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상태 개조 ②

로크네스 0 2,948
 
1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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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옷은 다 풀어헤치고 침대에 누워서 그렇게 말하니까, 아직도 눈이 새빨간 쿨도어는 참 흔쾌히도 고개를 끄덕여 줬어. 너무 심했던 것 같아서 사과하러 왔는데 안에서 막 이상한 비명 소리가 들려서, 사감실에서 열쇠를 받아서 왔다나봐. 미안하다고 막 사과하더라고. 두 번째 듣고 끊었어. 두 번 말하는 건 오늘은 제발 그만. 그리고 이상한 게 하나 있는데, 쿨도어가 아까부터 계속 나를 내려다보고 있거든. 그야 걱정이 되겠지. 마약을 먹고 환각에 빠져서 막 난리를 쳤으니, 자기 룸메이트처럼 멋지게 날아오르는 건 아닐까 생각을 했겠지. 그런데 저 표정은 아무리 봐도 걱정 백 퍼센트는 아니란 말이야. 걱정은 한 이십 퍼센트고,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왜 계속 내 눈을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거람.
“아, 아니 그게,”
똑바로 말을 해요, 좀.
“아니……, 그냥, 오늘따라 너무 예쁘다 싶어서.”
“약 했어?”
“농담 아니야. 뭐랄까, 눈이 달라. 눈이.”
서랍에 손거울이 있다고 말해주니까 쿨도어가 바로 가져오는데, 어라. 쿨도어가 약을 한 게 아니었네. 진짜로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여.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것도 그렇지만, 다들 인형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만큼은 그게 이해가 간단 말이지. 얼굴이 잔뜩 발그레해져서 꼭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모습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특히 저 눈. 동공이 평소보다 훨씬 커져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질 정도야. 그리고 그때서야 난 뭔가를 깨달았어.
“이거 마약이 아니야.”
“뭐?”
아니, 변명하는 거 아니야. 그냥 마약일 리가 없다는 거지. 무슨 마약이 황홀감도 쾌락도 없이 끔찍한 환각만 보여줘? 누가 이런 걸 하고 싶어 하겠어, 안 그래?
“그럼 뭔데?”
“글쎄, 증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체액 분비 억제로 인한 땀의 양 감소는 체온을 증가시키고, 동공이 아름답게 커지면서 빛에 민감해지고 시력은 감소, 침의 양도 적어져서 입이 마르고, 대신에 혈관은 확장돼서 얼굴이며 온 몸이 빨갛게, 마지막으로 악몽과도 같은 환각.”
정리하자면 ‘산토끼처럼 뜨겁고 박쥐처럼 눈멀고 뼈처럼 마르고 순무처럼 빨갛고 모자장수처럼 미쳤다’는 유명한 무장이 완성되지. 옛날 여자들이 눈에 한두 방울 떨어뜨려서 미모를 향상시키곤 했다는, 벨라도나에서 추출한 아트로핀. 아니면 그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항콜린제 중독 증상이야. 그래, ‘별 걸 다 아네’ 하는 표정도 이젠 익숙하다.
“그럼 지니가 선글라스를 낀 것도 이거 때문에?”
“증상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그런 걸 감수할 정도로 중독성이 심해?”
“그 반대야. 항콜린제는 중독되는 약물이 아니야. 오히려 호기심에 한 번 사용했다가, 환각에 질겁해서 다시는 손도 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다시 말해서 내 주장이 틀렸던 거야. 지니는 약물중독자가 아니었어. 이 계열 약물은 심장질환 치료제기도 하지만, 부작용을 어느 정도 없애서 제대로 약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이런 위험천만한 걸 치료제로 먹었을 리도 없고. 뭔가 다른 게, 약물중독자의 자살보다 더 재밌는 게 사건 뒤에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지. 단서가 더 필요하겠는데.
“걔네 가족은 왔다 갔어?”
“아니, 곧 오신대.”
“그럼 짐 정리하다가 수상한 거 있으면 슬쩍해 봐.”
날 즐겁게 해 보라고. 이런 험한 꼴을 당했으니,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환각에 시달렸으니 보상은 좀 받아야 될 거 아냐. 유품을 가족들 앞에서 도둑질하라는 내 요구에 쿨도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그 얼굴에 떠오른 건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단호한 확신이었어.
 
