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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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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 . . . 41회 일치
         [[199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는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었다.
         2004년부터 한나라당의 위기와 재도약을 이끈 박근혜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예비후보 중 하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당권과 대권의 분리 방침에 따라 2007년 대선을 1년 남긴 [[2006년]] [[6월 16일]]에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 레이스에 돌입하였다. 박근혜의 가장 큰 상대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 그 과정에서 [[청계천]] 복원, 버스 노선 개편 등으로 인기를 끈 [[이명박]]이었다. 본격적인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박근혜는 이명박의 부패 비리 의혹을 집중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 등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박근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와 '줄푸세'라는 정책을 내세웠다. '세금은 '''줄'''이고, 각종 규제는 '''풀'''고, 법기강은 '''세'''운다'는 뜻으로 그의 대통령후보 경선시 주요 정책구호였다. 이 정책은 그녀의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신분제 등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라기보다는,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로부터 억압받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ref>[http://news.mt.co.kr/view/mtview.php?no=2007052913423936363&type=2 박근혜 바꿔야 산다.]<<[[머니투데이]]>> 2007-05-29 작성</ref> 이는 이후 제17대 이명박정부의 정책에도 많이 반영되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3280135 李 “김정일은 만만치않은 터프가이” 朴 “줄푸세 운동해야”] <<[[동아일보]]>> 2007-03-28 작성</ref>
         폭로전은 경선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당 대회를 3일 앞둔 2007년 8월 17일, 박근혜 경선후보는 "거짓으로 한나라당이 과연 집권할 수 있습니까?"라고 발언하기도 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056525|제목 = 되돌아 본 대선|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07-12-20|확인날짜 = 2013-03-23}}</ref> 이명박 후보측은 도곡동 땅에 대한 검찰 발표가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체 조사와 각 언론사 조사를 종합할 때 10% 이상 차이로 낙승할 거라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058737_5780.html|제목 =  |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07-08-17|확인날짜 = 2013-03-23|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927121334/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058737_5780.html|보존날짜 = 2013-09-27|깨진링크 = 예}}</ref> 이와 관련해 진수희 대변인은 "1위 후보가 압승을 해야 경선 후유증이 최소화 된다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15% 격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 그러나 박근혜 후보측은 자체 전수 조사 결과 근소하게나마 앞서기 시작했다면서 각종 의혹으로 이 후보에 불안감을 느낀 당심이 옮겨온다고 주장했다.<ref name="imnews.imbc.com"/> 당시 세대별 지지율을 보자면, 이명박 후보는 3,40대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은 반면, 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ref name="imnews.imbc.com"/>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명박,박근혜에 2452표차 승리…경선결과 집계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20/2007082000855.html |출판사 = 조선닷컴 |저자 = |쪽 = |날짜 = 2007-08-20 |확인날짜 = 2009-07-07}}</ref>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5336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 - 이동복 "이명박, 박근혜에게 후보 양보하라"<!-- 봇이 따온 제목 -->]</ref>
         박근혜는 이에 대하여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돼 가고 있고, 기준도 없는데다 엉망"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 "지난 번에 경선에서 정치 발전을 위해 깨끗하게 승복했고, 한나라당에서 처음 제대로 경선을 한 것이 아니냐"며 "그로 인해 정치가 크게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잘못된 공천으로 그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런 공천을 가지고는 앞으로 선거가 끝나도 한나라당이 화합하기도 힘들고,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며 "정치 발전도 앞으로 기대할 필요가 없고, 한나라당의 발전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불안한 당내외 상황에도 불구하고 [[2012년]] [[4월 11일]]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을 획득하여 과반 1당을 유지하였으며 그 후 공식적인 당 지도부가 출범하였지만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 문제로 [[김문수 (1951년)|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 의원과 대립하였고, 결국 [[정몽준]] 대표, 이재오 의원의 불출마 선언 속에 경선을 치렀다. 8월 중순 치뤄진 경선에서 박근혜는 압도적 지지로 승리하였다.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당시 정몽준과 이재오가 당내 경선에 불만을 품으며 경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박근혜는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 전당 대회에서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득표율은 전체 유효투표의 83.97%인 8만 6천 589표로 지난 2002년 경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얻은 68%인 기존의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으나 경선 투표율이 41%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유력 정당의 첫 여성 후보이자 전직 대통령의 자녀가 대선 후보가 되는 첫 사례이기도 했다.<ref>[http://media.daum.net/society/nation/seoul/view.html?cateid=100004&newsid=20120820162306691&p=yonhap] 심인성 기자, 박근혜, 84% 최고득표율로 與대선후보 확정(종합), 연합뉴스, 2012.8.20.</ref> 한편 박근혜는 2002년 한나라당 제16대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선언 10년 후에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데 성공하였다. 박근혜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모토로 내걸었다.
