)을 쳐서 멸하면서부터였다.<ref name="삼국사기-664"/>
5년([[665년]]) 가을 8월에 왕은 당의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ref group="주">지금의 충남 공주시 연미산(鷰尾山)</ref>에서 모여 다시 맹약을 맺었다.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고 “서로의 경계를 넘어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맹약의 글은 유인궤가 지은 것으로 제물들은 취리산 제단의 북쪽에 묻고, 맹약문은 신라의 종묘에 보관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5">《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5년(665)</ref> 또한 그 회맹한 지점을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삼고 푯말을 세워 백제와 신라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71"/> 이는 전쟁이 끝난 뒤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에 귀속된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긴 당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처사였다. 같은 달, 왕자 정명(훗날의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5"/> 겨울에는 일선·[[거열주|거열]] 두 주의 백성들을 시켜 군수물자를 [[명주 (9주)|하서주]]로 운반하게 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ref name="삼국사기-665"/>
6년([[666년]]) 4월에는 대신 김천존의 아들인 [[나마 (관직)|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인 나마 [[김삼광|삼광]](三光)을 모두 당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6">《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6년(666)</ref> 12월에부터 당은 [[이세적|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현(安陸縣) 사람인 학처준(郝處俊)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는데,<ref name="삼국사기-666"/> 이때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들 사이에 형제 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마침내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남생]]이 아우 [[연남건|남건]]과 [[연남산|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의 성을 거느리고 당에 항복해버리면서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ref name="고구려-666">《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5년(666)</ref> 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정토]]가 24명의 부하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오자, 정토와 그의 부하들에게 옷과 양식, 집을 주어 서울 및 주·부에 안주시키고, 온전한 여덟 성에는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한다.<ref name="삼국사기-666"/>
7년([[667년]]) 7월에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고, 당에서는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발탁하고 대아찬 일원(日原)은 당의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임명되었는데, 문무왕은 지경과 개원에게 각각 파진찬과 [[대아찬]]의 관등을 주고,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명한다는 고종의 칙명은 왕궁 뜰에서 받도록 명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7년(667)</ref> 또한, 같은 달 고종은 유인원과 신라의 [[태종무열왕#가계|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성(卑列城)<ref group="주">지금의 [[강원도]] [[안변군]]</ref>의 길을 따라, 신라 병사를 징발해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 가을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9월에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이적(李勣)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ref name="삼국사기-667"/> 이때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한 단독 작전수행 대신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배를 계속 띄워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아직 평양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알고 먼저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먼저 고구려로 갈 길을 뚫기로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하지만 칠중성을 치기 전, 겨울 10월 2일에 평양성 북쪽 2백리 지점에 도착한 이적은 신라측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 강심(江深)에게 부쳐,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와서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신라군은 칠중성 공격을 포기하고 수곡성(水谷城)으로 향했지만,<ref name="삼국사기-671"/>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이적은 어느새 돌아가버렸고, 신라군도 그냥 돌아왔다.<ref name="삼국사기-667"/> 12월에 당은 다시 웅진도독부의 유진장군(留鎭將軍) 유인원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돕게 하면서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ref name="삼국사기-667"/>
8년([[668년]]) 2월 [[이세적|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연남건|남건]]이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애썼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ref name="고구려-668">《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ref> 3월에 신라는 북방의 요충지였던 비열홀(比列忽, 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8">《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ref> [[6월 12일]]에{{refn|group=주|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평양으로 간 것이 5월이라고 기록돼 있다.<ref name="삼국사기-671"/>}} 당의 우상(右相)<ref group="주">정확한 관직명은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이다.</ref>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68"/> 이에 유인궤는 약속을 마치고 신라의 선발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인 천강(泉岡)으로 향하고, 문무왕 역시 [[6월 21일]]에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ref name="삼국사기-668"/>
|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 || 대각간 김유신
| '''대당총관(大幢摠管)''' || 각간 김인문·김흠순·김천존·문충(文忠), 잡찬 진복(眞福), 파진찬 김지경(金智鏡), 대아찬 김양도(金良圖)·김개원(金愷元)·김흠돌(金欽突)
| '''경정총관(京停摠管)''' || 이찬 진순(陳純)<ref group="주">진춘(陳春)이라고도 한다.</ref>, 화랑 [[죽지]]
| '''귀당총관(貴幢摠管)''' || 이찬 김품일, 잡찬 문훈(文訓), 대아찬 천품(天品)
| '''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 || 이찬 김인태(金仁泰)
|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 || 잡찬 김군관(金軍官), 대아찬 박도유(朴都儒), 아찬 용장(龍長)
|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 ||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김문영(金文穎), 아찬 복세(福世)
| '''하서주행군총관(河西州行軍摠管)''' ||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
| '''서당총관(誓幢摠管)''' || 파진찬 의복(宜福), 아찬 천광(天光)
| '''계금당총관(罽衿幢摠管)''' || 아찬 일원(日原)·흥원(興元)
이때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된 대각간 김유신은 풍병(風病)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고,<ref name="김유신-하">《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 하</ref> 일찍이 백제를 치는데 선두로 나섰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지도부의 요직을 맡아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임명된 관직으로 추정한 진격루트는 한성주(한산주)와 비열주(비열홀주) 그리고 하서주(하슬라주) 세 곳으로, 수도 서라벌에서 조직된 군사들은 닷새 후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출처|날짜=2018-06-28}} [[6월 22일]]에 유인원이 신라의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고, 신라군 장수인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8"/> [[6월 27일]]에는 드디어 문무왕 자신이 서라벌을 출발했고, 이틀 뒤에는 여러 도의 총관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당군 총사령관 이적을 만난 신라의 김인문은 고구려의 평양 북쪽 20리 되는 지점인 영류산(嬰留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8"/>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군과 회합할 것을 명했다. 한편 비열성주행군총관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의 벌판에서<ref name="삼국사기-668"/> 고구려의 [[태대막리지]] 남건이 거느리고 온 군사와 충돌했는데, 함께 있던 당의 번병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와중에 김문영의 신라군은 앞으로 나서서 고구려군과 맞서 크게 이겼고, 신라군이 이기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당병은 겨우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한다.{{출처|날짜=2018-06-27}} 이 사천에서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은 훗날 문무왕에 의해 일길찬 관등과 조 1천 섬을 은상으로 받았고, 전사한 한산주소감(漢山州小監) 김상경(金相京)도 그와 준하는 상이 내려졌다. 다만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음에도,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 하여 포상에서는 제외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8"/>
- 장헌식 . . . . 63회 일치
'''장헌식'''(張憲植, [[1869년]] [[음력 9월 21일]] ~ [[1950년]] 양력 [[8월 20일]])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 관료를 지냈다. [[경기도]] [[용인시|용인]] 출신.<ref name="실록친일파">{{서적 인용
}}</ref>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 호는 취운(翠雲)이다. 일본식 창씨명은 기타 하리마(張間憲植)이다.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1903년까지 일본에 유학하며 [[게이오 의숙]]의 보통과와 고등과 과정, 도쿄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서 수학했으며, 일본 사법성과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의 사무견습, 대장성의 사무견습으로 재직했다. 귀국 후 궁내부 주사로 임용되어 학부에서 근무하다가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평안남도 참여관, [[1917년]]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으로 승진한 뒤 충청북도 도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총독부 관방실 계원, 1924년 전라남도 지사 등을 역임했다.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 보통과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 귀국과 관료 생활 ===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03년]] [[3월]] 학부의 훈령으로 귀국한 뒤로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4년]] [[8월]] 궁내부 어홍원 주사(宮內府御供院主事), [[10월]] [[궁내부]] 제실제도정리국 비서관(帝室制度整釐局祕書官)을 거쳐 [[1905년]] [[7월 13일]] [[일본]] 시찰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1905년]]에는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교장, [[1905년]] [[10월 18일]] 귀국과 동시에 6품으로 승륙하고, [[12월 20일]] 학부참서관 주임관 4등 7급(學部參書官敍奏任官四等七級)에 임명되고, [[12월 27일]]부터는관립외국어학교장(外國語學校長)을 겸직하였다. [[1906년]] [[10월 24일]] [[학부]] 편집국 사무임시대변(學部編輯局長事務臨時代辦), [[1907년]] [[3월]] 학부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거쳐 [[1907년]] [[5월]]부터는 관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장을 겸임하였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하였고, 1910년 12월 27일 종5위(從五位)로 승급한 뒤 1912년 8월 1일 일한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수여받았다. 1916년 3월 31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하였다. 이후 훈3등(勳三等), [[1917년]] [[6월 12일]]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고등관 2등(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승진한 뒤 도장관이 도지사로 관직 명칭이 바뀌자 그대로 [[충청북도지사]]로 유임되었다. [[1920년]] [[7월 31일]] 훈2등(勳二等)에 올라 서보장(瑞寳章)을 하사받고 [[1920년]] [[9월 27일]]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올랐다. [[1920년]] [[6월 24일]] 청주청년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1921년]] [[2월 12일]]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이 되고, 3월 10일 종4위(從四位)로 승급하였다. [[1921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 총독관방실(總督官房室) 행정관이 되었다. 1921년 3월 20일 칙임사무관(勅任事務官) 민정시찰관에 임명되어 4월 7일부터 6월 19일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를 민정시찰하였고, [[10월 16일]]부터 [[12월 27일]]까지는 민정시찰관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민정시찰을 다녀왔다. 이때 그는 관용 차량이 주어졌지만 거부하고 열차와 대중교통으로 시찰을 다녔다. [[1922년]] [[2월 15일]]에는 [[전라남도]]를 [[3월 5일]]부터는 [[전라북도]]를, [[7월]]에는 [[강원도]]를 시찰다닌 뒤 [[7월 22일]] 귀환하였다. [[9월 4일]]에는 [[황해도]] 수해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23년]] [[11월 25일]]에는 [[대성중학교]]에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금 40원을 기탁하였다. [[12월 27일]]에는 [[경성도서관]]에 도서구입비 1백 원을 기부하였다.
장헌식은 도 참여관, 도지사를 지낸 관료 가운데서도 [[1921년]] 총독부의 총독관방 근무 사무관(민정시찰 사무관)을 맡는 등 총독부와 특히 유착된 행보를 보였다. [[3·1 운동]] 후 신설된 이 직책은 독립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서적 인용
}}</ref> [[1921년]] [[2월]]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으로 전임되고,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서임었다. [[1921년]] [[3월 18일]] 총독부 총독 관방실에 발령되었다.
1926년 5월 1일 정4위(正四位)로 승급했지만 1926년 8월 14일 스스로 의원면관(依願免官)하였다. 바로 조선총독부 충주원 참의 칙임관대우(中樞院參議 勅任官待遇)에 선발되었다. 1926년 9월 13일 종3위(從三位)로 승급하고, 1928년 11월 16일 다시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27년 4월 6일에는 한식(寒食)일을 기념하여 사회단체에 5원을 기부하였다.
1927년부터 여성의 취직과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 설립이 추진되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928년]] [[1월 15일]] 조선여자직업사가 출범하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조선여자직업사 고문에 위촉되었다. 1928년 조선수산회(朝鮮水產會)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 [[6월 16일]] 조선임시교육심의위원회 창립에 참여하고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31년]] [[2월 14일]] [[경성부]]의 도시개발계획 자문위원회인 경성도시계획연구회 위원이 되고, 곧 도시계획연구회 간사에 피선되었다. [[1933년]] [[8월 14일]] 중추원 참의 임기만료가 되자 [[8월 15일]] [[칙임관]]대우인 중추원 칙임참의에 선임되었다.
[[1930년]]대 [[청주]]에 개교 예정인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의 건립과 개교에 관련하여 건립, 시설비용이 부족하여 개교가 지연되었다. 그는 학교 개교비용을 부담하고 자신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1935년 청주상고는 사립 학교로 개교가 확정되고, [[청주]]시민 대표 방인혁(龎寅赫), 민영은(閔泳殷) 등은 2월 20일 그를 찾아가 교장에 취임해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했다. [[1935년]] [[3월 1일]]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 교장에 취임하고 그해 [[5월 7일]] 개교식과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1935년 9월 27일 경성도시계획연구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장헌식은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7년에는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ref name="실록친일파" /> 37년 8월 21일에는 애국금차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8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1926년]]부터 [[1945년]] 광복 시점까지 19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으며, [[1945년]] [[5월]] [[이왕직]] 장관으로 관직에 복귀해 있었다. 광복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고, 11월 8일 구황실사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계속 재직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과 동시에 미군정 자문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다. 이왕직장관직은 11월 8일 사퇴하였다.
[[1946년]] [[1월 3일]] 이왕직 재산 관련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도 출국하지 못한 [[일본]]인 이왕직 회계과장 사이토 치로(齋藤治郎)와 함께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ref name="jigga">"전 李王職 장관인 張憲植 수감명령", 자유신문 1946년 01월 03일자, 2면 10단</ref> 그는 반성의 기미가 없었고, 과거 일본 정치하에서 있었지만 그래도 고관대작으로 있었는데 어찌하겠느냐고 대응하였다. 검찰관들은 분노했고 방청석을 분노하게 했다.<ref name="jigga"/> [[1월 16일]] [[보석금]]을 내고 보석출감하였다.<ref>"張憲植 보석출감", 자유신문 1946년 01월 16일자, 2면 5단</ref>
[[1946년]] [[3월 15일]] 공금횡령 및 공문서 위조 혐의로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은 뒤, 투옥됐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다시 미군정 자문관으로 복직하였다.
- 스틸오션/영국 . . . . 62회 일치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059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405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2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381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608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2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550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686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727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767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1×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914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850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6×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4,109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935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1×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2×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4,315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3,023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tablestyle="width:500px"> 2×4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2× ||
- 트로피코 4/칙령 . . . . 60회 일치
발표할 경우 국수주의자들이 "국제 구호 단체 직원들 때리기"라는 스포츠를 만들어 낸다. 관심 있는 사람은 엘 디아볼로에게 연락할 것.
* 교육 장관 필요
* 교육 장관 필요
* 교육 장관 필요
* 교육 장관 필요
* 교육 장관 필요
* 교육 장관, 대학 필요
* 외교부 장관 필요
미국을 찬양하며 양키 두들을 합창한다.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지만 소련과의 관계가 약간 나빠진다.
* 외교부 장관 필요
소련을 찬미하며 보드카를 대접해준다.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약간 나빠진다.
* 외교부 장관 필요
* 외교부 장관 필요
* 운영되는 공항, 외교부 장관 필요
워싱턴으로 무역 대표단을 파견한다. 2개월 후 랜덤으로 효과가 일어난다. 미국과의 관계가 좋을수록 좋은 효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 운영되는 공항, 외교부 장관 필요
모스크바로 무역 대표단을 파견한다. 2개월 후 랜덤으로 효과가 일어난다. 소련과의 관계가 좋을수록 좋은 효과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 미국과 최고의 관계, 외교부 장관 필요
주트로피코 미군기지를 유치하고 매년 $2,000의 임대료를 받아먹는다. 그러면서 소련의 침략도 막는다. 소련과의 관계와 국수주의자의 존경심이 하락한다.
* 소련과 최고의 관계, 외교부 장관 필요
- 흥친왕 . . . . 55회 일치
|대관식 =
|대관식2 =
|대관식3 =
|대관식4 =
[[1863년]] 음서로 사용이 되었으며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간 중 도승지, 참의, 직제학 등을 지내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퇴출당하고 고종의 친정 이후에도 이조와 형조,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한때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동생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대안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관직은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궁내부 대신, 육군 부장에 이르렀다.
[[1874년]] [[11월]] 이후 [[흥선대원군]]은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조선 고종|고종]]과 [[민비]]를 몰아내고 추대하려 했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냉대를 받았고 [[1899년]](광무 2)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된 뒤에도, 당시 황제의 친형이었음에도 4대 승습에 따른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융희 1)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1910년]](융희 4) [[8월]]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작]]으로 강등되어 이희 공이 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고 나중에 개명하여 이희(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첫 작위가 완흥군이었으므로 '''완흥군 이재면'''으로도 부른다.
==== 관직에 오르다 ====
철종 치세기간 중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아들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윤효정]]은 [[흥선군]]이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그의 과거 합격 청탁을 했다 한다. [[흥선군]]은 일부러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는데, [[김병기 (1818년)|김병기]]는 마음 속으로는 몰지각함과 비열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ref name="riss167">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167페이지</ref> 흥선군은 똑같이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등과 합격을 청탁하니,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 왕실의 금지옥엽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형편으로 아들의 등과를 청탁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ref name="riss167"/> 그런데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멸시하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남병철을 지목했다.
[[1863년]] 관직에 올랐고, 그 해 사용(司勇)이 되었다.<ref name="da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288a</ref> [[11월]]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선 철종|철종]]이 감제(柑製<ref>매년 감과 귤이 처음 열리는 날 직후에, 조선의 임금이 감귤 열리는 것을 기념하여 직접 주관하는 과거 시험이다.</ref>)를 친히 주관할 때 1등하여, 바로 [[과거 제도|과거]]에 직부전시(直赴殿試)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초기 ====
[[1863년]] [[12월]] 동생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후사없이 죽은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로 승후관부사용(承候官付司勇)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문과]]에 급제하여 그날로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었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그해 [[8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형 [[흥완군]]의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의 특명으로 다른 종친의 자제를 [[흥완군]]의 양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양자 입양은 취소되었다.
이후 고종 집권 초기에 삼사(三司)에서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과 언관직을 거친 뒤에 [[규장각]]시교, [[예문관]]검열, [[승정원]]주서 등을 지냈다.
그 뒤 당상관으로 승진 [[1865년]](고종 2년) [[1월]]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월 15일 철종의 빈전의 향관(享官)으로 추가 선출되었다. 이후 다시 [[승정원]]동부승지가 됐다가 [[4월]]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부제학]] 등을 거쳐 이후 [[성균관]][[대사성]]·[[승정원]][[도승지]]ㆍ이조참의ㆍ호조참의ㆍ예조참의, 부제학, 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1866년 도승지, [[1867년]]에는 직제학이 됐다가 그해 3월 가선대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하였고, 바로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동지경연사, 종정경에 제수되었고, 의정부 당상을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판서]], 금위대장,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873년]] 종정경(宗正卿)이 되었으나 [[1874년]] [[11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 의해 섭정직에서 강제 축출당한 뒤에도 그는 유유하고 고분고분한 성격 덕에 계속 관직에 남아 있을수 있었다. 동생이 국왕이었고 아버지는 섭정인데도 자신에게는 낮은 직위가 부여되었던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는 한때 [[명성황후]] 측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가인 민씨 척족에게 아부한 것 역시 관직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1878년]](고종 16년)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었고, 종정부, 춘추관, 의금부사를 겸임하였으며, [[1879년]] [[형조]][[판서]](刑曹判書),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시강원 좌빈객, 별입직(別入直)을 거쳐 종1품으로 특서되었다. 그해 숭정대부에 승진하여 행 병조판서가 되었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80년]] [[병조]]판서, 1881년 [[1월]] 금위대장,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이어 1월 말 판돈녕부사로 통리기무아문당상,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에 올라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해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81년]] [[4월]] [[시강원]] 우빈객(侍講院右賓客)이 되고 이후 [[금위대장]]과, 지훈련원사를 거쳐 같은 해 [[8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10월]] [[이재선]]의 옥사가 있자 상소를 올려 [[이재선]]의 적형임을 들어 스스로 죄를 청하였고, 곧 사직했다. 그 뒤 [[이재선의 옥사]] 관련자들에게 역적의 율로 다스려야 된다는 [[사헌부]]와 [[사간원]] 및 [[성균관]] 유생들의 비난을 받을 때 그는 역모 가담자의 가까운 친족이었음에도 특별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882년]] [[3월]]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행 예조판서가 되고, 호조판서를 겸하였다. 이어 훈련대장, [[선혜청]] 당상, 판삼군부사를 역임했다.
[[이재선]]과 이재면을 옹립하려던 추대기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흥선대원군]]은 장손인 [[이준용]]을 추대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준용]] 추대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이후 흥친왕과 고종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에 의해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개화파]]와도 인간 관계를 형성했던 그는 정변 내각의 [[의정부]][[좌찬성]](左贊成) 겸 좌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만에 진압되었고, 그도 좌찬성 겸 좌우참찬에서 해임되었다. 판종정경의 직위를 받았으나 [[갑신정변]] 당시 고위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민씨 일파의 공격을 받았으며, 정변 관련자들과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형이라는 이유로 불문율에 붙여진다. 그 후 흥친왕은 7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난에 가담하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제거되자, 그는 [[흥선대원군]]과 주한[[일본]]공사관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밀약에 의해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ref>제1차 김홍집 내각</ref>)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다.<ref name="daum1"/>
- 유승민(정치인) . . . . 54회 일치
|| '''본관''' ||<white><(> [[유(성씨)|강릉 유씨]][* 강릉 유씨 32세손 '承'자 항렬이며 아버지인 유수호는 31세손 '鎬'자 항렬이다. 참고로 같은 항렬에 가수 [[스티브 유]](한국 활동명 유'승'준)가 있다. 유명 연예인인 [[유재석]](30세손 '재(載)'자 항렬)은 그의 할아버지 뻘이 된다.] ||
공정거래위원장 자문관
1958년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삼덕동)에서 아버지 [[유수호(정치인)|유수호]]와 어머니 강옥성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삼덕초등학교, [[대륜중학교]][* [[유시민]]이 나온 중학교다. 즉 유승민이 유시민의 중학교 2년 선배. 심지어 대학도 서울대 경제학과로 과까지 같은 직속 선후배다. 얼핏 학연과 지연(대구)으로 얽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론 무관하고 정치인생이 정반대. 또한 유시민의 유는 柳라 혈연은 확실히 없다.],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17년 대선 1차 토론회가 열리는 SBS 프리즘타워 앞에서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언론노조 조합원과 마주쳤는데, 간단한 인사만 하고 입장하는 몇몇 후보와는 달리 '''언론사 지배구조 개선에 관심이 많다'''며 사뭇 진지하게 대화하는 유승민이 포착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아래의 동영상에서 마이크를 든 연사 역시 2012년 유승민의 언론사 파업 지지를 언급하며 꼭 부탁드린다고 연설 중이다,
== 국방정책 관련 행적 ==
유승민은 [[경제학]] 박사 출신의 경제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제18~19대 국회에서 8년 연속으로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고, 특히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방위원장으로도 재직했다. 당시 경선 상대였던 황진하 의원(육군 중장출신)과 맞붙을 당시 '''"병장이 장군을 이겼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국방위원회]]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위원회 같지만, 19대 국회에서 국방위원회 활동을 했던 김광진 의원에 따르면, 첫 번째로 지역구 예산을 챙겨주기 어려우며, 두 번째로 완전하지 못한 민군통제원칙에 인한 제약, 마지막으로 피감기관이 적고 언론 노출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비인기 위원회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후반기에는 국회 정보위원도 겸임하였고 외교통상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경제학자 출신답게 2013년에는 새누리당 사회적경제특위 위원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특히나 한나라당의 토론 에이스이자 저격수였던 유승민이 국방위로 자리를 옮기자, 그야말로 국방부와 군 장성들을 압도하는(...) 논리와 날카로운 질의로 화제를 모았다. 예를들어 2009년 1월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제2롯데월드 관련하여 공군참모총장 본인의 주장을 본인의 발언으로 반박하게 만들어버리기까지 했다.
> 이계훈 공참총장 : 활주로 3도 조정과 항행안전시설, 안전관련 장비를 보강하는 조건을 충족했을 때...
경제, 국방, 외교통상의 삼박자를 고루 거친 탓에 각 분야에서 웬만한 전문가급 식견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그 때문인지 국방정책 관련으로도 주목할 만한 주장을 간간이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모 신문사에서 매년 평가하는 '국감 스코어보드'에서 유승민 의원은 항상 최상위권에 등재되어 유승민 의원의 국방관련 식견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 ▲ 군 비행장 용도변경 관련 질의. ||
국방위원장을 지낸 후 국회 운영위원장으로 옮기기 전 잠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청와대 얼라들' 발언으로 외교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을 질타하였다. 또한 "'왜 사드를 배치하는데 [[중국]]이 난리냐"'며 사드의 국내도입에대해 강경한 찬성 입장을 보였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한미 전작권 재협상을 대선공약 파기라고 인정하며 "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친박]] 세력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약 9개월 남짓한 외교통일위원회 활동이였지만 유승민 의원은 NGO 국감모니터단 선정 우수국감의원, 그리고 경실련에서 선정한 외통위 국감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101012503606329|유승민 의원 질의에 외교장관, 통일장관 진땀]]
국회 내 대표적인 [[THAAD]] 도입론자이며, "국내 예산으로 [[THAAD]]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서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에 따르면, 2013년부터 [[THAAD]]도입을 주장했는데 정작 그땐 [[친박]]계에서 반대했다고(...) [[http://defense.na.go.kr/servlet/Download?committeeId=2005110000006&boardId=2006011000274&recordId=2014010040549&fileId=01|2014년 1월에 실시한 북핵방어관련 세미나 자료 - 유승민 국회 국방위원장]] 유승민 당시 국방위원장은, 북핵대응 강화를 위해 기존의 종말단계 하층방어에서 중 고고도를 포함한 다층방어 체계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2017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북핵(미사일) 방어능력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우며, 현재 저고도 방공을 담당하는 대한민국의 PAC-2는 독일에서 중고로 들여온 1980년대 연식에 원래는 전투기 요격용(...)으로 개발된 체계이기때문에 효용성이 낮다.
|| ▲ 그 유명한 '''[[문재인]] vs 유승민''' 사건. --공군참모총장의 벙찐 표정이 포인트-- 여기 나오는 [[정경두|공군참모총장]]은 지금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다. ||
보수진영의 대표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는 본인이 진행하는 시사프로그램 <이것이 정치다> 1월 5일자에 유승민 의원을 초청해 대화를 나눴다. 당시 유승민 의원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관련하여 미사일 발사 종류와 사거리, 사격고도 및 발사각도, 그리고 미사일 발사기지 위치 등의 자료를 만들어와 전원책 변호사 앞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사드배치 관련 타당성 주장을 하였는데, 전원책 변호사는 "이건 정말 정확한 자료이다", "공부를 많이 하셨다", "유승민 의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등으로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 ▲ 유승민 의원실 집무실에 있는 군사장비 모형들.[* 잘 보면 시중에서 파는 [[프라모델]]이 아니라, 해군이 증여한 것으로 보인다.] || ▲ '''KFX 사업'''관련 공군본부 [[국정감사]]를 준비 중인 유승민 의원. 빼곡하게 공부한 흔적이 보인다. ||
[[대한민국 해군|해군]]력 강화에 대체로 호의적이며, 2012년 예산안에 해군력 강화를 위한 방사청 연구 용역 발주를 주도했다.[* 이 연구에서 3개 기동전단 체제의 기동함대 건설안이 제시되었다.] 해군의 KDX-3[[이지스함]] 3척 추가 건조가 결정되기도 전에, 국방위 재량으로 관련사업 연구를 위한 착수금 명목의 예산을 배정한 적도 있었을 정도. 또한 그 이후에도 최윤희 당시 합참의장에게도 꾸준히 이지스함 조기전력화 관련 소요를 제기하였다. [[http://the300.mt.co.kr/newsView.html?no=2015070116257628062|방사청, 이지스함 의지 없나? - 유승민 의원]]
반면 [[대한민국 공군|공군]]력 건설, 특히 [[KFX]]나 [[L-SAM]]을 비롯한 국산 무기개발 사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 [[미국]]의 KFX 관련 주요 기술의 이전 문제가 논란이 된 상황에서도 정부가 자체 개발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방사청과 청와대 참모진이 대통령을 속이고 있다"며 여권 소속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KFX F-35 도입으로 전환, THAAD, [[미국]] 주도 MD 참여 등에 호의적인 견해도 나타냈다. 때문에 국산 개발을 통한 자주국방력 강화를 선호하는 이상주의적 [[밀덕]] 사이에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산 무기의 여러 결함 때문에 검증된 미국산 무기를 선호하는 현실주의적 [[밀덕]]들에게는 오히려 호평을 받고 있다.[* KFX의 경우, 실패하면 그대로 [[대한민국 공군]] 미래전력을 다 말아먹는 결과가 된다. 때문에 차라리 개발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 접고 검증된 미국제 전투기 도입을 찬성하는 주장이 [[밀덕]]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많다.]
|| ▲ 2010년 [[김관진(군인)|김관진]] 국방장관 후보 청문회 당시 영상 ||
이러한 국방과 안보관련 행적 이외에도 군 의문사 미제사건 해결과 군 전사자 유족 위로 등 내적인 분야로도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일을 추진했다. 국방위 간사시절 군 의문사특위 활동을 연장시키기도 했으며 국방위원장시절 군 의문사 유족 간담회, 관련 법안 제출을 여,야당 가리지 않고 함께 실시했다. 또한 12.12반란 사태 당시 순직한 고 김오랑 중령의 명예회복도 추진했는데, 17대와 18대 국회에서 잠자고 있던 명예회복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보국훈장 추서와 동상 건립이 이루어졌다. 훗날 대선에 나가면서 '''아예 대선공약으로 군 의문사문제 해결을 내걸기도 했다.'''
- 표창원 . . . . 54회 일치
||<:>'''가족'''||<(>2남 중 [[차남]][* 그의 친형은 표창해 [[응급의학과]] [[전문의]]다. 표창원이 그의 부인을 만나서 [[결혼]]하게 된 계기도 친형과 관계가 있는데, 형수가 자신의 지인이었던 현재의 부인을 소개해 줘서 연애를 하여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
|| '''약력''' ||<(> [[대한민국 경찰청|경찰청]] 제도개선기획단 연구관[br][[경찰대학]] 행정학과 교수[br]한국경찰발전연구회장[br]아시아경찰학회장[br]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장[br]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 ||
[[대한민국]]의 [[형사]] 출신[* 1989년 임용.] 경찰학자[* 프로파일러, 범죄심리학자로 흔히 알려져있으나 일선에서 범죄심리분석관으로 근무한 적은 없다. 주 전공은 사회학이고 그걸로 학위를 받은 [[경찰학]] [[박사]]이다. 실제 일선에서 근무했던 범죄심리분석관들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범죄학자이지 프로파일러는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의 주 전공은 경찰학이다. "Doctor of Philosophy in Police Studies in the Faculty of Social Studies" [[RISS]]에서 검색하는 내용을 봐도 경찰학 전문가가 맞으며 표창원이 낸 교양책을 봐도 경찰학 중심이다.], 정치인.
당선된 이후에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방송에도[* 국회의원이 되서 그런지 예전처럼 크라임씬같은 일반 예능에는 자주 나오지 못하고 시사가 섞인 시사 예능(썰전,강적들등)이나 뉴스 위주로 출연하는 중이다.] 얼굴을 자주 비추며 범죄 사건이나 경찰 검찰에 관련된 사건에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있다. 아무래도 현재 경찰 출신 국회의원중에서는 가장 인지도가 있어서 그런지 그쪽 관련 내용이 있을때 자주 부르는 편이다. 검사나 변호사, 판사등 법조인 출신은 많은데 형사나 경찰 출신은 그보다 훨씬 적어서...
이때 표창원 옆에서 바라본 당시 대한민국 경찰 수사라는 것은 엉망진창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치밀한 범인의 완전범죄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범인이 피고 버린 담배부터 해서 증거가 차고 넘쳤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의 과학수사 수준이 영...(..)] 결국 사건이 미제로 남게되자 패배감을 느꼈고, 당시 대한민국에는 전문적으로 학문을 배울때가 마땅치 않아 유학을 선택했다. 이후 1993년 국비장학생으로 [[영국]] 엑서터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서 경찰학을 수학해 1997년까지 사회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땄다. 범죄학이 아니다! 애초 엑서터 대학에는 경찰 및 범죄관련 석박사 과정이 없고 학사만 있다.[* 2015년 기준 [[http://www.exeter.ac.uk/undergraduate/degrees/sociology/criminologybsc/|학부과정]]은 개설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박사과정은 여전히 사회학만 [[http://www.exeter.ac.uk/postgraduate/research-degrees/sociology/mphil-phd_sociology/|개설되어 있다.]]] 다만 박사의 학위논문의 주제는 확실히 경찰과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박사과정에 대한 오해를 하는데, 사실 영국에서는 박사 과정은 특정 주제를 공부한다고 학위를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와 연구방법론에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교수와 학교를 찾아 연구계획서를 제출하여 몇 단계의 심사를 거쳐 학위를 최종 승인받는다. 수년간의 연구(보통 5년 가량) 끝에 분야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면 소속 대학의 기준에 따라 학위를 수여한다.[* 예를 들어 디자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디자인 관련 책을 많이 보면 학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에 대한 현재까지 성취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제까지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 기록한 뒤 평가를 통해 학위를 수여받는 것이다.]
박사학위청구논문의[* 'The police and crimewatch UK : a study of the police use of crime reconstruction and witness appeal programmes in Britain'] 주제만 놓고 보면 봤을 때, 표창원의 원래 전공분야는 미디어 매체[* [[http://www.bbc.co.uk/programmes/b006ppmq|Crimewatch UK]]는 우리나라의 [[경찰청 사람들]], [[공개수배 사건25시]]와 비슷한 TV 프로그램이다.]와 경찰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학위청구논문 이후의 연구 성과에 따라서 전공분야가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표창원 박사의 경우 형사사법분야의 전반에 걸쳐서 연구를 하는 편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찰에서는 [[경찰대학]] 졸업생 중 유학한 경찰들을 통해서 내부역량을 높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유학을 갔다온 경찰대 졸업생들의 논문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대개 집회시위법, 행정법, 형사절차 or 형사법에 관한 논문이 많다. 물론 표창원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세간에는 범죄심리학(criminal psychology)이나 프로파일링(Profiling) 전문가로 유명하지만 그가 이 분야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증거는 없고 이에 관한 전문적 연구 또한 미미하다.[* 여담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범죄심리학(Forensic psychology) 박사학위자는 [[숙명여자대학교]] 사회심리학과에 재직중인 [[박지선(교수)|박지선]] 교수가 있다.]
아무튼 유학길을 마치고 돌아와 1998년 경찰청 제도개선기획단 연구담당관, 경찰대학 교관 등을 지내고 1999년 퇴직했다.
경찰관 퇴직 범죄심리분석 자문위원으로 활동[* 일선 "범죄심리분석관"은 아니고 경찰관 시절에는 수사관으로, 교수 시절에는 범죄심리분석 지원을 위하여 파견된 형식으로 활동한 것이다.]하면서 본격적으로 [[강호순]] 사건, [[발바리]] 사건 등 많은 유명 주요 범죄사건 해결에 기여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4년 [[무한도전]] [[무도탐정사무소]]에 출연하여 멤버들에게 프로파일링을 짧게 강의하였으며, [[유재석]]을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이는 등 중년의 폭풍간지를 보여주었다. 다른 멤버들은 '드디어 유재석도 혼나는구나' 하고 좋아 죽는 중이었다고.
방송 쪽으로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범죄 관련 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하여 유명해졌고, 케이블 채널의 <살인자는 말한다>등의 자기 이름을 걸고 나오는 프로를 진행한 적도 있다. 2012년 경찰대학 정교수 퇴직 이후에는[* 개인 [[블로그]] 및 [[트위터]]를 통해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의혹]]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과정에서 돌연 "경찰대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경찰대학 교수직을 사퇴했다.] [[JTBC]] [[표창원의 시사 돌직구]]라는 프로그램에 MC로 발탁돼 방송인을 겸했으며, 범죄심리분석 전문가로서의 행보는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면서 본 문서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했던것 처럼, "저명성에 걸맞는 전문성을 갖추고 있냐."는 지적들이 나왔지만, 어쨌거나 [[대한민국]]에 프로파일 기법이나 범죄자에 대한 복합적 연구를 처음으로 대중화한 점에서 공로가 있다는 것은 인정 받고 있다.
일부에선 '흉악범죄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가. 사회에게 있는가'에 대한 시각차이로 이전부터 논쟁의 중점에 있던 인물이란 말이 있는데 논쟁의 중점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는데, 모든 형법이론들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든 형법학자들은 전부 저것을 기반으로 이론을 전개한다. 범죄론부터 시작해서 세세하게는 행위론, 구성요건론에서 위법성론, 책임론까지 모두 구이론인 객관주의와 신이론인 주관주의를 따라 견해가 나뉘며, 현대 형법은 이 둘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있는 형법 저서 하나 없는 사람이 저 논쟁의 중점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학계의 관점에서 논쟁의 중점에 있다고 할 수는 없고, 단지 그러한 논쟁을 '''일반 대중에게 던져준 사람'''으로서 논쟁의 중점에 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러한 표현이 들어맞을 것이다. 실은 국내에서는 어떤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이유를 "그 범죄자 개인의 인성보다 자라온 환경, 못 가지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냉혹한 사회 탓이 적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튀는 것이다.
정계 입문 이후 여러 [[종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민주당 변호인을 활약했다. 특히 2015년 12월 30일 '[[문재인]] 대표가 [[일본]]이 숨긴 금괴 1,000톤을 갖고 있다'는 루머를 맹신했던 어느 60대 남성이 문 대표의 [[사상구]] 사무실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두고 [[MBN]]의 [[김형오(1972)|김형오]] 앵커가 '문재인 대표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니냐'며 [[답정너]]식으로 질문을 하자 "그럼 2006년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 피습을 당한 건 (그 피습범이 정신병자였기 때문이지) 박근혜 당시 대표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가요?"라는 반문~~이건 몰랐지?~~으로 앵커를 [[역관광]]시켜--사실 [[마마무|음오아예]]를 부르게 한 거라더라-- [[더불어민주당|더민주]] 지지층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http://tvcast.naver.com/v/676104|네이버]] [[http://tvpot.daum.net/v/73446472|다음]] [[http://www.gomtv.com/view.gom?contentsid=14150137|곰TV]])[* 보도 자막이 포함된 인터뷰 전체 영상은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114977|MBN 홈페이지]]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7&aid=0000871698|네이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51231111239813|다음]], [[http://news.nate.com/view/20151230n53189|네이트]] 등에 올라와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대중적인 범죄학자 표창원을 1호 인재로 영입하면서 많은 관심을 모았는데, 영입 초반에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1807908|#'''오세훈 전 시장'''과 대결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때 본인은 이에 대해 '''"[[오세훈]] 전 시장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과 붙으라고 해도 하겠다"'''며 당락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였으며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1807908|#]] [[국민의당|안철수 신당]]과의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세훈 전 시장은 서울 [[종로구]]로, 표 교수는 밑에 서술되어 있듯 경기도 [[용인시 정]] 선거구에 출마하게 되면서 둘의 대결은 없던 일이 됐다.
20대 국회에서 국회 상임위 중 안전행정위원회 소속으로 배정을 받았다. 안전행정위원회의 소관에는 경찰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경찰 및 경찰대 교수 출신이었던 표창원 의원의 활약이 크게 기대를 받는 분위기다.
2016년 12월 27에 검/경 수사권과 관련해서 형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발의 내용을 보면 '''검찰의 수사지휘권, 수사종결권, 경찰비리를 제외한 직접수사권을 박탈하고 검찰의 영장청구권만은 유지'''하도록 했다. 다만 아직 발의 단계이고 거쳐야 할 절차가 많으며 해당 법안은 '''누가 봐도 경찰에게만 매우 유리한 법안 내용'''이기 때문에 법안 내용이 수정되지 않는 이상 해당 법안의 통과는 본 회의는 커녕 법사위 통과도 불투명한 상황으로 보인다. 이 같은 법안을 발의했다고 표창원 의원이 SNS에 글을 게시했을 때 일선 경찰들과 지지자들은 옹호하는 댓글을 남겼지만 해당 법안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혹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댓글을 남긴 시민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검찰개혁을 주제로 하여 김경진 의원과 같이 썰전에 출연했을 때 표창원의원이 말하길 "많은 일반 시민들이 저에게 '경찰에 수사권을 줘선 안된다'라며 '경찰개혁부터 하고난 뒤에 수사권 조정이 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문자를 많이 보내줬다"라고 말했다.] [[외부자들]]에 목소리 출연을 했을 때 패널이 표 의원에게 해당 법안 통과 가능성에 물어봤을 때 표 의원은 통과하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했다. 설령 통과하지 못 하더라도 "자신의 법안이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의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라고도 말했다. 2017년 9월 현재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었다.
다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수사의 90%이상은 경찰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기준으로 검사 한 명 당 하루에 11.4건의 사건을 배당받고 있는데, '''잔업해서 12시간 근무를 해도 거의 한시간에 사건 하나를 해결해야 한다(...)''' 사실상 수사의 주체는 경찰이고 경찰이 수사한 그 내용을 바탕으로 검사가 영장 집행시에만 지휘하는게 일반적이다. 즉 사실 이미 경찰이 수사 개시해서[* 경찰의 수사개시권은 2011년 때 법안 개정을 통해 이미 법률적으로 명문화되어 있다.], 증거를 모아서, 용의자를 잡아서, 검사한테 주면 검사가 이를 확인한 뒤 "OK" 외치고 끝나는 상황인데, 이것을 검사가 수사지휘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즉 경찰에게 유리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수사/기소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경찰은 수사에, 검사는 기소와 공소유지에 전념하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수사지휘권이 없어도 검찰의 기소권만으로도 얼마든지 보완수사를 요청하거나 경찰의 수사권을 통제할 수 있다고도 일선 경찰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장 청구권이 없으면 수사에 애로사항이 많다는 점에서[* 강제수사의 핵심은 영장이다. [[영장주의]]참조.] 검사의 권한은 해당 개정안에서도 여전히 막강하다.[* 실제로 표 의원보좌관의 SNS를 보면 해당 개정 내용을 접한 일선 경찰들이 표 의원의 보좌관(보좌관도 경찰출신이다.)에게 연락해서 "영장청구권를 왜 검찰에 남겼냐."라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8년에 있을 제7회 지방선거 때 같이 치뤄질 개헌 안을 살펴보면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폐지에 대해 동의하는 의원들이 있으므로 경찰에게도 영장청구권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개헌이 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경찰도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검사에게 영장을 청구할 시 검사는 법리적인 내용만 검토하게 하거나 혹은 변호사 자격을 가진 경찰을 특별검사와 같은 지위를 부여해 이들에게 영장청구권을 허용하게끔 하는 방안, 검사에 의해 영장이 반려되었을 때 법원에 항고를 할 수 있는 항고권 부여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표창원 의원의 경우 발의한 법안과의 균형을 고려해 경찰의 항고권 보유에 찬성하고 있다. 이에 관해 2018년 6월 21일 KBS 라디오에 전화로 출연해 다시 한 번 본인의 주장을 내세웠다. 현재는 경할은 수사는 하지만 종결권이 없다. 이는 한 번 한 수사 결과를 검찰이 받아서 다시 검토하는 두 번 일이 되므로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피해자/피의자가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수사권을 가지고 종결까지 할수 있게 될 경우에는 이를 해소할수 있으며, 문제가 없으면 바로 기소하면 되고 문제가 있으면 검찰이 재수사나 보완을 지시할수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경찰 내에서 종결권이 있다면, 경찰이 껄끄러운 사건을 묻어버리면 어쩌냐" 하는 반론이 있는데, 이에 대해 표 의원은 "검찰에서 묻어버리면 이미 대민 창구인 경찰의 손을 떠난 후라 사람들이 알수 없지만, 경찰에서 그러면 사건 관련된 사람들이 언론과 온라인으로 문제 제기를 하게 되고, 수사 지휘권이 있는 검찰도 알게 되므로 경찰이 사건을 묻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였다.
2018년 6월 22일, [[조국]] 민정수석에 의해 검경 수사권 합의안이 발표되었다. 표 의원이 주장한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고, 검찰은 금융 비리, 정재계 사건 특검 등 일부만 직접 맡고 다른 것은 모두 경찰에 맡긴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 업무 중에서도 중하지 않은 사건, 즉 민생 관련 건은 자치경찰로 넘기게 되며, 이를 위해 현재 제주도에만 있는 자치경찰을 서울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실시하고, 차후 확대한다고 한다.
*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범죄심리학은 경찰학(Police science)의 한 분파가 아니다. 정확히는 심리학에서 출발한 심리학의 응용분과이다. 물론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ity)가 학계의 추세이지만 경찰학과 범죄심리학은 엄연히 다른 분야다. 오히려 경찰학은 예방과 인권보호를 중심으로 하기에 형사절차(Criminal procedure), 범죄학(Criminology)과 관계가 깊다. 따라서 법학, 사회학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한편 범죄심리학은 법정공방이나 피의자 및 피해자 증언. 그리고 데이터 베이스 구축을 통한 귀납적 추리를 하는 프로파일링과 연관되며 이들은 모두 인지심리학, 사회심리학 등 심리학을 기반으로 응용된 분과이다. 물론 이런 분류를 할 수도 있겠지만, 범죄학이라 하여서 심리학 부분이 없는 게 아니다! 즉, 범죄를 다루는 모든 분야가 범죄학 범주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형법의 형벌론이라든가, 사회학의 일탈 이론이라든가, 심리학의 인지, 학습 분야라든가... 다만 현재 범죄학 중심이론들이 사회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학을 사회학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다.
* 야당 측 정치인 중에서 특이하게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22197|#]][[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0104502&viewType=pc|#]][[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6566.html|#]] 정치인이 아니던 시절에 중립적인 스탠스를 보이려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정희가 다 잘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은 경제성장이며 독재하고 인권을 탄압한 것은 죄라며 선을 그었다. 굳이 말하자면 공과를 모두 인정하며, 그 중에서 공이 더 크다고 보는 정도일 듯.
* [[국가정보원]]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적도 있다. 2013년 1월에 [[경향신문]]에 올린 한 칼럼에서 표창원은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잃어버렸고 무능하고 무력하다고 지적하면서 국정원이 위기라고 썼는데, 이 내용이 국정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 --4년 뒤의 실상을 보면 팩트폭행이었다-- 이 건은 1년이 지나서 '''무혐의가 명백하기 때문에''' 각하되었다. 애초에 판례 상 국가기관은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헌법에 나와있는 내용인데?!~~[* 해당 판례가 밝히는 정의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관은 당연히 국민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며, 비판으로 인해 더 나은 발전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를 욕한다고 [[고소미]]를 먹진 않으니까-- ~~하지만 [[대한민국 제1공화국|옛]][[대한민국 제4공화국|날]][[대한민국 제5공화국|에]]는 [[코렁탕|어떻게]] 했더라?~~]
- 정인숙 (1945년) . . . . 50회 일치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살해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cnbnews.com/category/read_org.html?bcode=72829&mcode= 믿을 수 있는 인터넷 언론 CNBNEWS<!-- 봇이 붙인 제목 -->]</ref><ref name=autogenerated3>[http://media.daum.net/digital/it/view.html?cateid=1077&newsid=20070314114210288&p=hankooki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정인숙은 현장에서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정인숙은 대구 S여중에 진학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가정형편이 넉넉했다. 그러나 S여중 3학년에 올라갔을 때 [[4·19 혁명]]이 발생했고,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아버지 정도환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아버지 정도환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대구 남산동 집을 팔고 삼덕동으로 이사하는 등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정인숙의 성격도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정인숙은 장사공과의 동거 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비밀요정을 경영하던 마담 김씨를 만난다. 그리고 김마담의 소개로 패션모델로 몇 차례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인숙은 김마담이 경영하는 서울 한남동 고급 요정에 접대부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접대부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뒤 유명한 요정 선운각으로 옮겼다. 타고난 미모와 영어실력으로 얼마 뒤 선운각의 인기 있는 1급 접대부가 되었다.
고급 요정에 종사하며 큰 돈을 거머쥐면서 씀씀이도 늘어났는데, 선운각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대한민국 정치계 인물인 모 씨다. 모씨와 계속 만나다가 그를 통해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도 만나게 됐다. 그때부터 그녀는 저명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다. 그 뒤 또다른 정부 고위 인사 모씨를 만났고, 그와는 관계는 석 달 남짓 계속된다. 그러다가 당시 그녀의 미모를 접한 정부의 각료 모 씨가 정부인사 모 씨와 한달간 그녀를 서로 차지하려고 갈등하였고, 그 뒤 정인숙은 선운각을 그만두고 비밀요정으로 옮긴다.
미스 코리아나 영화배우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요정에서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선운각, 옥류장 등 서울의 일류 요정들은 정인숙을 데려가기 위해 앞을 다투었다고 한다.<ref name="han01"/> [[선운각]] 등 최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고위층 인사와 교분을 쌓았다. 이때부터 정인숙은 저명인사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인숙은 비밀요정을 주 무대로 정부의 A급 고관대작들만 상대했다고 한다. 평소 그는 주위에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 없다”며 자신이 정치권 고위인사와 ‘깊은 관계’라고 털어놓기도 했다.<ref name="ilsa01"/> 이같은 그의 명성 때문에 ‘정인숙 피살 사건’은 제3공화국 최대 ‘섹스 스캔들’로 비화됐다.<ref name="ilsa01"/>
이렇게 밤이면 이름 있는 사람들과 접하고 낮과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주로 필동 변두리의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고, 바로 위 오빠인 [[정종욱]]은 근처에 살며 자주 왕래하였다. 이곳에 살 때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가끔씩 아버지 정도환이 방문하였으나 딸의 집에 자주 출입하던 정계 인물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정도환은 주로 집을 비우거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한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몇 번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목격되어 입담으로 전해지게 된다. 정관계 최고의 인사들과 어울리다 서너 번의 임신중절 수술을 받게 된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과도 술자리를 가졌다.
[[1980년]]대에 국회의원을 지낸 모 인사는 "정인숙을 편력한 이들은 박정희, [[박종규]], [[정일권]] 씨 등이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ref>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1992) 191</ref> 그 밖에 [[이후락]] 등과도 관계를 갖기도 했다.
=== 정일권과의 관계 ===
신원조회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비서<ref name="hp104"/> 실장인 [[문학림]]이 맡았고, 고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회수여권은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하였다.<ref name="hp105">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5페이지</ref> 여권 발급 날짜는 [[1968년]] [[12월 30일]]이고, 이후 정인숙은 [[1969년]] [[3월]]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0월]]에는 [[워싱턴 D.C.]]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ref name="hp105"/>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살해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cnbnews.com/category/read_org.html?bcode=72829&mcode= 믿을 수 있는 인터넷 언론 CNBNEWS<!-- 봇이 붙인 제목 -->]</ref><ref name=autogenerated3>[http://media.daum.net/digital/it/view.html?cateid=1077&newsid=20070314114210288&p=hankooki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정인숙은 현장에서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1주일 후에 나온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범인은 오빠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종욱은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정인숙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으나, 정인숙이 말을 믿지 않고 자신에게 심한 폭언을 가하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누이동생을 암살하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것이다.<ref>1970년 3월~: 여영무, 〈추적 정인숙 미스테리〉《신동아》(1983.9.) 166~167쪽</ref>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였다. [[정인숙 살해 사건]] 이후 의혹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관련자를 색출하였으나, 정일권 총리의 해임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다.
정종욱에 대해선 '권세가들에게 희생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떠돌았다.<ref>윤재걸, 《청와대 밀명: 윤재걸 르포집》(한겨레, 1987년) 14쪽.</ref> 한편 정계의 유력자가 은폐하려 했다는 설과 정적관계에 있던 자의 소행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2010년]] [[3월 20일]] SBS TV '그것이 알고싶다'는 20일 오후 11시10분 '나는 여동생을 쏘지 않았다 - 정인숙 피살 사건 미스터리'라는 주제로 오래전 정인숙 사건의 실체를 다시 추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http://sstv.tvreport.co.kr/index.html?page=news/flypage&cid=15&nid=78947 정인숙·정일권 누구?…40년 전 미궁의 살인사건, 경과부터 의혹까지] SSTV 2010-03-21</ref>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정인숙의 자택에서 발견된 포켓용 수첩과 장부에 적힌 이름과 일시, 장소, 명단 때문에 희대의 정치스캔들은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 경찰과 검찰 직원의 부주의로 언론에 드러난 정인숙의 수첩에는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장관, 차관급 인사들, [[대한민국 국군]] 장성, 5대 재벌그룹 회장,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 27명을 포함한 권력 실세들 수십여 명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ref>[[이제는 말할 수 있다]]'땅에 묻은 스캔들-정인숙 피살사건' 2000년 10월 8일 26회</ref>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br>
당시 한 청와대 인사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어디서인지 변조된 가사 전문을 입수, 박 전 대통령에게 따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박 전 대통령은 “내 아내한테까지 오해를 받고 재떨이까지 날아왔지만 참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씨는 ‘피살된 정인숙이 박 전 대통령의 여자였다’는 시중의 소문을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고 한다.<ref name="ilsa01"/> 이 때문에 [[나훈아]]의 노래 [[눈물의 씨앗]]은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은 물론 평소 거느리는 주변 사람들의 여자문제에도 관대한 편이었다. 심지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원을 시켜 정적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등의 사생활을 캐서 보고서로 제출하자 화를 내며 찢어버렸다. 그러나 자신과도 술자리 또는 잠자리를 같이 한 정인숙이 정일권과 관계를 맺어 자식까지 두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직후 “정 전 총리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위의 건의에 “남자가 여자 만나는 것은 예사”라며 사건을 무마했다는 후문이다.<ref name="ilsa01">[http://www.ilyosisa.co.kr/bbs/zboard.php?id=society&page=3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8 <nowiki>[</nowiki>제584호<nowiki>]</nowiki>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일요시사 2007년 03월 20일자</ref> 그러나 [[신민당]]의 정치 공세는 계속되었다. 정일권은 박정희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고, 바로 해임을 시키면 세간의 루머만 커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정일권을 불러 자진 사퇴를 권고한 뒤, 정종욱이 구속된 이후 잠잠해질 무렵 정일권을 해임하고 바로 미국으로 내보냈다. 정인숙 문제로 박정희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한 정일권은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사건의 파장은 국회에까지 올라갔다. 겉으로는 범인을 잡아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의 파장은 국회에까지 이르렀다. [[1970년]] [[5월]] 열린 임시국회는 정인숙 사건과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정부 발언을 통해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ref name="kim99">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99페이지</ref> 그 첫 출발은 [[법무장관]]이던 [[이호]]가 정인숙 사건을 자진해서 보고한 국정보고에서 시작되었다.<ref name="kim99"/>
70년 [[5월 12일]] 열린 첫 본회의에서 법무장관 이호는 정인숙 사건을 자세하고 비중 있게 취급해 보고를 했다. 국회 속기록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정인숙 관련 기록이 4쪽인 것에 비해 와우아파트와 관련된 기록은 3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호 장관이 이렇게 자세하게 정인숙 사건을 국회 본회의장에서 다룬 것은, 정인숙 사건을 자신의 발언 선에서 마무리 짓자는 일종의 호소였다.<ref name="kim99"/> 정인숙 사건을 야당이 더 이상 키우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유진산 당수를 시작으로 [[조윤형]], [[김상현]] 등의 야당 의원들은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소문을 전달하고 그 의혹을 추궁했다. 조윤형 의원은 [[5월 15일]]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본회의장에서 공개했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수사에서 불거진 의혹을 밝히라고 요구했다.<ref name="kim100">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0페이지</ref> 조 의원은 이어 경찰이 정 여인 주변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경찰은 오빠 정씨가 정 여인 재산을 노리고 열등감에서 살해했다고 하지만 재산 자체가 정 여인 명의로 돼 있어 상속할 수<ref name="kim100"/> 도 없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조윤형 의원은 또 이 사건에 청부살인의 혐의가 없는가, 검찰이 [[3월 22일]] 밤까지 철야 신문하면서 복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변호사]]를 접근조차 못하게 해서 정씨를 범인으로 자백케 한 것은 아닌가, 정종욱이 병원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수 없고 모 인사를 불러달라고 한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ref name="kim101">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1페이지</ref><ref>여영무, <추척 정인숙 미스터리>, 신동아 1983년 9월호(동아일보사, 1983) 171</ref> [[조윤형]] 의원에 이어 [[신민당]]의 [[김상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과 정인숙이 관계했을지도 모른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ref name="kim101"/>
- 이경영(1960) . . . . 49회 일치
[[1990년대]] 중반까지 영화계에서 [[박중훈]], [[안성기]], [[최민수]]와 함께 [[충무로(은어)|충무로]] 4대 배우라 불리며 잘 나가던 배우였다. 특유의 '[[젠틀맨]] 이미지' 를 통해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멋진 남자[* 물론 살짝 악역 느낌이 나거나 남녀 주인공 사이를 갈라놓는 삼각관계 축 역할도 했었지만, 주로 젠틀한 이미지가 강했다.] 역할을 많이 맡아서 주부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스타로 남성미가 강한 최민수와는 라이벌 관계였다. 네 배우들 중에서 코믹은 박중훈, 터프는 최민수가 맡고 있었고, 친숙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쪽 이미지는 안성기였다. 이경영은 멜로분야에서 세부적으로 다양한 성격을 모두 구별하며 미세한 감정선을 강조하는 연기쪽에 특화되어 있었다. 사실상 점잖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30대 애정 드라마 전문 주인공 느낌. (2018년 현재와 비교하자면 [[류진(배우)|류진]]이나 [[주상욱]]정도의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천하의 이경영이 나중에 아무리 나이를 먹어 조, 단역으로 간다 해도, 지금처럼 악역, 그것도 동정의 여지도 없는 악독한 역할 전문 배우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지나친 [[다작]]으로 가치가 훼손되기도 했다.
사실 이 시기에는 이 배우 저 배우 돌려쓰기 현상이 심하여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관객들이 외면할 정도로 충무로 배우 연령폭이 얇았다. 이경영 본인도 "그나마 [[안성기]]나 [[박중훈]]은 충무로나 언론에서 보호해주는 패턴이 강했다면 나는 그저 잡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며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가치관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부분이지만, 안성기나 박중훈이 어느 정도 자기 이미지와 고유의 연기색을 바탕으로 그 틀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게 코믹연기나 진지한 연기를 구축했다면, 이경영은 (최소한 영화작품 기준으로는) 자기만의 연기톤을 고집하려 들지 않고 당시 기준에서 극도로 19금적인 코믹연기도 하고 완벽하게 정석적으로 진지한 연기도 소화하는 등 팔색조처럼 넓은 연기폭을 시도했다. --물론 영화 자체가 실험적이거나 파격적인 사례가 많아서 흥행은 거의 망하곤 했다 [[안습]]-- 1994년에 [[문성근]]과 같이 출연했던 '세상 밖으로'라는 영화는 주인공들이 탈옥수라는 설정답게 쌍욕이 들어간 대사가 영화 내내 나오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 영화였다. (그전까지는 불량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영화라 할 지라도 욕설의 정도가 심한 대사들이 주연들 입에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일부 중요한 폭력적인 장면 한둘에서 나오는 정도) 그런 작품들에 출연하면서 연기변신에 대해 그렇게 힘든 요구를 항상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력 부분에서 점수를 깎이지 않고 합격점을 항상 받아왔다는 데서 이경영의 그 뛰어난 연기력에 대한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
2001년에 [[이요원]]과 같이 출연한 드라마 《푸른 안개》에서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아가씨와 플라토닉 러브를 나누는 유부남 역을 맡아서 화제가 되면서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했나 싶었으나[* 이 작품은 2001년 12월 열린 제 14회 한국방송작가상 드라마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삼각관계라는 구태의연한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번 드라마 작가상(집필자 이금림 작가가 SBS [[은실이]]로 12회(99년 12월 개최) 드라마 부문 수상)을 받은 사람은 다시 받을 수 없다"는 규정에 걸려 탈락했고 결국 제 14회 한국방송작가상 드라마 부문 수상작은 KBS 1TV 대하사극 [[태조 왕건]]으로 낙착되었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 철원성주 역으로 나온 [[송영창]]은 이경영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물의(둘 다 청소년 성보호법 위반)를 일으켜서 KBS 출연금지 명단에 올라 있으며 이경영이 출연한 드라마인 <푸른 안개> <은실이>는 이경영 신상 문제(청소년 성보호법 위반) 탓인지 3사에서 틀지 못한다.]...
2002년에 [[원조교제]] 혐의로 기소되어 형사재판을 받았다. 재판 결과 미성년자 L양과 3차례 성관계를 가진 것이 드러났으며 첫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상태에서 했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무죄, 두번째와 세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했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받게 되었다.
* 3차례의 성관계를 가질 동안 이경영은 L양이 미성년자임을 알았는가? 몰랐는가?
* 이경영이 L양에게 한 영화출연 약속은 성관계의 대가였는가?
* 2002년 5월 14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 (소위 원조교제) 혐의로 긴급체포
||1심 재판결과 이경영이 미성년자인 L모양과 3차례 성관계를 가진 것이 인정되었는데, 첫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했으므로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 정확하게 표현하면,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무죄, 두 번째와 세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했으므로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형량은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이었다. 아래는 당시 판결을 보도한 기사다.||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영화배우겸 감독인 이경영(41)피고인에게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과 함께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인천지법 형사 합의11부(재판장 이원규 부장판사)는 12일 이 사건 선고 공판에서 "이 피고인이 이모(18)양과의 첫 번째 성관계 시 미성년자인 줄 몰랐다는 점은 인정되나 두 번째는 성관계 전 이 양이 '나이를 말했다'는 진술이 신빙성이 높아 유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이 제작한 영화에 이 양을 출연시켜 줄 것 같은 느낌을 준 점도 인정된다"며 성 관계의 대가성 부분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220298|#]]
||1심 판결에 대해 이경영은 항소하지 않았다.[* 항소하지 않은 사실은 2심 판결문 상에 검찰의 항소에 대한 판단만이 담겨있을 뿐, 이경영의 항소에 대한 판단은 없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만약 이경영도 항소하였다면, 판결문에 이경영의 항소에 대한 판단도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검찰은 항소하였다. 검찰의 항소 이유는 '이경영은 첫 번째 성관계 때도 L양이 미성년자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첫 번째 성관계도 유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 법원과 똑같은 판결을 하였다. 아래는 당시 판결을 보도한 기사다.||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이성룡ㆍ李性龍 부장판사)는 25일 청소년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영화배우겸 감독 이경영(41)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대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모(18)양과의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를 맺을 때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은 정당한 것으로 보여 검사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157848|#]]
위 인터뷰를 보면 이경영은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런 기사들 때문에 이경영이 무죄판결을 받은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경영의 말은 1/3만 진실이고, 2/3는 거짓이다.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만 무죄고, 나머지 두 번의 성관계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니까.
* '''형사재판''':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임을 몰랐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무죄, 두 번째와 세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짐.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의 형이 선고됨.
법원은 이경영이 L양(당시 18세)과 가진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는 무죄라고 판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설령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도, 성매매한 사실만으로 첫 번째 성관계 역시 유죄(일반 성매매죄) 아닌가?'라며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법원은 검찰이 기소한 죄목에 대해서만 판결을 내린다. 이를 [[불고불리의 원칙]]이라고 한다. 따라서 검찰이 이경영을 미성년자 성매매죄로 기소했으면 법원은 미성년자 성매매죄가 성립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판결을 내리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일정한 경우에는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죄목에 대해서도 판결을 내리는데, 이 사건에서 법원이 첫 번째 성관계가 일반 성매매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판결을 했는지, 했다면 어떤 판결을 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누적 관객수 1억 명 돌파 배우 3호'''[* 1호와 2호는 각각 [[오달수]]와 [[송강호]]. [[유해진]]이 이경영의 뒤를 이어 누적 관객수 1억 배우 4호가 되었다.]
2월 : [[관능의 법칙]](최성재 역), [[또 하나의 약속]](교익 역)
위 문단에 서술되어 있지만 정말로 '부패한 높으신 분' 역을 할 만한 연기력과 외형, 목소리 등을 모두 갖춘 중년 배우가 정말 부족하다. 2010년대 들어서 [[건축학개론]](초반에 등장하는 건축한개론 교수 역), [[관상]], [[암살]], [[부산행]], [[미스터 선샤인]] 등 이경영 만큼 선과 악역을 넘나드는 배우 [[김의성]] 만이 거의 유일한 배우일 정도. 즉 영화, 드라마에서 넘치는 공급자리이지만 '''필요조건'''을 모두 갖춘 배우가 이경영과 김의성 뿐이니 이 두 배우가 나오는 작품과 안나오는 작품으로 나누어 지는 중 이다.
다만 감정 표현력과 별개로 대사 전달력은 지적받는다. [[베를린(영화)]]에서는 어색한 북한 사투리 연기까지 겹쳐서 뭐라고 대사를 하는 건지 못 알아듣는 관객들이 속출했고 [[군함도(영화)]]에서도 후반부 흥분하는 장면에서 대사 전달력이 떨어진다.
||<#EAEAEA>'''연도'''||<#EAEAEA>'''제목'''||<#EAEAEA>'''배역'''||<#EAEAEA>'''관객수(명)'''||
- 이정재(영화배우) . . . . 49회 일치
||<:><#4C4C4C>'''{{{#FFFFFF 본관}}}'''||[[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전주 이씨 [[효령대군]] 20세손, 시조 43세손 宰자 항렬이다. 동일 항렬 유명인으로는 [[이휘재|이영재]], [[이혁재]], [[이학재]] 등이 있으며, [[이경규]]와 [[써니(소녀시대)|이순규]]는 손자, 손녀 뻘이 된다.] ||
1999년 제1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99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2006년 제29회 황금촬영상 연기대상, 2013년 제34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2014년 제5회 올해의 영화상 남우조연상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였으며,[* 자세한 것은 수상 경력 항목 참고.] 2007년 3월 [[국가정보원]] 명예요원,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홍보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장동건]]과 더불어 유이하게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상, 조연상, 주연상을 모두 석권한 배우이기도 하다.'''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 이후1994년 12월 23일에 [[입대]]하여 52사단에서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1996년 6월에 제대했으며, 개그맨 [[유재석]]과 군대 동기다. 유재석이 업어키웠다는 말이 있으며 힐링캠프에서 본인이 직접 인증했다.[[https://youtu.be/W31NK0EW17s|#]] 입대 이후에는 군대에서도 여러 국방홍보영화의 주연을 맡았다.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 이외에도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에서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과시하며, 거의 [[대한민국]] 최초로 남자의 '[[몸짱]]'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그의 상반신 근육질 몸매가 드러난 영화 포스터가 길거리에 붙어있던게 젊은 여성 팬들에 의해 감상/보관용으로 뜯겨나가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하녀]]》에서도 재현되는 그 근육.
하지만 본인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2008년에 아레나와 한 인터뷰를 보면 “세상 살면서 그 정도로 안 힘들어본 사람 정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유독 자기만 힘들었던 것처럼 과거를 끄집어내 말하면서 동정표를 유도하는 이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진 않는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스토리는 있고 그 강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 아니겠나." 이제까지 친형에 대해서 함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아무튼, 고생한 것에 비하면 참으로 평온하고 맑은 소년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대신에 아트스쿨 같은 직업학교에서 인테리어와 건축을 공부했다. 지금도 연기 외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라고 한다. 직접 설계도를 그리기도 한다고. 학원비를 벌기 위해서 압구정동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시작했는데, 그때 매니저의 눈에 들어서 모델로 발탁된다. 그리고 모델료가 알바비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바로 알바를 그만두고 모델업계에 몸을 담게 된다.[* 절친 [[정우성]]과 연예계 입문 테크가 같다.] 그리고 그 후 93년에 출연한 롯데 [[크런키]] 초콜릿 광고가 대박을 쳤다. 90년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광고를 기억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j4MKFjzJ2Q|나만의음악]]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에 재희 역으로 발탁된 것도 이 초콜릿 광고 덕분이라고. 사실 같은 해에 롯데 초콜릿 다른 제품인 [[가나초콜릿]] 광고도 찍었지만 크런키 쪽이 더 인상에 강하게 남은편. [[https://www.youtube.com/watch?v=trE8bqdhYfA|가나 초콜릿 광고]]
영화 [[하녀]]로 칸 영화제에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2012년 [[도둑들]]에선 비열한 뽀빠이 역을 맡아 처음으로 천만관객을 돌파한 필모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3년 [[신세계(영화)|신세계]]를 통해 다시한번 배우 이정재를 대중들에게,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경찰과 조직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언더커버 이자성 역을 맡아 특유의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내면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캐릭터의 내면을 잘 표현했다고 평가 받는다.[* 겉으로 막 내뿜고 딱 봐도 --비주얼부터--강한 캐릭터인 정청에 비해 속으로 삭힐 수 밖에 없는 이자성이 밋밋할 수도 있으나 내면 연기가 원래 더 어려운 법이다.] 같이 출연한 최민식이 이자성 역할에 [[정우성]]과 이정재를 두고 고민하다가 이자성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위태로운 분위기가 이정재와 딱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하여 결국 이정재가 이자성을 연기하게 되었다. 19세 관람 불가인 조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이자성 때문에 지나간 청춘스타로만 여겨졌던 이정재가 다시 젊은 세대들의 오빠로 컴백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 후반부의 이사회장 런웨이씬과 반달처럼 휘는 이정재의 눈웃음이 백미.[* [[파일:2wr59IK.gif|width=70%]]] 실제로 저 마지막 눈웃음 때문에 신세계를 중복 관람한 여성팬들이 많았다.
이 당시 본인은 작품 편수가 줄게된 것이 연기 말고 사업 등에 관심을 돌리고 시나리오를 이리 고르고 저리 고르다 보니 작품수가 줄어들게 됐다고 말했으나 실상은 2003년 오브라더스의 그냥저냥한 흥행 이후 완연한 흥행부도수표가 되어가니 본인이 딴 곳으로 눈을 돌리며 움츠러드린 측면이 많았다. 결국 패션사업 등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사업을 모두 정리했고 다신 하지 않을거라고 한다.
이후 송강호와 함께한 《[[관상(영화)|관상]]》에서 [[수양대군]] [[http://img.theqoo.net/img/kuzzB.gif|역]]을 맡았는데 러닝타임에 반만 출연하고도 송강호를 압도하는 존재감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갔다. 한국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수양대군을 연기하였는데 이정재 본인 또한 이 역할을 놓치게 될까봐 전전긍긍한 것으로 유명하다.
총 관객 약 913만을 기록하며 역대 사극영화 중 네 번째 흥행작에 오른 관상은 평이 엇갈리고 지루하다는 평도 있으나,[* 2시간 20분이나 되는 긴 영화가 수양대군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정도로 극중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에 대해선 거의 만장일치로 호평 일색. 많은 기자들은 관상이 이정재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일반 관객들의 평도 매우 좋다. 관상보러 갔다가 [[수양대군|수양]] 보고 나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첫 등장 장면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리며 영화 시작 후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나오는 첫 등장 장면을 포스로 잠식해 버렸다. 누리꾼들은 이정재의 등장씬을 [[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배우)|강동원]]의 우산씬, [[아저씨]]에서 [[원빈]]의 삭발씬과 함께 한국영화 3대 등장씬이라고 부른다. [[이병우]] 음악감독은 그 장면에 쓰인 음악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고 했고, [[한재림]] 감독은 슬로모션 촬영 및 큰 개 두마리를 동원하여 시각적, 청각적으로 위협감을 주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배우 본인은 이 역할을 위해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동물의 왕국]] 등을 시청하면서 극중 '[[이리]]'의 상이라 표현되는 [[수양대군]]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이정재에게 [[관상(영화)|관상]] 시나리오가 온 것은 2012년 여름에 부산에서 [[신세계(영화)|신세계]]를 촬영할 때였는데, 그 때 감독이 직접 찾아와 대본을 전했다고. 처음에는 더 센 이미지의 남자 배우가 맡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출연을 망설였지만 [[하녀]]의 고훈 캐릭터에서 배어나온 기품과 카리스마를 원한다는 감독의 설득에 결국 역을 맡게 된다. 결과는 대박. 배우 본인의 아버지까지 네가 무슨 [[수양대군]] 이미지를 갖고 있냐면서 말렸다는데, 결국엔 역사상 최고로 섹시한 [[수양대군]]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연기력 논쟁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암살(2015)|암살]]에서 두얼굴의 임시정부 요원 염석진으로 나온다. 역할을 위해 무려 15kg이나 감량했다고 한다. [[조진웅]]의 증언에 의하면 촬영이 끝나고 배우들끼리 같이 밥 먹을 때 김치를 물에 씻어 먹는가 하면, [[하정우]]가 촬영 후 같이 술 마시자고 계속 꼬드겨도 끝까지 술 한방울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염석진의 불안하고 날카로운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48시간 무수면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하니, 연기에 대한 이정재의 열정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고생에 보답하듯 [[암살(2015)|암살]]이 8월 15일 광복절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도둑들]]에 이어 두번째 천만 영화를 갖게 되었다.
* 2013년 9월 28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데뷔 20주년을 맞아 이정재를 위한 특별전이 열렸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특별전은 여러번 있었지만 41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의 배우를 대상으로 한 특별전은 이정재가 처음. 주제는 '''"영원한 젊은 남자 이정재"'''로 데뷔 후 처음으로 팬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일본에서는 두 번의 팬미팅을 가진 적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팬미팅 류의 행사를 한 적이 없다.] 행사의 공식명은 GV, 즉 관객들과 영화에 대해 토론하는 심도 깊은 자리였으나, 곧 400여명이 함께한 팬미팅으로 변질 되었다. 약 한시간 반 동안 팬들과 출연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노래도 부르고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즉석에서 걸어 달라는 팬들의 요구에 걸어도 주는 등 팬미팅을 방불케 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이정재]]가 직접 준비한 클레이 비누를 일일이 팬들에게 선물해 주면서 포옹을 해 준 것''' 준비한 선물보다 사람들 수가 더 많아서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에게 포옹을 해주었으니,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겐 꿈 같은 1시간 반이었다. 관객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다 보니 400여명과 포옹이 끝난 후 이정재의 수트 상의 한쪽 부분이 온갖 화장품으로 범벅이 되어 하얗게 색이 변해 있었다. 여담으로 당시 [[신세계(영화)|신세계]]와 [[관상(영화)|관상]] 개봉으로 이정재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때라 표 구하는 게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전날부터 밤샌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새벽 5시에 나온 사람들도 10등안에 들지 못했을 정도. 12시에 온 사람들은 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으며 한국영상자료원 측도 이런 진풍경은 처음이라며 매우 놀라워 했다. 항간에 들리는 바로는 옆건물인 CJ E&M 사옥의 (엠카 보러 온) 줄보다 길었다고 하니... 본격 40대 아이돌 탄생.
* 영화 [[암살(2015)|암살]] 개봉 당시 관객 수 815만명이 넘으면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공약을 내 건 것. 8월 7일 관객수 815만명을 돌파하며 100여명이 넘는 팬들과 프리허그 행사를 가졌다.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팬들과 포옹해 준 결과 또다시 수트 상의가 화장품 범벅이 된 것은 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선착순에 들기 위해 행사가 저녁 8시에 시작됨에도 새벽부터 줄을 선 팬들이 많았다. 이런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애당초 약속한 100명이 아닌 120여명과 프리허그를 해주고, 엄청난 팬서비스도 보여준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leejungjae&no=56694&page=1&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D%95%98%ED%8A%B8|하트 춤 추는 이정재는 그야말로]] [[충공깽]]
* 자타공인 연예계의 대표 패셔니스타. 그가 레드카펫이나 공식행사에서 입은 의상은 바로 인구에 회자되며 무슨 옷을 입고 나타나는지가 대단한 관심거리가 된다.[* 실제로 시상식에 참가하면 그 날의 패셔니스타로 무조건 뽑힌다고 봐도 될 정도로 댄디하면서 멋진 수트핏을 연출한다.] 유수 명품 패션 브랜드의 파티에도 꼭 초대받는 패션 셀렙. 개인적으로는 댄디하고 베이직한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하며 좋아하는 브랜드는 입생로랑, 디올옴므 등이라고... 그렇지만 럭셔리하게 옷장을 몇 개씩 채우고 있을 이미지와는 다르게 쇼핑은 일 년에 두세번 하는 정도로 그친다고. 돈 쓰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며 옷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故우종완과 출연한 [[케이블]]TV의 프로그램 '토크 앤 시티'에 보면 몇십만원짜리 티셔츠를 비싸서 사기 싫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 2013년 영화 관상의 900만 돌파 행사 당시 한 여성 팬의 '''"잘생김"'''드립이 엄청난 반응을 몰고 왔다. 이후 연예프로나 기사에 이정재가 나오면 항상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잘생김이 묻은 배우"이며, 이 수식어는 2015년 8월 2일자 섹션 연예tv에 이정재가 나왔는데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역대급 드립을 해준 팬을 위해 실제로 이정재가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 배우 생활이 길고 역대급 인기를 얻어 본 만큼 안찍어 본 CF가 없을 정도로 다수의 CF를 찍었다. 특히 2013년 관상 이후 수많은 CF를 촬영하여 제2의 전성기가 왔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것은 아무래도 [[버거킹]] 15 CF 먹방인데, 표정과 음미하는 모습이 마치 [[고독한 미식가]]를 떠오르게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MDZGIuKG-A|광고 영상]] 관상과 엮여 "내가 왕이 될 상인가?" / "버거킹이 되실 상입니다" 같은 드립이 나돌기도 했다.
* 40대의 나이지만 웃을 때 소년 같은 느낌을 준다. 대표적으로 영화 신세계에서의 마지막 웃음이나 평상시 찍히는 웃음 사진을 보면 여전히 해맑은 청년의 느낌이 물씬 난다. 이 점은 힐링캠프 출현 당시 [[이경규]]가 언급하기도 했는데 당시 이경규는 "웃을 때 참 해맑다"고 이야기 했다. 참고로 영화 [[암살(2015)|암살]]에선 20대의 청년으로 잠깐 나오는데 아무 cg작업도 없이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5&aid=0003406913|정말 20대로 보여]] 많은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암살의 최동훈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히길, 촬영 당시 이정재의 모습이 너무 어려보여서 어떻게 된 거냐고 도리어 물어봤다고 한다.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50820092206173?f=m|최동훈 감독 인터뷰]]
* 2015년 9월 1일 [[디시인사이드]]의 '''이정재갤러리'''에서 후원금을 모아 독립유공자들에게 전달했다. 영화 [[암살(2015)|암살]]이 천만관객을 돌파하면서 독립군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팬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전달한 것.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832401|해당기사]]
* 많은 이들이 그의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인상에서 놓치는것이지만 '''사극'''연기를 굉장히 잘한다. 다른 영화에선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사극, 혹은 고어체를 쓰는 캐릭터를 정말 잘 소화해낸다. 그래서인지 신과함께에서 단순히 카메오로 그칠 예정이었던 비중이 2부작을 통틀어 중심내용을 관통하는 큰 역할로 확장되었고 관상의 수양대군 역이 펻론가와 대중들의 극찬을 이끌어내며[* 필모그래피의 정점이라는 평이 대다수다. 극중 수양대군의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음에도] 배우 인생 2부를 화려하게 부활시켰을 정도(...)
2015년 1월16일 '동양 사태' 항소심 5차 공판…동양피해자대책협의회·투기자본감시센터는 배우 이정재·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 배임 혐의 구속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또한 동양그룹 사태로 피해를 본 소액투자자들이 동양네트웍스의 외부감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에 대해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은 이정재가 동양사태와 관련이 있으며 배임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아직 재판중이다. [*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2978127|기사]]]
- 몽키 D. 루피 . . . . 48회 일치
||<:>해적이 아닐시 직업||<:>소방관||
'''~~초반엔 천재속성도 있었지만..~~뇌는 슬라임 급이지만 개념은 작중 최고인 자기 해적단 최고의 근육머리 바보(...)겸 개그캐'''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다, 특히 머리 쓰는 일을 잘 못한다. 독불장군 기질이 심해서, 다른 사람을 강제로 끌어가는 경우도 많다.정신력과 의지력은 초인적인 수준이며(쉽게 말하자면 그냥 멘탈이 강하다) 동료애도 강하다. 다른 사람의 동료애에도 공감하고(그래서 아론의 동료를 방패로 썼나?) 최선을 다해 도우려 하며, 반대로 동료를 속이는 것을 혐오한다. 동료들이 루피를 따르는 이유 또한 루피가 매사에 솔직하고, [니코 로빈|동료의 ][바로크 워크스|과거가 어떠하든] [프랑키|그런건] 신경쓰지 않고 동료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프랑키|조선공]이나 [니코 로빈|고고학자]는 첫 만남 당시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일단 동료로 받아들이고 난 뒤로는 그런 과거는 일절 따지지 않고 대우해준다.--좋게 말하면 쿨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거지만 루피 성격으로 봐선 멍청한 게 더 잘 어울린다.--물론 이건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샹크스와 빨간 머리 해적단의 영향을 받은 건지 수직적인 관계보다 허물없이 대하는 수평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신나게 즐기며 노래하고, 동료를 아끼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해적이라 생각한다. 제일 처음 본 해적이 [[빨간 머리 해적단]]이었기 때문인 듯. 영웅이 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해적은 고기를 가지고 잔치를 벌이지만, 영웅은 고기를 나눠줘야 하니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징베: 네가 먹을 고기는 내가 줄테니 일단 말을 들어!-- 이런 면모 탓에 해적기만 내리고 다녀도 인생이 편해지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있지만, 세계관 상 [[위대한 항로]]의 끝까지 가보려는 것 자체가 중죄다. 더군더러 해적기를 내리든 말든 몇몇 행동은 알아서 했을테니[* 특히 로빈을 구출하기 위해 에니에스 로비를 박살낸거나 천룡인을 패 버린것.] 별 상관은 없을듯.~~지금까지 해먹은 게 몇 년인데~~
해적사냥꾼 [[롤로노아 조로]]와 함께 밀짚모자 해적단을 결성하였으며 처음에는 단 둘뿐이었다. 루피가 계속되는 동료를 찾다가, 소규모 ~~[[어선]]~~해적단이란 소리를 들을 쪽수는 채웠다. 그런데 멤버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철철 넘치다 못해 흘러내릴 지경이며[* [[러시아식 유머|순록을 닮은]] [[토니토니 쵸파|너구리]](절대 오타가 아니다.), [[프랑키|로봇]]도 있는데 왜 또 [[브룩(원피스)|해골]]까지 동료에 추가하려 드냐고 상디한테 한 소리 들은바 있다.] 특히 [[위대한 항로]] 진입 이후에 들어온 동료는 전부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조로, 나미, 우솝, 상디는 '''일단은''' 멀쩡하게 생긴 인간이지만 쵸파는 순록 + 악마의 열매 능력자, 프랑키는 사이보그, 브룩도 해골 - 악마의 열매 능력자다. 그나마 외모로는 멀쩡하게 생긴 인간인 로빈도 악마의 열매 능력자. 사실 나머지 멤버도 조로, 상디는 초인급 싸움을 보여주고 나미는 위대한 항로에서 관측할 수 없는 사이클론을 감으로 예측하며 우솝은 사법의 탑 꼭대기에서 저 멀리 떨어진 다리에 있는 해군들을 정확하게 저격하는 등 나머지 네명도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가 끈끈한 동료애를 발휘하고, 일단 루피부터가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타입인 만큼 안 친한 멤버가 어디 있겠냐만은, 그 중에서도 해적단 내에서는 [[우솝]]과 가장 친한 편이다. 우솝이 좀 심한 겁쟁이에 평범한 인체스펙과 힘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루피는 무모한 성격과 악마의 열매로 인한 특이체질과 엄청난 힘 정도만 차이가 날 뿐, 기본적인 정신세계와 개그코드는 그야말로 [[소울메이트]]급으로 죽이 잘맞는다. [[남자의 로망]]을 동경하는 것도 그렇고, 둘다 [[빨간 머리 해적단]]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알다시피 [[샹크스(원피스)|샹크스]]는 루피의 '''인생 나침반''' 같은 존재이고, 동료인 [[야솝]]은 우솝의 '''아버지'''이다.] 그와 연령까지 똑같다. 이래저래 닮은 구석이 참 많은 콤비. 그래서인지 우솝이 루피의 바보짓에 태클을 많이 거는 만큼 루피의 장난에 가장 많이 받아주고 같이 행동하는 것도 우솝이다. 해적단에 별일 없으면 항상 루피 옆에는 우솝이 붙어 있다. [[토니토니 쵸파|쵸파]]가 합류한 이후로는 이 셋이 늘상 붙어다닌다. 일명 '''막내라인.''' 그렇기에 이 둘이 다투는 모습은 [[워터 세븐]]에서 [[고잉 메리호]]를 놓고 싸운 것이 유일했을 정도로, 이 때문에 당시에는 가장 친했던 멤버와의 처절한 결투를 비극적으로 그려내었다. 물론 [[에니에스 로비]]편 이후 [[프랑키|새로운 동료]]와 [[사우전드 써니 호|새로운 배]]가 생겼고, 배에 대한 트러블로 잠시 해적단을 이탈했던 우솝도 다시 돌아왔지만. 추가로 우솝이 루피에게 해적단에 멋대로 나간 점을 사과하고, 자신을 다시 넣어달라고 울고불고 하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그런 우솝에게 다시 손을 내밀고 눈물콧물범벅이 된 루피의 모습은 참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우솝의 재합류 이후로는 역시나 쵸파랑 항상 셋이서 붙어다닌다.
동인 쪽에서는 원작에서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 때문인지 [[하렘]]마스터 기믹으로 나오고 있다. [[주인공 보정|루피와 인연이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커플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사실 동인계 쪽에서는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루피와 인연이 있는 '''남성'''들과도 커플링이 만들어져 있을 정도니(…) 마성의 페로몬에 더해 만인의 연인에 가까운 기믹이 있다고 보면 된다.
어머니 쪽 가계도는 700회 이상 연재된 지금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기에 "어머니가 골 D. 로저의 딸이다"라는 루머가 있었으나 작가가 공식적으로 부정했다.~~로저 나이가 루피 아버지뻘인데 가능할리가~~ [[D(원피스)|D]]의 경우 혈연과는 관계없는[* 로빈과 인연이 있는 [[거인족]] [[하그왈 D. 사우로]]도 D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으로 보이니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골 D. 로저와 혈연일 가능성은 낮다.
[[니코 로빈]]을 구하느라 [[에니에스 로비]]를 박살내고, 포트거스 D. 에이스를 찾아 [[임펠 다운]]을 작살냈다. 뒤이어 [[해군본부(원피스)|해군본부]]를 뒤엎는 데도 한 몫 했다. 즉 루키 주제에, 그것도 최하위급 악마의 열매 능력자가 열기도 힘든 정의의 문을 넘고 넘어서 세계 정부의 중요기관 3개를 골고루 털었다.
은근히 인맥이 세다.--노골적으로 세다-- 원피스 전체에서 살펴봐도 루피만큼 인맥이 센 인물은 없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스팬담보다도 인맥이 더 세다.(…) 다만 인맥으로 은혜를 입은 일 보다는 자기 쪽에서 은혜를 입혀서 생긴 인맥이 많고, 나머지는 스스로의 인격이나 포부를 보여 거물들에게 인정받아 생긴 인맥이 대부분이다. [[스팬담|장관 아들로 태어난 것 하나만 가지고 낙하산 출세하고 졸개들한테도 뒷담이나 먹고있는 누구씨]]와는 애시당초 비교하기가 힘든 부분. ~~인맥은 써야 인맥이지 쓰지 않으면 그냥 단순한 술친구다~~
초반에는 자신보다 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들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는 은인으로써 친해지는 일들이 많았지만, 샤본디 제도 편 언저리부터는 루피 본인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인 인물들과도 관계가 생기고 있다.
특이 케이스로, 만났을 때는 웬만한 양민들보다도 더 약해서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았지만 어느새 육식 몇 개를 익혀오더니 대령이라면서 준장님쯤 되셨나 싶은 포스를 보여주고 있는 코비나, 명백하게 적대관계이지만 내심 루피를 마음에 들어하는 스모커 등이 있다. 루피라는 인간 자체는 마음에 들어하지만 위치상 적대관계이며, 특히 스모커는, 루피가 도와주는데도 그대로 돌려주어서 은원관계를 안 남긴다. 오로지 해군으로써 쫓고 있기 떄문에 코비보다 훨씬 살벌한 관계. ~~참고로 코비는 뒤에서부터 거리를 좁혀오고 있지만 스모커는 처음엔 앞이었는데 이젠 뒤쳐지고 있다.~~
그리고 임펠다운 탈옥에서부터 예전에 싸웠던 적들이 대거 재출연하면서 꽤 우호적인 관계로 나오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크로커다일, 버기, Mr3 등이 있다. 특이 케이스로 인성 자체가 변한 베라미, 이 경우는 루피가 베라미를 끌어들였다기 보다는 베라미가 스스로 변한 것이지만. 또 같은 초신성으로 명백한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물들과도 얽혔다 하면 친분을 만들고 인맥을 쌓고 있다. 예를 들어 트라팔가 로는 아무 관계도 없는 루피를 정상결전에서 피신시키고 치료해주며 현재는 동맹[* 사실 이것도 루피를 이용해 스마일 공장을 박살낼 의도가 컸지만 아무래도 루피는 로를 동료라고 생각하는 듯 하며, 실제로 로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알게모르게 루피를 위해 움직일 때가 많다. ]을 맺은 상태이다. 물론 이들은 엄밀히 말해 징베나 행콕과 비슷할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전, 현직 칠무해이며 적이 될 사람들까지도 어느 새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루피의 [[패기(원피스)|'사람을 이끄는 자질']]을 보여주는 케이스이다.
더불어 이름만 말해도, 누구나 알 만한 전설적인 인물들과도 인맥이 있다. 징베나 행콕 같은 인물들과 다른 점이라 한다면 대부분이 루피 이상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렙에 달해있는 인물들이다. 이 경우는 루피가 도움을 주고 말고 할 여지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상대방 쪽에서 일방적으로 마음에 들어하고 일방적으로 도움을 준다. 물론 그 수가 많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루피, 인맥, 거물 세 키워드만 넣어도 떠오르는 인물인 [[실버즈 레일리]]. 나머지는 사황 샹크스와, 가족관계인 가프와 드래곤 정도밖에 없다. 가프와 드래곤에게는 이러저러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지만 드래곤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 자체를 하지 않았고 가프도 군인이어서 나름 철저한 면도 있는 사람이라 가프 본인과 그 지인들에게는 진심으로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 정도밖에 없다. 물론 이것만으로 정상결전 생존률은 대폭 상승했겠지만(…) ~~내 손자가 아니라 나대는 새내기 해적 A였으면 공중에서 고무폭죽이 되어서 산화했다.~~ 가족 덕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루피가 인맥 덕을 봤다고 단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면 단연 레일리. 무력 면에서나 경험 면에서나 이미 만렙을 찍은 전설급 괴물이지만 2년 후로 접어들기 전에 이미 인정받았다. 여기서 한번 인정받은 것만 가지고 키자루한테 살해당할 뻔하다가 도움받고, 정상결전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레일리 덕분에 2년동안 힘을 기를 제안도 받고, 그걸 동료들한테 전하는 데에도 도움을 받고, 2년동안 직접적으로 지도까지 받는 등 두고두고 엄청나게 도움을 받는다. 루피가 워낙 오지랖이 넓다보니 사실상 이 정도로 루피가 받기만 한 인물도 얼마 없다. 그런데 정작 레일리에게 인정받는 과정 자체는 고작 하루만에 이루어져서 이렇게 잔뜩 덕 본 것치고는 너무 간략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사실 레일리와의 인연은 비단 레일리 한 명과의 인연이 아니다. 시당초 레일리가 루피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루피의 밀짚모자 때문이고, 즉 어릴때부터 줄곧 같이해오던 샹크스와의 인연에서 이어진 관계이며, 아직 밀짚모자의 사연이 세세하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로저까지도 얽힌 길고 긴 인연일 가능성이 크기에 당시의 레일리와 루피의 대화가 둘의 인연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레일리의 동거인인 샤키의 루피에 대한 태도나 언급등을 보면 레일리 또한 루피가 어느정도 주위의 이목을 끄는 순간부터 쭉 루피의 행보를 지켜봐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에도 속하기 힘든 인물들로 흰 수염 해적단의 잔당들이 있다. 일단 정상결전에서 함께 싸운 일이 있고, 루피가 에이스의 남동생인 데다가 흰수염 본인에게도 인정을 받은 바가 있어, 관계 자체는 루피에게 굉장히 우호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세력 자체는 샹크스 해적단이나 레일리나 동급일 정도로 전설적인 존재들이지만 정작 그 중심이 정상결전에서 목숨을 잃어서, 지금은 상당히 격하된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상결전에서 주력으로써 해군의 중대장들과 정면으로 싸운 인물들인 만큼 현재의 밀짚모자 일당들보다도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현 상황이 워낙 안습이다보니 루피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기 힘들다.
작고 큰 마을이나 세력에게도 은혜를 입힌 바가 있지만 규모가 특히 큰 케이스만 살펴봐도 알라바스타 왕국, 드럼 왕국, 하늘섬, 워터세븐[* 이 쪽은 국왕이 아니라 시장이지만 원피스 세계관의 국가들의 대부분이 어중간한 규모의 섬나라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웬만한 도시국가 스케일은 된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왕국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드럼 왕국하고만 비교해봐도…], 아마존 릴리와 어인섬이 있다. 드레스 로자도 거의 확정적인 후보.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높으신 분들과 친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나라 전체의 위기를 구한 구국영웅에 가까운 위치이다. 유달리 규모가 크고 해군의 감시가 강했던 알라바스타를 제외하면 일반 시민들도 은인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알라바스타의 경우도 루피가 초반에는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다가 막판에는 판을 크게 벌였기 때문에 당시 현장에서 싸우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을 목격한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 바로크 워크스의 잔당들도 당연히 파악하고 있을 테고 해군들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등,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뒷소문으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상 국가 지도자나 고위 관직들과의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국가 전체가 강하게 지지한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어인섬같은 경우는 전 국민이 전장을 둘러싸고 구원받는 그 순간을 직접 목격하거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밀짚모자 일당 심볼을 어인섬에 대놓고 걸 정도로 직접적인 유대가 더욱 강했다.
이것은 딱히 도플라밍고처럼 해적이 일개 국가를 소유한다거나 산하에 두는 것은 아니기에 국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무력을 행사하여 적개심을 사지 않아도 루피 본인 의향만으로 여러 국가에 강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으로, 국가마다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워터세븐 시장이 손수 해적선을 조선해준 일이 있고[* 얘가 해적왕이 되기라도 하는 '''순간 불법행위로써 인정'''된다. 그렇게 되기 전이라 해도 루피가 에니에스 로비를 개작살내고 온 직후이니 세계정부에게는 미움받고도 남을 일이다. [[톰(원피스)|톰]]역시도 그저 해적왕의 '''배를 건조했다는 죄로 사형'''당한 상황을 보면 아이스버그도 스승과 똑같이 끝장날 수 있다. 다만 나서서 도와줄 이가 없었던 톰과는 달리 아이스버그는 그를 열렬하게 존경하고 걱정하는 시민들이 있다. 물론 밀짚모자 일행들도 아이스 버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만큼 이들이 아이스버그의 사형을 순순히 묵인할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톰의 경우에는 스팬담의 온갖 방해공작이 있었다. 더군다나 워터세븐 마무리에서 아이스버그가 설계하고 있던 '워터세븐 전체를 바다에 띄우는 일'이 성공한다면 그의 위상이 과거의 톰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밀짚모자 일당의 새 해적선 [[사우전드 써니 호]]에 대한 건조는 밀짚모자 일당과 소수의 관계자만이 아는 일인 만큼 죄를 묻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톰의 경우, 본디 조선공은 해군이건 해적이건 일반인이건 상관없이 누군가를 위한 배를 건조하는 행위 자체는 죄를 묻지 않으나 톰의 경우는 그가 건조한 배가 다름아닌 '''해적왕 골 D. 로저의 기함, 오로 잭슨 호''' 였던만큼, 해적왕과 관계된 이들을 전부 숙청하려는 해군 본부의 표적이 된 것이다. 또한 스팬담의 음모로 [프랑키|커티 프람]이 만들었던 전투함들이 사법선을 습격했을 당시, 오로 잭슨 호의 건조 건은 바다열차 퍼핑톰의 제작으로 사면받는다 쳐도 사법선 습격 건이 그대로 죄가 되기 때문에 이를 바다열차 건으로 사면받고 [아이스버그|자신의] [프랑키|제자]들을 위해 오로 잭슨 호 건조에 대한 죄를 받아들여 처형된 것이었다.][* 다만 문맥상 중요한 것은 일개 도시의 시장, 세계관 상으로는 국왕하고도 맞먹을 정도의 권력자가 세계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해 주었을 정도로 밀짚모자 일당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처벌 받는다 안 받는다 여부가 중요한 점은 아닌 것(…)~~병림픽~~]어인섬의 경우는 언젠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국왕이 못을 박아두는 장면이 나왔고[* 밀짚모자 일당에게 감사인사란 감사인사는 죄다 퍼부은 뒤였기 때문에 단순히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출은 아니다. 어인섬에는 루피에게 붕괴당한다는 플래그도 서 있기 때문에 차후 재등장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알라바스타 왕녀는 비공식적이나마 밀짚모자 일당에 소속되어 있는 등 그 정도가 '''여차하면 특정 세력에게 적대 성향을 가지게 할 여지도 충분히 있기에''' 이미 심상치 않다고 말할 수준을 몇 단계 뛰어넘었다.
원피스의 최종보스 세력으로써 점쳐지고 있는 것이 세계정부이며 세계정부에 정면으로 적대하고 있는 세력인 반란군의 수장이 루피의 아버지인 데다가 2년간 니코 로빈이 임시적으로 반란군과 행동을 함께 한 행적이 있어 밀짚모자 일당과 관계가 나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세계정부 측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 어인섬 국왕 넵튠의 무거운 일언 등에서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 되던간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내용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아무리 산 속에서 살았다곤 하지만 산적들도 신문은 읽기 때문에 평소에 관심을 갖고 읽었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내용들을 가르쳐 줄 때 보이는 반응을 보면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그냥 본인이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이질 않는다. 보통 동경하는 [[샹크스(원피스)|해적]]이 생기면 [[바르톨로메오(원피스)|바르톨로메오]]처럼 그 [[몽키 D. 루피|해적]]의 정보를 신문에서 찾는 게 정상이다. 샤키와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는 점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정보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매스컴 자체에 관심이 없는 듯.[* 아닌게 아니라 현상금이 올라가면 단순히 올라갔다고 좋아라 하지만, 매스컴에서 자기를 두고 떠드는 소리소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기 기사에도 관심이 없는데 남 기사에 관심이 있을까(…)] 그나마 이 해적단 내에서 나미나 로빈 정도가 정기적으로 신문을 읽고 있어 중요한 정보는 귀에 들어오는 편이다.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은 흥미있는 정보다 싶으면 들여다 보기라도 하는데 루피는 웬만해서는 그냥 말로 듣고 놀란다. ~~가만, 얘 진짜 글 읽을 줄 아는거 맞나?~~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주요임무 . . . . 47회 일치
1754년, 데스몬드 마일즈의 조상인 헤이덤 켄웨이는 코벤트 가든 왕립 극장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상관인 레지널드 버치의 명령을 받은 헤이덤은 오페라를 보고있던 남자를 암살하고 그의 목에 걸려있던 유물을 가지고 극장에서 빠져나간다.
1754년, 보스턴 항구에 발을 디딘 헤이덤을 "찰스 리"라는 남자가 맞이한다. 이들은 잡화점에서 검(일반 검)과 권총(플린트락 권총)을 사고 그린 드래곤 여관으로 향한다.
그린 드래곤 여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 말다툼을 벌이던 여관 아저씨와 여관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맞이해 준다. 헤이덤은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력자인 윌리엄 존슨 경에게 협조를 부탁하지만 존슨 경은 자료를 도둑맞아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 존슨의 경호원인 토머스 히키가 조사 중이지만 헤이덤은 직접 나서기로 한다.
다시 그린 드래곤 여관. 존슨은 헤이덤이 보여준 유물을 살펴보고는 모호크의 물건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어디서 나온 건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한다고.
다시 그린 드래곤 여관으로 온 일행. 존슨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처치는 자신을 감금했던 사일러스 대처가 노예상이라는걸 밝힌다. 하지만 대처는 사우스게이트 요새를 관리하는 영국군 지휘관이며, 최소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 헤이덤은 사우스게이트 요새로 진입할 방법을 찾는 동시에 자신의 조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존 핏케언을 찾으려고 한다.
핏케언이 있는 군사 기지에 도착한 헤이덤과 찰스 리. 핏케언의 상관인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은 핏케언을 넘기기를 거부한다. 헤이덤은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브래독을 안타까워 한다.
브래독을 찾아 죽이기 위해서는 브래독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하는 상황. 두 사람은 콩코드에 있는 라이트 여관(Wright Tavern)에 들어가 병사들의 대화를 감청, 브래독이 이번 주 내에 원정을 벌일 생각이라는걸 알아낸다. 이후 여관에서 나가려던 중 병사들과 싸움이 붙지만 헤이덤이 병사들을 모두 두들겨 패버린다. 이때 헤이덤의 얼굴에 난 상처를 지혈해준 카니에티오는 브래독의 기지로 오라고 한 다음 사라진다.
여관의 테이블 근처에서 반격기를 사용하자. 적 병사가 여덟명이나 되니 두명을 테이블에 처박는건 일도 아니다.
다섯 달 후, 라이트 여관에서 술을 마시던 헤이덤 일행[* 찰스 리 제외. 찰스 리는 브래독 밑의 병사로 있다.]에게 카니에티오가 찾아온다. 카니에티오는 브래독을 습격할 때가 왔다며 헤이덤 일행을 북쪽의 캠프로 보낸다.
며칠 후, 그린 드래곤 여관으로 돌아온 헤이덤. 무언가를 찾았냐는 헤이덤의 질문에 장소가 틀렸었다고 대답하고는 윗층으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동료들에게 목표를 찾지는 못했지만 더 가까워졌으니 앞으로도 더 노력해야 된다는 투의 말을 하고는 찰스 리를 입단시킨다.
지하에는 암살단의 복장과 같은 장비들이 숨겨져 있었다. 라둔하게둔은 암살단 장비에 관심을 보이지만, 아킬레스는 먼저 암살단원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며 그를 제지한다.
* 이 임무 이후로 항만 관리소장(Harbormaster)를 통해 빠른이동을 할 수 있게된다.
저택의 문을 두드렸던 사람은 카나도곤이었다. 카나도곤은 사람들이 와서 땅이 팔렸다고 주장하며 마을 사람들을 내쫓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템플기사단원인 윌리엄 존슨이 이에 연관되었다는 걸 안 코너는 존슨을 막기로 결심한다. 아킬레스는 템플기사단은 강하다며 보스턴에 있는 새뮤얼 애덤스의 도움을 받으라고 한다.
라둔하게둔은 카나도곤에게서 토마호크를 건내받아 저택 현관 기둥에 박아버린다. 아킬레스가 무슨 짓이냐고 묻자, 코너는 카니엔케하카의는 전쟁을 시작할 때 도끼를 기둥에 박아 전쟁이 시작했다는걸 알린다고 대답한다. 끝나면 도끼를 뽑아낸다고. 이에 아킬레스는 나무에다가 하면 될 것 아니냐며 불평한다.
약속장소인 몰리뉴 여관에 도착한 코너, 애덤스는 코너에게 몰리뉴 여관의 주인인 윌리엄 몰리뉴와 경영자 겸 주방장인 스테판 샤페우를 소개시켜준다. 스테판 샤페우는 아까 전에 코너와 함께 싸웠던 집주인이었다. 대화가 격해지던 중, 코너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윌리엄 존슨이 차를 밀수해 땅을 살 돈을 벌고 있다는걸 알아낸다. 애덤스와 샤페우는 부두에 있는 차를 파기하고, 밀수꾼들의 배달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여관 밖으로 나간 코너는 상자를 들고 가던 남자와 부딪힌다. 남자가 운반하던 물건은 밀수된 차였다. 코너는 존슨의 부하들이 배달하던 차를 파괴한 후 부두로 가 쌓여있던 차 상자 역시 파괴한다.
코너가 몰리뉴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샤페우는 단단히 화가 나있었다. 샤페우는 자신의 물건을 훔친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하겠다며 밖으로 나간다.
* 이 임무 이후 암살단을 관리할 수 있다.
1775년, 대본포트 농지. 저택으로 편지가 온다. 폴 리비어에게서 온 도움 요청으로, 영국군이 보스턴에서 무언가를 하려 하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코너는 자신은 애국자들이 아니라며 거절하려하지만 존 핏케언이 연관되었다는 아킬레스의 말을 듣고 보스턴에 있는 리비어를 돕기로 한다.
1776년 6월 16일, 코너와 애덤스는 조지 워싱턴의 총사령관 취임연설을 듣는다. 애덤스는 워싱턴만큼 총사령관에 적합한 사람이 없을거라고 말하지만, 뒷자리에서 연설을 듣고 있던 찰스 리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며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찰스 리는 코너를 몰라보는 상태. 애덤스는 찰스 리에게 달려드려는 코너를 제지하고는 조지 워싱턴과 대화를 소개해준다. 워싱턴은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공을 세운 코너를 칭찬하지만, 코너는 애국자들이 한 것을 돕기만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워싱턴은 용맹한 만큼 겸손하다며 코너를 칭찬해준 후, 총사령관이 못 된 찰스 리를 위로해주러 간다.
- 최광식 . . . . 47회 일치
| 직책 =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최광식'''(崔光植, [[1953년]] [[5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이며,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2011년 [[대한민국의 문화재청장|문화재청장]]을 역임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30/2011083002044.html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내정자]《조선일보》2011년 8월 30일</ref><ref>[http://media.paran.com/news/view.kth?dirnews=3065334&year=2011 최광식 후보자, "영남·소망교회 출신 아니다"]《머니투데이》2011년 9월 15일</ref>
2011년 9월 20일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취임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9/20/0200000000AKR20110920113800005.HTML 최광식 "전통문화의 현대화·세계화에 역점"]《연합뉴스》2011년 9월 20일 정천기 기자</ref>
* 고려대학교 박물관장
* 국립중앙박물관장(차관급)
===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인사청문회 ===
민주당은 고려대 교수 재직 중 쓴 일부 논문의 자기표절 및 중복게재 의혹이 있다고 지적했으며 한나라당 [[심재철 (1958년)|심재철]] 의원 역시 “중복게재가 맞다”, “인정하라”고 말했다.<ref>[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667 야당, 최광식 문화부 장관 후보자는 “부적격”]《미디어스》2011년 9월 16일 권순택 기자</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987849 최광식·임채민 장관 후보자 자질·도덕성 검증]《SBS뉴스》2011년 9월 15일 김지성 기자</ref>
이에 대해 최 후보자는 “인용부호를 하지 않은 것은 불찰이지만 30여 페이지 중 한 페이지를 인용한 것은 자기표절이 아니다”라고 해명하였다.<ref>[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1105891 임채민·최광식 인사청문회…도덕성·'낙하산' 논란]《MBN뉴스》2011년 9월 15일 이상민 기자</ref><ref>[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newsid=01781046596380448&SCD=&DCD=A01503 최광식, 논문 이중게재.."불찰이지만 이중게재는 아냐"]《이데일리》2011년 9월 15일 나원식 기자</ref><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5546.html 최광식 장관후보 ‘논문 이중게재’ 의혹]《한겨레》2011년 9월 8일 최성진 기자</ref><ref>[http://imnews.imbc.com/replay/nw1200/article/2926338_5786.html 임채민·최광식 인사청문회‥도덕성 집중 검증]《MBC뉴스》2011년 9월 15일 박찬정 기자</ref>
[[허원제]] 한나라당 의원은 “교수에서 장관 내정까지 걸린 시간은 3년 반에 불과하다”며 “능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일 수도 있지만, 대통령과 같은 대학 출신이라 발탁됐다는 말도 있다”고 지적했다.<ref>[http://www.ajnews.co.kr/view_v2.jsp?newsId=20110915000197 최광식 '초고속 승진', 임채민 '전문성 결여' 도마위]《아주경제》2011년 9월 15일 정경진 기자</ref>
[[이경재]] 한나라당 의원은 “야당에선 낙하산 인사라고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장에서 문화재청,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말 그대로 승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ref>[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98 “최광식, ‘묻지마 청장’ 이어 ‘낙하산 장관’”]《PD저널》2011년 9월 15일 김세옥 기자</ref>
최 후보자는 “고려대 (출신) 30만명 중 한 명이고, 고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장관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152206025&code=910402 최광식 후보 ‘초고속 승진·해군기지 허가’ 도마에]《경향신문》2011년 9월 15일 임지선 기자</ref>
공직에 있던 3년 6개월간 외부 강의를 통해 부수입이 총 4,486만원, 한 달 평균 106만이 넘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ref>[http://www.newsj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668 최광식 문광부장관 강의평가 하위권 맴돌아]《제주환경일보》2011년 9월 13일 김태홍 기자</ref><ref>[http://www.newsjeju.net/news/articleView.html?idxno=69001 "최광식 후보자, 공직재직 중 외부강의로 4,500만원 벌어"]《뉴스제주》2011년 9월 13일 고병택 기자</ref>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최 후보자가 외부강의를 너무 많이 하는 등 경력관리에 너무 집착한다는 평이 있다"고 말했다.<ref>[http://www.idaegu.co.kr/new_gisa.html?uid=235241&part=%C1%A4%C4%A1http://www.idaegu.co.kr/new_gisa.html?uid=235241&part=%C1%A4%C4%A1 임채민 복지, 최광식 문체 청문회]《대구신문》2011년 9월 15일 장원규 기자</ref>
김제윤 민주당 의원은 최 후보자가 문화재청장 시절 제주해군기지 건설공사 승인과 관련‘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이하 ’매장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제주해군기지 부지에서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수혈주거지(움집터), 유구 등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으나 문화재청이 해군 측의 공사를 중지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 일부 조사완료구역에 대해서는 공사 시행을 승인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ref>[http://www.newsjeju.net/news/articleView.html?idxno=69369 최광식 '제주해군기지 책임론' 유탄 맞을 듯]《뉴스제주》2011년 9월 14일 고병택 기자</ref><ref>[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04297 최광식 후보자 ‘제주해군기지 유탄’ 맞나?]《제주의소리》2011년 9월 14일 좌용철 기자</ref><ref>[http://www.ajnews.co.kr/view_v2.jsp?newsId=20110914000169 최광식 장관후보,‘제주해군기지 유탄’맞나 ?]《아주경제》2011년 9월 14일 박현주 기자</ref>
매장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시공사는 매장문화재를 발견한 때에는 즉시 공사를 중지해야 하고, 전체 문화재 발굴조사가 완료되기 전에는 공사를 시행할 수 없다.<ref>[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194 최광식 문체부 장관 내정자, 제주해군기지 ‘유탄 맞나’]《제주투데이》2011년 9월 14일 강한성 기자</ref>
하지만 최 씨가 수술 등 적극적인 치료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 공익근무지 중 ‘가장 편한’ 곳으로 꼽히는 학교에서 근무했다는 점 등이 추가로 제기된 의혹이었다. 이에 최 후보자 측은 “수술을 받을 경우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는 의견에 따라 수술을 보류했다. 체중감량, 슬링운동치료와 함께 가벼운 운동을 해 오고 있으며 현재도 과격하고 힘든 운동을 삼가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또 아버지가 재직 중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진단을 받게 된 것은 ‘교직원 자녀에게 진료비가 할인(40%)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익근무지는 서울지방병무청에서 컴퓨터 무작위 배정 방식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으로 지정됐으며 당시 최 후보자 가족이 종로구 동숭동에 살고 있어 출퇴근 거리가 가까운 용산구의 학교에서 근무하게 됐다는 것이다.<ref>[http://news.donga.com/3/all/20110914/40286521/1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인사검증 리포트]《동아일보》2011년 9월 14일</ref><ref>[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10915000401 “최광식, MB정권서 3년여 초고속 승진”]《헤럴드경제》2011년 9월 15일 박정민·양대근 기자</ref>
2011년 9월 1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전재희]])는 인사청문회를 마친 최광식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최 후보는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의 “부적격하다”고 의견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수적 우위로 장관자리에 앉게 됐다.<ref>[http://media.paran.com/hotissue/view.kth?dirnews=3088095&year=2011&titlekey=PARAN_2011_3089993&clusterid=IiQmMjszUV5DVCtARVhTVktUK0NH&kind=0&pg=1&t=0&date=20110916&tq=%C0%CE%BB%E7%C3%BB%B9%AE+%C0%E5%B0%FC+%C3%A4%C5%C3+%C3%BB%B9%AE 최광식 인사청문보고서, 야 반대에도 ‘채택’]《미디어스》2011년 9월 16일 권순택 기자</ref><ref>[http://m.pdjournal.com/articleView.html?idxno=32615&menu=1 최광식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야당은 ‘부적격’]《PD저널》2011년 9월 16일 김세옥 기자</ref>
|직책 = [[국립중앙박물관#역대 관장|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직책 =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현진건 . . . . 47회 일치
본관은 [[연주 현씨]](延州 玄氏)이고 호는 '''빙허'''(憑虛)이다.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 20편의 단편소설과 7편의 중·장편소설을 남겼다.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현진건은 [[광무 (연호)|광무]](光武) 4년([[1900년]]) 8월 9일(양력 [[9월 2일]]) [[대구광역시|대구부]](大邱府)에서 현경운과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 정효(貞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대구군 2정목(町目),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구광역시)|중구]] 속칭 '뽕나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융희]](隆熙) 4년([[1910년]]) 6월 13일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위로는 홍건(鴻健), 석건(奭健), [[현정건|정건]](鼎健)의 세 형이 있었는데, 맏형 홍건은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과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을 지냈고 칭경시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 석건은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정건은 훗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현진건의 집안인 연주 현씨는 [[역관]](譯官) 등의 [[잡과]](雜科) 출신을 많이 배출한 [[중인]](中人) 집안에 해당한다. 현진건의 6대조로 왜역(倭譯) 즉 [[일본어]] 통역관이었던 태형(泰衡)부터 한역(漢譯) 즉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5대조 상복(商福), 몽역(蒙譯) 즉 [[몽골어]] 통역관이었던 시석(時錫)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관으로서 활약하였으며(각자의 처가도 또한 역관 집안이었다) 증조부 경민(敬敏)도 왜역으로 [[동래]](東萊)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현진건의 숙부인 현양운이 조민회의 후임으로 주왜공사(住倭公使)가 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영운의 가계를 그의 할아버지(즉 현진건의 증조할아버지)가 왜역으로 오랫동안 동래에 머무르다가 현지 기생과의 사이에서 현양운의 아버지를 얻었고, 현양운 자신도 그 아버지가 첩에게서 본 자식이었다고 적고 있다.<ref>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양진오, 2008, p.26</ref>
현진건의 할아버지 학표(學杓)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지냈고, 다시 경운(炅運)·철운(轍運)·영운(映運)·양운(暘運)·붕운(鵬運)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경운이 바로 현진건의 아버지이며, 봉호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라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화국|전보사장]]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계몽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윤치호]],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내무장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4대 대통령 [[윤보선]] 집안과 이중으로 혼반관계를 형성하였다.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1922년]] 9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ref>1년에 걸치는 「조선일보」 근무에 대해서 현진건은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로는 초기 「조선일보」가 보여준 노골적인 친일신문 표방 태도, 친일 색채가 농후한 발행 주체들이나 수시로 뒤바뀌는 발행인으로 인해 현진건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곤란했던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친일 분위기에 대해 현진건의 문우였던 박종화는 "월남 이상재 선생 사장과 신석우 부사장, 민세 안재홍 편집국장 등이 취임하기 전의 초기 「조선일보」에는 양심있는 사람으로는 오래 거접(居接)할 것이 아니었다"(박종화, 「빙허 현진건 군(君)」, 『신천지』 1954.10. p.139~140)고 하였으며,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는 현진건의 「지새는 안개」에는 「조선일보」를 빗대어 아예 "썩은내, 더러운내, 곰팡내, 음탕한내가 감도는 분위기", "도야지(돼지) 우리"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35~13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최남선]](崔南善)이 만든 동명사(東明社)에 들어간다. 그 다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시부터 민족적 색채가 농후했고, 역사지향적 성격을 추구하며 「조선통속역사강화」(최남선 저) · 「조선과거의 혁명운동」(문일평 저) 등 유독 국학(國學) 관련 논문이 자주 연재되었던 「동명」에서의 경험은 훗날 「고도순례 경주」, 「단군성적 순례」 등의 민족의식이 농후한 작품을 쓰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그리고 11월 13일에 그의 첫 창작집 『타락자』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된다.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ref>「文壇雜談」 1925년 3월 1일자 『개벽』제57호.</ref>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ref>현진건이 『조선문단』에 작품을 싣기 시작한 것은 『개벽』이 점점 '계급주의 문학'을 외치는 [[카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ref>당시 부암동은 서울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5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ref>「침묵의 거장 현진건 씨의 문학종횡담」, 『문장』 1939년 11월. p.116~120.</ref>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인용문|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창작가는 제2의 경우를 더욱 중시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이미 주제를 작정한 다음에 그 소재를 취하는데 현재와 과거를 가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작품상에는 현재라고 더 현실적이오 과거라고 비현실적이란 관념은 도무지 성립이 되지 않는 줄 압니다. 더구나 제2의 경우에는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등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ref>「역사소설문제」, 『문장』 1939년 12월. p.126~129.</ref>}}
원고료에 양계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현진건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방인근은 "박씨 성을 가진 친구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했다) 기미(期米) 사업을 시작하지만, [[1940년]]에 당시 명동에 있던 증권회사에 미두를 투자했다가 그것이 모두 실패하면서<ref>이재민, 「새 자료로 본 빙허의 생애」, 『문학사상』 1973년 4월. p.355.</ref> 양계장이나 다른 재산, 부암동에 있던 집도 처분하고 신설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의 조그만 초가집(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 137번지 61호)으로 이사해야 했다. 이 실패로 현진건은 더욱 술에 빠져 살게 되었고 결국 '혈압' 때문에 쓰러져 눕게 되었다(이 해에 현진건의 단편소설과 역사소설 「무영탑」이 박문서관에서 「현진건 단편집」과 「무영탑」으로 발간되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기자였던 양재하가 만든 친일잡지인 『춘추』 4월호에 소설 「선화공주」를 연재하지만 9월호에서 중단하였다(미완).
== 혈육 및 친척 관계 ==
숙부 '''[[현영운|영운]](映運)'''은 아내 [[배정자|분남]](粉男)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것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여, 장관급인 대한 제국 군령부 참장, 주일특명전권공사, 원수부 검사총장, 참모부 제1국장, 농상공부 협판 등의 고위직을 거친 구한말의 전형적인 친일관료였다. 이러한 그의 벼락출세가 영운의 형제들의 관직 진출에 음으로 양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 '''경운'''은 지위가 정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고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거쳐 [[1895년]] 대구부 전보사의 주사로 취임하기도 했다.<ref>당시 전보사는 농상공부대신의 관리를 받으며 전보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였으며, 1등사와 2등사로 구분되었다. 한성(서울)과 인천, 원산, 부산, 의주, 경성, 함흥, 회령이 1등사에 속했고 대구는 2등사였다. 통신원 국장이란 직책은 수준은 미비할 망정 국가의 전신, 전화, 전기는 물론 우편과 운송 분야와 관련한 시설과 제도를 관리하는 자리였기에 아무나 역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3~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숙부 '''철운'''은 안동관찰부 주사 겸 용궁군수를 지냈다. 숙부 '''양운'''은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궁내부 예식원주사에 태복시 기사 등을 지내고 [[원산]]과 [[동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으며 [[대한체육회]] 창설 멤버로 알려져 있다. 숙부 '''붕운'''은 태복시 주사를 지냈다.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각사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무 6년([[1902년]])에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과<ref>《각사등록》 광무 6년(1902년) 7월 28일조. 이듬해인 광무 7년(1903년) 4월 23일(양력 5월 19일)에 면관되었음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다.</ref> 칭경시(稱慶寺)의 예식사무위원(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ref>《승정원일기》 광무 6년([[1902년]]) 6월 24일조. 그러나 광무 7년(1903년) 2월 28일(양력 3월 26일)에 해임되었다(《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록).</ref>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현정건|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 관련 인물 ==
* [[이무영 (소설가)|이무영]] - [[1955년]] 8월 30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된 이무영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1932년]] 처음 중편소설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을 때 별다른 반응이 없이 문단에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 "오직 빙허(현진건) 선생이 꾸준히 읽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먼동이 틀 때」를 연재할 수 있도록 서항석과 더불어 힘을 써준 것도 현진건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만 이무영이 친일로 돌아선 것을 현진건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후 이무영과 현진건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술과 관련해 하루는 『조선문단』에 함께 작품을 기고하던 염상섭이나 [[김동인]]·나도향·[[양주동]] 등과 잡지사에 모였다가 저녁에 술을 마시는데, 술에 취해 저마다 "나는 조선의 [[괴테]]가 될 테니 자네는 (조선의) [[톨스토이]]가 되게", "나는 베르렌이 될테니 너는 [[안톤 체홉|체홉]]이 되라" 등의 주정을 늘어놓으면 곧잘 "그놈의 톨스토이, 괴테 좀 집어치우시오" 하고 큰소리치곤 했으며<ref>「문단이면사」(46) '방인근과 조선문단', 『경향신문』 [[1983년]] 12월 24일자 제7면 기사.</ref>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명월관에서 있었던 사원들끼리의 송년회식 자리에서 「동아일보」 사장에게 "이 놈아, 먹어, 먹으라고."하며 술을 권하다가 급기야 뺨까지 때렸다. 하지만 사장은 현진건을 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4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다만 이때 현진건에게 뺨을 맞았던 동아일보 사장이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였는지 [[김성수 (1891년)|김성수]]였는지는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다).
* 부부생활과 관련해서는, 지인 대부분이 "아내만을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사실 그 시절에 부인 외의 다른 여자와 연애하며 따로 살림을 차리기까지 하는 일은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김동인]]처럼 아예 자기 아내를 버리고 평양에서 서울로 거처까지 옮겨서 기생집을 전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기만은 "자기보다 두 살 더 먹은 아내를 일생을 두고 한결같이 사랑하였을 뿐이요, 다른 여자하고는 깊은 관계를 맺은 일은 없었다"고 했으며, 방인근은 "요릿집에서 술자리를 같이 할 때, 기생이 옆에 와서 지근덕거리면 미남에다가 신문기자라면 기생들이 홀딱 반해서 덤벼드는 시절이니 그러면 빙허는 좋아하는 체 대꾸를 하면서도 쌀쌀하게 범접치 못할 기상으로 난잡하게 굴지 않는다"고 회고하고 있다. 현진건의 아내 이순득도, 남편이 아침에 새로 입고 나간 황라 두루마기와 비단 마고자가 술 때문에 엉망이 되어 들어와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ref>문인들의 이러한 '딴집 살림'은 전통적인 현모양처 교육을 받은 소위 '구여성'과의 조혼을 괴로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데서 온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8~5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생가는 주소만 남아있을 뿐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인왕산]] 밑의 부암동 자택은 종로구에서 공용주차장을 짓기 위해 2003년에 헐어버려서 지금은 터와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이 남아 있다. 당시 그 생가의 철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행정당국은 '민간인 소유자와 부지 매입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는데<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11/h2007110618342324420.htm#none 편집국에서-사라지는 문학의 고향, 한국일보 2007년 11월 6일자 기사]</ref> 2012년 10월 4일에 [[안평대군]]의 사저와 함께 법원경매에 부쳐졌다. 유언에 따라<ref name="cho"/> 화장되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장리에 매장됐었으나 그 후 남서울 개발관계로 묘소가 사라져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 하정우(영화감독) . . . . 46회 일치
||<#878787> '''{{{#EEE156 학력}}}''' ||<(> 임실초등학교[br]관촌중학교[br]임실고등학교[br][[중앙대학교]][* 중앙대학교 연극, 영화학과는 2007년에 안성캠퍼스에서 서울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즉 97학번인 하정우가 재학 중이었던 시기에는 학과 자체가 안성캠퍼스 소속이었다.] 연극학과 ||
||<#878787> '''{{{#EEE156 본관}}}''' ||<(> [[광산 김씨]] ||
'''충무로에서 손꼽히는 티켓파워를 가지고있는 최연소 누적 관객수 1억 배우'''
2018년 8월 기준 주연작 누적 관객수가 1억 명 이상으로, 이는 [[송강호]]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주연작 누적 관객수 1억을 돌파한 기록이다. 주조연 전체로 보면 역대 다섯 번 째로 누적 관객수 1억을 돌파, 대한민국 배우 흥행 5위 기록이다. 무려 만 40세에 이런 대기록을 세운 것. 1억 관객 돌파 배우 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오달수의 만 46세 기록을 무려 6살이나 단축했다. 본인보다 연기 경력이 훨씬 오래된 선배 배우들과 흥행 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며, 또래 배우 중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다.
기초군사훈련이 끝나고, 연극 전공자여서 그랬는지 국군 홍보 관리소에 [[자대배치]]를 받게 되는데 군대 동기가 개그맨 [[강성범]]이고, 군대 선임이 [[무한도전]]에도 종종 출연했던 [[최대웅]] 방송작가였다. 복무가 1년 정도 지나 상병이 된 2000년 초에 호주에서 하는 국군공연으로 파병가자고 속인 강성범 때문에[* 원래는 육각수 멤버 [[조성환]]이 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안 가게 되어 아무것도 몰랐던 하정우가 가게 된 거라고..--안습--] 내전 중인 [[동티모르]] 원주민 위문 국군공연단으로 배를 타고 해군들과 함께 3개월 간 파병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가는 데만 17일이 걸렸고 멀미 때문에 상당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대신 원래 긍정적인 성격 탓인지 본인 말로는 가서 [[바나나]]도 많이 먹고, 강성범과 만담 공연도 하면서 평소에 강성범의 [[수다맨]][* 당시 강성범은 제대 후 개그콘서트에서 이 수다맨 코너 + 봉숭아 학당 코너의 연변총각 개그로 개그계 스타로 떠올랐다.] 연습을 돕기도 하는 등 나름 재미있게 적응했다고 한다.
처음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춘 건 [[2002년]]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이고, 드라마 데뷔는 [[2003년]]의 [[사극]] 《[[무인시대]]》에서 [[이의민]]의 아들이자 3류 악역인 이지광 역이었다. 이 역할이 스타로 거듭난 지금의 하정우 이미지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시청자들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충공깽]]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여기서도 닭백숙 먹는 연기가 일품이다. [[무인시대]] 항목 참조. 그리고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과 배우를 연결하면 아주 재미있어진다.] [[영화]]에 처음 출연한 건 [[조인성]]이 주연했던 [[2002년]] 영화 《[[마들렌]]》이다.
다음 해인 [[2008년]]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젊은 배우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드라마 《히트》와 영화 《추격자》는 둘 다 [[유영철]]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하정우는 《히트》에서는 검사 역을, 《추격자》에선 반대로 살인마 역을 맡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실제 사건에 대한 분위기가 흡사하게 조성된 《추격자》와 달리 《히트》는 경찰, 검찰과 범죄자의 심리 싸움 등이 주된 서사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그냥 유영철 사건에서의 모티브만 따온 것이고 내용이나 분위기나 인물들 자체가 실제 사건과는 차이가 많이 있어 그렇게 유영철 사건 느낌이 많이 나는 작품은 아니다.] 《추격자》는 하정우 뿐만 아니라 주인공 엄중호 역할이었던 [[김윤석]]도 살벌한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연기인지 실제인지도 모를 무아지경의 장면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 영화에서 지영민이 중호에게 쫓기며 한밤중 골목길 추격전을 벌이다 코너에서 미끄러지며 넘어지는 장면은 원래는 NG였는데 너무 리얼했던 나머지 [[나홍진]] 감독이 그 장면을 버리지 않고 그냥 썼다는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다. 이렇게 영화는 성공했지만, 그 덕(?)에 험악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돼 고생 좀 했다고 한다...[* 실제 살인마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사실 브라운관의 악역 역할을 맡는 배우들이 시장에서 험한(?) 꼴 당한다더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건 세계 어디서나 다반사다.] 주변에서 연쇄살인마 역할을 맡는 것을 말렸으나 전작 《프라하의 연인》에서의 말랑말랑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이 싫어서 이 역할을 선택했다고 한다.
[[2013년]]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영화)|베를린]]》에서 주인공 [[표종성]]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가 관객 수 700만 명을 넘기면서 당대 최고의 흥행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는 평. 또한 같은 해 7월에 개봉한 《[[더 테러 라이브]]》는 하정우의 단독 주연작에 같이 개봉하는 《[[설국열차]]》가 있어서 흥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평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550만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2014년]] 다시 한 번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는 백정 돌무치로 변신해 머리까지 밀고 열연하였지만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2015년]] 1월 하정우의 두 번째 연출작인 《[[허삼관]]》이 개봉했지만 여러가지 평가 속에서 흥행하지 못하였고, 7월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는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으며 데뷔 후 첫 천만 영화를 보유하게 되었다.
[[소재원]]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터널(영화)|터널]]》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터널 속에 갇힌 38세 자동차 딜러 [[이정수(터널)|이정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2016년 8월 10일 개봉되어, 개봉 12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여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최종관객은 712만 명으로 흥행 대성공.
2017년 12월 20일에 개봉한 《[[신과함께(영화)]]》에서는 저승사자 강림 역을 맡았다. 주호민 만화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신과함께(영화)]]》는 그의 두 번째 천만 영화가 되었다. 2017년 12월 27일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1987(영화)|1987]]》에서 검사 역할도 맡았다. 황해 이후 오랜만에 [[김윤석]]과 호흡을 맞추고, [[유해진]], [[강동원]], [[김태리]]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또 다른 영화 《[[신과함께(영화)|신과함께]]》와 개봉 시기가 비슷하여, 그의 영화 두 편이 동시에 영화관에 걸리게 되었다. --하정우 대 하정우-- 이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2018년 1월 현재 [[신과함께-죄와 벌]]과 [[1987(영화)|1987]]이 동시에 흥행하면서 약 2,100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단숨에 누적 관객수 9,3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한국 영화]] [[배우]] 누적 관객수 6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018년]] 8월, [[신과함께-인과 연]]이 기록적인 흥행을 이어나가며 개봉 6일 차인 8월 6일, 만 40세로 역대 최연소 1억 관객 돌파 기록을 세웠다. 주연작만 계산하면 [[송강호]]에 이어 역대 두 번째 1억 관객 돌파 기록이며, 주조연작을 포함하면 역대 다섯 번째 1억 관객 돌파 기록, 전체 동원 관객 수 5위에 해당한다.
하정우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역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연기력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한국 영화)|용서받지 못한 자]]》의 에이스 병장에서부터 《[[비스티 보이즈(한국 영화)|비스티 보이즈]]》의 양아치 [[호스트바|호스트]], 《[[추격자]]》의 냉혹무비한 [[연쇄살인마]], 《[[국가대표]]》의 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온 스키점프 선수, 《[[황해]]》의 조선족, 《[[의뢰인]]》의 변호사,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조폭과 《러브픽션》의 찌질한 소설가, 《[[베를린(영화)|베를린]]》의 비밀요원, 《[[더 테러 라이브]]》의 오만하고 가식적인 앵커, 《[[허삼관]]》속 아버지와 《[[암살(2015)|암살]]》의 낭만자객 하와이 피스톨, 《[[터널(영화)|터널]]》의 자동차 딜러까지 전혀 다른 배역을 위화감없이 소화해낸다. 연기력만으로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뢰감을 주는 배우이다.
연기공부가 안 풀릴 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아무 생각없이 사온 스케치북에 끄적거리던 게 포텐폭발. 처음에는 유명인이 그림을 발표한 점에 대해 '유명세로 뭣도 아닌 게 그림 그리는 척한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곧 그림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인정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미술잡지나 미술평론가들의 칼럼에서 익명으로든 실명으로든 까이고 있다. [[조영남]]의 그림이 [[피카소]]의 표절인 것처럼, 하정우의 그림도 외국의 [[장 미쉘 바스키아|어느 작가]]를 베낀 정도에 불과하다고....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하정우를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라는 헛된 자신감으로 현대미술가 행세에 나선 (망신스러운) 사례"라고 깠었는데, 현재 해당 글은 삭제된 상태이다. 그리고 [[안나 메리 로버트슨 모제스|저 글이 개소리임을 증명하는 실존 인물]]도 있다.]국내 H·art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뉴욕, 홍콩 등지에서도 전시를 했다. 다만 직업 화가들도 꿈꾸기 힘든 개인 작품전을 하며 유명한 전시관을 대관 받은 것은 여타 전시전을 했던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창작품의 작품성보다는 본인의 연예계적 인지도가 관여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정우 라이트 팬이 신분을 속이고 친구 대신 다녀온 캠프 인증글이 디시인사이드 기타 국내 드라마 갤러리에 올라와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고 각종 사이트로 배달되며 화제가 된 사건. 하정우가 더 테러 라이브, 군도 촬영 전 팬미팅 성격의 캠프를 주최하였다. 하정우와 정경호를 비롯한 후배들 대거 참여(전날 롤러코스터 크랭크업을 했다고) 피의 선착순 댓글을 뚫고 캠프에 당첨된 하정우 팬 80명은 경기도 모처 살얼음이 낀 논두렁 위에서 팀을 나누어 단체 티셔츠를 입은 후 각종 게임을 하였다. 퀴즈 1등 상품은 하정우 그림액자(하정우가 직접 시상). 참가 후기에 따르면 하정우는 동네 형과 싱크로율이 100%라는 이야기가.. 본인이 질식할 만큼 말보로 화이트를 석션했다카더라.. 80명의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털털하게 소맥을 마는데 이 때 머리 크기가 배우치고가 아니라 일반인 치고도 크고 아름다운 사이즈라 카더라. 마지막날 1대1 딥포옹 셀카 촬영 등 지옥의 팬서비스. (하정우에겐 호된 경험이었는지.. 그후 2차 캠프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없는 실정이라고) 이후 하정우 캠프에 대타로 참가한 글쓴이는 하정우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하정우 티셔츠를 맞춰 입고 하정우 앞에서 단체 줄넘기 하던 자신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캠프 이후 하정우가 나오는 영화를 잃었다는 안타까운 썰이 있다.
* 2008년 개봉한 히어로 영화 [[아이언맨|아이언맨1]]에서 당시 [[만다린(마블 코믹스)|만다린]] 역에 캐스팅 제의를 받고 오디션까지 봤다고 한다. 시나리오의 변경에 따라 만다린 배역은 없었던 것이 되었고, 그 만다린 역할은 다시 부활하여 [[아이언맨 3]]에서 [[벤 킹즐리]]가 맡게 되는데… --[[맥주/목록#s-2.1|우리는 지구상 최강의 맥주 먹방을 할리우드에서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만다린과 관련한 새로운 [[Marvel One Shot#s-2.5|떡밥]]이 나옴에 따라 어쩌면 다시 가능성이… 생기는걸까?
* 2012년 오후 10시 30분쯤 가로수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운전]] 뺑소니를 '''당했는데 200m 가량을 직접 추격한 끝에 직접 맨손으로 피의자를 검거'''하여 ~~[[추격자|영화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경찰에 신고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421&aid=0000056261|관련기사]] 이 때 당시 영화 베를린을 찍으면서 몸을 만든 상태라 '''체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였고 ~~잘못 걸린 거다. 하필이면...~~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가로수길 근처에 살아''' 그 골목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추격해서 잡았다고 한다.
* 영화 허삼관을 연출하면서 아역 일락이 형제를 뽑기 위해 약 1,600명의 아이를 만났다고 한다. 하정우의 소속사에 있는 아역 배우는 물론이고 그들의 형제들까지 모두 오디션을 보게 했다.
* 허삼관에 [[하지원]]을 캐스팅 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내용들을 포함한 '''월간 허삼관''' 잡지를 만들어 [[하지원]]에게 꼬박꼬박 보냈다고 한다. 하지원은 원래 허삼관을 고사하려 했으나 하정우의 이러한 지극정성 덕에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 황해를 촬영하면서 [[피부]]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피부가 좋지 않은 하정우는 인기를 얻으면서부터 피부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추격자 촬영 당시에 [[김윤석]]과의 싸움신을 촬영하면서 피 분장을 지우지 않은 채로 며칠을 보냈고 그 결과 색소가 피부에 침착되었다. 안그래도 좋지 않던 피부가 더 안 좋아진 것! 하지만 섹션 TV와의 인터뷰에서 마음에 맞는 [[피부과]] 의사선생님을 만났다며 몇 달 뒤에 피부가 완성된다고 즐거워 하였지만 황해를 촬영하면서 리얼리티를 엄청 중요시하는 나홍진 감독의 요구에 따라 로션 하나 바르지 않고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긴 시간 동안 촬영에 임했다. 그 결과 하정우의 [[피부]]는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버렸고 팬들은 고화질 화면에 나오는 하정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에 "세륜 나홍진"를 외친다. 이후에 어떻게든 복구하고 있는 듯.
- 김연경(배구선수) . . . . 44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3, top1=배구, top2=배구 관련 인물, top3=장신/목록)]
[include(틀:관련 문서3, top1=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top2=소녀가장, top3=보이시)]
|| '''가족 관계''' || [[아버지]] 김동길, [[어머니]] 이금옥, [br] [[언니]] 김혜경^^(1982년생)^^, 김희경^^(1985년생)^^ ||
불 같은 성격[* 의사와 상관없이 곧바로 화를 표출하는 불같은 성격은 신경계 연결 시스템이 유전된 것인데, 이것도 자식에게 유전된다고 한다.]과 승부욕이 있으며, 욕을 잘하는 편이고, 솔직한 걸 넘어서 직설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황하기도 한다.[* [[나 혼자 산다]]에 출연했을 때, 배구선수 한유미와 밥 먹는 자리에서 한유미에게 "언니는 성격이 드세고, 옆에 있는 사람이 힘들기 때문에 결혼하긴 힘들꺼다." 라고 해서 [[한유미]], [[양효진]]을 당황시켰다. 물론 한유미와 매우 친밀한 사이라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이렇듯 내면에 있는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는 편.]
이렇게 프로 입문 전부터 배구계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 왔고 그래서 김연경을 잡기 위해 2005년 원년 V-리그 당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과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가 꼴찌 쟁탈전을 벌이는 [[병림픽]]을 또 한 번 저질렀는데,[* 2005년 드래프트 이전에도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과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의 1순위 잡기 병림픽은 배구 팬들에게 유명하다. 2003년에 [[김민지(배구선수)|김민지]], 2004년에 [[나혜원]]과 [[황연주]]가 이 병림픽 대상 선수.] 결국 흥국생명이 ~~져주기를 했다~~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에게 패해 리그 꼴찌로 마감하였고, 2005-06 V-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김연경을 지명하였다. 이후 2005-06 시즌에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꼴찌에서 정규 리그, 챔피언 결정전 통합 우승을 차지하는 대박을 터뜨린다. 반대로 꼴찌를 하고 물러난 [[박삼용]] 전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 감독(현 상무 감독)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뼈 있는 말~~이라 쓰고 [[현실은 시궁창|현실은 개소리]]~~[* 인삼공사 감독 시절 보면 답이 나온다. 주전들이 모두 은퇴하자 갑작스레 구단에서 사퇴하여 이후 인삼공사 망가뜨린 주범이다.]을 남긴다. "'''훌륭한 선수만 필요하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굳이 필요할까'''?"
2005-06시즌 신인왕 수상. 그것도 모자라 정규 리그 MVP, 챔피언 결정전 MVP까지 모두 싹쓸이하는 괴력을 보였다.[*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신인왕-정규시즌 MVP 동시 수상은 김연경 포함, KBL 2001-02 시즌의 [[김승현(농구선수)|김승현]]과 프로야구 2006 시즌의 [[류현진]]이 있다. 그런데 둘 다 KBL 파이널/한국시리즈 MVP는 수상하지 못했다. 김승현은 2001-02 시즌 파이널에서 맹활약했긴 했지만 MVP는 [[마르커스 힉스]]가 탔다. 류현진은 [[2006년 한국시리즈|팀이 삼성에게 패퇴]]하며 코시 MVP는 커녕 우승도 하지 못했다. 신인왕-한국시리즈 MVP는 프로야구 2005 시즌의 [[오승환]]이 있으나 이 해 정규시즌 MVP는 [[롯데 자이언츠]] [[손민한]]이 수상했다. 따라서 신인왕-정규시즌 MVP-파이널 MVP를 데뷔 시즌에 모두 쓸어간 사례는 김연경이 유일하다.] 덤으로 서브상, 득점상, 공격상, 보너스로 트리플 크라운 1회 달성하였다. [* 데뷔시즌 6관왕]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현 연고지는 [[인천광역시]]이지만 김연경이 뛰던 당시에는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캐피탈]] 더불어 천안 [[유관순체육관]]을 홈경기장으로 사용했었다.]에서 뛸 때는 공격 순위를 거의 혼자 정복하면서 리그를 평정, 2005-06, 2006-07, 2008-09시즌 V리그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 시기 김연경을 막아낸 팀은 2007-08년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 단 한 팀이다.
어쨌든 이런 사정을 접어두고라도, 김연경은 일본 프리미어리그에서까지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니 일본 리그의 감독들까지 '''일본에서조차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만들었다.[* 물론 당시 일본 여자배구에는 오야마 카나(大山加奈), 구리하라 메구미(栗原惠), 기무라 사오리(木村沙織) 등 대형 거포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야마는 전성기가 너무 짧았고, 구리하라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에 폼이 급격히 무너졌으며, 기무라는 이 둘보다는 기량이 서서히 떨어지기는 했지만, 2010년대 초반 들어서는 예전만도 못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여자 배구에 한류 열풍을 몰고 온 좋은 케이스. 2009-10 시즌 초에 신종 독감으로 고생하더니 2010-11 시즌 초에 역시 독감으로 몇 경기 결장한 바 있다. 그래서 팬들의 가슴을 졸이기도. 하지만 결국 천천히 컨디션을 끌어올려 JT 마블러스의 시즌 우승을 또 한 번 이끌어 냈다.[* 2011 [[도호쿠 대지진]]으로 일본 V리그는 잔여경기에 상관없이 시즌을 강제 종료했다. 이로인해 정규 리그 최종 성적이 시즌 통합 성적으로 인정되어 정규 시즌 1위였던 JT 마블러스와 사카이 블레이저스가 2010-11 시즌 우승팀이 됐다.]
터키 아로마리그에서 시즌 무패로 정규리그 1위를 달성했다.(플레이오프 최종 3위) 거기에 CEV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했다. [[MVP]]와 득점왕을 수상했다. 공격, 서브 분야도 1위이다.[* 한 선수가 죄다 독식하면 안 된다고 해서 2관왕 먹었지만 사실은 4관왕인 셈이라고.] 팀은 22연승. ~~홍진호~~ 뭔가 일본에서 본 것 같은 기사가 다시 보인다. ~~그냥 기분 탓으로 하자~~
그리고 종료 후 아제르바이잔 리그, 중국 리그 등 타국 리그의 팀에서 연 20억을[* 세계배구계에서는 사실상 최고 연봉 금액이다. 야구, 축구, 농구 등 리그 풀이 큰 리그의 고액연봉자에 비해서는 분명 많은 편은 아니지만. 참고로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로베르틀란디 시몬]]의 연봉이 이 정도다.]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구애 속에서도 거취 문제 당시 도와줬던 것을 잊지 않고 페네르바흐체와 2년 재계약에 합의했다.[[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8&aid=0002300250|관련 기사 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366&aid=0000247757|관련 기사 2]]
2016-17 시즌 정규리그에서는 바키프방크에 이어 2위를 차지해 포스트시즌에 올라갔다. 준결승에서 골든 세트에 듀스까지 간 끝에 엑자시바시를 꺾고 먼저 결승전에 진출했고, 남은 한 자리에 [[갈라타사라이]]가 올라오면서 무려 리그 결승전이 [[이스탄불 더비]]로 치러졌다. 과연 1경기부터 응원열기가 과열되다 못해 2경기에서 경기 중 관중이 총을 쏘는 대형 사고가 터져 결국 2층 관중 전체가 퇴장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 외에도 양 팀 감독이 경기 중 서로 말싸움을 벌인다던가 하는 등 살벌한 더비전 끝에 페네르바체가 3연전 모두 3-0으로 셧아웃시키면서 우승을 달성했다!
2012년 9월 7일 14시에 김연경의 이적 문제에 관련한 기자회견을 연다고 [[대한배구협회]]가 밝혔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김연경을 위한 결론이 나오진 않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한편 이런 가운데 2012년 [[국정감사]] 때 '김연경 사태' 가 이슈로 떠오르며[* 국정감사가 있기 전부터 김연경의 팬들이 중심이 되어 SNS를 통해 정치권에 구명 활동을 벌여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화답을 하면서 불씨를 지폈다.] 정치권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2012년 10월 19일 김연경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해줄 것을 호소했으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8&aid=0002931824|기사 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271983|기사 2]]) 이 날 국회 문방위원회가 주재한 국정감사 정책질의에서 민주당 최재천 의원 등이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에게[* 이 날 감사는 대한체육회를 포함한 5개 기관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대통령 하고 싶다고 나대신~~ 대한배구협회장 임태희는 출석하지 않았다.] 국제이적동의서 발급 및 FA 규정 개정을 촉구하였다.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89937|#]] 사태가 커지자 결국 2012년 10월 22일 [[대한배구협회]]는 김연경에게 1년 기한의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할 것을 결정했다.
2013년 7월 1일,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결국 김연경을 [[임의탈퇴]] 공시했고, [[한국배구연맹]](KOVO)는 이를 승인했다.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입장으로는 김연경이 해외 진출하는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지원 ~~뭐?~~ 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공신력 있는 기관의 결정을 무시했다며 ~~뭐??~~ [[임의탈퇴]] 공시를 했다고. 다만 김연경이 규정을 준수하고 성의있는 사과를 한다면 ~~선수계약이 아닌 [[노예]]계약~~ 임의탈퇴를 해제하겠다고. ~~지금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듯한데?~~
문제는 그 때문에 세계급 에이스가 국내에 발목잡히고 만 것. 이에 팬들은 ~~이런 흥국생명의 입장을 알려주면 알바 취급하면서~~ 흥국생명'''만''' 깠다. 하지만 김연경도 리그의 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책임도 있다. 애초에 흥국은 임대료도 못받은것으로 알려졌다. '''그걸떠나 규정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구단이 리그 의사와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 계약을 했고 리그가 이를 방치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KOVO의 주체 중 하나가 바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임을 고려하면...
이후 긴급 기자회견이 기자회견이 아닌 김연경 측의 일방적인 발표였고 에이전트가 기자들의 질문을 전면 차단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김연경은 7월 24일 [[기독교방송|CBS]]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입장을 [[http://www.youtube.com/watch?v=6rryyZA0-GI|자세히 밝혔다.]] 한편, 협회와의 대화를 하러 변호사와 에이전트와 대동했으나, 협회에서는 이 조력자 둘을 빼고 김연경과 직접 대화를 했으며, 협회 관계자가 김연경에게 폭언을 했다는 후문을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남기기도 했다.
더군다나 김연경의 원 소속구단이 되고 싶었던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의 글자를 FIVB가 지워 줌으로써 후에 이적시 발생할 김연경의 이적료는 고스란히 [[대한배구협회]]가 챙겼다. 김연경의 해외 이적을 계속적으로 방해하는데 한몫했던 배구협회는 생각지도 못한 이적료라는 콩고물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돈은 배구회관 관련 대출 상환으로 꼴아박고(...)~~
추가적으로 김연경 이적 파동과 직접 당사자였던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구단, [[대한배구협회]], [[한국배구연맹]]의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얽히고설켜 삽질을 했다는 내용이 밝혀졌다. 박상설 KOVO 前 사무총장이 기금전용 문제로 궁지에 몰려 있었고, 대한배구협회 임태희 회장은 김연경 이적 파동이 생기려고 하던 시점에 공석이었던 KOVO 총재 자리에 눈독을 들이며 물밑 작업을 시도했었다. 여기에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이 국제이적동의서(ITC) 발급주최인 [[대한배구협회]]에 떡밥을 던졌고,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권광영 단장은 당시 KOVO 총재 추대위원회에 속해있어 KOVO 총재에 눈독을 들이던 임태희 회장의 [[대한배구협회]]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또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온갖 비리혐의로 궁지에 몰려 있던 박상설 총장에게도 추파를 던져 박 총장에 대한 연임 지지를 약속하며 김연경의 해외진출건을 KOVO 이사회 차원에서 막아달라는 ‘딜’을 성사시켰다. 이후에 임태희 회장이 새누리당 18대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하고, [[대한배구협회]] 전무이사의 ITC 발급 불가에 대해 SNS 구명활동에 응하는 엉뚱한 짓으로 우왕좌왕하며 망신을 자초했다. [[http://m.mk.co.kr/entertain/home/2014/213724|해당기사]]
다만, 아직까지 중국 리그가 빅리그가 아닌 관계로 2018년 오프시즌 때 여러 리그의 복수의 팀들이 김연경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결국 [[터키]] 리그의 강팀 중 하나인 엑자시바시로 이적하게 됐다.
우선 남자 프로구단은 한 시즌 동안 정규리그 36경기를 치른다. 여자팀은 이보다 6경기가 적은 30경기를 소화한다. ~~여자배구 구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반대해서 그렇다~~ 이는 자연스럽게 시즌을 더 많이 뛰어야 하는 것을 기준으로 연봉 책정에 반영됐다. A구단 관계자는 "남자부가 팀 당 경기 수도 많기 때문에 당연히 연봉도 더 높게 책정해야 된다."라면서 "게다가 남자 선수들은 군 입대를 해야 되는 선수들까지 고려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샐러리캡이 여자보다 더 많을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 박명수(MC) . . . . 44회 일치
||<#595959><:> {{{#FFFFFF ''' 본관 ''' }}}||<(> [[밀양 박씨]] ||
데뷔 초부터 방송계에서 활약하며 어느 정도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유명한 개인기인 이승철 흉내내기부터 배경 음악을 히트시킨 월매 댄스, 이회창 연기를 시도했던 3자토론 등 잘 알려진 개그들이 많다. 그러나 '''특유의 막개그 때문에 워낙 비호감 캐릭터였다.''' 무한도전 이후 "막나가지만 정이 많은" 츤데레 캐릭터로 정립되며 호감을 많이 얻었지만, 저 당시는 "겉으로는 지랄맞아도 속은 따듯한"같은 캐릭터가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때 였으며 박명수 또한 편집자들이 이미지관리를 해줄 정도로 대형스타는 아니라 완전한 비호감 캐릭터였다.
== 인간 관계 ==
[[유재석]] 외에는 몇 줄 안되는 것을 봐도 알겠지만, 유재석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명수의 tv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모습은 모두 유재석과 같이 있을때, 편안해할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다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무한도전 대기실 몰래 카메라나 주변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유재석에겐 맛있는 음식 등을 챙겨주면서 본인들은 거들떠도 안봐 왜 재석만 챙기냐고 불평하기도 한다고 한다.[* 해당 방송분은 2009년 김연아 특집때다. 물론 박명수는 "얘가 살아야 우리가 다 살아!!"라며 쿨하게 무시해주신다.] 그리고 대략 2012년 장기 파업간에 [[노홍철]]과 부쩍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무한도전을 보다보면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박명수는 항상 밥을 혼자 먹는다고 한다. 천하의 유재석에게도 밥먹자고 한 적이 없는데 그 파업기간동안 노홍철에게 같이 짬뽕 먹자는 전화를 해서 굉장히 놀라웠다고 한다. 또 노홍철 역시도 2009년 의좋은 형제들이나 2011년 짝 특집까지만 해도 유재석에게 쌀을 갖다주며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제일 가깝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후, 2014년 도둑들 특집때는 유재석을 튀통수치고 박명수와 짝을 맺음으로써 이들의 관계가 많이 발전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사실 방송분을 이미 2007년 부터 박명수가 노홍철만큼은 인정하고 이뻐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미존개오로 뜬 정형돈은 인정안해도 노홍철에게는 '너(노홍철)는 인정해'. and '길바닥출신이긴 해도 잘해'라며 박명수식 애정표현인 셈(...)] 또 프로그램 상에서는 티격태격하지만 정준하와도 잘 지내는 듯.[* 2011년 짝 특집때 서로 애정을 표하며 짝이 되기도 했고, 2014년 비긴어게인 특집때도 친구케미를 보여주고 2016년에 서로 국물을 떠다주는 sns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티격태격 하는건 방송컨셉이라는 건 이미 2013년 마이너리티 리포트 특집때 밝혀졌다. 싸움거는 박명수에게 뻘쭘해진 정준하가 왜 방송만 들어가면 그러냐고 묻자, 할게 없어서 라고 대단한 것이 좋은 예.] 또 무리한 도전, 무모한 도전 시절에는 정형돈과도 많이 엮였고,[* 설문조사에서 정형돈이 5위, 박명수가 6위를 도맡아 해서... 다만 박명수와 정형돈은 성격상 서로 잘 맞는 편은 아니다. 아무래도 직설적이고 마음에 없는 좋은 소리를 못하는 쿨남 박명수와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정형돈은 서로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그게 방송에서 많이 나타나기도 했고.] 하하와는 소속사가 같아서 하하를 많이 도와줬다. 당시 하하는 웃음담당이라 하하가 별로 웃기지 않아도 크게 웃어줬다고 한다.
[[이경규]]하고도 선후배 사이로 잘 지내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이유]]하고는 거의 G-PARK 식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양쪽으로 서로 사이좋게 많이 도와준다.[* 아이유와는 이상하게 접점이 많은 인물이다. 아이유가 뜨기 전 2010년에 게릴라 콘서트 할때 바쁜 제시카를 대신해 냉면 대타로 왔었고 2013년엔 런닝맨에 게스트로 둘이 동시에 출연하고 2015년 가요제에선 둘이 같은 팀이 되었다. 의도된 만남도 아니고 서로 접점이 그닥 없는데도 여러번 엮었던 신기한 운명(?)] [[무한도전]]에서 보면 집안팀이 조세호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할때 아이유를 부르려 했던것도 보면 사이가 좋은듯 하다. 그리고 [[탁재훈]]과도 꽤 사이가 돈독하다.[* 사실 최근에야 어떤지 알수가 없지만 2010년 뜨거운 형제들을 할때 보면, 박명수는 무한도전에서도 웃을때 주변 눈치를 보거나 누군가를 쳐다보며 웃는 리액션을 하곤 하는데, 뜨거운 형제들에서 웃을때면 항상 탁재훈을 마주보며 웃는 편이고 부를때는 탁형 or 재훈이형 이라며 살갑게 부르는 몇 안되는 형들 중 한명이다. 밑에 서술되어 있기도 하지만 박명수는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기가 쎈거나 디스하는 사람과는 궁합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탁재훈은 박명수에게 상당히 편한 형이다. 이를테면 런닝맨에서 지석진과 유재석 정도의 관계. 서로 성향과 웃음코드가 비슷하다 보니 잘 맞는 듯.] [[김구라]]와는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방송을 통해 말을 빌리자면 '서로 리스펙하는 사이'다.[* 참고로 이 말을 먼저 꺼낸 건 항상 박명수를 디스하는 김구라 본인이다. 겉으로는 무식하고 교양없다고 욕하는 김구라지만 내심 속으로는 인정한다는 소리. 둘이 동갑내기이기도 하고 미운정 고운정 정도 있는 듯] 후배이자 동갑내기인 [[김현철(코미디언)|김현철]]을 자주 챙기는 모습도 있다.[* 2008년에 땜빵이 부족하자 박명수는 친구 김현철을 섭외하려고 했는데 이전에 막말 전과가 때문에 꺼림칙 했던 PD가 가장 나중에 섭외하자며 만류했다. 그리고 머쓱해진 박명수는 "개 오지 말라고 그래' 라며 애써 쓴웃음을 짓기도..]
평소에 대인관계가 썩 좋은 편은 아닌 박명수에게도 의외로 여자들에게는 꽤나 친절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아내를 끔직히 생각하는 나름 공처가 이기도 하고, 2009년 품절남 특집에서 여자작가 몰카를 했을때에 무심한 듯 시크하게 여자작가를 끌어내서 츤데레의 정석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고, 2011년 미남이시네요 특집 오프닝에선 빵을 한가득 사와 여자작가들에게 먹으라고 나눠주는 모습도 포착되고 같은 해 사생결단 특집에서 정형돈이 자기 코디에게 박명수와 정준하 중 누구를 구하겠냐고 묻자, 미선 코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명수오빠라고 대답했다.[* 의외로 속정,잔정이 많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2010년에 있었던 '뜨거운 형제들' 에서도 막장 상황극을 통해 진단한 전문가가 의외로 가정적이고 자상한 면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또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다양한 노력 여심 어워드때에는 여성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하는 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이보다는 다른 방송사 공채 출신을 기용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라고 볼 수 있다. 실상 방송국 간 희극인들의 교류가 시작된 것 자체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그전까지만 해도 타 방송사 연예인은 방송 출연은커녕 프로그램 내에서 언급조차 안하는 것이 관례였다.[* KBS 출신인 김국진, 김용만(감자골) 등이 일요일 밤에에 출연하려고 했을때 MBC 공채 코미디언들이 몰려와 때려잡으려고 할 정도.] 게다가 무한도전에서 수시로 강조하듯이 박명수 스스로도 MBC 공채 출신이란 점에 대해 자부심이 상당한 편인데, 이런 분위기에 덜컥 KBS 출신 예능인이 영입된다니 달가울 리가 없다. 후술되는 특채에 대한 박명수의 까칠함도 같은 이유다.
정신감정 특집에서는 1000만원만 빌려달라는 유재석의 말에 '너한테는 2억까지 빌려줄 수 있어.'라고 화답했다. ~~조공으로 유지하는 관계~~ 사실 만일의 경우에도 [[나경은]]의 월급과 퇴직금을 압류하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박명수 가족은 다 함께 밤 10시에 부대찌개를 먹으러갔다--
이후 토크쇼에 출연해서도 실제로 형제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등 정말로 특별히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래서인지 프로그램 내에서도 다른 멤버들이 그럴 때는 별 반응이 없다가도 유재석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면 진심으로 섭섭해하거나 민감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한가위 특집을 할 때 유재석이 박명수네 집 앞에 영수증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자 "어떻게 재석이가 나한테..."라면서 계속 중얼거리는 걸 보면 진짜 가깝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거기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특집에서도 미리 탈락된 멤버를 데려와야 통과할 수 있는 미션에서도 시종일관 유재석만 따라다니다 나중에 유재석이 정준하와 동행하게 되자 진심으로 서운해하여 나머지 둘이 당황하기도 했다. 자유로 가요제때도 유재석이 거머리 팀을 이길 수 있다에 투표하자 "너는 가요제 때 죽여버릴거야! 니네 둘(유재석과 유희열)은 내가 죽여버릴거야!"라며 격하게 반응한다. ~~덤으로 낀 유희열 지못미~~ 세븐티 핑거스가 눌러도 별 반응없다가 유재석이 눌렀다는게 나오자 격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이에 박명수는 24년 전 못했던 감사인사를 했고, 그 시절에 '강박관념'이란 콩트를 했던 이야기와 자료화면이 나오며 마무리를 지었다. 여러 정황을 보면, 강호동 본인의 입장에선 공인인데 굳이 폭력을 휘두른거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부인데 박명수가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강호동 본인이 까맣게 잊고, 기억을 못 했던가.
참고로 강호동, 박명수는 1990년대 초에 MBC [[오늘은 좋은 날]]이라는 코미디 프로에서 姜朴관념이라는 꽁트에서 콤비로 출연한적이 있다. 이후 [[SBS]] [[일요일이 좋다]]에서 X맨을 같이 하기도 했다만, 그 이후로 두 사람이 같이 한 고정 프로그램은 없다.
그 외에 코디나 매니저 등의 주변인들 중 몇몇이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잦은 출연으로 유명해진 [[정실장]]이 유력한 예시다. 요즘은 매니저 한경호가 그 일을 맡고 있다. 박명수가 거성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면서 실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사라는 직함으로 불리고 있는 듯 하다. 시덕 코디 역시 방송에서 종종 언급되고는 하였다. 특히 <[[4가지쇼]]> 박명수 편에서 박명수가 [[인터뷰]]에서 언급하면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잘 웃지 않으며, 매우 시크한 성격인 듯 하다. 2012년 무도 초장기 파업으로 일이 팍 줄어들았을때 "야 요즘 일 없는데 월급 다 받을꺼야?"고 박명수가 말하자, '''"일 많을 때는 더 줬어요?"''' 라고 되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는 무한도전 파업 특별편에서도 언급. 그외에 너 시집은 안가냐고 묻자 "무슨 상관인데요?" 라고 싸늘하게 쏘아붙혔다. 그리고 한번은 "너 머리칼 잘랐구나?" 라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아니오." 이에 민망해져서 "그럼 잘라."라고 대답하고 대화는 그대로 뎅강 잘렸다. --악마의 아들 잡는 시덕코디-- [[http://cfile25.uf.tistory.com/image/2463E83E56039D3D030B4F|시덕 코디 일화]]
입춘특집당시 앙케이트 --호객행위-- 홍보용 자기 PR를 하는데 이때 출신지역이 서울로 소개되었다.[* 박명수가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라 자막으로 나간 것으로 PD가 확인을 하지않고 작성한듯 하다. 초등학교 4학년에 상경하여 초중고를 모두 서울에서 졸업하여 착각한듯 하다.] 소원을 말해봐 특집에서 박명수의 일생에 관한 자서지[* 자서전을 써야 하는데 책한권 분량이 아닌 종이 한장뿐이라 자서지가 되었다.]를 쓰면서 출생에 관해 언급하게 되는데 당시 [[군산]]시 조촌동[* 군산 시청 소재지이다.]에서 출생하였다고 했다가, 여섯이 내고향 특집에서 박명수의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군산시 선양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밝혀젔다. 그런데 박명수는 명수는 12살 특집 당시[* [[뒤집어 엎퍼]]의 지역간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출신지역을 밝히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본인 출신지를 군산시 선양동으로 밝혔다.추측컨데 박명수는 조촌동에서 출생하여 선양동에서 살았다고 생각한듯 하다.
가족 관계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며 남동생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현재에도 양친 모두 건강하시다. 참고로 어머니의 성함은 '신갑순'이시라고. 결혼 당시 나이가 19세로 굉장히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박명수를 낳았는데, 박명수는 "그 시절은 원래 그랬다. 할 거 없어서 결혼 그냥 빨리 했다"라고 말했다(...). 어시장에서 넘어져 크게 다쳐 주변을 피로 물들여 '''어시장 피바다'''라는 이명을 가지고 계시다.(...)
흔히 어린시절 공병 줍고 다녔던 시절, 동급생들에게 눌려지내던 쭈구리 시절 등 본인의 주장에서 비롯된 가난한 가정사가 언급되는데, 사실 군산에서 살때는 엄청 잘 살았다. 방마다 화장실을 따로 썼고, 집 안에 [[유치원]] 앞에 있는 그런 [[놀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 말하길, 학창시절 당시 기백만원 하던 컴퓨터(MSX급)를 아버지가 사주셔서 집에서 프로그램도 직접 짜며 놀고, PC용 게임도 많이 알고 있었다. PC통신도 즐겨한 듯한 언급이 있었다. 박명수의 어린 시절이 1970 ~ 1980년대라는 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중동으로 가서 달러를 벌어오시기도 했고 귀국 후 아버지가 운수업을, 어머니가 [[만화방]], 그것도 컬러 TV[* 지금이야 훨씬 더 선명하고 깔끔한 컬러 TV가 집마다 한 대씩 있고, 이젠 컬러냐 아니냐가 아닌 HD냐 LCD냐 등을 따지는 시대이니 별로 대단하지 않지만, 70년대 초반에는 흑백TV도 부의 상징이었고 컬러방송이 늦게 시작되어서 그때쯤 되어서야 컬러TV의 보급이 시작된지라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 컬러TV를 가진사람이 아직은 적었을때였다. 그래서 어쩌다 컬러 TV를 들여놓은 영업장에서는 컬러 TV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대가로 시간당 요금을 받는 식으로 굴려먹기도 했다.]가 있는 만화방까지 운영한 적도 있었다. 다만 사업이 뒤집어지면서 그 많던 재산을 죄다 날리고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200만원 융자 받아서 사글세 방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연대보증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공병 줍는 시절과 쭈구리 시절은 아마 이 시절을 기점으로 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 후엔 딸인 박민서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202회의 달력 특집 당시 민서와 같이 촬영할 계획을 세웠지만 아쉽게도 민서의 건강이 안 좋았기에 무산되었다. 그 이후로도 민서는 쭈욱 방송 출연 소식이 없다. 식스맨 특집에서 전화너머이긴 해도 잠깐 목소리가 나온 적은 있다. ~~잠꼬대같은 소리 하는 아빠한테 짜증내는 목소리긴 했지만~~ 최근 스피드 레이싱 특집후 징계 청문회때 민서의 근황이 언급 되었는데 많이 커서 무한도전도 알아서 틀어보고 인터넷 검색도 하는데 아빠 이름을 쳤더니 연관 검색어에 나오는 박명수 욕[* 이전에 GD가 특별 출연한 무한상사 편집본 유출로 생긴 연관 검색어다.]을 보고 "아빠 박명수 욕이 뭐야?"라고 묻는 바람에 명수옹을 당황시켰다고. 뿐만 아니라 점점 크면서 무도 옛날 촬영분도 챙겨보면서 박명수가 슬럼프일 때[* 예를들면 당시 여자친구이던 지금의 부인과 싸우고 나서 나온 일명 딱따구리.] 장면들을 보고 "아빠 왜 저랬어?"라고 물어보기도 해서 난감해진다는 모양. --본인 흑역사를 자식이 일일이 챙겨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종종 '집에 들어가기 싫다' '해외로 가자'식의 가정사 개그를 치는 것과 달리,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는 부부관계가 깨가 쏟아지는 수준인 듯 하다. 서로의 애칭은 왕자님과 마뽀. (마이 뽀로로) 지금도 하루 20통 정도는 통화한다고 하며, 촬영 끝나거나 쉬거나 하면 틈틈이 연락한다고 한다[* 과거 2009년 세계여행 특집 당시 차안에서 이동 중 본인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2014년 라디오 특집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별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식의 애정표현은 여전한 모양.] 아내인 한수민이 [[인스타그램]]으로 [[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177526606314256&DCD=A10102|이런 사진]]을 업로드해서 누리꾼들 사이에 '미녀와 아저씨'라면서 폭소하는 분위기가 화제가 되었다.
2014 MBC 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유재석이 박명수의 고백을 대신 전달했다. 그 내용이란게 "사랑하는데 SNS는 그만해줘..."라서 당시 참석자들이 단체로 뿜었다. 이에 한수민 씨가 바로 인스타그램으로 답변을 보냈는데 '''2014 MBC 연예대상, 박명수 서래 마을 휴 그랜트, SNS 계속할거야. 나도 사랑해'''라면서 박명수의 손하트 사진을 올려서 또 화제가 되었다.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123010524209884|관련기사]]
부부간 교류가 가장 많은건 의외로 유재석도, 집이 가장 가까운 정준하도 아닌 하하&별 부부인 것 같다. 별은 가장 사이가 좋은 멤버의 아내로 한수민 씨를 지목했고, 종종 쇼핑도 같이 다니는 모양. 한번은 철 지나 폭탄 세일하는 모피 코트 5벌을 사는 바람에 명수옹 뒷목을 잡게 했다. 별의 증언에 따르면 5벌 합쳐 1벌 값도 안되는 파격 세일이었다고. 그럼에도 박명수는 비싸다고 진저리를 쳤다. 근데 이 증언이 나온 때가 웨딩 싱어즈 중간 점검 회차인데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특급 누나 [[김희애]]가 "남자가 그렇게 쪼잔하게 굴면 안돼." 라고 특급 어택을 날려주신다.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위의 SNS 일화를 전후해서 꾸준히 하하 부부 입에서 '수민 형수는 연예계에 데뷔하고 싶어한다'는 식의 언급이 나오는데 박명수는 일관되게 안된다는 입장이다.
민서도 방송에 나오는것에 관심을 가져서[* 물론 진지한 건 아니고 그 나이때 호기심인 듯 하다.] 곤란하다는 듯한데, 악플을 설명하면서[* 박명수는 못생겼다 같은 식의 악플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방송에 나오는게 꼭 좋은건 아니라는 취지로 설명했다가 딸한테 "아빠는 못생긴게 맞아요"라고 대답을 들었다고. ~~팩트 폭력~~
- 조응천 . . . . 44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4, top1=법조인/목록, top2=정치인/목록, top3=대구광역시/인물, top4=불교/인물)]
|| '''약력''' ||<(> 대전지방검찰청 검사[br]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br][[국민의 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br]부산고등검찰청 검사[br]수원지방검찰청 부장검사[br][[국가정보원장]] 특별보좌관[br][[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br][[박근혜정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br]~~별주부짱 매니저~~[* 공직을 맡은 것이 아니라 취소선을 쳤지만, 이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공직기강비서관에서 잘린 뒤에 그는 아내와 같이 해물전문점을 운영했었기 때문이다. 즉, 당선될 당시 그는 자영업자였다. 이는 그의 총선 포스터에도 당당하게 적어 놓은 약력이다.][br][[더불어민주당]] 원내부대표 ||
[[대경권|TK]] 출신 엘리트 검사로,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요직을 맡아 성장했고 [[박근혜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하는 등 [[대경권|TK]] 성골 엘리트급의 보수 인재 루트를 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적당히 끊고 청와대에서 나왔다면 지금쯤 구 새누리당에서 요직을 맡아 보수층의 중심에 올랐을테고, 계속 해서 청와대에서 자리를 맡았다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축출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정윤회 문건 사건]]으로 인하여 축출돼 '''별주부짱'''이라는 이름의 [[횟집]]을 운영하며 중앙 정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는, 드라마틱한 이력을 갖고 있다.
=== 검찰 재직 ~ 청와대 보좌관 ===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사법연수원]] 18기로 수료 후 [[대한민국 해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을 이수하고 1992년부터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를 시작해 같은 해 [[박지만]]의 마약 수사를 맡았다.
[[김대중 정부]] 때는 검사 신분을 유지하면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하였다가 2005년 검사직을 사임하고 [[김앤장]] [[변호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후기인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법무부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하였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국가정보원]] [[국가정보원/원장|원장]] 특별보좌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변호사]]로 돌아갔다.
2013년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전문위원으로 [[박근혜정부]]에서 일하였다. 같은 해부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세계일보]]에 [[청와대]] 내외부 인사에 관한 감찰 자료가 보도되면서 이에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때가 2014년 4월 15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 발생 하루 전이었다.[* 해임된 다음 날, 혼란스러운 본인의 상황 중에 우연히 TV를 보게 되었는데, [[세월호 참사|갑자기 너무나 당황스런 화면]]이 나오고 있어서 몹시 어리둥절 했다고 한다.]
그후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정윤회 문건]] 사건이 터지면서 기소되었는데 그때 유출된 그 문건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했을 때부터 [[박근혜]] 의원 비서실장으로 오랫동안 보좌해왔던 [[정윤회]]가, 야인이 된 지금도 박 대통령에게서 특별히 더 신뢰받는 비서관들에게 여전히 지시를 내리며,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건 내용이 사실임을 의심케하는 대목이 있었음에도 사건 수사를 맡았던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은 이 문건을 작성해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s-4|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보고하였던 조응천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그의 부하 직원이었던 [[박관천]] 경정 등을 기소하는 선에서 사건을 대충 마무리해 버렸다.
본인 말로는 식당의 매니저, 셔터맨을 도맡았다고 한다. 실제 총선 후보 시절 직업란에 '''별주부짱 매니저'''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이후에 [[기독교방송|CBS]] 변상욱 기자가 김용민의 팟캐스트 관훈나이트클럽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http://www.podbbang.com/ch/9954?e=21859559|조응천 씨가 횟집 이름]]을 '''[[정윤회|정윤횟집]]'''으로 지으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공개하여 화제가 되었다. --주위에서 '''"그러다 너 죽는다"'''라고 뜯어말렸다 전해진다--
가장 유력시 되었던 곳이 서울 [[마포구 을]] 지역으로, 이 지역은 [[김종인]] 지도부에 의해 컷오프된 [[정청래]] 전 최고위원의 지역구였다. 이곳에 '별주부짱'이 있기 때문에 지역 연고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지역구 선거에서 조 전 비서관이 노려볼 만한 유일한 지역구로 손꼽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입당 이후 [[최재성(정치인)|최재성]] 전 총무본부장, [[정청래]] 전 최고위원과 몇 번 술잔을 기울이면서 친분을 쌓았던 모양인지 '나는 (동료의 지역구를 낼름 받아먹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마포을 공천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마포 을 지역은 [[문재인]]의 다른 영입 인사인 [[손혜원]]이 출마해 당선되었다.]
결국 불출마 선언을 했던 [[더불어민주당]] [[최재성(정치인)|최재성]] 의원의 지지를 받아 [[최재성(정치인)|최재성]]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도]] [[남양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상대 후보인 [[새누리당]] [[심장수]] 후보는 [[남양주시]]에서 3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던 지역 토박이였던 데다가 지역구 관리를 상당히 갈고닦았던 반면, 조응천 후보는 [[남양주시]]와는 어떠한 연고도 없는 정치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으나, 최종 개표 결과 [[새누리당]] 심장수 후보를 249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꺾고 신승했다.[* 조응천이 [[수동면]]과 [[화도읍]]에서 심장수에 밀렸지만 젊은 층 인구가 많이사는 [[호평동]]과 [[평내동]]에서 심장수를 앞섰다.] 이는 경기도 내에서는 최소표차로 당선된 것이다. 또한 정권 심판론이 좀 더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김어준의 파파 이스]]에 출연해 밝힌 에피소드에 따르면, 본인 선거 캠프의 보좌관이 떨어진 거 같다고 보고해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있다가 마지막 투표함이 더 남았으니 기다려보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응천 당시 후보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그 투표함에서 결과가 뒤집어진 것이다.
이런 신승에는 [[문재인]] 전 대표의 막판 호소도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 있다. 선거 전날 문 전 대표는 본인 [[SNS]]에 유난히 두 사람이 눈에 밟힌다면서 [[국가정보원]] 출신의 [[김병기(정치인)|김병기]] 후보와 함께 조응천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는데, 두 사람은 모두 선거에서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다. 아마도 문 전 대표가 여론조사 상황 등을 들으면서 두 사람의 당선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려고 한 것 같다. [[국가정보원]] 인사처장을 지냈던 김병기 후보와 [[대한민국 검찰청|검찰]] 및 [[청와대]] 비서관 출신의 조응천 후보를 콕 집어 지지를 호소했다는 점에서, 이는 [[문재인]] 전 대표가 [[국가정보원]]과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행동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선거 결과를 뒤집은 그 투표함은 주소지는 [[남양주시]]로 되어 있지만 타지에서 생활하는 관외 유권자들의 표를 모아놓은 사전 투표함이었다고 한다. 조응천 후보가 본인이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무렵, [[새누리당]]의 심장수 후보는 [[설레발|자기가 이긴 줄 알고 미리 당선증 받으러 가던 길이었다]]고(...). ~~[[안습]]~~[* 여담으로 심장수는 8년 전인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며 출구조사에서는 앞섰지만 개표 결과 당시 현역 의원인 최재성 전 의원에게 밀려 낙선했다. 더욱이 심장수는 조응천의 대학 선배이자 검찰 선배이기도 했기에 더욱 패배의 충격이 컸을 것이다.]
[[20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와 [[정보위원회|정보위]](겸)에 내정되었다. 2016년 6월 27일 법사위원회에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701997|"장관님, 서초동 4대천왕 들어보셨습니까"]]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법조비리에 관한 질문과 비판으로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베]]에선 고소각을 재느라 평소대로 막말을 내뱉지 못하는 [[정게할배]]들이 약이 올라 부들부들대고 있으며, [[친이]] 반 틀딱 성향의 일베 이용자들은 "응천게이 일베충이었노!", "틀딱들 부들부들", "[[박근혜]] 비서관 시절에 분명 2자릿수 고레벨 활동 이용자가 틀림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전의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반정부 성향이 강해진 인터넷 여러 커뮤니티들에서 이러한 조응천의 드립은 다시금 주목받았고, [[주갤]]에서까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tock_new1&no=4508912|통쾌하고 호감간다는 말들이 나왔다.]] 애초에 더민주에서 이 사람을 영입한 가장 큰 이유가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다는 이유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상을 수년 전부터 접했던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공직상 기밀 누설 혐의로 형사소추 당하지 않는 선에서 청와대, 검찰의 대응 플랜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분석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서[* 특히 [[문고리 3인방]]과 [[우병우]]에 대한 반감이 글에서 드러난다. 아무래도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사건 때문이다.]]] 현재 정국에서 관심도가 매우 높은 의원 중 하나.
조응천 의원은 상임위 발언이나 보도자료 배포 과정에서 사실 관계를 확실히 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을 빚었다. 한편, [[MBC]]는 명예훼손으로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214&aid=0000638302&date=20160701&type=2&rankingSeq=1&rankingSectionId=100|MBC의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 기사.]]
- 박경석(1933) . . . . 42회 일치
[[대한민국]]의 [[군인]], [[시인(문학)|시인]], [[소설가]]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출신이다.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33년 [[연기군]] 조치원읍 본정(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원리 88번지)에서 출생 하였다. 이후 [[대전고등학교]] 31회로 졸업하고, 17세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꾸며,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17세라는 나이로 인해 자격 미달이 되었지만, 같은 나이의 당시 권력자 [[원용덕]] 장군의 자제 원창희 씨의 육사 입교 압력이 육사 심사위원들에게 들어오자--완전 개꿀 금수저--, 형평성 문제로 덩달아 박경석 생도도 합격되었다. [[http://blog.daum.net/koreanmarinecorps/17321|국방일보 박정인 장군 회고록에서 발췌한 원창희, 박경석 생도 합격 비화]]
입교 보름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박경석 생도를 포함한 생도 2기생들은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어이없는 명으로 윗 기수인 육사 10기생과 육사 생도대대로 편성되어 포천 방면으로 이동, 첫 전투를 치렀다. 졸업 및 임관이 머지않은 육사 10기와 달리 박경석 생도를 포함한 육사 11기는 입교한 지 보름째로 기껏 소총 영점을 맞추었을 뿐이라 실전에 투입될 처지가 아니었다.[*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던 [[장창국]] 대령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에서는 전쟁 수행인력이 부족하여, 교육중인 사관생도들을 교육 단축을 시켜 졸업, 임관을 시켜 전쟁에 내보내 전쟁임무 수행의 전례를 들어, 졸업, 임관이 얼마 남지 않는 육사 10기와 11기에 해당하는 생도 2기생들을 교육 중에 투입할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채병덕]]에게는 그런 말이 조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채병덕 장군의 오판으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결국 애꿎은 생도 절반이 이 포천 전투에서 전사했다. 박경석 생도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끊어진 한강 다리를 구사일생으로 넘어 후퇴, 임시 수도인 대전 원동 국민학교에서 1기 선배인 육사 10기생들의 철모에 일명 반창고 소위 계급장을 붙여 주며 눈물의 소위 임관식을 치러 주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72900209105001&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7-29&officeId=00020&pageNo=5&printNo=22242&publishType=00010|육사 10기생의 눈물겨운 반창고 임관식과 비운의 육사 생도 2기생의 비화.동아일보1993년 軍 어제와 오늘 편]]
이후, 전장에서 더 많은 위관장교 자원을 필요로 하자 정부는 이들을 신설된 [[육군종합학교]][* 12.12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동 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고 갑종 전우회 대부였던 [[하소곤]]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두환]]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오자복]] 예비역 대장,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 예비역 대장, [[박정희]] 정부에서 경호실장을 지낸 [[차지철]] 예비역 중령 등이 육군 종합학교 출신이다.]에 입교시켜 단기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박경석 소위도 이 때 임관된 초임장교 중 하나였다. 이들은 생도 2기 출신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새로 신설된 제9사단[* 사단장 [[장도영]], --5.16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얼굴마담, 핫바지 노릇했던 그 때 그 사람-- 사단 참모장은 [[박정희]] --5.16 군사정변에서 대통령에 오른 그 분--]의 소대장으로 갔다. 그 1명은 당시 권력자였던,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의 아들 원창희 소위였다. 원창희 소위는 임관과 동시 후방의 육군본부로 배속받았다.[* [[원용덕]] 장군도 최종 보직이 헌병 총사령부 사령관이었고, 아들 [[원창희]] 장군도 헌병의 꽃 헌병감 보직을 마지막으로 육군 준장에서 전역하였다.]
그후 박경석 소위는 여러 전투에서 생사를 넘나들었으며, 한 번은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사실 박경석 소위가 포로로 잡힌 북한군 내에서는 박경석 소위를 비롯한 많은 한국군 장교포로들을 해방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전향시키려 했지만, 그게 안 되었고, 포로 생활도 도망가든 말든 자유로웠다고 한다. 박경석 장군은 포로 시절을 회고하며, 포로로 잡힌 북한군 사단의 사단장이 적이었지만, 그의 리더쉽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 부대에 식량이 떨어지면 사단장도 부하들과 함께 굶는 등의 리더쉽에 영향을 받아 뒷날 한국군내 정치군인이 판을 칠때도 그들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참군인으로써 군인의 본분과 사명을 다하는데 계기가 되었다.
1951년쯤,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기 육사 생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려, 미 8군의 도움으로 육사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중위 신분이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사 생도 복귀를 놓고 논쟁하다가 결국은 새로운 모집 공고에 의한 [[육군사관학교]] 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등이 판을 치던 그 육사 11기생들이 첫 정규 4년제 육사 생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부터 위관, 영관급 등 연간 100명의 장교들이 미국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 군사학 유학을 떠나는데, 여기서 배운 자유진영의 선진 군사학은 귀국 후, 전술 교관으로서 후배 장교들의 군사 지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한국군의 현대화에 있어 양적 팽창에 이어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에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하면서 전승 행진을 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군 위관, 영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은 한국군의 현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 전쟁 전후, 전쟁으로 인한 양적으로 급성장한 한국군은 1950년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으로,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영향도 있었지만, 미국의 선진 교육문화를 배워 온 일부 장교들의 엘리트심 발동으로 5.16이라는 쿠데타를 잉태하기도 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어]]와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도 1950년대 한국군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 도미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965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과 월남의 파병 요청 형식으로 [[조문환]]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주월 한군군]] 군사원조단 비전투부대 [[비둘기부대]]가 파병되었고, 뒤이어 미국의 대 한국 군사원조 약조인 [[브라운 각서]] 체결과 야당의 반대 등 진통 끝에 전투병력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 야당과 여당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월남 파병에 있어 한국군의 처우에 대해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특히나 집권 여당 공화당의 초대 당 의장을 지낸 [[정구영]]변호사는 "이 장관 엄밀히 따지면 호지명의 월맹은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우리가 그들과 총칼을 맞대야 하는거요. 내가 보기엔 그간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 정책의 일로 싸웠고, 지금 미국은 제국주의 위세를 떨치려 월남에서 군사적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도와주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소. 물론 이 장관 말대로 우리는 가난하오. 월남전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다가 피를 뿌리며 돈을 벌기보다는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것이 옳다는 생각이오."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28576|[[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발췌. [[http://gyuraeman.blog.me/110018127454|(대한 군사 원조의 약속인 브라운 각서)]]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를 포함한 경제적 원조와 월남이라는 특수 시장 개척에 한국 기업을 포함한다는 파병의 조건으로 협상하였다.]
[[재구대대]][* 초대 대대장 [[박경석]] 중령에 이어 정치군인 [[노태우]], [[박희도]] 등이 줄줄이 이 자리에 앉앗다]는 강원도 홍천에서 월남 파병 군사 훈련을 받던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중대원을 살린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준 [[강재구]] 대위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대대이다. [[재구대대]]는 그 이름답게 월남전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세계 만방에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용맹을 빛내었다. 그런 재구대대의 초대 대대장에 박경석 중령이 임명되었다.[[http://cafe.daum.net/pks6464/MnHf/114|재구대대를 포함한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활약상은 파병부대를 지휘한 장군들의 각종 수기에 나와 있지만 박경석 장군의 재구대대장 시절의 회고부분은 월남전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군은 월남 파병에 있어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독자적인 한국의 작전지휘권과 기타 수송분야의 한국업체의 참여를 미국에 정식 요청하였고, 협상 끝에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자체적인 작전지휘권을 얻어냈다. 이에 탄생한 것이 바로 [[http://panzercho.egloos.com/2765059|중대기지전술]]이다. [[주월한국군]] 전투부대는 각 마을마다 중대별로 기지를 세워, 민간인과 월맹군.베트공의 민간 침투를 차단하는 이른바 물과 물고기를 분리한다는 전술을 통해 지역 민간인의 지지를 얻으면서, 전투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수월해졌다. 나중에 이 작전이 성공하자 대만과 기타 자유진영의 군사고문단이 배우고 가는 등 대단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월남전]]에 있어, 초대 [[주월 한군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서도 "장교 이하 모든 장병이 누구하나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갈수 밖에 없었다"[* "나를 지금 억르누고 있는것이 고엽제 문제와 고엽제를 앓고 있는 전우에요.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방문도 하고 격려도 하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월남에 간 것은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간 것이지, 나나 우리 장병들이 가고 싶어서 월남에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국가를 위해서 월남에 갔고, 실지 국가의 경제 발전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면, 그것이 없어더라도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갔다면 국가가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화방송 1993년 정치드라마 [[제 3공화국]] 22회 월남파병 편에서 인터뷰 전문]을 하는 등 국가의 월남파병 장병들의 고엽제 문제와 국가 차원의 보상 문제가 남아있고, 일말의 강제적 파병의 성격을 띄었지만, 용병이다, 돈을 받고 군대를 보낸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한다는 일각의 생각은 매우 잘못되고 편협한 것이다. 분명 [[월남전]]은 우리 스스로 원해서 파병을 결정한 전쟁이 아니었지만, 당시 기성세대가 목숨 걸고 싸워주었기에 그에 상응한 군사원조와 경제적 원조 및 이익을 바탕으로 1970년대 공업화를 이루어 우리 아들, 딸들이 적어도 풍요롭게 사는데 있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주지없는 사실이다.[* 2000년 일부 진보적인 학자라 자처하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 등이 월남전 파병 기간 동안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자 [[채명신]] 장군, [[박경석]]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 등 월남전 참전 원로들이 나서서 이에 반박하는 글과 함께 학살 주장에 무게를 잡는 학자들을 상대로 토론을 제안했다. 동년 한겨례 신문에서 이와 관련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의 신문을 기고하자, [[채명신]]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하여 일어난 내란이며, 5.18 희생자와 시민군들을 광수1, 2로 지칭하며 현재 북한의 고위층과 비슷하다며 개드립을 쳤던 그 지만원 박사가 맞다. 삼만원도 안되시는 그분--이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 나와 이 주장에 반박하며,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 학자들과 토론을 했다. 이와 동으로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http://book.naver.com/search/search.nhn?query=%ED%95%98%EC%96%80%EC%A0%84%EC%9F%81|[[하얀전쟁]]]]의 원작자 [[안정효]] 작가는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로써, 당시 한국군의 학살이 있었다며 자신의 소설에 실화를 밝혔는데, 적과 민간인의 구별과 식별이 어려웠던 현대전 특히 민간인 복장으로 게릴라전이 빈번했던 월남전에서 총기 오발 또는 오폭으로 민간인을 살해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이나, [[유학성]], [[우종림]], [[전성각]]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기술되어 있다. 일단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 논의는 충분한 시간과 자료 수집, 그에 근거한 증언이 더 필요하다. 성급히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이유로 베트남 전쟁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금물이다. 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나라가 타국의 전쟁에 정당한 명분 없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며 민간인 학살 역시 아예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기 때문. 또한 [[라이따이한]] 문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전쟁은 보다 더 신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월남에서 귀국 후, 1970년 8월 육군 제 [[1사단]] [[12연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1사단 내 [[DMZ]]와 [[GOP]]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당시 휴전선 부근을 담당하던 미국 [[2보병사단]] 예하 [[4보병여단]]의 근무 지역을 인수 받았다. 이는 그동안 휴전선 지역을 관할하고 수비하던 미군의 임무를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계기와 선례가 되었다. [[http://cafe.daum.net/pks6464/MnHf/109|DMG내 미군 관할 지역을 인수받은 육군 1사단 12연대와 연대장 박경석 대령이 말하는 비화]]
1972년 10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으로 있던 박경석 대령에게 당시 실세 중에 실세 육군 수경사령관 [[윤필용]] 사령관의 참모장 [[손영길]] 대령이 찾아왔다. 육사 12, 13기 출신의 신참 대령들의 연대장 가용 청탁 쪽지였는데, 박경석 대령은 이 쪽지의 명단의 인물들을 대차게 거절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한달 뒤, 박경석 대령은 거의 확실시 되던 준장 진급에서, 진급에 한참 밀리던 윤필용 사령관의 직속인 김성배 대령 준장 진급자 명단이 바뀌었다. 그후 2번이나 연거푸 준장 진급 누락끝에 진급이 된 박경석 준장의 첫 보직은 [[6사단]] [[부사단장]] 겸 [[DMZ]] 내에서 발견된 땅꿀 특수개척팀장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2300209105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3-09-23&officeId=00020&pageNo=5&printNo=22296&publishType=00010|박경석 장군의 준장 진급 비화]][*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창군 및 초창기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였던 진급문제에 관해서다. 물론 후자에 기술하겠지만, 이 고질적인 진급문제가 [[5.16]]과 [[12.12]] 일어났던 원인이기도 했다. 창군과 한국전쟁으로 군은 양적 성장에 힘입어 장교들의 진급이 빠른편이었다. 소위 달고 몇개월 후에 대위, 소령 더구나 전쟁으로 인해 단숨에 영관급에서 장성으로 진급하는 일이 많았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초고속 진급은 멈춰졌으며, 특히나 [[군사영어학교]] 출신 70여명 대부분이 장성으로 진급했고,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자리를 계속하여 번갈아 앉는 사태가 생겼다.--대표적인 인간들이 [[정일권]]과 [[백선엽]]이다. 이들은 대장 진급 후에 육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 자리를 번갈아 2번씩 그 자리에 앉았다. 이러니 아래 후배 장교들의 불만과 원성이 쌓여갔으며, 특히나, [[육사 5기]]의 대령급과 [[육사 8기]]의 중령급에서 그 불만이 많았다.--특히나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정규 육사 출신들과 단기 육사 및 비육사 출신간의 진급문제가 두드러졌다. 박경석 장군 같은 경우에도 1950넌에 소위 임관후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있었는데. 1955년 갓 소위 임관한 정규 육사 11기생들이 1970년 후반 영관급 대 장성급으로 진급이 역전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이등병에서 장군까지 지낸 [[최갑석]] 장군의 증언과 그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 Crusader Kings 2/특성 . . . . 40회 일치
''매력적인 협상가는 우아한 드레스와 설득력 있는 미사여구로 고위 관리를 감동 시킬 줄 아는 훌륭한 외교관입니다.''
''이 인물은 전장에서는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휘관으로써는 평범합니다.''
''노련한 전술가는 예술적인 전쟁 감각을 지녔으며 용감한 전사이자 신뢰할 수 있는 지휘관입니다.''
* 관리력 +1
''놀라운 전략가는 전쟁의 모든 면을 이해하고 있는 비상한 인물로 사령관 또는 장관으로써 완벽한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 관리력 +2
=== 관리력 ===
* 관리력 +1
* 관리력 +3
* 관리력 +6
* 관리력 +9
* 관리력 -1
* 관리력 -1
''현명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전문 신학자는 철학과 신앙에 관해 깊은 조예가 있습니다.''
* 관리력 +1
''통풍에 걸렸습니다. 고열과 피로에 시달리고 붓기와 관절통이 이어집니다.''
* 관리력 -2
* 관리력 -2
''교묘하고 정직하지 못한 본성이 있습니다. 이 특성은 첩보관에게 유용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충성을 바칠 때 한해서입니다.''
* 관리력 -2
- 전태일 . . . . 37회 일치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ref>김정환, 《역사의 희망과 희망의 역사: 근・현대편》 (푸른숲, 1998) 272페이지</ref>,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을 뛰었지만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3~4시간 방치하였다.
{{인용문|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오십원으론 어림도 없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과 위생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 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회사에 밉보여서 [[1966년]] 여름 해고된다.
그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규합하는 어려움, 주변의 냉소와 비야냥거림, 노동청과 근로감독관, 언론들의 기만극, 생계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 서있었다.<ref>《녹색평론 78호 (2004년 9, 10월호)》 (녹색평론, 2004) 59페이지</ref> 일부 미싱사와 봉제 노동자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ref name="ganaess"/>"라고 비판하였다. 이 당시에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라고 썼다.<ref>조영래, 《전태일평전》 (돌베개, 2001) 183페이지</ref>
그는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 조문을 찾아 암기하며 현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불이익에 저항하였다. 그는 [[동대문구청]]을 찾아가 열악한 환경에 대해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청하기 위해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지만, 근로감독관은 평화 시장의 참혹한 얘기에 관심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노동청]]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ref name="chungg">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한국 현대사 이야기 주머니, 2권》 (녹두, 1993) 265페이지</ref>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전태일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노동이나 근로 기준법조차 사업주들의 편이라는 현실은 그를 한동안 허탈 상태로 몰아 넣었다.<ref name="chungg"/> 그는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직접 조사, 설문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돌아온 답변은 경멸과 비웃음 뿐이었다. 처음에 약간 말투가 어눌했던 그는 부랑자로 몰리거나, [[노동청]] 공무원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노동자 권리 청원은 언론들도 외면했고, [[경향신문]] 등에만 간략하게 보도되었다.
[[1969년]] [[7월]]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노동청]]을 찾아가 근로 환경 개선,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감리교|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70년]] [[4월]]부터는 평일에는 자신이 다니던 감리교회의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밤에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당 교사가 되었다. 주말 낮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 정치적 관점 ====
{{인용문2|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br><br>...(이하 중략)...<br><br>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br><br>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br><br>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br>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br>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br>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br><br>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ref>권태억, 《근현대 한국 탐사》 (역사비평사, 2007) 398~400페이지</ref>}}
[[박정희]]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는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아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어 은미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한번 밟(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ref>전태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36쪽</ref>…(이하 생략)…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요.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곳(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ref>전태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38쪽</ref>"라고 했다.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해 [[10월]]부터 그는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시위를 주관하였다.
그는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면서도 노동자들의 참상을 전달했다. [[1970년]] [[10월 7일]] 마침내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ref>〈이소선:아, 우리들의 어머니!〉, 《이야기 여성사 1》 163~4p, 여성신문사, 2000</ref> 쓰러졌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치료를 받은 전태일은 온몸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앞치마를 벗어 덮어주고 의사에게 갔다. 1만 5천 원짜리 주사 두 대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터이니 그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ref name="chock289">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9페이지</ref> 이때 평화시장 담당 [[서울시청]] 근로감독관 한 사람이 전태일을 따라 병원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내가 무엇 때문에 보증을 서요?"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어머니 이소선이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매달리자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 외엔 서너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ref name="chock289"/> 명동 성모병원으로 전태일을 옮기는 앰블런스가 오자,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 등과 함께 타고 병원을 떠났다. 차 안에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릴 듣고 나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되나 지켜볼 것이오" 라고 마음 속으로 분개하였다.<ref name="chock289"/>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이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였다.<ref>지명관,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98~ 101쪽, 다섯수레, 1996년; 한국정치연구회, 《한국정치사》 352~ 353쪽, 백산서당, 1990년;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347쪽, 풀빛, 1995년</ref>
기본적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고발한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11월 16일]] [[서울대학교|서울대]] 법대생 1백여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고, 상대생 4백여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11월 20일]] 서울대생, 성균관대생, 이화여대생 등과 기타 서울시내 학생운동가들이 모여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고 공동으로 시위를 벌였다가 해산되었으며, 고려대, 연세대생들도 집회를 열었다.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이래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사망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서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92000289120003&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9-20&officeId=00028&pageNo=20&printNo=2680&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6,09.20]</ref>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43117 전태일 동판 철거 ‘물의’ 경향신문, 2003.12.01]</ref>
이를 두고 환자를 살려야 되는 [[의사]]들이 책임을 방관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 당시 전태일의 담당 의사는 한 개인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의 [[대한민국]] 의료계 전체가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동반한 주치의였다. 그 글(전태일의 입원 과정)을 읽었던 [[1987년]]의 의료계도 사회적 책무라는 면에서는 [[1970년]]의 의료계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던 듯 했다.<ref>김선, 《의사가 말하는 의사》 (도서출판 부키, 2004) 104페이지</ref>"는 비판이 있다.
*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 현장의 상황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알려졌고 이로 인해 전체 노동자들이 겪고있는 인간이하의 고통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대는 종전에는 보도조차 하지 않던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 했다. [[신문]], [[방송]]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고 이로써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이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을 현실화해 줄 것을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ref name="hjaeshims">[http://www4.hankooki.com//nation/200212/h2002123116132714510.htm "민주화운동 보상금 현실화" 전태일씨 유족등 재심청구] 한국일보 2002/12/31</ref>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 한호문 . . . . 37회 일치
한호문(韓好問, ? ~ ?)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자(字)는 선경(善卿),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정헌대부 [[중추부]][[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훈련원]][[지사]]에 이르렀다. 봉호는 서원군(西原君)이다.
할아버지는 [[배천군|배천]][[군수]](白川郡守)를 지냈고 [[증직|증]]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과 서림군(西林君)에 증직된 한창서(韓昌緖)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충의위]](禦侮將軍 忠義衛)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형판(刑判)을 지내고 사후 [[증직|증]]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贈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서원군(西原君)에 추증된 한강(韓綱)이고, 어머니는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지중추부사 이전(李晉+戈)의 딸이다. 형제로는 한선문, 한의문, 한사문 등과 칠계군 헌민공 [[윤탁연]]의 아들 윤길원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 있다.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 한강보다 앞서 사망하였다.<ref>경기도, 《경기금석대관 2》, (경기도 편역, 1987) 한양위 묘갈편</ref>
[[음서 제도|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1598년]](선조 31년) 선전관(宣傳官)<ref>황여일 (黃汝一), 《해월집 권9》, 사신일기, 1598년 무술 11월 13일 갑오(甲午) </ref>, [[1599년]](선조 32년)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부임하였다.<ref>선조실록 113권, 1599년(선조 32년, 명 만력 27년) 5월 3일 경술 6번째기사, "조정·조희보·변이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602년]] [[9월 14일]] 군기판관(軍器判官)을 거쳐<ref>竹溪日記卷之六, 九月初十日戊辰</ref>, [[12월 16일]] 영흥판관으로 나갔다.<ref>竹溪日記卷之六, 十二月十六日</ref> [[1603년]](선조 36년) [[11월 29일]] 서산(瑞山)으로 부임하였고<ref>조익(趙翊), 《가휴선생문집권 10》, 공산일기(公山日記), 계묘 1603년 11월 29일자</ref>, 그가 서산군수로 부임한 내용은 서산군읍지(충청남도)(瑞山郡邑誌(忠淸南道))의 선생안에도 수록되었다. [[1607년]] [[9월 4일]] 도총경력에 임명되었다.<ref>竹溪日記卷之十, 九月初四日</ref> [[1615년]](광해군 7년) [[화기도감]]에 낭청으로 참여한 공로로, 그해 [[12월 29일]] 화기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을 시상할 때 승급되었다.<ref> 광해군일기 98권, 1615년(광해군 7년, 명 만력 43년) 12월 29일 신미 3번째기사 1615년 명 만력(萬曆) 43년 화기 도감 도제조·제조 유근 등에게 포상하다</ref>
[[1623년]](인조 1년) [[9월 19일]]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하였다가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었을 때는 부모의 나이가 70세임을 들어 상소하여 사직하더니, 본직에 제수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부임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9월 19일(병오)자 4번째기사, "사천 현감 이장형을 사판에서 삭제할 것 등을 청하는 사간원의 계"</ref> 그러나 그해 [[9월 20일]] 죄인 명단에서 특별히 정계되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9월 20일(정미)자 6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뢴 한호문 등의 일은 정계하였다"</ref> 명단에서 정계된 사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26년]] [[4월 13일]] 겸[[내금위]]장(兼內禁衛將)<ref>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4월 13일(을유)자 29번째기사, "병조가 남이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ref> [[1627년]] [[1월]] [[정묘호란]] 당시 [[소현세자]]를 배종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1월 24일(임진)자 7번째기사, "세자 배종인의 명단"</ref> 그해 [[4월 5일]]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賜給)받았다.<ref>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4월 5일(신축)자 2번째기사, "영부사 이원익 등에게 시상하라는 전교"</ref>
[[1633년]] [[9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서원군(西原君)으로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사신을 접대하였다. [[10월 4일]] [[명나라]] 사신을 [[모화관]]에서 접대한 것을 보고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1년 계유(1633) 10월 4일(계해)자 12번째기사, "모화관에서 금차에게 연향을 베푼 결과를 보고하는 호송관인 서원군 한호문 등의 계"</ref>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당시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인조 등을 수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1월]] [[인조]]의 [[정축하성]] 직후 작성된 호종록에 그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일기청 관원"</ref>
[[1637년]]에는 도정(都正)으로 그 해에 열리는 무과 정시(武科 庭試)에 좌참찬(左參贊) 이덕형(李德泂), 지사(知事) 변흡(邊潝), 동지(同知) 한명욱(韓明勖) 등과 함께 무과 정시(武科 庭試)의 명관(命官)으로 선발되었다. [[10월 13일]] 그 해의 무과 정시 합격자가 5천 수백명이라서, 본업무와 함께 합격자를 정하느라 보고가 40일이 지체된 것을 대죄하였으나 인조가 이를 무마시켰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0월 13일(정미)자 16번째기사, "출방할 때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므로 대죄한다는 무과 정시 명관인 좌참찬 이덕형 등의 계"</ref> 이후 부총관(副摠管)으로 전직되었다. [[10월 21일]] 전시의 시관으로 논박을 나갔는데, 즉시 왔어야 하는데 궐문이 닫힌뒤 천천히 왔다 하여 추고를 청하는 승지 김휼의 계에 의해, 추고받았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0월 21일(을묘)자 18번째기사, "전시의 시관인 부총관 한호문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김휼의 계</ref> 그해 [[12월]] [[도총부]] 부총관과 [[훈련원]]도정으로서 [[예조]]의 인사 포폄을 마감하는 좌기(坐起)에 참석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2월 14일(무신)자 2번째기사, "부호관 한호문이 예조의 포폄 좌기에 나아가므로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는 도총부의 계"</ref> [[12월 16일]] 이를 두고 [[사헌부]]에서 그가 위인이 용렬하다며 반대했지만, [[인조]]가 그정도는 아니라고 하여 무마시켰다.<ref>승정원일기인조 16년 무인(1638) 12월 16일(갑진)자 6번째기사, "사헌부의 계에 대해, 정시웅은 체차하고 엄종남은 추고하라는 비답"</ref>
이후 좌우포장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637년]](인조 15) 정축 정시무과(丁丑庭試武科)의 시험관을 맡아보았고<ref>정축정시문무과방목 (丁丑庭試文武科榜目, 1637)</ref>, [[1638년]] [[12월 17일]] 장령 안시현(安時賢), 이여익(李汝翊), 지평 박수문(朴守文) 등이 훈련 도정은 무관의 극선(極選)인데 도정 한호문은 평소 이렇다 할 명성도 없고 나이도 늙어 기력이 쇠한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은 지 이미 오래이므로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손가락질 받는 것과, 일을 처리할 때 거칠고 비루한 행동을 많이하여 위인이 용렬하다며, [[훈련원]]의 장(長) 자리를 결코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였으나 인조가 거부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12월 17일(을사)자 7번째기사, "훈련 도정 한호문을 파직할 것 등을 청하는 장령 안시현 등의 계"</ref> [[12월 19일]] 장령 안시현(安時賢)ㆍ이여익(李汝翊), 지평 이운재(李雲栽) 등이 다시 그의 파직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유시를 내렸다며 돌려보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12월 19일(정미)자 14번째기사, "예장하라는 명을 속히 정지할 것 등을 청하는 장령 안시현 등의 계</ref> [[1644년]] 무렵 자헌대부(資憲大夫) 서원군(西原君)이 되고, [[1645년]] 포도대장이 되었다. [[1645년]] [[12월 25일]] [[사간원]]이 그의 추고를 청하여 논계받았다.<ref>승정원일기 인조 23년 을유(1645) 12월 25일(계묘)자 3번째기사, "사간원이 포도대장 한호문의 일을 청하였다"</ref> 추고를 청한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다. [[1646년]] [[1월]] [[소현세자]]빈 [[강빈]]이 인조 등을 저주했다는 [[강빈 옥사]]가 발생, 좌포장으로 궐내에 대기하였다. [[1월 5일]] 인조는 좌우포장 한호문(韓好問)ㆍ신경진(申景珍)을 명하여 불러서 전교하기를“지금은 기밀(機密)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으니 야금(夜禁)을 십분 더욱 엄하게 단속하고, 경도 또한 옛 전례에 따라 친히 순찰하여 흉한 무리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왕래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ref>연려실기술 제27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강빈(姜嬪)의 옥사"</ref> [[1646년]] [[2월 5일]] 좌변포도대장으로 패초를 받았으나, 도착이 늦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때 출발하였다는 승지 여이재의 보고로 그는 문제되지 않았다.<ref>승정원일기 인조 24년 병술(1646) 2월 5일(임오)자 7번째기사, "우변포도대장 신경진은 집이 멀어 조금 늦는 것이라는 여이재의 계"</ref> [[1648년]](인조 26년) [[10월]] 무과(武科)의 일소(一所)의 시관(試官)이었으나 병을 이유로 패초에 나오지 않았다가 그해 [[10월 14일]] [[승정원]]의 탄핵을 받고 추고되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26년 무자(1648) 10월 14일(을사)자 13번째기사, "무과 일소 시관인 서원군 한호문이 칭병하며 패초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추고할 것을 청하는 본원의 계"</ref> 최종 관직은 정헌(正憲)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에 이르렀다.
== 가족 관계 ==
그의 동생 한의문의 부인이 도적에게 살해당한 일이 인조실록에 등장한다.<ref>인조실록 47권, 1646년(인조 24년, 청 순치 3년) 7월 3일 정미 2번째기사, 대신 및 비국 당상과 양사 장관을 인견하다</ref>
* 아버지 : 한강(韓綱, [[1535년]] ~ [[1629년]] [[4월 26일]]<ref>경기도, 《경기금석대관 2》, (경기도 편역, 1987) 한양위 묘갈편</ref>)
** 제수 : ?(? ~ [[1646년]] [[7월 3일]]<ref>인조실록 47권, 1646년(인조 24년, 청 순치 3년) 7월 3일 정미 2번째기사, 대신 및 비국 당상과 양사 장관을 인견하다</ref>)
== 관련 항목 ==
- 영천시 . . . . 36회 일치
[[경상북도]] 남부에 위치한 [[시(행정구역)|시]]. 2017년 기준 10만명을 간신히 넘기는 인구가 거주 중이다. 인구 변동폭이 워낙 작아서 2013년 8월 '''100,999명'''으로 인구가 10만 명대로 하락한 이후 4년 가까이 10만 명선에서 정체되어있다[* 그런데 2017년부터 '''서서히 아주 조금씩 인구가 늘고 있다!!'''] 행정구역면적은 920.29㎢ 에 1개 읍(금호읍), 10개 면(청통, 신녕, 화산, 화북, 화남, 자양, 임고, 고경, 북안, 대창), 행정동 5개 동(동부, 중앙, 서부, 완산, 남부), 법정동 30개 동(망정, 야사, 도남, 도동, 조교, 녹전, 오수, 조교, 대전, 매산, 신기, 문내, 문외, 언하, 괴연, 채신, 성내, 화룡, 오미, 과전, 창구, 봉동, 완산[*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완산구]] 완산동과는 전혀 상관없다.], 금노, 본촌, 서산, 쌍계, 범어, 작산, 교촌)이 있다. [[대구광역시]]와 접한 도시인 만큼 대구 생활권에 대체로 속하고, 다만 [[포항시]]와 접하는 고경면은 포항 생활권에 좀 더 가깝다...고 하지만 실상은 둘 다 차타고 넉넉잡아 1시간 정도의 거리라(...) 그냥 독자 생활권이라고 보면 편하다. 굳이 대도시에 볼 일이 있을 때 그쪽으로 간다는 것.
시화는 장미, 시조는 비둘기, 시목은 은행나무이다. 도시 브랜드 슬로건으로 '''Star''' '''YeongCheon'''을 내세우고 있다. 영천에 보현산천문대가 있기 때문이다.--육군3사관학교에서 양성해냈던 장성급 장교의 계급장에 있는 별이 아니다-- 그리고 S-sound, T-Technology, A-art, R-river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2010년대 들어 --대구를 제치고[* 사실 대구는 가로수길 조성 등 적극적인 수목정책에 힘입어 예전만큼의 혹독한 더위를 자랑(?)하진 않고 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덥긴 하다.--]-- 더위로 유명한 지역이 되었다. 심지어 2016년 8월 13일 최고기온 '''39.6도'''[* 기상관측소가 있는 망정동 쪽은 원래 시원한편인데도 이정도라면 시내인 완산동이나 인구가 많은 야사동이나 아파트가 밀집해있는 망정동 쪽은 40도를 넘겼을 수도 있다.]를 기록하면서 '''해방 이후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 다만 1년만인 2017년 7월 13일 '''[[경주시]]에 39.7도로 역전당했다.''' 인근의 경주, 포항, 울산, 경산과 함께 최근 '''[[대프리카]]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2009년 9월부터 천연가스버스가 운행 중이나, 영천시 관내에 CNG충전소가 없어서 금호읍 인근에 있는 [[경산시]] 와촌면 용천리의 하양CNG충전소를 이용한다. 하지만 용천리CNG충전소는 영천 시내에서 10km 넘게 떨어져 있다.
=== 관광 ===
[[팔공산]]도립공원 내에 있는 [[은해사]], 거조암, 수도사 등의 [[절(불교)|절]]과 치산계곡, 임고서원, [[보현산 천문대]], 최무선 과학관, 시안미술관, 운주산 자연휴양림등이 있다.
영천시민회관, 시립도서관, 청소년 수련관, 영화관 이게 전부다.(...)
영화관은 바로 옆동네 [[경산시]]의 읍단위인 [[하양읍]]에도 있는데[* 물론 하양읍은 대학교가 밀집해있어 학생들이 많은 탓이기도 하고 인구 2만 8천명의 대형읍인데다 진량읍과 함께 시내와는 거리가 재법 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영천'''시'''인데도 '''하나도 없다'''. 물론 1960~70년대에 아카데미극장 과 영천호돌이극장 2곳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90년대 경영난으로 폐업하게되었다.(...) 그러나 2017년 영천공설시장에 영화관이 생겼다. 그래서 영천시민들은 주로 영천의 몇안되는--유일한-- 문화시설중 하나인 영천시민회관에서 상영해주는 철지난 영화를 보거나 극장이 있는 근처 [[대구광역시]]나 [[경산시]]에 있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이런 상황이 꽤나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2014년에 시민회관옆에서 영천중학교 근처[* 영천중학교는 참고로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만 시립도서관이 원래 있던 곳에서는 많이 떨어진 곳은 아니다.]로 이전한 시립도서관에서 대출증으로 책을 대출해주고 한번씩 시청각실이나 강의실에서 공연이나 수업을 한번씩 하는 정도.
청소년 수련관은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실내체육관 옆에 있다[* 둘다 서문육거리에서 바로 통한다.].
2017년 현재 완산동에 짓고있는 미소지음 아파트 뒤에 고은힐즈라는 복합몰이 생길예정이며 그 속에 영화관도 건설한다는 소문이 있다.
||18||거여초등학교|| 금호읍 관정1길 31 ||
||1||<:>국립||[[육군3사관학교]]|| 고경면 호국로 495 ||
|| '''고경면'''[* [[육군3사관학교]]가 있는 동네] ||<:>15.28%||<:>{{{#C9151E 61.48%}}}||<:>12.85%||<:>6.50%||<:>2.76%||<:>{{{#808080 ▼46.20}}}||<:> 74.07 ||
|| '''관외사전투표''' ||<:>29.59%||<:>{{{#C9151E 32.40%}}}||<:>15.99%||<:>14.00%||<:>7.42%||<:>{{{#808080 ▼2.81}}}||<:>||
[[제1117공병단]], [[제50보병사단]] 122[[연대(군대)|연대]]와 [[육군3사관학교]] 등의 군사시설이 있어 대구의 위성도시이자 보조 군사도시의 기능을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 라인의 "최후저지선"에 포함되었던 지역으로 곳곳에 추모 동상이 있으며 [[6.25 전쟁]] 추모 행사를 매우 공들여서 하는 편이다.[* 이것은 [[칠곡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칠곡군은 [[다부동 전투]] 때문에 영천보다 더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영천을 잠시 내주고 나서 [[미군]]에서 [[서사모아]]에 '''신한국'''을 건설하고 후퇴하려고 했는데, 어느 국군 장군이 영천만 찾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던 일화가 있다.
2015년 5월 [[보잉]]의 항공전자 MRO 센터가 영천에 준공되어 대한민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F-15K 관련 항공전자 부품 테스트 및 정비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6&aid=0000740517|관련 기사]]
•서문통 : 서문오거리[* 총 육거리인데 동네로 들어가는길을 취급하지 않은탓인지 정식명칭은 '''서문오거리'''이다.] 가 있는 일대를 말한다[* 서문육거리쪽이 옛 영천성의 서쪽문이 있던곳이라서 그렇게 불리는것 같다 이외에 남문통과 북문통도 있다.] 영천에서 서문오거리는 가장 큰 교차로이며 과거에는 로타리방식으로 영천에 맞닿아 있는 다른지역이나 그지역 주변의 큰도시로 가는길이 거의 한방에 갈라지는 교차로 역할[* ([[대구광역시|대구]],[[경산]]) 금호, ([[울산]],[[경주]]) 북안 및 [[영천IC]], ([[안동]],[[의성]],[[군위]]) 화산•신녕•청통, ([[포항]],[[청송]])오미동•화남 및 [[북영천IC]], 영천시내, 영천실내체육관, 주거지역 등.][* 이 때문인지 서문육거리에서 시내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영천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서문통이라 불리오고 있다. 그래서 주로 서문오거리에 있는 아파트(스카이아파트, 녹원맨션등)에 사는 사람들도 주로 서문통에 산다고 한다. 이렇게 교통의 요지이나 발전이 수십년간 되지않고 원래있던 조그마한 상권마저 죽어버리는 등 영좋지 않아 주민들의 불만은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공병대 : 영천 내에선 최근 가장 핫한 지역으로 완산동 영천시내와 영천시장 뒷편에 옛 공병대 부지로 상당히 넓은 면적을 빈 공터로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7년 현재 공병대 앞쪽에 [[미소지움]]아파트가 건설되고 있으며 e편한세상같은 브랜드 아파트까지 건설예정이다. 공병대 부지도 영화관과 고은힐즈라는 복합몰이 들어오게 되면서 개발하고 있는데 고은힐즈가 완공되어도 몇년 간은 계속 공병대라고 불릴것 같다.
2018년 1월 대략 인구가 2.5배정도이고, 학생 인구가 많은 [[경산시]]보다 더 빠르게 [[맥도날드]]가 들어오게 되었지만, 정작 시민들은 학생들을 제외하곤 별로 관심이 없는듯 하다.[* 기존에 영천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은 [[완산동(영천)|완산동]]과, [[망정동]]의 롯데리아 2곳이다.]
- 울진군 . . . . 36회 일치
과거 '''[[강원도]] 관할이었다가'''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2670#0000|1963년 1월 1일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의 <울산바위> 편을 보면 [[울산]]에 있던 [[크고 아름다운]] 바위가 뒤늦게 [[금강산]]을 향해 가다가 강원도로 넘어가자 [[장승]]이 '어서오세요 여기는 강원도입니다'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영덕에서 울진으로 넘어가는 장면일 듯.
[[신라]] 시대에는 [[명주]], [[고려]] 시대에는 동계, [[조선]]~[[대한민국]] 시대(1962년)까지 1000년이 넘도록 강원도 관할이었고, 현재 [[경상도]](경상북도) 관할로는 2014년 현재 겨우 50여 년이 되었다. 경상도 다른 지역보다 강원도 정서가 좀 더 강한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도급 행정구역의 경계지역은 완전히 그 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것도 강원도같이 도내에서도 지역차가 확고한 지역이라면.
외딴 [[섬]]이나 [[반도]] 지형이 아니면서도 [[철도가 지나지 않는 시와 군]]과 [[고속도로가 지나지 않는 시와 군, 구]](정확히는 금강송면 서부지역에 200m가량 영동선철도가 지나긴 한다. 하지만, 정차역은 없다.) 에 모두 이름을 올린 얼마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다. 과거에는 [[승부역]]이 울진군에 속해 있었다. [[양원역(영동선)|양원역]]이 군 경계에서 가깝기는 하나, 교통 오지의 역이므로 그 마을에서만 이용하는 실정, 그나마 울진군 이용객이 있는 역은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있는 [[분천역]]이기는 하다. [[분천역]] 서쪽으로는 [[영동선]]보다 [[36번 국도]]가 좀더 나은 관계로 울진군의 철도 이용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예전에는 [[고속도로]]가 없고 군을 관통하는 [[7번 국도]]의 확장공사가 더뎌 교통이 상당히 나빴다. 특히 [[삼척시]]와 울진군 사이의 [[7번 국도]] 구간은 과거 [[영동고속도로]] 확장 이전의 [[대관령]] 고개 수준의 구불구불함을 자랑하여 인근 [[영덕군]], [[삼척시]]까지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었다.
그러나 울진은 항공교통의 요충지 중 하나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및 [[유럽]]/[[중국]]에서 우리나라 영공을 관통하여 [[일본]]으로 가는 대부분의 비행기들은 울진 상공을 거쳐서 대한민국을 떠난다. 일부 예외가 있는데 이 경우는 강릉 상공을 통해 대한민국을 떠난다.
2013년 5월 한국수력원자력의 비리와 관련하여 울진군와 영광군에서 발전소 명칭 변경을 요청함을 받아들여 울진 원자력 발전소는 한울 원자력 발전소로, 영광 원자력 발전소는 한빛 원자력 발전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관광 ==
백암[[온천]], 덕구[[온천]], 성류[[동굴|굴]], 불영계곡, [[불영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이 가운데 불영계곡을 지나가는 불영계곡로는 매우 구불거려 이곳을 처음 지나가는 초행자는 자칫하면 토할수도 있다.--[[흠좀무]]-- 아예 이곳을 지나가는 [[시외버스]]에는 [[M6724|비닐봉지를 달아놨을 정도다.]]그러나 반대로 --가도가도 끝이 안보이는-- 계속되는 왕복2차선짜리 곡선도로을 지나가는 스릴또한 있어서 나름 [[버스 동호인]]한테 유명한 코스이며 [[자전거]] 라이딩 코스로도 인기가 많다.
온정면에 위치한 온천관광지. 온천물 온도는 53℃로 충분히 뜨겁다. 데울 필요가 없을 정도. 약알칼리성을 띄는 방사능 온천인데 방사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인지 울진군 측에서는 실리카 온천으로 홍보한다. 물론 해가 될 정도의 방사능을 함유한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말자. 일제강점기 때부터 온천관광지로 개발이 되었고, 1970년대에 현대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꽤 큰 온천관광지이다. 온천호텔도 여러 곳이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위쪽에 있는 백암관광호텔이 원탕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는 거기서 끌어오는 곳인데, 어차피 어딜 가든 거기서 거기다. 취향껏 선택하자.
북면에 위치한 온천관광지. 한국 온천 중에서 유일하게 자연용출되는 온천이다.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노천탕도 운영했을 정도. 관광지 개발은 1980년대로 좀 늦은 편인데, 온천 위치가 산골짜기라서 개발이 어려웠기 때문. 이 때문에 용출되는 곳에는 개발을 못하고, 용출지에서 4 km 떨어진 지금의 위치에 관광지를 개발하고 파이프로 온천수를 끌어오고 있다. 규모는 제법 큰 편이며, 자체운영호텔과 스파월드라는 이름의 온천수 수영장이 온천탕과 별개로 운영되고 있다.--노천탕도 있다!-- 온천탕은 남,녀 대온천탕과 가족온천탕이 있다.
근남면 구산리에 위치한 석회암 동굴.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길이는 약 870 m. 내부는 12개의 광장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중 관람이 가능한 부분은 10광장까지이다. 11, 12 광장은 동굴 보호 문제로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동굴 앞에 왕피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왕피천 물이 성류굴로 흘러들어온다. 이 때문에 물에 잠겨있는 지역이 많고, 이런 곳은 탐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계속 새로운 지역이 발견되고 있다. 2007년만 해도 5광장과 12광장쪽에 물에 잠겨있는 부분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관람료는 성인 기준 3천원이고(만 65세 이상 무료),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절기는 오후 5시까지이다.
[[관동팔경]] 중 제 1경. 가장 남쪽에 있다. 동해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산 위의 정자로, 주변에 소나무가 많다. 풍경 이외에는 볼 거리가 없지만 울진읍에 가까워 접근하기도 쉽고 각 관광지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다 잠시 들르기 좋은 곳이다. 정자 자체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헐어버린 뒤 터만 남아 있다가 1960년대에 콘크리트로 어설프게 지은 것을 다시 철거, 1980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최근에 개발된 관광지. 조선 시대의 기인인 격암 남사고의 생가를 유적지로 개발한 곳이다. 성류굴에서 왕피천을 따라 약 2 km 상류에 위치해 있다.
* 봉평신라비전시관
근남면 산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이 곳 역시 관동팔경 중에 하나이다. 참고로 이 곳은 정철의 [[관동별곡]]의 종지부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 영화관 ===
지역 전체를 둘러봐도 영화관이 한군데도 없어서 과거엔 결혼 예식장에서 영화를 개봉하곤 했으나 --읍내리에 있던 울진소극장은 사라졌더라--현재는 군에서 청소년 수련관, 울진문화예술회관, 울진남부도서관,한울 원전 원자력 홍보관에서 개봉일이 좀 지난 영화를 무료로 상영해주다가 최근부터 1000원에 관람료를 받고 상영해주고 있다.
하지만 현제 군청 옆에 작은영화관이 공사가 진행돼는 중이다
|| '''관외사전투표''' ||<:>{{{#1870B9 34.89%}}}||<:>24.68%||<:>16.68%||<:>14.14%||<:>8.97%||<:>△10.21 ||<:>||
- 임수정(탤런트) . . . . 36회 일치
|| '''학력''' ||<(> 임실초등학교[br]관촌중학교[br]임실고등학교[* 몇몇 프로필에서 [[수원대학교]] 영화연극학과로 나오지만 잘못된 사항이다. 하단 부분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 ||
학창 시절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고 한다. 본인의 말로는 앞에서는 아니고 뒤에서 놀았다(?)고 한다.[* 본인은 인터뷰에서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불량한 친구들과도 사귀었다고 한다.] 공부에 큰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는데 그래서인지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녀의 모교인 [[명덕여자고등학교]]의 선생님들은 임수정에 대하여 "공부는 못하는데 아주 예뻤다"고 말하며, 학생들에게 '''"예쁘지 않은 너희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동창생의 증언도 '''좀 놀 줄 알고 예쁘장한 애'''라는 것으로 선생님들의 말과 대동소이하다. 문제아는 아니고 그냥 주위에서 흔히 보는 좀 노는 애 정도였던 듯.
오디션을 계속해서 보다가 마침내 [[학교 시리즈]]의 --당시에는-- 마지막인 《[[학교 4]]》에 출연을 하게 된다. 그것도 주연급으로 나왔다. 그러나 중간에 제작진과의 불화[[http://sports.chosun.com/news/entertainment/20011105/1be16005.htm|#]]로 그 이후로는 비중이 급격히 낮아지고 마지막회엔 거의 엑스트라급으로 나왔다. 그리고 당시에 같이 나오던 [[이유리(배우)|이유리]]가 더 잘 나갔다.[* 《학교 4》에서 둘은 극중 애증의 관계로 나온다. 중학교 시절 단짝이었으나 [[어른의 사정]], 정확히 얘기하자면 학교 선생의 실드 때문에 개, 소 보듯한 관계로 변하다 결국 서로의 진심을 알게되어 화해하게 된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역시 오디션을 통해서[* 이 [[영화]]의 감독이 [[DVD]]에서 당시 오디션이 경쟁이 치열했고 로비까지 있었지만 공정하게 심사를 했다고 말한다.] [[2002년]] 《피아노 치는 대통령》 으로 영화에 대통령([[안성기]] 분)의 딸 역으로 첫 데뷔를 하였으나 영화 자체가 평가가 안좋았다. 대통령으로 나온 [[안성기]]의 안정된 연기에도 불구하고 《[[겨울연가]]》로 당시 잘 나가던 [[최지우]]의 연기 문제와 비현실적인 내용이 문제였다. 임수정의 역할은 반항아인데, 얼굴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얼굴과 코디가 《학교4》의 범생역할 그대로...] 연기력도 부족해서 전혀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최지우]]의 연기가 워낙 가관이라 연기 못 한다는 말은 안 들었다는 건 자랑~~ 여담으로 여기서 첫 흡연 장면이 나온다.[* 임수정은 작품의 대부분에서 흡연을 하고, 본인이 죽거나 상대배우가 죽는다. 이건 동물도 예외없다.;;]
《[[장화, 홍련]]》 에 캐스팅이 된 것은 그녀의 연기인생의 큰 터닝 포인트가 된 일이었다.(사실상 마지막 오디션이기도 했다.) 여동생 역으로 나온 [[문근영]]과 자매연기를 한 그녀는, 여동생에 대한 집착으로 정신적으로 혼란한 언니의 연기를 보여 주며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3년 여름에 개봉되어 국내 공포영화 중 최다관객 기록.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2003년 각종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특히 청룡영화상에선 심사위원 만장일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간 콩라인에 떠돌다가 청룡영화상에서 결국 상을 받는다.~~
2004년 상반기 동안에는 잡지촬영, 광고 출연 외에는 특별한 활동이 없었다가 하반기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캐스팅된다. 이 캐스팅에 대해 그녀의 팬들이 이후 임수정이 배우, 연기자가 아닌 그저 대중적인 스타로 가는것이 아닌가 우려했고[* 사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전부터의 팬들 중 일부는 지금도 이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 경쟁작들이[* 대작드라마 전문 이환경 작가의 [[영웅시대]], 당시 서울대 출신의 미녀 탤런트로서 인기 절정이었던 [[김태희]]의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 만만치 않아 흥행도 보장을 못 했었다. 심지어는 KBS 관계자가 제작사 대표에게 임수정은 [[듣보잡]]이라며 빼라고 요청[[http://www.sportsseoul.com/news2/life/social/2009/0202/20090202101050100000000_6541684867.html|#]]까지 했다고 한다. [[2003년]] 각종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던 배우에게 이런 말을 한 건 '무식 인증'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2005년 많은 인기를 얻은 그녀는 영화 《새드무비》에 출연했으나, 영화가 높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 최고의 주가였던 임수정을 포함 [[정우성]], [[신민아]], [[염정아]], [[차태현]], [[손태영]], [[이기우(배우)|이기우]], [[여진구]]가 나오는데 흥행하지 못한 게 신기할 뿐;; 정우성이 2000년대 중반 놈놈놈을 제외하고 '새드무비’ ‘데이지’ ‘[[중천(영화)|중천]]’ ‘호우시절’ ‘검우강호’ ‘아테나: 전쟁의 여신’까지 모조리 망해가던 침체기였고 임수정도 거품이라는 말이 생기던 시점에서 차기작을 흥행필패로 여겨져서 여배우건 남배우건 기피하던 동물영화로 선택했다. 영화 《각설탕》 이 그것이다. 2006년 개봉한 영화는 동시기에 개봉한 《[[괴물(영화)|괴물]]》 강세 속에서도 1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존재감을 보여줬다. ~~여담으로 이 작품의 후속작은 [[김태희]]가 출연하여 16만 관객으로 폭망~~
곧이어 2007년 개봉한 《[[행복(한국 영화)|행복]]》에서는 다소 나이 차가 있는 [[황정민]]과 커플 연기[* 당시 영화 개봉 전 나온 예고편에서의 베드신과 영화 내용 때문에 [[황정민]]은 없던 안티 카페가 생겨 버렸다.(...)]를 보여주었다. 그 동안의 소녀 이미지와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나왔다. 2006년에 이어 2007년 역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작품은 [[허진호]] 감독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이다.
2007년 잠시 활동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이걸 한 기자가 과대해석하여 '임수정 연예계 은퇴선언'으로 기사를 올렸다.] 2007년 12월경부터 [[미국]] [[뉴욕]]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2008년]] 1월 중순에서야 뉴욕대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게 보도가 되었다. 유학생들의 목격담으로는 스타의식을 티내지 않고 ~~옷을 불쌍하게 입었다는 말도 있었다.(...)~~ 평범하게 [[도서관]] 같은 곳에서 돌아다녔다고. 심지어 중국인 유학생의 목격담도 있었다. 그런데 찍힌 [[사진]]이 없다.
분명 임수정 원탑 영화이고, 500만 관객 돌파에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까지 휩쓸었지만, [[류승룡]]의 존재감이 워낙 대단했는지라 이번에도 조금 묻히게 된다.
||<rowbgcolor=#c0c0c0>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관객수'''}}} || {{{#ffffff '''비고'''}}} ||
||<-2><#c0c0c0> '''{{{#white 총 관객수:}}}''' ||<-3> 21,537,878명 ||
흥행성적이 좋은 작품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장화 홍련》은 300만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고, 《각설탕》도 140만, 《행복》도 123만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이외에 《김종욱찾기》도 109만 명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아바타]]》에 밀리긴 했지만 《전우치》로 600만을 돌파하며 흥행력이 뒤떨어지는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전우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앉아서, 대부분 [[강동원(배우)|강동원]], [[김윤석]]의 영화로 기억한다.] 2012년 개봉작인 《내 아내의 모든 것》이 450만 명으로 흥행했다.[* 전국 관객수 4,588,395명 출처: 영화관입장통합전산망] 그런데 [[유연석]]과 함께 출연한 2014년작 《은밀한 유혹》은 손익분기점 200만에 14만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가족관계는 부모와 한명의 남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었는데, 빼어나고(秀) 밝게(晶) 되란 뜻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학창시절 조용한 성격에 공부에 관심이 없어 [[연예인]]이 될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사귀었던 친구들과 지금도 시간이 있으면 만나서 개인적으로 어울린다고 한다.
[[아날로그]]적인 성격이라고 한다. 때문에 컴퓨터도 쓰는 일이 별로 없다는데 전우치 인터뷰 당시 [[꿀벅지]] 드립을 친걸 봐서는 정보에 아예 무관심한 건 아닌 듯. 그리고 2015년 들어서는 인스타그램도 하기 시작했다.
* [[은지원]] : 말이 필요없는 관계. 같은 동안인데다가 친한데 임수정본인이 예능감이 없다고해서 예능을 안하다 보니까 서로 멀어졌다.
사실 위에 있는 인연들 대부분은 과거 신인 시절 소속사 선후배 동료 관계였고, 본인도 어느 정도 선배의 위치에 있고 소속사 이전 후에는 그 전과 달리 이들과 활발한 교류는 없는 듯. 오히려 의외로 [[구혜선]][* 위에도 언급된 애용처럼 영화 감독을 하고 싶다는 인터뷰에서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로 임수정을 꼽았고 임수정 본인도 인터뷰에서 구혜선과 알고 지낸다고 말했다.]과 [[산다라박]][* 김종욱 찾기 VIP 시사회 때 왔고 팬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친분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가 산다라박이 [[아이스버킷 챌린지]] 때 다음 지목 대상으로 임수정을 호명했고 임수정은 그걸 그대로 이행했다.], [[서현(소녀시대)|서현]][* 시간이탈자 VIP 시사회 때 임수정의 초대로 왔다고 말했다. 그 뒤 서현의 뮤지컬에 임수정이 관람을 오면서 서로의 인스타그램에서 대기실 셀카 사진을 올리며 친분을 다시 드러내기도.] 등 배우가 아닌 아이돌 기획사 소속 연예인과의 친분이 더 드러나고 있다.
* 학력위조? : 처음에 그녀는 수원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인터넷에 알려졌으나, 이는 학교4에 나온 다른 출연진의 프로필이 섞여생긴 해프닝이다. 2007년 학력위조 파문으로 연예인들의 학력위조 사례도 알려졌는데 한 언론매체는 그녀가 호서전문대를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프로필상 고졸로 한것은 학력위조라고 주장했다. 종종 그녀가 호서전문대에 다녔다는 주장이 나오긴 했었다. 2000년 기사엔 호서[[전산원]](당시 이름) 1학년 휴학 중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직업전문학교는 교육기관일뿐 대학교와 달리 취급한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1998년 학점은행제 시범운영 기관지정이 되었다. 현재는 직업전문학교를 졸업할때 80학점 이상 이수하면 전문학사 학위가 주어져서 전문대 졸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만 졸업했을때의 경우다. 재학 중에는 어떤 학력도 인정이 되자 않는다. 또한 졸업을 한게 아니기 때문에 학력에 기재할 필요가 없었고, 직업전문학교는 '중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치원이 아닌 미술학원을 다녀도 유치원을 다닌것과 같이 취급 받았다. 유치원과 같은 교육 어쩌면 미술에 대해선 더 자세히 교육을 받았다. 또한 똑같이 졸업식도 하고 유치원과 다를바 없다. 하지만 유치원은 졸업이라고 말하고 기재할수 있지만 미술학원 졸업이라고 쓰지 않는, 그와 다를바 없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학교는 대학이 아닌 교육기관이고 만약 그녀가 전문대 중퇴라고 했으면 그것이야말로 학력위조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2년제 전문대학 과정을 중심으로 4년제 학사과정까지 개설했으며 일정 학점 이상 이수하면 학위를 인정해준다. 호서전산원에 대한 언급이 처음부터 속이고 없었던 것도 아니며 처음엔 호서전산원 1학년 휴학 중이라고 밝혔으나 학력에 표기하기엔 당시 위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고졸로 표기된게 아닌가 싶다. 물론 현재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졸업했을시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사 학위가 주어져서 전문대 졸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결국 학력위조인지 아닌지는 판단에 맡긴다.
2007년 9월 당시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인기절정이었던 공유와 [[제주도]] 여행을 갔다는 특종이 실린다. 당시 [[수학여행]] 중이던 많은 고등생들이 사진을 찍었다. 누리꾼들은 학교 4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며 이들의 연애를 주장했지만..... 사실 단 둘이서 간것이 아니라 [[이천희]], [[공효진]], [[여욱환]] 등의 이들과 절친한 이들과 함께 여행을 간것이었다. 2008년 3월 7일 방송된 [[놀러와]]에선 당시 같이 여행을 간 이천희가 출연해 내막을 밝힌바 있다. 당시 수학여행을 간 고등학생들이 공항에서 임수정과 공유를 알아보고 몰려들어 일행들이 베이비룸으로 피했으나 일행과 떨어진 이천희가 뒤늦게 합류해 문을 열다가 이들이 플래시 세례를 받아 오해를 샀다는 것. 특히 여행 중 이천희는 임수정과 쇼핑도 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가졌다고(...)[[http://www.tvreport.co.kr/ArticleShellView.asp?art_id=200803080004|#]]
- 김민기(가수) . . . . 35회 일치
||<#9FC93C> {{{#white '''수상 경력'''}}} ||<#FFFFFF>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개똥이' [br] 한국평론가 협회 음악극 부문 연극상 [br] 서울연극제 극본상, 특별상 《[[지하철 1호선]]》 [br] 한국연극협회 '98 우수공연 5' 단체상, 번안상 《의형제》 [br] 제35회 동아 연극상 작품상 《의형제》 [br] 제6회 한국 뮤지컬 대상 특별상 [br]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의형제》 [br]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부문 [br] [[괴테 메달]] [br] 제5회 [[더 뮤지컬 어워즈]] 공로상 [br]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br]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은관 ||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고, 결국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익산시|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민기를 받아준 농가에서 정기적으로 김민기의 행적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멀지 않은 [[김제시|김제]]로 옮겨가 계속 농사를 지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뒤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1983년에는 2년 전 비공식 발표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가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극단 연우무대 대표 오종우를 각본가로 기재하고 자신은 익명으로 연출을 맡았다. 이 때까지도 김민기는 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12월에 전곡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특별시|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한살림은 2014년 현재 원주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조합원만 '''41만명'''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생활협동조합]]이다. 조합원들이 친환경-유기농산물를 생산해서 전국에 있는 직영매장에서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나, 해외 언론과 NGO에선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선 최고의 성과로 주목받고 있다.]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 공연을 하면서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공개적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1991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s-2|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는데,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서울)|대학로]]에 개관한 학전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 공연도 진행했고, 이 공로로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2001년에는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작곡된 김민기의 대표곡 아홉 곡을 김동성이 [[관현악]]으로 편곡한 앨범이 발매되었고, 발매와 동시에 '클래식 김민기'라는 타이틀로 임헌정 지휘의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공연해 화제가 되었다. 2004년에는 [[공장의 불빛]]이 [[정재일]]과 [[이적(가수)|이적]], [[이소은(가수)|이소은]], [[전인권]], 이지영, [[이승열]] 등 후배 음악인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1978년의 오리지널 카세트 테이프 복각본과 합쳐 두 장의 [[CD]]로 재발매되었다. 이 음반들은 그와 초기에 듀엣 활동을 했던 이노디자인 대표 김영세가 앨범 디자인을 맡았다.
'''[[2018년]] [[9월]]부터 [[지하철 1호선]]의 재공연을 시작한다고 한다.''' 워낙에 인기가 많던 뮤지컬이다보니 재공연 결정이 뜨자마자 관련 기사가 올라오는가하면, 배우의 면접을 위해 서류 심사를 시작한지 2주만에 1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지원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정은 [[지하철 1호선]] 문서의 재공연 문단을 참조하자.
정치적 행보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의 운동권 예술가들은 현재까지 그 성향을 이어가서 진보적 정치 성향을 드러내거나, 또는 전향하여 보수적 정치 성향을 드러내던지 해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 서있는 김민기 본인은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해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친형 이상의 존재로 여기던 [[김지하]]의 변절 논란에 관해서도 아무런 주관적 코멘트가 없다. 공식 석상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것과 더불어 김민기의 오랜 특징인듯.
2016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잠시 언론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같이 언급된 것은 일본의 [[하루키]] 작가이며, 어떤 기사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http://kns.tv/news/articleView.html?idxno=251534&daum_check=|관련 기사]]
[[김광석]]추모사업회의 회장이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도 그의 소관이라고. 생전에 김광석은 김민기 덕에 대학로의 스타가 될 수 있었고, 김민기 또한 그의 등장으로 학전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서로가 은인인 셈. 김광석 관련 사업을 생전 그의 멘토였던 김민기가 맡는 것에 이의를 품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김광석 다시부르기 프로젝트로 약 4억 3000만원이 모였고, 혹여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2018년이나 혹은 그 다음 해에 김광석의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을 만들겠다고 김민기가 직접 언급했다. 분명 김광석의 노래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못했는지는 하단 '인간관계' 문단의 김광석 항목 참조.
=== 인물 관계 ===
70년대를 살아낸 인물로써, 김민기는 당 시대의 수많은 인물들과도 연분이 있었다. 김민기의 인간 관계는 다음과 같다.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 한대수와 김민기 모두 대한민국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음악이 계몽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의 앨범에 한대수의 음악 '바람과 나' 가 실리기도 했고, 한대수도 2013년에 부른 '행복의 나라' 에서 '이제 나이 들어서 (음반을) 녹음할 수 없는 사람들' 로 김민기와 [[전인권]]을 뽑았다. 이를 보면 전인권과의 커넥션도 있었을지도?
김민기의 대학시절, 김민기가 만든 2인조 밴드 '도비두' 의 멤버였던 인물. 김민기와는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 현재는 산업 디자이너로 이노디자인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김민기의 스승 같은 존재. 김민기의 인터뷰에서, 김민기가 김지하로 하여금 '우리말의 생동성을 일깨워준 '''형'''' 이라고 언급했다. 스스로 자신을 김지하의 친동생 그 이상의 존재였다고 말할 정도. 애초에 김민기는 그가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김지하의 [[주여, 이제는 여기에|'금관의 예수' 에 쓰일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에, 김지하가 자신의 인생의 갈림길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지하가 '오적' 을 쓰고 도피하는 과정에서, 혜화동 다방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별로였다고.[* 당시 김지하는 '오적' 을 만든 죄로 수배 중이었는데, 태평하게도 럭셔리한 바바리 코트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 김지하가 정치적 행보를 바꾼 일에 대해서는, '그것은 그의 일' 이라며 말을 아꼈다.
[[공장의 불빛]]을 만들 때도 송창식의 집에서 비밀리에 녹음했고, 김민기 앨범 1에 수록된 송창식 작곡의 '내나라내겨레', 송창식이 부른 김민기 작곡의 [[이 세상 어딘가에]] 등, 김민기와 굉장히 많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뉴스, 기사는 없지만 굉장히 친했던 듯. 사실 자칫 발각되면 함께 연행될 수 있었던 공장의 불빛의 녹음을 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믿는 사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희은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송창식은 김민기에 대해 이야기하길 "아마 김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나는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반면에 김민기는 송창식을 형님으로 칭하면서 대인이시며 자신에 대한 송창식의 평가에 매우 쑥스러워하는 인터뷰가 있다.(SBS 한수진 아나운서의 인터뷰 영상이 있는데 링크 추가 바람)
전인권은 김민기가 프로듀싱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참여해 '이등병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 곡 해석을 둘러싸고 김민기와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전인권에게 김민기는 우상이자 컴플렉스고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천재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8113|관련 기사]].
전인권이 필로폰 복용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을때 김민기가 증인으로 출석해 전인권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6Fr&fldid=I62&datanum=10&q=%C0%FC%C0%CE%B1%C7%BE%C6%C4%A7%C0%CC%BD%BD&_referer=V7kfJwkeLEGMZxGlgqZEmaQLb8eiyrZGPTCztVfnclUh6RLC26EboI_ZSck8uQDHc6JGqBfCt.VxXtO6h.aYoA00|관련글]] [[http://weekly.hankooki.com/whan/last/990819/w615815.htm|관련기사]] [[http://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8786|관련기사]]
전 국무총리인 정운찬에게 부인될 사람(서울대 미대 동문)을 소개해주었다고 한다 [[http://news.joins.com/article/3759174|관련기사]]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Iv0I&fldid=29Q1&datanum=298&openArticle=true&docid=Iv0I29Q129820020828090019|관련기사]]
- 유인촌 . . . . 35회 일치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8CD7><bgcolor=#FFFFFF><height=50><-5><:>[[대한민국 정부|[[파일:대한민국 정부기 (구).png|width=50]]]] {{{+1 '''[[대한민국|{{{#043762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043762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043762 장관}}}]]'''}}}||
|| 본관 ||[[류(성씨)|전주 류씨]] ||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1951년]] [[3월 20일]]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태어났다.[* 그 이전까지 자신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라고 했다. 갑작스럽게 고향이 바뀐 이유는 가카 내각에서 호남 인사 홀대 소리가 나와서.... 유인촌의 부모가 [[한국전쟁]] 때 전주로 피란을 가 유인촌을 낳았다고 한다...]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연극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까지 중앙대학교 연극학과의 교수 역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예술대학에 교수연구실이 있었다. TV에서의 인자하고 덕이 풍부한 [[이미지]]와는 달리 강의 때는 여러모로 과격(?)했다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고 2012년 2월 20일부터 잠깐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맡았고, 2014년 배우로 복귀했다. 자신을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발탁했던 [[이명박]] 前 대통령과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어, 이명박이 퇴임한 현재도 최측근들과 더불어 이명박을 자주 만난다고 한다.
정치인이 된 이후 행보를 보면 꽤나 괴리감이 크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유인촌은 딱히 정치 성향 여부로 평가되는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역사스페셜> 진행자로서 공정한 이미지가 큰 편이었다.[* 한 예로 유인촌은 김대중 역으로 삼김시대에 출연한 시기(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해)에 역사스페셜 진행자도 맡고 있었다.] 유인촌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 잣대로 인해 엇갈리게 된 것은 그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 지지를 본격화하고, 이후 장관으로 입각한 200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다.
2014년 초, 홀스또메르를 통해 연극계로 복귀했으며 변함없는 연기내공을 선보였다. 특히 2015년에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라간 셰익스피어의 연극 [[페리클레스]]에서 메인 무대에 복귀했는데, 이때 아들인 연극배우 남윤호[* 이름은 당연히 [[예명]]이고, [[본명]]은 유대식이다. 유인촌의 아들이란 [[금수저]] 대우 받고 싶지 않다고 [[유학]]갔다 들어오면서 아예 성까지 바꾼 후 데뷔해서 수년째 극단 여행자 소속으로 활동중인 연극배우인데, 워낙 숨기다 보니 남윤호가 유인촌 아들인 걸 연극계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던 연출자가 남윤호를 한참 설득하고 나서야 이 연극에 부자가 같이 출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부자관계가 연극계에 뒤늦게 알려졌다. 심지어 같은 극단에서도 대부분이 그때 다들 처음 알았다고 한다.]와 페리클래스 역을 나눠 출연하여[* 아들은 젊은 페리클레스, 아버지는 해설자+나이든 후의 페리클레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실제 성은 '[[류(성씨)|류]]'씨(버들 류)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류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류씨를 유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유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유씨로 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류씨들이 행정상 유씨로 살고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유현진'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류'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류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류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유현진이 아닌 류현진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류(성씨)|류]]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
* [[가톨릭]] 집안 출신이다.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남동생은 [[성직자]]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이다. 2013년부터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을 근거리에 모시는 요직인 보좌주교를 담당하고 있다. 유경촌 주교가 막 신부가 됐을 적에, 배우 유인촌의 동생이라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http://m.pbc.co.kr/paper/view.php?cid=490221&path=201312|기사]]. 형제의 정치적 성향은 다른데, 유인촌이 보수정권 하에서 장관까지 지낼 정도로 보수성향이고, 동생 유경촌 주교는 카톨릭 내에서 진보적인 인사로 사회교리를 전공하였고, [[신부(종교)|신부]] 시절에는 [[가톨릭대학교]]에서 사회교리 전공 교수를 역임했다. 유인촌 본인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 [[개신교]]([[장로회]])를 잠시 믿었다가 이후에 다시 천주교로 돌아왔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된 후인 2015년 11월 22일에 논현2동 [[성당]]에서 동생인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로부터 [[견진성사|견진]]을 받았다. [[http://rose6217.blog.me/220557780401|같이 견진 받은 사람의 대모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보면 [[박인환]]과 [[이형석]]과 더불어서 견진을 받은 사진이 나열되어 있다. 사실 완전한 [[개종]]보다는 개신교 신자인 이명박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잠시 붙어다니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 장관을 하면서 재산 내역이 공개되었었는데 2008년 당시에 약 140억이었다. 그 중에 현금만 55억으로, 상당한 액수로 논란이 되었었는데 배용준은 재산이 더 많은데 왜 나를 가지고 그러느냐며 얘기했다가 애꿏은 사람 붙잡고 늘어진 것에 사과했다. 애초에 소속사 없이 활동하는 배우였고 80~90년대는 정말 잘나가는 배우로 여기저기 찾는데가 많았으니 사실 그 정도 레벨의 연예인이 저정도도 못 벌었다면 이상한 점. 다만 이 일을 기점으로 평소 역사스페셜등으로 널리 알려진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에서 과격하고 다혈질적인 이미지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 유인촌 장관에 대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311.html|#]]
* [[홍대거리/클럽|홍대 클럽]]의 은인(?)이다. [[카우치]] 사건이 터졌을 때 보수층 사이에서 홍대 클럽 폐쇄 여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에는 연극배우였고, 대학가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편이었던 터라 직접 서울시장 [[이명박]]을 데리고 클럽 드럭에 방문하여 록 공연을 함께 관람하며 클럽 문화를 변호했다. 이 덕분에 클럽을 쓸어버리려던 [[이명박]]은 생각을 돌렸고, 보수언론도 더이상 언급하지 않으면서 유야무야 넘어갔다. 이후의 행보가 어쨌든 현재 인디씬이 살아남는 데 나름 큰 공헌을 했다.
* [[본인]]이 적극적으로 추진했거나 크게 잘못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전파인증]] 규제를 완화시켜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10만 원대 휴대폰을 사서 전파인증으로 30만 원을 더 날려야 했을 것이다. 그가 전파인증 규제 완화를 시켜주게 된 계기는 바로 [[iPad]]. 국내에 아이패드가 출시되기 이전인 2010년 그가 방송에 직접 나와 발표를 하는데 아이패드를 쓰는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었던 것. 당시는 외산단말기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전파인증을 반드시 받아야 했으며 아이패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해주세염 하면 ㅇㅋ 하고 몇분만에 뚝딱 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30만 원이 넘는 비용을 내고 내부 회로도까지 직접 제출해야''' 가능했다. 이게 일반인 선에서 가능할리가 없다. 유인촌이 불법을 저지른것도 아니고 30만원에 내부 회로도 제출이 가능한 위치에 있으니 그 자체를 큰 문제라고 할 순 없지만 국민들은 비용과 절차 문제로 못쓰는걸 정치인인 장관은 태연히 방송에 나와 쓰는 모습 자체가 박탈감을 불러와 국민여론이 굉장히 안좋게 작용했다. 결국 정부는 '1인 1기는 전파인증 없이 반입 가능'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유인촌은 한동안 비꼬는 의미에서 '''[[문익점|문익촌]]'''으로 추앙을 받았다.
* [[문학구장]]에서 개막전 시구를 두 차례 한 적이 있다.(2008, 2009) 2008년에는 날씨 때문에 관중이 적긴 했지만 반응이 나쁘지 않았던 것에 비해 2009년에는 만원 관중들에게 엄청난 야유를 받았다. 왜냐면 아래의 찍지마 X발 때문에...
[[이명박]] 정권 초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08년 국정감사 도중, 야당 측의 [[이종걸]] 의원의 질의에 기분이 단단히 상했는지 '''"[[사진]] 찍지마! [[씨발|X발]] 찍지마!"'''라고 [[기자(직업)|기자]]들을 향해 [[반말]]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사실 이종걸 의원의 질의부터가 굉장히 무례했다. 'MB 정권의 휘하, 졸개' 운운한 것도 모자라서 그래 '사기극', '삼켜먹어버렸다.' 등의 과격한 [[단어]]들을 대놓고 내뱉었으며, 심지어는 [[호칭]]도 안 쓰고 그냥 '이명박의~'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욕설, 특히 기자들에게까지 [[막말]]을 했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대응이 아니었고, [[인터넷]]에서는 이종걸의 발언은 묻혀지고 이 욕설만 남고 말았다.국감이라는게 그런것이다. 질문자인 국회의원은 무슨 개같은 질문을 하든 묻히고, 발끈한 정부만 남는게 국감이라 10년이 지난 지금도 질문들을 개같이 한다. 유인촌입장에선 억울할법도. 연기하는 배우라서 오히려 카메라를 신경쓰지 못했나 싶을 정도. 아이돌 출신이면 카메라 신경썼을텐데..
뒤에서 말리고 있는 사람은 [[신재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2010년]]에 유인촌의 뒤를 이어 장관이 될 뻔 했으나[* [[청와대]]에서 지명.]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 등이 밝혀져서 후보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SLS조선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가 선고되었고, [[2013년]], [[대법원]] 판결에서 [[징역]] 3년 6월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차관들이 말리고 회의장을 나가면서 또 '''"XX, 성질이 뻗쳐가지고 정말... [[씨발|X발]]!"'''이라고 욕설을 했다.[* 일부 방송사에서는 삐~ 처리를 하거나 아예 [[소리]]를 안 내보냈다. 다만, 그냥 그대로 내보낸 방송사도 있었다.] 당연히 유인촌 장관은 [[구설수]]에 오르면서 푸짐하게 욕을 먹었고, 더불어서 유인촌을 데려온 [[MB]]도 싸잡혀서 [[세트]]로 욕을 무진장 먹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유머와 합성물의 소재가 되면서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2017년]] [[가을]],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의 작성이나 실행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나와서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164108|기사]]. 일단 본인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965355|기사]].
* [[원더풀 데이즈]] DVD 완전판 - 부관
극장 개봉 당시에는 [[김병관(성우)|김병관]]이 맡았다. 극장판의 부관이 너무 간사해서 악역이라기보다는 잡졸로 느껴졌던 것에 비해 유인촌의 부관은 좀 더 악당으로서의 존재감이 강조되었다.
- 정칠성 . . . . 35회 일치
}}</ref> [[민족 대표 33인]]은 요리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고 일부 기생들도 동참했다. 한편 이씨 성을 가진 남성과의 사이에서 일찍이 아들 이동수(李東樹)를 낳았지만 결별하고, [[고려공청회]] 책임비서인 [[신철]](辛鐵)과도 동거하기도 했다.
그는 작문에도 능하여 글과 논설을 지어 발표하였는데, 여성의 계몽, 교육의 장려, 사회 부조리의 개선, 위생 청결론 등을 주장하여 이른바 '사상 기생'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태화관을 출입하던 소설가 장혁주는 그의 존재를 인상깊게 기억했다가 회상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1896년)|김명순]] 등과 함께 잡지 [[신여자]]지의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다. 이후 그는 [[조선]]의 역사 관련 서적,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을 구해서 독서하였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체류 중, [[1925년]] [[3월]] [[도쿄]]에서 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삼월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3월 8일]] [[대구]]부내 노동공제회에서 [[대구여자청년회]] 주최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인데이]] 기념행사에 연사로 초빙되어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5년]] [[3월 22일]]에는 [[대구청년회관]]에서 경북지역 인사들이 모인 사회주의 연구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3월 31일]] 다시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여자기예학교]]에 복학하였다.
[[1926년]] [[신철]]과 이혼하였다. 그런데 신철은 정칠성의 동지인 [[정종명]]과 동거하였다. 정칠성은 개의치 않고 신철과 예전처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정종명과도 예전의 사상적 동지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들의 연애는 화제가 되었다.
[[1927년]] [[4월 26일]]에 [[경성]] 중앙유치원에서 좌우합작의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설될 때 [[유각경]], [[황신덕]], [[김선]], [[허정숙]]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연합체인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의 결연을 주선하였다. [[4월 28일]] [[근우회]]를 발족되자 [[근우회]] 회원모집부 부원이 되어 [[대구]]로 내려가 홍보, 회원을 모집하고 근우회 경상북도지회 조직을 주관하였다. 정칠성은 근우회가 전국에 지회를 결성할 때 대구지회 결성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집행위원(당시 21명)을 구성하는 데까지 활약하였다.<ref name="dispose"/>
정칠성은 근우회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 회원모집의 업무를 맡았고, 이후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dispose"/> 창립대회장에서 정칠성은 "여자의 날(당시 4월16일) 제정기념으로 시위를 하자" 는 의견을 내었으나 감시중이던 일본경관들의 저지로 시행할 수 없었다.<ref name="dispose"/> [[5월 27일]] [[근우회]] 선전조직부 위원, [[5월 29일]]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7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11월]] 서대문정 [[조선여자기예원]](女子技藝院) 교수로 초빙되었다. 여자기예원 교수로 있으면서 부녀자들에게 수자수, 편물, 공예 등을 가르쳤고 일과시간 이후에도 자신의 사택을 찾아온 부녀자들에게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다. [[12월 2일]] 마포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경성지회 강연에 [[이관용]](李灌鎔), 이관구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 '신간회와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8년]] [[1월 15일]] 서대문구 서대문정에 있는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28년]] [[2월 3일]] [[근우회]] 총회에서 경성지회 설치가 결정, 심은숙(沈恩淑), 조원숙(趙元淑), 문인순(文仁順)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를 조직하였다. [[2월 23일]] 공평동 근우회관에서 [[허정숙]]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 창립 발기인이 되고, [[3월 13일]]에 근우회 경성지회 출범 후 경성지회 중앙위원에 위촉되었다.
1928년 5월 12일 경성부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근우회 창립1주년 기념식 때 사회자이자 연사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근우회 창립 일주년 기념식을 맞으며'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5일]]에는 [[경상북도]] [[영천]]에 파견되어 [[근우회]] 영천지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6월 7일]]에는 근우회 영천지회 창립발기식을 지원하고 근우회 조직 취지를 설명하였다.
여자직업사의 수자수 교사와 근우회 각 지회설치 활동을 하면서도 동아일보, 삼천리지 등에 칼럼과 논설을 발표하였다. [[1928년]] [[5월 20일]]에는 황주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문제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 '여성운동과 신간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강연 주제 중 그는 '우리 조선여자들은 남자들의 완롱물이요, 남자의 위안물이며, 남자들의 일개의 생식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예였다.'는 내용이 문제시되어 임석경찰관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근우회 본부요원으로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개최된 근우회 임시전국대회 행사를 주관하였다. [[7월 16일]] 경성부 경운동 천도교회관에서 열린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에서 유각경, 황신덕 등과 함께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7월 17일]]에는 근우회 집행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랑과 섹스가 무관하다는 관점은 [[1920년]]대 [[1930년]]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칠성은 사랑과 성이 무관하다는 콜론타이의 이론을 수용, [[조선]]에 소개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며 사랑 없이도 섹스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성리학]]자들과 남성 문필가들로부터 음란하다는 비난과 반발을 초래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1930년]]에는 [[조선공산당]]과 관련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 투옥되었다.
[[1929년]] [[1월 21일]] 신간회 경성지회 사찰위원, [[1월 22일]] 신간회 임시대회에서 본부대회 대표회원에 선출되었다. [[2월 17일]] [[신간회]] 2주년 기념식에 [[권동진]], [[허헌]], [[김여식]], [[이종린]], [[홍명희]] 등과 함께 축사를 낭독하던 중 임석경관에 의해 소환되었다. [[2월 19일]] 근우회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근우회]] 회보 발행책임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22일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 5월 25일에는 진남포에서 에버트 청년회관에서 '근우회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1일]] 근우회 경성지회 상무위원을 겸하였고, 의주에 도착하여 의주공회당에서 강연하였다. 이후 신의주 강연을 거쳐 [[6월 14일]] 인천 내리에서 조선여성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순회강연을 마쳤다. [[6월 18일]]에는 개성 고려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근우회개성지회 대회 행사에 사회자로 참석하였다.
[[1930년]] [[3월 29일]] 열차 운전사들의 파업에 관련자로 지목되어 용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4월 3일]] 석방되었다. [[4월 15일]] [[신간회]] 경성지회 대회에서 [[정종명]] 등과 함께 [[신간회]] 경성지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저자=전봉관
[[1931년]] [[1월]] 《조선지광》 1931년 정월호에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녀는 연애로 인한 고민과 여성의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하였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종속적인 관계의 결혼을 하게 되는 여성들과 남자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의 길을 포기하는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성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연애도 결혼도 모두 평등한 여성으로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이러한 불합리한 사회적 제도와 환경과 싸워야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으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여중, 여고를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였다.
1938년 5월 함경남도 장진에서 삼포금광배급소 주임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ref name="dispose"/> 정치 활동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여 [[조선총독부]]의 의심의 눈을 피한 그는 지하활동을 하는 [[박헌영]], [[김조이]], [[조봉암]] 등과 수시로 연락하며 정세를 살폈다.
정칠성이 관여한 단체들은 한결같이 여성 해방과 무산계급 여성에 의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다.<ref name="propp"/> 그녀는 남자에게서 그리고 사회의 억압과 인습의 굴레에서 독립하여 한 사람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 하였다. 정칠성은 3.1운동 뒤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2년 도일하여 일본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수학했다.<ref name="dispose"/>
- 김숙자 (1389년) . . . . 34회 일치
'''김숙자'''(金叔滋, [[1389년]] [[8월 24일]] ∼ [[1456년]] [[3월 2일]])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f name="김숙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숙자(金叔滋),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 [[윤상 (조선)|윤상]](別洞 尹祥)의 문인이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1419년]](세종 1)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본처와의 이혼 경력으로 요직에 임명될 때마다 거듭 [[사헌부]]에서 논계하였다. 사예(司藝), 중훈대부에 이르러 관직을 사직하고 [[1456년]] 처가인 [[밀양]]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아들이자 문하생인 [[김종직]]을 통해 [[정몽주]]의 학통을 전수하였다.
[[1389년]](고려 창왕 1)에 [[경상도]] [[선산군|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태어났다.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 유씨이다.<ref name="김숙자"/>
=== 관료 생활 ===
[[1414년]](태종 14) 봄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417년]](태종 17) 봄 중성균시(中成均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그 해의 회시(會試)에는 낙방하였다.<ref>佔畢齋集彝尊錄 佔畢齋集彝尊錄 (上) 子通訓大夫前善山都護府使宗直撰, 先公紀年第二</ref> [[1419년]](세종 1) [[안동]][[향시]](安東鄕試)에 제2등으로 합격하여 [[한양]]으로 상경, [[1419년]](세종 1)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였다. [[장사랑]] 권지[[성균관]]학유에 임명되거 고향으로 돌아왔다. [[1421년]] 봄 학유에 다시 임명되고 이듬해 [[1월]] [[한양]]으로 올라가 관직을 시작하였고, 사관(史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전처인 한씨와 이혼하였다.<ref name="ginyon"/> 전처 한씨의 자매의 남편 김주(金宙)는 의술 재주가 있었는데, 김주는 성주목사 이상선(李相善)에게 그가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한 후 아내를 출처했다고 고하였고, 이는 그대로 [[예문관]]에 보고되었다.<ref name="ginyon"/>
[[1422년]](세종 4) [[5월]] 종사랑으로 승진, 성균관학록이 되었다. 아들 김종직에 의하면 [[1423년]] 김주가 한성으로 간 뒤, 장인 한변(韓變)을 불러서 [[사헌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사헌부]]에 소환된 그는 대질심문을 받았으며 낙직(落職)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다.<ref name="ginyon"/> 고령현감을 거쳐, [[1423년]](세종 5) [[7월]] 성균 직학(成均直學)이 되었을때, [[사헌부]]가 [[세종대왕]]에게 그가 자식이 있는 조강지처를 망령되이 서얼(庶孽)이라 일컬어 아무 까닭도 없이 버려 이별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대를 치라는 계를 올렸다.<ref>세종실록 21권, 1423년(세종 5년, 명 영락 21년) 7월 4일 임오 3번째기사, "성균 직학 김숙자를 처벌하다"</ref> [[1431년]] [[7월]] 모친 유씨가 죽어 밀양에서 분상했는데, 8월 아버지도 사망하였다. 그는 할머니 김씨부인 묘소 하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이후 3년간 복상하였다. [[1433년]] 가을 상복을 벗고 [[밀양]]으로 돌아왔다.<ref name="ginyon"/>
[[1435년]](세종 17) [[9월]]에 한성으로 돌아가 그해 [[10월]] 성균관학록에 복직했으며<ref name="ginyon"/>, [[12월]]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고, 또 통사랑(通仕郞)으로 다시 승진,[[성균관]]진덕박사 겸 [[양현고]]녹사(成均館進德博士兼養賢庫錄事)에 임명되었다.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9월]] [[무공랑]] [[성균관]]박사겸 [[양현고]]승이 되었다. [[1437년]] [[12월]] [[선무랑]]에 배사하고 [[선공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 [[예빈시]]주부, [[6월]] [[내자시]]주부 등을 역임했다.
그는 관료생활 외에도 [[소학]]부터 경학 등 학문을 가르쳤고, 아들 [[김종직]] 외에도 탁중(卓中), [[이재인 (조선)|이재인]], 손조서(孫肇瑞) 등의 문인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김숙자의 문인 중에서 우수한 제자 9명은 세칭 아홉 현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1438년]](세종 20) [[10월]] 내자 주부(內資主簿)로 재직 중 서연 정자(書筵正字) 직에 겸임되었다. 이때 사간원 좌정언 이예장(李禮長)으로부터 전에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고 죄를 얻어 침체되었다가, 이제 죄를 용서 받고 다시 벼슬길이 열렸사오나 잘못을 뉘우치는 행적을 듣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세종실록 83권, 1438년(세종 20년, 명 정통 3년) 10월 26일 정축 2번째기사, "음사는 본궁의 은밀한 곳에서 행하도록 하다"</ref> 이후 집현전 주부(注簿)로 있다가 [[1439년]](세종 21) [[4월]] [[이조]]에서 그를 동부 교수관(東部敎授官)으로 발령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탄핵 상주를 올려, 왕명으로 사유록(師儒錄)에서 삭제당하였다.<ref>세종실록 85권, 1439년(세종 21년, 명 정통 4년) 4월 14일 신묘 8번째기사, "김숙자를 사유록에서 삭제하다"</ref>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12월]] [[사재감]]부정, 54년 2월 성균관사예(司藝)를 거쳐 8월 봉렬대부로 승진하여 성주교수관이 되어 내려왔다. 그해 12월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되었으나, [[1455년]] [[12월]] 사직하고 [[1456년]]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 [[3월 2일]]에 [[밀양군]] 대동리 정침에서 죽었다. [[1455년]](세조 1년) [[12월 12일]] [[세조반정]]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관료들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으로 포상할 때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1457년]](세조 3) [[10월]] [[원종공신]]이었으므로 법전에 따라 1계급 특진 추증되어, [[증직|증]] [[중직대부]](中直大夫) [[예문관]][[직제학]] 겸 [[춘추관]][[기주관]](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에 [[추증]]되었다.<ref name="ginyon"/>
김숙자는 스승 길재의 가르침에 확신했고, 그걸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의 이 가르침을 평생을 두고 지켰다. 어릴 때부터 책 목록을 정해 놓고, 그 순서대로 읽는 습관을 따랐다고 한다. ‘소학’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실천 강조 학풍은 김숙자-[[김종직]]을 거쳐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될 정도로 큰 설득력을 발휘했다. 뒤에 영남사림파의 큰 학자로 드러난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지칭하면서 30세까지 ‘소학’에만 천착했을 정도였다. [[길재]]에서 김숙자를 거쳐 [[김종직]]에 이르는 [[정주학]](程朱學)의 학통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관(金琯)
- 홍순언 (1530년) . . . . 34회 일치
'''홍순언'''(洪純彦, [[1530년]] ∼ [[1598년]])은 [[조선]] 중기의 한어 통역관, 외교관으로 본관은 [[남양군|남양]](南陽)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구원군 파병에 공을 세웠으며, [[종계변무]]에 세운 공로로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었다. 기방에 팔려온 [[남경]]의 [[호부]][[시랑]] 류모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녀의 남편이자 당시 [[예부]][[시랑]] [[석성 (명나라)|석성]]의 전폭적인 신뢰로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시 [[명나라]] 군대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그의 가계는 남양 홍씨 첨사(詹事) 홍호(洪灝)의 동생인 예사 홍복(洪澓, 일명 홍복(洪復))의 12대손이다. [[가선대부]]에 추증된 [[홍겸]](洪謙)의 서자였다. 출신지는 한성부라는 설과 [[경기도]] [[광주군]]이라는 설이 있다. 1899년에 편찬된 [[경기도]] [[광주군]]의 향토지인 광주군지 인물편에 그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할아버지 홍경창(洪慶昌)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안동부사(安東府使)등을 역임했고, 큰아버지 홍신(洪愼)은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양주목사(楊州牧使), 형조참의(刑曹參議),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539년]](중종 34년)에는 [[명나라]]에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아버지 홍겸은 [[1531년]] 역과에 급제하여 [[명나라]]에 두 번 역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서출이었던 홍순언은 일찍이 [[한어]](漢語)를 익혀 한어역관이 되었다. 처음 이름은 덕룡(德龍)이고 자는 순언이었는데 뒤에 순언을 본명으로 쓰게 되었다. 동생인 수언과 이복 동생인 덕린이 있었는데, 동생 수언은 1549년의 역과에 급제한 인물로 한어역관으로 활동하였다.
[[명나라]] 연경에 체류 중 명나라의 예부 관원은 사신들을 대접한다며 홍등가로 데려갔다. 이때 홍순언은 그중 가장 값이 비싼 금 3천냥을 해어화채(解語花債<ref>기생의 몸값</ref>)로 제시한 기생의 방에 들게 되었다.
홍순언은 대죄하여 무릎꿇고 '작은 나라의 미관 말직 벼슬아치가 어떻게 대국의 귀한집 따님을 욕보이겠습니까' 하며 부복하여 절을 올리고, 자신이 가져온 돈 2천 냥과 인삼을 그녀에게 주었다. 2천냥과 인삼을 팔아 마련한 돈 1천냥으로 그날로 류씨 소녀의 빚을 청산해주고 장례비용까지 대주었다. 류씨 소녀는 거듭 감사하다 하며 그에게 성과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자신은 그냥 [[조선]]의 홍역관이다.<ref>혹은 성을 밝히지 않고 그냥 조선의 역관이라 했다.</ref>라고 했다. 류씨소녀는 은장(恩丈)이라 하며 거듭 감사를 표시했고, 그는 친히 소녀를 배웅하였다. 조선의 역관들은 조정의 허락 없이도 사적으로 인삼과 비단 무역이 가능했는데, 동료 역관들은 이것을 공짜로 류씨 소녀에게 주고 온 그를 바보라고 놀려댔다. 도리어 그가 류씨 소녀에게 준 2천냥의 돈이 공금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 하지만 얼마 뒤 석방되었다.
이후 동료 역관들은 홍순언이 [[명나라]]에서 소녀를 구한 사실을 물었으나 그는 덮어두라며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에서 종계변무사신이 파견될 때마다 담당인사 였던 석성은 사신을 만나주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홍역관이 왔느냐는 질문을 계속 했다고 한다.
[[종계변무]]란 조선 건국 때부터 선조 때까지 2백여 년간 명(明)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하였던 사건이다. 태조때부터 시정을 위해 사신을 15회나 파견하였지만 전부 거절당하였다. 지속적으로 거부당하자 조선 14대임금인 선조는 “종계변무를 이번에 성사시키지 못하면 목을 쳐버릴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역관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윽고 [[1588년]](선조 21년) [[대제학]](大提學) [[황정욱]](黃延或)을 종계변무사로 [[홍성민]](洪聖民)을 부사로 파견했다. 이때 홍순언은 역관으로 파견되었다.
변무사절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명나라 예부상서 [[석성 (명나라)|석성]]이 [[요동]]의 국경까지 영접 나와 홍역관이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자신임을 밝히자 석성은 장인어른 큰절을 받으라며 그를 친히 모셔갔다. 이상하게 여기던 중 장안의 관사에 도착하자 귀부인이 나와 그에게 큰절을 올렸는데 이는 그가 명종 때 구해준, 이제는 석성의 계비가 된 류씨 소녀였다.
석성은 동방에도 그대와 같은 의인이 있었다며 후히 대접하였고, 황정욱과 그가 《대명회통》과 명나라 《태조실록》에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로 기록된 내용이 잘못이고, 이성계는 이자춘의 아들임을 황제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대소관리들은 당대에 수정하지 않고 이제 와서 계속 번거롭게 구느냐며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당시 예부상서였던 석성의 적극 건의로 개정되었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사절단은 귀국하였는데, 류씨 부인은 손수 짠, 보은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황금 비단 1백 필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익을 취하기 위한 일은 장사치나 하는 것이라며 비단을 거절하고 귀국했다.
사신이 탄 말이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류씨 부인과 하인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이 되어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은 금수만도 못한 것이라며 비단을 받기를 거듭 부탁하며 하소연하니 비단을 받아서 되돌아왔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공으로 홍순언은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고, 면천 허통하여 [[자헌대부]] 당성군(唐城君)에 책봉되었다.<ref>홍순언은 서자의 신분이었다.</ref> 후에 우림위장(羽林衛將)이 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그가 [[장안]]에 도착하여 [[조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조국 정벌 음모를 접했음에도 이를 거절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며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명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토벌하려 하는 것은 아니냐며 조선 지원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병부시랑으로 있던 석성의 도움으로 홍수언은 [[명나라]] 군사 5만 명의 파병을 성사시킨다. [[석성]]을 통해 그의 의기를 접하게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선뜻 가겠다고 자청했고,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고 한다.
관직은 [[자헌대부]]에 이르렀고, [[1598년]]에 병사하니 향년 68세였다. 사후 [[조선]]에서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증직]]되었고, [[명나라]]로부터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의 [[증직]]을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조선 효종|효종]]의 부마인 동평위 [[정재륜]]의 동평위공사견문록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 [[이익]]의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 편 등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첫째 아들 [[홍건]]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당상관]]을 지냈고, 넷째 아들 [[홍운]](洪運)은 [[광해군]] 때인 [[161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홍건의 아들인 손자 [[홍효손]]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 가족 관계 ==
[[허봉]]은 그가 말을 잘 한다고 평가하였다. '홍순언의 말은 조리가 있어서 기록할 만하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오래 들으면 피로도 잊었다<ref>허봉, 《조천기 》(상)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연행록선집 1》 (경인문화사, 1976) pp.86-169</ref>'고 높게 평가하였다.<ref>김영숙, 〈역관 홍순언과 조명외교〉,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제70집 (2011년 02월호)》 (중국사학회, 2011) pp 195</ref>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에는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될 때 [[임진왜란]] 당시 5만의 병력을 파견하게 했던 [[석성]]이 투옥된 것을 기록한다. [[이익]]은 '[[1640년]]대 [[석성]]이 투옥된 후 [[이항복]]이 [[명나라]]의 [[베이징]]에 갔을 때 [[석성]]의 문하생인 양씨가 와서 "귀국에서 말 한마디라도 올려 스승을 구해주기를 청한다"고 간청하였지만 [[이항복]] 등 조선의 사절단들은 이를 웃으면서 방관하였고, 한 사람도 사신을 보내 [[석성]]의 억울한 옥사를 변명해주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석성]]의 문인은 [[조선]]에 와서도 스승 석성을 구해줄 것을 청했으나 [[조선]] 조정은 입으로만 소중화, 재조지은을 외칠 뿐 양씨의 청을 거절하였다. 성호 [[이익]]은 이를 언급하며 당시 관료들의 배은망덕함을 질타하였다.
== 관련 서적 ==
* 김영숙, 〈역관 홍순언과 조명외교〉,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제70집 (2011년 02월호)》 (중국사학회, 2011) pp195~222
- 황두진 . . . . 33회 일치
평양 출신의 아버지와 원산 출신의 어머니 사이 서울에서 태어났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o.kr/books?id=_EHEAwAAQBAJ&printsec=frontcover&dq=%EB%8B%B9%EC%8B%A0%EC%9D%98+%EC%84%9C%EC%9A%B8%EC%9D%80+%EC%96%B4%EB%94%94%EC%9E%85%EB%8B%88%EA%B9%8C&hl=ko&sa=X&ved=0ahUKEwjwoLqgxa_bAhWDVLwKHeIxBacQuwUIKDAA#v=onepage&q=%EB%8B%B9%EC%8B%A0%EC%9D%98%20%EC%84%9C%EC%9A%B8%EC%9D%80%20%EC%96%B4%EB%94%94%EC%9E%85%EB%8B%88%EA%B9%8C&f=false |인용=그의 할아버지는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하는 사업가였으며 해방 전에 사업을 서울로 옮겨 성북동 청암장(현재의 길상사)에 살면서 일종의 사설도서관을 운영했고, 해방과 전쟁으로 이북의 사업기반을 잃고 난 후에는 당시 창경원의 장서각 사서로 일했다.|제목=황두진,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p20|성=|이름=|날짜=|출판사=해냄|확인날짜=}}</ref>
서울대와 예일대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김종성, 김태수 등의 사무소에서 수련하였다. 그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건축가로 평가받고 있다. 한옥을 현대건축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일련의 작업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ref>{{웹 인용|url=https://gwangjinlib.seoul.kr/gjinfo/recommendBookDetail.do?bookIdx=2149&recommendTypeCd=general|제목=가장 도시적인 삶|저자=황두진|날짜=|웹사이트=광진정보도서관|출판사=반비}}</ref>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하여 유럽을 순회한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건축전>에 참여했고 동 전시회의 전시디자인을 맡아 새로운 개념의 건축 전시를 보여준 바 있다.<ref>{{웹 인용|url=http://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menuId=1030000000&exhId=200912140002813|제목=메가시티 네트워크ː 한국현대건축 서울|성=|이름=|날짜=|웹사이트=국립현대미술관|출판사=}}</ref>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모두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건축가 중 한 사람으로 그가 2010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동아시아박물관 한국실을 설계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마당과 툇마루, 방을 오밀조밀하게 누비는 한옥의 동선을 전시실에 적용했다"며 "한옥의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그 분위기를 은은하게 살렸다"고 했다. <ref name=":0">{{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13/2012021300208.html|제목=[오늘의 세상] 스웨덴 왕가의 代이은 한국사랑|저자=채민기 기자|날짜=2012년 2월 13일|뉴스=|출판사=}}</ref>
건축가로서 개별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도시, 거리와 소통하는 건물, 사회에 필요한 건축 등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무지개떡 건축은 그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이다. 그가 현대 도시건축의 중요한 유형으로 보고 발전시켜오고 있는 개념이다. 개별 작품과 기고문을 통해 생각을 전개시킨 후 2016년 저서인 '무지개떡 건축'을 통해 정리해서 발표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22085412|제목=진정한 의미의 주상복합이 가장 도시적인 건축|저자=이은주 기자|날짜=2017-11-06|뉴스=중앙일보|출판사=}}</ref>
까오 의자가 국립현대미술관과 쇳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웹 인용|url=http://www.mmca.go.kr/collections/collectionsDetail.do?menuId=2010000000&wrkMngNo=DE-05880 |웹사이트=MMCA|제목=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저자=|날짜=2006|출판사=|확인날짜=}}</ref>
* 2012 스톡홀름 동아시아박물관 한국관 (스웨덴 스톡홀름)<ref name=":0" />
* 2008 춘원당한의원 및 박물관 (서울 종로구 낙원동)<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HrAHT6ymcW8|제목=[空間사람] 춘원당 한방박물관 편 (황두진)|저자=tbs|날짜=|웹사이트=|출판사=}}</ref>
2016 베니스비엔날레건축전 한국관 ‘용적률게임’
2016 ‘New Shelters’, 아르코 미술관<ref>{{웹 인용|url=http://www.arko.or.kr/infra/pm1_04/m2_02/m3_01.do?mode=view&page=&cid=532226 |제목=New Sheltersː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성=|이름=|날짜=|웹사이트=아르코미술관|출판사=|확인날짜=}}</ref>
2014
'협력적 주거 공동체 Co-living Scenarios', 서울시립미술관
2012
'컨템포러리 한옥',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ref>{{웹 인용|url=http://sema.seoul.go.kr/korean/exhibition/exhibitionView03.jsp?seq=377&iPage=1&iListCont=10&sSrchType=x&sSrchValuEx=&iTcnt=0&iPageCont=10&iCurrPage=1&pDateGubun=PREV&pTypeGubunAll=&sStartDate=&sEndDate= |웹사이트=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제목=[기획전]컴템포러리 한옥 CONTEMPORARY HAN-OK|성=|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2011
'집을 생각하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ref>{{웹 인용|url=http://www.clayarch.org/web/board/BD_board.view.do?seq=MjAxMjAyMjAxMTI0MDU5MDE%3D&bbsCd=1080&pageType=&showSummaryYn=N&delDesc=&q_currPage=7&q_sortName=&q_sortOrder=&q_ctgCd=&q_searchKeyType=&q_searchKey=&q_searchDt=102&q_startDt=&q_endDt=&q_searchVal=&tab= |웹사이트=김해클레이아크미술관|제목=[기획전]집을 생각하다|성=|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2007-2009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건축', 프랑크푸르트 독일건축박물관, 베를린 독일건축센터, 에스토니아 건축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카탈로니아건축사협회 에스파이피카소,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순회<ref>{{서적 인용|url=https://www.jovis.de/en/books/product/megacity-network.html|제목=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Megacity Network, ISBN 978-3-939633-37-2|성=Sung Hong Kim / Peter Cachola Schmal (eds.) in cooperation with KAI (Korea) / DAM (Germany)|이름=|날짜=|출판사=jovis|확인날짜=}}</ref>
2006
'건축가의 가구', 쇳대박물관 ('까오' 의자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2016 환태평양 지역 4개 대학 순회강연(외교부 ‘국민 모두가 공공 외교관’ 프로그램): 싱가포르 국립대학(싱가포르), 말라야대학(쿠알라룸푸르), 출랄롱콘대학(방콕), 뉴사우스웨일즈대학(시드니)
2011-2015 국립중앙박물관 운영자문위원
2009
미국 5대 도시 순회강연: 보스턴 하버드건축학대학원 한국연구회,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 워싱턴 스미소니안 아시아미술관(프리어갤러리),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과 유씨엘에이(UCLA) 건축 및 도시디자인 대학원, 시애틀 워싱턴주립대 건축대학
2005
'황두진의 건축이야기' 연속강연, 성곡미술관
2004
현대미술아카데미 초청 강사, 국립현대미술관
- 김상조 . . . . 32회 일치
[Include(틀:국무총리직속기관장)]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1학번으로 [[서울대]]에서 경제학 학부, 석사 및 박사과정을 거쳤다. [[1993년]] '설비자금의 동원 및 배분체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당시 지도교수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었다.
2010년 한국경제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 3위에 꼽히기도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했다]].[* 1등은 당연히 [[이건희]]였다. 2위는 당시 기재부장관 윤중현. '없다'를 포함시키면 4위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내정되며 대중적인 인지도가 급속도로 올라갔지만[* [[최순실 국정조사]]에서 참고인으로 나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최순실 특검]]에게도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여 대중에게 조금씩 그 이름을 인식시켰다.] 이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 아주 오랫동안 재벌개혁 시민운동을 계속한 인물로 한국 재벌과 관련해서 학문적인 관심이 있어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접할 수 있었다. TV 토론에도 종종 얼굴을 비췄고 언론 기고 또한 활발했으며 독자적인 저술은 한 권밖에[* 제목은 '종횡무진 한국경제'. 책을 읽어보면 통계적 근거와 [[경제학]]적 통찰을 근거로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해 담백하게 논하는 대중 서적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진보인사라고 하면 거리를 둘 법한 주장도 많이 보인다.] 없는 듯하지만 [[알라딘]]에서 [[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SearchTarget=All&SearchWord=%b1%e8%bb%f3%c1%b6&x=0&y=0&|김상조]]를 검색해 보면 확인할 수 있듯 한국 경제, 재벌과 관련해서 다양한 저술에 저자로 참여해왔다. 공정위 위원장으로 내정되기 이전 소장으로 적을 두고 있던 경제개혁연대에서 수많은 저작물을 쏟아낸 것은 물론이다.
삼성과 관련해서도 꼭 원수지간(?)이라기 보다는 애증(愛憎)의 관계에 가깝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7/2017051702090.html|관련기사]]
6월 6일 기준, 7일로 예정되어 있는 김상조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이 진통을 겪는 중이다.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은 반대, 국민의당은 의원총회 후 당론 결정 이라고..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493128&ref=A|관련기사]] 결국 [[http://www.fnnews.com/news/201706121657206165|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되면서]] [[자유한국당]]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첫 시작으로 공정위에서 BBQ 가격 인상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된다. 이에 치킨 업계는 줄줄이 인상안을 취소하거나 심지어 기존 치킨 가격을 인하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2017년 BBQ 치킨값 파동]] 참조. 김상조 위원장은 공정위는 가격 조정 기관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임명 후 빨리 알기 쉬운 효과가 나타나자 국민들에게 일 잘하는 공정거래위원장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다음 타겟은 피자 헛[[http://news1.kr/articles/?3022211|#]]--
김 후보자 측은 “당시 중학교 교사였던 김 후보자 부인이 지방 전근 발령 난 상태에서 건너편 친척집에서 아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주소지를 옮겼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실제 친척집에 살지는 않고 2주 만에 서울 중랑구 신내동으로 이사 갔다. 김 후보자 측은 “그런 식으로는 교육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부인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했다”고 설명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5260204001&code=210100|관련기사]]
그리고 2005년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위장전입 의혹과 관련해 “안식년을 마치고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처가 대장암 2기 말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면서 “그때 수술한 병원이 강남의 모 병원으로, 치료를 위해 은마아파트로 이사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603004011|관련기사]] 이에 청문위원들은 해당 건에 대해 머쓱해 했다고 한다.
목동의 아파트를 매입하면서 다운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3068512|관련기사1]][[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9/2017052990167.html|관련기사2]][[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7&aid=0001129568|관련기사3]] 김 후보자가 제출한 자료에는 1999년 3월 양천구 목동의 현대 2차 아파트를 1억 7천 550만 원에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국토 교통부가 제출한 부동산 거래 내역에는 5천만 원에 매입한 것으로 신고되어 있다는 것.
부동산 정보 업체에 따르면 당시 해당 아파트의 평균 시세는 1억 7천만 원에서 1억 9천만 원 정도였으며, 따라서 계약서는 실제 거래가로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구청을 통해 국토부에 신고된 가격은 5000만 원이었기에 신고가 축소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부동산 실거래 가격 신고제도가 시행된 2006년 이전에 이루어진 거래이기에 불법행위는 아니지만 후보자의 도덕성에 흠결이 갈 수도 있다. 김 후보자 측은 해당 의혹에 대해 사실 관계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2일 청문회에서 김상조 교수는 당시 관행대로 진행되었으나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분명 문제가 있다.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이 이 계약서 작성에 참여하지 않았고 당시 부동산 거래를 맡긴 법무사 측에서 관행대로 진행된것으로 보인다고 분명히 선을 그엇다. 그리고 5000만 원으로 신고된 금액에서 세금을 탈루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회계사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이 ~~질의를 가장해~~ 해당 아파트를 김상조 교수가 3년 보유, 2년 거주했고 1세대 1주택으로 양도소득세 비과세 대상이라 세금탈루와는 상관없는 문제이며, 김상조 교수가 다운계약서의 작성으로 이익을 본 것이 없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청문회에서 발언하였다.
김상조 후보자의 아들이 하나금융투자와 BNP파리바은행의 인턴 채용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기사에 등장한 금융권 종사자는 김 후보자의 아들이 같은 인턴직에 지원한 사람들보다 대학교 시절 학점이 낮음에도 합격했다는 점이 '상식적이지 않다'고 하였고 익명의 금융관계자는 “금융감독당국 고위직 자제들이 방학을 이용해 유수의 금융사에 단기 인턴으로 경력을 쌓는 것은 금융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http://mlbpark.donga.com/mp/view.php?u=http%3A%2F%2Fnews.kmib.co.kr%2Farticle%2Fview.asp%3Farcid%3D0923757051%26code%3D11151100%26cp%3Dnv|관련기사]] 관련 의혹에 대하여 김 후보자 측은 "자녀 인턴십에는 관여한 바 없다"고 밝혔다.
김상조 아내도 부정 취업 의혹을 받고 있다. 아내 조 씨는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의 계약직 영어회화 전문 강사로 취직하여 5년 정도를 재직하였다.[* 참고로 영어회화 전문 강사는 임용고시를 통하여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계약직으로, 연봉은 현재 시점으로 약 2500만 원 수준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311261849211&code=115|#]]] 자유한국당 측의 주장으로는 현재 취직 조건이 토익 901점인데 아내의 점수는 토익 900점이었으며, 채용 응시자는 조 씨 1명뿐이었고, 조 씨가 합격이 확정된 이후에야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동시에 재임용 과정에서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30/2017053090046.html|관련기사]]
김상조 후보자는 현재 나무위키에도 계속 표기되었던 것처럼 '케임브리지 초빙교수'를 주요 이력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방문연구원 자격에 불과하고 이를 초빙교수로 기재한 것은 허위표기라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792924|관련기사]]
국제노동기구에서 근무하는 이상헌 박사가 이와 관련해 용어상의 혼선이라는 글을 남겼다 [[https://www.facebook.com/sangheon.lee.549/posts/1697202560293089?pnref=story|링크]]
2000년 8월, 과거 자신이 연구자로 참여하였던 정부 용역 보고서를 그대로 베껴 논문을 작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http://news.joins.com/article/21627448#homec|관련기사]] 표절이라 하면 남의 것을 베끼는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것을 베껴도 표절이다. 그리고 상당 부분 페이지가 그대로 옮겨졌다면, 현재 내용상으로는 표절로 볼 수 있는 것이 맞는다.
다만 당시를 기억하는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자기네 보고서 공개하기 어렵거나 혹은 연구자 업적에라도 도움이 되게 해준다고 따로 논문 내도 된다고 하던 시절이었고, 그것을 조건으로 액수를 적게 주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한다. 실제로 기사 내용에도 2000년 3월부터 8월까지 총 5개월간 3명이 공동 연구비로 받은 비용이 700만 원으로, 월당 1인 비용으로 치면 50만 원이 채 안 되는 비용이기는 하다. 자료 수집 비용조차 제대로 안 주던 시절의 이야기. 게다가 학계의 관행에 비추어 봐도 2000년 당시에는 자기표절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건의 경우 악의적인 표절이라기 보다는 한 보고서 가지고 두 번(용역보고서+연구논문) 활용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당시에는 이러한 경우가 흔히 용인되었다. 지금도 레퍼런스만 달면 용인해 주는 경우가 많다. 연구용역 발주기관에서 이를 용인해주지 않는다면, 미리 계약서에 연구논문 출판 불허를 명시하고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용역비를 주던가 한다.
>[[이해진]] 전 의장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책임자(CEO)처럼 우리 사회에 미래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아쉬웠다.
- K리그 관중 실 집계 정책 . . . . 31회 일치
K리그는 2011시즌까지 상당한 잡음이 일어왔었는데, 그 잡음 중 하나가 바로 관중 수 집계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 K리그에서 성적은 좋지만 인기가 정말 없기로 유명했던 구단으로 성남 일화 천마를 꼽을 수 있었는데, 이 성남의 홈 구장인 탄천종합운동장의 수용 가능 인원은 2만여명이 넘지만, 실제로 경기를 관람하러 들어온 관중은 2000여명이 채 되지도 않는 경우가 많았다. 헌데 경기장 전광판에서는 전반전이 끝나고 관중 수를 발표하는 걸 보면 4,000 ~ 5,000명을 발표하는데... 이건 경기장에 최소한 20~25%는 채워져야 가능한 이야기임에도 방문한 팬들조차 갸웃거릴 정도였다.[* 가령 2010시즌 경남과의 홈 경기에서 당시 발표로는 5000명이 넘는 관중이 들어왔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결코 그 정도로는 아니었다.]
이게 성남만의 문제였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성남이 성적과 흥행이 거의 완벽하게 반비례곡선을 그려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빈도가 가장 많아 그렇지 다른 구단들도 경우의 차이는 있을 지 모르나 실 집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남을 예시로 든 것 뿐이지만, 이는 서울이나 수원, 전북과 같은 당시 강호들도 껴안고 있는 문제였다. 자체적으로 실 관중 집계를 한다고 했으나, 엄밀성을 따졌을 때 정확한 집계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도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이 구단들이 집계하여 통보한 결과를 바탕으로 K리그 관중 수를 발표했다는 데 있다. 다음 기사와 같이 [http://sports.news.naver.com/kleague/news/read.nhn?oid=076&aid=0002051148|"허수가 많다"]는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이건 일부 구단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제였다. 구단에서 자체적으로 실 집계를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링크한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겉으로는 실 검표를 한다고 했으나 모든 경기를 실 집계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실 집계에 대한 시행기준도 구단마다 제각각이라 통일성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잘못된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지극히 높고, 또 이런 자료를 가지고 정책을 결정하니 구단의 어떠한 활동이나 연맹의 정책이 제대로 나타나고 있을 지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지표인 "관중 수"에 대한 신뢰성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연맹은 2012시즌부터 연맹의 경기감독관 뿐만 아니라 관중의 실 집계를 위한 검표관리자까지 각 경기장에 파견하게 되며, 이 검표관리자는 경기장 입장구역에서 검표를 수행하게 되며, 계수가 된 인원(시즌권 바코드 체크, 경기 표 바코드 체크 등이 완료된 인원들)만이 여기에 실 집계인원으로 잡히게 되었다.
실 집계를 시작하고 나서 가져온 파장이 엄청났는데, 2012시즌 348경기가 종료되자 2011시즌 246경기동안 300만명이 넘었다는 관중이 250만명으로 50만명이나 줄었다. 단순계산만으로도 평균관중이 1만 1천~2천여명 정도였던 2011시즌 성과와는 달리 2012시즌은 7천여명으로 경기당 근 4~5천명이나 차이가 나는 것.[*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382&aid=0000079171|스포츠동아, "-33.2%…거품 빠진 관중수 각 팀 마케팅 강화 긍정효과"]]
결과가 상당히 처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K리그 팬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로 '''간만에''' 연맹이 제대로 된 일을 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특히 직관을 나가는 팬들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점철되는 걸 바라보느니 차라리 까발릴 건 까발리고 제대로 된 마케팅 활동을 해 주었으면 한다는 것.
특히 무료티켓을 어느 정도 뿌렸는지 팬들이 어림으로나마 짐작이 가능할 수 있었기에 팬들이 구단에게 공평함과 내실을 요구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로 자리매김했다. 2016시즌 기준, 수원 삼성의 경우는 무료티켓을 거의 발행하고 있지 않아 실제 관객수 당 지불비용이 가장 높은 "객단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는 오히려 평균관중이 줄었음에도 입장 수익이 올라가는 대표적인 신기한 사례로 남을 수 있었다.[* 무료티켓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연맹의 요청으로 군경활동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구단은 무료티켓을 발행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각 연고지에서 지원하는 유소년 클럽의 경험 향상차원에서도 매 경기마다 무료티켓을 일정 이상 발행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 거의 각 구단마다 경기당 최소한 수백장 정도 무료티켓을 발행할 수 밖에 없다. 팬들도 이런 구단의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해명이 있을 경우에는 큰 문제 없이 수긍하고 가는 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의 인구 수를 매년 잘못 파악한다고 치면 해당 도시의 인구가 왜 늘어났는지, 혹은 반대로 왜 줄어들었는지에 대한 분석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여초현상이 발생했으면 왜 여초현상이 발생했는지, 여기에 대한 원인은 무엇인지, 해결책은 없는지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하는게 당연한 수순이다. 헌데 2011시즌까지의 K리그는 사실 이게 불가능한 정도를 넘어 구단들이 알아서 뻥튀기를 했고, 또 K리그를 주관하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이걸 공식자료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K리그가 지금 흥행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대대적인 실패를 하고 있는건지 진단조차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 관중 집계를 통해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정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기본지표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축구팬들 사이에선 아주 높은 평가가 다수를 이룬다.
실 관중 집계가 구단의 [http://news.tf.co.kr/read/soccer/1467594.htm|투자를 저하시켰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실 관중 공개와는 사실 별 관계가 없는게, 실 관중 수 집계와는 달리 구단은 명백하게 각 경기마다 들어오는 관중 수입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입장이라서 설득력이 없다. 되려 각 선수들의 연봉공개가 이적시장을 달궜으면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
사실 허수로 부풀린 관객수로 투자를 받아 봤자 투자자는 관객수에 비해서 수익이 적다는걸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면 독이 된다. 차후에 실제로 관중이 발표한 만큼 늘어나도 축구=수익이 안 되는 사업이라는 인식에 가로막힐 수 있기 때문. 부풀린 데이터를 제시하는건 일종의 '투자 사기'이며,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하는 것이 투자에 필요한 신뢰를 얻는데는 기본적인 사안이다.
== 관련항목 ==
- 김민희(1982) . . . . 31회 일치
최근엔 [[조진웅]]이 인터뷰에서 《[[아가씨(영화)|아가씨]]》에서 같이 호흡한 김민희를 보고 연기를 너무 잘해서 놀랬다고 같이 공연한 여배우중 최고의 연기력을 지녔다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연기력은 평단, 영화계, 연예관계자들에게 확실히 인정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 2011년 || [[모비 딕]] || 주연 || 성효관 ||
* 김민희는 과거 배우 [[이정재]], 모델 출신 배우 [[이수혁(배우)|이수혁]]과 공개연애를 했다. 그런 뒤 2013년 4월, 한 [[디스패치|인터넷 매체]]에서 [[조인성]]과의 [[파파라치]] 사진을 공개하면서 열애를 인정했다. 2014년 9월 24일 조인성과의 결별을 공식 발표했다. [[http://m.news.naver.com/read.nhn?sid1=106&oid=109&aid=0002886201|관련기사]] 그리고 [[2016년]] [[6월]], [[홍상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터지고 말았다. 문제는, 홍상수 감독은 기혼자라서 명백한 [[간통]]이라는 점이다.
* 다른 작품은 다 해도 [[공포 영화]]만큼은 정말 못한다고 한다. 공포 영화의 경우에는 시나리오를 읽는 것조차도 무서워한다고. 그래서 [[나홍진]] 감독의 《[[곡성(영화)|곡성]]》도 아직 못 보았다고 한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242885|관련 기사]]
* 영화 《[[아가씨(영화)|아가씨]]》의 대히트로 인해 여성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서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얻었다. 김민희가 팬들에게 아이돌 못지 않는 팬서비스를 했을 뿐더러, 한창 얼굴도 빛나 [[여초]] 사이트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로 떠올랐다. 원래부터 여성들의 워너비나 다름없었지만, 주가가 폭발적으로 오른 셈이다. 보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약 600만원 가까이 조공 금액이 모이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2016년 6월 21일, [[홍상수]] 감독과의 간통 보도가 터지고 난 후 역대급으로 모였던 조공금액을 다시 환불해주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과거 김민희는 한 인터뷰에서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16&aid=0001072347|'''“자기들이 부자와 결혼하면 사랑해서 한 거고, 연예인이 그러면 이상한 관계로 말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 평민들도 그런 것처럼, 통장에 든 적금보다 지갑 속의 돈이 더 좋다.”''']]라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다. 이후 질문자가 “‘평민’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봉건 사회가 아닌데.”라며 제지하자, 김민희는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고,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김민희는 한동안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았으며, 이를 비꼬아서 ‘'''평민'''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16년]] [[6월 21일]], [[http://me2.do/GXMuEUFO|기사]]에서 [[홍상수]] 감독과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호흡을 맞추고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문제는 홍상수 감독은 이미 결혼해 아내와 대학생 딸까지 있다는 것.
더욱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간통]]은 영화계에 암암리에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고, [[홍상수]] 감독의 지인들이나 다른 [[영화 감독]]들이나 영화 [[제작자]]들과 [[배우]]들까지, 여러 연예업계 종사자들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http://me2.do/5VnEezht|#]] 영화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내용이었지만 기사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http://me2.do/GsSnT8ET|홍상수 김민희 불륜설 비하인드 (뉴스엔 윤가이 기자)]] 영화 《[[아가씨(영화)|아가씨]]》가 [[칸 영화제]]로 진출할 때까지, 해당 영화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암암리에 아는 기자들에게 "영화에 흠이 되지 않게끔,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실제로 실명을 언급하지 않은 기사가 6월 1일자로 보도된 바 있다. [[http://www.ikorea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2065#074z|#]] ~~실명 대신 제목으로..~~
아직 사실 확인이 되지 않긴 했다만 김민희와 홍상수 역시 간통설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과거 [[설경구]]-[[송윤아]] 커플의 경우처럼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배우의 팬사이트라 할 수 있는 김민희 갤러리 역시 일시적으로 서포트 활동을 중단했으며 루머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팬질을 접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인 판국이다. 거기다 이 경우에는, (일단 홍상수 부인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김민희가 부인에게 [[아침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녀]]나 할법한 '''"그러게 남편 관리 잘 하지 그랬어요."'''라는 망언까지 했다는 루머까지 나온 판이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433&aid=0000017690|기사]]
하지만 [[2016년]] [[7월 20일]]에 방영된 [[리얼스토리 눈]]에서, 홍상수 감독의 부인은 '''자신은 인터뷰를 한 적이 없으며 일부 기사는 기자들의 악의적인 보도로 심하게 과장되었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6월 21일 단독보도라면서 나온 김민희의 [[막장 드라마]]스러운 발언 외에 기타 여러가지 자극적인 관련 보도는 정작 당사자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한마디로 [[카더라]] 통신에 불과 한 것. 자세한 것은 [[홍상수]] 항목 참조.
해당 기사까지의 불륜 관계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여느 불륜 스캔들보다도 더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홍상수]]와 함께 [[미국]]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같이 있어?~~ 두 사람이 [[중혼]]이 합법인 [[유타 주]]에서 비밀 결혼을 올릴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으나 이것은 오보로, 당연히 [[미국]] 내 50개주 모두 중혼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동거]]라면 모를까 결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후술하겠지만, [[미국]]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Sister Wives>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 [[몰몬교]] 일가의 [[일부다처제]] 허용 신청에 대해, 판사가 "법을 위반한 게 아니다"라는 말로 사실상 중혼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것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 애초에 이 판결은 이후 뒤집혔다. 어차피 재판 자체가 기각되었어야 할 사안이었고, 해당 사건 담당판사 역시 논란이 많은 인물인지라, 판사는 거의 전방위로 비판을 받았다. [[여담]]으로 [[유타 주]] 내의 중혼 금지 관련 규정이 더욱 강화될 예정이라 한다. 애초에 2013년 [[유타 주]] 연방지법의 [[중혼]]관련 판결은 중혼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그간 [[유타 주]]에서 금지되어 있던 부부+[[사실혼]] 관계 여성의 동거를 금지한 유타주 법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유타 주에 간들 결혼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뿐더러, 애초에 그들은 해당사항이 아니다. 또한 이 판결이 2016년 항소법원에서 무효판결이 나온 것의 근거는 유타주가 애초에 이런 종류의 동거집단이 범죄행위와 연류되지 않을 경우 기소를 하지 않는다는 유타주 검찰청의 정책으로 인해서 사실상 원고들이 피해를 볼 일이 없다는 근거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유타의 중혼관련 법이 강해지기는 힘들 것이다. 애초에 이런 법 자체가 [[몰몬교]]에 시달려온 유타주의 독특한 사례이기도 하고.]
그런데 헤어졌다는 기사가 떴다! [[http://m.insight.co.kr/newsRead.php?ArtNo=75203|관련 기사]] 기사에 의하면 두 사람은 연인으로 사랑한 게 아닌 영화인들 간의 끈끈한 우정이였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이에 [[네티즌]]들은 어디까지 우정이고 사랑인진 알 수 없으나 [[http://m.dcinside.com/view.php?id=kimminhee&no=77945&page=1|김민희 갤러리]], [[https://twitter.com/arlal1/status/775580103950467072|SNS]] 등 김민희의 팬들은 경사가 났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기사가 나온 다음 다시 재결합설과 추석을 함께 보낸다는 설이 도는 등 다시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고, [[홍상수]] 감독이 귀국 후 직접 해명하겠다고 하였으나 이후로는 소식이 없다.
일단 아직 사실 관계가 확인된 내용은 없다. 사태를 종합해보자면 [[홍상수]]와 그의 부인은 모종의 이유로 별거하게 되어 2016년 11월 이혼 신청을 넣을 만큼 사이가 소원해졌는데, (김민희와 홍상수 측의 해명에 따르면) 집을 나와 있는 홍상수 감독을 김민희가 보살펴 주다가 친해지게 되었고, 현재 홍상수 감독의 부인이 모종의 이유로 김민희를 그의 간통 상대로 의심하고 있다는 게[* 위에서 언급한 [[리얼스토리 눈]]에서 홍상수 감독의 소재를 묻자 "김민희 씨랑 어디 있겠죠 뭐." 라고 발언했다.] 요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민희와 [[홍상수]] 측의 해명에서 나온, 부부 관계에 문제가 생겨 별거 중인 유부남을 미혼의 젊은 여배우가 챙겨준다는 상황 자체가, 당사자인 배우자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인식으로도 상당히 의심스러워 보이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또 사건 초기에 기레기들의 악의적인 과장된 보도가 쏟아졌는데, 이것에 대해서 결국 홍상수와 김민희가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간통 논란이 기정사실화된 것에 일조했다.
[[청룡영화상]] 이후로 항간에 김민희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절했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김민희 측의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트로피는 받았으나 부상으로 딸려오는 수백만 원의 상금을 받는 것은 도의적으로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유니세프를 통한 기부와 단편영화제 지원 등의 방식으로 기부할 예정이라고 한다. [[http://m.news.nate.com/view/20161215n08068|관련기사]]
이런 두 사람의 태도 때문에 '''현재 상황은 누가 보아도 정말 간통설이 사실로 보일 수밖에 없게 되어가고 있다.''' 상식적으로 [[이혼]] 사유가 김민희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홍상수]]의 부인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홍상수 본인이 부인은 물론 대중에게도 불륜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여론과 상관없이, 우리나라 대법원은 유책주의를 고수하기에 간통 의심을 받고 있는 유책 배우자가 소송을 걸어봐야 받아주지도 않는다.[* 최근 파탄주의가 확산되고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건 한쪽 배우자가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이혼을 안 받아주거나 관계 파탄의 책임을 상쇄할 정도로 자녀나 가정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졌을 때나 인정한다. 현재 홍상수 감독은 몇 년째 집을 떠나 있어 가정을 착실하게 보살피고 있다고 보기는 힘드므로 성립하기도 어렵다.]
사실 국내는 당연지사고 간통을 개인의 사생활이라면서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본다고 하는 서구권의 간통 사례와 비교해도 홍상수와 김민희의 현재 태도는 대담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뻔뻔하다.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까지 그렁이면서 명백히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대상이 되는 간통을 아름다운 사랑이라며 미화를 하거나 아예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출품까지 하는 경우는 외국에서도 상당히 드문 케이스다. 덕분에 대중들은 "이 둘에 비하면 [[이병헌]]은 차라리 양반이다." 수준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민희의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여자연기자상을 수상한 이후에 똑같은 간통 논란을 의식한 기자가 이병헌에게 누가 봐도 대놓고 노린(...) 인터뷰까지 한 적도 있다.
2017년 2월 17일,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에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 홍상수와 김민희의 이야기를 베이스로 만든 영화인 것과는 관계 없이, 요즘 작품의 퀄리티가 물이 오른 홍상수 감독의 신작이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고, 결국 김민희가 해당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세계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연기 경력으로만 본다면 강수연, 전도연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에 관련하여 [[탈덕|마음이 떠난 팬들은 다 떠나고]] 남은 팬들은 초연한 자세로 받아들이면서 홍상수 감독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팬으로써 남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지지인지는 둘째로 치고 [[베를린 영화제]]가 둘의 도덕성을 별개로 예술성만 평가한 것처럼[* 서양 특히나 유럽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사적인 행보는 둘째로 치고 김민희라는 영화배우에 대한 팬심을 유지하기로 한 듯 보인다. 그래서 그 규모는 많이 줄었으나 남아있는 인원끼리 리뷰북을 제작하는 등 조공을 바친 모습을 보였다.
- 박진성(시인) . . . . 31회 일치
=== 여혐 이슈 관련 ===
이러한 자기 고발은 이후 ‘성폭력을 시인했다’는 내용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나 박진성 시인 본인이 적극 해명에 나섰고 GQ 코리아 등에서 [[http://www.gqkorea.co.kr/2017/09/29/%EC%A0%95%EC%A0%95%ED%95%A9%EB%8B%88%EB%8B%A4/?_C_=18|정정보도]]를 내기도 했다. 이후의 여러 정황들을 봤을 때 자신의 죄과를 시인했다고는 볼 수 없고 당시 문단 분위기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성찰하고 회고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어떻게 보면 자충수가 된 글이다. 이 글을 근거로 당시 다수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트위터리안 및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자신이 이런 글을 써 놓고 이제 와서 무혐의라고 말한다', '스스로 자백했으면서 무고를 주장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라는 공격을 당했고, 그 트위터리안 및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그가 남성들에게 [[여혐]] 프레임을 씌울 수 있는 빌미를 줬다고 '[[보빨]]남의 최후' 라던가 하는 식으로 양쪽에서 공격을 당했다.] 문제는 성폭력이 무혐의 판정이 나자 이 글을 빌미로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무고를 당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이다. 사생활이 어떻든 범죄 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성범죄를 당한 여성에게 평소 행적이 문란했다고 몰아가는 경우와 똑같다. 박진성을 가해자라 주장하는 측은 계속 이 건을 근거로 물고 늘어지며 박진성이 '면죄부'를 얻으려했다거나 '피해자'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아래에서 보듯 박진성은 무혐의, 무고가 밝혀졌다.
*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과 [[레진코믹스 집단 환불 및 탈퇴 사태]]에서 극단적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보였던 [[이자혜]] 작가를 옹호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있었다. 하단에 서술된 성폭행 무고사건에 휩쓸린 후, 2017년 12월부터 [[웃긴대학]] 커뮤니티를 시작하였는데, 이 때 한 유저의 이자혜 작가 옹호발언에 대한 해명글을 요구하였고, 이에 답하였다.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number=728608|해명글]]을 요약하자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 이자혜 작가는 명실상부 '''촉망받고 있는 작가'''였으며, 본인이 알고 있었던 점과 비교해 볼 때, 이자혜 작가가 그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는 입장. (덧붙여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수도 없을 뿐더러, 메갈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과거 쓴 트위터에 대한 답변으로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할 말을 잃었을 때는 침묵하거나 사과드리는 게 맞겠지요. 죄송합니다.' 였다. 성폭행 무혐의 사건 이후에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관점이 바뀐 듯 하다. 다만, 본인도 메갈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자혜 작가가 자신을 성찰하고 잘못됨을 인지하려 한다면, 그에 대한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 70조 2항 허위 사실 유포의 죄'''||
박진성 시인이 이후에 공개한 카카오톡 내용을 보면 익명으로 폭로한 최초 폭로자는 박진성 시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자 "그럼 본명 말해도 돼요?"라고 실명 폭로할 것임을 협박하며, "주실려면 저는 돈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37|#]] 전형적인 [[꽃뱀]]의 수법으로 보인다.[* 이후 사건 전개 과정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본인이 그 트윗 내용을 스스로 삭제했다. 이는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 폭로자가 한 말과 [[탁수정]]이 한 말이 비슷한 내용이라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박진성 시인은 2018년 2월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7662925585432576|최초 폭로자는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계정을 폭파했다]]고 했고 7월 22일엔 이 사람이 김○○이라고 밝혔다(이름을 밝히게 된 것은 7월 19일에 자신이 그 최초 폭로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사과를 했는데 이 트위터 계정이 박 시인의 다중계정 중 하나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의혹에 대한 자세한 건 '자살 시도와 이와 관련된 그의 이후 행적'을 참조.).]
2017년 11월에 시인의 아버지가 쓴 글에 따르면, 성폭행 혐의로 보도가 난 이후 집 앞에서 피켓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지인들의 연락이 모두 끊겼으며, 출판사는 책을 내주지 않는 등 결론이 나기도 전에 보도만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어떤 지인은 '한국일보 같은 신문사에서 성폭행을 했다고 기사를 썼으니 사실 아니겠냐'며 면전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박진성 시인의 출판을 담당했던 출판사는 사건이 나자, 무죄여부 확인 과정없이 일주일 만에 출판 계약 해지에, 출판된 시집은 출고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된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출고 정지 처분을 풀지 않고 있는데, 계약 해지에 대해 물었더니 "아직 시인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신다면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59082|해당 기사 출처]][* 이 기사에선 출판사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박 시인 아버지의 글에선 [[문학과지성사]]라고 나온다.] 2018년 3월 21일에 [[https://blog.naver.com/poetone/221233628914|문제의 출판사와는 결국 계약을 해지]]했으나, 무슨 문제가 있는지 7월에 박 시인이 밝히기를, 문제의 시집은 아직도 출고정지 상태라고 한다.[* 이 사실을 처음 밝힐 때 박 시인이 여러 시집의 계약을 이행하라는 언급도 한 것과 2016년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산문집의 글은 2018년 3월 계약해지를 알린 후에 산문집 '이후의 삶'에 포함되어 출간된 걸 보면, 기존의 시집과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시집과 관련된 계약을 해지하는데 문제가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민사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1115546|#]]
참고로 [[탁수정]]은 박진성 시인 외 다른 시인들도 성범죄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고임이 증명된 시인들은 그녀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다. 이 중 일부에서 그녀는 [[https://twitter.com/Bookistak/status/965482632808026112|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16년에 박진성 시인을 성범죄자로 거짓 고발한 2명 중에 탁수정이 있는 걸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아니다. 당시 거짓 폭로자들을 탁수정이 지지하면서 자신도 성희롱을 당했다는 식으로 말한 건 맞기 때문에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탁수정의 위치는 1차 가해자가 아니라 1.5차 가해자쯤 된다.] 이 때 그녀는 '좋은 소식'이라고 웃었는데 이 반응은 비판을 받고 있다. 박진성 시인은 이에 대해 탁수정의 [[이중잣대]]를 지적했는데, "무혐의"는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탁수정 본인이 예전에 적어놓고서는, 본인의 "무혐의"에 대해선 '무혐의 = 애초에 죄가 없었음' 식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https://blog.naver.com/poetone/221212096465|참고]] 또한 박진성의 이 지적은, 탁수정의 의견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그 내용대로 박진성 시인을 그대로 공격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도 해당한다. [[페미니즘은 지능의 문제|이들은 "무혐의 ≠ 결백"이라는 식의 논리로 박진성 시인을 공격했는데, 똑같이 무혐의 처분(증거불충분)을 받은 탁수정에게는 "무혐의 = 결백"이라는 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즉, '''성별에 따른 이중잣대와 [[진영논리]]로 가득 찬 사고로 인해 객관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아전인수]]와 [[내로남불]] 그 자체인 상황.
==== 자살 시도와 이와 관련된 그의 이후 행적 ====
그리고 자살 시도 관련으로 박진성 시인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남긴다. [[https://twitter.com/home_awaytwo/status/936879181043941377|해당 트위터 인물 정보]]
* 2017년 12월 7일, 오전 00시 47분에 의식을 회복하고 블로그에 첫 글을 남긴다. 그 이후에는 언론들에게서 받은 심적 피해가 심대했는 듯,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를 고발하는 글 등 언론들의 무고 관련 보도 태도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들을 남기기 시작한다. 또한 블로그의 내용을 보면 박시인의 아버지 분도 거기에 적극 협력하고 있는 듯하다. [[https://blog.naver.com/poetone/221157223698|해당 게시글 링크]]
그 와중에도 페미니스트들과 박진성 시인을 앞장서서 비난했던 사람들은 '자살하면 죄가 없어지냐' 같은 소리를 하거나 '박진성이 자살하기 전에 여성 습작생들에게 집적거렸다', '과거에도 자살을 빌미로 여자들을 꼬시고 동정심을 유발했다(본인의 고백 내용)' 같은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도 2017년 12월 7일 기준으로, 트위터를 이용해 마녀사냥한 주요 오프라인 가해자들은 비판을 받아 재판에 불리해질 것 같아 비공개로 돌리거나 계정을 폭파시키기까지 했지만, 가해자들의 편을 드는 SNS에서의 옹호자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9276420290576384|#]][[http://archive.is/meecs|@]][* 이 사례는 Holden 🔻Weatherfield라는 닉네임과 psychokinesis23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페미니즘]] 계정이다. 성향은 [[메갈리아]] 옹호자이자 가해자 [[이준행]]에게 [[재기#s-6|재기]]라는 [[남성혐오]] [[고인드립]]을 들은 피해자 [[전우용]]이 [[전우용#s-4.3|고소하다 용서한 사건]]의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https://twitter.com/psychokinesis23/status/772794350883315713|#옹호증거1]][[http://archive.is/gGvKe|@1]][[https://twitter.com/histopian/status/772787036306546688|#옹호증거2]][[http://archive.is/QG3O0|@2]]). 특히 박진성의 자살시도가 성공해야 기네스북에 올라갈 거라는 조롱을 일삼은 점을 자신의 취향으로 추정되는 아이디와 연관지어 해석해보면, ''''염동력이라는 초능력이 있다면 저 시인을 자살로 몰고갈 수 있을 텐데''''라는 입장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진영논리]]에 휩싸인 나머지 [[사이코패스|자기 진영 일원의 범죄의 피해자에 대한]] [[소시오패스|공감을 잃은]] 최악의 사례라 할 수 있다.])은 아예 사건에 입을 다물거나 익명의 계정에 숨거나 검색을 막기 위한 부계정과 스팸계정을 아직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https://twitter.com/No_JS_OK|해당 트위터 링크]] 이들은 어쨌든 관계를 맺고, 인정한 사실을 발설하더라도 [[지랄 옆차기 하네|해당 상황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따른 보호 조치라고 설명한다.]]
* 2018년 2월 초에도 [[트페미|어떤]] [[위근우#s-3.8|사람]][[페미니스트|들]]이 열심히 박진성 시인의 트위터로 계속해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길 멈추지 않고 있다([[http://archive.is/Di77O|@]] [[http://archive.is/4nRQ2|@2-1]] [[http://archive.is/zevjR|@2-2]]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sisa&no=1019438|#3]][[http://archive.is/UwWpI|@3]]). 결국 박진성 시인이 다시 고소 예고([[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59747957577850880|#]][[http://archive.is/4fn3p|@]][[http://down.humoruniv.org//hwiparambbs/data/editor/pdswait/e_4874374550_17a4b38c35c9327bb9b850b6f454c7fcb0b6aeae.png|#2]][[http://archive.is/WcO2d|@2]])를 하였고, 우선 자신의 해명 요청을 여러 차례 묵살했던 [[위근우]]에게 먼저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0171592985624576|선전포고를 날렸다.]] 그러나 위근우는 이에 대해서 여전히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 2018년 2월 7일 [[JTBC 뉴스룸]]에서 [[탁수정]]을 인터뷰하며 [[미투 운동]]을 보도한 것([[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174513|#]])을 보고 격분,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1266038443659264|그동안 거절해 왔던 무고 관련 인터뷰에 자진해서 나서겠다]]고 밝히고는 그녀를 비난했다. 그리고 탁수정이 이에 대해 반박한 것을 시작으로, 둘 사이에서 4월까지 설전이 진행되었다.[[http://kingshandle.tistory.com/488|2월 9일 시점에서 정리된 글]][* 이 글은 설전 초반의 상황이 정리된 글로, 그 이후 상황까지 정리된 글은 없다.] 실제로 박 시인은 2월 28일에 '''[[MBN]]과 이와 관련된 인터뷰를 했다.''' [[http://naver.me/FdNCVQm4|#]]
2월 19~20일에 그는 이 상황을 보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트위터리안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다수는 그를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린 거였지만, 비난하는 게 아닌 경우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에게 트위터를 잠깐 쉬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멘션을 보낸 트위터리안도 있다. 당시 위에서 설명한 무혐의 처분 결정을 탁수정이 공개하고 박진성 시인이 탁수정의 이중잣대를 지적한 탓에, 트위터 내에서 이 설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었다.], 마녀사냥을 그만하라는 의미로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5692582637453312|자신의 손목에 남아 있는 흉터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박진성 시인이 카톡 대화 전문 공개 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탁수정]]이 이에 대해 자살 시도까지 비꼬는 투로 그러면 병원 영수증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공격하자 2월 28일엔 병원 의무기록지를 공개했다(저 공격을 하기 전에 탁수정과 탁수정을 지지하는 측이 그의 자살 시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공개하라고 해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에 대해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로 굳이 공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최후의 카드였던 셈.). 이후 그녀는 자신은 떳떳하니까 전문 공개하려면 하라고는 했으나 병원 의무기록지를 공개한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2018년 4월 11일에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3915291196342273|다시 자해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중으로 [[리스트컷 증후군]]도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 이 일 때문에 입원하게 된다면 자신이 진행 중인 싸움이 전부 중지되기 때문에 버티고 있었지만, 며칠 뒤에 [[당뇨병]] 악화라는 다른 이유로 한동안 입원했었다.[* 탁수정이 또 영수증을 요구할까봐 미리 공개했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796927143927808|#]]]
* 3월 21일, 박진성 시인은 [[탁수정#s-2.2|3월 14일의 탁수정의 인터뷰]]와 관련된 인터뷰를 [[리얼뉴스]]와 가졌다.[[http://realnews.co.kr/archives/10275|#]] 인터뷰어는 [[박가분]].[* 여담으로 리얼뉴스는 여타 진보 언론들과는 달리 [[래디컬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성향이 강하며, 인터뷰를 맡은 박가분 또한 래디컬 페미니즘에 비판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참고로 박 시인은 자신을 공격한 이들과 7월 현재까지 소송 중인데, 무고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는 것과 관련해 웃긴대학의 일부 회원에게 강하게 비난을 받자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건지 17일 오전에 페이스북에다 자살을 암시하는 글과 동영상을 올렸다. 다행히 지인이 이 게시물을 보고 신고해,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병원에 가 안정제를 맞았다고 한다. 자세한 건 [[웃긴대학/사건 및 사고#s-6|한국 래디컬 페미니즘 동조자들의 박진성 시인 자살 유도 사건]] 참조.
* 7월 19일에 자신이 그 최초 폭로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https://twitter.com/ugeWQfbFleFEVyh|'그 발언은 관심을 끌기 위해 장난삼아 한 거짓이며 죄송하다']]([[http://archive.is/hcuSe|@]])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는데, 탁수정은 최초 폭로자에게서 이 트윗이 자신이 쓴 게 아니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한 뒤 해당 트위터 계정과 박 시인을 옹호하는 어떤 계정에 등록된 전화번호 끝자리가 박 시인의 트위터 계정에 등록된 전화번호 끝자리 04와 같다는 점을 들어 두 계정이 박 시인의 다중계정일 가능성을 제기했다.[[https://twitter.com/Bookistak/status/1020219141146341377|#]] 22일에 이 의혹에 대해 [[트페미]]들이 이야기하는 걸 본 박 시인은 한 트페미에게 최초 폭로자가 04로 끝나는 휴대폰 번호까지 개통해 조작을 하는 걸 거라고 말했는데, 그 트페미는 그가 여러 계정을 운영한다는 내용이 있는 트위터 신고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861907266228226|#]] 그러자 박 시인은 여러 계정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제재당한 적 없다고 말했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873415547224064|#]]
=== [[미투 운동]] 관련 ===
위의 사건들로 인해 일각에서는 박진성 시인이 [[미투 운동]]을 반대하고 [[무고죄]]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도 와전되어 있다. 그러나 박진성 시인은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며, 다른 문인들의 성범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즉 박 시인은 [[탁수정]]이나 [[위근우]]처럼 미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비판할 뿐, 미투 운동을 지지함은 물론 '''[[고은(시인)|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등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고백합니다. 밉보일까 봐 당시 동석했던 여성분들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범죄 현장에 있었습니다 저 역시 방관자였음을 시인합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고En 시인의 시를 보고, 고En 시인의 ‘기록된’ 행적만 보고, 고En 시인처럼 되고자 했던 저 자신을 먼저 반성합니다. 최영미 시인을 응원합니다. 제가 보고 듣고 겪은 바로는 최영미 시인의 증언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 추경호 . . . . 31회 일치
|경력 = 제6대 [[대한민국의 금융위원회 부위원장|금융위원회 부위원장]]<br/>제4대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기획재정부 제1차관]]<br/>제2대 [[대한민국의 국무조정실장|국무조정실장]]
|본관 = [[추계 추씨|추계]]
1981년 제2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다. 1983년 총무청 수습사무관과 환경청을 거쳐 1987년 경제기획원(이후 [[재정경제부]])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1987년부터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물가정책국, 대외경제조정실 사무관을 거쳤고 1993년부터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사회개발계획과, 경제홍보과, 지역과에서 일했다.
1996년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 서기관에도 몸을 담았다. 그 뒤 세계은행 시니어 이코노미스트로 파견나갔다가 2002년 다시 재정경제부로 돌아와 기획관리실에서 8개월 일했다. 이후 금융정책국 은행제도과장과 금융정책과장 등 금융분야 핵심보직을 섭렵했다.
이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을 거쳐 2010년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데 일조했다. 2011년부터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013년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기획재정부 제1차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4년 7월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에 임명됐다.
* 1983년 3월: 총무처, 환경청 사무관
* 1987년 9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물가정책국, 대외경제조정실 사무관
* 1996년 2월: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 서기관
* 2002년 7월: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 행정법무담당관
* 2005년 10월 ~ 2006년 8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 금융정책 과장(부이사관)
* 2006년 8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대표부 공사참사관
* 2010년 5월: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비상경제상황실장
* 2013년 3월 ~ 2014년 7월: [[기획재정부]] 제1차관
2014년12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우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교우상’을 받았다. 이 상은 1980년부터 고려대 경영대 교우회가 각 부문 특성에 맞춰 뛰어난 동문에게 수여하고 있는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품성과 덕망도 함께 평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규제기요틴은 경제혁신을 가로막거나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규제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강도 높은 규제개혁 방식이다. 이번 건의과제들에 대해 정부는 규제기요틴 이름에 맞게 그 어느 때보다도 속도감있게 전향적인 자세로 과제들을 검토했다." (2014/12/28 규제기요틴 민관합동 회의에서)
* "각 기관에서 공공, 민생, 경제·금융 분야 등 3대 분야에서 우선 추진할 과제를 선정하고,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실천방안을 마련해달라. 부정부패는 단호하게 척결해가되 비리의 환부만을 정확히 찾아 제거함으로써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유념해달라. "(2015/03/20 서울청사에서 추 실장의 주재로 열린 부정부채 척결 관계 차관회의에서)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시절 국제경제에 대한 높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은행제도과장으로 재직할 때 재정부 직원들이 뽑은 ‘가장 닮고 싶은 상사’에 선정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Who Is ?] 추경호 전 국무조정실장 실물경제와 금융 모두 정통한 경제관료|url=http://www.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37|날짜=2015-04-07|뉴스=비즈니스포스트}}</ref>
- 태종무열왕 . . . . 31회 일치
성은 [[김 (성씨)|김]](金)이고, [[휘]]는 춘추(春秋)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이찬 (신라 관직)|이찬]](伊飡)에 이르기도 했던 [[김용춘]](金龍春)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
[[선덕여왕|선덕]](善德) · [[진덕여왕|진덕]](眞德) 두 조정에 걸쳐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진덕여왕]] 때는 [[이찬 (신라 관직)|이찬]](伊飡)에 이르게 되고 [[진덕여왕]] 사후 [[대리청정]]으로써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그렇게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된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문왕]](文王),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 (신라 관직)|이찬]](伊湌)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이후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아버지는 [[진지왕]](眞智王)의 아들 [[김용춘]]<ref group="주">김용수(金龍樹)라고도 한다.</ref>,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었던 [[천명부인]]이다. 그가 사료에 '진골'로 기재된 것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국인에 의해 폐위당한 점이나 [[김춘추]] 자신이 진골이자 옛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희를 아내로 삼은 점 등이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ref>주보돈(2009), [http://www.riss.kr/link?id=A77046838 〈신라 骨品制 연구의 새로운 傾向과 課題〉] 《한국고대사연구》 54권 5-41쪽. 한국고대사학회</ref>
김유신의 주도와 김춘추의 동조로 이루어진 정략적인 측면이 강했던 이 혼인을 통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진지왕계와 옛 금관가야계 귀족간에 정치 ·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지왕계(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을, 금관가야계([[김서현]] · 김유신)는 진지왕계의 정치적 위치를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이러한 상호 이익에 입각해 이루어진 정치적 결탁은 신라의 중고(中古) 왕실의 진골 귀족 내에서 하나의 신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성골]](聖骨)계로 대표되는 기존의 구 귀족집단의 견제와 반발을 받았다. 무열왕은 부계가 진지왕의 자손이고 모계가 진평왕의 자손으로 양쪽 모두가 왕족인 성골에 속했지만, 무열왕 이후 부계만이 왕족인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그를 상징적인 진골 최초의 임금으로 평가한다.{{출처|날짜=2018-06-29}}
선덕여왕 11년([[642년]]) 8월, [[백제]](百濟)의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상남도]] [[합천군|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의 성주였던 이찬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古陀炤)의 남편으로 김춘추의 사위였는데, 앞서 그에게 아내를 빼앗긴 원한으로 백제군과 내통한 부하 검일(黔日)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김품석은 처자를 죽인 뒤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삼국사기》는 당시 김춘추는 이찬의 관등에 올라 있었고,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대야성의 일을 계기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였다는 것이다. 원병을 빌리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갈 것을 왕에게 건의한 김춘추는 고구려의 국왕 [[보장왕]]과 실권자 [[연개소문]]을 만나 원병을 청했지만, 원병 파병 조건으로 과거 [[진흥왕]](眞興王) 때에 신라가 획득한 죽령(竹嶺) 이북 땅의 반환을 내세운 고구려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김유신의 무력 시위,<ref name="선덕왕-11">《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선덕왕 11년(642)</ref> 그리고 고구려 대신 선도해의 도움으로 "돌아가는 대로 왕에게 아뢰어 땅을 돌려주게 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ref name="김유신-상">《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 상</ref>
고구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는 [[고토쿠 천황]](孝德天皇) [[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되어 있다.<ref name="일본서기-647">《일본서기》 권25 天萬豐日天皇 孝德天皇 大化 3년(647)</ref> 한편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되었다. 춘추와 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하여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ref name="신라-647">《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1년(647)</ref>
이듬해인 [[648년]] 12월에 김춘추는 드디어 아들 [[김문왕|문왕]](文王)과 함께 직접 [[당나라|당]](唐)에 입조하였고<ref>《자치통감》 권199 唐紀十五太宗文武 貞觀 22년(648)</ref> [[당 태종|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자감 (중국)|국학]](國學)을 방문하여 [[석전대제|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에 태종의 호출로 사적으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김춘추는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天朝)를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사온데, 백제가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천병(天兵)을 빌려주시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주시지 못한다면, 우리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요,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태종에게 원병 파병을 호소해, 태종의 허락을 받아냈다.<ref>《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5/진덕왕|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2년(648)]]. “二年... 遣伊湌金春秋及其子文王朝唐 ...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跪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強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翦 除凶惡 則敝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爲左武衛將軍 (2년...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ref>
귀국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3품 이상의 관인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온탕비(溫湯碑)』 · 『진사비(晉祠碑)』의 글과 《[[진서]](晉書)》 한 질을 김춘추에게 하사하였으며 [[장안|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까지 나아가 전송하였다. 앞의 서적들은 태종 자신이 직접 짓고 글씨도 쓴 것으로, 특히 《진서》는 당의 [[비서감]](秘書監)에서 맨 먼저 필사한 두 질 가운데 하나로서 태자(훗날의 [[당 고종]])와 김춘추에게 각각 내린 것이었다. 김춘추도 당으로부터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의 벼슬을 받은 아들 문왕을 숙위(宿衛)로서 당에 남겨두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김춘추는 [[서해]]상에서 고구려 순라병에게 포착되어 나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함께 왔던 [[온군해]](溫君解)가 귀인의 관을 쓰고 배에 남아 고구려군의 주의를 끄는 사이 작은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f name="신라-648">《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2년(648)</ref><ref>[[최치원]],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ref>
김춘추가 귀국한 태화 3년([[649년]])부터 신라는 관복을 당풍으로 바꾸고,<ref name="신라-649">《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3년(649)</ref> 태화 4년([[650년]]) 진덕여왕이 직접 당의 왕업을 찬미하는 「[[태평송|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수를 놓아 보냈으며, 신라의 고유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영휘]](永徽) 연호를 쓰는 등 친당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ref name="신라-65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4년(650)</ref> 진덕여왕 5년([[651년]])에는 중국의 제도를 본뜬 정월 초하루일 백관(百官)들이 모여 행하는 하정례(賀正禮)를 처음으로 조원전(朝元殿)에서 치렀으며, [[품주]](稟主)가 [[집사부]](執事部)로 개편되어 왕정의 기밀 사무를 맡았다. 좌이방부(左理方府)가 설치되고, [[파진찬]](波珍湌) [[김인문]](金仁問)이 다시 당에 파견되어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 벼슬을 받고 숙위를 맡았다.<ref name="신라-651">《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5년(651)</ref>
즉위 직후 무열왕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으며, 5월에는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는 문희 소생의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문희 소생의 왕자들에게도 관등을 수여하였다. [[대각간|대각찬]](大角湌) 김유신에게는 딸 [[지소부인|지소공주]]를 시집보내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ref name="신라-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무열왕 7년([[660년]]) 3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인 당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소정방과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이 인솔한 수륙 13만 군사를 파병하였다. 원병을 요청하러 보낸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신구도행군의 부대총관(副大摠管)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지위가 더해졌다.<ref name="신라-660"/> 무열왕은 바다를 건너온 당군을 영접하기 위해 [[5월 26일]], 대장군 [[김유신]]과 [[김진주 (신라)|김진주]](金眞珠){{.cw}}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ref group="주">신라 10정(十停) 중 하나로, 현재 [[경기도]] [[이천시]]에 있던 부대</ref>에 이르렀고, 21일에 태자 김법민을 보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덕적도|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아, [[7월 10일]]에 백제의 [[사비성]](泗沘城) 앞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당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할 5만 신라군의 지휘는 태자 김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품일|김품일]](金品日)과 [[김흠순|김흠춘]](金欽春) 등이 맡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서 머물렀다.<ref name="신라-660"/>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군 사령관 소정방은 9월 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이끄는 1만 군사만을 사비성에 남아서 지키게 하고, 포로로 잡은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의 왕족과 고위 신료, 1만 2천 명의 백제 백성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신라측 인사로 소정방과 동행한 것은 김인문과 사찬 김유돈(金儒敦), [[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이었으며, 왕자 김인태(金仁泰)가 [[사찬]](沙湌) 일원(日原) · [[급찬]](級湌) 길나(吉那) 등이 신라군 7천 명을 데리고 유인원을 도와 사비성을 수비했다.<ref name="신라-660"/> 당에서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고, 웅진도독으로 왕문도(王文度)를 파견하여 9월 28일에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무열왕을 만나 고종의 조서(詔書)를 전달하였는데, 예물을 주는 과정에서 왕문도는 급사(急死)하여 다른 사람이 대신 일을 마쳤다고 한다.<ref name="신라-660"/>
이미 의자왕이 항복한 뒤부터 백제 땅에서는 부흥군들이 일어나 신라 · 당군과 전쟁을 벌였으며, 고구려도 11월 1일에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해 와서 군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백제 부흥군에 대한 공세에 나선 무열왕은 10월 9일에 태자 법민과 함께 여러 군사들을 인솔해 이례성(尒禮城)을 쳐서 18일에 함락시키고 인접한 백제의 20여 성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30일에는 사비성 남쪽 산마루에 있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해 1,500명의 목을 베었다.<ref name="신라-660"/> 11월 5일에는 계탄(雞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해 7일에 함락시키고 7백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22일에 서라벌로 귀환해 논공행상을 벌였는데, 앞서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좌평]](佐平) 충상(忠常) · 상영(常英)에게 [[일길찬]](一吉湌) 관등을 주어 총관(總管)직을 맡기는 등 포로로 잡거나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도 처벌하지 않고 관직을 내리기도 하였다.<ref name="신라-660"/>
* 《삼국사기》를 비롯한 전통적인 사료의 기록 및 해석에서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의 다른 이름이 용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용춘과 용수는 서로 다른 인물이자 진지왕을 아버지로 둔 형제이며, 동생인 용춘이 천명공주와 혼인하여 춘추를 낳았으나 용춘이 먼저 사망하자 다시 용수와 재혼하여 춘추는 용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나온다.<ref name="multiple">{{서적 인용 | 제목 = 화랑세기 | 저자 = 김대문 |역주 = 이종욱 | 출판사 = 소나무 | 발행년도 = 2005 | 관련쪽 = 225 | id = {{ISBN|89-7139-546-X}} 93910 }}</ref> 다만 『황룡사중수기』에는 용춘이 《화랑세기》의 기록과 달리 후대에도 생존해 있는 상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화랑세기》 위서론의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화랑세기#용수 문제]] 참조).
[[남북국 시대]]론을 지지하였으며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기도 했던 [[안재홍]]도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것은 [[평양]]이나 [[관북]] 일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북방 영토를 방기한 데다 당의 명령을 빌어 외세의 힘을 이용한 [[신라]]의 행동에서 후세 역사에 등장한 소위 '[[사대주의]]'의 대부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평하였다.<ref>"新羅가 唐을 聯하야 麗濟를 깨뜨리매 渤海가 北方에서 再興하야 비록 南北朝 200년의 歷史를 나타내엇스나 分裂의 形勢는 드듸어 나흘 수가 업섯고 朝鮮의 勢力은 더욱 減殺됨이 잇섯다. 金庚信이 太宗 武烈王을 도아 統三의 業을 이루엇다 하지마는 당시의 記錄은 平壤이 오히려 茂草를 悲嘆하엿고 關北의 地 太半 荒廢하엿슴을 전하엿다. 하물며 唐의 誥命을 빌고 그의 節度에 應하는 등 外力을 이용하는 後世 所謂 事大政策은 이때부터 大部이나 作俑된 觀이 만타." 1926년 7월 1일자 〈[[개벽 (잡지)|개벽]]〉 제71호 「한양조 5백년 총평(漢陽朝五百年總評)」</ref>
[[1993년]] [[성균관대학교]]의 김영하 교수는 [[천리장성]]의 예를 들어 축소된 강역으로 [[만주]]의 요동땅을 밟지못하고 고토를 잃고 살다가 [[조선]]에 와서야 겨우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만을 찾을 수 있었다고 평가를 내놓으면서 당의 [[한반도]] 경략에 발맞추어 외세와의 공조로 [[백제]]만을 겨우 정복한 [[신라]]는 "통일을 완수할 힘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고 '통일신라 시대' 대신에 '신라와 발해' 내지는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신라의 '삼한통일', 나아가 그것에 처음 불을 당긴 김춘추의 대당 사대 외교에 대한 비판에서 주된 쟁점이 되는 것은, 과연 김춘추가 활동할 당시 혹은 그 이전에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사이에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존재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방의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리자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정책에 편승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전쟁의 결과로 당시 신라인들은 수백년간 지속된 전쟁 상태의 종식, [[백제]] 영토의 흡수, [[당나라|중국]] 신문물의 수입에 의한 [[중화]]식 개혁 등 신라의 국가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 영토 역시 근·현대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같은 인식이 없었던 고대의 신라 지배층에게 있어서는 땅을 상실하기는 커녕 [[대동강]] 이남 지역(현재의 [[황해도]])을 신라가 획득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낸 것이었고, 당대 최강 국가인 [[당나라]]를 상대로 한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다만, 이러한 냉정한 평가는 김춘추가 [[한민족]]사의 영웅이라기보다 중요 인물 중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본질과 한계를 재확인시켜 준다.
[[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604년 태어남|태종무열왕]][[분류:661년 죽음|태종무열왕]][[분류:신라의 왕|태종무열왕]][[분류:무속의 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여당전쟁 관련자]][[분류:불교도 군주|김춘추]][[분류:경주 김씨]][[분류:문무왕]]
- 세정(구구단) . . . . 30회 일치
||<#66AADD> '''{{{#white 별명}}}''' ||<#ffffff><(> 갓세정, 퀸세정, 킹세정, 원더세정, 빛세정, 세동[* [[구구단(아이돌)|구구단]] 멤버들이 자주 사용하는 별명이다.], 비데세정[* 비데에 '세정'이라고 써있어서 어릴 때부터 별명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비데를 보며 [[청하(가수)|청하]]에게 여기 자기 이름 있다고 말을 했고 그후로 청하는 비데를 볼 때마다 세정 생각이 난다고], [[치코리타|세코리타]][* [[파일:세코리타1.jpg|width=370]]][* 이 밖에도 센세, 천의얼굴, 슬픔이, 복숭아소녀, 홈쇼핑요정, 재능 치트키, 최종병기, 김크린, 생방요정, 우래기, 야세, 청정소녀, 적토마, [[세종]] 등이 있다. 센세의 경우는 [[김소혜(1999)|김소혜]]와의 관계에 한정된 별명이다.] ||
[[2012년]] [[SBS]] [[K팝 스타 시즌2]]에 참가했다.[* [[악동뮤지션]], [[신지훈]], [[방예담]], [[다원(우주소녀)|남다원]], [[이천원]], [[전민주]]가 나선 그 시즌이다.] 본선 2라운드 랭킹 오디션에서 개성 보컬조로 참가해서 [[YG엔터테인먼트|YG]]가 [[와일드카드(스포츠)|와일드카드]]로 보류한 후, 본선 3라운드 캐스팅 오디션에서 듀엣 부문에서 [[YG엔터테인먼트|YG]] 캐스팅 조로 나와 캐스팅을 그대로 유지해 합격했으나 [[걸그룹]] 부분 중 [[YG엔터테인먼트|YG]] 캐스팅 조에서 탈락했다. [[https://youtu.be/Iy6kYAPTddg|관련 영상]]
그리고 2016년 4월 16일 [[I.O.I]]로서의 첫 활동을 시작했다. 약 오후 1시 무렵 [[I.O.I]]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깜짝 이벤트 관련 영상이 올라왔다. [[I.O.I]]가 총 두 팀으로 나누어져 [[용산]] 아이파크몰, 상암 CJ E&M 센터로 갔는데, 세정은 상암 팀의 멤버였으며 현장에는 커피 차 한 대가 있었고 팬들은 커피 차에서 커피를 주는 역조공이 아닐까 추측했다.[* 당시 반응으론 동성로에 비해 별로일 것이다, 커피만 나눠주고 끝이라 별로일 것이다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안방충의 패배~~]
노래 실력이 매우 좋은 편으로 팀에서 포지션은 유연정과 더불어 메인보컬.[* [[타임슬립 - I.O.I|마지막 콘서트]]에서는 유연정과 함께 이승철의 서쪽 하늘을 불렀다. 유연정과의 호흡이 상당히 좋으니 들어보자.[[https://youtu.be/6Mw9qvnZ2EI|#]]--그런데 5단고음 덕분에 유연정에게만 관심이--] 두 번의 완전체 활동에서 모두 적지 않은 비중을 할당받으며 팀 보컬의 중심이 되었다. 말도 조리있게 잘 하는 편이라 언니인 김청하가 있지만 팀의 리더 임나영이 멤버 통제에 실패하거나 멘트를 못 하는 상황이 오면 김세정에게 대신 시킨다. 실제로도 임나영 다음의 리더 후보 중 하나였다. [* 물론 리더로 뽑았으면 큰일날 뻔 했다. 리더가 개별 활동으로 빠지는 최악의 상황이...]
I.O.I의 예능 치트키. 고정 프로인 어서옵쇼에서 아재들을 들었다 놨다 하거나, 예능에서 I.O.I를 홍보하거나 직접 자기가 고정인 프로에 예능에 잘 나오지 않는 멤버를 직접 데리고 나온다. 김청하, 김소혜 등을 데리고 나온 뒤 본인이 팍팍 밀어준다. 실제로 김소혜는 어서옵쇼 출연이 첫 예능이다. 주로 미는 소재는 괴력소녀와 노래방 성우 목소리. ~~그리고 임나영에게 받은 병든 닭~~ 팔씨름과 허벅지 씨름에서 씨스타를 관광태우거나 다른 예능에서 멤버들과 게임을 하면 멤버들을 관광태우기도 한다. 최유정은 배게 싸움에서 김세정에게 카운터를 맞고 다운됐고, 김청하는 언니이지만 어서옵쇼에서 굴욕적으로 세정에게 끌려다녔으며 방송인 홍석천, 박지윤 등도 김세정에게 관광당했다. 멤버들도 평소에는 김세정을 놀리지만 힘쓰는 게임을 들어가면 긴장한다. 하지만 전소미와의 베개 싸움에서는 도발당하고 지는 굴욕을 당하기도.. 뿐만 아니라 FPS 게임 대결에서 전소미와 대결했으나 전소미에게 진 적도 있다.
* [[황세준]] 대표가 똥고집(?)을 부렸던 [[구구단]]이라는 팀명에 관한 이야기와 어서옵쇼에서 선보인 등근육 얘기가 이어졌고 세정이 선보인 등근육에 관한 얘기가 나온 끝에 조충현 아나운서와의 즉석 팔씨름 대결이 이뤄졌다. 두 손가락, 세 손가락, 전체 손가락으로 대결이 이어졌고 조충현 아나운서의 샌드백 예능감이 발휘되는 가운데 세정의 전승으로 팔씨름 대결이 끝났다. S본부 [[배성재]]에 이어 K본부 도장깨기에 성공했다며 엄살을 부리는 조충현 아나운서의 예능감과 세정 특유의 털털함이 잘 어울려 여느 예능프로그램 못지 않은 재미를 선사했다. 파파야, 아보카도, 두리안 셋 중 한 과일을 고르는 문제를 맞춘 뒤에는 노래방 성우, 외화 더빙, 최화정, 해바라기 김래원 성대모사를 연이어 선보였다. 달팽이, 지렁이, 나비 셋 중 하나를 맞추는 문제를 푼 뒤의 토크에선 어려서부터 시쓰기를 자주 했다는 얘기를 했으며 1대100 삼행시를 선보였다.[* 1 - 1대100 나온다고 해서 제가 준비를 많이 했거든요. 대 - 대략 20편 정도를 챙겨봤는데 100 - '''100인으로 나올 걸...''']
