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④

로크네스 0 2,880
 
"애벌레를 고치로, 고치를 나비로, 나비를 먼지로 만드는 그 원인은 죄인가? 아이를 어른으로, 어른을 노인으로, 노인을 먼지로 만드는 그 원인 또한 죄인가?"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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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현실이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어. 이 녀석은, 오딜 그라이프라는 여자애는 나와 닮았어. 선천적인 살인마야.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끔찍한 충동에 시달리는 아이야.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녀석은 충동을 결코 잠재우려고 하지 않을 뿐이야.
충동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장갑을 끼고, 조금이나마 덜 지루하도록 속옷 위에 그대로 가운을 걸치는 나와는 다르게 최고의 유희를 더 효과적으로 즐기기 위한 청바지와 아웃도어용 재킷을 입어.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지루함에 몸부림치는 나와 반대로 녀석은 정말로, 속으로도 한껏 즐거워하면서 웃고 있어. 참을 필요가 없으니까.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푸파라고 했지.”
나를 나무에 묶어놓고 자기는 그 옆에서 빈둥대면서, 오딜은 뭔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어.
“이상한 이름이라고 한 거, 그냥 이상하단 의미는 아니었어.”
대답하기엔 너무 머리가 복잡해. 오딜은 잠시 기다리다가 자기 맘대로 떠들기 시작하고.
“푸파, 곤충의 고치 또는 번데기.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형이나 소녀의 의미도 있고. 확실히 인형처럼 예쁘게 생기긴 했네.”
또 저 소리야. 다들 나한테는 똑같이 말하지. 하지만 그 다음까지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지만, 곤충의 고치 또는 번데기잖아. 그 안에는 뭔가 숨 쉬고 있어.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조금씩 몸을 만들어가고 있어. 가끔씩 참을 수가 없지? 어떻게든 억제해보려고 해도 결국에는 아까처럼 칼을 쥐게 되지? 무의식적으로? 모든 살인마는 어릴 때는 하나의 번데기야. 작은 동물을 먹이로 하고 마을에 불을 놓으면서 조금씩 성장해가지만, 언젠가는 우화할 때가 와.”
그래, 이젠 정확하다는 말조차 지겨워. 전부 옳아. 오딜은 전부 이해하고 있어. 살아있는 심리검사 결과 같아. 내가 이대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니, 이대로 성장하리라는 걸 명확히 보여주는 것만 같아. 저 두 눈으로 나를 전부 관찰하고 전부 이해하는 것만 같아. 정말로 두려운 눈이야. 두려운 이유는 심리검사 결과서와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고, 내가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야. 더 끔찍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야.
만일에 오딜이 날 전부 이해한다면, 그래, 내 사랑하는, 내 사랑하는 풀고라 란테르나리아처럼 나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애가 내 모든 걸 이해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그 애의 말대로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애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왜 돌아가야 하지? 왜 한국에 돌아가야 하고, 왜 그 애한테로 돌아가야 해?
“있잖니, 푸파?”
그 전부 이해하는 두려운 눈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묶여서 숨을 헐떡대는 나를.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가족을 보는 것처럼.
“여자 둘이서 사람을 죽이고 다니면 센세이션이 일어나지 않을까? 나랑 너랑 둘이서. 하나는 독일에서, 또 하나는 먼 동방에서 온 두 악마가 세상을 새빨갛게 칠하는 거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두근거리지? 난 다 알고 있어.”
이건 유혹이야. 악마의 유혹이고 고백이야.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자는 강한 압력.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나한테 있을까? 분명히 오딜과 함께하는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덜 지루할 거야. 조금 빨리 죽거나 잡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훨씬 덜 지루한 삶일 거라고. 무엇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말이야. 어쩌면 운이 좋게 잡히지 않을지도 몰라. 보아하니 오딜은 다른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도 능한 것 같잖아. 그렇다면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오래도록 즐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게 이 주장을 거절할 이유는 없어.
“기분 나쁘니까 저리 꺼져.”
나는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어.
 
어째서일까.
 
분명히 즐거울 거야. 왜 좋다고 하지 않았어? 왜 너처럼 지루해하는 애가, 매일같이 지루함에 몸부림치면서 물건을 수십 개씩 깨먹는 애가 저렇게나 즐거워 보이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어?
 
모르겠어.
 
저 애는 너를 이해해 주잖아. 저런 애를 필요로 했잖아. 그걸 부정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저런 애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 생각엔 아닌데. 지금이라도 좋다고 해. 오케이라고 하라고. 너를 이해해주는 평생의 친구, 평생의 반려자, 평생의 연인을 얻을 수 있어. 도대체 뭘 우물쭈물하는 거야?
 
