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맹약

안샤르베인 1 2,112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산의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항상 단단히 대비를 하고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비틀거리며 산속을 헤매는 청년은 전혀 그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자리를 뜨는 것이 우선이었지 산을 탄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옆구리를 움켜쥐고 간신히 발을 떼고 있었지만 다리는 점점 더 느려졌다. 비는 아직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자신의 흔적과 체온을 등가교환 하는 셈이었다. 어느 쪽이든 죽을 수밖에 없군. 청년은 중얼거렸다.
 숲은 끝이 없었다. 눈앞도 가물가물했다. 이럴 때 검을 지팡이처럼 쓸 수 있었다면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무가 기울어진다고 느끼며, 청년은 눈을 감았다.

 “깨어났어요!”
 전혀 듣지 못했던 목소리에 청년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눈을 조금 떠서 상대를 보았다. 12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이였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아이는 희귀한 존재였다. 그들에게 잡히지 않은 건가? 조금 더 확인해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자신이 누운 침대 옆에 조그만 등잔이 보였다. 고개를 더 돌려보니 가구가 별로 없어 단순한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평범한 사람들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책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소년은 눈을 반짝이며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년은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소년이 손을 뻗어 만류했다.
 “안돼요. 억지로 일어나면 몸 상한다고 했어요.”
 “네가 무슨 상관이지? 여긴 어디고.”
 친절에 돌아오는 대답은 쌀쌀맞기만 했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싱긋 웃었다.
 “여긴 우리 집이에요. 형은 우리 아버지가 데려오셨고요.”
 청년은 물끄러미 소년을 보았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을 법한 천진한 웃음이었다. 보아하니 자신의 정체에 대해선 전혀 모를 듯싶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검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청년은 벌떡 일어나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옆구리에서 엄청난 격통이 전해졌다.
 “으윽…….”
 “왜 그러세요?”
 걱정스럽게 보는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이 힘겹게 말을 뗐다.
 “내 검……. 내 검 어딨지?”
 “검이요?”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주먹으로 탁 치곤 밖으로 쪼르르 나갔다. 청년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소년을 기다렸다. 친절하게도 소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로 가져다주었다.
 “이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청년은 바로 자신의 물건을 잡아챘다. 온전한 곳은 손잡이와 날받이 부분뿐이라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어디가 검이냐고 할 정도로 이상한 외관을 가지고 있는 검이었다. 하지만 주인의 손에 들어오면 그 어느 검보다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는 검이기도 했다. 청년은 손잡이를 한번 쓸어보고는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겁이 없군.”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저 소년은 자신이 겪을 수도 있었을 일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금방 소년은 도륙당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의심이 전혀 없는 걸까.
 “뭐가요?”
 “아니다. 됐어.”
 청년은 다시 누웠다. 아직 밖을 나서기엔 무리였다. 집주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팔아넘기지 않기만을 바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이거 밖에서 일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청년은 조금 뒤에 들어온 집주인을 보았다. 밭일을 하다 온 듯 옷 이곳저곳에 흙이 묻어 있었지만 말씨는 시골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에 살다가 시골로 흘러들어온 사람일까? 청년은 조금 더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을 살폈다.
 나이는 얼추 잡아 30세쯤 됐을 법했다. 옷차림은 농부처럼 후줄근하지만 얼굴은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제법 잘 생긴 외모였다. 아까 꼬마의 빛나는 미모가 조금은 설명되는군. 청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상처를 입었습니까? 늑대라도 만났나요?”
 청년은 잠시 침묵했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여행자로 보이는 것이 의심은 덜 받겠다 싶어 내린 판단이었다.
 “저런. 큰일 날 뻔 하셨군요. 여긴 가끔 양을 노리는 늑대들이 출몰한답니다. 개중엔 마물화된 녀석들도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청년은 속으로 코웃음이 나왔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습당하지만 않는다면 늑대 몇 마리 따윈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터였다.
 남자는 다시 청년의 붕대를 갈아주었다. 제법 능숙한 솜씨였다.
 “그런데, 왜 날 살렸지?”
 청년은 미간을 찡그리며 남자를 보았다. 자신은 노화가 멈춘 몸이기에 남자보다 어려 보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자는 존대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의 호의를 믿지 않는 청년으로선 맘에 들지 않는 태도였다.
