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c. 1022. 11. 20(Mon) 3:00 AM
길버트 아인게이츠는 매일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깼다. 유일한 혈육인 누나, 미스티 아인게이츠가 술집 일을 시작하고 난 뒤로부터 늦게 퇴근하는 누나를 맞이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었다.
길버트가 색 바래고 기워진 두툼한 무명 이불에서 몸을 빼내자, 초겨울 치고는 매서운 한기가 길버트의 잠을 확 달아나게 만들었다. 길버트는 곧바로 방 한가운데에 있는 석유난로를 켠 뒤 간밤에 세숫대야에 떠 놓은 살얼음 낀 세숫물을 난로에 올려 녹였다. 마음 같아선 잘 때도 난로를 켜놓고 따뜻하게 자고 싶었지만, 기름은 언제나 부족했기에 그래도 누나랑 다시 만나기 전에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구두닦이 하던 때보다 이런 거라도 있는 지금이 낫지, 하며 이 추위를 버틸 수 밖엔 없었다.
물이 적당한 온도로 데워지자, 길버트는 세숫대야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며 누나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 일은 무사히 마쳤을까, 술 취한 손님이 누나에게 심한 짓을 하진 않았을까, 요즘 들어 약이 늘었던데 몸은 괜찮은 걸까... 마음 같아선 길버트도 학교 따윈 그만 두고 부두에 가서 일을 해 누나를 돕고 싶었지만, 누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 남매가 살아남으려면 너라도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더 좋은 직업을 얻어야 한다며 그런 길버트를 말렸다. 그래도 길버트는 누나가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언제나 누나의 고집에 밀리곤 했다. 그리고 길버트를 말리고 난 누나는 언제나 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미 늦었으니까, 너만이라도 늦지 않게 해 줄게.’
길버트가 보기에는 누나도 학교에 다니기에 충분히 늦지 않았지만, 누나는 언제나 자신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이 얘기하곤 했다. 길버트는 결국 누나의 고집대로 학교에 다니면서도 죽은 줄만 알았다 겨우 다시 만난 이후로 언제나 그런 태도를 보이는 누나가 늘 마음에 걸렸다.
세수를 마친 길버트는 낡은 옷장에서 큼지막한 야전상의를 걸친 뒤 현관문을 열었다. 철제 계단에 발을 들이자, 계단 아래에서 음식 쓰레기를 뒤지고 있던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급히 골목 너머로 도망갔다. 길버트는 녹슨 철제 계단을 난간을 의지해 조심스럽게 내려가려 애써 봤지만, 간밤에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아 두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그렇게 겨우 계단을 내려온 길버트 앞에는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길다란 골목이 펼쳐져 있었다. 골목 저 너머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근처 전봇대에 붙어 있었을 선원 모집 전단지 몇 장이 날아가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은 골목 저 끝까지 띄엄띄엄 켜져 있어 구석구석에 버려진 쓰레기 봉투나 연탄재 따위를 오렌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길버트는 그 골목의 끝을 항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여전히 누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피난길에서 부모님이 기관총 포화 속에 찢겨나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봤을 때도 생각했고, 홀로 살아남아 전쟁으로 초토화된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을 때도 생각했고, 누나랑 다시 만나기 직전에도 생각했듯이. 그 생각은 너무도 오래 되고 깊은 것이어서 길버트가 긴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가로 나와도 멈출 수 없었다.
다니는 차 한 대 없이 휑한 차도가 보이자 길버트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 반. 누나가 올 때가 되었다. 길버트는 곧바로 길가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누나가 일하는 술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트루디 아주머니. 지금 저희 누나 퇴근했나요?”
길버트는 평소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돌아온 대답은 평소와 달랐다.
“길버트니? 큰일났어! 지금 미스티가...”
“네?”
다급한 목소리에 놀란 길버트는 수화기를 잡은 채 잠시 굳어 있었다. 그 때, 길 너머에서 검정색 밴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길버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 길ㅂ...”
익숙한 목소리가 반쯤 열린 차창 사이로 새어나왔다 끊겨 버렸다.
“누나?”
길버트는 급히 밴이 오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뒤편에 어렴풋이 보이는 긴 머리 여자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살짝 비쳤다. 길버트는 곧바로 수화기를 내팽겨치고 전화부스를 막 지나는 밴을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밴은 속도를 높여 밤길 너머로 사라져 버렸고, 끊겼던 목소리만이 다시 튀어나와 텅 빈 길가에 메아리쳤다.
“길버트─”
발을 헛디뎌 길가에 넘어져버린 길버트 뒤로 축 늘어진 공중전화 수화기에서 들리는 당황한 목소리가 약하게 울려퍼졌다. 길버트는 아직도 멈추지 않는 것만 같은 누나 목소리의 잔향이라도 따라가려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밴은 사라진 뒤였다.
Epc. 1022. 11. 20(Mon) 4:08 AM
길버트는 곧바로 근처 파출소로 갔다. 길버트가 파출소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파출소 앞에서 제복 단추를 풀어헤친 채 담배를 피우고 있던 경관 한 명이 길게 하품을 하며 길버트 앞으로 다가왔다.
“꼬맹아, 여긴 너 같은 얘들이 올 데가 아니란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
“아저씨, 방금 저희 누나가 납치됐어요!”
경관은 길버트의 말에 조금 놀랐는지 풀어진 단추를 급히 채운 뒤 상의 주머니에서 펜이 꽃힌 수첩을 꺼냈다.
“납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래?”
