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그 집안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요. 다시는 저나 제 아이 주변에, 그리고 우리 친정에 찾아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직장, 아이 어린이집을 포함한 당신과 관련된 어떠한 곳에도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말씀이시죠? 그것도 일가족 전원? "
"네. 그거면 됩니다. "
고키부리 사무실로 찾아온 여자는 꽤 젊어보였다. 젊어보이는 외양과 달리 이혼녀에 아이가 하나 있는 그녀는, 단정하면서도 편안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무언가 불안해보였다.
"그런데... 굳이 남편 뿐 아니라 일가족까지 찾아오지 못 하게 할 일이 있나요? 당신 뿐 아니라 아이까지... "
"네...? 그게 무슨... "
"보통 남편의 폭력성이나 바람기떄문에 헤어진 사람들은 남편 본인만을 뗴어놓거든요. "
"우리 남편이 폭력적이거나 바람둥이라면... 차라리 그랬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느쪽이든 머리는 돌아갈테니... 저희 남편은 그런 사람들보다 배움이 없답니다. "
"지체장애가 있다거나...한 건가요? "
"아뇨, 머리는 멀쩡해요. S대 국문과 나왔거든요. "
그녀는 꽤 이르다면 이른 나이인 스물 여섯에 남편과 결혼했다. 곧 둘 사이에는 두 사람을 꼭 빼닮은 아이도 생겼고, 부부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깨가 쏟아질 것 같은 부부의 일상이 변한 것은, 두 부부가 기다리던 아이 때문이었다.
"자기야... 우리 아이, 내 아이 맞아? "
"무슨 소리야, 자기랑 내 아이지... "
"그런데 어떻게 O형이 나와? 나랑 자기는 B형이잖아. "
"뭐라고? 그거 충분히 가능하잖아. "
두 사람의 혈액형은 B형이었는데, 아이는 혈액형이 O형이었다. 물론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과학에 관심이 있는 어린이라면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알 수 있다. 멘델의 유전법칙 중 하나인 우열의 법칙이 혈액형에도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일류 대학까지 나왔더는 그녀의 남편은 이런 당연한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친아들이라고 설명해줘도 믿지 않았다.
남편이 아이와 친자 검사를 의뢰할 동안, 그녀는 시댁 식구들로부터 '더러운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남편부터 시어머니까지, 누구 아기냐며 차마 입에 담지도 못 할 말을 했다. 시댁에서 유일하게 그녀 편이었던 것은 시누이였고, 시누이는 친자 검사와 검사 결과가 나올떄까지만이라도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 것, 그녀는 일단 친정으로 가 있을 것을 제안한 사람이었다. 아마 친자 검사를 맡기게 된 이유를 업체에서 알았더라면 업체에서도 분명 뒷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남편은 믿을 수 없었는지 검사 업체에 직접 찾아가서 결과를 들었다.
"고객님의 아이와 고객님은 99.9%의 확률로 친자입니다. "
"제 아들이라고요? 그런데 왜 혈액형이 다르죠? 저랑 와이프는 B형인데, 아이는 O형이잖아요. "
"부모님 중에 O형이 있으셨을겁니다. 멘델의 유전 법칙을 배우다 보면 예시로 많이 나오는 게 ABO식 혈액형인데, O형은 A형이나 B형보다 열성이라 O형 유전자끼리 만나야만 표현형이 나옵니다. "
"...... "
직원은 빈 A4지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해줬고, 그는 그제서야 납득했다. 남편은 자신의 무지로 인해 무고한 아내를 딴 남자랑 놀아난 여자로 만들었고, 시어머니는 일류 대학까지 나온 아들을 철썩같이 믿었던 탓에 자기 며느리에게 입에 담지도 못 할 욕을 했다. 중학생 정도만 되면 배우는 사실을 몰라서 일어난 결과였다.
