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①

로크네스 0 3,016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폭력성도 업그레이드. 분량도 업그레이드.
 
-----
 
변신 이야기
 
“경치 진짜 끝내준다! 그렇지 않아, 푸파?”
이거랑 비슷한 말을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하고 똑같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캠프장에 막 도착했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강원도 어디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였을 거야. 그렇다면 경치 얘기를 한 사람은 아마 아빠였겠다. 비엔나 봉봉의 쓸데없이 발랄한 목소리 대신에 아빠의 쓸데없이 발랄한 목소리였을 거고, ‘푸파’가 아니라 ‘우리 사랑하는 딸’이었던 나는 아마 심한 멀미로 기진맥진한 채 아빠 차에서 비틀비틀 내리고 있었겠지. 그때랑 비교해서 달라진 점을 조금 꼽자면 지금은 버스에서 내리고 있고, 캠프장도 강원도가 아니라 아르덴 숲에 있고, 같이 도착한 두 사람이 부모님이 아니라 비엔나 봉봉하고 쿨도어고, 나는 엄마 취향의 괴상한 분홍색 드레스 대신에 실험가운을 입은 채고, 멀미가 많이 나아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치 얘기를 들으면서 “나한텐 엄청 지루해 보이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 건 똑같고, 멀미는 아니지만 어쨌든 몸이 안 좋은 것도 마찬가지. 엄마 대신에 쿨도어한테 기대서 비틀비틀 차에서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 뭐야, 결국 중요한 부분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
특히 몸이 안 좋은 게 짜증나. 9월이 돼서 가을을 타는 건지, 수상한 약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벨기에에 숨어있던 미지의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아니면 다이아몬드에 얽힌 원혼들한테 저주라도 받고 있는지 최근 들어서 건강이 굉장히 나빠졌어. 무기력하고 온몸이 쑤시고, 머리는 뻥 터질 것처럼 아프고, 기분전환 겸 가볍게 운동이나 하려고 해도 너무 쉽게 지쳐버리지. 그저께에는 러닝머신 위에서 쓰러질 뻔 했다니까. 마침 헬스장에 있던 토피가 평소에는 그렇게 내 시선을 피하다가도 위급상황이 되니까 자존심 내팽개치고 달려와 준 덕분에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어. 그렇다고 걔랑 다시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든 것도 아니고(그러느니 부상을 당하는 게 나아), 물론 몸 상태가 극적으로 개선되지도 않았지만. 이런 참담한 꼬락서니 덕분에 비엔나 봉봉이 제안한 대로 멍청한 축제에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은 완벽하게 사라졌지. 그래, 그건 긍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9월 초에 루벤에선 커다란 축제가 열리거든. 관람차(아무 의미도 없이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지루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기구), 회전목마(아무 의미도 없이 빙빙 돌면서 지루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기구), 각종 노점상(평소에도 먹을 수 있거나 입에 대기도 싫은 음식을 사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곳)이 온 도시를 빼곡히 채워. 그딴 걸 같이 구경하자고 하는데, 걔도 그렇지만 나도 작년에 이미 봤거든? 그걸 또 가자고 했으니 내 반응도 뭐 예상할 수 있는 범위겠지.
“차라리 죽여. 원망 안 할게.”
그러니까 하는 말이, 축제날에는 학교도 쉬는데 뭔가 하지 않는 건 죄악이라는 거야. 나처럼 불쌍한 여자애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한이 있어도 축제만은 가기 싫다고 난 끝까지 버텼고, 지금도 나를 부축해 주고 있는 쿨도어가 그 때도 내 편을 들어줬어. 적어도 축제 말고 다른 데 갈 수 있지 않겠냐고.
“캠핑 같은 것도 있잖아!”
쿨도어 말이 내 건강이 나빠진 건 루벤에 종일 틀어박혀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공기 좋은 데서 푹 쉬게 해 주자는 거야. 처음엔 “그것도 싫거든!” 하고 태클을 걸 작정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처음 가족들하고 갔던 캠핑은 지루하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았거든. 적어도 축제보다는 나을 거란 말이야. 인터넷을 좀 뒤져보니까 아르덴 숲에서 하는 캠핑이 그나마 괜찮을 거 같더라고. 나랑 쿨도어가 끝까지 우긴 덕에 캠핑 쪽으로 살짝 마음이 기울어가던 비엔나 봉봉은 특가 할인을 하는 캠프장을 보고 완전히 격침. 요즘 아르덴 숲에 살인마가 돌아다닌다는 미확인 소문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특가 할인을 하는 거라고 비엔나 봉봉한테는 절대로 밝히지 않았지만, 사실 그 살인마 얘기는 총에 맞은 채 호수에 떠 있던 시체 하나랑 이상한 표식들 가지고 자아낸 일종의 음모론 같은 거고 나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별로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어쨌든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한 살인마 덕분에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긴 했어. 그건 긍정적인 일이고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 다만,
“지금은 좀 어때, 푸파? 몸 괜찮아?”
쿨도어의 이 물음에 “응, 좀 괜찮아졌어.” 라고 대답해줄 수 없다는 게 문제야. 억지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어. 뇌도 결국엔 몸의 일부, 몸이 아프면 생각도 따라서 우울해지게 마련. 아직 빛이 바래지 않은 초가을의 녹음에 둘러싸여서도, 따사로운 햇살과 상쾌한 바람 아래 캠프장을 걸어가면서도 내 뇌는 암흑에 둘러싸여 음울한 진창으로 걸어 들어갈 뿐이야.
 