         한편 경선 8일 뒤인 [[2012년]] [[8월 28일]]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유족과 노동자들의 거부와 반대로 무산되었다.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구 [[민주통합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전순옥]]은 진정으로 [[전태일]] 정신을 생각한다면 쌍용차나 용산참사 희생자 등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른바 국민대통합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현안이 일어나는 현장을 먼저 찾아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며 5·16 쿠데타와 유신, 군사 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ref name="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8/28/0200000000AKR20120828048951001.HTML?did=1179m 전순옥 "朴 고통당하는 사람 먼저 찾아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8월 28일</ref> 그러나 [[이상일]] 대변인은 "박 후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장막을 친다 해도 국민을 통합하겠다는 박 후보의 행보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반드시 물리치고 국민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는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후보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이미지는 지지층에서만 통할 뿐이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통도 안 되고 감동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되기도 했다.<ref name="mk1">[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199680 <매경이 만난 사람> 공천 탈락후 정계은퇴 선언한 강봉균 3선의원]매일경제, 2012년 3월 30일</ref><ref name="mk">[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425368 원칙·소신 두각 vs 불통·신비주의 한계] 매일경제, 2012년 7월 11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629300 박근혜·문재인·안철수 SWOT분석] 매일경제, 2012년 9월 28일</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391745 SWOT 분석으로 본 대선 주자들…장단점은?] 서울방송 8시뉴스, 2012년 9월 20일</ref><ref name="kh">[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72200245&code=910402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 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ref>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일부 대선 공약을 수정해 반대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61539471&code=940100]</ref>
         박근혜는 자신이 가진 독단적인 이미지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2년 7월 11일 [[김문수 (1951년)|김문수]]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의 예방에 "박근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칠푼이다"라고 말했다.<ref>[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20711205713287], 황철환 기자, 김영삼 "박근혜 별것 아니다..칠푼이다" 혹평, 연합뉴스, 2012.7.11.</ref> 칠푼이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인데,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독재, 독단적인 면에 대해서도 칠푼이라 표현한 적이 있어 박근혜 의원과 친박계의 독선적인 당 운영에 대한 비판적 표현<ref>[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28] 정세운 기자, '칠푼이=독재자'를 왜곡하는 언론, 시사오늘, 2012.7.11.</ref> 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차남 [[김현철 (1959년)|김현철]]이 총선 때 [[새누리당]]의 공천을 못 받은 것에 대한 감정적 발언'<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717224011214], 오윤환, 박근혜가 유신 2인자? YS 부자의 '멘붕', 데일리안, 2012.7.17</ref> 으로 보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 박근혜는 [[이명박]]과 거리를 두었으나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았다. 대통령과 면담을 하면서 대통합의 의지를 담고 활동하였다. 과거 정책상 본질적으로는 [[이명박]]과 크게 다를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근거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가 내세웠던 '줄푸세'나 당시 경쟁 후보였던 [[이명박]]이 내세웠던 '747' 둘다 공통적으로 감세 기조를 내세운 정책이라는 점이다. 또한 박근혜가 2008년 12월 국회의 감세 법안, 2009년 3월 [[금산분리]]완화법안, 2009년 12월 예산안 ─ 4대강 예산이 포함되었고 이른바 날치기 통과로 논란이 되었음 ─ 에 찬성해 [[이명박]] 정부 정책에 협조한 것도 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404181704062] 기사 내 박용진 민주통합당 대변인 발언 인용 ─ 최이락 기자, 민주 "불법사찰 가해자는 새누리·박근혜", 연합뉴스, 2012.4.4.</ref> 이를 빗대어 정치권과 인터넷 상에서 '이명박근혜'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명박]]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했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서울시의 무상 급식 정책 논란]] 때 바쁜 일정 속에 부재자 투표까지 참여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지원했던 [[이명박]]과는 달리 관련 사안에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2011년 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후 당명, 당 상징색, 강령 등을 변경하면서 [[MB]]정권과 기존 [[한나라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불거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 악재 속에서도 "어느 정권에서나 민간인 사찰은 일어나며 나도 피해자"라며 논란을 피하기도 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401174821598] 임진수 기자, 역공 들어간 새누리 "어느 정권이나 불법사찰, 노컷뉴스, 2012.4.1.</ref>
         * "일부에서는 자신을 보수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노선은 중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1911888& 박근혜 "나는 중도라고 생각한다"]</ref> 박근혜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친박계'와 달리 '친이계'는 과거 운동권 출신 인사가 포진해있고, [[4대 개혁 입법]] 대해 비타협적 태도를 취한 사실과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이명박 후보가 실용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이유다.<ref name="%2525EC%2525A7%252584%2525EB%2525B3%2525B4%2525EC%252598%2525A4%2525ED%252595%2525B4">{{뉴스 인용|제목=그녀에 대한 진보 진영의 오해|url=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90|출판사=시사 IN|저자= 이정무|날짜=2009-05-25}}</ref>
         박근혜는 2012년 6월 1일 비례대표 부정 경선과 '종북' 논란에 휩싸인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국가관을 의심받고 또 국민도 불안하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이어 제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퇴가 안되면 그렇게 가야된다고 본다"고 답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634394 박근혜 "이석기·김재연 사퇴하는게 옳다"(종합2보)] 연합뉴스, 2012년 6월 1일</ref>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일부 진보 성향 언론 등은 비판하였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두 사람의 종북 여부는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이고 경선부정도 내부조사와 징계절차를 지켜보는 것이 순서이며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종북'으로 몰아 의원직 제명을 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태라고 비판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032127065&code=990101 (사설) 박근혜의 민주주의관을 묻는다] 경향신문, 2012년 6월 3일</ref>
         이날 회견에 참여한 [[안동선]] 전 의원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2004년]] 1월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다시 탈당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이윤수 전 의원도 2002년 안동선과 함께 탈당했고,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지지에도 동참하였다. 송천영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당을 탈당, 국민신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그해 11월에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1997년에는 이회창 후보 불가론을 주장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그 뒤 2000년에는 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했고, 2002년 12월엔 이인제를 따라 민주당을 다시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송 전 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는 다시 한나라당 대전시당 고문직을 맡아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송 전 의원은 또한 2007년 [[강창희]]에게 불법 정치자금 3000만 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과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받고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이 밖에 이날 회견을 한 조한천, 이희규, 반형식 전 의원 등은 지난 2004년 혹은 2008년 총선에서 이미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던 인사들이었다.
