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선 만남(完)
안샤르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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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19:55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어. 책상에 앉아서 지루한 일만 반복하다 보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단 생각을 하는 건 나 뿐만은 아닐 거야. 하지만 그걸 실제로 겪는 건 또 다른 문제지.
원하지도 않았던 장소에 떨어져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갑자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건 사실 썩 유쾌한 일은 아냐. 하지만 그런 곳에서 뜻밖의 행운을 건지기도 해. 내가 그런 케이스였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난 무엇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만났으니까.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이종족 친구, 엔시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
“휴우, 여전히 어렵다니까.”
청년은 이마의 땀을 슥 닦곤 주저앉았다. 멋대로 빠져나갔던 양이 어느새 무리들 틈에 끼어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레 풀을 뜯는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양 한 마리 한 마리는 성주의 재산이기도 했으니 도망치면 곤란했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주는 충직한 개, 도우미 덕에 걱정을 뒤로 할 수 있었다. 양들이 또다시 사라지지 않을까 도우미가 이리저리 뛰며 발뒤꿈치를 노렸다. 그걸 지켜보는 청년의 입가에선 절로 웃음이 피어나왔다.
일을 잠시 도우미에게 맡기고 쉬고 있자니 집을 등지고 있는 산맥의 골짜기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불었지만 그의 머리칼을 흩뜨려놓는 덴 충분했다. 혹시나 모자가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재빨리 머리 위로 한 팔을 올려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맘때쯤 불어오는 바람은 변덕스런 어린아이처럼 산들산들 불다가도 갑자기 돌풍이 되어 몰아치곤 했다. 청년은 바람에게 들으라는 듯 새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난은 좋은데 모자까지 뺏어가진 말아달라고.”
모자 아래로 보이는 청년의 얼굴은 사실 청년으로 보기엔 앳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연한 하늘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푸른 눈동자는 크고 깊으면서도 맑았고, 반짝거렸다. 일을 많이 한 거친 손과는 달리 피부는 매끄러웠다. 한 번 보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다시 돌아보게 될, 그런 굉장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항상 모자로 가리고 다니지 않았다면 눈에 더 띄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얼핏 봐서는 소년으로밖에 안 보이는 청년의 나이가 실제로는 30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들이 배를 채운 것을 확인한 후,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걸 먼저 알아챈 도우미가 양들의 뒤꿈치를 물기 시작했다. 양들의 질서정연한 움직임을 보며 청년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먼발치에서 사람 형체가 보였다. 고개를 약간 들어 살피니 청년이 예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씨익 웃으며 청년은 상대를 반겼다.
“잔 아냐? 수업은 벌써 끝난 거야?”
“그래.”
짤막하게 대답하는 잔의 말투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아는 청년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검은 복면을 쓰고 있어 눈만 드러나 있지만 그 눈만으로도 미형의 얼굴을 상상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와 반쯤 묶은 검고 긴 머리칼, 망토를 포함해 전체적으로 새카만 복장이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가까이하기엔 어려운 인상을 풍겼다. 잔은 눈대중으로만 봐도 청년보다 10cm는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언제나처럼 무리한 어깨동무를 시도했다. 다행히 잔이 약간 굽혀준 덕에 얼추 높이가 비슷하게 맞춰졌다.
“나 만나러 굳이 안 올라와도 되는데.”
“식사나 준비해. 밥 시간 지났다. 엔시드.”
“우와. 내가 네 하인이냐? 사람 부리는 것좀 봐라.”
“……네가 부리는 거겠지.”
잔이 엔시드의 농담을 한 마디로 일축했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말수도 적고 뭘 생각하는지 모를 사람이지만 그 안에 자신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십 년 넘게 같이 사는 동안 잔은 엔시드를 마중 나가는 것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부산한 거 보니 그 여자가 또 오는 모양이군.”
“왜? 부럽냐?”
이죽대는 엔시드를 뒤로하고 잔은 말없이 집안을 치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내 둘이 사는 집이란 청소도 잘 안하고 빨래도 아무데나 던져 놓아서 퀴퀴한 냄새가 풍기기 쉬운 곳이다. 그러니 일찍 환기를 시켜서 냄새를 빼고 청소를 해 두는 편이 좋았다. 사실 엔시드 쪽은 집안일을 꽤 잘하는 편이었지만 같이 사는 사람은 깔끔한 성격은 못 되었다. 양떼를 먹이느라 멀리 다녀올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항상 집안이 어지럽혀져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항상 그녀가 올 때가 되면 이렇게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축사의 분뇨도 밭에다 처리하고 그 위로 흙을 잘 덮어서 최대한 냄새가 나가지 않도록 했더니 그럭저럭 안이든 바깥이든 깔끔해진 집이 보였다. 지붕은 최근에 손을 봤던 터라 돌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메에- 축사에서 우는 양들의 여물통에 건초를 집어 주어 달래고선 청년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청소는 다 됐고, 이제 식사 준비만 하면 되겠지? 어느 녀석을 잡을까?”
