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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순왕
         |사망일 = [[978년]] 4월 4일 ([[고려 경종]] 3년)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시|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경주시|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931년]] 고려 [[고려 태조|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고려 태조|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ref name="nate01"/> [[고려 태조|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고려 태조|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 고려 귀순 및 멸망 ===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마의태자|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 고려 귀순 후 ===
         [[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또 [[고려 태조|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고려 태조|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경종|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고려 경종|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고려 정종|정종]]·[[고려 광종|광종]]·[[고려 경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ref name="dk0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ref name="dk0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영조 22) 10월 14일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현 연천군 장남면)에서 경순왕의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고 묘비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748년]](영조 24) 1월 29일에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하여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을 유지 보존할 수 있었다.<ref name="dk01"/>
         ** 제1후비: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 일명 [[낙랑공주 (고려)|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첫째 딸
         *** 1남: 김은열(金殷說), 고려조 경주군(慶州君), [[경주 김씨|경주김씨 은열공파]] 시조<ref>부왕 경순왕의 식읍(食邑)을 습봉함 </ref>
  • 계림
         [[신라]]의 시조 [[김알지]]가 탄생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김알지의 후손이 신라의 왕족인 김씨가 되었기 때문에, 계림은 신라 시대 내내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이후 [[고려]], [[조선]]에서도 계림은 한 나라의 시조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져서 존중되었다.
  • 김근 (고려)
         '''김근'''(金覲, ? ~ ?)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신라]]왕실의 후예이다. [[김부일]], [[김부필 (고려)|김부필]], [[김부식]](金富軾), [[김부의 (고려)|김부의]] 형제의 아버지이자 [[김돈중]], [[김돈시]]의 할아버지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慶州). [[경상북도]] 출신.
         [[1080년]](문종 34년) [[호부]][[상서]] [[유홍]](柳洪), [[예부]][[시랑]] [[박인량]](朴寅亮) 등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송나라]]에 갔을 때 그는 [[박인량]]과 함께 시를 지었는데, 그의 시문에 감탄한 송나라 사람들이 직접 그에게 소화집(小華集) 이라는 문집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1086년]](선종 3년) [[예부]][[시랑]]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자위(李子威)와 함께 [[성균관]]시(成均館試)를 관장했고, 뒤에 [[국자감 (고려)|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左) 겸 좌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네 아들 [[김부필]]·[[김부일]]·[[김부식]]·[[김부의]] 모두가 글을 잘하고 관직에 올라 문벌을 형성하였다.
         ** 아들 : [[김부필 (고려)|김부필]](金富弼)
         ** 아들 : [[김부의 (고려)|김부의]](金富義)
         * [[김부필 (고려)|김부필]]
         * [[김부의 (고려)|김부의]]
         * 고려
         * 고려사절요
         [[분류:김부식]][[분류:고려 중기의 문신]][[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고려의 외교관]][[분류:고려의 시인]][[분류:경주 김씨]]
  • 김부식
         |출생지= [[고려]]
         |사망지= [[고려]] [[개성특급시|개경]]
         |국적= [[고려]]
         |학력= 고려 숙종대 문과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은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문신·역사가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5COb_A1075_1_0001702&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f>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고려 인종|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鄭襲明), [[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인 김위영을 [[고려 태조]]가 경주(慶州)의 주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ref>《[[고려사]]》 권97, 열전10, 김부일전.</ref> 부친 김근이 좌간의대부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지위가 높은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김부식은 [[고려 숙종|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 大都護府) 사록(司錄)과 참군 녹사(參軍錄事)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였다. [[1121년]]([[고려 예종|예종]] 16년)에는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고려 인종|인종]]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은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한 일<ref name="고려사 김부식전">《고려사》 권98, 열전11, 김부식전.</ref> 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하였다.<ref name="한국중세사학사">정구복, 《한국중세사학사(Ⅰ)》, 집문당, 1999년.</ref> 또한 [[1126년]]과 [[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사대인(御史大人)·호부상서(戶部尙書)·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하였고,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였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ref name="한국중세사학사"/> [[묘청]] 등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서경천도운동]]은 [[1129년]](인종 7년)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고 인종도 자주 행차하였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은 묘청과 [[백수한]]이 성인이니 모든 정치를 그들에게 물어서 행하자고 하면서 연판장을 돌렸다. 조정 신료 가운데 오직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敱), 승선(承宣) 이지저(李之氐)만이 이를 거부하였다.<ref>《고려사》 권127, 열전40, 묘청전.</ref> 그러나 서경의 서기(瑞氣)를 조작한 일이 탄로나고, 행차 때의 악천후 등이 잇따름에 따라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부식 일파는 [[1134년]](인종 12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ref name="고려사 김부식전"/>
         이후 [[고려 인종|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 [[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의 편찬을 지휘하였으며,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이 편수에 참여하였다. 그 후 집현전 태학사·태자태사(太子太師)의 벼슬과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사(館伴使)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徐兢)이 그의 《[[고려도경]]》에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고려 의종|의종]]) 5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었고, 죽은 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 20권을 지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1123년 중국 [[송나라]]의 국신사로 고려를 다녀 갔던 서긍(徐兢)은 김부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서적 인용|저자=서긍|제목=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연도=[[1123년]]}}}}
         {{인용문|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 년간 ‘[[묘청의 난]]’보다 지나친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왕의 군사가 반역자를 친 전쟁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니….(중략)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이며 진취적으로 진전했을 것이다.|{{서적 인용|저자=[[신채호]]|장=조선역사상(朝鮮歷史上) 일천년래(一千年來) 제일대사건(第一大事件)|제목=《[[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연도=[[1929년]]}}}}
         ** 아버지 : [[김근 (고려)|김근]](金覲, ? ~ ?), 국자좨주(國子祭酒)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ref>출처 : 고려사</ref>
         *** 형 : 김부필(金富弼, ? ~ ?)<ref>출처 : 고려사</ref>
         * [[고려 인종]]
         * [[이고 (고려)]]
  • 김숙자 (1389년)
         [[1389년]](고려 창왕 1)에 [[경상도]] [[선산군|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태어났다.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 유씨이다.<ref name="김숙자"/>
         가르칠 때에는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사서오경]]』·『[[자치통감]]』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고려]]의 유학자 [[길재]]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분류:1389년 태어남]][[분류:1456년 죽음]][[분류:고려 사람]][[분류:과거 급제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
  • 김정미
         * '''[[김정미 (1265년)|김정미]]'''(金廷美)는 [[고려]]의 문신 및 행정관 겸 정치가이자 [[춘양 김씨]](春陽 金氏)의 시조이기도 한 김이(金怡, 1265 ~ 1327)가 [[1325년]]에 개명(改名)한 이름이다.
  • 김정미 (1265년)
          | 출생지 = [[고려]] [[경상북도]] [[안동시]]
          | 사망지 = [[고려]] [[경상남도]] [[합천군]]
          | 군주 = [[고려 충숙왕|고려 충숙왕 왕만]]
          | 직책 = 前 [[고려|고려국]] [[도평의사사|도평의사사부]] 첨의중찬<br/>(前 高麗國 都評議使司府 僉議中贊)
          | 국적 = [[고려]]
         '''김정미'''(金廷美, [[개명]] 前 [[이름]]은 '''김이'''(金怡), [[1265년]] ~ [[1327년]] [[12월 26일]])는 [[고려]]의 [[문신 (관료)|문관 관료]], [[행정|행정관]], [[정치가]]이다. [[춘양 김씨]](春陽 金氏)의 시조이다.
         초명은 '''김지정'''(金之琔)이며 [[고려 충선왕|충선왕]]으로부터 '''김이'''(金怡)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325년]]에 '''김정미'''(金廷美)로 개명(改名)하였다. [[자 (이름)|자]](字)는 열심(悅心), 은지(隱之)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며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경상진안동도 복주(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출생이다. [[12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음서제|음서]]를 통하여 [[관료]]로 등용되었다. 이후 [[고려 충렬왕|충렬왕]], 충선왕, [[고려 충숙왕|충숙왕]] 등 세 임금을 섬겼다.
         {{토막글|고려|정치인}}
         [[분류:1265년 태어남]][[분류:1327년 죽음]][[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고려의 관료]][[분류:음서]][[분류:고려의 저술가]][[분류:안동시 출신]][[분류:불교 이탈자]][[분류:유교 신자]][[분류:춘양 김씨]]
  • 김진
         * '''[[김진 (신라)|김진]]'''(金進) [[신라]]의 [[왕족]]이자 [[김선 (신라)|김선]]의 아들로 [[고려]]조에 예부시랑을 역임하였다.
         * '''[[김진 (서흥)|김진]]'''(金縝) [[고려]]의 [[왕족]]이자 [[헌애왕후|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
         * '''[[김진 (고려)|김진]]'''(金縝, [[1071년]] ~ [[1126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 김천 (고려)
         '''김천'''(金闡)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강릉 김씨|강릉]](江陵)이다. [[김영석 (고려)|김영석]](金永錫)의 3남이다.
         [[고려 의종|의종]](毅宗)조에 내시(內侍)·호부시랑(戶部侍郞)·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세마(洗馬), 내시·전중감(殿中監)을 거쳤다.<ref name=a>『김영석 묘지명』</ref><ref>『고려사』 「의종세가」</ref>
         [[1170년]](명종 즉위년) [[고려 명종|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었고, [[1172년]](명종 2) 1월 서북면병마사행영(西北面兵馬使行營)·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나갔다.<ref>『고려사』 「명종세가」</ref>
         7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장문경(張聞慶) 등 29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ref>『고려사』 「선거지」</ref>, 이후 관직이 추밀원사(樞密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丞旨)에 이르렀다.<ref name=b>『박인석 묘지명』</ref>
         * 증조 - [[김상기]](金上琦, [[1031년]] ~ [[1111년]]) :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예병부사(判禮兵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 문정공(文貞公), [[고려 선종|선종]](宣宗)의 배향공신
         ** 조부 - [[김인존]](金仁存, ? ~ [[1127년]]) : 수태부(守太傅)·문하시중(門下侍中)·판이형부국학사(判吏刑部國學事)·감수국사·상주국, 문성공(文成公), [[고려 예종|예종]](睿宗)의 배향공신
         *** 아버지 - [[김영석 (고려)|김영석]](金永錫, [[1089년]] ~ [[1166년]])<ref name=a/> :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분류:생몰년 미상]][[분류:고려의 문신]][[분류:강릉 김씨]][[분류:무신정권]]
  • 노숭
         '''노숭'''(盧嵩, [[1337년]] ~ [[1414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노씨|광주]](光州).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목은 [[이색]]의 문생이다. [[고려]]조에서 동지밀직(同知密直) 겸 [[대사헌]](大司憲), [[전라남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조선 개국 후 [[조선의 개국공신|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조선 태종]] 때 벼슬이 검교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평(敬平)이다.
         [[분류:1337년 태어남]][[분류:1414년 죽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광주 노씨]][[분류:과거 급제자]][[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개국공신]]
  • 도길부
         | 직책 = 前 고려국 서북면도체찰사 겸 찬성사<br />(前 高麗國 西北面都體察使 兼 贊成事)
         | 출생지 = [[고려]] [[경상도]] [[성주군|성주]]
         | 군주 = [[고려 우왕|고려 우왕 왕우]]
         | 사망지 = [[고려]] [[황해도]] [[해주시|해주]]에서 사형 집행됨.
