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표현이 있을 수 있으니 심약자는 읽는데 주의를 요합니다]
4.
'아가페 3'의 하복부는 가로로 깔끔하게 열려있었다. 슬래셔 영화에서처럼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 상처의 테두리를 따라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으며, 그 피는 '아가페 3'의 속옷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다리를 타고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 상처 안에서 꺼내든 창자를 마치 수건을 두르듯 목 뒤로 휘감아 올려놓은 소녀의 표정은 고통과 체념을 넘어선 무언가였고, 탁하게 풀린 그녀의 눈동자는 이따금 몸과 함께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영상이 끝나기 3분 전부터 멈추었다.
전위예술적인 기괴함. DVD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4시간 7분 32초의 기괴함이었다. 화질도 나쁘고 소리조차 녹음되어 있지 않는, 실종된 소녀의 마지막 행방이 그 영상에 기록되어 있었다. 아만의 얼굴은 새하얕게 질려, 촬영자가 박아놓은 'That's all, Folks!' 라고 적힌, 악의가 가득 담긴 정지화면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한없는 악의와 잔인함에 아만은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었다. 1시간 전에 속을 비워내러 화장실에 달려간 뒤 조금 전에야 겨우 돌아온 비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아만의 PC에서 DVD를 꺼내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봉투와 DVD를 들고 가서 감식반으로 보내. 알아낼 수 있는 건 죄다 알아내라고 전해."
"예."
"코코와도 한시 빨리 연락하고. 엘름 새끼들이 드디어 정신줄을 놔버린 모양이야."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하라고! 제기랄. 대체 본국에 뭐하러 간거야?"
순간, 전화 소리가 들려왔다. 비서는 봉투와 DVD를 들고 방을 나서며, 그 전화를 아만에게 돌려놓았다. 아만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부여잡고 대답했다.
"국제… 국제 슈프림 대사관의 아만 공사입니다."
"공사님! 보안실입니다. 한시 빨리 만나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연락드렸습니다."
한심한 보안직원, 한심한 인간들. 지금 민원인을 상대할 때가 아니라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 아니, 이미 죽었다고. 아만은 뻗어오르는 화를 겨우 참아내고서, 수화기에 대고 낮고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민원인을 받을 상황이 아냐. 빨리 돌려보내…"
"민원인이 아닙니다, 공사님. 지희라고 자신을 설명하는 소녀가, 자신이 납치되었었고, 겨우 탈출에 성공해 대사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공사님을 찾는 중입니다."
"뭐?"
아만은 DVD가 없어 이제 빈 바탕화면을 표시하고 있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그 화면에 아직도 쇠사슬에 묶인 소녀가 아로새겨진 것 마냥.
"지문을 통해서 신원은 확인했습니다만, 식은 땀을 흘리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쇼크의 징후가 진하게 보이고 있으므로, 바로 병원으로 후송하는게 좋을 것 같겠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엠뷸런스 대기시켜. 내가 직접 밑으로 내려가 소녀를 만나도록 하지."
수화기를 내리치다시피 내려놓은 아만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로 향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선의 속도로 한시바삐 돌아다니는 인파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사람과 맞부딪치는 것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지금 그의 머릿 속에는 자신의 호불호따위는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직 보안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그 영상이 가상의 것이었다고, 웃어 넘길 수 있는 기분 나쁜 유머였을 따름이라고 생각 할 수 있도록. 제발, 살아있길 빌며.
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아가페 3'이라고 알고 있었던 소녀가 앉아있었다. 새하얕게 질려 자신의 덩치에 맞지 않는 코트를 부여잡은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녀를 아만은 조용히 응시했다. 웅성거리는 인파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그의 귀엔 들려오지 않았다. 정적. 그의 머릿 속에는 정적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오만은 이 아이가 지난 2년동안 많은 훈련과 실전을 거친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의 눈 앞에 떠는건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겪은, 홀로 떨고 있는 소녀 뿐이었다.