         [[2007년]] 대선 이전에 있었던 경선에서 박근혜는 이명박과 경쟁하며 갈등을 겪어왔다. 경선 당시 박근혜 진영은 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주장을 하거나,<ref>{{뉴스 인용|제목 = 朴캠프 "이명박 후보는 전과 14범" 주장 논란|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0231787|출판사 = 경향신문|저자 = 손봉석 기자|쪽 = |날짜 = 2007-02-28|확인날짜 = 2010-02-11}}</ref> 위장전입 문제도 파헤쳐<ref>{{뉴스 인용|제목 = 박근혜+범여권,이명박 위장전입에 파상공세|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3&aid=0000064154|출판사 = 쿠키뉴스|저자 = 김도훈 기자|쪽 = |날짜 = 2007-06-17|확인날짜 = 2010-02-11}}</ref> 이명박은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자녀교육 때문에 위장전입" … 사과|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970807|출판사 = 한국경제|저자 = 김인식 기자|쪽 = |날짜 = 2007-06-17|확인날짜 = 2010-02-11}}</ref> 이러한 갈등은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친박계 의원들의 한나라당 공천 탈락에 대하여 박근혜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라는 말을 하여 파장을 일으켰으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한 촛불파동때는 재협상을 요구했고, [[2009년]] [[용산 참사]] 때는 경찰의 강경진압을 비판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 = MB-박근혜, 누적된 '불신과 앙금'…화해 될까?|url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709623|출판사 = SBS|저자 = 김윤수 기자|쪽 = |날짜 = 2010-02-11|확인날짜 = 2010-02-11}}</ref> 한나라당에 의해 [[대한민국 미디어 관련법 개정 논란|미디어법]] 개정 추진 당시에도 박근혜가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을 던지는 등<ref>{{뉴스 인용|제목 = 박근혜, 미디어법 '반대 투표' 발언|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11835|출판사 = MBC|저자 = 황외진|쪽 = |날짜 = 2009-07-20|확인날짜 = 2010-02-11}}</ref> 정책 문제에 대한 시각차이와 개인적인 갈등들이 복합적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2009년]]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박근혜의 반대론과 대하여 [[2010년]] [[2월 9일]] 이명박은 "세계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며 '강도론'에 비유하였다. 그러자 박근혜는 다음 날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가지고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이명박과 친이계를 강도에 비유하며 정면으로 반박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박근혜, '강도론' 전면 반박…청와대 '황당'|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9&aid=0002085026|출판사 = mbn|저자 = |쪽 = |날짜 = 2010-02-11|확인날짜 = 2010-02-11}}</ref> 청와대는 "박근혜에게 한 말이 아니고 원론적인 부분을 말한 것인데 박근혜가 과민 반응했다"며 선후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대통령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박근혜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박근혜는 "(발언이) 문제가 있으면 있는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며 사과를 거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사과하라" vs "잘못없다"…계파갈등 폭발 직전|url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709614|출판사 = SBS|저자 = 박진원 기자|쪽 = |날짜 = 2010-02-11|확인날짜 = 2010-02-11}}</ref> 그러던 과정에서 청와대가 박근혜를 '한나라당 전 대표'가 아닌 '박근혜 의원'으로 호칭을 바꾼 데 대해 친박계 의원들은 "전면전에 돌입하자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며 이동관의 사퇴까지 요구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칼 뽑은 청와대에 친박계 "분노 폭발"...李-朴 전면전|url = http://polinews.co.kr/viewnews.html?PageKey=0101&num=99668|출판사 = 폴리뉴스|저자 = 김인아 기자|쪽 = |날짜 = 2010-02-11|확인날짜 = 2010-02-11}}{{깨진 링크|url=http://polinews.co.kr/viewnews.html?PageKey=0101&num=99668 }}</ref> 또한 친이계 [[정두언]] 의원은 "대통령한테 막말까지 하는 것을 보니까 자신이 마치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며 박근혜를 비난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정두언 "박근혜, 대통령 다 된 것처럼 생각"|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119359|출판사 = 연합뉴스|저자 = |쪽 = |날짜 = 2010-02-11|확인날짜 = 2010-02-11}}</ref> 이렇게 둘의 사그라들지 않는 갈등에 대해 [[중앙일보]]는 '경선과 대선을 거치며 둘 사이에 큰 불신이 생겼으며, 이명박도 박근혜와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있다'고 분석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MB - 박근혜 ‘비선 라인’이 없다|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059631|출판사 = 중앙일보|저자 = 고정애 기자|쪽 = |날짜 = 2010-02-11|확인날짜 = 2010-02-11}}</ref>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 검증 청문회 당시 '중정 조사에 의하면 최 목사는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 등으로 돈을 받은 단서가 포착되는 등 비리 건수가 40여 건 된다고 한다. 알고 있었느냐<ref name="chung01"/> 는 질문에 대하여서도 "아버지가 나와 중정 부장, 최 목사, 관계되는 사람들을 불러 직접 조사를 하실 때 어떻게 횡령하고 사기를 쳤는지 답하라고 했다. (비리) 내용이 막연했다. 실체가 없는 얘기로 끝나서 아버지가 대검에서 조사하여 보고 문제가 있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셨다. 아버지는 친척을 감옥에 보낼 정도로 엄격하신 분이다. 그 쪽에 가서도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권들이 나를 봐주거나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굉장한 매도의 기간이었다. 잘못이 있었다면 굉장히 시끄러웠을 거다.<ref name="chung01"/>"라고 반박하였다.