모르겠다고.
 
아하, 그 애 때문이야? ‘나의 사랑하는 (적당한 단어를 넣으세요)’ 때문이야? 정신 차려, 이 자식아. 잘 생각해 봐. 냉정해져야지. 합리적이 되라고. 그 애는 물론 너를 꽤 많이 이해했어. 하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했지. 네가 그 애를 끔찍한 집안에서 구해줬더니 어떻게 했지? 널 벨기에에 처박았잖아! 그게 네가 좋아서 그런 거 같아? 널 위해서 그런 것 같아? 진짜로 그렇게 믿는다면 너 같은 호구도 없을 거다! 상식적으로, 너처럼 미치지도 않은 애가, 아무리 나쁜 놈들이었다고 해도 자기 부모를 죽이고 집까지 홀랑 태워먹은 정신병자를 위해서 뭘 해주겠냐! 그 애는 네가 치료가 불가능한 인간 말종이란 걸 알았어. 그래서 다시는 볼 일이 없도록 벨기에에 처박아버린 거라고. 그걸 아직도 몰랐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방금은 농담이었어! 하, 하, 하! 이젠 좀 어때? 오딜하고 같이 세계를 뒤집어엎을 마음의 준비는 됐어?
 
아니, 전혀 이해 못 하겠어!
 
“푸파? 푸파, 뭐라고 했어?”
저 얼굴, 거의 달라붙다시피 얼굴을 가까이 하고서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내가 분명히 대답했는데 뻔뻔하게 다시 물어보고 있지. 놀랄 만도 해. 왜냐면 나도 내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겠으니까. 그래도 하나는 확실해. 내 대답은 내 심리검사 결과만큼이나 바뀌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엄청 싫어하니까.”
“흐응,”
몸을 멀찍이 떼면서 오딜은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되찾았어. 그러고서 이런 불길한 소리를 했지.
“뭐, 좋아. 방금 전까지 번데기였던 애가 갑자기 성충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나도 오래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무슨 제안을 해도 내 대답은 정해져 있어. 지루하게 하지 마. 오딜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낚싯줄을 풀어주고, 꿈틀거리는 나를 순식간에 제압하면서,
“아까 낚시터에서 같이 있던 여자 있지? 굉장히 친해 보이던데,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널 이해해줄 수는 없어. 너한테는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그래도 혹시 맛은 좋을지도 모르니까, 내일 저녁 시간쯤 우리가 만났던 낚시터로 데려오도록 해. 환영회 열어줄게! 기대되지 않아?”
땅바닥에 처박힌 채로 이런 제안을 들었어. 음, 쿨도어를 데려가는 건 간단한 일이야. 내가 같이 가자고만 하면 무슨 일인지도 안 묻고 쫄래쫄래 따라올 거 아냐. 그렇게만 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적어도 쿨도어랑 비엔나 봉봉이랑 캠핑이나 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덜 지루하겠지. 머리는 여전히 아프지만 그 정도로 냉정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 그런데 지금은 정상참작을 좀 받고 싶네. 아프니까 냉정하게 굴지 못해도 이해해 달라고.
“안 데려가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고 다시 《송어》를 불면서, 오딜은 조용히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어. 나를 홀로 남겨놓은 채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다시 아무도 없는 채로. 시간은 하루도 채 남지 않았고 그 전까지 뭔가 해결책을, 대답을 내놓아야만 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좋아, 질문은 충분히 쌓였어.
이제는 정말로 답을 듣고 싶어.
 