"지희… 맞지? 지희양? 괜찮다면 나를 보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염려깊은 목소리로 아만은 눈에 초점이 풀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아만 공사라고 한단다 . 처음보는 거지? 코코 대사님을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내 말이 맞니?"
조용히, 마치 투명한 아만 너머의 벽을 응시하고 있는 것 마냥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던 지희가, 코코 대사의 이름에 반응했다.
"그는 잠시 본국에 돌아가 있어서, 지금은 만날 수가 없단다. 대신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하면, 내가 확실하게 전해주도록 할게."
"전…전해야……하기 전에…"
발음조차 불분명하게 단어들을 힘겹게 쏟아낸다. 분명 쇼크 때문이라고 아만은 생각했다. 그래서 였을까, 그는 전에 없던 인내심을 발휘해 지희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여긴…마법소녀…더이상…그는…"
그리고 소녀는, 아만의 팔을 부여잡았다. 맥아리라고는 없는 그 갸냘픈 손목이, 악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깔끔하게 재단된 아만의 옷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보고싶어…엄마…으흑…공사님…저희는 착한편이죠? 그렇죠?…저희는… 도움을 주는…나라가…아니죠?"
그리고 그렇게 소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간의 불안을 눈물로 모두 씻어내려는 것 처럼 목을 놓고 울었다. 보안실 밖의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울었다. 아만은 소녀를 부둥켜안고,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소녀가 끝까지 울 수 있도록.
5.
현지인에게 친근하게 접근해 그들을 포섭하고, 교류 및 협상을 진행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종으로써, 코코의 성공은 슈프림에서도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귀여움을 유발하는 외모는 이를 이용해 현지인의 호감을 이끌어 내는데에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그 외모가 도리어 독이 되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을 우습게 여기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을 이겨내고 자신의 종으로써는 최초로 대사직에 기용된 코코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대접이 껄끄럽기만 했다. 벌써 그 대접이 3년째에 접어들었음에도.
약간 뾰족한 귀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지구의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슈프림인 사이에서, 혼자 아기자기 걸어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위의 사람들은 코코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갔고, 때문에 좁은 연구실 복도 안에서의 행렬은 자연스럽게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날 어께에 태워주면 되잖아, 코코는 생각했다. 엘름과 싸우던 시절, 다희는 싫다고 버둥거리던 코코를 잡아 어께에 올려 목마를 태우기 일쑤였다. 그 높은 눈높이와 상쾌한 바람을, 코코는 그녀가 은퇴하고 나서야 자신이 그 높이를, 그 속도를 좋아했음을 깨달았다.
"코코 대사님. 보시다시피 이렇게 골든 헬름 프로젝트는 완성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습니다. 아들러아우게 페이즈를 성공적으로 거친 알파 클래스 마법소녀는, 기존에 단 5명만이 존재하던 오메가 클래스의 마법소녀와 동급의 능력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메가 클래스의 마법소녀를 양산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죠. 저희는 아들러아우게 페이즈를 거쳐 오메가 클래스가 된 마법소녀를 타입 안수즈와 타입 게보에 이은 타입 이사즈로 지칭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타입 이사즈 오메가 클래스 마법소녀의 양산은 다차원 관리 조약기구에 있어서 마법소녀의 실질적 전력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며, 향후 다른 차원에서의 엘름이나 적대 세력과의 전투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자부합니다."
지금 이 연구소를 거니는 무리중 가장 랩코트가 어울리는 선임 연구원이 알량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눈높이 한참 아래에 있는 코코를 향해 몸을 숙여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사실 코코는 그중 절반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그것은 코코가 이 연구소에 도착하기 전에 연구소의 각종 보고서를 직접 분석했고, 때문에 연구원의 허황된 단어 속에 섞여있는 제대로 된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더라도 이 치가 기대하는 획기적인 영향력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코코가 4년이라는 기간동안 5명밖에 되지 않는 마법소녀를 양성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결국 마법을 쓸 줄 아는 진정한 마법소녀를 만드는 방법은 수많은 사람들 중 아주 낮은 비율로 존재하는 적합자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들러아우게 페이즈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실험도, 결국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억지로 비틀어 깨운데에 지나지 않았다. 분명, 그때보다야 성공률이 높아졌겠지만, 코코는 마법소녀로 이루어진 부대따위를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아들러아우게 페이즈에는 어떤 부작용이 존재하지?"
