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귀쟁이

노숙까마귀 0 2,201

"Cholera jasna"

 

  초록 눈의 엘프 하나가 던전 안을 걸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던전을 탐사할 때 섣불리 소리를 내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지만 그것은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불과 열 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동료와 고용인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의지할 것은 손에 든 AK-74 한 정 뿐이었다.

 

  던전을 헤집는 이들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용병이었다. 몇 주 전, 그녀는 스웨덴에 있는 어느 괴짜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런 괴짜들이 말하는 것은 놀라우리만큼 똑같았기에 그녀는 편지를 읽기도 전에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짭짤해 보이는 던전을 찾아서 한번 뒤져볼 생각인데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편지에는 써져있지 않았지만 그 곳에 가서 벌어질 일은 뻔했다. 분명 이 일에 낄 만큼 지능이 딸리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박물관에 견학 온 초등학생 마냥 날뛰는 괴짜를 호위하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뒤치다꺼리를 싫어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런 의뢰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많이 달랐다. 이 일이 얼마만의 일인가. 만약 이 일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쯤 굶어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보다는 나은 일이 들어왔을 수도 있겠지….”

 

  그녀는 발을 끌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봐야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의뢰를 받아들였다. 비행기와 기차를 거쳐 노르보텐에 도착한 그녀는 함께 일할 이들을 만났다. 지금까지 던전 탐사를 열 번 넘게 했다는 나이지리아 출신 덩치, 무용담을 떠벌리기 좋아하는 미국 출신 안경잡이 화염 마법사, 박사 학위를 따고 나서 학자금을 갚기 위해 이 업계에 뛰어든 일본 출신 대기 마법사, 그리고 이번 던전 탐사가 처음이라는 독일에서 온 젊은 사제. 그녀와 이 네 명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얼간이를 호위해야 했다.

 

  일은 처음에는 계획대로 돌아갔다. 버려진 철광산 깊은 곳에 숨겨진 던전은 예상대로 어렵지 않았다. 총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던 고블린들은 단검과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다가 쓰러졌다. 어느 정도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0층 쯤 내려왔나 싶었을 무렵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켄타우로스가 쏜 소총탄이 화염 마법사의 목을 관통했다. 사제가 그를 살리려고 치료 마법을 몇 번이나 사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화염 마법사의 시체를 버리고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그로부터 다섯 층을 내려가기도 전에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경험이 제일 많았던 덩치는 탐사대의 리더였다. 던전에 자리 잡고 있던 다크 엘프들도 이를 알아챘기에 그를 최우선적으로 노렸다. 그 나이지리아인은 노련한 전사였지만 결국 냉기 마법에 당해 하체가 얼어붙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다크 엘프 저격수가 쏜 탄환이 덩치의 얼어붙은 하체를 산산이 깨부쉈다. 그나마 다행으로 덩치는 즉사했다. 그는 최소한의 고통으로 죽었다.

 

  이 쯤 되자 그녀는 더 이상 탐사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용인에게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고용인은 생각보다도 더 멍청한 인물이었다. 그는 네 명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며 권총을 뽑아 들고 앞장섰다. 열 번 넘게 던전 탐사를 한 베테랑도 무너진 곳에서 권총을 든 초짜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고용인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이제 철수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세 명의 용병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셋은 내려갔던 길을 따라 올라갔다. 화염 마법사가 죽었던 곳에서 세 명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들과 마주쳤다. 세 마리의 놀이었다. 어깨에 낡은 소총을 멘 이들은 화염 마법사의 시체에 얼굴을 처박고 뜯어먹고 있었다. 세 명의 용병과 세 마리의 놀은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먼저 정적을 깬 건 놀이었다. 놀들은 기분 나쁜 울음소리와 함께 그물을 던졌다. 그물에 걸려 넘어진 이는 대기 마법사였다. 엘프는 대기 마법사를 구하려는 사제의 손을 낚아채 정신없이 달렸다.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대기 마법사가 제발 도와달라고 외쳤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둘은 대기 마법사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지 않을 때 까지 도망쳤다. 도망치는 것을 멈추고 나서 사제는 화를 냈다. 그는 숨이 차서 헉헉거리면서도 자신들이 대기 마법사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거세게 말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제는 그녀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둘은 던전을 걸어 올라가며 이야기를 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엘프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제는 그녀의 말을 받아 주었다. 둘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제는 카를스루에 출신으로 식료품점 아들로 태어났다. 여동생이 하나 있었으며 괜찮은 가정교육을 받았다. 첫사랑은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 만나게 된 성당 수녀님으로 당연하게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과는 전혀 친하지 않았고, 이런 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이 일에 끼게 되었다. 그녀는 사제가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이런 도살장에서 죽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를 구하기로 다짐했다. 147세밖에 안 되는 나이에 죽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보다는 사제의 목숨이 더 가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사제는 함정을 밟았다. 그가 떨어진 구덩이 속에서는 수많은 창들이 희생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제는 그렇게 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권총으로 그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창에 꿰뚫린 사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 일어나 출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사제를 잃은 후, 그녀는 AK를 꼭 쥔 채로 걸어왔다. 만약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면 움직이지 않을 때 까지 AK로 쏴버렸다. 적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이 던전에 남은 것은 적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만약 허기가 진다면 쏴 죽인 것의 시체를 날로 뜯어먹었다. 사제가 남은 식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3층까지 올라왔다. 이제 던전을 나갈 때까지 3개의 계단만이 남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나가면 무슨 일을 할지 생각했다. 일단 구충약부터 한 움큼 먹자. 고블린 고기는 기생충이 득시글거리니까. 그런 다음 온갖 입욕제를 부어넣은 욕조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하는 거야.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내가 내려가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뉴스를 보는 것도 좋겠어. 아, 그래. 이 일은 나가는 대로 그만두자. 이런 일은 한번이면 족해. 다른 일을 얻을 때 까지 받았던 선금으로 버틸 수 있을거야.