비토가 남긴 랜턴이랑 품 안에 있던 지도 하나를 가지고 숲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뜨고 있었어. 그렇다고 해도 다들 자는 중이어서 내가 나간 건 눈치를 못 챈 것 같지만, 정작 돌아온 내 꼴을 보더니 쿨도어는 아주 기겁을 하더라.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일이 좀 있었던 수준이 아니잖아! 이 긁힌 상처 좀 봐. 구급상자 가져왔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 전에 잠깐만.”
“뭔데?”
“둘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저쪽 낚시터가 좋겠다.”
이 말 한 마디에 따라오는 건 계획대로야. 나무 아래 앉아서 구급상자를 펼치고, 약을 발라주네 밴드를 붙이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손을 떠는 것도 전부 예상했던 그대로. 그래, 이럴 줄 알았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정말로 알기 쉽다고.
“무, 무슨 얘기 하려고 불렀어, 푸파?”
뭘 기대하고 앉았어. 그냥 뭣 좀 물어보려는 거야. 나보다 똑똑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내가 어떤 앤지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럴 생각도 없겠지만, 그래도 당장 물어볼 사람이 생각이 안 나니까. 뭐 적어도 나보다 오래 살긴 했잖아. 뭔가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
그래서 말했어. 전부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간략하게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애를 좋아했는데 여기서 다른 애를 만났다고, 나를 이해해주는 건 똑같고 아마 나랑도 더 비슷한 사람이라서 함께 있으면 즐거울 것 같다고 머리로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에 만난 애한테는 전혀 끌리지 않는다고.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이 얘기를 왜 굳이 쿨도어한테 했냐고? 표정이 볼만하거든. 내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할 때의 저 화려한 표정 변화란! 뭐어, 그래도 어른은 어른이더라. 상처를 딛고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내가 찢어놓은 눈 아래의 상처가 아직 그대로 있는데도 내 무릎의 긁힌 상처에 밴드를 붙여 주면서 쿨도어는 입을 열었어.
“으음, 어려운 얘기네.”
그건 알아. 내가 듣고 싶은 건 대답이라고. 대답을 내놓을 수 없으면 난 내 이성이 내리는 판단에 따라버릴 거야. 내 저녁식사나 되라지. 그건 나도 원하는 결말이 아니니까 빨리 대답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어떻게?”
“네가 한국에 있는 그 애를 좋아하는 이유가, 과연 널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그건 확실하잖아. 그게 아니라면 뭐겠어?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것 때문에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이후에는? 서로 이해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어? 시시한 얘기도 하고, 추억도 쌓고, 그러지 않았니?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만약, 만약의 얘기야. 그 애가 널 더는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해 봐. 갑자기 머리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고, 뭔가 심경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어. 아니면 처음부터 널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그 애를 그만 좋아할 수 있겠어?”
또 질문이네. 그것도 아주 어려울 것 같은, 칠판에 빽빽한 수학 공식처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지는 질문이야. 하지만 뭔가 이걸 풀면 진리가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뉴턴의 법칙처럼, 아인슈타인의 법칙처럼 멋진 우주의 방정식이 빛나는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느낌이야. 그러니까 일단은 눈을 감고, 이렇게 말한 다음에,
“잠깐 생각 좀 해 볼게.”
잠깐 환각의 세계에 다녀올게.
 
환각 속에서 나는 불타는 집 앞에 서 있어. 장갑도 없고 가운도 없어. 자주색 트레이닝복에 하얀 외투에 야구모자. 키도 지금보다 작아.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서 머리카락엔 아직도 물방울이 맺혀 있지만 그것도 열기에 날아가고 있어. 나는 그 앞에서 나의 사랑하는 로드니우스 프롤릭수스, 너에게 막 같이 벨기에로 떠나자고 제안한 참이야. 하지만 방금 본 광경에 심하게 충격을 받은 너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지.
“너, 너 뭘 한 거야?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넌 미쳤어! 이해 못 하겠어!”
ㅡ아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이런 말은 도저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장갑도 없어. 충동을 이길 수가 없어. 그 애는 계속 나를 비난하고, 그래, 이 광경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끝까지 비난하고 나는 결국 그 애마저도, 한때 나를 이해한다고 믿었던 사람마저도 내 손으로 직접, 오랜 시간에 걸쳐서, 쉬지 않고, 고통스럽게. 분명히 본 적이 있어. 환각 속에서. 이것과는 다른, 더욱 생생하고 소름끼치는 환각 속에서. 그 약을 먹었을 때.
그때 난 분명 그 애를 죽였어. 지금처럼, 지금 보고 있는 환각처럼. 옷을 벗기고 살을 찢고 피를 흩뿌리면서 가능한 한 끔찍하게 죽였어. 맞아, 그 애가 날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 장갑 없이는 난 도저히 충동을 참을 수 없을 거야. 그게 내 진심이고 본성이야. 나는 그렇게 태어났고 전혀 바뀌지 않았어. 이것이 하나의 정답이야. 이걸로 끝일까? 그 애가 날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나도 그 애를 사랑할 수 없을까? 이 질문은 답이 아주 간단하네.
‘절대로 아니다.’
날로 먹는 문제였어.
풀이과정을 쓰라고 하면 쓸 수 있어. 증명을 요구한다면 보여줄 수도 있고. 간단하니까 잘 보라고. 지금 내 아래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너도 잘 들어. 내가 비록 환각 속에서 나를 비난하는 널 죽이긴 했지만, 그것도 정말 잔혹하게 죽이긴 했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했지? 다시는 그 환각을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어? 약에는 손도 안 대고?
아니잖아.
나는 다시 약을 집어삼켰어. 장갑으로 충동을 봉인한 채로 네 분노에 스스로를 무력하게 내버려뒀어. 네가 화내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내겐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화를 내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서 소리치는 너를 보기 위해서 다시 약을 먹었다고. 그래,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으니 단지 너를 보기 위해서. 이거야말로 간결한 증명이지, 그래, 증명 끝.
 