그리고 확신에 찬 사람은 굉장하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지. 글쎄, 결국에 가져온 게 뭔지 알아? 책장에 있던 가족사진이었어. 가족들 앞에서 죽은 애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가족사진을 훔쳤다고. 평소 하는 거랑은 다르게 의외로 재밌는 사람이네, 쿨도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무기가 될 만한 건 다 내던졌는데 이건 놔둔 게 이상했다고.”
게다가 책장 맨 왼쪽에 있었고 중간에는 가로로 길게 흠집이 하나-왼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마치 액자의 틀과 함께 커다란 E자를 그리려는 것처럼. ‘왼쪽에 <E>라고 표시된 유리창을 열게’, 알겠습니다, 지킬 박사님. 액자를 열어 보니 사진 뒤쪽에 작은 메모지가 하나 숨어 있었어. 그 내용은 이 따위로 생겨먹은 암호였고.
 
Y O U M O L
E H A N U S
D O S E N J
I M U N R U
J E A H A X
S O N N E T
 
난 탐정이 아니지만, 어쨌든 지겹기 짝이 없는 강의를 제대로 듣는 것도 아니니까 그 시간에 암호 해독 놀이라도 하는 건 괜찮겠지. 머리가 벗겨진 사회심리학 교수가 앞에서 뭐라고 떠들든, 너무 지루해지기 전에 이거나 빨리 해독해 보자고. 눈도 따가워 죽겠으니까 가능한 한 빨리.
그럼 뭐부터 시작하지? 음, 명백한 단어가 몇 개 보이네. YOU, MOLE, DOSE, SONNET 같은 거. 우연히 나온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머지 글자들은 제대로 된 단어처럼 보이지 않잖아. 이렇게 끊어 읽고, 저렇게 끊어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되는 대로 휴대폰 사전으로 검색해 보던 내 눈에 문득 무언가 들어왔어. UNRUJE랑 AHAX 말인데, J랑 H를 서로 바꾸면 각각 독일어로 ‘불안 동요’를 의미하는 Unruhe,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비극인 아이아스(Ajax)가 되는 거야! J랑 H, H랑 J……,
“왜냐면 지킬(Jerkyll) 박사는 하이드(Hyde) 씨니까.”
따라서 J=H. 이대로 바꿔 보면 알 수 없었던 단어들의 뜻이 드러나지. UNRUHE, AJAX, JANUS(야누스), 그리고 NHIM(이건 베트남어야. Nhím은 ‘호저’를 뜻하는 단어)까지. 조잡하게도 국적을 멋대로 섞어 쓴 건 해독을 어렵게 하려는 작자의 의도겠지. 아니면 그냥 암호에 미학적인 센스까지 기대하는 내가 잘못하는 거든가. 그건 그렇고, 이렇게 바꿔놔 봐야 별로 뜻이 드러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지루해 죽겠네, 내가 뭘 놓치고 있단 말이야? 진정하자, 그 애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겠지. 그 난장판에도 뭔가 질서가 있었을 테니까. 이를테면, 그래, 알파벳 순서처럼.
 
A H A X D O
S E H A N U
S M O L E N
J I M S O N
N E T U N R
U J E Y O U
 
알파벳 순서로 단어를 다시 배열했어. 그리고 다음 힌트는 뭘까, 하고 생각하면 역시 지킬 박사한테 물어봐야지. 지금까지 모든 암호가 거기서 나왔잖아? 지킬 박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왼쪽에 E라고 표시된 유리장을 연 다음에는, ‘위에서 네 번째, 그러니까 밑에서 세 번째’ 서랍을 확인하라고 하시느니라. 위에서 넷째, 밑에서 셋째 줄. 암호문에서는 JIMSON.
 
