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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순이
         고순이의 남편 [[박종원 (종교인)|박종원]]이 [[체포]]될 때, 그녀는 남편과 고통을 같이하기 위하여 [[자수]]하였는데, 다음 날인 [[1839년]] [[10월 27일]]에에 포졸들이 그녀를 체포해 갔다. 그녀는 [[체포]]된 것을 특별한 [[은총]]이라 여겨 [[하느님]]께 감사하였다. 그 부부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였다. 포장은 [[심문]]을 위해 그 부부를 함께 불러냈다. 그는 그들에게 배교하기를 요구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고, 따라서 격심한 [[고문]]을 받았다. 고순이는 여섯 차례 고문을 받았고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약 20일이 지나고, 고순이는 다시 남편과 함께 매질을 당했다. 그녀는 격심하게 얻어맞아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원했다. 그녀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고문이 두려웠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저 같은 [[죄인]]을 축복해 주시므로,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저는 죽기가 이렇게 쉬운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 권득인
         권득인과 그의 가족은 다양한 방법으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반면에 권득인의 아내와 처남은 고문을 참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을 부정하여 석방되었다. 감옥에 남은 권득인은 그들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편지를 썼다. 그의 며느리 [[이 아가타]]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자신의 배교가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시인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그는 격심하게 고문받았고, 포장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그를 때리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호되게 때리다가 그가 두번이나 죽은 줄로 알았다. [[형조]]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사형 선고를 받게 한 죄목 중에 하나는 종교 물품을 만들어 팔았다는 사실이다.
  • 권진이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로 [[7월 17일]]에 권진이는 그녀의 어머니 [[한영이]]와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두 명의 여성은 따로 포졸들의 감시 하에 [[사관청]]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평소 그들의 미모를 탐내던 [[김여상]]이 그들을 납치하려 하자 그들을 동정한 몇몇 포졸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탈출하였고 [[한양]]에 있는 한 교우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먼저 체포된 한 하녀가 포졸들에게 그 두 아가타가 숨은 곳을 말하였고 그들은 다시 체포되었다. 아무리 많은 혹독한 [[고문]]도 그 두 아가타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 김 로사
         [[1838년]] [[1월 16일]] 한밤중에, 포졸들이 그녀의 집을 포위했지만, 그녀는 어떤 우려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며 행복해 했고, [[예수]]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며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옥졸들 마저도 그녀의 태도에 감동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정 (정치)|조정]]의 폭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형조]] [[판서]]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는 그녀의 앞에 온갖 [[고문]] 도구를 늘어놓으며 말했다. "죄인 김노사는 들으라. 우리가 이 도구들을 사용하여 네 다리를 부러뜨리고 네 살가죽을 찢어내기 전에, 너의 [[천주]]를 버리고 천주교도들의 이름을 대라." "판서님! 저는 저의 [[천주]]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미덕을 사랑하시며 죄를 벌하시는데, 제가 어찌 그분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 또한 죄입니다. 오래 전에 저는 그러한 진리를 위하여 저의 피를 뿌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죄인은 내 말을 듣거라. 네 종교의 교리는 어명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 교회에 속하기를 고집하고 있지 않느냐?" "지금 제 [[육신]]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앞서 [[국왕]]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전하 (호칭)|전하]]께서는 어찌 이 단순한 사실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판서는 격노하여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전까지 그녀를 극심하게 고문했다. [[1839년]] [[7월 20일]]에 그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56세 였다.
  • 김 로사 (1784년)
         [[1838년]] [[1월 16일]] 한밤중에, 포졸들이 그녀의 집을 포위했지만, 그녀는 어떤 우려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며 행복해 했고, [[예수]]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며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옥졸들 마저도 그녀의 태도에 감동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정 (정치)|조정]]의 폭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형조]] [[판서]]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는 그녀의 앞에 온갖 [[고문]] 도구를 늘어놓으며 말했다. "죄인 김노사는 들으라. 우리가 이 도구들을 사용하여 네 다리를 부러뜨리고 네 살가죽을 찢어내기 전에, 너의 [[천주]]를 버리고 천주교도들의 이름을 대라." "판서님! 저는 저의 [[천주]]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미덕을 사랑하시며 죄를 벌하시는데, 제가 어찌 그분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 또한 죄입니다. 오래 전에 저는 그러한 진리를 위하여 저의 피를 뿌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죄인은 내 말을 듣거라. 네 종교의 교리는 어명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 교회에 속하기를 고집하고 있지 않느냐?" "지금 제 [[육신]]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앞서 [[국왕]]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전하 (호칭)|전하]]께서는 어찌 이 단순한 사실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판서는 격노하여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전까지 그녀를 극심하게 고문했다. [[1839년]] [[7월 20일]]에 그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56세 였다.