* 2017년 1월 27일 [[KBS 2TV]] 설날특집 걸그룹 대첩 가문의 영광에 [[구구단(아이돌)|구구단]] 멤버들과 함께 출연했다.[* 이특: 선배팀을 깨부숴야 하거든요. 양세형: 어느 선배들을 부수고 싶으세요? 김신영: 도장깨기죠!로 이어지는 MC들의 짓궂은 질문에 '이게 계급장을 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럼 위~아래가 없다는 뜻으로... '라고 답하며 EXID를 지목하는 기지를 발휘해서 환호를 받았다.][[구구단(아이돌)|팀]] 대표로 흥대표로 출전해서 상위 4명의 결선에 오른 후 [[아웃사이더(가수)|아웃사이더]]와 '외톨이'를 같이 불렀으며, 수준급의 랩 실력을 보여서 --솔직히 수준급은 아니지만 보컬이 그 정도 한 거면 준수한 거다. 더구나 '''[[아웃사이더(가수)|아웃사이더]]'''의 랩이다.-- 프로그램 자체가 비난받는 와중에도 [[Apink|에이핑크]] [[윤보미]]와 함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오마이걸]]의 [[베테랑]] 보컬 [[승희(오마이걸)|현승희]]에게 밀려 우승에는 실패했다.[* 걸그룹 자리 배치가 같은 [[I.O.I]] 멤버인 [[정채연]]과 나란히 배치되어서 [[I.O.I]] 이별이 되면서 더욱 더 관심을 받았다.]--사실 마지막 무대로 [[고음]] 내지르는 [[소찬휘|Tears]]를 [[승희(오마이걸)|현승희]]가 불렀는데, 이건 솔직히 [[승희(오마이걸)|현승희]]가 이기라고 밥상 차려준 거나 다름없다--
* 2017년 2월 13일 [[구구단(아이돌)|구구단]] 멤버인 [[나영(구구단)|나영]]과 함께 [[KBS 2TV]] [[배틀 트립]]에 출연을 밝혔으며, [[프로듀스 101]] 게릴라 콘서트를 했던 [[대구광역시|대구]]로 내려가서 [[김광석]]길, 디아크문화관, [[이월드]], 안지랑네거리 곱창골목, 앞산전망대 일대를 투어했다.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1252478&cloc=|#]] 결과는 여수로 내려간 [[김대성(코미디언)|김대성]] - [[박소영(개그우먼)|박소영]] - [[오나미]] 팀에게 2표 차로 석패했다.
* 2017년 1월 [[SBS]]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수마트라 섬|수마트라]]편에 출연하는 것으로 확정됐으며,[[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464699|##]] 2017년 3월 17일 부터 4월 21일까지 방영된 [[SBS]] 예능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수마트라 섬]]편에 출연했다.[* 3월 10일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뉴스 특보 관계로 결방되어 한 주 밀린 3월 17일에 방영.] '재난의 땅에서 생존하라'는 주제로 생존을 시작했다. 방송 시작부터 뛰어난 체력과 적극성을 보이며 생존에 임했다. 생존 중에도 [[구구단(아이돌)|구구단]] [[Act.2 Narcissus|미니 2집]] 컴백 활동에 대비해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게 연습을 해야 한다'며 꾸준히 안무 연습을 해 책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바다 사냥을 위해 근거리의 섬으로 헤엄쳐 이동, 수중 사냥 등의 뛰어난 수영 실력 --[[타임슬립 - I.O.I|I.O.I콘서트]] 준비 기간 동안 배웠다고 하기 놀라운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또 첫 낚시에서 연이어 물고기를 낚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자신의 민낯에 막장이라는 자평을 하기도 하며, 자몽 cf를 아재 버전으로 해달라는 요청에 특유의 아재 매력을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생존 마지막 날 동료들의 캐리커처를 선물했으며, 정글 생존 기간 동안 느꼈던 점에 대한 자작 시를 읊어 훈훈함을 자아내며 생존을 마무리했다. 후에 '좋은 가족이 생긴 것 같아 정말 든든했다'라며 '선배님, 작가님, 피디님 모두 잘 챙겨주셨다. 자연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정글에 갈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방송을 지켜보는 내내 정말 행복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 같다'는 소감을 남겼다.
* 2017년 4월 24일에 방영된 [[JTBC]] [[비정상회담]]의 차회 예고편을 통해 [[구구단(아이돌)|구구단]] 멤버인 [[나영(구구단)|나영]]과 출연을 밝혔다. 5월 1일 방영. '수면의 세계'라는 주제로 각 나라의 수면 습관이나 자장가 등 수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7월 8일 방송 뒷부분부터 7월 22일까지 방영된 여수편에서는 같은 색깔의 의자에 앉은 [[김병만]]과 2인 1조가 되었다. 오후 5시까지 낭만포차에 해산물을 납품하는 미션-- 생선 구이용 생선 100마리, 모둠 해산물 5망, 갯장어 10마리-- 미션에 앞서 여수 3경을 즐기라는 제작진의 말에 팀명 정하기 등 --(병)만세(정) 팀-- 유독 여행에 들떠하며 신난 모습을 보였는데 자연 경관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후 조업배를 선택하는 미션에서 이들이 선택한 어선은 모둠 해산물을 잡는 잠수기 어선이었다. 수중 조업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잠시, 김병만과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촬영 간 김병만은 세정에 대해 멘탈도 강하고 운동신경도 있고 모든 일을 쉽게 터득 하는 것이 전천후 같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18킬로에 달하는 납 착용과 뒤엉킨 호스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함에도 불구 침착함을 유지했고, 이에 김병만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웬만하면 진짜 인정 안 하는데... 너는 인정해 진짜!-- 5망을 채워오지 못해 미션은 실패했고, 조업 후 크루즈에 탑승해 미션 성공팀의 식사를 바라봐야만 했다. 과일 깎기 대회에서 [[경수진]]에게 패해 김병만, [[이상민(룰라)|이상민]]과 함께 갈치잡이 조업에 가게 되었다. 처음해보는 낚시에 기대를 품었는데, 갈치의 모습을 보며 [[구구단(아이돌)|구구단]]의 [[Act.1 The Little Mermaid|데뷔 활동 당시]]의 의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처음 해보는 낚시에 난항을 겪던 와중 차차 적응해나가는 모습을 보여 선장에게 '남자도 하기 힘든 건데, 기가 막히다. 선수가 다 됐다.', 이상민에게 '머리가 좋다, 스마트하다', 병만에게 '요령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터득한다. 유연성이 대단한 친구.'라는 칭찬을 들었다. 갈치 100마리 잡기 미션에 성공한데 이어 추가로 81마리의 갈치를 획득했다. 조업 후 먹은 갈치회에 감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갓 110킬로 뽑아 오기 미션인 '지인 전화 스피드 퀴즈'에서 같은 [[I.O.I]] 멤버였던 [[김도연(위키미키)|김도연]]과 퀴즈를 진행했지만 결국 육중완, 김병만과 함께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갓'세정의 '갓'수확-- 지친 조업 끝에 얻은 재료들로 만든 밥상에 감탄하기도 했다. 역대 게스트 중 가장 많은 조업에 참여했다는 말에 '모든 경험이 즐거웠다. 지금 나에겐 재밌을지라도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겐 엄청난 일이겠다. 힘든 일을 마치고 먹는 밥상에 힘이 난다.' 라며 소감을 남기며 방송이 마무리되었다.
* 2017년 6월 28일에는 [[미미(구구단)|미미]]와 [[https://www.youtube.com/watch?v=DMWkwQ6xk2U|[어반로드] 세정&미미 ①편]]에 출연했다. [[현대 i30|최고급 해치백]]을 타고[* 협찬 차량인 만큼 차량에 대해 종종 언급되었다.] 버킷리스트 항목을 작성한 후에 --무작정 가기 (단 살아있기)-- 홍대에 방문해 인력거 타기, 인형 뽑기, 벽화거리 방문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6월 30일에 방영된 [[https://www.youtube.com/watch?v=f4YhLDyEp38|②편]]에서 연남동에 방문하여 쿠킹 클래스 시간을 가졌고, 태국 요리를 배워 둘 간의 요리 대결을 펼쳐 세정의 승리로 미미가 벌칙을 수행했다. 승패와 상관없이 결과를 예측했던 시민들과 사진을 찍으며 마무리했다. 7월 5일 방영된 [[https://www.youtube.com/watch?v=6xjuXiHZyN8|③편]]에서 구구단 멤버들에게 선물을 사주기로 해 멤버들의 이름이 적힌 팔찌를 제작했다. 한강 시민 공원 여의도 지구에 방문해 미미를 위해 자신의 노래인 '꽃길'을 불러주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구구단의 꽃길도 기원했다. 모든 버킷리스트를 완료한 뒤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 2017년 7월 17일부터 9월 5일까지 드라마 [[학교 2017]]에 주연을 맡았다. [[학교 2017]]에서 최초로 정극 연기에 도전했는데, [[마음의 소리(시트콤)|마음의 소리]]에 특별출연을 한 것을 제외하면 전술했듯이 아이돌이라는 선입견과 첫 주연에 첫 정극 연기라는 불안한 대중의 우려와 달리 무난히 연기를 해냈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꿈꾸는 것에 대한 기쁨과 관계에 대한 행복을 [[라은호|은호]]로 다시 깨달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라는 종영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24일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968203|기사]]를 통해 10월 27일에 개최되는 '제1회 더 서울어워즈'에 [[소녀시대]] [[윤아(소녀시대)|임윤아]]와 함께 여자 인기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음을 밝혔다. 시상식 자리에 윤아와 함께 올라, 불법 다운로드와 저작권에 관한 이야기를 학교 2017에서 했던 애교에 녹여서 보여주기도 했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송강호]]는 덤. 그리고 연이어서 12월 31일 '2017 [[KBS 연기대상]]'에서 걸그룹 출신 연기자 [[류화영]]과 함께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에서 수상을 받게 도와준 이들의 이름을 다 언급할 수 있도록 이름을 적어온 종이를 꺼내 수상 소감을 밝혔는데, '모든 제작진과 스태프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 누군가의 창작물에 있어서 누가 되지 않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는 소감과 함께 [[구구단(아이돌)|구구단]] 멤버들과 가족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베스트 커플상 후보에도 올랐었으나, [[쌈, 마이웨이]], [[김과장]] 등 인기 드라마 속 커플들이 수상했다. 참고로 [[현태운]] 역의 [[김정현(1990)|김정현]]을 비롯한 다른 학교 2017 출연진들은 이날 연기대상 시상식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상식이 끝난 뒤 학교 2017 박진석 PD와 김정현, 김세정이 따로 만남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에 같은 아이오아이인 [[김소혜(1999)|김소혜]]도 참석해서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2018년 4월 16일, 무한도전 후속 프로그램 [[뜻밖의 Q]](연출 최행호)에 캐스팅되었음이 보도되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4월 17일 첫 녹화가 시작되며 MC 이수근, 전현무를 필두로 설운도, 노사연, 강타, 은지원, 유세윤, 써니 (소녀시대), 송민호(위너), 서은광(비투비), 다현(트와이스), 솔라(마마무), 세정(구구단) 등이 출연한다고 하며 남북정상회담 관련 특집방송으로 인해 4월 말이 아닌 5월 5일로 첫 방송날짜가 결정되었다. 참고로 최행호 PD는 [[세바퀴]], [[우리 결혼했어요]] 등을 연출했었으며 최근에는 [[나 혼자 산다]], [[쇼! 음악중심]]의 연출을 맡았던 PD이기도 하다.
* 2018년 4월 30일 넷플릭스(Netflix) 예능 프로그램 [[범인은 바로 너!]] 레드카펫 행사와 제작 발표회에 조효진 PD, 김주형 PD, 유재석, 안재욱, 김종민, 이광수, 박민영, EXO 세훈과 힘께 참여했다. 제작발표회가 끝나갈 무렵 그때까지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못한 김종민과 세정을 챙기는 유재석의 배려 속에 [[김종민]]에 이어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범인은 바로 너!]]에 '사건을 풀어가는 출연자들을 관찰'하는, 관찰예능적인 요소도 있음을 설명하며 또 한 번 재치 넘치는 말솜씨를 선보였다.
* 8월 11일 토요일 오후, 세정이 게스트로 출연한 MBC [[뜻밖의 Q]]가 방영되었다. 5월 5일 첫회 출연 이후 두번째 출연이었으며 전현무, 유세윤, 승관과 한 팀을 이뤄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같은 날 밤에는 세정이 출연한 tvN [[짠내투어]] [[샤먼]]편 첫번째 화가 방영되었다.
* 8월 31일 저녁 있었던 [[프로듀스 48]] 최종회 순위발표식에 선배 자격으로 [[I.O.I]] 일부 멤버들(소미와 최유정)과 함께 [[고양체육관]]으로 초대되어 배석, 순위 발표가 있을 때마다 감정이입을 하면서 지켜보는 모습이 몇 번 잡혔는데, 카메라에 잡힌 자신의 표정에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이기도.
* 10월 13일 빅픽처패밀리 4회에서는 깜짝 생일파티의 주인공이 되었다. 차인표와 류수영이 세정을 검색(갓세정이니까 갓씨야? 곽씨인가,,,)하다가 녹화당일이 김세정의 생일임을 알아내고 생일상을 준비하는 에피소드가 메인테마였다. 훈훈한 생일카드 읽기와 20년전 나에게 말해보기 등의 촉촉한 얘기들이 오갔다. 김세정은 3살 세정이에게 "울어라. 그때 울지 않으면 23살 때 3살처럼 울게 된다"고 말했다. 관련 예로 입양아 봉사 시절 경험을 들어 2년 전 SNS와 대형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던 입양 예정아 태린에게 쓴 편지[* 태린아 ~ 너의 눈은 강을 닮은 것처럼 예쁘고 코는 오똑하니 자리잡아서는 조그마한 입술로 웃어줄 때마다 누나들의 마음이 사그러든단다.너의 울음소리가 시원하게 세상에 퍼질 수 있도록누나가 늘 응원할게! 눈만큼 예쁜 꿈을 꾸는 태린이가 되면 좋겠다ㅎㅎ 웃는 모습만큼 우는 모습도 예쁜 태린아. 세상앞에 움츠려 들지마. 넌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니까. 사랑해 태린아 이 세상 모두가 널]가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11월 11일 유튜버 [[윰댕]]의 실시간 방송에 하나, 미미와 같이 출연했다. [[유튜브]]와 구구단의 콜래보레이션의 일환이라고. 이 방송에서 김세정은 자기 남편 [[대도서관(방송인)|대도서관]]을 팔씨름으로 이긴다는 윰댕의 도전을 받아 왼팔씨름으로는 근소하게 뒤지는 상황(해녀왈 "손목이 꺽였는데 지지를 않아")이었으나 이어 계속된 오른팔씨름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윰댕"괴물이야 팔에 철심을 박았나?")해서 걸그룹 팔씨름 제왕으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어 반반댄스에서는 개다리춤으로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여담으로 구구단이 퇴근하고 이루어진 방송에서 윰댕의 스탭에게 "졌대요~ 졌대요~" 팔씨름 패배의 굴욕을 당했고 윰댕 본인도 이렇게 져본 적도 없는데 팔에 심각한 근육통까지 있어 심신이 굴욕적(퇴근하면서 세정이 "괜찮으세요? 팔 안아프세요? 와~ 힘 정말 세세요"했다고 한다...)이라며 나름 유쾌하게 방송종료했다. (참고로 윰댕은 학창 시절 유도를 했다.)
|| [[삼성전자]] || 빅스비[* 빅스비와 함께하는 구구단 세정이의 24시간 - #01~04편. 구구단 멤버들과 함께 출연했다.] || 인공지능(AI)서비스 || 삼성전자 모바일 인공지능 빅스비 관련 모델[* 광고가 나올 당시에는 빅스비가 서비스 초기라 지원 모델이 딱 [[갤럭시 S8|두]][[갤럭시 S8+|개]]밖에 없어서 사실상 갤럭시 S8 광고였다. 이후 갤럭시 S9 사전개통 행사식에 구구단 멤버들이 참여했다.] ||
- 안종범 . . . . 30회 일치
|학력 =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학사·석사<br>[[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본관 = [[순흥 안씨|순흥]]
|경력 =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br>[[새누리당]] 정책위부의장<br/>[[청와대 경제수석]]<br/>[[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경제 분야 공약을 만들었다. 2014년 6월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경제수석비서관]]에 지명되면서 의원직을 사직했다. 2016년 5월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에 임용되어 일하다가 [[박근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대통령]]이 '[[최순실]] 비선 실세 파문'과 관련해 수석비서관들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하면서 2016년 10월 30일 사임하였고 제3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강석훈]]이 그 직을 임시 대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69333 靑 수석비서관들 일괄 사표제출…朴대통령 인적쇄신 가능할까]. 서울신문. 2016년 10월 30일.</ref>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23&aid=0003228904 민정수석·청와대 비서관… 도대체 뭐 하는 자린고?]. 조선일보. 2016년 11월 16일.</ref> <ref>이상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774512 靑 정책조정수석, 강석훈 경제수석이 대행]. 머니투데이. 2016년 11월 16일.</ref>
2018년 3월 29일 서울동부지방검찰청 형사6부는 안종범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안종범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에 재직 당시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방해를 위해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에게 ‘대통령 조사’ 안건 부결 기획안 마련 등을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ref>{{보고서 인용|저자=공보담당관 차장검사 문찬석|url=http://www.spo.go.kr/_custom/spo/_common/board/download.jsp?attach_no=193667|제목=세월호 특조위 활동 방해 사건 수사결과|출판사=서울동부지방검찰청|날짜=2018년 3월 29일}}</ref>
*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 1997 . 04 ~ 1998 . 02 :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책임전문위원
* 1998 ~ 2016 :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2003 . 09 ~ 2004 . 08 : [[성균관대학교]] 경제연구소 소장
* 2009 . 08 : 금융위원회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
* ~ 2011 . 08 : 금융위원회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자금지원심사소위원회 위원장
* 2011 . 03 ~ 2012 : 재정위험관리위원회 위원
* 2014 . 06 ~ 2016 . 05 :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 2016 . 05 ~ 2016 . 10 : 대통령비서실 정책조정수석비서관
|직책 =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대통령비서실 정책조정수석]]
|직책 =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순흥 안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박근혜 정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자]]
- 김희철(1983) . . . . 29회 일치
||<#00239b> '''{{{#ffffff 본관}}}''' ||<(> [[김해 김씨]] ||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배우, 예능인. 공식 이름은 희철이 맞지만 보통 그의 본명인 김희철로 잘 알려져있다. '''아이돌계 돌아이의 대표주자'''[* 아이돌계에서 비글미와 사건사고로는 어느 그룹보다 뒤지지 않는, 덜 미친 자는 있어도 안 미친 자는 없다는 [[슈퍼주니어|그 그룹]]에서도 멤버들과 팬들이 공인하는 가장 미친 놈...--[[유리(소녀시대)|이 분]] 왈 : 싹바가지--]이자 '''아이돌계 미모 종결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미소년 이미지로 데뷔 초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한 줄로 설명 가능한데, 천하의 '''[[SM엔터테인먼트]]에 얼굴로 입사한 인물'''이다. 친구들과 서울에 처음 왔다가 오디션 시간에 30분 지각했는데 관계자가 얼굴을 보더니 어라? 하고 기회를 줬다고. 연예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건 다른 이유 없이, 2002년 어느 날 횡성 집에서 빈둥빈둥 TV를 보다가 마침 [[싸이]]가 3집 챔피언을 들고 가요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부른 걸 보게 되었고, 그걸 보며 '어? 나도 연예인이나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가서 지원했다고 한다. 참고로 노래는 [[애국가]]를 불렀다. 그렇게 3년을 연습하다가 [[반올림]]2 에 출연하며 먼저 배우로 데뷔를 하고 8개월 후 [[슈퍼주니어]]에 합류하며 가요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팀 내에선 이특과 함께 맏형을 맡고 있다. 이 정도로 서로간의 캐릭터가 완전히 정반대인 사람들 두명이서 맏형을 맡은 그룹도 참 드물지 않을까(...) 아이돌 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히 독보적이라 할 정도로 예쁘장한 미모를 가진 대표 [[미소년]] 비주얼의 아이돌. [[여장]] 사진이 진짜 여자보다 훨씬 더 예쁜 남자 연예인으로 정말 유명하다. [* 이 분야의 후임으론 같은 소속사 후배 출신의 [[태민]]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느낌이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특정 각도에서 보면 태민은 희철과 닮은 꼴이다. 덕분에 10년마다 나오는 얼굴이란 짤방도 있다.] 슈퍼주니어 내에서도 독보적으로 튀어 보이는 예쁜 얼굴과, 그와 정 반대로 솔직하고 할 말 다하는 성격과 자유분방하고 아이돌계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개성있는 ~~돌+I~~ 캐릭터 덕에 대중에게나 팬덤에게나 더 쉽게 각인이 되었다. 특히 이런 캐릭터가 소속 연예인 관리에 엄격하다고 알려졌던 [[SM엔터테인먼트|SM]] 출신에서 나왔다는 것에 더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활동 초기부터 인지도로 최상을 찍은 멤버 가운데 하나였으며 예능 쪽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멤버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안그래도 사건 사고가 많았던 그룹이고 그중에서도 유독 트러블 메이커가 되기 쉬워보이는 성격과 캐릭터덕에 오해를 받기 쉽지만 의외로 희철은 사생활 관리도 매우 철저하고 '''사건 사고가 전무하다.''' 음주운전이라던가 팬들을 속상하게 할만한 열애설이 거의 없었단 게 그 증거. 최근 [[강인]], [[성민]] 등의 멤버들이 잇따라 보이콧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재평가]]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이지만 희철은 슈주 멤버들 중에선 의외로 모범적인 태도를 가진 멤버 축에 속한다. 그외에, 팬들과의 소통도 활발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멤버들을 상당히 잘 챙겨주고, 멤버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모습을 본인 SNS에 많이 올려서 팬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탈퇴한 중국 멤버 한경과 친하게 지내서 미니홈피에도 글을 자주 올리곤 했는데 한경이 탈퇴하자 충격에 우울증까지 겪었다고 한다. 최근 한경이 매니저없이 한국 여행을 와서 희철과 찍었단 사진을 게재하는 걸 보면 여전히 교류는 이어가고 있는 듯.] 또한 스스로 '''꽃은 꽃잎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팬들을 자신의 꽃잎이라고 부르는등 자기 사람, 자기 팬은 확실히 챙기고 아이돌로서의 태도도 상당히 프로페셔널하다. 교통사고로 부상 당했을 당시 팀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서 자기 빼고 활동하라며 탈퇴를 고민하기도 했고[* 최근에도 다리 부상때문에 팀에 차질을 주고 짐이되는것 같다고 미안함을 표시했다.] 자신의 아픔은 자신만 알면 된다는 생각에 방송에서 이 얘기를 섣불리 꺼내지 않았던 일화도 있다. 자신은 다리가 아파 활동을 덜 하는 만큼 예능에서 슈퍼주니어를 더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대중성 있는 꽃미남 비주얼에, 호불호가 갈리는 마니아적인 캐릭터라는 특이한 조합 외에도, 기본적으로 성실한 태도와 팬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기에 인기를 끄는 것. 슈퍼주니어 내에서도 충성도가 높은 세계 단위 개인 팬덤[* '꽃잎'이라고 한다. 영어권 팬덤은 'Petal', 중화권 팬덤은 '花瓣', 일본 팬덤은 '花びら'라고 한다. 모두 꽃잎이라는 뜻이다.]을 거느리는 이유가 있다. 팬들을 내새끼들 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대하기도. 활동도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많아서 사실상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활동한 슈퍼주니어를 알리며 잊히지 않게 하는 멤버.
2011년 9월 1일 입대. [[공익근무요원]]으로 2년 동안 복무하고 2013년 8월 30일에 [[소집해제]]되었다. 공익으로 군 복무를 이행하는 것에 대해 입소 당시 좀 난리였는데 2006년도에 같은 멤버인 [[동해(슈퍼주니어)|동해]]의 부친상에 조문하고서 상경하다 차가 중앙분리대에 충돌하는 사고로 큰 수술을 요하는 중상을 입어[* 대퇴부와 발목 부분 골절상으로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고 뼈에 철심 7개를 박는 대수술이었다.] 4급 판정을 받게 되었다. [* [[아이돌 연구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방송이든 인터뷰든 저보다 아픈 분도 훨씬 더 많을텐데 제가 방송에서 아프다는 얘기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핑계 대기 싫었거든요." 실제로 [[아는 형님]]에서 [[이승기]]의 훈련병 당시 중대장이자 희철의 중대장이었던 분의 제보에 따르면 희철이 다리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연예인은 군대에서 태만하다는 이미지를 떨치고 싶어서 다리가 죽을 듯이 아파도 훈련에 다 참여했다고 한다.] 다리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고. 실제로도 활동을 하면서 과격한 동작은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음악방송을 예로 들면 제대 후인 2014~15년에는 약하게라도 무대를 전부 소화할 수 있었으나,([[https://youtu.be/4y1yRNJ9iuk|#]]) 2017년 [[Black Suit]]에서는 후반부에만 등장했고,([[https://youtu.be/_PMkWwo6xaw|##]]) 반년 뒤 나온 리패키지 [[Lo Siento]]의 무대에는 아예 참여하지 못했다.[* 철심제거 수술을 [[2008년]]에 했는데도 불구하고 교통사고 후유증이 남아 있는 듯 하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는 왼다리로 넘어졌다가 웃고 넘어갔지만 굉장히 아파했고, 아는 형님에서도 닭싸움이나 다리를 심하게 쓰는 코너에서는 제외된다.] 콘서트 무대는 아직까진 잘 소화하는 중이지만, 과격한 안무나 무대 퍼포먼스 후에는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공익 활동 당시엔 트위터도 없애고 팬들에게 절대 찾아오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고, 성실히 복무했다.[* 성실히 복무를 한 공로로 상장도 받았다. [[파일:external/contents.dt.co.kr/2013083002019919794015.jpg]]] [[https://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68819&imp=whot|관련기사]] 단, 공익근무시간에 LOL을 한 전적이 있었으며(당시 닉네임: 김기복), 이에 대해 해명하길 친구가 했다고~~대ㄹ..~~ 했다. 아무튼 군 문제에 관해서 대중들의 여론은 대체로 ‘안타깝다’는 의견이 많다. [[이민호(1987)|이민호]]와 같이 현역으로 복무할 수 없었던 명확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모범적으로 사회복무를 마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주는 편.
2017년 10월 17일, 11년 전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발목 통증이 심해지는 일이 잦아져 8집 앨범 활동에 정상적으로 임하지 못할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968126|기사]] [[https://www.instagram.com/p/BaWd2xznX0B/|인스타]] 그러나 곧바로 슈퍼주니어 측 관계자가 “컴백을 앞두고 고질적인 다리 통증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쓴 글이 확대해석 된 것”이라며 정상적으로 활동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1&aid=0002995714|#]]
기본적으로 의리 있는 성격이라 친해지면 오래 간다고 한다. 데뷔 초부터 여러 연예인들과 함께 방송, 드라마, 라디오등에 출연하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친분을 쌓아 나갔고 본인의 의리 있는 성격이 겹쳐져 2018년 현재 어마무지한 인맥 라인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실상 웬만한 메이저 아이돌들은 김희철과 친분이 있으며, 예능에 자주 출연하다보니 예능 MC들과, 데뷔 초 시트콤 출연 경력 등으로 배우들과도 친분이 있는 등, 연예계 다방면으로 인맥을 자랑한다. 가장 자주 만난다는 인맥그룹은 AB형 혈액형을 가진 남자연예인들의 모임인 쪼코볼[* '''쪼'''금 싸이'''코''' 같지만 '''볼'''수록 매력있는 남자들.]로 [[장근석]], [[이홍기(가수)|이홍기]], [[조성모]], [[미쓰라 진]], 낯선, [[쌈디]], 김정모 등이 멤버이다. 자주 술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이외에도 같은 소속사 선배 가수인 [[BoA]]와도 친분이 두텁다. 게임 전문 아프리카 BJ나 소속사 대표들도 알 정도로 연예계나 비연예계 전방으로 엄청난 친목을 자랑한다. 근데 오히려 슈주 멤버들과 덜 친하다고 절친 노트에 나오기도 했다(...) 슈주에선 [[최시원]]과 [[동해]]와 가장 친하다. [[이특]]과는 성격이 정반대라 자주 싸우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 관계를 '''친하지 않은데 안 친하지도 않은 사이(....)''' 라고 표현하기도. [[한경]] 과도 절친한 사이여서 한경이 탈퇴한 이후 우울증에 걸려 탈퇴를 고민하기도 했고 미니홈피에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탈퇴 이후에도 만남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방신기]]에서는 [[유노윤호]]와 친분이 있으며, [[동방신기]]를 탈퇴하고 [[JYJ]]로 활동하는 멤버 [[김재중]]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당한 게임광이라 휴일엔 집에 틀어박혀 게임밖에 안 하고 온라인게임도 그럭저럭 손을 대는 중이라고 한다. [[와우]] 모 서버의 [[호드]](블러드엘프)였다가 [[얼음왕관 성채]]가 나왔을 때 즈음 [[얼라이언스]]로 전향했다. 소집해제 후에는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고 있는지, 2013년 11월 27일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나는 캐리다]]에 출연했다. '김희철 동호회'라 하여 [[강민]], [[박정석]], [[이현우(게임 해설가)|이현우]], 오기종과 함께 나왔는데 결국 [[김캐리]]급 멘탈 인증(...) 그리고 방송 후 [[롤갤]] 하는 거 아니냐는 의심도 받게 된다(...) 이때 공개된 김희철의 티어는 플5. 이즈리얼, 베인, 케이틀린이 모스트인 원딜러인 듯. 아프리카TV BJ들과 게임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해킹당한 이후 게임을 접겠다고 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물론 게임은 계속한다. 최애캐는 리신. 참고로 같은 팀 멤버인 규현도 상당히 겜덕이다.
인맥이 많아서 약간 신뢰 없는 이미지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김희철은 인맥 관리에도 매우 철저하고 자신이 친한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챙기고 잘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는지라 평가가 높다.[* [[강은비]]가 한창 100만 안티에 시달리던 시절인 2006년, 레인보우 로망스 시사회에서 동방신기와 김현중의 팬들의 협박 때문에 강은비가 실신하자 강은비의 안부를 직접 챙기고 촬영장에서 무개념 팬들의 접근을 막는 등 강은비를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강은비는 지금도 김희철에게 고마워한다고.] 특히 여사친이 상당히 많기도 한데, 김희철은 일단 본인이 여자와 친구가 된 이상 그 여자를 절대로 이성으로 보지 않으며 본인이 이성으로 느껴지거나, 상대방이 자신에게 감정을 가지고 다가올 경우 친해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스캔들 한 번 없는 것도 철저한 인맥관리 때문일지도. 또한 주위 인물이 여자 연예인을 소개 시켜달라고 하면 바로 차단을 시켜버리는 등, 지켜야 할 선은 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초아 열애설 때 중개를 자신이 시켜줬다는 추측성 기사 때문에 엄청 불쾌했다고.
[[데프콘(가수)|데프콘]], [[심형탁]], [[정준영]]과 함께 대한민국 연예인들중 자타공인 오덕으로 유명하며, 이중에서도 수장이라 할만큼 유명하다.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아스카]]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으며, [[데프콘(가수)|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는 가수가 또 있다. 재미있게도 둘다 [[주간아이돌]] MC 출신이다.]][* 실제로 김희철 &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아스카]] 관련 게시글이 올라오면 댓글에는 반드시 [[데프콘]]이 언급이 된다.] 소집 해제 후 아예 인증을 했다. [[겨울왕국]] 공개 이후 불러도 대답 없는 아스카를 버리고 [[안나(겨울왕국)|안나]]로 갈아타겠다고 선언(...). 차가운 엘사보다 안나가 좋다고 한걸 보니 취향이 확실한 듯하다.[* 본인이 선이 뚜렷하고 쌍커풀이 진해서 여성분은 쌍커풀 없고 화장이 연한 게 좋다고...~~애니캐를 현실 여자처럼...~~] [[http://i.imgur.com/vjMPTi8.jpg|코스프레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까 [[https://twitter.com/HeeZZinPang/status/519142782602989570|다시 아스카로 갈아탔다.]] 2018년 1월 18일 친분이 있는 트위치 스트리머 케인의 방송에 게스트로 나왔을때 드러난바에 따르면 휴대폰 벨소리가 무려 [[잔혹한 천사의 테제]]. [[https://clips.twitch.tv/WittyWanderingPlumageSquadGoals|해당 클립]] 오래 전부터 그 벨소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 일본에서 찍고 인스타그램을 올린 사진을 보면 러브라이버로 추정된다. [[멜론북스]]에서 니코마키로 표지가 된 동인지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은 니코니코니의 포즈를 짓고 사진을 찍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aid=0000114331&oid=312|관련기사]]
또한 와우도 준 [[폐인]] 수준이다. 물론 연예인이라는 직업상 진짜 폐인들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허나 그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취미생활을 한다는걸 생각하면...(...) 또 한 가지 희철이 오덕이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언젠가 [[멍지아|지아]]의 핑크머리를 보컬로이드 [[메구리네 루카]]의 분홍머리와 닮았다면서 같이 트윗한 적이 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128615&cloc=rss|관련기사]]. 돈돈 활동당시 엠 카운트다운에서 본인의 의상 컨셉을 '''[[야가미 이오리]]'''로 잡는다던가...(...) 우리 결혼했어요 세계 판에서는 자기 여자 친구라며 베개를 들고 와 당당하게 바람을 폈다.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게임도 즐긴다. [[리그 오브 레전드]] 랭크 게임에서 다이아 티어에 서식하고 있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 [[이현우(게임 해설가)|이현우]]와 친해서 방송에 시시때때로 출연하는 것은 물론 [[박정석]]과는 서로 욕설(...)까지 주고받는 동갑내기 친구 관계다. 2016년 롤드컵 당시에는 게임방송국 [[OGN]]에서 객원해설로도 출연하며 적당히 게임을 좋아하는 게 아님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터뷰에 의하면 OGN 측이 나름 챙겨준다고 출연료를 챙겨줬지만 원래 희철의 몸값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나가겠다고''' 적극 주장해 출연했으며, 원만한 진행 능력&게임 지식을 발휘해 일반적인 객원 해설보다 훨씬 더 퀄리티 높은 해설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dwEu2bY5KI|해설영상]]. 이 해설을 기반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견해도 알 수 있다([[http://www.inven.co.kr/webzine/news/?news=165285&iskin=esports|인터뷰]]). 그 밖에 트위터에 이특과 [[킹 오브 파이터즈]]를 한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린 것을 보면 롤 이외의 게임도 즐기는 모양. 이특이 [[야가미 이오리|이오리]] 안 시켜주고 시원이 닮은 [[로버트 가르시아]]로 얍삽이만 쓴다고 폭로했다. 또한 2017년 2월에 있었던 SBS [[게임쇼 유희낙락]] 녹화중 트위치 스트리머 [[케인(스트리머)|케인]]의 킹오브 방송을 굉장히 재밌게 보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실제로 케인을 해당 방송에 섭외해서 녹화도 했다.[* 이때 섭외 과정에서 5개월 구독을 끊었다가 희철을 사칭으로 오해한 케인에게 생방으로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는데, 이를 계기로 케인과 친구를 먹고 이후로는 케인의 방송에서 시청자들과 채팅도 종종 주고받고 있다.]2018년 1월18일 케인의 방송에 출현했다[* 출연 계기는 다른 연예인들과 술마시던 중에 갑자기 케인이 보고싶어서 전화했더니 왔다고 한다. 그에 고마움을 느껴 합방제의를 했고, 뒤늦게 정신차렸지만 이미 뱉은 거 책임진다는 마인드로 합방을 하게 됐다고]~~케조씨도 희님덕분에 만명찍었다 그와중에 만명이면 적게보네라고한 희님 흠좀무 인스타라이브만 3~4만명보는데~~ 이 방송에서 단 1초도 오디오가 비지 않게 게임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제발 그만..." "차라리 죽여줘..." "야 누가 00게임 얘기 꺼냈냐" "뇌 용량이 얼마인거냐" "박찬호를 능가하는 투머치토커다" "귀에서 피 난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대단하기도 대단한 것이 게임 캐릭터의 인상착의, 배경음악, 스킬, 줄거리와 엔딩, 감상평까지 자세히 말을 하여 정작 방송의 주인인 케인은 아주 가끔 한 마디씩 끼워넣는 것 말고는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음성 도네로 에미넴 비트를 깔며 랩 드립을 쳤다.
== 관련 사건 ==
일반적으로 돈과 명성을 모두 지니는 유명 [[연예인]]이란 직업, 그런 상황에서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사람의 섭리에 비춰 볼 때 '''[[마약|약물]]''', '''[[도박]]''', '''불건전한 이성관계'''라는 세 종류에 탐닉할 위험성이 있지만 그런 스트레스를 [[덕질|건전한 취미]]로 해소하면서 자기 관리를 한 결과다. [[강인|같은 그룹의]] [[시원(슈퍼주니어)|아픈]] [[성민|손가락]][[이특(슈퍼주니어)|들]]이 돌아가며 사고를 쳤던 2017년과 현재 시점에서는 알고 보니, '''[[슈퍼주니어]]의 최종보스'''였다는 찬사까지 들을 정도.
심지어, [[아는 형님]]에서 예능 블루칩으로 주목 받은 이후로도 그 흔한 논란 한 번 없고, 이성 문제도 깨끗하다. 특유의 붙임성을 포함해, 친분을 쌓고 있는 여자 연예인들이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친한 게 아닌 지, 어지간한 연예인들 별명을 다 안다. 연예인을 하면서 덕질을 하는 흔치 않은 케이스. 걸스데이가 나왔을 땐 [[소진(걸스데이)|소진]]의 별명인 '''이모'''를 알질 않나, [[사나(TWICE)|사나]]가 나왔을 땐 '''사또떨'''[* 걸핏하면, 뭔가를 떨어트리는 '사'나가 '또' '떨'어트렸다.]을 알질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분있는 여자 연예인들과 관련된 논란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 데뷔 일화가 제법 빵 터진다. [[SM엔터테인먼트|SM]] 토요 오디션 시간에 지각을 해서[* 친구들과 함께 서울에 처음 온 날이라서 헤맸다고 한다.] 관계자가 '늦었어요 안받아요' 하길래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담당자가 얼굴을 보곤 "....어라?" 하시더니 기회를 한번 주겠다고 하더니 붙었다고 한다.[* 오디션 영상도 주옥같은데, 막춤 추고 애국가 불렀는데 망가지지 않는 외모덕에 합격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쓸 때 부모님께서 "널 받아주시다니 좋으신 분들이구나." 하면서 30년 계약을 권유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얼굴이 아닌 노래, 춤 실력이 없었다면 데뷔하고 인기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을 터이니 그의 성공이 모두 그의 외모 덕이라고 속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잘생긴 외모이기는 하나 중성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그래서인지 [[부녀자]]들의 마수에 자주 걸리기도 하고, 실제로도 여러번 오해를 받았다. 같은 소속사의 동료 남자 연예인들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처럼 소문이 나서 곤욕을 자주 치렀다고 한다. 이는 데뷔전부터 김희철의 스타일링도 한 몫했는데, 머리도 긴 편이었고 옷도 분홍색이나 화려한 무늬가 많이 들어간 독특한 옷을 자주 입었다고 한다. (혹자는 왜색이 짙다고도 표현한다.) [[유노윤호]]와 같이 있다가 김희철을 여자로 착각한 유노윤호의 여친이 그걸 보고 바람을 피우는 걸로 오해해서 유노윤호가 여친과 깨졌다는 일화도 있다. 데뷔 후 계속 관련 소문이 돌자 자기가 예능프로에서 직접 아니라고 밝혀야 했다. [[에픽하이]]의 [[미쓰라진]]과도 친한데 --믿기지 않겠지만 동갑이다-- 비슷한 이유로 예능에서 해명한 일이 있다. 트랙스의 제이와 모텔에 들어갔다가 모텔 주인이 희철을 여자로 오해하고 19금 스런 의미에서(...) 둘을 오해하는 바람에 쉬고 갈거냐 자고 갈거냐고 묻기도 했다는 일화가 [[SM엔터테인먼트|SM]]의 전설로 남아있다고 규현이 인증한 바 있다. ~~거기다 여장을 해도 위화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니..~~ 같은 방송에서 낯가림이 심했던 김희철이 숙소 생활 당시 제이에게 니 방에서 자면 안되냐고 해서 둘이 한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제이는 "희철이가 예쁘긴 하더라"고 드립을 쳤다~~ 때문에 아예 팬들이 여자 좀 만나라고 등 떠밀 정도... 이 때문에 인스타에 '니들이 원하는 현실여자와의 데이트다.'라는 멘트와 함께 우결 세계 판 사진을 자주 올린다. M&D 앨범 '가내수공업' 의 곡 '하고 싶어' 를 직접 작사했는데, 왜 자신은 연애를 못 할까 생각하며 한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 [[원더걸스]] [[소희]]의 팬으로 유명하다. 핸드폰 배경화면이 [[소희]] 사진인 것도 방송에서 인증했고, 트위터나 라디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실제로 [[소희]]가 방송에서 영상편지를 찍자 트위터에 영상편지 시스템은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군대 관물 대 액자에 있는 사진도 소희다. 자신이 공익근무 중일때 원더걸스가 라디오 스타에 나오자 김구라에게 "우리 소희 괴롭히면 죽을 때까지 저주할 거예요!"라고 하기도. 팬카페도 가입했다. 이때 대화명은 '킹왕짱 만두파 안소희'(...). 자기 라디오에서도 소희를 자주 언급했다. 기본적으로 잡덕 성향이 강하지만 최애가 소희인 것으로 보인다. [[http://youtu.be/tP0XpH_CkIA|마우스패드가 AOA]]
* 2017년 후반부터 [[fromis_9]]을 포함한 [[아이돌학교]] 출신 학생들에게 유독 애착이 깊다. 실제로 [[SUPER SHOW 7]]을 관람하러 온 [[fromis_9]] 멤버들 개개인과 [[이다희(1996)|이다희]] 등 사진을 인스타에 게시하기도 했고, fromis_9 멤버들과는 데뷔 이후 저녁식사를 가지고, [[아형 뮤비 대전]]에서 [[노지선]]을 여주로 함께하는 등 담임으로써 애착을 보이고 있다.
- 윤휘 . . . . 29회 일치
과거 급제 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에 관련, 삭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18년 동지겸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이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낼 때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을 지지했다가 [[인조반정]] 직후 파면되었다. [[1626년]] 복관되고, 성주목사, 청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어가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고, 주화론에 참여하여 [[조선]]측 대표로 [[청나라]]군과의 사이를 오가며 타협을 주관,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뒤 도승지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다.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우찬성]] 등을 지냈다. 사후 아들 [[윤면지]]의 공로로 [[의정부]][[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윤두수]]의 셋째 아들이다. [[윤흔]]의 동생이며 [[윤훤]]의 형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했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 또는 천상(川上),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후 [[1595년]] [[춘추관]][[기사관]], [[1596년]] [[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다시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해 [[동부승지]]를 거쳐 [[정유재란]] 종전 후에도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군대]]의 철군 문제를 교섭, 타결시켰다. 이어 [[의인왕후]]의 장지 문제 선정에 참여하고 [[명나라]]의 전몰 장병 위문을 주관하였으며, [[우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아버지 [[윤두수]]가 [[이홍로]]의 탄핵으로 [[홍원군]]으로 유배되자, 이홍로의 친지들과 친하게 지냈던 그는 이후 이홍로와 관련된 사람들과 절교하였다.
[[1603년]] [[좌부승지]], [[참찬관]]을 지냈다. 한편 [[선조]]의 특명으로 돈피 사모 이엄(獤皮紗帽耳掩) 1부(部)을 하사받기도 했다. [[1604년]] [[승지]], [[호조]][[참의]]를 거쳐 [[160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그뒤 [[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하였다.
=== 관료 생활과 외교 활동 ===
[[1609년]](광해군 1년) [[좌승지]]가 되고,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10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그해 호패(號牌) 사용으로 민심이 혼란함을 들어 호패제에 대한 무마책과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겨울 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2월]] 행 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1611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161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고, 영녕전 이안청 영건청(永寧殿移安廳營建廳) 건립에 참여한 공로로 아마 1필을 하사받았다. [[1612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지역 유림들의 [[조목]]의 [[월천서원]] 배향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형 [[윤흔]]의 첩 서씨의 남동생 서양갑과 관련, 연좌되어 벼슬에서 쫓겨났고, [[서양갑]]에게 군관 직위와 월급을 준 일이 문제되어 양사의 공격을 당하다가 뒤에 다시 기용되었고, [[인목대비]] 폐모론 때는 불참하였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 때 [[환관]]과 결탁하여 인사권을 주무르고, [[요동]]을 정벌하려 할때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서인]]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예조]][[참판]]에서 파면되고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4월]] 임피(臨陂)로 이배된 뒤 다시 [[아산]] 등지로 [[유배지]]가 이배되었다.
반정 초반 같은 [[서인]] 당원임에도 버림받았으나 반정 공신인 훈신들의 특별 사면 건의로 [[1625년]] 사면되었다. 그러나 계속 서인 간관들은 그를 처벌하거나 [[문외출송]]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사면된 후 [[1626년]] [[용양위]][[부호군]]이 되고, 그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가 [[광해군]] 조정에 참여한 일로 탄핵 상소와 비난이 계속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 [[좌윤]]을 거쳐 [1[628년]] 행 부호군이 되고 [[찬획사]]에 임명되었다가 병으로 취소되었다. [[1628년]] [[8월]]에는 그해의 [[별시]]과거의 시험관의 한사람으로 참관하였다. [[1629년]] [[성주]][[목사]]로 나갔다가 다시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뒤 [[호조]][[참판]],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32년]] 행 호군, [[1633년]] 부총관 등을 거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1639년]](인조 17년) [[3월]]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환국할 때 [[가마]]를 타고 천천히 가서 맞이하는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조선 인조|인조]]는 이를 무마시켰으나 계속 간관들의 탄핵을 받고 원배되었다가, [[유배지]]로 가던길에 석방되어 되돌아왔다.
[[분류:1571년 태어남]][[분류:154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서예가]][[분류:조선 광해군]][[분류:조선 인조]][[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해평 윤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
- 윤흔 . . . . 29회 일치
'''윤흔'''(尹昕, [[1564년]] - [[1638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무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평.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훤]]의 형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초명은 양(暘)이고, 자는 시회(時晦), 호는 도재(陶齋) 또는 청강(晴江), 계음(溪陰)이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 당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하였으며, [[병자호란|병자]],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협상을 반대하며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광해군]] 때 [[승정원]][[우승지]] 등을 지냈으나 한때 첩의 남동생이 칠서지변의 서양갑이라서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뒤에 관작이 복구되어 [[예조]][[참판]]·[[중추부]][[지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까지 호종하였고,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예조참판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는 [[후금]]과의 협상을 강력 반대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는 [[1632년]] [[인목대비]]와 [[1635년]] [[인열왕후]]의 [[국상]] 장례를 주관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636년]](인조 14년) [[정묘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으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 [[김상헌]]과 함께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후 [[병자]], [[정묘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증직|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웅렬]](尹雄烈), [[윤영렬]](尹英烈) 형제는 그의 7대손, [[윤치호]]는 그의 8대손이다. [[이이]]·[[성혼]]·[[정철]]의 문인이다.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윤훤]], 윤휘(尹暉)의 형이고, [[조선 선조|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백부였다.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월정 [[윤근수]]는 그의 삼촌이었다. 처음 이름은 양(暘)이었는데 뒤에 흔으로 개명하였다.
첫 부인은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의 손자 [[양원도정]](陽原都正) 이혜(李譓)의 딸과 결혼하였다가 일찍 상처하고, 뒤에 스승 [[이이]], [[성혼]]과 동문수학한 [[신응시]]의 딸 영산신씨(靈山申氏)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재취 부인 영산신씨 역시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전처 전주이씨에게서 1남 1녀를 두니 아들 윤취지(尹就之)와 유시경(柳時慶)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또한 첩실에서 1남 1녀를 두었으니, 서자 윤태지(尹泰之)는 관상감 직장(觀象監直長)을 지냈고, 서녀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유지만(柳之蔓)과 결혼하였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수학하였으며 이후 [[음서 제도|음보]](蔭補)로 출사하여 [[경력]](經歷)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매년 [[향시]](鄕試)에서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 그러나 정시 과거에는 낙방하였다.
[[경력]]으로 재직 중 [[1595년]](선조 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었고, 얼마 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이름은 윤양이었는데 뒤에 흔으로 개명한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95_004467 윤양]</ref> 향시에는 장원했지만 중앙의 과거에 낙방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굴욕을 펴게 되었다 한다. 그는 과거 급제 후에도 자신의 스승의 한사람인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의 문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조선 선조|선조]] 임금을 따라 [[의주]]로 피난갈 때 수행하였다. 그 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으로 [[성균관]][[전적]](典籍)으로 특진하였다.
=== 관료 생활 ===
이후 형조좌랑, 예조좌랑, 호조좌랑 등 다시 3조의 좌랑을 거쳐 [[평안도]][[도사]]로 나갔다. 복귀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 [[호조]][[정랑]]을 거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 그 뒤 내직으로 복귀하여 [[형조]][[정랑]]을 세 번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광해군]]을 보도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올랐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겼다. 그 뒤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홍문관]]수찬(修撰)이 되고, 교리(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에 올랐다. [[1601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상을 치뤘다. [[1603년]](선조 36년)에 3년상을 마치고 복직,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 [[군자감|군자감정]](軍資監正),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이후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승정원]][[우승지]]가 되었다.
[[1620년]](광해군 13년) 서반(西班)의 무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상소를 올려 물러난 뒤, 당시 [[북인]]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김류]], [[이귀]] 등의 요청으로 조직에 복귀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 등이 거병하여 도성으로 쳐들어와, [[이괄의 난]]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즉시 [[공주시|공주]]까지 달려가 [[조선 인조|인조]]를 호종하였으며, 그 뒤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 뒤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으며, [[청나라]]와의 강화, 회담을 강력히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그의 결사항전 주장은 묵살되었찌만 주화에 절대 반대한 점으로 [[사림]]의 지지를 받았다.
[[1630년]](인조 8년)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직되었다가 그해의 임오년(1582년) 사마시 합격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임오년사마방회도에 기록되었다.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1632년]] [[예조]][[참판]]이 되고, 1632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국장]] 업무를 주관하였고,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참판이 되어 1635년에도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며 [[조선 인조|인조]]의 정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장업무를 주관하였다.
[[1636년]](인조 13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으며, [[병자호란]] 당시 그는 [[김상헌]] 등과 함께 [[청나라]]와의 강화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1637년]](인조 15) [[정축하성]] 후 관직을 사퇴하고 칩거했으나 거듭된 출사 요청으로 [[한성]]에 되돌아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특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다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윤두수]]의 묘소 옆 자좌(子坐) 오향(午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사후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관상감사]]에 특별히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 관련 항목 ==
[[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해평 윤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감기와 폐병-->
- 이인 . . . . 29회 일치
|직책 = 前 초대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친인척= 이관준(친조부), [[이시영 (1882년)|이시영]](숙부)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 (이름)|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이인은 [[189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사일동(射一洞)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이관준은 영남의 명망가이자 [[성리학]]자였고, 삼촌 [[이시영 (1882년)|이시영]]은 독립운동가로 순국하였다. 아버지 이종영은 [[대한제국]] 당시 애국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계몽운동가였다.
[[1917년]] 귀국했다가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23년]] 5월 [[경성부]]에서 [[변호사]]·[[변리사]] 개업을 하여 7월 첫 변론으로 [[의열단]]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이후 계속 민족운동사건의 변론을 맡아 [[6·10 만세 운동]]·[[고려혁명당 사건]]·[[의열단]] 사건·[[원산총파업]]·[[통의부사건]]·[[정의부사건]]·[[신간회]]민중대회사건·[[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각종 소작쟁의, 필화(筆禍)·설화(舌禍) 사건과 [[친일파]]나 일본관리의 암살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고, 자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그가 맡은 변호만도 약 1천 5백여건에 달한다.
이후 [[장택상]] 등과 고학생의 상조(相助)기관인 갈돕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는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興農社) 사건을 변호하다 [[재판정|법정]]에서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 혐의로 6개월 동안 [[변호사]] 자격정지 및 정직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5년에는 [[이우식]](李祐植)·[[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ref name="양현혜1">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ref>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양현혜1"/>
[[1945년]] 광복이후 [[백관수]],[[김병로]]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안재홍]]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으나, 건준위원장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창당에 참여, 당무부장이 되었다가 10월 미군의 한반도 주둔 이후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首席大法官) 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군정청 특별범죄심사회 수석대법관이 되면서 그는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8월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법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어 [[반민특위]]법이 제정되었을때, 이인은 다음과 같이 반민법에 반대를 표명했다.
1949년 3월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인 [[장면]]이 주미대사 임명 관계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그는 보궐선거에 출마하였다. 3월의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6월에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49년]] 6월 경찰의 [[반민특위]] 특경대 습격사건 이후 [[7월 7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인은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신변보호를 담당하던 경찰마저도 모두 철수시켜 '더이상 반민족 행위자의 체포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ref>1949년 7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 발췌</ref> 나아가 이인은 반민특위 해체를 주요내용으로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그나마 기소된 [[친일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1963년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5년]] 이인은 [[안재홍]]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서울특별시|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집행, 주관하였다. 당시 [[안재홍]]은 자진월북자라는 오해와 편견으로 금기시되었고, 꺼려했다. 그러나 이인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과 함께 [[안재홍]]의 시신없는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군사정권은 그의 의도가 불순함을 의심하여 내사하였으나 혐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에 선임되었다. [[1974년]]에는 [[국토통일원|통일원]] 고문에 재선임되었다.
*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만 3년간 미결(未決)을 거쳐 2년형에 집행유예 3년으로 출옥
* 대법관 겸 특별범죄수사위원장
* 법무부 장관
*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 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ref name="이영1">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이영훈 지음 | 에디터 | 2006) 61페이지</ref>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ref name="이영1" />
* [[1965년]] [[안재홍]]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서울특별시|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집행, 주관하였다.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이관준(李寬俊, 호는 만당, 성리학자)
*** 손자 : 이관(李灌)
- 진종채 . . . . 29회 일치
|||||||||| [[대한민국 육군]]의 [[제2작전사령관]] ||
1925년 [[경상북도|경북]] [[포항시|포항]]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졸업한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8기로 졸업했다.[* 진종채를 군내 요직에 중용했던 [[박정희]]도 대구사범과 육사를 함께 졸업했다.] [[김종필]], [[김형욱]]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동기다. [[서종철]], [[노재현]], [[윤필용]] 등과 함께 [[전두환]] 등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꼽힌다.[*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에 숙청된 윤필용과 달리 진종채, 서종철, 노재현은 [[10.26 사건]] 때까지 군에 영향력을 행사, 영남 군벌 3인방으로 불렸다.]
[[제8보병사단|8사단장]], [[정보사령부|정보사령관]] 등을 맡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윤필용이 물러나자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하나회를 뿌리뽑으려는 [[강창성]]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육군보안사령관]]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게 육군보안사령부가 [[휘발유]]를 불법으로 판매한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강창성을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됐다.
[[1975년]]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육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77년]] 육군보안사령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런데 [[1977년]] 대대장 월북 사건을 납북이라고 거짓 보고하였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파견된 [[김기춘]] [[검사(법조인)|검사]]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정보처가 폐지되는 등의 국군보안사령부 축소안이 실행되었다. 또한 본인이 권력지향형 인물이 아니어서 보안사 권력 확장에 그닥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대대장 월북 거짓 보고 사건의 여파로 [[1979년]] [[제2작전사령관|제2군사령관]]으로 보직 이동했다. 보안사령관 후임자로 전두환을 적극 추천하였고, 갓 소장에 진급한 전두환이 핵심 요직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이 결정은 나비효과처럼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10.26 사태 후 규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이 됨으로써 전두환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후원자여서 그런지 12.12 군사 반란 이후 세 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고[* 12.12 군사반란 당시 야전군 사령관은 김학원 제1군사령관(중장), 진종채 제2군사령관(대장), [[이건영]] 제3군사령관(중장)이다. 이 중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진종채 제2군사령관을 제외한 제1, 3군사령관은 반란 이후 보직 해임되었다. 그리고 제1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던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이, 제3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핵심 맴버였던 [[유학성]]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임명되었다. ] [[1980년]] [[대장(계급)|대장]]에 진급하였다. 제2군사령관 임기 중이던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의 계엄군의 지휘계통 상에 있었지만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유혈 진압에 있어서 진종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진해화학(1987년 [[한일합섬]]에 인수) 사장을 맡은 것 외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고소되었으나 결국 불기소처분 되었다. 이 때 사위인 조준웅 검사[* 2007년 삼성그룹 특별검사였다.]가 해당 수사팀에 속하였다가 장인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제외되었다.
- 김륵 . . . . 28회 일치
'''김륵'''(金玏, [[1540년]] ~ [[1616년]])은 조선 [[조선 선조|선조]]·[[조선 광해군|광해군]] 때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예안 김씨|예안]],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이다. 시호는 민절(敏節).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안집사와 체찰부사로 민심 수습에 기여하였으며, 진주에서 [[이순신]]을 만난 뒤 그가 백의 종군할 때 구명 운동을 벌였다. 광해군 때는 [[이황]], [[이언적]]의 문묘 종사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추숭을 반대하기도 했다.
[[1540년]] [[경상북도]] [[영천시]] 에서 태어났다. [[조선 세종|세종]] 때의 천문학자 [[문절공 김담]]의 4대손으로, 증조부 김만칭(金萬秤), 조부 김우(金佑)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김우는 사후 [[증직|증]]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생부 김사명(金士明)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수학한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었다.
=== 관직 출사 ===
과거에 급제하고 바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이어 승정원 가주서와 [[예문관]][[검열]]을 지낸 뒤 성균관 전적·[[예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했다.
[[1580년]]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나갔다가 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이조 좌랑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김륵은 내직으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고 사헌부 집의(~[[1591년]] [[음력 6월 23일]]<ref>[[#선조실록 1616|선조실록 1616]]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6023_003 25권, 선조 24년 6월 23일 병진 3번째기사]</ref>)를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 [[승정원]] 우부승지·좌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경상좌도 초유사, 경상우도 [[관찰사]], [[이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선조 27)에는 사헌부 대사헌·이조 참판·홍문관 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1595년(선조 28) 부체찰사(副體察使)에 올라 수원·전주·남원·거창·진주·대구·창녕 등지를 순시하며 군졸들을 위무하고 전황을 살폈다. 이때 [[한산도]]와 [[거제도]]에 파견되어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활약상을 조사, 조정에 보고하고 이들의 전공을 위무하였다. 이후 진주에 가서 이순신을 만나 찾아가 대책과 전략을 상의하고 숨져간 병사들의 위령제를 지냈다.
그 뒤 이순신이 투옥됐을때는 [[유성룡]] 등과 함께 구명운동을 벌였다.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다시 관직에 올라 대사헌으로 시무16조를 올려 민심수습책을 제시한 뒤 1599년(선조 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1600년(선조 33)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영천(영주시)으로 물러난 뒤 김륵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밖에 월천 [[조목]]을 찾았고, 그 뒤 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 등 벗들과 이산서원에 모여 강학에 몰두하였다.
[[1608년]](선조 41)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이후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기축옥사]]에 연루된 [[동인 (정치)|동인]](東人)들이 [[정여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들어, 기축옥사때 희생된 동인들의 억울함을 신원해줄 것을 청하였고, [[이황]]과 [[이언적]]을 비롯한 5현의 [[성균관]]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611년]]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 영주시로 물러났다. [[1612년]](광해군 4) 대북(大北) 세력이 꾸며낸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그가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심문을 받은 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복관되었다.
== 가족 관계 ==
*{{위키인용 |ref="선조실록 1616"| reference ={{서적 인용 |저자=춘추관 관원들 |연도=1616 |제목=[[선조실록]] |ref={{sfnRef|선조실록 1616}} }} }}
[[분류:1540년 태어남]][[분류:161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예안 김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화가]]
- 슈가(방탄소년단) . . . . 28회 일치
||<:><#00CED1>{{{#fff '''학력'''}}} ||<(> 태전초등학교 (졸업)[br]관음중학교 (졸업)[br][[강북고등학교]] (전학) → [[압구정고등학교]] (졸업)[br][[글로벌사이버대학교]] 방송연예학과 (재학) ||
||<:><#00CED1>{{{#fff '''별명'''}}} ||<(> 설탕, 민슈가[* 본명인 민윤기와 예명인 슈가를 합친 것. 자매품으로 '''민슈가천재짱짱맨뿡뿡'''이 있다. ~~feat. 민윤기천재짱짱맨뿡뿡아 울지마라~~], 민피디[* 슈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다.], 슙기력[* 슈가 + 무기력], 민가마니, 슙슙이, 고유슈가, 민빠답, 윤기선배, 양꼬치 듀오[* [[정국(방탄소년단)|정국]]과 함께. 둘이 양꼬치를 자주 먹으러 간다고 한다. 옥수수 국수도.], 사탕[* 중국 팬 한정. [[중국어]]로 "탕탕" 이라고 발음된다. 설탕(슈가) 또는 사탕을 뜻하는 '탕(糖, táng)' 자를 두 번 연이어 쓴 것. 한글로 독음할 경우 '당당(糖糖)'], [[Agust D]][* 솔로 활동명. 2016년 8월 동명의 이름으로 믹스테이프를 공개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Agust D]] 항목 참고.],[br]민슈가천재짱짱맨뿡뿡[* V앱 스타캐스트 참고.], 민윤지[* V앱 달려라 방탄 11화에서 여장을 했다. [[지민(방탄소년단)|지민]]이 같이 [[https://twitter.com/BTS_twt/status/826697453105606656|셀카]]를 찍고 SNS에 민윤지(하트)라고 올렸다.], 슙디[* 꿀FM에서 슈가슈가슙디... 라고 DJ를 맡았었다.], 송월[* 트리비아 항목 참고.], [[메타몽]], 미늉기, 민다가오지마[* [[LOVE YOURSELF 承 'Her']]의 컨셉포토 사진 때문에 생긴 별명.], 슈왜노잘[* [[LOVE YOURSELF 承 `Her`]] 앨범이 발매된 후 김영대 음악평론가가 올린 트윗에서 유래된 말이다. [[https://twitter.com/toojazzy25/status/909994408468029440|슈가 왜 노래 잘하지?]]], 민덩방아[* [[RM]]이 준 의자를 받자마자 엉덩방아를 찧고 아픔을 호소했는데, 이를 [[RM]]이 민덩방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A.R.M.Y|아미들]]은 슈가 놀리려고 실시간 트렌딩에 올려놨다.--] , 민형[* 민윤기 형을 줄인 말. 데뷔 전부터 민형이라 불렸다고 한다.], 각슈가[* 각설탕(...)], 민설탕, 민달팽이[* 초등학교 때 흔하게 민 씨들은 민달팽이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지은 별명이라 한다. [[아는 형님]]에 나왔을 때 한 별명 맞히기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예명인 슈가와 관련된 별명을 내면 빠르게 들킬까 봐 민달팽이를 적어서 낸 것 같다.] ||
직설적인 가사로 인해 심의에 통과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명 '''프로 불통러'''. 특히 [[WINGS]] 앨범에 수록된 슈가의 솔로곡 First Love의 경우 [[방탄소년단]] 멤버의 솔로곡 중 유일하게 심의에 통과하지 못했다. 매 앨범마다 심의에 통과하지 못하는 곡들이 나오는데 팬들의 반응은 '''윤기가 또?''', '''역시...'''가 다반수이다. 심의에 통과하지 못해 걱정하기보단 이젠 즐기는 수준. 본인도 딱히 심의에 관해 별 상관을 안 하고 자유롭게 가사를 쓰는 것 같다. 필요할 때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가사도 잘 쓰는데, 이 역시도 독특한 어투와 어휘 사용, 특유의 날카로운 래핑 등으로 인해 슈가만의 감성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믹스테이프 타이틀 곡 <AGUST D>는 퓨즈TV에서 선정한 '''The 20 Best Mixtapes of 2016'''에 들어갔다. [[http://www.fuse.tv/2016/12/best-mixtapes-of-2016-hip-hop#16|링크]] 참고로 여기서 베스트 20은 [[K-POP]]만이 아니라 자국 내 음악까지 포함한 것이다.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19/2016121900616.html|관련 기사]]
'''2017년 [[멜론 뮤직 어워드]]에서 [[SURAN|수란]]과 함께 "오늘 취하면(Feat. [[창모]])"으로 핫트렌드 상을 수상하였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468&aid=0000327739|관련 기사]]
그리고 멤버들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RM|]]을 '''준이'''라는 [[https://youtu.be/6CHNUAO0eZQ|애칭으로]] [[https://youtu.be/kuxNKfi8_P8|부르거나]], [[정국(방탄소년단)|밥 안 먹는 멤버]]한테 [[https://youtu.be/5M9ruwJIaXs|왜 안 먹냐고 챙겨준다거나(1분 55초부터)]] 등등... 휴대폰에 멤버들을 저장해 놓은 이름도 --예상 외로-- 귀엽다. [[RM|랩몬킴이야]], [[제이홉|호옵]], [[진(방탄소년단)|찐형]] 식이다. 말 그대로 [[갭 모에]]. 툴툴거리면서도 멤버가 해 달라는 걸 다 해주는 모습도 보여준다. [[http://www.vlive.tv/video/5999?channelCode=FE619|14분 16초부터]] --[[츤데레]]--[* 충수염에 걸렸을 때 혼자 병실에서 [[SBS 가요대전]]을 보다가 [[지민(방탄소년단)|지민]]이 넘어진 것을 보고 TV 채널을 바로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무대가 끝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고... --흥! 널 딱히 좋아하는거 아냐!-- --츤츤-- '못 보겠더라고' 라고 말했다. 어투를 보면 놀라고 걱정되는 마음에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 아닌가 싶다.] --[[츤데레]]보단 [[다루데레]]에 가깝다-- 팬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단연 [[제이홉]]에게 치킨을 사다준 사연.[* 제이홉 [[제이홉#s-2|트리비아]] 항목 참고.] 달려라 방탄 ep.9에서 번지점프를 뛰는 [[지민(방탄소년단)|지민]][* 지민은 [[방탄소년단]]에서 겁이 두 번째로 많은 멤버이다. 첫 번째는 --당연히-- 제이홉.]을 보고 "뛰었어? 뛰었네. 아이고" 라고 말하고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한 면모가 많다. 때문에 슈가를 두고 '''무관심 속 유관심'''이라 일컫기도 한다. 제이홉 왈 그룹에서 슈가만큼 멤버들을 신경쓰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한다.
무뚝뚝하고 남에게 관심 없을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뒤에서 챙겨주는 다정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다 자신의 하수로 부릴 것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의외로 집안 막내다운 귀여운 모습을 보인다던가, 무기력하고 세상만사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멤버들끼리의 자체 콘텐츠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예능에서 짓궂은 말이 나오면 능글맞게 상황을 피해가는 등, 오디오 지분률이 가장 높은 멤버이기도 하다. --멤버 피셜 말 많은 할배-- 때문에 팬들에게 슈가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 --굳이 정의하자면 예민하고 나른하며 만사 귀찮아하지만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는 고양이 정도--
평소 '~슙' 이라는 말 습관이 있다. 일종의 의문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공식 트위터 말투뿐만 아니라 팬들이 지어주는 여러 애칭과 자막에 '슙' 자가 종종 들어가는 것이 특징. 이 중 '슙기력'은 '슙'과 '무기력'이 합쳐진 용어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누워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무기력한 모습을 빗댄 말이다. 또한 평소 '씁'에 가까운 정체 모를 언어를 매우 자주 사용한다. 이 역시 의문문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https://youtu.be/JcYjKdZUFJs|여기서 들어볼 수 있다.]]
[[http://btsblog.ibighit.com|블로그]]에 목소리와 손만 나오는 방탄소년단 앨범 리뷰를 올리고 있다. 다만 발매된 지 3개월 정도 뒤에 올라오는데 본인도 뒷북인 걸 알고 자주 민망해한다. [[http://btsblog.ibighit.com/320|화양연화 pt.1 리뷰]], [[http://bangtan.tistory.com/259|DARK&WILD 리뷰]], [[http://bangtan.tistory.com/227|SKOOL LUV AFFAIR 리뷰]], [[http://bangtan.tistory.com/142|2 COOL 4 SKOOL 리뷰]]. 보통 자기 사진만 찾고 앨범 제작과 트랙들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편이다. 또한 리뷰 영상을 찍을 때 펼친 앨범을 거침없이 꾹꾹 눌러 접어버리는 특징이 있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움찔거리는 팬들이 많다고...
2014년 초부터 믹스테이프 작업을 시작했으며[[https://youtu.be/jEBv32qDQ30|#]] 다만 일부 수록곡은 2011년에 미리 작업해 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http://m.star.naver.com/bts/news/end?id=8096001&langCode=ko|관련 인터뷰]]
함께 공개된 뮤직비디오는 총 두 편이며, 10번 트랙 "so far away" 뮤직비디오도 나올 것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으나, 아쉽게도 이는 [[http://blogfiles6.naver.net/20160816_85/dbsrldudwo_14713584110624YQm2_PNG/2016-8-16_23%3B39%3B36.PNG|오보]]에 의한 해프닝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자가 Agust D 뮤직비디오 설명란에 쓰여진 글 "Agust D’s ‘Agust D’, the first mixtape album, featuring ‘Agust D’, ‘give it to me’ and ‘so far away' is out now."를 뮤직비디오를 공개한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so far away" 뮤직비디오에 관한 긴 기다림과 궁금증은 [[http://mblogthumb1.phinf.naver.net/20161017_276/yang020215_1476716271498ISk0H_JPEG/Screenshot_2016-10-17-23-47-53.jpg?type=w2|이 사진]]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을 듯. 믹스테이프에서는 예명으로 SUGA가 아닌 위의 '''Agust D'''를 사용한다.[* Cyper pt.3 Killer에서 슈가 본인이 발음한 것에 기준하여 '어거스트 디' 라고 발음된다. 그러나 사실 영미권에서 이렇게 발음하려면 첫 글자 A 다음에 H를 넣어 묵음 처리를 하거나, 아니면 U를 넣어 (영어로 8월을 뜻하는) 'August' 라고 써야 하기 때문에 믹스테이프 공개 후 해외 유튜버들이 줄줄이 멘붕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결국 슈가의 발음대로 어거스트 디로 통일되는 듯. 하지만 일부 영미권 팬들은 여전히 '에이-거스트 디' 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이것이 '역겨움'을 뜻하는 'Disgust(디스-거스트)'라는 단어를 연상시켜 믹스테이프 분위기에 잘 맞아 떨어진다고 한다.] 타이틀도 동명의 Agust D이며 트랙은 총 10곡. 아이돌인 래퍼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며, 데뷔 이전부터 음악을 시작했던 13살 이후의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비롯하여[* 특히 7번 트랙 <마지막>] 자전적인 이야기를 가사에 담아냈다. 국내 팬들 사이에선 가사가 와닿는다는 반응이, 해외 팬들 사이에선 랩 전달력이 뛰어나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간혹 어거스트 디 믹스테이프을 두고 트랙들이 너무 강-강-강-강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제껏 이런 고민을 그는 몇 년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데뷔한 지 햇수로 4년이 되어서야 그 심정을 난생 처음으로 공개한 것인데 4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 묵혀 놓은 감정을 풀어내기에는 모든 곡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http://idology.kr/8078|관련 칼럼]]
서울에 올라와 생활하기 위해 새벽 알바를 한 것이 언급되는데 이는 후에 설명할 7번 트랙 마지막의 가사와 연관된다.
> '''감정소모하는 게 싫어진 19살 나의 관점에서 봤을 때'''
> '''덕분에 생긴 [[대인기피증]] 인간관계는 빵점'''
마지막이라는 트랙은 언급된 가사만 봐도 알겠지만 믹스테이프 곡들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솔직한 곡으로, 공개 당시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곡이다. 앞서 말했듯이 슈가는 이제껏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질환이나 어깨에 관한 사고를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dream 그대의 자리가 어딜지라도 관대하리'''
* 말할 때 "~도" 라는 부분에서 "~또" 혹은 "~뚜" 라고 발음하는 습관이 있다.[[https://youtu.be/gfomBsQyC9E|#]] 이 습관과 더불어 “~고” 라고 할때 “~구” 라고 발음하는 버릇이 있다. 사투리가 덜 고쳐져서 나는 발음이라고 하는데, 평소 사투리를 사용한 적 없는 슈가에게서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투리의 흔적이다.
* 한때 트위터에 글을 올릴 때 꼭 말머리에 '안녕하세여 슈간데여'를 붙이곤 했었다. 그러나 호르몬 전쟁 활동 이후부터는 잘 붙이지 않게 되었다. 또 트위터를 몇 해 동안 사용하며 점점 말투가 변하고 있는 것도 관전 포인트.[[http://blogfiles.naver.net/20150118_6/rkddlwjd220_1421507233527J9yOc_PNG/%C4%B8%C3%B3.PNG|#]]
* 빅히트 윤석준 이사에 따르면 멤버들과 화양연화라는 단어를 통해서 청춘을 표현하자는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되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게 슈가였다고 한다. "사실 그 나이 때의 슈가를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농구코트에서 홀로 농구공을 던지다 땀에 젖은 채로 앉아 있는 슈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런 얘기를 슈가에게 전달하였더니 슈가도 실제 그런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하더라. 그 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랩으로 만들어주면 그게 곧 청춘 그 자체일 거 같다고 얘기했고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자신감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젊음의 단면을 농구하는 소년을 통해 그려낸 우화라고 받아들여주면 될 거 같다. 내 입장에서 이 곡은 단순히 이번 음반만의 인트로가 아니라 화양연화 2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그려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http://www.mbn.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12&news_seq_no=2331260|인터뷰 전문]]
- 이시영(배우) . . . . 28회 일치
리버풀 팬들에게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방한해 FC 서울과 경기했을 때 이시영이 관중석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플을 가지고 있어서 리버풀 팬들에게 논란이 되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라이벌.] 하지만 꼭 리버풀을 좋아한다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싫어하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박지성이 있었다.
2013년 7월 중순경에는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 이시영편에 출연해 여러 토크를 풀어놓았다. 그중 우결 촬영당시 프라모델에 관한 언급이 있었는데 전부 본인 소장품에 본인 집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라고. 프라모델을 다른 집으로 옮겨 촬영해야 한다는 말에 그냥 자기네 집에서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덕분에 출연료 외에 장소사용료도 쏠쏠하게 받았다고 한다. 이때 성형과 복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주변에서는 성형한 얼굴인데 복싱을 해도 괜찮냐고 많이 물어보지만 정작 본인은 성형한 얼굴로 10년을 살아서 자기가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도 까먹고 살고 있었단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딸이라서인지 복싱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패배했을 때 '이제는 그만 두겠지'하는 마음에 부모님이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2017년 9월 30일 사업가 조승연씨와 결혼했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7/09/29/story_n_18135978.html|관련기사]]
2018년 1월 7일 득남했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671631|관련기사]]
2011년 3월 16일 전북 완주에서 열린 제7회 전국 여자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 -48kg급 준결승에서 양주 백석고의 신소영 선수를 상대로 승리했다.[[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962867|관련기사]] 생활체육을 넘어서서 아마복싱까지 점령중. 이러다 프로 전향할 기세. 그리고, 결국 해당 대회에서 '''우승'''했다.[[http://sports.media.daum.net/general/news/moresports/breaking/view.html?cateid=1076&newsid=20110317111622287|관련기사]] ~~정말로 배우에서 복싱 선수로 전업할 기세.~~ 경기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상대가 가드가 약하다 싶으면 왼쪽 스트레이트, 가드를 단단히 하고 있으면 오른쪽 훅을 사용했다. 판정은 17:0 ~~시작의 일보?~~아닌게 아니라, 이시영의 소속 체육관 관장인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 씨는 잘 키워서 런던 올림픽에 낼 생각이라고 한다.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317n11999|관련기사]] 여기에, 이시영의 소속사인 GnG프로덕션 관계자는 배우에 집중했음 좋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http://sports.media.daum.net/general/news/moresports/breaking/view.html?cateid=1076&newsid=20110317150916632&p=newsen|관련기사]] ~~복싱계와 연예계가 이시영을 두고 소유권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현장!!~~ 다만, 실제 저 경기에 출전했던 아마추어 복싱 선수의 말에 의하면 이시영에게 너무 좋게 판정한, 즉 편파적 전북가 진행됐다고 하는 말도 있기 때문에 복싱 실력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다.
2012년 7월 7일 제42회 서울시장배 아마추어복싱대회 겸 제93회 전국체육대회 서울시 복싱대표 선발전에서 여자부 48kg 급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해당 체급에 출전 선수는 3명뿐이었다는 점에서, 빈약한 여자 복싱의 상황을 엿볼수 있다. 어쨌든, 두명의 선수를 각각 준결승에서 20-0, 결승에서 21-7 이라는 큰 점수 차이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이름 그대로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서울시 복싱대표 선발전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우승시 전국체전에 나갈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어야 하는데, 출전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전국체전에 여자부 48kg 급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회의 51kg 급 우승자와 평가전을 추진하여 전국체전 출전권을 노릴 예정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77618|관련기사]] 전국체전에는 출전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한국체대 소속의 국가대표 선수와 대전할 만한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82&aid=0000053399|관련기사]]
2012년 12월 7~11일 제66회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겸 2013 국가대표 1차선발대회 에 여자부 48kg 급에 출전했다. 같은 체급의 출전 선수는 5명인데, 대진 뽑기운은 정말 없는지 부전승 없이 3전을 치룬다. [* 출전 선수가 5명이므로 3명은 부전승으로 바로 준결승행이지만, 나머지 2명은 한 경기 더 치뤄야 하는데 그 2명중 1명에 걸렸다.] 12월 7일 1차전에서 18-16으로 승리했고, 12월 10일 준결승에서는 7-1로 승리했다. 12월 11일 결승전에서는 박초롱 선수에게 4-10으로 판정패 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공식전 첫패배이며 현재까지 공식전적은 9전 8승 1패. 국가 대표 선발은 1차전 1,2위, 2차전 1,2위가 크로스토너먼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시영은 2위 자격으로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 진출하게 됐다. [[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2/12/11/1007000000AKR20121211108251007.HTML|관련기사]]
2013년 4월 23일부터 시작된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 출전했다. 대전 상대는 2차전 48kg급에서 1위를 한 김다솜 선수. 만약 이 경기에서 승리하면 당당하게 태극 마크를 획득하게 된다.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82&aid=0000101633|관련기사]] 당초 이시영의 무릎 부상으로 인한 훈련량 부족으로 고전이 예상됐다.
2013년 4월 24일 치뤄진 전북에서 이시영은 긴 리치를 이용한 공격이 주효했고, 결국 김다솜 선수를 22-20 판정승으로 이기며 선발전에서 최종 '''우승'''했다. 또한, '''국가대표''' 타이틀도 얻어 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9&aid=0002520374|관련기사]] 여성 배우로써는 첫번째 국가대표 선수 발탁이다.
2013년 10월 21일 51kg 로 체급을 올려서 처음 참가하는 제94회 전국체전 복싱 여자 일반부 플라이급(51㎏) 8강전에서 김하율[* 4월에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맞붙은 김다솜 선수와 같은 사람이며, 김다솜 선수가 개명한 것이다.] (충주시청)에 1대2로 판정패 했다. 3라운드에서 다운을 내주며, 승패가 거의 결판났다.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6&aid=0002409392|관련기사]] 3라운드에 어깨 탈골을 당했으나 스스로 다시 끼고 경기를 진행했다고.
이시영의 스승인 임 모 관장에 의하면 현재 복싱에서 은퇴를 한 상태라고 한다. 다만 선수로선 은퇴하지만, 생활체육인으로서 복싱을 즐기겠다고 한걸 보면 아마 생활체육복싱대회 정도는 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시영 소속사는 "습관성 어깨 탈구로 지난 (2015년) 6월부터 훈련을 중단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고 밝혔다.
== 성관계 동영상 루머 파문 ==
7월 1일 이시영과 소속사는 이는 '''사실무근'''이고 루머로 인해 이시영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최초의 루머 유포자를 처벌해 달라며 형사고발했다. 검찰은 이에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03&aid=0006612507&gid=999339&cid=1004159|관련기사]]
7월 24일 검찰은 전/현직 기자, 국회의원 보좌관, 대기업 직원 등 찌라시 유포자들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벌였다. 최초 유포자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http://news.jtbc.joins.com/html/051/NB10976051.html|관련기사]]
7월 25일 검찰은 동영상을 정밀 감식한 결과 '''동영상의 주인공은 이시영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최초 유포자는 계속 수사 중이며 카톡을 지우는 등 증거 인멸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말했다. [[http://news.jtbc.joins.com/html/605/NB10974605.html|관련기사]]
언론에 공개된 초기 유포자의 정보는 아래와 같다. [[http://tv.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73451|관련기사]]
* 前 기자 신OO(27)씨 : 아래의 신OO 기자에게 이시영 관련 루머를 최초로 전달함 - 불구속 기소
* 모 경제전문지 기자인 신OO(34)씨 : 이시영 관련 루머를 '''찌라시로 작성'''하여 지인(아래 4명)에게 전파함 - 구속 기소 되었으나 구속적부심에 의해 불구속 상태
* 국회의원 보좌관 박OO(36)씨, 언론사 기자 이OO(36)씨, 서OO(30)씨, 박OO(31)씨 - 찌라시의 내용을 SNS 에 최초로 공개함. - 300만원 벌금형으로 약식 기소
- 정승화(육군) . . . . 28회 일치
||<#2e8b57><:> {{{#ffffff '''임관'''}}} ||<#8fbc8f> 육사 5기 ||
|||||||||| [[대한민국 육군]]의 [[제1야전군사령관]] ||
[[대한민국]]의 [[군인]]. [[육군사관학교]] 5기, 최종 계급은 [[대장(계급)|대장]]. [[종교]]는 원래는 [[불교]]였다가 후에 [[천주교]]로 [[개종]]했으며 [[세례명]]은 베드로다.
[[경상북도]] 김천군(현 [[김천시]]) [[봉산면]] 출생이다. 상관을 잘못 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었다.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임관]]한 뒤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하필 강태무/표무원 [[소령]]이 [[월북]]해 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 3사단 백골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보임되어서 참전하였는데 [[군단장]]이 [[유재흥]] 장군이었고 그 전투는 [[현리 전투]]였다. 이 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일도 있었다. 탈출할 때 한 화전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보답으로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5.16 쿠데타]] 때는 방첩대장(현재의 명칭은 [[국군기무사령부|국군기무사령관]])을 역임했다.회고록에 따르면 이후의 원수지간이 되는 노태우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에 있었는데, 방첩대의 특성상 정치 분야에 관여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너무 그 쪽(정치)에 열중하지 마라. 군인이라면 야전에서 일하는게 더욱 군인답지 않겠나'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이 때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들의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였으나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인 [[김재춘]]과 함께 이 사건을 덮기로 하였다. 김재춘은 5.16쿠데타에 가담해서 한때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랐으나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육사 8기생 그룹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서 군부정권 핵심부에서 밀려났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3공화국, 4공화국을 거치면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제7보병사단]][[사단장|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인사국장, [[제3군단]][[군단장|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후에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그가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여하간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한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때 신군부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10.26 사건]] 문서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사건 당일 [[김재규]]는 대통령이 연회가 있으면서도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정 차장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고,[* 다만 뭔가 수상쩍다는 건 느꼈는지 차 안에서 김재규가 "목이 마를 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라." 하면서 준 사탕을 바로 바닥에 버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도 암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대통령이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 변호하였다.
그래서 [[10.26 사건]] 후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혔고, 전두환의 월권행위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다. 모진 [[고문(범죄)|고문]] 후 결국은 석방되었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간 뒤였다. [[장태완]](당시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당시 특전사령관)가 정 총장의 연행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를 하고 신군부를 제압하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들만으로 신군부 세력들을 막을 수 없었고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마저 믿었던 부하들에게 잡히고 만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기소되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에서 대장으로서의 체면을 지키지 않고 온갖 고문을 동반한 수사를 받고, 군사재판의 판결에 의해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불명예 전역]](강제 예편)해야 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최악의 처분이자 수치였으며,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 시 받을 [[화폐|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도 겪었다. 수감기간 중 [[한미연합사|한미연합]][[사령관]] [[존 위컴]] [[장군]]이 [[생일]][[케이크]]와 축하카드를 보내 준 것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정승화는 노태우가 당선되자 조용히 정치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어 전두환 정부에서 강등 조치된 장교들의 계급 환원 처리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육군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된 돈과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는 12.12사태 당시의 피해자로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증언 했다. 1993년에는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육본 헌병감), 하소곤(육본 작전참모부장) 등 12.12 사태 당시 육본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반란 혐의로 고발 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좆논리|모종의 이유를 들어]]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했다. 이것으로 기세등등해진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군본부 측 장군들을 외려 군사반란, [[무고]] 혐의 등으로 역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고 혐의 역시 기각됐다.
[[문화방송]]의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MBC 성우 [[정승현]]씨가, [[SBS]]의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는 MBC 성우 [[최병학]]씨가,[* 이후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12.12 직후 신군부의 지지로 [[국방장관]]이 되어 [[5.17 내란]]에 동조한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주영복]] 역할로 출연했다.]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인환(배우)|박인환]]씨가 정승화 역을 맡았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정종준씨가 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종준은 1995년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승화 체포령을 내린 [[전두환]]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자체가 블랙코미디이다 보니 꽤나 우유부단하고 코믹하게 나오는데 육군본부 앞에서 자신을 못알아보는 초병에게 내가 육군참모총장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씬은 이 영화의 백미. 영화 속 설정상 여자에는 사족을 못 쓰는 것은 덤.
* 10.26 당시 자신을 몰라보는 육군본부의 초병에게 "나 참모총장이야!!" 하니 그 초병이 대답하기를 "뭔 총장?? 대학교 총장 말인가요?"라고 한 일화는 정승화 회고록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대통령 저격이라는 비상사태가 일어났으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궁정동 안가의 연회에 참석할 때 정승화 대장은 군복이 아닌 사복, 즉 [[정장]] 차림이었고, 자신의 관용차가 아닌 [[김재규]]의 차를 타고 온 상황이었다. 육본의 초병도 "한밤중에 갑자기 민간차량을 타고 나타난 사복 차림의 장년 남성"이 설마 육군참모총장이라곤 생각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곧 다른 장교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알아보고 무사통과시켰다고.
* 세간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사건([[12.12 사태]])과 관련지어 정승화 장군을 기억하지만, 원래 군부에서 기억하는 정승화는, 휘하 장병들의 '''사격술 향상에 매우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이 거쳐간 부대는 사격자세라던가, 격발 등 [[사격]] 기본이 탄탄하게 갖춰졌다는 참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후문.
* 가족으로은 아내인 신유경 씨와 3남 1녀가 있다. 자녀 중 셋째인 정이열 씨는 아버지처럼 육군사관학교(육사 38기)를 나와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 및 전역했다.
* 대체역사 판타지 소설인 리턴1212에선 장정화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시작 배경이 12.12사태이기도 하고, 이름도 저작권 및 명예훼손 관련 문제 때문에 변경한 것으로 볼수 있으나, 누가 봐도 정승화 및 그 아들(여기선 아들이 주인공)이다.
- 김홍미 . . . . 27회 일치
김홍미(金弘微, [[1557년]] ~ [[1605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 관료, [[성리학]]자이다. 자(字)는 창원(昌遠)으로, 호는 성극당(省克堂), 성극(省克)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경상북도]] 출신.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바로 대과를 보지 않고,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근무하였으며 형제가 옥당에 근무하여 사대부들의 부러움을 샀다. [[정여립의 난]] 관련자로 누명을 쓰고 [[기축옥사]] 때 불이익을 받았다.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가, 뒤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질 때 [[남인]]이 되었다. 남명 [[조식]](曺植),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며, [[류성룡]]의 조카사위이고 [[류운룡]]의 사위이다.
관례(冠禮)를 치르기 이전에 그는 향시(鄕試)에 응시하였는데, 향시의 응제 "사마온공(司馬溫公) 염중론(念中論)"으로 향시에서 장원하였다. 그 문장이 정미롭고 아름다웠으므로 합격자 발표 후에는 그의 글을 돌려가면서 암송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한다. 남명 [[조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제문을 지었다. 그는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바로 대과를 응시하지 않고 사마시에 응시한다. [[1579년]](선조 12) [[과거 제도|식년진사시]]에 제2등으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 관료 생활과 임진왜란 ===
[[1585년]](선조 19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홍문관]]에 등용 되었으며,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 저작, 부수찬 등을 거쳐 [[예문관]]검열, 다시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형인 김홍민(金弘敏)도 옥당(玉堂)에서 근무하여, 형제가 모두 옥당에 근무한 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후에도 [[1588년]] [[홍문관]]의 관직에 결원이 생기자 [[조선 선조|선조]]는 [[이조]]에 특명을 내려 홍문관의 빈자리에 그를 임명할 것을 지시했다.
[[1589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누군가 그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지목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파면되었다. 이후 [[상주]]에 내려가 몇년 간 집에서 칩거하였다. 그 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에는 그는 [[남인]](南人)이 되었다. [[1589년]]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자 [[사헌부]]가 이를 지적하며 그가 이진길(李震吉)의 집에서 유숙한 일을 들었고,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그해 [[7월]] [[경상좌도]][[도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어머니 창녕조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그러나 상중으로 내려간 뒤에도 선조는 [[정경세]]를 시켜 그와 그의 형의 안부를 묻고, 그의 학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묻기도 했다.
탈상 후 [[1595년]] [[9월]]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교리 겸 [[시강원]]문학(校理兼侍講院文學)을 거쳐 그 다음해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며, [[경연관]]으로 《[[주역]]》의 [[경연]]을 맡아보았다. 그때 마침 [[조선 선조|선조]]가 《주역 (周易)》을 강론하기 앞서 경학(經學)에 정통한 선비를 선발하여 경연의 강관(講官)을 충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그가 경연에서의 강론에 고전의 의리를 인용하여 정밀하게 분석하였으며, 가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예로 들어 10여 줄을 연달아 외웠으므로, 임금이 싫증내지 않고 경청하면서 그가 박식하다고 거듭 칭찬하였다.
이후 [[홍문관]]응교가 되어 진선(進善)과 필선(弼善)을 겸임하였으며, 이후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과 대사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종종 여러 번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으로 거듭 임명되었다.
[[1598년]] [[1월]] 경상좌도 해안가의 전선을 제작하고 격군(格軍)을 충당하는 일과, 황해도 역시 솜씨좋은 목수로 하여금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을 많이 제작하는 등의 일을 신속히 조치하게 할 것을 지시받았다. 다시 돌아온 뒤 1598년 다시 형조참의가 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이르러 조정이 갑자기 변하자 마음이 맞지 않아 병환을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로 [[대사간]], 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599년]](선조 31) 다시 [[청송군|청송]][[부사]](靑松府使)로 부임했다가 [[1601년]](선조 34년) 봄에 병환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상주군|상주]]로 되돌아갔다. [[1602년]](선조 35) [[여주군|여주]][[목사]]가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강릉시|강릉]][[부사]]로 임명되자 와병중인데도 부임하였다. [[1605년]] 강릉부사로 재직 중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수재(水災) 재난을 당하였다. 당시 그는 병이 들었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수재로 재산을 잃거나 굶주린 자의 진휼(賑恤)과 구제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성리학]][[분류:조선의 작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순직한 사람]][[분류:조선 선조]][[분류:임진왜란 관련자]]
- 최광수 (공무원) . . . . 27회 일치
| 직책 = [[대한민국의 국방부 차관|대한민국 제16대 국방부 차관]]
| 경력 = 국방부 차관 <br/> 대통령 비서실 실장 <br/> 체신부 장관 <br/> 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사 <br/> 외무부 장관 <br/>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최광수'''(崔侊洙, [[1935년]] [[2월 24일]] ~ )는 [[대한민국]] 제21대 외무부 장관이다.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1956년]] [[2월]]을 기하여 외무부에 입부되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서울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의 [[외교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주미 3등서기관, 주일 2등서기관, 동북아주과장, 주미 참사관, 통상진흥관, 아주국장, 국방부 차관, 대통령비서실장, 제1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주유엔 대사, 외무부장관, [[하버드 대학]] 아시아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1992년]]-[[1993년]])을 역임하였다.
|직책 = [[대한민국의 국방부 차관|국방부 차관]]
|후임자 = [[정종택]]<br/>(정무제1장관)
|직책 = [[대한민국 제1무임소장관실|제1무임소 장관]]
|직책 = [[대한민국 체신부|체신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장관]]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서울창신초등학교 동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조지타운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전주 최씨]]
- 경관 . . . . 26회 일치
진서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공손연]]을 물리치고 경관을 만들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때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명을 [[학살]]하여 경관에 묻었다고 한다.
삼국지 등애전에 [[등애]]가 촉한을 평정하고, [[면죽]]에 가서, 대(臺)를 쌓고 경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면죽에서 [[제갈첨]]이 크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촉한 병사의 시체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특이한 점은 등애는 촉한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사졸(士卒) 가운데 죽은 자들 역시 경관에 함께 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군 전사자를 이런 식으로 경관에 함께 묻는 것은 이례적이다. 등애가 왜 위나라 사졸의 시체들까지 함께 경관에 묻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설이 있다.
적과 아군의 시체를 함께 매장해서 통일성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가설이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일종의 현대적인 '전사자 묘지'로서 삼았다는 것이다. 비교적 현대적 관점의 해설이다. 하지만 일단 경관이 되는 것 자체가 [[유교]]에서 중시하는 정식 매장 절차와는 거리가 멀고, 경관은 잔혹한 행위로 보아 부정적으로 여겨진 바가 이미 춘추좌씨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경관을 쌓은 목적이 전공을 자랑하려 했음으로 나오며, 게다가 면죽에 경관을 쌓은 기사 다음에 이어서, 등애는 자만하여 촉의 사대부들에게 말했다(艾深自矜伐,謂蜀士大夫曰)는 문장이 이어진다. 여기서 오한(吳漢)[* 후한 초 광무제 휘하의 장군. 촉에서 황제를 자칭하던 [[공손술]]을 물리치고, 성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을 언급하며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는 발언을 하고 자만하여 사대부들이 비웃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앞 뒤의 기사가 호응하여 이어진다면, "위군의 시신까지 한꺼번에 경관에 묻어버렸다."는 사실은 등애가 더욱 큰 경관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을 과도하게 부풀리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열전의 문학성에 비추어보면, 등애의 자만을 보여 주는 일화로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서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공손연]]을 물리치고 경관을 만들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때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명을 [[학살]]하여 경관에 묻었다고 한다.
삼국지 등애전에 [[등애]]가 촉한을 평정하고, [[면죽]]에 가서, 대(臺)를 쌓고 경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면죽에서 [[제갈첨]]이 크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촉한 병사의 시체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특이한 점은 등애는 촉한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사졸(士卒) 가운데 죽은 자들 역시 경관에 함께 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군 전사자를 이런 식으로 경관에 함께 묻는 것은 이례적이다. 등애가 왜 위나라 사졸의 시체들까지 함께 경관에 묻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설이 있다.
적과 아군의 시체를 함께 매장해서 통일성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가설이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일종의 현대적인 '전사자 묘지'로서 삼았다는 것이다. 비교적 현대적 관점의 해설이다. 하지만 일단 경관이 되는 것 자체가 [[유교]]에서 중시하는 정식 매장 절차와는 거리가 멀고, 경관은 잔혹한 행위로 보아 부정적으로 여겨진 바가 이미 춘추좌씨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경관을 쌓은 목적이 전공을 자랑하려 했음(用彰戰功)으로 나오며, 게다가 면죽에 경관을 쌓은 기사 다음에 이어서, 등애는 자만하여 촉의 사대부들에게 말했다(艾深自矜伐,謂蜀士大夫曰)는 문장이 이어진다. 여기서 오한(吳漢)[* 후한 초 광무제 휘하의 장군. 촉에서 황제를 자칭하던 [[공손술]]을 물리치고, 성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을 언급하며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는 발언을 하고 자만하여 사대부들이 비웃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앞 뒤의 기사가 호응하여 이어진다면, "위군의 시신까지 한꺼번에 경관에 묻어버렸다."는 사실은 등애가 더욱 큰 경관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을 과도하게 부풀리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열전의 문학성에 비추어보면, 등애의 자만을 보여 주는 일화로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백승주(정치인) . . . . 26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20대 국회의원[br]국방부 차관[br]자유한국당 경북도당 위원장[br]한국정치학회 부회장[br]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br]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관료, 정치인.
제40대 [[국방차관]]을 역임했으며, 제2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1년]] [[3월 20일]]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 장천면에서 태어났다. 구미 오로초, 대구 성광중, 대구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경북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정치학회와 [[한국국방연구원]]에서 근무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국방연구원 산하의 [[북한]]연구실장과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을 지냈다. [[2013년]] [[3월]]에 국방차관으로 선임되었다. 보통 국방차관은 예비역 [[중장]]이나 드물게 재정 전문가가 보임되는데 비해서 순수하게 안보 연구(북한군사 전문)를 해온 [[민간인]]이 선임된 사례는 처음이라 주목을 받았다.역대 최연소 차관이며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거의 독점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몇 안 되는 민간인[* 여기서 민간인은 비장성 출신.] 출신이다. 참고로 병역은 [[중위]]로 마쳤다.[* 아무래도 보직이 보직이다 보니 예비역 병장을 그 자리에 앉히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직업군인 출신이라는 점이 파격적이다.]
[[카운터파트]]가 누구인지로 국방 차관의 위상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미국]]에 방문했을 때는 국방부장관[* United States Deputy Secretary of Defense. 국방부 장관이 아니라 국방 부장관이다.]인 [[로버트 워크]]와 군수차관[* Under Secretary of Defense for Acquisition, Technology and Logistics. 언론에서는 획득차관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인 [[프랭크 켄달]]을 만났다. 일본 [[방위성]]과 만날 때는 [[카운터파트]]로 사무차관[* [[의원내각제]]라 국회의원이 임명되는 방위대신, 방위부대신, 대신정무관과 달리 방위성 [[내부승진]].] [[니시 마사노리]]를 만난다.
2016년 7월 26일 [[THAAD|사드]]관련 성주 지역주민과의 간담회에서 성주 사드 배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발언하였고, 이에 대해 한 [[성주군]]민이" (백 의원 지역구인) [[구미시]]에 사드를 배치해도 그렇게 말하겠느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하였다. --이분이 연구원으로 일하신 분야가 국방이다.--
[[최순실 청문회]]의 새로운 X맨으로 등극 중이다.[*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의 우병우 증인 등 변호하는 듯한 답변 유도와 태블릿PC에 집중하고 야당 의원에게 고함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 백미는 왜 최순실의 PC를 조사했냐는 것. 그리고 [[노승일]]이 멋대로 문서를 복사해 갔다고 범죄행위로 몰았다. --노승일은 쿨하게 처벌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노승일에게 무슨 의도로 문서를 복사했냐는 등 어떻게든 물타기를 시도했다가 의도와 정 반대로 답변이 나와서 모두 실패했다. 박근혜와 친족관계임이 밝혀지면서 '친박 이완용을 넘어서는 친족 백승주가 왔다' 는 평이 나왔다.
1.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0804&yy=2016|불법이지만 단 1달러도 줄 수 없다!]] 국방부 차관 재직당시인 2012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우리나라 국방부와 합참, 육·해·공군이 MS 소프트웨어를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사용료 지급을 요구했다. 윈도 서버 접근 권한인 '사용자 서버 접속 허가'(CAL·Client Access License) 구매 숫자를 훨씬 초과해 윈도 서버에 접속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MS사는 피해 액수가 무려 연 2011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으나, 백승주는 '''라이센스 등록 안하고 접속하는 곳 만큼 등록해놓고 접속 안 하는 곳도 많다! 라이센스 관리를 미숙하게해서 그렇지 플러스 마이너스 따져보면 우린 정당하게(?) 돈 내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 1달러도 못 준다! => 우리가 자체 조사해보니 불법 사용자도 없더라![* 말이 자체 조사지, 군부대와 군시설에 공문 보내서 혹시 불법으로 쓰는 곳 있으면 자백해라 정도 였을 것이다.] => 못 믿겠으면 니네가 니네 비용으로 전수조사해서 증명해라! => 대신 군사기밀을 건드려서는 안되고 당연히 우리는 조사에 협조도 못해준다!!!'''라는 식의 --어거지--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2. 한국국방연구원 소속 연구자인 동시에 국방부 차관을 엮임하였기에 차관 임기를 마친 후에는 곧바로 조기퇴직과 함께 국회의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주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전(前) 국방부 차관은 예비역 중장에 준하는 대우를 해줘야하는데, 한국국방연구원장도 예비역 중장이기에 모양새가 이상해져서 그냥 국회의원을 하기로 했다고...--한 하늘에 두 개의 4스타는 있을 수 없다!--
4. 국방연구원 출신이 사석에서 밝힌 카더라에 따르면, 백승주가 처음 국방연구원에 입사했을 당시 관상을 좀 본다던 임원급 연구원이 백승주를 보고는 '상당한 또라이상'이라 평하며 '옳은 길로 걷거든 최소 국회의원, 잘하면 차관은 찍고 내려올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정작 현지의 표심이 마냥 우호적이지만은 않다고 한다. 백승주가 국방차관 재직 시절에 구미가 국방신뢰성센터 유치에 나섰지만, 결국 대전에 패배하면서 "고향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것.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4702&yy=2015|대구 매일신문의 사설 참고]]
- 최재웅 (배우) . . . . 26회 일치
|DCF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DCF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대학로 유니플렉스2관
|우송예술회관, 대전
|성주문화예술회관, 성주
|DCF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DCF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유니플렉스 2관
|아트원씨어터 1관
|금정문화회관 대공연장, 부산
|엣지스<ref>[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5179 '쿨한 배우' 최재웅 "고민상담 해요" -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 '엣지스' 주인공 맡아]</ref><ref>[http://eto.co.kr/news/view.asp?Code=20101215101601200 배우는 '수다' 떨듯 연기... 관객은 '개콘' 보듯 폭소]</ref>
|대학로 티오엠 2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로맨스 로맨스<ref>[http://news.donga.com/3/all/20100216/26195964/1 로맨스냐 불륜이냐... 뻔한 질문 펀한 해답]</ref><ref>[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skye&artSeqNo=2159779 관객에게 풍성한 배우, 뮤지컬 <로맨스 로맨스>의 최재웅]</ref>
|대학로 티오엠 1관
|대학로 티오엠 2관
|동양예술극장 2관
|예술마당 1관
- 최홍만 . . . . 26회 일치
[[한국]]의 前 [[씨름]] 선수이자 [[킥복싱|킥복서]], [[종합격투기 관련 인물]].
[[2002년]], [[부산]] [[동아대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에 [[LG투자증권 황소]] 씨름단에 입단하여 프로씨름에 입문함으로써 데뷔했다.[* [[나무위키]]에서는 [[격투기]]에 비해 씨름에 대한 관심이 훨씬 적으니, 씨름선수 시절의 상세한 전적은 [[추가 바람]].]
하여간 그 특유의 상품성 덕택에 프로씨름 데뷔조차 하지 않았던 [[대학교]] 시절부터 [[텔레비전]] 등에 나오며 엔터테이너성을 쌓았다. 218㎝에 165㎏이라는 엄청난 체구에 [[파란색]], [[노란색]]으로 눈에 띄게 [[머리]]를 [[염색]]하여 처음 본 사람도 인상에 남는 외모였고, 씨름에서 이기고 나면 세레모니로 춤을 춰서 '''테크노 골리앗'''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좀 더 먼저 활동한 [[김영현]]이 이미 [[골리앗]]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영현과 비슷한 체격이면서 구분하기 위해 앞에 '테크노'를 붙인 것이다. 일반인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가던 씨름에 대한 관심을 간간히 지켜가는 역할을 해냈다. 처음 시작이 이런 것을 보면 본래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같은 해 6월 히로시마에서 프로레슬러 '그린베레' 톰 하워드를 1라운드만에 [[KO]]시키면서 '살인 니킥'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최홍만의 니킥을 맞은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또한 7월 하와이 대회에서 아케보노와 2차전을 가져 1라운드에 다운만 2번 뺏어내며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경기 후 관중석에 앉아있던 [[마이크 타이슨]]을 도발을 한 것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타이슨:내가 15년만 젊었어도...-- ~~사실 붙었어도 타이슨이 이겼을거다~~
결국 최홍만은 이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입어 한동안 불참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최홍만 항목에서는 '''로우킥 부상 부위에 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는 반달이 있기도 했다(...). 사실 경기 내용으로는 완벽히 말렸지만 피지컬 자체는 본야스키를 훨씬 능가하는 괴물이었기에 시합 도중에 본야스키의 로우킥을 맞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께를 들썩이기도 하고, 경기가 끝난 뒤 "본야스키의 로우킥에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인터뷰 이후 다리를 절뚝이며 퇴장해서 허세라는 지적도 있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악수 거부 논란에 대해 최홍만은 "너무 아쉬워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로우킥 관련해선 경기를 치를 당시 이미 왼쪽 허벅지가 부상당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38&aid=0000307310|#]] 사실 이때 최홍만이 판정에 불만을 표한 것도 좀 에러였던 게, 워낙 상대 선수보다 훨씬 크고 강하니 버텨낸 거지 유효타를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허용한 반면 본야스키는 최홍만의 타격을 대부분 막아냈다.(물론 워낙 타격이 세서 막아도 대미지가 들어갔지만) 애초에 이건 그냥 싸움이 아니라 (KO가 안 나온다면) 기술적으로 점수를 따내서 비교하는 격투기이기 때문에 확실한 본야스키의 승리가 맞다.
이후 2006년 2월 '프레데터' 실베스터 터카이를 상대로 두 차례 다운을 뺏고 피 튀기는 난타전과 체력 고갈로 고전한 끝에 판정승을 거뒀다.[* 당시 별 거 아닌 프로레슬러에게 고전했다고 까는 여론이 있었으나, 애초에 터카이는 '''5일 준비하고''' [[레미 본야스키]]를 고전 시키며 판정에서 한 라운드를 가져올 정도의 포텐셜이 어느 정도 있는 파이터였던데다 경기 전 발목 부상이 있었다는 게 알려지며 까이는 게 많이 줄었다.] 2006년 6월 서울에서는 슈퍼 파이트 초청 선수로 참가, K-1 2005 월드 그랑프리 챔피언인 세미 슐트에게 판정승을 거두는 이변을 일으켰다. 우주괴수 슐트의 무난한 KO승이 예상되었으나 최홍만이 예상 외로 선전을 보이며[* 세미 슐트는 실력이 분명 뛰어나지만 어디 가서도 안 꿀릴 무지막지한 피지컬도 겸비한 만능형 선수인데, 최홍만은 세미 슐트의 피지컬을 더욱 능가하는 세상에 얼마 없는 인간 중 한 명이므로 슐트가 여지껏 상대해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유형의 상대라 파이팅이 좀 꼬인 부분이 있다.] 슐트가 등을 돌리는 장면까지 나오게 만들며 선전했다. 다만 판정에 대해서는 논란이 크게 일었다. 유효타와 전박적인 경기 운영에 앞서나가던 슐트가 잦은 클린치로 인해 감점을 받았기 때문에 연장이 예상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슐트의 세컨은 거세게 항의했고[* 루머로는 세컨 중 한명이 저지들의 스코어 보드를 뺏어서 보려고 했다고도 한다.] 승자인 최홍만과 한국 관중들조차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최홍만의 승리에 환호가 나오다가 경기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흥행 안되는 절대 강자'''였던 슐트의 상승세를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K-1측의 견제였다는 의견이 대세이다. 최홍만 역시 경기 후 인터뷰에서 무승부가 가장 적절한 판정이었을거라며 자신의 판정승에 홈 어드밴티지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여론은 2007년 12월 8일 월드 그랑프리에서 벤너에게 또 다시 패하면서 가속화된다. 그 와중에 연예계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까이기도 했다. 12월 30일 야렌노카에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상대로 보여준 선전[* 전직 씨름선수답게 표도르를 테이크다운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후 파운딩을 엄청나게 날렸다. 정타는 없었지만. 파운딩을 열심히 날리다가 암바로 패.]으로 잠시 가라앉았으나 2008년 9월 바다 하리전과 2008년 12월 레이 세포전을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특히 2008 월드 그랑프리에서는 하락세가 뚜렷한 세포를 상대로 졸전을 벌인 끝에 스피드에서 농락당하며 세포의 [[굴욕기]]인 노가드[* 세포가 한창 전성기였을 무렵 사용하던 전술로, 당시에는 기량의 하락으로 거의 봉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홍만에게 다시 썼다'''.]에 관광당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냈다.
결과는 1라운드 1분 36초만에 [[http://sports.hankooki.com/lpage/moresports/201604/sp20160416221832136560.htm|TKO로 최홍만이 승리.]] 예상대로 저돌적으로 나오는 아오르꺼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밀려다니다가 결국 케이지를 등진 상태에서 펀치 러시를 이리저리 막아내는 상황이었는데, 이 와중에 뻗은 레프트 스트레이트가 아오르꺼러의 턱에 카운터로 들어갔고, 아오르꺼러가 그대로 실신하며 최홍만에게 안기듯이 바닥에 넘어졌다. 그리고 파운딩--이라 쓰고 젖치기라 부른다--로 마무리.[[https://m.youtube.com/watch?v=aA08N65pMks|영상]].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고 카메라도 아오르꺼러의 뒤통수쪽만 찍고 있었기 때문에 대충 보면 아오르꺼러가 열심히 밀어붙이다 제풀에 지쳐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당시 캐스터와 해설도 무엇 때문에 아오르꺼러가 쓰러졌는지 파악하지 못했고 경기를 지켜보던 각종 격투 커뮤니티에서도 왜 쓰러졌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상황이였다. 리플레이를 보고서야 다들 레프트가 맞았다는걸 알아차렸을 정도.][* 당시 나오던 드립들이 아주 가관이다. 돌연사(...), 밖에서 누가 사냥총으로 저격했다(...), 고혈압이 왔다(...), 아니다 당뇨다(...)], 다른 각도에서 찍은 느린 화면을 자세히 보면 아오르꺼러의 턱이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게 확실히 보인다. 경기 내내 밀리다 펀치 한 방에 끝낸 셈이므로 중계진은 연신 최홍만의 펀치력이 살아났다고 칭찬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그저 역대급 운이었거나 아오르꺼러의 맷집이 상상 이상으로 약한 게 아니냐는 쪽이 많았다. 운이 좋았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였지만 종양 수술 이후 근육이 빠져 멀대같은 허수아비 취급당하던 최홍만이라도 그 크기에서 나오는 한방 펀치만큼은 살아있었던 셈. 물론 레프트가 터지기 전까지 일방적으로 밀렸던 것이나 복싱 스킬이 부족한 점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점이다.~~어쨌거나 버릇은 고쳐줬다.~~
그리고 2016년 9월 2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샤오미 로드FC 033 무제한급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과거에 맞붙었던 코리안 킬러 [[마이티 모]]와 다시 겨루게 된다. 전성기 때 몸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도 마이티 모에게 KO패를 당한 전적이 있고, 승리를 한번 하긴 했지만 석연찮은 판정승이었기에 종양 수술 이후 근육이 다 빠져버린 최홍만이 아무리 나이가 불혹이지만 베테랑 헤비급인 [[최무배]], [[명현만]]마저 잡아낸 마이티 모의 펀치를 버텨내기 힘들거란 관측이 많다.
근육이 빠진 상태에서 이전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눈에 보일 만큼 벌크업에 성공했으나[* 특히 팔 근육은 아오르꺼러 전에 비하면 확실히 근육이 드러날 만큼 불어있었다.] 맞추질 못했으니... 이 날 마이티 모는 챔피언이 됐음에도 환호성은커녕, 박수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젠 관중들도 별 기대를 안했다는 뜻이다.[* 인터뷰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는지에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도 이 모양이기에 실망의 부분도 있고.]
이후, 자신을 이긴 저우진펑을 위대하다 찬양했다. [[http://sports.mk.co.kr/view.php?year=2016&no=776273|관련기사]] 실제로 기네스북에 등록될 기록이니, 진짜 실력으로 이긴 것이라면 위대한 것이 맞다. 농담이 아니라 이제 까놓고 최홍만이 격투가로서 제대로 된 복귀할 생각이 있다면 저우진펑이 킥복싱 계의 매니 파퀴아오같은 인물이 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쿤룬 파이트에선 네임드 선수니 가능성 있다 기도해라 홍만아.--
11월 10일, 경기 도중 이롱이 스피닝 킥을 차다가 로블로를 맞은 듯 했고, 최홍만이 속행 불가 의사를 밝히자 이롱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에 국내의 팬들은 마스파이트가 대놓고 편파를 한다고 비난했으나, 슬로우모션 캡쳐 결과 타격 위치가 치골이었고 이에 [[심건오|건오]]했다는 비아낭을 받았다. 게다가 경기 내내 최홍만은 유효타 제로에 저우진펑전 때처럼 이롱에게 일방적으로 로킥과 안면 펀치를 허용하며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함 그 자체. 이제는 예전과 다르게 욕이나 악플조차 달리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 자체에서 멀어진 듯 하다.
격투기 선수로서는 엄청난 무기라고 볼 수 있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긴 리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리치를 거의 이용하지 못하는데, 이는 위에 서술된 스피드의 문제도 있지만 최홍만 본인의 격투 스타일이 그다지 리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도 있다. 격투기 데뷔 시절부터 최홍만은 [[아웃복서|거리를 유지하며 대미지를 누적시키는 스타일]]보다는 [[인파이터|적극적으로 들어가서 큰 스윙을 날리는 스타일]]을 썼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본인의 리치를 제대로 이용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물론 격투기 선수마다 자신에게 맞는 격투 스타일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의 리치가 상대보다 길면 인파이팅보다는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것이 본인에게 더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상대는 때릴 수 없는데 자신만 때릴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은 격투기 선수로선 매우 큰 무기나 다름없다.] 전성기 시절에는 맷집이라도 강해서 얼굴 몇 대 맞아도 그냥 씹고 달려드는 게 가능했지만, 안면 타격 공포증 증세를 보이고 있는 지금은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관중 및 시청자들이 볼 때 최홍만의 문제는 안면 타격을 받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저돌적인 모습도 제대로 안 보여주고 있고, 거기에 반격을 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도 있기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도 제대로 안 보여주고 있는, 말 그대로 이도 저도 아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엔젤스파이팅에서 적극적으로 펀치를 뻗으며 러쉬를 하든 등 전성기시절의 모습을 어느정도 보여줬다.]
데뷔 초부터 최홍만은 예능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래서 한국과 일본에서 방송 출연이 잦은 것이 격투기 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한때는 음반까지 낸다고 해서 가수라고 까이기도 했다. [[디시인사이드]]의 [[격투 갤러리]]에선 그를 凶物([[흉물]])이라고 부른다(…)~~그 동네는 원래 그렇다~~
2006년 경부터 연예계로 외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격투기 성적이 시원찮게 되면서 까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6년부터는 등장할 때 자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들어오는 둥 "경기에 관심이 있기는 한 건가." 하면서 까였다. 결국 마이티 모에게 KO당하고 나서야 모든 연예계 활동을 중단했다. '''한국에서만.'''
2009년 격투기 활동을 잠시 중단한 후 부터는 일본의 쇼프로, 영화 등에서 자주 출연하고 있다. 주로 거구를 살린 악역 겸 개그 캐릭터 역을 맡는데, 외모가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자이언트 바바와 닮은 점도 화제꺼리가 되는 등 나름대로 인기가 있다. 본인도 예능 생활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모양. 소질도 이쪽 분야에 더 있는 듯 하다. 심지어 2010년에는 [[포켓몬스터]] 관련 TV프로인 [[포켓몬 스매시]]에도 출연한다(...). 일본어도 [[나름]]대로 잘하게 된 모양.[* 일본어는 2006년경부터 잘 하기는 했다.] 시무라켄의 바카도노에도 특별 게스트로 나온 적 있고, 여러 모로 일본 연예인 다 됐다. [[사사키 노조미(모델)|사사키 노조미]]와 사귀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 정치 관련 ==
일부에서는 [[거인증]]이 맞다면 지금까지의 최홍만은 '성장 호르몬 과잉분비'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도핑]]'''을 하고 있었던 것과 다름 없으며,[* 실제로 성장 호르몬은 운동선수들이 도핑을 위해 사용하는 호르몬이다.] 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괴력을 잃게 되었고 이후의 부진은 그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술과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 변화인지는 의사의 진단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수술을 전후하여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차이가 보일 정도로 근육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물론 뇌수술과 같은 큰 수술을 받았다면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신체적으로 부담이 많이 걸릴 것이다.
참고로 1999년도에 이미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는데[* 키가 너무 큰 게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2미터를 훌쩍 넘는 키이므로 규정상 당연하다. 1990년대 중반까지였다면 5급이 나왔겠지만 [[이회창|이 분]]의 아들 덕분(?)에 병역 판정 기준이 강화되면서......] 이 [[뇌하수체 종양]]으로 수술 후 아예 면제를 받았다. 여기서도 문제가 되었던 게 그가 면제가 된 시점이 공익근무요원으로 훈련소 입대를 이미 통지받고 나서 언론 주목까지 받은 뒤였다는 것이다. 사실 그냥 그 전에 수술하고 면제가 되었다면 그렇게 주목을 받지 않았을 텐데 입대가 결정되면서 그에게 맞는 특별 훈련복 제작이라던가 하는 여러 이슈들이 나오고, 최홍만 입대 후 생길 수 있는 문제[* 생활관 침상이 안 맞을 것이다. 화장실이 좁아서 볼일을 어떻게 볼 것이냐 등등]들에 대해서도 연예 정보프로그램 등에 얘기가 나오면서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최홍만 측도 이런 관심들에 "재밌고 색다른 경험을 하게 돼 기대된다. 누구나 하는 일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군대 생활을 하고 나오겠다. 오히려 같이 생활할 훈련소 동료들에게 미안하다." 등 반응을 보이고 입대 일에도 연예정보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하면서 입대를 하는데, 알고보니 이미 [[뇌하수체 종양]]에 대한 의사 진단서를 가지고 들어가서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던 상태였고 입소 후 사흘만에 그 진단서로 귀가 조치를 받고 귀가하여 한달 뒤 최종 재검으로 면제까지 받게 된다. 차라리 처음부터 훈련소 입소 같은 이슈를 만들지 말고 본인이 먼저 재검 신청을 했으면 훈련소 같은 곳 갈 일 없이 면제를 받을 수 있던 부분인데 관심을 끌고, 훈련소 생활을 할 마음 없이 자신이 가져온 진단서로 귀가 조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입대할 것처럼 언론에 말한 부분에 대해 비난이 있었다.[* 실제로 나중에 재검에서 면제가 되건 다른 등급이 나오건, 귀가 자체는 이런 신경과 관련 진단서가 있으면 어렵지 않고 그 정도는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그의 훈련소 생활에 대해 상상하면서 응원하던 대중들이나 그의 입대를 위해 특별하게 준비하던 훈련소 관계자들은 그가 2박 3일만에 금방 귀가하여 면제 판정 받은 일로 인해 바보가 된 것과 다름없었다.] 아마 본인도 최대한 [[뇌하수체 종양]]으로 수술을 하거나 이슈가 되고 싶지 않아서 버티다가 군입대 및 면제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이슈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적어도 입소 전에 재검 신청으로 해결했다거나 훈련소를 가게 되더라도 진단서도 가져가면서 훈련소 생활을 할 것처럼 인터뷰하지 않고 귀가했다면 별다른 부정적인 반응은 없었을 것이라 아쉽다.
이후 [[뇌하수체 종양]] 제거 수술 이후로 경기 실적이 크게 떨어지는 데다 자기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도요타와의 경기에서 펀치로 넉아웃 당할 때도 격려보다는 악플이 훨씬 많았다. 외관상 경기 기량 자체는 [[뇌하수체 종양]]제거수술로 인한 건강 악화나 신체 능력 하락이 더 커 보이지만, 방송과 예능에 치중한 행보 탓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인지 악플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누구든 유명해지면 땀흘리기보다는 얼굴만으로 돈을 벌려는 보통의 본성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지도.
- 김재박 . . . . 25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대구광역시/인물)]
~~[include(틀:관련 문서2, top1=물리학자, top2=임하룡)]~~
|| '''KBO''' || KBO 경기감독관 (2010~2016) ||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및 前 감독이자 前 [[KBO]]의 경기감독관. 2015년부터 새로운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의 코치도 겸임하고 있다.
== [[KBO]] 경기 감독관 ==
감독 임기를 끝내고, 바로 다음 시즌인 2010 시즌부터 [[KBO]]의 경기감독관 자리에 앉았는데 팬들에게 영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우천취소]] 결정에 있어서 욕을 많이 먹고 있는데 ~~본인이 꼴리면~~ 비가 안 와도 때려버리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해대고 있기 때문에 반발이 심하다. 오죽하면 [[고척 스카이돔]]에서 경기 열어도 관중 오기 불편하단 핑계를 대고 우천취소 때려버릴 양반이라는 말이 나올까.
2016년 4월 4일, KBO사무국이 김재박 감독관에게 6경기 출장 정지를 내렸지만, 야구팬들은 솜방망이 처벌~~도 아니고 일주일 휴가~~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이전에 [[최동원]] 감독관이 비슷한 사유로 똑같은 징계를 받은 만큼, 이번에는 최소 20~30경기 출장 정지는 받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이후 동년 4월 16일 전국에 비가 내리자 광주구장에서 열리기로 한 ~~비오는 날 돔구장 놔두고 원정경기하는 팔자인~~넥센-기아 경기를 제외하고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30분-1시간정도 후 우천취소 결정이 내려졌다. 김재박 경기감독관도 이날 삼성-두산전에 배정되었다가 45분 기다려 보고 우천취소를 선언했다. 솜방망이 처벌 문제는 둘째치고, 어느정도 경각심을 가지게 된 효과는 분명히 존재하는 듯 하다.
하도 여론이 안좋아서 김재박이 술을 즐겨 술자리에 참석하기 위헤 우천취소를 시켰다거나, 강제우취시키고 관계자들과 회식했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야알못이 간다에서 자신은 술을 못하고 술자리 회식 루머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런 논란 때문인지 2016시즌을 끝으로 경기감독관 직에서 물러났다.
* LG감독 첫 해인 2007년 4월 22일 삼성전 2-3으로 뒤진 연장 12회말 2사 1루에서 [[이대형]]의 2루땅볼이 1루심의 오심으로 아웃 판정을 받자 엄청나게 분노해서 어필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며칠 내내 그 상황을 가지고 불만을 표출하다가 심지어는 '''"설사 볼과 주자가 동시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때로는 관중의 재미를 위해 세이프를 선언할 필요도 있지 않냐"'''[* 사실 한미일 통틀어 볼과 주자가 동시에 들어오면 [[http://news.donga.com/Sports/3/05/20150707/72336135/1|규정상 세이프]]다. 김재박 외에도 이 규정을 모르는 관계자 및 팬이 많은 편.]는 발언으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LG가 이기고 있고 삼성이 오심으로 져도 관중의 재미를 위해 세이프를 선언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가 나올지 궁금하다 이 양반아.~~ 심판 판정은 모든 팀에게 공정해야 적용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오심도 불사하라는, 야구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망언이다.
* 선수 시절인 1986년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시상자인 여배우 [[이보희(배우)|이보희]]가 유격수 수상자인 김재박의 이름을 김재'''전'''이리고 부른 해프닝이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JTP7yPasIpg|해당 동영상]]). 博을 傳으로 읽어버린 건데, 이 사건 이후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이던 이보희는 [[두뇌풀가동|무식하다는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한자는 잘못 읽을 수도 있다. 문제는 김재박 선수가 너무나, 너무나 유명한 선수였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관심이 적은 스포츠 분야라고 하나, 시사 상식에 어두운 것, 게다가 자기가 나가는 행사에서 수상자 이름까지 몰랐다는 건 욕 먹을 만한 일이다. 나중에 선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도록 바뀐 뒤에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 2011년에는 뜬금없이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이라는 [[저축은행]]의 대부 광고 CF를 찍었다. 이게 또 주로 야구 중계방송 때 나왔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baseball_new&no=6164340&page=1&search_pos=-6110708&k_type=0110&keyword=%EC%9E%AC%EB%B0%95&bbs=|~~먹고사시기 힘드신가 봐요~~]] 나름대로 훌륭한 예능감을 뽐내고 있다. 이 기묘한 광고 캐스팅은 [[현대그룹]]과 전혀 무관한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이 자신들이 현대그룹 계열사인 것처럼 보이려는 꼼수를 부리려고, 현대 유니콘스의 전감독인 김재박을 데려다 찍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필이면 광고 카피도 [[8888577|8888]]'''~~
* 경기 감독관으로 활동하면서 우천취소를 많이 시키는걸로 야구 커뮤니티들에서 회자되다보니 [[클로저 이상용]] 690화에서 김재박을 패러디한 감독관이 우천취소를 하려다가 사무총장에게 슬리퍼 홀드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도 패러디 캐릭터로 특별출연한다. 우천취소를 쉽게 결정하는 모습을 반영하여, 요동전투 편에서 폭우가 내리자 철군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관구검]]이 대장이었을 때는 ~~우천취소~~철군을 받아들이나, [[사마의]]가 왔을 때는 철군 주장을 하자마자 바로 처형당한다.(...)
* 1998년 8월 26일, [[이승엽]]과 [[타이론 우즈]]가 치열하게 홈런경쟁을 펼칠 때[* 8월 26일 당시에는 이승엽 36홈런, 우즈 29홈런이었다. 이후 우즈는 9월에만 11홈런을 치며 역전하게 된다.] 현대가 삼성에 크게 이기고 있음에도 이승엽 타석에서 [[고의사구]] 지시. 수많은 삼성 관중들이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승엽의 홈런을 기대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이승엽을 고의4구로 걸렀고 경기장에는 빈병이 날아들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19대 4로 점수차가 크게 난 상황에서 [[안병원(야구선수)|안병원]]이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질 때 1루주자였던 [[양준혁]]이 도루를 성공하자 보복성으로 고의사구를 던진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82800329126008&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8-08-28&officeId=00032&pageNo=26&printNo=16524&publishType=00010|<스포츠 기자석> 팬들을 죽이는 프로야구]]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109&aid=0002580212|[한국프로야구 난투사](29) 대구 관중들, 현대의 ‘이승엽 고의 볼넷’에 분노 폭발]] 당시 [[허구연]]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90200209126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9-02&officeId=00020&pageNo=26&printNo=23976&publishType=00010|신문 기고]]를 통해 '우리 프로야구는 이승엽이란 슈퍼스타가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 경신이란 좋은 재료를 지니고 있음에도 상대 팀들의 지나친 견제로 축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극적으로 기회가 온 한화 장종훈(37)의 마지막 타석이었다. 올스타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장종훈은 16일 올스타전 6회부터 계속 헬멧을 쓴 채 덕아웃에 앉아있었다. 서군 김재박 감독으로부터 6회에 “9회에 나갈 준비를 해라”는 말을 들었지만 최근 몇년동안 언제 나갈지 모르는 대타 습관 때문에 헬멧을 벗지 않았다. 그러나 9회 투아웃까지 그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서군이 6-5로 뒤진 9회 2사 1·2루에서 조인성이 그대로 출장했다. 조인성이 아웃이 되면 장종훈에게는 더이상 기회가 없는 상황. 그런데 그 순간 덕아웃에서 의사결정이 빠르게 진행됐다. 또 다른 서군 포수 한화 신경현은 이날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출장하지 않기로 하고 조인성이 1회부터 8회까지 포수 마스크를 썼다. 조인성 타석에서 대타를 내면 동점이 됐을 경우 9회말에 뛸 포수가 없다는 것과 경기가 여기서 끝나면 장종훈에게 타석이 돌아오지 않는 것 사이에 고심하던 김 감독은 신경현에게 “뛸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신경현이 'OK'를 하자 볼카운트 1-0에서 재빨리 대타 장종훈을 외쳤다.(후략)||
* 2008년 5월 29일, [[이재우]]가 [[야맹증]] 때문에 항상 쓰고 나오는 [[고글]]을 지적하였다.[* 고글 착용은 규정상으로 위반이나, 어쩔 수 없거나 별 이상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관례다.] 이 일로 흔들렸는지 그 해 [[방어율]] 1점대를 기록하고 있던 필승계투 이재우는 안타를 맞고 강판되었고, LG는 이와 같은 "감독님의 활약" 덕에 [[잠실시리즈|잠실 라이벌]]인 두산전 5연패를 그날 끊었다.(...)
~~[[이대호|이젠 7관왕이 단 한 명이 아니다]]~~
- 서울특별시/인물 . . . . 25회 일치
* [[강감찬]] - 관악구
* [[권용관]] - 관악구
* [[기중]] - 관악구
* [[김병관(A.C.E)|김병관]] - 용산구
* [[나영(프리스틴)|나영]] - 관악구
* [[대도서관(방송인)|대도서관]] - 용산구
* [[루태]] - 관악구
* [[리키(틴탑)|리키]] - 관악구
* [[문성훈]] - 관악구
* [[박경수]] - 관악구
* [[박종호]] - 관악구
* [[오신환]] - 관악구
* [[이솜]] - 관악구
* [[이행자]] - 관악구
* [[임동혁(프로게이머)|임동혁]] - 관악구
* [[유희관]] - 서초구
* [[윤관석]] - 용산구
* [[정태호]] - 관악구
* [[태용]] - 관악구
* [[현진(이달의 소녀)|현진]] - 관악구
- 손병조 . . . . 25회 일치
* 1981년 : 목포세관 감시과 사무관
* 1997년 : 관세청 통관국 통관관리과장
* 1998년 : 관세청 통관국 검사분류과장
* 2000년 : 관세청 기획관리관 기획예산담당관실 기획예산 담당
* 2001년 : 관세청 심사정책국 심사과장
* 2001년 : 부산세관 조사국장
* 2003년 : 관세청 통관지원국장
* 2004년 : 관세청 기획관리관
* 2005년 : 관세청 정책홍보관리관
* 2008년 : 관세청 차장
|직책 = [[대한민국의 관세청 차장|관세청 차장]]
- 오지철 . . . . 25회 일치
'''오지철'''(吳志哲, [[1949년]] [[12월 30일]] ~ ,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언론인이다. 제9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 차관]],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역임하고, 현재 [[TV조선]] 대표이사이다. 본관은 [[함양 오씨|함양]].
* 1982.03 : 체육부 해외협력담당관
* 1994.06 ~ 1995.01 : 국립현대미술관 사무국 국장
* 1997.01 ~ 1999.06 : 문화관광부 문화산업국 국장
* 1999.06 ~ 2001.04 :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 국장
* 2001.04 ~ 2003.03 : 문화관광부 기획관리실 실장
* 2003.03 ~ 2004.07 :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 차관]]
* 2006.11 ~ 2007.11 : 대통령비서실 정책특별보좌관
* 2007.11 ~ 2009.05 : [[한국관광공사]] 사장
* 2009.07 : 전남발전정책자문위운회 문화관광정책고문
|직책 =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 차관]]
|직책 = [[한국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 사장]]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문화관광부 차관]][[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함양 오씨]]
- 이철희(1964) . . . . 25회 일치
|| '''본관''' ||<(> [[경주 이씨]] ||
|| '''약력''' ||<(> [[대통령비서실]] 정책2행정관[br]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br]더불어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 ||
한때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고, 중앙 정계의 언저리를 있으면서 민주당 쪽 정치인들과도 두루 인연을 쌓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두문정치전략연구소라는 작은 정치 컨설턴트 사무소의 소장으로 여러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바 있으나 역시 그의 인지도를 전국적으로 높여준 건 [[JTBC]] [[썰전]]이다. 이 시기 보수 진영의 패널을 맡았던 [[강용석]]과 더불어 진보 진영의 패널로서 ~~열심히 MB를 까며~~ [[썰전]]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1964년, 포항에서 3남 2녀 중 [[3남|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산광역시]] [[동래구]]로 이주하여 부산 [[동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석사가 되었다. 시대가 시대라 그런지 [[석사]] 논문 제목이 '민중통일론에 관한 일 연구 : 통일과 변혁이행의 상관성을 중심으로'인데, 별다른 건 아니고, 당대 운동권의 두 축이었던 [[NLPDR|NL]]과 [[민중민주주의|PD]]의 [[통일]]론을 비교 연구한 것이다.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하는데, 석사 논문 주제도 그런 영향일 것이고, 군 [[입대]] 전후로도 관련 [[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있기도 했다. 그래도 감옥에 갇히는 신세는 면했다고 한다. 잡힌 후 감옥에 갇히는 쪽과 안 가는 쪽이 있었는데 안 가는 쪽에 포함되었다고. 그리고 감옥에 갇힌 쪽의 학생들은 모두 국회에 한 번씩은 발을 담갔다고 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도 감옥에 갈걸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계파 문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김한길 의원 보좌관 출신에, 위 기사에서는 손학규 전 의원 계파로 분류했는데, 두 인사는 공통적으로 당시 공천을 주도한 친노계와 앙숙이었기 때문.]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실에서 정책 행정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고, [[노무현]] 대선 캠프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 [[김한길(정치인)|김한길]] 의원의 보좌관으로도 일했는데, 언제부터 일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2000년대 중반에는 확실히 의원 보좌관이었다. 2008년 전후로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는데, 정작 이후에도 대학 출강을 한다든지, 여론조사 기관에서 일한다든지, 민주당 당내 정책연구소에서 부원장을 지낸다든지,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정치 스펙을 쌓았다. 본인의 말로는 2012년 [[19대 총선]] 때 국회의원에 도전했으나 끝내 공천되지 못했다. 열심히 스펙을 쌓았지만 [[http://m.news1.kr/news/category/?detail&593920|서류심사에서 탈락해서]] 면접도 못 봤다. [[http://mnews.joins.com/article/7703750|공천 과정에 대한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들의 코멘트]]] 2016년 기준으로 보면 전화위복이지만, 그 과정에서 시사평론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E.E. 샤트슈나이더라는 학자를 좋아해서 그의 책과 이름을 자주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머 에릭 샤트슈나이더는 미국의 정치학자이다. 보통 샤'''츠'''슈나이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민주정의 발전은 다양한 정당들의 공정 경쟁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정당 정치에 깊이 관심 있는 사람치고 샤트슈나이더 영향 안 받은 사람은 드물다. 이철희는 샤트슈나이더의 책을 번역한 적도 있다. 참고로 샤트슈나이더는 대의제 민주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입장인데, 현 새정련 주류인 친노계가 직접, 참여적 민주정 강화를 지향하는 입장임을 보면 애초에 정당 운영 면에서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 갖고 까는 건 아니지만~~][[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28769|그래서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또한 학부 시절 [[최장집]] 교수에게 배운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장집 교수 역시 저서에서나 강연에서 대의제 민주정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 때문.
전반적으로 온건 합리적인 리버럴 스탠스를 가진 것과는 달리 사관엔 [[이덕일]]류 노론사관을 맹신한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저서 <뭐라도 합시다>와 썰전에서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노론으로, 이는 [[친일]] 단정 [[박정희|군사]] [[전두환|독재]] 세력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철희 소장은 [[권미혁]] 여성민우회 공동대표와 같이 [[더민주]]에 입당한다고 한다. [[http://media.daum.net/politics/all/newsview?newsid=20160119204538930|관련 기사 참조]] 1월 19일 기사시점으로 다음날인, 1월 20일에 같이 영입을 발표할 예정.
더불어민주당 입당 당시 비노계의 수장으로 불리던 [[김한길(정치인)|김한길]] 의원의 보좌관으로 근무한 경력이나 같은 친노 인사인데도 [[18대 대선]] 때 [[문재인]] 당시 후보에게 잔뜩 날을 세웠던 [[김두관]] 전 경남지사 등의 인물을 밀어준 발언들 때문에 처음 입당 당시에도 '비노'가 아니냐는 시선 속에서 입당을 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에서 당무를 맡게 된 이후의 공천 잡음과 관련되어 있지 않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입당 직후 [[https://www.viewsnnews.com/article?q=128501|문재인 의원의 부산 공천]]을 주장해서 논란을 만들기도 했고[* 대권주자 또는 당의 핵심인원으로 전국에서 선거지원 활동을 나서야 하는 인물들을 지역구 선거에 투입할 경우 지역구 선거유세에 발이 묶이기 때문에 전국지원유세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라 볼 수 있다.], 2월 초에는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205100351001&mobile|막말, 운동권 공천 배제]]'를 주장하였는데 [[정청래]] 의원의 공천 배제의 가장 큰 근거가 된 게 '막말'이었으며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대거 공천 배제당하다보니 이철희 전 소장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다.
이러한 비호감에 쐐기를 꽂아버리는 발언이 발생했는데, 첫 번째는 [[http://gosunggo.com/693|박영선 의원과의 녹취록 논란]]이고, 두 번째는 [[유시민]] 씨가 인터넷 방송을 통해 밝힌 [[http://m.hani.co.kr/arti/politics/assembly/735001.html|'특정 지인을 지역구에 꽂아주기 위해 인원을 컷오프했다. 그 배경에 박영선, 이철희가 있다']] 라는 내용.[* 유시민 작가는 불만이 있으면 자신에게 소송을 걸라며 당당하게 주장을 하긴 하였으나 민주당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인지라 더민주 내부 상황을 얼마나 잘 아는지 의문스럽고 또 정황 증거만 제시할 뿐 확실한 상황 증거는 내놓은 게 없다. 게다가 공개적인 토론 장소에서도 '새누리당 다음으로 싫어하는 정당이 더민주'라고 할 정도인 데다, 그때 김종인 더민주 대표가 정의당과의 당 대 당 야권 연대 방침을 철회하면서 정의당으로서는 지역구에서 궤멸당할 위기에 처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긴 어렵다는 뜻이다.][* 해당 발언의 사실성을 떠나서 민주당을 떠난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친분이 있는 인사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심지어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 의원과도 친분이 있었다. 특히 소위 친노 인사들과는 당연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민주당 내 주류가 친노라는 점에서 유시민 씨가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모를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러한 장대한 논란 거리를 만들어내다보니 [[박영선]], [[이종걸]] 의원과 함께 당내의 어그로 지분을 확보했다.
이후 국방위 소속 의원으로 MB 정부 시절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개입 문건을 결제한 사실을 공개하는 등 여당의 공격수로 군 내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파해 치며 정력적으로 의정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외에도 [[KEPD 350]] 도입이나 [[중고 치누크 도입 논란]]을 지적했는데 잘못 짚으면서 이미지를 좀 까먹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같은 당 출신인 [[김광진(정치인)|김광진]] 전 의원이 반박하기도 했다.
최근 정권교체 이후 썰전 출연분에서는 경제 관련 이슈에서 이명박, 박근혜 전정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조를 전개하고 있다.
* 썰전에 출연할 당시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말을 잘 했으나, 경제적인 의제와 관련해서는 식견 부족으로 그저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얘기만 늘어놓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드러낸 강용석과 복지를 주장한 이철희의 성향차이라고 보면 된다. 썰전에서 차라리 정치적 부분은 양자가 타협을 하기도 하고 서로의 주장을 인정하기도 했으나, 경제적 문제를 보는 인식 차이는 완벽한 평행선이었다. 썰전에서 즐겨 인용한 말이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의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만 말하는가?'''였으니.
* 썰전 출연 당시 [[강용석]]을 확실하게 압도한 적이 몇몇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메르스]] 사태 관련해서 다른 나라의 사례를 적절히 들어가며 메르스 발병 당시 공직자들의 행적을 시간 순으로 조목조목 반박한 것. 이때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말을 아주 후련하게 잘 했다 하여 '사이다'라는 칭송을 받았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210580|관련글 참조]]
- 문근영 . . . . 24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불교/인물)]
||<#f08080><:> {{{#ffffff '''본관'''}}} ||<(><#ffe4e1> [[남평 문씨]] ||
||<#f08080><:> {{{#ffffff '''학력'''}}} ||<(><#ffe4e1> 남원초등학교[br] 남원중학교[br] 남원고등학교[br][[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1999년]] 대역배우로 처음 연기에 발을 디뎠고[* 첫 출연은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박재홍(야구)|박재홍]]의 첫사랑 역할이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32&aid=0000012966|관련 기사]].], 1999년작 [[어린이 드라마]]《누룽지 선생님과 감자 일곱 개》에서 깍쟁이 소녀로 등장한 것이 본격적인 출연이다. 그 외에도 몇 편의 단역을 맡았으나, 본격 출세작은 [[2000년]] [[가을]]에 방영된 [[가을동화]]에서 [[송혜교]]의 [[아역]]. 성인 역할로 바뀐 [[송혜교]]보다도 역에 훨씬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9년]] 개봉한 [[얏타맨]]는 약 310만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국민 여동생으로 자리잡았다.
[[2005년]]작 영화 댄서의 순정에서는 순수한 연변 처녀의 역을 맡아서 춤 솜씨, 연변사투리 실력와 함께 120%의 존재감을 선보였다. ~~대신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로 당시 극강의 댄서로서 군림하던 [[박건형]]의 존재감은 이 영화에서 문근영의 아우라에 묻히고 말았다~~ 영화 속 여주인공의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한 '반딧불이...' 운운하는 대사의 경우 다른 여배우가 이런 대사를 했으면 관객들의 손발이 오그라들었을텐데, 문근영이 그런 대사를 하니까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평가가 나왔다. 진부한 스토리의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문근영이 연기한 여주인공 캐릭터의 애잔함이 영화를 완전히 살렸다는 평가도 나왔다. 흥행성적은 220만 관객으로 중박 정도였지만, 영화가 중독성이 있어서 문근영 팬과 상당수 남성 관객들에게는 거의 컬트 수준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30대 유부남은 이 영화 한번 보고 너무 좋아서 아내 눈총 받아가며 무려 1달 동안 매일 저녁 이 영화 비디오를 보고 잠이 들었다 한다.]
[[SBS 연기대상]]에서 [[신윤복]] 역으로 정향 역을 맡았던 [[문채원]]과 함께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고, 연기대상까지 수상했다. 통상 연기대상은 관례상 시청률이 높은 자사 드라마의 주연 내지는 자사 드라마에 출연해 주길 바라는 거물급 배우에게 수여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수상이었다. [[박신양]]의 [[김홍도]]가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드라마를 혼자 이끈 문근영의 공을 감안해도 10%대의 드라마 주연에게 연기 대상을 수여하는 일은 파격적이었다. 이로써 문근영은 만 21세에 연기대상을 수상, 방송 3사 통틀어 2번째로 어린 나이에 연기대상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참고로 역대 최연소 연기대상 수상자는 1998년 [[미스터Q(드라마)|미스터Q]]의 [[김희선]](당시 만 21세). SBS 연기대상은 그 해 12월 31일에 진행되고, 생일이 12월과 가까울수록 어린 나이가 되므로, 만 21세 때 대상을 수상한 두 사람 중 생일이 6월인 김희선이 역대 최연소 수상자다.] 이날 대상을 수상한 문근영은 수상소감 내내 몸을 바들바들 떨정도로 기쁨보다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며 대상 수상을 버거워하기도 했다.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상(방송)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6년 KTF의 음원서비스 도시락은 문근영을 내세워 직접 부른 "앤디자인"이라는 CF송으로 광고를 했는데, 이것이 가수 [[조덕배]]의 80년대 곡을 표절했다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문근영이 이 곡을 상업적으로 발매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당시 [[성균관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문근영 안티들이 공격하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사실 문근영이 "앤디자인"이라는 곡을 작곡했던 건 아니니까 이 사실을 가지고 문근영을 공격한다는 건 꽤 우스운 일이기야 하다. 조덕배 또한 표절 논란이 불거지자 " 문근영 양에 맞는 곡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인터뷰했었다.
[[2006년]] [[성균관대학교]] 인문학부에 특별전형 지원으로 합격했다. 입학 전 [[수능]] 성적으로 [[대학]]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고 수능 당일날 교실 하나를 혼자 쓰면서 요란하게 수능까지 봤다. 그런데 막상 원서 쓸 때가 되니까 특별전형, 그것도 연예인들이 으레 가는 '''[[연극영화과]]가 아닌 [[국어국문학과]]에 응시했고''' 간단히(?) 합격해 버려서 당시 [[고3]]들에게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아무래도 본인 수능성적이 예상 이하였던 모양이다.[* 문근영이 고3이던 당시, 모교인 [[국제고등학교(광주)|국제고등학교]](일반계 고등학교)를 방문한 졸업생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하다. 영화 [[댄서의 순정]] 이후 학업에 열중하겠다는 언플이 있었으나, 영화 개봉과 무대인사가 모두 끝난 5월 말까지도 등교가 아닌 외부활동(교사의 말에 따르면 [[칸 영화제]]를 '구경'갔다고 한다.)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미 특별전형을 고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006년]]도만 해도 평범한 티셔츠에 월남치마 차림으로~~[[일코]]?!~~ 열심히 학교생활을 한 터라 자주 볼 수 있었다.[* 2012년 즈음에는 한겨울 학교에 야상+츄리닝 차림으로 도서관에 출몰해 고학번 ~~[[복학생]]~~ 포스를 풍겼다. 애석하게도 사진은 나돌지 않는다.] 학교에서 사인은 해주지 않았지만(같은 학생이니까) 성균관대 근처 식당엔 문근영의 사인이 많이 있다. 한때 [[미스터피자]] 광고를 했던지라, 그녀가 그룹 스터디 등을 할 때면 성대 근처 [[미스터 피자]]에서 항상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음식값은 공짜였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확인바람.[* 사실 '그 피자집 제가 가도 돈 다 내고 할인도 없어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참 그 광고가 나가던 시절은 모르겠지만.]
[[2008년]]까지는 학업에 전념했으나, 이후 연기 활동으로 인해 휴학하고 09년에 복학,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최종적으로는 2012년에 현대소설론을 마지막으로 수료했다.[* 모든 대학들이 그렇듯, 수업만 전부 다 듣는다고 해서 [[졸업]]이 되는 것이 아니다.(가장 일반적인 것으로는 졸업 [[논문]] 미통과.) 수업을 다 들어도 졸업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졸업이 되지 않고 수료만 된 것으로 처리된다. [[성균관대학교]]는 학점 이수 외에도 영어 공인 점수, [[자격증]] 등의 3품을 따야 졸업 요건이 충족된다. 문근영은 학점도 이수하고 졸업 논문도 제출했으나 3품을 따지 못해 졸업은 하지 못했고, 국어국문학 학부를 수료만 한 상태이다. 그래도 3품 제출 기한이 무기한이기 때문에 문근영의 경우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 점수와 자격증을 취득하는 순간 바로 당해 학기에 졸업 처리가 된다.] 수료상태를 끝내고 2015학년도 전기학위수여식(2016년 2월)에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극우 군사평론가 [[지만원]]이 문근영의 선행을 빨치산인 그녀의 외조부와 연관지어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쓰면서 논란이 일었다.[[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17|#1]] [[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26|#2]] [[http://www.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4918|#3]] 여기에 대해 문근영의 선행까지 색깔론으로 보는 것이냐는 비판이 있었고, 지만원은 문근영을 이용하려는 미디어를 비판한 것이라 반박한다. 서울지법은 지만원의 패소로 판결했으나 서울고법에서는 양쪽의 주장을 모두 밝히라는 반론보도로 판결을 내리게 된다.
||본지는 지만원 씨가 배우 문근영의 기부와 관련하여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에 대하여 2008.11.16-18.에 걸쳐 2회의 인터넷신문기사와 1회의 신문사설을 통해. “지만원 씨가 문근영의 선행에 대하여 이념적인 색깔을 들어 비방하고, 올바른 기부문화 형성에 방해를 하였다”는 취지로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지만원 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은 문근영 씨의 선행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그 선행을 이용하여 빨치산을 미화하려는 일부 언론을 비판한 내용”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끝.||
||본 방송은 2008년11월17일 8시 뉴스에 배우 문근영의 기부와 관련하여, 우익논객 지만원 씨가 문근영 씨의 기부에 색깔론을 들고 나오면서 손녀인 문 씨의 선행은 빨치산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으로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지만원 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은 ‘문근영 씨의 선행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선행을 이용하여 빨치산을 미화하려는 일부 언론을 비판한 내용’ 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끝.||
당시 특종보도로 많은 미디어에서 다루어졌는데,가장 유명한 기부활동으로는 [[2006년]]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목사 부부에 의해 운영되다 재정악화를 맞은 공부방을 인수해 [[2009년]] [[개신교]] 계열 [[NGO]] '굿피플'에 기증한 것. 원래 익명으로 하려 했으나, 후에 기증하러 온 여인이 문근영의 어머니임이 밝혀져서 기증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그 외에 [[2005년]]부터 [[순천시]]의 도서관에 2,500만원을 기부한 것과, [[2002년]]부터 다년간 고향 [[광주광역시]] 빛고을장학재단에 거액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2009년 여동생이 유학 중이고 친척의 연고지이기도 한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한글도서관에 1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비록 S모 인강사이트가 실시한 기부천사 투표에서는 [[김장훈]]에 밀려 2위였지만, 김장훈 본인도 문근영의 기부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김장훈의 기부가 거의 거짓이고 입기부임이 밝혀진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소리다.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f08080><rowbgcolor=#f08080><tablebgcolor=#ffe4e1>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이름'''}}} || {{{#ffffff '''관객수'''}}} || {{{#ffffff '''흥행'''}}} ||
|| [[2006년]] ||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사랑따윈 필요없어]][* 상술했듯이 이 영화 개봉 직후 문근영이 약속을 깨고 [[성균관대학교]] 특별전형에 지원 합격해 버리는 바람에 인터넷에서는 '''수능따윈 필요없어'''로 패러디된 짤방이 유행했었다.] || 류민 || 54만 명 || 실패 ||
* 임성순 작가가 쓴 `문근영은 위험해`라는 소설이 있다. 은행나무에서 나왔으며 회사 시리즈 3부작의 2번째 책이지만 전작, 후속작과 거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게 함정. 정작 책을 쓴 작가는 책에 나오는 문근영과 배우 문근영이 1도 관계 없음을 목 놓아 외치고 있다만 영락없는 빠돌이로 보인다. 책의 내용 자체는 문근영과는 약간의 관련만 있을 뿐 매우 충격적일 수 있다.
- 은지원 . . . . 24회 일치
||<#000000> '''{{{#FFFFFF 본관}}}''' ||<(> [[은(성씨)|행주 은씨]] ||
||<#000000> '''{{{#FFFFFF 학력}}}''' ||<(> [[김제문화예술회관]] ||
||<#000000> '''{{{#FFFFFF 별명}}}''' ||<(> G, '''G1'''[* 실제로 자신의 모든 솔로 앨범표지에 Eun G1이라는 예명을 쓴다. --무한도전에서는 [[김재덕]]에게 [[장수원|장로봇]]이 형은 덕2로 하자...--], =G1, '''은초딩''', '''은각하'''[* 데뷔 초에 멤버들끼리 놀리듯이 붙여졌다. 그러나 시작과 달리 외모와 분위기 탓에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여담으로 [[은초딩]]과 [[은각하]]를 쳐도 이 문서에 들어올 수 있다.], 절대자, 은간지,[br]은까리, 은리더[* 방송 자막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은대장, 은리다,[br] 지니어스원, 은둘리, 여의도돌싱[* 신서유기 시즌1에서 이승기가 붙여준 별명. 바리에이션으로 여의도 이혼남이 있다.], [[외계인]][* 1박 2일에서 은지원이 외계인에게 관심을 너무 가진 것이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만들었다. 공주편에서 은지원이 공상과학 이야기 중 외계인 이야기를 하는데 "형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해? 없다고 생각해? 사람 몸속에 아무 흔적없이 마이크로 칩을 넣는데?"라고 발언 한 것. 이후 은지원이 강호동의 엉덩이를 나무로 때리고 이후 [[박찬호]]가 은지원보고 외계인 아니냐며 의심을 한 것이다. 이후 팜스테이 편에 등장하는 일심동체 게임에서 김C가 외계인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뭐냐는 문제에서 은지원을 적은 것. 이후 전국일주에서 UFO 관련해서도 빨리 사진 지우라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다.],[br]거칠이, 극한직업 젝키리더(...)[* 옛날부터 멤버들과 예능 나오면 마음 졸이며 수습하고 관리하기 바빴다. 최근 나온 방송들을 보면 멤버들이 산만한 편...],[br]젝키 유일 일반인[* 밖에선 미친자, 도른자, 돌아이, 외계인 취급받지만 젝키에선 가장 평범한 일반인 포지션이다. 그 정도로 동생들--특히 이재진--이 남다르다(...).], 섭섭이(...)[* [[1박 2일]]에서 얻게 됐다. 후에 --[[MC몽]]--이 섭섭이 라인에 합류하면서 은지원은 일섭이, --MC몽--은 이섭이로 불리게 됐다.], 미친者(...)[* 신서유기에서 얻게된 별명이다.], 구美[* [[안재현|이 사람]]이 합류하자마자 그에 못지않은 미친者의 면모를 보여서 신美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자동적으로 은지원은 기존의 미친者를 뜻해서 옛날을 뜻하는 한자 舊(옛 구)를 넣은 셈.], 찌오니[* 본인의 이름을 모에화하여 팬들이 부르는 별명, 본인도 이렇게 불리는 것을 알고 있다.], 은먹금[* 본인의 칭찬이 나오면 황급히 화제를 전환하거나 아예 외면해서 붙은 별명. 방송생활 20여 년간 본인 칭찬을 한 적이 한 손에 꼽는다(...).], 은요물[* 촉이 좋아서 미션의 흐름을 한번에 이해하고 진행해나가 신서유기 제작진들이 붙여준 별명], 은왜은[* 연예인 중에서 유일한 [[은(성씨)|은씨]]와 흔하지만 세련된 '지원'이라는 이름 때문에, 팬들이 은지원은 이름도 잘생겼다며 '은지원은 왜 이름도 은지원인가'를 줄여서 만든 별명.] ||
젝스키스 1집에만 해도 랩만 했으나 2집부터 보컬도 맡게 되면서 노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 힙합으로 전향한 이후 노래를 안 한지 꽤 됐지만 기본적으로 음색이 [[비성]]이 섞인 [[미성]]이다. 1세대 아이돌의 비보컬 멤버가 대개 그렇듯 진지하게 가창력을 논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중에서는 중고음이 가능하고[* 조금 무리하면 2옥 솔 정도는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음감이 있어 라이브에서도 음을 제대로 찍어부를 정도로 중간 이상은 하기때문에 상당히 괜찮은 편. 현대적인 관점에서 메인보컬을 받쳐주는 서브보컬의 역할을 당시에 상당히 충실히 해냈다.[* 이런 서브보컬 라인이 강해야 메인보컬을 적재적소에 꽂아넣는 프로듀싱이 원활하게 이뤄진다. 물론 1세대 아이돌 당시에는 그런 거 없고 후렴과 어려운 파트는 메인보컬이 몽땅 하고 그나마 몇 없는 쉬운 파트를 나머지 멤버들이 나눠가지는 식이었다. 은지원, [[이효리]], [[손호영]] 정도가 그나마 괜찮은 서브보컬이었다.] 그 예로 3집 활동 후속곡인 '무모한 사랑'에서는 은지원의 파트가 과장해서 노래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 많다. 보통 젝키에서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르는 강성훈이 이 노래에서는 후렴구만 부르는 반면, 은지원은 이 노래에서 서브보컬, 랩, 리드보컬까지 웬만한 파트는 거의 다 맡는다. 심지어 고음으로 지르는 부분도 있다.--느낄 수 있어써!!!!-- 또한 4집 후속곡 예감에서도 초반부 파트를 통으로 끌고 간다.
지금이야 예능에서의 모습으로 초딩 소리를 듣지만 젝키 시절에는 과묵한 이미지와 까리한(...) 외모로 '''은각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카리스마 있는 리더였다.[* [[H.O.T.]]의 리더 [[문희준]]이나, [[신화(아이돌)|신화]]의 리더 [[에릭(신화)|에릭]]과는 달리 그룹에 동갑이 없었다. (이들보다 1살 위인 [[NRG(아이돌)|NRG]]의 리더 [[이성진(NRG)|이성진]]도 같다.) 그래서인지 멤버들이 --연습할 때 한정으로--다들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재진(젝스키스)|이재진]]이 까다로웠다고 언급했다. --김재덕에 의하면, 은지원이 너무 독재자여서 이재진이 반항한 거라고 한다.-- 하지만 회사에게 받은 대접이 대접이라 그런지 "은지원이 아니었다면 3년도 가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애초에 독재자 발언은 예능에서 장난스레 발언한 것이다-- 은각하 자체가 데뷔 당시 멤버들을 갈구던 상황에서 놀리듯이 붙은 별명이다. 당장 [[토토가2 - 젝스키스]] 편이나 예전 예능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은지원은 동생들에게 갈굼당하기 일쑤다. --마이웨이 까칠이 이재진과 은지원 전용 어그로 고지용, 프로일침러 장수원, 방관하는 강성훈과 김재덕.-- --(극한직업 젝키 리더)-- --젝키 내에서는 은지원이 가장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본인 말로는 자신은 카리스마 있었던 적은 없었고, 말이 없었던 이유는 MC들이 질문한 내용이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그렇게 보였다고...
이후 라디오 스타 촬영분도 마쳤는데 멤버들을 배려하고 토크도 넘겨주는 등 계속 동생들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 관계자들과 은지원과 방송을 해본 경험이 많은 [[김구라]]조차도 '''예능인 은초딩과 젝스키스의 은지원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며 당황했다고 한다. 김구라는 심지어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것 같다"고 했을 정도. 젝스키스와 관련된 일이면 일단 책임감이 넘치고 진지해지는 것 같다.
'정신 질환으로 면제받았다.' 는 병역 비리 관련 소문이 돈 적도 있으나 사실 무근이며, 소속사에서 공식 부인한 상태. 한편 아래에도 언급되는 박근혜 집안과의 관계 때문에 면제가 된 것 아니냐는 다른 형태의 병역 비리의 루머도 있었으나 이 역시 아무런 근거가 없다.
== 가족 관계 ==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양날의 검이 된 관계이지만 이를 엮어서 은지원을 비난하는 것은 연좌죄와 다를게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문제없이 잘나가고 있는 이사람에게는 큰 실례이자 모욕이다.'''[* '''[[박근혜|고모가]] [[범죄자/목록/대한민국|이런 사람이니]]'''...]
2012년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위해 선거 활동에 유세 도우미로 참가했다. "친척 하는 일 거드는 것인데 뭐 어때?"라는 반응도 있지만, 과거 선거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참고로 2012년 초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박근혜|고모]]가 원하신다면 당연히 도와드릴 생각'''이지만, 내가 [[초딩]] 이미지라(...) 굳이 도와달라고 안 하시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본인의 --딱히 있을 것 같지않은--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친척이라 도와드린 것이라 밝힌 적 있다.
2010년 초반부에 언급한 대로 [[이동국]]의 처형과 결혼하게 되어서 품절남이 되었었다. --하와이에서 만나 젝키때도 문답 등에 꾸준히 언급해왔던 첫사랑과의 결혼!-- 즉 [[이동국]]과는 동서 관계. ~~그래서 [[이승기]]와 [[김종민]]이 그렇게 가까워졌나 보다~~ 결혼 이후 [[아내]]가 싸준 도시락에도 그야말로 애들이 좋아하는 구성으로 꽉 찬 반찬들이 공개될 정도인 걸 보면 집안에서도 여전히 초딩인 듯.
* [[츤데레]]다. 문제는 팬들도 오해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엄청난 츤데레라는 점(...).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425001447491|젝키 시절 사생팬들에게 쓴 손편지]] 멤버들 중 유독 [[이재진(젝스키스)|이재진]]과 티격태격대는 모습을 많이 보이고 도시락 때문에 싸웠다거나 이재진이 반항을 많이 했다는 언급도 몇번 해서 사이가 나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친하다. 애초에 이재진이 코가 크다는 이유로(...) 젝키 멤버가 되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막 합류한 김재덕이 이재진을 두둔했는데[* 이재진과 김재덕은 부산에서부터 아는 사이였다. 김재덕에게 처음으로 춤을 가르쳐준 사람이 이재진이고 같은 댄스팀에서 활동했으며 함께 상경해서 연습생 생활을 했었다.], 이 때 은지원이 춤도 잘 추지만 생각이 깊은 아이라면서 회사를 설득하여 무사히 젝키 멤버가 되었다. 해체 후 각자 솔로활동을 하던 시절에 이재진이 라디오 출연했을 때 [[https://youtu.be/BZ2QCgkw_pg|은지원이 전화연결]]을 하기도 했고, 이재진이 군대 전역 후 인터뷰에서 '입대 전까지 지원이 형, [[강성훈|성훈이]]랑 연락했다. 이제 나왔으니 또 연락할거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이 둘이 같은 예능에 출연하면(대표적으로 무한도전) 서로를 까면서 티격태격하다가도 어느 순간 죽이 맞거나, 남들이 까면 은근히 편을 들어주거나 서로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잡지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은지원을 꼽기도 했다. 젝스키스 무대나 예능에서도 은지원이 동생들을 계속 모니터링하며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냥 프로 츤데레일 뿐-- 해체 직후에 총알받이가 되어가며 황급히 솔로로 나온 것 자체가 동생들이 최대한 편히 솔로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누가 먼저 나오든 엄청난 욕을 먹을 것이라 나서서 총대를 맨 것. 재결합 전까지 젝스키스 언급을 자제하거나 상징색을 노랑이 아닌 은색을 써서 팬들에게 젝스키스를 부끄러워한다, 싫어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한창 오해받을 당시의 발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젝스키스가 너무 소중해서 함부로 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 --그 당시 현실적인 문제를 직설적으로 발언해 어린 팬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등 돌린 부분도 크다.-- 젝키가 다시 뭉쳤을 때 일개 추억팔이가 되어 과거의 추억까지 격하당할 것을 염려한 흔적이 많다. 게다가 그동안 리더로서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살았다. 재결합 후 반응이 좋자 마치 용서받은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노란색 관련해서는 예능에서 남들이 다 싫다는 샛노란 체육복을 젝키는 노랑이라며 좋아하거나, 우비를 노란 우비 위주로 입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희준이 방송에서 은지원은 오해하기 쉬운 성격이라고 발언했을 정도다. 문제는 오해받더라도 해명하지 않는다는 것.
* 그리고 [[나루토]], [[원피스(만화)|원피스]]의 팬이라는 듯.[* 실제로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가아라|모래 압사 사고]] 관련으로 나루토 관련 사연 문제를 내자, 다른 MC들은 몰라서 어쩔 줄 몰랐던 데에 비해 은지원은 문제의 답을 유창하게 해석하면서 쉽게 맞혔다.][* 신서유기6에서도 농부 분장을 할 때 밀짚모자를 쓰고 "루피다 루피!"라고도 했다.] 나루토 애니와 원피스 애니를 보면서 운 적도 있다고 한다. [[네모바지 스폰지밥|스폰지밥]]의 한국판 오프닝을 부른 적이 있어, 1박 2일에서 캐릭터 퀴즈로 스폰지밥이 나왔을 때 손쉽게 맞혔다. [[신서유기]]에 나온 모습에 따르면 [[드래곤볼]]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 '''같은 1978년생인 [[최현우(마술사)|최현우]], [[나얼]]과 같이 사기급으로 [[동안]]이다.''' --사실 젝키 멤버들 전체가 동안이다.-- 실제로 은지원은 연예계에서도 알아봐주는 동안연예인이면서 하는 짓도 초딩같고 그렇지만 벌써 '''마흔'''이다. 다만 얼굴이 너무 동안인데다 은초딩의 싱크로율이 너무 적합해서 그다지 부각되지도 않고(...) 지금 얼굴과 젝키활동 시절의 모습을 비교하면 얼굴선이나 눈매가 다소 부드러워진 것만 빼면 거의 차이가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치열 교정을 하라고 했음에도 귀찮아서 하지 않았다는 일화나[* 실제로 풀샷이 잡힐 때나 입을 벌리고 있을 때(뭔가에 집중하거나 오디오 겹침 때문에 멘트 대기중일 때 자주 그런다) 보면 위쪽 치열이 상당히 앞으로 나온 편이다. 그래서 일부 캡쳐에서는 앞니가 튀어나와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인지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연예인임에도 피부 관리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으로 보아 의외로 외모를 꾸미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2016년 [[젝스키스]] 재결합 이후 생전 처음으로 피부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은지원 본인의 말로는 젝스키스 해체 이후 솔로 가수로서 출연한 모든 방송에서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다고...] 젝스키스 재결합 이후 은지원의 관리 받은 사진들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흠많무. 현역 10, 20대 아이돌을 압살하는 포스를 보여준다. 흡연이라는 동안 유지에 치명적인 디메리트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재는 팬들을 위해 금연하는 중이다.] 최근 동안 얼굴이 큰화제가 되어 뜻밖의 월드투어(기사로)를 하는중이다.
* 잠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13년 12월 은희상담소 방송을 보면([[https://youtu.be/y30hcXif7GQ|13분부터]]), 젝키 시절 하루에 스케줄 7~8개를 하고 나서 다음날 아침 스케줄이 있었다고 한다. 멤버들을 각자 집에 내려다주고 씻고 챙기게 한 뒤 거의 곧바로 픽업하러 왔는데, 그래야 스케줄을 맞출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머지 멤버들을 태우고 마지막으로 은지원 집에 1시간반만에 다시 갔다. 그때 침대에 누운 은지원이 너무 피곤해서 매니저한테 "너 같으면 일어나겠냐"고 한 다음, 매니저가 멤버인 줄 알고 욕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케줄이 펑크났었다고 밝혔다. 매니저는 황당하면서 자기도 피곤하니까 라이터를 입에다 물고 씹었는데, 입에서 불이 펑 터지는걸 은지원이 봤다고 한다.
- 정명훈 (지휘자) . . . . 24회 일치
| 관련활동 =
'''정명훈'''(鄭明勳, [[1953년]] [[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본관은 [[하동 정씨|하동]]이다.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동생이다. [[종교]]는 [[개신교]]다.
[[1968년]]에 [[미국]] [[뉴욕]]의 [[메네스 음악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와 칼 밤베르거에게 각각 [[피아노]]와 [[지휘]]를 배웠다. [[1974년]]에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 [[피아니스트]]로 참가해 2위로 입상해 화제가 되었고,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만찬에도 초대되었다고 한다.<ref>{{뉴스 인용|제목=김문관의 클래식 산책 스승의 노래|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39830|출판사=아시아투데이|날짜=2012-05-14}}</ref> 이 만찬에서 정명훈은 콩쿨 상금으로 [[러시아]]에서 산 [[캐비어]] 5 kg 중 일부를 [[선물 (물건)|선물]]로 들고 갔다. 당시 소련 정부는 국부 유출을 금지해서 받은 상금을 [[모스크바]]에서 모두 써야 했다.</ref> 이듬해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추가로 [[공부]]한 후 [[1978년]]에 [[졸업]]했다.
줄리어드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부지휘자로 프로 관현악단 지휘의 [[경험]]을 쌓았다.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어 상임 지휘자인 줄리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고, [[1983년]]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1984년]]에는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윤이상]]의 교향곡 제3번 세계 초연과 음반 녹음 등의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6년]]에는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불의 천사' 를 [[지휘]]했고, 같은 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 를 [[지휘]]해 오페라 지휘자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무소륵스키]]와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 절찬을 받았고,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상을 [[상 (표창)|수상]]했다. [[1989년]]에는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오페라극장]]의 전속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신축된 [[오페라극장]]의 개관 공연에서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인' 을 상연해 호평을 받았다. [[1990년 10월]]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 제작도 시작했으며, [[조르주 비제|비제]]의 관현악 작품들을 시작으로 [[생상]], [[메시앙]], [[베를리오즈]], [[앙리 뒤티외|뒤티외]] 등의 작품들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생상의 '삼손과 데릴라(EMI)', 베르디의 '오텔로' 등 오페라 전곡을 [[녹음]]했다. 특히 [[메시앙]]과는 생전에 각별한 친교를 맺고 있었고, 녹음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4년]]에 새로 부임한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음악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1995년]] 유네스코 서울 협회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대한민국의 훈장|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7년]]에는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도이체 그라모폰]]의 전속 계약을 유지하면서 녹음 활동도 병행했다. [[1998년]]에는 [[한국]]에서 첫 직책으로 [[KBS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지만, 악단원들과 [[갈등]]을 빚어 불과 수 개월 후 사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랑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재구성된 [[일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 고문으로 초청되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2012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역사상 첫 번째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이외에도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네덜란드]] [[콘세르트헤바우 관현악단|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나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국]]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계 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들을 객원 [[지휘]]하고 있으며, 다수의 영상물과 음반들을 남기고 있다.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계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인천]]과 [[서울]]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두 누나([[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첼리스트]] [[정명화]])와 함께 피아노 3중주단인 [[정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고, [[체칠리아 바르톨리]] 등 유명 성악가들의 리사이틀이나 독창곡 녹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들들인 정선과 정민도 각각 재즈 기타리스트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9월]]에 홀로 [[북한]]으로 건너가서, 북한 국립 교향악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을 [[지휘]]했으며<ref>{{뉴스 인용|제목 = 정명훈, 평양에서 북한 교향악단 지휘|url = http://www.ytn.co.kr/_ln/0101_201109141856110294|출판사 = YTN |날짜 = 2011-09-04 |확인날짜 = 2013-05-10}}</ref>, [[북한]]의 음악 관계자들과 만나 남북 합동 관현악단의 연주회 개최를 제안 하는 등, 음악면에서 남북 융화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2012년 3월]]에는 [[라디오 프랑스]]의 초청으로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의 살 플레옐에서 [[은하수관현악단]]을 이끌고 자신이 [[음악 감독]]을 맡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관현악단]]과의 합동 연주회를 실현하였다.
<ref>{{뉴스 인용|제목 = 북한 은하수 관현악단, 정명훈 지휘로 파리서 ‘박수갈채’ 이끌다
3. 정명화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1944.03.19. 서울특별시 출생(첼로)
4. [[정경화]] (대관령 국제 음악제 예술감독,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 교수) 1948.03.26. 서울특별시 출생 (바이올린)
* 1995년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훈장|금관문화훈장]](1등급)
직책=[[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 음악 감독|
직책=[[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관현악단|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
- 허화평 . . . . 24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 정치인이다. 자는 봉우(鳳宇), 호는 우민(佑民)이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필립보.
1937년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에서 태어났다. [[포항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7기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진영(군인)|김진영]], [[허삼수]]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특히 허삼수와는 단짝이었다. 1979년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대령]])이었다. 말하자면 개국 공신 중의 공신인 셈이다. 1980년 9월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였다.
1980년 9월 [[전두환]] 취임 후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비서실보좌관이라는 직함은 없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비서실보좌관이라는 없던 직제를 일부러 만들어서 허화평을 임명한 셈이다.] 이를 통해 실질적인 청와대 핵심 기획자 역할을 했고 차관급 관료임에도 유일하게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근무했다. 명칭만 비서실 보좌관이었지 실질적으로 부총리급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보안사 시절부터 비서실장이었으니~~ [[허삼수]],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리며 실세로 활동했다.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실은 구 [[청와대]] 본관에 속해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과의 관계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였다. 그러나 허화평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에 1981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로 청와대 비서실장은 1982년 1월부터 [[이범석(1925)|이범석]]이 새로 도맡기도 하였다.]
좌천된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위상이라면 실세로서 잘나가던 시절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항명으로 비춰져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청와대를 나와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 재단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처리 조치로 기소되었다. 이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사면되었다.
군사정권의 인사답게 민주화운동에 시종일관 부정적인 논조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월간조선》은 2012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과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 허 전 수석은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박정희]] 대통령과 [[10월 유신]]의 결과물인 산업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발언했다. 제5공화국의 첫 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다는 말이다.[[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51768&iid=1140067&oid=449&aid=0000114843&ptype=052|#]]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서 청산하지 않고 놔둔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으며, 그 결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서 수습하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
5공 정치인답지 않게 나름의 정치철학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구속기소되었을 때 이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법정에서 다른 피고인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와중에도 허화평만은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96년 총선에서 무려 '''옥중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당선 여부와는 별개로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보수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종편채널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데 말빨이 기가 막혀서 진보성향 PD들이 애를 먹는다는 후문도 존재한다.
- 황종률 (정치인) . . . . 24회 일치
'''황종률'''(黃鍾律, <small>일본식 이름: </small>光田矗顯, [[1909년]] ~ [[1972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서울]])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 겸 정치인이다.
[[한성부]]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고, [[만주국]] [[대동학원]]을 거친 뒤 뒤 만주국에서 관리로 근무했다.<ref>{{서적 인용
|장=7. 역사적 심판 }}</ref> 직책은 만주국 경제부 금융사의 금융과 사무관으로, 경제 분야 관료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왔다. [[연희대학교]] 교수를 잠시 지내다가, 다시 경제 관료로 복귀했다. 제3공화국에서 [[대한민국 재무부]]와 [[대한민국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71년]]에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비례대표로 제8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었으나, 국회의원 임기 중 사망하였다.
* 만주국 경제부 사무관
* 1947년 : 주 [[일본]] 공관장
* 1952년 : 외자구매처장 겸 외자관리청장
* 1963년 : 재무부 장관
* 1966년 ~ 1967년 : 무임소 장관
* 1967년 : 체신부 장관
* 1968년 : 재무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임시외자관리청|임시외자관리청장]]<ref>외자구매처장과 겸직</ref>
|직책 = [[대한민국 재무부|재무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무임소장관실|무임소 장관]]
|직책 = [[대한민국 체신부|체신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재무부|재무부 장관]]
[[분류:1909년 태어남]][[분류:1972년 죽음]][[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재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충청북도지사]][[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규슈 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평해 황씨]]
- 김보름 . . . . 23회 일치
2010년 11월 일본 도마코마에에서 열린 2010-2011 스피드주니어월드컵 1500m와 3000m에서 정화여고의 김보름은 2관왕에 올랐다.<ref name=":1" />
2012년 2월 16일 서울 공릉동 태릉국제스케이팅장에서 열린 제93회 전국동계체육대회 대학부 3000m 결승에서 김보름(19)은 4분18초11의 대회신기록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17일 열린 1500m에서도 2분05초로 우승한 김보름은 대구-경북 동계체전 선수 중 유일한 2관왕 타이틀을 획득했다.<ref name=":5">{{웹 인용|url=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218.010200737070001|제목=대구경북 유일한 2관왕 ‘빙속 스타’ 김보름 “소치올림픽 금메달도 꿈만은 아닐 것”|성=영남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08}}</ref>
2012년 3월 3일 일본 오비히로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 3000m에서 박도영이 1위, 김보름이 2위를 차지했다.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위, 박도영이 4위, 남예원이 33위를 차지했다. 1000m에서는 김보름이 6위, 김현영이 7위, 박도영이 10위, 임정수가 27위를 차지했다. 종합에서는 김보름이 3위, 박도영이 5위, 임정수가 14위를 차지했다. 4일 열린 팀추월 경기에서 김보름은 박도영(한국체대), 임정수(청학고)와 팀을 이뤄 출전하여 3분07초36의 기록으로 일본(3분13초67)과 러시아(3분14초41)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ref name=":7">{{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8A%A4%ED%94%BC%EB%93%9C-%EB%B0%95%EB%8F%84%EC%98%81-%EC%A3%BC%EB%8B%88%EC%96%B4-%EC%84%B8%EA%B3%84%EC%84%A0%EC%88%98%EA%B6%8C-2%EA%B4%80%EC%99%95-%EC%B0%A8%EC%A7%80|제목=스피드 박도영, 주니어 세계선수권 2관왕 차지|날짜=2012-03-05|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1}}</ref>
제94회 전국동계체전에서 김보름은 3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2연속 2관왕을 달성했다.<ref name=":15">{{웹 인용|url=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40303.010270813440001|제목=동계체전 대구 대표로 출전한 올림피언 김보름|성=영남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14}}</ref>
2013년 10월 23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48회 전국남녀 종목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3000m에서 김보름(20)은 4분18초89로 결승선을 통과해 1위에 올랐다. 박도영(20-한국체대)이 4분21초30으로 2위에, 노선영(24-강원도청)이 4분21초37로 3위에 등극했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1023_0012457099&cID=10501&pID=10500|제목=::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성=NEWSIS|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5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44의 대회신기록으로 노선영(강원도청-2분02초77)을 제치고 우승했다. 5000m에서도 김보름은 이주연이 2008년 남긴 기존 대회기록(7분46초20)에 7초가량 앞선 7분39초14로 우승, 3광왕의 영예를 안았다. 여자 1500m 및 3000m에서는 팀추월 우선선발 대상자인 김보름과 노선영, 박도영(한국체대) 외에 양신영(전북도청), 전예진(한국체대)이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됐다.<ref name=":11">{{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13/10/25/20131025004859.html|제목=[종별빙속] 모태범·이승훈 나란히 2관왕…김보름 3관왕|성=세계일보|날짜=2013-10-25|뉴스=[종별빙속] 모태범·이승훈 나란히 2관왕…김보름 3관왕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닷컴 -|확인날짜=2017-03-13}}</ref>
2014년 2월 28일 서울 노원구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95회 전국동계체전에서 김보름은 3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3연속 2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ref name=":15" />
김보름은 잃어버린 자신감과 부상의 여파로 인해 세계대회에서 극심한 슬럼프를 겪지만 시즌 말 동계체전에서 2관왕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희망의 끈을 이어갔다.<ref name=":18" />
2015년 2월 26일 서울 태릉빙상경기장에서 열린 제96회 전국동계체전 대학부 3000m에 출전한 김보름(대구)이 대학부 3000m 4연패를 달성했다. 김보름은 이날 박도영(경기, 한국체대)과 같은 조로 경기를 펼쳤으며 차분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박도영과 거리를 유지해 나갔다가 경기 중반에 이뤘을때 치고 나가기 시작해 박도영과 거리를 벌리며 4분18초95로 여유롭게 결승선에 찍었다. 한편 김보름과 같은 조로 출전한 박도영은 4분21초13으로 최종순위 2위로 여자 대학부 3000m를 끝마쳤다.<ref>{{웹 인용|url=http://www.yachtpia.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43|제목='전국 동계체전' 여자 대학부 3,000M 김보름 선수 금메달 획득 - 해양레저전문미디어 요트피아|언어=ko|확인날짜=2017-03-15}}</ref> 27일 열린 1500m에서도 김보름(22)이 2분04초97로 참가선수 7명 중 가장 좋은 기록을 내며 4회 연속 2관왕의 대업을 일궜다. 박도영(22-한국체대-2분06초50)과 남지은(20-한국체대-2분07초01)이 각각 은, 동메달을 차지했다.<ref name=":18">{{뉴스 인용|url=http://news.zum.com/articles/20096322?cm=popular|제목=[동계체전] 곽윤기, 쇼트트랙 남자 3관왕[종합]|언어=ko|확인날짜=2017-03-17}}</ref>
2015년 10월 28일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벌어진 제50회 전국남녀 종목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3000m에서 김보름(대구일반)은 4분18초88로 박도영(동두천시청-4분22초97)에 여유있게 앞서 1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720|제목=이상화 빙속여제답지 않은 실수 '실격', 추천으로 구제되나|날짜=2015-10-28|언어=ko|확인날짜=2017-03-23}}</ref> 김보름은 1500m에서도 우승하며 2관왕에 올랐다.<ref name=":22">{{뉴스 인용|url=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234|제목=장거리 에이스 이승훈 1만m 우승, 종목별선수권 5년 연속 2관왕|날짜=2016-10-28|언어=ko|확인날짜=2017-03-26}}</ref>
김보름은 세계선수권대회와 월드컵 매스스타트 종합에서 우승하며 여제의 귀환을 알렸다. 상징적인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대 이리네 샤우턴(네덜란드), 2대 이바니 블롱댕(캐나다)에 이어 3대 챔피언으로 김보름이 등극했다. 진정한 강자가 살아남는 시즌 월드컵에서는 1대 마리스카 후이스만(네덜란드), 2대 김보름, 3대 프란체스카 롤로브리기다(이탈리아), 4대 블롱댕, 5대 샤우턴에 이어 6대 챔피언으로 김보름이 등극했다. 2011-2012 시즌 월드컵에 첫 선을 보이며 매스스타트가 세계대회에 등장한 이후 2011-2012 시즌은 월드컵 챔피언 후이스만이 압도했다. 2012-2013 시즌은 월드컵 챔피언 김보름이 압도했다. 2013-2014 시즌은 월드컵 챔피언 롤로브리기다가 압도했다. 2014-2015 시즌은 월드컵 챔피언 블롱댕과 선수권 챔피언 샤우턴이 양분했다. 2015-2016 시즌도 월드컵 챔피언 샤우턴과 선수권 챔피언 블롱댕이 양분했다. 2016-2017 시즌은 김보름이 최초로 월드컵과 선수권 2관왕을 차지하며 압도했다. 김보름은 또한 최초로 월드컵 종합 챔피언 2회에 오르는 위업도 달성했다. 깊은 내상을 입고 은거자중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영토를 여제가 돌아와 되찾으니 뭇 제후들이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ref name=":24" />
2016년 10월 26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51회 전국남녀 종목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3000m에서 4분17초63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김보름은 28일 1500m에서 2분02초76으로 우승했다. 김보름은 지난해 이 대회에서 1500m, 3000m 2관왕에 오른데 이어 2년 연속 2관왕을 차지했다. 여고 졸업반 박지우(의정부여고)는 2분04초77로 준우승을 차지했고 노선영(강원도청, 2분05초72)은 3위에 올랐다.<ref name=":22" />
2016년 12월 29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71회 종합스피트스케이팅선수권대회 5000m에서 김보름은 1위를 기록하며 3관왕을 차지해 여자부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김보름은 27일 3000m, 28일 1500m 1위를 차지한 뒤 마지막 날 5000m까지 석권했다. 종합 2위는 박지우(의정부여고), 3위는 박도영(동두첮시청)이 차지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대표팀의 윤곽이 나왔다. 중장거리(1500m, 3000m)에서는 김보름, 박도영, 박지우(의정부여고), 노선영(강원도청), 장수지(서울 일반)가 선발됐다. 여자 5000m는 김보름이 뽑혔다. 매스스타트는 3000m 1위 김보름과 2위 박도영, 추천선수 1명이 나선다.<ref>{{뉴스 인용|url=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1229185500007&site=1000000000|제목=-빙속- 삿포로AG 대표팀 윤곽…이상화·김보름·이승훈 태극마크|날짜=2016-12-29|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7년 1월 16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98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일반부 매스스타트에 김보름이 출전했지만 선두에 한 바퀴 뒤지면 실격 당하는 규정에 따라 실격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diodeo.com/news/view/2024706|제목=[동계체전] '실격' 김보름|언어=ko|확인날짜=2017-03-29}}</ref> 18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70으로 결승선을 통과, 1위에 올랐다. 17일 열린 3000m에서 대회신기록(4분14초54)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목에 건 김보름은 이날 1500m에서도 대회기록을 갈아치웠다. 김보름은 이주연이 보유하고 있던 대회기록(2분3초63)을 1.93초 단축했다. 노선영(28-강원도청)도 종전 대회기록보다 빠른 2분02초92의 기록을 냈지만 김보름을 넘지 못해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박도영(24-동두천시청)이 2분05초36으로 뒤를 이었다. 김보름은 노선영, 임정수(24)와 함께 강원도청 대표로 여자 일반부 팀추월에 나서 금메달을 일궜다. 김보름은 강원도청이 3분23초97의 대회신기록을 작성하며 우승하는데 앞장섰다.<ref>{{뉴스 인용|url=http://m.kgdm.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3595|제목=김보름, 전국동계 3관왕 등극|날짜=2017-01-19|언어=ko|확인날짜=2017-03-29}}</ref>
11 월 11 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의 티알프 인도어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7-2018 국제빙상경기연맨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1차 대회 여자 팀 추월에 출전한 김보름(강원도청), 박지우(한국체대), 노선영(콜핑팀)은 3분 2초 66으로 5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22105384|제목=日 빙속 女추월팀, 평창 앞두고 '무서운 질주'…ISU 월드컵서 '세계新' 우승|날짜=2017-11-11|뉴스=중앙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11-13}}</ref> 여자 매스스타트 예선에서는 김보름(강원도청)이 넘어져 결승 진출이 좌절됐지만 다치지 않아서 2차 대회에 충분히 나설 수 있게 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12/0200000000AKR20171112002800007.HTML|제목=빙속 이승훈, 월드컵 매스스타트 금메달…대회 2관왕(종합)|성=김경윤|날짜=2017-11-12|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11-13}}</ref>
11월 11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 티알프 인도어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7-2018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1차 대회 팀추월에 출전한 김보름(강원도청), 박지우(한국체대), 노선영(콜핑팀)은 3분2초66으로 5위에 올랐다. 다카기 미호, 다카기 나나, 사토 아야노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은 2분55초77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22105384|제목=日 빙속 女추월팀, 평창 앞두고 '무서운 질주'…ISU 월드컵서 '세계新' 우승|날짜=2017-11-11|뉴스=중앙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여자 매스스타트 예선에서 김보름은 넘어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12/0200000000AKR20171112002800007.HTML|제목=빙속 이승훈, 월드컵 매스스타트 금메달…대회 2관왕(종합)|성=김경윤|날짜=2017-11-12|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노르웨이에서 개최되는 2차대회에 김보름은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보름은 1차대회 1일차 매스스타트 준결승 경기 도중 다른 선수의 스키이트 날에 걸려 넘어 졌으며, 경기 후 허리에 통증을 느껴 1차대회 다른 경기 출전도 포기했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xn--q20b51t9le1sh.com/sub_read.html?uid=19371§ion=sc51|제목=[전남방송] 스피드 김보름 선수, 월드컵 2차대회 출전 포기|뉴스=전남방송|확인날짜=2017-12-12}}</ref> 12월 2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3차대회 여자 3,000m 디비전A(1부리그)에서 김보름은 4분06초41의 기록으로 16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14위를 차지했다. 3,000m에서는 다카기 미호(일본)가 3분57초09의 일본 신기록으로 우승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2/02/0200000000AKR20171202034500007.HTML|제목=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3차 대회 3,000m 14위|성=이영호|날짜=2017-12-02|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4일 열린 여자부 매스스타트에 나선 김보름은 11위에 그치면서 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김보름은 경기 초반 후미 그룹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6바퀴를 남기고 속도를 끌어올렸지만 먼저 치고 나간 선두 그룹을 다라잡지 못했다. 하위권에서 막판 스퍼트를 노렸지만 이미 선두권과 격차가 너무 벌여져 결국 11위의 성적표를 받았다. 하편, 독일의 백전노장인 45세의 플라우디아 페히슈타인(독일)은 매스스타트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49929a51806c4912ad5ee75e37e3b0d5|제목=이승훈ㆍ김보름, 월드컵 매스스타트에서 동반 부진|뉴스=한국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12-12}}</ref> 12월 10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유타 올림픽 오벌에서 열린 4차 대회 매스스타트에서 9분00초72의 기록으로 3위를 기록했다. 일치감치 선두그룹을 만들어 질주한 프란테스카 롤로브리지다(이탈리아)가 8분 53초49로 금메달, 중국의 궈단이 8분57초54로 은베달을 목에 걸었다.<ref>{{웹 인용|url=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712110100073520005174&ServiceDate=20171210|제목='컨디션 회복'김보름 월드컵 4차 대회 매스스타트 동메달: 스포츠조선|확인날짜=2017-12-12}}</ref>
[[2018년]] [[2월 19일]] [[2018년 동계 올림픽]] [[2018년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단체 추월|여자 단체 추월]]에 김보름, [[박지우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박지우]], [[노선영]]이 출전하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후반부에서 [[노선영]]이 김보름, 박지우에 비해 점점 뒤쳐졌다. 하지만 팀 경기인 만큼 팀워크가 중요시되는 종목이라 세 선수 같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보름, 박지우는 노선영을 뒤로 한 채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 중 "마지막에 어.. 네.. 그 뒤에 조금 저희랑 격차가 벌어지면서 네.. 기록이 조금 아쉽게 나온 거 같아요."라는 발언을 하여 노선영 선수를 지목한 것 같은 발언을 하여 논란을 빚었다.<ref>{{뉴스 인용 |저자= 박재덕|제목=인터뷰 직후 인스타그램 비공개한 김보름 선수…무슨 일?|url= http://news.joins.com/article/22379572|뉴스= 중앙일보|출판사= |위치= |날짜= 2018-02-19|확인날짜= 2018-02-13}}</ref> 2018년 2월 20일 오후 11시 53분, 그와 관련된 국민청원이 40만명을 돌파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142600|제목=김보름, 박지우 선수의 자격박탈과 적폐 빙상연맹의 엄중한 처벌을 청원합니다|출판사=청와대 > 국민청원 및 제안|날짜=2018-02-19|확인날짜=2018-02-25}}</ref>
- 맥스 페인 2: 맥스페인의 몰락/줄거리 . . . . 23회 일치
맥스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곳에는 [[짐 브라부라]]가 있었다. 브라부라는 맥스가 한 여성을 죽였다며 따지기 시작하지만, 무장한 자들의 공격에 쓰러지고 만다. 무장한 남자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도망치려고 하는 맥스에게 기관단총을 퍼붓지만, 근처에 있던 가스통 하나에 불을 붙이는 결과만을 낳게 된다.
청소부는 맥스를 데리고 가 셔터를 올려 주지만, 맥스가 셔터 너머로 들어가자마자 그곳에 있던 동료와 함께 공격해온다. 맥스는 이들을 처리하고 청소부들을 죽이면서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에서는 청소부들이 카우프만이라는 자가 차를 대기해놓고 있으니 모든 증거를 처리해야한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실제로 총기 작업장 입구에 있는 총기 보관소는 텅텅 비어있었다.
블라드를 찾던 맥스는 블라드의 동료인 카우보이 마이크가 단신으로 마피아 네명을 해치우는걸 목격한다. 마이크는 맥스는 보안관이니 부보안관이 필요하지 않냐면서 맥스와 동행한다.
맥스는 자고있던 소파에서 일어난다. 켜져있던 TV에서는 "주소지 불명"이 방영되고 있었다. 연쇄살인마 "존 미라"로 인해 범인으로 몰린 주인공은 싸구려 호텔에 숨어있었다. 그 때,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들겼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맥스의 집 현관문을 두들겼다. "주소지 불명"에서 문 밑으로 노트가 들어오듯이, 맥스의 집 현관문 밑으로도 [[모나 색스]]의 사진이 들어왔다. 맥스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미로로 된 아파트 복도를 달리고, 끝없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청소부들은 B동 302호에서 맥스의 행태를 감시하고, 그의 전화[* 저격수를 보고나서 윈터슨에게 건 전화와 폰섹스 통화에서 모나를 찾는 전화. 폰섹스 회사의 직원인 모나를 모나 색스와 착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전부 죽이니 뭐니 말한 결과 돌아온건 미친놈 취급.]를 감청하고, 그의 집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맥스가 그 방에 설치된 카메라로 자신의 방을 봤을 때는, 청소부들이 현관문을 열면 터지도록 폭탄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 이후 상황파악 못한 청소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셋이 다시 3층으로 올라갔을 때는 가스 배관에서 나오는 불이 꺼져 303호에 들어갈 수 있게 된 후였다. 바이올렛과 노숙자가 맥스를 엄호하는 사이, 맥스는 공사용 발판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간다.
맥스는 30층으로 올라가 코커런의 집에 도착했지만 현관문은 잠겨있었다. 맥스는 모나의 지시에 따라 그 옆집 발코니를 통해 코커런의 집으로 가기로 한다. 코크런의 옆집은 청소부들의 습격을 받아 집주인이 사망한 상태였다. 모나의 말에 따르면 이 곳은 다른 이너 서클 회원들도 살고 있다고.
맥스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청소부들을 해치우고 그 건넛집으로 들어간다. 그 집도 이미 청소부들의 습격을 받은 뒤였다. 맥스는 모나의 지령대로 발코니로 나와 차양을 타고 밑집 발코니(28층)로 옮겨간다. 그 집도 청소부의 습격을 받은 집이었다. 그 집에서 증거인멸 작업을 하던 청소부들을 모두 해치운 맥스는 한 남자가 집에서 도망치려다가 청소부들에게 죽는 광경을 보게된다. 맥스는 그 남자가 살던 집을 통해 28층에서 27층으로 내려간다.
* 30층 엘레베이터 옆의 집 문을 건드리면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아마 [[성관계|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아니 이 양반들아 밖에서는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어요.
[[짐 브라부라]]는 경찰서에 끌려온 맥스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인 용의자와 함께 다니냐고 꾸짖는다. 맥스는 청소부 사건과 게이트 상원의원 사건이 서로 연관되어 있었기에 [[모나 색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브라부라는 그러면 두 사건 모두 윈터슨 형사가 맡을거라고 하며 맥스의 총을 빼앗고 보고서를 쓰게한다. 맥스는 브라부라의 방에서 걸어나간다.
맥스는 자기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보고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게이트 상원의원의 죽음, [[스쿼키 청소회사]], [[비니 고그니티]], 이너 서클의 관계를 윈터슨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이때, 윈터슨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맥스는 부재중인 윈터슨 대신 전화를 받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걸 본 경찰 한명이 윈터슨은 전화에 대해 까칠하니 취조실에 있는 윈터슨에게 가보는게 좋을 거라고 말한다.
취조실에서 나오던 맥스는 윈터슨이 전화에 대고 모나가 체포될 때 페인이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걸 보게된다. 맥스가 누구랑 통화하는거냐고 물어보자 윈터슨은 관계자랑 통화하는 중이라며 자기 일에 신경쓰지 말라는 말을 하며 브라부라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이를 본 맥스는 윈터슨에게 의심을 품게 된다.
전화를 걸고 난 후, 유치장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청소부들이 모나를 죽이기 위해 습격한 것이었다. 모나는 침대 밑에 숨어있다가 죽은 경관의 열쇠를 훔쳐 철장문을 열고 도망간다. 이를 CCTV 화면으로 본 맥스는 캐비넷에서 총을 꺼내들고 모나를 쫓아간다. 그는 청소부들을 해치우며 주차장 밖으로 나갔지만 모나는 사라진 뒤였다. 이때, [[블라디미르 렘]]이 차를 몰고 나타난다.
* 취조실에서 나와 윈터슨과 대화한 후 경찰 테이블을 살펴보면 발키리에 중독된 상태에서 자신의 아내와 불륜관계의 우편배달부를 총으로 쏘고 그 중 하나는 전기톱으로 토막내 욕조에 담아둔 혐의로 구속된 남자가 있다. 자기가 너무 알았기에 그들이 날 제거하려고 모함한거다, 그들이 날 죽이려고 했기에 정당방위였다, 이 일 뒤에는 뭔가 커다란게 있다라고 횡설수설.
건물 최상층에 도착한 맥스는 어떤 방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엄청난 양의 시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맥스는 이것들 모두가 청소부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스는 모나에게 경찰을 불러달라고 요청했지만, 오늘 경찰서에서 탈출한 도망자인 모나는 "뒈져, 맥스"[* Go to hell, Max.]라며 무전을 끊어버린다.
맥스는 쫓아오는 청소회사 코만도를 피해 3층까지 도망친다. 하지만 길이 막혀서 관리실 책상 뒤에 숨게된다. 맥스가 청소부들에게 들키기 직전, 병원 경비원이 관리실로 들어왔다가 청소부들에게 죽게된다. 맥스는 경비원이 떨어뜨린 9mm 권총을 주워 청소부들을 해치운다.
맥스가 정신을 차리자 모나는 맥스를 부축해 불타는 놀이공원에서 빠져나간다. 맥스는 블라드를 쫓아 우든의 저택으로 가려고 했다. 모나가 그 상태로 가면 죽을거라고 말하자 맥스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모나는 맥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니 손 떼 라고 하지만 맥스는 자신이 이 일에서 손 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맥스는 모나를 데리고 우든의 저택으로 향한다.
>관심 좀 가지라고, 맥스! 너에게 말하고 있잖아! 네가 네 일을 못한다는건 알고있지, 맥스? 니가 만들어낸 난장판 좀 보라고.
- 박동진 (1922년) . . . . 23회 일치
'''박동진'''(朴東鎭, [[1922년]] [[10월 11일]] ~ [[2013년]] [[1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외교관, 국회의원이다.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와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51년 외무부에 들어와, 의전국장, 주 영국 참사관, 외무부차관, 주 월남 대사, 주 브라질 대사(1962년 10월~1968 2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2100329201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08-21&officeId=00032&pageNo=1&printNo=5173&publishType=00020 브라질 大使에 朴東鎭氏] 《경향신문》1962년 8월 21일, 1면. <!--“最高會議 第63次 常任委員會는 21日 越南共和國駐箚大使 朴東鎭氏를 「브라질」合衆國特命全權大使로,...”--></ref><ref>{{서적 인용 |저자 = 외교통상부 |제목 = 한국 외교 60년 |url = 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장 = 부록 |확인날짜 = 2015년 2월 21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11841/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보존날짜 = 2016년 3월 3일 |깨진링크 = 예 }}</ref>{{Rp|496}}, 페루 겸임대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429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79&publishType=00020 朴東鎭브라질大使 駐『페루』大使兼任]〉 《동아일보》(1964년 4월 29일) 1면 <!--“政府는 駐「브라질」大使朴東鎭씨를 駐「페루」大使도 겸임토록 28일하오 國務會議에서 議決했다.”--></ref>, 주 제네바 대사, 주 유엔 대사,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11대.12대), [[대한민국 통일부|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1976년 3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리타우딘 말레이시아 외무부 장관과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19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19&officeId=00032&pageNo=1&printNo=9377&publishType=00020 |제목= 貿易強化에 합의...韓․말聯 공동성명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1976-03-19 |인용문=<!--朴東鎭외무부장관과 리타우딘 말레이시아외상은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자유․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제국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朴장관은 지난 17일부터 3일간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후 발표한 이 성명에서...--> }}</ref> 1988년 4월 22일 한국 정부는 박동진을 주미대사에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422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4-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77&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 朴東鎭씨| 날짜 = 1988-04-22| 출판사 = 동아일보}}</ref> 박동진은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으나, 주미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민정당 전국구 예비후보 11번인 김종열이 5월 13일자로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 가족 관계 ==
|전임자 = [[김재순 (정치인)|김재순]](10대 정무차관)<br/>[[이수영 (1921년)|이수영]](10대 사무차관)
|직책 =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차관]]
|직책 = 초대 [[한-베트남 관계#대사관 및 대사|주 월남 대사]]
|직책 =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국토통일원|국토통일원 장관]]
|직책 =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 미국 대사]]
[[분류:1922년 태어남]][[분류:2013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국토통일원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최규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베트남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브라질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주오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민주정의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밀양 박씨]]
- 오세창 . . . . 23회 일치
개화파 중인 역관 [[오경석]]의 아들로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에 동참했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0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의 대표이사로 언론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천도교]]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18년]] 말부터는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1919년]] [[3월]]의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이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독립촉성중앙회]],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였다. [[서예]]가로도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위창 오세창은 [[1864년]](고종 1년) [[8월 6일]] [[한성부]] 출생으로, 중국어 [[역관]](譯官)이자 구한말의 선각자로 잘 알려진 [[오경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 아버지 역매(亦梅) [[오경석]]은 역관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 종일품)까지 올랐으며, 구한 말의 개화당의 이론적 지주이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역관]] 가문으로, 대대로 외국어를 익혀 개화 사상에 일찍 눈을 뜬 중인 집안에서 자란 데다 개화파의 거두인 스승 [[유홍기]]의 영향까지 받아 자연스럽게 개화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 관료생활과 개혁 운동 ====
[[1879년]] [[과거 제도|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박문국]][[주사]]시보로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했다. [[1886년]](고종 23년)에는 [[박문국]][[주사]]가 되어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1894년]](고종 31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軍國機務處郎廳總栽秘書官)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國通信局長) 등을 역임했다.
{{인용문2|청년시대의 제우(諸友)<br><br>먼저 청년시대의 나의 동무들을 말하면... 그때 동경에 망명하였든 인물들은 [[박영효]], [[조희연]](군부대신 다니든 분), [[장박]](대신 지난이), [[유길준]](수상 지낸 이), [[권영진]](나의 중씨로 [[경무사]]), 유세남(내무차관 다니든 이), [[김옥균]], 그러고 우리 동렬로는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윤효정]], 오세창 또 우리보담 조금 늦어 들어온 소장파에 이신(李申), [[유동렬]], [[권석하]], [[이동휘]] 등 제인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1,2차 대면에 끈친 이도 있었지만은 대개는 여러 번 만났고 일도 도모하여 본 분들로 비교적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ref>서정민,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161페이지</ref>}}
[[1902년]]부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손병희]], [[양한묵]](梁漢默) 등의 거듭된 권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 (萬歲報)》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환하였다. [[11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조선 고종|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李鍾一)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오세창은 [[경성부]]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 요리집에 [[손병희]], [[최남선]] 등 민족대표자들과 함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데 함께 서고, 대한독립 만세삼창을 외쳤다. 바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 자택에 칩거하며 서예, 서체, 서화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 서예가, 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낙관, 인장 혹은 관련 정보들을 모아 《근역인수 (槿域印藪)》를 편찬하였으며, 여러 서화가들의 다양한 낙관과 아호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그는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석하였으며, [[서화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 아들 : [[오일육]](吳一六, [[장면]] 비서관, [[경무대]]·[[이기붕]] 비서관 역임)
[[분류:1864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역관]][[분류:급진개화파]][[분류:한국의 기자]] <!-- 조선의 기자-->[[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작가]][[분류:대한제국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분류:독립협회]][[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 전쟁 관련자]][[분류:한국독립당]][[분류:의친왕]][[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종교인]][[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서예가]][[분류:김규식]][[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이승만]][[분류:이회영]][[분류:해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장기오 (공무원) . . . . 23회 일치
| 본관 = [[인동 장씨|인동]](仁同)
| 지휘 =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교육사령부|교육사령관]]
| 기타 이력 =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차관]] <br/>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장관]] <br/> [[한국근로복지공단]] [[이사 (법인)|이사장]] <br/> 민주자유당 특임위원 <br/>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
[[본관|본관(관향)]]은 [[인동 장씨|인동(仁同)]]이고 [[호 (이름)|아호(雅號)]]는 운정(雲汀)이며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다.
1958년 창설된 특전사의 전신인 공수특전단의 창설멤버로 차지철 대위(포병간부 임관), 전두환 대위(육사 11기), , 장기오 대위(육사 12기), 최세창 중위(육사 13기)와 함께 1958년 미국에 유학하여 특수레인저 코스를 수료하고 한국군 최초로 윙뱃지를 달았던 군인으로 유명하다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12기]] 출신으로 [[하나회]]의 일원이었다.
[[대한민국 육군|육군]] [[3성 장군|중장]] 예편 이후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장관]]을 역임하였고 [[1996년]] 12·12 군사 반란이 [[문민 정부]]에 의하여 사법처리가 확실시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 1997년 12월 22일 12·12 군사 반란 가담자가 사면된 뒤 대한민국과 미국의 범죄인 인도 협정이 발효될 예정을 보이자 [[1998년]] 귀국해 자수했다.
* [[1985년]] [[대한민국 육군교육사령부|육군 교육사령부 사령관]].
* [[1986년]] [[대한민국 총무처|제10대 총무처 차관]].
* [[1987년]] [[대한민국 총무처|제9대 총무처 장관]].
* [[1988년]]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장관]] 직위 퇴임.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12기]] [[공학]]사
|직책 =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차관]]
|전임자 = [[정관용 (1935년)|정관용]]
|직책 =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장관]]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분류:인동 장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나회]][[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서울공업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
- 전예용 . . . . 23회 일치
}}</ref>)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이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사회과장, 황해도청 산업부 농업과장, 경성세무서 서무과속, 개성세무서속 등을 거쳐 경기도 광주군수를 지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학무국장 보좌관으로 근무했으며 고려대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었다가 [[서울특별시 부시장]]이었고 [[6.25 전쟁]] 중 [[서울특별시장]] 직무대리를 역임했다.
그밖에 한국은행 부총재와 총재, 건설부장관, 부흥부 장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강사 등을 지냈다. [[서대문]]출신.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군수직과 [[조선총독부]] 사회과 과장, [[황해도]] 산업부 농업과장 등을 지냈다.<ref>{{뉴스 인용
[[194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이 되고 [[1945년]] [[조선총독부]] 재무부장으로 재직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 군정]]이 설치되자 학무국장 보좌관에 임명되었고, [[조선주택영단]] 이사를 겸임하였다. [[1946년]] [[조선주택영단]]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미군정]] 영림국 총무과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은행]] 부총재, 총재와 건설부 장관을 역임했고,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료로도 활동하여 의장서리를 지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에 [[서울시]] 부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전쟁 발발 사흘 후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시민들에게 통보 없이 미리 몰래 피난한 일이 있다.<ref>{{저널 인용
|쪽=550~567쪽}}</ref> 이후 문교부 총무과장,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부흥부 장관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가 되었다. [[1967년]] [[건설부]]장관이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1933년 :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 1960년 : 부흥부 장관
* 1964년 : 건설부 장관
== 가족 관계 ==
|제목 = 역대 정부부처 장차관 - 건설교통부
|전임자 = [[이석기 (1908년)|이석기]]<br/>(서울특별자유시 행정참사관)
|직책 = [[대한민국 부흥부|부흥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건설부|건설부 장관]]
[[분류:1910년 태어남]][[분류:1994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부흥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건설부 장관]][[분류:서울특별시 부시장]][[분류:한국은행 총재]][[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규슈 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이승만]][[분류:박정희]][[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정선 전씨]]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22회 일치
지도가 세세해졌다. HOI2에서는 프로빈스 하나였던 [[이오지마]]가 이오지마, 수리바치 산, 모토야마의 세가지 프로빈스로 나뉘었다던가, [[쿠바]]에 [[관타나모 해군기지]]가 추가되었다던가. 하지만 세세해지기만 한 건 아니라서 [[제주]]가 [[광주]]에 통합되었다.
로딩마다 있어보이는 전쟁 관련 어구가 나타난다.
국가의 혼란도. 장관을 갈아치우던가, 소비재에 필요한 공업력을 할당하지 못했다던가, 핵을 맞았다던가, 병신같은 이벤트가 떴다던가 하면 생긴다. 높으면 군대의 전투 능력, 공업력 효율 등을 다 깎아먹는다. 일정 수준 이상 불만도가 생기면 자국 영토에서 반란군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원자 관련 연구 속도를 가속시켜주는 건물. 핵무기 관련 연구가 완료되고, 충분한 크기의 원자로가 있으면 핵무기를 자동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핵무기 생산 속도는 원자로의 크기에 비례한다. 에너지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매뉴얼에 따르면 "핵 실험 시설"이라고 하는게 더 나았을 거란다.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지만, 한 프로빈스 밖에 지을 수 없다. 병신같은 곳에 배치해서 뺏기거나 하지 않게 하자. 적국에게 빼앗기면 그 즉시 파괴된다.
로켓 관련 연구 속도를 가속시켜주는 건물. 비행 폭탄, 전략 로켓의 생산 속도를 가속시키기도 한다.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지만, 한 프로빈스 밖에 지을 수 없다.
* 지휘관의 능력치: 지휘관의 능력치가 좋을수록 전투 효율이 오른다.
* 지휘관의 계급: 전투를 벌일때는 제일 높은 계급과 능력치를 가진 지휘관이 부대의 총사령관이 된다. 각 계급 마다 지휘한계가 있는데, 만약 총사령관의 지휘 한계를 넘는 양의 부대를 지휘하게 되면 초과된 부대들의 전투 효율이 대폭 감소한다. 이는 계급이 더 높은 지휘관이나 사령부 사단으로 해결할 수 있다.
동원령↔동원 해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없는 슬라이더. 움직이려면 디시전에서 동원령 관련 디시전을 발동시켜야한다.
이중 맨 위의 두 슬라이더는 정치 체제를 결정한다. 정치 체제가 비슷한 국가들끼리는 친해지기 쉬우며, 정치 체제는 사용 가능한 장관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정치 슬라이더 중 동원령↔동원 해제 슬라이더는 플레이어가 직접 움직일 수 없다. 반면 동원령 관련 지시전을 발동시켜 이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각 동원령들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 장관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장관]] 페이지 참조.
한 국가에 외교 활동을 하면 일정 시간동안 해당 국가에 외교 활동을 할 수 없다. 외교관이 대상 국가에 다녀오는 동안 기다려야하기 때문.
당연하지만 첩보 활동을 하다가 대상 국가에게 들키면 관계도가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성공 확률이 낮지만 꾸준히 시도하다보면 가끔씩 좋은 효과가 나올거다.
보통 제일 먼저 핵무기를 투하하는 나라다. 2차 대전에 참전하며 해금되는 디시전으로 10,000의 자금을 부어서 핵 관련 연구 청사진 모두를 습득하는 "맨해튼 계획"이 있기 때문.
코민테른의 우두머리. 1936년 기준으로 불만도가 20%쯤 있는데, 이걸 열심히 깎다보면 "대숙청" 이벤트로 불만도가 추가된다. 꽥. 대숙청 이벤트가 발생하면 연구진/장관/장군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더이상 쓸 수 없게 되니 주의. 초반에 쓸 구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김종훈 (1952년) . . . . 22회 일치
'''김종훈'''(金宗壎, [[1952년]] [[5월 5일]] ~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었고,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 2004년 8월 ~ 2007년 8월 :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고위관리회의 대표
* 2002년 ~ 2004년 : 주샌프란시스코영사관 총영사
* 1997년 : 외무부 국제경제국 심의관
* 1996년 : 외무부 의전심의관
* 1993년 :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 1991년 : 외무부 의전담당관
* 1990년 : 외무부 특전담당관
* 1987년 : [[주 캐나다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 1981년 : 주어퍼볼타대사관 2등서기관
* 1979년 :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 3등서기관
* 2015년 6월 : 국무총리 황교안 임명동의에 관한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위원
* 2014년 3월 : 새누리당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
* 2014년 2월 ~ 2014년 6월 : 제19대 국회 통상관계대책특별위원회 새누리당 간사
[[2010년]] [[12월 13일]] [[한미 FTA]]와 관련된 세미나에서 FTA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농민을 두고 '정부관리를 매수하여 농업보조금을 타는 다방 농민'이라고 비판하였다. 민주당 부대변인 [[김현 (정치인)|김현]]은 "김종훈 본부장이 숭미사대주의에 빠져 쌀값 폭락과 구제역에 피눈물을 흘리는 농민들의 아픔은 아랑곳 않고 있다"며 "터무니없는 언사를 듣고 있자니 김 본부장이 어느 나라 머슴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하였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62115 김종훈 '다방 농민' 발언 일파만파] 《노컷뉴스》 2010년 12월 14일</ref> [[진보신당]]도 "통상교섭본부장 그만 두고 다방에서 커피나 마시는 게 더 국익에 도움이 될 것"과 "한미FTA로 인해 고통당할 농민들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라고 공식적으로 비판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2141521251&code=940100 김종훈 ‘다방농민’발언에 “다방에나 가라” 역공] 《경향신문》 2010년 12월 14일</ref>
* [[한미관계]]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외교관]][[분류:통상교섭본부장]][[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바른미래당의 정치인]]
- 마니교 . . . . 22회 일치
종교적으로 서방에서는 마니교는 기독교의 이단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동방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신들의 이름을 끌어들여 조로아스터 교의 이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심지어 마니교 교단 조직 역시 "데인 마즈데이슨"이라고 칭하여 조로아스터 교의 신관 조직과 같은 이름을 썻던 것이다. 반대로 마니교 측에서는 기존 종교를 이단시 하였는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세미 크리스찬"(반 기독교인)이라고 칭하고 자신들을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칭했다.
마니는 어린 시절부터 교단에서 시리아 계 기독교 문헌을 많이 탐독한 것으로 추측된다. 마니가 신약 복음서를 인용한 발언을 보면 당시 시리아 교단에서 유행하던 통합 복음서 디아테사론(Diatessaron)[* 신약의 4대 공관복음서를 종합-요약한 서적. 아시리아 기독교인 타티아누스가 편집했다. 시리아에서 널리 읽혀졌으며 시리아의 일부 교회에서는 5세기에 금지될 때까지 정식 복음서로 쓰였다.]을 인용하고 있었다. 마니는 신비주의 문헌인 [[에녹서]]를 중시하였으며, 구약의 신은 악(惡)한 신이며, 신약의 신은 선(善)한 신이라는 마르키온 파의 사상에 영향을 받게 된다.
242년, 페르시아로 귀환했다. 마니 교단은 상당한 규모로 성장하였는데, 여기서 아브자크야는 [[시리아]]로, 아버지 파티크는 인도로 떠나서 지부를 담당하게 된다. 페르시아는 사푸르 1세가 즉위하였으며 사푸르 1세는 조로아스터 교 이외의 교단에도 관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니는 사푸르 1세로부터 제국 내에서 포교 허가를 얻게 된다. 마니교 문헌에서는 사푸르 1세로부터 3번에 걸친 초빙을 받고, 황제는 마니의 [[후광]]에 압도되어 존경하게 되었다고 하거나, 병든 딸이 있고 마니가 의술로 완쾌시켰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다만 시대배경으로 보면 사푸르 1세는 이 무렵 여러 종교가 번창하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종교 관용 정책을 펼쳤던 것으로 보이며, 니시비스의 유대교 공동체의 지도자 사무엘을 불러들여 알현을 허락했다는 일화도 있는 것으로 보아 마니는 단순히 포교 허가를 얻었을 뿐. 특권적인 지위를 얻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사푸르 1세는 조로아스터 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이고.
272년, 마니의 포교를 용인하던 사푸르 1세가 사망, 마니와 인연이 있던 아르메니아 왕 오르즈마흐드 아르다후시르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으나 1년 만에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사푸르 1세의 차남, 바흐람 1세가 즉위하였다. 이와 함께 우르즈마흐드 아르다후시르 때부터 조로아스터교의 대신관 킬데르가 대두하고,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조로아스터교 국교화 정책이 더욱 강경하게 밀어붙여졌다. 마니는 궁정의사에서 해임되어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종속국 코라살의 시의로 좌천되는데, 몇몇 문헌에서는 황제의 여동생의 치료를 실패한 것을 질책받았다는 언급이 있어 이 역시 신망을 잃은 원인으로 추측된다.
마니의 처형에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는데, 일단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크다. 본래 사산 가문 부터가 조로아스터교의 신관 출신이며, 사산 왕조의 황제는 조로아스터교의 신관으로 일하고 즉위 후에도 신관을 겸임하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신관들 역시 사산 왕조에서 관료로 봉직하였다. 사산 왕조가 곧 조로아스터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같은 이념에서는 사푸르 1세 같은 관용 정책이 오히려 특수한 사례였던 것이다.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종교를 탄압한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
크테시폰의 마니교 본부는 마니 사후 곧바로 분열에 빠진다. 마니가 후계자를 미리 지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싱과 가브리야브가 서로 후계자를 다투게 된다. 5년 간의 대립 끝에 시싱이 후계자가 되어 데인 서랄(최고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286년, 취임 후 시싱은 사프르에게 호출되어 3명의 장로와 함께 처형당하고 만다. 결국 페르시아 제국에서 탄압받은 마니교도는 [[로마 제국]]이나 주변국으로 탈출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마니교도가 급격하게 숫자를 불리게 되고, 일부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아랍계 속국왕 암르 이븐 아디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이 무렵 조로아스터교 대신관 킬데일은 유태교, 불교, 힌두교, 만다교, 기독교, 무토타크교, 잔드교를 이단으로 보고 이들이 제국에서 구축되었다는 비문을 남겼다.
시리아 기독교 계열의 자료에 따르면 조로아스터 교 신관단들은 마니교에 대해서 마치 [[후미에]] 같은 시험방법을 해서 색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 측에 선 신관단들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마니교는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남게 된다. 마니교는 경전을 확립하고 있었으며, 질서정련한 교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는 기도나 배화의례, 구전전승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고, 페르시아의 민족종교로서의 경향이 강한 탓에, 마니교처럼 복잡한 교리와 신화에서 지적인 측면에서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고 제국의 여러 속민들에게 어필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세기, 조로아스터교 신관단은 이전까지 쓰이던 팔라비 문자에서 아베스타 문자를 개발하며,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를 확립하게 된다. 성스러운 주문, 찬가, 종교법 등을 정리하여 아베스타를 편찬하며 조로아스터교가 확립된다. 게다가 484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에 반발하는 동방 시리아 교회가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승인을 얻게 된다. 이 무렵까지 마니교는 제국 내에서 은밀히 지속되었다고 여겨지지만, 내분에 더해서 지적 우위성 역시 무너지게 되어 완전히 쇠퇴의 길로 걸었다고 추측된다.
7세기 중반, [[이슬람교]]가 급격히 대두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한다.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는 타 종교에 비교적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마니교 역시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으로 오히려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앙 아시아에서 귀환한 마니교도와 중동 잔존 마니교도 사이에 사소한 대립이 있거나, 데인 서랄이 이라크 총독과 결탁하려 하는 등의 마찰은 있었지만. 오히려 페르시아 문화인들은 왠지 조로아스터교 보다 마니교에 기울면서 마니교의 세력이 회복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슬람교 세계에서 마니는 사교의 교조가 아니라 "화가의 선조"로 여겨졌다. 이슬람교 전승에서 마니는 천재 화가로서 사푸르 1세에게 기용되었으나, 신관단과 박해하여 중앙아시아로 떠나게 된다. 마니는 중앙아시아에서 문하생을 모으고 중국의 절에 벽화를 그리다가, 어느날 [[동굴]]에 들어가서 천국에 갔다가 1년 뒤에 돌아와 『아겐크』라는 화집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페르시아에 돌아가 오흐르마즈드 아르다흐시르에게 총애받아 궁전까지 얻었으나, [[바흐람 1세]] 치세에서는 소외 당하고 조로아스터 교 신관과 토론 끝에 산 채로 가죽을 벗겨진다. 제자들은 인도나 중국으로 도망치고, 머물렀던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다고 여겨졌다.
1263년 남송의 황진(黃震)은 『숭수궁기(崇寿宮記)』를 저술하는데, 이는 도교사원 숭수궁을 중건할 때 일을 적은 것으로서, 이 기록에 따르면 숭수궁은 사실 위장한 마니교 사원이었다. 원나라 때는 당국이 무관심하여[* 몽골인들은 '텡그리 신앙'(하늘 숭배)과 유사한 개념만 들어있으면 어떤 종교이건 딱히 제재하지 않았다.] 4개의 마니교 사원이 추가로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복주에 들렸던 마르코폴로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종교를 만났는데, 이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경전과 시편, 그림을 가지고 있지만 교설을 듣지 못해 교의를 모르게 되었고, 그러나 성자를 모시는 가르침은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는 이들을 원나라 궁정에 데려가 예배를 공개적으로 볼 수 있도록 허가를 얻었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는 이들을 경교 신도(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로 보았지만, 마니교 신도였을 가능성도 제시된다. 다만 이들이 마니교도가 확실한지는 알 수 없고, 마르코 폴로의 기록 역시 실증성이 명확하지 않다.
경주궁에서는 마니광불을 중심으로 하여 명사(明使)와 영상(靈相)이라는 좌우에 2명의 신을 함께 모신다. 명사는 명부(明父)가 내려보내 암흑과 싸운 신으로, , 영상은 이수(夷数=[[예수]])라고 하여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신이다. 명사는 싸우는 신이기 때문에 무장의 모습으로, 이수는 영혼을 구하는 신이기 때문에 문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명사의 생일로 일려진 3월 23일이 축일이 된다.
경주궁은 순수한 마니교 사원은 아니며 도교와 불교와 습합화된 사원인데, 마니광불 이외에도 도교의 신인 십팔진인(十八眞人)과 본래 마을의 성황신에 해당하는 경주공(境主公), 불교의 관음보살과 도교의 복덕정신(福德正神) 등도 함께 모셔지고 있어, 총 7명의 신을 모시며 그 가운데 셋은 마니교, 셋은 도교, 하나는 불교라는 복잡한 구성이 되어 있다. 이는 과거에 명사를 모시는 사원과 영상을 모시는 사원이 별도로 있었으나, 명나라 시기에 폐쇄당하여 여러 신들을 경주궁에 옮겨서 합사한 것이 계기가 된 듯 하다.
마니교의 방대한 가르침과 복잡한 우주론이 극도로 단순, 간략화 되었으며 다른 종교들과 뒤섞였으나, 핵심적인 교리(이원론적 세계관, 빛과 어둠의 싸움, 채식주의 등)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박승임 . . . . 22회 일치
'''박승임'''(朴承任, [[1517년]] ~ [[1586년]])은 [[조선]] [[조선 명종|명종]], [[선조]] 때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 자는 중포(重圃), 호는 소고(嘯皐)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수제자였다.
권신들의 발호에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하다가 [[윤원형]] 등이 물러난 뒤에 관직에 나갔다. 또한 이황의 학풍을 후학에게 전달하는데 힘을 기울여 퇴계 학파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남인]]과 일부 [[북인]]에 가담하였다.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때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된 [[박은 (1370년)|박은]]의 5대손이다. 아버지 박형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뒤에 안동을 떠나 처가가 있던 영천(榮川)으로 이주해서 살게 됐다. 어머니는 영천 지역의 명문가인 예안김씨 출신으로,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박승임은 7형제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황의 제자가 된 박승임은 특히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그리고 주자서(朱子書) 등 경전의 학습과 이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 뒤에도 의심 가는 곳이 있으면 빠짐없이 기록하여 퇴계를 찾아가 해석,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을 숙성시켰다. 또한 스승 이황 외에도 [[이현보|농암 이현보]]와 [[이언적|회재 이언적]], [[권벌|충재 권벌]] 등 인근의 이름난 [[성리학]] 학자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시세(時勢)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에 이조 좌랑, 사간원 정언, 현풍 현감, 진주 목사, [[관찰사|황해도 관찰사]] 등을 엮임하였다. 명종의 외숙이며 권신인 [[윤원형]]의 전횡이 심할 때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퇴계의 학풍을 후대에 계승하였으며, 여러번 불렀는데도 고사하였다. 그 뒤 [[을사사화]] 직후인 1547년(명종 2) 고향으로 돌아와 이황을 모시고, 의례(儀禮)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강독하며 다시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때 이황으로부터 학문적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 관료 생활 ===
박승임은 1570년(선조 3) 승정원 좌승지에 오른 뒤 을사사화의 거짓 공훈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명종 연간의 권신들과 척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간하였다. 이후 권신, 척신들의 비난 여론에 직면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병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571년(선조 4)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 부제학과 도승지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경주 부윤으로 발령되었고 이후 1577년(선조 10) 강화 부사,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 등으로 부임했다.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박승임은 세금을 가벼이 하고 진휼을 실시하여 민폐를 제거하였다. 한편 [[김안국|모재 김안국]] 제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는 등 민생의 안정과 교화의 보급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이때 어사(御史)로 파견된 정이주(鄭以周)는 그의 치적을 조사하여 박승임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는 ‘치행제일(治行第一)’이라는 보고서를 올렸고, 선조는 박승임의 공로를 치하하여 특별히 옷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박승임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려 하자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고 한다.
만년에 장남 박어와 셋째 아들 박조를 잃었다. 1585년(선조 18)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 뒤 1586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70세였다. 사후 경상도 영주의 [[구강서원]], 영주 향현사(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 가족 관계 ==
박승임은 7형제 가운데 6남이었는데, 맏형 박승문은 훈도(訓導)를 지냈고, 둘째형 박승건은 생원(生員)이었다. 셋째형 인암(忍菴) 박승간은 1600년(선조 33) 박승임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예문관, 사간원 등 주요 관직에 올랐다. 넷째형 박승준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또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는 박승임의 6촌 형이었다.
* 고조부 : 박규(朴葵, 음직(蔭職)으로 황해도·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 역임)
**** 아버지 : 박형(朴珩), 성균관 진사
그는 퇴계의 성리설(性理說)을 이어받아 심학(心學)의 측면을 강조하였고, 이와 기에 관해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계승하였다.
== 관련 항목 ==
- 오준 . . . . 22회 일치
{{다른 뜻|[[오준 (1587년)|대한민국의 외교관|조선의 문신 오준(吳竣)]]}}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55|10|4}}<ref name="이력서">{{언어링크|ko}} {{인용|chapter-url=https://archive.is/7iEfk |chapter=1056 재외공관장 인사_첨부.hwp |title=재외공관장 인사 〔제10-56호 보도자료〕 |publisher=[[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인사운영팀 |date=2010-01-28 |url=http://archive.is/GjVKV |archiveurl=https://archive.is/7iEfk |archivedate=2018-09-16 |accessdate=2018-09-16}}</ref>
|본관 = [[해주 오씨|해주]]
|경력 = [[UN]] [[유엔경제사회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 의장</br>주 [[UN]] 대한민국대표부 대사</br>제15대 주싱가포르대한민국대사관 대사</br> UN 군축위원회 의장<br/>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http://unpeace.khu.ac.kr/ 유엔평화학과] 교수
아버지는 독립 유공자로서 외교부의 창설 멤버인 [[오우홍]] 미국 초대영사이며, 어머니는 건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한 [[진인숙]] 여사다. 어머니의 고향이 [[개성시|개성]]이고 장인도 함경도에서 월남한 실향민이라 평소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한다.<ref>{{서적 인용|저자=정희순|제목=오준 유엔대사 특별 인터뷰|날짜=2015년 2월|출판사=우먼센스|url=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089&contents_id=82676}}</ref>
1978년 외교부에 입부하여 외교관 생활의 3분의2 이상을 [[UN]] 등 다자외교 분야에서 근무했다.
* 1985년 2월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 2등 서기관
* 1993년 8월 외무부 장관 보좌관
* 1996년 12월 ~ 1999 주말레이시아대한민국대사관 참사관
* 1999년 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연구부 연구관, 부이사관
* 1999년 7월 ~ 2001년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ASEM업무담당 심의관
* 2001년 ~ 2003년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국제기구 제2심의관
* 2003년 ~ 2005년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국제기구 정책관
* 2007년 8월 외교통상부 장관 특별보좌관
* 2008년 3월 외교통상부 다자외교조정관
* 2010년 1월 ~ 2013년 제15대 [[주싱가포르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직책 = [[주싱가포르 대한민국 대사관|주 싱가포르 대사]]
- 홍국영 . . . . 22회 일치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4월 28일]]([[음력 4월 5일]])<ref>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5일 세 번째 기사</ref>)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豊山)이며, [[자 (이름)|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 시절 때부터 [[조선 정조|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 풍산 홍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 대해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대개 홍낙춘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고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으나, 홍낙춘은 원빈이 후궁이 되기 전에는 관직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홍국영은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그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 김씨<ref>홍국영의 대고모가 정순왕후의 6촌 김면주의 생모(김한희 처)였다.</ref>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다 한다.
[[1772년]] 9월 정시(庭試: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ref>15명 중에 15위였다. 출처 조선문과방목 영조48년 정시</ref> 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이듬해인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ref>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와 이덕일《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고즈윈, 2008)에서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한 달에 바로 세손의 시강원에 임명되었다고 적고 있다. </ref>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조선 정조|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 <ref>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규6836</ref> 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그를 전격적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다. 이어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킨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원빈 사후 약 2개월 동안 물러났던 적이 있었음) 이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역임했다.
정조 초기의 가장 주요한 사업이라면 규장각 설치가 꼽히는데, 정조의 최측신이었던 홍국영 역시 규장각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된 관료였으며, 유명한 규장각 서얼 사검서관의 서용 역시 홍국영의 천거와 설득으로 이뤄졌다. 다만 홍국영 축출 후 규장각 내각일기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삭제하여 새로 작성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홍국영이 규장각에서 실제 이행했던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5년 후인 정조10년([[1786년]])에 생을 마감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퇴진시키고 숙위소를 혁파시켰으나 동시에 그의 백부 [[홍낙순]](洪樂純)을 정승에 임명했다. 따라서 한동안 그의 세력은 조정에 계속 건재했으며 그 자신도 계속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에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반대로 조정에서 축출 당한다. [[1780년]] 1월에는 홍낙순이 파직과 문외출송되고, 다음달 26일 김종수의 탄핵상소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그는 방출 처분을 받았다. 김종수의 탄핵 상소를 시작으로 하여 홍국영에 관한 탄핵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한중록》은 김종수의 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강원도]] [[횡성]], 그 다음에는 [[강릉]]으로 방출되었던 홍국영은 결국 이듬해인 [[1781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정조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이찬]]([[조선 정조|정조]]의 이복 아우)을 죽게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 중에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 가족 관계 ==
== 관련 작품 ==
- 홍헌표 . . . . 22회 일치
}}</ref> ~ [[1966년]] [[4월 20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했다. 광복 후 [[미군정]]에서 관료로 발탁되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과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에서 내무부 차관, 체신부 장관 등을 지냈다. 체신부 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입건되었으나,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도 수록되었다.
*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 평안남도 이사관
* [[함경북도]] 사무관
*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함북지부 감리관
* 1950년 : 내무부 차관
* [[성균관대학교]] 부총장
* 1963년 : 체신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차관]]
|직책 = [[대한민국 체신부|체신부 장관]]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 (당홍)]]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기술 . . . . 21회 일치
보병, 주둔병, 민병 사단과 헌병 여단에 관련된 연구. 처음부터 연구할 수 있다.
산악병 사단에 관련된 연구. 처음부터 연구할 수 있다.
해병 사단에 관련된 연구. 1916 Infantry Division 연구와 1916 Light Infantry Division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차량화보병 사단에 관련된 연구. 1931 Infantry Division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계화보병 사단에 관련된 연구. 1942 Motorized Infantry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병 사단과 기병 여단에 관련된 연구. 처음부터 연구할 수 있다.
공병 여단에 관련된 연구. Army Logistics 1911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연구를 할 때 마다 새로운 공병 여단이 해금되는 것 뿐만 아니라 보급 거리, 운송력, 공군 기지 건설 속도에도 보너스가 붙는다.
공수부대에 관련된 연구. 1926 Infantry Division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운송력 보정, 전력 회복 보정, 전략적 재배치 효율, 공군기지 건설 보너스 등등에 관련된 연구. 상당히 복잡한 테크 구성을 띄고 있다. 전략적 재배치 명령을 내리기 위해 이곳에서 Mobilization 연구를 해야한다.
대공포의 성능, 해군 유닛에 부착되는 대공 부속에 관한 연구. 처음부터 연구할 수 있다.
대공 여단에 관한 연구. Great War Static Anti-Air Artillery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대공자주포 여단에 관한 연구, Improved Anti-Air Brigade 연구와 Light Tanks 트리의 Early Tank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연구 시간을 줄여주고 사격통제장치를 업그레이드 해주는 연구들. Cryptography 트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처음부터 연구할 수 있다.
첩보 활동, 군사 유닛에 대한 정보, 기습 기회 등에 보너스를 주는 연구들. Computers 트리의 부속 연구로 생각하면 될 만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로켓과 터보제트엔진의 개발에 관련된 트리. 해금 이벤트를 위해서는 Industry 탭의 Experimental Rocket Engine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 해군폭격기 관련 트리
* 전략 폭격 관련 트리
* 전술 폭격 관련 트리
* 전투기 관련 트리
* 공수강습 관련 트리
- 김영철(배우) . . . . 21회 일치
[[대한민국]]의 배우. 얼굴, 목소리에서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거기서도 '''광기 넘치는 악역 보스, 리더'''[* [[태조 왕건]]의 [[궁예]], [[야인시대]]의 [[김두한]], [[서울 1945]]의 문정관, [[대왕 세종과 장영실]]의 [[태종(조선)|이방원]], [[공주의 남자]]의 [[세조(조선)|수양대군]] 등.] 연기는 최상급으로 평가받는다.[* 비슷한 연배이면서 보스나 리더 역할을 주로 맡는 배우는 [[서인석]], [[이덕화]], [[유동근]] 등이 있는데, 서인석은 노태우 역할 등 겉으로 무른 역할을 맡기도 한 적도 있었으나 서인석과도 포지션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덕화는 용모의 특성상 대부분 배역이 악역 보스이거나 안티 히어로이며, 서인석이 2000년대 들어 원톱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유동근과 포지션이 가장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유동근이 드라마나 현대극보다 사극에서 더 두각을 드러낸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남성적이고 강건한 보스 역할에서는 김영철이 단연 최고다.] 주로 맡는 캐릭터들도 남성미가 돋보인다. 특히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태조 왕건)|궁예]] 역할을 맡아 타이틀롤인 [[왕건]]을 제치고 광기와 카리스마의 완벽한 조합이 이루어진 연기로 극을 압도적으로 이끌며, 주인공이 아닌 역할로 연기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상 수상자가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할이 아니라는 사실이 당시 관례에서 보면 꽤나 파격적인 것이었으나 드라마 스토리상 실제 드라마를 보면 [[궁예]]가 주인공급이었다. 당시 김영철의 궁예 연기가 2000년 한 해 내내 전국민의 이슈였을 정도로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예상외로 비난이나 논란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사실 2000년도 연기대상은 사람들 대부분 KBS는 김영철, MBC는 [[전광렬]]이 탈거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대상 줄 거야! 안 줄거야!--]당연히 젊었을때는 나이 때문에 이런 캐릭터를 할수는 없었고 그 외 다양한 역할을 맡으면서 성장해왔다. 중장년이 된 이후에도 카리스마 보스가 아닌 평범한 시민의 역을 연기하기도 한다. ~~남자 시리즈 전문 배우~~[* [[위기의 남자]], [[공주의 남자]], [[적도의 남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출연. 그 중 [[위기의 남자]]를 제외한 3편은 각각 2011년 하반기, 2012년 상반기, 2012년 하반기에 KBS에서 방송되었다.]
[[1973년]] 극단에 입단해 연극배우 생활을 하던 중, [[1977년]] [[동양방송]] 공채 18기 탤런트로 브라운관에 데뷔하여 조연으로 주요 드라마에 출연하다가, [[언론통폐합]] 이후 KBS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80년대 TV 문학관에서 거의 주인공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선우휘]] 원작의 단독 강화에서는 대사 없는 시체로 나온 적도 있다.] 가장 인상적인 연기는 이병주 원작의 변명에서 독립운동가의 역할과 [[프랑스]] 지식인[* 원작에서 주인공이 고민하는 것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였던 블로크 교수의 총살 에피소드이다. 김영철은 여기서 1인 2역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탁인수와 프랑스 교수 블로크를 모두 맡았다], [[심훈]] 원작의 [[상록수(소설)|상록수]] 주인공, [[벙어리 삼룡이]]의 주인공 등이다. 체육인 출신이었던 덕에 젊은 시절에는 몸도 좋았던지라 KBS 특집극에서 [[손기정]]을 맡은 적도 있다.[* KBS 1TV에서 82년 1월에 5부작으로 방영했던 '맨발의 영광'이란 미니시리즈이다. 2013년에 작고한 [[강태기]] 씨가 이 드라마에서 손기정의 빛에 가려진 또 한 명의 [[마라톤]] 영웅인 남승룡 선수 역을 했다.] 대하드라마 [[토지(소설)|토지]]에서 김환 역을 하기도 했다.
[[주현]]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양동근]]의 출세작인 1992년작 KBS 드라마 [[형]]에서 고생 끝에 출세한후 냉혹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동생 역할을 맡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아출신인데 막노동꾼으로 동생을 공부시키는데 전력한 형의 밑에서 현실을 비관해서 운동권에 투신해서 감옥에 갔다온 후, 냉혹한 사업가로 변신해서 가족도 떠나가는 역할이었다.[* 자신의 형을 거둬 먹여준 은인에게 부동산 사기를 치기 까지 했다.] 마지막회 마지막 장면에서 형을 생각하면서 [[하모니카]]를 부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1993년]]에 히트한 SBS 드라마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에서 남편 "강세풍"역할을 맡아 부인 역할을 한 [[이미숙]]과 사실적인 코믹함을 바탕으로 한 부부연기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 이 드라마는 여러 다른 스타일의 부부들이 주인공으로 [[길용우]]-[[양미경]], [[유동근]]-[[이미영]], 김영철-이미숙이 각각 다른 3가지 부부생활을 보여줬다. 당시 김영철은 가부장적으로 행동하려 하지만 기가 센 부인에게 그게 잘 먹히지 않아 부인과 매일 부딪히는 남편 '강세풍'연기를 통해 코믹한 연기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당시 [[이영애]]가 조연(길용우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는데 이 작품이 이영애의 첫 TV드라마 데뷔작이기도 하다.] 극 중 김영철과 이미숙이 싸우는 장면이 백미로 꼽히는데, 김영철이 늦게 들어와서 이미숙에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뭐해! 밥차려 와!"라고 소리치면 이미숙이 노려보며 "어휴 저놈의 밥통대왕!"이라고 맞받아치며 화를 내는 장면이 대표적인 장면으로, 당시 한국의 부부관계 문제를 공감하도록 하면서 코믹함도 동시에 잘 보여준 부부연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해 SBS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기대상 시상식을 시작했고 1회 대상을 이 드라마의 [[이미숙]]이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밥통대왕"이라는 대사가 한때 시청자들(특히 주부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일으키며 유행어가 될 정도였으니 인기가 엄청났던 부부드라마계의 히트작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출연한 드라마 [[바람의 아들]]에서는 극 중 [[신현준(배우)|신현준]]과 [[이병헌]]의 친형으로 등장하여 국회의원 집안에 입양된 신현준이 복수에 사로잡힌 인물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하차한다. 이듬해 방영한 '머나먼 나라'에서는 [[김민종]]의 아버지이자 세탁소를 운영하는 절름발이로 등장하는데 방영한지 20년이 다된 지금도 이 드라마의 팬이라면 가장 먼저 회자되는 연기일만큼 일품이다.
'[[옴 마니 반메 홈]]', '짐은 미륵이니라' 등 김영철 특유의 몸동작과 말투로 표현된 궁예의 대사들은 수많은 대유행어를 탄생시켰고, 전국민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궁예가 자주 썼던 '[[관심법]]'이란 대사는 너무 크게 유행하는 바람에 단순한 [[유행어]]를 넘어 '상대방의 뜻을 아는척하며 넘겨짚는 행위'라는 뜻의 [[신조어]][* 물론 역사기록에 실제로 궁예가 썼던 걸로 기록된 말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신조어라 하기는 애매하지만, 드라마 이전에 역사연구하던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일반인들이 그 단어를 알거나 쓰는 경우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수준이 되어 지금까지도 인터넷이나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태조 왕건이 방영되던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말 못하는 아기였던 학생들도 쓸 정도이다. 안타깝게도 좋은 뜻으로 쓰지는 않고, 주로 상대의 태도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쓰인다. 아예 관심법 대신 '궁예질'이라는 단어를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한다. 어찌보면 궁예질이 진정한 신조어라 볼 수 있다,] '태조 왕건' 방영이 끝나고도 코미디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러 연예인들이 궁예의 유행어를 따라하고 궁예 패러디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는데, 심지어 10년이 지난 뒤에도 예능에서 궁예 성대모사(?)[* 아는형님에서 김희철이 하는데 비슷하다.]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로 시청자들의 기억에 깊게 남는 대히트를 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또 나이 지긋한 분들은 김영철을 볼때면 안대 안하고 왔냐고 물을정도. 2017년 현재도 포털에 궁예를 검색하면 김영철이 여전히 함께 뜬다.
당시 1999년~2000년대 초반에 [[개그콘서트]]로 큰 인기를 얻은 동명이인 [[김영철(개그맨)|개그맨 "김영철"]]의 활약으로 중견 배우 "김영철"로서의 이름에 대한 인지도를 점점 잃어가던 시기였는데, [[태조 왕건]]으로 대부분 중년배우에게 큰 관심이 없는 어린이들에게도 "김영철이 누구냐?"고 물으면 "궁예!"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엄청난 인기와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태조 왕건' 이후 어떤 새로운 사극이 나와서 다른 배우가 궁예 역할을 한다해도 김영철만큼 할 수 없을 거라는 평가를 받고, 모든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궁예 = 김영철"이라는 확고한 공식을 만든 그야말로 사극계의 [[레전설]].
대중 전체에게 장기간 공개되는 대하 TV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라는 부분 때문에 궁예나 김두한처럼 대중 전체적으로 엄청난 임팩트를 준 작품은 아니지만, 분명 레전드로 남은 역할은 또 있는데, 바로 [[달콤한 인생(영화)|달콤한 인생]]의 조폭 두목 회장님 역할이다. [[이병헌]] 역할 한명의 감정변화에 집중되는 영화인데다가 [[황정민]]이나 [[김뢰하]]처럼 뛰어난 연기파 배우들까지 개성이 매우 강한 조연으로 나온 영화임에도 결국 사람들 뇌리에 가장 많이 남은 연기는 김영철의 연기였다. 김영철만의 보스 감성에다가 중년의 나이에 어린 여자([[신민아]])를 사랑하는 남자의 쑥스러움에, 다른 남자를 견제하는 수컷 그 자체로서의 남성적 수치심까지 완벽하게 표현해내어 '역시 연기는 김영철' 소리를 들었던 작품.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이병헌과 단둘이 서서, "너, 정말 이럴거냐?", "너 그 애 때문이냐?" 라고 했던 대사는 명장면으로 남았고 김영철 특유의 포스가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10여년 뒤에도 수많은 개그나 코믹 재연 프로그램에 패러디되었다. 개그콘서트에서는 아예 장기간 정식 패러디 코너가 있었다.[* 물론 개그맨 [[김준호(개그맨)|김준호]]가 보스로서 김영철 말투만 흉내낼뿐, 내용은 전혀 관계없고 부하들(주로 [[유상무]])에게 당하기만 하는 보스 역할.]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유행어의 원조이기도 하다. 이 유행어에 관한 소문이 있는데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플짤들을 보고 재밌어한 김영철의 아들이 이를 직접 본인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볼 때는 별말 않던 김영철이 감상을 끝내고 아들의 방문을 나가면서 뒤돌아보며 나지막히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말하고 나갔다고….
2011년 여름에 방영한 KBS [[수목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수양대군 역을 맡아 [[충공깽]]급 연기를 선보였다.[* 다만 연령 고증은 조금 아쉬운데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당시에 36세이고 사망 당시에 52세였는데 김영철은 이 당시 이미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물론 연기력이 두말할 나위 없이 뛰어났기에 이 문제가 상쇄되기는 하지만.] 미화없는 실제 세조의 정체성에 가장 가까운 연기를 펼쳐, 2017년까지 제작된 영화 및 드라마 등 세조관련 모든 영상매체에서 '''역사상 최고의 세조 캐릭터'''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정적에 대한 처단에 망설이는 모습이 없고, 왕좌를 갖기 위해 또한 지키기 위해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가히 괴물같은 연기를 선보였다. 궁예나 이방원 역과는 묘하게 다른느낌을 주는 또 하나의 인생배역이다.
한편 궁예와 김두한 이후 연기대상 시상식과 인연이 없었는데.. 2011년도 KBS 드라마들이 전체적으로 부진했던 묘한 대진운(?)에다가 인기와 호평을 동시에 잡은 역할이었기에 많은 네티즌들이 '이번만큼은 김영철이 최우수상 아니면 대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괴물같은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연말 시상식에서는 무관에 그쳤다.[* 대상은 [[신하균]]에 돌아갔고 최우수상도 [[박시후]]가 탔다. 신하균의 연기력에는 이견이 없었고 박시후도 뭐 탈만하다는 의견도 있고해서 그냥 넘어갔다.]
앞서 서술한 배역들과는 다르게 몇 몇 작품에서는 약간 모자란 역할을 연기하기도 했는데 조민수와 호흡을 맞춘 MBC 특집극 [[미끼와 고삐]][* 조선작의 원작이지만 윤미라가 나온 TV 문학관판과 다르게 완전히 코믹 시트콤화 되었다. 장모님을 조민수인줄 알고 '''까꿍'''하는 장면은 2011년이라면 플짤로 돌만한 개그.]도 그렇고 심지어 영화 [[그놈 목소리]]에서는 어리숙한 서민적인 형사로 등장해 '''나체'''를 선보였다.
MBC주말드라마 [[가화만사성(드라마)|가화만사성]]에서는 [[봉삼봉]] 역할을 맡았는데 따뜻하지만 무뚝뚝한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했다. 가족들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마음의 어긋난 벽이 무너지고 마침내는 아내를 위해 마음을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자상하게 변하는 봉회장 그자체로 열연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큰 울림을 이끌었다. 다만 중간중간 극중 캐릭터 붕괴로 이기적이고 자기주장만 관철하는 부분도 많이 나왔는데, 그런것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2017년 8월 13일자 48화 방영분에서 '''"왜 벌을 안 주십니까?"''' 로 역대급 명연기를 뽑아내었다. [[http://entertain.naver.com/comment/list?oid=213&aid=0000982042|관련기사]] KBS 연기대상 연말 시상식에서도 [[남궁민]]과 함께 연기대상 후보로 유력시되었으며, 결국 [[천호진]]과 함께 '''공동 대상을 수상'''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637751|관련기사]]
[[2001년]] 7월 승용차를 몰다가 앞차를 들이받고 달아났으며 이 때문에 도로교통법상 조치불이행혐의로 불구속입건이 된 바 있었고, 그 이후에는 본인이 속해 있었던 매니지먼트사 사건과 관련되어 한동안 안방극장에서 활동이 뜸해졌다가 [[2006년]] [[KBS 1TV]] [[서울 1945]]로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 2006년 || [[서울 1945]] || KBS1 || 문정관 역 ||
* 1988- 1989년 [[대신증권]][* [[나라의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어떤 전설적 방송사고]]와 관련된 증권회사다.]
- 폐비 윤씨 . . . . 21회 일치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년]] [[7월 15일]] ([[음력]] [[윤달|윤]] [[6월 1일]])<ref name="tae">폐비 윤씨 태실의 태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현재 폐비 윤씨]] 태실 등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며, 관련 내용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자료 [http://www.museum.go.kr/NMK_DATA/redfish/cutator/2011/cu-253/book.html] 에서 일부 확인 가능하다.</ref><ref name="ja">{{서적 인용
|출판사= 국립중앙박물관
본관은 [[함안 윤씨|함안]](咸安)이며, [[윤관]]의 11대손이다.
흔히 생년이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폐비 윤씨 태실의 태지에는 그녀가 [[1455년]] [[음력 6월 1일]]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ref name="tae"/><ref name="ja"/>.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 성종|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하였다.<ref>
연산군은 즉위 후 선왕의 후궁을 죽이면 안된다는 언관들의 간언을 묵살하고 성종의 후궁들 몇인을 처형한다.</ref>
훗날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한 데 이어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사후 [[경기도]] [[장단군|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년(성종 19년)경 [[한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덕양구|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王妃)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폐위되어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그의 평가는 투기심과 질투심이 많은 여자로 평가받아왔다. 또한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부녀자의 덕을 중시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사랑을 중시하였다고도 한다.<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091 네이버캐스트 인수대비]</ref>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39977 김처선과 폐비 윤씨, 실제 관계는 어땠을까? - 오마이뉴스]
[[분류:1455년 태어남]][[분류:148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비]][[분류:폐위된 왕·황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기도 출신]][[분류:사사된 사람]][[분류:무오사화 관련자]][[분류:함안 윤씨]][[분류:조선 성종]][[분류:조선 덕종]][[분류:15세기 한국 사람]]
- 박세직 . . . . 20회 일치
[[육군사관학교]] 제12기 출신이다. [[박희도]][*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1공수여단장이었으며, 1985년 12월부터 1988년 6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박준병]][*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이었으며, 이후 국군보안사령관과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소속)을 지냈다.]과 함께 [[하나회]] 회원이었다. 그리고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등을 가리켜 '''쓰리 박'''이라고 하였다.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채명신]] 초대 파월사령관이 미군들과 파병 관련 한국 지원 및 작전 구역 설정, 그리고 지휘체계 설정 협상하는 과정을 지원하며 활약하였다. 이후 1976년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고, 1979년 군사정보 참모를 지냈다. 박희도나 박준병과는 달리 하나회였음에도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지 않아서 [[김영삼]] 정권 때 화를 겪지 않았다.
1980년 보병 제3사단 사단장을 역임하다가 그 해 8월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에서 예편하여 대통령이 되고 제8대 수도경비사령관이던 [[노태우]]가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자 노태우의 뒤를 이어 제9대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냈다. 이 때까지는 잘 나가는 듯 하였다.
그러나, 1981년 8월 '''박세직 사건'''으로 [[소장(계급)|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였다. 겉으로는 박세직이 육군사관학교 동기의 사업을 도와 준다는 이유로 비리를 저릴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과 [[허화평]], [[허삼수]] 등 측근 세력이 '하나회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박세직을 예편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사건은 1973년 일어난 [[윤필용 사건]]에서처럼 수도경비사령관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보안사령관인 상태에서 보안사령관이 동기생을 수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박세직은 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예편하였다. 후에 박준병은 조사 결과 박세직이 여기저기 “차기 대통령은 나”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1985년 2월 노신영 내각이 출범하자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지냈다. 1986년 제4대 체육부 장관으로 취임하고, '''제24회 [[1988 서울 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12월 배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1990년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91년 2월에 사직하여, 2개월의 단명시장에 그쳤다. 이것도 1991년 일어난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수서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모로 루머가 많았는데, 특별히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2017년 10월 10일, 다시 큰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박세직의 손녀와 수영선수 [[박태환]]의 교제 사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 축하한다는 반응도 많지만 교제 상대의 조부가 [[하나회]] 출신 주요인사라는 것이 주목받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 박주영 . . . . 20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축구 해외파 선수들)]
초년병땐 한국 공격수의 평균보다 키핑력이 좋았지만, 세계레벨에서는 키핑력을 활용하는 면에서 약점을 보였다. 낮은 레벨에서는 시야와 패스 능력이 좋아서 공을 끌어도 별 상관이 없었지만 높은 레벨일 때는 약점으로 작용했던 것. 등진 상태나 회전하면서 다음 동작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을 자주 보여주었는데, 프리미어리그 레벨의 수비수들은 박주영보다 운동능력이 뛰어났기에 박주영의 다음 동작이 따라잡히면서, 결과적으로 공을 질질 끌면서 템포만 잡아먹는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활약상을 쭉 돌이켜보면 들쭉날쭉 극심한 널뛰기를 뛴 것 같지만, 사실 뜯어보면 의외로 일관성이 있다. 실력에 비해 활약상이 저조했을 때는 예외없이 '''팀에서 에이스 대접을 받지 못할 때'''였다. 일종의 멘탈 문제라고 할 수도 있는데, 본인 위주로 팀이 돌아가야만 플레이가 온전히 살아난다. 이것을 한때 설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모나코를 제외한 아스널 셀타비고랑 비교해 2016년 4월 현재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FC서울과 박주영을 보았을때 확실해 보인다. ~~왓포드랑 알샤밥은 판단이 힘들다~~
아니, 그런 큰 경기에서 골을 넣어준다는 것 자체가 축구선수의 중요한 실력이니만큼 박주영은 실력없는 선수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한 위치는 절대로 아니다. 이동국이 성실한 국가대표(내신에 강하고 수능에 약한 학생)였다면 박주영은 좀 많이 뺀질거리지만(?) 현대축구에 요구하는 장점을 확실하게 갖췄고 필요할 때 뻥뻥 잘 터뜨려줘서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던(내신은 바닥인데 수능은 기가 막히게 잘 치는 학생) 캐릭터다. 박주영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양쪽에서 모두 멘탈이 매우 강한 편이란 점은 분명하다. 다만 태도문제나 일관성 없는 행보 등으로 인한 논란이 좀 많은 것이 문제.
* 관중영: 경기에 계속 나가지 못해서 관중이나 다름없는 신세라 관중+(박주)영.
* 모나코인, 모나코박 : 병역기피 시도 후에 한국 브라운관에 자주 비치기는 하는데, 한국 스포츠계 초유의 국적미상 상태의 선수라 이 선수의 국적이 도대체 어디인지 논란이 분분했던 가운데 일부 인물들은 그가 모나코인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 밥꼼수: 병역과 관련해서 일반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온갖 법조항 사이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붙은 비아냥. '밥'은 박주영의 다른 별명인 '밥줘영'에서 유래.
* 박XX : 일부 입이 거친 사람들이 지나친 비속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잠시잠깐 불렀다. 당연히 평소에는 한국 축구에 관심 없고 앞으로도 없을 월드컵 냄비들이다. 왜냐면 2014년 발효된 별명인데 그 전까지의 행보를 고려해 볼 때 월드컵에서 똥 쌀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병역기피 등등의 행적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사실 어찌 보면 일반명사에 가까운 비속어들로 특정인물을 호칭하기에는 대한민국에 박씨가 너무 많다.
* 봉와주영 : 소위 황제훈련 도중 봉와직염을 앓으면서 유래했다. 많은 남성들이 군대 시절 행군과 함께 접하게 되는 병명이다. 대부분의 남성은 군생활 도중 행군경험이 있으므로 약간의 위생관리만으로도 발병을 억제 가능함이 널리 알려진 바이며, 주로 더럽고 게으른 고참이나 게으르진 않지만 바짝 쫄아붙어 있는 이등병들이 자주 걸리며 모두의 골머리를 썩게 하는 병으로 유명하다.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짜증스러운 주제였기 때문에 수많은 네티즌들은 프로 축구선수의 위생관리에 대한 의문과 함께 위생상태 불량에 관한 혐오감을 표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더러운 질병이라 생명력이 길 수 없는 별명으로 잠시잠깐 반짝했다.
* 승부사 : 2010년 국가대표 훈련시 한 동영상에서 "야 형 승부사야 임마" 하면서 코너킥 위치에서 골대 안으로 공을 집어넣은 것에서 유래. [[http://tvpot.daum.net/v/-eIjWeuKyho%24|#]] 이후 인생의 분수령이나 갈림길마다 귀신같은 결단력을 보여주면서 재조명. 골결정력과는 전혀 관계 없음. 이따금 박주영의 경기력이 좋았을 떄 신문 기사에서도 박주영을 승부사라고 호칭하며 이 별명의 영향인지 그 빈도가 다른 선수들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긴 하나 그 날 경기 폼이 좋으면 종목 불문하고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크게 구별될 정도의 의미는 없다. 결국 기막힌 승부수를 던지고 연이어 성공한 그의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은 별명이다.
* 기자들이 무척 싫어하는 선수들 중 한 명이다. 한창 박주영으로 뜨거울때 인터뷰 요청을 안 받아주고 피해다녀서 그렇다고 한다. 심지어는 [[셀타 비고]] 이적 후에도 저런 태도로 일관해서 결국 현지에서도 비난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http://shootkim.khan.kr/493|박주영의 인터뷰 거부에 대한 관련 글]] 공식 인터뷰는 피한 적이 없으나 축구 선수에게 이런저런 기자와 언론의 사적 인터뷰 제의를 다 거절하면 공식 인터뷰라는 것이 몹시 드물기 때문에 프로 선수는 구단의 사업을 돕고 지지해주며 돈을 쓰는 팬들에 대한 의리상 인터뷰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까지는 아니어도 필요가 있다. [[여담]]으로 그의 성격자체가 한 몫했고 그 성격의 소유자가 어린 시절 국내 기자들에게 시달리다보니 그렇게 된 듯.
* K리그 팬이 아니면 잘 모르던 사실인데 FM 제작사인 스포츠 인터랙티브에서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2006버전부터 포항 스틸러스의 싫어하는 인물에 박주영을 넣어놨다. 그것도 혐오도 90에 영구적으로 혐오 체크까지. 실은 한국 FM 평점 주는 것은 한국 사람이 한다. 그래서 [[이영표]] 선수가 싫어하는 선수에 [[이임생]]이 들어가 있을 정도. 하지만 [[독자연구|주관적인 평가가 많이 개입되면]] 나중에 제작사에서 모든 데이터를 취합한 뒤 상식껏 조정을 한다고 한다.
* 2006~2008년 사이에, 너구리알이라는 사람이 박주영키우기 게임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관계자의 요청에 의해 현재는 모든 자료가 소실된 상태. 군복무 중 다른 게임으로 고소크리 맞고 그때까지 자신이 만든 게임을 전부 삭제했다. 덕분에 영창도 다녀왔다. 참고로 [[지만원|고소한 사람]]은 [[엔하위키]] 시절에 작성금지 되었다가 이 [[나무위키]]에서는 해금이 되었다.
* 2000년대 중반 박주영을 주인공으로한 [[육성 시뮬레이션]] [[플래시 게임]]인 '축구왕 박주영'이 있었다. 박주영을 키워 프로선수로 만드는 게 목적이고 중간 중간 '[[불멸의 이순신]]' 플래시 게임이 들어가있었지만 축구협회측에서 합의한 초상권 협의 종료로 결국 사라졌다. [[http://upload.inven.co.kr/upload/2014/06/26/bbs/i2943558749.jpg|관련 사진]]
- 배영수 . . . . 20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top1=한화 이글스/선수목록, top2=야구 관련 인물(KBO))]
[include(틀: 관련 문서3, top1=한화 이글스/2018년, top2=참교육, top3=펠릭스 호세)]
대표적인 별명으로는 삼성 시절의 {{{#blue 푸른 피의 에이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전에서 30년 발언으로 비록 오해지만 한국에서 밉상으로 찍힌 [[스즈키 이치로]]에게 빈볼을 던져 얻은 '''배열사'''가 있다.[* 모바일 게임인 [[게임빌 프로야구/2011]]에서도 배영수의 이름이 배열사로 나온다. 사족으로 본인의 의사보다는 고참이였던 구대성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26/2010042601473.html|입김]]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때는 "'''초'''절정'''미'''소년'''배'''영수"에서 따온 '''CMB'''로 삼성 팬들 사이에서 불린 적도 있다. 그리고 [[슬러거]] 유저 한정으로 배[[포크]][* 이거 때문에 배영수가 정통포크를 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배영수의 포크는 반(半)포크성으로 스플리터에 가깝다. 떨어지는 각도는 적지만 스피드는 빠른.]란 별명도 있다. 물론 못할 때에는 얄짤없이 배영구,[* 왠지 모르게 순박해 보이는 외모에 초년생때는 영구와 비슷한 까까머리를 하고 다닌 데다가 이름이 비슷하기도 해서인지 평상시에도 애칭으로 배영구라고 불리는 일도 있다.] 더 내려가면 배민폐, 패영수, 배0승으로 격하되며 심할 경우엔 '''패왕'''[* 말 그대로 '''敗'''王. 특히 1승 12패를 기록한 2009년이 절정이었다. [[선동열|이 사람]] 때문이라는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 때 배영수는 야구를 그만두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다만 아래 이야깃거리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배영수의 부진 원인이 06시즌의 역투다 보니 삼성 팬들에게는 이래 저래 아픈 손가락이라 부진한 성적에 비해 옹호를 매우 많이 받았'''었'''다. 성적과 컨디션에 상관없이 '''[[참교육|영쑤]]'''라는 별명도 자주 쓰인다.
2014년 12월 3일 2명의 선발 용병과 [[윤성환]], [[장원삼]]이 선발로 4명의 선발이 확정 된 삼성에게 5선발 자리는 선발 유망주에게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고,[* 배영수의 성적 자체가 선발 확정시켜 줄 정도로 좋은 편이 아니었고, 장원삼과 윤성환 둘 다 나이 30을 훌쩍 넘겨 언제 노쇠화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5선발 육성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선발을 육성하지 못한 것의 부작용은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으로 주전 투수들이 이탈하자 바로 나타났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출장 기회를 얻고 싶었던 배영수는 삼성에서 한화로 FA 이적하게 된다.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았으며[* 애초에 당시 대구상고의 에이스였던 [[장준관]]이 1999년 대구 개막전 시구자로 나서며 이미 1차지명은 장준관으로 정해져 있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준관이 계속 슬라이더 위주의 피칭을 했던데다 지명을 앞두고 계약금을 올리고자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삼성에선 배영수로 선회했다. --그리고 장준관은 [[LG 트윈스|모 팀]]으로 드래프트 지명이 되는데...--] 1999년 11월, 팀 고졸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이었던 2억 5천만 원을 받고 입단했다.[* 이 금액은 1년 후 대구상고 [[이정호]]가 삼성에 입단하며 '''5억 3000만원'''이라는 계약금에 입단하며 경신된다.]
2010 시즌을 끝으로 [[FA 제도|FA]]가 되는데, [[한신 타이거즈]]에서 배영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나, 한창 좋았던 시절의 배영수만 알고 있는 한신 스카우트 말이나 당시 배영수의 상태를 보면 그저 찌라시에 불과할 가능성이 99%. 그리고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스카우터가 배영수의 피칭을 보기도 했다. 과거 배영수의 가능성을 보고 이런 관심을 보이는 듯.
2015 시즌 후에 팔꿈치 뼛조각 수술을 받았다. 예정되는 복귀 시점은 5월이였으나, 재활이 지지부진하면서 결국 2016년 시즌을 말아먹을 것으로 전망되며 먹튀가 확정되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330849|관련 기사]]
재활이후 5월 20일 경희대와의 3군 경기에 등판했는데, 당일 경기에서 2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그런데 '''속구 최고구속이 131km/h, 평균구속이 129km/h'''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109&aid=0003322082|관련 기사]]
6월 14일 소프트뱅크 3군과 한화 2군간 교류전에서 3⅔이닝 1실점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15/2016061501455.html|관련기사.]] 이날도 역시 속구 구속이 130km/h도 안나왔다. ~~우완의 유희관~~
올해 배영수의 문제는 잃은 구속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제구력 위주의 피칭을 해야 하는데 [[유희관]]과 다르게 제구와 구위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 피홈런이 많은 것은 물론 피안타율과 피장타율이 각각 3할대, 4할대 후반인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투수 본인의 자신감을 잃었다. 은퇴 드립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김성근|금지어]]와 연관 깊다. 학창시절 은사로 포장되고 인연이 되었다지만, [[살려조]] 못지않게 특유의 혹사 패턴에 걸려들었다. [[조인성(야구선수)|칰금님]] 못지 않게 성실하게 잘 따라주었으나, [[권혁]]과 함께 관리가 필요했던 선수를 선발과 불펜 구분 없는 하루살이 야구에 갈아 넣었던 것이 컸다. 이미 삼성의 우승에 팔을 바치고 토미존 수술을 받던 그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44&oid=109&aid=0002067249|토미 존 수술을 창안한 프랭크 조브 박사가 직접]] 수술 결과를 점검했고 조브 박사의 제자가 집도했는데, 이리 엉망인 선수는 처음이라 평했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재활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이야기가 있는 선수가 이적 후에 그 따위로 굴렀으니.. 결국 2015년 팔꿈치 뼛조각 제거 시술을 받았다.
이는 샤인볼(공의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던지는 것)을 시도하는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행위이다. 규정에 의하면 로진백을 터는 행위는 스피드업 관련 규정에 따라 1회 경고, 2회부터 볼 판정을 받을 수 있으며, 현장 조사결과 허벅지에 왁스 바셀린 등이 묻어있어 부정투구임이 확인된다면 퇴장될 수 있다.
배영수 본인은 매우 당혹스러워 하며 부정투구를 하지 않았고, 허벅지 유니폼에 문지른 기억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패널들 모두 영상이 증거로 남아있고, 고의성 여부를 떠나 의심의 여지를 두는 행동을 한 배영수에게 잘못된 점이 있으며 규정상 명백한 부정투구라고 강조하고 있다. 고작 유니폼에 공을 문지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부정투구에 관한 룰이 생긴 이상 행위의 의도나 경중을 떠나서 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이야기.
* 배영수 아줌마,[* 현지 대구쪽의 삼성팬들이 부르는 애칭은 영수아지매.] 배영수 이모, 꽹가리 이모 등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유명한 팬이 있다.[* 원래는 [[김실]]의 팬이어서 실이아줌마라고도 불렸었다.] ~~직관팬들은 시끄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항상 배영수 유니폼을 입고 와서 꽹가리를 두들기며 응원하는 중년 여성으로 예전에는 [[김실]]을 응원하셨으며, 이 후에는 아들이 배영수와 동갑이라서 배영수를 응원했다고 한다. 삼성팬들에게 워낙 유명인사였던 지라 2014년 7월 29일 경기에서는 삼성 구단에서 이 배영수 이모를 시구자로 선정하기도 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1&article_id=0000388502|#]] 하지만 이 날 경기는 [[차우찬]]이 [[차르봄바|핵폭발]] 하면서 패배... 이 분은 배영수 이적 후 [[김상수(타자)|김상수]]로 갈아타셨다고 한다. ~~이젠 상수아지매~~
- 승리(빅뱅) . . . . 20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4]
||<#fde100> '''본관''' ||<(> [[이(성씨)|함평 이씨]] ||
예능을 굉장히 열심히 한다. 객관적으로 봐도 잘하는 편이나, 가끔 의욕이 너무 넘쳐 참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근래에는 연차가 되면서 --나이가 들면서-- 치고 빠지는 것에 능숙해졌으므로 원만한 진행을 한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잘한다. 특히 일본어는 간사이벤(오사카 사투리)까지 구사할 정도로 유창한 실력이다. 이는 멤버 형들의 특색이 너무나 뛰어나서 본인만의 특기를 개발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것이라 한다.
[[Last Dance Tour]] 서울 막콘에서 이에 대해서 태양이 언급을 했는데, 막상 승리는 그에 대해 크게 상관쓰지 않는 듯 하다. 우리는 우리니까 괜찮다고.
음악 만큼이나 사업에 관심이 많다. 본인 말로는 접었지만 댄스 아카데미(조이 댄스 플러그인뮤직아카데미)도 했었고[* 주간 아이돌에 따르면 선생님과 학생이 눈이 맞아 학부모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멤버들의 말에 따르면 와플 라이센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한국 매니지먼트 권리[* 호날두가 내한할 경우 일정 및 관련 매니지먼트에 대한 권리. 일견 거창해 보이는 권리긴 한데, 실은 대단한건 아니고 호날두의 아시아 매니지먼트를 총괄하는 싱가폴 지인이 "한국 담당은 네가 해라."하고 던져준 것. 정작 호날두는 한번도 한국에 온적이 없으며 관계자에 의하면 방한 의향도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 [[https://sports.new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469&aid=0000313277|그런데 써먹을 날이 오고야 말았다.--는 방한취소--]]]도 승리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2018년에 11년만에 호날두가 방한할 예정이라 존버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호날두가 하도 오지 않아서 라이센스는 폐업하여 이번 방한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밝혔다.[[https://sports.news.naver.com/wfootball/news/read.nhn?oid=343&aid=0000083110|그리고 호날두도 방한 취소를 했기 때문에 라이센스가 있었어도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업가적인 면모는 [[나 혼자 산다]] 출연분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데, 한국어를 비롯해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강남대로 한복판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등, 가수가 아닌 사업가로서의 승리를 보여줬다. 또한 [[미운 우리 새끼]]에서 이상민과 일본 여행을 할때도 드러나는데 정말 철저하고 독하게 준비하는 면을 보여서 홍진경과 함께 연예인이 자기 이름 걸고 사업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한다는걸 보여주는 좋은 예시.
|| '''8월 4일''' ||<|2><:> 서울 ||<|2><:> 한국 ||<|2><:> 장충체육관 || ||
|| '''12월 15일''' ||<|2> 인텍스 오사카 5 호관 || ||
* [[복면가왕]] 82차 경연(가명: [[우리 엄만 내가 제일 예쁘대요 고슴도치]])[* 참고로 라디오에서 밝히기를 3라운드 준비곡은 김준수의 'Beautiful thing'을 부를 예정이었다고 한다. [[http://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57160#08e1|관련 기사]] 그 외에도 보면 알겠지만 복면가왕에서도 빅뱅의 노래들이 자주 경연되었으며 대표적으로 [[거짓말(빅뱅)|거짓말]], [[FANTASTIC BABY]], [[뱅뱅뱅]], IF YOU 등이 있다.]
* 또다른 주목할 만한 외모적 특징은 [[다크서클#s-1|다크서클]]. 그래서 데뷔 초 별명이 죄다 [[판다|팬더]] 관련된 것이었다. 다크서클을 제거하기 위해 성형외과를 찾은 적이 있는데 의사 왈, "다크서클이 생기는 이유는 세가지인데 비염이 있어야 하고 간이 안 좋으며 눈의 구조가 얇아야 한다. '''근데 승리씨는 그걸 다 갖고 있다'''."라며 다크서클을 못 없앤다고 했단다.(...) 데뷔한지 10년이 넘은 요즘은 다크서클이 이전에 비하면 많이 옅어졌지만, 팬더라는 별명은 여전히 유효하며 솔로 콘서트 굿즈를 아예 팬더 캐릭터로 출시 했다. WHERE R U FROM뮤비에서도 팬더들이 먹는 대나무 막대를 드는 장면도 있다(!)
* (옛)승리 코디는 승리 사이즈, 키 등 모두 모르는 태도로 일관했다. --스토롱베이비 무대를 보자 저게 사이즈를 알면 입힐 옷이냐-- 승리가 한번은 "누나, 저도 지용이형처럼 멋있는 옷 입혀주시면 안돼요?" 라고 했으나 코디님께서 웃으시며 "야 사람이 멋있어야 뭘입어도 멋있는 거야" 라고 하셨고 승리는 그런 코디에게 "자신에게 멋진 조언을 해주셨다" 며 넘어갔다. 또한 평소 얘, 쟤, 걔 등으로 부르거나, 다른 맴버가 입고 남은 옷을 주거나, 다른멤버와 비교하는 모습 등이 카메라에 자주 잡혔었다. 그 외에도 판타스틱 베이비는 쎈 컨셉의 노래기 때문에 쎈 이미지가 필요하다며 머리를 밀것을 강요했다. 승리는 머리를 밀고난 뒤 많이 속상해하고 죽을 것 같았다며 울었다고 했으나 이젠 진짜 괜찮다고 한 일이 있었다. [[안습]]
* 승리 인터뷰 中: 전 사실 지금껏 활동하면서 혼자서 울고 그런 적 많았어요. 방송에 데이고 다치고. 대중들은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의 감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방송에서 비춰진 모습이 우울하고 그러면 '쟤 왜 저래, 왜 이렇게 거만해' 그러잖아요. 아무리 어떤 일이 있어도 밝게 웃고 감정을 컨트롤해야 하는데 제가 어린 나이에 그런 걸 하는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얘기할까요. 좀 쉬고 싶었어요. 근데 비즈니스라는 게 꼭 그렇게 가는 게 아닌거고. 저희가 생각하는 건 한틈도 대중이 저희로부터 시선을 놓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대중은 빨리 질려요. 핸드폰도 빨리 바꾸고, 빅뱅이 쉬고 있을 때 다른 가수들이 너무 치고 올라오면 우리도 사라질 수 있겠다 싶기도 하고. 그래서 빅뱅은 쉬지만 그때도 두 멤버(대성, 승리)는 뮤지컬도 하고, 엠씨도 보고 다방면에서 활동해야죠. 관객들 보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요. 옆에 있는데 저도 벅찬 거에요. 한곳에 집중해 있고, 시선이 마주치고. 저도 무대에 섰을 때 그런 게 희열이 느껴져요.
* 대성: 7장인가, 거기에 저하고 승리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옥상에 올라가선 진지하게 우리를 돌아보며 화이팅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것들도 사실 제 경험과 무관하진 않죠. 저도 비주얼이 안된다, 실력이 모자란다 이런 얘기 많이 들으면서도 힘들게 연습하고 남몰래 아픔 같은 걸 겪기도 했거든요.
* 일본어 실력이 상당하다. 개요에 서술되어 있듯 사키가케, 남자의 요리 등의 프로그램에서 MC를 맡기도 했으며(AKB48 멤버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외국인이 보면 일본인으로 착각할 수준. 한 재일 교포에 따르면 승리는 일본 표준어 뿐만 아니라 사투리[* 일본의 간사이 지역에서 사용하는 사투리([[칸사이벤]])다.]도 어색함 없이 잘 해, 정말 원어민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너무 오버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해서 듣기 민망하다는 반응도 있다. 승리의 일본 방송을 끝까지 볼 수 있는 팬은 없다 카더라.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는지 15년 MAMA에서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총 4개국어로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 4개국어 수상 소감은 16년 [[골든디스크 시상식|골든디스크]] 등 각종 시상식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데, 골든디스크 시상식의 경우 분명 한국에서 상을 받으면서도 '''한국에 계신 [[VIP(빅뱅)|VIP]] 여러분''' 이라고 --해 팬들을 [[안습]]하게-- 했다. --얼마나 한국에 안 왔으면-- --한국에 계신 VIP가 습관이 되었을까-- 그리고 데뷔 10주년 '''국내''' 콘서트에서는 가득 찬 팬들을 향해 VIP '''재팬''' 이라고 말했다. 팬들이 '아아~ 승리야~' 라는 식으로 야유하자, ' '''VIP 제 팬''' 이라고요!' 라고 이야기 했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속이 상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와중에 환호하며 소리지른 섬녀...~~ 그러나 빅뱅 내에서 승리가 가장 팬 서비스가 좋고 한국 팬을 가장 아끼기에 최근 일본 스케쥴을 많이 돌며 습관처럼 입에 붙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는 의견이 많다. 유행어와 신조어에 민감한 승리가 오죽 해외 스케쥴을 많이 뛰었으면 '히트다 히트'를 모를까...
* 일본에서 꽤 인기가 있다.[* 일본계의 대도서관이라 불리는 [[히카킨|HIKAKIN]]의 게릴라 라이브에서도 얼굴을 비췄다.]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문화를 정확히 알고 오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승리가 그런 케이스. 일본은 개그코드가 한국과 많이 달라 한류열풍으로 간 사람들이 일본 방송에서 크게 성공을 못할 때가 많다. 바닥부터 겪어봐야 일본 현지인의 말투나 문화, 개그코드를 이해하기 쉽다. 승리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처절하고 비참한 예능현실을 많이 맛봤다. 일본 현지 예능인들도 잘 나가고 싶지 않아하는, 한국에 비유하자만 케이블 방송보다 못한 수준의 예능프로에 나가 열심히 했고, 이를 토대로 일본 방송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승리는 그나라의 문화도 무시하지 않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는 일본의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의 문화를 비하하는 것은 참지 않는다. 사실 당연하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하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한국요리만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MC로써 다양한 요리를 소개하고 잡지에 코너를 만들어 한국음식 소개함] 스태프에게 잘하고 방송을 열심히 해서 일본 방송에서는 MC나 고정게스트로 자리잡았다. 또한 첫 일본 CF를 승리가 따냈다. 승리만 보고 빅뱅에게 CF를 줄만큼 신임을 얻고 있다는 증거.
* 빅뱅이 단체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에피소드 머신으로 활동하고 있다. 빅뱅의 에피소드의 70%가 승리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그래서 예능에서 제일 폭로를 많이 하고 폭로를 많이 당한다(...). 그래도 끝엔 항상 지드래곤이 승리를 칭찬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한다.
- 영주시 . . . . 20회 일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철도]]교통 중심지로서 시내에 있는 [[영주역]]에서 [[중앙선]], [[영동선]], [[경북선]]이 교차한다. [[철도청]] 시절에는 전국에 5개밖에 없었던 지방철도청이 자리잡기도 했다.(2013년 현재는 코레일 경북본부) 과거 철도로 번성한 도시였지만, 오히려 지금은 노후되고 도심을 이리저리 관통하며 찢어놓는 철도가 도시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여론도 높아진 상태다.
1980년 영주군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어, 남은 영주군 지역이 영풍군(榮豊郡, '영'주와 '풍'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새로 지었다)[* [[영풍그룹]]과는 관계 없다.]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2018년 6월 26일 서울신문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영주시청이 2019년부터 2022년 3월까지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소수서원)~단산면 병산리(선비세상 관광단지) 2.8㎞ 구간에 총 사업비 100억원(국비 50억, 경북도비 5억, 영주시비 45억원)을 투입해 모노레일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모노레일 설치와 함께 탑승장 3곳과 정거장 5곳, 회랑(1548㎡)을 설치하고 모노레일 차량 14량(8인승)을 투입한다고 한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uperidea&no=65078|꿈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train&no=868480|이루어진다]].
== 관광 ==
* 과거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극장 2개, 소극장 4개가 있었으나 90년대 말에 소극장 3개로 줄더니, 2018년 현재는 소극장 1개 밖에 안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예당 시네마'는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데, 상가빌딩 2층을 쓰는지라 관이 1개밖에 없고 그 크기도 작다. ~~하지만 의자는 [[CGV]]에서 뜯어온 듯하다.~~ 그래서 대부분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면 안동으로 이동하여 [[메가박스]]나 [[CGV]]를 이용한다. ~~심지어 문경시에도 메가박스가 있는데!~~
고속버스터미널이 2017년에 택지로 이전하면서 해당 부지가 재개발되어 6개관을 갖춘 [[롯데시네마]]가 들어섰다. 다만 관당 규모는 작아서 90석 밖에 안 된다.--영화관도 없는 동네라는 말 이제 안 들어도 된다--
* 시민회관이나 강변무대에서 가끔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이 있다.
|| '''관외사전투표''' ||<:>{{{#1870B9 36.31%}}}||<:>22.97%||<:>17.36%||<:>13.31%||<:>9.22%||<:>△13.34 ||<:>||
* 시작한 지 많이 지났지만 버스 정류장, 관광 안내판을 개선 중이다.
* 영주시 동 지역에는 관광명소가 별로 없다. [[소백산]], [[부석사]], 소수서원 같은 영주에서 알려진 관광지는 모두 영주시 읍면지역, 즉 옛 영풍군 관내에 있던 것들이다.
* 삼정승고택([[정도전]] 생가 복원 건물)과 구 도립도서관 사이 강둑에 [[박정희]] 기념식수가 있다. 대통령 취임 전에 와서 심은 거라 "장군" 기념식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과거 1961년 영주에 집중[[호우]]로 인한 대[[홍수]]가 나서 피해복구를 위해 군인들이 동원되었을 때 함께 참가했기 때문. 현재의 제민루가 있는 언덕과 시립도서관이 있는 산 사이(그리고 구성공원까지)는 원래 연결되어 있었으며, 서천 물길을 돌리는 직강공사를 하면서 절개 및 발파되었다. 그 때의 흔적으로 강바닥에 다른 곳에는 없는 바위가 드러나 있다. 현재의 나무는 처음 심었던 나무가 말라죽자 1979년에 다시 심은 것이다. 관련글: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931|#1]][[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0226.010140730260001|#2]][[http://blog.daum.net/shgh1225/8762740|#3]]
* 시내 서쪽을 흐르는 서천에는 교량 4개(서천교, 영주교, 가흥교, 제2가흥교)가 있는데 일부 다리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LED 조명등이 설치되어 있다. 강변에는 [[제방]]과 둔치가 있으며 시민들은 이곳을 뚝방(...)이라고 부른다.[* 영주 출신의 밴드 [[볼빨간사춘기]]의 곡 ‘가끔씩(우지윤의 보컬 스틸)’에서 언급된다.]둑 위에는 작은 길이 있어 운동하거나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으며 시민회관/주공아파트 주변에는 운동 시설과 쉼터, 식당 등이 있다. 제민루부터 경북전문대까지는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철에 [[벚꽃]]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 [[원세훈(1951)|원세훈]] : 전 행정안전부 장관,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부대~~
* [[정병주]] : 전 특수전사령관.
- 전형필 . . . . 20회 일치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 ~ [[1962년]] [[1월 26일]])은 [[대한민국]]의 [[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며 [[교육]]가이다. 자는 천뢰(天賚), 호(號)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훈민정음]] 원본 등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들을 되찾아와 1938년 조선 최초의 근대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중에 한국의 문화재들을 지켜내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유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고, 간송미술관에서는 [[1971년]] 봄부터 '겸재전'(謙齋展)주제를 시작으로 2014년 가을까지 일년에 2차례씩 무료 일반공개를 하였다. 현재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간송컬렉션을 선보이고자 동대문디자인프라자&파크에서 간송문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2012년 12월 14일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전형필의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하여 지정 관리하고 있고, 2014년 10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1906년]] [[서울특별시|서울]]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32년]] [[서울특별시|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고서, 고서화를 취급하던 서점)을 인수하고, 우리민족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문화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34년]]에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매입하여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으며,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웠다.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회이다.
[[1962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포장]] 과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들을 연구정리하기 위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개편되었고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의 이름으로 봄과 가을 일년에 두차례 일반공개를 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1942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에서 소재되어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만원에 판매하였다.
* 1906년 7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 112번지에서 중추원의관 전영기와 밀양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정선
* 1938년 북단장 소재 사립미술관 보화각 설립
*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추서
* [[간송미술관]]
[[분류:1906년 태어남]][[분류:196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문화유산]][[분류:박물관학]][[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간송미술관]]
- 정재학 (1856년) . . . . 20회 일치
|직업 = [[은행장]], [[관료]]
'''정재학''' (鄭在學, 1858~1940)은 [[대한민국]] [[금융업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민족자본은행]]의 [[개척자]]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은행산업의 대부다 .<ref name="ReferenceA">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7</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19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19편"</ref> 조선 말기부터 일제 치하에서는 [[은행]] 경영진들이 [[관료]]나 [[왕실]] 지방 토호 가운데에서 배출됐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맨주먹으로 일군 자금으로 55세 무렵 [[은행장]]에 오른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ref name="ReferenceB">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3</ref><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667~670</ref>
[[정재학]]은 1905년 [[군수]]자리에 오른다. 고급관료와 친분을 맺어 순흥군수에 이어 개령군수를 맡게 됐다. 전임 군수와 달리 세금도 낮춰주고 밥 굶는 이들이 없게했다. 장사꾼들에게는 밑천도 대줬다. 그는 군수 직책에 있으면서 은행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1906 년 8월 [[대구상공은행]]이 설립 될 당시 이병학, 이종면 등의 부호들과 힘을 합쳐 대주주로 등극하면서 감사역도 맡았다.<ref name="ReferenceA"/><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0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2</ref>
일본인 지인의 참여는 조선총독부의 간섭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다. 사카모토가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 <ref>동아일보 1995년 11월 9일 1면</ref> 에 의해 대구에 설립된 일본계 남선은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대구은행]]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정재학의 경륜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4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3</ref>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1921년 결혼, 여아를 뒀지만 1930년 아내가 사망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대구 남산동 거주 김분조와 재혼했다. 그런데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정인택 수기 겨자씨한알 =2</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한 뒤 물러나던 중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ref>민족문화대박과사전 독립운동가 김진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0638</ref><ref>독립기념관 29 김진만 독립운동가 서한집 http://www.i815.or.kr/media_data/data_chong/32.pdf</ref> <br> [[김진만]]의 손자 [[김일식]] 역시 1920~1930년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김진만과 함께 [[서우순]] 자택에 침입했던 광복단원들 가운데 [[정재학]]과 친척관계인 [[정운일]] ( 鄭雲馹 )도 있었다. 정운일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언도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 경상북도 상임고문과 반민특위 경북 도위원장을 역임했고 건국포장과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ref>민족문화백과사전 정운일 편
정인택 역시 항일학생운동에 가담, 경찰에 잡혀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와 교편도 잡고 부산소년원장을 지냈다. 소년원장을 그만둔 뒤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최선을 다했다. 대구시립희망원을 맡으면서 유아에서 노인까지 갈 곳 없는 이들을 보살폈다. 원장관사마저 병실로 개조한 뒤 원내 마당에 조그만 흙벽돌집을 세워 거처로 삼았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1966년]] 경향신문이 제정한 제1회 '국민의 주는 희망의 상'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내무부장관 국회사무총장 등 각계에서 격려 축전을 보냈다.<ref>경향신문 1966년 9월 28일 3면</ref><ref>경향신문 1967년 8월 17일 8면</ref> 정인택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당선소감에 자신이 정재학의 증손자라고 적고 있다.<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10일 7면</ref>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은행정책은 시기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1910년대에는 [[일반은행]] 신설을 장려했으나 1922년 이후 신설을 불허하고 합병정책으로 [[민족자본은행]]을 일본인소유은행으로 전환시켜갔다. 1910년대 수도권및 지방에 잇따라 신설된 민족자본은행들은 총독부의 관리를 받는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의 주도로 일본인은행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묘민 [[임호연]](1920~ 2009)은 일본대 전문부 경제학과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귀국 후 항일 지하 조직 활동을 하다가 2년간 옥고를 치른 항일 투사 경력의 경제부문 대기자다.<ref>동아일보 온라인판 2009년 7월 28 일 애국지사 임호연 선생 별세 http://m.donga.com/List/3/70060000000002/20090728/8760617/1</ref> 그는 1982년 [[매일경제신문]]에 [[대구은행]] 관련 연재기사 19편을 집필했다.<ref>매일경제 1981 년 4 월 21 일 1면 재계산맥 연재 사고</ref>
임 대기자는 [[정재학]]에 대해 " 거리의 일개 건달에서 수만금의 재산가가 되고 군수라는 관직에 오르기도 했고 풍운아인데 [[대구은행]] 설립을 통해 일제의 대항 세력이 되어 지체를 높인 특이한 존재 "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의 대구은행 설립은 대구를 [[봉건시대]]에서 [[자본주의]]경제로의 이행으로 이끄는 혁명이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정재학]]이 설립했던 [[대구은행]]은 일제에 대한 커다란 저항세력으로 한국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길러주는데 큰 몫을 했다"고 강조했다.<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0편</ref>
[[대구은행]]의 이 같은 [[민족자본]] 수호 의지는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자본구성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미군정]]이 우리 정부에게 넘겨준 주요 은행 주식분포를 보면 [[조흥은행]]의 경우 한국인 지분비율이 54%에 달한 반면 [[상업은행]] (36%) [[저축은행]](6.3%) [[신탁은행]] (9.4%) [[상호은행]](9.5%) [[조선은행]](3.5%) [[식산은행]](6.7%) 등 나머지 은행들은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에서 미군정 관리에 이어 우리 정부로 귀속됐다. 일제 당시 총독부 등이 민족자본 기반의 은행들을 수탈, 국유화시키거나 일본인에게 주식을 넘겼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78년 1월12일 5면</ref>
그러나 오구라는 행장에 오르지 못한 반면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은 1940년 4월 27일 열린 이사회에서 대표 이사 (대표취체역) 겸 행장에 선임됐다. 이듬해인 1941년 7월 총독부는 전시금융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금융기관 정리통합 방침을 밝혔다. 예상과 달리 [[경상합동은행]]은 [[대구상공은행]]과의 합병대신 1941년 8월10일 서울 소재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됐다. 정운용은 한성은행 주식 1220주를 보유하면서 [[상무]] [[취체역]](상무이사)로 발탁됐다. 해방 후 한국인 최초의 은행장이 되는 계기였다. 오구라는 이에 상심한 듯 은행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본업인 전력산업에 집중한다.
[[1897년]] [[탁지부]] 참서관을 지내고 [[1905년]]과 [[1908년]]에는 경북 [[순흥군]]과 [[개령군]] 군수에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에서 관리를 맡기도 했으나, 이후 [[대구광역시|대구]]와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대자본가로서의 활동이 더욱 두드러진다.
* [[1897년]] 탁지부참서관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940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진격의 거인/91화 . . . . 20회 일치
* 부관이자 [[지크 예거|짐승 거인]]을 계승한 콜트는 적의 참호를 뚫기 위해 "턱의 거인"과 "차력의 거인"을 동원하자 제안하지만 거절 당한다.
* 가비는 속옷바람으로 투항하는 척 적의 기관총 참호에 접근, 기습 적으로 수류탄 다발을 선로에 투척해 열차포를 탈선시킨다.
* 하지만 가비가 미처 도망치기도 전에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하고 파르코가 달려가 보지만 한 발 늦는다.
그때 소년의 "형"이 나타난다. 소년은 형은 알아보지만 그가 왜 군복을 입고 있는지 몰라한다. 포격의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것 같다. 형이라 불린 청년은 소년에게 철모를 씌워서 급히 이탈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피하기도 전에 적 진지에서 기관총세례가 쏟아진다.
지휘관인 마가트 대장은 콜트에게 상황을 묻는다. 콜트가 유탄이 직격해 전방의 전사대가 전멸했으며 이 이상 참호를 연장하는건 무리라고 보고한다. 그 보고를 들은 마르코는 "무리"라는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그건 "명령"이냐고 빈정거린다. 옆에 있던 부관이 마가트 대장님께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비난한다.
* 한편 그 옆의 콜트는 마가트 대장을 상대로 설득에 들어간다. 현재 그들 부대의 목표는 기관총 진지 뒤에 있는 열차 선로다. 하지만 보병들이 참호만 파대서는 승산이 없게 됐다. 적 측의 참호가 훨씬 견고하게 구축돼있다. 요새의 지원포격도 있기 때문에 전진하는건 말도 안 되고 여기서 버티는 것 조차 의미가 없다. 이대로는 전부 포탄의 밥이 될 뿐.
* 그때 관측병이 "놈"이 나타났다고 알린다. 그것은 "장갑열차"다. 거기에 달려있는 열차포는 "대거인포"라 불리는 연합의 신병기다. 장갑열차에 총 4문이 장착돼있다. 100mm짜리 철갑포로 보통 거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홉 거인"이라 해도 한 방이면 처리할 수 있는 괴물. 마가트가 우려한 것이 저것이었다. 콜트는 턱과 차력은 재빠른 거인이므로 목덜미를 당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만 마가트는 도박의 여지를 두고 싶지 않다. 만약 당하면 어쩔거냐는 반문에, 콜트는 거인의 힘과 전사를 잃고 거인의 힘을 되찾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가트 대장은 거기에 9년 전 있었던 "시조탈환 계획"의 처참한 실패를 덧붙인다. "여성형 거인" [[애니 레온하트]]와 "초대형 거인" [[베르톨트 후버]]를 잃은 실패 말이다. 이 전력의 상실이 지금의 전쟁을 일으킨 방아쇠가 되었다. 마레의 군사력이 저하됐다고 본 주변국들과 분쟁으로 전쟁이 시작,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팔라디섬 공략은 한없이 뒤로 밀렸다.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지휘관으로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기도 했다. 그래도 콜트는 미련이 남는다. 마가트는 그런 콜트에게 '''[[지크 예거|짐승 거인]]을 이어받는 자'''라면, 위에 서는 자로서 각오를 다지라고 핀잔을 준다. 콜트는 이 작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상황은 고스란히 전사후보생들에게도 보여진다.
* 열차포가 부대에 가까워진다. 그 말은 방금 전까지 총알을 퍼붓던 그 기관총 진지에도 가까워진다는 말이었다. 가비는 투항하는 척, 두 손을 들고 진지로 다가간다. 수류탄 다발은 줄로 오른발이 묶어서 질질 끌고 간다. 적이 보기엔 투항자가 다리를 절며 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적들은 그녀를 발견하지만 투항자라고 생각해서 바로 사격하지 않는다. 적도 상대가 엘디아인일 가능성을 상정하지만 소녀이고 투항의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인지 주저한다. 게다가 가비의 계산이 대충 들어맞아서 다리에 건 수류탄을 족쇄라고 잘못 관측한다.
* 가비가 가까워지자 기관총 진지의 병사들은 의견이 엇갈린다. 소총수는 엘디아인이 틀림없다며 거인화하기 전에 쏴버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관총사수는 그럴 거면 소총수인 네가 쏘라며 떠넘긴다. 그러자 소총수는 욕지거리를 하며 조준한다. 아무리 엘디아인이라도 어린애를 쏘는게 마음에 걸린 걸까? 그러는 사이 가비는 바닥에 쓰러져 있다. 이것도 연기의 일환일까?
그녀는 쓰러진척하며 오른발의 수류탄 다발을 끌른다. 그리고 열차가 최적의 위치에 다가오길 기다린다. 적당한 시기가 되자 선로 위, 열차포의 코 앞에 힘껏 던진다. 정확한 위치에 떨어진 수류탄은 적들이 대응할 틈도 없이 폭발한다. 열차는 폭발의 여파로 탈선하며 그 앞에 있는 기관총 진지로 굴러떨어진다. 열차포 파괴와 진지파괴를 동시에 이룬 쾌거. 최적의 결과다. 마가트는 곧바로 갤리어드를 부르라고 명령한다.
가비는 작전성공의 쾌감 때문인지 폭소를 터뜨리며 마구 달린다. 하지만 적의 기관총 진지는 완전히 무너진게 아니었다. 살아남은 소총수가 기관총을 쏴대기 시작한다. 미처 참호에 다다르지 못한 가비는 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 참호 연장에 실패한, 유탄이 떨어져 깊게 패인 자리를 향해 무작정 달리지만 총알을 피할 것 같지 않다. 지켜보고 있던 파르코가 뛰쳐나간다. 콜트가 말려볼 틈도 없었다. 그는 가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 가비가 몸을 날리는 순간, 기관총은 정확히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파르코도 그녀에게 손을 뻗지만 한발 늦었다. 그때 거대한 팔이 가비를 감싼다. 가비가 유탄으로 패인 자리에 떨어지는 순간 파르코도 그녀를 감싸며 떨어진다.
본래라면 기관총의 밥이 됐을 그들을 한 명의 거인이 지켜낸다. 그가 바로 "갤리어드", "턱의 거인"이다. 가비는 그의 등장에 기뻐하는데 옆에 파르코가 있는 건 몰랐는지 뒤늦게 의아해한다.
* 둘의 안전을 확인한 갤리어드는 기관총 진지를 향해 달려든다. 열차포가 파괴된 지금 그를 막을 수단은 없다. 겁에 질린 소총수가 기관총을 난사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고, 갤리어드는 진지를 짓뭉개버린다.
- 토탈워: 쇼군 2/요원 . . . . 20회 일치
외교 관계 -20
* 기병 지휘관(Cavalry Commander) - "영광으로 충분하지 않다. 영광의 뒤엔 반드시 강인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기병 지휘관 스킬 요구.
기병 지휘관 스킬 요구.
* 보병 지휘관(Infantry Leader) - "올바른 지휘관 아래에 있는 보병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야전 방어자, 보병 지휘관 스킬 요구.
* 아시가루 지휘관(Ashigaru Commander) - "농민들을 이끄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보병 지휘관 요구.
아시가루 지휘관 스킬 요구.
* 군의관 - "난 후방에서 부상을 치료할 기술을 약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비겁함은 치료할 수 없다!"
* 마부 - "바보는 자신의 검을 그저 보관용으로만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 관리도 소홀히 한다."
외교 관계 +10
관세 수입 +1%
* 치안관(Magistrate) - "내가 곧 법이다!"
* 수사관(Investigator) - "진실과 거짓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과 같다."
수사관 스킬 요구.
* 검열관(Censor) - "아무도 볼 필요가 없다!"
검열관 스킬 요구.
- 피우진 . . . . 20회 일치
[Include(틀:국무총리직속기관장)]
|| '''현직''' ||<(> [[국가보훈처장]](장관급) ||
1956년 8월 20일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직업군인의 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위로 언니 2명, 아래로 여동생 1명과 남동생 1명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도 [[체육교육과]]로 진학했다. [[청주대학교]] [[체육학과]] 졸업 후, 야간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당시는 돈이나 뒷배경으로 교직을 얻는 교사들이 많았으나, 피우진의 아버지는 그런 일을 단호하게 반대하여, 피우진은 일반 중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군]] [[사관후보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직업군인]]을 결심했다고 한다.
1979년, 사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훈련 과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육군|육군]] [[학사장교]] [[소위]]로 임관하였다. 여담으로 같은 해 임관한 인물로는 [[박선우]], [[신현돈]]이 있다. '''즉 [[문재인 정부]] 첫 육군 참모총장인 [[김용우(1961)|김용우]] 대장[* 1983년 임관.]보다 무려 4년 선배이다.''' [[여군]] 훈련소 [[소대장]], 여군 [[특전사]] [[중대장]]을 거쳐 1981년부터 육군의 [[헬기]] 조종사로 근무하였고, 2002년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매우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피우진과 같이 군 생활을 한 장병들은 모두 그녀를 '''"매우 훌륭하고 인성도 상당히 좋은 참 군인"'''이라며 칭송했을 정도. 그런데 피우진이 군 생활을 할 당시 [[소령]]이었는데, 하필 자신은 [[소대장]]이 되었다.[* 보통 [[소대장]]은 [[소위]]~[[중위]]가 배치된다.] 게다가 [[중대장]]이라는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남군 [[대위]]였는데 '''이는 명백한 [[성차별]]이다!''' 그나마 해당 남군 대위가 개념이 있어서, 자기보다 직급은 낮아도 계급이 높기 때문에 피우진을 존중해주고 서로 상호존대를 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넘어가기는 했다만.
2008년 5월에 복직한 뒤 육군항공학교 교리발전처장이라는 보직을 받고, 복무하다가 2009년 9월 29일에 육군항공학교에서 만기전역하였다.[* 참고로 구글링해 보면 관련 사진이 나온다. 거기서 어떤 [[준장]]이 피 중령에게 감사장 같은 것을 수여하는데, 그 준장은 [[육군사관학교]] 34기 배명헌 장군이다. 배 장군은 당시 육군항공학교장이었고, 그 후 영전하여 육군항공작전사령관을 거쳐 소장으로 전역한다. 현재 그는 성우회 소속 안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중령]]의 [[연령정년]](53세)이 됐기 때문이다.
2017년에 [[양승숙]] 준장과 함께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을 지지하였고,[* [[여군]]들은 보통 진보적인 친 [[더불어민주당]] 성향이 강하다. 반대로 [[남군]]들은 보통 보수적인 친 [[자유한국당]] 성향이 강하다. (다만 남군의 경우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민주당 성향이 강한 경우도 있는데, 보통 장병 복지 및 처우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민주당 쪽으로 지지하게 된다. [[백군기]] (예)대장이 그 예시.) 하필 피우진이 [[여군]] 인권 이슈를 내놓을 수 있던 자리에서 [[문재인/2017년#s-4.1|동성애자 난입]]이 일어나, 피우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실패하는 씁쓸한 일화가 있다.] 대선이 끝난 후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가보훈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그 이전까지 전임 국가보훈처장은 모두 예비역 중장이었지만 [[문재인]]이 주요직위자의 문민화를 위해 여군 출신의 피우진을 이 자리에 보직시켰다.
취임 이후 '사후 약방문식'의 보훈업무 일처리를 지양하고, 보훈복지의 사각지대를 선제적으로 찾아 문제점을 미리 제거하는 등 보훈복지 강화에 조직운용의 역점을 뒀다. 피 처장 부임이후 다양한 조직운용의 변화 시도가 결국 성과로 연결되면서 보훈처는 국정운영평가에서 '매우 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4085797|*]]
대위 시절, 소속 부대의 군사령관(대장)이 '''술자리에 [[여군]]을 보내라는 요구를 했다.''' 당시 피우진은 당연히 이 명령을 거절했다. 처음에는 본인 보고 직접 오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한다. 즉, 휘하 [[여군]]을 술자리 여흥을 위해 부르는 행위가 군 내에 만연했던 것. 부당한 명령이 계속되자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한 가지 꾀를 내는데, 술자리에 보내지는 [[여군]]들에게 사복이 아닌 [[군복]]을 입혀 보내는 것이었다. 군복을 보면 술자리 여흥을 위한 여성이 아니라 휘하의 군인임을 떠올리게 되어, 이들을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에서였던 것. 해당 여군들에게 [[완전군장]]에 총기까지 휴대시켜 실탄까지 지급 한 뒤 회식자리로 보낸다. ~~술이 확 깼겠군~~
이를 통해 피우진이 얼마나 대쪽 같은 인물인지를 깨닫게 되었기에 더 이상 비슷한 성격의 요구가 하달되는 일은 없게 되었으나, 높으신 분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피우진은 결국 중령에서 군 생활을 접게 된다. ~~안 돼~~ 한때는 이것이 루머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실제 실탄 지급을 한 것에 대해 징계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오호라, 그럼 기록에 남은 그 사람이 관련자로구나!~~이때가 1988년 무렵이고, 피우진은 [[제1야전군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1987년 6월부터 89년 4월까지가 [[정호근(군인)|정호근]](後 합참의장 역임)이 1군사령관이고 다음이 [[이진삼]]이다. 또한 88년 7월 소령으로 진급했기 때문에, 88년 대위 시절 사령관은 [[정호근(군인)|정호근]]으로 추측된다.
* [[소위]]로 임관한 피우진의 첫 보직은, 여군 부사관 후보생들을 지휘하는 중대장이었다. 이때 훈련소에는 후보생들 외에 영문 타자 주특기 교육을 받는 병사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손석희]]도 있었다고 한다.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에서, 피우진은 [[손석희]]를 "똑똑하고 예의 바른 병사"였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이 분위기가 비슷했는지, 한번은 피우진이 [[손석희]]를 꾸짖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소령]]이 "똑같은 녀석들끼리 교육 시키고 교육 받네"라며 웃은 적도 있었다고.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한국군/여군]][[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고위 공무원]][[분류:문재인 정부/인사]][[분류:1956년 출생]][[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장관]]
- 하현우 . . . . 20회 일치
국카스텐 라이브 공연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하현우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노래 뿐만 아니라 모션도 열정적이어서[* 하현우가 정신 놓고 기타 치는 모션을 팬들은 '기타지랄'이라 부른다.], 관객들 혼을 빼는 데 도가 텄다. 자기 말로는 [[담배]]를 피울 뿐[* 구정모 매니저에 의하면 간헐적으로 금연과 흡연을 반복한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3월 19일 HELLO 콘서트 기준으로 금연 2주차라고 밝혔으며, 계속 금연 중이라고. 그래서 작업 도중 담배를 피우는 대신 초콜릿과 스카치 캔디를 먹는다고 한다.] 등산이나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몸에 좋은 것도 잘 챙겨 먹는다고 하지만, 인터뷰에서 반쯤 농담 섞인 얘기로 '인이어 때문에 공연할 때마다 몸이 망가지는 느낌'이라는 말을 한 이후로 많은 이들의 걱정이 커졌다.[* 다만, 이는 모든 가수들의 피할 수 없는 직업병이기도 하다. 한쪽 귀만 인이어를 삽입해서 노래를 불어야 하는 보컬의 특성상, 고막에 문제가 생기는 느낌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음악 외적으로 미술과 책에 관심이 많다. 가수로 전업하기 전에 미술을 전공했었고, 시 쓰는 걸 좋아해서 시인을 꿈 꾼 적도 있다고. 군 복무 시절 기타 치기와 노래 부르기를 모두 금지당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부대의 모든 책을 독파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읽을 게 없어서 [[동의보감]]을 읽었다고 하니, 이 정도면 독서광 인증.
||<(>※ 아래 내용은 하현우가 2015년 4월 28일 조선대학교 강연에서 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얘기[*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ppl0523&no=15049&page=1&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YMCA|강의 내용 전문 보기]], [[http://blog.naver.com/sonkhj1116/220729059480|강의 내용 육성으로 듣기]].]와 몇몇 기사의 내용을[* [[http://www.sangsangmadang.com/webzine/pickupView.asp?seq=3272|2009년도 인터뷰]],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653783701123625010|관련 기사]].] 참고하여 간추린 것이다. ||
한편 하현우는 만화 그리기도 좋아했는데, 화가가 꿈이셨던 어머니가 미술 학원을 보내주신 덕에 고등학생 때부터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보통의 미대 지망생이나 미술가 지망생들에 비해선 꽤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한 셈. 아버지는 음악 뿐 아니라 미술도 반대하셨지만, 하현우는 결국 미대로 진학하였다. 미대 생활은 짧았지만 미술이나 미학에 대한 그의 관심 역시 훗날 국카스텐의 음악에서 큰 축을 형성하여 이미지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동력이 된다. 어쨌든 미대 진학 이후 한동안은 노래를 접고 살아가고 있었다.
밴드 보컬이 된 대학 1학년 시절엔 공연을 미친 듯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밴드 동아리의 경직된 선후배 관계와 술 문화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정말 제대로 된 음악을 하며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걷기 위해 드러머였던 이정길과 의논 후 함께 자퇴서를 내고 곧장 서울로 올라와 홍대의 인디씬에서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휴학을 했어도 됐지만 일부러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 자퇴를 했다고 한다.[* 후에 [[수상한 가수]]에서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걸 보여주려고 아예 여지 없이 잘라낸 거라고 밝혔다.]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였고, 음악 활동 외에도 생계 및 음악 활동에 필요한 장비 등을 구입하기 위해 여러 일을 병행해야 했다고 한다. 건설 현장에서의 일도 하였는데, 하현우는 우스갯소리로 "안산 YMCA 건물은 제가 지은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건설 현장에서 작업 도중에 감전 사고로 기절한 일화는 당시 서울 생활이 상당히 처참했다는 걸 알려준다. 결국 그는 음악을 접고 미술 공부 경험을 살려 의상 관련 일로 진로를 바꾼다.
* 2016 DMC 페스티벌에서 부른 [[http://tvcast.naver.com/v/1169980/list/96005|'Lazenca, Save Us']] 라이브를 보면 마지막 'Save Us'를 연달아 부르는 부분에서 소리가 관객들의 엄청난 함성과 락 밴드 특유의 크고 거친 사운드는 물론이고, 심지어 거기에 더해진 '''폭죽 소리까지 뚫고 나온다.''' 이런 행사에 참여할 때면 자신이 사는 곳에 다른 가수들의 노래는 들리지 않았는데 하현우의 노래는 들렸다는 인근 주민의 후기가 올라오곤 한다.
일단 가사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단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닐까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들은 애초에 국카스텐이 추구하는 '이미지적인 음악'이라는 음악관으로 봐서는 가사에 의미를 찾으려고 너무 애쓰는 것이 오히려 음악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 속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무엇”이라는 단어가 있으면 그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그 단어의 “느낌”으로 작사 한다는 것. 예를 들자면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의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이지만 이 문장에서 하현우가 “슬픈 느낌” 을 느낀다면 “자신이 앉아서 우는 모습”을 “나는 사랑이라는 의자에 발을 디뎠어”라고 작사한다는 것. 비유, 은유로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추상적인 작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카스텐이라는 밴드가 '사이키델릭 록'이란 장르의 노래를 주로 만드는 밴드인데, 이 장르의 정의가 환각에 취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러니까 진짜 약을 빤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음향, 그리고 그러한 '가사'를 가진 음악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르에 걸맞은 작사라는 것이다.[* 하현우가 [[피카소]]의 큐비즘을 자주 언급하는 것에서도 이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대상의 정밀한 묘사나 명확한 의도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무작정 약 빤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표현의 문학성이 상당한 데다가 팬들 사이에서 가사 해석의 시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그렇게 나온 다면적인 해석들이 또 설득력을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 국카스텐의 모든 곡, 특히 2집 앨범 수록곡들의 가사에 대한 하현우의 설명(해석이 아님)을 보고 나면 소재를 따온 방식, 담고 있는 의미, 뛰어난 비유에 감탄하게 된다. 주로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사물의 이미지나 신체 기관에 자아를 투영하거나(1집),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나 상황을 성찰하는 것(2집)이 큰 테마를 이루는데, 어휘 선택과 연출에서 한때 시인을 꿈꿨던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 실제로 여러 장에 걸쳐서 메모한 노트를 줄이고 줄인 결과가 한 곡의 가사라고 하니까, 무의미한 단어의 연결이 아니라 의미가 압축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모르겠는데 알 것 같은 이 의미의 모호함이 팬들 사이에서 수많은 2차 창작물(캘리그라피, 일러스트, 문학 등)을 양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2집부터는 가사 난이도가 하향 조정되고 전체적인 색깔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는 평도 있다.
작곡가이기도 하다. 국카스텐 곡의 작곡은 보통 하현우가 멜로디 라인을 스케치해두면[* 악보와 친하지 않아서 입으로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녹음기로 녹음하는 방식을 쓴다고 했다. 1집 작업 기준.]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멤버들이 각자 파트분을 작곡해서 덧붙이며 완성해간다고 한다. 2집의 경우는 곡의 일관성을 도모하기 위해 다른 악기 파트도 하현우가 맡았다. 본인이 상상하는 사운드를 밴드의 악기와 이펙터로 정확히 구현해내길 원하는데, 그 상상이 평범한 게 아니어서 특히 사운드의 중심 축을 이루는 기타를 맡고 있는 데다가 이펙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전규호가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전규호(공대 출신)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이런 요구들에 성질을 내면서도 결국은 어떻게든 다 해낸다고(?).
파괴적인 에너지, 낯설다가 익숙하다가 다시 방향을 트는 변칙적인 멜로디, 독특한 기타 리프, 풍부한 이펙터 활용 등을 특징으로 하는 국카스텐의 음악은 공식적으로는 사이키델릭 락을 표방한다. 그러나 사실 장르를 규정한다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국카스텐의 음악은 독특하고 혼종적이다. 사이키델릭, 얼터너티브, 메탈, 트로트[* 1집의 '거울'은 [[일본]] 엔카의 멜로디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 국악[* '라플레시아'의 굿거리 장단, '매니큐어'의 꽹과리 간주, '작은 인질'의 장구 장단.] 등이 자유자재로 활용되며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모든 곡을 일관성 있게 관통하는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는 말 그대로 '그 자체가 장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밴드 음악, 혹은 '정말 한국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굉장히 한국적인' 락. 이는 하현우가 성장 과정에서 접한 다양한 음악의[* 특히 [[신중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국카스텐이 사이키델릭이라는 장르를 택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정서와 리듬이 창작 활동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하현우의 송라이팅은 한국에서 대중음악의 성공 요건이나 다름없는 로맨틱한 감성과는 거리가 멀다. 가사의 난해함과 더불어 부드럽고 편안한 정서 대신 불편한 정서를 파헤치기 때문에, 국카스텐의 음악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국카스텐 음악의 독특한 점이자 매력은 패배주의적인 모티브가 짙게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관적이기보다는 희망적인 에너지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나'의 '허상'과 '위선', '뒤틀림', '무기력'에 대해 줄곧 이야기하지만, 이 우울한 이미지들은 어떻게든 결국 삶에 대한 의지로 가득 차 있는 '나'의 모습을 엮어낸다.
2018년 6월 16일 진행된 [[메이플스토리]] 쇼케이스 [[메이플스토리/업데이트 내역#s-9|The BLACK]] 행사에서 [[https://twitter.com/Guckkastens/status/1007887087780032516|깜짝 등장]]함과 동시에 라이브로 해당 곡을 불러서 아무런 사실을 모르던 메이플스토리 유저들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충공깽]]의 상황을 겪었다고 한다. 해당 곡을 행사장에서 부른 이후 당일 오후 6시에 릴리즈. 하현우 팬들 또한 '''"[[형이 왜 거기서 나와|형이 왜 거기서 나와?]]"'''라는 반응을 보였고, 메이플스토리 공식 트위터에서도 이 [[https://twitter.com/MapleStory_KR/status/1009622804516360192|유행어]]를 알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곡의 테마는 [[검은 마법사]]라고 한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380681|링크]] [[https://www.instagram.com/p/BkFdGLMghTc/|작사가 인스타그램 관련글]] [[https://www.instagram.com/p/BkFSrBUAivQ/|작곡가 인스타그램 관련글]]
*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본격적으로 노래에 빠지게 된 계기가 좀 웃픈데, 자기를 배신하고 떠난 여자친구와 관련되어 있다. 여자친구가 인천 남자와 바람이 났을 때 자기가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친구를 뺏겼을까 싶어 곰곰이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술학원 선생님으로부터 "넌 남자가 제일 멋있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나처럼 한 가지 일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남자는 제일 멋있는 거야"라는 말을 듣고선, 매일 노래방에 출석도장을 찍으며 목에 피가 터지도록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해피투게더 3 방송에서 노래 연습을 하다 목에서 피가 3번 나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함부로 따라하면 절대 안 된다. 잘못하다간 평생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 고음을 내고 싶으면 보컬학원에 가서 보컬 트레이닝 받는 것을 추천한다.]
* 무명 시절엔 라면 1봉지를 사서 멤버들끼리 셋이서(김기범이 합류하기 전) 나눠 먹었으며, 길거리 음식을 먹다 장염까지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 출연 당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던 역류성 식도염도 어려웠던 시절 식습관으로 인해 얻은 것.
* 20대 시절 세상이 무섭구나라는 걸 깨닫고서 나쁜 것들을 피해가고자 관상, 손금을 연구하기도 했단다... 실제로 예능 방송에 출연하여 몇 번 시범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라디오 스타, 복면가왕(연예인 판정단 출연 시), 그리고 해피투게더에도 나와서 여러 사람들의 관상이나 손금을 봐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별명 '''하 도사''' 획득.
* 군 시절 괴상한 선임이었던 듯하다. 라디오 스타 방송에 따르면 부대 안에서 연이은 도난 사건으로 모든 중대원이 내무반에 모인 최악의 분위기에서 옆에 있던 새파란 후임에게 뺨 때리기 가위바위보를 요청하고, 후임이 이겨서 우물쭈물하고 있자 후임 손을 잡고 직접 자기 뺨을 강제로 때리고 엄청 좋아했다든가,[* 후임과 빨리 친해지려고 그랬다고 한다.] 배식 받을 때 전원이 식판에 받은 밥을 하트 모양으로 만든 걸 확인하기 전까지 식사를 못하게 했다든가, 어느날은 후임에게 故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라고 시켜서 부르는데 '집 떠나와 열차 타고' 라는 구절에서 하현우 왈 "너 여기 입대할 때 열차 탔어? 자동차 탔을 거 아냐~"라고 하자, 후임 왈 "레조 탔습니다", 하현우 왈 "''''집 떠나와 [[GM대우 레조|레조]] 타고'''' 라고 불러야지!"라고 다그쳤다든가, 당직사관이 없는 점호 시간에 '''본인을 포함해''' 꼭 한 명씩 춤을 시킨다든가, [[http://mblogthumb1.phinf.naver.net/20160623_192/sen0209_1466669953537k4IHB_GIF/89.gif?type=w420|군대에서 췄다는 춤]] 보초 서다가 밖에서 힙합을 사랑하다 왔다는 후임에게 [[비트박스]]를 해줄 테니 군 생활에 대한 프리스타일 랩을 하라고 시킨다든가[* 와중에 "그지같은 군생활 UH 이상한 선임을 만났네"라고 디스 먹었다고 한다.] 하는 일화를 보면 얌전하게 군 생활을 한 것은 아닌 거 같다. 본인도 설명한 기행들을 순순히 인정했다.
- 홍진기 . . . . 20회 일치
| 경력 = 내무부 장관
'''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아호는 '''유민'''(維民)<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E0064442}}</ref> 배우자는 [[김윤남]](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김신석]]의 딸)이다. 당시 천재라 불리었으며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이 일본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인 차별정책에 의해 그의 꿈인 교수가 될 수 없게되었고 이후 법을 공부하여 전주에서 판사를 역임하였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08&aid=0000001146 | 제목=조·중·동이 친일인명사전 때리는 까닭 | 저자=주진우 | 뉴스=시사인 | 날짜=2009-11-20 | 확인날짜= | 보존url=http://archive.is/JKi44 | 보존날짜=2014-04-30 }}</ref>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법무부 차관, 장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법무부 차관이던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2/12/200802120500004/200802120500004_1.html | 제목=6·25 참전국 모두 모여 만든 ‘유일한 국제공인 통일원칙’| 저자=최운상 | 뉴스=신동아 | 출판사=동아일보 | 날짜=2008-02-01 | 보존url=http://archive.is/DTdrZ | 보존날짜=2016-08-18 }}</ref>
이후 [[삼성]]회장이자 훗날 사돈 관계<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032237 | 제목=이건희 장인이 '홍찐구'로 조봉받은 사연 | 저자=정은균 | 뉴스=오마이뉴스 | 날짜=2013-08-20 | 확인날짜= | 보존url=http://archive.is/k9DGp | 보존날짜=2014-04-30 }}</ref>를 맺게 될 [[이병철]]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 1968년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71년 주식회사 동양방송 대표이사, 1974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 1980년 중앙일보사 회장을 지냈다.
!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활동사항
| 장녀 || [[홍라희]] || [[1945년]] [[7월 15일]] || || [[리움]] 관장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법무부 차관]]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
[[분류:혁명재판 기결수]][[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86년 죽음]][[분류:한국의 일제 부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서울무학초등학교 동문]][[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이승만]][[분류:남양 홍씨 (당홍)]]
- 2016 K리그 다득점 우선적용 논란 . . . . 19회 일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발표에 따르면 "공격축구"가 관중을 끌어모은다는 판단 하에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22&aid=0000168424|"타 리그와 비교해도 골 수가 적으니 관중이 잘 안 모이고 흥행이 되지 않는다"]며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웃긴 이야기는 여기에서 예시로 든 분데스리가와 J리그를 보면 골 수와 관중 사이에는 의미있는 데이터가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주장대로, 공격축구를 통해 골이 많이 터질수록 흥행이 이루어진다면 골이 많이 나온 시즌은 관중이 많아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 시즌 || 시즌 평균관중 || 시즌 평균 골 || 전년대비 평균관중 증감 || 전년대비 평균 골 증감 ||
분데스리가의 10-11시즌부터 14-15시즌까지 과거 5시즌동안의 평균 골 수와 골당 관중 수의 변화추이를 확인하면 위의 링크한 기사와는 달리 연맹의 주장은 말도 안된다는 걸 알 수 있다. 13-14시즌을 제외하면 '''골 수가 줄어들었는데 전년보다 관중이 늘어나고, 골이 늘었는데 관중이 직전년도보다 줄어드는''' 상황이며, 이 13시즌조차도 증감폭에 의미를 두기 어렵다. 14-15시즌은 골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평균관중은 수십명 수준의 변화폭만 보여 여기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상황.[* 그마저도 그래프를 그려보면 반대방향을 그린다.] J리그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2012시즌부터 2015시즌까지는 골이 얼마가 되었든지간에 평균관중은 17000명에서 500여명 정도의 변화밖에 없고, 오히려 2011시즌에는 경기당 2.8골이 넘었지만 평균관중은 15000명 수준이었던 것이 2012시즌에 2.8골 미만으로 줄어들었음에도 17000명까지 평균관중이 증가한 것은 연맹의 주장이 뭘 어떻게 봐도 틀렸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K리그도 분데스리가와 마찬가지로 2012시즌부터 2015시즌까지 오히려 '''골 수는 줄었는데 관중이 늘고, 골 수가 늘었는데 관중이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연맹은 그 어떤 명확한 해답을 내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근거라고 내 놓은 분데스리가와 J리그 모두 연맹의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제시할 수 없다. 한마디로 2016년 한국프로축구연맹 활동중에 최대의 뻘짓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K리그가 성립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전두환 시절의 3S정책과 맞닿아 있던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으나, 박정희 시절부터 내려온 스포츠 지원정책의 기치는 '''"(저 북괴놈들에게 절대 꿇리지 않는) 국제적인 스포츠 업적을 거두어 세계만방에 걸친 명성을 쌓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국제 스포츠계에서 업적을 쌓는다는 명분이 대한축구협회 시절에 세운 기치이며 이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설립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프로축구협회 정관: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한국프로축구의 수준향상과 저변확대는 물론 국제교류 등 축구를 통해 국민의 건 전한 여가 선용을 도모하고, 스포츠 활성화와 지역사회를 비롯한 '''국가 발전 및 국제친선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국제축구의 흐름과는 명백히 다른 형태로 운영하는 부분에서 이 사항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차라리 [[승자승 원칙]]을 우선 적용한다면 AFC 아시안 컵을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충분히 그 명분을 가져올 수도 있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사례처럼 "양학을 막고 라이벌전의 관심도를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흥행목표를 가져오면 그나마 할 말이라도 있겠지만... 상기 공격축구 만능론에 대한 비판처럼 오히려 K리그는 골 수와 관중의 증가추이가 역방향 관계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선 연맹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육군 . . . . 19회 일치
* '''기관총''' 기술 연구시 '''{{{#green +2%}}}'''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산업#s-2.5|연소 기관]]''' 기술 연구시 '''{{{#green +2%}}}'''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산업#s-2.5|연소 기관]]''' 기술을 연구하지 않았을 시 '''{{{#red -5%}}}'''
* '''기관총''' 기술 연구시 '''{{{#green +1%}}}'''
* '''기관총''' 기술 연구시 '''{{{#green +25%}}}'''
=== Machine Guns(기관총) ===
기관총의 무장 발명의 방어력 상승 능력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 '''Machine Gun Armament (기관총 무장)'''
* '''기관총 무장''' 발명을 발견한 국가와 전쟁 중일시 '''{{{#green +2%}}}'''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산업#s-2.5|연소 기관]]''' 기술 연구시 '''{{{#green +1%}}}'''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산업#s-2.5|연소 기관]]''' 기술 연구시 '''{{{#green +3%}}}'''
* '''육군 부사관 훈련''' 기술 연구시 '''{{{#green +1%}}}'''
=== Army Risk Management(육군 위험관리) ===
=== Army NCO Training(육군 부사관 훈련) ===
* '''Literate NCO's(식자 부사관)'''
* '''NCO Field Training(부사관 야외 훈련)'''
* '''NCO Tactical Training(부사관 전술 훈련)'''
* '''부사관 야외 훈련''' 발명 발견시 '''{{{#green +1%}}}'''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Victoria II]]
- 손예진 . . . . 19회 일치
손예진은 2000년 박기형 감독의 영화 《[[비밀 (2000년 영화)|비밀]]》에서 홍미조 역을 맡아 출연(목소리 출연)한 후, 오디션을 통해 이듬 해 2001년에 방영 된 TV 드라마 《[[맛있는 청혼]]》에서 여주인공 장희애 역을 맡아 본격적으로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ref>{{웹 인용|url=http://koreajoongangdail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aid=1885703|title=Young, Charming and Innocent ? What More Could You Want?|date=12 March 2001|work=Korea JoongAng Daily}}</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00807 '방송'손예진 MBC 최고 루키 선정], 《한국일보》. 2001년 9월 25일 작성.</ref> 첫 드라마 작품부터 주연으로 시작한 손예진은 데뷔와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특유의 청순한 모습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첫사랑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같은 해 그녀는 연이어 《[[선희 진희]]》에 출연하며 [[MBC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 손예진은 픽션사극 드라마 《[[대망 (2002년 드라마)|대망]]》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 출연하였고, 이 영화는 제55회 [[칸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 되었다. 같은 해 출연한 영화 《[[연애소설]]》(2002)는 233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클래식 (영화)|클래식]]》(2003)은 154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그녀의 초기 경력에서 가장 큰 성공을 안겨주었고, 점차 주목 받기 시작했다. 《클래식》은 현재까지도 아름다운 멜로 영화로 회자되며, 손예진의 맑고 순수한 이미지로 인해 단숨에 청순 아이콘으로 떠올랐다.<ref>{{웹 인용|url=http://kpopherald.koreaherald.com/view.php?ud=201606101410484008937_2|title=Korean stars dubbed ‘Nation’s first love’|website=The Korea Herald|date=10 June 2016}}</ref> 이 작품들을 통해 2002년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과, 2003년 제3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신인연기상, 제40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살인의 추억' 대종상 4개부문 석권(종합)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396132|출판사 ='살인의 추억' 대종상 4개부문 석권(종합) |저자 =김병규 |날짜 = 2003-06-20 |확인날짜 =2017-09-16 }}</ref> 손예진은 2003년 TV 드라마 《[[여름향기]]》에서 여주인공 심혜원 역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한류 (문화)|한류 문화]]의 주역인 [[윤석호 (연출가)|윤석호]] PD의 ‘[[가을동화]]’, ‘[[겨울연가]]’를 잇는 계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손예진의 다음 작품으로는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외출 (영화)|외출]]》(2005)로 두 편의 영화 모두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서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ref>{{웹 인용|title=The Best Selling Films of 2004|url=http://www.koreanfilm.org/kfilm04.html|work=Koreanfilm.org|accessdate=2013-08-08}}</ref><ref>{{웹 인용|title=A Moment to Remember breaks Japanese record|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326|work=Korean Film Council|date=14 December 2005}}</ref><ref>{{웹 인용|title=Son Ye-jin to Star Alongside Bae Yong-joon in New Film|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163|work=Korean Film Council|accessdate=24 December 2004}}</ref>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국내에서도 256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흥행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각각 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에서 개봉 된 역대 [[대한민국]] 영화중에서 흥행 기록 1, 2위를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손예진, ‘日 2005 외국영화 흥행 톱10’서 2관왕|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32332|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05-12-16}}</ref><ref>{{웹 인용|title=Films Starring Sohn Ye-jin Attract 10 Mil. Viewers in Korea, Japan|url=http://english.kbs.co.kr/hallyu/entertainment_news_view.html?No=147|work=KBS Global|date=28 December 2005}}</ref> 특히 《외출》에서 손예진은 20대 중반 주부이면서 남편과 불륜 관계였던 여자의 남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여자 서영의 감정을 잔잔하면서 깊이 있게 그려내며 호평을 받알고, 이 영화로 제50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출연한 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손예진은 최고의 선수, 작업계의 고수 한지원 역을 맡아 이 작품에서 과감한 섹시 댄스를 선보이는 등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였고, 234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오싹한 연애> 손예진, <작업의 정석> 뛰어넘을까?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47&aid=000199139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하성태 |날짜 = 2011-12-17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 시기 손예진은 빠르게 스타덤에 오른 만큼 동시에 끊이지 않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mk.co.kr/news_forward.php?no=313364&year=2008|제목=무릎팍도사` 출연한 손예진 "루머, 모두 오해에요|출판사=매일 경제|날짜=2008-05-15|확인날짜=2017-09-09}}{{깨진 링크|url=http://news.mk.co.kr/news_forward.php?no=313364&year=2008 }}</ref><ref>{{뉴스 인용|url=http://kr.ibtimes.com/article/news/20080515/5493692.htm|제목=무릎팍도사’ 손예진, ‘루머해명, 대학시절 계획표 공개’|출판사=아이비 타임즈|날짜=2008-05-15}}{{깨진 링크|url=http://kr.ibtimes.com/article/news/20080515/5493692.htm }}</ref> 하지만 손예진은 루머에 적극적인 대응 없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성실함과 연기력을 인정 받았고, 다양한 작품 활동으로 안정적인 관객동원력을 증명한 손예진은 20대 중반에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va.co.kr/uhtml/read.jsp?idxno=431533§ion=S1N99§ion2=S2N602|제목=손예진이 '충무로 최고 흥행퀸'인 이유?|출판사=아시아 경제|날짜=2008-11-03|확인날짜=2017-09-09}}{{깨진 링크|url=http://www.newsva.co.kr/uhtml/read.jsp?idxno=431533§ion=S1N99§ion2=S2N602 }}</ref>
2008년, 손예진은 TV 드라마 《[[스포트라이트 (드라마)|스포트라이트]]》로 2년여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ref>[http://www.koreatimes.co.kr/www/news/art/2008/05/201_24097.html "Spotlight Shows Lives of Reporters"]. ''The Korea Times''. 13 May 2008.</ref><ref>{{웹 인용|title=SON Ye-jin as a Criminal Kingpin|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741|work=Korean Film Council|date=26 July 2007}}</ref> 같은 해 영화 《[[무방비도시 (2008년 영화)|무방비도시]]》에서 소매치기 조직을 진두지휘하는 리더 백장미 역을 연기했으며,<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섹시함 유지, 가장 힘들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0088606|출판사 =스포츠조선 |저자 =김경민 |날짜 = 2008-01-04 |확인날짜 =2017-09-16 }}</ref><ref>{{웹 인용|url=https://web.archive.org/web/20140202223903/http://twitchfilm.com/2006/09/alone-in-love-review.html|title=Alone in Love Review|성=|이름=|date=1 September 2006|work=Twitch Film|출판사=|확인날짜=2018-04-12}}</ref><ref>{{웹 인용|title=Actress Son Ye-jin's Movie Picks|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1122317340286147|work=10Asia|date=23 December 2011}}</ref> 박현욱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영화)|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자유로운 연애를 조건으로 달고 결혼한 후에도 다른 남자를 사랑하길 멈추지 않는 주인아 역을 연기했다.<ref>{{웹 인용|title=SON Ye-jin puts a new spin on marriage|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914|work=Korean Film Council|date=11 February 2008}}</ref> 그녀의 연기는 평단의 호평을 받아 제29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4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여우주연상, 제4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11210837541003|제목=눈물의 손예진 유일무이 3관왕 석권 기염, 청룡 여우주연상-인기스타상-베스트커플상 |출판사=뉴스엔|날짜=2008-11-21}}</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12/h2008121108013691980.htm|제목=손예진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여우주연상|출판사=한국일보|날짜=2008-12-11|확인날짜=2014-02-1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1224030924/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12/h2008121108013691980.htm#|보존날짜=2008-12-24|깨진링크=예}}</ref><ref>{{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2411169|제목=김윤석.손예진, 영화학도가 뽑은 최고 배우|출판사=연합뉴스|날짜=2008-12-15}}</ref><ref>{{뉴스 인용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022720042800689&type=1&outlink=1|제목=손예진, '아내가 결혼했다'로 여우주연상 3연패 |출판사=머니투데이|날짜=2009-02-27}}</ref> 2009년,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백야행 (영화)|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에서 욕망으로 가득찬 치명적인 매력의 여자 유미호 역을 연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차기작 ‘백야행’서 고수와 멜로호흡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1996689|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남안우 |날짜 = 2008-12-15 |확인날짜 =2017-09-16 }}</ref><ref>[http://www.koreatimes.co.kr/www/news/art/2009/11/141_53971.html "Son Ye-jin, Ko Soo to Bring Mystery Romance"]. ''The Korea Times''. 21 October 21 2009.</ref>
2010년, 손예진은 이새인 작가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TV 드라마 《[[개인의 취향]]》로 1년 9개월여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고, 개인 날 태어났다고 개인이란 이름을 얻은, 이름처럼 밝고 털털하고 유쾌한 캐릭터이자 무늬만 여자인 덜렁이 아가씨 박개인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개인의 취향' 손예진 "나이에 맞는 역 하고싶었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023820|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김현록 |날짜 = 2010-03-25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듬 해, 2011년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 (드라마)|시크릿 가든]]》의 최종회에서 톱스타 역할으로 특별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시크릿가든' 카메오…'숨길 수 없는 폭풍 미모'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116195|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강선애 기자|날짜 = 2011-01-17}}</ref> 같은 해 손예진은 호러 로맨스 코미디 영화 《[[오싹한 연애]]》로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고, 기를 쓰고 쫓아다니는 귀신 때문에 연애는 커녕 가족과 친구로부터 버림받은 여자 강여리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오싹한 연애’로 컴백…그녀, 인생을 말하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81&aid=0002245920|출판사 =서울신문 |저자 =임일영 |날짜 = 2011-11-29 |확인날짜 =2017-09-16 }}</ref> 영화는 300만 관객수를 기록해 자신이 출연한 모든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흥행시키며 '로맨틱 코미디의 퀸'임을 입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역시 손예진, '오싹한 연애' 300만 개인 최고 흥행기록 달성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96&aid=0000005946|출판사 =스포츠월드 |저자 =김용호 |날짜 = 2012-01-17 |확인날짜 =2017-09-16 }}</ref><ref>{{뉴스 인용 |url=http://news.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newsType=&page=&contain=&keyword=&mi_id=MI0094703987|제목=<오싹한 연애> 최근 6년간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중 최고 성적 |출판사=맥스무비|날짜=2012-01-03|확인날짜 =2017-09-16}}</ref> 2012년에는 재난 영화 《[[타워 (영화)|타워]]》에 출연하였고, 영화는 518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성공을 거뒀다.<ref>{{웹 인용|title=Queen of romance returns in disaster flick|url=http://nwww.koreaherald.com/view.php?ud=20121217000947|work=The Korea Herald|date=17 December 2012}}</ref>
2013년, 손예진은 5월부터 7월까지 방영한 TV 드라마 《[[상어 (드라마)|상어]]》로 3년여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또한 10월 개봉한 스릴러 영화 《[[공범 (영화)|공범]]》에서 정다은 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유괴살인사건 공소시효 15일 전, 범인의 목소리를 듣고 사랑하는 아빠를 떠올리게 되면서 잔인한 의심을 갖게 되는 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본 영화에서 공동 주연을 맡게 된 [[김갑수 (배우)|김갑수]]와는 ‘연애시대’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며, 김갑수의 부녀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스투매거진] 공범, 손예진 당신을 스릴러의 여왕으로 임명합니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77&aid=0003140577|출판사 =아시아경제 |저자 =장영준 |날짜 = 2013-11-28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 작품으로 제3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ref>{{뉴스 인용 |url=http://osen.mt.co.kr/article/G1110020088|제목=손예진, '해적'·'공범' 2관왕 후보가 의미하는 것|출판사=OSEN|날짜=2014-11-29}}</ref> 그리고 손예진은 2014년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해적단 대단주 여월 억을 연기했다. 영화는 조선의 옥새를 삼켜버린 귀신 고래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내려온 산적 장사정이 여자 해적 여월과 함께 바다를 누비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해적' 손예진 "女해적 여월, '으리으리'한 캐릭터"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384846|출판사 =조이뉴스24 |저자 =권혜림 |날짜 = 2014-07-02 |확인날짜 =2017-09-16 }}</ref> 866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으며, 역대 출연작 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수을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해적' 손예진, 알고보면 변신의 여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42336|출판사 =텐아시아 |저자 =최보란 |날짜 = 2014-08-25 |확인날짜 =2017-09-16 }}</ref> 작품의 성공으로 3000만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3000만 배우' 손예진이 충무로서 갖는 의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532716|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수정 |날짜 = 2014-08-20 |확인날짜 =2017-09-16 }}</ref> 손예진은 이 작품으로 제51회 [[대종상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osen.mt.co.kr/article/G1110014441|제목='대종상' 손예진, 연기·흥행 갖춘 유일무이 女우 탄생|출판사=OSEN|날짜=2014-11-22}}</ref> 2015년에는 한중합작 코미디 액션 영화 《[[나쁜놈은 죽는다]]》에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나쁜 놈은 죽는다' 손예진, 카리스마+살벌한 분위기 풍기는 액션배우로 변신 |url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216.99002115403|출판사 =국제신문 |저자 =디지털뉴스부 |날짜 = 2017-02-16 |확인날짜 =2017-09-16 }}</ref>
2016년에는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두 편의 영화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 (영화)|덕혜옹주]]》가 개봉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비밀'덕혜'가 2016년의 나..말그대로 다사다난"(직격인터뷰①)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578621|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김현록 |날짜 = 2016-12-21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경미 감독의 영화 《비밀은 없다》는 비록 2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손예진은 평론가의 호평을 받으며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22회 [[춘사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비밀은 없다' 손예진 연기, 촬영·미술이 살렸다? |url =http://www.mun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111|출판사 =문화뉴스 |저자 =양미르 |날짜 = 2017-09-02 |확인날짜 =2017-09-16 }}</ref> 대한민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그린 [[허진호]] 감독의 영화 《덕혜옹주》는 56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여성 원톱 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흥행도 일궈냈으며, 손예진의 인생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핫 아이콘★②] 손예진 "'덕혜옹주'·'비밀은 없다', 두려움 많았던 작품"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7&aid=0000026414|출판사 =OBS 독특한 연예뉴스 |저자 =조연수 |날짜 = 2017-01-02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 작품으로 제37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다.
- 월드 인 컨플릭트/줄거리 . . . . 19회 일치
1989년 6월 새벽, [[KGB]] 소속 [[정치장교]] 발레리 레브데예프 소령은 [[동베를린]]에 위치한 소련군 대대로 파견된다. 오랜 친구였던 대대 지휘관 블라디미르 올로프스키 대령과 포옹을 나눈 레브데예프는 올로프스키에게 소련 정치국이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는 암시를 준다. 이에 올로프스키는 휘하 장교인 로마노프 중위를 부른다.
소련군과 [[미군]]이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모여들자 소련군은 장벽 너머의 미군한테 포격을 시작한다. 그뒤 얼마되지 않아 소련군이 베를린 장벽을 폭파하고 진군하기 시작한다. 올로프스키는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미 제6기갑대대의 전멸, 몰트케 다리의 확보, 6월 17일 거리의 확보라는 작전 목표를 하달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나서 4개월 뒤. 아무런 표시가 없는 컨테이너선이 시애틀 항구에 나타난다. 신고를 받은 순찰차가 시애틀 항구에 도착하자 컨테이너선에서 소련군 Mi-24 공격헬기가 이륙, 순찰차를 공격해 쫓아낸다. 이후 소련군 부대와 장비가 시애틀에 상륙하기 시작한다. 소련군 사령관은 침공부대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방송국 헬기를 내버려두었다가 보여줄만큼 보여줬다고 생각되자 ZSU-23-4 자주대공포로 방송국 헬기를 격추시킨다.
무너진 다리를 탈환하려는 미군을 막기 위해 몇개의 기관총 포대를 추가적으로 설치한다.
소여는 또다시 휘하 중대장들을 마을회관 앞 광장에 불러 브리핑을 시작한다. 소련군 증원군은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질주하고 있으며, 약 한시간 내에 파인밸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소여는 배넌에게 북동쪽의 주유소를 사수하도록 하고 웹에게는 남동쪽 진입로를 사수하도록 지시한다. 마지막으로 파커에게는 북쪽 슈퍼마켓에 방어선을 피라고 명령한다. 이후 소이어 대대는 제1차 방어선을 그럭저럭 유지하지만, 소련군 포병대가 슈퍼마켓에 포격을 가해 파커의 중대를 후퇴시키고 웹의 중대가 피해를 감당하지 못해 후퇴하며 제2차 방어선을 치게된다.
이때 USS 미주리가 파인밸리 해안에 도착해 포격 지원을 시작하고, 윌킨스 대대가 남쪽에서 진입을 시작한다는 무전이 날아들어온다. 소여는 늦었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반가워한다. 파커는 전방관측수 역할을 맡아 USS 미주리에게 포격 좌표를 전송한다. 마침내 소련군이 후퇴하기 시작하고 윌킨스 대대가 파인밸리로 진입한다.
* 소련군 전방관측수 제거
소련군 포병대가 정밀한 포격을 벌일 수 있도록 해주는 전방관측수를 제거한다.
톰슨 이병은 국방부에 전화를 건다. 본래 워싱턴 주방위군이었지만 시애틀 함락 당시 정규군으로 편입된 바람에 봉급 체계가 혼선되어 봉급을 받지 못한 것. 톰슨은 시카고에 있는 전처에게 돈을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공무원은 중대 행정병에게 451-A 서류를 받아서 제출하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에 톰슨은 지금 미국이 침공당했는데 무슨 서류니 법정이니 무슨 상관이냐며 따지지만 미국이 침공당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전화는 말싸움으로 끝나버린다.
같은 날, 레베데예프 소령은 사기 관리반에게 넘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말라셴코 대위와 인터뷰를 한다. 미국 침공 후 몇주가 지난 시점에서의 감상을 묻는 레베디예프에게 말라셴코는 영광스러운 성과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스럽지만 딱 한가지가 불만스럽다고 한다. 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소련군에게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매복 공격을 가해 인명피해를 낸다는 것. 그는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미국인들이 더 대담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베디예프가 생각해본 해결책은 있냐고 물어보자 그는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매복을 당할 때 마다 민간인 10명을 무작위로 처형하는 것. 이에 레베디예프가 그래도 매복이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보자 말라셴코는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대답한다.
이번 진압 작전의 목표는 근처 민병대 기지에 있는 민병대 지휘관을 생포하는 임무였다.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로마노프가 이끄는 보병 중대가 한 농장을 습격하는 작전을 수행한다. 이 농장은 민병대가 무기와 밀수품을 저장하는 곳이라 폭격으로 날려버려야 하는데 대공 장비가 배치되어서 항공기가 접근할 수 없었다. 로마노프의 일은 민병대가 운용하던 모든 대공 장비를 파괴해 농장을 폭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농장에 있던 민병대는 주방위군이 지원해 준 브래들리 장갑차와 험비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로마노프의 중대는 모든 대공 장비를 파괴한다. 이들은 기화폭탄으로 날아가는 농장을 뒤로 하고 수송 헬리콥터에 몸을 싣는다.
올로프스키는 로마노프에게 민병대 기지를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차량 지원과 항공 지원의 힘을 입어 기지를 점령한 로마노프 중대는 기지를 수색하는 동시에 방어전을 준비한다. 대규모의 미국 정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레베데예프의 보고를 들은 올로프스키는 로마노프가 중포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민병대 지휘관은 미국 정규군이 반격을 시작하기 직전 부상을 입은 채로 생포된다. 이후 로마노프의 중대는 헬리콥터가 와서 민병대 지휘관을 싣고갈 때 까지 기지를 사수한다.
스토리는 4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역 후 통나무집에서 살고 있던 소여 대령에게 전화가 날아온다. 그에게 전화를 건 국방부 공무원은 소여가 다시 현역으로 전환되어서 유럽 전선에 보내질 것이라고 말한다. 소련군이 지중해에 있던 미해군 제6함대를 전멸시키고 독일에서 승승장구 하는 등 생각보다 선전하자 소여를 유럽으로 보내 NATO군과 연합 작전을 벌이게 하려던 것. 이 말을 들은 소여는 공무원에게 자신이 전역당한 이유를 알고 있냐고 물어본다. 공무원이 그 일은 면제되었다고 대답하자 소여는 면제를 바란게 아니라며 국방부와 관료들을 신나게 까고는 유럽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1989년 4월, 소련은 협상이 진행되던 도중 서독을 침공해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소련군은 지중해와 대서양 동쪽을 관할하던 미해군 제6함대를 전멸시킨 다음 마르세이유 인근에 상륙했다. 소여가 이끄는 미군들은 그 해 늦가을 유럽에 도착했다. 이들의 임무는 NATO군과 연합해 해당 지역의 소련군을 다시 바다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다
배넌 대위는 미군-NATO 연합 대대 간부들이 작전 계획을 짜는 현장에 나타난다. 배넌의 자기소개를 들은 소여는 배넌이 한시간이나 늦었다고 질책한 다음 파커 소위와 프랑스군 연락장교 장 사바티에 소령을 소개한다. 사바티에는 자신의 부하들을 만나러 자리를 뜨는 배넌을 보면서 저렇게 열렬한 것을 보니 오늘 내로 죽을 것이라고 평한다. 소여는 지휘관이 전사한 NATO 부대의 지휘를 파커에게 맡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바티에는 "미국놈들은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한다"고 프랑스어로 불평하지만,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똑같이 프랑스어로 받아치는 소여를 보고 말문이 막힌다.
사바티에 소령은 자신의 내연녀인 콜레트에게 전화를 건다. 콜레트는 장이 이틀전에 전화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이미 죽은 줄 알고있었다. 어제 있었던 공습으로 지금까지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콜레트의 말에 사바티에는 미군이 도착한 이후로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면서 곧 소련군을 몰아낼 수 있을거라고 말한다. 새로 온 미군 사령관이 미친놈이고 그놈이 내는 작전도 죄다 미친 소리지만 그게 효과가 있다는 말은 덤. 사바티에는 그가 죽는 꿈을 꿨다는 점과 사바티에가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콜레트를 안심시키고 오늘 전투가 끝내는 대로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공격이 시작되기 전 브리핑 시간. 소여는 소련군 사령부가 있는 강 너머에 몇차례 포격을 가한 후, 전위대를 투입할 계획을 세운다. 그것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사바티에는 한시라도 빨리 소련군을 자국 국토에서 몰아내고 싶다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소여는 오늘이 지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소여는 파커 소위의 중대에게 전위대를 맡기고, 배넌 대위의 전차 중대는 만일을 위해 남겨둔다. 이 말을 들은 배넌은 자신의 중대가 선봉이 되어야 하면서 불만을 표한다. "우리 중대가 전투를 놓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라는 배넌의 말을 들은 소여는 이곳에서 영광과 명예같은 것을 찾고있냐며 배넌을 윽박지른 후 그의 중대로 보내버린다. 얼마 되지 않아 강 건너에 연합군의 포격이 가해지기 시작하고, 소여는 나머지 지휘관들도 각자의 부대로 보내 전투를 준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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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계순 (1927년) . . . . 19회 일치
'''이계순'''(李季順, [[1927년]] [[3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교육자, 대학교수, 정치인이다. [[1953년]] [[경남중학교]] 영어교사를 시작으로 서울대학교 교수와 명예교수, 정무제2장관을 역임했다. [[1990년]] 정무제2장관 재직 중 ‘국·공립 연수기관에 여성관련 교과목’을 개설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1940년]] [[교토]](京都) 제일고녀를 다녔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421094 일본인들이 부러워한 조선인 석주명] 국민일보 2009.09.14</ref> 귀국 후 [[1953년]] [[부산]] [[경남중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후 부산연세실업학교 교수 등을 거쳐 [[196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과 교수가 되었다. [[1977년]] [[전문직 여성클럽]] 한국연맹 회장이 되어 여성단체 활동에 뛰어들었고 교수직과 병행하였다. [[1985년]]부터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을 맡았다. 1990년 3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정무제2장관을 지냈다.