 남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라 청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들인 듯한 아이에게 말했다.
 “엔시드. 죽 좀 떠 줄 수 있나요?”

 그 후로도 친절은 계속되었다. 순수한 호의를 받아보지 못한 지 꽤 오래 된 청년으로선 적응이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어색하게나마 감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려하던 추적자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군식구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아내는 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엔시드와 놀아주어 고맙다는 눈치였다. 청년으로선 할 일 없이 누워있기엔 따분해 아이의 말 상대가 돼 주는 것뿐이었음에도. 엔시드는 부모를 자주 도왔지만 마을로 내려가진 않는 듯 했다.
 청년은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부모가 없는 틈에 넌지시 아이를 떠 보았다.
 “네 친구는 한 명도 없나?”
 “엄마 아빠 빼곤…… 없어요.”
 엔시드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대답했다. 이 나이 또래의 애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는 법인데 친구가 없다라.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법했다.
 엔시드는 두리번거려 주변을 살피곤 청년의 귀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
 “형이 좋은 사람 같아서 말하는 건데. 이건 비밀이에요.”
 청년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엔시드가 소곤거렸다.
 “전 달의 저주를 받았대요.”
 달의 저주라는 이야기는 청년도 들은 바가 있었다. 달을 숭배하는 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달에게는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생명의 달 페이라, 죽음의 달 이슈타르, 지식의 달 카시야, 무력의 달 렌체. 이 네 달은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지며 특별한 힘을 사람과 사물에게 부여한다고 했다. 신이란 존재를 잘 믿지 않는 청년도 실제로 그 힘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골 소년에게 저주라. 달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 보군. 청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슬쩍 눈치를 보다 물었다.
 “형은 안 믿어요?”
 “그런 거 잘 몰라.”
 어차피 자신이랑은 관계없는 얘기일 터. 청년은 무심하게 받아넘겼다. 엔시드는 예의 그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역시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시골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농사를 돕다보면 아침이 지나고 새참을 먹을 시간이 되고, 또 일을 마무리하면 느긋하게 쉴 시간이 주어졌다. 저녁을 먹고 엔시드와 놀아주다보면 또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가끔 늑대가 나타나서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청년에게 늑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년은 어느새 자신이 검사에서 제법 쓸 만한 농사꾼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내심 마음속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항상 목숨을 위협받는 생활이 지겹다고 느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검 잡는 법 밖에 없었기에 계속해서 용병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이 가족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이 힘들지 않습니까?”
 집주인이 아무한테나 존대를 쓴다는 것도 함께 살면서 알게 되었다. 청년은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응답을 대신했다. 엔시드는 주먹밥을 입에 잔뜩 넣어 오물거렸다. 다람쥐처럼 불룩해진 볼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형 일 되게 빨리 배운다.”
 “그런가?”
 “엔시드. 밥을 입에 넣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용한 아버지의 꾸중에 엔시드는 바로 태도를 고쳤다. 부인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안 좋은 버릇은 빨리 고쳐야 합니다.”
 집주인의 단호한 태도에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청년은 생각했다. 이런 평화로운 삶을 언제까지 즐길 수 있을까?
 새참을 다 먹고 자리를 정리한 뒤 넷이 일어났다. 집주인이 기지개를 켰다.
 “그럼 오늘 일을 마무리해 볼까요?”
 
 양털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벌거벗은 양들은 애처롭게 메에-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엔시드는 개와 함께 양들을 몰아서 우리로 집어넣었다. 부인은 만족스럽게 양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양털도 질이 좋은걸요. 성주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어요.”
 “그렇군요. 이번에 값을 받으면 엔시드에게 뭘 해주면 좋을까요?”
 “책이요!”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튀어나오는 대답에 두 부부는 쿡쿡 웃었다. 청년은 특이한 생물을 보는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글자는 좀 익혔지만 책은 머리 아프다며 잘 보지 않았다. 그런데 소년은 정 반대로 초가 다 꺼질 때까지 책을 보는 걸 좋아했다. 초 값이 아깝다고 부모가 혼낼 만 했지만 두 부부는 그러진 않았다.