  • 김 루치아
         [[박해]]가 발발하자, 그녀는 세 명의 독실한 여성 교우들과 함께 [[자수]]하여 그들의 [[신앙]]을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들 중 가장 어렸지만 그 모임의 지도자였다. 그녀는 온갖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평정을 일지 않았다. "너같이 고운 여자가 [[천주교]]를 믿을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천주교를 믿습니다." "너의 [[천주]]를 부정하면, 네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저의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이십니다. 제가 어떻게 저의 [[왕|임금님]]이시자 아버지이신 분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수수번을 죽어도 그리할 수 없습니다." "너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 "저는 아직 스무살이 조금 넘었을 뿐입니다. 제 나이의 여자가 결혼을 안한 것은 이상할게 없습니다. 젊은 여자에게 그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너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 "아닙니다. 저는 죽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의 [[주님]]을 부정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네가 말하는 [[영혼]]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육신]]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신성하며 보이지 않습니다." "너는 [[하느님]]을 보았느냐?" "아닙니다. 보지 못했습니다. [[백성]]이 [[왕|임금님]]을 본 적 없다고 해서, 그분이 계시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까? 저는 땅 위의 피조물을 보았으므로, [[창조주]]께서서 계시는 것을 압니다."
         포도대장은 긴 시간 동안 그녀에게 여러 종류의 [[고문]]을 가했으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당혹스러워 했다. 그녀의 침착함을 본 형리들은 그녀가 [[귀신]]에 씌였다고 생각했다.
         {{인용문2|나는 격심한 고문과 고통을 겪고 [[사형]] 판결을 받은 것에 감사하게 생각해. 나는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가 언제인지 몰라.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우리를 따라 [[천국]]으로 와.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를 기다리고 있어.}}
  • 김 바르바라
         [[성녀]] 김 바르바라는 [[감옥]]에서 [[질병]]으로 죽은 [[순교자]]들 중에 한 명이다. [[현석문 가롤로]]의 《[[기해일기]]》에 따르면, 60명 이상의 사람들이 감옥에서 [[고문]]과 [[질병]]으로 죽었다.
         사실, 고문의 고통도 끔찍했지만, 매일의 수감 생활은 보다 더 심각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고문을 견디며 용감히 신앙을 증언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굴복했다. 고작 하루에 두 줌의 밥만이 배식된 죄수들은 종종 그들 밑에 깔려 있는 [[짚]]을 뜯어 먹었다. 또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작은 옥방에 수감되었으므로, [[질병]]이 생기고 빠르게 전염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후일에 [[순교자]]로 죽은 [[다블뤼]] [[주교]]는 감옥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했다.
         {{인용문2|우리 천주교인들은 너무 빽빽히 수감되었기 때문에 다리를 펴고 자는 것 조차 하지 못하였다. 수감 생활의 고통에 비하면 고문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썩은 상처에서 풍기는 악취는 견딜 수 없었고 [[장티푸스]]가 발발해 몇 일 동안 여러 명이 사망하였다.}}
         나라에 [[외국인]] [[사제]]가 입국하므로 인해, 그녀는 더 열렬하고 행복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녀는 [[1839년]] [[3월]]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배교하기와 교우들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3개월의 수감 생활 동안, 고문과 굶주림, 목마름 그리고 질병을 견뎠다. [[1839년]] [[5월 27일]], 그녀는 [[장티푸스]]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감옥의 더러운 [[멍석]] 위에 누워 숨을 거두었다.
  • 김임이
         김임이와 [[우술임]], [[이간난]] 그리고 [[정철염]]은 모두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두 달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들은 감옥에 있는 동안 모두 인내와 사랑 그리고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 네 사람 중 김임이는 가장 용감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들을 격려했다. 관찬 기록(《[[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들은 가혹한 [[심문]]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배교하지 않았다고 한다. [[1846년]] [[9월 20일]]에 그 네 명의 여성과 다른 세 명의 교우 중 일부는 [[장살형]]을 받아 죽었고 나머지는 그것으로 반죽음이 된 상태에서 [[교수형]]을 받아 모두 영광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렇게 김임이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36세였다.