수학의 역사에서 흔히 그랬듯이, 하나의 증명은 다음 증명의 힌트가 되고,
 
나는 왜 아르덴에 와 있는 걸까? 왜 몽롱한 정신 속에서, 정체조차 불분명했던 살인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걸까? 이젠 여기에 대한 답도 내놓을 수 있어. 나는 매우 우울했고, 그 이유는 심리검사 결과 때문에 다시는 그 애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야. 그 상황에서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그야 당연히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겠지.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 모르는 그 애에게로, 나의 사랑하는 드리오코셀루스 아우스트랄리스에게로. 그래서 수수께끼의 범죄자에게 이끌렸던 거야. 왜냐하면, 나는 결코 탐정이 아니지만, 탐정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애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어. 그래서 탐정놀이를 시작했고, 쉽게 질려버렸는데도 기회만 있으면 추리에 달려들었고, 선한 뜻 따위가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나를 여기로 인도했던 거야. 증명 끝.
 
그리고 작은 증명이 모여 더 커다란 명제를 향해 흐르고,
 
나는 왜 벨기에에 와 있는 걸까? 이 벨기에에서, 그 애하고는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서, 나는 과연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아니, 바뀔 수는 있을까?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야. 지금까지의 증명 방법으로는 풀 수 없을지도 몰라. 왜냐면 검사 결과는 내가 정말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거든. 그래, 아마 난 바뀌지 않을 거야. 뇌를 갈아치우지 않는 이상 나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도 없이 가학적이고 잔인하고 범죄적으로, 병적이고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으로, 나르시시즘이랑 마키아벨리즘 정도도 이 상태로, 심지어 뇌 영상 촬영 결과도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살아갈 거야. 이 사실을 인정하고서도 증명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까?
 
나는 눈을 뜨고, 환각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곁을 돌아봐. 쿨도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어. 미안한 일이지.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증명을 마치려면 아무래도 한 번 더 고통을 줘야 할 것 같으니까.
“쿨도어, 나 좋아해?”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어. 훨씬 어린 애 앞에서 새빨갛게 돼서는, 어른스럽지 못하게.
“내 생각엔, 나는 결코 쿨도어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이기적이고 가학적이니까. 그리고 이미 마음에 정한 상대가 있으니까. 하나 덧붙이자면 쿨도어가 어떻게 나올지 알 것 같으니까.
“나, 나는, 할 수 있는 일에는 최, 최선을 다할 거야.”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계속 최선을 다해 달라고. 넌 내 사랑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 그럼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어. 시간은 잔인하게 흐르고, 지난 2년이 지루함 속에서도 순식간에 지나갔듯이 저녁까지도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가. 그 동안 나는 쿨도어에게 몇 마디 해 두고, 그 다음엔 그저 기다릴 뿐. 지루해? 그래, 물론 지루하지. 그건 내 뇌의 문제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그래, 지루함 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야.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고들 하지. 좋은 말이야. 얼마나 멋져?
하지만 불만이 있다면, 왜 하필 새만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느냐는 거야. 파충류 양서류 조류 곤충 갑각류, 수많은 생물들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알을 뚫고 나와야 한다고. 작고 털이 난, 꿈틀꿈틀 움직이고 치명적인 독을 가진 애벌레도 마찬가지야.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애벌레는 싸워. 그렇게 세상을 만나.
하지만 새와는 달라서 애벌레의 싸움은 끝나지 않아. 시간이 흐른 뒤에 애벌레는 어째서인지 스스로를 다시 고치 속에 가둬. 헤르만 헤세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아마 질겁했을 거야. 왜 그렇게 힘들게 싸워서 손에 넣은 세계를 포기하고 다시 갇히는 길을 선택하는 걸까? 헤세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애벌레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천적을 격퇴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으니까. 비행? 재미없는 얘기 하지 마. 사람들은 단지 날아다니고 날개가 예쁜 곤충이 번데기에서 나오는 걸 경이롭게 지켜보지만, 걔네들이 고작 날아다니면서 날개 자랑이나 하려고 그 고생을 할 것 같아? 절대로 아니지. 그럼 무엇을 위해서 곤충들은 고치를 만드는 걸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고치에서 나온 곤충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야 하겠지. 그 지루한 데에 처박혀서 스스로를 그저 녹이고 다시 짜 맞추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밖으로 나오고 나서는 뭘 하지? 그냥 날아다니나? 싸우고 먹이를 먹고 잠을 자? 그럴 거면 그냥 애벌레로 있을 수도 있었잖아? 하지만 애벌레는 할 수 없는데 성충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어. 그래, 성충은 애벌레와는 달라서 사랑을 할 수 있어.
나비도 나방도 개미도 벌도 풍뎅이도 파리도 어릴 때는 사랑을 할 수 없어. 하지만 성충이 되면 한 쌍의 파리로부터 수백만과 수십억의 자손이 뿜어져 나오는 법! 그래, 알은 세계지만 그것을 부수는 건 고작해야 하나의 세계를 부수는 것에 불과해. 고치야말로 세계야. 나 하나만을 가두는 내 마음 속의 자그마한 세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사랑과 수백만과 수십억의 사랑의 결실들이 뚫고 나아가야 할 진짜 세계야. 사랑하려는 자는 반드시 그 세계를 깨뜨려야 해. 알을 뚫고 나온 벌레의 군세는 신에게로, 잔혹한 물리법칙과 차가운 방정식으로 그 무엇보다도 지루하고 끔찍한 고문도구를 자아내 피조물들을 한껏 괴롭히는 고문장치의 신에게로 날아가. 그 신은 고문장치의 신이지만, 생명체가 태초에 탄생할 때 세상은 잔혹했고 모든 것이 고통스럽게 끓는 수프였으나 그럼에도 생명체는 둘로 나눠지고 넷으로 나눠지고 여덟로 열여섯으로 서른둘로 나눠져 자손을 남겼으니 이것이 사랑의 기원으로서, 따라서 고통과 사랑은 태초부터 있었으니 그 신의 이름이야말로 사랑이라. 그러니까 이 증명 방법이야말로 신의 증명인 셈이지. 어릴 때 동생이 보던 만화에서 그렇게 주인공이 외쳤던 것처럼, 그래, 사랑의 힘으로.
 