"전에 엄마가 그랬잖아, 아빠가 O형이라고. 넌 진짜... "
"그건 알았는데... 그게... 그렇게 되는 건 줄 몰랐지... "
"일류 대학을 나오면 뭐 해, 상식머리가 없는데... "
"애가 문과라 그래, 문과라. 그런 건 과학 하는 사람들이나 알고 있는 거 아니니? "
"엄마, 이거 중학생들이 배우는거야. 과학에 관심 있는 애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아는거라고... 문과 이과랑 상관 없어. 둘 다, 이제 어떡할거야? 동서한테 손이 발이 되게 빌어도 모자랄 판인데. 내가 그렇게 말해도 안 듣더니... "
두 사람이 집안을 뒤집고 백년가약을 물러버렸다. 그것도 한 사람의 무지와 한 사람의 잘못된 믿음으로.
"동서, 그 결과 나왔거든. 응... 동서랑 내가 예상했던 대로야, 아이 정호 친아이래. "
"...... "
검사 결과를 들은 그녀는 한참동안 울음을 터뜨렸다. 그 동안 얼마나 서러웠을까, 그렇게 뜯어말려도 듣지도 않고 막말을 퍼붓던 부모님과 중학생만 되어도 아는 것을 몰라서 일을 키운 남동생이 원망스러웠다. 시누이는 그녀를 달랬다.
"이번 일 지켜보면서 내가 동서한테 다 미안하더라. 동생이 일류 대학 나왔다고, 똑똑하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는데 머리에 든 게 없어서야 원... 그리고 S대학 출신이라고 맹신하는 엄마도 그래. 우리 가족이지만, 참 한심해. "
"형님... "
그녀는 이혼을 결심하고 있었다. 상식의 결여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억울함을 토로하고 결백하다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 남편과 그런 남편만을 곧이곧대로 믿는 시어머니 때문이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사과한다고 해도, 그녀가 이미 받은 상처들이 사라질 리 없었다. 친정에서도 그런 남편, 그런 시댁이랑은 살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시누이에게 이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래, 동서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사실 동서가 이혼 안 한다고 하면, 내가 이혼하라고 설득하려고 했거든... 내 동생이지만 차마 같이 살아달라는 얘기는 못 하겠어. 서류는 도장 찍어서 우편으로 보내줘. 정호한테는 내가 전해줄테니까. "
"네, 형님. "
"아마 곧 동생이나 엄마가 동서를 찾아갈거야. 동생이나 엄마가 찾아가도 절대 받아주지 말고, 연락 딱 끊어버려. "
시누이의 말대로였다. 전남편과 시어머니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제발 집에 돌아와달라, 내가 잘못했다, 아이만이라도 주고 이혼해라. 그녀의 친정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경찰을 불렀다. 두 사람이 그녀의 직장으로도 찾아와 매달리는 통에 그녀는 손님이 왔다고 하면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고, 그런 그녀에게 알고 지내던 대리가 고키부리 사무실을 소개해줬던 것이다.
"상당히 상식이 없는 사람이네요. 당장 중학생만 돼도 아는 걸...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 뒤로도 찾아오나요? "
"네... 심지어 아이 어린이집까지 찾아와서 데려가려던 걸 친정엄마가 발견해서....... "
"시누이나 시아버지는 따로 말린다거나 하시긴 않으셨나요? "
"시누이는 최근에 겨우 연락이 닿았는데 그 일 이후로 집이랑 연을 끊고 산다고 하고, 아버님은 그이가 고등학생일 때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한들 시누이에게 영향이 가지는 않겠군요. 뭐, 시누이에게는 최대한 영향이 안 가는 방향으로 하긴 하겠습니다만... "
도희는 태영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전에 그 도박장 운영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었다. 하지만 태영은 그 친구는 지금 단속때문에 도박장을 쉬고 있다며, 단 사연을 들어보았을 때, 아내측이 거액의 위자료를 받아갈 수 있는 상황이니 이혼 전문 변호사를 먼저 주선하기로 했다.