         '''도길부'''(都吉敷, ? ~ [[1388년]] 6월)는 [[고려]]의 문신 겸 관료이다. 본관은 [[성주 도씨|성주]](星州). 호(號)는 성산(星山)·산남(山南)
         [[고려 공민왕|공민왕]] 치세 시절이던 [[1359년]]에 음서로써 관직 천거된 그는 [[1380년]](우왕 6) 왜구가 경산부(京山府)에 침입했을 때 원수(元帥)가 되어 도순찰사(都巡察使)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의 지휘를 받아 이를 토벌하였다.<ref>[http://db.history.go.kr/id/kr_126r_0010_0050_0020 《고려사》 권126 열전 권제39 변안렬]</ref>
         평소 [[이인임]]을 주군으로 섬긴 그는 [[1382년]] 한양천도 때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면서 자신의 겸종을 보내 가는 곳마다 무리를 이루어 백성의 전려(田廬)를 탈점하였다. 도길부는 [[이인임]]의 인척이라 대언(代言)에 제배되었다가, 오재(五宰)로 승진하였다.<ref>[http://db.history.go.kr/id/kr_126r_0010_0010_0080 《고려사》 권126 열전 권제39 간신(姦臣) 이인임]</ref>
         [[1383년]] 제조정방(提調政房)이 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kr_135r_0010_0030_0090 《고려사》 권135 열전 권제48 우왕(禑王) 9년 3월]</ref>
         1384년 우왕이 총애하던 봉가이(鳳加伊)를 간통하였다는 참소를 받음으로 인하여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좌천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kr_135r_0020_0120_0070 《고려사》 권135 열전 권제48 우왕(禑王) 10년 11월]</ref>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나, [[1388년]](우왕 14) [[이인임]]의 일당으로서 숙청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kr_137r_0010_0010_0030 《고려사》 권137 열전 권제50 우왕 14년 1월]</ref>
         {{토막글|고려|정치인}}
         [[분류:생년 미상]][[분류:1388년 죽음]][[분류:성주 도씨]][[분류:고려의 무신]][[분류:신돈]][[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이인임]][[분류:육군 장군]][[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불교 신자]][[분류:음서]][[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14세기 한국 사람]]
  • 박술희
         |복무=[[태봉]](泰封)/[[고려]](高麗)
         |지휘=태봉/고려
         '''박술희'''(朴述熙 또는 朴述希, ? ~[[945년]] [[10월 24일]]([[음력 9월 16일]]<ref>『[[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 [[고려 혜종|혜종]](惠宗) 2년(945) 9월 16일(기유)</ref>))는 [[신라]](新羅) 말기와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사람이며, [[고려]](高麗) 초기의 [[무신]](武神)이다. [[고려 태조|태조]](太祖)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다.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고려]]高麗) 전기의 무신(武神)이자, 개국공신으로 [[호 (이름)|시호]]는 엄의(嚴毅)이다.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이다.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시대의 문신 [[박제상]](朴堤上)과 [[백결 선생]](百結 先生)의 후손이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박술희는 성격이 호탕하고 전장에서 용전분투하는 맹장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성(현재의 [[당진시|당진]])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고려 태조|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고려 혜종|혜종]]을 정윤(왕태자)로 책봉할 때, [[장화왕후]]가 [[왕건]]의 의중을 박술희에게 전달하게 하여 [[왕무]]가 정윤이 되었으므로, 박술희가 [[왕무]]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35년]]에는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 나주 탈환 작전에 [[홍유]]와 더불어 지원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왕건]]은 그들 대신 [[유금필]]을 파견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고려 태조|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 혜종|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호족 세력과 왕권, 그리고 [[왕규의 난]] 사이에 얽힌 복잡한 권력 투쟁은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었던 박술희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왕무|혜종]]의 세력 기반은 미약하였고, 이복동생인 [[고려 정종 (3대)|정종]]와 [[고려 광종|광종]]은 외할아버지의 세력인 충주 호족 세력과 [[왕식렴]]을 중심으로 한 [[서경 (고려)|서경]] 세력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외척인 [[왕규의 난]](王規)도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태조]]가 아니면 유지되기 힘들었던 [[고려]] 초기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박술희에게는 불운이었다.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박술희는 [[고려 정종 (3대)|정종]]와 그를 지지하는 [[서경 (고려)|서경]] 세력에 의해 [[강화군|강화]] 갑곶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얼마 후 조정의 밀명을 받은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사후 증(贈)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 [[고려 혜종|혜종]](惠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열전에 의하면 그는 육식을 좋아하여 소.돼지고기는 기본이고 두꺼비·개구리·뱀·개미에 이르기까지 즐겨먹는 특이한 식성이 있었다고 한다.
         [[분류:암살된 사람]][[분류:생년 미상]][[분류:945년 죽음]][[분류:신라의 왕족]][[분류:태봉의 군인]][[분류:고려의 무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고려 태조]][[분류:고려 혜종]][[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면천 박씨]]
  • 박원종
         판서 박중선의 아들로 부지돈녕부사 [[박거소]](朴去疎)의 손자이다. 증조부 평양군 박석명(朴錫命)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고려]] [[고려 공양왕|공양왕]]의 조카사위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사육신 [[박팽년]]과는 8촌간이었다. 할머니는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온]]의 딸이며 [[조선 세종|세종]]비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심씨의 셋째형부 [[노물재]]의 본관은 [[교하 노씨|교하]]로 그 아들이 [[조선 세조|세조]] 때의 정승 [[노사신]]이다. 심씨의 넷째 형부 부지돈녕부사 유자해의 본관은 [[진주 유씨|진주]]로, 유자해의 손자가 박원종과 함께 [[중종 반정]]을 거사한 [[유순정]]이다.<ref>유순정과는 서로 진이종 6촌간이 된다.</ref>
  • 배극렴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FFD700> '''[[문하시중|{{{#800080 고려의 문하시중}}}]]''' ||
         1391년 정월에는 중군 총제사로 임명되었다가 평리를 옮겨 가을 8월에 한양의 궁궐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으며, 1392년에는 만호를 지내다가 파직되었고 여름 4월에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고 이후 판삼사사, 우시중 등을 지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익대 보조 공신 문하좌시중 성산백에 봉해졌고 [[조준(조선)|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세자를 세울 것을 청했을 때,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위해 [[무안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자 배극렴은 [[의안대군]]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인정사]]의 시발점'''이 된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만약에 반대를 하고 싶어도 그의 위치상 그러기가 힘들었으니, 당시 같이 의논을 하던 재상들은 그를 제외하고는 전부 문신 출신이었던데다 조준, 정도전, 남은은 물론이고, 그들만큼은 아니어도 김사형 또한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정몽주를 견제하는 등 이성계 측과 같은 길을 걸었던 이로써 그들은 전부 다 조선 건국에 영향을 미친 이들이자 진정한 실세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2인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으니......특히나 조준을 제외하고는 반대하는 이가 없었던데다, 이후의 상황을 보면 진정한 2인자인 정도전과 그의 지지자인 남은은 이성계와 신덕왕후를 지지하였으니......그가 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은 어쩌면 위치 상 2인자인 만큼 대표 격으로 한 것일 수도 있다.
         [[용의 눈물]]에선 태조 왕건의 수달역으로 유명한 [[김시원(동명이인)|김시원]]이 분했다. 고려말은 간략하게 다루고 조선 건국으로 빠르게 넘어가기 때문에 건국 직후 병사한 그의 비중은 크지 않으나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 할 때 영광이라며 기뻐하고 옥새를 얻으러 갈 때 [[정비 안씨|대비 안씨]]를 면전에서 겁박해 벌벌 떨게 만드는 등 매우 충성스러운~~하지만 고려 입장에서는 역적놈~~ 신하로 나온다. 그의 죽음에 이성계도 매우 안타까워했다.
  • 백결 선생
         '''백결'''(百結, [[414년]]<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97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 ?) 또는 '''백결 선생'''(百結 先生)은 [[신라]] 전기의 [[거문고]] 명수이다.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영해 박씨 족보》에 따르면 [[눌지 마립간]]대의 문신 [[박제상]]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형 또는 동생인 박효원(朴孝元)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의 측근인 [[박술희]]의 15대 선조가 된다. 다른 이름은 '''문량'''(文良)이다.
  • 변수 (1861년)
         할아버지는 변준(邊準)이고 아버지는 역관 변진환(邊晉桓), 어머니는 강릉 최씨이다. [[고려]] 말기의 무신 [[변안열]]의 아들 희정도총제부총제(喜靖都摠制府摠制) 변이(邉頤)의 후손으로, 변이의 아들 호군공 상근(尙覲)이 그의 선조이다. 상관의 동생 상회(尙會)의 아들로 그와 이름이 비슷한 원천군[[변수 (1447년)|변수]]는 그의 방계 선조가 된다.
  • 설총
         안타깝게도 이런 설총의 노력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바는 거의 없다.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대 명문장가로 꼽혔지만 이미 [[고려]] 중엽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설총의 문장이나 저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다만 [[신문왕]][* [[골품]]을 배제한 순수 혈연으로 보면 신문왕과 설총은 고종[[사촌]] 형제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화왕계]]가 남아서 오늘날까지 전한다.
         [[조각]]에도 조예가 있었는지 원효가 죽은 후에 원효의 유골을 모아서 거기에 흙을 붙여 [[원효회고상]]이란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의 시에 의하면 원효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뵈었다라고 하는 걸 보면 대단히 생생한 조각상이었던 모양이다.
         [[고려]]시대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비교적 문인의 성향이 강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관련 일화까지 조작한 것으로 보이는 최치원과는 달리, 설총의 경우는 유학자적 권위를 인정해서 배향이 큰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성혼
         [[고려]]가 망하자 은거한 [[성여완]](成汝完)의 후손으로, [[함흥차사]]로 유명한 [[성석린]](成石璘)의 종6대손이며 그의 동생인 예조판서 [[성석인]](成石因)의 6대손이었다. 종6대조 [[성석용]]은 [[성삼문]]과 [[성담수]], [[성담년]]의 증조부이며 [[이기 (1476년)|이기]]의 외고조부였다. 5대조 성억은 [[좌찬성]]이었고, 고조부 [[성득식]]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증조부 충달은 현령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사숙공 [[성세순]]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 소격서
         [[고려]] 시절에 복원궁(福源宮), 소격전(昭格殿) 등의 도교 관청이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1392년 11월에 복원궁 등을 없애고 소격전만 남게 된다. 한양 천도 이후 1396년에 종로구 삼청동에 소격전이 건립된다. 1466년(세조12년)에는 소격서로 개칭된다.
  • 소학
         소학은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매우 중요시되었다. [[천자문]]과 함께 [[서당]]에서 배우는 기초적인 교재로 쓰였다.
  • 솔롱고스
          * [[원나라]] 때, [[고려]] 여인들을 [[공녀]]로 맞이하면서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에서 불렀다. 예를 들어, [[기황후]]의 몽골어 이름이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라는 것이다. [[색동저고리]]를 입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름이 나왔다.
