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있었다.
항상 밝고 명랑하고 성실하게 남과 얘기하길 좋아했고, 때때로 힘들 때는 내게 기대어 그 동안 견뎌왔던 쌓인 것들을 풀어내던 그런 소녀가 있었다. 가족이었고, 그와 동시에 가족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였다. 항상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서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이해해주고 응원해주던 사이였다.
그녀는 그림을 그렸고, 나는 글을 썼다. 둘만이 사는 집에서, 그녀는 때때로 일러스트나 포스터 공모전에서 입상을 해오며 그 돈으로 내 용돈까지 나누어 썼다. 항상 미안했고, 고마웠다. 그녀가 이룬 것의 결과물로 나는 내가 그 당시 빠져 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것이나 다른 작가들의 책을 사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도 있었지만 뭔가를 소장하고 싶은 소유욕에 책을 빌려 읽기보단 사서 갖고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내 보잘 것 없는 그런 소유욕을 조금이라도 참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아마 그녀가 누리고 싶었던, 하고 싶었던 것들을 더 하고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그녀가 사라진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딱. 마지막으로 그녀의 흔적을 찾은 곳은 어느 박물관에서였고, 거기서 큐레이터를 해오다가 작년부터 다시 그녀는 어딘가로 사라진 것으로 들었다. 그녀가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내가 안 것은 그 박물관 큐레이터직이 유일할 것이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큐레이터를 하다가, 다시 갑자기 사라졌다. 그 박물관에서 친구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뒷자리에 축 늘어져 앉아 창문을 열고 손을 밖으로 내민 채 줄담배를 피우며 척척하게 하늘을 뒤덮은 회색빛 구름과 사느다랗게 젖어든 산의 능선을 보며 나는 그저 말없이 세 시간을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못되어서 그녀가 나를 피하는게 아닐까. 내 탓인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내 마음 속에선 그렇게 하릴없이 흐트러져 있던 톱니바퀴들이 아귀가 맞아 떨어져 갔고, 그럴 수록 나는 더 슬퍼져만 갔다. 심장이 칼에 찔린 것만 같았다. 그 칼날은 마치 서슬푸르게 쌀쌀맞은 날,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유리창을 만졌을 때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그 냉기와 같이 차가웠다.
그저 하염없이 일상을 반복해나갔다. 글은 절필했고, 밤의 들판은 서서히 판매 부수가 떨어져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유리에 비친 나 자신을 텅 빈 눈으로 쳐다보며 칫솔로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말린 다음 바지와 와이셔츠를 입고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매고 외투를 걸치고 현관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힐 때 그 틈새로 어렴풋이 비치는 집 안은 너무나도 적막하고 황량했다. 그녀의 캔버스와 팔레트만이 먼지를 수북히 머금은 채, 오늘도 하루를 보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깥의 칙칙한 하늘과 선명하고 깊이 찔러오는 차가운 공기가 나를 어루만진다.
그저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차가 멈추고 신호가 바뀌면 횡단보도를 건너고. 점심 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식당에서 백야를 만나 같이 밥을 먹고. 퇴근할 때가 되면 팜플렛과 흐트러놓은 캐치프라이즈와 프린트들을 그러모아 가방에 넣고 집으로 간다. 새벽처럼 보이는 저녁 하늘을 어렴풋이 뒤돌아보며 문을 열었을 땐, 거기엔 이상향도 E도 S도 혜인도. 아무도 없었다. 그저 속이 텅 빈 호두 하나가 구두를 벗고 집 안에 들어와 텔레비전 앞에 앉을 뿐이었다. 똑똑하고 두드려보면 공허한 울림만이 되돌아오는, 그런 껍데기만이.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가며 그녀를 그리다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녀가 앉았던 창가의, 캔버스 앞의 나무 삼발이 의자를 바라보았다. 모든게 변했지만, 그녀의 방과 그녀가 메고 등교하던 크로스백, 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과 그녀가 가녀리고도 정확하고 알맞은 움직임으로 물감을 짜고 섞고 흐트리고 모으던 팔레트와…….
