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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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가능성으로 충만할 때, 그것을 지나치기 쉽지 않다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었다. 물론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모르지만. 내 입장에 맞춰 바꿔보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가능성이 다가올 때, 거절할 수 없다고. 그 가능성이란 여자친구였다. 무어라 거절할 수 있을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난 네가 싫어, 별로야 하는 거짓말은 할 수 없다. 결국 나랑 만나보자, 네가 좋아, 하는 상대와 사귀게 되는 것이다.
세기도 귀찮을 정도로 사귀었지만, 그들에게 단 한 번도 먼저 헤어지자고 한 적은 없다. 내 감정은 사귀기 전과 사귄 후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날 좋아해? 잘 모르겠는데. 좋아하지 않는 거야? 모르겠어. 그럼 상대는 낙담한다. 그건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뒤이은 물음. 왜? 그러면 내가 대답한다.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네가 사귀자고 해서 사귄 거야. 상대는 할 말을 잃고,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상대는 모르지만, 나는 아프지 않다. 그들은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사귀자고 했던 것일까. 간혹 친구로 남는 경우가 있지만, 가깝진 않다.
지금 여자친구도 마찬가지다. 화영이. 걔도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다. 나를 좋아하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물었다. 날 좋아해? 화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었던 듯 싶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쯤되면 남자가 무어라 해야 할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 감정도 가지지 않은 상황에서 배려는 위선이니까. 날 좋아하지 말라고 말하는 위악도 한 방법이나, 그건 내가 부담스럽고. 그래? 하는 나의 물음과, 대답도 못하는 부끄러움 사이는 길었다. 내용 없는 말줄임표가 몇 줄씩, 몇 단락씩 계속 되는 상황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는 순간, 화영이 말했다. 저랑 사귈 수 있나요. 안 될 건 없었고,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그 날부터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다. 나의 행동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화영은 상처받았었다. 그건 나로써도 어쩔 수 없다. 상대가 나를 바꿀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여야 했다. 적어도 나랑 만나고 싶다면 말이다. 날 좋아해? 화영은 수없이 물었었다. 나보다 두 살이 많으면서도, 내게 의지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화영은 재잘거렸다. 어머니의 말버릇, 집의 역사, 동생의 버릇없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불화였다. 얼마의 빚과 성격차이로 싸우는 부모님 두 분의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이혼하실 것 같아. 그래? 학비는 어쩌지. 알바해야지, 아니면 그만 두던가, 학비 대출도 있고. 여자친구는 아르바이트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여자친구에겐 두려운 미답의 영역이었다. 그녀는, 현재의 생활에 불만이 있었지만, 정작 생활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를 만났다. 화영의 이야기는 어디서든 비슷했다. 거리, 까페, 학교, 식당, 모텔. 길을 걸으며, 턱을 괴고 빨대를 빨면서, 도서관에서 속삭이듯 몰래, 팔베개를 해줄 때에도. 그래? 라고 물으면 여자친구는 졸래졸래 이야기했다.
"이혼하실 것 같아."
"그 얘긴 자주 했었잖아."
"이번엔 진짜 하실 것 같아."
나는 말했다. "그래?"
"응." 여자친구가 말했다. "어쩌지."
"글쎄." 나는 물었다. "그냥 이혼이 싫은 거야? 아니면 생활이 바뀌는 게 싫은 거야?"
그러자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겪었다. 여자친구가 화를 낸 것이다.
"내가 그렇게 이기적으로 보여?"
"무슨 말이야?"
"아냐." 여자친구는 답답해했다. "너는 좀 너무한 것 같아. 그런 생각 안 들어?"
"전혀 안 들어." 나는 딱잘라 말했다. "이유도 모른 채 화내지 마, 애도 아니고."
여자친구는 상처받았다. 그러라지.
"어느 부분에서 이기적으로 들렸는진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네 생각이고. 그렇게 보여서 그렇게 말한 건데,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 아냐? 너야말로 나한테 왜그러지?"
여자친구는 울먹거렸다.
"날 좋아해?"
"난 똑같아, 사귀기 전이랑 지금이랑."
여자친구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사실이었다. 역시 상처를 받았고,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었다. 헤어지자고 해도 괜찮아. 아프지 않으니까. 하지만 여자친구는 울음을 삭였고, 한동안 집안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주일 후에 여자친구가 말했다. 이혼하셨어. 용돈은 주시겠지만, 학비는 내가 많이 감당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말했다. 그래? 여자친구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화영이는 말 대신 움직였다. 알바를 잡고, 장학금을 알아보았다. 전엔 자기가 주로 데이트 비용을 냈지만, 이젠 더치페이를 하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며, 바뀐 여자친구이 경제관념을 느꼈다. 상관 없었다. 일 때문에, 공부 때문에, 나랑 만날 시간이 줄어도 괜찮았다. 이대로 헤어지기도 한 방법이었다. 오히려 편하리라. 서로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 갈라져야 할 갈림길에서, 마침내 갈라서는 것.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자연스러운 이별. 드문 만남이 더 드물어졌다.
"자취를 할까 해."
화영이 말했다.
"돈은 있어?"
"정부 전세 대출을 알아보고, 안 되면 친구랑 월세 반반씩 내게."
'대출', '월세', '반반', 이런 단어들이, 화영의 입에서 나오자 낯설어졌다. 마치 수업으로만 배우다 실제로 경험했을 때의 괴리처럼 다가왔다. 화영이는 전보다 독립적이었고, 굳세어졌다.
"그래?"
"응. 그래서," 화영이 말했다. "너랑 만날 시간 없을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너도 날 좋아하지 않았고."
"응." 그러면서 나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분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잘 지내고. 여기까지인 것 같아. 갈게, 잘 지내."
"응, 너도." 나는 화영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분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대체, 왜? 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러다 화영이가 나갈 때 울린 종소리와 함께 깨달았다. 난 화영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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