  • 송익필
         그의 선조는 [[고려]] 때 상장군을 지낸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松禮)이다. [[고려 원종]]조에 [[상장군]]을 지낸 인물로 [[무신정권]] 말에 국왕 원종의 편에 서서 무신정권 인사들을 타도하고 국권을 왕에게 환원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후 송염은 낭산부원군이었고 송운은 개성원윤을 역임했고 송선은 여량군을 역임했다. 그는 송송례와 송운의 후손이었으나 그 뒤 그의 가문은 점차 몰락하여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다. 증조부는 송자근쇠<ref>또는 송자근금으로 부른다.</ref> 이고 할아버지는 갑사(甲士) 출신으로 [[직장]](直長)을 지낸 송린(宋麟, 또는 宋璘)이다.
  • 수비 권씨
         |배우자 = [[고려 충숙왕|충숙왕]]
         |왕조 = [[고려 왕조]]
         |출생지 = [[고려]]
         |사망지 = [[고려]]
         |국적 = [[고려]]
         '''수비 권씨'''(壽妃 權氏, ? ~ [[1340년]] [[4월 29일]]/[[음력 4월 3일]])은 [[고려]]의 제27대 [[왕]] [[고려 충숙왕|충숙왕]]의 후궁이다.
         [[안동 권씨|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진 [[권준 (고려)|권준]](權準)<ref name="jun">[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0285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권준〉항목]</ref>, 아버지는 좌상시(左常侍)를 지낸 [[권렴]](權廉<ref>원래 권형<權衡>이었으나 후에 권렴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사》권107〈열전〉권20 참고</ref>)이며, [[본관]]은 [[안동 권씨|안동]]이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8870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수비권씨〉항목]</ref> 권렴은 딸이 [[고려 충숙왕|충숙왕]]의 비로 책봉되자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지고, 나중에는 벼슬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까지 이르렀다.<ref name="ryeom">[http://100.naver.com/100.nhn?docid=24279 네이버 백과사전 〈권렴〉항목]{{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24279 }}</ref> [[고려 충혜왕|충혜왕]]의 제3비 [[화비 홍씨]](和妃 洪氏)는 고종 사촌이다.<ref>화비는 권준의 외손녀, 수비는 권준의 친손녀이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91059 《동국통감》권44 고려기 1342년] 참고</ref>
         권씨는 원래 밀직상의로 있던 [[전신 (고려)|전신]](全信)의 아들의 아내였다. 하지만 [[권형(고려)|권형]]은 전씨 집안이 불초(不肖: 못났다)하다는 이유로 권씨를 이혼시키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권형(고려)|권형]]은 [[1335년]](충숙왕 복위 4년) [[고려 충숙왕|충숙왕]]의 내지를 받아내어 딸을 이혼시키고 왕의 후궁으로 보냈다.<ref>《고려사》권89〈열전〉권2</ref> 이에 권씨는 같은 해 [[9월 3일]]([[음력 8월 15일]]) 비(妃)로 책봉되어 '''수비'''(壽妃)가 되었다.<ref>乙丑 納前左常侍 權衡女, 冊爲壽妃. 《고려사》권35〈세가〉권35</ref>
         남편 충숙왕이 사망한 후인 [[1339년]](충혜왕 복위년) [[6월 19일]]([[음력 5월 12일]]), 권씨는 자신의 아들뻘인 [[고려 충혜왕|충혜왕]]에게 강간을 당했다. 당시 충혜왕은 서모인 권씨나 [[경화공주]](慶華公主) 뿐만 아니라, 얼굴이 예쁘면 혼인 여부나 신분 등에 상관 없이 닥치는대로 사람을 시켜 빼앗아 강간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전혀 없었다.<ref>{{웹 인용 |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2Fitkcdb%2Ftext%2FnodeViewIframe.jsp%3FbizName%3DMK&seojiId=kc_mk_a004&gunchaId=av025&muncheId=02&finId=009&NodeId=&setid=423246&Pos=1&TotalCount=8&searchUrl=ok |제목=《고려사절요》권25 1339년 |확인날짜=2018-10-3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116083233/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2Fitkcdb%2Ftext%2FnodeViewIframe.jsp%3FbizName%3DMK&seojiId=kc_mk_a004&gunchaId=av025&muncheId=02&finId=009&NodeId=&setid=423246&Pos=1&TotalCount=8&searchUrl=ok |보존날짜=2014-01-16 |깨진링크=예 }}</ref>
         [[1340년]](충혜왕 복위 원년) [[음력 4월 3일]] 사망했다.<ref>夏四月 乙酉 壽妃卒. 《고려사》권36〈세가〉권36</ref> 무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남편 [[고려 충숙왕|충숙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권렴도 같은 해 사망했는데, 당시 권렴의 나이가 불과 39세<ref name="ryeom" /> 였던 것으로 볼 때, 그녀는 꽤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할아버지 : [[권준 (고려)|권준]] (權準, [[1281년]] ~ [[1352년]]<ref name="jun" />)
         *** 남매<ref>子鏞·鉉·鎬·鈞·鑄. 《고려사》권107〈열전〉권20 - 권렴</ref> : [[권용]] (權鏞, 생몰년 미상<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0225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권용〉항목]</ref>)
         *** 첫번째 남편 : 이름미상 - [[전신 (고려)|전신]](全信)의 아들
         *** 두번째 남편 : [[고려 충숙왕|충숙왕]] (忠肅王, [[1294년]] ~ [[1339년]], 재위 : [[1313년]] ~ [[1330년]], [[1332년]] ~ [[1339년]]) - [[고려]]의 제27대 [[왕]]
         * [http://db.history.go.kr/KOREA/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사 홈페이지]
         {{고려의 왕후와 왕비}}
         [[분류:생년 미상]][[분류:1340년 죽음]][[분류:안동 권씨]][[분류:안동시 출신]][[분류:고려의 왕비]]
  • 신비
         * [[신비 염씨|신비]](愼妃)는 [[고려]] [[고려 공민왕|공민왕]]의 후궁이다.
  • 신성왕후
         |전임자 = [[신정왕후 (고려)|신정왕후]]
         |배우자 = [[고려 태조|태조]]
         |왕조 = [[고려]]
         '''신성왕태후 김씨'''(神成王太后 金氏) 또는 '''신성왕후'''(神成王后)는 [[신라]]의 왕족 출신 [[고려]]의 왕후로 [[고려 태조]] 왕건의 제5왕후이다. [[신라]] [[신라 문성왕|문성왕]]의 후손으로 [[신라 경순왕]]은 그의 사촌 오라비였다. 그녀는 [[고려 안종|안종 왕욱]]의 생모이기도 하다. 본래는 왕후가 아니었으나, [[1010년]] [[고려 현종|현종]]에 의해 왕후로 추존되었다. 성은 김씨,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慶州)이다.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이며, [[신라 문성왕|문성왕]]의 5대손이며, [[신라 경순왕|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 그녀가 태조의 다섯 번째 왕후가 된 것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935년 11월 직후부터 936년 초기가 될 것이다.
         935년 11월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고려 태조는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냈다. 왕건은 “지금 왕이 나라를 과인(寡人)에게 주니 그 선물이 크도다. 바라건대 신라의 종실(宗室)과 결혼하여 생구(甥舅)의 친밀함이 오래 가고자 하노라.”라고 하여, 고려의 사신은 경순왕에게 태조가 신라 종실과의 혼사를 원한다는 사실을 전했고, 이에 경순왕은 “우리 백부(伯父) 김억렴(金億廉)에게 딸이 있어 덕(德)과 용모가 쌍미(雙美)한지라 이가 아니면 내정(內政)을 구비(具備)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고려로 시집보냈다.
         신성왕태후 김씨의 소생으로는 안종(安宗)으로 추존된 [[고려 안종|왕욱]](王郁)이 있는데, 그는 제5대 국왕 [[고려 경종|경종]]의 제4왕후 [[헌정왕후]] 황보씨와 정을 통해 제8대 국왕 [[고려 현종|현종]]을 낳았다.<ref>《고려사절요》</ref> [[1008년]] 현종(顯宗)이 즉위하고 [[1010년]] 왕후로 추존하여 시호를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라 하고 능호는 정릉(貞陵)이라고 하였다. 원당은 [[경기도]] [[장풍군]]에 있는 현화사이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1400&content_id=rp070314000001&print=Y 문화콘텐츠닷컴 〈현화사〉]</ref>.
         *** '''남편''' : 제1대 [[고려 태조|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 877~943 재위: 918~943)
         **** 아들 : 추존 [[고려 안종|안종]] 효의대왕(安宗 孝懿大王, ?~996)
         **** 며느리 : [[헌정왕후|효숙왕태후]] 황보씨(孝肅王太后 皇甫氏, 965/966~992, [[고려 경종|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 손자 : 제8대 [[고려 현종|현종]] 원문대왕(顯宗 元文大王, 992~1031 재위: 1009~1031)
         * [[고려 안종|안종]]
         {{고려의 왕후와 왕비}}
         [[분류:생몰년 미상]][[분류:신라의 왕족]][[분류:고려의 왕비]][[분류:고려의 왕태후]][[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분류:고려 태조]]
  • 아기발도
         [[고려]] 말 [[한반도]]를 침공한 [[왜구]]들 중 한 무리의 장수였던 인물이다. 음차로는 '아지발도'라고 한다.
         이성계가 고려 정계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한 부분 때문에 [[조선]]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 이름이 회자되었으며, 이 때문에 고려를 멸망시킨 주역인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토벌당한 아기발도에게 투영하여 그를 동정적으로 보는 설화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문서 참고.
  •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고려]] 말기에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였던 [[왜구]]의 장군 [[아기발도]]가 대표적인 아기장수 설화의 하나인 [[아기장수 우투리]]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전에는 [[인터넷]] 상에서 간간히 주장되던 이야기였으나, 2016년 1월에 이를 다룬 논문이 나온 바 있다.
          * 아기발도는 본명은 불명하며 한 왜구의 장수에 대해서 고려인들이 붙인 별명으로, 아기는 '아이'라는 뜻으로 적이 [[소년]]이라는 것을 뜻하며, 발도는 몽골어 '바토르'를 음차한 것인데 '용사'라는 의미가 있다.[* 고려 말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몽골어가 사회에서 흔히 쓰였다. 바토르라는 말은 몽골사에서 자주 등장하며, 현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볼 수 있다.] 즉, '아기발도'는 그 의미가 '아기장수'와 매우 유사하게 된다.
  • 아자개
         ||<tablealign=right><table bordercolor=skyblue><skyblue> '''국적''' ||<#ffffff>[[신라]] → '''[[고려|고려(高麗)]]''' ||
         ||<skyblue> '''거점지''' ||<#ffffff>신라 사불성(고려 상주) ||
         이를 토대로 진흥왕의 [[현손]]이라고 써 있는 계보가 있지만 다른 것을 떠나 진흥왕은 576년 사망했고 아자개는 900년경에 활동했으니 300년이 넘게 나는 시대 차이상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면 당연히 아자개가 진흥왕의 현손일 수는 없어서 이 계보는 정확하지 않다. 후백제의 정통성을 위해 아자개의 혈통이 조작되었다는 게 유력하지만[* 당장 [[태조(고려)|왕건]]도 [[당숙종]]의 후손이라고 신빙성 거의 제로에 가까운 자칭을 했다.] 실제로 아자개의 가문이 신라 외척의 후손이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후에 견훤이 아닌 [[태조(고려)|왕건]]에게 상주 땅을 바쳤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여 [[고려]]로 오는 아자개를 맞이할 적에 마치 '''아버지를 모시듯이''' 우대하였으며, 아자개의 환영식을 열 때에는 상석의 자리를 놓고 다투던 두 대신들을 크게 꾸짖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이는 아자개의 상주가 신라와 후백제 사이에 근접하여 상당한 전략/전술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라이벌의 아버지가 귀부했으니 후백제를 까기 위한 좋은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작중에서의 생몰년은 837년 ~ 935년.[* 견훤이 고려에 귀부할 즈음에 박술희가 아자개를 찾아가 수백년 된 산삼을 선물하는데, 이 때 아자개는 크게 기뻐하며 '그럼 날더러 백 년을 더 살란 얘기야? 내 나이가 백 살이 가까워! 구십 하고도 아흔이야.'~~그럼 180세??~~ 라고 한다.]