시간이 가까워. 쿨도어는 내가 시킨 일을 모두 마치고 쉬고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 낚시터에서 준비를 해 두고, 그 다음엔 캠프장 관리사무소 건물 안을 그렇게 뒤지고 다니면서 고생을 했으니 힘들 만도 하지.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성격 덕분에 준비는 아주 완벽해. 낚시터 쪽은 물론 준비 만전이지. 그리고 관리사무소 안의 CCTV와 인선은 전부 파악했고, 어느 화장실에 가장 사람이 없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도 전부 알고 있어. 그게 왜 필요하냐고?
오딜은 분명히 내 생각을 전부 읽고 있었어. 날 전부 이해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 반대도 성립하잖아? 난 오딜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낚시를 하고 물고기를 내팽개치고, 그건 아마도 오딜 나름대로의 충동 해소 방법일 거야. 동물 학대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흔한 습관이지. 그리고 또 하나가 있잖아? 내가 만일 쿨도어를 데려가지 않으면, 녀석은 나머지 하나를 할 생각인 거야. 이 아르덴 숲에, 이 캠프장을 둘러싸고 있는 온 숲에 말이야. 그걸 알고 있다면 계획을 망치는 것도 간단하지.
“그럼, 슬슬 다녀올게.”
“혼자 괜찮겠어? 몸도 안 좋은데”
뭐, 쿨도어 말이 맞아. 이런 상태로 혼자 어떻게 하기엔 분명 까다로운 상대지. 그래도 이 일은 혼자 책임지고 싶어. 이건 나와 내 사랑에 대한 일이고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는 없으니까. 바꿔 말하자면 이 얘기야.
“나도 다 컸거든. 비엔나 봉봉이 호들갑 안 떨게 잘 지켜봐 주기나 해.”
쿨도어는 뭐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반박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결국에 나온 말은 내가 기대하던 그대로였어. 전부 계획한 대로였어.
“최선을 다할게.”
 
