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6. Die Schwarz Tulpen

미식가라이츄 0 2,437

"가람 씨, 아직 멀었어? 이따 오후 주문도 해야 되는데. "

"다 됐습니다. "

 

오늘도 그는 주문이 들어온 물건을 포장하고 송장을 붙인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지만, 괜찮다. 학창시절에는 제대로 공부도 못 하고, 대학도 포기하고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어서 아르바이트 뛰는 마당에 뭘 더 바라겠어. 이런 일이라도 감사하며 해야지. 

 

"여기요. "

"수고했어, 점심 먹자. "

"네. "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아는 형이 운영하는 작은 쇼핑몰에서, 포장 하는 일을 하지 않겠냐고 해서 같이 도와주고 있었다. 물건을 포장하는 직원이 있긴 했지만, 최근 쇼핑몰이 잘 돼가면서 사람을 하나 더 구한다며 그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점심을 다 먹고 오후 일을 하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였다. 

 

"여보세요? "

'진가람 전화 맞죠? '

"임마, 나야. "

'...나 서형이야. 기억해? '

 

임서형, 반에서 당찬 여자애로 유명했던 그녀였다. 그가 엇나가려고 할 때마다 등이나 정강이를 시원스럽게 차 만류하곤 했는데... 그녀가 웬 일로 전화를 한 거지? 

 

"기억하지. 너한테 맞은 등짝이 아직도 아프다, 야... 무슨 일이냐? "

'오늘 동창회 한다고 다 모이는데, 너 오냐? '

"동창회? 오늘 동창회가 있었어? "

'뭐야, 연락 못 받았어? 오늘 동창회야. '

"어, 난 연락 못 받았는데... 어차피 선약 있어서 못 가. "

'어, 알았어. '

 

동창회가 있었다고? 그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같이 어울려 다니던 애들 빼고는,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잘 하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응답이 없고, 수능이 끝나자마자 번호를 바꿨거나 다른 이유로 전화조차 되지 않았다. 

 

'뭐여, 왜 나만 빼놓고...? '

 

그는 고등학생때 어울려 다녔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시성아. 나 가람인데. "

'어, 가람쓰. 웬일이야? '

"오늘 동창회 있는 거 알았어? "

'동창회? 오늘? '

"뭐야, 너도 연락 못 받았냐? "

'어. 나도 못 받았는데...? 너도? '

"어. 나도 서형이가 연락 해서 알았어... "

'그런 게 있는데 왜 우리한텐 연락을 안 했을까...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볼게. '

"어, 알겠다. 끊자, 나 오후 일 해야돼. "

'오냐, 수고. '

 

뭔가 석연찮았지만 그는 오후 업무를 해야 해서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늘 회식이라 못 가긴 하지만, 그래도 연락 정도는 해 줄 울 알았는데. 

 

'짜식들, 연락도 안 해주고 말이야... '

 

그 날 저녁, 막 회식을 마치고 퇴근하는 가람에게 전화가 왔다. 

 

"여, 인진쓰. "

'너 어디야? '

"나? 지금 회식 끝나서 들어가는 길인데? 넌? "

'동창회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이지. '

"뭐야, 너한테는 연락 왔어? "

'시성이 연락 받고 알았어. 그나저나 너 내일도 일 나가? '

"아니, 내일은 쉬는 날인데. "

'그럼 만나서 얘기 좀 하자. 다른 애들도 같이. G 카페로 나와라. '

"오냐. 내일 보자. "

 

다음 날, 그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다. 어제 동창회에 갔다 왔다던 인진이와 나처럼 연락을 당일 받은 다른 친구들도 와 있었다. 

 

"시성이는? "

"그게... 말하자면 길어. 커피 시켰냐? "

"응. 금방 나올거야. "

"그럼 너 커피 나오면 얘기하자.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

"알았어. "

 

막 자리에 앉았을 때, 진동벨이 울리고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빨대를 꼽고 자리에 앉자, 잠깐의 침묵 후에 혁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성이는 어떻게 된 거야? "

"걔... 지금 경찰서에 있어... "

"경찰서? "

"새끼,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뭐가 어떻게 된 거냐? "

"걔 어제 나랑 같이 동창회 갔었는데... "

 

어제 시성과 인진은 연락을 받고 동창회에 갔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타났을 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것 같았다. 