         [[고려]] 귀부를 환영하며 왕건이 벌인 연회에서 즐거워하는 아자개옹.
         왕건이 즉위한 이후 갑자기 병(육종)에 걸려서 고생할 때[* 이때 의원들이 치료하는 씬에서 '''"아갸갸갸갸갸갸갸갸"''' 하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었었다고(...)] 왕건이 박술희를 통해 보내온 천년 묵은 산삼을 먹고 운좋게 완전 회복한다. 그것도 그냥 천년 묵은 산삼도 아니고 '봉삼'이라고 따로 이름까지 붙어있는 [[네임드]]였다. 이 때 견훤도 부랴부랴 전국을 수소문하여 오백년 묵은 산삼을 구하여 최승우를 통해 보냈으나 이미 아자개는 천년 산삼을 먹고 회복한 뒤였다(…) 아자개는 최승우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구박해서 보내버린다.[* 아자개는 내심 견훤이 자기를 찾아오길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다리던 견훤은 오지 않고 그 신하들만 오는데다가 (남원부인의 말처럼) 고려에서 산삼을 보낸 탓에 마지못해 부랴부랴 찾아 보낸 것으로 보이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아자개는 고려로 귀순하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견훤은 군대를 상주 지역으로 출병시켰지만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고 아자개는 철원으로 떠난다. 그 동안 피까지 토하면서 속을 썩여오던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결국 '''"아버님! 아버님! 정녕 우리가 부자간이 맞사옵니까!!"'''하고선 '''피를 토하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리고 고려 귀순 이후 수십년을 더 사는데 견훤이 폐위당할 때쯤 다시 한번 더 등장한다. 고려가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을 때 그대로 철원에 남았는데, 귀는 먹긴 했지만 그래도 정신은 멀쩡한 데다 견훤의 계모와는 애정이 두터운지라 그렇게 초야에 묻혀 사는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고려는 견훤과 접촉하고자 박술희를 아자개에게 보내는데, 이때 박술희는 대주도금과도 잠깐 재회하였고[* 그녀는 불교에 귀의하여 무상스님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스님이 된 상태에서 그녀와 재회한 박술희의 씁쓸해하는 표정이 안습하다.] 그 후 아자개에게 견훤의 폐위 소식을 알려준다.
         100세에도[* 견훤이 사망할 시점에 70세였으니 이로써 둘의 나이 차는 30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견훤이 장자임을 감안하면 당대로선 상당히 늦게 자식을 본 셈.] 정치적 감각은 대단하여 견훤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예전의 기상을 찾기도 했다. 견훤이 신검에게 쫒겨난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황제랍시고 거들먹거리더니 꼴 좋게 됐다며 웃다가. .. 곧바로 통곡을 한다. 성까지 바꾼 아들이지만, 그래도 황제라서 아무 걱정 안하고 있었는데 너무 불쌍하다며 눈물을 펑펑 쏟는다. 연을 끊고 사는듯 해도 여전히 견훤을 아들로 생각하고 있단 증거라, 사실 견훤이 궁궐을 짓는다는 소식에 '그놈이 제법 하긴 하는 모양이다' 라며 내심 뿌듯해 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30회), 고려로 귀순했을때 그를 상보로 모시는 왕건과 함께 말을 타면서 '고려 왕과 백제 왕이 다 내 아들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 등 이런 모습은 은근히 비춘 적이 있다. 아예 작중 인물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애증이 섞인 거라고 하기도 한다. 일생동안 견훤과 대립했던 계모마저도 견훤의 소식을 듣자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며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아자개 본인 입장에서도 결과적으로 ~~드라마엔 나오지도 않은~~ 막내를 뺀 견훤 소생의 모든 손자를 잃은 셈이 되었으니...
         >"아들아, 황제가 되어 그동안 백제를 잘 다스려 왔음을 안다. 허나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내가 너를 미워했던 것은 니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의 핏줄을 부정하고 갔기 때문이었다. 이 늙은이는 어느덧 백 살이 다 되어 간다. 그 동안 니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허나 견훤아, 너의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게 되었구나. 내가 너를 떠났는데, 너의 아들이 또한 너를 버렸다 한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이냐. 어차피 너는 자식도 잃었고, 나라도 잃었다. 고려 황제는 덕이 있는 사람이야. 너의 일신을 부탁하여 보마.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재미있는 것이 아자개의 재등장 이후 왕건, 경보 대사, 장화왕후와 충주부인(신명순성왕후) 등은 아자개 상부가 아직도 살아계셨느냐며 감회에 젖는 장면을 보인다.[* 사실 이건 아자개라는 캐릭터가 수십화 동안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그것도 꽤나 중요한 역으로 재출연하는 것을 보정(?)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사소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작중 오류라고 해도 될 만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를 할 때 박술희를 따라가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던 아자개가 끝내 철원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박술희는 직접 아자개를 만나는 내내 눈물을 지었다. 이 때 왕건은 아자개의 장수를 기원한다며 다시 수백년 된 산삼을 박술희를 통해 전달했지만, 아자개는 199화에서 견훤이 고려로 귀순한 직후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CNTV버전에선 이 장면이 편집.) 견훤의 환영 연회 직전에 복지겸과 내군 부장의 대화가 잠시 나오는데, 일부러 밤낮으로 머루주를 계속 마시고 죽었다고. 이에 복지겸은 노환으로 운명한 것이라며, 불문에 부치라고 명령한다. 물론 극중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 인물로서의 아자개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명이다. 아마도 정황상 대우는 받고있지만 국가의 지도자에서 몰락해버린 늙은 아들을 다시 직접 재회하기에는 괴로웠던 모양이다.[* 아자개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만 했다. 자신이 보낸 편지에도 이야기 했듯 그 오랜 세월 내내 아들과 제대로 화합한 적도 없었고, 내내 발목을 잡다시피 했다. 그런 아들이 다 늙고서 집안일 때문에 몰락해 적국이었던 고려로 귀부를 하러 오는데 마음이 편할리 없었을 것이다.]
         방영 당시 견훤까지 고려로 넘어온 시점에서 견훤이 철원에서 아자개를 만나는 장면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작진에 따르면 본래 견훤과 아자개가 대면하여 아자개가 '''이놈아. 아들이란 원래 다 그런 놈들이다'''라고 말하는 장면까지 구상했다고 하지만 지나친 역사왜곡을 피하기 위해 결국 [[http://pic.joinsmsn.com/photo/article/article.asp?Total_ID=1090997&p_cat=2|집어넣지 않았다고 한다]]. 드라마 마지막의 극적인 장면을 기대한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일 수도 있겠으나 반대로 제작진이 지나친 역사왜곡을 피하려고 노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그렇게 방영했다면 끝물인 드라마 불씨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선은 지켰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드라마)]],[[근초고왕(드라마)]],[[기황후(드라마)]]라고 나온 것들을 보면--
  • 안축 (고려)
         '''안축''' (安軸, [[1282년]] ~ [[1348년]]) 은 [[고려]]의 [[학자]]이다. 자는 당지, 호는 근재, 본관은 [[순흥 안씨|순흥]]이다. [[충숙왕]] 때 원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려졌으나 가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성균학정을 거쳐 우사의 대부에 이르렀다. 충혜왕 때 안렴사로 있을 당시 <관동와주>를 지었다. 그 후 [[충목왕]] 때 감춘추관사까지 승진하여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남겨 그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근재집》, 《한림별곡》등이 있다.<ref name="gwe" />
         <ref name="gwe">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n.d.).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고려시대 문학/고려 후기#안축|“안축”]].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017년 11월 26일 확인함. </ref>
         [[분류:1282년 태어남]][[분류:1348년 죽음]][[분류:고려의 학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고려의 시인]][[분류:고려의 음악가]][[분류:순흥 안씨]]
  • 양녕대군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 [[민변 (고려)|민변]]
  • 영주시
         부석면의 봉황산 자락에는 그 유명한 [[부석사]]가 있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최순우 작가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배경)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대 문화재인데, 이 좌상은 향토색이 강조되고 인체비례적 아름다움에서는 약간 떨어지는 ~~저퀄~~고려 불상과는 달리 [[신라]] 불상의 양식을 계승해 균형미를 갖춘 불상으로 평가된다.
  • 예안 김씨
         '''예안 김씨'''(禮安 金氏)는 [[한국의 성씨 목록|한국의]] [[한국의 성씨와 이름|성씨]]이다. 시조 '''김상'''(金尙)은[[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혹칭 '''[[선성 김씨]]'''(宣城 金氏)라고도 한다.
         시조 '''김상'''(金尙)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으로, [[고려]] 때 예안호장(禮安戶長)을 지냈다. 선성(宣城)은 예안(禮安)의 옛지명으로, 후손들이 선성(宣城)을 본관으로 하였고,현재 예안(선성) 김씨라고 부르고 있다.
  • 오경석
         그는 대대로 8대나 역관을 하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인유]](吳仁裕)의 후손으로, [[오인유]]는 [[고려]] 때 검교[[군기감]]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대대로 [[과거 제도|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15대 오인량(吳仁亮)이 역과에 응시했다가 합격해서 역관이 되었고 [[사역원]] [[판관]]올랐다. 오인량의 동생 [[오제량]](吳悌亮)은 [[과거 제도|무과]]에 응시하여 [[훈련원]] [[첨정]]을 지냈으나 그의 아들 오정화(吳鼎和)는 [[의과]]에 응시하여 의관으로 [[활인서]] 별제를 역임했다. 17대 오지항(吳志恒)은 역과에 응시하여 다시 역관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 대대로 역관을 지냈다.
  • 오세창
         이후로는 서예가, 전각가(篆刻家) 및 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주로 활동했다. [[1922년]] 초대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을 때 서예 부문에서 수상했고, 서화사 연구에도 뛰어들어 아버지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역대 [[한국]]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 (槿域書畫徵)》(1928)과 [[고려]]∙[[조선]]의 서화들을 직접 찾아서 사진촬영 및 자신이 소장한 고미술품을 합친 화보집 《근역서화휘(槿域書畫彙)》를 출간하였다. 근역서화징은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들을 총망라한 인명 사전이다. 그 밖에도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묵》, 《근역인수》, 등을 펴내었다.
  • 용산원자
         |왕조 = [[고려 왕조]], [[원나라|원 황조]]
         |아버지 = [[고려 충숙왕|충숙왕]]
         |국적 = 고려
         '''용산원자'''(龍山元子, [[1325년]] ~ [[1341년]])는 [[고려]] 시대의 왕족이다. 고려의 제27대 [[왕]]인 [[고려 충숙왕|충숙왕]]과 [[조국장공주]]의 아들이다.