코코가 물었다.
"앗… 음, 그러니까 아주 미약한 우울증, 분노 조절 장애, 경계선 인격 장애등의 징후를 보였지만, 약물로 충분히 조절 가능한 수준입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었다. 아니, 그런 설명이었길 선임연구원은 빌었고, 코코는 연구원이 그렇게 생각하리라 예상했다. 대상자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10대 소녀층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런 정신병이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코코는 그들의 '성공'의 기준이 더 까다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마법소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진짜로 싸움에 뛰어들 마법소녀를 위해서는.
하지만 코코는 오늘 이 연구소에 '좋아'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왔다. 3년여의 연구 기간과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용을 투자한 끝을 보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마법소녀라는 전력에 대해 정말 많은 기대를 품은 것인지는 모르곘지만, 슈프림은 코코로 하여금 골든 헬름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그 결과물을 실전에 투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선에서 싸우는, 혹은 예전에 싸웟던 자로써 일말의 불안을 모두 해결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선, 실질적인 결과가 큰 영향을 끼친다.
그때 코코는 아가페 3의 실종사건을 떠올렸다.
"지금 아들러아우게 페이즈에 성공한 사람은 몇명이야?"
"여섯입니다."
"실전에 투입해도 이상이 없을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준비시킬 수 있도록 해. 현장 평가를 내린뒤 프로젝트의 채용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지."
그 말 한마디에 선임 연구원은 활짝 웃는 표정으로 온 몸을 비틀었다. 마음같아선 소리도 지르고 싶을 것이다. 그럴만도 했다. 그런 연구원을 보다 못한 코코가 덧붙이듯 물었다.
"아, 그러고보니 보고서에는 임상실험의 실패율에 대해선 언급되어있지 않던데, 임상실험에 투입한 마법소녀는 몇명이지?"
그 말 한마디에, 코코는 연구원의 얼굴이 선명히, 그리고 빠르게 굳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아들러아우게 페이즈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고… 샘플도 그 질이 균등하지 못했어서… 극 초기 임상실험의 실패율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는게 자체적인 평가고…"
"그래서, 몇명이냐?"
"그게…"
"걱정 마. 상부에 보고하지는 않을거야. 확인차 물어보는거야."
"백… 백명입니다."
백 명중 여섯명.
아흔네명의 실패.
"처리는?"
"예?"
"실패작의 뒷처리는 어떻게 됬어?"
"그게…"
"그게?"
"…전부 폐기 처분했습니다."
그쯤되자 연구원의 낯빛은 흙빛으로 변했고, 그가 쉴새없이 흘린 식은땀에 셔츠가 흠뻑 젖은것 이 코트 위로 드러나 보였다. 이런 장난을 좋아하지는 않았었는데, 코코는 생각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대사가 된 뒤로 이런 악의적인 장난에 맛이 들렸다.
"잘했어."
"예?"
연구원이 되물었다.
"잘했다고. 그걸 물어보고 싶었던거야. 솔직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
94명, 코코는 생각한다.
6명을 위한 94명이라.
바로 그때였다. 외부와 내부를 격리하는 격벽 너머로, 랩코트조차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은 남자가 내부를 향해 창문을 두들겼다. 그의 눈은 정확히 코코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외침도 코코를 향해있었다.
"대사님! 대사님!"
프쉿하며 소독액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계속 격벽을 두들겼다.
"대사님! 큰일입니다! 대사관에 아가페 3이-!"