  • 윤덕홍 . . . . 6회 일치
         === 단일화 경선 회피 논란 ===
         민주진보진영 서울시교육감 후보 단일화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던 윤덕홍은 단일화 불참 이유에 대해 "경선을 몰랐고,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갑자기 출마하게 됐기 때문에 그때는 경선에 관심도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서울 교육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출마를 했다'는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서울교육감 민주진보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던 '서울 좋은 교육감 시민추진위'는 "시민경선에 참가하시길 권유했음에도 참가하지 않았는데, 지금와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단일화 경선을 요구하는 게 민주주의 원칙과 상식에 맞는 진보적 행동인가?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을 책임지는 수장을 뽑는 선거인데, 이렇게 규칙을 어기고서라도 자신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행동은 교육적이지 않다"고 비판하였다.<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4285 "윤덕홍 탈당 시점은?"] 참세상 2014년 5월 9일</ref>
  • 전인범 . . . . 5회 일치
         2017년 2월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 [[문재인]]의 대선 경선 캠프인 ‘더문캠’의 안보자문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음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이에 앞서 그는 2월 4일 문재인 후보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주제로 연 북 콘서트에 국방·안보분야 패널로 참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006981 문재인, 경희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 북 콘서트], 《연합뉴스》, 2017년 2월 4일</ref>, 문 후보를 가리키며 “이분하고 함께하면 우리나라 안보를 든든히 하고 한미 관계를 튼튼히 해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문 전 대표는 빨갱이가 아닌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하며 문재인 캠프 합류 선언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352238 특전사령관 출신 전인범도… 문재인 캠프 ‘전방위 수혈’], 《한겨레》, 2017년 2월 5일</ref> 3성 장군 출신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이 전례 없는 여론의 각광을 받자 조선일보는 “[[송영무]], [[박종헌]] 등 참모총장 출신 4성 장군 두 명을 포함, 장성 10명이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그만큼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3252738 [만물상] 야당으로 간 특전사령관], 《조선일보》, 2017년 2월 7일</ref> 후일 전인범 영입을 기획한 것은 전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작품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ref>박성현. 2017.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089 “[집중분석] 파격인사! 문재인 대통령의 용인술(用人術).”] 『월간중앙』 201707호, 20-25.</ref> 당시 그를 영입하고자 다가온 많은 정치계 인사들에게 그는 군 개혁에 대하여 강하게 호소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그중 유일하게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문재인 후보였기에 안보자문 합류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선 경선 캠프에서 호감형은 아니었다는 그는 문재인 캠프 내의 안보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 복무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무슨 안보자문이냐”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ref>[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02/02/2018020200018.html [컬럼] 특전사 다목적대검 사태를 바라보며... #2], 《뉴데일리》, 2018년 2월 13일</ref> 자문위원 직은 맡았으나 [[더불어민주당]]에는 입당하지 않음을 강조한 그는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와 차이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546436 '文측' 전인범 "사드, 中 경제 압력 굴복 않아야"(종합)], 《뉴스1》, 2017년 2월 6일</ref> 이와 관련해 [[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경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기존 한미 정부 간 합의는 존중한다는 두 가지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동안 한중관계를 고려해 사드 배치 재검토를 주장해온 야권과는 결이 다른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4&aid=0000474843 문재인 캠프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사드 해법’ 제시], 《스포츠경향》, 2017년 2월 7일</ref> 이에 문재인 전 대표도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로 넘겨 국회 비준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서도 “한미간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 쉽게 취소하기 어렵다”며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69&aid=0000186840 “中 경제적 압력 굴복 말고, 美와 사드 합의 존중해야”], 《한국일보》, 2017년 2월 6일</ref> 그의 문재인 캠프 합류에 실망한 일부 보수세력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충분히 분노하시는 마음을 이해합니다”라며 “제가 이번 결심의 결정적 이유는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7만원짜리 특수작전 칼([[:en:Survival knife|서바이벌 칼]])을 부결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조용히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문재인 지지 선언의 이유를 설명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52237 文 캠프 합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페친 5000명 중 28명 이탈했다"], 《조선일보》, 2017년 2월 5일</ref> 친정인 군을 향한 비판에 육군은 공식 브리핑에서 “특전사 장병들이 생존용으로 사용하는 특수작전 칼을 당초 7만원씩에 구입하려고 했으나 더 나은 15만원짜리로 구입하기로 하고 2022년까지 모두 18억500만원을 예산에 편성했다”고 해명했으나, 2017년 예산에는 특수작전 칼 예산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3233 전인범과 육군의 ‘칼 싸움’], 《중앙일보》, 2017년 2월 7일</ref> 육군 관계자는 시범사업으로 구입했다가 나중에 평가에서 합격해야 향후 5년간 18억원으로 칼을 구입하게 된다는 뜻에서 “올해는 시범사업으로 소량만 구입할 예정이며 예산은 5000만원”이라고 재차 해명했다.
         * 2017.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제19대 대통령 선거 경선 캠프 안보자문위원
  • 남유진 . . . . 4회 일치
         === 도지사 출마와 경선 패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그리고 선거 심판]]과 공직 퇴임 ===
         한 지자체장에 3선을 초과하여 도전할 수 없다는 우리나라 법에 따라 구미시장 4선 도전은 할 수 없기에 2018년 1월 25일에 [[경상북도지사|경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자진 퇴임을 하였다. 곧바로 박정희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경북도지사 출마 선언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참석 이력을 강조하며 공약으로 포항 영일대에 박정희 동상을 설치하겠다고 한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2/26/0200000000AKR20171226141300053.HTML|연합뉴스]] 하지만 자유한국당 경상북도지사 경선에서 11.0%를 득표함으로써 경선을 꼴찌로 마감했다. 이후 경선에서 선출된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지사 후보의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 이철우(1955) . . . . 4회 일치
         2018년 1월 31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북도지사]] 경선 전에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계획을 돌연 철회했는데, 당에서 국회의원직 사퇴를 강력히 만류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국회의원 사퇴로 인해 다른 광역단체장 출마를 희망하는 국회의원들의 줄사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경북지사 선거 경쟁 후보자들이 국회의원 사퇴에 대해서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0년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자유한국당 김천당협위원장을 사퇴했다. 사실상 배수진을 친 셈이다. 4월 9일 경선에서 32%로 1위를 했다. 자유한국당의 경선은 결선투표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경북도지사 후보로 확정됐다. 당원 투표에서는 김광림 후보에 밀렸지만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1위가 됐다.