         [[성씨|성]]은 [[왕씨|왕]], [[본관]]은 [[개성 왕씨|개성]]이며, [[이름]]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고려 충혜왕|충혜왕]], [[고려 공민왕|공민왕]] 등과 이복 형제간이다. 용산원자의 어머니 조국장공주는 [[원나라]] 황족 출신으로, [[원 순종]]의 아들인 위왕 [[에무게]]의 딸이다. 1324년(충숙왕 11년)에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그와 혼인하였다<ref>《고려사》권89〈열전〉권1 - 조국장공주</ref>.
         용산원자는 1325년(충숙왕 12년) 음력 8월 15일, 충숙왕과 조국장공주가 [[한양]] [[용산구|용산]]에 행차하였다가 낳은 아들이다. 원자의 [[호 (이름)|호]]는 출생지인 용산을 따서 '''용산원자'''(龍山元子)라고 하였다<ref>《고려사》권35〈세가〉권35 - 충숙왕 12년 8월 - 왕과 공주가 한양 용산의 언덕에서 묵다</ref><ref name="Yongsan">《고려사》권91〈열전〉권4 - 용산원자</ref>. 그러나 조국장공주는 아들을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그 해 음력 10월 20일, 용산의 행궁에서 귀경하지 못한 채 1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ref>《고려사》권35〈세가〉권35 - 충숙왕 12년 10월 - 공주가 죽다</ref>.
         한편 용산원자 역시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어머니의 나라인 원나라에서 1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후 용산원자의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그 장례를 치렀으며<ref name="Yongsan" />, 매장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 부왕: [[고려 충숙왕|충숙왕]] (忠肅王, 1294년~1339년, 재위:1313년~1330년, 1332년~1339년)
         * [http://db.history.go.kr/KOREA/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사 홈페이지]
         {{고려의 왕자}}
         [[분류:1325년 태어남]][[분류:1341년 죽음]][[분류:고려의 왕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 용산구]]
  • 우천석
         '''우천석'''(禹天錫)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단양 우씨|단양]](丹陽)이다. 우중대(禹仲大)의 3남이고, [[우탁]](禹倬)의 숙부이며, [[우인열]](禹仁烈)과 [[우현보]](禹玄寶)의 증조이다.
         [[1273년]](원종 14)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재직 중, 서해도(西海道)의 전함이 많이 파선되었다는 이유로 원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의 문책을 받고 투옥되었다.<ref>『고려사』 「원종세가」</ref>
         [[충렬왕]](忠烈王)조에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충렬왕 6) 감찰잡단(監察雜端) 진척(陳倜)을 비롯한 감찰사(監察司)의 관원들이 유배 또는 파직되자 낭장에서 감찰잡단으로 승진했다.<ref>『고려사』 「충렬왕세가」</ref>
         [[분류:생몰년 미상]][[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문하시중]][[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단양 우씨]][[분류:무신정권]][[분류:삼별초]]
  • 운제부인
         운제부인은 [[신라]]의 2대 군주 [[남해 차차웅]]의 부인으로 아루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해왕과의 사이에서 [[유리 이사금]]과 [[아효부인]]을 낳았다. 사후에는 신격화되어 무속 신앙의 주신 중 하나가 되었다. [[운제산]] 또는 [[선도산]]에 산다 해서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 또는 선도성모(仙桃聖母)로 불리며, [[고려|고려시대]] 영일현(지금의 [[포항시]])의 서쪽에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에 여기에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하였다. 운제산은 현재 [[포항시]] 남구 오천읍과 대송면 사이에 있다.
  • 울진군
         [[신라]] 시대에는 [[명주]], [[고려]] 시대에는 동계, [[조선]]~[[대한민국]] 시대(1962년)까지 1000년이 넘도록 강원도 관할이었고, 현재 [[경상도]](경상북도) 관할로는 2014년 현재 겨우 50여 년이 되었다. 경상도 다른 지역보다 강원도 정서가 좀 더 강한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도급 행정구역의 경계지역은 완전히 그 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것도 강원도같이 도내에서도 지역차가 확고한 지역이라면.
         고려시대 이래로 울진현과 평해군으로 나뉘어져 존속해왔으며, 1895년 [[23부제]]의 시행으로 강릉부 울진군과 평해군으로 편제되었다. 1년 뒤 13도제의 도입과 동시에 [[강원도]]로 환원되었다.
  • 원효
         >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고려]] 의 원효에게 내린 시호. 자기 동생이자, 해동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의 진언에 따른 것이다. 의천이 원효를 높인 이유는 본인이 추진하는 불교계 통합에 원효의 사상이 유용하다는 정략적 판단이기도 했다. [[의천]] 항목 참조. 이때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업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을 세웠던 받침대만 남았다.]
         [[경상북도]] [[경산시]] 출생[* 당시 신라시대 때는 압량주(押梁州)였다. 공교롭게도 고려시대 승려이자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도 고향이 같다. (일연이 태어난 당시의 경산의 지명은 장산군.) 그래서 경산시에는 원효와 일연의 이름을 딴 원효로와 일연로가 있으며, 원효ㆍ설총ㆍ일연을 묶어 '삼성현'으로 부르고, '삼성현로'라는 도로도 있다.]이며, 속성은 [[경주시|경주]] 설씨[* 원효라는 글자 자체가 '으뜸 원'자에 '새벽 효'자로, '설날'의 '설'을 한자로 쓴 것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反公)[* 삼국유사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며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마 벼슬의 담날(談捺)이다.[* 소설 <원효대사>를 쓴 소설가 한승원에 따르면 '담날'이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다음 날'이라는 뜻이라고....(출처: 한승원 <꽃과 바다>)]
         [[부처]]님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열매)|밤]]은 한 톨이 사발만 하다나 뭐라나.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끼에 밤 두 톨밖에 안 준다." 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한 알이 발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끼에 밤 한 톨만 주라.''' 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망했어요.~~ 발우 사발 하나에 가득찰 정도면 작은 알밤 200g 정도일텐데 200g이면 400 칼로리 쯤된다. 원래 이걸 한끼에 두알 먹었으니 이 머슴은 한끼에 800칼로리를 섭취한 셈.(...)[* 이 당시는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성인 남성의 일일 권장 섭취 칼로리와 머슴이라는 특성상 육체노동자였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 끼 800칼로리도 오히려 적은 편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근거 없는 고소는 아닌 셈이다.]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삼국유사]]를 통해 여러 일화를 남겨 그 쪽이 더 유명하지만,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다. '''십문화쟁론'''으로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정리하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다.[*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세 번 절했다고 나온다. 흠좀무. 불교에서 '''[[붓다|세 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요도종|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00210175011329&p=hani|@]] 한때 이보다도 200년 앞선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나왔으나,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26|오보로 판명되었다]].
         [[분황사]]에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회고상]]이 전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에 [[몽골군]]이 [[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다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 생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 텐데... 물론 남아 있었다고 해도 [[임진왜란]], 아무리 늦어도 [[일제강점기]] 때 소실됐을 가능성도 높다.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한다.[* 고려사 악지에도 "가사에 범어(梵語)가 많아서 싣지 않는다." 하며 소개만 하고 가사를 빼버렸다.]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 지 2백 년이 지난 데다''' 한 명이 추던 것이 열두 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에서 광대들에게 얻은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발을 세 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같고 목은 여름 자라같은데/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 시대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 윤선도
         그의 가계는 [[고려]] 중기의 인물인 [[윤존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윤존부 이전의 가계는 실전되어 미상이다. 윤존부 이후로도 가계가 실전되어 광혁(光奕), 형(衡), 효정(孝正), 천즙(川楫), 환(桓), 녹화(祿和) 등은 이름만이 전해온다. 그 뒤 윤존부의 6대손이자 윤선도의 9대조인 윤녹화가 진사가 되고, 8대조인 윤광전(尹光琠)이 고려말기에 영동정을 지내면서 다시 가문을 일으켰으므로 그를 실질적인 중시조로 본다. 윤광전의 아들은 대호군을 지낸 단봉(丹鳳)과 [[군기시]]소윤을 지낸 단학(丹鶴)인데, 군기소윤 단학이 그의 7대조였다. 6대조 사보(思甫)는 [[통례원]]통례였고, 그의 두 아들 호군 종(種)과 [[참의]] 경(耕) 중 둘째아들 참의 윤경(尹耕)의 일곱째 아들이 윤선도의 고조부 윤효정이다.
         {{인용문|선도가 무슨 죄입니까? 선도의 죄는 종통 적통을 말한 것이니, [[조선 효종|효종]]을 위하여 좌단한 것입니다. 선도가 소를 드리던 날에 누가 전하에게 소를 태우자는 계책을 내었습니까? [[고려]] [[고려 공민왕|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워 버렸고 전번에 [[광해]]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는데, 국사와 야사에 쓰기를 만약 "아무 조정 아무 때에 윤선도의 '예를 논한 소'를 불태웠다." 한다면 성조(聖朝)의 누(累)가 됨이 어떻겠습니까.}}
  • 윤호 (1424년)
         [[고려]]말 문하평리를 지낸 [[윤승순]]의 증손이자 [[윤곤]]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증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영천부원군에 [[추증]]된 [[윤삼산]](尹三山)의 아들이다. [[윤승순]]의 형제 판도판서 [[윤승례]]는 [[조선 세조|세조]]의 장인 정정공 [[윤번]]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조선 세조|세조]]의 장인 [[윤번]]은 윤호의 재종조부, [[세조]]비 [[정희왕후]]는 7촌 재종고모가 된다.
  • 은정
         * '''[[은정 (고려)|은정]]'''(殷鼎)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 의상 (신라)
         후일 [[고려]] [[고려 숙종|숙종]]은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 시호하였다. 의상의 문인으로 뛰어난 10대덕과 전교(傳敎)의 10대찰이 있었다.<ref name="글로벌-의상"/>
         의상은 많은 [[사찰]]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영주시|영주]]의 [[부석사 (영주시)|부석사]]가 유명하다. 토에 정통한 승려로서 [[신라]]와 [[고려]]에서는 국사로 추존되었으며<ref>일부 고려의 왕족과 귀족 중에는 고려는 도선의 풍수지리설 덕택에 건국, 후삼국을 재통일했다는 사고관이 있었다.</ref>, 민간 신앙에서도 무속의 신 중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의 일부 무당들로부터 숭배되었다.
  • 의성군
         [[삼한]] 시대에는 조문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문소군이라 개칭되었다.[[고려]] 초에 이르러 의로운 고장이라 하여 의성부로 승격되었다.
  • 이규승(1920)
         [[고려]] 시대 재상 [[이조년]]의 직계 후손인 그의 [[본관]]은 [[성주 이씨|성주]]였고 [[경상북도]] [[성주군|성주]] 출생이다.
  • 이금서
         |사망지= [[고려]] [[개성시|개경]]?
         |거주지= [[신라]]?, [[고려]]
         |국적= [[신라]]?, [[고려]]
         |배우자= 신란궁부인 김씨(고려 태조 외손녀, 신라 경순왕 3녀)
         |친척= [[신라]] [[경순왕]](장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장모, 고려 태조 장녀), 대안군 [[김은열]](처남, 신라 경순왕 4남)
         '''이금서'''(李金書)는 [[고려]]초 문신으로,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ref>[[경주 이씨|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新羅) 개국원훈(開國元勳)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하고, 중시조는 [[효공왕]](孝恭王)때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이다</ref>. 경주 이씨(慶州李氏) 중시조 신라 말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의 손자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사위이다.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고려 태조|태조]](太祖) 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녹훈되었다.
