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disaster 1.1 - 구원

전위대 2 2,481
2426117

통합 인류 제국

아레스 행성

가엔 대륙

토블론 시 외곽 48번 구역

오후 515


스산할 정도로 조용한 맑은 오후였다. 익어가는 곡식처럼 누르스름하게 익어가는 하늘은 슬슬 하루 일과를 끝내지 않겠냐고 묻는듯했다. 정적인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의 바람이 낫처럼 들판의 이름 모큰 풀들을 쓸고 갔다. 모든 것이 앨범 속의 묵은 사진처럼 말이 없었다. 한가한 풍경화가가 마침 이곳을 지났다면 그의 창작욕이 상당히 자극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간 것은 화가가 아니라 위장막을 친 장갑차 한대였다. 무르익는 곡식 이삭 같은 풍경의 피날레는 육중한 병기에 의해 완전히 망쳐지고 말았다. 청아한 하늘은 불길처럼 하늘 위로 번지는 흙먼지 때문에 빛을 바랬고 바람 소리는 엔진 소리에 참혹하게 짓밟혔다. 십여 분을 서행하던 장갑차는 엔진을 멈추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정지했다. 그대로 멈춰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즈음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장갑차의 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털썩


흔치않게도 위장색을 칠한 장갑 전투복을 입은 군인 세 사람이 내렸다. 무거운 전투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몸놀림은 매우 날렵했다. 진흙탕 위에서도 단색 정복을 선호하는(정확히 말해서 지급할 군복이 그것 말고는 없는 것이지만.) 대다수 제국군의 후진적 모습과는 사뭇 달라 그들은 외국 점령군인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뒤이어 군인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검은색 제복을 입은 장교 한 사람이 내렸다. 장교는 몸을 돌려 자신이 내려온 장갑차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내려.”


장교가 내려도 좋지 않다고 들릴 정도로 힘없는 말을 뱉었다. 보기만 해도 검어질 것같은 무거운 제복을 입은 장교의 목소리는 바람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 갑자기 드리우는 빛에 얼굴을 가린 남녀 죄수들이 비틀거리면서 장갑차에서 조심스럽게 뛰어내렸다.


따라와.”


장교는 다시 나직하게 말하고는 길가로 걸어 나왔다. 죄수들은 초췌한 눈빛으로 주변을 불안하게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장교를 따라나섰다.


여기가 어디요?”


예기치 못한 광경에 월리스 포버스라고 적힌 명찰을 단 죄수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죄수를 호송하는 무장한 병사들만큼 고압적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기대대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던 장교는 예고도 없이 장갑차에서 3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정지했다. 장교는 엉거주춤하게 멈춰 선 죄수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들 자기 죄목은 알지?”


선해 보이는 인상에 어울리는 상당히 언변 좋아 보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좋은 목소리는 원래도 혈색이 없던 죄수들의 얼굴을 확실하게 탈색시켰을 뿐이었다.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니 불러주지.”

잠깐! 우린 군교도소로 이송되기로 했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닙니까?”


죄수 한명이 외치자 도주를 막기 위해 죄수들의 양 옆에 서 있던 군인들이 즉각 그의 목과 배에 총구를 박았다.


질문할 때만 대답한다.”

됐어, 됐어. 그리 빡빡하게 굴 것 없잖아?”


장교가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자 군인들은 즉각 총구를 도로 거둬들였다. 그의 손에는 남작을 상징하는 자수정 반지가 매우 선명하게 빛나서 모든 죄수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남작(뭐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는 헛기침을 하며 한번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아레스 군교도소는 어제부로 없어졌다. 이 근방의 모든 군교정시설은 현재 사용불능이다.”

“....”

그러니 부득이하게 이곳에서 절차를 진행한다.”


무슨 절차? 다들 그런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달아 올라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의 심연은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데 무엇보다 효과적인 도구였다.


점호부터 하지. 필립 소로, 데이비드 파커, 후안 에르난데즈, 헤르만 호트, 월리스 포버스, 레베카 프렌치, 크리스틴 텔레만... 이름 안 불린 사람? 없어? 좋아. 그럼 귀관들 전부 횡령한 군수물자를 정치장교에게 팔아넘기려고 시도할 만큼 얼간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나?”


공기가 조금만 부드러웠으면 다들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두어달 전에 그들은 운좋게 노획한 테네실린 총 석정과 먹다 남은 테네실린 팔 하나를 상부에 바치지 않고 군수회사에서 나온 삐끼와 접촉하여 상당히 비싼 값에 팔아먹는데 성공했다. 아 물론 비싼 값이라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기준이다. 군수회사 중역실에선 수지맞았다고 임원들이 배를 잡았다.

어쨌든간에 아마 그걸로 끝났으면 그들은 잿빛 군생활에 우연찮게도 화사한 선 하나를 그었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한번 맛들인 일은 쉽게 손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노다지 맛에 그들은 중독되었고 이것저것 팔아치울 것이 없나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군인들의 불법적인 매매에 주로 나오는 매물들은 전사자의 물건들이지만 테네실린 무기와 달리 재고가 넘쳐나는 그것들은 헐값이었고 사겠다는 사람조차 많지 않았다.