         2018년 8월 12일 상대 후보였던 오중기를 만나서 인사했다는 트워터글을 남겼다 뒤에 있던 사람이 송영길인거 보니 당대표 경선이 한창인 민주당 경북도당을 방문했는 것 같다.
  • 이철희(1964) . . . . 4회 일치
         E.E. 샤트슈나이더라는 학자를 좋아해서 그의 책과 이름을 자주 거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머 에릭 샤트슈나이더는 미국의 정치학자이다. 보통 샤'''츠'''슈나이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민주정의 발전은 다양한 정당들의 공정 경쟁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정당 정치에 깊이 관심 있는 사람치고 샤트슈나이더 영향 안 받은 사람은 드물다. 이철희는 샤트슈나이더의 책을 번역한 적도 있다. 참고로 샤트슈나이더는 대의제 민주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입장인데, 현 새정련 주류인 친노계가 직접, 참여적 민주정 강화를 지향하는 입장임을 보면 애초에 정당 운영 면에서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 갖고 까는 건 아니지만~~][[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28769|그래서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또한 학부 시절 [[최장집]] 교수에게 배운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장집 교수 역시 저서에서나 강연에서 대의제 민주정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 때문.
         비례 대표 당선 이후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정권교체와 더불어 세대교체, 정치교체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 이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안 지사뿐"이라며 "안희정은 품이 넓고 싸가지 있는 진보"라고 말했다. 진영을 넘어선 협치와 대연정을 강조하는 안 지사의 원칙에 동의한다"고 밝히며 안희정 캠프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본인이 속한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청산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을 크게 경시한 것이기에 이후 자신이 지지하던 안희정이 경선에서 탈락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물론 이철희 본인이 이기는 곳에 가는 것에 연연했다기 보다 본인에게 맞는 쪽으로 간 것이기에 이철희 본인도 이후 경선결과에 토를 달지 않고 승복, 이후 문재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적 표현에서 대통령다운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국민의당의 김경진 의원과 설전을 벌인 것이 대표 사례.
  • 추미애 . . . . 4회 일치
          * 2017년 [[더불어민주당]]의 [[제19대 대통령 선거|제19대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때는 [[아재개그|줌마개그]]를 선보였다. 호남권 경선 대회 때 개표 발표를 맡았던 [[홍재형]] 당시 선거관리위원장은 후보의 이름이나 총 득표율을 잘못 말하는 실수를 여러번 하였다. 이에 이름이 잘못 불리워진 후보 측에서 반발이 생기자 이후 충청권 경선 대회 때 자신의 말 실수를 공식 사과했다. 이후 추미애는 홍재형 위원장의 사과를 너그럽게 받아달라고 말하며 "제 이름을 거꾸로 하면 애미가 되겠지요?"라는 농담을 했다(...).
          * 2017년 10월 25일 녹화되고, 사흘 뒤 인터넷에 공개된 [[김어준의 파파이스]] 최종회에서 [[친노|친노무현계]]의 좌장으로 불리는 [[이해찬]] 의원은 (지난 대선 경선에 출마한 사람을 제외하고)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의 차기 대선 주자로 부상할 만한 사람들을 언급해달라는 [[김어준]]의 요청에 추미애를 언급하였다.
  • 유승민(정치인) . . . . 3회 일치
         [[박근혜]]와는 2005년 1월에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것을 계기로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같은 해 10월까지 10개월간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맡았다. 2007년에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하며 원조 [[친박]]으로 불리기도 했다.
         유승민은 [[경제학]] 박사 출신의 경제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제18~19대 국회에서 8년 연속으로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고, 특히 19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방위원장으로도 재직했다. 당시 경선 상대였던 황진하 의원(육군 중장출신)과 맞붙을 당시 '''"병장이 장군을 이겼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국방위원회]]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위원회 같지만, 19대 국회에서 국방위원회 활동을 했던 김광진 의원에 따르면, 첫 번째로 지역구 예산을 챙겨주기 어려우며, 두 번째로 완전하지 못한 민군통제원칙에 인한 제약, 마지막으로 피감기관이 적고 언론 노출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비인기 위원회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후반기에는 국회 정보위원도 겸임하였고 외교통상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경제학자 출신답게 2013년에는 새누리당 사회적경제특위 위원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내 주류에게 밉보인 탓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 논란을 겪으면서 본인이 [[새누리당]]을 탈당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위기가 찾아왔으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비대위 결정으로 세간의 예상보다 빠르게 [[새누리당]]으로 복당함으로써 여러 언론에서 [[제19대 대통령 선거|차기 대권 주자]]로써 이름이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바른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경쟁자 [[남경필]]을 누르고 19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 임동규(정치인) . . . . 3회 일치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특별시의회]] [[의장]]을 지내면서 당시 [[이명박]] [[서울특별시장]]과 인연을 맺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경선]]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며 [[친이]]계에 속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본선에서 직능정책본부 행정자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선거 후에는 제17대 대통령 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2014년 4월 12일,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최용호 전 강동구 부구청장과 [[서울특별시]] [[강동구]][[구청장|청장]] [[경선]]에 참여하여 승리했으나, 경선 과정에서 '''돈봉투를 돌려서 검찰에 압수수색을 당하는 바람에''' 최용호 후보로 변경되었다.