 

"난 그래서 1차만 끝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녀석 기어이 2차, 3차까지 가더니 일 냈다... "

"무슨 일? "

"3차에서 대한이랑 싸움이 붙어서, 대한이를 떡이 되도록 패 버렸어. 경찰서에 있는 이유도 그것때문이야... "

"...... 새끼, 아직 지가 일진인 줄 아는 모양이지... "

"휴우...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동창회 연락 못 받았지? SNS로 반 친구들하네 친구 신청하면 거절당하고... "

"어. "

 

그러고보니, 우리들은 전부 동창회 연락을 못 받았었다. 게다가 문자며 전화며 연락이라는 연락은 전부 불가능했고, SNS로 어쩌다 알게 돼 반가운 마음에 친구 신청을 해도 받아주질 않았던 것이다. 어쩌다 친구가 된 녀석들은 바로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홍태한테 들었는데... 전부 졸업하자마자 우리 연락처 수신거부했대. 그 동안 당한 게 많아서 얼굴도 보기 싫다고 일부러 안 부른 건데, 그걸 모르고 서형이가 우리한테 연락을 하게 된 거였단다... "

"뭐? 그럼 일부러 연락을 안 했다는거야? "

"어. 그 뿐 아니야... 누가 퍼뜨렸는지, 우리가 이재훈을 괴롭혀서 죽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다 퍼져서... 나 어제 시성이랑 갔는데, 니들이 왜 여기 있냐는 눈으로 노려보더라... "

 

이재훈. 

1학년때 그 녀석때문에 아주 곤란한 일이 있었다. 그저 그 바닥인 성적 좀 잘 받아보겠다고 컨닝을 했는데, 그걸 선생에게 찔러버리는 바람에 곤혹을 치뤘었다. 아, 그 후로 좀 괴롭히긴 했지만... 그 녀석, 2학년 끝날 무렵에 자살한 걸로 아는데? 

 

"고작 그것때문에 사람을 쓰레기 취급 한대냐? 어이없네, 정말. "

"고작이 아냐. 누가 찍었는지, 그 영상이며 사진이며 전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홍태가 보여줘서 안 거야... 우리 반은 물론이고 학교 후배며 선배며,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 "

"...... "

"우리가 걔들을 괴롭혔던 만큼, 우리는 고립당하고 있는 거야... "

"고립? 하, 말도 안 돼. 그럼 이제 와서 그 새끼한테 사과라도 하러 가자는거냐? 이미 죽었는데 사과는 어떻게 할 건데? "

 

나도 갔더라면 그 시선을 감당해야 했을까? 하지만 이미 죽은 녀석이고, 증거 따위 남았을 리가 없는데. 가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형이도 예의상 우리한테 연락한 거라고 하던데. 처음엔 몰랐는데, 걔도 애들한테 듣고 알았대. "

"진짜 돌아가면서 사과라도 해야 할 판이네. "

"...어떻게 보면 당연한거겠지... "

 

순호가 창 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와 동시에 창 밖을 본 가람은, 낯선 여자를 발견했다. 하늘거리는 흰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 역시, 가람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저 여자는...? '

 

하지만 이내 낯선 여자는 사라졌다. 

 

'내가 헛것을 본 모양이군... '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가람은 인진의 연락을 받았다. 시성이 아무래도 그냥 풀려나오긴 힘든 모양이라는 연락을... 

 

'짜식, 아무리 그래도 거기서 난동을 부리냐... '

 

이제 정신 차렸다던 녀석이 가서 사고나 치고 있을 줄이야... 가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달라진 게 없구만, 이 자식. 

 

"어, 홍태야. 나 가람이다. "

'...뭐야,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

"인진이한테서 알았어. 요즘 어떻게 지내냐? "

'뭐, 대학생 생활이 다 그렇지... '

"그래도 부럽네, 대학생이라니... 참, 홍태야.. 어제 시성이 일 말인데...... 어떻게 된 거냐? "

'휴우... 너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걔, 3차에서 대한이랑 취해서 말싸움 하다가 술병으로 머리를 내려쳤어. 그래서 니네들은 일부러 부르지 말자고 한 건데... '

"...시성이가 저지른 일은 나도 유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시키거나 한 건 아냐, 정말이야. 나도 인진이한테서 듣고 알았어. "

'...... '

"...근데 왜 우리한테는 연락을 안 돌린거야? "

'처음에는 너네가 그동안 지겹게 괴롭혀왔던 애들이 반대했어. 그러다가 니네가 재훈이 괴롭혀서 걔 자살한 거 알고 나서는 그냥 부르지 않는 쪽으로 결정한거고... 서형이도 처음엔 몰랐는데, 너네한테 연락 하고 나서 알게 된 거야. '

"...... "

'지금은 정신 차렸는지 어쨌는지 난 몰라, 그리고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너네거 정신 차렸다고 해서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특히 너네때문에 죽은 재훈이가 뉘우친다고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

"...... "

'재훈이 일 알게 되기 전부터 너네 싫어하는 애들 많았는데... 그래서 다들 수능을 기점으로 핸드폰 바꾸고, 졸업하자마자 너네들 수신 차단했어. 아마 연락 안 되는 애들이 많을거야. '

"그런 거였구나... "

 

어쩐지 씁쓸했다. 일부러 연락도 안 받고, 일부러 연락을 안 했던거였구나. 그 떄의 우리는 어리석게도, 멋있어 보일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찾았다... 살인자. "

"!!"