짐을 풀고 텐트를 치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와중에도 우울함의 수면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생각은, 바로 얼마 전에 아르투아 교수랑 했던 면담의 기억. 그래, 우울한 건 꼭 몸이 아프기 때문만은 아니야. 금요일 아침 면담이 항상 지루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울해지는 것도 아니지. 지루함이 불러오는 우울 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다면 난 벌써 한참 전에 목을 매달았을 거 아냐.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 면담은 그냥 지루한 것도 아니었고, 절망적으로 지루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절망적이었어.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다가 갱단한테 습격당해서 생명의 위협까지 겪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으면서도 아르투아 교수는 굉장히 침착했어. 밤에는 막 벌떡벌떡 일어나고 그러겠지만, 적어도 나랑 만나는 아침에는 멀쩡하기 짝이 없었지. 검사 결과는 전혀 멀쩡하지 않았지만. 그건 교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지.
“왜 그래요? 설마 제가……, 미쳤다는 결과라도 나왔어요? 그건 사양인데!”
하, 하, 하! 이딴 농담이나 할 정도였으니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겠지? 이번 검사는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한 거였어. 교수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거든. 왜, 가끔씩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 몸 상태가 나빠서 마음도 착 가라앉고 의욕도 없고 그렇지만, 객관적인 검사 결과를 보면 어떻게든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치료 끝! 당장 집으로 돌아가세요!” 같은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몸도 씻은 듯 나을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딜 어떻게 노력해야 될지는 알 수 있으니까 의욕이 생길 거 아냐ㅡ그래, 사실 그것까지 생각하고 받은 건 아니야.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 언제쯤 이 우울한 곳에서 벗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비타쿠스 아피칼리스에게 멋진 다이아몬드를 전해줄 수 있을지. 언제쯤이면 네 이름을 다시 소리 높여 외치면서, 잠에서 막 깼는지 부스스한 그 엉킨 머리를 멋대로 쓰다듬으면서, 네 뺨에 입을 맞추고 반대쪽에 또 맞추고, 그 가느다란 팔다리를 영구기관처럼 손으로 쓸고 혀로 맛볼 수 있을까, 달아오른 피부와 뜨거운 점막을 맞댈 수 있을까, 네 귀에다 대고 속삭일 수 있을까, 좋아해, 사랑해, 만나고 싶었어, 같은 말들이, 지난 2년 동안 네게 닿지 못하고 뇌세포 사이사이에서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나선은하가 되어버린 말들이, 아마 우주의 종말까지 계속 속삭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할 수 있을지, 가능한 일일지. 나는 정확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대다수의 달콤한 상상들이 그렇듯이 내 로맨스도 현실의 망치 아래서 무자비하게, 철저히, 한 조각도 남김없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지. 교수가 내게 건네준 검사 결과가 바로 그 현실의 망치였어.
처음엔 결과 보고서에 적혀있는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중 첫 번째가 ‘부정’이었던가? 나한테 그 결과는 죽음만큼이나 끔찍한 거였고, 그래서 결과를 부정하려고 애쓰기 시작했지. 받아보고 나서 처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이거 좀 이상한 거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 결과가 정확해요.”
두 번째 단계는 분노. 오, 그래. 분노하고말고. 도대체 어떤 멍청한 돌팔이가 이딴 터무니없는 결과를 내놓은 거야?
“전 2년 넘게 치료를 받았어요! 좀 있으면 3년이 된다고요!”
“알아요. 하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
세 번째는 협상-협상 좋아하네! 분노가 아직 안 끝났거든! 난 여기 치료받으러 왔어. 더 나아지러 왔다고. 그런데 2년이 지나도록, 이 보고서에 따르면……,
“2년 전에 비해서 단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정말로 단 하나도 없었어. 2년 전 수치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코멘트도 전부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데, 소수점 하나 토씨 하나 달라진 게 없다고. 2년 전 여기 벨기에에 올 때와 완전히 똑같은 정도로 병적이고 이기적이고 가학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나르시시즘이랑 마키아벨리즘 정도도 그대로에, 심지어 뇌 영상 촬영 결과도 예전 사진을 복사 붙여넣기 한 것처럼 생겼단 말이야!
“그래서 검사를 안 받는 게 좋겠다고 말했잖아요.”
받아야 했어! 뭔가 나아진 게 있다는 걸, 그래서 당장이라도 그 애를 만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러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그런데 결과가 이래, 단순한 우울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제 4단계 : 우울’로 멋지게 다이빙했어. 그리고 그 우울함 가장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이 바다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지. 2년 내내 차도가 없으면 3년, 4년, 10년이 지날 때도 차도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어?
 