         [[신라]] 때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을 역임하고, [[935년]](신라 경순왕 8년) 11월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할 때 함께하였다고 한다. [[고려 태조|태조]] 때 개국공신 삼한공신에 책록되고, [[고려]]조에 출사하여 광록대부를 역임하였다.
         일설에는 아버지로 알려진 이금현과 형제 관계라고 전한다. 이금현(李金現), 이금서(李金書) 부자의 이름상의 '금(金)'자가 같이 쓰인 점에서 비롯된 오해인 것 같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의 옛 풍습에 아들의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권행(權幸, 안동권씨 시조)의 아들 인행(仁幸), 공직(龔直, ?~939, 연산공씨 시조)의 아들 직달(直達)이 그 예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신라왕 김부(金溥 :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에 들어와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ref>신란궁부인 김씨이다.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는 출가 후 신란궁부인으로 불렸는데, 그 딸인 김씨가 다시 신란궁부인에 봉작되었다.</ref>을 낳았으니 금서의 아내가 되어 윤홍을 낳았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이윤홍이 '신라말' 병정(兵正)을 했다는 기록을 들어 연대상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ref>이에 대해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에 '고려 초 관제에 병부령(兵部令)을 설치할 때 병정(兵正)을 두었고 품계는 재상(宰相)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ref> 그러나 이금서가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으로 고려에서 처음 벼슬을 시작했고, 그 아들 이윤홍의 병정(兵正) 벼슬과 관련하여 고려 초 관제에 병부령(兵部令)을 설치하면서 병정(兵正)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윤홍의 병정(兵正) 벼슬은 고려 초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경주이씨 세보에 의하면, 이금서는 [[고려]]조정에 처음 출사하였다 한다. 또한 [[고려 태조|태조]] 때 [[고려]]의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런데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고려 태조]]의 장녀인 [[낙랑공주 (고려)|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 일명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와 혼인한 것을 고려할 때, 여기서 태어난 [[경순왕]] 3녀 김씨가 이금서와 혼인할 연령이 되려면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이후 15여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여기서 태어난 이금서의 아들들이 활약할 연령이 되려면 15여 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이금서의 아들들이 [[경순왕]]의 [[고려]] 귀부 이전에 활약했다는 기록들은 이러한 사실과 30여 년 이상의 연대상 오차가 생기게 된다.
         3남<ref>[[평창 이씨]] 측 기록에 의하면 2남. 현재는 이윤장과의 관련성 자체를 부인하는 듯하다.</ref> 이윤장은 고려의 대사마 대장군으로 후백제 견훤을 토평하고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경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윤장의 생모는 신란궁 부인 김씨가 될 수 없다.
         대학자인 [[이색]]의 인품과 그가 지은 [[이제현]]의 묘지명의 기록연대를 고려할 때, 기록 연대가 뒤처지고 위조나 오기가 발생하기 쉬운 족보상의 기록보다는 [[이색]]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의 신빙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모순점들을 생각해볼 때, [[경순왕]] 3녀 김씨의 높은 신분을 고려하여 그 소생인 이윤홍을 이복형들인 이윤장, 이윤원에 앞서 1남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있다. 또한, '신라말' 병정을 역임했다는 부분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고려초'의 오기로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이금서(李金書)의 증손자 [[이주좌]](李周佐)를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주좌의 증조부 이금서(李金書)는 중원태수 호부랑중을 역임하고 고려 태조의 외손녀이며 신라 경순왕의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와 혼인하였고, 조부 이윤홍은 병정(兵正)을 역임하였는데, 비록 부친 이승훈(李承訓)이 칠품 관직인 정조시랑(正朝侍郞)에 그쳤다고 한미한 가문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 증손 : [[이주좌]](李周佐) - [[고려 목종|목종]](穆宗) 때의 형부상서(刑部尙書)
         ** 장모 :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고려 태조의 장녀)
         * [[이진 (고려)|이진]]
         * [[고려의 공신|삼한공신]]
         *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분류:생몰년 미상]][[분류:신라의 문신]][[분류:고려의 문신]][[분류:경주 이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고려의 공신]]
  • 이상백 (1904년)
         | 소속 = 前 [[국제 올림픽 위원회|국제올림픽위원회]] 종신위원 <br/> 前 [[대한민국 문교부]] 편수관 <br/> 前 [[서울대학교]] 교수 <br/> 前 [[고려대학교]] 교수 <br/> 前 [[한국독립당]] 체육행정특보위원
         [[일제 강점기]] 당시 서자들을 차별대우하는 문제인 '서얼차대(庶孽差待)의 연원에 대한 일문제'를 [[진단학회]] 학보에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전기와 건국 초기 분야에 대한 것을 연구하였다. 그는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 이조 태조의 사전개혁운동(私田改革運動)과 건국 후의 실적, 위화도회군고(威化島回軍考),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 '[[고려]]말 이조초에 있어서의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운동(田制改革運動)과 그 실적' 등 고려 말, 조선 건국, 조선 전기 분야의 정치,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시도하였다.
         또한 [[1910년]]까지도 [[고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을 논증하고, 조선의 건국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인 것처럼 유포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근거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를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의 서자 차별 문제에 대한 연구 외에도 과부 재가 금지법인 '재가금지습속(再嫁禁止習俗)의 유래에 대한 연구' 등의 논저를 발표하였다. 그밖에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사-근세전기편-》과 《한국사-근세후기편-》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분류:1904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농구 선수]][[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수필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건국동맹]][[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인]][[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학자]][[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 이성계
         이성계는 [[고려]]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건국자이다. 즉위 후 '이단'으로 개명을 했는데 사람들은 좀처럼 개명한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다.(…)
  • 이숭인
         '''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 [[9월 10일]]([[음력 8월 23일]]))은 [[고려]] 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으로 꼽히기도 한다.<ref name="역대"> [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514&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50043004F0063005F00410031003300340037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900300032&pName=C774C22DC7780028674E5D074EC1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ref>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권신 [[이인임]]의 5촌 조카였다.
         [[공민왕]] 때 [[과거 제도|문과]]에 급제한 후 예의 산랑(禮儀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숙옹부승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學館)을 겸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정도전]] 등과 함께 [[원나라]]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된 적이 있다. 그 후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1386년]]([[고려 우왕|우왕]] 12)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인임]]의 인족(姻族)이라 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1389년]] [[창왕]] 때에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에도 혼란기를 맞아 유배·감금되었고,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에게 정몽주가 처형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고려 말기의 권신 [[이인임]], [[이인복]], 이인립, [[이인민]] 형제는 그의 5촌 당숙이었다. 그의 종형제이자 이인립([[이인임]]의 아우)의 아들인 [[이제 (여말선초)|이제]]는 [[조선 태조|이성계]]의 사위였다.
         {{고려 삼은}}
         {{글로벌세계대백과}} <!-- 〈고려 후기의 문화〉 -->
         [[분류:1347년 태어남]][[분류:1392년 죽음]][[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시인]][[분류:고려의 유학자]][[분류:문학자]][[분류:맞아 죽은 사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성주 이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이인임]]
  • 이인 (동음이의)
         *'''[[이인 (고려)|이인]]'''(李韌, ? ~ [[1381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 이장경
         '''이장경'''(李長庚, ? ~ ?)은 [[고려]]시대 중기의 호족으로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5형제의 아버지이자 [[이인기]], [[이승경]]의 할아버지였다. [[이인임]]의 증조부, [[이숭인]]의 고조부였다. 아들 5형제의 출세로 거듭 증직되고 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가 손자 [[이승경]]의 출세로 [[원나라]]로부터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되었다. 본관은 [[성주 이씨|성주]]이며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본다. [[경상북도]] 출신.
         생전에 상호장(上戶長)과 안일호장을 지냈고 사후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이백년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이천년은 참지정사, 이만년은 문하시중, 이조년은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아들들의 출세로 고려조로부터는 삼중대광 문하좌시중(三重大匡 門下左侍中) 흥안부원군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都僉議政丞 知典理司事 上濩軍)에 추증된 뒤 원나라 황제로부터는 농서군공에 추봉되었다.
         [[이백년]]의 아들이자 손자 [[이인기]]는 평양부 부윤이었고, 고손자(아들 이백년의 증손)는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자 [[고려]] 멸망 이후 두문불출한 절신 [[이숭인]]이었다. 이인립(李仁立)의 아들이자 이장경의 고손자인 이제(李濟)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조선 왕실과도 인척관계가 되었다.
         [[분류:고려의 문신]][[분류:원나라]][[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성주 이씨]][[분류:생몰년 미상]][[분류:이인임]]
  • 이제현 (1288년)
         '''이제현'''(李齊賢, [[1288년]] [[1월 28일]](음력 [[1287년]] [[12월 24일]]) ~ [[1367년]] [[8월 24일]]([[음력 7월 29일]]))은 [[고려]] 후기의 시인·문신·[[성리학|성리학자]]·역사학자·화가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 (이름)|자]]는 중사(仲思), [[호 (이름)|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 (고려)|이진]](李瑱)의 아들이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고려 말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이며, [[공민왕]]의 후궁 [[혜비 이씨]]의 친정아버지였다. [[고려]]말 [[신진사대부]]와 [[조선]]의 [[사림파]]의 학문적 선조로서,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그의 문하생 목은 [[이색]]은 후일 [[정도전]], [[조준]], [[남은]], [[정몽주]], [[길재]]로 학파가 나뉘게 된다. 그림과 서예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예작도 남겼고, 평론서인 [[역옹패설]] 등과 많은 산문, 시문 등을 남겼다. [[백이정]], [[권부]]의 문인이다.