한번 목돈을 만져본 그들에게 그게 성이 찰 리가 없었고 좀 더 대담한 도둑질을 계획하게 되었다. 대담한 도둑질은 더 많은 사람과 정교한 계획을 필요로 했고 당연히 꼬리는 길어졌으며 길어진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황당하게. 교묘한 방법으로 테네실린 무기들을 한 트럭 정도 탈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접선하기로 한 사람을 오해하여 정치장교에게 테네실린 무기 카탈로그를 내미는 희대의 병신짓을 하고 만 것이다. 다짜고짜 무기회사에서 언질을 준 사람과 비슷한 행색의 사람의 어깨를 덥석 잡고 좔좔좔 떠들었던 접선책은 헌병대로 끌려가 다시 자신들의 범행을 좔좔좔 불었고 남은 동료들도 굴비처럼 죄다 끌려왔으며 이젠 이 이름 모를 들판에 서 있다.


저 병신 새끼.”


신음같은 원망은 대열의 중간으로 몰리고 있었다. 죄수들 중에서도 월등한 체격을 가진 월리스 포버스는 날카로운 시선들의 집합소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사복 근무 중인 정치장교를 붙잡은 접선책이 바로 그였으니까.


만약 너희들이 직접 주운 총만 바꿔먹은 거면 아마 태업죄 수준으로 봐줄 수 있긴 한데 무기고를 털었으니 이건 손색없이 반역죄에 해당하는군.”


남작은 안주머니에서 멋들어진 리볼버 권총을 꺼내들었다. 이미 전장에서 퇴출된 지는 오래된 물건이지만 예술적인 형태 때문에 실질적으로 싸울 일이 별로 없는 정치장교들은 리볼버를 고집했다. 남작은 실린더를 열어 과시하듯이 총알을 하나, 하나 천천히 채워 넣었다.


한 번 더 장전해야겠네.”


아마 이거나 듣고 떨어라라는 의도가 분명한 중얼거림에 죄수들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몇몇은 주저앉았다.


아이고, 나리! 살려주십쇼.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소령의 의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누군가 간절히 외치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그런 아우성이 터졌다. 모든 죄수들이 무릎을 털썩 꿇고 탄원을 해대는 것을 잠자코 듣던 남작은 총알을 다 채운 실린더를 도로 집어넣으면서 눈을 반짝였다.


뭐든지?”


그의 미간에는 대상이 모호한 의구심이 고여 있었다. 아마 뭐든지란 말의 진정성이 그에게는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엎드린 죄수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코를 흙 속에 묻으려고 씰룩이던 죄수들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철저한 상하관계에 놓인 시선들이 서로를 마주했다.


좋아, 너희들의 살 길을 알려주겠다.”


말끝에 그는 물병에 입을 댔다. 독하고 강한 향이 확 풍겼다. 물병 안에 물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병뚜껑을 닫은 장교는 상당히 탁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너희들이 민간인이었으면 충군시키면 됐겠지만 너희는 이미 군인이니 그건 안되겠고 이거 어떻겠어? 모두 다 특무대에 들어가는 걸로 합의를 보지.”


생소한 이름에 죄수들은 뭐라고 반응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특무대? 너무 모호한 이름이다. 특무대란 이름 붙을 만한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무슨 특무대인지 말씀이나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누군가 대단한 용기를 발휘했다. 남작은 죄수 주제에 흥정을 하려는 것이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질문을 무시하진 않았다.


훈터 특무대.”


일제히 비명이 튀어나오기까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쇠사슬을 흔들어대고 고개를 젓고 목청껏 아우성쳤다.


못 갑니다! 그런 덴 절대로 못가요!”


문답무용이었다. 남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권총을 뽑아 가장 크게 외친 사람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평소에도 소심하던 소로였다. 왜 하필 오늘따라 큰 목소리를 냈을까. 이미 조각나서 알아보기도 어려운 얼굴을 하고 그는 동료들 틈새에 쓰러졌다. 시체에는 당연히 익숙하고 친한 전우의 시체에도 익숙한 그들이지만 그들이 시체를 밀쳐 내거나 시체로부터 떨어지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피범벅이 된 두개골과 뇌 파편을 뒤집어쓴 죄수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혼탁한 눈은 모두 남작의 총구 쪽으로 몰렸다.


다음 사람? 특무대에 들어가기 싫으면 저 친구 따라가야 해.”


다소 사무적인 물음이었다. 약간 멀리 있는 죽음과 당장의 죽음, 어느 쪽을 피해야 할까?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당연히 후자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죽음은 사실 죽음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이다. 머리에 총알구멍이 뚫리는 것은 그래도 사람답게 잘 죽은 것이다. 그 수많은 이빨들을 마주하느니 그건 축복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결론이 도출되었다. 저울은 채 매달아보기도 전에 이미 한쪽이 바닥을 치고 있다. 남은 여섯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어섰다. 남작은 살짝 얼빠진 표정이 되었지만 곧 납득하였다. 그도 자신이 내걸은 조건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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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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