그 날은 내내 교수 방에서 화를 내다가, 마지막엔 펑펑 울다가, 간신히 진정하고 방에 돌아와서 또 쓰러져 울었어. 뭘 부술 기운도 안 났어. 그렇게 하면 정말로 내가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 안 될 것 같아서. 이미 그 증명은 내 손에서 구깃구깃 구겨지다 못해 종이뭉치로 변해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 여기, 아르덴 숲의 캠프장 텐트 안에서 가만히 누워있는 내 머릿속을 민달팽이처럼 생생히 기어가며 온 머릿속에 끈적이는 우울함의 자국을 남기고 있지만. 그 자국을 따라서 통증이 저릿저릿 퍼져나가고, 혈관을 따라 전신으로 퍼지면서 손끝 발끝을 간질이고 아랫배에 모여들어 소용돌이쳐. 잔뜩 예민해진 센서들이 그 신호를 받아들여 다시 뇌로 피드백, 그리고 다시 우울한 증명의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하고.
그래, 몸이 이렇게 되니까 신경까지 잔뜩 예민해졌어. 얼마나 예민하냐면, 그래, 얼마 전에 내가 너무 기운이 없으니까 쿨도어가 와플을 사준 적이 있거든? 그 자리에서 먹고, 어쩐지 부족해서 또 먹고, 배는 부른데 그래도 이상하게 더 먹고 싶어서 세 개째 시켜서 먹으려니까 그만 먹으라고 하는 거야. 그 자리에서 포크를 집어던져서 쿨도어 눈 밑을 몇 센티미터 정도 찢어놨어(테이블에 집어던질 생각이었는데 조준이 빗나간 거지만, 결과적으론). 어째서인지 걔가 사과했지만, 응, 걔는 요즘 확실히 좀 이상하고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중요한 건 센서는 수백 배 민감해졌는데 브레이크는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다는 거야. 쉽게 화가 나고 쉽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그 다음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면서 쉽게 후회하고. 악순환의 교과서적인 사례지. 단순히 순환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야. 왜냐면 뭐든지 똑같은 사이클을 빙빙 돌다 보면 진절머리 나는 부산물을 내놓게 마련이거든. 익숙하고 친근하고 소름끼치는 지루함 말이야.
지루함, 그래, 근본적인 지루함. 내 머리에 착 붙은 채 태어난 사악한 샴쌍둥이. 조금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그 녀석은 센서의 스위치를 켜고 브레이크의 나사는 풀어버리지. 이건 뇌의 문제야. 태어날 때, 어쩌면 DNA의, 이중나선의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어서 생긴 오작동으로 인해, 어쩌면 어머니가 나를 임신한 채로 먹어서는 안 되는 약을 먹었기 때문에, 어쩌면 단지 태어날 때 산소가 잠깐 부족해서 생긴 뇌의 이 흉터. 오래 된 흉터에서 번지는 멈출 길 없는 가려움처럼 온몸이 지루함에 잠식되어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교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비엔나 봉봉도, 쿨도어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여동생도, 한국과 벨기에에서 만난 그 어떤 사람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이젠 멈출 수 없어. 강박적으로 상처에 앉은 딱지를 긁어 떼어내듯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사고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거야ㅡ
 
“푸파! 푸파! 얘 좀 봐봐! 너무 귀엽지 않아?”
 
이번엔 비엔나 봉봉한테 고마워해야겠네. 우울한 생각은 하다 보면 끝이 없으니까, 이렇게 딱 끊을 계기라도 있어야지. 별로 재밌는 계기는 아니겠지만. 텐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미니까 거기엔 쪼끄만 금발 곱슬머리 여자애 하나가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었어. 어머니는 근처에 있는 것 같고, 가족 여행인가보지. 비엔나 봉봉이랑 쿨도어는 걔 보면서 귀엽다고 난리야.
“아, 그래. 귀엽네.”
귀엽긴 무슨. 솔직히 말하면 저런 꼬맹이 따위 진절머리가 나.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딱 저 나이였거든. 한심하게 빽빽 울어대기나 하고, 떼나 쓰고,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하고, TV에서 해 주는 만화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들고. 그 날도 그랬어. 만화가 끝나니까 심심한지 계속 같이 놀자고 귀찮게 하다가, 내가 화를 내니까 또 징징 짜다가 침대에 기어 올라가서 잠이 들었지. 그 작은 애가 일주일 내내 손꼽아 기다리던 만화 다음 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 날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침대 아래 걸터앉아서 생각했어. 시간이 이것밖에 안 지났네. 엄마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왜 시간은 이렇게 느릴까, 이렇게 길까 하고, 그리고 그게 바로 금요일 아침 상담 때마다 내가 하는 생각이야! 어라, 달라진 게 없어? 정말로 난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거야? 정말로, 2년이 지나도 3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난 나아질 수 없는 거야? 아아, 머리가 아파, 손을 내려다보면 거기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피가 선명하게, 그래,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더 나아질 걸 바라는 것도 이상한가, 정말로 그 애한테로, 나의 사랑스러운 만티스 렐리기오사한테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아니, 하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어. 피는 없어. 환각인가? 내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하려는 찰나에 사라져버리고. 나쁜 징조야. 확실히 몸이 안 좋긴 안 좋은가봐.
 
