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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창수 (1958년)
         그 당시 박창수는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ref name="triosio"/>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구치소 내에서 고 [[강경대]] 열사 타살사건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하던 중 원인 모를 부상을 당해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이었다.<ref name="triosio"/>
  • 원희영
         [[1991년]] [[강경대]]의 죽음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시민, 인권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97년]] [[9월 9일]]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 출범에 참여하였고, [[1998년]] [[8월 1일]] [[동인련]]의 창립 멤버였다.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상담센터 준비팀원과 소식지팀장으로 활동하였다. 논리학 교수를 희망하였으나 가정 형편으로 [[2000년]]부터는 서울 시내에서 택배 배달원으로 활동하다 [[2003년]] 논술 강사, 논리학 강사로 활동하였으나 신병으로 2년만에 그만두고 투병생활을 하였다. 정당 활동으로는 [[2000년]]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의 창당과 [[2004년]] 성동구지구당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민노당 본부 정치실천단원, 당 여성위원회 위원, 광진을지구당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3년]] 생계를 위해 [[논술]] 강사로 활동하다 다시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과 노동, 결사 운동에 종사하다 [[2009년]] [[3월 12일]] [[스테로이드]]제 후유증 및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오래도록 병마를 앓았다. 동대문에서 학교를 다녔던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1991년]] [[강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시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스테로이드제의 부작용으로 알레르기, 발작, 크고 작은 병에 시달렸다. [[1993년]] 대학 입학 후, 대학 노래패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또 사회주의 단체에도 가입, 국제사회주의자로써 활동하였다. 당시 [[국가보안법]] 때문에 비합법조직, 이적단체로 쫓겼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94년]] 대학 중퇴, [[서울특별시]]로 올라와 이후 백화점의 판매직 직원 등으로 생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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