  • 김효임
         === 극심한 고문과 형벌 ===
         그리고 두 자매는 그들이 어째서 다른 교우들을 배신할 수 없고 그들의 종교 서적을 포기할 수 없는지를 설명했다. 그 후 그들에 대한 고문이 준비되었다. 체포되어 [[심문]] 받는 천주교인들을 [[고문]]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형리는 먼저 그들의 온몸을 매질했으며, 그 다음에는 못 박힌 몽둥이로 그들의 [[어깨]]와 [[팔]] 그리고 [[무릎]] [[관절]]을 가격했다. 하지만, 그 자매의 얼굴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포장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더 힘을 내라. 그들을 더 쎄게 때려라!"
         그리고 그들은 [[주뢰]]의 고통을 다섯 차례나 견뎠다. 포장은 매 회의 [[고문]] 사이 마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약속과 감언을 남발하며 그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 두 자매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극심한 주뢰형으로 인해 그들의 다리뼈가 뒤틀렸다. 그 때부터 벌써 그들은 모두 천국의 평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문을 받으면서 종종 "[[예수님]],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님]]"을 부르는 다른 죄수들은 있었지만, 그 자매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그는 난푹한 형리 몇 명에게 자매가 [[학]][[춤]]을 추게 만듦으로 자매에게 굴욕을 줄 수 있는 도구를 맡겼다. 그 형벌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수 손을 등 뒤로 묶고 두 팔 사이로 밧줄을 걸어 올려 죄수를 사람들 보는데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네 명의 형리들이 대나무로 만들어진 회초리를 들고 돌아가며 죄수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면, 죄수는 [[입]]에 [[거품]]을 물고 [[혀]]가 튀어나오며 얼굴이 검푸른 색으로 변했다. 만일 죄수를 신속히 바닥에 내려놓지 않으면 죄수가 이내 죽게 되었다. 여성에게 그것은 특히도 잔인한 고문이었다.
         두 자매는 질질 끌려 한적한 옥방으로 갔고, 옷이 벗겨진 뒤에 위의 방법대로 [[고문]]을 당하였다. 야비한 형리들은 일체의 자비심도 없었다. 그들은 자매가 죽기 직전에만 자매를 바닥에 내려서 잠시 쉬게 하다가 다시 매달아 잔학한 짓을 반복했다. 김효임과 [[김효주]]는 고통과 치욕에도 불구하고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소리를 내지 않았다.
  • 김효주 (종교인)
         === 극심한 고문과 형벌 ===
         그리고 두 자매는 그들이 어째서 다른 교우들을 배신할 수 없고 그들의 종교 서적을 포기할 수 없는지를 설명했다. 그 후 그들에 대한 고문이 준비되었다. [[체포]]되어 [[심문]] 받는 천주교인들을 [[고문]]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형리는 먼저 그들의 온몸을 매질했으며, 그 다음에는 못 박힌 몽둥이로 그들의 [[어깨]]와 [[팔]] 그리고 [[무릎]] [[관절]]을 가격했다. 하지만, 그 자매의 얼굴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포장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더 힘을 내라. 그들을 더 쎄게 때려라!"
         그리고 그들은 [[주뢰]]의 고통을 다섯 차례나 견뎠다. 포장은 매 회의 [[고문]] 사이 마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약속과 감언을 남발하며 그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 두 자매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극심한 주뢰형으로 인해 그들의 다리뼈가 뒤틀렸다. 그 때부터 벌써 그들은 모두 [[천국]]의 평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문을 받으면서 종종 "[[예수님]],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님]]"을 부르는 다른 죄수들은 있었지만, 그 자매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그는 난푹한 형리 몇 명에게 자매가 [[학]][[춤]]을 추게 만듦으로 자매에게 굴욕을 줄 수 있는 도구를 맡겼다. 그 형벌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수 손을 등 뒤로 묶고 두 팔 사이로 밧줄을 걸어 올려 죄수를 사람들 보는데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네 명의 형리들이 대나무로 만들어진 회초리를 들고 돌아가며 죄수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면, 죄수는 [[입]]에 [[거품]]을 물고 [[혀]]가 튀어나오며 얼굴이 검푸른 색으로 변했다. 만일 죄수를 신속히 바닥에 내려놓지 않으면 죄수가 이내 죽게 되었다. 여성에게 그것은 특히도 잔인한 고문이었다.
         두 자매는 질질 끌려 한적한 옥방으로 갔고, 옷이 벗겨진 뒤에 위의 방법대로 [[고문]]을 당하였다. 야비한 형리들은 일체의 자비심도 없었다. 그들은 자매가 죽기 직전에만 자매를 바닥에 내려서 잠시 쉬게 하다가 다시 매달아 잔학한 짓을 반복했다. [[김효임]]과 김효주는 고통과 치욕에도 불구하고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소리를 내지 않았다.