"이혼소송과는 별개로, 도희 씨 아는 기자분께 유괴 미수건은 찔러보세요. "
"유괴 미수건이요? "
"네. 그 문제가 일파만파 퍼지면 사람 하나 말려죽는 건 일도 아니죠. 일단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대신 이혼소송에 영향이 가면 안 되니, 판결 결과가 나오는 날 이후로 엠바고는 걸어주세요. "
"알겠습니다. "
도희는 아는 기자를 만나 의뢰 이야기를 했다. 어이없는 이유로 아내를 의심하고 막말한 남편과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시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이혼 후에도 피해자를 찾아가 괴롭혔을 뿐 아니라 아이를 유괴하려 했다는것까지.
"그런 사람이 정말 있군요... 그나저나 유괴 미수를 저지른 건 남편인가요, 시어머니인가요? "
"둘 다요. "
"둘 다요? "
"네, 자기들은 이혼한 걸 인정할 수 없다고 우리 아이고 우리 손주라고 데려가려고 했다네요. "
"허... "
이야기를 듣는 기자도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야말로 한 사람의 무지가 엄청난 파란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거기다가 사람을 바람난 여자로 매도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혼소송중이라고 아이를 유괴하려고 하다니, 이거야말로 우자 중의 우자가 아닌가. 이것은 엠바고가 걸려있는 게 상당히 아까운 기삿거리였다.
"아직 소송 결과는 안 나온건가요? "
"네, 그래도 오늘이 재판일이라니까 아마 기사는 내일이나 모레쯤 내시면 될겁니다. "
그녀는 이혼소송에서 승소했다. 노인과 청년은 스스로의 무지가 일으킨 파란에 휩쓸렸고, 며느리이자 아내를 근거 없는 말로 매도하고 상처를 준 댓가를 받았다. 딸에게 매달리려고 했지만 딸은 이미 연락을 끊어버린 후였고, 두 사람은 스스로의 무지와 맹신에 대한 대가를 접근금지와 막대한 위자료로 치러야 했다.
물론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매도의 댓가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소송이 끝나자, 그들이 유괴 미수를 저질렀던 이야기가 기사로 쓰여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정호가 이혼하기까지의 과정을 본 사람들은 정호를 비웃었다. 문과니 이과니 하는 것 이전에, 중학생이라면 배우는 것을 몰라서 이런 사단을 만들다니, 거기다가 그렇게 아내를 매도해놓고 뻔뻔하게 이혼은 못 해준다며 이제와서 아이를 유괴하려 하고 아내를 괴롭히다니, 전말을 본 사람들은 분개했다.
마른 섶에 불이 퍼지듯 기사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몇몇 네튜버들도 이 기사를 다뤘고, 기사에 나온 정호와 정호 엄마의 신상은 공공재가 된 지 오래였다. 동네 주민들은 정호와 정호 엄마가 나올떄마다 수군거렸고, 이사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사람들은 일부러 정호가 사는 집으로 찾아와 S대 나온 머리 빈 녀석 얼굴 좀 보자고 조롱까지 했다. 정호가 출근하면,회사 사람들도 뒤에서 수군거렸다. 면전에 대놓고 S대 나왔다고 해서 뽑았는데 상식이 없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호씨, 잠깐 인사과에서 부르십니다. "
"인사과요? "
하던 일을 내려놓고 인사과로 간 정호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를 들었다. 회사에서도 그 사실을 접했고, 회사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정호에게 직장을 그만 둘 것을 종용했다. 위자료에 양육비까지 내야 해서 안 된다고 간곡히 애원해봤지만, 회사 내 여론도 좋지 않다며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직장에서 쫓겨난 그는 이직을 시도했지만, 이미 정호의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있었다. 오히려 명문대 출신이라고 사람들을 별다른 질문도 없이 뽑았던 자신을 반성하게 해 줬다는 사람도 있었다. 정호가 할 수 있는 것은 막일뿐이었지만, 막일도 여의치 않았다. 우락부락한 사람들 사이에서 깡마른 그가 일을 받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것보다도 어려웠고, 인력 사무소에서도 정호의 사연을 알음알음 알고 있다보니 뒷말이나왔다.