상태가 이러니 가방에 처박아 둔 수영복은 꺼내지도 못했고(내 취향에 맞는 정말 굉장한-그러니까 자원 절약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천을 적게 사용한 수영복인데!), 결국엔 비엔나 봉봉 혼자서만 신나게 물놀이 하러 가게 됐어. 쿨도어? 내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옆에 있어주겠다나 뭐라나.
“너 저번에 엄청 비싼 수영복도 샀잖아! 누군가 보여주긴 해야지!”
비엔나 봉봉이 이러면서 끌고 가려고 해도 요지부동.
“난 혼자 있어도 되는데.”
이렇게 주장해도 꿈쩍하지도 않지. 비엔나 봉봉이 떠나고 나서야 주섬주섬 준비해서 어디 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번엔 또 나를 끌고 가려고 하네.
“저쪽에 낚시터가 있대. 경치 좋다는데.”
“지루할 거 같은데.”
낚시처럼 지루한 걸 하는 사람들을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해해 본 적이 없어.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지루하게 만든다고.
“그래도 가자, 푸파. 이왕 캠핑 왔는데 바깥 공기도 쐬고 그래야지. 그래야 아픈 게 나아.”
그런 건 말라리아가 나쁜 공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고대 로마 시절에나 통하던 의학이야. 바야흐로 과학과 이성의 21세기에 헛소리는 작작 해야지.
“푸파,”
그래, 차라리 진지하게 말해. 쿨도어 너한텐 그게 훨씬 잘 어울린다니까. 요즘은 뭐에 홀린 것처럼 흐느적거려서 기분 나쁘다고. 얼굴도 너무 가깝고 말이야. 하프도 그렇지만, 참 사람이 미치는 것도 한순간이다 싶다니까. 그래서 무슨 진지한 말을 하려는 건데?
“몸이 안 좋고 기운이 없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그럴 때일수록 변화를 줘야지. 관성의 법칙 몰라? 가만히 있으면 계속 가만히 있고, 움직이기 시작해야 계속 움직이는 거라니까.”
고대 로마 시절에도 그딴 물리학은 안 통했어! 정말 학점은 잘 받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덜떨어진 소리를 할 수가 있지……, 하지만 이런 멍청한 논리를 가지고도 쿨도어는 굉장히 끈질겼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 녀석은 안 되는 건 확실히 포기해도 가능한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었단 말이지. 현재 나는 장갑을 끼고 있어서 센서는 예민하지만 브레이크는 확실하게 작동하는 상태고, 몸에 힘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쿨도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단 말이지. 이거 참 지루한 상황이네. 차라리 낚시터가 나을 정도로.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가는 거지? 걸어갈 수 있겠어? 업어줄까?”
부축이나 제대로 해, 아니, 그냥 멋대로 해라. 이 바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지금은 그냥 아픈 사람의 특권을 누리는 게 좋겠네. 쿨도어는 나를 업고 걸으면서 심하게 휘청거렸고, 덕분에 조금 덜 지루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어.
 