[[1990년]] 정무제2장관 재직 중 ‘국·공립 연수기관에 여성관련 교과목’을 만들었다. 1991년에는 그가 직접 나서서 공무원 연수기관장들과 간담회를 열어 협조를 구했다. 이렇게 해서 개설되기 시작한 ‘여성관련’ 교과목은 ‘국가발전과 여성’ ‘여성문제의 현실과 정책방향’ 등의 과목명으로 1~2시간 특강 형식으로 배정됐다. 그러다가 정규과목으로 개설되고 교육훈련점수에도 반영되어 선택과정으로 전환되고 전문과정으로까지 확대됐다. 초창기 교수요원의 확보와 교육자료의 개발 등은 한국여성개발원이 담당했다.<ref>[http://www.womennews.co.kr/news/48170#.VNroPaJFBzo 공무원 양성평등교육이 제도화되기까지]</ref> 1990년 12월 27일의 개각에서 유임되었으며, [[1991년]] 퇴임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명예교수에 위촉되었다.
== 가족 관계 ==
* 남편 : 조관현(曺觀鉉, 오양인터내셔날 회장)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443092 이계순 정무2장관 프로필]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8&aid=0000043100 1988년 정무 제2장관실 '최초']
|직책 = [[대한민국 정무장관(제2)실|정무제2장관]]
|직책 = [[대한민국 정무장관(제2)실|정무제2장관]]
[[분류:192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영문학자]][[분류:대한민국의 여성주의자]][[분류:여자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정무제2장관]][[분류:교토 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동흡 . . . . 19회 일치
'''이동흡'''(李東洽, [[1951년]] [[1월 27일]] [[경상북도]] [[대구시]] ~ )는 [[대한민국의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경상북도]] [[대구시]]의 [[고성 이씨|고성]](固城) 집안에서 [[1951년]] [[1월 27일]]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제15회 [[사법시험 (대한민국)|사법시험]]에 합격하여 5기 [[사법연수원]]과 군 법무관을 마친 1978년 [[부산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종교는 [[불교]]이다.<ref>허신열,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701495&sid=E&tid=1 박근혜 인사에 불교계 민감반응], 내일신문</ref>
본관은이다.
부산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배석 판사로 재직하던 1980년 11월 24일 결심 공판에서 배석으로 관여했다가 선고 공판에 서명 날인을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6270032921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6-27&officeId=00032&pageNo=11&printNo=10997&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1년 6월 27일자]</ref>
판사로 재직하면서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 대법원 재판연구관, [[사법연수원]] 교수, 사법발전위원회 위원,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던 이동흡은 2000년에 [[수원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직무대우에 이어 2005년 2월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하다 2005년 8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서울가정법원]]에서 법원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9월에 [[한나라당]] 추천으로 국회에서 임기 6년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임명되었다. 2012년 9월 헌법재판관에서 물러난 이후인 [[2013년]] 1월 3일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특정업무경비 유용 의혹 등으로 인해 국회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아 41일만인 [[2013년]] 2월 13일에 헌법재판소장에서 사퇴하였다.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하던 이동흡은 법원내 형서 재판장 9며이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현행법을 지키지 않았던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선거법 전담재판부인 형사10부 재판장을 맡은 스스로도 [[박혁규]], [[유시민]] 의원의 재판에서 감정인·통역인·국선변호인의 일당과 여비·보수 등의 "소송비용에 대해 피고인의 부담으로 한다"는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108296]</ref>
* 1989년 [[대한민국 대법원|대법원]] 재판연구관
* 2006년 9월 ~ 2012년 9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 재판관]]([[한나라당]] 추천으로 국회 선출)
* [[서울고등법원]] 특별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10월 27일에 무학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대선주조 지분에 대한 매도를 요구하는 시정조치 등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67702]</ref> 10월 28일에 돈을 주고 청소년과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신상공개 처분을 받은 정모씨(29)가 "범죄사실이 알려지면 사업을 계속하기 어렵다"며 [[청소년보호위원회]]를 상대로 낸 신상공개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91305]</ref> 2005년 1월 5일에 2002년 6월 29일 발생한 [[서해교전]] 직전에 대북정보를 지나치게 변형 보고하고 "기무사가 표적 조사했다"고 주장하여 비밀누설과 명예훼손, 품위유지위반 등을 이유로 "정직 1개월 처분을 내린 것이 부당하다"며 한철용 소장(예비역)이 국방부장관을 상대로 낸 정직처분취소 청구소송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15524]</ref>
== 헌법재판관으로서 주요 의견 ==
*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BBK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이명박 특검법' 헌법소원에 대해 참고인 동행명령제를 제외한 나머지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김희옥 재판관과 이동흡 재판관 2명만 법 전체에 대해 위헌 의견을 냈다.<ref>미디어오늘 2009년 10월28일자 '재판관 성향으로 본 미디어법 위헌판결'</ref>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와 관련된 야간 집회 금지의 헌법 소원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2009년]] [[9월 24일]]에 헌법불합치로 결정할 때 "야간옥외집회 금지는 집회 및 시위의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의 조화라는 정당한 입법목적 하에 규정된 것"이라며 합헌이라고 했다.<ref>백나리, 차대운, [http://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8473.html 헌재, '야간집회 금지' 헌법불합치 결정], [[연합뉴스]]</ref><ref>{{뉴스 인용 |제목 = 盧 지명한 2인 등 위헌, 검찰출신·한나라 지명자 합헌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241805005&code=940301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조헌철 기자 |쪽 = |날짜 = 2009-09-24 |확인날짜 = }}</ref>
* [http://www.ccourt.go.kr/home/main/intro/judge_pop06.htm 헌법재판소의 이동흡 헌법재판관 소개]
[[분류:195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 재판관]][[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고성 이씨]]
- 이은수(육군) . . . . 19회 일치
||<bgcolor=#808080> '''{{{#FFFFFF 약력}}}''' ||<(>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br][[고등군사법원]] 법원장[br][[육군본부]] 법무실장(육군 준장)[br]고등검찰부장[br]보통군사법원장[br][[군법무관]] 임관[br][[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 ||
[[대한민국 육군]]의 법무장교. 여군으로는 7번째로 장관급 장교에 올랐다.
1965년에 [[구미시]]에서 태어났으며(당시에는 선산군이었음) 4남매(2남2녀) 중 맏이였다. 오상고를 졸업하였으며[* 이 장군은 원래 의사나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으나 당시 오상고 여자반에 이과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문과를 선택했고, 법대를 나온 고모부의 영향으로 경북대 법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1989년에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한국개발연구원에 연구원으로 1년간 근무하다가[* 이 장군은 대학 4학년 때 사시 1차와 군법무관 1차에 합격하였으나 사시 2차에 떨어지고, 집안형편상 더 이상 고시공부를 할 수 없어 취직을 했다고 한다.] 군법무관 시험에 최종합격하여 1991년에 법무사관 9기로 임관(중위로 임관)했다.[* 대개 임관을 하면 사단 법무참모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군이라 바로 발령받지 못했는데 당시 36사단장이 이은수 중위를 참모로 썼다. 36사단장의 사모님이 간호병과 대령이었기 때문에 여군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한다.] 법무사관 가운데 첫 여군이었다.[* 2012년 기준으로는 군법무관 560명 가운데 52명이 여성이었다.] 당시 임관한 뒤로 10년을 법무사관 중 홍일점으로 지내야 했다고. 2011년에 [[여군]] [[군법무관]]으로는 처음으로 [[준장]]에 올랐다.[* 여군 최초의 [[장성급 장교|장관급 장교]]는 간호 병과 출신 [[양승숙]] 준장이었다. 2014년까지 여군 [[장군]], [[제독]]은 간호 7명, 보병 1명, 법무 1명 등 총 9명(전원 육군)이다.] 법무 병과장인 [[육군본부]] 법무실장에 올랐다.[* 본래는 법무관리관이 병과장으로 육군 소장이 임명되었으나 여러 문제가 일어나 예비역 법무장교 출신 군무원을 임명하는 걸로 바뀌었다.] 같은 해 12월에 [[고등군사법원|고등군사법원장]]으로 옮긴 후 2014년 퇴임하였다.
2014년에 선임 장교의 성추행과 가혹행위로 육군 대위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회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980731#cb|관련기사]]
가족관계로는 남편과 딸 하나가 있었으나 남편은 07년에 지병(암)으로 사망하였고, 부친도 이 장군의 전역 3개월 전에 별세하였다.[* 이은수 장군은 자신의 장군 취임식 때 연평도사건으로 인하여 뒤숭숭한 분위기 때문에 부친을 모시지 못했다. 그래서 본인의 전역식 때는 부친을 꼭 모시고자 마음먹었으나 전역 3개월을 앞두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모친의 병간호로 무리했는지 사망했다.]
- 정창영 (공무원) . . . . 19회 일치
| 학력 = [[성균관대학교]] [[행정학]] [[학사]]<br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률학]] [[석사]]
| 경력 = [[한국철도공사]] 사장<br />[[대한민국 감사원|감사원]] 사무총장<br />감사원 제1사무차장<br />감사원 제2사무차장<br />감사원 국장<br />[[대한민국 국회|국회]] 예결위 입법심의관<br />[[대통령비서실|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br />감사원 과장<br />감사원 감사관<br />청와대 [[대통령경호실|경호실]] 감사담당관<br />감사원 부감사관<br />경북도 / 대구시 / 서울시 행정사무관<br />행정고시 24회
'''정창영'''(鄭昌永, [[1954년]] [[8월 29일]] ~ , [[대구광역시|대구]])<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81626 국회-감사원 첫 인사 교류] 《동아일보》 2005년 1월 20일 정용관 기자</ref>은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C%A0%95%EC%B0%BD%EC%98%81&os=766969 네이버 인물정보]</ref>
* 1980년 : [[성균관대학교]] 행정학 학사
* 경상북도 행정사무관
* 대구광역시 행정사무관
* 서울특별시 행정사무관
* 감사원 부감사관
* 대통령경호실 감사담당관
* 감사원 감사관
*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행정관
*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입법심의관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감사원 사무총장]][[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
- 최남선 . . . . 19회 일치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문학가이자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문화운동가]]이다. 본관은 [[동주 최씨|동주]](東州)이다.
육당 최남선은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최헌규(崔獻圭)와 어머니 진주 강씨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명문이었고 아버지 최헌규는 하급 관리였으므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901년 3살 연상의 부인 연주 현씨(玄氏)와 결혼했다. 스스로 독학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최남선은 인쇄시설을 추가로 구비하여 1908년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였다. 처음 건물과 비용이 넉넉하지 않아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하였으며 후일 사세를 확장하여 [[경성]]시내로 사무실을 옮겼다. 여기서 그는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 (잡지)|소년]]》을 발행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1909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3월에는 도산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내면서 청년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914년 몇몇 뜻있는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다시 종합 계몽 잡지 《[[청춘 (잡지)|청춘]] (靑春)》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으나 이 역시 총독부에의해 [[1918년]] 강제폐간되었다. 1918년 《[[청춘 (잡지)|청춘]]》에 역사 연구 논문인 《계고차존》(稽古箚存)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신문관에서 많은 책과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한민족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를 1910년 설립하였다.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 제18호에 [[일연]]의 《[[삼국유사]]》 전체를 게재하게 하였다.<ref>《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24~25쪽. {{ISBN|978-89-323-1536-2}}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다 일연(一然)의『삼국유사(三國遺事)』 를 실은 것이었다.” </ref> 같은 해 총독부가 집과 연구 비용을 지원한다고 회유하자 그해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 가담한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연이어 그와 결별 선언을 했다. [[한용운]]은 그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려고 시도했다.
1920년대에 문화 운동 활동한 동시에 같은 해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청구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라며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종 친일논설을 게재했다.
1938년 《[[만몽일보]]사 (滿蒙日報社)》 고문과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의 한국사, 한국학 교수직에 임명되어 교수로 부임해 1943년 2월까지 역임했다. 1940년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 세력을 상대로 귀순 및 투항공작을 전개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 고문으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매일신보를 비롯해 경성일보등에 학도병 권유 유세문을 기고했고, 각종 시국강연에 나서면서 활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다. 휴전 후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재직하였고,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기고활동을 계속했다. 1957년 10월 10일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최남선은 그는 평생 고전 정리와 주석에 관계된 것 등 다방면에 걸쳐서 국사와 고전 서적의 간행, 복원, 한글 번역 작업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창작하는 등 개화기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시조 부흥 운동을 지도하여 최초의 시조 시화집 《백팔번뇌》를 출판하기도 하는 등 신문화와 전통 문화의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한국의 신문화 운동에 남긴 업적은 매우 크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최남선의 [[단군론]]은 1926년 3월 3일부터 1926년 7월 25일까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인데 특유의 논법에 의거 ‘[[단군론]]’을 내세워 일본인 중심의 [[식민사관]]에 맞서기도 하였다.<ref>「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단군론의 문헌검색, 김성호 저, 푸른숲(2000년, 43~51p)</ref>
[[장준하]]는 '그를 경애하는 스승이며 민족 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했다'고 하였다.<ref name="changs"/> 장준하는 '선생은 약관 18세에 이미 궤란을 기도에서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우선 민족의 명영을 영원히 부지하려는 원대한 의도 밑에 문화의 황무지를 개척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이래 종시일관하여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족의 재흥을 위하여 발분망식하였다. 선생이 우리 역사학에 전심하여 마침내 사학의 태두로 일세의 숭앙을 받기까지에 이른 근본 연유도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ref name="changs"/>'라며 그가 한국 역사학 연구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하였다.
== 가족 관계 ==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195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출판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작원]][[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출판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한문학자]][[분류:민족대표 48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한확 . . . . 19회 일치
|직업= 문신, 정치인, 외교관, 작가
'''한확'''(韓確, [[1400년]]<ref>1403년생 설도 있다.</ref>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ref>{{브리태니커|b24h3077a|한확}}</ref>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조선 세종|세종]]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이다.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명나라]]의 [[영락제]]의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건너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를 거쳐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다.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과 [[세조 찬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가 서원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여비 한씨]], [[선덕제|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은 그의 넷째, 다섯째 누이이다. 검소하고 청렴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도왔고, [[1418년]]의 [[세종]]의 책봉 고명과 [[1455년]] [[조선 세조|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둘째 딸은 [[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 증]]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딸은 [[조선 세조|세조]]의 장남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비 [[인수대비]]로서 [[조선 세종|세종]], [[조선 세조|세조]] 2대에 걸쳐 사돈이 되었다. [[한명회]]의 일족이다.
[[1427년]]에는 그를 공격했던 좌군 도사(左軍都事) 최징(崔澄)이 역으로 무고죄로 처벌을 받았다.<ref>세종실록 38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12월 5일(무오) 2번째기사 "한확과 홍인을 무고한 죄로 좌군 도사 최징을 의금부에 가두라 명하다"</ref> [[1429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는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내관 백언(白彦)이 그의 어머니에게 주는 단초(段綃)와 성(成)·차(車)·정(鄭)·노(盧)·안(安)·오(吳)·최(崔)씨 등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여인들이 쓴 편지를 고국의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했는데,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
[[1438년]](세종 21년) 중추원사가 되었다가 통행금지 시간을 어겼는데 [[수문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탄핵을 받고 파면당했다.<ref>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10월 19일(경오) 1번째기사 "성문 출입에 문제가 있던 한확·연경·이연기·남계영을 벌주다"</ref> 그해 복직하여 정헌대부 중추원사를 거쳐, 1439년 판한성부사, 경기도관찰사, 판병조사,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경기도감사로 나갔다가 복귀, 1440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병조 판서, 판병조사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그는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함길도]]로 부임해갔다. [[1442년]](세종 25년) 동지중추원사와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를 겸하였고, 그해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행[[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그해 행[[평안도]][[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였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그 후 판이조사·[[좌찬성]] 등을 거쳐 [[조선 세조|세조]] 때 서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확의 저술은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차원부]] 치제문"이 있다고 주장되어 왔으나 실제와 다르고, 《차원부설원기》의 이본인 《차운암설원록》에 실려 있는 응제시 1편이 있으나 그의 저술이 아님이 논증되었다.<ref>[http://cafe.daum.net/moonwharyu/Gh3E/111 양성지와 한확의 차원부관련 글에 대한 고찰]</ref>
== 가족 관계 ==
== 관련 작품 ==
== 관련 항목 ==
[[분류:1400년 태어남]][[분류:145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왕족]]
- 함인섭 . . . . 19회 일치
|경력 = 前 [[대한민국 농림부|농림부 장관]] <br/> 前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농과학행정특임촉탁위원 <br/> 前 [[한국독립당]] 농림행정특보위원 <br/>前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br/>前 [[강원대학교]] 명예총장 <br/> 前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br/> 前 [[상지대학교]] 초빙교수
|직책 = 前 제6대 대한민국 농림부 장관
'''함인섭'''(咸仁燮, [[1907년]] [[5월 3일]] ~ [[1986년]] [[9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이며, 초대 강원대학교 학장, 제6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그는 [[춘천농업대학]]([[강원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에 참여, 개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춘천농업대학]] 초대 학장과 2대, 4~5대 학장, 강원대학교 농과대학원장, 강원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제3대 부통령 송암 [[함태영]]의 손자이며, 26년 연하인 [[함병춘]]은 그의 배다른 이복 삼촌이었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촉탁직원이 되었다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 [[황주군|황주]][[춘광원예학교]]와 [[자동농업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46년]] [[춘천공립농업중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이후 주로 [[강원도]]에서 교편을 잡았다. [[강원대학교]]의 전신인 [[춘천농업대학]]의 설립에 주로 참여하였다. [[1952년]]에는 농림부 장관으로 잠시 재직하면서 8.25 직후와 건국 직후의 토지보상 문제와 토지 관련 분쟁을 모두 해결하였다.
[[미군정]] 당시 대학 부지와 대학 설립 인가를 얻어서 [[1948년]] [[2월 1일]] 춘천농업대학을 개교하고 학장서리가 되었다가 [[1949년]] [[8월 30일]] 춘천농업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이후 춘천농대의 2대, 4~5대 학장이 되었고, 5대 학장 재직 중 춘천농업대학에서 강원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아명(兒名)은 '''함재인'''(咸在仁)이다. 본관은 [[강릉 함씨|강릉]](江陵).
[[1907년]](광무 10년) [[5월 3일]]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함병석과 진주 강씨 강리백가(姜利百加)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재인이었으나 뒤에 인섭으로 고쳤다. 함병석은 [[대한제국]]시대의 법관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던 [[함태영]]의 본처 밀양 손씨 소생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일찍 사망하였다. 형제로는 남동생 함의섭이 있었다.
[[1948년]] [[8월]]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現 강원대학교) 설립,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 학장서리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문교부]] 국가고등고시 전형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49년]] [[8월 30일]]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건국 이후 그의 할아버지 [[함태영]]이 조선 말 [[독립협회]]사건과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수감된 [[이승만]]에게 관대한 한결을 내려 그 인연으로, 내각 법무장관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성사되지 않고 할아버지 [[함태영]]은 [[심계원]]장과 제3대 [[부통령]]을 지냈다. 전쟁이 발생하자 그의 동생 함의섭이 일가족을 이끌고 [[부산광역시|부산]]으로 피신하였다.
[[1952년]] [[3월 6일]] 제6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이 되자 그는 정부 수립 직후에 시행한 [[토지개혁]] 당시 농지보상금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8·15 광복 직후에 발생한 토지관련 분쟁과 토지보상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1952년]] [[8월 28일]], 1952년의 중석불 사건으로 인책 사임<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1020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947&publishType=00020 ]</ref>하였다. 그는 중석불 사건의 피해자라는 시각도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2200099109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3-22&officeId=00009&pageNo=9&printNo=9047&publishType=00010 ]</ref> 그밖에 그는 강원도 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강원도 교육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1956년]] [[9월 12일]] UN가입추진위원회 전원위원회 강원도지부 부위원장<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9120032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9-12&officeId=00032&pageNo=1&printNo=3366&publishType=00020 ]</ref>이 되었다. 1957년 4월 20일 춘천농과대학 학장이 되고 1957년 5월 12일부터 [[1960년]] [[7월 7일]]까지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그는 또 [[1960년]] [[7월 5일]]까지 고등고시 전형위원에도 위촉되었다.
* [[문교부]] 농업교육담당관
* [[1952년]] [[3월 6일]] ~ [[1952년]] [[8월 28일]] 제6대 농림부 장관
* 논문, 한국에 있어서의 대두 재배 및 육종에 관한 연구
== 가족 관계 ==
|직책 = [[대한민국 농림부|농림부 장관]]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86년 죽음]][[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자유당]][[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농림부 장관]]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18회 일치
엄밀히 말해서 프로이센은 독일민족의 땅이 원래 아니었기에 신성로마제국 소속이 아니었지만, 영역이 제 1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여기에 서술한다.[* 사실 본래 '독일 민족의 땅'으로 한정한다면 메클렌부르크나 포메른일대도 신성로마제국 영역이 아니긴 하다. 독일 동방원정과 관련되어 복속된 경우.]
주문화권이 프러시아 문화권이거나, [* 시작지점에서 이걸 만족하는 국가는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그리고 리가 정도다.] 아니면 자신의 국가가 브란덴부르크일경우에, 쾨니히스베르그를 가지고 있고, 국교가 개신교(protestant)나 개혁교회(reformed)일경우, 프로이센을 형성할 수 있다. [* 브란덴부르크는 어차피 국가이념이 프로이센이랑 같기 때문에 취향따라 그냥 브란덴부르크로 가도 상관없다 ~~대신에 프뽕을 못느낀다.~~]
시작지점에서 폴란드와 역사적 라이벌이고, 리보니아 기사단과 역사적 친구관계이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거의 무조건 라이벌을 띄우고, 리보니아 기사단은 무조건 동맹을 해온다. 그런데 폴란드가 동군연합을 할경우에 튜튼이랑 리보니아 연합군이 뭔짓을 하든 이것들의 물량을 따라올 수가 없다(...)~~고증 제대로네~~ 그러므로 폴-리투연합을 견제해줄 국가가 필요한데, 추천되는 국가는 헝가리,보헤미아,모스크바,오스트리아정도이다. 그리고 중요한건, 신롬 가입을 위해 오스트리아랑은 무조건 친해져서 신롬가입을 하자. 안그러면 북독일지방 확장이 봉인된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상당히 힘들다. 오스트리아는 아우구스부르크나 잘츠부르크같은 남독일지방 소국들 문제로 분쟁을 겪을 일이 많으며, 신롬내 2위국이자 바로 옆에 붙어있는 보헤미아는 바이에른을 라이벌로 지정하는 경우가 잦다. 팔츠같은 좀 만만한 국가를 패려고 들어도, 옆에 붙어있는 국가들이 거의다 신롬내 자유도시들이며, [* 자유도시 국가는 기본적으로 황제국이 보호를 해주며 방어전때 앵간하면 거의 무조건 딸려온다.] 잘츠부르크랑 아우구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진출 방향과 겹쳐서 무조건 얼마안되 싸운다고 봐도 무방하며(...) 팔츠는 오스트리아나 보헤미아와 동맹하는 경우가 잦다(...) 다행히 주변국들중 안스바흐가 그나마 만만하고 관련 미션도 있으므로, 공격해 자신의 속국(vassal)로 삼는게 좋다. 일단 위치가 위치인지라 신롬내 강국들에게 다굴맞아 쪼그라들기 쉬우므로, 동맹하기 적당한 강국부터 찾아야 된다. 가장 좋은 동맹은 헝가리, 최근 리투아니아의 개발도가 너프되 폴란드의 힘이 상당히 빠져 동유럽의 강자로 떠올랐으므로 가장 좋은 동맹이다. 폴란드도 괜찮긴 한데, 이 녀석이 뭔 생각인지 브란덴부르크나 실레시아등 자기랑 맞닿아 있는 신롬국가들을 공격해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이는 경우가 잦으므로(...)그냥 하지 말자. 어차피 이젠 헝가리나 모스크바한테 털리는 호구다. 그외에 부르고뉴는 분할 상속이벤트로 저지대를 통채로 주기도 하니, 결혼정도는 해주는걸 추천한다.
플레이어의 국가의 주문화권이 이탈리아 지방 문화권에 속해있을경우, 필요 프로빈스를 다먹었을때 이탈리아를 형성할 수 있다.[* 단, 교황령은 불가능. 실제 역사에서 이탈리아 독립운동가들이 교황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독립을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교황청은 세속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거부하여 무산되고 사보이 왕국을 중심으로 독립을 추진한 것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을듯.] 추천되는 국가는 사보이,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나폴리 정도. 본래 나폴리나 교황령등의 비 신롬소속 이탈리아 국가들은 확장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1.12패치이후 그림자 왕국(shadow kingdom)이벤트로 1490년이 지나면 이탈리아지방 국가들은 신롬에서 탈퇴하니 조금 나아졌다.
우선은 그러므로 오스만과 오스트리아로 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동맹부터 구해두는게 가장 중요한데, 프랑스와 폴란드, 아라곤등이 여기에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 다만 최신패치부터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와의 동군연합을 거절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럴경우 헝가리마냥 초반에 사기장수가 없는 폴란드는 박살날 가능성이 높다. 혹시나 이런 경우가 생기면 재시작하자(...)] 구호기사단에 걸어둔 독립보장은 괜히 오스만과의 1대1맞다이를 강요하게 하니 관두면서 본토와 달마티아 지방을 육로로 연결하는데 주력하자. 아, 그리고 상인공화정은 영토가 20개이상이 되면 부패도 (corruptions)가 오르기에 그거 줄인다고 수입이 줄어든다. 1.16이후로 외교력 100을 소모해서 상인공화정도 정부체제를 바꿀 수 있으니, 적당히 확장해뒀다 싶으면 바꿔두자.[* 부패도 감소비용을 없앨수도 있으나, 테크비용이 늘어나기에 최종적으로 국력이 약해진다.]
초반에 저지대 국가 셋(플랜더스, 홀란드, 브라번트)을 동군연합휘하에 두고 있다. 그리고 느베르를 속국으로 가지고 있으며, 브로타뉴랑 동맹이다. 이것때문에 전통에 외교관계+1이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그나마 시작지점 군주인 선량공 필리프의 능력치가 555로 [* 이게임에서 군주의 최대 능력치는 666이다. 일단 여기에 시작지점에서 가장 근접한 군주는 [[세종]]과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정도.] 좋다만 그다음 후계자인 샤를의 능력치가 204(...) 이것때문에 외교테크 올리기 꽤나 힘들다. 다만 그렇다고 못올리는 수준은 아니니 외교관계수에 주의하면서 적절한 동맹을 구하자. 일단 시작지점에서 좋은 동맹으로는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역사적 라이벌이기에 가끔 시작지점에서 라이벌로 찍지 않는 이상은 동맹하기 어렵지 않다.], 카스티야, 아라곤등이 있다. 그뒤 교황령이 제발 빨리 프로방스에 파문에 걸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자. 아비뇽때문에 백프로 이둘은 사이가 좋지 않을것이고, 교황령은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것이다. [* 파문이 걸린 국가의 땅을 먹으면 AE가 50퍼센트 더 적게 늘어난다.] 교황령이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면 바로 프로방스에 그걸 명분으로 공세를 취해서 로레인에 속하는 지방[* 메프, 로트링겐, 바]를 모두 먹어두자.[* 시작지점에서 프로방스와 프랑스가 동맹상태일텐데, 어차피 프랑스 시작부터 프로방스에 왕위주장을 걸기때문에 동맹은 풀린다. 동맹 푼 틈타서 먹으면 됀다.]
그 다음 공세는 잉글랜드령 프랑스로 정해두자. 메인 할양 이벤트로 프랑스와 싸우게 되든, 그 할양 이벤트에서 잉글랜드가 메인을 넘기든, 잉글랜드는 결국 프랑스와 싸우게 되어있는데, 그틈에 잉글랜드를 쳐서 칼레와 노르망디일대를 먹어두자.(AE가 남으면 알렝송까지 먹어도 상관없다.) 이후 확장방향은 취향따라 다른데, 브르타뉴를 먹고 북프랑스쪽으로 확장하든, 북프랑스를 장악한뒤 신롬쪽 영역을 먹든, 신롬 영역을 치든, 그건 취향차니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다만 위치상 어디로 확장하든 신롬 소국들이 빼액대면서 반국가연합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는것에 주의하도록 하자.
''' 나, 정복자 술탄 칸은 만방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노라. 보스니아의 프란체스코회는 술탄의 이 칙령으로 보호받을 것이다. 아무도 그들과 그들의 교회에 해를 가할 수 없다. 그들은 나의 영토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 이들도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을 것이다. 내 영토의 변경에 자리한 수도원으로 안전하고 자유롭게 돌아올 수도 있다. 나의 제국의 귀족들, 관리들, 시종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없고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교회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다. 그들이 고국에서 가져 온 모든 것들. 데리고 온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땅과 하늘을 지으신 성스런 신의 이름으로 나의 검을 들어 이 칙령을 선포하노라. 나의 모든 신민(臣民)들은 이 칙령에 복종해야 한다.-메흐메트 2세 '''
''' 오늘이 여러분에게 영광의 날임을 기억하시오. 여러분은 피를 단한방울만 흘리더라도 여러분 스스로를 위해 순교자의 보관과 영원한 영광을 준비하게 되는것이오. -콘스탄티누스 1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프로빈스 3개[* 속국인 아테네 프로빈스까지 합치면 4개] 짜리 제국(...)국가. 이게임에서 초반 최강국인 오스만의 바로 옆에 붙어있다는것과, 그 오스만한테 상대도 안된다는게 가장 문제인 국가다(...) ~~시기상 당연하긴 한데...~~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건 어떻게든 쓸만한 동맹을 얻는것. 우선 오스만을 라이벌 지정하고 헝가리가 오스만을 라이벌지정하길 빌자(...) 폴란드가 리투개발도 너프이후로 약화된 이후 비잔티움이 살기위해선 헝가리와 헝가리의 초반 장군인 ~~갓노슈~~ 야노슈 후냐디에게 모든걸 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만 헝가리만으론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므로 그외에 발칸 소국들이 필요한데, 세르비아나 왈라키아를 끌어들이는걸 추천한다. [* 다만 왈라키아는 가끔 헝가리를 적국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있다. 뭔 깡인지는 불명(...)] 오스만과의 초반싸움에서는 어떻게든 그리스지방 코어를 얻어둬야 한다. 그외에 한개 땅정도는 추가로 얻어낼 수 있을텐데, 아나톨리아지방을 먹어서 이후 아나톨리아 탈환에 써먹든, 불가리아 코어가 있는곳을 먹어서 재정복 명분을 얻어내든, 어느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취향따라 뺏어라. 로마나 니코메디아, 알레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탈환 이벤트라던가 비잔티움 전용 이벤트가 상당히 많으므로 고생한 보람이 상당히 있는 국가. 참고로 로마제국 최대판도를 복원하면 로마제국 형성을 할 수 있는데, 이게 크킹 컨버터로 만드는 로마제국을 그냥 복사+붙여넣기 한거라(...) 정작 비잔티움관련 문화권은 전부 수용불가능 문화권이 되버린다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그냥 비잔티움으로 하자. 애초에 비잔틴이 로마다.~~
우선 시작지점에서 공위상태인데, 헝가리의 왕이 오스만과의 바르나전투에서 패배해서 그렇다.[* 같은 이유로 폴란드와 보헤미아도 공위상태다.] 오스트리아와 시작하자마자 동맹을 해두고 약간만 기다리면[* 앞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해두고를 적었지만 꼭 오스트리아와 동맹안해둬도 일어난다. 어차피 역사적 친구보정덕에 냅둬도 동맹을 걸고] 000섭정의회로 갈지, 야노슈 후냐디를 섭정으로 세우는지[* 능력치 455]가 갈릴텐데 능력치도 후자가 더좋고 역사적이기까지 하므로 얌전히 야노슈를 섭정으로 올리자.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가 깎이겠지만 역사적친구보너스 덕에 이거 가지고 동맹이 풀리거나 동맹을 못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 이후 보헤미아와 튜튼기사단중 헝가리를 라이벌로 삼지않은 국가와 동맹하고 폴란드가 튜튼기사단을 치길 기대하자. 리투아니아 개발도 너프전엔 폴란드가 거의 프랑스급으로 쎘지만 너프이후론 야노슈가 이끄는 헝가리군정도에 기사단 둘정도면 해볼만해질정도다.[* 다만 한타한번 밀리면 끝장이긴하다(...)] [* 만약 튜튼이 헝가리를 라이벌로 삼았다면, 독립보장을 걸어두자. 방어전 한정으로 따라서 싸울수 있다.] 그리고 이걸 하기전에 가장 중요한건 일단 미리 외교탭으로 가서 폴란드가 들고 있는 지방중 일부를 관심지역으로 지정해두는것. 전쟁기여도가 높으면 관심지역중 일부를 주는(아니면 전부!) 경우가 있으므로 굉장히 유용하다. 이상태로 10년이 지나고 헝가리왕의 후계자가 없으면 [* 만약에 생겨버렸으면 1470년까지 어떻게든 후계자를 없애야 한다. 후계자가 좋을경우엔 그대로 합스부르크가로 유지하면 되지만.] 두가지 선택지가 생기는데, 첫번째는 야노슈의 아들인 마챠시 1세를 왕으로 세우는것이고, 두번째는 랜덤한 합스부르크국가에게 동군연합되는것이다.
- 유해진(배우) . . . . 18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가톨릭/인물)]
|| '''본관''' ||<(> [[류(성씨)|진주 류씨]] 토류계[* 진주 류씨 토류계 26세손 '海'자 항렬이다.] ||
조연 전문 배우라 해서 조연만 맡은 것은 아니며 [[주연]]으로도 꽤나 출연했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 작품을 오롯이 끌고 나아가는 ~~외모~~힘은 아직 부족한 탓인지, 혹은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보였는지 주로 공동주연이 많으며,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들 중 유명한 것들로는 아래의 작품이 있다.
전술한 작품들 중 《극비수사》가 286만이고, 《그놈이다》와 《이장과 군수》가 고작 100만을 넘겼을 뿐, 나머지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못 올렸고(특히 《죽이고 싶은》은 10만대), 결국 2010년작 《[[부당거래]]》에선 다시 조연으로 출연했다(...). 거기다 2012년 남자 주인공으로 열연한 《미쓰고》도 61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2016년 [[럭키(영화)]]를 통해 드디어 첫 단독주연을 맡게 되었다! 영화는 대략 유해진이 맡은 주인공 형욱은 원래 냉혹한 킬러였으나, 우연한 사고로 기억을 잃은 후 무명배우로서 활동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킬러 부분은 소름끼치는 스릴러 영화 속 인물이지만 사고 후 갑자기 코믹해지는 부분에서 유해진과 정말 어울리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관객수 또한 손익분기점의 2배를 넘기면서 흥행도 크게 성공했다!
영화 [[럭키(영화)|럭키]]의 성공으로 누적 관객수 1억 명을 돌파하였다. 이는 [[오달수]], [[송강호]]에 이어 역대 세 번 째 1억 관객 돌파 기록이다. ~~하지만 1년 후 찍은 [[레슬러(영화)|영화]]에서 폭망을 맛보게 되는데...~~
이후 영화 [[공조(영화)|공조]], [[택시운전사]]가 연이어 흥행하며 총 관객수 1억 2000만 명을 기록, [[오달수]]에 이어 '''역대 대한민국 배우 누적 관객수 2위'''로 올라섰다.
||<#EAEAEA>'''연도'''||<#EAEAEA>'''제목'''||<#EAEAEA>'''배역'''||<#EAEAEA>'''관객수(명)'''||<#EAEAEA>'''흥행'''||
||<-2><#EAEAEA> '''총 관객수''' ||<-3> 128,071,223명 ||
||<-2><#EAEAEA> '''평균 관객수''' ||<-3> 3,370,295명 ||
대한민국 배우 누적 관객수 2위.[* 2018년 1월 기준. 참고로 1위는 [[오달수]].]
참고로 실제 성은 '[[류(성씨)|류]]'씨(버들 류)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류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류씨를 유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유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유씨로 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류씨들이 행정상 유씨로 살고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유현진'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류'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류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류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유현진이 아닌 류현진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류(성씨)|류]]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 ~~이게 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윗 동네]] 때문이다.~~]
옷 입은 모습을 보면 잘 모르겠지만 사실 근육질, 정확히는 [[이소룡]] [[근육]]의 소유자라는 얘기가 영화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정설로 돈다는 얘기가 있다. 한때 '''[[해군 특수전전단|UDT]]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위의 영상에서도 언급했듯이 6군단 예하 공병 출신으로 22살 이등병 때 우정의 무대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애청자. 심지어 삼시세끼를 찍으러 가서도 짬짬이 방송을 챙겨 들었다고 한다. 팝에 대한 관심이 많고, 의외로(!) 감성 넘치는 곡을 선호하며, 배철수가 휴가를 갔을 때 '''대타 DJ를 한 적도 있다.''' 유해진과 관련된 이야기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항목으로.
- 이경희 (1880년) . . . . 18회 일치
그뒤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3년]] [[조선총독부]] 폭파를 목적으로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총기와 폭탄, [[신채호]]의 격문과 [[조선총독부]] 관료들에게 보낼 투항권고문 사본 등을 국내로 반입, 격문 수백장을 받아 배포하였고,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미수 직전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 후 [[신간회]](新幹會)의 조직에 참여했고, [[신간회]] 경북지부, 대구지부 등을 조직했으며, [[밀양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와 초대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 미 군정 경상북도사령부 민정관 등을 역임했으나 [[미군정]]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다. 이후 시민단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자는 군선(君善) 또는 군미(君美)이고, 호는 지오(池吾),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仁川)이다. [[경상북도]] 출신.
지오 이경희는 [[1880년]](고종 17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서변동)에서 아버지 이병두(李柄斗) 어머니 경주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 [[이강희 (독립운동가)|이강희]]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증직|증]][[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공도공(恭度公) [[이문화|오천 이문화]](烏川 李文和)의 19대손이며,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주 (임란 의병장)|태암 이주]](苔巖 李李輈)의 11대손이다.
소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고종 32) 대구 공산의 소학교에 입학하고, [[1901년]](광무 4) 공산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부]]로 상경, [[경성부]] [[기호중학교]](畿湖中學校)에 입학했다. [[1905년]] 한성 기호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그해 [[11월 17일]]의 [[을사 보호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으나 조약이 강제로 통과되자, 관직의 꿈을 접고 교육계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의 아호를 지오라 하였는데 이는 나라 잃은 나는 못난 이라는 뜻이었다.
[[1909년]](융희 3) [[윤치호]],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고, [[청년학우회]] 경성부지회의 회원이 되었다. [[1910년]] [[5월 13일]] 독립운동가 [[구찬회]]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구찬회와 같은 고향 출신이던 그는 한국통감부와 일본의 눈을 피해 [[구찬회]]의 시신을 [[미역]] 속에 숨겨서 경성에서 대구 무태로 운반하여 [[구찬회]]의 가족들에게 시신을 전달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10년]](융희 4) [[10월]]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청년학우회 한성지회의 일원으로 [[이동녕]](李東寧), [[윤치호]], [[안창호]], [[윤치소]], [[이회영]](李會榮), [[윤기섭]](尹琦燮), [[이승훈]], [[김좌진]](金佐鎭),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회원이 되었다. 이후 [[신민회]]의 비밀회의에 참여, 독립군 기지창건을 목적으로 자금을 마련하는데 동참했고, [[105인 사건]]을 피해 바로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여 무관학교(훗날의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장사와 노동에 종사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돈을 모았다.
[[1923년]] [[의열단]] 단원으로 비밀거사를 준비하여 5월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3년]] [[김원봉]] 의 지령아래 [[김지섭]], [[김시현]](金時顯), 유시태(柳時泰), 홍종우(洪鍾佑), 황옥(黃鈺) 등과 모의하여 [[중국]]과 [[만주]]로부터 무역 목적으로 [[안둥현]]에서 [[쌀가마]]에 숨겨서 국내로 반입해온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의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반입, [[1923년]] [[3월 15일]] 이를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여 일제 패망론을 주장하며, 해방을 준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일본인]] 도지사와 부지사 등이 업무를 내려놓고 사퇴를 선언하자 행정공백을 피하기 위해 [[8월 16일]] 위촉장을 받고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가 되고, 그날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겸직하였다.<ref>당시 경상북도청은 대구시내에 있었으므로 그는 경상북도 부지사와 대구부윤 업무를 보느라 양쪽을 오고 갔다.</ref> 그는 대구부윤 上野彦八에게서 행정권과 치안권 일체를 인수하였다. 그밖에 그는 [[대종교]] 본부 경의원의 참의로도 임명되었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레이몬드 재노스키(Raymond A.Zanowski) 미육군 대령의 천거로 경상북도 미군정 사령부 민정관으로 위촉되었다.
[[1946년]] [[1월]] 다시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정책에 환멸을 느껴 [[1946년]] [[9월 4일]] 부지사, 대구부윤, 군정청 민정관 사직서를 제출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46년 [[9월 5일]] [[독립촉성중앙회]] 경북지부의 후신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에 피선되고, [[대종교]] 남사도본사 선범에 선임되고,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는 [[1949년]] [[7월 1일]] [[남선경제신문사]] 제4대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공적을 기려 [[대구광역시]] [[동구 (대구광역시)|동구]] 효목동 광복회 대구지회 회관 앞 [[망우공원]]에는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공적비'가 설립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신흥무관학교]] 개교에 참여
* [[1945년]] 미군정청 경상북도 사령부 민정관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신흥무관학교]]
|직책 = [[경상북도|경상북도 부지사]]<br />(겸임 경상북도 미군정 민정관)
- 이열희 (1924년) . . . . 18회 일치
| 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 근무 = [[국군수도병원|대한민국 육군수도병원 예하]] [[군의관]]
| 지휘 = [[군의관|군의무장교 공중보건의]]
'''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자, [[치과]] 의사, [[구강 성형외과]] 의사, 대학 교수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며, 치과, 악안면외과(악안면성형외과) 전문의였다.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의 치의학과 과장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초대 학장이었다. [[1962년]] [[11월]]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大韓顎顔面成形再建外科學會)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6.25 전쟁 당시에는 군의관으로 참전했고, [[1950년]]대부터 [[치과]]대학 부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979년]] [[경북대학교]]에 치의과대학을 별도로 설치하고, 이후 치과대학이 의과대학에서 분리, 단설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77년]] [[5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 대한치과의학협회 경상북도 지회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 학장, 경북치과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역사학자 겸 스포츠인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의 5촌 조카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그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천주교]] 영세명은 '''토마'''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1950년 군의관이 되어 전방에 배속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자 군의관으로 종군하였으며, [[1952년]] 육군 제1병원으로 발령되었다. 당시 육군 대위였던 그는 바로 제1병원 구강외과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54년]] 군의관으로 재직 중 최영보 중령(국군제1병원 외과부장겸 수련부장), 오상근 대위(국군제1병원 정형외과 과장), 허경발 대위(주한미군의무관실 연락장교) 등의 주선과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 [[한국]]의 치과 군의관 신분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의 [[성형외과]] 수련 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하였다.
경북대 재직 초기 당시 그는 "치과대 설립을 허가해 주고는 예산을 제때 배정해주지 않아 교실없이 신입생을 모집, 강의실을 구하기 위해 우왕좌왕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ref name="imails"/> [[1957년]]부터 [[대한민국 문교부|문교부]]를 상대로 치과 관련 대학의 별도 단설을 주장, 설득한 끝에 [[1979년]] 경북대학교 치과 대학외 7개 대학교의 치과대학을 시범으로 설립하여 성과가 나타나자 각 대학의 치과대학 별도 설치를 허가받았다.
== 가족 관계 ==
**** 5촌 조카딸 : 이재주, 군법무관 손준성의 어머니
*** 사촌매부 : [[서정귀]](徐廷貴, [[1919년]] ~ [[1974년]]), 4대·5대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1960년), [[호남정유사]] 사장 역임
* 처조모 : 이주열(李主悅,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 동서 : 노영달(盧榮達, 본관은 상주(尙州))
== 관련 항목 ==
[[분류:1924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치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 <!--[[구강 성형외과]] 의사-->[[분류:경북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
- 장성환 . . . . 18회 일치
'''장성환'''(張盛煥, [[1920년]] [[10월 27일]] ~ [[2015년]] [[1월 4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관료]]이다. [[공군참모총장]], 주(駐)태국 대사, [[대한민국 교통부|교통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11월에 미 제5공군으로부터 수송기를 인수하자 한국 최초로 공수업무를 담당했다. 참모총장 재임 시절에는 제30방공관제단, 즉 지금의 공군방공관제사령부를 창설했다. 빨간 마후라는 그의 임기 중에 제작되었다. 전역 후에 주 태국 대사, 대한항공공사 사장, 한국관광공사 총재,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1비행단장, 5비행단장 등을 거쳐 1957년에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올랐다. 그후 1958년 공군참모차장을 거쳐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
*1950년 공군사관학교 2기
*1952년 주미대사관 공군무관
*1971년 교통부 장관
|직책 = [[주 태국 대한민국 대사관|주 타이 대한민국 대사]]
|직책 = [[대한민국 교통부|교통부 장관]]
[[분류:1920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태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교통부 장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기후 대학 동문]][[분류:도야마 대학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국방연구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장]][[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공군무관]]
- 태영호 . . . . 18회 일치
[[북한]]의 [[외교관]].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공사로 활동했으며, 2016년 8월 [[탈북]]했다. 탈출 과정에서 '태용호'라는 가명을 썼다.
빨치산 가문에서 태어난 태영호는 고등중학교 재학 중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오진우]](1995년 2월 사망) 전인민무력부장 등 빨치산 1세대의 자녀들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태영호는 평양 국제관계대학(5년제)를 졸업하고, 외무성 8국에 배치되었다.
=== 외교관 ===
주로 [[덴마크]], [[스웨덴]], [[영국]] 등 서유럽에서 활동하며 북한의 입장을 대표했다. 김정일의 덴마크어 전담통역 후보인 '1호 양성 통역'으로 뽑혀 덴마크에서 유학을 했으며, 1993년 부터 덴마크 대사관 서기관직을 맡았다. 1990년대 말 덴마크 주재 대사관이 철수하자, [[스웨덴]]으로 옮겨졌으며, EU 담당 과장으로 승진했다.
2000년 12월에 [[영국]]과 북한이 수교를 맺고, 2003년 4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이 정식 개설되자, 1등 서기관 신분으로 런던에 파견되었다. 현학봉 영국 주재 북한 대사의 뒤를 잇는 2인자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20년간 중요 외교관으로 지내던 태영호는, 2016년 갑작스럽게 탈북하게 된다. 태영호는 2016년 여름 임기를 마치고 평양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태영호와 친분이 있었던 [[BBC]]의 스티브 에번스 한반도 특파원은, 개인적으로 태영호와 만나면서 직전까지 탈북을 하려는 어떤 눈치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외교관으로서 태영호는 런던의 극좌단체 행사에 참가하여 북한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으며, 언론이 북한에 대하여 자극적인 보도만을 일삼는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태영호는 영국 내의 탈북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가디언 지 보도에 따르면 태영호는 공식적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했으나, 사석에서는 빈궁한 생활에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의 친지들은 런던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못하며, 자신이 [[풀장]]과 [[사우나]]가 딸린 궁전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방 2개, 좁은 부엌이 딸린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봉급 한달 1200파운드(약 174만원) 정도로 물가가 비싼 런던이라 생활고를 겪었으며, 태영호는 "대사관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 혼잡통행료 걱정을 하기도 한다."고 발언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2016년 8월 17일, 갑자기 영국에서 고위급 북한 외교관이 탈북했다는 소식이 퍼졌으며 곧 그가 태영호 영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가족과 함께 탈북한 태영호는 한국 [[망명]]행을 택했는데, 1997년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 장승길이 망명한 이래 최고위급 외교관의 탈북이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태영호는 북한에서 중시하는 [[출신성분]]이 매우 좋은 인물로서, 이 때문에 북한의 외교관은 통상 3년간 근무하지만 주영 북한 대사관에서 10년 동안 근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태영호의 형 태형철 역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이다.--물론 태영호가 탈북한 이상 형 역시...--
이 인물의 탈북 이후로 김정은이 고사총(보통 12.7mm나 20mm 기관총을 2연장 ~ 4연장으로 엮어 쓰는 [[대공포]])으로 관련자 및 책임자들을 처형했다는 소문(확인 불가)과 함께 탈북을 적극적으로 막기 위한 북한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18/0200000000AKR20160818103151014.HTML?input=1195m|연합뉴스 단독 기사]]
- Victoria II . . . . 17회 일치
* 치안율: 해당 지역의 범죄가 얼마나 저지되는가에 따른 정도. 관료 POP가 제공하는 효율성과 국가 관리 효율성에 따라 바뀐다. 이 수치가 낮을수록 해당 프로빈스에서 사회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 엽관제(Spoil System): 제일 지지도가 높은 정당의 지지도 +500%
==== 식민지 개척과 관리 ====
또한 문명국들은 디시전을 통해 연구 담당 관리들을 변경할 수 있다. 이 디시전에는 약간의 위신 감소와 10여년간의 디버프가 동반된다. 선택할 수 있는 담당 관리들은 다음과 같다.
POP들의 투쟁성이 높아지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반란의 원인은 다양하다. 특정 민족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 전쟁을 벌인 걸수도 있고, 특정 사상의 지지자들이 정권 정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걸수도 있다. [[태평천국 운동]]이나 [[붉은 셔츠단]] 처럼 이벤트로 발생하는 반란도 있다. 이념 반란의 경우에는 수도를 점령하면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 이 경우 모든 외교관계가 초기화되니 주의. 당신 땅을 탐내고 있었지만 동맹국 때문에 침략하지 못하던 적국이 전쟁을 벌일 수 있다.
관계도(Relations)는 해당 국가 정부와 얼마나 사이가 좋은가를 의미한다. 관계도가 높을수록 요청을 들어줄 확률이 쥐꼬리만큼 늘어난다. 만약 관계도가 음수라면 모든 요청에 "ㅗㅇㅅㅇ"라는 반응이 날아온다.
* 관계도 증가(Increase Relations) : 2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와의 관계도를 살짝 올린다.
* 관계도 감소(Decrease Relations) : 1외교 점수를 소모해서 해당 국가와의 관계도를 살짝 내린다.
* 대사관 폐쇄(Ban Embassy) - 친숙함(Friendly)부터 사용 가능. 영향력 65를 소모해 지정한 열강이 해당 국가에 쌓은 영향력을 전부 날려버린다. 지정된 열강은 1년간 해당 국가와의 영향력을 쌓을 수 없다.
게임을 하다보면 두 국가가 지방이나 식민지의 소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이게 된다. 분쟁이 일어나면 긴장(Tensions)라는 수치가 올라가는데, 이 긴장 수치를 유발할 수 있다. 위기가 발생하면 두 국가는 자국의 입장을 대변해 줄 주요 열강을 찾게 된다.[* 위기의 당사자가 주요 열강일 경우에는 자국이 대표자가 된다.] 어느 한쪽만 지지자가 생기거나 두 국가 모두 주요 열강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대로 위기는 사그라든다. 하지만 두 국가 모두 주요 열강의 지지를 받게 될 경우에는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Victoria II]]
- 권재진 . . . . 17회 일치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前 대한민국 제62대 법무부 장관]]
|군복무 = 1983년 대한민국 공군 법무관 대위 전역
'''권재진'''(權在珍, [[1953년]] [[7월 27일]] ~ )은 [[대구]]에서 출생한 [[대한민국]]의 [[법조인]] 및 검사이다. 대검차장, 서울고검장, 청와대 민정수석을 역임했으며, [[2011년]] [[8월 12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장관을 맡아서, [[2013년]] [[3월 11일]] 법무부 장관 퇴임을 했다.<ref>[http://media.daum.net/economic/stock/others/newsview?newsid=20130311184903997 권재진 법무부 장관 퇴임], 뉴스토마토, 2013년 3월 12일</ref>
* [[2011년]] [[8월 12일]] ~ [[2013년]] [[3월 11일]] 제62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 [[1980년]]~[[1983년]]공군 법무관
* [[1990년]]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 [[1991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고등검찰관)
==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 ==
|직책 =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실 수석비서관]][[분류:이명박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분류:대한민국의 사외이사]][[분류:LS그룹]]
- 김경식 (1960년) . . . . 17회 일치
'''김경식'''(金景植, [[1960년]] [[1월 1일]] ~ , [[대구광역시]])는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차관이다.
* 1998.08 : 건설교통부 행정관리담당관
* 2002.01 ~ 2002.11 : 건설교통부 도시관리과 과장
* 2002.11 ~ 2004.03 : 건설교통부 기획담당관
* 2004.03 ~ 2005.07 : 대통령비서실 산업정책비서관실 행정관
* 2005.11 ~ 2006.08 :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정책홍보관리본부 본부장
* 2006.08 ~ 2010.02 : 주 중화인민공화국대사관 공사참사관
* 2010.03 ~ 2010.09 : 국토해양부 토지정책관
* 2013.02 ~ 2014.02 :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실 국토교통환경비서관
* 2014.02 ~ 2015.05 : 국토교통부 제1차관
|전임자 = [[박기풍]]<br/>(국토교통부 제1차관)
|직책 = 제2대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차관|국토교통부 제1차관]]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차관]][[분류:성광고등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김윤아(1974) . . . . 17회 일치
* 관련 문서: [[유용근밴드리즈]]
[[성신여자대학교]] 심리학과[* 본래는 음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아동심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심리학과에 입학한다.]에 입학한 93년 '풀카운트'라는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밴드활동을 시작하는데, 당시 풀카운트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던 구태훈과 처음 알게 된다. 이후 여러 밴드들을 거치다가 96년 김진만을 알게되고 97년 이선규와 김진만과 '미운오리'를 결성, 홍대 인근에서 활동한다. 이후 무대 디자인 일을 하고 있던 구태훈이 회사를 그만두고 합류하면서 최종 4인의 '미운오리'가 결성된다. 97년 4월 홍대클럽 "블루데빌"에서 공연하던 중 영화 관계자에 발탁되어 <꽃을 든 남자> OST 'Hey Hey Hey'로 데뷔했다. 자우림이라는 이름은 이때 지은 것. 별 생각 없이 지은 '미운오리'라는 이름이 막상 CD 자켓에 넣으려니 부끄러워서 하룻밤을 새서 지었다고.
2000년 <인터뷰>라는 영화에 본인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DVD가 활성화 되기 전이라 찾기 힘들어진 영화인데 2013년 9집 활동으로 출연한 SNL에서 어떻게 구해서 자료화면으로 틀어주었다. 관심있으면 찾아보자.
김윤아는 [[만화잡지]] [[르네상스]]-댕기 세대이자 [[PC통신]] 초기 세대로 덕력에 있어서 선배뻘이 된다. '자우림으로 데뷔하면서 포기해야 했던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만화' 라는 발언도 한 적이 있다. 2011년에 있었던 자우림 비밀결사모임[* 8집 팬 이벤트로, 발매 당시 정식 CD앨범의 가사집에 있는 힌트를 가지고 공식홈에 접속하면 고난이도의 퀴즈가 나왔다. 앨범 가사집을 이용하여 풀 수 있는 문제가 많았으며 기간 내 다섯 관문의 퀴즈를 통과한 사람에게는 비밀결사단 가면파티의 초대권과 함께 비밀결사단 인증서 및 특별제작된 굿즈로 붉은 수건(일반 제작 굿즈는 검은 수건)이 지급되었다.]에서는 메이드 복장을 입고 나타나 [[모리 카오루]]의 [[엠마]]를 언급하며 메이드 덕후 인증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오덕들에 대한 김윤아의 충고는 '결혼하면 오덕질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미리 하세요'(...)[* 하지만 본인은 바로 밑에 서술되어있듯 덕후 남편이랑 여전히 덕질중이다(…). 17년초 냉부 출연시 집안 가득 쌓인 만화책장을 공개.]
만화를 [[오마주]]한 경우도 많은데 자우림 1집의 앨범명인 퍼플하트는 그 당시 매니아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연재되던 [[강경옥(만화가)|강경옥]]의 만화와 제목이 똑같다.[* 덧붙여 김윤아와 강경옥은 사적으로 아는 사이이다. 지금은 사라진 강경옥의 홈페이지에 같이 식사했다는 글도 올라왔고, '설희' 1권에서 설희가 자우림의 '일탈'을 부르는데 이를 작가 본인이 언급한 적도 있다.[[http://blog.naver.com/kko314/10088861281?viewType=pc|#]]] 솔로앨범 2집의 제목 '[[유리가면]]'은 만화를 좋아하는 매니아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일본만화와 제목이 똑같다. [[엠넷]]에서 진행했던 '마담B의 살롱'은 [[권교정]]의 '마담 베리의 살롱'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성인 바이러스에서 남편 김형규가 출연하면서 김윤아의 취향도 함께 공개되었는데 음악, 요리 관련 만화와 작가로는 [[권교정]]을 좋아한다고 한다. 김윤아의 만화책장에 꽂혀있는 만화책 중에는 [[요츠바랑]], [[베르세르크]], [[유시진]]의 '온' 등이 있었다. 방송에서 말하기로는 자기보다 만화책을 많이 가진 사람은 김형규가 처음이었다고. 김윤아가 소장한 만화책은 1,500권 정도라고 한다. 자신은 실용주의라서 볼 책만 사고 보지 않는 책은 집안에 두지 않으며, 거기다가 더럽기까지 하면 더더욱 두지 않는다고 한다. 덕분에 김형규가 박스에 모아둔 상태가 좋지 않은 책들은 조만간 숙청하겠다고...
인디씬 태생이었던 자우림이 이름을 얻기 시작하자 (2000년대 이후) '자우림은 김윤아 밴드일 뿐'이며 '상업적이다', '김윤아는 성형한 주제에 [[페미니스트]]인 척 한다'는 식의 비난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네티즌들에게 화가 난 김윤아가 2005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반박글을 올린 적이 있다. 홈페이지가 리뉴얼되어 원글은 사라졌지만 관련기사가 남아 있다.[* 글 제목은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05069|자우림 김윤아, 자신 둘러싼 근거없는 이야기 반박글 올려]]
2000년대 중반에는 (특히 2006년 결혼 이후) 김윤아의 진정성, 기존의 인디적 음악과 세계관에서의 변화 (혹은 변절)에 관해 많은 비판이 가해진다.
실제로 2011년 MBC 프로그램 [[놀러와]]에서 가수 [[이하늘]]은 김윤아에게 "비주류가 되고 싶은 주류 아닌가요?" 라고 대놓고 [[디스]]를 걸기도 했다. 실제로 김윤아는 한국식 [[힙스터]]같이 적절히 쿨하며 주류를 쫓지 않는 독특한 자기 세계관과 문화취향을 갖으려는 삶의 스타일의 이미지로 본인을 설정하고 싶어하는 메인스트림의 모습을 보여왔기에, 본인만의 야인성(?)을 갖고 살아온 이하늘에게는 고깝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방송인 [[김나영]]은 해당 프로그램에서 김윤아가 한 "저도 비주류고, 제 남편도 비주류다." 라는 말에 대해 "남편 잘 만나셨잖아요. 남편은 [[치과의사]]인데 주류 아닌가요?" 라고 2번씩이나 소리를 지르며 억지를 부렸고 김윤아는 굉장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취향 얘기였는데 김나영과 이하늘이 열폭~~
그렇지만 성형과 관련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성형을 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기존의 김윤아 팬들은 그녀가 외모에 방점을 둔 여자 연예인이 아닌, 나름의 아우라와 출중한 실력을 가진 뮤지션이었던 점에 호감을 가졌는데, 언젠가부턴가 "전형적인 미녀"로서의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김윤아의 뮤직웨이브를 관람하는 일본투어상품이 나왔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11819|관련 기사]]
여담으로, '마담B의 살롱'은 [[권교정]]의 '마담 베리의 살롱'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은 마담 B는 아명이 김비였던 MC 김윤아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Beyond the music' 'Behind the show' 'B-side music' 등 음악 외에도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김윤아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1988670|관련 기사]]
관련 항목: [[자우림#s-6|나는 가수다 출연]], [[자우림#s-7.1|자우림이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노래들]]
2011년 7월 25일부터 [[자우림]]으로서 나가수에 합류한다고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락밴드인 [[YB]]와의 대결 구도 등 여려가지 흥미로운 모습을 기대하는 목소리 또한 높았다. 자우림이 출연하는 5차 경연은 31일 방영되었으며 비록 (처음 경연에 참가하는 관계로) 7번째 경연이라는 혜택이 있었지만 특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중저음을 내뿜으며 1위에 등극했다. 이후 비밀번호 776이라는 최악의 코드 달성까지 하지만 '재즈카페' 라는 곡으로 다시금 1위를 달성하며 이후 원곡의 코드를 자우림화 시켜 시청자들의 대찬사 를 받은 '가시나무',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꾸민 조용필 특집의 '꿈' 퇴폐적인 술집 마담과 항구의 뱃사장의 끈적한 사랑을 연상시켜 곱디곱게 노래한 심수봉도 깜짝 놀랄 법한 무대를 꾸몄던 '사랑밖에 난 몰라' 실향민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모던록 편곡의 '라구요' 그만 '자브라교'를 창시해 버린 '아브라카다브라' 깊은 감정몰입을 해 모두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던 록발라드 표 '1994년 어느 늦은 밤'. 이 사람의 비주얼의 끝은 어디인가 하며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얘기할 수 없어요." 내마주교를 창시하며 산울림 특집 2위를 차지했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김윤아가 사랑하는 인디 친구들 후배들이 함께한 멋진 무대였고, 그 후 인디밴드 후배들과 함께 만든 신나고 유쾌한 무대인 '정신차려' 그리고 스페니쉬 리듬을 가미하여 초상집 복장으로 처연하게 부른 '하루 까지. 총 14곡의 팔색조 변신으로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 [[2018년]] 3월 23일부터 방송되는 [[JTBC]]의 버스킹 리얼리티 프로그램 [[비긴어게인(JTBC)|비긴어게인 시즌2]]에 출연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3011323|관련 기사]] 촬영은 이미 완료되었고, 김윤아는 [[자우림|이선규]], [[윤건]], [[로이킴]]과 한팀을 이루어 [[포르투갈]]에서 버스킹을 하였다.
- 서정돈 . . . . 17회 일치
| 경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br />성균관대학교 총장<br />성균관대학 이사장
|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br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석사
2003년 2월부터 2011년 1월까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현재 학교법인 성균관대학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를 졸업, 196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197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대학교와 [[충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임강사로 활동했고, 1976년 ~ 199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1994년 ~ 199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학장을 역임했다. 1997년 3월 ~ 2003년 2월에는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맡았고, 2003년 2월에는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2011년 1월까지 역임했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9년 동 대학 유학대학원에 학생 신분으로 입학하여 이듬해인 2010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11758305&code=100203 성균관대 서정돈총장 대학원 진학] - 경향신문, 2009년 2월 1일</ref>
*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석사(2010년)
* 1972년 ~ 1975년 : 해군 군의관(소령 예편)
* 1997년 3월 ~ 2003년 2월 :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 2003년 2월 ~ 2011년 1월 : 성균관대학교 총장(제18대)
* 성균관대학 이사장(제18대)
* 《정상인 및 각종질환에서의 혈청 Lipoprotein에 관한 연구》 외 240편
[[분류:194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총장]][[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달성 서씨]]
- 오재희 . . . . 17회 일치
|본관 = [[해주 오씨|해주]]
|직업 = [[외교관]]
|경력 = 제25대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차관
'''오재희'''(吳在熙, 1932년 ~ )는 대한민국의 제25대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차관을 역임한 외교관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이며,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주미·주일 공사, 주 파키스탄 대사,<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070009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3-11-07&officeId=00009&pageNo=1&printNo=5439&publishType=00020 | 제목 = 韓國, 파키스탄과 修交 | 날짜 = 1983-11-07 | 출판사 = 매일경제신문 | 인용문 = 政府는 7일 파키스탄 정부와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고 외무부가 발표했다. 外務部는 이날 발표에서 韓․파키스탄 국교수립으로 양국 주재 총영사관이 각각 대사관으로 승격되고 양국 주재 대사 임명에 앞선 잠정조치로서 吳在熙 駐파키스탄총영사와 자베드․마수드 駐韓파키스탄 총영사가 각각 대사대리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ref>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차관|외무부 차관]], 주일 대사를 역임하였다.
1991년 2월 19일, [[노태우 정부]]에 의해 주일 대사에 임명되었다. 오재희 대사의 기용은 그의 직업외교관 경력으로 미루어 자연스런 인사로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기동창이고 [[노재봉]] 총리의 매형, [[이상옥]]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외무부 장관]]과는 대학 동기 사이라는 학연, 혈연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었다. 성격이 꼼꼼하고 일처리가 치밀하며 빈틈없어 부하 직원들로부터 오검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외무고시]] 출신으로 첫 주일 대사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21900329201007&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2-19&officeId=00032&pageNo=1&printNo=13971&publishType=00020 | 제목 =大使7명 이동 | 날짜 = 1991-02-19 | 출판사 = 경향신문}}</ref>
|직책 =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차관]]
|직책 =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주 일본 대사]]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해주 오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컬럼비아 대학교 동문]][[분류:일본 주재 대한민국 공사]][[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차관]][[분류: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파키스탄 주재 대한민국 대사]]
- 울펜슈타인 : 뉴오더 . . . . 17회 일치
크라이슬라우 서클의 리더. 독일 아이젠슈타트 출신으로 아버지를 나치에 의해 잃었다. 전쟁 당시 나치 집행관 한스 그뢰세에게 총을 맞아 척추를 다쳤다. 이 때문에 하반신을 쓸 수 없어서 휠체어를 타고다닌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신. 어린시절을 가난과 아동학대속에서 지났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켈러의 아버지는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그러자 켈러는 지역 친위대 사무소에 들어가 아버지가 레지스탕스와 연관되었다고 제보, 자신의 가족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고 데스헤드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켈러는 데스헤드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다.
나치 사령관들이 사용하는 제식 권총. 단거리에서 경무장한 적을 상대하는데 적합하다. 소음기를 장착할 수 있다.
* 기관단총
첫번째 챕터에서만 등장하는 무기. 미 육군의 제식 기관단총이다. 권총과 같은 탄약을 사용한다. 단거리에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적합하다……고 한다.
* 거치식 기관총
거치되어 있는 기관총. 거치된 그대로 쓰거나 잠시 떼어내서 쓸 수 있다. 영원히 가지고 다니는건 불가능. 거치될 시에는 무한탄창이지만 떼어내면 장탄수에 제한이 생긴다. 장탄수가 소진된 기관총은 거치대에 거치하는걸로 장탄수를 채울 수 있다. 실탄을 발사하는 1946년 버전과 레이저를 발사하는 1960년 버전이 있는데 1960년 버전은 얇은 철판을 뚫을 수 있다.
사령관을 은밀하게 사살하면 해금. 근처에 사령관이 있다는걸 알 수 있게된다..
사령관 5명을 은밀하게 사살하면 해금. 지도에 사령관에 위치가 표시된다.
* 사령관(Commander)
데스헤드가 손수 만들어낸 강화보병. 화학적 처리 등 여러 개조를 한 후 방탄 갑옷에 쑤셔박은 인간이다. 개조 과정 중 뇌를 원초적인 수준까지 열화시켜 매우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게 만든다. 거치식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죽인 후 몸에 붙어있는 철갑판을 떼어내 방어력 회복 수단으로 쓸 수 있다.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 배치되는 로봇. 수감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이다. 기관총과 로켓발사기로 무장했다.
나치 독일의 거대 로봇. 런던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고있다. 레이저포와 미사일 발사기로 무장했으며 다리 밑으로 접근하는 적은 화염방사기와 기관총으로 상대한다. 런던 지역에서 활동하던 영국계 레지스탕스가 이 로봇에 의해 괴멸당했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원빈(배우) . . . . 17회 일치
||<:><#4C4C4C>'''{{{#FFFFFF 본관}}}'''||[[김해 김씨]] ||
서울로 올라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히 오디션에 도전해 케이블의 제일방송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게 된다.[* 지금은 [[MBC 드라마넷]]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어렸을 적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배우의 꿈을 키웠던 것 같은데 영화 [[아저씨(영화)|아저씨]]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최민수]] 주연의 [[테러리스트(영화)|테러리스트]]를 보고 액션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액션에도 일가견이 있는 배우다.[* 실제로 [[태권도]] 유단자라고 한다. 90년대에 예능 프로에서 [[안재모]]와 태권도 대련을 하는 방송도 있었다.] [[http://todayhumor.com/?star_225458|#]]
2013년 7월에 나온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창동]] 감독은 [[경기도]]의 소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며 [[연쇄살인자]]와 [[연쇄살인자]]를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창녀|몸을 파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스릴러 형식의 영화의 각본을 쓰고 있다고 하며 [[연쇄살인자]] 역할에 원빈을, [[형사]] 역할에 [[설경구]]를, [[창녀]] 역할에는 [[장쯔이]]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내용은 전반적으로 [[구원]]에 관한 내용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창동]] 감독 본인이 이 프로젝트를 엎었다고 한다.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43337|이창동이 배우들에게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사인 [[http://m.media.daum.net/m/entertain/newsview/20131022092808979|파인하우스 필름의 관계자가 뉴스엔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서 '제작 무산이라고 볼 수 없으며 제작이 열려 있는 작품' 이라고 해명]]했다고 하니까 좀 기다려봐야 할 듯. 2014년 1월 말부터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탈고된다는 루머가 여러 웹사이트에 떠돌고 있으나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2014년 5월에 원빈 본인은 한 인터뷰에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382&aid=0000212249|당장은 아니지만 차기작은 분명히 있다]]라고 밝혔다. 그 차기작이라는 것이 이 [[이창동]] 감독과 함께 하는 영화인지는 불확실.
최근에는 [[류승완]] 감독의 차기작인 영화 《[[군함도(영화)|군함도]]》도 고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491352|관련 기사]]. 기사에 나온 바에 따르면 《[[신과 함께]]》나 《[[군함도(영화)|군함도]]》와 같이 규모가 큰 블록버스터보다도 작가주의적 성향의 영화를 찾고 있는 듯.
당시 원빈은 상황병으로 근무했으므로 원래대로라면 좌선이나 우선을 하루에도 두 번 이상 왕복하진 않고, 상황병은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연속으로 타면 많이 타는 게 통상적이나, '원빈' 이라서 소대장이 근무 때 자기 소대통신병 대신 원빈 데리고 자주 나갔었다.[* 이때 육군 홍보용으로 촬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흑역사|이 사진은 결국]]...] 그런 관계로 따라나갔다가 훅! 간 거라 [[카더라]].
하지만 원빈이 다친 후에 육군에선 가능한 한 배려해줬다. 민간병원에서 수술 이후 [* 군 복무중 중대한 부상이나 수술을 해야 될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부상당한 군장병은 사비로 민간병원에 치료할 것인지, 국비지원으로 국군병원에서 치료받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통상 국비지원 민간병원 위탁치료는 지방소재 국군병원 군의관의 진단에 의해 결정된다. 원빈은 국군수도병원 후송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비로 민간병원에서 수술받은 것으로 보이나, 실제 민간병원 수술이 이례적으로 국비지원 하에 이루어졌는지, 사비 부담인지는 당시 기사에서 정확히 다룬 것이 없어 명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요양은 군병원이 아니라 병가를 얻어 자신의 집에서 보냈다.[* 다만 재활치료는 춘천병원에서 받았다. 의병제대 판정도 여기서 받았고.] 군복무 중 중대한 부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민간병원에서 진료를 하였더라도 요양이 필요한 군장병은 수술이 끝나고 나면 군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자택에서 장기간 요양하거나 장기 병가를 얻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이례적이다.--쉽게 말해 수술을 위해 병가 10일 정도 혹은 가지고 있는 휴가를 합쳐도 20일을 넘기기 힘들고 그 안에 수술을 마치고 복귀해야 한다.-- 게다가 걸을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 단순히 다리를 절고 통증이 느껴지는 정도의 후유증이면 의병제대를 받지 못하고, 요양은 커녕 자대에서 군복무기간을 마저 채우고 만기전역을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2010년 이후나 되어서야 후자(걸을 수 있으나 후유증과 통증)와 같은 유형을 [[복무 부적격자]]로 판명하여, 아예 군병원에서 환자에게 한 달짜리 휴가증을 줘서 집에 보내고 전역일까지 계속해서 휴가증을 연장 발급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제대시키는 편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므로[* 공식적인 의병제대와의 차이점은 전역일까지는 군인 신분이라 만약 휴가 기간에 사고를 치면 헌병대에 끌려간다는 것과, 전역 전에는 여권 발급이 제한된다는 점, 그리고 '''예비군이 면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원빈의 경우는 그러한 경우에 비해서는 이례적으로 혜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FF8200> '''{{{#white 개봉 연도}}}''' ||<#FF9100> '''{{{#white 제목}}}''' ||<#FFA500> '''{{{#white 활동}}}''' ||<#FFA400> {{{#white '''배역'''}}} ||<#FF9100> '''{{{#white 관객수}}}''' ||<#FF9100> '''{{{#white 흥행}}}''' ||
|| 2004 || [[우리형]] || 주연 || 김종현 || 2,479,585명 || 성공[* [[신하균]]과 공동 주연. 이 관객수를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장르도 장르이지만 2004년 당시 '태극기 휘날리며'나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제외하면 별다른 흥행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2위인 [[어린 신부]]가 315만으로 우리 형은 그 해 흥행 6위로 나쁘지 않은 성적인 것은 분명했다.] ||
|| 2001 || [[킬러들의 수다]] || 주연 || 하연 || 871,125명[* 서울 관객 기준이다. 전국 관객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성공 ||
||<-3><#FF8200> '''{{{#white 총 관객수}}}''' ||<-3> 24,393,142명 ||
||<-3><#FF8200> '''{{{#white 평균 관객수}}}''' ||<-3> 4,878,628명 ||
2010년엔 영화 [[아저씨(영화)|아저씨]]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했으며 그와 덩달아 모든 여성 관객의 남친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중간에 '''상의를 탈의하고''' 삭발하는 장면에서는 매 상영 때마다 객석이 술렁거리거나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여성 관객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원빈 보러 갑니다'''라는 농담이 '''진리로 들린다'''.
* [[네이트]]에서도 인기가 많다. 네이트 판에 경우 댓글로 자주 볼 수 있는 게 바로 원빈이다. [[http://pann.nate.com/talk/310773324|오죽하면 이런 판에도 원빈으로 댓글 달면 바로 베플이 된다]]. 한 마디로 남자 연예인에 관련된 [[판]]에서 원빈 그림만 끼워 넣으면 무조건 베플이 된다는 소리. --이거 다 옛날얘기다--네이트 판의 80%는 그가 접수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의외로 원빈은 쑥맥이라고 한다.
* 소문에 따르면 집안에 모든 종류의 콘솔 및 매니저에게 부탁해 매년 업그레이드하는 현존 최고사양의 PC 가 구비되어 있고 각종 촬영시엔 인근 PC방에 들리거나 게이밍 노트북을 사용하는 게 일상이며 방에 게임 디스크가 빽빽히 들어찬 모습이 행여나 TV에 노출될까봐 누나가 걱정할 정도라는 이야기가 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나가서 조기축구를 하거나 간혹 연예인 친구들을 초청해 작은 위닝 대회를 여는 정도가 그의 취미 생활이라고.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스캔들이 생기지 않는 비결이라고 한다.[* 밖에선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일반인이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들조차도 하기 힘들기 때문에, 방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에 집중하기 쉬운 것으로 보인다.] 단 2012년 11월에 개최된 팬사인회에서 한 팬이 '아직도 게임하세요?' 라고 묻자 '요새 게임 안해요' 라고 말한 일화가 있긴 하나 이미지 관리에 불과할수도 있다.
- 이갑성 . . . . 17회 일치
그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고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시|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다.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다가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으며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뒤 [[1952년]] [[이승만]]의 친위조직이 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을 지냈고, 그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 야인으로 생활하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이후 독립운동을 실행함에 있어 학생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경성부]]의 학생들이 시국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학교에서 영향력이 있던 학생들과 자주 만나 [[손병희]] 등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다며 독립운동 계획을 알려 동참을 호소하는 한편, 비밀리에 [[경성부]]내 각 고등학교, 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이에 [[고종 황제]]가 갑자기 죽자 그해 [[2월]]을 만세 거사 기일로 정하였다.
[[2월 28일]]에는 목사 [[김창준 (1890년)|김창준]]에게 [[함태영]]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900매 중 약 600매를 받은 뒤 이를 다시 인쇄하고, 그날 5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李容卨)에게 교부하여 인쇄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돌리게 하였다. [[3월 1일]] 아침 일찍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수천 장 인쇄하여 400여매를 병원 사무실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에게 주어, 그중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보내고 나머지 200매를 [[마산]]의 독립운동 동조자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한다. 또한 학생 [[김병수]](金屏沫)에게는 [[전라북도]] [[옥구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 등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으며, [[충청남도]] [[천안]]에서 올라온 [[임영신]]에게도 일부 배포하고, [[경성부]] 강기덕(姜基德)에게 천500매를 주어 배포케 한다. [[2월 28일]] 밤 [[경성부]]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은,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결정했던 [[파고다 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정하였다.
[[3월 1일]] 경성부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때 그는 시위전단 살포와 학생들 독려를 위해 시내에서 활동하였다.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던 중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들은 태화관(泰華館)에 모였고 이갑성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한 뒤, 회합 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당하기로 약속한다. [[3월 1일]] 오후 이갑성은 조선총독부에 [[민족대표 33인]]의 의견서를 제출하러 갔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ref> 하지만 밀정 혐의의 특성상 세월이 흐른 뒤 근거를 찾기 힘들었고 관련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가 되어 버린데다,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의혹만 남았을 뿐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때 [[김규식]](金奎植) 등의 좌우합작에 협력하던 중 그뒤 단정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임명되었다. [[1948년]] [[5월]]에는 [[이승만]]의 친위조직화된 [[대한인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지도, 운영하였다.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1950년]] [[5월]]에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제2대 [[민의원]](民議院) 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6.25 전쟁]] 직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당하자 자가용편으로 [[대전]]으로 피신, 무임소 장관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하였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 이승만(李承晩)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國務總理)에 임명되기도 했다.<ref>[https://search.i815.or.kr/Indeman/Indeman.jsp?tid=ma&c1=%ED%9B%88%EA%B2%A9 ::: 독립기념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봇이 따온 제목 -->]</ref> [[11월]]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국회에 인준하였으나 부결되었다.<ref>대통령비서실, 《한국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 (역사비평사, 2008) 74페이지</ref>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최고위원과 당 정무부장이 되었고,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다. [[1953년]] [[3.1 운동]] 관련 단체인 민족대표 33인유족회의 회장이 되고, 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족청계가 숙청된 뒤 [[이승만]]의 특별 부탁으로, 혼란에 휩싸인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 재건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기붕]] 계열과 주도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던 중 [[이기붕]]계열에 의해 숙청되어 당의 실세에서 밀려나게 된다.
3·1 운동 당시 [[김창준 (1890년)|김창준]], [[박희도 (1889년)|박희도]]와 함께 30대 초반으로 가장 연소한 편이었으며, 93세까지 장수함으로써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다. 광복 이후 [[독립유공자]] 대표로 매년 3·1절 행사와 광복절 행사에 초청되었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정치외교학자 [[이용희 (1917년)|이용희]]가 이갑성의 아들이다.
|직책 = 전시 내각의 [[대한민국 무임소장관실|무임소장관]]
[[분류:1889년 태어남]][[분류:1981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한국의 약학자]][[분류:한국의 약사]][[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종교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의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약사]][[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분류:한국의 군정기]]
[[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이갑성|*]][[분류:허정숙]][[분류:김규식]][[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경성경신고등보통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단국대학교 명예박사학위 동문]][[분류:자유당]][[분류:한국독립당]][[분류:민주공화당 (대한민국)]][[분류:경주 이씨]][[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
- 이관섭 (1961년) . . . . 17회 일치
|이름 = 이관섭
|직책 =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이름 = 이관섭
|본관 =
'''이관섭'''(李官燮, [[1961년]] [[7월 12일]]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공기업인이다.
* 1984년 : [[상공부]] 행정사무관
* 1996년 4월 ~ 2000년 10월 : 총괄조정관실, 교육문화수석실,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서기관)
* 2006년 4월 ~ 2007년 4월 : [[산업자원부]] 산업기술정책팀장(부이사관)
* 2008년 3월 ~ 2009년 9월 : 대통령실 실장 선임행정관
* 2009년 9월 ~ 2010년 1월 :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정책관
* 2010년 1월 ~ 2011년 5월 : [[지식경제부]] 에너지산업정책관
* 2014년 7월 ~ 2016년 8월 :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직책 = [[대한민국의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경영대학 동문]][[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성희(배구감독) . . . . 17회 일치
* 상위 문서: [[배구 관련 인물]]
* 관련 문서: '''[[금지어/배구]]''', '''[[흑역사/목록/배구]]'''
전년도의 우승으로 2008-2009 시즌에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그는 베띠 데라크루즈를 앞세워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어창선]] 감독대행이 이끌던 ~~당시 굉장히 어수선했던~~ 흥국생명에 지며 준우승에 그쳤다. 2009-10 시즌에는 베띠가 떠나고 성적이 맛이 간 것을 후반기 합류한 [[데스티니 후커]]의 맹활약과 후반기 일정 덕[* 이 당시부터 GS칼텍스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겨 홈으로 [[장충체육관]]을 쓰게 되었는데, 전반기 때 홈 경기가 단 2번(그나마 한 번은 천안에서 했다.)에 불과했다. 즉, 반대로 후반기가 두 경기 빼고 모두 홈 경기였던 거.]으로 겨우 3위로 올렸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대전 KGC인삼공사|훗날 감독 자리를 맡을 팀]]에게 챔피언결정전 티켓을 내주며 감독직에서 사퇴하였다.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 시절은 비록 선수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흑역사]]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1-2-3'''을 찍으면서 선방했다.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 감독으로 재직하던 2008년과 2009년에는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2010년, GS칼텍스 감독 사임 후에는 KOVO의 경기감독관으로 지내다가, 2011-2012 시즌을 앞두고 [[대전 KGC인삼공사]]의 수석코치로 영입되어 [[박삼용]] 감독과 함께 인삼공사의 2011-2012 시즌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그의 [[노답]] 행각은 12월 16일 화성 원정 경기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는데 헤일리에게 몰빵지시도 모자라 작전 타임때 수비는 안할거냐는 둥 안 그래도 '''공격 점유율도 높은 선수에게 수비까지 전담'''하게 하는 정신병자급 작전을 선보여 인삼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대관절 이 인간에게 뇌라는 게 존재하기나 하는 건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 '''안 그래도 국내 선수층이 얇은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헤일리가 [[야반도주]]라도 한다면 대체 이 팀에 남는 게 뭐란 말인가?''' 이같은 막장스런 행각 때문에 심지어 2012 - 13 시즌 부상을 핑계로 단 한 경기도 뛰지 않고 배째다 퇴출된 드라간 마린코비치가 재조명받는 사태까지 이르고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팬들이 헤일리에게 야반도주해도 되니까 하루 빨리 팀에서 도망치라고 얘기하고 있을까? '''그것도 타 팀 팬들이 아닌 인삼 팬들이!!!''' 이 사실들만 봐도 돌성희가 얼마나 [[쓰레기]]같은 존재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헤일리가 복귀한 2월 16일부터 20일까지 2연승 행진을 하긴 했지만, 나머지 3경기를 모두 내주며 결국 '''7승 23패, 승점 22점'''으로 압도적인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헤일리 복귀 후 여전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성희의 질책은 계속되었고, 문제의 3월 2일 경기에서는 2세트 범실에 [[빡]]쳤는지 3세트에선 헤일리를 아예 빼버리기까지 했다. 그 사이 헤일리의 울먹이는 듯한 표정이 방송에 포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진정시키는 일엔 아랑곳도 없이 웜업존에 처박아두는 비정함을 보인 이성희는 더 이상 그를 코트에 출전시키지 않았고 팀은 0:3 셧아웃 패배를 당했다. 심지어 '''헤일리의 어머니까지 직관을 왔는데도''' 말이다. 진짜 이건 '''사람이 아니라 [[백정]]이다'''. 얼마나 감독의 질책이 누적되었으면 저렇게까지 안타까운 모습이 포착되었을까? 평소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성실한 선수에게 저런 되도 않는 [[군기]]를 시전하는 행동은 어떻게 봐도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이에 대한 답례로 자팀팬들에게는 물론이고 타팀 팬들에게까지도 대차게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절친이자 후임으로 들어온 [[서남원]] 감독이 [[한수지]]를 센터로 이동시키는 극약처방 등을 한 끝에 매우 성공적으로 팀을 일으켜 세우면서, KGC 관련 기사가 뜰 때마다 심심찮게 까이고 있다. 그리고 [[서남원]]이 3년만에 인삼공사를 봄배구에 진출시키면서 더 까였다.
저렇게 [[막장]]스런 행각을 보인 이성희에게도 유일한 [[장점]]이 있긴 한데, 그것은 바로 다른 감독들에 비해 [[비디오 판독]]을 의외로 잘 활용한다는 것.[* 실제로 2016년 2월 1일, 현대건설과의 홈 경기에서 [[비디오 판독|챌린지]]로 두 차례나 오심을 이끌어냈다.][* 이와 180도 대조되는 사람으로는 [[박미희]]가 있다.] 이 말인 즉슨, [[심판]]의 오심을 잘 캐치해 낸다는 것이다. 오심을 이끌어서 오심의 달인으로 등극했다. 이는 어찌 보면 인삼공사의 수석코치로 영입되기 전에 실제 2010년 KOVO컵 대회부터 2010-2011 V리그 대회까지 재직한 경기감독관 경력에도 한 몫 하는 듯.
이 때문에 배구 팬들 사이에선 감독보다 경기감독관이 더 잘 어울린다는 의견이 돌고 있으며, 2017년 KOVO컵 대회부터 경기감독관을 맡는다고 하였다. 다만, 정작 경기장에 안 나오는 걸로 봐선 사후판독관으로 있는 걸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이는 2017년 KOVO컵 대회때 잠깐 경기감독관으로 나온 심순옥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사후판독관으로 있던 [[강성형]]이 현 배구 국가대표 후보 선수 팀 감독으로 가면서, 심순옥이 사후판독관으로 바뀐 듯 하다.][* 다만, 기존 경기감독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생길 경우, 일정기간 사후판독관이 대타로 경기장에 오기는 한다.]
- 이장섭 . . . . 17회 일치
'''이장섭'''([[1963년]] ~ )은 [[대한민국]]의 시민사회 운동가 출신 정치인, 공무원이다. [[1986년]] [[민주화운동협의회]] 충북지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국회의원 [[노영민]]의 보좌관, 국회의장 비서실 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자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2017년]] [[5월 11일]] [[문재인]]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청와대]] 경제수석실 산하 산업정책비서관실 선임행정관(2급 [[이사관]]급 상당)에 임명되었다.
* 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낙선한 노영민의 측근이 되다.<ref>[http://www.newsis.com/view/?id=NISX20171027_0000130537&cID=10806&pID=10800 충북도 새 정무부지사에 이장섭 청와대 행정관] 뉴시스 2017-10-27</ref>
* [[국회의원]] [[노영민]] 보좌관, 3선(16~19대)
* [[2011년]] [[7월 4일]] ~ [[2012년]] [[5월]] [[대한민국 국회|국회]] 정책연구위원회 위원<ref name="ssss">[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898 충북 첫 국회 2급 비서관 탄생:이장섭 노영민 의원 보좌관 국회정책연구위원]</ref>
* [[대한민국 국회|국회의장 비서실]] 비서관
* [[2017년]] [[6월 10일]]<ref>[http://news.joins.com/article/21653324 충북 출신 이장섭·유행렬 청와대 비서실 '입성'] 중앙일보 2017.06.10.</ref> ~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실 산하 산업정책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사관]]급)
== 관련 항목 ==
*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71027_0000130537&cID=10806&pID=10800 충북도 새 정무부지사에 이장섭 청와대 행정관] 뉴시스 2017.10.27.
* [http://www.thecm.net/news/articleView.html?idxno=13098 충북도 새 정무부지사에 이장섭 청와대 행정관] 충청미디어 2017.10.29.
* [http://www.nocutnews.co.kr/news/4867765 차기 충북도 정무부지사에 이장섭 청와대 선임행정관] 노컷뉴스 2017.10.27.
- 창원시 . . . . 17회 일치
[[마스코트]] '피우미'. 통합 전 창원시의 캐릭터인 '창이와 원이'도 자전거 보관함 등에 간간히 쓰이고 있다. 심지어 마산, 진해 지역 자전거 보관함에는 현 창원시 로고에 창이와 원이가 쓰이고 있다! 통합 전 로고나 마스코트의 색상을 통해 유추해보자면 파란색이 구 마산, 녹색이 구 창원, 주황색이 구 진해를 뜻한다.
=== 뚜렷한 지역성, 그러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은 인센티브를 거론하며 기초자치단체 간 통합을 유도하였으며, 당연히 그전부터 경제/사회/문화적 교류가 많은 소위 마창진([[마산]], [[창원시/통합 이전|창원]], [[진해]])에 대한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3개 시는 지난한 정치적 협상 및 행정적 조율을 거쳐 드디어 2010년 7월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경상남도의 창원시, 마산시 및 진해시를 각각 폐지한다."(경상남도 창원시 설치 및 지원특례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경상남도에 창원시를 다음과 같이 설치한다."(같은 조 제2항. 제1항에 따라 폐지되는 창원시 일원, 마산시 일원 및 진해시 일원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창원시 설치)] 이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수립 이후 첫 번째 사례가 되겠다. 이 과정에서 [[함안군]]도 포함될 뻔했으나 제외되었다.[* 마산과 함안이 밀었던 모델은 함안+마산+창원 이였고 창원이 밀었던 모델이 마산 + 창원+ 진해 였다. 마산은 이 3도시가 통합되면 마산은 발전동력이 다해 쇠퇴하던 도시가 다시 도시중심부가 되어 새로운 발전동력을 얻을수 있었고 함안은 새로이 공장이 들어서는 발전가능성이 높은 도시였으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탓에 과감한 투자를 할수 없으므로 많은 재정을 유치할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창원시는 아직도 북면의 개발등 개발지역이 남아있고 함안과의 연동으로는 별 메리트를 찾을수 없었던 터라 함안과 마산을 제외하고 신항이 들어서던 진해와 합쳐서 항만도시로의 발전을 추구하는게 낫다고 판단하고 도시통합을 추진했다.]
우선 여름엔 무진장 덥다. 한반도에서 열대야가 가장 많이 관측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겨울엔 타 지역에 비해 별로 춥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눈도 거의 안 온다. 물론 추위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겨울되면 춥긴 추워서 시민들도 타이즈+티셔츠+스웨터+패딩 입고 다닌다. 다만 눈은 진짜 구경하기 힘든데 일년에 눈이 1번도 안 오는 해도 많을 정도. ~~단지 물이 얼음이 될 뿐~~ 와봤자 쌓이지 않을 정도로만 잠시 내리는 전국에서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현재, 2015년 2월에 눈이 몇cm 쌓여 꽤나 오래 눈이 남아있던 이후로는 눈이 쌓이지 않았거나 쌓이고 얼마 안 있어 다 녹아버렸다. 그래서 이 곳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들은 빙판이 뭔지 실제로 모르는 경우도 있다(...)[* 타 지역처럼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두껍게 어는 빙판이 아니라, 응달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가 살짝 언 정도의 매끈한 빙판 정도만 경험한다. 물론 육군 예비역들은 거의 다 전방을 다녀오기 때문에 눈 하면 이를 가는 건 타지 사람들과 마찬가지긴 한데 지역 특성상 해군, 해경에 지원하는 비율도 타지역보다 높은 편이라 눈이 익숙하지 않은 비율이 더 올라간다.] 이처럼 시민들이 눈에 대한 대비가 거의 안 되다보니, 정말 십몇 년에 한번 눈이라도 쌓일라치면 서울에선 이정도 눈쯤 하며 씽씽 달리는 차들이, 창원에선 15~30km 거북이 운행을 하며 골목골목에서 접촉사고가 나는 난리가 벌어지기도 한다. [[산복도로]]를 끼고 있는 마산합포구 권역은 정말 헬게이트가 벌어진다. 실제로 눈이 쌓였던 날 평소 30분 정도 걸리던 출퇴근 시간이 3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수도권에선 진눈깨비엔 불과한 눈이 내렸을 뿐인데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그날 따라 택시요금이 2배나 나왔다 카더라.~~ 1997년 약 10cm 정도의 적설량을 보였을 때에는 단 1개 노선[* 주간선 역할을 하던 구 21번 버스, 현재의 [[창원 버스 103|103번]]과 비슷한 노선이다.]만 제외하고 대중교통이건 승용차건 화물차건 모두 운행을 중단했던 적도 있다.
우리나라 기후 특성상 '''강수량은 연도마다 들쭉날쭉하다'''.[* 이는 연강수량 대부분을 장마와 태풍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 때문이다. 유달리 장마가 길고 태풍도 여러개씩 통과하는 해는 연 강수량이 2000mm 가까이 내리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장마가 짧게 끝나고 태풍이 통과하지 않는 해는 1000mm도 채 안내리는 경우도 있다. 당장 2016년만 하더라도 서울의 누적 강수량은 776mm(9월 20일 기준)로 평년의 66% 수주밖에 되지 않는다.] 1987년에는 최악의 겨울가뭄으로 저수지가 다 말라붙었고, 1999년에는 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거의 100일에 걸쳐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여름 8월에는 제대로 된 비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땡볕이 쏟아졌다. 일기예보에서 전국(남부지방 포함) 비 예보를 할 때조차 땡볕이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일기예보에서만 윗 지방의 홍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밥 먹다 숟가락 던지는 사람도 많다고. 경남 지역 뉴스의 일기예보조차 맞지 않아 각 개인이 날씨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단, 더위 관련은 예보를 뛰어넘는 찜통을 보여준다. 2016년 7월 31일을 기준으로 2016년 전국 최고기온을 달성한 적도 있으며, 대개 숫자상 최고기온은 내륙의 대구, 경산, 밀양이 갖고가지만 창원도 정말 만만찮게 덥다. 게다가 창원기상대는 마산합포구 해안가의 옛 마산측후소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구 창원 권역은 분지 지형이라 열섬현상에 분지 특성까지 얹어서 더 덥다.
== 관광 ==
=== 관광지 ===
* 창원해양공원 : 구 진해해양공원. 높이 136m의 창원 솔라타워 외에 어류생태학습관, 해전사체험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 [[하이트맥주]] : 하이트 제2공장이 천주산(마산역과 창원역 사이)에 있다.[* 원래는 [[한독맥주 사건|한독맥주]] 공장이었으나 1976년에 금융 관련 사건으로 인해 도산하면서 이듬해에 조선맥주가 인수했다.] 창원시의 지질이 화강암반이라 물맛이 좋다는 장점이 있었고, 1990년 페놀사태 당시 이 점을 크게 활용하여 광고했다. 그 결과 하이트가 히트상품이 되었고 사명을 아예 조선맥주에서 하이트맥주로 바꿔버렸다.
* [[몽고간장]] : 일제시대 몽고정 옆에 있던 간장 양조장. 현재도 몽고식품 본사가 이 자리에 있고, 경남지역 간장 시장점유율 부동의 No.1이다. 수도권에서는 기성업체에 밀려 보기 힘들지만 가성비가 괜찮기 때문에 가끔 수도권의 오래된 식당들이 플라스틱 벌크통째로 사다가 쓰는 게 관측되기도 한다.
창동, 오동동 지역이 망한 이유는 창원에도 곧 상업지역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창원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상업지구는 중앙동 일대로서, 이 곳에는 창원시청과 용지호수가 인접해 있다. 중앙동 상업지구의 중심지는 정우상가이다. 창원 중앙동에서 약속을 잡을 때는 정우상가 앞에서 만나는 것이 불문율일 정도이다. 지금은 상남동 등 다른 지역에 다소 밀리는 감이 있지는 않으나 그래도 주로 30~40대들은 다른 곳보다도 중앙동에서 만나는 것을 가장 선호하고 있다. 주변에 창원시청 등 관공서가 많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니 누가 보면 중앙동하고 상남동하고 엄청 떨어져 있는줄 알겠네 도로 하나 차이다~~
창원기계공업단지에는 [[장갑차]] 등 무기를 직접 생산하는 [[현대로템]]을 필두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방산업체들이 몰려있어 전시에는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 생산기지가 되는 도시다. 이 때문에 전쟁 발발시 서울 다음 폭격 지역으로 지목받기도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전쟁나면 일단 창원을 뜨라고들 말한다~~ 만약 전시에 이곳이 단기간에 박살나게 되면, [[스타크래프트]]에서 본진 군수공장이나 관문을 장악당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을 현실에서 겪게 될 확률이 높다. 게다가 한국은 땅이 좁은 까닭에, 2차 대전 때 [[소련]]이 [[독일]]한테 진창 두들겨 맞아 막장이 된 상황에서도 생산 시설을 저 머나먼 [[우랄 산맥]]으로 옮겨, [[독일]]군이 진군해 오는 동안 그 새로 만든 생산 시설에서 화기를 뽑아서 막아내는 그런 무리한 일을 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그 방어가 상당히 중요할 수 밖에 없는 도시이다.
그 외에도 [[진해구]]는 해방 직후부터 해군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애초부터 해군의 거점 도시로 발달한 곳이다. 지금도 해군 신병들을 교육하는 [[해군제1군사교육단]]과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해군사관학교]]가 진해구에 있다.
== 관련 문서 ==
- 청도군 . . . . 17회 일치
청도로 향하는 [[고속버스]] 노선은 전무하며 [[시외버스]] 노선은 있긴 하지만 타 지방에 비하면 그야말로 안습 그 자체. [[대구부산고속도로]]가 개통되었음에도 [[철도]]가 강세인 지역이다. 그러다가 2015년 1월(!)에 드디어 [[동서울터미널|동서울]]행 시외버스가 개통되었다. 1일 3회 운행하며, 경산, 시지를 경유한다. 사실 동서울행도 경산발이 청도로 연장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보기 드문 '''[[철도]] 초강세 지역'''이다. [[경부선]] 철도가 사실상 시외 교통망의 대부분을 책임지며, [[청도역]] 앞은 항상 이용객으로 북적거린다. 여기에 관광객과 귀성객들이 몰린다면 좁은 역사는 그야말로 카오스가 된다. 이외에 북대구, 노포동, 마산, 수원 등 여러 교통 요충지는 '''철도가 너무 커버를 잘 해주는 나머지 없다.(...)'''
[[청도버스]]에서 운영 중인 농어촌버스인 [[청도 버스 0|0번]]이 풍각정류장에서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신천4동 [[신세계 동대구 복합환승센터/동대구터미널|동대구터미널]]까지 1일 12회 운행하지만, 실제로는 시외버스가 절대적으로 강세다. 청도에서 시외버스로 갈 수 있는 곳으로는 서울, [[신세계 동대구 복합환승센터/동대구터미널|대구]], 경산, 밀양, 울산, 경주, 포항 등 7개 도시밖에 없다. [[경상남도]] [[창녕군]]과도 인접해 있지만, [[청도공용버스터미널]]에서는 [[창녕군]] 방면 시외버스가 없어 풍각에서 환승해야 한다. 7개 도시를 가는 것도 경주 경유 포항행과 울산행은 1일 3회 운행이다. 앞서 나와 있듯이 애초 산동 쪽으로 도로 연결이 '''매우''' 좋지 않기 때문이다. 넘어가 봤자 경주 시내까진 한참 걸리기도 하고... 청도군, 특히 청도읍과 산서 지역은 행정구역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안(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교통, 물류, 관광 등)에 대해서는 사실상 윗동네 대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 눈물난다.
=== 관광 ===
[[가지산]], [[운문사]], 운문호, 청도석빙고, 청도읍성, 와인터널 등의 관광지가 있다.
경산시와 밀양시에 가려져 '청도'라고 하면 일단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상당수 있으나, '''[[소싸움]]'''하면 대부분 청도 소싸움대회를 떠올릴 정도로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고장이다. 한창 [[IMF]] 구제금융을 받던 시기인 1999년에 개최되어 매년 3월 말쯤에 이서면 서원천 옆에 가설 경기장을 지어놓고 개최되어 지금은 문화관광부가 10대 지역문화관광축제로 선정할 정도의 네임드로 성장했다.
|| '''관외사전투표''' ||<:>28.51%||<:>{{{#C9151E 38.44%}}}||<:>15.19%||<:>10.85%||<:>6.44%||<:>{{{#808080 ▼9.93}}}||<:>||
얼핏 보면 조용해 보이는 고장이지만, 청도군수 선거를 4년(2005~2008)에 4번 치른(쉽게 말해 재선거만 3번) 것과 관련되어 청도군 전체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선출되는 군수마다 금품수수 때문에 실형을 선고받아 낙마한 데다 지역 유지나 마을 주민들이 선거운동 등을 통해 비슷한 혐의를 받은 터라 군민 상당수가 선거사범(…)이 되다시피 했다. 수배된 사람 중에 자살자가 여럿 나올 정도였으니.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7|관련 기사]]
사실 이 사건의 경우, 사회의 민주적 의식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민주주의적 제도를 시행했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부작용 사례로써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일단 해당 사건들의 배경으로 금권, 관권, 부정선거가 판치는 시기를 겪었던 노인층의 도덕적 해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물론 실제로 금품을 살포한 후보자 및 선거본부가 제일 나쁜 놈들인 건 분명하지만, 선거라고 하면 뭔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런 행위가 범죄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후보자나 선거운동원에게 '''뭔가 없냐'''고 채근하고, 금품을 줄 수 없다고 하면 '''그러면 선거에 왜 나왔느냐'''고 힐문하기까지 했다는 지역주민들의 책임 역시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시골 특유의 폐쇄적이고 인맥중심적인 사회구조가 부정선거 문제를 심화시키는 심각한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청도군은 집성촌을 중심으로 한 가문집단(문중)이나 초·중학교 학연(동창관계)등을 통하여 종횡으로 엮인 인맥관계가 사회적 분위기를 주도하는 폐쇄적인 사회였고, 이런 구조 속에서 부정선거 문제가 암처럼 번져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인맥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선거전 속에서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금품 살포등도 이런 인맥 구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선거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선량하고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범죄자로 전락하여 경찰 수사를 받게 된 심리적 부담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에 이르렀다는 것. 또한, 이들이 자살에 이르게 된 심리적 압박감의 주요한 원인 중 '''자신을 통해 금품을 전달받은 주변 사람들이 물게 된 과태료'''가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으레 선거때면 나눠주는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별 죄책감 없이 십만원 상당의 금품을 주고받았지만, 경찰 수사 결과 금품수수 사실이 드러나면서 50배의 과태료를 물게 된 것. 10만원의 50배인 500만원은 도시에서도 가볍다고 보기 어려운데, 농가 입장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무거운 돈이 된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 원만하게 유지되던 지역의 인간관계가 순식간에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청도군 군수 선거 부정 사건은 얼핏 보면 촌극 같지만 지독한 비극으로 끝맺게 되었으며 민주주의의 확립은 제도적인 개선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도덕적인 의식 개선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반면교사로 기억되게 되었다. 하다 못해, 선거가 진행되는 시기에 불미스런 일과 관련되어 금품을 수수하는 것은 범죄이고, 처벌대상라는 점이 명확하게 홍보되기만 했더라도 문제가 이 정도까지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
* [[윤필용]](1927~2010) : 전 수도경비사령관,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
* [[이진희(1932)|이진희]](1932~ ) : 전 문화공보부 장관, 전 [[문화방송|MBC]] 사장, 정치인.
송전탑 건설 문제로 반대측 주민이 마을회관을 이용하지 못하여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에게 호소하는 등 어려움이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49073|홈페이지]]
- 청송군 . . . . 17회 일치
유명한 관광지로 [[주왕산]]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외지 사람들은 "[[청송]]"이라는 동네 이름이 나오면 맨 먼저 '''[[청송교도소]]'''와 '''청송감호소'''부터 떠올린다. 이 지역에는 [[교도소]]가 무려 네 군데나 있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에 [[흉악범]]과 [[정치범]]을 [[감금]]하기 위해 이런 외진 곳에 [[교도소]]와 [[감호소]]를 왕창 지어논 것. 사실 교도소가 있는 곳은 청송읍이 아닌 [[영양군]]과의 경계지역에 있는 진보면이다. 청송이란 고장의 이미지를 깎는다고 [[대한민국 법무부]]에 지속적으로 진정이 제기되었는데 결국 이름이 경북북부교도소로 바뀌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교도소가 들어서면 [[교정직 공무원]]들 및 면회객들도 오기 때문에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도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청송군민들은 '''교도소를 추가 유치하겠다'''고 나설 정도.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725817&plink=ORI&cooper=NAVER|#]] 근데 이것을 역으로 보면 교도소 이외에는 지역경제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낙후가 심각하다는 거다.
교통은 [[당진영덕고속도로]], [[31번 국도]], [[34번 국도]], [[35번 국도]]가 군을 관통하지만, [[철도]][[철도가 지나지 않는 도시/대한민국|는 없다.]] 고속도로 나들목은 [[청송IC]]와 [[동청송·영양IC]]가 있다. 2011년 12월 27일 35번 국도 청송과 영천 사이의 고개인 노귀재를 관통하는 터널이 준공되어 영천 방면으로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군청 소재지인 청송읍보다 진보면의 교통사정이 훨씬 좋다. 진보면을 관통하는 [[34번 국도]]가 청송 관내 국도 중 포장이 가장 빠른 [[1975년]]에 이루어진 곳이다. [[동서울터미널|서울]], [[부산종합버스터미널|부산]], [[신세계 동대구 복합환승센터/동대구터미널|대]][[북부정류장|구]], [[안동터미널|안동]], [[영천시외버스터미널|영천]], [[영덕군|영덕]], [[포항시외버스터미널|포항]] 방면으로 시외버스가 운영되지만, 영천을 제외하면 어느방면이든 진보 쪽의 횟수가 훨씬 많다. 이는 인접한 [[영덕군]], [[영양군]]과 [[안동시]], [[서울특별시]] 등지를 잇는 시외버스들이 모두 진보를 경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청송읍과 안동, 서울을 잇는 시외버스도 진보를 경유한다. 안동으로 가는 시외버스편이 그나마 배차가 많은 편이다. 동서울 및 부산에서 청송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주왕산까지도 가니 참고. 다만 진보면에서도 안동이나 영덕으로 갈땐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만만치 않은 U자 코스이니 자가용은 운전에 조심할 것. 가랫재(안동 방향)와 황장재(영덕 방향) 두 고갯길 모두 터널 계획이 있다. 터널이 개통 되면 기존의 시간에서 10분 정도는 가볍게 당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표고버섯, 고추, 약대추 등도 재배되며, 그 외에 [[수석#s-2|꽃돌]], 옹기, 한지, 농산물 가공품 등이 생산되며, [[주왕산]] [[국립공원]] 인근에서 [[관광]][[산업]]도 이루어진다.
=== 관광 ===
'''[[주왕산]] [[국립공원]]''', 주산지, 송소고택, 청송문화관광재단의 청송백자 전시관과 심수관 도예전시관이 있으며, 청송문화관광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민예촌에서 한옥숙박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인근의 청송 달기약수탕 부근에 장난끼공화국 달빛예술학교에서 각종 체험 및 플리마켓등을 체험 할 수 있다.또한 지역의 전통문화유물인 청송백자,소설가 김주영선생의 소설 객주를 모티브로 한 객주문학관, 야송이원좌선생이 운영하고 있는 군림청송야송미술관과 위장병과 관절에 좋은 약수가 나오고 있는 달기약수, 신촌약수터 등이 있다.
|| '''관외사전투표''' ||<:>30.50%||<:>{{{#C9151E 33.04%}}}||<:>15.73%||<:>12.82%||<:>7.45%||<:>{{{#808080 ▼2.54}}}||<:>||
* 남관 (1913~1990): 화가
- 황정민(남자배우) . . . . 17회 일치
||<#6495ed> {{{#white '''본관'''}}} ||[[황(성씨)|창원 황씨]] ||
영화 배우로서는 주로 《너는 내 운명》의 남자 주인공과 같은 순박한 청년 역을 맡아 왔으나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영화)|달콤한 인생]]》에서 잔인하고 비열한 조폭 두목, 《[[사생결단#s-3|사생결단]]》에서 건들거리는 형사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사생결단》 이후부턴 몇몇 영화에서 흥행 부진을 맛보았으나 《[[부당거래]]》, 《[[댄싱퀸(영화)|댄싱퀸]]》, 《[[신세계(영화)|신세계]]》 등이 흥행하면서 입지를 키워가더니, 《[[국제시장(영화)|국제시장]]》, 《[[베테랑(영화)|베테랑]]》 두 편 모두 천만 명 돌파라는 연타석 홈런을 세우며 명실상부한 충무로 에이스로 탈바꿈하였다. 게다가 《[[히말라야(영화)|히말라야]]》에서 750만 명 정도를 추가로 끌어모아 2015년 한해만 해도 3천만 관객이라는 진기한 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본인은 사람들이 천만배우라고 말할 때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말한다. 천만이라는 숫자가 자기에게는 의미없고 단지 감사할 뿐이라고... 평소에 심각하게 의미 부여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씨네21 인터뷰- ] 연타석 홈런을 치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믿고보는 황정민'''이라는 뜻으로 '''믿보황'''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2018년 개봉한 영화 [[공작(영화)|공작]]으로 '''누적 관객수 1억 명을 돌파했다.''' 이는 역대 여섯 번 째 돌파 기록이며, 주연작만 계산할 경우 [[송강호]], [[하정우]]에 이어 역대 세 번 째 주연작 누적 관객수 1억 돌파 기록이다.
* 극단 '학전' 시절 무대를 관람하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일명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나머지 4명은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 [[조승우]] 이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2510929|#]]
* [[두산 베어스]] 팬으로, 어릴 때부터 [[OB 베어스]] 팬이었다고 한다. 두산팬들 사이에서는 생긴 것부터 오비아재라고. 잠실구장에서 올드 모자를 쓰고 직관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 [[빅뱅(아이돌)|빅뱅]] 특히, [[지드래곤]]의 팬이라고 한다. 2013년 [[지드래곤]]의 콘서트에서 왕관 머리띠를 한 것이 포착되는가 하면, [[박경림]]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3월달에 하는 빅뱅 콘서트 티켓팅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강동원이 YG에 들어가서 콘서트 티켓을 부탁 해본다고 한다.] --마지막 곡 선곡을 [[지드래곤]]의 Heartbreaker로 선곡했다.--[* 자신은 최근의 노래보다 초창기 노래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인줄 알았으나 그 후에 있었던 빅뱅 콘서트에 참석했다는 사진이 올라왔다.
2015년 12월 16일 개봉작 [[히말라야(영화)|히말라야]] 포스터로 인증샷을 찍는 '황정민 놀이'가 있다. 포스터의 적절한 사이즈에 헤어스타일, 성별 상관없이 미칠듯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정유미(1983년)|정유미]](왼쪽 위)를 시작으로 시작된 열풍은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져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FF8C00>'''{{{#white 연도}}}'''||<:><#FF8C00>'''{{{#white 제목}}}'''||<:><#FF8C00>'''{{{#white 배역}}}'''||<:><#FF8C00>'''{{{#white 활동}}}'''||<:><#FF8C00>'''{{{#white 관객수}}}'''||<:><#FF8C00>'''{{{#white 흥행}}}'''||
||<:>2015||<:>[[베테랑(영화)|베테랑]]||서도철||주연||1,341만명||성공[* 손익분기점은 전국 관객 기준으로 280만 관객이라고 한다. 이에 류승완 감독은 속편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속편으로 나온 영화가 바로 [[군함도(영화)|군함도]].]||
||<:>2014||<:>[[국제시장(영화)|국제시장]]||윤덕수||주연||1,426만명||성공[* 필모그래피상 첫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되는 영광을 가져다 준 작품]||
||<:>누적 관객수||<-5><:>'''1억 65만 명'''||
누적 관객수가 곧 주연작 관객수이며, [[송강호]], [[하정우]]에 이어 주연작 누적 관객수 3위. 전체로 따지면 6위다.
- 김태우(god) . . . . 16회 일치
[[컬투]]의 [[정찬우]]가 수색대 부사관 출신인데, 어느날 복무했던 부대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찾아가보니 그가 복무했을 당시 [[대대장]]이였던 분이 김태우가 소속된 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셋이 같이 술을 마셨는데, 그 분이 하는 말이 "자네가 수색대 나온 덕에 연예계에서 잘 됐잖아. 그래서 내가 김태우를 수색대로 보냈다. 하하하."(?!)[* 이 이야기는 2016년에 컬투쇼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한편, 이때의 인연 때문인지 [[진짜 사나이(일밤)|진짜 사나이]]가 [[제27보병사단|이기자부대]] [[대한민국 육군/수색대|수색대]]에서 촬영할 당시 예비 군복을 입고 위문공연을 왔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씨스타]]'''에게 장병들의 관심이 완전히 넘어가면서 공연은 대실패(?). 김태우 본인도 "군대에 남자 가수 따위가 누가 온다고 한들 좋아하겠어요?"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인정했다. 그리고 진짜 사나이 맴버들을 비롯한 후배 수색대원들에게[* 사실상 진사 전용 생활관 멤버들.] [[PX]]에서 한턱 쐈는데 마음껏 사랬더니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닥닥 긁어서 무려 19만원(!!!!)이 나오는 참사(?)가 발생 했다. 이걸 일반적인 편의점의 판매 가격으로 변환하면 대략 30만원 정도 나온 셈이다.[* PX는 [[부가가치세]], 주류세 등의 세금이 안 붙어서 저렴하다. 무엇을 사먹느냐에 다르지만 보통 둘이서 만원만 써도 배가 터지게 먹고도 남는다. 아니, 3봉지에 5000원하는 고향만두를 사면 3명이 먹어도 배부르다. 거기다가 이천원짜리 음료수로 나눠먹으면 7000원으로 3명이 만두와 음료수를 배불리 먹는 [[예수]]에 버금가는 [[기적]]을 보여준다. 그런 PX에서 19만원이면...] 자막으로 "PX를 샀냐..."라고 나올 정도다. PX 근무병 왈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당시 이병이던 김형근 군에게 군대에 대한 조언도 해준다.
청춘불패 출연으로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추진력을 얻은 건지]] SBS 2011년 설 특집 프로그램이었던 <스타맞선-유쾌한 스캔들>에서는 [[아이유]]와 러브라인을 만들었다...이와 같은 일 때문에 남자들에게 ''''해방 이래 [[연정훈]] 이후 제일 나쁜 놈''''이라며 지탄의 대상이 된다. 본인도 이 사실을 아는 듯, [[상상플러스]]에서 청춘불패 출연 이후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라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옛날옛적 god 시절 그 레드썬 교수의 전생 체험에서 밝혀졌던 전생이 '[[관우]]'. 다만 최근에 [[삼국지]]를 읽어서 최면이 잘못 들어갔다는 분위기이긴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상식이 뚜렷한 편은 아닌데다 이와 관련된 흑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 푸는 실력은 좋은 편이다. 194회 전반전에 참가했을 때는 6단계까지 생존했으며 두번째 도전인 287회 후반전 방송분에선 [[1대 100/최고 단계 문제 #s-4.4|정규 최종 단계(당시 11단계)에서 6명과 대결을 펼쳤다.]](두 대결 모두 각각 8, 12단계에서 남은 100인 전멸)
1인으로 3차 도전을 한 490회 방송에선 상금을 타면 후배의 뮤직비디오 제작비에 보탠다는 이야기를 했다. 중간 인터뷰 때 중학교 시절 당시 레크리에이션 강사였던 [[김제동]]에게 "가수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물었더니 그가 "넌 안돼!"라고 말하는 것에 상처를 받아서 독기를 품어 노력을 한 끝에 가수에 데뷔했다는 이야기를 했으며 데뷔 이후 김제동이 "태우야,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묻는 김제동에 "형은 안돼요!"라고 받아쳐 [[역관광|제대로 복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청춘불패 시즌1]]에서 [[구하라]]가 다리찢기를 하고 있는데 "넌 어려서 골반이 안 벌이지네"라고 말한 게 잠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당시 [[김신영]]이 잠깐 발끈하기도 했고... 이걸 '어려서 경험이 없어서 안 벌어진다'는 식의 [[성희롱]] 발언으로 해석한 일부에서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었으나 크게 불거지는 일 없이 금새 묻혔다. 이것을 두고 성실한 군복무로 인한 실드가 작용한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애초에 [[여성]]은 2차 성징이 끝나면 추가적으로 골반이 성장하지 않으며 골반이 벌어지는 문제와 성경험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출산시 고통을 수반하며-거의 틀어지는 수준으로- 벌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출산=섹스'라는 개념에 꽂혀있는 게 아니라면, 너무나 먼 이야기라 관련성이 적음을 알 수 있다. 즉, '어려서 골반이 안 벌어졌다'는 발언은 '2차 성징도 안 온 어린 애'라는 뉘앙스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라는 것.
이 외 그의 또 다른 개드립인 [[빈유|'목 돌아간 애']] 드립 등을 생각해보면, 그냥 '2차 성징이 안 온 꼬맹이'라는 의미로 쓴 게 맞다. 물론 나이가 어릴수록 더 유연한 것이 '''[[상식]]'''이지만, 이건 그냥 그가 '''무식'''하다고 보면 될 문제다. 주로 성인 여성의 성적 특징과 관련한 드립을 치는 것이니 섹드립이라면 섹드립이지만, 직접적으로 [[섹스]]와 관련한 드립이라기 보다는 [[나르샤(브라운 아이드 걸스)|나르샤]]가 사과 두 개로 글래머 흉내를 낸 것과 같은 수준의 색(色)드립인 것.
=== [[체중]] 관리 실패 사건 ===
[[http://news.nate.com/view/20180829n08433|살찐 김태우, 체중 관리 제대로 못해 6500만원 물 처지]]
2018년 8월 28일 서울중앙지법 207단독 이미선 부장판사는 비만 관리 회사 ‘쥬비스’가 김태우와 그가 대표로 있는 소속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속사는 쥬비스에 6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쥬비스는 2015년 9월 김태우와 1년 동안 체중 관리 프로그램 홍보 모델 계약을 맺고 출연료 1억 3000만원을 지급했다. 당시 113kg이었던 김태우는 85kg까지 감량 목표를 정하고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결과 2016년 4월 목표 체중에 도달했고, 쥬비스는 여러 홍보 기사를 내고 마케팅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는 목표 체중에 도달한 후 스케줄 등의 이유로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고, 4달 만에 다시 체중이 95.4kg까지 불어났다. 계약 기간이 종료되더라도 감량된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요요 방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관리를 받지 않았던 것. 이에 쥬비스는 “계약 의무를 위반해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김태우의 체중이 다시 증가하면서 쥬비스의 체중 관리 프로그램 효과를 의심하며 환불 신청을 요청하거나 상담을 취소하는 사례가 발생했다”며 “체중 감량에 성공해 쥬비스가 얻은 광고 효과도 있는 만큼 광고 모델료의 50%를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 도영(1996) . . . . 16회 일치
||<#FF0133><:>'''{{{#white 본관}}}'''||<(> [[김해 김씨]] ||
어릴 적부터 가수가 되기를 꿈꿨으며, [[샤이니]]의 무대를 보고 '춤추며 노래하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학창시절 밴드부로 활동해 학교 축제, 지역 축제 등의 여러가지 무대에 참가했고 가창대회에 솔로로 나간 경험이 있다. 그리고 '구리시 청소년 예술제'에서 하동균의 <비가 오나 눈이 오나>를 부르고 대상을 탄 뒤 SM엔터테인먼트에 캐스팅되었다.
* '동영'이라는 이름이 너무 동글동글해서 어릴 때는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영'과 '도영' 중 뭐가 더 좋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했다.-- 이름과 관련해서 어릴 적 별명은 똥파리, 동대문 등이었다고 한다. '동'이 돌림자여서 명절에 사촌들끼리 모여서 별명 얘기를 하면 모두가 같은 별명이었다고. 또 [[정동영|모 정치인]]과 동명이인이라 한때 대통령 선거 나가냐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쟈니:제 친구도 [[세훈|오세훈]]이 있거든요-- 외국인 멤버들은 도영의 예명이 생기기 전부터 '동영'이라는 발음이 어려워 '도영'이라고 많이 불렀다고 한다.
* [[탄산음료]]를 살짝 흔들거나 캔을 쳐서 탄산을 빼고 먹는 모습이 몇 번 포착된 적 있는데 후에 알려진 바로는 목관리를 위한 건 아니고 그냥 탄산 빠진 음료를 좋아한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는 목에 안 좋다고 해서 탄산음료를 3년 동안 마시지 않았었는데 연습생이 된 후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다시 탄산음료를 먹기 시작했다고.
* 목이 안 좋을 때 관리하는 방법은 말을 안 하는 것과 젖은 수건을 걸어 놓는 것. 그리고 가끔씩 일부러 마스크를 끼고 연습을 해서 입과 목 쪽에 습기가 차도록 하기도 한다고.
* [[태용]]의 미모를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해서 그와 관련된 명언들이 몇 개 있다. '음악방송 가면 보여주고 싶어. 복도에 있었으면 좋겠어. 진짜 복도에 좀 계속 서 있어. 형 너무 잘생겨서 자랑하고 싶어', '태용상노 가오가 월드 베스트'
* 드림 관련 행사에서 종종 사회를 보는 등 형 라인 중 드림이들과 접점이 많은 멤버 중 한 명이다. 런쥔이의 말에 의하면 사비로 햄버거 등 이것저것을 많이 사주기도 했다고. We Go Up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도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응원갔다고 한다.
* 멤버들이 출연하는 방송이나 각종 영상, SNS 모니터를 많이 하는 편. 엔나나에 종종 직접 문자를 보내거나 마크, 제노 등 동생들이 MC를 보는 음악방송을 홍보하기도 하고 다른 멤버들이 V live를 할 때 보고 있다가 전화를 걸기도 한다. 127이 해외 촬영 갔을 때 다른 멤버들끼리 찍은 유투브 미니게임 영상을 본 후에 127의 V live에서 '사랑해 게임'의 룰을 설명하기도 하고, [[루카스(NCT)|루카스]]와 [[윈윈(NCT)|윈윈]]이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고 나중에 루카스와 사진을 찍었을 때 그 글을 그대로 패러디해 올리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멤버들에 관한 일은 모르는게 없다(...)
* 그렇게 흑발을 1년 넘게 고수하다가 2018년 10월 말 갈색으로 염색하였다. 할로윈 파티 사진에서 염색한 것이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이때는 임금 분장을 하느라 익선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뒷머리와 구레나룻 색만 보였었고 2일 후인 11월 2일 있었던 행사에서 바뀐 헤어스타일이 갈색 투블럭컷임이 밝혀졌다. 갈색으로 염색한 도영을 보고 쟈니는 '제임스'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계속 쳐다보는데 느낌이 제임스였다고. 그런데 도영은 이미 어린 시절 영어학원을 다닐 때 지은 영어 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찰리'.
* 멤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예전에 갔던 영화관의 관과 앉은 좌석 번호까지 기억하는 수준. 그런데 기억력이 좋은 편이지만 감정에 충실한 기억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감정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 환경이 먼저 떠오르는 타입. 사건에 대한 기억력이 좋다고 한다. 눈치 또한 상당히 빨라서 서프라이즈 파티나 몰카에도 잘 속지 않는다.[* 그런데 윈윈은 본인의 장난에 잘 속는 멤버로 도영을 꼽은 적이 있다. 이유는 자기 말을 잘 믿기 때문이라고. --속이는 멤버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가--]
* 다른 멤버들에 비해 추천곡 리스트에 가요가 많다. 주로 소속사 선배들의 곡이나 [[린]], [[아이유]], [[백예린]], [[박효신]]의 곡을 많이 추천하지만 그 외에도 밴드 음악, 서정적인 발라드 풍의 곡도 비중이 높은 편. 평소에 노래를 찾아 들을 때 유사 아티스트를 찾거나 연관된 곡을 듣거나 좋아하는 가수가 커버한 노래를 많이 듣는다고.
* 쇼챔피언, 인기가요 MC 경험 때문인지 하차 이후에도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멤버들 사이에서는 장난식으로 '인기가요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본인이 스스로 아들이 아니라 (전)아들이라고 정정하자 제작진이 아들 맞다고 이야기하였다. 제작진이 인정한 아들답게 유독 인기가요 무대에서 도영의 클로즈업이 많은 편이며 도영에 대한 인기가요의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는 무대가 2018년 2월 25일 boss 무대. 노래가 시작하고 초반 30초 가량이 계속 흑백으로 처리되다가 도영의 파트가 시작되는 순간 컬러로 전환되는 효과를 보여준다.
* 팬들이 불러줬으면 하는 별명으로 '도영왕댜님'을 골랐다. 이유는 주어진 보기 중 제일 발음이 어려워서 분명 포기하실 것 같아서라고. --하지만 팬들은 발음과 상관없이 꿋꿋하게 왕댜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제는 '왕댜님' 호칭이 익숙해졌는지 아이돌룸 출연 당시 본인의 풀네임을 도영'왕댜님'이라고 이야기하였다. 할로윈에 임금 분장을 한 이후 '임굼님'으로 업그레이드. '임금님'이 아니라 '임굼님'이 된 이유는 '왕댜님'에 비해 '임금님'은 너무 유니크하지 않으니 '임굼님'이 좋겠다고.
* 팬들이 쓰는 용어나 덕질 정보를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편이다. 포카 교환에 관한 것이나 앨범이 나오자마자 사야 [[초동]]이 높아진다는 것 등.[[https://www.youtube.com/watch?v=bfHsl7sfo34|영상]]
* 이상형은 예의 바른 사람. 나이는 상관없다고.
- 몽키 D. 루피/작중행적 . . . . 16회 일치
{{{Insert non-formatted text here}}}=== [[아마존 릴리|여인섬]], 그리고 [[보아 행콕]]과의 관계 ===
샹크스에게 밀짚모자를 받고 7살이 된 무렵, 가프가 [[컬리 다단]]에게 맡기러 갔는데 이때 에이스와 첫대면했다. 처음엔 에이스가 다짜고짜 루피 뺨에 침을 뱉는 등, 험악한 관계였다.
그러던 중 에이스가 당시 그레이 터미널에서 살고 있던 [[사보(원피스)|사보]]를 만났을 때 해적선을 살 돈[* 정확히는 한 나무 위에 몰래 보관해두고 있었다.]을 모은 장소를 루피에게 들키는 바람에 사보와 함께 루피를 죽이려 했으나 사람 죽이는 것을 몰라서 그냥 나무 밑에만 묶어뒀다.
그리고 거의 하루종일 폴쉐미에게 처참하게 가시가 달린 글러브로 개패듯이 얻어 터지게 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에이스와 사보에 대한 얘기는 절대로 꺼내지 않았고, 결국 에이스와 사보가 직접 구하러 와서 폴쉐미를 관광태우고(…) 서로 친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사보의 꿈은 전 세계의 기록을 담은 책의 출판, 에이스의 꿈은 그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명성을 가지는 것. 헌데 '루피'의 꿈만이 비공개이다. 독자들은 '자유'에 관한 꿈일 거라는 추측을 하는 중.--해적왕인게 당연하잖아 해적왕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왕이라며--
이후 동료를 찾으려 섬을 떠날 때, [[실버즈 레일리]]를 만난다. 레일리는 지금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변한다고 충고하고, 루피에게 무슨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은 '마린 포드'를 '또 다시' 습격하는 것으로 해군과 초신성은 이를 마린 포드에 있는 '옥스벨'[* 이 종은 옛날에 이름을 날렸던 군함 옥스로이드 호에 달려있던 신성한 종이며 그 시대의 끝과 시작을 알리는 상징물이다.] 이라는 종으로 '신시대의 16타종'[* 해군 관습으로 옛날 이름을 날렸던 군함 옥스로이드 호에 달려있던 신성한 종인 옥스벨로 한 해의 끝과 시작에 한 해의 감사에 종을 8번을 울리고, 새로운 해를 맞아 종을 8번을 울린다. 합쳐서 16번을 울리는 관습으로 시대의 끝과 시작의 선언을 알리는 선언식이다.]을 행해 울렸다는 것과 꽃다발을 던지며 묵도를 한 행동으로 미루어 이번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의형제인 에이스를 개인적으로 애도했다. 그리고 흰 수염이 죽어서 구시대는 끝나고,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의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의지 표시인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해적왕]]이 목표라서 본래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루피답지 않은 사건을 일으켜 위화감을 느낀 동료들에게 뭔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면 묵도하는 루피의 오른쪽 팔에 3D2Y 문신(혹은 그림)이 있는데 3D에 X자가 그려져 있다. 사실 그 내용은 3 Day(X) 2 Year로 샤본디 제도에서 배의 코팅을 맡기고 3일 뒤에 만나자고 한 것을, 2년 뒤에 만나자고 정정하는 것으로 신문을 본 동료들이 루피가 보낸 메시지를 알아채는 모습이 나온다. 여담으로 S에 X자를 치고 AS(X)CE라고 적혀있는 에이스 문신과 위치가 같고 모양새가 흡사하다. 덕분에 에이스를 애도하는 장식처럼 보인다. 3D2Y라는 단어를 괜히 감추려는 레일리의 지혜로 보인다. 그 후 행보는 2년 간 각자 수련한다고 추측된다(현 전개로는 신세계는 완전한 지옥으로 나오며, 또한 지금 동료들은 각자 누구나 한명씩은 스승, 혹은 도움이 될 만한 사람과 함께 있으므로 가능성이 꽤 높다.).
=== [[시라호시]] 공주와의 관계, 그리고 어인섬 ===
루피가 먼저 [[호디 존스]]를 공격하면 인간과 어인들의 관계가 나빠질 것을 우려한 징베가 본인이 스스로 함정에 빠짐으로 루피를 영웅으로 만들자고 하지만 거절한다. 이때의 이유는 아주 가관으로, '''난 영웅을 좋아하지만 영웅이 되고 싶지는 않아! 영웅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 예를 들어 눈앞에 고기가 있다고 치자. 해적이라면 당장에 고기를 먹겠지만 영웅은 고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하잖아! 난 고기가 먹고 싶다고!!'''(...) 결국 징베가 '''네가 먹을 고기는 내가 마련해줄 테니까 말 좀 들어!''' 하니까 그제서야 수락한다(...)[* 조로의 영웅관 또한 걸작인데, 전투가 끝난 뒤 영웅대접 받기 싫어서 도망치자 시라호시 공주가 왜 도망쳤냐고 묻자 말하길 "그거 알고 있나! 영웅이란 건 네 술을 나눠주는 존재라고. 난 술이 마시고 싶어!" ~~이자식들이 하나같이~~]
이후 선수관람석에서 베라미의 B블록의 경기를 잠시 동행하게 된 캐번디시와 지켜보는 도중 콜로세움에 참가한 [[돈 칭자오]]가 나타나 '''"[[몽키 D. 가프|가프]]는 잘 계시는가? 루피 아우"''' 하고 물어보자 생각없이 바로 아저씨는 어떻게 할아버지를 아냐고 대답하는 바람에 또다시 정체를 발각당한다. 그리고는 옆에서 이를 들은 캐번디시가 루피가 맞냐며 추궁하자 당황하며 루피가 아니고 루시라며 발뺌하고,[* 이 와중에도 돈 칭자오의 계속되는 도발에 꼬박꼬박 반응하며 자기가 루피인 것을 계속 [[인증]]한다.~~역시 바보~~ 캐번디시도 그렇고 칭자오도 그렇고 애먼 데다 원한을 품은 인물들 때문에 보통 보케 담당인 루피가 츳코미를 해대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캐번디시 曰 "남의 인기나 뺏질 않나 귀신의 손자로 태어나질 않나… 순 원망만 사는 쓰레기 자식." 이에 루피 曰 '''"그거 다 내 알바 아니라니까?"'''] 돈 칭자오는 가프에게 수없이 살해당할 뻔 했다며 루피의 할아버지인 '''악마 가프'''[* 돈 칭자오가 활동하던 당시의 해적들에게 있어 가프는 악마로 통했다고 한다.]에게의 빚을 손자에게 갚겠다며 루피?를 공격하고, 이에 루피는 전력으로 머리통을 후려갈기지만 전혀 통하지 않고 흥분한 돈 칭자오는 계속 루피를 공격하려 하나 주변의 만류로 일단 와해된다. 이후 '''경기고 뭐고 일단 밀짚모자를 잡겠다는 캐번디시를 피해''' 관람석 외벽에 매달려 [[바르톨로메오(원피스)|바르톨로메오]]와 싸우던 [[베라미]]를 응원하지만, 결국 베라미는 엘리자벨로 2세의 왕의 펀치에 휘말려 탈락한다.
하이루딘을 쓰러트린 후, 떨어진 무기를 수집해 총알처럼 사용하는 참가자 "강도 쟝"[* 현상금 사냥꾼으로 현재 목표가 루피의 임펠다운 사건 당시 탈옥했던 죄수 전원을 잡아서 현상금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 중 ~~쩌리들~~몇십 명은 잡아서 현상금을 받은 듯.] 이 루피의 정체를 눈치채고 투구를 빼앗은 뒤 공격하지만 루피는 견문색으로 날아오는 무기들을 여유있게 피하며 접근해 투구를 되찾는다.[* 그리고 강도 쟝은 루피를 발견하고 뒤쫒아온 돈 칭자오가, '''하필 루피가 피한 무기들을 죄다 배에 맞는 바람에''' 아프다며 날린 박치기를 맞고 그대로 리타이어.] 뒤이어 계속 루피를 노려온 돈 칭자오와 서로 무장색 주먹을 부딪히며 마침내 맞붙는다. 둘은 실로 대등한 결투를 펼치나 늙은 돈 칭자오가 조금 밀리기 시작한다. 이후 돈 칭자오에게 '''늙은 자신과 호각을 이루는 정도라면 가망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겨우 이런 수준의 인간을 레일리가 선택했다면 레일리도 눈이 썩었다, 오히려 에이스를 죽인 해군의 판단이 옳았다 등등 여러가지로 화나게하는 말을 듣고 하늘높이 날아올라 칭자오에게 '''핵꿀밤'''(정확히는 고무고무 토르 엘리펀트 건)을 날려준다. 루피의 공격을 머리통에 직격으로 맞은 칭자오는 과거 가프에게 얻어맞아 찌그러졌던 두상이 다시 솟아오른다. [* 원피스 세계관의 골격변화는 참 경이롭다. 한데 젊은 시절의 가프가 특훈까지 해서 주저앉힌 두개골이 고작 루피의 펀치 정도로(?) 복구시킨 걸 보면 칭자오도 노화로 뼈가 약해진 것이 아닐까….] 그와 동시에 칭자오는 정신을 잃은 건지 경기장으로 곤두박질 치는데 뾰족해진 두개골에 경기장 바닥이 말 그대로 '''두동강'''나고 칭자오는 물에 빠져 장외 판정을 받는다. 이로써 루피는 C블록의 우승자가 된다.
머리 모양이 돌아온 돈 칭자오는 루피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며 자기 휘하의 팔보수군을 루피 산하에 넣어줄 생각까지 하게 되지만 피로 탓에 감사 인사를 한다고 고개 숙인 게 땅을 갈라버려 공격으로 오인한 루피가 도주해 버린다. 이 때 슬그머니 B블록의 우승자인 바르톨로메오가 루피의 극렬한 추종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일이 잘 풀리면 루피는 이 드레스 로자 편에서 산하에 팔보수군과 바르톨로메오의 바르토 클럽 해적단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징베나 보아 행콕과의 관계로 인해 어인 해적단과 구사 해적단과는 암묵적인 동맹 관계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는 큰 플러스.
- 미즈우치 타카시 살인사건 . . . . 16회 일치
2015년 1월 24일, 오사카부 순사장(大阪府警巡査長) 미즈우치 타카시(水内貴士, 당시 27세)가 내연 관계에 있었던 여성 시라타 히카루(白田 光, 당시 23세. 야마가타 출신)를 살해한 사건이다.
범인 미즈우치 타카시는 신장 183센티미터, 체중 89킬로그램의 훤칠한 체격에 샤프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성이었다. 미즈우치는 학생 시절부터 [[검도]]를 단련하여 [[검도]] 5단의 유단자였으며, 고교 졸업 후 2006년 4월에 경찰에 채용되었다. 근무 태도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미즈우치 타카시는 외모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여성을 농락하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은 매우 불성실한 남자로서, 2014년 8월 아내와 입적하기 전후의 기간에 피해자 시라타 히카루 이외에 센다이에서 3명, 오사카에서 3명의 여성과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즈우치의 사생활은 주변에서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듯 하며, 주변에는 성실한 경찰관 청년으로 알려져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미즈우치의 동급생이었던 여성은 "'검도 성적이 좋아서 부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뻐했었다. 믿을 수 없다."고 발언했으며, 지인인 여성은 "예의바르고 정의감이 강한 아이가 어째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검도를 지도했던 은사는 인터뷰에서 "바보야! 라고 말하고 싶다(アホや! と言いたい)"고 발언했다. 미즈우치의 3살 연하인 동생 역시 검도를 시작하여 [[인터하이]]에 선수로 출전했고, 경찰의 길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미즈우치는 경찰관 신분이나 오사카에서 온 것을 밝혔으나, 후에 아내가 될 여성과 간사이에서 이미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즈우치는 반년도 되지 않아 시라타 히카루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이 해 가을 무렵 시라타 히카루는 친구에게 미즈우치가 연락을 무시하고 데이트도 자주 취소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시라타 히카루는 "어차피 나는 '센다이의 여자'일까", "(미즈우치가) 스노 보드만 하고 있다. 나에게 관심이 없어진걸까."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미즈우치는 교제에 불성실해져서 시라타 히카루는 12월에 생일을 맞았지만, 미즈우치는 생일인데도 만나주지 않고, 놀아주거나 선물을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에 시라타 히카루는 "괴롭다.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2014년 6월에 미즈우치는 갑자기 시라타의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공판에서 진술에 따르면 "선배와 술을 마시다가 술에 취해서 막차를 놓쳤다. 돌아가는 것이 귀찮아져서, 시라타 씨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이후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미즈우치는 시라타와 단 3번 만나게 된다. 그리고 2014년 8월에 '''미즈우치 타카시는 한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오사카 경찰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2014년 10월, 시라타 히카루는 미즈우치 피고와 헤어지려고 했다. 사실 미즈우치는 이 때 이미 아내가 있어,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시라타 히카루와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그럼에도 미즈우치는 "나를 좋아하잖아. 헤어질 수 없잖아."라고 말하여 시라타는 눈물로 헤어지는걸 포기했다고 한다. 시라타 히카루의 친구가 한 이 증언에 미즈우치는 "기억이 없다."고 부정하였다.
이후 미즈우치는 오사카에 있는 단골 술집에 시라타를 데려가서, 후배 경찰관 A와 만나게 하여 셋이서 식사를 가졌다. A는 미즈우치가 기혼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즈우치의 의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시라타는 후배 경찰관 A를 소개받은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애인'으로 승인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즈우치는 2014년 크리스마스에도 시라타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1월 24일, 미즈우치는 시라타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미즈우치의 발언에 따르면, 시라타가 "제제를 하겠다"고 말한 것에 제정신을 잃고 '''마침 가방에 들어 있었던 벨트'''를 꺼내서 시라타의 목을 졸랐다. 「자기 맘대로 되어야 하는,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여성」에게 궁지에 몰린 것에, 격노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미즈우치는 이후 이별 이야기를 꺼내자 시라타 히카루가 관계를 "부인이나 경찰에게 말한다."고 해서 울컥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1월 24일, 피해자 시라타 히카루의 근무처에서는 항상 업무 시작 45분 전에 출근하는 피해자가 출근을 해오지 않자, 경찰에 통보를 하였다. 피해자의 자택과 근무처인 병원은 [[자전거]]로 1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 때, 히가시스미요시 경찰서의 경찰관이 시라타 히카루가 거주하는 오사카 시 히가시스미요시 구에 있는 독신자 아파트를 방문했다.
살인이라고 판단한 오사카 부경은 시라타의 관계자에 대한 탐문과 현장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날 저녁, 미즈우치 타카시는 피해자와 교우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 부경 본부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
2015년 10월 6일, 오사카 지방법원은 미즈우치 타카시에게 징역 18년(구형 20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미즈우치 피고가 흉기로 쓰인 가죽 벨트를 지참하는 등, 계획성이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장은 사전에 살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계획성은 부정하였다. 하지만 미즈우치 피고가 살려달라고 하는 피해자의 목을 집요하게 조르는 등의 행위에 대하여, "경찰관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지킬 의무를 위반하여 생명을 빼앗은 것은 강하게 비난받을 만 하다."고 하였다.
* 오사카 부경 현직 경찰관이 살인 혐의로 체포된 것은 이것이 통산 4번째. 이전의 사건은 1983년 순사부장이 교제 상대를 [[사살]]한 사건이다.
- 박석민 . . . . 16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4, top1=NC 다이노스/선수단, top2=야구 관련 인물(KBO), top3=먹튀/야구, top4=돈 내놔라 먹튀야)]
~~[include(틀:관련 문서2, top1=개그맨, top2=브로콜리)]~~
||<-5> '''[[NC 다이노스]] 등번호 18번'''[* 홍성용의 kt 위즈 이적 이후 [[배재환]]이 18번을 달려고 하였으나 박석민이 [[배재환]]의 동의를 얻어 18번을 달게 됨. --사실 배재환이 선동열을 닮아서 배동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어서 18번을 달려고 했지만, 박석민의 영입으로 실패(?)하게 된 것--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96&aid=0000363216|관련기사]]] ||
다만 잔부상이 많고 먹성을 주체 못해[* 스스로 밝히길 배고플 때 못 먹으면 돌아버린다고 한다.] 체중관리가 잘 안 되는 등 아쉬운 점도 상당히 많이 지적 받았다. 타고난 파워 덕분에 시즌 개인 최고 홈런기록을 세울 수 있었지만, 부상으로 인한 기복이 컸던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아직 가다듬을 곳이 상당히 많은 편이며,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잔부상으로 시즌 초반 2군에 갔다 오기도 하였지만, 그리도 2008년 이후 다시 규정타석에 들어서면서 데뷔 이후 첫번째로 타율 3할(0.305) 및, '''출루율 0.440'''(2위)을 기록하였다. 한때 출루율 부문 1위를 호시탐탐 노리며 [[이대호]]의 7관왕을 위협하기도. 다만 손가락 부상 때문에 작년에 비해 15개로 줄어든 홈런이 약간 아쉬운 편이지만 그래도 3번과 5번을 왔다갔다 하면서 좋은 성적을 유지해 주었다.
2010년 8월 13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 2사 상황에서 [[강봉규]]가 안타를 기록할 때 2루 주자로 나가 있었는데,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오면서 막판에 [[포수]] [[신경현]]의 태그를 피하다가 신경현과 홈 대치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에 심판은 결국 박석민을 바로 아웃시켜 버린다.(...)[[http://yoonseokmin.tistory.com/650|관련 포스트]]
[[KBO 리그]]의 대표적인 배드 볼 히터인 [[이병규|병규옹]]에 밀려 그다지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박석민도 만만찮은 배드 볼 히터다. 특히 컨디션이 만렙일 때는 그 어떤 공도 희한하게 갖다맞춰 안타를 많이 만들어 낸다. 바깥쪽 빠지는 공을 당겨친다거나 몸쪽 공을 밀어치는 장면에서는 허구연 해설조차 기겁할 정도. ~~물론 타격감 바닥일때는 선풍기질만 해대지만...~~ 그리고 [[선구안]]도 좋은편이여서 볼넷도 많이 얻고 출루율도 매우 높다. 2010년에 시즌 말 잠깐 출루율 1위를 기록하며 [[이대호]]의 7관왕을 위협했으며[* 당시 [[홍성흔]]이 시즌 아웃된 후 이대호의 7관왕을 저지할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었다.] 2009~2016시즌중에서 2011년을 빼고는 '''매년 출루율 4할 1푼'''을 넘겼다. 2013년까지 통산 BB/K가 0.74 정도로 양호한 편.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자기만의 스트라이크존을 괴랄하게 넓게 가져가는 눈야구형 타자다(...) 대부분 풀스윙으로 일관하는 풀스윙 히터이나 의외로 [[밀어치기]]에도 능하다.
* 볼매: 브콜돼 관련 기사가 뜨면서 박석민이 기자들에게 이왕이면 '볼수록 매력'을 줄여서 '볼매'라는 별명을 밀어달라고 요청. 이에 대해 [[한대화]] 당시 삼성 수석코치는 '''[[박한이|정신병자]]'''라고 하면서 혀를 끌끌 찼고, 수많은 야빠들은 '''볼수록 매를 번다'''며 볼매도 [[나름]]의 별명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여간에 본인은 볼매라는 별명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그런거 없고 넌 영원한 브콜돼이자 개그맨~~
* 퇘가놈, [[정현욱|박그분]] : 주장인데도 팀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는 이유. 박석민이 당연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삼팬들이 많았으나 FA이적으로 차세대 [[이호준|엔전드]]의 길을 걷자 바로 금지어로 등극했으며 박석민 팬은 [[노리타(야구)|퇘리타]]로 격하되었다. ~~두산팬 : [[홍성흔|우리가 한 번 당한 적이 있어서]]...~~ 더불어 브콜돼 이놈 대구로 오기만 해 봐라고 잔뜩 벼르는 중. 하지만 예상이 무색하게 첫 대구 원정에서 삼성팬들이 기립박수로 반겼다.[* 물론 여전히 온라인 반응은 안 좋은편. 일부는 박수친 팬들을 비난했는데, 이유는 우리 팀 투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 다만 이 경기에서 1회 말이 끝났을 때 삼성은 '''7대1'''로 이기고 있었다! 직관 간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끝난 경기인데 예전에 삼성에서 뛰던 선수가 왔으니 반갑다고 박수나 쳐 준 것. 박석민이 이 경기에서 솔로홈런을 쳤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거 한 방에 뒤집는 것이 불가능한 점수차였기 때문에 삼성팬들은 '''홈런을 맞았음에도 기분 좋게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덕분에 이날 삼성 선발이었던 [[윤성환]]은 상대 타자가 자팀 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두 번이나(한 번은 자신의 피홈런으로!) 받는 것을 마운드에서 지켜봐야 했다.] 꽤나 오랜 시간 이후 당시 삼성 스포츠단의 지원금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정유라]] 지원으로 인한 지원금 축소 의혹으로 계약금차이가 너무 컸다는 것과 친정 팀에 대한 애정을 종종 드러내는 것으로 인해 재평가되고 있다. 혹자는 괜히 오버해서 안먹어도 될 욕을 먹었다고도 하는 편.
=== 야구 관련 ===
자칭 야구[[천재]]. 6살 때부터 동네 야구부 형들에게 야구를 배웠으며 자신은 '야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야구를 잘했다'고 한다(…). 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양준혁]]''' 앞에서 하고 있으니 역시 허콜돼. 하지만 천재인 것은 사실인 듯. [[이범호]]와는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선후배인데 대구고 감독이 이범호가 노력형이라면 박석민은 천재형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4년 선후배라 같은 팀에서 뛴 적은 없다.] 2009년에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송된 45년간 야구를 본 할아버지에게 PD가 2회 WBC 때 맹활약하던 이범호 고교시절 이야기를 부탁했는데 이 할아버지께서 이범호도 잘 했지만 질문과 상관없는 박석민은 진짜 천재라고 수 차례 말했을 정도. 덕분에 허세에 관련된 이야기도 많은데 고졸 신인이던 2004년에 1군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김응용]] 감독에게 코치도 거치지 않고 [[오주원|오재영]]에게 강하다면서 내보내달라고 졸라서 펜스 직격 2루타(!)를 꽂은 적이 있다. 그리고 덕아웃에 들어오자마자 잠실구장을 욕하면서 넘어갔어야 선발고정이라면서 김응용 감독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는 전설이 있다.[[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kbotown2&mbsIdx=697613&cpage=1&mbsW=&select=&opt=&keyword |#]]~~쳤으니 망정이지 못 쳤으면 원산폭격행~~
>그는 [[몸에 맞는 볼]]과 관련한 해프닝 직후 [[홈런]]을 친 일이 두 번이나 있다. [[2009년]] [[6월 24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한화 이글스|한화]]전 8회말 공격 때 한화 브래드 토머스가 던진 볼이 박석민의 오른쪽 발 쪽으로 날아왔다. 박석민은 그 순간 볼이 자신의 발등에 맞았다면서 1루에 출루했다. 그러나 실제 볼은 박석민에게 맞지 않았다. 실제 볼은 포수 옆 그라운드를 맞고 [[한화 이글스]] [[포수]] [[신경현]]의 목 부분으로 튀었다. 이에 [[한화 이글스]] 코칭 스태프가 심판에게 항의를 하였고 결국 볼 카운트에 볼 하나가 늘어난 것으로 정정했다.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박석민은 토머스의 볼을 타격하여 중견수 쪽 담장을 넘어가는 1점 홈런을 기록했다. 2번째 일화는 [[2009년]] [[8월 16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KIA 타이거즈|KIA]]전 8회말 공격 때의 일이다. [[KIA 타이거즈]] [[투수]] [[곽정철]]이 박석민의 몸 쪽으로 볼을 던졌는데, 이 볼이 박석민의 팔꿈치 쪽으로 날아왔다. 박석민은 역시 볼이 자신의 팔꿈치 보호대 부분에 맞았다고 심판에게 이야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 볼은 팔꿈치에 맞지 않고 포수 뒤로 빠져 나갔다.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박석민은 곽정철의 볼을 통타,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1점 홈런을 기록했다. 이 일화는 [[2009년]] [[12월 25일]] [[MBC 스포츠플러스]]가 방송한 《프로 야구 결산 특집 - 야구는 야구다》의 코미디 에피소드 부분에서 〈소탐대득 - 작은 것(몸에 맞는 볼)을 탐하다가 큰 것(홈런)을 얻게 됨〉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 성훈(배우) . . . . 16회 일치
|| '''팬 페이지''' || [[http://m.cafe.naver.com/sunghoon83.cafe|[[파일:다음 카페 아이콘.png|width=24]]]][* 팬 카페의 이름이 포세이돈이다. ~~예체능에서의 모습을 보면 레알 신이다. 정말 이름 잘 지은 듯.~~ 성훈이 데뷔 전 수영선수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성훈의 일본 팬클럽의 이름은 머메이드 재팬이라고 한다.] ||
참고로 예체능에서의 돌고래로 빙의한 듯한 활약 덕분에, 수영 레슨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연예인은 부업으로~~ 참고로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본인은 운동을 싫어하는 듯. 수영선수 & 강사 경력 덕분인지, 예체능이나 각종 인터뷰에서 말을 상당히 조리 있게 잘하는 편이다. 예체능에서도 수영에 관한 정보를 전달할 때나, 멤버들의 훈련을 도와줄 때의 모습을 보면, 긴 설명도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술술 하는 등 말재주가 좋은 듯.
[[2017년]] [[7월 7일]] 방영분 [[나 혼자 산다]] 무지개 라이브에 출연했다. 자취 생활은 말 그대로...[[건어물녀|건어물남]]. 하는 게임은 [[배틀그라운드]], 그리고 오덕 기질이 보이는데, 인터뷰 영상을 보면 [[토니토니 쵸파]] 일러스트와 퍼즐, 케로로봇 프라모델, [[진격의 거인]] 일러스트, [[로이 머스탱]] 피규어 등이 내비쳤다. 나 혼자 산다 인터뷰에서 본인은 관심도 없었는데 팬미팅때 원피스라는 애니가 좋다라고 한적이 있는데 그후 팬들이 퍼즐, 장난감을 보내줬다고 말했다. 즉 본인이 산게 아니라 팬의 선물인 것. ~~방송 보신 분들은 앞으로 [[콘푸로스트|호랑이 기운 씨리얼]]을 보내줄듯~~ 이후로도 해당 방송에 수 차례 출연하였으며 그 때마다 그의 굉장한 먹성이 화제가 된다. 선수 출신답게 압도적인 기세로 엄청난 양을 단 시간 내 먹어치우기 때문. 다른 고정 멤버들에 비하여 출연 빈도가 높지 않음에도 화제성이 높은 것은 모두 이 때문. 덕분에 함께 출연한 양치승 트레이너까지 세간의 관심을 사고있다.
[[아이돌 마스터]] 역사상 최초의 실사 프로듀서 역으로서 출연하게 되어서 국내,외 프로듀서들에게 눈길을 끌게 되었다. 프로듀서의 이름은 '''강신혁'''이며,[* 공식적으로 프로듀서의 이름이 나온 케이스다.] 본래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들을 여럿 키워낸 가요계의 ‘미다스의 손‘이지만 어느 날 부터 시작된 루머에 돌연 잠적을 택했으나 어느 날, 데뷔를 위해 구성된 ‘리얼걸프로젝트’를 만나게 되고, 다시 한 번 프로듀싱에 나서며 아이돌의 성장과 성공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캐릭터로 나온다고 한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08395|관련기사]] --안경 안쓴게 아깝다-- --그래도 잘생겼잖아--
* [[아이가 다섯]] : 김상민 역. 극 중에서 프로 골퍼로 나오는데 데뷔 이래 재벌 역만 하다가 예체능 출연 이후 죄다 운동선수 역할만 맡고 있다. ~~정작 전직이었던 수영선수 역은 아직까진 없다.~~ 이 드라마에서 신기생뎐 때 여주인 [[임수향]]과 다시 같은 드라마를 찍게 되었지만 그녀와 엮이는 건 별로 없고,(일단 아주 안엮이는건 아니지만, 스토리상 이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커플이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연태 역을 맡고 있는 [[신혜선]]과 로맨스를 그려내고 있는데 이 드라마의 메인 커플인 [[안재욱]]-[[소유진]]보다도 반응이 좋다. 신혜선과 어색하지만 풋풋하고 달달한 로맨스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인생 배역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오로지 연태만 바라보는 직진남 상민과 눈치가 없어 얼떨결에 단호박녀가 된 연태의 케미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임수향과는 시숙-제수의 관계가 되었다(...)
|| [[MBC]] || 《[[나 혼자 산다]]》 || 무지개 라이브[* 212회 2017년07월07일방송. 신한류스타의 이중생활, 똥밍아웃, 시리얼먹방, [[건어물녀|건어물남]], 백수삼촌 등극, 인어왕자, [[올드보이(2003)|올드보이]]->만찢남, 조각몸매 등.. 성훈의 재발견.~~다이어트 위해 수영장에서 50m를 잠영으로(엄청난 폐활량)~~시청률 두자리수 ~~2부 수도권기준10.1%~~달성... 214회 여름 나래 학교1편~~정모~~ 2017년07월21일방송. 남성미~~어깨 깡패, 비율 깡패~~ 풀장착하고 웨이크 보드를 탔다.~~멋짐 풀풀~~ 다른 출연자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이시언]]웨이크 보드 타기 성공..~~을 했고 장비 셋팅도 도와줬다.~~웨이크 보드 강사를 해도 될듯.~~시청률 2부 수도권기준 11.3%...215회 여름 나래 학교2편 2017년07월28일방송. 1시간씩 전복을 꼼꼼히 씻는가 하면 산낙지를 ~~성난~~팔근육으로 다져 낙지 탕탕이를 만들었다. 식사후 [[박나래]]팀과 [[한혜진(모델)|한혜진]]팀으로 나누어 퀴즈를 푸는데 성훈이 '나 학교 안 다녔어'라고해 미취학 성훈이 됐다.~~헉~~ 벌칙으로 폐교 화장실에서 인증샷을 찍는데 그와중에 얼짱각도 맞춰 꽃미모 셀카를 찍고 나와 등뒤에서 느껴진 인기척때문에 주저앉아 한참 일어나지 못했다.~~5얼 등극. 헉~~ 시청률 2부 수도권기준 10.2%... 217회 2017년08월11일방송. 실내서핑장을 찾은 성훈은 두번째 시도만에 중심잡는데 성공..이후 만화방에가서 짜장라면, 김치볶음밥, 라면, 스*마요볶음밥, 핫도그, 미숫가루를 먹다가 관장님께 들켜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시청률 2부 수도권기준 11.9% 전국기준11.0%] ||
|| 2018 || [[MBC]] || 《[[나 혼자 산다]]》 || 무지개 라이브[* 229회 2018년01월19일방송. 성훈은 [[강민혁(가수)|강민혁]], 호랑이 관장님, 트리에너와 함께 고기 15팩을 4시간동안 쉬지 않고 흡입했다. 성훈은 2년만에 얻은 열흘간의 휴식으로 외모를 방치해 임꺽정 외모로 나타나 시선을 강탈했다. 시청률 2부 수도권기준13% 전국기준12.3%] ||
||<|3>2014||'SUNG HOON JAPAN' 팬클럽 창단||도쿄||<|3>일본||도쿄 청년관||
||<|4>월드투어 팬미팅 My Secret Romance||방콕||태국||Show DC 6층 Ultra Arena[* 2017년 07월 15일[[https://www.instagram.com/p/BWnHlz_hqzf/|행사관계자 후기]]~~인스타 로그인 하시면 번역보기가 나옴~~ ] ||
* 수영선수로 활동할 때 워낙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만큼 운동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배우인만큼 체중관리를 해야하기에 안할 수는 없어서 예전부터 다녔던 헬스장 관장님에게 1:1로 개인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나 혼자 산다]]에서 [[콘푸로스트|호랑이 기운]]때문에 이 관장님을 바보로 만들었다~~ 이 관장님은 그야말로 성훈의 저승사자. 특히 만화방에서 군것질하며 만화를 보던 성훈의 뒤에서 튀어나와 먹은걸로 왕창 혼내고 결국 헬스장으로 연행해가는 장면이 압권. 가장 최근 출연인 248회에선 관장님에게 수영을 가르치면서 그간 당해온걸 돌려줬다. 힘 빼라고 물 볼기를 때리고 강제 견인하고....
- 스틸오션/미국 . . . . 16회 일치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126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525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어뢰발사관''' |||| 4×3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282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672 m ||
||||<bgcolor=#cccccc> '''어뢰발사관''' |||| 2×4 ||
||||<bgcolor=#cccccc> '''기관총''' |||| 6× ||
>해군력 이론가인 알프레드 마한 제독(Admiral Alfred Mahan)의 이름을 딴 마한급 구축함은 패러것급의 강화형이다. 강화된 어뢰 발사관이 특징인 마한급 잠수함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미해군의 주력으로 활동했다. 마한은 마셜 제도와 길버트 제도 습격에 참가했으며,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공모함 호넷(Hornet)을 엄호했다. 마한은 전시동안 다섯개의 수훈성장을 받았다.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2,778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3,063 m ||
||||<bgcolor=#cccccc> '''기관총''' |||| 8×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256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2,884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4× ||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451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3,028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4× ||
>신형 증기기관을 탑재한 플로리다급 전함은 이전 함급인 델라웨어급(Delaware-class)보다 약간 큰 걸 빼고는 매우 유사하다. 플로리다급 전함은 네개의 파슨즈 증기기관에 의해 가동된다. 1920년대, 두척의 플로리다급 전함이 개장되었다. 런던 해군 조약에 의해 플로리다는 해체되었다. 유타(Utah)는 진주만 공격 때 격침되었다.
||<bgcolor=#cccccc> '''관측 범위''' || 3,793 m ||<bgcolor=#cccccc> '''교신 범위''' || 3,298 m ||
||||<bgcolor=#cccccc><tablestyle="width:500px"> '''기관총''' ||||<tablestyle="width:500px"> 12× ||
- 아이린(레드벨벳) . . . . 16회 일치
||<:><#FE3E5F>'''{{{#white 본관}}}''' ||<#FFFFFF>[[배씨|분성 배씨]][[https://ko.wikipedia.org/wiki/%EB%B6%84%EC%84%B1_%EB%B0%B0%EC%94%A8|(盆城 裵氏)]] ||
* 2012년 미국의 [[ABC(미국 방송)|ABC]] 뉴스에 출연했다.[[https://youtu.be/xlfr2G-4Gfs|#]] [[강남스타일]]의 인기로 K-pop과 연습생 시스템에 관한 내용
과거 연관 검색어나 [[http://me2.do/FzfeHQ6b|인터넷 기사]]도 떴을 정도로 [[소녀시대]] [[태연]]과 닮은꼴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아이린은 인터뷰에서 '[[태연]]은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며 영광이라고 설명했다.
2016년 멜론뮤직어워드 TOP10 수상소감 중 전광판에 원샷이 잡히자 객석에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자 아이린이 ''응?''이라고 놀랐는데 환호성이 더 커진 것은 덤. [[https://youtu.be/t0VoN-Ho4pE|관객들의 반응에 놀라는 아이린]]
* 닭을 전혀 못 먹는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일주일 동안 계속 간장치킨만 먹다 질려서 토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닭과 관련된 음식을 전혀 못 먹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린 어머니는 왜 그 때 일주일 내내 치킨만 시켜 먹었는지 기억을 못 하신다고(...). 때문에 [[주간 아이돌]]에 출연했을 당시, 랜덤플레이댄스에 실패 해 상품으로 걸린 치킨과 피자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웬디가 아이린을 배려해 치킨을 포기했다. --착한 여자 웬디--
* 인사를 할 때 본인의 긴 머리를 커튼처럼 잡는 습관이 있다.
* 몸이 굉장히 유연하다. [[주간 아이돌]]에서 체전굴로 유연성을 측정했는데 1차 시도에서 35cm로 2위였던 [[AOA(아이돌)|AOA]] [[초아(AOA)|박초아]]의 기록(34cm)을 깨고 2차 시도에서는 40cm로 1위였던 [[원더걸스]] [[혜림]](37cm)까지 제쳐 신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박초아, 혜림과 마찬가지로 [[정형돈]]이 신기록을 위해 억지로 한 손만 당겨서 나온 것이다. 순위와 상관없이 아이린의 정확한 체전굴 기록은 원칙대로 측정한 1차 시도의 35cm 정도이며 이는 현 체대입시 실기에서 만점을 받는 기록이다. 20대 중반의 나이까지 생각하면 굉장한 유연성이다.
* [[레드벨벳]]의 양궁 에이스. [[예리]]와 함께 양궁 주전 멤버다. 비록 결승전에서 [[EXID]]에게 패해 준우승했지만 처음 나섰던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2016년|2016 설날 아육대]] 양궁에서 [[여자친구(아이돌)|여자친구]]와 디펜딩 챔피언 [[마마무]]를 무너뜨리며 강한 인상을 남겼고, 1년 후 돌아온[* 2016 추석에는 SM 창립 20주년 단합대회 관계로 불참했다.]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2017년|2017 설날 아육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예리]]가 세트 직격을 저지르고 [[슬기(레드벨벳)|슬기]] 대신 양궁에 나선 [[웬디(레드벨벳)|웬디]]마저 과녁을 빗나가는 0점을 기록하는 최악의 부진으로 인해 [[레드벨벳]]은 [[러블리즈]]에게 7점 차로 패해 예선 [[광속 탈락|광탈]]의 수모를 당했다.
'''특정 성향의 서적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특정 성향으로 단정짓고 비난하는 행동은 매우 잘못되었다.''' 또한 어떤 책을 한 집단에서 많이 사용하거나 상징으로 삼는다고 해서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반드시' 그 집단의 일원인 것도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페미니스트라고 단정짓는다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사람은 공산주의자고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은 사람은 메갈이 된다.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일베가 되진 않는 것과 같다. 또 '이 책을 읽었다=무조건 페미'라는 그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82년생 김지영을 읽고서 혹평한 사람들, 처음부터 심층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탐독한 독자들도 '''전부 다'''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된다. 왜냐?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떤 문화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한 사람의 성향이나 가치관을 명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벨갤에서 포토카드 파괴 인증을 한 유저는 이후 [[관심종자|관심을 받기 위한 일이었다]]고 [[http://huv.kr/pds753585|밝혔다.]] ~~다른 멤버 포카도 자르고 있으니 [[관종]]이 틀림없다.~~
* [[http://www.yonhapnews.co.kr/digital/2018/03/26/4904000000AKR20180326018200797.HTML|연합뉴스]]에서는 이상적이라 여기는 상냥하고 순종적인 여성과 자신을 위협하는 도전적인 여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여성관이 원인이며,[* [[https://www.fmkorea.com/986132907|"너랑 결혼까지 생각한 나를 후회한다"]]와 같은 반응은 이러한 이분법적 여성관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며,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익명성을 통해 분노와 혐오가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한국여성정책연구소 안상수 평등문화교육연구센터장의 견해를 인용했다.
위 보도들 이외의 [[http://www.sedaily.com/NewsView/1RX1X3DS3P/GL01|여러]] [[http://www.ziksir.com/ziksir/view/6092|기사들]]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읽었다는 아무런 문제될 것 없는 동일한 행동에 대해 다른 성별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유독 여성 아이돌에게만 과도한 비난이 쏟아졌음을 지적했다. 이는 여성 아이돌에게 있어 남성팬은 가장 큰 고객층이고 이들의 반응이 인기 및 수입과 직결되는 서브컬처 산업의 구조 상 [[갑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실업 등 청년 문제가 심각한 저성장 시대에 자란 청년층은 사회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다. 이러한 불만을 표출했을 때 그 의견이 가장 잘 수용되는 분야가 바로 서브컬처 업계이기 때문에 갑질이 계속된다는 것이 주류 언론들의 일관된 견해이다. 이들은 소비자로서의 권력을 바탕으로 을의 사적 영역인 SNS 등을 사찰하며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 공격한다. 비록 이러한 사적 영역이 홍보 수단으로 활용되는 세태에도 문제가 있으나 그것이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 윤종신 . . . . 16회 일치
* 관련 문서: [[윤종신/디스코그래피]], [[윤종신/월간 윤종신]]
||<bgcolor=#201e1f> {{{#FFFFFF '''본관'''}}} ||<(> [[윤(성씨)|칠원 윤씨]][* 칠원 윤씨 39세손 '鍾'자 항렬이다.] ||
2010년대 들어서는 '''발군의 시간관리능력을 보여주며''' 음악가, 예능인, 연예기획자의 세 직업 분야에서 두루 성과를 내고 있다.
참고로, 윤종신의 디스코그라피에는 약 10년 주기로 본인의 나이를 노래한 곡이 몇 곡 있다. 관심 있는 위키러는 들어 보자.
윤종신과 음악노예: [[유희열]], [[조정치]], [[성시경]], [[박정현]], [[하림(가수)|하림]], [[투개월]]([[김예림]], [[도대윤]]) 순.[* 이 순서는 그림 순서이고, 실질적으로 '음악노예'라는 별명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들은 유희열, 하림, 조정치 정도까지로 봐야 한다. 가수 활동 위주로 하는 사람들이나 윤종신과 함께 일한 지 몇 년 정도 밖에 안 된 다른 사람들은 사실 노예 수준 노가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에 비해 유-하-조 세사람은 그와 함께 적지 않은 기간 일하면서 가수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작곡과 편곡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하림의 경우는 윤종신 관련 음반 편곡의 대다수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희열은 독립이라도 했지 하림은 윤종신에게 여전히 속해 있다.][* 이 중 [[김예림]]은 미스틱을 떠났다. 이제는 저 자리에 [[박재정]]이 들어와야 맞다 카더라...]
미성이 아예 사라진 것 같지만, 어릴때 목소리가 아직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하다. 스페이스 공감에서 라이브로 부른 2017 월간 윤종신 6월호 <끝 무렵>을 들어보면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진성을 내다가 가성으로 넘어가는 곳에서 꽤 맑은 음색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cgP43beYqE| 라이브 보러가기]]. 음색 변화는 관리 문제와 노화도 있겠지만 본인이 의도한 것도 있는듯하다.
[[2011년]] 10월에는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 개관기념으로 'Just Melody'라는 제목의 콘서트를 열었다.
결국 [[유희열의 스케치북]] 2012년 성탄특집에서 유희열까지 합세해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G1ZSHfh6NjE|'시선'을 방송에서 불렀다.]] 포인트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장미를 씹어먹을 듯한 윤종신과 무심히 피아노치며 [[코피]] 터지는 [[유희열]]. 그리고 [[손가인]]의 의상.
솔로 2집 시절부터 함께 작업해 온 사진작가 '안성진'과 2017년 6월~8월 27일까지 한남동 소재 '월간 윤종신' 스튜디오에서 사진전을 개최했다. 2집~10집 사이의 앨범아트워크 사진을 전시하고, 사진집 및 원본 필름도 판매했다. [[http://yoonjongshin.com/archives/3101|인터뷰 영상]] 사진전이 9월 말까지로 연장되었다. 관심 있는 위키러는 방문해 보자.
실제로 015B 멤버들의 어머니가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2014년에 만들었던 곡인데 발표를 하고 있지 않다가, 2017년에 새롭게 작업을 한 곡이다. 곡이 곡인지라 심금을 울리는 노래 내용과 가사가 일품이다. 실제로 10월 27일, 015B 'Homecoming' 콘서트에서 게스트로 참가한 윤종신이 이 노래를 부르다가 울기도 했다. 윤종신의 요청으로 앵콜에서 다시 불렀으나.... 또 울었다. 멤버들의 어머니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이기도 하고 본인의 어머니도 요양원에 계시는만큼 감정이입이 된듯하다. 유투브에 직캠영상이 떠있으니 관심있는 위키러들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프로그램 하차 이유에 대해서 인터뷰를 통해 '난 사실 음악을 말하는 걸 참 싫어했다. 그냥 듣고 느끼면 그게 다인데.. 트위터 시작하고 부쩍 음악을 말한다. 고치려고. 심사를 관둔 이유도 그 이유가 큰데. 열심히 만들고 부르고. 이 새벽도 그러면서 지샙니다'라는 트윗을 남겨 간접적으로 슈퍼스타K 하차 이유를 밝혔다.
* 2011년 2월에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서 정관수술을 했음을 고백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aAKYzwbg95c|이미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사실 강호동과 윤종신은 굉장히 친한 사이로 윤종신이 아내를 만날 때 강호동이 바람잡이 역할로 계속 둘을 엮었다고 한다. 전미라가 처음에는 키 작은 남자에는 관심이 없었고 윤종신도 마찬가지였으나 계속 엮다보니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미라는 결혼 전까지 윤종신의 노래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2012년]] [[2월]] 윤종신은 [[SBS]] [[힐링캠프(SBS)|힐링캠프]]에 출연해 [[난치병]]인 [[크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 크론병은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모든 소화기관에 염증이 생길 수 있는 병으로, [[수술]]로도 완치는 불가능하며 평생 약물치료를 해야하는 병. 윤종신은 2006년에 처음으로 병에 걸린 것을 알았다고 한다. 너무 늦게 발견해 소장을 60cm나 잘라야 했고 지금은 약물 치료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윤종신이 지금까지 예능에서 [[치질]]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며 웃으며 했던 얘기가 사실은 이 크론병으로 인한 치루질환을 말한 것이었다고… 난치병을 웃음소재로 바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줘야 했던 윤종신의 안타까운 고백이었다. 이 소장수술을 하고서 마취가 풀리면 링거에 연결된 [[모르핀]]이 조금씩 나오도록 장치를 해 놨다고 한다. 간호사가 너무 아플 때마다 버튼을 한번씩 누르라고 했다고. 그런데 마취에 깨면서 "아, 아! 아!!!" 비명 지르며 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 그리고 3일간 기절해 있었다고 조미료 섞인 썰을 예능에서 풀었다... [* 물론 실컷 눌렀다고 해서 모르핀이 쭉 나왔을 리는 없다. 모르핀이 한번에 많이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눌러도 실제로는 한두 번 밖에 안들어가도록 설계되어있다. 대체로 10분 간격으로 자동으로 투입되나, 그 사이에 몇 분 안에 한해서 누를수 있다던가. 방식으로 사용한다. 실제로 수술 후 깨어난 뒤에 모르핀 때문에 다시 기절해서 3일동안 못 깨어난다면 의료사고가 될 수 있어서 병원 뒤집어져 난리난다. 최소한 하루 이상 지난 뒤 '윤종신 수술 후 혼수상태로 위독'으로 연예뉴스에 나왔어야 할 정도..] 아직도 소화기 쪽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모양. [[김구라]]에 따르면 윤종신이 배가 아파 라스 녹화가 지연된 바 있다고. [[http://naver.me/xp0l7q57|링크]]
* 국어국문학 전공자답게 예능에서 국어 문법과 관련한 개그를 종종 하는 편이다.
- 이상백 (1904년) . . . . 16회 일치
| 소속 = 前 [[국제 올림픽 위원회|국제올림픽위원회]] 종신위원 <br/> 前 [[대한민국 문교부]] 편수관 <br/> 前 [[서울대학교]] 교수 <br/> 前 [[고려대학교]] 교수 <br/> 前 [[한국독립당]] 체육행정특보위원
독립운동가 [[이상정]], 시인 겸 작가 [[이상화 (시인)|이상화]]의 동생이며, 수렵가 겸 문필가 [[이상오]]의 형이고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준장 [[박창암]]의 처숙부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며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현재의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상백 형제의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ref name="daemyonh">[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540&seq=5570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ref>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하였다.<ref name="daemyonh"/>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다.
[[일본]]에서 수학, 연구하는 동안에도 자주 배편으로 귀국, [[경성]]과 [[일본]]을 내왕하며 국내 학계 학자들과 긴밀히 제휴하거나 학문적인 견해를 주고 받앗으며, [[진단학회]]의 결성준비와 창립 발기에 참여하고, [[진단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또한 [[진단학회]]의 기관지 [[진단학보]]에도 칼럼과 논문을 송고하였다. [[1927년]]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 3년간 동양학, 사회학을 수학하고 [[1930년]]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경성대학]](京城大學, [[서울대학교]]의 전신)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창설, 이후 사회학과 주임교수에 임명되어 사망 직전까지 재임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과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소장을 겸임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국사, 근세사 외에도 사회학사, 한국사회론 등을 강의하였으며, 《질서와 진보》, 《중간계급의 성격》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사회학과의 개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래 국내 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하고, 대학 강의와 교양지 및 학술지를 통해 사회학을 보급하였다. 또한 사회학을 연구하는데 기초자료로서 통계조사와 설문을 채택, 통계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어 사회학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외국 사회학을 소개하는 데도 힘써, 미헬스(Michels,R.)의 《정치 사회학》, 루세그 와런의 《사회학개론》 등의 책을 [[한글]]로 손수 번역, 이들 서적의 [[번역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학은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 사회학 이론을 국내에 도입하되 고전 사회학 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통계학을 연구하면서 사회 조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농촌, 도시, 사회 계층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조사 연구와 설문 등을 하였다. [[황해]]안의 여러 섬들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서해도서 (西海島嶼)》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그는 국학, 동양학의 연구를 목적으로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며 연구 계획을 수립하고 학술 세미나 개최를 기획, 준비하였다. 그는 장서가로, 젊은 시절부터 헌책방과 각종 서점을 돌며 평소 희귀한 한중고활자본을 비롯한 진귀한 많은 서적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는데, 만년에 자신이 수집한 책들 모두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하여 상백문고(想白文庫)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장례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한국사회학회, 진단학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주관한 연합장으로 주관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남구 화원동)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사후 1년 뒤인 [[1967년]] 그의 1주기에 세워졌는데, 묘비문은 국문학자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글씨는 이기우(李基雨)가 썼다.
== 가족 및 친척 관계 ==
***** 재종손 : 이재주, 군법무관 손준성의 어머니
**** 당조카사위 : [[서정귀]](徐廷貴, [[1919년]] ~ [[1974년]]), 4대·5대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1960년), [[호남정유사]] 사장 역임
== 관련 항목 ==
- 이시종 . . . . 16회 일치
|본관 = [[전의 이씨|전의]]
*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사무관
* [[강원도청]] 기획담당관
*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행정담당관
* [[대통령비서실]] 건설교통행정관
* [[충청남도청]] 기획관리실장
* [[충청북도청]] 기획관리실장
* [[국무총리실|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심의관
* 한국상하수도협회 수질관리과장(선출직)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28대 | [[지방 관청|시장]] | [[충주시|충북 충주시]] | 민주자유당 | 42,514 표 | 42.05 | 1위 | 당선_충북 |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초선]], 민선 1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29대 | [[지방 관청|시장]] | [[충주시|충북 충주시]] | 무소속 | 55,599 표 | 62.15 | 1위 | 당선_충북 |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재선]], 민선 2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0대 | [[지방 관청|시장]] | [[충주시|충북 충주시]] | 한나라당 | 46,811 표 | 56.67 | 1위 | 당선_충북 |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3선]], 민선 3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3대 | [[지방 관청|지사]] | [[충청북도지사|충청북도]] | 민주당2008 | 349,913 표 | 51.22 | 1위 | 당선_충북 |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 충청북도#광역자치단체장|초선]], 민선 5기}}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4대 | [[지방 관청|지사]] | [[충청북도지사|충청북도]] | 새정치민주연합 | 361,115 표 | 49.75 | 1위 | 당선_충북 |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 충청북도#광역자치단체장|재선]], 민선 6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5대 | [[지방 관청|지사]] | [[충청북도지사|충청북도]] | 더불어민주당 | 468,750 표 | 61.15 | 1위 | 당선_충북|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 충청북도#광역자치단체장|3선]], 민선 7기 }}
|전임자 = [[김관용]]
- 이진주 (1678년) . . . . 16회 일치
'''이진주'''(李鎭周, [[1678년]] ~ [[1737년]] [[10월 28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문보(文甫), 문주(文周),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취사 [[이여빈]]의 종4대손이 된다.
유학(幼學)으로 [[1710년]](숙종 36년) 경인(庚寅)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에 3등(三等)으로 입격,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4년]] [[성균관]]학유<ref>안명하, 松窩先生文集卷之九, 遠遊錄 西征記行</ref>, [[1719년]] [[1월 12일]] 전강에서 숙종이 친히 출제한 과제에 우승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1721년]](경종 1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겸 [[춘추관][[기주관]], [[1723년]](경종 3) [[3월]] [[성균관]]학유, [[5월]] 학록, 8월 학정이 되고 [[1724년]](경종 4) [[2월]]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이 되었다. 그해 [[5월 17일]] 다시 학정, 이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지내다.
[[1726년]](영조 2) [[12월 28일]] [[성균관]]박사, 1727년 3월 양현고직장, 8월 7일 전적,1728년(영조 4) [[2월 3일]] [[양현고]]주부, [[6월]] 직강, [[1729년]] [[11월 25일]]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겸춘추(兼春秋)직을 겸하여 입직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성균관직강, 3월 25일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3월]]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영조]]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영조가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다시 진보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순흥향교]] 활동으로는 1703년 8월 4일 [[순흥향교]] 서무찬인(西廡賛引), 봉작(奉爵), 1705년 2월 3일 봉작(奉爵), 제물유사(祭物有司), 1706년 2월 8일 서종사찬인(西從祀賛引), 8월 2일 봉로(奉爐), 1710년 8월 대축, 1711년 2월 서무헌관(西廡獻官), 8월 찬자(贊者), 1712년 2월 축(祝), 1716년 2월 6일 대축, 1717년 2월 2일 대축 등을 맡았다.<ref>執事案 地:癸未二月春享時, 丁酉八月告由時</ref>
1718년 2월 8일 [[순흥향교]] 대축(大祝) 8월 1일 대축, 1719년 8월 7일 종헌관(終獻官), 1720년 2월 10일 대축, 1721년 8월 9일 아헌관(亞獻官), 1722년 2월 2일과 8월 4일 초헌관(初獻官) 등으로 활동했다.<ref>순흥향교 집사안:自丁酉八月 行祭時, 至甲辰八月 釋奠時</ref>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이창동 . . . . 16회 일치
| 직업 = [[영화감독]], [[각본가]], [[영화제작자]], [[소설가]], [[교수]], [[교사]], [[전 문화관광부장관]]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신일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하다가 1983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중편 소설〈전리(戰利)〉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여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1993년 영화《[[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를 쓰고 조감독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영화계로 들어선 이후에는 소설보다 영화에 주력하게 되었다. [[1997년]] 이스트 필름의 창립 작품이기도 한 [[한석규]] 주연의 영화 《[[초록물고기|초록 물고기]]》를 통해 [[영화 감독|감독]]으로 데뷔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년 뒤 내놓은 영화 《[[박하사탕]]》은 1999년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설경구]]란 걸출한 배우를 탄생시켰다. 2002년 설경구, [[문소리]]와 다시 호흡을 맞춘 영화 《[[오아시스 (영화)|오아시스]]》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제목=‘오아시스’ 이창동―감독상·문소리―신인상 등 5관왕…베니스 영화제 쾌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118051|출판사=국민일보|저자=이광형 기자|날짜=2002-09-09}}</ref>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를 맡고 있다. 2009년 열린 [[칸 영화제]]에서 [[중화민국|타이완]]의 영화 배우 [[수치 (배우)|수치]](서기)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창동 감독 장편 부문 심사위원 위촉… “칸에서 나의 국적은 영화”|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514004092&subctg1=15&subctg2=00|출판사=[[세계일보]]|저자=김용호 기자|날짜=2009-05-14}}</ref> 2010년에 열린 50회 칸 영화제에서는 영화 《[[시 (영화)|시]]》로 각본상을 수상했다.
* 제6대 [[문화관광부]] 장관([[2003년]]~[[2004년]])
* 1987년 [[이상문학상]] 추천우수상 《운명에 관하여》
* 2000년 제1회 한국영화축제 관객들이 뽑은 감독상
* 2002년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훈장|보관문화훈장]](3등급)
|직책 =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 장관]]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1993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문화관광부 장관]][[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 수훈자]]
- 장도 (1876년) . . . . 16회 일치
'''장도'''(張燾, 음력 [[1876년]] [[음력 5월 7일|윤 5월 7일]]/양력 1876년 [[6월 28일]] ~ ?)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덕수 장씨|덕수]]이다.
[[한성부]]에서 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895년]]에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었다. [[1896년]]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주오 대학]]의 전신인 도쿄법학원에서 3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
외부 번역관,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한성부재판소]] 판사, 법부 참서관, 법관양성소 교관을 지내는 등 대한제국의 관료로도 일했다. [[1906년]] [[법관양성소]]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저술한 《형법론총칙》은 한국 최초의 형법 교과서이다.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 {{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날짜=2008-11-18 |형식= |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변호사]]로 등록했다. 이미 이전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분쟁에서 소송을 대리한 일이 있어,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변호사로 볼 수 있다. [[조선변호사협회]] 호장을 지냈다.
}}</ref> 중추원 참의로도 임명되는 등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 관헌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분류:1876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법조인]] <!-- 1908년 변호사 -->[[분류:대한제국의 학자]] <!-- 형법학자 : 1906년 《형법론총칙》 -->[[분류:대한제국의 저술가]] <!-- 형법학자 : 1906년 《형법론총칙》 -->
[[분류:한국의 법학자]] <!-- 1906년 《형법론총칙》 -->[[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법학자]][[분류:형법학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주오 대학 동문]][[분류:덕수 장씨]][[분류:실종자]]
- 장세용 . . . . 16회 일치
상술하였듯 [[구미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으로서, '[[개]]가 보수 정당 후보로 나온다고 해도 당선될 곳'이라는 인식이 박혀있고 실제로 [[김관용]], 전임 시장이었던 [[남유진]]이 모두 내리 3선을 지내기도 했다.
후보 출마 확정 후 구미시민들의 네트워크인 '구미텐인텐'에 출마 이유와 구상하고 있는 정책 등을 올린 바 있으며 [[http://cafe.daum.net/kumi10in10/IKJI/10328|*]] 구미시장에 당선된 직후, [[박정희]] 기념관을 비롯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 사업'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겠다고는 했지만, 기념 사업 예산을 칼질할 의지가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80614001410|*]]
어찌되었든 장세용 구미 신임 시장은 구미에서 박정희의 흔적을 아예 지울 순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나, 건설 중인 '박정희 유물전시관(역사 자료관)'은 공사 취소도 신중히 검토하고 있으며, 이미 완공된 새마을테마공원은 민족운동전시관으로 바꾸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등 그동안 지나치게 [[박정희]]에게 집중돼 있던 구미시정을 바로잡겠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http://v.media.daum.net/v/20180621100915142?rcmd=rn|*]]
- '''새마을테마공원에 경북민족독립운동 기념관 설립 역사교육 관광자원화'''
- 노동회관 신축 및 노동자 재교육 기관 설립
- 노동 관련 예산 증액 및 노동절 축제 개최
([[http://www.idaegu.com/?c=3&uid=380295|46개 시설·기관 시 예산으로 운영…지방 재정 악화 요인, '''비정규직 양산''']])
- 선산 인동 노인복지회관 분관 신설
9. 문화체육 및 관광 진흥책
9월 20일,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가 새마을운동 테마파크를 경상북도에서 직접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220851&part_idx=274#09HT|“경북, 새마을테마파크 직접 운영”]]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425991|879억 애물단지 ‘새마을공원’ 운영비, 결국 경북도가 부담]] 이로써 연간 20~30억원의 운영비 부담은 덜었지만 역사자료관 명칭 변경에서 보수측은 박정희 지우기라면서 반발하고 있다. ~~[[남유진|지난 시장]]이 저러다가 이번 지선에서 뒤집혔는데, 국회의원도 [[더불어민주당|파랗게]] 뒤집고 싶을 듯, 이 동네에서 [[정의당|노란색]]이나 [[바른미래당|민트색]]은 안 뽑힐 듯 하니~~[* 구미 갑은 원도심(원평, 도량, 형곡)vs공단+신시가지(공단/비산+선주원남/오태 등) 싸움이고, 구미을은 읍면vs동지역+공단(인동/진미/양포/산동)의 싸움인데(갑을 모두 앞쪽이 보수 우세 뒤쪽이 진보 우세), 구미 갑은 양쪽 인구 수는 비슷하지만, 자유한국당vs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범보수vs범진보로 본다면, 선주원남동, 비산동, 상모사곡동이 경합으로 넘어간다. 구미을은 동지역+산동면이 읍면 지역 인구의 1.5배 정도 되지만, 범진보가 8~22%p 우세를 보이는 동지역+공단과 달리 읍면지역은 범보수가 19~'''66'''%p 우세를 보여 읍면지역이 투표율이 더 높은 것과 함께 구미을 선거에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 TK에서, 그것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비록 기초자치단체장이라고 해도 '''민주당 당적으로 한 번만에 당선된 기적을 일으켰다.''' TK 지역 타파의 아이콘인 [[김부겸]] 장관도 두 번의 낙선 이후 세 번째 도전만에 대구에 민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놀랄 만할 일이다.[* 물론 상대가 경기도지사에서 도지삽니다 발언을 쏟아낸 김문수였고, 당시 새누리당이 대구를 자기들의 표밭이라고 대충신경쓴 덕분이기도 하지만.] 물론 자유한국당의 공천에 반발해서 무소속으로 뛰쳐나온 보수 성향 김봉재 후보가 9.5% 정도, 범야권인 [[바른미래당]] 유능종 후보가 또다시 7.5%를 들고 나르면서 (비록 TK긴 해도) 1여3야라는 역대급 꿀조건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고려하긴 해야 한다. 참고로 '''[[김해영|본인도 당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 절대가련 칠드런/440화 . . . . 16회 일치
* 미나모토와 사카키가 컨테이너 째로 이송된 곳은 우주기지가 아니라 일본의 최북단에 있는 "모호츠쿠 관측소"
* 사카키는 "관리관이 무슨 의도가 있어서" 보냈다고 생각하다가 미나모토의 설명을 듣고 경악한다.
* 미나모토는 단지 소문일 뿐이라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데, 모호츠쿠 관측소는 문짝이 낡아서 손잡이가 뽑혀나올 정도로 방치된 기지였다.
* 타니자키의 설명에 의하면 모호츠쿠 관측소는 "자연상태에서 무기물에서 발생하는 ESP나 유사전파를 연구하기 위한 기관"으로 외딴 곳에 있는 이유는 에스퍼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 극비기관인 것은 냉전시대의 영향인데 이 관측소의 관측기가 성능이 너무 좋다 보니 국경 너머 타국의 에스퍼까지 감지해서 국제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
* 일련의 부자연스러운 상황들을 놓고 봤을 때 흑막은 츠보미 관리관이며 미나모토와 사카키를 좌천시키는 거 자체가 목표임은 명백했다.
* 사카키는 관리관이 오염됐다고 볼지 아닐지 판단을 미나모토에게 맡긴다.
* 미나모토는 관리관을 구속해 검사를 강행하자고 정하고 연락이 두절된 관측소의 상황을 역이용하자고 한다.
- 천해성 . . . . 16회 일치
'''천해성'''(千海成, [[1964년]] [[8월 15일]] ~ ,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통일부 차관]]을 맡고 있는 공무원이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책조정실 정책담당관으로 근무했고, 통일부로 돌아와서는 회담기획부장으로 일하면서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다수의 남북회담에 깊숙이 관여했다.
2016년 7월 행시 후배인 김형석 차관이 부임하자 퇴임한 뒤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인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2017년 6월 제24대 [[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통일부 차관]]에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차관으로 복귀한 통일부 대표 정책통 천해성|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5/31/0200000000AKR20170531136600014.HTML|날짜=2017-05-31|뉴스=연합뉴스}}</ref>
*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실 통일비서관실 행정관
*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조정실 정책담당관
* [[대한민국 통일부|통일부]] 차관
|직책 = [[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통일부 차관]]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영양 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영등포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 . . . 16회 일치
* 관련 항목 : [[법조인/목록]], [[우병우 사단]]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며 전직 [[국가정보원]] 제2차장이다. [[우병우]]의 서울법대 84학번 동기이자, 우병우의 최측근으로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1989년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93년 [[사법연수원]]을 22기로 수료하였다. 그 후 잠깐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검찰에 들어갔으며, 서울지검, [[법무부]] 감찰관실 검사로 근무하다가 2009년 [[대검찰청]] 조직범죄부장으로 승진하였다.
2010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중앙지검]]에서 특수2부장을 맡았으며, 2015년 2월에는 서울중앙지검 제3차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서울법대 84학번 동기인 [[우병우]] 민정수석과의 친분관계가 주목을 받았다. 물론 우병우보다 사법시험은 2년 더 늦게 합격했지만, 사석에서 말을 놓을 만큼 우병우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2월에는 우병우의 추천(?)으로 [[국가정보원]] 제2차장[* 국내 정보 및 공안 부문을 담당하는 국정원 내 핵심 요직이다.]에 발탁되었다. 이때 청와대가 이 자리에 우병우의 측근인 최윤수를 발탁했을 때부터 사정당국 내부에서는 국정원을 통해 본격적인 총선과 대선 관리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최윤수가 2015년 말 검사장급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정원 2차장으로 전격 발탁된 점도 ‘정치적 인사’라는 뒷말을 낳았다.[* 참고로 최윤수는 전임 김수민 2차장보다 무려 9기수 아래였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24444379242d545ae3e855a102f4499|#]] ] 어쨌든 그 후 2017년 6월까지 국정원 제2차장 업무를 수행했다.
국정원 제2차장으로 일하면서 2016년 6월 ‘[[정운호 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수사를 받았다. 서울지검 제3차장 시절이던 2015년 2월경 [[홍만표]] 변호사로부터 청탁을 받아 정운호의 무혐의 처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 실제로 2016년 6월 [[정운호]] [[네이처 리퍼블릭]] 대표는 도박 혐의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홍만표 변호사에게 사건 청탁 명목으로 3억원을 건넸고, 홍 변호사가 당시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과 최윤수 3차장 검사에게 청탁하겠다고 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닌 게 아니라 2015년 2월 당시 최윤수 차장검사가 홍만표 변호사의 청탁 알선을 받고 정운호의 뒤를 봐줬기 때문인지 정운호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 후 검찰은 홍만표 변호사의 통화추적 등을 통해 홍 변호사가 최윤수 차장을 두 차례 찾아갔고, 최윤수와 무려 20여 차례나 통화한 사실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결국 최윤수 국정원 제2차장을 소환하지 않고 서면으로 조사하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은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 당시에도 최윤수와 우병우 간의 관계가 입길에 올랐다. 우병우는 2013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뒤 이듬해 5월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기용될 때까지 1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했고, 이 기간에 홍만표 변호사와 함께 사실상 ‘2인 1조’로 움직이면서 정식 선임계도 내지 않고 정운호 대표 등의 ‘몰래 변론’을 맡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홍만표와 우병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수사기획관과 1과장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우병우가 변호사 활동을 할 때 사무실을 연 곳이 서울 서초동 오퓨런스 빌딩 1111호로, 홍만표의 사무실(1010호)과 같은 건물 아래 위층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홍만표와 최윤수 차장 간의 연결 고리가 우병우 아니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de4c88fecae9760b9b6c86f97f5e042|#]]]
==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계 블랙리스트]] 관여 ==
국정원 제2차장 시절에 '국정원 문화·예술인 배제 보고서'를 수차례 보고 받고 지시하는 등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에 관여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추명호]]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우병우 전 수석에게 ‘비선 보고’하는 데 관여한 혐의도 받고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24444379242d545ae3e855a102f4499|#]] 그러한 이유로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2017년 12월 2일 [[오민석(법조인)|오민석]] 부장판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물론 검찰 내부에서는 최 전 차장의 구속영장이 '가담 정도'를 이유로 기각된 것에 불과하고 범죄 사실 소명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731.html#csidxe6517123a8063c9aaa12e8244fa6d69|#]]
* 前 [[KBS]] [[아나운서]] [[황수경(방송인)|황수경]]의 [[남편]]으로 더 유명하다. 2013년, 이들 부부의 ‘파경설’이 악성루머로 떠돌자 최 전 차장 부부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한 종합일간지 기자가 루머 유포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http://koridol.tistory.com/6471|#]]
법무부 감찰관실 검사 2005.2.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2014.1.
- 최호중 . . . . 16회 일치
| 경력 = 상공부 차관<br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장관
| 직업 = 전 외무공무원, 관료
'''최호중'''(崔浩中<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4250009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4-04-25&officeId=00009&pageNo=2&printNo=5582&publishType=00020 經濟에 밝은 직업外交官 崔浩中] - 매일경제, 1984년 4월 25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500329204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12-05&officeId=00032&pageNo=4&printNo=13292&publishType=00020 崔浩中 외무장관 外務部서 잔뼈굵은 正統派] - 경향신문, 1988년 12월 5일</ref>, [[1930년]] [[9월 22일]] ~ [[2015년]] [[2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전 외무공무원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 정책|북방외교]]의 한 주역이자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시에도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뒤 [[1956년]] 외무부에 들어갔다. 국제경제국장, 통상국장, 주유엔 유럽사무소 및 [[주제네바 대한민국 대표부|제네바대표부]] 공사, 말레이시아·[[주 벨기에 대한민국 대사관|벨기에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84년]] 상공부 차관을 지낸 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사우디아라비아 대사]] 등을 거쳐 [[1988년]] 12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1989년]] 2월 [[헝가리]]와의 수교 합의 의정서에 서명, 북방외교의 첫 성과를 대외에 알렸다. [[1990년]] 9월 30일 유엔에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부 장관과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재임 중 동구권 국가를 비롯해 18개국과 수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048101], [[한국일보]] 2015년 2월 20일, [부고]‘북방 장관’ 최호중 전 부총리 별세</ref> 1990년 12월부터 1992년 6월까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당시 남북은 1991년 9월에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잇단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다. 이후 통일원 통일고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한국외교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 노태우 정권 당시 북방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북방(北方) 장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048101], [[한국일보]] 2015년 2월 20일, [부고]‘북방 장관’ 최호중 전 부총리 별세</ref>
|직책 =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장관]]
[[분류:1930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벨기에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말레이시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강릉 최씨]]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 . . . 16회 일치
전통적인 중세 유럽의 제국 관념에서 '동쪽의 제국'[* 서쪽은 신성로마제국]을 차지하던 비잔티움제국은 11세기부터 이어진 튀르크의 지속적 공세앞에 아나톨리아[* 지금의 소아시아반도] 내륙을 영구상실했고, 그 이후 내륙지방을 지배해온 룸 술탄국의 멸망이후 부상한 오스만의 공세에 아나톨리아 최후의 거점인 니코메디아까지 함락당하며 아나톨리아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이는 중세까지 비잔티움을 지탱하던 아나톨리아의 풍부한 생산력[* 지금도 터키는 유수한 농업국이다.]과 그에 따른 인적 자원을 상실하게 되었고, 반대로 오스만은 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오스만은 꾸준히 확장하여 트라키아와 발칸의 패권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오스만은 몇번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제국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고 시도해봤지만,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후계자 분쟁으로 오스만이 여러 세력으로 분열하면서 실패하였다. 오스만의 혼란을 앞에 두고 비잔티움은 오스만의 후계자 분쟁에 개입하여 오스만 술탄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후 무라트 2세 시기 시행된 공세도 실패했다.
한편으론, 비잔티움은 황제 요안네스 8세가 죽고, 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한다. 그는 모레아의 친왕으로써 모레아를 비잔티움의 봉신인 모레아 전제국으로 일통하고, 바르나 십자군에서 그리스 지방 거의 전체를 일시적으로나마 탈환할 정도로 능력있는 자였으나... 바르나 십자군에 협력한거 때문에 초강대국이었던 오스만의 지도자였던 무라트 2세에게 찍혀서 재혼[* 당시 그는 두 번의 결혼을 치뤘으나 두 번 모두 자식이 없었다]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관식도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모레아에서 치뤘고 콘스탄티노플에 올때도 카탈루나 배를 빌려타고 온 안습한 처지가 되었다.
1451년 무라트 2세가 죽고 새로이 술탄으로 오른 이는 메흐메트 2세였다. 사실, 그는 1444년에 이미 즉위한바가 있으나 동쪽에서 카라만이 반란을 일으키고, 발칸에선 비잔티움의 사주를 받은 무라트의 동생 오르한이 폭동을 일으키고, 헝가리가 십자군을 선포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자 재상 할랄 파샤의 주도로 무라트 2세가 복위돼 퇴위되버린(..) 굴욕을 간직한 이였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유럽군주들은 그를 애송이취급하면서 무시해버렸고, 이때문에 오스만이 실제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때도 느릿느릿 관망만 하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사실 실제론 자기들 이권다툼이나 나라 내실다지기가 더중요했던게 크다. 바로옆에서 초거대세력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하던 제국을 무시한 이탈리아 중견국들이야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로저 크롤리의 표현대로 '동방의 알렉산드로스'를 노린 이였고, 이는 말년의 나폴리 침공에서도 잘 드러나는 일면이다. 아무튼, 그의 두번째 즉위당시 아무도 그의 야망을 모르거나 무시했고, 이는 유럽군주들의 가장 큰 실수로 남는다.
한편, 메흐메트가 그를 유럽의 기독교 군주들처럼 애송이로 생각한 카라만의 이브라힘 베이가 게르미얀,아이딘,멘테세의 지도자들과 연합해 일으킨 봉기를 진압한 뒤, 그는 예니체리의 봉급 인상문제로 한차례 곤경을 겪는다. 이문제는 봉급을 인상시키는대신 지휘관을 강등하는것으로 끝이 났으나... 이걸로 술탄의 지배력이 어느정도 약화된다. 이틈을 노렸던건지,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메흐메트에게 사절을 보내 이때 콘스탄티노플에서 머물고 있던 오르한의 생활비를 더욱 지급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추종자를 다시 풀어놓겠다는 사실상의 협박을 하기 이른다.
오히려 국가적인 지원보단 개인적인 지원이 더 줄을 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카스티야의 귀족인 톨레도의 돈 프란시스코[* 자신을 콤네소스 황가의 자손이라 칭하며 황제를 사촌이라 칭하기도 했다. 사실 이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콤네노스가 아닌 팔레올로고스 왕조였고, 오히려 [[트레비존드 제국]]이 콤네노스 왕조의 후손이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도 콤네노스 왕조와 인척관계이긴 하지만.]와 제노바의 군인 주스티니아니 롱고였는데, 특히 주스티니아니는 공성전전문가로 상당히 이름난 군인이었기에 황제가 직접 방어를 성공해낸다면 림노스 섬의 통치권을 나눠준다고 하기도 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동서대통합과 라틴 전례의 도입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정교회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의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매우 어리석고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로 평가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가 대표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대통합이 '확실하게' 정교회 전통을 단절시키는 반면 별다른 군사적 보호는 제공하지 않고, 이슬람의 정복은 아직 술탄의 관용에 호소하여 정교회 전통을 유지할 수 있을 가망이 더 크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교황의 삼중관보다 차라리 터키인의 터번을 택하겠다."는 말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인 중세의 관념에서 '서방제국'을 맡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는 나서기만 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수 있었겠으나, 그는 교황으로부터 갈굼을 받고나서야 오스만으로부터 (별의미없는) '최후통첩'을 보낼 정도의 위인이었다. 무엇보다, 전술했듯이 그는 당시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후 4월 5일에. 메흐메트 본인을 지휘관으로 하는 투르크 전군이 모두 성벽안으로 도착했다. 그들은 성벽 앞 2.4킬로미터 떨어진곳에 임시막사를 설치했고, 다음날 좀더 바짝 붙인 위치에 최종 위치를 잡는다.
그리고 외벽과 내벽중 어느쪽에 방어를 집중할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펼쳐졌는데, 황제와 주스티니아니 모두 1422년에 무라트 2세가 도시를 공격했을때 외벽방어에 집중해 막아낸것처럼 이번에도 외벽에 방어하기로 결정하려 했으나, [* 내벽에도 병력을 배치하는게 좋긴 하겠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스스로를 '전략가'라 자칭했던 교황청의 사절 레오나르도 대주교가 내벽을 방어하라고 우겨 잠깐동안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는 1422년 무라트 2세의 공격으로 인해 수리된 외벽이 제대로 수리되지 않았다면서, 이게 모두 수리비를 두명의 그리스인인 자가루스와 수도사 네이피토스가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부당한 주장으로, 자가루스는 마누엘 팔레올로고스가 본명인 황제의 친족으로, 수리된 성벽에 이름까지 적힌, 당시에 굉장히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또다른 횡령범으로 지목된 네오피토스는 통합반대파였다만, 황제와 친한 수도사중 한명으로 공적인 일에 일체관여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던 중이었다. 레오나르도 대주교의 주장은 가톨릭교도들의 전형적인 반통합파와 그리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편견이었다.
이에 맞서 튀르크군은 자가노스 파샤[* 그리스인 배교자로, 대표적인 주전파였다.]를 지휘관으로 한 부대를 금각만 근처에 배치했고, 보소포로스 해협건너 언덕에 병력을 산개시켜 페라의 제노바인들이 도시를 돕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성벽 맞은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금각만에서 언덕위에 카리시오스 문까지는 카라쟈 파샤를 지휘관으로 한 유럽 정규군들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중포도 상당수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포들은 블라케르나에 성벽에서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이어지는 귀퉁이 공격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리쿠스 계곡 남쪽 경사면에서 마르마라 해안까지는 이샤크 파샤의 지휘하에 아나톨리아 정규군이 저라접었는데, 그는 황제의 신임을 받지못했기에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리스인 배교자 마무드 파샤가 지휘를 맡았다.[* 그는 특이하게도 앙겔로스가 출신이었다.] 술탄은 메소테이키온 성벽 맞은편 리쿠스 계곡에 자리잡았는데, 그의 앞에는 그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부대와 헝가리인 대포 기술자 우르반의 대포들이 있었다.[* 이 우르반이란 자는 본래 황제에게 고용된 자였는데, 황제가 그의 신작품들을 만들어줄 자금이 충분치 않다는걸 알자, 몰래 도시를 빠져나와 술탄에게 간 자였다.]
- 현정건 . . . . 16회 일치
| 본관 = [[연주 현씨|연주]](延州)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 ~ [[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ref>이는 국내에도 알려져 신문에 「上海에 豫備講習」(『동아일보』 1924년 6월 6일자), 「豫備校 設立」(『시대일보』 1924년 6월 9일자) 등의 기사가 나기도 했다.</ref>,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ref> 재상해일본영사관경찰부(在上海日本領事館警察部)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1946년, 동문사서점(東文社書店)</ref>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ref>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년, 618~621쪽 및 일본 외무성경찰사(外務省警察史) 지나지부(支那之部) 『조선민족운동사(朝鮮民族運動史)』≪미정고(未定稿)≫ 4, 고려서림(高麗書林), 1989, 11~22쪽.</ref>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ref group="설명">현정건의 친형이다.</ref>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 가족 관계 ==
== 윤치호, 윤보선 가문과의 인척관계 ==
현정건의 집안은 [[윤치호]], [[윤치영]], [[윤보선]] 가문과 겹사돈 관계였다. 현정건은 [[윤치호]], [[윤치영]]의 7촌 조카딸이 되는 윤덕경(尹德卿)과 결혼하였다.
* 「박종화의 삶과 문학」 윤병로 저, 1998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황보관 . . . . 16회 일치
|이름=황보관<br />(皇甫官)
'''황보 관''' (皇甫 官, [[1965년]] [[3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감독, 축구 클럽 경영자이자 전 [[대한축구협회]] 소속의 행정가였다. [[일본]] [[J리그]] 팀 [[오이타 트리니타]]의 코치, 감독을 거쳐 오이타 구단의 부사장 및 이사를 맡았고 [[2010년]]부터 오이타의 감독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2011년]] [[대한민국]] [[K리그 클래식|K리그]] 팀 [[FC 서울]]의 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무대에 복귀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17일 만에 사임하고 [[최용수 (축구인)|최용수]]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사임한 후 [[대한축구협회]]로 옮겨 기술교육국장을 맡았고 [[이회택]]의 후임으로 기술위원장이 되었다. 본관은 [[영천 황보씨]]이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대구침산초등학교]],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축구부가 해체되어 [[서울체육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347934 "죽기 살기로 뛰기보다 상황대처 능력 키워라" 황보관 축구협 기술위원장] - 매일신문</ref> [[서울체육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A매치]]에서 종종 캐넌슛으로 골로 기록하여 '캐넌 슈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은퇴 후 그는 지도자보다는 구단 경영자, 행정가로 더 두각을 드러냈다. [[1998년]] 은퇴한 후, [[아시아 축구 연맹|AFC]]에서 주관하는 'C,B,A 코스' 및 '프로페셔널 지도자 코스'를 이수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U-20 대표팀]] 트레이너를 맡은 뒤,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1년]] [[오이타 트리니타]] 유스 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4년]] [[오이타 트리니타]]의 수석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5년]] [[요한 베르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오이타 트리니타]] 감독으로 승격하였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4120600017 황보관 J리그 오이타 감독 승격]</ref> 감독 취임 뒤,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열린 [[통영컵]]에 참가하여 데뷔전을 치러 우승을 차지하여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으나,<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5022700011 황보관의 오이타, 2005 통영컵 패권]</ref> 성적 부진으로 9개월 만에 해임되었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20&g_serial=167328 황보관 오이타 감독, 전격 해임 '성적 부진 탓']</ref> 이후 [[오이타 트리니타]] 유소년 육성부장을 거쳐, [[오이타 트리니타]] 부사장 및 이사에 올랐다. [[2008년]] 팀이 [[J리그 컵]]에서 우승하자, 우승컵을 갖고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또한 [[일본문리대학]] 축구부의 테크니컬 디렉터도 맡았다. 오이타가 [[2009년]] 경영난 속에 [[J리그 디비전 2|2부 리그]]로 강등된 후, 이듬해 감독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2부 리그에서도 15위에 그치자 사임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황보관, J2 오이타 사령탑에서 퇴임|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11300164 |출판사=OSEN |date={{날짜한글화|2010-11-30}} }}</ref>
이후 [[2010년]] [[12월 28일]] [[넬루 빙가다]] 감독의 후임으로 [[FC 서울]]의 감독직을 맡았으나,<ref>{{뉴스 인용|제목=FC 서울, 빙가다 후임에 황보관 감독과 2년 계약|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ports/Soccer/Article.asp?aid=20101229000575&subctg1=05&subctg2=00|출판사=스포츠월드|date={{날짜한글화|2010-12-28}} }}</ref> [[2011년]] [[4월 26일]] 리그에서 1승 3무 3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후 [[최용수 (축구인)|최용수]]에게 사령탑을 넘기고 사임했다.<ref>{{뉴스 인용 |제목=못다 이룬 꿈, 117일 만에 아듀|url=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426n05840?mid=s0300 |출판사=스포츠조선 |date={{날짜한글화|2011-4-26}} }}</ref> 사임 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교육국장으로 부름을 받아 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ref>[http://news.donga.com/3//20110525/37501428/1 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에 황보관] - 동아일보</ref> [[2011년]] [[11월 9일]] [[이회택]]의 후임으로 기술위원장이 되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60731 이회택 기술위원장 사임, 후임에 황보관 기술교육국장] - 스포츠조선</ref>
[[2008년]] [[3월 25일]] [[슈에이샤]]에서 발매된 [[비즈니스 점프]]의 증간지 <BJ혼> ([[5월 1일]])에서 연재되는 '[[오이타 트리니타]] 이야기・제로부터 스타트'(원작:기무라 모토히코,작화:미야기 신지)가 [[오이타 트리니타]] 설립에 분주하였던 前 자치성 동료 [[미조하타 히로시]]와 황보관의 교류를 그리고 있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2/soccer/world/worldnews/2008/0423/20080423101020202000000_5454151980.html 황보관 오이타 총괄 본부장, 일본 만화잡지 주인공 화제]</ref>
[[2009년]]에는 [[오이타 트리니타]] 구단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J리그에서 주관하는 GM(General Manager)교육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이수하였다.
* [http://www.kfa.or.kr/news/news_view.asp?tb_name=interview_gisa&g_idx=895 나의 선수 시절 - 황보관, 한국축구 최고의 캐논슈터]
- 황준국 . . . . 16회 일치
'''황준국'''(黃浚局), [[1960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외교관]]이다. <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1&aid=0008220815 |제목=<프로필> 황준국 주영국 대사|출판사=연합뉴스|날짜=2016년 2월 29일}}</ref>
* 주영국대한민국대사관 2등서기관
*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 1등서기관
* 주사우디아라비아대한민국대사관 참사관
* 외교통상부 의전1담당관
*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 참사관
* 외교통상부 국제기구협력관
* 주미국대한민국대사관 정무공사
* 외교부 장관특별보좌관
|전임자 = [[임성남 (외교관)|임성남]]
|전임자 = [[임성남 (외교관)|임성남]]
|직책 = [[한영 관계#외교관 목록|주 영국 대사]]
- 곽결호 . . . . 15회 일치
| 직책 = 前 대한민국 제15대 [[대한민국 환경부|환경부]] 장관
| 본관 = [[현풍 곽씨|현풍]](玄風)
| 경력 = 대구대학교 겸임교수 <br/> 환경부 차관 <br/>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 1974년 : 건설부 토목사무관
* 1996년 : 주 UN 대표부 참사관
* 2001년 : 환경부 기획관리실장
* 2003년 : 환경부 차관
* 2004년 : 환경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의 환경부 차관|환경부 차관]]
|직책 = [[대한민국의 환경부 장관|환경부 장관]]
[[분류:194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환경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환경부 장관]][[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현풍 곽씨]][[분류:대구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
- 서림 . . . . 15회 일치
서림의 생애는 임꺽정과 관련된 기록에서 중요하지만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명종 15년(1560년) 11월 24일 기사에서 서림의 체포 소식이 등장하는데, 그는 엄가이(嚴加伊)라는 가명으로 숭례문(남대문) 밖에서 거주하다가 관군에 체포당하여, 심문을 당하고 임꺽정 일당의 계획을 누설하게 된다.
국조보감에서는 실록의 기록과는 약간 다른데, 서림은 숭례문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임꺽정 일당이 [[구월산]]에서 포위되자 관군에 승산이 없음을 알고 산을 내려와서 투항한다. 그리고 임꺽정 일당의 정보를 남치근에게 고해바친다. 여기에서는 서림을 '모주(謀主)'라고 하여, 그가 임꺽정의 모사꾼임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 인종 때 문신 박동량(朴東亮)이 저술한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도 임꺽정의 죽음과 관련되어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만 실록의 기록과는 상당히 세부적인 차이가 있으며, 기록된 시기가 명종 시기와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기 때문에 설화적인 측면이 강한 기록으로 볼 수 있을듯 하다.
기재잡기에서 실록과는 달리 국조보감의 기록을 따라서, 관군이 구월산을 포위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하산하여 관군에 투항하여 [[남치근]]에게 임꺽정 일당의 정보를 알렸다고 한다. 서림의 투항으로 임꺽정 일당은 은신처가 발각되어 토벌당하게 된다. 또 임꺽정을 마지막까지 따르던 5~7명 역시 서림이 유인하였고, 관군에게 체포되어 모두 참살된다.
기재잡기에서 서림은 임꺽정의 마지막 죽음에까지도 관여하는데, 관군의 추격을 받아 궁지에 몰린 임꺽정은 한 노파의 집에 들어간다. 임꺽정이 노파를 위협하여 노파가 "도적이야!"하고 외치면서 달아나게 하고, 자신은 관군인 척 하면서 관군에 뒤섞여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슬쩍 진을 빠져나가 도망치려 하는 임꺽정을 보고, 수상하게 여긴 기병이 추적한다. 서림이 임꺽정을 보고 "도적이다!"라고 소리치자,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은 임꺽정은 서림이 투항하여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고 분통하게 여기는 말을 내뱉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림은 공훈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특례로서 관직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서림산 서림장군 전설 : 충남 천안에 서림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은 '서림장군'이라는 장군이 있었다는 곳이라 한다. 이를 서림의 이름과 연관하여 보기도 하는데, 단순히 이름의 일치에 불과한 전설이라 그리 확실한 건 아니다.[[http://www.oneclick.or.kr/bbs/boardView.do?id=81&bIdx=60757&page=1&menuId=134&bc=0 (참조)]]
* 벽초 홍명희의 장편소설 임꺽정에서, 서림은 평안감영의 아전으로서, 진상품을 빼돌리다가 들켜서 청석골 화적패에 가담하여 모사꾼이 된다. 그러나 나중에는 서울에서 체포되어 관군에 협력하게 되며, 임꺽정 패거리의 몰락을 암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실록과 국조보감에서 서림의 체포/투항 시기나 정황이 다르다.(남대문 밖/구월산) 실록에서는 서림이 도적과 다시 연락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한 번 체포된 뒤에 남치근에게 포섭되어 한동안 [[이중스파이]]로서 활동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남대문 밖에서 체포되어 남치근의 관리하에 있다가, 구월산으로 돌아가서 정보를 다시 빼내고 재투항 했다고 상상할 수 있을지도.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 . . . . 15회 일치
코너는 여관 앞에서 올리버와 빅 데이브가 영국군 정찰병 한명을 붙잡은걸 본다. 빅 데이브의 말에 따르면 그 정찰병은 탈영병인 빅 데이브를 찾아 여관 근처에 숨어 들었다가 잡힌 것이었다. 그 정찰병은 자신 혼자 왔다고 주장했지만, 또다른 정찰병이 코너에게 들켜서 도망친다.
코너는 대본포트 농지에 온 사람 두명이 에일, 치즈, 빵 등을 파는걸 본다. 이들은 올리버와 코린으로, 한때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영국군에게 여관을 빼앗겼다. 이에 에일을 사 마시던 노리스가 대본포트 농지에 정착하는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여관이 필요하지만 여관을 세울만한 돈이 없는 두 사람을 위해 코너는 1,000 파운드를 지원해 여관 "마일즈 엔드"를 세우게 해준다.
* 이 임무 이후 여관주인 올리버와 코린이 대번포트 농지에 정착한다.
여관으로 가는 도중, 티모시 신부는 코너에게 결혼식 중 미리암의 아버지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노리스는 전통에 까다로운 사람이라 아버지 역할이 필요한데 미리암의 아버지는 어딨는지 알 수가 없다고. 코너가 이를 승낙하자 티모시 신부는 결혼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면서 대번포트 농지 사람들이 해야할 일을 열거한다.
아킬레스가 뉴욕에 가서 어떤 그림을 가져오라고 부탁한다. 벽난로 위에 걸어놓을 거라는 듯. 아킬레스는 그림이 보관된 건물이 뉴욕 대화재에 휩쓸렸기 때문에 그림이 불타 없어질 수도 있다며, 그런 일이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티모시 신부는 아킬레스의 추도사를 한다. 추도사가 끝난 후, 티모시 신부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그의 관에 꽃을 바친 후 돌아간다. 모두가 돌아간 후, 홀로 남은 코너는 그의 관에 깃털을 바치며 자랑스럽게 해주겠다고 맹세한다.
영국군 징집관이 끌려온 사람들을 세워놓고 "정규군에 온걸 환영한다"로 시작하는 환영인사를 하고있다. 클리퍼 윌킨슨은 징집관이 젊은이들을 잡아와 배에 태워보내는 모든 일의 책임자라며 그를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너는 윌킨슨에게 지붕 위에서 라이플로 엄호할 것을 요청한다.
징집관을 제거한 후, 코너는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암살단과 지배만을 원하는 템플기사단에 대해 알려준다. 윌킨슨은 자신은 자유를 원한다며 코너에게 라이플 잘 쏘는 사람이 필요하면 부르라고 한다.
- 우현(배우) . . . . 15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경상북도/인물)]
물론 논란이 될 사항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가였던 故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도 [[1987(영화)|1987]]에서 [[전두환]]의 심복이자 [[안기부]]의 수장이었던 [[장세동]] 역으로 출연했는데(...) 정작 문성근 씨는 진보 성향인데다 과거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또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이라는 [[시민단체|시민운동단체]]를 조직하는데 앞장서서 진보시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고, 현재도 [[진보]] 진영에서 여러 활동을 하지만 영화, 드라마 등 작품에서는 반대 성향의 역할을 맡아왔다([[군부]] 정권 시절의 친 정부 성향 경찰 간부나 [[정보기관]] 수장, 부패한 정치인, 언론인 등등). 본인 스스로도 [[한밤의 TV연예]] 인터뷰에서 “그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라고 밝혔다.
그러다가 2003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단역으로 영화에 데뷔하였고, 같은 해 [[황산벌(영화)|황산벌]]에도 출연한다. 2004년 [[시실리 2km]]의 해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일반인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관심도 받게 된다. [[http://www.youtube.com/watch?v=ChRUT0rck9A|니가 94야 그럼?]] 흥행한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제일 늙은 막내 조폭'이라는 역할 설정의 매력으로 영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도 그 장면이 나오는 등, 출연자 중 우현만큼은 대중에게 얼굴을 꽤 알린다.
* [[대한민국 헌법 제1조]](2003) - 선관위 직원 역
* [[왕의 남자]](2005)- 홍 내관 역
아버지가 [[의사]]면서 병원 원장님이어서 어릴 때부터 유복하게 자랐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용돈도 현금 300만 원을 가지고 있지만 다 쓰지를 못 했다. 어릴 때부터 쭉 소고기나 장어 등 당시엔 쉽게 먹기 힘든 음식들을 자주 먹었고, 막상 감자탕이나 순대, 삼겹살 같은 음식은 대학에 들어와서 친구나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처음 먹어봤다고 한다. 특히 삼겹살을 처음 먹었을 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고기가 있다니"라고 생각했었다.[* 이러한 식습관 때문인지 [[편식]]이 굉장히 심하다. [[잘 먹는 소녀들]]에 의하면 [[닭발]], [[족발]], [[곱창]]을 못 먹는다고 한다. 후에 [[잘 먹겠습니다]]에서 자신이 먹지 못한 곱창 먹기를 시도하였고, 성공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편식]] 습관은 아들 준서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주고 있다. <유자식 상팔자>에서 보면 해산물이나 가지 등을 못 먹는다고 한다. 그래도 나름 먹기는 했다.]
상기했듯이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그것도 연세대 수석입학자에다 총학생회 사회부장직까지 맡은 수재였으니. 그렇게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외모에 놀 수도 없고 운동도 싫어해서 공부밖에 할 게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집안 환경이 공부 잘하는 가족들도 많고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였다고. 그에 반해 아들 준서는 공부에는 영 관심 없고 게임에 너무 빠져서 고민이라고 한다.[* 그 이유로는 게임도 있지만, 우현 부부 자체가 공부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키운 것으로 보인다.]
=== 가족관계 ===
아내는 배우 [[조련(배우)|조련]]으로, 남편과 다르게 상당한 미인이다.[* 아들 준서도 ~~다행히도~~ 엄마를 닮아 상당히 훈남이다.] 또한 배우로서는 아내가 훨씬 선배다. 첫 만남은 연극 제작자와[* 사실은 당시 우현도 배우가 아닐 뿐 연극 제작자로 참여했었다.] 배우의 관계로 만났고, 우현이 연극 연기를 시작한 뒤 본격 대쉬,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는데 친구 [[안내상]]이 여러모로 도움을 줬다. 하지만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오히려 안내상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련이가 너무 예쁘니까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어디다가 들이대느냐. 들이댈 곳에 들이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실제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우현이 장기간 아내에게 호감을 표시하였으나 아내가 알면서 적잖이 모른 척하거나 거부했고, 그걸 그전부터 조련과도 친분이 꽤 있던 안내상도 대략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안내상과 조련 두 사람이 같이 부부 역할로 연극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또한 당시 조련이 상당히 미인이라서, 주변 남자 배우들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안내상은 우현이 상처만 크게 받고 끝날까 걱정되어, 어떻게든 일찍 포기하게 하려고 공격적으로 말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내상]]이 그런 얘기를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현이 아내를 잠시 포기하다가 오히려 아내 쪽에서 마음을 바꾸게 되어 사귀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되자 우현의 진심이 통해 아내가 마음을 열게 된 것을 안내상 역시 진심으로 기뻐하며 관계가 깊어질 수 있게 적극적으로 밀어줘서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위 내용은 안내상 중심에서의 이야기며 부부 중심의 러브 스토리는 라디오스타나 유자식 상팔자에서 나오니 알아서 찾으시길.]
장모님은 유명 소설가인 故 곽의진 씨로, 백년손님에 함께 출연했다.[* 곽의진 씨는 103세의 아버지와 함께 [[인간극장]]-세월이 가면편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했었다. 또한 우현 가족도 아주 잠깐 출연했었다.] 또한 장모님이 실제로 워낙 [[동안]]이고 우현이 워낙 노안인 데다가 나이차도 얼마나지 않아, 장모-사위 관계가 아닌 부부 관계로 종종 오해를 받았았었다.[* 사실 처가 자체가 동안인 인물들이 많으며, 아내와 아들도 나이에 비해 어리게 보이는 편] 실제로도 <백년손님 자기야>에 출연 당시에도 오해하는 장면이 잠깐 나왔다.
*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못친소2]]에서 셀프카메라에서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공개했는데, [[송일국]]의 차남 민국이와 상당히 닮아서 화제가 되었다. 오죽하면 "민국이가 후에 우현이 되는 게 아니냐"며 드립이 성행하는 중. 또한 아들의 아기 적 사진을 공개했는데, 상당히 아빠와 [[붕어빵]]이었다.[* 사실 <유자식 상팔자>에서도 공개된 내용인데, 당시 우준서는 사진을 공개한 내내 상당히 좌절했고, 본인은 조기관리에 들어가겠다고 당돌하게 발언하였다. 이때 밝혀진 것인데, 아기일 적의 엄마와도 닮았다고 한다.]
- 원우(가수) . . . . 15회 일치
[[승관]]이 "이 형만큼 애교 없는 사람 없어요."라고 평할 만큼 애교를 부리는 것에 어색해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데뷔 후 열심히 연습했는지 [[2015년]] [[11월 8일]]에 열린 미니 팬미팅에서 [[https://youtu.be/wLJTh9HwbVM?t=46s|티아라의 뽀삐뽀삐]]를 추며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정한]]은 [[2018년]] 한 방송에서 [[원우]]를 두고 은근히 애교가 있는 성격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는데, 이 말을 들은 [[민규]]가 의아해 하자 "아냐, 있어. 형들한텐 있어."라며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민규]] : 엉?? 헣.. 궁금하다ㅎ..~~ 동갑인 [[준(세븐틴)|준]]도 [[원우]]가 상대방의 눈치를 볼 땐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문자로 돌려 물어본다는 일화가 밝히며 은근히 귀여운 행동을 많이 한다고 말해 동생들에겐 멋있~~는 척을 하~~고 동갑과 형들에겐 귀여운 그의 갭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책은 스릴러나 추리 소설 같은 장르 소설 좋아하는 편으로, 읽고 있는 책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셜록 홈즈]] 시리즈 [[바스커빌 가의 개]]를 언급한 적 있다. 가끔 팬 사인회 등지에서 팬들이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망설일 때가 있는데, 이는 친구 어머니로부터 "책에는 사상이나 가치관이 담겨있기 때문에 책을 함부로 선물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임 또한 모바일 게임과 PC 게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좋아하며 [[2015년]] MPD가 공개한 홍콩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MAMA]] 비하인드 영상에서 [[https://youtu.be/hPRTta7BDwg?t=1m33s|스타크래프트 방송을 보고 있는 원우]]가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데뷔 전엔 [[리그 오브 레전드]]를, 데뷔 후엔 [[오버워치]]를 한다는 멤버들의 증언이 있었고 최근엔 [[배틀 그라운드]]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때그때 유행에 따라 게임을 옮겨 다니는 듯하다.
말장난하는 것을 좋아해 데뷔 전부터 현재까지 각종 N행시와 [[언어유희]] 개그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멤버. 특히 동갑내기 [[호시(세븐틴)|호시]]와는 서로의 개그에 관대한 사이라 곧잘 웃음을 기부해주며 빵빵 터지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데뷔 초 [[세븐틴(아이돌)|세븐틴]] 공식 홈페이지 [[원우]]의 프로필엔 "주의사항: [[호시(세븐틴)|호시]]만 좋아하는 개그를 함"이라고 적혀 있었을 정도이다. 하도 시도 때도 없이 말장난을 많이 하는 터라 [[원우]]가 방송 활동을 잠시 쉬었을 [[2016년]] 5월 당시, [[에스쿱스]]와 [[우지(세븐틴)|우지]]가 [[원우]]의 개그가 그립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원우]]의 말장난 중 팬들에게 대표작 취급을 받으며 아직까지도 꾸준히 언급되는 것이 있는데, 때는 [[2016년]] 초 어느 날 [[세븐틴의 어느 멋진 날 : 13소년 표류기]] 방송 중에 일어났다. [[에스쿱스]]가 "전복"으로 2행시를 시도하며 "전"에 전원우!를 외치자 뒤에 있던 [[원우]]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와 [[https://youtu.be/cMUVRqNqYQ0|"복덩어리이이잌!!!!!!!"]]를 외치며 2행시를 가로 채 "'''전'''원우 '''복'''덩어리"로 완성한 것. 이 2행시는 섬 생활을 모두 끝내고 난 후 인터뷰에서 [[호시(세븐틴)|호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으며, ~~[[승관]] : 저는 솔직히 별로.. / [[호시(세븐틴)|호시]] : 야 완전 핵이었어 그거..~~ 팬들에게도 큰 인상을 남겨 곧바로 [[원우]]의 별명이 되었다. 이외에도 같은 방송 내용 중 여서도에서 첫날밤을 지낸 뒤 [[에스쿱스]]가 "[[세븐틴(아이돌)|세븐틴]] 기상!!"을 외치며 멤버들을 깨우자 [[https://youtu.be/GWN7r-1tKv4|"우리 지금 기상이야? 기상청 들어가 봐. 기상 예보를 보면서 기상청에서 기상하게"]]라고 중얼거린 장면도 유명하다.
[[세븐틴(아이돌)/힙합팀|힙합팀]]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모든 랩 메이킹에 참여하는데, 보통 네 멤버 중 가사를 가장 빨리 내놓는 멤버가 바로 [[원우]]이다. 평소 책을 많이 읽고 [[언어유희]]에 관심이 많다는 본인의 특성이 가사에도 반영되어 펀치라인에 라임을 많이 맞추는 편이고 추상적인 표현과 은유법을 많이 사용한다. 본인이 가장 생각이 많았을 때 쓴 가사가 <[[Al1]]> 수록곡 "Check-In"의 "꽉 차 있던 머리 위에 쓸모없는 짐에 불 지르는 듯이"부분이라고 한다.
* [[2018년]] [[7월 25일]] [[MBC FM4U]] <[[두시의 데이트|두시의 데이트 지석진입니다]] 게스트 with [[호시(세븐틴)|호시]], [[승관]], [[디노(세븐틴)|디노]]
* [[2018년]] [[5월 15일]] 월간 패션 매거진 <MAPS> 5월 호 with [[디에잇]], [[승관]], [[버논(세븐틴)|버논]]
* 데뷔 전부터 멤버들을 깨무는 버릇이 종종 목격되었다. [[에스쿱스]]와 함께 하트를 만들다가 그의 손을 깨물거나, [[조슈아(세븐틴)|조슈아]]의 귀를 깨물기도 했으며,(진짜로 깨물진 않았다.) [[호시(세븐틴)|호시]]나 [[민규]]의 어깨, 손 등을 깨물기도 했는데 이게 무의식 중에 나오는 행동인지 어느 팬사인회에서 이와 관련해 질문을 받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본인은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듯. 현재는 이 습관이 많이 줄어들어 찾아보기 힘들다.
* 근데 이런 본인의 버릇과 달리 어릴 때 큰 개에 물린 적이 많아 개를 무서워하고, 새도 무서워한다고 한다. 연습생 시절 새를 무서워하는 [[원우]]를 위해 비둘기를 쫓아주고, 결국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담긴 [[https://www.facebook.com/notes/seventeen/17s-diary-%EC%88%9C%EC%98%81-20130722-%EC%83%88%EA%B0%80-%EC%96%BC%EB%A7%88%EB%82%98-%EC%9D%B4%EC%81%9C%EB%8D%B0/200471620115646/|호시의 일기]]가 세븐틴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온 적 있다.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고양이. 팬사인회에서 고양이 관련 질문을 받아 답변한 바에 따르면 [[https://twitter.com/imreal717/status/1020632498580029440|오랫동안 밥을 챙겨주는 친한 길고양이가 있는 듯]].
* [[2016년]] <스타쇼360>에 출연해 즉석에서 [[https://youtu.be/0HUrGgW8020?t=12s|나쁜 남자 연기]]를 한 적있다. 데뷔 전 연기 수업을 괜히 받은 게 아님을 증명하듯 막힘없는 대사처리로 당시 자리해 있던 멤버들과 MC가 모두 감탄했으며 ~~[[승관]] : 야 이 나쁜놈아아아악!!!1~~ 연기 호흡을 맞추던 [[I.O.I]]멤버 [[소혜]]도 잠시동안 몰입해 진심으로 화난 표정을 지었다. 이후 [[2018년]] [[주간아이돌]]에서도 [[https://youtu.be/GXgGsySxZ1E|얼굴 하나로 단어를 표현]]해 탁월한 표정 연기를 멤버들과 MC에게 인정받았다.
* 해산물을 못 먹는다. --[[호시(세븐틴)|호시]]: 걔는 해물을 못 먹어요. 그래서 새우깡도 안 먹는 애예요.-- 알레르기는 아닌데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가 심하게 느껴져 꺼려하는듯. [[세븐틴TV]]에서 이와 관련해 [[호시(세븐틴)|호시]]가 에피소드를 밝힌 적 있는데, 함께 식사를 하려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숯불구이집을 보고 "[[원우]]야, 저기 숯불구이집 있다."라고 제안했더니 [[원우]]가 [[https://youtu.be/oKyl9VbIPYY?t=7m32s|"저기 앞에 글씨 안 보이냐? 생태 동태 숯불구이 집이잖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생선초밥을 먹어야 하는 게임에서는 [[에스쿱스]]가 대신 [[원우]] 몫까지 먹어주기도 했으며 [[2016년]] [[12월 29일]] [[양남자쇼]]에선 연어회를 먹어야 했을 때는 연어를 빼고 밥만 먹기도 했다.멤버들과 타꼬야끼를 먹었을때도 문어를 빼고 먹었다고한다.
* 이 때문에 [[세븐틴의 어느 멋진 날 : 13소년 표류기]]에서 여서도에 갇힌 [[원우]]는 밭을 일구며 "텃밭 요정"이라는 캐릭터를 구축해 주목을 받았다. 해산물을 전혀 먹지 못해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구운 생선은 조금이나마 먹는 모습을 보였다~~ [[원우]] 나름대로 살아남고자 텃밭에서 채소를 수확해 먹으려고 했는데, 텃밭 요정이 정작 채소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유발했다. --얘가 시금치인가?-- 하루는 [[승관]]을 비롯한 멤버들이 화분에 매달린 귤을 따 먹고 싶다며 탐을 내자 [[https://youtu.be/ukPeD8qPzZw|"어떻게 그렇게 작은 애를 먹냐"]] 하고 면박을 주더니, 이 귤을 사수하기 위해 멤버들을 향한 경고 표시로 조그만 모종삽을 텃밭에 폭 박아 두기도 했다. ~~밭에 못 들어오게 경고를 해놔야겟서~~
* 연습생 시절 야채 과자를 밥 대신 먹었을 정도로 좋아했으나 지금은 끊었다고 한다. --[[승관]]은 박수까지 쳤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담긴 [[호시(세븐틴)|호시]]의 일기가 아직 [[https://www.facebook.com/notes/seventeen/17s-diary-%EC%88%9C%EC%98%81-20130715-%EC%95%BC%EC%B1%84%EA%B3%BC%EC%9E%90-%EB%8C%80%EC%8B%A0-%EC%83%88%EC%9A%B0%EA%B3%BC%EC%9E%90%EB%8A%94-%EC%96%B4%EB%95%8C/198383483657793/|세븐틴 공식 페이스북]]에 남아있다.
- 정주관백 . . . . 15회 일치
정주관백이란, 집 안에서 위세를 부리는 남편을 뜻하는 말이다. 집 안에서는 그 권력이 관백이라도 된 것 같다고 하여 쓰는 말.
정주(亭主)란, 한 집안의 주인. 여관, 찻집, 가게 등의 주인을 뜻하며, 집 안에서는 남편을 뜻한다.
전국정주관백협회(全国亭主関白協会)라는 단체가 있다. 남편이 폭군이 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아니며, 정주관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자는 단체이다.(http://www.zenteikyou.com/zwhat.html)
이 단체가 새롭게 해석한 정주관백의 정의는 이러하다. 사실 관백은 조정에서 두번째 지위이며 덴노를 보좌하는 지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집 안에서 덴노란 곧 아내이다. 그리고 정주는 차를 내오는 사람을 뜻하므로, ‘정주관백’이란 사실 아내를 보좌하고 떠받들어 주는 남편을 뜻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오해하여 집안의 폭군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고 말한다.
관백(간파쿠)은 일본 헤이안 시대에서 부터 덴노를 대신하여 실권을 행사한 지위이다. [[후지와라 섭관가]]에서 대대로 이어받았으며 덴노가 어릴 때는 섭정(摂政)이 되고, 성인이 된 뒤에는 관백(関白)이 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이를 섭관정치(摂関政治)라 부른다. 헤이안 시대 이후로 권력이 쇠퇴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오툐미 가문이 일시적으로 관백의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에도 시대의 섭관 가문은 쇼군이 된 도쿠가와 가문의 후원으로 상당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도쿠가와 가문과 혼인을 맺기도 했다.
- 한선교 . . . . 15회 일치
| 학력 =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문학 석사
| 소속상임위 = [[대한민국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 1985년 : [[성균관대학교]] 물리학 학사
* 2007년 :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국가경영학과 정치학 석사 (학위논문명 - 여성 국가최고지도자의 등장조건 : 영국과 한국의 비교연구)
* 2012년 :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문학 석사
* 2008년 8월: 국회 문화체육관광통신위원회 위원
* 2010년 9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한나라당 간사
* 2012년 7월 ~ 2013년 3월: 제19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 2014년 6월 ~ 2016년 5월: 제19대 국회 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 2016년 6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 2018년 7월 ~ : 제20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문화방송의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동문]][[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동성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청주 한씨]][[분류:친박]][[분류:농구 행정가]]
- 김갑수(배우) . . . . 14회 일치
|| '''본관''' ||<(> [[광산 김씨]] ||
현재는 [[높으신 분들]]을 자주 맡는데 교수, 핵물리학자, 여당 국회의원, 검사장, 재벌 총수, 기업 회장, 학원 이사장, 고위 관료, 정보기관 고위간부, 언론사 사주, 북한 정찰총국장, 정치 거물 --타짜--등을 맡는다. ~~그리고 대부분 죽거나 체포 당했다~~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각인된 작품은 1994년에 개봉한 영화 [[태백산맥(영화)|태백산맥]]. [[안성기]], [[김명곤]]을 포함하여 [[신현준(배우)|신현준]], [[오정해]] 등등의 젊은 배우들이 기대 이하의 연기를 선보이며, 우익단체의 상영반대에 협박을 당하였다는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서 유일한 연기로 압도하고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 개봉일에 관객들이 사인받으려고 저 네명의 배우에게 많이 몰렸는데, 겨우 1회 상영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럽게 김갑수에게 관객들이 몰렸다고 한다. 금홍아의 금홍아나 TV 소설 등에서 난장질 치는 아저씨 연기는 일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소령을 연기한 데미안 루이스와 너무 닮아서 윈갑스 소령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연극 배우 출신으로, 지금도 대학로 등지에서 꾸준히 연극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로 맥도날드에 가끔 나타나서 일행들과 햄버거를 먹으면서 얘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역]]과 [[악역]][* 악역을 예로 들자면 드라마 '타짜'의 아귀, '연개소문'의 수양제, '개와 늑대의 시간'의 국정원 국장 역을 꼽을 수 있다.]을 둘 다 소화해내는 몇 안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비슷한 타입으로 김상중은 연극에서는 경박한 연기도 했지만 TV에서는 그런게 없다!]
그 이전에도 연극계에서 유명세를 떨쳤으나[* '님의 침묵'이라는 연극에서 한용운 선생역을 연기함으로서, 그쪽에선 이미 유명인사였다 한다. 관객동원수는 자그마치 약 3만명. 그는 이 작품으로 백상 예술대상을 비롯 총 5개의 상을 받았다. 그는 이 수상을 계기로 영화 '태백산맥'에 케스팅 되기도 했다.] 이 단 한 편의 드라마로 톱 중년 연기자로 단숨에 발돋움한 그는 그 이후로도 주로 현대극도 꽤 했지만 주로 사극에 많이 출연하게 된다.
시트콤 [[몽땅 내 사랑]] 기자회견 당시 한 기자가 '혹시 금방 죽는 작품이 아니라서 출연하신 건 아닌가요'라고 묻기까지 했다. 잠깐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려는 듯 했으나 포기하고 금방 인정.[* 물론 질문을 한 기자나 대답을 한 김갑수나 농담.] 지못미 갑수옹……. 그래도 2010년 맡은 작품 중에선 간만에 밝은 분위기에 장수할 것 같은 역을 맡게 됐다. ~~대신 작중에서 똥 싸셨다.~~[* 작 중에도 잦은 사망과 관련된 개그가 나온다. 딸 금지(손가인 분)를 놀리기 위해 바닥에 쓰러진 연기를 하는데 계획을 짜면서 하는 말 "내가 딴 건 몰라도 죽는 연기 하나는 대한민국 최고야."]
* 2011년 4월 12일 방영된 [[김승우의 승승장구]]를 끝으로 [[예능]] [[은퇴]] 선언을 했다...~~그러면 [[시트콤]]부터 접어야겠지?~~ 그런데 [[XTM]]에서 2011년 하반기부터 방송하는 [[탑기어 코리아]]의 멤버 중 1인으로 발탁되었다. ~~뭐??? 예능 은퇴한 거 아니었어??~~ 탑기코 시즌1에선 큰 형님 포지션 겸 [[메르세데스-벤츠]]의 차량을 좋아하는 기믹으로 활약. 그럭저럭 무난한 진행으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자동차에 관한 식견이 수준급이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는데, [[폭스바겐 골프]]를 엔진종류 별로 딱1번만 주행해보고 정확하게 차종을 구분하는 미션을 완벽하게 완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즌1의 백미로 꼽히는 슈퍼 카 택시 에피소드에서 [[험비]]의 민수형인 허머(Hummer) 택시를 담당하여 주목 받기도. 그러나 개인사정 상 시즌1에서만 나오곤 하차했다. 그러나 후임들이 워낙 평이 안좋은 지라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꽤 되는 것으로 보인다.
* 그 밖에도 미니홈피에 올린 사진들을 보면 브라운관 내의 중후한 분위기와는 달리 소탈한 일상을 담은 것이 대부분이다. 트위터도 운영한다고 한다.
||<|2> 2002년 || [[KT(영화)|KT]] || 김차운 || 주연 [*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한일합작품으로, 그는 여기서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된 모종의 인물을 연기한다. 줄거리 내용을 보면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듯.] || ||
||<|3> 2016년 || tvN || [[THE K2]] || 박관수 || 조연 || 사망[*스포일러2 마지막회의 마지막즈음 '''자살 당한다.'''(올가미가 있는 나무로 안내 받는 간접적묘사. 이때 대사가 '내가 자살당할줄은...')] ||
|| KBS2 || [[성균관 스캔들]] || 이정무 || 조연 || ||
|| [[KBS 연기대상]] || 남자 최우수연기상 || [[신데렐라 언니]][* 이 드라마를 비롯하여 이 해에 출연한 KBS 드라마만 하더라도 무려 네 편이다. '추노', '신데렐라 언니', '성균관스캔들', '거상 김만덕'까지... 오죽하면 수상소감에서 "다작을 했지만 [[사망전대|사실상 출연분량은 한편 뿐이다.]]"라는 너스레로 웃음을 주었다.] ||
- 김윤환 . . . . 14회 일치
|| '''본관''' || [[선산 김씨]] ||
|| '''약력''' || [[조선일보]] 기자[br][[영남일보]] 기자[br][[대구일보]] 기자[br][[문화공보부]] [[차관]][br]제13대 [[대통령비서실장]][br]제1정무장관[* 1988년, 1990년, 1994~1995년 무려 3번이나 제1정무장관직을 역임하였다.][br][[민주정의당]] 원내총무[br][[민주자유당]] 대표 ||
[[경북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역 언론사인 [[영남일보]]와 [[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 일본특파원 및 편집국장 대리를 거쳤다. 이 시절에 오랫동안 주일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의 금권 정치, 계파-계보 정치, 막후 정치를 보고 배운다. 중간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구미시|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김창환(정치인)|김창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는 등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78년 [[유신정우회]]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려 갔다가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되어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1986년 8월 개각 때 [[허문도]]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1987년 7월 [[김정렬(1917)|김정렬]] 내각이 출범하자 [[박영수(정치인)|박영수]]의 뒤를 이어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퇴임한 뒤 민주정의당으로 복귀했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인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군위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개원한 뒤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고,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원기(1937)|김원기]],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 [[김용채]]와 함께 4당 체제를 이끌어가는 원내 사령탑으로 화려한 활약을 펼쳤다. [[3당 합당]] 이후에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정무제1장관을 맡으며 정계의 중심에서 활약했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4선에 성공했다.
16대 총선 낙선 후 김윤환은 민국당의 대표를 맡아 당을 추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아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썰어놓지도 않은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암이 자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약세와 [[자유민주연합]]의 패망으로 나름대로의 입지를 살려 3당 연합(혹은 DJP 재연합)에 낄 수 있었지만, 2001년 10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 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자 유일한 지역구 의원 [[한승수]]도 탈당해버렸다.[* 한승수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유지하다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자 7월 장관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의 외교담당 특별자문이 되었다.] '''이 시기 "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정치공학적 구도를 구상했고 [[듣보잡|이 때까지만 해도 인지도가 낮아 가능성이 없다]]이라고 여겨졌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 YS에게 팽당한 5공, 유신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 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 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 김윤환 본인은 대선 직후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114|#]]
- 김준현(코미디언) . . . . 14회 일치
|| '''본관''' ||<(> [[김녕 김씨]] ||
tvN의 [[예능 프로그램]] [[현장토크쇼 TAXI]]에 출연하여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당뇨병이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다.[* 사실 정확히는 방송이라 그런지 당뇨병이라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의사]] 및 당뇨병 환자들이 그 방송을 보고 알았을 뿐이다. 덕분에 몇몇 사람들은 김준현 정도의 수치가 나와도 정상인줄 알고 있는 케이스도 있었다. 당뇨를 한참 넘어선 김준현의 수치에 비해 자기가 낮으니 당뇨임에도 혹은 당뇨전단계임에도 자기 수치가 지극히 정상인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참고로 방송에 공개된 수치는 당화혈색소 8.2에 공복혈당 196이었는데.. 당화혈색소 6.5, 공복혈당 126이 당뇨 기준임을 생각해보면 아득히 높다.] 직계가족에 당뇨병 가족력이 있고 선천적으로 췌장이 약하게 태어났다고 하는데 선천적으로 췌장이 약하게 태어나는 경우는 없다. 그냥 가족력과 식습관 때문일뿐. 거기에 초고도 비만[* 다만 BMI 상으로만 초고도 비만이지 [[야구선수]]나 무제한급 [[역도]] 선수, 백두급 [[씨름]]선수 등처럼 체지방도 많으면서 근육량이 상당히 많은 [[케이스]]이기 때문에 같은 체중의 일반 비만인보다 관리가 좀 쉬울수는 있으나 이미 당뇨가 나이대 대비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음으로 크게 의미 있는 사실은 아니다.]까지 있으니..... 김준현 본인도 그러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 검사결과 내용을 듣는 내내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비상대책위원회에서도 초반에는 [[김원효]]에 밀리던 듯 했으나 사실상 투탑 체제를 굳혔으며, 라디오 [[CF]] 개수는 "고뤠?" 쪽이 "안돼!~"보다 앞서고 있었다.~~[* 물론 점차 [[인지도]]를 높인 건 사실이지만, 사실 투탑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김준현이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도 상관없지만, [[김원효]]가 빠지면 비상대책위원회 코너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김원효와 김준현의 비중이 7:3 정도로 차이가 난다... [[라디오]] [[CF]] 개수가 많다고 해서 인기가 더 많다고 볼 수도 없다. "고뤠?"는 한마디로 간단하게 끝나지만 "안돼!~"는 [[유행어]] 그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현란한 대사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시간이 짧은 CF엔 "고뤠?"보다 약간 부적합할 뿐.]
그리고 편하게 있어가 종영된 후 시작한 [[존경합니다]]에선 역으로 송병철한테 무지하게 깨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역할을 맡고 있는 김준현의 발랑 까진 [[보좌관]] 역들인 송병철과 [[서태훈]]이 김준현을 열심히 괴롭히던 중. [[드라마]]광 사모님 [[박지선]]은 [[덤]].
* [[이마트]]: 매체 광고에는 거의 안 나오지만, 인터넷에 이마트 관련 영상이나 매장 내부에 영상에 주구장창 나온다.
* 수지의 [[무개념]] 팬들로 미니홈피 테러와 악플에 시달렸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거 없다|그런 거에 관심 없고]] 오로지 수지를 위로 & 김준현을 깎아내리기 급급했다.
* 그러다가 [[2013년]] [[4월 20일]]에 [[결혼]]했다. 상대는 6년간 열애해 온 [[여자친구]]라고... 주례없는 퓨전스타일로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32638|관련기사]] 본인 스스로 어느정도 신혼 시기를 가지고 싶었다고 얘기했고, [[슈퍼맨이 돌아왔다]] 이휘재 가족편 게스트에 출현하여 밝힌 바에 따르면 결혼 후 아내는 언제든지 준비가 돼 있다고 했으나 김준현 스스로가 준비돼 있지 않다고 생각해 자녀를 가지지 않고 있었던 듯하나, [[2016년]] [[8월 9일]] 결혼 3년 만에 아내의 [[임신]]을 발표했다. 아이의 태명은 '보고 싶고 보고 싶다.'라는 뜻의 '보보'라고...
* 2015년 먹방, 쿡방이 대세가 되며 프로 먹방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고정 방송인 [[백종원의 3대 천왕]]과 [[맛있는 녀석들]] 2개 외에도 각종 쿡방, 먹방 프로그램 게스트 섭외 1순위이며 식품 관련 CF도 꾸준히 들어온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고수(채소)|고수]], 삭힌 [[홍어]] 등 [[호불호]]가 갈리는 식재료도 다 잘 먹는 편이다.] 많이 먹기도 하지만 어떻게 먹어야 더 맛있을지,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일지에 대해 연구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남다르기 때문.[* 실제로 [[중학교]] 시절부터 집에 오면 [[라면]]을 끓이면서 이걸 어떻게 먹어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이것저것 시도해보는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다만 라면 끓이는 정도를 제외하면 요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방송 게시판을 보면 방송을 보고 다이어트를 포기했다던지, 장 수술후 입맛이 없어서 고생이었는데 방송을 보다가 침이 나와서 깨끗이 나았다던지 하는 반응이 많은데 그걸 보면 그렇게 뿌듯하다고 한다.
* 하지만 이 검사에서 근육량이 높다고 나오기도 했지만 혈액검사 상에서는 확연한 당뇨[* 당화혈색소 8.2로 나왔는데 6.5이상이면 의학적으로 당뇨이고 7이상이면 어느정도 증상도 있는 당뇨이고 8이면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나 김준현이 1980년생임을 생각해본다면 꽤나 관리가 필요하다.]로 나왔다. 방송이라 그런지 의사가 관리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만 했지만 사실 김준현의 상태는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수준이었다. 방송에서 오히려 의사가 적나라하게 진단하기 그래서 그런지 오해하고 있는 사람도 많고 저정도는 정상이구나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 다만 근육량에 있어서 이전에도 뒷태가 유민상 등 다른 비만 개그맨들과는 달리 역삼각형 체형에 승모근 등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고 복부보다 가슴쪽이 더 튀어나온듯한 모습들이 인간의 조건 등 여러 프로그램에서의 상의 탈의에서 공개되었던 적이 있었으며[* 이러한 체형은 백두급 씨름선수, [[스트롱맨]] 등에서 흔히 볼수 있으며, 실제로 김준현의 경우 [[강호동]] 등과 더불어 연예계에서 힘 좀 쓰는 사람들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으니 관리를 잘한다면 괜찮아 질수 있다. 또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것은 확실하며, [[보디빌딩]]식의 트레이닝보다는 [[파워 리프팅]]식의 [[스트렝스 트레이닝]]을 할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의 자격]] 철인 3종 특집에서 [[송일국]]과의 무릎씨름 대결에서 평소 연예계에서 스포츠 매니아로 유명한 [[송일국]]을 가볍게 발라버리기도 했다. 애초에 엘리트 체육인 출신인 사람과 스포츠 애호가인 일반인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지만. --체급이 다르잖아 체급이..----물론 김두한하고 싸우면 승부는 알 수 없다...--
* [[2018년]] [[5월 14일]], [[서울교통공사]]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3256819|관련 기사]].
* [[복면가왕]] 80차 경연에서 [[오빠 몸이 완전 돌덩이야 모아이]]로 나와 2라운드에 오르면서 선전했으며 제작진의 배려로 3라운드 준비곡인 장미여관의 '봉숙이'를 부르면서 정체를 밝혔다.
- 로힝야 . . . . 14회 일치
2016년 10월 9일,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 마웅토 등의 국경 검문소가 무장괴한의 공격을 받아 경찰관 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얀마 군부는 이를 로힝야 무장세력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군사작전으로 반격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수십명~100여명의 사망자가 있었고, [[성폭행]] 사건과, 다수의 난민이 발생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위성사진을 분석하여 진압과정에서 1,200채의 민가가 불에 탄 것으로 분석하였고, 유엔은 난민의 수가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미얀마 정부는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를 부인하였으며, 저 타이 미얀마 대통령실 대변인은 유엔의 주장을 부정하고, 확실한 증거에 기반하여 발언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미얀마 군부와 정부는 민가 방화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려는 로힝야 무장세력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2016년 12월 19일, 이 문제에 대한 아웅산 수치의 주변국 외무장관과의 회담과 더불어, 미얀마 정부는 국영 언론을 통하여 작전의 내용을 상세하게 알리는 한편 작전 지역을 공개하고 교도통신, EPA 등 외신도 불렀다.
국제분쟁 전문 연구기관인 국제위기그룹(ICG)은, 2016년 학살을 촉발한 무장괴한의 경찰 초소 습격 사건의 배후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한 로힝야 족의 지휘로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 초소 습격 사건의 배후로 분석된 '하라카 알-야킨'(Harakah al-Yaqin, 믿음의 운동)을 조사하여 미얀마 내외에서 활동하는 단체 회원 6명과 인터뷰하여,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로힝야 망명 위원회가 이 단체를 감독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하라카 알-야킨이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에 등장하는 지도자는, 파키스탄 카라치의 로힝야족 이주자 집단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로 이주한 '아타 울라'라고 분석되었다. 이 단체는 로힝야 남성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에서 활약시켜 게릴라전 경험을 쌓게 했고, 이렇게 20여명 내외의 '교관'이 2년 이상 수백 명에게 무기 사용법과 사제폭탄 제조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국제위기그룹의 보고서는 로힝야 무장단체가 국제무장세력과 연관이 있으나, 미얀마 내 불교도를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보다는 차별을 끝내고 시민권을 확보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종교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이고 국제 지하드 조직과 연결이 있어 언제나 목표가 바뀔 수 있으며, 미얀마 정부가 군사작전에만 치중하지 말고 로힝야의 고통을 외면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사실상 미얀마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 겸 외교장관에 대해서 비판이 쏟아졌다. 2016년 무장공격과 이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보복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던 그녀가 군사작전이 시작되고 6주가 지나도록 언론을 피하고 "법치에 근거하여 군사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원론적인 해명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에서 아웅산 수치는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다. 수치는 로힝야를 '벵갈리'라고 부르며 이방인 취급을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이에 응하여 2016년 12월 19일, 아웅산 수치는 [[아세안]] 회원국 외무장관을 미얀마 양곤으로 초청하여, 미얀마군 무장세력 토벌작전과 로힝야의 상황을 설명하고, 사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되어서 수치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국 외무장관들은 대체로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 돈 쁘라뭇위나이 태국 외무장관 : 모두가 만족할만했다.
* 인도네시아 레노 메르수디 외무장관 : 진솔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미얀마가 아세안 회원국에게 정기적으로 상황을 알리고, 로힝야에게 인도주의적 지원도 하기로 했다.
* 아니파 아만 말레이시아 외무장관 : 로힝야 인권문제 개선 속도가 더디다. [[이슬람국가]]가 이를 이용할 수도 있다. 아세안의 지역적 문제이므로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한다.
불교 승려들로 이루어진 '마 바 타'(Ma Ba Tha, 민족종교 보호를 위한 애국연합)라는 단체가 로힝야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로힝야 보트피플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서 미국 대사관이 논평을 내며 '로힝야'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로힝야 같은 종족은 없고 그런 말을 할거면 이들을 다 데려가라고 주장했다.
- 리그컵(K리그) . . . . 14회 일치
[[K리그]]의 리그컵은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프로축구구단을 위한 대회다. 1992년에 처음 시작되어 2011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폐지라고는 했지만 2016년 기준,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아직 리그컵을 공식경기로 보고 있다. 이는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또한 축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저조했던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프로축구선수권대회를 시즌중에 따로 개최하여 팬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리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흥행은 엄청난 대참패라서 2016년에 리뉴얼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연혁에서도 이 대회는 전혀 이야기가 없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도 '''"1992년, 정규리그 이외 최초로 별도 컵대회인 아디다스 “컵” 신설"'''이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로 당시 대회는 그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대회였다.] 연맹에서 K리그의 역사를 논할 때 프로-세미프로로 합동 운영했던 수퍼리그를 K리그의 일부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http://www.kleague.com/kr/sub.asp?avan=1001124800|리뉴얼 이전 자료]에는 남아있다.]
KFA가 구단들과의 의견조율이 실패하여 리그컵과 관련한 협조를 구하지 못했던 것도 리그컵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구단들은 10만 달러를 전액 상금화를 생각하였는데, KFA는 이걸 일부만 상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KFA에서 아마추어를 지원할 자금으로 돌릴 생각을 갖고 있어서 1회 아디다스컵은 "상금은 있는데 금액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당초에 이는 아디다스컵이 열리게 된 이유가 구단들과 제우교역측과의 논의에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50363|스폰금액은 전액 상금으로 쓸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KFA가 이를 계약서를 찍을때 "협회에 일임함"으로 이야기를 바꿔버려서 협회와 구단사이에 골이 생기게 만들어버렸다. 해당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디다스컵의 창설을 주도한 건 협회가 아니라 구단이며, 이는 구단의 수익을 위한 상금배분을 협회가 개입함으로써 제대로 수틀린 것. 제우교역측은 명백히 "프로구단을 위해 사용하길 바람"인데 KFA는 프로리그를 위한 돈을 멋대로 아마추어 사업에 쓰겠다고 나섰으니 구단들이 이 대회를 심정적으로나마 보이콧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아디다스컵이 처음 열렸던 시점만 하더라도 K리그와 사실상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상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와서 과거 한국프로축구와 관련된 기사를 살펴봐도 리그컵이 처음 열렸을 당시에는 정규리그보다는 아디다스컵 관련기사를 찾기가 더 쉬울 정도다. 10만달러 규모의 상금은 당시 국가대표 대회로 간주할 수 있었던 대통령배 대회를 빼면 축구계 최고액이었으니 당연히 화제를 몰고 올 수 밖에 없었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상황. 물론 이건 총 상금규모고 실제로 우승팀은 3000만원, 준우승팀은 1500만원을 받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런 사실은 명백히 K리그와 차별할 수 있는 위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K리그도 상금제도를 대폭 개선하면서 이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 K리그 승강제 도입관련 ==
또한 AFC에서는 리그컵에 대해 "ACL 참가티켓과는 관련없는 대회"라고 못박으면서 가장 중요하지 않는 대회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다보니 K리그 팬들 사이에서도 종이컵 취급을 받던 리그컵 폐지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K리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어쨌거나 현재로써는 공식 기록을 찾기가 가장 어려운 대회가 되었다. 리뉴얼 이전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에서도 이 대회에 대한 정보를 찾는건 상당히 어렵다. 비교적 협회보다 자료정리가 더 잘 되어 있고, 일반에 공개하는 자료양이 훨씬 많은 연맹임에도 그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협회쪽은 FA컵의 위상이 상당함에도 경기 관중 수나 카드 이력등을 별도로 공개하고 있지 않다. 협회가 비판받는 대표적인 부분.]
특히 관중과 관련된 부분은 믿기가 좀 곤란한게 이 대회는 단 한번도 실 관중 집계가 단 한번도 이루어 진 적이 없어서 관중 동원력도 사실 언급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존재한다.
- 오시만 . . . . 14회 일치
'''오시만'''(吳始萬, [[1647년]] - [[1700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으로 재직 중 [[1676년]](숙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으로 합격,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그 뒤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79년]] [[헌납]]으로 재직 중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 부수찬, 부교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1680년]](숙종 6년) 이조좌랑을 거쳐 [[경신대출척]]으로 파면되었다가 [[1689년]] [[승지]]에 오르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중용되면서 1690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부당하다 하여 다시 승지로 전임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유배되었다. [[서인]] 인사 일부와도 인척관계였으나 [[허새의 옥사]]를 전후하여 원수가 되었다. 본관은 [[동복 오씨|동복]]이며, 자는 영석(永錫), 호는 춘헌(春軒)이다.
1647년(인조 25)에 태어났으며 이조참판 만취 오백령(吳百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증오단(吳端)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 오정일(吳挺一)이다. 어머니는 나주 정씨로 사인(舍人) 정호선(丁好善)의 딸이며, 삼촌인 예조판서 오정위(吳挺緯)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양어머니는 박씨로 박유경(朴由慶)의 딸이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조선 인조|인조]]의 장인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증손인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한두상(韓斗相)의 딸이다.
1666년(현종 7) [[순천시 (전라남도)|순천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으며 그 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뒤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통덕랑으로 재직 중 1676년(숙종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지평을 지내고, [[1679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행[[홍문관]]수찬(修撰), 교리, 헌납 등을 역임하였으며 1680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경신대출척]]으포 파면되었다.
[[1689년]] [[승지]]에 머물렀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복귀하자 [[1691년]]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부당하다 하여 다시 승지로 전임되었다. [[1692년]] [[좌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 이현조가 오정위를 공격하자 피혐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반려시켰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바로 삭탈관직되고 유배당하였다. 지조가 깨끗하고 겸허 담백하였으나 [[1694년]] 당화(黨禍)(갑술환국)를 입어 [[전라북도]] [[전주시|전주]], [[전라남도]] [[무안군|무안]] 등지로 10여년간 유배살이를 하였다.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이소선 . . . . 14회 일치
이소선은 192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구광역시]] 에서 빈농인 이성조와 김분이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0년에 올렸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85 이소선의 어린 시절, 그녀는 빈농의 둘째 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8), 2014.06.12</ref> 아버지는 "딸 아이를 보니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 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이름을 소선(小仙)이라고 지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717423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 - 이 아이 이름은 작은 선녀], 경향신문, 2009년 1월 7일</ref> 이소선이 서너살 때 아버지 이성조는 항일 농촌 운동을 하다 일제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아버지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고 회고하였지만<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 />, 관련 기록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817524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 - 네 살 때 멈춘 ‘아버지 기억’], 경향신문, 2009년 1월 8일</ref> 아버지가 죽은 뒤 소작할 땅마저 떼이자 가족들은 감천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대리고 나오며 집에 불을 질렀다. 이소선은 평생 아버지가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1182947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 - 금지된 말이 된 ‘아버지], 경향신문, 2009년 1월 11일</ref> 이소선의 가족은 산 속 상엿집에 머무는 등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와룡산]] 기슭의 홀어미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41753535&code=2100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 - 와룡산 아래 더부살이],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새아버지는 어머니 보다 20살이 많았다. 이소선은 어머니의 재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도 새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5181532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6) - 오빠 살리려 개가한 어머니],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일제 말기에 오빠는 징용으로 끌려갔고 이소선은 공출을 위한 관솔가지 꺾기 등을 하며 어렵게 지냈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서 허락하지 않아 다닐 수 없었다. 한글은 어머니가 재가한 집안에 시집 온 분에게 배웠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6888 밤새 구구단 외워, 고무신을 상으로 받은 이소선],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9), 2014.06.12</ref> 이소선은 집안 몰래 일본이 세운 간이 학교(오늘날의 [[대구서재초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 틈에 섞여 들어가 구구단을 배웠지만 곧 들켜 매를 맞고 그만두게 되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517580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14) - 대물림 된 ‘못배운 한’], 2009년 2월 5일</ref> 헤어진 오빠와는 해방이 되어서도 다시 만나지 못했고 36년 만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2217440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9) - 일본으로 떠난 오빠], 2009년 1월 22일</ref>
전태일의 사망 후 경찰과 노동청 등 관계 당국은 서둘러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하며 회유하였다. 그러나 이소선은 아들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버텼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46 "다시는 안 부른다"... 목사들 쫓아낸 이소선],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5), 2014년 6월 12일</ref> 갖은 협박과 회유를 거부하고 기어코 요구 사항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노동조합 사무실을 준비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장례를 치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52 전태일의 마지막 가는 길, 평화시장이 아니었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7), 2014년 6월 12일</ref>
{{인용문2|북한에서 김일성을 모두 아버지라고 하는데 남한에선 이소선을 모두 어머니라고 부르니 이소선도 "빨갱이"가 분명하다|1980년 이소선을 심문하던 수사관<ref>오도엽, 《이소선 여든의 기억: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2008년 {{ISBN|978-89-9010-672-8}}, 189쪽.</ref>}}
이소선은 또한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을 서둘러 사형시킨 뒤 화장시키려 하자 그 앞을 막아선 사람도 이소선이었다. 이소선은 헌옷을 팔아 생계를 꾸리면서도 노동운동가나 민주화 운동가가 수배를 당하면 그를 숨겨주고 먹이고 재웠다. 수 많은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이 이소선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로인해 훗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에서 부터 평화시장의 어린 시다까지 이소선을 어머니라 불렀다.<ref>[http://www.redian.org/archive/40703 이소선 기억하기‘어머니’의 길이 일군 여성의 역사], 레디앙, 2012년 9월 4일</ref> 전태일의 장례를 도왔던 [[장기표]]가 수배 받아 장독대에 숨겼고 [[조영래]]를 숨겨줄 때에는 주변으로부터 다 늙어 서방질을 한다는 오해까지 받았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5932 수배범 장기표 구해낸 이소선의 임기응변],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54), 2014년 11월 4일</ref> 이소선의 판잣집을 거쳐간 사람들은 훗날 대통령이며 장관이 되기도 했지만 이소선은 늘 현재의 노동자 편에 서고자 했다.<ref name="경향46" /> 또한 1986년에는 민주화유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ref name="연표" />
* 1973년 5월 21일 노동교실 개관. 함석헌선생을 초청했다는 이유로 탄압 받음.
* 1978년 9월 22일 동일방직 노동자들 기독교회관에서 연극 공연 뒤 시위. 여기에 참가하여 심한 구타를 당함.
* 1980년 12월 14일 계엄사령관의 심사로 석방됨.
* 1981년 2월 2일 계엄 포고령,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등으로 구속. 징역 10월을 받음.
* 1981년 11월 13일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발족.(전태일기념사업회 전신)
* 1988년 10월 17일-89년 2월 27일 유가족들과 함께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진상 규명 농성 투쟁을 전개함.(135일간)
* 민종덕,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 돌베개, 2016년, {{ISBN|978-89-1799-743-7}}<ref>전태일 재단은 민종덕의 책은 평전이라고 하기엔 모자라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음 - [http://www.chuntaeil.org/b/notice/971 민종덕 씨의 이소선 어머니 관련 책 발간에 대한 전태일재단의 입장]</ref>
== 관련 항목 ==
- 이주호 (1961년) . . . . 14회 일치
|그림설명 =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직책 = 제3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후임 = [[서남수]] (교육부 장관)
|본관 = [[전주 이씨|전주]]
'''이주호'''(李周浩, [[1961년]] [[2월 17일]] ~ )는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 2008년 2월 ~ 2008년 6월 대통령실 교육과학문화수석비서관
* 2009년 1월 ~ 2010년 8월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
* 2010년 8월 ~ 2013년 3월 제3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교육과학기술부|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
|후임자 = [[서남수]]<br/>(교육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 교육과학기술부|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전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청구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코넬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실 수석비서관]][[분류:대한민국의 교육과학기술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분류:이명박 정부의 국무위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정재호 (1964년) . . . . 14회 일치
|경력 = [[한국외환은행]] 신용카드사 노조위원장<br />[[노무현]]대통령후보 정무보좌역<br />[[참여정부]] (대한민국, 2003년~2007년) [[대통령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시민사회수석실 선임행정관, 사회조정비서관, [[국무총리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br />
정재호는 1998~2001년 [[외환은행]] 신용카드사 노조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2년 故 [[노무현]] 대통령후보 시절 정무보좌역, 2003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2005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실 선임행정관, 2006년 [[대통령비서실]] 사회조정비서관과 2007년 [[국무총리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등 [[정무직]] 공무원직을 수행했다.
* 2003.02 [[노무현]] 대통령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 2005.04 [[노무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실 선임행정관
* 2006.04 [[노무현]] 대통령비서실 사회조정비서관
- 최창홍 . . . . 14회 일치
'''최창홍'''(崔昌弘, <small>일본식 이름:</small> 廣田昌弘, [[1903년]] [[5월 7일]] ~ [[1951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로,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이다.
[[1925년]]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으며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1934년]] 10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고 [[1936년]] [[5월 21일]] [[경기도]] [[장단군|장단]][[군수]]로 임명되었다.
[[1937년]] [[2월 20일]]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로 임명된 뒤부터 군용 자동차 징발 및 운전수 징집, 지하자원 개발 및 공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및 검거, 국내 물자 조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8년]]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간사를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1월 24일]] [[경상남도]] 이사관 겸 [[경상남도청]] [[내무부]] 학무과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경상남도]] 내무부 전무과장(1941년 8월 18일 임명), 도청 전매국 제조과장(1943년 9월 30일 임명)을 역임했고 [[1943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 서기관 겸 재무국 전매사업과장, [[1944년]] [[11월 22일]] 재무국 연초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학도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근로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농업계획위원회 간사, [[조선철도간선긴급증강위원회]] 간사를 역임하는 동안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1945년]] [[5월 11일]] [[충청북도]] 참여관 겸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고등관 3등과 정6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후임자 = [[구연직]]<br/>([[충청북도 부지사|충청북도 민정관]])
[[분류:1903년 태어남]][[분류:1951년 죽음]][[분류:대한제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페이데이: 더 하이스트 . . . . 14회 일치
민간인을 [[케이블 타이]]로 묶거나 죽기 직전의 법집행관을 위협해서 인질로 만들 수 있다. 이 인질은 크루 중 하나가 구속당했을 때 인질 교환으로 크루를 풀려나게 하는 용도다. 인질은 경찰에 의해 풀려날 수 있다. 풀려난 민간인은 도망가며, 풀려난 법집행관은 다시 플레이어에게 맞선다.
어설트 트리에서 해금되는 7.62mm 경기관총. 드럼탄창이라 높은 장탄수를 가지고 있다. 모델은 H&K HK21.
테크니션 트리에서 해금되는 기관권총. 모델은 글록 18c. 탄창 증가 I 업그레이드를 하면 탄창이 길어진다.
9mm 기관단총. 서포트 트리에서 해금된다. 높은 연사력과 낮은 반동을 내세우는 무기. 모델은 H&K MP5A2.
소음기가 달린 45구경 기관단총. 어설트 트리에서 해금된다. 극단적으로 높은 연사력을 가지고있다. 모델은 잉그램 MAC-10.
인질을 잡을 때 소모되는 아이템. 기본적으로 두개. 장비로 Extra Cable Ties를 선택하면 소지량이 늘어난다. 법집행관을 인질로 잡을때는 필요 없다. 스스로 수갑을 채우게 하기 때문.
패닉룸 하이스트 초반에 상대하게 되는 적. 패닉룸 하이스트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놈들은 기관단총을 난사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권총이나 산탄총을 든 경관. 잡몹으로 보이겠지만 산탄총이 매우 아프다.
기관단총, 돌격소총, 산탄총을 든 SWAT 요원. 전형적인 SWAT의 의상을 하고있다.
창문 같은 곳에서 기어들어오는 법집행관들. 권총으로 무장했다.
방패를 들고 기관권총으로 무장한 특수요원.방패는 무적이니 방패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을 노리자.
녹색 야시경을 쓴 특수요원.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가까이 접근하면 플레이어를 걷어차 다운시킨 후 수갑을 채우고 구타한다.
[[분류:페이데이]] [[분류:게임 관련 정보]]
- Crusader Kings 2/궁정 . . . . 13회 일치
* 외교 관계 향상시키기
=== 재무관 ===
세금을 걷고 영지를 관리하는 직책. 자신의 관리력을 국가 능력치에 보태준다.
재무관을 지목한 백작령으로 파견해 세금을 거두게한다. 해당 백작령의 세금 수입이 증가한다. 일정 확률로 짭잘한 특별 소작료를 징수해 보내오지만 낮은 확률로 성난 소작농들에게 폭행당해 부상을 입거나 죽어버린다.
=== 첩보관 ===
첩보관을 지목한 백작령으로 파견해 해당 지역 귀족들을 사찰하게한다. 해당 백작령의 인물에 대한 음모력이 증가한다. 일정 확률로 루머를 캐내 돈을 뜯어내거나 부정 부패를 적발해 벌금을 뜯어낼 수 있다.
첩보관을 지목한 백작령으로 파견해 해당 백작령의 기술들을 훔쳐오게 한다. 일정 확률로 랜덤한 분야의 기술 포인트 50을 물어오지만 낮은 확률로 발각될 수 있다.
* 종교 관계 향상시키기
* 궁정 환관
* 거마 관리관
* 지휘관
- 김승관 . . . . 13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2><#DC0232> {{{#FFFFFF 김승관(金承管 / Seung-kwan Kim) }}} ||
|| 최찬욱[br]박규대([[삼성 라이온즈 2군]]) || → || '''김승관'''(삼성 라이온즈 2군) || → || [[김광현(1971)|김광현]](삼성 라이온즈 2군) ||
|| 최찬욱(삼성 라이온즈 2군) || → || '''김승관'''(삼성 라이온즈 2군) || → || 김훈(삼성 라이온즈 2군) ||
|| [[김광현(1971)|김광현]](삼성 라이온즈 2군) || → || '''김승관'''(삼성 라이온즈 2군)[br]김무성·이동욱([[롯데 자이언츠 2군]]) || → || [[조효상]] [br] 이상현([[한화 이글스 2군]]) ||
|| 이상현(한화 이글스 2군) || → || '''김승관'''(삼성 라이온즈 2군) || → || 곽용섭(삼성 라이온즈 2군) ||
|| [[이재주]](KIA 타이거즈 2군) || → || '''김승관'''(삼성 라이온즈 2군) || → || 곽용섭(삼성 라이온즈 2군) ||
|| 곽용섭(삼성 라이온즈 2군) || → || '''김승관'''(롯데 자이언츠 2군) || → || 권희석([[KIA 타이거즈 2군]]) ||
|| 권희석([[KIA 타이거즈 2군]]) || → || '''김승관'''(롯데 자이언츠 2군) || → || [[모상기]](삼성 라이온즈 2군) ||
|| || → || '''김승관(1995)''' || → || 이계성(1996 ~ 1998, 2000) ||
|| 한기철(1992 ~ 1995) || → || '''김승관(1996 ~ 2004)''' || → || [[김대익]](2004) ||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대구상고 시절에는 [[이승엽]]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던 라이벌이었다. 당시 투수였던 [[이승엽]]이 팔꿈치 부상과 어깨 혹사로 인해 타자로 전향하자, 그가 "승엽이는 방망이도 잘 쳐요"라고 말을 했을 뿐인데…
항상 [[이승엽]]을 따라다니다가 본인이 스스로 무덤을 파 버린 비운의 천재. 당시 고교 코치들 말에 따르면, 이승엽은 부드러운 스윙을 휘두르는 반면, 김승관은 뻗어나오는 거친 스윙이라서 절대 프로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 김영환(1955) . . . . 13회 일치
|| '''약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학기술부 장관]][br][[대한민국 국회의원]][br][[국민의당]] 사무총장[br]국민의당 최고위원[br]바른미래당 [[안산시 상록구 을|안산상록을]] 지역위원장 ||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과학기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때 따라가지 않았다.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에 재산신고를 -8.2억으로 해서 보유재산 국회 최하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만 부채액이 많아서 -8.2억인 것이고, 이후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을 공시지가가 아닌 실거래가로 신고해서 1억원 정도로 신고했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를 거하게 망해서 수십억대의 부채가 추가~~][* 2008년 기준으로 최하위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로, 대선자금을 선관위에서 환급받기 이전이어서 -120억원을 신고했다. 이후 선거비용을 환급받으면서 30억대로 재산이 다시 늘어났다. 2009년에는 서청원 친박연대 대표가 1억 438만원, 2010년에 김영환 의원이 -8억원, 2011년에 자유선진당 김창수 의원이 1억 500만원을 기록하여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후 [[4대강 정비 사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재명(196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이재명(1964)/논란 및 사건사고|각종 의혹들]]로 공격할 때, [[이정희|작정하고 나왔는지]] 정책 홍보와 검증보다는 이재명 후보에 대한 온갖 의혹들을 들고나와 [[네거티브]] 공세를 펼치는데 집중한 모습을 보였다.[* 사회자가 없는 자유토론 방식이라 중재자가 없는 점도 한 몫 했다.] 성남 FC 후원금 관련 의혹, 시민 상대 고소, 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다, 조폭 연루설, 일베 가입 논란, 혜경궁 김씨, 김부선과 스캔들 의혹[* [[주진우]] 기자가 김부선에게 메일을 보냈다는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는데, 토론회 후 때마침 주진우로 추정되는 남성과 김부선의 대화 녹취 파일이 공개되었다.] 등을 주제로 네거티브를 걸었고, 이재명이 그에 대한 해명을 해도 거짓말로 단정짓고 자신의 주장만 강하게 몰아붙이며 토론회를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갔다. 흡사 경찰이나 검찰이 취조하듯 몰아붙였는데, 이재명은 처음엔 적극적으로 해명했으나 계속되는 공세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기도 했고, 여기 청문회장 아니라고 반박하자 김영환은 진실공방이 아니라 '검증'이라고 주장했다. 후반부엔 20년 국회의원 경력 동안 이재명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자신이 이자리에 있는것이 부끄럽다며, 왜 이런사람들과 토론을 해야 하냐며 한탄하며 반듯하게 살아서 미안하다는 자기반성을 했다. 또한 자신은 전과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어서 한 말이 "투옥되고 노동자 생활하고.."라고 삐끗하자 이재명이 투옥이 전과아니냐고 물으니 긴급조치 운운하며 [[정신승리|전과지만 전과가 아니라며 반박했고]] [[유체이탈|이재명이 그런 전과는 자신도 있다고 반론하자 교도소의 도둑놈들도 다 이유가 있다며,]] [[내로남불|이재명이 반성을 안한다며 되려 비난했다.]] 마지막으론 이재명이 박근혜를 비판할 자격이 있냐고 하며 발언시간을 마무리했다. 모두까기로 컨셉을 잡은건지 마찬가지로 이재명에게 네거티브 공격을 하고 김영환이 혜경궁 김씨를 언급할 때 같이 거들어 준 [[남경필]]도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출마한 점을 들어 비난했고, 이런 토론 태도를 보다못한 [[정의당]] [[이홍우(1959)|이홍우]] 후보가 인신공격과 진흙탕 논쟁은 도민들이 불편해하니 자제하고 경기도의 미래를 논의하는 토론을 할 것을 촉구하자 자기 얘기만 하라는 호통으로 막아섰다. [[https://www.youtube.com/watch?v=3d1pNRO-1Io|김영환 후보의 토론회 주요 장면 모음]][* 경기도지사 후보로서 경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데 ~~본인은 후보가 아니라는 듯~~너나 잘하세요라며 고성을 지르는 모습이 참으로 막장스럽다(...).]
[[2018년]] [[6월 5일]]에 진행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 2차 토론회([[KBS]], [[MBC]], [[SBS]] 공동주최)에 참석하였다. 기조연설에선 지난 토론회에서의 네거티브를 사과하면서도, 여전히 [[이재명(1964)|이재명]]의 해명을 거짓말로 규정했고, 이재명과 본인 중 한명만이 진실이라며 끝장승부를 예고했다. 1대1 정책토론에선 다른 후보들과 정책검증을 이어갔으나, 주도권 토론에선 자신의 차례가 오자 이재명에게 김부선과 스캔들 의혹에 대한 네거티브를 걸었고 시간이 없다며 해명을 무시하고 예/아니오로만 대답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다가 사회자에게 제지를 받기도 했다.[* 이재명도 이것을 문재인에게 했다가 크게 비판받은 적이 있다. 토론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6월 7일 오후, 뜻밖의 [[공지영|원군(?)]]이 [[https://namu.wiki/w/%EA%B3%B5%EC%A7%80%EC%98%81#s-3.3.4|등장한다.]] 그러나 아직까진 어느쪽이 옳다고 판단하긴 이른 단계. 애초부터 공지영은 과거 논란들로 신뢰성을 잃어버린지 오래 되었고[* 때문에 이번 사건에 대해 보수 일각에서는 현재 이재명에 대한 반발로 인해 과거부터 줄곧 공지영에 대해 그렇게 비난해대면서 정작 이재명 의혹에서는 공지영의 말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일이 보수내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공지영의 발언을 섣불리 신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추가적인 증거들이 나와야만"''' 공지영의 말이 신뢰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공지영 본인이 무슨 새로운 증거들을 거론한 것도 아니다.[* 관련자의 말을 자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이것이 네거티브 선거전이냐 사회고발이냐에 대해 아직까지 판단이 보류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증거 제시도 없이 흐지부지 되면 빼도박도 못하는 네거티브 선거이지만 확실한 증거들이 공개되고 당사자들의 증언이 사실로 판명날 경우 논란이 많다 하더라도 이것이 사회 고발이 될 수 있기 때문. 김영환 본인도 주진우, 김어준, 정봉주가 증언하면 된다고 하며 관련자들의 진술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정작 의혹을 제기한 김영환 본인에게는 원래부터 관련 증거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나마 사진을 제시하긴 했는데 이 사진은 증거로 볼 수도 없는 [[http://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8161|사진]]이였기 때문에 사진을 거론하며 이재명을 비난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보통 정치인들은 상대 후보에 대해 후폭풍이 엄청난 스캔들을 무기로 선거에서 공세를 할 때 당연히 관련 증거들과 당사자의 증언을 미리 확보하고 이것이 확실한지 확인을 하고 나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이고 독특한 케이스이다.
19대 의원 시절 골프 클럽하우스나 딸이 운영하는 한 쿠키점에서 간담회 명목으로 부당한 정치자금을 집행한 적이 있다. 물론 이런 불건전한 관행이 비단 김 전 의원 혼자만의 일은 아니나 그럼에도 비판의 여지는 충분하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38105.html|한겨레 기사]] [[http://imnews.imbc.com/replay/2018/nwdesk/article/4624882_22663.html|MBC 보도]]
- 김운용 . . . . 13회 일치
| 직업 = 스포츠기관단체인, 대학교수
김운용은 연희전문대(현재의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미국 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유학을 다녀오며 익힌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1군사령관 [[송요찬]]의 부관으로 일했다.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의 부관으로 근무하였으며, 경찰의 실탄 요청을 송요찬이 거부하였다고 증언하였다.<ref>이문영,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3473.html “4·19때 경찰이 계엄사령관에 총탄 10만발 빌려달라 요청”], 한겨레신문</ref>
* 1961년 : [[장면]] 내각의 수반 의전 추서관을 역임함.
* 1963년 ~ 1968년 :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 [[영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을 역임함.
[[분류:1931년 태어남]][[분류:201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텍사스 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메리빌 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잉글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수감자]][[분류:IOC 위원]][[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동덕여자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한성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이화여자대학교 교수]][[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한국체육대학교 교수]][[분류:서일대학교 교수]][[분류:숙명여자대학교 교수]][[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분류:경기대학교 교수]][[분류:세종대학교 교수]][[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태권도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헌액자]]
- 네드 켈리 . . . . 13회 일치
1887년 10월, 경찰은 켈리 갱을 체포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관 네명을 보냈다. 하지만 캘리 갱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경찰 팀이 야영지를 차린 스트링이바크 크리크(Stringybark Creek)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관들을 습격해 세명[* 로니건 순경(Constable Lonigan), 스캔론 순경(Constable Scanlon), 케네디 경사(Sergeant Kennedy).]을 살해하고 한명[* 매킨타이어 순경(Constabel McIntyre).]을 붙잡았다. 이후 켈리 갱은 호주의 [[은행강도|은행을 털었다]]. 1889년 2월에 네드 켈리에게 걸린 현상금은 8,000 파운드로 올라갔지만 켈리 갱은 잡히지 않았다. 켈리 갱이 최후를 맞은건 1880년 6월이 되어서였다.
1880년 6월 27일, 켈리 갱은 빅토리아 주 글렌로완(Glenrowan)의 한 여관에서 경찰에게 포위당한다. 네드는 근거리에서 총알을 막아낼 수 있는 갑옷을 입고 밖으로 나타났지만 보호되지 않은 두 다리에 총을 맞고 쓰려졌으며, 조 번은 경찰이 불을 지른 여관에서 뛰쳐나오다가 사타구니에 총을 맞고 죽었다. 댄 켈리와 스티브 하트는 여관이 불타 무너진 후 잔해 속에서 소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렇게 켈리 갱은 괴멸했다. 유일한 생존자는 네드 켈리 뿐이었다.
네드 켈리는 제릴더리(Jerilderie)의 은행을 털며 편지 하나를 남겼다. "제릴더리 편지[* Jerilderie Letter]"라고 불리는 이 편지는 1870년부터의 켈리 갱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당시 호주의 경찰이 부패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편지는 경매에 나와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이 사들였다. [[http://search.slv.vic.gov.au/primo_library/libweb/action/dlDisplay.do?vid=MAIN&search_scope=default_scope&docId=SLV_VOYAGER1636991&fn=permalink|전자책으로도 보게 해 주는 것 같으니 관심 있으면 클릭.]] 오른쪽의 View Online을 누르면 된다. 흘려쓴 영문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9세기에는 사형된 범죄자의 얼굴로 [[데스마스크]]를 만들었다. [[골상학]]에 근거해 분석하기 위한 용도였는데, 그 이유로 네드 켈리의 데스마스크도 만들어졌다. 현재 이 데스마스크는 [[http://www.nma.gov.au/collections-search/display?app=tlf&irn=76705|국립 호주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https://www.slv.vic.gov.au/search-discover/explore-collections-theme/australian-history/ned-kelly/ned-kelly-fact-sheet|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홈페이지- 네드 켈리 자료표(영어)]]
[[http://www.nma.gov.au/exhibitions/irish_in_australia/bushrangers|호주 국립 박물관 홈페이지 - 호주의 아일랜드인 전시관 페이지(영어)]]
[[http://ergo.slv.vic.gov.au/explore-history/rebels-outlaws/bushrangers/capture-kelly-gang|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산하 ergo 웹사이트 - 켈리 갱의 체포(영어)]] - 켈리 갱 단원의 소사체 사진이 있으니 주의.
- 레드 오케스트라 2: 스탈린그라드의 영웅들 . . . . 13회 일치
돌격병.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병과. Frontline Solder 등급까지 올라가면 권총(C96/TT33)이, Veteran 등급까지 올라가면 적국의 기관단총(PPSh-41/MP40)이 해금된다.
정예 돌격병.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병과. Frontline Solder 등급까지 올라가면 권총(C96/TT33)이, Veteran 등급까지 올라가면 돌격소총(MKb42(H)/AVT-40)이 해금된다.
기관총사수.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병과. Frontline Solder 등급까지 올라가면 권총(C96/TT33)이, Veteran 등급까지 올라가면 적국의 기관총(DP-28/MG43)이 해금된다.
공병. 기관단총, 대전차 수류탄, 휴대용 폭약으로 무장한 병과. Frontline Solder 등급까지 올라가면 권총(C96/TT33)이, Veteran 등급까지 올라가면 반자동소총(G41/SVT-40)이 해금된다.
지휘관. 소대장이다. 각 진영마다 한명 밖에 할 수 없다. 기관단총, 맵 곳곳에 설치된 무전기로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 기관단총
* 경기관총
* 거치된 기관총
맵 곳곳에 거치된 기관총. 과열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맥스 페인/줄거리 . . . . 13회 일치
>인생은 좋았다. 달콤한 여름 날의 해넘이, 깔끔하게 깎인 잔디밭의 싱싱한 냄새,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뉴저지의 강 너머 집.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딸.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되었다. 하지만 꿈이라는건 보고 있지 않으면 무너지는 나쁜 습관이 있다.
로스코 거리 역에서 내린 맥스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써진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곳에는 교통경찰 하나가 죽어 널부러져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맥스는 권총을 뽑아 든 후 수색을 계속한다. 역 안에는 정체모를 일당들이 들이닥쳐 교통경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맥스는 교통경찰관 한명을 구해내는데 성공한다. 교통경찰관은 자신을 지하철 통제실로 데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맥스가 교통경찰관을 지하철 통제실 앞까지 데려다 주자 교통경찰관은 통제실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문을 연다. 하지만 통제실은 이미 괴한들에게 점령당해 있었고, 교통경찰관은 괴한의 산탄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맥스는 통제실 안에 있는 괴한들을 모두 처리하고는 전력이 끊겨있던 2호선에 전력을 공급한다.
* 호텔 앞 도로의 양 옆은 경찰 버스로 막혀 있다. 본부에서 아무리 무전을 날려도 응답하지 않는데, 한쪽 경찰 버스가 뒤집어져서 불타고 그 곁에 경찰관들 시체가 있는걸 보면 펀치넬로 마피아들에게 털린 듯. 경찰 뭐하냐.
맥스는 미셸은 포옹한다. 미셸은 사무실에서 바이킹에 관한 이상한 메모를 봤다고 말한다. 맥스는 미셸에게 지금은 해야할 일이 있으니 저녁에 얘기하자고 말한다. 포옹을 나누는 둘 뒤에서 또다른 맥스가 나타나 "타락천사의 살"[* The flesh of fallen angel. 작중 극중국인 주소불명(Address Unknown)에서 등장하는 분홍색 플라밍고의 대사. 잭 루피노를 비롯한 발키리 중독자들이 읊조리는 소리이기도 하다.]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탈출을 감행하던 맥스는 혼이 우든을 협박하기 위해 보낸 비디오를 발견한다. 우든이 매춘부인 캔디 던과 성관계를 하는 비디오였다. 맥스는 이 정도는 우든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축에도 못 낄거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나서의 담보로 쓰기 위해 비디오를 챙겼다.
지하로 가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맥스는 헬리콥터의 기관총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바로 옆 엘레베이터로 뛰어내려 다시 지하로 향한다. 그곳에 있던 혼의 부하들을 전부 처리한 맥스는 보안 컴퓨터를 박살내 엘레베이터가 회장실로 갈 수 있게 한다.
혼의 펜트하우스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맥스는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혼은 펜트하우스에서 기관단총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맥스에게 살려달라고 빌지도, 맥스에게 뇌물을 줘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맥스와 혼 모두 이 일이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끝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찰들이 에이저 코퍼레이션 본사로 몰려들며 내는 사이렌 소리가 맥스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혼은 부하들에게 맥스를 처리할 것을 명령한 후 도망친다. 맥스가 부하들을 전부 해치우자 그녀는 헬리콥터를 불러 펜트하우스에 기관총을 퍼부었다. 그래도 맥스가 죽지 않자 혼의 부하들이 맥스를 죽이기 위해 들어온다. 맥스는 이들을 죽인 후 부하들이 들어왔던 방으로 나가 혼을 쫓기 시작한다.
- 박홍우 . . . . 13회 일치
대전고등법원으로 재직하던 2015년 2월 대전고등법원 제3행정부 재판장으로서 행정본안재판의 일부를 직접 맡았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 배석판사 시절인 1995년 시위 진압과정에서 최루탄에 도망가다가 넘어져 질식사 사망한 성균관대 학생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망인의 위자료를 5000만원 인정한 것과 2004년 [[세녹스]]의 석유사업법 위반 사건에서 1심에서의 무죄판결을 파기하고 유죄를 선고한 것을 들었다.<ref>[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1509100056]</ref>
* [[1993년]] ~ [[1995년]] [[헌법재판소]] 연구관 파견
* 정부불신임제도에 관한 입법론적 고찰 (1979) <ref>[http://www.kcllaw.com/prof/?no=667]</ref>
* 연차유급휴가권, 재판자료 제39집: 근로관계소송상의 제문제(상), 법원행정처 (1987)
* 선거구획정에 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동향, 헌법논총 제5집, 헌법재판소 (1994)
* 민사소송법 제426조 제3항의 위헌여부에 관한 고찰, 세계헌법연구 제1호, 국제헌법학회 한국학회 (1994)
* 재산권 제한의 법리와 그 적용한계, 재판자료 제77집: 헌법문제와 재판(하), 법원도서관 (1997)
* 헌법심판절차진행중 청구인 등의 사망과 관련되는 문제점 검토, 법과 인간의 존엄: 청암 정경식 박사 화갑기념논문집, 박영사 (1997)
* 정리채권 등의 신고·조사·확정에 있어서의 문제점, 재판자료 제86집: 회사정리법·화의법상의 제문제, 법원도서관 (2000)
* 환경권의 법적 성질, 재판자료 제94집: 환경법의 제문제(상), 법원도서관 (2002)
* 공판중심주의적 심리진행 방법, 재판자료 제104집 : 바람직한 민·형사소송 실무운영방안, 법원도서관 (2004)
* 국회의원지역선거구간 인구편차의 헌법상 한계, 현대 공법의 이론과 판례의 동향, 세계헌법학회 한국학회 편, 도서출판 관악사 (2014)
2007년 서울고등법원 재판장 시절 [[김명호 (1957년)|김명호]] [[성균관대학교]] 전 조교수의 재임용 불복 소송 항소심에서 패소 판결을 했다가 결과에 불만을 품은 [[김명호 (1957년)|김명호]] 전 교수로부터 집 앞에서 석궁 테러를 당했다. 이 사건을 소재로 [[2011년]] 영화 《[[부러진 화살 (2012년 영화)|부러진 화살]]》이 제작되었다.
- 소진은 . . . . 13회 일치
'''소진은'''(蘇鎭殷, <small>일본식 이름:</small> 伊蘇正峰, [[1892년]] [[1월 18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겸 경찰 간부로,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 삼립정이다.
[[조선총독부]] 군수를 지낸 [[소진하]](蘇鎭夏)와는 형제 관계이며, 아버지는 [[소영규]](蘇榮奎)이다. [[1911년]]에 문관보통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12년]] [[1월 29일]]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김산군 서기로 임명되었고, 1914년부터 1920년까지 [[김천군]] 서기로 근무했다.
[[1921년]]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경부에 임명되었으며, 왜관경찰서 경부로 발령받은 뒤부터 경찰 간부로 이동했다. 상주경찰서(1922년 ~ 1923년), 포항경찰서(1925년 ~ 1929년)를 거쳐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부(1930년 ~ 1931년)로 근무하면서 정치범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경상북도 경찰관교습소 교관으로 활동했고, [[1933년]] [[5월 12일]]에는 도경시로 승진하면서 전라북도 경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때부터 전라북도 순사교습소장, 순사징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4년]] [[11월 27일]]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이동한 뒤부터 도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 순사부장 시험위원으로 활동했고, 1935년 8월 23일 평안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5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를 받았으며, [[1936년]] 10월 16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10월 21일에는 평안남도 보안과장, 도순사부장 시험위원, 도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다시 관계로 돌아와 총독부 군수직을 지냈다. [[평안북도]] 선천군수(1937년 8월 6일), 의주군수(1941년 3월 31일 임명)를 역임했다. 1938년 8월 1일 당시에는 종6위에 서위되어 있었으며, 그밖에 쇼와 대례 기념장(1928년 11월 16일), 훈8등 서보장(1930년 2월 12일), 훈7등 서보장(1933년 9월 4일), 훈6등 서보장(1935년 9월 9일), 훈6등 단광욱일장(1940년 4월 29일), 훈5등 서보장(1941년 8월 9일), 일본적십자사 유공장(1944년 12월) 등을 받았다. 특히 훈6등 단광욱일장은 선천군수 재직 시절 [[중일 전쟁]] 당시에 군대의 숙영 및 급식, 군용물자의 조달, 군대 군인 및 파견 가족의 후원 및 위로, 국채 소화 및 저축 장려, 국방헌금 및 애국기 헌납자금 모집, 국방 사상 보급 및 선전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여 받은 것이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경시 부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와 경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분류:1892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진주 소씨]]
- 식극의 소마/211화 . . . . 13회 일치
* [[카와시마 우라라]]는 화제를 돌려 연대식극의 심사의원을 소개한다. 그들은 WGO란 집단에서 나온 집행관들이다.
* 흑발여성은 일등 집행관이자 삼인 중 리더 "안", 백인 남성은 이등 집행관 "샤름", 흑인 남성은 이등 집행관 "이스트와르".
* 안은 교전에 정식집 유키히라가 없다는 이유로 비꼬는 듯한 말을 마구 하는데, 관중들이 거기에 편승해 엄청난 야유와 비난을 퍼붓는다.
* [[카와시마 우라라]]도 어쨌든 토오츠키의 학생인 탓인지 소마의 조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라 일축한다. 그리고 화제를 돌려서 연대식극의 심사를 맡은 3인의 심사의원을 소개한다. 그동안 심사의원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이사미 알디니]]와 [[아라토 히사코]]도 어떤 사람들이 나올지 주목한다. 그런데 나오라는 심사의원은 안 나오고, 왠 여성이 전화번호부만한 책 뭉치를 낑낑대고 옮긴다. 그녀는 소마의 조리대 옆에 책뭉치를 내려놓고 한숨 돌린다. 소마는 황당해하는데, 그때 관중석에서 여성이 내려놓은 책을 보고 동요를 일으킨다. 반역자가 갇힌 감옥에서도 잡학다식한 이부사키는 그 책이 뭔지 알아보고 거품을 문다. 하지만 소마는 그런 분위기에 영 따라가지 못하고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상황인지 짐작하지 못한다.
* 이부사키는 그들이 틀림없이 WGO 집행관이라고 단언한다. WGO란 "월드 그루메 오가니제이션"의 약자. 세계의 모든 맛집에 별 세개로 평가를 남기며 1년에 한 번 이 결과를 모아서 책으로 엮는다. 이들에게 별 하나라도 받는 것은 요리사로서 대단한 영광이며 반대로 별을 하나라도 잃게 되면 아무리 장사가 잘 되던 가게라도 망하고 없어진다. 요리사들의 존경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는 조직이 이들 WGO인 것이다.
우측의 여성이 일등 집행관 "안". 일행의 리더다. 가운데의 백인 남성이 이등 집행관 "샤름". 좌측의 흑인 남성은 이등 집행관 "이스트와르"다.
안은 "교전에 실리지 않으면 가게도 아니다"란 말이 있다면서 "맞는 말이긴 하지만 뭐 어떠냐? 앞으로 실리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설교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교전에 없어도 앞으로 당신은 살아갈 것이다. 부모님한테 감사하라"는 돌려까기 가득한 말까지 한다. 뜻밖의 동정을 받은 소마는 동료들에게 "이런 놈들로 심사의원해도 되겠냐"고 묻는데, 소마야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만 동료들에겐 큰일 날 소리로 들린다. 유키노가 "실례되는 소리하지 마라"고 꾸짖자 관중들고 편승해서 야유를 퍼붓는다. B급 그루메 주제에 나대지 말라던가 그런 막 만든 요리로 센트럴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둥 폭언을 퍼붓는데 그때 안이 나선다.
과연 그녀의 발언력은 대단했다. 시장떼기같이 시끄럽던 장내가 단숨에 고요해진다. 소마도 그런건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안은 자신이 소마를 바보취급, 혹은 격려한 것은 단지 별이 없기 때문에 한 말일 뿐이지 심사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 샤름도 거기에 동의하고 이스트와르는 "신과 교전에 맹세하고 정당한 심사를 할 것"이라 장담한다.
* 잠시 후 소마와 네네의 요리가 모두 완성된다. 카와시마는 우선 네네의 요리부터 소개한다. 그녀의 요리는 벚꽃새우 카키아게를 곁들인 9할 소바. 소바의 매끈한 색채에 관중들이 할 말을 잃는다.
- 영양군 . . . . 13회 일치
영양군 관내에 있지는 않지만 [[2016년]] [[12월]]에 [[당진영덕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신설된 [[동청송·영양IC]]와 [[청송IC]] 덕분에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다.
== 관광 ==
안 그래도 전국에서 제일 낙후된 지역인데 볼 것도, 놀 것도 많이 없다. 즉 관광지로서도 많이 미약한 지역(...) 일단 관내에 있는 관광지로는 일월산, 수하 계곡 정도. 그 외에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 및 조지훈 생가가 나름 볼 만하다.
수비면 수하 계곡은 한때 반짝 피서지로 각광받던 적이 있었지만,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이할 만한 편의시설이 매우 부족했고, 무엇보다 그 관광객들이 온갖 쓰레기를 유기해놓고 가는 바람에 환경이 상당히 나빠져 결국 시들시들해졌다.
참고로 어지간한 [[구(행정구역)|구]]는 물론이거니와 인구가 많은 [[동(행정구역)|동]]의 학교보다 개수가 적다. 대표적으로 [[강서구(서울)|강서구]] [[화곡동]]과 더불어 [[관악구]] [[신림동]]과 [[봉천동]], [[노원구]] [[상계동]]이 그 예이다.
|| '''관외사전투표''' ||<:>{{{#1870B9 34.80%}}}||<:>28.20%||<:>15.54%||<:>12.51%||<:>7.66%||<:>{{{#696969 △6.60}}}||<:>||
*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적은 인구로 인해 [[사회복무요원]]의 근무가 굉장히 편한 곳이며 일하기 쉽게 되어 있다. [[울릉도]]는 섬이라는 특성상 생활이 불편하다 보니 영양군이 유리한 편. 1년에 2명만 모집하는데 일단 훈련만 받은 이후에는 영양군으로 거주지 이전시 100% 이곳으로 받아야만 되서 3명 이상만 되면 그 이후부터 어거지로 받아야 되는 특성을 이용하여 근무가 힘든 사람에게 대안으로 떠오르는 곳이다.[* 그 밖에도 복무기관 자리가 5년이 지나도록 공석이 나지 않아 자동으로 [[제2국민역]]으로 편입되었다는 얘기도 종종 들려온다.]
* 영양군의 5면 중 하나인 수비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밤하늘이 어두워서 [[별자리]]를 관측하기 좋은 곳이다. 덕분에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됐다. 20년 전에는 [[가로등]] 하나 없는 감천유원지[* 말이 유원지지 그냥 개울가 있고 돌 있고 소나무 있는 곳이다.]에서 '''육안으로 [[은하수]] 관측이 가능'''한(...) 굉장한 곳이었다. 아직도, 여름철에 수비면에서 빛이 없는 마을 입구, 다리 위, 밭에 누워 밤하늘을 보면 은하수가 잘 보인다.
* [[김재수]] -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 이순재(1935년 10월) . . . . 13회 일치
||<#878787> '''{{{#EEE156 본관}}}''' ||<(> [[광주 이씨]][* 광주 이씨 21세손 '載'자 항렬이다.] ||
현재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전국 노래자랑]]의 [[송해]](1927년 생) 다음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현역 연예인'''이자[*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자신이 유일하게 형님으로 부른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나이 많은 현역 원로 배우. 오랫동안 연기 생활을 했으며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허준]], [[상도(드라마)|상도]], [[야인시대]], [[거침없이 하이킥]], [[이산(드라마)|이산]], [[베토벤 바이러스(드라마)|베토벤 바이러스]] 이외에도 수많은 히트작에 출연했다. 빈틈없는 자기관리와 신념, 그리고 대체로 선역을 맡아서 이미지가 좋다. 연극부 출신이면서, 집음 장비가 나빴던 옛날 연극무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래서 고령인데도 발성과 발음이 아직까지도 뛰어나다. 복합모음인 ㅙ와 단모음인 ㅚ 발음을 구분할 만큼.[* 보통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시켜봐도 10에 9는 제대로 발음 못한다. 아나운서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ㅙ, ㅚ 는 커녕 장모음 단모음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이순재가 무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TBC]] 드라마 남우주연상도 2회 이상 받았을 정도로 입지가 탄탄한 배우이며, 당시에도 실력을 인정 받았다.[* 오히려 위에서 거론된 대기만성형의 대표주자는 [[백윤식]]이다. 그도 한창 젊은 시절인 70-80년대에는 비중없는 조단역에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90년대 들어서 드라마 [[서울의 달]]로 주목을 받고 2000년대 들어서 영화판에서 굵직하게 활약하여 노년에 들어 입지를 굳힌 케이스다.] 한 마디로 [[이순재]]는 최고의 스타는 아니었으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구도자의 길을 걸은 덕택에 자기보다 인기 있던 스타가 모두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로 거듭났다.[* MBC에서 최민수의 노인폭행 누명을 다룬 특집 방송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제작진은 연예인들을 둘러싼 각종 악성루머들을 조명하며 한번도 구설수에 없는 이순재를 찾아가 비결을 물었다. 이순재가 말한 비결은 무조건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라는 것이었다.]
2009년에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업(애니메이션)|업(Up)]]'''에서 '''주인공 할아버지(칼 프레드릭슨)'''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일반적인 [[비성우 더빙]]' 수준이 아니라 '역대 애니메이션 [[비성우 더빙]] 사상 최고의 목소리 연기', '원작 초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평가를 받을 만큼 절륜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강수진(KBS 성우)|강수진]] 성우가 맥심 인터뷰에서 '대가는 어디를 가나 통하더라'며 칭찬을 했다.[[http://news.maxmovie.com/74030|#]]] --이것이 바로 이순재의 업(業, Karma, 카르마, 운명)이니라.-- 한 평론가는 "[[초콜렛]]"이 아닌 "쪼꼬렛"이라는 할아버지 캐릭터에 맞는 발음을 구사한 것을 극찬하기도 했다.[* 사실 이순재는 옛날의 후시녹음 체제 때부터 활동해온 배우라 발음과 발성이 좋은 편이고, 한국 드라마가 제대로 정착하기 전이었던 옛날 젊은 시절에는 성우로 일하면서 더빙을 해서 얻는 수입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방송환경이 개선되면서 오래도록 목소리 연기를 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그냥 이순재의 자기 관리와 연기력이 뛰어난 거다. 본인은 카메라 연기와는 방식이 달라서 쉽지 않았다는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http://extmovie.maxmovie.com/xe/index.php?comment_srl=2358142&listStyle=gallery&mid=movietalk&page=997&sort_index=regdate&order_type=desc&document_srl=764826|#인터뷰]] 적당히 유명세 마케팅으로 투입된 배우, 아이돌, 개그맨들과는 내공이 다르다. 애초에 가벼운 마인드로 연기하시는 사람이 아니다.]이순재가 맡은 배역의 오리지널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 에드워드 애스너.]도 연극활동은 1940년대[* 대학생이던 [[1947년]]도부터 활동했다.], 영화산업에서는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하는 베테랑 명배우다.
특히 [[금융감독원]]에서 보험 광고에 출연하는 모델 규정을 강화해서, 이순재 역시도 생명보험공사가 주관하는 [[보험설계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야 했다고. 그 결과, 역시 서울대 출신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동중에 모의고사 문제 풀기에, 보험사의 교육팀으로부터 교육, 자격요건에 해당하는 30시간 온라인 교육을 이수하고, 생명보험 관련 문제에서 60점 이상으로 낙방 한번도 없이 합격해 78세의 보험설계사가 되셨다.
항상 먼저 모범을 보이는 자세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보통 이순재 정도 되는 원로 배우는 촬영 시간을 앞당겨 주는 것이 관례인데도 다른 배우들이 자신 때문에 촬영 시간이 늦춰지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몇 시간씩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미투 운동]]과 관련해서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http://mnews.joins.com/article/22423348#home|일침]]을 날렸다. 한 방송에서 '미투운동을 접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제자나 부하를 내 마음대로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분들 다 아는 분들이라 깜짝깜짝 놀란다. 설마설마했는데 사실화됐다"며 "관객들이나 국민들한테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고 꿈을 접은 후배들을 향해서는 "자기 탓이 아니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연기) 할 수 있게 돼야 한다"고 연기 재개를 권유했다. 반면 가해자들을 향해서는 "이 분야를 다 떠나야 한다. 다 끝을 내야 하지 않겠나"라며 "다들 깊이 반성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겠다고 약속했으니 지금 한 약속을 잘 지키고 '나 죽었소'하고 평생 엎드려 있으라"고 충고했다.[* 그래도 본인 역시 구시대를 살아와서 나이가 있다보니 걱정되었는지 한 방송에서 하이킥에 같이 출연한 후배 배우 [[박해미]]와 같이 식사하면서 하이킥 찍을 때 자신도 그런 적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참고로 박해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밝인 적이 있다.) 근데 오히려 박해미는 "당시 별명이 '''야동 순재'''였음에도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 [[야망]](1994, MBC)/우역관
* 2002 문화관광부 문화의 날 보관문화훈장
* 2018 제9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 이시형 (1934년) . . . . 13회 일치
| 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 근무 = [[군의관]]
| 지휘 = [[군의관|군의관 군의무장교 공중보건의]]
| 기타 이력 = [[경북대학교|경북대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출신 <br /> [[경북대학교|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br />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br />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br /> [[삼성의료원|삼성의료원 서울강북삼성병원]] 원장 <br /> [[차의과학대학교]] 석좌교수 <br /> [[서울사이버대학교]] 석좌교수 <br/> [[원광디지털대학교]] 석좌교수
'''이시형'''(李時炯, [[1934년]] [[4월 30일]] ~ )은 [[대한민국]]의 [[교수|의과대학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의사]]·前 [[군의관]]이다. [[경북대학교]]·[[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대학교]] 외래교수를 역임하였으나 사실상 [[서울대학교]]와는 별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 [[대한민국 공군|공군]] [[군의관]] [[대위]] 예편
*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역임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심리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경북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경북대학교 교수]][[분류:차의과학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사이버대학교 교수]][[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원광디지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예일 대학교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이홍렬(코미디언) . . . . 13회 일치
||<#595959><:> {{{#FFFFFF ''' 본관 ''' }}} ||<(> [[덕수 이씨]][* 덕수 이씨 26세손 '烈'자 항렬이다.] ||
||<#595959><:> {{{#FFFFFF ''' 가족 관계 ''' }}} ||<(> 1남 2녀 중 둘째 ||
1990년대 중반에는 [[이홍렬쇼]]라는 [[토크쇼]]로 나름대로 토크쇼 MC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서세원쇼]]가 토크박스 하나에 의지한 것과 달리 다양한 코너로 굉장한 인기를 구가해 전성기에는 자타공인 최고 인기 토크쇼였지만 이홍렬 본인의 사정으로 100회를 채우고 그만뒀다가 2000년대 초에 다시 부활, 또 200회까지 채우고 막을 내렸다.[* 부활했을 당시에도 인기는 좋았다.] 프로그램 코너들 중에서는 특히 '참참참'이 유명세를 탔는데, 당시 유명 스타가 나와서 [[밤참]]을 만들면서 토크를 하는 방식이었다. 주재료는 [[라면]], [[만두]], [[참치]] 통조림 등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 맞아 맞아 참참참이라는 제목으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989|책]]까지 발매되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이 책을 발견하기는 거의 어려울 것이다. 관심이 있다면 인근 도서관을 뒤져보자. 이때 게스트와 같이 했던 놀이 '참참참'을 전국에 유행시켰다. [[롯데월드]]에는 이 코너에서 만들었던 메뉴를 상품화해서 파는 참참참 레스토랑도 있었다. 특히 참참참은 당시 일본 버라이어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숱하게 시도되었던 [[쿡방]]들이 우리나라 사정에 안 맞아 몽땅 망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장수했던 코너였다는 점도 특색이다.
2000년 말부터 2002년 초까지는 SBS의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 출연했다.[* 사실 시트콤에 출연하게 된 배경이 재밌는데, 당시 진행하던 자신의 토크쇼가 MBC의 [[세 친구]]에 시청률이 추월당한 후, 종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오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시트콤에 도전한 게 해당 작품이라고 한다.] 진지한 배역을 주로 맡다가 코믹한 배역에서 맹활약했던 [[노주현]]과 [[신구(배우)|신구]]와는 반대로, 기본 베이스는 코믹하지만 중년의 로맨스와 관련되어 진지한 연기를 할 때도 많았던 노홍렬이란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 1995년 <[[삼양식품]] 대관령 김치라면>
* [[2007년]]부터 [[크라제버거]] 홍대점을 운영하고 있어서 방문하면 가끔 볼 수도 있으며, 3번 망하고 4번째로 낸 가게라고 한다.지금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운영 중단을 천명해 놓은 상태다. 어째 사업과는 연관이 없어보인다.
* 점심 시간에 홍대 앞을 지나면 [[담배]] 피는 이홍렬을 구경할 수 있으나, 워낙 [[연예인]]이 깔린 동네라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
* 과거에 음악활동을 한적이 있으며, 1998년에는 음반을 낸 적도 있다. 일종의 자선 음반으로 기획하였고, 일부 기존 노래를 커버한 노래(ex. 트로트곡 <물레방아 도는 내력>)도 좀 있다. 그외에도 Friends라는 곡은 함께 한 아티스트가 아홉이고, 마지막 트랙인 발라드 넘버 '다시 한번 해봐요'는 그를 비롯한 당대 유명가수들과 합창했는데, '''함께 한 아티스트가 열아홉이나 된다.''' 그러나 흥행은 [[흑역사]]. 지금은 정반 구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영희네 담벼락에 누가 써 놓은 이야기>라는 곡은 그럭저럭 유명하다. [[http://excf.com/bbs/view.php?id=EX2&no=234|들어보기]] 해당 곡의 작곡자는 그 유명한 [[김창완]]이다. 이 앨범 전곡을 이홍렬은 대인배스럽게도 자신의 홈페이지에 [[http://bbangco.com/board/zboard.php?id=song&page=1&page_num=20&category=&sn=off&ss=on&sc=on&keyword=&prev_no=15&sn1=&divpage=1&select_arrange=headnum&desc=asc|공개]]해놓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들어보자. 몇몇 곡의 경우 이홍렬의 라이너노트도 곁들여져 있다.
* [[결혼]]은 비교적 늦게 했으며[* 1987년 결혼 당시 34세. [[아내]]는 26세.], 1987년(당시 32세)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입학한 것으로 유명한 [[만학도]]. 그래서 그런지 상당한 다독가라고 한다. 2년간 [[일본]]에 체류 한 적이 있다.[* 당시 한참 잘 나가던 시점에서 갑자기 [[일본]]으로 공부한다고 떠난 경우였다. 때문에 [[전유성]]같은 이들은 대단히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체류 경험에 바탕해서 쓴 [[일본]], 일본어 서적도 있고, "아버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 노릇하기는 어렵다"라는 자녀 교육서를 쓴 적도 있다. 그 외 아버지에 관련된 책을 번역했으며 당연히 일본어에 매우 능통해서 일본인과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
* 자신에게 일어났던 여러 소사(小事)들을 꼼꼼히 메모하는 습관이 있기로도 유명하다. 그냥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식으로 쓰는게 아니라 날짜를 정확히 쓰고 중요한 사건을 간단히 소회하는 형식으로 기록해 뒀다. 인터넷 초창기 이홍렬이 직접 만든 홈페이지에 이러한 내용들이 남겨져 있었다. 또한 이홍렬의 두 아들이 태어난 날에 신문 1면을 스크랩 해 놓은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이 [[사진]]과 관련된 비화가 있는데, 당시 [[무명]] 개그맨이었던 이경규가 자신도 개그맨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방송사 선배와 사진을 찍고 싶어했는데, 이경규에게 그나마 잘해주고 가장 친한 [[선배]]였던 이홍렬이 이 소식을 듣고 같이 사진을 찍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은 후 이경규는 감히 선배인 이홍렬과 사진을 찍는데 옆에서 쪼개고 건방진 표정을 짓는다는 이유로 모 선배 개그맨에게 '''코피까지 흘릴 정도'''로 얼굴을 주먹으로 얻어맞았으며, 다른 선배 개그맨들에게도 어떻게 감히 후배가 선배랑 사진을 찍냐고 갈굼받았다고 한다...[* 개그계의 대표적인 [[똥군기]]의 예.] 이홍렬은 이경규에게 그나마 잘해주던 천사표 선배 중 하나였다. 나중에 가면 이경규도 이홍렬에게 "때려 봐. 때려 봐."라고 ~~쓸데없이~~약올렸다가 한 대 맞기도 했고, 이홍렬과 맞 담배를 피질 않나, 담뱃불 없다고 이홍렬이 피던 담배를 뺏어서(!) 자기 담배에 붙이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홍렬은 나중에 [[최양락]]한테 지나가는 식으로 뒷담화를 했는데 최양락은 말 끝나기 무섭게 자기도 똑같이 이경규를 따라했다. 그러자 참고 참던 이홍렬이 폭발해 "이 [[새끼]]가 더 나쁜 놈이네!"하면서 [[구두]]로 최양락을 때렸다고 한다.[* 최양락의 깐족거림은 개그계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주병진 족발사건이 대표적인 예.](...) 한마디로 매를 벌어서 맞은 것.
* 2001년부터 풀벌[* 벌이 아닌 털뭉치를 뜻하는 영어 furball에서 따 왔다고 한다.]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지난 2018년 7월 5일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88162|관련기사]] 그리고 풀벌을 키우던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PM_kmFTaaoI|연재하고 있다.]]
- 전효성 . . . . 13회 일치
||<#00CED1> '''{{{#000000 별명}}}''' ||<(> 전리다, [[닭튀김|치킨]] 부사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알리사 보스코노비치]], 잇몸돌, 잇몸소녀 ||
2차에서 탈락했으나, 그녀를 눈여겨본 회사 관계자의 권유로 [[엠넷]] <배틀신화> 서바이벌 공개 오디션에[* 여기서 배출한 가수들로는 [[빅뱅(아이돌)|빅뱅]]의 [[승리(빅뱅)|승리]],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가인(브라운 아이드 걸스)|손가인]], [[G.NA|최지나]]가 있다. 정작 배틀은 [[모닝구 무스메]] 7기 오디션 합격자처럼 [[가든파이브|대박 망했다.]]--그리고 [[G.NA|지나]]도 불미스러운 일로 [[망했어요]]--] 참가하게 되고, 참가자 200명 중 당당히 12명 안에 들면서 우승까지 하게 된다. [[http://www.youtube.com/watch?v=fSARVWG4d9Q|우승]] 후 효성은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때는 연습생 중 막내였다. 연습생 시절 학교 성적이 좋은 편으로, 전교 3등까지 해봤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연습생들의 성적 저하를 걱정하는 보호자들에게 회사 관계자들이 해주는 고정 멘트로 "본인 [[의지]]가 있고 [[노력]]이 있으면 전교 3등도 해요"가 생겼다고 한다.[* 1대100에서 2번 1인으로 나가서 2연속 7단계까지 진출했고 진짜 사나이 여군 특집에서는 8인의 멤버들 중 쪽지시험에서 유일하게 3연속 합격하였다.]
2018년 10월 29일 토미상회 엔터테인먼트와 새로 계약했음을 알렸으나, [[TS엔터테인먼트]]가 전속계약 위반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11월 14일 전속계약효력부존재확인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TS와의 관계를 일단락했다. 승소로 TS 측에서 전효성에게 1억 3000여만원과 소송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경축 탈 TS!!-- 소송이 끝난 뒤 자신의 SNS에 게시물을 올리면서 후련한 마음을 표출하기도...[[https://www.instagram.com/p/BqJLhWKgkdx/?utm_source=ig_share_sheet&igshid=10ae4h7tbvsnj|#]][[https://www.instagram.com/p/BqJ-IUlAaVT/?utm_source=ig_share_sheet&igshid=1my9qr2d0tmde|#]]
5월 7일 정오에 음원이 공개되었고 당일날 전효성 관련 실시간 검색어가 뜨고 검색어 1위에도 오르면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며 다음 날 자정이 넘도록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2위를 계속 유지했다.
선 음원 후 뮤비 공개 마캐팅 전략 역시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아마 뮤비 공개 전까지 음방버프로 어느정도 버티고 난 후 뮤비로 다시 화제성을 끌어모으겠다는 전략으로 보이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차라리 첫날에 음원과 뮤비를 동시 공개하여 화제성을 한방에 쓸어담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듯...[*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전효성은 섹시가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뮤비에 좀 더 관심이 가는게 대중들의 일반적인 생각일 탠데~~TS는 먼 생각일까...~~]~~첫날 실검 올킬했을 때 공개했으면 하루만에 조회수 칠십만은 찍었을듯...~~
3월 8일 SNS에 [[https://www.instagram.com/p/BCshdNOTeGn/?taken-by=secrettimehs|물망초 사진]]을 올렸는데 이것이 앨범 가사 내용과 관련된 것이 아닌지 추측이 이어지는 중이다.
3월 11일 시크릿 공식 페이스북에 전효성의 솔로앨범 티저 이미지와 자세한 컴백 일정이 떴다.[[https://www.facebook.com/SECRET2009/photos/a.185586928172375.49069.181948985202836/1087586711305721/?type=3&theater|#]][[http://www.xportsnews.com/jenter/?ac=article_view&entry_id=701833&_REFERER=http%3A%2F%2Fsearch.naver.com%2Fsearch.naver%3Fwhere%3Dnexearch%26ie%3Dutf8%26sm%3Dtab_etc%26os%3D169117%26pkid%3D1%26mra%3Dbjky%26query%3D%25EC%25A0%2584%25ED%259A%25A8%25EC%2584%25B1%26noq%3D%25EC%258B%259C%25ED%2581%25AC%25EB%25A6%25BF%26url%3Dhttp%253A%252F%252Fwww.xportsnews.com%252F%253Fac%253Darticle_view%2526entry_id%253D701833%26ucs%3DcHpXLxI8tOLE|기사]] ~~그리고 [[물망초]]와 관련된 떡밥도 해소되었다.~~
샤이보이 활동 당시 <더스타>와의 인터뷰에서 보여준 흐규흐규 애교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g1uXQkGvwo|영상]]~~지금으로 치자면 [[혜리]]급???~~
시크릿이 <I'm in Love>로 컴백 후 8월 16일 방영된 KBS [[연예가중계]]에서 자신은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의 외모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그러면서 밝힌 이상형이 [[강동원(배우)|강동원]](...)~~ 그런데 MC가 [[정우성]]의 이상형이 전효성이라고 밝히니까~~[[유이(배우)|유이]]가 이 글을 싫어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hOVTqm0Cvk|바로 정우성으로 갈아탔다]](...)~~[[장윤정|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7월 22일 [[소나무(아이돌)|소나무]] 컴백 무대에 깜짝 응원을 가기도 했다.[* 사실 시크릿과 소나무는 한솥밥을 먹는 친언니와 친여동생의 관계와 같으므로 서로 친분이 매우 깊다. 실제로도 [[소나무의 펫하우스]]에 시크릿 멤버들이 [[한선화]]만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 전원이 출연해줬다.] 처용 촬영날에 가서 그런지 복장은 교복차림(...) 그리고 소나무는 멤버 7명 중 5명이 170cm이상이라 체격들이 장난이 아니다. 그 틈바구니에 전효성이 끼어서 이질감이 좀 있다. [[https://twitter.com/Secretimehs/status/623808326954921984|#1]]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0&aid=0000002411|#2]]
2013년 11월 12일에 인터넷을 통해 대학시절 개인정보가 털리기도 했다.[[http://sports.donga.com/3/all/20131112/58831703/2|기사]]~~[[11월 괴담]]을 제대로 겪고 있다. 안습~~ 소속사 측에서는 학교측에서 사과 받은 상태이며 [[http://www.ob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2020|추후 상황 봐서 법적 대응 하겠다고 밝혔지만]][[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388422|법적대응은 와전된 내용이며 피해 내용은 경미한 편이라고 한다.]][* 참고로 2013년 11월 12일까지의 시기는 [[에일리]] 누드 유출 사건이나 [[은혁]] 트위터 해킹 사건, [[탁재훈]], [[이수근]], [[토니 안]] 불법 도박 사건 등 연예계 관련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진 시기이기도 하다.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46389|기사]]]
== 관련 링크 ==
- 정종원 . . . . 13회 일치
|직업 = [[은행장]],[[금융인]], [[관료]]
정종원은 잠시 부친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관직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1922년부터 1941년까지 19년간 경상도 일대와 평안남도에서 경찰 요직을 거쳤다. 이어 1941년부터 1943년까지 평안남도에서 성천군수, 순천군수를 역임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 가족관계 ==
== 교우관계 ==
대구은행 설립자 정재학의 후손인 정종원(3남)과 [[정운용]](맏손자)은 1957년 무렵 조흥은행의 주도권을 두고 동일은행계의 대주주였던 조선황실 외척인 민 씨 가문과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흥은행은 일제 말 동일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을 흡수한 한성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은행이다. 따라서 양대 대주주인 [[경상합동은행]](전 [[대구은행]])계 정씨 집안과 동일은행계 민 씨 집안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관심사였다.
민 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가게 됐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 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한 바 있다.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
정종원은 이병철마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정계 관계에 인맥이 두터웠다. 게다가 지역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이병철과 달리 정종원은 일제 강점기 내내 최고층 재벌2세로 성장한 초상류층이었다. 정종원행장은 1920년 동아일보 창간발기인(총 79명)으로 참여, 언론계와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ref>동아일보 1970년 4월1일 13면 전민족세력의 집결 동아일보 발기인</ref>
이병철은 당시 대구에서 서울 장충동1가 110번지 <ref>매일경제 1974년 9월 11일 7면 고액재산세 부과대상자</ref> 로 거처를 옮겼다. 정종원 자택 인근이었다.<ref>경향신문 1981년 6월 22일 9면 경제인록 22 재벌전횡 부른 귀속주 공매</ref><ref>매일경제 1987년 11월 20일 11면 이병철 그의 생애와 경영반세기</ref> 이웃이 된 이후 정종원과 이병철의 부인들은 친분이 두터워졌고 그로 인해 자손들은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정종원의 막내사위인 [[장유상]] KDI정책대학원 교수 (전 보스턴대 교수)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자문역을 맡으면서 삼성의 미국 진출에 기여했다.<ref>매일경제 2011년 1월 16일</ref>
정부가 조흥은행 등 시중은행의 주식을 모두 거둬들이면서 주요 은행의 지배주주는 정부가 차지하게 됐다. [[관치금융]]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부는 1960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금융산업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자금공급은 은행 자율보다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정종원 행장이 5.16쿠데타 직전 은행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부는 은행을 정부 경제성장전략의 들러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은행은 대출심사권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은행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은 철저히 통제됐고, 사실상 제대로 된 경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ref>경향신문 1965년 3월 11일 시은경영태세 대전환 필요</ref><ref>매일경제 1970년 11월 3일 3면 금융은 정상화될까</ref><ref>매일경제 1979년 5월 1일 1면 관치에 밀리는 자율화</ref>
한편 [[박정희]] 정권은 새롭게 지방은행들을 설립하면서 [[이수그룹]] 창업주인 [[김준성]]에게 [[대구은행]]을 맡겼다.<ref>동아일보 1969년 12월 19일 3면 김준성 지방은행 붐을 선도</ref> 현 대구은행은 조흥은행의 모태를 이룬 [[정재학]]의 대구은행과는 무관하다. 이름만 되풀이 썼을 뿐이다.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7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니혼 대학 동문]]
- 최세창 . . . . 13회 일치
|본관 = [[경주 최씨|경주]](慶州)
'''최세창'''(崔世昌, [[1934년]] [[4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慶州), [[호 (이름)|아호(雅號)]]는 유광(維光)이다.
[[1953년]] [[경동고등학교|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57년]]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77년]] 육군 특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으로 보임되었고 [[1979년]]에 일어난 [[12·12 군사 반란]] 당시 [[하나회]]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3공수특전여단을 지휘했다.
[[1980년]] [[5월 20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3공수특전여단에 실탄 배부와 실탄 사용을 지시했으며 나중에 사단장, 육군 제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합동참모의장,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 [[대한민국 국방부]]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모의 참여 주요 임무 종사·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8월 15일 사면됐다.<ref>{{뉴스 인용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3기 졸업
|직책 =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하나회]][[분류:경동고등학교 동문]][[분류:경주 최씨]][[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
- 페어리 테일/545화 . . . . 13회 일치
"이리스의 모험"은 그녀가 자신을 모델로 만든 주인공 "이리스"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었다. 출판관계자들과 작가들이 그녀를 축하하기 위해 몰려온다. 그들은 인기 소설의 원작자가 이런 미인일 줄은 몰랐다고 공치사를 늘어놓는다. 그러다 누군가가 "그녀는 사실 페어리 테일 길드 소속"이란 말을 꺼낸다. 그 말이 퍼져나가자 이 경사스런 자리에 왜 저런 이색적인 집단이 참석했는지 이해가 갔다.
* 다른 길드들은 대체로 전쟁 전과 다를 게 없다. 세이버투스는 매년 하는 푸드 파이터 대회를 또 개최했고 또 [[미네르바 올랜드]]가 석권했다. 최종 경쟁자였던 [[스팅 유클리프]]와 [[로그 체니]]를 압도적으로 앞지르는 스코어. 블루 페가수스는 [[이치야 반다레이 코토부키]]가 IOY 자리에 오르며 전성기를 구가 중. 변동이 심한건 머메이드 힐. 주간 소서러의 전속 모델팀으로 발탁되면서 [[카구라 미카즈치]]가 관심도 없던 모델 일을 시작했다. 어쨌든 다들 잘 지내고 있다.
* 그레이와 쥬비아는 저런 식으로 결론이 난 셈이지만 그 말고도 신경쓰이는 관계는 더 있다. [[엘프먼 스트라우스]]와 [[에버그린(페어리 테일)|에버그린]]도 한 때는 그런 관계였지만 지금은 공인된 관계가 돼서 논외. 의외로 [[렉서스 드레아]]도 혐의가 짙다. [[미라젠 스트라우스]]와는 전부터 그런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었지만 요즘은 또 잠잠한 모양. 그래도 관계는 나쁘지 않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여동생 [[리사나 스트라우스]]와도 제법 친한 관계. [[카나 알베로나]]도 의외로 같이 마시는 사이로 소문을 뿌린 적이 있다. 이렇듯 염문설은 잔뜩 뿌리고 다녔으나 정작 어디까지 진실이고 루머인지 알 수 없는, 렉서스의 여자관계.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스테리의 영역인 데다가 신경쓰이는 방향이 다르다.
루시가 신경쓰이는 관계는 엘자와 [[제라르 페르난데스]]다. 그녀가 아는 것만 봐도 참 많이 엇갈렸던 인연이다. 그 엇갈림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맞물리게 되었다. 전쟁 후 피오레 왕국의 국왕 [[토마 E. 피오레]]가 [[히스이 E. 피오레]] 공주에게 왕위를 넘겼다. 선대왕이 된 토마는 은거, 여왕이 된 피오레는 알바레스 제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한편 제라르와 그의 길드 크림 소르시엘에 한 가지 선물을 했다. 그들의 죄상을 사면하는 은사를 내린 것이다. 이 조치는 매우 뜻밖의 일로, 은사를 받은 [[코브라(페어리 테일)|코브라]]가 말도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엔젤(페어리테일)|소라노 아그리아]]는 자신들은 어둠의 길드 출신이라 자격지심을 느낀다.
그런데 루시가 모르겠는 부분은 여기서부터. 제랄도 한숨 돌리게 됐고 분명 엘자도 기뻐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내색도 없다. 루시가 쓴 소설이 "너무 어렵다"고 호소하는 걸 보면 전쟁 후유증으로 머리가 나빠진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루시는 그녀가 감추는 부분을 알고 있었다. 은사 소식이 전해지고 나자 전혀 관심도 없었던 머리 손질을 하기 시작해 지금은 매일 머리를 빗고 있다는 걸. 그게 루시가 원하는 답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츠는 그대로 루시를 붙들고 일터로 향한다. 감동과 기대를 배신 당한 루시가 원망하자 나츠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 페이데이 2 . . . . 13회 일치
수송차량을 습격하는 Transport 하이스트(의 5개 버전)와 기차에서 프로토타입 군용 병기를 훔치는 Transport: Train Heist 하이스트, 돌격소총(Commando 553), 기관단총(Swedish K), 권총(Gruber Kurz)이 들어있는 DLC
돌격소총(Eagle Heavy), 기관단총(SpecOps), 권총(Signature .40), 투척무기(Frag Grenade), 총기의 단발/연발을 고정시키는 부품과 총기 손잡이 부품이 들어있는 DLC.
기관총 세개(RPK, KSP, Brenner 21)와 칼 네개가 들어있는 DLC
[[핫라인 마이애미]]와의 콜라보 DLC. 러시아 마피아 두목을 족치는 Hotline Miami 하이스트와 기관단총 3개(Cobra, Blaster 9mm, Uzi), 야구빠따, 식칼, 정글도, 소방도끼가 들어있다.
저격소총(Nagant), 기관총(Buzzsaw 42), 기관단총(Patchett L2A1), 권총(Broomstick), 지휘봉, 막대 수류탄(근접무기), 군용 대검, 성조기가 들어있는 DLC.
박물관에서 저주받은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The Diamond 하이스트가 들어있는 DLC.
저격소총(Lebensauger .308)과 기관단총(Kross Vertex), 권총형 석궁(Pistol Crossbow), 수리검, 맨손무술, 쌍차, 수갑구, 쿠나이가 들어있는 DLC.
전직 야쿠자 지로와 체력이 적을 때 보너스가 들어오는 Yakuza 퍽 덱, 기관단총(Micro Uzi), 일본도가 들어있는 DLC.
러스트가 전에 속해있던 폭주족들을 털어먹는 The Biker Heist 하이스트, 기관단총(CR 805B), 투척용 도끼가 들어있는 DLC.
영화 [[존 윅]]과의 콜라보 DLC. 저격소총(Desertfox), 아킴보(Akimbo Contractor), 기관단총(Jackal), 권총(Contractor), 투척용 단검이 들어있다.
저격소총(Grom), 돌격소총(AK17), 기관단총(Tatonka), 스페츠나츠용 정글도가 들어있는 DLC.
자켓, 근접전에 특화된 소시오패스 퍽 덱, 기관단총(Jacket's Piece), 장도리를 준다.
- 한창수 . . . . 13회 일치
'''한창수'''(韓昌洙, [[1862년]] [[1월 19일]] ~ [[1933년]] [[10월 7일]])는 [[조선]] 말기의 관료 겸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며 자는 경문(景文), 호는 영애(穎愛)이다.
[[1888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주로 벼슬을 하였으며, [[1895년]]에는 [[한성재판소]]의 판사를 맡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한성사범학교]]의 교장직과 함께 [[유럽]] 지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바도 있었다.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대한제국 순종|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한창수는 거침 없이 친일적 언행에 더하여, 이왕직 장관을 지내면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하여 결국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한창수가 이왕직 장시국장 재직 중 고종이 사망했는데, [[고종 독살설]]에 [[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한상학]], 그리고 어의 [[안상호]] 등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 가족 관계 ==
}}</ref> 했고, [[11월 22일]]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ref>
|제목=`마지막 황실 … ` 사진전 서울대 박물관서 열려
[[분류:1862년 태어남]][[분류:1933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남작]]
- Crusader Kings 2 . . . . 12회 일치
6. 인물의 문화, 야망, 관심사, 능력치. 야망과 관심사는 Way of the Life DLC를 구매해야 나오는 기능이다. 예시의 무르하는 아일랜드인이며 전체적으로 암담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다. 괄호 안의 능력치는 국가 능력치로, 이것이 실질적인 능력치이다. 국가 능력치는 군주 능력치+군주의 배우자 능력치+해당 능력치와 관련된 주요 직책의 능력치이다. 각 능력치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 외교력: 외교활동에 관한 능력치. 다른 캐릭터가 자신을 보는 의견에도 영향을 준다. 이 능력치가 높으면 몇몇 이벤트에서 혓바닥을 놀려 약을 파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 무력: 전투에 관한 능력치.
* 관리력: 세금 수입과 직할령 크기 한도에 대한 능력치.
* 음모력: 음습한 짓거리에 관한 능력치. 이 능력치가 높으면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증가한다. 20을 넘어가면 중세의 [[피델 카스트로]]가 될 수 있다.
* 직할령 크기: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직할령의 양과 그 한계. 기본적으로 관리력에 비례한다. 직할령을 과도하게 소유하면 세금 수입이 감소하며 봉신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다.
* 외교 관계: 해당 인물과 특정한 관계를 맺은 작위들
10. 해당 인물의 인간 관계.
* 관계
- World Of Guns: Gun Disassembly . . . . 12회 일치
=== 기관단총/돌격권총 ===
* [[우지 기관단총|우지]]
* [[스콜피온 기관단총|스콜피온 vz. 61]]
* [[크리스 벡터 기관단총|크리스 벡터 .45 ACP]]
* [[스털링 기관단총|스털링 MK4]]
* [[맥심 기관총|맥심]]
* [[루이스 경기관총|루이스건]]
* [[스텐 기관단총|스텐 MK II]]
* [[톰슨 기관단총|톰슨건]]
* [[DP-27|DP 27 기관총]]
=== 기관총 ===
[[분류:게임 관련 정보]]
- 김국진(MC) . . . . 12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가톨릭/인물)]
|| '''본관''' ||<(> [[의성 김씨]] ||
[[1993년]] [[2월]] 감자골은 당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였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고별인사를 하고 [[미국]]행을 하기로 했는데, 녹화가 시작되기 직전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프로그램을 열 개씩 하던 감자골이 갑자기 그만 둔 것은 MBC로 이적하기 위함이였다!]]" 라면서 임하룡을 제외한 '''방송 3사 코미디언들 모두'''가 MBC로 쳐들어와서 녹화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난동을 피우는 통에 김국진은 스태프들을 따라서 개구멍으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김국진을 숨겨준 사람이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라고 라디오스타에서 밝혔다. 19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씁쓸해지는 대목. 감자골은 ~~[[이경규]]가 선처를 호소해서 선배들에게 줄빳다만 맞고~~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이적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은퇴하고 이민가는 것이다. ~~니들 밥줄 끊을 염려 없으니 놔줘라~~ 라고 설득해서 겨우 시청자들에게 고별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자골은 '''방송 3사 코미디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이들의 KBS 선배 개그맨 [[이봉원]]은 후일 방송에서 감자골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시 나는 SBS로 이적한 상태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
김국진을 제외하고 전국민적 인기를 누린 개그맨을 말하라면 [[유재석]]이 첫손에 꼽히는 일이 많기에 인터넷 상에서는 '전성기 김국진 vs 현재 유재석'이라는 떡밥이 항상 돌고 있는데 장기적인 커리어가 아닌 단기적인 최정점의 포스를 따지자면 김국진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중론. 물론 예능계에 있어서 종합적인 인기와 지지도, 커리어까지 본다면 유재석이 훨씬 더 앞선다. 비유하면 '''김국진은 2등과의 점수차가 굉장히 큰 전국 1등을 3~4년 한것과 같고 유재석은 2등과 점수차가 그리 크지는 않은 전국 1등을 15년 가까이 차지한것과 같은 느낌이다.''' 전성기가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지만 그 절반 정도의 기간을 [[강호동]]이라는 강력한 대항마가 공존했었던 유재석과 달리 전성기의 김국진은 개그계에서 라이벌이 존재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가수나 배우들을 통틀어서 인지도와 인기로 그를 넘볼 대상이 없던, 그야말로 연예계 혼자 1등이라 할만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 김국진은 개그맨이 연예계 최고 스타가 된 정말 몇 안되는 희귀 사례로 꼽힌다.[* 개그맨, 예능인이 가요계, 연기계를 넘어 연예계 전반에 걸쳐 최고의 위상을 지닌 톱스타가 된 경우는 정말로 극히 드물다.현재 예능계 최고의 MC들인 이경규, 강호동, 신동엽도 연예계 종합 최고 스타의 위상을 가져본적은 없으며 역대로 꼽으면 80년대의 이주일과 심형래, 전성기 김국진, 현시대 유재석 정도만이 달성한 매우 극히 드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김국진은 '''코메디 30년을 통틀어서 최고의 코메디언'''에 선정되었는데, '''2위가 한국 코미디계의 영원한 대부 [[구봉서]]'''. 또한 '''광복 50년 최고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는데, '''2위가 대중가요의 황제이자 전설 [[조용필]]'''. 광복 50년 최고의 연예인 설문조사에서 2위를 기록한 가왕 조용필을 이겼다는 건 그야말로 당시 중장년층을 넘어 노년층의 인기마저도 지배했다는 이야기이다. 김국진을 제외하고 코미디계를 넘어 연예계 전반 최강의 포스를 보여준 코미디언은 1980년도에 말 그대로 2주일만에 원톱이 되어 80년대 초중반 내내 연예인 소득 1위를 차지했던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그리고 영화로도 전국 300만 관중을 돌파할 수 있었던 전성기 [[심형래]] 정도 밖에 없다.
<반달곰 내사랑>에서 김국진이 맡은 배역에는 당초 [[유오성]] [[차승원]]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이들이 영화 촬영 등의 이유로 고사하자 김국진이 대신 들어갔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첫 회(2001년 9월 26일)부터 2001년 10월 11일까지 <신화>와 경쟁했다. <반달곰 내사랑>은 삼각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인지 주인공들의 주변 이야기가 없었던 데 이어 극이 너무 잔잔하게 진행됐다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쳤다.[* 참고로 <반달곰 내사랑> 출연진이었던 이세은, [[박정수(배우)|박정수]] 등은 차승원이 출연한 드라마인 KBS 2TV [[보디가드]] 조연이었는데 이 드라마 출연진 중의 한 명인 [[이원종(1966)|이원종]]은 김국진의 대학 1년 후배다.] 결국, 김국진은 <반달곰 내사랑>의 실패 후 2006년 MBC 진짜진짜 좋아해로 연속극 출연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이영자]]가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정극 드라마 출연을 했다. 그전에는 시트콤이나 특집극 위주로 출연했다.]
[[2005년]] 토요일 밤 6-8시대 버라이어티 꼭지에서 고전하고 있던 MBC에서 회심의 카드로 제작된 [[토요일]]이라는 버라이어티[* 이 프로그램에서 [[무한도전]]의 전신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로 복귀를 선언하고, 당시 [[김용만]], [[박경림]] 등과 중국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여행하는 "커이 커이"라는 프로그램으로 간만에 주말 버라이어티에 출연했다. [[MBC]]가 야심차게 준비한 특대형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기획이 된 프로인데다가, 유학 후 복귀하는 [[박경림]]과 함께 다시 전성기를 맞이 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참신한 기획보다는, 유명 MC의 복귀라는 회제성에만 치우친 분위기였고,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코너가 없어졌고 프로그램명도 [[토요일]]에서 강력추천 토요일로 바뀌었다. 이후 그는 다시 방송활동이 스톱된다.
김국진, [[박수홍]] 등과 함께 감자골 4인방이면서 연예계에서 세 손가락에 들만큼 그와 가장 친한 [[연예인]]들이던 [[김용만]]은 김국진과 젊었을 때 같이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김국진의 사주가 "평생 돈이 얼마가 들어가고 나갈 지 모를 사주"라고 했다는 걸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국진이 남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을 잘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부분은 본인이 돈을 빌렸던 것도 잘 잊었다는 점. 더 웃긴 일화는 감자골의 또다른 멤버였던 [[김수용(코미디언)|김수용]]이 신인 시절 이를 알고 역이용해 김국진에게 "아 형, 저번에 빌려준 거 왜 안 갚아?"라고 하면서 빌려주지도 않은 돈을 3번이나 받아봤다는 것이다. 김국진은 깜빡 속은 나머지 아무렇지도 않게 "어 잊어버렸구나. 미안."이라고 하면서 김수용이 말할 때마다 계속 그 돈을 줬다고 한다. 물론 큰 돈이 아니었으니까 쉽게 속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겠으나 정말 돈에 대해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김국진급의 억대 수입/지출을 내는 사람이면 개인 [[대한민국 공인회계사]]가 필요하다.) 다만 이런 성향이 어차피 번 돈이 많아서 돈 쓰는데 무신경한게 아니냐고 오해 할 수도 있는데 김용만이 김국진의 모친께 들은 바에 따르면 ' 등록금을 빌리러 온 친구에게 선뜻 돈을 주면서 정작 자신은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었다'라는 일화가 있는걸로 봐선 부의 유무와 상관없는 원래의 성격인 듯하다. 어려운 시기에 [[결혼]]했던 김수용에게 ~~비록 빌려 주지도 않은 돈을 여러 번 받아가긴 했지만~~ [[하이난]]으로 [[신혼여행]] 다녀올 경비를 대줬다는 미담은 [[덤]].
심지어 평소에 옷을 사는데도 관심이 별로 없어서 하루는 겨울에 김수용과 만나서 얘기하다가 "아, 추워. 야 옷 사러가자."라고 하더니 겨울옷을 파는 가게에 가서 옷을 전혀 입어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특정 옷을 가리키더니 "저거 미디움 사이즈로 주세요."하더니 그냥 받아서 입고 계산해버렸다고 한다. 또 그 자리에서 옆에 있던 김수용에게도 "야, 너도 하나 입을래?"라고 하면서 또 아무렇지 않게 옷을 사줬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이고 [[세례명]]은 [[가브리엘]]임이 가톨릭과는 전혀 상관 없는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서 밝혀졌다. 당시 출연자였던 [[정재형]]과 세례명이 똑같았던 걸 우연히 언급했던 것.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중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는 걸로 보인다. 김국진이 [[인창고등학교(서울)|인창고등학교]] 시절에 제2외국어를 중국어로 공부를 했고, 2005년 경에 김용만과 같이 중국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는 점, 공백기 기간에도 중국어 공부를 했다는 점에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예전에 [[f(x)]]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할 당시 [[빅토리아(f(x))|빅토리아]]에게 중국어로 인사하거나 간간히 중국어를 하는 점, [[효연]]이 라디오 스타에 나와 중국어로 음식 주문을 할 때도 이해하던 모습, [[차오루]]와 라스에서 대화할 때도 중국어가 말끝마다 나온 점을 보면 중국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는 실력인 것으로 보인다. [[불타는 청춘]]에서도 멤버들과 [[홍콩]]에 갔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데 큰 무리가 없는 중국어 실력을 보여 주었다.