         익재 이제현은 [[1287년]] 검교정승인 임해군 [[이진]](李瑱)과 부인 진한국대부인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이며 [[경순왕]]의 사위인 [[이금서]](李金書)와 [[형부상서]] [[이주좌]]의 후손이었지만 5대조 이선용의 대에 말단직인 군윤이 된 이래 하급관료를 전전하다가 아버지 이진이 다시 가문을 일으켰다. 아버지 이진은 과거에 급제하여 신흥관료로서 크게 출세함으로써 다시 가문을 일으켜세웠으며,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에 임명되고 [[1308년]] 예문 춘추관에 들어갔다. [[1309년]]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이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되어 귀국하자 왕을 따르던 원나라 여인이 따라왔다. 왕은 연꽃 한 송이를 이별의 징표로 주어 되돌려보냈다. 고려에 돌아온 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원나라에 가서 그녀를 만나보게 하였다.<ref name="deoksa46">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46</ref> 이제현이 갔을 때, 그 여인은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못하는 지경이었다. 겨우 붓을 들어 시 한 구절을 썼다.<ref name="deoksa46"/>
         그러나 왕을 염려한 이제현은 이 사실을 숨기려다가 보고한다.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와 [[충선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여인이 술집에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ref name="deoksa46"/>'라고 고하였다. 충선왕이 노하여 땅에 침을 뱉었다. 더러운 여자라는 뜻이었다. 다음해 임금의 생일에 이제현이 뜰 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ref name="deoksa46"/>'라며 대죄하였다. 충선왕이 그 연유를 물었다. 이제현이 여인의 시를 올리며 그때 일을 말했다. 충선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ref name="deoksa46"/>
         연경을 방문한 그는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염복, [[조맹부]](趙孟頫), 요수, 원명선 등의 한인 출신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할 기회를 갖게 된다.<ref name="pare199643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438페이지</ref> 원나라 체류 시 [[만권당]]에서 고전을 연구하며 원나라의 명사 [[요수]](姚邃)·[[염복]](閻復)·원명선·[[조맹부]]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더욱 심오해졌으며, 그때 [[진감여]](陳鑑如)가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리고 원나라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대한민국의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f>이 외에도 이제현의 초상화는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 사이에 제작되었는데, 2000년 현재 4점이 더 전하고 있다.</ref>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익숙한 원나라에 있으면서 새로이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하였던 것이다.<ref name="nae0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2042 이제현]</ref>
         [[원나라]]에 체류중일 때에도 그의 신분은 고려의 관리였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이제현의 직책을 유지해줄 것을 알려왔고, 충선왕, 충숙왕의 특별 배려로 [[만권당]]에 에 체류하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할 수 있었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충선왕의 방환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유배지를 토번에서 타마사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ref name="pare1996439">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439페이지</ref> 이후에도 충선왕의 석방을 적극 청원하여 [[1323년]] 풀려나오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에도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렸다.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감숙성]]의 타마사를 방문해 또 한번 중국의 외진 절경과 문화재를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다.<ref name="pare1996439"/> 이 같은 세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ref name="pare1996439"/>
         [[1320년]] 겨울, [[충선왕]]이 왕고와 친밀한 [[원나라]] 관료들의 비난을 받고 국정을 잘못이끌었다는 죄명으로 유배되면서 귀국하였고, [[원나라]] 체류는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와 동시에 [[원나라]] 조정에서는 고려를 직할로 다스려야 된다는 주장이 논의되었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도 나타났다. 이때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의 일파의 왕위 탈환 움직임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1320년]]말 다시 출국했으나 아버지 이진의 상으로 다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치고 [[1323년]] 출국, 다시 [[원나라]]에 되돌아갔다. [[1323년]]([[충숙왕]] 10) [[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나라의 제성(諸省)과 동등하게 하려고 청하자(입성론) 고려 편입 반대론을 주장하며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상소문은 실전되었지만 그 내용이 현재 전해진다. 이제현은 [[도평의사사]]에도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이 문제를 철회케 하였다.
         [[1356년]] 친명파와 신진사대부 일각에서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반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그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1357년 사임을 청하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ref name="pare1996439"/> 이제현은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유배된 적이 없는 정치가이기도 했다.<ref name="pare1996440">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440페이지</ref> 이후 관작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성리학]]자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공민왕]]과 [[우왕]]은 그를 수시로 불러들여 국가의 중대사에 대하여서는 자문에 응하였다. 하지만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고 주로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ref name="pare1996439"/>
         또한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민지 (고려)|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고 만년에는 백문보, 이달충 등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료들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국사를 집필하였다.<ref name="pare1996439"/>
         또한 역사책인 《국사 國史》 편찬하면서 그는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이달충]](李達衷), [[백문보]](白文寶) 등과 함께 편찬작업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유고는 후일 [[조선]]건국 초기 [[고려사]] 편찬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1367년]]에 사망하니 당시 향년 80세였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ref name="chung174">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74페이지</ref>
         산문의 작품성은 전 시대의 형식 위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내용을 위주로 한 재도적(載道的)인 문학을 추구했다.<ref>고려 중기로 올수록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노골적인 내용이 소재로 나타나기도 했다.</ref> 저서인 《익재난고》의 〈소악부 小樂府〉에는 [[고려]] 민중들 사이에 돌던 민간 가요를 7언절구로 번역한 17수가 특별히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ref name="daum01"/>
         그는 [[성리학]]을 소개, 보급하는데 노력하였다. 학자로서의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과 이색의 부자<ref name="nae01"/>와 [[정몽주]], [[정도전]] 학통(學統)이 이어진다.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최로로 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권보]]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낸 대학자이기도 했다.<ref name="pare1996440">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440페이지</ref> 그러나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단순히 성리학에만 깊이 빠지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했고,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부마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꾸준히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현실적이면서도 지조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ref name="pare1996440"/>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ref name="nae01"/> 그는 [[고려]]의 자주국론을 주장하는 세력의 견해도 일단 수용하였으나, [[원나라]]의 속국으로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엄연한 현실로 인식하였다.
         * 그의 시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계되는 충효사상·관풍기속(觀風記俗)·현실고발의 내용과 주제도 담고 있는데 영사시(詠史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ref name="daum01"/>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ref name="nae01"/>는 평가가 있다.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시각도 있다.<ref name="nae01"/>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ref name="nae01"/>는 평가도 있다.
         *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ref name="nae01"/>
  • 이조년
         '''이조년'''(李兆年, [[1269년]] ~ [[1343년]])은 [[고려]]의 원종-충혜왕 때의 문신·시인·문인이며 학자이다.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化軒)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성주]]이다. [[이장경]]의 아들이며 [[이인임]], [[이인복]], [[이인립]]의 할아버지이며 [[이제]]의 증조부이고, [[이숭인]]의 종증조부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장경]]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이다. [[고려 충렬왕|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06년]] 비서랑으로 왕을 모시고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갔을 때 [[왕유소]]·[[송방영]] 등의 모함으로 충렬왕과 [[고려 충선왕|왕자]]의 사이가 나빠졌다. 이때 그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나 화를 입고 유배되었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13년간 고향에 있다가, [[1340년]] [[고려 충혜왕|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천성이 결백 강직했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 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ref name="글로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고려시대 문학/고려 후기#이조년|이조년]]〉</ref> [[고려 공민왕|공민왕]] 때 성산후에 추증되었고, 충혜왕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렬(文烈).
         [[분류:1269년 태어남]][[분류:1343년 죽음]][[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시인]][[분류:고려의 학자]][[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성주 이씨]][[분류:이인임]][[분류:고려의 정치인]]
  • 일연
         [[고려]]시대 [[승려]]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다.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자(字)는 회연(晦然), 일연(一然)인데, 이중 일연을 [[법명]]으로도 사용했다. 호는 목암(睦庵)이다.
         내용면에서도 삼국사기와 비교하는 문제가 출제되는데 삼국사기는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유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면 삼국유사는 고조선 계승의식이 엿보이며 불교적이다. 역시나 서로의 내용을 뒤바꿔서 문제가 출제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기억을 해둬야 한다. 이 역시 각각의 시대적 배경과 특징을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문벌귀족]] 세력이 집권할 당시 편찬된 관찬사서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전 시대의 왕조인 신라를 계승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삼국유사는 원 간섭기에 저술되었다.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나타났다고 이해하면 된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승휴의 [[제왕운기]] 역시 고조선사를 다룬 것과도 연결지어 생각해두면 좋다.
  • 전한길
         강사로서의 중도적 입장을 최대한 견지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특히 현대사 강의 때는 좌파적 역사관과 우파적 역사관을 모두 고려하여 강의한다. 실제로 이승만이 체결한 한미상호방위 조약은 "이건 잘한 거다. 잘한 건 잘했다고도 할 줄 알아야 한다."라며 칭찬하는 한편, [[6.25 전쟁]] 당시 국민을 속이고 몰래 경무대를 떠나 대전으로, 부산으로 피난한 사건이나 [[진보당 사건|사법 살인]] 부분은 강하게 비판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강의 중 경제 발전에 관해선 지도자의 견지와 리더십을 칭찬하지만, 그의 과거 친일 행적과 독재에 대해선 가감없이 비판한다.
         2018년 4월경 '''"X발!! 이렇게 내면 어떡합니까!!"'''라며 한국사 문제 출제위원을 향해 발언을 한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38_YgGOfX4|#]] 2018년 3월 서울시 7급 시험에서 고려 후기 역사서들의 편찬 순서를 맞추는 ~~지랄맞은~~ 문제가 나왔는데, 해설강의에서 왜 '''이 따위''' 문제를 출제하냐면서 맹비난한 것. 결국 뉴스까지 탔다. [[https://youtu.be/AAswIVB1yKU|#]] 최근의 지나치게 지엽적인 문제 출제 경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사이다라는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전한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강사가 저런 식으로 욕설을 하면 어떡하냐"라는 논란도 일부 있었다. 신영식 강사에 의하면 이 때 취한 상태로 신영식 강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왜 맨날 나한테만 그라노!"라면서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같은 회사 내 [[강민성|모 강사]]가 직간접적으로 디스를 시전하였다.
         참고로 위 문제의 문제점(…)은 소거법으로 답이 확정되지 않으며([[제왕운기]]-본조편년강목-사략 순서를 알아도 3번과 4번이 남는다), 원부·허공의 고금록[* 고금록은 총 3번, [[고려]] 전기(박인량의 고금록), 1287년(원부·허공의 고금록), 1357년(이인복의 고금록) 편찬된 기록이 있으며, 편찬되었다는 기록 이외의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박인량의 고금록.]이 [[충렬왕]] 대에 출간되었다는 것을 기억해도 답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고금록 제왕운기 둘 다 충렬왕). 결국 연도를 외워야 풀 수 있는데, '''현전하지 않고 내용도 알려진 것이 없고 특별한 의미도 없으며 상당수의 기본서에 누락되기까지 한 고려 시대 역사서의 출판연도'''를 외우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지엽적인 출제이다. [[6.25 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나라 16개국 이름까지 외워두라고 하는 전한길이 깔 정도면(…)
  • 정 (시호)
         * [[고려]](高麗) 정종 [[고려 정종 (3대)|왕요]](王堯)
         * [[고려]](高麗) 정종 [[고려 정종 (10대)|왕형]](王亨)
  • 정도복 (고려)
         '''정도복'''(鄭道復)은 [[고려]]시대 말기,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선, 상시 등을 지내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밀직제학, 한성부우윤,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으며 형 [[정도전]]이 암살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성주 유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뒤 인녕부사윤에 이르렀다. 본관은 [[봉화 정씨|봉화]](奉化)이고 자(字)는 내지(來之)이고 호(號)는 일봉(逸峯)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며, [[정도전]](鄭道傳)의 친 아우이다.
         고려 충정왕 3년(1351년) 영주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나이 16세에 양친 부모님을 모두 잃고, 큰형인 삼봉 [[정도전]]이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우연히 처음으로 [[성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20세 때까지 4년여간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진사시(進士試)에 올랐으며, 우왕 11년에 지공거 염국보(廉國寶)와 동지공거 포은 [[정몽주]]가 주관한 과거에 제11위로 입격하였다.<ref>당시 우현보의 아들 우홍명(禹洪命)이 장원급제하고 함부림(咸傅霖), 변계량(卞季良), 한상덕(韓尙德), 박석명(朴錫命), 권원(權遠), 김자지(金自知), 이맹균(李孟畇) 등 기라성 같은 인물 33인이 급제한 과거에서 그는 제11위였다.</ref>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공양왕 2년(1390년)에 승정원 좌승선이 되었다. 그 뒤 [[고려]]에서 상시(常侍)에 이르렀다. [[1392년]] 형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조선이 개국 되면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으나, 아직 초창기여서 불교를 숭상하는 구습이 그대로 성하고 있어, 선생은 유생들에게 큰형 삼봉선생이 지은 『심문·천답』과 『심기리』3편을 강석하는 등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음에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더불어 힘썼으며,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사회 기강을 잡는데 기여하였다.
