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가 우는 소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작업 소리. 바다와 도시가 만나는 항구 특유의 악취 섞인 냄새는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어린 수병은 물론이고 백년이 넘는 세월을 바다에서 보낸 고참 부사관이나 나이 든 제독의 가슴도 설레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은 묘쇄가 묘쇄구를 지나며 내는 덜컥거리는 소리에 의해서 몇배는 더 강해진다.
"함장님. 상륙허가의 건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륙허가라.."
미셸 부장의 말에 티타니아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평소에 임시 소형 함장직을 맡을때는 대부분 단독 운항이였으니 상황에 맞춰서 스스로 결정하면 됐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기함의 호위에 임하고 있다. 아무래도 제독..아니 선임 함장의 말을 따르는게 좋을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티타니아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기함으로 돌리자 흠칫 놀랬다. 기함에 있는 대부분의 수병들이 하선하고 있는게 아닌가.
"...교대로 상륙을 허가하게."
기쁜 표정으로 달려가는 사관후보생을 보낸 티타니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이 끝났다. 아니 잠시 멈추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휴전은 이뤄졌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평화라.. 듣기에는 좋아보인다.
수병은 전쟁이 끝났다고 기뻐하며 장교는 하프페이를 걱정한다. 함장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작은 영지를 꾸리거나 이젠 기억나지도 않는 평시 규정을 떠올리기 위해 복무규정서를 뒤적이고 제독은 짭짭할 수익이 없어졌다며 안타까워 하겠지. 하지만 저런 사관 후보생은 아무것도 할수 있는게 없다. 배운거라고는 배 모는 법과 함포 사격을 지휘하는법. 이런걸로는 평상시엔 할수 있는 일이 없다. 축소될 해군의 남은 자리는 정규 장교 자리도 모자른 판이니 사관 후보생따위를 위한 자리가 있을리 없고 상선의 일자리도 적하법조차 제대로 못배운 사관후보생들이 할수 있을리 없다. 심지어 건강한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은 더 싸고 더 튼튼한 수병들이 잔뜩 풀려나오는 판이니.. 결국 운 없고 연줄없고 돈 없는 후보생에게 기다리는건 구두닦이 뿐이다.
티타니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느닷없이 휴전이라니.."
미셸의 말에 티타니아는 고개를 젓는다.
"뭐, 이젠 한계인거겠지. 저 제독..음..아무튼 그분 말씀 대로라면 우리나라의 해군도 타격을 많이 입었고 육군도 승리했다고 해도 파견군의 상당수가 궤멸 했으니..."
티타니아는 항해 도중에 기함에서 벌어졌던 만찬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오른다.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브리란테-베르기움란트 동맹의 패잔병을 간신히 이끌어 공화국군을 격퇴한 이야기를. 그 콧대 높은 육군 장군님들이 다 죽거나 빠져나가거나 해서 해군 장교가 나서서 지휘를 해야 할 판이였다. 본국에선 대 승리로 포장하고 있다고 한들 말그대로 격퇴에 불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승리를 이끌어낸 샬럿 제독..이 아니라 대령의 노고가 별게 아니였다는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본국은 이걸로 재정비의 시간을 번것이다. 육군병력을 모집하고, 경제를 재건하고 해군 함선을 건조할 소중할 시간을.
"그렇다면 공화국녀석들도 한계라는건가."
갈라테아측도 마찬가지, 이때까지 한번도 진적 없는 무적의 최정예 병력인 친위대까지 동원되었으나 고작 요새 하나를 점령한게 전부.
패잔병을 돌파하지 못하고 역으로 총사령부가 정예 산병에게 기습당해 총통은 꼴불견으로 도주하고 그 아내는 생포되었다. 그 물질,정신적 피해는 상당한 것이다.
"아니지, 오히려 우리쪽이 더 불리하긴 하지."
이런말을 담는다는것 자체가 보통은 강등, 재수없으면 전시 법규에 따른 처형을 감당해야겠지만 그둘의 대화를 듣는 사람은 없었다.