[[이경규]]가 사석에서 유독 어려워 하는 [[후배]]라고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경규가 [[회식]]을 한다고 모두 가자고 할 때 후배 중에 유일하게 거절하고 집에 가도 이경규가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라디오스타에서 남자의 자격 관련 이야기를 할 때, 김국진의 실수로 당시 공황장애 증상이 심했던 이경규가 멘탈이 나가자 '형 정말 이런 말 하기 죽도록 싫은데..... 미안해'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이처럼 선후배간의 강압적인 악습[* 알다시피 개그/코미디계는 선후배 관계가 [[군대]] 삐까치게 엄격하다.]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또 한 일화로는 [[커피]] 심부름하러 온 [[개그우먼]] 후배 [[김숙]]이 뒤에 김국진이 있던 것을 모르고 오랫동안 [[자판기]]를 혼자 사용하자 그저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자기 순서를 계속해서 기다렸다고 한다. 뒤늦게 자기 뒤에 김국진~~대선배님~~이 있자 당황한 김숙이 미리 뽑은 커피를 건네자 "음~ 나는 후배들에게 커피 심부름 안 시켜"하며 먼저 뽑아야 할만큼 뽑으라며 계속 기다렸다고... 결국 자기 커피를 직접 뽑아서 갔다고 한다. 이 외에도 김숙이 [[신인]] 시절 동기들과 함께 김국진과 같은 지방 행사를 갔던 시절 김국진은 김숙에게 “돈 받고 행사 오느냐”고 물었고, 김숙이 자기들은 신인이라서 무대 경험을 쌓으라해서 온거라며 행사비를 못 받았다고 말하자 “그런 게 어디 있어”라며 “개그맨의 자긍심을 가져라. 똑같이 나눠 써”라며 자신의 행사비 전부를 후배들에게 주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김국진 [[클래스]]다! --
- 김재홍 (1958년) . . . . 12회 일치
* 지식경제부 기획조정실 정책기획관
* 지식경제부 무역투자실 투자정책관
* 지식경제부 국무조정실 산업심의관
* 지식경제부 신산업정책관
* 2013년 3월 ~ 2014년 7월 :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전임자 = [[윤상직]]<br/>(지식경제부 제1차관)
|후임자 = [[이관섭 (1961년)|이관섭]]
|직책 = 초대 [[대한민국의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분류:195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분류:중앙고등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박상돈(정치인) . . . . 12회 일치
1949년 [[충청남도]] 연기군 (현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에서 태어났다. 연기소정초등학교, 천안중학교, [[대전고등학교]][* [[송영무]] 국방부장관과는 동창생이다. 송영무는 해군사관학교를 재수로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 제28기[* 동기생으로 [[김관진(군인)|김관진]], [[김병관(군인)|김병관]], [[박흥렬]]이 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과정을 졸업, 수료하였다.
이후 [[유신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지방행정국 지방기획과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수]], 대천시장, [[서산시]]장, 충청남[[도청(행정)|도청]] 기획실장 등을 지냈다.
대천시장 재직 당시에 박상돈 시장의 아이디어로 보령의 머드를 상품화하고 머드 축제를 창시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24&aid=0000009832|관련 기사]]
또 다른 천안시의 국회의원인 [[양승조]] 의원과 함께 국무총리실 관리관 출신의 [[구본영]]을 열린우리당으로 영입하는데 큰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현재 자신은 [[자유한국당]]에 있지만, 남은 두 사람은 각각 충남도지사 후보를 노리고 있고, [[천안시]]장을 역임하고 있다. --어쩌면 천안시를 민주당의 텃밭으로 만들려는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육사2기수 절친후배인 [[구본영]] 현직시장과 대결하게 되었다. --[[구본영]]의 선거책자 뒷면에는 ''[[문재인]] [[양승조]] 구본영 VS [[홍준표]] [[이인제]] 박상돈' 이라고 적혀있다(...)--
- 서명선 . . . . 12회 일치
| 직업 = [[문신 (관료)|문관]], [[정치가]], [[시 (문학)|시인]]
'''서명선'''(徐命善, [[1728년]] ~ [[1791년]])은 [[조선]]의 [[문신 (관료)|문신]] 겸 [[정치가]] 및 [[시인]]이다.
== 본관과 별칭 ==
[[본관|본관(관향)]]은 대구(大丘)이며 [[자 (이름)|자(字)]]는 계중(繼仲)이고 [[호 (이름)|아호(雅號)]]는 귀천(歸泉)·동원(桐源)이며 [[시호|시호(諡號)]]는 충헌(忠憲)·충문(忠文)이다.
영조 후반기 [[동부승지]]로 당상관에 오르고 의주부윤으로 나갔다가 이후 강원도관찰사와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낸다. 이어 강원도[[Javascript:hplink('18365')|관찰사]] 등을 거쳐 [[Javascript:hplink('78690')|부제학]](副提學)에 오르고 1774년 [[Javascript:hplink('127923')|이조]]참판 때, 세손(世孫: 正祖)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재상 [[Javascript:hplink('172387')|홍인한]](洪麟漢)을 탄핵, 파직시키고 [[Javascript:hplink('136845')|정조]]를 즉위하게 했다.
영조 말기 [[예조판서]], [[도총관]], [[병조판서]], 수어사, [[이조판서]]를 지내며 세손(뒷날의 정조)을 지켜서 정조의 신임을 얻는다.
정조 때 [[이조판서]], 금위대장, 약방제조, [[예문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수어사]], 판돈녕부사를 했다.
- 이중환(법조인) . . . . 12회 일치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의 대통령 대리인단에 합류하였으며 대리인단의 대변인이자 대표 대리인 역할을 맡았다. 탄핵 심판 초반에는 대리인단의 대변인으로서 언론에 박근혜쪽 입장을 대변하는 인터뷰와 브리핑을 전담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밉상으로 찍혀서 욕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탄핵 심판 중반부터 대리인단의 일부 [[서석구|변]][[김평우|호]][[조원룡|사]]들이 막말 변론을 해대고 탄핵에 반대하는 [[친박집회]]에 나가 헌재를 마구 비난하는 등의 추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무난했던 이중환 변호사는 대중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탄핵이 결국 인용되어 대통령이 파면된 후에 나름 이중환 변호사의 고충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 알려졌다. 일단 대리인단은 탄핵심판 내내 의뢰인 박근혜와 거의 만나지 못했으며 의뢰인의 입장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던 탓에 변론의 방향 설정에 어려움이 매우 컸다고 한다. 대리인단이 헌법 재판관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증인 신문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단지 대리인단의 무능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중요한 사건을 맡았는데도 수임료를 거의 받지 못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이 정도 사건의 경우 [[http://www.huffingtonpost.kr/2017/04/03/story_n_15772380.html|수임료가 2억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기사에서 보듯이 대리인단은 사실상 무료 변론을 했다.
||<tablewidth=100%><-6><#3F51B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white {{{+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white {{{+1 관련 인물 및 단체}}}}}} ||
||<#5c6bc0><-2> [[박근혜|{{{#white __박근혜__}}}]] {{{#white 측근 / 대리인}}} ||<-3> __[[김기춘]]__ · __[[우병우]]__ · ^^故^^[[이춘상]] · __[[정호성]]__ · [[이재만(1966)|이재만]] · [[안봉근]] · [[박지만]] · [[박근령]] · ''[[신동욱(1968)|신동욱]]'' [br]/ [[이중환(법조인)|이중환]] · [[손범규(법조인)|손범규]] · [[채명성]] · [[서성건]] · [[서석구]] · [[전병관]] · [[이상용(법조인)|이상용]] · [[황성욱]] · [[박진현]] · [[유영하]] . [[정기승]] ||
|| [[대한민국 정부|정부]] 관계자 ||<#ddd> [[청와대]] || __[[안종범]]__ · [[현기환]] · [[김한수(정치인)|김한수]][br] [[김상률]] · [[조원동]] [br] [[윤전추]] · [[이영선]] · ^^故^^[[김영한(공무원)|김영한]] ||<#ddd> [[대한민국 정부|행정부]] || __[[황교안]]__ · __[[문형표]]__ · [[김종덕]] · __[[조윤선]]__[br]__[[김종]]__ · [[송성각]] · ''[[유진룡]]'' · ''[[여명숙]]'' ||
|| 국정원·국군·경찰 ||<#ddd> [[국가정보원|국정원]]·[[대한민국 국군|국군]] || [[추명호]] · [[조현천]] ||<#ddd> [[경찰]] || ^^故^^''[[최경락]]'' · ''[[박관천]]'' ||
||<#ddd><-2>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 · [[삼성그룹/경영승계 문제|삼성그룹]] · 승마협회 관련 || __[[문형표]]__ · [[홍완선]][br]__[[이재용]]__ · [[김재열]][br][[최지성]] · [[장충기]] · [[박상진(기업인)|박상진]] ||<#ddd>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료 관련 논란|의료 논란]] || __[[김영재]]__ · [[김상만(의사)|김상만]] · [[주사 아줌마]][br] [[이선우(군인)|이선우]] · [[조여옥]] · [[신보라(군인)|신보라]] · [[이슬비(군인)|이슬비]][br][[이임순]] · [[서창석]] · [[박채윤]] ||
||<#ddd><-2> [[이화여자대학교 정유라 특혜 논란|이화여대 입시부정 및 특혜]] || [[김장자]] · __[[최경희]]__ · __[[김경숙(1955)|김경숙]]__[br][[남궁곤]] · [[이인화|류철균]] · [[이인성(교수)|이인성]] ||<#ddd>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br]블랙리스트]] || __[[김기춘]]__ · __[[조윤선]]__ · [[김희범]] · [[김소영(정치인)|김소영]][br][[정관주]] · [[신동철]] · [[모철민]] · [[송광용]] ||
||<#aaa><-6> 관련 단체 ||
||<-6><#aaa> 기타 관련 인물 및 단체 ||
[[분류:박근혜-최순실 게이트/관련 인물 및 단체]][[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 [[분류:1959년 출생]]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 전락원 . . . . 12회 일치
'''전락원'''(田樂園, [[1927년]] [[5월 16일]] ~ [[2004년]] [[11월 3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겸 교육가, 관광업자이다. '카지노의 대부'라는 별칭도 있다.<ref>[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31451.html ‘카지노 대부’ 전락원씨 유족, 증여 · 상속세 430억원 신고 : 경제일반 : 경제 : 뉴스 : 한겨레<!-- 봇이 따온 제목 -->]</ref>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장로교]] 목사 [[전주부 (목회자)|전주부]]의 아들이며, 수필가 [[전숙희]]의 남동생이었다. [[파라다이스그룹|파라다이스 그룹]]의 창업주이며, 카지노업과 교육 사업을 하였다. 본관은 [[담양 전씨|담양]]. 호는 우경(宇耕)이며 [[서울특별시]] 출신. 종교는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이다.<ref>[http://news.joins.com/article/2028144 '파라디이스 그룹 창업주' 전락원 회장 별세], [[중앙일보]], 2004년 11월 3일.</ref>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후 올림포스 관광호텔 대표이사로 관광업계에 종사하기 시작한 그는 [[1973년]] [[한국관광공사]]로부터 워커힐 카지노를 인수하며 국내 카지노 사업의 대표주자<ref name="카지노">[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408415 전락원회장 별세… 파라다이스그룹 어떻게 되나- 중앙일보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로 활약하였다. 그는 워커힐 카지노를 통해 막대한 부와 인맥을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차례로 부산, 제주, 도고, 인천, 아프리카 케냐 등에 파라다이스 호텔을 설립하고 부산과 제주, 인천에도 카지노를 개장하며 '카지노 업계의 대부'로 활동하였다.<ref name="카지노"/>
*1962년 1월 - 1964년 1월 한국관광협회 서울시협회 이사
*1967년 10월 - 1972년 4월 (주)오림포스 관광호텔 대표이사
*1997년 2월 성균관대학교 정경학부 경제학과 명예졸업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분류:1927년 태어남]][[분류:2004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 사람]][[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대학 설립자]][[분류:담양 전씨]]
- 정동기 . . . . 12회 일치
* 1995년 ~ 1996년 7월 : [[법무부]] 국제법무심의관
* 2006년 8월 ~ 2007년 3월 : [[법무부 차관]]
* 2008년 6월 ~ 2009년 7월 : 대통령실 [[청와대 민정수석|민정수석비서관]]
* 2017년 2월 ~ : 제10대 한국보호관찰학회 회장
2010년 12월에 [[감사원장]] 후보로 내정되었으나, [[법무법인 바른]] 재직 시절 7개월간 7억원을 받은 것과 관련해 전관예우 논란이 불거져, 후보직에서 사퇴하였다.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법무부 차관]]
|직책 =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위]][[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실 수석비서관]][[분류:경동고등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전주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원광대학교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동 정씨]]
- 정운용 . . . . 12회 일치
정운용은 대구 부호이자 민족자본은행의 개척자인 [[정재학]]의 장손으로 태어났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ref> 그의 모친 김인아는 정운용이 중학생이었던 1918년 타계했고 부친인 정응원마저 1933년 서거한 뒤 정재학 조부 밑에서 자랐다. 정재학은 3남인 [[정종원]]과 장손인 정운용을 각별히 여겨 니혼대학 법학과, 메이지대학 법학과로 유학을 보낸 뒤 3남에게는 관료로 활동하도록 했고 맏손자에게는 은행경영 노하우를 전수했다.<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0~226</ref><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11</ref>
== 가족관계 ==
[[정종원]] 제5대 조흥은행장은 그의 삼촌이고 한평생 외교관을 지낸 정운철, 기업가이자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한 정운익과 사촌이다.
정운용 조흥은행장은 미 [[군정청]] 골든 재무부장(중령)과 친밀한 관계였다. 해방 후 중앙은행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여서 조흥은행은 강력한 중앙은행 후보로 꼽혔다. 조흥은행은 민족자본비중이 절반을 넘은데다 일본자본의 침투가 가장 적었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22</ref> 하지만 1946년 광복1주년을 맞이하여 미 군정청 내각 전원이 한국인으로 채워진다. 골든 재무부장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윤호병이 신임 재무부장으로 선임됐다. 조흥은행 대신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선정됐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237</ref> 정운용 행장 역시 1947년 10월 군정장관의 명령에 의거 행장에서 물러났다.<ref>경향신문, 1947년 10월 18일 2면 정운용 행장 해임</ref>
대구은행 설립자 정재학의 후손인 [[정종원]](3남)과 정운용(장손)은 1957년 무렵 조흥은행의 주도권을 두고 동일은행계의 대주주였던 조선황실 외척인 민씨가문과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흥은행은 일제 말 동일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을 흡수한 한성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은행이다. 따라서 양대 대주주인 [[경상합동은행]] - [[대구은행]])계 정씨 집안과 동일은행계 민씨 집안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관심사였다.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이 조흥은행장으로 재직하던 1957년 3월말 실시 된 [[귀속주]]입찰에서 민씨 가문은 [[민덕기]]를 중심으로 계성(주), 휘문재단,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당시 조흥은행 전무 등의 지분을 합쳐, 7만8000 주를 확보하며 4만6000 주에 그친 정종원, 정운용 가문을 압도했다. 그러나 민씨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악화로 인해 민씨가문은 조흥은행 주식을 팔아 긴급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민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갔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첫 아내와 사별한 뒤 김분조와 재혼했다.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7면</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한 뒤 도피하다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ref>민족문화대박과사전 독립운동가 김진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0638</ref><ref>독립기념관 29 김진만 독립운동가 서한집 http://www.i815.or.kr/media_data/data_chong/32.pdf</ref>
[[김진만]]의 손자 [[김일식]] 역시 1920~1930년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김진만]]과 함께 [[서우순]] 자택에 침입했던 광복단원들 가운데 [[정재학]]과 먼 친척관계인 [[정운일]](鄭雲馹)도 있었다. 정운일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아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 경상북도 상임고문과 반민특위 경북 도위원장을 역임했고 건국포장과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ref>민족문화백과사전 정운일 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50653</ref><ref>놀라운 사실은 [[정재학]] [[대구은행]]장이 자신을 협박대상으로 꼽았던 친척 [[정운일]]에 대해 각별히 배려해줬다는 점이다. 정재학 행장은 정운일의 아들인 [[정인택]]( 1911~ 1973 )이 감옥에 있는 부친 때문에 상급학교진학이 어려웠던 사정을 알고 보증인 역할을 해줬다. 정인택은 정 행장의 보증 덕에 대구고보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인택 역시 항일학생운동에 가담, 경찰에 잡혀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와 교편도 잡고 부산소년원장을 지냈다. 소년원장을 그만둔 뒤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최선을 다했다. 대구시립희망원을 맡으면서 유아에서 노인까지 갈 곳 없는 이들을 보살폈다. 원장 관사마저 병실로 개조한 뒤 원내 마당에 조그만 흙벽돌집을 세워 거처로 삼았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1966년]] 경향신문이 제정한 제1회 '국민의 주는 희망의 상'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내무부장관 국회사무총장 등 각계에서 격려 축전을 보냈다. 정인택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당선소감에 자신이 정재학의 증손자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재학이 1858년 출생인 점에 비춰볼 때 1911년생인 정인택이 증손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정재학의 맏손자인 정운용 1대 조흥은행장이 태어난 해가 1904년이기 때문이다. 다만 항렬 등에 비춰볼 때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먼 친척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인택의 부친인 독립투사인 [[정운일]] (1884~1956)은 [[정재학]] [[대구은행]]장(1856~1940) 의 손자인 정운용 제2대 조흥은행장 (1904~ 1963 )과 같은 항렬이다.</ref>
- 창작:좀비탈출/0-1-2 . . . . 12회 일치
그 소음은 노크처럼 이어졌다. 현관에서 나는 소리다. 나는 비몽사몽한 상태에서도 집중했다. '''쿵 쿵……'''
벼락처럼 의식이 돌아온다.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구조대인가? 결국 온 건가? 현관으로 향했다. '''쿵 쿵……'''
하지만 현관에 가까워지면서 희망은 급속도로 빛이 바랜다. 이성이 뒤늦게 잠에서 깨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숨을 진정시키며 현관에 도달했다.
무엇인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다. 둔탁한 무언가로 규칙적으로. 이성의 목소리 탓인지 희망은 거의 사라졌지만 호기심이 생긴다.
나는 현관문으로 바싹 다가간다. 가볍게 문을 울리는 떨림에 귓가를 간질인다. 나는 문 너머를 뚫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의식을 집중했다.
이 창문 옆이 문제의 현관이다. 아까만큼 규칙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간헐적으로 소리가 들려온다. 쿵 쿵…… 한 놈 정도는 아직 가까이 있다.
담을 넘어도 문제다. 현관문은 엄청 두껍고 고급 아파트에나 쓰는 소재로 된 걸 달아놨다. 아버지는 이걸 달면서 "대전차 미사일이 날아와도 끄떡없어"라고 했는데, 나는 다 쓰러지고 허물어진 잔해 위에 문만 굳건히 서있는 장면을 상상했었다.
나는 덧문을 닫아놓다가 가끔 놈들을 관찰할 필요가 있을 때만 열어봤다. 수가 줄었는지 늘었는지 보기 위해서. 대략 하루에 두세 번 정도다.
이런 관찰의 결과 나름 생태란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태양빛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그런 호기심은 다른 일기상태에 대한 관찰욕구도 자극했다. 가령 눈이나 비같은 것에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날씨가 춥거나 더워지는게 영향을 줄지. 하지만 그런걸 관찰할 수 있을 정도면 계절이 바뀌도록 구조되지 못한다는 얘기니까 우울한 기분이 들어버린다.
- 창작:티겔 왕국 . . . . 12회 일치
그러나 상티겔 왕국은 달휴의 사후 점점 기울어져 갔는데, 우선 달휴가 죽고 그의 맏아들 '불운한' 달계가 즉위했으나, 그는 한달도 안되서 의문사하고(...) 그의 둘째 '천벌의' 달연이 왕위에 오른다.[* 호칭을 보면 알겠지만, 달계 암살의 유력 용의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왕위에 오르고 약 이틀도 안되어 그의 동생 달혜가 그를 암살하고(....) 또 왕위에 오르는데 그도 나흘이후 그의 제수의 명을 받은 암살자에게 죽을뻔 한다(...) 그에겐 다행히, 암기가 급소를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하가서 살았고, 얼마 안돼 제수는 교수형, 그리고 그의 여동생은 가택연금을 시키는걸로 마무리시킨다. 달혜는 상티겔 왕국의 왕들중 최악의 왕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그전까지 충실한 우방이었던 하이엔 왕국을 괜히 외교적으로 도발해 적대관계로 가게 하고, 북쪽의 라이엘기스 대공국[* 레잉 왕국이 멸망하기전 마지막 왕의 동생(적자가 아닌 서자였다.)이 세운 국가.]에겐 지속적으로 병력을 갈리면서(...) 국력을 낭비했으며, 그나마 우방이었던 츄프왕국과는 지속적으로 국경 분쟁이 벌어지는 상태인 불안한 동맹관계였다.[* 상티겔 왕국이 메롱한대도 츄프왕국이 굳이 티겔과의 관계를 끊지않은 이유는 북쪽의 숙적 크누고 공국과 그들을 지원하던 하이엔왕국 때문이었다. 즉, 크누고 공국을 제압하면 얼마든지 티겔과의 관계도 끊을 수 있었다는 애기.] 이렇게 외교적으로 불한한 상태에서 내정을 잘한 편도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사자족 토벌이라면서 상당한 량의 세금을 걷어갔고, 이는 지속적인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사서에만 기록된 반란의 횟수는 약 20여회정도이다... 사서가 훼손되어서 기록되지 못한 반란까지 포함하면 이횟수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달계의 아들이었던[* 달계가 죽었을당시 아직 태어나지 못해 계승받지 못했다.] 달유가 귀족들에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오른다.
달유는 상티겔 왕국의 멸망을 30년은 늦춘 왕으로 평가 받는데, 하이엔왕국 계승전쟁에 개입해 적자인 선왕의 손자를 왕위에 올려서 하이엔왕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의 딸을 츄프왕에게 시집보내 동맹관계를 두텁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지속적으로 북쪽 국경을 위협하던 라이엘기스 대공국쪽으로 안심하고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하는데 도움을 줬고, 최종적으로 나트렘 평원에서 벌어진 회전에서 라이엘기스 대공과 대공의 세아들을 모두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둬, 라이엘기스대공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얻어냈으나..... 기세를 몰아 라이엘기스로 공성을 곧장가는 도중에 병으로 달유가 급사하면서 급히 병력을 돌릴수 밖에 없었고, 이는 티겔 왕국이 마지막으로 라이엘기스대공국과 후신 레이먼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기회로 평가받는다.
달유의 급사이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달윤은 아직 어려 섭정자리를 두고 다툼이 생기게 되었는데, [* 평범한 경우라면 그의 어머니가 섭정직을 맞는게 정상이었으나, 남편이 죽기전에 먼저 병사 했다.] 우선 그의 새어머니였던 '에른 베트'를 중심으로 한 '북서부파'[* 레잉을 중심으로 모인 파벌로, 사자족이 많이 모여있는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서 상당수가 이미 사자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사자족들과의 혼혈(후대의 라이거 일족)도 상당수 있음.]와 달제의 증손자이자 등퍼산맥 서쪽을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으며 달유의 정변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여쿨 공작 '달규'를 중심으로 한 '동부파'[* 단, 중심이 동부쪽 귀족들이란거지, 꼭 동부만 있던건 아니다. 실제로 라이엘기스와의 접경지대에 있었던 상당수의 귀족들은 라이엘기스를 싫어하는 만큼 사자족 역시 싫어했고, 그에따라 사자족을 학살하면서 거기에 호랑이족을 이주시키는짓도 서슴치 않은경우가 많다. 이러한 귀족들은 전부 동부파에 가담했다.]로 나뉘어 상당히 피튀기는 궁중 암투를 벌였다.[* 단적으로, 에른을 노린 암살사주만 해도 10여회정도 있었으며, 동부파쪽은 여쿨의 달규가 중간에 (아마도 에른이 사주한)암살자에게 암살당해 그의 아들이 우두머리를 맡기도 했다.] 이러한 궁중암투는 최종적으로 티겔의 사학자들이 '대내전'이라 부르는 내전으로 이어졌으며, 여기서 최종적으로 에른의 남동생 '용담공' 에른 보우드가 동부파의 본거지였던 여쿨을 함락시키면서 끝난다. 이 내전은 지금까지의 티겔에서 벌어진 내전중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되며, 왕국의 인구중 절반이 이때 희생되었다. 이때 라이엘기스 대공국이 동부파에 가담했던 북부의 호랑이족 귀족들을 다수 굴복시키면서 다시한번 세를 키울 수 있었다. 그나마 이 내전의 의의가 있다면 북서부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티겔에도 레잉의 문화가 퍼졌다는것 정도? 이후 상티겔 왕국은 예전에 위세를 잃어버렸고, 하이엔 왕국과[* 그전까지 동맹관계였다만, '야심왕' 헤인켈이 동맹을 깨고 공격해 북동부쪽 땅을 상당수 빼앗아간 이후엔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라이엘기스 대공국사이에 끼여 수많은 땅을 빼앗기는(...) 동네북이 되었다.
== 하티겔 형성~계관문건설 ==
그러나 상티겔이 멸망하고 티겔이 불타갈때, 한무리의 군인들이 마지막 왕 에르두른2세의 아내였던 아르든 백작부인을 데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우여곡절끝에 어찌저찌 상티겔왕국이 남쪽에 세웠던 식민지인 '센티겔'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아르든 백작부인은 애를 베고 있었고, 당시 센티겔의 지방관이자 아르든 백작부인의 보호자였던 계형은 그 아이를 에르두른 2세의 적법한 후계자로 선언하고, 그를 티겔 왕국의 왕으로 선언하면서 섭정직을 맞는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국가를 하티겔 왕국이라 하며, 대중적으로 그냥 티겔 왕국이라 한다.
이러한 대립속에서 계형이 죽고 실권을 잡은 계로는 레이먼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5000명의 친위대들인 '흑군'[* 모두 검은 망토를 차서 이렇게 부른다.]을 창설했으며, 이들을 이끌고 레이먼 제국과 태겡대공국의 침입을 수차례 격퇴했다. 한편으로 계로는 흑군의 숫자를 점차 늘려가기 시작했으며, 이것때문에 늘어난 지출을 줄이기위해 귀족들과 지방관들의 세금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진 큰 불만이 없었으나, 센티겔을 더이상 임시수도가 아닌 수도로 지정하고, 이름을 티겔로 바꾼다는 조치가 문제였다. 이는 고토의 탈환보단 남부쪽 개척에 집중하는게 아니냐는 논란을 낳았고, 결국 북부파와 남부파까지 망라한 귀족들의 연합이 태겡 대공 루이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반란을 일으키며, 태겡이 이를 명분삼아 침공을 해오기까지 한다. 탈환지의 귀족중 80%가 이 반란에 따랐으며, 태겡과 귀족 연합의 병력은 3만에 이르렀다.
신유를 지휘관으로 한 사냥꾼 연합군은 처음에 게릴라 작전으로 꽤나 쏠쏠한 이득을 봤으나, 이러한 게릴라 작전에 몇몇 사냥꾼 씨족들이 불만을 가졌고, 이러한 여론이 점점거세져, 신유는 어쩔 수 없이 '곰의 뒷발뼈'산맥 북부에서 회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고, 참패를 당하고 만다. 결국 사냥꾼들은 티겔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 킹덤/502화 . . . . 12회 일치
* 진군의 지휘관들은 금안에 들르자 마자 진로를 업으로 변경한다는 통보를 받고 술렁인다.
* [[왕전(킹덤)|왕전]]은 우물쭈물대는 부대는 지휘관의 목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신속한 행군을 꾀한다.
대신 각 부대 지휘관을 찾는 전령이 분주하다. 비신대도 [[이신]]을 찾는 전령이 도착한다. 총대장 [[왕전(킹덤)|왕전]] 명의로 당장 총대장 막사로 집합하라는 것.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이신은 [[하료초]]와 눈빛을 교환한 후 왕전의 막사로 향한다.
* 가보니 이신이 맨 마지막이었다. 왜 이리 꾸물대냐는 질타가 쏟아지는데 "본진을 찾다 길을 잃었다"고 대꾸해서 [[토문]] 장군에게 얻어맞는다. 어쨌든 이걸로 지휘관 전원이 모였다. 왕전은 이제부터 중대한 사실을 전할 것이다. 그는 서두도 없이 "곧바로 출발한다"는 말을 꺼낸다. 지휘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듣는다.
드디어 연합종군의 진짜 목적이 하달된다. 지휘관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인다. 하지만 [[몽념]]과 [[왕분]]은 이미 아는 사실이니 동요하지 않는다. 신은 이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드디어 왔다"고 웃는다.
* [[벽(킹덤)|벽]]을 비롯해서 당혹하지 않는 지휘관이 없다. 이들은 이번 전쟁은 흑양 공략이고 또 업이라면 우리가 아는 그 업이 맞냐고 재차 묻는다. 왕전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는 하급 지휘관들이 의문을 표할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상황을 전달한다. 준비는 이미 끝났다는 그의 말처럼, 같은 시각 각 부대에는 금안에 축적되었던 병량이 지급되고 있다. 각 부대에선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병량을 수령 중.
왕전은 이제 곧 금안에서 출발할 거니 각 지휘관은 책임지고 부대를 움직여야 하며 우물쭈물대는 부대가 눈에 띄면 그 부대 지휘관의 목을 친다는 엄명을 내린다. 결국 지휘관들은 질문 한 번, 이의 한 번 제기하지 못하고 해산한다.
그가 삼대천에 천거된 인물이란 것, 그럼에도 그걸 거절했다는 것에서 파문이 인다. 설마 세 번때 삼대천이 될 법한 인물이, 그것도 그런 변경에 은둔하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카이네는 그럼 그 사마상이 어느 정도 인물이냐고 묻는데 이목은 자기 자신이 그를 천거햇던 장본인이라 밝힌다. 그는 자신의 청가성이 연관되지 않는한 전혀 움직이지 않는 성미로, 그를 삼대천으로 만들면 좀 더 큰 일에 쓸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물론 실력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
- 킹덤/523화 . . . . 12회 일치
* 그러나 마남자는 [[이목(킹덤)|이목]]의 부관을 맡은 검증된 인물이었으며 조아룡은 전 삼대천 [[인상여]]의 측근이었던 인물로 역시 대단한 인물.
* [[관상]]은 아광을 "잔꾀가 없는 무인"이라 평하며 왕분에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그를 주시하라 하는데, 과연 아광은 적진을 무쌍으로 휘저어놓는다.
* 조군의 좌익은 총 3만 병력에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맹장 셋이 배치되었다. 우측부터 [[조아룡]], [[마남자]], [[악영]]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거니와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적도 없었다. 이런 셋을 한 군으로 편성한 [[이목(킹덤)|이목]]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역시나 시작부터 신경전이 벌어진다. 선봉을 누가 맡는지 문제를 놓고 악영이 먼저 나서며 다른 두 장수를 무시했다. 마남자는 자기가 말을 꺼냈는데 냉큼 악영이 받아먹으려 들자 그를 "창쟁이"라 부르며 뭐하는 짓이냐 따졌다. 악영이 차가운 태도로 잘 알지도 못하는 둘에게 이 전장의 첫 칼날을 맡길 수는 없다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조아룡이 중재했다. 우선 악영이 마남자를 잘 모른다고 했으나 그럴 리는 없다. 마남자는 대단한 체격의 거한이면서 그 이목의 부관을 맡을 만큼 검증된 인물. 악영이 그 개인과 친분이 없을 지라도 그를 "보통내기"로 여기고 있을 리 없다고 지적한다. 악영도 그 지적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이번엔 조아룡을 두고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냐고 험한 소릴 입에 올린다. 조아룡은 쓴웃음을 짓고 말이 심하다고 할 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선전하지 않았다.
* 진군의 우익이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먼저 옥봉대의 전방에 포진했던 아광군이 넓게 횡진을 펼쳤는데 마치 옥봉대를 뒤에 숨기려는 듯한 배치다. 아광군이 한참 부산한데 옥봉대에는 아무런 지시사항이 오지 않았다. [[반상]]이 여기에 안달이 났다. [[관상]]을 붙들고 정말 아광군에서 전령이 오는게 맞긴 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관상이라고 더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므로 그만 죽을 맛이었다.
* 아광은 왕전군의 제 1장으로 왕분과도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는 왕분을 "도련님"이라 부르며 작전을 전달하러 왔노라 말한다. 헌데 관상은 그가 유독 "도련님"이란 표현을 쓴 것을 거슬려했다.
작전이란 결국 이런 식이다. 아광군이 단독으로 적과 맞서 싸우고 옥봉대는 "일격필살의 유격대"로 전력을 보존하며 대기하다가 아광군 측이 전령을 보내면 그때 지시에 따르면 된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왕분이나 관상은 그 참 뜻을 바로 이해했다. 왕분이 누가 이런 작전을 짰냐고 묻자 아광은 자신과 왕전이 짠 것이라 대답한다. 왕분은 더는 참지 않았다.
그 자리의 대부분은 아광의 말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아광의 호된 꾸짖음을 듣자 왕분은 더이상 따지지 못했다. 그리고 관상은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좋게도 나쁘게도"라는 아광의 말뜻과, 그걸 받아들이는 왕분의 심정을 한 눈에 읽어냈다. 일단 왕분으로서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보다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판단하는 데는 왕분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나, 급하게 달려온 전령 때문에 더이상의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적 1진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급보였다.
* 조의 선봉은 결국 악영으로 정해졌다. 제 1진 1만이 구름처럼 몰려오자 아광고 1만을 뽑아 응전하고 적장이 있다는 깃발을 발견하자 자신도 곧 전장으로 달려간다. 옥봉대가 있는 위치에선 이러한 움직임이 한 눈에 보였다. 아광 장군이 선봉에 나서는게 보이자 관상이 넌지시 왕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아광을 "잔꾀를 꺼리는 무인"이라 평했다. 그건 관상 개인의 소견이 아니었고 옥봉대 사이에서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 가령 제 2장 마광은 왕전군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나 의외로 책략을 잘 쓰는 인물. 반면 아광은 "정면에서 당당하게 적과 부딪히는" 성격이었다. 아광의 병사들 또한 마치 지휘관의 복사판 같은 인물들. 겁이라는 걸 모르듯 그저 장군을 따라 적진으로 향하는 자들이다. 옥봉대에도 몇 번 아광 밑에 편성됐던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결 같이 "악몽 같은 경험. 다시는 편성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증언을 입증하듯 조군의 전열이 가속하자 아광군도 맞서서 가속, 한 복판에서 그대로 충돌한다.
* 관상이 말을 꺼낸 것은, 왕분에게 이런 조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요원 . . . . 12회 일치
* 고무적인 지휘관 - "흠잡을 데 없는 말은 수천 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할 것이다."
고무적인 지휘관 스킬 요구. 장군일 경우에는 충성심 +1, 다이묘일 경우에는 명예 +1, 이 요원에 의해 점령된 지방의 침략자에 대한 저항 -25%
고무적인 지휘관 스킬 요구. 이 요원의 영향력 범위 +20%,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부대의 사기 +1
고무적인 지휘관, 수호자 스킬 요구.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부대의 사기 +1, 캠페인 지도의 가시거리 +25, 이 요원에 의해 점령된 지방의 침략자에 대한 저항 -25%
* 전설적인 지휘관 - "전설은 사라질 수 없다."
* 군의관 - "난 후방에서 부상을 치료할 기술을 약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비겁함은 치료할 수 없다!"
* 감찰관
* 수사관
* 훈련교관(Drillmaster) - "왼손이라고! 눈이 삐었군!"
훈련교관 스킬 요구. 부대 훈련 시 능력 +1, 이 요원이 배속된 군대에 있는 모든 부대의 돌격 보너스 +5
명사수, 훈련교관 스킬 요구. 군대 교란 시 능력 +1, 결투 시 능력 +1, 모병 감독 시 능력 +1, 부대 훈련 시 능력 +1, 게이샤에 의해 매혹될 확률 -25%, 암살 당할 확률 -10%, 자기 방어 시 적 요원을 죽일 확률 +15%
훈련교관, 병참장교 스킬 요구. 군사 행정 시 능력 +1, 모병 감독 시 능력 +1, 부대 훈련 시 능력 +1, 이 요원이 배속된 군대에 있는 모든 부대의 유지비 -15%, 모든 외국 베테랑의 행동스킬 비용 -5%, 해군 화력지원의 재충전 시간 -40초
- 하이큐/230화 . . . . 12회 일치
* 좀 허름하지만 숙소도 잡았고 네코마의 협조로 현지 체육관도 섭외해 막판 훈련에 매진한다.
* 드디어 시작되는 첫시합. 도쿄 체육관에서 네코마 고교가 카라스노를 마중한다.
주장 사와무라 다이치는 숙소에 짐을 풀고 네코마타 야스후미 감독의 협조로 얻은 체육관에서 현지 조정에 들어간다고 공지한다. 그러면서 특히 시끄러운 삼인조에게 "숙소에서 소란피우지 마라"고 경고한다. 조용히 대답하는 히나타, 타나카, 니시노야.
* 그들을 태운 버스는 으리으리한 호텔 앞을 지나친다. 이때 타케다 잇테츠 고문이 "곧 도착"한다고 말한다. 타나카는 이런 호텔이 묵는 거냐고 환호하는데, 진짜 숙소는 그 옆에 있는 허름한 보통 여관이었다. 어쨋거나 도쿄는 도쿄. 타나카는 "유령이 나올 거 같다"고 흥분하고 탐험하자고 제안한다. 히나타, 니시노야가 따라나서려는 찰나, 사와무라의 매서운 눈초리가 소리없는 경고를 날린다.. 또 조용히 대답하는 삼인조.
* 잠시 뒤 카라스노는 현지의 체육관에서 마지막 연습에 돌입한다. 평범하게 적응하는 멤버도 있지만 히나타는 잔실수가 늘었고 아즈마네 아사히는 평지인데도 산소가 부족하다며 호흡곤란을 일으킨다.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소심이들이 제실력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한다. 타케다 고문은 히나타는 긴장하는 편은 아니지만 첫 전국대회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팀 전체가 경직된 분위기라 매니저인 야치 히토카 조차 호흡곤란을 호소할 지경이다.
* 우카이 코치는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 타키노우에 유스케에게 맥주를 쐈다며 비장의 무기를 공개한다. 여관으로 돌아온 카라스노. 우카이 코치가 선수들을 집합시키는데 사와무라는 1회전 상대의 영상일 것으로 예상하지만 아니었다. 이름하며 NAE GAE JUZZ NUEN DONG-YEONG-SANG. 타키노우에 전자상가의 혼신의 역작이다.
엔노시타는 수완도 좋게 여관 주인에게 자전거를 빌려왔다. 꼼짝없이 끌려가게 된 츠키시마. 그 짜증 탓인지 한층 무서운 태도로 "내가 간다고 하면 바로 돌아가는 거고 말 안 들으면 돌아오기 어려운 곳에 방치"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어차피 히나타나 카게야마가 길눈이 어두운 관계로 절대 복종한다.
그때까진 얌전히 있던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들썩거리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때부터 매니저들의 입욕시간이다. 타나카는 그런 판국에 어떻게 평정을 유지하냐며 절규한다. 자칫하면 이 망상이 NAE GAE JUZZ NUEN DONG-YEONG-SANG까지 덮어씌워버릴지 모르겠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듣고 있던 나리타 카즈히토는 "네 머리통엔 뭐가 들어있든 상관없다"고 뼈아픈 말을 날린다.
* 3학년인 시미즈에겐 마지막 기회다. 히토카도 그 말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대답한다. 선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밤을 맞이한다.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런닝 삼매경. 츠키시마의 생각과 달리 쉽게 돌아오지 못할 듯하다. 아즈마네를 중심으로 동영상에 푹 빠진 파. 니시노야는 속편하게 자고 있다. 여관의 밤이 깊어간다.
* 마침내 오고야 만 1월 5일. 도쿄 체육관에 당도한다. 전국 배구 고등학교 선수권 대회. 통칭 봄고대회. 배구의 갑자원이라 불린다. 히나타는 작은 거인이 싸웠던 무대라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다른 학교 선수들이 지나가다 히나타와 부딪히는데 사과도 없이 가버린다. 상당히 키가 큰 그룹. 츠키시마는 2m가 넘을 거라고 예상한다.
* 이렇게 투닥거리는 사이 카라스노의 숙적이자 악우 네코마 고교 일동이 체육관에 도착한다.
- That 70's show . . . . 11회 일치
여주인공2.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 미모에 자신감이 넘치고 [[공주병]]이 강하다. 도나와 친구, 켈소와 연인 관계라서 그룹에 끼어들었지만 사실 초반에는 아무도 재키를 좋아하진 않았다(…). 시즌이 갈수록 우정으로 그룹의 일원이 되어간다. 작중 내내 켈소, 하이드, 페즈를 오가다가 8시즌 최종화에서 페즈와 맺어진다.
1시즌에서는 재키와 사귀게 되지만, 도중에 로리와 바람을 피우면서 삼각관계가 되고, 그것이 재키에게 들키면서 깨진다. 그리고 또 재키와 사귀려다가 재키가 하이드와 사귀게 되고, 도서관 사서를 임신시켰다는게 드러났다가, 하이드의 여동생 엔지와 사귀게 되고, 아무튼 맹렬하게 난잡한 관계를 유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전혀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일단 지구 반대편이고, 영국과 네덜란드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외국인 유학생. 뜨거운 호르몬을 가지고 있어 언제나 여자에게 열심히 들이대지만 결과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5시즌에서 추방 위기에 놓이지만 로리와 결혼하여 회피에 성공,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걸 위탁부모 가정에 알리지 않고 그냥 살다가 들켜서 쫓겨나고, 에릭네 집에서 몰래 얹혀살다가 들킨다. 이후 켈소와 룸메이트가 된다. 미용실에서 샴푸보이를 하게 되는데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안정적인 직장도 얻게 된다.
본래 직업은 자동차 공장 노동자였지만, 초반 시즌에서 폐업하는 단계가 되면서 한동안 무직이 되었으며 밥의 가게에서 일했던 적도 있다. 프라이스마트가 들어서자 관리직으로 취업했으나, 로리와 페즈가 결혼을 발표했던 충격으로 [[심장마비]](…)에 걸리면서 그만두게 된다. 이후 에릭의 학자금을 털어서(…) 자동차 머플러 가게를 차렸으나 그다지 잘 되지는 않았고, 대형 머플러 체인이 들어서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 때 체인점에 항의하러 갔다가 거액의 돈을 받고 주차장으로 팔아버리고 대신 노후자금을 득템한다.
에릭의 [[누나]]. 섹시하지만 사생활이 매우 문란한 [[빗치]](…). 에릭과는 반대로 키티와는 사이가 나쁘고, 레드에게는 귀여움 받는 딸이다. 에릭과는 견원지간으로 사이가 나쁘다. 시즌 초반에는 대학생이었지만 중간에 뭔가 문제로(…) 대학에서 짤리게 된다. 재키와 사귀던 켈소를 유혹하여 켈소와 관계를 맺고 삼각관계가 됐다가, 재키와 켈소 사이를 파탄내기도 했다. 5시즌에서는 페즈와 캠핑장에서 관계를 했다가 강제출국 위기에 놓인 페즈를 구해주려고 결혼을 해버렸는데 이 때문에 레드는 심장마비 발작을 일으켰다.
사진관 체인점 포토헛(Foto Hut)을 경영하는 [[히피]]로 등장. 과도한 대마초 사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으며,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 그런데 8시즌에서 사실 과거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퍼플하트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수송병으로 참가했지만 수송 트럭으로 독일군 탱크 부대를 뚫고 들어가서 소대원을 구출한 경력이 있다고. 귀국하고 차를 타는데 대마 연기를 풍풍 풍기는 수상한 재즈 뮤직션의 차를 얻어탓다가 그 이래로 히피화 된 것으로 보인다.
토미 총이 마리화나 관련 용품 판매로 잡혀가서 한동안 못 나왔던 적이 있다(…).
- Victoria II/POP . . . . 11회 일치
attachment:평양관료.png
* Size(규모): 해당 지역에 있는 해당 민족, 해당 종교, 해당 직업 POP의 인구수. 위 이미지에 따르면 평양에 거주하며 대승 불교를 믿는 조선인 관료는 모두 6,003명이다.
* Type(직업):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각 POP의 용도를 결정하기 때문. 예시의 POP는 관료다.
* Issues(관심사): 해당 POP들이 신경쓰는 정치 관심사. POP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맞는 정당을 지지한다. 예시에 있는 POP의 대다수가 정치 집회 자유화에 관심을 두고있다.
자신이 거주한 지역의 RGO 생산량을 늘려준다. 전제 군주정 체제에서는 행정 효율성도 올려주지만 관료보다는 성능이 딸린다.
==== Bureaucrats(관료) ====
attachment:관료.png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Victoria II]]
- 경순왕 . . . . 11회 일치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시|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경주시|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 본관 ==
[[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 가족 관계 ==
이들 어진 5점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돼 오다 2007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위탁 보관해 왔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ref name="kydy"/>
- 김대환 (법조인) . . . . 11회 일치
1942년에 [[경상북도]] 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대위를 전역한 이후 판사에 임용되어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와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수석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999년 10월 11일에 [[수원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수원지방법원]]장에 임명된 직후인 11월 20일에 수원지역 주민들의 등기민원 불편을 해소할 목적으로 2000년까지 수원시내 택지개발지구에 2개 등기소 를 설립하였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559307]</ref> 2000년 6월에 [[최종영]] 대법원장이 제청하는 신임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008261]</ref> 2000년 7월21일에 [[대전고등법원]]장으로 승진하였으며 2001년 2월 12일에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전보되면서 대법원장에 의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지명되었다. 서울고등법원장을 끝으로 법관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법무법인 율촌에서 송무 Group<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6&aid=0000189786]</ref> 변호사를 하다가 2004년 3월 2일에 박영철 고려대 교수와 함께 대법원장 추천으로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에 임명되었다. 2013년 4월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을 관할하는 서울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과 센터장을 맡았다.<ref>[http://news1.kr/articles/?1087614]</ref>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2년 10월 2일에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홍사덕]] 후보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흑색 선전물을 살포하다 1심에서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를 선고받은 안기부 대공수사국 소속 한기용(37세) 사무관과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박재규(29세) 김일환(32세) 전우경(27세) 등 4명에게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대공 수사관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음지에서 성실히 일해온 모범 공무원인데다 유죄판결로 공무원 자격 박탈되는 점 등을 참작했다"며 원심대로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2년 10월 2일자</ref> 1993년 2월 26일 [[5공화국]] 비리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받은 전 치안본부 정보1과 분실장 서정희(48세 당시 청와대 정부수석 비서관실 파견)에 대해 혐의사실 중에 일부만 유죄를 인정하여 선고유예 판결했으며<ref>동아일보 1993년 2월 26일자</ref>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은폐, 조작하여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65세)에게 범인도피죄를 적용해 1심대로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징역15년을 선고받고 1988년 가석방되었으나 1995년 보안관찰 처분을 갱신하자 낸 소송에서 "재범 위험성을 인정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ref>한겨레 1997년 1월 22일자</ref> 5월 20일에 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계장으로 있으면서 지방세 55억여원을 횡령하여 1심에서 징역22년6월 벌금40억원 선고받자 전재산 사회 헌납 약속으로 2심에서 벌금없이 징역22년6월만 선고된 안영휘의 가족이 "가족 명의의 재산을 압류한 것은 부당하다"며 청구한 소송에서 "구청은 안씨 명의의 부동산을 처분해 20억여원을 환수하라"는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5210032912300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5-21&officeId=00032&pageNo=23&printNo=16110&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7년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8년 4월 18일에 부하 직원의 불법행위를 묵인하고 뇌물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받은 전 김포세관 계장에
12월 2일자</ref> 12월 8일에 불공정행위 조사와 관련해 기업체로부터 3200만원의
- 김상중(배우) . . . . 11회 일치
|| '''본관''' ||<(> [[광산 김씨]][* 광산 김씨 40세손 '中'자 항렬이다. 후배 배우인 [[김수로(배우)|김수로]](본명은 김상중)와 [[김아중]]과 같은 항렬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배우 김수로의 본명은 김상중과 본관, 항렬까지 같다. 다만 한자까지 같지는 않고 김수로의 본명 김상중은 서로 상(相)이 아닌 위 상(上)을 사용한다.] ||
잘 안어울릴것 같지만 의외로 [[홍상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었는데[* 사실 홍상수의 작업방식이나 영화 등에 회의적인 입장이라 깔 겸 캐스팅에 응했다고한다. 하지만 함께해보니 배우들이 왜 홍상수 감독과 작업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의외로 잘 어울렸다.'''[* 사실 이런 반응은 홍상수 영화 캐스팅에서 처음이 아니었다. 고현정이라든지 김승우 이기우 등등 의외로 좀 있다. 이중 고현정과 이기우는 몇 편을 더 주조연으로 홍상수와 작품을 함께했다.] 아무래도 탄탄한 연기력으로 다져진 배우의 힘일 듯. 보통 나오는 기존의 남자상에 비해 좀 더 점잖고 젠틀하게 나왔긴 했는데 홍상수 영화 분위기 상... 영화 북촌방향 후반부 리얼했던 취한 연기[* 참고로 이런 장면을 찍을 때 홍상수는 배우들에게 진짜 술을 먹인다. 술에만 한정이 아니라 자다깬 장면이있을 시 진짜로 배우들을 좀 재우기도 하고 심지어 배우가 몸이 좀 안좋다 하자 한의원 신을 넣어 치료와 촬영을 동시에 하는 감독(...)]나 우리선희에서 제자와 만나는 교수의 모습은 브라운관에서만 김상중을 봐온 일부 팬들에게 신선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소년탐정 김전일|중년탐정 김상중]][* 줄여서 중탐이라고도 부른다.]으로도 불리고 있다. 한 예로 [[추적자 더 체이서]]의 홍보를 위해 출연한 한밤의 TV연예의 직구 인터뷰라는 코너에서도 그것이 알고싶다를 연상시키는 말투로 '중년탐정 김상중'이 직업병에 걸린 것이 아니냐 하는 우스개도 있었다. 대본이니 진지하게 논할 부분은 아니다. 특히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자주 하는 대사로 '''그런데 말입니다.''' (예전에는 그런데 말인데요)가 있다. 네이버에서 김상중의 연관검색어로 뜬다. 2014년 하반기 이후로는 "그런데요"라고도 하여 변화도 슬쩍 보이고 있다. 그외에 "~는 무엇을 의미하는걸까요?"도 제법 쓴다.
결국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으로 2012년 SBS 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https://youtu.be/X8MMNItNQGc|수상 장면]] 김상중은 수상소감으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나이에 공로상을 받기엔 이른 것 아닙니까? [[아재개그|상중의 상중소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대상후보를 대상으로 그것이 알고싶다를 패러디한 그들을 알고싶다라는 코너도 생방송으로 진행하여 만만치 않은 예능감을 보였다. 실제로 몇 차례 예능 프로그램 출연섭외 요청도 있었으며 팬들도 예능출연을 원하는 분위기이나,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을 위해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277982|관련 기사]] ][* 그알싶을 맡기 이전에는 [[상상플러스]], [[일요일이 좋다]]-엑스맨, [[여걸 식스]] 등등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영화홍보 등을 위해 게스트로 종종 출연했었다. 외모만 보면 [[엄진근]]스러울것 같은데 막상 토크나 게임에선 부드러운데 어딘가 허당스러운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추적자 종영 후 추적자 외전으로 런닝맨에 장신영과 출연했다. 당연히 컨셉은 극 중 강동윤 캐릭터.
* [[해병대 수색대]] 출신이고 [[병장]] 출신이다.[* 참고로 자신의 먼 친척인 [[김광규]]는 해병대 병 출신이 아니라 육군 부사관([[중사]] 만기전역) 출신이다. 김수로는 1990년대 중반까지 아버지가 없는 외아들에게 주어졌다는 병역(부사망 독자)인 6개월 방위 출신이다.]
* 손해보험 광고출연을 위해 연예인 최초로 [[보험설계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는 보험광고에 출연하는 연예인이 보험설계사 자격을 취득하지 않으면 보험광고에 출연하더라도 보험상품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할 수 없고 단순히 추천만 가능하도록 금융감독원에서 규정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2889599|관련 기사]][* 2013년 기준으로 최고령 연예인 보험설계사는 [[이순재]],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2731646|기사]]]
* [[취미]]는 온로드 바이크 운전인데,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바이크 마니아로 통한다. 젊은 시절엔 레플리카 바이크를 다수 [[소유]]했을 만큼 푹 빠졌고, [[현재]]는 방송 활동 등의 이유 덕에 자주 타지는 못하지만 꽤나 즐긴다고 한다. 실제로도 [[영화]] [[투사부일체]]에서도 [[스턴트맨]]도 쓰지 않고 자신이 직접 [[바이크]]를 몰며 촬영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2014년 중순부터 [[XTM]]에서 론칭한 바이크 관련 프로그램인 [[슈퍼바이크]]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어쩌다 어른]]에서 밝힌 일화로, 바이크를 타던 도중 불량 고교생으로 보이는 무리를 만나서 헬멧도 안쓰고 위험하다며 훈계했는데, 하필 그 때 조작 실수로 바이크의 시동을 꺼트리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다고.
* 2015년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 주인공 [[류성룡]] 역으로 캐스팅되었는데 기사가 나오자마자 덧글에는 '그런데 말입니다'를 비롯한 그것이 알고싶다 관련 드립들이 달리고 있다. 그런 드립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방영 초기에는 '그것이 알고싶다'의 톤과 겹쳐서 [[디시인사이드]] 징비록 갤러리 내에서 [[호불호]]가 갈린 바 있다. 멘트의 고조가 사극의 전형을 구현하면서 자신의 장기인 조곤조곤하면서 정확한 대사전달을 능히 하고 있어 연기력 자체에 대한 불만은 아니다고 볼 것이다.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두운 세트에서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 입은 중년이 생각나는데 조선시대 공복을 입고 있으니 그리고 마침내 징비록 40화에서 '그런데 말입니다'가 대사로 나와버렸다! 덧붙여서, 선조의 찌질함에 열받은 네티즌들은 김상중의 훌륭했던 악역 연기에 힘입어 [[https://www.youtube.com/watch?v=qR_0MJVAnGY|선조를 대놓고]] [[https://www.youtube.com/watch?v=Q4jfZU9um2M|비난해대는 영상을]] [[https://www.youtube.com/watch?v=D9HYf8cTLk8|만들고 있다.]]
* 과거 대학교 소극장에서 유준상을 별다른 이유 없이 구타한 일이 있다. [[http://theqoo.net/square/249161400]] 자세히 설명하면 당시 유준상은 소극장 청소를 하고 있었다. 청소 중 의자에 앉아있는 김상중을 발견했고, 청소 도중이라 가벼운 목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김상중의 표정이 굳더니 유준상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고 가까이 가자 갑자기 폭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건이 있은 후 유준상은 왜 자신을 때렸는지 몇차례 물어봤으나 그럴때마다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을 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나오자 그제서야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싶다/2016년 방영 목록#s-3.4|똥군기에 관련된 사고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올때]]마다 이 일은 더욱더 흑역사로 부각될 것이다.~~
* 혼사와 관련된 [[흑역사]]가 있다.[* 이전에 한번 [[결혼]]을 해서 아들을 두었었는데 [[2000년]]에 [[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200002/wd2000020120.html|이혼을 했었다]]. 이쪽도 이혼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2003년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049827|결혼 발표]]를 했었으나 [[신부]]가 [[파라다이스 그룹]] 재벌 2세 행세를 한 사기결혼으로 드러나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004595|파혼했다]]. 진행을 맡고 있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종종 사기 결혼에 대해 다루곤 하는데[* [[2013년]] [[8월 10일]] 방영된 「내 아내는 누구인가」편과 [[2014년]] [[7월 5일]]에 방영된 「사라진 '신데렐라' 예비신부 실종 미스터리」도 이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과연 어떤 심정일지.
- 김석훈(탤런트) . . . . 11회 일치
원래 [[금남리토종순대국]](구 가평예전)에 들어가 연극영화를 전공했었다. 본인의 회고에서 금남리토종순대국는 실전 연기와 실기를 충실히 단련해 지속적으로 익히는 점에서 최고의 과정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에 머물지 않고 연기내면의 깊이와 표현력을 높이는 한 방식인 이론 탐구도 갈구해 [[금남리토종순대국]]에 입학한다. 입학 후 연기이론에 정통해 진 것 외에도 철학과 심리 등 인문계통 학문을 여럿 접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했다. 거기다 학문소양도 차근차근히 다져, 자신의 연기로도 폭 넓게 반영 하고 배울 수 있어 뜻 깊고 좋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배우에게는 인간에 대한 관심 및 인간심리, 각종 군상들을 다각도의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다지는 일이 필수다. 이런 사안을 본인이 이미 그 중요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본격적인 영상영역활동 중 하나인 TV출연은 정세호PD와 국립극단에서의 강력한 권고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국립극단에서는 극단의 인지도 향상과 활력을 위해, 방송국에서는 드라마에서의 국면 전환과 참신한 인재발굴을 위한다는 점이 서로 맞아들어간 것이었다. 말 그대로 무명의 극단배우에서 데뷔작에서 타이틀롤을 맡으며 한순간에 스타가 되었다.[* 그것도 홍길동이다. 소재 하나만으로도 주목을 받을 수 있을 드라마다. 거기에 무명은 둘째치고 TV 경력이 없는 배우가 주연을 맡은 셈이다. 하지만 홍길동은 당시 신인이었던 김석훈이 맡았던 첫 작품임이었지만, 캐릭터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호평을 받았다. SBS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에 신선한 배우를 캐스팅한 사례가 또 있었으니 바로 [[임꺽정]]. 연극배우 생활을 하던 32세 [[정흥채]]는 브라운관 데뷔작을 타이틀롤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당시 최고의 인기배우 [[김희선]] 주연 드라마 [[토마토(드라마)|토마토]]에서 김희선 상대역인 남자 주연배우가 되었으니... 그리고 둘 다 최고의 시청률(50%를 넘겼다!)을 얻으며 전성기를 구가한다.'''단 1년 만에.''' 엄청난 향상이다. 김희선이나 김석훈이나 당시 비주얼 면에서도 최고를 달렸던 시기.[* 지금도 두 배우는 비주얼이 변함없이 최고다.]
드라마나 사극에서 주연 외에도 내레이션과 공연관련 활동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궁금한 이야기 Y]]의 MC로도 활동중이며, [[징비록(드라마)|징비록]]의 [[이순신(징비록)|이순신]]으로 캐스팅되었다. 일례로 들자면 징비록에서 얼마나 연기를 진지하게 했는지, 보고있던 주위의 제작진을 몰입시켜 현장을 다 숙연하게 했다는 전언이다. 카리스마 있고 군율에 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이순신을 탁월히 조화하며 잘 표현했다. --그것이 알고싶은 궁금한 이야기 Y--
말끔한 이목구비의 젠틀한 [[미남]]에 속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이다. [[일본]]의 약간 여리여리한 이미지의 남자배우들과 닮아보이지만, 여림에만 갇힌 것이 아닌 이지적인 특유의 외유내강이다. 이미지는 선하면서도 강단성이 동시에 있고 연기에서도 관련배역을 맡았을 때 온유함과 강인함이 함께 배어난다.
뮤지컬 브로드웨이42번가 공연에서 명 연출가 줄리안 마쉬역을 맡았다. 서울공연에서 성황리에 높은 유료점유율을 기록하고 지방순회공연을 이어갔다. 본인이 맡은 노래2곡을 배역에 조화롭게 녹여내기 위해, 무려 2달간을 꼬박 연습에만 매달렸다. 공연에서 마쉬의 캐릭터인 카리스마의 경중 조절에서, 상황별로 깊이있는 연기로 표현했다. 공연때나 리허설때나 스태프 및 출연진과 소통하며 배우는 신인의 자세를 잊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 이는 그간 인터뷰에서도 나타냈던, 데뷔당시의 변치 않는 신념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즉 본인이 말한 대로 철저하게 기초부터 다지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임해 많은 호평을 이끌어 냈다. [* 공연관람에 평소 흥미가 없었다고 한 층까지도 신규관람층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전년과 대비해 김석훈은 공연에 참여한 이후로, 신규층의 높은 관람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더 높이 호평받았다.]
배우 외에도 내레이션과 DJ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깊은 성량의 발성과 정확한 발음에서도 기인한다.[* 목소리만 들어도 성우같고 아나운서 같다.] 연기를 할 때 뿐만 아니라 진행분야에서도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클래식프로를 진행 할 때는, 연기의 캐릭터를 탐구하듯 연구에 몰두했다. 관련항목 탐구 및 현장탐사에 전력을 기울이며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갔다. 여담으로 작품에 임할 때도 하도 진지하게 몰입하고 연구해서, 고시공부 하냐는 비유도 나온다. 역시나 책임감이 투철하다.
시사프로그램과 내레이션에 대한 깊은 애정도 본인은 종종 드러내곤 한다. 프로그램에서 사례자의 입장을 대변하며 고려해 전하되, 객관성도 잘 조화시키는 능숙한 진행을 보여주고 있다.
성남마티니공연도 관객들에게 매끄럽고 풍성한 진행이라 호평을 받고 있다.
[[금남리토종순대국]]에서 연기 강의도 하는데, 제자인 [[임수향]]은 김석훈의 강의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 바 있다. 배우로 데뷔하고 활동하는 데 있어 부딪히는 각종 난관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해주고 조언을 아낌없이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제자인 [[진세연]]도 같은 언급을 하였다.
- 김정호 (1949년) . . . . 11회 일치
* 1976년 : 농수산부 종합기획실 사무관
* 1983년 : 농수산부 농업경제과 사무관
* 1986년 : 주 이탈리아 대사관 농무관보
* 1995년 : 주 제네바 대표부 참사관
* 1999년 : 청와대 농림해양수산비서관
* 2001년 : 농림부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 2003년 : 농림부 차관
|직책 = [[대한민국 농림부|농림부 차관]]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농림부 차관]][[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김처선 . . . . 11회 일치
* [[김(성씨)/목록]]. [[한국사 관련 정보]]
[[조선]] 시대의 유명한 [[환관]].
사실 김처선은 젊었을 때만 해도 상당히 '''노는''' 내시였던 모양으로, 세종 때 내시가 된 이후 [[문종(조선)|문종]] 때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1453년(단종 1년) 귀양이 풀리고 이듬해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단종 3년) 금성 대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 관직 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연산군]]은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직언을 하였던''' 김처선을 극도로 혐오하였으며, 때문에 김처선이 숨을 거둔 이후에도 밑도 끝도 없이 [[복수]]를 꾀하였다. 먼저 그의 양자인 이공신을 처형하고 7촌 관계의 친족들까지 벌을 주는가 하면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갔던 '처(處)'자의 사용을 금해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의 이름까지''' 풍두무(豊頭舞)로 바꿀 정도였다.
게다가 김처선 부모의 묘까지 헐어 버리고 집은 밀어버린 후에 터를 연못으로 만들었다. 또한 전국의 김처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명'''을 명하고 과거 시험에 처(處)자를 사용하였다고 합격자의 '''합격이 취소'''된 사례에 상소에 처(處)자를 써서 국문을 당하다가 천만다행히도 법 제정 이전에 썼다고 국문을 취소한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그의 본관인 전의(全義)도 없애버렸다.'''
SBS [[사극]]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며 각색이 심하게 되어 실제 김처선의 일생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려진다. 당장 활동 연대부터 실제 역사와는 크게 달라 성종 즉위 이후부터 내관을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실제론 손녀 뻘인 [[폐비 윤씨]]와 비슷한 나이로 설정되어, 그녀를 평생 동안 사모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폐비 윤씨의 자식인 연산군을 어려서부터 돌봐준 인물로 중종 반정으로 귀양가 있던 연산군이 어린 시절 김처선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후회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참고로, [[배우]]는 [[오만석]].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주인공 연산군이 주색잡기는 즐기지 않지만 무기 개발에 힘을 쏟고 일본과 여진족과 전쟁을 거듭하며 패도를 걷자 이 전쟁광스러운 행보에 대해 계속 직언을 한다. 주인공이 김처선의 말을 무시로 일관하자 김처선은 임금에게 매일을 함께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사냥터에서 짐승인 척 하고 수풀에 숨어있다가 연산군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그러나 이후 신하들에게는 김처선이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직언에 분노한 임금이 직접 총으로 쏴죽였다고 소문이 퍼진다.
하고 정이품 환관 처선에게 활을 당겨버렸다
또 이번에는 환관 김처선의 배 갈라 창자를 꺼내 던졌다
그것으로도 안 차서 양자 본관인 충청도 전의 고을을
- 박철우(배구) . . . . 11회 일치
* [[배구 관련 인물]]
|| 가족관계 || 장인 [[신치용]], 배우자 신혜인, 딸 박소율,박시하 ||
'''[[후인정]]-[[김세진]]을 잇는, [[문성민]]과 더불어 삼성-현대 라이벌관계를 상징하는 현재 한국배구의 에이스급 라이트'''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에서 2004년 데뷔해 2010년 삼성화재로 FA 이적을 했는데 그 배경에 전 [[부천 KEB하나은행|신세계 쿨캣]]의 [[농구]] 선수 [[신혜인]][* 이 열애설이 더 유명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혜인]]의 아버지가 삼성화재의 감독인 [[신치용]]'''이기 때문이었다.(어머니는 농구선수 전미애) 그래서 그가 현대캐피탈 소속이던 시절에 많은 이들이 이들의 연인 사이를 배구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비유하기도 했으며, 배갤에서의 별명이 무려 '''사위'''(...)다. 그리고 박철우가 삼성전에서 유난히 부진한 것을 보며, 장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다고 많이들 깠었다. 박철우가 FA로 이적하면서 사위와 장인이 한 팀으로 뭉쳤다.]과 연인 관계였던 것이 드러나서 유명하다.
2009년 9월,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이상열(배구)|이상열]]에게 피멍이 들 정도로 구타를 당했다. 이례적으로 공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체육계의 고질적인 선수 구타 관행이 재조명되며 대한체육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실효성은(...)-- 그 때 배구 대표팀은 [[태릉선수촌]]에서 쫓겨났고, [[이상열(배구)|이상열]] 코치는 '무기한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그 ~~[[이상열(배구)|이상열]] 코치~~는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없으나 KOVO 경기 감독관으로는 활동할 수 있었는데, 징계가 슬그머니 풀려서 [[경기대학교|경기대]] 배구부 감독으로 복귀했다. 하긴 전임 [[이경석(배구)|이경석]] 감독도 비리 문제로 물러났다가 은근슬쩍 복귀한 전례가 있었으니...
그런데 박철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문제가 있으니 바로 '''군 문제'''. [[기흉]]이 [[장동건]] 때는 면제 사유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아닌지라 병역 의무를 필해야 한다. 군대 문제 때문에 늦은 나이에 입대한 후 사그라든 선수들의 예를 봤을 때[* [[손석범]]이라든가, [[윤관열]]이라든가, [[백승헌]]이라든가... 이들은 모두 공익으로 복무한 후 복귀했지만 결국 은퇴했다. ~~여기에 [[신영수(배구선수)|신영수]], [[김학민]], [[한선수]]도 이 리스트에~~ 다행히 [[신영수(배구선수)|신영수]]는 공익으로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후 예전 감각을 잃지 않았다. 덤으로 팀의 주축으로 2013-14 시즌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다. 하지만 [[한선수]]는 [[일본]]에게 덜미를 잡혀 2015년 전역 확정.] 염려가 되는 게 사실이다. 본인이 건강 문제에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이가 태어났으니 [[한선수]]처럼 상근예비역으로 빠질 확률이 높긴 하다.--
게다가 [[가빈 슈미트]]와 레오나르도 '레오' 마르티네스로 이어지는 삼성화재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을 많이 내준 탓인지 공격감이 현대캐피탈에 있을 때보다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정규시즌에도 박철우의 비중은 적어졌고, 설령 공격을 해도 벽치기가 잦아서 '''벽철우'''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2013 KOVO컵에서도 그 현상은 여전히 드러났다. 그런데도 팀 공헌도가 박철우보다 객관적으로 높은 [[여오현]]보다 많은 돈으로 FA 재계약을 했는데, 연봉이 무려 '''3억 3,000만 원'''이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FA가 된 [[여오현]]이 삼성화재로부터 2억 6천만원을 연봉으로 제시받았는데, [[여오현]]은 이를 거부하고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와 연봉 2억 9천만 원에 3년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여오현]]은 KOVO컵에서 여실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현대캐피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지만, 준결승 [[일본]]전에서 패해 '''결국 군대 확정....''' 2014년 10월 23일로 입소일이 찍힌 입대 영장이 아시안 게임 이후 통지됐다고 한다. 삼성화재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그런데 행정절차 때문에 입소일이 [[2014년]] [[11월 27일]]로 연기된 상태. 이유인즉슨 박철우가 오프 시즌 동안 주소지를 팀 숙소와 전용 체육관이 있는 [[경기도]] [[용인시]] 근처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주소지 변경 때문에 관할 병무청이 변경되어 박철우의 입소 날짜를 다시 세팅하게 되었으며, 일과를 마치고 팀 훈련장에서 훈련하기 위한 취지로 추측된다. 2014년 11월 20일 대전 홈 경기를 끝으로 입대했다. 이후 기초 훈련을 마치고 [[수원시|수원]] [[권선구|권선구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 중이다.
2015-2016 시즌, 세계 최고 소리를 듣던 [[괴르기 그로저]]가 라이트 자리에서 뛰면서 폼이 빠르게 올라오지 않자 역시 다시 박철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고 있다. 단 주의할 점은, 세계 최고의 아포짓이라는 그로저의 명성에 비해 기대치가 안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다. 몇경기만에 득점 1위를 할 정도로 점유율도 높고, 공격 성공률또한 용병 중 3위정도를 할 정도로 괜찮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서브는 현재 1위를 기록중.
- 배경 세계 공유 . . . . 11회 일치
상단의 정보처럼 본 문서명은 가칭이다. 이러한 스타일에 관해 'shared universe', 'shared world' 등의 단어가 있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향을 받아 영화계열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고도 한다. 공통 세계관, 동일 세계관, 세계관 공유 등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SF영화 스타워즈와 관련 애니메이션, 만화 등이 있다.
* 클로버필드 관련 배경 공유 작품들[* <클로버필드 유니버스>라고도 하나 이는 정식명칭이 아니다.]
괴수영화 [[클로버필드]]가 대표적. 현재까지 나온 관련 작품들의 성격이 많이 다르나 배경 세계를 공유를 증명하는 요소가 있다.
* 언브레이커블 관련
장난감 회사인 하스브로와 관련이 있으며 준비 단계라 한다. <지 아이 조(G.I. Joe) 시리즈> 외에도 <M.A.S.K.>, <Micronauts>, <Rom>, <Visionaries: Knights of the Magical Light>가 등장한다는 정보가 있다. 또한 <트랜스포머(Transformers) 시리즈>가 리붓트되면서 이 프랜차이즈에 소속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이러한 것이 확정이라는 보장은 없다.
* [[퍼시픽 림]] 관련
<[[성방무협 아웃로스타]](星方武侠アウトロースター)>는 <[[성방천사 엔젤링크스]](星方天使エンジェルリンクス)>와 배경 세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Toward Star Worlds>라고 한다. 이 세계는 아웃로스타의 원작자인 이토 타케히코(伊東岳彦)의 출세작 <[[우주 영웅 이야기]](宇宙英雄物語)>와도 연관성이 있다.
- 배슬기(배우) . . . . 11회 일치
배슬기, 추소영, [[오승은(배우)|오승은]]으로 이루어진 그룹 [[더 빨강]]의 멤버로 데뷔했다.[* 엄밀히 말하면 드라마 [[풀하우스(드라마)|풀하우스]] 최종회에서 단역으로 나온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이 중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배슬기뿐이고, 나머지 두 명은 그냥 연기자.[* 오승은은 나중에 밴드를 꾸리고 본격적으로 가수 연기자 겸업 활동하고 있다.] 심지어 둘 다 예능감이 그다지 좋지 않은 관계로~~오승은은 후에 무한걸스로 예능감을 폭발시켰으나 이 당시엔 안습의 예능감~~, [[X맨을 찾아라]] 등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며 팀을 혼자 먹여살렸다. 이 시절 선보였던 ''''복고댄스''''는 12탄까지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많이 유포되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고 인터넷에서 UCC를 보고 혼자 연습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Bae Seul-Ki 배슬기 (Door To The Night 야관문 : 욕망의 꽃, 2013) Trailer 18+ ||
2013년, 9월 27일 [[신성일]]과 출연하는 '야관문'이라는 영화 개봉 소식이 올라왔는데 '''배슬기 노출'''이라는 [[언플]] 속에 검색어에도 올라왔다. 문제는 하필 이날이 본인의 생일이라는 게... 야관문은 [[11월 7일]] 개봉했으나, 역시나 떠들석한 언플치고는 노출 수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고 시나리오 수준도 엉망이며 평가가 좋지 않다. 거기다 중간에 한 번 나오는 뒤태 나체 장면은 '''대역으로 밝혀졌다.'''
=== [[정치]]성향 관련 발언 ===
[[2012년]] [[11월 24일]] [[안철수]] 대선 후보 사퇴와 관련된 트위터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11월 23일]] 안철수가 후보를 사퇴하고, 24일 [[임호]]가 자신의 트위터에 "안 후보님 사퇴하셨네요."라는 글을 올리자, 그에 대한 답변(멘션) 형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 당에 관한 종북 발언은 아니었습니다~ 말씀대로 그럴만한 정치 지식도 못 되고요. 개인적으로 '''이번 일들만 조명해 생각한 말이 아니다'''보니 실언을 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 콘서트 비매너 관람 논란 ===
2017년 5월 30일 엑소(EXO) 콘서트에서 [[채연]]을 포함한 볼링 팀과 함께 관람했다. 이 가운데 현장에 있던 팬들은 일행들이 공연 중 음식물을 먹거나[* 그 중에는 공연장에서는 반입이 안 되는 맥주도 마셨다.], 공연 도중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고, 공연이 끝나기 전 단체로 자리를 뜨는 등 매너 없는 관람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해 도마에 올랐다. [* 게다가 채연과 배슬기도 가수인데도 후배 가수의 공연에서 비도덕적 행동을 한 것이다. 같은 가수로써 공연 비매너가 얼마나 불쾌하는지 그 누구보다 아실 분들이 비매너를 저질렸다.] 그 사건 이후 [[채연]]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사과문을 올렸다.[[http://www.spotvnews.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7607|해당기사]]
|| 2013년 || 야관문 : 욕망의 꽃 || || ||
- 솔비 . . . . 11회 일치
| 관련활동 =
2018년 6월 플레이런TV '로마공주의 수상한 미술관' MC로 발탁됐다. 솔비는 방송과 SNS를 통해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밝혀왔다. 매년 봉사활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미술 교육도 한 바 있다. 이처럼 솔비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들과 치유 목적으로 시작한 자신의 일부가 된 미술를 결합해 아동 미술이라는 영역에도 도전했다. 그결과 '수상한 미술관'은 현대 미술을 기반으로 보고, 듣고, 만지는 경험을 통해 창의적 표현을 배워가는 기존에 없던 미술 프로그램이자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653218|제목=솔비, ‘수상한 미술관’ 신개념 교육프로그램 탄생…팔색조 변신|성=조유경 기자|이름=2018년 6월 13일|날짜=|뉴스=|출판사=스포츠동아|확인날짜=2018년 7월 3일}}</ref>
* 《[[가족오락관]]》 (KBS1, 2006~2007년)
*《로마공주의 수상한 미술관》 (플레이런TV, 2018년)
'지역 희망 박람회' 아톰관 전시,김대중컨벤션센터 광주
서울모던아트쇼, 권지안 특별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 [[2017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홍보대사
* [[2008년]]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홍보대사
* 2006년 제40회 가수의 날 모범 가수상, 문화관광부 7월의 우수 신인음반상
- 신현준(군인) . . . . 11회 일치
* 관련 문서: [[대한민국 국군/인물]], [[가톨릭/인물]]
|||||||| [[대한민국 해병대]]의 [[해병대사령관]] ||
부모를 따라 일찍 [[만주]]로 이주하여 [[하얼빈]]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이 [[만주]]에 세운 봉천군관학교에 [[1936년]] 4월 [[입학]]하였다. [[졸업]]한 후에는 [[만주군]] [[대위]]로 근무했으며, 이때 [[박정희]]보다 상관으로 같은 부대에 있었다. 그는 [[박정희]]를 비롯하여,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김석범]], [[원용덕]], [[김창룡]] 등과 함께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었다.
만주군 복무만으로도 이미 '일제 부역'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가 항일 독립운동가들과 그 항일조직들을 소탕하고 잡아 죽이는 일을 하기위해 만들어진 부대인 [[간도 특설대]] 간부였고, 그것도 창설 멤버였다는 점이다.[* 신현준의 간도 특설대 활동 증거는 다름아닌 만주군 동기생이자, 훗날 그의 후임으로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이 되는김석범의 저작 <만주국군지>다.] 해병대의 창설 지휘관이자 초대 사령관이 간도 특설대의 창설 간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사실은 해병대의 흑역사일수밖에 없다.
[[8.15 광복]] 후 잠시 [[광복군]]에 편입되었다가 귀국하여 [[1946년]] [[조선해안경비대]]에 입대한 뒤 [[해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같은 해 인천기지사령관을 거쳐 [[1948년]]에는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1949년]] [[4월 15일]]에 약 380명의 병력으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될 때 초대 [[사령관]]을 맡았다.[* 당시 계급은 [[중령]]이었다.]
2007년 10월, [[향년]]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해병대 초창기를 함께 이끌었던 후배 [[김성은(군인)|김성은]] 전 사령관이 세상을 떠난지 5개월 후의 일이었다.
- 연정(우주소녀) . . . . 11회 일치
||<#FFA38B><:> '''{{{#white 본관}}}''' ||<(> [[유씨|기계 유씨]][[https://ko.m.wikipedia.org/wiki/%EA%B8%B0%EA%B3%84_%EC%9C%A0%EC%94%A8|(杞溪 兪氏)]]||
인터넷상에서의 별명은 닮은꼴로 자주 언급되는 연기자 라미란. 부모님도 라미란을 닮은 걸 인정했고, 이젠 이름만 들어도 몸이 반응한다고 한다.[[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produce101&no=194322&page=1230&exception_mode=recommend|어린 시절 사진]]. 그래서 모녀관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네이버TV에 공개된 비하인드 영상에서 본인도 이 별명에 대해 안다고 밝혔다. 여기에 대장의 야민정음을 합친 '라머장', '머장님'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배성재의 텐에서 이 별명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쪽은 야민정음인지라 방송에서 직접 사용하지는 않지만 현장토크쇼 택시에서 제작진이 이를 사용해 버렸다.[* [[http://oi63.tinypic.com/mljq83.jpg|#]]] 그러나, '''다이어트를 한 후에는 라미란과 닮지 않았다'''(???) 다이어트 성공후 새로운 리즈를 갱신했다. 라미란 외에는 같은 팀 멤버인 수빈과도 닮았는데, 수빈이 <비밀이야> 활동부터 스타일을 단발로 바꾼 게 둘의 캐릭터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있다.
노래를 부를 때 특별한 기교나 습관을 넣는, 이른바 '자기화' 시키지 않는다는 것 역시 특징으로 꼽힌다. 어떤 노래라도 원곡의 분위기에 맞게 부르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다는 면에서는 정말 뛰어나다고도 볼 수 있다. [[프로듀스 101]]에 출연했을 때는 특정 장르의 노래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간혹 나왔지만 생방송 무대에서 보여준 <Crush> 무대 이후로는 그런 이야기가 사라진 상태. 어떤 류의 노래를 불러도 거부감 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걸그룹에서 메인보컬을하기에 최적화된 보컬'''이란 평. 감성 전달력이 약하지 않느냐는 평은 적지 않지만 전달력이 마냥 약한 건 아닌지라 자기만의 특색과 전달력은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아가면 해결 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어린 나이라는 걸 감안하면 오래지나지 않아 자기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복면가왕에 출연한 뒤로부터 "연정의 특색이 이거였구나."라는 반응이 많아져서, 이전까지는 되려 저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데, 방송에서 직접 언급했듯이 '''그 전까지는 방송에서 솔로곡을 완창한 적이 없었다.''' 평가할 만한 솔로 무대가 유튜브 영상 외에 없었으니 솔로로서의 평가가 박했던 것이다.
2017년 1월 20일 ~ 1월 22일 3일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I.O.I의 마지막 콘서트인 타임슬립 I.O.I 콘서트에서 같은 메인보컬인 김세정과 함께 이승철의 '서쪽하늘'을 불렀는데 저음부에 김세정이 감정을 잡고 고음부에서 유연정의 장기인 고음이 폭발하여[*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무려 5단고음을 선보였다] 엄청난 무대를 선보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AXDu6D1fpW8[|#]]
2016년 8월 10일 방영된 걸스피릿 4회에 다원을 지원사격하러 출연, 마마무의 <넌 is 뭔들>을 소화했다. 방송에 나오기도 전에 걸스피릿 연관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했다.[[http://dcimg1.dcinside.com/viewimage.php?id=2ab4c22af6c22aaf7aef85e746&no=29bcc427b38b77a16fb3dab004c86b6f113d37b1bcb96f74596c07c47348a17c44487b07c9662c1671ff75596f818e9797dea0e370aa9c87aaddc7bab3971b7329923d|#]] 그러긴 하나 연정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바람에 오히려 다원이 묻혔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스타쉽에서 관리를 혹독하게 시켰는지 비주얼이 엄청나게 상승했다.[[http://dcimg2.dcinside.com/viewimage.php?id=34b2df3fe0dd36ac7bb1d1&no=29bcc427b38b77a16fb3dab004c86b6f113d37b1bcb96f75556c19c26e5db7632c4092fc08cf1ba17954fbb230ddbbbfd58f21588be8d5b584a26b1400|#]] 팬들은 '''연정이가 각성했다'''라며 환호 중. 스타쉽이 이전까지의 홀대[* 일단 프로듀스 101에서 스타쉽이 밀었던 멤버가 태하였는데, 문제는 스타쉽의 기대와 달리 태하가 8회만에 방출당했다는 것..... 결국 태하는 스타쉽에서 더블킥으로 이적해 모모랜드에 합류했다.]를 멈추고 본격적으로 연정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듯 하니, 앞길은 창창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9월 23일 배성재의 텐에 리더 엑시와 함께 출연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jsVX0YY8bm8|풀버전]] 배성재와 눈싸움으로 붙어 80초 가량 눈을 떠서 승리했고, 연관검색어 토크에서는 '라미란', '고민 상담' 등에 대해 얘기했으며, 사이다 보컬이라는 별명에 맞게 사이다 광고 컨셉의 연기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eye돌', '[[장성군|장성]] 독사이다', '제갈광명' 등의 별명을 얻었다. 중간에 스타쉽 오디션에서 불렀다는 이선희의 <인연>을 무반주로 짧고 굵게 불렀다.[[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78965744&rtes=y&startDuration=26.57|#]] 잊을 때만 되면 배텐에 김소혜나 프로듀스 1077 게스트에 의해 언급되어, 채팅창이 광명독사로 도배되고는 한다. 연정이 출연료 주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
2017 설날 아육대에도 나갔지만,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김세정과 달리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은 관계로 리듬체조 동메달 획득 후 울고 있는 성소 앞에서 위로해 주는 장면만 살짝 내비쳤다.
2016년 12월 25일,2017년 1월 1일에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 [[하얀시 눈이군 쌓이면 우리마을]]이라는 가명으로 출연했으며 [[집 나가면 고생 컴백홈]]에 이은 우주소녀 멤버 중 두번째 참가자다. 1라운드에서 [[김군 최군 우리 모두 구세군]]을 이긴 뒤 2라운드 상대인 [[지방방위대 디저트맨]]에게 밀렸다. 참고로 2라운드에서 부른 유미의 '별'은 1년동안 활동하다가 해체를 앞둔 본인 그룹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선곡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경연에서는 그 뒤 복면가수로 나온 [[가왕? 별들에게 물어봐~ 첨성대|또다른 멤버]]와 동명이인인 [[주전자부인 펄펄 끓었네|혼성 그룹 여성 가수]]가 2라운드에서 [[사랑은 관람차를 타고|복면가수 출신 여성 판정단]]의 곡인 '멍'을 불렀으며 이들도 같은 성적을 보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 유연정의 이름을 유정연[* [[TWICE|트와이스]]의 멤버 [[정연(TWICE)|정연]]]으로 착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연과 정의 위치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본관이 같다.
- 영덕군 . . . . 11회 일치
원래 일제강점기 말기에 [[동해선]]([[동해중부선]]) 계획이 있었고 노반까지 남아있을 정도였으나 해방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결국 70년이 넘는 세월을 걸려서 [[동해선]]이 개통되어 영덕군 동부를 남북으로 관통한다. [[KTX]]가 정차하는 [[포항역]]을 출발해 [[장사역]], [[강구역]], [[영덕역]]에 모든 [[무궁화호]]가 정차하고 [[영해역]]을 지나 [[강원도]] [[삼척시]]의 [[삼척역]]까지의 공사가 진행중인데 영덕역 북쪽 구간이 완공되면 [[부산]]부터 영덕을 지나 [[강릉시]]까지 동해선 철도가 쭉 이어질 예정이다. 남쪽으로도 [[모량역]]부터 [[신경주역]]을 지나 [[태화강역]]까지 이어져서 최종적으로는 동해선의 실질적인 종점인 [[부전역(동해선)|부전역]]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개량중이다. 2018년 2월 기준으로는 중간 일부 구간들이 미완성이다. 동해선 외에 김천에서 의성을 거쳐 영덕을 이어주는 [[경북내륙선]]이 장기계획으로 추진 중 이다.
[[고속버스]]편을 이용할 때에는 인근의 [[안동시]]나 [[포항시]]를 찾는 것이 편리하다. [[시외버스]]는 [[대구광역시]]나 [[포항시]], 울진 같은 근거리는 많이 다니는 편이고, [[동서울터미널|서울]]을 오가는 [[시외버스]]도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있다. 시외버스를 이용하고 싶으면 관내의 [[영덕터미널]]이나 [[강구시외버스터미널]], 그리고 [[영해버스터미널]]을 이용하면 좋다.
[[2016년]] 12월 [[당진영덕고속도로]]의 잔여구간인 상주-영덕 구간이 개통되면서 영덕읍과 강구면 중간 쯤에 [[영덕IC]]가 개설되었다. 영덕군은 고속도로 개통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수도권-충청권-전라권에서도 운행 시간이 단축돼어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http://www.gyotong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229|#]]
[[국도]]는 포항과 울진을 연결하며 남북으로 관통하는 [[7번 국도]]와 서쪽으로 진보, 안동 방면으로 갈 수 있는 횡단도로인 [[34번 국도]]가 있다.
1989년, [[울릉군]]과 영덕 삼사해상공원을 오가는 헬기 노선이 개통되기도 했으나 개통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울릉도 관광 헬기 추락 참사|헬기 추락 사고]]로 사라졌다.
2018년 1월 25일 오후 [[동해선]] 포항~영덕 구간 개통식을 영덕역에서 가졌으며, 영업은 다음날인 26일부터 개시하였다.[[http://news.joins.com/article/22318523|개통식 관련 기사]]
== 관광 ==
군청 차원에서 관광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2/14/0200000000AKR20161214100700053.HTML|관련기사]]
|| '''관외사전투표''' ||<:>27.37%||<:>{{{#C9151E 35.01%}}}||<:>17.23%||<:>11.41%||<:>8.32%||<:>{{{#808080 ▼7.64}}}||<:>||
보수 성향 정당의 지지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경상북도에서도 보수 정당 지지율이 유독 압도적으로 높은, '''전국에서 [[자유한국당]] (구 새누리당) 지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2007년 대선 당시에는 [[이명박]] 후보가 여기서 '''84%'''를 득표해서 앞섰고, 또다른 보수 후보인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표가 무려 '''90%'''에 달했다. 2012년 말의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무려 '''87.11%'''를 득표해 '''대구경북권 2위이자 전국에서 2위'''[* 근소한 차이로 [[군위군]]이 1위.]를 기록했다. 이는 경상북도에서의 박근혜 후보 평균 득표율(80.82%)보다 무려 6.29%나 높고, 경북에서 가장 낮은 [[영주시]]와는 9.14%나 차이가 날 정도로 매우 압도적인 수치이다. 이윽고 열린 2014년 제 6회 지방선거에서도 [[김관용]] 새누리 경북도지사 후보의 득표율이 의성에 이은 2위를 차지했고[* 의성도 경북 평균보다 6~7% 높은,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보수 정당 강세지역이다.], 가장 최근에 열린 [[20대 총선]]에서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새누리당 득표율이 70%를 넘겨(70.83%)''' 경북 평균(58.11%)보다 무려 12.72%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평균(33.50%)의 무려 '''2배가 넘는 수치를 기록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 오중기 . . . . 11회 일치
|| '''약력''' ||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 특별보좌관[br]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br]영남대학교 총동문회 이사[br][[더불어민주당]] 경북도당위원장[br][[청와대]] 선임행정관 ||
대한민국의 정치인. 보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경상북도에서만 10여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이다.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서 선임행정관으로 일하다 2018년 2월 경북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2017년 8월,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중 균형발전비서관실의 선임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지역 도당위원장 정도를 선임행정관으로 임명하는건 격이 너무 약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균형발전비서관이 일찌감치 사직해 공석인 상황에서 2018년 2월 1일 선포된 국가균형발전 비전 수립을 이끌었다. 직후 사직하여 2018년 2월 5일, 경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재도전하기로 [[https://youtu.be/7R_kl03ESn8|선언]]했다.
* 2017년: [[문재인정부]] [[청와대]] 균형발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
경북도당위원장 경선을 앞둔 2016년 8월 4일 오후 10시 30분께 대구 북구의 한 음식점에서 민주당 지역위원회 간부에게 지지를 부탁하고 5만원 상당 음식물과 현금 50만원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되어 정당법 위반으로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16/0200000000AKR20170216180200053.HTML|관련기사]] 당세가 약한 경북지역 특성상 고생하는 지역위원회에 대한 격려 및 경비 지급 차원이었다고 해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당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사려깊지 못한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
- 이시영 (1882년) . . . . 11회 일치
'''이시영'''(李始榮, [[1882년]] [[1월 10일]] ~ [[1919년]] [[7월 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 본관은 [[경주시|경주]](慶州). 본명은 이중현(李仲賢), 호는 우재(又齋). 친족 관계에 있는 동명이인인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 성재 이시영)과의 구별을 위해 '우재 이시영'으로도 부른다. [[성리학]]자 이관준의 차남으로 [[대한민국]]의 제1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이인]](李仁)의 숙부이다.
이시영은 [[1882년]] [[1월 10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에서 성리학자 만당(晩堂) [[이관준]](李寬俊)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이관준]]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몸이 건장하여 무인(武人)의 기상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시(詩)과 글씨(書), 그림(畵)에 모두 능하였고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그런 성격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격과 과단성 있는 추진력 때문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는 그를 '''날개 달린 호랑이'''라고 칭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koreastory.co.kr/daegustory/human/leesiyoung.htm 대구의 인물<!-- 봇이 붙인 제목 -->]</ref>
[[1919년]] 3월 [[3·1운동]] 직후 그는 그를 따르는 [[한위건]](韓偉健), [[김영호]](金永浩) 등 청년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한인무관학교]](韓人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무관학교에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길러내 힘으로 왜적을 몰아내겠다는 결심이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 아버지 : [[이관준]](李寬俊, 호는 만당, 성리학자)
<!--1945년 이전 대구시는 경상북도 관할이었음-->
- 이재학 . . . . 1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NC 다이노스/선수단, top2=야구 관련 인물(KBO))]
~~[include(틀:관련 문서, top1=딸기)]~~
결국 10경기(선발 6경기) 31⅔이닝 1승 2패 1홀드 3.69를 기록하고 5월 27일 [[고양 다이노스|2군]]으로 내려갔다. 얼핏 보면 스탯이 좋아 보이지만 BABIP가 .226으로 상당히 좋은 편임에도 FIP(수비무관평균자책점)은 이전 시즌보다 1.0이나 올라갔다. 쉽게 말하면 수비 등 외부요소를 제외한 순수 기량 자체가 멸망한 수준이라는 것. WAR이 0.08이다.
2015년 11월 9일부터 기초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입소하는 관계로 마무리 훈련에 불참했다.
[[2016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본인은 그러한 의혹에 대해 결백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NC 다이노스]] 구단은 관련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7월 30일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08575719|1군 엔트리 제외]]를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경찰 수사 결과는 승부조작은 무혐의, 불법스포츠 베팅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만료로 불기소 처분 되었다. 따라서 검찰 수사나 더이상의 사실 관계 확인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승부조작은 무혐의로 어떻게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상당 수준의 증거나 정황, 증언 등이 드러난 불법 베팅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인 중에 있어 KBO의 징계도 복잡한 관계에 얽혀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계좌 내역이나 스스로 자백을 한 진야곱이 이재학과의 공모 관계를 경찰 조사에서도 진술했기에 이재학이 원하는 결백은 그리 쉽게 드러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후 2017년 1월 [[창원 LG 세이커스]]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창원실내체육관]]을 찾은 근황[* MBC SPORTS+와의 인터뷰에서는 개인 훈련으로 2017년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이나 스프링캠프에 참가하는 것을 봐서는 2017년 시즌에는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정상적으로 경기에 나서더라도 결백이 완벽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이 때의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닐 수밖에 없을 듯.
* [[물수제비]]를 10개까지 튀겨봤으며, [[반포대교]] 시작점부터 해서 맨 끝에 걸어가던 사람 뒤통수를 맞혔다고 '''본인이 주장한다'''(...) ~~재학아 [[허갤]]하니~~[[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96&aid=0000455235|관련 기사]]
- 이현보 . . . . 11회 일치
'''이현보'''(李賢輔, [[1467년]] [[8월 28일]]([[음력 7월 29일]])~ [[1555년]] [[7월 1일]]([[음력 6월 13일]]))는 조선 연산군, 중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賓翁), 본관은 [[영천 이씨|영천]](永川)이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1498년]] (연산군 4)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 가족 관계 ==
== 관련 작품 ==
* 해제: 자연을 벗하며 고기잡이를 하는 한가한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부는 "가어옹(假漁翁)"으로, 실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어옹"이란 속세를 떠나 강호에서 낚시하면서 시나 읊고 술잔을 기울이던 양반을 이르는 말로, 작품에서도 실제 어부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천심녹수(千尋錄水)", "만첩청산(萬疊靑山)"과 같이 상투적인 용어를 구사하여 관념적으로 어부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의 어부의 삶이란 곧 자연 속에서의 은둔 생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5수의 초장과 중장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있다.
- 임은정(법조인) . . . . 11회 일치
|| '''경력''' || 인천지방검찰청 검사[br]광주지방검찰청 검사[br]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검사[br]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br]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 ||
위의 일기 내용은 영화 ‘[[도가니(영화)|도가니]]’가 관객에게 충격을 주며 돌풍을 일으키던 2011년 10월 뒤늦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제 조용히 대세에 묻어가기만 하면 검찰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 2012년 9월 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의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하여 검찰은 물론이고 법조계 전체에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켰다. 당시 검찰 상부에서는 백지구형[* 백지구형이란, 검찰의 할 일을 포기하고 판사에게 형량을 일임하는 것이다. 즉 판사에게 "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고 의견을 내는 것을 말한다. 관행이라는 말로 합리화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검찰권의 포기이자 검찰 고유 권한의 불이행이다.]을 지시해 놓은 상태였으나, 지시를 거부하고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정권의 바람을 잘 알고 있는 부장 검사는 "무죄 구형을 하는 것은 검찰의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되니,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허나 임 검사는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무죄 구형도 그렇지만, 그때의 논고(최종진술) 또한 화제가 되었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에 맞아 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 몸으로 민주주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 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는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2년 12월 28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죄로 1962년 유죄선고를 받은 [[윤길중]][* [[윤길중]]은 죽산 [[조봉암]]과 가까운 사람으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한 정치인이다.] 진보당 간사장에 대한 재심 결심공판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무죄 구형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물론 법원도 당일 무죄를 선고했다.
2015년 이후부터는 의정부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2015년 12월 3일 검사로서의 직무수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의심받아 심층적격심사[* 2004년 법무부는 7년마다 한 번씩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문제검사'를 골라내겠다며 적격심사제도를 도입했다. 적격심사 대상은 검찰 내 특정 기수 전체이며, 법무부는 이 가운데 심층심사를 할 사람을 걸러내 특정사무감사를 진행한 다음 적격심사위원회를 연다. 여기서 최종 탈락한 인물은 강제로 퇴직당한다. [[검찰청법]] 제39조 참조.]를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검찰 상부가 '[[보복|찍어내기]]'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수많은 네티즌들이 격분하였다. 무죄 구형 후 법무부의 한 간부가 ‘임은정이 적격심사 얼마 남았냐’고 묻더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를 듣고 ‘적격심사를 계기로 자르려는구나’ 싶었다고. 자신이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한겨레]] 보도가 나오기 전 실제로 ‘(검찰 상부에서) 자르기로 했으니 마음의 준비 해야 할 것 같다’는 동료의 귀띔을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그때는 돌아버리겠더라. 누가 볼까 싶어 집까지는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는데, 현관문을 닫고 주저앉아 ‘너무 힘듭니다, 견디겠습니다만, 너무 힘듭니다’하고 신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친한 동료들까지 나와 연락하길 주저한다고 느껴질 때는 정말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 검사의 퇴직 사유를 발견하지 못한 법무부는 지난해 1월8일 결국 ‘적격’ 판정을 내렸다.[* 사실 이 적격심사제도로 잘린 사람은 매우 적다. 자세한 것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69&aid=0000240998|기사]] 참조. 그리고 이런 방식의 찍어내기는 오히려 법관이 훨씬 더 심하다. 저 기사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정작 검사적격심사제도는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다(...). 임은정 검사의 경우도 열리긴 열렸지만 저렇게까지 찍힌 임은정 검사도 문제가 없어서 적격 판정 받아 문제없게 되었다. 물론 이후 승진이 느려지긴 했으나 적어도 이 적격심사제도로 강제퇴직 당하진 않았다. 그러나 판사의 경우, 판사의 임기가 10년이므로 판사 본인이 직을 더 유지하고 싶어한다면, 10년마다 무조건 재임용 심사를 받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서기호]] 판사 재임용 탈락이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80799|한겨레와 인터뷰]]를 했다. 상당히 의외인 인터뷰인데 검찰 내에서 언론과 대응하는 공식 직책은 차장검사로 차장검사를 제외하고는 수사 보안 등을 이유로 언론과의 접촉이 금기시 되는 게 검찰 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사윤리강령상 이런 인터뷰는 기관장 승인 사항이다. 또한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린 특정 사건의 담당 검사로서의 ‘사건’에 대한 인터뷰가 아닌, 검찰 전체에 대한 비판을 SNS에 쏟아냈던 임은정 검사의 평소 견해를 중심으로 이뤄진 인터뷰였기 때문에 훨씬 더 이례적이다. 임은정 검사도 인터뷰에서 “대검찰청에서 (인터뷰) 허락을 해주다니 얼떨떨하다. 정말 세상이 좋아졌나 보다”라며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천지개벽을 맞은 기분이었다고. 도가니 사건, 백지구형 사건 등 여러 뒷이야기들과 검찰과 검찰 개혁에 대한 임은정 검사의 얘기와 생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시라면 역시랄까, 이 인터뷰를 가지고 상부에서 뭐라고 했다고.[[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273053|#]]
* 2009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검사
- 절연금 . . . . 11회 일치
테기레(手切れ,てぎれ)란, 지금까지의 관계, 교섭을 끊는다는 뜻이다. 특히 남녀 간의 관계에서 주로 사용한다. ‘절연’으로 번역한다.
테기레킨(手切れ金,てぎれきん)은 지금까지의 관계, 교섭, 특히 남녀관계를 끊어달라고 요청하면서 돈을 주는 관습이다.
※ 위자료로 번역할 수 없게 되는 사례는, 일단 관습적이고 쌍방의 동의만 있으면 합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위자료를 지불할 이유가 없는 경우’에도 절연금을 지불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위자료와 절연금을 지불했다.’는 식으로 위자료와 절연금이 별도로 언급되어 있을 경우, 양쪽을 모두 위자료로 번역하기는 곤란해진다.
엄밀하게 따지면 절연금이라 할 수 없는 경우라도, 언론 등에서 사실상 관계청산을 댓가로 돈을 지불하는 경우, 비유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예시.
위자료는 법률적에서 정의된 손해배상의 일종으며, 민사상의 불법행위, 정신적 손해에 대하여 배상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절연금은 인간 관계의 청산에 따라서 임의로 지급하는 금전을 뜻한다. 따라서 위자료를 절연금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법률적으로 남녀관계에서 「혼인」,「내연」,「혼약」 이외의 애정 관계에서는 위자료가 발생하지 않는다. 절연금은 이외의 남녀관계(주로 불륜)에서 당사자 간의 동의 하에 인연을 끊기로 서약하고 주고 받는 돈이다. 절연금 양도 자체는 자유계약에 따라서 법률적으로 보호된다.
- 진격의 거인/92화 . . . . 11회 일치
* 작전 지역이 가까워지면서 공수부대 지휘관은 강하를 앞두고 간략히 상황을 전달한다. 방금 전 보고로는 지상군이 장갑열차 파괴에 성공했다. 그러나 요새 내부엔 위협적인 야전포가 있을게 뻔하다. 지휘관은 그 점을 강조하며 브리핑을 마친다.
* 중동연합의 저항도 거세다. 다가오는 마레의 병사들은 포격과 기관총 세례를 받으며 쓰러진다. 사격에 몰두하던 적 병사들은 곧 그들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한다. 기관총 포탑을 짊어지고 다니는 "차력의 거인"이다. 매우 특이한 거인으로 엎드려 걸어다니며 등에는 한 쌍의 기관총 포탑이 올라가 있다. 얼굴은 말이나 개처럼 길쭉한데 묘한 형태의 철가면을 썼다. 각 포탑에는 병사가 타서 기관총을 난사한다. 적의 기관총 진지 코 앞까지 돌진한 차력의 거인. 포탑의 기관총이 진지 앞의 병력을 섬멸한다. 차력의 거인은 길쭉한 얼굴을 진지로 들이밀어서 지붕을 들어내 버린다. 그 사이 보병들이 진격, 적의 최종 방어선은 이렇게 무력화된다.
* 지휘관 마가트와 콜트는 전선의 동향을 주시한다. 마가트는 콜트의 의견을 묻는데, 그는 적 전선을 충분히 타격했으니 전사대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의 퇴로를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시선은 곧 하늘로 향한다. 이제 상공의 비행선이 육안으로도 뚜렷하게 보인다. 마레의 최주력이자 최고전력. 작전의 성패는 그들 몫이다.
마침내 허공의 엘디아인 낙하산 부대는 같은 수의 지성없는 거인들로 영영 바뀐다. 그저 식욕 뿐인 괴물들이 중력에 따라 요새 위로 쏟아진다. 아래에서 보면 거인이 비처럼 내리는 것 같다. 이들의 육중한 신체는 그 자체로 요새에 폭격을 가하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거인들이 쏟아지는 곳 마다 벽이고 건물이고 상관없이 무너져 내린다. 중동연합의 병사들은 허겁지겁 피하지만 그래봐야 의미가 있을까?
* 폭격이 비켜나간 온전한 요새 벽에서 최후의 저항이 이어진다. 지휘관이 말했던 대거인전용 야전포다. 위력이 상당해서 벽 위를 공격할 수 없는 작은 거인들은 속절없이 박살난다. 라이너는 낙하하면서 이 야전포의 숫자와 위치를 파악한다. 약 29대. 상당한 숫자가 기동 중이다. 거인병력의 6할은 낙하와 동시에 전멸했으니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하지만 라이너에게 치명적인 정도는 아니다. 그보단 벽이란 것 자체가 싫다. 그는 "또 벽이냐"도 중얼거린다. 그건 싫은 기억을 자극한다. 4년 전의 기억을.
- 채동욱 . . . . 11회 일치
|본관 = [[평강 채씨|평강]]
|경력 =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제2부 부장검사 <br>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차장검사 <br/>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br />[[대한민국의 검찰총장|검찰총장]]
[[2013년 4월]]부터 [[2013년 9월|9월]] 초 39대 검찰총장 재임기간 중 제13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노태우]]의 미납추징금을 완납받고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으로부터는 완납 계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2013년]] [[9월 6일]] 혼외자식이 있다는 의혹을 [[조선일보]]가 제기하자 법무부 장관 [[황교안]]이 감찰을 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사표를 제출했다. 청와대는 [[9월 30일]]에 사표를 수리하였다.
* 2005년 : 부패방지위원회 법무관리관
* 2005년 : 국가청렴위원회 법무관리관
* 2006년 :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를 맡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구속.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 고발사건과 관련해 당시 사장이던 허태학씨 등을 기소했고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로비사건, 외환은행 헐값매각 의혹사건 등도 지휘.)
* 2010년 : '스폰서 검사' 관련 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진상조사단장
[[군법무관]] 시절 고등학교 동창인 양경옥과 결혼했고, 사이에 2녀를 두었으나 장녀는 어릴 때 앓은 패혈증으로 뇌성마비 장애를 얻게 된 후 [[2009년]] 2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녀의 간호를 위해 아내는 [[중학교]] 교사를 그만뒀고, 채동욱은 장녀에게 소홀할까봐 장녀를 얻은 지 10년 만에 차녀를 얻었다고 한다.<ref>[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16/2013031600201.html 與대표(2003년 당시 정대철 민주당 대표) 구속 후 좌천… 작년 檢亂때 총장(한상대) '비토(veto)'] 조선일보(2013년 3월 16일), 류정 기자</ref>
- 트로피코 4/진영 . . . . 11회 일치
각각의 진영은 각기 다른 요구를 하며, 이들을 만족시켰을 경우 존경심이 올라간다. 반면 이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존경심이 내려가는데 관계가 험악한 지경일 경우 특정한 행동을 해서 플레이어에게 지장을 줄 수 있다. 이 행동은 해당 진영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면 사라진다.
관계가 험악해졌을 경우 플레이어를 파문시킨다. 파문당한 동안 교회나 성당을 방문한 시민의 존경심이 떨어진다.
관계가 험악해졌을 경우 장교들의 불만이 많아졌다는 투의 경고를 두번 해온다. 장교들의 불만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경우 쿠데타가 일어나 각하를 지지하는 장병들과 각하를 조지려는 장병들의 전투가 벌어진다.
* 국방부 장관 임명
관계가 험악해졌을 경우 벌목소나 광산, 공장 등 공해를 유발하는 건물 하나를 점거해 못 쓰게 만든다. 관계를 복구하는 방법 외에도 환경주의자를 탄압하거나 지쳐 나가떨어질 때 까지 무시하는 방법도 쓸 수 있다.
* 외국 출신 장관 해임
* 대통령 박물관 건설
* 새로운 대통령 박물관 건설
* 관저의 모든 업그레이드 완료 - 자본주의자의 존경심이 떨어진다.
- 페이데이 2/적 . . . . 11회 일치
권총, Mark 10 기관단총, 산탄총 등으로 무장한 갱 단원들. 체력이 약해서 뭘로 공격해도 죽는다.
Chimano 88 권총과 Compact-5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비원. 뭔가 수상한 것을 발견하면 느낌표를 띄운 후 신고를 한다.
=== 경찰관 ===
Chimano 88 권총과 Bronco .44 권총, Reinfeld 880 산탄총, Compact-5 기관단총으로 무장했다.
Compact-5 기관단총으로 무장했다.
민간군사업체 머키워터의 용병들. 머키워터가 관련된 하이스트 초반에 등장한다. 군인스러운 복장에 페이스가드가 포인트.
관통 효과가 있는 권총인 5/7 AP로 대가리를 날려버린다.
관통 효과가 있는 저격소총으로 대가리를 날려버린다.
감전당한 플레이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무기를 난사하게 된다. 감전은 테이저가 공격을 받고 휘청거려야만 중지된다. 만약 아무도 감전을 중단시키지 못하면, 감전당한 플레이어는 오랜 시간 동안 지져진 후 다운된다.
KSP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연장기관총을 장비한 포탑. 보통은 SWAT 밴 위에 설치된 채로 나오지만, 천장에 설치된 채로 등장하거나 헬리콥터 밑에 장착된 채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 하이큐/244화 . . . . 11회 일치
* 매점에는 봄고 관련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히나타는 눈을 반짝이며 "에이스의 마음가짐"을 담은 티셔츠를 S사이즈로 구매, 야마구치도 연습용 티셔츠를 산다.
* [[후쿠로다니 학원]] 대 에이와 고교. 후쿠로다니는 1회전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있다. 스코어는 10 대 7. 첫번째 TO를 사용한다. 에이스 [[보쿠토 코타로]]가 컨디션 난조. 관중석에서 보쿠토의 저조한 경기력을 비웃을 정도다. [[코미 하루키]]가 텐션 좀 올리라고 격려하는데, 보쿠토의 풀죽음 원인은 완전히 엉뚱한 것이었다.
* 보쿠토는 쇼맨십이 강한 성격으로 관중의 상태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가령 지난 전국대회에선 8회전에 비슷하게 난조를 보였는데, 이때도 저녁 시간에 시합이 잡혀 관객이 적었고 보쿠토는 보는 사람이 적다고 풀죽어버렸다. 올해는 낮시간이라서 방심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경기장이 메인 아레나가 아니라 서브 아레나라는 걸로 삐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방금 전 [[네코마 고교]]의 경기를 보러 메인 아레나에 갔던게 결정적. 관객 수가 너무 차이가 나는 걸 자각해 버린 것이다.
센터 코트란 준결승 이상부터 특설 코트. 메인 아레나의 가운데 한 면만 설치되는 코트다. 국제시합 등이 이 규격에서 시행된다. 아카아시는 메인 아레나가 더 크고 사람도 많지만 그래봐야 그 중에서 보쿠토를 봐줄 사람은 4분의 1이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곳 서브 아레나는 후쿠로다니가 독점하고 있으니 모든 관객이 보쿠토를 주목하고 있다. 즉, 실질 봐주는 관객이 더 많다는 얘기.
* 이야기가 먹혀든다 싶자 아카아시는 쐐기를 박을 방법을 찾는다. 그때 관중석에 적당한 소재가 눈에 띈다. 그는 보쿠토의 "제자"가 보러왔다며 관중석을 가리킨다.
매점에 갔던 히나타와 야마구치가 후쿠로다니의 경기를 보러 온 것이다. 히나타는 막 구입한 티셔츠를 흔들며 보쿠토를 응원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게 보쿠토에겐 큰 감동을 주는 듯 하다. 아카아시는 아직도 보쿠토의 생태에 관해선 이해가 안 가지만, 이렇게 별거 아니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도 그에겐 중요한 의미라고 이해한다.
- 한현규 . . . . 11회 일치
한현규(韓鉉珪, [[1954년]] [[5월 3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공무원이다. 제20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통령비서관, 경기도 정무부지사, 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 출신.
* 1977년 제20회 행정고시 입격<ref>[http://news.joins.com/article/4304309 손학규 지사,청와대 現비서관 副지사로 내정] 중앙일보 2002.06.29</ref>
* 1989년 ~ 1993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실 행정관
* 1993년 4월 10일 건설부 기획예산담당관
* 1994년 4월 25일 건설교통부 기획예산담당관
* 1996년 4월 23일 건설교통부 부이사관
* 2000년 건설교통부 공보관<ref>[http://www.fnnews.com/news/200101310543151302 ]</ref>
*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실 이사관
* 대통령비서실 건설교통비서관실 비서관
- 허준영 . . . . 11회 일치
'''허준영'''(許准榮, [[1952년]] [[10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제12대 [[경찰청장]]을 역임한 공무원으로 제4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김해 허씨|김해]]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 1980 ~ 1984 : 외무부 사무관
* 1989 ~ 1991 : 주홍콩 총영사관 영사
* 1999.2 ~ 1999.11 : 경북지방경찰청 차장(경무관)
* 1999.11 ~ 2000.12 : 강원지방경찰청 차장(경무관)
* 2000.12 ~ 2001.11 : 경찰청 경비교통국 교통심의관
* 2003.2 ~ 2004.1 :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실 치안비서관
용산역세권 개발사업과 관련해 뒷돈을 챙긴 혐의 등으로 기소되어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허준영은 현직 코레일 사장으로 재임하던 2011년 11월 용산역세권 개발과 관련해 업무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용산역세권개발 손모 전 고문에게서 뇌물 2000만원을 받고, 이후 3년여 동안 1억 3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4월 구속 기소되었으며 2017년 3월 16일 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상고심에서 불법 정치자금 1억원 수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추징금 1억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317011002&wlog_tag3=naver|제목=‘용산 개발 뒷돈’ 허준영 징역형 확정|뉴스=서울신문|언어=ko|확인날짜=2017-05-26}}</ref>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허씨]][[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외교관]][[분류:건국대학교 교수]][[분류:경찰대학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경찰청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홍준표]][[분류:명지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
- 홍승목 . . . . 11회 일치
'''홍승목'''(洪承穆, [[1847년]] [[음력 10월 11일]] ~ [[1925년]] 양력 [[2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계동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1875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하여 [[승정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1879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 자리에 올랐으며, [[1881년]]과 [[1883년]]에는 각각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90년]] 형조참판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1900년]]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홍승목은 [[190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강제 퇴위된 후부터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여, [[1910년]]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직전부터 협조한 관료들에 비해서는 좀 더 이른 시기에 적극적으로 친일파로 전향한 편이다.
[[대동학회]] 부회장을 맡았다가 회장 [[신기선 (1851년)|신기선]]이 사망하자 회장직을 물려받았고, 대동학회 후신인 [[공자교회]]의 부회장도 역임했다. [[1908년]]에는 [[민원식]]이 주도한 [[제국실업회]]의 회장을 맡았는데, 이 단체 역시 일본인을 고문으로 위촉하고 친일 성향의 보부상 등을 끌어모아 합방을 앞당기기 위한 활동을 벌인 친일 단체였다. 이 무렵 [[윤덕영]], [[민영기 (1858년)|민영기]]가 [[박제순]]을 회장으로 내세워 조직한 [[관진방회]]에 가담했고, [[1909년]] 이완용이 [[일진회]]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국민연설회]] 기초위원도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중추원의 찬의가 되어 [[1921년]] 관제 개편때까지 재직했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도 서훈 받았다.
[[분류:1847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
- 홍인한 . . . . 11회 일치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 [[7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정여(定汝), 본관은 풍산(豊山). [[예조]][[판서]] [[홍현보]]의 아들이고 [[영의정]]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삼촌이 된다. [[홍국영]]의 일족이기도 하다. 당색으로는 [[노론]]이며 노론내 외척당의 지도자였다.
과거 급제 후 청요직을 거쳐 175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으며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기생]]들의 춤과 노래실력을 트집잡아 [[곤장]]을 남발하고 즐겼다고 한다. 이는 중앙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성대중]]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승지, 사간, 대사헌, 호조와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이조,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1774년 의정부우의정, 1775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선조의 6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현보]]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이세황의 딸이다.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작은 아버지(숙부)이며, 관찰사를 지낸 홍창한은 8촌 형이 된다. 친동생은 [[홍용한]], [[홍준한]] 등이 있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이 되었다. 통덕랑으로 재직 중 [[175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 명문 가문인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며, 혜경궁 홍씨의 친정 숙부라는 점도 작용해 [[영조]]의 신임을 받으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53년 가주서와 [[정언]]을 지내고 1754년 [[교리]]로 있을 때 [[조영순]](趙榮順)을 변호하려다 파직되었다.
55년 헌납을 거쳐 당상관으로 특진하여 [[1757년]] [[전라]]감사로 부임했다.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기생]]들의 춤과 노래실력을 트집잡아 [[곤장]]을 남발하고 즐겼다고 한다. 이는 중앙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대중]]이 이를 듣고 청성잡기에 기술하였다.
그 후 승지, 한성부우윤, 대사헌 등을 지내고,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로 순무하고 돌아왔다. 호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로 승진, 공조판서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774년]] [[의정부]][[우의정]]으로 특진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774년]] [[우의정]]에, [[1775년]]에 [[좌의정]]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1775년 세손(훗날의 정조)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자 이를 반대해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할 때 세손은 세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강변하며, 승지와 사관의 대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대리청정 뜻이 확고해지자 [[혜경궁 홍씨]]는 사전에 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대조의 뜻이 그러함을 편지로 알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인한은 벽파의 당론에 따라 벽파, 외척당, [[정후겸]] 등과 함께 세손을 반대하였고, 홍인한은 영조의 면전에서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이후 [[정후겸]], [[심상운]] 등과 함께 [[홍국영]] 등을 모해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부사직 심상운을 시켜 세손의 대리청정 반대 여론을 조장했지만, [[홍국영]]의 부탁을 받은 부사직 서명선이 역탄핵상소를 올려 논박했고 오히려 심상운은 유배되었다.
후에 [[조선 철종|철종]] 때인 1855년(철종 6) 철종이 그의 혐의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그를 복직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홍문관과 양사의 반대를 받았다. 결국 여러차례 반대로 철종은 홍인한 복권 명령을 취소하였지만 1858년(철종 9) 10월 25일 복권되었다.
- 황효진(기업인) . . . . 11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2, top1=소닉 스타리그, top2=스베누)]
이후 초창기 [[아프리카TV]]로 진출하는데 당시 [[고소미#s-2|고소미]]를 좋아하던 [[유신(스트리머)|유신]](BJ)과 합작으로 스타 중계방송인 '노는대학'을 개설, 인터넷방송 플랫폼에서의 스타중계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이 둘은 2011년경 관계가 단절되었고 [[망치부인]] 다음으로 유신과 가장 대립각을 세운 인물중 하나였다. 유신의 여론이 예나 지금이나 워낙 나빠서 이때만해도 황효진이 차라리 낫다는게(물론 황효진도 까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절대적으로 까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여론의 대세였으나... 황효진이 지금처럼 추하게 몰락하리라고는 대부분이 생각치도 못했엇다.]
2008년 9월 16일에 군 입대해서 [[제8기계화보병사단]] 직할전차대대(현 81전차대대)에서 K1전차 승무원으로 군 복무를 하다가 2010년 7월 29일에 전역했다. 이등병 때 [[고무신#s-4|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그래서 관심병사가 되었지만 주위에서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BJ 활동 이력 덕분에 대대장배 스타리그 진행을 했다. 중대별로 대표 1명씩을 뽑아서 대회에 출전하였고, 군용 PC에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설치할 수 없었기에 소대장들의 개인 PC를 이용하여 대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일명 전승리그(전차대대 명칭 이 전승대대)로 매년 열릴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1회성으로 끝났다. 본부중대가 1등을 하였으며, 황효진과의 번외 경기에서 황효진이 1등에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 군대에서 사업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전역 후 다시 아프리카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주 만에 랭킹 1위를 먹는 기염을 토했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나왔을 무렵엔 상당히 살이 빠졌다. --물론 빠진 살은 도로 찌웠다-- 예전의 입담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건재하다는 평가.
그런데 스베누와 관련하여 여러 [[스베누#s-4|비판]]을 받아오다 결국 [[2015년]] 12월 사기혐의 피소를 당한 상황. 가맹점주, 하청 제조 업체, 에이전시로부터 집단으로 고소를 당했다. 가맹점주들은 합정동 본사 앞에서 항의 집회까지 열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201218|#]] 또한 스베누로부터 대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해 위기에 처한 제조업체 공장주들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상경해서 삭발식을 벌이는 등 강경하게 항의에 나섰다.[[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770|#]]
여담으로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법인세법과 소득세법이 개정되어 비영업용소형승용자동차에 대한 규정이 추가되었고 법인차량과 개인사업자의 차량에 대해 감가상각비와 그 자동차의 유지에 관련된 모든 비용에대해 제재가 가해지게 되었다. 요약하면 법인명의 차량으로 이런 고가의 차량을 구입해서 대표이사가 개인목적으로 타고다니면 업무 미사용으로 보아 법인세법상 감가상각비,자동차세,수선유지비는 물론이고 리스료나 렌트비용 등 일체의 비용을 부인하여 법인세를 물리며 그 법인의 대표이사에게는 자동차를 운용하면서 얻은 이익상당액을 소득으로 보아 소득세까지 왕창 물려버린다[* 예를들어 2억짜리 고가의 차량인경우 감가상각을 5년 정액법으로 강제상각시켜 4천만원의 감가상각비용을 계산하고 그에대한 유지비용까지 전부 가산해서 상여처분을 때려버린다. 만약 위에서 계산된 금액이 감가상각비 4천만원을 포함해서 5천만원이고 업무에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거나 전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5천만원을 대표이사의 근로소득으로 보아 소득세를 물린다. 대표이사는 이미 법인에서 근로소득을 얻고 있으므로 저렇게 상여처분이 된 금액이 더해져 높은 한계세율이 적용되면 만만치 않은 소득세를 내야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직장에 취업해서 연말정산영수증을 떼어 본 사람들은 그 영수증에 인정상여라는 칸을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저런 상여처분을 때려맞은 금액이 찍히는곳이다. 보통의 일반 근로자들이 인정상여처분을 받을 일은 없으니 당연히 0원으로 찍혀있다. 한편 위 5천만원이 법인세법상 손금부인되어 5천만원에 대해 법인세를 법인이 별도로 부담하는건 덤.]. 또한 이러한 자동차를 팔아서 손실이 난다고 해도 연간 800만원 한도로 손실을 인정하여 처분할 때 까지도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세법의 발전에 한 획을 그은 황효진~~
[[http://sports.news.naver.com/esports/news/read.nhn?oid=236&aid=0000143511|2016년 6월 나온 기사]]에 따르면 황효진은 더 이상 회사 일에 관여하지 않으며 [[롤챔스]] 게임단이 [[스베누 코리아]]로 바뀐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16년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7년 초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고소당했으며, 결국 2017년 10월 11일 [[https://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273538|횡령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5&aid=0002772185|게다가 서울시가 공개한 지방세 고액·상습체납자 명단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았다.]]
과거 [[아프리카TV]]의 클럽방송국인 노는대학과 온아이콘의 같은 소속 BJ들의 증언에 의하면 과거부터 [[인성]]이 좋지 못했고 본인이 하기 싫은 잡일과 방송관리를 동생 BJ들에게 모두 떠넘긴다고 한다.
2016년 상반기에[* 자세한 날짜는 [[추가바람]].] [[조선일보]]에서 "성공한 '''강소기업''' 대표"로 황효진을 취재한 적이 있다.[* 본지의 별도 부록으로 나왔으며, 기사 1면을 차지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미 스베누에 관련된 진실들이 차츰 드러나면서 한창 좋지 않은 소리를 듣기 시작했던 때였다. 인터뷰 당시에 황효진은 "사업이 어렵고 빚이 조금 있긴 하지만, 나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 거 없다|신발은 생필품에 가까운 물건인 만큼 금방 성장세를 되찾을 것]]"이라는 말로 비판을 무마하듯 답변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시궁창이었고, 이 인터뷰는 그의 마지막 변명이 되었다.
- 효령대군 . . . . 11회 일치
생전에 손자 33인,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파종회 중에 자손이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1&oid=011&aid=0000014551|제목=춘3월의 둘째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성명=채희묵 기자|날짜=2002-03-02|출판사=서울경제신문|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0-05-15}}</ref>
==가족 관계==
== 관련 작품 ==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편집한 『조야휘언』필사본에는 '세종이 태평관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는데 효령대군이 술을 권하자 일어나 받았다. 이를 보고 사신이 말하길 "임금이 형을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당시 왕실의 형제간 우애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는 연주암(戀主庵)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남쪽 과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연주암이 있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m<sup>2</sup>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 특이하게도 효령각을 만들어서 효령대군의 영정([[경기도]] [[문화재]] 제81호)을 봉안하고 있다. 찾는 등산객의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는 곳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url=http://er.asiae.co.kr/erview.htm?idxno=2009042321152119354|제목=연주암 점심공양 300그릇에서500그릇으로 늘어나,관악산 체감경기|성명=이형구 기자|날짜=2009-04-28|출판사=이코노믹리뷰|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0-05-15}}</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550624|제목=이웃과 함께하는 열린 종단 일궈낼 것|성명=문일호 기자|날짜=2009-10-23|출판사=매일경제|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0-05-15}}</ref>
[[1411년]]([[조선 태종|태종]] 11), 동생인 충녕([[조선 세종|세종]])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 관련 문화재 ==
* [[보신각 종]](원각사 대종) - 보물 제2호 (국립중앙박물관 경내 종각에 안치)
- 권혁 . . . . 10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top1=한화 이글스/선수 목록, top2=야구 관련 인물(KBO))]
[include(틀: 관련 문서3, top1=한화 이글스/2018년, top2=불교/인물, top3=살려조)]
2014년 11월 26일, 삼성과의 [[FA 제도|FA]] 우선협상이 결렬되었다. 자신과 구단이 제시한 금액의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본인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싶어서 나섰다고 밝혔다. 보통 FA선수가 기회 운운하며 협상이 결렬되면 대부분의 경우 '''기회=돈'''으로 인식되는게 일반적인데, 권혁의 경우 좋은 공을 던짐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삼성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권혁과의 협상 결렬에 매우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로써 한화는 20인 명단에서 빠져 [[KT 위즈]]로 이적한 [[윤근영]]이라는 좌완 불펜의 누수를 그 이상의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로 대체하였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의 등번호가 동일하기 때문에, 한화 관련 커뮤니티에선 [[한화 이글스|주황색]] [[잉어킹]]이 [[삼성 라이온즈|푸른색]] [[갸라도스]]로 진화했다(...)는 식의 [[http://gall.dcinside.com/hanwhaeagles/5325218|드립]]이 인기를 끌었다.] 좌완 불펜이 부족한 한화에서 매우 긴요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이며, 출장 기회를 원했던 그의 바람은 충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좌완 투수 조련에 매우 능하며 권혁과 같은 와일드 씽 유형의 불펜자원을 정말 잘 활용하는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이어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선수 본인도 계약을 체결하며 "김성근 감독님과 야구하고 싶었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오랜 감독 생활 중 처음으로 외부 FA 선수를 선물받은[* FA제도가 시행된 후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맡았으나 두 구단 모두 김성근 감독에게 외부 FA를 잡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양준혁]](LG), [[이진영]](SK) 등 내부 FA를 타팀에 내주는 등 김성근 감독에게 FA는 연이 없었다.] 김성근 감독의 기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2군에서 '''선발로 등판해''' 3이닝을 투구했다는 것이 밝혀져 이상군과 최계훈 모두 욕을 바가지로 처먹게 되었다. 단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5일을 불펜 피칭도 없이 쉰 후''', 선발로 올라가 '''약속된 투구수만 던지게 하며''' 3이닝을 던진 것인데 [[관음]]하던 [[노리타(김성근)|그놈들]]에게 소재가 되는 바람에 이상군과 최계훈이 필요 이상의 욕을 먹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수술 중 재활기간이 아닌 이상 아무리 휴식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소위 던지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몸을 푸는 선에서 규칙적인 투구는 필수적이다.]
2군에서 7경기 연속 무실점 중이다. 마무리 투수인 정우람은 컨디션 관리를 위해 경기당 1이닝만 소화하고 있고, 팀내 유일한 좌완 불펜인 99년생 박주홍, 4월 이후 유일한 살려조(...)가 된 송은범 등이 페이스가 약간 떨어진 상태여서 한번쯤 올려볼만도 하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추격조 장민재와 이태양이 2~3점대의 방어율을 기록 중이고, 박주홍은 가능한 한 경험을 쌓아야 할 입장이라서 딱히 내릴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 마침 팀 불펜진 방어율도 선두를 달리고 있으니, 더더욱 권혁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9월 5일 마침내 1군 리그에 다시 등판했다. 처음에는 2연속 삼진으로 타자들을 잡아내며 활약했지만, 바로 다음 회에서 홈런을 맞은 탓에 강판되고 말았다. 그러나 결과와 무관하게 팬들은 권혁의 복귀 자체에 기뻐하며 그를 환영했다. 홀드는 덤.
* 2009년 9월 6일 [[넥센 히어로즈|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예정에 없던 구원등판을 하게 되었는데, '''유니폼이 없었다'''. 평소같았으면 다른 선수 유니폼 빌려입고 나갔겠지만 하필 이 날 [[김응용]] 사장이 참관하고 있던 터라... [[최원제]]가 권혁의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을 갖고 있던 팬[* 아마 여자 팬인 듯. 크기를 보면...]에게 부탁해서 유니폼을 빌려입었는데, 그 사이즈가 너무 작았다. 그나마 너무 작아 겨드랑이를 잘라낸게 저정도라고. --그냥 경기장 밖에서 어센틱 유니폼을 사와-- --그럼 한국야구도 이제 빨래끝난 유니폼 선수가 직접 찾아가는 식으로 하지 말고 메이저리그처럼 구단 유니폼만 관리하는 전담 직원을 마련하던가..는 그럴 돈 없다능--
* 팬서비스는 간단하게 [[츤데레]]로 정리되는 듯. 올라온 후기들에 "안해준다고 하면서 다 해준다"라는 얘기가 대부분 적혀있다. [[https://www.instagram.com/p/8XKy4JsGvN|한 팬이 찍은 영상]] ~~아 모양 빠지니까 (선물)빨리줘용~~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anwhaeagles&no=8055499&page=1&exception_mode=recommend&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D%98%81|일화]]~~이와중에 첫번째 댓글이 [[권용관]]이 그랬으면 패 죽이고 싶을텐데~~
- 김수용(코미디언) . . . . 10회 일치
제1회 [[한국방송공사|KBS]] 대학 개그제에서 장려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한국방송공사|KBS]] [[공채]] 7기 취급.[* 감자골 이적 사태로 공식적인 기수명단에서 제외된 상태지만 선배들의 [[괘씸죄]] 때문이라는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 사실이라 최근엔 사실상 그런 건 의미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같은 방송사 후배들에게 선배 대접도 잘 받고 있고...][* 김수용은 감자골 사태가 일단락되고 난 후 1994년부터 각종 [[한국방송공사|KBS]] 코미디프로에서 활동했으므로 사실 기수명단에서 제외랄 것도 없다. 1996년 코미디 일번지에서 신세대 동작그만이라는 코너에 주연급으로 나오기도 했고, 특히 1998년 코미디 세상만사에서 유재석과 함께 귀농일기라는 코너에 공연하기도 했다. 게다가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공채 11기로 들어온 [[김숙]]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방송공사|KBS]]에 복귀한 이후로는 코미디언실에서 엄연히 선배로 대접 받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다.(개그계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다)] [[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등과 비슷한 세대의 [[개그맨]]이며 갈갈이 패밀리([[박준형(코미디언)|박준형]], [[정종철|옥동자]], [[김시덕]])나 옹달샘([[유상무]], [[유세윤]], [[장동민]])처럼 김수용을 포함한 김국진, 김용만, 박수홍까지 넷이서 "감자골"[* 팀명은 4명 다 [[강원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감자에서 따왔다고...그러나 2008년 12월 20일 방송 된 명랑히어로에서 김국진을 제외한 김수용, 김용만, 박수홍은 강원도와 상관 없는 강원태생이라고 말했다. ]이라는 팀으로 활동했었다. [[한국방송공사|KBS]]에서는 비교적 콩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흔히 소재는 좋은데 잘 살리지 못하는 류) [*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비중이 거의 없다든지 단역으로만 나오던 급은 아니었다. 1996년 토요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마법의 디스켓이라는 코너에 단독으로 주연을 맡을 정도로 나름 비중이 있었다. 확인큐 베일을 벗겨라나, 비디오 챔피언 같은 예능 프로그랭의 서브MC로 활약하기도 했다. 다만 동시기 신동엽, 김용만은 진행, 박수홍이나 김국진은 예능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으며, MBC와 SBS의 코미디 프로그램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기에 묻혔을 뿐이다. 1995-1997년 사이 SBS에서는 코미디 전망대와 웃으며 삽시다, MBC에서는 오늘은 좋은 날과 테마게임이 있었지만 [[한국방송공사|KBS]]는 한바탕 웃음으로 폐지 후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 없이 폐지와 신설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중에 MBC로 이적하면서 예능 MC로 갈아타서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각종 예능에 등장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 세대의 예능 MC들이 으레 그렇듯 배려형 MC 스타일이였다. 특유의 진한 [[다크서클]]도 트레이드 마크. 그래서 별명이 팬더다.
참고로 아버지가 상계[[백병원]]의 원장[* 3~4대 원장을 지낸 김관엽 내과 교수. [[http://www.paik.ac.kr/sanggye/pds/201212064269352.pdf|인터뷰 기사(3페이지)]] ]까지 지낸 분이라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여의도 고등학교 출신인데, 선천적으로 체격이 큰 것과 더불어 싸움도 잘해서 고등학교 때 '의리의 여의도 용팔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이 별명으로 학창시절 여의도 전체 고교생 주먹세계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연예계 데뷔 후에 여의도 방송국 근처 락카페에서 --진짜 주먹꾼-- [[임재범]]과 시비가 붙었다가 가죽옷을 입고 다가온 임재범이 김수용을 무섭게 노려보면서 "눈 깔아"라고 하면서 담배불을 자기 입으로 끄자, 김수용이 당황해서 "제가 제 친구인 줄 알고 사람을 잘못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여의도 출신이라 여의도에 아는 애들이 많아서 헷갈릴 때가 있어요."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서 째려보던 임재범이 그냥 돌아가면서 겨우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개그맨 동기 중에서도 유일하게 자가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자가용을 타고 동기들끼리 [[나이트클럽]]에 놀러다녔던 게 감자골 멤버들이나 [[유재석]]의 토크 레파토리였다. 그런데 후배들은 으레 선배가 술자리에 나오라고 하면 밥을 사줄줄 알았는데 김수용 선배는 딱 밥만 먹고 [[더치페이]]하고 각자 흩어졌다고.
그런데, 캐피털 쪽도 아주 막장이었는데 8억이나 되는 돈을 본인 확인과 부동산 가치를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담보대출을 해준 것이다. 알고 봤더니 이쪽도 캐피털사 지점장이 선배와 한패라서 대놓고 사기 대출을 눈감아줬다고 한다. 결국 캐피털사와는 그쪽 과실도 있고하여 추심은 안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후 경매를 통해 빌라를 매입한 다음 정산해보니 대출이자 + 부동산 관련 세금까지 해서 총 3억 7천의 빚이 남았다고 한다.
이후 선배에게 당한 배신감+빚에 대한 압박감으로 방송을 접고 우울증에 걸려 무기력하게 지냈다고 언급되었다. 이 기간 중에 온라인게임 [[리니지(게임)|리니지]]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아이디는 '겸댕이'. 연예인임에도 [[혈맹]] 모임에 대놓고 나가고 PvP관련해서 [[현피]]까지 할 정도였다고[[https://www.youtube.com/watch?v=FCaSUZ9wNwI|김수용 현피드립]]. 리니지를 접은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시가 몇 백만 원짜리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지인이 잠깐만 껴보겠다고 해서 김수용이 별 생각없이 아이템을 넘겨주었는데 그 사람이 아이템을 받자마자 '''[[닌자#s-11|그대로 로그아웃을 해서 잠수 타버렸다.]]'''[* 흔히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집 한 채값인 [[진명황의 집행검]]은 아니다. 집행검은 2010년 이후인 비교적 최근에 나온 무기로 김수용이 리니지를 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배성재의 텐]]에 출연했을 때 "+9 무기라서 빛이 나는 검이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빛이 나는 무기는 애초에 축복받은 무기이지 강화 수치와는 무관하다.]
김수용이 멘붕해서 [[NC소프트]]까지 전화해서 어떻게 복구 안 되겠냐고 했지만 자의로 교환한 거라 어쩔 수 없다고. 결국 온오프로 '''사기만 2번 당했다.''' 이후 리니지는 완전히 접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리니지에 대한 애정이 있는지 관련한 방송에 종종 출연하고 있다.[[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140219141906924.daum|#]] 심지어 [[2017년]]에는 리니지 챌린저 서버 CF까지 찍었다. [[https://youtu.be/V5CbUL-h5X0|#]][* 라스에서 밝힌 후일담에 의하면 이 CF 촬영 때 관계자에게 슬쩍 마방템 하나만 달라고 이야기 해 봤다고 한다. 다만 아이템은 회사 규정상 임원에게도 제공 못 한다고 거절당했다고..물약 하나도 안 줬다고 한다.]
2016년에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에 출연했는데, 과거 [[미남]] [[개그맨]]으로까지 불렸었는데[* [[파일:감자골_리즈시절.png]][br]미남으로 유명하던 시기의 외모는 지금으로서는 연상도 되지 않는 수준.] 근 몇 년새 살이 부쩍 불어서 [[유재석]]에게 자기관리 부족이라고 [[디스]]당하기도 했다. 실제 위에 프로필 사진으로 쓰인 2012년 라디오 스타 출연 당시와 비교해서도 현재는 꽤나 살이 찐 상태. 몸무게가 세 자리 가까이 육박한다고.
마리텔을 이후 많은 예능에 게스트로 출연하는데 가는 곳마다 불법체류자드립, 강제자숙, 카타르이민포기, 리니지사기, 세관에서 알카에다드립, 밀수범 드립 등 각종 안습한 이야기들을 꺼내 매회 레전드를 만들어 내고있다. 게다가 게임에도 박식하고 채팅에도 능하다보니 마리텔을 기점으로 젊은층에게도 말이 통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수드래곤이라는 별명으로 인기를 얻고있다. 게다가 해피투게더에도 고정이 되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처음 활동한 것은 20세기인데 그 세대에게는 인기가 없고 오히려 10대 20대들에게 인기가 많다. 동덕여대에 촬영을 갔는데 장년층은 김수용을 못 알아봤으나 오히려 대학생들이 '헐 수드래곤' 하면서 엄청나게 환대를 해주었다.
- 김양 (1953년) . . . . 10회 일치
| 본관 = 안동(安東)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은 관료를 지낸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號)는 수문(修門)이다. 제27대 국가보훈처장을 지냈다.
* [[1982년]] :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국제 관계|국제관계학]] 전공)
* [[2005년]] [[8월 9일]] ~ [[2008년]] [[3월 7일]] : [[주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 총영사]]
== 가족 관계 ==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성장한 그는 [[백범 김구]]의 손자이며, [[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공군참모총장]]·[[대한민국 건설교통부|건설교통부]] 장관·[[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중화민국|중화민국 타이완]] 주재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대사]] 등을 지낸 [[김신 (1922년)|김신]]의 둘째 아들이고, [[김진 (1949년)|김진]]의 동생이기도 하다. 본관은 [[구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다.
- 김진향 . . . . 10회 일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였고, '한반도 통일에 관한 담론의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된 연구분야로는 북한 체제, 남북관계, 평화통일 등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다가 [[세종연구소]]에 들어가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했다.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제32대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정치인)|이종석]]을 만났다.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했고, 인수위원회에서 [[국가 안전 보장 회의]](NSC) 설계 작업을 했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에서 NSC 한반도 평화체계담당관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하여 남북 평화체계를 다루다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에서 더 폭넓게 남북관계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여러 번 교섭과 협상을 했다. 학자 입장에서 북한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개성공업지구]] 근무를 자원했고 [[2008년]] 2월부터 4년간 [[개성]]에서 근무했다. 이 때 개성에서 발생하는 신청·세무·회계·세금·임금협상 등 북한과의 모든 협상을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북한 사람들과 부대끼고 토론하고 협상하는 경험을 했다.<ref>원희복.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3&aid=0000032094 (원희복의 인물탐구)카이스트 김진향 교수…종북을 각오하고 ‘북한’을 말하다]. 주간경향. 2016년 1월 16일.</ref>
* 2003년 5월 ~ [[2004년]] 12월:[[국가 안전 보장 회의]] 사무처 행정관
* 2004년 2월 ~ [[2005년]] 5월:[[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행정관
* 2005년 5월 ~ [[2008년]] 2월: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실 인사비서관
* 2008년 2월 ~ [[2011년]] 7월:[[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 부장
* 2017년 12월 ~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관리위원장
- 김태희 . . . . 10회 일치
| 본관 = [[김해|김씨]]
김태희는 2004년, [[KBS 2TV|KBS2]] 《[[구미호 외전]]》에 이어 [[SBS 월화드라마|SBS 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에서 하버드 의대생 이수인 역할로 출연했다.<ref name="김태은">{{뉴스 인용 |제목=작품속 김태희, 이렇게 바뀌었다|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61711531396823&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태은|날짜=2007-06-19|확인날짜=2014-03-05}}</ref> 그녀는 이 두 작품으로 [[KBS 연기대상]]에서 신인연기상,<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0004931 |제목=김태희-이완 남매, 최초로 신인연기상 동시수상 |날짜= 2004-12-31 |출판사= 스타뉴스 |확인날짜= 2010-10-02 }}</ref> [[SBS 연기대상]]에서 10대스타상과 네티즌최고인기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5&aid=0001978489 |제목=김태희의 하루’ 네티즌들 관심 가득 “뭘해도 예뻐요” |날짜= 2008-06-20 |출판사= 한국경제 |확인날짜= 2010-10-02 }}</ref>
이 드라마를 통해 자리를 확고히 한 김태희는, 2006년 제작비 130억,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영화 《[[중천 (영화)|중천]]》에서 [[정우성]]과 함께 공연하며 소화 역할로 첫 장편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ref name="김태은"/>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ref>최지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30&aid=0000001410 '국내' '이 상을 <하얀거탑> 폐인 분들께 바칩니다'] 매거진t 2007년 10월 4일</ref> [[대종상영화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3&aid=0000063392 ‘가족의 탄생’최우수작품·시나리오상…대종상 이변] 국민일보 2007년 6월 9일</ref> 그녀는 [[청룡영화상]]에서 인기스타상을 수상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lueaward.co.kr/bbs/board.php?bo_table=awards_news&sca=28|제목=제28회 청룡영화상|출판사=청룡영화상|확인날짜=2014-02-27}}</ref> 하지만 연기력에서 “대사 소화가 부족하고 표정연기가 풍부하지 못했다”, “평면적 연기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ref name="김태은"/> 《[[중천]]》은 관객수 150만 명을 기록하면서 흥행에도 실패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중천' 참패, CJ 주가 폭락|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3&aid=0000319790|출판사=뉴시스|저자=김용호|날짜=2007-02-19|확인날짜=2014-03-05}}</ref> 2007년에는 영화 《[[싸움 (영화)|싸움]]》의 윤진아 역할을 연기했다. 연기파 배우 [[설경구]]와 공연하며 연기력에 있어서는 이전 작품보다 확실히 좋아졌다는 평을 받았으나,<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연기력과의 싸움에서 '웃다'|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1100&g_serial=299002|출판사=조이뉴스24|저자=정명화|날짜=2007-12-05|확인날짜=2014-03-05}}</ref> 3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ref>{{뉴스 인용 |제목=톱스타 마케팅, 더 이상 안 통한다!|url=http://osen.mt.co.kr/article/G1010070161|출판사=OSEN|저자=이명주|날짜=2010-10-07|확인날짜=2014-03-05}}</ref>
김태희는 2009년 4년 만에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 (드라마)|아이리스]]》의 여주인공 최승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아이리스`, 가장 진지하게 준비한 작품"|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273866|출판사=MK 뉴스|저자=진향희|날짜=2009-05-12|확인날짜=2014-03-05}}</ref>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9.9%, 평균 시청률 30%대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아이리스’ 실체 추적하는 감성적 액션 주목하세요… 블록버스터 드라마 ‘아이리스2’ 제작발표회|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627557&cp=nv|출판사=국민일보|저자=진정희|날짜=2012-11-14|확인날짜=2014-03-05}}</ref> 연기력에 있어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일부에서는 첩보원 역할에 걸맞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ref>{{뉴스 인용 |제목='멍때리는' 김태희? 연기논란 재점화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102914300874627&type=1&outlink=1 |출판사=머니투데이 |날짜=2009-10-29 |확인날짜=2010-01-02}}</ref>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처음으로 연기력으로 우수연기상을 받았는데,<ref>[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김태희, '아이리스'로 연기력 논란 극복하고 상도 받고 눈물 '펑펑']{{깨진 링크|url=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 리뷰스타 2010년 1월 1일</ref> 이에 대해 “우수연기상은 인기로 받은 인기상이 아닌 연기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상이었다. 연기로 인정 못 받고 있다고 그간 생각했다.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저자1=김지연|제목=김태희 "연기력 논란,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91500362265489&type=1&outlink=1|날짜=2010-09-15|확인날짜=2015-12-14|뉴스=머니투데이}}</ref> 2010년 1월 김태희는 소속사를 [[나무엑터스]]에서 자신의 형부가 설립한 루아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1인 기획사 대열 합류… 전 소속사와 협업관계 유지 |url=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05720 |출판사=[[일간스포츠]] |날짜=2010-01-11 |확인날짜=2010-01-11}}</ref> 9월 16일에는 영화 《[[그랑프리 (영화)|그랑프리]]》에서 서주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추석영화열전⑥]'그랑프리' 김태희, 연기논란 잠재우고 흥행퀸 '찜'|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91608154987413|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조범자 |날짜=2010-09-16|확인날짜=2015-07-17}}</ref> 김태희의 연기력은 이전보다 나아졌다며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으나, 16만 명의 관객수를 끝으로 상업적 실패를 거뒀다.<ref>{{뉴스 인용|제목=[울림과스밈] ‘그랑프리 실패’ 김태희에게는 ‘약'|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42216.html|출판사=한겨레|저자=김진철|날짜=2010-10-05|확인날짜=2015-07-17}}</ref> 11월 22일에는 몇몇 내용을 편집해 만든 《[[아이리스: 더 무비]]》가 개봉했다.<ref>{{웹 인용|제목=씨네21 - 아이리스 더 무비|url=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출판사=[[씨네21]]|날짜=2010|확인날짜=2012-02-2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24525/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보존날짜=2016-03-04|깨진링크=예}}</ref> 12월 13일에는 《[[아이리스]]》의 스핀오프작 《[[아테나: 전쟁의 여신]]》 1회에 회상신으로 특별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짧아서 아쉬워"..이병헌·김태희 `아테나` 깜짝 등장|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138166593198520&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 |날짜=2010-12-14|확인날짜=2012-02-29}}</ref>
2014년 5월 29일, 김태희는 중국 사극 드라마 《[[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에 참석하며 중국 데뷔를 알렸다. 그녀는 극중 왕희지의 아내 씨루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중국 드라마 출연..'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 참석|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453046606094168&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4-05-30|확인날짜=2015-08-05}}</ref> 김태희는 자신의 역할 씨루이에 대해 "뻔한 여성상이 아닌, 순수하고 정의로운 캐릭터"였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中드라마 '서성 왕희지', 유학 동경해 선택한 작품"[TD포토]|url=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26553404869440017|출판사=티브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5-03-17|확인날짜=2015-08-05}}</ref> 이듬해 2015년에는 한국 브라운관으로 복귀해, [[SBS TV|SBS]] 드라마 《[[용팔이 (드라마)|용팔이]]》에 한여진 역할로 출연했다. 김태희에게는 2년만에 안방극장으로 복귀작으로 최고 시청률 20.4%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최우수연기상,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SAF 연기대상] 김태희, 최우수연기상 수상 "'용팔이' 덕에 행복한 한 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16&aid=0000174514|출판사 =SBS funE |저자 =김재윤|날짜 = 2016-01-01|확인날짜 =2017-09-09}}</ref>
2004년 김태희는 헤럴드경제 기업사랑 캠페인 홍보대사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6&aid=0000148878 'I Love Companies'`기업사랑 캠페인` 본궤도 올랐다] ''헤럴드경제'' 입력일자 2004-09-21</ref> 2005년에는 남편 [[이완 (1984년)|이완]]과 함께 수호천사로 위촉돼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였고, 같은 해 5월 [[스위스]]에서 친선문화대사로 선정 돼 "독도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리메이크 앨범 등을 나눠주는 활동을 했다.<ref name="광주일보"/><ref>[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SWISS FRIENDS 2005] {{웨이백|url=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date=20110813103724 }} 스위스관광청 홈페이지</ref><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50217085145988&p=yonhap 김태희, 스위스친선문화대사 선정] 연합뉴스 입력일자 2005.02.17</ref> 이후 2007년 유방암의 위험성을 알리는 핑크리본 홍보대사로 활동을 했고, 7월 22일 부산 [[해운대]]에서 열린 핑크리본 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ref>[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70419123412761&p=SpoChosun 김태희, 유방암 조심하세요 핑크리본 홍보대사] 스포츠조선 입력일자 2007.04.19</ref> 또한 12월에는 [[BC카드]]의 후원을 받아 서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밥차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밥차 배식 봉사활동 펼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3&aid=0000027316|저자=탁진현|출판사=[[네이버]]|날짜=2007-12-05|확인날짜=2011-09-15}}</ref> 김태희는 2005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도 난치병 어린이들과 함께 자선 활동을 계속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난치병 어린이들과 따뜻한 만남|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846672|저자=김가희|출판사=[[네이버]]|날짜=2006-05-16|확인날짜=2011-09-15}}</ref> 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난치병 아동들로 이루어진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앨범에 참여했는데, "Make-A-Wish"를 녹음했다.<ref>조성훈 [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배우 김태희,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음원 참여] {{웨이백|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date=20120316165433 }}, 《[[가온 차트]]》, 2011-09-15 작성. 2011-09-15 확인.</ref>
김태희는 사생활 관리가 철저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는데, 남자 연예인들과 [[스캔들]]이 난 적은 거의 없고,<ref>{{뉴스 인용 |제목=장동건·김태희, 스타들이 이상형으로 꼽는 이유?|url=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419696|출판사=[[SBS 뉴스]]|날짜=2008-05-22|확인날짜=2013-09-12}}</ref> 지금까지 연애 경험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라고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연애경험 고백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url=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104030858401119|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이은지|날짜=2011-04-03|확인날짜=2013-09-12}}</ref> 2003년 인터뷰에서 [[천주교]] 신자여서 보수적이라며 [[혼전 성관계]]와 [[낙태]]는 절대 안된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가 생각하는 ‘낙태’와 ‘혼전순결’은…|url=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33371|출판사= 뉴데일리|날짜=2012-12-28|확인날짜=2013-09-12}}</ref>
- 김효원 . . . . 10회 일치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퇴계 이황|이황]]과 [[남명 조식|조식]]의 문인이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1/wk2006111416012337070.htm 주간한국 : [종가기행 24] 善山金氏 省庵 金孝元 - 부친 여윈 뒤 家勢 기울어 "가문의 전통 범절 잘 몰라요"<!-- 봇이 붙인 제목 -->] </ref> 본관은 [[선산 김씨|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이황|퇴계 이황]]과 [[조식 (1501년)|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그는 문을 닫고 봄에 직접 꼬은 신발 한 켤레로 십여 년 이상 신었다 한다.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조선 명종|명종]]말엽 [[윤원형]](훈구파)일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이황]]과 [[조식]]의 문인인 덕에 신진사류의 한사람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564년(명종 19)의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바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565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 관료 생활 ===
[[1574년]] 이조전랑을 지냈고 이듬해인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관직은 절대로 척신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그는 [[심의겸]]과 [[심충겸]]을 외척이라며 비난하였고,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것과 같으므로 그의 주장이 공론으로 받아들여졌다.
=== 지방관 생활 ===
청의(淸議)를 주장하여 사림으로부터 선명성을 인정받고 [[동인 (정치)|동인]]의 영수로 추대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2 /> 그러나 10여년간 지방관 생활을 하며 서원과 서당 설립을 장려, 권장하는 등의 문교 진흥 정책에 힘썼다. 또한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정치와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또한 지방관으로 재임하며 사사로운 일로는 한 번도 도성을 밟지 않았다.
== 관련 항목 ==
-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 . . . . 10회 일치
--[[북유럽 신화]]--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란, [[나치 독일]] 시기의 독일국방군(Wehrmacht)이 [[전쟁범죄]], 인종 학살([[홀로코스트]], 소련인 학살) 등과 무관하며, 이러한 범죄 행위는 전적으로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에 위하여 자행되었다는 역사적 주장을 뜻한다. 이는 20세기 후반 까지 통설적으로 널리 통용되었으나, '''21세기 시점에서는 이미 깔끔하게 논파되어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사라진 주장'''이다.
개요에서 설명한 대로,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는 독일국방군이 전쟁범죄와 같은 범죄행위와 무관함을 주장한다. 심지어 이러한 전쟁범죄를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까지 주장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독일 정부와 독일군의 관계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 같은 이들이 주장한, 그리고 전간기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믿어지게 된 [[내부중상설]]에 따라서 '''자신들은 아무 것도 잘못 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반란으로 독일이 멸망했다'''고 굳게 주장했다. 그리고 황제를 몰아낸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독일 사회민주당]]을 배척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국가'와 '헌법'에 대하여, 히틀러가 수상이 되자 '민족'과 '조국'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했으나, 독일국방군으로 개편되기 직전에 있었던 이 충성 맹세는 '독일 민족의 지도자', '국방군 최고사령관'인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게 맹세한 것이다. 사실 이 시점에서 독일국방군은 (선입견과는 달리) '독일 국가의 군대'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는)'히틀러 개인의 군대'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시대가 기독교적 윤리가 아직 강하던 사회였고, 특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독일군에서는 '충성 맹세'가 지닌 사회적 가치는 매우 컷다.]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가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냉전]]이다. [[미국]]과 [[영국]]은 [[소련]], 그리고 소련의 위성국 [[동독]]에 맞서서 [[서독]]을 재건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군을 전쟁범죄로 단죄하면 독일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실용적 관점에서도 독일군이 해체하는 것은 공산 세력과 맞서는데 큰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었다. 독일국방군 출신의 장성들 역시 자신들이 전쟁범죄자로 받게 될 비난을 두려워하여, 모든 죄과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스]], [[나치 친위대]]에게 몰아놓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연합군의 허가와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된 전직 국방군 장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사를 자신들의 시점에서 저술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6월에, 프리츠 할더 육군 참모장이 책임자가 되어 328명의 독일 장교들이 제2차 대전 시기의 군사 서술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저술하였으며, [[독소전쟁]]에 대한 주요 자료 제공을 독점할 수 있었다.
독일군 장성들은 마음껏 자신들의 지휘관으로서 전문적 식견, 군사 기술을 칭송하고, 독일군 장병의 용기와 인내심을 강조했다. 모든 전쟁 범죄의 책임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스에게 돌렸고, 독일 국방군은 "'''어쩔 수 없이''' 나치스에 남용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범죄를 반대하고 억제했다'''."는 자기 변호를 '역사 기록'으로 만들어냈다.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영향은 [[소련군]]에 대한 폄하로도 나타난다. 독일군 장성들은 패전 이후에도 슬라브인을 멸시하는 인종주의를 버리지 못하여,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이 단지 물량을 바탕으로 한 막무가내 [[우랴돌격]]에만 의존한 군대였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 같은 관점을 전쟁사 계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소련군을 폄하하는 잘못된 관점이 오랫동안 독소전쟁 역사에서 뿌리깊게 남게 된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 측 역시 실증이 될만한 자료 공개를 하지 않고 [[프로파간다]]에만 집중하여 냉전이 끝날 때까지는 이런 관점이 오랫동안 바로잡히지 못하였다.
- 산킨고타이 . . . . 10회 일치
이는 중세 봉건제도의 관습에 근거하여, 하급자인 사무라이가 상급자인 대귀족[* 후대에는 실권을 사무라이가 쥐게 되었지만, 당초 사무라이는 대귀족을 따르는 호위무사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이나,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막부의 쇼군에게 '참배'하여 그들을 호위함으로서 '병역'을 봉공으로 바치고, 그 댓가로서 영지를 보유할 권리(은상)을 얻는다는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전부터 사무라이들은 일종의 군역으로서, 중앙에 상경하여 귀인을 호위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교토대번역(京都大番役)이라고 하여 지방무사들이 교토에 상경하여 호위를 맡는 관습이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대번역(鎌倉大番役)이라고 하여 가마쿠라에도 상경하도록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가마쿠라 시대의 무가법률)에 지정되어 있었으며, 교토에 상경하여 호위하는 임무도 무사들마다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일본에서 어느 정도 통일 세력이 나타날 때마다 반복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서도 오사카에 각 영주들을 상경하여 주둔하고 가족을 인질로 두게 만들었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가 열리고 에도 시대가 시작되자, 다이묘들은 에도에 처자를 두고 영지와 에도를 오가면서 생활하는 관행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이 무질서하게 시행되었기 때문에 폐해가 많아,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반포한 간에이령(寛永令)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의 제2조에 지정되어 공식적인 제도가 되었다. 법령으로 정해진 까닭은 이전까지는 참근하는 관행이 있었으나,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아 오히려 다이묘들이 불편[* 일일이 참근할 것인지, 영지에 돌아갈 것인지를 막부에 물어보지 않으면 안된다.]하였기 때문에 1년 간격으로 하도록 명확하게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법령이 정해짐으로서 다이묘들이 막부에 '인사'를 오는 것이 명확하게 결정되어, 막부와 다이묘의 상하관계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인질 정책 때문에 오히려 다이묘의 가족(본처와 적자)들은 지방 영지에 내려가지는 것이 금기시 됐다. 그래서 다이묘들은 지방에 [[첩]]과 [[서자]]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막부 말기에는 이 금제가 해제되었는데, 그 때문에 인질 걱정없이 반란을 일으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본래 영지가 지방에 있는 다이묘가 '상경'하는 현대의 관점에 맞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기에는 오히려 본래 수도 출신이었던 다이묘가 지방으로 '하향'하는 이미지에 가깝게 된다. 다이묘들은 대부분 에도에서 태어나서, 유년기를 에도에서 지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적자가 대를 이을 수 없는 경우가 되서 지방에 있던 서자가 대를 이어받게 된 경우라면 '상경'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 손치은 . . . . 10회 일치
본관은 [[밀양 손씨|밀양]]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변호사]]를 개업해 일제 강점기 동안 대구 지역에서 활동했다.
[[1932년]]에 [[경상북도]] 안동경찰서에서 순사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일본인 경찰관이 살해되고 조선인 청년 5명이 용의자로 체포된 일이 발생했다. 이때 손치은이 무료로 변호를 맡아 이들이 무죄임을 밝혀냈다.<ref>{{저널 인용
|제목=[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⑫]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저자=전봉관
}}</ref>,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본 제국]]의 사상통제 정책에 협조한 행적도 있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따라 사상범 감시를 위한 보호관찰 제도가 신설되고 지역마다 보호관찰심사회가 출범했을 때 대구보호관찰심사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분류:1892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
- 송진현 . . . . 10회 일치
|본관 = [[은진 송씨|은진]]
1952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 합격해 제8기 [[사법연수원]]을 수료, 공군 법무관을 전역했다.
1981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1983년 서울형사지방법원, 1985년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지원장, 1987년 [[서울가정법원]], 198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1991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1992년 [[대구지방법원]] 1994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1996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1997년 서울지방법원, 2000년 2월 [[대전고등법원]], 2001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였다. 2005년 11월에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수석 부장판사가 되었으며 2006년 6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서울동부지방법원]], 2008년 2월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하다가 2009년 2월에 사직하고 법무법인 로고스에서 변호사를 하였다. 보건의료직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면서 변호사를 하고 있을 무렵인 2015년 8월 [[박근혜 정부]]에서 제10대 [[경찰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자문위원을 겸직하였다.
* 서울형사지방법원 형사항소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0월 24일에 [[인천역]]에서 다른 승객이 놓고 간 35000원 상당의 공구함을 들고가다 붙잡힌 피고인에 대해 "지하철이 종착역에 도착한 순간부터 점유권이 지하철공사에 있으므로 피고인의 행위는 절도죄에 해당한다"며 징역10월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7년 10월 25일자</ref> 1998년 1월 10일에 일반음식점 영업 허가없이 통조림, 캔류 등 안주류를 파는 24시간 편의방을 운영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피고인에 대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1월 11일자</ref> 1999년 1월 10일에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경찰관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다른 사람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줘 공문서 부정행사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정모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관련 법령에 따라 운전면허증을신분증으로 규정한 조항이 없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9년 1월 11일</ref> 4월 24일에 서울대 캠퍼스에서 집단 농성을 주도한 한국통신 서울본부 위원장에 대해 "서울대 총장이 한국통신 노조의 총파업에 대해 학내 출입을 금지했음에도 무단 진입했다"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4월 26일자</ref> 5월 17일에 [[한총련]] 범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다가 [[집시법]]위반과 건조물 침입죄로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1년이 선고된 노래패 '희망새에 대해 단장 조모씨(31세)에 대해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라고 하더라도 공연의 목적으로 참석했고 구호를 외치거나 연설을 하는 등 집회,시위를 한 것이 아니다"는 이유로 원심을 깨고 [[집시법]]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5월 18일자</ref> 10월 7일에 폭력배를 동원해 채무 해결사 노릇을 했던 [[홍수환]]에 대해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 부탁으로 후배를 연결해준 점은 인정되지만 채권을 회수하기로 후배와 공모한 일은 그 뒤에 이뤄져 피고인이 개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10월 8일자</ref>
* [[서울고등법원]] 특별8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10월 22일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효순·미선양 사망 사건'과 관련해 미군 2명을 소환해 조사했던 [[의정부지방검찰청]]을 상대로 "관련 수사 기록을 공개하라"며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들이 청구한 정보 내역 가운데 피의자 신문 조서 등은 정보공개법상 비공개 대상 정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 대한 미군측 군사재판 원고 사본 등은 원심대로 한미 관계 등을 감안해 공개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며 원심대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65906]</ref>10월 25일에 지난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집회에서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된 송모씨가 "단체협약에 정한 징계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해고한 것은 부당하다"며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소송에서 "노조활동에는 집회참가도 포함되고 따라서 [[집시법]]에 의해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당연해고할 수는 없다”면서도 "집회 도중 자의적인 폭력행위는 조합활동의 일부라고 볼 수 없다"며 "집회에서 폭력을 행사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로 당연해고 사유에 해당한다”며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83535]</ref>
- 스트라테고스 . . . . 10회 일치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관직]]명이다.
스트라테고스란 '군사적 지도자', '군사령관'을 의미한다. 고대로부터 그리스어에서 이는 주로 고위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시대별, 국가별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장군]]'과 비슷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 스트라테고스는 투표로 선출되는 장군직이었다. 스트라테고스(복수형으로 스트라테고이)는 10인이 선출되었고, 투표로서 전략적 방침을 정했으며, 매일 1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민주정을 채택한 아테네에서 스테라테고스는 실질적으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들이었으며 현대의 내각과 비슷한 위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평시에는 정무를 보며 전쟁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전선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다만, 10명의 스트라테고스가 전부 다 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대체로 1,2명 정도가 원정에 나서고 나머지는 정무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후후. 그놈은 우리 10인의 스트라테고스 가운데 최약체지."--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이론상 [[민회]]가 최고기관이었으므로, 스테라테고스 역시 국정의 책임을 져서 민회에서 탄핵을 받아 재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패전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까지 있었다.--아군을 팀킬하는 최종보스--
[[마케도니아 왕국]]은 필리포스 2세 이후로 스트라테고스를 특정한 지역에서 왕의 권력을 대리하는 장군-지방장관의 직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례는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받은 헬레니즘 왕국에서도 이어져서, 스트라테고스는 특정 지역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군이자 지방의 행정을 처리하는 장관의 권한을 가진 직위가 되었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같은 사례가 그러하다. 이들은 서로마 제국 후기의 국방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으나, 너무 큰 지위였기 때문에 서로마의 '스트라테고스'는 황제와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스틸리코는 모함을 당해 처형되었고, 아에티우스는 암살당했다.
결국 제국 말기에는 마기스테르 밀리툼과 황제의 권력관계가 역전되고 말았다. 예를 들어, 리키메르는 거꾸로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마음대로 죽이고 폐위를 반복하며 농락하였다. 서로마 최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은 [[훈 족]]의 [[왕]] [[아틸라]]를 따르던 플라비우스 오레스테스로서, 그는 자신을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한 [[율리우스 네포스]] 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삼았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는 게르만 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패배하여 사망하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소멸한다. 이로서 서로마의 마기스테르 밀레툼 역시 사라지게 된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스테라테고스는 일반적으로 한 '테마'(주州)의 군사-행정 장관의 지위였으며, [[장군]]이나 [[제독]]으로 번역된다. 스테라토게스는 군사직위의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었는데, 아치스테라테고스(archistrategos ,대장군), 프로토스테라테고스(protostrategos , 제1장군)이나 히포스테라테고스(hypostrategos, 하위-장군) 같은 지위가 나타나게 된다.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그리스계 문화권 군주가 공작위급 지방관직[* 캐릭터가 죽으면 후계자가 있어도 주군에게 돌려받아지는 직위]을 하사받으면 가지는 작위로 나온다.
- 안재욱(배우,가수) . . . . 10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가톨릭/인물]], [[음주운전/명단/대한민국]]
|| '''본관''' ||<(> [[순흥 안씨]] ||
2011년 안재욱은 사랑해 이후 오랜만에 [[문화방송|MBC]]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로 브라운관에 복귀한다. 창사 50주년 특집 드라마이며 안재욱이 원톱으로 총 64부작을 이끌었다.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안재욱은 연말 [[MBC 연기대상]] 대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고 무관에 그쳐 많은 시청자들의 분노를 샀다.
2017년 1월 18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역으로 출연중이다. 1월 9일 삼성카드홀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쇼케이스에서 가사를 틀리는 실수를 범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6년 [[KBS 연기대상]]에서 [[아이가 다섯]]으로 우수상 수상 소감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예전에 한번은 끝까지 기다렸다 그냥 간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상을 받았네요'라며 이 사건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하지만 라디오스타에서 엠뷔시는 상도 안줘놓고 케비에스에서 우수상밖에 못받았다고 오히려 케비에스를 까는데 ㅋㅋ 똥묻은개가 겨묻은개를 ㅋㅋ
2015년 6월 1일 뮤지컬 배우 최현주와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614530|결혼했다]]. [[프로불참러|그런데 세바퀴에서 김흥국이 이것 때문에 조세호를 갈궜다]]. 정작 조세호와 안재욱은 아예 모르는 관계다. 그리고 2016년 2월 16일, 득녀했다.
* 2001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올해의 한국관광 대상 장려상
* 2001년 문화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 외척 . . . . 10회 일치
전통적으로 중국의 왕조는 외척의 권세가 강했는데, 특히 [[전한]], [[후한]] 시기는 외척의 권세가 아주 강력했던 시기이다. 황제들은 이것을 제어하려고 [[환관]]과 손을 잡고 외척을 타도하기도 했으나, 이로 인해 이번엔 환관이 반대로 지나치게 강해져서 환관 세력이 창궐하게 된다.
더군다나, 환관의 화는 외척보다 훨씬 오래 가서 나중에 명나라까지 좀먹었으니... 반면 외척 문제는 후한의 막장화 이후 이를 본보기로 삼아 역대 왕조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으며, 외척이 나대면 욕먹는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외척이 크게 억제되는 등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씨, 그 가운데서도 5개의 가문(고노에, 쿠죠, 니죠, 이치죠, 타카츠카사)인 [[고셋케]], 일명 '후지와라 섭관가'가 오랬동안 황후를 배출하면서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사실상 후지와라 가문이 일본의 지배자였다.
일본 귀족 정치가 몰락하고 무가(武家) 정치가 대세가 되면서 섭관가는 물론 덴노가 까지 쩌리가 되고 실권은 [[쇼군]]이 차지하게 되어 섭관가 역시 실권을 잃었으나, 그래도 덴노의 외척이라는 권위는 근세까지 이어질 정도로 독보적이었으며 덴노가의 황후를 배출하는 것은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 섭관가 출신으로 한정되었다. 관습적으로 후지와라 섭관가가 '왕비족'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 윤덕홍 . . . . 10회 일치
민주진보진영 서울시교육감 후보 단일화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던 윤덕홍은 단일화 불참 이유에 대해 "경선을 몰랐고,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갑자기 출마하게 됐기 때문에 그때는 경선에 관심도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서울 교육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출마를 했다'는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윤덕홍은 2013년 4월 3일자 민주당 대구시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였다고 하였고, 2013년 4월 당시 민주당 대구시당 위원장이었던 이승천은 "2013년 4월 3일 윤덕홍이 직접 탈당계를 제출했다는 보고를 받고, 당의 원로이므로 함부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해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업무가 폭주하던 상황이어서 탈당처리를 잊어버리고 못했었고, 후에 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명확하게 처리하지 못했다"고 해명했지만, 새정치연합(구 민주당) 대구시당은 "윤덕홍의 당적과 관련해서 더 이상 대구시당에서 답변하지 않기로 했다. 중앙당으로 문의하라"고 답변을 회피했고, 새정치연합(구 민주당) 중앙당은 "당적과 관련되어서는 본인이 아니면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는 등 새정치연합 중앙당과 대구시당이 윤덕홍의 탈당시점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며 의혹이 증폭되었다.
또한 윤덕홍은 2014년 4월 말까지도 새정치민주연합 경북도당 공천관리심사위원장을 맡는 등 예비후보 등록 시점까지 실질적으로는 당원으로서 활동하였으며, 국회 교육위 소속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교육감 선거 후보 조건으로 당적 1년 미보유 조항을 없애 달라", "최근 당적을 지난해 4월로 소급해 말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02838 윤덕홍은 시한폭탄] 뉴데일리 2014년 5월 13일</ref>
대개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 결과를 홈페이지에 공표하는데, 《한국인텔리서치》는 "담당자가 없다. 현재 홈페이지 개발 중"이라며 설문조사 문항을 공개하지 않았다. <ref>[http://www.redian.org/archive/70041 "윤덕홍 전 부총리, 교육감 출마와 동시에 지지율 1위?"] 레디앙 2014년 4월 28일</ref>
* 2003 ~ 2003 :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직책 = [[대한민국의 교육부총리|부총리]] 겸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부총리]][[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구대학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동덕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금서 . . . . 10회 일치
|본관= [[경주 이씨|경주]]
'''이금서'''(李金書)는 [[고려]]초 문신으로,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ref>[[경주 이씨|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新羅) 개국원훈(開國元勳)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하고, 중시조는 [[효공왕]](孝恭王)때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이다</ref>. 경주 이씨(慶州李氏) 중시조 신라 말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의 손자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사위이다.
일설에는 아버지로 알려진 이금현과 형제 관계라고 전한다. 이금현(李金現), 이금서(李金書) 부자의 이름상의 '금(金)'자가 같이 쓰인 점에서 비롯된 오해인 것 같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의 옛 풍습에 아들의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권행(權幸, 안동권씨 시조)의 아들 인행(仁幸), 공직(龔直, ?~939, 연산공씨 시조)의 아들 직달(直達)이 그 예이다.
[[경주 이씨]] 대종보에 따르면 이금서의 아들은 1남 이윤홍(李潤弘), 2남 이윤원(李潤遠), 3남<ref>[[평창 이씨]] 본원 선계록에 의하면 "금서공은 신라 [[경순왕]] 김부의 셋째 딸 '신란궁부인'을 맞아 부마가 되어 두 아들을 두셨다. 장자는 휘 윤홍이니 [[경주 이씨]]의 선조가 되시고, 둘째 아들은 휘 윤장이니 [[평창 이씨]]의 시조이시다."라고 하여 이윤장을 2남으로 기록하고 있다.</ref> 이윤장(李潤張)이며, 이윤원은 [[가평 이씨]](加平李氏)로 이윤장은 [[평창 이씨]](平昌李氏)로 분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 분적종이 아니라고 밝혀져 분적종에서 제외되었고,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중국에서 유래되어 본래부터 분적종이 아니다. [[평창 이씨]] 내부적으로 [[조선 숙종|숙종]] 대의 족보를 근거로 이광(李匡)을 이윤장(李潤張)의 8세 손으로 보아 이윤장(李潤張)을 시조로 보는 분파와 이광(李匡)을 시조로 보는 분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조선 숙종|숙종]] 대의 족보가 위작으로 밝혀져 이광(李匡)을 시조로 확정하고 이윤장과의 관련성에 선을 그었다.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신라왕 김부(金溥 :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에 들어와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ref>신란궁부인 김씨이다.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는 출가 후 신란궁부인으로 불렸는데, 그 딸인 김씨가 다시 신란궁부인에 봉작되었다.</ref>을 낳았으니 금서의 아내가 되어 윤홍을 낳았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이윤홍이 '신라말' 병정(兵正)을 했다는 기록을 들어 연대상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ref>이에 대해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에 '고려 초 관제에 병부령(兵部令)을 설치할 때 병정(兵正)을 두었고 품계는 재상(宰相)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ref> 그러나 이금서가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으로 고려에서 처음 벼슬을 시작했고, 그 아들 이윤홍의 병정(兵正) 벼슬과 관련하여 고려 초 관제에 병부령(兵部令)을 설치하면서 병정(兵正)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윤홍의 병정(兵正) 벼슬은 고려 초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남<ref>[[평창 이씨]] 측 기록에 의하면 2남. 현재는 이윤장과의 관련성 자체를 부인하는 듯하다.</ref> 이윤장은 고려의 대사마 대장군으로 후백제 견훤을 토평하고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경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윤장의 생모는 신란궁 부인 김씨가 될 수 없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이금서(李金書)의 증손자 [[이주좌]](李周佐)를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주좌의 증조부 이금서(李金書)는 중원태수 호부랑중을 역임하고 고려 태조의 외손녀이며 신라 경순왕의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와 혼인하였고, 조부 이윤홍은 병정(兵正)을 역임하였는데, 비록 부친 이승훈(李承訓)이 칠품 관직인 정조시랑(正朝侍郞)에 그쳤다고 한미한 가문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 3남 : 이윤장(李潤張)<ref>[[평창 이씨]] 족보에 따르면 이금현의 아들은 2명으로 이윤장은 그 중 2남으로서 시조 [[이광]]의 7대조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있는 [[조선 숙종|숙종]] 대의 족보를 근거로 그 시조를 이윤장으로 하는 족보가 간행되기도 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 숙종|숙종]]대의 족보가 위작으로 밝혀져, [[평창 이씨]] 측에서는 그 시조를 [[이광]]으로 확정하였고, 이윤장과의 관련성에 선을 그었다. 이에 따라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의 분적종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윤장을 [[평창 이씨]]의 시조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어 논란의 소지가 있다.</ref>
- 이재용(배우) . . . . 10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불교/인물]]
|| '''본관''' ||<(> [[경주 이씨]][* 경주 이씨 41세손 '在'자 항렬이다.] ||
--[[이재용|이름에 걸맞게]]--주로 [[높으신 분들]] 역할을 많이 맡는데 '''[[조폭]] [[보스]]''', 군 장성, 금융기관 회장, 펀드매니저, 재벌 총수 --재벌 총수가 [[이재용|재벌 총수]] 연기를 하네--, 대기업 오너, 언론사 사주, 경찰청장, 국회의원, 장차관, 고위관료, 검찰·국정원 고위층 역할을 맡는다. [[사극]]에도 자주 얼굴을 비춘다.
[[배우]] [[유호정]]의 남편인 배우 [[이재룡]]이나[* 그런데 이쪽은 [[본관]], [[한자]], [[항렬]]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 이재룡이 한살 동생.]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과 헷갈리지 말자.
[[영화]] [[친구(영화)|친구]]에서 묵직한 부산 사투리로, 동수([[장동건]])를 앞에 두고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으로 [[미친 존재감]]을 알렸다.[* 실제로 이재용은 유년시절을 마산시에서 보냈기 때문에 부산 사투리가 능숙한 건 일도 아니다.] [[이재용|동명의 재벌 후계자]]가 있는 관계로 이재용이라는 [[본명]]을 기억하는 사람보다는 친구의 차상곤, [[야인시대]]의 [[미와 와사부로(야인시대)|미와 경부]], 제5공화국의 [[이학봉]] 등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범인을 쫓다가 벌로 얼굴이 뒤덮여 절벽 밑으로 추락사하는 추형사 역할을 연기했으며, 드라마 [[대물(드라마)|대물]]에서 [[권상우]]의 상관인 공성조 지청장을 연기했다. 이 작품으로 배우 커리어 첫 상인 드라마 스페셜 조연상을 수상했다.
|| KBS || [[성균관 스캔들]] || 하우규 || ||
|| MBC || 에어시티 || 국정원 감찰관 || 특별출연 ||
- 이종배(국회의원) . . . . 10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본관}}}''' ||<(> [[광주 이씨]] ||
||<bgcolor=#C9151E> '''{{{#FFFFFF 가족관계}}}''' ||<(> 배우자 박종숙, 슬하 2남 ||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19~20대 국회의원[br]제35대 [[충청북도]] [[충주시]]장(민선5기)[br][[행정안전부]] 제2차관[br]행정자치부 차관보[br]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br][[충청북도]] 행정부지사[br]충청북도청 기획관리실장[br][[충청북도]] 청주시 부시장[br][[대통령비서실]] 행정비서관[br][[충청북도]] [[음성군]]수(관선)[br]제23회 행정고시 합격 ||
1957년 충청북도 중원군 주덕면(현 충주시 [[주덕읍]])에서 태어났다. 주덕초등학교, 충주중학교, [[청주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학사장교]]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주로 충북도나 행정자치부-행정안전부에서 근무하였다. 공직 사퇴 직전에는 행정안전부 2차관을 역임하였다. [[이시종]], [[윤진식]]처럼 충주 출신으로 고위관료 테크를 탄 사람이다.
당시 한나라당이 충주에서 낼 수 있는 강력한 카드인 [[윤진식]]은 [[2010년 재보궐선거#s-2|2010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한 상태였고, 김호복은 2010년 선거의 패배로 경쟁력이 의심되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한나라당은 충주 출신 고위관료 테크를 탄 이종배를 적극적으로 영입한 것. 이후 재선 국회의원 출신의 [[민주당(2008년)|민주당]] [[박상규(정치인)|박상규]] 후보, 그리고 이종배 영입에 반발하여 미래연합 후보로 출마한 김호복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당선, 민선 5기 충주시장이 되었다.
- 이홍기(군인) . . . . 10회 일치
|||||||||| [[대한민국 육군]]의 [[제3야전군사령관]] ||
||<#ffa500><:> {{{#ffffff '''임관'''}}} ||<#ffd700> 육사 33기 ||
||<#ffa500><:> {{{#ffffff '''최종보직'''}}} ||<#ffd700> 제3야전군사령관 ||
[[대한민국]]의 前 [[군인]]. 예비역 대장 [[제3야전군사령관]] 역임했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이냐시오이다.
[[1953년]] [[8월 25일]][* [[음력]]이다.], [[경상북도|경북]] [[김천시|김천]] 출신으로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육군사관학교]] 33기로 입교해 1977년에 임관했다. 2012년 [[제3야전군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이임과 동시에 36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예편했다.
- [[대한민국 육군|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대장
-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실 국방비서관: 소장
-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정책기획관: 소장
- 장석조 (판사) . . . . 10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경력 = 제42대 전라북도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61년 [[서울시]]에서 태어나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제15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대전고등법원]] 판사,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부장판사,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대전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역임하는 등 민사, 형사, 행정, 헌법재판소 근무 등 주요 분야를 두루 거쳤으며, 집행절차에 있어서의 채무자 보호, 판결의 편취와 절차적 기본권, 우리 헌법상 절차적 기본권, 조세법상 실질과세원칙의 적용한계, 헌법과 민사소송법, 민사재판과 헌법적 판단, 재판받을 권리의 헌법상 보장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여 2008년에 한국법학원 법학논문상을 받았다.
* 대전지방법원 제1형사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12월 5일에 1999년 1월 7일과 9일 이종기 변호사가 "판,검사 등에게 대가성 소개비를 지급했다"는 등의 허위 보도로 이종기 변호사의 명예를 훼손하고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4-8월 집행유예 1-2년, 사회봉사명령 120시간 등을 선고받은 [[대전MBC]] 기자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1999년 1월 9일 보도내용중 당시 판,검사들이 이종기 변호사로부터 떡값이나 전별금을 받았지만 뒷거래를 없었던 만큼 미필적이라도 허위에 해당한다"고 하면서도 "수사기관이 아닌 언론이 정확한 사실을 가려내기 힘든 점과 이종기 변호사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점으로 미뤄 비방한 것으로 볼수 없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하면서 "당시 보도가 법조계의 전관예우라는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고 보도 이후 법조계에서 이같은 관행이 해소된 점과 국민의 알권리 등 언론의 공익적기능 등을 고려했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강모씨에게 벌금 500만원과 고모씨, 석모씨에게 벌금 700만원을 각각 선고하면서 김모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010361]</ref>
* 서울고등법원 행정8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14년 9월 28일에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이 제기한 증여세 부과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강남세무서장 등 15개 관서장이 고지한 각 증여세 139억원의 부과를 취소한다"며 원고 승소판결했다.<ref>[http://www.joseilbo.com/news/htmls/2014/09/20140926234304.html]</ref> 12월에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6곳이 서울 동대문구와 성동구를 상대로 낸 영업시간제한 등 처분 취소소송에서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일을 지정하는 방법으로 달성되는 전통시장 보호 효과가 뚜렷하지 않고 아직까지 논란이 있다"고 하면서 원고 승소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1심 판결을 인정하여 파기하여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했다.<ref>[http://www.ajunews.com/view/20151119130813012]</ref>
- 전숙희 . . . . 10회 일치
'''전숙희'''(田淑禧, [[1919년]] [[3월 15일]] ~ [[2010년]] [[8월 1일]])는 일제 강점기와 군정기, [[대한민국]]의 작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담양 전씨|담양]], 호는 벽강(璧江), 목사 [[전주부 (목회자)|전주부]]의 딸이며 기업인 [[전락원]]의 누나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함경남도]] 협곡에서 출생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38년]] [[단편소설]] 《시골로 가는 노파》를 《[[여성 (잡지)|여성]]》에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10월]] [[미군정]]이 주둔하자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1948년]] 미군정이 물러난 뒤 다시 작가, 수필가로 돌아와 [[한국 전쟁]]을 거친 뒤 [[1954년]] 수필집 《탕자의 변》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수필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수필의 특징은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여성심리를 조촐한 필치로 표현하는 데 있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펜중앙위원회에서 국제 종신 부회장으로 선임됐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 독일 괴테문화훈장, 러시아 푸슈킨 문화훈장 등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훈장|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후 동생인 고(故) [[전락원]] 전 파라다이스그룹 회장과 함께 1993년 [[계원예술고등학교]], [[계원디자인예술대학]] 등 계원학원을 설립했다. 1997년에는 한국 문학 유산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국 최초의 현대문학 자료관인 동서문학관(현 한국현대문학관)을 개관했다. 2010년 8월 1일 오전 8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향년 91세로 별세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001&aid=0004585279 원로 수필가 전숙희씨 별세 (연합뉴스 2010년8월1일자)]</ref>
**** 자녀 : 강영국(재미 사업가), 영진(한국현대문학관 관장)씨, 딸 은엽(미술가), 은영(미술가)
<!--군정기 때 통역관 역임-->[[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2010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
- 절대가련 칠드런/463화 . . . . 10회 일치
* 한때 일본 정부는 "전 에스퍼 등록격리법안"이란 것을 추진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에스퍼를 등록, 격리해서 관리한다는 방침으로 명목은 비 에스퍼 국민의 안전. 당연히 에스퍼를 보호하는 BABEL에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키리츠보 타이조]]는 단숨에 테이블을 엎으려 격분.
* 당연한 반응이지만, 장관은 당혹해하면서도 에스퍼에 의한 범죄나 부정은 엄연한 사실이고 대다수인 노멀 국민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한다고 응수한다. 하지만 [[츠보미 후지코]]는 범죄발생률과 능력은 별개 문제라고 정론을 펼치며 "에스퍼는 국민도 아니라는 거냐"고 꼬집는다. 물론 장관으로서는 그렇게까진 말할 수 없는 입장이므로 표면적으론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카시와기 오보로]]가 조용히 자료를 제출한다. 정권의 비위를 조사한 자료로 보이는데 반양 격리법안이 상정된다면 이걸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이날의 제의는 무효화.
* 그랬던 것이 지금까지의 입장인데, 어쩐지 오늘 수뇌부는 매우 협조적이다. 장관은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어쨌든 협조를 받았으니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에스퍼의 편의를 아무리 봐줘봐야 선거에 득될 것도 없고, 사회의 관리하에서 에스퍼를 이용하기 위해선 이 법안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 장관의 퇴장 후 척보기에도 수상한 무리가 나타난다. 더 칠드런 일행과 판도라의 간부들이 작전에 나선 것이다. [[미나모토 코이치]]는 관리관이 상대지만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고 팀원들에게 주의를 준다. [[효부 쿄스케]]가 거기서 리더 인양 굴지 말라고 끼어든다. 미나모토는 판도라는 용병 입장이 아니냐고 따지는데 효부는 자기가 능력, 경험, 기술, 인격 면에서 모두 앞선다고 대꾸한다. 물론 미나모토는 "적어도 인격은 아니다"고 격렬하게 반박.
리더들이 병림픽을 벌이는 옆에선 [[후지우라 요우]]가 왠일로 어른스럽게 "리더 따윈 누구든 상관없고 싸움은 리듬을 타고 타닷하고 접근해 파밧하고 이기면 된다"고 말한다. 진지한 말투와는 달리 내용은 대충. [[사카키 슈지]]는 거기에 태클을 걸며 어차피 용병으로 쓸 거면 [[마기 시로]]가 제일 쓸만할 것 같으니 데려 오라고 한다. 요우는 자세히 밝히지는 않지만 "사정이 있어 못 온다"고 말한다.
* 입구의 경비병력은 효부와 유리의 최면으로 간단히 통과, 보안키도 미리 준비한 위조ID카드로 무사히 지나간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난관이다. 바벨 보안시스템의 최종 방어라인 더 더블 페이스. 하이 레벨 에스퍼인 [[노와키 호타루]]와 [[토키와 나츠코]]에겐 최면도 통하지 않는다. 일행이 나타나자 마자 더블 페이스는 초감각으로 투사가 안 되는걸 감지하고 경계한다.
- 정도복 (고려) . . . . 10회 일치
'''정도복'''(鄭道復)은 [[고려]]시대 말기,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선, 상시 등을 지내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밀직제학, 한성부우윤,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으며 형 [[정도전]]이 암살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성주 유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뒤 인녕부사윤에 이르렀다. 본관은 [[봉화 정씨|봉화]](奉化)이고 자(字)는 내지(來之)이고 호(號)는 일봉(逸峯)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며, [[정도전]](鄭道傳)의 친 아우이다.
고려 충정왕 3년(1351년) 영주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나이 16세에 양친 부모님을 모두 잃고, 큰형인 삼봉 [[정도전]]이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우연히 처음으로 [[성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20세 때까지 4년여간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진사시(進士試)에 올랐으며, 우왕 11년에 지공거 염국보(廉國寶)와 동지공거 포은 [[정몽주]]가 주관한 과거에 제11위로 입격하였다.<ref>당시 우현보의 아들 우홍명(禹洪命)이 장원급제하고 함부림(咸傅霖), 변계량(卞季良), 한상덕(韓尙德), 박석명(朴錫命), 권원(權遠), 김자지(金自知), 이맹균(李孟畇) 등 기라성 같은 인물 33인이 급제한 과거에서 그는 제11위였다.</ref>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올랐다.
얼마 아니 되어 밀직제학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올라 성균관대사성을 겸임 했으며, 태묘공신의 봉호를 받았다. [[1398년]] 왕자 난 때 큰형 삼봉선생이 화를 입은 뒤 문하찬성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 태종 3년(1403)에 성주 유학교수(星州儒學敎授)에 부임하여 7년여 동안을 교육에 힘쓰다가 동왕 9년(1409) 8월에 인녕부사윤(仁寧府司尹)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다시 유배되는데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7월 12일조에, “사헌부에서 2품 이상으로서 외방(外方)에 있는 자의 죄를 청하는 계청(啓請)에, “2품은 외방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습니다. 검교(檢校) 한성 윤(漢城尹) 손가흥(孫可興)·박상경(朴尙絅)·박후식(朴厚植)·고도관(高都琯)·윤사혁(尹思奕)·최함(崔咸)·여극해(呂克諧)·정도복(鄭道復)·전이성, 병마사(泥城兵馬使) 정과(鄭過) 등은 항상 외방에 거주하니 심히 미편합니다. 청컨대, 고신(告身)을 거두고 다른 도(道)에 이치(移置)하소서.”라고 비난하였다.
* 승정원도승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지내다.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정찬성 . . . . 10회 일치
* 상위 문서: [[종합격투기 관련 인물]]
||<#000002> '''{{{#white 본관}}}'''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000002> '''{{{#white 가족관계}}}''' || 부인 외 1남 2녀 [[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6&aid=0003065656|스포츠조선]][[https://www.instagram.com/p/Bl4yGGeAOCh/?taken-by=koreanzombiemma|셋째(아들)]] ||
2010년 2월에는 It's Showtime에 출전하여 [[태국]]의 룸피니 챔피언인 패종슥 룩프라밧과 입식 경기를 갖게 되었다. 패종슥의 킥에 고전하는 양상을 살짝 보였으나 2분 경 킥 페이크 이후 백스핀 블로로 패종슥을 실신시키며 대 이변...을 일으키는 줄 알았으나 '''백 스핀 블로가 반칙으로 인정되면서''' 반칙패를 당하게 되었다. 2010년부터 백 스핀 공격을 반칙 공격으로 하는 것으로 룰이 개정되었었는데 룰 미팅 당시 통역도 없었고 분위기도 어수선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반칙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게 사실 문제가 심각한 게 정찬성은 물론 상대 선수인 패종슥도 백스핀 블로우가 반칙인 줄 몰랐다고 한다. 경기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그래서 패종슥도 자신이 패배한 줄 알고 있다가 경기 결과를 듣고는 어리둥절해한다. 쇼타임의 선수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비록 패배를 하긴 했지만 이 경기를 통해 매니아들 사이에서 정찬성의 네임벨류가 올라가게 되며 이는 ZUFFA사와의 계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2012년 5월 15일 UFC on FUEL TV 3의 [[메인 이벤터]]로 비슷하게 탑 10위권의 강자인 [[더스틴 포이리에]]와 대결이 확정되었다. 이 경기는 넘버원 컨텐더 결정전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받고 있다. 상대인 포이리에는 상당히 위험한 상대로, 89년생에 동체급 최상위권의 그래플러이며 어린 나이에도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선수라 이 경기야 말로 정찬성의 검증 매치가 될 듯 하다. 호미닉의 경우는 거품이 있다는 평가가 있던 선수인지라.
결국 5월 15일 UFC on FUEL TV 3의 메인이벤트에서 [[더스틴 포이리에]]를 상대로 멋진 다스 초크 서브미션 승을 거두었다. 3라운드까지의 심사위원들의 스코어카드를 공개했는데 전부 정찬성의 승리였다. 그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상황. 1라운드는 의외로 정찬성이 발전된 레슬링 기량과 정확한 타격을 선보이며 포이리에를 밀어붙였다. 포이리에는 얼굴에 커팅까지 나긴해도 스윕을 성공하며 선전했지만 스탠딩 상태에서 정찬성과 주고받으면서 대미지를 받은 상황. 그리고 이어지는 2라운드에는 무에타이 스탠스에서 '''플라잉 니킥과 트레이드마크인 넥클린치 니킥''', 그리고 어퍼컷으로 화끈하게 난타전을 벌이다가 포이리에가 더블렉을 시도하자 몽키 플립을 시전해 탑 포지션을 점유하며 암바와 트라이앵글초크를 연속적으로 시도하며 오히려 포이리에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사실 2라운드 마지막에 걸린 트라이앵글 초크로 피니시를 할 수도 있었지만, 공이 울리며 아쉽게도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2라운드 이후부터 관중들의 'Zombie!' 챈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3라운드 에서는 두 선수 모두 어느정도 지친 모습을 보였고, 포이리에가 아웃복싱으로 정찬성을 견제했지만 정타수는 정 선수가 위였다. 다소 정찬성이 많이 맞은 정도로 보인것. Fuel TV 중계진도 포이리에가 영리하게 타격을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이때 체력이 저하되는 조짐이 보인 것. 사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어보니 2라운드인가 3라운드 중반에 무릎을 다쳐서 페이스를 조절해야 했다고 했다. 본인은 지친 기색이 별로 없었던 모양. 그리고 이어지는 4라운드에서 초반 상황을 살피다가 어퍼컷과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포이리에의 턱에 적중시켜서 케이지로 몰아 붙인 뒤 이어지는 '''플라잉 니킥'''에 포이리에는 타격을 입었고, 반사적으로 정찬성에게 테이크다운을 시도했지만, 정찬성은 침착하게 포이리에에게 다스 초크 그립을 완성시키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I want Jose Aldo"라는 코멘트로 정식으로 챔피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크 호미닉전을 시작으로 2경기 연속 언더독으로 평가받으며 싸웠는데, 모두 승리로 마무리 지었으니 선수 자신에게도 감격이 클 듯. 대회가 끝나고 이 경기는 Fight of The Night과 Submission of The Night에 선정되어 보너스만 미화 10만 불을 받았다. 참고로 이 보너스는 병세로 인해 현장에 없던 데이나 화이트 대표가 직접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주라고 했다고 한다. --역시나 각별한 사장님의 코리안 좀비 사랑--
[[서울]] [[강남구]]에 코리안좀비MMA 체육관을 만드는 등 [[코리안탑팀]]과는 사이가 멀어진 것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는데 버뮤데즈와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 코리안탑팀에 감사를 표했고 현재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8년 5월 9일, [[박재범]]이 이끄는 힙합 레이블인 [[AOMG]]의 새로운 멤버로 공개되었다.[* 물론 뮤직 아티스트가 아니라 새로운 사업인 스포츠 관련으로 영입되었다.]
- 조성모(가수) . . . . 10회 일치
||<width=24%> [[H.O.T.]], [[김종환(가수)|김종환]][br]빛[br]사랑을 위하여[br](1998) || → ||<width=24%><#FFFFA1> '''조성모''', [[송대관]][br]'''For Your Soul'''[br]네 박자[br]'''(1999)''' || → ||<#FFFFA1><width=24%> '''조성모''', [[태진아]][br]'''아시나요'''[br]사랑은 아무나 하나[br]'''(2000)''' || → ||<width=24%><:>[[god]], 태진아[br]길[br]잘났어 정말[br](2001) ||
|| '''학력''' ||<(> 관촌중학교[br] 임실고등학교(전북)[br] [[대림대학교]] 인문사회계열 [[문헌정보학과]] 졸업[br] [[경기대학교]] [[체육대학]] 레저스포츠건강학과 학사[br] [[경기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원 체육학과 석사 ||
▲ 조성모의 최고의 순간 중 하나인 1999년 [[KBS 가요대축제|KBS 가요대상]] 대상 수상 순간이다. 조성모는 그해 KBS와 MBC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서울가요대상과 골든디스크에서도 대상을 수상하며 4관왕을 달성했다.
- [[http://youtu.be/C9CMZ35vTYs|아시나요 (3집)]][* 영화 '플래툰'의 촬영지인 [[필리핀]] [[마닐라]] 올로케로 촬영되었으며 2000년 당시 총 제작비로 15억원이 들어간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 사상 전무후무한 대작 스케일을 내뿜는다. 스토리 내용은 주인공 조성모가 월남전쟁에 파병되어 베트남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가 결국 함께 죽는 슬픈 결말로 구성된다. 극중 파병 부대로 마크까지 등장하는 [[제9보병사단]]으로부터 베트콩에게 전멸당하는 전투장면 및 얼차려 등의 병영생활 등이 나오는 장면들과 관련하여 거센 항의를 받고 법정공방까지 가기도 했다. 한편 [[천국의 눈물|이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도 만들어진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http://www.youtube.com/watch?v=oB4oCDXFXhE|수정판]][* [[제9보병사단]]으로부터 항의로 인해 부대마크를 모자이크 처리 및 전반부 국군이 베트콩에 전멸하는 전투장면을 삭제하고 후반부 전투에서도 주인공 조성모가 베트콩 수장을 죽이는 장면을 추가 삽입하는 등의 수정작업을 거쳤다.]) : [[신민아]][* 1999년 이승환의 당부 뮤직비디오로 데뷔하였고, '아시나요'는 그녀가 출연한 두 번째 뮤직비디오 작품이자 실질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알린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뮤직비디오에서 주연으로 열연한 조성모의 히로인이라 할 수 있는 민간인 베트남 소녀 역할을 맡았으며, 전투를 떠나는 부대원의 지리정보를 주기위해 겁도 없이 총도 안가지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결국 베트공의 총에 맞아 죽는다.], [[허준호]][* 주인공 조성모가 소속된 월남파병 부대의 [[말년병장]] 쯤으로 추정된다. 방탄모도 안쓰고 지멋대로 두건을 하고 다니는 등 군기가 제대로 빠져있는데, 중간에 민간인 구출 작전 과정에서 베트공에게 포로로 붙잡히게 되고, 베트공 대장의 살해 협박에 아군의 부대 위치를 알려주는 병크를 저지르고 결국 살해 당한다.], [[정준호]][* 조성모가 있는 파병부대의 소대장으로 계급은 중위. 민간인 구출 작전에서 구해낸 현지 월남 주민인 신민아가 현지 지리에 밝은 것을 활용해 도움을 받기도 한다. 마지막 부분 전투에서 숲속에 [[네이팜탄]]을 뿌리며 불을 지르다가 베트공의 습격에 폭사당한다.], [[신지수]][* 극중에서 신민아의 여동생으로 연기한다.], ~~[[오상훈]]~~[* To Heaven에 출연했던 악역 전문 배우와 동일 인물이며, 뮤직비디오에서 한국군과 대치하는 베트콩의 대머리 수장 역할로 거의 주연급 악역으로 출연한다.], ~~[[김대진]]~~[* '여름아 부탁해'를 부른 그룹 인디고의 멤버 맞다. 그 이전에는 지오에서 활동했다. 조연급 배우로 활동중이며, 아시나요 뮤직비디오에서 조성모의 동료 병사로 출연하는데, 극중에서 전투중에 아역배우였던 신지수를 비롯한 월남 민간인들을 구출하려다 총상을 입고 전사한다.]. ~~[[한나나]]~~[* 가을동화에서 송승헌의 약혼자로 나왔던 그 배우 맞다. 뮤직비디오에서 간호장교로 간간히 등장한다.]
조성모가 탈락하자 MC인 전현무부터 시작해 연예인 패널들, 관중석, 그리고 조성모 본인도 큰 충격에 휩싸였는지 잠시 스튜디오에 적막이 흘렀으며, 이후 전현무와 연예인 패널들이 각종 분석을 하면서 그를 위로하느라 정말 애썼다. 허나 원래 히든 싱어의 슬로건이 '숨은 가수 찾기'이기 때문에 이후 라운드에서 조성모에게 가는 표는 무효 처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결국 마지막에는 1등을 하였다. 비록 조기 탈락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세우긴 하였지만, 덕분에 조성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다시 집중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중왕전 및 TOP3 생방송에 걸쳐 임 군의 조성모 모창이 너무 뛰어났기에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는 등 히든 싱어 출연의 결과가 마냥 안습이라고는 볼 수 없을 듯. 그리고 시즌 3종료후의 왕중왕중왕전(시즌1~3 통합전)에는 콘서트 종료 직후 달려와 약간의 농담을 던지며 호탕한 웃음을 보이는 등 아무렇지 않게 참석했기에 쎄한 느낌을 말끔히 지웠다.
하지만 자타가 공인한 최대의 흑역사는 [[초록매실]] 광고이다. 이 광고 때문에 조성모는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 안티들로부터 '''조매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은 조성모가 간 영화관에서 이 광고가 지나가자 관객들이 일제히 "야! 저건 아니잖아!"하고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사실 조성모 본인도 이 CF를 엄청나게 찍기 싫었지만 그 당시에 '''빚이 넘쳐나는 등 집안 경제상황이 너무 어려워'''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던 상황이었기에 궁여지책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심지어 '''원래 끝은 저게 아니다!''' 마지막 대사를 하고 풉하고 웃는 장면이 있었으나 정작 광고에서는 그 부분을 뚝 잘라버렸다고(...).~~ 그게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흑역사로 등극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후 2006년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CF에 출연한 [[이준기]]가 '석류청년'으로 화제를 끌며 조매실의 후예로 등극한다.[* 조성모가 이준기의 석류청년 CF를 보고 "저 친구도 집이 어려웠나 보구나"라는 생각에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했다. 당시 이준기의 석류청년 CF에서는 배우 [[송하윤]]과 [[카라(아이돌)|카라]]의 [[박규리]]도 같이 있었다.] [[히든 싱어]]에서 밝힌 후일담으로 이 광고를 찍고 ~~친구들에게 욕먹고~~ 잃어버린(?) 남성다운 이미지를 되찾고자 부른 노래가 3집에 있던 댄스곡 [[다짐]]이라고 한다. 조성모 개인한테는 정말 숨기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광고 자체는 사람들의 뇌리 안에 제대로 각인되었고, 그 덕도 있는지 매실음료가 출시되고 저 광고도 나온 그 해 매실음료가 '''[[코카콜라]]'''를 매출에서 '''이겼다'''고 한다.[* 무릎팍 도사 조성모 편 출처]
이 흑역사는 결국 2014년 [[SNL 코리아]]의 조성모 편에서 다시 등장했다. 광고에서 조성모가 했던 멘트들이 다시 재현될 때 이 대사를 듣고 '''사람들이 [[손발이 오그라든다|너무 오그라든]] 나머지 사망'''하는 어이없는 사건 드라마로 재현. 이 날 마지막 순서로 유희열과 토크쇼에서 그문제의 초록매실 광고주 [[웅진그룹|웅진식품]]에서 보낸 화환이 공개됐는데, 그 화환에 적힌 문구는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421&aid=0000838804|우리도 이럴줄 몰랐어요...ㅠㅠ]]'''[* 이 날 웅진식품에서 초록매실의 PPL을 하기도 했으며, 관객들에게도 초록매실이 1병씩 증정되었다.]
2010년에 공채 탤런트 출신 구민지와 결혼하여 유부남이 되었다. ~~아아 들린다 여심이 단체로 쪼개지는 소리가~~ 다만 결혼 전에 아내와 관련된 좋지 않은 루머가 돌아 둘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조성모가 직접 나서 결혼식 당일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울먹거리며 아내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었다. 눈시울까지 붉힌 그의 진심이 전달된 덕인지 이후로는 여론도 안정을 찾아 별다른 소음이 일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상당히 애처가이다. 부인 얘기만 나와도 눈에서 꿀이 떨어지고 함박웃음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결혼 이후, 설거지 탓에 주부습진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 이를 들은 다른 남성 출연자들의 어색한 반응에, 설거지는 당연히 남자가 하는 것 아니냐는 투로 대응한 바 있다. [* ~~물론 그것 역시도 그 자리 남성 출연자들에게 공감을 사지는 못하였다. 그의 말에 네?? 하고 멍하니 쳐다만 볼 뿐..~~] 결혼 4년만에 임신 소식이 전해졌고, 2015년 10월 득남하여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2018년 8월 26일, KBS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방영분에 아들 조봉연 군이 잠깐 등장하였는데 조성모를 쏙 빼닮은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배우 [[봉태규]]의 아들인 봉시하 군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 창작:IDF . . . . 10회 일치
IDF는 모병에 있어서 선진국의 사관학교 출신자, 군복무 경험자를 우대하며, 특히 장교급 지휘관이나 특수부대 출신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다. 그 결과, IDF의 영관급 이상 장교는 선진국 사관학교 출신자나 퇴역장교 출신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반면 병사들은 상당수 생계를 위해서 IDF에 개인적으로 참가한 제3세계 출신이며, 선진국 출신자 역시 저소득 계층 출신이 많다.
* 이사회 : IDF가맹국에서 파견된 외교관으로 구성된다.
* 사무국 : IDF에서 자체적으로 고용된 사무 직원으로 구성된다. IDF의 운용 업무와 행정 실무를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국가조직에서 '국방부'에 해당한다. 관료주의적 경향이 강하며, 사령부와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다.
국가주의-민족주의 입장에서는 다국적 군대인 IDF에 대한 경계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일국에 필적하는 무력을 해외 기구에 의탁함으로서,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각국의 군대, 특히 선진국 군대의 장교들은 일종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IDF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같은 전장에서 싸운 '전우'로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선진국 출신자가 사무국, 군간부 등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IDF의 내부 구조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문제의 한가지 원인은 IDF가 자체적으로 사관학교 같은 교육 시설을 갖추지 않아, 지휘관 교육 등 본격적인 군사교육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체적으로는 하사관 교육 이상의 교육 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아, 장교층을 선진국 출신에 의존하는 문제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최만린 . . . . 10회 일치
| 수상 = [[2014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 본관과 출생 ==
[[본관]]은 [[수원 최씨|수원]](水原)이고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다.
[[1935년]] 아버지 최춘빈(崔春彬)과 지석모(池錫模)의 외동딸인 어머니 지명순(池明淳) 사이에 2대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 최씨|수원]]. 부친은 [[동아일보]] 만주 지국장이었고 어머니는 모더니스트였다. 양친 모두 [[본적]]이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종로]]이며 모두 서울 토박이 중에서도 골수 서울 토박이였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던 외가에서 외조부의 사랑을 받으면서 유년기와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나, 경기중학교 3학년 때인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1997년]]에서 [[1999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 역임, [[2000년]]부터 현재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이다.
[[1997년]]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2014년]]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 가족 관계 ==
*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1999년 퇴임) .
* [[2014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 토리코/366화 . . . . 10회 일치
* 그들은 식재가 바닥나서 먹을 게 없어질 때만 소멸하기 때문에 식재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에 주력했다.
* '''그 정점이 "금관두". 어떠한 식재도 썩지 않게 보존해주는 "통조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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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거"는 당연히 토리코의 "오니"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사탄"은 써니의 "사탄 헤어"가 관련이 있을 듯 싶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번 . . . . 10회 일치
>무역 관계는 수립되었지만, 화친조약은 서구열강들에게 유리한 협정이었습니다. 경제는 흔들거렸고,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1863년, 덴노는 쇼군의 결정을 뒤엎었습니다. 모든 서구 세력을 축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10년간의 굴욕적인 외교, 그들은 이것을 바다로 내던졌습니다. 서구 세력들은 이러한 행태에 대한 답을 주었습니다. 덴노는 백성에게 죽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마츠다이라 가문이 다스리는 번. 본거지는 후쿠시마. 마츠다이라 가문은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과거에 쓰던 "마츠다이라"라는 성씨를 하사 받을 정도로 도쿠가와 막부와 밀접한 관계였다. 우츠노미야 번과 전쟁 중이며 나가오카 번과 동맹 중이다.
에치고를 본거지 둔 번. 전사보다는 행정관에 가까운 마키노 가문이 다스리고 있다.
* 감찰관
* 관용: 파벌 차이로 생기는 불행도 -3
* 재치: 외교 관계 +10
* 오즈 번 - 시코쿠 북서쪽의 이요를 차지하고 있는 번. 토사 번과 전쟁 중이며 마루가메 번과 동맹 및 무역 관계이다. 다이묘는 가토 야스아키.
>무역 관계는 수립되었지만, 화친조약은 서구열강들에게 유리한 협정이었습니다. 경제는 흔들거렸고,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1863년, 덴노는 쇼군의 결정을 뒤엎었습니다. 모든 서구 세력을 축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일본은 더이상 서구화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반격할 때가 왔습니다. 서구 세력들은 이러한 반격에 대해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기만적인 서양인은 우리 백성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 행정: 관리비 -5%
* 재치: 외교 관계 +10
- 한무숙 . . . . 10회 일치
| 웹사이트 = [http://www.hahnmoosook.com/ 한무숙문학관]
'''한무숙'''(韓戊淑, [[1918년]] [[10월 25일]] ~ [[1993년]] [[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소설|소설가]], [[삽화가]], [[극작가]], [[수필|수필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고 호는 향정(香庭)이다.
장편 작품으로는 [[한국방송]] 대하드라마로 각색되어 유명해진 《역사는 흐른다》 외에 《빛의 계단》, 《석류나무집 이야기》, 《만남》 등이 있다. [[정약용]]의 삶을 주제로 한 《만남》에서 보듯 한국 고유의 전통과 여인의 한에 대한 관심이 특징으로, 동양적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수필집으로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이 외로운 만남의 축복》, 《내 마음에 뜬 달》 등이 있다.
사후에 남편 김진흥(金振興)이 [[종로구|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고택을 개조하여 한무숙문학관으로 개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책 읽어라” 등떠밀지 말고 문학관서 작품 체험시켜요 - 엄마랑 아이랑 책나들이 (1) 한무숙 문학관
== 가족 관계 ==
* [[한무숙문학관]]
* [http://www.hahnmoosook.com/ 한무숙문학관 홈페이지]
- 한석명 . . . . 10회 일치
'''한석명'''(韓錫命, [[1890년]] ~ ?)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출신 관료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다.
[[한성부]] 출신이다. [[관립한성법어학교]]와 독일협회중학교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익힌 뒤 [[대한제국]] 말기에 내부 소속 통역관으로 임용되었다.
이때 여러 경찰서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한 것을 계기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얼마 뒤에는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다. [[경상남도]] [[창녕군]]과 [[부산부]] 등지를 거쳐 경남 도경찰의 고등과 형사로 재직했다. [[1925년]]에는 경시로 승진하여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다루는 직책인 경상남도 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에 [[조선총독부]] 군수로 천거되어 관계로 이동하였고, [[사천군]]을 시작으로 [[동래군]]과 [[하동군]] 군수를 지냈다. 하동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ref> {{뉴스 인용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찰, 관료 부문에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장남 [[한복 (1914년)|한복]]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죽음]][[분류:20세기 한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통역관]][[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유교 신자]][[분류:청주 한씨]]
- 헌경왕후 . . . . 10회 일치
생전에 받은 존호로는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고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이 되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정조의 생모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혜빈이었지만 혜빈이라는 칭호 대신 혜경궁으로 불렸다. 흔히 경의왕후(敬懿王后)라 하지만 죽은 후 받은 시호가 헌경이었고 의(懿) 자는 황후로 추존된 후 받은 제호(帝號)로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한중록]]의 저자이다.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이고 [[서울]] 출신.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을 배신했다고 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번 있었으며 정조 즉위초에도, 정조 사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대해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조선 고종|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903년]](광무 7년) 장조가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 가족 관계 ==
** 고조모 : 관찰사 송시길(觀察使 宋時吉, 1597∼1656)의 딸 여산 송씨(礪山 宋氏, 1629~1677)
**** 외조부 : 관찰사 이집(觀察使 李潗, 1670~1727)
***** '''어머니''' : 관찰사 이집(觀察使 李潗, 1670~1727)의 딸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韓山府夫人 韓山 李氏, 1713~1755)
****** 올케언니 : 관찰사 민형수(觀察使 閔亨洙, 1690~1741)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
=== 정약용과 인척 관계 ===
[[조선 정조|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조선 정조|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은 [[정약용]]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된다.
- 호민관 . . . . 10회 일치
[[고대 로마]]의 관직.
[[평민]] 집회에서 선출된다. 그 권한은 평민 집회에 법률 안을 상정하거나, 법률 안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 등이다. 또한 '신체불가침권'을 지닌다. 군사적 권한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매우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관직이지만 실질적으로 [[원로원]]의 견제나 현실적 한계 때문에 로마 역사 내내 호민관의 권한 행사는 크게 제약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 호민관의 권한, 이른바 '호민관 특권'은 [[로마 황제]]로 계승되었다. 이 호민관 특권이 거의 왕권이나 다름없는 권한이었던 만큼, 호민관 특권과 전군 지휘권을 가짐으로서 황제의 권한이 완성될 수 있었다.
현대로 치면 호민관은 거의 [[대통령]]에 준하는 지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나, 군사적 권한 등은 모두 집정관이나 법무관 등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제]]의 강력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의원내각제]] 하의 제한적인 권한을 지닌 대통령에 가깝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연구진 . . . . 9회 일치
* General Equipment(일반 장비): 아이콘은 드럼통 두개. 돌격소총 같은 소화기들은 Artillery가 아니라 이 전공과 관련있다.
* Mathematics(수학): 아이콘은 수식. 주로 계산기 관련 기술에서 요구한다.
대부분의 연구진은 영원히 존재하지만. 일부 연구진은 특수한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일정 년도가 되면 그대로 사라진다. 이는 실제 역사상에서 해당 연구진이 사망/해체/파산된 것을 구현한 것이다. 반대로 새로 생겨나는 연구진도 있다. 그런데 이거 좀 어거지로 되어있어서 1950년대 일본 제국은 겨우겨우 살아서 제국주의짓 해도 일본군 관련 연구진들은 싹 쓸려나가고 해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가 그 자리를 메꾼다.
* Zhukovsky Air Force Academy(주코브스키 공군사관학교)
* K. E. Voroshilov RKKF Naval Academy(K. E. 보로실로프 RKKF 해군 사관학교)
영국의 유일한 계산기 관련 연구진. 그런데 레벨이 9라 계산기/암호 관련해서는 만능에 가까운 능력을 보여준다.
* Huangpu Academy(황푸 군관학교)
* Huangpu Naval Academy(황푸 해군군관학교)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상업 . . . . 9회 일치
== Financial Institution(금융 기관) ==
* Multitude of Financial Instruments(많은 양의 금융 기관)
* 관리 효율 +5%
* 관리 효율 +5%
* 관리 효율 +5%
* 관리 효율 +5%
* 관리 효율 +5%
* 관리 효율 +5%
* Work Control and Hierarchy(작업 관리와 계층제)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해군 . . . . 9회 일치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상업#s-6.2.1|작업 관리와 계층제]]''' 발명 발견시 '''{{{#green +2%}}}'''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산업#s-2.5|연소기관]]''' 기술 연구시 '''{{{#green +2%}}}'''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산업#s-2.5|연소기관]]''' 기술 연구시 '''{{{#green +2%}}}'''
* '''Ammunition Conservation System(탄약 관리 체계)'''
=== Naval Risk Management(해군 위험관리) ===
=== Naval NCO Training(해군 부사관 훈련) ===
* '''Literate NCO's(식자 부사관)'''
* '''NCO Tactical Training(부사관 전술 훈련)'''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Victoria II]]
- 구승빈 . . . . 9회 일치
시즌 3 롤드컵 이후로 다데와 댄디가 예전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롤챔스 윈터 2013-2014에서는 각성한 마타와 함께 다시 팀의 확실한 구심점으로 주목받았다. SKT T1 K를 상대하게 된 결승전을 앞두고 거의 모든 이가 "모든 면에서 SKT T1 K가 우세하나, 바텀이 유일한 변수"라고 평가할 정도. 임프 본인도 경기 전 피글렛과 엄청난 신경전을 벌이며 보는 이들의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결과는 임프가 1인분을 간신히 해낼 동안 다른 팀원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한타에서도 말려 팀의 3대0 압도적 패배. 사실 임프도 '그나마' 잘했을 뿐, 라인스왑이 걸린 상황에서 마타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상대 라이너를 압박하려다 크게 손해를 보는 플레이를 두 번이나 보여주었다(1세트에서 임팩트에게 솔킬을 따일 뻔했으며, 3세트에서는 페이커에게 역관광당해 플래시를 낭비했다). 각 세트 중반에는 본인이 밀리는 상황을 ~~청년가장으로서~~ 타개해야한다 생각했는지 무리한 포지셔닝,킬욕심을 내다가 먼저 끊기거나 하는 등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롤챔스 2013 섬머 8강에서 자신들과 맞붙을 예정이었던 [[정우광|mima]]가 대리랭크에 연루돼있음이 밝혀지자, 이를 밝힌 Apdo에게 친추를 걸고서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크오오오오오오오! 승리의 포효!'라고(…). [[윤성영|옴므]]는 한때 같은 팀이었다고 직관까지 가서 mima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러면 안되는거 아니냐는 평.
* 롤챔스 2013 섬머 4강에서 SKT가 승리한 이후 한 인터뷰에서 피글렛의 말에 따르면 경기전 SK선수 세 명이 모여있는데 "3:0!"이라 말하며 도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3으로 패배하며 보기 좋게 역관광당했다. 피글렛이 이를 언급하며 "우리가 이겼는데 어떡하죠?" 말하고 짓는 썩소...[[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TvIomD-Im-s|*]]
* 시즌 3 롤드컵에서 공개된 롤드컵 애니버전 Road to the cup(롤갤 8대 관문)에 등장했는데, 실제와 애니속 작화를 비교해보면 딴사람이다. 머리색도 다르고 심지어 미친고딩은 커녕 판타지 만화 주인공 마냥 진지하다. MVP 마크와 (심지어 이 영상이 올라온 시점은 삼성에 팀이 인수되어 MVP Ozone에서 Samsung Galaxy Ozone이 된 시점이였다) 등 뒤에 달고 있는 베인의 석궁을 확인하고도 임프인지 몰랐다는 반응을 보이는 유저들도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PX_IQkeXq9g&feature=youtube_gdata_player|오글거림 주의]]
* 2013~2014 판도라 tv 롤챔스 윈터 16강 팀다크와의 두번째 경기에서 MVP를 받았다. 하지만 이 경기는 인섹 사건에 버금가는 엄청난 방송사고였다. [[http://news.sportsseoul.com/read/economy/1275300.htm|관련기사]] 원딜이 cs 38개 먹고 MVP를 받은 상황. 경기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문제로 팀 다크가 맹비난을 받는 동안, MVP 인터뷰에서 임프는 어떻게 이 경기에 임했냐는 조은나래의 질문에 "프로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인터뷰로 임프가 철 좀 들었다, 얌전해졌다 라는 반응이 꽤 나왔다.[* 롤드컵 이후로 뭔가 깨달은게 있긴 한 듯. 임프 한명 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고, 실제로 롤드컵 가서 푸짐하게 똥싸고 오셨던 마타와 다데가 부활했으며 성적도 좋게 나왔다. 그리고 팀 다크와의 2경기에서 같이 던지는게 아니라 일말의 자비도 없이 최선을 다해 경기를 끝냈다. 어쨌거나 정신적으로 성장한 면은 분명히 있는 듯.]
* 형제 팀의 원딜러 [[김혁규(프로게이머)|데프트]]를 많이 아끼는 듯 하다. ~~SNS에 종종 같이 찍어 올리는 사진들이..~~ ~~SKT LTE LOL 마스터즈 2014 IM과의 3세트에선 관중석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포텐이 터지기 이전부터 데프트를 꾸준히 언급했었고 인터뷰에서 데프트를 넘어서겠다느니, 데프트 외 원딜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는 모습을 보면.. 롤 마스터즈 2014 우승 인터뷰에서도 데프트를 넘어서겠다는 말을 했다. [* 재미있게도 4강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전까지는 데프트가 임프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트롤쇼 3회에서 나온 데프트의 발언을 들어보면 임프가 유독 데프트를 좋아하고 ~~힘으로~~ 키스(..)를 하는 등 애정을 쏟는다고 한다. 임프가 데프트의 스승 격이라 그런듯.]
* 2014 롤드컵에서의 인터뷰~~대본을 읽는~~ 영상이 화제가 되었다.--본격 초등학생 국어책 읽는 인터뷰+이분 최소 국문과--[[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e_sports&ctg=news&mod=read&office_id=236&article_id=0000109810|#]] 참으로 국어책스러운 인터뷰로 [[클템|간나새끼]], [[장건웅|땅땅땅빵]]에 이은 새로운 made in 롤드컵 [[관문]]을 만들어냈다.
* 사실 펜타킬과 연관이 많은 선수다. 롤드컵 최초로 두번의 펜타킬을 기록한 선수고, 처음 기록했던 펜타킬은 롤챔스 최초로 패배한 경기에서 나온 펜타킬이다.
[[2015 SBENU LOL Champions Korea Summer]] 결승전에 관전을 왔는데 입고 있는 셔츠가 [[지방시]] 플로랄 마돈나인지라 화제가 되었다. 저거 한벌이 135만원(…).[* 정작 본인은 롤갤에서 저 당시 입은 건 짭이라고 언급을 했다.]
- 김대휘 . . . . 9회 일치
|본관 = [[예안 김씨|예안]]
|소속기관 =
195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74년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7년 제1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제10기 [[사법연수원]]과 해군 법무관을 마치고 1983년에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1985년에 서울형사지방법원, 1987년에 [[춘천지방법원]], 1989년에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1990년 서울고등법원으로 전보되어 판사로 재직하였다.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할 때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심의관을 겸직하다가 1994년에 부장판사에 승진하여 [[제주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1997년 [[인천지방법원]], 1998년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1999년 서울지방법원, 2001년 부산고등법원, 2003년 서울고등법원으로 전보되어 부장판사를 하였다.
2008년 2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춘천지방법원]], [[의정부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 법관에서 퇴직하여 법무법인 화우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하면서 동국제강 사외이사와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였다. 2014년에 [[새누리당]] 경제혁신특위 규제개혁분과위원회 전문가위원에 지명되었으며 2014년부터 [[세종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를 하였다.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2월 11일에는 민혁당을 결성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이 구형된 하피고인에 대해 국보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죄 등을 유죄로 인정,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226118]</ref> 6월 15일에 1994년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추종하는 국제사회주자들이라는 조직에 가입한 뒤 이 조직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노동자연대 등을 소지한 혐의 등으로 4월달에 구속되어 징역 3년이구형된 피고인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의 이적단체 가입혐의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다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는 것으로 보여 보석을 허가한다"고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244671]</ref>
법관 재직 중에 민·형사법 주석서와 ‘형사실무제요’ ‘양형실무’등 각종 법원 실무지침서와 40여편의 논문을 썼다.
* 법원론에 관한 연구 (박사)
* 법관의 법률에 의한 구속과 법발견 (석사)
- 김부식 . . . . 9회 일치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은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문신·역사가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5COb_A1075_1_0001702&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f>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인 김위영을 [[고려 태조]]가 경주(慶州)의 주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ref>《[[고려사]]》 권97, 열전10, 김부일전.</ref> 부친 김근이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지위가 높은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1140년]](인종 18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국 개국후(樂浪國開國候)로 봉했고, 그 뒤 김부식은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사(館伴使)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徐兢)이 그의 《[[고려도경]]》에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고려 의종|의종]]) 5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었고, 죽은 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 20권을 지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인용문|《삼국사기》는 합리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씌어진 사서로 이전의 신이적(神異的)인 고대 사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사서|{{서적 인용|저자=[[이기백]]|장=문학과 지성 (文學과 知性)|제목=《[[삼국사기론]](三國事記論)》|연도=[[1978년]]}}}}
* [[윤관]]
- 김종호(1935) . . . . 9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호는 동헌(東軒)이다. [[종교]]는 [[가톨릭]]([[세례명]] : 베드로)이다.
이후 주로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서 관료로 근무하였다. 1980년 1월부터 9월까지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 9월부터 1981년 3월까지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83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김완태(정치인)|김완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따른 민심 수습책으로 경질되었다. 내무부 장관으로 민주화운동세력, 학생운동권에 대한 강경대응을 지시해서 [[박종철]] 사건을 촉발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경찰관계자들의 증언으론 김종호 장관이 '‘대통령 임기가 1년밖에 안 남았다. 정치일정이 있으니까 3월 개학 때까지 모든 사건을 끝내라’'는 지시를 내렸고, 일선 경찰들은 장관이 제시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즉 개학전까지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차별적인 연행과 무리한 강압수사(=[[고문(범죄)|고문]])을 했다는 것이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1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3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자유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다시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무라하치부 . . . . 9회 일치
*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서 시체가 썩으면 질병이 생기가 쉽다. 혹은 죽은 자는 벌을 줄 수 없다는 관념.(죽을 때까지가 벌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라하치부는 무라의 규칙과 질서를 명분으로 하지만, 무라 사회를 주도하는 것이 지역 토호이므로 당연히 객관적이고 공명정대한 법률과는 거리가 멀어 공정한 질서 활동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지역 유력자의 이익에 부합하여, 자신들에게 거스르는 사람에게 일방적인 무라하치부를 선언하는 예도 존재한다.
총촌은 오토나(乙名, おとな), 사타닌(沙汰人, さたにん)을 중심으로 자치가 이루어졌는데, 오토나는 마을에서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하며 집안이 좋거나 많은 농지를 보유한 유력자였다. 사타닌은 본래 마을에 상주하며 영주의 판결이나 명령을 집행하는 관리였지만 총촌의 자치능력이 강해짐에 따라서 지위를 세습하면서 마을의 중심적인 인사가 되었다.
총촌의 치안은 이러한 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창, 칼, 활 같은 무기로 무장하는 것 역시 일상적이었다. 본래의 헤이안 시대의 국법대로라면 형사 재판과 처벌은 영주나 관리가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의 간섭을 무라 사회는 거부하는 예가 적지 않았고, 가마쿠라 후기에는 무로마치 시대에는 총촌의 자치능력이 강화되고 영주의 지배력이 부족하다보니 이러한 자경 활동을 승인하였다.
이러한 자검단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농촌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무기이다. 에도 시대에는 신분지배의 상징적인 관점에서 무기를 몰수하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거의 명분상의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무라에서 칼, 창, 총, 활 같은 무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신불에게 헌납한다는 목적, 혹은 맹수 피해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인정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상당한 양의 무기가 농촌에 보유되어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GHQ에 위한 무장 해제 정책, 극좌, 극우 혁명의 위험에 대비하여 경찰의 강력한 무장 해제 조치를 통하여 사라지게 된다.
무라하치부 사건 가운데서는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이 마을에서는 1952년 이전부터 조직적인 대리 투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을의 토나리구미(隣組, 관 주도의 자치회)의 조장이 공공연하게 각 가정을 방문하여 기권하면 대신 다녀오겠다고 반 강제적으로 입장권을 회수하거나, 기권할 사람이 있으면 조장의 집에까지 입장권을 가지고 오라는 회람판을 돌렸다.
일본의 선거는 미리 선거의 이름, 투표 시간, 선거인의 주소, 성별, 성명, 명단번호, 접수 번호 등이 기록된 투표소입장권(投票所入場券)을 배부하고, 이를 투표소에 가지고 가서 직원에게 전달하고 투표용지와 교환하여 투표하며, 이는 원칙적으로 본인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이렇게 회수한 입장권으로 마을의 유력자가 여러 차례 투표를 했다. 선거 관리자는 이를 묵인하였고, 마을 주민들도 이러한 행위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 당시 이 마을에 거주하던 중학생 소녀 이시카와 사츠키(石川皐月, 1935년 5월11일 생)는 1952년 부정선거의 풍조에 의문을 느껴 학내 신문인 우에노 중학교 신문에 이 사실을 고발하는 글을 개제하였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모든 학생에게 배포된 신문을 회수하여 소각 처리했다. 1952년 5월 6일 열린 참의원 보궐 선거에서도 비슷한 수법으로 부정이 실행된 것을 알게 된 이시카와(당시 고교생으로 진학)는 아사히 신문에 이를 투고하여 고발하였다. 아사히 신문사의 기자는 5월 8일 이시카와를 방문하였고, 몇일 뒤에는 사건이 기사화 되었으며 사건 관계자 수십명이 경찰에 출두하게 되었다.
치바현 모현의 별장지에 이주한 M씨(39세) : 주위는 본래 도시에서 살던 고소득 리타이어 노인 뿐이다. 1주일에 1번 씩 아이가 시끄럽다고 불만이 들어오고, 현관에 노부부들이 직접 몰려왔다. 집집마다 부지가 300평방미터 이상은 되는데.
- 무신 . . . . 9회 일치
武의 신. 군신(軍神), 전신(戰神), 투신(鬪神)과 이미지가 겹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군신, 전신은 무신보다는 지휘관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며, 투신은 무신보다 더 거친 느낌이 있다. 묘하게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지는 '신'보다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장수, 격투가를 지칭할 때 쓰이는 경우가 많다.
문신(文臣)과 대비하여 군사 관련 관직을 맡은 신하들을 뜻한다. 현대의 군인(軍人)에 해당. 열심이 노력하면 무신(武神)도 될 수 있는 사람들.
본래 고대 중국에서는 문신과 무신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때 그때 맡고 있는 관직에 따라서 구분되는 것에 불과하였다. 물론 개인적인 적성은 있으니까 문신 성향과 무신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구분이 없다고 봐도 좋다. 장군이나 도독 같은 무관직을 맡다가 문관직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문관직을 맡다가 무관직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양자를 겸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문신과 무신의 분리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나타나게 되는데, [[과거 제도]]가 나타나면서 문과(文科)와 무과(武科)가 시험 단계에서 분리되면서 문무의 분리가 가속되었다. 문신과 무신은 등용 과정 부터가 달라졌기 때문에 명확하게 별도로 구분되는 '집단'이 된 것이다. 무신은 오직 군사 관직에만 임명되게 되었고, 승진하는 루트도 달라져서 '직업군인'화 되었다. 또한 당나라 이후 중국에서 징병제가 사라지고 모병제가 중심이 되면서 무신의 전문화도 진행되었다.
- 박신혜 . . . . 9회 일치
박신혜는 2001년, [[이승환]]의 7집 앨범 타이틀곡 〈사랑하나요〉 뮤직 비디오로 출연하며 데뷔하였다. 이후 2003년에도 이승환의 〈꽃〉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박신혜는 당초 배우지망생이 아닌 가수를 꿈꾸는 연습생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본 2003년 12월 첫 방영 된 드라마 《[[천국의 계단 (드라마)|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의 아역인 한정서 역을 맡아 브라운관에 데뷔하였다.<ref>{{웹 인용|url=http://globerove.com/south-korea/tree-of-heaven-korean-drama/3740|title=Tree of Heaven Korean Drama|publisher=GlobalRove|accessdate=2014-09-0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908015531/http://globerove.com/south-korea/tree-of-heaven-korean-drama/3740|보존날짜=2014-09-08|깨진링크=예}}</ref><ref name="hancinema1">{{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tree-of-heaven--a-new-tryout-for-a-resurgence-of-korean-wave-5387.html|title='Tree of Heaven': a new tryout for a resurgence of Korean Wave|publisher=The Korea Herald via Hancinema|accessdate=2013-10-08}}</ref><ref name="hancinema2">{{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park-sin-hye-invited-to-photo-exhibition-for-korean-top-stars-6302.html|title=Park Shin-hye Invited to Photo Exhibition for Korean Top Stars|publisher=KBS Global via Hancinema|accessdate=2013-10-08}}</ref> 이 작품에서 그녀는 14살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어린 소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럽고 풋풋한 첫사랑 감정을 첫 연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한 연기를 선보이며, 안방극장의 뜨거운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그 당시 이례적으로 아역들의 분량이 1회 늘어나기도 했다. [[SBS 연기대상]] 아역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연출을 맡은 이장수 감독은 박신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인용문2|“(박신혜씨 연기를) 정말 잘해요. 연기한 걸 직접 한 번 봐야하는데…우리나라 배우들이 자질이 정말 뛰어나다는 걸 신혜를 보면 느낄 수 있어요. 비록 신인이지만 잘 할 것으로 봐요”|MBN스타 2016년 7월 8일자 기사<ref name="mbn">{{뉴스 인용 |제목 =[M+TV피플] 박신혜, 꾸미지 않아 더 아름다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57&aid=0000989093|출판사 =MBN스타 |저자 =금빛나 |날짜 = 2016-07-08 |확인날짜 =2016-07-10 }}</ref> 중}}
박신혜는 2009년,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로 이후 1년 반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극중 속세와 차단된 수녀원을 나와 쌍둥이 오빠 고미남을 대신해 비밀과 가십, 계산과 계약으로 움직이는 연예계에서 살아 나가는 고미녀 역을 연기하며 배우 인생 전환점을 맞이했고, 일본 및 중화권에서도 인지도를 높히며 한류 퀸으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ref>{{웹 인용|url=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51058 |title=‘미남이시네요’가 ‘아이리스’에 기죽지 않는 이유 |출판사=일간스포츠 |저자= 정지원|날짜=2009-10-30 |확인날짜=2016-12-29}}</ref><ref>{{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jang-geun-seok-you-re-beautiful-beats-winter-sonata-33223.html |title=Jang Geun-seok "You're Beautiful" beats "Winter Sonata" @ HanCinema :: The Korean Movie and Drama Database |publisher=Hancinema.net |date=2011-09-14 |accessdate=2016-12-29}}</ref> 나중에 박신혜는 인터뷰에서 “성인이 돼 처음 한 작품으로, 아역이 아닌 ‘박신혜’라는 한 여배우의 시작을 알리게 해준 작품”이라고 ‘미남이시네요’에 대해 말했다.<ref name="mbn" /> 이듬 해, 2010년 박신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연애 조작 요원 오민영 역을 맡아 [[엄태웅]], [[이민정]], [[최다니엘]]과 공연하며 영화는 26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대만 드라마 《선풍관가 旋風管家》에서 샤오즈 역을 맡아 출연하였고, 2011년 방영되었다.
박신혜는 2011년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에서 가야금을 전공하는 상큼한 여대생 이규원 역을 연기해, [[정용화]]와 다시 공연했다. 예술대학을 배경으로 풋풋한 청춘의 사랑과 우정을 그려내겠다는 취지로 시작 됐지만 연이은 시청률 부진으로 15회로 조기 종영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시청률 부진 속 <넌 내게 반했어>, 15회로 종영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47&aid=000198457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이미나 |날짜 = 201-08-09 |확인날짜 =2013-09-01 }}</ref><ref>https://www.soompi.com/2010/09/01/george-hu-is-park-shin-hyes-combat-butler/</ref> 이듬 해, 2012년에는 단막극 《[[KBS 드라마 스페셜]] - 걱정마세요 귀신입니다》에서 본인이 귀신이란 걸 자주 망각하는,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생기 넘치는 귀신 연화 역을 연기해 호평을 받아 [[KBS 연기대상]] 단막극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박신혜는 2013년 초 개봉 되어 역대 여덟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7번방의 선물]]》에 성인 예승 역을 연기했다.<ref>{{웹 인용|title='Miracle in Cell No. 7' third most-viewed Korean film|url=http://english.yonhapnews.co.kr/culturesports/2013/03/15/27/0701000000AEN20130315007900315F.HTML|work=[[연합뉴스]]|accessdate=2013-03-20|date=15 March 2013}}</ref><ref>{{웹 인용|title='Miracle in Cell No. 7' third most-viewed Korean film|url=http://nwww.koreaherald.com/view.php?ud=20130315000902|work=The Korea Herald|accessdate=2013-03-20|date=15 March 2013}}</ref><ref>{{웹 인용|last=Ji|first=Yong-jin|title=MIRACLE IN CELL NO. 7 Passes MASQUERADE to Become 3rd Most Successful Korean Film|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2324|work=Korean Film Council|accessdate=2013-03-20|date=19 March 2013}}</ref> 같은 해 1월 첫방영 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에서 사람 만나길 두려워 하는 히키코모리 고독미 역을 연기했고, 제 나이와 성격에 어울리는 밝고 씩씩한 여대생의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f name="mbn" /><ref>{{웹 인용|url=http://www.soompi.com/2012/10/31/park-shin-hye-and-yoon-shi-yoon-to-star-in-new-drama-flower-boy-next-door/|title=Park Shin Hye and Yoon Shi Yoon to Star in New Drama "Flower Boy Next Door"|date=June 26, 2012|accessdate=February 7, 2012|publisher=soompi}}</ref> 박신혜는 코오롱스포츠 4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 된 '웨이 투 네이처 필름 프로젝트 단편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에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가위바위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02356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이선필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이후, 2013년 10월부터 방영 된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가난하지만 당당한 여고생 차은상 역을 맡아 성인 연기자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kdramastars.com/articles/13557/20131228/2013-kdramas-that-got-the-best-ratings.htm |title=2013 Kdramas That Got The Best Ratings : Drama Stories |publisher=KDramaStars |date= |accessdate=2016-12-29}}</ref> 이 작품을 통해 국내를 넘어 아시아권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면서 여배우 최초로 ‘Dream of Angel’라는 타이틀의 아시아투어를 하는 등 부동의 인기를 누리는 한류스타로서 입지를 다졌다.<ref>{{뉴스 인용|title=Park Shin Hye First Female Actress to Tour Asia|url=http://www.kdramastars.com/articles/8567/20130315/park-shin-hye-first-female-actress-tour-asia.htm|accessdate=31 January 2014|newspaper=kdramastars|date=15 March 2013}}</ref> [[S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여자우수연기상, 베스트 커플상, 10대스타상 3관왕을 수상했다.
박신혜는 2014년 11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피노키오 (드라마)|피노키오]]》에 캐스팅 되어 《[[천국의 나무]]》 PD였던 조수원 감독과 9년만에 재회하게 됐다.<ref>{{뉴스 인용 |제목 ='피노키오' 박신혜 "작품 기다리는 배우, 취준생의 심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1&aid=0000404814|출판사 =엑스포츠뉴스 |저자 =김승현 |날짜 = 2014-11-06 |확인날짜 =2014-11-10 }}</ref> 이 작품은 방송국 사회부 기자들의 삶과 24시간을 함께 하며 전쟁같이 보내는 이들이 설레는 관계로 발전해가는 풋풋한 청춘을 그린 드라마로 박신혜는 거짓말을 하면 딸꾹질을 하는 가상의 증후군인 '피노키오 증후군'을 앓고 있는 최인하 역을 연기하였고, 실제 사회부 기자들의 실상이나 문화를 현실적으로 잘 반영해 호평을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40904000373|title=Park Shin-hye confirmed to star in ‘Pinocchio’|publisher=The Korea Herald|accessdate=2014-09-08}}</ref><ref>{{웹 인용|title=Cultural Exports to Surpass 1 Trillion Won This Year|url=http://www.businesskorea.co.kr/english/news/lifestyle/8231-culture-trade-balance-cultural-exports-surpass-1-trillion-won-year|work=Business Korea|accessdate=2015-10-24|date=2014-12-26}}</ref><ref>{{웹 인용|title=‘Pinocchio’ sells distribution rights to China for record price|url=http://kpopherald.koreaherald.com/view.php?ud=201411241750324868840_2|work=Kpop Herald|accessdate=2015-10-24|date=2014-11-24}}</ref> 박신혜는 [[S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과 베스트 커플상, 10대스타상 3관왕을 수상했다. 또한 제5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으며,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연속 인기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5년 연속 인기상 수상…대세 여배우 입증 [51th 백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612085|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이은지 |날짜 = 2015-05-26 |확인날짜 =2017-09-20 }}</ref> 같은 해 12월, 개봉 된 사극 영화 《[[상의원]]》에 왕비 역을 연기하였다.
2016년 6월, 첫 방영 된 메디컬 드라마 《[[닥터스 (드라마)|닥터스]]》에 캐스팅 된 박신혜는 학창시절 무기력한 반항아에서 사랑이 충만한 국일병원 신경외과 펠로우 의사로 성장하는 유혜정 역을 맡아<ref>{{뉴스 인용|제목=박신혜·김래원, '닥터스' 본방사수 독려 "오늘 첫방 아시죠?"|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606210100156110010947&servicedate=20160620|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정유나|날짜=2016-06-20|확인날짜=2016-06-20}}</ref> 한층 더 발전한 연기력을 선보였고,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21.3%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으며 따뜻한 감성 드라마로 호평를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닥터스' 박신혜, 이게 바로 인간 승리…'공부의 신' 됐다 (종합)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8&aid=0000162374|출판사 =스포츠서울 |저자 =김수현 |날짜 = 2016-06-21 |확인날짜 =2016-06-21 }}</ref> 연출을 맡은 오충환 감독은 제작발표회 당시 박신혜에 대해 “촬영장 공식 명칭이 ‘우리 신혜’다. 오전, 오후로 미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처음으로 내가 열심히 해서 배우를 잘 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연기도 좋고 인성도 좋다”고 말했다.<ref name="mbn" /> 박신혜는 연말 [[SBS 연기대상]] 장르&판타지드라마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10대스타상 3관왕을 수상했우며, 제53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작품을 통해 박신혜는 20대 여배우 중 가장 주목 받는 한류 스타이자 대표하는 ‘흥행배우’로 성장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닥터스' 종영기획②] '3연속 흥행퀸' 박신혜, 믿고 보는 20대 女배우 우뚝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807409|출판사 = 마이데일리|저자 =최지예 |날짜 = 2016-08-24 |확인날짜 =2016-09-01 }}</ref><ref>{{뉴스 인용 |제목 =[SS이슈]'닥터스' 박신혜,안방 흥행여왕+20대 CF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8&aid=0000169345|출판사 =스포츠서울 |저자 =조현정 |날짜 = 2016-07-12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6년 11월 개봉 된 코미디 영화 《[[형 (2016년 영화)|형]]》에서 국가대표급 오지랖 유도코치 이수현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만났다하면 케미퀸…이번엔 조정석x도경수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23745|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수정 |날짜 = 2016-11-08 |확인날짜 =2016-11-10 }}</ref>
- 신지애 . . . . 9회 일치
'''KLPGA 역대 첫 번째 및 2, 3번째 대상-다승-상금-평균타수의 4관왕 달성자.''' [* 2015년의 전인지까지, 지금껏 총 7번의 4관왕이 탄생했으며 그 중 혼자 3번, 3년 연속으로 했다. '지존' 그 자체. 이 둘을 제외하면 서희경 - 이보미 - 김효주가 있다.]
2005년 아마추어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2006년 프로로 전향해 KLPGA 무대를 평정하였다. 신인왕과 대상, 상금왕과 평균타수 1위 등. 2007년이 되자 프로 경험의 예열이 끝났는지(!) KLPGA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2007년 9승[* 통계가 완전치 않아 확인은 어렵지만, 아마도 KLPGA 역사상 시즌 최대승일 것이다.]을 기록하고 최단기간 통산 상금 10억원을 돌파하였다. 더 놀라운 것은 저 상금을 단 30개 대회 출전만에 경신하였다는 것이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MVP를 포함하여 최저타수상,상금왕,다승왕 차지하여 4관왕에 올랐다.[* 2006년은 신인상으로 인하여 5관왕.]
2009년에는 세계 4대 투어(LPGA, JLPGA, KLPGA, 유러피언투어) 시드권을 Q스쿨 없이 통과하였지만, 주로 LPGA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신지애는 LPGA에서 3승을 기록하였고, 신인상, 상금왕, 다승왕 등을 차지하며 '''3관왕'''에 올랐다. 이는 [[대한민국]] 여자 골프의 영웅이자 선구자인 [[박세리]]도 이루지 못한 대기록이며, 1978년 낸시 로페즈의 달성 이후 30여년만에 등장한 새로운 기록이었다. 같은 해에는 [[미래에셋증권]]과 스폰서 계약을 했다.
그러나 본인의 무언가를 느꼈는지[* 아시아 -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 - 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나날이 발전하는 장비 때문에 LPGA에서 전체적인 전장을 늘였던 점도 부담이 있었다는 설이 있고, 어린 나이에 이룰 것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심적으로 고생이 심한 투어생활을 하기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와 관련된 인터뷰도 있으니 읽어보고 판단해 보도록 하자. [[http://golf.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122142001]]] 2015년 현재는 주로 JLPGA에서 뛴다. 거기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이보미]], [[안선주]] 등과 JLPGA의 최강자 중 한명으로 활약 중이다. 그러나 JLPGA 집중을 선언하자, [[미래에셋증권]]은 스폰서 계약 만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했다.
3라운드까지 전년도 KLPGA 전관왕이자 새로운 대세인 [[이정은6]]에게 밀렸으나 마지막 날 2언더를 기록하며 전반적으로 타수가 줄어든 경쟁자들을 눌렀다.
* 18년 현재 KLPGA 통산 21승, JLPGA 통산 18승, LPGA 통산 11승, LET 3승, 아시아여자골프투어 1승 등 전 세계 투어 통산 54승 기록 중(단, 2008년, 2010년에 우승한 LPGA 미즈노 클래식은 JLPGA와 공동주관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52승'''이다.)
* KLPGA에서 활약 중인 [[전인지]]와도 친분이 있다. [[함평골프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이지만 한일 여자골프대항전에서 만난 뒤로 더욱 친해졌는데, 주로 [[전인지]]의 고충이나 인생에 대한 조언 등을 해주는 등 대화를 많이 하며 서로의 스트레스를 푼다고 한다.
- 안기효 . . . . 9회 일치
* 관련 문서: [[e스포츠 관련 인물]]. [[대구광역시/인물]]
||<#F157FF> {{{#ffffff '''본명'''}}} ||<bgcolor=#ffffff> 안준호[* 안기효에서 개명. [[http://www.gamechosun.co.kr/webzine/article/view.php?no=92414|관련기사]]] [br] An Jun Ho ||
||<#F157FF> {{{#ffffff '''별명'''}}} ||<bgcolor=#ffffff> '''전사 안기효''' [br] 내품에 안기효 [br] 하부리그 총사령관 [br] 흑아인 [br] 랩교 [br] 챱기효 [br] 교수님 ||
||<#F157FF> {{{#ffffff '''관련사이트'''}}} ||<bgcolor=#ffffff> [[http://afreeca.com/aghhi| [[파일:아프리카TV 로고.png|width=18]] 아프리카TV]] [br] [[https://www.twitch.tv/aghhi| [[파일:트위치 로고.png|width=18]] 트위치 채널]] [br] [[https://www.youtube.com/channel/UCYG8tuvbQzWsDeoADyJFU8Q| [[파일:유튜브 아이콘.png|width=18]] 유튜브 채널]] [br] [[http://cafe.daum.net/NalROCK| [[파일:네이버 카페.png|width=18]] 팬카페]] ||
그 외 대표적인 별명은 하부리그의 총사령관, 혹은 지옥의 하데스. 메이저 본선에서는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하나, 하부리그인 챌린지 리그나 듀얼 토너먼트 등에서는 못이기는 상대가 없기에 붙여진 별명. [[온게임넷]] 예선인 챌린지리그와 듀얼토너먼트에서 대 테란전 전적은 총합 25승 6패이며 상대들의 이름만 보더라도, 각 팀 주전급 이상의 테란들이다. 아래는 챌린지 및 듀얼에서 맞붙은 [[테란]] 목록.
투신 [[박성준]]에게 천적 관계[* 사실 [[박성준]]에게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프로토스]]는 '''아무도 없다.''' [[박성준]]은 '''대 [[프로토스]]전 5전 3선승제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걸 넘어서, 5전제를 치를 때 2패째를 허용한 적도 없다.''' 전성기가 한참이나 지났다고 평가 받던 [[EVER 스타리그 2008]] 결승전에서도 당시에 잘나갔던 [[도재욱]]을 상대로 3:0 떡실신을 먹였을 정도. 전무후무한 저그전 최강이라던 [[김택용]]에게도 3대3의 상대전적을 보유하고 있다. 박성준을 상대로 전적이 앞서는 프로토스는 비공식 포함 7승6패의 [[송병구]] '''뿐.''' 이도 호각세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공식 전적만 볼 때는 오히려 2승 5패로 송병구가 [[김준영]]만큼 고배를 마신 저그가 박성준이다. 안기효가 유난히 자주 만났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즉, '''그냥 재수없는 거다.'''(...)]이며, 두 번의 16강, 두 번의 8강, 그리고 [[WCG]] 대표선발전에서 에서 고배를 마셨으며,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에서 유명한 미니맵 [[관광]]을 당한다. 실은 안기효가 첫 온겜 [[스타리그]] 데뷔전 당시 꺾었던 상대가 다름아닌 전대회 우승자였던 [[박성준]]이었다. 리버+캐논으로 인한 조이기 라인으로 체면이 팍 깎인 [[박성준]]이 그 후 안기효만 보면 잡아먹으려 든다는 이야기.(...) 아무튼 안기효의 개인리그 상위 라운드 진출은 번번이 [[박성준]]에게 막혔다. 전략성을 감안하면 개인리그에서도 4강 한 번쯤은 노려볼 수 있는 선수였기에 매우 아쉬운 일.
== 관련 항목 ==
- 어쌔신 크리드 III/등장인물 . . . . 9회 일치
암살단원. 데스몬드 마일즈의 아버지. 데스몬드가 어렸을 때 부터 그를 암살단원으로 훈련시켰지만 데스몬드가 도망가버렸다. 아들과 재회한 후로도 서먹서먹한 관계다.
[[런던]]의 [[상인]]. 템플기사단원으로 헤이덤의 상관이다. 헤이덤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켄웨이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며, 헤이덤이 어렸을 때 그의 교육을 담당했다. 유물을 입수한 헤이덤을 아메리카로 보낸다.
영국군 장군. [[불독]]이라는 별명이 있다. 핏케언과 찰스 리의 상관으로 첫 등장 당시 핏케언을 갈구고 있었다. 템플기사단원이었지만 헤이덤이 핏케언을 데려가는걸 거부, 암살검으로 위협 당하고 나서야 핏케언을 데려가게 해줬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대륙군 지휘관이자 초대 미국 대통령. 주인공의 조력을 받아 영국에 대항하는 입장이지만, DLC '워싱턴 왕의 폭정'에서는 에덴의 조각의 힘으로 원래 역사와는 달리 '왕'으로 등극해 폭정을 저지른다. 해당 DLC의 최종 보스.
마서스비니어드에 위치한 여관의 주인. 대가족의 장녀로 태어났다.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도중 로버트 폴크너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까지 갔으나 폴크너가 암살단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면서 시망.
상선대 소속 포수들. 둘은 형제 관계로 데이비드가 형이고 리처드가 동생이다. 폴크너에 의해 아퀼라의 포수로 고용된다.
영국 군인. [[보스턴]]에 도착한 헤이덤을 항구에서 마중나왔다. 헤이덤의 계획만 믿고 군대 상관인 브래독에게 소똥(아마)를 던지는 충성스러운 부하. 시퀀스3 마지막에 템플 기사단에 입단한다.
영국 해병대 장교. 찰스 리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소개해준 템플기사단원. 상관인 브래독이 핏케언을 데려가는걸 승인하지 않자 헤이덤과 찰스 리가 군대 행렬을 습격해 데려갔다.
- 영창대군 . . . . 9회 일치
>대군이 죽을 때의 나이가 9세였다. 정항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 대군의 위리(圍籬)를 수직한 자가 있었는데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은 계축년에 대질 심문할 적에 말을 만든 것이 망령되이 착오되어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인용하여 흉도(兇徒)가 구실삼을 거리를 제공하였으니,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에 출송할 것을 명하소서. 정항(鄭沆)은 강화 부사(江華府使)로서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핍살(逼殺)하였고, 이정표(李廷彪)는 교동 별장(喬桐別將)으로서 임해군(臨海君)을 핍살하였으므로 여정이 분노하는 것이 극에 달했습니다. 관작을 추탈하소서. 그리고 두 사람의 여러 아들들은 모두 정배함으로써 악을 징계하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대체로 박동량은 훈척(勳戚)인 재신(宰臣)으로서 선묘(宣廟)가 유교(遺敎)한 뜻을 생각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감히 말해서는 안 될 일까지 끌어들임으로써 마침내 화를 궁금에 전가시켜 공론에 죄를 얻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단지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에 출송할 것만을 청하였으니, 사정을 따른 자취가 있음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 뒤 >>정항 등의 일에 대해서는 며칠 동안 연계(連啓)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가 박동량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할 것 등을 청하다
실행자로 지목된 정항은 인조반정 이후 관직을 빼았겼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정언 이후선(李厚先)은 그 위인의 용렬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조부 이정표(李廷彪)는 일찍이 혼조(昏朝) 때 강화 별장(江華別將)으로 있으면서 부사(府使) 정항(鄭沆)과 함께 악행을 저질러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혹독하게 죽였으므로 이제까지도 그 일을 말하는 자는 목이 메이니, 이는 참으로 온 나라 사람이 다 가슴아파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후선은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함부로 벼슬길에 들어섰으며 이제는 요직에 있는 자에게 빌붙어 분수넘게 미원(微垣)의 관원이 되었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나 욕을 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이후선을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사국에 심유를 서용하고 사천때 이기발을 논핵한 대관을 조사하라 하다
선조의 노욕과 일부 정치인들의 정치적 야심에 휘말려 본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존재 자체만으로 광해군의 정적이 되고 말았고, 그것이 본인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 예천군 . . . . 9회 일치
예천(醴泉)의 이름을 풀어보면 '''단술 례'''와 '''샘 천'''이다.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의 장수 [[양호]]가 지나가다가 마신 샘물이 너무 달고 맛나 중국 예천(醴泉)과 같아 이름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설화가 있는데 이설로는 '크고 넓은 땅'을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인 '단슬얼'로 불렸던 이곳의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착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2&dirId=121117&docId=147391514&qb=7JiI7LKcIOyngOuqhSDsnKDrnpg=&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SGmGBlpySEZssb4QN7wsssssstl-014086&sid=A4deAbPXJdB8Y7c9w/egHw%3D%3D|관련 링크]] 간혹 醴'川(내 천)'이나 '禮(예도 례)'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의하자.
== 관광 ==
|| '''관외사전투표''' ||<:>32.39%||<:>{{{#C9151E 32.44%}}}||<:>15.48%||<:>11.32%||<:>7.60%||<:>{{{#808080 ▼0.05}}}||<:>||
예천군 호명면과 안동시 풍천면에 도청신도시가 조성되었다. 도청 및 유관기관은 안동시 지역에 위치하지만 아파트 단지는 예천군 지역에 훨씬 더 많이 조성, 2018년 드디어 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섰다. 계획인구가 모두 들어와 예천시로 승격될 수 있었으나, 저출산으로 가구당 인구수도 줄어들었고, 안동시내에서 통근하는 사람도 많을 것으로 예측되어 승격은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2014년 재선에 성공한 이현준 군수 주도로 1981년 건립된 현 군청 청사 대신 신예천군청을 건립하고 이전하였다. 신부지는 예천읍 대심리 353번지, 구 엽연초생산조합 부지이다.[[http://www.ycg.kr/open.content/ko/administrative/news/headline/?id=986407f875b54364aa54a89bda326e86|#]] 2015년 말 착공, 2018년 2월 5일 준공되었다. 2015년 5월 설계 공모작을 선정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5/29/0200000000AKR20150529063100053.HTML|당선작 조감도]] 하지만 현 군청 청사가 위치한 노상리와 인근 노하리, 서본리, 동본리, 백전리 주민들은 '''군청 이전 후 해당 지역 경제 위축'''을, 그외 지역 주민들은 '''부채 증가, 도청 이전과 연계한 각종 사업의 선행 추진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http://www.kbsm.net/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306&idx=118103|#]] 한편, 현 군청 청사가 위치한 예천읍내는 배산인 흑응산과 임수인 한천 간 폭이 좁은터라 더이상 확장가능한 공간이 없어서 예전부터 쭉 이전의 필요성이 강하게 피력됐다. 그러나 공공기관이 이전하게 되면 으레 [[도심 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구 군청 청사 인근 지역 경제가 위축되지 않게끔 정책을 마련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예천은 [[활]]의 고장으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예천군의 [[양궁]]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다음 링크를 참조. [[http://www.ycinews.co.kr/ArticleView.asp?intNum=47617&ASection=001002|링크]]. 예천 출신의 양궁 국가대표 [[김진호(양궁)|김진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 대회에서에서 사상 첫 5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이를 계기로 1983년 남·여 2개의 양궁팀을 창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100여명이 넘는 선수들이 예천양궁선수단을 거쳤고, [[황숙주]], [[김수녕]], [[장용호]], [[양승현]], [[김성남]], [[한희정]] 등 10여명의 [[국가대표]]를 배출, 각종 국제 및 국내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300여회의 입상과 각종 훈·포장을 수상했다고 한다. [[http://ycg.kr/open.content/ko/organization/archery/stadium/|출처]].
* [[권영자]] : 문민정부 제2 정무장관, 계명대 교수
* [[현석호]] : 장면내각 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내무부 장관 역임, 전 민주당 국회의원
- 오타쿠 혐오 . . . . 9회 일치
* 성적인 물건 : 성적인 것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며, 이는 일반인들에게 [[성범죄]]의 징후로 여겨진다.
* 잔혹한 물건 : 잔혹한 물건은 잔혹함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며, 이는 일반인들에게 [[살인]] 등 폭력범죄의 징후로 여겨진다.
* 군사적 물건 : 군사적 물건, 즉 밀리터리 매니아(소위 [[밀덕]])의 군사적 물건에 대한 관심은 곧 [[전쟁]]에 대한 관심이며, 이는 일반인들에게 '잠재적 전쟁 범죄자'의 징후로 여겨진다. 이들은 때때로 군사적 저술에 과도하게 경도되어 일반인들과 동떨어진 수준의 [[우익]] 성향을 가지거나, 몇몇 경우 [[학살]]을 옹호하거나, [[독빠]]의 경우 [[나치]]에 대한 옹호로 [[주화입마]]하는 경우도 있다.
* 철도적 물건 : 철도적 물건, 즉 철도 매니아(소위 [[철덕]])은 철도적 물건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로 일단 일반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이며, 이들은 때때로 철도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정상적인 철도 운행을 방해하는 등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오타쿠들은 외모에 관심이 없어 비호감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사회성 부족과 연결되며, 이들을 대하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혐오를 준다.
* [[여드름]] 등 각종 피부 트러블 : 이는 오타쿠들이 취미에 관심을 쏟고, 피부 관리를 할 비용을 줄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예비 범죄자라는 관점에서 오타쿠를 대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위의 사회성 부족(=반사회적 성격)과 혐오적 외모에서 일반인들의 경계를 받기 때문이다. 또한 [[미야자키 츠토무]] 등 몇몇 오타쿠가 저지른 범죄가 오타쿠를 범죄자 예비군으로 낙인찍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 유키히라 소마 . . . . 9회 일치
편입시험 중에서 심사관이자 토오츠키 학원 십걸(十傑) 평의회 10위인 [[나키리 에리나]]와 만나게 되며, 유키히라의 비밀 메뉴 8번인 둔갑하는 [[후리카케]] 밥을 선보인다. 에리나 본인도 맛있다고 생각했지만 소마옆에서 심사받던 소마가 "안가고 먹길 잘했지~?" 라던가 "늬들같은 높으신 분들은 못만드는 요리도 있지" 라던가 "자 어때? 맛있지! 맛있지!" 라는식으로 좀 심하게 깐죽댄다가(...) 본인의 자존심 문제도 있고 해서 에리나는 홧김에 "맛없다"라고 발언. 불합격처리 당한다.
메구미는 상하기 시작한 콜리플라워의 문제를 보완하려고 와인식초로 데치는 방법을 썼는데, 재료의 한계를 보완했다는 것을 칭찬은 못할망정 '''자신의 르세트(레시피)를 망가트렸다며 주저없이 퇴학'''시켜버린 것이다. 소마는 메구미가 늦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창의적으로 대응했으며, 식재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시노미야의 책임이 아니냐고[* 이전 주석에서는 테스트로 보기에는 이상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니 그렇지 않다. 시노미야가 작중에서 말하듯 콜리플라워는 다루기 어려운 식재료이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콜리플라워를 챙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상태가 나쁜 콜리플라워만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시노미야는 당황하여 이 점을 망각한 학생들은 요리사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누군가가 꼭 떨어져야 하는 '상대평가'였다면 말이 되는 테스트고, 학생들의 역량을 공평하게 실험하는 '절대평가'였다면 말이 안 되는 테스트다. 그런데 이 부분은 시험관 재량에 따라 퇴학시킬 학생의 숫자를 0부터 무진장 많이(...)까지 고를 수 있어 보이므로, 그냥 시노미야의 성격이 더러운 걸로 해석하는 게 옳다.] 반론하나 시노미야는 '''조리장은 자신이라며 소마의 의견을 묵살. 더이상 대들면 조리장 권한으로 소마마저 퇴학시킬 수 있다'''고 위협한다.
식극 시간이 되어 토오츠키 이궁의 별관 지하 1층 식당으로 간 소마와 메구미는 도지마와 시노미야를 위시한 강사들이 심사위원 자격으로 모여있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이누이는 의자에 묶여있다--
모색한 끝에 타코스와 유사한 가라아게 롤을 개발하면서 불황 탈출 성공. 그러나 그 가게는 십걸 제9석 유우잔 에츠야가 관리하고 있던 가게였기에 악연을 쌓게 된다.
심사위원들이 쿠로키바와 소마의 요리보다 아키라의 요리를 위로 평가한 이유는 이것이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요리''', 스페셜리티이기 때문이었다. 아키라의 요리는 기존의 인식과는 다르게 전채 요리를 메인에 내놓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 과정에서 준을 사모하는 마음을 요리에 담았고, 그 진정성은 요리에 그만의 유니크함을 더해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은 것. 소마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고, 아버지와 전화하면서 자신만의 스페셜리티를 찾기 위한 결의를 다진다. 소마가 처음 토오츠키에 들어갔을 때 죠이치로가 한 말인 '''자신의 요리 전부를 주고싶다고 생각할만한 여자를 만나라'''와 오버랩되는 부분. 현재 스테지엘 과정과 이후 전개에서 히로인과의 관계에 대한 복선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 엮일 가능성이 높은 히로인은 --당연하지만--[[나키리 에리나]]와 [[타도코로 메구미]] 이 둘.
> 따끈따끈하게 찐 감자에 기름을 잘 흡수하는 섬유질인 버섯류를 다져넣어 치댄다. 거기에 두툼한 베이컨을 둘둘말아 오븐에서 진득하게 구워낸다. 그러면 베이컨은 기름이 쏙 빠져 바삭바삭해지고…. 감자가 돼지의 감칠맛과 지방을 전부 받아들인다─. 이로써 밖은 바삭바삭. 속은 촉촉한 관능적인 식감이 탄생한다!
여담으로 이때 사용한 재료는 특판하던 700엔짜리 '서로인 스테이크'. 20%할인에 반액 스티거까지 붙어있었다. 상대인 니쿠미의 A5 소고기와 비교할 수 없는 고기였기에, 당연히 이 고기를 본 관중들은 분노에 물건들을 던졌다(…). 승자는 소마로, 이쿠미는 강한 와규 맛에 대항해 밥까지 강하게 만들어서 맛이 서로 싸우게 되었고, 소마는 반대로 맛끼리 조화를 이루어 승리를 얻었다. 이때 이쿠미는 소마의 덮밥을 먹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알몸으로 덮밥에 파묻힌 듯한 리액션을 취했다(…).
주로 사용하는 식칼은 데바보쵸(でばぼちょう). 날이 두껍고 폭이 넓으며 끝이 뾰족한 물건이다. 매일 밤 자기 전에 갈아두는 듯 하며 작은 전용 케이스에 담아 보관한다. 이 문서의 맨 위에 있는 그림에서 소마가 들고 있다.
- 은혼/632화 . . . . 9회 일치
* 당시 관군에 있던 헨페이타는 신스케를 끌어내기 위해 마타코를 미끼로 쓰는데, 이때 생각지도 못하게 살인귀 반사이까지 엮여든다.
* 한 번 신스케가 내쳤던 소녀, 마타코는 근시일 안에 신스케와 다시 만난다. 이번엔 죽음이 예정된 "사형수"로서. 때는 양이지사를 탄압하던 시절. 막부는 폐도령을 내리고 위험한 물건을 소지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던 때였다. 마타코도 검문에 걸렸는데 아버지의 유품을 내놓을 수 없어 저항하다 양이지사로 낙인 찍혀 잡혀왔다. 마타코의 이런 사정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관군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양이지사로 몰아 잡아들이고 있고, 백성들이 저항할 방도는 없다.
연주 소리를 듣고 관군들이 다가온다. 무슨 짓이냐고 추궁하자 그는 조용히 듣기나 하라며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무렇게나 둔 칼이 발각된다.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양이지사로 모는 시대. 시비가 일어난 동안 관군들도 행인들도 반사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느라 정작 사형수에게 일어난 이변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소녀를 감시하던 병력들을 쓰러뜨렸고 어느 새 소녀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없었던 것이다.
* 이같은 옥중대담은 헨페이타가 모두 헨페이타가 듣고 있었다. 그는 관군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진 남자였다. 신스케를 함정에 빠뜨린 그가 이제 저 두 위험분자의 대화를 어떻게 취급할까? 그는 조용히 감옥을 나선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길로 접어 들었을 때, 자객을 맞이한다. 마타코였다. 마타코는 신스케가 구해준 뒤 줄곧 근처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녀는 칼을 들이대며 신스케를 해방시키라고 요구한다.
반사이가 구하려던 이들은 모두 신스케에게 포섭된 자들이었으며 관리 조차 포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 헨페이타는 그 날과 오늘을 겹쳐본다. 그날 처음부터 결성된 귀병대는 관헌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리고 줄곧 같은 일을, 오늘도 같은 일을 하는 셈이지만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슴다.
긴토키는 지지 않고 연어연에 대응하는 하세가와연 따위를 걸자고 하는데 신파치는 "그건 지옥의 번지 점프"라고 환상적인 표현력을 발휘한다. 아무튼 긴토키는 이런 날이 있음 좋겠다고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마다오 본인은 "내일 휴일이라 상관없다"고 소감을 말한다. 신파치는 제대로된 어른이 없다고 통탄.
- 이근직 . . . . 9회 일치
1903년 [[경상북도]] 김산군(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관상가의 조언으로 이근직으로 개명하였다.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고료척식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도 1949년까지 강원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서울특별시청]] 산업국장, 1952년 심계원(현 감사원) 심계 제2국장, 1952년 [[함태영]]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1955년 2월부터 1957년 9월까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경상북도지사 재임 중이던 1957년 8월 [[가짜 이강석 사건]]이 일어났다. 1957년 9월부터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행정안전부 장관|장관]]을 지내다가 1958년 6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자유당]] 당무위원으로 있다가 1959년 3월부터 1960년 5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장관]]을 지냈다. 농림부 장관 재임 중 [[3.15 부정선거]]에 관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구속 기소되었다.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이노센트 투어 . . . . 9회 일치
= 스토리 및 세계관 =
세계관이 조금 특이한 것이 이 여행에 참여하는 주인공들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본질이 되는 신화가 다르다. 가령 엘프는 [[켈트 신화]], 발키리는 [[북유럽 신화]]를, 흑기사는 [[기독교]]와 [[헤브라이 신화]]에서 유래된 전승들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캐릭터이며, 이노센트 투어의 세계관에서는 이 모든 신화가 짬뽕으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힌두 신화]]도 일부나마 추가되어 있다.
이 게임에서는 체력이 0이 된다고 게임이 종료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게임종료라 할 수 있을만한 패널티가 주어지는데, 어떠한 경우에라도 체력이 0이 된다면 그 캐릭터는 '''해당 보드의 스타팅 포인트로 되돌아간다'''. 이는 결투에 의해서든, 혹은 적의 방해마법이나 트랩에 의한 결과든지 상관없다. 따라서 HP의 관리는 여타 게임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하다.
정령능력치는 아래에서 설명할 "정령"과 관련된 능력치이다. 이 정령 능력치는 '''스테이터스 창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유추할 수 밖에 없다.''' 단, 바람의 정령력은 마법의 결과값에 난수가 포함되지 않아 정확한 능력치를 역산할 수 있다.
정령마법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축적한 정령력을 통해 사용가능한 마법으로 사실상 공통마법으로 봐도 무방하다. 공통이기 때문에 신화의 특성과는 상관없이 위에서 언급한 정령 능력치에 따라 효율이 달라진다. 단, 회복마법은 정령능력치에 상관없이 투자한 정령력만큼 정비례하여 HP가 회복된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이노센스 투어]]
- 이선희 . . . . 9회 일치
[[1964년]]<ref>[https://www.leesunhee.com/sunny/contents/contents.do?cmnx=16 데이터 관련 리스트]</ref> [[대구광역시]] 에서 [[울산광역시]] 출생의 [[불교]] [[승려]]였던 아버지와 [[부산광역시]] 출생의 [[불교]] 신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대전광역시]] 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광주광역시]] 와 [[인천광역시]]에서 각기각기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는 [[1969년]]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줄곧 자랐다.
그녀는 대학 시절이던 1984년 제5회 [[강변가요제]]에서 같은 학과 선배 임성균과 "4막 5장"이란 팀으로 출전하여 《J에게》를 불렀다. 애초에 2학년 때 노래가 하고 싶어 작곡가 [[장욱조]]의 음악 사무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어떤 무명 작곡가([[이세건]])가 말하기를 "아직도 내가 만든 노래를 아무도 아니 불러 준다."며 [[악보]]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그 악보 뭉치를 주우면서 차라리 마음대로 불러도 되는지 물어 보아 결국 허락을 받았고, 그 더미 속에 있던 노래가 바로 <J에게>였다. 3년이 지난 이후 1984년, 이 노래로 참가를 하여 MBC 강변가요제 대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으며 데뷔하였다. 폭발적인 가창력과 바지만 고수하는 옷차림의 보이쉬한 매력으로 ‘언니 부대’가 만들어졌으며, 특히 동그란 [[안경]]과 커트 [[머리]] 등이 여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며 소위 '이선희 신드롬'을 일으켰다.
아직 정규 앨범 한 장 없이 오직 <J에게>란 곡 하나만으로도 11월 25일부터 [[KBS]]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하여 골든컵을 차지하였고, 1984년 KBS 방송 가요대상 신인상, 1984 [[MBC]] 10대가수가요제 최고 인기가요상, 신인상, 10대 가수상으로 최초 3관왕에 오르는 등 데뷔 직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2005년 이선희가 모두 작사, 작곡한 13집 《사춘기》를 발매하였다. 대표곡 <인연>은 천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 《[[왕의 남자]]》의 OST로 삽입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장미>와 <왜?> 등은 이선희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드러내어 전문가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
}}</ref> 2800여 석에 이르는 좌석이 모두 매진이라는 큰 기록을 세우며 한인으로서는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하였다. [[2011년]] [[9월]]부터 방송된 [[문화방송|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시즌 2의 멘토로 출연하였고, 멘티 구자명이 우승하였다.
2018년 4월 1일 평양 대동강지구 [[동평양대극장]]에서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 공연 《봄이 온다》 무대에 올랐다. 부른곡은<J에게, 알고 싶어요, 아름다운 강산> 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남북 합동공연 《우리는 하나》를 선보였다.<ref>{{뉴스 인용 |제목=조용필·이선희 등 4월 평양 공연 |url=http://www.yonhapmidas.com/article/180403173727_417430 |날짜=2018-04-03 |확인날짜=2018-08-10 |뉴스=연합마이더스}}</ref>
* 1991년 《[[이선희 & 몬트리올 챔버 오케스트라 세종문화회관 라이브]]》
* 1995년 《[[이선희 데뷔 10주년 세종문화회관 라이브]]》
* [[12월 31일]]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J에게'), 신인상, 10대 가수상 수상 (역대 최초 3관왕)
- 이수민(야구선수) . . . . 9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분류:1995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좌완 투수]] [[분류:좌투좌타]] /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프로필상 180cm, 82kg의 투수치고는 다소 작은 체격에, 탈삼진 신기록을 세운 10이닝 완투 경기 이외에도 경기가 있을 때마다 선발 투수로 나서서 거의 모든 경기를 책임지며 2013년 5월 21일 당시 7경기에 나서서 평균 139개의 공을 던지는 등 혹사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으나, 경기를 마치고 난 이후 '''[[삼성 라이온즈]]의 지정 병원'''인 세명 병원에서 마사지 및 회복 치료를 받는 등[[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39640|#]], 상원고 및 삼성에서도 관리를 해 주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삼성이 이수민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얼마나 큰 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며, 많은 삼성팬 역시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66981|지명 이후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 이수민의 각오를 보고 난 이후 많은 관심과 활약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중이다.--뭐 그래도 불안하면 우리에겐 [[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있잖아?--
2014년 전지훈련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삼성 트레이닝 센터]]에 입소했다. 2013년에 많이 던진 탓에 관리 차원에서 입소한 것이지 부상으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 마디로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스프링캠프에서 훈련한 후 곧바로 실전에 많이 투입하면 그것도 혹사로 이어질 수 있어서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배려인 듯.
2월 2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연습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3이닝 3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이날 최고구속은 136km가 나왔지만 위기관리 능력을 과시하며 호투하였다. 히로시마의 1군 멤버가 대거 포함된 상황의 호투라 고무적이다.
상무에서의 생활과 전역 후 부진에 관련된 글. [[http://gall.dcinside.com/samsunglions_new/562430|주소 현재 원글은 지워진 상태다.]][* 다만 이 블로그 주인의 다른 글들이 [[사자 사랑방]]과의 논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그동안 수면 위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었던 문제인 고교야구 혹사 문제를 수면 위에 떠오르게 했던 선수다. 2013년 동안 프로야구의 하향 평준화와 순수 신인 육성 문제가 동시에 떠오르면서 이수민의 179개 투구수는 모든 야구팬들의 분노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게다가 고교를 졸업한 투수들 80%가 어깨, 팔꿈치 부상을 안고 있다는 충격적인 결과까지 나오면서 이에 2014년부터 고교 야구에도 투구수 제한이 도입되었다.[* 한 경기에서 한 투수가 던질 수 있는 최대 투구 수를 130개로 제한했다. 원래 130개를 초과하면 의무적으로 휴식일을 주도록 했으나 실제 경기에서는 129개쯤 되면 바로 투수 교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휴식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상태.]
[[박세웅(1995)|박세웅]]과는 구미 도산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야구를 한 친구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구·경북 야구 팜에 오랜만에 등장한 투수 유망주였기 때문에 삼성 팬들은 하필 같은 년도에 두 선수가 신인드래프트 지명 대상자에 오른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했다. 삼성라이온즈 역시 두 선수 중 누굴 1차지명 대상자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이수민을 선택하였는데, 이유는 이수민이 왼손잡이인 점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삼성팬들은 대체로 이 결과에 만족하면서도 비슷한 체격[* 프로필 상의 키는 180cm로 나와 있으나 지명 당시 실제 키는 177cm 정도라고 한다.]을 지닌 [[박민규(야구선수)|2009년 지명 당시 희대의 망픽 지명 선수]]의 프로 행보를 생각해 볼 때[* 실제로 삼성 스카우트진 역시 2012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다수의 예상과는 달리 비슷한 체격을 지녔던 [[박종윤(투수)|박종윤]]을 지명하지 않았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아무래도 [[박민규(야구선수)|박민규]]의 영향 때문이 가장 큰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으로 걱정하는 삼성 팬 역시 적지 않는 편이다.~~부디 장준관 거르고 [[배영수]]의 결과처럼 되게 해주세요~~ 다만 단순히 체격이 비슷하다고 비교하기는 곤란한 것이, [[박민규(야구선수)|박민규]]는 고교 당시 속구가 최고구속이 140km/h를 못 넘긴 것과 달리 달리 이수민은 최고 구속 144km/h로 고교 선수치고는 빠른 편이다. 또한 스타일도 전혀 다른데, [[박민규(야구선수)|박민규]]가 변화구와 제구로 승부하는 스타일이라면 이수민은 속구와 슬라이더의 투 피치로 타자를 잡는 스타일이다.
- 이승엽 . . . . 9회 일치
'''이승엽'''(李承燁, [[1976년]] [[10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야구]] 선수로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지명타자]]이다. 본관은 [[광주 이씨|광주]]이다.
199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ref>[[문화일보]] - 2009년 9월 기사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91701032230073002 "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 - 실패는 성공을 잉태한다"]</ref><ref>[[동아일보]] - 2010년 8월 기사 [http://news.donga.com/3/all/20100820/30624874/1 "투수 → 타자 변신 성공시대… 타자 → 투수는 왜 잘 안 될까"]</ref>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 (야구인)|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ref>[[마이 데일리]] - 2010년 8월 기사 [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이대호·이승엽·추신수, ‘잘 던져야 잘 친다’… 투수 출신들 맹활약"] {{웨이백|url=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date=20140814152842 }}</ref>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ref>엑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추신수와 부산고의 황금 시대를 이끈 한화의 김백만"]{{깨진 링크|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ref>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 자이언츠|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 (야구인)|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ref>스포츠 춘추 - 2009년 12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38 "양준혁이 말하는 ‘선구안 향상법’"]</ref>
* [[1999년]]에 홈런(54), 타점(123), 득점(128), 출루율(0.458), 장타율(0.733)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고, 대한민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그는 시즌 시작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2017년]] [[5월 21일]] [[송창식 (야구 선수)|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했고<ref>[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B21&newsid=01666246615931216&DCD=A20102 '이승엽, 통산 450홈런'삼성, 661일만에 시리즈 스윕(종합)] - 이데일리</ref>,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 (1994년)|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로 4000루타를 달성했다.<ref>[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707291933932974&ext=na '라이언킹' 삼성 이승엽, KBO리그 최초 4000루타 돌파] - 마이데일리</ref>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그 여정이 끝난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대구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대구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대구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612121051081031 ‘일구대상’ 이승엽 “마지막 1년, 떠날 때 후회없도록”(일구상 시상식)]</ref>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13/0200000000AKR20170113128700007.HTML?input=1195m 이승엽 "은퇴 이후 일? 야구 관련 아니면 안 한다"]</ref>
== 가족 관계 ==
* [[2009년]]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 이지아(배우) . . . . 9회 일치
'''이지아에게 있어 평생 짊어가야 할 짐이자, 그녀의 활동에 있어 발목을 잡는 굴레[* [[서태지]]와의 결혼 생활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이거 하나 때문에 국내에서 연예인으로서의 이미지가 비호감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2011년에 했던 소송은 이혼소송이 아닌 위자료 및 재산 분할소송으로 이지아는 국내법에 따라 2009년 이혼 성립을 주장, 서태지는 미국법에 따라 2006년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지아측 발표에 따르면, 이지아가 만 15세 때(1993년) 팬과 스타의 만남으로 서태지와 만난 인연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태지가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미국에서 서태지를 만나 친언니의 증인참석으로 결혼에 골인한다. 어쨌든 그녀와 연관성이 짙은 남자만 해도 [[서태지|한국 굴지의 대중 뮤지션]], [[배용준|전설적인 한류 탤런트이자 사업가]], [[정우성|연예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미남 배우]]이다.
비판하는 여론의 주장은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정우성을 속인 것은 심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하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입장에서 자신을 굳이 이혼녀라고 밝힐 이유는 없지만, 전 남편과의 관계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시점에서 연애를 한 것은 경솔하다는 주장. 덕분에 애꿎은 정우성만 졸지에 서태지와 이지아 사이에 끼인 꼴이 되어서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은 두말 할 것 없고. 또 다른 것은 서태지에게 건 거액의 소송을 이유로 남자를 등쳐먹으려는 [[악녀]]라고 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얻을 것이 많지않은 소송을 굳이 해서 이지아가 얻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서 출발하는 동정론도 있다. 신비주의로 일관하며 따라다니는 뒷말들에 계속 침묵으로 일관해왔는데 -일본 화류계 출신이라든가 텐프로 출신이라든가 하는 루머- 제대로 된 과거를 가졌다는 걸 증명할 방법은 서태지가 직접 나와서 인정해주는 것 이외엔 없었다. 사실 '나 서태지의 전 부인이었어요' 라든가 '비공식 결혼해서 이름까지 바꿨어요' 이런 걸 말한다고 믿을 사람도 없을 뿐더러 이혼까지 한마당에 굳이 말할 이유도 없으니 본인의 과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소송을 했다는 의견이다.
2012년 11월 29일, 12월 6일 [[무릎팍도사]]에서 (정확히는 12월 6일 방송분) 이지아의 과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해당 방송에서는 파리 여행을 갔을 당시에 과거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털어놓았다고 했고, 위자료 청구소송에 관해서는 해당 기사가 터지기 바로 직전에 이지아가 정우성에게 정중하게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얘기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무릎팍 도사 섭외요청에 응한 이유는 그와 관련된 여러 오해들을 풀기 위해서라고 한다.
2016년 2월 13일 [[연예가중계]]에 영화 <무수단>과 관련하여 홍보차 출연하여 애교를 선보였다. [[http://m.media.daum.net/m/entertain/newsview/20160214065110719|#]]
2009년 6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맑은내 배꽃마을에서 굿네이버스와 함께 자원봉사활동을 한 바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녀온 사람이 추가바람.
- 이평 (1572년) . . . . 9회 일치
'''이평'''(李坪, 1572년 [[8월 17일]] - 161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자(字)는 여원(汝遠)이고 본관은 우계(羽溪), 도촌 [[이수형]](李秀亨)의 4대손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며 이잠(李埁)의 형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 해 [[9월 9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발령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유학(儒學)으로 [[1612년]](광해군 4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1612년]](광해군 4년) [[5월 12일]]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한 [[유영경]](柳永慶)을 강경하게 탄핵하였다. 대동야승과 연려실기술, 광해군일기에 그가 유영경의 죄를 탄핵한 기록이 실려 있다. 유영경(柳永慶) 등을 추형(追刑)하고, [[광해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고, 공신(功臣)을 녹훈하고, 역당(逆黨)의 흉서(兇書)를 중외에 반포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였다.<ref>광해군일기 53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5월 2일 을미 1번째기사, 이평이 유영경 등의 추형, 존호를 올리는 일, 공신을 녹훈하는 일 등을 상소하다</ref> 이에 그해 [[5월 29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었는데 입계하였다. 광해군은 "임금은 부귀하기는 한 나라를 소유하였고 귀하기는 군왕이니, 그 영화와 높게 드러난 것이 그 이상 더할 수 없다. 저 존호를 올려 찬양하는 일은 하늘 끝의 한 점 뜬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명예에 대해 옛날의 지사(志士)들은 얻고 잃고 가고 오는 것을 역시 개의치 않았으니, 임금에게 헛된 칭호를 가하는 것이 무슨 털끝만한 보탬이라도 있겠는가. 도리어 손상만 시키는 것이다. 나는 감히 과장하지 못하겠으며 명예도 원치 않고, 다만 본분을 지키다 자연을 따라 죽고자 할 뿐이다. 더구나 지금 이평(李坪)의 상소 하나로 인하여 경들이 정청(庭請)을 그치지 않으니, 내가 더욱 통탄스럽게 여긴다.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어찌 한 애숭이 유자의 망언으로 인하여 경솔하게 당치도 않은 큰 칭호를 받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이럴 리는 없으니, 번잡하게 하지 말고 빨리 물러가도록 하라.<ref>광해군일기 53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5월 29일 임술 3번째기사,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숭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ref>" 하였다.
이후 [[이항복]] 등이 신하들을 데리고 입계하여 그에게 존호 올리기를 청하기도 했다.<ref>광해군일기 54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6월 1일 갑자 4번째기사, 우의정 이항복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호를 올릴 것을 재차 청하다</ref> 일설에는 [[이이첨]]이 이평을 사주하여 유영경의 추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는 의견도 있다.<ref>광해군일기 54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6월 4일 정묘 5번째기사, 양사에서 시관으로서 시험 출제를 잘못한 김시언을 국문할 것을 청하다</ref>
[[1612년]](광해군 4)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생원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져 그해의 [[9월 9일]]의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발령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한다. [[선교랑]] [[홍문관 부수찬]]이 증직으로 추서된다.
== 관련 항목 ==
- 존 딜린저 . . . . 9회 일치
1933년 5월 10일, 8년 가까이 빵에서 썩은 딜린저는 오하이오 주립 교도서에서 가석방된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오하이오 주에 있는 은행을 털었다가 9월 22일 체포되었다. 딜린저는 재판에 앞서 오하이오 주 리마에 있는 감옥으로 보내진다. 그러자 피어폰트를 포함한 4명의 동료들[* 해리 피어폰트, 러셀 클라크(Russell Clark), 찰스 마클리(Charles Makley), 헨리 코프랜드(Harry Copeland)]은 감옥을 지키던 보안관을 속여[* 가석방 기간 도중 범죄를 저지른 딜린저를 인계받기 위해 오하이오 주립 교도소에서 왔다고 속인 다음 문을 열어준 보안관을 쏴죽였다.] 딜린저를 탈옥시킨다.
딜린저는 인디애나 주 크라운포인트의 감옥에 갇힌다. 이스트시카고에서 벌인 은행강도 도중 경찰관을 살해한 죄를 재판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딜린저는 나무를 깎아 총 모형을 만든 다음 그걸로 간수들을 위협해 감방에 가둔 다음 자동화기을 가지고 탈출한다. 그 후에는 보안관의 차를 훔쳐타고 일리노이 주 시카고까지 도망친다. 이로 인해 훔친 차량을 다른 주로 밀수했다는 혐의가 추가로 붙게 되며 FBI가 딜린저를 쫓기 시작한다. 한편 함께 붙잡힌 동료 세명은 딜린저의 탈옥을 도와주며 보안관을 살해한 일로 재판을 받게된다. 재판 결과 피어몬트와 마클리는 사형을, 클라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사형을 선고받은 둘은 탈옥을 시도했으나 마클리는 탈옥 시도 중 사살되고 피어폰트는 부상을 입은채로 붙잡혀 한 달 후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친다.
1934년 3월 30일, 세인트폴의 링컨코트 아파트 관리인이 자신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헬만 부부를 수상하다고 신고했다. 헬만 부부가 수상하게 행동하며. 관리인을 집 안으로 들이기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헬만 부부의 정체는 딜린저와 프래쳇이었다. 다음날 FBI는 경찰과 함께 그들의 은신처 문을 두들긴다. 문을 연 프래쳇은 이들을 본 즉시 문을 닫아버렸고, 즉시 증원 경력이 추가로 투입되어 링컨코트 아파트를 포위한다. 하지만 밴 미터가 나타나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사이 딜린저와 프래쳇은 뒷문으로 탈출한다. 이들은 그린의 은신처로 도망친다. 하지만 그린 역시 4월 3일 역시 FBI의 습격을 받고 총을 뽑다가 사살된다.
7월 21일, 안나 세이지(Anna Sage)라고 자칭하는 여성이 경찰에게 연락해온다. 그녀의 정체는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포주일을 하던 아나 쿰파나슈(Ana Cumpănaș)였다. 이민 귀화국에서는 이 루마니아 출신 포주를 국외추방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쿰파나슈는 보상금을 주고 미국에 남게 해준다면 존 딜린저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연락한 것이었다. FBI는 보상금은 약속할 수 있지만 국외추방에 관한건 노동부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쿰파나슈는 이를 받아들였다.
밤 10시 30분. 영화를 보고 난 딜린저는 두 여자를 데리고 극장 밖으로 나선다. 극장 문 앞에 서있던 멜빈 퍼비스(Melvin Purvis) 특별 수사관이 시가에 불을 붙이는 것을 신호로, FBI 요원들과 경찰들이 딜린저에게 접근했다. 위기에 처했다는 걸 깨달은 딜린저는 바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골목길로 도망갔지만 그곳에는 FBI 요원들이 매복해 있었다. 세 발의 총알을 몸에 맞은 딜린저는 그대로 쓰러졌다. 20분 후, "공공의 적" 존 딜린저가 알렉시안 브라더즈 병원(Aliexian Brothers Hospital)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 최공웅 . . . . 9회 일치
|본관 = [[경주 최씨|경주]]
|소속기관 = 법무법인 화우
[[1940년]] [[1월 4일]]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난 최공웅은 [[1958년]] [[경동고등학교]], 1962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면서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수석합격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공군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에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1969년 까지 재직하다가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전보되어 1971년 까지 재직하였다. 1971년에 다시 서울민사지방법원으로 돌아와서 1975년 까지 근무하다가 1975년과 1976년에 [[춘천지방법원]]에서 합의부 재판장을 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 까지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를 하면서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치는 동안 1974년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서 비교법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78년에 Hague Academy of International Law에서 국제국제사법 과정을 연수했다. 특히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에서 국제사법 연수를 받고 저서 <국제 소송>은 국제사법 분야에서 바이블로 통한다.<ref>동아일보 1995년 11월 21일자</ref>
1991년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1994년 까지 [[청주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에서 지방법원장을 하였으며 1994년에 고등법원장으로 승진하여 1996년 까지 [[대구고등법원]]에서 법원장을 하다가 1996년에 [[대전고등법원]], 1998년에 [[특허법원]]으로 전보되어 초대 법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993년 3월에 법관 생활을 마치면서 법무법인 우방 변호사가 되어 변호사를 하다가 법무법인 화우 대표 변호사, 고문 변호사를 하였으며 2003년에는 [[경동고등학교]] 재경 총동창회 회장을 맡았다.<ref>[http://kyungdongi.co.kr/dong_news/index.php?start=120&view=y&seq=25&pageGubun=1%20class=f_link_bu%20f_l 경동고 총동창회]</ref>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3부 재판부 판사로 재직하던 1971년 7월 27일 밤에 같은 재판부 구성원인 이범렬 부장판사와 동부서기 이남영과 함께 "1심에서 징역3년 자격정지3년이 선고된 제주 김녕중학교 교장 이방택의 [[국가보안법]], [[반공법]]위반 피고사건의 항소심 증인 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갈 때 피고인의 하경철 변호사로부터 왕복 항공료 3만3천원과 향응 비용 등 9만7천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법조 사상 최초로 현직 판사로서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72800099203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1-07-28&officeId=00009&pageNo=3&printNo=1657&publishType=00020 매일경제 1971년 7월 28일자]</ref> 이후 해당 피고인의 재판은 원심이 파기되어 징역1년6월 자격정지1년6월이 선고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72900209207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07-29&officeId=00020&pageNo=7&printNo=15326&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1년 7월 29일자]</ref> 관행으로 이루어진 변호사의 경비 부담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은 1차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ref>[http://www.newspim.com/news/view/20170721000060]</ref>
* 1966년 - 1981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형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판사, 대법원재판연구관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18부에서 배석판사로 재직하던 1969년 11월 3일에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법학 박사인 박노수(37세) 피고인과 전 국회의원 [[김규남]](40세), 사진업을 하는 임문준(30세)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하면서 사형이 구형된 여관업을 하는 김희병(48세)에게 무기징역, 박노수의 처인 전명희(28세) 등 14명에게 징역7년~징역1년과 같은 형량의 자격정지를 병과하면서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1103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11-03&officeId=00020&pageNo=1&printNo=14790&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69년 11월 3일자]</ref>
*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8년 2월 5일에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유세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기도하고 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1971년 7월 26일에 기소된 사건에 대해 "재판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했다.<ref>동아일보 1988년 2월 5일자</ref> 3월 4일에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 법정모욕 등으로 1,2심 군법회의에서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이 선고됐다가 대법원 상고심에서 이미 폐지된 [[긴급조치]] 면소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채 파기환송된 [[강신옥]]에게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형사 피고인에 대한 자유로운 방어권 행사없이 형식적인 변론만 인정한다면 사법권읜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말 것"이며 "공개재판에서 변론은 재판 방해를 하려는 폭력이 없는 한 처벌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3040032921100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3-04&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056&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3월 4일자]</ref> 5월 27일에 내란 예비죄 피고인인 [[박형규]] 목사에게 "10여명의 선동만으로 국가 전복을 우려한다는 것은 전혀 합리성이 없다"며 징역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2700329211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5-27&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126&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5월 27일자]</ref> 5월 31일에 1974년 세검정 동굴에서 북한방송을 듣고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 대해 "똑똑한 학생이 왜 나쁜 짓을 하겠느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을 선고받은 박규신 피고인에게 대법원에서 파기된지 13년만에 반공법위반 무죄, 긴급조치 위반은 면소 판결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3100289107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5-31&officeId=00028&pageNo=7&printNo=14&publishType=00010 한겨레 1988년 5월 31일자]</ref>
- 최석민 . . . . 9회 일치
|본관 = [[경주 최씨|경주]]
'''최석민'''(崔錫敏, [[1858년]] [[8월 6일]] ~ [[1915년]] 양력 [[12월 20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한성부]]의 출신이며 본적은 [[경성부]] 북부(北部) 이동(泥洞)이다. 의정부와 내각의 관리로 일하다가 지방의 군수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최석민은 관제 정비와 지방 제도, 세금 분야 등의 실무 전문가로 점차 고위직에 올랐다.
[[1906년]] 내부협판(內部協辦) 및 지방세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왕가의 국유 재산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포상금 형식의 [[은사공채]](恩賜公債) 2만 5천원을 받았다. 조선귀족 중 남작 작위는 본래 전직 관료에게 주어졌으나, 그는 칙임관 1등 이상의 현직에 재직 중인 것을 기준으로 이 작위를 수작했다. 최석민의 작위는 양자 [[최정원 (조선귀족)|최정원]]이 습작했다. [[1911년]] [[8월 29일]]에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매일신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 1894년 의정부 관리 -->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1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남작]][[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
- 최정호 (성우) . . . . 9회 일치
*[[메타제트]]([[KBS]]) - 블랙 클라우드 기술사관 / 노아
*[[전쟁과 평화 (2016년 드라마)|전쟁과 평화]]([[KBS]]) - 아나톨리(칼럼 터너) / 제니소프(토마스 아놀드) / 쿠투조프의 부관(마이클 앱)
*[[닥터 후]] ([[KBS]]) - 경찰관(션 칼센,시즌 2) /피치(그렌 스페어스,시즌 10)
*[[아이 로봇]]([[KBS]]) - 형사 / 광고 방송 / 로봇 / 수사관
* 2004.12.12 김종관 <서점 네 시> (대규)
* 2014.03.23 편혜영 <몬순> (관장)
* 2002.02.24 제 아내는 외출중입니다 (안내경찰관)
* [http://www.kbs.co.kr/radio/scr/library/aod/aod/index.html 라디오 문학관] - '''[[라디오 문학관]] ([[KBS 한민족 방송]])'''
- 츠라츠라 와라지 . . . . 9회 일치
* 쿠마다 하루타카 : 오카야마 번 5대 번주. 대대로 검약을 기풍으로 삼던 쿠마다 가에서 유독 풍류와 호사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도를 넘는 사치는 하지 않는다. 막부의 검약정책을 지나치다고 여겨 우회적으로 비꼬곤 했기 때문에[* 사치를 막기 위해 은 제품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오자 일부러 금으로 된 곰방대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다. (그 직후 금 제품 또한 금지령이 내려졌으나, 그 이후로도 금으로 된 곰방대를 사용하였다.)] 막부의 실력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와 사이가 나쁘다. 여러가지 일화가 따라다니는 인물로 기행을 일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속이 깊고 대범해서, 이 때문에 행렬 중간중간마다 과거에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 선물을 바치려고 줄을 잇곤 한다. ~~전국시대 시절이었다면 천하통일은 무리라도 관서 제패는 해냈을 것 같은 포스다~~
* 이와타 토메지로 : 오오고쇼가시라. 루스이(留守い. 참근교대 때문에 영주가 비운 거성을 관리하거나, 또는 반대로 에도에 있는 영주의 저택을 관리하는 직책) 출신으로, 온화하고 여려보이지만 배후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며 유능하게 일처리를 해낸다. 다만 야마와키와는 달리 하루타카의 속내까지 읽어내는 정도는 아니다.
* 마츠다이라 사다노부 : 막부의 수석 로쥬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보통 관직명인 '엣츄노카미'로 불린다. 실제 역사에서 전 시대인 '타누마 시대'의 중상주의 정책을 백지화하고 검약을 강요하던 '칸세이 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굽힘없는 완고한 성격 때문에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냈으며 급기야는 쇼군에게도 노여움을 샀다. 자신의 정책에 우회적으로 비판을 던져오는 하루타카를 불편하게 여기지만 그 능력은 인정하고 있다.
* '호노이케' 젠자에몬 : 오사카 상인으로 환전상이자 오카야마 번의 전속 상인. '호노이케 상단'의 우두머리라서 평소에는 호노이케라고 불리고 있다. 번의 재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점잖은 성품을 지녔다. 수완좋은 상인으로 주변의 다른 상인들도 앞다투어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으며, 칸세이 개혁의 한계를 궤뚫어보고 일시적인 정책에 그칠 것이라 내다보며 느긋하게 관망한다. 하루타카에 대해서 돈의 흐름을 알고 있다고 하며 높게 보고 있다.
* 관백 : 후지와라 씨의 혈통을 지닌 다섯 가문 중 하나인 이치죠 가문 출신 공가(公家. 귀족). 형제가 없어서, 종제(從弟)인 이즈미(관백의 모친이 이즈미의 백모)가 수행 가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고 싶어하여 거짓 칭병(稱病)을 하였다. 조정과도 사이가 소원한 사다노부에게 반감을 갖고 있으며, 반대로 하루타카의 인품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 협본진 찬모 : 고오리야마 본진(本陳. 에도 시대의 숙박 시설 중 다이묘와 그 수행원들이 이용하던 숙사의 통칭)의 찬모(반찬을 비롯한 음식을 만드는 여자). 누명을 쓰고 탈번(脫藩. 번을 이탈하여 낭인이 되는 것. 당시 무단으로 탈번하는 것은 중죄였다)한 관리와 정을 통한 사이로,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관리가 숙사를 수배하러 온 선발대에게 들켜 처형당하자 쿠마다 가에 원망을 품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하루타카가 그녀 뱃속의 자식을 자신의 사생아인 것으로 꾸미고 이를 인정하는 듯한 연기를 하여 협본진에서 계속 일하며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었고, 원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하루타카의 배려에는 감사하게 된다.
- 츠츠모타세 . . . . 9회 일치
이 단어는 "[[부부]]나 내연 관계에 있는 남녀가 공모하여, 남자가 '아내' 혹은 '정부'에게 다른 남자를 유혹하게 하여, [[간통]]을 저지르고, 그것을 명목으로 하여 그 남자에게 돈을 뜯어내게 하는 [[사기]] 행위"를 뜻한다.
현대의 츠츠모타세는 데이트 사이트나 전화방, [[SNS]]를 통하여 먹이감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흔히 있다. 과거에는 성관계를 가지기 직전이나 직후에 [[호텔]]에 나타나서 "[[불륜]]에 [[위자료]]를 청구하겠다." 등의 [[협박]]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현대에는 [[호텔]]에서 [[피해자]]의 [[신분증]]이나 [[휴대폰]]의 번호를 알아내서 이를 차후 연락 수단으로 사용하며, 성관계 장면은 [[몰래 카메라]] 등으로 촬영하여 확보한다.
[[피임]]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지고, [[임신]]이나 [[낙태]]를 명분으로 돈을 뜯어내기도 한다.
* 여성 쪽에서 적극적으로 만나고 싶거나, 성관계를 요구하는 경우.
애초에 여성은 경계심이 강하므로,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과 만나거나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갑자기 만나서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내용을 의도적으로 전하는건 시간을 들이지 않고 빨리 만나서 돈을 뜯어내려는 속셈인 경우가 많다.
* "성관계를 해주면 돈을 준다."고 말하는 경우
이 경우는 거의 확실하다고 여겨지는데, 돈을 내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성도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여성은 돈을 받는 쪽이며,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좋다고 생각하는 남성도 적지 않으므로 외모가 그리 좋지 않은 여자도 돈을 쓰면서 까지 남성과 성관계를 가지려 할 가능성은 낮다.
[[성병]]이나 [[임신]]의 위험을 생각하면, 처음 만나는 사람과 피임 없이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피임 없는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는, [[임신]]과 [[낙태]]를 명분으로 위자료를 청구해오는 유형일 가능성이 있다.
- 태학 . . . . 9회 일치
중국, 한국, 베트남 등의 왕조국가에서 설치하던 고등교육기관.
전한, 한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 들여 태학이 설치했다. 태학의 학생들은 '오경박사'의 강의를 받으며 공부를 하며, 시험 성적에 따라서 낭중 이하의 관직을 가지게 되었다. 태학에 쓸 교과서로서 유교 경전을 돌에 새긴 [[석경]]이 제작되어 설치됐다. 이 석경은 한나라 시기까지는 금문으로, 위나라 이후에는 고문으로 작성되었다.
태학은 수도에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전한에서는 장안(현재의 시안)에, 후안에서는 낙양(뤄양)에 설치되었다. 여담으로 [[광무제]] 유수는 젊은 시절 태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수업료를 내려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아르바이트--
태학의 규모는 점차 발전, 확대되었는데, 태학이 생겨난 당초에는 학생 50여명에 불과했으나 후한 시대에는 무려 3만명에 달하게 됐으며, 학교 건물은 240채,1850실을 갖추게 되었다. 엄청난 수의 태학 학생들은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려는 의식도 높아서, 후한말기에 태학은 [[청류파]]의 거점이 되어 외척과 환관 등 부패한 중앙 정치에 저항하는 역할을 했다.
서진에서는 276년 공경, 대부 등 고위 관료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태학과는 별도로 국자학(國子學)이 설치된다. 국자학과 태학은 당날 때까지 병행하여 지속되었는데, 국자죄주(國子祭酒)가 관리했다. 당나라에서는 국자감(國子監)을 둬서, 국자학, 태학 이외에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 등을 관리했다.
고구려에서 소수림왕 때 태학이 설치되었다. 신라에서는 국학을 설치했으며, 고려에서는 국자감을 설치했다. 국자감은 고려말에 [[성균관]]으로 개칭되며, 조선에서는 성균관으로 지속되었다.
- 토탈워: 쇼군 2/가문 . . . . 9회 일치
현대의 [[카나가와 현]] 부근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쉬움. 본거지 사가미, 이외에도 이즈를 통치하고 있다. 좀 멀리 북쪽에 있는 다케다 가문과 우호적, 동쪽에 있는 오기가야츠 가문과 전쟁 중, 서쪽에 있는 이마가와 가문과 우호적이다. 다케다 가문과는 무역 관계.
현대의 나고야 근처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 오와리. 동남쪽에 있는 도쿠가와 가문, 그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 가문, 오다 가문의 북쪽에 있는 사이토 가문과 죄다 전쟁중이다. 오다 모리타카의 반란군도 있다. 서쪽에 있는 기타바타케 가문과는 무역 관계. 주변 가문에게 존경받지 못해 외교에 패널티가 있다.
혼슈 최북단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보통. 본거지는 겁나 넓은 이와테. 서쪽에 있는 모가미 가문과 전쟁 중이며 남쪽에 있는 하타케야마 가문과 무역 관계. 다테 타네무네가 이끄는 반란군이 있다.
현대의 야마나시 현 부근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는 카이. 무라카미, 오기가야츠, 이마가와, 호조, 키소 가문 사이에 끼어 있는 내륙 가문이다. 북쪽에 있는 무라카미 가문과 전쟁 중. 호조 가문과 무역 관계다.
* 외교 관계 보너스
현대의 아이치 현 부근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는 미카와. 이마가와 가문의 봉신이다. 종주인 이마가와 가문과 무역 관계이며 오다 가문과 전쟁 중.
현대의 니가타 현 부근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는 에치고. 봉신인 야마노우치 가문과 무역 관계이며 진보 가문과 전쟁 중. 자신이 다이묘 자리를 이어받지 못한 것에 반발한 나가오 하루카게의 반란군이 있다.
교토 바로 밑 이가를 다스리는 가문. 그냥 닌자로 유명한 가문이지만 와패니즈들 등쳐먹으려고 주요 가문 중 하나로 나왔다. 난이도 보통. 아시카가 막부와 무역 관계이다.
큐슈 북부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는 분고, 이외에 부젠을 영토로 가지고 있다. 이토 가문과 무역 관계이며 쇼니 가문, 오우치 가문과 전쟁 중.
- 하이큐/266화 . . . . 9회 일치
코즈메 또한 스포츠맨으로서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당시 네코마의 1학년들은 하나같이 별종이었던 셈이다. 그런 별종들끼리 잘 어울려서 해나가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특히 코즈메와 야마모토의 관계가 문제였다. 함께 훈련을 거듭하는 동안 둘은 극과 극의 성격 때문에 도무지 어울리질 못했다. 지나치게 스포츠맨적인 야마모토와 지나치게 스포츠맨답지 않은 코즈메, 둘은 훈련 중에도 공공연하게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패스 연습에서 둘이 한 조가 되자 어김없이 으르렁 거리기도 했다. 야마모토에겐 코즈메가 2학년 [[쿠로오 테츠로]]와 소꿉친구 사이라는 것도 거슬렸다. 대놓고 "쿠로오 선배랑 친해도 봐주지 않겠다"고 신경을 건드렸다. 코즈메도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건 관계없고 지금은 패스 연습 중이지 않냐고 받아쳤다. 야마모토가 코즈메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패기도 없고 목소리도 작은 점. 그리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실력은 또 그럭저럭 괜찮은 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코즈메 쪽은 딱히 어느게 싫다기 보단, 저쪽이 싸움을 거니 응해준다는 식이었다. 어쨌든 둘은 패스 연습 중에도 일부러 까다롭게 공을 보내며 티격태격했다. 근처에 있던 야쿠는 기합이 들어갔다고 웃었지만 쿠로오 쪽에서 보면 진상은 명백했다.
* 봄이 지나가면서 1학년들도 시합에 나가볼 기회가 왔다. 근성맨인 야마모토가 더 열을 올리는 시기다. 그는 선배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훈련을 계속했다. 때로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을 정도였지만 체육관에서 맨 마지막에 나가는건 거의 야마모토였다. 그건 중학생 때부터 계속된 일과였다. 당시에도 배구를 하던 야마모토는 친구들에게 "너무 무리하지 마라, 너무 힘이 들어갔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거기에 대한 야마모토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 그날 저녁. 체육관 정리 중. 코즈메는 쿠로오, 야마모토와 비품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쿠로오가 교사의 호출로 불려가면서 둘만 남게 된다. 코즈메가 문득 쿠로오의 조언을 떠올렸다. "조금은 협력할 생각도 해라".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오늘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언에 따라보기로 했다. 용구실을 나서던 코즈메가 야마모토에게 말을 걸었다. 어깨에서 힘을 조금 빼면 좋지 않겠냐고. 그게 상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일 거라곤 생각지 못한 채.
한편 막 체육관으로 돌아오다 이 촌극을 목격한 쿠로오는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 체육관 사건 이후, 둘은 여전히 한 팀에서 티격태격하며 훈련을 받았다. 여전히 연습에서는 코즈메가 야마모토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시합에서는 달랐다. 홍백전을 하면 코즈메의 교묘한 플레이에 야마모토가 속아넘어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이전처럼 "기합이 빠졌다"고 느끼지 않게 됐다. 그가 코즈메를 잘 관찰해본 결과, 그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그런 둘의 인간관계가 진전을 보인건 예선전이 끝나고 얼마 뒤였다. 둘은 또 한 번 체육관에서 대판 싸울 일이 있었다. 야마모토가 코즈메를 "켄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 허용석 . . . . 9회 일치
'''허용석'''(許龍錫, [[1956년]] [[7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제22대 [[대한민국의 관세청장|관세청장]]을 역임한 공무원이다. 본관은 [[하양 허씨|하양]]이며,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
* 1994 ~ 1995 :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 재무·건교·정통담당관
* 2004.04 ~ 2006.06 : 재정경제부 세제총괄심의관, 조세정책국장
* 2008.03 ~ 2010.03 : 관세청장
|직책 = [[대한민국의 관세청장|관세청장]]
[[분류:195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관세청장]][[분류:덕수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경영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밴더빌트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양 허씨]]
- 홍양호 (1955년) . . . . 9회 일치
* 총무처 행정사무관
* 통일부 교류협력국 심의관
* 통일부 기획관리실장
* 통일부 차관
*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위원장
|전임자 = [[이관세]]
|직책 = [[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통일부 차관]]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황연대 . . . . 9회 일치
[[1966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를 설립하여 상임이사로 취임했으며 [[1974년]]에는 [[미국]] [[뉴욕 대학교]] 재활의확과 연수 과정을 이수했다. [[1975년]]에는 소아마비 장애인을 위한 재활 시설인 정립회관(正立會館)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장애인의 권익 향상 활동에 참여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여의사회 홍보부장 겸 잡지 《여의사회보》 편집인을 맡았다.
[[1988년 하계 패럴림픽|1988년 서울 하계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1988년]]에는 월간 《주부생활》과 일요신문사가 공동 주관한 오늘의 여성상 시상식에서 받은 상금 200만원을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에 기부했다. 이 상금은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가 [[황연대 성취상]](옛 이름 황연대 극복상)을 시상하는 계기가 된다. 1988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 직속 한국장애인복지대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민국 노동부]] 산하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 1979년 서울특별시 주관 서울교육상 수여
* 1983년 한국로타리 주관 새서울로타리상 수상
* 1985년 5.16재단 주관 5.16 민족상 수상
* 1988년 월간 《주부생활》, 일요신문사 공동 주관 오늘의 여성상 수상
* 1992년 《[[한국일보]]》, 서울특별시 주관 서울시민대상 수상
* 2009년 한국YWCA 주관 제7회 한국 여성 지도자상 대상 수상<ref>{{웹 인용|url=http://whangaward.org/ko/dr-whang-youn-dai/main-awards|제목=주요 수상 - 황연대|언어=ko|확인날짜=2018-06-08}}</ref>
- 경주시 . . . . 8회 일치
경주시의 캐릭터 관이와 금이
보문관광단지
경주시립도서관 본관
국립경주박물관
|align="center"|관료
|align="center"|[[황수관]]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a/Korea-Gyeongju-Bomun_Lake_in_autumn-02.jpg/120px-Korea-Gyeongju-Bomun_Lake_in_autumn-02.jpg|[[보문관광단지]]호수
- 고성국 . . . . 8회 일치
1998년 10월 서울지검 공안1부는 고성국이 [[총풍 사건]]의 관련자인 오정은 전 청와대 행정관, 윤만석 전 [[이명박]] 의원 보좌관, 조청래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과 제[[15대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당선을 위한 '비선 참모 조직'으로 활동했다고 밝혔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5</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102700209112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10-27&officeId=00020&pageNo=12&printNo=24023&publishType=00010</ref>
당시 검찰의 중간수사발표에 따르면, 고성국 등 4명의 이회창 비선참모조직은 1997년 11월 초에 서울 평창동의 한 사무실에서의 회의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전달할 보고서에 대해 논의하다가, 총풍 사건 3인방 중 하나인 한성기로부터 이회창의 친동생 [[이회성]]을 통해 이 보고서를 이회창에게 직보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되고, 이후 한성기는 비선참모조직이 작성한 총 18건의 보고서를 이회창에게 전달했다. 검찰은 고성국과 총풍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중간수사발표를 내놓았다.
1998년 검찰 수사발표에 대해 고성국은 2012년 5월 "(이회창 측의) 비선 참모조직원이 아니었다. 후배들이 이회창 팀에도 갔고 김대중 팀에도 갔는데 일하다 나한테 가끔 물으러 왔다"고 말했다. 고성국은 이어 "당시 언론에서 나를 총풍 사건의 책임자라고 방송한 적이 있는데 그 사건과 관련해 검찰수사를 받은 적이 없고 사건은 무혐의 판결났다"고 밝혔다.<ref name="mediatoday.co.kr"/>
2011년 들어 고성국은 친[[박근혜]] 정치평론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디어오늘은 고성국의 친박 성향과 그의 동생이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기획사를 운영했다는 점을 연결지었다. 고성국은 자신의 동생이 설립한 정치기획사에 대해 "동생과 다른 사람이 합쳐 만든 회사로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ref name="mediatoday.co.kr"/>
* [[2010년]] ~ [[2012년]] : [[기독교방송|CBS]] [[시사자키|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고성국의 판읽기)
- 고아성 . . . . 8회 일치
| 학력 = [[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휴학
2015년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으로 브라운관에 복귀한 고아성은 성인 연기자로 변신에 성공했고,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신인연기상 등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2017년 [[MBC]]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으로 드라마 첫 주연을 맡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고아성 “부당한 경험 있어...은호원에게 감정이입했죠” |url =http://www.viva100.com/main/view.php?key=20170522010007552|출판사 =브릿지경제 |저자 =조은별|날짜 = 2017-05-24|확인날짜 =2017-09-07}}</ref>
* [[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휴학
| [[항거: 유관순 이야기]]
| 유관순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남선녀 홍보모델 위촉
| [[항거: 유관순 이야기]]
[[분류:2004년 데뷔]]][[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
- 곽월 . . . . 8회 일치
'''곽월'''(郭越, [[1518년]] ~ [[1586년]] [[8월 6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1556년]](명종 1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제주목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현풍 곽씨|현풍]](玄風)으로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재(定齋) 또는 정암(定庵)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아버지이다. 사후 아들 [[곽재우]]의 훈공으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성균관]][[사성]]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에 [[추증]]된 [[곽지번]](郭之藩)이고 아들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자 무신인 [[곽재우]]이다. 6세 때 어머니 허씨를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하였다. 첫 부인 진주강씨와 결혼하여 재우를 얻었으나 일찍 사별하고 부인 허씨와 재혼하였다.
[[1546년]](명종 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56년]](명종 1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 뒤 권지, 승문원정자, [[1566년]] 영천군수(榮川郡守) 등을 지냈으나 4년 만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2년]](선조 2년)에 [[선조]]의 여러차례의 간곡한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사헌부]]지평, [[1573년]] [[사헌부]]장령, [[1574년]] [[사간원]]사간 등을 지냈다.
[[1579년]](선조 12) 수[[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하였다.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김근 (고려) . . . . 8회 일치
'''김근'''(金覲, ? ~ ?)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신라]]왕실의 후예이다. [[김부일]], [[김부필 (고려)|김부필]], [[김부식]](金富軾), [[김부의 (고려)|김부의]] 형제의 아버지이자 [[김돈중]], [[김돈시]]의 할아버지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慶州). [[경상북도]] 출신.
본관은 경주로 역사가 김부식의 아버지이다. 신라 왕실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경주]]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던 위영(魏英)이고 아버지는 원충(元冲)이다. 그의 생애 초기나 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며, 아들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는 경주에서 생활했다 한다.
[[1080년]](문종 34년) [[호부]][[상서]] [[유홍]](柳洪), [[예부]][[시랑]] [[박인량]](朴寅亮) 등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송나라]]에 갔을 때 그는 [[박인량]]과 함께 시를 지었는데, 그의 시문에 감탄한 송나라 사람들이 직접 그에게 소화집(小華集) 이라는 문집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1086년]](선종 3년) [[예부]][[시랑]]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자위(李子威)와 함께 [[성균관]]시(成均館試)를 관장했고, 뒤에 [[국자감 (고려)|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左) 겸 좌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네 아들 [[김부필]]·[[김부일]]·[[김부식]]·[[김부의]] 모두가 글을 잘하고 관직에 올라 문벌을 형성하였다.
== 가족 관계 ==
[[분류:김부식]][[분류:고려 중기의 문신]][[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고려의 외교관]][[분류:고려의 시인]][[분류:경주 김씨]]
- 김기섭 (1939년) . . . . 8회 일치
'''김기섭'''(金己燮, [[1939년]] [[12월 7일]] ~ )은 [[신라호텔]]에서 근무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김영삼]]의 가신 그룹 인사였다. 본관은 [[김녕 김씨|김녕]].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아남산업]]에서 근무하다가 삼성계열사로 이직, [[신라호텔]]과 삼성전관 등에서 이사, 상무, 전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김영삼]] [[민주자유당]]의 총재특보로 발탁되었으며, 대선 당시 총재특보와 이미지메이킹 등을 담당하였다. [[문민정부]] 출범 후 [[안기부]]의 기조실장과 운영차장을 역임했다.
* [[1990년]] [[1월 11일]] [[삼성전관]] 상무
*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
* [[삼성전관]] 기획담당 전무이사
* [[1992년]] [[김영삼]] 대통령후보 특별보좌관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김동한 (1919년) . . . . 8회 일치
| 본관 = [[광산 김씨|광산]](光山)
[[1951년]]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해군|해군]] 군종 장교로 [[대한민국 해군|해군]] [[대위]] 임관하여 이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군종장교|군종사관]] [[사제]]로 참전하였으며 [[군종사제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1970년]] [[대한민국 해군|해군]] [[중령]] 예편하였다.
[[1978년]]부터는 결핵환자 요양시설을 설립, 경영하였다. 그의 세례명은 '''가롤로'''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 태생으로 [[추기경]] [[김수환]]의 넷째 형이었다.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光山)]]이며 [[대구광역시]] 출신.
그 뒤 김동한 가롤로 사제는 [[1949년]] [[6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목하다가 [[1951년]] [[대한민국 해군|해군]]의 첫 [[군종장교|군종사관]](군종 신부)로 [[대한민국 해군|해군]] [[대위]] 임관하였다.<ref name="가톨1">[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6413 (한국교회사 인물 80) (하)]{{깨진 링크|url=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6413 }} 가톨릭뉴스</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528492 김동환 신부와 함께하는 故 김수환 추기경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1953년 4월 진해 및 인근 본당들과 함께 ‘군민 합동 성체대회’ 개최했으며 이 대회는 진해 지역의 천주교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ref name="가톨1"/> 그 이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계산성당]] 등에서 사목하였다.
한편 김수환이 추기경에 임직된 이후 그는 일부러 김수환을 피하였다. 추기경인 동생에게 누가 될까봐 주교관 출입을 일부러 피했던 것이다.<ref>[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454191&sid=E&tid=0 고뇌와 번민 적지 않았던 인간 김수환 《내일신문》]</ref>
== 가족 관계 ==
- 김중혁 . . . . 8회 일치
음악, 영화, 스포츠, 그림을 아우르는 다양한 관심사 만큼이나 작가의 경력 또한 화려한데,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리는 인디밴드 쇼케이스를 진행했고, [[이동진(평론가)|이동진]] 평론가와 함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흑임자~~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 칼럼도 쓰고, 웹툰 작가로도 활동했다니[* 그림 솜씨가 출중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고 개성있는 편이다. <펭귄 뉴스>, <뭐라도 되겠지>, <미스터 모노레일>의 표지도 직접 그렸다.] 그야말로 문학계의 [[팔방미인]](...)
* [[악기들의 도서관]] (2008)
* 커트보니것을 좋아해서 사용하는 모든 아이디가 커트보니것과 관련있다.
강동 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근무중인 경위. 친구인 동진과는 [[베스트 프렌드|제일 친한 친구]]라고 한다. 동진과는 대학에 들어와 친해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러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문자를 보낸 친구와 한 달 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데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심한 성격인듯.(본인은 매일 연락을 주고 받아야 친구는 아니다는 말을 했다.) [[아싸|사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것이 매우 서툴다]]. 하지만 먼저 다가와 인사해주는 동진에게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이내 마음을 열게된다.
허은실과 이야기 하던 도중 허은실의 발이 다친것을 보자 나한테 관심있냐면서 10m 떨어져 있음으로 몸소 인증했다.
사실 그동안 자신도 법칙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몰랐었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도록 닥치고(...)살아왔던 것.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사회생활 정도는 해왔던 걸 ~~그냥 남중 남고 공대 군대를 가면 된다~~[* 안타깝게도 전부 공학을 갔다(...) 다만 직장은 확실히 고려해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내근만 하는 부서를 근무하고 있는 것도 웬만하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해서인 듯.] 보면 히키코모리가 따로 없는 삶을 살던 박미정보다 훨씬 강인한 인물이다. 통계학과에 온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동진은 자신이 사라지면 중혁이 반드시 조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블로그를 개설하여 비밀글들을 숨겨두었고 예상대로 중혁은 동진의 블로그속 마녀의 법칙을 찾아낸다. [* 이때 아이디는 중혁의 주민등록번호였으며 비밀번호는 'Shine on you'였다.]동진의 조사가 유독 오래 걸린 이유가 미정을 조사함과 동시에 대학시절부터 중혁에 관해서도 눈치채고 같이 역학조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혁과 관계된 여성 리스트가 나오는데 수십명~~이런말 하면 안되지만 '''부럽다'''. 게다가 다 남녀공학이야~~가까이 중혁을 좋아하여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글은 이 글을 볼 중혁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중혁아. 네가 사랑해야 돼.''' 라는 말, 즉 해결책을 써준 동진에 대한 크나큰 고마움을 느낀다.
- 김찬돈 . . . . 8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경력 = 법원도서관장
1959년에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능인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여 판사에 임용되었다. 1990년 [[대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2000년 2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2004년 2월에 부장판사에 승진하여 [[대구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대구고등법원]], [[부산고등법원]]에서 재판장을 하다가 법원장으로 승진하였다.
* 2010년 3월 경상북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2015년 2월 ~ 2016년 2월 법원도서관장
* 2017년 2월 ~제23대 대구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원 형사합의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10월 30일에 영덕 오십천 제방 공사 등과 관련하여 지역 건설업체 이사로부터 두차례에 걸쳐 1600만원의 뇌물을 받은데 이어 지역 건설업자 2명한테 예산확보를 위한 중앙부서 방문 경비 명목으로 모두 13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우연]] 영덕군수에 대하여 징역 2년6월 추징금 1600만원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29917]</ref>
- 김필곤 . . . . 8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1963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4년 12월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6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육군 법무관을 전역한 이후 1988년 10월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 판사에 임용되어 [[대구지방법원]], [[수원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가정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 2018년 3월 2일 제26대 대전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3월 31일에 모텔에 투숙한 손님들의 자동차 번호판을 나무 판자로 가려줘 자동차관리법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벌금 5만원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불복해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모텔 종업원에게 항소심에서 "해당 조항에서 처벌에 특별한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처벌 근거 조항에 대해서는 행정형벌의 일반적인 특징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며 "자동차 관리와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반적 위험성이 있는 행위를 모두 처벌 대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면서 원심을 깨고 벌금 5만원을 선고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7248.html]</ref> 7월 8일에 "지하철에서 장갑을 팔았다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받아야 한다"며 강제연행하려는 서울메트로 질서기동팀 소속 공익근무요원을 폭행한 홍모씨에게 "임의동행을 거부한 피고인을 강제 연행하려 하거나 경찰관이 도착할 때까지 체포한 행위는 공익근무요원의 정당한 직무상 행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피고인이 이에 대항해 폭행을 가했다 해도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며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0907080856516671?t=y]</ref> 12월 9일에 비자발급 심사를 부실하게 한 혐의로 기소되어 "일부러 직무를 포기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 전 영사 황모씨에 대해 "중국 현지 한인회의 부탁으로 서류가 보완되지 않은 중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도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하면서도 "자의적인 비자 발급으로 불법 체류자가 생긴 만큼 죄질이 나쁘지만 그동안 국가에 헌신해 왔고 나태한 마음으로 범행을 하게 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09120911405515959&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2010년 2월 11일에 면허정지 기간에 운전을 하다 적발돼 벌금 100만원에 약식 기소되자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면허 운전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무면허 운전은 면허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차를 몰아야 성립하는데 최씨가 정지처분 통지를 받지 못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비록 경찰 당국이 통지를 대신하는 공고를 거쳤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그가 면허 정지 사실을 알았다고 보기에 부족하다”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1002110848419738?t=y]</ref>
- 라미란 . . . . 8회 일치
'''여배우 누적 관객수 2위'''[* 1위 [[예수정]], 3위는 [[진경(배우)|진경]]이다.]
||<table align=center> '''개봉 연도''' || '''제목''' || '''배역''' || '''관객수(명)''' ||
||<|3> [[2009년]] || [[거북이 달린다]] || 마사지녀 1(단역)[* 역할 설정이 웃긴데, 아가씨들이 다 빠져서 겉절이를 무치다가 그냥 급히 온 여자였다. 극중에서 경찰관인 김윤석(극중 이름 조필성)이 성매매 현장을 덮치자, "저는 그냥 겉절이 무치다가유"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 - ||
|| [[남쪽으로 튀어]] || 연금관리공단 직원(특별출연) || - ||
||<-2> '''총 관객수''' ||<-3> 57,481,702명 ||
||<-2> '''평균 관객수''' ||<-3> 2,299,268명 ||
* 개념있는 언행을 보여 좋은 이미지의 연예인이기도 한데, 진짜사나이에 나와선 남녀를 포함한 역대급 엘리트의 모습[*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입대를 권유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물론 나이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당시 교육을 맡은 교관은 훈련을 마친 라미란이 다른 교육생들은 해냈다는 것이 그저 감동적이었다 말할 때 '''전시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지체해선 안 되겠다'''란 소감을 말해 벌써 군인의 마인드를 갖고 있다 칭찬하기도... ~~체력 제외~~ 사격을 포함한 모든 훈련부터 군 생활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을 보여 찬사를 받았고 본인의 남편이 흔히 말하는 노가다를 뛴다 해서 전혀 창피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다고 말해 신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연정(우주소녀)|유연정]]과 외모가 닮아 모녀관계 의혹을 받고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언니들의 슬램덩크]]에서 [[I.O.I]]의 연습실에 찾아갔던 당시. 여담으로 [[연정(우주소녀)|연정]]이 나중에 합류한 [[우주소녀]]는 [[신동엽(코미디언)|몇몇]] [[이민호(1987)|연예인]]들과 [[성소|닮은꼴]]인 [[다영|멤버]][[연정(우주소녀)|들]]이 좀 있는 그룹이다. 그리고 라미란은 2017 KBS 연기대상 단막극 부문에 [[I.O.I]] 출신의 [[김소혜(1999)|김소혜]]와 함께 노미네이트된 적이 있다.]
- 랑그릿사 . . . . 8회 일치
우선 닌텐도의 암흑룡과 빛의 검(1990)과 메가 드라이브의 랑그릿사(1991)는 발매 시기가 굉장히 비슷한데, 암흑룡과 빛의 검을 참조하여 이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개발된 것이 랑그릿사라고 생각해보면 마케팅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쉽다.
랑그릿사가 암흑룡과 빛의 검에 대항하는 게임이라는 점은, 판타지 세계관을 소재로 한 시뮬레이션 RPG라는 점만이 아니라, 줄거리 역시 단순히 '빛과 어둠의 대결'이라는 판타지적 선악대결의 관점 만이 아니라, '제국에 대항하는 저항군'이라는 요소를 더해서 국가간의 전쟁이 복합된 전개가 들어가는 등. 양자 간의 유사성이 많다.(물론 넓게 보면 '스타워즈'의 영향이겠지만.)
단순한 유사성도 있을 수 있겠지만, 서로 다른 경쟁 게임기에서 비슷한 장르로, 이렇게 많이 비슷한 게임이 나왔다는 점에서 보면, 랑그릿사는 파이어 엠블렘을 굉장히 많이 의식하여 대항하는 관점에서 만든 게임으로 보는 것도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 관련 항목 =
[[그로우랜서]][* 스토리상 연관성은 거의 없으나 개발진이라든가 기존 메사이어의 컨셉들을 상당수 가져왔기 때문에 관련이 있는 게임이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랑그릿사]]
- 무협/용어 . . . . 8회 일치
[[무협]] 장르에는 특정한 관용구가 존재한다. 거의 무협 장르에만 쓰이는 용어로서, 한국 무협소설에서는 매우 특이한 무협소설만의 문체를 만들어낸다.
* 관용적인 조어 : 정파, 사파, 흑도, 백도, 내공, 검기, 강기, 본좌 등이 장르 공통의 클리셰적으로 쓰이는 관용 조어이다.
* 독자적인 조어 : 과잉 한자어, 관용적인 조어를 넘어서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쓰이지 않고, (주로 한국의) 무협소설에서만 쓰이는 단어'.
* 관후(寬厚) : 너그럽다는 뜻. 일단 한국어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으나, 일상적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어이다.
=== 관용적 조어 ===
* 무복(武服) : 무림인(武林人)이 입는 옷을 무복이라 부른다. 하지만 독자적인 조어에 가까우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본래 중국에는 특별히 무술인을 위한 복장이 있는게 아니었으며 일반인이 입는 것과 비슷한 옷을 입었다. 소림사의 경우 특유한 무승복(武僧服)이 있거나, 도가 문파의 경우 도복(道服)을 입지만 종교에 관련된 복장이지 무술을 위한 복장이 아니다.
* 애병(愛兵) : 애용(愛用)하는 병기(兵器)라는 의미. 한국 무협소설 이외에는 이러한 단어가 쓰이지 않는다. 중국 고전에는 [[손자병법]]과 관련하여 애병총화(愛兵總和)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애용하는 병장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병사]]들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 문문 . . . . 8회 일치
음악 활동 이전엔 본래 [[직업군인]]이었으며 부사관으로 5년간 복무하다가, 20대 중반에 음악에 대한 꿈 때문에 전역을 하고 [[여주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에 '저수지의 딸들'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음악계에 진입했으나 밴드 활동이 잘 되지 않자 잠정 해체되고, 그 후 2016년 7월에 싱글 앨범 [Moon, Moon]으로 데뷔했다. 대표곡으로는 '''물감'''과, [[비행운(노래)|비행운]] 등이 있다.
문제는 해당 내용이 범행 당시 혹은 수사 도중이 아닌, '''적법한 절차로 죗값을 다 치르고도 한참이 지난 이후에야''' 폭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디스패치#s-4.1]] 문서에 서술.
||<rowbgcolor=white> 05 || 미술관 || 3분 29초 ||
||<rowbgcolor=white> [[파일:문문 미술관.jpg|width=100%]] || 미술관 || 2017.08.28 || '''미술관 (With 모은)'''[br] 미술관 (Inst.) ||
||<-2><:>{{{#000 미술관 (With 모은)}}}||<:><#FFE4B5>96420||<:><#FFCCCC>90541||
- 미래소년 코난/설정 . . . . 8회 일치
다이스 선장이 담당한 배. 원양항해가 가능한 기범선이다. 동력기관으로는 돛과 함께 증기기관을 사용하며, 증기기관의 연료로는 불타는 것은 다 된다고 하는 것을 볼때 혼소가 가능한 보일러라고 보면 된다. 선체 상부에는 2개의 마스트와 2개의 굴뚝이 있으며, 수선(首線)부분이 부풀어 오른 텀블홈형 선체를 갖고 있다.
[[비행정]]. 기간트를 제외하면 작품상에 등장하는 유일하게 전투가 가능한 비행기다. 전체적으로 기체는 둥글며, 주익은 있지만 수평꼬리날개가 없고, 수직꼬리날개 상단 후방에 수소가스터빈엔진으로 구동하는 프로펠러 1기가 장착된다. 최고속도는 360km/h 이며, 최저속도는 60km/h 까지 가능하다. 기수에 고정된 기관총과 선회식 기관총으로 무장한다.
인더스트리아의 작업용 [[로봇]]. 로봇이지만 조작원 1명이 탑승해서 조작해야 하는 물건이다. 일반적인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며, 3개의 레버와 4개의 스위치로 조작이 가능하다. 형태는 상자 모양의 본체에 양팔과 양다리가 붙은 모양이며, 머리가 있어야 할 지점에는 조작원이 탑승하는 좌석이 오픈형으로 설치된다.
허접한 모양과는 달리 작업용으로도, 전투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특히 양팔의 매니펼레이터(manipulator)는 매우 정밀한 편이라, 삽질은 물론이거니와 기관총 등을 직접 들고 사격이 가능할 지경이다. 그래서 각종 작업장 및 바라쿠다 호에서도 널리 사용된다. 코믹하게 묘사될 때는 로보노이드의 매니펼레이터로 (탑승자의) 머리를 긁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더스트리아에서 유일하게 원양항해가 가능한 무장선박. 전장 58m, 전폭 8.3m, 배수량 415t의 비교적 소형의 선박이며, 가스터빈 동력에 최고속력은 24노트다. 무장은 76mm 단장포탑 1기가 선수에 있고, 57mm 단장포탑 1기가 선미에 있으며, 함교에 23mm [[기관포]] 2문이 있다.
- 박경림(MC) . . . . 8회 일치
|| '''출생''' ||<(> [[1979년]] [[3월 30일]][*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이다. 실제 생년월일은 1978년 12월 8일생이다. 라디오 DJ 하던 시절 본인이 어릴 때 약하게 태어나 출생신고가 늦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고, 2002년 말띠해, 2014년 말띠해 당시에 본인을 [[https://entertain.v.daum.net/v/20140102191109515|말띠라고 소개했다.]] 심지어 2001년 1월 9일 뉴논스톱에서 생일로 사주를 보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이때 극중 박경림 스스로가 언급한 자기 생일이 12월 8일이었다. 물론, 학교는 1979년생들과 다녔다.] ([age(1979-03-30)]세),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관평길) ||
|| '''본관''' ||<(> 충주 박씨 ||
* 상술된대로 인맥을 늘리고 관리하는 능력이 탁월해서인지, 고교시절부터 활발한 외부활동으로 데뷔전에 이미 [[장동건]]을 자기 학교 행사에 초대하여 오게했던 적[* 다만 이 때는 아직 장동건이 지금과 같은 최정상급 인기연예인은 아니었다. 원래는 당시 최고였던 신성우를 섭외하려 했지만 실패해 같은 소속사의 신인이던 장동건을 섭외했다고 한다.]이 있었으며, [[이휘재]]와도 고등학교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오후 2시부터 20분간 진행된 민방위 훈련으로 인해 [[두시의 데이트]]가 14시 20분에 시작하자 오프닝에서 "민방위 훈련 때문에 늦어진 20분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하느냐"라는 발언을 해 뭇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오프닝 멘트 후 청취자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청취자와 20분 늦게 만나는 마음이 아쉬워서 어떻게 재미있게 표현할까 하다가 많은 분을 속상하게 한 것 같다. 오프닝에서 표현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나 지금도 희생하고 있으신 분들을 불편하게 하고 화나게 해 드린 것 같아 생방송 중 사과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진심을 다해 사과의 말씀 드리겠다” 며 의도와는 다르게 표현된 경솔했던 발언에 대해 즉시 방송에서 사과했다.[* 아버지 역시 상이군경임을 밝혀 불손한 의도의 발언이 아니었단 뜻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방송통신 위원회는 해당프로그램에 주의 조치를 내렸다.][[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2695&yy=2014#axzz3Ba6cD9TR|기사]] 게다가 하필이면 "남성만 병역 합헌"문제로 넷상에서 군대관련 문제가 좀 예민할 때라...--안 될지도--
* 2010년대 중반들어 각종 영화 제작발표회, 쇼케이스, 시사회의 MC를 자주 맡고 있다. [[신세계(영화)]], [[명량]], [[내부자들(영화)]], [[사도(영화)]], [[검사외전]], [[곡성(영화)]], [[아가씨(영화)]], [[1987(영화)]] 등 근래 화제작들을 싹쓸이하고 있는 수준. --원래 행사진행MC라면 당연히 갖춰야만 하는 소양임에도 다들 잘안하는--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도 많이 공부해오고[* 영화 곡성 제작발표회에선 대본에 써있지도 않았던 감독의 전작 황해의 개봉일을 정확히 언급하는 등. 사전 준비가 철저하다고 [[http://extmovie.maxmovie.com/xe/index.php?_filter=search&mid=movietalk&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B%B0%95%EA%B2%BD%EB%A6%BC&document_srl=10927091|#]]] 연예계에 인맥들도 많고 진행실력도 무난한 덕분에 업계 관계자들이 꽤 선호하는 듯 하며 [[네이버]] [[V앱]] 무비토크 진행을 맡고 있다.
|| 2006년 || [[MBC 연기대상]] || 라디오 부문 우수상[* 호명해야 할 지인들이 너무 많은 관계로(...) 자막을 통해 미처 부르지 못할 것 같은 고마운 분들을 나열해 화제였다.] || 박경림의 심심타파 ||
|| 2012년 ||<-2> 행복나눔인 보건복지부장관상 || ||
== 관련 문서 ==
- 박경석 (1960년) . . . . 8회 일치
이후 5년간 집안에서만 생활하다가 [[1988년]] 서울장애인복지관에 입소, 그 곳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91년]] [[숭실대학교]]에 입학하여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였으며<ref name=park /> [[200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숭실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논의가 시작된 장애인을 위한 야간학교의 설립에도 참여하여 [[199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구의동]](현 [[광진구]]) 정립회관 일부를 빌려 노들장애인야간학교(현 [[노들야학|노들장애인야학]])를 설립하였다.
[[2001년]] [[1월 21일]]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용 리프트가 추락하여 이를 이용하던 장애인 부부가 사망 및 중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는 5개 관련 단체들과 공동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민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그 해 4월 장애인이동권연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2007년]]말, 정립회관 측의 요구로 노들장애인야학은 그곳에서 퇴거당하여 [[이화동|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수업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ref>[http://www.segye.com/content/html/2008/01/02/20080102001716.html 터전 빼앗긴 ‘노들 장애인 야학’ 천막 개학식], 《[[세계일보]]》, 2008년 1월 3일</ref> 시민들의 모금과 [[서울특별시]]의 예산 지원으로 [[2008년]] 3월 마로니에 공원 인근의 건물에 입주하게 되었다.
* [[2002년]] 장애인 리프트 추락사고와 관련하여 [[서울지하철]] 철로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다가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ref name=pressian>[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845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몸…당신은 자유로운가], 《[[프레시안]]》, 2014년 5월 4일</ref>
*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 초청되어 대통령에게 장애인 인권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다가 경호실 직원들에 의해 퇴장당한 사건이 있었다.<ref name=khan />
* [[2012년]] [[10월 26일]] 장애인 당사자 인권운동가 김주영이 화재로 사망한 사건과 관련하여, 광화문에서 장례식 노제를 치르다 폴리스라인을 넘어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은 장애인 활동가 18명에게 총 1500여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였고, 박경석은 이를 대신하여 스스로 노역형을 자처, [[서울구치소]]에서 5일간 노역형을 복역하고 출소하였다.<ref name=park /><ref name=pressian />
- 박정수(정치인) . . . . 8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3478><#FFFFFF><-5><:> {{{#003478 ''' 대한민국 ''' }}} {{{#003478 ''' 외교통상부 ''' }}} {{{#003478 ''' 장관 ''' }}} ||
1932년 2월 9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에서 태어났다.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던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5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5년에는 부인 [[이범준(동명이인)|이범준]]과 함께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68년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1973년 [[국민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의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원의 강제추방 사건에 맞대응해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원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강제추방한 것이 화근이 되어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경질된다. 이후 19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복귀했다.
- 박홍 (신부) . . . . 8회 일치
'''박홍'''(朴弘, [[1941년]] [[2월 27일]], [[대구광역시]])은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천주교]] [[예수회]] 소속 성직자이다. [[천주교]] 신부로서 정치 관여 발언을 많이 했고, 서강대 총장을 지냈으며 [[극우 반공주의|반공주의]], [[보수주의]] 성향의 언론인이기도 했다. [[1994년]] [[주사파]]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
[[1994년]] [[서강대학교]] 총장으로 재직중, 주사파 관련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767077 1등신문 대전일보 59년 정통언론<!-- 봇이 붙인 제목 -->]</ref>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종교분과위원장을 지냈으며, '주사파'발언 이후 경찰관 2명이 그를 밀착하며 신변을 보호하기도 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hani.co.kr/h21/data/L000626/1pau6q2f.html 한겨레 21<!-- 봇이 붙인 제목 -->]</ref> [[1997년]] 총장직에서 퇴임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15&aid=0000004186&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 으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운동권 인사들은 박홍 총장에게 근거를 대라며 추궁했다. 이에 대해 박홍 총장은 "주사파 관련 내용을 고해성사 때 들은 내용"이라고 답했다. 이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김동주 공동의장 등 신도 6명이 박홍 신부를 '고해성사 비밀 누설 혐의'로 서울대교구에 고발했다. 당시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이었던 염수정 추기경은 사건 조사를 담당했고 박홍 총장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83100289119004&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8-31&officeId=00028&pageNo=19&printNo=1997&publishType=00010|<한겨레신문>1994년 8월31일자 19면]</ref>
* [[홍관희]]
* [[박관수 (1897년)|박관수]]
* [[홍관희]]
- 북한의 역사왜곡 . . . . 8회 일치
북한의 역사왜곡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특색이 강한데, 너무 왜곡의 강도가 심해서 역사관이 다르다거나 견해차이가 있다는 수준이 아니다. 이미 '''북한 사람들의 역사관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선'''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북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은 [[북한]]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월미도에서 리대훈 해안포 중대장이 단 4문의 포, 1,000대의 비행기와 수백천의 함선의 함선을 이끌고 공격하는 맥아더의 5만 대군을 3일간 좌절시켜 대참패를 안기고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위 내용은 1983년에 북한에서 "월미도"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홍보하였으며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관으로 보인다.
>- 광주 인민봉기가 일어나 미 국무장관 머스키, 국방장관 브라운, 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 브레진스키, 미 중앙정보국장 터너 등은 긴급모의를 벌려놓고 광주 인민봉기를 진압할 흉계를 꾸미었다.
>-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는 항쟁을 ‘무쇠주먹으로 진압해야 한다’고 폭언하였으며 ‘초전박살’, ‘젊은이 싹쓸이 작전’의 살인수법들도 불사하라고 명령했다.
>- 이에 따라 대 살육작전을 현지에서 조종 지휘할 데 대한 임무를 받은 남조선 강점 미군사령관 윅캄(위컴)은 의로운 항쟁자들을 ‘버릇없는 망나니’, 지어는 ‘들쥐’로 모독하면서 ‘공수특전대’ 5개 여단과 보병사단, 기갑부대, 항공대를 비롯한 7만 여명의 방대한 무력과 장갑차, 중포, 군용직승기와 지어는 항공모함전단까지 광주의 평화적 주민들을 살육하는데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 블랙 클로버/89화 . . . . 8회 일치
* [[판젤 크루거]](젤)는 다이아몬드 왕국 시절 지휘관이자 교관. 상당한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젤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바람 마법이 다이아몬드 병사들의 마법을 상쇄, 자신은 놀라운 속도로 적진을 헤집어 놓는다. 사실 그는 다이아몬드 왕국 시절 지휘관이자 교관으로 유명한 인물. 그러나 지금은 나라를 배신했다고 해서 배신자 취급이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도 걸려있는지 막대한 포상금이 나올 거라며 죽이려 든다.
* 젤이 무모하게 달려든 것 같지만 사실은 고도로 계산된 작전이다. 아군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는 쉽게 반격하기 어려운 법. 마르스와 라드로스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젤의 예상대로 둘은 상황을 관망하고 나서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혼자서 이 대병력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자신의 반려자와 제자에게 기대하고 있다. 거기에 부응하듯 다이아몬드 측이 전열을 재정비하려 할 때, 아래 쪽 숲에서 일제히 마법의 사격이 가해진다.
마리엘라는 적의 지휘관에게 사실 자신은 다이아몬드 왕국의 암살부대에 있었으며, 지금 이들은 너무 약해 빠졌다고 밝힌다. 마리엘라는 한때 자신의 삶을 위해 남을 죽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와서 무엇을 하든 그 죄는 씻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이아몬드의 횡포를 막는 것, 그게 자신의 속죄라고 생각한다. 다이아몬드의 지휘관은 그녀를 배반자라 욕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 마르스와 라드로스는 아직도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전세가 상당히 기울었는데도 둘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라드로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쾌활한 말투로 밑에 덫이 있으니 함부로 날아가면 안 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보이니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혼자서 돌격한다.