그렇게 낚시터가 있는 호숫가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 확실히 쿨도어는 날 걱정해서 같이 있어주겠다고 한 건 아닌 것 같아. 아니 뭐, 쿨도어가 생각하기엔 밖에 나와서 좋은 공기라도 쐬는 게 내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라는 거지. 호숫가 나무그늘에 앉아서 내 기진맥진한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하는 걸 보면 확신할 수 있어. 이 여자는 단지 경치 좋은 곳에서 나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그냥 텐트에 있는 것보단 이게 분위기가 좋다 이거지. 할 수 없는 일은 깔끔하게 포기하지만 가능한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 이거지.
“어때, 기분이 좀 낫지?”
아니면 그냥 순수하게 내 건강을 염려한 걸 수도 있고. 방법이 굉장히 수상쩍은 우격다짐이긴 했지만, 확실히 공기도 경치도 텐트 안보단 여기가 훨씬 나으니까. 호수는 깨끗하고 나무는 푸르고, 캠프장 홈페이지에는 사람이 무지 많은 것처럼 나와 있었는데 실제로는 특가 할인을 하는데도 한산해서 더 나았고, 왠지 여기서도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가끔씩 프랑스어로 “아, 아까 그 예쁜 언니다!” 하면서 나를 보고 까르르 웃는 금발 애새끼는 짜증나고.
“낚시 할래? 낚싯대 대여가 된대. 내가 받아올까?”
그래, 애새끼가 아무리 짜증나게 굴어도 너만 하겠니. 내가 시큰둥하게 구니까 쿨도어는 이번엔 호숫가에 서서 능숙하게 낚싯대를 휘두르는 여자애를 가리켰어. 동그란 안경을 끼고 어깨까지 오는 풍성한 갈색 머리를 찰랑찰랑 흩날리면서, 휘파람으로는 슈베르트의 《송어》를 즐거이 불면서, 그거 분명히 낚시꾼이 송어를 잡는 걸 굉장히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내용이라서 별로 선곡이 좋지 않은데, 어쨌든 노래 내용대로 낚싯바늘로 불쌍한 물고기를 꿰어 바닥에 내팽개치는 모습을. 어때? 너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한 번 해 봐!
“해. 한다고. 그만 좀 귀찮게 해.”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낚시가 차라리 너랑 있는 것보단 덜 지루하겠다. 이 플라이 낚시라는 건 생전 처음 해보는 거고, 호숫가에 멍청하게 서서 뭘 어떻게 휘둘러야 생선이 잡히는지 나는 도저히 아는 바가 없지만 그래도 비교하자면 말이야. 쿨도어가 뒤에서 카메라를 꺼내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걸 무시하면서 나는 옆에 있는 여자애를 어떻게든 따라하려고 애썼어.
물은 반짝이고 낚싯대는 흔들리고 내 몸도 흔들리고, 힐끗 옆을 보면 프랑스 여자애가 내팽개쳐진 물고기를 쿡쿡 찌르면서 놀고 있어. 동물 학대, 그래. 나도 저 나이 때부터 꽤 좋아했지. 넌 소질이 있구나. 나도 그런 짓 꽤 좋아해ㅡ지금도 그렇고. 정말 바뀐 게 없어. 나아진 게 없어. 검사 결과대로야.
아니, 정말로 아주 어릴 때부터 바뀐 게 없는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똑같이 미친 살인광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야. 분명히 어느 한 순간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바뀐 적이 있기는 해. 그 이후의 나는 결코 그 이전의 나와 같을 수 없었지. 약에 취한 것처럼, 완전히 중독되어버린 것처럼 모든 사고체계가 새로 짜였으니까. 까마득한 오래 전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얼마 전이라는 느낌도 들어, 응, 그건 거의 4년 전의 일이었어. 아무도 다시는 만화를 틀어놓지 않게 되었던 날로부터 아마 몇 달 후였을 거야.
홀로 남은 나한테 부모님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난 언제나 ‘우리 사랑하는 딸’이었으니까. 그렇게 난 혼자 쓰는 컴퓨터를 손에 넣었지. 그것 자체만으로는 사실 별다른 변화가 없었어. 인터넷이란 항상 나쁘지 않은 도구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지루함을 덜어줄 수 없는 법이니까. 나는 조금이라도 지루하지 않은 모든 정보를 정말 필사적으로 흡수했지만 그렇게 쌓인 정보들은 순식간에 지루해졌어. 조금이라도 지루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곧 그 사람들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어. 정보의 바다가 회색 진흙의 바다로 변하고 노트북이 다섯 개째 박살날 무렵이었지만, 부모님은 어처구니없이 마음이 좋으신 분이었고 나는 여섯 번째 노트북으로 회색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지.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아는 탈출구는 그것뿐이었으니까ㅡ그래, 그 때 찾아낸 거야. 진주 따위가 아닌, 차라리 100 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좋을, 아니, 어떤 비유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내 삶의 이유를. 그 카페의 그 게시판에서 왜 하필 그 글이 눈에 띄었을까. 만약 어떤 거대한 섭리가, 천지만물을 주관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책임지는,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잔혹한 고문장치의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내가 그 글을 클릭한 것도 신의 섭리겠지. 신에게 고마워해야 할 내 인생 단 하나의 일이었고, 벨기에의 모든 사람들을 산 제물로 바쳐 드리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어, 그건. 나는 별 생각 없이 댓글을 달았고, 그 애도 다시 댓글을, 그렇게 댓글은 대화가 되었고 우리는 채팅방으로 옮겨갔어, 믿을 수가 없었어, 그런 감각이, 그런 기분이, 그런 정신상태가 내 안에 존재할 수 있다니! 이게 진짜로, 진짜로 지루하지 않을 때의 감각이구나! 유레카! 유레카! 홀딱 벗고 뛰어다니기에는 그 애와의 대화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했지만!
황홀했지, 응, 황홀함의 번개가 정수리에 내리꽂혀 전신을 짜릿짜릿하게 관통하는 매일이었어. 지루하지 않았어. 그 애는 항상 나를 놀라게 했고, 나를 기쁘게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이해해주었어. 처음엔 개미에 대해서 말했고 그 애는 이해하는 듯 보였어. 고양이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그 애는 정말로 이해하는 것 같았어. 조심스럽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면서 여동생에 대해 말했는데, 잔혹한 섭리시여, 믿을 수 없사오나 저 아이는 정말로 이해하고 있사옵나이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도 안 나. 정말 모든 걸 털어놓았어. 그 애는 묵묵히 들어주었어.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모니터에 떠오르는 글자들, 그래, 내가 생각하는 게 그대로 떠오르면서, 그 모든 순간들. 그 애는 진짜 탐정이었어.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했어. 그 애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전부 가르쳐주었어. 범죄에 대해서 이상심리에 대해서 질병과 증상에 대해서 독과 약물에 대해서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그 애는 전부 이해했어. 내게 모든 것을 배우면서 모든 것을 이해해갔지. 내가 묻는 모든 것을, 내가 궁금해 했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 대답해 주었어. 나를 둘러싼 세계, 이해할 수 없는 지루함으로 가득한 세계가 마침내 이해 가능한 수식과 문자열로 환원되기 시작했어. 농업혁명 과학혁명 산업혁명? 웃기지 말라 그래. 그 사람들은 이런 혁명을 맞이해본 적이 없어. 그 때의 감각을 비유하자면, 그래, 물고기가 처음 육지로 올라와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 연약하고 부드러운 폐를 가득 채우는 차갑고 아린 산소의 감각. 그 순간 나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던 거야. 평생 물속에서 살다가 낚싯바늘에 걸려 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저 물고기처럼, 회색 진흙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시간이 마침내 흐르기 시작했어.
덜떨어진 물리학을 다시 가져오자면 이건 그야말로 뉴턴의 운동 제 2법칙, 가속도의 법칙. 힘은 계속 가해지고 속도는 점점 늘어나고, 시간의 흐름은 점점 빨라지며 격렬해지고. 나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어. 그 애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어. 사진을 공유하면서 살아온 삶을 공유했어. 처음 그 애의 사진을 봤을 때의 그 느낌, 그래, 저런 어린애한테 느낀 감정을, 난 결코 잊지 못할 거야. 그렇게 모든 것을 공유해가면서 나는 조금씩 그 애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가슴은 요동쳤어. 그 애는 여전히 나를 전부 이해해주는 듯 보였어. 하지만 가슴속에 남은 혁명 이전의 잔재는, 온 몸을 다 풀어헤친 채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 여동생을 보고도 부모님이 보였던 그 반응을 되새겨보면,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 확신해야만 했지. 세상에는 지루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어. 게다가 마침 그 애는, 나의 사랑하는 브라콘 헤베토르는 아주 꼬인 가정에서 살고 있었거든. 그 애 앞에서 정말로, 텍스트가 아니라 실제 장면으로 내 감정을 보여주기로, 그리고 그 애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난 정말로ㅡ
“푸파!”
 