         [[분류:과거 급제자]][[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성리학자]]
  • 정진
         * '''[[정진 (1361년)|정진]]'''([[1361년]] ~ [[1427년]])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 정진 (1361년)
         '''정진'''(鄭津, [[1361년]] ~ [[1427년]])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으로 시호는 희절공(僖節公)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관직에 올라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거쳐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고려 공양왕|공양왕]] 즉위 후 1391년 [[정몽주]](鄭夢周) 등 온건파가 역성혁명파를 탄핵할때 탄핵을 받고 아버지 [[정도전]]과 함께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 숙부 : [[정도복 (고려)|정도복]](鄭道復, 1351 ~ 1435, 호는 일봉(逸峯)) 한성판윤(漢城判尹)
         [[분류:1361년 태어남]][[분류:1427년 죽음]][[분류:음서]][[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고려의 군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조선의 군인]][[분류:해군 군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봉화 정씨]][[분류:조선의 공신]]
  • 정환덕
         [[고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정종소]](鄭從昭)의 12세손이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영월 환고사에 배향된 현령 증 병조판서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며, 대구부의 청호서원(淸湖書院)에 배향된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의 8세손이다. 증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식원좌장례(禮式院左掌禮) [[정하형]](鄭夏亨)의 증손이며,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감승(秘書監丞) [[정윤휴]](鄭胤休)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선전관(宣傳官)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군부협판(軍部協辦) [[정의채]](鄭義采)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와 증 정부인 주씨(貞夫人 周氏)이다.
  • 청도군
         [[고려]] 시대였던 940년(태조 23) 오악현, 형산현, 소산현을 통폐합하여 청도군이라 하였다가 밀성군에 속하게 하였다. 1366년(공민왕 15)에 청도군이 되었다.
  • 탁광무
         '''탁광무'''(卓光茂)는 [[고려]]의 문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광산 탁씨|광산]](光山). 자는 [[겸부(謙夫)]], 호는 [[경렴정(景濂亭)]],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높은 관직에 발탁되어<ref>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5권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ref>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다.<ref>[[『세종실록』]] 8년 병오(1426,선덕 1) 1월18일</ref>
         [[1331년]]([[고려]] [[충혜왕]] 1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하였다.<ref>『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ref>
         [[1340년]]([[충혜왕]]) 문과에 급제하여 사의대부(司議大夫)가 되었다.<ref>朴龍雲, 『고려시대(高麗時代) 음서제(蔭敍制)와 과거제(科擧制) 연구(硏究)』, 一志社, 1990년</ref>
         [[분류:생몰년 미상]][[분류:14세기 사람]][[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광산 탁씨]]
  • 탁신 (조선)
         |출생지= [[고려]] 전라도 광주(光州)
         |국적= [[고려]] → {{국기나라|조선}}
         '''탁신'''(卓愼, [[1367년]] ~ [[1426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광산 탁씨|광주]](光州). 자는 자기(子幾)·겸부(謙夫)·계위(係危), 호는 죽정(竹亭)이다. [[조선 태종]] 때 지신사(知申事),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세종]] 때 [[예조]][[참판]], [[의정부시|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평장사 탁영(卓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제학 탁문위(卓文位)이고, 아버지는 고려의 간의대부(諫議大夫) [[탁광무]](卓光茂)이며, 어머니는 판종부시사 박지연(朴之衍)의 딸이다. 경학(經學)에 밝았고, 무예·음률에도 능하였다.
         1389년([[고려]] [[창왕]] 1) 동진사(同進士) 3위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ref>『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ref> 부모가 연로하여 고향인 전라도 광주(光州)에 돌아와 감지(甘旨)를 지냈다.
         {{인용문|신(愼)의 자는 자기(子幾)요, 광주(光州) 출신이며, 고려의 간의 대부(諫議大夫)인 탁광무(卓光茂)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영특하였고, 12세에 향교에 입학하였는데, 동무들이 장난을 치며 희롱하였으나, 신은 꿇어앉아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길을 걸어다닐 때에는 반드시 팔짱을 끼고 좌편으로 다녔다. 홍무(洪武) 기사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부모가 늙었으므로 집에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임술년 10월에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그는 옷을 벗지 않고 옆에 모시고 있었다. 그리하여 광무(光茂)는,
         [[분류:1367년 태어남]][[분류:1426년 죽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고려의 문신]][[분류:고려의 학자]][[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광산 탁씨]][[분류:조선 세종]]
  • 태종무열왕
         태종 무열왕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이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다.<ref group="주">그러나 고구려의 [[태조왕]]의 경우에는 묘호로 봐야 되는가, 시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 밖에 태조의 묘호를 받은 [[태조 성한왕]]이나, 국조의 묘호를 받은 [[박혁거세]]도 존재한다.</ref> 이에 대해 [[당 고종]]<ref group="주">《삼국사기》에는 [[당 중종]]이라 표기됨</ref>이 “당 태종이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었기에 태종이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하자,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당 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 답서를 받은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이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 기록을 찾아 확인해보고서는 놀랍고 두려워서, 태종의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ref name="유사-기이1"/> 훗날 [[조선]](朝鮮)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高麗)의 [[왕건|태조]](太祖) 이래 역대 군주들의 묘호를 시호로 대체하고자 하는 [[조선 성종|성종]](成宗)에게 태종 무열왕의 선례를 들며 굳이 기록된 묘호를 뺄 필요는 없음을 주장하였다.<ref>《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1487년) 2월 경진(10일)조</ref>
         [[성덕왕]](聖德王)은 태종 무열왕의 명복을 빌고자 [[봉덕사]](奉德寺)를 지었으며,<ref name="유사-성덕왕">《삼국유사》 권제2 기이 성덕왕</ref> [[혜공왕]](惠恭王)은 오묘(五廟)를 정하면서 김씨로서 처음으로 왕이 된 [[미추왕]](味鄒王)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대대로 헐지 않는 신주(世世不毁之宗)로 삼았고,<ref>《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제사(祭祀)</ref> 이것은 [[애장왕]] 2년([[801년]])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만 따로 떼어 모시는 사당을 지어 신주를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다.<ref>《삼국사기》 권제10 신라본기 제10 애장왕 2년(801)</ref> 9세기 중엽 신라의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郞慧和尙白月普光塔碑)』([[890년]]경 건립)에서 무열왕의 8세 손으로 당에 유학하여 불법을 배우고 돌아온 승려 [[낭혜화상]]의 행적과 무열왕의 업적을 교차대비시켜 "이때(태종 무열왕의 입당 후 귀국)부터 우리는 한 번 변하여 [[노나라]]가 되었다(自玆吾土一變至於魯)", "두 적국(敵國)을 평정하고 문명에 접하게 하여 주셨다(平二敵國俾人變外飭)"고 하여 태종 무열왕이 신라 국내의 제도를 당풍으로 개편하여 '문명화'시키고, 당시 신라뿐 아니라 중국에게도 적국으로 여겨지던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평화를 가져왔다고 찬양하였으며, 또한 [[진성여왕]] 7년([[893년]])에 당의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글에서 옛날 고구려와 백제의 강성함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그 직후 무열왕이 당으로 들어가 수교를 맺고 원병을 청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과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세워진 [[발해]]와 당, 신라의 충돌 등의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3백여 년 동안 한쪽 지방은 무사하고 넓은 바다가 편안한 것은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라고까지 평가하였다. [[고려]]나 [[조선]]의 유학자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인식이었다.
         [[백제]]의 영토를 흡수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신라는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인 [[고려]], [[조선]]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삼한일통'이나 '삼국통일'과 같은 말은 [[19세기]]까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계속 쓰였다.<ref>박노자,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8/07/021163000200807160719009.html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한겨레21》 제719호 (2008년07월16일)</ref>
         * 방기환, 《김춘추 1~3》 (고려출판사, 1987)
  • 폐비 윤씨
         고조부 [[윤희]](尹禧)는 [[고려]]조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낸바 있다.
  • 풍산 류씨
         풍산 류씨(豊山 柳氏)의 시조 '''류절'''(柳節)은 [[고려]] 초에 수주(樹州 : 현 경기도 부평)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인물이다. 《풍산류씨세보(豊山柳氏世譜)》에 따르면, 류절의 증손자 류백(柳伯)이 1290년([[충렬왕]] 16년) 은사(恩賜)로 급제하여 가문의 기틀을 세웠고, 7세 [[류종혜]](柳從惠)가 조선 초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고 낙향해 하회동(河回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풍산류씨 시조 류절의 증손자인 류백은 1290년(충렬왕 16년) 은사(恩賜)로 급제했다. [[문화 류씨]] 분적설에 따르면 류소는 류백의 6대조가 되는데 류소는 고려 고종조(1214~1259)에 관직에 있었다. 7대에 걸치는 활동 기간이 50여년 전후에 걸쳐 있다는 것은 의문이 간다.
         ; 고려 문과
  • 한명회
         그는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한강(韓康)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세조]]의 사돈이었던 [[한확]]과는 9촌숙질간이다. [[한확]]은 한악(韓渥)의 넷째 아들 한방신의 증손이었고, 한명회는 [[한악]]의 둘째 아들 한공의의 4대손이었다.<ref>광윤-강-악-방신-녕-영정-확, 광윤-강-사기-악-공의-수-상질-기-명회</ref> 그가 태어난지 얼마 뒤 동생 [[한명진]]이 태어났다.
         [[조선 단종|단종]] 복위를 꾀한 성삼문, 박팽년을 변호하여 세조가 직접 신문할 때에 “일찍이 성삼문.박팽년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라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말을 하였다.”라고 하여 환열(轘裂)을 명하였다가, 세조는 [[정보 (조선)|정보]]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정상을 참작,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감형, 연일(延日)에 유배시켰다.<ref name="정보1"/>
  • 한확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지낸 한강(韓康)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세조]]의 측근이었던 [[한명회]]와는 9촌숙질간이다. 한확은 한악(韓渥)의 넷째 아들 한방신의 증손이었고, [[한명회]]는 한악의 둘째 아들 한공의의 4대손이었다.<ref>광윤-강-악-방신-녕-영정-확, 광윤-강-사기-악-공의-수-상질-기-명회</ref>
         동생 한전(韓磌)·한질(韓)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한확이 그 고아를 무육(撫育)하기를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작품으로는 [[고려]]말기의 문신 [[차원부]]를 애도하는 치제문이 있다. 그가 죽자 [[조선 세조|세조]]는 9월 22일까지 정사와 조회를 중단하였다. 이때 강무까지 중단하려 하였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강무는 계속하였다.
  • 허참례
         '''면신례'''(免新禮)는 [[고려]] [[우왕]] 때부터 신입 관리에 대한 신고식 형식으로 행해진 [[집단 따돌림]]이다.
         신입 관리는 선임 관리에게 술과 음식, 기녀를 대접해야 했으며, 짓궂은 명령을 받들기도 한다. '''면신'''(免新)또는 '''신래침학'''(新來侵虐)으로도 불린다. [[고려]] 말 [[우왕]]때, 권문 세족의 아들들이 부모의 권세를 배경으로 관직을 얻는 일이 많아지자(→[[음서]]) 선임 관리들이 그들의 기를 꺾고 관리들의 질서를 잡고자 시작되었던 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것을 오늘날 [[신고식]]의 유래로 보기도 한다.
         [[분류:고려의 문화]][[분류:조선의 문화]][[분류:집단 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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