그렇게 나는 낚시터로, 타오르는 석양 때문에 불길이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호수로 향했어. 거기에 서 있는 것은 동그란 안경, 아웃도어용 재킷에 청바지, 풍성한 갈색 머리를 흔들면서 능숙하게 휘파람을 부는 낚시꾼. 오딜 그라이프가 이쪽을 돌아보면서 생긋 웃었어. 어젯밤 숲에서와는 다르게 광기의 파편조차 보이지 않는, 엄청나게 상냥해 보이는 모습으로.
“올 줄 알았어.”
“뭐, 어쩔 수 없잖아.”
나도 기다리는 사람한테 말 한 마디 안 하고 도망갈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오히려 너무 일찍 온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단 말이야.
“만일 네가 안 왔다면 캠프장 주변에 불을 질렀을 거야.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다 같이 타죽을 수 있게. 나, 무선전신이나 플라이 낚시보다 훨씬 더 폭발적인 것도 할 줄 알거든? 순식간에 여길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불 지르는 거 좋지.”
“역시 이해하는구나! 네가 오면 안 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어쩔 수 없네! 파티 끝나고 초대형 캠프파이어라도 하는 게……, 그런데 그 여자는 어디 있어? 데려온 거 아니었어?”
정말 너무 일찍 왔나, 하고 생각할 무렵, 쾅! 관리사무소에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비명소리가 들리고, 가스를 열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창고에 쌓여 있던 연료 젤이랑 소독용 알코올을 이용하면 비슷하게는 할 수 있지! 그래, 불길은 언제 봐도 엄청 지루하지는 않다니까. 그것보다 더 즐거운 게 있다면, 불길을 보고 깜짝 놀라는 여자애의 얼굴 정도일까. 좋아, 조금 더 놀려 줘야지.
“어머나, 불이 났네.”
그래, 표정 좋고. 이렇게 보니까 나름대로 귀여운 면이 있잖아. 마음에 드는데.
“소방차가 오려나? 아니면 소방헬기?
이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귀여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뭐가 됐든, 지금이라면 숲에 불을 지르든 폭탄을 터뜨리든 별로 피해가 없을 것 같지 않아?”
“뭐 하는 짓이야!”
오케이, 오케이! 그런 표정이야! 모든 게 무너질 때,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는 그런 표정을 지어야지!
“난 널 이해한다고! 널 이해해준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왜 날 방해하는 거야? 왜 이런 짓을 했어? 왜 넌 날 이해해주지 못하는 건데!”
“왜 이해해야 되는데?”
이젠 내가 질문을 던질 시간이야, 오딜. 답할 수 있으면 답해보라고. 아마 못 할 거야. 왜냐면 난 이미 증명을 완벽하게 끝내 뒀거든. 자아, 멍청한 얼굴로 똑똑히 보라고.
“나한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 애를 정말로 사랑해. 처음엔 그저, 그 애가 날 이해해준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였어.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어. 내 사랑은 점점 더 성숙해가고, 더듬이와 날개와 다리를 기르면서 지금에 이르렀어. 그래, 나의 사랑하는 밀라브리스 팔레라타, 만일 네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아무래도 좋아! 날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 날 매도해도 좋아, 날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도 좋아! 그래도 사랑해! 치명적인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네가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난 널 무한히 사랑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이해할 때까지 말하고 싶어, 이해할 때까지 감금하고 싶어, 이해할 때까지 아프게 하고 싶어, 가능하다면 억지로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어, 방법은 많아,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야,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더라도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본질은 하나야. 네가 나를 영원히 이해해주지 못하더라도 그저 같이 있고 싶어! 그런데 오딜 네가 날 이해해줄 수 있다고? 필요 없거든! 이제야 깨달았어. 나한테 필요한 건 이해가 아니었어, 그저, 그저 그 애만 있으면 돼!”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고, 앞을 보면 녀석은 그저 멍하니 있고. 생각해보면 내가 저 상황이었어도 엄청 어이가 없었을 것 같긴 하다. 이렇게나 부끄러운 외침을 듣다니 말이야. 으으, 이런 부끄러운 사랑 고백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다니, 제 정신이 아니었지, 내가 미쳤지. 방금 이거 농담! 하, 하, 하!
“푸파 너……,”
그래, 감상을 들려줘. 엄청 로맨틱하지 않았어? 영화 같지 않았어?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전혀 다른 게 깨어나 버렸구나.”
그건 별로 로맨틱한 감상이 아니잖아. 뭐어, 감상에 불만만 가지면 발전이 없는 법이니까 실전에서는 이것보다 더 잘 해야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오딜은 안경을 벗었어. 아주 천천히. 중얼거리면서.
“아빠는 항상 말했어. 난 눈빛이 소름끼친다고. 마귀의 눈이라고.”
안경알 아래에서 드러나는 건, 와아, 안경 벗으니까 완전히 인상이 다르잖아. 인상이 완전 다르다 싶었는데 저게 비밀이었나.
“그래서 너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거든.”
“죽어.”
“그건 이해할 수 있겠ㅡ”
 
