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꽁트 - 25일의 은행업무

cocoboom 0 2,880

은행에서 일주일만 일해 보면 아는데, 1년 내내 출근하는 거 보다 하루만 들르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올 수 있다. 약간의 투자만 있으면.

 

나는 첫 월급으로 피스톨과 삼단봉을 구입했다. 그렇게 쉬운 일일 거라 예상도 못했는데 위대하신 구글신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오히려 어려운건 당일까지 잘 숨겨놓는 일이었다. 진작 독립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독립을 하려면 이 물건들이 필요하다니 아이러니다.

 

거실은 언제나 엄마에게 점령 상태고 누나는 변비로 고통 받으며 삼십분마다 화장실로 달려가는데 그 바로 옆이 내 방이다. 그래서 한여름인데도 방문도 열어놓지 못한다. 창문은 있지만 팔을 뻗으면 옆 건물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빌라가 다 그렇지 뭐.

 

어쩌자고 한 달이나 앞서서 사버렸을까? 그래 솔직히 이럴 줄은 몰랐다. 컵라면 못 기다려서 10초 간격으로 들춰보는 성미지만 내 총만은 포장도 안 뜯고 침대 밑에 박아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케이스는 벌써 책상 위에 있다. 누가 보면 조던 신제품 박스라고 우길 생각이다. 하루에 적어도 여섯 번은 당겨보지 않으면 당일에 보기 좋게 총알이 걸리는 그림이 보인다. ‘찰깍’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덮치는 경비원.

 

시간은 더디지만 기어이 목표에 도달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제대하자마자 구입한 등산장비였다. 햇볕가리는 마스크는 CCTV도 가려줄 것이다.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도 어느 때보다 제몫을 하고 있다. 파카 안에는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었다. 마치 막 입국한 사람 분위기를 내려는 것이다. 이 커다란 배낭엔 꿍쳐온 더플백이 들어있다. 나는 출발하기 전 현관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김포공항으로 직행해서 화장실로 뛰어든 다음 돈은 더플백에 옮기고 겉에 걸친 건 다 배낭에 넣어서 버리고 곧장 택시로 인천으로 직행한다.”

 

거울 속의 내가 브리핑을 맡은 참모였다. 얼마나 황당한 계획이 됐든, 내가 계획할 수 있는 최선이다. 다른 사람도 김포에서 은행을 턴다면 갈만한 데는 김포공항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한 번 훼이크를 넣으니까 치밀하지 않은가?

 

은행은 고작 10분 거리다. 이 짧은 길을 걷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뮬레이팅을 했던가? 이윽고 정문이 보이고,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이 보인다. 틀림없이 한 달 중 제일 많겠지. 세금 납부, 카드 결제, 집세 불입 등등. 이날이 은행금고가 미어터지는 날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머니 속의 피스톨을 단단히 쥐면서 문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

 

“모두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사실은 아니다. 몇 발짝 더 가야 된다. 적어도 창구여야 했다. 이건 전혀 계획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컵라면 끓이는 시간도 기다리질 못하는데. 시선이 모이고, 경악에 찬 마스크맨들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맨?

 

“시끄러워! 너만 볼일 있냐?”

 

다수의 발길질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피스톨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러 사람의 욕설 속에 파묻힌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전신안마. 나는 무엇에 깔린 것처럼 허물어지고 아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들려오는 한 마디가…… 경찰이 오면 어쩔 거야?

 

누군가 나를 일으킨다. 멱살을 잡아 올렸다는 게 맞겠지. 아직 얼떨떨한 얼굴에 주먹이 날아온다. 마주보이는 건 나랑 같은 등산마스크.

 

“멍청아! 순서를 지켜! 번호표는 저쪽이야!”

 

“버, 번호표?”

 

“은행에 번호표는 상식이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쩌겠어? 어서 번호표 뽑아와. 강도질을 해도 질서는 지켜라!”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두 같은 얼굴. 마스크다. 오토바이 헬멧에 파워레인저에 황사마스크까지! 엉터리 같은 가면무도회인가? 나는 그 사람들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서야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젠장,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똑같다더니.

 

은행직원들은? 그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창구직원들은 태연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경비원은…… 핸드폰을 만지고 있잖아! 그래 나도 일할 땐 그랬지. 녀석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들고 쳐다본다.

 

“도와드릴까요? 번호표는 저쪽입니다.”

 

알고 있어! 다른 할 말은 없냐?

 

“저, 저기. 괜찮은 겁니까? 이 상황.”

 

내가 말했다.

 

“어차피 보험처리 되니까요. 본사에서도 개입하지 말라고 하고……. 나중에 증언만 잘하면 되죠.”

 

그의 대답이 기억을 자극한다. 분명 처음에 그런 비슷한 설명을 들은 것도 같은데…… 그게 이런 의미였던 건가?

 

잠시 후, 나는 대기표 242번을 들고 대기줄에 서있었다. 내 차례가 다가온 건 약 30분 후였다. 그때에도 내 뒤로 들어온 사람들, 아니 동업자들이 즐비해서 대기열 자체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차례가 가까워지면서 나는 앞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도 볼 수 있었다. 그건 평소의 은행업무랑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고객이 꺼내놓는 물건이 조금 다를 뿐이지.

 

내 직전 사람에 이르러 트러블이 생겼다.

 

“고객님, 얼굴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이봐, 난 고객이 아니잖아. 왜 얼굴을 보여주겠어?”

 

“저희도 고객님 얼굴을 확인해야 증언을 하죠. 앞에 분들도 다 보여주셨어요, 고객님.”

 

실랑이가 오가는 동안 뒤에서 성질 급한 사람들이 소리쳤다.

 

“거 빨리빨리 합시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그 사람은 투덜대며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직원이 말했다.

 

“고객님, 총은 가져오셨어요?”

 

“없는데?”

 

“강도 업무를 보시려면 총이 필요합니다. 총도 없이 돈을 달라뇨. 그럴 수는 없죠.”

 

“깜빡해서 그래. 나이프로 어떻게 안 될까? 이거 스위스제야.”

 

“그건 좀. 나중에 보험사로 보고가 되거든요. 나이프로 드리면 저희가 문책당해요.”

 

뒤에서 거세지는 아우성. 아니 강도하러 온 놈이 총도 없어? 안 되면 빨리 나와 내가 볼일 봐야 하니까……. 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되는 말들. 어쨌든 난 투자를 했으니까. 결국 남자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은행을 나섰다. 그리고 나의 차례. 은행원은 잠깐 모니터를 보다가 대기벨을 누른다. 다가가자 은행원이 활짝 웃으며 말한다.

 

“얼굴 좀 보여주시겠어요,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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