“짐슨? 짐슨이 누구야?”
학생 식당에 앉아서도 한 손에는 필기 노트를 들고 보면서 쿨도어가 물었어. 한 번에 세 가지에 전부 최선을 다하려는 그런 태도는 참 존경스러웠지만 답은 못 해줬지. 당연한 거 아냐? 짐슨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짐슨이란 사람이 누군지, 이제부터 알아내야지.”
“어떻게?”
“글쎄? 온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불러 볼까? 짐슨, 짐슨 하고?”
농담 아니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일 뿐이라고. 짐슨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는 지금,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키워드를 아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직접 접근하게끔 하는 것뿐이야. 약이 있으면 공급자도 있을 거 아냐? 그러면 그 공급자가 언젠가는 그물에 걸려들겠지. 안 그래?
음, 사실 그 의도만 있었던 건 아니야. 걸어 다니면서도 노트를 보려고 실핀으로 앞머리를 고정시킨 쿨도어, 이 성실한 사람을 조금 더 사건에 깊숙이 끌어들이고 싶었던 거기도 해. 의외로 재밌는 사람이란 걸 안 이상, 그리고 이 사건에 뭔가 더 재밌는 진상이 있다는 걸 안 이상 두 가지를 합쳐서 느껴보고 싶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잖아? 그 과정에서 쿨도어가 얼마나 더 망가지도 무너질지, 그걸 보고 싶다고. 밤늦게까지 가로등 불빛을 따라, 곰팡내 나는 건물을 지나고 또 지나면서까지. 효과가 없는 걸로 밝혀진 손의 물기만으로 그런 지루함을 참으면서까지, 온 학교에 인적이 사라질 때까지.
“그래서 짐슨이란 사람이……,”
“거기 학생들.”
오, 반응이 왔다. 곰팡이인지 그림자인지 모를 그늘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나이가 꽤나 든 학교 관리인. 우리한테 볼 일이 있는 모양인데.
“짐슨이란 사람을 찾고 있나?”
네, 그런데요. 빨리 단서나 토해놓으시죠.
“아까 누가 나한테 와서, 짐슨을 찾는 사람이 오면 이걸 전해주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관리인은 내게로 다가와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는데, 에, 백지잖아? 내 눈이 이상한 거야, 아니면 이 관리인 아저씨가 지금 우리를ㅡ
 
ㅡ있지,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마취제 뿌린 손수건을 가지고 사람을 납치하는 장면이 가끔 나오잖아?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장면이야. 클로로포름이나 에틸에테르 같은 마취제는 쉽게 날아가는데다가, 손수건 같은 걸로는 충분히 그걸 들이마시게 할 수도 없다고. 하지만 이 아저씨는 품에서 허연 마스크를 꺼내서 내 코랑 입에다 대고 짓누르는데, 마스크 안에는 축축한 솜 같은 게 덧대져 있어서 몸에 나쁠 것 같은 냄새가 확 풍기고, 들이마실 때마다 정신이 흐려지고, 저항하려니까 퍽, 배를 걷어차서 쓰러뜨리고. 쿨도어가 달려들지만 속수무책. 내가 마취제 기운에 비틀대는 동안 쿨도어도 제압당했고, 순식간에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관리인의 억센 손이 짓누르는 마취제 마스크에, 적어도 5분 정도ㅡ
 