 “그래요. 이번에 다녀오면 책을 구해다주겠습니다.”
 “정말이죠!”
 신나서 방방 뛰는 모습이 청년의 눈에도 귀엽게 보였다. 청년은 피식 웃었다.

 마을은 크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있을 것은 있었다. 마침 장이 열린 모양인지 사람들이 제 가게에 들려 달라며 목청껏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도축한 고기를 걸고 파는 사람도 있었고, 집에서 정성껏 키운 농작물을 가져오거나, 나무를 한 짐 지고와 파는 자들도 있었다. 집주인은 양털 값을 받고 오겠다며 성으로 향했기 때문에 혼자 남은 청년은 술집으로 향했다. 간만에 술을 한 잔 하고 싶기도 했고, 목마르기도 했다.
 “어서 옵쇼!”
 주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청년을 반겼다. 청년은 짤막하게 말했다.
 “맥주 한 잔.”
 주인이 술을 가지러 들어간 동안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에 비하면 반도 안 될법한 작은 가게인데도 손님이 복작거렸다. 대부분 자신처럼 평범한 농사꾼의 복장이었지만 사냥꾼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새 주인이 내온 것인지 잔에 담긴 술이 자신의 앞에서 출렁였다. 청년은 술을 마시다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한 쪽 구석에 앉은 사람들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일부러 사냥꾼처럼 꾸민 듯한 모습이었지만 모습이나 태도, 허리에 찬 무기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청년은 그런 자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저자들은 분명 용병이다. 나와 같은 족속이다. 이런 마을엔 왜 온 거지?
 힐끗 보면서 귀를 기울이니 낮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놈 정말 찾기 힘들군.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동감이야. 그렇지만 흔적이 여기서 사라졌으니 말이지.”
 “죽은 거 아냐?”
 한명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상대가 그를 노려보았다.
 “죽었으면 검이라도 남았겠지. 그 검이 마력탐지기로도 흔적조차 안 보인다는 게 말이 되냐? 그것도 마검인데?”
 “쳇.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군.”
 동감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년은 돈을 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에 띄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리라. 지금은 검도 수중에 없었다.
 술집 문을 나서자 집주인이 보였다. 집주인이 청년을 반갑게 맞았다.
 “잔 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괜찮다. 어서 가지.”
 군중 사이로 섞여들면서도 잔은 아까의 술집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들이 눈치 채지 말아야 할 텐데.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시장을 다녀온 지 며칠이 흘렀다. 청년은 수련을 잊지 않았다. 정확히는 더욱 집중했다. 용병들이 이 마을에도 흘러들어온 이상 여기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기에. 집주인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었다.
 엔시드는 그런 청년을 신기하게 보다가, 나중엔 숫제 가르쳐달라고 조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청년은 둘 몰래 엔시드에게 초보적인 검술을 가르쳤다. 어차피 양을 치게 된다면 늑대들에게 습격당할 일도 있을 터였다. 제 몸을 지킬 정도로 검을 쓸 수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

 며칠이 지난 후 집주인은 잔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간단하지만 오래 걸리는 심부름이었다.
 “이걸 마을의 대장장이님께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로 혼자 내려간다는 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금방 다녀오면 될 일이었다. 대장장이라고 했으니 어디 사는지 금방 알 수 있을 테고.
 잔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집주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은 싸하게 굳어 있었다.
 “이제 나오십시오.”
 “킥킥. 역시 쫓아오길 잘했어.”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사람들이 집주인의 앞으로 나타났다. 잔과 술집에서 마주쳤던 자들이었다. 그의 부인은 오들거리며 엔시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용병 중 한 명이 수배 전단지를 쭉 훑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이거 큰 수확인데. 전설의 검의 소유자뿐만 아니라 반역자들까지 만나다니.”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집주인의 이마에서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용병 중 한 명이 씨익 웃으며 검날을 혀로 핥았다. 소름이 쫙 돋는 광경이었다.
 “저 꼬마 목?”
 엔시드는 정확히 무슨 상황인진 몰랐지만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만은 느꼈다. 부인은 더욱 엔시드를 끌어안았다. 집주인이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래. 태어난 게 죄지 죄야. 암. 그것도 카이저의 기운을 타고났다면서?”