  • 민극가
         민극가는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자 회장으로서 각지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12월에 [[한양]]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과 유혹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신앙을 증언했다. 그는 여러 차례 주리를 틀리고 꼬챙이로 찔리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가 만 대의 매를 맞는다 하여도, 결코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석방]]시킨다면, 저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널리 전파할 것입니다." 형리들은 그를 더 극심하게 매질했다. 그는 [[곤장|대곤]] 40여대를 맞았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줄곧 배교자들의 마음을 돌리고 그들의 신앙을 다시금 고백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였다.
  • 박종원 (종교인)
         [[1939년]] [[기해박해|기해년에 박해]]가 발발하자, 박종원은 집을 떠나 8 개월 동안 수감된 교우들과 연락하는 한편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가 돌보기를 계속하던 중, [[10월 26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격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아서 [[팔]]과 [[다리 (해부학)|다리]]를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고통]]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의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는 [[하느님]]을 위해 고통받는 것을 행복해 했다.
  • 박준규(1925)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민당(1967년)|신민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으로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당한 [[김성곤]]이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대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목요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89년 1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임하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4대 국회가 개원하자 13대 후반기에 이어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여 공직자 재산 공개를 할 때 재산이 문제가 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이후 1995년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그와 손을 잡고 자민련에 합류하여 당 최고고문이 되었다.
  • 박희순 루치아
         궁녀 중에 한 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 소식은 급속히 퍼졌다. 궁궐에서 한 [[칙명|교지]]가 내려졌다. "만일 어떤 현직 궁녀나 전직 궁녀에 대해 불리한 증거가 있다면, 그들은 궐에 신고가 있은 후에 체포된다." 박희순은 궁녀였기 때문에,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포장은 그녀에게서 요구된 답변을 얻어낼 수 없음을 깨닫고 그녀와 그녀의 언니를 [[형조]]로 이송시켰다. 형조 감옥에서 그녀는 각각 30대의 [[곤장]]을 포함한 세 차례의 고문을 더 받았다. 그녀의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으며 다리뼈가 튀어나왔고, 결국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녀는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상처를 닦아내며 말했다. "이제야 저는 [[주 (기독교)|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극심한 상처가 났어도, 그것들은 며칠 내로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보였고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판서와 형졸들은 그것을 요술로 보았다. 죄수들이 배교할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판서는 이렇게 보고했다.
  • 손소벽
         그녀는 그녀의 [[사위]] [[조신철]]이에서 가져와 그녀에게 맡겨 놓은 [[교회]] 물품에 대한 출처의 추긍으로 인하여서도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녀는 일곱 차례의 [[심문]]을 받았고, 세 차례 [[주뢰형]]에 처해졌으며, [[곤장]] 260 여대를 맞았다. 그녀는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으며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 [[하느님]]께 감사했다.
         손소벽은 그녀의 두 살 된 막내딸도 [[감옥]] 안으로 들였다. 하지만, 그곳은 탁한 공기에 어둡고 음식이 부족한데다가, 그녀는 자식이 그녀의 [[순교]] 의지를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딸을 한 친척에게 맡겼다. 그녀는 [[형조]]에서도 3 차례의 [[고문]]을 더 견녀낸 뒤, 사형장에서 [[순교]]하였다.
  • 유대철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아버지 [[유진길]]을 포함한 많은 교우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서는 [[순교]]를 결심하고,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그는 포도청에서 극심한 [[형벌]]과 [[고문]]을 견뎠다. 그는 형리가 그의 [[허벅지]] [[살]]을 뜯어내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빨간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집어 넣으라며 입을 벌리며 당당히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총 14 차례의 형벌을 받았고, 100여대의 [[태형]]과 40여대의 [[장형]]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언제나 만족스럽고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 유진길
         === 체포 및 투옥 그리고 고문 ===
         포장은 그를 [[심문]]했다. "너는 관리로서 어떻게 [[조정 (정치)|조정]]에서 금하는 [[종교]]를 고수할 수 있느냐? [[천주교]] 교인들과 서적들이 어디에 있는지 대거라." 유진길은 아무것도 누설하지 않았고, 따라서 다섯 차례 격심한 [[고문]]을 받아 그의 살가죽이 뜯겨 나갔다.