“아가씨! 안 됩니다요! 주인어른이 아시면 경을 치십니다요!”
시얀 지방에서 가장 큰 성, 가문의 이름을 딴 성인 글로스티어 성에서 한 마부와 말에 탄 여성이 실랑이 중이었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여성의 옷은 아무리 봐도 귀족가의 하녀가 입을 법한 복장이었지만 얼굴에선 고생의 흔적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끝이 제멋대로 말린 머리칼은 일반적인 그 나이 대의 여성과 달리 목 언저리 정도의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의 밝은 금발이 햇빛에 생기 있게 반짝였다.
“괜찮아. 잠깐이면 된다니까? 어차피 아버님과 오라버니는 사냥 나가셨는데 뭐. 저녁 먹기 전에 오시지도 않을 걸?”
“그렇지만 이렇게 매번 그러시다 들키면…….”
“하여간,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한숨을 내쉬고 여성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마부가 앗, 하는 사이 말과 여성은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인 흙먼지만 방금 전에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부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성주의 단 하나뿐인 외동딸, 아스티라 글로스티어는 그 나이 대의 귀족 여성들과 달랐다. 학문이랑은 담을 쌓고, 사교계에서 좋은 신랑감을 만나 결혼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으며, 취미로는 집 안에서 그저 자수나 놓고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일반적인 귀족 영애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라는 다른 여성들이 자신의 외모만 가꾸고 있을 시간에 책을 더 읽었고, 말을 탔다. 특히 말 타는 솜씨는 웬만한 남성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리고 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말 좀 탔다고 하는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
“꼭 말과 한 몸이 된 것 같구먼.”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스티라는 빙긋 웃기만 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배운 승마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유용한 기술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이가 기다린다. 아마 지금쯤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아스티라가 평소보다 말 옆구리를 더 세게 걷어찬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은 얼마나 즐거운 하루가 될까? 아스티라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가 사는 언덕이 눈앞에 들어왔다.
사각 사각, 글 쓰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방 자체는 꽤 넓었지만 서류가 그득그득 들어차 있어 겨우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만 뚫려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사람이 앉아서 서류를 꼼꼼하게 검토하는 중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앙다문 입술만 아니었더라면 웬 꼬마가 장난을 치는 것인가,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책상의 주인은 앳되었다. 빗질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산발한 머리카락은 눈까지 가렸고, 춥지 않은 날씨에도 이것저것 껴입은 옷의 소매 사이엔 이상할 정도로 가는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어딜 봐도 사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손에서 서류가 끝까지 넘어가는 데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소년은 한숨을 쉬고 읽은 서류에 서명했다. 벌써 몇 시간째 반복적인 일만 하자니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밀린 서류를 외면하고 나가겠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부하들을 내버려두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년은 입술을 짓씹으며 다음 서류를 집었다.
“그나저나 요즘 이 사건은 뭐지? 갑자기 행방불명이라니……. 그것도 곳곳에서.”
일에 집중하다보니 소년은 자신 주변에서 일어난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불길한 기운에 뒤를 돌아봤을 무렵, 소년 주변에서 생긴 균열이 그를 뒤덮는가 싶더니 종이더미가 균형을 잃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사이에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양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익어갔다. 이때쯤이면 아가씨가 도착할 것을 예상하고 엔시드가 먼저 숯불에 양고기를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고기가 타지 말라고 물을 조금씩 뿌리면서 구웠더니 연기가 엄청나게 났다. 상의를 벗고 구워야 옷이 엉망이 되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잔은 언제 익나 구경만 할 뿐 도와주진 않았다. 자연히 고생은 엔시드의 몫이었다. 엔시드가 툴툴거렸다.
“좀 도와주라. 나 혼자 일하고 있잖냐.”
“더 할게 있나?”
“아이스크림도 내와야 한다고.”
“…….”
귀찮다는 표정으로 잔이 일어섰다. 좀 전에 씻기도 했겠다, 편하게 앉아서 주는 고기를 받아먹으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상의를 벗어버리고 고기를 구우려고 했지만, 자신 쪽으로 오는 연기 때문에 잔은 콜록거렸다. 바깥 생활을 오래 했지만 요리엔 별 관심이 없었던 잔으로선 이것도 힘든 일이었다.