"세실리아 제국이 브리란테쪽에 우호적으로 변했다. 라는게 더 크지 않을까."
베르기움란트의 보존으로 인해 대륙 서쪽의 교두보가 여전히 남아있는이상. 만약 세실리아 제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다면 갈라테아로써는 양면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뭐 어느쪽이든 우리야 놀아날수밖에 없지 뭐. 안그런가 함 장 님?"
"함장직이 유지나 될라나 모르겠다."
자신의 자리도 위험하다. 간신히 준함장이 되나 했더니 본국의 허가도 받지 못한채니 자칫하면 진급이 거부될수도 있는것이다. 그래도 사관후보생들 보단 낫긴 하지만.. 역시 평화란건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적지 않은 사람에게 절망을 주는 양날의 검이다.
"그나저나 콜레트양 아직도 있으려나. 만난지가 벌써 3년이야."
"어휴 술집 아가씨 타령이냐."
"아냐, 매춘부야."
"....에라이."
"그래서 어느쪽이 먼저 상륙하겠어?"
미셸이 말했다.
"글쎄..나중에 정해야 할것 같은데."
티타니아의 시선은 기함. 정확히는 기함의 긴호색에 가 있었었다.
막 '함장은 기함에 내함하라.' 라는 신호가 올라가고 있었다
가끔 있는 황궁의 파티. 앙리에타 황녀는 파티장 내부를 한붙 훑어보았다. 정적의 방문에 마주쳐 껄끄러운 일을 피하기 위하여 슬쩍 자리를 피하는 자. 어떻게 초대받은지는 모르나 아마도 처음으로 황궁에 들어와본듯한 하급귀족의 티를 내는 숙녀. 무언가를 유력 귀족에게 설명하려 하는 한 처녀. 애초에 파티에는 관심이 없었고 서로를 찾자 마자 으슥한곳을 향하는 처자들. 아무리봐도 보안에 위협이 되는 일은 없었다. 카트린느 언니는 고작 이런일을 하면서 친위대장의 업무이니 뭐니 하면서 유세를 떨어대는건가. 원래는 카트린느의 일이지만 이 파티가 카트린으의 생일을 기념하는 파티이기에 앙리에타가 대신 맡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정작 카트린느는 파티장에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아가씨 하나 잡아다가 침실로 끌어들였겠지. 앙리에타는 생각했다.
"황녀 전하."
출입 담당관이 작은 목소리로 앙리에타 황녀를 부르자 앙리에타는 조용히 부채로 가리며 대답했다.
"무슨일인가."
"실은, 초대받지 않은 자가 들어오고 싶다고 합니다."
"이런 파티 한 두번 해보는것도 아닐텐데 그런걸 가지고 고민을 하는가. 위험한자라도 된단 말인가?"
여제의 파티다. 초대받지 않은이가 들이닥치는건 흔하디 흔한일이다. 아니 없는쪽이 더 이상한 일에 가깝다. 그저 여제의 눈에 드는것을 기대하는 하급 귀족일수도. 자신의 새로운 발명의 투자자를 찾지 못한 과학자일수도 주제를 모르는 한 귀족의 애첩일수도 있다. 그야 말로 온갖 인간들이 다 들어오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것은 아닌듯 하오나 고작 대령밖에 안되는 군인인지라.."
군인이라면 귀족의 직급을 내세우는게 아닌한 적어도 준장급은 되어야 불시 참가가 허가되는게 상례였다.
"근위대 소속인가?"
"아닙니다, 해군 대령입니다."
"해군 대령..? 이름은 어찌되는가."
해군은 앙리에타의 휘하였다. 전부 다 기억하는것은 아니더라도 대령급 함장의 이름은 어느정도 알고 있다. 애초에 해군 함정이 별로 없는것도 있지만.
어쨌든. 해군 대령이 어째서 황성의 파티에 참가하려 한단 말인가. 앙리에타는 호기심을 느끼며 되물었다.
"샤를로트 에이스팅스 대령이라고 하옵니다."