6.
"그럼, 다음주 이 시간에도, 댕댕이를, 부탁해!"
"컷!"
"다들 수고하셨어요! 예림양도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유명 연예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애완동물을, 전문 조련사의 손에 의해 30분만에 조련시킨다는 독특한 컨셉의 예능 프로그램, '댕댕이를 부탁해'의 촬영장 분위기는 그 인기만큼이나 좋았고 또 화목했다. 하지만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촬영이 끝나고도 계속 되었기 때문에, 결국 예림이 촬영 스튜디오를 벗어나게 된건 작별인사를 맨 처음 시작한지 20분이 지나서였다. 이 프로가 이번주의 마지막 스캐쥴이었음에도, 예림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빠져나와서야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변신을 해제했다.
변신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사실 변신 전의 얼굴이 공개된 뒤로는 큰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였지만 그것은 예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수많은 규칙중 하나라는 점에서 다른 규칙만큼이나 중요했다. 팬들의 환상을 깨지 말자는 취지에서 정한 규칙이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한, 예림은 그 규칙을 철저히 지켜왔다.
후, 안도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며 예림은 생각했다. 맨 처음 코코와 만났을땐 이런 인기를 얻게 될 줄은 몰랐었는데. 그리고 언제나 생각하지만, 그렇게 바라지도 않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선글래스를 집어든 그 때, 예림은 골목 구석에서 갑자기 인기척을 느꼈다. 순간, 브로치에 손을 가져다 댄 예림은, 바로 다음 순간 그것이 다희와 경미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해맑게 웃었다.
방송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커피숍은 대형 프렌차이즈의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좁은데다 테이블도 3개밖에 놓여있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포근하고 조용했으며 구석에서 가게의 내부는 물론 바깥의 인파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다희는 문 밖에 한눈에 보이는 가장 안쪽 자리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고, 경미는 자연스럽게 그 옆을 차지하며 앉았다. 예림은 핸드백에서 굵은 울로 짜여진 비니를 눌러쓰고는 다희에게 물었다.
"주문은 뭘로 하실건가요?"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이런 커피숍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던 다희와 경미는 순간 당황했다.
"어? 어…"
"나…나는 다희 언니가 마시는걸로 마실게."
"그…그럼… 아무거나?"
"후후. 그럼 두 분을 위해 카라멜 마끼아또에 타라미스를 주문할게요. 여기 타라미스는 정말 맛있답니다."
"자…잠깐! 계산은 내가…"
"아니에요! 저희 마법소녀 연금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고 있는데, 그럴수는 없죠. 등록금으로 빠지면 얼마 남지도 않을텐데,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이 부담하는게 맞죠."
미안함에 다희가 뻗침, 힘없이 허우적대는 손길을 부드럽게 거절한 예림은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다가가 주문을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경미는 다희에게 속삭였다.
"언니… 예림이가 어른이에요오… 어른이 되어버렸어요…"
"예상은 했었지만, 이쯤되니 내가 너무 한심해보여… 막내였던 예림이가…"
"저희의 쓸모없음 수치가 나날히 증가하고 있어요… 제가 더할나위 없이 쓸모없어져도 절 버리시지 않을거죠? 제가 정말 쓸모없어져도 다희 언니는 잘 나가는 외과의사가 되어서 저랑 결혼해 주실거죠?"
"…농담이라도 그런 부담은 주지 말아줘."
"농담이 아니니까요. 진심이니까요."
그때 한 남자가 커피숍에 들어왔다. 키가 큰 백인. 화려한 색채의 스트리트 패션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다희를 보지 않고 카운터로 다가가 예림의 뒤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예림이 환하게 웃으며 주문을 마치자, 자리로 돌아오는 예림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카운터 쪽으로 돌려 무언가를 주문했다.
"언니! 보셨나요?"
"응? 뭐가?"
"예림이가 방금 카드를 썼다구요! 체크카드도 아니고 신용카드에요!"