         그 후 유진길은 두 차례 더 고문을 받았다. 그의 [[살]]가죽이 더 찢겨나갔으며 [[뼈]] 여러 곳이 부러졌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 윤치영
         |경력= [[한국민주당]] 상임위원 <br />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전임위원 <br />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최고위원 <br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고문 <br /> [[경희대학교]] 재단 이사장
         {{인용문|나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입은 다물어졌으며 오히려 더욱 강하여지고 담담하여졌다. 나는 이러한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이 나이를 먹기까지 철없이 살아왔구나 싶은 뉘우침이 들기도 하였다. 더욱이 나도 모르게 침착하여지고 냉정해졌으며 마음과 정신이 맑고 깨끗해짐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듣거나 보지 못했던 인생대학([[형무소]]를 지칭)의 큰 시련장이었던 것이다. 나라 없는 인간은 이렇게 당하다가 맥없이 죽어가야만 하는구나 하는 뼈저린 자각을 했다. 그러나 나의 육신은 한계가 있었다.<br /><br />어려서부터 육상이나 야구, 검도로 단련된 강단있는 몸이지만 저들의 연일 계속되는 모진 고문에는 당할 항우장사가 없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0-133페이지</ref>}}
         몇 차례의 구타와 고문에 계속 기절하자 형사들은 강제로 신체검사를 했다. 신체검사가 있던 날 그는 헌병에 의해 목욕탕이 있는 으슥한 지하 취조실로 끌려갔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구미위원부]]로부터 어떤 목적을 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는가 진술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거절했다.취조실에서 그는 헌병들에 의해 넘어진 뒤 물고문을 당한다.
         ===== 고문과 아사 직전 =====
         그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를 모른다며 잡아떼었다. 그러자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종로구에 있는 그의 집을 뒤져서 그의 서재에서 [[이승만]], [[서재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부원들과 촬영한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독립공채표 등을 찾아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며 부인했고, 일본 형사들은 그에게 고문을 가한다.
         후일 "앞서 말한 물고문은 '해전'이라고 해서 고문치고는 그래도 약과였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매질을 한다든가 물을 먹이는 일은 고문 중에서도 ABC와 같은 초급의 것이다.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공중전'(空中戰)이라고 하는 혹독한 신체적 고통이 계속되는 형벌이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그에 의하면 이것도 밤이 깊어 자정이 지난 시각에 지하실 으슥한 곳에서 행하여지는데, 우선 두 팔을 묶은 뒤 목총을 묶인 팔과 등 사이에 찔러넣고 양 끝을 밧줄에 매서 천장에 끌어올린다.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얼마 안가서 어깨, 팔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오는 것이다. 기절하면 머리에 물을 쏟아붓기도 하고 몽둥이로 쿡쿡 쑤시기도 하며 호령 호령 죄를 자백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끝내 자백을 받아낼 수 없게 되니까 이들은 점점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나중에는 손가락을 비틀고, 침질을 하여 고문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그 뒤 [[1939년]] [[3월]] 초 중부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옥중에서 그는 [[3월 10일]] [[안창호]]의 부음 소식을 접하였다. 그리고 곧 [[경기도경찰청|경기도 경찰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안재홍]]을 추켜세우고 [[여운형]]도 이미 자백을 하였는데 너만 혼자서 버틴다며 회유하였다. 그 뒤 그의 국내활동을 따지더니 교우관계를 추궁당하였다. 일경은 그에게 제시한 흥업구락부의 명단을 제시하며 관련성을 집중 추궁하기도 했다. 그 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3,4개월 수감되어 있었고, [[유길준]]의 아들이자 순종의 동서인 [[유억겸]]도 끌려와 취조당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중부서와 경기도경찰청 등으로 끌려다니며 5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ref name="경향19720408"/> 고문 과정에서 윤치영은 [[흥업구락부]] 회원은 아니지만 흥업구락부의 영향하에 있는 서울 거주자들의 명단을 진술한 적이 있다.<ref name="우남 이승만 연구 p.365">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365-366페이지</ref>
         수감기간 중 윤치영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자신과 최근 교류했던 인물들을 모두 진술했고, [[유억겸]], [[유만겸]], [[안재홍]], [[김병로]], [[곽상훈]], [[허정]] 등이 끌려가 고문당했다.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그는 또 [[흥업구락부]] 예하 3개 그룹에서 포섭하려던 포섭자 명단을 [[일본]] 경찰에 발설하였다.<ref name="우남 이승만 연구 p.365"/> 마침 [[서대문 경찰서]]에 취재차 왔다가 윤치영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매일신문]] 기자 [[서정억]]은 그의 처참한 고문 장면을 목격하고 항의했다가, 취조형사들에게 구타당하였다. [[서정억]]의 구타사건으로 현명건 등 서대문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경기도 경찰부에 항의하기도 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5">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5-136페이지</ref> 윤치영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부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다.