깨어나 보니까 불빛이 엄청 밝았어. 손은 쇠사슬로 묶여서 책상 다리에 고정돼 있고, 그렇게 주저앉은 내 옆에는 쿨도어도 똑같은 신세로 있네. 아직도 마스크가 씌워져 있지만 이미 마취제 기운은 다 날아간 거 같아.
“괜찮아, 푸파?”
“완전히 당했네. 범인이 준비를 너무 잘 했어.”
“여긴 어딜까?”
글쎄, 사방에서 칙 칙 소리가 들리는 여긴 어딜까. 익숙한 느낌인데. 저번에 비엔나 봉봉하고 같이 왔던 화학 실험실이구나. 그때 비엔나 봉봉은 결과물을 다 만들어놓고 엎어서, 수도 없이 기기를 깨먹은 나 다음으로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지. 그거 아니었으면 진짜 지루해서 미쳐버렸을 거야. 근데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엔 비엔나 봉봉이 없다는 거, 눈앞에는 빔프로젝터가 있어서 거기 동영상하나가 계속 재생되고 있다는 거, 그리고 온 사방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증기를 내뿜고 있다는 거. 심지어 묶여있기까지 하다니, 벌써 지루해지기 시작했어.
“그 관리인이 짐슨일까?”
그래, 쿨도어. 계속 말을 해서 조금이라도 지루함을 덜어 보라고. 하지만 방금 한 말은 에러였어. 관리인 아저씨 얼굴이 동영상에 계속 나오고 있잖아. ‘하워드 짐슨’이라는 자막하고 같이.
“건물 관리인이니까 실험실을 몰래 사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약을 만들었던 거 같아. 마취제도 그렇게 구했겠지. 클로로포름이나 에틸에테르는 마취제인 동시에 흔한 용매기도 하니까.”
요즘은 안 쓰는 마취제지만. 위험하다고. 나 죽을 수도 있었다고.
“그럼 이 사람이 지니를……,”
그래, 동영상 자막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지. 꿈을 현실에 불러내는, 중독성이 없고 완벽히 안전한 환각제 ‘야누스’ 를 개발하고 있다. 이 약은 세상을 바꿔놓을 것이다.
“두 얼굴의 신?”
“문의 신. 인식의 문을 열어준다, 뭐 그런 의미겠지. 정신 나간 약 이름으로 딱이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첫 장 제목도 ‘문 이야기’고 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저 하워드 짐슨이 모든 일의 원흉입니다’가 되는 거지.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람이 약을 개발했다는 것과 지금 이 실험실에 환기용 팬 돌아가는 소리가 안 난다는 사실을 종합하면? 지금 끓고 있는 건 뭐다?
“이 방을 환각제 증기로 채울 생각이라고?”
그래. 악당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신만의 고문실이라고. 그런 환각은 다시는 사양인데 말이지. 점점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흐려지고 몸이 따끔거리는데, 이거 정말 짜증나 죽겠다니까. 영상은 또 얼마나 지루한데! 자기가 개발한 약 때문에 힘을 잃을 것을 우려한 마약상과 그와 결탁한 정부가 자신을 노리고 스파이를 보냈대!
“그러니까 그 암호가 그런 의미였구나.”
“무슨 암호? ‘짐슨’ 말이야?”
“그것도 있지만, 사실은 이중 암호였던 거야.”
YOU, MOLE, JANUS, DOSE, NHIM, UNRUHE, AJAX, SONNET. Mole은 속어로 ‘정체를 숨기고 상대 조직에 잠입해 활동하는 스파이’를 가리키고, 미국의 초대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은 자살하기 전에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구절을 유서 대신 남겼고, 소네트는 서정시의 일종. 다시 말해서 저 암호는 ‘너는 스파이, 야누스 복용량, 호저 불안, 아이아스의 시구’라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야. 이거 참, 더 이상 의미심장하기 힘들 정도로 의미심장하잖아?
“그럼 지니를 죽인 이유도?”
“지니는 순수하게 사상에 끌려서, 아니면 약이라도 얻어 보려고 접근했겠지. 하지만 그때쯤 이 하워드 짐슨이란 사람은 실험하면서 습관적으로 약물에 노출돼서 환각을 경험한 끝에, 망상하고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으로 정신이 망가져버린 거야. 음모론에 빠져서 지니가 스파이라고 생각한 거지. 죄책감 없이 실험 중이던 약물을 계속 주고, 실험하면서 지니가 호저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그러다가 급기야는 농도가 높은 약을 일부러 건네줘서 죽게 했어.”
그리고 아마 암호도 하워드 짐슨의 작품이겠지. 그렇게 해 놓도록 지시한 거야. 지니가 만약 스파이라면, 지니가 죽었을 때 그 동료들이 암호를 풀고 자기를 찾으러 올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으니 미리 준비를 해 놓고 나랑 쿨도어를 습격할 수 있었단 거네.
“그럼 우리도 스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구나.”
그렇게 된 얘기지.
 
