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금 멍청한 소리를 했다.
그러면…… 기념일은 언제부터 계산하는 거야?
내가 그 때 일을 말하면 너는 웃는다. 나는 기억한다. 너와의 일들, 했던 말들. 대화를 통해 드러난 너의 기호, 기호를 형성했던 너의 과거, 과거를 통해 선명해지는 너의 윤곽. 너가 행여 잘못 기억했다면 나는 그걸 정정했고, 너가 아니라고 했을 때, 나는 잘못 기억의 주변 상황을 되짚고 정리해 잘못을 바로잡았다. 너가 말한다. 너는 나보다 나를 잘 아는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나보다 너를 잘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내가 너를 아는 것보다 나를 모를 것이다. 네가 나를 말하기가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숨어버리고, 숨었던 구멍을 들춘다면 새하얀 뺨과 콧잔등을 피나오게 긁어버리고 싶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보다 너를 더 잘 알고 싶다. 나는 나를 알아가는 게 싫으며, 때로 무섭다.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만 알면 된다.
너와 함께 있었던 두 번째 밤. 너의 귀, 귓바퀴에서 귓볼로 흘러내려 목덜미로 뚝 떨어지는 곡선. 입술로 너의 곡선을 훑다보면 너는, 사랑해, 속삭일 수밖에 없게 된다. 입을 맞추니 너가 머리를 기댔다. 우리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나는 내게 말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구?
나. 나 말야…….
너는 나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반응해주었다.
난 대단한 녀석이 아냐. 오히려… 오히려 한심하지. 너를 만나는 거 빼고는 하루하루 인생을 낭비해. 하얀 종이도 다 타버린 재도 아닌 어정쩡한 그을음. 냄비받침을 쓰기에도 불편한…… 24시간을 찢어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하고싶은 건?
없어.
잘하는 건?
널 좋아하는 거. 그것 빼고는……. 나는 심각하게 말했다. 없어. 정말로.
너는 내 이모저모를 물었다. 학교생활. 성적. 과거.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가족에 대하여.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군대에 있던 때까지. 짧은 순간에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를 말해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너는 간단하게 말했다.
오빨 위해 살아.
나? 나는 혼란스러웠다. 너가 아닌 나를 위해? 과거를 되짚어도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 수없었으며, 무언가 있던 것 같았으나 잊어버렸다. 단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과거의 자신감이 너를 통해 다시 세워졌다. 내가 필요했던 건 '너'였다. 진작에 너를 만났다면, 어쩌면 나는 일찍이 완전해져서 아주 놀랄만한 녀석이 되었을지 모른다. 위대한 사람. 분명한 자기확신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나는 너를 너무 늦게 만난 걸까? 아니다. 너가 나를 도와준다면… 이끌어준다면……
아냐, 그건 오빠 몫이야.
너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내 앞가림조차 버거워. 알잖아…… 그건, 그건 누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냐. 나한테 잘해주고, 기쁘게 해주고……, 그게 오빠가 원한 인생이라면, 나는 고맙지만 내 전부를 오빠에게 줄 순 없어. 알겠어? …미안해. 근데 알아야해. 알아야 하는 거야. 나는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냐. 졸업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 때까지 어떡할건지 생각해보구. 그동안 오빠가 앞일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한 면이 있었어. 나한테 잘해주느라 그런 거지만…… 난 오빠를 좋아하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나를 구성하는 수만개의 톱니들이 칼날로 바뀌었다. 칼날들은 나를 흉폭하게 베었다. 나는 이 느낌을 너에게 말하지 못했다. 오직 너만을 생각한다면, 너는 나를 싫어할 거야? 나는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다. 섬뜩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예상을 입으로 뱉어버리면 반드시 벌어진다. 느낌을 설명해 동정을 받고, 너의 생각을 철회하길 소망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하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태도로 가장하고선, 그 가장이 실제의 나인 양 스스로도 속이려 들었다. 너는 내 거짓에 대항했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다독이고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고양이 말인데,
응.
나 고양이 키우는 거 알지?
응.
혹시 고양이 맡아줄 수 있어?
왜?
서울 고모네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인데?
몇 달 정도만 서울서 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아.
너가 준비하는 시험에 대해 공부시키는 학원. 나는 싫었다. 떼를 쓰듯 물었다.
대전서 다니면 안 돼? 인강도 있고 굳이 서울가서 고생해서….
돈이 없어. 집값도 그렇고.
너가 말했다. 내가 물었다.
많이 모자라?
알바해서 모아둔 거 다 썼고… 다시 또 일하자니, 알잖아, 시험 준비 해야되는데. 집은 잠깐 친구 빌려주기로 했는데, 걔가 나한테 조금씩 주기로 했어 서울 있는 동안.