"뭐…라고?! 미성년자 아냐? 미성년자에게도 발급하는 거였어?"
"세상에… 우릴 두고 변해가고 있어요오… 뒤쳐져가고 있어요…"
이런 대화를 나누는 둘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던 예림은 멋쩍게 웃으며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그런 눈으로 보시면 부담스러워요…"
"에이, 매일 TV 앞에서 수십만의 눈빛 앞에서 웃음짓는 매지컬 로라양께서 무슨."
"아녜요. 두분은 제 우상이시니까, 다른 팬분들과는 달라요."
예림은 그렇게 말하고는 멋쩍게, 그리고 수줍게 웃었다."
"정말 오랬만에 뵙는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머리 자르셨네요?"
"응? 아, 꽤 됬어. 걸리적 거려서."
포니테일로 묶고 다녔던 긴 머리를 자른건 2년 전이었나, 다희는 그동안 쭉 고수해왔던 헤어스타일을 포기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기억하고 있기로 그 이유는 마법'소녀'를 은퇴한 이유와 같았다. 17살이 넘었으면 더이상 소녀가 아니라는 나름의 규칙.
"정말 잘 어울리세요. 예전의 포니테일도 정말 귀여웠지만, 지금의 다희 언니를 정말 잘 표현해주는 느낌이 드는걸요."
"으으… 고마워. 머리를 자른걸 칭찬해준 사람은 얼마 없었는데, 역시 예림이밖에 없어."
"그리고 경미 언니는… 대단한 것 같아요. 계속 커진건가요?"
"그렇지. 현재 진행형으로 커지고 있고."
경미 대신, 다희가 대답했다.
"그걸 왜 언니가-"
"제 3자의 눈이잖니. 그리고 넌 살이 찐거라느니 착각이라느니 변명할 거면서."
"사실이니까요오!"
"그런 것 치고는 새로운 속옷도 자주 사오고 특히 가슴 사이즈만 항상 갱신되고 있더만."
"우우…"
"어쨌든, 내 생각엔 네가 우리 셋 중에 가장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예뻐졌어. 솔직히 말하면, 정말 부럽기도 하구."
칭찬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예림의 뺨이 화악 붉어졌다.
"아뇨! 두분에 비하면 전 한참 멀었으니까요!"
"에이, 그렇게 겸손해 할거 없어. 인기있는 아이돌은 아무나 되는게 아냐. 자신감을 가져!"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우리들보단 예림이가 훨신 더 나은걸."
마치 그 사실이 죄라도 되는양, 예림은 고개를 흔들며 다희와 경미의 말을 부정했다."
"아녜요! 요즘에도 다희 언니와 경미 언니는 어디 있는지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 걸요. 그리고 아무래도 그 5인방 중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건 저 뿐이니까요."
뜻 밖의 사실에, 다희의 입가가 살짝 풀어졌다."
"그럴리가… 히히. 그래도 기분은 좋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시면 저희 기획사도 소개시켜 드릴 수 있으니까요. 경미 언니도 마찬가지니까요. …아마 저보다 인기가 많아질 수도 있구요."
"에이, 내가 무슨…"
"아냐, 그 부분에 있어선 나도 동감해. 너에겐 가스…, 아니 가능성이 있어."
아마 수많은 시민들도 그 사실에 동감할 것이라고 다희는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경미 언니는 올해 수능 준비 잘 되어가고 계세요?"
"나? 난 괜찮아. 다희 언니가 날 부담할 테니까."
"…"
"하지만 재력을 생각하면, 예림이한테 가는게 더 좋을지도…"
"그게 무슨 소리… 하지만 반박을 못하겠어…!"
"후후후. 저는 언제라도 환영이랍니다. 다희 언니는, 올해 3학년인가요?"
"아, 작년에 2학기 마치고 휴학했으니까 아직 3학년은 아냐. 그러고 보면 지금 완전히 백조 신세인거지. 예림이는 요즘 잘 나가고 있던데, 광고만 다섯개 올라가 있었나?"