- 상디 . . . . 8회 일치
요리사답게 [[밀짚모자 일당|밀짚모자 해적단]]의 식량 관리도 더불어 하고 있는데 [[고잉 메리호]] 시절에는 늘 [[몽키 D. 루피|어떤 바보 식충이]] 때문에 식량이 없어져서 종종 나미에게 자물쇠 달린 냉장고를 사자고 조르기도 했으나 [[사우전드 써니 호]]로 바뀐 이후에는 [[프랑키]]가 직접 자물쇠 달린 냉장고를 만들어 준 덕분에 식량 도난 문제는 없어졌다. ~~그리고 2년뒤, 루피는 패기를 배워왔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럽게 보이겠다'''는 이유로 무리해서 담배를 피우다 결국 골초가 됐는데도 미각이 전혀 둔해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면 손에 담배 냄새가 흥건히 묻어서 요리에도 냄새가 베일 텐데도 그런 묘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위의 프로필에서 쵸파가 상디에게 느껴진느 향기는 담배와 해산물 냄새라고 되어있는데, 수트에는 담배 냄새가 베어있어도 요리전 손의 위생 관리에는 철저한 모양] 또한 담배는 해상레스토랑에서 일을 했고 항상 항해생활을 해야되사 시중에서 구입하기 보단 직접 제작하는듯 하다.[* 클리크와의 전투후 루피를 간호하느라 상디의 방이 나왔는데 담배를 직접 제작한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샤키]처럼 담배를 피는 또 다른 캐릭터들의 담배와 비교해봐도 형태가 좀 다르다. 일반 담배와 달리 만드는 담배 특유의 약간 찌그러진 모양이 묘하게 리얼하다.] 더불어 수영의 달인으로서 [[어인]]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의 폐활량까지 갖추고 있으니 필시 원피스의 담배 자체가 현실의 담배와 다른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상디의 과거회상에서 담배를 처음 피우는 상디를 보고 제프가 "관둬. 담배 같을걸 피우면 혀가 돌아버린다."라고 한마디 하는 장면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게...거참. ~~아니면 상디의 미각과 폐활량이 패기를 쓸 줄 알거나~~]
[[나미(원피스)|나미]]나 [[니코 로빈]]과는 다르게 지식량이나 정보 수집 능력 면에선 떨어지지만 '''주어진 상황 자체를 바꿔 버리는 전략안'''이 특출해 해적단 내에서 비공식적인 참모 역을 맡고 있다.[http://blog.naver.com/zt777/20175605172 일단 밀짚모자 멤버 중 조커 겸 히든카드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건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그러나 해당 링크의 인터뷰 내용은 루머일 가능성이 있다. 상디가 조커 포지션인건 사실이지만 결말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활약이 있을거라고 보장할수는 없다는 것.] 루피와 조로와 함께 해적단의 주 전투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면서도 완력에 의존하는 [몽키 D 루피|이] [롤로노아 조로|둘]과는 달리[* 그런데 조로는 무조건 완력에 의존하는게 아니고 적어도 전투에 관한한 머리만큼은 밀짚모자 일당 중에서도 최상급이다. 더구나 루피 부재시 자신이 선장 루피를 대신하여 전략이나 작전을 지시하는 등 상디와는 다른 방향의 두뇌 플레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히려 루피야말로 순수하게 완력과 본능에 의존하는 스타일에 더 가깝다.] 일행의 식단을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전황 자체를 유리하게 바꿔버리는 능력을 보여주는 등, 밀짚모자 해적단에서는 전술전략 양쪽을 모두 갖춘 유일한 멤버이다. 쉽게 말하자면 루피와 조로가 [[람보]]같은 케릭터라면 상디는 [[007]] 같은 스파이 스타일. 예를 들면 [[바로크 워크스]]의 꼬리를 잡거나, [[갓 에넬]]의 비행선을 망가뜨리거나, 정의의 문을 닫아 해류를 만들어 탈출을 쉽게 만들어 낸 장면들은 그의 임기응변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한 최고의 두뇌플레이. 말하자면 지략과 완력을 모두 겸비한 밀짚모자 해적단의 '''조커'''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그의 또 하나의 염원은 [[투명투명 열매]]를 얻어 여탕을 실컷 엿보는 것 이었는데, [[압살롬(원피스)|압살롬]]이 이미 그것을 먹어버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꿈이 깨지자]] 여러 가지 의미로 분노해 압살롬을 끔살낸다. 참고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상상해왔던 덕분에 투명투명 열매와 관련된 모든 전술을 파악하고 있어서 꽤 선전했는데, 위에 서술한 밀짚모자 일당 내 '히든카드'로서 첩보원 포지션에 덧대어 생각해보면 투명해진다는 능력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열매일지도. ~~당사자는 순전히 음흉한 마음에서 원했던 것 뿐이지만(...)~~ --두번째로 먹길 원했던 열매는 [[또록또록 열매]]이다.이유는....알 것이라고 믿겠다.(드레드로자 에피소드에서 나온다.)--
* [[wiki:"쿠로오비(원피스)" 쿠로오비]] - 어인을 상대로 수중전까지 하는 바람에 고전. 그러나 어인의 약점을 파악해 지상으로 끌어올린 후에 양고기 슈트 풀 코스로 마무리.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애니판에서는 수중에서 탈출한 후 총 7대를 공격했으나 스페셜인 에피소드 오브 나미에서는 17대로 그 횟수가 늘어났다. ~~물속에서 발린 원한이 엄청 컸나 보다~~ ~~근데 그걸 다 센 사람은 도대체~~
* [[wiki:"와다츠미(원피스)" 와다츠미]] - 반더 데켄 9세의 부하. 크기가 마인 수준이다. [[징베]]와 함께 담당했으며 계속 몸 속에 공기를 주입하는 와다츠미에게 계속 크라켄보다 작다고 도발하면서 끝없이 크게 만든 후에 징베가 먼저 무뢰관으로 공중으로 띄운 후 상디의 헬 메모리즈로 싸그리 태워버린다.
> ~~잘 들어 [[우솝]] 나는 나미씨를 위해서라면 '''니가''' 죽어도 상관안해~~
- 송병구 . . . . 8회 일치
| 별명 = (무결점의) 총사령관, 공룡토스, 송순신,연승 브레이커,
둘의 첫 만남은 2007년 5월 14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이지만, 실질적인 라이벌 관계는 두 번째로 만난 [[곰TV MSL 시즌2]] 결승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까지 동일한 종족 간의 결승은 왠만해선 흥행이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두 선수는 5경기까지 가는 모든 경기를 명승부로 만들며 우승자 [[김택용]]도, 준우승자 송병구도 박수를 받는다. 이후 두 선수 모두 전성기를 이루면서 역대 [[스타크래프트]] 리그 판도에 전혀 없던 [[프로토스]]의 전성기를 만들고, [[김택용]]과 송병구의 '택뱅시대'를 만들게 된다.
온게임넷의 엄재경 해설위원과 김태형 해설위원은, 스타 뒷담화 방송에서 과거 [[박정석]]과 [[강민 (프로게이머)|강민]]의 라이벌 관계와 비교하여 [[박정석]]-송병구의 정파 [[프로토스]], [[강민 (프로게이머)|강민]]-[[김택용]]의 사파 [[프로토스]]라는 프로토스 계보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후 프로리그 1라운드 포스트시즌에서는 [[원이삭]]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으며 2라운드에서 김준호와 이영호를 꺾는 등 2014년 2월 프로리그 3연승을 기록,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2014년 첫 GSL 예선전도 통과하며, 송병구의 2014년은 난관없이 잘 풀려가고 있다. 특히 5월에 들어 ESTV CUP 에서 우승을 하였으며 프로리그 3라운드 SK텔레콤과의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3라운드 SK텔레콤의 전승을 막았다.
송병구만 만나면 한없이 작아지던 염보성은 2008년 9월 6일 신한은행 올스타전경기에서 마침내 자신의 천적 송병구를 물리치며 승리소감으로 "엄마 나 병구형 이겼어!" 라고 인터뷰하며 그동안의 한을 조금은 씻어낼 수 있었다.<ref>실제 인터뷰에서 말한게아니라 채팅으로 말했다</ref> 그 경기는 송병구와의 천적관계를 조금은 극복하는 발판이 되면서 이후 계속된 대결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게 됐다. 하지만 상대전적은 공식전에서 14:6, 비공식전 포함 전적으로는 18:7로 여전히 송병구가 크게 이기고 있다. 현재 염보성은 은퇴를 했고 둘의 대결은 볼 수 없게 됐다.
**'''스타리그 100승 달성''' - [[임요환]], [[홍진호]] 다음 역대 세번째이며 프로토스 유일<ref>{{뉴스 인용|title='사령관' 송병구, 역대 3번째 스타리그 100승 대기록 달성|url=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259548&ctg=1601|newspaper=중앙일보|date=2012-05-22}}{{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259548&ctg=1601 }}</ref><ref>{{뉴스 인용|title=삼성전자 송병구, 레전드의 반열에 오르다. 임요환-홍진호에 이어 세 번째 온게임넷 개인리그 100승 점령|url=http://esports.dailygame.co.kr/view.php?ud=201205222119450060784|newspaper=데일리e스포츠|date=2012-05-22}}</ref>
*무결점의 총사령관 : [[MBC게임]] 작가진에서 지어준 별명. 전종족을 상대로 한 높은 승률, 모든 유닛을 두루 다루는 플레이 스타일에 착안
*예능왕 : 스타크래프트와 관련된 다른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예능감을 선보여 지어진 별명.
- 스틸오션 . . . . 8회 일치
* 어뢰발사관(T-Bomber)
박살나면 박살난 부분의 어뢰발사관을 못 쓴다.
함종에 관계없이 공평한 극딜을 때려박을 수 있는 무장. 포에 비해 장전시간이 길고 탄속이 느려서 신중하게 사용해야한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충돌하면 폭발하지 않고 지나가니 주의. 잠항한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다.
* 기관총
=== 사령관 ===
[[월드 오브 탱크]]의 승무원에 대응하는 시스템. [[스틸오션/사령관]] 페이지 참조.
로비에서 할 수 있는 요소. 함선을 도색해 위장성을 늘리고 깃발을 달아 사령관 포인트 회복 속도를 늘릴 수 있다. 사소한 문제는 캐시템이라는 것.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스틸오션]]
- 식극의 소마/174화 . . . . 8회 일치
* 시험관은 성공적으로 반역자팀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는데 시험종료 30분을 남기고 소마 일행이 돌아온다.
* 시험관은 소마일행의 "여기서 가장 맛있는 연어 요리를 하겠다"는 선언에 경악한다.
* 종료까지 30분 밖에 남지 않자 시험관은 반역자 떨구기가 성공했다고 희희낙락하다.
* 시험관은 형편없는 연어나 구해왔을 거라고 예상하는데 보기좋게 빗나간다.
* 그러나 지금은 겨울. 시험관은 어째서 여름 연어를 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 시험관은 이들의 인맥과 지식에 감탄하지만 어차피 시간 안에 조리는 불가능할 거라고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 하지만 반역자를 처단한답시고 1학년 베스트8을 한 팀에 몰아놓은 인선 덕에 역관광을 당한다.
* 시험관은 입으로는 현실을 부정하지만 혀는 정직해서 그 놀라운 맛에 굴복하고 만다.
- 신민아 . . . . 8회 일치
한 때 CF쪽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유독 [[영화]]와는 인연이 없는지,--드라마라고 아닌건 아닌데..-- 아니면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이 낮은건지 출연한 작품 중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말아먹었다'''. 그 덕분에 ''''한국 영화사 최고의 [[핵잠수함]]'''', ''''[[충무로]]의 흥행 [[부도]] [[수표]]''''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의외로 이름난 드라마작가나 유명 [[영화 감독]]들과 작품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CF나 영화에 캐스팅되고 있어서 '[[스폰서]]가 빵빵하다', '[[언론플레이]]에 능하다'라는 의견도 다수 가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공히 '히트작이 없음'에도, 'CF에 있어서는 가히 도배'를 하고 있는건 미스테리다. 흥행 관련해서는 비슷한 내용이 [[봉태규]] 항목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2010년대 들어서는 남배우로 봉태규보다 ~~새로 떠오르는 국밥배우~~ ~~흥행전선 먹구름~~[[김강우]]와 더 많이 비교되는 것 같다. 다만 김강우의 경우 2017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살아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 2015년 10월 15일 약 7년째 꾸준히 기부를 해온 사실이 기사로 나왔다. 새터민들을 돕는 단체 및 사랑의 열매를 통한 매달 200만원, 연말에는 5천만원에서 1억정도의 액수를 기부해 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싱글맘들을 위해 분유를 기부하기도 하고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돕기도 하는 등 그동안 기부한 액수가 약 10억 원 정도라고 한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178574|관련 기사]] 특히 새터민들을 돕는 행사는 몇 년전 공개 행사를 할때 참석하였는데 드라마 작가인 노희경씨와 함께 하기도 하였다. 불교 단체를 통해 기부한 적도 있는데, 재미있게도 신민아는 개신교 신자. 이따금 절에서 목격담이 있기도 하고, 오래 전 인터뷰에서 자주 가는 장소 중 하나가 봉은사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타종교에 대한 편견은 없는 모양. --드라마 고사장에서 절을 하지는 않는 정도--
* 신민아의 연관 검색어 중 가장 꾸준한 것은 네일과 피어싱. 손톱 관리를 상당히 깔끔하게 잘하는 편으로 별다른 장식이나 패턴 같은 것 없이 단색으로 깔끔하게 바르는 편인데, 그날 입은 옷과 컬러를 잘 맞추는 편이라 인기가 꽤 높다. 피어싱도 다른 여배우나 아이돌, 가수들처럼 신민아존이라고 통칭되기도 한다. --안 아플까--
*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인터뷰에 최근 읽은 책이나 재미있게 본 책들을 말하기도 한다. 팬들 중 관심이 생긴다면 인터뷰를 잘 찾아볼 것. 음악도 상당히 좋아해서 수집량도 꽤 된다고. 제 3세계로 분류되는 음악이나 샹송을 좋아해서 해외로 나갈때마다 사서 모으는 편이고 같은 앨범을 여러번 산 경험도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도 있다.
||<table align=center><#FF8200>'''{{{#white 연도}}}'''||<#FF9100>'''{{{#white 제목}}}'''||<#FFA500>'''{{{#white 활동}}}'''||<#FF9100>'''{{{#white 배역}}}'''||<#FF9100>'''{{{#white 감독}}}'''||<#FF9100>'''{{{#white 관객수}}}'''||<#FF9100>'''{{{#white 흥행}}}'''||
||2005||새드 무비||주연||안수은 役||권종관||90만 명||실패||
||2001||[[화산고]]||주연||유채이 役||김태균||170만 명[* 공식기록 58만 명은 서울관객수이다. ] ||실패[* 사실 실패라고 보기 묘한게 국내에서 10억 정도 적자가 발생한건 맞지만, 수출로 메꾸고 오히려 더 남아서 2005년 속편 기획에 돌입했다가 회사 합병 등의 사정으로 엎어졌다. ] ||
- 신화용 . . . . 8회 일치
2014 시즌에도 맹활약 중인데, 2014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부리람 원정에서는 신화용 답지 않은 실수로 1골을 내줬으나 팀이 승리하여 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시즌 초반 [[황지수]]의 부상 결장으로 매 경기 실점을 내주고 있는 포항 수비진의 삽질을 혼자서 다 커버하는 등 이러한 활약 속에 5라운드 [[상주 상무]]와의 경기에서는 미친 선방쇼로 4:2의 스코어와 상관없이 이 날 MOM에 선정되었다.
15시즌이 끝나고 다른 한국 골키퍼들이 연달아 J리그로 떠나자, 해마다 포항 팬들에게 주목 받던 '''신화용의 거취문제가 어느 때 보다 관심이 높아졌다.''' 게다가 전남 드래곤즈와 [[김병지]]의 결별, 성남 FC의 [[박준혁(축구선수)|박준혁]]의 현역 입대, 부산 아이파크의 강등으로 클래식 팀들의 구애를 받게 된 [[이범영]]까지 골키퍼 연쇄이동이 점쳐지는 가운데 '''언급된 모든 키퍼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신화용이 재정감축위기에 빠진 포항을 떠날까 포항팬들이 걱정했으나...
2016년 12월 우선 협상기간 동안 신화용의 거취에 관심이 쏠렸다. [[http://news.donga.com/View?gid=82057389&date=20161227|기사]] 그리고 해를 넘겨 1월 3일수원과 이적 협상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이미 [[문창진]], [[김원일(축구선수)|김원일]], [[신광훈]] 등 신예 베테랑 가리지 않고 핵심 멤버들을 보낸 마당에 마지막 프렌차이즈 스타마저 떠난다는 소식에 포항팬들은 [[멘붕]] 중. 게다가 팀을 떠나는 이유도 '''16시즌 종료 이후 구단이 직접 나서 신화용을 팔기 위해 여러 구단과 만난 사실이 드러나면서''' 포항 프런트와 수뇌부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특히 신화용은 자신의 성적이 좋았던 시즌에도 포항과의 의리를 지키려고 구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해 '''연봉을 스스로 깎고 포항에 남았는데,''' 정작 16시즌 팀 성적과 신화용의 개인 성적이 하락하자 바로 신화용을 시장에 내논사실을 알게 된 신화용은 배신감을 느끼며 결국 포항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후 사정을 알게 된 [[최순호]]가 급하게 구단에 강력요청하여 신화용을 잡기 위해 다시 협상을 하게 되나[*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감독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프런트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팀의 레전드급 선수를 팔겠다는 계획을 독단적으로 내렸다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 포스코의 낙하산 사장에 휘둘리는 포항 프런트가 얼마나 막장으로 전락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이미 신화용의 마음은 포항을 떠났고 결국 신화용은 새팀으로 이적했다. 포항은 이적료+'''[[노동건]] 임대'''를 하는 형식으로 신화용을 내줬다. 노동건이 아직 리그 정상급 기량은 아니지만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축구|인천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군면제를 받은 20대 골키퍼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수원 프런트가 '과연 군필 골키퍼를 임대 후 이적 조건으로 포항에 줬을까?' 를 생각해본다면 즉전감 키퍼를 받고 후보 키퍼를 빌려줘 경험치도 먹이려는 [[호구]]딜일 가능성이 높다.
키가 큰 골키퍼를 선호하는 김봉수 코치 때문에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저 소문일 뿐이다. 김봉수 코치는 오히려 김병지, 이운재, 카시야스를 거론하며 골키퍼는 키보다 경기 운영능력,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http://www.sportnest.kr/1564|관련 기사]] 정성룡 때문에 덩달아 미운 털이 박혀서 본인이 한 말과 정반대의 말이 퍼져 인터넷에서 공연히 욕을 먹고 있다.[* 덧붙여 굳이 김봉수의 양아들을 찾자면 정성룡이 아니라 A매치 달랑 1경기 뛰어본 이범영이다. 유소년 시절부터 가르친 선수로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4강 UAE전에서 한국에서 패널티킥 방어가 가장 뛰어난 김승규를 빼고 승부차기 대비용으로 넣을 정도로 신뢰를 보였다. 정성룡은 부진할 때 코치로서 변호해준 게 다인데 어쩌다 보니 양아버지란 낙인이 찍혔다.] 신화용이 뽑히지 못한 건 잘한다고 무한정 돌려 쓸 수 없는 골키퍼 포지션의 특수성 때문이지 다른게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최악의 경기인 2015 K리그 클래식 홈 개막전 울산과의 경기를 슈틸리케 감독이 보도진 몰래 [[포항 스틸야드]]에 암행정찰을 왔다. --왜 잘 할 때는 안 오고-- 이 날 모습을 생각한다면 국대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화용 >>>>>> 정성룡을 외치던 K리그 팬들을 입 다물게 한 반면에, 오히려 K리그까들로부터 '''정성룡이랑 뭐가 다르냐, 정성룡보다 더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조롱받고 있는 중. 기량이 제대로 폭발한 이후로 실수가 상당히 줄어든 키퍼인데 역대급 실수를 엄청나게 보여주면서[* 그것도 공중파 전국 생중계였다. [[KBS]]가 올 시즌부터 K리그 클래식을 전격 중계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 --아니, 왜 잘할 때는 중계를 안 해주고-- 참고로 KBS의 K리그 클래식 전격 중계는 [[이영표]]가 해설위원이 되면서 내건 조건으로 KBS는 이를 받아들였다라고만 서술하면 이영표 해설위원 혼자서 다 한 거 같게 느껴지는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프로축구연맹에서 따낸 계약 조건이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이영표 해설위원이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면 프로축구연맹>>>이영표의 기여도 차이가 있는 일이다.] 엄청 평가가 떨어졌다. 다만 이 경기를 관람한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에서는 언제든 실수가 나올 수 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실수였고, 선수들은 이런 실수가 나오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343&article_id=0000047475|관련기사 1]],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108&article_id=0002396186|관련기사 2]]
- 실업팀 . . . . 8회 일치
실업팀은 기업, 군부대, 공공기관, 지자체 등의 구성원, 종업원으로 구성된 팀이다, 실업팀은 원칙적으로 종업원의 "사내 스포츠 클럽"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스포츠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상부 조직의 특정한 '부서'로서 운영된다. 따라서 팀의 운영은 전적으로 해당 상부 조직의 관리 하에 놓여져 있다.
실업팀의 운영 실태는 모 회사나 운영단체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다. 일반 종업원과 똑같이 업무를 하고, 잔업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만 연습과 시합을 하며 어디까지나 부가 활동으로서 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상 실업팀 활동이 주가 되며 활동이 거의 프로 스포츠 [[클럽팀]]과 같은 수준으로, 형식만 실업팀일 뿐이지 종업원으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스포츠 활동에만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해당 종목을 관할하는 협회의 기준에 따라 준프로 내지는 세미프로로 규정되기도 하며,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는다.[* 축구의 경우, KFA에서는 세미프로로 규정된 실업팀들은 대학팀 같은 완전한 아마추어 팀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팀으로 규정된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FA컵]]에서 1라운드 예선을 면제받고 2라운드부터 참가할 수 있는 등의 혜택을 받는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군부대나 공공기관 단위로 실업팀이 조직되었으며, 이 같은 실업팀들이 높은 명성을 누렸다. 일본에서는 쇼와 초기에 실업단이라는 명칭으로 실업팀을 창설하였으며, 일본 만이 아니라 한국, 대만에도 이러한 문화가 퍼져서 실업팀 중심의 스포츠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국민체육진흥법에 따라서 지자체, 공공기관이 의무적으로 운동경기부(실업팀)을 두도록 하고 있는데, 지자체는 실업팀을 '1팀 이상'을 두도록 되어 있으며, 공공기관의 경우는 상시 근무하는 직장인이 1천명 이상인 경우에 설치하여 운용하도록 한다. 이 의무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신청을 거쳐서 면제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구조에서는 팀의 성적과는 무관하게, 기업의 실적에 따라서 팀의 향방이 정해진다는 문제가 있다. 기업 실적이 나빠지면 팀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꼼짝없이 실업팀이 정리해고 대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특히 불황기에는 눈에 뛰게 직접적인 수익을 올릴 수 없는 실업팀이 가장 먼저 해체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삼성의 경우는 이건희가 실질적으로 경영활동에서 물러난 것과 동시에 럭비팀을 운영하던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10506333771780|삼성중공업의 경영실적이 악화되자 지체없이 짤렸다.]
게다가 프로 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지역밀착형 중심의 운영"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실업팀은 기업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기업이 주소지를 이전하면 그 지역과는 관계청산"이라는 한계가 있다. 일례로 코레일이 본사를 옮기자 팀도 같이 움직이면서 [http://www.fnnews.com/news/201401161713584684|인천 연고였던 팀은 어느새 대전으로 가게 되는] 것.
- 오경태 . . . . 8회 일치
* [[농림부]] 법무담당관실
* [[농림부]] 기획예산담당관실
* [[농림부]] 농어촌복지담당관실
* [[농림부]] 농업협력통상관실 통상협력과
* [[2010년]] ~ [[2011년]] [[농식품부]] 녹색성장정책담당관
* [[농산물품질관리원]] 원장
* [[대통령비서실]] 농수산식품담당 비서관
* [[2015년]] [[3월 30일]] [[농림축산식품부]] 차관보
- 월드 인 컨플릭트/유닛 . . . . 8회 일치
[[미국]]은 M1A1 에이브람스, [[소련]]은 T-80U, [[NATO]]는 독일군 레오파르트2A4. 강력한 체력, 방어력, 공격력을 가진 유닛. 차량과 건물에는 주포를, 보병과 헬리콥터에는 기관총을 사용한다.
* 공격능력: 철갑탄(NATO) - 일정 시간동안 날탄을 사용한다. 기관포탄이 입히는 대미지가 증가한다.
미국은 M2A2 브래들리, 소련은 BMP-2, NATO는 영국군 FV510 워리어. 기관포로 무장한 장갑차.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다.
* 공격능력: 고폭소이탄(소련, NATO) - 일정 시간동안 고폭소이탄을 사용한다. 기관포탄에 폭발 효과와 화염 효과가 추가된다.
미국은 AAVP7A1, 소련은 BTR-80, NATO는 독일군 룩스. 기관포로 무장한 장갑차.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으며 물 위를 이동할 수 있다. 쓸모없다.
미국은 AH-64A 아파치, 소련은 Mi-24V 하인드, NATO는 이탈리아군 A129 망구스타. 로켓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공격헬기.
미국은 [[HMMWV]], 소련은 UAZ-469, NATO는 영국군 D-90. 기관총으로 무장한 고기동 차량.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으며, 손상된 차량을 수리할수도 있다.
미국은 M163 VADS, 소련은 ZSU-23-4 실카, NATO는 독일군 게파드. 기관포로 무장한 자주대공포.
- 유지인(1956) . . . . 8회 일치
|| [[원미경]] || [[이미숙]] || [[정애리(배우)|정애리]][* 최근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배우)|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를 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으니 이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보희(배우)|이보희]]를 참고바람.] ||
[[1975년]] TBC 드라마 님이 성공하고 <쥬단학화장품>(현<한국화장품>)의 전속 모델이 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전속 모델이 된 계기가 좀 슬프다. [[문경희]]라는 신인 여배우가 교통사고로 사망 후 유지인이 이 자리를 얻은 것. 당시 문경희는 정소영 감독이 발탁한 TBC 출신의 유망 신인이었으나 영화 촬영이 마치고 자신과 연애 중었던 유부남의 차에서 교통사고를 겪은 것.] 이후 [[1977년]]까지 매년 1~3편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하였고 77년 TBC 드라마 <서울야곡>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77년 같은 해 TBC 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연인 장미희·정윤희와 함께 신트로이카를 구축하며 브라운관과 영화계를 이끄는 대스타로 성장하여 최고의 인기를 얻는 스타가 된다. 1978년 영화 <[[마지막 겨울]]>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흥행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1979년]] 흥행 1위를 기록한 <[[내가 버린 남자]]>를 비롯해 <[[26 x 365 = 0]]>,<[[청춘의 덫]]>[* 80년대 트로이카였던 [[원미경]]이 대형 신인으로 주목받던 영화이기도 했다.] , <[[불행한 여자의 행복]]>, <[[가시를 삼킨 장미]]> 등의 영화들을 히트시켰으며 그 해 <심봤다>로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 처음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79년을 완전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 [[1982년]] [[KBS1]] 단막극 《[[TV 문학관]] - 묵시의 바다》 ... 박경화 역
* [[1979년]] 《[[경찰관 (영화)|경찰관]]》
* [[2011년]] [[KBS]] 《상상오락관》 패널
* [[1993년]] ~ [[1994년]] [[삼양식품]] (대관령 김치라면, 삼양 콩간장, 삼양 육개장 큰냄비)
- 윤상현(배우) . . . . 8회 일치
한국나이로 33살 무렵인 2005년 TV 드라마 '백만장자와 결혼하기'의 PD 역으로 처음부터 주연으로 데뷔했다. 연기에 연자도 몰랐던 윤상현의 눈빛이 마음에 든 강신효 감독은 모든 사람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캐스팅했다고 한다. [* 캐스팅 후 강신효 감독에게 3개월간 연기지도를 받았으나 연기가 심각하게 늘지 않았고, 최후의 조치로 [[박근형]]에게 연기수업을 보냈는데 너는 드라마 하지 말라고 엄청 혼났다고 한다. 자신도 연기자에 대한 꿈이 없었고, 본인의 실력을 잘알기에 강신효 감독에게 울면서 전화를 하며 못하겠다고 했으나 감독님의 만류로 결국 드라마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기초짜인 윤상현의 --[[발연기]]--때문에 [[프랑스]] 로케이션 촬영분이 방영을 못할 정도로 너무 심각해서 재촬영을 위해 국내에 프랑스를 재현하기 위한 성(城)세트를 짓느라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었다고 한다.]이후 불꽃놀이, 독신천하에서 고만고만한 전형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다가, 2007년 [[문화방송|MBC]] 드라마 [[겨울새(2007년 드라마)|겨울새]]에서 주경우 역을 맡아 주목받게 되었다. 원래 이 드라마는 [[이태곤]], [[박선영(1976)|박선영]]이 주연이었으며 윤상현은 오히려 주연들보다 더 돋보이는 싸이코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찌질이 연기를 선보인 끝에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제목을 쪼다새, 찌질새 등으로 바꿔 부르게 할 정도였다.[* 원래 이 역할은 어두운 캐릭터였는데 윤상현이 감독과의 회의 끝에 어수룩한 마마보이 역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또 그전까지 가수와 자영업을 꿈꾸며 연기에 별로 관심없이 연기하던 그에게 진심으로 연기에 빠져들게 만든 작품이였다고 한다. 결국 이때의 호연으로 MBC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 수목 미니시리즈 '내조의 여왕' 등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되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드라마)|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인간미 넘치는 차관우 역할을 통해 2년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너목들이 2013년 최고의 드라마로 꼽히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 내조의 여왕이 잘 되어 일본에도 방영이 됐고 결국 일본에서 음반 제작을 하기도 했다. 앨범 발표 당시 많은 기자들이 모였는데 윤상현은 일본어를 하지 못해 어쩔 줄 몰랐다. 그 탓에 옆에 통역관에게 수다 본능을 보였고 통역관은 윤상현의 말을 통역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일본의 기자들은 그의 말 하나하나를 기사화 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일본 측에서 한류스타 최초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한 분 처음이라고 했으며 친절하고 재미있다라는 내용으로 우호적인 기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아가씨를 부탁해]]가 쿠바에서 시청률 90%가 넘어 쿠바의 문화부 장관에게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 2013년 || SBS || [[너의 목소리가 들려(드라마)|너의 목소리가 들려]] || [[차관우]] || ||
|| SBS || [[피노키오(드라마)|피노키오]] || 차관우[*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같은 배역. 《피노키오》가 '너목들' 제작진(조수원 PD, [[박혜련]] 작가)의 차기작이었기 때문에 이 인연으로 특별출연 하였다.] || 특별출연 ||
- 의성군 . . . . 8회 일치
[[경상북도]] 북부에 위치한 군. 2018년 6월 기준 인구는 약 5만 3천여명이다. 북쪽에 안동시, 동쪽에 청송군과 영천시, 남쪽에 군위군, 서쪽에 구미시와 상주시가 위치해있다. 의성군의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르며, 낙동강의 주요 지류 중 하나인 위천이 의성 군내를 관통하며, 경작지가 넓고 평야지대가 비교적 많다. 때문에 농업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했던 197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인구가 20만을 넘을 정도로 제법 큰 군이었으나 이후 농촌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리즈 시절]]보다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 [[5번 국도]]가 군의 남북을 관통한다. 영천, 군위를 거쳐 예천, 영주로 연결되는 [[28번 국도]]와 [[59번 국도]]도 있다. [[25번 국도]]는 단밀면을 잠깐 지나친다. [[의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안계면에서 별도로 [[동서울터미널]]행 시외버스가 있다. 다만 원주 방면에서 의성으로 갈 때는 [[의성IC]]가 아닌 [[남안동IC]]를 이용한다. [[의성IC]]가 의성군 남쪽의 봉양면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관광 ===
탑리 5층석탑([[국보]] 제77호), 관덕동 3층석탑([[보물]] 제180호) 빙산사지 5층석탑([[보물]] 제327호) 등의 문화재와 금성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373호) 등이 있다. 이 중 탑리 5층석탑, 빙산사지 5층석탑 등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3권에 소개되어 있다.
2013년 의성 조문국박물관과 조문국 유적지([[금성산 고분군]])가 개장하였다.
국내 최초의 [[컬링]] 전용 빙상장 [[경북컬링훈련원]]이 의성읍 충효로 104에 위치해 있으며, 의성군 내의 중, 고등학교의 방과 후 활동엔 [[컬링]]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이는 의성군 출신의 체육인이자 국내 컬링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김경두]] 전 대한컬링연맹 부회장의 노력이 컸다. 전직 레슬링 선수 출신이었던 김 회장은 컬링이라면 동양 선수와 서양 선수의 체격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종목이라 생각해서 의성군에 컬링훈련원을 개설했고 실제로 그의 예상은 거의 들어맞아서 한국은 단기간[* 1994년에 컬링 연맹 설립, 곧바로 세계 연맹에 가입했으며 2001년 아-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 정도면 단기간이 아니라 초단기간 급성장이라고 봐야할 지경(..)] 내에 세계 랭킹에서 경쟁하는 선수들을 배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선수들의 수준과는 무관하게 컬링은 오랜 기간 비인기 종목이었고, 결정적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해 외면 받았다. 이 시기를 거쳐간 지도자나 선수들도 하나 같이 아직 우리 컬링은 멀었다는 말을 한다. 처음으로 출전권을 따낸 소치 올림픽을 준비하던 2013년 당시에도 컬링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에서 식사도 못할만큼 인지도나 후원이 열악했다.]
|| '''관외사전투표''' ||<:>29.22%||<:>{{{#C9151E 35.59%}}}||<:>13.99%||<:>13.03%||<:>7.72%||<:>{{{#808080 ▼6.37}}}||<:>||
* [[김용달]] : 야구 관련 인물
- 이기백(군인) . . . . 8회 일치
||<:><-5><tablealign="center"><tablewidth=500> [[대한민국 육군]]의 [[제2작전사령관]]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FF0000><#FF0000><-5><:> {{{#FFFFFF ''' 대한민국 ''' }}} {{{#FFFFFF ''' 국방부 ''' }}}{{{#FFFFFF ''' 장관 ''' }}} ||
[[1931년]] [[충청남도]] 연기군(現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났다. [[전두환]],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는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이다.
[[1983년]] [[6월]] [[김윤호]]의 뒤를 이어 [[합동참모의장]]이 되었다. 합동참모의장으로 있던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버마(現 [[미얀마]])에 갔다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부상을 당하였으나, 다행히 그가 입고 있던 [[장교]] [[정복]]과 정복에 달린 [[훈장(상훈)|훈장]]이 [[방탄복]] 역할을 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수행했던 [[전속부관]] [[전인범]] [[중위]]에 의해 구조되었다. 귀국 후 그 정복을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하여 육군사관학교 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 [[1986년]] [[1월]]부터 [[1987년]] [[7월]]까지 [[국방장관]]을 지냈다. 이때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여 [[서울특별시]]가 물에 잠길 것이라고 과장하여서 [[평화의 댐]]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이 되었다.
- 이민호(1987) . . . . 8회 일치
||<#878787> '''{{{#EEE156 본관}}}''' || [[경주 이씨]][* 경주 이씨 42세손 '鎬'자 항렬이다.] ||
2010년 8월 2일, 아시아송페스티발 관련 기자회견장에서의 이민호.
2013년에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김은숙]]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상속자들|상속자들]]에서 주인공 [[김탄]]역을 맡아 최고 시청률 25.6%를 찍으며 연말 수목극 1위를 유지하며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기존의 까칠한 [[김은숙]]표 로코 남주들과 달리 다정하며 직진하는 고등학생의 모습을 담담하게 연기해 냈다.[*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96854|연애의 발견 정현정 작가는 트위터를 통해 이민호의 연기를 칭찬했다]].] 2013 SBS 연기대상에서 중편드라마 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베스트드레서상, 10대 스타상, 시청자 인기상, 베스트커플상의 다섯 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상속자들|상속자들]]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이민호를 일약 최고의 한류스타로 도약시켰다. 2014년 1월 외국인은 출연이 힘들다는 [[중국]] CCTV의 춘완에 한국인 최초로 출연하여 이민호가 출연한 순간 최고시청률을 기록하였고 7억명의 시청자들이 보았다고 한다.
2015년 초에 개봉한 [[강남1970]]의 [[김종대#s-2]] 역할로 영화 첫 주연작품을 찍었다. 이민호의 새로운 연기 변신에 호평을 받았고 눈빛 연기, 액션 연기 쪽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청불임에도 불구하고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총 관객수 220만 명으로 막을 내리는 걸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렀다. [[강남1970]]으로 2015년 52회 [[대종상영화제]] 남자신인상 수상, 19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프로듀서초이스상을 수상하였다.
영어권 최대 한류 포털 사이트 숨피닷컴이 진행하는 제12회 숨피어워즈에서 올해의 배우 1위, ’푸른 바다의 전설‘이 올해의 드라마로 선정된데 이어 베스트 커플, 3관왕을 석권했다. 필리핀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아이플릭스가 진행한 ‘Best Actor of 2016’ 투표에서는 41.75%의 지지를 얻어 1위에 선정됐다. [[전지현]]과 호흡을 맞춘 [[푸른 바다의 전설]]은 21%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여담으로 과거 [[카오스(워크래프트 3/유즈맵)|CHAOS]] 유명 클랜 ANA 클랜 소속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용하던 닉네임은 ANA_MIN. 나이스 게임TV의 게임 캐스터&해설 하광석은 자사 홈페이지에서 관련된 드립을 친 바 있다. 나캐리에 나온 [[희철|김희철]]에 의해 롤 유저임이 밝혀졌다. 티어는 다이아 5라고 하며, 최대 티어가 다이아 2~3이었다고 한다.[* [[게임쇼 유희낙락]]에서 김희철이 언급.] [[직스]], [[케일(리그 오브 레전드)|케일]]을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희철|김희철]]이 공익으로 복무했을 때 같이 롤을 자주했다고 했는데, [[희철|김희철]]은 [[베인충]]이고 이민호는 [[야스오충]]이라 같이 게임걸린 팀원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연예계에서 게임 잘 하는 연예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 2013년 ||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상속자들|상속자들]] || [[김탄]] || ||
- 이상휘 . . . . 8회 일치
|| '''최종학력'''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박사 ||
[[이명박정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명박정부]] [[청와대]] 춘추관장 ||
[[1971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포항해양과학고등학교, [[용인대학교]]를 졸업 및 학위를 취득했으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이후, [[데일리안]]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위덕대학교]] 부총장까지 지냈다.
[[2009년]] 3월에 [[이명박정부]]로부터 [[청와대]] 춘추관 관장 및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친이|친이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포항 북 지역구로 공천을 신청했으나 [[친박계]]에 의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후 [[2014년]]에는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2016년]]에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을 앞두고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아 [[동작구 갑]]으로 출마했지만 국정원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병기(정치인)|김병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같은 해 10월에는 [[이정현(정치인)|이정현]] 대표에 의해 새누리당 원외대변인으로 임명되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대변인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비박]]계 모임인 [[비상시국회의]]에 참여했다.
- 이연희(배우) . . . . 8회 일치
그러나, 부족한 연기력으로 늘 비판을 받다가 2013년부터 서서히 연기 쪽에서도 호평을 받기 시작했지만 [[화정]] 출연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는 평을 받았다가 [[더 패키지]]를 통해 다시 호평을 받고 있다. 가히 롤러코스터 같은 커리어를 보이고 있는 셈. 연기력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 서술되어 있다.
2015년 설 연휴에 개봉한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서도 연기력은 지적받지 않았고 300만 이상의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명민과 오달수의 연기를 보기 위해 조선명탐정을 보러 갔기 때문에 이연희 덕분에 영화가 흥행한 것은 아니다. 다만 2013년 작인 [[결혼전야]]에 경우 주연 롤을 맡은 배우들이 단체로 나오는 옴니버스식 영화였던 것에 비해 조선명탐정 같은 경우 김명민, 오달수와 함께 메인 주역이였으므로 300만 이상의 흥행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후 2018년에는 첫 고정 예능 프로그램인 [[섬총사]] 시즌 2에서 [[강호동]], [[이수근]]과 출연하면서 현재는 과거의 발연기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기복 없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2003년 ||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습관 ||
* 2010년 피부관리 《싸이닉》
* 2002년 관광 《일본관광청 일본관광》
- 이지은(2000) . . . . 8회 일치
파이널 무대에 관객으로 참여했다. 바로 MC 뒤에 인형 두개를 껴안고 참여를 했는데, 미친 위치선정으로 카메라에 꽤 잡히게 된다.
5곡중에 하나인 "카라의 허니"에도 쥐꼬리 만큼 랩이 붙어있는 관계로 데뷔조 이향숙이 이지은을 선택해 허니 조에 들어가게 된다. 귀여운 이미지로 몇 컷이 들어가게 되는데 전체적으로 편집 방향이 [[유키카]]에 몰빵되었다.
방송 상에서 공개된 허니조는 그나마 편집이 살려준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초반 주목을 받았던 인형을 컨셉으로 한, 안무는 익스프레션 마리오네트의 어설픈 카피였고[* 그걸 의식해서인지, 본방에서는 편집으로 날려버린다. 물론 현재 춤이라는 영역에서 익스프레션에게 완벽하게 자유로운 팀은 없겠지만.] 그 컨셉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 채, 컨셉이 붕떠버리게 된다. 그에 더해 확실한 보컬이 없는 관계로, 후반부 벌스에서는 밸런스가 무너지게 된다. 게다가 의상컨셉이 최악인 상황 도중 수란의 "지은이 랩하는데 의상이... 허.." 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뜬다. 이 와중에 이지은은 나름 노래에 맞게 랩[* 방청러들의 말에 따르면, 심사위원들에게 노래에 맞는 랩을 했다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근데 방송에는 통편집]을 하게 되었다. 최악의 평을 들은 공연에서 [[유키카]]의 엔딩과 함께 유이하게 살릴만한 퍼포먼스였던 것.
곡은 HUSH(쉿), Dangerous girl, 이 밤이 지나면 총 세곡이었으며 상당수의 연습생들이 이 밤이 지나면에 몰리게 되고, 그 중 이지은도 한명. 그 곡에 총 13명이 몰린 관계로 4명을 방출해야되는 상황. 이수민은 자진해서 HUSH 팀으로 가버리고, 나머지 3명을 투표를 통해 방출해 버린다. 그리고 이지은은 여기 포함되었다.
이 밤이 지나면이 상당히 랩파트가 핵심인 관계로 남아있었던 유일한 랩재원인 신류진이 전부 하게 됐는데 로우톤인 보이스와 안 어울렸다는 평. 이지은이 간 Dangerous girl의 경우 랩파트가 있지만 핵심파트가 아니었고... 이미 랩재원인 정사라와 루이가 있었으며, 방출되어 가게된 멤버 3명 모두 랩파트였다... 쥐꼬리 만한 랩 파트를 5명이 나눠하게 된다.
[[http://m.dcinside.com/view.php?id=hiphop&no=5184814|관련 내용 정리]]
자신이 이지은의 질투로 친구 관계를 맺기 힘들었고 이지은의 전 남친과 친구, 그리고 이지은이 자신의 집에 술을 들고와 진창 취하고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성폭행을 당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뮤직웍스가 네이트에 돈을 써서 글이 계속 내려간다는 주장도 있는데 뮤직웍스는 돈이 없고 이런 논란에 무대응으로 일관해왔다.
- 이철우(1955) . . . . 8회 일치
||<table width=100%><height=40><width=20%><bgcolor=#C9151E> {{{#FFFFFF ''' 본관 ''' }}} ||<width=80%><(> [[경주 이씨|경주]] ||
1955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 곡송국민학교, 대구 [[영남중학교(대구)|영남중학교]], [[김천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했다. 이후 상주 화령중학교, 의성 신평중학교와 단밀중학교 수학 [[교사]]를 역임하였다가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 공채에 합격하여 정보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2005년 말부터 2008년 초까지 [[이의근]] 도지사와 [[김관용]] 도지사 밑에서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당선됐다. [[친이]]와 [[친박]]계의 대립이 심했던 제18대 국회에서 계파모임에 가담하지 않아 중립 성향으로 분류되는 편이었다. 국가정보원 출신으로 초선에 정보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고 한나라당 재해대책위원장과 국민공감위원장을 역임했다.
--[[김관용|전 도지사]]는 항상 최상위권에 머물렀다--
2018년 8월 28일 경산소방서 회의실에서 세쌍둥이를 출산한 이기찬 소방관을 찾아 격려하고 육아용품을 전달하였다. 세쌍둥이를 낳았다고 도지사가 찾아서 직접 격려해주는 것은 지자체의 발전을 위해 아이낳기 좋은 경북을 만드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8월 29일, 뜬금 없이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찾아 왔다. 회의가 열린 구미의 경제에서 초당적 협력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지역예산 배정문제를 언급한 것을 보아, 자유한국당 소속이지만 지역 국회의원이 못 미더웠나보다.-- ~~이점은 당연해 보인다 현재 정부 예산 편성안을 쥐고 있는 대통령이 어느 당인지 생각하면~~
2018년 9월 10일 두번째 시행된 리얼미터 시도지사 직무수행 지지도에서 4위[* 1위 김영록 전남지사, 2위 원희룡 제주지사, 3위 권영진 대구시장]를 차지하며 포스트 [[김관용]] 체제의 틀을 닦아나가고 있다.[[http://news1.kr/articles/?3422005|#]]
2018년 8월 6일 청탁과 관련하여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사자는 민원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좀더 지켜보아야 될 것 같다. [[https://m.news.naver.com/read.nhn?oid=052&aid=0001178176&sid1=100&backUrl=%2Fhome.nhn&light=off|#]]
- 이희근 (1929년) . . . . 8회 일치
| 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1기
* 1968년 국방부 행정차관보.
* 1971년 공군 군수사령관 보임.
* 1973년 공군사관학교 교장
* 1974년 공군 작전사령관.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공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국방참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전두환]][[분류:백선엽]][[분류:박정희]][[분류:정일권]][[분류:노태우]][[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심대평]][[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자시키로우 . . . . 8회 일치
감금된 대상은 일반적으로 장애인, 미치광이 같은 정신질환자, 행실이 불량한 자, 그 외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바깥으로 내보내기 부적절하다고 생각된 자 등이다. 하지만 기준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합리한 것도 많으며, 후계자가 아닌 아들,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이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은 연애를 한 자 등도 자시키로우에 감금될 때도 있다.
일반적으로 다다미 방이며, 철이나 나무 격자 등으로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둔다. 사적인 감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출입 자유는 박탈하지만 일단 생존에는 지장이 없도록 음식 등을 공급하며 관리하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대개 감금된 사람은 겨우 음식만 먹으면서 최소한의 생존만을 유지할 뿐, 위생관리 등은 되지 않아 생활이 지극히 비참하며 알몸으로 오물에 덮혀 살아가는 경우도 많이 보고되었다. 공간 역시 부족하여 한평 반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심지어 환자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우므로 그러지 못하도록 벽에 빽빽하게 못을 박아두는 경우도 있다.
법률적으로 1900년에 『사택감치(私宅監置)』라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당시 정신의학에서는 정신질환자를 일단 감금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정신병원의 시설이 부족한 편이었다. 게다가 이미 자시키로우의 관습이 있었으므로 쉽게 도입되었다.
미디어에서는 무작정 감금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당시에 일단 어느 정도 제한 절차는 있어서, 가구의 호주, 오인조(다섯 가구를 한데 묶어서 관리하는 조선시대의 오가작통 같은 제도), 그리고 의사의 확인서 등이 필요했으며, 도면 등을 경찰에 제출해야 하고 경찰에서 이를 관리하였다.
법률적으로는 1950년대 무렵에 폐지되었으나, 그 이후에도 정신병원 시설이 부족하거나 주변의 시선을 걱정하여 자시키로우에 가두는 관습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 정선 (화가) . . . . 8회 일치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정씨|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1138&pTotalSearchCount=3&pPosition=2&pRecordId=PPL_6JOc_A1676_1_0012083&pName=정선(鄭歚){3}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 정선]</ref>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의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落款)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입암도]](立巖圖)>, <[[혼혼해색도]](混混海色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 <[[산창유죽도]](山窓幽竹圖)>, <[[의송관란도]](倚松觀瀾圖:扇面)>, <[[노산폭포도]](盧山瀑布圖)>,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청풍계도]](淸風溪圖)〉 그리고 개인 소장의 <[[금강산 정양사도]](金剛山正陽寺圖)>, <[[해금강도]](海金剛圖)>, <[[노산초당도]](盧山草堂圖)>, <[[통천 문암도]](通川門巖圖)>, <[[봉래산 불정대도]](蓬萊山 佛頂臺圖)>, <[[석굴암도]](石窟庵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정선 필 금강전도|금강전도]](金剛全圖)> 외에 다수가 있다.
* [http://jeongseon.gangseo.seoul.kr/index.jsp 겸재 정선 기념관]
- 정형돈 . . . . 8회 일치
| 관련활동 = 뚱's
'''정형돈'''([[1978년]] [[2월 7일]]<ref>[https://entertain.v.daum.net/v/20160730070104091 정형돈,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시기"]</ref><ref>[https://www.fncent.com/JHD/b/introduce/10713 음력 1978년 2월 7일, 양력 1978년 3월 15일]</ref> ~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희극인]], [[사회자]]이다.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
정형돈은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경상북도]] [[김천시|김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하기 이전에 [[경상북도]] [[김천시]]으로 옮겨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다.<ref>{{뉴스 인용|제목='불안장애' 정형돈은 누구? '웃기지 않은 개그맨'에서 '예능계 4대천왕' 섭렵|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82&aid=0000550194|출판사=부산일보|저자=김상혁 기자|날짜=2015-11-12}}</ref> 고교 시절 '금강 소리 하나'라는 교내 연극부에서 학년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94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예총]] 산하 6개 지부가 주관한 제8회 '부산 청소년 예술제'에 참가하여 '청소년 연극축전' 부문에서 '연기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부산시 고등학교 대표로 서울에서 개최된 '동랑 청소년 연극제'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 [[QTV]] 《[[왕관은 내꺼야]]》
* [[KBS]] 《가족오락관 991, 1024회 (4월 17일, 12월 25일) : 게스트》
* [[MBC]] 《[[나 혼자 산다]] 81회 (11월 28일) : 카메오 (배상재(장미여관) 결혼식 사회)》
* 2011년 12월 7일 [http://www.cau.ac.kr/04_ulife/causquare/excelsior/excelsior_view.php?primaryNum=19&bbsId=excelsior&schKey=title&schVal=&category1=×tamp=1323663583929&page=1&pageSize=30 《명사 특강》]{{깨진 링크|url=http://www.cau.ac.kr/04_ulife/causquare/excelsior/excelsior_view.php?primaryNum=19&bbsId=excelsior&schKey=title&schVal=&category1=×tamp=1323663583929&page=1&pageSize=30 }} - 연사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학생회관 3층 루이스홀)
* 2014년 11월 7일 《졸업생 멘토링 특강 - 도니선배와 함께하는 TALK SHOW》 - 연사 (인덕대학교 은봉관 로비층 은봉홀)
- 진격의 거인/86화 . . . . 8회 일치
* 마레 측은 정부 관리 하의 "일곱 거인"을 계승시킨다는 계획.
* 그리샤는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클루거는 무슨 생각인지 "비행선을 보러 온거 아니냐? 모처럼이니 보다 가라"고 관용을 베푸는 듯 하다.
* 아버지는 마레인들이 그들을 멸족시켜도 당연하지만 그러지 않고 살려두고 있다며 관대한 처분이라고 묘사한다.
* 아버지는 피해자 측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이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일이라며, 단지 여기서 조용히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 이 시대의 군사력은 신병기들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를 확보하는게 관건이고, 파라디섬은 이 화석연료가 풍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지크를 비롯한 작전 관계자들은 모두 "엘디아는 악마의 자식이며 멸망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걸로 보이는데 지크가 훗날 배신하는 것 등을 보면 고도의 세뇌가 가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이나 프리츠에 대해서도 수상한 점은 있는데 그녀의 신분을 보장하는 것은 자신의 발언 밖에 없으며 "왕이 전쟁을 외면하고 사라졌다"거나 "거인대전은 마레와 무관하게 시작된 전쟁"이라는 등의 정보는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거인화 능력이 어떻게 아홉개로 나눠질 수 있었냐는 것도 관심거리. 작중 밝혀진 방식대로라면 거인화 능력은 1대1로 계승되는 것만 가능하다. 단순히 거인화 약물을 가진 것 뿐이라면 지성을 갖추고 거인화를 컨트롤하는 거인은 될 수 없으므로, 어찌됐든 유미르 혼자서 여덟명의 거인을 추가로 만드는건 불가능해 보인다.
- 창작:좀비위키 . . . . 8회 일치
* 좀비기관차 : 좀비력 5년 전후에 모 생존자 조직에서 제작. 좀비를 수거하여 연료로 사용하는 바이오 연료(?) 식 [[증기기관]] 차량. 작동방식은 단순하여, 기관차 위에 있는 화부들이 기관차에 다가오는 좀비를 갈고리로 낚아서 끌어올린 다음, 토막을 내고 말려서 연료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한 연료를 보일러에 투입하여 좀비 시체를 보일러에서 불태워서 그 화력으로 증기기관을 돌려서 작동하는 차량이다.
건조 기후에서는 마른 좀비가 잘 타서 이동이 쉽게 되지만, 우기나 비가 많은 지역에서는 좀비가 물기가 많아서 연료로 쓰기 부적합하여 이동이 어려운 것이 단점. 이 때문에 미리 토막을 내서 좀비를 말려서 연료 보관고에 보관하는 방식을 택한다. 제작자에 따르면 원래는 차가 고장나서, 어쩔 수 없이 나무로 가는 증기기관이라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좀비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할 수 없이 좀비를 잡아다가 태우게 되었고 생각보다 효율이 좋아서 여러 생존자 캠프에 보급되었다고(…).
- 창작:좀비탈출/5-1-1-1-1 . . . . 8회 일치
현관문 틈으로 발등을 밀어넣으면서 수만 번도 넘게 최악의 가능성이 떠올랐다가 구체적인 영상이 되기도 전에 사라진다. 그만큼 너무나 유혹적인 이름이다.
예상했듯이 집안의 구조는 우리 집과 별 차이가 없다. 좁은 현관은 거실 겸 응접실로 이어지고 그 뒤에 주방이 있다. 거실과 구분되는 벽 같은 건 없으므로 한 눈에 주방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나는 토트넘이 꽤 이른 시기에 당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집 안에서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실 쪽이 어수선하게 떨어진 물건들이 많은 데 비해 주방 쪽은 깨끗하다. 사용감을 느낄 만한 흔적이 없다. 그야 녀석들은 주방을 쓸 줄 모를 테니까. 반대로 토트넘이 오래 버텼다면 주방에 흔적이 많이 남았을 것이다.
토트넘 본인이든, 아니면 다른 방문객이든 누군가 거실을 드나든 흔적은 있다. 먼저 보이는건 담배다. 적어도 생존자가 남기진 않았으리라. 담배갑 째로 버려져 있는데 통채로 물어뜯어놨다. 잇자국이 선명한 걸 보니 치아 관리를 잘했나 보군.
현관에는 키가 없다. 막연히 현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건 잘못이었다. 그런 물건이야 어디에든 있을 수 있으니까. 토트넘이 그 차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감안하면 그걸 움직이는 키도 신주단지 모시듯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방에 있는 걸까? 나는 더 들어갔다. 어느 덧 거실 한 가운데에 있었다. 사방이 적막하다는 점이 오히려 대범하게 만든다. 녀석들은 여기엔 없어, 근거없는 확신이 차오른다.
최악의 기분으로 수색을 이어나갔다. 논리적 오류와 헛점 투성이인 추론은 이성적 판단과 상관없이 강렬한 설득력으로 나를 괴롭혔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짜맞춘 이야기다. 지금도 나의 이성은 이 바보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빈정댄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보다,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다 결국 녀석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을 때보다, 그리고 굶주림 때문에 바깥으로 나와야 했을 때보다도 뼈져리게 내 처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말로 풀어놓지 않아도 나의 직관은 매우 분명하게 그것을 인지했으니까.
왜 이런데에 놓여져 있었을까? 이건 냉장고 바로 옆에 있었다. 냉장고에 가려져서 처음 현관에서 살펴볼 때 안 보였다. 안방에서 일을 치르고 여기로 옮겨서 해체 작업이라도 한 걸까?
- 최준석 . . . . 8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주루 플레이나 수비가 안되는 [[지명타자]]를 35억원이나 주고 영입했다는 점에서 불안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관리 실패로 인해 체중이 점점 불어나서 고질적인 무릎부상을 안고 있다는 점이 염려스런 부분이다. 최준석이 두산으로 트레이드되기 전이었던 2005년 말 [[이대호]]가 체중 감량을 목표로 통도사로 들어갔을 때 일각에서 '최준석은 왜 안 가냐'라고 반응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롯데 구단이나 감독은 최준석 영입으로 인한 우산효과를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기존의 1루수인 [[박종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굴욕인 것이, 누적 스탯을 보고 따질 것이 아니라 출루율을 비교하면 최준석은 커리어 .351, 13시즌 .376을 기록했다. 박종윤은 커리어 .294, 13시즌 .298로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NC의 대졸신인 [[권희동]]에 이어 뒤에서 두 번째이다. 거포라고는 불릴 수 없지만 [[대타]]로서는 확실한 일발장타력을 갖춘 박종윤이 1루수로는 노답이라고 평가되는 이유가 선구안임을 감안하면 둘의 타격은 레벨이 다르다. 한편 [[1루수]], [[좌익수]], [[지명타자]] 자리에 구멍이 뻥뻥 뚫린 롯데의 상황상 지명타자 자리 고정이 큰 문제는 아니므로 수비능력 또한 무조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최준석의 통산 스탯이 거포라고 하기에 부족한 것은 최준석이 파워툴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늘 부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건강한 최준석이 [[잠실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거포임을 부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결론적으로 최준석 영입이 상당히 비판받는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체중관리와 부상이다. '''분명히 건강하면 팀에 도움이 될 선수이지만 부상 위험이 정말로 큰 선수'''를 '''포스트시즌 반짝 성적'''과 '''FA시장의 과열'''로 인해 '''너무 비싸게 샀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어야 할 것이다.
시즌 초에는 연이은 부진으로 35억은 오버페이라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 이후 타격감이 살아나며 준수한 활약을 보이자 이전의 비난은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시즌 후반들어 페이스가 떨어지는 바람에 시즌 종료 후의 성적은 극심한 타고투저였음을 감안하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지만 타율 0.286, 23홈런, 90타점으로 꽤 괜찮은 편. 4년간 35억이라는 가격에 관해서도 괜찮게 나온 시즌 성적과 더불어 계속되는 FA시장의 과열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 가격이면 납득할 수 있다는 식의 재평가도 이뤄지는 중. ~~그리고 도루 쿠폰도 채웠다~~
타격은 좀 한다지만 나이도 있고, 수비도 기대할 수 없고, 발도 느리고, 늘 지적받는 체중 관리 문제도 그렇고 다른 구단에서 딱히 메리트를 느낄 요소가 적다는 점이 문제다. 롯데에서 잡거나 강제 은퇴 수순을 밟지 않을까 예상하는 팬들이 많다.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12월 4일 롯데 구단 측은 최준석, [[이우민]] 두 선수가 다른 구단과 계약할 경우 보상선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http://sports.khan.co.kr/sports/sk_index.html?art_id=201712041422003|관련 기사]]
상대적으로 지명타자 자리에 여유가 있는 KT와 삼성이라면 한번쯤 고려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17시즌 후 이승엽의 은퇴로 최준석이 지명타자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이미 지명타자 자리에는 박한이가 있다. 당장 김한수 감독이 박한이 안쓴다고 2017년에 엄청 욕먹었었는데 그런 박한이를 뒤로한채 최준석을 영입한다면 대구아재들은...][* KT의 경우 지명타자 자리에 [[이진영]]과 1루수, 지타를 병행하는 [[윤석민(타자)|윤석민]]이 있다. 또한 KT는 2017년 [[황재균]]을 '''4년 88억원'''에 영입한 데다 KT는 넥센 다음으로 돈을 적게쓰는 구단인 만큼 삼성보다도 영입할 가능성이 낮다.~~[[남태혁]], 한기원의 체중 관리 문제로도 벅찬데~~] 막상 어느 팀도 트레이드조차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3206027|관련기사]]
- 추미애 . . . . 8회 일치
||<#1870B9> '''{{{#FFFFFF 본관}}}''' ||<(> [[추(성씨)|추계 추씨]] ||
관련하여 판사 재직 시절 이런 일도 있었다. 1985년 봄,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공안 통치를 위해, 오늘날에는 명작으로 평가 받는 <[[난쏘공|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100권이 넘는 책을 불온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압수수색하였다. 전국 검찰에선 일제히 영장을 청구했고, 전국 법원은 예외 없이 영장을 발부했다.
* [[2012년]] 전자도서관 이용 최우수상 <국회도서관>
* 남편인 서성환 씨는 아내와는 달리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법무법인을 설립해서 본업인 변호사 업무를 행하며 정치와는 사실상 무관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내인 추미애에 대한 기본적인 외조나 선거 캠프 등에서 실무 작업으로 참여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대외 행사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 2000년 7월 5일, 동료 의원들 및 기자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X같은 [[조선일보]]', '[[이회창]]이 이놈' 등의 발언을 했고, [[동아일보]] 기자와 싸움이 번져 '사주같은 놈', '누구의 지시를 받아 기사를 썼느냐'는 등의 불호령을 내렸다. [[정동영]] 등 동료 의원들이 말리면서 데리고 나오자 '정의가 바로 서야 하는데 왜 이러느냐' 하고 마당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고 한다. 다음 날, 조선일보에는 추미애의 'X같은 조선일보' 발언이 대문짝만하게 실려서 곤욕을 치렀는데, 오프 더 레코드로 사석에서 나온 말을 기사화한 것은 업계 상도의에 어긋나는데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보복성 보도였다는 평가가 주론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7095|그날 추미애 의원에게 일어난 일들]]
* 2017년 [[더불어민주당]]의 [[제19대 대통령 선거|제19대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때는 [[아재개그|줌마개그]]를 선보였다. 호남권 경선 대회 때 개표 발표를 맡았던 [[홍재형]] 당시 선거관리위원장은 후보의 이름이나 총 득표율을 잘못 말하는 실수를 여러번 하였다. 이에 이름이 잘못 불리워진 후보 측에서 반발이 생기자 이후 충청권 경선 대회 때 자신의 말 실수를 공식 사과했다. 이후 추미애는 홍재형 위원장의 사과를 너그럽게 받아달라고 말하며 "제 이름을 거꾸로 하면 애미가 되겠지요?"라는 농담을 했다(...).
*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제19대 대선]] 기간 동안 [[문재인]] 후보가 내세운 [[문재인 1번가]]를 홍보하는 [[https://youtu.be/8mKZ9xM1Hvs|홍보 영상]]에 [[금태섭]] 의원과 함께 직접 출연했다. 물론 추미애가 전문 배우는 아닌 관계로 발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금태섭의 발연기가 더 심해서 묻힌 감이 없잖아 있다. 금태섭 의원의 연기에 대해서는 "금씨 성을 가진 더민주 인사는 무기한 출연 금지 요청합니다."라는 반응도 있었다.(...)
- 카라스노 고교 . . . . 8회 일치
도쿄에 있는 [[네코마 고교]]와는 유서 있는 [[라이벌]] 관계이다. 두 학교의 [[더비 매치]]는 아예 '''쓰레기장의 결전'''이라고 불린다. 네코마와는 여러차례 연습 시합을 가졌지만 공식 무대에서는 한 번도 붙어보지 못한 [[안습]]한 역사가 있다. [[사족]]으로 카라스노 고교는, 작은 거인이 있던 시절(=즉 가장 강했던 시절)에도 연습시합에서 네코마 고교를 이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 3 || 인터하이 || 1차 예선 1회전 || [토코나미 고교] || 승리 || 2 : 0 || 센다이시 체육관 || 6월 2일 || 5권 ||
|| 4 || 인터하이 || 1차 예선 2회전 || [다테 공업 고교] || 승리 || 2 : 0 || 센다이시 체육관 || 6월 2일 || 5권 ~ 6권 ||
|| 5 || 인터하이 || 1차 예선 3회전 || [아오바죠사이 고교] || 패배 || 1 : 2 || 센다이시 체육관 || 6월 3일 || 6권 ~ 8권[* 애니화 1기까지의 줄거리.]||
|| 8 || 봄고 || 2차 예선 1회전 || 조젠지 고교 || 승리 || 2 : 0 || 센다이시 체육관 || 10월 25일 || 13권 ||
|| 9 || 봄고 || 2차 예선 2회전 || 와쿠타니미나미 고교[* 줄여서 와쿠난.] || 승리 || || 센다이시 체육관 || 10월 26일 || 13권 ~ 14권 ||
|| 10 || 봄고 || 예선 준결승 || [아오바죠사이 고교] || 승리 || 2 : 1 || 센다이시 체육관 || 10월 26일 || ||
|| 11 || 봄고 || 예선 결승 || 시라토리자와 고교 || 승리 || 3 : 2 || 센다이시 체육관 || || ||
- 콜 오브 듀티 . . . . 8회 일치
>강력한 .45 ACP탄을 발사하는 톰슨 기관단총은 근접전에 효과적입니다. 먼 거리에서는 끔찍한 명중률을 보이지만 높은 연사력으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30발 짜리 기관단총.
>PPSh 기관단총은 71발의 소비에트 권총탄을 장전할 수 있으며 매우 높은 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거리에서는 적합하지 않고 비교적 약한 탄을 사용하지만 이 총의 연사력은 제압과 근접전에 효과적입니다.
>스텐 마크 2는 방과 참호를 소탕하기 좋은 9mm 기관단총입니다. 작은 뼈대와 가벼운 중량 덕분에 뛰어난 운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브렌 경기관총
>브렌은 분대지원용으로 뛰어난 기관총입니다. 큰 크기가 운용성을 깎아먹지만, 포복한 상태에서 정확한 자동사격을 먹여줄 수 있습니다.
거치된 기관총. 잡아서 쏠 수 있다. 아군 NPC가 쓰는 중이라도 빼앗을 수 있으니 참고.
[[분류:게임 관련 정보]]
- 킹덤/512화 . . . . 8회 일치
* 이틀 뒤 돌아온 왕전은 지휘관들 앞에서 [[창평군]]의 업 공략 구상을 폐기하고 자기 자신의 책략으로 업을 공략하겠다며 전군 진격을 명하는데.
* 동행한 [[아광]]은 겉으로 보이는 업성의 무시무시한 위용에 혀를 내두른다. [[이목(킹덤)|이목]]이 크게 개조했다는 풍문은 들었으나, 보는 것은 듣던 것을 한참 능가했다. 아광은 안목이 없는 자신들에겐 그저 견고한 성으로 보이는 저것이, 지략가이자 총사령관인 왕전에겐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하며 그의 입만 쳐다본다.
한참이나 성을 관찰한 왕전의 입이 천천히 움직인다.
* 하지만 왕전의 다음 행동은 더욱 뜻모를 것이었다. 그는 아광에게 조의 왕도권에 있는 모든 성의 지도를 펼치도록 한다. 커다란 군사 지도가 바닥에 펼쳐진다. 왕전은 말에서 내린 채, 무릎을 뚫고 지도 위로 엎드린다. 그는 아광에게 척후들이 파악한 정보를 일일히 물으며 업성을 관찰했던 것만큼 세심한 눈으로 지도를 훑는다. 부하장수들은 당황스럽지만 그 모습이 뜻하는건 하나 밖에 없다. 왕전은 지금 이 자리에서 업 공략을 위한 새로운 군략을 짜고 있는 것이다.
*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 하릴 없이 열미성에 주둔하던 진군은 총사령관의 복귀를 확인한다. 아광을 비롯한 부하들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왕전은 상처 하나 없다. 열미로 돌아온 왕전은 휘하의 지휘관들을 불러모은다. [[환의(킹덤)|환의]]와 [[양단화]] 양대 장군들을 비롯해 [[이신(킹덤)|이신]]을 포함한 장교 전원이 집결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그대로 왕전은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교시한다.
[[창평군]]이 구상한 "열미를 교두보로 업을 친다"는 책략은 열미성 자체의 취약점 때문에 불가능한 목표가 됐다. 이 같은 사실은 [[벽(킹덤)|벽]] 등 하급 지휘관들은 금시초문이었으나 이신, [[몽념]], [[왕분]]은 이미 아는 내용이다. 하기야 하급 지휘관들은 이 작전의 진짜 목표를 아직가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그저 어리둥절하고 황당한 얼굴로 왕전의 교시를 듣는다.
- 킹덤/525화 . . . . 8회 일치
* 왕분은 아광군의 측면을 파고들던 [[마남자]]군의 우측을 찔러들어갔고 교전은 [[관상]]에게 맡긴 채 자신은 적장을 직접 처단하러 나선다.
후위에 있는 병사들은 마남자를 고립시키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왕분이 펼치는 창술 앞에 부질없이 목숨을 잃었다. 옥봉대의 공격이 쐐기처럼 박히고 상황이 난전으로 전환됐다. 왕분은 현장을 [[관상]]에게 맡겼다. 이대로 적의 후위가 올라오는걸 막고 적장의 고립 상태를 유지한다. 그동안 자신은 직접 적장의 목을 취할 것이다. 관상은 이 같은 지시에 별 반대 없이 무운을 빌었다. 그리고 [[영강]]에게 부탁에 왕분의 호위를 맡겼다. 늘 한 마디씩 토를 달던 관상이었다. 아무 반대도 없어 미심쩍기도 했으나 왕분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곧 [[반양]]과 함께 출발했다.
* 그의 고분고분한 태도가 이상한건 [[흑금]]도 마찬가지였다. 싸우던 그가 다가와 "별 일이다"고 말을 걸었다. 관상은 자기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건 아니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확실히 이상하다. 아광이 내린 대기명령을 대놓고 위반하지 않았나? 깐깐한 관상이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흑금이 그렇게 말하자 관상이 "고립유군으로서 틀린건 아니다"고 대답했다. 마남자의 돌격은 아광군의 큰 위기였는데, 옥봉대가 끼어들면서 그 고비를 넘겼고 오히려 적장을 궁지로 몰아세웠다. 이대로 적장을 쓰러뜨린다면 진군 우익의 싸움은 초반부터 크게 우세해지는 격. 지시야 어떻든 전술적으로 틀린게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흑금은 새삼 왕분의 전술안이 보다 날카로워진다 감탄했다. 관상도 그게 틀림없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흑금이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말에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떨떠름하게 "맞아"라고 대답하는데.
- 트로피코 4/외교 . . . . 8회 일치
트로피코와 좋은 관계인 국가들은 혜택을 배풀어 준다. 트로피코와 나쁜 관계일 경우, 무역에 여러가지 불이익을 주거나 엠바고를 때리거나, 몇몇 국가의 경우에는 트로피코를 침공해 당신을 끌어내릴 것이다.
샌드박스 모드에서는 설정 중 하나로 미국과의 거리를 멀게 할 수 있다. 침략당할 확률이 낮아지지만, 관광객이 적게 온다.
* 자본주의 진영과 좋은 관계
* 관광객 수 증가
* 공산주의 진영과 좋은 관계
* 지식인 진영과 좋은 관계
* 환경주의 진영과 좋은 관계
- 피수영 . . . . 8회 일치
| 본관 = [[홍천 피씨|홍천]](洪川)
| 근무 = [[서울대학교병원|서울대학교 병원]] 소속 [[군의관]] <br /> 국군수도통합병원 소속 [[군의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1년간 [[군의관]]으로 참전하기도 한 피수영은 대한민국 신생아학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며, 대한민국의 신생아 치료 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 1972년 ~ 1975년 : [[대한민국 육군]] 군의관 ([[소령]] 제대)
== 가족 관계 ==
* [[피천득]](皮千得)의 1965년 수필 〈피가지변(皮哥之辯)〉에서 "… 피(皮)씨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이요, 그 중에는 시의(侍醫, 임금·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도 있었다는 것이다. …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올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수필에 나오는 아이가 바로 당시 23세로 [[서울대학교]] 의대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피천득]]의 차남 피수영이다.
[[분류:1943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순천향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울산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홍천 피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하동부대부인 . . . . 8회 일치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9월 23일]] - [[1567년]] [[6월 24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정인지]]의 후손이며 [[조선]] 제14대 [[선조]]의 사친이자 [[덕흥대원군]]의 부인이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가례를 올려 군부인이 되었으며, [[1567년]] 셋째 아들 [[조선 선조|선조]] 즉위 직전에 사망하였다. 사후 임금의 사가 생모로서 '''하동부부인'''으로 추증됐으나 정의상의 오류로 인해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관은 [[하동 정씨|하동]](河東)이다.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 [[조선 영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인데<ref>《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ref>, 사실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조선 경종|경종]]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조선 경종|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ref>《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7월 17일(경자) 1번째기사</ref>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조선 경종|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다시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하다가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으로 섞여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해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으로 짐작된다.<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B%E4%BA%BA&set_id=-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7%E5%A4%AB%E4%BA%BA&set_id=59642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E5%A4%A7%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_s.jsp?M=0&oflag=0&set_id=596427&selK=1&selT=1&query=%E5%A4%A7%E9%99%A2%E5%90%9B%E5%A4%AB%E4%BA%BA&query_Result=&sinfo=&list_per_page=10&chkID=0&opAll=0&opP=0&opA=0&opB=0&opR=0&opT=0&opG=0&opW=0&qAll=&qP=&qA=&qB=&qR=&qT=&qG=&qW=&idS=&idE=&tc=2&pc=2&cp=1&startpos=0&pos=0 대원군부인]</ref><ref>《조선왕조실록》영조 117권, 47년(1771 신묘 / 청 건륭(乾隆) 36년) 8월 9일(정축) 1번째기사 中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하동 부인(河東夫人)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ref>
이를 바탕으로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조선 철종|철종]]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ref>《조선왕조실록》철종 1권, 즉위년(1849 기유 / 청 도광(道光) 29년) 6월 17일(계미) 1번째기사</ref>, 이후 [[조선 고종|고종]]의 생모 여흥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져 왕족부인으로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은 부대부인으로 봉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 국어사전에는 부대부인을 왕의 사친의 작위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동부부인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 가족 관계 ==
*** 오빠 : 선전관 정창수(宣傳官 鄭昌壽)
**** 며느리 : 선전관 증 이조판서 [[이의로]](李義老)의 딸 [[신안군부인 이씨|신안군부인]] 이씨(新安郡夫人 星州 李氏, 1556~1616)
== 관련 항목 ==
== 관련 자료 ==
- 하이큐!!/등장인물 . . . . 8회 일치
※단행본화가 되지 않은 최신 연재본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으니 열람 시 주의할 것.[* 스포일러 틀 → 정발/원서/잡지에 상관없이 중요한 반전이 있을 경우]
일본 고교 선수들 중 베스트 3 안에 들고, 미야기 현에선 혼자서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었다. 관동의 선수들도 '우시와카'의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 카라스노가 봄 배구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다. [[오이카와 토오루]]에게는 중등부 시절 부터 악연의 상대였다. 라이트 자리에서 각도 내기에 적합한 왼손잡이 공격수.
참고로 작가의 전작인 [[궤변학파 요츠야 선배의 괴담]]과 관련되는 캐릭터, 해당 작품의 주역급 캐릭터였던 마코토의 두 살 터울 오빠이다. 즉, 이 작품의 시간대는 해당 작품의 2년 후.
남자 배구부와 다른 체육관을 사용한다. 제 1체육관을 농구부와 코트를 반으로 나누어 쓰고 있는 중.
본명 불명.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OB로 주전당시 배번은 히나타와 같은 10번이었다. 봄의 고교 배구 전국 대회에서 미야기 현 대표로 활약했으며 해당 경기는 주인공 [[히나타 쇼요]]가 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타나카 사에코와는 같은 학년이었고 츠키시마 아키테루보다는 한 학년 아래인 점에서 나이는 1권 기준 21세. 작은 신체(170cm 안팍)에 비해 엄청난 점프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대단한 박력과 카리스마를 가져[* 타나카 사에코의 회상으로는 컨디션 난조로 연습 때 교체 되었는데, 락커룸 관물함을 머리로 들이받으며 분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의 눈매와 포스가 엄청나서 좀 놀던 언니로 추정되는 사에코마저 움찔할 정도.] 에이스로서의 자부심과 실력으로 팀과 동료의 사기를 북돋으며 카라스노 배구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 다만 현재까지 작중 직접적으로 묘사된 일이 적어서 베일에 싸여 있다.
츠키시마의 형이자 카라스노 고교 졸업생. 츠키시마가 부활동에 청춘을 거는 사람들을 껄끄러워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자세한 것은 [츠키시마 케이] 항목 참조. 현재는 센다이 시에서 근무하며 사회인 팀에 소속되어 있다. 11권 이후부터는 츠키시마와의 관계가 많이 회복되어 예전만큼 형제관계가 쌀쌀맞지는 않은 모양이다. 150화에서 시라토리자와와의 결승전을 치루게 된 카라스노를 응원하러 동생 몰래(...) 경기장에 찾아왔다. 동생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해하면서도 변장까지 해가며 경기장에 일부러 올 만큼 동생을 남몰래 굉장히 아끼고 있다.
- 하이큐/231화 . . . . 8회 일치
* 카라스노는 시합 순서 전까지 대여한 체육관에서 워밍업을 한다.
카라스노는 일전에 빌린 체육관에서 워밍업에 들어가고 그 사이 1, 2시합은 타키노우에 유스케와 시마다 마코토에게 맡기는데 정작 타키노우에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 한편 체육관까지 전철로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전철이 멈춘다. 카라스노는 잠깐이지만 패닉 상태에 빠질 뻔하지만 타케다 잇테츠 고문이 사전이 대체 이동수단을 확인해 놨고 재반시설을 달달 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없이 체육관으로 이동한다.
* 체육관에서 몸을 푸는 동안 어제와 같은 긴장과 압박감은 보이지 않는다.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1, 2시합이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됐다며 슬슬 도쿄 체육관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 무사히 체육관에 도착한 카라스노. 사와무라는 평상심을 중얼거리고 있고 스가와라는 그걸 지적하며 놀린다. 시미즈는 아즈마네 아사히가 출입증을 놓고 간걸 챙겨준다. 우카이 코치는 다들 딱딱해 보이지만 상정한 범위라며 오히려 자신이 긴장을 떨치려고 애쓴다. 그런데 히나타가 시합 직전 짐을 뒤적거리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한다. 모양은 같지만 자기 가방이 아닌 것 같다고 하는데. 그러다 소름 돋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한동안 잊혀져 있었던 히나타의 "칠칠맞음"이 대폭발. 첫 전국대회부터 대형사고를 쳐줬다. 그런데 가방이 바뀐 건지 처음부터 안 챙겨온 건지 아직 불명. 하지만 위의 히나타가 야마구치에게 가방을 맡기고 화장실에 가는 장면에서 뒤에 작게 한 인물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히나타의 가방과 똑같이 생긴 가방을 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슨 관련성이 있는듯 싶다.
- 하이큐/251화 . . . . 8회 일치
* 스코어는 4 대 3. 이나리자키의 1점 리드. 그러나 경기 초반부터 이나리자키로 기울던 분위기가 [[히나타 쇼요]]와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동공격으로 뒤집힌다. 그동안 이나리자키의 플레이에 관심이 집중됐던 관객들은 새삼 카라스노 고교와 1학년 콤비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경기 시작전 카라스노 고교를 형편없이 얕봤던 [[미야 아츠무]]는 생각보다 솔직하게 멋지다고 감탄한다. 놀라운 순발력과 민첩성, 그러면서도 점프 높이는 전혀 줄지 않는 탄력 등. "직접 보니 더 멋지다"고 감탄하고 있으려니 동생 [[미야 오사무]]가 옆에서 "너는 시합만 하면 정신연령이 5살 이하"라고 빈축한다.
체육관을 가득 채우는, 종전보다 빠르고 높아진 야유. 다른 관객들은 품위가 없다고 투덜거리지만 높고 빠른 소리가 다른 소리를 묻어버린다. 그런데 방금 전 우연찮게 파인 플레이를 선보인 주인공, 히나타는 묘한 희열을 느끼느라 그런 소리에 일일히 반응할 틈도 없다. 아니, 오히려 저쪽 응원단의 안달난 반응이 기쁘기까지 하다. 그는 전국 2위의 이나리자키 고교가 전력을 다해 카라스노 고교를 무찌르고자 하는 상황에 도취된다.
* 관중석의 [[아카아시 케이지]]는 카게야마와 마찬가지로 아츠무의 "첫 디딤"을 높이 평가한다. 그 세련된 디딤이야 말로 딜레이없는 속공 연결의 밑바탕이다. 매우 빠르고 정확하겐 첫 스텝 덕분에 이후의 모든 동작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카게야마의 서브 때 그랬듯, 이번에도 이나리자키의 응원석은 떠들썩하게 박자를 맞춘다. 큰 북과 각종 타악기를 이용한 빠른 템포의 연주. 그런데 이 연주 때문인지 카라스노를 응원하는 관중들도 템포에 맞춰서 박수와 구호를 연호한다. 이것은 육상 경기 같은데서 선수가 객석의 응원을 유도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문제는 그건 선수가 자기 컨디션을 위해 유도하는 거지만, 이번 적측이 카라스노의 템포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하는 행동. 이나리자키 응원단은 관객의 호의를 끌어내는 척하며 실제론 방해행동을 하고 있다.
관중석에 와있는 노헤비 학원 배구부의 전주장 [[다이쇼 스구루]]는 나이브한 태도로 "이나리자키가 가차없다"고 평한다.
- 하춘화 . . . . 8회 일치
||<:>김세환[br]이수미[br]사랑하는 마음[br]내 곁에 있어주[br](1975)|| → ||<#FFFFA1><:>김훈[br]'''하춘화'''[br]나를 두고 아리랑[br]'''대관령 아리랑[br](1976)'''|| → ||<:>김훈[br][[혜은이]][br]모래탑[br]당신만을 사랑해[br](1977)||
|| 학력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br] [[경남대학교|경남대학교 병설 산업 전문대학]] 가정과 (졸업)[br][[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 (학사)[br][[동국대학교|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석사)[br][[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
|| 본관 ||[[진양 하씨]]||
이 와중에도 하춘화는 공연과 학업을 병행함에도 불구하고 학업에도 열중하여 [[1994년]]에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 정책과정을 수료한 후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였다. [[2000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공연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 [[8월 25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되었다.
* 대관령 아리랑 (1976)
- 한승주 (공무원) . . . . 8회 일치
'''한승주'''(韓昇洲, [[1940년]] [[9월 13일]] [[경기도|경기]] [[경성부|경성]] - )는 대한민국의 교육인, 외교학자, 외교관,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외무부]] 장관, 주미 대사를 지낸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1978년]]부터 교수로 재직한 외교학자이다.
[[1993년]] 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외무부 장관이었다.
청와대는 2003년 4월 한승주를 주미대사로 서둘러 내정하였다. 여기에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진용을 가급적 빨리 구축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북핵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대두됐으나 양성철 당시 주미대사는 3년의 임기를 거의 마쳐가고 있는 상태였고 가능한 한 빨리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승주가 국내 인사로는 드물게 미국내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으며,1993년 북핵 위기 때는 외무부 장관으로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점도 고려돼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북핵해결 위한 美지명도·인맥 고려…한승주 주미대사 내정 배경 |url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18951804&code=11121200 |뉴스 = 국민일보 |날짜 = 2003-03-27 }}</ref> 이리하여 [[2003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제19대 주미대사를 지냈다.
|직책 = [[대한민국 외무부|외무부 장관]]
|직책 =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 미국 대사]]
[[분류:194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고려대학교 총장]][[분류:욱일대수장 수훈자]]
- 허근욱 . . . . 8회 일치
[[1930년]] [[3월 28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에서 변호사 겸 독립운동가 [[허헌]]과 문화 유씨 유덕희(柳德禱, 또는 유문식(柳文植))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 언니 2명이 있었고, 둘째 언니가 독립운동가 겸 여성운동가 허정자([[허정숙]]으로 개명)였다. 유덕희에게서는 첫 딸이었다. 그 아래로 음악가인 여동생 [[허선욱]]과 허기욱, 허영욱, 허선욱 그리고 [[북조선]]에서 외교관을 역임한 [[허종욱]] 등이 태어났다.
그 뒤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고초를 겪은 후 글쓰기에 전념하면서 1959년 KBS 방송국 작가실 집필이 되었으며, [[1960년]]에는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뒤 KBS 방송국의 집필담당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 [[정년 퇴임]]하였다. [[2001년]]에는 아버지 허헌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을 담은 전기문 《민족변호사 허헌(許憲)》을 출간하였으며, 딸의 시선에서 바라본 허헌의 삶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 돋보이는 저작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1965년 한국부인회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고, 1967년 [[황애덕]] 등 [[3.1 만세 운동]] 관련자 및 투옥,수감된 독립운동가 및 그 유가족들이 중심으로 조직된 3.1여성동지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도 위촉되었다. 1968년 한국여성유권자연맹 이사, 1969년 국제직업여성연맹 한국측 이사, 198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중앙위원회 위원 겸 편집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 문학 작품들도 존재한다. 이를 두고 자신의 출신과 관련된 남한 쪽에서의 모종의 제약 때문에 의식적으로 이데올로기나 분단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는 평도 있다. 또한 일찍이 이념과 삶의 진정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아버지 및 가족과 결별하고 월남했던 이력이 말해주듯, 누구보다 분단과 가족공동체의 회복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있다는 작품평도 있다.
* [[1976년]] [[6월 29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반공문학상 소설 부문, 문화공보부장관상
== 관련 항목 ==
== 관련 서적 ==
- 현이와 덕이 . . . . 8회 일치
그러던 중 1990년 1월 [[장덕]]은 [[신년]][[드라마]] 《[[구리반지]]》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연기를 선보였으나, 어릴때부터 앓아 오던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를 과다복용 하게 되어 [[1990년]] [[2월 4일]]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5동 1008호 자신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8월 [[장현]] 역시 설암으로 사망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04533|제목 =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저자 = 이투데이|날짜 = 2013년 3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14일}}</ref>
| 관련활동 = {{flatlist|
1975년 4월 만 14세(중학교 2학년)가 된 장덕은 오빠 [[장현]]과 함께 [[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으로 [[통기타]]를 메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에서 열린 [[미8군]] 주최의 파티 무대에서 <To Be A Child Again>라는 곡으로 데뷔한다. <To Be A Child Again>는 장덕 작곡의 첫 발표곡으로 영어가사는 [[미8군]] 관계자이자 [[드래곤 래츠]]를 초청한 엘 클리나드가 붙인 것이다([[드래곤 래츠]]라는 듀엣명 또한 엘 클리나드가 붙였다.). 장현 · 장덕 남매는 이 공연을 통해 출연료도 제대로 받았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의 쇼 매니저로부터 [[드래곤 래츠]]의 노래와 미모에 반했다는 찬사를 들으며 엘 클리나드를 통해 출연계약까지 정식으로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장현 · 장덕 남매는 곧바로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 되었고 1개월 뒤(5월) TBC TV의 청소년과 젋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오라오라에 출연해 장덕이 [[작사]] · [[작곡]]한 <꼬마인형>, <일기장>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장덕은 [[작사]] · [[작곡]]에 능한 [[천재]][[소녀]]로 평가 받게 된다.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의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한다. 장덕은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아 본 적은 있었지만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한달 뒤(5월)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 (가수)|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만 14세) 때 작사 ·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 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을 하며 이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 권한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곧 데뷔하게 되는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 [[작곡가]]로서 제1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제 2회 대회부터는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에서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로 이름이 바뀐다.)에 출전한다. 당시 가요제 규정상 작곡가도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에 장덕은 빵모자를 눌러 쓴 깜찍한 모습으로 나와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입상). 같은 해 7월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박태원 [[감독]]의 [[영화]] <[[선생님 안녕]]>에서 [[장현]]은 [[임예진]]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얽힌 영화로 비록 단역이지만 장덕 또한 [[장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이와 덕이는 이 영화에서 [[사운드트랙]] <정말>도 싣게 된다.
1979년 1월 그녀의 어머니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 · 장덕을 불러 유학을 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떠나면서 어머니는 덕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부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덕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장현은 이미 천인실과 결혼을 하였고 임신 6개월이 지나 곧 아이를 낳게 된다고 실토한다. 어머니는 장현과 천인실의 관계를 예전부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결혼한 사실에 실망하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이 가수로서 성공하고 부양능력이 생겼을 때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수차 그것을 장현에게 말해 왔었기 때문이다. 6월 제2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가 가야금상을 수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3년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같은 달 장덕은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솔로 데뷔음반 《첫사랑》을 발표한다. 이 음반은 타이틀곡 <첫사랑>을 비롯 <나도 그래>, <웃어봐요> 등 신곡 4곡과 현이와 덕이의 1집 수록곡들을 다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그 해 10월 장덕은 오빠 [[장현]]의 집에서 나와 월세방을 구해 혼자 살게 되는데, 이 때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동맥을 끊고 또다시 자살을 기도한다. 이 사건 이후 장덕은 오빠 · 아버지 가족과 함께 한 집에서 살게 된다. 그해 초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이 시기 장덕의 자살 소동을 모르고 있었다.
1980년 5월 제3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병걸 (가수)|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 (노래)|사랑은 떠나도]]>가 입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4년 연속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1977년 · 1978년 · 1979년 3년 연속 입상한 사실은 맞지만 서울국제가요제 관련 정보를 찾아봐도 1980년 입상한 기록은 없다.). 6월 그녀는 타이틀곡 <순정>을 비롯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등 신곡 5곡과 현이와 덕이 정규 1집, 그리고 그녀의 첫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 (장덕의 음반)|첫사랑]]》의 수록곡들 중 몇 곡을 골라 그대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 《순정》을 발표한다. 10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우연히 1년이 지난 1979년 9월 9일자 선데이서울 주간지를 통해 장덕의 자살 소송 기사를 접하게 된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장덕을 간곡히 불렀고 장덕은 아무 반응이 없다가 결국 어머니가 결혼해 살고 있는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들어가게 된다. [[내쉬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어머니는 오빠 장현 또한 불러서 대학 공부를 시키려 했지만 설득시키지 못했다.). 12월 내쉬빌 한인회가 주최하는 송년파티가 있었다. 장덕과 어머니도 참석했는데, 한인회 회장이 찾아와 장덕에게 밴드를 도와 달라고 한다. 한인사회에는 밴드가 딱 하나 있었는데, 형제들이 조직하여 만든 가족밴드 리 패밀리였다. 실력들이 부족했기에 장덕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장덕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금년만 해 보라고 해서 결국은 승낙을 한다. 이후 장덕은 형제들 중 한명인 이승언이라는 남자와 점점 가까워 지게 된다.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고 가수활동을 중단하며 오빠의 병간호를 하던 장덕은 점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 1월 21일 장덕은 모처럼 가요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데 이것이 장덕이 대중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었다. 1990년 2월 4일 오전 3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2동 1008호 안방에서 장덕은 다량의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 세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 이상증세를 보이며 신음 중이었는데, 이것을 본 의상 담당 문인옥씨가 발견하고 장덕의 아버지에게 연락,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상승작용에 의한 쇼크로 장덕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향년 28세였다. 문인옥씨에 따르면 장덕은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장덕이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 오빠 장현의 병간호를 오래 해왔으며 최근 이은하 · 조영남 · 최진희 · 변진섭 · 김승진 · 하춘화 등 동료 가수들에게 곡 의뢰를 받고 신곡 작업까지 하는 등 빽빽한 일정으로 무리를 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과로와 감기증세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판명했다.<ref>이상열 앵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0/1830767_13421.html 가수 장덕, 수면제 과용으로 사망], 《[[MBC 뉴스데스크]]》, 1990년 2월 4일 작성, 1990년 2월 4일 확인.</ref>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이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동생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장현은 인터뷰에서 "동생의 죽음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앞선다"고 고백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 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그 해 6월 장덕 · 장현 남매의 매니저로서 그들이 죽는 날 까지 항상 함께 했던 김철한의 기획하에 [[전영록]], [[이선희]], [[김범룡]],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임종환]], 위일청, 지예, 양하영, [[임지훈]] 등 11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장덕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된다. 이 음반은 장덕이 생전 발표한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 하고 있는 형태이지만 <일어나> 등 악보로만 남아있던 미발표곡들도 수록되어 있으며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1990년 한해 총결산 가요순위 톱10 안에 들게 된다.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장현]]은 7월 중순경 병세가 악화돼 경기도 성남시 성남병원으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에서 인공호흡으로 연명했지만 8월 16일 오후 4시 20분경 11살난 아들 원이를 남겨둔 채 어머니가 지켜 보는 앞에서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고 말았다.<ref>{{웹 인용 |url =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04533|제목 =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저자 = 이투데이|날짜 = 2013년 3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14일}}</ref>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 현주엽 . . . . 8회 일치
[[1975년]] [[7월 27일]]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의류제조업을 하는 아버지 현진구(玄晉具)와 前 국가대표 농구 선수인 어머니 홍성화(洪性華) 사이에서 슬하 3남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위로는 세 살 위의 두 쌍둥이 형이 있다. 그의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고 [[종교]]는 [[불교]]이며 신장은 195cm이고, 체중은 120kg이다.
서울 도성초등학교 6학년 시절 우연히 농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휘문중학교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키도 작고 농구 실력이 부족하였던 그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으나 공교롭게도 서울 휘문중학교로 학교를 배정받아 농구특기생이 아닌 일반학생으로 휘문중학교를 입학하고 다시 농구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비교적 늦은 나이인 휘문중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하게 된 현주엽은 1학년 동안은 늘 벤치를 지켰으며 2학년이 돼서야 코트에 첫 출전을 하게된다. 현주엽은 휘문중학교 2학년 때까지 자신의 어머니가 농구선수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의 경기를 관람하러 온 어머니를 현주엽의 농구 코치가 알아보는것이 계기가 되었다.<ref name=sports>SPORTS 2.0 2008년 10월 3호</ref> 운동선수 생활을 하였던 어머니는 현주엽이 농구선수가 된 후 항상 주위 사람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예의를 지킬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현주엽은 그 당시 NBA 농구 비디오를 보면서 농구연습을 했고 그의 롤모델 농구선수는 매직 존슨이었다. 매직 존슨을 동경하여 2008년까지 줄곧 백넘버 32번을 달았다.
휘문고 시절부터 초고교급으로 분류되던 현주엽은 고려대와 연세대 양교 관계자들의 치열한 경쟁속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오다 고3때인 1993년 3월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고려대 진학을 발표한다.<ref>한겨레 1993년 4월1일 “휘문 현주엽 고려대 간다”</ref> 이후 현주엽이 밝힌 바에 따르면 1993년 3월 대학연맹전에서 고려대가 8강 진출에 실패하는 것을 목격하고 고려대 진학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미 대학 최강의 전력을 갖추고 고대에 줄곧 승리를 거두던 연대에 들어가기보다는 연대와의 대결에서 열세에 있던 고대에 들어가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보이고 싶어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주엽이 대학진학후 첫 출전한 대회인 MBC배 대학농구에서 고대는 연대를 맞아 28점차로 대패하게 된다. 이 경기후 고대는 선수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고 절치부심하여 패자부활전을 통해 결승에 올라와 다시 연대를 만나 승리를 거두었고, 다시 최종결승전에서 고대는 연대에 시종일관 리드를 당했으나 시합종료 1분을 남기고 고대 양희승이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 동점상황에서 현주엽이 속공으로 종료 직전 0.4초를 남기고 회심의 레이업을 시도하였고 연대 김택훈의 반칙으로 얻은 자유투 2개를 모두 침착하게 성공시키면서 고대의 우승을 이끌었다.<ref>경향신문 1994년 4월3일 “안암골 호랑이 "大(대)역전쇼””</ref> 대학무대 첫 대회에서 세간의 기대만큼의 활약을 벌이지 못한 현주엽은 대회 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이번 대회를 통해 모든면에서 선배들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고교농구와 대학농구의 엄청난 차이를 느꼈다고 대답했다.<ref>스포츠서울 1994년 4월 2일 [http://kids.olivercho.com/SportsLeisure/148 “현주엽,고려 우승의 "일등공신",인터뷰”]</ref> 그러나 이 후 현주엽은 파워 포워드로서의 팀내 입지를 탄탄히 다지게 되고, 고대는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신기성이라는 베스트 5 체제를 구축하며 대학무대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처럼 고려대학교가 연승가도를 질주하자 세간의 관심사는 고려대가 70년대말에 이룩했던 최다연승 49연승을 깨고 50연승을 달성할것인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1995년 가을철 대학농구 연맹전 예선 첫 경기에서 현주엽이 발목 부상으로 빠진 고대는 당시 약체였던 홍대에 3점차로 덜미가 잡히며 20연승에서 연승을 마감했다.<ref>경향신문 1995년 10월30일 “고려대 20연승 마감 약체 홍익에 덜미”</ref> 이후 고대는 다시 한동안 연승을 이어갔지만 50연승에 근접하지는 못하였다. 고려대학교는 충분한 전력을 갖췄음에도 현주엽이 졸업하기전까지 끝내 농구대잔치에서는 연세대학교가 이루어내었던 대학팀 우승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현주엽은 상무 복무중 출전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결승전에서 중국에 극적 역전승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ref>연합뉴스 2002년 10월14일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255351 “아시안게임-<농구> 한국, 20년만의 금메달(종합)”]</ref> 당시 중국은 NBA 지명 1순위에 빛나는 야오밍이 포함되어 있었고, 한국은 시종일관 중국에 리드를 당해 종료 3분 17초를 남기고 71-84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다. 이때 김진 대표팀 감독은 작전타임을 부른후 현주엽과 김승현을 교체 투입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현주엽의 미들슛과 골밑돌파, 그리고 김승현의 가로채기와 어시스트가 빛을 발하며 한국팀은 무더기 득점을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4쿼터 종료 4.7초를 남기고 현주엽이 드리블에 이은 대담한 골밑돌파로 레이업슛을 성공, 동점을 만들면서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연장전에서도 김승현과 현주엽의 활약은 이어졌고 102-100로 경기를 마무리 지으며 20년만에 남자농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 무관의 제왕 ==
* [[한국방송공사|KBS]] 《[[가족오락관]]》 ... (with [[문경은]], [[우지원]], [[석주일]], [[서장훈]])
- 홍지호 . . . . 8회 일치
| 소속 = 서울 홍지호치과의원 원장 <br /> 前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외래교수 <br /> 前 [[경희대학교]] 치과대학 외래교수 <br /> 前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교수 <br /> 前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br /> 前 [[삼성의료원|삼성의료원 서울 강북삼성병원]] 예하 치과 과장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고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며 [[경기도]] [[여주시|여주]]와 [[김포시|경기도 김포]]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서울 홍지호 치과의원(舊 서울 홍지호·이신정 치과의원) 원장을 지내고 있다.
== 가족 관계 ==
* 형: 홍성호<ref>홍성호(洪聖鎬) 의학박사의 [[본관|본관(관향)]]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학위를 거쳐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의학석사·의학박사 학위하였고 한때 [[영화 배우|영화여배우]] [[이미숙]]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하였으며 이후 전진숙이라는 일반 여성과 재혼한 그는 한때 [[연세대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겸임교수]] 겸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전임강사]]를 역임 이후 현재 경기도 용인 홍성호 성형외과 원장을 지내고 있다.</ref> (洪聖鎬, 1947년 ~ ) - [[성형외과]] [[의사]] 및 의학박사
* 《홍지호 원장의 치아관리만 잘해도 인상이 바뀐다》 (팜파스, 2007년)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치과 의사]][[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자유 연애]][[분류:남양 홍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 AT4 . . . . 7회 일치
가볍고 다루기 쉽다는걸 포인트로 내걸고 있다. 조준해서 쏘고 빈 발사관을 버리면 된다는 것.
유효사거리 40-400m, 관통력 420mm.
유효사거리 400m, 관통력 480mm.
유효사거리 1,000m. 공중폭파-충격신관 두가지 모드가 있다.
유효사거리 20-300m, 관통력 500mm
유효사거리 20-300m, 관통력 350mm
미국에선 어떤 얼간이가 군대에서 사용한 AT4 발사관을 집에 가져온 적이 있다. 경찰에서 총기 회수 캠페인을 벌일 때 가족 중 한명이 넘겨버렸다고. [[http://usnews.nbcnews.com/_news/2012/12/28/16221808-rocket-launchers-surface-during-los-angeles-guns-buyback?lite|링크]].
- Crusader Kings 2/DLC . . . . 7회 일치
관심사 시스템을 해금시켜주는 DLC.
이 DLC가 있을 경우 자신의 캐릭터의 관심사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관심사는 모두 열개로 다음과 같다.
* 가족과의 관계도를 향상시켜주는 가족(Family).
*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관리력을 향상시키는 통치(Rulership)
또한 관심사에 따른 이벤트들이나 불륜 상대와 손잡고 잠시 사랑의 도피를 하는 이벤트 등이 추가되었다.
이외에 고양이 키우기 이벤트, __여러가지 사형 방법__, __사망 요인에 따른 다양한 사망 효과음__, 특별한 관계의 인물이 죽었을 때의 이벤트 등이 추가된다.
- K리그 챌린지 . . . . 7회 일치
K리그 챌린지의 발족은 승강제 도입과 관련한 이슈로 인해 탄생하게 되었다. 허나 K리그는 선수들의 수준만 보면 아시아 최고라 자부할 수 있을지언정 리그 자체가 가진 상업성은 아시아 최하위 수준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라서 새로 프로축구구단을 창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쉽의 관계처럼 새로 1부리그에 부여하는 이름이 명확하게 다른게 아니기 때문에 이 둘의 명칭이 상당히 헛갈릴 우려가 있었던 점이 지적되었다. 이런 이유로 2부리그도 단순히 K리그의 이름을 물려받는게 아니라 K리그 클래식처럼 충분히 구분가능한 명칭을 짓는 것이 공론화되었고, K리그 챌린지란 이름이 공식화된다.
= 내셔널 리그와의 연관성 =
간혹 내셔널리그를 챌린지의 전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계획과는 달리 고양 국민은행이 승격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울산미포조선까지 승격을 거부함으로써 승강제가 가동하지도 않았고, 리그의 구성 팀마저 프로화를 마친 구단이 없었기 때문에 챌린지와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챌린지는 리그가 구성된 이후에 승강이 이루어졌으며 리그의 구성 회원들도 모두 프로구단이기 때문에 그 연결성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K2리그로 출범했던 당시에는 리그의 운영이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아니라 한국실업축구연맹으로 봐야 하며, 이 두 연맹은 상하위적 조직이 아니다. 또한 챌린지가 발족하였음에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까지 미뤄 보면 이 둘간의 관계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챌린지의 대회 운영도 승강제 도입과 관련한 문제 때문에 각 시즌마다 다른 운영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관련항목 =
- Q.E.D. 증명종료 . . . . 7회 일치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에 무관심한 15세에 [[MIT]]를 졸업한 [[천재]]소년 [[토마 소]]가 일본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해보고 싶어서...라고 한다. 천재들이란...] 체력과 의욕이 넘치는 [[미즈하라 가나]]와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래도 고정팬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추리만화다. 다만 작가가 소재가 겹치는 [[C.M.B. 박물관 사건목록]]을 연재하면서 Q.E.D.를 다소 소홀히 하는 듯한 경향이 보이며 또 팬들의 애탄 바람과는 상관없이 [[토마 소|토마]]와 [[미즈하라 가나|가나]]의 ~~연애질~~연애노선이 진전될 가망이 안보인다는 점(...)[* 주인공들이 아직도 서로를 토마군-미즈하라씨 로 부르고 있다...]
같은 작가의 [[C.M.B. 박물관 사건목록]]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극중에서 토마가 언급한 괴짜 사촌이 바로 박물관 사건목록의 주인공인 [[사카키 신라]]. 콜라보레이션 기획으로 두 작품의 주인공이 만나는 편도 있다. 이제까지 총 2번의 기획이 진행되었으며, 해당 단행본은 첫번째가 QED 28/CMB 6권[* 이 때는 서로 다른 사건을 쫓다가 마주하게 되었다. 사건이 성격이 각각 다르기에 둘의 지능에 우열을 매길 수는 없겠지만, 자기가 쫓는 사건이 아님에도 신라보다 진상 파악이 빨랐던 것으로 보이는 토마의 판정승이라 보는 의견이 많다.], 두번째가 최근의 QED 41/CMB 19권.[* 전편을 의식한 것인지, 이번엔 아예 각자의 두뇌를 한껏 활용하면서 말 그대로 정면충돌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예고편 동영상이 올라오면서 뭇 팬들을 설레게 했었다. 밝혀진 결과물은 정면 충돌.
* [[NHK]]에서 드라마로 제작, 2009년 01월부터 방영되어서 10화로 완결. 여주인공 가나역에는 모닝구무스메의 멤버([[다카하시 아이]])가 캐스팅되어 화제...였다고는 하지만...아~[[망했어요]][* CMB 14권에 따르면 작가의 부인이 이 드라마 덕분에 다카하시의 팬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과연...] 다행히 실사판의 흥행여부와는 관계없이 만화는 계속 사랑받고 있다.
- Victoria II/정당 . . . . 7회 일치
관세에 영향을 끼친다.
국가간 거래를 통제하자고 주장한다. 관세를 평균치의 200% 수준으로 뜯어낼 수 있지만 평균치의 75% 수준까지 밖에 끌어내릴 수 없다.
상인들의 거래에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관세를 폐지할 수 있지만 평균치의 125% 수준까지 밖에 끌어올릴 수 없다.
플레이어와 자본가 POP의 공장, 철로의 관리 가능 여부와 세금 한도, 공장 효율 등에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못 알아먹겠으니 관리 가능 여부만 쓸거임 ^오^.
종교와 국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종교는 개인 취향으로만 취급된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Victoria II]]
- 강우영 . . . . 7회 일치
'''강우영'''(1924년 - 2011년 3월 24일)은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검사 출신의 대법관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1950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대구지검,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61년 법무부 검찰과 과장을 하다가 1961년 서울고검 검사, 1962년 부산지검 부장검사, 1966년 전주지검 차장검사 1968년 서울지검 부장검사 1970년 부산지검 차장검사를 하였으며 1971년에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장이 되었다. 지청장 임기를 마친 이듬해 서울고검 차장검사를 하다가 대검찰청 특별수사부 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전주지검 검사장,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구지검 검사장, 법무부 법무실장을 하는 등 박정희 정부에서 법무부와 검찰 주요 요직을 거쳤다. [[전두환]] 등 신군부 집단에 의해 권력이 장악된 1980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22대 서울지검장을 하고 1981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재직중인 1981년 4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기 5년의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대법관에 재직중이던 1984년 7월 제6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였으며 대법관 퇴임이후인 1987년에는 대한공증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분류:1924년 태어남]][[분류:2011년 죽음]][[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검사]][[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
- 고소영 . . . . 7회 일치
||<#896AB7> {{{#ffffff '''본관'''}}} ||<(> [[반|제주 반씨]] ||
가족관계는 1남1녀 중 둘째로 2살 위의 [[오빠]]를 두고 있다. 이후 고소영은 미남 배우 [[장동건]]과 결혼하여 마찬가지로 1남 1녀의 자녀를 두게 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빠]]-[[여동생]] 남매라는 점도 같다.
연기력에 대한 비판과 함께 '''광고 모델이 주업인 배우'''로 손꼽힌다.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린 전도연이 자타공인 연기파 배우로 성장한데 반해 이쪽은 정말 발전이 없었다. 90년대 [[김희선]]처럼 연기폭이 좁은것도 아니고 그냥 연기를 못한다. [* 한 시대를 풍미한 미녀배우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지금도 두사람이 같이 거론되지만 배우로서는 엄연히 김희선이 위다. 김희선은 브라운관안에서의 존재감에 비해 연기력이 미숙하다는 평가를 받은 90년대에도 선하고 청순 발랄한 캐릭터를 맡기면 대박을 터트렸고 원톱 주연을 맡아 완판을 기록했으며 연기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주목을 덜받었을 뿐 《세상 끝까지》나 《안녕 내사랑》같은 90년대 말 작품에서 진지한 연기도 가능함을 보여줬다.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원숙함과 노력에 더해진 2010년대에는 진지한 역, 억척스러운 역, 우아한 역 다 해내면서 연기력 논란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연기 잘 하는 배우 반열에 올라섰다.]1990년대에는 워낙 잘나가서 그런 얘기가 드물었지만 2002년 [[이중간첩(영화)|이중간첩]]의 흥행 참패 이후 본격적으로 연기력 논란이 제기 됐으며, 이 논란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앞서 말한 2000년대 들어 활동이 없다시피한 것도 결국 그녀의 연기력이 문제로 작용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출연작 중 그나마 연기평이 좋았던 출연작은 [[강풀]]작가 웹툰 원작의 영화 [[아파트(영화)|아파트]] 정도.
2014년 12월 30일 패션사업을 접었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469&aid=0000056567|관련기사]]
* 2015년 9월부터 [[J TRUST]]의 모델이 되어 TV 광고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떴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277&aid=0003578730|#]]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기 배우가 대부업체 광고에 출연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논란이 일었으며 이런 논란에 대해 '''그저 이미지 광고에 출연하는 것 뿐'''이란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해명하는 바람에 팬들의 비판이 더욱 들끓었다. 연예계 관계자 중 한명도 고소영 본인뿐만 아니라 남편인 장동건 또한 이미지 실추가 우려된다는 반응과 함께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는 평이 나왔다. 더구나 [[상호저축은행|저축은행]] 항목에도 나와있는 광고 규제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광고로 출연한 탓에 그 또한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중이다. 고소영은 사건이 생긴 지 '''2일 뒤에 사과하였고 광고 계약도 취소'''하였다. 여러모로 한국에서의 대부업체의 이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 남편은 장동건, 절친은 [[정우성]], [[이정재]] 등이다. ~~ㅎㄷㄷ~~ 대표작 '비트'를 함께 찍었던 정우성과는 [[구미호]]라는 영화에서도 호흡을 맞춘 적이 있으며 정우성의 말에 따르면 데뷔 전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19&aid=0002345735|관련기사]]
* [[별]] (1996, MBC) - 장혜미[* 드라마 자체는 SF에 스릴러 느낌을 담았으며, 정확하게는 사고로 지구에 표류한 외계인 과학자다. 극중 장혜미는 드라마 초반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했으며, 과학자 외계인이 지구에서 지구인들의 눈을 피하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려고 죽은 장혜미에게 빙의했다. 같이 주인공으로 나온 모델 이소라는 살아있지만 마찬가지로 외계인 군인에게 빙의당해 행동을 같이한다.]
- 고현정(미스코리아) . . . . 7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불교/인물)]
특히나 위자료에 대한 루머가 많은데 가장 널리 알려진 썰은 인사동 '''[[스타벅스]]'''의 소유주가 고현정이라는 것. 왜 하필 많은 지점중에 인사동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널리 퍼졌다. 다만 스타벅스 코리아는 신세계와 미국 스타벅스 본사가 50:50으로 투자한 합작회사[* 하지만 이는 스타벅스 코리아의 설명일 뿐이고 대부분의 자본 및 실질적인 투자는 신세계에서 거의 몰빵하고 있기 때문에 지분이 저렇더라도 이익배분 자체도 다를 것이고 사실상 합작회사라기보다는 좀 더 두둑한 로열티를 주는 형태에 가깝다.]인지라 고현정 본인에게 지점 하나를 내줄 수 있는 구조가 아님으로 근거없는 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밝혀진 위자료가 15억원에 불과한데 고현정과 결혼 이후로 [[정용진]] 부회장의 재산이 급증한 점.[* 신세계의 지분과 관계없이 그 시기의 신세계의 주식은 IMF를 지나고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자녀도 둘이나 있는 점[* 아랫쪽에 나와있지만 두 자녀 모두 부모의 좋은 점만 따왔는지 외모가 매우 훤칠하다. 특히, 아들은 정용진, 딸은 고현정을 닮았다. 특히 딸의 경우 사려깊은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양엄마와의 사이도 좋은 것 같다. 한 SNS에서 고현정의 딸과 지인이 나눈 대화록이 공개된일이 있는데 친엄마가 보고싶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렇게 보고싶은 것은 아니며 그건 양엄마에게(그분이라고 호칭) 예의가 아니라고 답했다. 더구나 양엄마보다 친엄마가 예쁘시지 않냐는 질문에는 양엄마도 예쁘신 분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례라고 할 정도.], 사촌인 이건희 회장의 맏딸 [[이부진]]씨와 [[임우재]]씨의 이혼소송에서 이부진 씨가 대단한 변호인단을 이끌고 2심에서 완승을 거두었음에도 86억이라는 돈을 지급했다는 점을 보았을 때 15억의 위자료는 적어도 너무 적고 특히나 세상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싫어하는 재벌가에서 고현정이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는데 고작 15억이 위자료의 전부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고현정이 이혼한 직후, 삼성가의 내부에 대해서 책을 쓰자는 제의도 물밀듯이 들어왔는데 물론 고현정 본인이 싫어서 안했을수도 있지만 했다하면 15억은 애들 장난수준으로 벌었을 것이다.] 원래는 신세계 백화점 하나를 달라고 했는데 스타벅스로 떼웠다는 얘기들도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루머가 많은 부분.
고현정 또한 무릎팍도사에서 정용진에 관한 부분에서는 진정성이 있는 태도로 말한 걸 보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정용진에 대한 세간의 평판[* 정용진 부회장은 일반인들의 재벌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는 다르게 싹싹하고 정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SNS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이 재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신비주의에서 탈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사실이라면 당사자들은 죽고 못 살 정도로 금슬이 좋았지만 전형적인 시집살이[* 고부갈등+시누이 간의 갈등]가 두 사람의 파경 원인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수현 드라마 주연 출신이어서, 정확하고 약간 빠른 발음을 구사한다. 연기력은 엄마의 바다나 두려움없는 사랑이 인기였던 모래시계 이전에도 주연을 맡을 만하다는 평이었는데,(우는 장면에서 근성의 노메이크업으로 펑펑 울거나) 모래시계 때 레전설 소리를 들었다.~~그리고 총알은퇴. 관광지 [[정동진역]]을 남기고.~~ [* 김종학 감독은 연기력이 아까워 결혼을 말렸다고 이후에 인터뷰한 바 있다.] 김종학 감독은 20대 초반의 고현정을 두고 한 줄의 대사로도 파급력을 갖는 배우라고 이야기했으며 복귀 후의 고현정은 봄날의 실어증 여주인공, 여우야 뭐하니의 음란 잡지 기자, 히트의 강력반 형사 등 다양한 캐릭터를 오가며 연기를 펼쳤다. 트레이드마크인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디테일한 연기[* '무언가 배우고 싶을 정도로 수많은 미덕(단순히 매력이 아닌)을 지니고서도 나쁜 정치인일 수밖에 없는 미실을 얼굴의 오른쪽과 왼쪽, 입과 눈과 눈썹이 다 따로따로 움직이며 복잡한 심리를 보여주는 섬세한 연기로 강렬하게 소화해낸 고현정은 이 작품이 성공한 이유이자 일등공신이다.' -이영미(문화 평론가). 시사IN 기사 중] 는 선덕여왕 때 처음 화제가 되었다. 비결에 대해, '사극이라 몸이 안움직이니 얼굴이라도 움직여야 시청자들을 잡겠다 싶어서...'라고 코멘트. 같이 촬영했던 [[이순재]]도 인상적이었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이순재]]는 헐리우드로 지금 당장 진출할 수 있을 정도의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김명민]], [[김희애]], 고현정을 꼽았다.] 선덕여왕에서 고현정은 주인공에 비해 많지 않았던 분량임에도[* 어느 팬의 편집 결과에 의하면 62부작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나온 시간은 13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고...] 주요 시상식을 휩쓸고 그해 실시된 한국갤럽 설문조사에서 38%라는 역대 최고의 득표율로 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를 차지하는 등 대중과 평단 모두의 극찬을 받았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051965|#]] 차기작으로 선택한 드라마 대물은 방영 내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작가, 감독이 바뀌는 등 내부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고 드라마 내용은 산으로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현정의 연기는 호연이었다는 반응과 함께 2년 연속 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를 차지하였다.[* 이 때 2위와의 격차가 무려 23%였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156691|#]] 여왕의 교실은 시청률 면에서는 고현정 필모그래피에서 최하를 기록했지만 무표정에서 종종 보여지는 미세한 표정 연기(일명 나노 연기)는 미실을 능가했다는 반응도 얻어 원작과 다른 마여진을 만들어냈다며 호평을 받았다.
영화 필모그래피가 약해 영화에서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많이 찾기 힘들다. 그러나 두 편의 홍상수 영화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출연한 고현정이 감독의 영화세계 뿐 아니라 영화를 찍는 방법론에까지 영향을 미쳤을거라는 평[* 프로-아나 시대의 카운터 디바 <여우야 뭐하니> (Dramatique 7호) -변영주 감독]과 더불어 영화평론가 [[이동진(평론가)|이동진]]으로부터 고현정은 홍상수스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넘어서 자기스러움을 연기하는, 대한민국 여배우 중 가장 머리가 좋은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푸른밤 성시경 '필름 속을 걷다'에서] 고현정이 고현정을 연기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에 있어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판단은 자기 몫.[* 짜고 치는 상황극인 고현정 vs 최지우 씬에 관한 유튜브 댓글에서는 실제 배우가 까이고 있다. 이걸 보면 연기를 잘하긴 잘한 듯...?] 2012년 개봉한 고현정의 첫 상업영화 미쓰GO는 유해진, 성동일, 박신양 등 걸출한 배우들과 함께 했지만 모두 영화가 구리다는 평으로 덮혔다.
* [[윤여정]] '선생님', [[이미숙]] 선배님과는 오래된 친분. 결혼 후 힘들었던 시기 미용실에서 마주친 [[이미숙]]은 "얘, 할말은 하고 살지? 기죽지 말고 살어." 라는 돌직구를 꽂아넣고 사라지셨다고. [[윤여정]] 선생님은 영화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이 이혼 후 고충을 털어놓자 한 마디를 남기셨다. '내때는 예수재림이었다' 고. [* 영화 대사 중: "나 때는 내 [[이혼]]이 거의 주홍글씨였어. 이혼한 여자가 TV에 나오면 국민 정서에 안 좋대나 뭐래나. 그래서 방송 관계자들이 방송도 안 나오는 게 좋겠다고 하던 시대야, 얘." 윤여정의 결혼과 이혼(연예계 최초 공식이혼)은 당시 고현정 이상의 센세이션과 루머를 일으켰다. 몇십년 뒤 요즘도 아침방송 및 종편에서 쉽게 들을 수 있을 정도. 즉 내때는 더했다는 뜻.] 영화 [[여배우들]]이나 무릎팍 도사 [[윤여정]] 편, 고쇼 [[윤여정]] [[최화정]] 출연분에서도 윤 선생님의 포스와 굽신거리는 고현정을 확인할 수 있다.
* [[조인성]]은 봄날의 종영 당시 고현정을 '[[고해성사]]를 받아 주는 [[수녀]]님 같은 분'[* 참고로 [[수녀]]는 고해성사를 줄 수 없다. [[미사]]와 [[7성사|성사]] 집전은 [[사제]]서품을 받은 성직자만이 가능하며, [[가톨릭]]에서 성직자(교황>추기경>주교>신부>부제)는 [[남자]]만 될 수 있다. 수녀는 성직자가 아닌 [[수도자]]이다. 수도자 중에서도 사제서품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 남성 수도자인 수사만 가능하다(수도사제, 성직수사, 수사신부 등으로 불린다).]이라고 했고, 지금은 각종 매체에 고현정을 스승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연기에 대한 평도 듣고 있다고. 싸이더스를 떠나 고현정의 1인소속사로 들어가는 등, 사제관계는 계속되는 모양이다. 참고로 [[지진희]]의 평은 "한마디로 대장부죠"[* 여담으로 지진희는 봄날 이전에 찍었던 [[대장금]] 종영 후 [[이영애]]에 대해 '60부작을 찍었는데 이렇게 안 친해진 상대 배우는 처음'이라고 고백(…)]
- 김기창 (법학자) . . . . 7회 일치
영국 유학 시절 [[리눅스]] [[운영 체제]]를 사용하면서 [[오픈 소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마이크로소프트]]의 국내 독점에 대항하는 [[오픈웹]]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모든 운영 체제에서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 한다며 [[금융결제원]]을 상대로 2007년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제1심과 항소심에서 패소하고<ref>[http://m.ddaily.co.kr/view.php?uid=48223 오픈웹, 금결원과의 민사소송 2심서 패소]{{깨진 링크|url=http://m.ddaily.co.kr/view.php?uid=48223 }}</ref>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2009년에 기각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0&oid=001&aid=0002906855 대법 "익스플로러만 공인인증 위법 아니다"]</ref> 2009년에 《한국 웹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서적을 저술하였다. 오픈웹은 2013년에 [[사단법인]] [[오픈넷]]에 통합되었고 현재는 오픈넷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서 행정 심판 위원을 역임한 바가 있고,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하여 《서해안기름유출사고와 삼성중공업의 배상책임》에 대한 논문을 저술하였다. 2008년 10월에는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에 대한 형사 소송 사건에서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취지의 증언을 하였고, 2009년 6월에는 [[2009년 대한민국의 시국 선언|법률가 시국 선언]]에 참여하였다.
* 법관의 배상책임과 사법면책 -영국의 경우-, 高麗法學 41호,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2003.10
* SOFA 제4조와 환경손해 -원상회복의무와 손해배상의무에 관하여-, 民事法學 26號, 韓國民事法學會, 2004.09
* 영국의 법조인 양성 및 선발제도 개관, 한국법학교육과 법조실무의 국제경쟁력: 도전과 대응, 한국법학교수회, 2004.12
* 성문헌법과 ‘관습헌법’, 公法硏究 33輯 3號, 韓國公法學會, 2005.05
* 서해안 기름유출사고와 삼성중공업의 배상책임에 관하여, 한국비교사법학회 제56회 정기(춘계)학술대회, 2008.5.23
- 김성현 (1989년) . . . . 7회 일치
대구에서 태어나 줄곧 초등학교와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 활동했고, 대구고 1학년 재학 중이던 2005년, 대구고를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청룡기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으로 이끌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맞상대가 프로 야구를 주름 잡는 괴물 투수 [[류현진]]이 이끌던 [[동산고등학교|인천 동산 고등학교]]. 결승전에서 대구고는 먼저 8점을 내지만, 경험 부족으로 9점을 내주면서 대역전패하게 되어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된다. 1차 지명이 있던 시기라 오랜만에 나온 유망주에 대구를 연고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 팬들도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대구고 1학년을 마치고 전격적으로 제주 관광 산업 고등학교(현 [[제주고등학교|제주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당시 제주관산고의 감독인 [[성낙수]] 감독의 스카웃 및 설득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후에 고등학교 스승의 인터뷰에 따르면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제주특별자치도]]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학생 출전 정지 규정에 묶여 1년을 쉬게 된다.<ref>[[빠른 생일]]이지만 다른 1989년생들과 같은 년도에 입단한 이유.</ref> 그리고 이때 [[경상남도]] [[김해시|김해]]에서 같이 제주관산고로 건너와 친하게 된 친구가 바로 전 [[두산 베어스]]의 투수 [[김수완 (야구 선수)|김수완]]. 그 뒤 2년 동안 제주관산고에서 공을 던지지만 특별히 대구고 1학년 시절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스포츠동아]]에서 영구 제명된 김성현의 사진을 승부 조작과 전혀 관련이 없는 [[SK 와이번스]] 내야수 [[김성현 (1987년)|김성현]]의 사진으로 잘못 게재하는 바람에 비난을 받았다. 다만 지적을 받고 바로 진짜 김성현의 사진으로 교체한 걸 보면 편집 과정에서의 실수인 듯하다.<ref>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2&aid=0000439632</ref>
[[분류:198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넥센 히어로즈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제주고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본리초등학교 동문]][[분류:승부조작에 관여한 스포츠인]]
- 김진선(군인) . . . . 7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6400><#006400><-5><:> [[대한민국|{{{#FFFFFF ''' 대한민국 ''' }}}]] [[대한민국 육군|{{{#FFFFFF ''' 육군 ''' }}}]] [[제2작전사령관|{{{#FFFFFF ''' 제2작전사령관 ''' }}}]] ||
||<#2e8b57><:> {{{#ffffff '''임관'''}}} ||<#8fbc8f> 육사 19기 ||
||<#2e8b57><:> {{{#ffffff '''최종보직'''}}} ||<#8fbc8f> 제 2군사령관 ||
1939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괴산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9기 출신이었다. [[1993년]] [[제2작전사령관]]([[대장(계급)|대장]])에서 예편하였다. 하나회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병호, 이현부(이상 20기)처럼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노태우]]계 군인을 지칭하는 9.9 인맥의 (노태우가 사령관이었던 9공수여단, 9사단에서 노태우의 참모나 휘하 부대장을 한 인사들) 핵심이었다. [[제7보병사단]] [[사단장]] 등을 지냈다. 준장 때, [[국군체육부대]] 초대 부대장을 역임했다.
- 김형기 (법조인) . . . . 7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7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9월 27일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기자 장봉진에게 공갈죄를 적용해 징역9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하면서 [[반공법]]위반에 대해서는 "송고 시간이 급박했고 오보된 기사의 정정을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이적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9월 27일자</ref> 10월 4일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기소된 영화배우 [[박노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반공극에 공헌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10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2년 10월 4일자</ref> 12월 21일에 북한에서 의약업자를 하다가 귀순하여 국가보건원 직원들에게 국가시험 정답지를 20만원~100만원을 주고 빼낸 피고인 20명 중에서 1명만 무죄를 선고하고 징역1년~벌금5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12월 21일자</ref> 197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선거구 공화당 후보에게 사전 투표를 하여 구속된 피고인에게 징역1년6월~10월을 각각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5월 16일자</ref> 7월 24일에 일본에서 지내던 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2차례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합작투자로 위장하여 국내 경제계, 군부 등에 침투하려 했던 재일교포 사와모도 산지(한국명 한삼차)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피고인이 일본에 귀화했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7월 24일자</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724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94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자]</ref>
*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1월 19일에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때 선거 거부를 주장하다 기소된 전 서울대 학생 등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1월 19일자</ref> 2월 9일에 통혁당 재건과 정부 전복을 기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을 선고받은 [[지정관]]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박현채]]와 [[양정규]]에게 각각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집행유예3년과 징역2년6월 자격정지2년6월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9일자</ref> 2월 22일에 '옛 석굴암'이라는 상호로 공예품 판매업을 하면서 문공부 장관의 허가없이 자신의 소장품인 유형문화재 청자 등 이조 자기류 10점을 점포에 진열하거나 매매 목적으로 진열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22일자</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1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1년 2월 4일에 문공부 종무과장으로 있으면서 해외여행의 편의, 불교계 분규 수습에 있어 선처 등을 조건으로 불교계 관계자로부터 200여만원을 받아 구속된 한영수에게 [[특가법]]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 217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1년 2월 5일자</ref> 4월 11일에 1965년 8월 남파된 삼촌에게 포섭되어 입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하고 남파돼종로구청 세무과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국가기밀 수집 등으로 간첩활동을 했던 정춘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81년 4월 11일자</ref>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복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
- 김희애 . . . . 7회 일치
||<:><#cccccc> '''본관''' ||[[경주 김씨]]||
1966년 4월 23일 생.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서울]]로 이사와서 자랐으며, 혜화여고 1학년 때 의류CF 모델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일 년 뒤인 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 날"로 데뷔했다. 10대 시절 하이틴 영화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85년 MBC 베스트셀러 극장 "알수없는 일들"로 브라운관에 데뷔했고, 이후로는 TV 쪽에 주력했다. 1986년에 KBS 일일드라마 "여심"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고 스무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0대부터 60대를 소화하는 연기력으로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키며 하이틴급 청순가련형은 아니지만 대학 동창 [[전인화]]와 신세대 스타로 급부상한다.
1996년 [[이찬진]]과 [[형부]]한 후 슬하에 1998년과 2000년에 기현, 기훈 두 조카를두고있다. 결혼 후 공백기를 가지며 [[수원과학대학교]]에서 연기 강의를 하고 육아에 힘쓰다가 2003년 "[[아내(드라마)|아내]]"를 통해 본격적으로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1999년 일일드라마 "하나뿐인 당신"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둘째의 임신으로 도중 하차하였는데 이에 앞서 MBC 세 번째 남자, KBS 2TV 진달래꽃 필때까지 등에서 캐스팅 제의가 왔지만 모두 고사했다.) 그리고 2003년 [[SBS]]에서 '''[[완전한 사랑]]''', 2007년 '''[[내 남자의 여자]]'''를 통해 미시들의 우상으로 등극한다.
[[sk2|SK-II]] 화장품 장수 모델로도 유명하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옆나라에서 시밤쾅]] 한 이후로 이 화장품 인기가 떨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에센스 한 병에 15만 원을 훌쩍 넘는 고급 브랜드의 광고 모델을 2005년경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온 걸 보면 얼마나 자기관리를 위해 애쓰는지 알 수 있다. 당장 90년대 김희애 모습을 찾아봐도 지금과 외모나 몸매가 거의 차이가 없다.
[[2015년]]에는 애교 [[끝판왕]] '''[[나꿍꼬또 기싱꿍꼬또]]'''를 [[연예가 중계]]에서 했다. 동영상을 [[추가바람]]. 또한 [[미세스 캅]]에 출연하면서 [[경찰]] 아줌마 역할을 맡으면서 새로운 연기 변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해 [[SBS 연기대상]]에 불참했는지 상도 무관되었다. 사실 미세스 캅에서의 연기는 상당한 호불호가 갈린 편이었다.
남편은 한글과컴퓨터 창업자로 유명한 [[이찬진]] 씨이다.[[http://enews24.interest.me/news/article.asp?nsID=358786|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김희애의 형부가 이찬진의 서울대 선배였는데, 형부의 주선으로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사업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모양. ~~[[성철|남편은 남편이오, 사업은 사업이로다]]~~
[[꽃보다 누나]] 촬영 당시에 여행 짐 관련해서 잠깐 집이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진 몰라도 남편의 취미는 확실히 알고 있긴 한듯. 왜냐면, '''집에 있는 가재도구 안에 [[아이맥]]과 [[아이패드]]가''' 있었기 때문. 설마 가족 전체가 [[앱등이]]일리가...
- 남유진 . . . . 7회 일치
||<:>제15·16·17대[br][[김관용]]||<:>→||<:>'''제18·19·20대[br][[남유진]]'''||<:>→||<:>제21대[br][[장세용]]||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제22회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총무처, 내무부(이상 현 [[행정자치부]]), [[산림청]] 등에서 근무하다가 [[노태우 정부]] 후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였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관선 경상북도 [[청송군]]수를 지냈다. 이후 다시 내무부, 행정자치부에서 근무하다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김관용]] 구미시장[* 15 ~ 17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밑에서 구미시 부시장을 지냈다.
그렇게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구미시장 재선에 도전하여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구미에 암운이 드리웠다.''' 이 즈음부터 대기업들이 하나둘 씩 구미를 떠나기 시작했고,[* 2005년 수도권 규제 완화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파주 같은 과세율이 낮은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위기감은 인식했고, 그 당시 구미시장 김관용도 어느 정도 이 현상을 감지는 하고 있었다. 다만 두 시장 모두 제대로 대처하지는 못했다.] 2010~11년을 전후해서 구미 1공단이 급격히 몰락한데다 2012년 즈음에는 2, 3, 4공단도 완벽하게 터져버렸다. 구미시민들은 안 그래도 물가도 비싸고 생활 환경은 최악의 수준임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불황 속에서 정말로 경제를 살려줄 수 있는 다른 후보가 혹여나 나설 수 있는지를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극렬 [[친박]] 성향의 정치인 중 하나로, '''[[박정희]] [[반인반신]] 발언의 당사자'''라고 하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미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시 예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커서 그게 논란이 됐다.[* 남유진 재임기간 중 구미시 1년 예산은 1조 가량 되는데 매년 수백억을 박정희 관련해서 낭비했고 임기 말에는 1400억짜리 박정희 타운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물론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도 참석해서 비판을 받았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의 인용([[파면]]) 판결에는 존중한다고 하였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1115500010|남유진 구미시장 “박정희는 반신반인” 신격화 논란]] [[http://www.idaegu.com/?c=4&uid=357752|남유진 구미시장, 기초 지자체장 중 첫 탄핵반대 집회 참석 논란]]
정작 당연히 기본으로 공공장소에 깔려야 하는 [[휴지]], 고작 한 롤에 '''500원'''이면 충분히 매입 가능한 이런 단순한 것들도 '''예산이 없다면서''' 제대로 지급 자체를 못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기념 사업, [[새마을운동]] 관련 사업 같은, 후순위로 미뤄도 되는 일에는 [[구미시]] 한 해 예산(1조 1,000억 원 내외)의 25%에 가까운 2,600여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3년 동안 써댔으면서 말이다.
- 노동기준감독서 . . . . 7회 일치
[[일본]]의 정부기관, 줄여서 노기(労基, 로우키)라고 한다. [[후생노동성]] 산하의 기관으로서, 노동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기업에 대하여 지도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노동기준감독서 감독관에게는 사법 경찰관으로서 권한이 있어서, 위법하다고 판단한 경우는 시정을 위하여 지도와 조사를 할 수 있고, 악성인 경우는 강제 수사나 체포를 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명확한 노동법 위반에 대하여 움직이는 기관으로서, 노동기준법에 위반하는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명확하지 않으면 실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또 노동법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내용은 노동기준감독서의 관할이 아니다. 노동자에 대한 대우조건 이나 법적판단이 미묘한 문제에서는 [[상담]] 정도는 할 수 있어도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분류:일본 정부기관]]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 . . . 7회 일치
* 마블 코믹스의 영화들이기에 마블의 캐릭터와 세력, 설정이 등장하며, 내용 중에는 코믹스에 기반을 둔 경우가 많으나 그렇다 해서 코믹스를 100% 반영하지는 않고, 그렇기에 호불호가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코믹스에서 아이디어를 얻기에 전혀 상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코믹스에 나온 것을 기본 소재로 두면서 MCU에서 독자적인 전개를 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 관련 영상 ==
== 관련 설정 ==
* 소니 픽처스의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는 MCU와 아무 관련 없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MCU판 스파이더맨이 등장했으나 이 스파이더맨과 소니의 기존 스파이더맨 영화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MCU 이전에 나온 마블 관련 영화나 드라마도 MCU와 관련없다.
- 막부 . . . . 7회 일치
고대 중국에서 [[장군]]이 전쟁에 출전할 때, 막(幕)을 치고 부(府, 관서)를 설치하여 군사 행정 업무를 실시했는데 이를 '막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막부 체계를 근거로 하여 [[사무라이]]가 중심이 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이 역시 막부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에서 장군은 [[황제]]에게 여러 권한을 위임받게 되는데, 실질적으로 독자적인 군사행정조직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 부(府)를 설치하게 되면 독자적으로 장군의 부(府)에서 근무하게 될 속관을 뽑아서 임명할 수 있고, 부(府)를 통하여 군사, 사법, 행정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이를 상징하는 부월(생살여탈권) 같은 상징물을 받았다. 막부는 현대로 치면 [[계엄령]] 하의 '계엄사령부'처럼 일정 지역, 시기 동안 제한적으로 전권 통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일본이 중국에서 들여온 [[율령제]] 체계에서 [[조정]]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막부를 근거로 하여, 이를 상설 통치 조직으로 바꿔서 운용하였던 것이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정부가 있기는 한데 계엄령이 내려져 있고, 계엄령은 무기한이고 범위는 전국(…)이라서 계엄사령관이 사실상 국가의 실권자인 상태가 된 것과 같다.
중국에서 막부라는 단어는 [[전국시대]]부터 나타난다. [[전한]]의 이광, 위청 등도 흉노를 정벌하며 전선에 막부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막부라는 단어가 관서를 나타나게 된 것은 [[후한]] 시기로서, [[후한 명제]] 시기에 동평왕 유창이 [[표기장군]]이 되어, 자신의 정청을 설치하고 천자를 보좌하였을 때 부터라고 한다. 기록을 보면 막부를 설치할 권한이 있는 것은 사방장군 이상(좌 / 우 / 전 / 후 의 4장군, 4평장군, 4진장군, 4정장군 등)의 장군들이었다.
일본의 막부는 원래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 본래 일본 조정은 지금의 긴키 지방에서 큐슈 일대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지금의 간토 지방이나 도호쿠 지방은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하면서 해당 지역 선주민과 싸워 이를 정복하는 군대의 지휘관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삼아 그에게 막부를 열고 해당 지역의 독자적인 군사와 사법권을 부여하던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이 당시는 중국의 사례와 같이 일시적인 군정권에 불과하여 특수한 정권 체계는 아니었다.
결국 [[오닌의 난]]과 [[일본 전국시대|전국시대]] 개막 후에는 권위가 실추되어 다른 실력자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가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폐쇄된다. 노부나가는 이후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잡아가다가 [[혼노지의 변]]으로 변사하여 어떤 형태의 정권을 만들려고 했는지 제설만 분분하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사후에 일본 전역을 제압하여 천하통일을 이뤘으나, 본래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막부를 열 수는 없었고, 이 때문에 그 대신 '후지와라' 등 귀족 성을 받아 귀족이 되는 방법으로 최종적으로 '도요토미' 씨를 창씨하며, 조정의 최고 관위인 '[[관백]]'과 '태정대신'을 수여받는 등 조정의 권위를 빌리는 방식을 택하였다.
- 맥스 페인 2: 맥스페인의 몰락 . . . . 7회 일치
* 왼쪽 아래의 사람 모양으로 생긴 것은 캐릭터의 체력이다. 체력이 붉게 차버리면 캐릭터는 죽는다. 화염과 접촉하면 체력 상관 없이 불춤을 추며 죽으니 주의.돌아다니다가 주울 수 있는 진통제[* 최대 8개 까지 소지 가능]로 체력을 천천히, 약간씩 회복할 수 있다. 진통제의 소지 유무와 수는 체력 옆에 표시된다. 총 8개 까지의 진통제를 소지 가능.
* 기관단총(4)
맥스를 보안관이라고 부른다던가, 두번째로 만났을 때 "하이 눈"을 외치거나 하는걸 보면 [[서부개척시대]]에 관련된 걸 좋아하는 듯.
Punchnello Family. 뉴욕의 마피아 집단. 전편에서 맥스가 잠복수사를 했고, 무수히 쏴죽였던 그 놈들. 그 꼴이 났는데도 살아있다. 블라드의 러시아 갱단과는 적대관계.
Lords and Ladies. 귀족 남자 발렌타인과 천한 신분을 가진 여자의 러브스토리. 당연히 발렌타인의 집안에서는 이를 좋아하지 않는 듯 하다. 발렌타인의 형인 잭이 여자를 모욕하자 발렌타인은 잭에게 결투를 벌여 죽여버린다. 그러자 발렌타인의 어머니가 여자에게 독이 든 와인을 먹여 죽이려 하지만 그 와인은 발렌타인이 대신 먹고 죽어버린다. 이때, 그들의 저택에 불이 나고 발렌타인은 여자를 도망치게 한 다음 마지막 힘을 다해 어머니를 붙잡고 타죽는다. 여자는 도망쳐 발렌타인과의 관계로 생긴 아이에게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후 기른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문희(배우) . . . . 7회 일치
|| [[원미경]] || [[이미숙]] || [[정애리(배우)|정애리]][* 최근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를 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으니 이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보희]]를 참고바람.] ||
[[1965년]]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친구를 따라 KBS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카메라 테스트를 참관한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에 의해 발탁되어 영화 흑맥으로 데뷔했다. 유명 여배우 [[엄앵란]]이 흑맥의 촬영 현장에서 문희를 보았다고 하는데, 같이 촬영하던 남자배우들이 문희의 눈이 너무 예뻐서 쳐다보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후 1966년 [[초우]], 1967년 [[원점]]을 찍으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그렇지만 다른 트로이카 여배우들이 데뷔 초부터 화려하게 성공한 거랑 비교하면 문희의 성장은 더딘 편이었다.[* [[윤정희]]는 [[청춘극장]]으로, [[남정임]]은 [[유정]]으로 데뷔작부터 대박을 터뜨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들은 데뷔하자마자 승승장구했지만, 문희는 이들에 비해 데뷔작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8년 여름 [[미워도 다시 한번]]으로 이들에게도 명함을 내밀 수 있는 흥행작을 내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당시 서울 시내 한개 영화관에서 37만 관객을 동원하여 이전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윤정희도 남정임도 못했던 기록 갱신에 성공한다. 비련의 여주인공역을 맡았는데, 이러한 비련의 여성 이미지는 문희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 문희에게 붙은 수식어가 '''눈물의 여왕'''. 미워도 다시 한번의 성공으로 남정임과 윤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 여배우가 되었다.
* 1970년 《[[위험한 관계 (1970년 영화)|위험한 관계]]》
- 박희광 . . . . 7회 일치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통의부)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되어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던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만철연선 친일파 제거등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김광추(金光秋), 김병현과 함께 3인조 암살단을 조직, 활동하였다.
박희광은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통의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일본 영사관 습격,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 암살,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해 활동한 스파이 배정자(裵貞子, 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다코) , 이용구, 최정규 암살임무 등 항일 독립운동단체와 임시정부에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 했었다.
박희광은 1924년6월7일 상해임시정부(김구 선생)의 지령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날 저녁 대서관(大西關)에서 군자금을 탈취하고, 금정관(金井館)에서 다시 군자금 300엔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일본, 중국 경찰과 총격전끝에 현장에서 김병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광추는 총격전을 벌이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16년 8월1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뤼순감옥 박물관과 다롄외국어대 김월배 교수의 도움으로 안중근, 신채호, 박희광, 백여범, 채세윤 등 이분들의 수감생활을 짐작할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는 행사도 진행되었다.
- 백남순 (1929년) . . . . 7회 일치
|직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 외교관
'''백남순'''(白南淳, [[1929년]] [[3월 13일]] ~ [[2007년]] [[1월 3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정치가]]로 [[조선로동당]]원이다.
[[2004년]] [[2월 2일]] [[외무성]] 부상 [[김영일]]과 함께 [[평양시|평양]]을 방문한 [[오스트레일리아]] [[알리스태어 머레이 맥클린]] 외무상특사를 단장으로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성 대표단을 만나 면담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kcna.co.jp/calendar/2004/02/02-03/2004-02-03-001.html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09-10-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107061721/http://www.kcna.co.jp/calendar/2004/02/02-03/2004-02-03-001.html |보존날짜=2006-01-07 |깨진링크=예 }}</ref>
[[2006년]]의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지역포럼에서도 회의에 출석하면서 사적으로는 요양을 계속하고 있었다. [[2007년]] [[1월 3일]]에 사망하였으며, 사인은 만성 신부전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상으로 재임하던 중에 사망하였으므로, 상사에 해당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헌화를 받았다. 사망 당시 실질적인 외교 책임자는 [[강석주]] 제1 외무차관이었으므로, 사망 후의 외교 정책에 영향은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 관련 항목 ==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07년 죽음]][[분류:청도 백씨]][[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사회주의자]][[분류:공산주의자]][[분류:수원시 출신]][[분류:김일성종합대학 동문]][[분류:병사한 사람]][[분류:폴란드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분류:월북자]][[분류: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백이소 . . . . 7회 일치
'''백이소'''(白以昭, [[1557년]] [[경상북도]] [[경주시]] ~ [[1597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융원(隆遠), 호는 부암(傅巖)이다. 본관은 [[청도 백씨|청도]](淸道)이나 옛 지명인 오산(鰲山)으로 쓰기도 한다.
고려 때 [[박경순]](朴慶純) 일당의 난을 진압한 [[청도]] 호장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인 선략장군(宣略將軍) [[백희]](白熹)의 둘째 아들로 [[경주부]] 서면 부산촌(富山村) 출신이다. 풍채가 크고 힘이 출중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선조25) 6월 [[경주]]지역 의병장으로 경주부윤 [[윤인함]], 판관 [[박의장]]과 함께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노모와 아내를 산 속에 피신시킨 후 산에서 내려와 가복들을 이끌고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무찔렀다. [[1594년]]([[선조]] 27)에는 갑오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에 특제되었다.<ref>《[[부암실기]]》</ref>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재차 침입해오자 적을 공격하던 중 탄환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부상당한 몸으로 고통을 무릅쓰고 다시 출전하자 경주 판관이 만류했으나 '신하된 도리로 죽을 뿐'이라 말하며 [[영천]] [[창암]]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장 [[최봉천]](崔奉天)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ref name="dg">《[[동경잡기]]》</ref>
시신을 찾지 못하여 의관으로 초혼장을 지냈다.<ref name="dg"/> 묘는 월성군 산내면 장사리에 있는데, 향인들이 '백장군묘'라 부르고 있다.
== 가족관계 ==
[[분류:1557년 태어남]][[분류:1597년 죽음]][[분류:조선의 무신]][[분류:의병]][[분류:의병장]][[분류:조선 의병장]][[분류:임진왜란 의병장]][[분류:정유재란 참전 중 사망자]][[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정유재란 관련자]][[분류:16세기 한국 사람]].[[분류:백씨]][[분류:청도 백씨]][[분류:문천회맹]][[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 뱌체슬라브 몰로토프 . . . . 7회 일치
[[소련]]의 정치가, 외교관. --[[바텐더]].-- 1890년 3월 9일 생, [[러시아]] 쿠카르카(지금의 소베츠크) 출생. 1886년 11월 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정치가로서 인민위원회 의장(총리), 외무인민위원(외교장관) 등을 지냈다. 소련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서, 20세기 역사를 조사하다보면 여기저기서 이름을 내민다. --스탈린의 충실한 외교용 딸랑이--
=== 외교관으로서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5월에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10월에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1949년 3월, 외무장관직을 사임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다시 복귀, 1956년 6월,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정치적 불화로 해임되었다. 11월에 흐루쇼프 제거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모든 고위 관직을 잃었다.--[[숙청]]!--
- 블랙 클로버/60화 . . . . 7회 일치
* 성가셔하는 검은 폭우단은 아스타를 제외하고는 대충 뺏어서 튈 생각을 하거나 아예 작전 자체에 관심이 없고 귀찮아 한다.
* 하지만 대신관이 쓰는 "방해마법"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대신관과 야미는 각 에리어가 한 눈에 보이는 방으로 이동해서 술잔치를 벌인다.
* 야미는 의욕이 만땅인데 왜 자기만 제외됐냐고 따지는데, 대신관이 "너무 강해서 밸런스가 맞지 않아 뺐다"고 답하니 금세 풀어진다.
* 대신관은 검은 폭우 단원들이 하급 마도사라는걸 알고 "우리 쪽은 전원 중급 마도사 이상"이라며 당해낼 방도가 없을 거라 호언한다.
* 대신관은 경악하고 야미는 "저 멍청이들(검은 폭우단원) 실력이 계급대로라면 말이야."라고 너스레를 떤다.
* 야미가 대신관과 붙을 가능성도 있다.
- 샬롯 링링 . . . . 7회 일치
의외로 부하들과의 관계가 훈훈하다. [[타마고 남작]], [[페콤즈]], 그리고 [[보빈]]이 샬롯을 부를 때 '''"마마"'''라고 부르는 걸 보면... [[흰 수염 해적단]]이 [[흰 수염]]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른다면 이쪽은 샬롯이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느낌?[* 물론 빅 맘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타마고 남작과 페콤즈가 서로 빅 맘이 건 전보벌레를 받는 걸 미루어 볼 때 흰 수염처럼 친숙하다고 보긴 힘들다.]
여담이지만 [[스릴러 바크]]편에서 등장했던 [로라(원피스)|로라]의 어머니라는 추측이 있다. 입모양이라든가 사이즈를 볼 때 그럴 듯 하긴 하다. 거기다가 로라라고 하는 이름은 영어로 샬롯의 애칭이다. 무언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진짜 로라의 엄마라고 해도 어인섬에서 빅 맘의 성질을 이미 하도 긁어놓아 버린지라... 정말로 로라와 무슨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한바탕 하고 난 다음에야 언급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빅맘 曰 : 로라의 친구? 그렇다면 싸울 이유가 없지! 오늘은 잔치다! 이런 전개는 없다.~~ 로라나 그 부하들이 페콤즈, 타마고 남작, 보빈처럼 마마(ママ)라는 표현을 쓴 걸 보면 로라가 빅 맘의 친딸이라는 뜻이 아니라 과거 빅 맘 해적단의 일원이었을 거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근데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닮았다.~~ ~~아빠는 도대체 누구냐 그럼~~
5번째 설정집인 블루 딥에 따르면 [wiki:"샹크스(원피스)" 샹크스]를 비롯한 다른 [[사황]]과는 적대 관계, [해군본부원피스)|해군본부]와는 대립 관계라고 한다.
그리고 능력의 경우는 아직 전혀 불명이지만 빅 맘의 침이 바닥에 떨어질 때 '치익' 이라는 효과음이 난 점과 다과회가 기대된다고 말할 때 위산 드립을 친 걸로 보아 어쩌면 '산'과 관련된 능력자일 수도 있다.
여담으로 실루엣이 [완제]와 비슷해 혹시 관련 인물이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다.
- 식극의 소마/175화 . . . . 7회 일치
* 시험관 측에서는 통탄하며 더 흉악한 음모를 꾸미고 이를 감지한 에리나는 보다 철저하게 대비한다.
* 시험관은 이번에야 말로 반역자를 일소하겟다고 벼르는데
* 시험관은 이들을 떨구지 못해 통탄하는데 다른 방에서도 반역자들은 누구도 탈락하지 않았다.
* 그리고 반역자 전원 통과라는 이변에 술렁거리는 시험관 일행.
* 최고급 관광열차로 유키노는 이게 진급 시험만 아니었으면 최고의 여행이었을 거라며 피눈물을 흘린다.
* 에리나는 회를 거듭할 수록 더 가혹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예측한다.
* 시험관은 아무도 탈락시키지 못해 초조해한다.
- 식극의 소마/207화 . . . . 7회 일치
* 탈락한 반역자들은 특별석이란 이름의 우리에 갇혀서 관전.
* 각 대결은 메뉴가 적혀진 제비를 뽑아서 결정한다. [[유키히라 소마]]는 첫 대결의 메뉴선택을 상대인 [[키노쿠니 네네]]에게 양보한다. 하지만 그녀는 공정한 승부를 원한다며 소마 쪽에게 우선권을 준다. 그녀는 속임수를 싫어하는 성격으로 같은 십걸인 에이잔도 부정한 짓을 저지른 녀석이라며 경멸한다. 관중석에서 반역자를 야유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것도 "더러운 야유는 싫다"고 차갑게 노려보는데 어쩐지 관중석의 남학생들은 그 차가운 시선이 더 좋다며 심쿵한다. 그리고 쿠가는 왠지 구경하는 주제에 "저 땋은 머리는 언제나 날이 서 있고 오늘은 아마도 생리"일 거라고 도발해댄다.
* [[나키리 에리나]]는 네네에 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복기한다. 주력 요리는 일식 전반이며 특히 "소바"에 관해선 적수가 없는 달인이다. 본가는 칸다에서 소바가게를 하고 있으며 "에도 소바"의 전통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초일류 가게. 그런 본가에서 어려서부터 일식의 정수를 교육받은 그녀는 일식계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타쿠미 알디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 짐작하며 십걸로서 6석에 있었으니 단순 비교로는 잇시키보다 위가 아닐까 추측한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메뉴 선정. 마치 조작이라도 가해진 것처럼 최악의 카드가 뽑혔다. 정적에 휩쌓이는 대회장. 반역자 측은 물론 센트럴을 응원하는 관객들과 네네 조차 얼어붙는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환호성. 카와시마와 관객들은 벌써 네네의 승리가 정해진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한편인 잇시키와 메기시마는 태연하게 카드를 뽑을 뿐. 잇시키는 "변함없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뜻모를 소릴하고 메기시마는 흥미 자체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헤프닝처럼 시작돼버린 연대식극.
* 넋을 놓고 솜씨를 지켜보던 반역자들은 그게 곧 소마의 패배로 이어진다는 참담한 현실을 떠올린다. 애초에 정공법으로 이기는건 바라지도 않고 변화구를 던져서 별난 걸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이제 소마가 어떤 소바를 만들지가 관건이다.
- 식극의 소마/209화 . . . . 7회 일치
* 생각보다 좋은 출발을 한 [[유키히라 소마]]. 그런데 옆 조리대의 [[잇시키 사토시]]는 자기 대결도 재쳐놓고 관전모드다.
* 시라츠 가문은 대대로 이탈리아 영사관의 전속 요리사 자리를 맡아온 명가. 특히 남 이탈리아에선 장어를 크리스마스 특식으로 먹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 그런데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똑같이 1회전 멤버인 [[잇시키 사토시]]가 아예 이쪽 조리대에 와서 관객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소마가 자기 요리는 어쨌냐고 묻자 어차피 숯불을 달구고 있는 중이라 한가하니 신경쓰지 말라고 할 정도로 태평하다. 그는 소마의 요리를 흥미롭고 기특하게 바라본다. 그는 아군을 고무시키는 것도 팀워크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자기 혼자 고무되고 있는 것 같다. 같은 십걸인 [[메기시마 토스케]]는 반대로 아주 성실하고 묵묵히 조리를 하고 있다가, 이쪽을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 실의에 빠진 인물은 2학년 [[시라츠 쥬리오]]. 십걸의 빈 자리를 메운 뉴 페이스다. 관객들은 엄청난 환호를 퍼부어주지만 쥬리오는 "잇시키가 나를 모른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츠카사 에이지]]는 왠지 그 기분에 공감하며 자기가 저런 처지였다면 삼일은 잤을 거라고 실없는 소릴한다. [[코바야시 린도]]는 "동급생 이름도 모르면 어떡하냐"고 야단치는데 잇시키가 친근하게 "머리 바꾼게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자 좋아라 웃는다. 결국 누구한테도 이해받지 못한 쥬리오는 이 승부로 잇시키에게 자신의 존재를 새기겠다는 패배 플래그 같은 대사를 친다.
* [[카와시마 우라라]]는 쥬리오가 이탈리아 요리의 달인이라고 소개한다. 쥬리오는 시작부터 의욕적으로 조리에 들어간다. 큼직하게 자른 장어에 소금을 쳐서 기름 두른 팬에 넣고 양파와 마늘, 그리고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볶는다. 이때 와인을 뱅뱅 돌리면서 춤추는 듯한 모습으로 넣는게 포인트. 꼴은 우스꽝스럽지만 실력은 대단하다. [[나카리 에리나]]도 그의 내력과 실력에 대해선 자세히 안다. 에리나는 시라츠 일가는 대대로 이탈리아 영사관의 전속 요리사를 했던 유서깊은 가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실력은 일본과 이탈리아 양국에서 소문이 자자하고 특히 선대는 공적을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그가 가른 장어는 칼이 지나가고 나서도 조금 늦게, 핏물이 솟았다. 마치 혈관이 자기가 베인 것을 조금 늦게 깨달은 것처럼.
* 잇시키는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지만 설마 기숙사 후배들까지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그의 웃는 얼굴은 돌아왔지만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다.
- 심현섭(코미디언) . . . . 7회 일치
|| '''본관''' ||<(> [[청송 심씨]] 안효공파[* 청송 심씨 24세손 '燮'자 항렬이다.] ||
이와 같은 행보는 그가 드라마제작사 [[스타맥스]]의 기획이사로 재직하면서 드라마 '[[아내의 유혹]]', '[[가문의 영광#s-2|가문의 영광]]', '압록강은 흐른다', '순결한 당신' 등의 홍보와 마케팅 업무에 참여했기 때문이며, [[까메오]] 출연자로 종종 작품에 얼굴을 비춘 적도 있다. [[예능]] 프로그램인 '택시(TvN)',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당시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브라운관에는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몇 년째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념하며 활동 자체는 계속하고 있다. 2010년 [[박준형(코미디언)|박준형]]과 함께 KBS 라디오에서 '신나는 오후4시'를 진행하였으며, 2011년부터 2012년까지는 EBS라디오에서 '대한민국 성공시대'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3년 4월부턴 TBN한국교통방송에서 평일 오후 2시에 [[아나운서]] 선우경과 함께 '심현섭 선우경의 신나는 운전석'을 진행하고 있다.
연예인 야구동호회 조마조마 야구단의 감독이기도 하며 연예뉴스에서 이와 관련된 소식으로 그의 얼굴을 종종 접할 수 있다.
개그맨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이후 2002년 대선에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s-1|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2년 대선까지도 보수파 계열에서 정치적 지지 의사를 꾸준히 표명했는데, 이러한 행보는 사실 정치권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이나 출세욕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심현섭 본인의) [[아버지]]가 [[북한]]이 벌인 [[테러]]로 순직하게 된 특수한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참여정부 시절의 탄압 주장도 사실 그의 정치적 지지 행보와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아웅산 테러를 일으킨 공작원이 2008년 [[미얀마]]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공작원도 아버지와 함께 남북 분단 시대의 희생자"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아버지의 사망 이후 가세가 기울어진 상태에 놓이고 후에 정치적 논란도 겪게 되는 심현섭 본인 또한 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주관이 뚜렷하고, 행동력도 거침이 없고 한때 최고의 인기를 끌었을 정도로 잘 나갔던 개그맨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 가지 사실로는 [[후배]]들의 [[군기]]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후배들과도 친한 개그맨들 중에 1명이었다고... 슬럼프 시절에는 [[김진철(코미디언)|김진철]]의 후배 얼차려, 폭행 사건때는 대놓고 국민들에게 웃음을 줘야할 개그맨들이 웃지 못할 모습을 보여줬다며 씁쓸하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는데, 이는 김진철의 후배 얼차려, 폭행 사건이 여자 후배들에게까지 범행을 저지르게 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그에게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이 [[디시인사이드]] 예능 프로그램 갤러리에 올라왔다. 글을 올린 L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가을, 심현섭과 소개팅을 했고, 첫 만남에 간 영화관에서 계속 허벅지를 주무르는 심현섭에게 불쾌감을 표현했으나 그는 L씨를 차에 태운 후 CCTV가 없는 장소를 찾아갔고, L씨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문을 잠그고, 자신을 애무할 것을 요구했고 "만지기 싫으면 이것만 봐달라"며 바지를 벗고 자위행위를 했다고 설명했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599831|JTBC]]
- 오국영 . . . . 7회 일치
'''오국영'''(吳國泳, <small>일본식 이름: </small>大原國泳, [[1889년]] [[10월 26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출신 기업인으로, [[대한민국]]에서도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출신지는 [[경상북도]]이다.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제 강점기 초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했다. [[함경남도]] 내무부에서 근무하던 중 [[1910년대]] 후반에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었다. [[이원군]] 군수로 수년 동안 재직했다가 병으로 퇴관했다. 이때 정8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경상북도 평의원, 군농회의원, 금융조합장, 연초경작조합장, 관선 도회의원 등 지역 유지들이 맡는 직함을 두루 맡으며 활동했다. 경상북도 도평의원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ref>{{뉴스 인용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분류:1889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유민상(개그맨) . . . . 7회 일치
|| '''학력''' ||<(> [[동두천중앙고등학교]] 졸업[br][[경복대학교]] 관광학과^^1998^^ ||
[[개그 콘서트]]에서는 최초에는 비중이 별로 없었다가 [[뮤지컬(개그 콘서트)|뮤지컬]] 코너에 출연을 해서 좋은 반응을 보였고,[* 팀 - 사랑합니다 편을 보면 쓸쓸한 노년의 아버지 역을 맡아 관객을 울린 적이 있었다. 정극 연기도 꽤 잘하는 편이라 류담처럼 개탤맨 기질이 보였다.] 한 때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에서 [[황현희]]한테 당하는 업자로 나왔고 [[초고속 카메라]]에서 열연했다가, [[파라킹 홈쇼핑]]에 출연했다.
6월에는 이수지가 자신의 라디오 프로 가요광장에서 '진짜 오빠가 고백한다면 사귀어줄 수도..'라며 여운을 만들긴 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하다가, 2018년 1월 이수지가 일반인과 열애설이 터진다. 교제 기간은 1년으로 이미 첫 녹화 언저리부터 일반인과 교제 중이었던 것. 어차피 예능은 예능일 뿐인데 별로 욕하는 사람도 없고 유민상 역시 쿨한 반응이었다. 2018년 4월 14일 [[아는 형님]]에서 '이수지 열애설 터지고 심경 인터뷰가 밀려올 줄 알았는데 기자들에게 전화 한 통조차 없었다'며 씁쓸해 했다.
그 외에도 먹방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언제는 후배들을 집합시켰을 때 누구도 왜 혼나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다들 왜 그러냐고 하자, [[피자]] 박스를 발로 차면서 "이거 안보여? 엉!?". 자기 없을 때 맛있는 거 먹었다고 삐진 것. 후배들이 그때 빵 터졌는데, 문제는 그가 진심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애들이 박살났다고 한다.
물론 늘 당하는 역할만 하는 건 아니며, [[큰 세계]] 같은 코너에서 다른 사람을 관광시키는 역할로도 나온다.
* 그리고 주변 개그맨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본좌|'''유본좌''']] 급이라고. 2012.07.31 방영한 안아줘(KBS joy) [[http://blog.naver.com/edubox123?Redirect=Log&logNo=120166861651|오덕페이트 체험 편]]에서 [[다키마쿠라]]에 반응을 보이고 심지어 캐릭터([[유이(Angel Beats!)|엔젤비트 유이]])를 알아 보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덕후|'''덕이 있는 자''']]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했을 때에는 냉장고에 가슴 모양 푸딩이 들어있는 게 방송으로 나가기도 했다. 일본어를 대학 때 전공하다보니 일본문화에도 관심이 많고 일본어도 꽤 하는듯.
* 이 날 본인이 이 항목을 보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흑역사에(야구 비하 사건) 대한 항목까지 보았고, 이 항목은 사실이지만 본인에게 있어서는 이 사건보다는 그보다 과거에 있었던 개그 표절 사건을 더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이 날 방송에서 흡연자임이 밝혀졌다.(이미지 관리상 흡연하는 모습은 직접 나오지 않았다.)[* 다만 후에 [[유장프]]에서 술 담배를 끊었다고 언급된 걸 보면 끊은 듯.]
- 유하나(1986) . . . . 7회 일치
2011년 당시 [[KIA타이거즈]]의 선수였던 [[김대한]]와 갑작스런 열애설이 터지면서 두 사람의 연인 관계가 확인되었다. 2011년 6월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표시한 뒤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만난 지 3개월만에 결혼소식을 알리면서 매우 빠른 진도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일련의 상황이 속전속결로 진행되다보니 당시에는 [[속도위반#s-2|속도위반]]을 한 게 아니냐는 의심도 왕왕 있었다. [* 실제로 아들인 도헌군은 2013년 9월에 출산했으니 근거가 없는걸로...] 결혼 이후에는 연기생활을 중단, 이용규의 소속팀 연고지인 광주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내조에 전념했다.
결혼 이후 가끔씩 이용규의 출전경기에 직관을 와서 남편을 응원하기도 했다. 2012년 6월 22일에는 경기 중계 카메라에 관중석에서의 모습이 잡혀서 주목을 받았는데, 연기자 출신답게(...) 이용규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른 표정 변화 때문에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8&aid=0002863433|#]]
[[그실일|'''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결국 2013년 11월 17일 이용규는 FA로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게 된다. --근데 한화 이글스는 수도권이 아니잖아-- 문젠 이 과정에서 과도한 언플로 인해 잡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이적이 결정된 후 이용규의 행보에 실망한 일부 팬들이 유하나의 블로그에 댓글로 불만을 토로해 잠시 블로그를 닫기도 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당시 댓글에 인신공격이나 욕설이 난무했다. 심지어 아기사진에도 욕설을 달았다는 말도 나오지만 이는 와전된 이야기고, 실제로는 이용규와 관련해서 응원과 섭섭하단 글이 주였다. 이후 블로그를 닫은 것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던 공간에 남편과 관련된 글이 더 많이 올라온 탓에 부담을 느껴 그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그 전까지는 유하나가 팬들과 함께 단관을 추진하는 등 팬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안타깝다는 반응이 많았다.
- 윤태동 . . . . 7회 일치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친일]] 관료.
이후 [[만주]]로 건너가 간도성(間島省) 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민생부 교육사 독학관, 대신관방 이사관 겸 교학관, 자료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협화회]]의 분회(수도계림분회)에서 참여(參與)로 활동하였으며 협화회 주최 행사에서 '일본국민과 협화정신'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간도성 차장을 거쳐 [[1945년]] 4월에 간도성장(間島省長)에 취임했는데 조선인이 성장(省長)에 발탁된 것은 [[이범익]] 이래 두번째이다.
[[충주시]]가 윤태동의 생가를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생가에 정부가 돈을 쓴다는 논란이 일었다.[[https://archive.is/VRcc0|#]].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133번지에 위치한 이 [[한옥]]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윤양계(윤태동의 조부)가 1873년 지은 것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135호로 지정돼 지금까지 3억원 이상의 관리 비용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 담당자는 인물과는 무관하게 건축양식의 가치를 기준으로 지정됐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 은혼/594화 . . . . 7회 일치
* 천도중은 각인을 가지고 별의 아르타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조직. 여러 별의 아르타나를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아르타나 관리협회"였다.
* 천도중은 아르타나의 관리를 독점하고 있는 "아르타나 보전협회". 여러 별의 아르타나를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 각별의 "용혈"을 통해 아르타나를 관리하는데 그걸 제어하는 문은 천도중이 있어야만 개패가 가능하다.
* 이 각인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르타나를 독점으로 관리할 수 있었고, 이걸 받지 못한 우츠로는 실질적으로 아르타나를 다룰 힘을 얻지 못한 것이다.
* 천도중은 여러 별의 아르타나를 관리하는데 이누가미의 존재도 아는 그들이 우츠로와 같은 아르타나의 화신격인 존재에 대해서 몰랐던 걸 보면, 이들이 흔하게 존재하지는 않는 걸 알 수 있다.
- 이경실 . . . . 7회 일치
||<#595959><:> {{{#FFFFFF ''' 본관 ''' }}} ||<(> [[전의 이씨]] ||
풍만한 글래머에 색기 있는 중년여성 컨셉도 있다. 젊었을때는 [[박미선]]이나 [[팽현숙]]과 함께 미인 코미디언으로 나름 인기 있었다. 현재도 자기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편으로, 방송에서 동료들이 그녀의 맵시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예능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목욕탕에서 만난 이경실'인데, 뒤태가 엄청 예쁜 여자가 있어서 가봤더니 이경실이더라, 그런데 그 예쁜 몸으로 아줌마들이 즐겨하는 '''배 두들기는 기체조'''를 하고 있어서 경악했다는 내용. 주로 [[박미선]]이나 [[김지선(개그우먼)|김지선]]이 자주 언급했다. 얼굴은 나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몸매는 웬만한 젊은 여성 수준이다.
== 인간관계 ==
전 남편과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평소 [[의처증]]이 심했던 전 남편 손모씨에게 [[2003년]]도에 야구 방망이로 복부를 마구 난타당해 이경실은 입원했고, 결국 [[이혼]]하게 된다. 이 때 [[결혼]]을 앞두고 있던 [[후배]] [[개그우먼]] [[김지선(개그우먼)|김지선]]이 병문안을 갔는데 그녀를 보며 씁쓸하게 웃으며 "너는 내 이런 모습을 보고 결혼이 하고 싶니?"라고 했다. 다행히 김지선은 --애를 쑴풍쑴풍 낳으며-- 잘 살고 있지만... 前 남편과 함께 방송과 CF에 출연하기도 했고 잉꼬부부로 알려지기도 했었던 터라 소식을 접한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 일로 인해 한동안 이경실을 브라운관에서 못 본 적도 있었다. 이 당시에 모 스포츠신문 기자가 이경실에게 의사를 사칭한 다음 몰래 접근하여 인터뷰를 시도한 사실이 발각되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취재윤리를 무시한 행동에 문제의 신문사의 주주였던 모 조간신문에서 이를 비판하는 만평을 보냈을정도. 다만, 지금은 재기에 성공했고, 사업가--단란주점 사장--인 최모씨와 재혼하여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 했으나... 후술할 내용 중 [[JTBC]] '[[유자식 상팔자]]' 등에 자녀들과 활발히 출연하고 있으며, 남편이 주말마다 점심을 해준다는 등(!) 과거의 시끄러운 사건과는 별개로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 했었다...
주된 방송 스타일은, 아무래도 방송의 관록이 관록이다 보니, 일부 출연자들의 [[무리수]], [[개드립]] 등을 잘 살리는 편이다. 흔히 말하는 버려야 하는 몹쓸 드립들도 적절하게 살려내는 편. 그냥 얼떨결에 묻힌 멘트들을 발굴해서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주요 화법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면박이나 [[자폭]]류 [[개그]]. 다년 간의 방송 짬밥으로 웬만한 MC역할의 연예인들에게 태클 걸 수 있는 입장이다. 때문에 [[김구라]]나 [[박명수]] 등의 독설가나 버럭류 캐릭터의 [[개그맨]]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캐릭터도 갖고 있어 기센 아줌마 + 짬밥왕인 이경실에게는 확실히 쩔쩔맨다. 이들을 적당히 제지하거나 역으로 공격하는 등의 역할을 맡는다. 어떻게 보면 MC들을 보조하는 보조적 MC 속성. 어느 프로그램에서 나오든 입담과 타이밍 감각으로 중박 이상은 치므로 고정 패널로 선호가 높은 듯. 특히 친정인 MBC에서는 [[박미선]]과 함께 공무원 급으로 자주 나온다.
* 2005 제42회 저축의 날 재경부장관표창
- 이국철 . . . . 7회 일치
2011년 9월, [[신재민]] 전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게 그동안 수십억 원을 건넸다고 폭로했다.<ref>《시사저널》(2011.09.21),[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6092 <단독> “신재민 전 문화부 차관에게 수십억 원대 금품 줬다” ]</ref> 민주당 국회의원 [[박지원]]은 회장 이국철에게서 전 차관 [[신재민]]이 대선 전후 [[미국|아메리카합중국]] 출장 시 현지 법인카드를 사용한 내역을 가지고 있고 다른 여권 실세에게 돈을 주었다는 주장을 들었다고 밝혔다.<ref>《손석희의 시선집중》(2011.09.27), [http://www.imbc.com/broad/radio/fm/look/notice/?list_id=5667955 " 이국철 게이트 터지나"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 터뷰]</ref>
2012년 5월 23일, 징역 8년이 구형됐다. 2012년 6월 4일엔 전 차관 [[신재민]]과 징역 3년 6월이 확정되었으나 2012년 11월 30일, 항소심에서 보석으로 석방됐으나<ref>《노컷뉴스》(2012.12.03)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333935 이국철 보석으로 석방, 신재민도 풀려날 가능성 커신재민 항소심 재판 연기되면서 이국철 구속만기 중 선고 불가능]</ref> 재수감됐고 2013년 1월 31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고서<ref>《아시아투데이》(2013.01.31)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761723 이국철 SLS그룹 회장, 항소심서 징역 2년6월로 감형]</ref> 2013년 6월 13일, 징역 2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됐다.<ref>《연합뉴스》(2013.06.1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6313553 대법, 이국철 SLS 회장 징역 2년6월 확정(종합)]</ref>
- 이근택(1865) . . . . 7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3, top1=매국노, top2=친일반민족행위자, top3=을사오적)]
|| '''직업''' ||<(> 군인, 관료 ||
[[1905년]] 당시 군부대신(지금의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장관) 시절 [[을사조약]]에 지지를 표명했다.
=== 관료 생활 ===
본관이 [[전주 이씨]]다. [[성종(조선)|성종]]의 아들인 경명군의 아주 먼 후손으로, 1865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출신이며 초명은 근용(根湧)이다. 무신 집안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 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 참판 등을 역임 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한규설]]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사돈]] 관계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규설은 을사 조약을 반대한 애국자이다. 그래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근택에게 딸을 따라온 교전비(여종)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 이민우(배우) . . . . 7회 일치
1999년 윤석호 PD가 연출한 '초대'에서 이영애, 추상미, 김민, 김상경, 이창훈과 함께 나와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주목받으며 성인 연기자로 순조롭게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http://m.isplu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474652&cloc=|관련기사]]
그러다가 2013년작인 [[홍상수]] 감독 영화 《우리 선희》에 오랜만에 나왔는데 전국 40개 극장에서 개봉한 저예산 영화임을 생각하면 전국 관객 68,770명으로 꽤 성공했다.
이제 갓 40대에 접어들었으니 아직 젊은 나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기 때문에 연기력은 본좌 그 자체로 그냥 연기를 잘 하는 수준을 넘어, 시청자가 볼 때 이민우가 '''연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정도로''' 배역과 혼연일체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또래의 배우 중에서는 연기력이 가장 최상위권에 있다. 최신작인 [[공주의 남자]]에서의 연기가 그 훌륭한 예이다. 자기관리도 굉장히 엄격하여 대본 암기와 연기 구상은 물론, 쉬는 날도 체력관리와 연기 모니터링을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해서 대본 암기에는 도가 틀 정도다. 연기를 할 때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대사까지 다 외우도록 배워왔다고.
|| 1984년 ||<|3> KBS1 || TV 문학관 - 저승새 || 동자승 || ||
|| TV 문학관 - 수몰촌 || || ||
* 1985년 제21회 [[백상예술대상]] (당시 한국 연극 영화 TV 예술상) 아역상 《TV 문학관 '저승새'》
- 이인민 . . . . 7회 일치
'''이인민'''(李仁敏, [[1330년]] ~ [[1393년]])은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호는 모은(慕隱)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성주]]이다. 대제학 [[이조년]]의 손자이자 [[이인복]], [[이인임]]의 동생이며 [[이숭인]]의 당숙이다. 경상북도 출신.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급제, 우왕 9년(1383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고 문하평리 겸 대제학(門下評理兼大提學)에 올랐다. 1388년 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에 의해 형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1388년 공양왕의 즉위 이후 석방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2년(1390년)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관련,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이듬해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생일에 사면령이 내려져 특사, 풀려났다. 그 뒤 경외종사관(京外從使官)이 되었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직(李稷)이 개국공신(開國功臣)ㆍ좌명공신이 되어 태조(太祖) 때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증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판이조사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經筵判吏曹事監春秋館事)에 [[추증]]되었다.
== 관련 항목 ==
- 이인영(정치인) . . . . 7회 일치
1987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통령선거 직선제 쟁취를 위한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노태우]]의 항복선언을 받아내자,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 중심으로 [[전대협]]을 결성하여, 1987년 7월 대전 충남대에서 출범식을 거행하였다.
- [[ http://news.kukinews.com/news/article.html?no=375221|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 [[http://news.kukinews.com/news/article.html?no=375221|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 [[http://news.kukinews.com/news/article.html?no=375221|생명안전업무 종사자의 직접고용 등에 관한 법률안]]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현행법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보조금의 경우 보조금이 지급되는 대상 사업의 범위와 기준보조율을 대통령령에 위임하고 있으나, 중앙 및 지방정부의 예산규모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항인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지급 대상 사업 범위와 각 사업별 국고 보조율은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임. 한편, 양로시설을 제외한 노인시설 운영사업은 보조금 지급을 제외하고 있음. 그런데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노인시설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종교시설에 설치된 노인시설에 대해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비를 일부 지원하여 종교시설 유휴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노인복지를 증진할 필요가 있음. 주요내용 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보조금의 경우 보조금 지급 대상 사업, 지급 제외 사업, 각 사업별 기준보조율을 법률로 상향규정함(안 제9조제2항?별표 1?별표 2 신설). 나. 종교시설에 설치된 노인시설 운영사업을 보조금 지급 대상 사업에 포함함(안 별표 1 제122호 신설)]
-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773775.html|남북한 간의 인도지원과 개발협력에 관한 법률안]]
- 이준승 . . . . 7회 일치
1934년에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이듬해 졸업한 이후 육군 법무관을 마치고 1961년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처음으로 검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1963년 [[청주지방검찰청]]과 1966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를 하였으며 1969년 [[국회사무처]]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파견되었다가 1971년 [[인천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 검찰에 복귀하였다. 이후 1973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1977년 [[서울지방검찰청]] 1978년 [[청주지방검찰청]]에서 부장검사로 재직하였으며 1978년에 차장검사로 승진하여 [[청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에 임명되어 1979년에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전보되어 차장검사로 재직하였다.
대검찰청 공판부장, 1980년 서울지검 북부지청장과 1981년 법무부 법무실장을 거쳐 검사장으로 승진하여 1982년 대전지검, 1983년 마산지검에서 검사장을 지내고 광주지검 검사장 재직 중인 1986년 4월에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1986년 4월 17일에 2년 임기의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고 1988년 [[이일규]] 대법원장 취임이후 대법관 재임명 과정에서 탈락하여 대법원 판사 퇴임이후에 변호사 활동을 하였다. 1991년에 국회 추천 몫으로 여당인 [[민자당]]이 추천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에 추천되어 1997년까지 임기를 마쳤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117027020]</ref>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시절에는 [[동백림 사건]]을 맡아 처리했으며 <국제분쟁에 있어서의 국가배상 문제> 등의 저서가 있고 테니스와 등산을 즐겼다.<ref>경향신문 1986년 4월 3일자</ref> 대구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던 1980년 7월 3일 소속 검사와 직원들에게 "공사간 언행을 조심하고 사건처리과정에서 피의자들에게 이해와 설득으로 승복하여 신뢰받는 검찰상을 구현해달라"고 하면서 "공보관은 엄연히 검사장이므로 검사나 일반직원들이 함부로 수사기밀을 누설하지 말고 검찰청 출입자의 신분을 가릴 것 없이 수위실에서 출입증을 받아 패용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고<ref>경향신문
* 대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1984년 1월 27일에 불온 유인물 소지로 신고된 사람에 대해 영장없이 압수수색하고 연행하여 6일동안 불법 구금한 진주경찰서 정보계장 김태진(64) 등 3명을 상대로 낸 불법구금 등 불기소처분 기각에 대한 [[재정신청]] 사건 항고심(주심 [[이회창]])에서 인용되어 환송된 사건의 재항고심 주심을 맡아 "경찰의 불법구금 사실은 인정되나 경찰관들이 수사업무에 과잉의욕을 보이다 위법행위를 저질렀고 오랜 정보업무에 종사하며 국가에 공헌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검찰의 불기소 처분은 타당하다"는 이유로 기각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12800209210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1-28&officeId=00020&pageNo=10&printNo=20099&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7년 1월 28일자]</ref>
* 대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1986년 11월 24일에 남성전기 주식회사 대표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학력을 속여 취업을 했더라도 신뢰관계나 기업질서유지에 영향을 주지않고 특별한 학력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직일 경우 이를 이유로 해고한 것은 위법하다"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는 위장취업을 이유로 노조간부 등에 대해 해고를 하는 것에 제동을 건 최초의 판결이다.<ref>동아일보1986년 11월 25일</ref>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안동시 출신]][[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
- 임대윤 . . . . 7회 일치
|본관 = [[울진 임씨|울진]]
|경력 = [[민주당 (대한민국, 1991)|민주당]] 대구동구(갑)지구당 위원장<br/>[[민주당 (대한민국, 1991)|민주당]] 총재비서실 차장<br/>대구·경북지방자치연구소 이사<br/>제일리서치 이사장<br/>제22·23대 [[대구 동구청장|대구광역시 동구청장]]<br/>[[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사회조정 1비서관<br/>[[더불어민주당]] 대구광역시당 위원장<br/>[[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 1984 ~ 1987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 석사과정 졸업, 외교학석사 (학위논문명 - 국제정치의 개입주의에 관한 일연구 :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정책을 중심으로)
* [[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사회조정1비서관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22대 | [[지방 관청|구청장]] | [[대구 동구청장|대구 동구]] | 한나라당 | 63,014 표| 56.32 | 1위 | 당선_대구 |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초선]], 민선 2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23대 | [[지방 관청|구청장]] | [[대구 동구청장|대구 동구]] | 한나라당 | 74,443 표| 71.82 | 1위 | 당선_대구 |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초선]], 민선 3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4대 | [[지방 관청|시장]] | [[대구광역시장|대구광역시]] | 더불어민주당 |458,112 표| 39.75 | 2위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낙선]] | 민선 7기 }}
- 장발 (화가) . . . . 7회 일치
| 직업 = [[서양화]][[화가|가]] <br/> [[미술평론가]] <br/> [[대학 교수]] <br/> [[외교관]]
| 소속 = 前 이탈리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br/> 前 대한민국 [[평화민주당]] 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장발'''(張勃, Thomas Chang, [[1901년]] [[4월 3일]] ~ [[2001년]] [[4월 8일]])은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며 [[서양화|서양화가]] 겸 [[외교관]]이다.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이며, 초명(初名)은 '''장지완'''(張志完), [[호 (이름)|호]](號)는 우석(雨石), 우당(宇堂), 누수(樓樹)이다. 정치가 [[장면]]의 친동생이며, 대학 교수 [[장진 (1927년)|장진]], 가톨릭 주교 [[장익 (1933년)|장익]]의 숙부이다. [[한성부]] 출생이며 [[인천광역시|경기도 인천]]에서 성장하였다.
우석 장발은 [[1901년]] [[4월 3일]] [[한성부]] [[종로구|종로]] 친척 집에서 인천세관의 관리 [[장기빈]]과 그의 부인이었던 황루시아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후 [[인천광역시|인천]]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형은 후일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역임하는 [[장면]](張勉)이다. [[인천광역시|인천]]의 개화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초명은 지완(志完)이라 했다가 뒤에 발(勃)로 개명하였다.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뒤, [[1922년]]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수학했다.
== 가족 관계 ==
- 장재인 . . . . 7회 일치
|| '''출생''' ||<(> [[1991년]] [[6월 6일]] ([age(1991-06-06)]세), [[전라남도]] [[강진군]] [* [[http://m.ebn.co.kr/news/view/767918/?pcv=0|장재인 "술 잘 먹고 홍어삼합 좋아한다"…송대관 '깜놀']]][* 선배 [[싱어송라이터]]인 故[[유재하]], [[손동운]]과 생일이 같다.] ||
결과는 '''대박'''. 제대로 대박 맞았다.(그 뒤에 강인수'''--쌈바신--'''조는 동반 탈락 이유가 '앞에 떨어진 장재인 씨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 다했다.) 박진영은 '3일 동안 심사를 하면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너무 재밌고, 신났고, 잘 했다.'라고, 이승철은 '서인영의 신데렐라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심사하던 것중에 가장 어려운 심사를 맡은 것 같다.라고 평했다.
2011년 1월 15일 작곡가 김형석이 설립한 키위 엔터테인먼트과 계약을 했다. 자신의 음악을 이 소속사 관계자에서 잘 이해해줘서 계약했다고 한다.
2011년 2월 26일엔 이승환이 주관하는 차카게 살자 Season2 공연에 본공연 게스트로 참여했다.
2018년 2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작곡가 이영훈 헌정
12월 14일 2화에서 처음 짧게 등장하였고, 16일엔 [[http://pann.nate.com/video/215920747|티저영상]]이 공개되었다. 나오는 장면으로만 추측해보면(이지아 중심으로 차승원, 정우성이 나옴), 차승원-이지아-정우성의 삼각관계 신 혹은 이지아 테마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21일 자정에 음원과 [[http://gall.dcinside.com/list.php?id=jji&no=34423|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4화 마무리를 Please 티저영상으로 했다.(...)
* [[KBS]]에서 방영한 밴드 서바이벌 프로그램 [[TOP밴드]] 시즌1 우승밴드인 [[톡식]]과는 지인이자 음악적 동료인 관계라고 한다. 16강전때는 톡식을 응원하러 슬로건을 들고 나타나기도 했다.
- 전관 . . . . 7회 일치
|이름 = 전관
|본관 = [[정선 전씨|정선(旌善)]]
'''전관'''(全寬, [[1944년]] [[12월 17일]] ~ )은 [[대한민국 육군|육군]] [[2성 장군|소장]] 예편한 [[대한민국]]의 정당인이다.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문학사
* [http://blog.naver.com/gjun9994/ 전관 네이버 블로그]
[[분류:194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정선 전씨]][[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 전성군 (1488년) . . . . 7회 일치
'''전성군'''(全城君) 이대(李對, [[1488년]] [[7월 21일]] ∼ [[1543년]] [[10월 29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자(字)는 성중(盛仲)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여양군(呂陽君), 조부는 율원군(栗元君), 증조부는 보성군(寶城君).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심의겸]], [[심충겸]] 등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른 이름은 이대(李薱)이다.
생전 관직은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주부]] 등이었지만 후손들의 거듭된 출세로 [[증직|증]]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호조]][[판서]]와 [[증직|증]] [[이조]][[판서]]를 거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는 등 거듭 증직이 [[추증]]되었다. [[대한민국]] 초기의 정치인 만송 [[이기붕]]은 그의 13대손이다.
약관의 나이에 독서를 하였으며 [[참례도]]찰방(參禮道察訪)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광산김씨 혹은 대흥현부인 영광신씨으 건의로 내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다. 이후 [[활인서]]별좌(活人署別坐)를 거쳐 [[사재감|사재]]직장(司宰直長)에 올랐다가 이무망좌(以無妄坐)를 이유로 파직되었다. 수개월이 지나 복직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군자감|군자]]주부(軍資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했다.
[[1527년]](중종 22) [[7월]]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면직되었다. 이후 좌익찬(左翊贊), [[사복시]]주부, 겸[[한성부]][[참군]](兼漢城府參軍), [[장예원|장예]][[사평]](掌隷司評), [[종부시]]주부를 거쳐 다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부정(副正) 이공장(李公檣)의 천거를 받았다가 [[사헌부]]로부터 성품이 본래 침착하지 못하고 소행도 탐욕스럽고 간특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ref>중종실록 94권, 1541년(중종 36년, 명 가정 20년) 2월 17일 갑술 1번째기사, "헌부가 천거하는 자들이 사적으로 천거를 함으로 폐단이 심하다고 아뢰다"</ref>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정종보(鄭宗輔)의 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8남 1녀를 두었는데, 일곱째 아들이 권신 [[이량 (조선)|이량]]이고, 고명딸은 [[청송 심씨]] [[의정부]][[영의정]][[심연원]]의 아들이자 [[좌의정]] [[심통원]]의 조카 [[심강]]에게 출가했다.
== 가족 관계 ==
- 절대가련 칠드런/458화 . . . . 7회 일치
* 모호츠쿠 관측소에 고립돼 있던 [[미나모토 코이치]] 일행. 탈출루트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 미나모토는 관측소를 [[사카키 슈지]]에게 맡기고 [[타니자키 이치로]]와 도시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 그때 관측소에 있는 사카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블랙팬텀의 세뇌가 발동하려 하는데.
사카키 슈지는 미나모토와 타니자키 이치로가 외부에서 탈출 계획을 실행하는 사이 관측소에 남아 돌발 상황에 대처하고 있다. 그가 우회 시스템을 잘 유지하는 동안 미나모토와 타니자키가 인근 도시에 잠입해 두 번째 작전으로 넘어가는 계획인데.
산노미야 시호는 어떤 조사를 위해 타니자키를 두고 미나모토와 사카키를 데려오라고 말하며 현장에 있는 더 하운드와 나오미도 따라달라고 말한다. 협력자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사카키는 블랙 팬텀에게 "백도어"로 이용당해 왔고 그쪽에선 다시 사카키를 지배하려 들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 그 말을 들은 미나모토는 사카키를 혼자 두고 온 걸 후회한다. 본래는 ESP 감지기에 사카키가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관측소에 두고 온 건데 이런 식으로 악수가 됐다. 나오미는 자신이 먼저 관측소에 가보겠다고 하는데 미나모토는 혼자 움직이는건 위험할 거라 판단해서 전원이 돌아가기로 한다. 미나모토는 이 작전에 대해선 모든 것이 자신의 판단미스라고 후회한다.
* 한편 관측소의 사카키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작업 중이다. 그런데 그의 왼팔에서 블랙팬텀의 감염체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는데.
- 절대가련 칠드런/459화 . . . . 7회 일치
* 모호츠쿠 관측소에서 대기 중이던 사카키 슈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나모토 코이치 일행의 탈출을 알리려 했다 제지 당한다.
* 여기는 모호츠쿠 관측소. 사카키 슈지는 미나모토 코이치 일행이 탈출 루트를 찾는 사이 관측소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바벨 본부 시스템의 갱신에 맞춰 감시 카메라의 대체 영상을 셋팅한다. 사카키는 초시계를 보며 정확한 시간에 영상을 전송하려고 타이밍을 재는데.
* 미나모토는 ESP록을 사카키의 왼팔에 채운다. 이것으로 무의식 수준에서도 세뇌의 영향을 차단할 수 있다. 사카키의 세뇌는 이걸로 일단락된 셈이지만 본인은 큰 충격을 받는다. 사카키는 관리관 츠보미 후지코를 감염시키고 미나모토에게 뒷공작을 한 것도 자신이었던 거냐며 좌절한다. 미나모토는 다 적의 계략일 뿐이라며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누군가의 정보"로 사태의 확산을 막았으니 제대로된 반격이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직 사정을 듣지 못했던 사카키는 그 "누군가"나 "정보"가 뭐냐고 묻는데 미나모토도 사실 그 이상은 잘 모른다. 이 문제를 정보를 아네 모르네 잠시 옥신 각신.
* 미나모토는 사실 자신도 화가 난다며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받은 것 이상으로 길리엄에데 되돌려주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가 행한 무수한 범죄를 일일히 열거하며 이젠 사카키와 관리관까지 이용했다며 조용히 분노한다. 그러나 너무 힘을 줘서 찬장을 망가뜨릴 정도로 속으로 흥분하고 있다. 사카키는 그가 대신 분노해주는 것에 감격.
- 정건용 . . . . 7회 일치
* 1993.06 ~ 1996.02 : 관세청 근무(부이사관)
* 1996.02 ~ 1996.08 : 관세청 기획관리관
* 1996.08 ~ 1997.12 : 국세심판소 제6심판관
* 1997.12 ~ 1998.03 : 재정경제원 금융총괄심의관
- 진격의 거인/87화 . . . . 7회 일치
* 당국에 잡혀간 그리샤에겐 혹독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치안당국은 그에게 올빼미의 정체를 캐지만 그는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걸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당국의 고문기술자들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끈질기게 심문을 반복한다. 이미 그리샤의 남은 손가락은 세 개 뿐이다. 그리샤가 아는건 전부 말했다고 애원하는데도 관리들은 또 하나 손가락을 자른다.
* 그때 고문실에 낯익은 남자가 들어온다. 그는 그리샤의 여동생을 죽이는데 일조한 남자, "클루거"였다. 하지만 그리샤는 낯이 익다고 생각했을 뿐,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기억을 뒤져보는 사이 클루거는 관리들에게 상황을 보고받는다.
* 반역자들 뒤에는 한 사람씩 관리들이 붙어 있었는데 글로스가 지시하자 일제히 주사제를 투약한다. 엘디아 복권파의 동료들은 주사를 맞고 벽 아래로 떨어진다. 그라이스가 그랬듯 언덕을 타고 굴러떨어지던 동료들은...
* 아버지의 기억. 다이나가 변한 직후 글로스는 그리샤를 조롱한다. 다이나의 거인이 보통 거인들처럼 그라이스를 쫓아가 버리자 "사실은 저 남자에게 마음이 있었다"고 빈정거린다. 분노한 그리샤는 닥치라고 욕하며 15년 전 여동생을 죽인게 바로 너라고 폭로한다. 하지만 글로스는 혀를 찰 뿐 동요하지 않는다. 평범하게 마지막 죄수를 인계 받아 자신이 처리할 테니 부하들은 배로 돌아가라 지시한다. 부하들은 관련되는걸 꺼리며 그 지시에 따른다. 이미 글로스의 "취미생활"은 유명한 듯한데 지금도 글로스가 "취미생활"을 할 생각이라고 여긴다. 부하들도 그리샤의 폭로를 들었는데 "아무리 엘디아인이라도 어린 소녀까지 손을 대다니"라고 진저리를 치지만 특별히 다른 반응은 없다.
* 말문이 막혔던 그리샤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마레의 역사는 날조이며 엘디아인이 인류에게 번영을 주었다는 자신의 믿음을 말한다. 하지만 글로스는 무관심하다. 아무래도 좋으니 "밑에 있는 친구"랑 이야기하라며 그리샤를 떨어뜨리려 한다. 그리샤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묶여있는 상태에선 어쩔 수가 없다. 글로스는 참신하게 먹히라는 둥, 여동생이 부르고 있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지만 그리샤는 절규할 뿐, 아무런 방법도 없다. 그런데...
글로스는 떨어뜨리는 클루거. 모래언덕 아래로 떨어진 글로스는 자신이 만든 거인과 마주친다. 잠시 뒤, 그의 절규소리가 벽 너머로 울려퍼진다. 클루거는 모자를 벗으며 그리샤에게 말을 건다. "이게 재미있다고 생각해?" 방관자인 줄 알았던 클루거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폭로한다.
클루거의 정체가 올빼미이자 그리샤가 가진 거인의 힘의 정체. 지난 화에서 묘하게 관용적인 인물이었고 소년 그리샤를 주의깊게 살펴봐서 올빼미일 거라는 떡밥이 있었지만 설마 거인화 능력자일 거라는 예측은 없었다. 엘디아인의 혈통을 숨기고 마레 측의 치안당국에서 활동했다는 건데 상당한 수완가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유독 그리샤를 택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정체를 드러내는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스포일러 단계에서는 여동생 사건의 속죄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본편에선 그런 언급은 없었다.
- 진격의 거인/97화 . . . . 7회 일치
* [[베르톨트 후버]], [[라이너 브라운]]은 [[에렌 예거]], [[장 키르슈타인]]과 교류하며 병단에 섞였지만 아니는 여전히 적응을 못하고 관계가 삐걱거렸다.
회심의 돌려차기는 남자의 관자노리를 정확히 노렸다. 애니가 아는 한 그런 일격이 빗아갈 일은 드물었다. 그게 하필 미행이 실패하고 뒤를 잡힌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은 더더욱. 케니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고 발차기는 벽에 박히며 벽돌을 박살냈다. 케니로선 그녀가 늘어놓은 드라마보다 이 발차기 쪽이 훨씬 감동적이었다. 케니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진 순간 애니는 몸을 날렸다. 지나온 골목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케니가 뒤쫓아오며 "벌써 아빠가 싫어지는 시기냐고"고 도발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애니가 모퉁이를 돌았다. 그도 모퉁이를 돌았다. 그 다음, 아무도 없었다. 케니는 뚜껑이 열린 배수구를 발견했지만 그의 몸집으로는 통과할 수 없었다. 그가 혀를 찼다.
병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가 이 시설에 와서 생각한 것들. 며칠 동안 그는 "왜 이렇게 됐을까"하고 고심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몸도 정신도 피폐해지고 자유를 빼앗기고 종국엔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린 사람들. 이런 끝이 예정된 줄 알았다면 누구도 전쟁에 나서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누구든 "무언가"에 등을 밀려 전장에, 지옥에 떨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그 "무언가"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다. 타인이나 환경에 의해 강제적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하나같이 같은 지옥에 발을 들인다. 예외가 있다면 단 하나. 스스로 등을 민 녀석들이다.
* 레벨리오의 마레군 본부 앞에는 헤로스 상이란 동상이 있었다. 거인을 쓰러뜨린 마레인 영웅의 동상이다. 한 남자가 일가를 이끌고 그 동상 곁을 지나왔다. 그 뒤로 본부는 습격을 당한 것처럼 술렁거렸다. 때마침 전사대 대장 [[테오 마가트]]가 복귀했다. 부관이 요인의 방문 소식을 전했다. "전추의 거인". 타이버 일가의 방문이었다.
마가트는 곧바로 응접실로 호출됐다. 응접실 바깥 복도는 병사들이 진치고 있었다. 낯선 군복. 마레의 병사가 아니다. 타이버 가의 근위병들. 부관이 그 사실을 귀띔해줬다. 응접실 안에서 맞이하는 것도 타이버의 근위병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병사가 문을 열어줬다. 마치 남의 집에 온 기분이다. 그 다음 마가트를 호출한 사람이 나타났다. 타이버가의 현당주 [[빌리 타이버]]였다. 장발을 뒤로 쓸어넘긴 젊은 남자였다. 그는 갑작스런 방문에 양해를 구하며 악수를 청했다. 마카트는 공손한 태도로 관등성명을 댔다. 빌리의 태도는 격의가 없는데다 이 방문만큼이나 난데없었다.
무슨 장난일까? 마가타는 사무적인 선에서 답했다.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이 정체불명의 방문 목적 자체도. 빌리는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했다. 전추의 거인이 누구에게 계승됐는가는 마레에서도 극히 일부만 아는 기밀이었다. 빌리는 마가트의 대답을 "사려 깊다"고 평했다. 하지만 마가트는 사려 깊은 데서 끝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한에서 말했다. "극히 일부"에는 이 본부의 최고책임자도 포함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책임자는 갑작스런 상부의 명령으로 오늘 아침 출타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매우 드문 일이다. 마가트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최고책임자가 없기 때문인데, 그런 날 타이버가의 당주가 일족을 이끌고 본부를 당분하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다. 과연 이상의 사건들은 모두 무관계한 것인가? 마가트가 그렇게 물었다.
- 창작:세대륙 이야기 . . . . 7회 일치
최초 창작자가 동생과 놀아주다보니(....) 짜게 된 기묘한 세계관.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설정변경이 상당히 많았던 편. 기본적으론 설정덕후인(...) 필자가 만든 세계관이기에 세계관만 적당히 짜두고 그걸 통해 스토리를 진행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나름대로 스토리를 몇개짜두고 있긴 하다만, 언제 연재로 이어질지는 미정.
= 세계관 관련 설정 =
보통 대륙의 생김새가 곰을 닮아 '곰'이라고 호칭한다.[* 그러다보니 지명의 상당수가 '곰'과 관련되어 있다. '곰의 등뼈'라던가 '곰의 머리뼈'라던가....] 기본적으로 티겔 왕국, 아라스 제국, 레이먼 제국의 세개의 열강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각열강마다 다른쪽 열강외 기타문제때문에 본인들의 영역이상의 확장은 무리인 상황.
이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사는 곳''' [* 다만, 단순 인간형 종족이라면 다른 대륙에서도 살고 있다.] 안덴산맥을 통해 남부와 북부가 구별되며, 남부 해안가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다. 큰섬들은 대강 하와이 정도의 크기이지만, 예외는 있다. 보통 섬에서는 거상들이 근처 영주와 협업해 그들만의 공화국들을 세우는 편이 흔하다.
- 채형석 . . . . 7회 일치
|본관 = [[평강 채씨|평강]]
|학력 = [[성균관대학교]] 경영학 학사<br />[[보스턴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1960년 서울에서 애경그룹 창업주 [[채몽인]](蔡夢印)과 [[장영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제주판관을 역임한 [[채구석]](蔡龜錫)이다.
1982년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 재학 당시 같은 학교 미술교육과에 다니고 있던 홍미경을 소개받아 교제 1년 만에 결혼했다. 홍미경의 아버지는 인천교육대학 음대 교수를 지낸 음악가다.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보스턴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1983년 [[성균관대학교]] 경영학 학사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평강 채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보스턴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최영미 (시인) . . . . 7회 일치
[[서울대학교]] 2학년이던 198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내 시위에 가담하여 [[서울관악경찰서|관악경찰서]]에서 구류 10일을 살고 1년간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대학졸업 후에 반독재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비합법 조직 '제헌의회그룹'의 사회주의 원전 번역팀에 들어가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의 저작물을 공동번역했다. 십 여명이 번역과 교열작업에 매달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해방 이후 최초로 현대 한국어로 옮긴 《자본 1》이 1987년 이론과실천사에서 김영민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역자로 내세워 출판되었고, 출판사 대표는 사회주의 원전을 출판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0년대 말 [[소련|소비에트 정권]]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최영미는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자신의 안과 밖에서 진행되는 심각한 변화를 글로 표현하려 노력하며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최영미는 인간의 조건을 풍자적인 언어로 파헤친 시집 《돼지들에게》로 2006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수문학상 심사위원 유종호교수는 “최영미 시집은 한국사회의 위선과 허위,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번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이유를 구현한다”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돼지들에게》의 추천사에서 [[신경림]] 시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 없이는 이와 같은 시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칫 관념적 교훈적으로 될 수도 있는 알레고리적 방법이 시에 활기와 재미를 더해주는 점도 주목을 끈다”라고 썼으며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진정성과 언어의 조탁이 돋보인다”라며 심사평을 전했다.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3년 상반기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다
최영미의 시는 관습과 예의를 따지는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험스런 모험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스타일은 바로 그녀의 독립성이다. 그녀의 시는 삶으로 쓴 시들이다
미국의 계관 시인이자 [[버클리 대학]] 교수인 로버트 하스(Robert Hass)는 2009년 버클리에서 열린 시 낭송회 런치 포임(lunch poem)에서 " 최영미의 시는 추상표현주의 회화같다."라고 평했다. 2005년 일본의 청수사(靑樹社)에서 출간된 최영미의 시선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문화면 머릿기사로 다루며 《아사히신문》은 "다의성(多意性)이 풍부한 명석한 언어"라며 "시에 의해서 잉태된 언어를 이만큼 신중하게, 고독하게 기르고 있는 시인이 가장 이웃한 나라에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라는 사사키 미키로 시인의 평을 실었다.
최영미는 삶과 여행, 그리고 예술에 관한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를 출간했으며, ''Francis Bacon in Conversation with Michel Archimbaud''를 한국어로 번역해 《화가의 잔인한 손: 프란시스 베이컨과의 대화》(1998,도서출판 강)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인하대학교]]와 [[강원대학교]]에서 시 창작을 가르쳤으며, 지학사 고등검정교과서 문학(2014년)에 최영미의 시 〈선운사에서〉가, 창비사 고등인정지도서 문학(2012년)에 〈지하철에서 2〉가, 학연사 고등검정지도서 작문에 (2012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쾰른〉편이 수록되었다.
최영미는 2011년 [[국회도서관]] 홍보 대사로 위촉되었고,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열렬한 축구팬인 그녀는 2006년 ''Die Tageszeitung''에서 발행한 독일월드컵 특집호 ''Taz journal Mai 2006''에 한국 축구에 대한 글을 기고했고, 2011년 축구 에세이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 카치구미 . . . . 7회 일치
1940년대 무렵 [[브라질]]에는 [[일본인]]이 약 30만 명 가량 거주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양국은 적대관계가 되었으므로, 브라질과 일본은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브라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일본어로 출판이나 언론 활동을 할 수 없고, 일본인끼리 모이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 일본어 학교는 폐쇄되었다. 1942년에는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외교관들도 [[포로 교환]]으로 일본으로 귀국하여, 완전히 본국과 연결이 단절되었다. 또 이 당시 [[포르투갈어]]를 읽을 수 있는 일본인은 숫자가 적었으며, 지식인과 브라질 사회에서 성공한 소수의 사람에 국한되었고 대부분은 오지에서 농장에 종사하고 있었다.
10월 19일에 인식파는 상파울루의 미국 총영사관에 일본으로부터 [[신문]], [[잡지]]를 주문해달라고 의뢰하여, 1946년 3월 16일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이를 각 도시에 배포했다. 하지만 3월 이후에는 카치구미가 더욱 과격화하여 '특행대'가 조직되고 일본계 사회 지도층과 인식파 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습격을 당하게 되었다.
6월 3일 스웨덴 공사관 일본인 권익부는 요시다 총리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상파울루 주 집정관이 관저에 카치구미 600명을 모아서 진실을 알리고 설득했다. 심지어 일본에서 직접 정치인이 브라질까지 와서 향후에 대한 연설을 하기도 했지만, ''''카치구미는 믿지 않았다.'''
- 킹덤/522화 . . . . 7회 일치
* 마광군의 공격은 대성공이었다. 부관이 그 명성 높은 기수군 치고는 너무 쉽게 처리됐다며 오히려 실망한 기색이다. 마광은 그게 "양동의 공"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수군의 이목을 끌어준 낙화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설마 기수군을 이렇게까지 희롱할 줄은 몰랐다며 그 지휘관인 몽념 또한 입만 산 녀석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부관들은 여기서는 물러나서 재정비를 할 때라고 진언하나 단칼에 거절한다. 물러난다면 적은 그만큼 철저하게 뒤따라올 것이다. 기수는 이 자리에서 결사항전할 것을 지시하며 적이 소수 부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달하게 한다. 적이 부대를 나눠 파상공세를 취하고 있으니 실제로는 5천 씩 4파로 나눈 총 2만 병력. 기수군이 총 3만이니 병력면에서 압도하고 남는다는 논리였다. 계산 자체는 맞았다. 부관들 눈빛에 희망이 돌아온다.
* 낙화대는 아슬아슬하게 마정을 놓쳤다. 마정을 구출하자 기수군은 빠르게 퇴각했다. 적이 1만이나 되는 병력이니 추격하기엔 마땅치 않다. 부관들은 다음 행동에 대해 물었다. 몽념은 마정이 가는 방향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마정이 전방으로 간다는건 본진이 무사하다는 말이고 파상공세의 후방을 요격하러 간다는 말이었다. 기수는 분명 이대로 공세를 버티는 길을 택했다. 이건 왕전이 예견한 그대로의 전개였다. 왕전이 따로 설명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몽념은 그가 그린 그림을 함께 보고 있던 것이다.
* 기수는 부관들을 모아놓고 이게 "미끼"에 불과했던 낙화대가 5천 병력의 "유격대"로 바뀌었음을 설명한다. 좌측에 들이닥친 마광군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이상, 낙화대 5천은 이제 유격대가 돼서 언제든 아군의 배후에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이다. 게다가 그 지휘관인 몽념은 필시 평범한 장교가 아니다. 이 병력의 존재가 너무 크다. 이제와서 요격하려 해도 병력을 빼면 그만큼 본진이 파상공세에 밀릴 공산이 크다. 생각해보면 단순한 미끼로 끝날 거라면 5천은 많았다. 기수는 여기까지는 내다보지 못했음을 시인한다. 도발, 양동을 위한 5천 병력이 끝내 자군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주역"의 위치까지 발돋움했다. 이건 우연도 뭣도 아니다. 철저한 계산에 따른 배치. 왕전히 그린 밑그림이었다. 기수는 새삼 이것이 진군 총대장 왕전이라며 좌절감을 느낀다.
- 킹덤/524화 . . . . 7회 일치
* [[왕분]]의 측근인 [[관상]]은 이런 점을 설명하며 분하지만 지금은 아광과 그 부대가 왕분과 옥봉대의 몇 배는 더 강하다고 냉정히 평한다.
* [[왕분]]과 옥봉대는 총대장 [[왕전(킹덤)|왕전]]의 지시로 전장에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광군이 적과 비등하게 부딪히자 모두가 감탄했으나 [[관상]]만은 그저 맞먹을 뿐이 아니며 아광군이 강한건 지금부터라고 말한다. 곧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양군의 제 1열은 적과 부딪히면서 큰 희생자를 냈다. 아무리 급박한 전장이라도 이렇게 격돌하고 나면 서로 부상자와 시신에 가로막혀 잠시 물러설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아광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제 1열의 병사들을 방패로 삼고 넘어뜨리고 짓밟으면서 계속 전진했다. 관상은 선두의 기마들은 설사 그 앞에 있는게 자기 가족이라 해도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무엇이든 짓밟고 무너뜨릴 각오 뿐이라고 말했다.
* 그 차이야 말로 아광군이 정면에서 격돌해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강군으로 만들었다. 곧 전선의 균형이 크게 깨지며 조군을 밀어냈다. 관상은 지금 옥봉대의 기마대도 충분히 강하며 진군 전체를 통틀어봐도 손꼽히는 수준이라 인정했다. 그러나 저같은 냉혹함 승부욕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관상은 아광이 한 것처럼 그를 도련님이라 불렀다.
* 이제 마남자가 부관 [[월보]]를 데리고 제 2군을 맡아 돌진한다. 조아룡이 조금 빠르지 않냐고 묻는다. 마남자는 자신이 가슴에 품고 있던 생각을 밝히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본디 북방에서 나고자란 그는 딱히 애국심이란 걸 느껴보지 못했다. 그런 그 조차 진나라의 이번 침공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놈들은 진심으로 조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이 정체불명의 기마대는 마남자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 기마대는 곧 말머리를 돌려 마남자가 있는 주공 3천을 향해 돌진해왔다. 분명 진군의 별동대다. 주공의 중심을 쳐서 전위를 고립시키려는 계산이다. 마남자는 [[친비]]를 시켜 우측에 나타난 새로운 적을 방어하도록했다. 친비는 기마대를 이끌로 적이 접근하기를 기다려 요격을 가한다. 그러나 적의 선두가 눈부신 창술을 펼쳐 친비와 그 부하들을 일소한다. 이들은 왕분과 옥봉대였다. 그렇게 얌전히 있으라고 일렀건만 결국 멋대로 전장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관상이 나중에 아광에게 한 소리 듣겠다 투덜대지만 왕분은 "시끄러" 한 마디로 대꾸했다.
- 토탈워: 쇼군 2/세력 기술 . . . . 7회 일치
전쟁에 관련된 세력 기술들.
내정에 관련된 세력 기술들.
오토모 가문은 불교와 관련된 세력 기술들이 기독교 관련 세력 기술들로 대체되어 있다.
* 관개시설 농장(Improved Irrigation)을 계단식 농장(Terrace Farming)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게 됨
* 외교 관계 +10
* 외교 관계 +20
- 트로피코 4 . . . . 7회 일치
>Tropico 4는 새로운 정치 요소를 통해 전작에 비해 게임플레이 요소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외교를 진행할 새로운 초강대국이 등장할 뿐더러, 논란 많은 정책을 쉽게 통과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장관을 임명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십시오! 모두의 의견을 신중히 파악하십시오! 자연이 가져오는 새로운 재해가 나라를 휩쓸고 지나가면 국민들은 사후복구를 위해 국고를 열 것을 소리높여 요청해올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 당신의 정치적 결단력이 샅샅히 시험될 것입니다.
* 체포 - $1,000 소모. 교도소나 지하 감옥 필요. 경찰관이 해당 시민을 토끼 몰듯 몰아서 교도소나 지하 감옥에 처박는다. 대상은 5년간 수감된다. 대상과 그 가족들의 존경심이 떨어진다.
이들의 습격이 시작되면 병사, 장군, 대통령 각하가 반란군에 맞서 싸운다. 전투는 어느 한쪽 모두가 죽거나 도망칠 때 까지 지속된다. 정부군이 승리하면 별 탈 없이 끝나지만, 반란군이 승리할 경우 습격당한 건물이 폭파된다. 대부분의 경우 다시 지으면 되지만 대통령 관저가 폭파되면 게임오버.
* 1991: 걸프 전쟁 - 중동과의 관계가 기본값으로 돌아감
* 2006-2008: 라틴 아메리카 국채 위기 - 모든 관광지의 가격이 50% 상승
* 부두 저택 건물 추가 - 부유층 관광객이 좋아함
* 이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건물 추가
- 페이데이 2/인벤토리 . . . . 7회 일치
* 경기관총
[[페이데이 2/인벤토리/주무기/경기관총]] 페이지 참조
* 기관단총
[[페이데이 2/인벤토리/보조무기/기관단총]] 페이지 참조
소모성 투척무기. 대다수의 투척무기들은 날아가던 중 적의 총알에 맞으면 그대로 터진다. 기관총 포탑에게 던질 때 주의할 것.
* Technician - Engineer - Engineering Ace: 센트리건이 철갑탄을 사용하게 할 수 있다. 철갑탄을 사용하는 센트리는 연사력이 75%로 감소하지만 데미지가 250% 증가하며 적의 방탄복과 몸을 관통할 수 있다.
아머량에 관여하는 장비들. 중장갑일수록 아머량이 늘어나지만 은닉도, 이동속도, 회피율, 스태미나가 떨어진다.
- 프로 스포츠 . . . . 7회 일치
프로 스포츠에서는 [[경기]]를 보러 오는 [[관객]]에게 징수하는 입장료 수익이나, 선수나 해당 스포츠를 주제로 한 상품의 판매, [[스포츠 마케팅]] 광고 효과를 노리는 광고 스폰서 등으로 수익을 얻어, 영리적으로 스포츠 단체를 운영한다.
권투의 경우도 권투경기를 주관하는 주요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다 뿐이지, 올림픽 권투경기를 보기 위해서 올림픽 관람료를 내야함은 물론이고 올림픽 성적에 따라 각 국가의 올림픽 관계 단체로부터 상금이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개중에는 스폰서가 붙는 경우까지 생각하면, 이전과는 달리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 만으로는 프로 스포츠와 아마추어 스포츠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각 종목과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가 규정하는 바에 따른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종목에 따라서 상황이 상당히 다르지만,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대회와 그렇지 않은 대회는 어느 정도 방향성에서 차이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프로 스포츠 마케팅에서 강한 선수, 강한 팀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관객들이 강한 선수나 강한 팀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다만 반대로 강한 선수나 강한 팀이 흥행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는데, 오히려 "누구누구만 나오면 이기니까 재미가 없다.", "어디 팀만 무조건 이기니 재미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 시장에서는 이러한 '흥행'을 고려하여 리그에 영향을 미치는 규칙을 변경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대회운영과 일정 관리 등, 스포츠 대회를 열었을 때 수반되는 각종 어려운 부분들이 발생함으로써 영리기업은 보통 여기에 별도로 운영하기 위한 부서를 두는게 비용적인 면에서 불리함이 있기 때문.
- 하이큐/229화 . . . . 7회 일치
* 돌아가는 길에 잠깐 체육관에 들리는데 다른 부원들도 모여있다. 괜히 돌아다니다 우연히 모이게 되었다고.
* 사와무라는 부리나케 체육관으로 달린다. 가면서 휴대폰으로 스가와라 코시나 아즈마네 아사히에게 연락하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연락처가 사라져 있다. 체육관에 도착해 보니 체육관은 농구부가 쓰고 있는데 어째서 농구를 하고 있냐고 하니까 "여기는 이제 농구부 것"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괴이함을 느낀 사와무라가 다른 배구부 부원들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더니 "배구부는 너 한 명이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 귀갓길에 다른 3학년들과 떨어진 사와무라는 여전히 꿈 때문에 찜찜한 기분이 든다. 가던 길에 잠시 체육관에 들러보는데 왠지 부원들이 체육관에 와있다. 히나타는 참배갔다 오는 길에 그냥 들렀고 왠지 카게야마는 런닝 중이었는데 어쩌다 들렀다고 한다. 타나카는 누나의 주정을 참다 못해 도주, 니시노야는 "강자를 찾아서"라는 해괴한 이유. 사와무라는 "참치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냐"고 핀잔하며 쉬는 날엔 푹 쉬고 괜히 돌아다니다 감기나 들지 말라며 쫓아낸다. 그런데 사실 사와무라도 "체육관을 농구부한테 뺏기지 않았나 확인"하러 왔으니 엉뚱하게 돌아다니긴 마찬가지다.
- 하이큐/245화 . . . . 7회 일치
* 그리고 카모메다이 학원의 시합 시작. 카라스노 고교 선수들은 관중석에서 주의깊게 경기를 지켜본다.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우카이 감독의 지인에게 붙들려서 아직도 이런저런 잔소리 듣는 중. 관중들 대부분은 눈에 띄게 키가 작은 호시우미에게 이목이 모인다. 히나타와 카게야마 역시 그의 활약에 집중한다. 카게야마는 전 일본 유스 직후 히나타에게 "정말 잘 뛰는 점프"에 대해서, 호시우미의 요령을 히나타에게 전달했던 적이 있다. 히나타가 그 점프의 주인공이 호시우미라는걸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점프가 범상치 않다는건 눈치 챈 것 같다.
히나타는 객석을 내려가 코트에서 호시우미의 플레이를 주의깊게 관찰한다.
* 호시우미는 그저 점프가 대단한 스파이커가 아니다. 수비면에서도 리시브와 블록, 위치를 가리지 않고 고르게 활약하는 좋은 선수다. 공수 양면에서 활약하는 그는 중계진도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빛나는 활약을 한다. 그 플레이에 관중들까지 단숨에 팬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서브 차례에서 깔끔한 점프 서브로 서브 에이스까지 기록하는 등, 그야말로 전천후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활약에 중계석에서는 그를 "작은 거인"이란 별명으로 부르고 체육관에는 온통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 [[사와무라 다이치]], [[아즈마네 아사히]]와 관전 중이던 [[스가와라 코시]]는 문득 이런 염려가 생긴다.
3학년들은 코트 바로 옆에서 히나타가 열심히 경기를, 호시우미의 플레이를 관찰하는게 보인다. 스가와라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하지만, 사와무라와 아즈마네는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 하이큐/256화 . . . . 7회 일치
* 숨겨진 "괴짜 속공 킬러"로 [[미야 아츠무]], [[미야 오사무]] 형제의 괴짜 속공을 칼같이 차단한 [[츠키시마 케이]]. 중계진은 그를 [[카라스노 고교]] 최장신이라 소개하며 상대 코트를 끝까지 잘 살핀 냉정한 플레이를 칭찬한다. 관중석에서 보고 있던 노헤비 학원의 [[다이쇼 스구루]]도 방금 전 블록을 호평하며 자신이었으면 놓쳤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여친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채지 못한다. 다이쇼의 설명이 이어진다.
* 우승후보인 강호를 상대로 선전을 펼쳐가는 카라스노. 관중석에서는 이 다크호스를 대단히 우효적으로 평가한다. 1학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리베로인 [[니시노야 유]], "사무라이"란 별명을 얻은 아즈마네 또한 "강하다"는 평이다. 주장 사와무라도 리시브가 뛰어난 걸로 고평가. 그런데 5번, 빡빡머리 [[타나카 류노스케]]가 어정쩡하다. 관중석에서는 "그냥 활발"하다는 걸로 평하며 놀림거리로 삼는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관계자 [[아마나이 카노카]]가 싸늘한 눈으로 키득거리는 관중을 쳐다본다. 당사자들은 원한을 샀다는 것도 모른다.
* "활발"한 타나카의 플레이. 좌측에서 스파이크를 때리지만 오사무와 [[스나 린타로]]의 벽에 막힌다. 블록에 맞고 튀어오르는 공. 그대로 타나카의 안면으로 향한다. 꼼짝없이 한 점을 내주게 생겼는데, 타나카가 필사적으로 목을 틀어서 공을 피하고 그 공은 아웃라인을 넘는다. 구사일생. 카라스노의 득점으로 인정되면서 타나카가 쾌재를 부른다. 어쨌든 득점은 득점. 비록 관중석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지만 말이다.
* 츠키시마가 공수를 가리지 않고 날뛴다. 벤치의 야마구치와 히나타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활약. 중계진의 말처럼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그런데 이런 파인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그걸 성공시킨 세터와 스파이커는 그 흔한 하이 파이브 조차 하지 않았다. [[스가와라 코시]]도 그걸 지적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언제라도 후려칠 것 같은 썩은 눈빛 교환. 이 눈빛에 관해서는 엔노시타가 해설한다. 츠키시마는 "잘 되고 있는건 인정하지만 거슬린다"는 눈빛, 카게야마는 "니가 노려보니까 나도 노려보겠다"는 눈빛. [[키노시타 히사시]]는 그걸 읽어내는 엔노시타가 더 신기한 모양이다.
- 한복 (1914년) . . . . 7회 일치
'''한복'''(韓宓, [[1914년]] [[9월 16일]] ~ [[1994년]] [[1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겸 관료로, [[서울특별시]] 출신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1932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5년 3월 졸업할 때까지 [[일본]] 다케구라(武藏) 고등학교 고등과에 재학했으며 [[1935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8년 3월 졸업할 때까지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부 법률학과를 전공했다. [[1937년]] 11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38년]] [[3월 30일]]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임명되었다.
[[1939년]] [[12월 4일]] 부산지방법원 예비판사, [[1940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1942년]]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44년]] [[8월 17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평안남도 이사관 겸 평안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을 역임하면서 고등관 5등에 서위되었고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사법 부문,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허준호(배우) . . . . 7회 일치
원로 배우 [[허장강]]의 아들로도 유명하긴 하지만 스스로의 연기력으로 올라선 인물로서, 20대 무명시절을 겪고난 후 30대 초반이던 1990년대 중반부터 청춘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들과 함께 비중있는 조연으로 얼굴을 내 비추며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6년 드라마 "주몽"에서 맡은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 역이 유명하다. 주몽의 훌륭한 멘토이자 과거 [[세계관 최강자]]였던 인물의 멋진 연기를 선보였다.
[[실미도(영화)|실미도]]를 촬영할 때 북파 공작원으로 캐스팅을 받았는데 '''명령에 충실했을 뿐인 북파 공작원 교관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공작원이 아닌 교관역을 자청하여 매섭고 냉정하지만 사실 속정은 깊은 조돈일 중사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초반에는 정말 악질 교관의 모습을 보이며 구타를 일삼았지만 후반에 북파 공작원들이 버스를 탈취했을 때 이를 진압하는 진압군 앞에서 공작원들을 변호하며 어떻게든 자신이 훈련시킨 공작원들을 살려보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폭한 공작원들의 이름을 쉰 목소리로 외치며 오열하는 호연으로 관객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특히 사탕봉지를 떨어뜨리는 장면의 애잔함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쟤들 무장공비 아닙니다!~~
* 2003년 《[[실미도(영화)|실미도]]》... 684부대 훈련교관 조돈일 중사 역
* 2001년 ~~KBS2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건 맞지만, 드라마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는 [[이미연(배우)|이미연]]의 당시 소속사인 GM기획이 음반 제작을 주도하면서 드라마 제작진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실제 뮤직비디오 속 배우와 드라마 속 배우들이 몇몇 배역의 경우 다르다. 대표적으로 뮤직비디오의 사실상 남자주인공이었던 [[정준호]]도 드라마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 홍정욱 . . . . 7회 일치
2008년 4월 9일 노원구 병 선거구의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을 받아, 당시 [[진보신당 (대한민국)|진보신당]]의 후보였던 [[노회찬]]을 누르고 제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18대 [[대한민국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 독도영토수호대책특별위원회 위원이며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정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09년 9월 24일 [[한나라당]] 국제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2010년 8월 17일에 [[한나라당]] 2030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외에 [[한나라당]]에서 천안함대책위 위원, 북핵도발대책특위 위원, 서울시당공천심사위 위원, 지방선거기획위 위원, 2010 지방선거 중앙선대위 스마트유세지원부단장, 2010 지방선거 서울시장후보선대위 O2유세지원단장, 평창동계올림픽유치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가족 관계 ==
홍정욱은 미국 [[바너드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던 [http://www.jungheesohn.com/ 손정희](1974년~)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고 있다. 장인인 손명원은 [[현대미포조선]], [[쌍용자동차]] 사장을 지낸 전문 경영인으로 정치인 [[정몽준]]의 손윗 동서이다. 처의 증조부는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2대 의장을 역임한 [[손정도]] 목사이고, 처의 친할아버지는 [[대한민국 해군]] 창군 주역이자 전 국방부 장관인 [[손원일]] 제독이다. 처의 외할아버지는 [[김동조]] 前 외무부 장관이다.
* 現 [[국립중앙박물관회]] 이사, 한미협회 이사, [[서울대학교미술관]] 운영위원
== 병역 관계 ==
- 홍학표(배우) . . . . 7회 일치
1990년부터 1994년까지 2개의 시즌을 걸치며 방영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던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은 그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작품'''이다. 당시 서른을 넘기는 나이였지만 유난히 어려보이는 얼굴에다 '''풋풋한 개성과 선량한 이미지로 어필'''하며 [[최진실]]과 함께 시즌1[* '우리들의 천국'은 공식적으로는 시즌제작품이 아니지만 편의적으로 시즌1과 시즌2로 나눌때 홍학표가 주연을 맡았던 시즌1은 단순히 대학생들의 삶과 연애를 다룬 내용이라기보다는 어머니,아버지,대학생 큰형(홍학표),쌍둥이 고교생 형제로 된 다섯 가족의 삶을 다룬 홈드라마의 성격이 강했다. 각각의 가족들도 비중이 있어 어떤 회에서는 홍학표 관련 내용은 별로 없이 쌍둥이의 학교 생활,아버지의 직장생활에 대한 에피소드가 대부분이었던 경우도 있다.홍학표가 중심이 된 대학생활과 연애가 아무래도 중심이긴 했고,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대학생들의 연애 드라마로 완전히 변화한다. 시즌2부터 등장한 배우들이 [[박철]],[[음정희]],[[염정아]],[[김명수(배우)|김명수]]등. 홍학표가 빠지고 실질적인 시즌2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청춘연애물이자 대학생 로망스 겸 젊은 배우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게 된다. '사랑이 뭐길래'에서의 막내 아들 역할을 비롯 이전작들을 통해 청순스타로 각광받던 [[김찬우]]가 주인공이었고,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재수까지 하여 같은 대학에 입학한 절친으로 [[장동건]]이 나왔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박철]]은 훗날 안좋은 이미지가 된데다 최근의 살집있고 우스꽝스러운 아저씨 이미지가 전혀 아닌 당시 특A급 꽃미남스타였다. 여자배우로는 장동건의 파트너로 [[이승연]]이 나왔고 이 드라마가 마지막으로 배출한 스타가 [[전도연]]이다 .]에서 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추며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로 자리매김'''한다. 큰 키도 아니고, 확 눈에 띄는 얼굴도 아닌 그가 청춘스타로 등극한 것은 사실 한국 연예계사상 이례적인 일이다.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2005년에 화제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연기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정치드라마에 출연하며 '''군사정부의 실세인 [[장세동]]을 열연'''하였다. 실제 [[장세동]] 배역은 카리스마와 충절로 대변되는 캐릭터라 캐스팅 과정에서 연기자들의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고 하는데, 홍학표는 실제 장세동 배역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극중에서 실제인물과 외모면에서 싱크로율이 높아 최종 낙점'''되었다고 한다.[* 외모뿐이 아니라 목소리까지 비슷하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TlpSgQ_nrVM|이쯤되면 도플갱어급인듯]]] 캐스팅되고나서 실존인물인 [[장세동]] 측근으로부터 만남의 요청을 받아 배우로서 자료수집이 될 것 같아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장세동과의 술자리 대화 내용이야 뭐 자기 좀 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홍학표의 친구 중에 미술학원 원장이 있었는데, 그의 학원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던 홍익대 미대 1학년인 '''9살 연하의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때 홍학표는 아내의 모습에 첫 눈에 반했으나 당시에 최고의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아내 때문에 8개월 동안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결국 아내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이 차이도 많은데다 연예인이라는 직업도 마음에 안들었던 장인, 장모의 반대에 부딪쳤다고 한다. 너무 나이차가 많다 보니 심지어는 장모가 "애 데리고 그러지마"라는 충고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중간에 헤어질 위기도 있었으나 중간에 홍학표의 어머니가 혈압으로 쓰러졌고 아내가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다시 마음이 돌아섰다고 한다. 결국 대학 1학년때 처음 만나 졸업하고나서까지 5년이라는 세월동안 꾸준한 믿음과 성실한 모습을 통해 결국 장인, 장모로부터 결혼승낙을 받아내고, 1994년 아내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고 있다고 한다.
2009년 [[송대관]]의 아내와 함께 해외 원정도박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서 2011년에 관련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동안 배우로서 쌓아온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다. 결국 '''도박방조죄 혐의[* 실제 도박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도박현장을 목격하고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다.]로 [[약식기소]]'''되고 200만원 벌금형을 받았는데, 문제는 실제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전혀 관련도 없는 [[송대관]]의 아내와 염문설이 있는 식으로 기사가 나온데다, 법원판결에서 유죄를 받은 혐의인 '도박방조죄' 혐의 부분도 자신의 외식사업의 해외진출을 위한 투자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곳이 하필 [[마카오]]의 [[카지노]]였는데 이게 원정도박혐의로 부풀려져 그로서는 억울한 부분이 많은 듯. 오죽했으면 벌금 200만원의 배 이상인 변호사를 수임하면서 정식재판을 청구했을까?
- 화장실의 하나코 씨 . . . . 7회 일치
1937년, 토오노에서 어느 가족이 있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며, 아내와 아들, 두 딸로서 5인 가족이었다. 이 가족은 토오노 초등학교 바로 뒷편에 있는 경찰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경찰관인 아버지는 여자 버릇이 나빠서, 어느날 창녀와 둘이서 온천 여행을 떠났다. 그것을 알게 된 아내는 질투한 나머지, 가족동반자살을 하고 말았다. 먼저 아들과 둘째 딸을 교살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 이었던 이쿠코(いく子)는 무서워서 관사에서 학교로 도망쳐서 체육관 뒤에 있던 공동 화장실에 숨었다.
이 사건 이후로, 토오노 초등학교 체육관 뒤의 공동 화장실 안쪽 세번째 칸에서, 노크를 하면 아무도 없는데 노크가 3번 되돌아오거나, 있을 리가 없는 여자아이를 목격하는 학생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메이저한 도시전설로서, 다양한 요괴 관련 작품에서 등장한다.
- 휴먼 토치 . . . . 7회 일치
== 스파이더맨과의 관계 ==
[[스파이더맨]]과는 초창기부터 티격태격하며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스파이더맨 그만둘까 고민하던 피터가 쟈니 스톰의 영웅에 대한 연설을 듣고 다시 기운 차려서 스파이더맨이 되는 이야기도 있었고, 자니 스톰도 스파이더맨하곤 스스로가 "친근한 [[라이벌]]" 관계였다고 말하기도... 그래도 가끔씩이 둘이 싸우면 아주 난장판으로 싸우기도 했다. 쟈니가 파티장에서 여자들에게 인기를 끈 것을 보고 질투한 스파이더맨이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고 둘이 싸우기도 했다. 그래도 나중에 둘이 협력해서 샌드맨과 싸우기도 하는 등 티격태격하는 라이벌 관계라고 보면 된다. 한번은 쟈니가 자신의 여자친구와 관계가 서먹해지고 여친이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이 아닌 평상시의 모습)에게 관심이 있자 질투심에 피터를 찾아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는 와중에도 샌드맨등의 적을 힘을 합쳐 쓰러뜨렸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수 있는 친구가 되고 나중에 쟈니가 자신이 죽을 경우 스파이더맨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란다고 말할 정도의 관계가 된다.
- K리그 . . . . 6회 일치
시작은 5개 팀이었지만 어쨌거나 참가팀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994년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조직되고나서부터 KFA가 운영하던 때보다 좀 더 세심하게 "프로"리그를 구성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상당한 잡음이 생기긴 했으나 본격적인 지역연고정착에 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월드컵 유치와 관련하여 축구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기 시작한다. 또한 대우 로얄스와 성남 일화, 포항 스틸러스, 수원 삼성이 ACL의 전신인 아시아 클럽 챔피언쉽(ACC)를 돌아가며 제패하는 등, 아시아 최상위 리그임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 [[상무 축구단]][* 현재 상주 상무 프로축구단과는 연맹의 기준으론 "연속성이 없는" 관계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 항목으로 소개]
이와 관련하여 당연히 기존 K리그 회원들의 반발이 거셌고, 특히 강등할 가능성이 높은 시민구단들이 가장 거셌는데 이에 대해 연맹이 내 놓은 해결책은 사실상의 세미프로인 군경팀을 일단 확정적으로 강등시키며, 군경팀을 제외한 최하위 팀을 추가로 강등하는 1+1 강등안을 발표한다. 때문에 군경팀인 상주 상무는 자동으로 강등되었으며, 추가로 상주를 제외한 팀들 중 최하위를 기록한 광주가 사상 첫 강등이라는 아픔을 겪게 된다.
= 관련항목 =
[[분류:축구 관련 정보]] [[분류:K리그]]
- 강구열 . . . . 6회 일치
두 선수의 첫 인연은 곰TV [[MSL]] 시즌2 조지명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조지명식에선 [[김창희 (프로게이머)|김창희]](당시 [[온게임넷 스파키즈]] 현 영구제명)와 [[박성훈 (프로게이머)|박성훈]]([[삼성전자 칸]])의 신경전이 한창이었는데, 이는 서바이버 토너먼트에서 일어난 '버그 사건' 때문이었다. 시종일관 박성훈은 "벌레(버그)테란과 맞붙고 싶다" 등의 공격적인 멘트로 김창희를 자극하였다.
이같은 설전의 영향으로 두 선수의 맞대결엔 뜨거운 관심이 모아졌고, 경기는 강구열의 완승으로 끝났다. C조 2경기에서 강구열이 승리한 이후, 최종진출전에서도 강구열이 김창희를 꺾으며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결국 김창희는 진영수와의 대결은 고사하고 탈락의 쓴맛만 봤고, 그의 안티팬들은 강구열에게 '세스코 테란(벌레를 박멸했다는 뜻)'이란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이후 두 선수는 한동안 어색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MBC게임의 스타 무한도전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또한 MBC게임 히어로-온게임넷 스파키즈간의 이벤트전인 라이벌 배틀 브레이크에서도 둘은 줄곧 맞대결했고, 팬들 역시 이들의 경기를 '열창록'이라 칭하는 등 높은 관심을 보였다. 강구열과 김창희의 대결 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은 2008년 초에 열린 올스타 스킨스 매치로, 이날 경기에서 김창희는 강구열을 7:0으로 꺾으며 500만원의 상금을 차지했다.
MSL에는 8강에 오른 선수들에게 그 특징을 살린 별명, 문구를 붙여주는 관행이 있다. 당시 강구열에겐 '날카로운 빌드의 귀재, BLADE TERRAN'이란 수식이 붙었는데, 이는 기본기나 운영보다는 초반 빌드에 집중하는 강구열의 플레이 스타일에 착안한 것이었다. 5판 3선승제로 치러진 8강에서 강구열은 예의 그 '날카로운 빌드'를 시전했으나 송병구의 탄탄한 운영에 모두 막히면서 0:3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혹시모를 이변을 기대했던 팬들은 허무하게 끝나버린 경기에 크게 실망했고, 시드를 획득한 강구열이 곰TV MSL 시즌 3 32강에서 [[손주흥]]과 [[김윤환 (1988년)|김윤환]] (KTF)에게 2연패를 당하면서 맥없이 탈락하자 "거품이다", "천운 8강이다" 등의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 [[손찬웅]] (현 [[화승 OZ]]) : 2011년 7월 은퇴. 손찬웅의 행보는 강라인이 되는 데 정말 완벽했다. 2007 스타챌린지 S2에서 손찬웅은 [[변길섭]]과의 최종전에서 변길섭을 꺾고 박카스 [[스타리그]]에 올라가 김동건, 박명수, 박영민에게 패하며 탈락했고, 그 다음 시즌 [[에버 스타리그 2008]] R1에서 [[이제동]]과 [[한동욱]]을 떨어트리는 충격적인 대진으로 2R에 진출했다. 그 후 R2에서 [[김택용]], [[박성균]], [[박영민 (1984년)|박영민]]과 같은 조가 되어 김택용과 박영민을 이기고 박영민과 8강에 진출하며 김택용과 박성균의 진출을 기대하였던 관계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또 8강에서는 강력했던 로얄로더 후보 [[허영무]]를 2:1로 역전시키며 4강에 진출하여 시드를 얻었다. 하지만 4강에서 [[프로토스]]전을 제일 잘 하기로 유명한 [[박성준 (1986년)|박성준]]에게 3:1로 패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탈락하였으며, 끝내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 16강에서도 [[송병구]], [[염보성]],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에게 전패를 당하고 광속 탈락, 강라인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인크루트 스타리그 3패 탈락의 영향으로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에서도 김택용, 박영민에게 2패를 당하고 광속 탈락, 이 후에도 서바이버 시즌 3에서도 [[박태민]]과 STX의 저그 신예 [[조일장]]에게 연패하며 탈락, 강라인의 일원임을 입증했다. 이후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는 [[박태민]]과 [[서기수]]를 이기고 16강에 진출은 하나 [[문성진]], [[송병구]],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에게 무난한 3패로 광탈하며 강라인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차기 시즌에서는 36강에서 탈락하며 본선 진출 실패. 그 뒤로는 스타리그에도 MSL에도 복귀하질 못하였고, 계속 탈락만 하다가 2011년 7월 은퇴.
- 고경표(배우) . . . . 6회 일치
데뷔 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인 SBS 접속 무비월드 '영화는 수다다' 코너에서 영화 [[쩨쩨한 로맨스]]를 본 일반 관객의 한 사람으로 인터뷰한 내용이 나온다.([[https://youtu.be/T9uKOlhvB5k?list=PLGPoxas8n3q9_mB8PVv56z_IBUpVIhRhy|1분25초, 3분50초]])
그러나 고경표는 장진 사단으로, 2011년 SNL에 들어갈 당시 정치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으며, 많이 배우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였다([[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341304809351989002|SNL하면서 정치 공부… 울분 터지더라]]). 또한 영화 변호인을 보고 젊은이들이 투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나름의 소신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52156|배우 고경표 "검은옷 입고 '변호인' 보았다"]]). 평소 고경표는 노란 리본을 직접 받아서 달고 다닌다고 하였으며, 일베 논란은 응답하라 1988 포상휴가 당시 공항에 세월호 리본을 가방에 달고 나타나 일축되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19/2016011902740.html|'선우' 고경표,'가방에 달린 세월호 노란리본']]).
[[박유천]]과 관련된 논란에서는 2014년 대종상 영화제 신인 남우상을 수상하였던 박유천을 두고, 비공개 계정에서 친구와의 대화했던 것이 논란이 되었다. 당시 후보로는 <화이; 괴물을 삼킨아이>의 [[여진구]], <족구왕>의 [[안재홍]], <신의 한수>의 [[최진혁]], <변호인>의 [[임시완]], <해무>의 박유천이 있었으며, 박유천이 수상하게 된다. 이를 두고, 한국 영화제에 대한 비난과 함께 수상한 박유천에 대한 언행을 한 것은 잘못한 점이 분명히 있으나, 이를 두고 고경표는 '아이돌이 연기하는 것을 싫어한다.'라는 오명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전 인터뷰에서 아이돌 출신인 임시완에 대해 존경하고 배워야 할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였고 딱히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던간에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보고 배워야 한다는 인터뷰를 한 것으로 보면, 아이돌의 연기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확대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박유천/사건사고|엄청난 사건사고]]로 큰 논란에 휩싸인 [[박유천]]을 옹호중인 [[심영섭]]이 [[http://hgc.bestiz.net/zboard/view.php?id=ghm2b&page=2&sn1=&divpage=44&sn=off&ss=on&sc=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78586|믹키유천의 오랜 팬이자 본 신인 남우상의 심사위원중 한명이이었다는것이 밝혀져]] 본 발언이 '''재평가를 받고있다.'''
2015년 11월 이루어진 고경표의 페이스북에서는 "너무 나대서 불편하고만"이라는 글과 함께 tvN 초인시대에서 [[응답하라 1988]]을 풍자하는 [[유병재]]에 대해 비난조의 글을 게시한다. 당시 tvN 드라마 '초인시대'에서 유병재는 "올해 하반기에 '응답하라 1988'이 방영합니다. '너무 옛날로 돌아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공감을 얻을 수 있겠느냐' 뭐 이런 우려들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조금 더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답하라 1894', [[동학농민운동]] 때로 돌아가서 그 안에서 벌어졌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여자 주인공 전봉준과 탐관오리 조병갑 사이에서 누구한테 갈까 이런 내용으로 시청자들과 밀당한다면..."이라는 등 응답하라를 풍자하는 내용의 콩트를 하였는데, 당시 응답하라를 출연 준비중이었던 고경표가 이에 대해 '너무 나대서 불편하고만'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 옥수수 ||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 || 이민우 || 특별출연 ||
- 구자춘 . . . . 6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호는 취산(翠山)이다.
1950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었다. 그 해 [[6.25 전쟁]]이 터지자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쟁이 끝난 1954년 미국 육군학교를 졸업하였다.
=== 관료 ===
1974년 9월 2일부터 1978년 12월 21일까지 제16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원래는 영등포-왕십리로 계획되어 있던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거대 순환선으로 만든 사람이다. 특히 2호선 계획 당시 지도에 줄 그어서 30분만에 만들었다는 레전설이 나름 유명. 웃긴건 그렇게 날림처럼 노선이 정해졌음에도 정작 공사할 때 [[영등포역]] 경유 예정 구간이 [[신도림역]] 경유로 바뀐 것, 딱 한 곳만을 제외하면 딱히 난공사라 할만한 구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구자춘 시장이 포병 출신이어서 지도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레전설 일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근데 이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 아닌가,--[* [[손정목]] 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다만 이는 좋게 봐줘도 2호선 한 노선 한정이고, 바로 다음 노선인 3호선부터 서울 지하철 노선의 선형은 '''온갖 병크'''가 터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서울/강남|강남]]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그 이외에도 [[강남8학군|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의 명문고 이전]],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립[* 다만 본인이 기안한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고속터미널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지하철 3호선|3호선]]을 무리해서 끌어오느라 3호선의 선형에 '''지랄맞은 ㄷ자 드리프트'''가 생기는 원흉이 된다.], 금화터널 건설 과정에서의 [[독립문]] 이전, [[한양도성]] 일부 복원, 도심부 주차장 확충--당시 도시계획국장 [[손정목]]의 말을 안 듣다가 땅을 치고 후회했을 듯...-- 등을 추진하였다. 이런 그의 별명은 대표적으로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10110020920202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10-11&officeId=00020&pageNo=2&printNo=17237&publishType=00020|황야의 무법자]]'''였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별명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111900329206004&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11-19&officeId=00032&pageNo=6&printNo=9891&publishType=00020|붙었다]].~~관료계의 [[김태균(1982)|김별명]] [[박용택|별명택]]~~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인 1978년 12월 22일부터 1979년 12월 14일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 [[10.26 사건]] 당시 [[육군본부]] 국무회의에 참석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달성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장관]][[분류:대한민국의 자치단체장]]
- 그랜드 테프트 오토 2/무기 . . . . 6회 일치
* S-우지 기관총(S-Uzi Machine Gun)
기관총. 군인이 들고 다닌다.
* 소음 S-우지 기관총(Silenced S-Uzi Machine Gun)
쏘면 맞은 사람만 반응하는 기관총. FBI 요원이 들고 다닌다.
* 기관총 차량 정면에서 기관총 두정을 발사한다.
- 긴나라 . . . . 6회 일치
고대 베다 문헌, [[마하바라타]],[[라마야나]] 등에는 킴푸루사(Kiṃpuruṣa)라는 유사성이 많은 존재와 등장하는데, 긴나라와 킴푸루사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킴푸루사 역시 ‘(어떤) 사람인가’라는 뜻으로서, [[자타카]]에서 운문 자타카가 산문 자타카로 옮겨지면서 킴푸루사가 긴나라로 바뀌는 경우가 있어 후대에 혼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람들이 별로 관심없는지 예술작품에 따라서는 머리가 말 대신에 소가 되거나 새가 되거나 한다.
인도 신화에서는 노래하고 춤을 춰서, 여러 신들과 보살, 중생을 감동시키는 음악의 신이다. 카일라스 산(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재복을 관장하는 신 [[쿠베라]]의 천국에 살면서, 천국의 음악을 연주하는 역할을 한다.
천룡팔부 가운데서 가장 관심을 못 받는 종족. 사람들의 관심이 매우 부족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기가 없다(…). 있는줄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천룡팔부 자체가 아수라, 야차 등 몇가지를 제외하면 사실 크게 관심을 못 받지만 긴나라는 독보적이다.
- 김기수(코미디언) . . . . 6회 일치
* 여초 커뮤니티 등의 반응이 좋지않다. 여성들의 기준에는 김기수의 화장 실력이 초보 수준으로 서툴고 어설프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 여성 뷰티 크리에이터만 아니더라도 맨즈 뷰티를 주제로 하는 남성 뷰티 크리에이터와의 비교를 해도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김기수한테만 어울리지, 남자 누구에게나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데일리 메이크업이나 피부 관리 위주도 아니라는 지적도 많다.] 그런데 이런 실력에도 불구하고 단지 '남성' 개그맨이라는 이유로 이 분야의 유명세를 얻고 있으며 전문가인 척 하고 있어서 비호감으로 전락했다. 또한 자신의 화장 방식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비꼬며 좋지 못한 리액션을 보인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 자신이 런칭한 썬 스틱 화장품 영상에선 [[https://youtu.be/Usd6i4iJAlk?t=1m42s|시연자의 피부에 바르는 '시늉'만 하는 장면을 보여줘]] '블루투스 선스틱'이라는 부정적인 반응도 나타났다. [* 이에 관련 제조업체는 '촬영 전 연출된 부분' 이라 해명했고 김기수는 '홈쇼핑 생방에서는 제가 직접 화장 위에 시연한다. 본의아니게 실망드려 죄송하다.'며 곧바로 사과 댓글을 썼지만 애초에 연예인의 이름을 걸고 광고할 때 소비자는 연예인을 신뢰하고 사기 때문에 조심했어야하는 부분.]
* 유튜브 미미채널과의 합방에서 밝히길, 어렸을 때 부터 코스메틱 덕후였으나, 주변의 오해들 때문에 밝히지 못했다고 한다. 댄서킴 할 때도 이미 집에 화장품이 많았으나 오해가 더 커지는 게 싫어서 밝히지 못하다가 한참뒤에야 뷰티 유튜브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q1Voh45qbH8|미미채널]][* 남자들도 미용에 관심을 가지고 남성용 비비크림까지 나오는 지금까지 남자가 화장품을 좋아한다던지 화장을 한다던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이 많은 편인데 지금보다 훨씬 이전인 댄서킴 활동 당시에는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진 않는다.]
* 롤 모델은 뷰티 유튜버 쟈니 시오스라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9173864|링크]] 메이크업 스타일이 남성스러운 섹시함을 잃지 않는 젠더리스 스타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장은 여성미를 추구하는 것이란 세간의 고정관념과는 다른 길을 추구하는 듯하다.
* 한 패션지와의 인터뷰에서 '화장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http://www.smlounge.co.kr/grazia/article/34212|관련기사]]
* 이와 관련해, '"화장만 젠더리스 추구…동성애 옳고 그름 규정 어려워"'라는 제목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지적이 있었다. '''어려워'''라는 단어가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제목만 봐서는 김기수가 [[호모포비아]]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 의도는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 판단할 사안이 아니란 의미일지라도 독자에 따라서는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라고 오독할 수 있는 모호한 문장인 것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3화 . . . . 6회 일치
* 임시면허 시험의 첫관문은 1500여명 응시에 합격자는 100명 밖에 나오지는 엄청난 경쟁률.
* 과거엔 사무소가 가까워서 자주 만나다가 인연이 생긴 듯한데, 그녀가 설명하면서 "기정사실"인 관계처럼 말하려고 할 때마다 아이자와가 커트한다.--죽이 척척 맞네--
* 그러나 스테인이 주창한 히어로 관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가혹. 어찌됐든 히어로 사회의 성립 이후 사건 처리가 놀랄 정도로 신속해진게 사실이다.
* 교사들은 관중석에서 보고 있는데 아이자와는 이러니 저러니해도 Ms.조커 옆에 있다.
* Ms.조크도 같은 지적을 하는데 이른바 "임시면허 시험의 관습"
* 현장에선 미도리야가 지휘관을 맡아 돌파구를 찾아나선다.
- 남명렬 . . . . 6회 일치
* 《[[쉬리 (영화)|쉬리]]》 (1999년) - 관호 역
* [[2009년]] [[KBS 2TV|KBS2]] TV문학관 《언니의 폐경》 - 순길 역
* [[2009년]] [[KBS 2TV|KBS2]] 월화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 김승헌 역
* 미술관 음악회 (2017년)
* 음악이 흐르는 박물관 (2014년)
* 대관령 국제음악제-Eh, Joe (2008년)
- 남성진 . . . . 6회 일치
== 가족 관계 ==
* 1995년 [[SBS]] 창사5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 [[국군서울지구병원]] [[군의관]] [[송계용]] 소령 역
* 2002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 역
* 2008년 [[KBS2]] 미니시리즈 《[[최강칠우]]》 ... 시강원 관리 조성두 역
* 2013년 [[tvN]] 미니시리즈 《[[환상거탑]]》 ... [[교도관]] 역
* 2019년 [[JTBC]] 금토드라마 《[[보좌관 -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 ... 안현민 역
- 노재헌 . . . . 6회 일치
|근무 = 육군제3사관학교 법무과
|본관 = [[교하 노씨|교하(交河)]]
*1990년 육군제3사관학교 예비역 소위([[석사장교]])
*1991년-1993년 국회의장실 국제담당비서관
*1993년-1994년 일본 도쿄대 국제관계론 객원연구원
==가족 관계==
- 니나(이노센트 투어) . . . . 6회 일치
두번째 시나리오 Asgardian Wars(아스가르드의 전쟁)편의 주인공. 관련 신화는 [[북유럽 신화]]다.
관련신화가 북유럽 신화인데, 이 북유럽 신화에 속한 카드 중에서 프레이&프레아 남매카드는 발키리가 쓸 때 가히 사기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적어도 프레이&프레아만 있어도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정령속성이 부족할 이유가 없으며 토르와 같이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카드도 존재하기 때문.
== 등장인물들과의 관계 ==
1. [[포리(이노센트 투어)|포리]] - 관계는 최악. 처음부터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함은 물론이고 게임 내에서도 서로 방해 마법을 쓸 때 미안한 기색이 없다.
1. [[아니에스(이노센트 투어)|아니에스]] - 관계는 최악. 상성 자체가 맞지 않는다. 아니에스는 엄청나게 순진해서 니나가 놀려먹어도 반응을 하지 않아 니나 입장에선 최악의 상대.
1. [[칼리(이노센트 투어)|칼리]] - 관계는 최악. 이쪽도 신이라 동급인데다가 신화까지 서로 다르다보니 경쟁심까지 있다. 이런 이유로 서로 깔보고 있다.
- 단기선교 . . . . 6회 일치
그래서 교회 등에서 모집하는 단기선교라는 활동은 명목상으로만 '선교'를 내걸고 있는 [[체험]] [[관광]] [[여행]]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기선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단기선교는 현실적으로 현지인에 대한 봉사 보다는 참가자를 위한 체험 활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단기선교는 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 없이 마치 관광여행처럼 프로그램 되어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참가자들의 자질이나 현지 활동은 현실적으로 관광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관광'이 아닌 '선교'를 목적으로 하며, 관광사업에는 아마추어인 교회 조직이 선교를 추진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현지 문화와의 마찰을 빚는 문제, 현지에서의 안전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 안전 사고를 겪거나, 심지어 테러에 휘말리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단기선교를 꾀하는 집단이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관광객이라면 피할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안전 보장에서 철저하지 못하고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위험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 대한민국 FA컵 . . . . 6회 일치
대한민국 FA컵은 [[대한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컵 대회]]이다. 프로, 아마추어 구분없이 KFA에 등록되어 있고 규정을 충족한 모든 팀이 겨루는 대회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모든 경기는 단판승부가 원칙이나 흥행을 유도한다는 이유로 대회진행방식이 끊임없이 바뀌고 있어 NTX위키에 일일이 적기가 어려울 정도.
= 명칭에 관하여 =
대한민국 FA컵의 전신은 1921년에 개최한 '전조선축구대회'와 해방 이후 1946년에 열린 '전국축구선수권대회'로 본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는 K리그가 시작된 1983년을 기점으로 관심이 시들해지고 또 출전 자격이 KFA가 자격을 심사한 뒤에 초청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의 FA컵과는 거리가 동떨어져 있었다.
= AFC 챔피언스 리그와의 관계 =
FA컵 우승팀은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할 자격을 갖는다. 이 때문에 모든 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FA컵은 상금규모와 대회 진행에 따른 보상이 너무나도 초라했던 관계로 초창기에는 리그컵 내지는 그보다 못한 대회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대회라는 인식이 없었다. 하지만 AFC에서 차기 ACL티켓을 부여하고부터는 K리그 클래식 다음가는 권위있는 대회로 탈바꿈했다.
= 관련항목 =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6회 일치
* 대학팀: 경북영남대, 경기용인대, 경기성균관대, 인천인천대, 충북건국대, 강원한라대, 강원상지대, 충남단국대, 서울연세대, 대전한남대, 서울고려대, 경기경희대(남)
* 대학팀: 충남단국대, 충북건국대, 경기성균관대, 경북영남대
|| 64 || 2016년 05월 11일 || [[서울 이랜드]] || : || 경기성균관대 || 2:2(1:3) ||
* 대학팀: 경기성균관대, 충남단국대
|| 75 || 2016년 06월 22일 || [[성남 FC]] || : || 경기성균관대 || 0:0 ||
= 관련항목 =
- 로버트 켈리 . . . . 6회 일치
2017년 초, [[반기문]] 사무총장의 귀국과 대통령 후보 논란에 대하여, "그는 구식 관료이며 그 점에서 나는 한국인들이 그를 선택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반기문을 변화를 가져올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매우 '대가 약한 사람'(milquetoast)", "올해는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한 '격동의 해'(big year)"라는 언급을 월스트리트 저널에 남겼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12/0200000000AKR20170112199600009.HTML (참조)]]
로버트 켈리 교수 개인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BBC 방송사고와 관련되어 SNS에서 퍼지게 된 사건이다.
위의 방송사고 사건과 연관된 것. 위의 상황 비디오를 BBC가 업로드 하면서 인터넷에서 유머 영상으로 널리 퍼지게 됐는데 --이렇게 박근혜 탄핵은 딱히 관심없던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다-- 영어권 언론매체나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려가는 로버트 켈리 교수의 아내를 보고 "겁먹은 유모(horrified nanny)"라고 표현하거나, "저 유모/베이비시터는 해고당하겠다."는 댓글을 달았던 것이다. [[http://www.latimes.com/nation/la-na-bbc-professor-video-asian-wife-nanny-stereotypes-20170310-story.html (참조)]]
"아시아인 여성=베이비 시터, 유모" 라는 인종적인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서, 언론사나 SNS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었다.
- 마재윤 . . . . 6회 일치
[[파일:Byununjong.jpg|섬네일|left|260px|[[조용호]]가 [[변은종]]이랑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관망하고 있는 마재윤]]
그 후에도 블리즈컨 2007에서 강민을 2:0으로 꺾고 우승하는 등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WWI2007, IEF2007 결승에서 김택용에게 각각 1:2, 0:2로 패하면서 천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WCG 2007에서는 한국대표선발전 3위로 본선에 진출하였으나 중국의 샤쥔춘에게 1:2로 역전패당했으며, 2007년 말부터는 천적 이성은의 등장으로 마재윤의 부진은 더욱 심화되었다.
마재윤은 집행유예 기간이던 2011년 6월부터 아프리카 개인방송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모습을 방송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e스포츠 관계자들과 게임단에서는 즉각 방송을 중지하라 했지만, 마재윤은 이에 신경쓰지않고 계속 방송을 진행하는 중이다. 승부조작으로 인해 영구제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방송을 진행하여, 많은 e스포츠 관계자들과 팬들로부터 질타와 비난을 받았다. 2012년 3월에는 시간당 돈을 받고 스타크래프트를 강의하겠다는 게시물을 작성하였다. 또한 자신에게 욕을 하거나 비난하는 사용자는 강제로 방송국에서 퇴출시키며, 금칙어까지 만들어 아예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였다. 2013년 2월 자신을 비방한 네티즌들을 다수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범죄자라는 타이틀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한 시청자 수의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로 모든 금칙어와 제한을 해제하고 스스로 조작을 컨셉으로 한 방송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마재윤과 최연성의 경기는 팬들에게서 "마괴록"이라 부르면서 관심이 집중됐다. 상대 전적은 비공식전을 포함해 11전 8승 3패인데, 비공식 경기를 제외한 공식 경기에서는 6전 6승 0패로 마재윤이 모두 승리하였다.
[[분류:198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승부조작에 관여한 스포츠인]][[분류:아프리카TV BJ]][[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분류:저그 선수]][[분류:CJ 엔투스의 선수]]
- 바키도/135화 . . . . 6회 일치
* 전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백악관에 입성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 그는 "오거"라는 이름을 전해듣지만 아는 바는 커녕 관심도 없다. 하지만 그와 불가침선언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는데.
* 트럼프는 그것을 "알랑거린다"는 표현까지 써가벼 거부감을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렇다 알랑거린다"고 직설적으로 답한다. 트럼프는 혹시 그가 엄청난 부자냐고 묻는데, 어떤 의미론 맞지만 그것과는 무관한 일이라 설명한다. 다시 트럼프는 그를 체포해버리자고 하는데 오바마는 한숨을 쉰다.
설사 FBI가 동원돼도 다를건 없고 관이 산더미처럼 쌓일 거라 경고한다.
* "그 개똥 같은 관례"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했냐는 트럼프. 시작은 80년대로 거슬러간다. 로널드 윌슨 레이건 대통령 시절 시작됐는데 그 말을 들은 트럼프는 "미국의 위대함이 사라진 타이밍"이라고 납득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격한 흥분 속에서 트럼프는 자신이 이 "개똥같은 관례"를 종결지을 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텔 최상층에 당도한 순간, "그"를 목격한 순간 확신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박두을 . . . . 6회 일치
|본관 = [[순천 박씨|순천]]
'''박두을'''(朴杜乙, [[1907년]] [[11월 8일]] ~ [[2000년]] [[1월 3일]])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배우자이다.<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04/06/201004060500007/201004060500007_2.html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신동아></ref> 본관은 [[순천 박씨|순천]].
박두을에 관한 공식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 남편 [[이병철]]의 일생이 자서전과 소설, 추모집 등을 통해 자세히 알려진 것과 대조적이다. 하긴 그 옛날 내조하는 아내의 전통적인 삶이란 게 이렇게 철저히 그림자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병철]]조차 286쪽에 달하는 자서전에서 박두을에 대한 언급을 단 몇 문장으로 줄였다.
고향에서 쉬면서 곧 건강을 회복했지만 이번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병철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들과 노름에 빠졌다. 노름은 늘 한밤중까지 계속되었고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오곤 하여 이 무렵 호암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날도 골패노름을 하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26세였던 [[이병철]]은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이 그동안 너무 허송세월을 했다는 자책이 컸다. '뜻을 세워야 한다. 독립운동도 좋고 관리가 되어도 좋고 사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을 빈곤에서 구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병철]]은 사업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결심하였고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 가족 관계 ==
**** 손자 : 이재관 (1963 ~ )
- 박은수 (1956년) . . . . 6회 일치
| 본관 = [[면천 박씨|면천]]
1980년 제22회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나 법관 임용 심사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하자, 사법부의 부당한 처사를 언론에 호소했고 마침내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들끓는 여론에 힘입어 1983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서 법조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대구와 마산지방법원에서의 판사생활을 거쳐 1988년 대구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판사 시절, 그가 하는 재판마다 아들을 데리고 오는 경찰관이 있었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는데, 경찰관 아버지는 재판관 자리에 앉은 박은수 판사를 가리키며 아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법조계는 물론 롤 모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1991년 대구 볼런티어센터 소장으로 취임<ref>[http://www.dgvolter.org/ 대구볼런티어넷 센터 소개]</ref> 하면서 장애인 전용버스 운행, 장애인 카풀 운동을 펼치는 등 장애인을 위한 본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993년 노인도 장애인도 탈 수 있는 지하철을 만들자는 대구시민단체협의회(노장지협) 사무총장이 되었다. 대구 종합자원봉사센터 소장, 달구벌종합스포츠센터 관장, 대구시 휠체어농구단 단장등을 역임하였다. {{출처|날짜=2010-4-15|2004년 한국장애인고용촉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장애인들에게 대기업 직원, 공무원 등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박화요비 . . . . 6회 일치
qkrghㅏ * 관련 문서: [[가수/한국]]
|| '''본관''' ||[[밀양 박씨]] ||
데뷔 초기의 맑은 음색을 필두로한 테크닉 중심적인 음악에서부터 점점 감성과 소울이 짙어졌다고 하는 5집까지의 가창은 그녀의 목 상태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리즈 시절로 보는 2~3집 활동 당시에도 1집 때와 창법과 음색이 바뀌었다고 성토하는 팬들도 많았다.] 성공적인 성대 수술 이후의 가창은 '가사중심적이고 감성중심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의향을 확실히 따라가고 있다. 6집에서의 음색은 오히려 5집의 그것보다 부드럽지만, 7집부터는 현재의 목소리로 노선을 전환, 현재는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인 가수가 되었다. 현재 팬들도 거의 모든 앨범을 명반으로 추천하고 있고, 간간히 내는 싱글이나 OST들 역시도 팬들의 호감이 굉장히 높은 편.
4집 활동 도중, 추후 화요비의 제 2의 전성기를 열어준 예능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녀가 두각을 나타난 예능 프로그램은 [[KBS 2TV]]의 [[상상플러스]]로, 그 전에는 음악 방송에만 출연해왔기 때문에 그녀의 발언과 화제성의 파급력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이휘재를 비롯한 출연진들을 빵 터지게 한 '케이블 TV는 한 것을 자꾸 틀어준다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비슷한 기믹을 이어 '비디오' 관련 소재를 SBS [[X맨을 찾아라]]에서 사용하여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디오 기믹의 유느님과의 콤비네이션이 유려하다!~~
이전의 예능 출연에 비해 더더욱 대중적인 알림과 이미지를 구축한 것은 2008년 한가위 특집부터 출연한 [[우리 결혼했어요]]. 지고지순(?)한 여성적인 매력이 부각되고 특유의 말투와 캐릭터성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로, 무뚝뚝한 남자인 [[환희(플라이 투 더 스카이)|환희]]와의 앙상블은 팬들 입장에서보면 거의 환상 그 자체였다. 환희의 다소 마초적인 모습까지 화요비에 대한 여성 시청자들의 관심도를 상승시켰다는 점에 있어서 이래저래 시너지 효과가 장난이 아니었던 셈. 이후 [[언터쳐블(가수)|언터쳐블]]의 [[슬리피]]와 연애 사실이 알려지며 '가상결혼'에 대한 진실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에 관해 화요비 본인은 그때의 음색과 스타일은 못 내는 것이 아니라 안 내는 것이라고 13년 4월 2일 공언을 했다. 앞으로 앨범 내에서 선보일 예정이라고.
- 백낙청 . . . . 6회 일치
|부모=부 백붕제(1910~?) 친일관료<br/> 모 최귀란(1911~?)}}
'''백낙청'''(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은 [[한국]]의 대학교수,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이다. 친일관료 백붕제의 아들로 [[대구]] 출신이다.
친가는 [[평안남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외가가 있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백붕제''']]는 친일관료로 6.25 때 납북되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유학을 떠나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
* 아버지 : [[백붕제]]([[1910년]] ~ ? ), 친일관료
*《[http://www.yes24.com/24/goods/5043455?scode=032&OzSrank=5 관악 초청 강연 백낙청 : 주체적 인문학을 위하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 벼랑개 링링 . . . . 6회 일치
11월 17일 발견된 이 개는 약 1주일 간 조난 상태에 있었다. 20일 TV중계가 되는 가운데 구출되었고, 22일 도쿠시마 현 동물애호관리센터에 맡겨졌다. 구출된 이 개를 많은 사람들이 기르고 싶다고 연락했다. 2007년 1월 28일, 동물애호관리센터는 센터에 찾아온 11명의 신청자에게 추첨을 거쳤으며, 66세 여성 마키 카즈코(馬木カズ子)가 인수하게 되었다. 마키 카즈코는 개에게 링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기르게 되었다.
2008년 5월 12일에 포획되어 또 다시 도쿠시마 현 동물애호관리센터에서 보호하게 된다.
마키 씨는 건강 문제로 양육을 포기하였으며, 도쿠시마 현 동물애호관리센터에서 길러지게 되었다.
* 11명의 신청자는 TV에서 보도된 벼랑개에게만 관심을 가졌고, 보호센터에 있는 다른 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보호센터에서는 다수의 개가 안락사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이 논란이 되었다.
- 보루토/3화 . . . . 6회 일치
*중급닌자 시험이 시작되고 사이가 시험관이 되어 재치와 끈기를 보는 시험을 진행한다.
* 사이가 시험관으로 나서 문제를 출제한다. "닌자 군사 기록첩"의 5권을 가지고 문제를 내는데, 그 책은 사라다 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책.
* 그런데 감독관들 사이에서 그런 보루토의 행동을 보고하는 녀석이 있다?
* 하지만 요즘 아들하고 관계가 잘 안 되는 나루토는 어색하게 대꾸한다.
* 이어지는 2회전 시험. 감독관은 텐텐이다.
* 하지만 이번에도 감독관 중 하나가 "이번엔 그걸 썼다"며 누군가에게 보고하고 있는데...
- 붐(연예인) . . . . 6회 일치
'''그리고 2013년, 저 세 명의 안양예고 동문들은 나란히 [[연예병사|군 관련 구설수에 휘말렸다]].''' 그나마 기반이 탄탄했던 [[비(연예인)|비]]는 복귀 후 여론이 나쁘지 않지만, 붐과 [[SE7EN|세븐]]의 경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했던 [[일본인]] 패널 준코와 사귄 적이 있다는 고백을 했다가 당사자인 준코가 미니홈피에 "당신이랑 사귄 적이 없는데요..." 라고 딱 잘라 말해서 완전 새가 되기도 했다.[* 일부에선 준코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단 둘이서 어디 놀러가고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붐은 그 정도면 사귄 거라고 생각한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덕분에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선 연신 '준코! 준코!' 를 외치며 놀려대는 [[김구라]]와 [[신정환]]에게 [[관광]]타고 착잡한 표정으로 ''''제가 경솔했습니다'''' 라는 말을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준코 사건은 이때 개그 소재로 쓰이며 오히려 이미지 세탁에 도움을 준 편.
참고로, 자기가 직접 이야기 하기전에 한 연예계 관련 기자가 냄새를 맡고 취재를 시작했으나 ''' 전진이 "다 지난 일이고 좋은 동생이니까 그냥 덮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서 기자 [[본인]]도 당사자가 저러니 취재할 수가 없었다고...[* 다만, 정황상 전진이 진짜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이후 논란이 일어나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저랬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로 [[문희준]] 뺨칠 정도로 붐의 안티가 대거 생성되었다.[* 근데 문희준과는 본질이 틀린 것이, [[본인]]의 경솔한 행동도 있지만 당시 "남들이 까니까 나도 깐다"는 식으로 이유없이 까이기도 했다. 또한 문희준은 붐처럼 명백한 범법 행위를 저지른 적도 없다. 게다가 문희준은 무엇보다도 [[군대]]에 갔다 온 이후로는 호감남이 되었다. --근데 문희준도 [[결혼]] 과정에서 까발려진 일부 것들 때문에 또다시 엄청난 [[안티]]가...--] 신화창조들 중에서도 [[코스프레]]하는 붐을 본 사람이 있던 것이다. 물론 전진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문제 자체야 없었지만, 정작 모르는 사람들은...
=== 연애 관련 언플 ===
2013년 11월에 [[이수근]], [[탁재훈]], [[토니 안]], [[앤디(신화)|앤디]], [[양세형]] 등에 이어 붐도 11일 불법도박 혐의로 소환 당했다. 가뜩이나 잦은 사건사고 및 군대 문제로 이미지가 원래부터 안 좋았던 마당에 맞대기 도박 혐의까지 밝혀지면서 그런지 넷상은 일제히 [[위 아 더 월드#s-2|위 아 더 월드]]. 현재 소속사 측에서는 결국 검찰 조사 받은 걸 인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에 상관없이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31111201004280?f=m|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한다는 뜻을 밝혔다]].
2015년 12월 20일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방영분에서 [[나를 따르라 김장군|복면가수]]의 정체를 추측하면서 [[김정민(1989)|김정민]]이 그에 대해 언급했는데, [[http://m.busan.com/m/News/view.jsp?newsId=20151220000107|사진, 영상 자료가 필터링 없이 멀쩡히 나온 것으로 보아]] [[출연금지 연예인|출연금지]]가 해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전에 같은 방송국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 505회분(2016.12.14.)에서 [[김재원]]이 군 시절 붐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했고, [[CG]]까지 나온 바 있다.]
- 사회 . . . . 6회 일치
그런데 [[애덤 스미스]]가 어쨰서인지(…) 서로간에 특정한 이해관계나 안면조차도 없는 일반인들의 광범위한 상호작용까지도 소사이어티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의미로 확장되었는데, 이러한 의미의 소사이어티는 사실상 본래 뜻과는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단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체 애덤 스미스는 왜 이상한 용도로 단어를 썻는지 모르겠다.
범죄적 관점에서 보면, '''[[악의 조직]]'''
사회라는 조직은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거의 모든 범죄에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온갖 흉악범죄에 연관이 되어 있으며, 살인,강도,마약거래 등 온갖 흉악범죄에 사회의 책임이 끼어있어 정말로 사회의 책임이 없는 범죄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라 빈곤,집단괴롭힘 등 온갖 문제와 도덕에도 사회가 깊이 관여되어 있어 사회의 책임은 매우 크다.
이렇듯 여러 관점에 따르면 정말로 악랄하기 짝이 없는 것이 사회지만, 사회라는 조직은 아직도 자신이 죄악에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 서거정 . . . . 6회 일치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은 [[조선 문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성종|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며,<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20_1_0005362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ref>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 세종|세종]], [[조선 문종|문종]], [[조선 단종|단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예종|예종]], [[조선 성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1456년]](세조 2)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함)이 되었으며 [[1466년]] 발영시에 또 장원, 이후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 등을 두루 거쳐서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郡)에 봉해졌다.
문학 이외에도 여러 방면에 통달하여 세조 때 《[[경국대전]]》, 성종 때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책]]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번역했다.
== 가족 관계 ==
- 서신애 . . . . 6회 일치
||<#E2A6B4> {{{#ffffff '''학력'''}}} ||<(>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재학) ||
와우중학교 졸업 후 [[김소현(1999)|김소현]]처럼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홈 스쿨링을 한 후 검정고시를 통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에 수시 합격을 했다.
|| [[2011년]] [[4월 28일]]~[[2011년]] [[5월 5일]]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 알라딘 || 라나 || 뮤지컬 ||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E2A6B4><#E2A6B4> '''{{{#white 역임 연도}}}''' ||<#E2A6B4> '''{{{#white 기업/기관}}}''' ||<#E2A6B4> '''{{{#white 직함}}}''' ||
* [[Apink|에이핑크]]와 인연이 있다. [[박초롱]]의 경우 2013년쯤에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봉사를 같이 다녀왔고, [[김남주(Apink)|김남주]][* 첨언하자면 [[김남주(Apink)|김남주]] 역시 아역배우 출신이다. 연예계에 있어서도 서신애의 3년 선배며, 2001년 [[LG전자]] CF로 데뷔했다.]의 경우는 [[성균관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재미있는 게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상대 역할로 나왔던 [[진지희]]는 [[걸스데이]]와 인연이 있다는 데 있다.[* (지금은 드림티가 탈예당했지만) 한때 같은 웰메이드예당 소속이었고, [[혜리]]의 경우 [[진지희]]와 함께 선암여고 탐정단에 출연했다.]
*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파격적인 노출 드레스를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636390|관련 기사]]^^
- 서울특별시장 . . . . 6회 일치
수도라는 특성과 국가의 최대도시로서 행정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서울특별시장은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장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1962년 1월 27일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1988년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이를 개정한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서울특별시는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 서울특별시장은 '장관급'으로 대우받는다. 다른 광역시 등은 '차관급'으로 대우를 받는다.
* 선출직 최고위 [[대통령]]과 장관급인 서울시장 사이에는 총리, 부총리 등 많은 지위가 있으나, 이는 임명직이기 때문에 '선출직'만 따지면 서울시장은 '대통령 바로 다음'에 오게 된다.
1962년 「서울특별시행정에관한특별조치법」에 따라서 서울시와 서울시장의 법적 대우가 향상되어, 종래의 내무부 소속에서 국무총리 직속이 되었다. 서울특별장은 별정직이 되었고, 국무회의 출석권을 얻게 된다.
- 세속주의 . . . . 6회 일치
[[정교분리]]를 통하여 [[종교]] 기관과 [[국가]] 정부 기관을 분리, 종교가 대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 모든 종교가 국가의 법 앞에서 평등해야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를 [[세속국가]]라고 한다.
세속주의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특정 종교의 규범이 국가기관을 통하여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반대한다. 세속주의는 국가기관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 단체와 관련되는 것을 비판한다.
세속주의는 [[무신론]]과 혼동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무신론과는 달리 세속주의는 개인적인 생각 보다는 정치와 사회 구조에 집중된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믿어도 상관없지만, 국가적으로 특정 종교를 지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손담비 . . . . 6회 일치
| 관련활동 = 에스블러쉬
2008년 2월 29일 게임 [[프리스톤테일2]]의 주제가 "Change the World"를 불렀다.<ref>[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136656 네이버 뮤직 - Change The World (프리스톤테일 2) O.S.T] 《[[네이버]]》</ref> 같은 해 4월 29일 손담비는 첫 미니 앨범 ''[[Mini Album Vol.1]]''을 발매하며 컴백 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 "Bad Boy"로, 전 에스블러쉬 멤버로 함께 활동했던 [[가희]]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이 때 손담비는 주로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활동했다. "Bad Boy"는 발표한지 2주만에 음원 사이트 1위를 차지했고,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할때마다 검색어 순위는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모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배드 보이', 29일 미니앨범 공개 후 '대박 조짐'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27079|출판사=조이뉴스24|저자=박재덕|날짜=2008년 4월 20일|확인날짜=2011-02-06}}</ref>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후에는 조회수가 20만 건이 넘었고, 무대에서 입고나온 코르셋 스타일의 파격적인 의상도 많은 관심을 받아 홈페이지가 폭주하기까지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코르셋패션 "열기"...홈페이지 또 "혼수상태" |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63|출판사= 깜뉴스|저자=신명희 기자|날짜=2008년 5월 25일|확인날짜=}}</ref>
5달 후인 2008년 9월 17일 두 번째 미니 앨범 ''[[Mini Album Vol.2]]''의 타이틀곡 〈미쳤어〉의 티저 영상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공개하였는데, 티저 영상은 공개후 각종 동영상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받으며 컴백을 알렸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미쳤어' 티저 영상에 팬들의 반응 뜨겁네~ |url=http://www.consumernews.co.kr/news/view.html?gid=main&bid=news&pid=111539|출판사=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연예|저자=스포츠연예팀|날짜=2008-09-19|확인날짜=}}</ref> 이어 18일에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타이틀곡인 〈미쳤어〉 열풍이 한국에 불었는데, 특히 처음 후렴구부분의 의자춤이 인기를 끌었다. 각종 연예인들은 의자춤 패러디를 했는데, 재일 먼저 배우 [[허이재]]가 패러디를 했고,<ref>{{뉴스 인용|제목= 허이재, 손담비 ‘미쳤어’ 의자춤 깜짝공개 눈길 확~|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10191843251001 |출판사= 뉴스엔 연예|저자=이현우|날짜=2008-10-20|확인날짜=}}</ref> 계속해서 김효진, 신봉선, 양정아, 현영, 노홍철 등이 예능에서 따라했으며, 《[[내 사랑 금지옥엽]]》의 유인영, 《[[수상한 삼형제]]》의 오지은 등 드라마에서도 패러디를 했다. 또한 일반인들도 UCC를 통해 많은 패러디 동영상을 올렸다. 너도나도 다 따라한탓에 급기야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미쳤어〉 금지령까지 내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 방송가, 손담비 '미쳤어' 이제 그만! |url=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80986|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박재덕 기자|날짜=2008년 12월 22일}}</ref> 2008년 11월 17일에는 [[마이티 마우스 (음악 그룹)|마이티 마우스]]의 싱글 〈[[Family (Special Edition)|패밀리]]〉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ref>{{뉴스 인용|제목=마이티마우스, 이번에는 손담비‥'패밀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2372273|출판사=네이버|저자=유상우|날짜=2008-11-11|확인날짜=2012-05-20}}</ref> 가수 활동 이외에 MBC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우리결혼했어요]]》에 [[마르코 (배우)|마르코]]와 함께 가상 부부로 나와 [[MBC 방송연예대상]] 특별상/베스트커플상 수상했다.<ref name="2008MBC"/> 또한 각종 CF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했는데, 1년만에 몸값이 3배가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몸값, 1년만에 3배 이상 높아져 '미쳤어' |url= 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0966034|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날짜=2008-11-12|확인날짜=}}</ref>
손담비는 2010년 5월 컴백을 앞두고 준비해왔지만, 같은 소속사 그룹인 [[애프터스쿨]]이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하여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활동이 미뤄졌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컴백 연기..애프터스쿨 때문?|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42809051209710|출판사=아시아 경제|저자=조범자 기자|날짜=2010-04-28|확인날짜=}}</ref> 한달 뒤인 2010년 6월 25일 손담비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컴백을 알렸다.<ref>{{뉴스 인용|제목='섹시디바' 손담비, 1년 3개월만의 컴백…움직임 포착!|url=http://autotimes.hankyung.com/article_view.php?id=81096|출판사=오토타임즈|저자=연예취재팀|날짜=2010-06-25|확인날짜=}}</ref> 7월 2일에는 음반의 수록곡 중 하나인 "Can't u see"를 공개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그림자댄스'로 서버다운까지? '히트예감'|url=http://ntn.seoul.co.kr/main.php?cmd=news/news_view&idx=39797|출판사=서울신문NTN|저자=오영경 인턴기자|날짜=2010-07-03|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ntn.seoul.co.kr/main.php?cmd=news%2Fnews_view&idx=39797 }}</ref> 음반 발매 하루 전 날에는 전곡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ref>{{뉴스 인용|제목=허무한 손담비, 컴백 하루전 음원유출|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100708004612&subctg1=10&subctg2=00|출판사=스포츠월드|저자=김용호 기자|날짜=2010-07-09|확인날짜=2010-12-06}}</ref> 그리고 2010년 7월 8일 ''The Queen''을 발매했다. 이후 《[[뮤직뱅크]]》를 시작으로 《[[음악중심]]》, 《[[인기가요]]》에서 "Can't u see"와 "queen"을 선보이며 컴백 무대를 펼쳤다. 한편, 7월 결산 차트에서 손담비는 "Can't U See"와 "queen"이 20위권에 들면서 7월 상위 20위권 차트에서 유일하게 2곡 이상을 진입시킨 가수가 됐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7월 음원 톱20 멀티히트 가수 '유일'|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80215133583882&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관명 기자|날짜=2010-08-02|확인날짜=}}</ref> 이렇게 초반에는 좋은 출발을 했지만, 얼마 안 되어 "queen"의 MR을 제거한 영상이 올라오면서 처음으로 가창력 논란이 일어났다.<ref name="아츠">{{뉴스 인용|제목='표절논란' 손담비 '퀸(Queen)' MR제거, 무엇이 문제일까?|url=http://www.artsnews.co.kr/news/89424|출판사=아츠뉴스|저자=박진영 기자|날짜=2010-07-12}}</ref> 또한 "queen"의 뮤직비디오 일부분이 미국 드라마 《엘리스》의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는 표절논란을 빚어 소속사는 논란이 된 장면들을 모두 삭제키로 결정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뮤비 표절 논란 일부 장면 삭제|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79|출판사=투데이코리아|저자=김민철 기자|날짜=2010-07-12}}{{깨진 링크|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279 }}</ref> 2010년 8월, 손담비는 타이틀곡 활동을 마무리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퀸’ 활동 끝 ‘잠시만 안녕’ 모두다 이뤄졌나?|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8201835291002|출판사=뉴스엔|저자=이언혁 기자|날짜=2010-08-20}}</ref> 이후 후속곡인 "[[dB Rider]]"로 9월부터 10월 초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크게 히트치지는 못했다.<ref>{{뉴스 인용|제목=‘라이더 변신’ 손담비, 파워풀한 섹시美 돋보인 후속곡 첫 무대 |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9171909341131&ext=na|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강선애 기자|날짜=2010-09-17|확인날짜=2010-10-12}}</ref>
- 식극의 소마/217화 . . . . 6회 일치
* 키 163cm, 쓰리 사이즈 B79 W56 H84, 좋아하는 것은 애플티와 테니스 관전, 싫어하는 것은 담배냄새와 거미다.
* 십걸 진영은 초상집 분위기에 가까운데 [[시라츠 쥬리오]]는 너무 심하게 압살 당한 탓인지 좀처럼 몸을 추스르지 못해 들것에 실려나간다. [[코바야시 린도]]는 큰 일이나 난 것처럼 "뒷 일은 나에게 맡겨라"고 소란을 피운다. 정작 쥬리오는 잇시키만 찾으며 "너무나 멋지다"는 말만 하고 듣질 않는다. [[츠카사 에이시]]는 누가 봐도 맛이간 시라츠의 상태를 보고도 "그래도 행복해 보인다"는 핀트가 빗나간 평을 남긴다. 옆의 [[사이토 소메이]]는 "잇시키의 강렬함이 작렬"한 대결이었다 총평한다. 특히 그의 "후배들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에 감동한 듯 하다. [[에이잔 에츠야]]가 "그런게 아니라 대세에 거스르는 자신에 취한 것"이라 혹평하는데 사이토는 딱히 반박하진 않지만 "자신의 방식을 관철한다는 강한 각오"를 느꼈다고 덧붙인다. 같은 2학년이 3학년 사이토에게 이정도까지 평가를 받자 에이잔은 물론 그에게 패한 [[키노쿠니 네네]]도 할 말이 없어진다.
* 어쨌든 1라운드는 반역자팀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타도코로 메구미]]는 이대로 1승을 더 추가할 가능성도 타진한다. 소마도 거기에 호응해 그렇게만 된다면 꽤 큰 차이를 내는 거라고 하는데, 이 좋은 분위기에 불청객이 끼어든다. MC인 [[카와시마 우라라]]다. MC 주제에 마이크까지 내던져 놓고 호쾌한 뻐큐부터 들이민다. 그녀는 반역자팀의 전승 가능성을 "그렇겐 안 된다"고 일축한다. 그리고 연대식극은 각 대결 대결에서 한두판 앞서 가도 최종승리하고는 상관없다며 정신승리를 시전한다. 센트럴에 넘어간 관중들이야 이 드립에 크게 호응하지만 반역자팀의 분위기를 죽이진 못했다. 쿠가가 태연하게 "그러다 얼굴에 주름 생긴다"고 극딜을 넣자 이성을 놓고 Fuck을 연발, 역으로 도발 당한다.
그와 동시에 관중석이 술렁거린다. 카와시마가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는데.
>좋아하는 것 : 애플티와 테니스 관전
- 식극의 소마/232화 . . . . 6회 일치
* 시합이 한창인 동안, 대회장 바깥의 "츠키레분"이란 여관에선 전 토오츠키 학장 [[나키리 센자에몬]]이 숯을 떼며 생각에 잠겨 있다. 놀랍게도 [[나키리 아자미]]가 대회장을 비우고 여기에 방문. 센자에몬에게 관전하러 가지 않냐고 떠본다. 센자에몬은 이미 자기가 할 일은 다 마쳤고 그들을 "신뢰"하고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하는데, 아자미는 신뢰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시합이 이루어지는 동안 일절 관여도 관전도 하지 않고 있다. 근처 여관에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자미가 방문한다. 아자미가 떠보는 말에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그들을 신뢰하고 있어서 관전할 필요도 없다"고 대답하는데 아자미가 그걸 비웃으며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반역자들의 주축인 토오츠키 92기생들이 사실 센자에몬이 직접 모은 "옥의 세대"라는 것을.
- 신동일 (언어학자) . . . . 6회 일치
호주 ISLPR (International Scale of Language Proficiency Rating, Griffith University, Australia), 영국 ELT and Assessment International Seminar (British Council, UK), Cambridge ESOL YLE (Young Learners of English) Examiner, 미국 ACTFL (American Council of Teachers of Foreign Languages, University of Pennsyvania, USA) 기관 등에서 영어평가 전문가 및 채점자/면접관 훈련 과정을 200시간 이상 이수했다.
숙명여자대학교의 MATE(Multimedia Assisted Test of English), [[YBM-Sisa]]의 [[SEPT]](Spoken Engish Proficiency Test), 크레듀가 참여한 [[OPIc]] (Oral Proficiency Interview computer), 교통부의 Pilot & Air Traffic Controller 대상 영어말하기능력인증평가, 교육부의 국가영어인증시험 등과 같은 학교, 기업, 국가 단위의 다양한 언어시험 개발/시행, 말하기/쓰기교육 콘텐츠개발에 관한 (책임)연구에 참여했다. 2000-2007년에 한국영어평가학회 총무로 일했고, 2007-2009년 동안은 비영리교육단체인 ACTFL((American Councils on the Teaching of Foreign Languages) 한국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교육과 연구분야는 영어평가(시험개발과 시행), 언어(평가)정책, 언어권리, 언어생태계, 언어정체성, 말하기교육과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적정교육, 사회적기업, 기독세계관 등이다. 해당 분야로 80여편의 논문을 학술등재지에 게재했으며 10여권의 단행본과 번역본 중 몇 권은 문화관광부나 대한민국학술원의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 〈시험의 권력: 언어시험 사용에 대한 비평적 관점〉(공역) ([[2010년]])
- 심판 토토하지 말라고 . . . . 6회 일치
2015 K리그 클래식 12라운드 성남 vs 광주의 경기[* 경기번호는 클래식 2015-99]에서 어이없는 심판의 판정 번복이 일어나면서 나오게 되었다. 그때 관중석에서 일갈이 나오는 것이 방송을 타버렸으니, 바로 이 '''"심판 토토하지 말라고"'''. 이 발언은 당시 공중파 방송인 KBS1에서 중계한 경기중에 여과없이 나온 발언이었기에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고, 해당 경기와 관련이 있던 성남과 광주의 팬들 뿐만 아니라 심판의 오심에 관련하여 데인 기억이 많은 K리그 전체 팬들에게 호응을 얻어냈다.
1. 심판의 판정에 있어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만족스럽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 판정 번복 자체가 이 일관성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득을 본 팀에게는 찝찝함을 주고, 손해를 본 팀에게는 억울함을 주기 때문에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하다 평할 수 있다.
* 프로 스포츠 관계자는 [[스포츠 토토]]가 금지되어 있다.
- 어쌔신 크리드 III/부가요소 . . . . 6회 일치
업그레이드는 항만관리소장(Harbormaster)이나 로버트 폴크너 옆 책에서 할 수 있다.
* 관통탄(Piercing Round)
맵 곳곳에 템플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는 요새가 있다. 이 요새에 침입해 탄약고를 파괴하고, 요새 지휘관을 살해한 후 영국 국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계양하면 요새를 해방 시킬 수 있다.
== 암살단 관리 ==
* 레벨 3: 부사관(Sergeant)
* 레벨 4: 사관 후보생(Officer Cadet)
- 오석락 . . . . 6회 일치
'''오석락'''(吳錫洛, 1934년 ~ 2014년 3월 25일)은 제20대 [[청주지방법원|청주지방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전 대법원 판사와 동서지간이며, 전 법무장관의 매제다.<ref>[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0962 법률신문 2014년 4월 3일자]</ref>
1934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난 오석락은 [[김천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김덕주]] 전 대법원장, [[최재호 (법조인)|최재호]] 대법관, [[이재성 (법조인)|이재성]] 대법관, [[김진우 (법조인)|김진우]] 헌법재판관, [[김태경 (법조인)|김태경]] 경기도지사, 김동환 변호사 등과 함께 30명을 선발한 1956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에 임용되었다.
[[고등고시]] 동기인 김동환 변호사에 의하면 오석락은 "내성적이지만 주관이 뚜렷하다"고 밝히면서 "법원장 재직할 때 지역 기관장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 윤덕주 (농구인) . . . . 6회 일치
'''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이자, 대한체육협회 부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구한말의 계몽 운동가 [[윤필오]]의 손녀이자,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윤홍열]]의 딸이다. 4,5대 국회의원과 재무부 차관, [[호남정유]]사장을 지낸 [[서정귀]]의 부인이다.
* [[1998년]] [[10월 13일]] 건강을 이유로 [[대한체육회]] 부회장직에서 사퇴<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340757 김운용 KOC위원장, 스위스장관 만나 환담]</ref>
* [[2005년]] [[5월 18일]] 2005 FIBA 여자농구 월드리그 행사 주관<ref>[http://www.jumpball.co.kr/cont/cont_view.php?cont_cd=03&cont_seq=1661 <nowiki>[</nowiki>월드리그<nowiki>]</nowiki> 한· 일전 이모저모]</ref>
== 가족 관계 ==
* 남편 : [[서정귀]](徐廷貴, [[1919년]] ~ [[1974년]]), 4대·5대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1960년), [[호남정유사]] 사장 역임
== 관련 항목 ==
- 윤진식(국회의원) . . . . 6회 일치
[[대한민국]]의 관료, [[정치인]]이다. 1946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 에서 태어났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재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는 [[관세청]]장,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장관 역임 당시에는 대북송금 특검을 반대할 정도로 꽤 진보적이었다. 기회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후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 국가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 부위원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투자유치TF팀 팀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노선을 변경하였다. --[[우디르|윤진식급 태세전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이시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래도 이때 일방적으로 패할 것이란 여론조사 예측을 깨고 이시종과 2% 차의 격전을 벌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대통령실(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대통령실 정책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여담으로 이시종은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에서 충주시장을 맡았으나, 2003년 돌연 시장직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며, 2004년 [[열린우리당]]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 은혼/613화 . . . . 6회 일치
* 그의 별에는 "치당네쿠스코", 줄여서 "칭코"라는 기관의 크기가 남성의 가치가 되는 사회. 그에겐 유능하지만 칭코가 작은 형이 있었다.
* 그렇다. 오우고쿠 행성은 수컷의 상징인 이마의 외설물... 아니 "치당네쿠스코"란 기관, 줄여서 "칭코"의 크기야 말로 남자의 가치이자 인격의 척도로 통했던 것이다. 다른게 다 별로여도 칭코만 크면 굉장한 사람이고 하다못해 택시라도 칭코가 큰 쪽이 잘 잡는다. 단도 작은 편이지만 황태자인 바루카스야 말로 정말 눈물나게 작은 칭코의 소유자였다. 이 점이 후계자로서 치명적인 단점이다.
* 그의 발언을 듣고 하타 황태자와 그 부하들은 물론 무전으로 상황을 전해듣던 자작 제독과 사카모토 다츠마 일행까지 경악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오우고쿠 행성과 지구의 동맹. 하지만 사카모토 조차 이런 상황에서 가능할리 없다고 여긴다. 그 멍청한 하타 황태자도 고작 지구인들을 위해 전우주를 상대로 싸우란 소리냐고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가츠라는 단지 동맹이 되라는 거지 싸우란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노리는건 해방군이 "설마 지구에도 동맹이 있었다니"하고 동요하는 것. 일시적으로 해방군의 이목을 끌고 나면 그대로 달아나든 말든 상관없다. 일시적으로 생긴 틈으로 해방군 본부를 단숨에 점령, 전쟁을 멈춘다는게 카츠라의 구상이다.
>가츠라 : 너무 늦은거 아닌가 입관국장"
하세가와 타이조는 사실 등장부터 하타 황태자랑 엮여서 피곤한 상황이었고 결국 하타 황태자의 민폐를 철권제재한 대가로 관직에서 짤려 마다오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로는 딱히 둘이 엮인 적은 없지만 일단 원한관계는 아직도 살아있는 듯. 결과적으론 하세가와가 또 하타 황태자에게 한 방 먹인 셈이 됐다.
- 의상 (신라) . . . . 6회 일치
기(入法界品鈔記)》<br />《화엄십문간법관(華嚴十門看法觀)》<br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br />《제반청문(諸般請文)》<br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br />《화엄일승발원문(華巖一乘發願文)》<br />《투사례(投師禮)》외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 [[낙산사]])에서 백일을 기도하고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의상"/>
== 인간 관계 ==
* 의상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당나라]]는 [[삼국 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여제(麗濟) 양국을 공취한 것에 노하여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을 잡아 가두었다.<ref name="글로벌-의상"/>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김흠순]] 등에게 들은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明朗)이 [[문두루법회|밀단법]](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ref name="글로벌-의상"/>
의상은 많은 [[사찰]]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영주시|영주]]의 [[부석사 (영주시)|부석사]]가 유명하다. 토에 정통한 승려로서 [[신라]]와 [[고려]]에서는 국사로 추존되었으며<ref>일부 고려의 왕족과 귀족 중에는 고려는 도선의 풍수지리설 덕택에 건국, 후삼국을 재통일했다는 사고관이 있었다.</ref>, 민간 신앙에서도 무속의 신 중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의 일부 무당들로부터 숭배되었다.
== 관련 항목 ==
- 이광수(배우) . . . . 6회 일치
||<#ACF3FF> '''{{{#000000 본관}}}''' ||<#ffffff><(> [[광주 이씨]] ||
상대를 괴롭히는 쪽이든, 본인이 괴롭힘을 당하는 쪽이든 예능인으로써 이런 쪽으로 망가지는 것에 거부감 없이 매우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라 런닝맨을 보면 유재석이 이광수를 매우 아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특히나 2018년 쇠퇴기에 이른 무한도전은 여러모로 원초적인 웃음에 대한 슬럼프가 온 와중에 또 다른 주력 방송인 런닝맨에서는 이런 인재가 있으니 더욱 좋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 괴롭힌다-- 런닝맨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방송 전체적인 흐름을 장악하고 있다. 대부분의 웃음이 다 이광수를 통해서 나오고 멤버들도 대부분 다 이광수를 공격하면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게스트들까지도...특히나 비슷한 캐릭터인 전소민이 투입된 이후로는 '광돌남매' 관계가 구축되며 서로간 시너지가 창출됐다.
심지어 싱가포르에서 런닝맨 팬미팅이 아닌 이광수 개인 팬미팅도 했었다.관객수는 대략 2000명정도였다고 한다.개인 팬미팅까지 열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황광희|광희]]는 친밀한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한도전 들어가기 전부터 [[런닝맨]]에 몇 번 출연했고 인기가요에서 MC로서 진행을 맞춘 적이 있다. 또한 양세형은 동생인 양세찬이 런닝맨에 합류하고 난 뒤에 양세형과 인스타그램이 팔로잉되어 있다. 둘다 동갑이기도 하고.. 물론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 에너지관리공단 포스트박스
* [[티아라 화영 트위터 사건]]이 터지자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단지 코어콘텐츠미디어 --사장--실권자 김광수[* 김광수의 공식 직함은 사장이 아닌 제작이사다.]와 '''[[이름]][[동명이인|이 같다는 이유로]]''' 욕을 들어 먹었다. 이름 같은 게 무슨 죄인지. 그리고 [[4월 13일]] 런닝맨 방영분에선 진짜 김광수로 불렸다. 게다가 [[이광수(소설가)|어느 극성 친일파 소설가]]와는 [[빼도 박도 못한다|빼도 박도 못하는]] [[동명이인]].[* 다만 그 동명이인의 친일파 소설가는 [[전주 이씨]]고 이 쪽은 '''성주 이씨'''다.]
- 이기택 . . . . 6회 일치
||<#6e7edd> '''본관''' ||<#c5cae8>영천 이씨 ||
1980년 [[5.17 내란]]으로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가 1984년 해금되면서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동래구 지역구에는 이미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한 자신의 비서 출신 [[박관용]]이 있었다. 이에 지역구를 [[해운대구]]-[[남구(부산)|남구]]로 옮기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해운대구로 출마할까 말까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못 이기는 척(?) 전국구 상위순번을 배정받아 당선되었다. 반면에 [[노무현]]과 [[김정길(1945)|김정길]]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부산에 출마해서 [[지역감정]]의 역풍 속에서도 처절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패배하면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때부터 부산에서 노무현은 4번, 김정길은 총 7번을 떨어졌으나, 김정길은 장관이 되었고 노무현은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초재선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지역감정과 맞서면서 죽을둥 살둥 싸우는데, 정작 격전지에 출마해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할 당대표는 유유자적 전국구 상위 순번으로 편하게 금뱃지를 달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즉 지역구 당선가능성을 보고 간을 보다가 지역감정으로 안 될 거 같으니 전국구로 도망간 거 아니냐는 비아냥이다. 실제 당대표이자 영남권에서 가장 정치경력도 길고 지명도가 높은 이기택이 지역구 출마를 주저하면서 민주당의 영남권 선거전략이 제대로 꼬인 건 사실이다. 결국 노무현, 김정길과 몇몇 정치지망생들이 각개전투에 나서는 모양새가 되면서 모조리 낙선하였다. ~~뭘하던 당시 부산에서 김영삼을 넘기는 힘들었겠지만...~~]
이미 1970년대부터 태도결정에 너무 신중해 답답하다는 얘기가 돌았다. 만약 1990년 [[3당합당]] 때 차라리 김영삼을 따라갔다면, 김영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노무현처럼 야권잔류 결단을 빨리 내리고 김영삼과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면, 최소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낙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지역감정]]에 맞서서 부산 해운대 지역구에 출마했다면,[* 뒤늦게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로 돌아왔지만 아무 실익이 없는 때늦은 결정이었다.] 노무현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돌아올 수도 있었다. 또 1994년 한반도 전쟁위기때 대북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빨리 분명한 입장을 취하였다면, 김대중의 컴백을 막고 1997년에 대권을 잡으며 그의 염원대로 3김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가족관계 ==
자형 이임용이 [[태광그룹]] 회장이었다. 아내 이경의 여사는 [[이화여대]] 메이퀸으로서 미모가 대단하였는데,[* 늙어서도 미모가 죽지 않았다. [[http://news.joins.com/article/19624318|사진 참조]]] 1960년대 총각 국회의원 시절에 보좌관들이 이대 교문 앞에서 이경의를 '''보쌈해다가''' 이기택과 소개팅을 시켜서 결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 이문식(배우) . . . . 6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본관''' ||[[전주 이씨]][* 이씨 집안의 11대 종손이다.] ||
[[대한민국]]의 [[배우]]. 본디 [[대학로(서울)|대학로]]에서 활동하던 연극 배우였다. 대학 졸업 후 극단 '한양 레퍼토리'를 통해 전문 연극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유해진]]과 같이 대한민국 조연배우의 양대산맥이며 주로 조연 위주로 활약을 하는 배우이다. 영화계 대표적 [[단신]]배우로 찌질하거나 소심한 개그캐릭터에서 악랄한 악당역할도 잘 소화하다보니 그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작품들은 전부다 성공하는데[* 다만 유해진처럼 메가히트하거나 화제가 된 작품은 없다. 유해진보다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이유.] 그것 때문에 주연을 시켜보면 어떨까 해서 주연을 시켜봤다. 그게 '''[[플라이, 대디, 플라이#s-3|플라이 대디]]'''와 [[형사 공필두]]라는 영화였는데 결과는 흥행 대실패.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이문식은 조연으로서나 어울리지 주연은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같은 케이스로는 대표적으로 [[김수로]]가 있다. 또한 이문식의 경우 [[SNL 코리아]] 시즌 4 2화에서 이문식이 호스트로 나왔는데 이와 관련한 자학개그가 나왔다.]
사실 그는 '''굉장히 독한 양반이다.''' 일단 고등학교 때 진학하려고 작정했던 학교부터 대학교 중에서는 독하기로 소문난[* [[서경석]]이 수석합격을 해놓고도 견디지 못하고 자퇴한 또는 애초에 마음에 안들지만 안전빵으로 지원해뒀던 그 학교다.] [[육군사관학교]]였고[* 물론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합격은 못했지만.] [[한국항공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다가 1년을 못채우고 중퇴,
* 배우들 사이에서 원조 고무줄 체중조절자로 유명할 만큼 배역을 위한 몸관리가 철저하다. 고무줄 체중으로 유명한 황정민도 이문식에게 체중감량에 대한 조언을 얻어갈 정도고, 조진웅 역시 이문식 선배님에 비하면 내가 체중조절하는 건 장난수준이라고 할 정도. 그만큼 평상시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 이보희(배우) . . . . 6회 일치
|| 가족관계 |내연남[[승리]]|[br]아들 함원준[br] ||
|| [[원미경]] || [[이미숙]] || [[이보희]][* 최근에는 [[정애리(배우)|정애리]] 대신 [[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를 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다.] ||
== 필모그래피[* 당시에는 하나의 서울 영화관 관객수만 기록하였으므로 표의 기록수의 10배 정도로 보면 현재의 관객수랑 얼추 비슷해진다고 한다.] ==
||<table bordercolor=#9D0416><#9D0416>'''{{{#white 연도}}}'''||<#9D0416>'''{{{#white 제목}}}'''||<#9D0416>'''{{{#white 배역}}}'''||<#9D0416>'''{{{#white 관객 수}}}'''||<#9D0416>'''{{{#white 비고}}}'''||
- 이원재(공무원) . . . . 6회 일치
|| '''약력''' ||<(>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실 국토교통비서관[br]국토교통부 건설정책국장[br]주중국대사관 공사참사관 [br]국토해양부 주택정책관[br]국토해양부 토지정책관 ||
- 이장희 (시인) . . . . 6회 일치
'''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 [[1929년]] [[11월 3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문학|시인]], [[번역]][[작가|문학가]]이다.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仁川)이고 호는 고월(古月)이다.
[[1900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이병학 (1866년)|이병학]]의 11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 (1866년)|이병학]]이며, 어머니는 박금련이다. 다섯 살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 밑에서 크며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외에 측실도 1명을 거느렸다. 이장희 자결 당시 형제는 모두 10남 8녀로 매우 복잡한 가계였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아들 이장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이장희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이장희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3일]]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ref>장백일, 〈고월 이장희시 연구〉, 《국어국문학》84권, 국어국문학회, 1980, 79~82쪽</ref>
== 가족 관계 ==
== 인간 관계 ==
시인 생존시에 이루어진 평으로는 [[박종화]]와 [[이상화 (시인)|이상화]]의 것이 있다. 박종화는 《조선문단》 1925년 10월호 〈9월의 시단〉에서 《여명》에 실린 이장희의 시〈청천의 유방〉과 〈비오는 날〉을 평가하면서 〈청천의 유방〉은 "기괴를 쓰랴는 마음, 상징을 위한 상징시라는 것을 나는 말할 뿐이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하고 말했으며, 〈비오는 날〉은 "작자에 착각적 정서로부터 나온 작품이다. 다만 한 때에 마취된 감흥의 씌운 붓장난이라 할 것이다."하고 혹평했다.<ref>이기철, 〈이장희 연구(1)〉, 《인문연구》6권,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84, 179쪽</ref> 반면, 이장희와 동향 친구였던 이상화는 같은 해, 《개벽》 6월호에서 이장희의 시 〈고양의의 꿈〉과 〈겨울밤〉을 이채 있는 시라고 하면서, 이상화를 정관(靜觀)시인이라고 고평하였다. 다만 생명에서 발현된 열광이 없음을 덧붙였다.<ref>{{서적 인용
-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 . . . . 6회 일치
사건이 시작된 것은 2001년 6월 8일 오전 10시, 오사카 교육대학부속 이케다 초등학교는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들어가기 직전의 시간이었다. 학교 앞에서 타쿠마 마모루는 자동차 전용 게이트로 침입하여, 체육관 앞을 지나갔다. 이 때 아이들과 화단으로 가던 교사 1명과 엇갈려 지나갔지만, 교사는 [[학부모]]라고 생각하여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 인사를 했다.
>[사무실] 현관 홀 [1-남][1-서][1-동][2-남][2-서][2-동] 계단
>체육관 중앙뜰
9월 14일에 살인죄, 살인미수죄 등으로 오사카 지방 법원에 기소되었으며, 12월 27일에는 첫 공판이 시작되었다. 타쿠마는 재판에서도 기행을 반복했는데, 검찰이 기소를 읽어주고 시작했을 때 "여어, 앉으면 안됩니까"라고 말하여 재판관은 엄격하게 서서 들으라고 말하면, 노려보기도 했다. 첫 공판에서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했으나, 나중에 왜 그런 말을 했냐고 추궁당하자 "신문기사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라서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사형수는 대부분의 경우 구치소에서 [[다비]]를 하고 유골이 전달되지만, 타쿠마의 시신은 유족의 희망에 따라서 시신 상태로 넘겨졌다. 교도관은 시신과 대면한 아내에게 "고맙다.고 내가 말했다고 전해주세요."라는 유언을 아내에게 남겼다고 전했다. 마지막까지 피해자 유족에게 사죄를 하지 않았다.
이케다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의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교내에 수상한 사람이 침입하여 난동을 벌이는 것을 가장한 훈련을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이케다 초등학교에서는 추모비가 세워지고 「기도와 맹세의 모임(祈りと誓いの集い)」이 발족하여, 매년 6월 8일 유족을 중심으로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정부는 학교의 안전관리가 미흡했음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총 4억엔을 배상했다.
- 이한응 (1849년) . . . . 6회 일치
이한응(李漢應, [[1849년]] [[2월 24일]] ~ [[1905년]] [[4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무신, 군인이다. 자는 공모(公模),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다른 이름은 이한경(李漢景)이다. 비슷한 시기에 [[과거 제도|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그 해에 사망한 동명이인 이한응(李漢應), 외교관 [[이한응]](李漢應) 등의 동명이인이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다.
[[1870년]](고종 7년) 봄 무과(武科)에 급제,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특별히 가설 내승(內乘)에 임명되었다.<ref name="dager1">고종실록 7권, 1870년(고종 7년, 개국 479년) 5월 20일 을유 1번째기사, 조선 개국(開國) 479년 문희묘, 의소묘,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에 전배하다</ref> [[김병학]]은 '(故) 충장공(忠壯公) 이복남(李福男)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절개와 의리에 대해서는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종전에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선전관(宣傳官)과 내승(內乘) 중에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한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다'며 그에게도 선전관이나 내승을 가설하여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ref name="dager1"/>
[[1873년]] [[8월 8일]] 훈련주부, 그해 [[10월 10일]] 훈련판관, [[1874년]] [[7월 12일]] 도총경력, [[1875년]] [[1월 21일]] 도총경력, 그해 [[12월 22일]] 무겸 등을 역임했다.
[[1879년]](고종 16년) [[6월 23일]] 부사정을 지냈다.<ref>승정원일기 고종 16년 기묘(1879) 6월 23일(을축)자 11번째기사, "병비의 관원 현황"</ref> [[1905년]](광무 8년) [[4월 23일]]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이류면]] 가장리 장현(長峴) 고개 자좌(子坐)에 있다.
- 이효상 . . . . 6회 일치
'''이효상'''(李孝祥, [[1906년]] [[1월 14일]] [[경상북도|경북]] [[대구광역시|대구]] - [[1989년]] [[6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교육자, 철학자, 시인이다. 제5~7대, 제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12월부터 1971년 6월까지는 7년 6개월 간 [[국회의장]](6대~7대)을 역임했다. 이는 역대 국회의장 중 최장 재임기간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고 세례명은 아길로이다. 본관은 [[성산 이씨|성산]]이며 아호는 한솔이다.
일본에 유학, 1930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6년]] 《가톨릭청년》지에 <기적>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등단한 후 많은 작품, 특히 문학과 관련된 연구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 [[박관수 (1897년)|박관수]]
* [[홍관희]]
== 가족 관계 ==
- 임페라토르 . . . . 6회 일치
로마 공화정에서 '군사령관'을 뜻하던 단어,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뜻하는 칭호가 되었다.
본래 '군사령관'을 뜻하는 이 단어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성립시키면서, 군단편성권 등의 군권을 '독점'함으로서 황제가 유일한 '임페라토르'가 됨에 따라 황제권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 기원에 따라서 군사적 의미가 강하여 제국 시기에는 주로 군인이 황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대개 1개 군단 이상의 지휘관이 휘하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다수의 군단을 거느리는 인물들이 나타나면서, [[폼페이우스]]나 [[안토니우스]] 같은 거대 군벌도 일상적으로 이 칭호를 쓰게 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성립하면서 군단편성권과 같은 군권을 자신에게 독점시켜 황제는 유일한 '임페라토르'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구멍이 있었는데, 내전기의 로마 전통에 따라서 병사들은 자신의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군단 병사들의 지지를 얻은 지휘관은 언제든지 '임페라토르'로 승격될 수 있었다.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얻게 된 사령관은 사실상 '잠정 황제'가 되는 것이며, 여기에 [[원로원]]의 동의를 얻으면 진짜 황제가 될 수 있다. 평시에 황제(현임 임페라토르)의 권위가 높다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지만, 황제의 권위가 떨어지는 정치적 혼란기에는 언제든지 제국 각지에서 임페라토르가 난립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내전과 군인 황제들의 지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임효성 . . . . 6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농구 관련 인물(한국))]
|| 출신학교 || [[충주고등학교]] - [[성균관대학교]] ||
|| 가족관계 || 아내 [[유진(배우)]], 아들 임유, 딸 임로희, 임로린 ||
[[충주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2004년]] [[서울 SK 나이츠]]에 입단하여 프로에 데뷔했다. 전체 3번이라는 드래프트 순번에서 알 수 있듯이 데뷔 당시에는 제법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데뷔 후 SK에서 ~~벤치워머로~~ 한 시즌을 뛰고, 2번째 시즌 도중 [[문경은]]의 맞트레이드 상대로 지목되어 [[김일두]]와 함께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되었다. 이적 후 2번째 경기에서 23득점을 몰아치는 등 기대를 모았으나 그 이후 활약은 미비했다.
상무에서 활동하던 2008년, 지인의 소개로 유진를 만나게 된 후 가을부터 관계가 급격히 진전되었다고 하며, 실제로 임효성은 [[S.E.S]]의 팬이었다고 한다. ~~이러니 관계가 안 좋을래야 안 좋아질 수가 없지....~~ 실제로 슈가 상무 경기가 있을 때 [[슈|유수영]]과 함께 임효성을 응원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 장가용 . . . . 6회 일치
| 근무 = [[군의관]]
'''장가용'''(張家鏞, [[1935년]] [[9월 20일]] ~ [[2008년]] [[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외과]] [[의사]], [[의학자]], [[교수|대학 교수]], [[종교|종교인]], [[인도주의|인도주의자]]이자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며 [[본관]]은 [[안동 장씨|안동]](安東)이다.
[[외과|외과 의사]] [[장기려]](張起呂) [[의학박사]]의 둘째아들로 [[일제 강점기]] [[경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안북도]] [[룡천군|용천]]에서 성장하였다. [[한국 전쟁]] 때 아버지 [[장기려]]를 따라 남하하였고 그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의관|군의무관]] [[소령]]으로 예편하였고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학장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는 부인 윤순자 여사와의 사이에 슬하 1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장여구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의관]] [[대위]]도 조부 [[장기려]]와 부친 장가용의 뒤를 이어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2008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안동 장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인도주의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제주대학교 교수]][[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장강명 . . . . 6회 일치
1975년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와 잡지사 기자이자 문학가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94년 PC 통신 하이텔에 SF 소설을 연재하고, 군 복무 중에는 장편소설을 투고하는 등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을 보였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였으나 전업 소설가가 되겠다는 일념을 갖고 퇴사하였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열광금지, 에바로드》로 [[수림문학상]]을, 《2세대 댓글부대》로 제주4.3평화문학상을,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네이버 인물검색|url=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9E%A5%EA%B0%95%EB%AA%85&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214607|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신문기자 관두고 2년만에 소설 6권, 문학賞 휩쓸어… 글만 써 먹고살고 싶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3112580|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조선닷컴 인물검색|url=http://cdb.chosun.com/search/db-people/i_service/manDisAllXml.jsp?uci=G010+1-02142006092000380346|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YES24 《한국이 싫어서》 소개|url=http://www.yes24.co.kr/24/goods/17972275|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
* 제22회 관훈언론상<ref>2005.1/관훈클럽</ref>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감사장<ref>2008.7/중앙선관위/(17대 대선 공정보도)</ref>
- 장대환 . . . . 6회 일치
'''장대환'''(張大煥, [[1952년]] [[3월 21일]] ~ )은 [[매일경제]]와 [[매경미디어그룹]]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본관은 [[흥덕 장씨|흥덕]].
* 1979년 3월 ~ 1983년 3월 : 공군대위.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정치학, 경영학 교관, 생도전대 상담교관 전임강사
* 2008년 11월 ~ :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 2009년 3월 ~ : 국립대한민국관 건립위원회 위원
- 전민제 . . . . 6회 일치
| 소속 = [[전인터내셔널|전 인터내셔널]] 명예회장 <br/> [[한국재료학회]] 명예회장 <br/> [[한국화학회관]] 명예이사장 <br/> 前 [[한양대학교]] 강사 <br/> 前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수
[[본관|본관(관향)]]은 [[대구 전씨|대구(大邱)]]이며 [[경성부]]에서 출생한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학사를 거쳐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석사 및 박사 학위하였다.
* 1989년 한국화학회관 이사장(1994년 퇴임)
* 1994년 한국화학회관 명예이사장
- 정근모 . . . . 6회 일치
'''정근모'''(鄭根謨, [[1939년]] [[12월 30일]] ~ , [[서울특별시|서울]])는 대한민국의 물리학자이자 원자력 전문가이며 과학기술 행정가이다. [[유효정|유호정]] 박사가 2018년에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최연소 박사 학위 취득 기록을 갖고 있었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22899529 22세 국내 최연소 박사 탄생 "학원 싫어 대학까지 독학"]</ref> (만 23년 5개월) [[대한민국 과학기술부|과학기술처]] 장관을 2번 지냈고, [[한국과학원]](현 [[한국과학기술원]]) 설립을 주도하고 2대 부원장도 맡았다.
* 미국 [[과학재단]] 에너지 수석 심의관
* [[대한민국 과학기술처|과학기술처]] 장관
|직책 = [[대한민국 과학기술처|과학기술처 장관]]
|직책 = [[대한민국 과학기술처|과학기술처 장관]]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물리학자]][[분류: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분류:대한민국의 과학기술처 장관]][[분류:한국과학기술원]][[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미래희망연대]][[분류:친박]][[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명지대학교]][[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동문]][[분류:미시간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동래 정씨]][[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
- 정난정 . . . . 6회 일치
본관은 [[초계 정씨|초계]](草溪)로 아버지는 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이고, 정난정은 그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다. [[한성부]] 출신.
[[한성부]]에서 [[초계 정씨]] [[오위도총부]] 부총관 [[정윤겸]]과 차실(次室) 남씨(南氏)의 2남 3녀 중에서 막내 딸로 태어났다. 모친은 본래는 상민이 아니었으나 난신에 연좌된 부녀로서 노비가 되었고, [[정윤겸]]의 집에 분배되었다. 그는 정윤겸과 노비가 된 반가 여성 사이에서 서녀(庶女)의 신분으로 태어났다.<ref>그러나 그 모친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ref> 그리고 정난정은 어릴 때 집을 나와 기생이 되었다.
정난정은 윤원형과의 슬하에 4남 2녀를 남겼는데, 정난정이 정실부인이 됨에 따라 그 자녀들도 적자가 되었다. 양반가에서는 그녀의 권세에 힘입으려고 사돈이 되자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많은 재산을 모으며 부귀를 누렸고 문정왕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 관련 작품 ==
* 정난정의 4촌인 [[정준]]이 명종7년 6월 18일 사헌주 집의에 임명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정준은 음험하고 경박한 성품으로 윤원형의 위엄을 빌어 대관이 되어 마음내키는 대로 인물들을 공격하였고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욕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정승환(가수) . . . . 6회 일치
|| '''관련 사이트''' ||<(> [[http://cafe.naver.com/jeongsuenghuanfans|승환데이]], [[http://gall.dcinside.com/board/lists/?id=jsh|디시인사이드 정승환 갤러리]], [[https://www.instagram.com/__seung__h/|인스타그램]], [[http://정승환.com|꿈꾸는나무(정승환 팬페이지)]] ||
다만 때로는 흉성에 기반을 둔 파워에만 의존해 무리하게 고음을 올리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이건 [[박진영]]이 지적한 부분. 중간평가 도중에는 목에 힘을 주고 고음을 올리는 습관에 안 좋은 컨디션이 겹쳐져 음이탈과 음정 불안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는 어느 정도 고쳐진 상태. 고등학생 재학중 부른 '말리꽃'을 보면 '''2옥타브 라♯(A♯4)'''[* 키를 하나 내렸기 때문에 라♯이 맞다.]까지 음이 올라간다.
첫회(1라운드) 출연 당시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시크한 매력을 뿜었던 그는 틀에 박힌 교육이 싫어서 노래 배우기를 거부했다는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있는 모습과 심사위원들이 수능 준비 상태를 묻자 "아니요"라고 덤덤하게 대답하고 이어 "노래만 하고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발언을 하는 등의 모습은 다른 참가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김범수의 [[http://tv.naver.com/v/239492|'지나간다']]를 선곡하여 감정을 잡아 진지하게 노래의 느낌을 표현하며 부른 것이 청중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되었고, 무대가 끝난 후에는 심사위원과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유희열로부터 '한 끗이 다르다' 는 평을 받으며 가볍게 2라운드에 진출했고, 무대에서 내려오며 그는 믿기지 않는 듯 볼을 꼬집는 모습을 보였다.
4월 12일 열린 결승전에서 ‘니가 있어야할 곳’, ‘만약에 말야’ 등을 열창하며 시청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경쟁자인 [[케이티 김]]과 근소한 점수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정승환은 “그동안 받은 많은 관심과 격려가 경연을 하는데 큰 힘이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6년 5월 30일 2016년 5월 2일 월요일부터 방영중인 tvN의 18부작 월화드라마 '[[또 오해영]]'(박해영 극본,송현욱 연출)의 OST에 참여한다고 밝혔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328167|관련기사]]
* 샘 김과 함께 체육관에 [[복싱]] 회원권을 끊었다고 하며 테니스도 배우는 중.
- 정용화 . . . . 6회 일치
* [[경희사이버대학교]] 중국학과 학사<ref>{{뉴스 인용|제목= 경희대 사이버 대학원 측 “정용화 관광레저항공 석사 졸업…박사과정은 경희대학원에서” |url=http://chicnews.mk.co.kr/article.php?aid=1516156769171420007
* [[경희사이버대학교]] 대학원 관광레저항공학과 석사<ref>{{뉴스 인용|제목= 경희대 사이버 대학원 측 “정용화 관광레저항공 석사 졸업…박사과정은 경희대학원에서” |url=http://chicnews.mk.co.kr/article.php?aid=1516156769171420007
* [[2009년]] [[12월 6일]]부터 [[2010년]] [[3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들의 일밤|일요일 일요일 밤에]] - [[헌터스]] : [[헌터스|에코하우스]]》를 시작으로 예능활동을 시작하였다. [[2010년]] [[2월]]부터 [[2011년]] [[4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 결혼했어요]] 시즌 2》에 고정출연하였고, [[2010년]] [[7월]]부터 [[2011년]] [[3월]]까지는 [[SBS]] 《[[인기가요]]》 [[사회자|MC]]를 맡았다.<ref name="ingi">[http://seoulntn.com/cindex.php?c=news&m=view&idx=41989 정용화-조권, '인기가요' 새 MC 발탁..'관심집중'], 《서울신문NTN》, 2010년 7월 18일 작성.</ref> 또한, [[2009년]], [[2010년]] 2년 연속 《[[SBS 가요대전]]》 MC로 활동하였다.<ref name="gayo1" /><ref name="gayo2" /> 이러한 고정 출연 외에도 [[황금어장]], [[런닝맨]] -게스트로 최다출연기록을 세웠다, [[강심장]], [[명받았습니다]], [[승승장구]], [[놀러와]],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청춘불패]],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 [[2012년]] [[1월 13일]] 《제26회 [[골든디스크]]》에서 음반부문 본상, 음원부문 본상, 비비드림상, 아시아최고그룹상을 수상하며 4관왕을 달성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골든디스크 4관왕 달성하며 최다 수상! 아시아 대세로 떠오르다!|url=http://www.stv.or.kr/ez/bbs.php?table=health&query=view&uid=5346&p=1|출판사 = STV24|날짜 = [[2012년]] [[1월 13일]]}}</ref>
- 정웅인 . . . . 6회 일치
|제목= 정웅인 “딸 교육 최대 관심,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인터뷰] |url=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367188800503441008 |출판사=티브이데일리|날짜= 2013-04-29 }}</ref> 그는 [[서울예술대학]] 연극학과(89학번)에 입학했고, '프라나'라는 동아리의 회장을 맡았다. 또한 신입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 악마선배로도 유명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유웅인 아내 이지인, "자랑스럽다"던 남편 말과는 달리 '경북대 퀸카' 미모 |url= http://starin.edaily.co.kr/news/newspath.asp?newsid=01164406606184368 |출판사=이데일리|날짜= 2014-08-05 }}</ref> 연인관계로 발전하여 1년간의 열애 끝에 [[2006년]] [[6월 3일]] 결혼식을 올렸다.<ref>{{뉴스 인용
|align="center"| 검열관 역
|align="center"| 서울 아트원씨어터 2관, 코엑스 아트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br >아트센터K 동그라미극장, NH아트홀 판타스틱전용관 외 부천, 화성 공연
* [[2018년]] 명예교도관
- 정치공학 . . . . 6회 일치
정치학의 한 분야, 혹은 한국 정계의 관용어. 때때로 쓰이는 단어지만 그 의미가 확실하지는 않다.
한국정치계에서 쓰이는 관용구로서 '정치공학'은, 공학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학문은 아니며, 정치분야에서 마치 공학에서 기계나 사물을 다루는 것처럼 특정한 어젠다를 의도적으로 추종하거나, 정당, 계파 간의 연대와 협력 등의 정략으로 자기 정당의 집권을 도모하는 것을 뜻한다. 정치공학에는 국민의 의사나 복리를 무시하고, 정치권의 집권 이득만을 추구한다는 뉘양스가 있으며, 부정적인 의미가 매우 강하다. 또한 계파 간의 연대와 협력 과정에서 어떤 동질적 가치관이나, 이념에 대한 합의 추구가 없이 정권 획득과 권력 추구만을 하여 지조없이 협력하므로 '신념'이 없다는 의미도 있다. 다만 노골적인 협잡, 야합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http://www.newspim.com/news/view/20161213000292 (참조)]]
이에 대해서는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 미국 남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에서 강의를 하던 주관중(朱冠中) 교수가 1960년대 후반 '정치공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냈는데, 이 책이 청와대에서 모두 회수하고 박정희 정권은 주관중 교수를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공학적 수완'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7031758521&code=990326#csidxb914cb4e3f87ea0a4d75944b31219dc (참조)]]
- 창작:왕국 . . . . 6회 일치
남부에서는 가끔씩 모래폭풍이 불어 재산 및 인명 피해를 입히기도한다. 이를 예측하기 위해 "폭풍 감시원"이라는 직업이 있는데 모래폭풍을 관측해 방향, 규모, 속도 등등을 무전으로 보고하는 직업이다. 정부는 이들을 영웅으로 선전하지만, 실제 대우는 좋지 못한 편이다.
헌법에서는 왕국을 입헌군주국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국왕에게 군대 지휘권, 총리 임명권, 국회 해산권 등이 부여되어 있는 등 완벽한 입헌군주국은 아니다. 해외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나 국내의 왕실에 대한 지지율은 상당히 높으므로 별 상관은 없다.
여러가지 이유로 국왕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가 소수 존재한다. "반국가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는 과격한 행동 양상을 보이는 자들도 있기 때문에 국가의 적으로 여겨진다. 그렇기때문에 "반국가주의자"로써의 의견을 내는 자는 방첩기관과 경찰, 국가헌병대에 의해 제재된다.
심각한 인구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노동력을 어떻게든 수입해오려고 하는 편. 이 때문에 다민족 국가의 면모를 보인다. 이에 반대하는 왕국인들도 존재하며, 과격파의 경우에는 총기를 들고 이민족을 사냥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방첩기관과 경찰, 국가헌병대에 의해 제재된다.
전체적인 외교관계는 왕따. 한때 플라흐란트 왕국과 리자 연방이라는 동맹국이 있었지만 플라흐란트 왕국은 연합에게 합병당했고, 리자 연방과는 점점 서먹서먹해지는 중.
북쪽으로 바다 건너 있는 연합과 관계가 최악이다. 원래부터 자기들보다 못살고 낙후된 국가라고 깔보고 있었는데 연합이 왕국과 친하던 플라흐란트 왕국을 덥썩 집어먹어버렸다.
- 최종원(국회의원) . . . . 6회 일치
수상경력은 1995년 〈[[영원한 제국]]〉으로 대종상 영화제 남우조연상 수상 밖에 없지만,[* 정조의 정적인 노론의 수장 심환지역을 맡았는데 당시 쉰도 안된 나이로 칠순 가까운 노인 심환지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게다가 그릇된 노론사관이 짙은 영화임에도 수구세력이 아닌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나온 극중 심환지의 모습이 시너지를 이루었다.] 1993년 영화 [[투캅스]]의 악당 보스 역을 비롯하여, 사실 수많은 영화에 비중있는 단역이나 조연으로 출연했다. 단 한컷만 잡혀도 강렬한 마스크와 독특한 목소리 때문에 잊을수 없는 인상을 남겼던 그는 한국 영화 최초의 신스틸러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그의 활약 이후 [[이문식]], [[이원종(1966)|이원종]], [[유해진]], [[성지루]], [[김응수]] 등의 굵직한 조연급 배우들이 줄지어 그의 뒤를 이어 한국영화계의 신스틸러 소리를 듣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계 정당과 가까운데 국회의원 경력도 있다. [[2010년 재보궐선거|2010년 7.28 재보궐선거]] 강원도 태백시·[[영월군]]·[[평창군]]·[[정선군]] 선거구 민주당 후보로 나서 55.01%(35271표)의 득표율을 기록, 44.98%(28841표)의 한나라당 [[염동열]] 후보를 제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제18대 [[국회의원]]([[민주당(2008년)|민주당]], [[민주통합당]])을 역임하였다. 이 와중에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을 맡았던 [[유인촌]]과 마찰을 빚고 대립을 세우곤 했다.[* [[애초에]] 국회 입성을 앞두고 유인촌 장관과 마주치는걸 엄청나게 별렀는데 '''"유인촌 장관은 나랑 만나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라는 막말을 남겼을 정도(...) 실제로 당선 후 두 달 남짓 지난 2010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유인촌 장관을 예상대로 거하게 몰아붙였다.] 다만 [[19대 총선]]엔 출마하지 않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 커맨드 앤 컨커 : 레드 얼럿 2/연합군 . . . . 6회 일치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 요구전력이 공급되는 전력보다 많으면 미니맵 꺼지며 생산이 느려지는 동시에 기관총포탑 외의 방어건물이 먹통이 된다.
* 기관총포대
기관총을 쏘는 토치카. 전력이 없어도 작동한다.
연합군의 기본 보병 유닛. 배치시키면 모래주머니를 쌓고 기관총을 거치한다. 이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전투력이 향상된다.
* GI: 기관총
보병을 수송할 수 있는 헬리콥터. 기관총으로 무장했지만 전투력은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가만히 냅두면 자꾸 착륙하려고한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 . . . 6회 일치
보병 유닛들이 기관총 사격이나 박격포 공격같은 걸 당하면 제압 상태가 된다. 제압된 보병 유닛들은 그대로 포복하기 때문에 생존성은 올라가지만 이동 속도가 느려진다. 이 상태에서 추가적인 공격을 당하면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엎드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기 저하 상태가 된다. 이 경우에는 총을 쏠 수 조차 없기 때문에 다른 유닛의 도움을 받거나 후퇴를 통해 본부로 돌려보내야 한다.
기관총 사수가 차량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차량에 발생한다. 사수가 사망해 기관총을 사용할 수 없게된다. 개별 업그레이드로 기관총 사수를 올린 차량이라도 수리를 통해 기관총 사수를 소생(?)시켜야 한다.
숙련도 시스템은 전투 유닛들에게 버프를 주는 지휘관 유닛-중위, 대위, 크롬웰 지휘전차-등이 버프를 주는 유닛들의 전투를 통해 승급하는 방식.
- 켄카양성패 . . . . 6회 일치
켄카(喧嘩)는 싸움이라는 뜻. 성패(成敗)는 처벌, 징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일단 싸움이 일어나면 시비곡절에 관계없이 양자를 모두 '싸움 그 자체'를 죄로 보고 처벌한다는 뜻이다.
본래는 사무라이(무사)들의 법도이며, 양자를 모두 처벌하는 것은 사무라이가 무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이런 관습이 나타난 이유는 사무라이들은 특정한 가문 아래에서 봉건적으로 조직되어 있어, 무력을 휘둘러서 서로 정당한 이유를 대고 보복전을 벌이면 결국 끝이 없고 이러다보면 다른 세력에게 먹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싸움을 억제할 이유가 있었던 데는 사무라이들의 호전성도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에서 [[일본 전국시대]]에 걸쳐서, 사무라이들은 불합리할 정도로 복수심이 강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피해자가 명백하게 자업자득인 경우조차도 집요하게 복수를 했다. 켄카양성패는 이러한 문화에서 전국 다이묘들이 불합리하더라도 질서를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법이다.
이 관습은 본래 사무라이 계층의 것이었지만, 무로마치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서 사무라이 계층의 풍습이 관습법적으로 여겨져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되었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 '집단의 화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는 관습이기도 하다.
- 콜 오브 후아레즈 : 건슬링어 . . . . 6회 일치
실존인물. 보안관. 링컨 카운티 전쟁에 빌리 더 키드와 다른 편으로 참전했다. 빌리 더 키드를 죽인 사람으로 유명하다.
팻 가렛의 보안관보.
작중에서는 루랄레스에 고용되어서 카우보이즈를 추적하던 사일러스를 개틀링 기관총으로 공격한다.
실존인물. 풀네임은 윌리엄 헨리 핸디 플러머. 보안관인 동시에 갱단 "이노센츠"의 두목.
레버액션식 소총. 적을 관통할 수 있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킹덤/503화 . . . . 6회 일치
* 총사령관 [[왕전(킹덤)|왕전]]은 조군을 [[환의(킹덤)|환의]]에게 맡기고 그대로 강행돌파하려 한다.
* 태행산맥의 조군 봉화대에서 산맥을 넘는 전서구의 무리가 관찰된다. 봉화를 관리하던 병사는 무슨 일이 있길래 이 높은 산맥을 넘어, 저 정도 숫자의 전서구가 날아가는 건지 불길해한다. 그 전서구는 진군이 업을 노리고 있다는 급보를 담은 [[이목(킹덤)|이목]]의 전서구다.
* 조나라의 왕 [[도양왕]]은 급보를 들고간 호주가 무안할 정도로 한가롭다. 그는 시동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즐기고 있다. 그는 적이 이곳으로 온다는 듣고도 농담으로 일관한다.
호주가 그런 농담할 때가 아니라고 간업을 거듭해도 그는 시동 염관에게 발가락이나 빨게 하며 퇴폐적인 향락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카이네]]는 이미 늦은 것이 아닐까 우려하는데 이목은 열미에서 오래 버틴다면 그렇지도 않다고 본다. 결과적으론 열미까지 누가 먼저 도달하느냐가 관건. 물론 도양왕이 얼마나 협조를 할지도 달려 있지만, 진군으로서도 열미까지 가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 킹덤/519화 . . . . 6회 일치
* 양군이 마침내 주해평야에 당도하고 병력이 배치된다. 그런데 양측 지휘관 모두 정석에서 엇나간 포진을 준비하는 듯 한다.
* [[이목(킹덤)|이목]]과 [[왕전(킹덤)|왕전]]. 양 진영의 총지휘관은 이미 이 땅에 도착해 있다. 척후만 데리고 빠르게 현장에 도착한 두 장군은 지형을 머리에 새겨넣고 그 위에 상상 속의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어떤 포진을 해야 할지, 어떤 작전으로 싸워야 할지를 치열하게 계산하고 있다.
* 환의는 부관 [[마론(킹덤)|마론]]과 함께 기마대의 활약을 지켜본다. 마론은 이옥 기마대의 위력에 만족한다. 아마 흑양전에서는 일대가 수림지라 기마대를 굴릴 기회가 없어서, 그 분풀이를 하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마론이 보기엔 셋으로 나뉜 진군 중 자기들이 가장 편안한 위치다. 여러 방향에서 조군이 들이닥친다지만, 당장 업성에 접근하는데 급급한 중소부대들 뿐. 이런 부대들을 이옥 기마대가 선회타격하는 걸로 낙승을 딴다. 당분간은 이런 방식으로 여유롭게 버틸 수 있을 거라 쾌재를 부른다.
* 진군의 지휘관들은 총사령관의 기상천외한 명령을 하달받고 안색이 흐려진다. 우선은 포진부터가 이상하다. [[비신대]]의 [[이신(킹덤)|이신]], [[하료초]], [[강외(킹덤)|강외]]가 모두 어처구니 없어한다. 정말로 이게 왕전이 지정한 자기들의 위치인가? 그보다 더 기가 막힌건 [[몽념]]의 낙화대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배치. 신은 몽념과 낙화대를 걱정하지만 몽념은 호들갑떨기 보다는 잠자코 포진을 살핀다. 깊이 생각을 마친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알겠습니다"라 대답하고 부대로 돌아간다. 오히려 웃음마저 보이는데. [[왕분]]도 몽념처럼 지도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총지휘관의 지시에 귀를 의심하는건 이목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기수]], [[마정]], [[금모]]가 정말 이 지시가 맞냐고 재차 확인한다. [[카이네]]와 [[부저]]도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 그러나 이목은 확신한다.
- 킹덤/531화 . . . . 6회 일치
* [[왕전(킹덤)|왕전]]의 명으로 기수의 목을 취하러 왔던 [[이신(킹덤)|이신]]과 [[비신대]]는 우선을 난전에서 몸을 피해 상황을 관망하나 답이 나오지 않는다.
* [[마광]]이 [[이목(킹덤)|이목]]의 얼굴을 알아차리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왜 여기 있는가? 한참 [[기수(킹덤)|기수]]를 몰아붙이고 있던 자군의 후방에서, 자신의 바로 후방에서 어떻게 적의 총지휘관이 나타날 수 있는가? 그런 의문을 해결할 겨를도 없이 칼날이 목에 박혔다. 마광의 부관은 그보다도 한 발 먼저 이목의 등장을 눈치챘다. 그러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고 설상가상 마광의 창은 자신의 손에 있었다. 이목이 일을 끝마치고 나서야 그가 목소리를 냈지만 닿을 일은 없었다. [[부저(킹덤)|부저]]가 뒤에서 부관을 처리했다.
* 그러나 정해진 승부는 뒤바뀌지 않았다. 마광의 혼신의 칼날보다도 빠르게, 이목이 내리친 칼이 마광의 목과 팔을 단칼에 잘랐다. 기수군을 몰아가는데 골몰하던 진군은 저희 대장의 목이 굴러디는 걸 보지 못했다. 반면 언덕에 있던 기수와 그 부관들, 조군 병사들은 똑똑히 보았다. 이목이 마광의 목을 쳤다. 믿기지 않기로는 목이 떨어진 당사자 못지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부관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채로 기수를 돌아보았다. 그도 눈 앞의 광경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 알고 있었는데도.
- 토이 솔져스: 콜드 워 . . . . 6회 일치
기관총. 보병을 상대하는데 최적화 된 포탑이다.
미국은 M2. 소련은 PK. 적당한 기관총이다.
미국은 M134. 소련은 발칸-1. 둘 다 부무장으로 유탄발사기가 달려있다. 미국이 미니건을 사용하는 대신 소련은 유탄기관총을 사용해서 컨셉에 차이가 약간 있다. 미국이 시원한 연사력으로 쇼부를 본다면 소련은 한방한방으로 쇼부를 보는 느낌.
미국은 브래들리, 소련은 BMP. 주무장은 기관포, 부무장은 유도 미사일. 유도 미사일은 최대 두대의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중전차. 주무장은 전차포, 부무장은 기관총.
특수부대. 주무장으로 기관총을 부무장으로 로켓 발사기를 장비한 보병. 일반적으로 볼 수는 없고 Barrage에서 Spec Ops가 나오면 일정 시간 동안 쓸 수 있게 해준다. 매우 강해서 왠만한 지상 유닛은 한큐에 썰어버린다. 미군 스펙 옵스는 [[존 람보]]의 패러디인 듯 보이며, 소련군 스펙 옵스는 "암호명: 이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 하이큐/212화 . . . . 6회 일치
* 다양한 각도와 시점에서 플레이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과 다른 선수들의 강점, 그 중에서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을 판별한다.
* 히나타는 묘한 분위기로 체육관에 돌아온다.
* 볼보이로서 역할을 열심히 하면서 다양한 각도와 위치에서 코트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 히나타는 계속 코트 위를 관찰하며 훌륭한 플레이라도 다 같은 건 아니며 선수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한다는걸 알게 된다.
* 제목의 시점은 히나타가 플레이를 보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초반부에 나온 우카이 코치와 타케다 고문의 "교육자로서의 관점"이란 의미도 있다.
- 하이큐/232화 . . . . 6회 일치
* 도쿄 체육관. 카라스노는 생각지도 못한 악재에 직면했다. 역에서 잠시 내려놨던 [[히나타 쇼요]]의 짐이 누군가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유명 브랜드의 체크무늬 가방인데 흔한 디자인이라 누군가 착각해서 가져간 모양이다. 원래 이건 히나타 동생 가방이지만 크고 튼튼해서 적당하다 싶어서 고른게 화근이었다.
*한편 체육관에선 실전에 서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우카이 코치는 도쿄 체육관의 코트 특성에 대해 보통보다 덜 미끄러지는 재질이나 평소처럼 뛰어다니다간 큰 일이 난다고 주의준다. 그리고 최대한 땀을 빼서 그걸로 마찰을 줄이라는 요령을 전달한다.
키요코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을 빠르게 달려간다. 연습을 거듭해 쌓아온 것은 생각보다 훨씬 허무하게 끝난다. 하지만,
* 공식 워밍업 타임이 끝나는 휘슬이 들린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도착했다. 키요코는 관중석에서 코트 위의 히토카에게 짐을 넘긴다. 짐은 확실히,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키요코는 코트 위의 3학년들과 승리의 제스쳐를 교환한다.
귀중한 키요코의 주연 에피소드. 선수들과 유대관계와 다음 세대인 히토카에게 역할을 승계하는 내용이다. 봄고 대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키요코와 3학년들의 역할은 여기까지이므로, 히토카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전달하려고 하는 듯 하다.
- 하이큐/239화 . . . . 6회 일치
* 히메카와는 특이하게 "언더핸드 서브"를 구사한다. 초심자들이 많이 쓰는 방식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게 특징. 카라스노에서는 그저 특이하게 친다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다.
* 그런데 치는 손맛이 이상하더니, 공은 엉뚱하게 같은 팀의 테라도마리의 뒤통수에 작렬한다. 적아군 모두 표정이 얼어붙을 정도로 황당한 실책. 게다가 이 실수로 1세트를 카라스노에게 넘겨주고 만다. 좀 황당하지만 어쨌든 선취는 선취. 카라스노의 응원단에선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관중석에서는 히메카와의 실수가 입방아에 오르며 "평생 꿈에 나오겠다"는 말이 본인에게 들릴 정도였다.
* 관중석에서 시시덕거리던 커플 뒤에 있던 아저씨가 "츠바키하라는 긴장감이 없다"며 가벼운 분위기의 벤치를 질타한다. 하지만 커플은 그 말에 반박하며 "심각해져봐야 카라스노가 딴 1세트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침체된 분위기를 하고 있는 쪽이 오히려 패배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
이후 선수들 간의 간단한 반성회가 이어진다. [[니시노야 유]]는 막판 토스가 너무 네트에 가까웠다고 [[아즈마네 아사히]]에게 사과한다. 아즈마네는 별일 아니라며 아직도 이 체육관의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은 탓으로 여긴다. 우카이 코치는 그 점을 마음에 걸려하는 듯 하다.
오오사도 감독은 이게 의외로 먹힌다며 웃는다. 천장 서브는 배구 역사 초기에 등장했지만 현대엔 사장된 기술이다. 딱히 장점이 없기 때문인데, 반대로 이것이 허를 찌르는 수단이 된다. 현대에는 잘 쓰지 않는다는건, 이 서브를 "익숙하게 받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의미. 게다가 이 체육관이라는 낯선 환경까지 합쳐지면 좀처럼 쉽게 대처하기 어려운 공격이 된다. 따라서 이 1회전에서 히메카와를 기용한건 단순한 도박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 히메카와는 오오사도 감독이 말한 "가장 큰 아군"이 뭔지 깨닫는다. 바로 이 체육관의 드넓은 천장. 이제 그에게서 긴장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 하이큐/264화 . . . . 6회 일치
* 타나카가 [[시미즈 키요코]]에게 반한건 입부한 첫날의 우연한 사건. 막 체육관으로 뛰어들어오던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언제나처럼 체육관으로 달려오던 키요코. 교복에 실내화 차림으로, 운동화는 두 손에 들고 있었다. 항상 제일 먼저 체육관에 도착하는게 그녀의 일과였고 그날도 그런 줄로만 알고 멋지게 체육관으로 뛰어들었다. 그때가 타나카와 처음 마주친 순간이었다. 약간 민망해하는 키요코에게, 타나카는 인상적인 첫마디를 던졌다.
그 우렁찬 외침은 동기들, 그리고 막 체육관에 드러서던 [[사와무라 다이치]], [[스가와라 코시]]에게 딱 포착됐다. 그리고 키요코의 대답.
* "빡빡이"를 빈정거리던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쿠토 코타로]]는 [[아카아시 케이지]]의 목을 휘감을 정도로 흥분했다. 누나인 응원단의 [[타나카 사에코]]는 감격을 숨기지 못한다. 벤치의 동기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너무 굉장해서 어이가 없었다.
- 한비야 . . . . 6회 일치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산에 오르면서 자신감을 키웠다고 한다. 세계일주 여행의 첫 여행지가 ‘산들의 고향’인 네팔이라는 것만 보아도 한비야의 산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확인날짜 = 2013-09-09}}</ref> 했다. 이밖에도 서울랜드에 마련된 세계시민교육관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실시하고 있으며 2012년, 이 세계시민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ref>{{웹 인용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펴낸 후부터 대중 강연 활동을 펼쳤으며 2012년,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의 초빙 교수로 임용되었고 각종 교육 관련 단체, 기업 등에서 강연하고 있다.
**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사서 추천도서
** 한국도서관사서협회 추천도서
** 학교도서관사서협회 추천도서
- 핫라인 마이애미 . . . . 6회 일치
20발 짜리 기관단총.
30발짜리 기관단총.
32발짜리 기관단총.
리히터를 착용하면 들고 나오는 30발짜리 기관단총. 소음기가 달려있어서 총소리가 나지 않는다.
* 경찰관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핫라인 마이애미]]
- 현재덕 . . . . 6회 일치
'''현재덕'''(玄在德, [[1912년]] ~ ?)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 문학|아동문학가]], [[삽화|삽화가]], 아동[[미술]]가이며,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다.
[[경성부]] 태생으로, ‘노마’ 시리즈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현덕]](본명 현경윤)의 친동생이다. 현덕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문학, 미술에 관심을 가져, 건강이 좋지 않은 형을 대신하여 《[[소년조선일보]]》의 동화 연재를 이어 받는 등 [[일제 강점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했다.
== 가족 관계 ==
== 인간 관계 ==
* [[연극]][[연출가]] [[주영섭 (1912년)|주영섭]](朱永涉, [[1912년]] ~ ?)과 오랜 친구 관계를 맺었다.
* 김영순, [http://dongsim.net/gnu4/bbs/board.php?bo_table=hyundek&wr_id=4&page= 아동문학 선구자 현덕 - 생애와 업적] (동심넷 - 아동문학선구자기념관)
- 홍기(영부인) . . . . 6회 일치
할아버지가 한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웃어른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며 교양을 쌓았으나 정규 교육기관에는 다니지 않았다. 다만 남편인 최규하 전대통령이 주일대표부에 근무하던 8년간 일본어를 공부해 능숙하게 구사하였다고 하며, 주말레이시아 대사 부인으로 있을때 영어를 익혔다고 한다.
[[성균관]] 박사인 [[최규하]]의 할아버지인 최재민씨와 한학자인 홍기여사의 할아버지간 교류가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의 중매로 19살 되던 1935년에 연하의 최규하와 결혼하였다. 이후 남편 최규하가 도쿄고등사범학교와 만주 [[대동학원]]에 유학하던 시절에는 함께 동행하지 않고 시가(媤家)인 [[강원도]] [[원주시]]에서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생활했다.
소박하고 서민적인 풍모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화로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향후 영부인 활동 구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홍기여사가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했고, 보다 못한 청와대 관계자가 화제를 전환시켜 여사께서 청와대 김장을 직접 모두 담갔다고 소개하자, 그제서야 본인도 '김장 30포기를 직접 담갔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기자들도 화제를 돌려 여가시간에는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TV나 보지요'라고 답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부인치고 너무 생각 없어 보일 수 있으나, 바로 앞 뒤 영부인이 좋든 나쁘든 워낙 말이 많았던지라, 상대적으로 (공무원 아내다운) 홍기 여사의 소박하고 다소곳하며 서민적인 분위기가 당시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인상을 남겼다.
[[최규하]] 대통령의 사저인 서교동 집은 홍기 여사가 “살 만하면 그만”이라며 못 고치게 해 남루한 편이라고 한다. 실제 홍 여사가 사망할 당시 홍 여사가 10년 이상 사용하던 그릇장, [[외교관]] 시절 사용하던 유리잔들, 생전에 사용하던 돌절구와 오이지 누르는 돌, 연탄보일러, 빨래 물을 긷는 펌프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매년 가계부를 거르지 않고 썼다고 한다. 홍기 여사가 총리공관 시절 쓴 가계부에는 겉장에는 친필로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06, 국무총리 공관, 국무총리 부인 洪基>라 이름표를 적고 있고, 책장을 넘기면 콩나물 등 부식을 구입한 명세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선비다운 풍모로 검소한 생활을 했던 최규하 대통령에 걸맞는 소박했던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홍명희 . . . . 6회 일치
[[한국]]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월북 [[북한]]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 뜻은 "[[에스페란토|푸른빛(碧)의 말]]을 처음으로(初) 배운 [[한국인]]". 에스페란토을 상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그렇다.]이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로 알려진[* 참고로 말하는데,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대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들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면서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 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라서 그럼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여담]]으로 이 3대천재 드립은 전부 다 홍명희 관련으로 나왔다. 현대에 이 언급을 한 것도 홍명희 평전이었고, 조선삼재 이야기도 홍명희와 [[현상윤]]이 나눈 1940년대 인터뷰에서 나왔다.] 인물로 실제로 이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앞의 둘은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데 비해서 홍명희는 변절하지 않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춘원이 납북되자 그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그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야사에서는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최남선]]과 [[정인보]], 최남선과 정인보의 스승인 승려 석전 박한영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또는 스승 박한영)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
[[충청북도]] [[괴산군]] 출생으로,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설에 따르면 장남 홍명희를 앉혀 놓고 그가 보는 앞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을 다니다가 한일합방이란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단 한편의 소설 《임꺽정》(林巨正)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여담으로 일제치하에서 수감된 문인들중 유일하게 옥중집필이 허용된 작가가 홍명희 였다. 홍명희가 수감된이후 임꺽정이 연재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총독부 관리들조차 임꺽정에 맛들려서 제정신을 못차렸던 상황. 옥중에서 임꺽정 집필이 완료되면 총독부 관리들이 먼저 읽고 조선일보에 넘겼다고 한다.
