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

더듬이 0 2,611

저녁이었다. 밖은 어둑하니 깜깜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주위는 텅 빈 공터만이 있을 뿐이었고 허물어져 가는 폐건물 한 채만이 그 주변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적막만이 주변에 깔려 있을 뿐이었다. 터질듯 한 침묵이 주변을 사로잡았다.

폐건물 안에서는 작은 불빛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바로 근처에 있는 사내에게 머물렀다.

사내는 건물 안에 혼자 있었다. 안경을 쓰고 왜소하고 마른 몸집의 사내였다.

그 사내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조급한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사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불빛 하나만이 사내 한명만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그는 중얼거리며 계속 하던 일에 몰두했다. 그의 눈은 감겨있었고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사내는 문득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어떤 형체가 서서히 불빛 쪽으로 오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키가 거의 2m는 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였다.

그는 천천히 사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불빛이 사내 때문에 거의 다 가려졌다.

"아 드디어 나타났군."

안경 쓴 사내가 말했다.

"혹시나 안 될까봐 걱정했다고. 난 이걸 매우 힘들게 얻었다고."

거구의 사내는 아무런 말도 않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진 뒤, 그 침묵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안경 쓴 사내가 다시 말을 했다.

"좋아, 내가 뭐 하러 여기 왔는지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

안경 쓴 사내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네."

거구의 사내는 계속 지켜오던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무슨 질문을 하기 위해서 나를 불렀나?"

"잠깐, 그전에 내가 원하는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알려주게."

거구의 사내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가 원하는 해답은 가지고 있네. 하지만 그 해답은 자네 스스로가 찾아야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자네가 답을 줄 수 없다는 건가?"

"그건 아닐세. 난 분명히 자네에게 해답을 줄 걸세. 하지만 그 해답을 '찾는 건' 자네가 해야 한다는 거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 이해되게 설명해줄 수 있나?"

"그러니까 난 자네에게 '해답'을 줄 걸세. 하지만 무엇이 자네가 원하는 해답인지는 정확히 자네도 모를 거야. 그걸 찾기 위해선 자네가 스스로가 노력해야 할 걸세."

"그러니까 당신이 '해답'을 주고 그중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찾으라는 건가?"

"잘 이해했네."

거구의 사내는 마치 어려운 문제를 학생에게 이해시킨 교사처럼 말했다.

"왠지 굉장히 어려운 임무 같군."

"물론 자네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방향은 제시될 거야. 자넨 그걸 토대로 찾기만 하면 되네."

"다른 사람들은 다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얻고 갔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던 해답을 얻기는 했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궁금증을 얻어갔지. 얼마만큼의 해답을 얻는지는 자네에게 달린 몫이네."

"우주의 진리 같은 것도 가능한가?"

"이제껏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식과 비밀도 가능하지. 하지만 그것 역시 자네 스스로 찾아야 할 걸세."

거구의 사내는 말을 마쳤다. 그가 말을 마치고 난 후 침묵은 물에 돌멩이를 던진 듯 잔잔히 계속 퍼져나갔다.

계속해서 침묵만이 내릴 무렵, 안경 쓴 사내는 무언가 다짐한 듯이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옥죄이고 있던 얼음장 같은 침묵을 깨면서 입을 열었다.

"좋아, 한번 해보지. 시도해 보겠네."

"자네가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다시 시도할 수 있네."

안경 쓴 사내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살짝 내려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그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거구의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준비 됐네. 해답은 어떻게 줄 건가?"

"간단하지. 그냥 거기 서있게나."

그리고는 갑작스러운 혼돈, 안경 쓴 사내는 해답의 혼돈 속에서 해매이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으로 거대한 지식의 연결고리들이 무지막지하게 두개골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해답이 저 너머에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해답에 가까워질 참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날아와 그의 등에 꽂혔다.

그는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와 동시에 해답의 혼돈도 눈앞에서 픽 하고 사라졌다.

"크억!"

안경 쓴 사내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칼이었다. 단칼이 사내의 등에 꽂혔다.

"... 이게 무슨?!"

사내는 고통스럽게, 그리고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의문의 말을 꺼냈다.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쓰러진 사내의 바로 다섯 걸음 뒤에 계단으로 통하는 문가에 어떤 사내가 서있었다.

그는 갈색 코트를 걸치고 머리는 짙은 갈색에 약간 삐죽하게 위로 세운 모습의 사내였다.

의문의 사내는 천천히 안경 쓴 사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얼음장과도 같은 딱딱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다른 단칼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오른손에 가져대 살짝 그었다.

안경 쓴 사내는 도망치려고 하였지만 등에 꽂힌 칼 때문에 힘이 없었다. 그는 등에서 피를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는 겨우 움직일 뿐이었다.

갈색 코트를 걸친 사내는 빠른 걸음으로 안경 쓴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등에 꽂힌 칼을 뽑아냈다.

안 돼, 내 질문은 절대 빼앗길 수 없어!”

안경 쓴 사내는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갈색 코트의 사내가 몸을 붙잡고 있어 쉽지 않았다.

이건 내가 힘들게 얻은 질문이라고. 현자면 다야? 이 손 빨리 치워!”

그는 몸부림을 치며 발악했지만 출혈과 사내가 잡고 있는 힘 때문에 반항하기가 힘들었다.

현자라고 불린 그 사내는 칼이 꽂혀있었던 상처에 자신의 오른손을 갖다 댔다. 그 순간 둘의 머릿속은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경 쓴 사내의 머릿속은 마치 소용돌이와도 같았다. 해답의 파편이 그 소용돌이에 흩어지면서 마치 선풍기의 날에 흩어지는 신문지처럼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해답은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그 해답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잡음들은 뭐지? 내 질문... 내 해답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현자는 그의 질문과 해답들을 가져갔다. 해답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엄청난 지식들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해답이 그의 머릿속으로 다 들어오고 난후 그는 조심히 손을 뗐다. 현자가 안경 쓴 사내의 해답을 빼앗은 것이다. 안경 쓴 사내는 좌절에 빠진 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현자는 해답을 뺏고는 그대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때 거구의 사내가 그에게 말을 했다.

해답을 빼앗다니, 자네도 참 너무하는군. 그자가 얼마나 힘들게 질문을 얻었는지는 자네도 알 텐데 말이지.”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어차피 이 녀석도 불법으로 질문을 얻은 거 아닌가? 그런 녀석의 질문을 뺏은 게 뭐가 잘못된 거지?”

,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할 말 없네만... 자네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질문을 모으고 다니는 건가?”

당신이 알바 아니야.”

현자는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거구의 사내는 창문으로 현자가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새벽의 떠오르는 햇빛 아래로 점점 저 멀리 작아지고 있었다.

내가 알바 아니라... 거참 그러니까 더더욱 알고 싶어지는군. 정말 나도 한번 질문을 써보고 싶군 그래.” 거구의 사내는 혼자 중얼거렸다.

건물 밖에는 이른 새벽에 떠오르는 햇살이 밝게 떠오르고 있었다. 절반쯤 나온 태양이 붉은 빛으로 건물 안 사이사이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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