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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인

강중인(姜仲仁, <small>본식 이름: </small>德田仲仁, 1908년 ~ ?)은 제 강점기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법조인이다.

생애

경상북도 출신으로 1935년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8년에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검사국 사법관시보가 된 것을 시작으로 법조계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39년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가 되었고, 1940년에 예비검사를 거쳐 그해부터 1943년까지 조선총독부 검사로 근무했다. 강중인은 경제담당 검사로 하면서 태평양 전쟁 중 시국 연설과 기고로 사회 활동을 병행했다.

1942년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저명 인사의 시국연설을 방송했을 때, 〈필승사상전(必勝思想戰)〉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이 있다.

삼천리》에 〈최근의 반도의 경제사범 ­국민의 신경제 윤리의 파악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경제사범을 "미증유의 국난"을 돌파해 "대동아를 건설하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집단으로 묘사하고, 이들은 국민의 대수치이므로 엄벌주의로 대처할 것이라 경고했다. 또한 관민이 체가 되어 "사보국의 성을 다함"으로써 성업을 어서 완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943년에 대전지방법원 검사로 자리를 옮겨 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했다.

미군정 하의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면서 좌익 운동에 뛰어들었다. 좌익 법조인 모임인 법학자동맹남조선로동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강중인이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동기는 후에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ref> {{뉴스 인용
|저자=정지환,정은성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93183
|제목=연행 날짜, 수사관, 배후세력은 알지만 구속한 검사 이름만 기억나지 않는다? - <nowiki>현대사 추적 이회창 후보 부친 좌익혐의 구속사건 미스터리(3)</nowiki>
|출판사=오마이뉴스
|날짜=2002-11-04
|확인날짜=2008-06-09
}}</ref>

{{인용문|정(日政) 당시에는 내가 내 한 몸을 구하기에 여력이 없었습니다. 8·15 해방을 맞이하자 피고는 이때야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할 수 있을까 함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투쟁하던 위대한 애국자들이 해방된 조국을 찾아 들어옴을 볼 때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 후 피고는 남로당에 가입을 작정하였던 것이며, 법맹에도 초창기부터 가입하였습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토지문제연구위원에 임명되었고, 미군정 과도정부의 사법부 총무국장도 지냈다. 같은 해 7월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여 남로당과 미군정이 정면 충돌을 으켰을 때 위폐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남로당은 곧 불법화되었고, 강중인은 1949년에 발생한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참고자료

* {{서적 인용
|저자=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인명사전 시안
|꺾쇠표=예
|연도=2008
|발행월=4
|출판위치=서울
|장=강중인
}}

각주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