  • 김연경(배구선수) . . . . 2회 일치
         남은 것은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이 ~~표면상~~ '대승적인 차원' 에서 배려해주는 것 뿐이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아보였다. FIVB 월드 그랑프리 이전에 결정짓겠다던 이적 문제가 [[2012 런던 올림픽|올림픽]]을 지나 9월 초가 되도록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김연경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대한배구협회]]의 [[높으신 분]]의 말씀 한마디이면 해결될 문제이긴 하나 사실 진짜 일해야 할 곳은 계약기간과 신분부터 확실히 해줘야 할 [[한국배구연맹]](KOVO)고 [[대한배구협회]]는 이적동의서 쓰는 것이 할 일. 따라서 이 일이 [[대한배구협회]]로 가는 것부터가 [[현실은 시궁창]]. ~~그리고 그 높으신 분은 김연경 이적 파동 발생 때 대통령 해보고 싶으시다고 나대셔서...~~[* [[대한배구협회]] 회장은 이명박 정권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 의원으로 18대 대선 새누리당 경선후보로 나선 바 있다.]
         추가적으로 김연경 이적 파동과 직접 당사자였던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구단, [[대한배구협회]], [[한국배구연맹]]의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얽히고설켜 삽질을 했다는 내용이 밝혀졌다. 박상설 KOVO 前 사무총장이 기금전용 문제로 궁지에 몰려 있었고, 대한배구협회 임태희 회장은 김연경 이적 파동이 생기려고 하던 시점에 공석이었던 KOVO 총재 자리에 눈독을 들이며 물밑 작업을 시도했었다. 여기에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이 국제이적동의서(ITC) 발급주최인 [[대한배구협회]]에 떡밥을 던졌고,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권광영 단장은 당시 KOVO 총재 추대위원회에 속해있어 KOVO 총재에 눈독을 들이던 임태희 회장의 [[대한배구협회]]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또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온갖 비리혐의로 궁지에 몰려 있던 박상설 총장에게도 추파를 던져 박 총장에 대한 연임 지지를 약속하며 김연경의 해외진출건을 KOVO 이사회 차원에서 막아달라는 ‘딜’을 성사시켰다. 이후에 임태희 회장이 새누리당 18대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하고, [[대한배구협회]] 전무이사의 ITC 발급 불가에 대해 SNS 구명활동에 응하는 엉뚱한 짓으로 우왕좌왕하며 망신을 자초했다. [[http://m.mk.co.kr/entertain/home/2014/213724|해당기사]]
  • 김영환(1955) . . . . 2회 일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장경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6년에는 [[민주당(2005년)|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려고 하였으나, [[박주선]] 의원이 전략공천되면서 경선을 요구하며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이인제]] 민주당 대선후보의 충청선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1월 [[민주당(2005년)|민주당]]을 탈당하여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화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열린우리당 계열과의 반목이 심했던 터라, 합당에 반발하여, 한나라당 입당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이후 [[민주당(2008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
         2017년 1월 15일 국민의당 당대표 경선에서 3위를 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 김윤환 . . . . 2회 일치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김윤환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이내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이회창]]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면서 다시 '킹 메이커'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당내 민정계와 영남세력을 대거 규합해 이회창을 대선 후보로 옹립한 김윤환은 3회 연속으로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정작 이회창은 아들들의 병역 문제와 [[이인제]]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이때부터 김윤환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자신이 밀었던 이회창 총재에게조차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면서 [[토사구팽|팽]]당해 공천을 못받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난다.[* 이 당시 이회창의 참모가 [[윤여준]]이었는데, 그간 총선의 화두는 공천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김윤환을 위시한 민정계, 구시대 인물들을 쳐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회창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윤여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윤여준의 전략대로 중진급 현역 의원과 정계 거물 수십여명을 날리고 정치 신인들을 대거 전면에 내세운 개혁 공천은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조순(1928)|조순]], [[이수성(정치인)|이수성]], [[박찬종]], [[이기택]] 등 3김 정치 + 이회창에게서 팽당한 정계의 옛 거물들을 끌어모아 [[민주국민당(2000년)]]을 차렸다. 재야의 장기표나 심지어 신군부 출신 [[허화평]]도 있었다! 이렇게 거물과 명망가만으로는 상당히 그럴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급조한 정체성이 불문명한 정당으론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양당 구도에 밀려 지역구에선 [[춘천시]]의 [[한승수]] 前 경제부총리, 전국구에선 후보 1번이던 [[강숙자]] 등 총 2명 당선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본인 역시 자기 지역구인 구미시에서 한나라당 [[김성조]] 후보를 상대로 10% 차의 패배를 당했다.(41.7%:32.1%)
         대화와 협력을 명분으로 실제론 막후 밀실에서 정치자금과 권력을 배경으로 야합하는 [[일본]]식 정치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노무현이 실제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으로서[* 개혁 성향의 영남후보를 세워서 영남표를 잠식하고 수도권의 개혁 성향 야당표를 결집시켜야 한나라당의 호남 포위 구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 [[천하삼분지계]]가 [[제갈량]]만의 독창적 사고가 아니라 당시 주요 책사들의 공통적 인식이었던 것처럼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도 정치권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나리오로 여겨지던 내용이다. [[노무현]]의 지지율이 2~3%에 불과할 때도 일단 민주당 후보 경선만 통과한다면 대선 승리 가능성으론 가장 높을 것이란 평가가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지배적이었다.] 당선된 것이나, 홀로 여러 계파를 다룬 점 등 정치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김윤환이 속해 있던 민주정의당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어 김윤환을 만난 다음 "그래도 김 선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장내에서 민주주의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했고, 언론계 인사들 역시 "허주는 순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물 흐르듯 한다."는 평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보면 친화력만큼은 역대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힐 수 있을 만큼 대단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회창이 사과의 뜻을 표했으나 공식적 화해 없이 세상을 떴다.
  • 송호창 (1967년) . . . . 2회 일치
         *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경선 준비기획단 위원
         * [[민주통합당]]에서 의왕·과천 지역에 경선 없이 전략 공천을 했으나 입당 8개월, 국회의원이 된지 6개월 만에 민주통합당을 탈당하고 안철수 대선캠프에 참여.<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10/2012101000156.html 공천 받은 黨 6개월 만에 떠나며 "낡은 정치 세력"] 조선일보 2012-10-10</ref>
  • 조원진 . . . . 2회 일치
         2017년 4월 11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경선 후보로 단독 입후보한 조원진을 대선후보로 공식 확정했다.
