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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당 지도 원리
         [[공산당]]이 [[혁명]]의 '전위'가 되어, 국가, 정부, 군대, 사법, 종교, 사회단체 등 사회의 모든 요소를 '지도'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1936년, 소련에서 헌법이 제정되면서 공산당(볼셰비키)의 지도적 역할이 헌법에 명시되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 같은 체제를 도입했으며, 다른 정당이 존재한다고 해도 [[위성정당]]으로 전락하여 사실상 [[일당독재]]로 변질되었다.
         이 공산당 지도 원리는 공산당을 법률과 정부 위에 놓는 '독재집단'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유럽 국가에서는 민주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헌법에서 '삭제'되면서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현재에도 북한,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의 헌법에는 공산당의 지도 원리가 명시되어 있다. 중국의 경우는 헌법에는 '노농연맹'으로 되어 있어, 공산당이 아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가 지도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공산당이 지도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마찬가지이다.
         이 공산당 지도 원리는 [[지도자 원리]]로 변형되어 [[파시즘]]에도 유입되었다. [[나치 독일]]에서 나치당의 경우 역시 공산주의 국가의 공산당과 유사한 지도적 정당이었다. 다만 나치 독일의 경우는 법률적 정의보다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의지'를 우선시하는 성향 탓에, 나치당의 지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비슷한 지위라고 볼 수 있었다.
         공산주의의 결정적인 반민주적 요소이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 지도 원리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몇몇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이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인물로는 [[카를 카우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소련에서 쫓겨난 이후의-- [[레프 트로츠키]] 등이 있다.
  • 김성수 (1891년)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ref name="농개1"/>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ref name="지위1"/>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ref name="kee587"/> [[대한민국]]의 장관과 [[대한민국 국회|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ref name="kee587"/>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 김영인(탤런트)
         다행히도 합성을 대범하게 넘어가면서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합성요소로서 생명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김영인 씨 본인은 기왕에 합성을 할거면 합성을 했을 때 유쾌한 것들 위주로 또 합성을 할 때 주인공으로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 역시 "[[공산당]]을 싫어한다."라고 밝혔다. --공산주의자 한번 맡았다가 성불구자 취급 받았으니 어쩌면 싫어하는게 당연할지도--] 다만 합필갤러들은 김영인씨가 충격을 받을수도 있는 [[붕탁]] 합성은 자제하기로 했다.[[https://youtu.be/N7WII_6MWts|김영인 씨의 당부 영상]]
         여담으로 촬영 중인 영화 <이끼새> 에서도 [[http://news.chosun.com/misaeng/site/data/html_dir/2017/11/01/2017110101272.html|공산당 간부를 맡았다고 한다.]]
  • 윤치영
         [[9월 6일]] 오전 그는 [[경기여고]]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수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집 안국동 104번지에서 담 하나 사이인 당시 경기여고 강당에는 6백여 명이 모여 소위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여운형]]은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허헌]] 등과 함께 각본대로 좌익 인사들이 중심이 된 55인의 헌법기초위원을 정하고 소위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켰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 경기여고 강당에서 담장 하나 건너편에 있던 윤치영은 자기 집에서 이 장면을 목격했다.
         [[1946년]] [[5월]] [[미군정]]에 끌려갔다 온 [[조봉암]]을 적극 지원하여 그의 전향을 유도한 것은 윤치영이었다.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에게 보낸 [[조봉암]]의 편지가 미군 정보 기관에 압수되어 공개된 일이 있었다.<ref name="dae388">조용중, 《대통령의 무혈혁명, 1952 여름, 부산:조용중의 한국 현대사 연구》 (나남출판, 2004) 388페이지</ref> 이왕 미군정에 의해 이왕 공개될 것이면 자발적으로 공개하라고 유도했다.
         [[조선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의 당 운영에 불만을 품은 조봉암이 박헌영의 1 인체제 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편지를 신문에 공개 하게끔 은밀하게 주선한 것이 바로 윤치영이었던 것이다.<ref name="dae388"/> 미군정이 편지를 공개하기 전에 [[조봉암]]은 윤치영의 권고대로 선수를 쳐서 언론에 '[[박헌영]]에 대한 비판을 공개비판'으로 발표하고 전향을 선언하게 된다. 이는 [[조선일보]]와 [[안재홍]]의 [[한성일보]]에서는 특히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유진오]])의 사상이 의심스럽다.<ref name="안녕 헌법"/>"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ref name="여순1">[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볼록거울> 국가보안법 제정 60돌]{{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 연합뉴스 2008년 8월 29일자</ref> 여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강경 진압론을 주장하였고 극우 세력이 배후에 가담했다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윤치영은 사람과 자원,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을 상대로 쿠데타를 기도하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후일 언론 인터뷰에서 "[[장면]] 정권은 너무나도 무능해서 횃불데모가 벌어지는 등 [[공산당]]의 발호가 염려되는 만큼, 사회가 극도로 혼란되어 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나 자신이 직접 혁명을 하려고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요."라고 하였다.<ref name="경향19720408"/> 정변이 실패하자 [[장면]]은 극우 인사라며 그를 공박했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따라붙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자신에게 가해진 친일파라는 주장은 오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에 의하면 정치는 혁명이나 독립 운동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 일제하에서 왜놈에게 협력했다고 해서 신생국가가 이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처벌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에서 우리가 본 역사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도 회개하는 사람은 일단 그 죄를 사해 주듯이 해방된 조국이 새 정부를 출범시킨 마당에 우리가 또 다른 우리 적인 공산당을 북에 두고 있는........현실에서 우리 국민은 서로 관용과 용서로써 이해하고 화합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영도자인 이 대통령의 노선에 따라 신생국가 건설에 일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ref>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222페이지</ref> 라는 것이다.
  • 홍진기
         [[4.19 혁명]]을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사건으로 모는 등 [[이승만]] 독재정권 부역 행위의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고, 처음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얼마 안 가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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