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를 탄 놈

랑쿤 0 2,589

-그러니까.

 

달은 뜨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 해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부턴가 빛이 있었다. 모래사장 너머로 그득한 횟집의 형광등빛을 등지고 그녀는 조약돌을 하나 들어 물수제비를 했다.

 

-이게 전부 다 흡혈귀 때문이라고요?

 

파도에 휩쓸려 제대로 날아가지 못하는 조약돌을 보고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며 그녀가 빛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모래사장에 앉아 달빛이 아니라도, 아름답게 빛을 반사하는 바다를 보고 있던 남자가 여자를 올려본다.

 

-일을 벌인 건 그놈이죠.

 

여자는 입을 벌렸다. 마치 모기에 물린 게 가려워서 긁다가 피가 좀 났다고 말하는 투였다. 그녀가 겪은 일은 간지럽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다시 볼에 바람이 들었다. 마음에 안들 때 하는 여자의 버릇이다.

 

-지금 그게 대답이에요?

 

이번에는 남자가 입을 벌리고 한동안 말이 없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뭐 이런 미친년이 다 있어.’ 속으로 생각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다. 가뜩이나 시끄러운 이곳의 밤에 더 큰 소음을 추가하는 건 사양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핫팬츠 입은 다리에 눈이 갔기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로.

 

-벌써 설명은 다 했잖아요.

 

애써 다리에서 여자의 눈으로 시선을 돌리며 남자가 말했다. 확실히, ‘그놈의 범행 동기가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보통은 이런 여자 피하고 말겠지만 비뚤어진 놈들은 꺾어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 진짜.

 

여자는 말문이 막혔다. 대화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수평선처럼 끝없이 달려갈 기세였다. 그래도 다행인건 조금은 똑똑한 그녀가 남자보다 먼저 지금 벌어지는 소통장애의 원인을 파악했다는 거다. 남자라는 생물은 어떤 놈이든 대화의 어간을 읽는 재주가 떨어진다. 아마도 발달한 근육대신에 잃어버린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내 말은 흡혈귀 같은 게 진짜 있냐는 거였어요.

 

-좀 전에 집에서 본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눈치라고는 없는 새끼.’ 이럴 땐 놀라지 않았냐고 다독여주는 게 백마탄 왕자의 정석이 아닌가. 첨부터 왕자 같지도 않은 몰골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혹시나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걸 그녀는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아까 본 걸로는 부족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본 게 흡혈귀는 아니었잖아요!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오며 눈을 부라렸다. 횟집의 형광등 빛이 여자의 눈에 반사되며 제법 아름답게 빛났다. 주변을 지나던 커플 두 쌍이 그들을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상식을 벗어나는 상황을 겪었으면서 눈으로 보지 못한 비상식은 또 부정한다. 그럼 아까 있었던 일은 본인이 한번이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일이었나.

 

-그럼 아까 본 게 인형탈 쓴 알바라도 된다는 겁니까.

 

여자의 말문이 막힌다. 그 괴물이 진짜라면 그녀가 핏대를 세우며 아직 흡혈귀를 못 봤다고 열불을 낼 필요는 없다. 그들은 세랭게티 투어를 나와서 치타 따위를 찾고 있는 게 아니니까. 흡혈귀를 못 본걸 다행으로 생각하면 모를까. 이 여자는 오늘밤 자기가 겪은 일 따위가 무슨 흔한 악몽의 끝자락이라고 여기는 건가.

 

-거기 흡혈귀까지 있었으면 모르긴 몰라도 당신 살리기가 제법 힘들었을 거 같다는 생각 안 들어요?

 

-…….

 

여자가 조금 진정되는 모양이다. 최소한 여기서 흡혈귀를 목격하고 안하고가 그렇게 중요한 대화거리는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하다. 사실 드문 일도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만나면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가 필요한 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 여자가 겪은 일은 어떻게든 자기 위안이 될 거리를 찾고 싶을 만한 일이었다. 침묵을 지키면서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남자는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부탁인데. 가디건 좀 똑바로 입을래요? 브라 다 보입니다.

 

여자는 생각했다. ‘백마탄 왕자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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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게 써볼까 하는 장르 소설의 인트로 입니다만. 이게 재미가 있을 지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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