"여섯개에요. 그리고 지금 하나 더 준비중이구요."
"정말 대단해.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야…"
탁자 위에 올려둔 부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카운터에 그득히 쌓인 커피잔이 올려진 트레이가 다희 일행의 것인 모양이었다. 예림이 자리에 일어나기도 전에, 경미가 재빨리 카운터로 달려갔다. 금발의 외국인은 톨 사이즈의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지체없이 가게를 나선지 오래였다. 이제 가게 안에 남은 것은, 다희 일행과 노곤하게 커피잔을 닦고 있던 가게의 주인 뿐이었다. 다희는, 바깥을 향해 시선을 한번 훝어보고는 예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 진중한 눈.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내가 보낸 이메일은 읽었니?"
예림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다희의 흐름에 합류했다.
"예. 언니가 오랬만에 보내온 이메일이라 꼼꼼하게 읽었답니다."
"그럼 조사해본거야?"
"예."
경미가 트레이를 들고 다가와 그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었다. 거품을 잔뜩 머금은 두잔의 머그컵과 다르게, 예림이 집어든 작은 머그컵에는 검은색에 한없이 가까운 갈색 핵체가 김을 뿜고 있었다. 예림이 먼저 그 진한 향기의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걸 보고서야, 경미는 자리에 앉아 허둥지둥 자신의 잔을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에요. 한명도 없어요. 모두 실종됬어요. 저희 말고는, 엘름과 싸웠던 다른 마법소녀는 이제 찾을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음벨도? 음벨씨도 없어진거야?"
"…예."
정적.
"아프리카는 물론, 세계 전역에서도 그녀에 관한 소식이나 소문은 들려오지 않고 있어요. 3년 전부터 말이에요."
"…믿을 수 없어…"
테이블이, 정적을 찾았다. 주인의 취향인 것인지, 조용하고 느린 템포의 현악 이중주가 가게를 적막히 멤돌았다. 다희는 생가갷ㅆ다. 아니, 자리에 앉은 세사람은 모두 생각했다. 3년 전, 아니 그로부터 한참 전부터 엘름과 함께 싸워온 이들을.
맨 처음 엘름이 지구에 나타났을때 지구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엘름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아군을 세뇌하거나 허공에서 쏘아내는 포격같은 상식 외의, 인간에게 있어선 마법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전술을 사용하며 침공해 온 그들은 막강했다. 여기에 재래식 무기로 많은 이들이 분전했지만, 결국 그들이 맞이한건 비참한 패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마법소녀라는 존재가 등장했다. 코코와 같은, 슈프림이라는 이차원에서 파견된 스카우터들이 엘름과 싸울 수 있는 능력과 장비를 소녀들에게 제공하기 시작 한 것이다. 왜 그 대상이 소녀인 것인지, 다희는 예전에 코코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우리는 현지에 투입하기 전에 지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어. 니케, 아테네, 잔 다르크, 나이팅게일 등, 전쟁에서의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은 대다수가 여자였어. 지금 지구인은 전쟁을 치루고 있고, 그들에게 필요한건 희망이야. 나는 그 상징으로써 너희들을 택한거고."
하지만, 소녀에 더 가까웠었던 당시의 다희와 달리,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고 영웅으로써 세계에 알려진 마법소녀 음벨은 완연하고도 아름다운 숙녀에 가까웠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바가 하나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녀'라고 부르던 그녀가 소수의 병력으로 엘름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사용되던 게릴라 전술을 떠올리곤 했다.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런 음벨의 활약은 진정한 희망이자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신화를 보고 자랐던 다희에게 있어서, 그녀는 우상이었고, 아마 그녀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결코 마법 소녀가 되지 못했으리라고 다희는 생각했다.
그런 음벨이 실종되었다. 그것도 3년 전에.
항상 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