"그게 정말인가?!"
"아시는자이시옵니까?"
앙리에타는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는 본래의 얼굴로 돌아가고는 물었다.
"흠흠, 뭐 알고 있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그자가 그렇게만 말하던가?"
"네, 그렇습니다. 샤를로트 에이스팅스 해군대령이라고만.."
"후후후훗, 그렇단 말이지. 뭐 통과시켜도 될것이다. 내가 보증하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잠깐."
재빨리 입구쪽으로 가려던 담당관을 앙리에타가 불러세웠다.
"자네, 정말로 그 이름을 들어본적이 없는가?"
담당관은 잠깐 생각하는듯 했지만 역시 떠오르는게 없는듯 했다.
"들어본적 없사옵니다."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그게 당연할지도 모르겠구나. 뭐, 좋다. 가서 일 보거라."
출입 담당관은 약간 이상함을 느꼈지만 어쩄든 앙리에타의 말대로 하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갔다.
"샤를로트 에이스팅스 대령 듭시오!"
문지기의 말에 몇몇사람들이 황실 전용 출입구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출입구는 열리지 않았고 그 몇몇 사람들의 예상 외로 하급 귀족용 출입구 쪽에서 한명의 숙녀가 나타났다.
"어머."
가장 먼저 반응한건 출입구 근처에 앉아서 비슷한 나이 또래의 귀족 영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릴리안느 황녀였다.
"샤를로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샬럿이 고개를 돌렸다. 릴리안느는 확실하다는듯 의자에서 일어나 샬럿에게 다가가다가...넘어졌다.
"황녀님!"
"릴리안느 전하!"
"아야.."
"몇년이 지나도 여전하시네요. 황녀 전하."
"그래도 이런일이 있을줄 알고 크리놀린에 쿠션을 끼워놨다구. 샤를로트야 말로 변한게 없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거야?"
"그럼 세실리아 제국의 제3황녀님을 뭐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언제나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릴리안느 언니. 라고 불러야지."
"아..음... 생각해보겠습니다."
샬럿이 난감한듯 고개를 긁적이자 릴리안느는 잠깐 삐진 표정을 짓다가 샬럿을 와락 끌어안았다.
"몇년동안 얼마나 보고싶었다고!"
"그래봐야 2년밖에 안되잖습니까.."
"잠깐 좀 비켜주게나. 오오 정말로 샤를로트가 아니냐."
"앗, 여제폐하. 아 그게.."
샬럿은 인사를 올리려 했지만 릴리안느가 꽉 껴안고 있어서 팔조차 빼낼수가 없었다.
"이거 2년동안 몰라보게 변했구나. 완전히 숙녀가 되었어. 특히..음음.."
여제는 샤를로트의 가슴께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복으로도 숨길수 없구나.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질 않았군."
".아하하.."
"이런 튼실한 가슴을 가지고도 이런 자리에 군복을 입고 오는건 좀 아니지 않느냐. 뭐, 급하게 와서 그런걸테니 이해 하마. 아아 그렇군. 다들 아시겠지만 이 아이가 내 네번째 딸 샤를로트라오. 설마 2년새에 잊지는 않았겠지."
예상치못한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샤를로트를 대충 소개시킨 여제는 다시 샤를로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샤를로트, 네가 왜 황실 전용이 아니라 아랫쪽으로 들어온거냐."
"아, 그게 문지기가 이쪽으로 안내시켜 줬습니다."
"뭐라?! 페틸젠녀석 내 딸을 뭘로 보는거냐. 당장 그놈을 잡아다가..."
"그건 샤를로트도 원치 않을겁니다 아버님, 안그러니 샤를로트? 아니, 에이스팅스 대령?"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앙리에타가 어느새 다가왔다. 자신의 사소한 장난으로 담당관이 극형에 처하는건 별로 기분좋은 일이 아닐것이다.
"..아..네 안녕하십니까 전하, 그리고 헤이스팅스입니다."
" 너 아직도 언니란 말 안하는구나. 그리고 여기선 그렇게 발음 안해. 아니지 에이스팅스도 아니고 넌 베르티유-세실리아나지."