그래, 잘 했어. 마침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던 차였는데, 역시 생각은 제때 끊어야 한다니까. 그러고 보면 쿨도어가 저렇게 소리치는 거 전에도 한 번 들어본 적 있는데, 약 먹고 정신 나가 있던 때였나? 그럼 지금은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그리고 시야는 왜 이렇게 점점 기울어져 보이는 거지? 음, 글쎄, 내 생각엔 아마도, 몸도 안 좋은데 낚싯대 멋대로 휘두르면서 딴생각 하다가, 두통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린 것 같네. 젠장. 그리고, 첨벙.
“푸파! 괜찮아?”
“호들갑떨지 마. 별로 안 깊어.”
쿨도어가 내미는 손을 잡고 기어 올라오니 온 사방에서 물방울이 뚝뚝. 초가을에 흠뻑 젖으니까 역시 춥네. 쿨도어는 자기가 오자 그래서 그렇다고 미안하다면서 호들갑을 떨다가, 내가 가운을 벗어던지려고 하니까 더 심하게 호들갑을 떨고, 그러면서도 볼 건 다 보고 있고,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첫째로 내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안 좋다는 거고, 둘째로 기껏 빌린 낚싯대가 호수에 빠져 사라져버렸다는 거야. 아니다, 둘째 문제는 별로 안 중요하다. 쿨도어가 알아서 변상한다네.
“진짜 괜찮은 거지? 걱정 안 해도 되지?”
안 해도 된다고 말해도 할 거잖아. 정말로 걱정 안 해도 되지만. 기껏해야 여기에 감기 정도 더 걸리는 거 아니겠어? 어차피 물에 빠지는 것 정도로는 나를 더 이상 우울하게 만들 수도 없다고. 이 정도의 사건으로는, 고작 이 정도의 변화로는 나를 움직일 수 없어.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옳은 말을 하기란 쉬운 법이라고, 쿨도어. 항상 중요하고 또 어려운 건 ‘어떻게’야. 그 애는 나를 바꿀 수 있었지만 이 아르덴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와 독일과 프랑스 네 나라의 국경이 모이는 곳인데도 그 애만큼은 없어.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바뀔 수 있겠어? 어쩌면 이거야말로 관성의 법칙일지도 몰라. 변하지 않는 건, 결국 변하지 않아.
 