         그의 고문현장을 목격한 [[동아일보]]사 [[서정억]] 기자에 대한 구타사건은 언론계와 [[기독교]]계로 번졌고, 외부로도 알려져 [[일본]] 본국의 언론인과 [[기독교]] 단체에서 총독부에 항의성명서와 항의방문을 하는 사태로 확산되었다.
         고문 후유증은 쉽게 아물지 않았고, 그는 '오랫동안 팔다리를 마음대로 가눌 수 없었고 불길한 예감이나 강박증에 시달림을 당했다. 이후 날이 궂으면 어깨나 팔 여러 곳이 결려서 고생하였다. 그의 거처는 그의 부모가 마련해준 안국동 104번지에 제한되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5"/> 아내의 간호로 몸이 어느 정도 차자 나아 정상을 찾아가던 때에 그는 보호관찰처분을 받고 대화숙에 입소했다.
         그는 [[대화숙]] 보호감찰기간동안 세뇌교육을 거절하며 버텨냈다. 이후 그는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품게 된다. [[일본]]에 대한 반감과 감정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에 의하면 '(고문) 이후 그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입은 다물어졌으며 오히려 더욱 강하여지고 담담하여졌다. 나는 이러한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이 나이를 먹기까지 철없이 살아왔구나 싶은 뉘우침이 들기도 하였다.고 회상했다. 침착하여지고 냉정해졌으며 마음과 정신이 맑고 깨끗해짐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듣거나 보지 못했던 인생대학(형무소를 지칭)의 큰 시련장이었던 것이다.'고 했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조선총독부|총독부]]의 엄한 감시와 고문에 그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다. 그에 의하면 "그들의 무자비한 식민 통치의 폭력 앞에 나는 하루 아침에 짐승이나 벌레만도 못한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나를 죽음의 일보 직전 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나라 없는 인간은 이렇게 당하다가 맥없이 죽어가야만 하는구나 하는 뼈저린 자각을 했다." 라며<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이후에도 한일 외교에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하며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냈다.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친구와 친지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지만 냉담하게 거절당했다. [[조선총독부]]의 [[고문]]과 감시, [[파산]] 이후 경제적인 빈궁함과 주변의 무시, 조롱, 친한 친구와 지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외면 등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회의]]와 함께 [[냉소주의|냉소적]]인 [[인간관]]을 품게 된다. 이후 각종 회식이나 모임 자리에 나가는 일을 스스로 기피하였고, 홀로 독서와 사색에 빠졌다.
         한편 주한국 총영사이자 [[하지]]장군 정치고문이었던 [[랭던]]을 규탄한 익명의 진정서를 보냈다가, 진정서사건으로 [[이묘묵]]의 비판을 받고 이승만의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6819&v=44 '이묘묵' - 네이트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6819&v=44 }}</ref> 쿠데타가 좌절되자 신익희는 일을 폭로한 윤치영을 책망했고, 미군정과 갈등하던 윤치영은 후회한다. [[1947년]] [[2월]] [[안재홍]]이 민정장관이 되면서 [[미군정청]] 재산처분국장으로 복직한다.
         이후 당시 최고회의의장인 [[박정희]]를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토록 한 것도 동산이었다.<ref name="조선19960210"/> 그는 [[여운홍]]과 함께 [[박정희]] 공화당 총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군정 연장을 반대하던 야당에서는 그가 음모를 꾸민다며 비난했다.
         [[서울특별시|서울]]의 인구가 폭증하자 1963~1966년까지 서울시장을 지낸 그는 "서울에는 도시계획을 전혀 하지 않아도 매년 20~30만 명씩 인구가 모이니, 만약 도시계획을 잘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몰려 인구집중을 유발하지 않으려면 아예 도시계획을 안하는 것이 좋다."고 공언하였다.<ref name="대한민국 부동산 40년">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한스미디어, 2007) 279-280페이지</ref> [[서울특별시장]]을 거쳐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에 재입당,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7대 국회의원, 국토통일원 고문,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1968년]] [[5월]] 다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의장에 피선되었다.
         <ref name="Con66"/> 강력한 지도자와 리더십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유신 개헌을 지지하였다. [[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었다.