 

  그녀의 시야에 갑자기 녹색 슬라임이 나타났다. 슬라임은 그녀의 머리 바로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채 뭘 하기도 전에 슬라임은 그녀를 삼켜버렸다. 그녀는 숨을 참았다. 슬라임 안은 몹시 기분 나빴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입고 있던 옷이 점점 헐거워지는 것도 느껴졌다. 슬라임은 그녀를 녹이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상아로 만든 완드 하나를 꺼냈다. 화염 마법이 깃든 완드였다. 비록 허접한 화염 마법이었지만 슬라임을 내쫓을 수는 있으리라. 그녀는 빠르게 완드에 깃든 마법을 발사했다. 작은 불꽃이 튀어나와 슬라임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슬라임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녀는 돌바닥에 처박혔다. 슬라임은 혼비백산 도망쳤다. 그녀는 자유를 얻었다.

 

"Kurwa."

 

  그녀는 욕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슬라임에서 탈출했지만 기분은 여전히 매우 나빴다. 그녀는 슬라임의 체액이 아직 몸에 묻어있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는 장비를 점검했다. 슬라임의 산은 거의 모든 것을 녹이기에 어떤 것은 여전히 쓸 수 있고 어떤 것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는지 알아봐야했다. 입고 있던 양모 스웨터는 몇 개월 간 쓴 걸레라고 느껴질 만큼 넝마가 되었다. 그 위에 걸친 체스트리그는 어느 정도 부식되었지만 아직 탄창을 담을 수는 있었다. 청바지와 부츠 역시 스웨터만큼 심하게 부식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배낭은 해질만큼 해져서 더 이상 배낭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제일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AK가 심하게 부식된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한 발이라도 더 쏘려 한다면 AK는 그대로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한숨을 쉬며 AK를 내던지던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에 녹색 빛이 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배낭을 거칠게 잡아 찢었다. 그런 다음 상처 치료 물약과 마법 해제 물약, 저항력 부여 물약, 심지어는 성수까지 좋은 물약이라면 전부 입 속으로 부어 넣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약병의 뚜껑을 여는 손에서 점점 진흙이 질퍽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스웨터에 난 구멍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맨살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라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엘프는 덜덜 떨리는 손을 허리춤으로 뻗어 권총을 뽑았다. 그런 다음 권총의 총구를 자기 관자놀이에 대었다. 관자놀이에 권총이 닿으며 철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들으며 147년간의 짧은 인생을 떠올렸다. 그녀는 슬라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엘프로 죽고 싶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거칠게 당겼다.

 

“툭.”

 

  슬라임의 산으로 부식되었던 방아쇠가 그대로 부러졌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권총을 떨어뜨렸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녹색 덩어리가 되었다. 그녀는 더이상 어떤 생각을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

슬라임에게 닿았을 때 일정 확률로 몇 턴 내로 슬라임이 되어서 게임 오버되는 그런 게임이 있었죠. 그 게임 오버에 대한 기억과 총 들고 던전을 뒤지는 게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합쳐지니 이런게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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