         [[김진태(정치인)|김진태]]와 [[김태흠]]이 친박의 돌격대장이라면 조원진은 [[광신도]]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사실 광신도인 척을 하면서 박근혜를 동정하는 국민들의 표를 바탕으로 정치 활동을 해나가고자 하는 고도의 전략을 가진 인물일지도 모른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781608|#]] 탄핵까지는 아니지만, 4월 30일 퇴진을 주장했고, 최순실 특검법에도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 게다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나, 넷 중 4위라는 처참한(...) 경선 결과로 인해 다음 지선에서 대구시장 공천을 장담할 수 없게 되어 정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직접 신당을 만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참고로 정당 소속 후보가 내야 하는 공탁금이 무소속 후보가 내야 하는 공탁금보다 적다.
  • Victoria II . . . . 1회 일치
          1861년 7월 1일부터 시작하는 캠페인. 이탈리아는 통일을 완수하여 열강의 자리에 올라갔으며, 한때 열강이었던 스페인은 이탈리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탈락해버렸다. 아편 전쟁으로 홍콩을 강탈당한 중화제국은 천왕이 이끄는 태평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멕시코에게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강탈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거의 완성했지만 독립을 선언한 아메리카 연합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튀니스와 트리폴리를 자국 영토로 합병하고 이집트에게서 중동 지방을 빼앗았다. 프랑스 역시 알제리를 완전히 먹어치웠고. 한편 일본은 미국의 영향권 내에서 근대화를 끝마쳐가는 중이다. 중앙아메리카 합중국은 분열되어 여러개의 나라가 되었으며, 페루는 에콰도르가 지배하고 있는 파스타사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 김민희(1982) . . . . 1회 일치
         || 2012년 || [[화차(영화)|화차]] || 주연 || 강선영/차경선 ||
  • 김충섭 . . . . 1회 일치
         공직을 퇴직한 이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김천시장에 출마하게된다. 김천시장직은 박보생 시장이 3선 연임제한에 걸려 출마할 수 없었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TK지역 여당인 [[자유한국당]] 공천을 바라며 경선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공천을 정하는 과정에서 불투명한 여론조사와 당원투표 등 여러 문제로 공천 잡음 들이 생겨나게된다. 이러한 문제 들로 인해 이에 불복한 [[최대원|시장 후보 중 한명]]은 아예 탈당하고 체급을 올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공천 문제로 분열된 자유한국당은 원래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더불어 민주당|친여 세력]]의 지원사격까지 받으며 진보층 세력까지 흡수한 김충섭 후보에게 시장직을 내주고 [[이철우(1955)|전직 의원]]이 경북도지사 후보로 영전함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격인 [[송언석]] 후보는 최대원 후보에게 1%정도 차이로 초박빙 승부를 벌이는 모습을 보이며 국회의원직도 겨우 당선되는 등 옆동네인 구미와 함께 자유한국당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 남능미 . . . . 1회 일치
          * 일부변경선
  • 류현경 . . . . 1회 일치
         * 《[[쩨쩨한 로맨스]]》(2010) - 경선
  • 박승호(정치인) . . . . 1회 일치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에 경상북도지사 예비후보로 등록하였으나 경선에서 현직 도지사인 [[김관용]]에 밀려 탈락하였다. 이때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개칭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7528.html|#]]
  • 박준규(1925) . . . . 1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박철언]]과 함께 자민련 내 대구경북세력을 대표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에다 김대중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경선]]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끝에 당시 [[한나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오며 국회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박준규는 이로써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반면 [[한나라당]]은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1928)|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 박희부 . . . . 1회 일치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공주시]]-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정진석(정치인)|정진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오시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후보 [[경선]] [[전당대회]]에서 [[박근혜]]를 지지하였다.
  • 서상일 . . . . 1회 일치
         56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론에 떠밀려 제일야당 민주당과 진보당은 후보단일화협상을 갖게 되었는데 협상장에서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은 민주당 [[대통령]] [[신익희]]에게 양보의사를 밝히는대신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민주당측이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ref name="서158">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8 페이지</ref> 일단 [[신익희]]는 이 제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민주당 (1955년)|민주당]] 으로서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왜냐하면 당시 신구파연합체였던 민주당은 당내경선에서 구파의 영수 신익희와 신파의 영수 장면을 나란히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던 것인데 신익희가 신파를 설득하는것도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익희ᆞ조봉암 회동이 이루어진지 6일만에 호남유세에 나섰던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안에서 뇌출혈로 급사함으로써 사실상 후보단일화는 엉뚱하게 조봉암으로 되어버렸지만 민주당은 당차원에서 조봉암을 밀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민주당 최고위원 김준연은 조봉암의 사상적 문제점을 들어 이승만 지지를 공개선언하기까지 했다.
