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5. Die Lavendelblute

미식가라이츄 0 2,486

"난 단죄자. 너를 벌하러 왔어. "

"...... 저를...? "

 

눈앞에 나타난 낯선 여자는, 자신을 단죄자라고 소개했다. 흩날릴 것만 같은 하얀 머리에 붉은 눈이, 이 세상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여자였다. 쏘아보고 있는 눈이 매섭다. 

 

"최근 친구를 잃었지? 괴롭힘을 이기지 못 해 자살한 그 아이에게, 너는 해줄 수 있는 것을 해 주지 않았어. "

"해 줄 수 있는 것을... 해 주지 않았다고요? 그게 무슨... "

"그건, 명계에 가서 생각해보도록 해. "

 

고등학교 2학년의 끝을 얼마 안 남기고 내 친구는 자살했다. 반에서 그 녀석을 괴롭히던 무리가 있었는데, 결국은 견디지 못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는,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너의 침묵이 그 아일 죽였어. 사과는 저승에서 하도록 해. "

"...... 저승에 가면... 만날 수 있는거죠? "

"...아마 널 원망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겠지. ...넌 그 아이에게 미안하니? "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자칫 잘못했다간 저도 말려들 수 있었기 떄문에... "

"...... 과오는 알고 있군... "

 

재훈아, 미안해.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뭘까? 

 

나와 재훈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서 처음 만났다. 처음에는 뭐, 다 그렇듯 어색했지만 알고보니 같은 동네 사람이었고, 어릴 적 같은 초등학교에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어서 금방 친해졌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용한 성격이었던 재훈이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늘 도서실에 있었다. 그리고 반에서 성적도 꽤 잘 나왔지만 다른 상위권에 있는 사람들처럼 우쭐거리거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물어보러 가면 척척 가르쳐 줄 정도로 착했다. 

 

그런 재훈이가 괴롭힘을 당한 건, 1학년에 갓 입학하자마자였다. 당시 학교에서 꽤 유명했던 컨닝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건을 제보했던 게 재훈이였기 때문이었다. 컨닝을 저지른 아이들은 교내 일진으로 소문난 무리였고, 재훈이는 그 후로 그 무리에게 찍혔다. 

 

지금은 다른 반이라 덜한 편이라고 했다. 방과 후와 등교 중에만 조심하면 되니까. 작년에는 칠판 지우개나 실내화가 날아오거나, 일부러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거나 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양동이에서 구정물을 받아 끼얹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 무리들을 알고 있었다. 같은 중학교를 나왔고 거기서도 꽤나 유명한 일을 저질러서 강제 전학 처리가 된 아이들이었다. 어째서 우리 학교로 진학한건지 미스테리일 정도로, 행실도 성적도 좋지 않았다. 그 무리 전원에 대한 평가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재훈재훈~ 오늘 야자도 끝났는데 떡볶이 먹을래? "

"아, 저... 나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

"뭐야, 또 그 놈들이야? "

"아, 아냐... "

 

약속이 있다고 먼저 갔던 재훈이는, 다음날 한쪽 눈에 멍이 들어서 왔다. 재훈이는 부정하고 있었지만, 분명 그 패거리가 어제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서 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어머님은 뭘 하는건지 한편으로는 야속하기도 했다. 익명으로 투서라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방법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재훈이는 학생회 일이 남아있었고, 나는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무리들이 학교 건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재훈이를 데리고 체육 창고로 향했다. 

 

'저 새끼들... 또? '

 

도저히 안돼겠다 싶어서, 몰래 그 무리들을 따라갔다. 낡은 체육 창고는 벽 이곳저곳에도 구멍이 많았고, 문을 닫아도 틈새가 보였다. 밖에서 들여다보니, 안에서 재훈이를 둘러 싸고 있었다. 

 

"야, 돈 가져왔냐? "

"아니... 그게... "

"하- 이 새끼 봐라? 야, 돈을 따박따박 가져와야 할 거 아냐! 너 내가 오늘까지 안 가져오면 죽여버린다고 했어, 안 했어? "

"그...... 미안해, 내, 내일까지는... "

"하- 진짜 골때리는 새끼네... 야, 죽이지는 마라. "

 

여전히 재훈이는 그 녀석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학주라도 부르러 갈까, 하다가 증거가 없으면 안될 것 같아 나는 핸드폰을 켜고 재훈이가 맞는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창고를 벗어나 수돗가에서 씻는 척 하며 동태를 살폈다. 