 저들은 이미 다 알고 온 것이었다. 집주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지역에서만큼은 안전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 아이를 아무것도 모르고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집주인은 용병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발을 뒤로 옮겼다. 자신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뭐라도 잡아서 방어해야했다.
 그러나 용병들은 그 틈을 주지 않았다.
 “커흑!”
 “아버지!”
 집주인은 자신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상처 언저리로 번져가고 있었다. 고통이 온 몸으로 퍼지기도 전에 눈앞이 흐려졌다.
 “독화살이지. 뽑아도 살 수 없을 걸?”
 “꺄아아악! 여보!”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엔시드도 자신이 본 것을 의심했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광경. 악몽이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광경이었다.
 “안 돼, 안돼요! 아버지!”
 엔시드가 뛰쳐나가려는 걸 간신히 부인이 제지해서 제 뒤로 숨겼다. 용병들은 천천히 부인 쪽으로 접근했다.
 “저항은 좋지 않아. 아이만 순순히 넘겨주면 살려줄 수도 있다고?”
 “아이는, 아이는 안돼요!”
 뒷걸음질하던 부인의 손에 난로 위에 얹어진 양동이가 잡혔다. 양동이에선 물이 팔팔 끓고 있었다. 부인은 제 손이 데는지도 모르고 용병들에게 바로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으아악! 이 계집이 감히!”
 앞에 있던 둘은 뜨거운 물세례를 받고 펄쩍거렸지만 뒤에 있던 자는 바로 석궁을 장전했다. 집주인을 꿰뚫었던 화살이 명중했다.
 “아…….”
 “어…… 어머니.”
 이제 소년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물을 맞은 용병은 표정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려 무척이나 험악하게 보였다.
 “젠장 망할 계집! 살려둬서 맛 좀 보려고 했더니.”
 “저 꼬마만 남았군 그래.”
 엔시드는 오들거리며 떨었다. 부모님도 다 죽이고 자신만 남았다. 저런 사람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잔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잔의 보따리에 든 것은 자신이 가져온 마검, 루스펜시아와 식량 조금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왜 굳이 식량을 넣었을까? 마치 돌아오는 데 오래 걸릴 사람처럼. 혹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어째서 집주인은 이런 것을 챙겨주면서 자신을 피신시키려 했을까? 진작에 보따리 안을 확인했어야 됐다고 잔은 자신을 책망했다.

 엔시드가 후라이팬을 들고 이리저리 휘둘러 봤으나 용병들에겐 역부족이었다. 용병들은 간단하게 엔시드를 제압했다. 한 명이 격통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엔시드의 머리를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런데 이놈, 그냥 죽이기엔 좀 아깝지 않아?”
 “그러게. 손가락 하나 잘라서 노예로 팔아버릴까? 그럼 돈도 두 배로 벌 텐데.”
 추잡한 대화들이 오갔다. 엔시드는 아프고 분했다. 자신이 힘이 있었다면 이런 거 겪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와 아버지도 죽지 않았을 텐데.
 그놈의 카이저가 뭐기에? 왕의 운명이라는 게 뭐기에?
 “안 돼. 목을 가져와야지만 제대로 된 수당을 받을 수 있다고.”
 용병 중 한 명이 딱 잘라 말했다. 나머지 둘은 혀를 찼다.
 “쳇. 높으신 분들은 의심도 많고만.”
 “그럼 몸이라도 좀 풀까?”
 한 명의 말에 다른 둘이 악취미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였다.
 집의 문이 걷어차여 날아왔다. 나무 파편이 용병들 앞에까지 튀었다.
 “뭐야?”
 “…….”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마을 방향으로 향하던 청년이 돌아와서 자신들의 앞에 서 있지 않은가. 그것도 살기등등한 눈으로.
 한 용병이 청년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노엔이다! 정말로 노엔이야!”
 “저 손에 저거, 저게 루스펜시아 아냐?”
 “크하하. 이거 잘 됐는데? 마침 방해물도 제거했겠다.”
 노엔이라 불린 청년은 집을 둘러보았다. 집주인도, 그의 부인도 전부 죽었다. 남은 거라곤 저들 손에 잡혀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아이 한명, 엔시드 뿐.