  • 안종범 . . . . 1회 일치
         * 2012 . 09 ~ 2012 . 12 : 새누리당 대통령 선거후보 경선캠프 정책메세지 본부장
  • 오중기 . . . . 1회 일치
         경북도당위원장 경선을 앞둔 2016년 8월 4일 오후 10시 30분께 대구 북구의 한 음식점에서 민주당 지역위원회 간부에게 지지를 부탁하고 5만원 상당 음식물과 현금 50만원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되어 정당법 위반으로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16/0200000000AKR20170216180200053.HTML|관련기사]] 당세가 약한 경북지역 특성상 고생하는 지역위원회에 대한 격려 및 경비 지급 차원이었다고 해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당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사려깊지 못한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
  • 윤진식(국회의원) . . . . 1회 일치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는 2010년에 제대로 참패한 새누리당의 전략적 선택이었는데, 2010년 당시 [[정우택]] 후보는 나름 중진이고 거물임에도 인구가 적은 진천이 출신지여서 '''충주 출신의 이시종'''에게 그야말로 처참히 발렸다. 이때 정우택은 이시종에게 36,267표차로 졌는데 청주권(구 청주시, 청원군)에서 29,606표차, 이시종의 텃밭 '''충주에서 23,963표차'''로 패했다. 때문에 새누리당은 같은 충주 출신인 윤진식으로 맞불을 놓은 것.(사실 다른 경선 후보들이 모두 중도하차하면서 후보가 윤진식 혼자밖에 남지 않았던 탓도 있다)
  • 은혼/629화 . . . . 1회 일치
          * 통제불능의 보케질은 소요 공주의 포용력으로 적당히 수습됐다. 공주와 노부메는 함께 이불을 덮고 푹신한 사다하루의 몸통에 등을 기댄다. 공주는 이 푹신한 털 위에서라면 잠들 수 있겠다고 좋아한다. 한동안 말이 없던 두 사람. 공주 쪽에서 예전 생각이 난다며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일국경선편에서 소요 공주가 "쓸쓸해서 잠을 못 자겠다"는 핑계로 긴토키 일행과 함께 잤던 적이 있다. 그때 노부메도 있었다.
  • 이기택 . . . . 1회 일치
         그러나 1978년 신도환 계보에서 이탈하였고, 1979년 5월 [[전당대회]] 때에는 따르는 의원 1명도 없이 원외인사들로만 독자 계보를 형성하여 1차 대회에서 신도환을 뛰어넘는 92표를 획득했다. 그리고 전당대회 2차 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사퇴하여 자신의 표들을 김영삼에게 몰아 주어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이때 신민당 내에서는 중도통합론을 내걸고 사실상 독재정권과 야합하던 이철승에 대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래서 2차 투표를 앞두고 [[선명야당]]을 내걸고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을 공언하고 있던 김영삼으로 반이철승 세력들이 결집한 것이다. 이기택의 후보사퇴는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도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철승을 떨어뜨리고,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김영삼은 이들의 표를 모두 모아서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 속에서도 총재경선에서 승리하였다.]이 때 박정희 정권은 이기택이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을 지지하려 하자 자형 이임용이 운영하는 태광그룹의 장부를 압수하기까지 하였다.
  • 이동흡 . . . . 1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선거 전담 재판부인 형사10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3월 22일에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03년 9월 선거구 아파트 조기축구회 창단식에 참석해 고사상에 현금 20만원을 기부하고 같은해 12월 제주도에서 열린 이장단 단합대회에 두차례 참석해 1100만여원 상당의 음식값과 술값을 후배를 통해 지급하여 기소된 [[박혁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 이장단 단합대회에 대해 무죄라고 판단하여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모두 유죄로 인정하면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0519344]</ref> [[민주노동당]]을 공개 지지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2년이 선고된 정용천 전국공무원노조 수석부위원장에 대해 징역6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19351]</ref> [[열린우리당]]을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시스템클럽]]에 게시하여 1심에서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군사평론가 [[지만원]]에 대해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19374]</ref> 3월 29일에 [[백원우]] [[열린우리당]] 의원에 대해 "경선 당시 인쇄물을 배부한 대상은 입당 원서가 지구당이나 중앙당에 제출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진정한 의미의 당원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0521828]</ref>
  • 이명규(국회의원) . . . . 1회 일치
         2004년 초 북구청장직을 사임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전당대회]]에서 [[이명박]]을 지지하여 [[친이]]계에 속하였다.
  • 이원재(축구선수) . . . . 1회 일치
         ||<width=30%><:> [[진경선]] [BR] (2015) ||<:> {{{+1 →}}} ||<width=30%><#050403><:> '''{{{#f2c91f 이원재}}}'''[BR]'''{{{#f2c91f (2016)}}}''' ||<:> {{{+1 →}}} ||<width=30%><:> [[배기종]] [BR] (2017~) ||
  • 이인영(정치인) . . . . 1회 일치
         참고로 이때 20대 총선에서 이인영이 고향인 충북 충주로 사실상 '''하방'''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2016년 당시 충북 충주는 민주당에게 사지(死地)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시종]]이 충북지사로 출마하면서 국회의원을 사퇴한 이후의 모든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64% 이상의 득표를 했던 것. [* 다만 [[19대 대선]]에선 [[문재인]] 34.4% vs [[홍준표]] 30.4%로 문재인이 약 4%차로 승리했다.] 이인영이 아무리 야당 당대표 경선까지 출마한 나름 거물일지라도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었다.
  • 창작:티겔 왕국 . . . . 1회 일치
         이러한 성과의 결과는 (달제가 원하진 않았겠지만)상티겔 왕국 멸망이후 하티겔 왕국의 형성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후 하티겔의 형성이후까지 이뤄지는 사냥꾼과 티겔 왕국의 협력에 기반을 닦아두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후 남쪽에 탐험가를 보내어 동부 대륙 남쪽에 농사짓기 좋은 평야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재의 티겔 평원] 그곳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다만, 거리가 거리다보니 대부분 일부만 겨우 도착했다.] 한편으론 동북쪽의 강자들인 하이엔 왕국과 츄프 왕국과 연합해 남진을 시도하는 레잉 왕국의 침략을 여러번 막아내면서 [* 특히, 북티겔 언덕에서 벌어진 회전에선 레잉의 왕과 태자까지 사살할 정도로 대승을 거뒀다.] 국경선에 요새를 쌓고 방어를 준비하는데 힘썼다.
  • 토탈워: 쇼군 2/유닛 . . . . 1회 일치
         === 경선박 ===
  • 효령대군 . . . . 1회 일치
         * 고모 : [[경선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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