'''[[김정일]]이 직찍[* [[김정일]]은 [[사진]]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관련 이론에 대한 책을 직접 쓰기도 했다.]한''' [[김일성]]과 홍명희. 1958년 국제노동자절 행사가 끝난 후 함께 뱃놀이를 하다가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홍명희 선생과 민족의 화해와 대단합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 동지'라고 하는데 56년 [[8월 종파사건]] 직후 이기에 벽초의 모습이 왠지 어색하다. ~~ 나 떨고 있니? ~~ 그런데 홍기문이 김덕홍에게[* 북한의 군 출신 정치가로 [[황장엽]]과 같이 망명한 탈북인사.]귀띔한 바로는 꽤 추악한 이면이 있다 한다. 1956년 김성애의 비서로 일하던 홍명희의 딸인 홍귀원이 김일성과 간통을 하다가 덜컥 임신을 했는데 아버지를 볼 낯이 없다고 죄책감에 시름시름 앓으며 아버지를 끝내 찾아보지 못하다가 아이를 낳던 중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홍명희가 딸을 잃은 충격으로 맛이 가자 김일성이 홍명희를 위로해주겠다고 석암호수[*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저수지, 지금은 견룡저수지라고 불린다고 한다.]로 데리고 나가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이다. 죽은 김일성이나 홍명희에게 물을 수도 없고 진실은 홍기문에게 전해들었다는 김덕홍이 알고 있다.
- 홍성유 . . . . 6회 일치
'''홍성유'''(洪性裕, [[1928년]] [[10월 4일]] ~ [[2002년]] [[11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소설|소설가]]이다.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며, 호(號)는 백파(伯坡)이다.
[[1928년]] [[10월 4일]] [[경성부]]에서 태어나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1951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학사 학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51년 9월 [[갑종장교|육군 갑종사관]] 제10기로 육군 소위 임관하여 [[195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헌병사령부]] [[기관지]] 《[[사정보]]》(司正報) 기자·편집장을 지낸 이후, 1952년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53년]] 국방부 군사잡지 《[[명랑]]》(明朗) [[편집장]]을 거쳐 [[1955년]] [[2월]]에 대한민국 육군 중위 예편하였으며 [[1957년]] 《[[한국일보]]》에 장편소설 《[[비극은 없다]]》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 1996년 보관문화훈장
* [http://nate.nanet.go.kr:8080/dl/SimpleView.php 국립중앙도서관]
- 황병하 . . . . 6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황병하'''(黃炳夏, 1962년 ~)는 대한민국의 법관이다. 제44대 대구지방법원장을 역임하고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다.
1962년 [[서울시]]에서 태어나 [[우신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5회 사법시험 합격하여 15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다. 군 법무관으로 병역을 마치고 판사에 임용되어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서울민사지방법원,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인천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를 하였다. 대법원 재판연구원,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 지원장을 거쳐 2004년 2월 정기인사에서 부장판사로 승진하였다. 2016년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였으나 [[대구지방법원]]과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고 평생 법관제에 따라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하고 있다.<ref>[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130901&part_idx=335]</ref>
* 2016년 2월 제22대 대구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황선필(1939년) . . . . 6회 일치
| 경력 = 국무총리비서실 공보비서관<br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br />[[문화방송]] 사장
* [[대한민국 문화공보부|문화공보부]] 홍보조정관·보도국장 겸 대변인
* 국무총리비서실 공보비서관
* 1982년 ~ 1986년 :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자]][[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
- 후지와라 섭관가 . . . . 6회 일치
[[일본]]의 귀족 가문.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천황가의 [[외척]]이자 [[섭정]]으로서 지위를 세습하여, 이들을 후지와라 섭관가라고 부른다. [[일본 귀족]]의 정점에 서있는 가문이며, 섭가(摂家) 혹은 섭관가(摂関家)라고도 한다. 5개의 가문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에 오섭가(五摂家)라고 불린다.
제56대 [[세이와 덴노]](清和 天皇) 시기에 [[후지와라 요시후사]]가 섭관이 되면서 섭관가로서 후지와라 씨의 역사가 시작된다.
본래 이 무렵까지 황족이 아닌 신하, 후지와라 씨가 섭정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후지와라 씨는 천황가와의 혼인으로 인척관계가 강해졌고, 응천문의 변(応天門の変)이라는 사건을 처리한 것을 계기로, 반씨(伴氏), 기씨(紀氏) 등의 라이벌 씨족을 배척하여 섭정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부터는 오히려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을 차지하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 Crusader Kings 2/종교 . . . . 5회 일치
* 여성이 첩보관에 임명될 수 있음
* 여성이 첩보관에 임명될 수 있음
* 여성이 첩보관에 임명될 수 있음
* 여성이 첩보관에 임명될 수 있음
* 여성이 첩보관에 임명될 수 있음
- GHQ . . . . 5회 일치
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
GHQ는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로서, '총사령부'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군]]--[[연합군]][* 소수의 영연방군이 참가하였으나, 대부분은 미군이었으므로 사실상 미군.]이 [[일본]]에 --[[막부]]--[[군정]]을 펼치기 위하여 설치한 사령부를 뜻한다. [[맥아더]]를사령관으로 하였으며, GHQ에서 지시하는 점령정책이 일본 정부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1945년에 설치되어, 1952년에 강화조약이 맺어지면서 폐지되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1945년 부터 설치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맥아더 원수가 해임되고, 리지웨이 장군이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2년 4월 강화 조약이 발효되어, GHQ는 폐지되었다.
외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기관이지만 [[일본]]에서는 [[음모론]]의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 MoniWikiACL . . . . 5회 일치
* `protect`: 비밀번호 제한이 가능한 몇몇 POST액션에 대해 (모든 액션이 관리비번으로 제한가능하지는 않습니다)
* 일부 POST액션은 관리자 비밀번호로 제한을 걸어둘 수 있는 액션은 protect 가능한 액션입니다. protect 액션은 ''제한된 allow''이며, 일부 POST액션만 지원합니다. 예) do_post_savepage()는 post 액션이며, 일반 do_goto()같은 액션과는 달리 관리자 비밀번호로 액션을 제한을 할 수 있습니다.
wildcard를 쓴 것 보다 explicit하게 지정된 것이 먼저 적용된다. (순서에 상관 없다)
* Anonymous (@Guest): {{{deny *}}}: 모두 거부 (@Guest그룹의 priority가 높으므로 @ALL에 대해 허용된 것과 무관하게 거부된다)
- This is the Police . . . . 5회 일치
보이드의 부관. 보이드와는 30년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마피아가 FPD 안에 심어넣은 내부자로 활동했지만 게임이 시작되기 얼마 전의 시점에 걸려버렸다. 이후 보이드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도와주면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쳐 신분 세탁을 하지만 거부하면 가족들과 함께 끔살.
5일에 한번씩 경찰 설비나 봉급에 대한 요청을 보낼 수 있다. 시청과의 관계가 좋을수록 이 요청을 잘 받아준다.
* Job Slot: Officer : 대기조의 경찰관 용량을 1 늘린다.
* Crime Trap: 1,000달러 소모. 마피아가 범죄를 일으킨 다음 신고를 받고 온 경찰관을 쏴죽인다.
==== 부관 ====
-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 . . . 5회 일치
김모씨는 2008년부터 올해까지 6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 정도로 불안정한 정신상태였다. 그의 병력은 조현증, 즉 정신분열증이었으며 평소 여성에게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찰은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묻지마 범죄로 규정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시민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린다. 대체로 수사관과 범죄심리학 관련자들 사이에서는 기존 묻지마 범죄의 전례와 완전히 일치하며 특정한 편견에 의한 범죄가 아니므로 묻지마 범죄로 봐야한다는 여론이 강세이나 반대로 사회학자, 페미니즘 학자들 사이에서는 전형적인 여성혐오범죄이며 여성이 사회적 약자이며 강력 범죄에 취약함을 주지시키는 사건이라는 여론이 강세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극명하여 때아닌 성대결 양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이때 정도를 지켜야할 언론에서는 사건을 원색적이고 편파적으로 다루면서 논란을 부채질했다. 특히 한겨레, 경향신문 등 진보 언론에서는 워마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면서 극도의 페미나치스러운 기사를 쏟아내어 진보 진영 안에서도 성토를 당했다. 일부 유명인들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워마드에 편승하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특히 진보논객이자 미학자로 유명한 진중권은 한국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면서 "x잡고 반성이나 해라"는 폭언을 늘어놓고 욕을 먹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작 피해자와 유가족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특히 피해자의 오빠는 여혐논란에 대해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피해자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여초사이트에서는 이러한 유가족의 목소리 조차 "한국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비하로 일관하였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일반시민 사회에서는 이러한 남혐 대 여혐 논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 성별과 무관하게 해당 사건을 추모하고 취약해진 치안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데는 이견이 없었다.
- 강원 FC . . . . 5회 일치
원래 강원도는 축구 열기가 정말로 높은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강릉시에 위치한 강릉제일고와 강릉중앙고와의 대결인 [[강릉 축구 정기전]]이 고등학교 축구경기임에도 강릉시의 단오제 행사 중,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366890|가장 뜨거운 호응을 받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하고, [[K3리그]]에 참가하는 [[춘천시민구단]]의 개막전 3000명 관중 사례만 봐도 강원도의 축구열기는 분명 전국적으로도 대단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원도는 지역적으로 산세가 험해 원정을 가기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어 팀 유치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거 천안 일화가 천안시의 미온적인 지원 때문에 강릉으로 연고를 옮기려고 했는데, 당시 타 팀들이 "연고 이전은 상관 없는데, 강원도는 불편해서 안된다. 다시 생각해 봐라"는 요청이 들어왔었던 사실은 제법 유명하다. 결국 일화가 강릉이 아닌 성남으로 옮기자 이를 반기는 타 구단들의 입장이 신문에 나왔을 정도.]
허나 이 과정에서 이 과정에서 도의회와의 협조는 특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강원도축구협회와의 협의는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깜짝 쇼는 시민들에게는 이벤트였을지는 모르나 축구 및 도의회 관계자들에게는 뜬금포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강원도청측은 당초 발표한 대로 일정에 맞춰 절차를 밟아 창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 관련항목 =
- 강타 . . . . 5회 일치
|관련활동 = [[H.O.T.]], [[강타 & 바네스]], [[S (음악 그룹)|S]]
* 2004년 한류 관광의 해 ‘코리안 웨이브 2004’(Korean wave 2004) 출범식 한류 열풍의 주역, 감사패 수상
== 출생날짜 관련 ==
=== 사생활 논란에 관한 공식 입장 ===
금일 발매 예정이었던 신곡 공개는 취소하며 뮤지컬과 콘서트등 이미 정해져 있던 활동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관계된 모든 분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 개성(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 . . . 5회 일치
4살 전후까지 발현되며 확인은 새끼 발가락 관절 개수 같은 신체적 특징을 통해 개성의 유무를 알 수 있다는데,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 새끼 발가락 관절이 없다고 한다. 쓸모 없는 기관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기에 개성같은 부분이 진화되어있을 확률이 높다고. 그리고 4살 전후라는 점에서 어려서부터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의 유전이 크게 작용하는 듯 하다. 개성혼이란 문제가 나오기도 했을 정도. 다만 미도리야는 부모 양쪽 다 개성이 있음에도[* 어머니는 염동력으로 추정되는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는 아직 등장이 없으나 불을 뿜는 개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무개성인 것을 보면 유전 법칙이 절대적이지는 않은 듯 하다.
개성과 관련된 법률도 당연히 이미 제정되어 있는 상태인데 상세한 면은 나오지 않았으나 일단 자격이 없는 상태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한도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모양.[* 극중에서 뭐가 됐건 억눌린 시대라는 말이 이것과 관련이 잇을 듯하다.]
- 건즈 고어 앤 카놀리 . . . . 5회 일치
* 톰슨 기관단총
6발이 장전되는 리볼버. 헤드샷 한방에 좀비를 잡는 공격력을 가지고 있으며 총알이 처음 맞은 적을 관통한다.
* 기관총
80발이 장전되는 수냉식 기관총. 그런데 카놀리건 군인이건 이걸 들고 쏜다. 톰슨보다 데미지가 높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경대수 . . . . 5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본관}}}''' ||<(> [[청주 경씨]] ||
||<bgcolor=#C9151E> '''{{{#FFFFFF 군복무}}}''' ||<(> 육군 중위 제대(군법무관) ||
||<bgcolor=#C9151E> '''{{{#FFFFFF 가족관계}}}''' ||<(> 배우자 안승화, 슬하 1남 1녀 ||
[[1958년]]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에서 태어났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으로 병역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검사로 근무했다. 검사장까지 승진 해 대검찰청 강력부장 당시 [[바다이야기]] 수사를 한창 지휘 했다. 그러나 윗선에서 수사를 중단 시키고 대검찰청 중수부로 수사를 넘길 것을 지시했다. 이에 반발 해 사표를 제출하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이낙연]] 총리 후보자 청문회에서 이낙연 아들 군면제 관한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장남이 미공개 질병으로 군을 면제 받았음이 드러나 비판을 받았다. 이후 본인의 아들이 [[간질]]로 군면제를 받고 간질에 대한 사회적 편견때문에 병명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네티즌들은 알리기 힘든 질병임은 이해하지만 정작 비슷한 처지의 이낙연의 아들에 대해선 왜 그런 태도를 보였냐며 질책했다.
- 김광석 . . . . 5회 일치
| 관련활동 = [[동물원 (밴드)|동물원]],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나 [[부산광역시|부산]]로 상경하여 1982년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가요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 (1951년)|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동물원 (밴드)|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1996년 1월 6일 사망하였으나 사인 관련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2010년 11월 그가 태어난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05/2014060501769.html|제목=김광석 출생 50년에 주목받는 김광석 길 따라가보니...|출판사=[[조선일보]]|저자=조성관 편집위원|날짜=2014-06-05}}</ref><ref>{{뉴스 인용|url=http://www.ytn.co.kr/_ln/0115_201405251507299539|제목='김광석'으로 되살아 난 길|출판사=YTN|날짜=2014-05-25}}</ref> 2015년 11월 2일, 1975년부터 1990년까지 김광석의 매각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단독]가수 고(故) 김광석, 학창시절 보낸 창신동 집 팔려 |url=http://www.focus.kr/view.php?key=2016012200153752620 |출판사=포커스뉴스 |저자=이유정 |날짜=2016-01-25 |확인날짜=2016-05-08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0508074315/http://www.focus.kr/view.php?key=2016012200153752620 |보존날짜=2016-05-08 |깨진링크=예 }}</ref>
1964년 1월 22일, [[서울특별시|경기도 서울시]] 남창동 (서울) (남대문시장4길) 서울남대문시장 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현재는 [[연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총 3가지 주요 의문점이 있었는데 1.김광석이 목을 스스로 맸냐는것, 2.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3. 정말로 우울증이 있었냐는것이다. 1번 의문의 근거는 목을 매달 전깃줄을 묶기 위해 쓰였어야 했을 의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목을 매달 위치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살을 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또 지인은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것처럼 해서 발견됐다. 줄이 늘어나야 사람이 서있을거다. 근데 전깃줄이 늘어나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고 김광석 자택은 현재 내부 공사가 이루어져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2번 의문은 고 김광석씨는 메모광으로 유명하였는데, 아무런 유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 김광석 첫째 자형은 "(김광석은) 메모가 아주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습관이 있다. 틀림없이 유서가 있을 것이다"라고 털어놨다. 3번째 이유가 된 고 김광석씨의 부인 서해순씨가 주장한 우울증 역시 지인 말에 따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음악 동호회 지인은 "분명 말씀 드릴 수 있다. 김광석 씨가 우울증이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며 "적어도 1년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라이브 1,000회 공연 할때 매일 봤었고 그동안 병원 가는걸 본적이 없다"라고 설명했다.<ref>{{뉴스 인용|제목=故김광석 타살의혹 제기 이유 3가지 들어보니..|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6191535352210|출판사=뉴스엔|저자=허설희 기자|날짜=2012-06-19|확인날짜=2013-12-29}}</ref>
- 김만수(정치인) . . . . 5회 일치
1992년 [[민주당(1991년)|민주당]] [[원혜영]]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 부천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춘추관장을 지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문수 대 만수'''라는 드립을 쳤다.(...) 원래 시의원일 때도 지역구가 오정구에 속한 원종2동이었지만, 오정구는 자신이 모신 [[원혜영]]이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어서 결국 김문수가 지키고 있는 소사 지역구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는 김문수가 아직 개념잡고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 성실히 하고 지역구 관리 아주 제대로 하던 때였으니 탄핵풍을 등에 업었음에도 도저히 상대가 안되었다.
2005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대변인을 지냈다. 김문수가 ~~[[도지삽니다]]~~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생긴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집권여당의 인기가 최악이어서 낙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2008년은 뉴타운 광풍으로 인해 민주당계 정당이 역대 최악의 패배를 당한 선거여서 김만수 역시도 그 광풍을 빗겨가지 못했다. 2006년과 2008년 모두 김문수의 보좌관 출신으로써 지역구를 물려받은 한나라당 [[차명진(정치인)|차명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다만 실제로는 차명진 전 국회의원과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2010년에 부천시장으로 당선되었을때 당이 다름에도 차명진 당시 의원이 축하 연설을 해 주기도 했다.
본인이 보좌관으로 모셨던 분은 부천시의 국회의원 4명 중 [[원혜영|1명]]인데 자신은 시장이 되었다.(...)--그 분도 부천에서 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 김만제 . . . . 5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1934년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귀국하여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근무하였다.[* 이 때문에 역시 서강대에서 경제학 교수를 역임했던 전임 [[남덕우]], 후임 [[이승윤(정치인)|이승윤]] 경제 부총리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종인]] 등과 더불어 서강 학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1971년 [[한국개발연구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1982년까지 재임하였다.
한국개발연구원장 퇴임 후 잠시 [[한미은행]]장을 지내다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제5공화국]]의 경제정책을 주도하였다. 그의 경제부총리 재임 시절은 소위 3저(低)[* 낮은 물가, 금리, 석유가격을 뜻한다.]로 대표되는 경제 호황기로 수출 증대,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국내외적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었던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후임 [[노태우]] 정부의 출범 후, 이 때의 부실기업 처리 과정이 문제가 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 김무력 . . . . 5회 일치
[[금관가야]]의 왕족, [[신라]]의 장군이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며, 그 손자는 그 유명한 '''[[김유신]]'''이다.
금관가야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였다. 이 떄 구형왕의 세 아들은 첫째가 노종(奴宗), 둘째가 무덕(武德), 그리고 막내가 무력(武力)이다. 법흥왕은 이들에게 가야 땅을 [[식읍]]으로 주고 벼슬을 내렸다.
554년에 있었던 [[관산성 전투]]에서 원군을 이끌고 백제군을 급습하여, 백제의 군주 [[성왕]]을 붙잡아 죽이는 공적을 세워, 백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556년에 세워진 <창녕진흥왕척경비>,<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 '무력지 잡간(武力智迊干)'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잡간은 신라 관등 3위에 해당하는 지위로서, 백제 성왕을 죽인 공적으로 크게 승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김문오 . . . . 5회 일치
* 한국언론진흥재단 기금관리위원회 이사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3대 | [[지방 관청|군수]] | [[달성군|대구 달성군]] | 무소속 | 14,094 표 | 22.44 | 2위 |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낙선]] | 민선 4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4대 | [[지방 관청|군수]] | [[달성군|대구 달성군]] | 무소속 | 31,378 표 | 47.22 | 1위 | 당선_대구 |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 대구광역시#기초자치단체장|초선]], 민선 5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5대 | [[지방 관청|군수]] | [[달성군|대구 달성군]] | 새누리당 | 무투표 | 0 | 단독출마 | 당선_대구 |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 대구광역시#기초자치단체장|재선]], 민선 6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36대 | [[지방 관청|군수]] | [[달성군|대구 달성군]] | 무소속 | 64,474 표 | 58.0 | 1위 | 당선_대구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 대구광역시#기초자치단체장|3선]], 민선 7기 }}
- 김미숙(1959) . . . . 5회 일치
* [[1981년]] [[KBS 2TV]] 《[[TV문학관]] - 무진기행》
* [[1985년]] [[KBS 2TV]] 《[[TV문학관]] -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
* [[1985년]] [[KBS 2TV]] 《[[TV문학관]] - 열하일기》
* [[2010년]] 대한민국대중문화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 김민서(배우) . . . . 5회 일치
중학교 3학년 때 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오랜 공백기를 가진 후 [[2008년]]부터 연기자로 전업했다. 드라마에서는 주로 악역으로 출연했지만, 사실 악역이라기보다 [[짝사랑]] 전문(?) 배우다. '[[동안미녀]]'에서의 디자인 실장, '[[해를 품은 달(드라마)|해를 품은 달]]'의 중전 [[윤보경]], [[성균관 스캔들]]의 기녀 [[초선]], '[[7급 공무원(드라마)|7급 공무원]]'의 요원 [[신선미]] 등 대부분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남성에 대한 짝사랑을 하다 맺어지지 못하는 캐릭터다. 주인공과 연적 관계라서 관계도상 악역.
[[성균관 스캔들|성스]]의 종영 이후 [[2010년]] 11월 [[배용준]]의 기획사인 [[키이스트]]와 계약했으나, [[2014년]] 5월에 [[키이스트]]와 계약이 만료된 후 [[FNC엔터테인먼트|FNC]]로 이적했다. 이적한 이유로는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4&aid=0003259596|"같은 크리스천과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알려져 있다.
* KBS [[성균관 스캔들]]
- 김병옥(배우) . . . . 5회 일치
출연하는 영화, 드라마마다 독특한 헤어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다. 원로 배우 [[박근형]]과 많이 닮았다. --어디가?-- 얼핏 보면 ~~BJ 우마이~~ [[마츠시게 유타카]]나, 코미디언 [[송준근]]도 닮기도 했다. [[박문성]]이 이 분을 많이 닮았다. 예능 아는형님에서 [[희철|김희철]]이 닮은꼴을 자청하며 성대모사를 하는데 원래 꽃미남류라서 그리 닮지는 않았다. 그리고 [[김영환(1955)|김영환]] 前 장관과도 닮은 편.
|| 2017년 || [[보안관(영화)|보안관]] || 강 반장 || ||
|| [[허삼관]] || || ||
|| [[미녀의 탄생]] || 관상가 || ||
- 김성곤 . . . . 5회 일치
||<#796E65> {{{#white 본관}}} ||[[김해 김씨]] 삼현파 22세손||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야당 정치인 중 [[유진산]]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박정희 분노를 산 김성곤 회장은 [[길재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범죄)|고문]]을 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났다.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서 생으로 변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오죽했으면 신민당에서 문제삼으며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소위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싸그리 숙청해버린 것이다. 집권당 국회의원도 박정희한테 반대하면 잡혀가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본 이후에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과 정권내에는 박정희한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완벽한 1인 독주체제가 된다. 이 때문에 노골적인 종신집권 의욕을 보인 [[10월 유신]] 때는 집권세력 내에선 전혀 반대가 없었다.
- 김시진 . . . . 5회 일치
* [[KBO (단체)|KBO]] 경기 감독관 (2008년)
}}</ref> 정규시즌 MVP 자리에서 밀려나야 했고 [[1983년]] 홈런-타점 2관왕으로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이만수]]는 그 해 최다승(30승)(28선발승)을 기록한 [[후쿠시 히로아키|장명부]]가 재일동포란 이유 탓인지<ref>{{뉴스 인용
}}</ref> 경쟁에서 탈락해 MVP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으며 다음 해에는 최초 타격 3관왕으로 2연속 정규시즌 MVP가 유력했음에도 막판 타격왕 레이스를 인위적으로 조작했던 탓에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3 시즌 계투진의 많은 블론세이브와 투수 교체에 관한 비판이 있었고, 또한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였던 [[김승회]] 혹사 논란이 있었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296602]
그는 감독에서 물러난 뒤 [[2008년]] 한 해 동안 [[KBO (단체)|KBO]]의 경북 포항 감독관으로 재직하였다. 2017년부터 [[KBO (단체)|KBO]]의 경북 포항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 김정태(영화배우) . . . . 5회 일치
외모부터가 범상치 않은 인상으로 실제 조폭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의 남다른 포스를 가진 탓에, 초창기 배역의 거의 80% 정도는 조직폭력배이거나 그거와 연관된 직업군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조폭 연기를 했던 [[친구(영화)|친구]], [[해바라기]], [[똥개]]등의 작품에서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조폭전문배우, 조폭 연기의 스페셜리스트 소리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폭과 어찌보면 상극의 관계에 있는 경찰 역할도 다수 맡았다. 이때는 험악하고 거친 조폭일때와 달리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소인배 형사 캐릭터를 아주 그럴싸하게 소화해 낸다. 그러한 연기의 정점에 있는 작품들이 바로 [[체포왕]]과 [[히트(2007)|히트]]. 볼멘소리로 궁시렁거리는 모습이 과거의 그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
아내와는 19년간의 연애 끝에 [[2009년]]에 결혼했으며, 2011년에 아들 지후를 얻게 되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 중인 [[장현성]]의 지인으로 방송에 등장 시 아들 지후군의 관심에 힘입어 2014년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명 야꿍이로 알려진 지후군과 함께 아빠는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새누리당 [[나동연]] 양산시장 유세를 하여 논란이 되었다. 당초에는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하였지만 후보 홍보물에 이미 방문 계획이 나와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과 함께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하차하게 되었다. 다만 거짓말 논란 이전에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특정 성향 네티즌들의 비난 및 하차요구로 뭇매를 맞고 있었다. 즉, 단순히 거짓말 -> 비난 -> 하차 수순이 아니라 선행된 부당한 비난에 대한 자구적 해명이었다는 걸 참작할 여지가 있다.
* 과거 경기 연천 [[정관신도시]]에 살았으며 정관의 많은 상가들에서 그의 사인을 볼 수 있다. 현재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사는 걸로 보여진다.(살림남 시즌1 참고)
- 김종호(1933) . . . . 5회 일치
1952년에 [[해군사관학교]] 10기로 입학해 1956년 임관했다. 목성함장과 부산함장을 지냈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함대사령관을 지냈다. 해당 한국함대는 뒤에 명칭이 바뀌어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었다.[* 해작사의 영어 표기도 Naval Operation Command가 아닌 Korea Fleet Command이다. 일본의 경우 작전사령부에 해당하는 함대가 [[자위함대]]로 [[함대]]급 부대인 [[잠수함대]], [[호위함대]], [[항공집단]]의 상위기관이다.] 1986년 2월 1일에 한국함대가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자 초대 작전사령관을 지냈다.
- 김형준(배우,가수) . . . . 5회 일치
=== 인간관계 ===
* 3월 6일 허영생, 김규종과 함께 [[웃찾사]]에 출연했다. [[꽃보다 남자(2009년 드라마)|꽃보다 남자]]의 패러디를 했는데 김형준은 허영생과 함께 배우 [[박영규(배우)|박영규]]의 ‘장모님 왜 그러세요?’라는 멘트로 성대모사로 관객들을 폭소케 했다.
* 9월 6일, 15일 [[백인백곡 - 끝까지 간다]]에 출연했다. 6일에는 [[태양(빅뱅)|태양]]의 '나만 바라봐'를 열창해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여 선호단과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5일에는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불러 또 한번 감탄을 자아냈다. [[https://vimeo.com/138451045|영상1]][[https://vimeo.com/139138333|영상2]]
* 2017년 6월 24일 경상북도 김천시 문화예술회관 열리는 교통 봉사자와 함께하는 음악회 홍보단 뮤지컬 갈라 2곡 인스타 라이브에 나왔다.
== 관련 문서 ==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9화 . . . . 5회 일치
* 사걸고교의 털복숭이 학생이 와서 바쿠고 카즈키에게 시시쿠라의 일을 사과하며 "웅영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하는데.
* 드디어 시작되는 2회전. 그런데 현장에 있는 "프로 요구조자"들은 구조대상이자 시험관이기도 했다.
*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웅영하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 HUC는 체점을 맡고 있는 시험관이기도 했다.
* 역할도 착착 나눠서 구조활동에 들어가는데, 관객석의 아이자와 쇼타는 역시 이런 부분에선 훈련이 부족한 웅영고 학생들이 떨어진다고 본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3화 . . . . 5회 일치
* 웅영고 재학생 중에서도 최강으로 불리는 "빅3"의 등장. 그 존재에 관해서는 A반에도 소문이 전해져 있었지만 실물을 보는건 대부분 처음이다. [[카미나리 덴키]]는 여학생을 보고 "예쁘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론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 학생들은 체육관에 다시 모인다. 몸을 풀고 있는 선배에게 [[세로 한타]]가 "정말로 합니까"라고 묻는데 역시 진심이다. 체육관에서 조차 벽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아마지키는 "밀리오"에게 "적당히 설명해주고 말자"며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작정 싫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응. 언제 어디서 와도 상관없어.
* 아마지키는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체육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듣고 보고 있다. 학생들이 그의 개성에 경악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주목해야 할 건 "개성 자체가 아니라 그걸 쓰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밀리오는 스카우트를 거쳐 "어떤 히어로" 밑에서 그 기술을 길렀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2화 . . . . 5회 일치
* [[키리시마 에지로]]는 관서 지역의 BMI히어로 [[패트껌]], 빅3 중 하나인 "선 이터" [[아마지키 타마키]] 밑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다.
>이게 관계가 있지?
* A반의 인턴은 한 명이 더 있다. [[키리시마 에지로]]는 관서 지방의 "에스하"시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히어로네임은 "레드 라이오트". BMI히어로 [[패트껌]]의 사무소였다. 이곳은 빅3의 일각 [[아마자키 타마키]]가 인턴활동을 하고 있다. 히어로네임은 "선 이터". 왜소하고 음침한 모습의 타마키와 달리 패트껌은 엄청난 거구에 비만 체형. [[타코야키]]를 판 째로 들고 다니며 먹는 타입이다. 원래 키리시마는 직업체험 때 신세진 [[포스카인드]]에게 인턴 활동을 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그걸 마침 무투파의 신인을 찾고 있던 패트껌이 픽업, 먼 관서에서 인턴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이것도 타마키의 중계가 있던 모양인데, 타마키는 [[토오가타 밀리오]]에게 떠넘기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나 보다. 키리시마가 너무 댓쉬해와서 무서웠다고 약한 소릴 한다. 패트껌은 "그 멘탈만 어떻게 하면 인재"라며 껄껄 웃는데 그 점이 더욱 타마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멀고 먼 관서에서 일어난 총격전, 거기서 사용된 총알은 지금 시라가키가 들고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물건이다. 시라가키는 이 물건을 맞은 직후 Mr.컴프레스가 일시적으로 개성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개성을 봉인하는 마취총알인 셈이다. 시라가키는 이걸로 뭘 할 거냐고 묻는다.
- 남보라(배우) . . . . 5회 일치
||<bgcolor=#7F00FF> '''{{{#white 본관}}}''' ||<(> [[남(성씨)|의령 남씨]] ||
완도사랑채마지막칼국수였던 [[2005년]]에 11남매[* 2005년 당시에는 11남매였다. 방송 당시 셋째와 아홉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방송에 거의 비치지 않았다.]의 일상 생활을 담은 MBC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천사들의 합창"에 맏딸로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출연 직후에는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관계자들의 제의도 거절했으나 부모님의 설득과 계속된 소속사의 러브콜 끝에 연예인이 되기로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060812000512864?f=m|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남보라는 [[신동엽(코미디언)|신동엽]]이 진행하는 "천사들의 합창"을 계기로 얼굴을 알려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0곳 이상의 기획사가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08191711172510|연예인 제의를 했다고 한다.]]][* 당시 미니홈피 게시글을 토대로 보면 학교(혹은 교회)에서 성극반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사들의 합창 당시, 웬만한 눈썰미를 가진 시청자는 남보라의 집안이 [[개신교]] 집안임을 알 수 있었을 듯. 원래 초등학교를 장안동에 위치한 불교계 학교를 다니다가 저학년 무렵 전학을 갔었다.]
2006년 [[KBS 2TV]] [[시트콤]] '웃는 얼굴로 돌아보라'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하였지만 극 중에서 비중이 작은 역할이었고 시트콤 자체가 큰 재미가 없어서 [[망했어요]]..... ~~그리고 이 때는 [[발연기|연기도 더럽게 못 했다]]. 차라리 시트콤이 망한 게 본인의 경력 관리에 도움이 될 정도로..~~
어릴 때 방송 출연을 한 탓도 있지만, 데뷔한지 오래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연 미인이다. 숱한 여배우들이 휴식기 지나면 '몰라보게 예뻐졌네(고쳤네)'소리 듣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 여성의 광고 모델 중에서 미모 인정이라 할수 있는 화장품 광고에 (회사는 바뀌지만) 끊임없이 캐스팅되고 있다. [[부르조아]]화장품 모델로는 동양 최초였다. 동안에 순하게 생긴 덕에 섹시한 이미지는 없다. 섹시를 표방한 화보가 없지는 않은데, 전혀 안 어울린다. 그래도 비율도 좋고, 날씬하고 예뻐서 화보나 해외 관고아지에서 수영복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배우답긴 하다.
매주 새벽 기도를 드릴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고 한다. 그리고 개신교 관련 악세사리를 항시 차고 다닌다고 한다.
-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다 . . . . 5회 일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는 일본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구로서, 어떤 계기로 [[각성]]을 얻는 것을 뜻한다. 유래는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이다. 단순히 줄여서 "눈에서 비늘"(目からウロコ,目から鱗,메카라우로코)라고 쓰기도 한다.
이 관용구는 [[신약성서]] 『[[사도행전]]』 제9장에서 유래하였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도 바울|사울]]이 어느날 예수의 음성을 듣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사도]] [[아나니야]]가 예수의 지시를 받아 사울을 도우러 찾아간다. 아나니야는 사울을 위해서 기도를 올렸는데, 그러자 사울의 눈이 보이게 되었다. 기적을 겪은 사울은 박해에 앞장섯던 것을 회개하고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가 되어 [[사도 바울]]이 된다.
일본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관용어이다보니, 일본에서 써진 창작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주 쓰인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자의 주석이 따로 달려있지 않은 [[라이트 노벨]]이나 설명 자체가 배제될 가능성이 높은 [[애니메이션]]을 접할 때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는 경우가 많다.
[[분류:관용어]] [[분류:일본어]] [[분류:성경유래 관용구]]
- 니라오치 . . . . 5회 일치
히죽히죽(ニヤニヤ)거리면서 관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 용어이다. 니라(ニラ)는 는 니야니야(ニヤニヤ,히죽히죽, 싱글벙글)이 변형된 니라니라(ニラニラ)에서 왔다. 오치(ヲチ)는 관찰하다는 뜻인 워치(ウォッチ)에서 나온 말이다.
[[아이돌]]의 [[블로그]], [[트위터]]나 [[SNS]]에서 이상한 발언을 하는 유저에 대해서 끼어들지 않고 관찰하면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직접적으로 코멘트나 비판은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관찰하는 상태이다.
- 대한민국 망명정부 야마구치 현 설치계획 . . . . 5회 일치
[[6.25 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부 측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민국의 망명정부를 일본에 설치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제안하고 일본 정부가 [[야마구치 현]][* 혼슈의 서쪽 끝, 큐슈와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에 설치하도록 추진했던 계획. 이 제안에 관한 기초적인 기록은 전 야마구치 현 지사,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승만의 제안은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이 제안을 전달받은 일본 정부는 당시 야마구치 현 지사 다나카 다쓰오에게 임시정부를 수용할 6만명 규모의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대하여 특별 식량배급 요청 여부를 검토하였다. 당시 다나카 지사의 비서 역시 관련 증언을 하였다.
[[http://wmk.kr/ko/412 전쟁기념관]]
- 디아스포라 . . . . 5회 일치
영어에서 디아스포라는 본래 [[유대인]]과 관련이 밀접하였으며,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가리키는 의미가 강했다. 20세기에는, [[아르메니아인]]이나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나타내는 말로 디아스포라를 인용하면서 디아스포라는 다른 민족에게 대해서도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http://blog.oup.com/2013/06/10-facts-about-diaspora/ 참조]
분산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오픈소스]]로 개발되는 [[비영리]]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디아스포라 재단이라는 단체에서 관리하고 있다.
Diaspora*는 수많은 Pod를 연결하여 Diaspora*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하여 높은 수준의 암호화 기술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Pod의 관리자라도 사용자의 정보를 꺼내기는 어렵다.
=== 관련 사고 ===
좋은 뜻으로 시작한 서비스이지만, [[트위터]]에서 퇴출당한 [[이슬람 국가]]가 디아스포라를 조직원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정보 소통 통로로 악용하고 있는 문제가 생겨났다. 디아스포라는 보안 수준이 높기 때문에 그룹에 참여한 사람들 끼리만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네트워크 관리자도 이에 접근하는 것에 쉽지 않아 테러 단체가 악용하여도 추적이 어렵다고 한다. 디아스포라 개발자들은 이에 우려하고 있으나 통제가 어렵다.[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H11&newsid=01161126606190272&DCD=A00801&OutLnkChk=Y 참조기사] 뭐든지 좋은 뜻으로 만들면 나쁘게 써먹는 놈들이 있는 것 같다.
- 라이징 스톰 . . . . 5회 일치
주축군 전용.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병과.
* 기관단총
100식기관단총. 주축군 Assault의 기본 주무기. 무기 레벨이 25까지 올라가면 반동 감소와 고성능 조준기가 해금된다.
* 경기관총
96식경기관총. 주축군 Machine Gunner의 기본 주무기. 무기 레벨이 25까지 올라가면 총검이 해금된다.
- 레스터 길리스 . . . . 5회 일치
1934년, 길리스는 아내인 헬렌 길리스(Helen Gillis), 그리고 그의 친구 체이스와 함께 시카고로 가서 딜린저 갱에 들어가 강도짓을 벌인다. 그러다가 4월 말 리틀 보헤미아 산장이라는 곳에서 아내, 다른 갱단원과 함께 휴가를 보냈다. 하지만 산장 주인의 신고를 받은 FBI가 들이닥쳤고, 딜린저 갱은 헬레스를 포함한 여자들을 남겨두고 탈출한다. 이 과정에서 길리스는 W. 카터 바움(W. Carter Baum) 특별 수사관을 살해한다. 이후로도 길리스를 포함한 딜린저 갱은 활동을 계속한다.
11월 27일, 길리스 일당은 시카고에서 차를 훔쳐 위스콘신 주로 향하던 도중 FBI 차량에게 발각된다. 곧이어 FBI와 길리스 일당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길리스 일당은 FBI를 피해 도망쳤지만 또다른 FBI 차량을 만나게 된다. 새뮤얼 P. 코울리(Samuel P. Cowley) 감찰관과 허먼 E. 홀리스(Herman E. Hollis) 특별 수사관이었다. 첫번째 차량과의 총격전으로 라디에이터가 파손되어 제대로 도망칠 수 없던 길리스 일당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일리노이 주 배링턴(Barrington)에서 차를 세운다. 그러고는 뒤쫓아 오는 FBI 차량에 자동화기를 난사한다. 배링턴 전투라고 불리는 이 총격전으로 홀리스 특별 수사관은 사망하고, 코울리 감찰관 역시 치명상을 입어 다음날 사망한다. 하지만 길리스 역시 치명상을 입는다. 체이스와 헬렌 길리스는 FBI 요원들이 타고있던 차를 훔쳐 길리스와 무기들을 옮겨 싣은 다음 그 차를 몰고 도망친다.
- 롬니아 제국 흥망기 . . . . 5회 일치
* 스테라스테라 : 사이파카르의 교육담당관. 황제를 대신해 사이파카르를 제어하고 그 동태를 보고하는 역할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이파카르를 흠모하여 자신의 처지 때문에 갈등한다. 무투파가 대부분인 가신단 내에서 몇 안되는 '지모' 담당.
* 리셉트 : 캘거리의 비서관. 재상의 '암시'를 읽어내어 정적들을 제거하는 뒷공작을 수행하는 '까마귀'란 조직을 이끌고 있다.
* 자네티 : 변경주의 집정관. 매사에 소극적이고 보신주의가 강한 소시민 타입. 기억력이 좋다.
* 리리엔테르리오나슈브라피슈카 : 보통은 줄여서 '리리'라고 불린다. 집정관 보좌 및 군단장. 체구가 작고 어려 보이지만 괴력을 자랑한다. '꼬맹이'라고 부르면 화를 낸다.
* 레프라프티 : 수군사령관. 실제로는 내륙 지역인 변경주엔 수군이 없지만, 변경주로 좌천된 신분이라 임시로 달게 된 직함.
- 마기/329화 . . . . 5회 일치
알리바바 덕에 고성이 오가던 분위기는 정돈된다. 알리바바는 다소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가 암흑대륙에서 돌아와 신드바드와 벌인 상업대결이 즐거웠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게 왜 즐거웠는지 생각해 봤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대답에 도달했고, 그래서 전에 마스루르에게 "신씨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고 들었을 때 이해가 안 됐던 것도 지금은 깨달았다고 한다.
* 신드바드는 그런 알리바바에게 세상의 구조를 아냐며 선문답같은 말을 시작한다. 그는 세상은 단 한 명의 신이 관리하고 있다며 성궁에서 만났던 우고를 언급한다. 알라딘이 동요하며 우고를 만났냐며 묻는데 신드바드는 그가 완전히 미쳤다고 대답한다. 우고의 사정을 몰랐던 알라딘은 그 말에 충격을 받는다. 알리바바가 알라딘 대신 무슨 뜻이냐고 묻는데 어쩐지 신드바드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의 주변이 요동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쓸데없고 핵심과 상관없는 것까지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기 시작한다. 마치... 우고처럼.
*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사이, 신드바드의 손에 들려있던 한 자루의 펜이 기괴하게 변한다. 펜은 소용돌이치더니 우고의 수족관에 들어있던 일 일라의 그가 창조한 세상으로 바뀌고 다시 신드바드의 손아귀에서 깨어져 한 자루의 돌아간다. 알라딘과 알리바바는 그 모습에서 신드바드가 손에 넣은 힘을 실감한다.
알리바바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알라딘과 신드바드를 화해시키려고 나름대로 설득했으나 신드바드가 너무 글러먹어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알리바바가 신에게 "신이 돼버린 거냐"고 하는 장면에선 알리바바가 부모를 잃은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도 어정쩡한 관계 밖에 가져보지 못한 그에게 신드바드는 친구이자 아버지인 존재이며 그 점은 상단을 꾸릴 당시 "신드바드씨는 나의 아버지 같은 입장"이라 한 데서도 드러난다. 결국 이번 에피소드에서 알리바바가 한 말은 설득하기 위해서 짜낸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의 속내를 드러낸 걸로 보이는데, 이미 정신이 나간 신드바드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다.
- 문경시 . . . . 5회 일치
문경새재 3관문
문경석탄박물관
문경 관음리 석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문경 관음리 석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옛길박물관
- 문희옥 . . . . 5회 일치
2017년 11월 1일 같은 소속사 후배에게 사기 및 협박혐의로 고소당했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421&aid=0003024614|관련기사]] 그러던 중 피해자가 문희옥의 협박을 녹음하여 공개한 것이 파장을 일으켰다. [[https://www.youtube.com/watch?v=-2W4xDW-9jg|협박녹취록]]
11월 2일 후배가수 A씨의 아버지는 인터뷰에서 민사소송을 준비중이라고 했으나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520632|관련가사]] 1월 3일 문희옥은 사기 및 협박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725518|공식전문]] 그로 인해 12월 13일 후배가수 사기 및 협박 협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9749189|관련 기사]]
이후 2018년 3월 18일 사건은 무혐의로 끝나긴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2&aid=0000305603|관련 기사]] 이렇게 결과가 나왔지만 아직 주변 반응은 혼란스럽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결과를 인정하느냐 마느냐, 문희옥에 대해 비난하느냐 응원하느냐 따라 설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네티즌들과 수많은 팬들은 실망감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다. 여담으로 소속사를 옮겼다는 기사가 떴을때 전부 비난글이었다고..
- 물에 흘려보내다 . . . . 5회 일치
일본어의 관용 표현으로서, 어떠한 문제 등을 "없었던 것으로 하다.", "일체 탓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종교적으로 '더러움'을 흐르는 시냇물 등에 깨끗하게 씻어서 흘려보내는 관념이 있어, 물에는 '정화'를 하는 힘이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다툼이나 대립 같은 어두운 감정도 이처럼 물에 흘려보내서 '없애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관념 때문에 개인 간의 시시비비나 사회적 정의보다 집단의 화합을 과도하게 중시하여, 명백한 피해자에게 "물에 흘려보내라"는 식으로 합의를 강요하는 등의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비판이 있다.
[[분류:관용구]]
- 바실레이오스 1세 . . . . 5회 일치
바실레이오스 1세 '마케도니아인'[* 참고로 그는 혈통상 마케도니아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데도 이렇게 불린 이유는 후술.], Βασίλειος Α΄ο Μακεδών[* 현대 그리스어로는 '바실리오스'라 읽는다.], Basil I 'the macedonian'
이후 바실레이오스가 미카엘과 절친해지면서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자, 당시 실권자였으며 사실상 후계자로 점찍혔던 황제의 외삼촌 바르다스와 바실레이오스와의 관계는 나날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처음에 바르다스는 바실레이오스를 그저 변방 촌뜨기로 보고 무시했었으나, 점차 그가 미카엘과 친해지자 자신의 위치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실레이오스도 바르다스가 제위에 오르면 자신이 밀려나리란것도 예상하고 있었고, 이에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는 유약한 미카엘을 교모히 충동해 바르다스가 그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할거라고 이간질했으며, 그에게 바르다스를 제거하는게 그가 살아남을 길이라고 부추겼다. 음모는 바르다스가 크레타에 원정을 갈 준비를 할때 준비되었던걸로 보이는데, 바실레이오스에게는 아쉽게도 그의 암살음모가 바르다스의 첩보망에 걸려버렸다. 그러자 바르다스는 원정을 취소하고 수도로 가서 미카엘에게 따졌으며, 결국 미카엘과 바실레이오스는 성모 마리아 칼코프라테이아 성당에서 바르다스에게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는 공식 선언서에 서명하게 된다.[* 바실레이오스는 글을 몰라서 서명란에 십자가만 그리게 된다.] 이후 바르다스는 크레타 원정전 막사에서 황제에게 작전을 의논하던중 바실레이오스에게 죽는다.[* 죽기전에 미리 칼을 뽑았으나 바실레이오스가 그냥 맨손으로 쳐서 쓰러뜨렸다고(...)] 해당 행위는 미카엘도 어느정도 관여를 했던게 확실한듯 한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인 포티우스에게 바르다스가 반역죄로 즉결 처분되었다고 암살이 실시된 후 바로 알린것으로 알 수 있다.이후 포티우스의 조언에 따라 수도로 미카엘과 바실레이오스는 돌아갔고, 이후 성령강림절에 바실레이오스는 공동황제로 임명된다.
단독 황위에 오른 바실레이오스는 적극적으로 제국의 고토를 되찾으려 했는데, 그 중 하나인 남이탈리아의 장악을 위해서는 교황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걸 위해서 그는 우선 서방과 사이가 좋지못했던 포티우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해임하고, 그의 정적이었던 이그나티우스를 새로운 대주교로 임명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열며, 포티우스를 해임했다는 소식을 교황에게 전하는데, 당시 교황이던 히드리아누스 2세는 황제의 해당 행위를 회개의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포티우스 분열]]을 일으켜 동방과 서방교회의 관계를 험악하게 만든 포티우스를 처벌하게 만들기 위해 사절을 보낸다.
같은해 2월, 제국은 프랑크 황제 루트비히 2세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 그는 2년전에 사라센이 장악하고 있던 남이탈리아의 바리를 공격했는데,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자 바실레이오스는 그에게 해군함대를 보내 지원해주겠다고 하면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와 딸 헤르밍가르데의 결혼도 제의한다. 루트비히는 우호적인 답신을 보냈고, 869년에 니케타스 제독을 지휘관으로 한 제국의 함대가 바리를 향해 출항한다. 그러나 니케타스는 프랑크군이 군기가 형편없는 모습을 보고 경멸을 감추지 못했고, 루트비히에게 '프랑크 왕'이라고 한단계 낮춰부르기까지 했다. 결국 두사람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니케타스는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버린다.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낸것이다. 자칫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루트비히가 베네벤토를 공격하다가 그곳 공작의 포로가 되어 베네벤토를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고 복음서에 맹세를 한 굴욕을 당해 어느정도 조용해졌다.
- 바키도/116화 . . . . 5회 일치
* 도쿠가와는 지하격투장이 여느때와 같이 성황일 줄 알았지만 관객은 거의 들지 않았다.
* 관객들은 "승부"가 보고 싶은 거지 "살육극"이 보고 싶은게 아니었기 때문.
* 바키, 오로치돗포를 비롯해 격투기 관계자들만 자리하고 있다.
* 관객들은 렛츠 카이오의 죽음 이후로 "승부"가 아닌 "살육극"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던 것이다.
* 무사시가 사람 접어버리는 것도 재미있게 보던 관객들이 이제와서 윤리를 찾고 있다.
- 박부남 (1931년) . . . . 5회 일치
'''박부남'''(朴富南, [[1931년]] ?월 ?일 ~ [[2018년]] [[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소아과|소아]][[내과]] [[의사]], 대학 교수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구한 말의 관료 [[박중양]]의 손녀이며, [[청도군|청도]], [[상주군|상주]], [[청송군|청송]][[군수]]를 지낸 [[박문웅 (1890년)|박문웅]]의 딸이다.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침산동]] 출신.
== 가족 관계 ==
* 할머니 : 이주열(李主悅,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 형부 : 노영달(盧榮達, 본관은 상주(尙州))
== 관련 항목 ==
- 박승호(정치인) . . . . 5회 일치
용인대학교 졸업 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1기 공채로 입사하여 [[노태우]] 조직위원장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다가 1985년 [[민주정의당]] [[총재]]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다가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국가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김영삼]] 정부 때 관선 [[봉화군]]수를 지냈다. 이후 내무부, 행정자치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5년 경상북도공무원교육원 [[원장]]을 지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에 경상북도지사 예비후보로 등록하였으나 경선에서 현직 도지사인 [[김관용]]에 밀려 탈락하였다. 이때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개칭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7528.html|#]]
- 박옥수 . . . . 5회 일치
>제가 박옥수에게 ‘목사’안수를 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웹사이트에도 게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가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목사’라는 직위는 제가 반대의 권면을 했음에도 그 자신이 붙인 것입니다.''' 그의 직위에 대한 신임장은 없으며 그러니까 '''그 자신이 자신에게 안수를 준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교회와 교회의 체계는 그와는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목사에 대한 관점은 그와 매우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질문에 대한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그 주제는 나중에 언제 더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딕 욕은 2010년 9월 30일 사당 청소년 문화의 집 강당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교회에는 성직제도가 없어야 된다고 그들(故[[유병언]], [[이요한]], [[박옥수]])에게도 가르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6월 2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진○○(박씨와 같은 혐의를 받고 있다) 측 변호사는 박씨가 딕욕 선교사에게 안수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박씨는 4월 20일 수백억 원의 주식을 사기로 판매했다는 혐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을 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현재 항소심에서 무죄로 판결되었다.) 진○○ 측 변호사는 미국의 딕욕 선교사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딕욕 선교사가 박씨에게 목사 안수를 준 적이 없다고 답해왔다며 박씨는 가짜 목사라고 밝혔다. [[http://hdjongkyo.co.kr/news/view.html?section=22&category=1007&no=14622|기사 전문]].
[[http://www.cbs.co.kr/cbsplayer/2011/live.asp?xnum=NOCUT_MOVIE&xkey=2011/07/06134514609_61200040.wmv&url=http%3A//christian.nocutnews.co.kr/show.asp%3Fidx%3D1850923|관련 뉴스 동영상]]
결국 암치료를 받지 않고 또별만 먹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문제가 되었다. [[http://christian.nocutnews.co.kr/show.asp?idx=1850923|관련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62&aid=0000004777|또 다른 기사.]] 또한 [[한국방송공사|KBS]] 추적 60분 2012년 3월 21일자 방영분에서도 또별 사건을 취재한 바 있다. 추적 60분 보도 이후 KBS와 신동아에서 반론 보도를 냈다. [[http://m.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11450|기사 전문]] [[https://youtu.be/hNhIUwPlWKk|반론 보도 영상]] 결국 박옥수는 식품위생법 위반으로만 벌금을 받았다고 한다. [[http://www.newsmission.com/news/news_view.asp?seq=52944|기사]]
또별을 개발한 후 주식으로 ~~상장~~[* 상장한 적 없다. 주식회사로 설립하는 과정 주주로 참여했거나 비상장 장외 거래로 구주 매출을 했을 것.]하여 870명의 교인들에게 주식 200억치를 판매하였다. 또별이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면서 또별 개발사인 운화의 주식이 유망한 줄 알고 산 사기피해에 대해서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1/0200000000AKR20170711109100004.HTML|관련 기사]] 피해자 측에서 [[줄기세포]]에서 추출한 기적의 약이라는 '또별'이 알고보면 그냥 ~~[[나주 성모동산|율신액]]~~녹차가루라며 사기죄로 고소하자, 박옥수 측에서는 "해당 제품에 항암효과가 있다고 홍보한 적은 없었다."라며 발뺌하였다.
- 박제균 (1887년) . . . . 5회 일치
'''박제균'''(朴濟均, [[1887년]] 음력 4월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전인 [[1909년]]에 경상북도 [[안동군]] 주사가 되어 [[대한제국]] 말기에 관계에 들어섰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분류:188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백일섭 . . . . 5회 일치
* [[1993년]] [[MBC]] 대하드라마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 역
* [[1968년]] 《[[나그네 황금 검객 108관]]》
== 논란 관련 사태 ==
*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공개 지지하면서 무소속 [[이회창]] 후보를 비하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64591|제목=탤런트 백일섭 "이회창 뒈지게 맞아야" 발언 파문 - 당 행사에서 규탄사... 이회창 캠프 "선전포고냐"|날짜=2007-11-14|확인날짜=2008-02-01|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손병관}}</ref>. 백일섭은 추후 이 발언이 단순한 농담이었다고 해명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news_uid=202857|제목=백일섭 이회창 관련 발언 해명 “농담이 큰 오해가 됐다”|날짜=2008-01-30|확인날짜=2008-02-01|출판사=뉴스엔|저자=김미영 기자}}</ref>.
- 보루토/1화 . . . . 5회 일치
* 자신의 속성이나 비전과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고, 사실 닌자가 아니라도 쓸 수 있다.
* 보루토는 수행 따윈 상관없다며 자기 혼자 여러 술법을 쓸 수 있다고 자랑하는데, 나루토는 코노하마루에게 "뭘 가르치는 거냐"며 한소리 한다.
* 카타스케는 보루토에게 중닌 시험에 나갈 거냐고 묻는데, 보루토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 그때 초인종이 울리는데,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보루토는 현관을 열자마자 주먹질을 선사한다.
* 이 눈이 백안처럼 보이는데, 눈 주위에 나타나는 특유의 혈관은 나타나지 않는다.
- 브로포스 . . . . 5회 일치
미니건으로 무장한 몸집이 큰 무크. 게임 내에서 이름이 나오는 유일한 무크로 테러리스트 운동 기술의 정점이다. 브로를 발견하면 일정 주기마다 그 방향으로 기관총을 난사한다. 몸집처럼 맷집이 좋다.
중장갑 강화복을 착용한 무크. 브로를 보면 기관포를 난사한다. 모든 공격을 튕겨내기 때문에 지형이나 추락 데미지로 죽여야한다. 위에 올라가 근접공격키를 누르면 강화복을 탈취할 수 있다.
2번째 임무인 캄보디움의 보스. 폭탄 투하와 기관포 난사라는 두 종류의 패턴을 번갈아 사용한다.
5번째 임무의 보스. 말이 스텔스지 그냥 풀떼기로 위장한거다. 곡사포 발사, 기관포 난사, 근처에 수류탄 뿌리기라는 세 종류의 패턴을 번갈아 사용한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브로포스]]
- 브로포스/브로 . . . . 5회 일치
* 주무기: 기관총
* 주무기: 기관단총 아킴보
적을 관통할 수 있다. 6발을 쏘면 장전할 때 까지 쏠 수 없게된다.
* 주무기: 기관권총
* 주무기: 아킴보 기관단총
- 생일파티 . . . . 5회 일치
서양에서는 [[케이크]]를 차리고, 나이 수만큼 [[촛불]]에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빌면서 불어서 끄는 관습이 기본. 생일에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과 즐거움을 나누거나, 연인과 함께 알콩달콩 거리거나, 아니면 혼자서 쓸쓸하게 지내며 생일에도 만난 사람이 없는 자신의 대인관계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한국에서는 [[생일빵]]이라는 관습이 있다.
서양의 생일파티는 본래 [[이교도]]의 관습으로서, 1년 간을 다이몬(Daemon)에게 가호를 비는 행사였다고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4세기까지 이교도의 관습으로 보고 생일파티를 금기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소지섭 . . . . 5회 일치
|'''북쪽왕관자리'''
# 북쪽왕관자리 (Feat. 소프라노 한경미)
* 강원도 관광홍보대사
| 올해의 배우 문화부장관상
| 제2회 한국관광의 별 시상식
- 송종호 (1956년) . . . . 5회 일치
* 상공부 정책심의관
* 중소기업청 정책심의관
* 2004.01 : 중소기업청 혁신담당관 공업부이사관
* 2008.03 ~ 2010 :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중소기업비서관
- 슈퍼걸(드라마)/1시즌 4화 . . . . 5회 일치
제임스는 루시와 식사를 하며 애정 공세를 받지만, 제임스는 카라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떨떠름하게 느낀다. 제임스는 루시와의 관계를 힘겨워한다. 카라는 빌딩에서 터지는 폭탄 테러를 감지하고 날아가서 무너지는 빌딩을 떠받치고 화재를 끄는데, 수수께끼의 무인기가 카라를 관찰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폭탄의 잔해를 보고, 로드 테크닉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리고 행크와 함께 FBI로서 로드를 추적하기로 한다. 알렉스는 카라에게 제임스와의 관계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는데, 그 때 캣 그랜트의 전화가 걸려와서 엄청 서둘러서 카터를 데리러 간다. 카터는 굉장히 수줍은 아이였다.
행크와 알렉스는 맥스웰 로드를 추궁하지만 맥스웰은 관계를 부인한다. 카터는 슈퍼걸 뉴스를 보자 엄청나게 흥분하여 슈퍼걸의 팬심을 드러낸다. 카라는 제임스와 대화를 하는데 루시 레인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매우 떨떠름한 상황에 놓인다.
- 슈퍼맨 리벤지 스쿼드 . . . . 5회 일치
[[저스티스 리그]] [[애니메이션]]에서도 등장. 그 동안 관련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한 [[메탈로]], [[칼리박]], [[라이브와이어]], [[토이맨]], [[웨더 위저드]]로 구성되어 있다.[* 웨더 위저드는 슈퍼맨 TAS의 플래시 관련 에피소드에서 빌런으로 등장했다.]
괴력을 지니고 있으며 물질,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프로젝트 캐드머스(Project Cadmus) 관련 캐릭터.
환상을 다루며 비행능력 등도 있다. 프로젝트 캐드머스 관련 캐릭터이기도 하다.
기업가 악당. 인터갱(Intergang) 관련 캐릭터다. 언론사도 가지고 있다.
- 슈퍼히어로 . . . . 5회 일치
슈퍼히어로는 대체로 [[손오공(드래곤볼)|전투 그 자체를 목적을 삼고 있지 않으며]], [[경찰]]이나 [[소방관]]과 같은 역할을 --[[원펀맨|개인적으로 취미로]]-- 하고 있다. 물론 히어로가 다양해지면서 전투광도 있긴 하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장르와는 달리 슈퍼히어로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배경이 필수적으로 여겨진다. 설사 주인공인 슈퍼 히어로가 아무리 사회와 단절되고 고립된 존재라고 하여도 하여도, 그 활동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단순한 이야기가 많아서 관점에 따라선 유치하고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슈퍼히어로 물은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여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는데, 갈수록 단순한 [[권선징악]]의 스토리가 아니라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거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차이가 문제가 되는 이야기들을 내놓았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슈퍼히어로의 존재의의, 슈퍼히어로의 갱니적인 내면 갈등 등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리하여 역으로 독자에게 다양한 생각할 점을 던지는 깊이있는 작품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히어로에 따라 조금 달라지는데 [[슈퍼맨]]은 얼굴을 가리는 코스튬이 아니지만 이 비밀 신분은 확실하게 만들었다. [[판타스틱 포]]의 경우 없다. 그냥 자신들에 관해 다 공개했다. [[헐크]]의 경우에는 딱히 숨기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다.
== 관련 용어 ==
- 식극의 소마/176화 . . . . 5회 일치
* 시험관 엔도의 농간으로 반역자 일행은 제대로된 재료를 제공받지 못하고 눈보라에 가로막혀 재료를 구할 갈 수도 없어진다.
* 2회전 감독관 엔도.
* 감독관은 본색을 드러내며 "부족한 재료를 채우는게 시험"이라고 주장한다.
* 이들이 출발하고 나서 엔도는 전화를 받는데, 1회전 감독관 히로이에게 온 전화.
* 이들의 당혹을 보고 미소짓는 엔도 감독관
- 식극의 소마/177화 . . . . 5회 일치
* 감독관은 에리나 덕분에 요행을 얻은 거라고 폄하하지만 에리나는 직접 나서 "이들은 당신에게 질 요리인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 엔도 감독관은 허세일 뿐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각 시험장 마다 반역자들이 남아 면을 만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 당황했던 감독관은 차츰 진정하며 "단지 면을 만드는 것 뿐이라면 의미가 없다. 만족할 만한 맛을 내야 한다"며 여유를 보인다.
* 소마를 필두로 개성적인 고세츠 우동이 속속 제출되고 감독관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 엔도 감독관은 에리나의 리더쉽과 카리스마를 잔다르크게 비유하며 패배를 인정한다.
- 식극의 소마/210화 . . . . 5회 일치
* [[사카키 료코]]는 본래 장어는 등가르기가 주류고 배가르기는 오사카나 교토 같은 "관서"의 기술이라고 지적한다. 후배들은 잇시키의 내력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가 관서 계통의 기술을 사용하자 의아해한다. [[나키리 에리나]]는 그게 놀라운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십걸 출신인 그녀인 만큼 잇시키의 내력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있었다. 특히 그가 속한 "잇시키" 가문에 대해서라면.
잇시키가는 기원을 따져보면 무라마치 시대부터 대대로 교토에서 음식점을 해왔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그들은 [[키노쿠니 네네]]의 키노쿠니 가문과 함께 교토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동의 키노쿠니, 서의 잇시키란 말이 있을 정도. 이 둘은 관서를 넘어 "일식계 전체에서 양대 명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 키노쿠니는 잠시 옛일을 떠올린다. 키노쿠니 가문의 영애로 보람찬 생활을 하던 그녀. 어느날 아버지는 "잇시키 가문의 아이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됐다"고 통보한다. 잇시키 가문엔 후계자가 4살이 되면 먼 곳에 보내 훈련시키는 전통이 있다. 두 가문은 절친한 관계이기 때문에 여러번 잇시키가의 후계자를 맡아줬다. 이번에도 같은 경우. 아버지는 네네에게 잘 대해주라고 당부하며 동갑이니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보내진게 잇시키 사토시.
소마는 삶기 까지 마친 소바 면을 망설임없이 펜에 던진다. 이 상식 밖의 전개에 관객들 까지도 "기다려 설마"라고 말리다시피한다. 하지만 소마는 분명히 소바를 굽고 있다. 유키와 이쿠미는 온면인지 냉면인지 했더니 아예 구워버린다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네네도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이해불능 상태에 빠진다. 기껏 28소바로 안정적인 길을 선택해 놓고서 그걸 굽는다? 소바면은 저런 식으로 구우면 메밀의 향기가 날아가 버린다. "야키소바"라고 하긴 했지만 절대로 해선 안 될 형태인 것이다.
- 식극의 소마/216화 . . . . 5회 일치
* 그런 과거를 뒤로하고 멀쩡한 인물인 양 대중 앞에 나타난 잇시키. 그는 심사의원 앞에 자신의 요리를 내놓는다. 그의 장어요리 "히츠마부시 쿄쿠세이 기숙사풍미". 히츠마부시는 일본식 장어덮밥으로 반찬과 함께 먹거나 육수나 차를 부워 오챠즈케 스타일로 즐길 수도 있다. 전형적인 일식이지만 그가 내놓은 한 그릇은 일식이라 부르기엔 대단히 이질적이다. 우선 플레이팅부터 양식 접시를 이용했고 쌀밥이 아니라 "치즈 리조또" 위에 장어구이를 올려놨다. 관중과 [[카와시마 우라라]]가 "어떻게 봐도 평범한 히츠마부시가 아니다!"고 경악한다. 게다가 쿄쿠세이풍이란건 또 뭔가? 별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코바야시 린도]]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웃음을 터뜨린다.
유키를 비롯해서 후배들은 잇시키가 저지른 폭거에 열이 뻗혔다. 잇시키가 말한 "비장의 재료"란 전부 후배들이 쿄쿠세이 기숙사에 있을 때 만들었던 것들. 잘 보관해놨던 것들인데 어째서 잇시키가 가져가 쓰는 건가? 여기에 대해 잇시키는 뻔뻔하기까지 하다.
* 이쯤에서 잇시키가 조리한 장본인으로서 재료 해설에 들어간다. 우선 마늘. 그건 이부사키가 만든 특제 훈연 마늘칩이다. 어패류의 맛을 돋궈주는 호두나무 장작으로 만든 마늘칩. 이걸 가볍게 으깨서 토핑으로 추가하면 아삭한 식감까지 추가한다. 이 마늘칩을 추가할 수 있었던건 장어를 "칸사이풍 장어구이"로 조리했기 때문이다. 관동에서는 장어를 쪄서 조리하기 때문에 부드럽지만 기름은 많이 빠져나간다. 하지만 관서에선 찌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기름기가 있고 향이 강하게 완성되기 때문에 마늘칩 처럼 향이 강한 재료를 첨가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런 요소 이상으로 이부사키, 아오키, 사토의 정열과 땀이 베어 있어서 맛있을 수 밖에 없다고 덧붙인다. 후배들은 잘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 때문에 반발.
* 쥬리오는 일식에서 치즈와 마늘을 쓰는 잇시키의 방식에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는 "상식에 벗어나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일갈하는데 잇시키는 "이런건 나에겐 시작에 불과"하다며 코웃음친다. 가령 일식에 프랑스식 소스를 더하는 거야 말로 그의 특기다.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재료든 조리법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푸아그라나 트뤼프에 저온 진공조리를 하거나 숙성한 생선에 감귤류 과일을 곁들여 신선한 향을 내는 거나, 그에겐 어느 것이든 필요하면 쓸 수 있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그는 일식을 한다는 관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 식극의 소마/219화 . . . . 5회 일치
* 쿠가와 츠카사의 대결 주제는 "녹차". 찻잎을 이용한 요리다. 찻잎을 주제로 한 요리는 낯선 주제로 특히 쿠가와 츠카사의 전공 분야와는 아주 무관하다.
* 쿠가는 츠카사가 "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인간"이라 비난하는데 모든 것은 1학년 당시 츠카사와 했던 식극에서 시작한다.
* [[쿠가 테루노리]]는 스스로 "모든 걸 다 갖췄다"고 말하는 재수없는 부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집은 부자고 요리도 잘하고 생긴 것도 이럭저럭. 키는 못 받았지만 당사자가 애써 상관없다고 부정하는 부분이니 재쳐놓고. 어쨌든 부모의 애정도 듬뿍 받고 그만큼 여자애들의 애정도 듬뿍 받으며 무탈하게 성공가도를 걸어온 쿠가. 식극에 있어서도 다를 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다"는 말의 주인공은 자신이라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도 키는 별도 문제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신감을 전부 태워먹을 정도로 역사적은 대패배"에 대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생소한 재료. [[요시노 유키]]와 [[사카키 료코]]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유키는 "맛있는 차로 대결"인 거냐고 의문을 표하는데 료코는 "찻잎의 맛이나 향을 살리는 요리"를 하라는 걸거라 추측한다. 메구미는 하다못해 이 대결이 [[잇시키 사토시]]나 [[키노쿠니 네네]]가 낀 대결에서 나왔다면 일식 요리사인 만큼 어떤 요리를 할지 이미지가 나왔겠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미토 이쿠미]]도 같은 의견이다. 사천 요리 전공인 쿠가, 프랑스 요리 전공인 츠카사와 너무 동떨어진 주제다. 그 증거로 츠카사는 주제가 정해지자 한참 생각에 잠겼다. 둘 다 자신의 장르를 못 살리는 주제라면 남은건 2시간 뿐인 제한시간 동안 고민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게 관건이다.
그 자리에는 잇시키도 있었는데, 이땐 하급생이어서 그런지 옷도 벗지 않고 십걸로서 멀쩡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에이잔관 달리 "그래도 1석을 승부의 자리로 끌어냈다"는 점 자체가 대단한게 아니냐고 격려한다. 이게 제대로 먹혔다. 쿠가가 언제 풀죽었냐는 듯 회복. "츠카사 에이시가 2학년이 돼서 유일하게 식극한 1학년"이 자신이라는 식으로 정신승리하기에 이른다. 이젠 또 지나치게 기운이 넘치자 에이잔은 잇시키를 타박하면 "그냥 뒀으면 한 달은 조용했다"며 탓한다.
- 안석환 . . . . 5회 일치
'''안석환'''(安奭煥, [[1959년]] [[1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본관은 [[광주 안씨|광주]].<ref>{{웹 인용 |제목=안석환 인물정보 |url=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9606 |웹사이트=조선일보}}</ref>
* 2003년 [[SBS]] 드라마 스페셜 《[[때려]]》 ... 봉기봉 관장 역
* 2006년 [[KBS1]] 단막극 《[[TV문학관]] - 나쁜 소설》
* 2006년 [[KBS2]] 4부작 미니시리즈 《[[특수수사일지 - 1호관 사건]]》 ... 최준 역
* 2008년 [[KBS2]] 단막극 《[[드라마시티]] - 징계위원회》 ... 공보관 역
- 안숙선 . . . . 5회 일치
이 외에도 친이모 강순영 명인에게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와 약간의 가야금 병창을 배웠고, 함동정월(최옥삼류), 원옥화(강태홍류), 김죽파(김죽파류)에게 가야금 산조를 사사했으며, 20대에 상경한 이후에는 향사 [[박귀희]](박귀희류 가야금병창)에게 가야금 병창을 사사하여, [[판소리]], [[가야금 병창]], [[가야금 산조]]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명인이 되었다.
특히 [[1998년]]에 '천상의 소리'라는 극찬과 함께 프랑스 [[:en:Ordre des Arts et des Lettres|문예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았으며, 다음해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훈장|옥관문화훈장]]과 '올해의 국제적인 음악인상'{{출처|날짜=2015-08-13}}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2001년]]부터는 한국예술교육의 최고교육기관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성악전공 교수로 임용되어 국내 최초의 판소리 전공 교수가 된다. 이후 그녀는 퇴임하는 [[2013년]]까지 전통예술 후학양성에 힘썼으며, 현재에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소리꾼으로 많은 국내외 공연활동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2006 프랑스 기메박물관 초청 공연.
* [[1999년]] [[대한민국의 훈장|옥관문화훈장]](4등급) 수훈
- 에이스 컴뱃 5 : 언성 워 . . . . 5회 일치
그로부터 15년 후, 오시아 연방 샌드 섬 공군기지. 종군 기자 알베르 쥬넷은 훈련 교관의 기체에 동승해 조종사 훈련생들이 훈련받는걸 촬영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동쪽에서 국적 불명의 전투기가 습격. 쥬넷을 포함해 단 세명의 생존자만을 남겨버린다.
샌드 섬 기지의 사령관.
TAC 네임 하트브레이크 원. 계급은 대위로 샌드 섬 비행대의 훈련 교관이다. 국적불명기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훈련 교관. 유크토바니아에 애인이 있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오원 (조선) . . . . 5회 일치
|직업= 문관, 정치인
|본관= [[해주 오씨|해주]](海州)
'''오원'''(吳瑗, 1700년 ~ 174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吳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조선 현종|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ref name="대제학">[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1610010_001 《영조실록》 52권, 16년(1740 경신 / 청 건륭(乾隆) 5년) 10월 10일(정미) 1번째기사]</ref>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va_11712017_002 《정조실록》 38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12월 17일(병자) 2번째기사]</ref>
17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33년 교리(應敎), 1735년 [[대사간]](大司諫),<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1108007_001 《영조실록》 40권, 11년(1735 을묘 / 청 옹정(雍正) 13년) 8월 7일(계유) 1번째기사]</ref> 1736년 [[대사성]](大司成), 1737년 승지(承旨)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 가족 관계 ==
- 우라센케 . . . . 5회 일치
[[센노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마찰을 빚어 [[할복]]한 뒤, 리큐의 양자 쇼우안(少庵)은 교토에서 재흥을 허락받아 후신안(不審庵) 같은 리큐와 연고가 있는 다실을 재건했다. 또한 불교에 들어가 있던 아들 소우탄(宗旦)을 [[환속]]시켜서 가문을 이어받게 하고 다도를 보급하는 것을 맡겼다. 소우탄은 도쿠가와 가문 등에 자식들을 다두(茶頭)로서 임관시켜 가문을 부흥시켰으며, 소우탄의 자식 대에 센 가문은 셋으로 갈라진다.
* 장남 소우세츠(宗拙) : 장남인데 경력을 알 수 없다. 의절당했다는 설이 있으며, 카가 번 마에다 가문(加賀藩前田家)에 임관했다는 설도 있다.
* 삼남 코우신 소우사(江岑宗左) : 정식으로 소우탄의 뒤를 이어 「오모테센케(表千家)」를 일으켰다. 키슈 도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의 다두(茶頭)로 임관했다.
* 사남 센소우 소우시츠(仙叟宗室) : 카가 번 마에다 가문에 임관했다가, 이후에 「우라센케(裏千家)」를 계승했다.
여러 다도 유파 가운데서도 명성이 높다. 특히 우라센케는 16대 센 겐지츠(千玄室)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三笠宮崇仁親王)의 차녀 마사코 내친왕(容子内親王)과 결혼하여, 황족과 인척 관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황족, 일본을 [[국빈]]들이 와서 다도를 배우기도 한다.
- 원피스/873화 . . . . 5회 일치
하지만 페로스페로는 머리가 좋은 만큼 현실적이었다. 스무디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선 총요리장이 며칠을 들여서 그걸 만들었던가? 여러 나라에서 상납받은 "환상의 식재"도 이젠 없다. 물론 있다 해도 그걸 만들 당사자가 의식불명. 난관은 더 있다. 빅맘은 지금까지 이런 "최고의 웨딩 케이크"를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빅맘이 고대에 고대를 거듭하면서 기대치는 한껏 올라갔고, 이제 그게 다시는 못 먹데 된 셈이다.
[[샬롯 푸딩]]이었다. 샬롯가의 천덕꾸러기. 그녀는 이번 웨딩 케이크가 "초콜릿 시폰 케이크"였고 초콜렛에 관해서는 총요리장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시폰 케이크"라면 [[샬롯 시폰]]이 최고의 장인. 그녀와 언니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재현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오빠들이 정말 가능하겠냐고 입을 모으면서, 그 시폰은 벳지의 부인이고 지금은 배신자라고 말한다. 과연 그녀의 협조가 가능할까? 푸딩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그동안 숨겨왔던 세 번째 눈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번뜩이는 권총. [[상디]]를 쏘려던 그 총이다. 항상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푸딩만 알았던 시민들은 이렇게 돌변한 모습에 당황하지만 돌아가는 상황 때문에 연연할 수가 없었다. 푸딩의 "작전"은 계속된다. 그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예견이나 한 것처럼 마지막 난관도 타파한다. 재료 문제. "환상의 식재"라면 예비분이 있다. 그것도 푸딩이 거주하는 카카오섬 "쇼콜라 타운"에. 그녀는 페로스페로에게 빅맘이 루피 일행을 처치한다면 이후엔 쇼콜라 타운으로 오게 유도해달라 부탁한다. 방금까지 죽는 줄만 알았던 페로스페로가 반색하며 "고맙다"고 말한다.
나미는 일행을 루피가 상디를 기다렸던 그 벌판으로 인도했다. 거길 가로질러 유혹의 숲을 돌파하는게 최단 경로. 루피는 그 숲에 또 들어가도 될지 걱정한다. 그런데 전방을 보니 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전에 탈것으로 애용했던 킹 바움이었다. 그런데 "레이디 트리"라는 여자 나무와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던 중. 그녀의 간호를 받으며 상처를 치료하던 차였다. 루피와 나미는 킹 바움을 금방 알아봤다. 물론 킹 바움도 그들 얼굴을 알아봤지만,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반가워하는 관계였다.
잠시 뒤, 킹 바움은 또다시 나미에게 지배 당하는 신세가 됐다. 일행을 태우고 그대로 유혹의 숲으로 직진. 그 바람에 레이디 트리와는 눈물을 삼키며 헤어졌다. [[샬롯 로라]]가 준 비브르 카드를 뺏긴 줄만 알았는데, 나미는 그걸 반으로 쪼개서 하나는 잘 보관하고 있었다. 유혹의 숲의 주인인 킹 바움만 데리고 있으면 그 숲도 무사통과, 나미의 절약정신이 빛을 봤다.
- 유병수 . . . . 5회 일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홍익대학교]]로 진학했고, 홍익대학교의 전국 추계 1, 2학년 대학축구대회 우승에 기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080929174456§ion_code=10&key=%C8%AB%C0%CD%B4%EB&field=gisa_title&search_key=y |제목=홍익대, 전주대 꺾고 추계 1-2학년대회 우승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스포탈코리아}}</ref>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데뷔 시즌부터 득점포를 터뜨려 언론의 대단한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고, 국가대표에 승선하기도 하였다.
홍익대학교를 휴학한 유병수는 [[K리그 2009|2009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인천 유나이티드 FC|인천 유나이티드]]에 지명되며 프로리그에 데뷔했다. 시즌 시작전, [[인천 유나이티드 FC|인천 유나이티드]]는 창단멤버인 [[방승환]]을 팔게 되는데, 이는 주 공격수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인 선수의 이적이므로 팬들의 걱정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대표이사인 안종복 사장은 "신인 유병수가 그의 자리를 메꿔 줄거라 의심치 않는다" 라는 발언으로 유병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또한 인천의 새 감독 [[일리야 페트코비치]] 역시 앞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선수로 클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개막전에서 데뷔골을 성공시키고 무회전 프리킥을 선보이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308_0001583942 |제목='유병수 데뷔골' 인천, 부산에 1-0 승리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뉴시스}}</ref> [[2009년]] [[11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볼턴 원더러스 FC|볼턴 원더러스]]가 유병수의 영입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가 볼턴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Wanderers line up another raid on South Korea |url=http://www.theboltonnews.co.uk/sport/4734025.Wanderers_line_up_another_raid_on_South_Korea/ |출판사=The Bolton News |저자=Marc Iles |날짜=2009년 11월 12일| 확인날짜=2011년 6월 25일}}</ref> 그러나 유병수는 사실무근이라며 기사에 반박했다.<ref>{{웹 인용|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07817 |제목=유병수 "볼턴行? 금시초문, 오직 인천 우승이 목표"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엑스포츠뉴스}}</ref> [[K리그 2009|2009 시즌]]이 끝날 때까지 [[김영후]]와 [[K리그 신인선수상|신인왕]] 대결을 펼쳐 많은 주목을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910122224013&sec_id=520101&pt=nv |제목=‘유병수 vs 김영후’ K리그 신인왕 경쟁 후끈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스포츠칸}}</ref> 결국 김영후가 간발의 차로 신인왕의 자리에 올랐지만<ref>{{웹 인용|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08762 |제목=김영후, K-리거가 뽑은 2009년 '최고 신인'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엑스포츠뉴스}}</ref> 유병수는 프로 데뷔 첫 시즌만에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K리그 2010|2010 시즌]]이 시작된 후에는 7라운드까지 무득점으로 일관하다가 8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전에서 네 골을 터뜨린 것부터<ref>{{웹 인용|url=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13432 |제목=유병수 4골 '펄펄' 6년 만에 진기록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경인일보}}</ref> 시작해, 강원전까지 네 경기에서 아홉 골을 몰아쳤다. 비슷한 시기에 [[김영후]] 또한 득점포를 터뜨려 언론은 이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재조명했다.<ref>{{웹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080011 |제목=유병수-김영후는 전생에 부부?...득점 사이클 '비슷'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OSEN}}</ref><ref>{{웹 인용|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508870 |제목='찰떡궁합(?)' 김영후-유병수, 올해도 경쟁은 계속된다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아이뉴스24}}</ref> 이후 유병수는 대전전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리그 20골을 기록, K리그 최연소 한국인 득점왕과 최연소 20골을 달성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22골을 기록하며 17골을 기록한 [[호세 오르티고사]]를 5골로 따돌리고 [[K리그 2010|2010 시즌]] 득점왕을 차지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11071805472239&ext=na |제목=유병수, 올시즌 정규리그 득점왕 |출판사=마이데일리 |날짜=2010-11-07}}</ref> 2011년 2월 22일 유병수는 인천 유나이티드와 2013년 12월까지 계약 연장에 성공했다.<ref>{{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2230096 |제목=유병수, 인천과 2013년까지 계약 연장 |출판사=OSEN |날짜=2011-02-23}}</ref>
[[K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유병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의 승선이 거론되었다. 국가대표팀 감독 [[허정무]]도 그에 대해 관심을 숨기지 않았으며, 마침내 [[201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3연전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ref>{{웹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11806415&code=980201 |제목=신인 유병수, 허정무호에 ‘깜짝 승선’|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경향뉴스}}</ref> 그리고 [[2009년]] [[6월 3일]]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평가전에 후반 교체 출전하여 A매치에 데뷔하였지만<ref>{{웹 인용|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090604122105§ion_code=10&key=%C0%AF%BA%B4%BC%F6&field=gisa_title&search_key=y |제목=A매치 데뷔 유병수, UAE전 승리 위한 '비밀병기'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스포탈코리아}}</ref> 오만전이 A매치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은 삭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sportsseoul.com/news2/soccer/world/world/2009/0804/20090804101020201000000_7288524317.html |제목=6월 허정무호 오만전, FIFA A매치서 제외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스포츠서울}}</ref> 이후 대표팀과 인연이 없다가 [[10월 4일]], [[조광래]] 감독이 [[10월 12일]] 열릴 한일전을 앞두고 유병수를 발탁하면서 다시 기회를 잡게 되었고<ref>{{웹 인용|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10041004362234&ext=na |제목=한일전 명단 발표…유병수-신형민 대표팀 복귀 |확인날짜=2010-10-04 |출판사=마이데일리}}</ref> 경기가 끝나기 9분 전에 교체 투입되며 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 윤정희(1944) . . . . 5회 일치
|| [[원미경]] || [[이미숙]] || [[정애리(배우)|정애리]][* 최근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배우)|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를 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으니 이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보희(배우)|이보희]]를 참고바람.] ||
1967년, 영화 "[[청춘극장(1967)]]"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극장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http://m.kin.naver.com/mobile/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1219865&qb=67aB7ZWcIOycpOygle2drCDrsJXsoJXtnaw=&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백건우와 결혼 과정에 육영수 여사가 개입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윤정희를 총애하자 이에 [[육영수]]가 백건우와 서둘러 결혼시켜 프랑스로 쫓아냈다' 류의 소문이 떠돌았다. 위의 지식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도 윤정희와 관련된 뜬소문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 제목 || 상영일자 || 관람인원 || 배역 ||
- 윤천주 . . . . 5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관료, [[정치인]]이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필]] 등과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1963년 초대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과 관련하여 [[6.3 항쟁]]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한 징계에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 은혼/620화 . . . . 5회 일치
* 다키니는 지휘관을 잃자 혼란에 빠져 [[츠쿠요]]의 백화와 힘을 합친 가부키쵸 주민들의 반격에 격퇴된다.
* 신라의 지휘관 [[소타츠]]는 여자들을 인질로 겐가이포를 만든 인물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세계가 어찌되든 상관없다.
* 츠쿠요는 그런 독백을 하며 전장을 누빈다. 지휘관을 잃은 다키니 부대는 혼란에 빠져 가부키쵸 저항군의 반격에 퇴각하기 시작한다. 츠쿠요는 여자를 얕봐놓고 여자를 피해 달아나는 적들을 빈정거린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큐베도 "여자한테 대장의 목이 따였는데 원수도 갚지 않느냐"고 호통친다. 우연히 같은 소릴하게 된 두 여자는 마주보고 웃는다.
* 쓰러진 것 같았던 오우가이가 어느 새 기력을 되찾고 있다. 그는 "나의 뿔을 부러뜨리는 녀석이 또 나올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리검이 뿔을 꺾으면서 날이 상해 버렸고 그 탓에 두개골을 관통하지 못했다.
- 이강돈 . . . . 5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당시 드래프트 제도상 대구 지역의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가 우선권을 가졌는데, 여기서 삼성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지명해 놓고서는 이강돈에게 먼저 군대를 갔다 오면 입단시켜 주겠다고 한 것. 다른 선수에게는 관대하게 입단 조건을 걸고서, 유독 자신만 군대를 걸고 넘어지는 것에 화가 난 이강돈은 전격적으로 빙그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드래프트의 질서를 해치는 이 행동은 '''그냥 넘어갔다.'''[* 그렇긴 한데, MLB에서 [[스캇 보라스]]의 유명세를 알린 loop hole FA사건 원인이 드래프트 지명 후 15일 안에 구두로든 서면으로든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선수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의무 불이행이므로 계약 무효를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져서인 만큼, 삼성 측이 계약하지 않고 군입대를 제안한 것이 의무 불이행으로 해석될 가능성 때문에 법적 공방 들어가도 이강돈에게 승산이 있는 사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왜냐면 당시 빙그레는 막 생긴 신생팀으로서 기존의 6개 구단들보다 전력이 한참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원년 참가 팀들을 제외하고, 1군 첫 시즌을 보낸 팀들 중 최저승률 기록을 갖고 있다.] 여기에 당시 빙그레의 초대 단장인 노진호는 바로 직전까지 삼성에서 [[프런트]]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삼성은 전관예우 + 신생 구단에게 선심쓰는 차원에서 무상으로 그의 지명권을 양도했다. 그래서 이강돈은 빙그레에 입단할 수 있었고,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드래프트 질서를 거부하고도 별 일 없는 선수가 되었다.
그래도 이강돈 본인은 타율보다 안타에 더 애착을 가졌던 만큼, 타격왕을 놓친 것에 큰 아쉬움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0 시즌 막판 한대화 등과의 타격왕 경쟁에서도 마음만 먹었다면 타율 관리 명목으로 쉴수도 있었지만, "정정당당히 승부하겠다"면서 이를 사양했다. 대신 그해 이강돈은 최다 안타 1위를 차지했고, [[KBO 리그]] 역사상 최다안타 부문에서 정식으로 시상을 받은 첫 주인공이 되었다.
2013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북일고를 이끌고 결승까지 올라가 지역 라이벌인 [[공주고등학교 야구부|공주고]]와 맞붙었는데, 0:4로 끌려가던 중 상대 [[선발 투수|선발]]인 [[김훈호]]의 볼질로 한점차까지 따라간 상황에서 뜬금없는 스퀴즈를 지시했다. 결과는... 결국 준우승에 머물렀다.[* 공주고는 [[김경문]]이 활약하며 [[MVP]]로 선정됐던 1977년 이후 36년만의 대통령배 우승이었다. 이 날 경기는 월요일에 목동야구장에서 진행되었으며 공주고 동문인 손혁, 박정배, 조동화가 와서 관전했다. 박찬호는 아예 덕아웃 옆에 있었고...]
- 이름뿐인 관리직 . . . . 5회 일치
[[일본]]의 노동법에서 관리직은 잔업수당 등의 할증임금 적용에서 제외되는 것을 악용하여, 직함만 관리직으로 하고 실제로는 임금 등을 지불하지 않는 직원.
다음과 같은 4가지 경우에 이름뿐인 관리직이라고 말하고 있다.
* 관리직에 마땅한, 부서 총괄 등의 권한이 없다.
* 관리직이지만, 자신의 업무량, 업무시간 등을 재량으로 제어할 수 없다.
- 이주승(영화배우) . . . . 5회 일치
* 태권도 선수출신이다. 겨루기 선수였던듯. 9살때부터 9년동안 태권도를 했다고. 태권도 관장이 꿈이였을 정도로 열심히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때리고 맞는 게 싫어서 그만 두게 되었다. --나중에 태권도 관장도 생각하고 있다고-- 심심할때 혼자 발차기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메이킹필름에 발차기하는 모습이 종종 잡히곤 한다.
* 영화 셔틀콕은 제대하자마자 --2일만에-- 찍기 시작한 작품이다. 그래도 영화에 나올건데 머리가 좀 길어야겠다는 생각에 행보관에게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진지공사를 하면 허락해 주겠다... 그리하여 작품을 위해서 말년병장이 매일 진지공사를 나갔다. 게다가 로드무비인 특성상 운전하는 씬이 많은지라 휴가 나와서 직접 면허 2종을 땄다고. 하지만 실제 본인은 길치고 여행에 대한 두려움도 많아 여행을 잘 다니지 않는 성격이라 한다.
* 팬카페 이름을 따라 본인도 팬들을 "승승장구" 라 칭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함.
* 예전부터 매년 팬들과 생일파티를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팬이 많아지면 불가능-- 최근들어 팬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골수 팬인 경우 배우 본인과 만난 예가 허다함.
- 이준(배우) . . . . 5회 일치
||<#878787> '''{{{#EEE156 본관}}}''' ||<(> [[전의 이씨]] ||
2012년 하반기, 오연서와 커플로 [[우리 결혼했어요]] 출연 중이었으나 2013년 1월 [[김태희]] 와 [[비(연예인)|비]]의 열애설이 터진지 하루만에 오연서가 [[오자룡이 간다]]의 상대역인 [[이장우(배우)|이장우]]와 거리를 걷는 모습이 포착되어 스캔들 기사가 났다. 마치 연인처럼 서로를 대하는 모습에, 이준이 좋다면서 실제로는 이장우랑 사귀고 있었다는둥, 사건은 오연서를 나쁜년으로 몰아가기에 이르며, 이준은 위로 아닌 위로를 받는 처지에 이르렀는데... 오연서와 이장우 양측이 단순한 친구관계라면서 사건을 일축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장우 측은 가만히 있었는데 오연서 측이 사귄다고 인정해버렸다. 그러더니 "사귀는 건 아니고 좋은 감정이 있었다"라고 말을 바꾸더니 끝에 가서는 "그냥 친한 친구 사이"라고 번복. 처음과 완전 말이 바뀌어 깃털같은 태도에 빈축을 샀다.] 거세지는 여론에 팬들이 제작진에게 하차 요구를 하면서 하차수순에 놓이는가 싶었는데, 제작진이 하차는 없다고 못박았다.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하지만 이후로도 [[우리 결혼했어요]] 게시판 지분의 대부분을 잡아먹었던 상황.
여기서 끝나면 모르겠는데 1월 23일 경, 팬카페에 '''내가 로봇도 아니고 거짓연기는 더 이상 못 한다. 참을만큼 참았다'''라는 식으로 글을 올렸다가 삭제. 이에 대해서 [[우리 결혼했어요|거짓 연기]]라는 게 우결인지 관심이 쏠리는 찰나, 빠르게 소속사에서 해명을 했다. 쓴 글은 이준 본인이 썼으며, 소속사와 차후 활동에 대해서 의견조율이 잘 안되어서 쓴 것 이라고... 결국 우결에서 [[http://news.nate.com/view/20130130n26719|하차]]하여 2월 2일까지만 출연.
[[디스패치]]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baseball_new1&no=3540943|털지 못한 연예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따라다녔지만 라디오스타에서 밝힌대로 정말 김밥천국에서 김치볶음밥만 먹고 나오는 것만 포착했다고. ~~돈 안쓴다더니 사실이었구나?~~ 후에 한 번 더 따라 붙었지만 새우 튀김을 먹고 길거리에서 턴하는 모습만 찍혀 끝판왕 다운 면모를 보였다. [[디스패치]]에서 열애설 특종이 나올 때 마다 그의 김치볶음밥 썰은 전설처럼 다시금 언급된다. 그만큼 화제의 인물로 올랐으나 2018년 1월 1일 새해 첫 날, 해당지에서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연인으로 호흡을 맞췄던 [[정소민]]과 열애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http://www.dispatch.co.kr/1057864|관련 기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소속사에서 열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2017년 10월 24일 8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645212&gid=999339&cid=1073307|관련기사]]
- 이진만 (1675년) . . . . 5회 일치
이진만(李鎭萬, [[1675년]] ~ [[1752년]])은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로 자(字)는 맹능(孟能)이고, 호는 백은(白隱), 본관은 우계이다. [[1699년]](숙종 25)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시험 주제에 문제가 있다 하여 파방되었다. 뒤에 [[1702년]](숙종 28) 식년시 생원 3등에 합격하고 그 해의 진사시에 다시 응시하여 식년시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였지만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675년]](숙종 1)에 경상북도 에서 태어났으며, 도촌 [[이수형 (1435년)|이수형]](李秀亨)의 8대손이고 성균관전적을 지낸 취사 [[이여빈]](李汝香+賓)의 4대손이며, 노인직으로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을 지낸 이기정(李基定)의 아들이다. 동생으로는 이진화(李鎭華), 이진방(李鎭芳), 이진영(李鎭英) 등이 있었다.
== 관련 항목 ==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440827 도난문화재 박물관 전시 적발] 연합뉴스
- 이태현(씨름) . . . . 5회 일치
그러나 2006년 한국씨름연맹[* 흔히 (프로)씨름을 관장하는 단체가 대한씨름협회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됐다. 쉽게 말하자면, 야구로 치면 대한씨름협회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한국씨름연맹은 [[한국야구위원회]]와 같은 위치의 단체들이다.]의 막장 행정, 세력간 정치다툼으로 흑화가 되고 [[최홍만]]이 [[K-1]]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이태현은 소속팀 현대삼호중공업과 2012년까지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며 [[종합격투기]]에 뛰어든다.[* 이 때 소속 팀인 현대삼호중공업이 이태현에게 계약파기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가 취하했을 정도로 이태현은 종합격투기 진출 선언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이태현은 국내 복귀 후 인터뷰에서 "그저 관중이 있는 곳에서 시합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는데, 종합격투기의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환호, 매스컴의 관심 등을 보면서 엄청난 유혹에 시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2006년 9월에 있던 [[PRIDE]] 데뷔전에서 [[브라질]]의 히카르두 모라예스에게 1라운드 8분 8초만에 TKO패를 당했다.(얼굴에 싸커킥 '짝!') 1년 후 10월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K-1]] 히어로즈 대회에서 일본의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1회 TKO로 꺾어 데뷔 첫 승을 거뒀지만 2008년에 네덜란드의 [[알리스타 오브레임]]에게 1라운드 36초만에 KO패를 당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종합격투기에서 거둔 전적은 1승 2패. 이태현의 타고난 힘으로 상대를 테이크 다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결국 타격부분에서는 밀릴 수 밖에 없었던게 실패의 요인이었다.
- 이판석 . . . . 5회 일치
1960년 주사보(현 [[7급 공무원]])로 공무원 경력을 시작하였다. 관선 [[춘천시]]장, 관선 [[마산]]시장을 거쳐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서 재정국장, 행정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등을 지냈다.
1992년 1월부터 1993년 3월까지 관선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1993년 3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농촌진흥청]] 청장을 지냈다.
- 임관빈 . . . . 5회 일치
||||<table align=right><#ffa500><:> {{{#ffffff '''임관빈'''}}} ||
||<#ffa500><:> {{{#ffffff '''임관'''}}} ||<#ffd700> 육사 32기 ||
1953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등학교를 28기로 졸업했다. 이후 1976년 육군사관학교 32기로 졸업하여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준장시절 육군 제2군단 참모장, 육군본부 비서실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육군 기획관리참모부 정책처장을 지냈다. 소장진급 후 제6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정책홍보실장,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여 수도군단장과 육군참모차장, 국방대학교 총장, 국방부 정책실장을 지냈다.
- 장미화 (희극인) . . . . 5회 일치
|학력 = [[관동대학교|관동대학교 국어교육학과]]<br/> [[숭덕여자고등학교]] 졸업
* [[관동대학교]] 국어교육학과
* KBS1 《[[가족오락관]]》
[[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희극인]][[분류:1993년 데뷔]][[분류:관동대학교 동문]][[분류:숭덕여자고등학교 동문]]
- 장서희(1972) . . . . 5회 일치
||<#9966FF> '''{{{#FFFFFF 본관}}}''' ||<(> [[장(성씨)|흥덕 장씨]][* 2018년 1월, ‘[[아는 형님]]’에 출연해 “어디 서씨냐”고 [[이수근]]이 잘못 묻자, ~~“장씨냐고 물어야지!”라고 핀잔을 주면서~~ “흥덕 장씨다.”라고 밝혔다.] ||
'''그런데 드라마가 초대박이 났다!''' 방영 석 달만에 시청률은 30%를 돌파했고[* 최고 시청률이 무려 '''47%'''였다.], 장서희는 복수심에 불타오른 은아리영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결국 2002년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포함해 무려 '''5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배우가 한 해의 연기대상에서 5관왕이라는 수상을 한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 당시 장서희의 연기력을 얼마나 인정받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사례.] 드라마 한 편으로 무명에서 연기파 배우 & 인기 스타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인생역전인 셈.
다만, 이 연기력이 주로 [[막장 드라마]]같은 자극적인 연출 내에서 빛을 제대로 발하는지라 약점 아닌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누구든 장서희를 떠올리면 복수의 화신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니...[* 복수극이 아닌데도, 장서희만 나오면 어르신들이 '''“그래서 쟤는 언제 복수한대니?”'''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젊은층도 그렇다~~] 그래서 복수극을 촬영한 다음에는 색다른 작품에 출연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해 왔으나, 이상하게도 비(非)복수극들은 작가의 삽질이나 안습한 대진운 등이 겹쳐서 인기를 끄는 데 실패했다. 일각에서는 '장서희의 연기력이 좋긴 하지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은 연기력에 비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아내의 유혹]]같은 작품을 보다보면 안목이 부족해도 연기력이 저 정도면 무슨 문제랴 싶은 생각이 든다. 너무나 개연성이 부족한데 신애리를 용서하고 다시 애정어린 관계로 돌아간다. 일일드라마라 티가 덜 났나 하는데 2018년에 하루에 4편씩해주는걸 보다보면 정말이지 배우들의 연기력에 치얼쓰하고 작가의 막장력에 기브업하게된다.
* 나이에 비해 [[동안]]이기도 하다. 데뷔할 때나 지금이나 본판이 크게 안 바뀌었다.[* 물론 당연히 관리를 받기도 하는데, '[[한밤의 TV연예]]'에서 엄청 부은 얼굴로 나와서 “피오나 공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보톡스]]를 맞고 나서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데다가 감기까지 겹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 장세현 (배우) . . . . 5회 일치
《[[성균관 스캔들]]》에서 '성균관 상유 3인방' 중의 하나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서 주목을 받은<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5&aid=0002315234 성스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지" 감초 3인방은 누구?]</ref> 장세현은 《[[내일도 칸타빌레]]》에서 마수민을 맡아 유진([[주원]])에 첫눈에 반한 '유진바라기'로 설내일([[심은경]])과 경쟁관계에 놓이는 역할을 맡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532683 신예 장세현, '내일도 칸타빌레' 캐스팅…심은경과 천적관계]</ref>
| [[성균관 스캔들]]
- 장평도정 . . . . 5회 일치
'''장평도정'''(長平都正, ? - ?)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족이다. 조선 [[조선 태종|태종]]의 손자이자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이며, 이름은 이흔(李訢)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15대조로, 이승만은 그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다.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이순신 (1554년)|무의공 이순신]]은 그의 6대손이다.
그의 초기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37년]](세종 19년) [[2월 21일]] 정윤(正尹)에 제수되고<ref>세종실록 76권, 1437년(세종 19년, 명 정통 2년) 2월 21일 신사 2번째기사, "권전·윤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나중에 작위 개정으로 장평부정(長平副正)에 봉해졌다. [[1454년]](단종 2) 승작하여 장평정(長平正)에 봉해졌다가<ref>단종실록 11권, 1454년(단종 2년, 명 경태 5년) 5월 21일 신미 1번째기사, "세조가 경회루에서 풍정을 올리다"</ref> 뒤에 도정으로 승진했고, 품계는 [[명선대부]]에 이르렀다.
[[파평 윤씨]]와 [[진주 강씨]] [[강위]](姜偉)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파평 윤씨는 딸 둘을 두었고, 진주 강씨에게는 3녀를 두었다. 서자로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 · 우성령(牛城令) 이석(李碩) 등의 2남이 있다. 부림령의 시호는 정숙공(靖肅公)이며, [[원주 변씨]] 변처관(邉處寬)의 딸과 혼인하여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ref>이윤인은 이승만의 13대조 할아버지이다.</ref> · 유제도정(楡梯都正) 이윤의(李允義) · 덕풍부령(德豊副令) 이윤례(李允禮) 등의 3남을 두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rfo.co.kr/html/pachong_view.php?No=39&mode3=history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봇이 따온 제목 -->]</ref>
== 가족관계==
**서자부 : 원주변씨([[1490년]] - [[1539년]]), 변처관의 딸
- 전민희 . . . . 5회 일치
* 《[[아키에이지]]》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종족 중 '누이안'의 조상인 '키프로사 데이어(Cyprusa Daeior)'가 주인공이다.
== 관련 내용 ==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 걸쳐 '패러렐'과 유사한 구조가 등장한다. [[세월의 돌]]에서는 200년 전과 현재의 사건이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고 있고, [[룬의 아이들: 데모닉]]에서는 주인공의 조상과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의 조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세월의 돌-에제키엘 나르시냐크, 룬의 아이들 데모닉-초대 아르님 공작). 이런 구조가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점술'과 '별자리'와 '타로'의 부분이 각각 세월의 돌, 룬의 아이들-데모닉, 태양의 탑에 순서대로 나타난다. 세월의 돌에서는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던 점술에 대한 막연한 부분이 태양의 탑과 데모닉을 거치며 점점 구체화된다. 이것이 소설의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양의 탑의 각 장의 제목은 타로 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 중 몇 장의 카드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각 카드의 의미와 소설 내용의 연관성을 보인다.(메이저 아르카나는 원래 운의 내용이 '강한' 사람의 점을 칠 때에 나타나게 되는 카드다.)
- 절대가련 칠드런/439화 . . . . 5회 일치
* 검은 선글라스가 "관리관은 바빠서 일개 에스퍼를 일일히 만나주지 않는다"는 말만 듣는다.
* 산꼭대기에 낡아빠진 시설물이 있는데, 사카키는 "관리관은 우리가 여기서 뭔가 하길 바라는 건가?"라고 의문스러워한다.
* 하지만 미나모토는 이곳을 알아보고 "출세는 물 건너가고 퇴직을 앞둔 사람들만 온다는 전설의 부수 '모호츠쿠 관측소'"라고 소리친다.
- 절대가련 칠드런/464화 . . . . 5회 일치
이것은 [[쿠모이 유리]]가 보여준 환상. 이들은 모두 블랙 팬텀 산하의 경비업체에 소속된 용병들이다. [[효부 쿄스케]]는 신념도 뭣도 없이 상황이나 이득에만 관심있는 녀석들은 최면에 걸리기 쉽다고 비아냥 댄다. 그러자 유리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나 [[길리엄(절대가련 칠드런)|오빠]]도 세력을 키웠다."고 자조한다.
* 일행이 잠시 정체된 그때 갑자기 후지코의 방이 열린다. 하지만 거기서 나타난건 관리관이 아니었다. 세뇌된 [[키리츠보 타이조]] 국장과 [[카시와기 오보로]] 대위. 미나모토의 예상대로 관리관은 이 상황을 예측한 건지 두 사람은 일행을 환영하며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데.
- 절대가련 칠드런/470화 . . . . 5회 일치
* 일본 정부도 에스퍼관리 및 규제 법안을 상정했고, BABEL의 [[키리츠보 타이조]]국장과 [[카시와키 오보로]] 대위는 다시 세뇌되어 찬동.
* 작전은 세뇌된 이들을 관리하는 블랙 팬텀의 감응 네트워크 포털을 탈취, 붕괴 것. 그러자면 포털의 3분의 1 이상을 탈취해야 하나 아직 포털의 위치조차 모른다.
* 코메리카 합중국은 반에스퍼 정책을 펼치는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는 "노멀 우선 주의"를 제창하며 초능력자에 대한 규제 관리를 강화하고 에스퍼 시대 이전의 질서로 되돌리려 한다.
* 작전 실패 후 퀸 오브 카타스트로피 호에서 은둔하고 있는 칠드런 일행. Tv에선 에스터 규제 관련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일본도 국제적인 반 에스퍼 흐름을 이어받아 에스퍼에 대한 관리 및 규제 강화 법안이 통과됐다. 바벨의 [[키리츠보 타이조]] 국장과 [[카시와기 오보로]] 대위는 다시 세뇌됐는지 넉살 좋으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정대석 . . . . 5회 일치
정대석은 전통적 기반위에 현재의 감성을 입혀 새로이 재구성하여 거문고를 일반인에게 알리고 보급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연주자다. 출중한 거문고 연주자로서의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그동안 고고하게 기품을 유지해 온 거문고를 일반 계층에게 전파시키는데 기여해온 바 크다. 그는 거문고와 더불어 연주자 및 창작자로서의 삶을 일관하여 온 사명의식을 갖고 있는 국악인이다. 정대석은 일찍이 거문고의 창작음악에 몰두하여 많은 거문고 곡을 탄생시켰으며 그 곡들은 거문고의 고유한 특징과 매력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을 받고 있다. 거문고연주자 정대석은 이런 관점에서 면면히 자기완성을 의지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국악인으로서의 자태를 유지해온 예술인이다. KBS국악관현악단 수석 및 악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 서울악회 동인, 거문고연구회 동보악회 대표이다. 2003년 KBS국악대상 대상 및 현악상과 제2회 대한민국 작곡상을 수상하였다.<ref>[http://www.segye.com/content/html/2007/03/11/20070311000979.html 거문고 명인 정대석씨 ''非음대'' 첫 서울음대] 교수세계일보(2007.03.12)</ref>
* KBS국악관현악단 수석, 악장 역임
*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 역임
- 정서임 . . . . 5회 일치
* 1986년 KBS2 tv문학관 《[[그해 여름]]》 - 주연
* 1986년 KBS2 tv문학관 《[[B사감과 러브레타]]》
* 1985년 KBS2 tv문학관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
* 1985년 《아침마당》 - 63빌딩 개관시 아쿠아리움 소개
* 1987년 《가족오락관》 - 김성환씨와 출연
- 정좌관심 . . . . 5회 일치
송나라 이후 [[유교]]에서 주장하는 수행법이다. 정좌는 조용히 앉아서(정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관심)으로서, 줄여서 정좌(靜坐)라고 하였다. [[주희]]는 특히 이를 강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안정 상태로 두는 거경(居敬)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독서]]와 함께 수행법으로서 중시되었다.
유교의 정좌는 [[불교]]와의 대립, 영향 관계에서 나타난 수행법으로 보인다.--[[좌선]] 퍼가요~-- 실제로 주희는 자신의 저작에서 유교의 '정좌'는 [[불교]]의 [[좌선]]과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이후에는 오히려 불교와의 관련성을 지적받게 되었다. [[정약용]]은 주희가 강조한 '본성'과 '명덕'이 『능엄경』의 '여래장'과 동일하며, 주희가 주장한 공부 방법 역시 불교의 [[좌선]]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주희가 불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반론도 있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정좌관심은 간화선과 같이 한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돈오돈수)가 아니라 독서와 병행한 '점진적'인 깨달음(돈오점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한국 불교에서 주류가 되는 [[간화선]]보다는 이후 불교계에서 쇠퇴하여 사라지는 [[묵조선]]과 유사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 주희의 철학과 불교의 관계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 정차온 . . . . 5회 일치
'''정차온'''(鄭次溫, [[1399년]](정종 1) ~ ?)은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 정씨|경주]]이고 자(字)는 공후(孔厚)이다. [[경상북도]] 출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조산대부(朝散大夫)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상주]][[판관]](尙州判官)에 이르렀다. [[1455년]] [[조선 단종|단종]](端宗)이 강제로 [[조선 세조|세조]](世祖)에게 강제로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세조가 평양판관(平壤判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 관련 항목 ==
- 정채진 . . . . 5회 일치
'''정채진'''(鄭埰鎭, [[1932년]] [[4월 27일]] ~ [[2008년]] [[7월 26일]] , [[대구광역시|대구]])은 공무원이자, 시민사회 운동가이다. 검정고시 출신 관료로 일반 공무원 공채에 합격, 공무원 재직 중 다시 보통고시에 합격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대구직할시장]], [[경상북도지사]], [[부산직할시장]]을 역임하였다.
* 1968 : 내무부 기획예산관
* 1973.01 : 내무부 지방항공담당관
* 1980.08 : 내무부 지방차관보
최초의 고졸 검정고시 출신 장관, 도지사이기도 하다.
- 정충원 . . . . 5회 일치
'''정충원'''(鄭忠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烏川忠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 12일]]<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정충원의 출생일이 [[1893년]] [[5월 22일]]로 표기되어 있으며 사망일은 미상으로 표기되어 있다.</ref>)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금융인으로 본관은 연일이며 다른 이름으로 '''정종원'''(鄭宗源, 1949년 10월 개명한 이후부터 사용한 이름)이 있다.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재직 중이던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 당시 공습에 대비한 방공 사무를 수행하는 한편 군용 자동차를 징발하고 운전수를 징집하여 [[관동군]]의 군사 작전에 협조했다. 또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차원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검거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적극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 을(功勞 乙)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3월 31일 평안남도 성천군수, [[1943년]] [[3월 29일]] 평안남도 순천군수로 각각 임명되었고 [[1942년]] [[4월 8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조흥은행]] 취체역을 역임했으며 [[1956년]] 10월부터 [[1961년]] 4월까지 조흥은행 은행장, [[1958년]] [[금융통화위원회]] 정위원을 역임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과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
- 정해창(정무직공무원) . . . . 5회 일치
고등고시(제10회) 사법과 및 행정과에 합격하여 1962년부터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였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차관]]을,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사법연수원]] [[원장]] 등을 지냈다.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습 차원에서 [[김성기(1935)|김성기]]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법무부 장관|장관]]이 경질되자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어 1988년 12월까지 역임하였다.
법무부장관 퇴임 후인 1989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을 설립하였다. 1990년부터 1993년 초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장|장]]을 역임하였다.
- 정환덕 . . . . 5회 일치
'''정환덕'''(鄭煥悳, [[1857년]] ~ [[1944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이자 [[대한제국]]의 문신, 작가으로 본관은 연일, 휘는 환덕(煥悳), 호는 퇴산(退山)이다. 시종원 부경으로 궁궐에서 15년 동안 재직하면서 궁 안에서 듣고 본 온갖 일들을 저술하여 "[[남가록]](南柯錄, 남가몽)"이라는 책에 남겨 놓았다.
[[고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정종소]](鄭從昭)의 12세손이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영월 환고사에 배향된 현령 증 병조판서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며, 대구부의 청호서원(淸湖書院)에 배향된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의 8세손이다. 증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식원좌장례(禮式院左掌禮) [[정하형]](鄭夏亨)의 증손이며,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감승(秘書監丞) [[정윤휴]](鄭胤休)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선전관(宣傳官)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군부협판(軍部協辦) [[정의채]](鄭義采)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와 증 정부인 주씨(貞夫人 周氏)이다.
==가족관계==
== 관련 항목 ==
- 주현미 . . . . 5회 일치
연예인 중에서는 나름 엘리트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중앙대학교]] [[약대]]를 졸업해서 [[약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 딸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원한 어머니의 바람이 컸다고 한다.] 이후 약국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수줍음 타는 성격이라 사업수완이 없었던데다 원칙을 고수하는 탓에 손님이 없어 일찍 가게를 접었다고 한다. 당시 [[의약분업]]이 이뤄지기 전이었는데, 증상과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영양제나 항생제 등을 달라는 손님들에게 그럴 수는 없다고 거절하다보니 별난 약사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https://youtu.be/lw2MKM2wwZE|약국이 망해서 가수한 주현미]]
트로트계에서는 이미 넘어설 수 없는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곡의 스타일이나 가창법도 기존 가수들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국민가수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만큼 음반판매, 히트곡의 수, 실력, 자기 관리 면에서 흠 잡을 곳이 없다. 음색이 얇으면서도 강하고 부드러워 ~~음색계의 깡패보스~~ 애절하거나 높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기억하기 쉽지만 성량이 굉장히 풍부해 라이브를 들어 본 사람은 놀랄 정도. 여기에 특유의 고음 뿐 아니라 중저음이 굉장히 탄탄하고 매력있어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보컬리스트이다.
그럼에도 역대급 보컬리스트를 논할 때 발라드나 알앤비 위주의, 소위 디바 스타일 가수들보다 비교적 언급이 적을 수도 있었는데 이는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한 전반적인 낮은 시선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주현미는 락밴드 활동으로 음악을 시작했으며 클래식, 락, 알앤비,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저 트로트의 여왕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넘사벽급의 실력과 표현력을 가진 가수.'''
* 전성기 시절에는 1년 내내 딱 1일만 빼고 휴일 없이 방송과 지역 행사를 모두 수행한 적도 있었단다. 참고로 그 하루는 [[현충일]]. 현충일에는 유흥업소들이 자체적으로 휴업하는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 관련 문서 ==
- 진격의 거인/94화 . . . . 5회 일치
* 얻어맞은 라이너를 베르톨트가 위로해주며 "13년 밖에 못 살아도 괜찮겠냐"고 묻는데, 라이너는 "영웅이고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거니 상관없다 답한다.
파르코는 라이너를 의식해서 힐끗힐끗 돌아봤던 건데, 가비는 그걸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 이걸 "반역의 예조"라며 부대에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파르코가 "이게 누구 때문인데!"고 항변한다. 가비가 알아듣지 못하자 라이너와 지나가던 병사들이 "가비 너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당사자만 의미를 몰라서 반발하느라 파르코에게서 관심이 떨어진다.
[[사샤 브라우스]]의 일이었다. 교관이 무슨 짓이냐고 물었을 때 조차 "맛있어 보여서 훔쳤다"고 대답하던 그녀. 이런 악당인데다 상황이 위험하다가 판단되자 교관을 매수하려고 감자의 반을 제시했다. 하지만 거기서 내민 양은 절반에 절대로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다. 정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야비함. 이 뿐만이 아니다. 화장실에 가더니 뭘 싸러 갔는지 잊어버려서 그냥 돌아오는 얼간이, [[코니 스프링거]]도 있었다.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 것도 신경 안 쓰는 불성실한 [[장 키르슈타인]]. 반대로 남을 끔찍하게 챙겼던 [[마르코 보트]]. 그리고...
* 당시에도 대장은 마가트였다. 그때는 마레의 전사들 지원자들의 교관이었다. 지원자들은 폭풍 속에서 각개전투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숨이 차고 치가 떨리는 훈련이지만 라이너는 버텼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앞서나갔다. 라이너가 다급한 마음에 기다리라고 손을 뻗어보지만 멈출 리가 없다. 이건 경쟁이다. 결국 그를 앞서간 [[마르셀 갤리어드]]가 합격을 거머쥔다.
- 진격의 거인/95화 . . . . 5회 일치
라이너가 할 말을 잃은 동안, 가비는 그걸 무언의 동의로 이해한 것 같다. 그녀는 곧 거인학회의 최신 연구를 인용한다. 아홉 거인의 "기억 계승"에는 "혈연관계가 강한 영향을 준다"는 내용. 가비는 그게 라이너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턱의 거인과 [[마르셀 갤리어드]]의 궁합도 좋다. 턱의 거인은 강습형이라 할 만하다. 가장 작지만 가장 빠르며 강력한 턱과 손톱은 대부분의 적병기를 파괴한다. 임기응변이 능한 마르셀에게 적격이다. 그걸 입증하듯 적진의 기관총 포탑을 기습해 박살내 버린다.
초대형 거인이야 말로 마레 측이 가진 최대의 "전략병기"였다. 베르톨트는 관처럼 생긴 케이스 안에서 그대로 거인화, 경계하며 피난이 한창이던 마을이 그저 그것만으로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마레의 장교들은 단 한 마디로 이것을 표현했다.
* 작전이 발표되자 전 국민적인 성원이 뒤따랐다. 작전에 참가하는 네 사람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카퍼레이드까지 벌이며 최고의 환희를 맛본다. 언제나 심드렁한 애니는 여전히 관심없어 했지만. 라이너는 거리를 가득채운 시민들 사이에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감격한다. 그런데, 그는 퍼레이드에서 등 돌리는 어떤 남자를 발견한다. 낯설지 않다, 감이 왔다.
* 가비의 발언을 통해서 거인을 계승할 때 기억을 전승받는건 혈연과 깊은 연관이 있음이 밝혀졌다.
- 진격의 거인/98화 . . . . 5회 일치
* 수용구 안에서는 "축제"가 준비 중. 실제로는 타이버가가 팔라디섬 침공을 선언하는 "선전포고" 연설이 메인이벤트다. 가비는 타이버가의 연설이 잘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도는 마레인 이상으로 엘디아인을 증오하는 세계의 사람들이 협조해줄리 없다고 생각한다. 때마침 마가트와 [[빌리 타이버]]도 준비 중인 무대를 살펴보고 있다. 빌리가 한 달 전 본부를 방문했을 때 둘은 "협력관계"를 구축했고 빌리는 마가트에게 군의 전권을 넘기기로 한 상태다. 마가트는 이 나라가 "빌리 타이버의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빌리는 그런 의식이 없다. 그는 자신을 "나라는 마레인과 엘디아인 모두의 것이고 자신은 그저 조타수일 뿐"이라 여기는 데다, 그 역할을 버거워하고 있다. 마가트는 "집안"이 무너질 위기지만 쓸만한 자들도 있고, 그들이 "집안에 생쥐가 들어왔다"는 정보를 전했다고 귀띔하는데.
예거 박사의 입을 통해서 그의 숙부뻘 되는 인물이 엘디아 복권파의 간부였고 그 바람에 일족 전체가 연좌제로 고생한 사실이 밝혀진다. 정황으로 보면 그 숙부가 그리샤 예거를 가담시킨 "그라이스"란 인물. 콜트가 짐승의 거인을 계승하게 된 덕에 겨우 사정이 나아졌는데 반대로 현 짐승의 거인 계승자인 지크의 가족과는 다소 불편한 관계가 된 모양이다.
에피소드 초반에 라이너가 참모들에게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에 동석. 하지만 진행 중인 이야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라이너가 조금 이상하게 여길 정도. 그의
속셈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밝혀진다. 한 달 전 빌리 타이버의 방문 때 협력하기로 결정하고 내통하는 관계가 된 것. 부패한 군당국을 "집의 증축 건"으로 비유해서 "대대적인 해체공사가 필요하다"고 보고한다. 빌리는 만족스러워하며 그에게 군의 전권을 맡기고 "원수"로 승격시킨다. 이때 빌리가 "군은 네 것"이라 말하자 "군은 나라의 것이며 나라는 빌리의 것"이라고 대답하는데, 사실 빌리는 그렇게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안심시키듯이 "집안이 무너질 판이지만 쓸만한 기둥도 있다"며 그들이 보고한 집안에 든 생쥐에 대해서 전달한다.
축제 준비 현장에 나타나서 무대 건설 상황 등을 체크. 이때 마가트가 나타나 무대는 순조롭냐고 묻자 순조롭고 "나에게 연출가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를 떤다. 마가트와 협력관계를 구축했으며 그가 군의 개혁 방안을 보고하자 만족하며 원수로 승격시킨다. 하지만 마가트가 "이 나라는 당신의 것"이라 말하는데에는 난색을 표한다. 의외로 그는 나라는 누구의 것도 아닌 국민의 것, 마레인과 엘디아인 모두의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은 단지 조타수인데 그것도 우연히 그 역할을 계승하게 된 남자라며 부담감을 피로한다. 은연중에 "선대 중 누구도 이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고 말하는데 타이버가에는 아직도 비밀이 많은 듯.
- 창작:좀비탈출/5-1-1-1-1-2 . . . . 5회 일치
나는 오래간만에 샤워를 했다. 녀석들이 수도관을 파해치던 것과 그로인한 찝찝함은 잊어버렸다. 하긴 내 눈으로 아직 수도관은 멀쩡한걸 보긴 했으니까. 물론 그 밖에도 이 물이 어디에도 오는지, 그쪽은 안전하게 버티고 있는 건지 생각할 거리는 많았지만 피로와 의혹도 물줄기에 쓸려 보냈다.
꿈에 토트넘이 나왔다. 녀석은 여전히 거무죽죽한 면상을 한 주제에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라 하마터면 현관까지 달려나갈 뻔 했다. 그 대신 집 안에서 이렇게 소리질렀다.
지금은 내 의지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 무언가를 향해서. 지금은 손 뿐이지만…… 손에서 끝날까?
- 천장호 . . . . 5회 일치
서울고등학교 20회 동기로는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육군사관학교), 강호문 삼성전자 부회장(서울대), 이민주 에이티넘파트너스 회장(연세대), 유웅석 전 SK건설 사장(서울대), 이종수 SH공사 사장(서울대)등이 있다. 당시의 서울고등학교는 졸업생 대부분이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육군사관학교,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등 최고 명문 학부에 진학하던 시절이었다.
[[광운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연구처장, 중앙도서관장, 대학신문 주간, 학생처장, 부총장 등을 지내고, 2014년 1월 광운대학교 제9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 최동 . . . . 5회 일치
본관은 [[해주 최씨|해주]]이며 [[한성부]] 출신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전라남도)|순천군]] 군수를 지낸 아버지 [[최정익]]을 따라 [[순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놓고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도일했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수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미국]]으로 떠나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라 고학을 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최동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개화파]]의 [[박영효]], [[서재필]], 계몽운동 계열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장해서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에 크게 영향 받아 본업인 의학 연구 외에 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 최두선 . . . . 5회 일치
|본관 = [[동주 최씨|동주]]
본관은 [[동주 최씨|동주]]. 호(號)는 각천(覺泉)이다. [[한성부]] 출생이고 한때 [[철원군 (남)|강원도 철원]]과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제8대 [[대한민국의 총리|국무총리]]를 지냈으며 [[유엔]]총회 한국대표,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1920년]] [[6월 16일]] [[경성부]] 명월관에서 열린 [[조선체육회]]발기인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ref>이학래 《한국체육사연구》 (국학자료원, 2006) 375~376페이지</ref>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 최성관 (1925년) . . . . 5회 일치
| 이름 = 최성관<br />崔聖寬
'''최성관'''(崔聖寬. [[1925년]] [[9월 5일]] ~ [[1999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 [[영화 감독]], [[영화 편집자]]이다.
[[1925년]] [[9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국학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 《선화 공주》를 감독하였다. 감독활동은 1959년 《남의 속도 모르고》, 1962년 <태양(太陽)을 등진 사람들>로 이어졌다. 김근자, 박귀희 주연의 <선화공주>는 흑백영화로 일관되다시피한 당시에 16미리이기는 했으나 모처럼 천연색 필름으로 촬영하여 큰 관심을 끌었다. 이는 홍성기 감독이 <여성의 일기>(1949)로 색채 화면을 선보인 이후 두 번째의 시도였다. 그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99년]] [[7월 19일]] 별세하였다.
* {{KMDb 사람|00000718|최성관}}
- 최성원(가수) . . . . 5회 일치
* 관련 문서: [[가수/한국]]
1990년 '어린 왕자'[* 1985년 우리노래전시회에서 강인원이 불렀던 곡을 리메이크했다.], '솔직할 수 있도록' 등이 수록된 2집을 발매하였다. 사실 이 음반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명곡들이 상당히 많다. 도입부의 나레이션과 몽환적인 분위기의 '어린왕자'와 낙관적인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솔직할 수 있도록'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들국화 초기 시절의 추억을 담은 '생각이 나는지', ccm풍이 물씬 풍기는 '행복의 열쇠'와 최성원 특유의 음색과 곡의 멜로디가 잘 어울려져 있으며 손진태의 기타솔로가 인상적인 '네 눈 앞에만' 등 수록된 모든 곡들이 명곡이다
* 들국화 시절 전인권과 정말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최성원과 전인권은 [[비틀즈]]로 따지면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라고 할 만큼 애증의 관계. 음악 성향부터 사생활까지 극단적으로 다르며, 각자 음악적 역량도 뛰어나고 주관도 너무 뚜렷한 둘은 들국화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고 한다. 재미 있는 것은 이들을 중재해 주던 것이 드러머 주찬권이었는데, 이것도 [[비틀즈]] 시절의 [[링고 스타]]와 판박이. 이후 전인권이 약물중독 등의 방황을 벗어난 후에는 서로 인정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들국화 재결성은 힘들 듯~~
- 최성준 (법조인) . . . . 5회 일치
최성준은 1957년 7월 12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3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86년 9월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1989년 3월 서울형사지방법원 1990년 9월 제주지방법원 1992년 8월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판사를 거쳐 1994년 법원행정처 송무국 심의관으로 발령받았다가 1995년 3월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98년에 특허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였다. 이후 2000년 2월 수원지방법원, 2002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를 계속하였으며 2005년 2월 특허법원 고등부장판사, 2006년 8월 특허법원 수석부장판사, 2007년 2월 서울고등법원 고등부장판사, 2010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수석부 부장판사를 하였으며 2009년 3월에는 2년 임기의 지적재산권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2년 2월에 장인어른인 [[김용철 (1924년)|김용철]] 전 대법원장이 1973년부터 2년간 법원장으로 근무한 춘천지방법원에서 제44대 춘천지방법원장 겸 제42대 강원도 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되어 "행동을 통해 원하는 결과가 얻어지지 않더라도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며 명심보감 성심 편의 '행유부득(行有不得) 이어 든 반구저기(反求諸己)니라'는 글귀를 인용하면서 "법관을 단순히 국가기관이나 기업체의 고급 간부처럼 생각해서는 안되며,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국민을 심판하는 권한만 있다"며 "국민으로부터 받은 법관의 권한은 재판업무에만 사용하도록 목적이 특정된 만큼 취지에 맞게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는 취임사<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2/16/0200000000AKR20120216185000062.HTML]</ref>로 시작한 법원장을 재임하여 임기 2년을 마치고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돌아와 재판 실무를 담당하다가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2014년 4월 임기 3년의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방송통신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법무법인 양헌 대표 변호사로 재직 중이며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인 최기준과 법무법인 양헌에서 공동 대표 변호사를 맡고 있는 최경준이 동생이다.
- 최재연 . . . . 5회 일치
* 건축사무소 기용건축 근무 (MBC 느낌표 기적의 도서관 설계)
* 건축2002년 제주기적의도서관
* 건축2002년 서귀포기적의도서관
* 건축2002년 순천기적의도서관
* 건축2002년 진해 기적의도서관
- 최지우(영화배우) . . . . 5회 일치
2018년 3월 29일 결혼한다고 깜짝 발표를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214&aid=0000821425|관련 기사]] [[http://img.theqoo.net/img/TEvjC.jpg|자필 편지]]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770340&cluid=c_201803292140_00000002|웨딩사진]]
그 외에도 [[안성기]], [[류시원]], [[권상우]], [[유지태]], [[안재욱]] 등과 투탑으로 출연하였고, 에어시티에서 같이 출연했던 [[이진욱]]과는 연인관계로도 발전하였으나 결별하였다. <지고는 못살아>에서는 [[윤상현(배우)|윤상현]]과 호흡을 맞추었다. 역시 히로인 of 히로인.
과거 공포체험방송인 <돌아보지 마>라는 프로[* 서세원이 MC를 맡았던 인기 프로그램. 지금 예능과 비교해보면, 대놓고 짜고 하는 티가 많이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예능이다.]가 방영되던 시절, 관련 예능에 한두 번씩 출연하곤 했는데, 출연할 때마다 ~~영혼을 담은~~ 리액션을 선보였다. 최지우가 톱스타로 발돋움하기도 했고 공포체험도 식상해져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으나, 토크쇼 [[힐링캠프(SBS)|힐링캠프]]에 출연하였을 당시 최지우를 위해(?) 공포특집을 기획하여 그 리액션을 재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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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 세계관광도시포럼 || 최고 인기상 || ||
- 칼리파 하프타르 . . . . 5회 일치
1980년 년대 중엽,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은 리비아-차드 전쟁(통칭 토요타 전쟁)에 리비아 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차드]] 군은 [[프랑스]]의 후원과 [[토요타]] 픽업트럭을 이용한 기동전술로 리비아 군을 참패시켰다. 1987년에 하프타르 장군은 병사들과 함께 차드 군에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카다피는 하프타르와 관련성을 부인하여 그를 [[투사구팽]]해버린다.--딱히 토끼를 잡지는 않았지만.--
2011년 카다피에 반대하는 반란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리비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로 귀환하여, 동부 벵가지 지역에서 반란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2014년 2월, 하프타르는 TV를 통하여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반 국민회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라고 선언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의회 의사당을 장갑차와 로켓포로 공격하여 의회 권한 정지를 선언했으며, 국민군은 벵가지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안사르 알 샤리아' 등 이슬람계 세력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 사실상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리비아 국민군에는 세속주의 반군 세력이 모두 결집하게 된다. 2014년 6월 국민투표(유권자 중 18%, 약 63만 명 투표)를 거쳐 동부지역에서는 대표자 정부(the House of Representatives)가 2014년 8월 4일 창립되어 일반 국민회의를 대체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국민군(the Libyan National Army)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015년 12월에, UN의 증재로 동부와 서부의 일부 세력이 합의하여 국민합의 정부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동부지역은 반대파가 많이 합의가 승인되지 못하고 있다. 하프타르의 지지자들은 국민합의 정부에 대하여 하프타르의 지위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리비아 국군의 지휘권을 넘기지 않고 있다. 국민합의 정부는 동부지역 군 사령관 가운데 한 명인 마흐디 이브라힘 알 바르가티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하프타르를 소외시키는 중.
- 커맨드 앤 컨커 : 레드 얼럿 2 . . . . 5회 일치
플레이어의 상관. 항상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
플레이어의 부관.
로마노프의 보좌관. 사이킥을 쓸 수 있다.
플레이어의 부관.
[[분류:게임 관련 정보]]
- 킹덤/511화 . . . . 5회 일치
지휘관들이 모이자 몽념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뛴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지휘관들, 그리고 성을 면밀히 살펴본 하료초는 진작부터 알던 내용이었다. 하료초는 말해봐야 시끄러울 테니 일부러 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분은 직접 공격한 주제에 그런 것도 몰랐냐고 핀잔한다.직접 싸워보면 국문치곤 손맛이 없는 걸 알았을 거라면서. 신은 비신대와 산민족이 강해서 그런 거라고 반박한다.
만일 함곡관처럼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면, 반대로 조나라로서는 업의 코 앞에 적의 전진기지가 생긴 꼴이다. 하지만 쉽게 빼앗겨도 쉽게 되찾을 수 있게 만든다면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적이 열미를 뚫고 왕도에 진입했을 때 조는 그 병력에 대응하는 한편 미리 태행산맥에 잠복시킨 병력을 운용해 열미성을 급습, 열미를 탈환함과 동시에 적이 후퇴할 "출구"를 차단해 버린다. 이것만으로도 적 병력은 포위섬멸되는 형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 몽념은 이렇게 대담하고 파격적인 전략은 아무나 구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신을 제외하고 모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거명하는 것은 딱 한 명. 이목이다. 또다시 이목에게 발목을 잡히게 된 신은 이를 갈지만 곧 시간을 번 것은 자기들이니 대응책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왕분은 그것이 "수가 없다"고 잘라말한다. 그건 바로 [[창평군]]의 대전략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수립한 계획은 열미를 빠르게 함락, 난공불락의 전진기지로 삼아 업을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열미를 지키기 어렵다면 달리 보급을 유지할 방법이 사라진다.
* 환의는 노골적으로 젊은 지휘관들을 "송사리들"이라 비웃는다. 몽념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 탁석산 . . . . 5회 일치
|그림설명 = 세종도서관에서 강연하는 탁석산
|본관 = [[광산 탁씨|광산]]
탁석산은 1956년 서울 태생이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자연계열에 입학했으나 1년 후 자퇴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부전공으로 택한 철학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철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대학원에 진학하여 주로 서양철학을 공부하였다. 《흄의 인과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한양대학교]], [[KAIST]] 등에서 강의를 했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사상연구소 박사 후 연수과정을 마쳤다. 주로 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왔는데, <흄의 두 원인 정의의 완전성과 양립가능성> <흄의 초기 단편과 《대화》에서의 악의 문제> <툴리의 인과실재론 비판> <흄의 합리론 비판과 그 역사적 원천>등의 논문을 썼으며, 최근에 『열린지성』에 『언어분석철학의 종언과 한국철학』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 등이 있다.<ref>[http://www.kyobobook.co.kr/author/info/AuthorInfo.laf?authorid=1000033701 교보문서 저자 정보]</ref>
* 《성적은 짧고 직업은 길다(직업에 관한 고찰 01)》
* 《준비가 알차면 직업이 즐겁다(직업에 관한 고찰 02)》
- 토리코/384화 . . . . 5회 일치
* 그러나 이미 타락한 아카시아는 그가 가진 식운이 중요할 뿐 플로제인지 아닌지는 무관하다고 비웃는다.
* 죠아는 미도라에게 금관두를 어떻게 뚫었냐며 경악한다.
* 말하자면 플로제 본인의 환생인 셈이다. 따라서 그녀 뱃속에 있던 아이들과는 무관하다.
* 그에게 필요한건 플로제의 식운 뿐이며 그것만 있으면 죠아가 누구인지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
* 그리고 미도라가 오해를 하고 있다며, 플로제가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말한다.
- 토탈워: 쇼군 2/건물 . . . . 5회 일치
>현명한 남자는 자신이 관리하는 말에 귀를 귀울인다.
==== 관개시설 농장(Improved Irrigation) ====
재보충률과 유닛의 이동 속도에 관여하는 건물.
>산과 신들은 관대하지 않다.
>상업이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 토탈워: 쇼군 2/유닛 . . . . 5회 일치
* 쐐기진(Wedge Formation) - 지휘관에게 기병 지휘관(Cavalry Commander) 스킬 요구됨. 토글. 쐐기 모양으로 대형을 바꿔 돌격의 효율성을 늘린다.
* 고수(Stand and Fight): 보병 지휘관(Infantry Leader) 스킬 필요. 토글 기능. 장군 호위대 전부가 말에서 내려 부대를 지휘한다. 고수 상태로 있는 동안 장군 호위대 주변 아군 부대의 근접 공격력, 장전 실력, 사기가 크게 상승한다. 고수 상태에서는 움직일 수 없다.
* 쐐기진(Wedge Formation) - 지휘관에게 기병 지휘관(Cavalry Commander) 스킬 요구됨. 토글. 쐐기 모양으로 대형을 바꿔 돌격의 효율성을 늘린다.
- 퇴계 이황 . . . . 5회 일치
조선시대의 관료, 유학자.
1527년, 27세 나이로 과거에 합격했다. 34세에 문과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40세 이후로는 어렵게 부탁해야 겨우 벼슬에 나가고, 벼슬에 물러나는 것을 자주 하여, 명종실록(13년 8월 5일 년 기사)에 따르면 [[명종]]이 요청이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황과 사림을 후원하던 고관 이준경 역시 이황이 산금야수(山禽野獸)처럼 툭 치면 고향으로 물러난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이황은 전습록(傳習錄) 등을 지어서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양명학]]을 비판하였는데, 진헌장과 왕수인(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를 비판하고, 이것이 선불교의 돈오돈수 처럼 근거없이 자의식에 빠질 우려가 높다고 보았다. 또 자신의 마음에 치우쳐서 사물의 객관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간과한다고 비판했다.
[[화담 서경덕]] 학파와 대립하였는데, 서경덕의 제자 남언경(南彦經)이 무의(無意)와 무욕(無欲)으로 담일청명(湛一淸明)에 이르고자 하였을 때, 이를 불교식 수행법이라고 비판하였다.[* 퇴계전서 중 ‘남시보에 답하다’] 올바른 [[정좌관심|정좌(靜坐)]]는 신비주의적으로 정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을 통제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갖추는데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계전서 중 ‘김돈서에 답하다’, 퇴계전서 중 ‘이굉중에 답하다’]
- 판타스틱 포(2015년 실사영화) . . . . 5회 일치
영화도 영화인데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정보에 의하면 감독도, 폭스도 영 아니게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초기 각본이 공개되었는데 내용은 지금의 영화와 많이 다르다고 하며 이에 호의적인 반응도 있지만 저건 저거대로 좀 그렇다는 식의 반응도 있다. 더불어서 감독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도 거짓말이거나 부풀려졌다는 추측도 있는 듯 한데 이에 관해 어떤 결론이 나오든 영화가 망했다는 현재의 사실은 바뀌지 않을 듯.
* 마찬가지로 마블 코믹스 원작에 폭스에서 영화화한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멘 실사영화 시리즈]] 세계관과 크로스오버를 얘기하는 팬들도 있는데, 사실 판타스틱 포 영화의 리부트 계획 당시 엑스맨 영화의 세계관과 병합시키고자 하는 '''크로스오버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차츰 계획 진행이 예상과 달라지면서 세계관 병합은 무리라고 판단한 20세기 폭스가 독자적인 영화로 만들고자 했는데, 제작자의 현재 입장은 "엑스맨과의 크로스 오버는 언제든 가능하다. 하지만 일단 판타스틱 4는 그 자체 작품만으로 집중할 것이다. 마블이 그들만의 세계관을 합치는 과정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엑스맨과 판타스틱 4 역시 그러한 방면에서 융합이 시도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 풍운 . . . . 5회 일치
보경운이 무쌍검을 훔치려고 천하제일루에 잠입했을 때 갑자기 천지12살과 함께 등장. 이들은 사실 웅패와 협력하는 관계였다. 천하제일루에 숨어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이들의 악행을 보다못한 검성에 의해서 천지가 박살나버렸고 간부였던 천지12살과 도주했는데 도중에 웅패를 만나서 그와 협력하는 대신에 검성으로부터 숨겨주기로 했기 때문.
본래 독고일방을 살해한 섭풍을 원수로 보고 있어서, 섭풍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대립한다. 하지만 섭풍이 천하회에서 물러나자 일단 웅패에 대항하는 협력자 관계가 되고, 나중에는 섭풍에게 복수를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웅패와 천하회가 멸망한 뒤, 동영편에서는 특별히 끼어들지 않고 무쌍성을 재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영편 막바지에 천황의 첫째 아들의 사다리에 걸려서 어처구니 없이 사망. 무쌍성을 재건하려는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여동생 독고몽은 딱히 무쌍성 재건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천하회의 하녀. 보경운과 섭풍, 진상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성. 요약하자면 진상과 결혼하고, 보경운과 관계하고, 섭풍을 사랑한 여자. 웅패의 명령으로 진상과 결혼했지만, 보경운의 대쉬에 밀려서 육체관계를 맺는 간통을 하고 있었고, 또 사실 가장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바로 섭풍이었다. 보경운이 가장 미친듯이 사랑했던 여인으로서, 공자의 사후에 한참 동안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도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그래도 여자는 자꾸 꼬이고 결혼도 몇번이나.--
- 하리수 . . . . 5회 일치
[[2001년 3월]]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하였으며 같은해 1집 '템테이션'을 발표하고 가수가 되었다. 이후 영화배우, 방송 출연 등을 하였다. .<ref name="Transsexual entertainer testing the boundaries of South Koreans' Confucian ideals" /><ref name="Harisu Superstar">Markus Augustus, "Harisu Superstar", ''Giant Robot'', issue #28 p.56-59.</ref> 한편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삶 자체의 엄청난 변화를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한 언론사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나름의 ‘상품가치’를 설파하였다. 그는“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으로서 당연한 것 아닌가요? 자신의 상품가치를 뽐내는 건”이라 했다.<ref name="repircj">[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065613 “성전환 상업적 이용 심하지않나” “내 상품가치 뽐내는게 어때서요?”] 국민일보 2001.07.18</ref> 기자는 또 그에게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수술후유증이라도 나타나면 몸이 상할텐데…”.그녀에 대한 관심이 최근 폭발하면서 화장품 CF,드라마,영화 출연에 이어 음반까지 준비하고 있는 상황.“걱정은 고맙지만 모든 게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피곤을 몰라요”라고 답했다.<ref name="repircj"/>
[[2011년]] [[4월]] 《파주 Fantastic Show》<ref name="fanfan1">[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4011540171001 최한빛 ‘이것이 슈퍼모델 각선미’(하리수 판타스틱쇼)] 뉴스엔 2011.04.01</ref> 를 기획하였다. 판타스틱쇼(Fantastic Show)는 하리수와 [[2009년]] 슈퍼모델출신의 [[최한빛]] 그리고 전국에서 끼와 재능으로 똘똘 뭉친 대한민국 최고의 트렌스젠더들이 모여 다년간 하루 10시간의 트레이닝을 통해 만들어낸 공연이었다.<ref name="fanfan1"/> 당시 하리수는 “태국의 대표적인 알카자쇼와 같은 공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적 지원 속에 문화 관광 상품을 넘어서 세계적인 쇼로 자리잡았다. 트렌스젠더들이 꿈의 무대를 이루어낸 것처럼 한국의 후배 동료들에게도 공연예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세상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ref name="fanfan1"/> [[2012년]] [[12월 1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컬처스페이스 엔유에서 열린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 VIP데이 포토타임 행사에 참여했다.<ref>[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21212000972 하리수 달라진 얼굴…또 성형 의혹?] {{웨이백|url=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21212000972# |date=20160305005647 }} 뉴스핌 2012.12.12</ref> [[2013년]] [[10월]]에는 제8회 [[서울국제문화축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 나이 관련 ===
데뷔 초기에 그녀는 [[1979년]]생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1년]] [[7월]] 실제 나이는 네 살 많다고 스스로 밝혔다. 데뷔 초 실제 나이가 스스로 공개한 나이보다 많다는 ‘의혹’을 받아온 그녀는 진짜 나이를 공개했다.<ref name="naitge">[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0074014 <nowiki>[</nowiki>연예<nowiki>]</nowiki> 하리수 "실제나이 26살 본명은 이경엽"] 동아일보 2001.07.10</ref> [[2001년]] [[7월 10일]] 당시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자신의 신상과 관련해 “실제 나이는 75년생 26세,본명은 이경엽”이라고 밝혔다.그동안 그녀가 밝힌 나이는 23세, 본명은 이수였다.<ref name="yisuu">[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064377 <nowiki>[</nowiki>여울목<nowiki>]</nowiki> 하리수 “26살에 본명 이경엽”] 국민일보 2001.07.10</ref>
하리수측은 “데뷔 때 밝힌 것보다 네 살 많은 26세이고, 본명도 데뷔 때 밝힌 이 수가 아닌 이경엽”이라고 밝혔다. 하리수 측은 “필요에 따라 나이를 조절하는 연예계 관례를 따른 것”이라며 “본명도 이미지 메이킹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바꾼 것”이라고 해명했다.<ref name="naitge"/> 한편 그녀도 직접 “예명으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해 본명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나이를 실제보다 어리게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사과했다.<ref name="yisuu"/>
- 하이큐/236화 . . . . 5회 일치
* [[카게야마 토비오]]를 중심으로 기세를 잡아가는 카라스노. 관중석의 분위기는 카라스노에 우호적으로 바뀐다.
* [[카게야마 토비오]]의 파인 플레이로 관중석의 여론은 단숨에 카라스노 쪽으로 기운다. 스코어는 16 대 15. 위태로운 한 점차 리드. 츠바키하라는 침채된 분위기를 절감한다. 이때 첫 번재 TO.
* 카게야마의 두 번째 서브. 마루야마가 받는다. 리시브를 받아서 에치고가 테라도마리에게 연결, 쐐기를 박는 듯이 강렬한 스파이크가 작렬한다. 카라스노의 코트를 때린 공이 관중석까지 날아가는 강력한 스파이크. 아나운서는 "고교생 답지 않은 파워"라고 코멘트한다. 스코어는 17 대 15.
* 카라스노도 지고 있지만은 않는다. 카게야마의 페이크로 [[히나타 쇼요]]에게 갈 것 같았던 공은 [[아즈마네 아사히]]에게. 아즈마네도 관중석까지 튕겨나가는 강 스파이크로 되갚아준다.
* 양측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 공은 수 차레 양 진영을 오가며 화려한 랠리가 이어진다. 이쯤에서 츠바키하라가 승부수를 던진다. 높이 공을 띄우며 테라도마리의 스파이크를 준비한다. 카라스노는 츠키시마를 주축으로 세 명이 블록에 나선다. 이미 츠키시마에겐 테라도마리의 특징과 습관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 높이도 파워도 초고교급이지만 코스는 대각선으로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 하이큐/237화 . . . . 5회 일치
* 관중석의 카라스노 졸업생들은 [[타나카 류노스케]]나 [[아즈마네 아사히]] 또한 성장했음을 실감한다.
* 타나카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이런 임기응변은 없었다. 중 3때 체험입부 했던 시기에는 너무 힘만으로 쳐대서 아웃되기 일쑤였다. 지금 다이치나 아즈마네, [[스가와라 코시]]는 그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듯 하다. 관중석에 있는 졸업생들도 그걸 기억하는데 지금은 좋은 코스를 고른다며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선수들은 물론 벤치와 관중석에서도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한편 히나타는 수비에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자꾸 몸통으로 공을 받아서 관중석에선 "몸으로 받지 말고 손으로 받아라"고 웃음거리가 된다. 본인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서 부끄러워하는데 사와무라는 전에 "야생의 감"으로 공을 따라가던 것과 달리 상대의 플레이를 보고 공이 올 곳을 예상해서 움직인 점을 좋게 평가한다. 그 뿐만 아니라 카게야마나 츠키시마 조차도 "경쟁심을 발동시킨" 얼굴로 히나타를 주시한다.
- 하이큐/268화 . . . . 5회 일치
그는 주위를 환기시켰다. 사루카와의 전략은 잘 먹혀들고 있다. 코즈메가 진이 빠진 지경이 된건 변함없다. 상대는 전통의 강호 네코마. 어려운 적인게 확실하지만 비등한 상황을 이끌어냈다. 그는 이 객관적인 사실들을 새삼 강조하며 선수들을 다잡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시시오 감독의 정론이 먹혀들었다. 다시 안정을 되찾아가는 사루카와 진영을 곁눈질하며, 코즈메는 매우 성가셔했다.
관중석의 [[다이쇼 스구루]]도 방금 전의 플레이를 의도적으로 흔들린 리시브라고 해석했다. 사루카와가 세터를 죽이는 전략으로 나온다는걸 눈치채곤, 세터에 더 많은 부하를 가하는 대응책. 진성 S같다고 느끼면서도 분명한 만고의 진리도 떠올랐다.
양측 벤치에서는 해볼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시시오 감독은 사태를 관망하며 끝까지 자신의 책략과 선수들을 믿었다. 네코마타 감독은 단지 타마유키에게 워밍업을 시키며 교체할 시기를 고르고 있을 뿐이다.
얼마나 파김치가 되든, 뒤쳐졌든 상관없었다. 결국엔 해낸다. 코즈메가 포기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게 야마모토가 코즈메를 다시 보게된 이유. 코즈메 켄마 식 근성론이었다.
네코마의 뇌이자 심장인 코즈메. 그리고 혈관이자 근육이자 모든 것인 동료들. 언제나 자신을 지탱해준 이들.
- 한교원 . . . . 5회 일치
--[[한국교원대학교]]와는 관계가 없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도 관계가 없다--
2016 시즌에 유종의 미를 거둔 이후 한교원은 2017년 1월부터 사회복무를 위해 6개월간 팀을 떠나 [[K3리그]] [[화성 FC]]에서 뛰게 되었다.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인 한교원은 병역법에 따라 사회복무요원으로 6개월간 일하면 병역의 의무를 마치게 된다. 6개월간 사회복무를 마친 이후, 2017년 후반기 다시 [[전북 현대]]로 복귀하게 된다. 한교원은 K3리그에서 최종 10경기 2골 3도움을 기록, 나름대로 꾸준히 몸 관리를 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리고 큰 부상 문제 없이 후반기에 전북으로 복귀했다. 복귀 이후에는 로테이션 멤버로 기용되었고, 간간히 활동량을 앞세워 수비적인 역할을 부여받거나 아예 풀백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리그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14시즌만 못하던 차에 박대한을 폭행하고 퇴장당한 경기를 '''[[http://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410&aid=0000243677&|슈틸리케가 관전했기에]]''' 여름 평가전 차출에 적신호가 커졌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역시 사고를 친 [[이범영]]과 함께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재성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이청용이 부상에서 회복한데다 이종호, 김승대 등이 동아시안컵에서 자신을 어필할 기회를 잡은지라 대표팀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슈틸리케호에서도 갑자기 흥분해서 옐로 카드를 받은 전적이 있었는데, 물론 커리어를 통틀어 보면 이런 일이 거의 없는 선수이긴 하나 슈틸리케 감독 눈 앞에서 두 번이나 저질러 버린 터라 천천히 그런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고, 사실 국가대표에까지 오르내리는 스타가 된 이후 받는 압박감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이 새롭게 필요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없다면 국대에 재승선은 어려울 것이다. ~~전북 현대에서 빨리 심리상담 시켜라~~
* 위 논란과 관련해 '''한퀴아오''' '''봉동꿀주먹'''이란 별명이 붙었다.특히 [[전북 현대 모터스 마이너갤러리|전북갤]]에서는 아예 우리꿀이라 불리며 전북선수들이 거친파울을 당할때마다 우리꿀 불러오라는 글들이 올라온다
- 허진(법조인) . . . . 5회 일치
'''허진'''(許瑨, [[1894년]] ~ [[1968년]] [[5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대법관]]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본관은 [[김해 허씨|김해]](金海). 호는 우촌(友村)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다시 판사로 임용되었고, 대구지방법원장(1948), 부산지방법원장(1951), 서울고등법원장(1952)을 역임하였다. [[1954년]] 9월 대법관에 임명되어 [[1959년]] 9월까지 5년간 재임했다.
* 대법원, 역대 대법관 - [http://www.scourt.go.kr/public/history/scsv_chf_jus/1172389_10372.html 허진]
[[분류:1894년 태어남]][[분류:김해 허씨]][[분류:196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 현동완 . . . . 5회 일치
서울 출신. 1917년 조선중앙[[YMCA]] 학관을 졸업했고, 1918년부터 YMCA 간사가 되어 소년부와 체육부 간사, YMCA 연맹 주임간사, 영창학교(英彰․Y학관) 교장, 그리고 서울 YMCA 총무를 지내는 등 거의 전 생애를 YMCA와 더불어 산 YMCA맨이다. [[1920년]] [[3월 30일]] 현동완은 농구 선수 겸 감독원으로서 반하트와 함께 일본 도쿄 원정을 떠났다. YMCA 농구팀은 최초의 해외 원정 경기에서 2승 3패의 전적을 남겼다.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YMCA가 폐쇄 상태에 있었던 시기나 8.15 해방 후의 혼란기, [[한국전쟁]]으로 인한 회관 상실, 부산 피난과 환도 이후의 혼란기에 YMCA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전쟁 고아와 부녀자를 위한 구호사업에 주력했다. [[1952년]]에는 삼동부녀회관(三同婦女會館)을 설립하여 전쟁 미망인과 윤락 여성을 구호하였고 [[1953년]]에는 100만평이 넘는 [[난지도]]를 사들여 '보이즈 타운'이라고 불린 [[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을 짓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양육하였다. 소년들이 시장(市長)을 뽑고 자체 은행권을 발행하는 등 유토피아적인 소년 자치도시였다. 난지도의 소년들은 1969년 물난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도 YMCA 사업의 하나로서 계속 운영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YMCA 총무이자 '고아의 아버지'로서 전쟁고아 구호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3년]] [[10월 25일]] 삼동소년촌에서 고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 환희(플라이 투 더 스카이) . . . . 5회 일치
7집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환희의 창법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흉성을 진득하게 다루던 6집에 비해서 아주 조금은 얇아지고 비음이 가미되었으며 고음역폭이 넓어졌다.[* 8집의 술을 들어보면 환희의 고음역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특이한 버릇이 생겼는데, 6집까지는 없던 습관으로서 음을 끌다 끝처리를 독특하게 맺는다. 이 끝음 처리라는 것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인데, 들어보면 제법 호불호가 갈릴 법한 습관이다. 2015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미워해야 한다면'라는 더블 타이틀 곡중 하나를 불렀는데 바리톤의 음역대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3옥타브 도#의 진성 고음 파트는 '''레전드 수준'''. 창법이 안정적으로 바뀐 2014년도부터 최근 라이브를 들어보면 굉장히 안정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후 예능은 히든싱어, 불후의 명곡, 너의 목소리가 보여 시즌 2, 판타스틱 듀오 등 음악 관련 프로그램 위주로 참여하고 있다. 2017년에는 [[복면가왕]]에도 참여해서 맹활약을 펼쳤다. 자세한 것은 [[환희(플라이 투 더 스카이)/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여기]] 참조.
[[웃어라 동해야]]의 도진이로 알려진 배우 [[이장우(배우)|이장우]]와 사촌관계이다. 같이 놀던 사촌형이 가수로 집안을 일으키는 것에 감명받고 연예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사실은 환희 형 갖다 주라며 기념일마다 주변 사람들이 과자나 초콜릿을 한가득 주는게 부러웠다고~~ 이장우와 [[은정(티아라)|은정]]의 우결 집들이에 초대된 환희는 커플속옷을 선물함으로써 역시 한핏줄임을 인증하였다. 이장우가 환희의 첫 솔로 정규앨범 타이틀곡 뮤비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데뷔 이전부터 습관성 어깨탈골을 겪고 있다. 예능 촬영하다가는 물론이고 콘서트 중에 춤추다가도 빠진 적이 있다. 예능에서 게임 중 빠졌을 때는 공교롭게도 다른 연예인이 같은 게임을 하다 부상을 당한 적이 있어 기사가 나는 등 해당 프로그램이 조금 욕을 먹었으나 본인은 "자주 그런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학창 시절에 야구부를 하고 싶었으나 탈골로 실격 당했다고 한다. [[천하무적 야구단]]의 멤버 물망에도 올랐었으나 같은 결과. 주변 사람들도 적응이 되어서 어깨가 빠지면 두어명이서 같이 힘 모아 끼워 넣는다고(...) 현역을 위해 재검을 받았으나 결국 공익판정을 받았다.
- 황용식 . . . . 5회 일치
* 1982 : [[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정무행정관<ref name="사전"/>
* 1984 : 주 [[유엔]]대표부 참사관<ref name="사전"/>
* 1993 : 외무부 국제기구국 심의관<ref name="사전"/>
* 1997 : 대구시 국제관계 자문대사<ref name="사전"/>
* 1998 : 외교통상부 정책기획관<ref name="사전"/>
- AFC 회원 랭킹 . . . . 4회 일치
[[아시아축구연맹]]에 소속된 협회에서 일정기간동안 거둔 업적을 평가하여 산정한 순위자료다. AFC에서는 AFC MA Ranking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한국 언론에선 보통 AFC 랭킹으로 표기하고 있다. AFC 회원 순위는 AFC에서 주관하는 각종 클럽대항전 참가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회원이란 특정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축구협회를 가리키며, AFC에서는 특정한 상황이 아닌 한 1국가 1회원이라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다소 정치적인 문제와 역사 때문에 중국 본토와 마카오, 홍콩에 있는 축구협회는 중국이라는 하나로 보지 않고 별개로 인정하고 있다.]
FIFA 랭킹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는 점도 특이한 부분이다. UEFA는 월드컵 진출이나 유럽 국가대항전과 관련한 시드배정에 UEFA 계수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AFC 회원 순위는 그 정도로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차기 시즌에 부여할 수 있는 티켓은 모두 의결에 의해 판단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별도로 성적이 딱히 뚜렷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AFC의 의결에 의해 ACL로 올라올 수 있다. 즉, 객관적인 수준판단에 대한 신뢰성을 AFC 스스로가 버리고 있는 셈.
= 관련항목 =
- DC 확장 유니버스 . . . . 4회 일치
DC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며 DC의 유명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슈퍼맨 주연 영화인 맨 오브 스틸이 첫 영화이며 그 이전에 나온 DC 영화들과는 무관한 세계관이다. 즉,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 시리즈,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등과는 세계를 공유하지 않아 설정과 내용에서 아무 관계 없다.
== 관련 항목 ==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 . . . . 4회 일치
첫 대회가 열렸던 2014시즌에는 이 대회 역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이 규정한 공식경기지만 챌린지의 기록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기록했었다. 이는 챌린지 플레이오프가 엄밀히 말하면 챌린지의 정규 라운드의 연장선이 아니라 승강 플레이오프라는 [[승강제]]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 대회로 보기 때문이며, K리그의 소식을 전하는 공식매체인 [[K리그 웹진]]에서도 2014시즌의 데이터는 챌린지와 호환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2015시즌부터는 챌린지 플레이오프를 K리그 챌린지의 연장선으로 보고 이 데이터를 공식으로 집계하기 시작하였으며, K리그 웹진 2015년 12월호에서는 다 통합하여 데이터를 공개하였다.
이런 이유로 응원팀이 K리그 챌린지에 있는 팬들은 ㅋㄲㅈㅁ를 외치는 중. 물론 여기와 관련없는 클래식 팬들은 매번 챌린지 플레이오프를 팝콘뜯고 구경하는게 다반사다.
= 관련항목 =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2014시즌 . . . . 4회 일치
기념할만한 첫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의 시작이며, 준플레이오프 승자가 승격자격을 획득함으로써 이후 진행된 2015시즌에 모든 K리그 팬들의 관심을 받게 만든 대회이다.
|| 관중집계 ||<-3><:>1,065명||
|| 관중집계 ||<-3><:> 2,767명 ||
= 관련항목 =
- NTX . . . . 4회 일치
* 메모 : 메모를 쓰는 곳. 창작과 관련하지 않아도 된다. 소량의 모니위키 문법이 적용된다. 현재는 사실상 정전.
* 창작 : 창작 관련 논의를 하는 게시판...이지만 사실상 옛날에 있었던 창작 위키용 위키게시판 취급. 창작 위키가 사라진 지금은 정전.
* 위키 게시판 : 위키 관련해서 글을 쓰는 곳.
* 게임 : 커뮤니티 소속으로 게임 관련 글을 올리던 게시판.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현재는 자유게시판과 통합되었다.
- Project:Union . . . . 4회 일치
[[인물 관련 정보]]
[[기술 관련 정보]]
[[행성 관련 정보]]
[[동・식물 관련 정보]]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산업 . . . . 4회 일치
=== Practical Steam Engine(실용적인 증기기관) ===
=== High & Low Pressure Steam Engine(고압/저압 증기기관) ===
=== Combustion Engine(연소기관) ===
* Vacuum Tube(진공관)
- 가석방 . . . . 4회 일치
* 법무부 장관의 허가로 최종 결정된다.
가석방은 형기가 종료되어 풀려나는 석방과는 다르다. 가석방 일에서 형기종료일까지 기간 동안은 관할경찰서나 보호관찰소의 보호와 감독을 받게 된다. 가석방자는 이 떄 준수사항을 위반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가석방은 취소, 혹은 실효된다.--[[한군두|한감두]]-- 물론 남은 형기를 채워야 하며 당연히 저지른 범죄는 가석방 중에 저지른 것이므로 매우 질이 좋지 않게 본다.
아래 사이트는 '''정부기관 사이트 답게''' 대뜸 키보드 보안 설치를 강요하므로 주의.
- 강동우 . . . . 4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두산 베어스/선수단)]
이미 [[삼성 라이온즈]]를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삼성 팬들에게 [[강기웅]], [[박충식]]과 함께 여전히 안타까움으로 가슴에 남는 선수다.[* 다만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을 때는 까였던 적도 있다.] 강동우와 관련된 신문기사의 리플을 보면 '''[[한화 이글스|한화]] 팬들보다 삼성 팬들의 응원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삼갤]]에는 간간히 '은퇴식만큼은 삼성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온다. 이미 [[마해영]]의 사례도 있고.
후반기에 타율을 많이 끌어올린 덕분에 타율 0.288로 훌륭한 성적을 내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팀 내 '''타자 고과 1위(!!)'''에 홈런 개수로 커리어 하이고, 타점도 순도높은 타점들이 상당히 많아 38살 나이임에도 차기 시즌에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한편 [[FA 제도|FA]] 대상자였지만 시즌 종료 후 FA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봉은 고작 5천만원이 올랐는데, 강동우의 생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인상액이 너무 적다는 인상이 짙다. 물론 노장선수의 연봉은 상대적으로 인상폭이 적은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시기 한화 프런트진의 연봉 인상 정책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강동우는 물론이고 [[이대수]], [[박정진]] 등 A+급 활약을 보인 선수들의 연봉 인상폭이 똑같이 5천이었다. 이는 선수들의 동기부여 실패로 이어졌고, 2012년 한화가 최악의 시즌을 맞이하는데 적지 않은 일조를 한다.
O형 수염 자국이 선명한, 살짝 [[마초]]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상당한 [[미중년]]이다. 2014년 4월 19일까지 미혼(!!)이었다. 2011 시즌 중반부터 굉장한 활약을 펼치던 때의 스포츠신문 인터뷰 중 '체력 관리의 비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보내 주는 [[인삼]]을 꾸준히 먹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팬들은 '저런 건 친구가 아니라 와이프가 챙겨줘야 되는데...'라며 심히 안타까워했다. 어느새 '동우햄 장가 보내기'는 새 시즌 한화팬들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2013년에는 [[류택현]] 바로 다음으로 나이 많은 미혼의 프로야구 현역 선수였다. 위의 사례에서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결국 2013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면서 이제는 노총각 코치(...). ~~삼성에서 뛰던 소싯적에 선배였던 [[양준혁]]을 그렇게 잘 따랐다더니 엉뚱하게 노총각 운명까지 따르는 걸까~~
- 강진(가수) . . . . 4회 일치
* 관련 항목 : [[가수/한국]], [[불교/인물]]
사실은 [[1986년]]에 발표한 "이별의 신호등"으로 데뷔해 활동을 시작한 중견 트로트 [[가수]]로, 본격적으로 뜨게 되는 시기는 [[1994년]]이다. 이 때 발표한 "남자는 영웅과 삼각관계"(김병걸 작사, 이호섭 작곡)가 히트하여 강진은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유명 가수가 된다. 삼각관계는 이후도 강진이 직접 부르는 곡이다.
땡벌 외에도 "화장을 지우는 여자", "삼각관계" 등 [[히트곡]]들이 꽤 많다.
- 경산시 . . . . 4회 일치
* [[윤상직]] - 현 부산 기장군 국회의원,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 [[최경환 (1955년)|최경환]] - 현 경산시 국회의원(4선,[[새누리당]]),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 [[장미관]] - 모델
*배기원 - 전 대법관
- 고독의 요새 . . . . 4회 일치
여기에 설정이 덧붙여지면서 무한 지구 위기 이벤트에서 미치광이 컴퓨터가 지구를 제 2의 [[크립톤]]으로 만들기 위해 전초기지로 만든 것이 고독의 요새이고 슈퍼맨이 [[크립톤]]의 과학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차원으로 관리한다는 설정이 만들어졌다. 요새는 슈퍼맨의 아버지 조 엘이 아들을 걱정해서 백업으로 준비해 놓아다는 설정으로 보인다. 슈퍼맨 영화 시리즈도 이렇게 설정을 잡아놓았고 조 엘의 정신을 본딴 AI가 존재해 슈퍼맨에게 조언과 힘을 준다. 또 그 안에 외계무기나 맹수들을 보관하는 케이지도 존재한다. 물론 긴 세월 동안 이런저런 고독의 요새 뒷배경이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에피소드마다 고독의 요새 위치가 시시때때로 바뀌었는데 현재는 북극에 위치해 있다.
이런 SF틱한 설정과는 반대로 보안은 굉장히 심플한데 그냥 열쇠구멍에 열쇠 넣고 돌리면 들어갈 수 있다. 열쇠도 그냥 문 근처에 존재해서 구하기도 쉽다. 문제는 이 열쇠가 '''슈퍼맨을 제외한 존재는 도저히 들 수가 없다.''' 초창기에는 사이즈도 더럽게 커서 구멍에 넣기도 힘들었다가 근래에 들어서 단순한 열쇠 사이즈가 되었지만 무게가 몇 조(!) 톤이나 되어서 문앞 매트 밑에 넣어놨다.[* 보통 가정집 열쇠 보관하는 그 방식으로.] 슈퍼맨의 인간다움을 부각시키려는 장치의 일종이었는데 아무래도 고독의 요새라는 간지나는 네이밍과는 안 어울려선지 지금은 완전 SF틱한 분위기가 되어 열쇠는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NEW 52 이후 부터는 슈퍼맨의 목소리와 DNA 검사로 문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켈렉스]](Kelex)라는 로봇이 관리하고 있으나 New52 이후에도 이러한 설정이 유지될지는 불분명.
- 권영해 (1888년) . . . . 4회 일치
| 본관 = [[안동 권씨|안동]](安東)
'''권영해'''(權永海, [[1888년]] [[8월 12일]] ~ [[1949년]] [[6월 23일]])는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19년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리 진평교회(眞坪敎會) 목사로 재직 당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대대적으로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교회 집사 이상백(李相柏)·이내성(李乃成) 등과 함께 1919년 3월 12일에 동민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전격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2일이 되자 그와 일행들은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太極旗)와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를 동리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동리 곳곳에 횃불을 붙였으며 끝끝내 동리 야산에서 300여명의 동민을 규합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들과 일본 헌병들에게 제압이 되며 끝내 강제로 해산되었지만 이후 이곳 민중들의 항일 저항의식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만세 시위 운동 관련 계획을 다시 협의하여 1919년 3월 14일 21시경을 기하여 2백 명의 동민과 아울러 동리 야산에서 다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등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결국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19년 4월 25일을 기하여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관련으로 징역 1년 10월형을 언도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26일을 기하여 특별사면 석방되었다.
- 김남조 . . . . 4회 일치
그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규슈 후쿠오카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44년 돌아와 경성여자전문학교(이화전문)에 입학하였다.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마산고등학교와 여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ref>이은영,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49 예술가 위한 공간 ‘예술의 기쁨’ 개관하는 원로시인 김남조], 서울문화투데이</ref>
* 은관문화훈장(1998년)
== 가족 관계 ==
- 김다솜(배우) . . . . 4회 일치
연예활동 이외에도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어린 시절 부모님이 시를 잘 쓴다고 칭찬했다거나 30살 전에 수필을 직접 쓰는 것이 소망이라고 하는 등. 또한 일기도 자주 쓰는 것 같다. ~~언니들이 애써 외면해서 그렇지.~~ 일기장에는 인종차별 문제를 우유에 빗대어 썼던 것으로 보아 의외로 생각이 깊은 것 같다. 멤버들 말로는 문자도 평소 길고 장황하게 쓰는 타입이라고...
알레르기 때문에 털 있는 동물을 못 길러서, 해수어 종의 [[물고기]]를 기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해수어를 기르는 것이 굉장히 까다로운 것이라 관리를 잘 못한 나머지 감기에 걸린 물고기 한 마리가 어항 안에 있던 모든 물고기에게 감기를 옮겨 결국 다 죽었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시 해수어 기르기에 도전하고 싶다고 한다.
[[과거]]에 4년간 짝사랑하던 2살 연상 오빠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장관리]]를 당한 거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오빠]]는 가식걸 활동 직후에도 연락했으며, 지금도 그 오빠를 기다린다는 듯.
2015년 6월 20일과 27일에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에 출연하였다. [[노잼]]이란 이미지를 벗고 싶었지만 결국 노잼 확정. 방송 분량도 별로 없고 [[시청률]] 순위도 꼴찌. 대다수의 아이돌 출연자처럼 특정 컨텐츠보다는 자기 어필식으로 여러 가지를 보여주어 한 가지에 몰입할 수 없었고 보여준 컨텐츠도 다음팟 시청자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게 추가되는 데만 해도 근 한 달이나 걸렸다. 7월 16일에야 추가되다니...~~
- 김범룡 . . . . 4회 일치
| 관련활동 =
[[1982년]] 연포가요제에서 [[보컬]] 듀오 빈 수레의 [[보컬]]리스트로 참가하여 자작곡 《인연》으로 우수상을 수상하여 첫 데뷔하였고 그 후 [[1985년]] 개인 음반 1집에 수록된 자작곡 《바람 바람 바람》으로 솔로 [[가수]] 데뷔하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85년]] [[KBS 가요대상]] 신인가수상을 수상하였고 1986년에는 [[MBC]]와 [[KBS]]에서 10대 가수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잠시 영화배우와 뮤지컬배우로도 활동하였는데 히로뽕과 대마초를 흡입했다는 이유 때문에 [[1995년]] [[2월 21일]] 서울지검 강력부로부터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고<ref>{{뉴스 인용
== 인간 관계 ==
* [[전영록]], [[김수철 (가수)|김수철]], [[임지훈 (1959년)|임지훈]], [[최성수 (가수)|최성수]]와 절친한 친구 관계이다.
- 김봉수(1953) . . . . 4회 일치
[[1953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 김씨]]이며, 1970년 2월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학과]]에 입학하였다.
2000년에 최초의 온라인증권사인 키움닷컴증권을 설립하고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당시 많은 증권사 CEO들이 은행권이나 관료 출신이고 대기업 인사 등을 통해 증권업계에 투신한 것과 비교되었다.
[[2016년]] [[1월 19일]] [[안철수]] 의원을 주축으로 한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안 의원은 "김 전 부회장이 증권업을 시작했을 땐 이미 증권업계가 강고한 기득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며 "(김 전 부회장은)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홀로 증권업을 시작해 큰 성공을 이루고 업계를 바꿨다"고 평했다.[* 관련기사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3&aid=0006992789|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3&aid=0006992789]] 참조.]
국민의당에 입당하면서 "지식이 많은 노인이 한 명 죽으면 큰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거라는 말이 있다"며 "지식과 경험이 많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한 부분에 지적 기여를 하는 풍토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맥락에서 40여년 간 제가 경제, 증권, 금융계에서 쌓았던 경험과 지식을 미력하게나마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 김상희 (1951년) . . . . 4회 일치
* 2004.06 ~ 2005.08 : 법무부 차관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법무부 차관]]
[[분류:195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검사]][[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김수자 . . . . 4회 일치
'''김수자''' ([[1957년]] ~ )는 [[뉴욕]], [[파리]], [[서울]]을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개념 미술|개념 미술가]]이다. 24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55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특별관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출품하였다.<ref name="biography">Kimsooja Biography: http://www.kimsooja.com/biography.html</ref>그의 작업은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를 넘나들며 가장 첨예한 회화적 질문으로부터 예술과 삶의 조건들을 연계하여 다루어 왔고 이 시대를 치열하게 직면해 왔다. 구겐하임 빌바오(2015),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13), 밴쿠버 아트 갤러리(2013), 국제 갤러리(2012), 뉴욕PS1/현대미술관(2001)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30여 회의 주요 국제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에 참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vmspace.com/2008_re/kor/sub_emagazine_view.asp?category=artndesign&idx=11956&pageNum=3|제목=SPACE Magazine|웹사이트=www.vmspace.com|확인날짜=2016-11-18}}</ref>
- 김연수(작가) . . . . 4회 일치
[[대한민국]]의 [[작가]]. 1970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2013년]] 7월 기준, 최근작은 장편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다.[* 다만 해당 책이 출간된 출판사에서 자사의 여러 책들을 사재기하여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이와 관련하여 김연수 작가는 해당 책의 관련 여부와 관계없이 발매된 지 9개월 만에 본 책을 절판시켜 버렸다. 그리고 [[2015년]], 자신의 단편집 <스무살> 재판과 함께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다.]
- 김장섭 . . . . 4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관료, [[정치인]]이다. 1909년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인 1940년 [[조선총독부]]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를 역임하였다.
1958년부터 1959년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차관을, 1959년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0년 1월 [[김익노]]의 당선 무효로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일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참의원]](경상북도)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1961년 초 [[3.15 부정선거]]를 이유로 반민주주의자로 결정되었다. 이에 공민권 제한 대상자가 되어 국회의원직이 상실되었다.
- 김진우(WINNER) . . . . 4회 일치
||<:> '''{{{#!html<span style="text-shadow: 0 0 10px #ffffff;color:#d0d0d0"> 본관}}}''' ||<(> [[김(성씨)|진주 김씨]] ||
'수박상(이수만-sm수장-이 박수칠 얼굴상)'이라는 별명의 장본인 답게 매우 잘생겼다. 특히 '소슴이'라는 별명답게 눈이 굉장히 크고 예쁘다. 데뷔 전인 WIN때도 비주얼로 주목을 받았지만 데뷔 후 관리를 받으니 비주얼이 더 빛나게 되었다. 자신도 자신이 잘생긴 걸 알고 있는지 데뷔 후 첫 주간아이돌에 출연 당시 도니코니가 다른 멤버들 중에서 가장 눈이 예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말에 당당하게 "저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도니가 "멤버들 얼굴 부위 중 가지고 싶은 멤버의 부위는?"라고 물어보니 얼굴 부위는 말하지 않고 승훈이 다리라고 말하며 자신의 특기가 얼굴이라고 답하는 등 자신의 비주얼에 대해서 ~~엄청난~~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활동곡인 <[[REALLY REALLY(WINNER)|REALLY REALLY]]>에서 "널 좋아해" 라는 킬링파트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대중들에게 "김진우 음색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며 음색에 대해 호평을 받았다. 이에 더하여, 검색창에 김진우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김진우 널 좋아해'가 뜰 정도이니...(또 하나의 여담을 추가하자면 무대를 본 김진우를 몰랐던 머글들이 '널 좋아해 걔'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실상 REALLY REALLY를 유명하게 만든 일등공신인 셈.
* 한결같다. 좋아하는 옷, 노래, 영화, 습관, 취향, 음식 등이 잘 변하지 않고 한결같다. 한 음식만 매일같이 먹는다던가 [* 대표적으로 콘스낵과 돈가스김밥. ] 좋아하는 노래는 끊임없이 들어 오히려 멤버들이 먼저 질린다는 둥. 그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노력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 김현철(교수) . . . . 4회 일치
|| '''현직''' ||<(>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 ||
[[대한민국]]의 정무직공무원.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이다.
이후, [[문재인 정부]]의 첫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에 임명되었다.
보좌관으로서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는 국내용 이슈라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http://news.nate.com/view/20180202n33963?mid=n0201|출처]]
- 김형일(배우) . . . . 4회 일치
본관은 [[김녕 김씨]], 생년월일은 1960년 12월 28일 [[경기도]] [[성남시|분당구]] 출신이다. '''장군 [[전문배우]]의 대표 주자.''' 묵직한 목소리, 183cm인 키, 다부진 체격, 외모마저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군에 특화되었다.
울림이 깊은 중후한 ~~목욕탕~~목소리로 유명하다. 20대 시절에는 [[CBS 성우극회]] 15기 공채 성우로서[*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때 동기가 [[최덕희]]다. 세일러 문, 리나를 비롯한 여주인공 전문 성우인 그 사람이다.], 에로 영화의 후시 녹음 등의 활동을 했다고 한다. 목소리 탓인지 정극물에서는 주로 무게감 있고 듬직한 역할을 맡았다.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건 KBS 사극 [[태조 왕건]]에서 [[신숭겸]] 역할을 맡으면서부터. [[태조 왕건]] 이전에는 1989년 KBS 13기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 에서 [[신마적]] 엄동욱 역할로 얼굴을 알렸고, 청춘 드라마 [[내일은 사랑]]에서 [[이병헌]]과 친구들이 단골인 카페 사장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 후 [[문화방송|MBC]] 개그 프로 <오늘은 좋은날>의 꼭지 [[큰 형님]]에 나와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시트콤 [[세 친구]]에서는 옆집에 이사온 신혼 부부로 아내([[노현희]])를 끔찍히 생각하다 못해 의처증 증세가 있는 [[개그 캐릭터]] 연기도 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김재규]] 역을 맡았는데, 목소리와 풍채를 제외하면 실제 인물과 매우 비슷했다.[* 김형일은 키가 180을 넘고, 목소리도 무겁다. 그러나 김재규는 키가 170도 안됐고, 목소리도 높았다. 무엇보다도 김재규는 말이 빨랐다. 김재규와 김형일은 [[김녕 김씨]]로 본관이 같은데, 재미있는 건 김형일이 김재규보다 항렬이 한 항렬 위다.] KBS [[무인시대]]에선 [[최충헌]] ([[김갑수]])을 도와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지만 욕심 때문에 [[최충헌]]에게 역관광을 당하는 찌질한 동생 [[최충수]] 역을 맡기도 했다.
* [[2015년]]에는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 [[신립]] 장군 역으로 출연하였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신립]] 장군은 태조 왕건에서 김형일이 맡았던 [[신숭겸]]의 후손이란 거다. 즉, [[본관]]이 평산이다.
- 김형철 (가수) . . . . 4회 일치
|학력 =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학사]]
|관련활동 = [[신화창조 (음악 그룹)|신화창조]] <br/> [[신촌 블루스]]
*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학사]](1987년 8월)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200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김현식]][[분류:유재하]][[분류:신해철]][[분류:김성재]][[분류:이승환]][[분류:김광석]][[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1985년 데뷔]][[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영신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1화 . . . . 4회 일치
* 싸움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친밀해진다.
[[우라라카 오챠코]]는 화해는 한 거냐고 하는데 사실 화해인지 아닌지 애매한 무언가라서 미도리야가 대충 얼버린다. [[이이다 텐야]]는 어쨌든 둘은 시업식에 빠질 수밖에 없겠다며 나머지 학생들을 인솔해 기숙사를 나선다. 나가면서 [[토도로키 쇼토]]는 임시면허 보충수업 어쩔 거냐고 하는데 바쿠고는 퉁명스럽게 상관하지 말라고 대꾸할 뿐이다.
올마이트가 느낀 대로 둘의 관계는 뭔가 달라졌다.
* 사실 B반 학생 중에 시비를 거는건 모노마 뿐이다. [[츠노토리 포니]]는 일본어가 서툰데도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모노마가 이상한 일본어를 가르쳐줘서 실언을 하고 만다. [[켄도 이츠카]]가 모노마를 제재.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0화 . . . . 4회 일치
* 다음주 아침. A반은 주말을 보충강습으로 보내고 상처투성이로 복귀한 [[바쿠고 카츠키]]와 [[토도로키 쇼토]]로 말이 많다. 임시면허 보충강습이 엄청 스파르타라 이꼴이 되었다는데. 그리고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 [[우라라카 오챠코]]와 [[아스이 츠유]]가 공결이다. 인턴활동과 관련된 모양. 그리고 [[키리시마 에지로]]도 결석이다. 그도 인턴과 관련된 걸까?
우선 올마이트는 나이트아이와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본래 올마이트는 사이트킥을 두지 않는 주의였다. 나이트아이는 광적인 올마이트의 팬이었고 그 열의에 꺾여서 그를 사이드킥으로 삼았다. 그렇게 지낸게 5년. 신체능력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팀의 브레인으로서 귀중한 조력자였다. 여기까지는 미도리야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6년 전, 올마이트가 불의의 부상을 당한 그때 콤비를 해산했다. 가치관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8화 . . . . 4회 일치
* 정면대결에서 밀린 그들은 협력관계인 "이리나카"를 자극,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만드는데.
* 트와이스는 랏파가 눈 앞에서 쓰러지는 걸 보았지만 다음 순간 랏파가 자신을 지나쳐 뒤쪽 벽에 처박히고 있었다힌 이유는 이해하지 못했다. 랏파를 거기까지 밀어낸 "무언가"는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트와이스는 그것이 허공에 남긴 궤적을 쫓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경찰관 하나가 트와이스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했다.
* 나이트아이에겐 관심없는 문제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날인이 트와이스를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날인은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마스크 좌측을 크게 찢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나이트아이는 다음 날인을 꺼내고 있었다. 저 괴물은 저런걸 얼마나 가지고 다니는 걸까? 도망치자, 트와이스는 미련없이 등을 보였다. 그가 허겁지겁 뛰자 이리나카가 그와 나이트아이 사이를 벽으로 막았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지만 트와이스가 원망을 늘어놨다. 찢어진 마스크. 트와이스는 이것도 이리나카가 미적거려서 당한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열하고 있었다. 위험신호였다. 그의 자아가 주체할 수 없이 갈라지려고 했다. 만일 토가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트와이스는 그대로 끝장이었다.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상냥하게 그의 찢어진 마스크를 감싸주었다. 감싸면 하나. 토가의 손길이 닿자 트와이스가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다.
시가라키는 맨 얼굴인 채로 아까 하려던 설명을 이어갔다. 시에핫사이카이, 오버홀은 빌런 연합의 기동력을 깎으면서 연합의 유용한 인재들을 회유하려는 속셈이다. 바깥으로 끌어내 구슬려서 정식으로 시에핫사이카이의 장기말로 만들려는 수작. 저쪽은 처음부터 이쪽과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사실 시가라키도 마찬가지였다. 세력의 문제가 아니다. 신뢰의 문제가. 그 부분이라면 시가라키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55화 . . . . 4회 일치
* [[오버홀]]과 히어로들의 난전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 이레이저 헤드 [[아이자와 쇼타]]는 [[쿠로노 하리]]에게 포획됐다. 시에핫사이카이는 에리를 연구하는 동안 [[개성(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개성]]을 지우는 아이자와의 개성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쿠로노는 혼란한 틈에 아이자와를 자신의 개성으로 포획, VIP룸으로 격리시켰다.
* 의식이 남아있던 나이트아이는 정말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가 본 예지에는 자신과 미도리야가 죽고 오버홀이 도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도리야는 나이트아이가 "원 포 올은 밀리오에게 줘야했다"고 말한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를 멈추진 못했다. 미도리야는 설령 "쓸데없는 참견"일 지라도 누구도 죽게하지 않고 에리를 구하겠다고 선언하며 다시 일어섰다. 바로 그때, 현관에서 철포옥 핫사이슈와 싸우던 [[류큐(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류큐]] 팀이 적과 함께 천장을 부수며 도착한다.
지난 회에 오버홀이 언급한 VIP룸에 포획된 채로 등장. 쿠로노 하리의 개성에 당해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그의 무효화 개성은 시에핫사이카이가 관심있게 연구한 대상인 듯. 에리 다음으론 그를 연구하기 위해 포획한 듯 하다. 쿠로노가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있어서 도움 없이는 무효화를 걸 수도 없는 상황.
현관에서 거구의 핫사이슈와 대치중이었다가 천장을 무너뜨리며 세 명 모두 현장에 도착. 그냥 떨어진건 아니고 원래 일행과 합류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 날조트랩 -NTR- . . . . 4회 일치
소꿉친구 관계에 있는 여고생 오카자키 유마(岡崎由真)와 미즈시나 호타루(水科蛍)가, 서로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관계가 깊어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오카자키 유마의 남자친구. 유마와 사귀면서 진도를 나가려고 하지만, 호타루와 유마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잘 풀리지 않는다. 1학년 때는 호타루와 같은 반이었다.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호타루를 걱정하기도 한다.
유마와의 관계에 불안감을 느끼다가, 유마가 후지와라와 호타루 때문에 데이트 시간에 늦게 되자 잠시 거리를 두자면서 멀어지게 된다. 유마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불안감을 느낀다. 타케다와 헤어지고 나서 자신이 나쁜 짓을 했다고 후회하는 유마를 본 호타루가 화해를 주선해서 일단 친구 사이로 돌아간다.
- 남치근 . . . . 4회 일치
토포사가 된 남치근은 임꺽정의 책사로 활약하던 서림을 회유하여, 임꺽정의 본거지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황해도를 집중공격하러 나선다. 임꺽정 일당이 장악하고 있는 황해도에서 남치근은 잔혹한 명령을 내렸는데, 많은 아전과 양민이 임꺽정과 협력하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도적을 숨기는 자, 도적에게 관군의 상황을 알리는 자, 도적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 심지어 '''도적을 보고도 관군에게 알리지 않은 자''' 까지 도적과 한패로 보고 처단하겠다는 엄명을 내린 것이다.
을묘왜변, 임꺽정 토벌에서 대단한 공적을 세운 장군이다. 하지만 서민의 대변자로서 [[의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임꺽정을 토벌했다는 점, 그리고 황해도에서 상당히 잔혹한 토벌작전을 펼쳤다는 점 때문에 이미지가 그리 좋지는 않다. 사실 관서(황해도)에서의 토벌 당시 외에도 "제주 목사 시절에 왜선 5∼6척이 당물(唐物)을 가득 싣고 풍랑을 만나 표류해 와 정박해 있을 때, 왜인들을 전부 죽이고 금은 보화와 비단들을 공공연히 자신이 차지하고서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다.
* 임꺽정 관련 작품에서 거의 언제나 [[최종보스]]로 등장. 잔인하게 토벌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 니쿠쟈가 . . . . 4회 일치
마이즈루 시는 1901년, 도고 헤이이치로가 처음으로 사령장관으로서 마이즈루 진수부(舞鶴鎮守府)에 부임한 것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마이즈루 해상자위대총감부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니쿠자가 레시피로 알려져 있는 1938년 출판된 『해군주방관교과서(海軍厨業管理教科書)』가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1995년 마이즈루 시는 「니쿠쟈가 발상지(肉じゃが発祥の地)」를 선언했다. 그리고 매년 마이즈루 니쿠쟈가 축제(まいづる肉じゃがまつり)를 열고 있다.
어차피 다 관광객 다툼이겠지만….
일본해군과 니쿠쟈가의 관련된 제설을 검증
- 독이 든 성배 . . . . 4회 일치
[[관용구]]의 하나. 예수의 피를 담았다는 전설의 성배(Holy Grail)과는 대조적인 관용구로서 사용된다.
*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3편에서 잘못된 성배를 마시면 끔살 당하는데 마치 이 관용구를 연상케 한다.
[[분류:관용구]]
- 드라콘 . . . . 4회 일치
기존의 관습법을 바탕으로 수정하고 개폐하여 최초의 성문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콘 법은 가해자의 의도에 따라서 구별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에페타이(Ephetai)라는 [[배심원]] 법정을 설치했다. 이 법정에서는 피살자의 모든 '유족'(부모 형제가 살아 있을 경우에는 부모나 형제, 그렇지 않을 경우는 사촌이나 친척)이 용서해줄 경우 사면을 내릴 수 있으며, 유족이 없고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판단되면 프라트리아(Phratria)라는 기관[*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계. 민주정치 이전에 시민의 명단을 관리했다.]에서 사면 여부를 결정한다. 우발적인 살인의 경우, 국가는 살인자가 아테네를 떠나서 국외로 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한 이동을 보장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라콘의 법은 너무나 거칠고 형벌이 무거워서 살인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솔론]]이 법률을 제정할 때 모두 폐지되었다고 한다.
- 디도(성우) . . . . 4회 일치
다만 턱시도 가면은 본인이 노력해서 매 시리즈마다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등 현재는 어느 정도 진지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 하지만 온화하게 말하는 장면에서의 연기 톤이 내향적인 캐릭터마냥 다소 힘이 빠지고 여려지는 문제점은 끝까지 개선되지 않은 것[* 이 때문에 [[이지현(성우)|이지현]]의 완전히 안정된 [[츠키노 우사기|세일러문]] 연기에 비하면 호평이 덜하다. 이지현의 경우 밝은 소녀 캐릭터에 특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완전히 안정된 세일러문 연기는 [[최덕희|추억 보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혼연일체 수준이었다.]과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트 캐치 프리큐어!]]의 [[묘도인 사츠키]][* 이 쪽은 병약 속성이라서 여린 톤의 목소리가 어울린다.]는 무난하게 소화한 걸 보면 차분한 캐릭터 중에서도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캐릭터보다는 여리고 내향적인 캐릭터를 더 잘 소화하는 것 같다.[* 사실 이는 디도 본인이 진지한 캐릭터에 완전히 적합한 성우가 되었다기보다 비록 디도 본인의 노력도 있었지만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레온(턱시도 가면)의 캐릭터성이 상대적으로 디도가 맡기에 적합하게 바뀌어간 게 크다.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1기|1기]]의 레온은 쿨시크한 성격과 장난기가 공존하는 캐릭터였는데 디도는 비슷한 시기에 맡은 듄 또한 혹평을 들은 것처럼 쿨시크한 캐릭터에서 좋은 평을 들은 적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1기에서 디도의 레온 연기는 장난기만 살아있고 쿨시크함과는 거리가 먼 가벼운 느낌이라서 대차게 까였다. 그러다가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R|2기]]를 기점으로 점차 레온의 성격이 부드럽게 바뀌어가고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S|3기]] 이후로는 개그로 망가지는 일도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디도가 소화하기에 편한 캐릭터성이 되었던 것. 부드럽고 온화하거나 소심한 캐릭터 내지는 밝고 활발한 개그캐릭터에 특화된 디도의 입장에선 큰 행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드러워지고 개그로 망가지기도 한 캐릭터성도 어디까지나 1기 때에 비해 그럴 뿐이지 기본적으로 레온은 시종일관 온화한 캐릭터도, 시종일관 코믹스러운 캐릭터도 아니고 1기 때의 성격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라 온화하게 말하는 장면에서의 연기가 KBS판 성우인 [[김일(성우)|김일]]처럼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간 톤이 되어야 하는데 다소 여리고 힘빠지는 느낌이 된 건 아쉬운 부분. 김일이 1기에서의 쿨시크한 레온과 2, 3기 이후로 성격이 부드러워지고 개그로 망가지기도 하는 레온 모두 완벽하게 소화하는 디테일한 연기를 보여준 것과 비교하면 더더욱 아쉬움이 더해진다.] 그 이후로 비슷한 캐릭터는 [[키즈 CSI 과학수사대]]의 [[키즈 CSI 과학수사대/등장인물#s-3.1|고진]]을 한번 더 맡았는데 1기 때의 레온 연기에 비하면 평가는 나았지만[* 하지만 디도가 진지한 배역을 맡을 때마다 나오는 여리고 힘빠지는 느낌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그렇게까지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레온과 고진 이후로는 진지한 배역에 많이 캐스팅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후에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 맡은 [[이고르(가면라이더 고스트)|이고르]]의 경우 처음에는 나름 진지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28화를 기점으로 점차 개그형 악역으로 변해갔으니[* 애초에 이고르를 연기한 배우인 야마모토 히로시의 외모도 중후한 카리스마 악역보다는 가볍고 얍삽한 3류 악역에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특촬물을 포함한 외화 더빙의 특성상 담당 배우의 외모까지 고려한 캐스팅을 해야 했으니 가벼운 인상인 야마모토 히로시의 외모에 맞춰 가벼운 배역에 특화된 디도가 캐스팅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재까지도 더빙 업계에서는 그를 진지한 배역에 그다지 적합한 성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맥도날드]] -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
- 마기/345화 . . . . 4회 일치
* [[알리바바 사르쟈]]는 살아돌아가고 싶다고 공언한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고 그와 통성명한 [[와히드]], [[셋타]], [[테스]] 조차도 돌 쌓는 놀이나 하라며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그래도 알리바바는 포기 않고 보이는대로 현세로 돌아갈 방법을 묻고 다닌다. 테스는 셋타에게 "살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어떤 거냐고 묻는다. 셋타는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원래 그건 테스 또한 가지고 있던 거라고 대답한다.
*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지만 그동안은 모르고 있었던 사실. 셋타와 와히드가 탄성을 내뱉는다. 오로지 무력하게 시간을 보냈던 그들에겐 그런걸 생각해볼 여력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리바바가 일깨워주자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이란걸 실감한다. 이들만이 아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주위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이들이 하나둘 관심을 나타낸다. 무력하게 돌맹이만 쳐다보고 있던 공간에 활기가 퍼진다.
* 알리바바의 생각대로 이곳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마법의 전문가들. 셋타가 돌맹이를 분석해서 여기에 연결된 것은 하얀 루프도 알마트란의 것이 아니라서 자신들이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결론낸다. 하지만 곧 다른 의견도 나오는데 어차피 사용할 것은 하얀 루프에 속한 알리바바이니 자신들의 적합성 문제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알리바바가 현세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을 개발해야하지만.
버섯이 없는 사람들, 삶의 활기를 찾은 사람들이 늘어나자 테스도 이들을 관심있게 지켜본다. 테스는 마법을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자기 아버지 와히드에게 "마법이란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묻는다. 육체파인 와히드는 한심하게도 "노력해서 만든다"는 하나마나한 대답이나 해서 셋타의 비아냥을 듣는다. 셋타가 "옛날부터 머리 쓰는건 나나 [[우고(마기)|우고]]한테 떠넘겼다"다고 빈정거리자 발끈해서 "나도 마법 정도는 할 수 있다"며 엄청난 의욕을 보인다.
- 마로 . . . . 4회 일치
이치조 가문이 인물로 삼위(三位)의 관위를 받고 있다. 딱히 별거 없는 3류 악당이지만,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둥근 눈썹, 붉은 입술이라는 전위적인 화장[* 일본 귀족의 전통 화장이다.], 그 3류 스러운 행동거지에 비해서 미토 고몬이 문장을 내밀고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관위를 내세우면서 버티는 과감한 클리셰 파괴(!)로 인지도가 높다.
미토 고몬의 문장을 보고서도 "마로는 미카도[* 덴노]로부터 정삼품의 관위를 받은 몸! 도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아니니라! 마로의 저택에서 이런 난행을 벌이다니! 미카도에게 상주할 것이다!"라면서 버티는 대사의 인지도가 매우 높다.[* 정삼위는 미토 고몬 자신과도 동급이므로 일단 이 말은 거짓말은 아니다.]
여담으로 에도 시대의 귀족 가문은 자택 내부가 사실상 치외법권인 것을 악용[* 막부 휘하의 관리들은 간섭하기 어려웠기 때문.]하여, 자택 내에 도박장 등을 영업하여 부수익을 챙기는 경우가 실제로 많이 있었다고 한다.
- 마블 퍼즐퀘스트 . . . . 4회 일치
저과금시 이 게임의 난관은 크게 3가지 이다.
* 이벤트 보상은 랭킹보상과 절대점수 보상이 있다. 랭킹보상은 말 그대로 이벤트에 참여한 사람들간의 점수 순위로 차등 보상이 이루어지며 이벤트 종료시점의 점수를 토대로 산정한다. 상위권은 3,4성캐릭, 중위권은 2성캐릭, 하위권은 은카드 보상으로 이루어져있다. 절대점수 보상은 랭킹과 무관하게 이벤트에 참가하여 획득한 포인트에 따라 주어지며, 최종점수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점수를 올려 일단 획득하고 나면 차후 패배하여 점수가 차감되더라도 무관하다. 낮은점수에서는 참가상 정도의 은카드와 소량의 ISO지만 보통 300점정도만 획득해도 금카드를 한장 주고, 그 이상부터는 히어로포인트나 3,4성캐릭, 상당량의 ISO를 제공한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퍼즐 게임]] [[분류:마블 퍼즐퀘스트]]
- 맥스 페인 . . . . 4회 일치
* 왼쪽 아래의 사람 모양으로 생긴 것은 맥스의 [[체력]]이다. 체력이 붉게 차버리면 맥스는 죽는다. 화염과 접촉하면 체력 상관 없이 불춤을 추며 죽으니 주의. 돌아다니다가 주울 수 있는 [[진통제]][* Tab이나 백스페이스로 사용함.]로 체력을 천천히, 약간씩 회복할 수 있다. 진통제의 소지 유무와 수는 체력 옆에 표시된다. 총 8개 까지의 진통제를 소지 가능.
* 기관단총(4)
Angelo Punchnello. 펀치넬로 패밀리의 수장. 경찰은 그가 발키리와 관련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맥스는 그 증거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때 맥스는 도망자가 되어버린지 오래. 모나 색스의 말에 따르면 아내인 리사를 가학적으로 폭행한다고 한다. 모나에게서 그가 모든 일의 주범이라는 정보를 얻은 맥스의 표적이 된다. 맥스를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결국 자택에 쳐들어온 맥스에게 붙잡힌다. 맥스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니콜 혼의 존재를 말하려 하지만 난입한 니콜 혼의 부하들에게 죽는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메탈슬러그 시리즈 . . . . 4회 일치
메탈슬러그 6부터 등장하는 용병부대 사령관. [[이카리 시리즈]]와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에 나오던 그 랄프 맞다.
메탈슬러그 6부터 등장하는 용병부대 부사령관. [[이카리 시리즈]]와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에 나오던 그 클라크 맞다.
모덴군의 병사. 시리즈의 중간 보스격 인물로 기관총과 수류탄, 대검으로 무장하고 주인공들을 상대한다. 아무리 죽여도 다음 편에는 살아있다. 신기해라.
알렌 오닐의 아들. 메탈슬러그 어드밴스에서 등장. 정규군 특수부대 "펠그린 팔콘즈"의 훈련 교관으로 잠입해 있었다. 괜찮은 걸까, 정규군.
- 몬스터버스 . . . . 4회 일치
2014년에 개봉한 [[괴수]][[영화]] 고질라를 포함한 배경 세계 공유 괴수 영화 프랜차이즈. 관련 회사는 [[레전더리 픽처스]], [[워너 브라더스]]다.
== 관련 정보 ==
== 관력 항목 ==
* 정식 명칭인 몬스터버스는 킹콩 관련 완구에서 처음 나왔다.
- 무료로 책 읽는 사이트 . . . . 4회 일치
* 각 전자도서관
전자도서관들은 현재 각 도서관의 정책에 따라 일정한 가입절차 및 인증절차에 의해서 자신의 기기에서 전자도서를 대여할 수 있다. 위키러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도 전자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을 테니 학교에 문의하면 사용절차를 안내받을 수 있으니 참고.
- 미래소년 코난 . . . . 4회 일치
일단 기본적 줄거리의 토대, 등장인물의 이름 등의 공통점은 있으나 해당 소설과 미래소년 코난은 차이점이 있다. 극중 인물들의 역할과 비중이라던가. 주인공 코난은 나이대가 달라진데다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인 발가락 힘이 애니메이션에서 생긴 것이다. 이는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대폭 수정했기 때문인데 소설을 읽어본 미야자키는 이 애니메이션의 주시청자가 될 아이들에게 소설 내용을 그대로 내보내는 것에 꺼렸다고 한다. 그래서 인물 설정과 줄거리의 대폭 수정을 조건으로 감독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그래도 소설에 나왔던 것들이 애니메이션에서도 나온 것을 보면 아무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 <[[미래소년 코난II 타이가 어드벤처]](未来少年コナンII タイガアドベンチャー)>라는 것이 있다. 감독은 미래소년 코난의 연출, 콘티에 참여했던 하야카와 케이지. 1999년에 방영했으며 화수는 24화. 내용은 초자력병기 등의 일부 단어는 공통되나 그외에는 미래소년 코난과 아무런 관계 없다.
* 당연한 말이나 [[명탐정 코난]]과는 아무런 관련 없다. 서양의 소설 [[코난]]과도 무관하다. 다만 명탐정 코난도, 서양의 코난도 애니메이션화되어 국내에서도 방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 바키도/124화 . . . . 4회 일치
* 그가 나타나자 관람객 일동이 동요한다.
* 결국 언제나 무를 생각하고 있다는 대답. 시부카와는 그것을 "사내와 여인, 연애같은 관계"라 평한다.
* 그때 관중석에서 시부카와가 누구보다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 이어서 여러가지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는 관람객들.
- 바키도/127화 . . . . 4회 일치
* 관중석의 한마 바키는 무슨 수를 쓰든 살아만 달라고 기원하고 가이아는 뜻밖의 선전에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 관중석의 갤러리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혀를 내두르는데 가이아만은 "그 수밖에 없다."고 감탄한다.
* 도쿠가와는 자기 몸도 못 추스리겠다고 관중석으로 달아난다.
* 그 놀라운 반사신경에 관객들이 경악한다.
- 박승호 (야구인) . . . . 4회 일치
[[200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0 시즌]]부터 박승호는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겨 4년간 타격코치로서의 일을 계속 이어 나갔고, [[2004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4 시즌]]부터는 팀을 옮겨 [[KIA 타이거즈]] [[김성한 (1958년)|김성한]] 감독, [[서정환]] 수석코치의 지휘 아래 타격코치 생활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8&aid=0000027357 기아 김성한 감독 재계약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481897 <프로야구소식> 박관용 국회의장, KS 1차전 시구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009800 KIA, 서정환 2군감독 1군코치 임명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09720 최하위 기아 코칭스태프 개편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6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6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KIA 타이거즈]] 코칭 스태프 개편을 통해 [[서정환]]이 감독으로, 박승호가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1190864 <프로야구소식> KIA, 코칭스태프 보직 확정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7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7 시즌]] 전반기에는 팀 성적이 최하위에 머물면서 6월에 대대적인 코칭 스태프 개편이 있었고, 수석 코치로 있었던 박승호는 2군 감독으로 보직이 이동되었다.<ref>[[마이 데일리]] - 2007년 6월 기사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706181438192229 "KIA, 조범현 전 SK 감독 영입 등 코칭 스태프 개편"]</ref><ref>[[한겨레]] - 2007년 6월 기사 [http://www.hani.co.kr/arti/sports/baseball/216991.html "기아 1·2군 코치진 맞교체… “분위기 쇄신” 효과 관심"]</ref> 2007 시즌이 끝날 때까지 끝내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KIA 타이거즈]]는 시즌 후 [[서정환]] 감독을 경질하였고, [[2007년]] 시즌 중 배터리 코치로 영입했다가 새로 선임한 [[조범현]] 감독이 코칭 스태프를 새로 구성하면서 그는 구단과 재계약하지 못했다.<ref>[[스포츠 칸]] - 2007년 10월 기사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710212230173&sec_id=510201 "조범현 감독 KIA 코치진 물갈이"]</ref> 하지만 그가 키워냈던 [[이용규]]는 국가대표 외야수로 우뚝섰다.
[[2013년]] [[11월 1일]] [[NC 다이노스]]의 코치 보직 발표에 따라 [[양승관]]에게 수석코치직을 넘기고 D팀(잔류군) 총괄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1101_0012481419&cID=10502&pID=10500 NC, 2014 시즌 코치 인선 확정…양승관 수석코치 체제] - 뉴시스</ref>
- 박용우(배우) . . . . 4회 일치
[[중앙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하고 [[1994년]] [[문화방송|MBC]] 공채 탤런트 24기로 데뷔했다. 1995년 MBC 인기 드라마 [[아파트]]에서 [[최진실]]을 쫓아다니던 호민 역, 영화 [[올가미(영화)|올가미]]에서 고부갈등에 끼인 남편 역 등으로 눈길을 끌었다. 핸섬한 외모로 데뷔 당시 포스트 [[차인표]]로 주목받고 영화 쉬리의 [[낙하산]] 역으로 출연해[* 이때 이 배역으로 박용우와 캐스팅경쟁을 벌이던 배우는 [[이범수]], [[강성진]], [[공형진]]이었고, 최종적으로 [[공형진]]과 경합 끝에 이 배역을 따냈다고 한다.(공교롭게도 모두 [[중앙대학교|중앙대]] 선후배 사이였다.)] 관심을 모으기도 했으나, 이후 [[조재현]], [[김명민]] 등과 함께 작업했던 영화 [[스턴트맨]]이 제작 중단되는 등 잠시 힘든 시기를 거쳤다.
그러다가 [[2003년]] [[한국방송공사|KBS]]의 [[KBS 대하드라마|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 [[경대승]] 역을 맡아 호평을 받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더욱이 이 캐스팅은 초기 미스캐스팅이라는 여론[* 심지어 그 친하다는 정우성까지 '''형이 장군이라곸ㅋㅋㅋㅋㅋ'''이라며 --비--웃었다 한다.]을 불식시킬 만큼 호연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명성을 가져다 준 역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극에서의 호연으로 [[무명]] 시절을 벗게 된 [[케이스]]로는 [[김명민]]이 맡았던 [[이순신]] 역,[* 박용우와 김명민은 2002년 '스턴트맨' 이란 영화의 투톱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촬영까지 진행했었다. 그러나 김명민의 부상과, 치료 후에도 흥행 전망에 비관적인 제작사와 투자사의 포기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 후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침체기를 겪은 두 배우가 나란히 대하사극 주인공들로 인상 깊은 연기로 재기했다.] [[김남길]]이 맡았던 [[비담]] 역 등이 있겠다.
나이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교제설이 드문 배우이기도 하며, [[2008년]] 말 [[조안]]과 커플 관계로 확인됐지만 [[2010년]]에 들어서면서 헤어졌다고 한다. 과거 인터뷰를 보면 본인은 딱히 이성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은 없는 듯.
* [[베스트극장]] <당신의 편지를 냉동실에 보관하세요> (MBC, 1995)
- 박준규(1925) . . . . 4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송산(松山)이다. 본관 [[순천 박씨|순천]]. [[백남억]]씨가 그의 자형이고 [[삼성그룹]]창업주 [[이병철]]회장의 처조카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육신]] [[박팽년]]의 직계후손이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박철언]]과 함께 자민련 내 대구경북세력을 대표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에다 김대중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경선]]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끝에 당시 [[한나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오며 국회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박준규는 이로써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반면 [[한나라당]]은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1928)|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 방실이 . . . . 4회 일치
* 부안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인 [[1982년]]에 미8군 부대에서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 때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방실이와 두 여자》, 《글래머걸스》 등 여러 그룹을 결성하여 화려한 율동과 특유의 시원스런 가창력을 무기로 무명시절을 극복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가수로 활동한 시기는 1986년 박진숙, 양정희와 함께 국내 유일 여성 트리오 《서울 시스터즈》를 결성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리더였던 방실이는 1집 트로트곡《첫차》를 발표하고 공식적인 무대에 출연하게 되었다. 타이틀곡 〈첫차〉는 신나는 리듬과 함께 시원한 가창력이 돋보이는 노래로, 이 노래를 계기로 데뷔 초부터 남성팬들을 사로잡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 정상급 가수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2년 뒤 발표한 3집 〈청춘열차〉도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면서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 몇 년 뒤 같은 팀원이던 박진숙, 양정희가 [[결혼]]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자 서울 시스터즈는 공식 해체되었고 방실이는 데뷔 4년만인 1990년에 솔로로 전향하였다. 중장년층을 겨냥한 방실이의 솔로 데뷔곡이자 방실이의 1집 앨범의 타이틀곡 〈서울탱고〉는 탱고리듬으로 된 가요였다는 점과 그룹 활동 때 갈고 닦은 그녀의 풍부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낯선 곳을 떠도는 나그네의 쓸쓸한 넋두리를 부질없는 세상사에 연관지어 관조하듯 표현해 특히 중장년층과 기성세대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92년, 2집 앨범 〈여자의 마음〉도 유행하여 다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 가요계를 뜨겁게 달궜던 방실이는 1994년에 사업가인 김연국과 결혼하고 한동안 잠정 은퇴하였다.[* 이 결혼은 당시 소속사 때문에 강제로 했다고 한다. 당시의 남편은 [[일본인]]이었다고...] 그러던 1997년, 선행 연예인으로 문화체육부 장관 표창을 받은 적 있다.
- 배영호 . . . . 4회 일치
'''배영호'''(裵泳鎬, 1915년 ~ 1983년)는 대한민국 제21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법조인]]이다. 본관은 [[성주 배씨|성주]]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 1970년 12월 21일 ~ 1971년 6월 3일 : 제21대 법무부 장관
[[분류:1915년 태어남]][[분류:1983년 죽음]][[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교토 대학 동문]][[분류:성주 배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법원행정처장]][[분류:대한민국의 국회사무총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 백남억 . . . . 4회 일치
[[5.16 군사정변]] 이후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던 박준규, [[김재순]], [[민관식]]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되었다. 이때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당무의원을 지냈다.
그 후 1971년 6월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된 후에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사건]] 등이 일어나자, 야당인 신민당과 협조하여 친김종필계였던 오치성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장관의 해임안 가결을 주도하였다. 야당과 손잡고 박정희가 직접 임명한 장관 해임에 찬성하는 항명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10.2 항명 파동]] 참조.
그 후 1988년부터 1996년까지 [[동부화재|동부화재해상보험]]의 전신인 한국자동차보험 회장을, 1991년부터 5년간 (재)성균관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 백운산 물고기 . . . . 4회 일치
[[열대어]]로 [[관상어]]의 일종. 학명은 Tanichthys. [[일본]]에서는 붉은 지느러미를 특징으로 보아 붉은 지느러미라는 뜻으로, 아카히레(アカヒレ)라고 부른다.
본래는 열대어지만, 관상어로 유통되는 종은 오래 전에 채집되어 양식된 종으로서, 수온 변화나 오염에 강한 변이를 거쳤기 때문에 [[겨울]]에도 기온 10도 정도 온도의 실내라면 버틸 수 있어 사육이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베트남에서 채집된 종류는 변이가 없는 열대어라서 쉽게 얼어죽는다.
관상어로 유통되는 종은 [[알비노]] 변이를 거쳐 금빛을 가진 종류나, 지느러미가 길고 아름다운 종류 등 다양한 변종이 있다.
[[분류:어류]] [[분류:열대어]] [[분류:관상어]]
- 변요한 . . . . 4회 일치
*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군 복무를 마친 육군 예비역이다. 연기를 위해 예고를 진학하려고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유학을 떠났고, 돌아와 입대한 뒤 한예종에 24살의 나이로 늦게 진학했다고 한다. [[http://sports.donga.com/3/all/20150111/69029903/3|관련 기사]] 여담으로 TAXI 미생편에 출연하였을 때, [[강소라]]가 변요한을 해병대 출신으로 소개해 당황한 적이 있다. 알고보니 주변 사람들이 강소라에게 거짓말을 한 것. 이에 대해 강소라는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호감도가 높았다며 울컥했다.
* 20대 초반 연기하기 전 길거리 캐스팅된 적이 있으나 아버지가 '빠른 길 말고 바른 길로 가라'며 반대하셨다고 한다.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501060945053410|관련 기사]]
* 넷상에서는 일명 '변요한 패밀리'~~[[AKB48|BYH48]]~~로 불리는 연예계 친목 모임이 핫하다. 주로 독립영화나 대학 동기 등의 인맥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같이 노래방에 가거나 생일파티를 하는 등 ~~아주 건전하게~~ 친분있는 인사끼리 어울리는 듯하다. 이 무리들이 변요한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며 알려지기 시작했고, ~~여러 남친짤들과~~ [[류준열]]이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확 뜨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류준열]], [[지수(배우)|지수]], [[이동휘(배우)|이동휘]], [[김희찬(배우)|김희찬]], [[수호(EXO)|수호]], 이현욱, 권시현, 이기혁, 차영남, 김동환 ~~일명 연예계의 어벤져스~~ 등 연극, 단편영화, 독립영화에서 보이는 다수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을 '변요한 패밀리'라고 부르는 것은 변요한이 가장 먼저 떠서이기도 하고 사진 등이 가장 많이 올라오기 때문인 듯 하다. 영화 '글로리데이'와 관련한 연예가중계 인터뷰에서 류준열은 BYH48로 불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변요한의 집에서 자주 만나기 때문이라는 심플한 답변을 했다.[* 사실 이 별명은 자신들이 붙인 것이 아니라 네티즌들이 장난스럽게 부른 것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름의 기원(...)은 앞서 서술한 이유가 더 신빙성 있다. 물론 여러모로 변요한의 인맥과 관련된 모임이라는 점에서 류준열이 언급한 이유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변요한 패밀리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한 명씩 뜨고 있어 다음 차례는 누구일지 네티즌들이 눈에 불을 키고 있다~~
- 보통국가 . . . . 4회 일치
사전적 의미는 그냥 '평범한 나라'라는 뜻이다. 다만 일본우익사관에서 보통국가라고 하면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일본우익 사관]]에서 말하는 '보통국가'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이들의 역사관에서 현재 일본은 소위 '평화헌법'으로 인하여 전쟁할 권리가 박탈당한 '보통이 아닌 국가'이며, '보통국가'와는 달리 '전쟁을 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어서 전쟁을 할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평화헌법 폐지론을 펼치는 우익사관의 주장이다.
- 블랙 클로버/105화 . . . . 4회 일치
마법제는 곧 본론인 실적발표를 진행한다. 근처에 있던 [[락 볼티어]]와 [[매그너 스윙]]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군중들은 당연히 금색의 여명이 1위를 할 걸로 예상하는데, 매그너는 어차피 꼴찌는 자기네들일 거라며 관계없다고 자학적인 개그를 한다.
* 문제는 시민들의 반응. 놀라는 건 잠시고 과연 이게 제대로 산정된 건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카호노]], [[키아토]]처럼 순수하게 기뻐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극소수. 대부분 여론은 부정을 저질렀다는 쪽이다. 하지만 거기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레베카처럼 검은 폭우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들이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은 거라고 변호한다. 그 중엔 왕도에 백야의 마안이 침입했을 때 구원 받은 꼬마도 있다. 이런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군중들도 쉽게 검은 폭우를 비난하지 못했다. 이때 마법제가 중재를 해서 비록 검은 폭우는 작년엔 마이너스 50이란 전대미문의 성적표를 받았지만 올해는 분발해서 성과를 낸 거라고 설명한다. 그게 가능했던 건 검은 폭우의 신인 덕인데, 소개를 할라치니 단장은 커녕 관계자 조차 참석하지 않아 난처해졌다. 마법제는 군중을 향해 누구 관계자 없냐고 묻기에 이른다.
- 블랙 클로버/122화 . . . . 4회 일치
* 잭스가 "나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아 자신도 "나의 방식"을 관철한 아스타. 기세등등하게 적과 아군 모두를 도발한 결과가 되는데.
* 2회전 1시합. 아스타, [[미모사 버밀리온]], 잭스의 B팀과 [[네르슈 버밀리온]], [[매그너 스윙]], [[솔 마론]]의 C팀의 격돌이다. 1회전에서 단연 돋보였던 네르슈의 기세가 한도 끝도 없이 오르고 있었다. 무대가 바뀌어도 자신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했다. 뒤따르는 매그너와 솔은 이젠 체념한 분위기. 그는 덤으로 오물의 말로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스타의 말로. 각오하라는 엄포에 아스타는 자기는 꽤 끈덕질거라고 응수했다. 미모사는 아스타의 역성을 들면서 못난 오래비야 말로 각오해야 할 거라고 대꾸했다. 파탄난 남매 관계에 비하면 아스타와 매그너의 선후배 관계는 훈훈한 축이었다. 매그너가 서로 봐주기 없기를 선언하자 아스타가 기꺼이 그러겠노라 답했다.
* 그런데 의외의 의욕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잭스 류그너였다. 1회전에서 건성으로 일관했던 그가, 갑자기 눈빛이 달라졌다.
- 블랙 클로버/62화 . . . . 4회 일치
* 대신관은 보기보다 실력이 좋은 녀석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나의 아들, 손주들이 본실력만 발휘하면 역전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 카호노는 사실 해저신전을 찾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이 오면 할아버지(대신관)가 게임을 할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 바로 대신관의 아들. 그는 "둘 다 덤벼라"라면서 여유를 부린다.
* 대신관의 아들은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백야의 마안이 사용한 마법에 처박혔다.
- 블랙 클로버/63화 . . . . 4회 일치
* 대신관은 해저신전에서 가장 강한 지오 조차 간단히 당하는걸 보고 경악한다.
* 그러나 대신관의 마법은 규칙대로 게임을 끝내야지만 해제되고 본인 조차 마음대로 풀 수 없다.
* 야미는 대신관에게 부탁해 자신의 말을 신전 전체에 전파한다.
* 대신관은 해저신전의 명운을 걸 게임이 돼버렸다고 쓴웃음 짓고 룰을 변경한다.
- 빅터 차 . . . . 4회 일치
조지 부시 행정부 시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또한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in Washington, DC) 한국 석좌로 있다.
그의 부인은 군인,정치인 김식의 딸이다. 김식은 전남 강진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으며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동기이다. 군에서 소장으로 전역했으며, 11대, 12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으로 당선됐다. 13대에서는 낙선했고, 14대에서는 [[민주자유당]], 15대에서는 [[신한국당]]에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http://ko.pokr.kr/person/1933151 (참조)]] 13대에서 낙선한 이후로 농림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 서든어택 2/무기 . . . . 4회 일치
하지만 반동이 크다 해도 기관총과 별 차이가 없는 과거의 자동소총에 비해서는 다루기 쉬운 편이었으며, 2~3발씩 끊어 쏠 때만큼은 라이벌이 M16 못잖은 높은 명중률을 보인다.||
* 기관단총
* 기관단총
* 기관총
- 서정제 . . . . 4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대구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던 1993년 7월 13일에 대법원이 법관인사위원회를 강화하기로 하면서 [[이원배]] 서울민사지방법원장, [[박영식 (법조인)|박영식]] 광주지방법원장과 함께 위원으로 추가 임명되었다.<ref>동아일보 1993년 7월 14일자</ref>
* 대구지방법원 형사 단독 판사로 재직하던 1973년 2월 5일에 물 먹인 소를 도살한 피고인 55명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가축 보관업자 5명에게 사기죄를 적용해 징역10월을 선고하는 등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20600329207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2-06&officeId=00032&pageNo=7&printNo=8417&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73년 2월 6일자]</ref>
- 선조 . . . . 4회 일치
조선의 인재풀의 포텐이 폭발할 때 재위에 올랐으며[* 이순신, 권율, 류성룡, 이이, 정인홍,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등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 모두 이 시기 사람들이다!'''] 본인의 인재 보는 안목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왠 하급 군관을 10계급 특진시키냐면서 말이 많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군관 이름이 이순신'''.] ~~그러나 본인의 인성이 문제여서...~~ '기축옥사' 같은 경우에는 다소 수단이 음습했으나, 이 때만 해도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실드칠 여지는 있었다.
왜란 이후에도 그의 삽질은 계속되어, 당시 세자인 '''광해군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인목왕후를 들이지 않나[* 사실 이는 현대 관점에서 보면 충공깽이지만, 관례적으로 중전의 지위를 공석으로 놔둘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중전은 궁녀들의 모임인 내명부를 통솔하는 안주인 역할을 맡고 있다. 중전은 단순히 사적인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업무를 통솔하는 직책이기도 하므로 중전이 부재하면 궁궐의 기능에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전은 정치적으로 왕권과 후계의 안정에 큰 기여를 한다. 문종 때 새 중전을 들이지 않았던 탓에 단종이 '수렴청정'을 통한 왕권 수호를 받지 못한 것이 세조의 쿠데타를 쉽게 했다는 분석도 나올 정도.--인목왕후는 오히려 불안정만 불러왔지만--],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인 [[영창대군]]을 [[유영경]]등과 영합해 나중에 영창대군이 좀더 장성할 때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다! 그것때문에 광해군은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왕위에 집착하게 되고, 영창대군의 최후와 [[인조반정]]의 원인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 세이와 겐지 . . . . 4회 일치
츠네모토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과 관련이 있다. 무사시국(武蔵)을 다스리는 지방관 쿠니시로 부임하게 된 츠네모토는 무사시 국에 도착하자마자 조속히 토착 호족들에게 검주(検注)[* 이 무렵 쿠니시가 호족들에게 받는 '''[[뇌물]]''']를 실시하려 했다. 하지만 호족 무사시노 타케시바(武蔵武芝)가 정식 임관도 하기 전에 검주를 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반발하였는데, 격노한 츠네모토는 타케시바를 공격하여 약탈을 실시한다. 도주한 타케시바는 이 무렵 무용을 떨치던 [[타이라노 마사카도]]에게 '중재'를 의뢰하고, 겁을 먹은 츠네모토는 산으로 도주하여 틀어박혔다가 동행하였던 흥세왕(興世王)을 하산시켜 협상을 시작했는데 협상이 진행되던 도중에 타케시바의 군대가 츠네모토의 거주지를 포위하자 마사카도에게 살해당할까봐 두려워진 츠네모토는 그대로 교토로 도주하고, 흥세왕, 마사카도, 타케시바 등이 결탁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고 보고한다.
== 막부 정권와의 연관성 ==
- 소격서 . . . . 4회 일치
조선전기에 [[도교]] 식 재초를 거행했던 관청이다.
도교의 신에 대한 초제를 주관하였고, 가뭄이나 홍수 등이 났을 때 기우제, 기청제를 지냈다.
[[고려]] 시절에 복원궁(福源宮), 소격전(昭格殿) 등의 도교 관청이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1392년 11월에 복원궁 등을 없애고 소격전만 남게 된다. 한양 천도 이후 1396년에 종로구 삼청동에 소격전이 건립된다. 1466년(세조12년)에는 소격서로 개칭된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폐지하였다. 소격서의 근거가 되는 [[도교]]가 [[노자]]를 숭상하는 이단이라는 점, 제후국인 조선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점, 초제를 지내는 비용이 낭비되며, 소격서는 쓸데없는 관리라는 점 등의 이유이다.
- 손지현(배우) . . . . 4회 일치
2017년 12월 어머니의 성인 손씨를 따라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687740|손지현이라는 예명을 쓰기로 했다.]] 법적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지(개명)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성도 바꾸려면 바꿀 수 있는데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본명은 남지현, 활동명을 손지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며 본인도 [[대군 - 사랑을 그리다|대군]] 종영 후 인터뷰에서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805140943490310|모친의 성씨를 갖고 와서 예명으로 쓰는 게 맞다고 언급했다]].[* 성씨를 바꿔서 예명을 쓰는 케이스는 아니지만, 배우 [[조진웅]]은 아버지의 성함을 활동명으로 쓰고 있다.] 걸그룹 활동과 배우 활동을 병행하던 시절과 달리, 전업 배우의 길을 걷는데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3&aid=0002014258|예전에 관련 기사가 나온 것도 있고 그런지]] 5세 아래의 동명이인인 [[남지현]]의 존재가 활동명을 바꾼 것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Huh>로 컴백 후 뮤직비디오 및 결정적이었던 2010년 5월 28일자 뮤직뱅크 영상을 통해 [[허가윤]]을 능가하는 [[거유|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뭇 남성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시크릿(아이돌)|다른 그룹]]의 [[전효성|에이스]]도 능가한다고 한다.
* 자타공인하는 [[대인배]]이자 천사표인데, 아이돌들 사이에서도 화내는 모습을 본 적 없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착하다.~~딴 재주가 없으니 행보관 역할이라도 해야지~~ 큐브 사무실 앞에 눈이 엄청 쌓였는데 애들 넘어질까 봐 옆가게에서 빗자루 빌려 약 두 시간 동안 그걸 걷어낸 일화가 있다. 대중적 인지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팬들 사이에서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 듯.
* [[상명대학교]] 졸업식 당시 대학 총장이 그녀를 불러 둘이서 사진을 찍었는데, 졸업식을 참관하는 군중들 사이에선 야유가 터져나왔다.
- 송언석 . . . . 4회 일치
[[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63년 출생]][[분류:대한민국의 차관]]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20대 국회의원[br]기획재정부 제2차관[br]기획재정부 예산실 실장[br]자유한국당 경상북도 김천시 당협위원장[br]국민대학교 특임교수[br]제29회 행정고시합격 ||
제29회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박근혜 정부]] 때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실 실장, 제2[[차관]]을 지냈다.
계파는 [[친홍]]계로 분류된다.[* 송언석 의원이 [[박근혜정부]] 시절에 [[기획재정부]] 차관으로 일하면서 친박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송언석 의원은 [[배현진]], [[길환영]]과 같이 [[홍준표]]에 의해 자유한국당에 영입되면서 친홍 인사로 분류된다.]
- 송창현 . . . . 4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top1=한화 이글스/선수목록, top2=야구 관련 인물(KBO))]
[include(틀: 관련 문서, top1=한화 이글스/2019년)]
2014 시즌 이후 마무리 훈련에 참가했지만 부상으로 도중에 낙마했다. 이후 11월 19일 요코하마의 한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좌측 어깨 전관절 와순 부분 파열로 접합 수술을 받았다. 26일에 퇴원해서 귀국한 이후 서산에서 재활훈련에 들어간다고 한다. 단계적으로 내년 2월쯤에 캐치볼을, 5월달쯤에 실전 피칭에 들어간다고 한다.
* 트레이드 초기에 [[류현진]]의 [[등번호]]인 99번을 요구했다는 소리가 있어 ~~안 그래도 트레이드로 호구잡힌 기분에~~ 언짢아 있던 한화팬들의 심기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루머로 밝혀졌다.[[http://www.sportsworldi.com/Articles/Sports/BaseBall/Article.asp?aid=20130124022341&subctg1=25&subctg2=00&OutUrl=naver|#]] 롯데에 지명되었을 때는 [[이대호]]의 등번호였던 10번을 요구하였다는 소리도 있었다.[[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1122637.htm|#]] 물론, 한화로 트레이드 되면서 이 번호는 [[스캇 리치몬드]]에게로 넘어갔으나 리치몬드도 무릎 부상으로 인해 퇴출. 이 영향인지 네이버에서 송창현을 치면 처음으로 뜨는 연관 검색어가 '송창현 무개념'이었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5화 . . . . 4회 일치
다시 과거. 카라와 알렉스는 비행 소녀들이 되서 외출했던 것 때문에 혼난다. 카라가 능력을 쓰고 무모한 짓을 할 때마다 알렉스는 관리책임을 추궁받아 더 심하게 혼났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댄버스 부부는 DEO의 방문을 받았다. DEO 팀을 이끌고 찾아온 것은 행크 헨쇼.
카라는 대결중에 위기에 몰렸다가 봉인 장비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라이브와이어가 눈치채서 실패한다. 라이브와이어는 카라를 죽이려고 격렬한 전격을 퍼붓는데, 그랜트가 나타나서 레슬리를 설득한다. 그 떄를 노려서 카라는 지하에 있던 수도관을 완력으로 뜯어서 라이브와이어에게 뿌리고, 라이브와이어는 물에 닿자 전력이 방전당하여 쓰러지고 만다.
다음날 윈은 카라에게 분위기를 보고 가볍게 키스를 하지만 곧 제임스가 돌아와 분위기가 깨진다. 그랜트는 카라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려고 생각한다.
카라와 알렉스는 엄마와 화해한다. 그리고 엄마는 아버지 댄버스 박사가 카라가 DEO에 끌려가는걸 막기 위하여, DEO에 소속되어 일하다가 죽었다는걸 알려주고, 거기에 행크 핸쇼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려준다.
- 슈퍼맨 . . . . 4회 일치
시력, 청력을 포함해 모두 뛰어나다. 청력의 경우 지미 올슨이 쓰는 시계와 관련한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슈퍼맨과 관련된 스토리 가운데 가장 흔한 패턴. 슈퍼맨이나 그에 해당하는 캐릭터가 각종 다양한 이유로 악(惡)의 길에 빠지는 것으로, 대개 자신의 슈퍼파워로 인류를 제멋대로 지배하는 [[독재자]]가 되서 인류의 위협이 된다. 슈퍼맨 관련작 가운데서는 비교적 흔한 패턴(…)이다. 너무 많이 써먹어서 질리는 감도 있다. 뭐 좀 해본다고 하면 악당 슈퍼맨 아니면 독재자 슈퍼맨이니 원.
## == 인물관계 ==
- 식극의 소마/173화 . . . . 4회 일치
* 유키가 항의하려고 하지만 시험관은 눈길도 주지 않고 시험을 시작한다.
* 시험관은 이들을 비웃으며 "불만이 있다면 스스로 재료를 조달해도 좋지만 어차피 불가능"할 거라고 조롱한다.
* 시험관 뿐 아니라 센트럴측 학생들까지 한 목소리가 돼서 이들을 비웃는다.
* 에리나는 이들을 그저 바라만 보는데 시험관은 "에리나님께 꼬이던 해충은 구제될 것"이라고 말을 건다.
- 식극의 소마/197화 . . . . 4회 일치
* 죠이치로는 50인 연대식극 이후엔 괴식요리도 관두고 파죽지세로 외부 콩쿠르를 섭렵, 비길 자가 없는 강자로 진화한다.
* 영웅의 귀환. 죠이치로는 많은 학생들의 환대를 받으며 기숙사로 돌아온다. 건성으로 이들의 환영을 받은 죠이치로는 어느새 조리대 앞에 서있다. 문득 시오미가 나타나 요즘 괴식요리를 만들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죠이치로는 대답 대신 "그렇게 탐을 내는 거냐"고 놀려먹는다. 옆에 있던 도지마가 그 말을 듣고 식극에도 낼 정도로 좋아하더니 왜 관뒀냐고 묻는다. 하지만 죠이치로는 자세한 설명보다는 "너도 먹을 걸로 장난친다고 화내지 않았냐"고 답할 뿐이다.
* 얼마 뒤 도지마는 십걸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아자미에게 묻는다. 요즘 죠이치로가 걱정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아자미는 지금 죠이치로에게 문제될게 없다고 본다. 오히려 묘한 살기를 띄는 그가 정점에 어울린다며 존경스럽다고까지 말한다. 도지마의 생각은 다르다. 50인 연대식극 이후에는 그 누구도 죠이치로에게 도전하는 일이 없어졌다. 오히려 식극에 죠이치로가 관여된 듯 하면 사퇴해버리는 녀석들까지 나타났다.
* TV에서 조차도 그는 칭송의 대상이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어 요리관련 채널이라면 어디든 그의 이름을 들을 수있다. 그럴 수록 학교 내에서 그를 숭상하는 발언은 수위가 높아지지만, 이 또한 죠이치로 본인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는 무감동한 얼굴로 바라볼 뿐, 다시 그의 여정으로 돌아간다.
- 식극의 소마/214화 . . . . 4회 일치
* [[나키리 아리스]]가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하는데, 그건 이 대회장의 "온도"와 관련이 있다.
* 소마는 조리에 들어가기 전 메밀가루를 면밀히 관찰해 "평소 것보다 향이 약하다"는 것을 간파, 처음부터 향이 강한 3번 가루를 선택했다.
센트럴을 찬양하기 바빴던 관중들과 [[카와시마 우라라]]의 얼굴에 아연함과 당혹함이 얼룩진다. 네네는 그제서야 소마의 소바를 맛보고 확실히 자신의 것 보다 풍미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십걸 네네가 흔들리자 관중들은 더이상 야유 조차 퍼붓지 못한다.
- 식극의 소마/218화 . . . . 4회 일치
* 2라운드 대전자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 반역자의 대기실이 떠들썩하다. 가장 목소리를 높이는건 [[나키리 아리스]]. 그녀는 [[사토시 잇시키]], [[메기시마 토스케]], [[쿠가 테루노리]]로 현재 낼 수 있는 최강 전력을 구성해 "최대 전력을 단번에 투입해 적을 빠르게 제압한다"는 이론을 주창한다. 그녀는 이 이론을 강조하기 위해 별 상관없는 수식까지 칠판에 빼곡히 적어놓는 열성을 보였다. 여기에 대항해 [[마루이 젠지]]는 강한 카드를 순식간에 소모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경고했다. 상황을 보면서 전력을 온존하는 것도 전략이라는 것. 그 옆의 [[쿠로키바 료]]와 [[하야마 아키라]]는 별 의견이 없다.
* 연대식극 2회전의 무대가 시작됐다.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반역자 측에서 나타난 출전자들은 이 셋. 쿠가, 메기시마, [[미마사카 스바루]]다. 셋 모두 더할나위 없이 자신감에 차 보이지만 관중들의 평가는 미묘하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평가를 받는건 역시 전 3석 메기시마. 그를 누구와 싸우게 하느냐가 2라운드 승패를 가늠할 것이다. 미마사카는 그저 "기분 나쁘다" 외에는 논외. 그리고 쿠가는 전 십걸 출신인데도 "3학년을 꺼내면 무난하게 이길 상대"라고 상당히 평가 절하 당한다. 어느 정도는 쿠가 자신도 그런 평가를 알지 모른다. 센트럴 측 출전자가 발표되려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재점검하고 소마의 승리를 떠올린다. 소마도 이겼는데 여기서 멋진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쿠가 테루노리의 이름이 운다면서. 그는 호기를 부려서 센트럴 측을 향해 "나와라!"라고 소리친다.
* 쿠가의 기합과 관중들의 환호에 등판하는 센트럴의 참전자. 1석 츠카사, 2석 [[코바야시 린도]], 4석 [[사이토 소메이]]. 현 십걸 중 최강 전력이며 연대식극 참가자 전원을 기준으로 봐도 최강의 카드가 여기서 나왔다.
* 린도가 대결 상대를 정하자고 한다. 먼저 응하는 것은 미마사카. 처음부터 사이토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트레이스하고 있는 상태다. 너무 심취한 나머지 "나는 사이토 소메이"라고 소개하며 그의 입버릇을 따라하는데. 사이토는 그런 부분을 재미있다고 평하며 승부에 응한다. 메기시마는 린도 쪽으로 도전. 남은 것은 자연히 쿠가와 츠카사. 쿠가가 바라마지 않던 매치가 성립했다. 관중들은 8석 대 1석이라며 무모한 대결이라고 혹평하지만 어쨌든 소마는 쿠가의 선전을 기원한다. 그리고 공이 울리는 2라운드.
- 식극의 소마/225화 . . . . 4회 일치
[[식극의 소마]] 225화. '''관철하는 무사도'''
* 대결은 마무리를 향해가고 먼저 요리를 완성한 것은 사이토. 작고 정교한 "참치 십관 홍옥알 스시"를 제출한다.
* 한 번 발동이 걸리자 미마사카의 트레이스는 멈추지 않는다. 잠시 손이 쉬는 동안에도 "소생 사이토 소메이, 자신이 믿는 요리도를 걷는자"라며 사이토의 입버릇을 흉내낸다. 의외로 사이토는 미마사카의 존재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카피라곤 하지만, 찰나의 관찰로 자신의 실력을 재현할 수 있는 미마사카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부족하다고 지적하는데, 자신은 스스로를 "소생"이라고 칭하지 않는데, 미마사카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 사이토가 내놓은 요리. "참치 십관 홍옥알 스시". 화과자를 연상케하는 작고 정교하고 화려한 초밥이다. 이전에 [[나키리 아리스]]가 만든 "테마리즈시"보다도 작다. 보는 이들은 누구나 "아름답다"고 입을 모으는 작품. 한편 아직 조리를 마치지 않은 미마사카는 사이토의 공정에 없는 무언가를 추가하려고 하고 있다. 어떤 재료를 볼에 담아서 꺼내는데. 소마는 그것이 뭔지 직감했다. 이것이 승부의 향방을 판가름할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조리 시간은 10분. 2라운드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 식극의 소마/229화 . . . . 4회 일치
* 소마가 적과 정담을 나누고 있자 다른 반역자들의 관심도 쏠렸다. 어느 정도 십걸과 친분이 있는 히사코가 모모가 평소와 달리 말이 많다고 한 마디 했다. [[잇시키 사토시]]도 거들었는데 원래 모모는 낯을 많이 가리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제법 수다스럽다고 한다. 타쿠미도 이때만큼은 정신집중 상태를 풀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이토가 냉수마찰로 목욕재계했다는 말을 듣고 "고풍스럽다"면서도 역시 그러면 컨디션이 안 좋아지지 않겠냐고 쥐가 고양이 생각을 해줬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모모가 타쿠미를 "타쿠먕"이라 부르며 "소먕"은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소먕은 분명 사이토를 부르는 말. 타쿠먕은 타쿠미를 부른 것인 듯 했다.
* 3rd Bout의 준비가 끝났다. 대전자 전원과 모든 관계자가 입석. 반역자들도 우리에 들어갔다. 센트럴 측의 참전자는 사이토와 모모, 3학년 콤비와 2학년이자 현 7석 [[에이잔 에츠야]]였다. 사이토는 모모가 증언한 대로 팔팔하게 회복했다. 그가 입장하며 에이잔에게 적이 하급생이라도 강적이니 의기건양하게 임하라 충고하자 에이잔은 충분히 의기건양하다며 살의와 짜증때문에 그렇다고 눈을 번뜩였다. 이제 자리에 앉은 심사의원들이 최종 마이크 테스트 중. 결전이 코 앞이다.
그리고 제 3카드. 모든 과자의 스페셜 프로페셔널 아카네가쿠보 모모. 이에 맞서는 반역자의 출전자는 역시 타도코로 메구미. 카와시마는 메구미를 "명백히 버리는 카드"라며 평가절하했다. 관중의 여론도 비슷. 메구미 또한 가을 선발 때 베스트 8까지 갔던 인재건만 매우 평가가 박하다. 그녀에겐 아직도 "만년 낙제생"이미지가 따라다니고 있었고 사실 지금까지 거명된 라인업 중에선 가장 약체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의 야유가 퍼부어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메구미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담대한 태도를 보였다. 허둥거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라면 있었다. 레분 섬 결전이 시작되기 전 [[사이바 죠이치로]]와 [[도지마 긴]]이라는 양대 일류 셰프에게 특훈을 받은 바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녀를 안심시켜주는 훈련이 한 가지 더 있었다.
* 이야기는 몇 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월광호에 타고 있던 시기. 도지마는 그녀만 따로 주방칸으로 불러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주방엔 아무도 없었다. 오도카니 기다리는 메구미. 도지마가 일전에 "오늘부터 다른 메뉴를 시작한다"고 한 적이 있어서 그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맞는 추론이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가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들렸다. 메구미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 식극의 소마/230화 . . . . 4회 일치
* 도지마 자신이 [[타쿠미 알디니]], [[사이바 죠이치로]]는 [[유키히라 소마]], 메구미는 시노미야가 교육한다는 인선. 그러나 뜻밖의 난관이 있었다.
타쿠미도 풀스포르 훈장 수여자인 그가 도움을 준다는 자체에 경악했다. 소마는 물론 대환영. 자기 가게도 있는데 그들을 위해 헌신해준다고 감동에 겨워한다. 시노미야는 "잠깐의 변덕"이라고 말하지만 소마가 제대로 들을 리 없다. 이렇게 잘 풀려가는 것 같은데, 도지마는 뭔가 걸리는 듯 하다. 아니나 다를까 소마가 "잘 됐다"고 축하하면서 보니, 메구미는 사색이 된 채 오돌오돌 떨고 있다. 합숙 시절 시노미야에게 당했던 트라우마가 한꺼번에 플래시백하고 있던 것이다. 이래서는 특훈은 커녕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도 무리 같은데. 과연 이 난관을 메구미와 시노미야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도지마도 메구미조의 주방을 찾았다. 그는 특훈과는 상관없는 화제를 들고 왔다. 시노미야가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게 의외였다는 얘기였다. 혹시 시노미야도 나름대로 토오츠키 학원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또 "그냥 변덕"이라고 얼버무렸다. 애초에 아자미 정권 따윈 알바가 아니라면서. 시노미야는 일본 전국의 식당을 "진정한 미식"으로 통일한다는 그 사상은 퍽 대단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자기 가게는 그런 것과 얽힐 생각도 영합할 생각도 없다 했다. 오히려 센트럴의 지시를 받는 식당들이 망하게 되더라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초등학생 메구미는 한때 순정만화에 푹 빠진 소녀였다. 특히 좋아했던 건 어떤 스포츠 근성 탁구만화. 거기 나오는 "코치"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녀가 중학생 때까지 탁구계에 몸담았던 것도 이 만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시노미야의 근성론이, 그 만화 속의 가르침을 일깨운 것이다.
- 신경림(대학교수) . . . . 4회 일치
데뷔한 이래로 10여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으나, 1965년 겨울에 동료 시인이자 절친이었던 [[김관식]]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면서 다시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생활 형편이 어려워 동네 학원에서 영어 강사 일을 하면서 끼니를 이어야 할 지경이었다고도 한다.
한국 문학계의 원로인지라 과거 한국 문단에서 활동했던 여러 유명한 시인과 작가들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그 중에서는 [[천상병]]이나 [[김관식]], [[조태일]], [[민병산]], [[황석영]] 등이 있다. 특히 천상병이나 김관식 등은 서로 ~~육두문자~~구수한 말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했으며 세 사람이 하나같이 알아주는 주당들이라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전에 [[일제강점기]] 시기에 겪었던 어린 시절의 일화나 문단에서 사귀었던 여러 문학가들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오늘날의 시점으로 봐도 심히 기이한 각종 [[기행]](...) 등을 재미난 입담으로 다룬 수필집을 내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수필집과 회고록을 종합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자신의 시 중 하나인 <파장>의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신경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특히 기행에 있어서는 당대 문단의 1,2위를 다투던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일화는 배꼽을 잡게 할정도로 웃기고도 기이하다(...). 한편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학창시절을 다룬 파트에서는 당시의 어수선한 사회상은 물론이고, 자신이 저질렀던 비행이나 창피스러운 일도 담담하고 솔직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 역시 재미있다. 중학생때는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 신성왕후 . . . . 4회 일치
|본관 = 경주
'''신성왕태후 김씨'''(神成王太后 金氏) 또는 '''신성왕후'''(神成王后)는 [[신라]]의 왕족 출신 [[고려]]의 왕후로 [[고려 태조]] 왕건의 제5왕후이다. [[신라]] [[신라 문성왕|문성왕]]의 후손으로 [[신라 경순왕]]은 그의 사촌 오라비였다. 그녀는 [[고려 안종|안종 왕욱]]의 생모이기도 하다. 본래는 왕후가 아니었으나, [[1010년]] [[고려 현종|현종]]에 의해 왕후로 추존되었다. 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慶州)이다.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신성우(가수) . . . . 4회 일치
|| '''본관''' ||<(> [[평산 신씨]][* 평산 신씨 35세손 '東'자 항렬이다. [[코미디언]] [[신동엽]]과 [[항렬]]이 같다.] ||
사실 3집 또한 <서시>하나를 빼면 대중적인 앨범으로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본인의 말마따나 정통 얼터너티브록 앨범이다.[* 록음악 팬이 아닌 TV에서 서시 나 내일을 향해 등의 팝 성향의 히트곡으로 그를 처음 접한 팬들이 앨범 구매후, 한 두곡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중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실험적인 넘버들에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를 흉내내기 록커로 착각했던 록매니아들은 그의 앨범을 접하고 나서는 그의 외모에 가려진 음악성을 안타까워 했다.] <초연>은 퍼즈톤이 두드러지는 질펀한 마이너 록이며, <천사여 울지 마세요>는 그런지가 구현할 수 있는 따뜻함과 온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건달의 허세>는 얼핏 코믹하지만 당시에도 존재했던 취업난을 풍자하여 작은 인기를 끌어서 2000년대로 넘어와 (신성우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플래시 영상물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당시에 비슷한 록발라드 가수 컨셉이라 서로 경쟁관계였던 가수 이덕진과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아, 둘이서 대판 현피를 떴다는 소문도 있다.
[[채시라]]와의 연애와 파혼 과정도 시끄러웠다. 미남미녀 커플로 화제를 모았으며, 두 사람이 한참 연애중이던 시절에는 커플 수영복 잡지 화보까지 찍을만큼 떠들썩하게 연애했다. 그러나 [[1997년]] 파혼하면서 당시 언론들이 일주일이 넘게 어지간히 저 얘기만 떠들어댄 탓에, 사람들이 지긋지긋해 제일 듣기싫어한 뉴스였을 정도로. 공개 기자회견까지 열어서 무난하게 결혼하나 싶더니 결혼 후 분가, 연예활동 및 재산 관리를 둘러싼 집안 갈등으로 인해 파혼을 선언했다.
- 심학봉 . . . . 4회 일치
이후 이공계에서 활동하였다. [[특허청]] 특허심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실,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등을 거쳤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런데 성폭행 의혹을 사면서 형사법 위반 여부를 떠나 품위에 맞지 않는 성관계 (기혼이면서 기혼여성과 성관계)로 제명위기에 몰리자 2015년 본회의 표결 당일 자진사퇴하였다.
- 아스팔트 우파 . . . . 4회 일치
과거에도 대한민국에 우파 정치단체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현존하는 아스팔트 우파와는 크게 관련성이 없다. 제1공화국 시기 [[자유당]]과 연계된 [[이정재]]의 [[화랑동지회]] 등 [[정치깡패]] 부류의 조직이 존재했으나, [[조직폭력배]]로서 처단, 와해되어 현재의 아스팔트 우파들은 이러한 조직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군사정권 시기에 정부에서는 우익성향을 가진 관변단체를 만들었으나, 민주화 이후로 이들은 대부분 몰락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고 현재의 조직들은 이러한 단체들과의 연관성이 모호하다.
[[분류:관용구]]
- 안내상 . . . . 4회 일치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소외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사회 혁명"을 꿈꾸며 사회운동에 나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2월 26일 광주직할시 (현재 전라북도 고창군) [[미국]] 문화원 내 도서관 진열장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한 혐의가 드러나 총포 도검 화약류 단속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8개월 동안 수감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 2010년 [[KBS2]] 미니시리즈 《[[성균관 스캔들]]》 ... [[정약용]] 역
* 2019년 [[MBC]] 수목드라마 《[[더 뱅커]]》 ... 육관식 역
- 에스컬레이터 식 학교 . . . . 4회 일치
초등학교-중학교, 혹은 중학교-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일관적으로 진학하는 형태의 학교.
그러나 동일한 학교 법인, 혹은 비슷한 계열이나 제휴 관계가 있는 학교 사이에서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혹은 고등 전문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 단기대학(전문대학) 등에 입학할 때 입학 시험없이 진학할 수 있는 별도의 선발 제도가 있다. 이를 한 번 타면 자동으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에 비유하여 에스컬레이터 식 학교라고 부른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일체화 되어 있는 중고일관교(中高一貫校)가 흔히 있는 형태이다. 학교에 따라서는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도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다닐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수업진도 진행이 비교적 빠르다. 특히 중고일관교의 장점은, 6년 간의 수업 일정을 모두 한 학교에서 진행한다는 것이 꼽힌다. 예를 들어서, 고3 동안 1년 전체를 대학 입시를 위한 수업에 임한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거 아니라도 하는데
- 오병희 . . . . 4회 일치
|본관 = [[해주 오씨|해주]]
1994년 3월 국내 첫 원거리 심장이식에 성공했다. 이후 서울대병원 심장이식 프로그램 책임자로 심장이식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고혈압·심부전 관련 200여 편 이상의 SCI(과학기술논문 색인지수)급 논문을 발표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대학교병원]] 기획조정실장,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강남센터 원장,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진료부원장 등 병원 경영과 관련된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포커스] 신임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박수 받는 이유|URL = http://jhealthmedia.joins.com/news/articleView.html?idxno=9886|출판사 = 중앙일보|날짜 = 2013-06-10}}</ref>
*2004년 ~ 2007년 :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 센터장
- 오지호(배우) . . . . 4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1999년 CF 모델로 데뷔했지만 [[듣보잡]]에 가까운 처지로 있었다. 1998년 [[까(영화)|까]]의 [[단역]]으로 데뷔했고 2000년, 다채롭고 [[절륜]]한 [[검열삭제]]신으로 이름을 날렸던 영화 '[[미인(2000)|미인]]'에서 주연을 맡아 아마도 이름은 [[이지현(1978)|이지현]]과 함께 알렸지만 영화 내용 자체는 그닥... ~~미인은 스토리가 필요 없는 영화지 몸매만으로도 그 가치가 훌륭하다~~.[* 다만 이 부분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흥행 실적에서는 절대로 망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이익을 봤다. 10만 명 정도의 관객이 관람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많다고 할 관객 수는 아니었지만 작은 수치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저예산'''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무릎팍에서 오지호 본인도 흥행은 성공이었다고 말했다.]
- 왝더독/줄거리 . . . . 4회 일치
대통령 선거 2주일 전 밤, 콘래드 브린(로버트 드 니로)이라는 남자가 [[백악관]]에 찾아온다. 백악관을 방문했던 "반딧불 소녀단"의 단원 중 하나가 대통령과 단 둘이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후 그 소녀는 대통령이 자신을 성희롱했다고 주장했다. 브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것. 그는 시간을 끌기 위해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대통령이 희귀병에 걸린걸로 위장해 귀국을 지연시킨다.
일행은 슈만 상사를 선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조니 딘이 만든 노래는 1930년대 노래로 포장해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노래"라며 퍼뜨리고 백악관 앞 나무에 슈만 상사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낡은 운동화를 던진다. 슈만 상사의 귀환을 바라는 물결은 미국 각지에 퍼져나가고, 성희롱 사건은 모두의 머릿속에서 잊혀진다.
- 외도 . . . . 4회 일치
* (한국어) 불륜.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하고 성관계를 맺는 것. 여담으로 일본인들에게 '불륜은 외도 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외도라고 할 정도로 사악하게 느껴지는 행위까지는 아닌 모양이다(…).[[http://ayiva.sakura.ne.jp/doc/gedou/dic/ptalk-korean.html (참조)]]
본래 불교용어로서, 당대에 불교 이외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을 뜻했다. [[불교]]가 탄생하던 시기는 [[인도]]에서 [[인도철학]]의 발전으로 아리안족의 전통적인 [[바라문교]]에서 벗어난 새로운 종교·사상이 많이 탄생하던 시기였다. 불경에서는 불교 이외에 당대의 신흥 종교나 철학을 육사외도(六師外道), 구십오종외도(九十五種外道) 등으로 언급하였으며, 불경은 불교중심적인 관점으로 쓰여졌으므로 다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관점으로 서술하였다. [[바라문교]], [[자이나교]] 등이 불경에서 언급되는 대표적인 외도이다.
외도(外道)란 본래 불교 외의 다른 사상가를 뜻하는 말이었으므로, 논쟁의 여지는 있어도 외도 자체가 악(惡)하다는 의미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불교가 조직화 되면서 불교 중심적 관점에서 외도라는 단어는 비방하는 뜻이 강하게 담기게 되었으며, 불교를 폭력적으로 공격하거나 모욕적으로 비방하는 자들에게도 외도라는 말을 쓰게 되어 매우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됐다.
- 요시다 세이지 . . . . 4회 일치
사실, 요시다 증언의 영향은 한정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증거는 요시다 증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을 참조하지 않았으며, 이는 1991년 1월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를 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을 하면서, 한국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피해자 증언이 잇따르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위안소 제도를 운영했다는 것 " 자체에 제기되는 인권 문제이며, 강제연행의 유무나 피해자들 증언에 관한 세부 논란은 '각론'에 불과하다.
* 2014년 11월, [[도서관]]에서 보유하던 요시다 세이지의 저서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8876104&code=61131211&sid1=i (참조)]]
- 우의형 . . . . 4회 일치
|본관 = [[단양 우씨|단양]]
|소속기관 =
1948년 태어난 우의형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 [[서울가정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서울고등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법원행정처에서 조사심의관으로 지냈으며 2003년에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장, [[청주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고 퇴직한 2005년에 변호사 우의형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2009년 7월 22일에 제17대 영남대 재단 이사장,<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7375.html]</ref> 2011년 11월 10일에 주식회사 화진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11111017081381674&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4년 5월 17일에 [[상문고등학교]] 교장으로부터 1500만원의 뇌물을 받아 구속된 국립교육평가원장 박병용에게 "유죄는 인정되나 큰 과오없이 30년간 공직생활에 충실했다"며 [[특가법]]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2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15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4년 5월 18일자</ref> 1994년 6월 10일에 상무대 사업과 관련하여 공사대금 189억여원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된 청우종합건설 전 회장 조기현에게 [[특가법]] 횡령, 사기죄 등을 적용해 징역5년을 선고했다.<ref>매일경제 1994년 6월 11일자</ref> 6월 14일에 접착테이프로 암달러상의 입을 막고 금품을 빼앗으려다 전치2주 상처를 입혀 구속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4년 6월 15일자</ref> 7월 15일에 [[범청학련]] 결성식에서 인공기를 게양하여 구속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영하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징역2년 자격정지2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4년 7월 16일자</ref>
- 우천석 . . . . 4회 일치
'''우천석'''(禹天錫)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단양 우씨|단양]](丹陽)이다. 우중대(禹仲大)의 3남이고, [[우탁]](禹倬)의 숙부이며, [[우인열]](禹仁烈)과 [[우현보]](禹玄寶)의 증조이다.
[[충렬왕]](忠烈王)조에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충렬왕 6) 감찰잡단(監察雜端) 진척(陳倜)을 비롯한 감찰사(監察司)의 관원들이 유배 또는 파직되자 낭장에서 감찰잡단으로 승진했다.<ref>『고려사』 「충렬왕세가」</ref>
이후 관직이 전리정랑(典理正郞)에 이르렀으며, 후손들이 귀해지자 [[문하시중|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ref name=a/>
== 가족 관계 ==
- 원피스/851화 . . . . 4회 일치
* 철판도 관통하는 총으로 당연히 빈스모크 일가라도 통하는 총이다. 내일 이걸로 빈스모크 일가를 전부 죽일 거라 하는데.
* 그때 푸딩이 갑자기 총을 쏘는데 총알이 상디가 서있는 벽 옆을 뚫고 나간다. 퍼커션 락 36구경 권총 "워커"와 통칭 "캔디 재킷"이라 불리는 탄환이다. 그 위력은 장갑을 두른 방패병을 등까지 관통하며 "철의 몸"을 가진 빈스모크 일가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푸딩은 바로 이 총으로 [[빈스모크 레이쥬]]를 저격했던 것이다. 푸딩은 내일도 이 총으로 상디를 쏠 건데 무슨 표정을 지을 건지 기대된다며 악취미적인 발언을 한다.
>거기다 저희 선장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남자!
푸딩의 무기 "워커"는 철판도 뚫는 철갑탄으로 원피스 세계관에선 별볼일 없는 무기 취급이었던 총기가 엄청나게 상향. 육식의 철괴나 신체를 철 이상의 강도로 만드는 열매 능력자들과의 상성이 기대된다.
- 원피스/858화 . . . . 4회 일치
* 본래 빅맘은 거인족 전체와 대립하고 있었으나 엘바프의 왕자 "로키"가 로라에게 청혼한 걸 계기로 관계가 개선된다.
* 하지만 로라는 정략결혼을 피해 도망쳤고 관계개선은 없던 걸로, 빅맘은 거인족을 가족으로 만드는걸 포기하고 거인화 약물을 추구하게 된다.
* 시폰은 로라가 어째서 결혼상대를 찾아 바다로 나갔는지 경위를 설명해준다. 빅맘은 어떤 이유 때문에 전세계 거인족들과 적대하고 있었다. 지금도 토트랜드에 거인족은 없는건 그때의 일 때문이다. 콜렉터인 빅맘에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딱 한 번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있었다. 엘바프 족의 왕자 "로키"가 로라를 보고 한 눈에 반해서 청혼했기 때문이다.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빅맘과 거인족 간의 원한은 단숨에 해소되는 데다 빅맘은 세계 최강국 엘바프의 강력한 군사력과 거인족 가족이 생긴다.
시저는 얼른 해치우고 이 관계를 끝내자고 말한다. 이때 개막까지 남은 시간 3시간 20분.
- 원피스/872화 . . . . 4회 일치
* 그렇게해서 현재. 다과회와 암금왕 루 펠드와 스튜시 등이 얽혀서 복잡한 경로로 개봉된 옥갑은 재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 성 밑으로 떨어진 옥갑이 깨지면서 기폭장치가 작동, 홀 케이크 성 절반을 날리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홀 케이크 아일랜드 바깥에서 관측될 정도의 대폭발. 성 안은 난데없는 폭발음과 성 일부의 소실, 이어지는 기울음으로 아비규환이다. [[타마고 남작]]이 상황을 종합해 보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능성이 떠올라 버렸다.
* 토트랜드 수도이자 성 밑에 형성된 마을 "스위트 시티"의 주민들도 폭음을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들은 기우는 성을 바로 볼 수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한 발 먼저 피난하기 시작했다. 피난하는 와중에도 대체 무엇이 이런 사태를 촉발했는가 의견이 분분했는데 적의 공격은 아무래도 아닐 거 같다. 토트랜드 최심부의 이 섬만을 타격할 수 있는 적이 어딨겠는가? 누군가가 막연하지만 성 옥상에서 진행 중인 다과회와 관계된게 아닌지 추측했다.
* 천운 덕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해적동맹군은 홀케이크 아일랜드 북서쪽에 이르러 잠시 휴식했다. 밀집모자 일당의 써니호와, 파이어탱크 해적단 아지트 사이의 중간 쯤 되는 지점이었다. 벳지는 체내의 밀집모자 일당을 바깥으로 쏟았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라 선언한다. 나미가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자 벳지는 "좋은 일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니 관둬라"며 말을 가로막았다. 시저는 고생한 건 자기라고 나대는데 나미가 독설을 퍼부어 조용히 시킨다.
* 루피가 이제 탈출할 일만 남은 거냐고 묻는다. 벳지는 처음부터 그랬는데, 시작부분이 너무 난관이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제 서두르는게 좋을 거라고 충고한다. 추격대는 금방 올 거고 배에 도착하더라도 토트랜드의 영해에서 빠져나가려면 하루는 걸릴 거다.
- 원피스/874화 . . . . 4회 일치
* 빅맘 [[샬롯 링링]]는 칼 형태로 변한 "나폴레옹"을 휘둘러 엘바프의 창 "위국"이란 위력적인 기술을 구사한다. 사정거리를 직선으로 관통하는 기술.
* 그 다음 빅맘이 뇌운 "제우스"에 타고 있다는 점에 착안, 자신도 크리마텍트로 뇌운 "블랙 볼"을 생성해 제우스의 관심을 돌린다.
* 홀 케이크 아일랜드의 수도 스위트 시티는 사고의 수습과 함께 배신자 추격대의 지휘통제실이 꾸려졌다. 통제관은 [[샬롯 몬도르]]. 통제실을 통해 두 갈래로 갈린 배신자들, 밀집모자 일당과 [[카포네 갱 벳지]]의 파이어 탱크 해적단을 추격할 두 부대가 교신했다. 벳지는 거의 따라잡았고 방금 전 유혹의 숲에서 목격된 화재는 빅맘의 전투 때문으로 보인다.
밀집모자 추격을 맡은 [[샬롯 브륄레]]는 미러 월드로 1만의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제 거울이 설치된 곳이라면 어디든 기습할 수 있다. 거울 밖의 몬도르에게 그런 내용을 전하자 적당한 때를 알려주겠다고 대답한다. 이어서 몬도르는 해방병력도 점검한다. 토트랜드의 초콜릿섬, 치즈섬, 너트섬에서 출동한 군함들로 남서쪽 해안을 봉쇄했다. 써니호의 출항을 허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들은 포위망의 제 1관문일 뿐. 그 뒤에는 플레버섬과 리큐르 섬에서 출동한 "타르트 쉽"이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항구에서 대기하면서 정찰용인 "영역 해우"를 풀어서 감시망을 조였다.
- 원피스/875화 . . . . 4회 일치
* 써니호가 있는 남서쪽 해안에서 관측될 만큼 거대한 번개가 빅맘과 추격대 위로 떨어지고 루피 일행도 무사히 벗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운행 중 바깥을 살피던 쵸파가 "인어"를 발견했다고 알렸다. 브룩의 불쾌한 기분을 달래줄 좋은 소식이었으나, 그 인어는 남자. 브룩의 관심이 빠르게 식었다. 쵸파는 그를 좀 더 관찰했는데 잘 보니 낚시 같은 걸 하는 것 같았다. 물 속에서 낚시라? 어쨌든 브룩은 눈도 돌리지 않았다. 이제 써니호가 가까웠다.
* 써니호가 정박한 남서쪽 해안. 마지막 관문인 유혹의 숲. 루피 일행은 간신히 여기까지 도착했지만 빅맘 [[샬롯 링링]]의 추격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의 탈것(?)이었던 킹 밤이 당했다. 먹부림에 눈이 뒤집힌 빅맘은 유혹의 숲이 불타는 것도 아랑곳 없이 무차별 파괴행위를 거듭하며 루피 일행을 압박했다. 루피가 이 먹부림 상태에 대해서 궁금해하자 [[징베]]가 답을 줬다. 그는 그게 일종의 지병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먹고 싶은 걸 실컷 먹기 전까진 모든 걸 파괴하는 병. 원인은 "웨딩 케이크"일 것이다. [[나미(원피스)|나미]]가 새삼 "케이크를 부순 루피 탓이다"고 원망했지만 루피는 그 덕에 작전이 잘 풀리지 않았냐고 대꾸하는 데다, 실은 자신은 케이크를 맛 봤다. 도망치는 중인데도 그렇게 맛있는 케이크는 흔치 않을 거라고 감상까지 남겼다. 정작 그토록 원하던 빅맘은 입에 대보지도 못했건만. [[상디]]가 작정 와중에도 먹은 거냐고 한심하다는 듯이 질책하자 [[캐럿(원피스)|캐럿]]도 "사실 나도 먹었다"며 슬쩍 고백했다. 아무튼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뒤에는 미쳐버린 빅맘. 앞에는 방해꾼인 유혹의 숲인 호미즈들. 써니호는 멀지 않은 위치였지만 제때 이 숲을 돌파할 수 있을지, 제대로된 방향으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월하노인 . . . . 4회 일치
두릉(杜陵)에 위고(韋固)가 살았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빨리 아내를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여러 갈래로 구혼을 해봤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정관(貞観, 당태종 때의 연호) 2년, 청하로 여행을 떠났을 때, 송성(宋城)의 남쪽에 있는 점(店, 여인숙)에서 묵게 되었다. 먼저와 있던 손님에게 청하사마(清河司馬) 반방(潘昉)의 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점의 서쪽에 있는 용흥사(龍興寺)의 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위고는 그것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밤에 외출을 나갔다. 달이 밝을 때였다.
위고가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묻자, 노인이 말하기를, "붉은 끈(赤縄)뿐이다. 이걸로 부부의 발을 묶어서, 태어났을 때 몰래 서로를 이어주도록 되어있다. 비록 원수의 집안이건, 귀천(貴賎)의 격이 다르건, 하늘 끝에서 관직을 가지고 있건, 오나라와 초나라의 다른 시골에 있건, 한 번 맺어지면 달아날 수 없다. 너의 발에도 이미 맺어져 있는 상대가 있으리라. 다른 곳에서 찾아도 이롭지 않다"
"세살 때, 안겨서 시장에 갔는데, 미치광이가 나타나 찔러서, 칼 흉터가 남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꽃장식으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십칠년이 지나, 숙부가 노룡(盧龍)님의 보좌관직을 얻게 되어, 마침내 유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로서 당신에게 시집을 간 것입니다."
훗날 아들 곤(鯤)을 낳았는데 안문태수(雁門太守)가 되었고, 태원군 태부인(太原郡太夫人)으로 봉해졌다. 저 세상에서 몰래 정해진 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송성의 관리가 이를 듣고, 그 점을 「정혼점(定婚店)」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 유동근(배우) . . . . 4회 일치
||<:><#cccccc> '''본관''' ||<(> [[유(성씨)|강릉 유씨]][* 시조 33세손 '根'자 항렬] ||
정황을 따져보면 '왕과 나' 촬영 당시 쪽대본 & 이런 저런 사유 때문에 그 날따라 몸도 아픈 상태이던 아내 전인화가 너무 힘들어서 눈물까지 흘리는 바람에 유동근씨가 화가 나서 따지러 간 거 같은데... 본인 주장에 따르면 아내가 걱정되어서 항의하는 와중에도 CP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고. [[http://star.mt.co.kr/stview.php?no=2007122719592056123&type=3|당시 인터뷰]]. 자기 자신도 연기자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항의한 취지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완력을 사용한건 아무래도 잘못이 맞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이 터진 후 이 드라마의 연출자인 故 [[김재형]] PD도 건강상의 이유로 사극 제작에서 완전히 은퇴한다. 그리고 이걸 보고 온라인 상에선 '''용의 주먹'''이라며 조롱하는 반응도 있었다. 이 바람에 [[SBS]] 드라마는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 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가, [[SBS]]의 [[아테나:전쟁의 여신]]에 NTS국장 권용관 역으로 출연이 확정되면서 4년만에 SBS 드라마로 컴백하게 되었다.(여기서 유동근 외모가 스플린터 셀 컨빅션 샘 병장과 닮았다.)
2014년에 방영될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 [[이성계(정도전)|이성계]] 역할을 맡았다. 담당 PD가 용의 눈물 시절 연출부의 막내인걸 생각하면... 재미있는 것은 [[용의 눈물]]에 이어 [[이방원(정도전)|아들]]역에는 [[안재모]]. [[이지란|의형제]]역에는 [[선동혁]]이 그대로 나온다는 것. 참고로 '''[[서북 방언]]'''을 구사한다! 공교롭게도 사극에서 [[정도전]]과 관계 깊은 사람을 세 번 연기한 셈인데, [[이성계|정도전을 발탁하고 중용한 사람]], [[이방원|정도전을 죽인 사람]], [[흥선 대원군|정도전을 복권시킨 사람]]을 모두 연기했다는 진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유동근은 이 세 가지 배역을 통해서 세 번의 연기대상을 수상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 유동근이 대상을 수상한 배역들은 모두 조선 왕조의 인물들이며 직간접적으로 정도전과 연관점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 유한식 . . . . 4회 일치
||<height=40><bgcolor=#C9151E> {{{#FFFFFF ''' 경력 ''' }}} ||<(> [[한국농어촌공사]] 감사[br][[새누리당]] 세종시당 위원장[br]제1대 [[세종특별자치시장]][br]제35~36대 [[연기군]]수[br]연기군청 농업기술센터 소장[br][[충청남도]]청 농촌진흥원 사회지도과장[br][[농촌진흥청]] 농촌지도관[br]농촌진흥청 기술공보담당관 ||
[[1949년]] [[6월 20일]] 생 ([age(1949-06-20)]세), [[충청남도]] 연기군 (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출생하였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농어촌 관련 공무원으로 활동하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중심당]] 소속으로 도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2012년 || '''[[201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s-3.1|4·11 재보궐선거]] [BR]세종특별자치시장 1대 (민선 5기)''' || 자유선진당 || '''19,387표 (41.73%)''' || '''당선(1위)''' || '''초선'''[* 초대 세종시장^^[세종시 교육감]^^의 임기는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세종시법)^^''의 부칙 제2조에 따라 2014년 6월 30일까지로 한정하고 있다.(약 2년)] ||
- 육성재 . . . . 4회 일치
||<#42B4E6> '''본관''' ||<(> [[육씨|옥천 육씨]](沃川 陸氏)[* [[https://www.youtube.com/watch?v=Dch7hnLfKC0|150205 해피투게더 방송]]]||
[[김동률]]을 롤 모델로 삼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를 부른 적이 있고, 유튜브에 '기억의 습작'을 커버한 동영상도 있다. 복면가왕에서 마지막으로 부른 '감사' 역시 김동률의 노래이다. 리얼리티 영상을 보다보면 김동률의 노래를 습관처럼 부르곤 하는 모습을 살짝살짝 엿볼 수 있다.
* [[장미여관]]의 [[http://www.starnnews.com/news/index.html?no=362275|육중완과 먼 친척 관계]]이며 항렬로만 따지면 육중완이 한 항렬 위이다. 육중완 왈 "성재는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37929&gid=999339&cid=1054626|집안의 기적]]".
- 율리우스 네포스 . . . . 4회 일치
네포스의 출신은 일치하지 않는 사료가 많아서 확실하지 않은데, 달마티아 지역의 로마 귀족 출신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삼촌은 달마티아 총독 마르케리누스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스트라테고스|서로마 제국의 군사장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부하로서 아에티우스가 발렌티아누스 3세에게 암살된 뒤 반란을 일으켜, 달마티아 지방[* 이탈리아 반대편에 있는 아드리아 해 해안 북부.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일대.]을 영지로 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마르케리누스의 통치는 여러 황제들에게 승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네포스는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조카와 결혼하여, 동로마 제국의 권력 중심부에 들어가게 된다.
네포스는 훈 족의 아틸라를 모시던 [[플라비우스 오레스테스]]를 [[스트라테고스|제국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크나큰 실책이었는데, 475년 8월 28일,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했으며, 네포스는 자신의 고향이자 삼촌의 영지였던 달마티아로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네포스를 쫓아냈던 오레스테스는 오도아케르의 반란으로 살해당하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역시 폐위당하고 만다. 476년, 오도아케르는 로마 원로원을 통하여 제논 황제에게 서로마 제국 제위를 반환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자신의 지위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제논은 오도아케르의 요구를 대체로 받아들여, 그를 "이탈리아 장관(Dux)"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 통치권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네포스에게 배려를 하여, 서로마 황제에게도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오도아케르는 네포스와 제논에게 모두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다만 로물루스는 일단 --난장판이긴 해도-- 즉위가 로마 원로원에서 인정을 받았으며, 네포스는 결국 이탈리아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사망했다는 점[* 다만 말기에는 로마 황제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탈리아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즉위하고 활동한 사례도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에서 감점. 이런 관점에서 보면 474년 이후의 네포스는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명목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 은혼/597화 . . . . 4회 일치
* 천인 용병들을 막아선 하세가와는 자신은 입국관리소 소장이라 밝히며 더이상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 그는 관리소장으로서 천인들의 보스와 할 말이 있다며 안내하길 요구한다.
* 하세가와는 거듭 보스에게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지만 천인들은 어째서 그래야 하냐며 상식적으로 대답한다. 하세가와는 다시 자기가 입국관리소 소장이라 말하는데 평범하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없다고 하니 그냥 끌고 간다.
* 녀석들은 원래 이런 건물 자체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며 위안부로 쓴다고 여자들을 끌고 가려고 한다.
- 이경영(1958) . . . . 4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KBS [[무인시대]] - 조환관 역 (2003~2004년)
* MBC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 남영식 싱가포르 대사관 부이사관 역 (2005년)
- 이기광 (법조인) . . . . 4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1955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대구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15기를 수료했다. 1986년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에 임용되어 1987년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1990년 [[대구지방법원]] 1996년 [[대구고등법원]] 1999년 [[대구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2001년에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 2008년 [[대구고등법원]]을 거쳐 2011년까지 재판장을 하였으며 2012년에는 [[대구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에 임명되어 2015년 2월까지 보임하였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수석부장판사에 임명된 2012년 2월에 경상북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으며 2015년에는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 1년동안 재판장을 하였다. 2016년 2월 법원 정기인사에서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2년동안 제18대 [[울산지방법원]]장에 임명되면서 제20대 울산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다. 울산지방법원장을 끝으로 30년이 넘는 공직자 생활을 마치면서 퇴임식에서 "아내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저를 뒷바라지하면서 삼남매를 훌륭히 키워 준 제 아내, 무등 한 번 태워 주지 못했고, 손잡고 봄길 한 번 함께 걸어 보지못했다."며 아쉬워했다.<ref>로이슈 2018년 2월 12일자</ref>
- 이승현(농구선수) . . . . 4회 일치
* [[농구 관련 인물(한국)]]
헌데 오세근이 11-12시즌에 가장 근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다시 커리어 하이를 갱신할 조짐을 보이고 있고, 15-16시즌부터 시작된 기자들의 과도한 언플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안티팬들이 대거 양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와중에 아버지의 암투병 소식을 접한 이후 오리온의 경기가 있을때마다 매번 아버지 관련 기사를 쏟아내기 때문에 팬들의 시각도 영 좋지는 못하다. 이런 와중에 동료 포워드들의 활약으로 이승현이 없이도 승수를 착실하게 쌓는 장면이 연출되자 안티팬들은 '''스탯도 오세근보다 낮으면서 고평가를 하는데 [[종범(인터넷 속어)|이승현한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도 있냐?]]''' 라면서 거품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자신이 소속했던 초(대구 칠곡초), 중(서울 용산중), 고(서울 용산고), 대(고려대), 프로(고양 오리온)팀 모두를 우승시켰다. 초등학교 6학년 당시 KBL총재배 초등부 농구대잔치 우승을 시작으로 중학교에선 춘계연맹전, 협회장기, 전국체전에서 모두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고, 고등학교 시절엔 오랜시간 무관에 그치던 용산고를 우승시켰다.[* 이승현은 꽤 어린 나이부터 용산고 OB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용산고 출신인 양동근이 "넌 여기 와도 돼. 우승시켰으니까" 라고 이승현에게 이야기 해줬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재학 중 단 한번도 지지않았으며, 김종규/두경민/김민구가 버티던 경희대를 꺾고 MBC배와 대학농구리그를 모두 제패해버렸다. 특히 4학년에 재학중이던 2014년 가을 MBC배 대학농구 결승전에선 종료 1분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동점 3점슛을 작렬시키고, 종료 1초를 남기고 역전 2점슛을 성공시키는 원맨쇼까지 보여줬다.
* 이승현에 이어 2순위로 서울 삼성에 입단한 [[김준일]]과는 선의의 라이벌 관계이자 오랜 친구사이이다. 1년차때는 실제 신인왕 경쟁을 치열하게 다퉜는데 마지막 맞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이승현이 신인왕을 차지했다. 팀 성적 역시 이승현이 더 좋은것도 컸다. 다만 김준일이 끝까지 경쟁력이 있었던건 용병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공격해 득점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신인왕 평가 기준이 전에 비해 팀 성적을 덜 보는 풍토가 시작된 점도 컸다. 둘 다 상당히 힘이 좋은 선수들인데 이승현의 말로는 순수 힘에서는 [[김준일]]이 본인보다 더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2년차 이후 완전히 변하게 되었는데, 1년차에는 비교적 비교가 가능했다면 2년차에는 김준일이 PO에서 보여준 삽질과 비교되어 이승현에게 미안할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 이억년 . . . . 4회 일치
'''이억년'''(李億年, ? - ?)은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 유학자이다.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이조년]]의 형이자 [[이승경]]의 삼촌이고, [[이인임]], [[이인복]], [[이인민]], [[이인립]]의 종조부이며 [[이숭인]]의 종고조부이다. [[경상북도]] 출신.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부임했다. 개성부 유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가 국정에 간섭, 관여하자 원나라의 개입을 항의하는 시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경상남도 함양군 위성(渭城)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서당인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사후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되었다.
사위 광평군 이능의 본관은 성주로 기록되었으나, 이억년과는 다른 문중 사람이었다. 이억년의 선조는 신라의 재상 이순유였고, 이억년의 사위 이능은 고려 말에 사재감 동정을 지낸 이무재(李茂才)의 증손이었다.<ref>뒤에 이무재를 시조로 하는 이씨는 성산이씨, 광평이씨라 하여 성주이씨와 구별하려 부르고 있다.</ref>
== 관련 항목 ==
- 이영 (1494년) . . . . 4회 일치
'''이영'''(李英, [[1494년]] ~ [[1563년]] [[2월 22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이다.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 본관은 영천이다. 청렴결백하였으며, 수령 재직시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무관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무신으로 드물게 청렴하고 근실했다는 평을 들엇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조선 중종|중종]] 때인 1514년(중종 9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절도사, 참판 등을 역임했다. 벼슬에 있으면서 염근(廉謹)하기가 무반(武班)에서 가장 보기 드문 자라는 평을 들었다. 1545년 [[조선 명종|명종]]이 즉위하자 단천 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정평 부사에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평부사 재직시 사적으로도 백성을 범하지 않아 감사가 포장(褒奬)하고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1552년 회령부사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청백리에 뽑혔다. 또한 야인을 회유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군비 확충과 군사훈련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1556년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병조참판과 제주 목사·경상우도 병마절도사·부호군·호군 등을 지냈다.
- 이영아(배우) . . . . 4회 일치
또한 베트남이라는 연관 검색어도 뜨는 것이 특이하다. 2007년 [[SBS]] 주말드라마 [[황금신부]]에서 [[베트남]] 신부 역으로 주연을 맡아 유명해지면서 생긴 일. 베트남 신부 역을 실감나게 해서 당시 실제 베트남 사람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으며, 지금도 이영아를 치면 자동적으로 베트남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뜬다.
* 이영아를 치면 자동적으로 다이어트라는 연관 검색어가 뜬다.[* 과거는 지금과 같은 몸집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거구였다고 한다.] 보기보다 상당한 글래머다. [[강소라|이 배우]]와 비슷하다.
|| 보건복지부 || 장관 표창상 || ||
- 이영훈 (경제학자) . . . . 4회 일치
한신대학교 등에 강사로 출강했었고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및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경제사학회 연구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후 2017년 2월 28일 정년 퇴임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28/0200000000AKR20170228081000004.HTML?input=1195m|제목=서울대 교수정년식…'식민지근대화론' 이영훈 등 28명 퇴임|성=이재영|날짜=2017-02-28|뉴스=연합뉴스|언어=ko-KR|확인날짜=2017-03-26}}</ref>.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ref>{{웹 인용|url=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2&nNewsNumb=20170324115&nidx=24116|제목=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 “자본주의 맹아론은 대한민국 부정으로 이어지는 주장”|언어=ko|확인날짜=2017-04-13}}</ref>
[[2004년]] [[9월 2일]] [[문화방송]]의 100분 토론에 출연하여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함으로써 일제 식민 통치를 찬양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이 교수는 "정신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범죄행위는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며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업소 주인들이고 그 명단이 있다"고 주장하여 정신대 문제를 성매매와 동일시 하였다.<ref>{{뉴스 인용
2013년 그가 저술한 《대한민국 역사》(도서출판 기파랑)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관하는 시장경제대상 저술부문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 이유리(배우) . . . . 4회 일치
이 후 2004년 [[김수현(작가)|김수현]] 작가가 집필한 KBS 드라마 《부모님전상서》에서 '안성미'역으로 분한다. 김수현 작가의 가족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다복하고 바람잘날 없는 대가족의 막내딸로 현실의 문제를 대변하는 젊은이로 나왔다. 이때부터 소위 '김수현 사단'이라 불리며 김수현 작가와 인연을 맺게 된다.이 후 청춘스타에서 벗어나 한층 성숙한 이미지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연기폭을 넓히기도 했지만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가 트렌디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후 너무 이른 나이에 중장년층에게 어필하는 이미지가 고착된 것이 아니냐는 평도 있었다. 이유리는 이에 대해 후일 "《부모님전상서》 부터 같이 해서 그런지 기자 분들이 김수현 사단이라고 저를 부르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제게 기회를 많이 주신 분이고 연기를 통해 배워갈 수 있게끔 해 준 연기사관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한 연기자가 한 작가로 인해 이렇게 많은 기회와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게 행운아 같다."며 생각을 밝혔다.
* 이유리의 형제관계는 4남매 중 막내로 큰 언니, 오빠, 작은 언니 그리고 이유리가 셋째 딸이다. 이와 비슷한 사람은 [[이효리]]가 대표적[* 공교롭게도 이효리의 둘째언니 이름은 이유리 본인의 이름과 동명이인이었다]. 가족의 막내딸이라 곱게만 자랐을 것만 같지만 이유리는 어릴 때부터 무거운 것도 많이 들고 그랬다며 지나가듯 푸념하면서 식구가 많아 어릴 때 [[짜장면]] 같은 걸 시키면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 식탐이 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상해]]에도 이러한 형제관계였다. 허나 실제로 이유리는 1남 3녀 중 막내이고, 극중 변혜영은 1남 3녀 중 장녀이며, 둘째이다. 이유리 실제 형제의 맏이는 여자고, 극중 맏이는 남자라는 것이 차이점.] 10년 전 방송 '좋은 아침'을 통해 작은 언니의 얼굴이 잠시 비춰졌는데 막내 못지않은 미모의 소유자이다. 당시 언니는 성경책을 보고있는 동생 이유리에게 "지금 니가 대본을 봐도 모자랄 판에 성경책을 보냐"며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이유리가 '만원의 행복'에 출연당시 부모님이 등장했는데 부모님과는 반반씩 얼굴이 닮은 듯하다. 이때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처음 말해본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였다.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353535><#353535> '''{{{#white 수상 연도}}}''' ||<#353535> '''{{{#white 시상식}}}''' ||<#353535> '''{{{#white 부문}}}''' ||<#353535> '''{{{#white 작품}}}''' ||<#353535> '''{{{#white 관련 영상}}}''' ||
- 이장경 . . . . 4회 일치
'''이장경'''(李長庚, ? ~ ?)은 [[고려]]시대 중기의 호족으로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5형제의 아버지이자 [[이인기]], [[이승경]]의 할아버지였다. [[이인임]]의 증조부, [[이숭인]]의 고조부였다. 아들 5형제의 출세로 거듭 증직되고 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가 손자 [[이승경]]의 출세로 [[원나라]]로부터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되었다. 본관은 [[성주 이씨|성주]]이며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본다. [[경상북도]] 출신.
[[이백년]]의 아들이자 손자 [[이인기]]는 평양부 부윤이었고, 고손자(아들 이백년의 증손)는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자 [[고려]] 멸망 이후 두문불출한 절신 [[이숭인]]이었다. 이인립(李仁立)의 아들이자 이장경의 고손자인 이제(李濟)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조선 왕실과도 인척관계가 되었다.
* 장인 : 이약(李若, 본관은 [[합천]])
== 관련 항목 ==
- 이종화 (1949년) . . . . 4회 일치
* 1983. 03. 28 : 총무처 수습행정관
* 1998. 04. 11 : 대구시청 종합건설본부 관리부장
* 1999. 08. 21 : 대구시청 공보관
* 2000. 08. 04 ~ 2003. 05. 26 : 대구시청 감사관
- 일곱개의 대죄/193화 . . . . 4회 일치
* 드레퓌스는 드디어 제정신으로 일어서 프라우드린에게 천관파옥인을 날린다.
* 프라우드린은 "관돌"로 기습을 걸고 자라트라스는 핸드릭슨을 데리고 "뇌신의 섬동"이란 기술로 피한다.
* 프라우드린을 관통하는 공격.
* 분노한 드레퓌스의 "천관파옥인"이 프라우드린을 날려버린다.
- 장익 (1933년) . . . . 4회 일치
| 관구 =
'''장익'''(張益, [[1933년]] [[1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이자 시민사회단체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이며, 세례명은 십자가의 요한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신부 등을 거쳐 [[천주교 춘천교구]]장과 [[천주교 함흥교구]]장 [[서리]] 그리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을 지낸 운석 [[장면]](張勉)의 넷째 아들이다.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이다.
==가족관계==
** 여동생 : 장명자 (張明子, 데레사, [[1941년]] [[10월 3일]] ~ [[198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빌라노바대학교]] 도서관학 석사)
- 전가의 보도 . . . . 4회 일치
그러나 이렇게 귀한 가치가 있는 반면, 가치가 너무 높기 때문에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전가의 보도였다. 가문 대대로 물려줄 정도의 보도라면 가치가 매우 높지만, [[일본도]]는 관리하기가 어렵고 실전에서 사용하면 손상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가의 보도에는 높은 가치가 있는 만큼 실제로 사용하다가 손상을 입히면 그만큼 깍여나가는 피해액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군도]]를 대신하여 이런 '전가의 보도'를 가지고 전장에 나가는 사례도 많았는데, 그 탓에 이런 전가의 보도가 손상을 입는 사례도 빈발하였다. 아무리 이름 높은 명검이라고 해도 근대 공업제품과는 달리 품질이 일관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근대 기술로 만들어진 칼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헤이세이 24년도 일본 문화청에서 발표한 「국어에 관한 여론조사(国語に関する世論調査)」에 따르면, 전가의 보도(伝家の宝刀)로 쓰는 사람이 54.6%, 그런데 본래 한자가 아닌 천하의 보도(天下の宝刀)[* 일본어로는 발음이 같다.]로 쓰는 사람이 무려 31.7%나 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분류:일본어]][[분류:관용구]]
- 전상우 (1953년) . . . . 4회 일치
* 1998.11 ~ 2000.01 : 특허청 기획관리관실 기획관리관
- 전성우 (배우) . . . . 4회 일치
| 학력 =안양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br>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 《[[육룡이 나르샤]]》 (2015년, SBS) - 성균관 유생 역
* 《화랑》 (2010년) - 무관랑
- 절대가련 칠드런/442화 . . . . 4회 일치
모호츠쿠 관측소에서 펼쳐지는 구르메 라이프?
* 모호츠쿠 관측소로 좌천된 미나모토 일행은 라면이나 만들어 먹으면서 느긋느긋 먹방라이프를 찍는 중.
* 표면상으로는 요리나 하면서 한가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서는 모호츠쿠 관측소의 시스템을 장악하고 감시카메라엔 가짜 영상이 흘러가도록 꾸미기 위한 시간벌이.
* 하지만 미나모토의 요리를 즐긴 거 자체는 맞는지, 미나모토가 요리는 관두겠다고 하자 울상이 된다.
- 절대가련 칠드런/445화 . . . . 4회 일치
* 한조와 니아는 불량 에스퍼의 교정을 전담하는 "재단"의 교정시설 팀에 들어가 있으며 "조사관H", "조사관N"이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 상황을 눈치챈 한조가 '조사관 A'의 전언이라 강조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 언리미티드의 주인공 앤디 히노미야와 유우기리도 지금은 "재단" 소속. 조사관A가 앤디를 말하는 것.
- 절대가련 칠드런/465화 . . . . 4회 일치
* 이 때 '츠보미 문서'가 나타나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추구하려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달라고 하고, 후지코는 흔들린다.
그녀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해 조직을 재편한 거라며 초능력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에스퍼에게 관용적인 지휘관을 경질한다, 이것이 모두의 바람대로가 아니냐고 묻는다. 지금의 그녀에겐 소수 에스퍼의 안녕보다는 사회 전체의 평화가 중요한 문제다. 만약 그녀가 이대로 블랙 팬텀이나 "보통 사람들"같은 조직을 분쇄하면 그걸로 끝날까? 인간은 배타적인 생물이다. 설사 그들이 사라져도 또다른 조직이 나타나 에스퍼를 배척할 것이다. 교육이나 홍보로 그걸 극복할 수 없고 그런데 연연하는건 시간낭비다. 그럼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둬버리면, 반대로 에스퍼도 "원하는 대로" 해버릴 명분이 생긴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면 결국 이기는 건 에스퍼. 세상은 한 번 망하겠지만 에스퍼의 주도로 재건될 것이다.
* 효부가 뭘 보여줄 셈이냐고 묻자 그는 절망의 모습을 직접 보여준다. 후지코는 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총구를 자기 자신의 관자놀이로 향한다.
- 정만조 . . . . 4회 일치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과 가까운 친척으로 [[한성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개화파 학자였던 [[강위]]의 제자로 수학하여 글과 글씨에 뛰어난 재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884년]] [[교섭통상아문]]에서 주사 벼슬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1889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한 뒤 예조참의, 승지, 내부참의 등을 역임했다.
정만조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개화 사상을 익힌 앞서가는 지식인이었다. 당시 세도 세력인 [[여흥 민씨]] 일파와는 대립하다가 정치적인 사건에 말려들어 [[전라남도]] [[진도 (진도군)|진도]]로 유배되었다. 10년이 넘는 유배 생활 끝에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에야 사면을 받아 다시 관계로 복귀하였으며, 이후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이익에 따라 활동하는 친일 학자가 되었다.
[[1929년]] 관제 친일 유림 조직인 [[경학원]]의 대제학을 지냈고, 국사 편찬 업무에 발탁되어 일본의 시각에서 역사를 적는 데 일조했다. [[1921년]]부터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일본 측의 시각에서 《조선사》를 집필하였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편찬에도 감수위원으로 참여했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39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개화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정몽헌 . . . . 4회 일치
|본관 = [[하동 정씨|하동]]
'''정몽헌'''(鄭夢憲, [[1948년]] [[9월 14일]] ~ [[2003년]] [[8월 4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2002년 9월]]부터 [[대한민국의 특별검사제도|대북 불법송금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도중 [[2003년]] [[8월 4일]] 현대계동사옥 12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정몽헌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아버지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
- 조원진 . . . . 4회 일치
* 관련 문서: [[친박]], [[미국병/사대주의]]([[미빠]]), [[친미파]], [[극우]],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
|| '''본관''' ||[[조씨|배천 조씨]]||
[[한국외대]] 총장을 지낸 [[황병태]]가 제15대 국회에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출마하면서 조원진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에 응한 조원진은 그를 따라 보좌관으로 1996년 정계에 입문하였다.
만 34세에 [[대우자동차]]를 거쳐 [[포스코대우|대우]] 중국기획조사부 부장까지 했었다. 그 후 [[황병태]]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두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16대 총선 선거공보물에는 명동판매라는 기업의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한다.
- 지증왕 . . . . 4회 일치
즉위 초부터 그는 제도와 체제 개편을 추진하였다. [[504년]] 음력 4월 상복법을 제정하고, 음력 9월에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五年 夏四月 制喪服法頒行 秋九月 徵役夫築波里 彌實 珍德 骨火等十二城(5년(504) 여름 4월에 상복(喪服)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시행하였다. 가을 9월에 인부를 징발하여 파리성(波里城), 미실성(彌實城), 진덕성(珍德城), 골화성(骨火城) 등 12성을 쌓았다.)}}</ref>
[[509년]]에는 시사(市肆, 혹은 [[시전]])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十年 春正月 置京都東市(10년(509) 봄 정월에 서울에 동시(東市)를 설치하였다. )}}</ref> 이리하여 무역과 상인들의 거래를 단속, 통제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6년(505) 봄 2월에 왕이 몸소 나라 안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하였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는데, 군주(軍主)의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512년]] 실직주(悉直州)의 군주이자 [[이찬 (신라의 관직)|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이 항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ref>
- 진격의 거인/93화 . . . . 4회 일치
대장 마가트가 옥상으로 올라오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담배를 문다. 콜트가 불을 붙여주자 연기를 마시며 밀담을 계속하라고 제촉한다. 지크는 "엘디아인의 비밀에 관심이 있으시냐"고 농담하듯 화제를 돌린다.
술주정이나 다름없는 연설이었지만 청중의 마음을 울리기엔 충분했다. 이미 한 전씩들 꺾은 듯하고, 어린 동포가 헌신한 이야기는 더할나위 없이 감동적이었다. 엘디아인 전사대는 모두 흥분해서 함성을 내지르고 가비의 이름을 연호한다. 이런 소란은 마가트 대장과 마레 장교들이 있는 일반객실에도 들렸다. 지크와 피크, 갤리어드도 여기에 있다. 부관은 소리를 듣고 그만두게 해야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마가트는 "오늘밤만 눈감아 주자"고 넘어간다. 이 조치는 마레의 전사들에게도 만족스러운 것 같다.
* 프리츠 왕가와 레이스 왕가의 관계의 수수께끼는, 그냥 '프리츠 왕가 = 레이스 왕가' 였다(…). 이름이 바뀌게 된 데는 무슨 원인 - 이를테면 방계계승이라든가 - 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동일한 가문인듯.
* '아커만 일족'이라는 설정이 제시. 거인과학의 부산물이라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뭔가 거인과 연관되어 특수한 개조를 받은 일족인 듯 하다.
- 차광렬 . . . . 4회 일치
| 본관 = [[연안 차씨|연안]](延安)
| 근무 = [[군의관]]
| 지휘 = [[군의관|군의무장교 공중보건의]]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연안 차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산부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차동엽 . . . . 4회 일치
|본관 = [[연안 차씨|연안]](延安)
'''차동엽'''(車東燁, [[1958년]] [[5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부|사제]]이며, 세례명은 '''노르베르토'''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77학번으로, [[1981년]]에 학사 학위하였다. [[대한민국해군 사관후보생|해군학사장교]] 72기 출신이며, 현재는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 [[1984년]], [[대한민국 해군]] 중위 전역 ([[대한민국해군 사관후보생|해군학사장교 72기]])
차동엽 신부는 해군사관후보생 훈련기간 중 작은 체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성적이 우수하였다. 그래서 동료들이 '차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차명진 . . . . 4회 일치
|본관 = [[연안 차씨|연안]]
* [[1996년]] ~ [[2000년]] : [[김문수 (정치인)|김문수]] 국회의원 보좌관
* [[2003년]] ~ [[2005년]] : 손학규 경기도지사 공보관, 특별보좌관
- 창작:좀비탈출/4-1-2-1 . . . . 4회 일치
하긴 생각해 보면 놈들에게 "소리"가 감지되는지는 알 수 없다. 관찰에 따르면 놈들은 개인차가 상당하다. 그야 부패 정도나 생전의 몸 상태가 영향을 줄 거란건 명백하다. 하지만 고막은 어떨까? 안구나 피부는 썩어 버린다. 고막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야 호되게 싸다귀라도 맞으면 터지겠지만 놈들이 그럴 일이 있을까? 설사 고막이 있더라도 자극을 느낄 뇌가 녹아 버린 놈들이 소리를 들을 수는 있을까?
초조함은 나의 모든 선택에 회의감을 던졌다.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단 다섯걸음이 이렇게 길고 고통스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발씩 옮길 때마다 모퉁이에서 튀어나오는 손톱과 이빨이 3D 입체영상처럼 생생하게 재생됐다. 아직가지 들린 적이 없는 그르렁대는 소리도, 내 머릿 속에서는 정지버튼 없이 자동재생 된다. 모퉁이에 다 도달해서는 갑자기 현관문 쪽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쿵 쿵……'''
이럴 땐 문을 닫아둬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덕분에 그게 환청일 뿐이라는 자각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엉거주춤 멈춰서서 오줌이나 지리고 있겠지. 아니, 사실 지리는건 상관없어. 지금 이미 '''축축해져 버렸으니까.'''
독을 묻은 자리는 놈들이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그때 이것들을 묻으면서 커다란, 거의 바위에 가까운 돌덩이를 하나씩 올려놨었다. 개나 고양이가 파해치는걸 막으려는 조치였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한두 마리 정도는 여기에 찝적거렸겠지만 그놈들 힘으로 이걸 치우는건 무리였을 거다. 이 고무적인 사실 때문일까? 조금 긴장이 풀렸다. 꽉 졸려있던 기관지가 풀리면서 몇 주만에 맛보는 바깥 공기가 달게 느껴졌다.
- 창작:좀비탈출/5-1-2 . . . . 4회 일치
내가 치운 돌은 두 개째까지다. 기억이 맞다면 세 번째 부터는 된장, 고추장, 간장의 순서일 것이다. 물론 그것들도 필요하지만 이제 와서야 담아갈 수단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놈의 그릇을 챙겨왔어야 했다. 그래서 세 번째부터 포기하고 쌀과 야채만 가방에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았다. 이정도만 해도 대략 일주일치는 된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현관을 잠가 버리면 내 목숨은 적어도 일주일 연장되는 것이다.
식량을 옮긴 뒤 깨끗히 몸을 씻었다. 물리진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녀석들과 접촉했던 것은 찜찜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라디오 정보에선 녀석들에게 물리거나 체액이 혈관에 들어가지 않는 한은 안전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까지 진실일까? 혼란을 막아보려는 질병관리국의 정보조작이 아니란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가 내가 씻는 그 물이 며칠 동안 찜찜해서 쓰지 않았던 "수돗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뭐가 어떤가? 왠지 이젠 신경쓰이지 않는다. 체약이 묻었던 옷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버렸다. 세탁을 하기엔 물이 아깝고 시간도 아깝다.
관찰 결과 하룻밤이 다 가도록 마당으로 침입하는 녀석은 없었다.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나는 묘한 행복감에 젖었고, 오래간만에 거실에서 보는 동네 풍경은 아버지가 사랑했던 바로 그 세트장이었다. 어슬렁거리는 출연자들 따윈 없는 셈 쳐주지.
- 채수빈 . . . . 4회 일치
| 서울 대학로 수현재 씨어터 DCF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br />(2016.10.13 ~ 2016.11.20 공연)<ref>{{웹 인용|title=채수빈, 연극 ‘블랙버드’ 관객 호평 속 마무리|url=http://m.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20905|website=Naver}}</ref>
|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br /> (2019.3.15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ret>{{웹 인용|title=채수빈,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 차기작 결정 |url=http://m.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20905|website=Naver}}</ref>
- 최동수 (야구인) . . . . 4회 일치
[[2010년]] 시즌 좀처럼 주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그 해 [[7월 28일]] 4:3 대형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다. 주전 [[내야수]] [[박정권]], [[나주환]]이 부상으로 이탈하여 [[내야수]]가 필요하였던 [[SK 와이번스]]와 [[투수]]가 필요하였던 [[LG 트윈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그는 [[권용관]], [[안치용]], [[이재영 (야구 선수)|이재영]]과 함께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고, [[LG 트윈스]]는 [[SK 와이번스]]로부터 [[투수]] [[박현준 (야구 선수)|박현준]], [[김선규 (야구 선수)|김선규]], [[포수]] [[윤요섭]]을 받았다. 그 때 [[SK 와이번스|SK]]와 [[LG 트윈스|LG]]는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3연전 중이어서, 트레이드 된 선수들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에서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트레이드가 성사된 [[7월 28일]] 당일, 트레이드 당사자인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가 맞대결하게 되었는데 그는 같이 이적한 [[안치용]]과 함께 선발 출장하였고 [[권용관]]은 도중에 대주자로 교체되어 출전하였다. 그리고 이적한 선수 중 [[윤요섭]]이 대타로 나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SK 와이번스]] 이적 첫 경기에서 그는 3점 홈런을 쳐 내는 등 4타점을 쓸어담아 맹활약하였다. 그 날 [[SK 와이번스]]는 연장전에서 [[권용관]]이 [[정성훈 (1980년)|정성훈]]의 타구를 놓치는 실책을 범해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여 패했다. 특히 그에겐 프로에서 눈을 뜨게 해 준 [[김성근 (야구인)|김성근]]과의 재회여서 더 의미가 컸으며, 2차 드래프트가 있기 전 [[김성근 (야구인)|김성근]]이 감독직에서 경질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2010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 해 시즌 후 32번을 쓰고 있었던 [[외야수]] [[박윤]]이 보류 선수에서 빠져 [[신고선수]]로 전환되자, 자신의 번호였던 '32'번을 되찾았다. [[2011년]]에는 [[박경완]]의 재활이 장기화되어서 10년 만에 그의 본업인 [[포수]]로 출전하기도 하였으며, [[2002년]] 이후 9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복귀하여 [[2011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도 출전했다.
- 최상열 . . . . 4회 일치
'''최상열'''(崔相烈, 1958년 ~ )은 대한민국의 제36대 [[광주고등법원]]장을 맡고 있는 [[법관]]이다.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14기를 수료했다. 1988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판사에 임용되어 1994년 부산고등법원 판사, 1997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하다가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2005년에 부장판사가 되어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서울고등법원을 거쳤다. 2014년 2월에는 제17대 울산지방법원장과 제19대 울산광역시 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되어 2년간 역임한 이후 2016년에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판장을 맡았으나 2018년 2월에 제36대 광주고등법원장에 임명되었다.
김우종 전 경희대 교수와 소설가 이호철씨 등 [[문인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씨 등이 지난 2003~2008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지정돼 생활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에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국가의 주장에 대해 "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지급한 보상금이 위자료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며 "국가는 총 6억 96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 최선 (정치인) . . . . 4회 일치
'''최선'''(崔善, [[1974년]] [[1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서울시 강북구 삼양동에서 태어났으며 [[서경대학교]] 일어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시 강북구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민주통합당]] 소속이다. 2005년 어린이집 [[꿀꿀이죽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2006년 5월 31일 기초의회선거의 강북구 구의원에 출마하여 당선하였으며 이후 '보육조례개정안'제정 활동등을 하였다. 최근 강북구 의회의 의정비 인상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고 있다. 2009년에는 강북구청장이 공공근로 인력을 동원하여 부인 땅을 경작했다는 사실을 폭로해 MBC 뉴스데스크 등 언론의 관심을 끈 바 있다.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373215 SBS의 관련보도]
*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20060720154255 프레시안에 기고한 '꿀꿀이죽' 사건관련 최선의원의 글]
- 최승자 . . . . 4회 일치
가족이 없었고, 서울의 세 평짜리 고시원에서, 여관방에서, 밥 대신 소주로, 불면의 시간으로 죽음 직전의 단계까지 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다시 시를 발표했다.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 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 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
('여성에 관하여' 중에서)
- 카네다 쇼타로 . . . . 4회 일치
철인 28호 FX에서는 왕년의 영웅인 중년 탐정.[* 철인 28호 FX의 배경 세계는 초대 철인 28호 이후의 시대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미인 천재 과학자인 사카키 요코와 결혼했으며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카네다 마사토를 얻었다. 이 마사토가 시리즈 3기인 FX의 주인공. 그런 이유로 주역의 자리는 내줘야 했지만 소년 시절부터의 짬밥은 어디 가지 않는지 활약도 많다. 중반부터는 인터폴의 장관이 되며, 그에 따라 카네다 탐정 사무소 전원이 인터폴 소속이 된다.
꽤 애처가인 듯. 초대 철인 조종기의 보관함 암호가 아내 생일이다. 덕분에 마사토는 손쉽게 철인을 몰고 나갔으며 덕분에 어떤 의미에서는 시리즈의 전통인 철인의 조종기 탈취 요소가 3기의 주역인 마사토와 철인 FX만이 아닌 쇼타로와 초대 철인에서도 지켜졌다.(...)
복장은 블레이저에 반바지 차림. FX에서는 정장에 트렌치 코트 등 서양 느와르의 탐정풍 복장을 입다 이후 인터폴 장관이 되면서 장관복을 입는다.
- 캡틴 아톰 . . . . 4회 일치
DC로 오면서 설정이 대폭 바뀌는데 에너지를 방출 및 흡수하는데다 에너지 파장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쓸 수 있다. 이름이 너새니얼 크리스토퍼 애덤(Nathaniel Christopher Adam)으로 바뀌고, 과학자가 아닌 공군이 되었다. 아담은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하는 대가로 모종의 군사실험에 참여한다. 그런데 모종의 군사실험이...추락한 외계인 우주선을 핵폭탄으로 날리는 것. 아담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는데, 18년 뒤 외계 금속으로 코딩(?)한 신체와 초능력을 가진 채 등장했다. 이후 사형드립협박을 받아 어용관제 히어로(...)가 된다. 미 정부는 모든 기록을 날조하고 캡틴 아톰을 저스티스 리그에 침투시켰는데, 아담은 보기 좋게 즐 때리고(...) 히어로 길을 걷는다.
와일드스톰 세계관을 여행중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타락]하고 [[슈퍼맨 프라임]]과 싸우다가 에너지를 감당 못하고 폭발해서 차원 하나를 날려버리며 사망. 그러나 돌아왔다.
참고로 열기나 냉기를 느끼지 못하고 먹거나 잠을 안 잔다고 한다. 확실한 지 확인되지 않았고 비관적인 의미에서 한 말이지만 죽지도 않을 것 같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파워걸]]과의 전투에서 [[부스터 골드]]의 말에 의하면 그가 높은 수준의 힘을 쓰면 [[방사능]]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대접은 이렇지만 [[wiki:"먼치킨(양판소)" 먼치킨]] 반열에 들어간다.
[[저스티스 리그]]에 가입한 초반부에 임무 때문에 블루 비틀 II에게 초대 블루 비틀과 친했다고 했다가 거짓말인 것이 들통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보면 거짓말이 아닌 것이 사교관계가 어쨌든 두 캐릭터는 찰턴 코믹스에 있다가 DC 코믹스에 흡수되었다.
- 콩고(소설) . . . . 4회 일치
어찌됐든 앞서게 된 일행은 잃어버린 도시 진즈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진즈의 원주민들이 경비를 위해서 남겨놓은 회색 고릴라 집단이 살고 있었고, 곧이어 회색고릴라 무리의 집요한 공격에 노출된다. 첫교전에선 전기철조망과 자동사격기관포로 막아내지만 탄약이 절반이상 소모된데다 고릴라들의 전기철조망에 한번 당하자 나무 막대로 철조망을 젖혀놓고 들어와 대원 하나 살해할 정도로 높은 지능과 무서운 집념을 보인다. 이후로 영장류가 물을 싫어하는 특성을 사용해[* 에이미도 앞서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급류를 타기 위해 고무보트를 타야하자 피터에게 똥 같은 놈이라고 욕했다.(...)] 강물을 끌어들인 도랑도 파고 보유량이 넉넉한 최루탄으로 밀어내는 등 선전을 펼치고 고릴라 무리를 선제 공격하거나 아예 철수하는 방법도 찾지만 고릴라 수가 너무 많이 총으로 무장했어도 십여명 수준으로는 대책이 없었고 퇴로도 다 매복한 상태라 오도 가도 못하며 탐험대는 희생을 내며 궁지에 몰린다.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탄약도 떨어지고 비까지 내려 최루탄도 무력화되고 도랑은 고릴라가 나무를 걸쳐 통과해버리면서 몰살될 위기에 처하는데 에이미의 도움으로 엘리엇은 고릴라들이 쓰는 언어를 해독하여 그들을 진정시키는데 성공하여 위기를 벗어난다.
암컷 [[고릴라]]. [[수화]]를 사용할 줄 아는 고릴라로서 지능이 높으며, 성격은 대체로 상냥하고 온순하지만 가끔 토라져서 화내기도 하는 [[츤데레]]. 인간으로 치면 사춘기 정도이다. 과거에 진즈 주변에서 살았으며, 진즈에 접근했다가 회색 고릴라에게 모친이 살해당하고 고아가 되었다가 잡혀서 팔려가게 되었다. 피터가 회색 고릴라 무리 앞에 떨어졌을 때 직접 나서서 우호적인 행동을 보여서 피터를 구해내고, 회색 고릴라들이 쓰는 언어를 해독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 탐험대의 캐리어로 대활약한다. 피터와 먼로 쌍방에서 관심을 받는 이 소설의 메인 히로인(!) 격인 고릴라, 모험이 끝난 뒤에는 야생 고릴라 무리들 사이에 들어가서 아이도 낳고 살게 된다.
정체는 상당히 충격적인데, 작중에서 고대에 살았던 진즈 주민들과 기존 고릴라와의 '성관계'로 태어난 '인간과 고릴라의 [[혼종]]'으로 추측된다. 원주민 여성과 고릴라가 성관계를 하는 부조물 등에서 추측되는 결과.
- 키프 . . . . 4회 일치
연애 관계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연인으로 삼으려고 관리를 하고 있는 중인 연인 미만의 이성 대상을 뜻한다.
키프 군이란 여러 남자와 사귈 정도로 인기있는 여성의 관점에서, 진심을 내고 있는 남성 이외에 연인 미만의 교제를 하고 있는 남자를 뜻하는 말이다. 국내속어로 하자면 어장관리의 물고기. 남자친구 예비군 같은 취급.
- 킹덤/498화 . . . . 4회 일치
* 병력을 증강한 이후 처음으로 전쟁 준비에 나서는 비신대. 갓 입대한 활형제와 간두 등 신병들은 수도 함양으로 소집되면서 수도 함양의 전경과, 몰려드는 무수한 군세와 긴장감으로 정신이 없다. 초수 등 고참들이 이들이 들뜨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이 작전은 매우 기밀로 취급돼서 병사들도 이 자리에 올 때까지 아무런 정보를 받지 못했다. 다만 여기에 모여든 지휘관들의 면면을 보고 얼마나 위험한 전투가 될지 짐작할 따름이다.
정치적 차원으로 생각하면 잡음이 많을 법한 에피소드. 우선 종전 전투에서 공을 세운 환의가 총대장이 되지 못했고, 비록 최 공방전의 댓가로 대장군과 동급의 지위를 얻었다곤 하나 출신과 편제가 애매모호하고 환의 군 이상으로 이질적인 군세를 이끄는 양단화가 환의와 동격으로 합류했다. 이들을 최종적으로 조율할 총대장 왕전도 공공연하게 흑심이 있는 걸로 비춰지는 인물. 이런데다 이신이나 왕분, 몽념같은 개성적인 하급 지휘관들이 독립부대 노릇까지 하게 됐으니, 지휘관 편재 상으론 콩가루 군단이 완성된 거나 다름없다.
- 킹덤/505화 . . . . 4회 일치
몽념은 내심 열미 성의 최대 무기는 성이나 병력이 아닌 저 높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진나라도 함곡관이 돌파됐을 때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오합지졸의 민병으로 어떻게든 수성에 성공한건 진왕 [[진시황(킹덤)|정]]이 직접 전선에 나서야 사기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이 이번엔 진군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그는 비신대 지휘관 [[이신(킹덤)|이신]]에게 큰 짐이 지워졌다고 본다.
* 한편 공성을 맞은 지휘관 이신, [[하료초]], 양단화를 만나고 있다. 양단화는 [[바지오]]와 [[타지후]]를 대동. 하료초는 왕전의 의중이 어떻든 진짜 자기들만으로 열미를 따낼 각오를 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견은 없다. 하지만 하료초가 이틀안에 공성을 마치자고 하자 양단화는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해서 이신과 하료초를 놀라게 한다. 이신은 좋은 책략이라도 있는 거냐고 묻는데 그녀의 대답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양단화는 혼자 말을 몰고 진군의 앞으로 나아간다. 총사령관 왕전은 물론 몽념의 눈도 그녀에게 쏠린다. 특히 왕전은 그녀의 행동을 매우 주시하고 있는 듯 한데.
- 킹덤/513화 . . . . 4회 일치
* 왕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그대로 행군하는데, 갑자기 진로를 바꾸서 업과는 무관한 소도시 "오다"를 공략하겠다고 하는데.
* 열미를 빠져나온 진군은 바쁘게 진격하고 있지만 지휘관들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하료초]]는 [[이신(킹덤)|이신]]에게 이 작전이 불길한 예감 밖에 안 든다고 토로한다. [[몽념]], [[왕분]]도 이들과 말머리를 같이하고 달려가고 있다. 하료초는 병참인 열미를 버리고 가지고 있는 병량만 가지고 업을 친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몽념의 의견도 같다. 전략을 아는 사람이 취할 방법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면서 "네가 자살행위라고 했던 그 행동"이라고 왕분을 끌어들인다. 몽념은 [[왕전(킹덤)|왕전]]에게 간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식인 왕분 뿐이라며 은근히 그가 작전을 중단시켜 주길 청한다. 왕분은 말없이 한 발 앞서 가버린다.
그렇게 해서 진군이 도달한 곳은 업 공략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소도시 오다. 그저 따를 뿐이라 했던 왕분 조차 당황하고 지휘관들이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입을 모으는 작전이었다.
- 킹덤/517화 . . . . 4회 일치
* 이목은 그래도 언젠가는 함락될 거라 지적하나 그는 "나는 어차피 몸이 약해 그때 쯤엔 죽었을 것"이라며 알바 아니라고 일관한다.
* 드디어 업을 포위한 진군. 총사령관 [[왕전(킹덤)|왕전]]은 마지막 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장교들을 불러놓고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작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이신(킹덤)|이신]]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귀를 기울인다. 우선 왕전이 가장 처음 정의한 전황은 진군이 포위한 업을 중심으로 왕도권의 모든 조군이 진군을 요격하러 온다는 것이다. 듣기에도 진땀이 나는 설명이지만, 왕전은 그 중에서 진정으로 진군을 저지할 수 있는 병력은 단 둘 뿐이라 일축한다. 바로 북서의 대도시 "알여"와 태향산맥 일대의 세력을 규합한 "요양"이다. 오직 이 두 군만이 업에 당도해 진군을 격멸할 힘이 있다.
* 그리고 나머지 부하들은 전부 알여로 함께 간다. 이또한 "알여에 너무 편중됐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목은 "왕전도 알여를 향해 올 것"이라 내다본다. 놀랍게도 양군 지휘관이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셈. 이제는 정면승부, 이목은 그렇게 말한다.
- 킹덤/526화 . . . . 4회 일치
* 여전히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전장을 관망하던 [[조아룡]]은 그 흐름을 짐작하고 있었다. 마남자는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아광과 왕분에게 "지나치게 뭉쳤다"고 훈수하며 조군에 장수가 자신만 있는게 아니라고 말했다. 조군이 다시 힘을 받고 있었다. 마남자를 잡자고 아광과 왕분이라는 두 지휘관이 모두 집중된 게 틈이 됐다. 시간을 번 [[악영]]이 성공적으로 자군을 수습, 다시 대형을 갖춰 아광군에 들이쳤다. 그런데 정작 아광은 일선에 있지 않았으니 힘의 균형이 맞을 리 없었다. 전열이 위태로운 와중에 뒤에서는 마남자 2진까지 몰려오는 상황. 위기는 진군 쪽이었다.
조아룡은 그의 부관이 "지금 조아룡군까지 가세하면 승세는 완전히 넘오지 않겠냐"고 말하자 조금 더 시간을 두자고 했다. 조아룡군이 나서는 건 적이 좀 더 약해진 다음. 충분히 약해진 적을 먹으러 갈거라 말했다.
* 진의 중앙. 총대장 [[왕전(킹덤)|왕전]]은 이 같은 사태를 아는 것일까? 잠자코 있던 그가 후방에 배치한 [[비신대]]를 불러들였다. 그 지휘관 [[이신(킹덤)|이신]]이 왕전과 독대했다. 이신은 왕전의 부하가 "허가가 있을 때까지 장군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제지했지만 그 말을 무시했다. 왕전은 거기에 개의치 않았고 자기 생각에 잠겨 그가 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뻘쭘해진 이신이 "드디어 우리가 나갈 차례냐"고 막 떠들어대려 할 쯤, 왕전이 입을 열었다.
- 킹덤/529화 . . . . 4회 일치
* 견융왕 [[로조]]는 상황을 아주 쉽게 봤다. 산민족 진영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고 그의 병사들은 거침없이 그들을 분쇄했다. 견융의 영역을 침범한 벌, 로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조군 지휘관 [[순수수]]를 향해 이제부터 산민족군 후미를 쳐서 절반을 몰살시키겠다고 장담했다.
* 양단화는 산민족을 돌아보았다. 일선에서 깨져나가는 그들의 몸뚱이가 보였다. 자신에 전략적 실책 때문에 죽어나가는 동족들. 개전이래 처음, 그녀의 얼굴에 쓰라린 표정이 스쳐갔다. 그러나 잠시 뿐이다. 그녀는 곧 난관을 타개할 무언가를 찾아냈다. 부대의 우측 전방에 있는 산등성이였다. 그 위에 견융의 기마대가 포진해 있었다. 바로 그것이다. 양단화는 잠깐 고심했다. 방금 떠오른 직관이 전략적으로 타당할까?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양단화는 용기있는 여자였고 한때의 실책이 그걸 꺾을 수는 없었다. 결단이 섰다. 메라 족, 타라 족, 콘 족을 불러서 저 산을 빼앗으러 가자고 호령했다. 나머지 부대는 벽의 진군 부대와 함께 퇴각을 속행. 벽은 귀를 의심했으나 분명 지시는 내려졌다. 만류해볼 틈도 없이 달려나가는 양단화.
로조가 까불지 말라며 양단화는 자신의 먹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순수수는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승리. 조군은 요양에서도 이기고 주해평원에서도 이겨야 한다. 자신과 [[이목(킹덤)|이목]]이 모두 이기면 역사는 바뀔 것이다.
- 텐프레 . . . . 4회 일치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영어에서의 템플릿(Templet, Templete)은 어떠한 판형을 의미하며, IT쪽에서는 좁게는 플로우차트에서 넓게보면 프로젝트 관리상까지 포함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행해지는 관습 및 서식화된 표준을, 디자인에서는 일반화된 패턴과 믹스[* 글렌체크라든가 스프라이트와 같은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등을 가리킨다. 하지만 일본의 속어로는 이런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 [[편지]], [[연하장]]의 서식이나, 디자인 파일의 양식 등을 뜻한다. 어떤 양식이 정해져 있고, 몇가지 단어나 문장만 바꾸는 것. 여기에는 프로그램 오류 제보등을 했을 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며 앞으로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같은 [[코피페]]스런 대응도 포함된다. 친절하지만 별로 쓸모없고, 때로는 화까지 돋게 만드는 마이크로소프트스런 대응까지 포함.
[[텐프로]]와는 무관.
- 토리코/362화 . . . . 4회 일치
브란치는 미도라가 미식회를 비운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토리코 일행은 금관두 안에 든 음식을 확인하는데...
* 그 밑은 토리코 일행이 풀코스를 먹고 있던 현장. 금관두(통조림)에 봉인돼 있던 식재를 개봉하는 순간이다.
* 금관두의 내용물은 GOD, 센터, 네오의 일부 등등 여러가지 설이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 특이한 세금 . . . . 4회 일치
* 수염세 : 1705년, [[러시아]]의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가 제정했다. 이는 당시 러시아 남자들이 [[수염]]을 길게 기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럽 문화를 동경하여 이를 러시아에 도입하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는 수염을 기르는 관습을 없애려고 수염에 세금을 메겼던 것이다.
* 가발에 뿌리는 파우더세 : 1795년 도입. [[가발]]에 뿌리는 파우더에 과세가 이루어졌다. 이 당시까지 서양에서는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매우 위엄있는 가발(…)을 쓰는 것이 관례였으며 가발에는 파우더를 뿌려서 향이나 장식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 세금을 물리게 되면서 가발의 이용률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 스포츠 스타세 : 40개 이상의 주. 소득세의 일종으로서, 도시나 주를 방문한 사람이 해당 지역에서 수익활동을 했을 경우 그 소득세의 관할권을 주장하는 법률이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행정능력의 한계 때문에 한 경기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스포츠 스타들만 피해를 본다. 1991년 [[시카고 불스]]가 [[LA 레이커스]]를 NBA 파이널에서 꺽고나서, 캘리포니아 주에서 졸렬하게 보복성으로 제정했다(…). 그리고 이 졸렬함을 여러 주들이 앞다퉈서 따라하게 됐다.
- 페어리 테일/512화 . . . . 4회 일치
나츠의 정신세계에서 어째서 다른 멸룡마도사들이 안내역을 맡는지는 불명. "최후의 해답"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나"라는 여성이 등장했는데 생김새가 루시와 닮아있는걸 보면 그녀의 조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루시의 어머니도 용들이 사라진 떡밥과 관련인물이므로 여러모로 루시가 얽힐 떡밥이 많다.
그레이가 나츠와 제레프의 관계에 대해서 알았다. 해피 외에는 나츠의 정체와 제레프와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인물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주목된다.
- 페이데이 갱 . . . . 4회 일치
[[미국]]인. [[성조기]]가 그려진 가면을 사용한다. 30대 때 시카고의 두 폭력단을 싸움붙인 전적이 있다. [[FBI]]는 달라스가 페이데이 갱의 우두머리거나 부관 격 되는 인물이라고 추측하는 중.
[[아일랜드]]인. 페이데이 갱이 세력을 불리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영입된 멤버. 맥켄드릭 박물관에서 다이아몬드를 훔쳐낼 때 참가했다고 한다.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 러스트 영입에 관여했다.
영화 [[존 윅: 리로드]]와의 콜라보로 등장한 기관. 음지에서 일하는 자들의 비밀 천국.
- 하이큐!! . . . . 4회 일치
작중 배경은 작가의 전작 [[궤변학파 요츠야 선배의 괴담]]처럼 [[미야기]]현이다. 미야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정도 되는 곳인데, 그 중에서도 [[카라스노 고교]]가 있는 곳은 시골이다. ~~괜히 얘네들이 패스트푸드점 대신 [[만두]]를 사먹으러 가는 게 아니다~~ 카라스노 학생들이 촌사람이라는 걸 반영한 연출인지, 도쿄에 간 [[카라스노 고교]] 부원들이 눈에 보이는 철탑 마다 [[도쿄 타워]]냐고 묻거나, [[타나카 류노스케]]는 [[관동]]의 학교들을 가리켜 '시티보이 연합'(...)이라 부르거나 한다.
[[카라스노 고교]]의 모델은 이와테현 구노헤 군 가루마이마치의 현립 가루마이 고교이다. 실제로 까마득한 산골로, 하이큐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광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http://blogs.yahoo.co.jp/yosicosmic 블로그(일본어)] 작품의 배경은 미야기현이면서 카라스노 고교의 배경은 이와테현이 된 셈인데, 이는 작가가 미야기 출신이지만 이와테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 2014년 9월 22일부터 소년 점프+에서 れっつ!ハイキュー!?(렛츠! 하이큐!?)가 연재되고 있다. [http://plus.shonenjump.com/rensai_detail.html?item_cd=SHSA_JP01PLUS00000087_57 소년 점프+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카게야마가 대놓고 왕관을 쓰고 백마를 끌고 다니고 킨다이치는 진짜 머리에 락교를 쓰고 있는 등, 본편 내용을 개그로 바꾼 내용이다. 때문에 [[캐붕]]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정상적인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 사실 그것보다는 본편과 개그 코드가 상당히 달라서 안 맞는 사람들은 정말 안 맞다. --그러나 고양이인간 쿠로오와 켄마가 정말 귀여운 데는 이견이 없을 듯--
* 작가인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이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후루다테 작가가 졸업한 도쿄 디자인 전문학교에 졸업 후 찾아왔었다는 포스팅이 어떤 블로그에 올라왔는데, 댓글에서 어떤 팬이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을 묻자 '작가님이 직접 공개하지 않으신 사생활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라고 철통방어(...)를 하기도 했다. 종합 1000만 부 이상 팔린 만화책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심지어는 인터뷰조차도 그의 활동은 적어 필명이 본명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성별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작품들이 [이와테]현 및 [미야기]현을 작중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으므로 출신지가 그 쪽인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여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팀메이트 간의 감정 묘사, 이름 및 생일의 의미와 관련성까지도 계산한 ~~설정덕후의~~ 섬세함,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근거로 내세워 여자 작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반면 작가가 남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wiki:"니시노야 유" 니시노야]와 [wiki:"타나카 류노스케" 타나카]의 [wiki:"시미즈 키요코" 시미즈] 빠질을 저렇게 완벽하게(...)그려내는 것은 남자밖에 하지 못한다.', '[쿠로코의 농구]도 남자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잘 그려내고 있다' 등을 근거로 남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점치고 있다.
- 하이큐/214화 . . . . 4회 일치
* 타나카 류노스케는 점프 서브를 구사하게 된 이후 특이한 자세가 습관이 됐는데, 그 폼만은 멋지다.
* 카라스노는 딱히 패널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플라잉[* 체육관을 포복 비슷한 동작으로 횡단하는 훈련] 한 바퀴를 자발적으로 돈다.
* 우시지마를 비롯한 시라토리자와 멤버들도 체육관에 도착. 우시지마는 한발 먼저 와서 훈련을 견학하고 있다.
* 그리고 전일본 유스가 훈련하는 체육관
- 하이큐/224화 . . . . 4회 일치
*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너의 본질은 임금님"이라며 스포츠 타월로 왕관 모양을 만들어 씌워준다.
* 임금님은 보통 "멋있는 거"라면서 타월을 왕관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 카게야마는 이 공격 직후 "너에겐 안 맞춘다"라고 선언, 츠키시마는 "딱히 그래도 상관없다"며 신경전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 그러더니 스포츠 타월을 둥글게 말아서 왕관처럼 만들어 카게야마에게 씌워준다.
- 하이큐/228화 . . . . 4회 일치
* 다테공고와 카라스노고교의 연습시합 종료. 승패와 무관하게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시합이었다. 다테의 코가네가와 칸지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테이핑에 대해서 묻는다. 보통 선수들은 손가락에 무리가 가는데다 손톱이 부러지는 사고도 있어서 테이핑을 하는데 카게야마는 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하지만 카게야마는 특별한 건 하지 않고 철저한 단련과 손관리로 극복하고 있다. 테이핑을 감으면 공을 직접 느끼는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관점이 전혀 다르다는걸 깨닫고 코가네가와도 오늘부터 손가락 관리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데 지나가던 후쿠타니 켄지는 "작심삼일"이란 뼈있는 한 마디를 던지고 지나간다.
- 하이큐/234화 . . . . 4회 일치
* 경기는 계속된다. 카게야마는 이번에도 히나타와 속공을 시도하지만 공은 히나타의 손끝을 지나친다. 하지만 히나타는 헤딩으로 공을 넘기는 기예를 시전, 공격은 성공하나 츠바키하라 측과 관객석 양쪽의 비웃음을 산다.
객석의 어느 커플은 배구에 대해 잘 모르는지, 카게야마의 컨디션 난조만 보고 엄청 못하는 1학년이라고 시시덕거린다. 그들만이 아니라 그런 조롱적인 언사는 관객석 여기저기서 나오는 듯 하지만, 카게야마는 신경쓰지 않고 적응에 집중한다.
그를 코치한 시마다 마코토는 한 가지 요령을 전수한다.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리지 말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연습을 하라"는 것. 중요한건 "리셋하는 시점"이다. 워밍업 단계에서 시선을 진정시킬 지점을 하나 정한다. 그게 표식이든 비상구든 뭐든 상관은 없다. 이 이야기를 할 때 리셋지점은 전봇대에 걸린 시마다 마트 봉지. 여기에 집중하는 걸 신호로 삼는 것이다.
* 귀신 같은 핀 포인트 세트. 봄고 대회 최초의 괴짜 속공 작렬. 상상을 능가한 초속공의 위력에 장내가 경악. 츠바키하라는 물론 객석에서 카게야마를 비웃던 커플과 관객들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다.
- 하이큐/247화 . . . . 4회 일치
* 한편 쓰레기장 결전을 성립시키려면 양팀 모두 3회전까지 가야하는데, [[카라스노 고교]]의 2회전 상대인 이나리자키 고교가 엄청난 난관이다.
쓰레기장 결전은 카라스노와 네코마가 3회전까지 올라가야 성립한다. 그러기엔 2회전 상대가 워낙에 난관이다. 선수들을 불러모은 우카이 코치가 "이제와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며 내일의 상대 "이나리자키 고교"를 정식으로 소개한다. 인터하이 준우승에 빛나는 이 대회 시드교이자 우승 후보다. 말이 필요없는 강호.
* 1월 6일. 2회전 당일이다. 체육관이 문을 여는건 8시. 시합 개시는 8시 30분이다. 그 사이의 30분은 2회전 제 2 시합 팀들이 워밍업으로 사용한다. 카라스노가 제 2시합. 그런데 이건 개장과 동시에 카운트 된다. 첫 출전인 팀들은 이 사이에 짐을 옮기는 등 잡일을 하다 날려먹기 십상이다. 물론 시드교에 베테랑인 이나리자키가 그러리라고 바랄 수도 없다. 30분을 귀중하게 쓰기 위해 카라스노는 7시 20분 부터 구보로 이동을 개시, 동선과 역할 분달을 스무스하게 배치해 시간 손실을 최소화했다.
워밍업을 시작한 뒤에도 양팀 간의 신경전이 장난이 아니다. 이나리자키의 코치 [[오오미 타로]]는 [[타케다 잇테츠]] 고문에게 스파이크 연습을 하고 싶다며 압박을 가한다. 타케다 고문은 관록만으로 쫄아서 우물쭈물하는데 우카이 코치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서브로 부탁한다"며 받아친다.
- 하이큐/248화 . . . . 4회 일치
* 1회전부터 감초처럼 등장하던 바보커플이 2회전 관람 일정을 짜고 있다. 남자 쪽은 배구 지식이 상당한지 남녀 강호팀에 대해서 자세히 안다. 그들은 이나리자키 고교의 미야 형제를 보려고 대진표를 확인하는데 상대팀이 [[카라스노 고교]]인걸 발견한다. 그들은 꽤 인상깊은 팀이었는데 탈락확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나리자키는 그만큼 강호로 작년 봄고와 인터하이에선 각각 3위를, 이번 인터하이에선 또다른 강호 "키류"를 누르고 2위를 기록했다. 결승에서도 패하긴 했으나 그 왕자 "이타치야마"에게 한 세트를 뺏어왔을 정도로 상승세. 지금 가장 주목 받는 팀이다. 여자 쪽은 개인적으로 미야형제팬인지 멋있다고 호들갑을 떨자 남자 쪽이 인상을 구긴다.
* 스가와라는 관중석에서 미야 아츠무의 극성팬을 본 일을 이야기한다. 부채에 커다랗게 아츠무의 이름을 써서 가지고 다니는게 마치 아이돌 팬덤같다.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실제로 그들은 아이돌 같다며 1위팀 이타치야마하곤 다른 의미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말한다. 실력과 화려함을 겸비한 "최강의 도전자"라는 캐릭터. TV에서도 이걸 살려서 자주 취재 대상으로 삼고 있다.
* 관중석은 아직 1시합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이나리자키의 응원단이 기분 나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음악단은 물론이고 치어리더의 안무와 시라토리자와 학교를 연상시키는 전교 응원. 엄청난 규모의 "대악단" 응원단이다. 카라스노의 보통 규모 응원단은 소리가 파묻힐 지경이다. 사실 이나리자키는 배구 말고 취주악부로도 엄청 유명하다고 한다. 그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그게 낭비가 아닌지 야마구치처럼 기가 약한 선수들은 응원전 만으로 벌써 위가 쑤시다며 위축된다. 히나타같은 단세포는 "커다란 나팔이 멋지다"며 정작 응원에는 무신경하다.
* 안 그래도 시끄러웠던 관중석이 이제는 코트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묻힐 정도로 커다란 환성으로 바뀐다. 사와무라가 치지지 않고 "가자"고 외치려고 하지만 계속 소리가 묻힌다. 투지에 분노까지 끌어올리고 나서야 "가자"는 구호가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봄고 배구 2회전 B코트 제 2시합. 카라스노 고교 대 이나리자키 고교 개전.
- 하이큐/250화 . . . . 4회 일치
* 되돌아온 공은 [[니시노야 유]]에게. 안정적으로 리시브한다. 공은 다시 카게야마의 세트업으로. 그런데 곧바로 뛰어 오를 줄 알았던 히나타가 "앗"하고 움찔한다. 정면에 있던 이나리자키의 오미미가 거기에 주의를 뺏긴다. 그리고 순간. 히나타는 폭발적인 가속으로 코트 반대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도약. 아츠무가 그랬던 것처럼 한순간 체육관의 모든 이목이 히나타에게 쏠린다. 카라스노를 얕봤던 미야 형제는 똑같은 타이밍에 "우와"하고 탄성을 뱉는다.
* 그들이 대등한 "도전자"임을 입증하듯, 이나리자키의 좌현을 관통하는 스파이크. 코트 위의 선수들은 반응하지도 못했고 이나리자키의 응원단은 얼어붙은 듯이 서서 야유하는 것도 잊었다. 관객들은 물론 관중석 조차 한순간 정적. 마치 시간을 멈추로 때린 것 같은 스파이크였다. 단숨에 기세를 되찾는 카라스노 고교.
- 하이큐/259화 . . . . 4회 일치
* [[타나카 사에코]]가 타이밍 좋게 분위기를 띄운다. [[카라스노 고교]]의 기세가 더할나위 없이 높아진다. 일반 관중들 속에서도 카라스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바보 커플 중 남자 쪽은 진지하게 역전 가능성을 점친다. 반면 여자 쪽은 "미야 형제를 질투해 적을 응원하는거 아니냐"며 시들한 반응이다.
* 이나리자키의 감독 [[쿠로스 노리무네]]. 가족관계가 심란해 보이는 41세다. 그는 선수들이 자꾸 10번, 히나타에게 정신 팔자 탐탁지 않아한다. TO 중에도 선수들이 10번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연연했다. 쿠로스 감독은 "10번에 정신 팔리기 시작하면 카라스노에 먹힌다"고 지적한다. 그는 히나타를 개에 비유하며 "개한테도 무시가 제일 잘 먹힌다"고 주장했다. 이 개에 비유하는 버릇은 이미 유명한지 선수들은 "또 개에 비유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마도 가족 중 그나마 친한게 개인 모양이다.
* 카게야마의 2회차 서브로 경기 재개. 서브는 잘 쳤지만 오사무가 막아낸다. 흔들리며 떠오른 공. 좌익의 [[마지로 알랭]]에게 이어진다. 카라스노는 사와무라, [[타나카 류노스케]], 히나타까지 합쳐 총 세 장의 블록으로 대항하나 마지로는 그 셋의 블록 위에서 때리는 스파이크로 간단히 블록을 뚫는다. 이거야말로 할 말이 없어지는 공격. 카라스노 벤치와 관중석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 아즈마네가 달려나온다. 이나자키는 기다렸다는 듯 블록 세 장이 올라온다. 그런데 아즈마네가 유독 힘차게 뛰어오른다. 그 차이는 관중석의 [[보쿠토 코타로]] 정도가 눈치챈다. 아즈마네가 노리는건 명백했다. 블록 위에서 치는 스파이크. 하지만 그 의욕이 독이 됐을까? 타점이 빗나갔다. 공에 겨우겨우 스친 손. 공은 공중에서 튀어올라서 간신히 블록을 넘기고 떨어진다. 스파이크라고만 생각했던 이나자키의 후위가 황당해하며 달려온다. 하지만 공이 코트에 닿는게 먼저다. 어이없지만 득점 성공. 공격에 성공한 카라스노 측 조차 헛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아즈마네는 속으로 왠지 미안하다고 씁슬해한다. 어이없어하는 이나리자키 진영.
- 하이큐/261화 . . . . 4회 일치
아쉽게도 [[스나 린타로]]의 눈치가 빨랐다. 여지없는 셧다운. 공이 카라스노 진영의 코트를 찍는다. 카게야마가 세트업이 살짝 짧았다고 사과하지만 타나카는 그를 탓하지 않는다. 자신도 될 줄 알았던 스파이크였다. 오늘 타나카는 묘하게 풀리지 않는다. 반면 번번히 타나카를 방해하는 스나 린타로는 이제 발동이 걸린 것처럼 펄펄 뛴다. 반면 타나카는 실책이든 불운이든 좋은 그림을 보여주지 못했다. 관중석에선 그럴 "활발 빡빡이"라 칭하고 구멍 취급이다. 어떤 선수든 안 풀리는 날이 있기 마련이지만... [[후쿠로다니 학원]]의 [[보쿠토 코타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열 받아서 로우 텐션 모드가 됐다"고 중얼거린다. 옆의 [[아카아시 케이지]]는 그걸 본인이 알긴 알았던 건가 하며 충격을 받는다.
* 24 대 24. [[야치 히토카]]가 스코어 보드 옆에서 결국 이런 상황이 왔다고 부르르 떤다. 우카이 코치도 바라지 않던 상황이다. 여기서 끊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과연 어떨지? 서브 위치에 아츠무가 들어서고 만다. 관중석의 바보 커플은 또 티격태격한다. 여자 쪽이 "아츠무군"이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내자 남자 쪽이 "아츠무랑 친하냐"고 빈정거려서 치고받는다. 이러다 헤어지는거 아닌가?
팀이 해냈으면 된거 아닌가? 아츠무의 서브를 깨끗하게 저지, 이걸로 한 고비 넘겼다. 이제 아카아시의 생각처럼 히나타가 없는 상황에서 카게야마가 누구로 치고 들어갈지가 관건이다.
* 사와무라는 지금 만큼은 백어택이 익숙하지 않은 걸 잊어버리고 때렸다. 블록의 반응이 늦다. 완전히 속였다. 스파이크가 이나리자키 코트를 깊숙히 관통한다. 완벽한 코스. 카라스노가 아츠무의 서브를 단칼에 끊으며 1점을 추가한다. 아츠무도 여기에는 "제법"이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스코어는 24 대 25. 다시 세트포인트. 후쿠로다니의 콤비가 "사와무라가 백어택 치는건 처음 봤다"며 눈이 휘둥그래하다.
- 하이큐/262화 . . . . 4회 일치
그런 타나카가 보기에도 카라스노의 경기성적은 좋지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빴다. 인근 학교와 연습시합에서도 번번히 패했다. 3학년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은퇴했다. 남겨진 입장이 된 타나카는 "수수한 건 생각보다 힘들다"는 말로 심정을 표현했다. 이 시기 카라스노는 전용 체육관은 커녕 체육관을 쓰게나 해주면 감사해야 하는 처지였다. 타나카는 이런 대우에 반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주장을 물려받은 사와무라는 "작년보단 낫다"거나 "밖에서도 할 수 있는게 있다"면서 말을 돌렸다. 타나카에겐 "느슨"하게 보였다.
* 그런 기억에도 불구하고 타나카의 의지는, 빡빡머리는 변함이 없다. [[이나리자키 고교]]를 맞이한 봄고 대회 2회전. 스코어는 25 대 24. 카라스노가 1세트를 가져갈 찬스. 아즈마네의 서브. [[야치 히토카]]는 숫제 스코어 보드 옆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1점만 더. 사실 지금 카라스노 선수라면 누구나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관중들도 우승후보를 여기까지 밀어붙인 카라스노의 저력에 감탄한다. 과연 시라토리자와 학워을 쓰러뜨릴 만하다, 잘하면 1세트를 가져가겠다... 하지만 "이렇게 우세할 때 못 가져 가면 다음은 힘들다"는 현실을 퍼붓는 말도 있다. 히토카에게 뻔히 들릴 정도. 히토카가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외쳐본다.
* 스파이크. 블록을 피했다. 극히 좌측. [[미야 오사무]]의 우측으로 꽂히는 공. 그러나, 라인을 넘겼다. 아웃 판정. 동료 선수들도 관중석도, 탄식이 꼬리를 문다. 이나리자키의 득점. 스코어는 25 대 25. 듀스. 다시 피말리는 시소게임으로. 아츠무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번 플레이가 실점으로 이어졌다면 역전이 될 뻔했다. 사실 오사무는 이미 그렇게 취급하고 있다. 이번엔 꼭 세 개 들이 한 세트가 아닌 하나짜리 고급 푸딩을 뜯어낼 작정이다.
- 하쿠다 켄 . . . . 4회 일치
숙부인 [[백남준]]의 도움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하여 경제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고 장난감 판매, [[텔레비전]] 프로덕션 등의 사업을 하던 그는 [[1990년대]] 이후 숙부 [[백남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숙부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한 후 그는 [[미국]] [[뉴욕]]의 백남준 스튜디오와 백남준의 모든 작품의 저작권을 물려받아, 현재 뉴욕 백남준 스튜디오의 이사이자 백남준의 법적 대리인으로서 작품 관리와 기념사업 등을 책임지고 있다.
[[2006년]] [[백남준]]의 사후 추모행사 및 [[백남준아트센터]] 건립 문제와 관련하여 하쿠다는 [[경기문화재단]] 및 [[대한민국]] 미술계 인사들과 큰 갈등을 겪은 바 있다. [[2008년]] 경기문화재단과 하쿠다의 합의가 극적으로 이루어져 동년 [[4월 30일]] 백남준아트센터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개관하였다.
- 한말숙 . . . . 4회 일치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며 [[경성부]] 출생이다. 여성 [[소설|소설가]] [[한무숙]]의 누이동생이며 [[가야금]] 연주가 [[황병기]]의 부인이다. [[1956년]] 《신화의 단애》로 [[소설|소설가]] 등단하였다.
== 가족 관계 ==
== 인간 관계 ==
* [[숙명여자고등학교]] 동창인 [[소설|소설가]] [[박완서]]와 절친한 친구 관계를 유지하였다.
- 한승조 . . . . 4회 일치
* 《동북아 정세변화와 한일관계:아산재단연구총서 22》 (1995)
* [[박관수]]
* [[홍관희]]
* 한승조 외, 동북아 정세변화와 한일관계(아산재단연구총서 22) (집문당, 1995)
- 함신익 . . . . 4회 일치
'''함신익'''(咸信益, [[1957년]] - )은 [[대한민국]]의 지휘자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경신 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음악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에 [[미국]]으로 유학해 [[라이스 대학교]] 석사 와 [[로체스터 대학교]] 이스트만 음대에서 지휘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1991년 [[폴란드]]의 피텔베르크 국제 지휘자 콩쿨에서 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밀브룩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와 퍼시픽 대학교 지휘 교수로 부임했다.199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예일 대학교]] 음악대학 지휘학과 교수가 되었다.
1995년 해외 음악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화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고, 2003년에는 자서전 '다락방의 베토벤 을 출간하기도 했다. 예일 대학교 음악대학 지휘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인 지휘자들을 배출해냈으며, 그 중 싱가폴 출신의 Darrell Ang은 2007년도 브장송 국제지휘콩쿨에서 우승하였다.
그는 또, 현대음악에 관심을 기울여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을 초연했으며 한국에 머무를 때면 동서울 FC의 레프트 윙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 관련서적 ==
- 허종 (1939년) . . . . 4회 일치
'''허종'''(許鐘, [[1939년]] [[4월 29일]]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명은 허종욱(許鐘旭)이다. 독립운동가 겸 변호사, 정치인 [[허헌]]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 겸 여성 해방 운동가 [[허정숙]]의 이복 동생이고, 소설가 겸 작가 [[허근욱]]의 남동생, 소설가 [[박노문]]의 처남이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이 되어 각국 순회대사, UN 주재 [[북조선]] 대표단 부대사, 외교부 대변인, 다시 [[1994년]] 북조선과 미국 간 북미회담 시 외교단 대표, 그해 UN 주재 [[북조선]] 대표단 부대사, 외교부 순회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 관련 항목 ==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분류:허정숙]][[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현덕 . . . . 4회 일치
'''현덕'''(玄德, [[1909년]] [[2월 15일]] ~ ?)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소설가]], [[시 (문학)|시인]], [[아동 문학|아동문학가]]이다. 본명은 '''현경윤'''(玄敬允)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다.
[[1932년]] 《[[동아일보]]》에 동화 〈고무신〉을 발표한 뒤, [[김유정 (소설가)|김유정]], [[김기림]], [[이석훈 (1908년)|이석훈]], [[박태원 (1909년)|박태원]], [[안회남]], [[이상 (작가)|이상]] 등과 교유하는 습작 기간을 거쳐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남생이〉가 당선되면서 정식 데뷔했다. 처녀작인〈남생이〉의 화자는 ‘노마’라는 소년이며, 노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를 《[[소년조선일보]]》와 어린이 잡지 《[[소년 (잡지)|소년]]》에 꾸준히 발표하는 등 아동 문학에 관심이 컸다. 이후 〈경칩〉(1938년), 〈두꺼비가 먹은 돈〉(1938년), 〈골목〉(1939년), 〈잣을 까는 집〉(1939년), 〈녹성좌〉(1939년), 〈군맹〉(1940년)을 차례로 발표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의 어렵던 시절이라 더이상의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 후 월북을 한 이후에는 [[1961년]]까지 〈싸우는 부두〉 등의 단편소설을 자작함으로써 작품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 경향은 농민과 도시 빈민의 참혹한 현실을 묘사하며 사회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데뷔 시기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해체 이후이므로 카프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으나, 카프의 이념적 성향과 대체로 방향이 일치하는 작품을 썼다.
== 가족 관계 ==
* 김영순, [http://dongsim.net/gnu4/bbs/board.php?bo_table=hyundek&wr_id=4&page= 아동문학 선구자 현덕 - 생애와 업적] (동심넷 - 아동문학선구자기념관)
- 현재윤 . . . . 4회 일치
[[신일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8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2차 4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프로 입단 대신 [[성균관대학교]](1998학번)에 입학한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2002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였다. [[2004년 한국 프로 야구 병역 비리 사건|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2005년]]부터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였고 [[2007년]] 소속 팀인 삼성으로 복귀했다.
* 1998년 ~ 1999년 : [[성균관대학교]] (1998학번)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자]][[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서울수유초등학교 동문]][[분류:신일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신일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연주 현씨]]
- 홍경인 . . . . 4회 일치
특히 [[박광수(영화 감독)|박광수]] 감독과 함께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그 해 [[씨네21]]에서 설문조사한 '최고의 남자배우'부분에 [[안성기]]와 공동으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당시 [[충무로(은어)|충무로]] 톱스타였던 [[안성기]]는 다작 출연으로 인기가 내려가기도 했으나, 그래도 부동의 원탑이었던 시기였다. 이 외에도 각종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시절로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노동문제등에 관심이 크던 시기인지라 당시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컸다고 한다.] 분신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이것은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배우의 몸에 불을 붙인''' 것이었는데 당시 기술이 부족했던 국내 여건상 호주의 특수효과 전문가를 섭외해서 촬영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최초로 사용했던 기법이 할리우드에서나 쓰던 '워터젤'을 몸에 바르고 불을 붙이는 기법.[* 훗날 이는 한국에서도 수많은 화재 재난 영화에서 쓰이게 된다. 영화 전태일의 성공 덕분이었다. --근데 어설프게 써서 조금 다친 배우들도 있었다고..--] 그 전문가 曰 "우리 나라에서도 주연 배우가 몸에 이 정도 양의 불을 붙인 적은 없었다." 라고 호평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태일' 이후의 그의 행보는 썩 좋지 못했다. 케이블 및 공중파 오락프로그램에 여기저기 출연하고 진행하는 등의 그의 행보로 인하여 특히 영화계에서는 '''도대체 누가 배우 관리를 저렇게 하는거냐? 저런 배우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고 방송 여기저기 나오게 하냐?'''는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개그맨들과 꽁트를 찍기도 했었고 드라마타이즈 코미디에도 참여했을 정도다. 그것도 개그를 받쳐주는 정상인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본인이 바보스럽게 코믹한 쪽으로... 무려 90년대 최고 개그우먼 중 하나인 [[이영자]]와도 꽁트를 했을 정도. --이영자한테 홍진경이 77년생이고 자기가 76년생이라 홍진경이 누나라는 드립을 치기도...--] 그럴수 밖에 없었던게 이 당시 젊은 배우들은 극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예능프로에 자주 출연하여 인지도나 친밀감을 쌓는게 당연시였던 시절이었고, 당시 [[배용준]]이 소속되어있던 소속사로 이적하다보니 여기저기 나오는게 당연시 되었던 것.[* 역시 배우에게는 예능이 毒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홍경인과 [[배용준]]을 관리하던 사람은 바로 훗날 [[전지현]]을 대 스타로 만든 사이더스HQ의 '정훈탁' 되시겠다. 당시 정훈탁은 EBM이라는 매니지먼트사를 차렸는데, 소속 연예인은 바로 배용준, 한재석, 정찬, 차태현, 홍경인...] 더불어 영화 전태일의 이미지를 지우고자 선택했던 '피아노맨', '채널 식스나인'이라는 영화에서도 연기력면에서는 호연을 보여줬으나 영화 자체의 운이 없었거나 연기력이나 화제성에서 다른 배우들에게 밀리기도 했다.