증기는 계속 나오고, 동영상도 계속 나오고. ‘그들은 야누스를 묻어버리려고 했다. 이제는 이 방법밖에는 없다. 오늘이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려는 것 같은데, 헛소리는 좀 작작 하란 말이야. 지루해 죽겠으니까.
한편 쿨도어는 화도 나고 겁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또 말도 안 되게 침착했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는 게 저런 건가봐. 이 수갑만 풀리면 당장이라도 하워드 짐슨을 찾아가 한 방 먹여줄 생각 가득이지만, 그럴 수 없으니 가만히 화를 삭이고 있다. 조용히 타는 불꽃같아. 정말,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전문가인 내가 보증하는 거니까 이건 이력서에 한 줄 써도 된다고.
그렇다면 난 어떨까? 지금 어디에 최선을 다해야 할까? 환각제 농도가 더 높아지면 또 악몽에 시달릴 거야. 게다가 지금 이 상황 자체도 지루해 죽겠어. 묶인 채로 계속 신체적 자극이 없으면 곤란하다고. 평소에도 무리할 정도로 운동을 해서 어떻게든 자극을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나 무력하게도 앉아 있기만 하다니. 끔찍해. 견디지 못할 거야.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지. 몸을 돌려서 쿨도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더니, 쿨도어는 또 괜히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어.
“반하지 마. 죽여버린다.”
난 임자 있는 몸인데 진짜 뭐 하는 건지. 하여튼 실핀을 이로 뽑아내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묶인 손으로 요령있 게 집어서, 쇠사슬을 고정시키고 있는 이 정도 자물쇠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스킬이 내 일생일대의 사건의 시작이었는데. 딸깍, 딸깍 하면, 짜잔! 풀렸습니다! 까진 좋은데ㅡ
“푸파? 푸파, 괜찮아?”
겨우 몸이 자유로워졌는데, 마침 약에 살짝 취한 상태란 말야,
“일단 문부터 열고……,”
그래, 문부터 열고. 끓고 있는 비커도 다 때려 부수고.
“그리고 나도 좀 풀어 주지 않을래?”
“위험해.”
“그건 알아.”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위험하다고.”
묶여서 멍청한 선언문이나 보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지루했어. 거기다 정신도 슬슬 혼미해지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뭘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 팔을 휘두르고, 비커가 깨지고, 그래도 진정이 안 돼서, 젠장, 진짜 싫어,
“손 씻으면 괜찮아진다고 그러지 않았어, 푸파?”
“지금은 무리야!”
이미 그 암시는 깨졌다고. 손을 그렇게 씻었는데도 결국 난 환상 속에서, 내, 내 사랑스러운 클라비셉스 푸르푸레아를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고! 이미 손에 묻은 피는, 환상의 피는 현실의 물로 씻어낼 수가 없어.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이대로라면 진짜 미쳐버리고 말 거야!
“물 말고 다른 걸 써 보면 어때?”
“비누도 소용없어!”
“소독용 알코올은? 여기 한 통 있어!”
아, 그래, 그건 아직 실험해 본 적은 없어. 확실히 차갑다. 손이 잠깐이지만 얼어붙는 것 같아서 진정이 되는데-하지만 순간이야!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희미한 냉기밖에 안 남는다고! 실험 실패야!
“장갑을 껴 보면 어때?”
장갑? 아, 라텍스 장갑? 실험용? 그걸 끼면 애초에 손이 더러워지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없잖아 멍청한 년아!
“어차피 심리적인 거잖아! 실험해 볼 가치는 있다고 봐!”
아, 그래? 실험? 인생은 실험이니까? 그러니 인생이 이렇게 지루한 거지, 그래도 어쨌든 알코올을 콸콸 쏟아 부은 손으로, 라텍스 장갑을 집어서, 바들바들 떨면서 쑥 밀어 넣고 나면,
어라, 뭐야 이 느낌.
방금 전까지 쇠사슬에 묶여 있던 손목의 차가운 구속감, 그로 인한 철저한 무력감, 그 감각이 장갑을 끼자마자 되살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 어째서? 소독용 알코올이 날아가면서 손을 차갑게 하고, 거기에 장갑이 손 전체를 빈틈없이 답답하게 조이면서, 그래, 브리에르는 생각도 못 했던 전혀 다른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이런 감각이라니, 이런 끔찍한 감각이라니, 이거라면 절대로 무시해버릴 수 없어. 먹힐 지도 몰라.
“푸파, 진정이 좀 됐어?”
“덕분에.”
차라리 사슬에 묶이는 게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됐지.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쿨도어도 풀어줄 수 있게 됐고, 생각도 다시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아까 선언에 따르면, 하워드 짐슨은 오늘이 지나기 전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것 같아. 지금쯤 뭔가 벌이고 있을지도.”
“서두르자.”
그래, 서두르자. 재밌는 광경을 놓치면 아깝잖아.
 