 

녀석들이 창고를 나오자, 나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야! 이재훈! "

"으... 진형아... "

"너 이새끼, 괜찮냐? "

"으... 응... "

"야, 이 새끼야! 너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한테도 말 안 한거야? "

"괘... 괜찮아... "

"하, 새끼... 니네 엄마는 아냐? "

"어, 엄마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아직 모르셔... "

"...... 얌마, 피나 닦고 가자. "

 

재훈이를 수돗가로 데려가 얼굴에 묻은 피를 씻겼다. 하도 얻어맞았는지 온 몸이며 교복이며 피투성이였지만 학교 수돗가에서 교복을 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안경에 깨지진 않았지만 미세한 금이 가 있었던 안경에 묻은 먼지도 대충 털어서 재훈이에게 건넸다.  

 

내가 선생님이든 부모님이든 말하자고 했지만 재훈이는 완강히 거부했다. 엄마는 몸이 많이 안 좋으시고, 선생님꼐 말해봤자 그 녀석들이 더 심하게 보복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하긴, 그게 우리네 현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너, 그래도 정말 참기 힘들면 선생님이든 부모님이든 말해라. 그러다가 너도 힘들어지고 네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져. "

"응... "

"근데 너 안경에 금 간 거 같은데 괜찮냐? "

"아, 전에 쓰던 거 있어서 괜찮아. "

"임마, 우리 누나가 안경 써서 아는데 안경은 지금 쓰고 있는 거 쓰는 게 좋대. 나중에 하나 새로 해라. "

"아, 응... "

 

나는 그저,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방학동안 나와 재훈이는 보충을 들었지만, 그 녀석들은 공부와는 학을 뗐는지 보충은 커녕 학교 앞에 한 발짝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녀석들이 학교 근처에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학주가 교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녀석들도 어쩌진 못 했다. 

 

나는 재훈이 몰래 그 동안 모아왔던 증거들을 모아오고 있었다. 그 동안 괴롭힘 당했던 영상들, 재훈이가 입은 상처... 그리고 재훈이가 최대한 그 녀석들하고 맞닥뜨릴 일이 없게 도와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소지품 검사를 하겠다고 가방을 열어보신 선생님은 재훈이와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이재훈, 잠깐 선생님 따라 교무실로 오도록 해. 진형이 너도. "

"예. "

"네. "

 

선생님이 우리 둘을 교무실로 부르셨다. 교무실에 내려가니 선생님이 우리 두 사람 앞에 꺼낸 것은 담뱃갑이었다. 누가 봐도 그 녀석들이 피우는 담배였다. 

 

"이재훈, 네 가방에서 담뱃갑이 나왔더구나... "

"네? "

"이 녀석, 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안 돼지. 순 범생이인 줄 알았더니? "

"죄송합니다... "

"야, 임마! 니가 뭐가 죄송해? "

"오진형, 넌 가만히 있어. "

 

어쩐지 분했다. 그 녀석들이 몰래 담뱃갑을 가방에 넣는 걸 분명히 봤지만, 재훈이는 그 죄를 자기가 다 뒤집어썼다. 

 

"이 새끼야, 니가 피우는 거 아니잖아! 그 새끼들이 니 가방에 몰래 넣는 거 내가 다 봤어! "

"하지만... "

"그게 무슨 말이니? "

"하아... 선생님, 재훈이를 1학년때부터 괴롭혔던 무리가 있는데, 걔들이 넣어둔 거예요. 여기 증거요. "

 

내가 내민 것은, 어제 우연히 찍은 사진이었다. 원래 찍으려고 했던 건 우연히 발견한 새였지만, 그 옆에 녀석들이 재훈이 가방에 손을 대는 것도 같이 찍혀 있었다. 

 

"제가 봤어요. 얘네들이 재훈이 가방 속에 담뱃갑 넣는 거. "

"이 녀석들은... 작년에 컨닝으로 물의 일으켰던 애들이네? "

"네, 그 때 재훈이가 녀석들이 컨닝한 걸 얘기했다가 지금까지... "

"그럼 이건 재훈이 담배가 아니라는 얘기지? 알겠어, 가 봐. ...이재훈, 그 녀석들이 또 괴롭히면 선생님에게 얘기 해. "

"...네... "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이 문제를 덮어두길 원했다. 학교의 명예가 떨어진다는 같잖은 이유에서였다. 내가 보기엔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그 녀석들을 강제로 전학이라도 보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리고 재훈이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었다. 