- 황병기 . . . . 4회 일치
'''황병기'''(黃秉冀, [[1936년]] [[5월 31일]] ~ [[2018년]] [[1월 31일]])는 국악 [[작곡가]]이자 [[가야금]] 연주가이다. 본관은 [[우주 황씨|우주]](紆州)이다.
2001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로 활동하였으며, 2002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특별초빙교수로서 "한국 전통음악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한 바 있다. 이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활동을 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다.
* [[2006년]] [[2월]] ~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 [[2003년]] 은관문화훈장
- 황은진 . . . . 4회 일치
[[경성부|일제 강점기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대한민국 서울]]) 출생이고 [[본관|본관(관향)]]은 [[평해 황씨|평해(平海)]]이며 배우자는 [[배우|연기자]] [[서승현]]이다.
* [[1993년]] 《[[김환기]]와 [[구본웅]]의 기묘한 친척 관계》
- 황재규 . . . . 4회 일치
[[청원고등학교 (서울)|서울청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인 [[허유강]] 선수와 함께 팀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하였다. 제 4회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 대표팀으로 참가하여,<ref>[http://isplus.joins.com/sports/kbo/200806/12/200806122017013276010700000107020001070201.html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표팀 명단 발표] 《일간스포츠》, 2008년 6월 12일 작성</ref> [[일본]]전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 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67& 세계 대학야구 결산 - 협회의 외면 속에서도 유망주는 큰다] 《박동희칼럼》, 2008년 7월 29일 작성</ref> 제 1회 KBO 총재기 대학 야구 결승전에서 선발 [[투수]]였던 [[정태승]]에 이어 팀의 2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8.1 이닝 3안타 6탈삼진 1실점의 호투로 [[성균관대학교]]의 우승에 기여하였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348816 성균관대, 연세대 꺾고 제 1회 KBO 총재기 우승] 《조이뉴스》, 2008년 8월 8일 작성</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75& 대학야구 취재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박동희칼럼》, 2008년 8월 9일 작성</ref>
[[분류:198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청원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황씨]]
- 황희두 . . . . 4회 일치
| 출생지 =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2016년 7월, 서울시가 주최한 [['광장은 시장실']]에 참석하여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e스포츠]]의 발전과 게임 문화의 인식 개선을 제안하였고 체택되었다. 학부모들과 청소년들에게 게임 문화가 마냥 안좋은게 아니란걸 알리기 위한 목적과 또한 중국 시장에 밀려 뒤쳐진 대한민국 e스포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다. 실제 2014년도 기준으로 중국은 약 4조원대의 금액을 [[e스포츠]]에 투자하며 세계 e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였으며, 정작 e스포츠의 종주국인 대한민국은 점차 중국에 밀리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현직 프로게이머, 게임단 관계자, 지자체, 정부 등과 협력하여 '대한민국 e스포츠 시장 살리기'를 추진중이다. <ref>http://www.sportsseoul.com/news/read/417966|턱 밑까지 쫓아온 중국...한국 e스포츠는 어디로?
*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게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무척 아쉽다. 공부 외의 게임의 길에서도 충분히 인생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싶으며, 선수 시절 게임에 더 미치지 못했던 점을 후회한다. 그래도 무언가에 미쳤던 경험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웠다고 생각하여 무척이나 행복하다." - 《Global Leaders Club 게임 관련 특강 中》<ref>http://www.kns.tv/news/articleView.html?idxno=358096|프로게이머 출신 청년문화포럼 황희두 회장, Global Leaders Club 포럼에서 게임관련 특강 실시</ref>
- Europa Universalis 4/공략/아시아 . . . . 3회 일치
이게임시작지점에서 가장 많은 땅덩어리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높은 총개발도(developement)를 지닌 국가. 상당히 많은 고유시스템을 들고있는데, 고유 팩션인 천조국 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관료, 사원, 환관이 행정, 군사, 외교를 담당하고 있으며, 각 팩션의 영향력이 가장 높을경우 그 팩션이 보너스를 주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유 정부체제인 천조국(Celestial Empire)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기술비용과 안정도 비용을 10%줄여주며, 모든 땅의 수입이 반이된다. 천명이란 시스템으로 반란도를 5줄여준다. 만약에 정통성이 70이하이거나 안정도가 음수가 될경우엔, '천명을 잃음'이 뜨면서 천명의 보너스가 사라지고 반란도가 5상승해 최종적으로 반란도 10이 늘어난다(...) 거기다가 중국계 문화권이 엄청 세분화되어 천명한번 터질경우엔 오나라, 촉나라, 연나라, 제나라등 소국들이 죄다 반란일으키고 독립해 춘추전국시대를 만들기도 한다...~~안습~~ 내적 완결성등 명한테 들어있던 수많은 디버프들이 전부 사라져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여전히 천명이란 고유시스템덕에 빵빵터지는 반군들을 맛볼 수 있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서구화를 하도록 하자
난이도는 상당히 쉽다. 실제역사대로라면 조선이 남만주를 먹는 즉시 명나라에서 견제가 들어오겠지만 이게임에서는 그런게 없다보니(...) 초반애 훈춘(hunchun)이나 헤투 알라(Hetu Ala)정복 미션을 받고 남만주를 먹고난뒤, 지린에 클레임을 걸고 먹어둬서 지린노드를 장악하면 된다. 다만, 예전에는 조선과 명에 역사적 친구 보정이 있어서 명과 동맹을 걸고 편하게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집어삼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보정이 삭제되어 명과의 관계도를 미리미리 올려둬서 침공의 가능성을 줄여둬야 할것이다. 결국 조선의 난이도는 명이 얼마나 빨리 갈라지느냐에 있다. 명이 초반에 천명이 터져서 조각조각 갈라진다면 게임은 굉장히 쉬워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당히 고달픈 난이도가 될것이다.
- FrontPage . . . . 3회 일치
* 항목은 관리상의 필요에 따라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세계관''' 혹은 '''프로젝트''' || ○○○ ||
* [[게임 관련 정보]]
-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2014시즌 . . . . 3회 일치
|| 관중집계 ||<-3><:>2,667명||
|| 관중집계 ||<-3><:>1,969명||
= 관련항목 =
-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2015시즌 . . . . 3회 일치
|| 관중집계 ||<-3><:>2,347명||
|| 관중집계 ||<-3><:>6,135명||
= 관련항목 =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2015시즌 . . . . 3회 일치
|| 관중집계 ||<-3><:>1,240명||
|| 관중집계 ||<-3><:> 1,240명 ||
= 관련항목 =
- K리그 클래식 . . . . 3회 일치
K리그는 [[수퍼리그]] 시절부터 승강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승강을 실행하기에 충분한 수준의 팀이 창설되지 않았던 관계로 이 부분이 상당히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던 것이 월드컵 유치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약간의 축구붐이 조성되면서 K리그에 참가하는 팀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예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실업팀의 프로화를 통한 K리그 참가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던 상황.
= 관련항목 =
- MC메타 . . . . 3회 일치
한국 힙합 문화의 발달에도 관심이 많다. 그러한 일례로 2013년부터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랩을 하자는 취지의 '모두의 마이크' 행사를 나찰, [[김봉현]] 평론가와 진행하고 있다. 메타의 말을 빌리면, 마스터플랜처럼 '물리적인 공간에서 서로 랩을 하고 서로 호흡하는 그런 지점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시와 랩에 중간 지점인 [[포에트리 슬램]] 행사인 '포에틱 저스티스'를 김봉현씨와 개최하고 있다.
* '''청와대에 입성했다.''' 8월 20일에 실시된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음악 관련 불공정 사항들을 고쳐달라고 말하였다. ’문재인 시계’는 못 받았다고 한다. [[http://m.ulsanfocus.com/news/articleView.html?idxno=84820|#]]
프리스타일에서도 일가견이 있다. [[허클베리피]]가 티비에서 MC 메타의 프리스타일을 보고 래퍼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도 한다. [* 여담으로 [[마이크 스웨거]]에서 한 헉피의 프리스타일을 보고 [[올티]]가 래퍼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 마스터플랜 클럽 시절 당시, 예정공연이 전부 끝나고 MC 메타의 프리스타일 타임이 관객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고 한다. 2014년 총 세 편의 [[싸이퍼]]를 기획하고 참여하기도 하였다.--[[치타]] 학살-- 그리고 프리스타일을 할 때마다 '연결고리'를 많이 외치기로 유명하다. [[https://youtu.be/r4h1cHTOCJI|증거자료]] 일리네어레코즈에서 본인이 피쳐링한 '연결고리'라는 곡의 유래도 엄밀히 따지면 저 멘트이다.
- MoniWikiPlugins . . . . 3회 일치
== 사용자 인터페이스 관련 ==
=== 블로그 관련 ===
=== 관리자 기능 ===
- Victoria II/군사와 전투 . . . . 3회 일치
== 군대 양성과 관리 ==
장군이나 제독의 성능은 랜덤이다. 말 그대로 가챠. 아무리 병신같은 똥별이 나오더라도 왠만하면 장군 없는 상태에서 처맞는 디버프보다 낫다. 가능한 모든 군대/함대마다 지휘관을 붙이자.
게임을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지휘관 자동 생성과 자동 임명이 체크되어있다. 군대 늘리려고 연대 대량양성하다가 아까운 지휘 점수 날려먹을 수 있으니 주의.
- 강영식 . . . . 3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그리고 제리 로이스터의 무리한 투수 운용으로 이기는 경기, 지는 경기 구분없이 등판하다가 허리 부상이 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허리부상이 아니라 팔꿈치 부상이었다고... 허리부상이라고 속였다가 당시 강민호의 팔꿈치 부상 이후 팀 내 모든 선수들의 부상 여부를 조사하다가 드러났다. [* 팀 내 다른 불펜 투수들은 3일 이상 연투 금지에 왠만하면 휴식일을 지켜주고 불펜도 가능한 한 로테이션을 돌려 관리를 해주고 있지만 강영식은 당시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을 제외하면 팀내 유일한 좌완 불펜이었다. 따라서 이닝은 많지 않은 데 비해 출장 경기수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08시즌에 64경기, 56⅓이닝을 던졌으니 원 포인트 릴리프라도 어지간한 경기에서 거의 항상 등판해오다 시피 한 것에 대한 후유증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수술과 재활에 성공적이었는지 시즌 초에는 거의 2008 시즌 때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5월 이후로 난조를 보였다. 피홈런이 많아 피안타율이나 [[WHIP]]에 비하면 [[평균자책점]]은 높았다. 롯데 불펜진 중 [[임경완]](4개) 다음 가는 블론세이브(3개)를 기록했다. 시즌 중반에 [[허준혁(1990)|허준혁]](좌완)이 불펜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좌완투수가 없는 관계로 상당히 자주 등판했다.
- 강중인 . . . . 3회 일치
[[경상북도]] 출신으로 [[1935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8년]]에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검사국 사법관시보가 된 것을 시작으로 법조계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최근의 반도의 경제사범 국민의 신경제 윤리의 파악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경제사범을 "미증유의 국난"을 돌파해 "대동아를 건설하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집단으로 묘사하고, 이들은 국민의 일대수치이므로 엄벌주의로 대처할 것이라 경고했다. 또한 관민이 일체가 되어 "일사보국의 성을 다함"으로써 성업을 어서 완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제목=연행 날짜, 수사관, 배후세력은 알지만 구속한 검사 이름만 기억나지 않는다? - <nowiki>[현대사 추적] 이회창 후보 부친 좌익혐의 구속사건 미스터리(3)</nowiki>
- 거타지 . . . . 3회 일치
'''거타지'''(居陀知)는 9세기 경 [[신라]]의 무신, 외교관, 궁사이다. [[진성 여왕]]의 왕자 [[양패]]의 수행원으로 [[당나라]]에 다녀왔다.
== 관련 항목 ==
[[분류:신라의 무신]][[분류:저격수]][[분류:한국의 신화]][[분류:신라 사람]][[분류:외교관]][[분류:한국의 전설]][[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64화 . . . . 3회 일치
* 타이헤이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어머니를 기다리던 신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신사는 현재 포켓햄GO의 체육관으로 등록.
* 신사는 포켓햄의 체육관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우마루는 햄타로스를 얻는다.
* 리뷰에는 작성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
- 고유민 . . . . 3회 일치
* 상위 항목 : [[배구]], [[배구 관련 인물]]
1월 4일 4라운드 첫 경기였던 계양체육관 흥국생명 전에서 범실을 너무 많이 해서[* 팀 범실 19개 중에 무려 '''12개'''가 모두 고유민의 범실이었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2위에 까지 올랐다. 그런데 양철호 감독은 한유미가 빠진 자리에 고유민을 꽤나 오랫동안 기용했다. 심지어 반등의 기회가 될 수 있는 3세트 22:22에서 지고있다가 팀의 추격조라 할 수 있는 [[김주하(배구선수)|김주하]]와 [[이다영]]을 다시 고유민과 [[염혜선]]으로 교체하며 결국 자멸했다.
TV로는 보기 어렵지만 경기장에 가보면 [[양효진]]이 붙어서 중점 관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 권해효 . . . . 3회 일치
상당히 독특한 마스크를 가지고 있는데 부리부리한 눈과 큰 하관 때문에 턱과 관련된 별명이 많다. 예를 들면 90년대 말부터 불렸던 '''턱주가리'''라든지(...)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에르난 크레스포]]와 이목구비가 비슷하다. 또, 유럽 최대 컨설팅 회사 롤랜드버거의 샤를 에두아르 부에 CEO나 스티브 부세미와 몹시 닮았다.
* 2013 [[관능의 법칙]] : 박대표 역
- 그랜드 테프트 오토: 산 안드레아스 . . . . 3회 일치
로스 산토스의 경찰관. 갱단원들을 협박해 더러운 일을 시키는 부패 경찰이다. 성우는 [[새뮤얼 잭슨]]
로스 산토스의 경찰관. 텐페니와 한패이다.
개발 당시에는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맺는 [[미니게임]]이 존재했다. 출시 버전에는 이 기능을 이용할 수 없게 했으나, 데이터는 [[더미 데이터]]로 남아 있었기에 모더들이 이를 복원한 "핫 커피 모드"라는걸 만들어버렸다. 이 사건은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왔다.
- 그린 랜턴 . . . . 3회 일치
'그린'이란 점에서 녹색과 관련이 많다. 주무기인 파워링부터가 녹색이며 녹색 에너지를 쓴다.
앨런 스콧을 말한다. 정확히는 지구에서 처음 등장한 그린 랜턴이란 의미이며 그 힘은 마법과 관련이 있다.
메인스트림과 관계없는 외전 만화도 있다. 이중에는 [[슈퍼맨]]이 파워링을 얻는 경우도 있다.
- 김가은(1989년 5월) . . . . 3회 일치
|| [[2008년]] || 연인들[* 영화감독 김종관의 단편영화 11편을 묶은 영화이다. 헤이,톰이 포함되어있다.] || 가은 ||
* 2018년 1월 28일 저녁, 피자먹방을 하며 '나는 살을 찌우는 식단관리를 해야해' 라고 말했다.
* 트위치 방송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총무님]]으로
- 김기철 . . . . 3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정치인]], 관료이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1961년 5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정무[[차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체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임명되어 1981년 3월까지 역임하면서 여당 인사로 변신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김동욱(배우) . . . . 3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가톨릭/인물)]
2017년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서현 역을 맡아 큰 호평을 받았다. 이어 12월에 개봉한 [[신과함께-죄와 벌]]에서 원작의 [[유성연]]을 재구성한 김자홍의 동생 김수홍을 연기해 화제를 일으켰고 "진주인공이다" 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호평을 보여줬다.[* 특히 현몽신에서는 웬만한 관객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또한 영화 개봉 후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가졌다. 후속작인 [[신과함께-인과 연]]에는 주연으로 출연한다. 정작 본인은 [[이정재]]와 같은 특별출연으로 출연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꽤나 중요한 역할을 맡아 놀랬다고 한다. 또한 영화가 1300만 관객을 돌파하자 여동생이 가장 기뻐했다고 한다.[[http://sports.khan.co.kr/sports/sk_index.html?art_id=201801030858003&sec_id=540401|기사]]
- 김병기(배우) . . . . 3회 일치
이후 현대극에서는 주로 [[재벌]] [[회장]], 중앙정보부장[* 하필 동명이인인 정치인 김병기도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국정원 출신이다.], 국회의원, 국무총리, 장관 등 [[높으신 분들]]을 연기하는 편이다.
* [[1998년]] [[KBS1]] 대하드라마 《[[왕과 비]]》 ... 내관 엄자치 역
* [[2006년]] [[KBS1]] 단막극 《[[HD TV문학관]] - 등신불》 ... 청지기 역
- 김봉환(1921) . . . . 3회 일치
[[대한민국]]의 관료, 법조인([[변호사]]), [[정치인]]이다. 호는 선주(善洲)이다. [[신광순]] 전 국회의원이 그의 손아랫동서이다. 또한 [[손경식]]의 장인어른이다.
[[일제강점기]]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관료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하였다.
- 김선길(국회의원) . . . . 3회 일치
이후 [[웨슬리안 대학교]], [[켄터키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다가 1969년 귀국하여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 연구조정관으로 임명되어 공무원 경력을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처,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등에서 근무하면서 상공부 [[차관]], 중소[[기업은행]]장, 대한증권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3월부터 1999년 3월까지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9년 [[한일어업협정]]이 문제가 되어 경질되었다.
- 김성겸(탤런트) . . . . 3회 일치
|| '''본관''' ||[[김해 김씨]] 경파[* [[김해 김씨]] 경파(京派) 25세손, 수로 75세손 '謙'자 항렬이다. [[정치인]]인 [[김부겸]], [[아프리카]] [[BJ]]인 [[김보겸]], [[GOT7]]의 멤버인 [[김유겸]]과 같은 항렬이다. --어째 김X겸이 많다.--]||
|| '''신체''' ||'''183cm, 98kg'''[*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던 당시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중학교 때 키가 다 커서 중학생 때 180을 이미 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중학교 때 짝사랑하던 이웃 여학생을 찾았는데, 정작 그분은 김성겸을 기억 못했다. [[MC]] [[이상벽]]이 김성겸이 동네에서 제일 체격이 컸다는데 외모라도 기억이 안 나냐고 하자, 그 여성분의 아버지도 키가 180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살면서 키 큰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인상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그녀는 김성겸을 방송에서 본 모습으로만 기억했는데 그가 주로 맡던 역할 때문인지 그냥 좀 무섭다는 인상밖에 없었다고.. --간단히 말해 어렸을때 동네에 살았건 말건 TV에 나오건 말건 별 관심없었다는 이야기(...)-- 몸무게는 90년대 말에 KBS 모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밝힌 것.]||
|| '''학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 김승대 . . . . 3회 일치
시즌 종료 후 [[박태하]] 감독이 이끄는 중국 2부 리그 우승팀이자 2016년 [[중국 슈퍼 리그]]로 승격하는 [[옌볜 푸더]]로 이적설이 나왔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468&article_id=0000086796|관련 기사]]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명주도 없고, 승대도 없고]]~~ 그리고 결국 이적료 20억+@를 포항에 안겨주고 연변으로 이적했다. 포항으로서는 아쉽지만 포스코의 지원금이 또다시 삭감되어 70억 수준으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김승대가 안겨준 이적료 덕분에 나머지 FA인 [[신화용]], [[황지수]], [[손준호]]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현대판 [[심청전|심청이]]~~
25라운드 전남전에서 경합 도중 발을 높게 든 것이 김영욱의 무릎을 가격하면서 시즌 첫 퇴장을 당하였다. 퇴장 과정에서 "[[VAR]] 이런 거 왜 해?"라며 거칠게 항의하면서 욕설까지 내뱉은게 확인되면서 추가로 5경기 출장정지에 범칙금 500만 원의 징계까지 당했다. [[http://sports.news.nate.com/view/20170811n16405?mid=s0301|관련기사]] 결국 오자마자 팀 전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포항 역시 2년 연속 하위 스플릿으로 내려가 버렸다.
9월 17일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조별리그 A조 두 번째 경기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1:0 승리에 기여,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16강 진출을 확정했다.
- 김옥이 . . . . 3회 일치
| 본관 = [[경주 김씨|경주]](慶州)
'''김옥이'''(金玉伊, [[1947년]] [[12월 2일]] ~ )는 여군 출신의 정치가이자, 준정부기관인이다.
* [[2011년]] 6월 : 한나라당 7.4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
- 김우중 . . . . 3회 일치
|본관 = [[광산 김씨|광산]]
== 가족 관계 ==
5년 8개월 간의 해외로 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입국하여 [[대한민국 검찰|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ref>[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61640 관련기사]</ref>[[2006년]] [[11월 3일]] 열린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천 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7년]] [[12월 31일]] [[사면|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의 0.5%정도인 약 887억원을 납부하였다. [[2013년]] 김우중법에 대해 논란이 일었고, 여전히 17조 8000여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이다. [[2014년]] [[대우그룹]] 창립 기념일에 추징금 문제가 불거져 참석하지 못했다. 그해 [[8월 26일]]에 [[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 김지수(배우) . . . . 3회 일치
데뷔는 본인도 감추고 싶은 비밀인 [[흑역사]] 《여형사8080》[* [[SBS]] 초기에 방영된 3인의 여형사가 한국의 강력범죄를 해결한다는 본격 여성 버디 드라마...인데 범죄 예방과 사회경각심 고취의 목적은 고사하고 여배우들의 액션(...) 눈요기만 했다는 평으로 신문에서 비난 기사가 나자 그 다음 주로 종영했던 작품이다. 참고로 《적색지대》와 함께 [[김갑수]]에게도 흑역사로 간주되는 작품.]으로 1992년에 데뷔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작품은 [[SBS]]의 《머나먼 쏭바강》[* 란당팜에게 밀렸지만 [[박중훈]]의 상대 여주인공으로서도 꽤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실력파라는 걸 증명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연예인으로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임성한]] 작가의 작품이자 1998년 당시 최고의 인기작이었던 MBC의 《[[보고 또 보고]]》에 출연하고 나서이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자매 중 미운오리 취급을 받던 동생이지만 큰아들과 결혼하여, 작은아들과 결혼한 친언니와[* 즉 손위관계가 역전된 겹사돈.] 관계가 역전되는 여인 은주를 연기했다. 《[[보고 또 보고]]》 이후 《온달왕자들》, 《태양은 가득히》, 《나쁜 친구들》등 시청률 30%가 넘는 히트작에 출연하였고 《신화》, 《햇빛 사냥》등의 미니시리즈에 다수 출연하였으나, 작품이 히트한 것과 별개로 배우 개인으로는 주목받지 못했다.[* 후술할 [[음주운전]]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른 영향이 크다.]
* 가녀린 외모와 달리 좋아하는 스포츠는 [[스노보드]]. [[제트스키]], [[수상스키]]까지 즐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탔기 때문에 연예인 중에서는 보드를 잘 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족으로, 배우 [[김혜리(배우)|김혜리]]는 김지수가 그랬던 것처럼 가녀린 외모와 달리 스포츠광이면서 두 번 이상 음주운전으로 구속된 전과[* 김지수는 [[KBS 1TV]] [[태조 왕건]]에서 김혜리가 맡았던 강비 역 물망에 한때 거론됐다.]가 있었다. 그러다가 2011년, [[백혈병]] 환자에게 조혈모세포를 기증하는 선행을 베풀었으며, 이 과정에서 어린이 환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지 2013년, 소아암 환자 진료비를 위한 자선행사에도 기부했다.[[http://www.humanmp.co.kr/news/news_index.php?vDown=news_read&vKey=14910&vBid=02&vTable=BBS|#]] 이로 인해 이미지는 어느 정도 개선된 듯(...)
- 김충공 . . . . 3회 일치
=== 관료 생활 ===
[[헌덕왕]]과 [[흥덕왕]] 때의 실권자로 헌덕왕 때는 정사당(政事堂)에서 내외관(內外官)의 전주(銓注)를 맡아보면서 인사문제의 실권을 맡는 등 당시 최고의 정치적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 관련 항목 ==
- 김태환(1943) . . . . 3회 일치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이다. 5선 국회의원과 정무제1장관을 역임한 허주 [[김윤환]]의 친동생으로 아버지 [[김동석]]도 제4대 국회의원(경상북도 선산군. [[무소속]]-[[자유당]])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5년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에 임명되었다. 2005년 골프장에서 시비가 붙어서 건방지다면서 골프장 경비원을 폭행했는데 비슷한 시기 맥주병 폭행을 일으킨 당시 같은 당적의 [[곽성문]]의원 등과 더불어 진보 네티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더 가관이었던건 이때 사용한 도구가 건어물(...)이어서 '오징어 의원'이라는 비아냥이 돌았었다.
한번도 당을 버린 적은 없으나, 당으로부터 2번이나 버림받은 비운의 정치인이다. 2008년 총선 당시에야 친박계여서 친이계 당 지도부가 공천을 안줬다지만, 친박 중진이 된 2016년에 '''친박 지도부가 공천을 안주는 사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이에 대해, 비박계를 대대적으로 공천에서 떨어트리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티 안나는 친박 몇 명'''을 미리 낙천시켜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라는 관측이 많았다. 김태환이 친박 중진이기는 했어도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친박 핵심부는 또 아니었기에 그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케이스로는 [[서상기(정치인)|서상기]] 의원이 있는데, 서상기가 떠난 지역구는 결국 '''친 야 무소속의 [[홍의락]]'''이 당선되었다.]
- 김현정 (1979년) . . . . 3회 일치
* [[2012년]]부터 [[세계일보]] 미술[[칼럼]] '''''배우화가 김현정의 그림 토크'''''를 연재했다. 이 칼럼은 작가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평론하며 미술이론, 미술사 등에 관한 작가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2009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 '나비'를 마지막으로 배우로서 활동을 마치고 '가톨릭상담봉사자과정'에서 1년 넘게 심리상담 교육을 받은 후 화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2014년 6월에는 첫 개인전인 <묘사와 연기>가 열렸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965311 화폭으로 옮긴 심리 치유…배우겸 화가 김현정 개인전], 연합뉴스, 2014년 6월 17일 작성.</ref>, 2014년 11월 9일 부터 11월 19일까지 [[백남준]], [[이왈종]]과 함께 중국 베이징에서 <하나에서 셋으로:한국 예술가 3인전>에 작품전을 열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18578 ‘동양화로 그린 장서희는?’ 화가 김현정, 中진르미술관 초청], 뉴데일리, 2014년 10월 7일 작성.</ref>
:장소 : 중국 [[베이징]] 진르미술관
- 김혜은(탤런트) . . . . 3회 일치
||<bgcolor=#405366> {{{#FFFFFF '''본관'''}}} ||<(> [[경주 김씨]] ||
|| [[보안관(영화)|보안관]] || 이미선 || ||
- 김호근 . . . . 3회 일치
* [[교육인적자원부]] 기획감사담당관(서기관)
* [[한국체육대학교]] 총무과장(부이사관)
- 나비야 꽃이야 . . . . 3회 일치
일본어 관용구. 부모가 아이를 지극히 귀여워하는 모습을 뜻한다. 같은 뜻의 단어로 '「치야호야(ちやほや)」'가 있다.
확실한 기원은 없지만 가장 오래된 용래는 [[마쿠라노소시]]에 있다. 비슷한 시기에 [[겐지모노가타리]]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헤이안 시대에는 관용적으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분류:일본어]] [[분류:관용어]]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1화 . . . . 3회 일치
* 파워로더는 그녀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미도리야에게 힌트가 된다.
* 4일 후의 체육관. 올마이트가 학생들의 성과를 보러 왔다.
* 바쿠고는 폭발을 손바닥 전체에서 한 점으로 모으는데 성공, 관통성을 높인 "철갑탄"(AP샷)을 개발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6화 . . . . 3회 일치
* 미도리야와 바쿠고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난관을 타개한다.
* 관람석의 아이자와 쇼타는 Ms. 죠크의 농담에 시달리고 있다.
* 각자 팀을 이끌고 난관을 돌파하는 미도리야와 바쿠고.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1화 . . . . 3회 일치
* 요아라시의 히어로관으론 이들의 행동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고 디스하는데 토도로키는 무시하려 하지만 엔데버에 대한 증오가 고개를 든다.
* 토도로키는 아버지는 관계없다고 항변하지만 요아라시는 관련없는게 아니라며 과거의 일을 밝힌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6화 . . . . 3회 일치
* 올마이트는 개인적 사정으로 나이트아이와 불편한 관계였고 그래서 직접 그를 소개해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인턴제도에 관심을 보였던 학생들은 모두 실망하고 혼자 근신 받느라 뒤쳐져 있던 [[바쿠고 카츠키]]는 "꼴좋다"고 웃어재낀다. 그러나 아이자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호만 해서는 강한 히어로를 키울 수 없다"는 반대의견이 나왔고 결과적으론 이런 방침이 되었다.
>네가 말하는 히어로관에 딱 아냐?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5화 . . . . 3회 일치
* 관서지역의 사건으로 [[패트껌]]이 밝혀진 정보는 [[아마지키 타마키]]가 맞은 탄환이 "개성인자를 파괴하는 약물"이라는 것.
* 관서의 히어로인 그는 여기서는 초면인 사람이 많다. 그는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는데 둥글둥글한 몸매가 여학생들의 호평을 산다. 패트껌은 좋아라하며 사탕을 나눠주겠다며 꺼낸다. 그 사이 나이트아이는 그가 합류한 정황을 설명한다. 시에핫사이카이가 금지약물을 유통해 수입원으로 삼는다고 보고 관련 계통에 빠삭한 그의 협조를 구했던 것이다. 패트껌은 사탕을 나눠주려다 말고 며칠 전 사건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다. 금지 약물 유통은 과거에 한 번 근절시켰다. 그런데 키리시마, 레드 라이오트의 데뷔전 날 사건이 터졌다. 그때 전혀 본 적도 없는 종류의 약물이 타마키를 맞췄다고 말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7화 . . . . 3회 일치
작전은 어디까지나 "에리쨩"이란 소녀의 발견과 보호가 목적. 그 이상 파고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일 걱정해야 할 건 [[빌런 연합]]의 그림자다. 경찰이나 나이트아이의 견해 상으론 딱히 양호한 관계는 아니라 하니 이번 가택 조사에서 같은 장소에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1학년의 참가는 거기서 끝이다. 이 점은 학생들도 납득한다.
같은 메시지가 아이자와에게도, 빅 3에게도 전해졌다. 밀리오는 아직까지도 에리쨩과 관련해서 울쩍한 기분이었지만 네지레와 타마키가 적극적으로 위로해서 조금씩 기운을 차린다.
* 결행일에 앞서, 나이트아이가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맥 풀리는 정보를 공개했다. 에리쨩의 위치를 특정했다는 것.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3화 . . . . 3회 일치
* 그런데 랏파가 황당하게도 텐가이를 공격한다.일단 작은 배리어를 쳐서 그걸 막는 텐가이. 랏파에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적도 아군도 없는 모양이다. 극는 오버홀은 "오바호"란 자기만의 애칭으로 부르는데, 이 콤비도 "오바호"가 멋대로 정한 거니 상관없고 자신은 누구든 패죽일 수만 있으면 만족이라고 말한다. 텐가이는 질렸다는 듯이 배리어를 해제해주며 그렇게 해서 처리할 수 있으면 맘대로 해라고 허락해주며 "오바호가 아니라 오버홀님"이라 정정한다. 랏파는 "좋은 히키코모리"라고 응수.
* 두 중량급의 격돌. 일찌감치 뒤로 밀려난 키리시마는 지켜볼 뿐이다. 두 팔은 부러졌고 자긍심도 박살냈다. 설마 언리미티드 모드가 이렇게 쉽게 깨질 줄이야. 하지만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다. 패트껌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다. 대결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기관총의 연사같은 러쉬가 쉴 새없이 패트껌을 때렸다. 그는 손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그 충격으로 몸이 떠오를 지경이다. 패트껌이 충격을 다 흡수하지도 못하는 것, 그럼에도 자신을 감싸기 위해 싸움을 자청했음을 키리시마는 알았다. 그럴 수록 자괴감이 사무친다.
그렇게 자문자답을 되풀이하는 동안 눈동자에 공포가 비친다. 덩치들의 싸움에 관심이 없던 텐가이가 그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눈빛에 어린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키리시마가 공포에 물들었고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될 거라며 불쌍하게 여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56화 . . . . 3회 일치
* 시에핫사이카이의 현관에서 철포옥 핫사이키 "카츠카메 리키야"를 저지하던 드래곤 히어로 [[류큐]]와 웅영고 인턴들은 그를 어렵지 않게 제압한다. 리키야의 [[개성(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개성]]은 접촉한 상대에게 "활력"을 흡수해 거대화하는 능력. 그를 제압한 류큐팀은 서둘러 선행한 히어로 연합군을 따라가기 위해 저택으로 돌입하려 했다.
* 그때 무슨 우연인지 루밀리오의 망토가 날아다니다 낙석에 휘감겨 스쳐 지나간다. 오버홀은 단지 기분 나빠하고 마는데, 에리가 문득 망토를 붙잡는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오버홀은 에리의 뿔에서 기이한 빛이 나는 순간 섬뜩한 기분과 함께 에리에 내력에 대해서 떠올랐다. 에리는 두목의 딸이 낳은 딸. 즉 두목의 손녀였다. 두목의 딸은 "남편이 저주받은 딸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서 딸을 버리고 잠적해버렸다. 어느날 남편이 에리를 만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것. 조사 결과 에리는 양측 가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돌연변이. 저주도 뭣도 아닌, 아주 낮은 확률로 일어나는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에리는 너무 어렸던 관계로 자신의 개성을 자각하지도 컨트롤하지도 못했다. 두목은 "접촉한 상대가 소멸했다"는 점이 오버홀의 개성과 닮았다고 여겨 에리를 보살피고 그 개성의 실체에 대해 파악해 보라고 지시했는데, 그게 오버홀의 "사업"의 시작이었다. 조사에 착수한 오버홀은 곧 해답을 찾아냈다. 에리의 개성은 "되감는 것". 두목은 오버홀과 에리의 개성이 닮았다고 했지만, 오버홀 자신은 "차원이 다르다"고 두려워하게 된다.
현관에서 덮쳤던 카츠카메 리키야를 제압하지만 잠시 방심했다가 크게 통수를 맞았다. 리키야는 원래 "닿은 대상"의 활력을 빼앗는 개성인데 개성 부스트 약물의 힘으로 직접 닿지 않아도 공기를 빨아들여서 활력을 흡수하는게 가능한 상태였다. 하도 네지레는 처음으로 정확한 개성이 공개. 자신의 활력을 충격파로 쏘아내는 능력. 왠지 빙글빙글 돌면서 나가서 속도는 느리다. 활력을 흡수하는 리키야와는 상성이 나쁜 모양이다. 그 때문에 아무리 공격해도 통하지 않고 리키야에게 성희롱 당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전원이 활력을 빨려서 지지부진하게 싸우고 있었으나 토가 히미코가 미도리야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힌트를 준 덕분에 역전할 수 있었다. 다들 힘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지만 능력을 종합해 리키야를 지면으로 떨어뜨리고 아예 지반을 붕괴시켜 역전과 미도리야 일행과 합류를 한 큐에 성공. 이후에 빌런연합의 개입을 눈치채지만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 나체의 마하 . . . . 3회 일치
* 당시 누드화는 누드의 '미美'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신]]이나 고전 조각상 같은 완벽한 인체비례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나체의 마하는 그냥 일반 여성의 관능적인 누드를 드러내고 있다.
* '''[[음모]]를 그렸다'''. 중세의 윤리관으로 체모 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한다고 보아 금기시 되었고, 여성의 음모는 나체라고 해도 순수한 미에 방해가 된다고 보고 그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나체의 마하에서 음모를 그린 것은 매우 파격적인 사례였다.
* 『프라도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 남창희(연예인) . . . . 3회 일치
||<#878787> '''{{{#EEE156 본관}}}''' ||<(> [[남(성씨)|의령 남씨]][* 23세손 'O熙'항렬로 11살 연상의 개그맨 [[남희석]]의 증조할아버지뻘이다...] ||
[[대한민국]]의 방송인. 비공채 출신 개그맨. 전북 진안고 3학년 재학 당시 [[기쁜 우리 토요일]]의 학생이 선생님이 되고 스타들이 학생이 되어 수업을 받는 코너 '스타스쿨' 에 출연하면서 방송에 데뷔하였다. 학생답지 않은 노련한 화술로 단번에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었고 재출연 요청까지 빗발쳐서 한번 더 출연했을 정도. 어찌보면 제대로 연예인길을 걷고 있는 지금보다 이때가 더 떴었다(...)[* 진안고 연극부 출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남창희가 방송에 데뷔한 시점과 비슷한 때 데뷔한 고교생 스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판유걸]]'''이다. 두 사람 다 1982년생 동갑내기이지만 판유걸은 1999년에 데뷔했고 남창희는 2000년에 데뷔했다. [[안습]]한 것은 판유걸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에 남창희가 뜨고 남창희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에 판유걸이 뜬다는 점. 다만 데뷔 당시 더 뜬 사람은 판유걸이었고 대중은 남창희를 판유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유재석]]이 국민MC가 되기전부터 심복으로 활동하며 [[유라인]]에 근속한 초창기 멤버 중 한명이다.
- 낭만 주먹 . . . . 3회 일치
조직폭력배와 관련된 [[도시전설]]의 일종이다.
조양은과 관련된 자서전 등의 문헌에서 시작하여, 사회적으로 별다른 검증없이 널리 이야기 되는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깡패들이 흉기를 써서 사람을 위협하거나 폭력하는 사건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다. 또 몸을 사리게 된 성인 조폭과는 달리 새롭게 성장하는 청소년 불량배들은 이러한 불문율에 아랑곳하지 않고 흉기를 휘두르면서 막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태촌, 조양은 등은 이렇게 성장한 '신세대 조폭'이었던 것이며, 소위 '낭만주먹'과 비슷한 조폭들이 몸을 사리는 시기는 고작 한 세대도 가지 못한 일시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노영하 . . . . 3회 일치
* 현 [[한국경제신문]] 한경바둑기보 및 바둑 관전기 집필자로 활약하고 있다.
* [[2009년]] 한국경제신문 바둑 관전기 집필자.<ref>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41290041<ype=1&nid=105&sid=8398 한경바둑기보, 노영하 9단이 해설] 한국경제신문 바둑</ref>
== 가족 관계 ==
- 니세코이/229화 . . . . 3회 일치
* 이치죠는 본야리시의 관공서에 공무원으로 취직.
* 관공서에서 치안 관련으로 일하게 된 김에 야쿠자 쪽도 계승, 공사 양면에서 본야리의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 니시키노미하타 . . . . 3회 일치
붉은 [[비단]]에, 일월을 금은으로 자수하거나, 그린 깃발을 뜻한다. [[가마쿠라 시대]] 이래, [[일본]]에서는 조적(朝敵)을 토벌하러 갈 때 쓰는 관군(官軍)의 깃발로 쓰였다. 금기(錦旗,킨키)라고도 한다.
이 '니시키노미하타'가 관군의 깃발로 쓰였으며, 관군이라는 것은 곧 일본 조정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역사적으로 좋은 명분이 되었다.
- 대전광역시 . . . . 3회 일치
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
한밭도서관
국립중앙과학관
- 데드 스페이스 . . . . 3회 일치
탄약이 다 떨어졌을 때 저항수단 A. 기물 파손 용도로만 쓰고 그냥 탄약 관리를 잘 하자.
탄약이 다 떨어졌을 때 저항수단 B. 상자 부수는 용도로만 쓰고 그냥 탄약 관리를 잘 하자.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데미안(드라마) . . . . 3회 일치
'''악질적인 데미안 스토커'''(…)로서 데미안이 취재한 사진들을 마구 사들이고, 어린 시절에 쓰던 물건들(오멘 1의 소품)을 방 안 가득히 챙겨놓고 있으며, 데미안과 관련되면서 뭔가 느끼는 표정(…)을 짓기도 하는 등 참 못말릴 아줌마. 역시 악마숭배자 답다.
[[백악관]]의 수석 비서관. 데미안의 아버지 루퍼트 쏜이 죽었을 때 데미안을 맡아서 돌봤던 적이 있다. 데미안의 정신적 [[멘토]]이며, 데미안을 따듯하게 아껴주는 할아버지. 자신의 운명에 다가가면서 고뇌하는 데미안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고, 데미안 자신이 적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 도서관 . . . . 3회 일치
[[책]]을 보관하는 건물.
현대의 도서관은 책을 대출할 수도 있게 해준다. 반납 기한은 지키는게 좋다. 안 지키면 연체료를 물거나 일정 기간 대출이 불가능해진다.
고대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으니 상당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설이다.
- 동군연합 . . . . 3회 일치
* 중세 유럽에서 행정은 분권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민들의 인구조사, 빈민구휼 같은 현재의 일반적인 대민행정은 [[교회]]가 담당했으며, 도시의 행정은 시민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납세는 징세권은 영주나 국왕이 보유했으나 실제 징세업무는 [[징세청부업자]]가 대리했다. 법률은 각 지방의 관습이나, 역시 교회법에 따라서 처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본래 중세적인 구조에서 '귀족'이나 '왕실'은 일반 행정에서는 크게 하는 개입할 일이 없고(…) 징세권에 따라서 세금을 거둬가서 군대를 조직하고 외침을 방어하는 역할("싸우는 자")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분권화된 행정체계였으며, 행정체계가 왕실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을 '갈아끼우는 것'이 용이했던 것이다.
''' 근세 유럽국가들의 동군연합중 최강의 동군연합 ''' 스페인의 왕위계승자였던 카를로스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에 오르면서 생겨난 동군연합. 당시 스페인은 신대륙의 금광+저지대의 미친 생산력에서 나오는 자금과 스페인+보헤미아+오스트리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나오던 국력을 통해 당시 유럽 최강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는 통치면적으로 보자면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다만, 당시 스페인의 왕이던 카를로스가 독일 쪽에 영 관심이 없어서(...) 연합은 1대만에 해체.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나뉘어진다.[* 다만, 플랑드르 지방은 스페인에게 갔다. 그리고 이후 네덜란드, 벨기에로 독립하게 된다.]
다만 부부관계는 최악이라 헨리나 엘레오노르 둘다 정부를 거느렸으며, 둘의 불화는 악화되어 헨리가 엘레오노르를 가두기까지 한다. 이에 둘사이에 나온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단체로 대항했으며, 결국 리차드가 헨리를 투옥시키고 잉글랜드 왕위를 상속받으면서 모자동군연합이 됀다
- 동왕부 . . . . 3회 일치
서왕모 자체의 양성구유, 혹은 천상의 천제-지상의 서왕모라는 구도는 한나라 시기에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서왕모가 서쪽을 관장하는 신격이 되면서 동쪽을 관장하는 신격의 필요성이 나타난 것이다.[* 시대적으로 보자면, 춘추전국시대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있었던 중국이 하나의 국가([[진제국]], [[한제국]])이 나타나면서 '중앙'(자국)에 대응하는 '사방'(국경,외계)의 개념이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왕모와는 달리 동왕부는 독자적으로 숭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왕부를 묘사할 때는 미술 작품(동경, 그림 등) 등에서 서왕모와 나란히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미술적 관점에서 서왕모와 대칭되는 존재로 나타난 것이 동왕부의 시초인 것이다. 동왕부는 서왕모의 부속신이라고 할 수 있다.
- 동전던지기 . . . . 3회 일치
* [[DC 코믹스]]의 [[배트맨]]과 관련된 [[빌런]] [[투페이스]]가 집착하는 행동이다.
이와 관련된 [[사기]] [[아이템]]으로는 앞뒤가 똑같은 동전이 있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내기]]
- 둠 패트롤 . . . . 3회 일치
[[마블 코믹스]]의 [[X-MEN]], [[판타스틱 포]]와 관련하여 논쟁이 있다.
* [[틴 타이탄즈]]의 한 에피소드에서 비스트 보이 관련으로 등장하고 가끔 언급된다. 등장했을 때의 모습은 평범하게 유명한 슈퍼히어로 팀으로 원작에서의 어두움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치프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명 스캇 피셔. 피부에서 초고온 복사열이 발생하는 인간 화산. 카르마가 콜더를 내켜하지않는 것과 달리 그를 좋게 평가한다. 저스티스리그 #27에서 아토미카에게 혈관 파열로 사망.
- 듄 2 . . . . 3회 일치
플레이중에 "멘타트" 메뉴를 클릭하면 멘타트와 대화하여 게임의 세계관이나 정보를 알아볼 수 있다. 세계관에 몰입할 수 있는 요소이긴 하지만, 문제는 멘타트 메뉴바가 쓸데없이 큼지막한 반면에 정작 게임 내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게임 내 로어를 알아볼 용도가 아니면 별로 클릭할 필요가 없다. 근데 하도 버튼이 커서 마우스 클릭을 열심히 하다가 잘못 눌러서 들어가기 쉬운 일종의 트랩 스윗치가 되버린다.(…).
상징색은 푸른색. 열대 행성 칼라단을 본거지로 하는 가문으로 성실함과 친절함으로 잘 알려져있다. 듄의 토착민인 프레멘과 우호적인 관계이므로 이들이 적의 기지를 공격하게 유도할 수 있다.
- 로베르 기스카르 . . . . 3회 일치
이후 기스카르는 그해 12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로 퐁투아즈 백작 라뒬프를 보냈는데, 표면적으로 그가 온 이유는 니케포로스 3세에게 헬레나에게 만족스러운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기위해서였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제국의 수도에 있던 노르만 용병들의 세력을 결집시켜 원정에 끌어들이는것과, 당시 내무대신이자 실세로 떠오르던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예상치못하게 알렉시오스가 니케포로스로부터 제위를 찬탈해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해버렸고, 노르만족들을 결집시킬 역할을 했어야될 라뒬프 백작은 오히려 알렉시오스에게 감화되어서 그와 우호관계를 구축하자는 기스카르의 의도와는 정반대인 답을 해버린다(....) 라뒬프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스카르는 라뒬프를 ~~갈군~~호되게 질책한 뒤, 브란디쉬와 오트란토에 이미 모여있던 그의 원정군들을 아드리아해 너머 비잔티움령에 보내려 했다.[* 이미 아드리아해 너머에는 그의 장남 [[보에몽 1세|보에몽]]이 이끄는 선봉대가 상륙해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전투는 노르만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황제측 지휘관으로 나선 게오르기오스의 아버지인 니케포로스 팔라이올로고스와 미하일 7세의 동생인 콘스탄티오스 두카스도 여기서 전사한다. 황제는 겨우 목숨만 건져서 이마에 상처에 출혈과 통증을 참으며 오크리드의 산악지대로 도망쳤다. 그나마 황제에게 위안이었던건, 디라키온이 이듬해 2월까지 넉달을 필사적으로 버텼다는것이다. 그러나 결국 디라키온은 한 베네치아 주민이 밤중에 성문을 열어 함락된다
그러나 기스카르가 돌아가고 남은 군대를 맡게 된 보에몽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형이자 당시 세바스토크라토르라는 관직에 있던 이사키오스가 성 소피아 성당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과거 교회의 금과 은을 녹여 전쟁포로들을 되찾아온 전통을 상기시키면서 교회 재산을 모두 몰수한다고 선언해 겨우 전쟁자금을 구할 수 있었지만, 보에몽은 야니나와 아르타에서 알렉시오스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그리스일대를 장악하고 테살로니카로 진군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어찌저찌 라리사에서 전세를 역전시킬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보에몽의 군대에 항복한 노르만 병사들에게 더많은 봉급을 주고 용병으로 재고용해주겠다고 보에몽의 진지에 소문을 퍼뜨리게까지 했다. 결국 연패를 거듭한 보에몽은 그리스에서 쫓겨난다.
- 마기/319화 . . . . 3회 일치
* 홍옥은 일관되게 자신의 의사를 관철한다.
*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드바드가 사실 자신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함을 자각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쌓아온 세계관이 붕괴하는걸 감당하지 못한다.
- 마기/332화 . . . . 3회 일치
지금 처한 상황은 누구 한 사람이 나빠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성궁"이라는 시스템의 한계. 성궁이 관리하기 때문에 "검은 루프"나 "타전"이 구분되는 것이다. 게다가 성궁이 존재한다는건 누군가는 "관리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게 신드바드든, 솔로몬 왕이든, 자신이나 [[우고]]든 합당한 자리가 아니다. 그 누구라도 "평범한 인간"인 이상 완벽한 관리자는 될 수 없으니까.
- 마기/343화 . . . . 3회 일치
* 아르바는 세상이 망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며 이 시련도 대충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
알라딘이 설마 알마트란과 솔로몬을 부정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신드바드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알라딘은 그 존재 자체가 알마트란의 상징 같은 것 아니냐고 반박하려 하지만 알라딘은 단호하게 상관없다고 말한다. 신드바드는 알라딘으 망설임을 버렸다는걸 깨닫는다. 이제 그들에겐 싸움이 남았을 뿐이다.
* 알리바바는 정오가 지나면서 다급해졌지만 아르바는 매우 태평한 태도다. 알리바바는 세상이 멸망한 위기인데 왜 태평하게 누구냐고 말하는데 그녀는 자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그 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이고 지금 임하는 시련도 "빨리 안 끝나나 이거"라고 투덜거릴 뿐, 아무런 의욕도 없다. 알리바바는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색한 채로 던전 내부로 걷고 있는 두 사람.
- 마기/349화 . . . . 3회 일치
* 분리를 주장하는 알라딘, [[아르바(마기)|아르바]]와 연결을 주장하는 알리바바, 우고의 대립. 그 가운데 신드바드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신드바드는 우선은 국경을 올바로 관리하되 미지의 세상에서 미지의 생명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지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그걸로 발전적인 관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없는 자원을 교류하며 유익한 거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토론자들은 그 점을 놓치고 있는가? 비로소 우고와 알라딘, 알리바바가 아차하면서 맞는 말이라 맞장구친다. 물론 처음부터 "커뮤니케이션은 된다"고 주장했던 아르바는 왜 이제야 그 말을 듣냐고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 마마토모 . . . . 3회 일치
아이들 때문에 엮이게 된 관계의 [[어머니]]들.
[[공원]], [[놀이터]], [[보육원]], [[유치원]], [[학교]] 등, 아이가 다니는 장소에서 알게 된 어머니들 끼리의 관계나, 그런 관계로 알게 된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 마치콘 . . . . 3회 일치
* 마치콘에서 만난 상대가 기혼자였다. → 기혼자가 신체관계만을 목적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 마치콘에서 만난 상대와 교제를 시작했지만, 또 다른 마치콘에 참가해서 바람을 피웠다. → 쉽게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관계가 문란한 사람인 경우도 많다.
* 경찰관이 마치콘에서 만난 여성을 살해한, [[미즈우치 타카시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 맥시 제우스 . . . . 3회 일치
[[배트맨]] 계열 빌런으로 그런 이유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그리스 로마 신화]]가 주된 테마다. 이름이 제우스인 것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그냥 [[인간]]이지만 [[전기]] 관련 무기를 다룬다.
참고로 [[DC 코믹스]]에는 [[원더우먼]] 관련으로 그리스 신화의 신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짝퉁 또라이가 아닌 '''진짜 제우스'''도 있다. 하지만 진짜 쪽은 이 듣보잡 미친 놈은 무시하고 있는 듯.
[[그리스 신화]]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스스로를 제우스라 생각하게된 사업가. 번개 무기를 사용하여 고담을 공격하려다 배트맨에게 패하고 붙잡혀 [[아캄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런데 그 반응이 가관인 것이 갇혀있는 빌런들을 보고는 [[헤르메스]]([[조커(DC 코믹스|조커]]), [[야누스]]([[투페이스]]), [[데메테르]]([[포이즌 아이비]]) 등 그리스 신화의 신들로 보고 자기 방에 오고나서는 자신이 [[올림푸스]]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배트맨이 나타났을 때에는 그를 [[하데스]]라 불렀다. 여러모로 미친 놈들이 많이 나오는 시리즈지만 독보적으로 현실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미쳤다.
- 맨씽 . . . . 3회 일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등장할 가능성에 대한 떡밥이 있다. 영화 [[아이언맨 3]]에서는 관련인물인 [[엘렌 브란트]]가 등장했고 [[에이전트 오브 쉴드]] 1시즌 20화에 등장한 [[마리아 힐]]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다. 다만 이것을 등장 떡밥으로 봐야될지는 미지수인 것이 브랜트는 맨씽과 관련없이 AIM 관련으로만 등장했을 수도 있고, 힐의 언급은 그저 서비스적인 측면일 수도 있다.
- 명탐정 코난 . . . . 3회 일치
== 관련 정보 ==
* [[명탐정 코난/관련 설정]]
* 본 만화는 추리 만화인데 어째 [[건담 시리즈]]와의 관련성이 나온다. 물론 건담계 등장인물이 나오거나, [[모빌슈트]]가 나오는 것은 아니고, 건담을 연상케하는 요소가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라던가.
- 모레아 전제국 . . . . 3회 일치
전제공(δεσπότης,despótēs,데스포테스,데스포티스)이란 비잔티움 제국의 작위로서, 본래 이 말은 '전제 군주'라는 의미였으며, [[로마 제국]] 시기에 라틴어 '도미누스(주인, 군주)'의 번역어로서 그리스어에서 쓰이게 되었고, 그리스어권에서 [[로마 황제]]의 별칭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이를 군주와 혈연이 있는 고위 귀족, 황족에게 주는 '작위'로서 사용했으며, 제4차 십자군 이후 망명정권의 하나였던 에페이로스의 군주가 황제를 칭하기 이전에 전단계로서 '데스포테스'를 사용하면서 독립 국가 군주의 칭호로 등장하게 되었다. 에페이로스의 '데스포테스'는 니케아 제국에 패배하였으나 니케아 제국은 에페이로스를 봉신으로 삼고 '데스포테스'의 칭호를 쓰는 것을 인정하여, 데스포테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 작위로 여겨지는 관례가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전제공','전제후'로 번역된다.[* 다만 이는 확고하게 널리 쓰이는 번역어는 아니다.]
14세기 이후에 비잔티움 제국은 각지의 봉신국에 황제의 동생이나 아들 같은 가까운 황족을 봉하여 행정, 군사, 사법 전권을 행사하며 통치하도록 했다. 전제공의 작위는 종신 보유가 되며, 행정관 임기도 기본적으로 종신이었으나, 전제공의 직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제4차 십자군]] 시기 이 지역에서는 '아카이아 공국'이 세워졌다. 아카이아 공국은 [[니케아 제국]]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기욤 2세는 콘스탄티노플 탈환 이후 영토를 할양하고 풀려났다. 비잔티움 제국은 펠로포네소스 영토에 케파리(군정관)을 두고 이들에게 펠로폰네소스 방면의 전권을 위임했다. 케파리는 연단위 임명이었지만 이 지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종신 임기가 되었고 팔레올로고스 황족이 부임하게 되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지역을 다스리는 멜리키 케파리와 전역을 다스리는 카소리키 케파리로 분화된다.
- 몰맨 . . . . 3회 일치
Subterranea라는 공통점이 있는 [[아웃캐스츠]](Outcasts)에 합류하기도 했으며 [[레드 고스트]](Red Ghost)와 파트너가 되기도 했으나 관뒀다.
오래 등장한 악당이다보니 마블 관련 미디어믹스 이곳저곳에서도 등장했다. 판타스틱 포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은 물론 헐크와 에이전트 오브 스매쉬에도 등장. [[아이언맨]] 관련과 슈퍼 히어로 스쿼드 쇼에도 등장했다.
- 문호근 . . . . 3회 일치
| 소속 = 前 [[예술의 전당|서울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관
[[경상북도]] [[김천시|김천]] 출생이며 본관은 [[남평 문씨|남평]](南平)이다.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장남이자 [[영화배우]] [[문성근]]의 형이다.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한 뒤 [[독일]] [[뮌헨 대학교]] 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 [[피아노 연주자|피아니스트]] 첫 데뷔를 한 그는 이후 피아니스트 활동을 접고 1970년대 이래 각종 오페라를 연출하였으며, 진보적인 예술인단체인 민예총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97년]]부터 [[예술의 전당|서울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관으로 재직하던 중, [[2001년]] [[5월 17일]] 5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f>{{뉴스 인용|성1=연합뉴스 |제목=오페라 연출가 문호근씨 타계 |url=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5/009000000200105171428773.html |날짜=2001-05-17 |확인날짜=2018-09-05 |뉴스=한겨레신문}}</ref>
- 미스터 판타스틱 . . . . 3회 일치
즉, 리드 리처즈라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이미 국가차원의 기술력을 압도한다. 리드 개인의 기술력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나 다른우주를 관측하는 장비까지 만드는 수준으로 과학의 새로운 미래로 그들을 이끌어나갈 수준이라고 보면된다. 실재로 [[마블 유니버스/평행세계|멀티버스]] 중에는 리드에 의해 인류의 과학수준이 올라간 세계도있다.--그럼 이 인간보다 더 똑똑하거나 비슷한 수준이라는 [[발레리아 리처즈|딸]]은 대체..--
리드 리처즈는 '''브리지'''라는 기계도 만들었는데, 무한한 가능성들 가운데 특정 가능성이 실현된 [[마블 유니버스/평행세계|멀티버스]]의 다른 우주를 관측하는 '대체현실 뷰어'다.
현재 일어난 사건이 혹은 일어나게 될 사건이 다른 우주에서 일어났을 경우 해당우주의 주민들이 어떻게 그 상황에 대처했는지를 관측하고 그걸 분석해내는데 사용하는 것.
- 바르나바 복음서 . . . . 3회 일치
바르나바 복음서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 책은 내용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지 않고, 대신 [[가롯 유다]]가 십자가에 매달린다. 전반적인 내용은 4대 공관복음서와 유사하나, 이 같은 차이점은 [[기독교]] 전통보다는 오히려 [[이슬람교]]에서 묘사하는 예수와 유사함이 많다. 또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하고, 메시아의 이름은 [[무함마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20세기에 [[영어]]로 번역이 이루어졌고, [[파키스탄]] 등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 출판되어 상당히 많은 관심을 끌었다.
* [[포도주]]를 보관할 대 나무통을 사용하는 묘사가 있어, 항아리를 사용했던 팔레스타인 지역과 생활상이 다르다.
- 바키도/132화 . . . . 3회 일치
* 한마 바키는 승부는 났다고 외치며 시합 중지를 외친다. 그러나 모토베 이조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멈추면 지킬 수 없다"고 중얼거리고 있다. 무사시도 승리를 확신한 것인지 모토베보다는 관중석에서 일어난 바키에게 시선을 돌린다. 모토베가 파고든 것은 그 틈. 두 다리가 부러졌을 텐데, 혼신의 태클이 깔끔하게 들어간다.
* 관중석의 여론이 일거에 뒤집힌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역전극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가이아는 모토베의 승리라고 외쳐버린다.
* 무사시는 최후의 힘으로 저항한다. 모토베의 오른쪽 어깨에 칼을 꽂지만 아무 소용도 없다. 관중들도 그런 걸로는 무리라고 입을 모을 정도로 무의미한 저항.
- 바키도/133화 . . . . 3회 일치
* 한마 바키를 비롯한 모든 관중들의 부러움과 안도감, 감사가 뒤섞인 복잡한 박수갈채를 받는다.
* 오로치돗포부터 시작해서 하나둘 관중들이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들 사이에선 지켜지고 말았다는 안도감과 감사, 그리고 앞질러 가버린 동료에 대한 질투와 씁쓸함 따위가 뒤섞인 감정이 흘러나온다. 그런 감정들이 박수를 타고 모토베에게 쏟아져 내린다.
정작 승자인 모토베의 의견은 다르다. 그렇게되기까지 "몇 번이나 베어졌던가"라고 씁쓸하게 술회한다. 무사시가 한마 유지로와 겨루던 때부터, 그는 몇 번이나 무사시의 무검에 베어졌던 바였다. 무사시는 그런건 그저 "통보"일 뿐이라며 실제 베는 것관 다르다고 단언한다.
- 박상면(배우) . . . . 3회 일치
|| '''본관''' ||<(> [[밀양 박씨]] ||
연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스타킹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비치는 이미지 때문에 코믹한 인상을 받기 쉽지만[* 이 당시 [[별명]]이 '몹쓸 상면'이었다.] 이 사람도 진지한 역할을 맡을 때에는 정말 한 없이 진지해진다. 특히 [[소방관]]의 활약을 주제로 한 영화 리베라 메에서 베테랑 소방관을 맡아 열연했을 때는 그야말로 절정의 카리스마와 간지를 선보였다(물론 마지막 장면에 한정). 창문을 통해 사람들을 리프트 카에 태워 대피시키려는데 자리가 모자라자(그것도 불길이 코 앞에 닥쳐와서 리프트 카에 타지 않으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남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킨 뒤 조용히 건물에 남아 담배를 물고 닥쳐오는 불길을 노려보는 모습은 그야말로 폭풍간지. 또한 [[서울1945]]에서 박창주라는 [[악역]] 군인을 맡아 열연해 [[KBS 연기대상]] 조연상을 받았다. 제빵왕 김탁구에서도 코믹이 아닌 진지한 연기를 맡아 호평 받았다.
- 박정민(배우) . . . . 3회 일치
2016년 2월 17일에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영화)|동주]]>에 [[강하늘]]과 함께 주연으로 참여했다. 강하늘은 [[윤동주]] 역, 박정민은 윤동주 시인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으로 분했다. 탄탄한 연기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송몽규 열사의 재조명과 함께 그 자신도 조명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동주로 같이 작품을 하게 된 이준익 감독에 따르면, "저예산 영화계의 [[송강호]]"라고. 그리고 이후 인터뷰에서 관련 언급을 하면 자신은 "그러지 마세요 제발"이라며 난감해한다.
||<tablebordercolor=#4682b4><rowbgcolor=#4682b4>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활동'''}}} || '''{{{#white 배역}}}''' || '''{{{#white 관객수}}}''' || '''{{{#white 흥행}}}''' ||
||<rowbgcolor=#4682b4><tablebordercolor=#4682b4> {{{#white '''역임 연도'''}}} || {{{#white '''기업/기관'''}}} || {{{#white '''직함'''}}} ||
- 백정현 . . . . 3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top2=삼성 라이온즈/선수단)]
그런데 팔꿈치가 생각보다 안좋은 듯 하다. 사실상 작년이 프로 첫 선발 시즌이었던지라 [[버두치 리스트|향후 철저한 관리가 필요할 듯]].
5월 25일 '''두산전에서 8이닝 5k 무실점'''[* 무려 2018시즌 크보를 지배했던 두산을 두산의 홈인 '''잠실'''에서 완벽투를 선보였다.]으로 본인 야구인생 최고의 투구를 펼치며 2승을 수확, 2015년 9월 이후 32개월 만의 팀 5연승을 이끌었다. 위력적인 공을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 꽂아넣는 완벽한 투구내용을 보여줬다. 완봉도 가능했지만 100구를 넘기는 등 많이 던졌기에 관리차원에서 8이닝만 던지게한듯. 이날의 호투로 본인의 평균자책점을 3.86으로 끌어내렸다.
- 브와나 비스트 . . . . 3회 일치
이름답게 [[동물]] 관련 초인으로 아프리카의 동물들과 연결되어 초인적인 힘, 스피드, 감각을 소유한다. 또한 킬리만자로 동굴의 미네랄 워터를 마셔서 마신 양만큼 상해에 대한 저항력을 얻는다. 이 미네랄 워터는 붉은 원숭이 듀바(Djuba)가 병에 담고 다니며 보충해준다.
[[엄친아]]같은 인물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백만장자 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으란 말을 들었지만 거절하고 대학 룸메이트였던 루퍼트 켄보야와 함께 아프리카로 가서 잠베시 국의 새로운 동물보존구역 책임자 겸 게임 관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배트맨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 2시즌에서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며, 자신과 비슷하게 동물과 관련된 능력을 가진 빅센을 연인이다. [[틴 타이탄즈]] Go! 에도 짧게 등장한다.
- 블라디미르 렘 . . . . 3회 일치
[[뉴욕]]에서 활동하는 [[러시아]]계 범죄조직의 보스로 펀치넬로 패밀리와 적대 관계이다.
잭 루피노 소유였던 나이트클럽 "라그나 록"을 사들여 고급 레스토랑 "보드카"로 개조 중. 자신은 보드카가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이 되고, 자신은 부유한 유명인이 될거라며 자신한다. 여전히 범죄조직의 관련자기에 형사인 페인과는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수는 없는 관계. 블라드 曰 "내전의 양편에 선 형제와도 같군,"[* Like brothers caught on the opposite side in a civil war.]
- 블랙 클로버/104화 . . . . 3회 일치
* 그때 샬롯만 내버려두고 어딘가에 갔던 [[솔 마론]]이 돌아온다. 그런데 수습할 생각은 커녕 잘한다고 장단까지 맞춰주는게 가관이다. [[아스타(블랙 클로버)|아스타]]는 슬슬 그만두지 않으면 진짜 죽을 거라고 말려달라고 하는데, 참으로 운 좋게 발이 걸려서 솔 마론의 가슴에 뛰어들게 된다.
* 그때 야미를 찾아다니던 [[바네사 에노테이커]]가 나타난다. 역시 평소 습관대로 진탕 마시고 헤롱거리는 상태다. 그녀는 야미를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오다가, 그 옆에 있는 샬롯과 눈이 마주친다. 여자의 육감 탓일까? 두 여자는 무의식 중에 상대를 연적으로 간주한다. 바네사는 누군지도 모르면서 "져선 안 된다"고 막연히 직감하고 샬롯은 "묘하게 야미한테 친하게 구는 여자"라며 질투한다.
* 샬롯은 야미를 의식해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탄한다. 자신이 뭘하고 있는 건지 한심해하던 그녀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어떤 "저주"에 관해 회상한다.
- 블랙 클로버/108화 . . . . 3회 일치
[[블랙 클로버]] 페이지 108. '''무관무패의 여사자'''
아무래도 레오폴트는 눈치가 없는게 아니라 그냥 체념한 것 같다. 붙잡힌 둘에게 새로운 단장 [[메레오레오나 버밀리온]]을 소개한다. 본래 정치나 전쟁에 관심이 없어 야인으로 살고 있었으나 진짜로 싸우고자 하면 푸에고레온보다도 강하다는 숨은 강자가 그녀였다. 그녀는 마법제가 소개할 때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는지 아스타와 유노를 "신인 1위, 2위"라 부르며 그 힘이 어느 정도일지 잘 봐주겠다고 입맛을 다신다.
*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엄청 편한" 온천 합숙. 그 합숙지는 세상의 멸망이 시작된 듯한 등산로, 강마지대 중 하나인 "유르팀 화산"이었다. 화산인 주제에 등산로도 있는 걸 보면 관광객이 있긴 하나 보다. 온천이란 이름에서 억만년 정도 동떨어진 풍경을 마주하고 굳어버린 일행. 의욕을 내는건 레오나 뿐이다.
- 블랙 클로버/71화 . . . . 3회 일치
* 절망의 베토를 관통한 숙마의 검.
* 숙마의 검이 베토를 관통한다.
* 베토는 그저 무기를 빼앗기 위해 일부러 맞아준 것. 관통된 부위도 치명상을 피했다.
- 블랙 클로버/82화 . . . . 3회 일치
* 금발의 여성은 벗고 있던 남성을 두들겨 패고 "제발 알몸이 되는 습관 좀 고쳐라"라고 갈군다.
* 남성의 이름은 판젤 크루거. 흔히 젤이라 부른다. 다이아몬드 왕국에선 지휘관이었다.
* 원래 바네사는 여왕의 "완벽한 계획"과 관련된 인물이었던 모양.
- 블랙 클로버/84화 . . . . 3회 일치
여왕이 쓰는 마법은 "혈액 마법"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용할 때의 모습을 보면 혈액만이 아니라 "혈관" 자체가 생성되어 거기서 혈액이 방출되는 모습이다. 아스타의 상처에도 핏줄이 접촉하는 듯한 모습인걸 보면 본체는 이 혈관쪽이라 해도 좋을 듯. 바네사의 실 마법과 연관점일지도 모른다.
- 블랙 클로버/85화 . . . . 3회 일치
* 부관격으로 보이는 변태 같은 마도사가 있는데, 이 녀석은 파마의 힘과 미모를 칭송하며 "한 번 상대하고 싶다"고 섹드립이나 날리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마녀들을 끌고 가서 노예로 쓰겠다며 부하들을 출동시킨다. 부하들은 포박 계통의 마법으로 마녀들을 잡아간다. 어린 마녀 하나가 적에게 잡히는데 아스타가 바네사 에노테이커, 핀랄 룰러케이트, 노엘 실버와 함께 현장에 도착, 마녀를 포박한 마법을 베어버리며 구출한다. 하지만 마녀의 숲의 마녀들을 남자를 싫어해서 구해준 아스타를 할퀴고 달아나 버린다. 바네사 에노테이커는 원래 그런 나라라며 대신 사과한다.
* 노엘은 파나가 지른 불을 마법으로 끄고 바네사는 자기 고향을 망가뜨리는 다이아몬드 왕국에 적의를 드러낸다. 부관은 여러 마녀를 포획해서 성희롱을 남발하고 있는데 나름 페미니스트인 핀랄이 분노한다. 아스타는 곧바로 녀석을 향해 날려달라고 하는데 거리가 멀어서 다시 회수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아스타는 걱정말고 해달라고 하는데 바네사는 그의 실력을 믿고 날려보낸다.
* 아스타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법탄을 베어버리며 적들에게 날아간다. 이미 아스타는 절망의 베토를 쓰러뜨린 걸로 적들 사이에서 이름이 나있다. 적들이 경계하지만 아스타는 적들을 밟고 날아다니며 순식간에 쓸어버린다. 부관은 어떻게든 아스타를 저지해 보려 하지만 거침없이 달려드는 기세를 막을 수 없고 단 한 방에 박살이 나고 만다. 바네사는 그 실력을 칭찬하며 일단 저렇게 기세를 타면 막을 수 없는 아이라고 말한다.
- 블랙 클로버/94화 . . . . 3회 일치
* 소란이 정돈되자 파나를 둘러놓고 여러가지를 묻는다. 우선 파나는 최종훈련에서 마르스에게 쓰러진 이후론 기억이 거의 없다. 희미하게 나마 기억나는건 자신의 "불사조" 마법 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흥미롭게 여긴 마도학자 모리스가 마석을 부여해줬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마법의 부활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고 마력이 늘어나지도 않자 모리스는 관심을 끊는다. 파나는 다시 죽어갔으나 이번엔 낯선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를 거둬간다.
* 바람같이 나타난 아스타가 라드로스의 마법 공격을 베어버린다. 라드로스는 "상관없는 녀석은 꺼져라"고 욕하지만 아스타는 물러서지 않는다.
>이제 상관있어!
- 빅 사이언스 액션 . . . . 3회 일치
일본판 [[저스티스 리그]]라 할 수 있다. [[슈퍼 영 팀]]과도 관련이 있다.
오토바이 라이더. 불과 관련되어 있다.
[[불]] 제어, [[비행]] 등. Super Friends #8 (November 1, 1977)에 등장. [[글로벌 가디언스]]와도 관련이 있다.
- 석등보 . . . . 3회 일치
[[벌휴 이사금]]의 후손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세대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최종 관직은 아간(阿干)에 이르렀다.
== 가족 관계 ==
== 관련 항목 ==
- 성시경 . . . . 3회 일치
|관련활동 =
* 작사 : 권순관([[노리플라이]])
* 작곡 : 권순관([[노리플라이]])
- 세조 . . . . 3회 일치
재위 기간동안 민생을 돌보는 정치를 했다며 옹호하는 의견도 있으나, 그의 치세에 일어난 각종 옥사나 반란(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난 등)은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고, 또한 이러한 변란의 여파로 인해 세종 조에 개척한 북방 영토 중 일부(4군 지역)를 관리를 포기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정통성이 완벽했던 조카를 상대로 찬탈했다는 사실은 정치와 관계없던 민초들에게도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여 세조와 관계된 야사나 민담은 좋은 게 없을 정도이다.
- 소명(가수) . . . . 3회 일치
|관련활동 =
* 2004년 문화관광부 장관상 (우수예능인상)
- 송가인 . . . . 3회 일치
| 관련활동 =
* 2011년 제23회 목포 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문화관광부 장관상
- 송종익 . . . . 3회 일치
'''송종익'''(宋鍾翊, [[1887년]] [[2월 27일]] ~ [[1956년]] [[1월 7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야로 송씨|야로]], 호는 우강(友江),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56377 송종익 - 네이버]</ref>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190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국인]]의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1908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D. W. 스티븐스]]를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재판후원회 재무로 활동하였다. [[1913년]] [[흥사단]] 창단 때 경상도 대표를 지냈으며 [[1919년]]에는 흥사단 이사장과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지냈다.
[[1936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때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했고 집행부 위원 겸 재무를 맡았다. 1941년 12월에 열린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는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지만 몇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56년]] [[1월 7일]] 사망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스위스 방공호 . . . . 3회 일치
2010년대의 기록에 따르면, 스위스는 매년 1억 5천만 달러를 방공호의 유지와 관리에 지출하고 있다. 전국 방공호의 총 건설비는 1백억 달러로 추정되며, 주택용 방공호의 건설비는 개당 평균 9400달러이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자하 방공호이다. 융프라우 길목의 관광도시 루세르네 호수 옆의 소넨베르크 산에 건설되어 있다.
* 임대를 하여 비트코인 보관 네트워크 장소로 활용하는 사례.[[http://m.asiae.co.kr/view.htm?no=2013110614540503056#hi (기사)]]
- 스파이 스매셔 . . . . 3회 일치
현재의 DC코믹스 세계관에선 오래전에 은퇴해서 포셋 시에서 조용히 거주.
흑백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저스티스 리그 언리미티드]]에서도 등장했다. 단, 웨일링 장군이 나치스의 [[캡틴 나치]]에 관한 서류를 읽으면서 나오는 과거 시점에서였다.[* 과거의 일이라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인지 흑백으로 처리.]
2대 스파이 스매셔. 여성으로 정말 다양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 거만한 성격이며 임무 완수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위험한 면을 지녔다. 1대와는 관계는 불분명하나 별명과 복장은 그에게 자극받은 것으로 보인다.
- 시티락 . . . . 3회 일치
관련 캐릭터는 스테그론(Stegron)이 있다. 스테그론은 새비지 랜드에서 일을 낸 록슨(Roxxon)을 저지하려 했고, 이때 헐크와 함께 스테그론을 도운 것. 한편 스테그론의 의도를 안 [[스파이더맨]]와 새비지 랜드의 관련 캐릭터인 [[카자르]](Ka-Zar)와 [[셰나]](Shanna)도 협력했다.
마블 관련 게임에 등장. PS2, PSP인 Spider-Man: Web of Shadows에 등장했다.
- 식객 . . . . 3회 일치
중국사의 식객이란, 귀족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그 대신에 자신의 '재주'[* 학문이나 무예는 물론, '계명구도'의 일화에서 나오듯이 개나 닭 소리를 흉내내는 특이한 재주까지 있었다.]를 팔아서 주인에게 도움을 주는 '손님'을 뜻했다. 즉 공식적으로 종속 관계인 하인&고용인과 달리 상하관계가 자유로웠다. 본인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자신의 집에 찾아온 '객(손님)'이니만큼 항상 대접을 해주었던 걸로 추측된다. 본래 어느 문화권이든 사회 고위층은 '손님'을 우대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문화가 있는데 여기에서 발전하여 손님을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모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양 유력자들이 평민이나 해방노예들을 거느리고 세력을 형성하던 것과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느슨한 관계라서 주인이 실각하여 힘을 잃거나 하면 미련없이 떠나거나 다른 집에 식객으로 들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 식극의 소마/179화 . . . . 3회 일치
* 린도는 그건 시험관들이 멋대로 한 짓이지 자기들하곤 상관없다고 선을 긋는다.
* 승부 자체는 공정하게 진행될 것이며 원하면 에리나가 참관해도 괜찮다고 한다.
- 식극의 소마/182화 . . . . 3회 일치
* 쿠가는 하야마가 선발시험 때랑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라고 충고하고 "소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돌파구가 될 거라고 조언한다.
* 모처럼 십걸과 아자미가 집결. 아무래도 십걸에 공석이 생긴 것과 관련된 듯 하다.
* 그리고 재료의 본질을 파악한 후 "새로운 관점"을 추가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 식극의 소마/200화 . . . . 3회 일치
*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싸움은 에리나의 방까지 이어졌고 이게 간밤에 3 vs 3 홍백전을 치르는 이유였다. 타도코로는 쉬고 있는 에리나에게 미안하게 됐다며 그래도 동료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하자고 한다. 에리나는 거기에 동의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키리 아자미]]에게 위축되고 있는 사실에 거듭 심란해 한다. 그런 손녀의 심리를 간파한 [[나키리 센자에몬]]은 더이상 인솔자들이 개판을 치고 있으면 안 되겠어서 결단을 내린다. 몸소 심판으로 홍백전을 주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센자에몬의 진행으로 팀부터 정해진다. 죠이치로, 소마, 에리나의 사이바 팀. 도지마, 타쿠미, 타도코로의 도지마 팀. 각각 죠이치로와 도지마가 리더다. 시합 장소는 소마 부자가 대결한 열차 내의 조리실. 차장이 대결장소도 빌려줄 겸 대결을 관전한다. 시작이 치졸한 자존심 싸움이라 그런지 대결이 시작하기 전에 리더들의 신경전이 첨예하다.
* 타도코로가 거의 패닉에 빠진 사이 타쿠미는 침착하게 도지마의 조리를 관찰한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도지마에게 필요한 재료를 정확히 찾아 대령하면서 대화없이도 팀워크를 맞춰나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타도코로도 깨닫는다. 이것도 결국 평소하던 조리와 다를게 없다. 셰프의 움직임을 잘 보고 조리과정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나가면서 움직인다. 그녀는 소마와 노점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자신이 앞으로 조리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확히 맞는 역할을 찾아낸다.
- 식극의 소마/220화 . . . . 3회 일치
* 린도가 일찌감치 치고 나가자 관중석에선 메기시마에게 겁 먹었느냐고 야유를 퍼붓는다.
가령 토오츠키 학원의 축제인 "월향제"에서도 그 탐구심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매해 참가하는 연구회 중에는 "곤충식 연구회"라는 끔찍하게 매니악한 동호회도 있었다. 소마 같은 괴식 마니아 조차 "어떤 별종이 관심을 가질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이너. 그런 동호외의 단골손님이 린도였다. 그녀는 언제나 "120점포 올 클리어"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물론 곤충식도 빠질 수 없다. 하지만 그저 목표나 달성하자고 억지로 먹는게 아닌, 정말로 즐겁게 "귀뚜라미 풀코스" 같은걸 먹어치우곤 했다.
* 상대인 린도가 놀라운 호조를 보이며 좌중의 이목을 쓸어간다. 반면 메기시마는 묵묵하다고 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다. 관중석은 메기시마가 린도에게 쫄은거 아니냐고 야유를 퍼붓는다. 그때 카와시마가 무언가를 발견한다.
- 식극의 소마/221화 . . . . 3회 일치
저런 설명이 있었지만, 후배들은 여전히 알쏭달쏭해한다. 우선 저렇게 대량의 고추를 사용하면 너무 맵지 않겠냐는 것. 물론 심사의원들은 세계 최고의 미식가들인 WGO의 집행관이다. 그저 맵기만해서는 통할리가 없는데.
>너 예전부터 "승부에는 관심없다"고 했었잖아?
애초에 그 셋이 작당해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것이다. 그는 [[나키리 아자미]] 총수를 낚는 작전이 잘 됐다며 웃는다. 다음으로 연락한 멤버는 쿠가. 이쪽도 잇시키가 손을 써뒀다. 진작부터 잇시키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있던 그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이 [[미마사카 스바루]]였다. 이쪽은 잇시키와는 연관이 없었지만 소마에게 개인적인 빚이 있다고 승락한다. 전화를 받은 시점부터 바로 십걸 타도를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개시.
- 식극의 소마/224화 . . . . 3회 일치
* 미마사카가 쿠가를 도운건 사이토가 레시피를 고안하고 조리에 들어가는 때를 기다리는 동안을 이용한 것. 따라서 미마사카의 전술상 아무 상관도 없다.
마침내 사이토의 솜씨가 펼쳐진다. 거대한 참치를 한 번의 기합으로 잘라나가는 사이토. 힘과 기술을 겸비한 솜씨다. 그런데 관중들이 사이토의 솜씨에 눈을 빼앗긴 사이, 어느 새 미마사카 또한 참치 손질을 하고 있다. 그 진도는 사이토와 정확하게 같다. 사이토가 미심쩍인 구석을 감지하지만 그보다는 일단 조리가 먼저다. 이번엔 작은 칼로 바꿔들고 다시 한 번 기합을 넣는데, 그때 미마사카의 눈이 번뜩인다.
* 센트럴편인 관중들은 쿠가가 비겁하게 나왔다고 욕한다. 그는 츠카사와 일 대 일로 붙고 싶던게 아니냐는 것.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쿠가는 마이웨이. 오히려 자신은 어른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자존심은 세우지 않는다고 응수한다. 자신의 바람이 어떻든, 지금은 반역자 팀을 대표해 싸우고 있는 입장. 그의 뒤에는 후배들이, 동료들이 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다.
- 식극의 소마/226화 . . . . 3회 일치
* 시식은 아직 관건인 마지막 한 점까지 진행되지 않은 가운데, 다른 조리대의 요리들도 속속 완성, 심사위원들이 한꺼번에 모든 음식을 맛봐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 [[사이토 소메이]]가 완성한 "참치 십관 홍옥알 스시". 한 입 사이즈인 작은 크기에 참치의 각 부위를 이용한 열 조각의 초밥이다. 이스트와르는 교토 오이란들이 화장이 상하지 않게 먹을 수 있게 만든 작은 초밥에서 발전한 것 같다고 평한다. 그 말대로 오이란의 치장용품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작고 아름다운 초밥.
* 아직도 술이 덜 깬 [[안(식극의 소마)|안]]은 다들 한 꺼번에 달려들었으니 시식도 한 꺼번에 여섯 종류를 다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황당한 소리 같았지만 이스트와르는 안이라면 그렇게 해도 충분히 심사가 가능하며, WGO 심사관인 자신들도 마찬가지라고 자신한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2nd BOUT의 최종 심사. 과연 승부는 어떻게 갈릴 것인가?
- 식극의 소마/227화 . . . . 3회 일치
* 샤름은 메기시마의 초밥을 먹기 전부터 상당히 만족스러워 보인다. 불로 구운 초밥이 그의 취향을 정확히 저격. 메기시마의 라멘은 겉으로는 고추라는 주제를 어떻게 살린 건지 알기 어렵다. 이스트와르는 별첨된 빨간 테이스트가 고추 요소가 아닌지 짐작하며 신중하게 관찰한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짐작이 가능한 둘의 요리와 달리 쿠가의 요리는 문자 그대로 미지수. 앤은 취중에도 그 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중화 냄비로 튀기고 볶은 고기를 다시 훈재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그 맛이나 주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했는지는 먹어보지 않으면 전혀 예측이 불가능. 이제 이걸로 플레이팅에 대한 평가는 정리가 됐다.
* 반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호평 행진. 이제 관건은 안이 담당한 쿠가의 탕수육이었다. 시식 전에 안이 내키지 않아했던 인상이 마음에 걸리는데.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절정에 도달한 안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런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안은 그렇게 주장했다. 좌우간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격찬이었다. 그건 말하자면 "흑초 탕수육"이었다. 흑초 소스가 발라져 장식물처럼 반짝이는 탕수육. 그걸 먹는 순간 숨겨져 있던 녹차의 강렬한 향이 시야를 신록으로 물들이는 극상의 맛. 관건은 흑초 소스다. 발사믹 소스에 미마사카가 준 훈제 간장을 함께 졸여 향을 극대화했다. 쿠가는 기존 탕수육의 틀을 철저히 파괴하고 돼지고기 특유의 텁텁한 뒷막과 기름기를 신맛과 감칠맛으로 잡았다. 그 자리를 녹차의 향으로 채우면서 돋보이게 만들어 단연 요리의 주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 식극의 소마/228화 . . . . 3회 일치
* 그야말로 압도적. 반역자들은 센트럴의 힘을, 십걸 상위 멤버의 힘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rd Bout 이후 침체돼 있던 관중들과 [[카와시마 우라라]]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카와시마가 그만한 전력을 보내놓고 전멸 당했다며 꼴좋다고 조롱했으나 에리아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건 관둘게.
* [[잇시키 사토시]]는 냉정하게 승부를 관망하는 에리나를 보고 대장으로 풍격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흐뭇해했다. 한편 결국엔 지고 만 쿠가는 돌아오자 마자 벌렁 드러누워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에리나가 충분히 공헌했다고 말해줘도 "위로는 됐다"며 생떼를 부렸다. 결국 투정을 감당하는건 소마의 몫이었다. 어깨를 주무르라는 둥, 땀을 닦으라는 둥, 차를 내오라는 둥 실컷 소마를 부려먹고 나서야 조금 잠잠해졌다. 하지만 소마가 기껏 차라고 가져온게 츠카사가 우려놓은 거여서 다시 발끈. 한동안 그 차를 들여다 보던 쿠가는 냉큼 들이켜 버렸다. 그는 츠카사가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말하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그의 목적은 거의 완수된 거나 다름 없었다. 츠카사에게 자신을 각인시킨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말이다. 쿠가는 츠카사의 곤란한 표정을 본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오늘에 한해서는.
- 식극의 소마/234화 . . . . 3회 일치
* 에이잔이 그렇게 장담한 이유는 자신의 크림소스 때문이다. 에이잔은 모든 공정을 끝낸 뒤, 방금 전 시점에 한 가지 재료를 추가했다. 아티초크. 특별할건 없는 재료다. 여기에 에이잔이 설명을 더한다. 그가 노린 것은 아티초크에 들어있는 "시나린". 쓴맛을 내는 성분인데 사람의 미각을 저하해 맛을 착각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아티초크를 먹은 뒤에 다른 음식을 먹으면 정상보다 훨씬 달게 느껴진다. 관중들 중에선 정말 그런지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키리 아리스]]는 틀림없는 사실이라 단언한다. 실제로 아티초크를 디저트 전에 내서 디저트의 단맛을 극대화하는 기법은 많은 레스토랑에서 쓰고 있다.
지난 회에 가지러 간다던 식재료는 아티초크. 타쿠미가 단맛이 강한 피자를 만들 걸로 예상하고 미각을 조작하는 식재료를 고르러 간 것이다. 아티초크의 시나린 성분이 미각을 조작해 단맛을 더욱 달게 느끼게 하므로, 자신이 요리를 먼저 먹인다면 타쿠미의 피자맛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반역자들은 당연히 비겁하고 자존심도 없다고 극딜하는데 어차피 이기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놈이라 노데미지. 어쩐지 심사의원 안도 그래도 상관없다고 허락해줘서 완전히 기세등등하다. 자신잇게 화이트 소스가 들어간 로스트비프를 내놓고 승리를 자신한다.
한동안 반역자팀에게 유리한 듯한 상황을 조성해줬는데 에이잔이 대놓고 함정을 팠다고 선언하는데도 문제될 게 없다고 판정한다. 판정기준은 완성된 요리와 자신들의 미각 뿐이므로, 그 조건 안에서 어떤 전술을 펼치든 상관없다는 것. 요시노 유키가 반발했을 때 이렇게 말하는데 표정이 얼음마녀같다.
- 식극의 소마/236화 . . . . 3회 일치
* 쇠고기 시구레니가 메인인 [[타쿠미 알디니]]의 피자. 그런데 그건 반만 맞는 표현이었다. 피자의 절반은 시구레니가 듬뿍 올라가 있지만 나머지 반쪽은 치즈 온리. 즉 치즈와 쇠고기 시구레니 하프 앤 하프 피자였다. [[에이잔 에츠야]]도 이런 부분은 의외였던 모양이지만 심드렁하다. 과연 이것만으로 타쿠미가 공언한 대로 시나린 성분과 상관없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걸까?
타쿠미의 계산은 이랬다. 에이잔이 상대의 음식맛을 방해하는 요리를 하는건 필연. 그렇다면 어떤 재료를 선택할 것인가? 우선 그는 자신이 쇠고기 시구레니를 들고 나오면 반드시 단맛에 장난을 칠거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지금 재료창고엔 어떤 재료가 있는가? 단맛을 방해하는 식재료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다른 대결에 영향을 주지 않고 단기간에 쓰일 재료는 아티초크 뿐이었다. 가령 미라클 후르츠도 단맛에 영향을 주지만 지속시간이 몇 시간에 달해 다른 십걸의 요리까지 방해할 것이 뻔하다. 고로 선택지는 처음부터 아티초크 하나 뿐. 타쿠미는 이같은 결론은 에이잔을 유심히 관찰해 "트레이스"한 결과라고 말한다. 결국 트레이스대로 움직여준 에이잔이야 말로 타쿠미의 "노림수"에 걸린셈.
* 에이잔은 그같은 설명을 헛소리로 일축하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하나같이 의미심장한 장면들 뿐이다. 가령 자재창고에서 마주쳤을 때, 타쿠미가 노려보고 있다, 복수심을 불사르고 있다고 생각했던건 실제로는 그를 면밀히 관찰하는 모습이었다. 그게 3rd ABOUT이 시작된 내내 계속됐다. 그는 타쿠미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기 요리에 정신이 팔려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타쿠미는 에이잔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자신의 유도에 따라오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 신적강하 . . . . 3회 일치
이와는 극적으로 대조적인 사례가 [[명나라]]이다. 명나라의 경우는 황족에 대한 대우가 비교적 후하고 황족을 정리해고하는 제도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약 200여년간 황족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낳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 재정으로 후한 복지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 결과 너무 많이 불어난 황족들 탓에 말기에는 재정 압박이 상당히 심해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 황족들은 거의 다 복지제도에만 의존하고, 반란을 명나라에서는 의도적으로 황족의 관직 진출 등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니트족]]으로 살고 있어 사회 문제가 심각했는데 명나라는 법률적으로 이들에 대한 혜택을 줄이기도 어려웠다.
물론 일본과 명나라와는 시대적 차이, 관습적 차이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서 명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섬나라라서 대외 침략의 위험이 적었고, 일본 황족은 관습적으로 친족 내의 근친혼이 권장되었기 때문에 근친결혼으로 황족의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를 약간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황족 문제에 대처가 거의 없으면 고작 200년 만에 국가 재정이 파멸적인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아동관 . . . . 3회 일치
아동관은 실내형 놀이시설로서, 놀이를 통하여 심신을 건강하게 하고 놀이를 통한 교육을 실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48년 부터 아동복지법 40조에 따라서, 법률로서 정의되어 있다. 1951년에 아동후생시설 운영요령이 [[후생성]] 아동국에서 편찬되었으며, 1963년에 시립아동관에 대하여 국고보조제도가 창설되었다. 2010년 시점에서 4,300여개의 아동관이 일본 전국에 존재한다.
- 아웃 오브 안중 . . . . 3회 일치
'관심이 없다'는 뜻의 신조어. 보통 줄여서 아오안이라고 부른다.
안중은 눈 안, 혹은 관심이나 의식의 범위 내에 있다는 뜻이다. [[무관심]]을 뜻하는 말로 '안중에 없다'는 말이 본래 있었는데, 이것을 [[영어]]로 '벗어나 있다'는 뜻인 'Out of-'를 붙여서 강조한 것이다.
- 안영준 . . . . 3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농구 관련 인물(한국), top2=동명이인/ㅎ)]
드래프티 동기인 허훈과 양홍석도 소속팀 kt에서 활약 중이고 안영준은 팀 성적에서, 허훈은 개인 성적에서 상대방보다 앞서 있었기에 신인왕에 어느 선수가 적합한지 여러 의견이 오가는 중 뜬금없이 3월 9일 [[유재학]] 감독이 기자들의 신인왕 관련 질문에“자질만 놓고 보면 양홍석이 안영준보다 훨씬 낫다”, “양홍석은 국가대표가 될 수 있지만, 안영준은 지금처럼 하면 국가대표에 뽑히기 힘들다. 가지고 있는 기본 자질이 다르다”라고 평가한 보도가 나왔다. [[http://www.basket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063|기사]] 유재학 감독이 국가대표 선발 주무 부처라고 할 수 있는 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선수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순 있겠지만 동시에 4강 플레이오프 직행을 두고 경쟁하던 팀의 감독이니만큼 언론에 대고 한 본 발언이 적절한지에 대해선 설왕설래가 있었다.
SK나이츠가 18년만에 우승하면서 신인왕+챔피언결정전 우승에 성공한 역대 6번째 선수가 되었다. 소속팀이 워낙 오랫동안 무관으로 고생했던지라 너는 축복받은 선수다라고 선배들이 말하는 듯. 안영준 본인도 대학 우승 이후 곧바로 프로에서 우승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SK 나이츠 국내 선수들 중에서 챔피언결정전 평균출장시간이 28.1분으로 팀내 최장출장시간을 기록했다. 첫 시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활약. 신인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면서 성장시키는 스타일의 문경은 감독 체제하에서 발전이 기대되는 선수다.
- 애로우 . . . . 3회 일치
배우는 [[슈퍼맨 리턴즈]]에서 슈퍼맨 역할을 맡았던 브래던 라우스.--슈퍼맨에서 아톰으로 강등.--[* 배우 개그로, 플래시에서 크로스오버 출연 했을 때, 날아다니는 아톰을 보면서 "새인가? 비행기인가?"하는 슈퍼맨 패러디 대사가 나온다. 슈퍼걸이 애로우버스에 끼어들고 그쪽 슈퍼맨도 같은 세계관에 들어오게 되면서 뭔가 난처해졌다(…).] 스스로 개발한 아톰 아머를 입고 다니며, 상당히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아톰 아머는 이후 확대, 축소 기능도 얻는다.
퀸 코퍼레이션을 인수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팔머 테크의 사장. 뛰어난 과학기술력을 자랑하는 천재 미남 사업가. 가볍고 밝으며 허당스러운 성격이다. 3시즌에서 팰리시티를 사이에 두고 올리버와 삼각관계를 연출하지만, 이미 올리버는 팰리시티에게 마음이 있어서 성공하지 못한다. 라스 알 굴의 음모 때문에 애로우를 살인자라고 생각하여 적대시 하며, 자신이 개발한 아톰 아머를 입고 애로우와 대결하지만 팰리시티의 설득으로 올리버가 누명을 썻다는 것을 알게 되고, 팀 애로우에 합류하여 아톰으로서 올리버를 돕게 된다. 팰리시티와 잠시 연인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팰리시티는 올리버와 맺어지게 되면서 차인다.
- 어쌔신 크리드 III . . . . 3회 일치
* 몬머스 - 항만관리소가 있다.
검과 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 수배레벨이 3이 되면 코너를 찾아 다닌다. 말 탄채로 나타나기도 한다. 평타를 막으며 카운터도 막는다. 방어파쇄도 막는다. 요새의 지휘관은 모두 얘네들이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어쌔신 크리드 III/아이템/대번포트 농지 . . . . 3회 일치
게임 [[어쌔신 크리드 III]]에 나오는 대번포트 농지와 관련된 아이템에 관한 페이지.
몬머스 항만관리소장 앞 상자에서 설계도 획득 가능. 빅 데이브 레벨2 부터 제작 가능. 특수 철괴.
- 에이스 컴뱃 제로 : 더 벨칸 워 . . . . 3회 일치
임무를 플레이 할 때, 노란색으로 표시된 타겟을 볼 수 있다. 이 타겟들은 중립 타겟이다. 전투 능력을 상실하고 도망가는 적기, 적이 보급품을 보관한 창고 등이 중립 타겟으로 표시된다.
벨카 전쟁이 끝난 후, 벨카 전쟁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던 기자 브랫 톰슨은 "마왕"이라고 불리던 용병을 알게된다. "마왕"에 대해 관심이 생긴 톰슨은 벨카 전쟁에 참전했던 에이스들을 찾아가 "마왕"에 대해 취재한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연하장 . . . . 3회 일치
조선시대에는 ‘세함(歲銜)’이라고 하여, 신년 초에 직접 찾아가 인사하지 못하면 아랫사람을 시켜서 서찰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관아에 속한 장교나 병졸은 자기 이름을 적은 쪽지를 상관의 집으로 찾아가서 세합장에 넣었다.--셀프 우편배달-- 양반 집안 여인들은 바깥 출입이 어려워, 친지에게 덕담을 담은 글을 써서 여종을 시켜 배달하게 했는데, 이를 문안비(問安婢)라고 불렀다.
우편제도가 등장하자 우정국에서 연하장을 발매하게 되었다. 최초의 연하장은 1900년에 발매되었으며, 전통의상을 걸친 우정국 관리들의 모습을 컬러 인쇄하고, '신년을 맞이하여 한국 황실과 우정국의 임직원들은 여러분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염재욱 . . . . 3회 일치
* [[2003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꽃 다만 때늦은 사랑에 관하여》
* 중근 홍보광고촬영-안중근 기념관 상영(남산)-안중근역
* [[1999년]] sifac 패션페스티발 솔로공연-잠실체육관-
- 오세정 (교수) . . . . 3회 일치
| 본관 = [[해주 오씨|해주]]<ref>{{웹 인용|제목=오세정 인물정보|url=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2017|웹사이트=조선일보}}</ref>
* 2008.05 ~ 2009.05 교육과학기술부 세계적 연구중심대학 사업 총괄관리위원장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해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동문]][[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물리학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김대중]][[분류:노무현]][[분류:문재인]][[분류:국민의당 당원]][[분류:바른미래당 당원]][[분류:안철수]][[분류:박지원 (1942년)]][[분류:이회창]]
- 오승근 (1908년) . . . . 3회 일치
[[한성부]]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주오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법원 사법관시보를 거쳐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어 근무했다.
[[분류:1908년 태어남]][[분류:2002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주오 대학 동문]][[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
- 오창경 . . . . 3회 일치
* 《[[범죄의 여왕]]》 (2016년) - 관리소장 박세주 역
* 《열대병》 (2007년) - 부사관 역
* 《[[그림자 (영화)|그림자]]》 (2007년) - 부관 역
- 오철환 . . . . 3회 일치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6대 | [[지방 관청|시의원]] | [[대구광역시의회|대구광역시(수성구제2선거구)]] | 한나라당 | 21,949 표| 44.28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 대구광역시|초선]], 민선 5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7대 | [[지방 관청|시의원]] | [[대구광역시의회|대구광역시(수성구제2선거구)]] | 새누리당| 38,484 표| 64.96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 대구광역시|재선]], 민선 6기 }}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8대 | [[지방 관청|시의원]] | [[대구광역시의회|대구광역시(수성구제2선거구)]] | 자유한국당| 31,112 표| 49.93 | 2위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 대구광역시#광역의원|낙선]] | }}
- 요괴:냉장고 . . . . 3회 일치
그래도 냉장고에 관해서는 엄마 잔소리가 옳았어요. 그러니까, 엄마는 꼭 그런 이유였다고는 지금도 그때도 인정한 적이 없어요. 엄마도 좀 미신 같은걸 잘 믿는 편이거든요.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돈벼락 맞는 꿈 얘기를 딴 사람한테 하면 행운이 날아가 버린다고 믿는 사람들. 횡재하는 꿈은 아니지만 우리한테 하는 그 잔소리의 진짜 이유를 밝혀 버리면 액땜이 날아가 버린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엄마의 잔소리... 아니 경고와 그 사건이 연관된 거라고 생각하는건 순전히 추측이에요. 아주 신빙성 높은 추측.
얘기를 좀 바꿔야겠는데, 나는 첫남친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생겼어요. 이거 우리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엠바고에요 엠바고. 내가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었어요. 남친이래 봐야 둘이서 자전거타고 공원까지 갔다 돌아오는 사이 정도였죠.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니까 만든 거지 그 이상 관심은 없었어요. 오히려 진지하게 나온건 그쪽이었죠. 점심시간에 부르더니 그러더군요. "오늘 우리 집에 엄마아빠 없어"라고요.
- 요괴:선풍기 . . . . 3회 일치
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죠. 그 여관방에서만 세 명이 죽어나갔습니다. 하나같이 밀실이었고 CCTV를 아무리 돌려봐도 누가 침입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딱 하나 수상한 점이 있다면 방에 있는 창문이 고장나서 열리지 않았다는 거 뿐인데, 그야 그렇게 낡은 여관이니까 수상하다고 할 것도 못 되죠.
우리는 한달 동안 그 방을 샅샅히 뒤졌습니다. 아마도 그 여관을 설계한 사람보다 우리가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겁니다. 물론 그게 설계도라는게 존재하기나 할때 얘기겠지만. 뜯을 수 있는 거면 장판부터 벽지, 못자국 막은 스티커 하나까지 다 뜯어 봤어요. 할 수 있었으면 틱틱대는 주인양반 머리통도 뜯어버렸을 겁니다. 그 빌어먹을 요강 속에 든게 우동사린지 확인해 봐야죠.
- 우라 게시판 . . . . 3회 일치
일본 인터넷에서 학교 등 특정 단체에 공식적으로 관리되지 않는 사이트로서, 그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게시판. 익명 게시판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주로 학교 같은 것에서 만들어지고 학생들에게 관리가 된다. 때때로 개인정보 유출, 온라인을 통한 집단괴롭힘 같은 문제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 원피스/840화 . . . . 3회 일치
* 형제들은 상디가 죽었다는데도 슬퍼하지도 않고 "어찌돼도 상관없다"고 웃고 있다.
* 제르마의 과학기술 때문에 베가펑크와 연관성이 점쳐지고 있었는데 사실로 드러났다.
* 밀집모자 일당도 베가펑크와 연관된 인물이 있는데 프랑키. 그러나 정작 프랑키는 다른 루트로 갔다.
- 원피스/848화 . . . . 3회 일치
"옥갑"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있는데 고대병기와 연관됐거나 D의 일족과 관련있다는 설이 많다. 하지만 옛날부터 일본에서 "용궁에서 받아온 옥갑"은 우라시마 타로 이야기에 나오는 "나이를 먹게 하는 옥갑"으로 통했다. 그것과 관련된 아이템일지도?
- 원피스/860화 . . . . 3회 일치
그렇다 해도 징베는 빅맘의 산하를 떠나는 것 자체는 "인의"로서 대가를 지불하려고 했다. 그러나 빅맘이 요구한 대가는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포기했다. "룰렛"에 적혔던 것은 "징베와 함께 산제물이 될 동료의 수"였다. 징베는 자신에게 가해질 제재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지만 무관한 동료들까지 희생해야 한다는 데서 말도 안 되는 불합리라고 느꼈다.
무엇을 전달받았는지, 지그라는 그 말을 끝내지 못한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미간을 관통했다. 쓰러지는 지그라가 손에서 총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관통한 것은 총알이 아니라, 젤리빈즈였다.
- 원피스/863화 . . . . 3회 일치
* 작전 개시로부터 세 시간 반 전. 그러니까 일행이 아직 [[카포네 갱 벳지]]의 아지트에 있을 때의 일이다. [[몽키 D. 루피]] 자신이 자신하던 [[원피스/859화|재미있는 등장법]]을 벳지에게 설명한다. 그는 웨딩 케이크 안에 커다란 거울을 넣어뒀다가 거울 세계를 통해 케이크 안에서 튀어나오는 연출을 구상했던 것이다. 벳지는 당장 좋다 아니다 말은 안 하지만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지 거절하지도 않는다. 그 자리엔 [[샬롯 브륄레]]도 있었는데, 빅맘 [[샬롯 링링]]이 케이크가 박살나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기 때문에 절대해선 안 된다고 성화를 부린다. 하지만 루피는 브륄레가 하는 말 보다는 그녀의 능력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근처 숲에서 동물들을 잔뜩 잡아온 다음, 유혹의 숲에서 한 것처럼 자기 모습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한다. 브륄레는 당연히 질색하지만 결과적으론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는데.
* 빅맘의 자식들은 죽은 줄 알았던 루피가 최악의 형태로 재등장하자 갈피를 잡지 못한다. [[샬롯 스무디]]는 죄수 도서관에서 죽은게 아니었냐고 경악하고 [[샬롯 몬도르]]도 역시 [[샬롯 오페라]]가 거짓말을 했던 거라고 이를 간다. 그러나 이들의 분노는 빅맘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루피의 등장도 열 뻗힐 일이지만 웨딩 케이크가 무너진 것은 최악의 사태다. 거의 마더 카르멜의 사진에 이변이 생겼을 때처럼 평정을 잃는다. [[슈트로이젠]]은 빅맘이 정신을 잃을까 우려해서 진정시키려 하지만 부하 요리사들은 오히려 그가 피해야 할 때라고 간청한다. 아니나 다를까, 빅맘은 성미를 참지 못하고 근처 요리사들에게 "당장 새 웨딩 케이크를 가져와라"고 억지를 쓴다. 그런게 될리가 없다. 그러자 그녀는 "라이프 오어 웨딩 케이크?"라는 질문을 내뱉는다. 그러자 하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하고 모간즈가 특종이라며 환호한다.
* 요리사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한 빅맘은 곧 사건의 주모자 루피를 찾아 눈을 번뜩인다. 하지만 그와 전보 벌레로 통화한 적은 있어도 얼굴을 보진 못했다. 죄수 도서관에서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그가 말했다.
- 원피스/866화 . . . . 3회 일치
* 엘바프 마을의 어른인 "폭포수염 [[요를]]"와 "산수염 [[야를루]]"는 본래 링링과 양의 집 아이들을 관대하게 지원해주었으나, 링링의 난동에 분노한다.
* 링링이 양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설립한지 37년 째가 되던 해였다. 이때 마더 카르멜의 나이는 80세. 카르멜은 링링을 받아들이며 "부모님은 곧 오실테니 여기서 함께 기다리자"고 안심시킨다. 양의 집에 사는 아이들도 그녀를 반갑게 맞이한다. 마더 카르멜이 공약했던 대로 이곳엔 다양다종한 종족의 고아들이 모여있었다. 신분과 처지도 그랬는데 카르멜을 안고 있는 왕관을 쓴 아이는 어느 나라의 왕족이지만 폭동으로 내몰려 여기까지 흘러왔다. 선글라스를 낀 뚱뚱한 아이는 부모가 빈곤한 나머지 노예로 팔려갈 뻔했던 과거가 있다. 이외에도 부모 손으로 벅차다 여겨졌던 문제아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도 링링의 괴력은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카르멜은 링링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길렀다. 링링은 항상 의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 특유의 경솔함과 괴력 때문에 사고를 일으켰다. 거인족 아이 에일리에게 모기가 붙어서 잡아주려가 골절을 시키기도 했고, 수장족 아이는 관절이 너무 많아 보인다며 뽑아주려 들거나, 어인족 아이인걸 모르고 지느러미가 붙은걸 제거해주려고 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카르멜은 꾸짖고 타일러 가르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는 링링이 나쁜 뜻이 없고 남을 배려하다가 그렇게 된 거라 설득했다.
- 원피스/870화 . . . . 3회 일치
>네놈들 따위 처음부터 어찌되건 상관없었어...
* 이윽고 저지는 돌아서며 알겠다고 대답한다.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이스트 블루"의 발라티에도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이로써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됐다. 레이쥬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말을 얻었는지 작게 미소짓는다. 그러는 동안 탈출방법에 대한 논쟁은 답도 없이 치열해졌다. 무조건 성공확률 0%라고 주장하는 시저, 어차피 이대로도 죽는다는 벳지의 의견이 평행선이었다.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저지. 그는 제르마가 호위가 될 테니 작전을 실행하자고 한다. 시저는 왜 너희 맘대로 하냐고 반발하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벳지는 듣고 보니 제르마도 하늘을 날 수 있었다며, 다만 그럴 경우 제르마를 두고 가게 될 텐데 괜찮겠냐고 반문한다.
>상관없다.
- 원피스/871화 . . . . 3회 일치
* 루 펠드를 저격한 것은 환락가의 여왕 스튜시. 그녀의 진짜 정체는 스튜시의 진짜 정체는 세계정부의 첩보기관 "사이퍼 폴 이지스 제로"의 요원.
* 옥갑을 빼돌리려고 했던 루 펠드는 난감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성 밑으로 옥갑을 떨어뜨려 버린 것. 다행히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옥상 바로 밑의 넓은 지붕 부분. 그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루 펠드는 저걸 어찌해야 좋을까 고민한다. 뛰어내려야 좋을까? 그 고민은 환락가의 여왕 스튜시가 해결해준다. 그녀가 불쑥 튀어나오자 당황한 루 펠드가 중심을 잃고 난간 너머로 떨어진다. 그도 마침 지붕 부분으로, 딱 옥갑 앞에 떨어진다. 루 펠드가 잘 됐다치고 옥갑을 열어보려 하는데, 어디선가 저격이 날아온다. 탄환없는 총, "지건"이다.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스튜시. 그녀가 범인이다. 환락가의 여왕은 표면 상의 얼굴. 진짜 정체는 세계정부 첩보기관 "사이퍼 폴 이지스 제로"의 요원. "날으는 지건"이란 기술로 루 펠드를 조용히 처리했다. 그녀의 목적, 아니 세계정부의 목적도 옥갑이었다. 그녀는 옥갑을 빼돌리고 그 죄를 루펠드에게 뒤집어 씌울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
* 빅맘과 전면전은 계획에 없던 일. 그러나 레이쥬가 당할 것 같자 상디와 루피가 앞뒤 없이 뛰쳐나갔다. 그걸로 레이쥬를 구했으니 다시 퇴각 대열에 합류해야 할 일. 그러나 깔끔하게 돌아선 상디와 달리 루피는 돌아가려 하질 않아 억지로 끌고 가고 있다. 빅맘의 도발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인섬 때와 죄수도서관 때의 일을 운운하며 "너를 날려주마! 마지막에 이기는 건 우리다!"고 떠든 주제에 도망치는 거냐며 "겁쟁이"라고 조롱했다. 상디가 저런 뻔한 도발에 응하지 말라고 타이름 반, 꾸짖음 반으로 설득했지만 루피는 성미를 누르지 못하고 상디의 손을 뿌리친다. 그리고 "한 방만!"이라 약속하고 빅맘에게 달려든다.
- 원피스/879화 . . . . 3회 일치
[[몽키 D. 루피]]를 완전히 가지고 노는 중. 부하들이 일기토를 구경하는 중인데 "삼장성 최강은 카타쿠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루피가 손도 발도 못 써보고 발리는 중. 루피가 사용하는 기술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더 강하게 어레인지해서 되돌려주고 있다. 자기입으로 "고무가 되는게 내가 안 될릭 없다"고 주장 중. 루피가 레드호크 개틀링을 쓰면 자신은 팔을 늘려서 천수관음같은 모습으로 막아내고 그 많은 팔로 러쉬를 가해 되갚아주는 식으로 싸우고 있다. 견문색 패기로 루피의 움직임을 완전히 읽고 있어서 루피가 "체"로 모습을 감춰도 전혀 소용이 없다. 결국 루피의 필살기격인 엘리펀트 건까지 더 크고 아름답게 배껴서 밟아버린다.
아직도 쇼콜라 타운으로 가는 중. [[샬롯 푸딩]]하고 관계가 완전히 역전돼서 상디는 평범하게 대하는게 푸딩이 전전긍긍한다. 가정 도중 [[샬롯 시폰]]이 원래 [[샬롯 로라]]가 초콜릿 대신이었고 푸딩이 후임이지만, 푸딩이 거부해서 초콜릿 대신 자리는 비어있다는 설명을 듣는다. 그래서 스릴러 바크에서 로라가 뛰어난 초콜릿 만들기 실력을 보였던걸 납득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겨우 쇼콜라 타운에 도착. 작업을 시작한다.
정상 결전이래 오랜만에 상하관계 드립이 나왔다. 카타쿠리가 모치모치 열매가 루피의 고무고무 열매의 상위호환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루피가 쓰는 기술은 대부분 카타쿠리가 쓸 수 있었다. 심지어 루피의 무장색 패기 기술도 똑같이 구사하는데 카타쿠리는 견문색만이 아니라 무장색 또한 루피 이상으로 구사하는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 월드 인 컨플릭트 . . . . 3회 일치
* 1단계: 기관총 진지가 설치된다.
파커와 배넌, 웹이 소속된 대대의 지휘관. 계급은 대령. 유럽 전선에서 파커, 배넌과 함께 복무했다. 파커를 우수한 장교로 여기는 반면 배넌을 못마땅해 한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위안부 소녀상 망치 테러 사건 . . . . 3회 일치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위안부 소녀상]])을 30대 여성이 [[망치]]로 내리친 사건.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 소녀상 철거 반대! 대학생행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협상결과를 반대하고 특히 소녀상 철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2015년 12월30일부터 소녀상을 경비하고 있었다.
* 일본 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은 상징성이 강하여, 과거에도 테러 목표가 된 적이 있다. 2012년 6월, 극우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가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적은 말뚝을 소녀상에 묶는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
- 위의공 . . . . 3회 일치
춘추시대 위(衛) 나라의 군주. [[학]](鶴) 애호가로서, 학을 총애하여 학에게 관직을 주는 등 기행을 벌였다. 정치가 혼란된 결과 나라가 쇠퇴하여, 적(狄) 족의 공격을 받고 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적족과의 싸움에 나서 전장에서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갈갈히 찢겨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간(肝)'[* 고대의 간은 간장, 심장 등을 가리킨다.]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공자]]가 [[관중]]을 높이 평가한 배경도 알 수 있게 된다. 위의공의 처참한 죽음은 다른 나라에도 닥쳐올 수 있는 것이고, 관중이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패자의 시대를 열지 않았다면 중화 문명 자체가 이민족의 공격으로 크게 쇠퇴하였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유로달러 . . . . 3회 일치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관할 밖의 구역에서 거래되는 [[미국 달러]]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유럽]]에서 거래가 활발하여, 유로달러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1986년, [[영국]]은 금융빅뱅(Big Bang)이라 불리는 대규모 금융개방정책을 실시했으며 달러 시장의 중심지가 된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자산동결을 우려하여 서유럽에 달러 자산을 보관하였다. 이를 '유로뱅크'라고 한다. 이렇게 유로달러의 기세가 강해지자 미국은 자본시장의 주도권을 찾기 위하여 뉴욕의 국제금융시장을 강화하였다.
* 유로컬런시라고 하지만 정작 유로화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 유지태 . . . . 3회 일치
2003년 [[단편 영화]]《자전거 소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었고 그해 부산아시아 단편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음으로써 영화 감독으로 재능을 발휘했다. 2005년《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2008년《나도 모르게》, 2009년《초대》의 단편 영화를 발표했고, 네 번째 단편 영화《초대》는 2009년 7월, 제5회 인디판다 국제 단편 영화제와 제8회 제주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ref>{{뉴스 인용|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819001036&subctg1=15&subctg2=00|제목=유지태, 네 번째 작품 제주영화제 출품|성=|이름=스포츠월드 황인성 기자|날짜=2009-08-19|출판사=세계일보|확인날짜=2010-04-17}}</ref><ref>{{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907300038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819001036&subctg1=15&subctg2=00|제목=감독 유지태, 인디판다 국제단편영화제 4연속 초대|성=|이름=OSEN 조경이 기자|날짜=2009-07-30|출판사=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OSEN|확인날짜=2010-04-17}}</ref>
*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2018)
| 관객상
- 유태웅(탤런트) . . . . 3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2006년]] || [[공필두]] || 강 수사관 || ||
|| [[2013년]] || [[야관문: 욕망의 꽃]] || 오 기자 || ||
- 윤다훈 . . . . 3회 일치
||<#40E0D0> '''{{{#ffffff 본관}}}''' ||<(> [[남(성씨)|의령 남씨]][* 25세손 '우(祐)'자 항렬] ||
* 1999년 KBS 신 TV문학관 - 아우와의 만남
* 1995년 KBS2 [[가족오락관]]
- 윤용현(1969) . . . . 3회 일치
주로 파워풀한 배역을 자주 맡는 편이다. 야인시대의 신영균이라든지, 대조영에서 계필사문이라든지, 천추태후에서의 야율적로라든지, 자이언트에서 고재춘이라든지, 제5공화국에서 고문을 잔인하게 하는 준사관이라든지.
* SBS [[야인시대]](2002) - '''[[신영균(깡패)#s-2|신영균]]'''[* 야인시대 관련 합성물에서 신영균 자체는 출연비중이 많진 않지만, 그가 했던 [[폭☆8|어떤 장면]]은 합성물에서 엄청나게 사용되고 있다(....)]
단 제5공화국 작중에서는, 신동기라는 이름이나 언급은 없다. 다만 실제로 [[10.26 사건]] 당시에 [[김재규]]를 수사한 사람이 신동기 준위라는 기록이 있으며, [[드라마]] 내에서는 수사관이라는 직책에 맞게 보안사, 안기부 등에서 전두환 일당의 공작이나 정책 등의 실무자로 나오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 윤주희(배우) . . . . 3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대전광역시/인물)]
당시에 최고의 배우들이 머물던 [[싸이더스HQ]]에 소속되어 배우 연습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채널V, M-net등에서 방송활동을 하며 착실히 연기수업을 하던중[* 배우 연습생 윤주희 씨에 관한 취재를 했던 [[씨네21]]의 당시기사.[[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7186|기사]]], [[싸이더스HQ]]의 간판 [[김선아]]가 영화 [[목요일의 아이]]에 캐스팅되었고 같은 소속사 배우로서 함께 촬영에 참여했으나, 영화촬영이 중반에 엎어지는 바람에 모든 촬영분을 들어내야 하기도 했다.
|| 2007년 || 두번째 사랑 || 지하[* [[하정우]]의 배역.]의 여자친구 || 특별출연[* 액자속의 사진으로만 출연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5&aid=0000007389|관련기사]] ] ||
- 윤채경(가수) . . . . 3회 일치
이후 [[이현주(배우)|현주]]가 2016년 10월 [[APRIL]]에서 연기자 전향을 위해 탈퇴하자, [[레이첼(APRIL)|레이첼]]과 함께 2016년 11월 11일 APRIL에 합류했다. 덕분에 [[전소민(KARD)|전소민]]의 탈퇴 후 1년 만에 [[퓨리티]] 출신이자 1996년생 멤버가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채경은 [[C.I.V.A]], [[I.B.I]], [[APRIL]] 총 3개의 걸그룹에서 활동하게 된다.[* 물론 [[C.I.V.A]]와 [[I.B.I]]는 프로젝트 그룹이며, 정식 그룹은 [[APRIL]]뿐이다. 그리고 채경의 APRIL 합류를 기점으로 C.I.V.A와 I.B.I의 활동은 사실상 멈춰버린 상태. 아직까지 이들 활동에 대해서 [[DSP미디어]]나 본인이 부정적인 의사는 내비치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애매한 상태였으며 관련된 언급 중 Prelude 쇼케이스에서 한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아직은 이들 활동이 결정된 것은 없다'는 듯. 그러나 2017년이 저물고 2018년으로 접어든 시점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것을 봐서는 C.I.V.A와 I.B.I의 활동 재개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보인다.]
첫 행사를 앞두고 C.I.V.A 멤버들은 LTE 월말평가를 받게 된다. 이때 학춤을 추면서 심사를 맡은 진영의 평을 듣는다. 이후 시청률 부진 문제로 인해 LTE 사람들은 방송국 관계자들과 면담을 하게 된다.
[[프로듀스 101]] 방영 중 다른 [[연습생]]들이 SNS 계정을 열고 팬들과 소통을 시작할 동안 [[조시윤]]과 함께 SNS 활동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DSP미디어]]와 관련이 큰데 [[연습생]]에게 SNS를 만들어 주지 않는 [[DSP미디어]]의 전통(?) 때문이다.[* [[안소진|소진]]도 [[트위터]] 계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3년까지 트위터 활동을 하다가 [[카라 프로젝트]] 시작 후에 트위터 활동을 그만두고 카라 프로젝트 팬카페에 글을 자주 올렸다.] 이 때문에 팬들은 [[DSP미디어]]에 SNS를 열어달라고 [[빼애액]] 소리를 지르곤 했다.
- 윤태진(아나운서) . . . . 3회 일치
2017년 12월 4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스토킹 피해를 호소해 놀라게 했다. '아파트 앞이다, 안자는 거 안다, 뺨한대 맞을까 나와라' 등등 혐오스러운 말들이 담겨있었다. 윤태진은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그만두라며 그동안은 팬의 관심이겠거니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했지만 그만하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해당 포스팅에 댓글은 닫았지만 여러모로 놀란 팬들이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이후로는 스토킹에 관해 언급이 나온 적은 없다.
- 은혼/624화 . . . . 3회 일치
* 지휘관을 잃은 신라 부대는 일단 퇴각하기 시작하고 일행은 한숨 돌리게 된다.
* 예상에 없던 반격에 신라 부대는 싱겁게 쓰러지기 시작한다. [[도로미즈 지로쵸]]는 선봉을 날리며 다가오는 적들을 쓸어버린다. 그런데 연거푸 베어나가는 와중, 신라의 지휘관 [[소타츠]]는 동포의 시체를 방패막으로 삼으며 지로쵸를 노린다.
* 지휘관이 쓰러지자 신라 부대는 원통해하면서도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승리의 일각을 담당한 카츠오는 "우주제일의 야쿠자" 지로쵸의 힘을 잘 보았냐고 과시하며 자신도 은근슬쩍 "우주 제일의 7 대 3 가르마"라고 포장하지만 가구라가 가차없이 태클을 건다. 가구라는 이상한 대항심을 발휘해 소타츠를 쓰러뜨린게 자기네 대장이니 해결사는 곧 "우주제일 야쿠자 해결사"라고 주장한다. 신파치는 언제 야쿠자가 됐냐고 태클에 태클을 거는 직업정신을 발휘한다.
- 은혼/625화 . . . . 3회 일치
* [[다키니]]의 [[지휘관]] [[오우가이]]는 과거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적이 있다. 그것도 같은 다키니에게.
* 또다른 3대 용병부족의 일각 [[신라(은혼)|신라]] 부대 또한 급히 퇴각하고 있다. 건물 위로 뛰어다니던 부대가 호각을 불자 산발적인 퇴각이 시작된다. 지휘관 [[소타츠]]는 [[사카타 긴토키]]의 일격으로 패배, 의식을 잃었다. 집단전술을 자랑하는 신라도 지휘관이 부재하면 오합지졸일 뿐이다. 백화와 [[코제니가타 헤이지]] 등과 싸우던 신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을 개시한다.
- 은혼/634화 . . . . 3회 일치
그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야토족 부대, 지휘관 노사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노사는 송사리들이 소란을 부린다며 코웃음을 친다. 저것은 히노카구츠치의 빛이 아니다. 그랬다면 자신들은 그 시점에 우주의 먼지가 되었을 터였다. 아마 저것은 멋모르고 지구에 접근해 버린 우주선일 것이다. 겐가이포의 나노머신 "벌"의 먹이가 됐겠지. 그래도 그 벌이 대기권 바깥까지 영향을 준다는 건 대단히 큰 문제긴 하다.
노사가 관찰한 겐가이는 고문이 통하지 않는 남자. 그건 그가 죽기보다 지는걸 더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걸 것이다. 그걸 이용했을 뿐이다. 이젠 겐가이라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죽어도 상관없겠지.
- 은혼/636화 . . . . 3회 일치
* 는 무슨. 바로 패대기로 갚아준다. 적아군 상관없이 황당해하는 가운데 혼자 이제 비긴 거라고 희희낙락한 카무이. 당연히 노사에게 등뒤를 얻어맞고 가구라가 처박힌 위로 충돌, 천장을 뚫고 바깥까지 나가떨어진다.
* 사정이 이렇게 됐는데도 이 바보남매는 노사는 재쳐놓고 서로 잘했네 못했네를 따지고 있다. 실수인데 이렇게까지 하냐는 가구라와 발목이나 잡는다고 디스하는 카무이. 서로 "죽거나 물러나라"며 치열한 접전으로 치닫는다. 부관인 아부토만 속이 터지는 상황. 이 한심한 작태에 그렇게 혈통드립을 쳤던 노사 조차도 "너무 오래된 혈통도 생각해볼 문제"라고 문제의식을 가지게 한다.
가구라는 그 말을 받아들여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눈이 아닌 피로 적을 포착하는 방법. 그러나 갑자기 잘 될리는 없고 그저 캄캄할 뿐. 반대로 카무이는 적이 아주 잘 보인다. 구체적으로 바로 옆에 있는 가구라의 얼굴이다. 딱밤을 먹이며 "이걸로 비겼다"고 선언하는 카무이. 참 관대한 처사다.
- 은혼/641화 . . . . 3회 일치
* 해방군 모선 내부의 [[다카스기 신스케]], [[카와카미 반사이]], [[키지마 마타코]]는 내부에서 중추시설을 요격하려 하나 난관이 한둘이 아니다.
* 히노카구츠치의 제어 중추로 향하던 신스케 일행은 발걸음이 늦춰졌다. 교신 중이던 헨페이타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통신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그를 불러봐도 대답은 없다. 좋지 않은 예감. 그때 그들의 앞을 기관총 사격이 막는다. 황급히 샛길로 피하는 일행. 제어 중추가 코 앞이었다. 생존자를 쥐어짠 호위병력이 복도를 빼곡히 매우고 있었다. [[키지마 마타코]]는 이쪽도 더는 한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말대로다. 방어가 두터울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저 병력들을 다 처리하려면 15분이 아니라 15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일단 제어 장치까지 도달하면 희망이 있다. 그 내부에서는 적의 공격도 기세를 죽을 것이다. 축적된 에너지를 유폭시키고 싶지 않다면.
* 불사신처럼 보였던 반사이. 그러나 해방군의 사격은 한 발 한 발 그의 사지를 관통했다. 에너지 중추로 접근하는 헨페이타의 우주선도 비슷한 신세였다. 반사이가 짐작했듯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옛날에 신스케를 위해 죽기로 했던 그 결심이, 이제와서 후회된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 생을 부여잡고자 하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 이 전쟁의 끝이 보고 싶다. 이 전쟁이 끝나서 영웅이 아니게 된 한 명의 친구, 신스케의 옆에서 살고 싶다 바라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
- 은혼/644화 . . . . 3회 일치
모니터 너머, 관측병들의 보고였다.
>우리의 이 기분을 부딪힐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어.
무츠는 아직 남은 의식을 모아 다츠마를 칼날의 진행 방향에서 밀쳐냈다. 칼날은 무츠를 관통해 천장까지 찔러들어갔다.
- 이강철 (1947년) . . . . 3회 일치
'''이강철'''(李康哲, [[1947년]] [[5월 6일]] [[대구]] - )은 [[대한민국]]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을 지낸 정치인이다.
*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대구서부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대근 (조선) . . . . 3회 일치
'''이대근'''(李大根, ? ~ ?)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불발(不拔),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이다.
[[음서 제도|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선교랑 관상감 주부(觀象監主簿)가 되었으며, 연산(燕山)2년 병진(丙辰1496)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 [[생원]](生員)이 되었다. 그 뒤 통훈대부로 승진, 사헌부 감찰을 거쳐 홍천현감으로 나갔다.
- 이만섭 . . . . 3회 일치
|본관 = [[합천 이씨|합천]]
|후임자 = [[박관용]]
|전임자 = [[송관수]]
- 이영희 (1936년) . . . . 3회 일치
* 사단법인 미래문화(뉴욕 이영희 한국박물관) 대표
* 문화훈장(옥관, 2009)
== 가족 관계 ==
- 이요원 . . . . 3회 일치
이요원은 [[1980년]] [[4월 9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태어났다. [[1997년]] 고교 방송반으로 활동중 별 기대없이 출전한 연예인 캐스팅 컨벤션의 모델캐스팅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월간 잡지 '피가로' 11월호의 모델로 데뷔했다. [[1998년]] 당시 [[명세빈]]의 아역을 찾던 [[장현수 (영화 감독)|장현수]] 감독이 이요원의 잡지화보를 보고 바로 캐스팅했으며 이어 영화 《[[남자의 향기 (영화)|남자의 향기]]》를 통해 연기자로 정식데뷔한다. [[1999년]] [[KBS]] 청소년드라마 《[[학교 2 (드라마)|학교 2]]》와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 아르바이트 주유원으로 출연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2001년]] [[청룡영화제]] 여우신인상을 안겨준 《[[고양이를 부탁해]]》와 [[KBS]] 드라마 《[[푸른 안개]]》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차세대 톱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KBS 드라마 《[[순정 (드라마)|순정]]》과 영화 《[[서프라이즈 (영화)|서프라이즈]]》에서 주연을 맡았다. 《[[모래시계 (드라마)|모래시계]]》 [[김종학]]-[[송지나]] 콤비의 [[2002년]] [[SBS]] 드라마 《[[대망 (2002년 드라마)|대망]]》에서 여주인공 윤여진 역을 맡은 후 잠시 연기자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2년간의 공백 이후 [[2005년]] [[SBS]] 드라마 《[[패션70s]]》로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했다. 이후 [[2007년]] [[SBS 연기대상]]에서 10대스타상, 최우수상, 인기상, 베스트커플상 4관왕을 안겨준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와 730만 관객동원 영화 《[[화려한 휴가]]》가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며 흥행보증수표로 자리잡았고,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열연을 펼쳐 [[2009년]] [[MBC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다. 이후 다시 [[SBS]]로 돌아와 드라마 《[[49일]]》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여 드라마가 동시간대 시청률 1위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후 드라마 《[[마의 (드라마)|마의]]》에서 주인공인 강지녕 역을 맡아 조승우와 호흡을 맞추었다. [[2013년]]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선 차갑고 냉철한 재벌가 상속녀를 맡아 호소력 있는 감정연기로 최서윤 역을 완벽 구현하며 열연을 펼쳐 [[2013년]] [[S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 10대스타상을 수상하며 많은 호평을 받았다.
* 2009년 12월 경상북도 관광 홍보 대사<ref>{{뉴스 인용 |제목=‘선덕여왕’ 이요원, “많이 지쳤지만 유종의 미 보이겠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2068502 |출판사= 네이버 |날짜= 2009-12-06 }}</ref>
- 이장영 . . . . 3회 일치
* 재정경제부 장관 자문관
* 감사원 경제금융특별보좌관
- 이전환 . . . . 3회 일치
* 국세청 기획예산담당관
* 국세청 재정기획관
* 중부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담당관
- 이종희 (1942년) . . . . 3회 일치
| 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겉보기에는 무척 부드러워 보이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강한 추진력을 발휘,매사에 빈틈이 없다는 평을 받는다. [[대한항공]]이 사업정상화를 위해 제트기를 새로 도입할 당시 신입직원이던 이종희는 영어로 된 부품과 정비매뉴얼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가가 전무한 상황에서 밤을 새워가며 정비매뉴얼을 완벽하게 번역하면서 오너로 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영업부에서 항공기 운항과 정비 등의 운항 종합정보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아 5년간 휴일을 포함해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사무실을 지켰다는 일화는 지금도 사내에 회자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한 · 프랑스 협력에 앞장서고 세계 항공시장에서 양국 간 경제협력과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이종희에게 프랑스 정부 최고 훈장인 레종 드뇌르 슈발리에(La Legion d'honneur Chevalier) 훈장을 수여하였다. 레종 도뇌르 훈장은 ‘영광의 군단’이란 의미를 지닌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데 레종 도뇌르는 일반적으로 코망되르, 오피시에, 슈발리에 등 3개 등급으로 구분되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004년]] 이 훈장 가운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인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를 받은 바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12408021|제목=이종희 대한항공 사장‥40년 한국 민항 역사의 산증인|날짜=2009-11-25|출판사=한국경제|확인날짜=2010-04-12}}</ref>
* [[2002년]] 제29회 관광의 날 은탑산업훈장
- 이현우(배우) . . . . 3회 일치
||<#6495ED><:> {{{#ffffff '''본관'''}}}||<(> [[경주 이씨]][* 경주 이씨 38세손 '雨'자 항렬이다. 현재 이 연령대의 경주 이씨 사이에서 항렬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뻘, [[이건희]] 회장의 할아버지뻘, [[이재명(1964)|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증조할아버지뻘, [[프로게이머]] [[이제동]]의 '''6대조'''뻘이다.] ||
영화판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리해진]]'''역을 맡고 영화 관객수가 500만이 넘어간 상황이 되면서 10대 여성 및 20대 초중반 여성층에게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다. 본 영화 내에서도 여전히 학생 역이지만, 아역 이미지는 어느 정도 벗은 듯 보인다.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흥행을 끌면서 이현우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아져, 2014년에 기대가 되는 배우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약 1년만에 영화 [[기술자들]]로 돌아왔다. 귀여운 이미지를 벗어내기 위해, 차기작을 나름 신중히 선택한 듯 하다. 해커 박종배 역으로 분해 연기를 선보였다. 이 영화가 [[에이브러햄 링컨|김우빈의 김우빈에 의한 김우빈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현우 분량이 상당히 안습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인지도를 높였으나 그것은 이현우 자신의 외모적 매력에 힘입은 것이므로 성인 연기자로서 아역이미지를 벗고 자리잡았는가에 대한 검증은 아직 지켜봐야 한다.
|| 2009년 || KGC인삼공사 || 정관장 아이패스 || ||
- 이희승(1913) . . . . 3회 일치
[[8.15 광복]] 후 충북자동차주식회사 취체역, 주한미군 제7사단통역관, 경기도청 및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통역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충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동청년단]] [[김기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대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UNKRA 및 KCAC 정치고문,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기술교육원부원장서리, [[미군]] 작전과 포로심사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기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김기철에 밀려 탈락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무소속 [[정상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일곱개의 대죄/194화 . . . . 3회 일치
* 프라우드린은 천관파옥인에 관통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던 멀린은 이내 걱정을 거둔다.
- 일곱개의 대죄/202화 . . . . 3회 일치
* 스티그마의 본거지는 "요정왕의 숲"에 있었는데 그 거점에선 어쩐지 여신족과 그들의 지도자 "사대천사"가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다.
* 여신족의 지도자 [[뤼드셀]] 등장. [[네로바스타]]도 부관격으로 활동하고 있다.
네로바스타는 [[일곱개의 대죄/187화|던젤의 몸을 통해 나타났던 여신족]]. 등장 당시에도 고위 여신족이었고 성전 시기에도 사대천사의 직속 부관격으로 보이는데 거만하기만 하지 실력은 개뿔도 없다.
- 일곱개의 대죄/203화 . . . . 3회 일치
* [[엘리자베스 리오네스|엘리자베스]]는 전쟁의 방침과 마신족과 관계를 놓고 [[뤼드셀]]과 [[네로바스타]]와 대립한다.
* [[할리퀸(일곱 개의 대죄)|킹]]은 스티그마와 현시대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지만 디안느는 생활에 적응해서 별 관심이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 밝혀지자 킹의 표정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다. 게라이드는 오빠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고 이상하게 여기는데 킹은 얼버무리기 바쁘다. 킹은 생각해 보니 그녀가 초대 요정왕 때부터 섬겨왔단 얘기를 해준 걸 떠올린다. 하지만 설마 자신과 [[엘레인]]처럼 남매 관계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모습과 분위기는 그가 알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 현대의 게라이드는 속이 검고 요정왕의 안위만 맹목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 임인배 . . . . 3회 일치
1954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고등학교]],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검찰청]] 수사관으로 근무하였다. 1995년 현직 검찰 수사관 신분으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12800329116014&edi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5-01-28&officeId=00032&pageNo=16&printNo=15325&publishType=00010|"조국을 남기고 님은 가셨습니다"라는 소설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호를 따서 덕천장학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회창]] [[총재]]의 특별보좌관, 한나라당 원내수석부총무를 역임하였다.
- 장민호 (1962년) . . . . 3회 일치
'''장민호'''(1962 ~ )는 [[일심회 사건]]의 핵심 관계자로서 이적 단체인 일심회를 결성한 뒤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대법원]] 3부는 징역 7년에 추징금 1900만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공안 당국은 북한과 그가 386 인사들과 접촉해 국내 정치 현안에 개입하려 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ref name="dd11">[http://www.ytn.co.kr/_ln/0103_200610301602410348 24 HOUR NEWS CHANNEL ::::: YTN (와이티엔)<!-- 봇이 따온 제목 -->]</ref> 5.31지방선거와 윤광웅 국방장관 해임건의안 처리과정 등이 포함돼 있고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자의 동향과 6자회담에 대한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의 입장 등도 보고 대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dd11"/> 이후 대한민국 검찰에 USB 메모리 칩과 이메일이 가압류되었고, 그는 [[대한민국]] 검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 [[1981년]]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 장순왕후 . . . . 3회 일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년]] [[2월 22일]]([[음력 1월 16일]]) ~ [[1462년]] [[1월 5일]]([[1461년]] [[음력 12월 5일]]))는 [[조선]] [[조선 예종|예종]](睿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이며,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셋째 딸로,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다. 세자빈 시절 [[인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가족 관계==
*** 조모 : [[예문관]]대제학 [[이척]](藝文館大提學 李逖)의 딸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贈 貞敬夫人 驪州李氏)
- 장후영 . . . . 3회 일치
경성제국대학에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경성지방법원과 광주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로 일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고 물러간 뒤 [[미군정]] 법사국 법제부장을 역임했다.
이후 [[변호사]]로 일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고, 고등고시 법전편찬위원, 군법무관전형시험위원, 군법제편찬위원회 고문 등도 지냈다. 출판사인 법정사 사장을 맡아 월간 법률연구지인 《[[법정 (잡지)|법정]]》을 발행하기도 했다.<ref>{{웹 인용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
- 전국 BASARA(애니메이션) . . . . 3회 일치
오슈의 독안룡. 아무리봐도 폭주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다테군의 수장. 어부지리를 노리고 다케다군과 우에스기군의 전투에 난입하려다가 이를 막으려는 유키무라와 일기토를 벌인다. 이후 유키무라와 라이벌 관계가 된다.
카이의 작은 호랑이. 열혈 바보. 다케다군의 무장으로 다케다 신겐과 서로를 외치며 죽빵을 날리는 사이다.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라고. 어부지리를 노리고 다케다군과 우에스기군의 전투에 난입하려는 다테와 일기토를 벌인다. 이후 다테와 라이벌 관계가 된다.
다테군의 무장. 다테의 부관 같은 위치다.
- 전명운 . . . . 3회 일치
'''전명운'''(田明雲, [[1884년]] [[6월 25일]] ∼ [[1947년]] [[11월 19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죽암(竹嵒)이며 본관은 [[담양 전씨|담양]](潭陽)이다.
이에 분노한 그는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 이틀 후인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여객선 선착장에서 [[일본인]] 총영사와 함께 있는 스티븐스를 공격했고, 격투가 벌어지자 같은 목적에서 별도로 대기하던 [[장인환]]이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 이틀 후인 [[3월 25일]] 절명하게 하는 중상을 입혔다. 그는 이때 장인환의 총격에 총상을 입고 장인환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공범 관계가 아님이 드러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때 통역은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의 변호를 통역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함에 따라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 정제우, 〈竹嵒 田明雲 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10집, 225~261쪽, 1996년
- 전소민(배우) . . . . 3회 일치
2013년 12월 29일 [[개그 콘서트]] <[[시청률의 제왕]]>코너에 출연하여 [[오로라 공주(드라마)|오로라 공주]]를 패러디--라고 쓰고 폭풍디스--했다(...) [[http://tvpot.daum.net/mypot/View.do?ownerid=NFCuTYsUzgw0&clipid=55449486|#]] 컵 들고 부들부들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뺨을 때리고 발로 차며 "나, [[오로라(오로라 공주)|오로라]]에요"라질 않나, 스토리랑 아무 상관 없다고 태클받자 "막장 이렇게 하는거 아니에요?"라며 천연덕스럽게 굴고, --[[브라우니(개그 콘서트)|브라우니]]의 탈을 쓴-- 떡대가 ~~암세포~~감기세포=생명이라 말하자 ~~개가 말을 해~~ "[[개소리]]"라며 때리고, 주변 사람들이 다 죽자 "왜 나랑 있으면 다 죽는 거야?"라며 디스의 정점을 보여주며 떡대가 죽을 차례가 되자 자기 발로(...) 차고는 "떡대야~ 으흑흑"하며 돌변하는 태도가 압권. 그런데 방송이 나간 후 "그래도 자기를 키워준 [[임성한]] 작가한테 너무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고,[* 실제로 [[인어 아가씨]] 주연이였던 [[장서희]]의 경우 "[[임성한]] 작가를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방송에서 수 차례 말한 바 있고, 심지어 [[인어 아가씨]]가 막장이 아니라고도 하였다.~~말은 바로 해야지...~~] 이에 소속사를 통해 "드라마는 드라마, 예능은 예능으로 봐달라"며 수습(?)에 나섰다. ~~왠지 진심이 느껴졌었던 것은 논외로 치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13&aid=0000422927|#]]
|| TV 문학관 - 광염소나타 || 남정연 || ||
* 독특한 습관으로 면을 먹을 때 아무리 길어도 좀체 안 끊고 입 안으로 흡입해서 먹는다. 제주도 고기국수를 먹을 때는 무려 7번이나 [[면치기]](?)을 하기도. 숨도 안 쉬고 흡입하는듯한 모습이 독특해서인지 [[런닝맨]]에서 면요리를 먹을 때마다 클로즈업을 받고 있다.
- 절대가련 칠드런/468화 . . . . 3회 일치
* [[마기 시로]]는 [[효부 쿄스케]]가 심장을 관통 당하는 치명상을 입자 예상 이상으로 동요한다. 다른 세뇌자들 이상으로 강력해 보였던 세뇌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
마츠카제는 지휘관인 미나모토가 남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반발한다. 차라리 자신이 남아서 폼을 좀 잡게 해달라고 드립을 친다. 카오루가 심쿵할지도 모른다고. 정작 카오루는 관심이 없다.
- 절대가련 칠드런/469화 . . . . 3회 일치
* [[머슬 오오카마]]가, 로비에트 정부에도 [[길리엄(절대가련 칠드런)|길리엄]]의 마수가 뻗어와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했다고 알린다.
* [[머슬 오오카마]]가 효부의 부상 소식에 사색이 돼서 달려온다. 효부에게 자신의 심장을 바칠 테니 써달라는 참 갸륵한 말을 하지만 역시 머슬이 하는 소리라 그런지 효부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거절한다. 머슬은 로비에트 정부가 블랙팬텀에 넘어갔는지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제 대사직도 없어진 자신이 조직에 헌신하는건 그런 것 정도라고 말하지만, 효부는 그 제안에 심전도가 떨어질 정도로 거부반응을 일으켜서 결국 보류된다.
* 잠시 뒤, 모미지로부터 이상의 상황을 전달받은 [[아카시 카오루]]는 어떻게 초조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방방 날뛴다. 그녀와 칠드런 일행은 퀸 오브 카타스트로피의 [[도서관]]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산노미야 시호]]나 [[노가미 아오이]], [[쿠모이 유리]], [[마츠카제 코우이치]]는 비교적 침착한 모습이다. 하지만 카오루는 고함을 치면서 이렇게 된 이상 힘으로 바벨을 습격하자는 과격한 말을 하다가 시호가 쏜 바람총을 맞고 다운된다. 시호는 그런 결단은 블랙팬텀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라고 정론을 펼친다.
- 접대 . . . . 3회 일치
본래는 [[손님]]을 맞아서 대응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집]]에서 손님을 맡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정 간의 일에 가까운 용어였으나, 현대에는 주로 회사나 관공서 관계에서 [[을]] 측에서 [[갑]]에 해당하는 [[높으신 분들]]에게 각종 향응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변질되어 쓰이고 있다.
== 관련용어 ==
- 정광용 . . . . 3회 일치
탄핵반대 집회 관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박사모 집회에서 계엄령 선포요구, 폭력집회 선동, 내란 선동, 경찰관 폭행, 기자, 시민 폭행 등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불법행동을 많이 저질러졌다. 심지어 3월 10일 박근혜 파면이 결정된 날에는 박근혜 지지자들의 폭동이 격화되는 바람에 사망자가 3명이나 나왔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의 주동자 정광용은 경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지만 끝까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책임지지 않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7885974|무책임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결국 2017년 5월 25일 같이 폭력 시위를 선동한 손상대 뉴스타운 대표와 함께 구속되었고 2017년 12월 1일 1심 재판에서 손상대와 함께 실형 2년을 선고 받았으나 2018년 5월 31일,2심 재판부는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1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http://naver.me/GGVzj1Wi|#]]
[[분류:박근혜-최순실 게이트/관련 인물 및 단체]][[분류:대한민국의 범죄자]][[분류:1958년 출생]][[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 정규수(배우) . . . . 3회 일치
* [[2007년]] [[KBS1]] 단막극 《[[KBS HDTV 문학관]] - 카스테라》
* [[2013년]] 《[[관상 (영화)|관상]]》 ... 박첨지 역
- 정명환 . . . . 3회 일치
* 1993년 MBC 《[[파일럿 (드라마)|파일럿]]》 ... [[대한항공]] [[B727]] [[B747]] [[항공기관사]] 김광수 역
* 1999년 MBC 《[[허준 (드라마)|허준]]》 ... [[포도청]] 종사관 배천수 역
* 2001년 MBC 《[[상도 (드라마)|상도]]》 ... 의주 [[만상]] 본전 대행수 → 본전 도방 김두관 역
- 정성왕후 . . . . 3회 일치
|사망지 = 창덕궁(昌德宮) 관리각
정식시호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원렬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元烈端穆章和貞聖王后)이다. 본관은 [[대구 서씨|달성]](達城).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와 잠성부부인(岑城府夫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족 관계==
- 정세진 . . . . 3회 일치
|학력 =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2009~2011||[[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분류:197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성심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정의동 . . . . 3회 일치
'''정의동'''(鄭義東, [[1948년]] [[4월 25일]] [[대구광역시]] ~ )은 [[대한민국]]의 경제관료이자 [[금융인]], [[기업인]]이다.
* [[재정경제부]] 뉴욕주재 재경관
* [[재정경제원]] 공보관
- 정재안 . . . . 3회 일치
|직업 = [[대한민국 |시회기관단체인]]
|소속 = [[사회기관단체인]]
재활용 막는 ‘폐기물관리법’<ref>
- 정혜선(배우) . . . . 3회 일치
[[김희애]]와 [[전광렬]]하고 모자(녀) 관계로 수 차례 출연한 인연이 있다. 김희애의 경우 [[1991년]] 산너머 저쪽, [[1993년]] [[아들과 딸]], [[2003년]] [[완전한 사랑]]에서 모녀관계로 출연했으며, 전광렬의 경우 [[1999년]]판 [[허준(드라마)|허준]], [[2010년]] [[제빵왕 김탁구]], [[2017년]] [[당신은 너무합니다]]에서 모자관계로 출연했다.
- 젠 멘 . . . . 3회 일치
딱히 관련은 없어보이나 New 52 이후에 나온 멀티버시티(The Multiversity)에도 neo-humans의 팀인 G-Men이 등장한다. 전자는 뮤턴트, 후자는 엑스멘이나 선술한 것처럼 일단 젠 멘과 관련성은 없어보인다.
== 관련 항목 ==
- 조긍하 . . . . 3회 일치
'''조긍하'''(趙肯夏, [[1919년]] [[8월 16일]] ~ [[1982년]] [[1월 28일]])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영화감독]]이다. 본관은 [[풍양 조씨|풍양]](豐壤)이며 [[아명|아명(兒名)]]은 '''조중하'''(趙重夏)이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대구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를 졸업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8383&mobile&categoryId=1639 조긍하 - 네이버 지식백과]</ref>. 그 후 [[테너]] [[성악가]]와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은퇴하고 [[사진가|사진]] 촬영과 [[영화]] 분야로 전향하였다. 사진작가의 관록으로 조감독 수련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이 되었는데, [[1952년]]에 《베일부인》을 감독한 것을 시작으로 《황진이》([[1956년]]), 《곰》, 《육체의 길》([[1959년]]), 《인간만세》, 《과부》([[1960년]])등의 영화를 감독하였고, 시나리오도 직접 집필해왔다. 또한, 1960년대 말에는 《상해임시정부》, 《인천상륙작전》 등 애국지사들의 일대기를 내용으로 한 작품들을 만들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1300032921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1-30&officeId=00032&pageNo=12&printNo=11181&publishType=00020 故(고) 趙肯夏(조긍하)감독의 人間(인간)과 作品(작품)세계 고지식하면서도 유머풍부 - 1982년 1월 30일 경향신문]</ref>.
== 가족 관계 ==
- 조동혁(배우) . . . . 3회 일치
||<#20B2AA> '''{{{#ffffff 경력}}}''' ||<(> 2013.11 제51주년 소방의 날 명예 소방관[* 예능 심장이 뛴다를 통해 소방관에 대한 인식을 높임으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
* 수사관 앨리스 - 정레오
- 조재윤 . . . . 3회 일치
* 2019년 [[MBC]] 《[[신입사관 구해령]]》 - 김척점 역 (특별출연)
* 2007년 《대머리 여가수》 - 소방관 역
* 2013년 《웃음의 대학》 - 검열관 역
- 죽는다 죽는다 사기 . . . . 3회 일치
* [[자살]]을 선언하고, 이를 통하여 이득을 얻거나 관심을 받으려는 행위. 관심 받으려는 경우는 [[관심병]]의 일종.
- 지석진 . . . . 3회 일치
||<#FFA500> {{{#FFFFFF ''' 본관 ''' }}} ||<#ffffff><(> [[충주 지씨]] ||
2000년에 스타일리스트 출신 류수정씨와 결혼하였다. 원래 [[정선희]]의 스타일리스트로 오빠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내던 유재석이 소개해줬다고 한다. 첫만남 당시 소개팅을 주선한 유재석이 집에 데려다 주는 순간까지 동석해서 어이가 없었다고 하는데, 알고보니 지석진을 첫만남에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한 류수정씨가 유재석에게 계속 있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석진 역시 류수정씨가 자신을 별로 마음에 안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 유재석에게 중개를 부탁한 끝에 연애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모양. 결혼식 사회까지 유재석이 봤으니 결혼의 시작과 끝을 유재석이 다 챙겨준 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때문인지 유재석은 지석진이 결혼한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류수정씨 개인과도 꽤 친한 모양. 방송에서 지석진과 대화 중에 "형수 저번에~" "형수 요새~"하는 식의 말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인지 지석진은 후에 "그 때 왜 그랬냐"는 식으로 유재석을 맹폭하는 컨셉을 세우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일관된 평가 중 하나로, 김용만과 함께 '''팔랑귀'''로 엄청 유명하다고 한다. 유재석이 '임팔라'란 별명을 붙인 것도 여기저기 온갖 소리에 나서서 반응하는 모습이 초원에서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임팔라와 꼭 닮았다는 이유. 유명한 사건으로, 김용만과 해외여행 가서[* 황당한 것은 날짜 맞추다 보니 이게 '''허니문 코스'''였다고 한다(...).] 잠시 휴식하던 사이, 가이드가 사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는데도 현지 장사꾼들한테 속아서 ~~호구 왔는가~~ 가짜 악어 지갑 수십 개를 그 자리에서 샀다고 한다. 사실 압축 종이로 만들어진 지갑이라 물에 젖더니 순식간에 찢어졌다고... 유재석한테도 선물로 줬는데 모르고 썼던 유재석은 뒷주머니에 넣어 뒀더니 땀 때문에 퉁퉁 불어서 돈이랑 엉겨붙느라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모양. 이 방면에서 워낙 유명하다보니 세일즈맨들 사이에선 "김용만이나 지석진한테 물건 못 팔면 이 바닥 떠나라"는 말까지 돌았다고...이 때문에 주식이나 사업도 여러번 날려먹은 뒤로는 사업은 안하고 주식도 안전한 주식만 한다고 한다.
- 진격의 거인/96화 . . . . 3회 일치
* 애니는 라이너에게 등을 돌리며 돌아가자고 했다. 라이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애니는 마르셀을 먹은 거인을 찾아서, 턱의 거인을 탈환해 돌아가자고 했다. 지금쯤 인간으로 돌아와 있을 터였다.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겠지. 지휘관인 마르셀을 잃은 이상 작전의 속행은 불가능하고, 턱의 거인이라도 되찾아 가야했다.
혼자서 거인들을 몰이하고 있는 애니의 체력은 한계였다. 라이너는 그래도 작전을 강행했다. 공언한 대로 마르셀을 대신해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거인들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데 아직도 벽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지평선 위로 하얀 벽이 보였다. 이제 교대할 시간이다.
* 2년의 세월이 바람 같이 흘러가는 동안 알아낸 건 별로 없었다. 섬에 오기 전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라이너와 베르톨트가 개간 작업이 한창일 때 애니가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 숲이었던 땅은 급하게 벌목되고 밑둥만 남은 나무들이 잔뜩 있었다. 그걸 뿌리채 들어내는건 젊고 힘있는 라이너와 베르톨트의 몫이었다. 둘이 작업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막 생겨난 밭에서 일하고 있었고, 애니가 접근해서 "진짜 일"얘기를 시작해도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다.
- 진창현(음악인) . . . . 3회 일치
1970년대에는 자작 현악기들로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해 악기상들의 관심을 모았고, 1974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진창현: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계속 초후의 센가와 공방에서 현악기 제작을 계속 했고, 2000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린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의 제작 참고 악기로 선정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2001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 바이올린 '광주호'를 시작으로 이듬해 바이올린 '대구호', 비올라 '한라호', 첼로 '백두호'까지 네 점의 악기를 무상 기증하면서 [[대인배]] 인증을 하기도 했다.
* [[1970년]]의 한국 방문에서 당한 일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자서전에도 그 경위를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머니]]와 [[여동생]]의 가난했던 삶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충 조사를 마무리지은 뒤 회식비를 자신에게 모두 떠넘겼다거나 1976년에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귀국했을 때 자신이 만든 악기가 위조품으로 간주되어 반입 불가를 당한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당시 한국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한국이 [[민주화]]되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이념적 재단 같은 편파적인 잣대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 국민훈장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으로도 명예회복을 이루었다. 말년에는 한국 언론들과 자주 인터뷰나 대담 등을 가지기도 했고, 생전에 마지막으로 언론과 접촉한 것도 타계 열흘 전인 5월 3일에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 병상을 찾았을 때였다.
- 진헌식 . . . . 3회 일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 이긍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충청남도지사 임기 중이던 1952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서리]]를 [[충남대학교/역사|겸직하였다]]. 이어서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가 [[곡물]] 관리상의 문제로 경질되고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류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짐 브라부라 . . . . 3회 일치
맥스는 그를 "수상쩍은 식습관과는 별개로 브라부라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Apart from his suspicious food habits I figured Bravura to be one of the good guys.]라고 평했다.
맥스의 상관으로 등장. 맥스에게 [[스쿼키 청소회사]]가 애니 핀을 살해한 사건을 맡기고, 발레리 윈터슨 형사에게 세바스찬 게이트 상원의원 살인 사건을 맡긴다.
맥스가 게이트 상원의원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모나 색스]]와 함께 행동하다 붙잡히자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며 맥스를 꾸짖는다. 맥스가 자신이 맡은 사건과 게이트 상원의원 사건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자, 두 사건 모두 윈터슨이 맡게 한다. 그러고는 맥스의 총을 빼앗고 해당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다.
- 차선우 . . . . 3회 일치
||<:> '''본관''' ||<(> [[차(성씨)|연안 차씨]] ||
||<:> '''제아''' 《'''압구정보안관프로젝트'''》 ||<:><|6> [[2015년]] ||<:> [[2월 5일]] ||<:> '''01''' ||<:> 하루만이라도 (Feat. 바로 of [[B1A4]]) ||
* 애니메이션 더빙을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2358203|했다]]. 영화 이름은 <일곱난쟁이>로, 바로가 맡은 역은 주인공 막내난쟁이 '보보' 역으로, 어떤 일에든 호기심 가득한 보보는 치명적인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나머지 여섯 난쟁이들과 함께 용기 있게 모험을 나서는 캐릭터로 위기에 빠진 동화 속 주인공들을 구하기 위해 긴 여정에 나선다. 그 외의 캐릭터들은 모두 현역 [[성우]]들이 맡는다. 바로는 관객수 50만이 넘으면 케이크를 쏘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꼭 보자 두번 보자~~
- 착취용 애완용 아이 . . . . 3회 일치
기본적으로는 자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노예라고 생각하며, 대우는 극히 나빠서 매도, 방치, 학대 등을 당하게 된다. '용도'에 어긋나거나 단순히 돈이 아깝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대개 부모가 교유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한 탓으로 친구 한 명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독부모라고 인식하여 관계를 끊었다고 해도 나중에 사정이 곤란해진 독부모가 의지해오면 독부모에게 가식적이라고 해도 인정과 애정을 받는 것이 기뻐서 컨트롤 당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응석을 부리는 버릇과 부모의 과도한 컨트롤의 영향 , 타인을 얕잡아 보고 대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정신세계를 가지게 된 탓에 사회에 부적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니트가 되기도 하며, 최악의 경우 히키코모리.
- 창작:Project NA . . . . 3회 일치
매일 가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저 커피나 차를 마시러 온 단골들이 보통이지만 가게주인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도 보이곤 한다.
간단히 위 설정과 관련된 작품을 작성하면 된다. 가게를 바탕으로 한 일상물도 좋고, 골동품이 갖고 있는 사연을 작성해도 된다.
=== 관련 작품 목록 ===
- 창작:바벨 코스트 . . . . 3회 일치
항구를 바탕으로 성장했으나 공업은 발달하지 않아 도시 성장은 더딘 편이다. 주요 산업은 관광으로, 대공황 시절에 꽃핀 다다이즘과 유사한 성향의 문학과 미술, 연극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발달했고 이러한 문화 수준에 맞게 교육 수준도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인구 분포는 주로 동유럽계 이민자들과 유색인종의 비중이 많고, 서유럽·영국계 백인들과 북미 원주민들은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바벨 코스트로 유입되며 성장세가 커졌다. 개중에는 아메리카 연합국 지역에 살던 일부 백인들이 신분을 속이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아 이로 인한 분쟁이나 갈등은 원한 관계로 인한 것 외에는 거의 없었다. 이때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Babel이라는 이름을 Barbell로 바꾸게 되었다.
- 창작:좀비도시 . . . . 3회 일치
||<#191970> '''{{{#white 용도}}}''' || 소설, 게임용 세계관 ||
* 대규모 화력을 동원한 도시 파괴는 내부의 생존자들이 사망할 우려가 너무 크며,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치적 관점에서 어렵다.
* [[지명수배|지명수배범]] : 이들은 이미 사법기관에 그 죄상이 노출된 수배자이다. 이들은 단지 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다는 이유 때문에 좀비도시에 있고 싶어한다.
- 창작:좀비탈출/2-1 . . . . 3회 일치
옆집 현관 주변을 뒤져봤다. 말라죽은 꽃 화분 아래에 현관 열쇠가 있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옆집 거실로 들어갔다.
- 창작:좀비탈출/5-1 . . . . 3회 일치
토트넘이 다가오는 순간 그 속도와 무기의 위치와 내가 손을 뻗는 속도의 차이에 대해서 계산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풀리지 않는 방정식이 머리를 괴롭히는 사이 몸은 직관적인 행동을 취했다. 자세를 낮추고 팔을 뻗어 손아귀에 싸늘한 손잡이가 잡히는 동안, 토트넘은 '''정확히 2m 앞'''에 있었다.
녀석으로선 기적적으로 느긋하게 움직여준 셈이다. 담장을 넘은 운동능력과 이 늦은 걸음걸이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 것인가? 그런건 생각해 봤자다. 죽은 놈의 머리통을 무슨 수로 알아맞추겠는가. 녀석의 손톱이 살갗에 박히기 전에 휘둘러버리는게 중요하지.
나는 살아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직관이 그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격려나 위로를 통틀어서 가장 살에 와닿고 기쁜 한 마디다. 나는 살아있다.
- 창작:좀비탈출/5-1-1-1 . . . . 3회 일치
이제 다른 목표도 달성할 차례다. 나는 담벼락 밑에 쌓여있던 것들을 적당히 치우려 했다. 일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벽을 바라봐야 하는데, 그러자면 등 뒤가 너무 허전했다. 담 하나 차이지만 여긴 우리 집이 아니다. 아직 앞 마당 쪽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단 말이다. 녀석들이 거기 모여서 티타임이라도 갖고 있다면 내가 부수럭대는 소리로 관심을 끌어 버릴지도 모르잖아?
…… 그렇게 끝나면 좋을 텐데. 나는 쓸데없는 것에 신경쓰고 말았다. '''현관이 열려있는 것'''.
이건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내가 토트넘을 쓰러뜨리고 시체를 잘라서 던져놓은 거에 비하면 쉬운 일일 것이다. 현관에서 살펴보고 위험이 있을 법하다면 바로 도망치면 된다. 아무렴 토트넘의 조기축구회 친구들이 여기서 뒷풀이를 하고 있진 않을 거야. 우선은 그저 보는 것, 그정도는 위험하지 않아. 이미 위험한 단계는 지나버린 거라고.
- 창작:좀비탈출/5-2 . . . . 3회 일치
꼬리뼈에서 후끈한 기운이 퍼지는가 싶더니 무릎 아래가 근지러웠다. 그걸 느꼈을 땐 이미 다리가 달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토까가 된 것처럼 껑충거리며 뛰었다. 내 생애 그렇게 빨리 달린 적은 처음이다. 가방과 골프채가 독 옆에 있다는게 생각났지만 찰나였다. 나는 오로지 현관으로 들어가서 재빨리 문을 잠그는 것만 생각했다.
현관이 보이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문 뒤로 돌아가 체중을 실어서 문을 밀어붙였다.
어느 정도 풍경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커튼을 활짝 젖히고 느긋하게 관찰했다.
- 창작:좀비탈출/요새편/1-1 . . . . 3회 일치
다시 내가 찾아낸 물건 얘기로 돌아가자. 우리 집에는 생각보다 정원 용품이 많다. 날이 좀 나갔지만 전지가위도 하나 찾았고 어디에나 써먹을 수 있는 목공장갑도 몇 벌 찾았다. 그리고 두툼하고 투명한 비닐 시트도 발견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겨울에 방한 목적으로 창문에 치던게 기억이 났다. 이게 또 요긴할 것이다. 같이 쓸 수 있는 굵은 철사도 있다. 녹 하나 나지 않은 새것이다. 나는 백지를 받아든 어린애처럼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분명 재료가 부족할게 뻔하지만 작은 비닐 하우스를 만들어서 겨울에 대비하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은 부족하지만 나에게 제일 풍족한건 시간이 아닌가? 시간이 많다는 것,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만으로 근거도 없이 낙관적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생존이란 거겠지.
'''무기는 전혀 없다.''' 이럴 줄이야. 설마 그럴 듯하게 쓸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을 줄이야. 창고에 있는 물건 중에 그나마 길죽한건 마당 쓸 던 플라스틱 빗자루가 전부다. 길이는 약 1m에 죽창만한 강도 조차 기대할 수 없는 물건이다.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나?
알고 있다. 어느 쪽도 확실한건 없다. 지금 어느 쪽의 가능성이 높은지를 따진다는건 순전히 내 심리가 얼마나 낙천성을 회복하고 있는지에 따를 뿐 객관적인 어떤 지표도 반영하고 있지 않다.
- 창작:좀비탈출/요새편/1-2-2 . . . . 3회 일치
나는 녀석을 오래 관찰하진 않았다. 그야 이 꼴이 되면 사람이든 녀석들이든 끝장이니까. 어쩌면 이게 녀석들에게 남은 유일한 '''인간성'''일지도 모르겠다. 죽어도 모가지는 조심해야 하다니. 갑자기 사방이 텅 빈 느낌이 들면서 녀석의 썩은내가 훅하고 올라왔다. 이게 긴장이 풀린 효과인지 아니면 코가 삐뚫어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한 번 더 죽어버린 녀석은 강렬한 악취로 존재를 과시했다. 아니면 그 체액이 묻어서 더 역겹게 풍겨오는지도 모르겠다. 코를 틀어쥐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양손이 지저분하다.
다시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위험이 사라진 앞마당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일상감이 넘쳤다. 한쪽에 줄지어 둔 작은 화분이 그대로 있다. 모종은 시들어 버렸지만, 저것만 봐서는 집주인이 게으르다는 생각만 들 것이다. 텅비어 있는 차고도 주인이 마트라도 가서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현관문이 열리고 남의 집 마당에서 무슨 짓이냐고 외치는 토트넘네 아줌마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토트넘이 앞마당 관리를 깔끔하게 한 탓인지 변변한 물건이 없었다. 화분이 있었다는건 정원용품이 있었다는 말일 텐데 그 흔한 꽃삽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긴, 우리집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지.
- 창작:치킨교 . . . . 3회 일치
치킨교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선지자가 누군지 경전이 없는 치킨교의 특성상 알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근원이 되는 종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치킨교를 믿는지에 상관없이 후라이드 치킨교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반면에 이 순살 치킨교는 기존의 교리를 거의 완전히 뒤엎으며 "치느님은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보다 순수하도록 노력하시며 뼈 없는 형상이야말로 극진한 모습으로 화하신 것이다"는 아예 새로운 교리를 들고 온 종파였다. 이들은 무기를 거의 들지 않는 후라이드든, 양념이란 무기를 든 양념 치느님이든 상관없이 치느님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뼈 없는 형상"으로 규정지었으며, 이는 치킨교도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오게 되었다.
후라이드든 양념이든 상관없이 뼈만 없으면 된다는 이들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었지만 후라이드교와 양념교 양측의 교도들이 일부 여기에 합세하게 되었고, 그 수가 적지 않자 후라이드 교황과 양념 총대주교는 회합을 갖고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이단으로 규정된 사유는,
- 천호진 . . . . 3회 일치
| 혁명검찰부 검찰관 역
| 현병대 수사관 노 원사
| 최 관장
- 최수범 . . . . 3회 일치
유달리 데뷔때부터 '''3'''과 관련이 많았던 그는 '''삼체'''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삼수범'''으로 불린다.
최수범은 숫자 3과 유난히 인연이 많았다. 다음은 그가 3과의 관련된 에피소드들이다.
* [[1월 3일]] 태어남. (이는 그레고리력으로 평년, 윤년 상관없이 3번째 날이다.)
- 최아라 (모델) . . . . 3회 일치
| 학력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졸업)
[[분류:199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
- 최은석 (배우) . . . . 3회 일치
|이름 = 최은석 (너는 모델 장미관씨처럼 야구방망이와 벽돌로 머리통을 아프게 죽여버릴 거야.)
'''최은석'''([[1973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너는 모델 장미관씨처럼 야구방망이와 칼로 머리통을 아프게 죽여버릴 거야.)<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542101 최은석-다음인물정보]</ref>
* 《[[야인시대]]》 (2002년, SBS) - 여러 조직원, 교도소 교도관 간부 역
- 최은희 . . . . 3회 일치
그리고 이 때 [[신상옥]]을 만났고,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계기로 신상옥 감독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김학성은 둘을 [[간통죄]]로 고소했으나, 김학성과 최은희는 [[사실혼]] 관계에 가까웠지 혼인신고는 하지 않은 동거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이 나온다. 자서전을 보면 당시 최은희는 김학성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 생활중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입양]]을 하였다, 신상옥은 이후 자녀를 보았기 때문에, 최은희가 [[불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가면서 1985년에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1986년 3월 13일, [[신상옥]]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해 10년 넘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9년에 영구 귀국했다.
- 최재성(배우) . . . . 3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흔히 [[최민수]]가 터프가이 컨셉 [[허세]]라고 욕먹지만, 당시에 허세가 아닌 진짜 독보적인 연예계 터프가이는 최재성이었다. 실제 연기자로서의 경력 이외에도 어릴때부터 [[복싱]]을 했고 아마추어 복싱 선수 타이틀을 갖고 있어서 [[연예인]]들의 무술실력 관련글들에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폭행이나 폭력 사건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생활]]은 깔끔한 편.
* [[1986년]] KBS 단막극 《TV문학관-젊은 느티나무》
- 최태영 . . . . 3회 일치
'''최태영'''(崔泰永, [[1900년]] [[3월 28일]] ~ [[2005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이다. 한국인 최초로 [[1925년]]에 법학 정교수가 되어 한국 근대 법학의 초기에 [[보성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상법·민법·헌법·국제법·행정법·법제사·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며 법학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여러 저서를 출간하였다.
학술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부터 [[1972년]]까지는 한국상사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술로 국내 최초로 상법과 관련된 《현행 어음·수표법》을 집필하였고,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77년]]에 출간한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단군]]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하였다. {{출처|날짜=2014-2-3|《[[삼국유사]]》의 ‘[[환인]](桓因)’은 ‘[[환국 (의사 역사학)|환국]](桓國)’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통해 잘 알려졌다.}} [[1989년]]에는 《한국 상고사 입문》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이 [[이병도]]와 공저한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정작 해당 책에는 이병도가 저술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90세 이상의 고령일 때도 활발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 추자현 . . . . 3회 일치
2012년 [[중국]] [[드라마]] '마랄여우적행복시광'에 [[중국]] 배우 [[조동혁]]과 함께 출연하여 연인으로 발전<ref>[http://entertain.naver.com/movie/now/read?oid=108&aid=0002595616 추자현, 조동혁과 4월 아닌 올 하반기 결혼 "일정 때문"] 스타뉴스. 2017년 03월 07일</ref>, 2016년 9월 연인 관계임을 알렸다. 2017년 1월 18일에 배우 조동혁과 혼인신고를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996073|제목=[룩@차이나] "조동혁♥추자현, 1월 18일 결혼" 中매체 관심 보도|언어=ko-KR|확인날짜=2018-03-26}}</ref>
... 석관음 역
- 캐딜락&디노사우르스 . . . . 3회 일치
본디 원작은 마크 슐츠[* [[피너츠]]의 작가와 성씨가 같지만 혈연관계는 아니다. 나중에는 슈퍼맨&배트맨 vs 에일리언&프레데터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다.]의 제노조익 테일즈(Xenozoic Tales). [[만화]]가 히트한 후 당시 애니메이션의 주 시청자인 미국의 10대 소년, 소녀들에게 맞게 원작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부분을 삭제하면서 내용을 변형시키고[* 그러한 부분들을 삭제하니 내용 자체가 안 이어져서 그냥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스토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제목을 바꿔서 [[애니메이션]]화한 것이 바로 캐딜락&디노사우르스이다. 이후 애니메이션을 베이스로 [[마블 코믹스]]에서 이걸 다시 만화화했으며, 또 이 만화를 [[캡콤]]이 [[벨트스크롤 액션게임]]화한 것 또한 캐딜락&디노사우르스이다. 본 항목에서는 게임 위주로 서술한다.
* 7스테이지(지하로) - 해상 도시→엘리베이터→도서관→연구소
* 8스테이지(최후의 싸움) - 유전자 보관실→하수구→동굴→최종 연구소
- 캡틴 울트라 . . . . 3회 일치
원래 배관공으로 돈을 못낸 심리학자 노인에게 자신의 흡연습관을 최면으로 치료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심리학자는 사실 외계인이었고, 최면을 통해 잠재된 초능력을 각성해 슈퍼히어로 캡틴 울트라가 되었다. 그러나 [[불]]에 관한 공포증 탓에 불을 보면 기절하게 되었다.
- 코난 월드 . . . . 3회 일치
[[만화]] [[명탐정 코난]]의 세계관. 현실과 비슷하지만,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다.
* 그 반면에 범죄에 관한 지능과 능력은 괴이하게 높다.
참고로 세계의 위험도와 인간의 광기와 말도 안되는 능력에 대해서는 명탐정 코난의 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콜만스코프 . . . . 3회 일치
버려진 마을답게 관리가 안 되어있다. 그 결과 모래로 뒤덮혀 버렸는데, 이걸로 유명해져서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다.
[[http://www.interafrica.co.kr/dbrm/view.php?id=route&area=south&country=6&category=6&no=42|아프리카 관련 여행사 "인터아프리카"의 콜만스코프 페이지]]
- 킹덤/506화 . . . . 3회 일치
* [[환의(킹덤)|환의]]군, [[왕분]]대에 파발이 온다. 이들은 도중에 마주쳤던 조군을 성공적으로 격멸하고 막 휴식에 들어가던 참이다. 파발은 열미성 공략이 시작되었고 산민족과 [[비신대]]만이 투입되었다고 알린다. 왕분은 예상과 다른 인선에 움찔한다. 부하 장수들은 자기들이 맡은 역할 때문에 비신대에게 선수를 뺏겼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 사이에 왕분은 조용히 자리를 뜬다. 관상이 어딜 가시냐고 묻자 중요한 전투에서 총대장 [[왕전(킹덤)|왕전]]이 이같은 지시를 내린 의도를 물으러 간다며 본대는 부상자 조치를 마친 뒤에 따라 오라고 지시한다. 한모대가 호위를 자청. 관상은 왕분의 핑계가 솔직하지 못하다며 그냥 비신대가 신경쓰여서 간다고 하시면 된다고 하지만 왕분은 대답없이 그대로 출발한다.
곧 관상도 "나도 비신대가 보고 싶다"며 본대를 부장 번양에게 떠넘기고 빠져나간다. 번양은 노발대발.
- 킹덤/507화 . . . . 3회 일치
* 각오를 다진 창인은 신들린 것처럼 적을 맞춘다. 화살 한 발에 적 하나. 심지어 지휘관만을 골라서 노리고 있다. 지휘관이 셋이나 화살 한 방에 가버리자 열미군도 저격수의 존재를 눈채지만 늦었다. 벌써 벽 위의 지휘관들이 줄줄이 죽어나갔다. 성벽 위는 혼란에 빠지고 일단은 조가족 쪽을 향해 응사를 해본다. 그렇지만 워낙에 빠르고 정확한 창인의 솜씨 덕에 성벽 위로 몸을 드러내는 것도 힘들다. 응사를 위해 잠깐 일어서기만 해도 화살이 어김없이 날아와 꽂힌다.
- 킹덤/514화 . . . . 3회 일치
* 오르도는 생각지 못한 난적의 등장도 "재미있다"고 표현하며 전의를 고조시킨다. 그런데 이때 조의 동군 본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고 보고가 들어온다. 그곳 사령관 [[조박]]이 이제야 미적미적 도착했다는 애기일 줄 알았으나, 오로지 조박은 국경을 넘어 연나라로 진격, "이"성을 공격하고 있다고 한다. 그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급보가 도착한다. 이성은 이미 떨어졌으며 그 뒤의 양성을 공격, 함락 직전이라는 낭보였다.
* 조의 총사령관 이목은 바람같이 행군을 거듭해 벌써 "난"성까지 도착했다. 예정보다 하루 가량 빠른 속도였다. 그는 여기서도 잠시 쉬기만 할 뿐 곧 출발할 거라며 급히 보급을 행한다. 난성에 도착해 보니 그 앞에 들어온 보고가 두 건 있었다. 하나는 사마상이 오르도를 격퇴했다는 것. 이로써 연군을 걱정할 필요 없이 진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다른 소식은 진군의 동향. 그런데 보고하던 성주는 자신도 미심쩍다는 듯이 양해를 구하며 그 내용을 전달한다.
모든 것이 파격적이다. 지휘관이 적의 백성들에게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모든 걸 다 뺏어놓고 "다른 성으로 가라"고 한다라? 어쨌든 백성들은 그저 죽이지 않고 놓아주는 것에 감격해서 왕전의 말에 따른다.
- 킹덤/518화 . . . . 3회 일치
둘째, 곧 [[순수수]]가 도착할 테니 대장직을 이임하라는 것이다. 이 지시는 공손룡의 부관들 사이에선 이견이 나오는데, 그가 장군이긴 하지만 내세울법한 전공을 세웠다고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대장직을 내놓게 된 공손룡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순수수를 "그 북쪽의 고아"라고 부르는데 무언가 아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셋째, 필요하다면 요양에 "틀어박힌" 주력 부대를 끌어다 쓰라는 것. 이 또한 부관들은 의문을 표시한다. "틀어박혔다"는 표현도 그렇지만, 지금도 공손룡군은 9만, 양단화군이 5만으로 숫적으로 우세하다. 그런데 증원을 부르라는건 숫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쪽이 불리할 거라 봤다는 것인데. 공손룡은 이목을 대신해 "이목님은 순식간에 최를 해방시켰던 산민족 군세의 실제 역량을 가늠하려 하시는 것"이라 설명해 부하들을 납득시킨다.
* 양단화군이 행동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공손룡군은 두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첫째는 "양단화군은 조군을 저지하기 위해 방어전"을 펼칠거라 생각했던 것. 그것은 뜻밖의 공격 시도로 보기좋게 빗나갔다. 방패와 창을 장비한 인족 보병들이 일사분란하게 조군으로 들이닥친다. 부관들이 동요하는 것을, 공손룡은 단칼에 조용히 시키고 이목이 위험시한 산민족 군세의 "힘"이란 어떤 것인지 지켜보기로 한다.
- 킹덤/530화 . . . . 3회 일치
새로 나타난 적의 정체는 비신대. 그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전령이 도착했다. 비신대의 1진 돌파. 기수와 그 부관들은 모두 흑양에서 비신대의 위력을 실감했고 그래서 신의 조치는 큰 효과를 봤다. 부관들은 하나같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술렁거렸지만 누구하나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 채 기수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기수도 기수대로 고민에 빠졌다. 흑양의 악연이 필살의 기동대가 되어 자기 목을 치러 오고 있다. 모두 [[왕전(킹덤)|왕전]]의 포석이다. 그러나 이 치가 떨리는 함정 속에서도 이점은 있었다. 적어도 적의 힘을 오판할 여지는 없다는 것.
* 정면의 마광군도 비신대의 출현은 뜻밖이었다. 부관들은 왕전의 안배가 비신대였던 것가하고 반쯤 실망했다. 마광이 그런 부하들을 달랬다.
- 타이라노 마사카도 . . . . 3회 일치
이 무렵 [[세이와 겐지]]의 시조 미나모토노 츠네모토가 무사시국에 부임한다. 무사시국(武蔵)을 다스리는 지방관 쿠니시로 부임하게 된 츠네모토는 무사시 국에 도착하자마자 조속히 토착 호족들에게 검주(検注)[* 이 무렵 쿠니시가 호족들에게 받는 '''[[뇌물]]''']를 실시하려 했다. 하지만 호족 무사시노 타케시바(武蔵武芝)가 정식 임관도 하기 전에 검주를 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반발하였는데, 격노한 츠네모토는 타케시바를 공격하여 약탈을 실시한다. 도주한 타케시바는 이 무렵 무용을 떨치던 [[타이라노 마사카도]]에게 '중재'를 의뢰하고, 겁을 먹은 츠네모토는 산으로 도주하여 틀어박혔다가 동행하였던 흥세왕(興世王)을 하산시켜 협상을 시작했는데 협상이 진행되던 도중에 타케시바의 군대가 츠네모토의 거주지를 포위하자 마사카도에게 살해당할까봐 두려워진 츠네모토는 그대로 교토로 도주하고, 흥세왕, 마사카도, 타케시바 등이 결탁하여 모반을 일으켰다고 보고한다.
관동지방을 제압한 마사카도는 신황(新皇)을 자칭하게 된다. 헤이안쿄(平安京)에 있는 조정에서 독립한 독자 정권의 수립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 템포라 . . . . 3회 일치
Tempora. [[영국]]의 [[정보기관]]인 [[GCHQ]]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광케이블]]을 해킹해 전화 통화, 인터넷 접속 내역, 이메일 등을 수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빼낸 정보는 30일 이상을 저장된 상태로 분류되고 분석되었으며, 미국 정보기관인 [[NSA]]에 공유되기도 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303662|국민일보 - 영국 정보기관, 대서양 광케이블 해킹… ‘템포라’ 프로그램 운용(한글)]]
- 토리코/364화 . . . . 3회 일치
* 이치류는 영혼세계에서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데 마치 네오와 닮아있다.''' 그는 "무언가가 태어나려 한다"면서 엄청난 식욕의 에너지를 감지한다.
* 이치류는 이것을 관찰하면서 "영혼세계에 조차 식욕은 존재한다"면서 식욕이란 진화의 촉매이고 생물은 이 식욕을 바톤처럼 이어받으며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소견을 밝힌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저것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라고 하는데, "아카시아님"은 저것이 어디서 온 무엇인지, 그걸 알고 싶어하셨을 거라고 짐작한다.
*토리코 안에 있는 적귀, 청귀, 흑귀도 이 "세포의 색"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토리코/365화 . . . . 3회 일치
* 블루 니트로는 그 가공할 힘을 '''팔왕이나 구르메 세포의 악마에 비견'''한다. 하지만 지로는 '''"재생기관"을 가진 인간'''인데, 인간의 몸임에도 '''"어둠의 세포"'''가 농축되어 있다는데...
* 지로가 낭왕 기네스와 관련되었을 거란 떡밥이 완전히 회수됐다.
* 지로에게도 "어둠의 세포"가 농축되어 있다는 말이 나왔는데, 이건 전회에 나왔던 "세포의 색" 떡밥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다.
- 토리코/374화 . . . . 3회 일치
* 아카시아는 GOD의 혀 공격에 정통으로 맞는다. 이 혀 공격은 지면을 뚫고 지구 반대편까지 관통할 정도로 강한 공격.
* GOD는 장난치듯이 혓바닥으로 지구 반대편을 관통하며 땅 속의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 오오타케가 발견한 이변은 토마츠와 연관됐을 거란 설이 있다.
- 토탈워: 쇼군 2 . . . . 3회 일치
외교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전투 도중 아군 부대가 패주하면 부관이 "Our men are running from the battlefield! A shameful display!"(우리 병사들이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입니다!)라는 대사를 치며 보고한다. [[https://youtu.be/U6zQ6ZqEqg0|그런데 일본풍 억양]] 때문에 "Shamefur Dispray"라고 불리며 [[밈]]이 된적이 있었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건물 . . . . 3회 일치
==== 관청(Magistrate) ====
==== 포병 사관학교(Artillery Academy) ====
* 친밀한 관계(Cordial Relations) 기술 연구 필요.
- 트로피코 4/인물 . . . . 3회 일치
Penultiomo. 대통령 각하의 충실한 보좌관. 아틀란티스 대학에서 페눌티모를 전공했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각하와는 애인 관계로 보인다. 초등학교를 열었을 때 늙은 선원도 얼굴이 빨개질만한 책을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가져와서 낭독하는 모습을 보인다.
국방부 장관을 임명하라는 제안을 할 때 대사를 보면 계획이 있다. "자유주의자 녀석들이나 범죄자, 그리고 짜증나는 청소년 녀석들을 쏴죽이는 계획"이. 이후에는 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축할 생각으로 보인다.
- 특촬물 . . . . 3회 일치
단어 그 자체의 의미로는 '''특수촬영물'''(特殊撮影物)의 약자. 넓은 의미로는 특수촬영기법이 사용된 모든 영상물을 말하지만,[* 오죽하면 [[닥터후]]나 [[히어로즈]]와 같이 특수효과로 점철된 [[드라마]]들도 특촬물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크게 보자면 틀린말도 아니긴 하다)--한 술 더 떠서 [[텔레토비]]도...--][* 대표적으로 몇 년 전 [[루리웹]]의 애니 게시판에서(여기선 특촬물 관련 글도 같이 취급한다) 일부 회원들이 저 두 작품을 두고 '이것도 특촬이다'라며 도배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가 잠시 동안 특촬 관련 게시글이 금지가 됐었다.] 일반적으로 '특촬물'이라고 하면 전대물, [[괴수]]영화 같은 일부 장르의 영상물에 한정된다. 특수효과를 뜻하는 약어인 SFX(Special Effect)가 영상물 전반의 이름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SF]]와 헷갈리지 말자! [[디워]]의 경우가 --애초에 이 영화 자체가 여러가지로 까이지만-- SF와 SFX를 구별 못한 대표적 사례로, SF영화라고 홍보했다가 엄청난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하나 알아 둘 것이, 특촬물은 대부분 아이들이 좋아하는 히어로물이기 때문에 만화와 같은 카테고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앞에 각주에서 언급한 루리웹의 애니 게시판도 그렇고 [[이글루스]]에서도 특촬 포스팅은 대개 [[애니메이션 밸리]]로 보내는 경우가 많은 등, 유독 애니 관련 커뮤니티에서 이 두 장르를 같이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도 특촬물을 특수 촬영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특촬물은 엄연히 '''실사이자 드라마'''이다. 특촬물 더빙도 외화 더빙에 해당된다.
- 페어리 테일/507화 . . . . 3회 일치
엘자가 두 사람을 타이르면서 끌어안는 장면 때문에 가슴만질래 드립을 떠올리는 사람도 꽤 있다. 사실 기존에는 쥬비아와 루시가 나타나서 두 사람이 무사한걸 보고 싸움을 멈춘다는 설이 대부분이었는데, 결국 두 사람이 나타나긴 했지만 싸움을 말린건 어디까지나 엘자.--다시 고개드는 엘자 진히로인설-- 엘자가 나온게 의외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따지고 보면 나츠와 그레이가 길드 안에서 가장 가깝고 깊은 관계가 있는 상대는 바로 엘자다. 어렸을 때부터 형제처럼 자란데다 엘자는 언제나 누나역할을 해왔기 때문. 특히 둘은 길드=가족이라는 관념이 가장 강한 멤버들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싸울 때 말린다면 엘자가 나서는 것도 당연하다.
엘자와 아이린의 관계 떡밥이 드디어 풀리기 시작했다. 모녀지간, 자매지간 등 여러가지 설이 있었지만 이번 주에 나온 "나는 너, 너는 나" 발언으로 평행세계의 엘자나 미래세계의 엘자가 아니냐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 페어리 테일/529화 . . . . 3회 일치
* 포격은 정확하게 명중하지만 아크놀로기아는 마법을 먹는 마룡. 조금의 타격도 줄 수 없었다. 곧 실탄병기로 바꿔서 공격을 가해보지만 기관총 정도로는 맞추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크놀로기아는 자잘한 공격 따위는 비웃으며 총알을 피해 속도를 높여온다. 크리스티나호 측은 공격을 멈추고 속도를 올려 더욱더 목표를 끌어들인다.
안나는 분명 이 시대로 오는 "문"을 만드는건 성공이었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이 문은 제레프가 만든 것이다. 그 문을 여는 역할은 안나 자신의 몫. 제랄은 제레프가 이 일에 관여했다는 것에 놀라지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제레프는 당시에도 "시간"을 연구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원하는 "과거"로 거슬러가는건 불가능했지만 그가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시절이다. 안나는 "출구"에 있을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아직 어린 멸룡마도사들을 키우는 역할로 선택되어 함께 미래로 오게 된다.
그리고 문이 이어진 현대에서 "출구"를 여는 것이 [[레이라 하트필리아]]였다. 그녀가 777년에 사망한 것도 이 사건과 관련된 모양이다.
- 페어리 테일/542화 . . . . 3회 일치
* [[루시 하트필리아]]는 마침내 페어리 테일 도서관에서 페어리 스피어 사용법이 담긴 책을 발견, 하르지온으로 향한다.
* 마룡의 공격이 매그놀리아 여기저기를 휩쓸면서 페어리 테일 길드도 휩쓸린다. 거기서 최후의 희망인 "페어리 스피어" 발동법을 찾고 있던 [[루시 하트필리아]] 일행이 무너지는 서가에 깔릴 뻔 한다. [[마카로프 드레아]]는 지상의 시설이 파괴됐을 뿐, 지하인 이 도서관은 안전할 거라며 작업을 속행 시킨다.
* 적어도 한 가지 문제는 막 해결되었다. 아크놀로기아가 매그놀리아를 뒤흔드는 와중에도 루시 일행은 임무를 완수했다. 한 차례 지진으로 지하도서관의 서가가 엉망으로 무너졌다. 다행이 일행은 무사했지만 [[레비 맥거딘]]이 루시가 보이지 않는걸 깨달았다. 그녀는 쏟아진 책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그게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던 페어시 스피어 발동법이 담긴 책이, 루시를 덮친 책더미 속에 있었던 것이다.
- 페이데이 2/하이스트/베인 . . . . 3회 일치
하베스트&트러스티 뱅크 내에 보관된 현금을 훔치는게 주 목표인 하이스트.
하베스트&트러스티 뱅크 내에 보관된 금괴를 훔치는게 주 목표인 하이스트.
>베인이 미술관으로 되돌아가길 바란다.
- 포스탈 리덕스 . . . . 3회 일치
플레이어는 정해진 구역 안을 돌아다니며 적들(경찰관, 자경단, SWAT, 군인 등등)을 보이는 대로 죽이면된다. 타조를 포함한 [[민간인]]들은 죽이던 말던 상관 없음. 90% 이상의 적이 죽으면 다음 스테이지로 갈 수 있다.
* 기관단총(1)
- 풍평피해 . . . . 3회 일치
풍평(風評, 뜬소문)으로 일어나는 피해를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재해나 사고에 관하여 부적절하거나 허위 보도가 일어났을 경우, 생산물이나 서비스의 질적감퇴, 문제를 염려하여 재해나 사고에 관련된 제품의 소비가 줄어들고, 그로 인하여 본래 재해나 사고의 책임에 관련이 없느 업자가 피해를 입는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 피너츠 모녀 . . . . 3회 일치
피너츠는 [[땅콩]]이며, 마치 하나의 땅콩 껍질 안에 들어간 두 개의 땅콩처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튼튼하게 연결된 모녀관계를 뜻한다.
단지 사이가 좋은 모녀를 뜻하는 말로 쓰이는 경우도 있으나, 인터넷에서 쓰일 때는 부정적인 뉘양스가 강하여 성인으로서 자립하지 못하고, 과잉보호나 [[공의존]] 관계에 있는 모녀관계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 하이큐/209화 . . . . 3회 일치
* 타케다는 좋게 타일러서 돌아오게 하려고 하는데, 그때 전화 너머로 "볼보이 한 명 늘어나는건 상관없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 한편 체육관에선 갑자기 등장한 히나타를 놓고 설왕설래 중.
* 히나타는 조금 충격 받은 것 같았는데, 체육관으로 슬금슬금 나가더니 "포지션은 볼보이. 잘 부탁합니다."라고 힘차게 자기 소개한다.
- 하이큐/233화 . . . . 3회 일치
* 선수들은 긴장감은 떨쳤으나 달라진 체육관 환경에 초반 고전한다.
*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전일본 유스 합숙이 시작되던 겨울 무렵부터 봄고 대비 훈련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야마가타의 니시키야마 고교는 감독이 대학 선배라는 인연 덕에 성립. 니시고가 봄고에 갔을 때도 어떤 느낌이었는지 확인해봤다. 그 결과 우카이 코치가 걱정하는 의외의 난관은 "천장"과 "바닥". [[타케다 잇테츠]] 고문과 우카이 코치는 막판까지도 너무 높아진 천장, 감촉이 다른 코트 때문에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다.
* 타케다 고문은 배구는 공간 인식 능력이 필수불가결한 경기이니만큼 긴장감과 낯선 체육관 탓에 경기감각이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현재 선수들의 공간 인식 능력은 평소보다 현저한 듯 한데, 그건 특히 초정밀 세트를 올리는 카게야마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 하이큐/235화 . . . . 3회 일치
* 봄고 첫번째 괴짜 속공. 벼락같이 내리 꽂히는 속공으로 체육관이 일순 고요해진다. 적응을 마친 [[카게야마 토비오]]는 기다려준 팀원들에게 말한다.
관중석에서 보고있던 카라스노 출신자들은 사와무라의 실력이 올라갔다며 감격한다.
* 상식을 초월한 카게야마의 파인 플레이에 배구를 잘 모르던 관중들까지 들썩인다. 특히 카게야마가 서툴다고 깔봤던 커플은 서로 카게야마를 칭찬하기에 바쁘다. 중계진은 새삼 카게야마가 전일본 유스에 지명될 정도로 유망한 선수라고 추켜세우고 호흡을 맞추는 히나타 또한 "잘 쳤다기 보다도 공중에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결성한지 1년도 안 된 콤비라고 볼 수 없을 정도라고 칭찬한다. 이와중에도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방금 플레이에 불만이 있는지 서로 옥신각신하는데.
- 하이큐/242화 . . . . 3회 일치
*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졸업생들은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며 그간 3학년들의 인내와 노력에 감격한다.
3학년들의 활약을 보며 관중석의 카라스노 졸업생들은 그들이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된 그들이 봄고 대회에서 사활을 걸고 활약하고 있다.
* 관객석에서는 다크호스로 떠오르는 카라스노의 활약 상으로 떠들썩하다. 대부분 1학년 괴짜 속공 콤비나, 레귤러 중 1, 2학년 비중이 높은 점을 화제로 삼는데 아쉽게도 3학년들의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 하이큐/243화 . . . . 3회 일치
* 치열했던 1회전은 [[카라스노 고교]]의 완승으로 끝났다. 인터넷으로 관전하고 이케지리가 컴퓨터로 시청 중에 카라스노의 승리가 확정되자 환호성을 지른다.
* 양팀은 다시 코트에 나란히 도열해 악수와 인사를 나눈다. 관객석의 바보커플은 이번엔 후쿠로다니 학원의 경기가 보고 싶다며 E코트로 간다.
* 카라스노는 도시락을 먹으며 [[네코마 고교]]의 경기를 관전한다. 네코마의 상대는 코치현의 키요카와 고교. 3학년 WS 야마자키 료지가 에이스를 맡고 있다. 신장 183cm의 스파이커. 상당히 활약하며 네코마의 블록을 공략하고 있다. 아즈마네와 스기와라가 굉장하다고 평할 정도의 기량이지만, 사실 봄고 대회까지 오면 굉장하지 않은 팀도, 굉장하지 않은 선수도 없다.
- 하이큐/249화 . . . . 3회 일치
* [[미야 아츠무]]의 서브로 경기가 시작. 아츠무의 서브는 소문대로 날카롭지만 이나리자키의 응원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 덕에 2회차 서브는 빗나간다.
이나리자키 고교 정도는 아니지만 [[카라스노 고교]]도 관중의 시선을 모으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히나타 쇼요]]와 [[카게야마 토비오]]의 괴짜 콤비는 카라스노를 잘 모르는 사람도 주목할 정도로 별나 보인다. 특히 히나타의 점프력은 이나리자키도 체크하는 요소. 이나리자키의 [[오지로 알랭]]은 특히 눈여겨 본다. [[스나 린타로]]도 표현은 하지 않지만 눈을 돌리지 않는다. 사실 히나타의 점프는 어제를 기점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호시우미 코라이]]의 점프를 연상하며 자세를 바꿔보고 있다. 히나타는 방금 전 점프는 괜찮은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흘러가는 느낌"이 난다고 아쉬워한다. 다시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하지만 팀이 서브 연습으로 바꾸면서 기회를 놓친다.
* 아츠무가 위치에 서자 이나리자키의 "음악단"이 사기를 고양하는 박자를 연주한다. 그런데 아츠무가 주먹을 쥐는 순간, 지휘자의 지시처럼 일제히 연주가 멈춘다. 커다란 체육관이 정적에 휩쌓인다. 카게야마나 [[츠키시마 케이]]는 그것을 썩 달갑지 않게 바라보지만 히나타는 "저거 멋있다"고 생각하며 구경하는 기분이다.
- 하이큐/255화 . . . . 3회 일치
* 그리고 이번 경기는 전일본 남자 대표팀의 감독 "히바리다 후키" 감독도 관람 중이다. [[하이큐/210화|카게야마의 전일본 유스 합숙]]에서도 감독 역할을 맡기도 했던 인물이다. 동행한 코치가 카라스노의 10번, 히나타를 거명하며 "키는 작지만 득점율이 높다."고 평한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필살기가 카피 당해서 풀이 죽은거 같다고 말하는데, 히바리다 감독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히나타는 카게야마 없이는 별다른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앞으로 카게야마하고만 선수생활을 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괴짜 속공을 아츠무도 올릴 수 있다는게 증명됨으로써, 반대로 말하면 히나타는 카게야마 없이도 그 속공이 가능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 이어지는 공격. [[마지로 알렝]]의 스파이크. [[니시노야 유]]가 받아낸다. 카게야마는 튀어오른 공을 곧바로 세트업, 두 번째 괴짜 속공 시도다. 불규칙한 궤도지만 아츠무의 시야를 벗어나진 못한다. 자신이 직접 리드 블록을 시도하는 아츠무. 그런데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체공하는 히나타의 눈이 뻗어오는 손아귀들을 뚫어지게 관찰한다.
* 관람 중인 [[호시우미 코라이]]가 방금 플레이는 요행이 아니고 정확하게 "보고" 플레이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 플레이로 우카이 코치도 안심했다. 그도 미야 형제의 괴짜 속공을 크게 우려하진 않았지만, 선수들의 멘탈에 대해서는 조금은 우려했던 바였다. 하지만 카게야마가 "괜찮다"고 했던건 허세가 아니었다. 그는 최선의 토스를 올릴 뿐이고 이후의 일까진 자기가 어쩔 수 없다는걸 확실히 체득했다. 옛날의 카게야마라면 그것까지 자기가 해결하려고 안달을 부렸을 거라고, 우카이 코치는 생각했다.
- 하이큐/257화 . . . . 3회 일치
* 승부의 관건은 미야 형제가 후위로 내려갈 때까지 얼마나 실점을 막는다. 여기서 히나타가 적극적인 리드 블록 가담을 승부수로 삼는다.
* 이나리자키의 첫 TO에서 코치가 이런 방침을 전원에게 전달한다. 카라스노의 괴짜 속공은 히나타의 기동력을 전제로 언제 어디서 어떤 각도로든 때려넣는게 장점. 하지만 미야 형제는 오사무의 원래 포지션인 우익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히나타가 아츠무를 전담마크하고 카게야마와 [[타나카 류노스케]]가 좌익과 센터를 리드 블록으로 막는 걸로 대응해본다. 히나타가 오사무를 얼마나 틀어막느냐가 관건인데, 히나타가 제대로 도움닫기만 하면 도달점이 팀내에서 가장 높고 반응도 빠르니 기대해볼만하다.
츠키시마의 지적처럼 우카이 코치도 큰 기대를 걸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블록은 [[다테 공업 고교]]의 그것처럼 어떤 공격이든 두 장 이상의 리드 블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카라스노는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미야 형제의 속공에 휘말려 블록이 분산되는 것. 즉 이 작전은 미야 아츠무가 후위로 내려갈 때까지 최대한 실점을 줄이는데 역점을 두었다.
- 하이큐/263화 . . . . 3회 일치
* 꼭 넣어야 했던 1점. [[타나카 류노스케]]가 혼신을 담은 스파이크는 [[이나리자키 고교]]의 빈틈없는 블록을 넘지 못하고 사이드 라인을 넘긴다. 이나리자키의 득점. 스코어는 25 대 25 듀스. 흐름이 끊기는 듯한 실점. 동료 선수들의 얼굴도 관중들도 타나카를 응원하는 [[아마나이 카노카]]도 낭패한 빛이 떠오른다. 노헤비 학원의 [[다이쇼 스구루]]는 방금 플레이가 단지 동점을 허용한게 아니라 더 위험한게 있다고 봤다. 그것은 "이나리자키의 블록이 순조롭게 압박을 쌓고 있다"는 것. 그점이 노출된 것이다. 이는 양팀 모두에게 큰 영향을 준다.
* 좋은 유명세는 아니지만, 관중석에서 "빡빡머리"라는 이름으로 타나카가 자주 오르내렸다. 바보 커플 중 남자 쪽은 결정적으로 컨디션이 망가지기 전에 타나카를 빼야 한다고 말했다. 가차없는 말 같지만 여자 쪽은 더 했다. 이미 망했으니 당장 빼야 한다는 것. 하지만 잔인한 것에 가까운데다 현 상황에서는 교체도 어렵다.
* 그러나 츠키시마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그가 택한건 아즈마네. 백 어택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았다. 관중석의 [[보쿠토 코타로]]와 [[아카아시 케이지]]도, 다이쇼와 미카, 그리고 적측인 린타로도. 벤치에서 타나카의 건재를 자신하던 2학년들도. [[우카이 케이신]] 코치, [[타케다 잇테츠]] 고문도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입에 올릴 필요도 없었다.
- 하이큐/265화 . . . . 3회 일치
* 야쿠 만큼은 아니지만 카이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 코즈메는 원채 그런 성격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정말로 싫었다면 진작 관뒀을 거라고 말한다. 마침 곡절 끝에 음료를 쟁취한 코즈메가 이쪽으로 온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쿠로오가 질색을 했다. 수면의 질을 명목으로 자기 전에 게임은 금지시켜 둔 터였다. 엄마같은 참견이었다. 코즈메는 이쪽이 나누는 대화를 전부 들은 모양이다. 쿠로오의 잔소리를 무시한 채 "진짜 그만두고 싶어지면 그만 둔다"는 말을 꺼냈다.
* 봄고 2일차. 카라스노 고교가 [[이나리자키 고교]]를 맞아 1세트 승리를 거머쥐기 30분 전. 카라스노의 괴짜 콤비가 괴짜 속공을 꽂으며 B코트의 관중석 분위기에 불을 질렀다. 여친 미카와 동행한 노헤비 학원의 [[다이쇼 스구루]]는 본래 C코트에서 진행 중인 네코마 고교의 경기를 보던 중이었다. B코트 쪽에서 환호성이 오르자 미카가 먼저 그쪽 분위기가 달아올랐다고 말하자 다이쇼도 그쪽을 신경쓰기 시작했지만 당초 관전 포인트는 네코마였다.
- 하이큐/272화 . . . . 3회 일치
* 긴지마의 2회차 서브. [[아즈마네 아사히]]의 리시브로 공은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카게야마는 [[타나카 류노스케]]에게 세트업. 타나카는 좌측에서 이나리자키의 [[미야 오사무]], [[스나 린타로]]의 블로킹을 따돌리며 우측으로 꽂아넣는다. 네트에 바짝 붙은 스파이크. 한동안의 침채를 씻어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중계진도 1세트 이후부터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다고 호평. [[츠키시마 케이]]의 서브 순서에서 선수교체. 츠키시마가 빠지고 [[스가와라 코시]]가 투입된다. 로테이션으로 [[니시노야 유]]가 빠지고 히나타가 진입. 스가와라는 실컷 두들겨 맞은 니시노야에게 "원수를 갚아준다"고 농담했지만 "저 아직 안 죽었습니다"라는 신경질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엔노시타 치카라]]는 스가와라가 빠르게 투입된 이상 [[키노시타 히사시]]가 나갈 차롄 없겠다며 내심 아쉬워했으나 정작 키노시타는 머릿속으로 25 번째 서브 에이스를 따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멈추지 않는다. 투입 여부와 상관없이 준비는 완료.
* [[오오미 타로]]는 오지로에게 "천천히 가자"고 지시한다. 이나리자키의 서브. [[스나 린타로]]와 교대해 1학년 서버 리세키가 투입된다. 이나리자키에선 그리 유명한 선수는 아니다. 중학교 시절엔 만년 벤치 신세에 딱 한 번 핀치 서버로 기용됐다가 서브 미스로 경기를 말아먹은 전력이 있다. 고등학교에선 강호 이나리자키에 들어온 건 좋으나 여전히 기회는 적었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공산도 있다. 미스하면 본전도 없다, 이런 부담을 안고 "일단 들어가는 서브"라는 안전빵을 택한다. 하지만 이게 패착이 됐다. 우선 자군 벤치에서부터가 시들한 반응. 무난하게 아사히에게 떨어지는 것을 안전하게 리시브, 히나타의 스파이크로 이어지는데 하필이면 그게 리세키가 있는 위치로 떨어지면서 리시브까지 실패하고 만다. 간만에 손맛을 본 히나타가 기뻐날뛰려는데, 이나리자키 관중석에서 들리는 굉음으로 뻘쭘해진다. 이나리자키의 응원단이 자군 서버의 실수를 "볼보이는 안 불렀다"고 극언해가며 까대는 소리였다. 대부분 관중들은 딱히 실수한 것도 없는 자기편 선수를 디스하는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바보커플의 여자 쪽은 단숨에 알아챘다. 이른바 "이나리자키 도깨비 응원단". 소심한 플레이를 인정사정없이 욕하는 묘한 기질이 있다. 사실 프로도 아닌 고교 선수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장외플레이. 적이라도 같은 서버인 [[야마구치 타다시]]나 키노시타마저 기를 죽일 정도로 무자비한 야유였다. 그리고 이 야유는 의외의 인물도 자극하는데, 바로 카게야마였다.
- 한용덕 . . . . 3회 일치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으나 [[대전광역시|대전]]으로 이주하였다. 대전천동초등학교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하여 충남중학교를 거쳐 [[북일고등학교]]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야구인)|김영덕]]과 인연을 맺게 된다. [[북일고등학교]] 시절 포지션은 [[유격수]]로 [[북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 때 어려워진 가정 환경과 무릎 관절염으로 인해 [[야구]]를 포기하고 대학도 자퇴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01109 사회인 선수 → 프로 무대‘연습생 신화’] 《대전일보》, 2007년 4월 23일 작성</ref>
[[동아대학교]] 중퇴 이후 병역을 마쳤으나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선수로서의 꿈을 이어 가던 중 [[북일고등학교]] 시절 은사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야구인)|김영덕]]의 주선으로 [[1987년]] 9월 [[빙그레 이글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2553 무관의 투수왕 '한용덕'] 《오마이뉴스》, 2006년 9월 27일</ref>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 주는 힘겨운 [[신고선수]] 시절을 보내고 2년 뒤에서야 비로소 정식 선수로 승격되었다.
아주 빼어난 선수였으나 수상 경력이 전무해서 무관의 투수왕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 한진희(1949) . . . . 3회 일치
서민 가장 전문 배우 취급을 받는 [[장용]] 과 대비되는 점도 인상적이다. 몇몇 드라마에서 [[사돈]] 역할로 많이 나오는데, 직접 대면하는 씬은 적다. 이 경우 보통 한진희의 집은 부잣집이고 장용의 집은 가난한 집. 한진희는 중간에 (출생의) 비밀 폭로나 부하의 배신, 사업 실패로 인해 충격을 받아서 심혈관계 질환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많다. 또한 혼외정사로 밖에서 애 낳아서 들여오는 아버지 역도 자주 맡는다.
[[장용]]과는 [[동양방송|TBC]] 선후배 관계기도 하고, 시간 차이는 많이 나지만 [[동화약품]]의 까스[[활명수]] 모델로 같이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때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한진희가 한 대사.
[[리멤버 - 아들의 전쟁]]에서는 [[남일호]]라는 [[범죄자]] 블랙기업인을, [[문화방송|옆 동네]]의 내일도 승리에서는 천사 그 자체인 자상한 아버지 [[서동천]] 회장님을 연기하는데 이중인격이 아닐까 할 정도로 완전 두 캐릭터가 성격이 반대이다. 분명 동일인물이 연기를 하는데도 소름끼칠 정도로 [[서동천|절대 선]]과 [[남일호|절대 악]]으로 분리되어 있다. [[남일호]]가 한 짓을 [[서동천]] 회장님이 알면 참 볼만해질 것이다. 또한 [[남일호]]가 한 짓을, [[금 나와라, 뚝딱!]]의 [[박순상]]이나, [[왔다 장보리]]의 [[이동후]]가 봐도 볼 만해지실 것이다. 참고로 한진희보다 선배급 탤런트인 [[이정길]]도 2015년 즈음에 동시 방영된 내일도 승리의 전작인 이브의 사랑에서는 [[남일호]]처럼 악하게 생긴 악덕 블랙기업인 [[구인수(이브의 사랑)|구인수]] 회장을, 9월 쯤 방영된 [[내 딸 금사월]]에서는 [[서동천]] 회장처럼 인자하게 생기시고, 자상하고, 도덕관이 투철하고 투명한 생각을 가진 [[신지상]] 회장님을 연기한 적이 있다.
- 핫라인 마이애미/등장인물 . . . . 3회 일치
매 챕터가 끝날 때 마다 만나는 인물. 마트, 피자집, 비디오 대여점, 술집 같은 여러가지 사업을 하고있으며 자켓에게 여러가지 공짜 서비스를 해준다. 자켓과 친한 관계로 보인다.
양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자켓에게 맞서지만 자켓이 던진 단검에 의해 양 손을 못쓰게 된다. 이후 권총으로 자살.
챕터 19에서 재등장. 가면쓴 사람들에게 지령을 내리고 있던건 이들이었다. 이들은 국수주의자로, 러시아[* 배경이 1989년 이므로 아직 소련일 때.]와 미국의 외교관계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러시아 마피아들을 습격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있던 것. 이 사실은 퍼즐을 모으고 맞춰야만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들은 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다.
- 허위 . . . . 3회 일치
||<#ffd700> 사망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경성 감옥]] ||
||<#ffd700> 본관 ||[[김해 허씨]](金海 許氏) ||
호는 왕산(旺山)이다. 1855년 [[경상도]] [[구미시|선산군]] 하고면 임은동(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허씨|김해]].
- 헌터X헌터/369화 . . . . 3회 일치
* 제 9왕자 할겐부르그는 사설병 둘을 보냈다. "세쥬르"라는 안경잽이 남자와 검은 머리의 "유히라이"라는 남자. 할겐부르그는 계승전에서 빠지기로 했지만 자신을 비롯해 소속병 전원의 손등에 "깃털문양"이 나타나자 예사일로 느끼지 않았다. 분명 "넨수"가 관련되었다, 그렇게 직감했다. 그 정보를 유포한 와블 왕자측과 접촉해 이 깃털문양의 실체를 밝히는게 목표. 그걸 위해서라면 이쪽의 정보를 전부 공개하는 것도 상관없다. 세쥬르는 알아볼 필요도 없이 할겐부르그의 넨수일 거라고 짐작한다. 유히라이도 동감한다. 이 문양은 왕자가 말하는 "각오의 각인" 그 자체다.
* 첫 정찰의 성과는 놀라웠다. 헌터 협회 소속 경호원은 당연히 넨능력이 있겠지만, 그를 제외해도 네 명이나 더 있었다. 못 쓰는 척을 하고 있다. 그들이 그저 잠복이나 하자고 와있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만일 자신과 "같은 임무"를 받아온 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들이 먼저 능력을 발동한다면 자신도 적극적으로 "방어권"을 발휘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는 녀석들이 어떤 면상을 숨기고 있을지도 뻔히 알았다.
- 현석문 . . . . 3회 일치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될 때에, 현석문은 [[관아]]에 [[자수]]하기를 원했지만, [[선교사]]들이 그를 말렸고 살아남아서 교우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현석문이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문을 면제 받았다고 하였다. 어쨌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관찬 기록(《[[헌종실록]]》)에 따르면, 현석문은 [[1846년]] [[9월 19일]]([[음력 7월 20일]])에 [[참수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관찬 기록(《[[승정원일기]]》)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군문효수형]]도 선고받았다고 전한다.
- 현소환 . . . . 3회 일치
'''현소환'''(玄昭煥, [[1937년]] [[8월 1일]] ~ [[2018년]] [[7월 28일]])은 [[연합뉴스|연합통신]]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현재는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연합통신]] 사장 재직 당시 [[YTN]] 설립에 관여했지만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1959년)|김현철]]씨가 YTN 초대 사장에 [[김우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을 앉히기 위해 현소환 당시 연합통신 사장에게 사퇴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 현실문화사 . . . . 3회 일치
이후 "현실초점"이라는 이름의 계간지를 발간했다. 해당 잡지는 창간호에서 "우리 사회 내부의 무질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욕구 분출과 과격행동들이 빚어낸 민족의 재난을 경계하고 올바른 국가관·가치관을 뿌리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잡지 창간 목적을 밝혔다.[*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1990년 10월 9일자 - 보안사 잡지사 운영] 해당 잡지의 내용은 재야와 [[운동권]]의 논리를 반박하는게 주를 이루었다.
현재 현실초점 1권을 국회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http://academic.naver.com/search.nhn?field=3&_id=1&query=%27%EA%B6%8C%ED%98%B8:%ED%98%84%EC%8B%A4%EC%B4%88%EC%A0%90%201%EA%B6%8C%27|네이버 전문정보의 검색결과]]도 참조할 것.
- 현아 . . . . 3회 일치
|관련활동 = [[원더걸스]], [[트러블 메이커 (음악 그룹)|트러블 메이커]], [[포미닛]], [[트리플 H (음악 그룹)|트리플 H]]
2011년 12월에 [[현아]]는 같은 소속사의 가수이자 [[비스트 (음악 그룹)|비스트]]의 멤버 [[장현승]]과 함께 유닛 그룹 [[트러블 메이커 (음악 그룹)|트러블 메이커]]를 결성했다.<ref>{{뉴스 인용|제목='뮤직뱅크' 장현승-김현아 '트러블메이커' 컴백 예고|확인날짜=2011-11-26|url=http://reviewstar.hankooki.com/Article/ArticleView.php?WEB_GSNO=10013323|출판사=리뷰스타|저자=김혜정|날짜=2011-11-25}}</ref> 트러블 메이커는 12월 1일 첫 미니 앨범 《[[Trouble Maker (EP)|Trouble Maker]]》를 발매했고, 동명의 타이틀곡 〈Trouble Maker〉로 활동을 시작했다. 〈Trouble Maker〉는 좋은 반응을 얻으며 [[K-Pop 빌보드 핫 100]] 최고 2위까지 올라갔고,<ref>{{웹 인용|제목=BILLBOARD K-POP HOT100 12월 3주차|출판사=[[빌보드]]|url=http://www.billboard.co.kr/v1/chart.php?t=3&query=&pubdate=2011-12-14|확인날짜=2011-12-12}}</ref> [[가온 디지털 차트]]에서는 1위를 했다.<ref>{{웹 인용|제목= 2011년 12월 다섯째주 디지털 종합차트|출판사=가온 차트|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total/list.gaon |확인날짜=2011-12-12}}</ref> 그러나, 〈Bubble Pop!〉과 똑같이 공연 중 안무 선정성 문제가 일어나 결국 안무를 수정했다.<ref>http://star.moneytoday.co.kr/view/stview.php?no=2011120913181888325&type=1&outlink=1</ref> 2012년 3월 현아는 [[스파이시칼라]]와 손을잡고 현아 위드 스파이시칼라라는 브랜드를 론칭했고, 50년대 낙관주의와 60년대 레트로 빈티지 무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자신의 이름 내건 브랜드 론칭|확인날짜=2012-03-15|url=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2&c1=02&c2=02&c3=00&nkey=201203141127323&mode=sub_view|출판사=bntnews|저자=이형준|날짜=2012-03-14}}</ref> 2012년 여름에는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싸이 강남스타일, 유재석 노홍철 김현아 ‘3인 3색 댄스 화제|url=http://www.interview365.com/news/27962|출판사=인터뷰365|저자=장민혜|날짜=2012-07-13|확인날짜=2012-08-07}}</ref> 2012년 8월 15일에는 〈강남스타일〉을 여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오빤 딱 내 스타일〉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ref>{{뉴스 인용|제목=싸이·김현아, '오빤딱내스타일' 뮤비공개..섹시·상큼↑|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81512060525950&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길혜성|날짜=2012-08-15|확인날짜=2012-08-05}}</ref> 〈오빤 딱 내 스타일〉 뮤직비디오는 [[유투브]] 조회수 1억 건을 넘기며 [[소녀시대]]의 〈[[Gee (노래)|Gee]]〉를 제치고 〈강남스타일〉에 이어 유튜브 역대 가장 많이 본 동영상 한국 순위 2위를 차지하고 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오빤 딱 내 스타일' 1억뷰 돌파..싸이 효과!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102111121506368&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윤성열|날짜=2012-10-21|확인날짜=2012-10-21}}</ref> 2012년 10월 21일에는 두 번째 솔로 미니 앨범 《[[MELTING]]》을 발매했다. 타이틀곡 〈Ice Cream〉은 [[가온 디지털 차트]] 1위에 올랐고, [[코리아 K-Pop 핫 100]]에서는 최고 6위에 올랐다. 2012년 12월 29일 SBS 《[[SBS 가요대전|가요대전]]》을 앞두고 현아는 [[효린]], [[전효성]], [[니콜 (1991년)|니콜]], [[나나 (가수)|나나]]와 함께 대즐링 레드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27일 [[용감한 형제]]와 똘아이박이 작곡한 〈이사람〉을 발매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효린]]·[[전효성]]·[[니콜 (1991년)|니콜]]·[[나나 (가수)|나나]], SBS '가요대전'서 대즐링 레드 결성|url=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212280748241118|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최두선|날짜=2012-12-28|확인날짜=2014-01-08}}</ref>
|rowspan="2"|베스트 댄스 퍼포먼스 솔로<ref>{{웹 인용|url=http://mama.mnet.com/kr/winner.asp?broady=2010|제목= 2010 MAMA 수상자 및 후보자|웹사이트=[[Mnet]]|확인날짜=2011-12-09}}</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2191151|제목=슈퍼주니어 ‘MAMA’ 3관왕, “우리는 미운오리…팬들 감사하다”(종합)|출판사=[[네이버]]|날짜=2011-11-29|확인날짜=2011-11-30}}</ref>
- 현재현 . . . . 3회 일치
* '''최종계급''' 법무관
* 1973년 해군 법무관으로 복무한 뒤 1975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
* 2011년 Van Fleet상 수상. 현재현 회장은 한미재계회의를 이끌며 한미FTA체결과 비자면제 프로그램 가입, 한미간 특허심사 하이웨이제도 도입 등 한미 양국의 경제협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수여하는 ‘2011 밴 플리트상’을 수상했다. 밴 플리트 상은 한미 우호증진과 양국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 공이 큰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한국인 중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최종현 SK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 받았고, 미국인으로는 조지 W. 부시,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대사, 헨리 키신저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등이 수상했다.
- 현제명 . . . . 3회 일치
[[대한민국]]의 음악가, 성악가(테너), 작곡가. 1902년 12월 8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남산동(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남산동) 출신.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계 무디성경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이수하고,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다가, 독립 계몽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친일 성향 단체인 대동민우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친일 찬양적인 성향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고향]]인 대구 중구에는 '현제명 나무'라고,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팝나무]]가 있는데, 대구에서는 친일파인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나무가 있는 것이 싫어서 없애버리자고 난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6&aid=0010494119|관련 보도]]
- 홍병선 . . . . 3회 일치
[[한성부]]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한학을 수학했다. 일본 기독교계에서 설립한 신교육기관인 경성학당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08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시샤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911년]] 귀국했다.
홍병선은 신흥우와 함께 [[1927년]] [[덴마크]]와 [[미국]]의 농촌사업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농촌 협동조합 및 구락부를 조직하는 사업에 열중했다. 덴마크식 농촌사업을 위해 [[1931년]] 서울 [[신촌]]에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고등농민수양소를 세우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홍병선과 농촌진흥운동을 함께 했던 [[윤치호]], 신흥우 등이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전쟁 지원을 빌미로 적극적인 친일파로 돌아서면서, 홍병선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한국 YMCA가 폐쇄되어 일본 YMCA 산하로 흡수 편입될 때 주역이었고, [[1938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쟁협력 강연에 [[정춘수]], [[박연서]], [[이동욱 (목회자)|이동욱]] 등 감리교 목사들과 함께 연사로 참가했다. 같은 해 YMCA가 발행하는 《청년》에 〈기독교도와 시국〉이라는 글을 발표해, 기독교도의 신사참배는 황국신민으로서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당연한 것이라며 [[신사참배 강요]]에 호응하는 주장을 편 일도 유명하다.<ref>{{서적 인용
- 홍서범 . . . . 3회 일치
|학력 = 김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
|관련활동 =
* 김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
- 홍세화 . . . . 3회 일치
그러나 [[1967년]] [[10월]] 자퇴하였다. 그 뒤, 다시 재수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다시 복학하였으며,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ref>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사회과학대학 소속으로 변경</ref>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체류 중 [[망명]]하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망명자로 인정받았고, [[1982년]] 이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망명생활을 하며 집필, 기고활동에 종사하였다. [[1995년]] 자서적 고백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발간하고, [[1997년]] 《[[르 몽드]]》에 실린 기사 묶음인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하여 출간했으며, [[1999년]]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펴냈다.
== 관련 항목 ==
- 황두성 . . . . 3회 일치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를 중퇴하고 [[1997년]] [[포수]]로 [[삼성 라이온즈|삼성]]에 입단했다가 시력이 좋지 않아 당시 [[장호연]] 코치의 제안으로 [[투수]]로 전향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77&article_id=0002712347 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 - 아시아경제</ref> 그러나 눈에 띄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1999년]] [[KIA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에 3:1 현금 트레이드([[양준혁]]·[[곽채진]]·황두성↔[[임창용]])되었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812300034 황두성-이재우, '늦깎이의 성공시대' 열 것인가] 《Osen》 2008년 12월 30일</ref>
* [[성균관대학교]](중퇴)
- 황옥 (1885년) . . . . 3회 일치
1923년 [[김상옥 (1890년)|김상옥]]이 일으킨 [[종로경찰서 투폭사건]] 이후에 사건 관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중국으로 출장을 가서 [[톈진]]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났고,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수령, 김시현, 김재진, [[권동산]] 등과 함께 물건을 [[단둥]], [[신의주]]를 거쳐 [[경성]]까지 밀수했다.
황옥은 재판정에서 자신이 일본 경찰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프락치]]로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죄를 선고받고 1924년 징역 12년형에 처해졌다([[황옥 경부 폭탄사건]]). 1924년 [[김지섭]]이 [[도쿄 어소 투폭사건]] 때 사용한 폭탄도 황옥이 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여 세관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가 1928년 5월 재수감, 1929년 다시 가출옥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반민특위]],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 유키치]]는 황옥이 자신의 재가를 받은 작전에 따라 활동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김원봉과 김시현은 황옥이 의열단원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상호 증언이 엇갈리고 있기에 황옥이 의열단원이었는지, 일본 경찰의 프락치였는지, 또는 양자에 모두 발을 걸친 [[이중간첩]]이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83년 [[서울대학교]] 도서관 건물에서 추락사한 민주화운동가 [[황정하]]가 황옥의 손자이다.
- 황치열 . . . . 3회 일치
* 2015년 9월 6일 스페셜 뮤직 페스티벌 with [[노을]], [[하동균]], [[이정]] 잠실실내체육관
|문화체육부장관상
* 2015년 10월 31일 미래창조과학부 주관 '스마트 쉼 캠페인'에서 홍보대사로 위촉
- 후쿠오카 예비교생 살인사건 . . . . 3회 일치
피해자와 범인은 특별히 관련성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피해자가 스토커 상담 등을 했던 적은 없고, 같은 예비교의 동급생 이상으로는 볼 수 없는 관계였던 것으로 같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남학생의 발언에 따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잘 모르지만 예비교에서는 평범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고, 데이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범인은 평소 폭력적이거나 흉폭한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 히어로(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 . . . 3회 일치
활동 내용은 범죄와의 싸움이나 재해현장에서 구조 활동 등도 포함되며 심지어 요리 분야에도 히어로가 있는 듯 하다. 이러다보니 활동양상에 따라 히어로들의 전문 분야도 달라져서 빌런 진압 전문, 재해 구조 전문 등 차이가 있다.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로부터 각 지구마다 일괄적으로 요청이 오고, 체포 협력이나 인명 구조 등의 공헌을 신고, 전문 기관을 거쳐 조사하고 나서 등급에 해당되는 돈을 받는다.
경찰이나 소방관처럼 국가에서 내는 돈을 받아서 일종의 준 국가 공무원이라 활 수 있으나 흔히 말하는 부업이 가능해 연예인처럼 광고를 찍기도 한다. 이러다보니 일종의 연예인스러운 느낌도 있어서 돈과 인기를 위해 지망하는 사람도 있으며 덕분에 사회에서 히어로를 비판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일단 이러한 부업에 대한 것은 공무로 정해졌을 때에는 일부에서 상당히 다퉜으나 인기와 수요에 의해 무마된 듯 하다.
얼마나 있는지 명확하게는 나오지는 않았으나 히어로를 양성하는 시설도 있으며 [[유우에이 고등학교]]는 이러한 곳들 중에서도 최고의 양성기관이다.
- 2세대주택 . . . . 2회 일치
* 같은 건물이지만, 부엌, 욕실, 화장실, 현관 등이 별도로 되어 있어 완전히 분리된 다세대구조. 좌우분리형과 상하분리형이 있다.
* 현관, 거실, 부엌, 화장실 등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구조.
- 3월의 라이온/119화 . . . . 2회 일치
* 관전자들은 체통도 없이 지저분하게 둔다고 힐난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가 싸우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관전한다
- 3월의 라이온/120화 . . . . 2회 일치
* 객관적으로 보면 라이도가 천하의 개썅놈이지만, 왠지 너무 불쌍하게 차여버린 데다 혼자 좋아라 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2ch 막장판에나 있을 법한 인물--
* 거의 에피소드와 무관할 거 같았던 카와모토 자매는 아버지의 일과 겹쳐서 생각해볼 거리를 남겨주었다.
- AliasPageNames . . . . 2회 일치
WindowManager,창관리자
# 위키위키 관련
- DV . . . . 2회 일치
* 가계 관리를 모두 혼자서 쥐고 있다.
* 돈의 용도를 세밀하게 관리하고 지적한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유닛 . . . . 2회 일치
공격력은 볍진같은데 내구성은 높은 놈들. 사실 전투용이 아니라 기능성 사단이다. 근처 부대의 보급 효율을 높이고 소속된 부대의 지휘관이 대장(General)이나 원수(Field Marshal)이라면 지휘 패널티 한도도 올려준다.
>로켓 동력 요격기는 추진에 로켓을 이용합니다. 로켓기는 같은 크기의 제트기보다 더 빨리 날 수 있지만 매우 적은 시간만을 비행할 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활공해야합니다. 대기 중 산소 양에 상관없이 비행할 수 있는 이들은 고고도 비행에도 적합합니다. 또한 이들은 매우 뛰어난 가속력을 지녔으며 빠르게 이륙합니다.
- E-4B 나이트워치 . . . . 2회 일치
[[미국]]에서 운용하는 항공기. 별명은 심판의 날 비행기(Doomsday Plane). 보잉 747-200B 모델을 모체로 하여, [[핵전쟁]]이 발발 했을 때, 대통령이나 국방장관, 합참의장이 탑승하는 '공중지휘본부'로 쓸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1974년 처음 도입됐다. 냉전 종식 이후에는 주로 국방장관의 의전용 비행기로 활동하고 있다.
- EM 드라이브 . . . . 2회 일치
* EM 드라이브의 작동은 워프 버블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분류:추진기관]]
- GLA . . . . 2회 일치
트럭에 기관총을 거치한 유닛. 보병 유닛을 수송할 수 있다. 잔해를 먹어 유탄발사기→로켓발사기로 무장을 강화할 수 있다.
네정의 기관포를 단 트럭. 대공 사격이 가능하다. 잔해를 먹어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
- IsbnMap . . . . 2회 일치
IsbnMap 에서 map 을 분리해서 사용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 이 경우 출판년도에 따라서 옵션을 달리 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 ISBN 매크로를 고쳐서 (가능하다면 jpg가 없을 때 gif를 찾는 어떤 로직을 넣는 방법이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coding에 능력이 전혀 없는지라, 이게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논리적 차원에서는 이게 사용자 정신건강에 이로운 해결책이 아닐까합니다. (제 위키에서 책목록을 관리하는데 수작업으로 바꿔 줄 생각을 하니 조금 끔직합니다. - 스크립트를 돌려도 되기는 하지만 ... )
모니위키 1.1.3에서는 이와 관련된 버그가 고쳐졌고, 알라딘 같은 경우는 확장자가 jpg/gif인 경우를 자동으로 검출합니다. 이 경우 php.ini에 {{{'allow_url_fopen=1}}}같은 식으로 설정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또, config.php에 {{{$isbn_img_download=1;}}} 와 같이 옵션을 넣으면 이미지를 다운로드할 수도 있게 하여, 일부 referer를 검사하여 이미지를 보이지 않게 하는 사이트에서도 활용하기쉽게 하였습니다. -- WkPark [[DateTime(2009-01-13T07:14:27)]]
-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 . . . . 2회 일치
K리그 클래식에서 챌린지로 떨어지면 천단위 관객이 '''백단위'''로 줄어들고, 반대로 승격되면 백단위가 '''천단위'''로 늘어나는 마술을 지켜보게 된다. 또한 강등되면 보통은 지원금이 뚝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주축선수를 팔아버리는 상황도 각오해야 하며 '''팀이 언제 올라갈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 관련항목 =
- K리그 클래식/2016시즌 . . . . 2회 일치
|| 평균관중 || 미집계 ||
= 관련항목 =
- MoniWikiOptions . . . . 2회 일치
== 위키 문법 관련 ==
* 모니위키 관리자 패스워드 설정. `tools/mkpassswd.pl` 이나 [[HelpOnInstallation#s-5|초기 설정]]을 통해 입력을 권장함.
- MoniWikiTutorial . . . . 2회 일치
* '''무엇이나''': 어떠한 페이지라도 상관없이
모니위키에 관련된 문제점은 http://kldp.net/projects/moniwiki 혹은 MoniWiki:MoniWiki 를 통해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 NEC 코퍼레이션 . . . . 2회 일치
본래 [[웨스턴일렉트릭]]과의 합작회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미일 관계가 악화되자, 스미토모 재벌이 인수했다. 전쟁 이후에 개편되어 지금과 같은 체계가 되었다.
1995년 10월에 [[NEC]]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부문이 분리되어 NEC인터채널 주식회사로 창립됐다. 2004년 3월에 NEC가 보유하던 주식의 대부분이 양도되어 2004년 7월 1일에 '주식회사 인터채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하지만 이 회사 전성기는 NEC인터채널 시대로 그냥 '인터채널'로 하면 도무지 적을 정보가 없으니 이걸로 쓰자.
- Oui Oui Marie . . . . 2회 일치
[[https://www.loc.gov/item/2013563233/|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보관중인 Oui Oui Marie의 악보(영문)]]
- The Men Who Built America . . . . 2회 일치
발명가. 연구하고 있던 전구와 직류 전기가 J.P. 모건의 관심을 끌어 지원을 받게 된다. 새로운 경쟁자인 테슬라와 교류를 상대로 "전류 전쟁"을 치른다.
[[공화당]] 정치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막고 백악관에 사람을 만들기 위해 록펠러-카네기-모건이 후원한 정치인. 친 기업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 결국 대선에서 브라이언을 이기고 [[대통령]]이 된다.
- UR임대 . . . . 2회 일치
과거에 공단주택(公団住宅)이라고 불렸으며, 도시공단에서 관리했다. 현재는 도시재생기구(都市再生機構)에서 관할하고 있으며, 이 단체의 영문명인 Urban Renaissance Agency 에서 UR을 따와서 UR임대주택이라고 불린다. 일본 전국에 약 75만 가구가 존재한다.
- Victoria II/개혁 . . . . 2회 일치
* 관세 효율 +20%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Victoria II]]
- Victoria II/디시전 . . . . 2회 일치
>오랜 기간 극동 및 인도와의 무역을 할 때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가야 했다. 근대 공학의 경이로운 힘으로 수에즈를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하면 우리는 아시아로 항해하는 기간을 줄일 수 있다.
* 미국과의 관계도 '''{{{#green +100}}}'''
- 가상 메모리 . . . . 2회 일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에서 가상 메모리 운용의 필요성은, [[GUI]] OS로 전환하고 [[멀티 태스킹]]이 보편화되면서 나타났다. 멀티 태스킹 기능은 다수의 어플리케이션을 하나의 OS에서 돌릴 수 있게 했으나, 프로그램을 마구 올리다가는 [[램]]이 [[으앙 죽음]] 수준으로 심각하게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OS차원에서 고도의 메모리 관리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제시되었다.
가상 메모리 기능이 있는 OS에서는 메모리 영역의 물리적인 어드레스 이외에 ‘보조기억장치’, 대표적으로 하드 디스크를 대상으로 가상의 어드레스를 할당하고 이를 OS에서 하드웨어의 MMU(Memory Management Unit)와 맞물려서 알아서 관리를 해준다.
- 개돼지 . . . . 2회 일치
인터넷에서 자조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국개론과 비슷한 느낌. 당시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607082025001&code=|영화 "내부자들"의 대사를 인용,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는 발언을 한 것에서 유래한다.
[[분류:관용구]]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44화 . . . . 2회 일치
* 사실 타이헤이는 우아한 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우마루가 바닥을 더럽히는 건 TV가 바닥에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해서 마음이 바뀐다.--그게 아닐 거야 아마--
* 방구석 폐인이라 그런지 우마루는 가구에 관심이 많다.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56화 . . . . 2회 일치
* 봄바는 노인이 되어 있고 최종보스는 거대 인조인간, 융해로에서 싸운다던가 하는 표절스러운 세계관이다.
* 우마루와 실핀이 신나게 떠들던 세계관은 이블데드나 매드맥스, 터미네이터가 짬뽕된 해괴한 포스트 아포칼립스.--폴아웃이네--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67화 . . . . 2회 일치
* 평소 옷이나 장신구에 관심이 많았고 요리에도 흥미가 생겼다고 한다.
* 어머니 에비나 네네는 요리에 흥미가 생긴 것은 몰랐는지 놀라며 "먹는걸 좋아하니까"라고 말하는데 딸이 관심있는건 만드는 쪽이었다.
- 검은방 시리즈 . . . . 2회 일치
전 시리즈의 개근하는 조력자. 강력반 형사로, 1편의 사건 당시 허강민의 의도와 상관없이 납치당했다. 어쩌다가 납치당한 하무열로 인해 몰살로 끝나야 했던 허강민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검은방 1편의 범인. 스포일러 틀까지 쓰면서 스포일러 경고했다. 두명의 동생을 두고 있었으나 한명은 백화점 붕괴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 다른 한명은 그 충격에 빠진 상태로 입대했다가 중대장의 갈굼으로 자살. 두 동생의 죽음에 연관된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검은방 1편에서의 사건을 일으켰지만 류태현과 하무열에게 저지당한다.
- 계림 . . . . 2회 일치
중국 [[광시성]] 동북부에 있는 [[계수나무]] 숲이다. 카르스트 지형과 기암괴석 등이 숲, 강과 조화되어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관광지]]로서 이름이 높다.
[[쉔무]] 2의 제6장의 부제이자 배경이기도 하다. 본래 계림에 갈 때까지 다양한 [[떡밥]]이 뿌려졌으나 도착하자마자 게임이 끝나버렸고 이후 쉔무 후속작은 나오지 않는다.(…) --뭐 계림 관광 잘 하면 되겠지--
- 공의존 . . . . 2회 일치
>공의존이란,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타인의 인정으로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고, 그 때문에 호의를 얻으려고 자기 희생적인 헌신을 무리하게 행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 그 헌신은 결국 타인의 호의, 심지어 그 타인 자신을 컨트롤 하려는 동기와 결부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 행동이 자기 중심적이고 계략적인 것이 되어서 점차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된다. - 카토 아츠시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며, 그렇게 인정을 받음으로서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고, 자신의 희생으로서 타인을 컨트롤 하려고 하는 행위. 연인이나 부부, 부모자식 등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하기 쉽다. 자아 존중감이 약한 개인에게 발생하는 일이 많다.
- 곽성문 . . . . 2회 일치
'''곽성문'''(郭成文, [[1952년]] [[1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7대 [[국회의원]]이자 언론인이다. [[자유선진당]] 사무총장을 지냈고, 현재는 제2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이다. [[대구광역시]] 출신이며, 본관은 [[현풍 곽씨|현풍]]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임마누엘이다.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문화방송의 직원]][[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교육대학교 대구부설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선진통일당의 정치인]][[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현풍 곽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광해군 . . . . 2회 일치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리 순탄치는 못했는데[* 정확히는 임란 이전에도 그리 순탄한 입지는 아니었다. 선조는 임란 이전에는 다른 후궁 소생인 신성군 등을 총애했다.], 우선 명은 시시각각 광해군에 세자 책봉에 딴죽을 걸었으며[* 당시 명은 황제와 관료가 후계 문제로 한참 입씨름을 했던 시기였다. 당시 만력제도 선조와 비슷하게 나이 어린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는데, 만약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허용할 경우 만력제가 이걸 빌미로 이용할 수 있어서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 또한 형인 임해군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 선조는 이 틈을 노려 광해군보다 거의 10살 연하인(...) 인목왕후를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새어머니가 아들보다 10살 어리다는 거다. (선조 상도둑놈 인증...)~~ 거기다가 [[김희정 (1992년)|인목왕후]]왕후가 아들인 [[영창대군]]까지 낳자, 광해군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기까지 했으며, [[유영경]]등의 소북들(후대에 탁소북)은 대놓고 영창대군 편을 들기도... 그래도 ~~노년에 무리한~~ 선조가 영창대군이 3살일 때 죽어 결국 왕이 되는데 성공했으며 유영경과 그의 무리들은 사사된다.
다만 세자 시절에 겪었던 전쟁 때문에 PTSD가 걸렸는지 지나치게 많은 궁궐과 성을 쌓아 국고를 탕진시키기도 했으며, 이는 민생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고 현대 연구자들 역시 비판하는 요소이다. 왕권을 강화하는 방도로 한번 반역음모가 생기면 관계자들을 지나치게 국문하기도 했다.
- 구미시/인물 . . . . 2회 일치
* [[김관용]] - 전 광역단체장
* [[김승목]] - 전 사회기관단체인, 전 국회의원
- 구본욱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
- 구성재 . . . . 2회 일치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선친이 [[구자춘]] 전 [[행정안전부 장관|내무부 장관]]이다.
- 국가원수 . . . . 2회 일치
한 [[국가]]의 대표자. [[국제법]] 상에서 해당 국가의 대외적인 대표권을 가진 인물 혹은 직위. 각국의 [[헌법]]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관습법]]으로 국가원수의 지위를 맡는 경우도 있다.
* 산마리노 : 2명의 집정관이 원수가 된다.
- 귀적에 들어간다 . . . . 2회 일치
[[일본어]]의 관용어로, "죽는다."는걸 돌려서 말한 것이다.
[[분류:일본어]] [[분류:관용어]]
- 그랜드 테프트 오토: 산 안드레아스/지역 . . . . 2회 일치
이들우드 경계 부근에 옷가게와 체육관이 있다.
발라스 구역. 갱 전쟁에 관심이 없더라도 스토리 상 여기서 갱 전쟁을 벌이게 된다.
- 금춘수 . . . . 2회 일치
'''금춘수'''(琴春洙, [[1953년]] [[9월 1일]] [[경상북도]] [[안동시]] ~ )는 [[한화그룹]]의 전문경영인, 기업인이다.<ref>[http://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142847 한화의 ‘금춘수’ 카드, 구관이 명관임을 입증할까]</ref>
- 기간트 . . . . 2회 일치
원래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에서 플라잉 머신이 추락하면서 죽은 줄 알았던 레프카는 살아남은 상태였다. 이들은 기간트의 격납고에 숨어있었다가 [[삼각탑]]의 주조종실을 기습해서 기간트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지하 격납고의 문을 열고 기간트를 출격시킨다. 이때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 방어력 및 장갑도 충실하다. 동체와 날개는 기본적으로 [[기관포]]이하는 아예 튕겨내버리며, 자신의 총탑으로 집중사격해도 표면만 좀 긁히고 마는 수준의 단단함을 자랑한다. 물론 대포를 장비한 선회포탑의 사격으로는 손상을 입지만 비행에는 지장이 없는 국부적인 손상만 입으며, 레이저 포탑으로는 큰 손상을 입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발 맞는 정도는 버틸 수 있다.
- 길용우 . . . . 2회 일치
[[아이언맨]](?)을 연상케 하는 복장과 유려한 [[CG]], 그리고 웃는 얼굴로 증기기관차와의 정면 충돌을 시도하는 아스트랄한 전개가 일품이다.
* [[술의 나라]] - 서태관 역
- 김건우 (1990년)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
- 김근백(프로게이머) . . . . 2회 일치
경기 시작 전 팬들이 외치는 파이팅 콜이 특이했는데, "○○○ 파이팅!" 대신 "김근백 관심있어요!"라고 외쳤다. 이는 한 인터뷰에서 김근백이 [[여자]]에게 듣고 싶은 말로 "관심 있어요"라는 말을 꼽았기 때문.
- 김덕현 (변호사) . . . . 2회 일치
김덕현은 판사 출신으로 [[1986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 여성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여성문제연구실무위원장,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이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등을 거쳤다.<ref>김효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11071 전원위원회 구성 어떻게]. 서울신문. 2004년 8월 25일.</ref> <ref>강충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33227 (‘로스쿨’로 뛰는 대학들) (1)한양대]. 서울신문. 2005년 2월 28일.</ref> <ref>심규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323957 <헌법재판관 5인 교체 앞두고 하마평 무성>(종합)]. 연합뉴스. 2006년 6월 11일.</ref> <ref>이하나. [http://www.womennews.co.kr/news/54417 네 번째 여성 대법관 탄생하나]. 여성신문. 2012년 8월 17일.</ref>
- 김민수 (1992년)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9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KT 위즈 선수]][[분류:청원초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청원중학교 동문]][[분류:청원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김상훈 (1963년) . . . . 2회 일치
* 1997년 ~ 1998년 : 대구시청 일본파견주재관
* [[2018년]] [[3월]] ~ [[2018년]] [[5월]]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천관리위원장
- 김석형 (역사학자) . . . . 2회 일치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이 논문을 보완하여 1966년에 발표한 《초기조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가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삼국분국설은 현재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파기되었지만, 백제 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는 학설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 유물의 상감 기법 등으로 제작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며 가지가 실제로는 7개가 아닌 6개라는 등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초기조일관계사》(1966)
- 김성곤 (1913년) . . . . 2회 일치
|본관 = [[김해 김씨|김해]]
[[1967년]] 김성곤은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과 함께 [[민주공화당]] 내의 핵심인물이 된다. 그 이후 [[1971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1년]] [[10월 2일]]에 야당과 동조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어기고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를 [[10.2 항명 파동]]이라 한다. 그 이후 김성곤은 [[10.2 항명 파동]]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아 경위조사를 받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그 뒤 [[1973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을 지냈으며, [[1974년]]에는 대한양회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 취임을 했다. 그 뒤 [[1975년]] [[2월 25일]] 사망하였으며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김성민 (1994년) . . . . 2회 일치
[[대구옥산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를 거쳐 [[대구상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제66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2011년 청룡기]]에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3승,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239733 청룡기 MVP 김성민, "류현진 같은 선수 되고 싶다"], 《OSEN》, 2011년 8월 1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고교야구 아시아 시리즈 대표에 선정되었고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 선수로도 거론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8&aid=0002694959 성탄절, 고교야구아시아시리즈와 함께...일본·대만과 격돌], 《머니투데이》, 2011년 12월 2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국외 스카우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2012년]] [[1월 31일]] 계약금 55만 달러를 받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5489936 고교 2학년 선수, 미국프로야구 입단 논란], 《연합뉴스》, 2012년 1월 31일.</ref>
이후 [[5월 18일]]에 당시 [[넥센 히어로즈]] 소속이었던 [[김택형]]과의 1:1 트레이드로 [[넥센 히어로즈]]로 이적하였다. 이에 관해 [[고형욱]] 단장은 이전부터 그를 지켜봐 왔다고 밝히면서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컨디션과 실전 감각이 대학 시절만큼 회복된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29&aid=0000001214 <nowiki>[배지헌의 브러시백]</nowiki> 넥센은 왜 김택형 대신 김성민을 택했나], 《엠스플뉴스》, 2017년 5월 18일.</ref> [[2017년]] [[5월 2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데뷔 첫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4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2017년]] [[7월 2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 요건을 갖췄고, 6회에도 올라왔으나 경기가 강우 콜드로 끝나면서 완투승으로 데뷔 첫 승을 기록하였다.<ref>[http://news1.kr/articles/?3036995 '김성민 데뷔 첫 승' 넥센, kt에 6회 강우콜드 승리] 《뉴스1》, 2017년 7월 2일.</ref>
- 김성주(축구선수) . . . . 2회 일치
*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 [[축구 해외파 선수들]], [[제주 유나이티드]]
8월 3일 [[FC 안양]]과의 리그 홈경기에서 선발출전해서 캡틴 김재성의 결장으로 세트피스를 전담했지만 득점에 관여는 못하고, 후반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의 선제 결승골로 1:0 승리했다. 1득점을 기록한 [[주민규(축구선수)|주민규]]가 MOM 선정. 11승 5무 5패, 리그 2위로 한계단 상승.
- 김수학 (법조인) . . . . 2회 일치
|본관 =
|소속기관 =
- 김영한 (1900년) . . . . 2회 일치
== 가족 관계 ==
* 《월간중앙》 (2001년 9월호) 〈친인척 관리 스타일 전혀 다른 3인의 군 출신 대통령〉
- 김인철 . . . . 2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현역 은퇴 후에도 자신의 마지막 현역 팀인 [[한화 이글스]]와의 관계를 유지했고, 한화의 원정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하다가 스카우트팀 과장으로 인사이동되었다. 그 후 2017년 선수폭행으로 물의를 빚은 장 모 감독과 심 모 감독의 뒤를 이어 [[한화 이글스]]의 연고지역 야구부인 [[청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 김정수 (1991년)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
- 김준 (배우) . . . . 2회 일치
* 2009년 인천관광 홍보대사
* 2010년 글로벌관광에티켓 홍보대사
- 김지훈(배우) . . . . 2회 일치
|| '''팬 페이지''' ||<(> [[http://cafe.daum.net/jihunforever|[[파일:다음 카페.png|width=24]]]] [[http://gall.dcinside.com/m/jihoonlove|[[파일:디시인사이드_로고.png|width=24]]]][* 개설은 2016년에 했으나 약 1년간 인스타그램 업뎃 위주로 글이 올라오다가 ~~인별갤~~ 몇몇 고닉들이 꾸준히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인별갤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현재는 유동닉들도 글을 많이 올리고 있고 최근 케이크 조공도 계획했었지만, 총대가 나타나지 않은 관계로 무산되었다.] ||
|| 2003년 ||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습관 ||
- 김진환(iKON) . . . . 2회 일치
* 2014년 가을까지 관람차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믹스앤매치 오사카 자유시간 편에서 [[구준회]]와 함께 탔던 것이 난생 처음이라고. ~~탄 후에 감상평은 " 경치는 좋으나 남자 둘이서는 타긴 좀.. "~~
* 아이콘 내 가장 친한 멤버는 바비인 것을 밝힌 적 있다. 그러나 연습생 시절 가장 싸움이 잦았던 멤버이기도 하며 실제로 둘은 애증의 관계라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 김창규 (작가) . . . . 2회 일치
{{출처|날짜=2012-04-03|[[1975년]]부터 민주화운동을 시작해 구금, 구속, 연행 등의 고난을 겪었는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때 입은 부상으로 한쪽 청각을 상실하고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출처|날짜=2012-04-03|1981년에는 납치되어 대전 안기부, 경찰서 보안대 지하실에서 고문을 당했으며, 1987년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구속당하기도 했다.}} {{출처|날짜=2012-04-03|[[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으로 감시대상 1호임을 알게 되었다.}} 2008년에는 ‘남북관계 정상화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하였다.<ref>{{뉴스 인용
| 제목 = <nowiki>각계 650명, 남북관계 정상화 촉구 시국선언 발표
- 김충섭 . . . . 2회 일치
||<bgcolor=#808080> '''{{{#FFFFFF 약력}}}''' ||<(> 제21대 김천시장[br]경상북도 구미시 부시장[br]경상북도청소년수련원 원장[br]경상북도 김천시 부시장[br]경상북도청 문화관광체육국 국장[br]경상북도 청도군 부군수||
1954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봉곡초등학교, 김천중학교, [[김천고등학교]], [[영진전문대학]] 행정과를 졸업[*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김 시장은 고등학교 재학시절 큰 병이 걸려 3번이나 큰 수술을 하였고 이로인해 1년 늦게 졸업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대학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공직에 진출하였다. 대학은 이후 공직에 있으며 [[영진전문대학]]을 졸업하였다.]하였으며. [[청도군]] 부군수, [[김천시]] 부시장, [[구미시]]의 부시장, 경북도청 문화관광체육국장과 경북청소년수련원 원장직을 역임했었다.
- 김취경전 . . . . 2회 일치
작자 미상 고전소설. 총 260장에 달하는 장편 소설로서, 2권 2책이다. 국립도서관에 한글 필사본이 있으며 유일본이다.
김형국 일가에서는 선애의 시비 채향이 선애가 야반도주하자 안씨를 무서워하여, 어사 서윤택(徐潤擇)에게 집안의 흉사를 고발한다. 서윤택은 김형국과 안씨를 국문하고 취경 남매를 모함한 윤도익을 체포하려고 하지만, 윤도익은 흉계를 꾸며 서윤택은 반대당파의 모함으로 삭탈관직과 유배를 당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왕이 진실을 간파하여 서윤택은 복직되었다.
- 김희정 (펜싱선수) . . . . 2회 일치
'''김희정'''(金熙正<ref>{{뉴스 인용 | 제목=<프로필> 펜싱 에폐 금메달 金熙正 | url=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013398 | 출판사=연합뉴스 | 저자= | 쪽= | 날짜=1995-04-15 | 확인날짜=2018-09-14}}</ref>, [[1975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펜싱]] 선수로 주 종목은 [[에페]]이다. [[1996년 하계 올림픽|1996년]]과 [[2004년 하계 올림픽]]의 출전 경험이 있다.<ref name="sports-reference">{{웹 인용|url=http://www.sports-reference.com/olympics/athletes/ki/kim-hui-jeong-1.html |제목=Kim Hui-Jeong Olympic Results |확인날짜=2012년 2월 19일 |웹사이트=sports-reference.com}}</ref> 그녀는 [[2002년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여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을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0154716 펜싱 이승원-김희정 2관왕 찔렀다]</ref>
- 나가 . . . . 2회 일치
이들은 22세 이상의 성인 여성들이 중심인 가문으로 뭉치는데, 이 성인 여성들중 한명을 가주로 한다. 작중에선 가주에 대한 투쟁은 반쯤 전쟁수준으로 묘사되는데,[* 현실의 작위계승 관련을 생각해보면 쉬울듯.] 나이와 딸이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인덕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듯 하다.
이들은 22세가 되는해에 '심장적출'이란 의식을 가지는데, 일종의 성인식으로, 심장을 말그대로 '빼서' 심장탑에 보관하는 식이다. 이상태의 나가는 사실상 불사로, 목이 잘려도 어느정도의 시간과 영양공급만 있으면 목이 다시 붙는듯. 심장을 뽑지 않은 나가는 '비에나가'라 부르는데, 이들은 말그대로 '가짜 나가'취급을 받는다. 만약 어쩌다 사정이 생겨 심장을 뽑지 못했을경우엔, 여성은 그 다음해에 심장적출이 벌어지는때까지 가문에서 보호해주지만, 남성은 무조건 끔살이라는듯(....)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0화 . . . . 2회 일치
* 아이자와 쇼타는 실연을 하며 이야기를 계속하겠다며 체육관 감마로 이동할 것을 지시한다.
* 체육관 감마, 통칭 "트레이닝 부엌 랜드". 줄여서 TDL이다.[* 도쿄 디즈니 랜드 패러디]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0화 . . . . 2회 일치
* 그런 주제에 관중석에 앉아 요아라시의 구조활동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평가질이다.
* HUC는 이런 대규모 재해에선 구조자는 한없이 부족하기 마련이니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 관건이라 평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5화 . . . . 2회 일치
* 추레해 보이는 아저씨의 독백으로 시작. 이마에 깊은 흉터가 있는 아저씨다. 그는 창가에서 아메리칸 스피릿을 피워물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이것이 늘하는 일과일 뿐이라 여기는 한편 "특별한 일"이라 여기기도 한다. 그의 거주지는 카나가와현 카미노구. 그 싸움 이후 올마이트가 은퇴한지 반달이 지난 시점이다.
* 그런 모습들을 관찰하던 아저씨는, 자기가 찾고 있는 유형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때 전화가 온다. "기란"이란 남자의 전화다. 아저씨는 잘 지냈냐고 인사한다. 기란도 오랜만이냐며 그쪽은 어떻냐고 묻는데, 아저씨는 "나는 내가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고 뜻모를 소릴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9화 . . . . 2회 일치
*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분석하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태도를 자신을 염탐하고 뭔가 꾸며댄다고 보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공격을 퍼부으며 아무리 때리고 떨쳐내고 따라다니던 미도리야가 기분 나빴다고 외친다.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면밀한 눈으로 그를 관찰하고 정말로 추월해 보이겠다는 듯한 그 태도도.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4화 . . . . 2회 일치
* [[토도로키 쇼토]]는 "No.1에 가장 가까운 남자" [[토오가타 밀리오]]의 위력에 경악한다. 그런데 경쟁심을 보이는 것도 아니라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모습이라 옆에 있던 [[아이자와 쇼타]]가 이상하게 여긴다. 아이자와가 "너도 No.1에 관심있는거 아니었냐"고 묻는데 토도로키는 "전 아직 임시면허가 없습니다"라고 태평한 대답을 한다. 아이자와는 토도로키가 둥글어졌다고 생각한다.
*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의 관심사는 단연 인턴십이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1학년의 참여 여부를 결정한게 없어서 구체적인 건 이야기할게 없다. 그런데 미도리야는 따로 적당한 인물에게 의견을 구한다. [[그랜토리노(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그랜토리노]]였다. 직업 체험에서 그를 지목했던 그랜토리노라면 인턴으로 채용할 가능성도 높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7화 . . . . 2회 일치
* 미도리야가 빠르게 사무실을 체크해보니 사실 눈 돌리는 곳마다 올마이트 관련 굿즈가 가득하다. 나이트아이도 중증의 올마이트 팬이었던 것이다.
미도리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시도한다. "비니거스 사이드 사건". 올마이트가 해결한 사건 중 하나로 수질을 바꾸는 개성을 바꾼 소년이 물에 빠져 생긴 일이다. 별로 중요한 사건도, 빌런이 나왔던 것도 아니라 묻혀진 사건이지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어 골수팬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사건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1화 . . . . 2회 일치
* 그러나 미도리야는 이미 그 이야기에 관심을 잃었다. 그는 올마이트가 죽는다는, 나이트아이의 예지가 더 신경 쓰였다. 그 예지가 언제 일이고 절대로 바뀌지 않는 거냐고 묻자 올마이트는 태연한 태도로 당시 기준으로 6, 7년 후라면서 먼 미래일 수록 오차는 생기긴 하지만 예지로 본 장면 자체가 바뀌는 일은 없다고 대답한다. 계산해 보니 예지가 실현되는 시기는 올해나 내년 정도. 미도리야는 현실을 부정하며 올마이트에게 살라고 애원한다. 미도리야는 웅영제 때 한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이트아이의 예지가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는 힘을 잃었고 히어로로서의 삶은 끝났다. 그러니 이제와서 그를 볼 면목이 없다는게 올마이트의 생각이다. 지금은 점점 강해질 미도리야에게 족쇄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뿐이다. 어쩌면 이미 그들의 관계는 형태가 달라진 후일지도 모르겠다고 그가 말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6화 . . . . 2회 일치
* 나이트아이도 그 부분을 난점으로 지목한다. 아직은 전체 계획도 목적도 불분명. 한 번에 확실히 노리지 않으면 반격의 기회를 허용한다. 여기에 대한 대책으로 현재 시에핫사이카이가 소유한 모든 부동산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조직들의 영역을 전부 리스트로 만들었다. 거의 전국적인 규모의 리스트. 각지의 마이너 히어로들까지 소집한 건 이 때문이었다. 해당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토박이들이 조사에 유리할 터. 나이트아이는 각자 할당된 지역을 살피고 거점이 될 만한 곳을 지목해 달라고 요청한다.
같은 건물의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는 나이트아이가 그랜토리노와 대화 중. 그랜토리노는 미도리야를 굳이 나이트아이에게 보낸건 그걸 통해 올마이트와 그의 관계를 화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꼬여서 이런 상황이 되자, 그랜토리노는 "나이를 먹어서 괜한 짓을 하게 됐다"고 자책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5화 . . . . 2회 일치
* 지금도 책상 한켠에는 그 시절 읽던 히어로 백과가 보관되어 있었다. 키리시마는 그 책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 견디기 어려운 듯 책장으로 집어 던진다. 책과 함께 진열했던 히어로 굿즈들이 떨어진다. 그 중엔 언젠가 생일선물로 받았던 히어로 위인전의 부록도 있었다. 물론 크림슨 라이오트가 나오는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홀로그램을 투사하는 부록이 멋대로 작동했다.
* 부록의 영상은 크림슨 라이오트가 출연한 인터뷰 장면이었다. 자신의 히어로관을 피로하던 대목이다. 키리시마는 이 영상으로 처음 크림슨 라이오트를 만났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4화 . . . . 2회 일치
내 걱정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거냐?
나의 마음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거냐? ||
- 남의 집은 남의 집 우리 집은 우리 집 . . . . 2회 일치
일본의 관용구. 주로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이다.
[[분류:관용구]]
- 남일해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2015||제6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 남효온 . . . . 2회 일치
육신전은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고, [[사육신]]의 절개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왕조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왕실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심각한 '불온 서적'이었다. 하지만 이 충격적인 '불온 서적'은 사림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필사]]되어 널리 읽혀졌고, 후대의 사림은 육신전에 근거한 '사육신 사관'을 널리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결국 육신전의 기록에 근거하여 사육신이 복권-헌창받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 네마와시 . . . . 2회 일치
* 협상, 회의의 사전교섭에서 나온 말로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작활동. 어떤 갈등관계가 예상될 때 주변에 자신에게 유리한 소문을 미리 퍼트리거나, 사실을 미리 알려두는 작업이다.
- 노 오디너리 패밀리 . . . . 2회 일치
가족 히어로라는 점에서 [[판타스틱 포]]를 연상케하는데 의도한 것인지 주연인 짐 파웰을 맡은 마이클 치클리스는 판타스틱 포 실사영화에 출연했다. 이러한 점을 의식한 것인지 국내에서 방송할 때도 제목이 '판타스틱 패밀리'. 방송사인 ABC도 [[마블 코믹스]]와 연관이 있다. 이외에도 가족 히어로라는 공통점 탓에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이 떠오르게 한다.
파웰 가족의 가장. [[대머리]]에 뚱뚱한 인남캐이며 미묘하게 고개숙인 가장이다. 직업은 [[경찰]]에서 일하는 몽타쥬 작성관이며, 신체능력이 강화되는 능력을 얻었다.
- 니엘(가수) . . . . 2회 일치
||<#ad84db> {{{#white '''가족'''}}} ||[[부모님]], 3남 중 차남[* 집안이 개신교인지라 형의 이름은 안다윗이다. 허나 남동생은 개신교와는 상관없이 안보성이라고.] ||
N모 포털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연관검색어로 '''틴탑 입술 두꺼운 애'''가 나올 정도로 두껍다. 그 덕분에 틴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멤버이기도 하다.
- 닌자 거북이 . . . . 2회 일치
관련 캐릭터는 스승인 스플린터, 동료는 에이프릴 오닐, 케이시 존스가 있으며 주된 빌런은 슈레더.
* 닌자 거북이들과 관련 인물들
- 다크 유니버스 . . . . 2회 일치
== 관련 항목 ==
* 관련 영상을 보면 투명인간과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도 등장하는 듯 하다. 그리고 예정 목록을 보면 노틀담의 꼽추인 콰지모도도 예정된 듯. 그런데 이상한 것이 투명인간이야 그렇다 해도 팬텀과 콰지모도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물론 시점을 괴물영화보다 고전 호러 영화에 두면 딱히 이상하진 않다만 드라큘라, 미이라 등 대표적인 캐릭터들을 생각해보면 뭔가 안맞는 느낌도 있다.
- 대라신선 . . . . 2회 일치
대라신선은 보통 의술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그가 언급되는 장면에서는 보통 중병, 중상을 입었을 때 언급된다. 누군가가 중상을 입거나 중독되었을 때, 등장인물의 대사나 전지적 지문으로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물론 초월적인 의술을 지닌 몇몇 작중 인물들은 이런 언급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살려내서 대라신선을 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강함과 관련되어 언급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악당이 무공이나 함정을 쓰면서, 대사 혹은 전지적 지문으로 대라신선이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언급을 하고, 주인공은 그 무공이나 함정을 파해하여 경악을 일으키는 것이다. 역시 대라신선은 무색해진다.
- 더 선 . . . . 2회 일치
축구 경기 도중 96명의 관중이 압사한 [[힐즈버러 참사]] 당시 리버풀 팬 일부가 사망자의 주머니를 털고, 경찰에게 오줌을 쌌으며 인공호흡을 시도하던 경찰관을 구타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https://www.thesun.co.uk/archives/news/919113/we-are-sorry-for-our-gravest-error/|그리고 23년후 사과 기사를 냈다.]]
- 던전스 & 드래곤스: 섀도우 오버 미스타라 . . . . 2회 일치
유명 TRPG D&D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벨트스크롤 게임|벨트스크롤 아케이드 게임]]. 개발사는 [[캡콤]]으로 1996년작.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벨트스크롤 게임]]
- 도지한 . . . . 2회 일치
* 정관장
* 국립중앙박물관
- 독친 . . . . 2회 일치
자식이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서도, 특별히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
식사, 수면, 복장이나 머리 모양 등의 사소한 생활, 학교, 직장, 친구, 연인 등의 인간관계에 간섭이 격심하다.
- 동물의 체온조절 시스템 . . . . 2회 일치
* 관성항온성 : 몇몇 냉혈동물은 커다란 덩치를 이용하여 제한적인 항온성을 지니기도 한다. 현재는 몇몇 대형 거북에서 관찰할 수 있다.
- 드래곤볼 . . . . 2회 일치
나메크 별에서 전투력 이상 반응이 나타나자, '[[큐이]]'와 같은 디자인의 캐릭터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우리 종족을 멸망시킨 프리더가 드디어 죽었다."고 발언을 하는데, 그 발언을 하자마자 광선 총에 무수히 맞아서 시체도 안 남기고 소멸한다. 숙청을 한 것은 또 큐이와 같은 디자인의 캐릭터(망토 장비). '사령관'이라고 불리는 이 캐릭터가 "우리가 우주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건 프리더 님 덕분, 언젠가는 우리 종족을 부흥시켜 주신다고 약속했다. 프리더 님이야 말로 전 우주의 구세주다!"라면서 열렬한 프리더 빠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초사이어인 오공의 전투력을 계측한 순간 계측기가 폭발하여 기지채로 전멸.
내퍼는 베지터에게 프리더가 베지터왕을 죽이고 혹성 베지터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지만, 베지터는 그런 것은 자신에게 관계 없다면서 강한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라데츠는 몰랐던 듯. 놀란다.(…)] 그리고 언젠가 강해져서 프리더를 대신하여 우주를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낸다.
- 등신대 패널 . . . . 2회 일치
사람의 몸과 같은 사이즈로 사진을 인쇄한 판넬. 주로 [[연예인]] [[사진]] 같은 것을 인쇄하여, 상점 등에 배치해놓고 광고용도로 쓰인다. 오타쿠 관련 가게에서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등신대 패널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여성용 화장품 가게나 영화관에서도 시각효과를 돋보이게 만드는 보조수단으로 널리 퍼지고 있으며, 90년대 포스터가 해준 역할을 대신하는 2000년대의 신규 홍보아이템이 되었다.
- 디텍티브 침프 . . . . 2회 일치
원래 [[아프리카]]에 살던 침팬지로 프레드 쏘프에게 잡혀 훈련되었다. 다만 쏘프와는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쏘프가 죽으면서 혼자 일했는데 법적으로 자립할수 없어서 돈도 못벌었고, 대중들에게 잊혀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알콜중독]]이 된데다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다.
[[배트맨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의 몇몇 에피소드에서 배트맨과 협력 관계로 등장한다.
- 라데츠 . . . . 2회 일치
[[피콜로]]와 손을 잡고 협력하여 라데츠와 싸운다. 고전 끝에 피콜로의 [[마관광살포]]로 승리를 거두지만, 라데츠를 붙잡아서 제압하고 있던 오공은 라데츠와 함께 죽음을 맞는다.
## == 인물관계 ==
- 랄프 알거 배그놀드 . . . . 2회 일치
[[https://www.iwm.org.uk/collections/item/object/30028094|(영문)제국전쟁박물관의 배그놀드 태양 나침반 설명]]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m/view.do?ntt_writ_date=20141030&bbs_id=BBSMSTR_000000001037&parent_no=1|국방일보의 장거리 사막 정찰대 관련 기사]]
- 랑그릿사(검) . . . . 2회 일치
랑그릿사 세계관의 시초가 되는 3의 시작에서는 랑그릿사는 존재하지 않았고, 마검 [[알하자드]]만이 존재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족과 어둠의 군세에 대항하기 위해서 알하자드에 필적하는 성검을 벼릴 필요성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그릇인 파사의 검은 루시리스가 보관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을줄 알았지만...
- 러시안 라이프 . . . . 2회 일치
Russian Life. [[미국]]에서 발행되는 [[러시아]] 관련 [[잡지]]. 러시아의 [[문화]], [[역사]], [[과학]], [[인물]]에 대해 다룬다.
소비에트 라이프처럼 러시아 내 미국 관련 잡지인 "아메리카"(Amerika)가 있었다.
- 런던 맥주 홍수 사건 . . . . 2회 일치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보스턴 당밀 홍수 사건]]'이 있는데, 이 런던 맥주 홍수를 소개하는 글 대부분이 당밀 사건과 혼동해서 당밀 사건 관련 사진을 맥주 홍수 사건 현장으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던 내연기관 자동차들이 현장에 보인다.)
- 레갈리아 . . . . 2회 일치
왕관, 옥새 등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 즉위식, 대관식 등 군주가 왕권을 이어받는 행사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 레이프 . . . . 2회 일치
[[라틴어]] rapere 에서 왔다. 이 단어는 제압하다, 유괴하다, 뭔가를 강제로 끌고 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게 현재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라틴어에서는 이러한 의미로는 stuprare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였다. 원시 프랑스어(Old French) rapir를 거쳐서, 영국식 프랑스어(Anglo-French) raper 를 거쳐, 중세 영어에서는 rapen, rappen으로 쓰였고, 현대 영어로 rape가 된다. 노르만어, 스웨덴어, 저지 독일어 등에도 유사한 단어가 있어 이들과의 연관관계도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 리얼충 . . . . 2회 일치
리얼에 충실하다는 뜻은, 남녀관계나 친구 등 인간관게 측면에서 충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 마기/302화 . . . . 2회 일치
모든 것이 잘 되기만 할 것 같았던 전송마법진 계획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너와 나는 상회대표로선 대등한 라이벌 관계야"
- 마기/305화 . . . . 2회 일치
* 알라딘은 "한 사람의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후대의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 알라딘. 자신이 겪은 모든 괴로움은 "성공을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는 신드바드에게. 달편으로 일관하던 신드바드도 여기에는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 마기/316화 . . . . 2회 일치
* 신드바드는 표면적으론 알라딘 일행과 우호관계를 되살리는 듯 했지만 실상 그들의 의견을 폄하하고 있다.
* 그는 알라딘 일행의 의견을 수용한 것처럼 행동하며 2년 전의 우호관계를 재구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리바바의 결혼도 축하해준다.
- 마기/318화 . . . . 2회 일치
* 국제동맹 본부는 천산산맥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금속기의 보관과 각국 요인들 간의 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 뢰엠이 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채로 무역을 하고 있는 것도 도마에 오르는데 무는 그만큼 많은 관세를 내고 있다고 응수한다.
- 마기/327화 . . . . 2회 일치
* 시시껄렁한 논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알라딘은 "가치관의 골을 메꿔가는게 남녀의 사귐"이라고 최대한 진지하게 조언한다. 그 조차도 지금의 알리바바에겐 잘난척하는 얼굴로 보인다. 알라딘은 모르지아나를 좋아하지 않느냐,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묻는데 알리바바는 별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좋다고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는다. 알라딘은 어른스러운 태도로 그쯤하면 됐으니 가서 모르지아나에게 사과하라고 권하는데 알리바바는 자기는 잘못한거 없고 사과는 여자가 해야 한다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 결국 글러먹은 태도에 폭발하는 알라딘.
너무 일변한 태도 때문에 알라딘과 알리바바는 어리둥절하다. 홍옥도 너무 입장이 바뀌어서 이상하다. 하지만 알리바바는 원래 황제국은 "하나의 세계"를 표방하던 나라이니 그럴만도 하다고 수긍하려 한다. 알라딘도 적당히 동의하고 어차피 나라의 일은 자기들이 관여할게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문득 알라딘이 같이 국제동맹을 등진 뢰엠과 귀왜국의 상황을 궁금해한다. 사실 이들 나라의 지도자 무 알렉키우스나 야마토 타케루히코는 신드바드를 매우 경계하는 인물들.
- 마기/334화 . . . . 2회 일치
* 어쨌든 동료가 추가되는건 반가운 일이라 알리바바가 악수를 청하는데, 네르바는 무례한 태도로 거부한다. 자기는 장차 위대한 황제가 될 텐데 소시민인 알리바바가 격의 없이 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쥬다르를 "나의 검은 마기"라 부르며 친한척한다, 정작 쥬다르는 무시로 일관한다. 자기는 네르바의 마기가 아니라는데.
* 알리바바가 추궁하자 쥬다르는 간단히 인정한다. 그때는 이런 녀석 말고는 전쟁하겠다고 설치는 놈이 없었고 백룡의 행방도 찾지 못해서 대충 '''타협한'' 거였다고. 네르바가 그 말을 듣고 분개하며 털어놓은 말에 따르면 처음엔 좀 치켜세워졌지만, 금방 싫증을 내서 결국 아무 도움도 안 됐다. 갑자기 무관심해지더니 집에 간다고 사라지질 않나, 나중에 나타나서는 "쓸데없는 혁명 놀이 보단 우리 고향에서 농사나 지어라"면서 납치, 부하들과 함께 쥬다르네 고향에서 머슴으로 부려졌다.
- 마기/344화 . . . . 2회 일치
테스는 곧 알리바바에게 관심을 거두고 아버지와 하던 돌맹이 쌓는 놀이로 돌아간다. 부자는 번갈아가며 돌을 쌓아올리는 놀이를 반복하고 있다. 알리바바가 왜 그런 걸 하냐고 묻자 달리 할게 없어서 그렇다고 답한다. 잘 보면 이들 뿐이 아니다. 대부분 돌을 쌓거나, 아니면 도미노처럼 늘어놓거나 자신의 변함없는 기억을 멍하니 감상한다. 그저 보기만 해도 무기력하고 지루한 모습들. 그래서인지 이들의 몸에는 버섯같은 것이 마구 피어나고 있다.
알리바바는 다시 테스 일행을 향해 여기가 일 일라의 내부냐고 묻는다. 테스가 맞다고 대답하자 이번엔 "여기는 사후세계냐? 나의 부모님들도 여기 계시냐"고 묻는데 셋타는 무관심하게 "없는거 아니냐"고 답하고 알리바바는 알마트란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또 말한다.
- 마기/346화 . . . . 2회 일치
* [[알리바바 사르쟈]]는 자신이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마친다. [[아르바(마기)|아르바]]는 일 일라에 대한 이야기도 잊고 "다윗의 확신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부분에 관심을 가진다. 알리바바의 말대로 다윗은 자신이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의 몸을 빼앗고 성궁의 주인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알리바바는 그걸 막기 위해 되살아난 건데, 정작 그 두 가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르바는 그 점을 지적하며 다윗이 신드바드의 몸을 빼앗긴 커녕 회유당해 하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는 김에 [[우고(마기)|우고]]와 일곱 진들 조차도 그의 편이 되어버린 것도 다시금 강조한다. 신드바드는 새삼 그동안 성궁에서 일어난 일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는 [[알라딘(마기)|알라딘]]에게 펼친 논리를 재탕 한다. 그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솔로몬 대왕을 비롯한 "보다 높은 곳의 신"들의 의지다. 아울러 그의 "세상을 루프로 환원한다"는 정책에 동의하고 추종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신드바드가 두각을 드러낸 것이며, 신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섭리 앞에 알리바바 개인의 윤리관은 의미가 없다.
- 마기/347화 . . . . 2회 일치
이러한 허무감은 신이라고 피해가지 못한다. 우고 조차도 허무감을 이기지 못하고 미쳤으며 이는 새로운 목적 없이 타성적으로 세상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드바드는 "허무"를 쌓으며 끝없이 위로 올라가는 "운명이라는 지배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고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신드바드는 단순히 "언젠가 전쟁으로 세상이 망할지도 몰라서" 이런 짓을 하려는게 아니다. 인류가 언젠가 "운명"을 이해하고 그 허무감에 사로잡히는건 필연이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운명을 관장하는 자를 무찌르자, 이게 신드바드의 결론이다. 결국 그또한 "모두를 지키기 위한 싸움"의 연장이며 "대의명분"이라 할 만하다. 단지 누가 이해하지 못할 뿐인데, 다름아닌 알리바바가 그것을 이해한 것이다.
- 마기/351화 . . . . 2회 일치
* 방금 전까지 세상의 앞날을 놓고 열띈 토론을 하고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의 생각마저 돌려놓았던 [[알라딘(마기)|알라딘]]과 [[알리바바 사르쟈]]. 갑자기 던전이 사라지고 성궁에 밤이 찾아온다. 성궁의 관리자 [[우고(마기)|우고]] 또한 영문을 알 수 없는 사태. 우고는 혹시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이 발동된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렇지만 알라딘은 방금 전 신드바드가 그 마법을 막지 않았냐고 반박하는데, 그 신드바드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 알리바바가 대체 누가 그럴 수 있냐고 묻는다. 성궁을 관리하는 우고도 신드바드도 여기에 있지 않나? 우고도 "그런 사람은 있을 리 없다고" 자기가 한 말을 바로 부정한다. 신은 세상에 단 한 명 뿐. 신드바드가 이 세상의 신인 지금 다른 신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을 하는 우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 마블 코믹스 . . . . 2회 일치
== 캐릭터 관련 ==
== 관련 정보 ==
- 마츠자카소 . . . . 2회 일치
[[일본]] [[미에 현]] 중부의 마츠자카 시(松阪市)를 중심으로 하여, 마츠자카소 협의회(松阪牛協議会)에서 관리하여 생산하는 [[소]]의 브랜드. 코베소(神戸牛),오우미소(近江牛)와 함께 일본 3대 화우(和牛,와규)로 이름이 높다.
본래 [[에도 시대]]까지 일본에서 소는 [[농업]]용으로만 길러졌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소고기를 먹게 되었고, 이때부터 마츠자카 지방은 육우의 산지로 유명해졌다. 1958년에 마츠자카 육우협회가 창설되었으며, 1974년 부터 소 한마리를 개체 단위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 마터니티 마크 . . . . 2회 일치
임신 초기는 아기의 성장은 물론, 엄마의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시기이지만, 외관으로는 초기 임산부를 구분할 수 었기 때문에 다양한 불편함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지하철 같은 곳에서 노약자, 임산부 석을 이용할 때 트러블이 일어나거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 초기 임산부라는 것을 알릴 수 있도록 마터니티 마크가 제작되었다. 현재 이 마터니티 마크의 디자인의 저작권은 일본 후생노동성에 귀속되어 있으며, 동시에 영리 목적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마터니티 마크 보급위원회라는 기업이 존재한다. 관련된 굿즈를 만들고 판매하고 있다.
- 멀티플맨 . . . . 2회 일치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로 [[엑스멘]] 관련 캐릭터. 다만 주된 소속 팀은 [[엑스 펙터]]다.
텔레파시로 연결되었다 해도 복제의 사고력이 독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체인 매드록스와 별도의 길을 가게된 복제체도 있다. 그러다보니 복제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으며 이런 때에 동일한 능력을 지닌 암살자 클레이(Clay)와 대면하기도 했다.
- 메데타시메데타시 . . . . 2회 일치
옛날 이야기 같은데서, 일이 무사히 잘 풀리고 좋게 끝난 결말에서 하는 관용구.
[[분류:일본어]] [분류:관용어]]
- 모리시오 . . . . 2회 일치
기본적으로 입구에 놓는다. 집,점포, 사무소의 현관이 이에 해당한다.
그 외에 연예운, 사업운, 재물운 등에 관련되어 각각의 방법으로 행운을 올려준다는 다양한 배치법이 잡다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런 잡다한 배치법은 모리시오를 담는 접시의 색이나 무늬, 재질까지 따지는 경우도 있고, 그 용도도 사랑을 성취하는 것에서 남편과 헤어지는 것 까지 아무튼 여러가지가 있다.
- 모리오리 족 . . . . 2회 일치
>우리는 우리의 관습대로 그 섬을 점령했으며 놈들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한 명도 벗어나지 못했다. 더러는 도망쳤지만 우리가 곧 죽여버렸고 다른 놈들도 죽였다. 그러나 그게 어쨌단 말이냐? 우리는 관습에 따랐을 뿐이다. - 마오리 족 정복자
- 몬스리 . . . . 2회 일치
인더스트리아의 행정국 차장인 28살의 여성. [[레프카]]의 행동대장이자 부관으로, 항상 최전선에 서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여전사. 두뇌가 명석하고 냉정 침착한 성격으로 [[브라이아크 라오|라오 박사]] 추적과 하이하버 급습 같은 중요한 작전의 지휘를 맡았다.
- 몬스터 페어런트 . . . . 2회 일치
이러한 단어가 학부모와 학교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존재한다. 학부모와 학교가 협력하는 것이 올바른 공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학부모와 학교의 갈등과 대립을 부추김으로서 협력 관계가 무너져 올바른 교육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무언의 귀가 . . . . 2회 일치
[[일본어]] 관용 표현의 하나.
바깥에서 사망한 사람의 [[시신]]이 [[관]]에 넣어져서 집에 돌아가게 되는 상황을 뜻한다. 해외에서 사망하여 시신이 [[공항]]으로 운반되는 경우는 '무언의 귀국(無言の帰国)'이라고도 한다.
- 문서사유화 . . . . 2회 일치
옛날 [[엔하위키]]에서 특정 문서를 자기 마음에 드는 형태로만 수정되어야 한다고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을 제제하기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졌던 용어. 생각해보면 위키위키인 이상 당연한 것이다.
[[분류:위키 관련 정보]]
- 미래소년 코난/등장인물 . . . . 2회 일치
샐비지선에서 일하는 노동자. 2등 시민이 되려하며 자기 등급 점수를 10점 깍은 샐비지선 리더인 파치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 품성에 문제가 있는 인물인 것이 실수를 저질러서 큰 피해가 났는데 파치는 등급 점수를 깍기만 했다. 그런데 이런 관대한 처분에 적반하장격으로 굴어서 루카가 한마디 할 정도. 이후 몬스리에게 파치가 라오 박사라는 것을 밀고하나 이외에는 딱히 이용가치가 없다보니 몬스리가 정보만 듣고 가버리면서 무시되었다. 이후 등장이 없다가 루카에 의해 사고로 크레인에 깔려 사망했다는 언급이 나왔다.
샐비지선의 노동자. 파치처럼 나이 있어보이는 할아버지다. 테리트와 달리 승급에는 무관심하나 그와 달리 품성은 정상이라서 테리트에게 한소리 하기도 하고, 코난과 라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줬다.
- 미스터 마인드 . . . . 2회 일치
[[샤잠]]과 관련된 악당으로 캐릭터명이 [[캡틴 마블]]이던 시절부터 싸워온 빌런이다.
[[미스터 아톰]]을 부하로 쓰기도 했으며 사지 스틸을 조종해 백악관을 차지하려고도 했다.
- 바키도/118화 . . . . 2회 일치
* 관객들은 범에 날개를 단 격으로 생각한다.
* 처음 들어본 칼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피클
- 바키도/128화 . . . . 2회 일치
* 무사시의 어금니가 단숨에 박살나고 관객들이 그가 무사시를 압도하고 있다며 놀라워한다.
* 관객들은 그저 허세가 아니라 철저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평한다.
- 바키도/130화 . . . . 2회 일치
* 관객들의 이목이 집중하고 고요한 격투장에는 베었다라는 한 마디만이 소리없이 아우성친다.
* 관객석의 잭 해머는 공원에서 특수섬유 옷으로 자신의 "물기"를 방어하고 이까지 뽑아낸 것을 떠올린다.
- 바키도/138화 . . . . 2회 일치
* 검사 우오호리 마나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한다. "위죄"라는 것. 지금 그들의 목적은 죄를 만들어내서 구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실제 행위가 온당하냐 아니냐, 위법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체포할 명분을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무사시는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현관으로 내려선다. 경찰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 바키도/140화 . . . . 2회 일치
*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총을 든 경관을 가장 먼저 무력화시키고 밀려드는 병력도 하나둘 박살. 현장엔 오오츠카 헤이베만 남는다.
* 총기를 소지한 경찰이 무력화되자 무사시는 주정없이 들어온다. 그는 "지휘관"인 오오츠카를 제일 먼저 노린다.
- 박경호 (1949년) . . . . 2회 일치
* 1987년:내무부 장관 표창
* 1994년:농림수산부 장관 표창
- 박상원(배우) . . . . 2회 일치
* 행정자치부 장관 표창상(2006년)
* 일본 도쿄도미술관 삭일회상(2009년)
- 박수영(연극배우) . . . . 2회 일치
* 《[[7호실]]》 (2017년) - 건물 관리인 역
* 《[[궁녀 (2007년 영화)|궁녀]]》 (2007년) - 서고 관료 역
- 박종준 . . . . 2회 일치
경찰대학 졸업 후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평창군|평창]][[경찰서장]], 공주경찰서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 [[마포구|마포]]경찰서장, 충남[[지방경찰청]] [[지방경찰청장|청장]], [[대한민국 경찰청|경찰청]] [[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 박진수(1985) . . . . 2회 일치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군포시문화예술회관 철쭉홀(소공연장)
- 박학기 . . . . 2회 일치
| 가족 = 형제자매 관계는 형 1명 <br/> 자녀는 슬하 2녀<br /><small>(장녀 [[마틸다 (음악 그룹)|박승연]], 차녀 박정연)</small>
| 관련활동 =
- 배대윤 . . . . 2회 일치
* 청송야송미술관(구.신촌초등학교) 졸업
* 행정자치부 정보화담당 부이사관
- 배성룡 . . . . 2회 일치
'''배성룡'''('''裵成龍''',[[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청도군]] ~ [[1964년]] [[12월 8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언론인, 경제평론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성주 배씨|성주]](星州). 필명은 수성(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이다.
아버지는 운홍(運鴻)이며,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1917년 결혼을 전후해 일본의 니혼(日本)대학에 유학해 1923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사하고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했다. 가입 후 사회주의 운동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저를 발표해 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1925년 8월 이후 〈동아일보〉를 주무대로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1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만기 출옥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11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사에 경제부장으로 입사하여, 1932년 봄 정치부장, 10월에는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3월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자 편집차장·정치부장을 역임하다가 10월 신문이 정간되자, 절필하고 은둔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글들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 백결 선생 . . . . 2회 일치
《영해 박씨 족보》등에만 나와있는 기록으로는 관직을 떠날 때 귀향곡인 〈낙천악〉(樂天樂)이 있다고 한다. 청렴하고 결백했으며 궁중으로부터의 일체의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 가족 관계 ==
- 백기만 . . . . 2회 일치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 [[1966년]] [[8월 7일]])은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 [[문학 평론|문학평론가]]이다. 본관은 [[수원 백씨|수원(水原)]]이고 [[호 (이름)|아호(雅號)]]는 목우(牧牛), 흰곰이며 [[필명|필명(筆名)]]은 '''백웅'''(白熊)이다.
== 인간 관계 ==
- 백작 . . . . 2회 일치
로마 후기 군사관료나 프랑크 왕국 시기 지방관을 뜻하는 '코메스'에서 따온 말이다.
- 백춘희 . . . . 2회 일치
'''백춘희'''(白春喜 [[1958년]] ~ )는 [[대한민국]]의 사회기관단체인, 정당인, 공무원이다. [[충청북도]] 출신
== 관련 항목 ==
- 법테라스 . . . . 2회 일치
[[일본]]의 무료법률지원서비스. 정식명칭은 일본사법지원센터(日本司法支援センター). 2006년 설립된 일본 법무성 소관의 공공법인으로서, 민형사상의 법적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 베이식 (가수)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베이식'''(Basick, {{본명|이철주}}, [[1986년]] [[8월 12일]] ~ )은 [[이노베이터]]와 같은 [[더블 트러블]] 멤버이자 힙합 가수이다. 본관은 [[광주 이씨|광주(廣州)]]로 베이식은 2007년 2월부터 리드머 스튜디오를 통해 처음 가사를 쓰고 랩을 시작해 꾸준히 활동하다, [[2007년]] 여름 Z-juc 의 앨범을 통해 데뷔를 했다. [[DJ Soulscape]] 창작과 비트 Rap Competition 에서 2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ref>[http://www.openmic.co.kr/bbs/bbs/viewbody.html?code=bbs_3&category=61&page=1&sort=1&number=210813&keyfield=&key= DJ Soulscape 랩컴피티션 발표]</ref>, 2007년 11월, 크루 [[Jiggy Fellaz]]에 영입되었다. [[이노베이터]]와 함께 [[더블 트러블]]을 결성했다. Jiggy Fellaz의 Vasco가 설립한 Independent Record로 거처를 옮겼지만 Vasco의 이혼으로 레이블이 와해되며 현재 [[RBW]]와 계약을 맺었다.
- 변정수(배우) . . . . 2회 일치
|| '''가족 관계''' ||<(> 여동생 [[변정민]], 남편 유용운, 딸 유채원, 유정원 ||
자기관리에 굉장히 철저한 연예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 보루토/4화 . . . . 2회 일치
* 감독관은 록 리. 5대 카게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 왠지 카타스케도 부하를 데리고 관전 중인데 보루토가 과학닌구를 쓴걸 알고 있다.
- 보에몽 1세 . . . . 2회 일치
물론 그가 아버지가 못다한걸 이루겠다는 야심을 버린것으로 보이지는 않다. 오히려 이 행동은 원정을 요청했던 알렉시오스에게 인정을 받아 십자군의 '종교적' 지도자였던 아데마르 주교와 배치되는 '세속적' 지도자가 되려는 생각에서 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알렉시오스에게 제국의 아나톨리아군 총사령관직을 요청하기도 했다.]
안티오크 공작으로서 보에몽은 명목상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독자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대립 관계였다. 주변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여 영토를 늘려나갔는데, 이렇게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다가 결국 이슬람 셀주크계 다니슈메드 왕조(Dânişmendliler)에 포로로 잡히고, 당시 그와 대립하던 알렉시오스 1세에게 이송될뻔했기도 했으나, 군사적 협약을 미끼로 풀려나 다시 공작위를 되찾는다.
-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 . . . . 2회 일치
[[2016년]] [[2월 15일]], [[하테나 익명 다이어리]]에 올라온 익명의 게시물에 대하여 [[일본]] 사회에서 보육문제로 논란이 일어났던 사건이다. 2016년 3월 전후의 게시물에 '일본 죽어!'라는 글이 보이면 대체로 이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산 이후 직장에 복귀하려는 여성이 보육소([[탁아소]])를 이용하려고 해도, 보육을 바라는 아동의 숫자에 비해서 보육소의 숫자가 적어 이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입소를 대기하고 있는 아이들을 '대기아동'이라고 칭하는데, 이 숫자가 매우 많아서 보육소에 아이를 맡길 수 없는 사람이 매우 많다. 보육원의 개설에는 지자체의 인가가 필요한데 이에 관련한 여러 행정적 문제 등이 원인으로 보육원은 쉽게 늘릴 수 없으며, 보육사 역시 대우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보육원은 쉽게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보증 . . . . 2회 일치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부유한 사람이 가족, 친척, 친구, 선후배 등, 매우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정이 있는 상대에게 보증을 서서 대출을 지원하는 관행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인간적인 보증제도로 신용을 창출함으로서 부를 개인이 독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눠주고 더불어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보증에 관련된 문학 가운데 하나로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가 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와 또한 다자이 오사무가 친구에게 술값을 보증서게 해놓고 술집에 친구를 맡겨놓은 다음 자신이 나중에 술값을 가져왔다는 훈훈한 일화에서 따왔다.
- 봉화군 . . . . 2회 일치
* [[김재창]] - 제10대 연합사부사령관
* [[강석훈]] - 19대 국회의원,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 브이원 . . . . 2회 일치
1996년 뮤지컬배우 첫 데뷔한 그는 [[대구광역시|대구]] 태생으로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방송예술대학|동아방송대]] 방송연예학과 전문학사와 [[단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학사 학위를 거쳐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대중예술학전공으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브이원'이라는 예명으로 발라드 가수로 데뷔,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강현수는 임채홍과 함께 [[2010년]] [[3월 27일]]부터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입시 전문 방송아카데미 '배우&배움'을 열기도 했다. 평소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두 사람은 오랜 준비 끝에 개업식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거나, [[2003년]] 방영된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에서 복학생 역을 맡는 등 배우로서도 활동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3/h20100325062909111780.htm|제목=강현수·임채홍 방송아카데미 오픈|성=|이름=스포츠한국 안진용기자|날짜=2010-03-25|출판사=한국일보|확인날짜=2010-04-17}}</ref>
* [[2000년]], [[2004년]], [[2006년]] KBS [[가족오락관]]
- 블랙 클로버/100화 . . . . 2회 일치
자신이 그 말을 했었다는걸 알고 있다. 그 순간 아스타는 아까와는 달리 십자가의 밑둥을 잘라서 노엘을 해방시킨다. 마녀왕은 뭔가 잘못됐다는걸 느끼기 시작했지만 아스타는 여전히 조종당하는 상태.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노엘을 다시금 공격한다. 그때 또 한 번 고양이가 달려와 아스타에게 닿는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아스타의 검은 노엘의 가슴을 관통하고, 마녀왕은 이번에야 말로 끝이라고 생각한다.
- 블랙 클로버/103화 . . . . 2회 일치
* 난데없이 더블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키아토]]는 멋대로 동생 [[카호노]]가 오빠를 위해 벌이는 이벤트라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복심은 따로 있었다. 척봐도 관계 진전이 미적지겋나 [[노엘 실버]]와 [[아스타(블랙 클로버)|아스타]]를 자극하기 위한 이벤트다. 의도대로 노엘은 카호노가 아스타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스타는 더블 데이트가 뭔지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냥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다.
* 노엘은 아이를 달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려고 하지만 너무 심하게 울어서 곤란해한다. 아스타는 게임경품으로 탄 공놀이 세트로 간단한 곡예를 펼쳐서 아이의 관심을 돌린다. 카호노와 키아토는 춤과 노래를 더하고 노엘은 여기에 물마법으로 무대효과를 연출해서 그럴 듯한 공연으로 만든다. 덕분에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투덜거리기만 하던 시민들도 공연을 보며 환호한다. 노엘은 드디어 아이에게 물어서 "에마"라는 이름을 확인한다. 카호노는 그 이름을 노래마법에 실어서 축제현장 전체에 울려퍼지게 한다.
- 블랙 클로버/109화 . . . . 2회 일치
* 하지만 레오폴트는 이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비결을 파악했다. 단장들은 마력을 상시 몸에 두르고 있었다. 강마지대라 마나가 안정되지 않는 곳임에도 일사분란하게 마력을 방출하고 있다. 사실 마법기사들에겐 기본기와 같은 마법이다. 이른바 "마나 스킨". 어떤 타입이든 간에 조금씩은 마나를 방출, 몸에 둘러서 여러가지로 응용한다. 하지만 그 경우는 일시적으로 쓰는 것이며 이런 험난한 환경에서 장시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원들은 레오폴트의 분석에 감탄하면서도 그렇게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조금씩 감각을 익혀가면서 마나를 순응시킨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레오폴트가 먼저 마나스킨을 방출하며 의욕을 표출한다. 그의를 따라서 단원들도 의욕을 보이며 각자 마나스킨을 펼친다.
* 상성만으로 본다면 노엘은 이 지역에선 최적의 인재지만 별 힘을 쓰지 못했다. 마나스킨을 활용하자면 결국 마나 컨트롤이 문제였는데, 알다시피 그녀에겐 그 기술이 부족했다. 노엘은 이 마나스킨을 "극악한 난제"라 여기며 메레오레오나가 "간만에 만났는데 괜히 이런데나 데려왔다"며 투덜댄다. 그 말을 들었는지 어느새 메레오레오나가 다가왔있다. 노엘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동안, 메레오레오나가 그녀를 지긋이 관찰한다. 그녀의 마나를 보면 여러가지를 알 수 있다는데.
- 블랙 클로버/113화 . . . . 2회 일치
* [[솔 마론]]을 비롯한 마법기사들이 그의 불손한 태도를 비난했다. [[아스타(블랙 클로버)|아스타]]도 마법제에게 무슨 짓이냐고 언성을 높였는데, 공분을 산 잭스는 적반하장으로 "너네나 마법제를 존경하지 나는 아니다. 너네 가치관을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고 꾸짖는다. 그로인해 대회장의 분노지수는 최고조.
O팀은 [[알렉드라 산드라]], [[솔리드 실버]], "데미트리 브린트"의 조합. 일단 솔리드와 알렉드라가 서로 경멸하는 관계로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다.
- 블랙 클로버/117화 . . . . 2회 일치
키르슈가 다음에는 아스타 차례라며 지목한다. 그를 "금이 간 그릇"에 비유하며 산산조각 내주겠다고 하는데, 아스타는 그 말을 듣고도 태연히 웃는다. "그릇은 금이 가고 나서야 오래 쓴다"는 관용구를 인용했지만, 그건 그냥 빈곤을 뜻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에 시스터가 아스타를 키우면서 그런 말을 했던 모양인데, 그냥 비유삼아 했던 말을 아스타가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여기서 핀랄이 지휘를 자청한다. 자신의 공간마법에 자신을 보이며 공격법에 관해선 자기에게 맡겨달라 말한다. 그동안 검은 폭우에서 쌓은 경험을 여기에 십분 활용할 생각이다. 레오는 그 자신감이 설득력이 있다 봤는지 흔쾌히 승락한다.
- 블랙 클로버/126화 . . . . 2회 일치
* 신나게 관전하건 [[마법제]]도 그 마법에 나오자 표정이 바뀌고 [[아스타(블랙 클로버)|아스타]] 또한 어디서 느꼈던 흉흉한 기운이라 여기는데.
즐겁게 관람하던 마법제는 그 마법이 나오는 순간 진자하게 경계하는 빛을 띄었다. 아스타는 그 흉흉한 느낌이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다고 확신했다.
- 블랙 클로버/127화 . . . . 2회 일치
* 핀랄은 몰랐지만 보드가의 모두 사람이 랜길스를 지지했던건 아니다. 고용인들 사이에선 재능은 뒤쳐져도 상냥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핀랄을 높이 평가하는 여론도 있었다. 랜길스는 그걸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도 형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피네스" 양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식을 떨쳐낼 수도 없던 것이, 누구보다 자신이 핀랄을 상냥한 형이라 인정했기 때문이다. 핀랄은 부모의 냉대를 받으면서도 랜길스를 챙겨주는 좋은 형이었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랜길스를 더욱 자극했고 비뚫어지게 만들어 "내가 우수하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므로 무엇 하나 형에게 져선 안 된다"는 아집을 키우고 말았다.
* 이미 승부가 났음에도 랜길스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핀랄이 사라져야 한다며 의식도 차리지 못하는 형을 공격하려 했다. 그때 [[아스타(블랙 클로버)|아스타]], [[매그너 스윙]], [[락 볼티어]]가 저지하고 나선다. 관중석에 있던 이들이 어느 새 날아와 랜길스의 목을 겨눴다. 비록 대회장에 난입하진 않았지만 [[챠미 퍼밋슨]]도 그리모어를 펼쳐들고 요격할 태세였으며 [[노엘 실버]]는 제일 먼저 핀랄의 상태를 확인하러 달려갔다.
- 블랙 클로버/70화 . . . . 2회 일치
* 아스타는 "그딴걸 한 틈이 어딨냐"는 외침과 함께 검으로 베토의 몸통을 관통시킨다.
* 아스타가 반마법 검으로 "관통"한 최초의 사례. 아스타가 죽인 첫 번째 적이 될지도?
- 블랙 클로버/72화 . . . . 2회 일치
* 보고 있었던 대신관 영감은 "너무 강해서 흥이 식어버렸다"며 카호노와 키아토를 돌보러 이동한다.
* 야미는 네 마력이 얼마나 대단하든 상관없고, 이 마법은 "차원 째로 벤다"고 말하는데.
- 블랙 클로버/73화 . . . . 2회 일치
* 대신관은 카호노와 키아토를 붙들고 오열.
* 정작 대신관은 그게 마석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일행의 기억을 읽어서 "마석이란게 필요하구나"라고 알았을 뿐. 싱거울 정도로 시원하게 가져가라고 줘버린다.
- 블랙 클로버/74화 . . . . 2회 일치
* 당시엔 외국인이고 대인관계가 좋지 않아서 잡음이 많았던 모양
* 특히 적의 지휘관은 세 명의 "팔휘장". 다이아몬드 왕국 측의 마법기사단장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상당한 마법을 구사한다.
- 블랙 클로버/76화 . . . . 2회 일치
* 그리고 다이아몬드의 마법사들이 펼친 방어장벽을 관통, 라가스와 부하들일 한 번에 명중시킨다.
* 벤전스를 발견하고 조용히 관찰 중이다.
- 블랙 클로버/77화 . . . . 2회 일치
* "싸움에 아무 상관도 없어"
* 바람의 검이 라가스를 관통한다. 라가스는 마지막에 "아름답다"고 유노를 인정하며 리타이어.
- 블랙 클로버/88화 . . . . 2회 일치
* 지휘관인 마르스는 말없이 젤을 바라본다. 또다른 지휘관인 라드로스는 마녀는 어디가고 혼자 나선 거냐고 머리가 나쁘다고 빈정거린다. 젤은 마르스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알아보겠냐고 하는데, 마르스는 묵묵부답이고 다른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옆에 있던 라드로스가 혹시?하며 기억해내는 듯한 모습.
- 블랙 클로버/90화 . . . . 2회 일치
* [[판젤 크루거]]가 교관이던 시절은 [[마르스(블랙 클로버)|마르스]]나 [[라드로스]]도 평범한 소년들에 지나지 않았다.
* [[판젤 크루거]]가 다이아몬드 왕국에서 교관을 하던 시절엔 [[마르스(블랙 클로버)|마르스]]나 [[라드로스]]도 지금처럼 잔인한 성격이 아니었다. 젤은 이들의 힘이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가르쳤고 소년들은 그 말을 의심없이 믿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 블랙기업 . . . . 2회 일치
이런 야쿠자 기업을 돌려서 표현하던 것이 2000년대 들어와서는 노동환경과 관련하여 명백하게 노동기준법을 위반하는 [[불법]]을 자행하고 있거나 불법은 아닐지라도 보편적인 윤리 및 도덕적 시각으로 볼 때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들이 태연히 일어나고 있는 기업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블랙기업이냐 아니냐를 두는 기준은 단 하나, 보편적 가치관에서 본 노동환경 수준이다. 기원을 보면 알겠지만 [[야쿠자]]의 악행에 비견할 만큼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나쁠 정도로 노동환경이 열악한 기업을 가리킨다. 보통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 블러드와인드 . . . . 2회 일치
[[저스티스 리그]] 아메리카의 일원이었으며 이후 예비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마법 관련 캐릭터인지라 마법이나 오컬트에 관한 이야기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 블리치/677화 . . . . 2회 일치
우라하라 키스케는 아스킨에 대항해 만해 "관음개홍희 개"를 시전한다.
* 우라하라 키스케는 만해 "관음개홍희 개"를 해방한다.
- 블리치/678화 . . . . 2회 일치
* 우라하라는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든 준비를 한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 세계관에서 그런 준비를 하는건 우라하라 뿐이다.--성실한게 얘 하나냐--
* 다들 자기 능력 설명하다가 파홰 당해 죽는게 일상인 세계관이라 마치 작가의 자아비판처럼 들린다.
- 비니 고그니티 . . . . 2회 일치
펀치넬로 패밀리의 언더보스인 잭 루피노의 오른팔격 인물로, 루피노는 그를 통해 사업을 관리했다. 이 때문에 맥스는 두달간의 잠입수사 중 루피노를 한번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미쳐가는 루피노를 보며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펀치넬로 패밀리의 보스인 안젤로 펀치넬로에게 루피노를 어떻게 해달라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후 맥스의 악몽에 나오는 TV 속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블라드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해 기회를 얻는다. 캡틴 베이스볼배트보이에 관한 문제들을 맞추면 인형탈에 설치된 폭탄을 제거해주겠다는 것. 비니는 첫번째 문제인 "캡틴 베이스볼배트 보이의 덩치 큰 악역은 누구인가?"의 답인 "맥스웰의 악마"를 맞춰 폭탄 반쪽을 해체받지만, 두번째 문제인 "현실에서 맥스웰의 악마를 만들어낸 사람은 누구인가?"를 틀려 폭발한다. 비니는 캡틴 베이스볼배트보이의 작가인 새미 워터스라고 대답했지만 정답은 "맥스웰의 악마"라는 사고실험을 만들어낸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이었다.
- 비둘기가 콩알총을 맞은 것처럼 . . . . 2회 일치
[[일본어]] 관용구 표현. 줄여서 비둘기에 콩알총(鳩に豆鉄砲)이나 하토마메(鳩豆,비둘기콩)이라고도 한다.
[[분류:일본어]] [[분류:관용어]]
- 빈병 . . . . 2회 일치
공병을 팔러 갈 때 이물질이 들어간 병이나 입구가 손상된 병은 가져가지 말자. 재활용의 관점에서 [[재떨이]] 대용으로 쓰는 등, 이물질을 투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 페이지에 써지지 않은 내용도 있으니 관심 가면 한번 보자.
- 빗치 . . . . 2회 일치
* 성욕이 강하다. 여러 남자와 육체 관계를 가진다. 혹은 그런 분위기가 있다.
* 쾌락과 금전을 요구하고 남자와 육체관계를 가진다. 혹은 그런 분위기가 있다.
- 사람을 죽여 보고 싶었다 . . . . 2회 일치
* 홋카이도 오토후케정 미용사 살인사건 : 2015년 8월 3일, 홋카이도 오토후케정(北海道音更町)의 아파트에서 회사원 소년(19세)이 피해자 콘노 에리카(金野恵里香, 미용사 31세)를 살해한 사건. 범인은 피해자의 아파트 윗층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피해자와 특별히 교우관계는 없었다. 3일 아침 열쇠가 걸려 있지 않았던 아파트 1층에 있는 피해자의 자택에 침입하여 날붙이로 목과 가슴을 찔러 피해자를 살해하였다. 체포된 뒤에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다. 누구라도 좋았다."고 진술했다.
[[분류:관용어]] [[분류:일본어]]
- 삼감의 난 . . . . 2회 일치
본래 주공단의 동생인 삼감은 주공단이 정권을 잡고 섭정을 하는데 반발한다. 삼감 가운데 관숙선(菅叔鮮) 등 2인이 무경을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명분은 주공단이 주성왕이 어린 것을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국정을 운용한다는 것이며, 주나라를 대신하여 상나라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나라 제후로 봉해진 태공망 여상이 토벌에 나섯으나 3년에 걸쳐 싸워도 승리를 얻지 못했다. 이에 주공단은 제후들을 모아 친정에 나서게 된다. 본래 '친정'이라면 천자인 주성왕이 전장에 나서야 하지만, 어린 나이였던 주성왕은 나서지 않고 섭정인 주공단이 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주공단이 왕위에 올랐다는 설도 있다.
- 샤잠 . . . . 2회 일치
관련 캐릭터는 [[위저드 샤잠]]과 [[메리 마블]], [[캡틴 마블 주니어]], [[엉클 마블]], [[루테넌트 마블스]]
* 해당 캐릭터의 이름은 본래 '캡틴 마블'이었으나 마블 코믹스 소속이 아니라 포셋에서 DC에 옮겨진 캐릭터다. 마블의 캡틴 마블은 따로 있다. 한편 이름과 관련해서 에피소드가 있는데 사정 탓에 코믹스아 못나오다 나중에 연재개 재개되었을 시기에는 이미 마블에서 캡틴 마블을 내와 DC는 '파워 오브 샤잠'이란 제목을 써야 했다.
- 서강준 . . . . 2회 일치
*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패션코드 2015 F/W' 홍보대사 (with [[소녀시대 태티서]])
* 2017년 KOTRA 아스타나 엑스포 한국관 홍보대사 (with [[뽀로로]])
- 서도영 . . . . 2회 일치
|2008||KBS1||[[KBS TV 문학관|KBS HDTV 문학관]] - 봄, 봄봄||경호||
- 서상일 . . . . 2회 일치
'''서상일'''(徐相日, [[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 [[대구]]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호 동암(東菴). 본관은 [[달성 서씨|대구]].
|후임자 = (대구시 중구) [[송관수]]
- 서영무 . . . . 2회 일치
삼성의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대구에 1급 차량 정비공장을 차려 운영하였다. [[1984년]]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의 초대 감독이었던 [[김영덕 (야구인)|김영덕]]을 [[삼성 라이온즈]]에서 나은 조건으로 스카웃하여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게 되자, [[두산 베어스|OB 베어스]]는 이에 맞서 그 해 [[4월 13일]] 서영무를 자문역 역할인 관리 이사로 영입하여 [[삼성 라이온즈]]의 전력 분석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산 베어스|OB]]의 이사로 임명된 지 한 달도 안 돼 [[1984년]] [[5월 11일]] OB와 삼성의 대구 경기를 앞두고 원정 숙소였던 [[수성관광호텔]]에서 선수들의 방을 정하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경북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식물인간이 되었고, 긴 투병 끝에 [[1987년]] [[5월 26일]] 오전 7시 5분,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서영춘(코미디언) . . . . 2회 일치
다만 전성기 시절에 관한 부분은 더욱이 자세히 봐야 하는것이 서영춘이 구봉서, 배삼룡보다 데뷔 시기나 주목받은 시기가 확실히 눈에 띄게 늦은 편이다. TV 방송 이전 악극단, 영화 시절 그리고 웃으면 복이와요 초창기 시절만 보더라도 메인은 서영춘이 아닌 구봉서, 배삼룡이었다. 실제로 웃으면 복이와요 초기 오프닝을 보면 배삼룡, 구봉서의 이름이 맨 처음에 등장하고 이 두 명을 중심으로 오프닝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https://youtu.be/CxMGWjLKOYA|1969년 당시 웃으면 복이와요 오프닝 링크]]
게다가 사적으로 [[구봉서]]와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는데, 한때 주당으로 유명한 구봉서가 싫다는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매번 데려갔다고 한다. 훗날 구봉서는 [[개신교]]에 귀의해 술을 끊었고, 뒤늦게서야 서영춘의 음주습관을 말리려 했으나 너무 늦은 뒤였다. 이 때문에 구봉서는 이를 두고두고 애통해하며 그때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데리고 다녔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 서정환 . . . . 2회 일치
'''서정환'''(徐定煥, [[1955년]] [[7월 5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유격수]]였다. 현재는 [[KBO (야구)|KBO]]의 대구 감독관이다.
이후 [[MBC 스포츠+|MBC ESPN]]에서 해설가로 활동했고, 현재는 [[KBO (야구)|KBO]]의 대구 감독관으로 재직 중이다.
- 서훈 (1942년) . . . . 2회 일치
경북대학교 법대 재학시 총학생 회장으로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고 ROTC 대위로 전역한 이후 신민당 시절 김영삼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대구에서 신민당,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번번히 낙선하였다. 영남지역 재야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교육에도 관심이 높아 가난한 지역학생들을 위해 팔공 재건학교와 같은 야학을 오랬동안 운영하였다. 1990년에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을때 이를 민주화 세력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오랜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 총재와 결별하게 된다.
- 선원 . . . . 2회 일치
船員. 배에 근무하며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항해 관련된 게임에서는 항해에 꼭 필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 성격 . . . . 2회 일치
8. 관심 - '''기대''' - 경계
18. 슬픔 + 기대 = 비관
- 세컨드 오피니언 . . . . 2회 일치
병원을 바꾸거나, 의사를 바꾸는 것과는 다르다. 세컨드 오피니언을 받고, 결과적으로 의사를 바꾸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의사에 따라서는 세컨드 오피니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존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사가 있어, 기존 주치의와 환자의 관계에 지장이 올 수 있다.
과거에는 의사에게 모든 의료를 맡겨왔으나, 설명과 동의를 받아 자기 자신도 치료에 관해서 결정하는 의료로 변해왔으며, 이러한 사회 배경의 변화에 따라서 세컨드 오피니언이 나타나게 되었다.
- 손해보고 이득얻다 . . . . 2회 일치
[[일본]]의 관용구. 처음에는 손해를 보지만 나중에는 큰 이득을 얻는다는 뜻.
[[분류:관용어]] [[분류:일본어]]
- 송금식 . . . . 2회 일치
* 1991년 《[[장미여관 (영화)|장미여관]]》 ... 누나 애인 역
- 송남헌 . . . . 2회 일치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 졸업하고 교사로 지냈다. 일제강점기 말기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조선사람이 단파통신을 통해서 [[1943년]]에 있었던 [[얄타회담]]에 관한 소식, 그리고 [[이승만]]박사 등의 외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친지들에 전한 것을 들은 죄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이 [[단파방송 밀청 사건]]이다.
- 송재호(배우) . . . . 2회 일치
현재 야생생물관리협회 회장을 맡고있다.
* [[상도(드라마)|상도]] - 임봉핵[* 임상옥([[이재룡]])의 아버지. 역관(통역사)이 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들을 위해 장사에 뛰어들었으나, 송상 대방 박주명([[이순재]] 분)의 음모에 휘말려 참수당한다.]
- 송호창 (1967년) . . . . 2회 일치
| 본관 = [[여산 송씨|여산]](驪山)
'''송호창'''(宋皓彰, [[1967년]] [[2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이자 인권 변호사이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228110317 민주당, 송호창·이학영·백혜련 전략공천] 프레시안 2012-02-28</ref>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 당시 TV토론에 출연해 촛불 정국으로 대변되는 촛불민심을 지지하여, '촛불 변호사' 로 활약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0662 '촛불 변호사' 송호창, 안상수 16년 아성 '탈환'] 오마이뉴스 2012.04.12</ref>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그리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후보로 나선 [[박원순]]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165 ‘박원순 대변인’ 송호창, ‘보온병’ 안상수에 도전장] 미디어오늘 2012-02-06</ref>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의왕·과천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ref>[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20120411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깨진 링크|url=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20120411 }}</ref>
- 수애 . . . . 2회 일치
2005년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출신의 통역관을 연기하였고, 2016년 영화 《[[국가대표 2]]》에서도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출신의 [[아이스하키]] 선수를 연기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movie/now/read?oid=111&aid=0000462127 '국가대표2' 수애 "동생 役 박소담, 저와 닮은 것 같아요"] 조이뉴스24. 2016년 07월 27일</ref>
| 제3회 [[CGV]] 관객이 뽑은 올해의 영화상
- 슈퍼 영 팀 . . . . 2회 일치
모스트 엑셀런트 슈퍼배트가 리더이며 관련 캐릭터로 서니 스모(Sunny Sumo)가 있다.
[[물]]을 제어. 웨이브맨 관련 캐릭터.
- 슈퍼걸(드라마)/1시즌 10화 . . . . 2회 일치
행크(마샨 맨헌터)는 카라와 함께 비행을 하며, 카라에게 비행술을 가르쳐준다. 행크와 카라, 알렉스는 맥스웰 로드를 조사하려 한다. 캣 그랜트는 루시 레인을 법무 자문위원으로 고용하려 하며, 제임스는 매우 기뻐하지만 루시와 제임스의 관계는 틀어진다.
토이맨이 탈옥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그 때문에 토이맨의 아들인 윈에게 수사관들이 찾아온다. 윈은 아버지에 대해서 매우 격하게 화를 낸다. 카라가 물어보자, 윈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디자인을 훔친 상사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비서와 5명을 살해했다는 과거를 말해준다. 윈은 토이맨을 체포하는 작전에 협력하기로 한다.
- 슈퍼머슬봄버 . . . . 2회 일치
그러나 레슬링게임이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해보면 나름대로 꽤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대쉬와 로프 반동을 이용한 스피디한 공방은 이 게임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백미.
게임자체는 망하기는 했지만, 세계관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파이널 파이트]]나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와 연결되기도 한다.(대표적인 예가 [[해거]]와 [[버디]], [[휴고]])
- 스쿼키 청소회사 . . . . 2회 일치
경찰에 체포된 모나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자 모나를 죽이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한다. 폭약으로 유치장 벽을 무너뜨리고 유치장을 지키던 경찰관들을 죽이는 것은 성공적이었나, 침대 밑에 숨은 모나를 발견하지 못해 죽이는데는 실패한다.
맥스와 모나가 사랑을 나누는 현장을 급습한다. 하지만 오히려 격퇴당하고, 후퇴하는 청소회사 밴에 맥스가 기어들어가 본거지를 습격당한다. 이 과정에서 맥스는 수많은 무기들과 폭발물, 수많은 시체들이 보관되어 있는걸 보고 이들이 일반적인 떨거지들이 아니라는걸 알아낸다. 이 순간부터 청소 회사 위장을 그만두고 검은 복장으로 나오는 놈들이 생긴다.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 . . . . 2회 일치
== 관련 설정 ==
* 캡콤이 만든 게임인 [[2010 스트리트 파이터]]란 게임이 있는데 스파 시리즈와는 아무 관련 없는 게임이다. 항목 참고.
- 스파이더 슬레이어 . . . . 2회 일치
[[스파이더맨]] 관련 빌런. [[J 조나 제임슨]] 편집장을 비롯한 [[스파이더맨]]의 적들이 사용해왔다. 시리즈가 많아서 마크19까지 나왔다. 개발자는 스펜서 스마이스(Spencer Smythe), 주 조종자는 선술한 제임슨 편집장이며 용도는 이름이 가진 의미 그대로 스파이더맨 엿먹이기(...)
국내에 방영된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에서도 등장. 스마이시 부자 둘다 등장해 스파이더 슬레이어를 만들었는데 스파이더맨보다 훨씬 큰데다 합체(!)하는 종류도 나왔다.[* 사실 합체라기보단 그냥 위에 올려놓기.] 그리고 앨리스터 스마이시가 변화된 모습인 스파이더 슬레이어도 등장. 그가 성과를 못내는 등 갈등이 생긴 [[킹핀]]에 의해[* 수행은 그의 지시를 받은 학자가 했는데 이전의 [[엑스멘]] 에피소드에서 등장했던 반뮤턴트 주의자다.] 스파이더 슬레이어가 되었다. 이후 킹핀과는 적대 관계가 된다.
- 스파이더맨 . . . . 2회 일치
몇몇 관련 작품에서는 몸에서 직접 만들어져 발사된다. 정식 시리즈에서는 일시적으로 가졌던 능력이며, 샘 레이미의 영화판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묘사로 나왔다. 이런 종류에서는 보통 손목에서 거미줄 발사관이 있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올드한 팬들은 이쪽 설정은 징그럽게 느끼는 것 같다(…).
- 시계태엽 오렌지(영화) . . . . 2회 일치
루드비코 요법을 마친 알렉스는 교도소에서 출소한다. 하지만 알렉스의 방은 다른 누군가가 차지한 상태였고, 알렉스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부모님이 팔아치운 상태였다. 알렉스는 집에서 나와 떠돌다가 한 주정뱅이를 만난다. 알렉스와 동료들이 린치했던 주정뱅이였다. 알렉스는 주정뱅이와 그 동료들에게 구타당하고 소지품을 빼앗겼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간 경찰관들은 과거 그의 부하이던 딤과 조지였다. 결국 알렉스는 그들에게 물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 일은 크나큰 파장을 불러온다. 정부는 혼수상태에 빠진 알렉스의 루드비코 요법을 치료한다. 그러고는 깨어난 알렉스에게 정부의 편을 들 것을 권하며 환희의 송가를 연주하는 오디오를 선물한다. 기자들이 병실로 몰려들어와 정부 관계자와 악수를 나누는 알렉스의 사진을 찍는 와중, 알렉스는 섹스를 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자신은 치유되었다고 독백한다.
- 식극의 소마/178화 . . . . 2회 일치
* 히사코도 관심있는 가게가 있으나 에리나 때문에 가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타도코로가 에리나와 동행하기로 하면서 그녀에게 에리나를 맡긴다.
* 객관적으로 십걸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할 수 있는 기숙사 인원이 별로 없기 때문에 3차 시험에서 대량으로 탈락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 식극의 소마/181화 . . . . 2회 일치
* 원래는 그도 3회전의 시험관으로 등장할 예정이었던거 같지만 "재미있는 놀이"가 떠올랐다며, 이 시험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 원래 그는 진급 시험에서 시험관으로 차출된 듯하다.
- 식극의 소마/184화 . . . . 2회 일치
* 시오미 세미나가 센트럴에 반항하자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기업들이 일제히 교류를 중단, 시오미 세미나를 압박한다.
* 그리고 상관없는 일이라며 얼른 돌아가라고 내쫓는다.
- 식극의 소마/186화 . . . . 2회 일치
* 베르타와 실라는 쿠가 테루노리와 티격태격하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금방 친해져서 노닥거리는데, 막상 대결이 시작되자 대결의 긴장감에 끌려가 조용히 관전 중.
* 하야마의 요리에 사로잡혀 있던 베르타와 실라가 눈을 빛내며 흥미를 보이고 현장에 있던 모든 관계자가 주시한다.
- 식극의 소마/191화 . . . . 2회 일치
* 시오미 준은 사실 도지마 긴의 주선으로 대결을 관전 중이었다. 시오미는 하야마의 따귀를 때리며 꾸짖는다.
* 한편 다른 쪽에서도 시험은 진행되고 있었다. 미토 이쿠미, 이사미 알디니, 아라토 히사코 3인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곳. 그런데 시험관인 네네가 승부는 났다고 선언하고 있다.
- 식극의 소마/195화 . . . . 2회 일치
* 그러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동세대 2인자 [[도지마 긴]]이 동경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대외적으로도 토오츠키 학원의 1인자로 이름을 날렸다.
>설령 두 번째라도 상관없으니 계속해서 이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싶다.
- 식극의 소마/206화 . . . . 2회 일치
아리스를 비롯한 반역자 일행은 [[유키히라 소마]]의 연대식극을 관전하기 위해 레분토 섬에 도착했다. 막 연대식극이 시작되려는 참이다.
* 특설회장은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다. 관객들이 가득차 있는데 모두 진급시험을 통과한 일반 학생들이다. 히사코는 이들 전부가 센트럴의 승리를 바라는 자들이라 말한다. 그때 슬슬 무대가 막이 오른다. 사회를 맡은 토오츠키 학원의 아이돌 [[카와시마 우라라]]가 무대에 올라오는데... 심하게 맛이 가있다. 센트럴 측의 세뇌를 당한 것 같은데 뭘 어떻게 당했는지 아이돌 컨셉은 때려치우고 심하게 펑크해져 있다. 그리고 대놓고 "아자미 정권의 승리를 바란다"는 멘트를 하는 둥 매우 편파적이다.
- 식극의 소마/222화 . . . . 2회 일치
소마는 일개 고교생이 관록넘치는 야쿠자와 같은 풍격을 갖는게 가능한 일일지 고민하지만, 그걸 눈 앞에서 확인하고 있다. 한 젊은 요리사가 선대 점주인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메기시마에게 도움 받은 일을 회고하며 새삼 감격했다. 충분히 미담이지만 메기시마는 그 일화도 젊은 요리사의 공으로 돌렸다.
* 메기시마는 한 번 분명히 거절한 이야기를 다시 끌고 온 소마 일행이 못 마땅했다. 그는 연대식극이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 못박았다. 메구미가 그도 무관한 일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도 3석 자리를 뺏기지 않았던가? 여기서 이기면 그 자리를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메기시마의 태도는 시큰둥. 그는 본래부터 자신은 승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토로했다. 토오츠키에 들어간건 그저 최고의 요리학원이라 해서 그랬던 건데, 막상 들어가니 하나에서 부터 열까지 승부 타령. 그의 적성이 아니었다. 어지간하면 거절했지만, 몇몇 끈질기게 달라붙는 녀석들과 식극을 하긴 했다. 3석이란 결과는 그래서 얻은 것. 자신이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런 지위가 부여된 것이다. 소마는 그것도 굉장하다 여겼지만 정작 당사자는 번잡스러워했다. 이제 그런 건 질색인 데다, 요리사가 승패를 논한다면, 그건 손님을 얼마나 기쁘게 했냐로 쳐야한다는 이야기였다.
- 식극의 소마/233화 . . . . 2회 일치
* 타쿠미가 주재료인 소고기 조리에 들어가는데 얇게 채친 쇠고기를 참기름에 볶으며 물과 간장, 설탕과 채친 성강을 투입한다. 그건 일식의 조리법인데 [[사이토 소메이]]가 알아보고 [[시구레니]]를 만드는 거라고 설명한다. 생강을 더한 조림의 일종으로 농후하고 달면서도 생강의 강렬한 악센트가 포인트. 동생인 [[이사미 알디니]]는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승패를 가를 관건일 거라고 첨언한다.
* 그 후 타쿠미는 보란 듯이 그 기술을 훔쳐냈다. 이 식극회장에서 그 기술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타쿠미가 눈부신 속도로 생강 바늘썰기를 시연하자 언제나 반역자를 야유하던 관중석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심사의원 안은 "어메이징"이란 표현으로 아름답고 섬세하고 대단하다는 극찬을 남겼다. 대호평의 바늘썰기 이후 타쿠미가 착수한 것은 밀가루 반죽. 피자 도우를 만드는 공정이었다. 시구레니를 토핑으로 쓴 피자가 타쿠미의 계획. 이 역시 기대가 동료들과 심사의원으로부터 기대가 된다고 격찬을 맏는데, 왠지 동생 이사미만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 신귀식 . . . . 2회 일치
* [[1993년]] [[문화방송|MBC]]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 [[육종관]], [[김원만]] 역
* [[2012년]] [[OCN (방송)|OCN]] 《[[신의 퀴즈 3]]》 ... 이명관 역
- 실즈 . . . . 2회 일치
일본의 학생운동 단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自由と民主主義のための学生緊急行動)을 뜻하는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의 약자에서 따왔다. 단체 스펠링은 다르지만 일본어 발음은 영어 실즈(SHIELDS)와 비슷하여 영어로 '방패'와 연관을 지어서 지은 이름으로 추측된다.
* 어벤저스에 나오는 특수조직 실즈와는 무관하다.
- 심양홍 . . . . 2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가톨릭/인물]]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따라서 [[이순재]], [[신영균(배우)|신영균]] 등과 같이 고학력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순재[* 이순재는 심양홍의 서울고 선배며 서울고 출신 탤런트로는 [[박용식]]이 있다.], 신영균, 심양홍 등은 서울대학교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 . . . 2회 일치
[[고려]] 말기에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였던 [[왜구]]의 장군 [[아기발도]]가 대표적인 아기장수 설화의 하나인 [[아기장수 우투리]]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전에는 [[인터넷]] 상에서 간간히 주장되던 이야기였으나, 2016년 1월에 이를 다룬 논문이 나온 바 있다.
아기발도와 우투리 사이의 연관성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공통점이 지적되고 있다.
- 아마쿠사 키리시탄 진중기 . . . . 2회 일치
현재 큐슈 구마모토 현, 아마쿠사 시립 아마쿠사 키리시탄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야마다 우에몬사쿠는 호소카와 번에 체포되어, 에도로 보내져서 심문을 받은 다음, 나가사키로 와서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그는 내부에서 시마바라의 난을 관찰하여 편지를 보냈으며, 난이 종결된 뒤에는 『야마다 우에몬사쿠 구서(山田右衛門作口書)』를 남겨 시마바라의 난을 진술하여 남겼다.
- 아웃워드 작전 . . . . 2회 일치
[[http://www.nww2m.com/2017/03/scitech-tuesday-operation-outward/|뉴올리언스 제2차 세계 대전 박물관 블로그의 기사(영문)]]
[[https://www.theguardian.com/news/2016/sep/15/weather-balloons-britains-secret-weapon-weatherwatch|가디언-어떻게 10만개의 기상 관측 기구가 영국의 비밀 병기가 되었는가(영문)]]
- 아워맨 . . . . 2회 일치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오브 아메리카와 관련있다.
히어로가 되기 전엔 화학자였으며 소박, 소심, 순한 성격에 시간에 강박관념을 가진 그는 동료들로부터 "똑딱(영어로 Tick-Tock)"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 아키즈키 리츠코 . . . . 2회 일치
* 대부분의 2차 창작에서 상식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사실 디어리 스타즈의 세계관을 적용하면 리츠코는 사촌 남동생을 여장시켜서 아이돌로 만들어버린 코토리도 소름끼쳐할 변태다. 디어리 스타즈가 상당히 흑역사이기는 한데 아무튼 이쪽도 존재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으므로, 이 점은 대부분의 세계관에서 변하지 않게 된다. 765프로덕션에서 숨은 최강 변태.
- 악당 . . . . 2회 일치
=== 인간관계 ===
* '''관심/소외'''
- 안동준 . . . . 2회 일치
1919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청주공립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8.15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1년 국제관광공사 [[총재]]에 임명되었다.
- 안지만 . . . . 2회 일치
[[200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2년]] [[삼성 라이온즈]]의 2차 5순위(전체 40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2005년]]에 [[오승환]]과 함께 불펜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2010년]]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며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권혁]], [[정현욱]]과 함께 불펜의 '안정권' 트리오라는 별칭이 있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200005 오치아이 코치가 바라보는 안정권 트리오] - OSEN</ref>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4홀드로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13년]] [[8월 17일]] [[넥센 히어로즈|넥센]]전에서 우완 [[투수]]로써 최초의 100홀드를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377859 삼성 안지만, 우완 투수 최초 100홀드 대기록] - 스포츠조선</ref> 그리고 [[2014년]] 프로 데뷔 12년 만에 FA 자격을 획득하여 계약금 35억, 연봉 7억 5000만원으로 총액 4년 65억에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재계약하였다. 그 뒤 [[2015년]] [[6월 5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는 [[KBO 리그]] 최초 개인 통산 150홀드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윤성환]], [[임창용]]과 함께 해외원정 불법도박 혐의로 [[2015년 KBO 한국시리즈|2015년 한국시리즈]]에 승선하지 못했고 [[2015년 WBSC 프리미어 12|2015년 프리미어 12]]에도 탈락하였다. [[2016년]] [[7월 20일]]에 검찰로부터 불법 스포츠 도박사이트 자금 투자와 관련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다음날 계약 해지를 발표함에 따라서 유니폼을 완전히 벗게 되었고, 구단에서 퇴출되었다. 퇴출 이후에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결국 지인의 도박 사이트 개설 자금 지원과 관련한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120시간의 사회 봉사 명령을 선고받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468&aid=00002349</ref> 검찰은 수익금을 분배 약정을 했다는 점에서 안지만을 공범으로 판단했는데, 그나마 재판부에서 직접적으로 사이트 운영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은 데다 그동안 이로 인해 언론의 도마에 오르내리며 손해를 받은 점을 참작해 집행 유예 처분이 내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지만은 항소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09035460</ref> 안지만의 항소로 재판이 장기화되는 데다, 앞서 언급했듯이 재판부도 안지만을 도박 사이트의 공범으로 판단했기 때문에<ref>그동안 법원 판례에서 불법 도박 사이트에 돈을 댄 사람도 공범으로 인정해 왔다.</ref> 향후 야구계 복귀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 압박면접 . . . . 2회 일치
[[면접]]에서 면접관이 일부러 면접을 받는 지원자에게 불쾌한 발언을 던지거나, 부정적, 비판적인 질문이나 발언을 하여 지원자의 성격과 자질을 확인하는 면접 기법이다. 압박면접의 예를 들자면 일부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거나, 짜증이 나는 질문을 하는 것, 노골적으로 위압적인 태도를 지원자에게 가하는 것 등이 있다.
* 일단 스트레스에 강한 인재를 뽑는다는 명분이 있지만 면접관이 정말로 성격이 나쁜 경우(…)도 있다.
- 애니프사 . . . . 2회 일치
트위터 반 애니프사 계층에서는 대체로 애니프사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오타쿠 혐오]]와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서 1980년대 일본 좌익 사회활동가들은 지금보면 말판에서 종이조각으로 된 말을 가지고 노는 종이게임에 대해서도, 살인게임(人殺しゲーム)이라는 비판을 했고, 이러한 게임을 하는 취미인에 대해서 경멸하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 시대에도 그랬고, 그 이후 시대에도 그랬으며, 대략 수십년간 이어지면서 적대관계는 거의 고착되었다.
- 야규 무네노리 . . . . 2회 일치
전국시대 말기, 에도 시대 초기의 인물. [[에도 막부]]의 관료, 정치가, 검술가. 야규 무네토시 세키슈사이(柳生宗厳 石舟斎)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임관하여, 도쿠가와 쇼군의 호위 무사와 검술 지도역으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츠 까지 보좌하였다. 에도 시대 야규 신음류(柳生 新陰流)의 번영의 초석을 놓았다. 검술가, 정치가로서 평가가 높다.
- 양진성(배우) . . . . 2회 일치
||<#FFCC33> {{{#ffffff '''본관'''}}} ||<(> [[양(성씨)|청주 양씨]] (淸州楊氏) ||
[[2010년]] 영화 웨딩 드레스를 통해 배우 활동을 시작한 양진성은 2011년부터는 주로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다. [[2014년]] [[TV조선]] [[주말 드라마]] '백년의 신부'에서 [[1인 다역|1인 2역]]의 주인공을 맡으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9&aid=0002721159|관련 기사]]^^
- 엉클 샘 . . . . 2회 일치
기원은 미극 민담에 등장하는 브라더 조너선(Brother Jonathan)과 양키 두들을 합친 것이라 한다. 뉴욕의 샘(새뮤얼) 그라고 윌슨이라는 고기납품업자가 [[쇠고기]] [[통조림]]에 United States 라는 뜻으로 U.S. 라는 도장을 찍기 시작했던 것을 납품고기를 검사하던 부대 감독관이 U.S → Uncle Sam으로 알아서 엉클 샘이라는 캐릭터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반대로 납품업자가 자기 별명인 엉클 샘의 이니셜인 U.S.를 찍어 보낸 것을 감독관이 United States인 줄 알았다는 설도 있다.[* 이 엉클 샘에 대한 것은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도 실린 이야기다.]
- 여태조 . . . . 2회 일치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고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으로 일관한 결과 명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대월을 다시 건국하고 여왕조를 열어 초대 황제 태조로 등극하게 된다.
내치적으로는 행정체제의 확립, 토지 제도의 개혁을 이룩하였으며, 특히 통치 지역을 5개 도로 나눠 행정관을 파견해 다스리게 하고 명나라의 유교를 도입해 진흥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 연경흠 . . . . 2회 일치
* 상위 문서: [[야구 관련 인물(KBO)]]
이후엔 2018년 대전서구유소년 야구단의 감독으로 한화에서 활약했던 외야수이자 현재 코치인 [[박상규(야구선수)|박상규]] 와 함께 창단 3년차에 불과하지만 양구대회에서 4강 진출, 인제군수배에서는 준우승을 거두는 등 유소년야구대회에서 굵직한 성과를 냈다고 한다..[[http://www.spor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501|관련기사]]
- 연규진 . . . . 2회 일치
* 1995년 SBS [[코리아게이트(드라마)]] - [[오원철]] 제2경제 [[수석비서관]]
* 1987년 KBS 2[[TV 문학관]] - 눈보라
- 연정훈 . . . . 2회 일치
* 2003년 [[KBS2]] 《[[드라마시티]] - 〈사로잡히다〉》 ... 교도관 역
* 2015년 [[중국]] 관광의 해 홍보대사
- 오보카타 하루코 . . . . 2회 일치
일본의 국가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에서 일하면서, STAP 세포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니 연구조작이 드러나 매장되었다.
STAP 세포의 정체는 다른 기관에서 연구하던 'ES 세포'였던 것이 드러나, 절도 등의 용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 오수미 . . . . 2회 일치
|| 가족관계 || 여동생 [[윤영실 실종 사건|윤영실]] [br]배우자 [[신상옥]](이혼), 김중만(이혼)[br]자녀 신상균(아들), 신승리(딸) ||
[[1970년]], 영화 [[어느 소녀의 고백]]으로 데뷔하였다. 그러다 [[1973년]] [[신성일]]과 함께 출연한 [[이별(영화)|이별]]이 흥행하며 스타가 되었지만, 동시에 감독이었던 [[신상옥]]과 사랑에 빠지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오수미는 신상옥의 아이를 낳지만, 돌연 신상옥이 [[이북]]으로 납치되며 자연스레 신상옥과 이별하게 되었고, 김중만과 사실혼 관계를 맺는다.
- 오승근 (가수)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 가족 관계 ==
- 오카마 . . . . 2회 일치
* 에도시대에 남창을 의미하는 「카게마(陰間, かげま)」와 연관이 있다는 설.
* 가부키(歌舞伎)의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 배우 「오야마(女形,おやま)」와 연관이 있다는 설.
- 요괴:트위터 . . . . 2회 일치
트위터라는 이 요조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흉내내어 여러 곳에 퍼트린다. 이 새는 남의 말을 몰래 듣고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는데, 그 말이 평범한 것이면 상관없으나, 문제가 있는 말이면 큰 낭패를 겪게 된다. 트위터가 곁에 있는걸 깜빡하거나 모르고 혼잣말로 실언을 하여, 크나큰 낭패를 겪은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트위터를 불행을 퍼트리는 흉조라고 부르며 두려워 한다.
사람의 불행과 관련이 많기 떄문에 트위터의 울음소리를 듣고 점을 치는 사람도 있다.
- 우찬양 . . . . 2회 일치
||<#ed0000> '''{{{#ffff00 가족관계}}}''' || 부, 모, [[현민|형]], 누나 ||
* 2017년 U-20 대표팀 동료 [[이진현]]에게 오른발 못 쓰는 왼발잡이라는 디스 아닌 디스를 당했다.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516&aid=0000000070|관련기사]]
- 원 포 올 . . . . 2회 일치
타인에게 계승시킨다는 점에서 고유의 능력으로 확립되는 개성이란 개념에 크게 반하는 매우 이질적인 개성. 물론 엄청나게 강력한 힘인지라 아무나 계승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쓰려면 사용자의 그릇, 즉 육체가 관건인데 개성을 넘겨받을 수 있을 정도, 원 포 올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육체가 아니면 '''사지가 찢겨 터져나가 죽는다!'''[* 이즈쿠는 이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10개월 동안 하드한 트레이닝과 쓰레기장 해변의 대형쓰레기와 사투했다. 그사이 보인 노력은 오기의 레벨을 넘어선 순수함 그 자체.~~[[사이타마(원펀맨)|이 분]]이 생각난다.~~] --ㅎㄷㄷ-- 그리고 설사 겨우 개성을 받아낼 수 있는 몸을 만들어내도 어디까지나 급조된 그릇인데다 담을 수 있다는 것과 쓸수 있는 것은 다르기에 이러한 상태에서 쓰면 몸이 못버티고 파열한다. 사용자의 육체가 더 강해지거나 사용자 스스로가 조절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물론 올마이트는 출력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단, 뭐가 됐건 혈연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넘겨줄수 있는 힘이란 점에서 공개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 특성상 알려지는 것 자체가 사회에 큰 위협이 되기에[* 원포올의 특성이 알려지면 원포올을 양도 받기 위한 빌런들의 암약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만일 실수로라도 빌런에게 양도 되면...] 올마이트는 괴력이나 부스트 등으로 얼버무리고, 포장하는 식으로 넘겨왔으며 이 덕에 올마이트의 개성은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되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선 원 포 올 자체는 여전히 불가사의다. 이는 후술.]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계승자인 미도리야도 이 원 포 올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 원피스/827화 . . . . 2회 일치
* 빅맘이 있는 "홀케이크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34개의 섬이 흩어져 있고 하나하나를34명의 "대신"들이 관리하는 "대국".
* 밍크족에게 "관광 중이니 소란떨지 말라"며 입막음 시킨다.
- 원피스/828화 . . . . 2회 일치
* 브룩은 형제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는다.
* 페콤즈가 납치당한 것,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남은 것, 그리고 빅맘이 이미 밀집모자 일행의 상륙을 알고 있는 건 모두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 원피스/833화 . . . . 2회 일치
* 상디는 어린시절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는데, 전사만을 가치로 여기는 제르마에서는 낙오자 취급을 받고 가족들 조차도 그를 학대한다.
* 그는 진작부터 빅맘과 손을 잡고 싶었지만 혈연관계를 맺는게 조건이라 거리끼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들을 빅맘에게 사위로 잡히는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
- 원피스/839화 . . . . 2회 일치
* 빈스모크 저지는 이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들이 활약한 전장도 도플라밍고 패밀리의 붕괴와 연관된 전쟁이었던 듯 하다.
* 그러나 상디는 이야기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니디의 접시만 쳐다보고 있다.
- 원피스/847화 . . . . 2회 일치
인간까지 컬렉션으로 책 속에 보관하는 모습에 그 비정한 빈스모크의 형제들 조차도 인상을 찡그린다. 빈스모크 저지는 자신이 이곳에 와서 다양한 종족과 생물을 봤지만 딱 하나 "거인족"만은 보이지 않는다고 묻는다. 그러자 한순간이지만 빅맘이 발끈해서 인상을 구긴다. 하지만 곧 안색을 바꾸며 "어쩌다 보지 못했을 것"이라 얼버무린다.
* 빅맘은 뜬금없이 루피가 어인섬에서 가로챈 과자값으로 준 어인섬의 보물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 루피가 줬던 보물 중에는 어인섬의 국보인 "옥갑"이 섞여 있었다. 넵튠이 왜 이런 것까지 루피한테 줬는지 모르겠다며 웃으며 내일 다과회에서 개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이야기는 루피를 도발하기 위해서 한 말 같지만, 정작 루피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전히 상디의 결혼 문제에 화를 내는데, 급기야 샬롯 푸딩을 언급하며 그녀가 자신들의 친구니 만나게 해달라고 발언한다. 나미는 그 발언을 막으려 하는데 빅맘은 그저 둘러대는 말이려니 하고 귀담아 듣지 않는다.
- 원피스/861화 . . . . 2회 일치
* 그런데 다과회에 처음 참가한 게스트가 경솔한 짓을 저지른다. 빅맘에게 "마더 카르멜이 당신과 어떤 관계냐"고 묻고 만 것이다. 빅맘은 대번에 얼굴색을 바꾸며 그 남자에게 패왕색 패기를 쏘아보낸다.
상디는 이런건 당연히 연기라며 자기 자신에게 강조한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혹시 정말로 꿈을 꾼게 아닐까"라며 자신의 기억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버린다. 상디는 정신줄을 잡고 있으려고 아무 말이나 한다. "맹세의 키스"를 할 때 사람들 눈도 있으니 이마에 해주면 어떻겠냐고 하자 푸딩은 한껏 귀여운 척하며 "부부가 되는 거니까 당연히 입술에"라고 대답한다. 거기에 또 넘어간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무너지는 상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벽에 달려가 부딪히기까지 한다. 상디가 피를 흘리기 시작하자 푸딩도 일단은 걱정하는 시늉을 하지만, 속으로는 질려하며 "얼른 쳐죽이고 싶다"고 이를 간다.
- 원피스/876화 . . . . 2회 일치
* "제우스 브리즈 템포"가 유혹의 숲 한복판을 꿰뚫었다. 추격에 열을 올리던 빅맘 해적단이 한 순간에 증발. [[밀집모자 일당]]은 간발 차이로 폭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무사했다. [[몽키 D. 루피]]와 그 일행은 도망치던 것도 잊고 폭뢰가 만든 거대한 구멍을 바라봤다. 누구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술을 시전한 [[나미(원피스)|나미]] 조차 통상적으로 낼 수 있는 위력이 아니라고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페드로(원피스)|페드로]]는 추격대가 전멸했을 거라는 추측을 내놨다. 그렇다면 관건은 빅맘 [[샬롯 링링]]. 그녀의 생사였다. 분명 그녀는 폭심지 한 가운데 있었다. 직격.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저 시커먼 구멍에 삼켜진 건 분명하다. 과연 그녀는 그 충격을 견뎌낸 걸까?
어지간해서는 장단 맞춰주는 루피 조차 짜증이 났다. 그딴 소릴 할 거라면 빨리 사라지라고 항의하자 시폰이 다급하게 상황 수습에 들어갔다. 지금은 도망치는 것 보다 빅맘을 멈추는게 먼저다. 그녀는 상디에게 과자 만드는 솜씨도 뛰어나다고 들었다 말한다. 상디는 어떤 요리에 관한 거든 일류라고 자신했다. 시폰이 듣고 싶은 대답이었다.
- 원피스/877화 . . . . 2회 일치
* [[샬롯 카타쿠리]]가 유혹의 숲에서 묘한 움직임을 주목한 건 그때였다. 숲이 심상치 않은 굉음을 내고 있었다. 곧 호미즈들이 뿌리째 뽑혀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곧장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타쿠리가 그 움직임을 형에게 알렸다. 빅맘 [[샬롯 링링]]이 틀림없다. 페로스페로는 그렇게 여겼다. 이제 마마가 왔으니 장난질도 끝마칠 때다. 빅맘을 [[샬롯 푸딩]]이 웨딩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카카오 섬으로 유인해야 하니까. 행여라도 빅맘이 이 배에 웨딩 케이크가 없다는걸 알아차리면 그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숲을 유심히 관찰하던 카타쿠리는 "그럴 단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곧 페로스페로도 그걸 깨달았다. 숲을 무너뜨리듯이 가르고 나타난 것은 빅맘만이 아니었다. 빅맘에게 죽었다고 생각했던 밀집모자 일당, [[몽키 D. 루피]]와 그 일당들이었다. 여전히 빅맘의 추격을 피하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 [[페드로(원피스)|페드로]]도 선상을 점거한 페로스페로와 카타쿠리를 보고 "귀찮은 녀석들이 앞질렀다"고 불평했다. 이제 선상에 남은 빅맘 해적단은 카타쿠리와 페로스페로 단 둘. 페로스페로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일행에게 잘도 도망쳤다고, "감동 받은" 데 대한 선물을 날렸다. "캔디 메이든". 캔디로 된 아이언 메이든. [[캐롯(원피스)|캐롯]]은 그게 사탕 벽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벽일리 없었다. 캔디 메이든의 날카로운 이빨이 일행을 덮쳤다. [[징베]] 조차 여기선 우회하자고 했지만 루피는 강행돌파를 고집했다. 루피의 전력을 다한 "고무고무 레드호크"가 불길을 일으키며 캔디 메이든을 꿰뚫었다. 관통력에 불까지 붙은 레드호크는 페로스페로에겐 천적 같은 기술이었다. 당황하는 페로스페로.
- 원한해결사무소/1화 . . . . 2회 일치
이 때, 형사의 부인은 부상을 안대를 두르고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원한해결사는 형사가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쾌감을 느끼는 사디스트'라고 알려준다. 원한해결사는 형사는 그 외에도 두 명을 더 죽인 것 같지만, 경찰에서는 경찰과 관련된 불상사가 많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퇴직 시키고 1년 뒤에 잡으려 하고 있다고 설명해준다.
사실 원한해결사에게 의뢰한 것은 형사의 아내였다. 형사는 경찰관이면서도 집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최악의 남자로서, 도박을 좋아하고 생활비를 안 주고 애들 교육비에도 손을 대는 등. 죽어 마땅한 남자였기 때문에 5천만엔을 주고 원한해결사에게 살해를 의뢰한 것이었다. 그리고 1억엔의 보상보험을 들어놨기 때문에 이미 보상은 받았다.
- 원한해결사무소/4화 . . . . 2회 일치
이번화 의뢰인은 사장 부인으로서, 불장난을 해다가 성관계 비디오를 찍혀서 지속적인 성관계와 금품을 뜯어내는 협박을 당하고 있는 여성. 원한해결사는 100만엔의 보수로서 사회적 말살 의뢰를 받는다.