휴대폰은 이미 빼앗긴 채. 짐슨이 어디로 도망갔을지 찾아서 밤의 학교를 달리는데, 세상에나, 밤에 학교를 뛰어다니는 미친 사람이 나랑 쿨도어 말고도 하나 더 있지 뭐야. 제정신이 나가서는 막 도망 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어.
“무슨 상황이야?”
글쎄, 나한테 물어도 뭘 알겠어? 기껏해야 바닥에 뒹구는 에너지 드링크 캔을 보고 짐작할 뿐이지. 하워드 짐슨이 말하길 자신을 적대하는 조직이 환각제 ‘야누스’의 존재를 아무리 묻어버리려고 해도, 오늘이 지나면 모두가 야누스를 알게 될 거라고 했어. 어떤 방법이면 될까? 시험공부 때문에 늦게까지 깨어 있는 대학생들에게 약을 탄 에너지 드링크를 공짜로 나눠주는 거?
“그럼 짐슨은 사태를 최대한 크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이 가장 많은 데로 갔을 거야. 어디려나ㅡ”
“기숙사! 여기서 가장 가까운 기숙사가 저쪽이야!”
“비엔나 봉봉 사는 데네?”
아, 잡아끌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구경 좀 하자. 처음에는 부작용 없는 환각제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된 남자의 작품이라고. 나쁘지 않은 광경이란 말이야. 아마 기숙사는 더 굉장한 꼴이겠지?
 
더 굉장한 꼴이었어. 누구 한 명이 기숙사 앞에 나와서 막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려는 걸 쿨도어가 멋지게 제지했지만, 그 애 말이 아까 로비에서 나눠줬다는 거야. 방송을 해서 기숙사에 있는 사람이 아마 다 내려왔을 거라고. 곧 로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 그리고 아까부터 지겹게 들었던 말도.
“아무도 야누스를 묻어버릴 수 없다!”
로비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웃는 짐슨, 그 주변에는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고, 쫓아가고, 약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말리려고 하거나, 얻어 맞거나,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래, 이런 광경이라면 별로 나쁘지 않다고. 게다가 이 약, 심혈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벌써 몇 명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어간다고? 쿨도어는 그 한가운데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비엔나 봉봉한테로 달려갔고, 나는ㅡ그래, 이 속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약 때문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이프 아닐까?
“쥐새끼 같은 놈!”
어라, 이거 나한테 말한 거야?
“어떻게 도망쳤는지 모르겠지만, 보아라! 이것이 너희들의 악몽이다!”
맞다. 이 사람은 나를 스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구나. 확실히 내가 정부의 스파이였다면 이 상황이 악몽처럼 느껴졌겠지. 완전 실패잖아. 이런 대사건을 덮는 건 좀 무리 같잖아. 하지만 나는 정부 요원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성격이 나쁘고, 그래서 약 핑계를 대고 뭐라도 해 볼까 하는데,
“마음의 문을 열어라! 꿈의 세계를 보아라! 우리에게 약속된 세계다!”
글쎄, 그러려고 하는데 손에 장갑의 감촉이 너무 선명해. 너무 답답해. 너무 효과적이란 말이야. 이것 참 끝내주는 목줄을 발명해냈네. 이 상황에서도 아무 짓도 안 할 수 있다니 말이야. 내가 하는 건 고작해야 그 애가 항상 하듯이, 무력하게 서서 주변을 관찰하는 것뿐이야. 주변을 관찰하는 게 과학의 시작이고 추리의 시작이고 재미의 시작이라고, 그래, 이를테면 지금 짐슨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칼을 든 남학생이,
“아무도 야누스를 이길 수 없ㅡ”
빙고! 저 놀란 눈 좀 봐! 고통이 녀석의 정신을 환상에서 현실로 돌려놓았고, 이제 녀석이 느끼는 것은 계획 성공의 환희가 아니라 단말마의 고통이지, 거기에 더해서 내 조롱까지.
“두 번 말하니까 그런 꼴을 당하는 거야. 어때, 현실은 아프지?”
이 분야는 내 전문이라고. 악몽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지만, 그 악몽보다 더 아프게 하는 건 현실이라고. 적어도 그 애가 처음 나타났을 땐 기뻤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 애는 저 멀리 있단 말이야.
 