가능하면 이런 기분으로 칼을 잡고 싶지는 않았어. 칼을 쓰는 게 아주 즐겁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 조각이거든. 하지만 저녁으로는 바비큐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고, 감격스러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비엔나 봉봉은 나한테 고기 손질을 맡겼어. 아르투아 교수가 봤으면 아마 기겁했겠지. 내 방에는 가위도 없는 거 알아? 내 팔만큼 길고 톱날이 난 칼은, 오랜만에 쥐었지만 정말로 익숙한 감촉이었고 덕분에 손에서 다시 피가 뚝뚝 흐르는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어. 고개를 흔드니까 알코올과 함께 증발해버리는 환각이었지만, 머리도 계속 아프고, 고기는 멋지게 잘라지고, 사각, 사각, 사각,
그래, 이 감촉. 금속을 타고 손잡이를 지나 피부로 전해지는 진동. 혈관을 거꾸로 흘러 팔을 거쳐서 심장으로, 뇌로 전해지는 짜릿함. 단순히 고기를 자르는 것 때문에 느껴지는 건 결코 아니야. 이 행위 자체는 그저 지루할 뿐. 하지만 이를테면 홍차에 적신 예쁜 마들렌을 한 입 먹자마자 그 맛을 느꼈던 과거로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고기를 써는 감촉만으로도 과거에 비슷한 일을 했던 경험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거라고. 그 때는 훨씬 큰 고기였고, 핏물도 안 뺀 고기였지만. 손에 흐르는 피를 다시 느끼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나는 어느새 캠프장이 아니라 어느 집 침실에 있어, 숨을 한껏 들이마시면 낡은 가구의 냄새와 새로 흘러내린 피 냄새가 아찔하게 뇌를 자극해, 그래, 이 날이었어. 내 시간이 가장 빠르게 흘러갔던 날, 그리고 다시 얼어붙었던 날, 그런 날이 있었어……,
피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조금 시간을 뒤로 돌려 보면, 밤늦게 학원을 마치고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며 돌아가는 내 또래들과 언니 오빠들 사이에, 자주색 트레이닝복 위에 하얀 외투를 걸치고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내가 다소곳이 앉아 있어. 무릎 위로 꼭 끌어안은 배낭 안에는 준비물이 가득. 오래도록 계획한 끝에 모든 준비는 끝났어. 나의 사랑스러운 루키올라 크루시아타, 네가 얼마나 날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줄 시간이야. 네가 알고 있는 계획은 이렇겠지. 불합리한 논리와 규칙이 지배하는 집에서, 부모님에게서 도망쳐서 나와 함께 벨기에로, 네가 그렇게나 가자고 주장했던 벨기에로 날아가서, 위조해 둔 신분증을 가지고 새로운 두 사람으로 재탄생해 둘이서만 영원히 사는 거야. 힘들지라도 둘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말했고 너는 동의했지. 그 계획 자체에 거짓말은 없어. 말하지 않은 디테일이 있을 뿐.
버스를 갈아타고, 한참 걸어서 멀리 떨어진 정거장에서 다시 타고, 외투를 벗어서 배낭에 집어넣은 다음에 택시를 타서 괜히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행적을 숨기려는 것만은 아니었어. 뭐랄까, 긴장되는 것도 당연하잖아? 내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날이라고? 그래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법, 그 6월 초의 밤에, 내 기억이 맞는다면 무슨 지방선거 날이었고, 마침내 긴 여행을 끝마쳤을 무렵 시간은 새벽 두 시. 겨울엔 어떻게 다니나 싶을 정도로 경사가 심한 골목길을 발걸음도 가벼이 올라서, 좋아, 이 집이 맞지, 공주님이 갇혀 있는 악마의 성은 그 애가 말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단독주택이야. 거창한 대문도 있고, 담벼락 옆의 노란 쓰레기통도. 이걸 밟고 올라가면 담을 뛰어넘을 수 있어. 정원을 가로지른 다음에는 이 날만을 위해서 지루함을 꾹 참고 연습해둔 낡은 자물쇠 따는 법. 딸깍, 딸깍, 수십 수백 번 연습해서 눈 감고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현관문 여는 것도 순조롭고. 멋져, 전부 계획대로야.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전부. 현관 너머로 펼쳐진 어둠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쾅쾅 울렸어.
“시, 실례하겠습니다.”
막 이래. 신발은 딱히 벗어놓지 않고, 거실을 흙발로 짓밟으면서, 그 애가 말하길 자기는 보통 소파에서 잔다고 했는데 어디에 있는 거지. 정말이지 부모는 무슨 생각이람. 저렇게나 가냘프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애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벌을 받아야 해, 암 그렇고말고.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TV가 저쪽이니까 소파는 아마 그 반대편에 있겠
 
“거기 야채 좀 이쪽으로 줄래? 푸파? 푸파, 뭐 해?”
 
이런, 아무래도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 같네. 환각도 아직 조금씩 보이는 것 같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할수록 정신이 점점 흐려져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환각하고 현실이, 아아, 구분이 잘 안 가는데 그도 그럴 게, 그 날 처음으로 그 애를, 모니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짜 두 눈으로 보았는데,
 
“거기 소금이랑 후추 있지 않아? 푸파?”
 
