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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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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맹영'''(高孟英, [[1502년]] ~ [[1565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관료이다. 의병장 [[고경명]]의 아버지이고, [[고인후]]의 할아버지이며,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고종후]]의 할아버지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는 영지(英之), 호는 하천(霞川) 또는 하헌(霞軒)이다. 그의 아버지 형조좌랑 고운(高雲) 또한 하천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광주광역시|광주]] 출신.
 
생원(生員)을 거쳐 [[1540년]](중종 35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의 당여가 되었다가의 몰락 이후 반대파의 공격을 당하고 몰락, 유배되었다. 배소에서 사망했으나 아들 [[고경명]], 손자 [[고인후]], [[고종후]]가 [[임진왜란]] 때 순절하고도 20년이 지나 광해군 때 가서 아들 [[고경명]]의 훈공과 손자 고용후의 신원 상소로 복작되었다. 과거 급제 직후에는 행예조정랑으로 기주관을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수관으로도 참여하였다. 뒤에 [[의정부시|의정부]]에 추증되었다.
 
== 생애 ==
[[1502년]](연산군 8) [[전라남도]] [[광산구|광산군]] 압촌마을(현, [[광주광역시]] [[동구 (광주광역시)|동구]])에서 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다. 증조부는 행충좌위부사직을 지내고 사후 증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된 고상지(高尙志)이고 할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贈通政大夫工曹參議諱)에 추증된 고자검(高自儉)이며 아버지는 승의랑,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 추증된 고운이다. 아버지 고운은 [[조광조]]와 친했다는 이유로 [[1519년]] 관직을 잃고 내려와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어머니는 광산이씨(光山李氏)로 이호선(李好善)의 딸이다. 아버지 고운은 그림도 잘 그렸는데 동문선에도 수록되었고, 남화풍의 맹호도를 잘 그렸으며, 백액대호도 등이 현전한다.
 
그의 선대는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에 살았지만 아버지 고자검의 대에 영광에서 [[광산구|광산군]] 압촌마을로 이주해 왔다.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그 뒤 늦게 [[1540년]](중종 35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 행 예조정랑(行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문관(弘文館)에 올랐고, 1546년(명종 1)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7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된 뒤, [[1550년]] [[5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으며 이때 양사에서 [[진복창]] 일파를 논죄할 때 구수담·송순·허자·이준경·이윤경 등을 함께 죄인을 두둔했다며 공격하였으며 7월까지 계속 구수담 등을 논핵하였다. 다음해 10월 28일 특지(特旨)로 옥천군수(沃川郡守)에 발령되었다. 이후 [[관찰사]] 이몽량(李夢亮) 등의 보고가 임금에게 전달되어, 1553년 10월 23일 지방관을 시상할 때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558년]](명종 13) 장령이 되었다. [[1558년]] 이후 장령, 헌납, 집의 등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560년 2월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있을 때 특별히 가자(加資)되고, [[1561년]](명종 16년) [[2월 10일]] [[강원도 (남)|강원도]][[관찰사]]로 발령되었다. 그는 이량(李樑)과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하며 항상 이량의 당여(黨與)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그 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을 발탁, 이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그 또한 병을 핑계로 사퇴하였다가 내직으로 들어왔다. [[1562년]] 중추부[[첨지]]사,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거쳐 그해 8월 [[홍문관]][[부제학]], [[형조]][[참의]], [[10월]] [[병조]][[참의]], [[11월]] [[병조]][[참지]](參知)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명종 18)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절충장군 행 충무위 상호군(折衝將軍行忠武衛上護軍)으로 전직되고, 다시 [[이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 [[8월]] 이 [[심의겸]]과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몰락하자 양사에서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량]], [[윤백원]] 등이 실각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 파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1565년]](명종 20) [[사헌부]]집의 [[홍인경]](洪仁慶) 등이 그에게는 큰 잘못이 없다며 극력 두둔하여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홍인경 등은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그해에 배소에서 사망하였으나 사망일자는 미상이다. 사후 시신은 [[전라남도|전남]] [[광산구|광산군]] (뒷날의 전라남도 광주시)에 매장되고, 부인의 묘소는 바로 뒤에 매장되었다.
 
=== 사후 ===
이후 [[임진왜란]] 때 아들 [[고경명]], 손자 [[고인후]]가 전사하고, [[고종후]]는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는 죄안에 올라 사면복권되지 못했다. [[1612년]](광해군 4) 손자 고용후(高用厚)가 상소를 올려 그의 아들 고경명의 연고로 고맹영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자, 이조와 광해군의 논의 끝에 이로 말미암아 추후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뒤에는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로 추증되었다.
 
아들 고언명(高彦命)의 서녀는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경유]]의 첩이 되었다. [[이경유]]는 [[효령대군]] 이보의 7대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지휘관의 한사람인 [[이경록]]의 동생이다.
 
== 관련 항목 ==
* [[조광조]]
* [[기묘사화]]
* [[임진왜란]]
* [[고경명]]
* [[김백균 (조선)|김백균]]
* [[이량 (조선)|이량]]
* [[고인후]]
* [[고종후]]
* [[신사헌]]
* [[이경유]]
 
== 참고 문헌 ==
* 중종실록
* 명종실록
* 선조실록
* 광해군일기
* 국조방목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장흥 고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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