 

재훈이는 끝까지 자신의 아픔을 쉬쉬하려고만 하는 학교 때문에, 그리고 그 녀석들 떄문에 울다가 갔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성인이 되겠지. ...그게, 가장 역겹고 분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당신이 단죄자라면, 죽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

"...뭐지? "

"왜... 가해자가 웃고 피해자가 우는 거죠? 가해자가 벌을 받고 피해자가 행복해지는 건... 전부 책 속의 이야기일 뿐인가요? "

"그건 말이지... 소설 몇 페이지로 끝나는 가해자가 울고 피해자가 우는 결말이라는 건, 현실에서는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걸릴 수도 있어서 그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은 느리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지. "

"...... "

"...그 녀석은, 특별히 내가 더 빨리... 단죄해줄게. 그 아이가 눈물 흘린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

 

그렇구나. 그럼 언젠가 그 녀석들도, 기약없는 세월이 지나면 우는 날이 오겠지... 


Author

8,759 (78.7%)

<덜렁거리는 성격. Lv.1에 서울의 어느 키우미집에서 부화했다. 먹는 것을 즐김. >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53 디트리히 루프트헬름의 이야기 (1) 네크 02.24 2496
252 카펠라시아 기행록 - 1 댓글2 [군대간]렌코가없잖아 02.01 2496
251 Cats rhapsody - 3 민간인 11.23 2495
250 prologue VII-두 개의 무덤 작두타는라이츄 03.18 2494
249 나는 너의 미래다 - 3 민간인 02.12 2493
248 훈련소에서 댓글1 폭신폭신 05.25 2493
247 작문 쇼 댓글2 민간인 08.10 2492
246 VI-4. Die Spinnenblume 미식가라이츄 10.11 2492
245 [Project Union] 여명 댓글1 Badog 01.07 2490
244 애드미럴 샬럿 1 폭신폭신 07.15 2490
243 HIGH NOON -4 잉어킹 11.21 2489
242 마녀 이야기 2(끝) 댓글1 네크 01.17 2489
241 walking disaster 1.1 - 구원 댓글2 전위대 09.28 2488
240 [소설제 : I'm Instrument] 열시까지 BadwisheS 01.30 2488
239 VII-2. 지박령이 된 가장 작두타는라이츄 03.18 2488
열람중 VI-5. Die Lavendelblute 미식가라이츄 10.12 2487
237 로슈포르 중앙은행 - 2 - 폭신폭신 10.23 2486
236 Resolver(리졸버) - 4 댓글2 [군대간]렌코가없잖아 10.03 2486
235 아름다웠던 하늘 김고든 04.10 2484
234 본격 토끼구이가 오븐에서 나오는 체험담 댓글2 베키 06.24 2484
233 운명론자 이야기 네크 01.25 2483
232 언제든지 돌아와도 괜찮아 [군대간]렌코가없잖아 03.18 2480
231 네버랜드 - 3. 엄마? 마미 07.03 2480
230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 네크 12.20 2478
229 한방꽁트 - 풍운 마왕동! 2부 댓글2 cocoboom 04.13 2478
228 부탁 댓글2 안샤르베인 09.24 2476
227 VII-8. 어느 노배우의 사흘 작두타는라이츄 11.01 2474
226 카라멜 마끼아또, 3만원 어치 민간인 06.26 2473
225 VIII-1. 빛을 보지 못한 자의 원한 작두타는라이츄 12.30 2473
224 Cats rhapsody - 4 민간인 11.23 2472
223 Vergissmeinnicht 블랙홀군 02.26 2472
222 뚜렷 한흔적 댓글2 다움 05.10 2469
221 천랑성 作家兩班 01.18 2468
220 추락. 댓글1 양철나무꾼 06.14 2468
219 관찰 안샤르베인 09.12 2467
218 Resolver(리졸버) - 3 댓글2 [군대간]렌코가없잖아 09.28 2465
217 학교에 가는 이야기. 폭신폭신 05.13 2465
216 HIGH NOON -5 잉어킹 11.21 2464
215 [백업][밝음 소설제 출품] The Lone Star NoobParadeMarch 09.27 2461
214 (본격 아스트랄 판타지)성스러운 또띠야들의 밤-1 댓글3 greenpie 10.04 2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