내가 줄게. 내가 알바해서 알바비 주면 되잖아.
너는 싫어했다.
그러지 마. 아까 말했잖아. 오빠 돈을 왜 날 줘, 오빠가 써야지. 괜찮아. 오빠 마음 아니까. 하지만 오빠도 알바 말고 직장을 구해야지. 그럴 시간 없다구.
서울은…… 나는 말했다. ……서울은 너무 멀어. 지금보다 더 보기 힘들 거라구.
참아야지 뭐. 연락 자주 하면 되니까, 응? 고양이만 어떻게좀 안될까?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없으니까 오빠한테 말하는 거지. 친구도 안 된댔구.
내 걱정도 이렇게 좀 해줘봐. 나는 진심을 포장해 어리광처럼 말했다.
오빠는 알아서 잘 하잖아.
그건 너가 있어서 그런 거야. 너는 모르는 거야? 너에게, 나는 어떤 의미지?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하는 거야? 또 나는 묻지 못했다. 너가 말했다.
부탁이야.
손이 많이 갈텐데.
나는 내키지 않았다.
나라고 생각하고 데리고 있어줘. 나한테 소중한 아기야.
……알았어.
나는 대답했다. 너가 서울에 있을 동안 고양이 미래는 내가 맡기로 했다. 너는 미래에 대한 애정이 유난했다. 너는 미래를 키우기 위한 이모저모를 알려주었다. 다른 고양이보다 손이 몇 배는 가는 고양이었다. 미래는 뇌성마비였다.
네 자취방이 생각난다. 고양이 때문에라도 깨끗해야 한다면서, 너는 항상 자취방을 정돈했다. 화장실 문 앞과 화장대 옆에 붙었던 고양이 미래에 대한 지침들이 기억난다. 그 때 미래는 힘없는 울음으로 나를 반겼던가. 미래는 똑바로 서있지 못했다.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기었고, 잠깐 다시 일어나도 쓰러졌다. 뇌성마비라는 말을 들으니, 티나지도 않건만 비대칭의 얼굴과 몰린 눈이 신경쓰였다. 이제는 내가 데리고 있어야 할 고양이었다.
고양이를 이동시키기부터 쉽지 않았다. 고양이는 쉴 새 없이 울어댔다. 너는 서울로 가기 전에 고양이를 우리집까지 같이 바래다주었다. 한 명이라도 차가 있다면 편했겠지만, 우리는 차가 없었다. 버스는 같이 탄 승객들이 신경쓰였고, 그래서 기차를 탔다. KTX를 끊었는데, 우리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연결칸에서 우는 고양이를 달랬다.
나는 시작부터 피곤했다. 너는 내 눈치를 보며 미안해했다. 기차 올라가는 김에 고양이를 서울로 데려가라는 말이 턱까지 꽉 들어찼으나 고양이에 대한 너의 의미, 너의 상황을 생각하면 모진 말들이 쉽사리 누그렀다. 고양이는 나를 반기지 않았다. 내가 이동장을 살짝 열어 아는 척을 하자 쇄액- 소리를 내며 적개했다.
너는 그것이 '하악질'이라고, 비공식적 용어로 설명했다. 집에 도착하면 나아질 거라고, 영역동물인 고양이가 자기 영역 밖으로 나와서 그렇다고,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들 때문에 겁먹었다고 나를 얼렀다. 나는 너를 위해 대신 이동장을 들고가려고 했으나 고양이 때문에 오만정이 떨어졌다. 너 역시 나보다 자기가 드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기차에 내려서 택시를 잡았다. 한 번에 잡지 못했는데, 택시 기사가 고양이 울음 소리에 질색하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음 택시를 타고선 서럽게 우는 고양이를 달래며 우리집으로 갔다.
네 역할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너랑 좀 더 있고 싶었지만 너는 가야한다고 했다.
고양이는 새 집에 적응하지 못했다. 네 다리로 서있지도 못하면서 구석에 가 내게 적의를 드러냈다. 너는 말했었다.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고. 애써 노력하면 상처받을 거라고.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고양이에게 나는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나는 고양이에게 특별한 사람이길 기대했던 걸까. 그런 기대로 먼저 다가갔기 때문에, 고양이의 적의에 마음이 상했던 걸까. 졸지에 약한 고양이를 괴롭히는 악역이 된 것도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서운함을 무관심으로 돌렸다. 먼저 도착한 고양이 용품을 정리한 뒤 컴퓨터를 만졌다. 꼴도 보기 싫었기 때문에, 정말로 보지 않았다. 너는 말했었다. 혼자 설 수 없으니까 일으켜줘야 한다고. 제대로 먹지 못하니까 떠먹여줘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밥 시간이 되자 사료만 부어주고는 무시했다.