보았는데, 아 정말, 이 부분을 생각하려고 하면 항상 그래. 기억 속에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제대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뇌세포는 점점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기라도 하는 듯 눈이 타는 빛 속에서 어두운 형체만이 춤을 출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응, 그것 정도는 알고 있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추측하고 확신할 수는 있어. 내가 뭘 하러 여기에 왔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소파 위에서 인기척에 부스스 일어나는 그 애를 꼭 껴안았겠지. 아마 껴안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을 거야. 내 첫 입맞춤이었을지도 몰라. 낡은 잠옷으로 가려진 맨살을 영원처럼 쓰다듬었을지도 몰라. 만화였다면 아마 하트가 퐁퐁 솟아나왔겠지, 아니면 모자이크 처리가 됐겠지. 그러면서 귀에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을지도 몰라. 나의 사랑하는 헤미플레비아 미라빌리스, 나의 사랑하는 시멕스 렉툴라리우스, 나의 사랑하는 마기시카다 셉텐데심, 분명히 그랬을 거야.
그리고 지금, 비엔나 봉봉이 날 흔들어 깨우면서 정신을 차리게 한 것처럼, 그 때도 바깥에서 들려온 빵빵 소리에 정신을 차렸어. 누가 고맙게도 경적을 울려 줬거든. 깜짝 놀라면서 다시 긴장이 몸을 가득 채우고, 아직도 무슨 일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그 애한테 나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어. 방금 비엔나 봉봉이 한 말처럼, 일어나, 이제,
“바비큐 파티 시간이야.”
 
-----
 
긴 이야기입니다.

Author

Lv.1 로크네스  3
0 (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53 색깔의 무게 (1) 글한 11.13 2709
52 Magica - 1 [팬픽] 마미 11.09 2649
51 과제로 낼 소설 - 결말 댓글2 안샤르베인 11.08 2922
50 [소설제-천야] Nighthawk's Dream 카페인성인 11.06 2817
49 악마들과의 인터뷰 댓글2 작가의집 11.04 2921
48 Tycoon City 데하카 11.02 2907
47 과제로 낼 예정인 소설 - 위기, 절정(수정본) 댓글2 안샤르베인 11.01 2904
46 로슈포르 중앙은행 - 2 - 폭신폭신 10.23 2852
45 라이즈 프롬 헬 - 프롤로그. 악몽 댓글3 무지작가 10.23 2864
44 [어찌됐건 스토리와 제목 창작연습을 하기 위한 소설] 대충 창조한 세상 댓글8 BadwisheS 10.22 2919
43 피와 명예의 파스타 작가의집 10.19 3305
42 죽은자들의 밤 댓글2 작가의집 10.19 3785
41 증기의 심장 작가의집 10.19 3192
40 공분주의자 선언 작가의집 10.19 2913
39 이상한 석궁수와 모험왕 작가의집 10.19 2953
38 과제로 낼 예정인 소설-전개 부분 댓글4 안샤르베인 10.18 2739
37 2012년을 보내며 잉어킹 10.17 2862
36 다 좋은데 자네만 없었으면 좋겠군 (3) 댓글5 잉어킹 10.13 3150
35 네 마리 형제새의 일부라고 가정한 단편. 댓글3 환상갱도 10.10 2860
34 다 좋은데 자네만 없었으면 좋겠군 (2) 댓글8 잉어킹 10.09 3210
33 [Relay]Witch on Tanks -Prologue : 그는 그렇게 마녀에게 홀렸다.- 댓글1 LucifelShiningL 10.02 3133
32 다 좋은데 자네만 없었으면 좋겠군 (1) 댓글6 잉어킹 09.29 3723
31 과제로 낼 예정인 소설 - 발단 부분만입니다 댓글6 안샤르베인 09.29 2810
30 [백업][리겜 소설제]The Onyx Night Sky 댓글5 Lester 09.27 2947
29 [백업][리겜 소설제]풍운! 북채선생 댓글1 Lester 09.27 3225
28 [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④ 로크네스 09.27 3221
27 [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③ 로크네스 09.27 2925
26 [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② 로크네스 09.27 3044
열람중 [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① 로크네스 09.27 3017
24 [백업][밝음 소설제 출품] The Lone Star NoobParadeMarch 09.27 2798
23 [백업][Cytus 소설제 출품] Area 184 NoobParadeMarch 09.27 3110
22 [백업][6X6 소설제 출품] 보드카, 보르쉬, 카츄샤 - director's cut NoobParadeMarch 09.27 3287
21 [푸파 시리즈] 안트베르펜의 연인 ② 댓글2 로크네스 09.26 2990
20 [푸파 시리즈] 안트베르펜의 연인 ① 로크네스 09.26 3313
19 그만 살아주소서 (1) 글한 09.25 2511
18 하바네로 잉어킹 09.25 2741
17 여행자들을 위한 신비롭고 놀라운 이스티야의 안내서 - 요정과 마녀 (백업 자료) 댓글1 Badog 09.23 2876
16 [푸파 시리즈] 상태 개조 ② 로크네스 09.23 3221
15 [푸파 시리즈] 상태 개조 ① 댓글2 로크네스 09.23 4315
14 [푸파 시리즈] 더러운 손 ② 댓글4 로크네스 09.21 3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