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강봉규"에 대한 역링크 찾기

강봉규의 역링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강동우
         || [[류중일]](1987~1999) || → || '''강동우(2000~2005)''' || → || [[강봉규]](2006) ||
         || [[강봉규]](2000~2005) || → || '''강동우(2006)''' || → || [[이승엽(1982)|이승엽]](2007) ||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을 달고 뛰며 타격에서는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타율 0.288,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2001년 데뷔하여 삼성의 붙박이 타자가 된 왕년의 좌타 [[라이벌]] [[박한이]]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타율이 2할 중후반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외야진 보강 차원에서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의 [[강봉규]], [[김창희(야구)|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 이는 훗날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발언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 구자욱
         스프링캠프와 시범 경기 때 맹활약하며 기대를 받았으나, 외야의 [[최형우 (야구 선수)|최형우]], [[박해민]], [[박한이]], 내야의 [[채태인]], [[박석민]]을 제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범 경기 때 부상을 당한 [[채태인]]을 대신해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갔으며, 3월 28일 [[SK 와이번스]]와의 개막전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데뷔 첫 타석에선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으나, 두 번째 타석에서 우측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쳐,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였다. [[4월 1일]] [[kt 위즈|kt]]전에서 [[정대현 (1991년)|정대현]]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시즌 초반 아쉬운 1루 수비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홈런을 기록한 [[4월 3일]]을 기점으로 타격감이 안좋아지자, [[강봉규]]가 한동안 1루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4월 9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강봉규]]의 대타로 타석에 나와 [[김승회]]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데뷔 첫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였다. 다음날 경기에서 부상당한 [[채태인]]이 1군에 올라와 시즌 첫 선발 출장을 했으나, 한 타석만에 그와 교체되었고, 그는 홈런 포함 3타수 2안타로 맹활약하였다. [[채태인]]이 다시 2군으로 내려가며 주전 자리를 이틀만에 꿰찼지만, 다시 타격감이 안 좋아져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이 주전으로 나섰다. 그러나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도 기대 이하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4월 29일]]에 그는 다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면서 데뷔 첫 3안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 뒤로 꾸준히 타격감을 끌어올린 그는 [[채태인]]이 부상에서 돌아오자, 타격 부진에 빠진 [[박해민]]을 대신해 중견수로도 출장하며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5월 21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윤명준]]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였고, 이 홈런은 [[삼성 라이온즈]]의 4000번째 홈런이 되었다.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이승엽]]의 [[KBO (야구)|KBO]] 최초 400호 홈런이 터지던 날, 대수비로 출전한 그도 나란히 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이 포스트 [[이승엽]]의 자격이 있다는걸 증명했다. 꾸준히 타격감을 올린 그는 [[6월 18일]]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치며 3할고지를 돌파하였고, 시즌 끝에는 3할 4푼 9리의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 뒤 그는 부상으로 빠진 [[박석민]]과 [[박한이]]를 대신하여 3루 수비와 우익수 수비도 소화하며 수비에서의 재능도 보여줬다. 그는 전반기 0.329의 타율과 9개의 홈런으로 [[2015년]] [[올스타전]] 드림 올스타의 1루수로 뽑히게 되었다. 그는 [[8월 4일]] [[kt 위즈|kt]]전에서 [[저스틴 저마노|저마노]]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하며 신인 최다 경기 연속 안타인 2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였고, 다음 날 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하며 23G 연속 안타로 기록을 늘렸다. [[8월 22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5타수 5안타 5득점 1홈런으로 맹활약하며 생애 첫 5안타, 5득점에 두 자릿수 홈런까지 달성하였다. [[9월 20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타격 후 옆구리 통증으로 시즌을 아쉽게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대 신인 최고 타율을 갱신하였다. 최종 성적은 11홈런, 17도루, 57타점, 97득점이었다. 이는 타율 3위, 득점 10위, 출루율 10위의 대단한 성적이였다. 비록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서는 0.286의 타율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며 팀은 준우승을 하였으나, [[김하성]]과 [[조무근]]을 제치고 신인왕에 오르게 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24/0200000000AKR20151124125600007.HTML?input=1195m '타격 3위' 삼성 구자욱, 2015 신인왕 수상] - 연합뉴스</ref>
  • 김창희(야구)
         프로 데뷔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했으며, [[2003년]] [[손혁]]과 함께 [[진필중]]을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두산 베어스]]로 가게 된다. 그 후 2006 시즌을 앞두고 [[강봉규]]와 함께 [[강동우]]와 맞트레이드로 삼성으로 이적했다.
         여러 코치들의 평에 의하면 발은 빠르지 않지만 낙구지점 판단력이나 송구과정 등의 [[외야수]] 수비 플레이에 있어선 국내 최고라고 한다.[* 그 때문에 발이 빠르지 않음에도 [[중견수]]도 볼 수 있었다.] 팀 내에서는 두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강봉규]] 선수와 친한 선후배 사이인 듯. 2009년 시즌 종료 뒤로는 김창희가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강봉규]]가 홀로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트레이드로 특정 해당 선수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본의는 아니지만 2차례의 트레이드 당시 [[강봉규]]를 제외하면 살아남지 못했다.([[강동우]], [[손혁]], [[진필중]].) 사실 그전 기믹은 [[김종훈(1972)|김종훈]]이 가지고 있었다.[* 단 [[손혁]]은 김창희보다 그 전에 [[양준혁]]을 상대로 트레이드된 사건이 더 임팩트가 컸었다. 물론 [[강동우]]는 한화에서 다시 부활하긴 했지만.. 고로 직접적인 피해자는 [[손혁]]과 [[강동우]]보다는 [[진필중]]이 좀 더 가깝다.]