         [[1976년]]에는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되었고,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두 번 지냈다. [[1978년]] [[한국유신학술원]] 고문을 지냈다. 말년에는 덕수교회 [[장로]]로서 봉사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파]]가 세웠다는 주장에 반박, 학생운동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79년]] [[12월 9일]]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 이 가타리나
         물론, 그들은 배교하라는 포장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고, 극심한 [[고문]]을 견뎠다. 그들은 계속되는 가혹한 [[형벌]]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감옥]]에서 수 주 동안을 몹시 앓았다. 그들은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1839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수일 간격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숨을 거두었다.
  • 이 바르바라
         그녀는 [[서울특별시|서울]]의 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두 [[wikt:고모|고모]] [[이영희 막달레나]]와 [[이정희 바르바라]]에게 양육되며 [[신심]]을 키워갔다. 그녀가 15세 되던 해에 [[기해박해|1839년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났고, [[4월 11일]]에 그녀는 두 고모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녀는 [[포도청]]과 [[형조]] 그리고 다시 포도청을 거치면서, 온갖 혹독한 [[고문]]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배교를 거부하며 [[신앙]]을 [[증언]]하다 [[5월 27일]]에 15세의 나이로 굶주림과 목마름, 고문의 상처 그리고 [[장티푸스]]로 인해 옥사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 이 아가타
         이 이가타는 반복적으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포장은 처음에 그녀가 배교토록 설득했지만, 듣지 않자,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는 폭력도 아무 소용이 없음에 놀랐다. 어린 이 아가타는 온갖 협박과 고문을 용감히 견뎌냈는데,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좀처럼 믿지 못하였다.
  • 이간난
         [[1846년]] [[5월]] [[김대건]] [[사제|신부]]가 [[체포]]되자, 이간난은 포졸들의 수색을 피해 [[현석문]]이 새로 이사간 집에 피신해 있던 중 [[7월 11일]]에 [[현석문]], [[정철염]], [[김임이]], [[우술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관찬 기록(《[[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들은 두 달 이상을 수감되어 있었으며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치 않았다고 한다.
  • 장성집
         포도대장은 그를 상급 [[재판소]]로 이송했다. 장성집은 관청의 아치들이 왜 자신을 아무런 [[심문]]이나 [[고문]]도 없이 내버려 두는지 알려달라고 외쳤다. 이미 그는 정신병자로 오해받고 있었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포장은 끊임없이 배교하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는 포장의 충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곤봉으로 수차례 맞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결국 그는 [[1839년]] [[5월 26일]], 54세의 나이로 [[한양]]에 있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 전경협
         그녀가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고,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그녀가 [[궁녀]]였었기 때문이었다. 포장은 그녀를 [[심문]]했다. "어째서 너는 궁녀가 이교를 믿느냐?" "저의 종교는 이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을 [[천사]]와 사람 그리고 만물의 [[창조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포장은 그녀가 [[천주교]]를 부정하도록 만들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형조]]로 이송했고 거기서 다시 심문이 이어졌다. "궁녀가 이교를 믿는 것은 대역죄이다. 너의 [[천주]]를 부정하고 천주교도들과 천주교 서적들이 숨겨져 있는 데가 어딘지 불어라." "제가 만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그녀는 격심하게 매질을 당해 그녀의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고, 그녀의 뼈 여러 곳이 부러졌으며, 엄청난 양의 피를 흘려 바닥이 흥건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 까지도 그녀에게 감복하였다.