“방금 전에 까만 차 한 대가 퇴근하는 우리 누나를 태우고 사라지는 걸 봤어요. 차 번호는 FP0375였어요.”
경관은 수첩에 길버트가 하는 말을 급히 적었다.
“오케이. 그럼 너희 누나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줄래?”
“이름은 미스티 아인게이츠라고 하고요, 나이는 스물 두 살...”
그 때, 경관이 미스티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손짓으로 길버트의 말을 막았다.
“잠깐, 너네 누나 이름이 미스티 아인게이츠라고 했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미스티 아인게이츠는, 지금 마약 사범으로 수배 중이다.”
“...네?”
길버트는 경관의 말을 믿을 수 없어 경관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관은 다 탄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린 뒤 말을 이을 뿐이었다.
“어제 우리 서에서 체포한 마약상의 거래 장부 맨 윗줄에 적혀 있던 이름이 미스티 아인게이츠였지. 혹시 너네 누나 마약 하는 거 본 적 있냐?”
‘마약’ 이라는 말에 길버트는 잠시 누나가 늘 먹곤 하던 약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약이라뇨! 아파서 먹는 알약 가지고 마약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에요!”
“아파서 먹는 알약이라, 그게 마약이란다, 꼬맹아. 신경안정제를 바탕으로 조제된 신종 마약이지. 요즘 우리 서에서도 그거 잡느라고 난리도 아니라 아파서 먹는 알약이라는 변명은 지긋지긋하게 들었단다.”
경관은 발끈해 하는 길버트의 앞에서 콧방귀를 낀 뒤, 다시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넌 끝까지 안 믿겠지만 너네 누나가 ‘약 안 먹으면 잠을 못 자겠다’ 따위의 말을 한 적 있으면 백프로다. 그것도 중독 말기증상이지. 아오, 만날 약쟁이들만 잡다 보니 약쟁이 구문 하는 덴 이골이 났네, 아주 그냥.”
길버트는 저 건방진 경관에게 그렇지 않다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경관의 말대로 누나는 약이 없으면 잠들 수가 없다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러면 네가 본 상황도 대충 견적이 나오지. 너네 누나는 어제 우리가 체포한 거래처가 사라지자 다른 거래처를 찾아보았고, 그쪽에선 너네 누나가 예전 거래처 단골이라는 거 알고 뽕 뽑으려고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요구했겠지. 마약 없인 잠들 수도 없는 너네 누나는 자기 돈으로는 그걸 살 수 없게 되자 결국 자기를 팔기로 하고 그 차에 스스로... 꼬맹이 앞이니 심의상 여기까지만 말하지. 넌 아니라고 해봐야 난 이런 케이스를 수십 번도 더 경험했단다, 꼬맹아. 안 봐도 뻔하지. 그 마약이 그 정도로 무서운 거란ㄷ... 악!”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길버트 앞에서 신나게 떠들던 경관은 결국 길버트에게 한 방 얻어맞았다.
“아저씨가 우리 누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거야! 멋대로 지껄이지 마!”
길버트는 그렇게 말한 뒤 황급히 경관에게서 빠져나왔다. 경관은 길버트를 쫓는 대신 맞아서 부어오른 뺨을 손으로 감싼 채로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금발의 여경이 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오닐 선배! 또 사고 치고 온 거에요?”
“사고라니, 마약 사범 하나 잡느라고 개고생 하다 왔다고, 메리.”
“선배...가요? 그리고 제 이름은 메리가 아니고 메리벨이라고 몇 번을...”
“됐다. 경감님한테 여기 적힌 번호 단 차 추적하라고 무전이나 때려.”
오닐이라고 불린 경관은 영 못미더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메리벨에게 수첩을 휙 던져 주었다. 메리벨은 곧바로 수첩을 집어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Epc. 1022. 11. 20(Mon) 4:37 AM
길버트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침대 밑에서 누나가 평소에 먹던 그 약이 한 뭉큼 나오자 길버트는 곧바로 그 약을 난로에 넣어 태워 버렸다. 그 다음, 길버트는 옷장에서 통장과 귀중품을 챙겨 책가방에 쑤셔넣은 뒤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길버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누나가 납치되고, 누나가 마약에도 손을 댔다니. 자신을 아끼는 누나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나를 그대로 납치된 채 버려두거나, 경찰에게 붙잡혀 감옥에 가게 둘 수는 없었다. 누나가 무슨 짓을 했든간에 일단 누나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행히 길버트는 누나를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주머니 속 쪽지에 적어 둔 흥신소나 탐정 사무소의 번호들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적어도 경찰보단 믿음직했다.
Resolver Episode 1 : 길버트 아인게이츠의 그림자
프롤로그 : 미스티 아인게이츠 납치사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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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글 쓰는거 참 오랜만이네요. 렌없입니다. 기억하실 분도 있겠지만, 2년 전에 구 엔하에 올렸던 작품을 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소재로 고민하다 결국 원래 썼던 걸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게 묘하긴 하지만, 결국 가장 확실하게 떠오르는 소재는 이것이라 외박 나가서 만년필도 샀겠다 본격적으로 써 볼까 합니다. 개작이라 원래 썼던 거와는 한참 다르겠지만요. 시점도 3인칭으로 바꿨고, 원래 3번째 에피소드였던 걸 첫 에피소드로 끌어내고, 인물 이름도 바뀐 게 있고...
뭐 아무튼, 시간 날 때마다 진짜 꾸준히 올려 볼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엔하위키에 설정정리도 하고 싶지만 일단 그건 제대한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