"리더, 전에 의뢰하러 왔던 사람 남편을 오늘 인력사무소에서 봤지 뭐예요. "
"정말요? "
"네. 회사에서 짤린 모양이던데요... 이직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고... 근데 인력사무소에서도 평이 좀 안 좋아요. 비리비리한 게 시멘트 나르다가 쓰러질 것 같아서... "
"막일까지 알아볼 정도라니... 지금이 딱 그 적기인 듯 합니다. "
막일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위자료에 양육비도 줘야 하는데다가 소송 비용을 대출했던 것까지 갚아야 하니 급한대로 집에 있던 가구나 귀중품들을 처분했지만 그걸로는 택도 없었다. 집도 더 작은 곳으로 옮겨야 했다. 대출을 받기 위해 알아봤지만 소송 비용도 다 못 갚은 그에게 흔쾌히 대출을 해 줄 은행은 없었다. 2금융권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그는 사채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사채에 손을 댄 후,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호는 물론 정호의 엄마도 사채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무지와 맹신의 결과로,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고 외면당하며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다. 양복을 입은 험상궂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돈을 갚으라며 찾아오면 간신히 빌고 빌어서 돌려보낸다. 이런 하루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와중, 정호는 구미가 당기는 문자를 하나 받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스팸이라고 무시했겠지만, 돈줄도 끊겨벼린데다 사람들마저 손절해버린 그에게 있어서는 실낱같은 희망같은 문자였다. 불법도박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사이트에 문자에 딸려 온 추천인 코드를 입력하고 베팅을 한다.
"좋아, 마침 오늘 야구경기가 있으니 한번 걸어볼까... "
용케도 그는 돈을 땄다. 첫 베팅에 돈을 따긴 했지만, 아직 부족했던 그는 판돈을 점점 더 크게 늘렸다. 이번에 크게 한 탕 하면 이자까지 쳐서 갚겠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사채를 더 끌어다 썼다. 그리고 베팅을 한 그는 돈을 땄다. 됐어, 이제 끝이야. 이 지긋지긋한 가난과 사채에서 떠날 수 있겠어! 환호성을 지른 그는 돈을 찾으려고 했다.
"어라... 왜 돈이 안 들어오지...? "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록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분명 도박에서 돈을 땄는데, 입금이 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사이트에 들어가봤지만, 사이트는 닫혀있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내 돈, 내 돈이라고 읊조릴 뿐이었다.
"아, 아냐... 이럴 리가 없어... 안돼... 내 돈...... 분명 땄는데...... 분명 땄단 말이야... "
"아, 안돼! 정호야! 이놈들, 차라리 날 데려가...! "
"거, 노인네 참 끈질기네... 어이, 할멈. 얘가 돈 빌리는 대신 못 갚으면 신체 포기한다고 신체 포기 각서 썼잖아. 엉? 이거 안 보여? "
"이거 놔라, 이놈들! "
"저리 안 비켜? "
분명 돈을 땄다며, 그런데 왜 접속이 안 되냐며 묻는 그를 건장한 남자 둘이 끌고 나갔다. 정호를 붙잡고 안된다는 어머니에게, 남자 한 명이 신체포기각서를 보여주었다. 정호는 어머니의 눈앞에서 커다란 승합차에 실려 그대로 가 버렸고, 끌려가는 정호를 보며 그의 어머니는 울었다. 사람들은 그런 정호의 엄마를 무심한 듯 바라보았다.
실낱같은 희망이라 생각했던 것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가는 동앗줄이었다. 무지에 대한 댓가는 매우 컸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댓가였다. 자신의 무지와 맹신으로 인해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한 댓가.
"저 집 아들이 잡혀갔다며? "
"몇 달이나 시끄러웠는지 몰라요. 내 돈 내놓으라며... "
"어휴... 이제 좀 조용해지겠네. "
"가만... 저 집 아들, 혹시 그 사람 아냐? 왜 거, 몇주 전에 신문에서 나왔잖아. 혈액형때문에 이혼한 사람! "
"S대 나왔다더니, 다 부질없구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