곧 경찰차와 구급차가 도착하고, 쿨도어는 정말로 열심히 상황을 설명해 줬어. 역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구나. 그리고 잠깐 짬이 났을 때 나는 쿨도어를 불렀어. 마지막으로 실험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거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줄게, 푸파.”
뭐, 그냥 내 얘기만 들어주면 돼. 내가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이 사건에 뛰어들었는지, 얼마나 지루했고 그래서 얼마나 쿨도어 너를 괴롭히고 싶었는지. 단지 누군가를 괴롭히면서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얻어보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내 머릿속에서 모든 상식과 윤리를 압도할 수 있는지.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나쁜 앤지. 이렇게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한결같아.
“속으로는 안 그런 거 알아, 푸파.”
그래, 그러면서 껴안지. 내 겉모습을 껴안아. 하지만 결코 속까지는 닿지 못해. 날 이해해주지 못해. 이 절망감, 아무도 내 진짜 모습을 봐주지 않는다는 절망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을 거의 대부분 지배했던, 그 애 말고는 아무도 덜어주지 못했던 바로 그 감각. 억제할 길 없는 분노.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 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응, 고마워.”
하지 않았어. 라텍스 장갑에 갇힌 손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이런 분노마저 참아낼 수 있다니, 굉장히 씁쓸한 성공이네. 실험 대성공이야.
 
그리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갔어. 저 소동도 이젠 지루해. 곧 끝날 거고, 야누스는 잠깐 화제가 됐다고 곧 묻혀버릴 거야. 이젠 별로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지금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따로 있거든.
약병은 쿨도어한테 뺏겼지만, 그 전에 알약 몇 개를 미리 빼돌려 뒀어. 가장 끔찍한 악몽을 가져오는 알약을. 내게 있어 가장 끔찍한 악몽이란 내 사랑이,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그 애가 나를 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내 가장 끔찍한 악몽에는 반드시 그 애가 등장해야만 해. 할머니의 환영을 보기 위해 성냥을 켜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장갑 낀 손으로 약을 집어 입에 넣으면, 몸이 뜨겁고 눈은 아프고, 말라가는 입, 그리고 두근, 두근, 뛰는 심장. 아아, 문이 딸깍 열린다. 내가 한때 그랬듯이 그 애는 손쉽게 문을 따고 들어와. 무슨 말을 듣더라도 이 손은 잘려나간 것처럼 힘을 쓰지 못해. 거세된 야수처럼, 저항하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환상에 오로지 몸을 맡기면 돼, 안녕, 오랜만이야, 나의 사랑하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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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실험이죠. Birth Choice Death 너머의 Experi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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