빨라.
내가 느려진 걸 수도 있지. 몸이 안 좋으니까.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빨라. 커리큘럼을 무시한 내 무리한 운동의 성과는 이 녀석 앞에서는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해.
게다가 다 읽히고 있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공격하려는지, 칼을 어떻게 꺼내서 휘두르려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느낌이야. 감으로 피하는 걸까, 오랜 살인 경험 때문에 나랑은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생긴 걸까. 돌이켜보면 난 어린애 아니면 묶여 있는 사람한테만 칼을 댔으니까. 이런 면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 앞으론 스타일을 좀 바꿔볼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쉽지는 않아, 응, 확실히 어려워. 저쪽이 쓰는 흉기라고 해 봐야 낚싯줄 정도지만, 난 어느새 칼을 놓쳤고 몇 번이나 목을 졸렸다가 간신히 탈출했어. 이대로라면 나도 희생자가 되고 말 거야. 뭔가 변수를 만들어보는 방법밖에는 없겠는데, 그래, 그 방법뿐이네. 도망치는 척, 후퇴하는 척 호수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젠장, 젖는 건 싫은데, 하고 풍덩.
 
그래, 이것도 계획에 있긴 했어.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획이란 그런 거니까.
첫째로 고려한 건, 지금쯤이면 하루살이가 또 우르르 우화할 거라는 거야. 그걸로 뭐 시간을 벌 생각은 없어. 단순히 수면에 하루살이가 들끓게 만들어서 시야를 가리면 되는 거야. 그건 계획대로 잘 됐어. 나도 바깥이 안 보이거든.
두 번째로 고려한 건, 사실 아주 의도적인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활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활용해야지. 이쯤이었는데? 여긴가? 이거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짜 능력이지.
그리고 세 번째로 고려해야 되는 건……, 녀석은 내 생각을 대충은 읽었을 거야. 그러니까 이를테면 내가 이 낚싯대를, 어제 떨어뜨린 이걸 쥐고 녀석이 있을만한 곳을 향해 힘차게 내뻗는다면,
“말했잖아! 난 널 전부 이해한다고! 넌 절대로 날 못 죽여!”
제대로 찔러보기도 전에 이렇게 붙잡히는 거야. 아아, 하지만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고 살아남고픈 파리는 수억의 자손을 남기는 법. 무슨 말이냐 하면, 낚싯대가 붙잡히자마자 난 이걸 힘껏 잡아당기고, 녀석이 균형을 잃고 호수 안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까 쿨도어가 호수 안에 던져 둔 두 번째 칼을 가지고,
“아무래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네.”
살인마의 희생자가 되는 살인마, 둘 다 여자애, 이게 진짜 센세이션이지. 봐, 너도 엄청 놀랐잖아. 최고로 좋은 표정이야. 흠뻑 젖을 만한 가치는 있었어.
 