"그..그렇습니까.."
"그런거다, 안그렇습니까 아버님?"
"앙리에타의 말이 옳다. 넌 나의 딸이니까. 그보다 카트린느를 불러오지 않겠느냐. 자기 생일파티에 쏙 빠져서 계집질 하는것까진 그러려니 해도 동생이 돌아왔는데도 그러는건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
"물론입니다."
앙리에타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자 릴리안느가 끌어안은 팔을 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샤를로트를 바라보았다.
"나, 들었어 들었어. 샤리가 반역자놈들을 박살을 내줬다면서! 반역괴수의 아내도 잡았다던데!"
"나도 그건 듣고 싶지만 그건 파티가 끝난 다음 천천히 듣도록 하자꾸나."
"에, 아버님!?"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대화하기도 힘들지 않겠느냐. 재밌는 이야기는 아껴서 들어야지."
"그런데 르네는?"
"아, 르네는 지금 밖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을겁니다."
"아, 그럴것 같네."
릴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는 샤리의 시녀가 되기 전까지는 문장관이였거든. 확실히 르네가 없어진 이후론 뭔가 행사들이 나사빠진것 같긴 했어."
"흐음.. 확실히, 아무리 샤를로트가 브리란테식 이름을 댔다고 해도 그것도 구별못하고 하급 귀족의 입구로 들여보내다니. 일장연설로 끝나면 다행이겠군."
"전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네요, 아버님이였으면 그대로 사형시키셨을테니까."
"하하하, 그리되나. 우리딸은 내맘을 잘 아는구나!"
"그런 쓸데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는건.."
"그게 아니다 샤를로트, 넌 아직도 네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듯 하지만 넌 제국 황실의 일원, 그것도 최중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를 고작 하급귀족으로 취급한것이다. 이는 황실의 명예를 더럽힌것이며 나아가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는 다시 말해 반역의 의중을 품고 있다는것으로 해석될수밖에 없는것이다.."
"단순한 실수라곤 해석되지 않는겁니까..."
"실수로 총을 쐈다고 해서 거기에 맞은 사람이 안죽는건 아니다."
의외로 날카로운 반격이 날아오자 샬럿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 어쨌든 오늘 일은 넘어가도록 할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돌아와서 기분이 아주 좋은데다가 르네가 이미 혼쭐을 내고 있을테니까 말이지. 안나, 여기 상파뉴를 가져오도록, 샤를로트, 상파뉴 좋아했었지?"
샤를로트가 상파뉴 잔을 들었을때
누군가가 갑자기 덮쳐와 음료를 쏟아버리고 말았다.
"아앗."
"오호라, 나의 생일 선물은 막내동생의 순결인가..! ..잠깐, 아니지 아직도 처녀일리가.."
카트린느 제1황녀였다.
"뭐 처녀는 아니라도 충분히 맛있는 선물이겠지. 그보다 이런서비스까지 하다니, 핥아달라는거? 제법인걸.."
"으잇."
샬럿의 새하얀 군복위에 상파뉴가 쏟아져 몸에 달라붙고 있었다. 샤를로트는 뭔가 기분나쁜걸 밀어내는듯 카트린느를 밀어버렸다.
"아직 샤를로트 황녀님께서는 숫처녀입니다. 안녕하시옵니까 여제 폐하. 드 펠리아나 여공 인사드리옵니다."
"오, 르네. 왔구나. 페틸젠 녀석은 어떻게 했느냐."
"훈육실에 쳐넣었습니다."
"....여전히 한성질 하는구나."
"죽는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재산을 몰수하는것도 아니고."
"뭐 됐다. 자세한건 나중에 듣도록 하고. 자 여러분. 내 딸의 환영회기도 하오. 다들 축배를 듭시다!"
생일 기념 파티에서 졸지에 귀환 기념 파티가 된 파티는 한층 더 활기를 띄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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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연습을 해야 만화로 만들텐데.. 몇년 걸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