 베풀어준 은혜를 다 갚지도 못했는데, 자신 때문에 휘말려 죽어버리다니.
 “……할 말은 그게 끝인가?”
 “맨몸으로 덤비겠다고? 그거 좋지.”
 “200년 동안이나 살았다고 해도 독에는 못 버틸걸?”
 한 명은 엔시드를 붙들고 있었고, 두 명이 일어섰다. 둘인데 한 명쯤 못 상대하겠냐는 듯한 자신감이었다. 그렇게 만용을 부리다가 죽은 자들이 많지.
 노엔은 검을 꼬나들었다. 네놈들만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으리라.
 “쏴!”
 화살이 날아들었다. 잔은 바로 몸을 굽히더니 검을 한차례 크게 휘둘렀다.
 “그런다고 막을 수 있을 줄…….”
 용병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손잡이와 날받이 부분밖에 보이지 않았던 루스펜시아가 강렬한 외관을 뽐내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은 검은 빛을 뿜었다. 바닥에는 화살들이 토막토막 잘려 떨어져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쏴! 더 쏘라고!”
 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용병이 화살을 마구잡이로 날려댔지만, 잔은 바스타드 소드 정도의 크기가 되는 루스펜시아를 마치 한손검처럼 가볍고 빠르게 다루었다. 루스펜시아의 날에 닿는 순간 화살들은 튕겨나가고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화살은 금방 동나버렸다. 용병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목을 따버리겠어!”
 한 명이 달려들었으나 자신의 목이 깔끔하게 베어져 나갈 따름이었다. 화살을 쏜 녀석도 노엔의 검에 몸이 두 쪽이 났다. 얼굴에 튄 피를 무시하고 노엔이 접근하자 남은 한 명은 오줌까지 지렸다.
 “그, 그만. 히익! 살려줘!”
 노엔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이대로는 살아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한 명이 엔시드의 목에 칼을 겨눴다.
 “더, 더 이상 접근하면 이 꼬마 목을 따버리겠어!”
 “……해봐.”
 오싹하기 그지없는 저음에 용병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뭐, 뭐라고?”
 “해 보라고 했다.”
 “으, 으아아아!”
 정말로 목을 확 그으려는 시늉은 노엔에 의해 간단하게 저지됐다. 루스펜시아의 날이 용병의 머리를 관통하고 빠져나오자 피와 뇌수가 한데 섞여 분사되었다. 늘어났던 날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뒤, 청년은 기절 직전인 엔시드를 내려다보았다.
 “엔시드.”
 “흐,흐윽. 우와아아앙!”
 상황파악이 끝난 엔시드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노엔은 검을 내려놓고 엔시드를 힘껏 안았다. 자신은 그거밖에 해 줄 수 없으니까. 적어도 자신의 품에서 안심할 수 있도록.

 “카이저라고?”
 집안을 정리한 뒤 청년은 소년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소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오자 저도 모르게 반문이 나왔다. 엔시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만월의 카이저가 떠올랐을 때 태어났어요.”
 “그런가. 그래서 같이 노려졌던 거군.”
 엔시드의 눈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다. 청년은 카이저를 알고 있었다. 페이라와 이슈타르가 겹쳐진 상태. 생명과 풍요도, 전쟁과 죽음도 모두 가져다 줄 수 있는 왕. 그런 왕을 태어나게 한다는 달이 카이저였다.
 이제야 부모가 왜 엔시드를 그리 숨기려 들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왕의 운명을 타고 난 이상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을 터였다. 그 운명은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저기 잔……, 아니 노엔 형.”
 “잔이라고 불러라.”
 엔시드의 부름에 잔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집주인과 꼬마가 고심해서 지어준 이름. 이제부턴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될 것이었다. 잔은 엔시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잔 형……?”
 “미안하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모두 무사했을 텐데. 아니…… 차라리 너흴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엔시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눈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형 잘못이 아니에요.”
 잔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상냥한 아이.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니,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부턴, 내가 널 지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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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ofBlade
설마 justified로 이런 소설이 나올줄은...상상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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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소설제: STEP] 종료입니다! 댓글2 QueenofBlade 12.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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