내가 호숫가로 간신히 기어 올라왔을 때, 오딜은 비참한 몰골로 얕은 물가에서 헐떡이고 있었어. 깊이 베인 가슴과 배의 상처는 아마 치료하기 힘들 거야. 피가 새빨갛게 호수를 물들이면서 하루살이의 우화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나는 그 광경을 웃으며 지켜보고. 아아,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움직였네.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돼.
“왜, 왜 이러는, 거야”
뭐야, 죽을 거면 깔끔하게 죽으라고. 좋은 살인마일지는 몰라도 희생자로서는 완전 빵점이잖아.
“우리는 달라,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르단 말이야. 우리 둘이 있으면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어, 난 항상, 나 같은 애를, 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길 바랐는데, 어째서 이런,”
그 정도 얘기라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어릴 때 나도 똑같은 고민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야. 왜냐면, 그래, 레오폴트 브리에르가 말했었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 다음 구절은 건너뛰고, 그 다음 구절을 보자고.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니까 이해받고 싶다는 어린애의 소망 따위, 내 사랑보다 덜 중요한 게 당연하잖아.”
“그런, 치사해…….”
“어른스럽다고 해 줘.”
죽어가는 몸이 하루살이 떼에 파묻히고,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힘도 조금씩 줄어들고, 오딜은 슬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어. 어른스럽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대신,
“푸파, 푸파,”
“이상한 별명인 거 안다니까.”
“그 어원은 인형, 사람의 형체, 그것으로부터 인형을 뜻하는 ‘퍼핏’, 그리고, ‘눈 속에 비치는 사람의 모습’에서……, 눈동자를 뜻하는 ‘퓨필’도,”
“갈 때가 돼서 정신이 혼미해?”
“그래, 그랬구나, 난 그랬던 거구나,”
“마지막까지 궁금증 남기고 가면 저주할 거야. 무슨 말 하고 싶은 건데?”
“그 눈, 눈동자에, 반한 것 같아, 아무래도,”
“뭐, 뭐야 갑자기. 안 살려줄 거거든.”
오딜은 마지막 숨을 토해냈어. 피가 섞여 나오고, 고통스러운 단어들이 섞여 나와. 마지막으로, 흐린 정신으로 남기는 마지막 이야기.
“홀려 버렸던 거야. 너무 예뻐서,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원하는 모습만을, 보게, 되어 버려, 그래서 눈치 채지 못했어. 그 안에, 그 안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 바보 같네, 나…….”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에, 에, 에? 그러니까, 음, 돌이켜보면 브리에르도 내 눈이 귀엽다고 했고, 쿨도어는 맛이 갔고, 고빌라는 자기 옛날 아내 닮았다고 그랬고, 비토는 선한 뜻을 보았다고 했고, 그리고 이젠 오딜 너도? 그리고 그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다 자기 멋대로 이상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정말로? 좀 더 돌이켜보면 엄마도 그랬고 아빠도 그러긴 했어. 우리 사랑스러운 딸, 눈이 어쩜 이렇게 예쁘니,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하고. 내가 여동생을 죽인 날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 어라, 어라라라,
“설마 이것 때문에?”
이, 이 눈 때문에 아무도 날 제대로 봐 주지 않았던 거야? 눈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내가 사람을 죽여도 살인마로 보이지 않았던 거라고? 와아, 와아 와아 와아, 나 지금 얼굴 완전 새빨갛겠다, 이건 진짜 부끄럽거든! 응, 정신 차리자. 냉정해져야지. 문제 해결법을 찾아보자고. 난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인데, 아무나 내 눈에 반하게 둘 수는 없잖아? 방법이, 방법이, 아까 싸우다가 오딜이 떨어뜨린 안경이,
“이러면 어때?”
마귀의 눈을 감추기 위해 썼던 안경이지만, 그렇게나 인상을 바꿔 주는 물건이라면 이걸로 불필요한 오해도 막을 수 있지 않으려나. 도수는 없지만 코랑 귀가 조금 간지럽네. 뭐 나중엔 익숙해지겠지ㅡ하고 생각하는데 별안간 오딜이 웃음을 터뜨렸어. 아하, 아하하하하, 하하하, 하면서 다 죽어가는 소리로.
“왜 그래!”
“아니 아니야, 그냥,”
아, 진짜 부끄럽게! 마지막까지 짜증나게 하기는!
“너무, 너무 웃겨서, 눈부셔……,”
그래도, 그게 마지막이었어. 오딜은 죽었고, 축 늘어진 시체는, 뭐 어떻게든 낚싯줄을 가지고 통나무에 묶어서 가라앉혀 뒀어. 언젠가는 떠오르겠지만 그래봐야 또 다른 학살자 전설이 시작될 뿐이겠지. 마침 통나무에 스마일이랑 물고기 표시도 해 뒀으니까 말이야.
 
곧 소방차가 도착했어. 모든 게 끝났어. 화재도, 웃는 얼굴 학살자도, 뒤틀린 아버지의 불쌍한 가족도, 성 비토의 어릿광대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도, 그리고 짧지만 길었고 지루했지만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았던 캠프도. 근처에서 쿨도어가 기다리고 있었고, 참 애매하게 웃으면서 “절대 포기 안 해. 최선을 다할 거야.” 이렇게 중얼대면서도 몸을 닦아 줬으니까, 그렇게 피 묻은 옷이랑 흉기는 쿨도어의 배낭에 처박혔어. 전부 내가 계획했던 그대로야.
여전히 몸은 아파. 죽지 않았으니까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지. 그리고 여전히 지루해. 내 뇌는 결국 바뀌지 않으니까.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당장 그 애를 안을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살아있다는 건 결국 고통스럽고 지루한 거야. 하지만ㅡ떠나는 버스로 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지랑이 같은 게 호수 위를 덮고 있었어. 그래, 저건 하루살이의 춤추는 구름이야. 찰나의, 덧없는 죽음을 향해서 물이라는 세계를 깨고 나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단 한 번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불태우는 하루살이들의 죽음의 무도. 그 한 번을 위한 물속에서의 삶이니까……, 그렇게 고통스럽고 지루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래, 저 벌레들처럼 나는 결코 바뀌지 않을 거야. 고치(푸파)에서 벗어나더라도 유전자는 변하지 않아. 이런 뇌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게 유전자에 새겨진 내 운명이야.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깊은 곳에, 이중나선의 뿌리에는 분명 사랑하라는 운명이 잠들어 있어. 그러니까 바뀌지 않더라도 사랑은 할 거야. 반드시 돌아갈 거야. 그 애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반드시 돌아가 주겠어. 앞으로는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 그래, 이것도 어쩌면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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