 

아까 카페에서 봤던 낯선 여자가,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3년 전 일, 기억해? 잘못된 일을 해서 바로잡았을 뿐인 아이를, 괴롭혀서 죽게 만든 너희들을 말이야... "

"...... 그야 기억은 하지만... 이제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

"그 아이를 괴롭혔던 건, 그 아이의 친구가 증거를 남겨둔 거야... 그리고 그 아이 역시,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못 했기 때문에 내 손에 죽었지... 그 아이가 묻더라. 왜 자기 친구는 울면서 죽었는데 너는 웃어야 하냐고. "

"...... "

"그 때의 치기로 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이 정도라니, 어때? 당장은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떄가 후회스럽겠지? "

"매우. ...그 때는 왜 그랬을까... "

"...애석하지만 후회해도 소용 없어. 그 아이도, 그 아이의 친구도... 너를 매우 원망하고 있단다. ...사과는 저승에서 하렴. 이승에서 하기엔 너무 늦었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자는, 이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간섭할 수 없거든. "

"...... "

 

낯선 여자는 그에게 가윗날을 내밀었다. 

 

"이건 단지 벌이니까, 날 원망하지는 마. "

"...... 난 용서받을 수 있을까... "

"무간지옥에서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된다면, 그 아이를 만나 사과할 수 있게 될거야. "

"...... 그런가, 죗값을 치뤄야 하는군... "

"뭐든지, 죄를 지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니까. "

 

서서히 의식이 흐려진다. 그 때의 괴오로, 지금의 나는 벌을 받고 있구나. 한 떄의 치기로 인해 사람도 잃었고, 친구녀석은 사고를 쳐 교도소에 갈 지도 모른다. ...짜식, 여전히 정신 못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구나. 

 

"자, 이걸로 네 친구를 죽인 자에 대한 심판은 끝이야. 그러니 편히 쉬렴. "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고, 차갑게 식은 남자의 시체를 뒤로 한 채 방을 나갔다. 


Author

8,759 (78.7%)

<덜렁거리는 성격. Lv.1에 서울의 어느 키우미집에서 부화했다. 먹는 것을 즐김. >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53 만월의 밤 自宅警備員 06.26 2377
252 추락. 댓글1 양철나무꾼 06.14 2459
251 헌신하는 아내 이야기 3 (끝) 네크 06.13 2192
250 無力と言う罪_after 블랙홀군 06.08 2268
249 예전에 쓴 즉흥시? 댓글1 귤탕자MAK 06.08 2315
248 無力と言う罪_Borderland 댓글1 블랙홀군 06.05 2383
247 남자로 돌아왔는데 두근거림이 멈추지않는다 댓글1 네크 05.23 2542
246 헌신하는 아내 이야기 2 네크 05.22 2387
245 헌신하는 아내 이야기 1 네크 05.16 2398
244 단상 1 WestO 05.11 2360
243 안개왕 이야기 네크 05.09 2383
242 여느 4월 때와 같은 날씨였다. Novelistar 05.04 2420
241 백마를 탄 놈 랑쿤 04.29 2572
240 무제 YANA 04.29 2535
239 꿈을 꾸는 이야기 네크 04.19 2369
238 부재 greenpie 04.19 2289
237 애드미럴 샬럿 4 폭신폭신 04.12 2362
236 통 속의 뇌 댓글1 네크 03.22 2530
235 Robot Boy - 2 댓글1 Novelistar 03.17 2581
234 Robot Boy - 1 댓글1 Novelistar 03.14 2429
233 마법사가 우주비행사를 만드는 법 댓글1 Heron 03.11 2523
232 239Pu 댓글1 Heron 02.25 2516
231 디트리히 루프트헬름의 이야기 (1) 네크 02.24 2489
230 별의 바다와 열두 이름들 이야기 네크 02.15 2601
229 운명론자 이야기 네크 01.25 2481
228 붉은 찌르레기 이야기 네크 01.23 2411
227 천랑성 作家兩班 01.18 2463
226 마녀 이야기 2(끝) 댓글1 네크 01.17 2486
225 마녀 이야기 1 댓글2 네크 01.16 2522
224 미래의 어떤 하루 주지스 01.07 2414
223 시간 야생의주지스 01.07 2541
222 그 해 가을 - 上 Novelistar 12.18 2828
221 애드미럴 샬럿 3 폭신폭신 12.15 2497
220 기관사 아가씨 16편 폭신폭신 12.06 2598
219 매장昧葬의 후일담後日談 Novelistar 11.10 2832
218 있을 때 잘해. 댓글1 Novelistar 10.31 2521
217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2 Novelistar 10.25 2392
216 상담사님과 함께 작가의집 10.24 2536
215 프로자식 레나 10.23 2577
214 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1 Novelistar 10.21 2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