  • 김헌곤(야구선수)
         4월 1일 [[박한이]]가 시범경기 중 햄스트링 부상으로 빠지며 [[강봉규]]가 [[박한이]]의 공백을 메꾸게 되며 우타 백업 외야수로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배영섭]]과 [[최형우]]가 부진한 상황에서 1군에서 기회를 받아 세차례 선발 우익수로 기용되기도 했으나, 2군에서와 달리 선풍기 스윙만 작렬하며 타율 0.133으로 부진해 4월 19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 박석민
         2010년 8월 13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 2사 상황에서 [[강봉규]]가 안타를 기록할 때 2루 주자로 나가 있었는데,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오면서 막판에 [[포수]] [[신경현]]의 태그를 피하다가 신경현과 홈 대치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에 심판은 결국 박석민을 바로 아웃시켜 버린다.(...)[[http://yoonseokmin.tistory.com/650|관련 포스트]]
         [[최형우]]가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4월 한달동안 0.344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날리며 [[이승엽]]과 함께 삼성의 중심타선을 지탱했다. 1번 [[배영섭]]과 4번 [[최형우]]가 슬럼프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중일]] 감독은 9번 김상수를 1번으로, 5번에서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던 박석민을 2번으로 전진배치한다. 박석민은 2번 타순에서도 맹타를 휘둘렀지만 박한이가 부상에서 회복될 때까지의 임시직이라고 한다. 박석민 본인도 5번을 선호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최형우의 슬럼프가 길어지자 최형우가 5번으로 내려가고 박석민이 4번을 치게 되었다. 결국 최형우가 2군으로 내려가고 나서는 이승엽이 4번으로 가고 박석민은 3번을 치게 되었다. 최형우가 1군으로 복귀한 이후는 최형우를 이승엽 뒤에 세우지 않겠다는 류중일 감독의 뜻에 따라 박석민 - 이승엽 - [[강봉규]] - 최형우 또는 최형우 - 이승엽 - 박석민의 타순을 따라 3번 또는 5번 타자로 나서다가... 최종적으로는 4번으로 고정되면서 삼성의 중심 타선은 '''3번 이승엽 - 4번 박석민 - 5번 최형우'''가 되었다.
  • 부산광역시/인물
         * [[강봉규]] - 부산진구
  • 송원국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청소년 국가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으며, [[1998년]] [[두산 베어스|OB]]에 2차 1순위로 지명됐다. 하지만 [[팔꿈치]] 부상과 [[간염]]으로 인해 2군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2001년]] [[6월 23일]] [[김동주 (야구인)|김동주]]의 부상으로 1군에 올라와 그 날 벌어졌던 잠실 [[SK 와이번스|SK]]전에서 점수 6-6 상황에서 9회말 2아웃 만루 상황에 [[강봉규]]의 대타로 나와 [[투수]] [[김원형]]의 초구를 쳐 프로 데뷔 첫 타석 끝내기 만루 [[홈런]]을 쳐냈다. 그 대타 만루 홈런 하나로 강한 인상을 남겼고 [[2001년 한국시리즈]]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02년]] [[8월 9일]] 아침, 동료 외야수 [[유재웅]]과 함께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잠실야구장]]으로 가다가 [[송파구]] [[올림픽대로]]에서 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했고 그 때 차에 끼이는 바람에 왼쪽 [[무릎]] 인대를 다쳤다. 이후 [[독일]]로 출국해 무릎 인대 접합 수술을 받고, 2년이 넘는 재활 훈련을 했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재활에 실패하여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 때 동승한 [[유재웅]]은 타박상과 찰과상에 그쳤다. 현재는 [[자동차]]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다.
  • 신명철(야구선수)
         [[별명]]으로는 '''유혹의 명철신, 돈성의 심장, 돈성캘리버''' 등이 있다. ~~못할 때는 그런 거 없고 신멍청~~ '유혹의 명철신'은 삼성으로 이적한 후 응원가로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로 선정되면서 등장할 때마다 저 노래가 나오던 까닭에 기존의 별명이었던 '명철신'과 '유혹'이 합쳐지면서 나온 별명이다.[* 파생된(?) 표현으로 "유혹 성공", "유혹당했다"(…) 등이 있다. 다른 팀 선수들의 타구가 2루쪽으로 가서 병살을 당하거나, 신명철의 타구에 타팀 수비수들이 실책을 저지르거나, 파울라인을 타거나 수비수들 사이에 뚝 떨어지거나 하는 변태안타를 만드는 등의 상황이 발생할 때 주로 쓰인다. 신명철이 이렇게 ~~유혹에 성공하면~~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 [[까임방지권|평소때보다 덜 까며]] 그냥그냥 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09년과 10년 타선수들의 빈타 속에 결정적인 순간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돈성의 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가 돈성캘리버로 진화했고 타팀팬들이 영원한 돈성맨으로 남기를 염원하며 돈성의 심장이라는 별명도 붙여주었다. 자매품으로는 돈성의 채찍이라 불리는 [[강봉규]].
         그것도 모자라서 2009년 9월 23일, 마침내 [[20-20 클럽|20홈런-20도루]]에 성공하면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20-20 클럽 가입 2루수가 되었다.'''[* 최초는 [[30-30 클럽]]을 달성했던 1999년의 [[홍현우]].] 완전히 각성. 비록 이 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은 결국 실패했지만, 명철신은 2009년 삼성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도저히 작년에 타율 1할대를 찍은 타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 얼떨결에 [[강봉규]]와 쌍두마차를 결성하게 되었다.[* [[강봉규]]는 기존 쌍두마차인 [[김창희(야구)|김창희]]를 잃는 대신 신명철이라는 새 파트너를 얻었다. 물론 나가시마 타격코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11889의 페이지중에 8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