고양이가 기척을 내건 말건 신경쓰지 않다가, 저녁이 되자 그럴 수 없어졌다. 고약한 냄새가 났는데, 고양이 미래가 방 구석에 똥을 싸질렀고, 그걸 그대로 뭉개 앉았다. 고양이는 제딴에 그걸 닦겠다고 몸을 굽혀 혀로 핥아 닦으려고 했다. 그러나 잘 굽혀지지도 않았고, 굽히려고 하면 할 수록 바닥에 똥을 더 문댔던 데다가, 혀에 똥이 닿으면 그것 나름대로 역겨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고양이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똥닦기에 정신 팔려 있다가 나를 보자 다리를 휘두르며 난리를 쳤다. 나는 고양이가 움직이며 집에 똥을 문지르는 걸 막기 위해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렸다. 뒷덜미잡기는 너가 알려준 방법이었는데 효과가 있었다. 나는 고양이를 화장실에 넣었다. 고양이는 내가 자기를 죽이려는줄 알고 엉엉 울었다. 짜증이 꼭대기까지 솟았지만, 나는 고양이를 화장실에 가둔 채 휴지로 바닥에 묻은 똥을 닦고 걸레로 또 닦았다. 그래도 냄새는 여전해서 페브리즈를 네 번 뿌렸다. 재발을 막기 위해 고양이 화장실도 그 자리로 옮겼다.
그 다음에 고양이를 씻겼다. 씻겼다는 표현보다 빨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고무장갑을 끼고 더운 물을 뿌린 뒤 샴푸로 벅벅 문질렀다. 고양이가 발악했지만 내 힘이 더 쎘다. 나는 고양이에게 상한 기분을 그대로 담아 고양이를 씻겼다. 고양이의 물기를 짜고 말리는 과정도 완력이 필요했다. 드라이기로 말릴 때는 좀 얌전해지겠지 생각해서 고무장갑을 벗었지만, 엄지손가락 등에 벌건 핏물이 흘러 다시 꼈다. 고양이는 드라이기를 켜자 소스라쳤다.
한바탕 고양이와 실갱이한 뒤 고양이를 내버려두었다. 고양이는 가져온 폭신한 집에서 정신없이 몸을 핥았다. 한 시간 정도 핥았다. 나는 고양이에게 질려서 신경을 끈 채 지냈다. 나는 컴퓨터와 티비로 빈둥거리다 잠들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고양이 밥그릇이 뒤집힌 채 엉뚱한 곳에 있었고, 담긴 사료는 흩어져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원인인 고양이는 자기 집이 아니라 내 발치에서 자고 있었다.
"아- 야."
나는 깨어나서 고양이에게 말했지만, 고양이는 한 번 수염을 씰룩거릴 뿐 눈 뜨지는 않았다. 네가 사랑하는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잔인한 상상을 상상으로 그치곤 널린 사료를 쓸어 담았다. 그 때 너에게서 카톡이 왔다. 미래는 잘 있어?
내 잠자리를 먼저 물어주길 원하는 유치함이 앞섰지만, 나는 잘 자고 있다며 고양이 자는 모습을 찍어 보내주었다.
잘 자서 다행이다. 너는 말했다. 나는 네게 고양이 미래가 어제 했던 행동들을 소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역시 너는 또 미래가 많이 긴장했나보다라며 고양이를 내 앞에 두었다.
고양이 키우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나는 물었다.
원래 미래가 손이 많이 가. 아프잖아.
……얘가 날 좋아하지 않아.
처음엔 싫어할테지만 나중엔 널 좋아할 거야.
너의 말에, 나는 한동안 대답을 않았다. 한참 후 너가 다시 카톡했다.
미안해, 고양이 보느라 고생 많지?
나는 내가 가진 서운함의 작은 일부를 드러냈다.
그냥… 너도 보고 싶고……. 너라고 생각하고 고양이 돌보려는데 얘가 날 자꾸 싫어하니까.
너는 내 말을 바로 확인했지만, 너 역시 한참 후에 대답했다. 확인과 대답사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네 대답은 몇 번의 마음변화를 겪어 나온 걸까. 내 상상이 끊임없이 뻗어나가, 말과 말 사이의 맥락, 정황, 우리의 관계를 되짚고, 너무 많은 생각에 사실과 동떨어지며, 생각의 양만큼 마음의 거리를 느낄 즈음, 너는 이렇게 말했다.
부탁해. 나 공무원 붙으면 다시 데려갈게. 카톡도 줄여야 해. 필요한 말만 하고.
너는 이어 말한다.
고양이에 관한 건 찾으면 다 나오니까 그거 참고해.
내가 말한다.
미안해.
나는 너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미안하다고 했지만, 너는 한참을 확인하지 않았고, 확인해도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