그녀가 캔버스에 거칠게 칠해놓은 울트라마린 몇 획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남아서, 내가 울부짖으며 벽을 두들기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절망하고 우울에 빠지고 기어올라 나가려다 미끄러지던 새하얀 방 안에 남아 내 눈길에 항상 닿았다. 끝은 있을까. 끝은 있겠지. 하지만, 그 끝이 내가 원하는 끝이 아니랄 건 확신할 수 있다. 좋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가며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끝나겠구나.
문득 생각이 나 그녀가 놓아둔, 말라 비틀어진 붓을 들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립다보다 그리다라고 말하는게 더 좋아. 그리워한다는 건, 그리는거라고 했었다. 크기에 차이는 있겠지만, 캔버스 위에 그리워하는 사람을, 시간을 그리며 점점 채워나간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다보면 더 이상 그릴 자리가 없어서, 캔버스를 칠해나가는 자신이 서있을 곳이 없어 밀려나 떨어져 하염없이 추락한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S. 그건 아마 나를 두고 한 말이니……?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 "왔어?"라고 말하며 그 하이얗고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날 반가워할 것 같을 때, 설렘과 기대와 그리고 각오와 함께 문을 열면, 역시나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길을 걷다 그녀를 마주칠 것 같다던가, 버스를 탔는데 그녀를 발견한다던가, 누구를 만나게 되도 혹시 그녀가 그 자리에 있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나를 설레게 하고, 기대하게 만들고, 실망으로 내쳤다. 그렇게, 어느샌가 화석으로만 내 마음 속에 남은 그녀를 어루만지고 부여잡고 끌어 안고 웅크리고 있게 되었다. 백야는 그런 날 걱정해 다시 글을 쓰는게 어떻느냐고 힘을 내라고 말해준다던가. 이상향과 이리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건데 단편으로라도 참여해주면 고맙겠다던가. 그런 말들을 해줬다. 하지만, 죽은 이상향과, 자신을 펜으로 찔러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얼굴의 그녀인 E를 죽이고 사라진 이리는 이미 초월했다.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 얼싸안고 기뻐하며 들판을 구르고 하늘을 보며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의 숫자를 세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곤 피식 웃고 그렇게 행복하게 사라져간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하루 하루 수액을 맞는 소나무처럼 연명할 뿐인 나는 끼어들 자격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백야의 제의를 거절했다. 백야는 아쉬운 듯이 "너라면 이리의 또 다른 이야기를 써줄 수 있을텐데." 라고 말하며 바를 나갔다. 나는 피스타치오를 두세 개 더 까서 먹지는 않고 플레이트에 던져 놓고는, 한 잔을 더 마시고 바를 나섰다. 블러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잔을 닦고 있었다. 내게 그런 제의를 해온 걸 보니 아마도 백야는 이상향이 그토록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이리에 대해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리문을 열고 붉은 벨벳이 깔린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빗줄기가 우수수 떨어져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혀 강줄기가 되어 흘러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아직 남아있던 때라면 내 걱정을 하며 우산을 가져왔을 것이다.
어렴풋이 우산을 쓴 채 공원에 있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빗방울이 부딪는 것을 보다가, 내가 걸어나오자 반가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를 악 물었다.
외투를 머리 위로 덮어쓰고 달려온지라 머리카락은 별로 젖지 않았다. 외투를 허공에 탈탈 털고, 바지춤을 손으로 털어내리고 집 열쇠로 문을 땄다.
철컥. 하고 열쇠가 돌아가는 순간, 어디선가 내 마음 속으로 별이 떨어져왔다. 그 동안 느껴보지 못한 기대감과 설렘이 몸을 휘감아올랐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To be Continued…….
2014 03 04 06 17
LOM Sentimental Blue Velvet Ground
[N]
Tribute to Enril / 白夜 / 理想鄕 (GirlmeetTop) / Ariel
이번이 마지막 페이지야. 이 페이지를 쓰면 널 떠나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