  • 전장운
         [[1839년]]에 그는 [[체포]]되었지만, 그의 신앙의 깊이가 충분히 깊지 않았기 때문에, 극심한 [[고문]]과 [[박해]]는 그를 배교케 만들었고, 그는 [[석방]]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에, 그는 어머니의 격려로 자신의 배교를 뉘우쳤지만, [[고해성사|고해]]를 받아줄 [[사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전장운은 속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866년]] [[3월 1일]]에 포졸들이 그 [[인쇄소]]를 급습하여, 전장운은 [[체포]]되었고, [[목판 인쇄|목판]]들은 몰수되었다. 그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예수]]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고통]]을 견뎌냈다. 그는 [[포도청]]에서 1회의 [[심문]]을 받은 후, [[의금부]]에서 9회의 [[심문]]과 2회의 형문을 받고 [[장형]] 32 대를 맞았고, [[1866년]] [[3월 6일]]에 [[형조]]로 이송되어,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아 그날에 [[서소문]] 밖에서 [[최형]]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는 사형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목]]을 자르는 [[망나니]]가 과거에 자신과 면식이 있는 전(前) 천주교우였음을 알아보았다. [[망나니]]는 전장운의 [[목]]을 자르기를 주저했는데, 남종삼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왕|임금님]]을 따르십시오. 저는 [[하느님]]을 따르겠습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전장운은 [[참수]]되었고, 사흘 후에 [[장례]]가 치루어졌다. 그가 자신의 신앙에 따라 [[순교]]했들 때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 최영이 (종교인)
         포장은 그녀가 배교하고 동료 [[천주교]]인들과 그녀의 집에서 발견된 [[종교]] 물품들의 주인의 이름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최영이는 배교치 않았고, 교우들과 알고 지내기에 자신은 너무 젊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녀는 2 차례의 [[주뢰형]]을 260 여대의 [[태형]]을 받았다. 그녀는 [[형조]]에서도 3 차례의 [[형벌]]과 [[고문]]을 견뎌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 최창흡
         그는 [[1839년]] [[6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의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성물]]들이 발견되어,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일곱 차례의 극심한 [[주뢰형]]과 주장질을 받고 [[태형]] 150대를 맞으면서도 결코 배교하지도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하지도 않았다. 그는 [[형조]]에서도 세 차례를 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심으로써 견뎌냈다. 그는 사형장으로 압송되기 직전에, 한 형졸을 불러 수감되어 있는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울지 말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며 [[순교]]로서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청했다.
  • 트로피코 4/건물
          * 괜찮은 한 해: 소형 비행선에 대통령 각하의 광고판을 만듭니다. 광고문의는 1-800-HAEMIMONT로 주십시오. 광고 수익은 국고에 보태집니다.
         ||이곳은 반역자, 반체제 인사, 반동분자와 같은 각하의 특별 손님들을 위한 "[[고문|놀이]]"시설입니다. 가장 인기있는 "[[고문|놀이]]"는 "[[물고문|물놀이]]"이지요. 몇몇 방문자들은 이곳의 "놀이 시설들"에 너무나도 신난 나머지 며칠이고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랍니다.
  • 허협
         허협은 [[체포]]되어 배교를 거부하였으므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주뢰|주리]]를 틀리었고, 꼬챙이로 찔리는 형벌을 받았으며, [[곤장]] 70 여대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부정치 않았다.
         그러나, 몇 주 후, 허협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배교하였다. 하지만, 그는 즉시 속죄하고, 포장에게 가서 자신은 오직 입으로만 배교하였고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은 여전히 [[천주교]] 신자라고 주장하였다. 형리들은 그에게 배교를 취소하는 표시로 사람의 [[똥]][[오줌]]을 마시기를 요구하였고, 허협은 주저없이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는 [[십자고상]]에 절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그가 한때 배교했던 것을 뉘우치며 [[예배]]하였다.
  • 현석문
         어떤 사람들은 현석문이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문을 면제 받았다고 하였다. 어쨌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관찬 기록(《[[헌종실록]]》)에 따르면, 현석문은 [[1846년]] [[9월 19일]]([[음력 7월 20일]])에 [[참수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관찬 기록(《[[승정원일기]]》)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군문효수형]]도 선고받았다고 전한다.
  • 홍금주
         홍금주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제가 입을 빨간색 옷이 한 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순교자]]가 되고 싶으니까요." 그녀는 [[최 필립보]]의 집에서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녀는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으며 배교할 것과 [[천주교]]인들이 숨은 곳들을 누설하기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형리는 그녀의 주뢰를 틀고난 뒤,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를 감방의 천장에 매달아 놓고서 그녀에게 매질을 가했지만, 그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사흘 후 그녀는 [[형조]]로 이송되었고 세 차례를 다리에 격심한 매질을 당했지만, 형조 [[판서]]에게도 굴복치 않았다. 그녀는 감옥에서 심한 열병을 앓아 거의 죽을 뻔 하였지만, 매우 빨리 회복되었다. 그녀는 [[사형]]이 집행 때까지 근 6개월을 형조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오직 사랑과 봉사로써 다른 수감자들을 돌보았다. 감옥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큰누이처럼 존경했다.
  • 홍병주
         홍병주 [[홍영주]] 형제는 9월에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형리들은 그 형제에게 동료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할 것과 배교할 것을 강요했지만, 형제는 결코 그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형조 [[판서]]가 그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그들을 직접 [[고문]]하지 않았고, 그의 부하들을 시켜 형제가 배교하도록 극심히 고문케 하였다. [[도둑|절도범]]과 [[살인자|살인범]] 등의 다른 수감자들도 형리들을 따라 홍병주와 홍영주 형제를 구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절대 꺾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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