- 유다인 . . . . 2회 일치
|| [[2005년]] || 야수와 미녀 || 미술관 안내원 || ||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3D414D><#3D414D> '''{{{#white 역임 연도}}}''' ||<#3D414D> '''{{{#white 기관/기업}}}''' ||<#3D414D> '''{{{#white 직함}}}''' ||<#3D414D> '''{{{#white 비고}}}''' ||
- 유승옥 . . . . 2회 일치
2015년 1월경 [[정아름]]이 유승옥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비판을 올렸던 일이 조명된 바 있다. [[http://www.sportsseoul.com/news/read/195170|링크]] 정아름은 뒤늦게 논란이 되자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12&news_seq_no=2318991|이는 디스나 폄하가 아니며]] 유승옥에 대해선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자기 비판에 인용하게 되었을 뿐이란 입장을 [[http://news.tf.co.kr/read/entertain/1577514.htm|밝혔으나,]] 나중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과 연관되게 되자 다시금 안 좋은 쪽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 태도를 비판하는 입장에선 유승옥 디스 건이 논란이 되었을 당시부터도 정아름이 골프 선수 시절 '''누드 화보를 찍었던 당사자가 남 말하듯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었다.'''[* 일단 [[정아름]] 본인은 자신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기위해 찍었더고는 하지만[[http://news.topstarnews.net/detail.php?number=119901]] 그 사진들이 모바일 서비스로 유통된 것이라(...) 논란이 좀 있다[[http://www.koreatimes.com/article/199436.]] ]
2월경 소속사 고소 문제로 인기가 땅에 떨어진 이전의 섹시 심볼이었던 배우 ]의 뒤를 이어 2015년 초에 인터넷상에서 차세대 섹시 심볼로써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얼굴이 [[노안]]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러나 딸의 유명세가 단지 몸매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는 상황 때문에, 유승옥의 아버지는 심적으로 괴롭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 유재한 (1955년) . . . . 2회 일치
* 재정경제부 정책홍보관리실 실장(2006년 ~ 2007년 2월)
*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2002년 2월 ~ 2003년 1월)
- 윤균상(1987) . . . . 2회 일치
2012년에 [[SBS]] [[드라마]] [[신의(드라마)|신의]]로 데뷔하였으며, 2년 뒤에 같은 방송사의 [[피노키오(드라마)|피노키오]]에서 주인공의 형 역할인 [[기재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 후 또 같은 방송사의 [[너를 사랑한 시간]]에서 천재 피아니스트 차서후 역으로 지지를 받기 시작하고, 그리고 같은 해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앞서 방영했던 이후의 세계관을 다룬 [[뿌리깊은 나무(드라마)|뿌리깊은 나무]]의 내금위장 [[무휼(뿌리깊은 나무)|무휼]]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 앞서 연기했던 차서후가 귀공자적인 매력을 가진 엘리트 피아니스트였다면 무휼은 우월한 신장과 제대로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금사빠]]에 허당기가 넘쳐서 [[갭모에|귀여운]]모습까지 보이는 야생 ~~[[개그 캐릭터|개그]]~~무사의 이미지. 메이킹 영상이나 인터뷰를 보면 배우의 실제 성격은 그간 맡아온 배역들 중 무휼에 가장 가까운 듯 하다.
||<#c0c0c0> {{{#ffffff '''개봉 연도'''}}} ||<#c0c0c0> {{{#ffffff '''제목'''}}} ||<#c0c0c0> {{{#ffffff '''활동'''}}} ||<#c0c0c0> {{{#ffffff '''배역''' }}} ||<#c0c0c0> {{{#ffffff '''관객수'''}}} ||<#c0c0c0> {{{#ffffff '''흥행'''}}} ||
- 윤보라 . . . . 2회 일치
2017년 현재 [[이시영]]이 다녔던 체육관에 이시영과 같은 코치에게 [[복싱]]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701900|#]]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B26724><#B26724> '''{{{#white 역임 연도}}}''' ||<#B26724> '''{{{#white 기업/기관}}}''' ||<#B26724> '''{{{#white 직함}}}''' ||
- 윤석용 . . . . 2회 일치
[[2012년]] [[2월 14일]]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장애인체육회가 후원받은 8275만원 상당의 옥매트 250개를 횡령해 지역 복지단체와 동료의원 사무실 등에 임의로 전달한 혐의, 자신의 지역구(서울 강동을) 선거구민과 연관된 단체에 축구공 100개와 30여만원 상당의 김ㆍ빵을 기부해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혐의, 2011년 8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앞두고 장애인체육회 직원 20여명을 동원해 단계적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내용의 투표 운동을 시켜 주민투표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횡령혐의는 무죄,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선고받고 확정되었다.<ref>{{웹 인용|제목=옥매트 횡령 윤석용 의원 불구속 기소(종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512434.html|저자=[[연합뉴스]]|확인날짜=2012-02-14}}</ref>
* 2006년 산업자원부 장관표창<ref>{{웹 인용|제목=네이버 인물검색 |url=http://people.naver.com/DetailView.nhn?frompage=nx_people&id=67393|저자=네이버|확인날짜=2008-07-30}}</ref>
- 윤식 . . . . 2회 일치
| 본관 = [[파평 윤씨|파평]](坡平)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이며 [[호 (이름)|호]](號)는 화중(禾中)이다.
- 윤주상 . . . . 2회 일치
* [[2007년]] [[KBS2]] 미니시리즈 《[[경성스캔들]]》 ... 선우관 역
* [[KBS1]] 《[[가족오락관]]》 (2002년) 게스트
- 윤철종 . . . . 2회 일치
그 후 2010년 5월 민트 페이퍼 프로젝트 3집 앨범 <Life>의 수록곡인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로 참여. 이 곡이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다가, 2010년 8월 발매한 디지털 싱글 ''''아메리카노''''가 제대로 대박을 터뜨려서[* 2010년 [[GMF]]에서는 관중들이 이 곡을 [[떼창]]했다.] 여자들이 이름만 들어도 열광하는 가수로 급부상하게 된다.[* 사실 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앨범화가 되지 않은 노래들이 많다. '''녹음하기 귀찮아서.'''] 이때 아메리카노로 [[뮤직뱅크]] 최고 순위 7위에 든 적도 있다.
- '술'이 들어갔으므로.[* 사실 이 때만 해도 술, 담배가 가사에 들어간 노래는 싸그리 청유물을 먹이는 관행이 있었다.]
- 율령 . . . . 2회 일치
고대 중국에서 [[법률]]을 뜻하는 말. 율과 령은 모두 법을 뜻하지만, 약간 의미에 차이가 있다. 율(律)은 주로 형벌(刑罰)에 관련된 법율을 뜻하며, 령(令)은 주로 행정(行政)에 관련된 법령이다. [[법가]] 사상에서는 율령을 통괄하는 통치 기술을 법술(法術)이라고 불렀다.
- 은혼/590화 . . . . 2회 일치
* 단지 땅을 기는 벌레(양이지사)의 생사여부 같은 자잘한 사실은 그의 큰 계획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라는 것.
* 오보로는 쇼요든 우츠로든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며 그분의 방해를 제거할 뿐이라고 답하고 싸우기 시작한다.
- 은혼/596화 . . . . 2회 일치
* 그의 이름은 입국 관리소 국장 하세가와 다이조.
|| 입국관리소 국장 하세가와 다이조. ||
- 은혼/598화 . . . . 2회 일치
* 한편 우주에서는 연합군의 지휘관들과 담판짓기 위해 가츠라, 다츠마가 노부노부를 대표자로 내세워 접촉하는데.
* 저항자들의 분위기는 좋아지지만 객관적으로 우주에서 모여든 연합군을 상대로 전지구가 힘을 합친들 충분치 않은게 사실.
- 은혼/600화 . . . . 2회 일치
* 다른 해방군측 지휘관들은 자신들을 적대하겠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는데 변의에 몸부림치는 노부노부는 이것을 일축
* 주작은 자신이 책임지고 다른 지휘관들을 설득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노부노부는 그런 것 보다도 급한 것이 있었다.
- 은혼/602화 . . . . 2회 일치
* 아르타나 해방전쟁이 시작되기 전, 자작은 어떤 별의 지휘관으로 이웃나라와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 "누구든 상관없다. 지구인이든 천도중이든 우리들의 증오를 받아줄 적이라면."
- 은혼/603화 . . . . 2회 일치
* 핫토리 젠조는 혼란해진 정세를 관망하고 있다.
* 그가 친구를 위해 속죄하며 사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때문에 싸우고 있는 친구들을 져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 은혼/611화 . . . . 2회 일치
* 같은 용병민족이지만 신라 측은 드라이하게 관망하고 있다. 리더인 소타츠는 다키니는 이끼 낀 고대 유물들이라고 비하하며 어차피 현시점에선 통솔도 어려울 병력 따윈 다키니에게 던져주자고 한다. 저들이 지구측과 교전해서 교착상태가 되면 그때야 말로 자신들이 목표를 달성할 때라는 것.
* 야토 측도 아직은 관망 상태. 야토의 두목은 해가 저무는걸 보고 곧 자신들의 시간이 될 거라고 말한다.
- 은혼/622화 . . . . 2회 일치
* 소타츠는 이들이 과거 가부키쵸 사천왕이자 [[하루사메]]의 일원이었던 [[카다]]를 처치한 장본인이라는걸 깨닫는다. 그렇잖아도 일족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며 병력들을 더 불러낸다. 지로쵸는 자신이 처리하려 하지만 이번엔 피라코가 자신의 상대라며 나선다. 자신은 이 마을과 해결사에게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그걸 전혀 갚지 못했으며 그대로는 지로쵸의 딸도 해결사의 막내도 되지 못한다며 "모두가 선물해준 이 이름을 걸고 의리를 관철해 보이겠다"고 선언한다.
* 그 의지를 들은 지로쵸는 좋을대로 하라며 아버지는 아버지의 의리를 관철하겠다고 한다. '''대체로 쓸데없이 딸하고 친밀해 보이는 긴토키에 대해서'''. 피라코가 형님이라고 부르고 왠지 친해 보이는게 심사에 거슬렸는지 긴토키를 핀포인트로 견제한다.
- 은혼/629화 . . . . 2회 일치
* 한편 포획된 겐가이는 복구된 통신으로 해방군 총지휘관 원상황자와 통신으로 대담을 가진다.
* 긴토키는 애초에 겐가이 영감이 적에게 잡힌게 맞긴 하냐고 묻는다. 오키타가 겐가이가 길똥을 때리다 휴지가 없어서 고립되었을 때 붙잡힌거 같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현장에 대변이 발견되었지만 닦은 흔적이 없는 관계로 엉덩이에 묻힌 채로 그대로 끌려갔다는 정말로 쓸데없는 추리를 덧붙인다. 긴토키는 그딴 추리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 거냐고 까버린다.
- 은혼/630화 . . . . 2회 일치
자작 제독은 구속이 풀린 직후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을 포섭한다. 자작 제독은 그들에게 반란에 휘말리게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부하들은 자신들은 처음부터 자작 제독을 따르던 자들이니 상관없다고 대답한다. 그것보다 현재의 해방군이, 엔죠 제독이 큰 문제라고 하는데.
엔죠가 팬던트를 닫는 순간 숨겨져 있던 화기가 불을 뿜는다. 사령실의 각 벽면마다 설치된 비상장치였다. 반란을 도모했던 자들은 방아쇠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쓰러진다. 엔죠는 죽어버린 반역자와 살아남은 방관자들, 그리고 화면 속의 겐가이 영감에게 말한다. 증오와 슬픔을 치유할 길도 없어진 자신들은 전쟁이란 불길로 그걸 태워버릴 수밖에 없다고. 증오도 슬픔도 전부 타서 재만 남을 때까지. 그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
- 은혼/637화 . . . . 2회 일치
이런 비교적 온유한 경고가 나오자 [[아부토]]를 비롯한 7사단은 "독감이라도 걸렸냐"고 놀린다. 하지만 카무이는 딱히 바뀐 건 없고 그저 송사리들에겐 볼 일이 없으니 얼른 보스랑 싸우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가 가구라가 "송사리 좀 늘어도 상관없다"며 적의를 드러낸다. 카무이 또한 "네가 보스인 줄 아나 본데 정리해버리고 싶은 송사리일 뿐"이라며 남매싸움 2라운드를 속행하려 든다.
* 이렇게 되자 야토족 용병부대다 더는 버틸 수 없다. 본래 7사단에게도 밀리고 있었으니 증원까지 왔다. 중간관리자로 보이는 야토가 당장 퇴각하라고 외치고 있는데, 하늘에서 석장이 내려온다. 그 석장이 그를 꼬치로 만든다.
- 은혼/638화 . . . . 2회 일치
* 긴토키는 발 밑을 울리는 심상치 않은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우츠로에게 외친다. 우츠로는 다소 친절할 정도로 자세하게 대답했다. 우선 다행한 점은 [[히라가 겐가이]]의 나노머신이 터미널 지하 깊숙한 곳까진 미처 닿지 않았다는 것. 거기서 우츠로가 계획한 최후의 계획이 무사히 시작했다. 그는 손에 넣은 "열쇠"를 이용해 터미널 지하의 "문"을 열엇다. 문이란 "용혈"을 봉하고 있는 터미널의 중추 장치다. 아르타나의 흐름이 "용맥"이며 그 원천이 "용혈". 그걸 제어하기 위해 설치된 "문"을 잘만 다룬다면 단숨해 폭주시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만한 대폭발을 일으킬 수도, 지금처럼 혈관 각지를 부수어 폭주를 확산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우츠로는 가부키쵸 연합군 따윈 언제든 처리할 수 있었다. 긴토키와 그들은 단지 우츠로의 손 위에서 춤을 췄을 뿐이다.
* 아르타나의 비정상적인 집중은 해방군 본대에서도 관찰했다. 엔죠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걸 확인했다. 우츠로는 천연덕스럽게도 "지구를 파괴할 힘"을 준 답례로 "이쪽의 선물"도 준비한 거라 말한다. 전 지구의 힘을 긁어 모아서 선물을 보낼 거다.
- 은혼/639화 . . . . 2회 일치
*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플하고도 거대한 음모. 모든 걸 파멸시키려는 [[우츠로(은혼)|우츠로]]의 계획은 우주에서 싸우는 [[귀병대]]에도 전달된다. [[다케치 헨페이타]]가 관련된 사실을 전달하자 [[키지마 마타코]]가 귀를 의심한다. 그녀는 병력을 이끌고 히노카구츠치를 저지하기 위해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전해진 아르타나의 폭주. 마타코는 에도의 가부키쵸 연합군이 어떻게 됐는지 다급하게 물었다. 거기까지는 헨페이타도 알 수 없는 일. 그저 많은 별들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사태가 지구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그 배후가 우츠로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카와카미 반사이]]가 우츠로의 진짜 목적은 뭐냐고 물었다. 헨페이타가 알아낸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지상의 해방군 잔당을 일소하고 본대가 히노카구츠치로 보복하는 걸 유도하는 것. 거기에 지구의 전 아르타나를 모은 아르타나 캐논을 작렬, 막대한 힘을 충돌시켜 지구를 부수고 전우주에서 모인 해방군과, 잘하면 이 은하까지 부수는 걸 노리고 있다.
* 귀병대가 끈질긴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하루사메의 증원군도 해방군 모함에 돌입했다. 삼흉성 [[사루가쿠]]의 전달이었다. [[바토우]]도 돌입 성공. "악당 총집결"이라고 들떠있는 사루가쿠에게 "악당이 아니라 원숭이를 잘못 말한 거겠지"라고 디스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해적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수행할 "임무"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런데 관심이 없는 사루가쿠는 전부 "삼흉성 제일의 일벌레"에게 떠맡긴 뒤 부하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향한다.
- 은혼/640화 . . . . 2회 일치
* 해방군의 히노카구츠치를 저지하기 위해 해방군 모선으로 돌격했던 귀병대. 그러나 해방군 사령관 [[엔죠]] 황자는 모선의 일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히노카구츠치의 충전을 서둘렀고 그 결과 불필요한 구역을 아군까지 희생시키며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귀병대가 침투했던 구역이 하나둘 파괴되면서 최전선에서 지휘 중이던 [[다카스기 신스케]]와 [[카와카미 반사이]], [[키지마 마타코]]도 위험에 처한다. 하나둘 산화하는 부하들. 그러나 그저 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 해방군 모선이 붕괴하고 있다. 히노카구츠치 발사와 컨트롤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면 전부 폐기 당했다. 외벽부터 우주로 흩어지기 시작하자 [[다케치 헨페이타]]와 그의 부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한카이]]는 방금 전의 조치로 완충까지 고작 15분이 남았다 계산한다. 그게 이 세계에 남은 수명. 헨페이타는 한카이에게 방법을 강구해달라 요청하지만 그로써도 역부족. 유일한 가능성은 외부와 연계해 에너지 회로를 파괴하는 것. 그러나 이것도 시간끌기에 지나지 않아 15분 정도 뒤에는 끝이다.
- 은혼/648화 . . . . 2회 일치
머지 않아 형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어떤 나라와 동맹을 체결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아직 형수였던 시절엔 남편을 초연하게 배웅하는 법을 몰랐다. 형은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러 가는게 아니며 영웅 초연의 황자가 지켜줄 거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엔쇼는 형의 곁에 있었다. 아무 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적당한 위치에 도달한 형의 함선이 기습을 당하고 동생에게 구원을 요청할 때조차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형을 내버려둔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슬픔을 가장했다.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형이 누워있는 관 앞에서 형수를 위로한 일이었다.
* 총알은 자작의 후두부를 관통해 이마를 뚫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총알이 심장과 우측 복부를 꿰뚫었다. 즉사. 총을 쏜 사람은 엔쇼의 충직한 부하였다. 일선에서 그의 지시에 따라 동포들을 희생해온 남자였다. 그 병사는 엔쇼가 말한 "웃기는 얘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이강덕 . . . . 2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12대 해양경찰청장[br]서울지방경찰청장[br]경기지방경찰청장[br]청와대 대통령실 치안비서관[br]부산지방경찰청장 ||
경찰대학 졸업 이후 [[대한민국 경찰청]] 소속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포항남부경찰서장, 구미경찰서장, 서울남대문[[경찰서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대통령실]] 치안비서관, 부산[[지방경찰청장]], 경기지방경찰청장, 서울지방경찰청장, [[해양경찰청장]] 등을 지냈다.
- 이경석 (배구인) . . . . 2회 일치
'''이경석'''(李京錫, [[1961년]] [[3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전 배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고려증권 배구단|고려증권]]의 세터 출신이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모교 [[경기대학교]]에서 감독을 했으며, 2011-12시즌 [[김상우 (배구인)|김상우]] 감독이 경질된 후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LIG]]의 감독에 부임했다. [[2012년]]에는 KOVO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LIG의 KOVO 주관 대회 첫 우승을 안겼다. 그러나 2012-13시즌 성적이 부진하여 시즌 도중 경질당했다. <ref>{{뉴스 인용
현재는 KOVO 경기감독관이다.
- 이기열(배우) . . . . 2회 일치
* 2006년 《[[조용한 세상]]》 - 검시관 역 (특별출연)
* 2015년 [[KBS]] 《[[장사의 신 - 객주 2015]]》 - 청나라 세관장 역
- 이동찬(기업인) . . . . 2회 일치
[[대한민국]]의 [[기업인]]. 호는 우정(牛汀)이다. 본관 [[여강 이씨]].
스포츠에도 관심이 있었던지 1971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실업농구연맹 회장,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회장, 198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 이병석(정치인) . . . . 2회 일치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옥중 출마한 [[무소속]] [[허화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허화평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박태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허나 이런 훈훈한 일화도 얼마 못가 [[포스코]] 비리 연루 의혹을 받으면서 빛이 바랬다.(...) 결국 2016년 1월 25일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청]]에 의해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으며, 결국 2016년 2월 1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포스코 관련 비리 때문에, 새누리당이 인명진 비대위체제로 넘어간 뒤 2017년 1월 18일에 당에서 '''제명되었다'''.
- 이병후 . . . . 2회 일치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1957년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58년 1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어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야간에만 개표를 했던 대구병구 올빼미 개표사건, 팔공산에서 생포한 대남 간첩사건 등에서 배석판사로 심리하는 등<ref>동아일보 1959년 4월 4일자</ref><ref>동아일보 1958년 12월 17일자</ref>1961년 8월 27일 대구지방법원<ref>동아일보 1961년 8월 27일자 1964년 5월 19일자</ref> 1966년 11월 15일 대구고등법원 1967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69년 3월 31일 서울고등법원 1969년 10월 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장 1971년 4월 1일 부산민사지방법원 1973년 3월 27일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성동지원장, 1974년 성북지원장을 거쳐 1976년 12월 29일 서울고등법원<ref>동아일보 1976년 12월 30일자</ref> 1977년 11월 5일 서울고등법원<ref>매일경제 1977년 11월5일자</ref> 1980년 영등포지원장 1981년 4월 20일 수원지방법원장<ref>매일경제 1981년 4월 21일자</ref> 1982년 3월 12일 대전지방법원장<ref>경향신문 1982년 3월12일자</ref> 1983년 8월 12일 인천지방법원장<ref>경향신문 1983년 8월 12일자</ref><ref>동아일보 1986년 4월 3일자 매일경제 1966년 11월 16일자 경향신문 1969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1969년10월7일자 매일경제 1971년 3월 26일자 경향신문 1973년 3월 27일자</ref>을 거쳐 1986년 4월 16일에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1987년 대법원이 상고허가 신청사건의 처리를 전담하는 상고허가신청부를 신설하면서 [[정기승]] [[황선당]]과 함께 전담 판사로 구성되었으며<ref>매일경제 1987년 1월 5일자</ref> 1987년 5월 18일에 대법원장 추천으로 [[헌법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ref>동아일보 1987년 5월 16일자 매일경제1986년4월3일자</ref>
[[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
- 이상오 . . . . 2회 일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며 호(號)는 모남(慕南)이다.
[[사냥|수렵]]과 [[야생동물|들짐승]]에 관한 저술서도 다수 남겼으며 [[사격]]과 [[바둑]]에도 유단자였다.
- 이상정 (1897년) . . . . 2회 일치
| 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은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 조선]]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겸 [[군인]]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이며 일명(一名)은 '''이연호'''(李然晧)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이다.
- 이상훈 (1987년)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8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중견수]][[분류:KBO 리그 좌익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KT 위즈 선수]][[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
- 이설주 . . . . 2회 일치
| 본관 =
* 19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 서훈
- 이수진(치어리더) . . . . 2회 일치
* 상위 문서 : [[야구 관련 인물(KBO)]], [[치어리더]]
[[2013 아시아 시리즈]]가 열린 대만 현지에 파견된 삼성 라이온즈의 치어리더 멤버 중 한명이였으며, 현지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 이영 (1492년) . . . . 2회 일치
이영(李榮, [[1492년]] [[2월 10일]] ~ [[1583년]] [[10월 2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은자|은사]]이다. 자(字)는 양수(陽臼+又), 호는 북산(北山),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이다.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녹래리로 이주하였다. 뒤에 노인직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를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출신.
== 가족 관계 ==
- 이예린 (1974년)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 [[1998년]] [[KBS 2TV|KBS2]] 《[[가족오락관]]》
- 이원형(1951) . . . . 2회 일치
1951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 [[영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이후 [[계명문화대학교]] 관광영어통역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이명박 정부]] 때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를 역임하였다.
- 이장훈(배우) . . . . 2회 일치
1972년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부거리길에서 태어난 이장훈은 연극,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관객을 압도하는 카멜레온 같은 배우이다. 가족 뮤지컬《피노키오》부터 미스터리 영화《물고기》, 그리고 코믹적인 요소가 가득 담긴 드라마《푸른거탑》까지, 탁월한 집중력과 진짜인지 연기인지 모를만큼 훌륭한 연기력으로 어떤 배역이든 맛있게 소화해 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는 서울호서예술전문학교 연기예술학부의 교수직을 맡고 있으며, 기절 전문 대대장 이장훈 역할로 [[tvN]] 《[[푸른거탑]]》에서도 맹활약하였다.
*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 (양재 교육문화회관)
- 이종근(1923) . . . . 2회 일치
1923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에서 태어났다. 충주농업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다.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생전에 청렴한 생활로 유명하였으며, 의원 임기 동안 [[건국대학교]]를 충주에 캠퍼스로 유치시켰으며, 충주여성회관. [[충주대학교]], 충주재향군인회를 건설하면서 [[충주시]]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 이지현(1983) . . . . 2회 일치
2016년 6월 10일,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821557|수원지방법원 관계자]]는 "이지현이 최근 이혼 조정 중이다. 이지현 측이 먼저 신청했다"라고 밝혔다. 결국 2016년 8월 25일에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449032|합의 이혼했다]]. 양육권은 이지현이 갖고 간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당시 일부 [[찌라시]]에서는 이지현의 아이들을 ''''두 남매'가 아닌 '두 딸'로 잘못 기재''' 했다 [[카더라]].
|| 2002년 [br] 2005년 || [[KBS1]] || [[가족오락관]] || 게스트 || ||
- 이채영(fromis_9) . . . . 2회 일치
*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보더라도 본인이 장문의 사과 편지까지 썼고 경찰의 개입 없이 학교 안에서 마무리 된 사안인데 4년이나 지나서 다시 인터넷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만한 사안인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와 싸웠다가 사과 혹은 화해한 사실 하나만 있다면 연예계 진출은 영구 금지 당해야 하는 것인가? 학교 측의 조치에 부족함이 있었다면 그 당시에 학교나 관할 경찰서를 통해 최종적으로 해결해야 했던 것 아닌가?
* 대중의 투표라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최종 선발된 것이고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 글의 내용이 널리 전파된 시점은 대중의 투표 시작 훨씬 전이었다. 대중에게 관련 정보가 알려진 후 대중의 선택을 받아 대중 앞에 서는 직업을 갖는 건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 이카르부스 . . . . 2회 일치
1954년에는 [[오스트리아]] 회사 [[자우러]][* 총기 회사 SIG 자우어와의 관련은 없다.]의 [[버스]]를 라이센스 생산한다. 이는 현재 이카르부스의 밥줄이 될 버스 제작의 시초가 되었다. 이카루스는 1961년 군사분야의 산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자동차 회사가 된다.
1992년 공산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하며 이카루스는 합자회사가 된다. 이후 1993년 이카루스는 현재의 이카르부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이후 이카루스는 [[메르세데스]]와 [[MAN]], [[투쉬노 자동차]]와 협력관계를 맺게 된다.
- 이헌일 . . . . 2회 일치
| 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이헌일'''(李憲一, [[1917년]] [[3월 25일]] ~ [[1979년]] [[4월 17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 호(號)는 창록(蒼綠). 경상북도 대구(慶尙北道 大邱) 출생이다.
- 이현우 (가수) . . . . 2회 일치
| 가족 = 자녀는 슬하 2남 <br/> 형제자매 관계는 2남 2녀 중 차남 <br /> 친척 관계는 5촌 당숙 [[이경영 (1960년)|이경영]](영화배우)
- 이호재(연극배우) . . . . 2회 일치
* 2006년 MBC 《[[궁(드라마)|궁]]》 ... 공내관 역
* [[2011년]] [[대한민국의 훈장|보관문화훈장]](3등급)
- 이효린 . . . . 2회 일치
'''이효린'''(李孝麟, 1540년 - 1622년)은 조선시대의 유학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우계이고, 도촌 이수형의 증손이며 참봉 이은의 넷째 아들이다. 자는 원서(源瑞),
[[이수형]](李秀亨)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혜민서 참봉 은이고 어머니는 공주이씨 이성의 딸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다. 순흥 재향지에 의하면 음사로 관직에 나갔다 한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촌형 [[이흥문]]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김개국]] 의병장 휘하에서 왜적에 대항하였다. 그 공로로 [[내자감]] 주부(內資監主簿)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고, 80세에 수계(壽階)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이희성 (1988년)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
- 인비저블 우먼 . . . . 2회 일치
[[미스터 판타스틱]]과 연인 → 부부 관계이다.[* 참고로 나이차이가 상당히 심하다. 거의 키잡에 가깝다.(…)] 판타스틱 포의 [[홍일점]]이며, 두 아이에다 항상 티격태격하는 벤과 동생 조니, 워커홀릭 남편인 미스터 판타스틱이 그렇게 사고치고 속을 썩이는데도 용케도 끝까지 같이 사는 걸 보면 '''[[성녀]]''' 수준.(…) 게다가 퓨처 파운데이션 이후 집에 식구가 더 늘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건 아닌 것 같은 것이, [[닥터 둠]], [[네이머]]와 서로 끌리는 관계에 있음을 그린 에피소드들이 많다. 수잔 스톰 자체가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중 최고급의 미모를 자랑해서 그렇기도 하고.
- 일곱개의 대죄/191화 . . . . 2회 일치
* 그레이로드는 겁 먹고 도망치려 하지만 멀린이 "엔들리스 월"이라는 바람의 마법을 사용, 그대로 실험관에 가둬버린다.
* 그레이로드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남김없이 실험관으로 빨려들어간다.
- 일곱개의 대죄/208화 . . . . 2회 일치
* 곤죽이 됐던 [[사리엘]]과 [[타르미엘]]이 재생을 마치고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뤼드셀은 이런 촌극에 더 어울려줄 수가 없다며 두 사대천사를 불러들여 십계들이 묶여 있는 동안 끝장을 보려 한다. 엘리자베스는 정화의 힘을 유지하느라 뤼드셀을 제지할 수가 없다. 그때 멜리오다스가 뤼드셀의 앞을 가로막는다.
* 두 사대천사의 힘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모든 힘을 모아 다시 한 번 빛의 화살에 집중한다. 화살은 데리엘과 몬스피트를 관통하면서 그들 안에 있는 어둠의 힘을 끄집어낸다. 이윽고 화살은 거대한 어둠의 힘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두 십계는 천천히 지면으로 떨어진다.
- 일곱개의 대죄/210화 . . . . 2회 일치
* 이 시대의 고서는 감정변화가 극심하고 어딘지 정상이 아닌데, 그를 관찰하던 할리퀸은 그가 진짜 고서가 아니라고 느낀다.
스티그마는 그가 마신족과 한패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건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그와 마신족은 그저 목적이 일치했을 뿐,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다.
- 일곱개의 대죄/211화 . . . . 2회 일치
* 성전 같은 것에도 관심이 사라진 그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 메라스큐라를 조종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어.
- 일곱개의 대죄/212화 . . . . 2회 일치
* 디안느는 할리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고서는 뜬금없이 "그가 너의 연인이냐"고 묻는다. 디안느가 당황해서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얼버무리지만, 고서의 눈에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듯한 신뢰관계로 보인다. 그리고 고서 자신의 계금이 그들에게 발동하지 않는 것도 증거다. 그들은 서로에게 뭔가 원하기 보단 뭔가를 채워주고 있다. 고서는 그런 점이 부럽다. 모든 종족이 그들 같이 사이가 좋다면 성전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일곱개의 대죄/214화 . . . . 2회 일치
* 그것은 [[반(일곱 개의 대죄)|반]]의 모습. 자청해서 창에 맞으려는 듯한 로우의 모습을 보고 반을 떠올렸다. 그리고 [[엘레인]]과 그의 관계, 그때문에 그가 할리퀸에게 속죄하려 했던 일들.
* 그러나 영창은 이미 로우의 몸을 관통하고 난 뒤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창은 분명 그가 멈췄다. 그럼 도대체 누가?
- 일곱개의 대죄/221화 . . . . 2회 일치
* 봉우리 뒤편의 언덕에서 불청객이 기어나왔다. [[반(일곱 개의 대죄)|반]]과 할리퀸이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은근히 힐난했다. 분명 엿듣고 있던게 분명하다. 둘은 사랑싸움이냐느니, 왕녀가 울고 있던거 같다느니 쓸데없이 참견해온다. 멜리오다스가 여긴 왠 일이냐고 묻자 반이 "킹이 요정 주제에 프로포즈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고 대꾸했다. 혹시 전부 들었냐고 묻자 둘은 전혀 아니라고 답했지만 반이 곧바로 "사랑 싸움의 원인은 뭐냐"고 짖궂은 얼굴로 물었다. 요즘 연애를 시작했다고 너무 기가 산 할리퀸 쪽도 "여자 마음을 좀 더 공부해야 한다"고 거들먹거린다. 부하들의 따뜻한 관심에 감격한 단장.
* 그리고 그걸 맞으면 죽는다고 엄살부리는 킹에겐 관대하게 딱밤을 먹인 뒤 사이좋게 둘 모두 언덕 아래로 내던져 버린다.
- 일장청 호삼랑 . . . . 2회 일치
## == 인물관계 ==
호삼랑의 별명 '일장청'의 의미는 현재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흔히 쓰이던 관용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 임백천 . . . . 2회 일치
이게 인연이 되었는지 1993년도 [[문화방송|MBC]]의 예능 프로그램인 [[특종 TV 연예]]에서의 서태지와 아이들 컴백쇼 코너를 보내주었고, MBC의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컴백 무대에서도 멘트를 맡았고, 몇몇 서태지 관련 이벤트 등에서 나와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특집 방송이나 공연의 MC를 맡기도 했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다. 실제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들도 임백천에 대해 각별히 생각한다고 한다. 서태지의 40대 이후의 외모가 놀랍게도 임백천과 매우 비슷하다는 평가가 많다.
* [[롯데관광]]
- 임성은(가수) . . . . 2회 일치
||<#eee> '''가족 관계''' || 1남 1녀 중 장녀 ||
나중에 그녀가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해 밝힌 바로는 소속사 실장이 정산을 제대로 안 해줘서 항의를 했다가 탈퇴를 요구받았다고 하며 그래도 탈퇴 후에 발매된 2집에서 피처링을 해주는 등 전 멤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 임채무 . . . . 2회 일치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에 (손불중앙길)는 손불중앙교회를 운영 중이나 빚이 수백억 원이다.~~[[채무|이름]]이 씨가 되다~~ 두리랜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로 [[대인배]]. 놀이공원 사장님이 되고 싶었다는 그의 어릴 적 꿈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고 하는데 수년간 계속 적자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운영하고 있으며, 연기 스케줄이 없을때면 항상 두리랜드에서 놀이기구 방송을 하거나, 팬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을 해 주는 일을 지속한다고 한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374&aid=0000092844|관련기사]] ] 놀이기구 임대업자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1심은 원고패소, 2심은 원고의 항소 기각으로 끝났다고 한다.[* [[https://news.v.daum.net/v/20180824090104518|관련기사]]]
- 임현성 . . . . 2회 일치
* 2015년 허삼관
* 2017년 [[보안관(영화)]]
- 임현식(배우) . . . . 2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가톨릭/인물]], [[음주운전/명단]]
||<#878787> '''{{{#EEE156 본관}}}''' ||<(> [[임|평택 임씨]] ||
- 잘츠부르크 . . . . 2회 일치
== 관광 ==
잘츠부르크 관광국 : http://www.salzburg.info/
- 장갑차 . . . . 2회 일치
병력을 수송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전투 능력에도 중점을 둔 장갑차. 대부분의 APC가 기관총으로 무장한다면 대부분의 IFV는 기관포로 무장한다. 여기에 적지 않은 IFV가 대전차미사일을 달고다닌다.
- 장남교 . . . . 2회 일치
장남 중시는 구시대의 관습으로, 기본적으로 메이지 시대의 가독상속 제도의 흔적이다.
1947년 5월 3일, 평등상속 제도가 실행되면서, 이러한 가독상속 제도는 없어지게 되었지만 사회적 관습은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장성원 (배우) . . . . 2회 일치
| 교도관
| 《[[가자, 장미여관으로]]》
- 장영 (조선) . . . . 2회 일치
'''장영'''(張銢, [[1622년]] ~ [[170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 (이름)|자]](字)는 명세(鳴世), [[호 (이름)|호]](號)는 소매당(訴梅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장응일]](張應一)의 아들로, 할아버지인 [[장현광]](張顯光)에게서 학문을 이어받았다.
[[1662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가 되었다. 이후, [[경안찰방]](慶安察訪), [[고령현감]], [[이인찰방]](利仁察訪), [[군자감판관]], [[공조정랑]], [[경흥창주부]], [[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 등을 거쳤으며, 사후에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 장우석 . . . . 2회 일치
[[2004년]] 대구 평화영화제를 시작으로 대구 5.18영화제, 앞산달빛 마을영화제, [[영남대학교]] 북한영화제 등 여러 지역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를 지냈다.<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0515.010350815480001 장우석 독립영화 감독·물레책방 대표, 10월항쟁·위안부 할머니 관련 다큐 제작], 《영남일보》, 2015.5.15.</ref>
[[2003년]] 《OST-BOX》에 <영화 《[[하얀 비요일]]》 OST 리뷰>를, [[2006년]] 《[[녹색평론]]》 87호(2006년 3~4월)에 <4.3 항쟁, 변방, 끝나지 않은 세월><ref>[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5922 김경률 감독 추모전 대구에서 열린다], 《제주의소리》, 2006.3.24.</ref>을 각각 기고한 이후 《[[오마이뉴스]]》, 《[[대구신문]]》, 《이삭》 등 여러 매체에 지역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으며, [[2014년]] 3월부터 현재까지 《[[영남일보]]》에 [[영화]]칼럼 <장우석의 電影雜感(전영잡감)><ref>[http://www.yeongnam.com/ynsearch/search.jsp?searchWord=장우석의+전영잡감 <장우석의 電影雜感(전영잡감)> 연재 읽기], 《영남일보》, 2014.3.14~현재.</ref>을 연재하고 있다.
- 장윤성 . . . . 2회 일치
'''장윤성'''(張允聖, [[1963년]] [[12월 9일]] ~ , [[서울특별시]] 출생)은 [[대한민국]]의 지휘자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 창악회와 동아콩쿨, 중앙콩쿨 작곡 부문에서 입상하기도 했고, 아르스 실내 관현악단 연주회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졸업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지휘 석사과정을 이수했고, 이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로 유학해 빈 국립 음악원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원에서 지휘를 배웠다.
2003년 [[창원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어 2007년까지 재직했다. 2004년에는 [[쇤베르크]]의 초대형 오라토리오 '구레의 노래' 를 통영과 서울에서 한국 초연해 화제가 되었다. 2008년 4월부터 [[오사카 음악 대학]]의 더 컬리지 오페라하우스 관현악단 수석 지휘자로 활동 중이며, 2009년 8월에는 [[대전 시립 교향악단]]의 예술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다.
- 장은숙 (가수)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산청군 홍보대사<br />한일문화교류대사<br />대한가수협회 상임이사
* [[2011년]] [[경상남도]] [[산청군]] 홍보대사, 서울관광대사
- 장준휘 . . . . 2회 일치
* 《[[그리다]]》 (2017년) -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도서관 사서 역
- 장태영(야구선수) . . . . 2회 일치
1949년 6월 13일, 뜨거운 태양 아래 5천명 수용가능한 [[동대문야구장]]에는 15,000명의 관객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들어차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눈은 두명의 투수가 그라운드에서 모든것을 쏟아 붓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일본 야구서적인 "스포츠맨의 몸 관리", "일본 스포츠맨 의학"등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이 친필 원고지는 그가 사망한 이후 [[KBO]]에 기증되었다.[[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79|출처]]
- 전기안전관리법 . . . . 2회 일치
본래 [[공산품]]에만 적용되었지만 2017년 1월 28일부터, 의류나 가방 등을 관리하던 생활용품안전관리법과 통합된 법률로 재출범했다.
- 전병조 . . . . 2회 일치
* 재정경제원 금융정책과 서기관
*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 전순옥 . . . . 2회 일치
| 본관=
* [[러스킨]] 칼리지 유럽비교노사관계 학사
- 절대가련 칠드런/461화 . . . . 2회 일치
* 나오미는 자신의 검진용 ID와 비밀 코드를 사용해 연구시설로 접근시켜준다. 하지만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미지수. 사카키는 곧바로 혈청을 제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사카키는 완전히 잠식된게 아니므로 혼자만 두지 않으면 작업을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고 혈청만 잘 만들어지면 [[츠보미 후지코]] 관리관을 되돌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카키는 오명을 반납하겠다며 사명감에 불탄다.
- 절대가련 칠드런/466화 . . . . 2회 일치
* 가까스로 주파수를 재조정해 총알이 관통하는건 막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 [[사카키 슈지]]가 필사적으로 응급조치를 한다.
* 하지만 그 판단은 조금 늦은 것이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면에서 탄소섬유가 뻗어나와 요우와 효부를 관통한다. 마기 시로였다.
- 절대가련 칠드런/473화 . . . . 2회 일치
* 아오이는 단숨에 부스트해서 전부 되찾자고 제안한다. 유리도 거기에 동의하지만 마츠카제는 다섯 명이나 되는 특무 에스퍼 상대로 현실성 없는 작전이라며 만류한다. 게다가 헬기 부대까지 고려하면 부스트는 비장의 수로 남겨놓는게 좋다는 것이다. 그러자 시호가 주축이 돼서 "그걸 어떻게든 하는게 지휘관"이라며 아오이와 유리까지 가세해서 "되는 작전을 짜내라"고 스킨십 공격으로 농락한다. 마츠카제는 갈 수록 M에 개화하는지 "좀 더 부탁받고 싶어진다!"며 곤란해한다.
카오루가 왠일로 상식적인 얘기로 마츠카제의 편을 들어준다. 지금 우선해야 할 건 미오일행의 구출이라는 것. 오염된 멤버의 구출은 제 2순위다. 최종적으로 승리하면 모두를 되돌릴 수 있지만, 지금은 판도라가 최종 방어선. 미나모토가 뒤를 맡기고 효부가 판도라의 지휘관을 일임한 이상 책임을 다해야 한다.
- 정광조 (1883년) . . . . 2회 일치
3·1 운동을 사실상 주도한 뒤 곧바로 [[의친왕]] 탈출을 꾀한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이듬해에도 천도교인 [[신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계속했다. 천도교 기관지 《[[신인간]]》 발행에도 천도교 교무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목=<nowiki>[발굴]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 김성수는 2등급, 유관순은 3등급</nowiki>
- 정기선 . . . . 2회 일치
| 본관 = [[하동 정씨|하동]](河東)
== 가족 관계 ==
- 정다정 . . . . 2회 일치
[[부산외국어고등학교|부산외고]] 재학 중 한국의 입시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에서 고교 졸업 후 2011년 귀국하였다. 2011년 9월경 블로그에 올린 그림, 레시피가 [[네이버]] [[웹툰]] 관계자의 눈에 띄어, 같은 해 네이버에 웹툰 《[[역전! 야매요리]]》를 연재하며 데뷔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닭떡된 닭튀김? 괜찮아요 ‘야매요리’니까!|url = http://news.donga.com/3/all/20120802/48267162/1|출판사 = 동아일보|저자 = 신나리|쪽 = |날짜 = 2012-08-02|확인날짜 = 2012-10-27}}</ref> 가족관계로는 부모님과 정다정보다 5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 정몽규 . . . . 2회 일치
| 본관 = [[하동 정씨|하동]]
HDC현대산업개발은 1976년 설립된 [[종합부동산인프라기업]]이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단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40만여 세대의 주택을 공급했고, 대표사업지로는 ‘[[삼성동 IPARK]]’, ‘[[수원 IPARK CITY]]’, ‘[[해운대 IPARK]]’ 등이 있다. [[주택사업]] 뿐 아니라 [[도시개발사업]]과 [[건축]], [[토목]], [[플랜트]], [[SOC개발사업]] 등 다양한 건설 분야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2017년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것을 목표로 ‘[[풍요로운 삶과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그룹 철학 선포했다. 현대산업개발은 2018년 5월 투자회사인 HDC와 사업회사인 HDC현대산업개발로 분할하고 정몽규 회장은 HDC 회장으로 취임했다. HDC는 자회사 관리와 부동산 임대사업 등 사업 포트폴리오 고도화에 집중하고, HDC현대산업개발은 사업집중 회사로 주택, 건축, 인프라 부문에서 전문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 정몽원 . . . . 2회 일치
|본관= [[하동 정씨|하동]]
그러나 무리하게 추진했던 조선사업이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그룹 회장 취임 1년 만에 '그룹 해체'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았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은 계열사인 한라건설 회장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1999년 만도를 매각한 뒤 8년 만에 되찾았다. 하지만 정 회장은 주식배당을 두고 정몽국 전 한라건설 부회장과 법정다툼을 벌인 바 있으며, 한라중공업 불법지원과 관련해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 정승빈 . . . . 2회 일치
:〈관리자들〉조직관리자 역
- 정은표 . . . . 2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1999년작 영화 '유령'에서 미사일 발사키를 부함장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삼켰다가 [[끔살]][* 삼긴 미사일 키를 찾으려고 즉시 살아 있는 채로 개복수술을 하려는데 마취할 시간도 아깝다며 부함장이 그냥 꺼내라고 시켜서 그만... ]당하는 조리장역[* 그전에 함내 규칙상 금지되어 있는 가족사진을 보다가 주인공인 431에게 들켰으나 처벌없이 자기 방에 라면이나 두 그릇 끓여서 가져다 달라는 것으로 넘어간다. ~~방에 라면을 끓여 들고 오면서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은 꼬들하게 끓여왔습니다." 라고 해주는 센스...는 한 "같이 먹지. 한 그릇은 자네꺼야."라는 정우성의 인자함에 바로 묻힌다.~~ 그렇게 자신을 봐주며 인간적 친분이 쌓인 431을 돕기 위해 미사일 발사키를 삼켰다가 그만...][* 순박한 인상으로 가족을 그리워 하다가 결국엔 그야말로 끔살당하며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계속 힘없이 눈치보며 살 수 없다.'며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부함장 202의 행동를 그저 대의를 앞세운 광기로 보일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훌륭한 연기로 소화해냈다보니 상대적으로 당시에 무명이던 손병호, 설경구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함께 출연했음에도 조연중 가장 주목 받을 만한 역할이었다.]을 맡으면서 영화 관객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전체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얻은건 역시나 [[해를 품은 달(드라마)|해품달]]. ~~"전하~~~~ 좋아서 입이 안 다물어지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특별한 이름이라는 이유로 막내 아들의 이름을 지'''훤'''이라고 지었다고 한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2317203|##]]
- 정재호 (1930년) . . . . 2회 일치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이다.
* [[성균관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 정진(1941) . . . . 2회 일치
그는 [[2000년]]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사극 드라마 《[[태조 왕건 (드라마)|태조 왕건]]》의 [[능환]](能奐) [[장군]] 역과 [[2009년]]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사극 드라마 《[[천추태후 (드라마)|천추태후]]》의 고현(高峴) [[내시|내관]] 역으로도 친숙한 연기자이다.
* [[2009년]] [[KBS]]《[[천추태후 (드라마)|천추태후]]》 ... 고현 내관 역
- 제너럴 우 . . . . 2회 일치
[[캡틴 아메리카]]와 싸운 빌런. 바트록의 협력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AIM과 관련이 있다.
미군 헬기 조종사인 짐 베이커 중위를 구하려는 캡틴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일단 캡틴은 교섭을 위해 왔으나 공격해오니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약점을 발견할수 없어서 고전한 캡틴은 베이커를 풀어준 뒤, 탈출했다. 몇년 후, AIM의 보카 칼리엔테(Boca Caliente) 섬기지에서 그들의 무기전시회가 열렸는데 바트록(Batfoc)에게 매드독(Mad Dog), 램로드II(Ramrod II), 레이저 피스트III(Razor-Fist III)를 포함한 백병전 전문가로 선정되었고, 이후 캡틴과 재전투를 하게 되었다. 이때 캡틴은 잠입을 위해 세르시의 도움으로 모습을 크로스본즈로 바꾼 상태였고, 의심을 피하려고 바트록의 결투신청을 받아들였다. 이때 우는 램로드에 의해 위기에 처한 캡틴을 공격했는데 캡틴에 의해 기관지가 압박되어 그를 내던졌다. 그러나 그에게 패배.
- 조대연(1888) . . . . 2회 일치
1888년 [[충청도]] 충주목(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장영원 전사판임관5등에 임명되었으며, 대동법률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관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 같은 해 12월 치러진 [[196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경질되었다.
- 조진호 (축구인) . . . . 2회 일치
'''조진호'''(趙眞浩, [[1973년]] [[8월 2일]] ~ [[2017년]] [[10월 10일]])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였으며, [[대전 시티즌]], [[상주 상무]],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지냈다. 본관은 [[함안 조씨|함안]].
한편 이번 조진호 감독의 사망을 통해 감독의 고충과 스트레스가 재조명받으며 감독이라는 자리가 선수들보다 더 힘든 직업인지를 깨우쳐 주고 선수들과는 달리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 만한 방법이 없는 현실에 대한 개선과, 건강검진 의무화 및 관리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K리그는 2018년부터 감독 및 코칭스태프들의 건강검진을 의무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 주윤발 . . . . 2회 일치
10세 때였던 [[1965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홍콩 도심으로 이주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인하여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였고 중학교를 다니던 중에는 끝내 중퇴하였다. 이렇게 초, 중, 고, 대학 등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던 중, 친구의 권유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72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73년]] [[영화]] 《투태인(投胎人)》의 주연으로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4년]]부터는 [[홍콩]] [[TVB]]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였으며 2년 후 [[1976년]]에는 [[영화]] 《지녀》(池女)의 주연을 맡았다. 그 후로도 홍콩 영화와 홍콩 TVB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고, TVB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1980년]]에 출연한 《상해탄》(上海灘) 등으로 입지를 다졌다. [[1988년]] [[가수]] 데뷔하였으며 [[1989년]] [[영화]] 《아랑적고사》(阿郎的故事)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각색도 처음 맡아 각색가로서 데뷔하게 되었다.
* 족보에 의하면 송나라 시대 관직을 지낸 [[주응두]]로 이어지는 가문 출신이라는 그는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 [[오나라]]의 군사 [[주유]](周瑜)의 직계후손이다.<ref>
- 진격의 거인/80화 . . . . 2회 일치
* 하지만 "말이 있어도 말에 타고 돌아갈 사람이 없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절규한다.
* 엘빈은 산 자들에게 다음을 맡기자며 최후의 작전을 지휘한다. 그가 싸우라고 외치는 동안 투석이 그가 탄 말을 관통한다.
- 진격의 거인/84화 . . . . 2회 일치
* 최후에 살아남은 것은 아르민. 사실 엘빈의 지휘관 캐릭터는 대신할 자가 있지만 아르민은 대신할 자가 없다는 점에서 생존이 유력했다.
* 초대형 거인의 완전한 사망, 아군측 두 번째 거인화 확보로 인해 거의 망한 것 같았던 조사병단은 극적으로 성과를 거뒀다. 병력이 거의 전멸하고 지휘관 엘빈까지 사망했기 때문에 그대로 돌아갔다면 턱없는 패전으로 취급됐겠지만, 이로써 적어도 무승부라고 주장할 근거가 생겼다.
- 진격의 거인/88화 . . . . 2회 일치
여동생의 사인을 통보하러 간 날, 그가 그리샤를 관찰하고 내린 평가다. 크루거가 오늘에 이르는 계획을 구상한건 그때부터 일지 모른다. 크루거는 "예전의 자신"도 그랬다고 털어놓는다.
거인화 능력자의 "수명"이 밝혀졌다. 엘런의 나이와 계승시기로 볼 때 그리샤가 아들에게 능력을 계승시킬 수밖에 없었던건 이 수명과 관련된 문제같다.
- 진격의 거인/90화 . . . . 2회 일치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대의가 있어서 레이스 왕에게서 왕관을 빼앗았지?
* 언쟁을 말린건 장이었다. 장은 왜 죽은 동료를 애도하는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냐며 프록을 제지한다. [[코니 스프링거]]도 다 끝난 얘길 다시 하지 말라며 거든다. 하지만 프록은 그러는 너희들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며, 그 자리를 방관하고 있던 둘을 탓한다. 이 자리엔 [[사샤 브라우스]]도 참석해 있었지만, 당시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눈치만 보고 있다.
- 진구 . . . . 2회 일치
| [[KBS TV 문학관|KBS HDTV 문학관]]
- 진동한 . . . . 2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광주경기 때 3회에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7회말까지 잘 막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다가 해태팬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고 교체되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투수는 [[김시진]]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김시진이 불을 지르며 역전패했다. 한창 잘 던지고 있던 선수가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교체되고 경기마저 패하자 [[대구아재|삼성팬]]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3차전 대구경기에서도 삼성이 역전패를 당하자 분노한 삼성 팬들은 경기 후 해태 구단버스에 불을 질러 분풀이를 한 것. 이 구단버스 방화사건은 프로야구 관중 난동 사건하면 늘 언급이 되며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 차금봉 . . . . 2회 일치
서울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용산(龍山) 기관차 화부 견습공으로 일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식민지 현실의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같은해 3월 [[김명식 (1890년)|김명식]]·[[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교양부 간사를 맡았다. [[1922년]]에는 최상덕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쇄신운동을 폈으며,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조선금물직공조합·경성신문배달조합 창립을 지도했으며, 1923년 9월에는 조선노농대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24년 5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각지의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활동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노동운동 단체와 농민운동 단체를 분리하는 정책을 실행시키기 위해 힘썼다.<ref name="역대"/>
- 차희식 . . . . 2회 일치
|본관 = [[연안 차씨|연안]]
== 가족 관계 ==
- 창작:맹수인 . . . . 2회 일치
늑대족은 보통 다른 종족에게 도적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크게 두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북극인근의 '눈늑대섬'과 아프반반도 북부, 대륙 북부일부에 서식하는 '눈늑대족', 그리고 대륙 중부 '메말사막'과 대륙 중북부를 나누는 '등퍼산맥' 인근에 사는 '늑대족'으로 나뉜다. 메말사막에 사는 이들은 메말사막 북쪽 초원에서 말을 공급받아 그 말들로 노략질을 하는것으로 유명한데, 츄프의 몇몇 대귀족들까지 연관되있어 뿌리뽑기 매우 힘들다. 츄프 왕국은 티겔 왕국과 동맹관계기에 이 부정한 동맹을 뿌리뽑으려 노력했지만 현재까지도 잘 근절되지가 않는 실정이다.
- 창작:악마의 열매 . . . . 2회 일치
||<#191970> '''{{{#white 세계관}}}''' || [[원피스]] ||
* 사람사람 열매 모델 아재 : 사람사람 열매의 아종 중 하나. 먹은 사람을 아재로 만든다. 소위 아재아재 열매라 불리는 종류. 먹은 사람을 아재로 만들며 썰렁한 아재 개그와 발암을 유발하는 꼰대 능력을 부여한다. 아재 개그는 이 열매의 주요한 기능으로 이말년 서유기에 나오는 감요검처럼 듣는 이를 빡치게 하다 결국 죽게 만드는 무서운 능력. 아재 개그를 구사하기 위해 언행이 크게 바뀌게 되는데, 이 바뀐 언행이 발암발암 열매처럼 상대를 발암시키는 능력도 일부 지니게 된다. 다만 이 열매도 단점이 있으니, 아재들처럼 항상 드러누우려는 성향이 강해지고 관절염이라는 무시무시한 패널티가 걸린다.
- 창작:좀비탈출/4-1-1 . . . . 2회 일치
현관을 두드려 대던 녀석은 어느 덧 사라져 있었다. 정오의 햇볕은 따가워서 뼛속까지 파고들 것만 같다.
관자놀이가 빨라진 맥박 때문에 욱신거린다. 팔에 너무 힘을 줬는지 쥐가 날 것만 같다. 입안이 빳빳하게 말라서 혀가 말려넘어갈 것 같다.
- 창작:츠키노 아스카 . . . . 2회 일치
월영천극도(月影天極刀) : 원래는 아스카가 소지하고 있던 보구는 아니었으나, 어째선지 아스카가 소지하게 되면서 아스카가 그 능력을 100% 다 이끌어내 사용중인 보구이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뻔 한 전력이 있었던 요도로써 불려왔었고, 그 덕분에 원래 요도를 수호하고 있던 타치바나 가문에서 보관되어있었다가 자의로 그 가문에서 탈출하다시피 나가게 되어 현재는 아스카에게 의탁하고 있다.
== 관련 인물 ==
- 창작:헤이즈 . . . . 2회 일치
그러나 구NTX 시절에 연재되었던 "담력시험"을 계속하지 않고 '''리부트'''되었다. 먼저 "담력시험"이라는 제목으로 계속할 경우 초점이 어디까지나 '학생, 담력시험, 청소년물' 등으로 소재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또 대략적인 세계관 설정이 없이 무작정 연재되었기 때문에, 선택지마다 내용이 상충되거나 진행이 힘들어지기도 하고[* "담력시험"의 경우 주인공급 캐릭터만 5명이었기 때문에 캐릭터 하나하나 행동과 대사를 부여하고 주인공들간의 대화를 마련해야 했다. 차라리 아래에서 언급한 "언틸 던"처럼 2명씩 다니는 걸로 설정해 두는 게 좋았을 것이다.] 뚜렷한 핵심 없이 선택지가 양산되기도 했다. 결국 수습이 되지 못한 채 말이 방치지 사실상 중단되었다.
무동고등학교의 영화동아리인 RECORD의 일원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정식 영화 촬영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전원일기처럼 동네 소개 영상에 불과했지만, 시나리오에 살이 점점 붙어가자 아예 스릴러 영화를 찍자는 쪽으로 계획을 고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의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인 [[창작:세정종합병원|세정종합병원]]의 별관에 숨어들어 촬영을 하기로 한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계획이 이상해진다...
- 채동선 . . . . 2회 일치
채동선은 1901년 [[대한제국]]령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에서 출생하였다.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일제강점기 시절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복하고 편안하였던 그의 인생은 그가 고등학생이 된 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채동선은 서울로 올라가 현재는 [[경기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경성제1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3.1운동]]이 발생함에 따라 채동선은 만세 운동을 매우 열렬하게 하였고, 이러한 그의 행적은 일본경찰의 감시라는 낙인을 주었다. 3.1절 이후 일본에 회의감을 느끼며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후 서양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채동선은 베를린 음악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렇게 일본의 착취와 폭력은 지속되었고, 채동선은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분했고 안타까워했다. 채동선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동료 음악가들과 사이가 우호적이지 못하였는데, 이는 친일 행위와 연관성이 있다. 채동선이 일제강점기 시절 다른 음악가들과 다르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홍난파]] 등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노래 가사 및 노래 작곡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과 달리 끝까지 친일 운동을 거부하였던 채동선은 광복절까지 창씨 개명과 친일 노래 작곡을 거부하였다. 해방 이후에 그는 이념적 성향으로 인해 다시 한번 동료 음악가들과 마찰이 있었다. [[한국전쟁]] 동안 피난길에 오른 그는 그의 병환이 깊어져서 1953년에 타계하며, 그의 작품은 향후 [[이은상]]에 의해 부활하게 되었다.
- 천안함 침몰사건 . . . . 2회 일치
천안함 사건 당시 생존한 정주현 중사[* 천안함 사건 이후 소말리아 청해 부대로 파병을 자원했다.]는 2015년 6월 전역하여, 청해부대소속 부대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내부 교육 자료에서 "승조원들의 안이한 태도 떄문에 피격을 당했다."고 되어 있었다며 분개하였다.
또 다른 천안함 생존 장병 강정원 하사는 2012년 한 교육에서 교육사령관은 "나약하고 방심하고, 제대로 정신 안 차리면 천안함 사건처럼 당한다."고 발언하여 수치심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패배한 전장에서 살아나온 것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 철인 28호 . . . . 2회 일치
2005년이 되면서 실사영화가 개봉. 연기력 있는 배우들이 등장하고, 한국에서도 관심을 가졌으나 아쉽게도 평가는 좋지못했다. 이후 오시이 버전인 연극판도 비슷한 평.
== 관련 항목 ==
- 첼렌느 베르체코프 . . . . 2회 일치
가족관계 3녀중 차녀
술을 굉장히 좋아하며 임무가 없을땐 거의 술을 입에 달다시피하고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간이 3배정도 튼튼하다고 병원에서 들었으니 3배는 더 마셔도된다는 괴악한 논리를 펼치고있다. 술뿐만이 아니라 홍차도 주로 자주 마시는 편이지만 이미 다른 발할라 요원이나 관계자들은 주당으로인식하고있으나 본인은 사실이니 신경쓰지않는 모양이다(...)
- 총기 . . . . 2회 일치
통칭 총(銃). [[화약]] 등을 사용해서 [[추진력]]을 얻어 관으로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 화약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어 다른 모든 [[무기]]를 물리치고 개인무기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총기는 [[탄환]]을 발사할 때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는데, 폐쇄된 관에서 화약이 폭발하면 폭발적인 연소과정에서 나오는 대량의 가스가 갈 곳을 잃고 고압으로 압축되는 상황이 된다. 이 때 약실이 충분히 튼튼하지 않거나 뭔가 결함이 있다면 약실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폭발하여 발사자가 오히려 [[끔살]]당한다. 정상적인 총기에서는 오직 탄환이 있는 곳만이 밀어낼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므로 연소가스의 압력은 탄환을 밀어내게 되며, 탄환은 초고속으로 총신을 따라서 튕겨나가서 총신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가게 된다. 이렇게 발사과정을 거쳐서 날아오는 탄환은 인간의 신경으로는 포착하거나 반응할 수 없으며, 정확하게 명중한다면 대개 '''그대로 죽는 수 밖에 없다.'''
- 최덕희 . . . . 2회 일치
* [[EBS 라디오 문학관 - 사랑 손님과 어머니]] (EBS) - 옥희
* [[EBS 라디오 문학관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BS) - 영희
- 최문식 . . . . 2회 일치
최문식은 선수들, 팬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상당히 부족했다. 2016시즌 중반에는 [[서동현 (축구 선수)|서동현]]이 최문식과의 불화로 반년만에 팀을 떠나기도 하였었고, 선수들은 최문식의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 2016시즌 중반 이후 간담회에서의 팬의 요구에 따라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경기 종료 후 서포터즈석을 앞을 찾아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팬들과의 퍼포먼스에 같이 참여하는 등 팬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였다.
최문식은 앞선 소통 부재나 책임 회피 등의 문제들 탓에 팬들이나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잃었으며, 팬들과 선수들로부터의 지지기반이 상당히 취약했었고, 팬들과의 관계가 상당히 좋지 못하였었다. 그로 인해 재임 기간 내내 많은 팬들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 최서일 . . . . 2회 일치
'''최서일'''(崔瑞日, [[1906년]] [[9월 27일]] ~ [[1970년]] [[7월 24일]],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의 공직자이자 국회의원이다. 본관은 [[통천 최씨|통천(通川)]]이다.
190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ref>통천최씨 족보에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도쿄 대학|동경제국대]] 수산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산업기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주)조선수산개발 사장으로 사업을 펼치다 공직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수산국장과 초대 해무국장을 지냈다. [[1960년]] 해무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완도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제 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을 지냈다. 1970년에 사망하였고, 묘는 양주군 모란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 최선영 (희극인) . . . . 2회 일치
| 학력 = [[서울관광고등학교]]
* [[서울관광고등학교]]
- 최성국 (축구선수) . . . . 2회 일치
2014년 현재 최성국은 어느 한 사회인 야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7월 축구선수 최성국·김동현 협박했던 30대 남성이 6년만에 기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news.mk.co.kr/newsRead.php?no=537548&year=2016|제목=축구선수 최성국·김동현 협박했던 30대 남성 6년만에 기소|확인날짜=2016-08-08}}</ref> 그와 동시에 2016년 7월 징계가 끝나는것과 관련하여 복귀 의사를 밝혔지만 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연맹은 아직 영구제명에 대해 경감의사가 없는것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ref>{{웹 인용|url=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675935|제목=복귀 타진 최성국…축구계 "현실성 없는 일"|확인날짜=2016-08-08}}</ref>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가시와 레이솔의 축구 선수]][[분류:성남 FC의 축구 선수]][[분류:광주 상무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축구 선수]][[분류:FK 라보트니치키의 축구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4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6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7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정명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승부조작에 관여한 스포츠인]][[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대한민국의 축구 해설자]][[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최수진 (성우) . . . . 2회 일치
* [[동방불패]] ([[MBC]]) - ([[관지림]])
* [[동방불패]] ([[MBC]]) - 임영영([[관지림]])
- 최수환 . . . . 2회 일치
1933년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및 경영대학원 [[최고위과정|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13번)으로 당선되었다. 1984년 말 [[홍사덕]], [[김현규]], [[서석재]], [[허경만]], [[박관용]], 손정혁, [[김찬우(1933)|김찬우]] 등과 민주한국당 탈당 선언을 하고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정의당]] [[박경석(1937)|박경석]] 후보와 민주한국당 [[서종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최우석 (화가) . . . . 2회 일치
1915년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면서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생이 되었고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서화협회]] 전람회 정회원을 역임했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근대적인 채색화 수법을 응용한 풍경화와 한국의 역사 인물을 주제로 한 초상화 연작을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연달아 수상했지만 그가 작품 활동 초기에 그린 풍경화와 인물화는 일본 화풍의 채색화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점차 한국의 전통적인 수묵 담채화의 관념적 작품으로 회귀하게 된다. 주로 산수화와 신선도 등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1954년 6월 7일부터 6월 17일(당초 6월 13일까지 열릴 예정이었지만 6월 17일로 연기됨<ref>{{뉴스 인용 | 제목=「鼎齋(정재)」 畵展(화전) 延期(연기)|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615003292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6-15&officeId=00032&pageNo=2&printNo=2548&publishType=00020 | 출판사=경향신문 | 저자= | 쪽=2 | 날짜=1954-06-15 | 확인날짜=2011-08-14}}</ref>)까지 개인전을 열었으며<ref>{{뉴스 인용 | 제목=崔禹錫 畵伯 個人展(최우석 화백 개인전)|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60600329203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6-06&officeId=00032&pageNo=3&printNo=2539&publishType=00020 | 출판사=경향신문 | 저자= | 쪽=3 | 날짜=1954-06-06 | 확인날짜=2011-08-14}}</ref><ref>{{뉴스 인용 | 제목=崔禹錫 個人展 盛況(최우석 개인전 성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61300329203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6-13&officeId=00032&pageNo=3&printNo=2546&publishType=00020 | 출판사=경향신문 | 저자= | 쪽=3 | 날짜=1954-06-13 | 확인날짜=2011-08-14}}</ref> 1956년<ref>{{뉴스 인용 | 제목=國展(국전) 11月(월) 10日(일) 開催(개최)|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102600329203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10-26&officeId=00032&pageNo=3&printNo=3410&publishType=00020 | 출판사=경향신문 | 저자= | 쪽=3 | 날짜=1956-10-26 | 확인날짜=2011-08-14}}</ref><ref>{{뉴스 인용 | 제목=國展(국전) 來(래) 10日(일) 開幕(개막) 紛糾 解決(분규 해결)|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10260020920301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10-26&officeId=00020&pageNo=3&printNo=10433&publishType=00020 | 출판사=동아일보 | 저자= | 쪽=5 | 날짜=1956-10-26 | 확인날짜=2011-08-14}}</ref> 과 1958년<ref>{{뉴스 인용 | 제목=國展(국전) 審査委員(심사위원) 26名(명) 藝術院 臨時總會(예술원 임시총회)서 決定(결정)|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8091000329102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8-09-10&officeId=00032&pageNo=2&printNo=4092&publishType=00010 | 출판사=경향신문 | 저자= | 쪽=2 | 날짜=1958-09-10 | 확인날짜=2011-08-14}}</ref>, 1959년<ref>{{뉴스 인용 | 제목=藝術院 臨時總會(예술원 임시총회) 하루 앞서 任命(임명)|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9091600209203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9-16&officeId=00020&pageNo=3&printNo=11485&publishType=00020 | 출판사=동아일보 | 저자= | 쪽=3 | 날짜=1959-09-16 | 확인날짜=2011-08-14}}</ref>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전가풍미(田家風味, 1959년 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 있다.
- 최윤 (소설가) . . . . 2회 일치
본명은 최현무(崔賢茂)이며, 1953년 7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여고 졸업 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1978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프로방스대학교에서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ref> 1988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등단했다. 최윤의 소설은 언제나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다.<ref>{{두피디아|101013000712678|최윤}}</ref>
- 최윤동 . . . . 2회 일치
* 중국 운남 육군사관학교 졸업
* 중국 봉천성 신흥학교 교관
- 최채흥 . . . . 2회 일치
한양대학교 진학 후, [[김한근]] 한양대 감독에게 투수가 아니면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김한근 감독은 너를 투수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투수로 전업하여 1학년 때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팀의 마무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67.2이닝 동안 피홈런 없이 54삼진 6사구 16볼넷 평균자책점 0.93을 기록했다. 1학년이던 2014년부터 팀의 에이스로 자리를 잡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는 팀을 17년만의 대통령기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투수상을 수상했고 바로 U-21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승선했다. 투수 전업 첫 해에는 평균구속이 130km/h 중반대에 불과했지만, 빠른 성장세로 평균구속을 10km/h 가까이 끌어올리면서 탈삼진 능력도 늘어나 꾸준히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2015년에는 27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활약했다. 2016년에는 학점 관리한다고 8월 이후에는 경기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대한민국 U-23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임지섭]]과 원투펀치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혹사 논란까지 일었을 정도.
최채흥이라는 이름이 어려워서인지 가끔씩 최재흥이라고 잘못된 표기가 된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삼갤]]에서는 때때흥이라고 한다~~ ~~[[최채박]]과는 관련이 없다 카더라~~
- 최흥철 . . . . 2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국가대표(영화))]
* 영화 [[국가대표(영화)|국가대표]]에서는 마약 복용자로 나오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모든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은 스키에 관심이 있어서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된거지, [[군면제]]를 이유로 나가는것이 아니였다. 하지만 실제로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어 군면제가 되었다.
- 최희준 (가수) . . . . 2회 일치
'''최희준'''(崔喜準, [[1936년]] [[5월 30일]] ~ [[2018년]] [[8월 24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며,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제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관은 [[삭녕 최씨|삭녕]]. 개명 前 이름은 '''최성준'''(崔省準)이며, [[호 (이름)|아호]](雅號)는 소헌(小軒)이다.
* 1998.8 ~ 2000.5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위원
- 추봉 (배우) . . . . 2회 일치
* 1974년 《유관순》
* 1995년 《[[금홍아 금홍아]]》- 국향여관 집사 역
- 춘추 . . . . 2회 일치
춘추시대, 각국의 사관이 편찬한 공식적인 기록이다. 『[[맹자]]』에서는 진에 '승', 초에 '도올', 노에 '춘추'(晉之乘, 楚之檮杌, 魯之春秋)가 있다고 하였으며, [[묵자]]에는 주나라, 송나라, 연나라, 제나라에 춘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춘추는 점차 국가 기록이 아닌 개인에 대한 기록에도 쓰이게 됐는데, 여씨춘추, 노씨춘추, 안자춘추 등이 그것이다.
춘추는 역사서이며, 당시 학문을 익히던 사람들의 교과서이기도 했다. 『국어(國語)』에는 초어상 진어칠(楚語上 晉語七) 편에서 춘추를 배우고 익혔다는 언급이 있어, 춘추시대에 이미 춘추가 교과서로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춘추는 단지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소박한 용도로만 쓰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공자]]와 연관되면서 복잡한 '춘추학'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 카미마치 . . . . 2회 일치
카미마치란, [[가출]]이나 기타 이유로 주거가 정해지지 않은 젊은 여성이 인터넷의 가출 사이트나 프로필 사이트를 사용하여, 숙박할 장소와 식사를 제공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를 무료로 제공해주는 사람을 '카미'='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카미마치란 단어를 쓰게 됐다. 다만 대가로서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은 카미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원조교제]]와는 달리 일단 명목상으로는 성관계 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인터넷 상의 기록으로 범죄행위가 적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성관계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커맨드 앤 컨커 : 레드 얼럿 2/소련군 . . . . 2회 일치
기관총을 쏘는 포대. 전력이 없어도 작동한다.
소련군이 사용하는 자원 채취 유닛. 자원을 채취해 제련소에 밀어넣는다. 기관총이 달려서 보병 한둘은 상대할 수 있다. 제련소를 건설할 때 하나 주지만 필요하면 군수공장에서 더 생산할 수 있다.
- 커피 젤리 . . . . 2회 일치
[[일본]]에서 커피 젤리에 관한 최초 자료는 1914년 4월 3일 [[요미우리 신문]]이며, 가사나 생활을 다루는 '가정' 면에서 커피 젤리의 레시피가 실렸다.
커피 젤리는 일본 태생의 빙과 간주합니다. 커피 젤리에 관한 최초의 자료는 1914 년 (양 3 년 대) 4 월 3 일 요미우리 신문에 등장합니다. 가사 나 생활을 취급하는 "가정면"커피 젤리 레시피가 게재되었습니다.
- 크립토나이트 . . . . 2회 일치
[[DC 코믹스]] 세계관에 존재하는 가상의 물질.
[[렉스 루터]]나 [[배트맨]]이 이 물질을 소지하고 있다. 렉스는 반지로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고, 배트맨은 배트케이브에 보관해 두고 있다. 크립토나이트의 방사능은 인간에게는 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너무 오래 반지를 끼고 있었던 렉스 루터는 방사능 과다 노출로 암에 걸려서 클론 시체를 만들어야 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장기간 노출은 인간에게도 위험하다.
- 키이치 보우겐 . . . . 2회 일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관련 전설에 등장하는 전설상의 인물. '오니이치おにいち'라고도 읽는다.
키이치 보우겐의 이야기는 조루리, 가부키 등으로도 만들어진다. 가공인물이지만 요시츠네가 유명하다보니, 그와 얽힌 키이치 보우겐도 음양사로 이름이 높아져서 각종 음양도 관련 문헌에 가공의 저자로서 언급되기도 한다.
- 킹덤/497화 . . . . 2회 일치
* 그러나 왕분의 의견은 정반대. 그 가능성이 가장 중요한게 아니냐고 딴죽건다. 몽념이 예상한대로 왕분은 비관적인 입장이다. 업 자체도 한단에 버금가는 대도시에 강력한 군사도시가 즐비한 왕도원 안에 위치한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 작전은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하료초도 속으로는 그 평에 맞장구친다.
* 그때 자신도 한 마디 끼어들겠다며 진왕 정이 나타난다. 몽념과 왕분은 바로 포권하고 꿇어앉는데 신은 공적인 자리인걸 깜빡하고 잊다 뒤늦게 예를 갖춘다. 정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며 얼굴을 마주한다. 그는 업 공략은 지금까지 없던 중요한 전장이며 가혹하겠지만 "중화통일"의 난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강조한다.
- 킹덤/504화 . . . . 2회 일치
* 열미는 진나라의 함곡관과 같은 "국문"으로 진군은 계획보다도 더 빨리 이곳에 도착한다.
* 낭토 부근에서 진군은 야영에 들어간다. 신은 하로쵸에게 하루이틀이면 열미까지 도착하지 않냐고 확인한다. 하료초는 틀림없다 답한다. 하료초의 설명으로 조의 열미는 진나라의 함곡관에 비견할 수 있는, 조나라의 뚜껑 같은 격이다. [[연(킹덤)|연]]과 부장들이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될 텐에 왕전군에서 지시가 내려온 건 없냐고 묻는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도 왕전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이제 슬슬 열미에 총공세를 퍼부어야 할 시점인데도 말이다.
- 킹덤/516화 . . . . 2회 일치
* 이목의 통찰대로 구름떼 같은 난민 무리가 업성으로 모여들었다. 업성의 각 입구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난민 행렬을 통제하기 위해 병사들이 분주하다. 백성을 수용하고 나서도 각 성의 사람들이 뒤섞이고 일행이 헤어지지 않게 통제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숫자. 벌써 2곽이 꽉 찼는데 아직도 행렬이 이어진다. 현장 지휘관은 제 3곽도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려 하는데, 부하는 이 3곽도 꽉 찬지 오래라고 보고한다. 이만한 숫자는 먹이는 것도 문제다. 식량도 지니지 않은 채 먼 길을 온 난민들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했다. 우선은 배급을 진행 중이지만 얼마나 갈 수 있을지?
* 업의 성주 [[조이백]]은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면 업성의 부양능력을 그만큼 믿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장에서는 이제 난민을 그만 받자는 상소가 올라오는데 그는 일언지하에 각하한다. 아직 진군이 당도하지도 않았는데 나라의 근간인 백성을 버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진군이 도달하기 전까진 난민을 받아라"란 지시가 내려간다. 자비롭고 관대한 명령이지만, 이 전시에 타당한 것일까? 가신들이 난색을 표하는데다 난민의 수가 늘 수록 식량창고가 비어가는 속도도 빨라진다. 얼마 안 가 제 3 창고가 텅 비었다는 보고가 올라오는데, 조이백은 놀라기는 하지만 "창고는 얼마든지 있다"며 제 4, 5 창고까지 개방한다.
- 킹덤/527화 . . . . 2회 일치
* 순수수는 산민족 1진이 미처 혼란을 감지하기도 전에 돌파를 감행했다. 그는 맨 선두에 서서 적진을 무인지경처럼 빠르게 돌파했다. 양단화의 맞은 편, 공손룡군 본진에서도 적진을 가로지르는 순수수를 볼 수 있었다. 공손룡은 그가 전장에 나타난 이후의 행동을 빠짐없이 목격했다. 새로운 지휘관은 여러모로 자기 상상을 뛰어넘은 인물이었다.
순수수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부관으로 내려앉은 공손룡은 별다른 말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순수수의 설명이 끝나자 그가 입을 열어 후퇴한다면 어느 선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 킹덤/528화 . . . . 2회 일치
순수수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견융왕은 거기에 반박을 미뤄둔 채 순수수가 이민족말을 구사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순수수가 밝히길 그건 흉노의 말이었다. 견융왕은 그 솜씨가 유창하다고 칭찬하는 한편 순수수의 행색을 면밀히 살폈다. 갑옷에 새겨진 늑대 문양. 견융왕의 시선이 거기에 멈췄다.
견융왕이 본 것은 무엇일까? 순수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챘지만 그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말을 잘랐다. 여기까지 모든 대화는 순수하게 이민족의 말, 흉노의 말로 주고받고 있었다. 조군 장수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견융왕이 먼저 평지의 말로 그들의 말을 들어는 보겠다며 적대감을 누그러뜨렸다. 이목의 이름을 댄 것이 효과가 있었다. 견융왕은 조나라 도양왕을 "쓰레기"라 칭했지만 이목에 대해서는 대단히 좋게 보았다. 그는 매년 한 번씩 직접 요양을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안문 땅에서 가져온 맛있는 양고기를 베풀었다. 그 이목의 대리를 칭하는 순수수를 봐서 일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것이었다.
- 타루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더 멜로디]]
# 내일이 오면 (Duet with [[노리플라이]]의 권순관)
- 타오파이파이 . . . . 2회 일치
== 인물관계 ==
* [[학선인]] - 학선인과 형제 관계. 학선류가 등장하면서, 타오파이파이는 학선인의 동생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 탐라국 여왕 . . . . 2회 일치
탐라국 여왕 설화는 부산과 제주도의 역사, 지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 탐라국 여왕과 최영의 대결은, 실제 역사에서 최영이 고려말에 제주도에서 진압한 [[목호의 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털이 난 정도 . . . . 2회 일치
[[일본어]]의 관용 표현. '조금 나은 정도'라는 뜻.
[[분류:일본어]] [[분류:관용어]]
- 토니 고 . . . . 2회 일치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3살이였던 1986년, 부모님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ref name="헤럴드"/> 방과 후에는 부모님이 하시던 미용용품 사업일을 도왔다. 어릴 적부터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고급 브랜드의 화장품을 살 형편은 되지 않았고, 저렴한 화장품의 질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합리적인 가격의 질 좋은 화장품을 만들자 마음 먹고, 25세 때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화장품 브랜드 "닉스"(NYX Cosmetics)를 설립했다. 인기 판매 제품인 립 펜슬은 3.5 달러 정도였다.<ref name="포브스 프로필"/>
브랜드 출시 첫 해, 4백 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ref name="포브스 프로필"/> 2000년대 초반 닉스는 미국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화장품 브랜드 중 하나였다. 또 2008 금융 위기 시절, 저가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오히려 불황은 기회가 되었다.<ref name="헤럴드"/> 또 토니는 사람들이 [[미셸 판]] 등 뷰티 유튜버에 영향 받는 모습을 보며, 소셜 미디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SNS]]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ref name="헤럴드"/> 이후 15년 동안 안정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간 후, 2014년 [[로레알]]에 닉스를 5억 달러에 매각했다.
- 토리코/363화 . . . . 2회 일치
* 돈슬라임의 공격은 생물 몇 종을 멸종시킬 정도이며 그 위력은 우주에서도 관측될 정도지만 NEO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NEO는 공격 그 자체를 먹어치우며 다가오고 있었고 결국 '''돈슬라임의 머리를 물어 뜯는다'''
- 토리코/371화 . . . . 2회 일치
* 그리고 페어는 "곧 모든 것이 끝난다"며 금관두를 꺼내는데.
* 죠아는 의외로 아카시아에게 반말을 하면서 수평적 관계임을 어필한다.
- 토리코/381화 . . . . 2회 일치
* 그것은 미도라. 금관두를 박살내고 현세로 돌아왔다!
* 미도라의 부활. 사실 삼제자 중 유일하게 죽지 않았고 단지 봉인만 됐기 때문에 풀려난다는 설이 많았다. 하지만 자력으로 금관두를 박살낸데다 구르메 식운까지 훔쳐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는 듯
- 토리코/382화 . . . . 2회 일치
* 금관두에서 풀려난 미도라.
* 금관두에서 풀려난 미도라는 근처에 브란치가 있는걸 파악한다.
- 토리코/383화 . . . . 2회 일치
* 블루 니트로 페어과 독자적으로 아카시아와 협력관계를 맺은건 사실이었다. 이전에도 묘하게 단독으로 아카시아와 만나는 장면이 많아서 의심되던 부분인데 확인되었다.
* 스타준과 토리코의 형제관계가 공식언급됐다.
- 토리코/392화 . . . . 2회 일치
* 하지만 정말로 식운을 다 먹어치운 것인지 토리코의 가슴을 관통하는 강렬한 펀치를 날린다.
세 번째 악마는 뜻밖에도 매우 정중한 성격으로 네오는 물론 자기 숙주인 토리코에게도 공손한 존댓말로 일관한다. 웃음소리는 "쿄쿄쿄".
- 토리코/393화 . . . . 2회 일치
하지만 처음부터 선역화를 염두에 뒀는지 의심스러운 구석도 많은데 플로제가 아카시아의 계획을 막으려 했던 점, 그리고 그 결과가 죠아의 탄생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번 에피소드에서 순순히 아카시아에게 찬동하는 모습과 모순된다. 페어도 아카시아가 돈슬라임을 잡아먹는 시점에서 나타나 무언가를 하려고 망설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싶어 관두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봐도 금관두 사용을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유닛 . . . . 2회 일치
소총을 든 병사 150명. 토사 번 전용 유닛이다. 다른 존왕파 번의 비슷한 유닛들의 사관학교 테크의 염가형 보병으로 있는 반면, 적웅대는 고급 전열보병으로 사용된다.
말로 운반하는 기관총 4문과 운용병 30명.
- 통일주체국민회의 . . . . 2회 일치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는 전국을 1만명 단위의 소선거구로 나눴으며, 약 3천명 가량의 의원을 선출해서 [[장충체육관]]에서 투표를 진행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 선거에서 거수기 이외의 거의 아무런 역할도 없는, 사실상 [[무직]] 명예직이다. 딱히 '''아무것도 안 하는 거나 다름없는 집단'''을 3천명이나 뽑는데 엄청난 선거비를 소모하고, 게다가 이 위원들이 세비는 없지만 소정의 활동비까지 받았다는걸 생각하면, 상당히 제정신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통일주체국민회의 자체가 '''거대한 낭비'''라는게 모순.
- 티나 (1980년)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티나는 해외 팬이 많다. 그녀는 21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악과 춤 접하면서 성장했었다. 2004년 한국에서 "설레임"이라는 앨범을 발매하였으나, 이와 관련하여 일절 홍보활동을 하지 않고 한달 만에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원 순위는24위에 올랐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도 꾸준한 음악활동을 하였고, 그녀의 음악적으로 묘한 매력과 놀라운 춤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에서도 러브 콜을 여러 번 제의 받았었다. 리키마틴, 켈리클락슨의 프로듀서인 Suren과 함께 2008 C U 2nite 타이틀"Catch me” 앨범을 미국에서 제작 하였고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발표했었다. C U 2nite 앨범은 해외에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이 노래 역시 활동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는 도중 티나는 EDM 전설이며 보컬 겸 그래미수상 경험이 있는 유명 프로듀서 Kevin Irving에게서 오디션 제안을 받았고, 케빈은 미국의 유명한 팝 가수인 Dr Dre, Beyonce, 50cent. Pink, Janet Jackson과 같은 수많은 뮤지션과 작업을 해왔었다. 케빈 프 로듀서는 티나의 재능을 보고 영어 앨범을 제작 했고, 대표 곡” Come Mr. DJ”를 작업했다. 케빈은 티나에게 마돈나한테 느낄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가수라며 극찬하였다. 그녀는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노래를 하고 싶다면 2014년 귀국했고 트로트 장르로 변경 2016년 7월20일 콩 앨범 발표하고 현재 활동 중이다.
- 페어리 테일/489화 . . . . 2회 일치
* 이 공격은 페어리 테일 길드에서도 관측될 정도로 규모가 크다.
* 이 빛은 왕국 어디에서나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범위다.
- 페어리 테일/491화 . . . . 2회 일치
* 제목 때문에 엘자와 아이린의 관계가 밝혀진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그보다는 메이비스(어머니)와 페어리 테일 길드원을 지칭하는 거라는 의견도 있다.
* 히스이를 쥐로 만들며 아이린이 떡밥스러운 행동을 하기 때문에 결국 아이린 본인의 모녀 관계 떡밥이란 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 페어리 테일/498화 . . . . 2회 일치
* 그레이는 처음부터 정의의 사도 놀이 같은건 관심이 없었다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이든 쓰레기든 되어 주마"라고 일갈한다.
*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를 노려보게 되는데.
- 페어리 테일/509화 . . . . 2회 일치
* 오거스트는 제랄이 한 때 제레프 드래그닐을 신봉했던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를 져버리고 다른 길을 걷는지 묻는데 제랄은 "내 마음을 비추는 빛을 손에 넣었다"고 말하며 엘자 스칼렛을 떠올린다. 그런데 대답을 들은 오거스트는 빛은 정의고 어둠은 악이라는 사고방식은 어리석다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제레프 드래그닐에겐 "아들"이 한 명 있다고 말을 꺼낸다. 제랄에겐 놀랄 틈도 없이 오거스트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 아이는 강대한 빛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했으며 어느 쪽도 아닌 무의 경지에 도달했다. 오거스트는 빛과 어둠에 선악은 무관하다며, 굳이 정의가 있다면 그건 "사랑" 뿐이라 말하며 돌아선다. 그러는 사이 제랄은 엘자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다짐하며 몇 번이나 다시 일어서라고 시도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라케이드는 중증의 파더콤. 나츠를 삼촌이라고 인식하는데 "아버지가 나츠를 더 신경쓰니 제거한다"는 사고로 움직이고 있다. 오거스트는 방황한 끝에 "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데 하는 짓은 얀데레. 무의 경지가 아니라 얀데레의 경지다. 빛과 어둠 양쪽에서 방황했다는 언급도 있으니 현재는 빛의 마법만 사용하지만 어둠의 마법도 사용할 것으로 추정. 또 같은 빛속성인 스팅이 나오면 어떤 대결이 될지도 관심사다.
- 페어리 테일/514화 . . . . 2회 일치
떡밥이 우수수 풀린 에피소드. 멸룡마도사의 기원과 원리가 밝혀졌다. 지금까지 페테 세계관에는 세 종류의 멸룡마도사가 있었는데 모두 아이린이 개발한 인챈트 마법에 기반한 것이었다.
나츠의 마음 속 세계에서 언급된 "안나"라는 여성의 떡밥이 강화 중. 안나는 아이린과 멸룡마도사의 진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최후까지 이그닐과 협력했던 것으로 보이고 또 루시와 관련된 인물로 보이는 등, 새로운 떡밥의 여왕으로 떠오르고 있다.
- 페어리 테일/526화 . . . . 2회 일치
* 오거스트는 아직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에 집착하고 있지만 싸우는데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따위"라고 중얼거리며 카나를 지팡이로 찌른다. 길다트가 몸을 던져서 그 앞을 막지만 이전 아크놀로기아가 뜯어먹은 왼팔의 의수 부분을 관통 당한다. 카나는 무리하지 말라고 염려하는데 오히려 길다트는 딸을 지키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겠다며 투지를 끌어올린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만 생각하고 살았지만 애가 생기니 그게 전부 아이를 위한게 되더라며 신기하다고 말한다. 카나는 전투 중인 것도 잊었는지 지금도 실컷 싸돌아다니지 않냐고 핀잔을 주는데, 그것도 카나가 아버지를 껄끄럽게 여기는 것 같아서 한 행동이다. 만약 카나가 같이 있어주길 원한다면 언제까지라도 곁에 있겠다고 하는데 역시 카나는 그런건 싫다고 질색한다.
* 오거스트는 그 바보같은 문답을 들으며 잠시 넋을 놓는다. 길다트를 그 기회를 노려 어깨를 관통한 지팡이를 붙잡고 오거스트를 밀어붙인다. 길다트의 표정은 전혀 농담하는 것도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다. 카나는 길다트가 정말로 옥쇄를 각오했음을 직감하고 말린다.
- 페어리 테일/528화 . . . . 2회 일치
* 엘자는 침묵을 깨고 아크놀로기아의 행동을 제지한다. 더이상 시체를 욕보이지 말라는 말에 아크놀로기아가 뒤돌아 본다. 둘을 살펴본 아크놀로기아는 엘자에게선 아이린과 같은 냄새가 나고 웬디는 멸룡마도사인 것을 간파한다. 이제 그의 관심은 아이린에게서 떠났다. 엘자는 그의 정체를 묻지만 대답 없이도 깨닫는다. 웬디도 마찬가지다. 마력이 그가 누구인지 알려준 것이다.
그는 속성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마법을 먹을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특성이 있었다. 이 압도적인 스펙에 일행은 그저 경악할 뿐이다.
- 페어리 테일/541화 . . . . 2회 일치
루시의 작전에선 그 잠깐이 필요하다. 그녀가 진짜로 노리는건 어떤 마법을 명중시키는 것이다. 아크놀로기아에게 통할지도 모르는 마법. 그녀는 곧 레비와 [[프리드 저스틴]]을 데리고 길드의 도서관으로 향한다. 남은 사람들은 할지온으로 이동할 팀과 아크놀로기아를 할지온으로 유인할 팀으로 나눈다. 그런데 할지온에 모일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페어리 테일 멤버여야 한다. 그래야만 아크놀로기아가 유일하게 부수지 못했던 그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 천랑섬에서 페어리 테일 일행을 구했던 "페어리 스피어"를 말이다.
* 루시 일행은 길드 도서관에서 페어리 스피어의 발동법을 찾기 위해 책이란 책은 전부 뒤지고 있다. [[해피(페어리 테일)|해피]], [[팬서 리리]], [[샤를(페어리 테일)|샤를]]도 합류했다. 마카로프도 거들고 있으나 단서가 될만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마카로프는 초대 마스터 [[메이비스 버밀리온]]가 분명 "있다"고 했다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루시는 반드시 그 기록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 페이데이 2/하이스트 . . . . 2회 일치
최대 네명까지의 경비원을 죽이거나 제압할 수 있으며, 그 후에는 관제실에서 해당 경비원을 호출하는 것에 응답해야 한다. 관제실에서 이상을 감지하고 상황을 물어보는걸 경비원인 척 하며 속여넘긴다는 설정. 일정시간 내에 페이저 응답을 하지 않거나 페이저 응답을 하던 중 중단하면 바로 신고가 들어간다. 이후 다른 사람들이 시체를 볼 만한 위치인가 아닌가 판단한 다음, 볼 만한 위치라면 바디백에 넣어서 못 볼만한 위치(쓰레기통, 숲 속, 방구석 어딘가 등등)로 옮기자.
- 페이데이 2/하이스트/클래식 . . . . 2회 일치
먼저 마약 거래로 위장해 갱단의 본거지인 아파트로 들어가게 된다. 마약 거래가 끝나면 마스크를 쓴 다음 갱단의 뒷통수를 찰지게 후려주면 된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2층으로 올라갈 수 없으니 반드시 해야한다. 낮은 확률로 갱단들이 먼저 뒷통수를 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 이 경우에는 아파트 입구에서 대기하다가 기관단총을 쏴갈긴다.
>아파트 단지의 건물이 대규모 총격전의 현장이 되었다. 출동한 지역 경찰이 대혼란과 페이데이 갱을 목격하였다. 사건 이후 수사관들의 현장 분석에 따르면, 건물 전체를 완전히 박살낸 것은 폭발물로 보인다. 무언가 큰 것이 있었던게 확실한다.
- 편의치적 . . . . 2회 일치
편의치적은 오래된 관행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라이베리아]], [[파나마]], [[소말리아]], [[온두라스]], [[레바논]], [[키프로스]], [[바하마]], [[버뮤다]], [[싱가포르]] 등의 소국이 외국 자본 회사의 설립을 쉽게 하는 회사법을 제정하고, 선박세를 저렴하게 하고 법적 규제를 완화하여 외국의 선박 회사와 선박을 유치하였다. 여기에 [[미국]]이나 [[그리스]]의 선주들이 대거 이들 나라로 옮겨가면서 편의치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미국의 석유 메이저 회사와 그리스 계 선주(특히 선박왕 오나시스) 였다.
[[파나마 침공]] 당시에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 정권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파나마 선적 선박이 제제를 받을 수 있다는 걱정이 널리 퍼지자, 파나마에서 [[라이베리아]]로 선적을 옮기는 사례가 빈발했다. 하지만 [[파나마 침공]]으로 마누엘 노리에가 정권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이러한 움직임은 곧 멈췄다.
- 포리(이노센트 투어) . . . . 2회 일치
첫번째 시나리오 Elf's Dream(엘프의 꿈)편의 주인공. 관련 신화는 켈트신화다.
관련신화가 켈트이기 때문에 카드사용에 제약이 좀 있다. 켈트신화는 북유럽 신화나 헤브라이 신화에 비해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카드가 있는 게 아니라서 한방에 역전할 수 있는 수단이 사실상 없기 때문. 또한 정령력을 충전할 수 있는 카드 역시 켈트 신화에는 없기 때문에 엘프는 이런 면에서 신화보정이 약한 편이다. 이런 이유로 배틀 이외의 상황에서는 공격보다는 방어적인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 포켓몬 . . . . 2회 일치
포켓몬스터 세계관의 동물을 대체하다시피 하는 존재로 포켓몬 세계 곳곳에 널려있다. 사람들은 포켓몬들을 몬스터볼로 포획, 길들여서 함께 놀거나, 타고 다니거나, 포켓몬 배틀을 벌인다. 포켓몬을 기르는 사람들을 포켓몬 트레이너라고 한다.
포켓몬스터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설정이 제대로 짜여지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코끼리 같은 현실의 동물이 도감에 언급되기도 했다. 이는 애니메이션판도 마찬가지라서 수족관에 포켓몬이 아닌 현실의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 피서영 . . . . 2회 일치
Spires에 등록된 피서영의 논문 수는 총 66편으로 3800번이 넘는 피인용을 얻었으며, 특히 Alan Guth와의 인플레이션 초기 우주의 양자역학적 요동에 관한 연구는 1000여번의 피인용수를 받은 중요한 업적이다. 양자 요동이 밀도 요동(density perturbation)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최초로 밝혀 낸 사람 중에 한 명이다.
피서영은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에서 자주 언급되는 막내 딸로 수필 '서영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수필 '서영이'에는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정서가 풍부하고 두뇌가 명석하다. 값싼 센티멘털리즘에 흐르지 않는, 지적인 양 뽐내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소녀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외에도 '서영이 대학에 가다', '딸에게', '서영이와 난영이' 등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딸에 관한 글을 남겼다.
- 핀 팡 품 . . . . 2회 일치
[[아이언맨]], [[토르]]와 싸웠으며 [[헐크]]와도 남극에서 싸웠다. 그리고 아이언맨의 아치 에너미인 [[만다린]]과 연관성이 있다.
아이언맨 관련 코믹스 중에선 멋들어진 [[기계]] 드래곤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도 있다.
- 하이큐/210화 . . . . 2회 일치
* 그냥 돌려보내면 될 일인데 굳이 남긴데다 사실 작은 선수에겐 관심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
* 한편 전일본 유스에 참가한 카게야마는 배구 전용 체육관의 첨단 시설에 감탄하고 있다.
- 하이큐/213화 . . . . 2회 일치
* 갈고 닦은 관찰력으로 공의 코스를 파악하는 눈썰미를 갖추며 스플릿 스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 고시키의 스파이크를 관찰하다 보니 공의 코스를 읽는 눈이 길러진다.
- 하이큐/217화 . . . . 2회 일치
* 히나타의 관찰로는 쿠니미가 들어가는 팀은 대체로 유리하다.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여유가 있다"고 평하는데.
* 그리고는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간단한 어드바이스를 해준다.
- 하이큐/221화 . . . . 2회 일치
* 사와무라 다이치는 체육관을 쓰라고 허락하긴 했지만 과연 "조금만"으로 끝날지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 히나타는 합숙에서 익힌 대로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를 관찰하고 있다.
- 하이큐/225화 . . . . 2회 일치
* 카게야마는 그렇게 불러도 상관 없다고 받아친다.
* 동료들은 히나타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몰라보게 성장한것에 감탄한다.
- 하이큐/227화 . . . . 2회 일치
* 관중석의 3학년들은 비웃음 폭발.
* 3인의 블록을 뚫고 후방의 관중석까지 날아간다.
- 하이큐/252화 . . . . 2회 일치
* 응원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나리자키 고교는 [[오지로 알렝]]이 두 번째 서브 에이스를 달성한다. 스코어는 7 대 4. 관람석의 바보 커플은 이나리자키가 벌써 분위기를 가져갔다며 이미 끝난 게임인 것처럼 취급한다. 여기서 [[카라스노 고교]]가 첫 번째 TO를 쓴다.
다이쇼 스구루의 말은 틀렸다. 조금이 아니라 무지 창피하다. 관중석에서 "또 쟤다"라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히나타는 얼굴이 시뻘개졌지만 코트 바깥의 니시노야가 "좋은 자리 선점이었다!"고 격려해서 이를 악문다.
- 하이큐/253화 . . . . 2회 일치
* [[카게야마 토비오]]의 페이크는 관전하던 [[보쿠토 코타로]]와 [[아카아시 케이지]]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 카라스노를 혼비백산 시키며 코트 위로 내리꽂히는 스파이크. 관중들은 아직 이 플레이의 의미를 모르는 듯 하다.
- 하이큐/254화 . . . . 2회 일치
* 관중석의 [[아카아시 케이지]]는 방금 전 카게야마가 놀라운 페이크 플레이를 선보였을 때처럼 아츠무의 플레이를 섬뜩하게 여긴다. 상대의 특기를 굳이 따라해서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것, 그걸 해내고자 하는 센스와 하고자하는 결단력이 질투심이 들 정도다. 반면 [[보쿠토 코타로]]는 "아아" 정도로 대꾸하고 말 뿐이라서 정말로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무관심한건지 모를 일이다.
- 하이큐/260화 . . . . 2회 일치
* 스코어는 다시 동점이 된 상황에서 또다시 카라스노의 리시브 실패, 공이 이나리자키 측 관중석으로 날아간다.
* 관중석의 [[다이쇼 스구루]]는 냉담한 표정 치곤 경기에 집중하고 있다. 옆에 앉은 여자친구 "미카"는 방금 전 타나카의 플레이를 보고 소스라쳤다. 벽에 부딪힐게 뻔한데도 달려드는 모습. 미카는 그게 무섭다고 말하곤 도중에 "못 잡는다"고 생각하지는 못한 건지 궁금해한다. 설사 따라잡더라도 코트로 돌려보낼 수도 없을 텐데. 스구루가 거기에 답을 줬다.
- 하이큐/267화 . . . . 2회 일치
* 사루카와 주장 "시라미네"는 승부를 낙관하며 짐작하게 플레이에 나서나 어느 순간 코즈메가 블록을 유도하고 있는걸 직감한다.
* 매치 포인트 직전에서 동점. 주장 시라미네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상대가 자신들에게 익숙해졌지만 "완벽하진 않다"는 말로 독려했다. 선수들은 한결같이 동의했다. 다만 코트 밖의 시시오 감독은 조금 달랐다. 뭔가가 석연치 않다. 분명 불안요소가 있다. 그게 뭔지 정확하게 짚을 수가 없을 뿐. 이런 상태에서 플레이가 재개됐다. 야마모토의 2회차 서브. 네트에 걸리며 실점. 서브권이 다시 사루카와에 돌아왔다. "와쿠치"의 서브. 느리고 앞쪽에 떨어지는 서브였다. 야쿠가 있는 위치였다. 무난하게 받을 수 있는 공이었지만, 실수가 생겼다. 어중간하게 흘리는 리시브. 다이쇼는 이 어이없는 실책이라 쓴소릴 했지만 눈을 의심할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시시오 감독도, 상황을 낙관하던 시라미네도 같은 걸 보았다. 들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했다. 마치 친절하게 안내하는 코즈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하이큐/271화 . . . . 2회 일치
* [[스나 린타로]]의 비기, 블록을 통과하는 듯한 스파이크의 비결은 상대 블록을 "조종"하는 특기 덕이었다. 린타로는 스파이크 시 타점의 가로 폭이 넓어 보통 선수의 약 두 배 정도가 된다. 이는 스파이크를 상반신 전체를 활용해 때리는 기술 덕. 팔의 움직임만 보고 블로킹을 하면 블로커가 "분명 맞게 블록했는데 통과해버렸다"고 착각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이나리자키 고교]]의 팬이었고, 스나 린타로 개인의 팬이었던 노인 관객은 일행에게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 관전 중인 [[네코마 고교]]의 [[코즈메 켄마]]와 [[쿠로오 테츠로]]도 린타로의 스파이크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쿠로오는 상황을 정확히 봤는데 블로커들이 딱히 문제를 범한 건 없었다. 그의 위치에서는 린타로의 "유도"가 좀 더 자세하게 보였다. 그 원리는 납득하면서도 스파이크의 위력을 전혀 떨어뜨리지 않고 구사하는 것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무렵 린타로의 팬인 노인도 같은 설명을 일행에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통 MB의 속공은 다른 공격보다 콤팩트하기 마기 마련인데, 린타로는 제대로 토스만 올라오면 언제든 정면승부가 가능하다고 격찬했다.
- 하일권 . . . . 2회 일치
2011년 연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때밀이인 주인공 허세는 우연히 목욕탕 금자탕에 피신하게 되고, 그 곳에서 회장에게 목욕의 신 태미러스의 손을 가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허세는 결국 금자탕의 목욕관리사가 되고, 때밀이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며 꿈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하일권 역대 만화 중 가장 높은 누적수를 기록하였다. 또한, 만화에서 나온 목욕투의 폭발적인 인기의 힘입어 목욕투 애플리케이션이 출시되었고, 2012년 4월 영화화가 결정되어 2013년에 개봉될 예정이다.
관계자는 스케줄상의 이유로 당초 연출자에서 다른 감독으로 대체되었고, 케스팅 또한 감독이 재진행 할것이라고 설명했다.
- 하지호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8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중앙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경원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서울잠원초등학교 동문]]
- 하현정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 경력 : 연극 '우리 읍내' & '꽃마차는 달려간다' · 뮤지컬 '페임' & '유린타운' 등 출연, 2010년 한마음혈액원 홍보대사, [[2011년]] 세계 7대 자연경관선정 홍보대사
- 학동 . . . . 2회 일치
여담으로, 후생노동성은 한국의 보건복지부에 해당한다. 한국의 방과후학교는 교육부에서 관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교육부에 해당하는 일본의 부서는 문부과학성이다.
후생노동성이 소관하며, 지자체나 민간사업체, NPO단체 등을 중심으로 설치된다.
- 한가인 . . . . 2회 일치
| 학력 = [[경희대학교]] 관광경영학과 졸업
* [[경희대학교]] 관광경영학과 졸업
- 한국진 . . . . 2회 일치
* 《[[사도 (영화)|사도]]》 (2015년) - 나내관 역
* 《[[마의 (드라마)|마의]]》 (MBC, 2012년) - 관군 역
- 한동욱 . . . . 2회 일치
2007년 중반, 한동욱은 재차 슬럼프에 빠지며 개인리그 및 프로리그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소속팀과의 원만치 못한 관계가 외부로 알려지면서, 이를 둘러싼 e스포츠 팬들의 거센 논쟁과 관심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한동욱, 온게임넷 스파키즈, 이명근 감독을 둘러싼 이른바「한동욱 사태」는 2007년 9월 7일, 한동욱이 [[위메이드 폭스]]로 이적하면서 일단락되었다.
- 한명진 (1426년) . . . . 2회 일치
'''한명진'''(韓明溍, [[1426년]] ~ [[1454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 공신이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참여하였으며,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고 [[한명회]]의 아우이다.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수(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문춘추관대학사 상질(尙質)이고, 아버지는 감찰 기(起)이고,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척]]의 딸이다.
- 한상대 (검사) . . . . 2회 일치
김학재 의원은 한 후보자가 서울 행당동 대지를 2006년 공시지가의 4분의 1 수준으로 매각한 것을 두고 ‘다운 계약서’ 의혹을 제기했다. 한 후보자는 “모친이 관리한 땅이라 계약서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후보자는 고교 동창이 운영하는 벤처회사의 비상장주식 1000주를 500만원에 매입했다가 2000만원에 팔아 수익을 냈다는 주장에 대해선 “실제론 주식을 2000만원에 구입했다. 500만원에 산 것으로 돼 있는 것은 해당 회사에서 회계편의상 액면가로 세무신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땅 매도 당시 부동산 매매계약서, 토지측량 도면, 토지 매수자의 사실확인서를 공개했다.<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955222 인사청문회 앞둔 한상대·권재진 '의혹 백화점']《SBS》2011년 7월 22일 정혜진 기자</ref>
- 한영이 . . . . 2회 일치
한영이는 한 배교자의 고발로 [[1839년]] [[7월 17일]]에 그녀의 딸 권진이와 딸의 친구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런데, 한영이만 따로 수감 되었고, 딸 권진이를 포함한 세 명의 여성은 포졸들의 감시 하에 이웃 집에 수감되었다. 배신자 [[김여상]]이 [[권진이]]를 첩으로 들이려 유혹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젊음과 미모를 동정한 포졸들에 의해서 풀려났다. [[조정 (정치)|조정]]에서 그 사건을 알고 김여상에게 협조한 관리 및 포졸들을 처벌했다. 권진이를 포함한 그 세 명의 여성은 나중에 다시 체포되었다.
한편, 한영이는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녀는 [[주뢰형]]과 [[장형 (형벌)|장형]]을 받았지만, 그녀의 신앙과 용기는 꺾일 줄 몰랐다. 그녀는 침착하고 평온하게 [[순교]]의 영관을 쓸 때만을 기다렸다.
- 한요한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분류:위키 관련 정보]]
- 한인수(탤런트) . . . . 2회 일치
* [[내게 거짓말을 해봐]] -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한충 (조선) . . . . 2회 일치
'''한충'''(韓忠, [[1486년]] ~ [[152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다. 주부(主簿) [[한창유]]의 아들이다.
[[151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정언(正言) · 이조정랑(吏曹正郞) · 응교(應敎)를 하였다. [[1518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게 된 [[남곤]]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함께 동행했으나, 남곤과 의견 대립을 하게 되었다.
- 한혜숙(배우) . . . . 2회 일치
|| 가족관계 ||<(> 이복 언니 1명[br]이복 오빠 1명[br]동복 누이동생 4명 ||
실제 성격이 직선적이고 도도한 편으로, 드라마에 반영되어 주로 꼿꼿하고 도도하고 고집이 있는 여자주인공 역할을 주로 맡았다. 1970년대에 '브라운관의 [[김지미]]'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 올곧은 성격으로 인해 [[PD(방송)|PD]]들하고 트러블도 있었는데, 그로 인해 하차하거나 방송에 나오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도 1970 ~ [[1980년대|80년대]] 미모 순위하면 항상 순위권에 들었다.
- 함중아 . . . . 2회 일치
== 논란 관련 사태 ==
기업가를 겸직하기도 한 그는 2002년 해외산 양주 판매 관리법 위반 혐의로 적발된 바 있다.
- 해외결혼식 . . . . 2회 일치
결혼식 풍속의 하나. 해외의 관광지에서 올리는 결혼식을 뜻한다. 호화, 사치스러운 결혼식으로서 행해지기도 하지만, 관광지 이벤트로서 비교적 간소하게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 해원군 . . . . 2회 일치
| 작위 = 정(正) <br /> [[군 (작위)|군(君)]] <br />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總府 都總管)
| 직업 = [[왕족|왕족 종실]], 문신, 무관, 정치가
- 허미영 . . . . 2회 일치
'''허미영'''(許美英, [[1982년]] [[2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개그우먼]]이다. [[2015년]] [[2월]] 남편 국회의원 보좌관 박모씨와 결혼했다.
* 《[[가족 오락관]]》 (KBS1)
- 허지애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 특기: 요리, 스포츠관람
- 현경련 . . . . 2회 일치
현경련은 [[한양]]의 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주문모]] [[사제|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1811년]]에 [[순교자]] [[최창현 요한]]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친정]] 어머니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며 평온한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았다. 그녀는 또한 사람들의 성화와 [[문맹]]의 예비 신자를 가르치기, [[냉담자|냉담교우]]를 격려하기,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병자]]들을 돌보기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이교도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등에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선교사]]들이 방문한 동안에, 그녀는 자신의 집에 사람들을 불러들여 [[성사]]를 보도록 해주었다.
[[1893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 초기에, [[교리]] [[선생]]이 된 현경련은 박해를 피해 숨었지만, [[6월|6]] [[7월]] 경에 [[체포]]되었다. 관리들은 현경련이 [[선교사]]들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던 [[현석문]]의 누나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숨은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더 가혹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녀는 여덟 차례 [[심문]]과 두 차례의 [[주뢰형]] 그리고 300 여대의 [[장형 (형벌)|장형]]을 받았다. 형리들은 선교사들을 체포해서 포상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더 혹독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러나 현경련의 강한 의지로 인해서, 그들의 탐욕적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녀는 [[형조]]로 압송된 후에, 다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그녀의 온몸에 상처가 깊어서 피와 [[고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또한 그녀는 [[감옥]]에서 [[콜레라]]에 걸려 앓았다.
- 호소키 카즈코 . . . . 2회 일치
방송에서 하차한 원인으로 야쿠자와의 관련설이 있다.[[http://www.ikedahayato.com/20151007/32595427.html (참조)]]
* 2008년, 『호소키 카즈코 마녀의 이력서(細木数子 魔女の履歴書)』라는 폭로서적이 출간. 야쿠자와의 관련설이 지적되면서 방송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https://www.amazon.co.jp/exec/obidos/asin/B00HPSTJNO/nubonba0a-22/ 참조]])
- 홍석형 . . . . 2회 일치
'''홍석형'''(洪錫亨, [[1936년]] [[10월 1일]] ~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계획재정부장으로 있었으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었다.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 가족 관계 ==
- 홍승규 . . . . 2회 일치
* [[성균관대학교]]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자]]
- 홍준표 (1949년) . . . . 2회 일치
* 일본의 항공기 부품 생산업체 아이신 타카오카사와 주조공정 설계 프로그램 개발에 관한 연구용역<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09&aid=0000110808 홍준표 연대교수, 日서 25만불 수주]</ref>
* 일본 "다이캐스팅(Diecasting)" 생산 기업 동경이화, "반(半)응고신주조기술"에 관한 연구<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581158 日 업체서 50만달러 받고 프로젝트 계약 .. 연세대 홍준표 교수팀]</ref>
- 홍진경 . . . . 2회 일치
* 1999년 루브르 박물관 패션쇼 모델
* [[KBS]] 《[[가족오락관]]》
- 홍해성 . . . . 2회 일치
그러나 [[1931년]]에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여 재기했다. 홍해성은 신극운동 단체인 극예술연구회의 공연작을 연출하며 연극계의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극예술연구회에서의 연출작은 총 9편이다. 이 시기에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연출을 병행하고, 연극과 관련된 기고 활동도 활발히 벌였다.
[[1935년]]에 상업연극 전문 극장인 [[동양극장]]이 개관하자, 동양극장 연출부로 이동했다. [[1943년]]에 지병으로 사임할 때까지 동양극장에서 총 400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승방비곡》, 《검사와 사형수》, 《어머니의 힘》 등이 대표적인 흥행작이다. 본격적인 전문 연출가로서 한국에 근대극을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데 이어, 동양극장 이적 후에는 세련된 상업 연극으로 대중극의 수준을 격상시켰다는 평이 있다.
- 홍효의 . . . . 2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신장 190cm인 장신의 사이드암 투수로 고교 시절 [[우동균]]과 더불어 2008년 1차지명자로 꼽혔지만, 오른쪽 엄지발가락 골절상으로 1차지명은 커녕 2차지명 때도 지명받지 못했다. 게다가 대학에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2년제 대학인 강릉영동대로 진학, 대학 시절에는 부상 때문에 타자(우익수/지명타자)로 나섰다.
- 황부인전 . . . . 2회 일치
다시 제갈량이 떠나려고 하는데 문 밖에서 큰 범이 가로막는다. 황부인에게 구원을 바라자 범이 가만히 있어, 길을 떠나 수십리를 갔는데 돌아보니 여전히 황부인의 집 앞이었다. 모든 것이 부인의 신술임을 깨닫고 질책하였는데, 황부인이 슬퍼하며 간곡하게 바라자 제갈량은 가련히 여겨서 하룻밤을 더 묵고 가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나 황부인은 전생의 허물을 용서받아 선관에게 받은 환약을 먹고 경국지색의 미녀로 돌아온 것이다.
이 때, 유비 관우 장비가 서서를 군사로 등용하였는데, 조조가 서서의 어머니의 필적을 위조하여 서서를 데려온다. 서서는 떠나면서 제갈량을 천거하고 조조에게 가는데, 서서의 어머니는 위조편지에 속은 아들을 질책하고 아들의 의기가 꺽이는걸 염려하여 목을 메어 자살한다.
- 황성관 . . . . 2회 일치
|선수명 = 황성관
'''황성관'''(黃成寬,[[1974년]] [[1월 15일]] ~ )은 [[KBO 리그]] 전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다.
- 황제성(코미디언) . . . . 2회 일치
|| 학력 ||<(>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학사 ||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를 졸업하였고, [[MBC]] 16기 공채 개그맨으로 [[개그야]][* [[그렇지요]]라는 코너를 히트시키면서 개그야의 마지막 황혼기를 캐리했다.] [[하땅사]] 등에 출연하였다.
- 회고록 . . . . 2회 일치
개인이 자신의 삶이나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 회고(回顧)하여 기록(録) 한 문서 혹은 서적. 개인적인 기록이므로 개인의 주관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정치,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들이 말년에 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물들의 회고록은 사료 가치가 높기도 하지만, 회고록에도 개인의 주관이 반영되어 있어서 [[자서전]]만큼이나 회고록의 기록은 검토하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 히나타 쇼요 . . . . 2회 일치
경기가 시작되고,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경기에 대한 집념과 미숙한 세터가 토스미스한 공을 쳐낼 정도의 뛰어난 반사신경에 감탄한다. 하지만 히나타 외엔 누구도 의욕도 실력도 없었던 유키가오카 중은 불과 31분만에 세트포인트 2-0로 키타가와 제1중학교에 참패. 이 때 카게야마는 중학교 3년 동안 무얼 했냐며 히나타를 질책한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설욕을 다짐하며 남은 중학교 시간을 여자 배구부, 동네 아줌마 배구팀과 훈련한다. 그리고 그렇게 설욕을 다짐하며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러나 배구부가 있는 제2 체육관에 있던 건 바로 원수 카게야마였다.
선배들 앞에서 카라스노의 에이스가 되겠다며 목표를 밝혔으나, 그 말을 전면 부정하던 카게야마와 티격태격하다가 나란히 배구부 입부를 거절당했다. 그 후, 3대 3 경기를 통해 카게야마와의 협력을 보여주고 배구부에 입부한다. 히나타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배구에 관한 기술은 초보티를 간신히 벗은 정도. 서브나 리시브도 제대로 못하고, 자그마한 키와 몸집 등 불리한 면이 많지만, 경이적인 반사 신경과 순발력을 갖고 카게야마를 비롯한 동료들을 놀라게 한다. 오히려 히나타가 제대로 스파이크를 하지 못하는 점이 카게야마가 세터로서 본래의 능력을 개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카게야마와는 호흡을 맞춰 '괴짜속공' 이라는 이상한 속공을 보여주기도 한다. 뛰어난 신체적 능력과 괴짜속공으로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어 히나타를 경계 시키게 만듦으로서 다른 선수가 득점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 그래서 현재 경기 중 히나타의 임무는 '최강의 미끼'가 되었다. '미끼'라는 자신의 포지션이 '에이스'에 비해 초라하다고 느껴 기죽기도 하지만 이를 꿰뚫어본 카게야마에게 한소리를 듣고 자신의 역할을 긍정하게 된다.
- 히모 . . . . 2회 일치
[[일본어]]에서 히모는 일반적으로는 '끈'이라는 뜻이다. 남녀관계에서 속칭으로 쓰일 때는, 여성을 일하게 하고 자신은 그녀가 주는 돈으로 놀고 먹는 [[정부]]를 뜻한다. 정식으로 혼인관계를 맺으면 히모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농담이나 놀림삼아 불릴 수는 있지만.
- 1000가지 위기의 순간 . . . . 1회 일치
골때리는 죽음이 많다. 캠핑 중 떡치다가 혈관이 눌려 눈이 머는데, [[텐트]] 밖으로 기어나왔더니 [[곰]]이 먹을거 먹으려고 나와있었다던가……. 그 외에도 진짜 위험한 행동을 다루기도 한다.
- 1986년 에드먼드 우체국 총기난사 . . . . 1회 일치
패트릭 셰릴은 자신이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1986년 8월 20일 아침, 그는 우편 가방에 자동권총 3정을 숨기고 직장에 나타난다. 셰릴은 관리자였던 리차드 에서 주니어(Richard Esser Jr.)를 쏴죽인 후 다른 직원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이로인해 14명이 사망하였다. 이후 출동한 [[SWAT]]과 [[FBI]]가 우체국을 포위하자 셰릴은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 2013 K리그 심판매수 . . . . 1회 일치
2013시즌은 K리그에서 승강제가 도입된지 두번째 시즌이었고, 경남 FC는 강등될 가능성이 아주 유력했던 팀 중 하나였다. 당시 경남의 사장이었던 안종복은 팀의 강등을 모면하고자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저지르고야 마는데, 바로 심판매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http://sports.news.naver.com/k_league/news/read.nhn?oid=015&aid=0003436896|외국인 선수의 몸값과 관련한 횡령혐의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차후 발표결과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241&aid=0002495741|심판매수]]로 알려져 K리그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게 되었다.
- 3월의 라이온 . . . . 1회 일치
== 관련항목 ==
- 3월의 라이온/122화 . . . . 1회 일치
* 게다가 대국 중에는 키리야마를 빤히 관찰하는 등 엄청 거북한 상대.
- 3월의 라이온/125화 . . . . 1회 일치
* 중계실에선 끝까지 이 대국을 관찰하고 있다.
- 3월의 라이온/126화 . . . . 1회 일치
* 또다른 삼각관계 예고.
- 3월의 라이온/128화 . . . . 1회 일치
* 경험자의 관록인지 이런 가게에서도 능숙하게 주문을 해서 하야시다의 부러움을 산다.
- 3월의 라이온/129화 . . . . 1회 일치
* 올해도 8월이 찾아왔다. 장기회관을 찾은 [[니카이도 하루노부]]와 [[키리야마 레이]]. 니카이도가 게시판에서 반가운 소식을 발견하고 흥분한다.
- AC-130 . . . . 1회 일치
미국 영화 [[백악관 최후의 날]]에서는 [[북한]] [[테러리스트]]들이 조종하는 AC-130이 [[F-22 랩터]] 두대를 박살내고 [[워싱턴 D.C.]]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 AEC 장갑차 . . . . 1회 일치
20mm 기관포 두정을 장비한 대공형.
- ATM . . . . 1회 일치
사람이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은행 측에선 비용이 상당히 절감될 수 있기에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기이다. 이렇게 대중에 노출이 많기 때문에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으며, 시도때도없이 카드복제기나 도촬카메라 같은걸 설치한다. 조금이나마 힘 쓸 생각이 있는 놈들은 이걸 뜯어서 가져간다고한다. 이런 이유로 ATM도 보안에 대한 이슈와 관련하여 끊임없는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보안 업데이트를 꾸준히 실행한다. 자동화기기가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 위해선 어쨌거나 현금이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창작물 등지에서는 좀 최신식 [[금고]] 취급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간혹 억지로 뜯으면 잉크가 뿌려지거나 해서 사용할 수 없는 돈이 된다는 설정을 붙이기도 한다.
- CharacterTemplate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DC 코믹스 . . . . 1회 일치
== 관련 정보 ==
- EZ2AC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Europa Universalis 4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Europa Universalis 4]]
- FN 에르스탈 . . . . 1회 일치
1890년대에 소유권이 마우저 소총의 특허를 보유한 독일인들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자전거]]도 만들게 된다. 미국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미국 총기제작자 [[존 브라우닝]]과 관계를 쌓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 HelpOnEditing . . . . 1회 일치
이러한 색깔 효과는 주로 [[리듬게임]]의 곡 등 게임과 관련된 요소의 난이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며, 대사집 등에서 각 인물의 대사를 분류하거나 문서를 대조할 때 구분하는 등 여러가지로 쓰입니다. 특히 긴 글을 인용할 때 몇몇 부분을 구분해야 하는 경우에만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 M25 최루탄 . . . . 1회 일치
|| [[http://www.policemuseum.go.kr/pm_info/new_relic_view.asp?lcode=Large_9&mcode=Middle_10&id=4935&GotoPage=3&category_1=%C0%E5%BA%F1%B7%F9&category_2=&column=&searchString=|경찰박물관 웹사이트 출처]] ||
- NTX위키 . . . . 1회 일치
[[분류:위키 관련 정보]]
- OK 본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 OrphanedPagesMacro . . . . 1회 일치
위키 페이지를 만들다보면 어디에도 링크 되지 않은 페이지가 생성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사용자가 특정 페이지에 위키 링크를 먼저 만들고 그 링크를 따라가서 페이지를 만드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 PageListMacro . . . . 1회 일치
SisterWiki에 있는 내용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FullSearchMacro야 SisterWiki랑은 무관하지만 PageList는 SisterWiki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SORN . . . . 1회 일치
마엘스트롬을 지키는 대마법사 게이트키퍼의 제자로서, 게이트 키퍼를 봉인해버려서 세계를 멸망의 위험에 빠뜨린 대마녀. 마법의 방패 주문을 가지고 있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미지를 줄 수 없으며, 오직 게이트키퍼만이 이 마법의 방패를 돌파할 주문을 알고 있는데 정작 게이트키퍼를 만나려면 SORN을 돌파해야 한다는 복잡한 난관을 보유하고 있다. 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 같다.
- USS 뷰캐넌 . . . . 1회 일치
채리엇 작전의 목표는 프랑스의 도시 생나제르에 위치한 대형 건선거, "노르망디 독"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캠벨타운의 역할은 폭뢰를 싣고 수문에 돌격, 수문을 폭파시키는 임무였다. 캠벨타운은 이 작전을 위해 개조되었다. 4문의 4인치 함포는 12파운드 함포와 20mm 기관포로 교체되었고, 독일 어뢰정처럼 보이기 위해 연돌 두개를 제거하였다.
- USS 피닉스 (CL-46) . . . . 1회 일치
1943년 7월,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을 [[카사블랑카]]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피닉스는 다시 태평양 전역으로 돌아온다. 같은 해 12월에는 글로스터 곶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으며, 1944년 1월에는 [[뉴기니]] 섬의 해안시설을 포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2월에는 [[로스니그로스]] 섬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3월에는 다른 연합군 순양함과 함께 일본군의 해안 포대를 깨부쉈다. 4월 22일에는 홀란디아[* 現 [[자야푸라]].]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그로부터 1주일 후에는 근처 지역의 일본군 비행장을 포격, 연합군을 위협할 수 없게 하였다. 5월에는 또다른 상륙작전들을 지원하여 일본군의 초소를 초토화시켰다. 6월에는 해당 지역에 증원군을 수송하던 일본군 구축함들을 발견, 쫓아내었다. 7월에는 Numfoor[* Neumfoor라고 읽기도 하는 듯. 갓-구글님께서 한국어 표기를 말씀하시지 않으신다.]의 해안을 포격했다. 9월에는 말루쿠 제도의 [[모로타이]]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였다.
- Victoria II/상품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Victoria II]]
- Y2K 버그 . . . . 1회 일치
미국의 컴퓨터 관련 기업들은 Y2K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트를 공동으로 개설하였으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51000099107012&ed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9-05-10&officeId=00009&pageNo=7&printNo=10363&publishType=00010|매일경제 1999년 5월 10일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국내 컴퓨터 업계 또한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60800329109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6-08&officeId=00032&pageNo=9&printNo=16453&publishType=00010|경향신문 1998년 6월 8일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head to head . . . . 1회 일치
이 룰이 도입된 리그에서는 [[골득실]]의 가치를 낮추며, 소위 '[[양민학살]]'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게 줄어드는 셈이다. 다른 약팀을 많이 잡는 소위 '양민학살'을 잘 하는 것이나, 골득실은 팀의 실력과 직결된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운]]'이 따르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합리적인 개선인 셈이다.
- 가면부부 . . . . 1회 일치
부부관계는 차가워졌고, 이미 애정은 없지만 이혼하지 않는 상태. 약 30%의 부부가 가면부부에 가까운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답변했다.
- 가치제이 . . . . 1회 일치
반댓말로 엔조이제이(エンジョイ勢)가 있다. 이들은 게임에서 점수나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즐기는 것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 감정없는 존재 . . . . 1회 일치
1. 사고기관중에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이 물리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경우
- 강세정 . . . . 1회 일치
|2001||KBS1||[[가족오락관]]||출연자||
- 강연재 . . . . 1회 일치
| 본관 =
- 강예빈 . . . . 1회 일치
* 《[[가족오락관]]》 (2008년, KBS1)
- 강호 . . . . 1회 일치
당나라 시대의 당시(唐詩)에서 강호는 관계(官界)에서 벗어난 재야(在野)의 생활들을 뜻하는 말로서, 낙향하여 초야에 묻혀 사는 생활을 가르키게 된다.
- 개인용 웹페이지 저장 서비스 . . . . 1회 일치
자신이 캡쳐한 것을 id로 로그인해서 직접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구글 아이디로도 로그인이 된다.
- 거푸집 . . . . 1회 일치
정동찬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장이 화학세계 1999년 7월호에 투고한 내용에 따르면, 활석 거푸집은 열전도율이 뛰어나며, 진흙이나 사암 거푸집과는 달리 가스 구멍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고, 단단하여 잘 망가지지 않으므로 오래 쓸 수있어서 좋다고 한다.[http://www.kcsnet.or.kr/main/k_chemstory/k_c_story_read.htm?qpage=k_c_story_main&uid=11&cat=2 참조]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 . . . . 1회 일치
== 관련항목 ==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50화 . . . . 1회 일치
* 리뷰에는 작성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55화 . . . . 1회 일치
* 특진 클래스는 출석율이 상관이 없어서 거의 학교에 가지 않는 건데, 우마루는 그걸 듣고 "무한하게 뒹굴뒹굴할 수 있어 좋겠다"라고 부러워한다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57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타이헤이와 우마루의 말로 봄바가 오빠로서 고생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조금은 관계를 회복한다.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71화 . . . . 1회 일치
* 실핀이 창고에서 레트로한 굿즈가 잔뜩 보관돼 있는걸 발견한다.
- 건포인트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경비원 . . . . 1회 일치
경비원에게 제압당할 정도면 영웅이나 수사관이 등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만, 도입부나 중간 전개에서 위기감을 강조하려고 애꿏은 경비원이 죽어나가는 장면이 매우 많다. 경비원이 등장하면 '''일단 죽는다'''고 보면 될 정도. 미국 수사물에서는 대개 경비원을 쓰러드리고 [[경찰]], [[SWAT]], [[FBI]] 순서로 테크가 올라간다.
- 계한보신찬 . . . . 1회 일치
[[유비]], [[제갈량]], [[관우]]-[[장비]], [[마초]], [[법정]], [[방통]], [[황충]], [[조운]]-[[진도]], [[위연]] 등의 순서로 비평을 내린다.
- 고다이고 덴노 . . . . 1회 일치
일본에서는 고대사 이후로는 덴노가 직접 나서서 정치에 개입한 몇 안되는 사례이다. 후지와라 씨에 의한 섭관 정치, 상황에 의한 인세이 정치, [[막부]]의 통치 등으로 덴노가 직접 나설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 하지만 그 성과가 실로 비참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후 덴노들은 찌그러져 사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 고독사 . . . . 1회 일치
인간관계가 고립된 사람이 [[의사]]나 [[가족]], 이웃 등 주변 사람들에게 간호를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사망하는 경우를 뜻한다. 주로 [[독거노인]]에 많으며, 지역사회에서도 고립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사망을 면할 수 있었을 사람도 많다.
- 고수희 . . . . 1회 일치
* [[2018년]] : 《[[레슬러 (영화)|레슬러]]》 - 귀보체육관 회원 역
- 고스트 패트롤 . . . . 1회 일치
[[프랑스]] 외인부터 시절 상관으로부터 프랑스가 통제하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원주민 마을에 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기술자 헨리로부터 임무를 수행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나 일단은 참여했는데 주민들을 죽이길 원치 않았던 셋은 안전한 곳에 투하했다. 문제는 헨리가 주민들을 지키려고 셋의 전투기에 시한폭탄을 장치했다는 것으로 결국 셋은 사망해버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3인은 [[유령]]이 되어 있었고, 이를 나치와 싸울 두번째 기회라 생각했다. 이후 고스트 패트롤이 된 삼인조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대항했다.
- 고양이를 덮어쓰다 . . . . 1회 일치
일본어 관용표현.
- 고원희 . . . . 1회 일치
* [[한국관광공사]]
- 고인범 . . . . 1회 일치
* 2013년 JTBC 월화드라마 [[네 이웃의 아내]] - 합기도 관장
- 고종(조선) . . . . 1회 일치
그 이후 10여년동안 조선은 청이 주류로, 그리고 일본이 보조로 마지막으로 미국등의 열강이 찔끔찔끔 이권을 뺏어먹는 형편이 되고(...), 결국 이는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진다. 처음에 동학의 교주였던 최시형의 탄원시도로 시작한 이 운동은 결국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박살내고 전주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정은 청군에게 병력을 급파해주길 요청한다. 그런데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홍계훈의 대포에 밀려 더이상의 북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과 미리 텐진조약을 맺은 일본은 청이 조선으로 간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조선에 병력을 상륙시킨다. 어찌됐든 '''일본이 개입하자''' 놀란 농민군과 조정은 전주화약을 맺어 일단 농민군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해주는걸로 끝난다.
- 곤조야키 . . . . 1회 일치
1980년대 무렵부터, 지역에 따라서는 다르지만, 대체로 곤조야키는 감소하고 있다. 일설에는 불량배의 상하관계가 약화되어, 보스의 권위나 절대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감소하게 되었다고 한다.
- 골든 위크 . . . . 1회 일치
골든 위크라는 이름은 이 시기에 "자유학교"라는 영화를 개봉하고 흥행이 정월, 오봉 연휴 이상으로 대성공한 것을 기념하여, 다수의 관객 동원을 목적으로 영화사 다이에이(大映)가 1952년 무렵에 만든 선전 용어였다. 이 용어가 각계에 퍼지게 되었다. 일부 언론사에서는 선전 용어라는 이유로 골든 위크라는 표현은 쓰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 공명(배우)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18일,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에서 19살 딸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의 사연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최근 이혼을 한 아버지가 스크린 골프에 빠져서 딸의 돈을 빌려 유흥비를 탕진했고 딸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딸 생일이거나 아플 때도 아버지의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느라 딸 문제는 뒷전이었다고 한다.] [[http://tvcast.naver.com/v/990812/list/84583|영상]]을 보면 정말로 무슨일이 난 것 마냥 굉장히 슬프게 운다. 감정이입이 빠른 듯 하다[* 생각보다 본성, 즉 그의 실제 마음은 많이 여린 편이라 그런지 감정이입은 물론, 연민의 마음을 잘 보여줬다 할 수 있겠다. 속 마음이 실제 이미지와 비슷하게 많이 착한 것으로 보인다.].
- 공병 . . . . 1회 일치
군대에서 전쟁이나 전투에 필요한 각종 시설물을 만들거나 설치하는 데에 관여하는 병과.
- 공주님 안기 . . . . 1회 일치
이런 관계로 때때로 그림으로 그려진 이 포즈를 보면 안기는 쪽의 몸 크기가 일반적으로 서 있을 떄의 반 이하로 축소(…)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고무고무 열매?-- 괜히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찜찜해지는 사례.
- 곽승준 . . . . 1회 일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위 인수위원을 지내며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대통령실(현 [[대통령비서실]]) 국정기획[[수석비서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 등을 지냈다.
- 광주 FC . . . . 1회 일치
= 관련항목 =
- 교육 마마 . . . . 1회 일치
자식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라는 뜻. 지나치게 교육에만 관심을 쏟고, 과도하게 학원에 보내거나 학대적인 육아를 하여 자식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좋지 않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 구미시 . . . . 1회 일치
구미시내를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
- 구성윤 . . . . 1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축구 해외파 선수들)]
- 권은희 (1959년) . . . . 1회 일치
* 1998년: 정보통신부장관상 부가서비스 발전 공로상
- 그랜드 테프트 오토: 산 안드레아스/무기 . . . . 1회 일치
== 기관단총 계열 ==
- 그랜드슬램 . . . . 1회 일치
* 축구 : 축구에 한정하여 쓰이는 그랜드슬램이라는 용어는 특정 팀이 거둔 업적을 평가하는게 아니라 특이하게 [[FIFA]] 주관대회를 얼마나 많이 개최하였느냐에 따라 다르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회는 월드컵, 컨페더레이션스컵, U-20 월드컵, U-17 월드컵이 여기에 해당된다.
- 금고 . . . . 1회 일치
[[현금]], 중요 서류, [[귀금속]] 등의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한 [[금속]]제 상자. 쉽게 뜯기 힘들도록 튼튼하게, 옮기기 힘들도록 무겁게 만들며 [[자물쇠]]를 달아놓는다. 자물쇠는 열쇠나 다이얼키, 번호키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 금잔디 . . . . 1회 일치
* 특집 관광스페셜 트롯트 금잔디 1, 2집 (2017년)
- 금조(나인뮤지스) . . . . 1회 일치
* 2017년 5월 15일 브이앱에서 [[프로듀스 101 시즌2]] [[주학년]], [[형섭|안형섭]], [[라이관린]]을 응원했다고 언급했다.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 . . . 1회 일치
'헤드 기어'에서 내놓은 [[거대로봇물]]. 레이버라는 작업용 로봇이 탄생하고, 이어서 증가하게된 레이버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에서 준비한 패트레이버, 그 패트레이버를 운용하는 특차 2과와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다.
- 기동전사 건담 실루엣 포뮬러 91 . . . . 1회 일치
처음에는 토키오 일행을 연방군으로 오해하여 교전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협력하는 관계가 된다. 후반에는 실루엣 건담을 타고 토키오와 협력하여 가렘슨을 쓰러뜨려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
- 기은세 . . . . 1회 일치
* [[2007년]] [[한국관광공사]]
- 김경식 (희극인) . . . . 1회 일치
한편, [[1996년]] 초 갑작스런 군 입대(공익)를 하면서 한동안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뒤<ref>{{뉴스 인용
- 김경준(축구선수) . . . . 1회 일치
*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
- 김규철(배우) . . . . 1회 일치
* 2009년 KBS 연기대상 특집 문학관 남자 단막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김대륙 . . . . 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롯데 자이언츠/선수단, top2=야구 관련 인물(KBO))]
- 김도균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김(성씨)/목록]]
- 김동준(제국의아이들) . . . . 1회 일치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 [[출발 드림팀]] 등 주로 체육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을 보여서 '체육돌'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원래 운동선수를 하려 했으나 포기하고 아이돌이 되었다고... [[직업군인]]도 고려했다고 한다. [[애초에]] 연예계로는 관심도 없었지만 이 분야에서는 꽤나 흔한 비화인 '친구 오디션에 따라갔는데 내가 뽑힘'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 김민교 (가수) . . . . 1회 일치
* [[2006년]] [[9월 16일]], [[2007년]] [[1월 13일]] [[KBS]] 《[[가족오락관]]》
- 김민희(1972)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김병윤 . . . . 1회 일치
1946년 동지교육재단을 설립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 때부터 동지상업고등학교(현 [[동지고등학교]]) [[교장]], 포항시의회 의원, 동지교육재단 [[이사장]],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포항[[시장(공무원)|시장]], 포항수산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 김석원 (금융인) . . . . 1회 일치
[[행정고시]] 19회로 재무부 이재국•국제금융국에서 근무하였고, 재정경제부 중소금융과장, 금융•부동산실명단 총괄반장, 보험제도과장 등을 거쳐, 일본 대장성에 파견 연구관으로 재직하였다. 이후 [[재정경제부]] 본부국장, 한국국제조세교육센터 소장, 미국 미시간대(금융연구센터)의 Visiting Scholar로서 활동하였으며, 금융감독위원회 기획행정실장, 금융감독위 및 [[금융감독원]] 합동대변인, [[예금보험공사]] 부사장, 상호저축은행중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김선영(1976) . . . . 1회 일치
|| '''학력''' ||<(> [[태백석탄박물관]] ||
- 김성주 (기업인) . . . . 1회 일치
김성주는 MCM을 글로벌하게 키워냈으며 직설적이고 튀는 발언을 많이 하는 캐릭터로도 알려져 있다. 2014년 제주 BPW(Business & Professional Women) Congress에서 '글로벌 여성 지도자 상' 수상 당시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더이상 권리가 아닌 의무"라며 "세월호 사태도 기득권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며 여성들은 더이상 이런 사태를 주시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장관의 1/3은 여성으로 채워져야만 한다"고 말하는 등 여성의 사회활동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 김승목 . . . . 1회 일치
1959년 [[민주당(1955년)|민주당]] [[박순천]]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기출]]의 뒤를 이어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동구(부산)|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김쌍수 . . . . 1회 일치
이름이 특이해 [[가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텐데, '''[[본명]]'''이라고 한다.--[[쌍꺼풀 수술|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 김원주(가수) . . . . 1회 일치
어떤 지인의 말에 따르면, 뭐든지 둔하지만 집착은 있는 편이라서 자신이 궁금한 거는 못 참아서 끝까지 알아내지만 모든 걸 다 알아버리면 관심을 놓아버린다고 한다.
- 김정재 . . . . 1회 일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8년 한나라당 중앙여성위원회 기획분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만 이 과정이 좀 특이했는데 4회 지선에선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5회 지선에선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국회나 지방의회나 보통 비례대표로 당선된 사람들이 다음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에 나서는 것과는 정반대. 덕분에 5회 지방선거에서 괴멸당하다시피 한나라당 서울시의회의 몇 안 되는 재선이었다. 이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특별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김정혁 . . . . 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김준영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그러나 2006년 9월 15일 변형태와 알카노이드에서 치른 일전은 많은 게임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온갖 화제를 낳았다. 이 경기에서 김준영은 테란으로 트리플 커맨드를 확보한 변형태를 상대로 전 맵에 걸쳐 멀티를 가져가면서 막대한 자원 수급량을 확보했고(총 8개의 멀티 보유), 처음 택한 공격이 아드레날린 업그레이드가 완료된 저글링 드랍이었을 정도로 엄청난 배포를 보였다. 이후 공중유닛에 매우 강한 발키리, 골리앗 조합으로 진군하는 테란 병력을 소위 새떼라 불리는 뮤탈리스크 대부대로 무난히 격파하고, 전맵에서 뿜어져 나오는 울트라리스크로 상대의 본진을 싹쓸이하면서 최고의 관광 경기를 연출했다. 이 경기가 펼쳐진 16분 동안 김준영은 40000이 넘는 미네랄을 채취했을 정도로 엄청난 물량을 뽐내며 당시 최고조에 다다랐던 테란전 실력을 입증하였으며, 경기 내적인 측면에서도 대인배스러운 캐릭터를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경기였다. 또한 훗날의 [[다음 스타리그 2007]]에서의 호적수, 이후에는 팀동료로 계속 이어진 변형태와의 인연이 시작된 경기이기도 했다.
- 김지석(배우) . . . . 1회 일치
||<#595959><:> {{{#FFFFFF '''본관'''}}} ||<(> [[김해 김씨]] ||
- 김지훈(1993)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김청(1962년 6월) . . . . 1회 일치
* [[보스를 지켜라]] - 황 관장
- 김현성(가수)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가수/한국]]
- 김형종(배우) . . . . 1회 일치
* 《[[결정적 한방]]》 (2011년) - 근석보좌관 역
- 김혜옥 . . . . 1회 일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컷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문득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홍익대 미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떨어졌다. 그런데 당시 시험감독관으로 들어온 교수가 그림에는 소질이 없어뵈지만 연기를 하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고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에 진로를 바꿔 서울예대 연극과 응시, 합격하였다.<ref name="월간조선">{{웹 인용|성1=서철인 |제목=중견배우 인터뷰 탤런트 김혜옥 “다들 저보고 귀엽다네요” |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307100055 |웹사이트=월간조선 |날짜=2013-07 |확인날짜=2018-08-18}}</ref>
- 김효기 . . . . 1회 일치
* 상위 문서: [[경남 FC]], [[축구 관련 인물]]
- 나고야 대학 여학생 살인사건 . . . . 1회 일치
2014년 12월 7일, [[나고야 대학]]에 재학중인 여학생이 77세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 범인은 [[나고야 대학]]에 진학중이던 여대생 오오우치 마리아(大内 万里亜)이다. 범인은 평소 얼굴을 알고 지내던 피해자 모리 토모코(森外茂子,77세 여성)를 자신의 아파트에 불러들여서, 방 안에 보관해두던 [[도끼]]로 공격했다. 하지만 몇번을 때려도 피해자가 죽지 않자, 피해자가 하고 있던 [[머플러]]를 빼앗아서 목을 졸라서 살해했다. 이후 피해자의 시체를 욕실까지 끌고 가서 세면대에 방치하고, 「마침내 했다.(ついにやった。)」고 [[트위터]]에 보고하며 휴대폰으로 시신을 찍어서 올렸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 . . . 1회 일치
== 관련 정보 ==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8화 . . . . 1회 일치
* 관객석의 Ms.조크는 걸물고교 학생들이 우르르 통과하는걸 발견하고 기뻐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2화 . . . . 1회 일치
* 시험 내용은 3km 마라톤이지만 많은 장애물이 있어 개성을 활용하지 않으면 난관인 코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4화 . . . . 1회 일치
사걸고교 케미의 정체는 토가 히미코. 진짜 케미의 행방은 미지수다. 하지만 토가의 성미로 봤을 땐 성하게 있지는 못할 것으로 추정. 일단 토가의 행동은 단독행동으로 빌런연합의 계획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개성이 변신이고 단지 피를 얻으면 변신할 수 있다는 패널티가 매우 적은 능력. 처음엔 스테인을 추종하는 태도나 우라라카, 아스이 츠유와 교전했을 때의 정황 때문에 스테인과 비슷한 계통이 아닌가 추정되었으나 완전히 빗나갔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6화 . . . . 1회 일치
* 올마이트를 타르타로스로 안내한건 [[츠카우치 나오마사]]였다. 돌아가는 길고 그의 차를 이용한다. 츠카우치는 하필 임시면허 시험일자와 날짜가 겹쳤다고 사과한다. 그러면서 어땠냐고 묻는데 올마이트는 유감스럽지만 정보는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예상했는지 "장기전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츠카우치는 또 수속 관계로 정리를 못했다며 "스팅"과 면회는 어쩔 거냐고 묻는데 그때 전화가 울린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7화 . . . . 1회 일치
*미도리야는 올 것이 왔음을 직감한다. 바쿠고는 그저 감으로 찍은게 아니라 나름대로 추리를 했다. 올 포 원이 개성을 뺏거나 부여하는 것을 보았고 올마이트는 녀석과 면식이 있다. 개성을 이동시키는게 가능하며, 그 당사자와 올마이트와 연관돼 있고, 미도리야는 올마이트와 유사한 개성을 "받았다"고 한다. 또 올마이트와 만나서 미도리야가 바뀌었고, 그는 힘을 잃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0화 . . . . 1회 일치
* 올마이트는 긴 히어로 생활 끝에 정립한 자신의 지론을 밝힌다. 히어로는 바쿠고처럼 승리를 열망하는 마음과 미도리야처럼 남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 모두가 필요하다. 어느 한 쪽이라도 결여된다면 자신의 정의를 관철할 수 없다. 올마이트는 미도리야의 마음을 두려워한 바쿠고의 속내와 바쿠고를 동경했던 미도리야의 속내가 드러난 지금이라면 각자 깨달았을 거라고 말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8화 . . . . 1회 일치
>기묘한 관계에 망설일 틈도 없이...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9화 . . . . 1회 일치
* 무엇보다 그의 "히어로관"이 허용하지 않는다. 밀리오가 말했던 것처럼, 코스튬을 입고 마을에 나온 그들은 히어로다. 히어로가 겁먹은 아이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미도리야는 오버홀에게 "이 아이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4화 . . . . 1회 일치
하지만 키리시마를 뒤쫓아온 [[패트껌]]과 맞주쳤다. 패트껌은 곧바로 빌런을 포획한다. 그의 [[개성(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은 "지방흡착". 몸에 뭐든지 흡착시키고 집어넣을 수 없다. 키리시마의 경화도 뚫었던 칼날이지만 그의 두터운 몸에는 무용하다. 패트껌은 빌런의 승리조건은 "살해", "도주", "쓰러뜨린다" 등등 다양하지만 히어로는 "피해자 없이 붙잡는다" 단 한 가지이며 빌런을 얼마나 빨리 전의상실 시키느냐가 관건이라고 조언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2화 . . . . 1회 일치
* 1층에선 [[버블걸]]과 [[센티피더]]가 경찰과 협조해 시에핫사이카이 조직원을 거의 체포했다. 버블걸은 설마 전원이 방해하러 올 줄은 몰랐다며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한다. 이래서는 잡히러 온 것 밖에 안 되니까. 조직원들은 "제정신이라 잡히러 왔다"고 반박한다. 얌전히 있으면 오버홀에게 반드시 죽었을 거라며. 그들은 오버홀, 아니 치사키가 권력을 잡으면서 모든게 변했다고 털어놨다. 원래 지금의 두목은 야쿠자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시에핫사이카이도 빌런집단과 선을 긋고 어디까지나 "협객"으로서 양지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그런 두목의 뜻을 따랐다. 반기를 든 것은 두목의 아들이었던 치사키. 그가 오버홀이란 이름을 걸고 조직을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는 빌런 같은 이름을 대고 행동을 했으며 빌런과 힘을 합쳤다. 개성 관련 금지 약품을 유통한 것도 치사키. 반항은 할 수 없었다. 조직원들은 현두목이 와병생활을 하게 된 것도 분명 오버홀의 짓이라고 수군댔다. 버블걸은 그렇게 치사키를 싫어하면서도 그가 잡힐 거라고, 실패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 거냐고 반문한다. 조직원은 그렇다고 답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4화 . . . . 1회 일치
>의협심이 있으면 "개성"따위 관계없어!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6화 . . . . 1회 일치
단지 그것만으로는 싫다는 이야기, 그 점이 타마키와 패트껌의 관심을 끌었다. 키리시마는 크림슨 라이오트 처럼 제대로 지킬 수 있는 히어로를 목표로, 그런 인물로 변하고 싶어서 억지로 타마키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누군가의 위기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한심한 녀석"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7화 . . . . 1회 일치
>연합하고는 양호한 관계가 아닌 걸로 보인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51화 . . . . 1회 일치
* 오버홀은 밀리오가 에리를 데리고 있는데도 가차없이 공격하는데 어차피 "망가져도 바로 수복하면 상관없고 이미 체험시켜줬었다"며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57화 . . . . 1회 일치
* 처음으로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깨달은 "에리". 에리의 도움으로 마침내 [[미도리야 이즈쿠]]는 에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접촉하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관통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인지할 틈도 없이 [[오버홀]] 치사키가 다시 한 번 흉수를 뻗쳐온다. 미도리야는 아직 공중이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 그 순간 [[토오가타 밀리오]]가 물었던 "어떤 히어로가 되고 싶냐"던 물음이 떠오르고 "반드시 이기고 반드시 구하는 히어로"라는 대답이 떠올랐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79화 . . . . 1회 일치
* 한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미도리야의 "지휘관 적성"이 다시 드러났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0화 . . . . 1회 일치
* "상처를 내서 피를 빨겠다"고 하는데 개성하고 연관된 건지 불분명하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1화 . . . . 1회 일치
* 미도리야가 최후의 추격대로 뽑혀가지만, 거의 리타이어 직전 상태인 관계로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3화 . . . . 1회 일치
* 메스컴에서 연일 비난하고 있고 기존 웅영의 방침인 "굴하지 않는 자세"도 관철할 수 없게 된다. 프로히어로에 대한 신임마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5화 . . . . 1회 일치
* 거리의 대형스크린에서는 [[유우에이 고등학교|웅영]] 관계자들의 사죄방송이 방영 중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9화 . . . . 1회 일치
* 올 포 원의 일격이 그의 흉부를 관통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1화 . . . . 1회 일치
* 그 주먹은 올 포 원이 쓰고 있던 헬멧을 관통해 버리는데, 이때에 맞춰 올마이트의 활동시간도 한계에 달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2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프로 히어로들과 웅영고 관계자들은 경악하며 보도를 주시하고 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3화 . . . . 1회 일치
* "관람객은 얌전히 있으라"는 올 포 원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7화 . . . . 1회 일치
* 미도리야는 자신의 부상은 학교의 정책과 무관하며 그들은 언제나 말려왔지만 자신이 잘못돼서 다치게 된거라고 변호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8화 . . . . 1회 일치
* 사실 남학생들은 대체로 별 관심이 없다.
- 나폴레옹 빠 . . . . 1회 일치
* [[보카사 1세]]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독재자]]. [[쿠데타]]로 집권하여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국가예산의 2배를 들여서 나폴레옹 1세를 흉내낸 [[대관식]]을 벌이거나, 옥좌는 나폴레옹 독수리를 본떠서 프랑스에서 제작한 2톤 짜리 거대 청동옥좌를 사용했다.
- 낚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 . . . 1회 일치
[[분류:관용어]] [[분류:일본어]]
- 남경민(배우) . . . . 1회 일치
* 2017년 《[[아리랑 TV]]와 함께하는 [[한국관광공사]]의 한국절경》([[아리랑 TV]]) ... ([[더 이스트라이트|이스트 라이트]] & [[모모랜드|모모 랜드]] & [[엘리스 (음악 그룹)|엘리스]] with [[남경민 (배우)|남경민]] & [[안다빈]] & [[최다니엘]] & [[김소혜 (1992년)|김소혜]] & [[박종찬 (배우)|박종찬]] & [[이랑 (배우)|이랑]] & [[신세휘]] & [[이지훈 (1979년)|이지훈]] & [[신수지]] & [[박세영 (배우)|박세영]] & [[김예린 (미스코리아)|김예린]] & [[정다빈 (2000년)|정다빈]] & [[이수민 (2001년)|이수민]] & [[이상벽]] & [[이문세]] & [[박상원]] & [[박상면 (배우)|박상면]] & [[노희지]] & [[박중훈]] & [[이진우 (배우)|이진우]] & [[최현석]] & [[이원일]])
- 남명학파 . . . . 1회 일치
이들은 전술했듯이 이론만 왈가왈부하면서 정작 그에 따라 실천하지 않는 경우를 혐오했으며, 이때문에 조선 성리학 이론을 집대성하려한 퇴계 이황과 그의 학파와는 앙숙이었다.[* 조식은 이기론에 관한 논쟁을 '입만 나불댈줄 아는 유생놈들이 실천에는 신경쓰지 않고 이론가지고만 키배하는 짓'정도로 여겼을 정도였다.] 이황은 조식을 두고 '오만해 중용이란것을 모르고, 노장사상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했고, 이에 조식은 '요즘 학자들은 물뿌리고 청소하는 법도 모르면서 천리를 논한다.'라고 그를 간점적으로 비꼬았을 정도였다.
- 남봉진 . . . . 1회 일치
'''남봉진'''(南鳳振, [[1921년]] ~ 2008년<ref>{{뉴스 인용|제목=[부음] 남봉진씨(전 경기도지사) 별세|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8&no=173109|날짜=2008-03-27|뉴스=매일경제}}</ref>)은 [[대한민국]]의 제12대 [[경기도지사]]이다. 본관은 [[영양 남씨|영양]].
- 남윤정(탤런트) . . . . 1회 일치
* [[1974년]] 《유관순》
- 노예 . . . . 1회 일치
현재 국제사회의 원칙에 따라서 노예는 전 세계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사실상 노예 상태에 있거나, 관습적으로 여겨지는 노예는 세계 어딘가 존재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암암리에 [[섬노예]]라는게 있다.
- 노인 홈 . . . . 1회 일치
[[양로원]]의 일종. [[노인]]이 거주하기 위한 시설. [[주거]]와 식사제공, 간호제공, 세탁과 청소 등의 가사, 건강 관리 등 일상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개 유료 시설이 많으며 입주에는 상당한 비용이 든다.
- 노재우 . . . . 1회 일치
== 가족 관계 ==
- 니세코이/215화 . . . . 1회 일치
* 천채관측일 날 혼잣말을 듣지 않았냐며, 치토게 또한 이치죠를 좋아하지 않냐고 묻는다.
- 니세코이/222화 . . . . 1회 일치
* 저택에서 아직 그림책 마지막 페이지를 돌려주지 못했다는걸 깨닫지만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이고 둘은 분명 행복해질 테니까"라고 생각하며 벽장 속에 보관한다.
- 니세코이/228화 . . . . 1회 일치
탈락한 히로인들의 사후관리가 영 좋지 않았고 특히 마리카 팬들은 두 번 세 번 대못질을 당하고 오노데라도 만만치 않은 상황. 전반적으로 혹평이 줄을 잇고 있다. 완결이 1화 남은 상황에서 이 모양이라면...
- 니시노 카나 . . . . 1회 일치
리얼한 연애관을 담은 가사로 주로 여성팬에게 사랑을 받았다.
- 니트 . . . . 1회 일치
지구 근접 소행성 관측 프로젝트(Near-Earth Asteroid Tracking)를 줄여서 NEAT라고 하며, 여기에서 발견된 혜성에 니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 다이스(미래소년 코난) . . . . 1회 일치
인더스트리아의 무역국 직원으로 35세. 기범선인 바라쿠다 호의 선장으로 플라스칩을 수집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이익과 보신을 위해서라면 말 바꾸기와 배신과 변절도 주저하지 않는 천하의 악당.......같지만, 의외로 사람이 좋고 미워할 수 없는 구석도 있고, 배와 바다에 관해서라면 진지한 성격인지라 그의 부하 선원들은 선장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결코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함께 한다.
- 단기대학 . . . . 1회 일치
[[일본]]의 교육제도. 직업 기술에 관한 전문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2년제, 혹은 3년제 대학. 단대(短大)라고 줄여서 부른다.
- 단종 . . . . 1회 일치
그 이듬해에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집현전 출신 학사 관료들과 일부 무인 세력이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다 발각되어 제거되었고, 이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했다. 그 후 유배중이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사사당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단종은 세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사약으로 사사되었다는 설과 활줄로 교살당했다는 설 등이 있다.) 단종의 시신은 엄홍도란 사람이 몰래 거두어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 대구광역시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청 본관
- 대구광역시/인물 . . . . 1회 일치
* [[김승관]] - 북구(대구)
- 대마신 . . . . 1회 일치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오마쥬, 혹은 패러디가 나왔는데 예를 들어 [[RPG전설 헤포이]]에서 대마신을 닮은 캐릭터가 등장했고, 만화 [[케로로 중사]]에서도 관련 패러디가 나왔다.
- 더듬이 . . . . 1회 일치
생물의 감각 기관 중 하나. [[곤충]]에게 많이 달려있다.
- 도나우 강 . . . . 1회 일치
한국 수자원공사 글로벌 하천관리 탐방 도나우강
- 도노 . . . . 1회 일치
* 사마를 더하여 도노사마(殿様). 유복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대개 서민 생활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 도예종 . . . . 1회 일치
== 관련 항목 ==
- 돌턴 갱 . . . . 1회 일치
Dalton Gang. [[서부개척시대|미국 서부시대]]에 활동했던 8인조 갱단. 갱단 멤버 중 밥 돌턴(Bob Dalton), 그랫 돌턴(Grat Dalton), 에밋 돌턴(Emmett Dalton) 세명이 형제였기에 돌턴 형제(Dalton Brothers)라고도 불렸다. 이 세명은 연방보안관으로 활동하였으나 1890년경 무법자가 되었다. 이들은 다른 총잡이들과 함께 돌턴 갱을 이루었고, [[오클라호마]]주와 [[캔자스]]주에서 [[은행강도]]와 [[열차강도]]를 벌였다.
- 동북중고등학교 . . . . 1회 일치
=== 본관 ===
- 드럭스토어 . . . . 1회 일치
일본의 드럭스토어는 선물로 쓰기 좋은 기능성 있고 특이한 상품이 많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 드립위키 . . . . 1회 일치
[[분류:위키 관련 정보]]
- 딩크 . . . . 1회 일치
아이를 양육하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보다, 수익을 늘려서 개인의 삶의 질을 중시하는 선택을 하겠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아이를 건전하게 양육하는데 많은 돈과 노력이 소모된다는 어려움도 반영되어 있다.
- 딴따라 . . . . 1회 일치
과거 유교적 관습이 남아있던 시대에는 연예인이 그리 좋은 직업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음악을 팔고 웃음을 파는 직업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수들의 이야기를 보면 노래를 연습하고 있으니 "너 딴따라 될거야?"라면서 부모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 떨어진 용왕과 멸망해가는 마녀의 나라 . . . . 1회 일치
* 라이바하 란티에스 : 검은 숲에 은둔중인 해리건 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카산드라 제국군의 일원. 노부나가의 책략으로 인해 원정군이 궤멸당하고 오히려 요새를 빼앗기는 참패를 겪은 뒤 후임 지휘관에 의해 최전방에 배치되었다가 우연한 기회로 마녀들에게 생포당했다. 마녀들이 이제껏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젊은 여자들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데다, 그녀들(특히 유우키)를 보고 과거 도적들에게 살해당한 딸이 생각나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결국 노부나가의 부하가 된다.
- 라늬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LPG (음악 그룹)|LPG]] (2013년 ~ 2015년)
- 라몬 베렝게르 3세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램즈혼 달팽이 . . . . 1회 일치
수조에서 사육하여 관상용으로 쓰는 종류는 껍질의 색에 따라서, 레드, 블루, 옐로, 핑크 등을 붙여서 부른다.--모두 모아서 달팽이 [[전대물]]을 찍어보자.--
- 러시안 룰렛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레오(워저드) . . . . 1회 일치
칼을 쓰는 통상기들은 밀착해서 맞출시 데미지와 스턴치가 반토막나는 페널티가 있으므로 거리 조절이 관건. 엄청난 리치의 점프 약K과 앉아 중K으로 견제하며 서서 중K이나 앉아 강P로 대공을 처리하는 식의 싸움이 주가 된다.
- 레이나 검랑전설 . . . . 1회 일치
3편의 OVA는 각각 단편작에 가까우며 원작과는 물론, 서로 간에도 내용은 별로 관련이 없다.
- 레이디 제인 (가수)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레킹 크루 . . . . 1회 일치
레킹 크루의 중심 인물. 원래 폭파 작업원이었으나 문제있는 태도 탓에 해고되면서 범죄자 레커가 되었다. 약탈한 곳을 폭파시키고, 현장에 쇠 지렛대를 놔두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레커가 초인이 된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바로 로키. 오딘에 의해 힘을 잃었던 로키는 레커의 호텔방에 들어가 퀸 카르닐라(Queen Karnilla)와 접촉해서 그녀의 힘으로 자신의 힘을 회복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레커가 돌아왔고, 힘이 없는 로키를 두들겨 패놨는데 이때 카르닐라가 레커를 로키로 오인하여 마법을 걸어 초인이 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법의 쇠 지렛대도 획득했다. 마법의 힘을 힘을 얻게 된 레커는 마구 날뛰며 토르를 이기기까지 했으나 시프가 가져온 디스트로이어에 의해 패했다. 그 뒤에 다시 토르와 싸우려고 [[탈옥]]했지만 힘을 회복한 토르에게 패배. 결국 다시 [[교도소]] 행. 교도소로 돌아온 레커에게 같이 감옥에 갇혀 있던 엘리엇 프랭클린 박사가 접근했다. 박사는 자신이 만든 감마 폭탄을 되찾아 [[뉴욕]]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거금을 벌길 원했다. 먼저 쇠 지렛대를 확보한 레커는 프랭클린과 마찬가지로 수감자인 헨리 캠프, 브라이언 칼루스키에게 폭풍우가 치는 동안 동시에 쇠 지렛대를 꽉 쥐도록 했고, 번개가 지렛대를 내리쳤는데 그 결과 다른 셋에게도 힘이 생겼다. 그리고 레킹 크루 결성.
- 로빈 . . . . 1회 일치
배트맨 관련 매체에서 자주 등장해왔으며 국내에서도 방영한 [[배트맨 TAS]]에서도 등장. 이후의 배트맨 NBA에서도 등장했다.
- 로어셰크 . . . . 1회 일치
18살 때, 코백스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하게 된다. 40여명의 시민들이 제노비스가 소리치는 걸 들었음에도 그녀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걸 방관했다는 소식을 접한 코백스는 2년 전 자신이 얻었던 옷감으로 마스크를 만들고 "로어셰크"로써 활동하게 된다. 이때는 범죄자들을 죽이지 않았다.
- 로켓레드 . . . . 1회 일치
이외에 로켓레드 #7인 블라디미르 미코얀이 있으며 관련 캐릭터로 [[파이어스톰]]의 협력자인 [[포자르]]가 있다.
- 롬팩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루시우스 폭스 . . . . 1회 일치
[[배트맨]] 관련 캐릭터.
- 류명선(야구선수)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류원정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류자키 레이카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류종원 . . . . 1회 일치
* [[1999년]] [[KBS1]] 단막극 《[[TV문학관]] - 새》 ... 우일 역
- 류지혜 (레이싱모델) . . . . 1회 일치
* 2016년 영상기자재전 코리아프로덕츠관 포즈모델
- 리듬게임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리스트 컷 . . . . 1회 일치
리스트 컷은 주로 사춘기에서 20대 젊은이, 그 중에서도 미혼 여성에게 많이 볼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이 손목에 2,3회 상처를 입히는 것이며, 손목 이외에 팔다리, 얼굴, 복부 등에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리스트 컷은 반복되거나, 습관화 하는 일이 많지만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참조링크(일본어)
- 리전 오브 몬스터즈 . . . . 1회 일치
흡혈귀, 늑대인간, 미이라 등 마블의 괴물 캐릭터들로 구성된 팀이다. 두버전이 존재하는데 1976년 버전은 고스트 라이더가 리더이며 Starseed라는 존재와 관련해서 만들어졌으며 이후 해체되었다. 그리고 2010년 버전이 나왔는데 리더는 웨어울프 바이 나이트이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같은 형태로 되살아난 퍼니셔도 이들과 협력했다.
- 마기/297화 . . . . 1회 일치
* 야무라이하는 여전히 사를르칸과 썸인 듯 썸이 아닌 듯 미묘한 관계인 듯.
- 마기/298화 . . . . 1회 일치
* 샤를르칸이 '''겁나 큰 뱀'''을 감고 있는건 이 나라의 관습. 왕족은 모두 그렇게 하지만 신드바드와 있을 땐 기후 상 하지 못했다고. 쇠사슬을 감고 다닌 이유는 뱀 대신이었다
- 마기/304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알라딘은 그런건 상관없다며, "신드바드가 하려는 짓에 찬성할 수 없다"고 쏘아붙인다.
- 마기/309화 . . . . 1회 일치
* 아르바는 유난을 타전시키려 하면서 "알 사멘의 마기"로 쓰겠다고 하는데, 신드바드에게는 알 사멘과 관계를 끊었다고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결국 신드바드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다.
- 마기/311화 . . . . 1회 일치
* 알라딘은 "연백영의 몸을 돌려주고 신드바드에게 수작 부리는 것도 관둬라"고 요청하고 아르바는 대답 대신 "네 얼굴은 그 두사람(솔로몬과 시바)과 닮아서 싫다"고 디스한다.
- 마기/313화 . . . . 1회 일치
* 백룡은 이제 자신은 순수하게 연가의 사내이지 홍염과는 무관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며 "더이상 네가 갈아탈 몸은 없다"고 한다.
- 마기/315화 . . . . 1회 일치
* 홍옥은 귀왜국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싶어하는데 이들은 수배자인 주제에 관광하러 다니는 통에 자리에 없다.
- 마기/320화 . . . . 1회 일치
* 지금 그가 성궁에 가기만 한다면 운명을 내다보고 다시 쓸 수 있는 "루프의 관리자"가 된다고 말한다.
- 마기/321화 . . . . 1회 일치
* 국제동맹 본부의 금속기 보관고
- 마기/324화 . . . . 1회 일치
이번 화 시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관 최강자로 일 일라가 개입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우주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우고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걸로 보인다.
- 마기/325화 . . . . 1회 일치
쥬다르는 여행이라도 다녀왔다는 듯 슬렁슬렁 등장. 그런 것치곤 뭔가 뒤에서 한 일이 있는 듯 한데. 알라딘을 찾는 것도 그것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높다.
- 마기/333화 . . . . 1회 일치
* [[알리바바 사르쟈]] 일행은 천관산맥의 국제동맹 본부에 잠입한다. 전송마법진으로 간단하게 잠입에 성공, 금속기를 탈취하는데까지 성공한다. 알리바바는 암흑대륙에서도 [[쥬다르]]가 이걸 써줬으면 좋았다고 투덜대는데 쥬다르는 "닥쳐 찰흑인형"이라고 폭언한다.
- 마기/336화 . . . . 1회 일치
* [[연백룡]], [[쥬다르]], [[알라딘(마기)|알라딘]]은 주위를 주시하며 보통 던젼이 아니라고 짐작한다. [[아르바(마기)|아르바]]는 일행과는 무관하게 모래시계만 들여다 보고 있다. 그때 진 "바알"이 나타나 이 던전 바알은 신드바드가 14살 때 공략한 던전인 동시에 현재 그의 "신념"을 나타낸 것이니 신드바드를 이기고자 한다면 일곱 개의 신념을 넘어보라고 말한다.
- 마기/338화 . . . . 1회 일치
* 쥬다르는 목을 쳤는데도 죽지 않는다고 기겁한다. 그리고 질린다는 말투로, 주위를 가리키며 "이건 너의 14세 무렵의 원망, 내가 저지른 일하고는 관계없다"고 항변한다. 아마 그는 초대 신드리아 왕국 멸망에 일조했던 것 같고 자격지심이 있는 것 같다.
- 마기/341화 . . . . 1회 일치
* 마기로서 사는 알라딘의 삶은 자신의 의지하고는 무관하다. 그건 솔로몬 왕, 그리고 [[우고(마기)|우고]]가 정한 일이다. 알라딘이 지키고자 하는 세상도 결국 솔로몬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매달리는 것, 결국 남의 삶과 남의 의지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 마기/348화 . . . . 1회 일치
알리바바는 자신의 대마법이라면 세상을 구분하는 모든 벽, 가로든 세로든 상관없이 모두 부수고 연결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 마누엘 고도이 . . . . 1회 일치
* 『프라도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 마왕이 나타났다 . . . . 1회 일치
일단 장점은 최종 보스를 쓰러뜨려서 뭔가 끝났다는 안도감을 줄 수 있다. 또 마왕을 이용해서 불필요한 등장인물을 '구조조정'하여 복잡한 갈등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 마운팅 . . . . 1회 일치
괴롭힘 처럼 명백하게 드러나는 형태로 공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척, 상대를 걱정하는 척, 혹은 자학하는 척 하면서 연애, 외모, 인간관계 등에서 자신을 어필하고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는 행동을 뜻한다.
- 매터니티 해리스먼트 . . . . 1회 일치
직장 등에서,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괴롭힘을 뜻한다. 약칭은 마타하라(マタハラ).
- 맥시멈즈 . . . . 1회 일치
== 관련 항목 ==
- 머슬봄버 . . . . 1회 일치
배경의 관중성을 자세히 보면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류와 춘리가 보인다.
- 머신맨 . . . . 1회 일치
[[로봇]]이라서 강력한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아다만티움]] 성분이 들어간 티타늄 합금 탓에 강력한 내구성을 지니고 있다. 거기다 자가수리에 초정밀 계산능력, 굉장한 시력, 비행, 변신에 팔과 다리는 30m까지 늘어난다. 두뇌는 인간과 같은 감정, 창의적 지능, 무한한 자기 동기부여 활동을 할수 있다. 태양열 에너지가 동력이나 필요시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외부 에너지를 이용할수 있다. 손가락은 장비가 장착되어서 총알, 전기, 냉각선, 열선을 발사할수 있으며 가스 분석기, 레이저 관측기, 마이크로 펄스 레이저, 음향 측정기, 지진계, 중력파 검출기, 펄스 코드 변조기, 컴퓨터 입출력 장치, 전파표지, 만능통신기, 레이저 절단 토치 등이 있다. 대형 칼날이나 전기톱 등이 팔에 장착되어 있고 가슴에는 빔 캐논이 있다.
- 메디나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4일 저녁(한국 시간 5일 새벽) 한 남성이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모스크]] 부근에서 자폭하여, 보안요원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우디에서는 같은 날 동부 카디프, 서부 제다 항구도시의 미국 총영사관 부근에서도 자폭 테러가 발생했다. 이는 이슬람 테러 조직 [[이슬람국가]]가 [[라마단]] 기간 동안에 테러를 무슬림들에게 호소한 것에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예언자 사원을 향하던 남성을 수상하게 여긴 치안 당국자가 제지를 했는데 몸에 두르고 있던 폭발물을 터트려서 테러를 일으켰다고 한다.[[http://www.47news.jp/korean/international_diplomacy/2016/07/141460.html (참조)]]
- 메시아 컴플렉스 . . . . 1회 일치
통속심리학 용어. 자신이 '구세주'([[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비정상적인 강박관념을 가지고, 비정상적이거나 과도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고방식이다.
- 문숙(배우) . . . . 1회 일치
우리나라로 돌아온 후 패션지 화보 촬영을 하거나 아침방송 등에 출연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2015년엔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38년만에 스크린관에 복귀하였다.
- 문연주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문호월 . . . . 1회 일치
| style="width:80%;" | 〈'''관서천리'''〉
- 미도리야 이즈쿠 . . . . 1회 일치
* 어려서부터 언젠가 히어로가 됐을 때를 대비해 개성 보유자들을 관찰해와서 그런지 분석 실력이 우수하다. 그러다보니 필기도 자주 한다.
- 미스터 피어 . . . . 1회 일치
본명 졸탄 드라고. 원래 밀납인형 박물관 경영자였으나 자신의 화학지식으로 인형들을 생명체로 만들어서 부하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포가스를 얻었다. 공포가스를 이용해 옥스, 일을 부하로 삼아 펠로우쉽 오브 피어라 칭하며 활동을 시작, 그러나 데어데블에게 패했다. 최초의 미스터 피어이나 두번째 미스터 피어은 스타 색슨의 손에 죽었다.
- 미이라(2017년 영화) . . . . 1회 일치
'''심각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실제 영화 완성도도 안 좋은 의미에서 심각하다'''. 다음 영화의 스토리나 설정에 방해가 될법한 요소가 있는지 상관없이 영화의 수준이 처참하다.
- 미저리 . . . . 1회 일치
이후 내용은 도서관에서 직접 빌려 보시던지ㅇㅇ
- 미하 . . . . 1회 일치
단어 자체의 발상은 쇼와 초기, 1920년대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한 1950년대에 널리 쓰이는 유행어가 되었다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어원에 관한 설은 여러가지 있다.
- 민도 . . . . 1회 일치
한국에서 이렇게 잘 안 쓰이는 단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원인으론 2004년에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의 망언 때문으로, 중국과 일본이 [[AFC 아시안 컵]]축구경기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양국간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이시하라 당시 지사는 "중국 관중이 일본에게 야유를 보내는 건 중국의 '민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망언을 했던게 한국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바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민생위원 . . . . 1회 일치
지역의 실정을 잘 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도도부현지사의 추천을 받아 후생노동대신(후생노동성의 장관)에게 위촉되어 임명된다. 민생위원은 후생노동성의 기준에 따라서 교육 훈련을 받는다.
- 민폐료 . . . . 1회 일치
타인에게 민폐(迷惑)를 끼쳤을 때 주는 관례적으로 내미는 돈.
- 바리어프리 . . . . 1회 일치
"장애물이나 장벽이 없다"는 의미이다.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물리적, 심리적인 장애, 정보에 관한 장벽 등을 제거하려는 운동 혹은 그러한 사상의 결과로 이루어진 개선책. [[고령자]], [[장애인]]에게 안전하며, 살기 쉬운 사회를 만들자는 개념이다.
-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 . . . 1회 일치
게임 내용은 부도덕한 거대 기업 [[엄브렐러]]가 몰래 개발하던, '생물체를 가공할 전투력을 지닌 괴물로 변이시키는' 바이러스 병기가 유출되어 사람은 물론 벌레까지 감염되어, 게임 배경이 [[좀비]]와 별 희한한 괴물들로 득실대는 막장이 된 와중에 용감하고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들(경찰 관계자인 경우가 많다.)이 각종 화기를 능숙하게 휘둘러 온갖 몬스터를 처치한 후 탈출하는 것이다.
- 바키도/107화 . . . . 1회 일치
* 무사시는 가뿐히 떨쳐내고 "결과를 두려와 말라"고 하는데, 알버트는 그 절대적인 가치관 차이를 실감하고 항의할 의욕도 잃어 버린다.
- 바키도/108화 . . . . 1회 일치
* 오로치는 그런 부분에 놀라면서도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더니, "혼돈이라 해도 끝까지 관철한다면 투명함"이라며 그게 무사시 나름의 순수성이란 의견을 낸다.
- 바키도/109화 . . . . 1회 일치
* 점토로 만든 인형에 양복정장을 입힌 것, 경찰관 의상과 방탄복, 방패를 소지한 기동대복, 자위대 복장 등이 준비되어 있다.
- 바키도/123화 . . . . 1회 일치
* 의외의 결과에 경악하는 관중석.
- 바키도/125화 . . . . 1회 일치
* 관중 일동은 깨끗하게 기습이 성공하자 감탄한다.
- 바키도/126화 . . . . 1회 일치
* 뜻밖에도 담배를 권하는 모토베. 그의 시대에 있던 "연관"하고 같은 거라고 친절히 설명까지 해준다.
- 바키도/137화 . . . . 1회 일치
>오우거와는 아주 관계가 없지도 않으니.
- 박광정 . . . . 1회 일치
* 2006년 특수수사일지:1호관 사건
- 박근영 (야구인) . . . . 1회 일치
[[2014년]] [[4월 30일]] [[SK 와이번스]]와 [[KIA 타이거즈]] 의 경기에서도 6회초에 KIA 선수가 병살을 시도했지만 1루에서는 육안으로 보기에는 아웃이지만 세이프를 선언해서 7회초가 시작되기전에 관중에 의해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박노식(1930)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본관 [[밀양시|밀양]](密陽).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이냐시오이다. 1930년, [[전라남도]] [[여수시]] 에서 태어났으며[* 그런데 정작 [[응답하라 1994]]에서 [[순천시]] 출신인 [[해태(응답하라 1994)|해태]]가 여수 아줌마와 고향 대결을 할 때 박노식을 순천 사람이라고 내세운다. --해태 [[의문의 1패]].--],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여수 수산중학교]]를 거쳐 순천사범학교[* 1946년 11월에 설립되었다가 1962년 2월에 폐교되었는데, 뒤이어 순천실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1967년에 지금의 순천공업고등학교로 재개편되었다.] 체육과를 졸업했다. 1950년에 지금의 여수 소라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 선무공작대에 입대·종군했다.
- 박노식(1971) . . . . 1회 일치
1994년 사랑의 묵시록을 통해 영화에 데뷔하였으나 주로 연극판을 전전했고 진짜 영화배우로 유명해지고 소속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용의자 백광호로 출연하면서다. 감독까지 감탄한 열연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당시 코미디언들도 수도없이 패러디[* 개그맨 [[김시덕]]이 개그콘서트 코너에서 많이 했는데, 그 코너에서 [[송강호]] 역할이었던 인물이 [[정형돈]]. --물론 정형돈은 송강호 스타일과 별로 비슷하지 않았다--]했었고 다른 연예인들도 성대모사를 하곤 했었다.
- 박녹주 . . . . 1회 일치
23세인 [[1928년]]부터 음반을 취입[*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것으로 단가 대관강산과 심청가 중 선인 따라가는 대목을 취입하였다.]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성악연구회에도 참여하여 춘향전, 흥보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등 창극의 여주인공으로 자주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44세가 되던 [[1948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당시 창극 활동을 했던 여성 명창의 처우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고, 국극의 연출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8년 눈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고, 해방 이전부터 접했던 [[아편]] 중독 증세로 인해 병고와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 박상철(가수) . . . . 1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젤나가 감시탑)]~~
- 박성우 (정치인) . . . . 1회 일치
==가족 관계==
- 박세웅(1996)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박소연 (배우) . . . . 1회 일치
* 제9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여우주연상 (2015년) <ref>[http://www.xportsnews.com/jenter/?ac=article_view&entry_id=609742 대국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 여우주연상 수상 관련기사] </ref>
- 박술희 . . . . 1회 일치
|본관= [[면천 박씨|면천]]
- 박승효 . . . . 1회 일치
== 가족 관계 ==
- 박재홍(1941) . . . . 1회 일치
1941년 2월 28일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큰형 [[박동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백수]]로 있다가 [[박태준]]의 도움으로 [[포스코|포항종합제철]]의 중간간부를 역임하다가, 동양철관(주)의 사장, 회장을 역임하였다.
- 박지일(배우) . . . . 1회 일치
* [[2007년]] [[KBS]] 단막극 《[[KBS HDTV 문학관]] -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 [[김만중]] 역
- 박진석 (가수) . . . . 1회 일치
무도장 디스코 Vol.1 (관광디스코)
- 박진옥 . . . . 1회 일치
* 상위 문서: [[축구 관련 인물]], [[제주 유나이티드]]
- 박창달 . . . . 1회 일치
|| '''본관''' ||[[박(성씨)|구산 박씨]]||
- 박태준 (작곡가) . . . . 1회 일치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며 호(號)는 귀봉(龜峯)· 산남(山南)· 계산(桂山)이고, 종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개신교(예장통합)]]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고등학교 (대구)|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이후 미국 [[터스컬럼 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음대 및 대학원을 나왔다.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종교 음악과를 창설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한국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64년 연세대학교 음대 학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오빠생각〉 〈집 생각〉 〈사우(思友)〉 등 150여 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 〈중 중 때때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 등이 있다.
- 박하나(배우) . . . . 1회 일치
|| 2017년 || 9월 18일~ || 채널A || [[풍문으로 들었쇼]] || 진행자 ||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621488|관련 기사]] ||
- 박현진 (음악가)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박희부 . . . . 1회 일치
동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신민당(1967년)|신민당]] 사무국 직원으로 근무하며 조직부국장 등을 지냈다.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수감되기도 하였다.
- 반하면 패배 . . . . 1회 일치
'반한 쪽이 패배'라는 말은 연인관계에서 애정의 크기가 서로 다르거나, 주도권이 한쪽에 있는 경우를 뜻한다.
- 발 . . . . 1회 일치
물론, 하이힐이나 밀폐형 부츠등을 쉬지도 않고 장시간동안 신는다면 비단 발의 피부질병문제가 아니라 근육과 골격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남녀노소 모두 바람직한 생활 습관으로 소중한 발을 잘 지키도록 하자. 발이 건강하다면 그 사람의 건강도 보장된다.
- 발달장애 . . . . 1회 일치
* 전반적 발달장애 : 자폐스펙트럼장애, [[자폐증]], [[아스퍼거 증후군]] 등. 의사소통이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으며, 특정한 행동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 배상면 . . . . 1회 일치
'''배상면'''(裵商冕, [[1924년]] [[9월 22일]] ~ [[2013년]] [[6월 7일]])은 [[대한민국]]의 기업가이다. 호는 우곡(又麯, 또 누룩을 생각한다는 의미).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대한민국 전통주 시장을 개척했다.<ref>[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7/2013060703105.html 전통주 외길 '배상면' 국순당 창업자 별세] 조선비즈, 2013년 6월 7일</ref> 본관은 [[달성 배씨|달성]].
- 배소연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배트맨 . . . . 1회 일치
[[로빈]]이라는 사이드킥이 있는데, 1920년대부터 꾸준히 동성애 관계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다. 갑부가 어린 남자애랑 사는게 뭐가 어때서.
- 버리는 대사 . . . . 1회 일치
* [[연극]], 주로 [[가부키]]에서 배우가 극본과 무관하게 즉흥적으로 내뱉는 [[애드립]] 대사를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단어를 무대에서 등장할 때, 혹은 퇴장할 때 날리는 경우가 많아
- 법 없이도 사는 사람 . . . . 1회 일치
[[분류:관용구]]
- 베이지 . . . . 1회 일치
* [[OCN]] 경성기방 영화관 (낙화)
- 벨트스크롤 게임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게임 장르]]
- 변신합체로봇 . . . . 1회 일치
변신합체 구조가 복잡해지면, 변신합체와 멋진 외관을 양립시키는 것이 어렵다.
- 변질자 . . . . 1회 일치
퇴폐, 변질을 뜻하는 [[프랑스어]] dégénéré에서 나온 말이다. 과거에 [[동성애자]]들이 정상이 아닌, '이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에 기원을 가진다. 성적인 퇴폐, 정신장애를 사회적 병리와 동일시한 [[우생학]]과 연관이 되어 있는 말이다.
- 보루토/2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보루토는 그런데 관심없다며 "약점"을 알려달라고 조른다.
- 보루토/5화 . . . . 1회 일치
* 회장이 붕괴해 관람객들이 위험해진다.
- 보스턴 당밀 홍수 사건 . . . . 1회 일치
조사 결과, 사고 원인은 전형적인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인재(人災)였음이 드러났다. 요약하면, '탱크 부실 시공 + 관리 소홀 + 부실 은폐 시도'. 여기에, 사건 당일에 갑자기 영상으로 상승한 기온으로 인해 부피가 늘어난 당밀 시럽이 가뜩이나 부실한 저장 탱크에 부담을 가중시켜 이와 같은 참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 보쿠걸/96화 . . . . 1회 일치
* 타케루는 아버지에게 미즈키와 관계를 가지고 놀림 당한다
- 부산광역시 . . . . 1회 일치
=== 관광지 ===
- 부시왜커 . . . . 1회 일치
한때 성직자를 꿈꿨던 전직 CIA 요원.[* 이때 팔이 총으로 개조되었다.] 현재는 뮤턴트 사냥꾼인데 그에게 희생된 뮤턴트들은 초인적 힘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예술 관련으로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뮤턴트들이며 큰 돈을 받고 활동하는 것은 맞으나 누구에게 고용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그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 [[울버린]]이 추격에 나섰으며 그의 아내에게 부탁받은 맷 머독도 움직였다. 처음엔 부시왜커를 죽이려는 울버린을 맷 머독이 데어데블로서 막았으나 탈출한 부시왜커의 손에 뮤턴트 발레리나가 죽으면서 둘이 연합하게 되었다. 결국은 패배했으며 이때 울버린에게 다시 죽을뻔했으나 데어데블이 또 살려줬다. 이후 데어데블의 손에 의해 뉴욕 경찰서에 넘겨졌다.
- 북유럽 신화 . . . . 1회 일치
* 에인헤야르 : 오딘이 모은 전사. 오딘은 전쟁에서 승리를 약속하지만, 어느 순간 때가 되었다 싶으면 [[발키리]]를 보내서 강제로 [[전사]]시켜 버리고 영혼을 끌고 오는데 이것이 에인헤야르이다. 발할라라는 [[무간지옥]]에서 매일매일 싸우다 죽고 싸우다 죽는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라그나로크가 오면 순삭당할 운명이지만 자신들은 싸움을 실컷 하고 저녁에 술과 고기와 여자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으며 '[[오늘만 산다|오늘만 사는]]' 가치관의 사람들.
- 분류:Europa Universalis 4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Victoria II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게임 관련 정보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게임 장르 . . . . 1회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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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그랜드 테프트 오토 2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그랜드 테프트 오토: 산 안드레아스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드래곤 퀘스트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랑그릿사 . . . . 1회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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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마블 퍼즐퀘스트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보드게임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브로포스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서든어택 2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 . . 1회 일치
[[분류:관악구 출신 인물]]
- 분류:스틸오션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악마성 드라큘라 시리즈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위저드리 시리즈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이노센스 투어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커맨드 앤 컨커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페이데이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분류:핫라인 마이애미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불심자 . . . . 1회 일치
2001년,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이 일어났고, 여기에 대한 대응으로 2002년 [[문부과학성]]이 위기관리 매뉴얼을 발행했는데, 여기에서 '불심자'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쓰였다고 한다.
- 브레이니악 . . . . 1회 일치
[[슈퍼맨]] 관련 [[빌런]]이며 [[렉스 루터]] 못지 않은 악연이다. 외계에서 온 [[천재]]이며 이에 어울리게 굉장한 지식과 첨단장비를 활용.
- 블랙 클로버/102화 . . . . 1회 일치
이러고 있자니 이번엔 [[고슈 아들레이]]와 [[고든 아그리파]]가 귀가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들도 치료법을 찾아 왕립 도서관으로 향했었는데. 아스타는 이들에게도 고맙다고 인사하려 하는데.
- 블랙 클로버/114화 . . . . 1회 일치
* 로열 나이츠 선발시합 제 1회전. 전략전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놨던 [[잭스 류그너]]가 시작과 동시에 드러누웠다. 노숙자마냥 흙바닥에서도 잘만 자는 잭스. [[아스타(블랙 클로버)|아스타]]가 이럴 거면 설교는 왜 했냐고 갈군다. 잭스는 이기고 지는건 그들 관심이지 자신은 아니라 대꾸한다. 그러면서 그 특유의 신경 긁는 말투로 아스타와 [[미모사 버밀리온]]의 멘탈을 농락한다.
- 블랙 클로버/118화 . . . . 1회 일치
* 로얄 나이츠 시험엔 관심이 없었던 [[챠미 퍼밋슨]]이 방문. 후배들도 재쳐놓고 [[유노(블랙 클로버)|유노]]를 응원하러 온 것이다.
- 블랙 클로버/119화 . . . . 1회 일치
클라우스의 새로운 강철마법 "선관의 열창". 적을 분쇄하는 거대한 드릴형태의 창이었다. 상대의 마법을 분쇄하고 쾌진격하는 클라우스. 락도 그의 강함을 인정하고 "시합이 끝나면 따로 붙자"고 깐죽거렸다.
- 블랙 클로버/120화 . . . . 1회 일치
* 드디어 [[유노(블랙 클로버)|유노]]와 [[노엘 실버]]의 팀이 시합. 그런데 세 번재 멤버는 곧 죽을 것 같은 관상의 묘한 아저씨였다.
- 블랙 클로버/121화 . . . . 1회 일치
>이제 당신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 블랙 클로버/124화 . . . . 1회 일치
* [[잭스 류그너]]는 [[네르슈 버밀리온]]이 기절한 것도 상관치 않고 독설을 퍼부우며 그대로 생매장시켜 버린다.
- 블랙 클로버/128화 . . . . 1회 일치
* 바깥에서 관전하던 이들은 누구도 랜길스의 행동을 수긍하지 못했다. [[네르슈 버밀리온]]도 "보드가는 대체 어찌된 건가"며 개탄했다. [[릴 부아모르티에]는 아예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벙벙하다. 하지만 마르크스만은 짐작가는 구석이 있었다. 시합이 있기 얼마 전. 백야의 마안의 뒷공작을 감지한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마법제는 "무의식의 배신"이라는 추론을 냈다. 지금까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백야의 마안에 협력하는 "배신자"는, 사실 자신이 백야의 마안에 협조한다는 자각 자체가 없다. 하지만 마법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역시 마법이 아니겠는가 의견을 냈지만 마법제는 마법이라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헤맸다. 어쨌든 그는 로열 나이츠 시험에서 그걸 확인하려 했다. 전장에서 강한 마력을 상대로 싸우다 보면 무의식 중에 꼬리를 드러낼 거라면서. 마르크스는 마법제의 감은 잘 맞는 편이라며 "무의식의 배신자"에 대해선 납득했지만, 그런 방식으로 확인하는건 위험하지 않겠냐고 우려했다. 하지만 마법제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리고 지금와서 보니 어쩌면 랜길스가 그 무의식의 배신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블랙 클로버/56화 . . . . 1회 일치
* 그는외국 출신이라 텃세를 당했는데, 야미의 재능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관심을 보여준 것이 당시 마법기사단장이던 마법제였다. 훗날 야미가 마법기사단장이 되는 것도 마법제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블랙 클로버/61화 . . . . 1회 일치
* 키아토는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카호노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 블랙 클로버/65화 . . . . 1회 일치
* 대신관은 락 볼티어와 매그너 스윙이 혼신을 다 해 싸웠음에도 상처하나 내지 못했다며 경악한다.
- 블랙 클로버/66화 . . . . 1회 일치
* 리히트가 고슈를 알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고슈와 백야의 마안이 관련이 있을 걸로 추정되었으나 이번에 나온 적들은 고슈를 알아보지 못한다.
- 블랙 클로버/67화 . . . . 1회 일치
* 대신관이 유희마법 "몬스터 토이"로 공격하지만 역부족. 전혀 타격을 줄 수 없다.
- 블랙 클로버/68화 . . . . 1회 일치
* 베토는 그 마력을 보고 왕족이냐고 묻는데 노엘은 "그런건 지금 상관없어. 난 검은 폭우의 노엘 실버!"라고 받아친다.
- 블랙 클로버/69화 . . . . 1회 일치
*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핀랄 룰러케이트는 이번에도 지레겁을 먹고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다.
- 블랙 클로버/78화 . . . . 1회 일치
* 실프는 유노의 관심을 끄는 모든 것에 질투하는 골치 아픈 성격
- 블랙 클로버/79화 . . . . 1회 일치
* 윌리엄 = 리히트 설은 일단락되는 듯 하지만 워낙에 둘이 닮아 있어서 무슨 연관이 있긴 할 듯.
- 블랙 클로버/81화 . . . . 1회 일치
* 고슈 아들레이와 고든 아그리파는 왕립도서관에서 자료 조사 중
- 블랙 클로버/92화 . . . . 1회 일치
그녀를 관찰하던 젤은 이마의 마안에 주목한다. 그 자체가 누군가 걸어놓은 마법인데 [[백야의 마안]]이 그것으로 파나를 조종하고 있다고 간파한다.
- 블랙 클로버/96화 . . . . 1회 일치
* 라드로스의 마력탄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라져서 기를 읽어도 피할 수 없었다. 아스타는 어깨를 관통 당하고 쓰러진다. 라드로스는 최고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광분하며 다른 팔휘장 따윈 문제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왕국도 손에 넣을 수 있겠다고 환호한다.
- 블리치/676화 . . . . 1회 일치
* 눈을 잃고 궁지에 몰리지만 그 순간 우라하라는 만해 "관음개홍희 개"를 해방한다
- 블리치/686화 . . . . 1회 일치
* 토시로는 저렇게 보내는게 맞다며 "사신은 가족이나 상관을 위해 싸우는게 아니라 인간과 벗을 위해 죽는 것"이라 배웠다며
- 블리치/694화 . . . . 1회 일치
* 렌지는 둘만 있으니 하는 얘기라며, 완전히 엇갈려 버렸던 루키아와 관계를 되돌려준 것은 이치고라고 말한다.
- 블리치/698화 . . . . 1회 일치
* 이미 유하바하의 힘이 풀려나 관측 중이던 대장들을 공격하는데
- 비지란테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Illegals - . . . . 1회 일치
히어로가 직업이 된 세상에서 면허가 없으면서 자경단원 활동을 하는 넉클 더스터와 그를 따르는 하이마와리 코우이치, 프리 아이돌 팝 스텝이 주역이다. 넉클 더스터가 [[올마이트]], 하이마와리가 [[미도리야 이즈쿠]]의 포지션을 떠올리게 하는데 둘의 관계는 본편쪽 인물들이 스승과 제자인 것과 달리 히어로와 사이드킥 느낌이다.
- 사갈 . . . . 1회 일치
[[분류:관용구]]
- 사키모리 . . . . 1회 일치
고대 일본에서 관동 지방(지금의 도쿄 인근)에서 징병되고 큐슈로 파견되어 수비와 축성 등을 담당하던 군역(軍役)의 일종이다. 당시 농민들에게는 부담이 큰 일이었다.
- 사혈 . . . . 1회 일치
* 중세에서 근세기 까지는 주로 혈관에 구멍을 내는 방법으로 피를 뽑았다.
- 살바도르 달리 . . . . 1회 일치
[[바르셀로나]]에서 두 시간 떨어져 있는 피게레스에서 태어났다. 죽고 난 뒤에 피게레스에 묻혔고, 피게레스에는 달리 미술관이 있다.[http://www.dailian.co.kr/news/view/485121 참조]
- 살을 주고 뼈를 친다 . . . . 1회 일치
[[분류:관용구]]
- 샘 윗위키 . . . . 1회 일치
== 대인관계 ==
- 섀도우문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서상기 (1946년) . . . . 1회 일치
|본관 = [[달성 서씨|달성]]
- 서상돈 . . . . 1회 일치
* [[한국사 관련 정보]]
- 서수민 . . . . 1회 일치
물론 단발적으로 호응이 좋은 코너를 가지고 성공했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호응을 얻기 힘든 것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시청자들이 질리게 만들었으니 매니악한 팬들만 질리게 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다만 PD로서의 역량은 높지만 개그를 보는 눈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개그는 본디 "개그맨이 짜고 개그맨이 연기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개그를 선별하여 방송에 내보내는 개그 프로그램 감독으로서의 [[무능력한 상사|역량은 무능하다 보는게 일반적인 시선이다.]]
- 서용주 . . . . 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서정윤 . . . . 1회 일치
'''서정윤'''(徐正潤, [[1957년]] ~ 본관은 달성)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 서지석(배우)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서진 . . . . 1회 일치
[[위나라]]에서는 황족을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등, 황족 견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위나라가 황족이 약하여 정변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본 서진에서는 중앙정치에 참가하는 것을 허가하고 황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팔왕의 난]]을 부르는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 서태화 . . . . 1회 일치
* 2010년 [[OCN]] 미니시리즈 《[[야차 (드라마)|야차]]》 ... 내관 도시평 역
- 서호진 . . . . 1회 일치
[[2011년]] [[4월 16일]] 쇼트트랙 선수에서 은퇴했다.<ref name=et /> 현재는 동아종합인쇄사의 부장을 맡고 있으며 2010년부터 가업을 잇기위한 경영수업을 듣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안현수]] 선수 폭행 논란 및 금메달 양보 의혹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기에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사라질 줄 알고 침묵했다" 라며 부인했고, 관련 루머를 퍼뜨린 유포자에 대해서 경찰 수사의뢰하겠다며 강력한 조치 의사를 밝혔지만, 소식이 없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hi2014&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6761293 서호진씨 "안현수 선수 구타한 적 없다…억울하다"], 연합뉴스, 2014년 2월 18일 작성.</ref>
- 서효림 . . . . 1회 일치
| [[성균관 스캔들]]
- 석경 . . . . 1회 일치
유교는 한나라 시기에 국교화 되었다. 경전의 문장을 공식화-통일화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에서 이를 배우게 할 목적으로서 석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모방하여 불교, 도교에서 석경을 건설하게 된다.
- 선거인단 . . . . 1회 일치
선출된 선거인단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후보를 선택할 수 있으므로, 각 주의 선거에서 선출된 후보와는 별개의 인물에게 투표하는 것이 가능하다. 몇몇 주에서는 이러한 행위에 처벌 규정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관례적으로 선출된 후보를 선택하며 배신 투표는 지극히 드물다.
- 선문답 . . . . 1회 일치
* (한국어) 주어진 문제와 상관없이, 한가롭게 주고받는 불필요한 이야기.
- 성역 도시 . . . . 1회 일치
시애틀의 에드 머리 [[시장]]은, “오늘은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수용 이후 미국 이민역사상 가장 어두운 날”이라면서, 트럼프의 반헌법적 행정명령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애틀시의 가치를 지킬 것이라고 주장, 킹 카운티의 다우 콘스탄틴 수석행정관은 “킹 카운티는 어린이들과 가족들을 음지로 몰아넣지 않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을 것”, “다른 여러 지자체들과 함께 불법체류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대응장치를 구축할 것”이라고 했다.[[http://ny.koreatimes.com/article/20170126/1036862 (참조)]]
- 성재(가수)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비셔스글레어]]<br />[[인조이트립핑]]<br />언리시드앵거<br />맨카인드 디자인<br />[[GMC 레코드]]<br />IX CREW
-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 . . . . 1회 일치
== 관련 캐릭터 ==
- 세이브 노가다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센터 시험 . . . . 1회 일치
[[일본]]의 대학입시시험. 우리나라의 [[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독립행정법인 대학입시센터의 주관으로 실시한다.
- 소벌도리 . . . . 1회 일치
== 관련 항목 ==
- 손석우(작곡가)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손정혜 . . . . 1회 일치
좋고 정직한 사회를 만드는데 공헌하는 변호사 특유의 포부와 다양한 분야에 일하고 있으며, 건설 [[부동산]] 엔터테인먼트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법률신문에서 변호사를 인터뷰하는 [[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 손지창 . . . . 1회 일치
* 싱가포르 명예관광 홍보대사(1998년)
- 송상진 . . . . 1회 일치
==관련 항목==
- 송정현 . . . . 1회 일치
[[분류:197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경북 드래곤즈의 축구 선수]][[분류:대구 FC의 축구 선수]][[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아주대학교 동문]][[분류:승부조작에 관여한 스포츠인]][[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송주훈 . . . . 1회 일치
한편 성인 대표팀 경험은 없었는데, 前 감독이었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센터백]]으로 [[김기희]], [[김영권]], [[김주영(1988)|김주영]], [[장현수]] 등의 [[중국 슈퍼 리그]] 소속 선수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인지 [[J리그]]에서 뛰는 송주훈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실제로 같이 J리그에서 뛰는 센터백 [[김민혁(1992년 2월)|김민혁]]이 몇 차례 성인 대표팀에 선발되긴 했으나 실전에서 뛰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슈틸리케가 떠난 후에 새로 출범한 [[신태용호]] 체제에서 커리어 최초로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http://m.sportsseoul.com/news/read/554778?refer=facebook|#]] 이후 [[신태용]]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U-23 대표팀에서도 중용했던 송주훈이 올림픽 직전의 부상으로 안타깝게 대표팀 승선에 실패한 것에 대한 보상 겸, 성인 대표팀에서의 기량도 확인해볼 목적으로 이번 대표팀에 선발했다고 한다. [[https://www.facebook.com/KoreaFootballTeam/photos/pcb.10155941753318836/10155941751838836/?type=3&theater|#]] 그리고 10월 1일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대표팀이 대패를 당하게 되는데 첫번째 실점이 되는 수비에 기여하는둥 데뷔전임을 감안해도 아쉬운 수비 실력으로 신태용 감독 눈 밖에 나게 되고 다음번 대표팀 승선에는 실패하게 된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3화 . . . . 1회 일치
카라는 제임스를 만나러 가는데, 로이스의 여동생 루시 레인이 제임스를 만나러 왔다. 루시는 제임스에게 관계를 끝내기는 싫었다면서 저녁 식사를 제안하고 제임스는 그걸 받아들여, 카라는 상심한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6화 . . . . 1회 일치
루시는 군법무관을 사임하고 제임스와 함께 하는걸 택하고, 아버지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8화 . . . . 1회 일치
아스트라는 크립토나이트 나이프로 카라를 위협한다. 아스트라 일당은 크립토나인트 방사능 방어 장치를 만들어서 크립토나이트 나이프에도 문제가 없었다. 아스트라는 카라에게 힘을 합치라고 권유하지만 카라는 거부하고 달아난다. DEO에서 카라는 당장 아스트라와 싸우려고 하지만, 행크와 알렉스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며 카라를 말린다. 알렉스는 행크는 아버지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카라에게 말한다.
- 슈퍼히어로 팀 . . . . 1회 일치
[[슈퍼전대 시리즈]]의 [[전대]]도 슈퍼히어로 팀에 해당된다.[* 다만 스타일에 따라서는 팀보다 더 큰 기관 등이 되기도 한다.]
- 스님 미우면 가사까지 밉다 . . . . 1회 일치
스님이 미우면 그 스님이 입고 있는 가사까지 밉다는 의미로서, 뭔가를 미워하게 되면 그에 관련된 것까지 미워진다는 뜻이다.
- 스쿨 카스트 . . . . 1회 일치
'계층'이 갈라지는 기준은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지만, 흔히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주목되는 경우가 많다.
- 스타 연구소 . . . . 1회 일치
[[틴 타이탄스]]의 [[사이보그(DC 코믹스)|사이보그]] 스토리에 연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모님이 스타 연구소 직원이었고, 아들이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연구소에서 사이보그로 만든 것. 이 설정은 New 52에서도 유지되었다.
-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 . . . 1회 일치
한국에서는 [[PC방]], [[프로게이머]], [[E스포츠]] 등 많은 영향을 끼쳤다. 관련없는 장르나 매체에서도 패러디를 볼 수 있을 판.
- 스틸오션/아이템 . . . . 1회 일치
기관총 명중률 5% 증가.
- 스피커 아줌마 . . . . 1회 일치
[[선풍기 아줌마]]와는 무관하다.
- 시그니처 웨폰 . . . . 1회 일치
* [[람보 시리즈]] - [[존 람보]]의 M60 기관총
- 시노자키 아이 . . . . 1회 일치
== 가족 관계 ==
- 시드 마이어의 에이스 패트롤 . . . . 1회 일치
급증한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띄운 관측 기구를 보호하는 임무.
- 시로우토 동정 . . . . 1회 일치
성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으나, 그 대상이 어디까지나 풍속 여성 등 성매매 업계 종사자이며 일반인(素人)과는 했던 경험이 없다는 것. 즉 성경험은 있으나 연애 경험은 없는 사람을 뜻한다.
- 시마지로우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식극의 소마 . . . . 1회 일치
[[요리사]] 양성 기관인 [[토오츠키 학원]]을 배경으로 "식극"이라 불리는 요리대결을 다루고 있다.
- 식극의 소마/155화 . . . . 1회 일치
* 원래 아리스는 연구회 활동에 관심이 없어서 식극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쿠스노키의 도발에 쿠로키바 료가 넘어가 대결하게 되었다
- 식극의 소마/157화 . . . . 1회 일치
* 관객들은 센트럴의 압승을 예상한다.
- 식극의 소마/159화 . . . . 1회 일치
* 관객 사이에는 아자미 총수의 모습이 보이는데...
- 식극의 소마/160화 . . . . 1회 일치
* 아리스와 에리나는 서로 츤데레 관계다.
- 식극의 소마/166화 . . . . 1회 일치
* 그러면서 "억지로 끌고 가는 건 관두겠다"고 한다.
- 식극의 소마/167화 . . . . 1회 일치
* 아자미는 이름난 미식가와 요식업 관계자들을 초빙해서 토오츠키 학원 중등부 학생들의 실력을 과시한다.
- 식극의 소마/168화 . . . . 1회 일치
* 정작 센자에몬이나 에리나의 어머니는 아자미의 야망이나 이념에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한데,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걸까?--사위라고 하나 있는게 노답 중2병--
- 식극의 소마/171화 . . . . 1회 일치
* 또 한 가지 "방금까지 쓰고 있던 편지"(퇴학하게 된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는 당장 처분해도 상관없다는 말도 전하라 한다.
- 식극의 소마/172화 . . . . 1회 일치
* 홋카이도에 도착한 기숙사생들은 홋카이도의 자연경관과 잔뜩 쌓인 눈에 흥분한다.
- 식극의 소마/180화 . . . . 1회 일치
* 시험관들은 에리나는 일반 수험생과 같은 과목이 준비되어 있다며 우격다짐으로 끌고 간다.
- 식극의 소마/183화 . . . . 1회 일치
* 소마는 사냥꾼인 그도 토오츠키 학원을 아는 것에 놀라는데, 사냥꾼은 오히려 음식과 관련된 직종 중 토오츠키 학원을 모르는 자는 없을 거라 말한다.
- 식극의 소마/185화 . . . . 1회 일치
* 쿠가는 이들이 나키리 아자미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한다.
- 식극의 소마/192화 . . . . 1회 일치
* 방금 전 시식 상황. 린도는 뱀처럼 사악한 얼굴로 타쿠미의 요리를 시식하는데... 의외로 간단히 "맛있다"고 해준다. 이어서 타도코로의 음식도 먹더니 적당히 맛있다고 해주고 합격을 선언한다. 원래 시험 과제 자체가 "내가 맛있게 먹는 음식"이었고 대결도 딱히 요리실력을 대결하는건 아니었다. 십걸 상대로 빡쎄게 싸우고 깨져나간 다른 루트 학생들관 달리 완전 날림 시험.
- 식극의 소마/193화 . . . . 1회 일치
* 일행은 에리나를 앞세워 그같은 제안을 전달하는데 예상대로 센트럴 측에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관계로 거절 당한다.
- 식극의 소마/194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아자미는 차갑다. 이미 [[나키리 센자에몬]]에게서 총수 자리를 빼앗고 계획의 90%를 완료한 상황. 그런 거래에 응할 "메리트"가 전혀 없다. 지금 반역자들을 처리하는 것도 "뒷처리"일 뿐, 계획의 완성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자 죠이치로는 뜻밖의 미끼를 던진다.
- 식극의 소마/199화 . . . . 1회 일치
* 도지마와 죠이치로는 이러한 합의에 대해서 각각 털어놓고 있다. 죠이치로는 아들 [[유키히라 소마]]에게 상관도 없는 그들 세대의 승부를 이용하게 된 점을 사과한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 문득 소마를 쳐다보니, 코방울까지 달고 신나게 졸고 있다. 물론 아들에게 "적당히 흘려들어라"곤 했지만 너무 흘려들어 버렸다. 그래도 핵심은 전달됐다. 소마는 자기 아버지가 아자미에게 지독한 짓을 한게 원인이지 않나 우려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마는 그 점을 다행으로 여긴다.
- 식극의 소마/201화 . . . . 1회 일치
* 관객들은 두 팀의 행보를 보고 "승부고 뭐고 두 팀 모두 완성 조차 못 시킨다"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타쿠미는 그 말을 들으며 스타지엘 시절을 떠올린다. 그가 일하러 갔던 요정 "후지사메"는 전통있는 요리정이었지만 딱히 스타지엘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센자에몬이 사정해온 탓에 12대 점장 "후지이 토모나리"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허락이야 했지만 못마땅한건 마찬가지고, 이력서로 본 타쿠미의 인상도 좋지 않아서 적당히 청소나 시키다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식극의 소마/203화 . . . . 1회 일치
* 지켜보던 사람들은 의외의 결과를 보고 놀란다. [[도지마 긴]]이나 죠이치로는 말 없이 지켜본다. 어쨌든 관객들은 "신의 혀"를 가진 에리나가 상대팀을 가리키고 있으니 가장 정확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 식극의 소마/204화 . . . . 1회 일치
* 최종시험인 6차 시험이 결행되는건 한 달 뒤. 레분 섬 남단에 특설회장을 설치하고 연대식극을 거행한다. 현재 진급시험을 받고 있는 학생들도 최종적으로는 여기에서 식극을 관전하게 된다. 언뜻 평범한 것 같지만 결국 반역자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볼거리로 삼겠다는 악의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회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쪽이 십걸 자리를 전부 가져가는 심플한 결론. 그리고 대전에 참가할 인원은 딱히 규정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아자미 측에서 먼저 [[사이바 죠이치로]]의 1대50 연대식극을 예로 들며 제안한다. 정말로 쿄쿠세이측에 가세하려는 인물이 있다면 얼마든지 데려와도 좋다는 호기.
- 식극의 소마/208화 . . . . 1회 일치
그녀는 스스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라는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에 경험을 쌓고 실력을 갈고 닦는 일이 즐거웠고 그걸 과시하는 것 역시 그랬다. 이런 경향은 요리에도 이어져서 특히 "소바"에 관해서라곤 누구를 상대로라도 자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식극의 소마/215화 . . . . 1회 일치
반면 관중들과 [[카와시마 우라라]]는 대놓고 분통을 터뜨리며 [[시라츠 쥬리오]]에게 복수를 기원해본다.
- 식극의 소마/223화 . . . . 1회 일치
가장 이목을 모으는건 서열로 보나 체급으로 보나 제 2카드. 제 3카드 쪽은 아직 밑준비 중이고 양측 모두 구체적인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야마 아키라]]는 어떤 대결이든 주제를 자신의 요리에 어떻게 녹여넣느냐가 관건이라고 평한다. [[쿠로키바 료]]도 동감한다. 그게 안 된다면 적과 싸우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 신고은(가수)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가수/한국]]
- 신동미 . . . . 1회 일치
* 2015년 [[MBC]] 수목드라마 《[[맨도롱 또똣]]》 ... 미소갤러리 관장 역
- 신동주(야구)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신웅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신혜성 . . . . 1회 일치
:상해노만체육관
- 신혜진 . . . . 1회 일치
위의 [[편지]] 이후로는 전혀 소식이 없어 우려가 커지던 와중, 결국 [[2017년]] [[10월 30일]] 결국 [[WM엔터테인먼트|소속사]]와 전속[[계약]]을 해지하고 팀 활동에서 빠지게 되었다. 8명이 다 같이 컴백하길 [[기도]]해오던 찰나에 들려온 소식이라 여러모로 많은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더구나 진이는 전 [[APRIL]] 멤버인 [[전소민(KARD)|전소민]], [[이현주(배우)|이현주]]처럼 그룹 활동만 관두고 계속 연예계 활동을 이어가는 게 아니라, 아예 [[WM엔터테인먼트|소속사]]를 나왔다.][* 공교롭게도 진이의 [[탈퇴]] 이후 [[오마이걸]]이 낸 첫 [[앨범]]인 [[비밀정원]]에서 [[오마이걸]]이 [[데뷔]] 후 첫 [[음악 방송]] [[1위]]를 달성하자, 많은 [[미라클|팬들]]은 '진이도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은진|이와 같은]] [[DIA|일이]] 7개월 뒤에 [[Summer Ade|일어났다]].]
- 심령 스팟 . . . . 1회 일치
몇몇 심령 스팟은 심령 현상에 대한 소문 때문에 관광지화 되는 경우도 있다.
- 아게만 . . . . 1회 일치
1990년에 개봉한 동명의 일본 영화가 존재한다. 여주인공인 게이샤 '나요코'를 중심으로 그녀와 관계한 남성들의 출세와 몰락을 그린 내용.
- 아기발도 . . . . 1회 일치
이성계가 고려 정계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한 부분 때문에 [[조선]]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 이름이 회자되었으며, 이 때문에 고려를 멸망시킨 주역인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토벌당한 아기발도에게 투영하여 그를 동정적으로 보는 설화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문서 참고.
- 아멜리아 윌 테슬라 세일룬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아사쿠마 . . . . 1회 일치
1948년 12월 10일 창업, 1979년에 관동에 진출했다.
- 아이네이아스 . . . . 1회 일치
한편, 카르타고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인 '디도 공주'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비중있게 실려 있는데, 이는 시기상 '포에니 전쟁'이라는 크나큰 전쟁을 치른 상대인 카르타고와의 관계를 운명론적으로 해석하려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아이박 . . . . 1회 일치
[[샤잠]] 관련 빌런으로 첫등장은 Captain Marvel Adventures #8 - Forward, America! (1942 March 6)[* Atlantis Chronicles라는 정보도 있다.]
- 아케미 호무라 . . . . 1회 일치
아케미 호무라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시간 관련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버클러, [[총기]], 화기 등을 무기로 사용한다.
- 아테지 . . . . 1회 일치
[[일본어]]에서 [[한자]]의 음과 훈을 그 글자의 뜻과 관계 없이 맞춰놓은 한자 표기를 뜻한다.
- 안드로니코스 1세 . . . . 1회 일치
그는 마누엘 1세와 사촌의 관계로, 그의 아버지는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인 이사키오스이다. 그는 젊은 시절 풍운아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그는 마누엘의 조카딸인 유도키아 콤네나를 건드렸고, 마누엘의 명령으로 킬리키아를 압박할때 예루살렘 왕 보두앵 3세의 동생이자 마누엘 황제의 처제인 필리파와 또 스캔들을 내 마누엘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마누엘이 그를 소환하려하자, 그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왕인 아모리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는 사고를 치는데, 보두앵 3세의 미망인이자 그의 친척인 테오도르 콤네나와 또다시 스캔들을 터뜨린것이다. 이렇게 되자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엘의 분노를 피해 룸 술탄국으로 도망치는데, 거기서 그는 아나톨리아일대에 영지를 하사받고, 인근에 그리스인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아넘기는 짓까지 하게 된다.(...) 결국 그는 총대주교로부터 파문까지 받게 되어버린다.
- 안평대군 . . . . 1회 일치
단종실록에서 가장 많이 까이는 인물인데, 뇌물 받고 관직을 올려줬다느니, 문종의 복상 기간에 술과 고기를 먹고 잔치를 벌였다느니, 기생하고 놀아났다느니, 조강지처를 저버렸다느니 하는 온갖 추문이 써 있다.
- 안효민 . . . . 1회 일치
* [[수전전대 쿄류저|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 - 백면신관 카오스 / 라미레스 (싸이언 다이노)
- 알프레드 우든 . . . . 1회 일치
첫 언급은 의외로 이르다. 매춘부 캔디 던의 일기에서 언급되는 인물인 "외눈박이 알프레드"[* One-eyed Alfred]가 이 인물. 캔디 던은 자신과 그의 성관계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정체불명의 여성에게 팔아넘기고 있었다.
- 알프레드 페니워스 . . . . 1회 일치
웨인 가문의 집사 이전에는 배우인 적도 있으며 심지어 군의관, 용병 활동도 해본 적이 있는 인물.
- 암 . . . . 1회 일치
* 암세포는 혈관 또는 림프절을 통해 체내에 무작위적으로 퍼질 수 있다. 한 조직에 발생한 암세포가 다른 조직에 달라붙어 증식한 것을 “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암을 치료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암이 한 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곳만 수술로 잘라내면 살 수 있지만, 암이 온 몸으로 퍼졌다면 수술로는 치료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 암살교실/번외편 3화 . . . . 1회 일치
* 그때까지 코나 파고 있던 후토시는 갑자기 대부업법을 줄줄 읊어대며 사채업자를 관광태워 버린다.
- 애니 일본어 . . . . 1회 일치
대표적으로 속칭 오죠사마 캐릭터 말투라던가, 관서 사투리같은 계통이 그러하다.
- 애니멀-베지터블-미네랄맨 . . . . 1회 일치
상단의 서술대로 그 외관이 상당히 괴랄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 한번 보면 잊기 힘든 모습이다. 몸의 반은 인간이나 반은 공룡같은 모습이고, 팔다리는 한쪽은 나무인데 한쪽은 광물인 형태.
- 애니멘 . . . . 1회 일치
본명 Francois LeBlanc. 개구리 스타일이다. 스파이더맨과 관련이 있는 프로그맨과는 별개의 인물.
- 야규 신지로 요시카츠 . . . . 1회 일치
* 야규 구사부로 스미요시(柳生 久三郎 純厳) :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에게 임관하였다.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울산]]에서 전사했다.
- 야규 쥬베에 미츠요시 . . . . 1회 일치
[[에도 막부]]의 관료, 정치가, 검술가. 야규 무네토시 세키슈사이(柳生宗厳 石舟斎)의 손자이며,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의 장남. 야규 가문의 적자이다. 아명은 시치로우(七郎).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를 모셧다.
- 야설록 . . . . 1회 일치
* [[2004년]] 《태황기》<br />《낭만수라》<br />《월인몽 월인색》<br />《무림판관》<br />《역천행》<br />《무적》<br />《사대세가》<br />《아미타불》<br />《표향》 {{ISBN|978-89-91036-49-9}}
- 야차원숭이 . . . . 1회 일치
== 인물관계 ==
- 양윤재 . . . . 1회 일치
* 2003.01 ~ : 서울특별시 환경보전정책보좌관
- 양키 . . . . 1회 일치
북부 미국인을 뜻하는 양키(Yankee)와의 관계는 애매하지만, 당시 미국인=화려하다 는 이미지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 1983년 7월 21일 발매된 카몬 타츠오(嘉門達夫)의 양키 오빠의 노래(ヤンキーの兄ちゃんのうた)는 ‘나쁜 남자’를 뜻하고 있었다. 이 노래를 전후하여 전국에 양키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퍼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 어쌔신 크리드 III/아이템 . . . . 1회 일치
=== 대번포트 농지 관련 ===
- 엔자이 . . . . 1회 일치
수사기관의 편견, 피의자에게 밀실에서 [[자백]]을 강요하고, 그러한 자백을 과신하는 것이 엔자이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 엘디아 인 . . . . 1회 일치
일단 파라디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엘디아 인이다. 다만 [[미카사 아커만]]은 [[동양인]]이라고 언급된 바가 있는데, 동양인은 엘디아 인이 아니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지, 혹은 인종과는 무관하게 동양인 역시 엘디아 인으로 여겨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아커만 등이 기억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등 아닐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 여정남 . . . . 1회 일치
==관련 항목==
- 역병신 . . . . 1회 일치
일본에서는 욕설로 쓰인다. [[병신]]과 어감이 비슷하게 느껴지겠지만 무관하다.
- 역적 . . . . 1회 일치
전근대 시절에 내란이나 외환 등의 수단으로 국가나 왕실을 전복시킬 것을 기도하는 이를 칭하던 명칭. 또는 한 지역이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어 있을 때에 자신의 정통성이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릴 목적으로 역적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로 반대파를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역적으로 모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 연령=동정 . . . . 1회 일치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연령별 동정 비율은 이상과 같아서, 20대 이후로 동정을 가지는 사람은 소수파가 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이성관계를 맺지 못하는 인간'으로 여겨질 수 있어, 동정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나타나게 된다.
- 연분홍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영국 . . . . 1회 일치
== 관련 페이지 ==
- 영국 요리 . . . . 1회 일치
근대에는 또한 맛 뿐만이 아니라 건강과 영양에 대한 관심도 대두되어, 영국 요리는 건강영양식으로 개량되었다. 건강영양식을 먹은 영국 병사들은 높은 전투력을 발휘하여, 대영제국이 군사적으로 명성을 떨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영혼결혼식 . . . . 1회 일치
죽은 사람과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을 결혼시키는 의식. 과거 죽은 사람들이 미혼으로 죽을 경우 원혼이 되기 쉽다는 관념이 있어서 이를 막고 혼을 달래기 위해 벌어졌다. 주로 고인과 인연이 있던 이성(약혼자 등)이나 혹은 특정한 동일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미혼인 이성들을 임의로 짝지어서 의식을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오경훈 . . . . 1회 일치
| 본관 = [[해주 오씨|해주]]
- 오늘만 산다 . . . . 1회 일치
[[분류:관용어]] [[분류:인터넷 은어]]
- 오다 노부나가 . . . . 1회 일치
당시 기준으로 여러 방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행보를 보인 인물로, 상공업 촉진을 위해 [[관문]]을 철폐하거나 종교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등 선진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군사적으로 최강은 아니었으나 이를 전략적인 밑그림을 통해 역전시켜 다른 다이묘들을 차근히 압도해 나갔다. 한편 성정이 폭급한 부분이 있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왕]]'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으나 사적인 부분에서는 당대 기준으로 오히려 자상한 부분도 보인다.
- 오대석 . . . . 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오소영 (조각가) . . . . 1회 일치
'''오소영'''(吳素英, [[1960년]] ~ )은 [[일본]]의 [[살인 조각가]] 겸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해주 타씨|해주]](海州)이며 [[호 (이름)|아호]](雅號)는 추량(秋凉)이다.
- 오싱 . . . . 1회 일치
작중에서 오싱의 인생이 참으로 파란만장한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일꾼으로 쌀도매상에 팔려가거나, 어른이 되어 상경한 다음 미용사가 되었다가 옷장사를 하는 남편과 만나고 상업재능을 그럭저럭 잘 살게 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쑥밭이 되서 망하거나, 그 때문에 시골로 내려나 시집살이를 하는데 학대 당한 탓에 자기 아이는 사산되고 시누이가 낳은 아이의 젖을 물리게 되거나, 2차대전으로 남편과 장남을 잃고 생선 장사를 시작하여 자기 가게를 일으켜 세우지만 성장한 아이들은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면서 반발하거나 등등.
- 오영식 (1967년) . . . . 1회 일치
[[분류: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관련자]]
- 오영실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오은석 . . . . 1회 일치
'''오은석'''(吳恩錫, [[1983년]] [[4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이다. [[런던]]에서 열린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구본길]], [[김정환 (펜싱 선수)|김정환]], [[원우영]]과 함께 단체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대한민국 펜싱 역사상 처음으로 나온 단체전 금메달이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392494 '14초의 찌르기' 오은석, 金 찌른 비장의 '히든카드'], OSEN, 2012년 8월 4일.</ref> [[한국방송공사|KBS]]의 리듬체조 해설가인 [[김윤희 (체조 선수)|김윤희]]와는 부부관계이다.
- 오정근 (1929년) . . . . 1회 일치
|본관 = [[해주 오씨|해주]](海州)
- 오정태 (희극배우) . . . . 1회 일치
* 《[[가족오락관]]》
- 오정희 (소설가) . . . . 1회 일치
| 본관 =
- 오지훈 (1973년)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투투 (음악 그룹)|투투]], YAB
- 오츠보네 . . . . 1회 일치
본래 궁중이나 에도 시대의 오오쿠(일본 쇼군을 위한 후궁)등에서 츠보(局, 개인실)이 주워진 여관(女官)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오츠보네는 당시 후궁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상당히 지위 있는 계급이었다.
- 오치 . . . . 1회 일치
[[일본]]의 인터넷 속어. 뭔가를 흥미롭게 관찰한다는 의미.
- 오하라이 . . . . 1회 일치
의식을 할 때는 대개 신관이 [[고헤이]](御幣)를 흔들면서 축문을 외운다.
- 오현근 . . . . 1회 일치
퓨처스리그에서 29서울 91타석 동안 타율 0.418에 9도루 17타점을 기록하였다. 때마침 부진했던 외야수 [[조홍석]]이 시즌 중 현역으로 입대하자, 정식 선수로 전환됨과 동시에 1군으로 등록되었다. 등번호도 조홍석의 번호를 갖고 왔다.<ref>롯데는 [[백민기]], [[임종혁]], 조홍석을 2015 시즌 중 현역으로 입대시켰다. 롯데 구단에서 선수들의 병역관리 취지로 시즌 중 입대를 희망하는 선수들을 모집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들은 모두 외야수인데, 롯데에 외야 자원들이 어느 정도 모였다고 판단하여 2차 드래프트를 앞두고 미필자인 이들을 군에 보내서 유망주들의 유출을 차단했다.</ref>
- 와일드 독 . . . . 1회 일치
본명 Jack Wheeler. 과격한 자경단원. [[기관단총]] 등 총으로 무장했다.
- 와일드캣 . . . . 1회 일치
드라마 [[스몰빌]]의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관련 에피소드에서도 짧게 등장. 이후 드라마 [[애로우]]에도 등장하는데 거의 카메오 수준인 [[스몰빌(드라마)|스몰빌]]과 달리 확실하게 등장한다. 다만 코스튬은 코믹스와 차이가 많다. 큐트한 고양이 가면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가리는 일반적인 검은 마스크를 쓰게 됐다. 주인공 올리버가 '애로우'로 활동하기 전부터 도시의 빈민가에서 활약하며 악당과 싸우던 가면의 영웅이었으나, 애로우가 등장하기 전에 은퇴한 몸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사이드킥'이었던 자가 악당이 되면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는 줄거리로 등장한다.
- 완벽한 공산주의 . . . . 1회 일치
* 인류 사회가 지닌 생산력이 그렇게 발달하는 시기가 오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문제이다. 과학기술이나, 생산력의 발전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딧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21세기 초의 [[기술적 특이점]]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왝더독 . . . . 1회 일치
대통령 선거 2주 전, 재선에 도전하던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반딧불 소녀단"의 단원 중 하나를 [[성희롱]]했다는 소문이 터진다. 이에 대통령은 정치 문제 해결사 콘래드 브린을 시켜 이 스캔들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 욕창 . . . . 1회 일치
노인은 피부가 얇아지고, 지방과 근육이 줄어들며, 혈관은 찢어지기 쉬워져서 욕창이 생기기 쉽다. 또 상처의 치료 속도가 느린 것도 욕창이 발생하기 쉬운 원인이 된다.
- 우건도 . . . . 1회 일치
3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게시글에 ‘2005년 6월 우 후보가 총무과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라고 했으나 실제 총무과장 근무기간은 2005년 7월 25일부터 그 해 9월 4일까지였다"며 “폭로 글은 악의적으로 날조된 허위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게시자가 성추행을 당한 날 모 식당에서 마셨다는 주류도 판매한 적이 없다고 주류 납품 업체가 확인해줬다”고 부연 설명했다. 현재 우 예비후보 관련 미투 폭로 글은 작성자에 의해 민주당 도당 홈페이지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283022|*]]
- 우동균 . . . . 1회 일치
[[2008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삼성]]의 1차 지명을 받아 [[대구상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했다. 신인시절 당시 2군 감독이었던 [[장효조]]의 총애를 받아 팬들로 부터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2202&yy=2008 아버지 꿈 이룬 우동균] - 매일신문</ref>
- 우물가 회의 . . . . 1회 일치
비슷한 시기에 관청이나 회사에서는 의사결정 방식으로 회의가 정착되기 시작하여, 남자들이 여자들의 수다를 회의에 빗대어 조롱하는 말로서 우물가 회의라는 말이 나타났다.
- 운명의 붉은 실 . . . . 1회 일치
흰색 - 남녀를 넘어 깨끗한 관계 사이에 맺어지는 것.
- 운전기사 . . . . 1회 일치
이 때문에 높으신 분들 역시 운전기사와의 관계를 생각보다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고. 반대로 그 높으신 분의 성격이 상당히 이상하거나 안 좋으면 운전기사 역시 고달프다.
- 울산광역시 . . . . 1회 일치
울산 남구 장생포에 위치한 장생포 고래박물관
- 울산광역시/인물 . . . . 1회 일치
* [[권재관]] - 남구(울산)
- 웃음 주머니 . . . . 1회 일치
관련 상품으로 화내는 소리가 나오는 '분노 주머니', 우는 소리가 나오는 '울음 주머니' 등이 있다.
- 워터보딩 . . . . 1회 일치
Waterboarding. [[물고문]]의 일종. 헝걷이나 비닐로 얼굴을 덮고 짧은 시간 동안 물을 졸졸 부어주는 고문이다. [[관타나모]] 수감자들에게 [[CIA]]가 행한 대표적인 고문으로 알려져있다.
- 원더우먼 . . . . 1회 일치
관련 캐릭터로는 아마존의 여왕이자 어머니인 히폴리타, 사이드킥인 원더걸이 있다. 주된 빌런은 치타.
- 원피스/823화 . . . . 1회 일치
* 난데없는 혁명군 본부 괴멸 소식. 특히 혁명군 서열 2위 사보의 동생 스테리가 등장해서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
- 원피스/826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그는 "빈스모크 욘디"(윈치 그린). 본인은 "상디와 관계성은 비밀"이라고 말하지만 누가 봐도 동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원피스/831화 . . . . 1회 일치
* 상디도 가짜로 보이는데 복제된 루피와 관련이 있을듯?
- 원피스/836화 . . . . 1회 일치
* 나미는 원래 목적과 상관없이 싸울 필요 없다며 적당히 도망치자고 하는데
- 원피스/842화 . . . . 1회 일치
제프의 발언 덕에 원피스 세계관에도 공룡이 있었다는게 확정됐다. 원래 드레이크가 동물계 고대종으로 변신했기 때문에 "원피스에도 공룡이 있다"는 설이 있었는데 이걸로 확정됐다.
- 원피스/849화 . . . . 1회 일치
식탁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귀족 악어는 아웅성치는 소리를 듣지만 둔해 빠져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몬스터 모드로 변한 쵸파는 귀족 악어를 붙잡아서 우왕좌왕하는 조무라기들 위로 매쳐버린다. 유일하게 디젤만 무사히 도망치지만, 자기 발이 빠르다고 자부한 것관 달리 캐럿에게 너무나 쉽게 따라잡힌다. 결국 디젤까지 간단하게 정리. 섬 전체와 연결된 미러월드가 쵸파 일행에게 함락된다. 쵸파는 이 미러월드를 이용해 흩어진 동료들을 찾자고 한다.
- 원피스/850화 . . . . 1회 일치
* [[상디]]는 자신의 방에서 [[샬롯 푸딩]]을 위한 요리를 마친다. 평소 습관대로 너무 많이 만들어 버렸는데, 푸딩의 식사량을 생각해서 덜어내려다 "내가 다 못 먹겠으니 상디씨가 먹어줘 아앙"같은 패턴을 망상하며 역시 전부 가져가기로 한다.
- 원피스/852화 . . . . 1회 일치
* 레이쥬는 자신의 고향이자 가문이자 가족들을 그렇게 한 마디로 평가했다. 다행히 빅맘이 원하는건 제르마의 "과학력". 상디가 도망친대도 구태여 이스트 블루의 발라티에까지 관심을 가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인질취급했던 제르마의 인간들은 죽어 마땅하다. 단순한 "살인자 집단"이니까. 상디는 다른 가족들에겐 일말의 정도 없지만, 어째서 레이쥬까지 죽음을 자청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 원피스/854화 . . . . 1회 일치
이들의 피가 뿌려지고 나서부터가 "진정한 축제". 그녀가 그토록 케이크에 공을 들인 것도 이 순간에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지휘관을 잃은 제르마가 통채로 자신 손에 들어올 것을 기대하며 흥겨워한다.
- 원피스/855화 . . . . 1회 일치
빅맘 [[샬롯 링링]]의 처소 "여왕의 방". 빅맘은 브룩을 소중한 인형처럼 품에 끼고 잠들어 있다. 게다가 브룩 자신도 꿀잠 중. 주위엔 "프로메테우스", "제우스", "나폴레옹"이 함께 자고 있다. 브룩을 구하려던 일행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당황한다.
- 원피스/857화 . . . . 1회 일치
* 벳지는 웨스트블루 출신으로 그곳을 주름잡는 5개의 마피아 중 하나. 지위나 영역에 관심없이 잔인한 고문과 조직 내부의 패권다툼을 즐기는 성격.
- 원피스/859화 . . . . 1회 일치
벳지가 빅맘 산하로 들어간 것은 약 1년 전이다. 그때부터 면밀히 관찰했지만 빅맘은 도무지 상처를 입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부수고 포탄에 맞고 배를 가라앉혀도 그녀의 육체는 흠집하나 생기지 않았다. 벳지는 새삼 강철의 풍선이란 별명이 참 적합하다고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그런 빅맘도 딱 한 번은 상처를 입었다. 그것이 바로 "마더 카르멜"의 사진 사건이다.
- 원피스/862화 . . . . 1회 일치
* 푸딩의 행동은 형제들 사이에도 동요를 일으킨다. 빅맘은 푸딩을 이용하기는 글렀다고 판단, 주례에게 신호를 준다. 주례는 조용히 자신이 준비한 총으로 푸딩을 돌보는데 여념이 없는 상디를 겨눈다. 하지만 카타쿠리는 그가 주례의 총을 피하는걸 본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상디를 저격하지만 이것도 맞추지 못한다. 조준은 정확했지만 상디가 견문색 패기로 감지하고 피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빗나간 총알은 주례의 미간을 정확히 관통, 주례가 뒤로 넘어지면서 그의 총은 허공에 발사된다.
- 원피스/864화 . . . . 1회 일치
[[나미(원피스)|나미]], [[캐럿(원피스)|캐럿]], [[쵸파]]는 아직도 케이크 안에 숨어서 바깥 동향을 살피는 중. 역시 약속했던 3초가 훌쩍 지나 불안해한다. 브룩은 난전통에 목이 잘려서 머리가 루피 근처로 굴러온다. 하지만 이것도 연기. 애초에 브룩은 목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몸이다.
- 원피스/868화 . . . . 1회 일치
이제 그녀의 꿈은 카르멜의 꿈도, 당초 그녀가 가졌던 꿈과도 상관없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는 삶"에 대한 집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없어진, 어떤 의미에선 영원히 하나가 된 카르멜과 그녀의 친구들을 꼭 다시 찾고 자신만큼 크게 만들어서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밥을 먹겠다고 다짐했다. 사황에 오른 지금까지도.
- 원피스/869화 . . . . 1회 일치
* 카타쿠리가 젤리빈즈를 난사한다. 기관총 세례를 받은 것처럼 쓰러지는 벳지의 부하들. [[샬롯 스무디]]는 뒤처져 있던 [[나미(원피스)|나미]]를 붙든다. [[캐럿(원피스)|캐럿]]과 [[쵸파]]가 나미에게 눈을 돌린 사이 [[샬롯 다이후쿠]]가 마신으로 캐럿을, [[샬롯 오븐]]이 쵸파를 잡는다. 루피가 그걸 인지했을 땐 이미 너무 먼 거리였다.
- 원피스/881화 . . . . 1회 일치
* 물론 써니호는 무사했다. 거울을 깨뜨린건 나미. 브룩과 쵸파는 그러면 루피가 돌아올 길도 끊기지 않냐고 하지만 나미는 "카타쿠리에게 집중하고 싶다"던 루피의 말을 상기하며 "선장명령"이라며 배 안의 모든 거울을 깨뜨리게 한다. 써니호로 이어지는 모든 거울이 하나둘 깨지자 미러월드의 빅맘 해적단이 술렁인다. 브륄레는 역시 살아있는게 아닌가 의심하지만 다른 부하들은 "수압 때문에 깨지고 있다"며 낙관한다. 그때 루피의 거울 조각으로 나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 원피스/885화 . . . . 1회 일치
* 써니호는 토트랜드 해상에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바다 위는 특별한 이상도 위협도 없지만 [[나미(원피스)|나미]]와 [[징베]]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결국 관건은 [[상디]] 일행이 만드는 케이크. 그게 없으면 모든게 허사다. 그 우려대로 빅맘해적단의 선단이 총출동해 다시금 추격을 시작했다. 밀집모자 일당과 파이어탱크 해적단, 태양해적단이 그 목표다.
- 원한해결사무소/3화 . . . . 1회 일치
마츠지리 신지는 개발부의 여직원 우메모토 사유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애인으로 삼으려고 하여 개인적으로 전화번호까지 전해주고 있었다. 도청으로 정보를 획득한 원한해결사는, 사장이 거주하는 맨션 바깥에서 전화박사를 뜯어 사장 방의 회선을 훔쳐내 우메모토 사유리에게 집요하게 남자 신음소리를 흉내내어 장난전화를 건다.
- 원한해결사무소/5화 . . . . 1회 일치
토사쿠라는 젊었을 때 여자들에게 돈을 뜯기고 차인 경험이 있어, 남자를 제물로 매춘을 하는 놈들은 누구든 재판을 해야 한다는 삐뚤어진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토사쿠라는 갑자기 경찰에게 가택수색을 받는데, 집에서는 속옷이 가득 든 상자가 발견되어 속옷도둑으로 체포되고 만다. 하루 뒤 토사쿠라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지만, 곧바로 매스컴의 집중공격을 받게 된다. 그의 과거나 원조 OL 버스터즈에서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했던 것이 모두 폭로당한다.
- 원한해결사무소/6화 . . . . 1회 일치
의뢰인은 신혼 새댁 여성 마츠자와. 의뢰 대상은 맨션 관리조합의 '부이사'라는 아줌마. 결혼과 동시에 맨션을 사서 살기 시작한 마츠자와는 지어진지 6년이 된 맨션을, 리폼을 끝내고 2,200만엔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옆집 아줌마는 6년 전에 새로 지은 맨션을 6천만에 구입했기 때문에, 40이 되서 겨우 가지게 된 '내 집'을 땅값 하락 때문에 젊은 것들이 쉽게 삿다고 분노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주택융자를 메꿀 수 있었다.]
- 월드 인 컨플릭트/전술지원 . . . . 1회 일치
공격기가 날아와 일자로 30mm 기관포와 로켓을 난사한다. 전차와 차량을 잡는데 권장된다. TA 중 싸고 빠르고 강한 편이기에 자주 쓰게된다.
- 위키규정 . . . . 1회 일치
* 국내 정치, 종교, 사회 문제 관련 항목 작성을 금지합니다.
- 위키백과 . . . . 1회 일치
[[분류:위키 관련 정보]]
- 위키서치 . . . . 1회 일치
[[분류:위키 관련 정보]]
- 유곽 . . . . 1회 일치
전근대시기에 있었던 매춘업소의 형태. 유곽의 곽(郭)은 성곽이라는 의미로서, 그 말에서 보여주듯이 외부와는 벽이나 도랑으로 차단하여 자유로운 출입을 막고, ㅊ출입구를 한 곳으로 하여 철저하게 관리되는 형태로 만들어진 매춘업소이다.
- 유기농 . . . . 1회 일치
현재 한국에서 유기농 제품은 (1) 3년 이상(다년생작물, 그외 작물은 2년) 화학비료/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논/밭에서 재배되어야 함 (2) 농수산식품부에서 인정한 인증기관에서 인증을 받아야 함 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http://hyunsoolim.com/eco-friendly/holes-of-organic-food/ 참조]
- 유니콘남 . . . . 1회 일치
이 스레드는 레스수 253개 로 끊긴데다가, 대부분 별 내용도 없는 처녀드립 수준의 기입이고, 정작 방송 내용과 관련된 기입은 전혀 없다. 이 스레드 만으로는 유니콘 계 남자가 처녀만 허용하는 처녀 광신자를 뜻한다는 증명을 하기 어렵다.
- 유미(가수) . . . . 1회 일치
2012년 12월 10일 녹화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엄정화]] 편[* 무대의 방영은 2013년 1월 12일.] 2부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녀의 사연이 알려졌고[* 당시 함께 출연한 [[손호영]]은 방송에서 "실력이 좋은데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배반의 장미'를 강렬한 사운드로 편곡해 폭발적인 가창력과 무대를 그리워하는 애틋함으로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첫 출전으로 우승은 못 했지만 그녀를 향한 관심은 방송이 끝나도 식을 줄 몰랐고, 데뷔 이래 가장 많은 기사들이 쏟아졌으며 하루종일 주요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고 불후의 명곡 시청자 게시판이 폭주할 정도로 그녀의 재출연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리고 2월 16일 방영된 불후의 명곡 [[김민종]] 편에서 다시 그녀의 모습이 전파를 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가수 활동 영역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불후의 명곡 [[임재범]] 편, [[들국화(밴드)|들국화]] 편, [[설운도]] 편, [[장미화]]&임희숙 편, [[최진희]] 편에 출연하였고, 그 이후에도 종종 출연 중이다. 또한 '눈물나는 얘기(나인 OST)', 'Last One([[주군의 태양]] OST)' 그리고 2013년 10월에는 디지털 싱글 '싸구려 반지'를 발표하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 유승민(배우) . . . . 1회 일치
[[HD TV 문학관]] 2005 ~ 2009
- 유언/만화 . . . . 1회 일치
|| [[로어셰크]] || 후우우. 물론, 바이트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보호해야겠지. 그 토대에 시체가 하나쯤 늘어도 별 상관없을 거야. 왜? 뭘 주저하고 있는 거지? 해. 어서 하라구! ||
- 유열 (가수) . . . . 1회 일치
직접 제작한 어린이 뮤지컬 《브레멘 음악대》는 현재까지 70만명 관객돌파 흥행뮤지컬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2009년에는 [[독일]] [[브레멘]]주정부 초청공연,2011년 8월[[중국 상해]] [[국제 아동극 페스티벌]]에 개막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 유지연(탤런트) . . . . 1회 일치
* [[1996년]] [[KBS1]] TV문학관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다]]》 - 백화점 직원 역
- 윤인조 . . . . 1회 일치
* [[2019년]] [[KBS2]] 수목드라마 《[[닥터 프리즈너]]》 - 여자 교도관 역
- 윤진이 . . . . 1회 일치
[[1990년]] [[서울특별시|서울직할시]] (現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어릴 때 현대무용을 하였던 경력이 있다. 중학교 3년 간 미국 얼바인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고,<ref name="midopa2"> 유아정 기자[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newsid=20120816091204527 윤진이 “美 유학 3년, 정말 외로운 시간이었다”]일간스포츠 2012.8.16 작성 </ref> 귀국 후를 졸업하고 영화예술학과 진학하였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KBS 1TV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였다.<ref name="midopa1">김보라 기자[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newsid=20120717114513244 윤진이 초등학교 시절, 모태 미모 입증 '귀요미']TV리포트 2012.7.17. 작성</ref> 2011년, 학교로 오디션을 보러온 소속사 관계자에게 캐스팅되었다.<ref name="midopa2"> 유아정 기자[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newsid=20120816091204527 윤진이 “美 유학 3년, 정말 외로운 시간이었다”]일간스포츠 2012.8.16 작성 </ref> 2012년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의 임메아리 역으로 데뷔했다. 2018년 하반기에 방송된 KBS 2TV 주말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데뷔 이래 최대의 악역을 맡았다.
- 은행강도 . . . . 1회 일치
비슷하게 금융 관계를 취급하기도 하는 [[우체국]]이 표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는 무인이라 훔치기 좋아보이는(?) [[ATM]]을 노리는 경우도 많다.
- 은혼/574화 . . . . 1회 일치
"그날 누구라고 할 거 없이 만든 무수한 무덤은 선생님이나 동료들 뿐만이 아닌 우리들의 무덤이기도 했다. 요시다 쇼요와 함께 그 제자들은 죽었다. 그 길이 더이상 교차하게 될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각자의 길을 걷더라도 선생님의 가르침만은 벗어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망설이며 굽어진 길을 가자고, 어떤 때는 실수로 꺾어진 길을 가자고. 각자의 무사도를 찾아 방황하고 번민하며 걷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길은 다시 한 번 교차하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들의 길을 다시 한 번 이곳에 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선생님이다. 그것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 한 순간의 해후일지도 모른다. 내일이 되면 우리들은 다시 검을 맞대며 서로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 없겠지. 긴토키, 다카스기. 설령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다시 한 번 요시다 쇼요의 제자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친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 은혼/578화 . . . . 1회 일치
* 우미보즈는 "너 같은 녀석도 그런 하찮은 말을 하냐"며 "그깟 일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개구리면 된다. 내 우물 안만 지킬 수 있으면 그만이다"고 대꾸한다
- 은혼/580화 . . . . 1회 일치
* 용맥에서 태어난 돌연변이라는 점 때문에 [[우츠로]]와의 관계도 조명되고 있다. 용맥에서 태어난 존재인 코우카가 죽었다면 우츠로 또한 불사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 은혼/581화 . . . . 1회 일치
* 아부토는 "악당이 될 소양이 있다"며 비꼬는데 카무이는 "강하진다면 악당이든 뭐든 상관없다"고 대꾸한다
- 은혼/583화 . . . . 1회 일치
* 달려오던 아부토가 경고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우미보즈의 등뒤에서 관통한 칼날을 쥐고 있다.
- 은혼/587화 . . . . 1회 일치
* 아부토는 가구라 집안 문제엔 관심이 없다면서도 "(가족을 죽일 거라면)네가 직접 하라고 단장"이라며 카무이를 힐난한다.
- 은혼/589화 . . . . 1회 일치
* 제목의 "남매"도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됨을 의미하는 것.
- 은혼/591화 . . . . 1회 일치
* 쓰러져 있던 다카스기는 몸을 일으킨다. 오보로의 칼이 그의 얼굴을 가로로 관통해 있다.
- 은혼/606화 . . . . 1회 일치
* 마츠다이라와 곤도는 이 나라를 부수는 것도 지키는 것도 자기들 소관이라 일갈하며 혁명군과 교전을 시작한다.
- 은혼/609화 . . . . 1회 일치
네오암스트롱사이클론제트암스트롱포가 에도성을 때려부순건 눈축제 에피소드에서 나왔던 내용인데 지나가는 드립이 아니라 정말로 은혼 세계관의 정사. 그래서 그런지 적들도 겐가이포가 나타나자 네오암스트롱사이클론제트암스트롱포라고 생각해서 긴장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리고 긴토키는 실제로 완성도 높게 눈조각을 만들었던게 증명됐다.--완성도 높은데 어이!--
- 은혼/614화 . . . . 1회 일치
실제 역사에서도 가츠라 고타로의 모델 가츠라 고고로는 외교관으로 활약한 부분이 있어 이런 동맹 성립에 기여한 점은 현실고증이다. 그런데... 이건 엘리자베스의 활약이 아닐지?
- 은혼/615화 . . . . 1회 일치
* 양단 작전의 성공으로 해방군의 지상군이 허리가 잘린다. [[진선조]]의 [[곤도 이사오]], [[히지카타 토시로]], [[오키타 소고]]가 일제히 부대를 이끌고 돌진, 해방군의 후방을 공격한다. 해방군 내에선 후방으로 돌아가 원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지휘관 [[오우가이]]는 일언지하에 각하한다. 기책 정도로 뒤집을 전력차가 아니며 그대로 냅둬도 후방 부대가 그정도는 알아서 할 거란 논리.
- 은혼/623화 . . . . 1회 일치
* 타츠고로는 오토세가 일하는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던 놈들을 정리하던 참이다. 녀석들은 지로쵸의 이름을 팔던 조무라기들인데, 그래서 지로쵸의 부하인줄 알고 마침 나타난 지로쵸에게 "부하관리 똑바로 해라."고 경고한다. 오토세가 쓰러진 놈들은 멋대로 그의 이름을 팔 뿐, 실제로는 부하도 뭣도 아닌 건달들이라 해명한다.
- 은혼/626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그 사내는 오우가이의 말조차 관심두지 않는다. 그는 짓밟힌 꽃을 들여다보며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손을 들어 달라고 말한다.
- 은혼/633화 . . . . 1회 일치
* 다츠마는 그들이 우주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환영한다. 적어도 그만은 신스케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가츠라는 겁먹고 우주 구석탱이에서 떨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한테 베이고 싶어서 돌아왔냐고 험악한 말을 한다. 신스케가 돌격을 멈추지 않으며 "해방군 말고 네놈들이랑 먼저 한 판 해도 상관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어차피 온 우주와 거하게 한 판 해야 할 참이니까. 가츠라는 그 뒤를 따르며 나라를 뺏은 다음엔 우주를 뺏을 심산이냐며 그놈의 허풍은 우주에 나와서도 못 고쳤다고 비꼰다. 다츠마가 따라와 "이참에 그 허풍을 현실로 만들어 보자"고 끼어든다. 해방군한테 몰살 당하는 것 보단 낫지 않은가?
- 은혼/635화 . . . . 1회 일치
* [[히라가 겐가이]]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야토족 용병 부대 사이로 뛰어들었던 [[가구라]].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위기에 처하고 위험한 순간 [[카무이(은혼)|카무이]]가 나타난다. 용병부대의 지휘관 "노사"는 가구라가 지구인을 위해 헌신하는 걸 보고 "바보"라 비하하자 카무이는 적들을 날려보내고 "바보는 혼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 은혼/642화 . . . . 1회 일치
니조가 기억하는 귀병대는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반사이의 안부인삿말에는 관심도 없이 떨어진 그의 샤미센을 주웠다. 그것을 건네며, 자신이 나타난 용건을 밝혔다.
- 은혼/646화 . . . . 1회 일치
* 엔쇼는 다츠마의 사격에 굴하지 않고 라이트 세이버의 찔러들었다. 그 끝이 다츠마의 복부에 박히는 순간, 엔쇼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다츠마의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의 눈은 흔들림없이 표적을 노려보고 있었고 방아쇠를 당기는 손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격발. 총알이 엔쇼의 오른팔 상완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엔쇼가 라이트 세이버를 놓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은혼/647화 . . . . 1회 일치
* 해방군 최후의 격전. [[사카모토 다츠마]]와 [[가츠라 고타로]]를 상대로 분전했던 [[엔쇼]] 황자도 여기까지다. 치열한 접전 끝에 왼팔을 잃은 엔쇼 앞에 [[다카스기 신스케]]가 우뚝 선다. 엔쇼의 비통한 호령과는 상관없이 신스케의 칼이 곧게 올라간다. 이제 해방군도 전쟁도 앞으로 한 칼이다.
- 은혼/654화 . . . . 1회 일치
우츠로가 양이 사천왕도 방치하고 있는 마당에 친히 처치하러 나와서 주역급 주목도를 받았다. 열심히 뛰어댕긴 덕에 에도를 날려먹을 것 같았던 용맥의 폭주는 진정. 하지만 본류에 해당하는 용혈 그 자체의 폭주는 아직도 남아 있다. 아네는 한때 사다하루를 버리고 일족의 사명도 팽개쳤던 관계로 죄책감이 심한 것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사다하루를 반드시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필 그때 사다하루와 코마코가 검력을 너무 소진해 쪼그라든걸 발견했고 덮친격으로 우츠로의 시생인 부대까지 습격하면서 치명사을 입는다. 일단 모네가 데리고 열심히 도망쳤는데, 결국 용혈은 손 쓸 수 없는 상태로 돌입하고 앞으로 코마코와 사다하루가 계속 검력을 쓰면 아예 존재가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에 처한다.
- 의식 높은 계 . . . . 1회 일치
취업 활동 관련 이벤트에서 '의식이 높은 학생이 모이는 이벤트'라는 표어에 마구 참가하여, 취업보다 오히려 취업활동이 목적이 되버린 듯한, 착각이 많은 취업활동 학생을 가리켜서 "의식 높은 학생ㅋㅋㅋ"이라고 불렀던 것을 시작으로 여겨진다.
- 의천도룡기(영화) . . . . 1회 일치
또 익히고 있는 무공이 소림사 무공이 아니라 [[구양신공]]이 되었다.(본래 화공두타는 구양신공과는 특별히 관련이 없다.)
- 이규환 (영화감독)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나 어릴 때 [[경성부]]로 이주하여 자랐다. [[우미관]]을 드나들며 [[찰리 채플린]]의 작품을 보며 성장하였다. [[1919년]]에 대구 [[계성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중학교에 재학 중, [[3·1 운동]]으로 인해 [[밀양시|밀양군]]의 시골 마을에서 2년 동안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이규환의 영화 작품에 드러나는 향토적 화면에 영향을 미쳤다.
- 이득윤 . . . . 1회 일치
'''이득윤'''(李得胤, [[1553년]] ~ [[1630년]])은 [[조선]] 중기(선조-광해군)의 정치가·학자·음악 이론가이다.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다.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년) 진사가 된 뒤, 참봉, 형조좌랑, 괴산(槐山)군수를 지냈다.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역학 (철학)|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620년]](광해군 12년)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엮어서 세상에 내놓아 [[거문고]]의 법도(法道)를 바로 전하게 하였다.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여러 금보 및 그 저자와 [[거문고]] 대가에 대하여 다룬 것을 보면, 그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상당히 박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서로 〈서계집(西溪集)〉이 남아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 인경산(引頸山) 아래에 있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군|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 이명규(국회의원)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종교]]는 [[불교]]이다. 본관은 [[성주 이씨|성주]]이다.
- 이미연 (배우) . . . . 1회 일치
||산사춘||기업PR||국민관광||기업PR
- 이민호(1969)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이방원 . . . . 1회 일치
고려 시절에 과거에도 급제한 등 문재(文材)도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훗날 백전노장이던 부친의 군대를 친정하여 제압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도 있던 나름 먼치킨으로, 정치적으로 노회한 운영을 보여준다. 원경왕후 민씨의 일족이나 세종의 왕후인 소헌왕후 심씨의 일족을 멸족시키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진력하였으나, 숙청 대상을 확실하게 선을 그어 지나친 옥사는 자제하였으며 또한 사관이나 대간의 역할을 긍정하여 균형추를 맞추는 부분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개국 초부터 피바람 불었던 조선 왕조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 이별대행업체 . . . . 1회 일치
일반적인 경우, 이별공작은 탐정사 측의 공작원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에게 접근하여 '유사연애'를 반복하여 마음을 빼앗은 다음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 이병규 (1983년) . . . . 1회 일치
왼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병역이 면제되었으며,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2011년]]에는 재활군에 머무르다가 후반기에 복귀하여 33경기에 출전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95995 LG는 왜 최희섭에 관심이 없을까?] - OSEN</ref>
- 이병욱(스트리머) . . . . 1회 일치
게다가 비슷한 사건을 벌인 김윤태는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반면에 이병욱은 법정 출두 관련 이야기 조차도 없다. --푸워와 다시 친해져서 그런건가...--
- 이상화(1980)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이석훈 . . . . 1회 일치
2014년 10월 21일 전역했다. 이석훈 측 관계자는 “남자라면 당연한 의무인 군생활인데 연예인이란 이유로 전역하는 날 특별히 축하 받는 걸 이석훈이 원치 않는다”며 “여느 병사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전역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에 따로 전역행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344937|링크]]
- 이센고린 . . . . 1회 일치
당시 [[일본군]]이 징집 통지서를 보낼 때 가격이 2센 5린이었기 때문에 붙은 속어다. [[태평양 전쟁]] 관련 서적들[* 제임스 브래들리의 "플라이보이스", "아버지의 깃발", 이에나가 사부로의 "Pacific War, 1931-1945" 등등]에서는 이 금액에 "1페니 보다 적다,"라는 프레스기로 찍어낸 듯한 설명을 붙여준다.
- 이승경 (1290년) . . . . 1회 일치
== 관련 항목 ==
- 이안 (시인) . . . . 1회 일치
1999년 『실천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우주적 비관주의자의 몽상」 외 4편의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2014년 평론집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를 내면서 시와 동시, 평론을 함께 쓰고 있다.
- 이애란(가수) . . . . 1회 일치
그 이후로도 굴곡이 심했다. 특히 '[[못 간다고 전해라]]'로 유명해진 <[[백세인생]]>은 원래 1995년 경주 엑스포에서 부른 곡으로, 원래의 이름은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말하리>이다. 그러나 그 후로 10년간 제대로 된 가수 활동을 못 하였고, 2006년에야 가수로서 첫 음반인 <천년의 사랑>--[[박완규|이 분이랑 상관없다.]]--을 취입하였으나 실패를 맛보았다.[[http://news.joins.com/article/19122364|#]] 트로트계에서 쌓은 인맥덕에 시장 등 불러주는 곳에서 노래하며 버텼다고 한다.
- 이원재(축구선수) . . . . 1회 일치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축구 해외파 선수들)]
- 이자연(가수) . . . . 1회 일치
* 관련 항목: [[가수/한국]], [[불교/인물]]
- 이재룡(1964)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배우]]. [[1963년]]생 배우 [[이재용(배우)|이재용]]과 이름이 유사하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다.[* 게다가 [[본관]], [[한자]], [[항렬]]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 깔끔한 외모로 젊어서는 하이틴 스타로 인기가 많았고, [[결혼]] 이후에는 안정적인 연기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에 출연중이다. 부인은 탤런트 [[유호정]]. 결혼 전인 [[1993년]], [[김수현(작가)|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산다는 것은'''에 같이 출연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불멸의 이순신]], [[제왕의 딸 수백향]] 등의 사극에 출연하며 호평을 받았다.
- 이정무 . . . . 1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DJP연합]]에 따른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연정|공동정부]]의 몫으로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이정훈(배우) . . . . 1회 일치
* [[2016년]] [[MBC]] 드라마 《[[워킹 맘 육아 대디]]》 ... 인사관리팀 차장 권정훈 역
- 이종혁 (배우) . . . . 1회 일치
* [[2008년]] [[KBS2]] 미니시리즈 《[[강적들]]》 - 유관필 역
- 이주현(배우) . . . . 1회 일치
* 본관 전주 이씨
- 이차강간 . . . . 1회 일치
성범죄의 피해자가 사건에 관련된 진행에 따라서 정신적으로 더욱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을 뜻한다.
- 이토 시로 . . . . 1회 일치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위한 모임에 참가하거나 [[야스쿠니 신사]]에 매년 참배하는 등. 우익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 이현 (1983년)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8eight]], [[옴므 (음악 그룹)|옴므]]
- 이효정(남배우)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인종개량 . . . . 1회 일치
[[후쿠자와 유키치]]와 모리 아리노리는 인터넷에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인과 서양인과의 잡혼을 통한 인종개량을 주장한 적이 없다. 영문과 일어 어느쪽에서도 관련 근거를 찾을수 없다. 아마 타카하시 요시오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란 점과 모리 아리노리가 극단적인 영어 공용어화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에 루머가 퍼진듯하다. 단, 건강한 일본인끼리의 결혼이나 의식주의 개량을 통한 것은 주장했을 수도 있다.
- 일곱개의 대죄/171화 . . . . 1회 일치
* 십계의 안드로메다 관광타임.
- 일곱개의 대죄/175화 . . . . 1회 일치
* 에스타롯사는 초반에 멜리오다스 수배서에 나온 얼굴과 동일인물. 멜리오다스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일곱개의 대죄/177화 . . . . 1회 일치
* 에스타롯사는 눈물을 흘리며 멜리오다스의 마지막 심장을 관통한다.
- 일곱개의 대죄/179화 . . . . 1회 일치
* 호크에 이어 두 번째로 말하는 축생이고 고양이라는 점 때문에 "장화신은 고양이"와 연관이 있는 캐릭터라는 설도 있다.
- 일곱개의 대죄/186화 . . . . 1회 일치
* 관망하던 몬스피드. 인간 중에도 괴물이 있었다고 평한다.
- 일곱개의 대죄/187화 . . . . 1회 일치
* 분명 십계는 "영원한 어둠의 관"에 봉인되었는데 누가 봉인을 풀었냐고 경악해한다.
- 일곱개의 대죄/188화 . . . . 1회 일치
* 데리엘과 몬스피드는 분명 특별한 관계로 보이는데, 머리를 다듬어 주면서 나눈 대화로 보면 뭔가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것 같다.
- 일곱개의 대죄/190화 . . . . 1회 일치
* 리오네스 왕국에서 관측될 정도로 거대하게 강화된 회신룡.
- 일곱개의 대죄/198화 . . . . 1회 일치
할리퀸이 날개가 없는 것에 대한 떡밥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번 에피소드로 날개가 없는 이유&할리퀸 각성으로 이어질 듯. 디안느는 아직도 춤이 서툴다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할지 관건.
- 일곱개의 대죄/199화 . . . . 1회 일치
둘이 정말로 십계를 배신한게 맞다면 현재 남은 십계는 리타이어가 확인되지 않은 몬스피드, 데리엘, 에스타롯사, 젤드리스 4인이다. 문제는 죄다 심각하게 관광탄 상태라 제대로 전투가 가능한 상태일지 미지수. 이렇게 되면 십계 중 유효한 전력이 한 명도 남지 않는 웃기는 상황이 된다.
- 일곱개의 대죄/206화 . . . . 1회 일치
* 그때 갈란의 몸을 빛줄기가 관통한다. 갈란이 저항하기도 전에 빛줄기는 두 번 세 번 공격을 거듭해 갈란을 쓰러뜨린다. 마침내 사대천사 최강자 뤼드셀이 전장에 도착. 어느새 [[프라우드린]]을 쓰러뜨린 상태다. 그는 갈란을 비웃듯 만남 인사와 작별인사를 동시에 한다.
- 일곱개의 대죄/207화 . . . . 1회 일치
* 뤼드셀은 물론이고 재생을 마치고 상황을 관망하던 [[사리엘]]과 [[타르미엘]]까지 모두 경악한다. 뤼드셀은 정말로 다급해졌는지 호통을 쳐서 사리엘과 타르미엘을 부른다. 자신을 도우라고 하는데, 두 천사는 머뭇거리면서도 그 명을 거역하지 못한다.
- 일곱개의 대죄/215화 . . . . 1회 일치
* 젤드리스는 곧 다시 돌아와 디안느와 대치한다. 디안드는 거인왕 [[드롤]]로서 "전투의 춤"을 펼치며 젤드리스와 싸울 자세를 보인다. 드롤의 춤에 따라 대지가 요동치고 흘러가며 장관을 이룬다. 젤드리스는 잠시 그 춤을 감상하며 감탄한다. 엄청난 마력이 대지를 따라 드롤에게 모여들고 있다. 마신족 사이에서도 드롤의 강함과 명성은 유명한 모양인지 "이게 그 유명한 드롤의 춤인가?"라고 중얼거린다.
- 일곱개의 대죄/217화 . . . . 1회 일치
하지만 멜리오다스는 그의 사과를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데다, 할리퀸의 날개에 더 관심을 뺏겼다. 반과 같이 다가와서 그의 날개를 보고 "이제 너도 어른이 됐구나"라는 둥 애송이 취급을 해대는데다 반도 "작다. 어린애 사이즈"라고 추임새를 넣는다. 결국 분개하는 할리퀸. 하지만 디안느가 "두 사람도 나름대로 기뻐하는 것이니 화내지 말라"고 타이르자 고분고분해진다. 멜리오다스와 반이 그걸 지켜보다 "좀 달라진 것 같다"고 말하는데, 할리퀸은 "연인 같아졌다"고 지례짐작해서 으스대지만 곧 "너 말고 디안느가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무안해진다. 디안느는 그게 맞다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려준다.
- 일곱개의 대죄/220화 . . . . 1회 일치
* 다시 술잔이 한 바퀴 돈다. 디안느는 문득 성전시대에서 풀지 못했던 의문을 고서에게 물었다. 대체 진짜 고서는 어떻게 성전을 종결지었냐는 것. 할리퀸도 자기도 궁금했다고 말을 보탠다. 하지만 고서는 난처한 기색이다. 그리고 성전시대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다른 인워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어지간히 지식이 있는 멀린이나 당시 참전했던 멜리오다스 조차 고서가 직접 성전을 끝냈다는 말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다. 일단 에스카노르가 "여신족이 자신들의 몸을 희생해 마신족을 봉인해서 끝났다"는 전승을 읊는다. 멜리오다스는 "어둠의 관"을 혹시 고서가 만든게 아닌가 추측해 보지만 멀린이 그것만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건 거인 명공 "다프즈"란 인물이 만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 일곱개의 대죄/222화 . . . . 1회 일치
* [[에스카노르]]와 [[핸드릭슨(일곱 개의 대죄)|핸드릭슨]]의 놀라운 시선을 받으며 엘리자베스의 정화의식이 끝난다. 그녀가 젤드리스와 접촉한 일이 이것과 관련이 있을까? 저주에서 풀려난 멀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건강해진 모습에 에스카노르가 감격. 그때 멜리오다스 일행도 들어온다. 깨어난 멀린은 자신은 젤드리스의 마력에 사로잡혀 잠드는 저주에 걸렸었다고 말한다. 이런 추태를 보인 것에 사과하고 저주를 풀어준 엘리자베스에게 감사한다. 멜리오다스는 그녀가 젤드리스의 마력을 풀어냈다는 말을 듣고 놀란다. 멀린은 간호해준 에스카노르에게도 감사를 전하는데, 그는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못 됐다며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사실 그는 멀린이 [[아서 팬드래곤(일곱 개의 대죄)|아서 팬드래곤]]을 "그는 내 희망 자체"라고 했던 일을 마음에 걸려하고 있다.
- 일곱개의 대죄/223화 . . . . 1회 일치
* [[킹(일곱 개의 대죄)|할리퀸]]은 일행과 떨어져 친구 [[헬브람]]과 떠들고 있다. 돼지의 모자정 옆구리의 손잡이 조형 부분이었다. 작전 회의 도중에 헬브람이 없었던 걸로 그때 어디에 있었냐고 묻는데, 그의 친구는 묘하게 말을 돌려버린다. "먼저 축하할게 있다"는 핑계로. 그는 드디어 할리퀸이 디안느와 애인관계가 된 걸 반쯤은 축하하고 반쯤은 놀린다. 그리고 날개에 대해서도 일단 축하하나 "빈말로도 멋지다고 할 수 없는 날개"라고 덧붙여서 속을 긁어놓는다. 할리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역정을 내자 헬브람이 답했다.
- 일곱개의 대죄/224화 . . . . 1회 일치
그저 많이 닮은 타인이 아니었다. 멜리오다스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다시 태어난 엘리자베스라는 걸 알았다. 어찌된 일인지 인간의 모습이었고 멜리오다스를 알아보지도 못했지만 상관 없었다. 그는 무수히 걷어차이고 거부 당하기를 반복하며 그녀의 곁을 따랐다. 결국 그의 열성에 엘리자베스가 항복했다. 여전히 그를 기억하진 못했지만, 둘은 친구가 되었다.
- 일곱개의 대죄/226화 . . . . 1회 일치
* 전투를 대죄 전체와 멜리오다스의 싸움으로 뒤바꾼 메라스큐라의 계략. 카멜롯 탈환의 전초전에 불과했던 작전이 생각지도 못한 난관으로 드러났다.
- 일곱개의 대죄/228화 . . . . 1회 일치
화살은 디안느를 관통하면서 그 안에 깃든 온갖 부정한 것들을 끄집어 냈다. 화살이 산산히 부서지면서 디안느의 눈이 본래의 맑은 빛을 띄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디안느. 그녀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 잠깐 못 봤을 뿐인데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일곱개의 대죄/고서 외편 . . . . 1회 일치
* 나자가 눈을 떴을 땐 그녀의 방이었다. 동생 바트라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트라는 그녀가 비밀 입구 근처에 쓰러져 있는걸 시녀가 발견했다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그 소년"과 관련해 무서운 일이라도 겪었냐고 묻는다. 나자는 "그렇다"고 말하며 그는 멜도르도 마법사도, 인간 조차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 일념발기 . . . . 1회 일치
* [[발기]]가 들어있어 엄해보이는 단어지만 그 [[발기]]와는 다소 무관할 듯 하다.
- 일본 니카타현 이토이가와시 대화재 . . . . 1회 일치
이날은 강풍이 불어서 화재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순간풍속은 최대 24.2미터로 관측됐다.
- 일본어 단어를 찾아보기 좋은 사이트 . . . . 1회 일치
아사히 신문, 코단샤, 소학관에서 운영하는 사전 사이트. 유용성과 신뢰성이 높다.
- 임신균 . . . . 1회 일치
과거에는 시골에서 [[돌하르방]]이나 각종 문화재(…)를 갈아서 --문화재 파괴-- 그 가루를 자식 혹은 아들을 낳는 약이라고 쓰거나, 자식을 낳는 여러가지 비법이 쓰였다는 점에서 볼 때, 한 때 [[가족계획]]이라는 저출산을 긍정적으로 보는 문화로 위축되었던 이 같은 임신과 관련된 속설과 미신이 [[저출산 고령화]]로 임신과 출산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압력이 강해지면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임윤선(법조인)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법조인/목록]]
- 임혁주 . . . . 1회 일치
*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 《[[한명회 (드라마)|한명회]]》 - [[구치관]] 역
- 자본통제 . . . . 1회 일치
* "개인적인 견해로는 지금처럼 모순적인 상황에서는 자본통제가 환율을 관리하는데 유용할 수 있다" -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세계경제포럼 연례회의에서
- 자타라 . . . . 1회 일치
자타나와 재커리 자타라 외의 관련 인물로 Luigi Zatara가 있다. 자타라의 할아버지이자 자타나의 증조부.
- 잠버릇 . . . . 1회 일치
* 주기성 리듬 장애 : 잠든 시간에 무관하게 똑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 장계현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 장남석 . . . . 1회 일치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구 FC의 축구 선수]][[분류:상주 상무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승부조작에 관여한 스포츠인]]
- 장다경 (영화배우) . . . . 1회 일치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영화)|눈에는 눈 이에는 이]]》 (2008년) - 관광객들 역
- 장문규 . . . . 1회 일치
*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2019년, MBC)
- 장범준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슈퍼스타K 3]]
- 장성집 . . . . 1회 일치
포도대장은 그를 상급 [[재판소]]로 이송했다. 장성집은 관청의 아치들이 왜 자신을 아무런 [[심문]]이나 [[고문]]도 없이 내버려 두는지 알려달라고 외쳤다. 이미 그는 정신병자로 오해받고 있었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포장은 끊임없이 배교하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는 포장의 충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곤봉으로 수차례 맞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결국 그는 [[1839년]] [[5월 26일]], 54세의 나이로 [[한양]]에 있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 장소팔 . . . . 1회 일치
* 옥관문화훈장(사후 추서)
- 장수원 . . . . 1회 일치
2016년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2"에서 [[젝스키스]]가 재결합하였다. 이후 [[YG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을 체결하여 《[[2016 Re-ALBUM|Re-Album]]》, 《The 20th Anniversary》 등을 발매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제이워크]]로의 활동은 당분간 휴식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젝스키스]]가 해체하고 재결합하기 이전까지, 일반인이 된 [[고지용]]을 포함하여 모든 멤버들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며 멤버들간의 우정을 유지하는 데에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 장용석 . . . . 1회 일치
'''장용석'''은 1993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최우등<ref>[http://web.yonsei.ac.kr/yongsukjang/Vita.htm ''Vita''], 연세대 행정학과 장용석 교수 홈페이지, 2008년 8월 </ref> 으로 졸업한 뒤, 2001년 [[스탠포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를 받았다. 지도교수였던 [[신제도주의]] 이론의 대가 [[존 W. 마이어]](John W. Meyer)와 사회연결망 연구의 권위자인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의 영향 아래, [[거시조직]] 및 [[국가비교]] 연구 등에 주로 관여하였으며, 최근에는 [[사회적 책임]] 및 [[투명성]] 등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대표 연구로는 The Worldwide Founding of Ministries of Science and Technology, 1950-1990 (2000)와 Sources of Rationalized Governance: Cross-National Longitudinal Analyses, 1985-2002 (2006)이 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유타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조교수]]를 역임하였고,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조교수 및 부교수로 재직하였다.
- 장우람 (가수)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 장우혁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H.O.T.]] , [[jtL]]
- 장원준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챙겼으며, 이는 좌완 투수 최초의 기록이다. 팀 내에서 그와 [[더스틴 니퍼트]], [[마이클 보우덴]], [[유희관]] 등 4명의 선발 투수가 70승을 합작했고 일명 '판타스틱 4'로 불렸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8.1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적 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뒀고 역대 최고의 모범 FA로 꼽혔다. 시즌 후 3번째로 [[최동원]]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 장유환 . . . . 1회 일치
** 〈관심 좀 갖자!〉
- 장윤희 (미스코리아)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장은아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장혁주 . . . . 1회 일치
일본 문단에서 활동하던 장혁주는 [[1933년]] 장편 《무지개》로 한국 문단에도 선을 보였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지개》도 초기의 사실주의적 작풍이 살아 있는 작품이나, 이후 남녀간의 복잡하게 얽힌 애정 관계가 묘사된 《삼곡선(三曲線)》(1934~1935) 등 점차 통속적인 경향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무렵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 재호 (배우) . . . . 1회 일치
|진관
- 저스디스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래핏 (Rapit) <br /> 커먼콜드 (Common Cold) <br /> 도플갱음 (DOPPELGANGEM)
- 전경협 . . . . 1회 일치
전경협의 친오빠는 이교도였으며, [[조정 (정치)|조정]]의 고위 관리였다. 그는 [[왕|임금]]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배교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의 간청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는 독이 든 계란 과자를 [[감옥]]에 있는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수상스럽게 생각한 전경협은 과자를 비녀로 찔러 보았는데, 그 비녀의 색쌀이 금새 변했으므로 그 과자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오빠는 형리장을 매수하여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도록 시켰다. 하지만 형리장은 여러 차례 그녀를 때리되 죽이지는 않았다. 전경협의 조카 즉 오빠의 딸이 그녀의 상처가 하루만에 다 낫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전경협은 그녀의 오빠가 그녀가 감옥에 영원히 갖혀 있도록 요청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참수]]되기를 [[기도]]했고, 마침내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 전국 BASARA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전덕기 . . . . 1회 일치
[[상동감리교회]]의 전도사와 목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정선 전씨|정선]](旌善)이다. [[신민회]]와 [[상동청년회]]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전성인 . . . . 1회 일치
2012년 [[안철수]] 후보의 대선캠프에 합류하여 안후보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일을 맡기도 했으나<ref>{{뉴스 인용 |제목= 장하성·전성인·이봉의 3인방 앞세워 安, 재벌개혁 선명성 놓고 文과 신경전 |url=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1015031206108&type=& |출판사=조선일보 |날짜= 2012-10-15 |확인날짜=2013-02-10}} </ref> 향후 진로에 관한 이견 차이로 그만두었다.<ref>{{뉴스 인용 |제목=전성인 교수도 "안철수 정책 자문 그만하겠다" |url=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3112103960&d=2013112103960 |출판사=조선일보 |날짜= 2013-11-21 |확인날짜=2018-01-17}} </ref>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인 [[김상조]]의 공정거래위원장 청문회 과정에서 김상조를 “우리보다도 더 깨끗한 사람”이라며 공개적으로 옹호한 바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상조의 도덕적이고 청렴한 삶을 증언합니다” |url=http://m.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97666.html?_fr=gg |출판사=한겨레 |날짜= 2017-06-06 |확인날짜=2018-01-17}} </ref>
- 전재국 . . . . 1회 일치
|본관 = [[완산 전씨|완산(完山)]]
- 전재용 . . . . 1회 일치
|본관 = [[완산 전씨|완산(完山)]]
- 전정희 (배우) . . . . 1회 일치
*2007~2013 서울 강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 전지수 . . . . 1회 일치
| 사진 설명 = <프리뷰> 18/19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 일정과 내맘대로 관전포인트
- 전혜진(1970) . . . . 1회 일치
|| 1992년 || KBS || [[가족오락관]] ||<|7> 진행 ||
- 전희숙 . . . . 1회 일치
[[2009년]] FIE 펜싱 세계 선수권 대회 여자 플뢰레 개인 부문에서 결승에 진출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러시아]]의 [[아이다 샤나예바]]에게 패하며 은메달을 획득하였다.<ref name="코리아타임즈2009" /> [[2014년 아시안 게임|2014 인천 아시안 게임]] [[2014년 아시안 게임 펜싱|여자 플뢰레]] 개인전 준결승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남현희]]를 이긴 뒤 결승에서 중국의 리후이린마저 15-6으로 꺾으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단체에서도 금메달을 따 2관왕에 올랐다.<ref name="한겨레2014" /><ref name="연합뉴스2014" />
- 절대가련 칠드런/432화 . . . . 1회 일치
* 고로 길리엄을 도발할 수 있는 사념파를 보내는 걸로 반응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 절대가련 칠드런/433화 . . . . 1회 일치
* 그래서 관련자 전원을 아무리 조사해도 결국 단서는 없을 거라고 추측한다
- 절대가련 칠드런/436화 . . . . 1회 일치
* 후지코의 환영은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모두 행복했을 것"이라며 자신의 관자노리를 쏘는데...
- 절대가련 칠드런/438화 . . . . 1회 일치
* 애초에 판도라와 바벨은 적대관계고 임시적으로 휴전하고 있을 뿐인데, 적의 수장이 위기에 처했다면 자신들에게 나쁠게 없는 상황이라고 비웃는다.
- 절대가련 칠드런/443화 . . . . 1회 일치
* 블랙팬텀의 자객은 마츠카제를 견습지휘관이라고 부르면서 전만큼 얼빵하진 않다고 하는데, 이걸로 보아 이전부터 칠드런 팀을 감시하고 있던 걸로 보인다.
- 절대가련 칠드런/448화 . . . . 1회 일치
* 마기는 이전에 나왔던 4컷 만화에서 능력 특성상 샤프심 같은걸 비축해두는 습관이 있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연필을 챙겨서 다니고 있다.
- 절대가련 칠드런/451화 . . . . 1회 일치
* 사실 이들은 "어떤 기관"에 매수된 첩자들이었다.
- 절대가련 칠드런/452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그 뒤에는 모르겠다며 자기는 살고 싶은대로 살고 죽고 싶은대로 죽을 테니 그런 자신과 관계하면 너희에게 좋을게 없다고 말한다.
- 절대가련 칠드런/455화 . . . . 1회 일치
* 후지코는 그 방법 외엔 없고 녀석만 잡을 수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극단적인 말을 한다.
- 절대가련 칠드런/456화 . . . . 1회 일치
* 마기의 작전은 이렇다. 장소를 도심지로 옮긴 이상 아무리 츠보미 후지코라도 과격한 조치는 할 수 없을 것이고 적당히 싸우다 안전하게 잡혀주면 되는 것. 그리고 바벨의 전 병력이 이곳에 집중된 동안 나머지 판도라 일행은 박물관 등 돈 될만한 물건이 있을 곳을 털어서 앞으로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한다. 일단 효부가 잡혀간 동안은 판도라에 대한 감시도 소홀해질 테니 이후 판도라의 활동은 아주 여유로워 지게 되는 것.
- 절대가련 칠드런/457화 . . . . 1회 일치
* 마기는 효부를 공격한다. 효부가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막겠다고 한 말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이라고 절하하며 자신은 효부를 죽이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그를 죽일 수 있다며 살의를 드러낸다. 카노 모미지가 효부를 휘감은 탄소섬유를 끊어버리며 말리자 이번엔 모미지를 공격, 손에 관통상을 입힌다. 후지우라 요우는 모미지의 부상에 충격을 받는다.
- 절대가련 칠드런/467화 . . . . 1회 일치
* 마기는 분명 그의 심장이 관통된 걸 확인하고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효부는 자신의 의도대로 되자 짖궂은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분명 치명상을 입고 있고, 효부의 치명상에 마기의 세뇌가 흔들린다.
- 절대가련 칠드런/471화 . . . . 1회 일치
이렇게 되자 미오는 츤츤거리며 고맙다고 하려고 하지만 애초에 미오의 성격을 잘 아는 동료들이라 그런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카가리가 곧바로 해킹 장비로 형무소 내의 감시 시스템을 15분 정도 무력화시킨다. ECM은 손댈 수 없었지만 이걸로 미나모토와 [[사카키 슈지]]가 감금된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절대가련 칠드런/472화 . . . . 1회 일치
둘은 칠드런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들이 칠드런에게 구해지는 일이 빈번하다. 이것이 둘의 강박관념을 자극해서 "칠드런을 지켜야 한다", "반대로 지켜지는건 싫다", "모두를 지킬 힘을 얻기 위해선 블랙 팬텀에 의탁하는게 최고다"라는 비약적인 사고로 돌아간다. 평소 바보로 일가견 있는 미오가 보기에도 앞뒤가 엉망진창인 전개. [[모모타로(절대가련 칠드런)|모모타로]] 블랙 팬텀이 그들의 "마음의 틈"에 세뇌를 집어넣은 거라고 본다. 미오는 떨어져 버린 카즈라 일행도 염려하는데 모모타로는 텔레파시로 그들도 교전 중임을 알린다.
- 절대가련 칠드런/474화 . . . . 1회 일치
* 팀은 그렇다쳐도 칠드런 일행이 부스트를 쓰는걸 허용할 수 없고 갓로봇의 원수도 갚아야 한다며 바렛에게 마무리를 맡긴다. 아키라가 ECM이 켜진 상황에서도 가능하겠냐고 묻는데 바렛의 저격은 초능력과 무관한 재능. 바렛은 저격총으로 카오루를 겨누며 맡겨만 달라고 말한다.
- 정겨운 . . . . 1회 일치
* [[2009년]] 캘리포니아 관광홍보대사
- 정경호(1972) . . . . 1회 일치
* [[2006년]] [[각설탕(영화)|각설탕]] ... 보안관 역
- 정력 . . . . 1회 일치
[[건담 시리즈]]의 세계관에서는 최종적으로 턴A 건담에 의해 지구권의 문명과 역사는 [[흑역사]]속에 묻혀버리게 된다. 그로 인해 잊혀진 시절은 뒤로하고 새로운 기년법을 만들게 된 것이 이 정력이다.
- 정몽근 . . . . 1회 일치
|본관 = [[하동 정씨|하동]]
- 정무식(정치인) . . . . 1회 일치
1924년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근무하며 [[육군정보학교]] [[교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중앙정보부]]에서 대구[[대공분실]]장, 제3국장, 정보부장 특별보좌역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정미남 . . . . 1회 일치
* 2007년 《[[펀치 레이디]]》 ... 관장 1 역
- 정봉수(역사) . . . . 1회 일치
군대를 전역한 후 1987년 코오롱 마라톤 팀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선수들에게 소식(小食)과 풍부한 단백질 식단을 집중 공급하는 방안을 도입하고 과학적인 선수 관리로 1990년과 1992년에 김완기가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1992년 황영조가 2시간 10분벽을 넘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봉주 선수와 김이용, 권은주를 발굴해 세계적인 마라토너로 키우면서 한국 마라톤을 육성, 발전시켜 세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 정상희(정치인) . . . . 1회 일치
정상희의 차남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이 삼성그룹 초대회장 [[이병철]]의 4녀 [[이명희(기업인)|이명희]]와 결혼 했다. 이병철과 사돈관계이며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시아버지 그리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백화점 부문 총괄사장의 할아버지다.
- 정성룡(야구선수)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정수아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정욱(1973) . . . . 1회 일치
* 2015년 《[[화정 (드라마)|화정]]》 (MBC) - 대전내관 역
- 정인선(탤런트) . . . . 1회 일치
|| [[KBS2]] || [[맨몸의 소방관]] || 한진아 || 4부작 ||
- 정정아 . . . . 1회 일치
* 2000년 <검찰관> - 1인 다역
- 정종 . . . . 1회 일치
※ 그런데 사실 왕위 계승은 서자라도 상관없다. 왕실은 사가와는 달리 정실 소생과 측실 소생 사이의 적서 차별이 없기 때문. 애초에 다수의 후궁을 두는 이유는 혈통 단절을 막기 위해 '왕위 계승이 가능한' 많은 자손을 얻기 위해서이다. 계승 서열 자체는 적자>서자이므로, 적자가 따로 있는데 서자가 계승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적자>서자이기 때문에 '적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바로 다음 순위인 서자가 계승하는데는 어떤 문제도 없다.
- 정종철 . . . . 1회 일치
2009년 10월 11일에 방송된 [[MBC]]의 새 개그 프로그램인 [[하땅사]]에 출연하였다. 《나 이런 사람이야》코너에서 '물을 아끼자'라는 주제로 정종철이 [[이순신#이순신과 관련된 것|이순신 동상]] 앞 분수대에서 머리를 감는 모습을 미리 촬영한 동영상이 방송되었다. 이에 시청자들은 "모두가 사용하는 공공장소에서 이러는 건 방송 횡포다" ,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라"라며 시청 후 불쾌함을 호소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하땅사' 개그맨은 웃고, 시청자는 뿔났다?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1/2009101100645.html |출판사 = 조선일보 |저자 = 박현민 기자 |날짜 = 2009-10-11 |확인날짜 = 2009-10-12}}</ref>
- 정진호(1956) . . . . 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제303전투비행중대 . . . . 1회 일치
[[https://www.rafmuseum.org.uk/research/online-exhibitions/the-polish-air-force-in-world-war-2/303-squadron.aspx|영국공국박물관의 303비행중대 페이지(영문)]]
- 제령 . . . . 1회 일치
* 전문가(?)에게 의뢰한다. 일본에서는 주로 신토의 신관이나, 불교의 승려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 조길형(1962)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출신 [[정치인]]으로, 현 [[충청북도]] 충주[[시장(공무원)|시장]]([[자유한국당]])이다. 본관은 [[함안 조씨|함안]].
- 조소혜 . . . . 1회 일치
* [[TV문학관]] - 〈타인의 목소리〉 (1985년, KBS1) 외 다수
- 존 루터 존스 . . . . 1회 일치
1900년 4월 30일 오전 3시, 존스는 [[미시시피]] 본에서 열차 충돌로 사망한다. 그는 열차가 충돌하기 전까지 경적을 울리며 제동기를 작동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로인해 기관차의 속도가 최대한 감속되었고, 이 사고의 사망자는 존 루터 존스 한 명 뿐이었다.
- 존 헨리 . . . . 1회 일치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존 헨리이즘(John Henryism)이라는 연구가 있다. 이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 중년 이후에 그 간 무리한 탓에 건강이 손상되어 고통을 받는 현상을 뜻하는 말로서, 80년대, 셔먼 제임스라는 청년 연구가가 소작농 출신 존 헨리 마틴이라는 사람의 사례를 기초로 하여 “존 헨리 척도”를 제안했다. 이는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한다”, “인생은 내가 노력하기 나름이다” 는 등의 문항에 얼마나 동의하느냐 하는 것으로 측정된다.([[http://newspeppermint.com/2017/01/31/john-henryism/ 참조]]) 특히 미국에서는 사회 구조적으로 차별을 받는 흑인 남성에게 많이 나타나던 현상인데, 기계와 싸우다가 죽음을 맞은 이야기 속의 존 헨리처럼 존 헨리이즘은 현실과 싸우다가 스스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 존오그로츠 . . . . 1회 일치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작은 해안 마을. 주 산업은 [[농업]]과 [[관광업]]이다.
- 주토피아 . . . . 1회 일치
주인공은 총격전을 벌이고 이를 대중들에게 알리지만, 대중들은 무관심하게 반응하는 결말이다.
- 지도 . . . . 1회 일치
* 평생 한 번 밟아볼까 말까한 땅을, 지도에 자기 동네랑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만족감을 가지게 하며, 딱히 본인의 인생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지도에 같은 색을 칠하려는 목적 하나로 전쟁을 벌여서라도 빼앗거나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만든 사악한 발명품이다.
- 진격의 거인/81화 . . . . 1회 일치
* 그런데 아르민은 초대형거인을 관찰하더니 "얇아지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다.
- 진격의 거인/85화 . . . . 1회 일치
* 베르톨트는 벽 안 인류를 "악마의 자식들"이라 불렀고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짐승거인 또한 차이는 없는 듯. 따라서 바깥 인류와 벽 안 인류는 적대관계로 추정할 수 있다.
- 진격의 거인/89화 . . . . 1회 일치
* 아무튼 억울해진 엘런이 대체 뭐하러 왔냐고 소리치자 리바이는 감옥 문을 열어준다. 사실 그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리바이와 한지가 [[다리스 작클레]]와 협상해서 "갑옷 거인과 초대형 거인을 쓰러뜨린 영웅들을 처벌하는건 말도 안 된다"는 명분으로 이런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거역한 지휘관은 결과적으론 갑옷과 짐승거인을 놓친 실책을 범한 점도 고려되었다.
- 진도희(1971) . . . . 1회 일치
* 1999년 옥문관
- 진선유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난 진선유는 경북사대 부속초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빙상장에 갔다가 스케이트에 빠졌다. 주니어 대회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선수였지만, [[2004년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며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경북여자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광문고등학교 (서울)|광문고등학교]]에 전학한 진선유는 [[2005년]] [[11월 13일]] 2005-06 [[쇼트트랙]] 월드컵 1차 대회([[이탈리아]] [[보르미오]])에서 1:30.037로 들어오며 한 달 전 중국의 [[왕멍 (쇼트트랙 선수)|왕멍]]이 세운 기록을 0.134초 앞당기며 세계 신기록을 세웠었다. 2006년 겨울, [[2006년 동계 올림픽|토리노 동계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 최초로 올림픽 단일 대회에서 쇼트트랙 3관왕을 차지했다.(1500m,1000m,3000m 계주)<ref>{{뉴스 인용
- 집단연구 . . . . 1회 일치
[[분류:위키 관련 정보]]
- 차성훈 . . . . 1회 일치
* 《[[강력반 (2011년 드라마)|강력반]]》 (2011년, KBS2) - 검시관 역
- 차수연 . . . . 1회 일치
||<#D7D8CA> '''{{{#584A41 가족}}}''' ||<(> [[추가 바람]][* 2012년 [[iHQ|싸이더스 HQ]] 소속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前 판타지오 대표인 나병준과 결혼했으나, 2016년에 이혼했다. 부모님 관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남동생이 한명 있다고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665|밝혔다.]]] ||
- 차오루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피에스타 (음악 그룹)|피에스타]]
- 차재욱 . . . . 1회 일치
* [[2002년]] 청소년 사이버 게임대전 우승 (문화부장관상)
- 참군인 . . . . 1회 일치
* --참교육과는 상관없다.--
- 창작:6피트 계획 . . . . 1회 일치
6ft Plan. 장난삼아 만든 판타지(?) 이세계물 세계관. 삘이 오면 소설로 써볼수도 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 창작:마스터즈 . . . . 1회 일치
||세계관||SF||
- 창작:요괴위키 . . . . 1회 일치
* 사물이나 용어를 일종의 '요괴'로 보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 창작:좀비탈출 . . . . 1회 일치
* 작중에 등장하는 좀비의 특성에 관해선 [[창작:좀비탈출/기록]]에 기재할 것.
- 창작:좀비탈출/0 . . . . 1회 일치
나는 올해 대학에 입학한 남성이다. 수수하지만 이럭저럭 흠은 없는 외향에 체형도 그리 둔하진 않다. 전문적인 운동을 해본 적은 없지만 체력관리 차원에서 가벼운 조깅 정도는 꾸준히 했다. 게임, 영화나 만화를 잡식으로 좋아했고 어딜 가나 있을 법한 남자 대학생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Tv는 잘 안 보지만 걸그룹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내가 마지막까지 Tv로 보고 있던게 [[트와이스]]와 [[AOA]]였다.
- 창작:좀비탈출/0-1 . . . . 1회 일치
분명 거기는 수도관이 지나는 길목이다. 놈들이 물에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면… 이건 마실 수 없다.
- 창작:좀비탈출/1 . . . . 1회 일치
나는 탈출을 결심하고 배낭을 짊어진 다음, 조용히 현관을 나섯다.
- 창작:좀비탈출/2 . . . . 1회 일치
* [[창작:좀비탈출/2-1|현관으로]]
- 창작:좀비탈출/3-2 . . . . 1회 일치
그럼에도 학교로 자전거를 움직인 것은 그저 익숙한 길이기 때문일까, 매일 같은 일과를 반복하다가 생겨난 빌어먹을 습관 때문일까.
- 창작:좀비탈출/4-1-2 . . . . 1회 일치
현관을 두드려 대던 녀석은 어느 덧 사라져 있었다. 정오의 햇볕은 따가워서 뼛속까지 파고들 것만 같다.
- 창작:좀비탈출/4-1-2-2 . . . . 1회 일치
관자놀이가 빨라진 맥박 때문에 욱신거린다. 팔에 너무 힘을 줬는지 쥐가 날 것만 같다. 입안이 빳빳하게 말라서 혀가 말려넘어갈 것 같다.
- 창작:좀비탈출/5-1-1-1-1-1 . . . . 1회 일치
나는 잠시 동안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 부질없는 퍼즐 맞추기를 계속한 결과, 한때나마 원래는 인간이었고 이웃이었고, 내가 말을 주고 받던 대상이었음이 떠오르고 말았다. 한 명은 내가 마무리를 지어줬는데 어떤 면으론 장례식을 치뤄준 셈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내는 지금 냉동실에서 썩은 고기가 되어 있는걸 발굴해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썩어빠진 인간관계'''가 돼버렸네
- 창작:좀비탈출/요새편 . . . . 1회 일치
바깥 상황은 내 예상보다 훨씬 낙관적이다. 무엇보다 행운은 이 집이 건재하다는 것. 담도 대문도 제기능을 다하고 있다. 깊게 생각하고 한 일은 아니지만 대문을 닫아버려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 이웃집 쪽의 담벼락만 대비하면 녀석들이 마당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 채영인 . . . . 1회 일치
[[런닝맨]]을 통해 [[송지효]]와 함께 연기자 동기 사이였음이 밝혀졌다. 덕분에 간만에 브라운관에 모습을 비췄다. 이미 결혼해서 딸까지 있는 상황.
- 채이식 . . . . 1회 일치
|본관 = [[인천 채씨|인천]]
- 채호기 . . . . 1회 일치
|제목=고양 아람누리도서관 채호기 시인 낭독으로 초대
- 챈슬러 (음악가)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이단옆차기]], Oneway
- 챔피언스 오브 앵거 . . . . 1회 일치
== 관련 항목 ==
- 천제훈 . . . . 1회 일치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FC 서울의 축구 선수]][[분류:광주 상무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목포시청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포천 시민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내셔널리그의 축구 선수]][[분류:K3리그의 축구 선수]][[분류:승부조작에 관여한 스포츠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철인 28호(로봇) . . . . 1회 일치
철인의 힘을 노리고 조종기를 노린 경우도 있다. 철인은 자율사고회로가 있으나 애니메이션 오프닝 가사에서도 언급되듯이 조종기에 의해 조종되고, 조종기는 사람을 고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조종기 관리에도 주의가 따른다. 게다가 탑승이 아니라 외부에서의 원격조종이기에 철인이 아무리 파괴되어도 조종사는 무사하지만 반대로 조종사만 해결하면 철인도 무력화된다는 약점이 있다. 이외에도 전파방해 등의 이유에 의해 조종사가 무사해도 철인을 조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 청년 튀르크 당 . . . . 1회 일치
[[파리]]에서 학생, 청년 사관, 지식인들이 비밀 결사인 '통일진보위원회(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CUP)'를 조직하여, 헌법의 부활과 전제 정치 폐지를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아메드 리자라는 지식인이 이 단체의 주대변인이 되었다. CUP는 [[자유주의]] 사상을 유포하고 고무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 체육회계 . . . . 1회 일치
* 선배와 후배로 구분되며, 상하관계를 엄격하게 한다.
- 최다빈 . . . . 1회 일치
| 2011 [[아시안 피겨 스케이팅 트로피]] (중국, 광동성 동관)
- 최단비 . . . . 1회 일치
|본관 =
- 최대원(정치인,국회의원) . . . . 1회 일치
[[자유한국당]] [[이철우(1955)|이철우]] 의원이 경북도지사 출마로 국회의원을 사퇴하게 되자, 해당 지역구인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도전했다. 당초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도전을 시도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관계로 자유한국당 [[송언석]] 후보와 맞붙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민주당 및 진보 지지자들의 기권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민주당 도의원 후보의 암묵적인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자유한국당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친여무소속 취급을 받았다.
- 최동희 . . . . 1회 일치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로 '''최소수'''라고도 불린다. [[천도교]]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아들이다 이후 최제우가 아들이 없어서 의암 손병희가 해월의
- 최두호 . . . . 1회 일치
|사진설명 = 최두호가 이길것이라 믿습니다만 최두호가 졌을시 팬분들 멘탈관리도
- 최란(배우)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최민호(유도선수) . . . . 1회 일치
* 그리고 최민호는 [[관광|재밌는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그들을 초대했다. ~~[[남친]] 입장에선 이게 웬 날벼락?~~
- 최성재(배우) . . . . 1회 일치
|| tvN || [[써클 : 이어진 두 세계]] || 관제팀장 || 특별출연 ||
- 최성조 . . . . 1회 일치
* [[KBS]] [[가족오락관]]
- 최연제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최재만 . . . . 1회 일치
|소속사=[[플럭서스뮤직]]|관련활동=[[어반자카파]], [[The Nucleus]]
- 최재원(배우) . . . . 1회 일치
[[최재원(야구선수)|동명의 야구선수]]와는 관계가 없지만, [[야구]]가 [[취미]]라고 한다.
- 최재희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최정원(남자배우)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가수/한국]]
- 최진순 . . . . 1회 일치
* [[문화체육관광부]]뉴미디어 부문 공로(2007년)
- 최진희(가수)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가수/한국]]
- 최창흡 . . . . 1회 일치
최창흡은 [[1786년]] 경에 [[한양]]에 있는 한 [[중인]] 신분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3살일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천주교]]의 [[교리]] 수업을 시작했지만, [[세례]]는 받지 않았다. [[박해]]로 인해, 그는 교우들과 멀어진 이래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815년]]에 그는 한 천주교 공동체에 입회하여 교리를 다시 배웠다. 그는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신유년의 박해]] 동안에, 그의 집안은 파산하였다. 그러한 곤궁한 상황 속에서, 그는 [[손소벽]]과 결혼하였고,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 중 아홉 명은 어릴때 운명을 달리했다. [[1821년]]에,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최창흡은 그 무렵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모든 의무를 지켰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 최창흡은 가장 독실한 신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제가 젊어서 저지른 [[죄]]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들을 속죄하고 제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
- 최태수(가수)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최태원 (야구인) . . . . 1회 일치
하지만 [[1997년]] 겨울부터 그는 시련을 맞이했다.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이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IMF]]의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모기업 [[쌍방울 (기업)|쌍방울]]이 법정 관리를 신청하면서 [[김현욱 (야구인)|김현욱]], [[조규제]], [[박경완]], [[박성기]], [[김실]] 등의 동료들이 현금 트레이드되어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팀의 4번 타자였던 [[외야수]] [[심성보]]는 [[당뇨병]]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장타력을 상실하면서 그는 타선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타 구단 투수들은 그를 타깃으로 두고 [[빈볼]], [[고의 사구]] 작전을 펼쳤고 그는 힘겹게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이어갔다. [[김원형]], [[오상민]], [[장재중]] 등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의 끝까지 함께하였다.
- 최학봉 . . . . 1회 일치
'''최학봉'''(崔鶴鳳, [[1856년]] ~ ?)은 [[조선 고종]] 때의 [[대금]]의 명인이다. 일명 '''성호'''(聖浩)라고도 하며,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이다.
- 최현진 (드러머)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바닐라 유니티]], [[바세린 (밴드)|바세린]], [[서태지 밴드]]
- 최효진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2007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여, [[K리그 2007|2007 K리그]] 우승과 [[FA컵 2007|2007 FA컵]] 준우승, [[FA컵 2008|2008 FA컵]]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2008년 FA컵 우승 당시 대회 MVP를 받았고,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으며 [[대한축구협회]] 주관 최우수선수 부문을 수상, 2008년, 2009년 [[K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또한 [[AFC 챔피언스리그 2009|2009년 AFC 챔피언스리그]]에 전 경기 출장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특히 16강전 [[뉴캐슬 유나이티드 제츠 FC|뉴캐슬 제츠]]와의 경기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6-0 대승을 이끌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4&oid=139&aid=0001950957 |제목=(ACL 리뷰) '최효진 해트트릭' 포항, 뉴캐슬 6-0대파하고 8강행 |날짜=2009-06-24 |출판사=스포탈코리아 }}</ref>
- 최희서 . . . . 1회 일치
|<ref name="yonhapnews_2017-10-25_54th_grand-bell-awards">{{뉴스 인용 | 저자= 김희선 | 위치= 서울 | 뉴스= 연합뉴스 | 제목=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에 '택시운전사'…'박열' 5관왕 | url=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25/0200000000AKR20171025185700005.HTML | 날짜= 2017-10-25 | 확인날짜= 2017-10-25 | 보존url= http://archive.is/Bv9w9 | 보존날짜= 2017-10-25 | 깨진링크= }}</ref>
- 충완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취활 . . . . 1회 일치
주로 [[대학생]], [[대학원생]], [[단기대학]] 학생 등이 졸업 전년에서 졸업년에 걸쳐서, 민간기업에서 채용 [[내정]]을 받기 위하여 하는 구직 활동을 뜻하는 말이다. 취직과 관련하여 인터넷 취직 사이트 참가, 기업 취직 설명회 참석, 성격 테스트, 적성 검사, [[면접]] 등을 거치는 과정을 종합하여 취활이라고 말한다.
- 카맛테쨩 . . . . 1회 일치
[[관심병]]으로 번역할 수 있다.
- 카스미가세키 . . . . 1회 일치
일본 외무성을 비롯한 많은 관청이 있다. 외무성을 뜻하는 속칭으로도 쓰인다. 한국으로 치면 "남산"이 [[국정원]]을 뜻하는 것처럼 지명이 특정 기구를 가리키는 은어가 세간에 자리잡은 사례로 볼 수 있다.
- 카이고로시 . . . . 1회 일치
* 쓸모없는 사람을 해고하지 않고 평생 고용해주는 것. 평생고용 문화와 관련이 있다.
- 카쿄인 노리아키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카쿠스 . . . . 1회 일치
[[로마 신화]]의 인물. [[헤라클레스]] 연관된 이야기가 있는 악당 혹은 괴물이다. 그 이름은 그리스어로 '나쁘다'는 뜻을 가진 카코스(Kakos)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 캡콤 . . . . 1회 일치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 [[록맨 시리즈]] 등 유명한 게임 [[프랜차이즈]]를 보유한 회사이며 국내에서도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오락실에 가봤다면 한번쯤은 캡콤 로고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만큼 다수의 게임을 만들었다. 다만 현재는 캡콤의 게임을 즐겨온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나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사실은 오너의 관심사는 와인이며 게임은 그냥 돈 나오는 지갑 취급이다.-- 까는 사람들은 '개껌'이라고 부른다.
- 캡틴 아메리카:시빌워/스포일러 . . . . 1회 일치
* 기존 시리즈의 인간관계 상의 떡밥이 대폭발
- 캥거루 . . . . 1회 일치
[[호주]]의 상징 동물. 호주와 관련된 것에서 자주 등장한다. 콴타스 항공, 호주 공군, 그 외 등등.
-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 . . . . 1회 일치
타이베리움 사가의 최종편인 커맨드 앤 컨커 4 타이베리안 트와일라잇이 혹평을 받은 후, 제너럴의 후속작인 커맨드 앤 컨커 온라인이 제작되고 있었으나 EA가 개발을 중지시키고 제작팀이던 빅토리 게임즈를 해산시켜버렸다. 그렇게 춫은 관짝에 처박혔다.
-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 . . . 1회 일치
[[분류:커맨드 앤 컨커]] [[분류:게임 관련 정보]]
- 컬트 종교 . . . . 1회 일치
* [[마인드 컨트롤]], [[세뇌]]와 같은 심리적 기법으로 신도의 의지를 꺽고 다수의 신도를 지도부의 명령에 따르도록 조종하여, 일반 사회와 유리된 가치관을 가지게 만든다.
- 케모 . . . . 1회 일치
[[New 52]]에서는 메탈멘 관련 에피소드에서 등장. 누군가 매그너스 박사의 눈을 피해 프로토타입 리스폰스미터를 화악약품이 담긴 금속 통에 실험이라며 넣었고, 그것이 케모가 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으나 메탈멘의 희생으로 어떻게든 되었다.
- 코만단테 카펠리니 . . . . 1회 일치
1943년 2월 20일, 독일 해군 총사령관 [[칼 되니츠]]는 일본에서 전쟁물자를 가져오는 선박들의 손실이 크니 이탈리아의 대형 잠수함을 수송용으로 개장해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이탈리아는 이를 독일 잠수함 7척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 그렇게 개장된 잠수함 중에는 코만단테 카펠리니도 있었다
- 코미디언(왓치맨) . . . . 1회 일치
한편으로는 예상 외의 모습을 보인다. 1966년 캡틴 메트로폴리스가 크라임 버스터즈라는 히어로 조직을 창설하려하자 "늙어서도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를 하고 싶은"거라고 돌직구를 날리면서 [[냉전|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런건 쓸모 없다고 씹는다. 임신한 현지처를 살해한 후에도 닥터 맨해튼이 이를 비판하자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녀를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을 언급하면서 그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역으로 깠다.
- 코스트코 . . . . 1회 일치
* [[도매점]]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어, 점포 운영비와 판매비, 관리비를 절감하고 대신 가격을 낮춘다.
- 코토부키 퇴사 . . . . 1회 일치
여성이 결혼을 계기로 하여 일을 그만두는 일이 일반적이었던 시대 배경과, 여성의 행복=결혼이라는 관념에서 태어난 말이다.
- 콘도 마코토 . . . . 1회 일치
* 의사를 신뢰하지 마라, 의사가 환자를 죽인다 등의 자극적인 주장을 하여, 환자와 의사의 신뢰관계를 파괴하였다.
- 콜 오브 후아레즈 : 건슬링어/줄거리 . . . . 1회 일치
사일러스는 빌리가 숨어사는 스팅키스프링스 근처 버려진 농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편에 속해있었던 보안관, 팻 가렛의 추격대가 빌리의 은신처를 습격한 것이었다. 멀리서 나는 총소리를 들은 사일러스는 서둘러 빌리의 은신처로 달려간다. 팻 가렛의 수많은 부하들이 빌리가 있는 농가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 포위망을 정면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 사일러스는 농가 뒷쪽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적들을 기습한다. 실력이 형편 없었던 적들은 기습을 당하자 마자 순식간에 무너진다. 사일러스는 빌리 일당의 엄호를 받으며 농가 뒷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계단에서 소총을 쏘던 [[https://en.wikipedia.org/wiki/Dave_Rudabaugh|더티 데이브]]를 지나 빌리와 [[https://en.wikipedia.org/wiki/Charlie_Bowdre|찰리 보우드레]]가 있는 방에 들어섰다.
- 쿄로충 . . . . 1회 일치
[[교실]], [[식당]] 등에서 자신의 지인이 있는지 항상 두리번 거리면서 같이 행동을 할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혼자서 학생 식당 등에서 밥을 먹는 것은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며, 그런 자신을 누군가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데 강한 두려움과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 쿠죠 죠린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키드르 . . . . 1회 일치
이슬람 신화에서는 이스칸다르(알렉산더 대왕)과 연관지어지기도 한다. 키드르는 이스칸다르와 함께 어둠의 땅으로 생명의 물을 찾는 모험을 떠나며, 이 이야기에서 이스칸다르는 찾지 못하고 실패하지만 키드르는 생명의 물을 얻어 불로불사를 얻게 된다.
- 킹덤/499화 . . . . 1회 일치
* 그때 근처에서 [[창평군]]과 함께 [[왕전]]의 모습이 나타난다. 최고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 사이에서 드높은 함성이 터져나온다. 그를 바라보던 벽은 하료초에게 그가 대장군을 맞는 것에 대해 어떻게 여기냐고 의견을 묻는다. 아무래도 벽은 그를 신뢰하지 못한다. 산양전에서 미끼로 쓰였던 전례도 있지만, 그 속 모를 눈빛은 아군 조차 불안하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 킹덤/501화 . . . . 1회 일치
* 그런데 하늘을 쳐다보던 왕전이 갑자기 전군에 휴식을 명한다. 각 지휘관들은 왜 이런 데서 휴식을 하나 의아해하는데 하료초는 이런 시점에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게 좋을거 없을 거라 우려한다. 하지만 [[강외]]만은 왕전이 그랬듯 하늘을 바라보더니 비 때문일 거라고 중얼거린다.
- 킹덤/508화 . . . . 1회 일치
* [[창인]]의 엄호 아래 산민족을 이끌고 열미성 성벽에 선 [[바지오]]. 열미군의 움직임이 일순 멈춘다. 숨 막힐 것 같은 순간, 사다리를 올라온 산민족들이 서서히 무기에 손을 올린다. 열미군 지휘관의 공격 지시를 시작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공기가 열기를 토해낸다.
- 킹덤/509화 . . . . 1회 일치
* 이렇게 해서 조의 관문이자 업공략의 초석인 열미성이 함락. 진 연합군은 성으로 입성한다. [[몽념(킹덤)|몽념]]은 한 것도 없이 입성해서 뭔가 미안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환의는 벌써 주민들이 다 도망쳐서 약탈할게 아무 것도 없다는 보고를 받으며 입맛을 다신다.
- 킹덤/515화 . . . . 1회 일치
* 진군이 조의 왕도권에 진입한 이후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고 진의 수도 함양에선 최전방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던 [[진시황(킹덤)|진왕 정]]과 [[창평군]], [[창문군]] 등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보고가 잇따르자 크게 당혹한다. 열미를 따내는 것까지는 모든 것이 작전대로. 그러나 총사령관 [[왕전(킹덤)|왕전]]은 곧바로 열미를 버린 채 왕도권으로 진입했다. 심지어 왕전이 직접 보낸 보고에는 "열미는 곧 조군이 수복할 것이므로 보급을 보내지 마라"는 황당한 소리가 적혀 있었다.
- 킹덤/520화 . . . . 1회 일치
* 중앙에, 그것도 왕전의 본대 뒤에 배치된 [[비신대]]. 지휘관 [[이신(킹덤)|이신]]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굳이 중앙에 두려면 본대 옆이든 앞이든 둘 것이지, 이런데 처박아서 전장이 보이지도 않는다고 투덜댄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서는 자신들이 이목을 두려워 숨은 듯하다는게 제일 큰 불만이었다. 이신의 생각없는 불평이 [[하료초]]에겐 단서가 됐다. 하료초는 왕전이 이런 배치를 한건 이신의 말대로 비신대를 숨기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게 뜻하는 것은 한 가지 뿐.
- 킹덤/521화 . . . . 1회 일치
* 마정이 포위. 적 복병의 등장. 기수군에 좋지 않은 소식만 줄을 이었다. 낙화대 병력이 이제 몽념의 별동대로 모여들면서 총 5천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 반명 황각과 마정이 이끄는 기마대가 합류해도 병력차는 두 배 이상. 마정을 잃을게 불 보듯 뻔하다며 부관들이 원군을 보내자고 아우성친다. 기수는 그 심각성을 모르지 않았으나 조용히, 냉정하게 상황을 다시 되짚는다. 벌써 1천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적의 수가 적다고 얕본게 문제였다. 분명 몽념은 수많은 전략을 능수능락하게 구사하는 인물일 것이다. 지금 펼치는 전술도 기마대의 기동력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 조군의 병력을 갉아먹는 것이다. 방치하면 외측의 보병대의 출혈을 피할 수 없고 어중간하게 기마대를 써도 덫에 걸린다.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옅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킹덤/534화 . . . . 1회 일치
* [[몽념(킹덤)]]은 [[마광]]군의 지휘권을 빠르게 인수하고 사기를 북돋는다. 마정의 부관 [[정양]]은 군이 상승세로 돌아서자 기뻐하나 몽념은 이제 겨우 최저한의 준비가 끝났을 뿐이고 위기는 계속 된다 단언한다. 그는 정양에게 중앙에서 움직일 수 있는 부대를 파악해 좌우거점으로 원군을 보내게 하고 특히 우측 [[비신대]] 진영엔 기마 위주로 편성해 보내라고 지시한다. 몽념은 마정군이 일몰 후에도 살아있을지 어떨지는 전적으로 군략에 달렸다며 지금부터 진정한 본진의 싸움이 시작된다고 선언한다. 한편 조군 최전선에 있던 [[마정]]은 진군의 기세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 사이에 세 무리의 깃발이 움직이는 걸 발견하고 주시한다.
- 타코나구리 . . . . 1회 일치
[[문어]]를 조리할 때는 먼저 질긴 살이 풀리도록 많이 때려서 부드럽게 만들고 나서 조리를 하는 관습이 있어, 이러한 표현이 생겼다고 한다.
- 타코베야 . . . . 1회 일치
메이지 시대에 부터 [[일본]]에서 있었던 [[강제노동]] 관행을 뜻한다. 채무 등을 이유로 감금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는 시설. 현대에는 주로 불법 사채 업자들이 채무자들을 기숙사 등에 감금하여 강제노동을 시킨다.
- 타쿠마 마모루 . . . . 1회 일치
1984년 11월, 부동산회사 업무 중 관리하던 오사카 시내의 아파트에, 수금을 빌미로 하여 여성의 집에 들어가서 폭행하고 [[강간]]을 저질렀다. 체포를 당하지 않으려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환청이 들린다."고 호소하여 [[정신분열병]]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오사카 지검에서는 성격 이상이 있으나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있다고 진단하여 기소하였다. 그리고 1986년 7월 31일,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으로 실형 판결을 받고 나라 소년 교도소에 들어간다. 1989년 8월에 교도소를 나왔다.
- 탁민제 . . . . 1회 일치
| 본관 = [[광산 탁씨|광산]]
- 태극문 . . . . 1회 일치
주인공이 정작 태극문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기무술(불괴연혼강기 등)로 떡칠을 해서 최강자가 되어놓고 태극문 무술로 최강이 되었다고 구라를 쳐서 제자들을 받아들여 키우는 사기극을 묘사한 소설.
- 태보 . . . . 1회 일치
2011년 5월에 있었던 [[테크노마트]] 진동사건의 원인(…). 공교롭게도 12층 체육관에서 하던 태보 레슨의 [[고유진동수]]가 빌딩과 일치하여 건물을 뒤흔들고 수백명이 대피하는 소동을 일으켰다.[[http://www.afpbb.com/articles/-/2814345?pid=7523220 (참조)]]
- 태종학 . . . . 1회 일치
|본관 = [[영순 태씨|영순]]
- 토리코/358화 . . . . 1회 일치
|| 내 눈앞에 놓인 조그마한 저녁밥상 이외엔 관심없어. ||
- 토리코/361화 . . . . 1회 일치
* 토리코가 식사를 마치려 할 때 코마츠가 "남은 것이 있다"며 통조림을 꺼내는데, 전에 8대륙을 통과할 때 얻었던 '''황금색 통조림'''(금관두)이다.
- 토리코/367화 . . . . 1회 일치
* 블루 니트로 아톰은 지금이야 말로 지로를 처리할 기회지만 아카시아에게 금관두를 보일 수가 없어 망설인다.
- 토리코/368화 . . . . 1회 일치
* 죠아는 처음부터 미도라를 이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주 짧은 틈을 타서 그를 금관두에 봉인해 버린다.
- 토리코/370화 . . . . 1회 일치
* 미도라를 봉인한 죠아는 금관두를 땅에 묻는다.
- 토리코/372화 . . . . 1회 일치
* 죠아의 관찰에 따르면 이미 GOD 내부에서 조리가 진행되고 있다.--또 코마츠냐--
- 토리코/373화 . . . . 1회 일치
* 금관두를 비롯해 황금색의 식기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다.
- 토리코/375화 . . . . 1회 일치
* 이 충격파는 지구를 관통할 정도의 위력.
- 토리코/385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한 번 금관두를 사용하기 위한 눈속임.
- 토리코/388화 . . . . 1회 일치
* 아카시아가 말한 자신의 진정한 풀코스도 이것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다.
- 토리코/394화 . . . . 1회 일치
* 블루 니트로 페어도 이 생물에 대해 알고 있어서 이름과 내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고대 미식가들 사이에선 매우 유명했던 식재로 맛만을 놓고 보면 미식세계를 평정할 만한 식재. 네오의 안에서 맛이 더욱 숙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청귀는 블루 유니버스의 식재가 아닌 탓인지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데 제 3의 악마는 유심히 쳐다보더니 "저 식재가 토리코의 여정의 마침표가 되진 않을 것 같다"고 평한다.
- 토요토미 히데요시 . . . . 1회 일치
1585년에 [[관백]], 그 다음해 [[태정대신]]이 되며, 이때부터 토요토미(豊臣)라는 성씨를 쓰게 된다.
- 토츠카 요트 스쿨 . . . . 1회 일치
1979년에서 82년 까지 훈련생의 사망, 행방불명 사건이 잇다라 교장 이하 15명이 체포, 형사 재판이 벌어지며 이를 토츠카 요트 스쿨 사건이라고 한다. 토츠카 교장은 6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으며, 2006년에 출소하여 학교에 복귀하고 운영을 여전히 담당하고 있으며, 학부모와 교육 관계자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 토탈워 시리즈 . . . . 1회 일치
전투 장면은 엄청난 장관을 보여준다. 전략 화면에서 훈련하게 되는 유닛 하나는 몇십~몇백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이기 때문. 그걸 또 세세히 볼 수 있다. 물론 사양을 많이 탄다.
- 파리피포 . . . . 1회 일치
클럽이나 라이브 하우스에서 진행자가 관객을 이렇게 불렀던 것이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 파이널 파이트 시리즈 . . . . 1회 일치
딱히 부각되는 것은 아니나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와 연관이 있다.
-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분류:롤플레잉 게임]]
- 판타스틱 포 . . . . 1회 일치
=== 관련 인물 ===
- 판타스틱 포(1994년 실사영화) . . . . 1회 일치
당시 웬만한 드라마 1회 제작비보다도 적은 예산인 100만 달러에 3주 촬영이란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존의 1분 길이의 짧은 견본이 아닌 장편 영화로 완성시켜냈다. 초저예산 영화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있지만 저예산 영화 제작 경험이 풍부한 코먼 사단답게 열악한 조건에서도 효율적으로 만들어져 오히려 다른 초대예산을 들인 영화들 이상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극장 개봉은 못했다. 이후 콘스탄틴 필름은 2000년대 실사영화 2편의 제작에 관여하고 독일 내 배급권도 쥐고 있었는데, 2015년 리부트 제작사 명단에서 빠진 걸 보면... 그래도 2015년판의 독일 배급도 콘스탄틴에서 맡았다.
- 판타스틱 포: 실버 서퍼의 위협 . . . . 1회 일치
가만 보면 좀 어이없는 장면이 있는데, 엄연한 [[러시아]] 영토인 [[시베리아]]에 '''미군'''기지가 있는다거나 [* 왜 그런지 이해가 잘 안 간다면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때 어떤 관계였는지, 그리고 러시아가 동구권 내의 [[친미]]세력을 견제하는 걸 생각해 보자.] 마지막 결판을 치른 데는 [[홍콩]]인데 수잔과 리드의 결혼은 [[자포네스크|일본에서 기모노 입고]] 한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있다.
- 패드립 . . . . 1회 일치
현실이건 인터넷이건 상대와의 관계를 화끈하게 파탄낼 수 있는 행위다. 당사자나 목격자에게 교양없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으니 주의.
- 퍼니셔 . . . . 1회 일치
군인 출신이라 전투실력이 뛰어나고, [[기관총]] 등 총화기를 능숙하게 다룬다.
- 페어리 테일/483화 . . . . 1회 일치
* 나인하르트가 "아이린"과 엘자가 닮았다고 생각하는걸 보면 혈연관계가 추측된다.--이 만화에서 이런 적이 한두 번인가--
- 페어리 테일/484화 . . . . 1회 일치
* 아이린과 엘자으 혈연관계 떡밥은 일단 뒤로 밀렸다.
- 페어리 테일/487화 . . . . 1회 일치
* 가질은 그동안 멸룡마도사로서 동료들보다 뒤쳐져 있던 걸 신경쓰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한다.
- 페어리 테일/490화 . . . . 1회 일치
* 본편이 뜨기 전 유포된 정보에는 제목이 "어머니와 딸"이어서 아이린과 엘자가 모녀관계라는 설이 확정되는 듯 했지만 가짜 스포였던 걸로 밝혀지면서 다시 유보되었다.
- 페어리 테일/497화 . . . . 1회 일치
* 엘자와 아이린의 관계에 대한 떡밥이 재살포. 모녀설이 가장 지지를 얻고 있다.
- 페어리 테일/499화 . . . . 1회 일치
* 둘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투를 벌이기 시작. 그레이가 쥬비아를 압도한다.
- 페어리 테일/500화 . . . . 1회 일치
* 그레이가 END의 정체를 드디어 알았다. 아직 정확하게 들은건 아니지만 다음화에는 듣게 될 듯. 과연 나츠와 관계가 어떻게 될지.
- 페어리 테일/508화 . . . . 1회 일치
라케이드가 제레프를 "아버지"라고 폭로해버렸는데 이쪽도 "논란이 많을 테지만 중요한 에피소드"에 부합하는 부분. 우선 제레프 본인의 친자라는 의미인지, 단지 그 자신도 제레프 서의 악마라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다른 제레프 서의 악마들이 직접적으로 아버지란 호칭을 쓰지는 않는 점, 그리고 제레프 본인이 라케이드의 마법에 격하게 반응한 점을 들어 전자로 추정하는 의견이 많은데 그렇다면 과연 어머니는 누가될지도 관심거리.
- 페어리 테일/511화 . . . . 1회 일치
* 라케이드 드래그닐과 조우한 스팅 유클리프는 어째서 그가 나츠 드래그닐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지 의아해한다. 렉터와 유키노 아그리아가 그도 "드래그닐"이고 나츠와 혈연관계라고 알려주는데 스팅 입장에선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 이해를 하지 못한다.
- 페어리 테일/513화 . . . . 1회 일치
꽤나 무정한 말이지만, 어차피 아이린도 별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딸이 줄곧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살아있든 어떻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퍽 기구한 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엘자는 단호하게 "누가 됐든 길드를 공격한다면 적"이라고 잘라 말한다. 여기에 아이린도 "나의 알바레스 제국에 이를 드러내는 자도 적일 뿐"이라 응수하며 모전녀전을 보여준다.
- 페어리 테일/515화 . . . . 1회 일치
아이린의 남편으로는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엑스트라로 낙찰. 그래도 한 나라의 장군이고 멸룡마도사인 아이린을 제압할 수 있는 정도였으면 제법 강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용화가 됐다고 아이린을 헌신짝처럼 버린데다 학대하기까지 했으니 이 세계관 최악의 쓰레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아이린의 흑화는 이 인간 때문에 시작된 거고 그 아이린이 현재 작중 벌이고 있는 악행을 생각하면 거의 원흉급.
- 페어리 테일/517화 . . . . 1회 일치
>상처는 몇 개가 늘어도 상관없어요.
- 페어리 테일/518화 . . . . 1회 일치
>솔직히 어떻게 불리든 관심은 없었지만
- 페어리 테일/522화 . . . . 1회 일치
그 뿐만 아니라 [[루시 하트필리아]]도 루시 자신이 아는 것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녀의 조상이고 나츠의 심상세계에서도 나타났던 "안나"라는 여인은 제레프의 친구였다. 안나가 갓난아기였던 나츠를 키우는데 일조했듯 후손인 루시도 지금의 나츠를 성장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언제나 함께하는 친구 [[해피(페어리 테일)|해피]], [[엘자 스칼렛]], [[가질 레드폭스]], [[웬디 마벨]] 등등. 제레프는 나츠와 관련된 주요 인물은 전부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 페어리 테일/524화 . . . . 1회 일치
* 카나는 요정 삼대 마법 "페어리 글리터"를 오거스트에게 쏟아붓는다. 그동안 카나가 사용했던 것을 훨씬 뛰어 넘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오거스트를 관통한다.
- 페어리 테일/525화 . . . . 1회 일치
* 오거스트는 길다트와 카나의 관계를 보며 부모자식 간의 애정은 당연한 건데 "어째서 폐하의 아이는 사랑받지 못한 건가"라고 중얼거린다.
- 페어리 테일/527화 . . . . 1회 일치
>아니... 무언가를 보고 영창을 관뒀어.
- 페어리 테일/530화 . . . . 1회 일치
* 폭염마법과 유사한 마법이었다. 그런데 곧 소용돌이같은 형상으로 바뀌면서 나츠의 몸을 얽어맨다. 마치 나츠의 몸으로 침투하는 것 같다. 나츠의 혈관이 도드라지면서 고통스러워한다. 마법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나츠를 묶어놓는다. 제레프는 누구한테 말하는 건지 모르지만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서. 그러기 위해선 메이비스의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 페어리 테일/532화 . . . . 1회 일치
* 메이비스 입장에선 황당하기만 한 원망이다. 제레프는 그래도 다시 시작한 인생에선 꼭 나츠와 함께, 아크놀로기아가 지금처럼 강해지기 전에 끝을 내겠다며 "인류의 미래는 내가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지금 세계와 아무 상관도 없는 세계에서 말이다.
- 페어리 테일/544화 . . . . 1회 일치
* 계속해서 모여드는 힘. [[마카로프 드레아]], [[폴류시카]], [[카구라 미카즈치]], [[셰리아 브렌디]], [[샤를(페어리 테일)|샤를]], [[브랜디쉬]], 저주받은 섬 주민들과 엑시드까지. 여태까지 페어리 테일과 만났던, 그들을 아는 사람들의 힘이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던 그런건 관계없었다. 인연과 유대로 묶인 사람들의
- 페이데이 2/하이스트/로크 . . . . 1회 일치
신호탄을 터뜨리면 로크가 헬리콥터를 타고 온다. 팔레트를 헬리콥터에 고정시키면 헬리콥터가 팔레트를 싣고 날아간다. 이걸 세번 하면 된다. 세번째 팔레트를 처리할 때에는 도로에 기관총이 설치된 SWAT 밴이 나타나니 주의.
- 페이데이: 더 하이스트/하이스트 . . . . 1회 일치
베인은 페이데이 갱을 태우기 위해 또다른 운전수인 브루스를 호출한다. 브루스를 만나기 위해 스칼렛 거리로 가자. 길을 막아서는 경찰관을 쏘며 길까지 가면 된다.
- 평론을 쉽게 쓰는 법 . . . . 1회 일치
→ "미국적인 가치관을 주입하는…", "미 제국주의적인…", "헐리우드 특유의 상업적인…"
- 표민수 . . . . 1회 일치
[[본관]]은 [[신창 표씨|신창(新昌)]]이며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학사]] 졸업하였고,<ref>[http://people.nate.com/people/info/py/om/pyominsoo 네이트 인물검색]</ref> [[1991년]] 공채를 통해 [[KBS]] 드라마 제작국 PD로 입사하였다.<ref>[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117442&t__nil_main_introduce=more 다음 영화 인물 정보]</ref> 1991년부터 2001년까지 KBS 드라마 제작국 프로듀서로 근무하였고, 퇴사 이후 프리랜서 PD로 활동하고 있다.
- 표양문 . . . . 1회 일치
'''표양문'''(表良文, [[1907년]] [[5월 15일]] [[한성부]] ~ [[1962년]])은 초대 인천시장과 제3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신창 표씨|신창]].
- 표현명 . . . . 1회 일치
* [[1997년]] : 정통부장관상
- 푸 파이터즈 . . . . 1회 일치
## == 인물관계 ==
- 프레샤 . . . . 1회 일치
* [[건담 시리즈]]에서 [[뉴타입]] 간에 서로 정신적 압력을 뿜어내서 서로를 감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서로 적대적인 관계이고 뉴타입 능력이 강할 때 강력한 프레샤를 발하게 된다. 예시) "코노 프레샤와?! 샤아!"
- 프로라 . . . . 1회 일치
[[나치]]가 집권하던 1936년 당시 "Kraft durch Freude"[* 즐거움을 통한 힘. 기존의 사민당계, 공산당계 노조를 흡수하고 그 자산을 강탈하여 설립한 일종의 어용노조인 '독일노동전선' 산하의 단체로서, 노동자 복지와 레저 분야를 주로 담당하였다.]이라는 기관에 의해 건설을 시작했다. --쓸데없이 커다란걸 좋아하는 나치답게-- 20,000명의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시설로 설계되었다고.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건설이 중단되었다. 이후 프로라는 군사 시설로 사용되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군과 동독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 프리덤 파이터즈 . . . . 1회 일치
* <관련 캐릭터>
- 프릭쇼 . . . . 1회 일치
시간이 흐르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관심이 향상됨에 따라서, 점차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여전히 이런 프릭쇼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인권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장애인들이라고 의사표현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보여주면서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특별히 제제할 이유가 없는 것도 사실.
- 핑커톤 . . . . 1회 일치
1861년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밝혀내기도 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서부개척시대]]에는 [[제시 영거 갱]]이나 [[와일드 번치]]같은 갱단을 추적하거나 열차강도를 잡는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사를 위해 [[신문]] 기사를 오려내 보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의 시초가 되었다. 이 외에도 [[시카고 대화재]] 직후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고용되기도 했다.
- 하마치 . . . . 1회 일치
[[세토 내해]]에서 양식으로 방어를 기르게 되면서, 간사이 지방의 호칭이 퍼지면서 크기에 관계없이 '하마치'라는 호칭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 하수빈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하야시 선생님 . . . . 1회 일치
아무튼 이 사이트에서는 정신과 관련의 질문을 메일로 받아들이고, 그 질문과 답변을 게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답변이 묘하게 친절한가 하면, 너무 단견을 내리거나, (독자 입장에서 볼 때) 초 전개로 나아가거나 해서, 가끔 엄청 재미있는게 나타난다.
- 하이큐/218화 . . . . 1회 일치
* 히나타는 몸풀기 때부터 우시지마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다닌다.
- 하이큐/219화 . . . . 1회 일치
* 쿠니미는 적당히 킨다이치를 데리고 가며 "별로 카게야마한테 관심없다. 다음 공식전에서 박살내주마"라고 싫은 소릴한다.
- 하이큐/220화 . . . . 1회 일치
* 신나게 달려온건 좋았으나 정작 부실키도 체육관키도 없는 두 사람
- 하이큐/223화 . . . . 1회 일치
* 상황을 관망하는 우카이 코치와 히나타 쇼요.
- 하이큐/226화 . . . . 1회 일치
* 이런 역학관계가 쌓이다 보면 상대의 블록은 망설이기 시작하고 엉뚱한데로 뛰기 마련이다.
- 하이큐/238화 . . . . 1회 일치
* 관중석에서도 히나타의 속공이 인기만점. "10번은 공중에서 멈춘 것 같다"고 말해진다. [[엔노시타 치카라]]는 TO 때 스기와라가 말한 "후방 마이너스"가 뭐냐고 묻는다. 그건 스가와라가 붙인 괴짜속공의 새로운 이름. 스기와라는 괜찮은 이름 아니냐며 으시댄다. 카게야마는 별로 신경 안 쓰지만 히나타는 엄청나게 감동. [[니시노야 유]]는 뒤에 "썬더"더 붙이자고 제안하지만 그럼 니시노야의 필살기 같아진다며 거절 당한다.
- 하이큐/240화 . . . . 1회 일치
* 누구보다 체육관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던 히메카와, 그리고 그 히메카와의 주무기를 능숙하게 받아낸 니시노야. 히메카와는 새삼 "이것이 바로 전국"임을 실감한다.
- 하이큐/246화 . . . . 1회 일치
* 그런데 사실 그는 카노카의 사촌오빠였고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는데... 타나카의 씁쓸한 썸을 뒤로하고 봄고 2일차 돌입. 시드교가 참전한다.
- 하이큐/273화 . . . . 1회 일치
* [[카게야마 토비오]]의 "온화 모드" 발동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스코어는 20 대 12. 카게야마의 노 터치 서브 에이스 달성을 기점으로 [[이나리자키 고교]]가 첫 번째 TO를 쓴다. 중계진은 경기가 서브 경쟁으로 흐름이 바뀌는 걸로 보고 있고 과연 카게야마의 서브로 [[카라스모 고교]]의 반격이 시작될지 주목한다. 그렇게 카게야마의 2회차 서브. 이번에도 완벽한 서브. [[미야 오사무]]가 손을 뻗었지만 리시브 실패. 연속 서브 에이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세 번째 서브에 임한다. 이번엔 긴지마 쪽. 리시브에는 성공했지만 자세가 좋지 않았다. 공은 [[오지로 아란]]에게 연결. 2세트부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오지로. [[우카이 케이신]] 코치의 의도도 그것이다. 아주 조금씩 쌓인 스트레스, 피로감이 평소 플레이를 조금씩 뒤흔든다. 그리고 지금 미스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오지로의 스파이크엔 블록 세 장이 따라붙었다. [[사와무라 다이치]], [[히나타 쇼요]], [[타나카 류노스케]]. 오지로는 우카이 코치가 노린대로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블록을 의식하게 됐고 우측으로 길게 찌른 스파이크가 라인을 벗어난다. 카라스노의 득점. 스코어는 20 대 14. 우카이 코치는 이것이 전환의 1점임을 단언한다. 관중석의 [[다이쇼 스그루]]와 여친 미카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그 아웃은 오지로에겐 "꺼림직한 아웃"이다.
- 하츠모우데 . . . . 1회 일치
일본의 풍습. 설날(새해첫날)에 신토의 신사를 참배하여 신에게 축복이나 소원을 비는 관습이다. 새전함에 돈을 넣고 신에게 빌거나 [[오미쿠지]] 같은걸 뽑거나 한다.
- 하태웅(가수)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세계 군악공모전 한강음악제
- 하트플러스 마크 . . . . 1회 일치
[[일본]]의 비영리재단법인 하트플러스의 모임 이라는 곳에서 배포하는 마크. 외관으로는 알 수 없는 [[내장]]계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을 주변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됐다.
- 한가빈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 한국영 . . . . 1회 일치
[[2013년]] [[유럽]] [[프라이부르크]]와 [[셀틱]], [[클럽 브뤼헤]] 등이 한국영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이적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한국영은 [[김창수 (축구 선수)|김창수]]가 뛰고있는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였다. [[2015년]] [[카타르 스타스 리그]] [[카타르 SC]]로 이적하였다.
- 한동근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한병주 . . . . 1회 일치
'''한병주'''(韓秉柱, [[1879년]] ~ [[1950년]] [[7월 26일]])는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 호(號)는 산남(山南).
- 한상원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쉼, <br /> 석기시대, <br /> [[김태화]]밴드, <br /> 코리아 슈퍼세션, <br /> [[긱스 (6인조 음악 그룹)|긱스]]
- 한성식 . . . . 1회 일치
* [[2016년]] 《[[트릭 (2016년 영화)|트릭]]》 ... 해관 역
- 한성호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Be (비이)
- 한소정(1980) . . . . 1회 일치
예술마당 4관
- 한송이 (레이싱모델) . . . . 1회 일치
* [[청암대학]] 부사관과
- 한승엽 (1985년) . . . . 1회 일치
*[[2001년 9월]] 문화장관부 주최 세계청소년Youth페스티벌 스타크래프트 대회 준우승
- 한승원 (만화가) . . . . 1회 일치
==대인관계==
- 한용희 . . . . 1회 일치
[[1931년]]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경찰 출신인 그는 [[1954년]] [[한국방송공사]]에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동요 프로그램 '[[누가누가 잘하나]]'를 연출하는 등 동요 보급에 불씨를 지핀 장본인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동요 반세기' 등 동요사 저작도 펴냈다. 한국음악협회 이사, 한국동요음악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옥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 한윤성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 한재권 (응원단장) . . . . 1회 일치
* 경기 도중 관중석을 돌아다니며 응원을 하도록 권유한다.
- 한지우(배우) . . . . 1회 일치
||<#3D414D> {{{#ffffff '''수상'''}}} ||<(> 2007년 [[미스코리아]] 중국 진[*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2&aid=0000233142|관련기사]] ] ||
- 한징 . . . . 1회 일치
'''한징'''(韓澄, [[1886년]] - [[1944년]])은 [[한글]]학자이다. 호는 효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부터 10년간 <[[시대일보 (1924년)|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를 지냈다. [[1930년]] [[이윤재]]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으며 이어 [[표준말]] 사정위원이 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944년]] 함흥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 한채이 . . . . 1회 일치
* [[2011년]] - 서울 국제모터쇼 기아관 모델
- 한필수 . . . . 1회 일치
본관은 청주. 호는 동석(東石)이다. 서울 장교동에서 육군 정위 용호(龍鎬)의 둘째 아들로 [[태양태음력|음력]] [[1900년]] [[11월 6일]] 태어났다. 출생일과 출생지가 상이한 기록도 있으나 유가족을 통해 확인한 결과 1900년이며 장교동이 정확하다.
- 한행 . . . . 1회 일치
* 칸게이고(寒稽古) : 무도에서 겨울에 수행을 하는 것. 유도나 검도 등의 일본 무도에서 관습적으로 행한다. 기술 향상 보다는 정신력 단련에 중점을 둔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운동생리학적으로 그리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 한현민(코미디언) . . . . 1회 일치
* KBS [[가족오락관]]
- 한희 (연출가)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MBC]] 드라마1국 국장
- 함기호 . . . . 1회 일치
'''함기호'''(咸基浩, 1961년 ~ )는 [[한국휴렛팩커드]] 대표이사 사장에 재직 중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ref>{{뉴스 인용 |제목=글로벌 기업의 국내 전사들 함기호 한국HPE 대표 |url=http://www.sedaily.com/NewsView/1RVMXB5V60 |날짜=2018-02-09 |뉴스=서울경제}}</ref> 본관은 [[양근 함씨|양근]]이다.<ref>{{웹 인용 |제목=함기호 인물정보 |url=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61885|웹사이트=조선일보}}</ref>
- 함영준 . . . . 1회 일치
|본관 = [[강릉 함씨|강릉]]
- 함준호 (교수) . . . . 1회 일치
'''함준호'''(咸駿浩, 1964년 2월 11일 ~ )은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냈다.<ref>{{뉴스 인용 |제목=한은 떠나는 함준호 금통위원 "더 편하게 시장과 소통할 것"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3936133 |날짜=2018-05-09 |뉴스=한국경제}}</ref> 본관은 [[양근 함씨|양근]]이다.<ref>{{웹 인용 |제목=함준호 인물정보 |url=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54450 |웹사이트=조선일보}}</ref>
- 함화진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 해쉬스완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 해양군 . . . . 1회 일치
| 작위 = 도정(都正) <br /> [[군 (작위)|군(君)]] <br />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
- 핼로워크 . . . . 1회 일치
공공직업안정소란, 국민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후생노동성에서 설치한 행정기관이다. 약칭은 쇼쿠안(職安, 직안).
- 행맨 . . . . 1회 일치
[[분류:게임 관련 정보]]
- 행복회로 . . . . 1회 일치
[[실장석]](국내명 속칭 '참피') 관련의 창작물에서 나온 설정.
- 허가윤 . . . . 1회 일치
| 관련 활동 = [[포미닛]]
- 허만하 . . . . 1회 일치
* 2003년 보관문화훈장
- 허윤희 (방송인) . . . . 1회 일치
* [[경희대학교]] 국제관계학 학사
- 허준 (1981년) . . . . 1회 일치
'''허준'''(許俊, [[1981년]] [[7월 20일]] ~ )은 전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포수]]이다. 2014 시즌후 무릎관절 수술대에 오르며 은퇴하였다. 현재는 2018.[휘문고] 야구부 코치이다.
- 허협 . . . . 1회 일치
그는 [[1840년]] [[1월 31일]] 또는 [[2월 1일]]에 [[형벌]]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는데, 관찬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곤장]] 130 여대를 맞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옥사로써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45세였다.
- 형불상대부 예불하서인 . . . . 1회 일치
형불상대부는 형벌은 대부(大夫)[* [[왕]](王)이나 [[제후]] 귀족 휘하의 고위직 신하들.]에 이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예불하서인은 예(禮)가 서인[* 귀족 계급이 아니며, 관직이 없는 일반인.]에게 이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호환성 . . . . 1회 일치
이는 [[정보공학]]의 호환성이다. 하나의 장치에서 처리한 데이터, 프로그램을 다른 장치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윈도우즈]] 프로그램은 컴퓨터에 관계없이 어떤 윈도우즈 기기에서도 호환성이 있다. 물론 [[사양]]은 있지만. 윈도우즈와 맥은 기종은 프로그램은 호환성이 없지만, 데이터는 서로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데이터 호환성은 있다.
- 혼활 . . . . 1회 일치
[[연애]]와는 달리 마치 취업을 하는 것처럼 각종 관련 서비스에 가입하여 결혼 상대를 알아보는 것을 가리킨다.
- 홍소희 . . . . 1회 일치
* 《[[메디컬 기방 영화관]]》 (OCN, 2007년) - 연 역
- 홍유경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에이핑크]]
- 홍은희(배우) . . . . 1회 일치
* 관련 문서: [[살인/한국]]
- 홍인영 . . . . 1회 일치
[[2001년]]에 이승환 뮤직비디오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2005년]] 홍콩 ATV가 주관한 '미스 아시아 선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홍인영은 18명의 아시아 미녀들을 제치고 '미스 아시아 '2위 격인 아(亞) 및 포토제닉상, 아시아 여성 매력상, 전통한복상, 인터넷 투표 1위상, SMS 투표 3위상 등 총 6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2009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한국활동을 하였다.
- 홍준표(야구선수) . . . . 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SK 와이번스/선수단)]
- 홍창선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연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
- 홍혜경 . . . . 1회 일치
|관련활동 =
- 화석연료 . . . . 1회 일치
* 탄소균형 문제 : 화석연료의 남용으로 인해 지구 환경이 자연적으로 축적하는 탄소화합물의 양보다 배출하는 탄소화합물의 양이 훨씬 많아져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쉽게 말해 '지구온난화'와도 관련되어 있다.
- 화염병 . . . . 1회 일치
만들면 잡혀간다. [[http://www.law.go.kr/%EB%B2%95%EB%A0%B9/%ED%99%94%EC%97%BC%EB%B3%91%EC%82%AC%EC%9A%A9%EB%93%B1%EC%9D%98%EC%B2%98%EB%B2%8C%EC%97%90%EA%B4%80%ED%95%9C%EB%B2%95%EB%A5%A0|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 참조.
- 화완옹주 . . . . 1회 일치
== 가족 관계 ==
- 화표 . . . . 1회 일치
화표가 황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렇게 화려하고 거대한 화표를 세우는 것은 보시라이의 정치적 야망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2012년 6월, 다롄 화표를 디자인한 다롄시의 건설 관계자는 일본의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를 하며, 보시라이가 '''"나는 장래 천자가 될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높은 화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 황광희 . . . . 1회 일치
| 관련활동 = [[ZE:A]]
- 황대봉 . . . . 1회 일치
1967년 [[포항버스]][* 이후 1990년대에 성원여객으로 통합되었고, 신안여객을 거쳐 現 코리아와이드 포항이다.]를 설립하여 현재의 대아그룹을 창업하였다. 이후 해운([[대아고속해운]]), 금융(대아상호신용금고), 건설, 관광레저(대아여행사), 문화사업, 지역언론사업([[경북일보]])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1983년 포항에 [[세명고등학교]](학교법인 영암학원)를 설립하였다. [* 여담으로 세명고등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 가끔씩 이사장이 오셨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황대봉 이사장과 악수를 하면 수능을 대박 친다는 일종의 카더라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이사장이 등장하시면 3학년들이 악수한다고 난리였다고 한다.]해당 과정을 통하여 포항시에서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함께 지역 경제계에서 큰 인물로 인식되었다.
- 황병일(1960) . . . . 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LG 트윈스/선수단]]
- 황정오 . . . . 1회 일치
[[1985년]]에 은퇴한 황정오는 [[1987년]]에 미국의 마린 대학교로 유학을 가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고, [[1997년]]에는 테네시 대학교에서는 대학교수로 발탁되었으며 2010년에는 미국태권도고단자회 관장을 맡고 있다.
- 황정혜 . . . . 1회 일치
:〈관리자들〉
- 회맹 . . . . 1회 일치
회會는 여러 제후들이 시간, 장소, 의제를 정해놓고 모인다는 의미이며, 맹盟은 안건에 합의한 뒤 삽혈歃血을 하여서 맹세를 하는 의식이다. 삽혈은 제물로 쓴 소牛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으로서, 회맹의 맹주가 가장 먼저 삽혈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삽혈 의식을 생략하고 구두로만 서약할 때도 있는데 이를 황성불맹荒成不盟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두 서약은 삽혈보다 신뢰성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때문에 황성불맹은 형식적인 약속을 뜻하게 되었다.
- 후리소데 . . . . 1회 일치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의 일종. [[소매]]를 길게 만든 기모노이다. 고대에는 [[관례]]를 치르기 이전의 남녀가 모두 입었으며, 현대에는 주로 미혼여성의 정장으로 사용된다. [[성인식]], [[결혼식]] 등에서 입는다.
- 후지와라 요시후사 . . . . 1회 일치
본래 이 무렵까지 황족이 아닌 신하, 후지와라 씨가 섭정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후지와라 씨는 천황가와의 혼인으로 인척관계가 강해졌고, 응천문의 변(応天門の変)이라는 사건을 처리한 것을 계기로, 반씨(伴氏), 기씨(紀氏) 등의 라이벌 씨족을 배척하여 섭정이 될 수 있었다.
- 히키코모리 . . . . 1회 일치
스스로 일이나 공부, 인간 관계 등 일상 생활을 피하면서, 장기간에 걸쳐서 집이나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혀서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 혹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 거의 히키코모리 상태에 있지만 드물게 외출을 하는 사례는 준 히키코모리(準ひきこもり)라 한다. 줄여서 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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