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좋은데 자네만 없었으면 좋겠군 (1)

잉어킹 6 3,865
*이 글은 실제 인물, 단체, 기타등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유기화학에 대해 특별한 원한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1

"이젠 완전히 끝났어."

민혁은 육각형과 막대 그림으로 가득한 노트를 잡아 구긴 뒤 좁아터진 자취방 구석으로 던졌다. 그리고 책상 위로 엎어졌다가, 머리로 책상을 쿵쿵 받았다.

"이딴 과목은 듣기 싫어...... 뭘 해도 모르겠어."

그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시곗바늘은 그를 비웃는 것처럼 얇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과제는 내일 9시까지 제출이었다. 만일 반 이상이라도 했으면 저렇게 구겨서 던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기 초에 이 과목을 신청한 나를 죽여버리고 싶다......"

우리의 주인공은 중얼거리며 의자를 뒤로 뺐다. 물론 그도 조금이나마 더 휘갈겨 놓는 게 점수에는 눈꼽만큼이나 더 도움이 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어나려는 거였다. 암담한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조명이 더 어두워 보였다.  

"씨팔, 이놈의 전등까지 날 엿먹여! 안......"

민혁은 뒤로 돌았다가, 일어나지도 앉지도 않은 어중간한 자세로 굳었다.

"안녕 ‘나’, ‘나’다."

그것이 말했다. 그것은 민혁의 두 배는 되는 덩치에, 옷이라고는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벗은 몸에는 기름으로 떡이 져 엉킨 털이 가득 덮혀 있었고,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입이 세로로 찢어져 열려 있었다. 그리고 민혁이 매일같이 아침마다 마주치며 저주하는 얼굴과 아주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은 것이 고간에 자리잡아 있었다. 전등불을 그 덩치로 가린 덕분에 놈은 역광을 받아 더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뭐여 씨발! 너 뭐야! 어디로 들어왔어! 아니지, 이건 헛것이야! 헛것이지! 여러분, 이게 다 유기화학 때문입니다! 유기화학은 죽어야 해!"

민혁이 말했다. 그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제 미치기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뭐긴 뭐야. 나는 나다. 평행차원의 회의결과를 전하러 왔다. 너만 죽어주면 다 해결된다."

그것이 말했다. 고간에 달린 얼굴이 한 바퀴 돌았다.

"씨팔, 이제 환각까지 날 죽이려 든다고......"

민혁은 그 순간, 털복숭이 나에게 붙들려 높이 끌어올려졌다. 태어나서 한번도 안 씻었을 법한 체취를 맡는 순간, 그는 이게 유기화학 과제만큼이나 잔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명 안 해주고 죽이면 억울할 테니 알려주도록 하겠다. 너 말고도 다른 평행차원에서도 모두 과제 때문에 고통 받거나, 과제 때문에 떨어진 학점으로 고통 받고 있지."

"그래서?"

민혁은 슬슬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모든 차원의 내가 투표한 결과, 이 시간대의 나는 모두 죽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투표 안 했어, 이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간대의 나도 개새끼라는 이야기겠지. 그리고 네게도 분명히 기회를 줬다."

"언제!"

"일 주일 전 이 시간에."

민혁은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그러다가, 그의 머릿속에서 술 먹고 집에 들어가다가 무슨 서명운동 같은 걸 하라고 하던 걸 뿌리치던 게 떠올랐다. 아, 그거였나. 물론 납득은 전혀 가질 않았다.

"분명 모든 것은 공평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시간대의 나만 제외하고 모든 내가 납득하며 죽었다. 그러니까 이제 죽어라."

"이......"

"쓸데없는 저항이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모두 끝날 것 같나. 마지막으로 이 시간대의 나만 죽으면 모든 것이 바로잡힌다. 학기 초의 나의 게으름에 의한 재앙을 모두 원점으로 돌릴 수 있다. 걱정 마라. 모두 한 순간에 끝날 것이다."

민혁은 매달린 채로 다리를 있는 힘껏 젖혔다.

"그보다 왜 너는 그 모양 그 꼴이냐."

"이 시간의 내가 유기화학을 수강 신청했기 때문에 신세를 비관해서 화학약품 통에 빠졌다."

"아, 그렇구만......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씨발년아!"

털복숭이 고간 사이로 민혁의 혼신을 담은 킥이 꽂혔다. 거기 달린 민혁의 얼굴은 눈을 까뒤집더니, 몸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민혁은 하마터면 넘어지며 나의 머리 부분에 달린 이빨에 다칠 뻔했다. 그는 일어나서 비명을 지르며, 바퀴 달린 의자를 들어 '나'를 마구 내리쳤다. 의자가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내리치는 걸 멈췄다.

"젠장, 별 꼴 다 보겠네...... 저거 어떻게 치워야 하지."

민혁은 담배라도 피려고 현관문을 열려다가, 발목을 잡히고는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어차...피 마찬가지다...... 나를 따돌리건 죽이건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내가 찾아올 것이다......"

털복숭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그 자리에 엎어져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민혁은 시체 처리나 기타 등등 복잡한 것은 조금 이따가 생각해 보기로 하고, 어제 냉장고에 넣어둔(그래봤자 3시간 전이었다) 에너지 드링크라도 마시려고 냉장고 쪽에 손을 뻗었다.

"잠깐만......"

 민혁은 시계를 봤다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바늘은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지은 채로 멈춰 있었다. 시계가 고장 났나 하고 그는 거실 시계를 봤는데 역시 멈춰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자 건너편 대로는 이미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매일 그의 밤잠을 설치던 경적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병신 같은."

 민혁은 먼지와 바퀴벌레 시체만 가득한 창고를 급히 뒤져서, 자취방 들어온 이후로 한번도 쓰지 않은 알루미늄 배트를 꺼냈다. 털복숭이가 인기척도 없이 뒤에 ‘나타났던’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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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로크네스
이건 무조건 유기화학이 잘못했네요. 저도 이번학기에 광학개론 잘못 신청했다가 죽을 뻔 했는데, 미지의 빛에 맞아서 다차원 생명체로 변한 다른 세계의 저 자신에게 습격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잉어킹
그러니 우리는 수강신청이 실패하면 제일 먼저 알루미늄 배트부터 챙겨놔야 할 것입니다
카리스트
평행세계의 '주인공'이 주인공을 죽이려 들다니 이 무슨!(초성) 끝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잉어킹
더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전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NoobParadeMarch
시계가 멈췄으면 지금이야말로 빨리 과제를 해야지...하고 생각했던 저는 잘못한 걸까요.
잉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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