잠깐 혼자 놔둔 사이 양고기와 씨름중인 잔을 보고 엔시드는 큭큭 웃으며 가지고 온 아이스크림, 돈두르마를 내려놓았다.
“미안 내가 잘못했다. 넌 이거나 저어.”
“이래저래 귀찮게 만드는군.”
투덜거리면서도 잔은 돈두르마를 건네받았다. 얼음으로 잘 보관된 돈두르마는 끈적거렸다. 잔이 철봉으로 돈두르마를 휘휘 젓는 동안 엔시드는 고기가 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아가씨에게 다 탄 양고기 꼬치를 줄 순 없으니까.
멀리서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엔시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가씨!”
그는 상의를 벗고 있다는 것도 깜빡하고 달려 나갔다. 같이 환한 표정으로 달려오던 아스티라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엔시드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그제야 상황파악을 하곤 멈춰 섰다. 엔시드의 몸은 오랜 기간 농사와 양치기 일로 단련돼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돌아오는 엔시드를 보곤 아스티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지만 언제나 처음 맞이할 때는 예의를 갖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게 엔시드의 지론이었다.
엔시드가 위로 손을 뻗자 아스티라는 마주 잡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혼자서도 내려올 수 있었지만 애인의 친절이 싫지 않았기에 그에 맞춰주었다. 말고삐를 잡고 집까지 오자, 밖에서 여전히 돈두르마를 젓고 있는 잔이 보였다.
“야야, 그만 멈춰도 된다니까 왜 아직도 젓고 있어?”
“언제 말했는데?”
귀찮은 표정으로 잔이 멈췄다. 아스티라는 잘 구워진 양꼬치를 보고 눈을 빛냈다.
“어머나, 벌써 이렇게 맛있는 걸 다 준비하시고.”
“지금쯤이면 오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후훗. 생일 선물인건가요?”
“뭐 그런 셈이죠.”
성주 가족의 생일은 단순히 귀족들이 와서 축하해주는 것이 아니라 평민들의 축제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엔시드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정작 아스티라의 생일에는 서로 아는 척도 하기 힘들 터였다. 조금이라도 반가워했다간 의심 받을 테니 이렇게 미리 준비했으리라. 아스티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엔시드 씨.”
“아하핫.”
아스티라의 입맞춤을 받고 엔시드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잔은 눈꼴시다는 듯 한번 흘겨보고는 양꼬치 하나를 집었다.
“어엇, 아가씨부터 먼저 드셔야 된다고.”
“저 여자만 입인가?”
아스티라에겐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씩 웃기만 했다. 엔시드와 사귀면서 잔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잔이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자신보다 먼저 먹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스티라는 알았다.
“그럼 드실까요?”
“아, 잘 먹었다.”
양꼬치를 먹고 돈두르마로 입가심을 하니 배가 불러왔다. 아스티라는 밖으로 꺼내온 의자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꼬치는 아직 몇 개 더 남았지만 아무도 먹지 않을 터였다. 엔시드가 아까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적게 만드는 건데.”
“얼려서 보관하면 되잖아.”
“그럼 맛이 없어지니까 그렇지.”
엔시드가 핀잔을 주었다. 일반 사람들은 고기를 보관하기가 힘들어서 육포나 햄으로 말려 먹었다. 그러나 마법을 책으로나마 조금 배운 엔시드는 남는 음식을 자주 얼려놓곤 했다. 그러다보니 음식을 얼리면 상대적으로 맛이 떨어진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음식을 얼려서 보관하진 않았다. 잔이라면 이런 데 신경을 안 쓰겠지만.
“돌아갈 때가 됐네요. 아쉬워라…….”
하늘에 노을이 번져가는 걸 보고 아스티라가 정말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엔시드도 마찬가지였다. 헤어질 땐 언제나 여운이 남는 법이다. 잔은 눈꼴시단 표정을 짓고선 두 연인이 서로를 껴안자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잔에게 무언가가 웅웅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검이었다. 자신과 대화를 원하는 신호였다. 잔이 칼자루를 잡았다.
「주변 기류가 이상하다.」
“뭐가 말이지?”
「뭔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조심해라. 아주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다.」
경고의 메시지가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만약 적이라면, 그것도 자신이 끌어들인 거라면…….
그때, 우리 방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아스티라를 껴안고 있던 엔시드도 자연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우리의 천장이 부숴지고, 양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부산히 움직였던 것이다. 갑자기 천장이 부숴지다니? 돌풍이 인 것도 아닌데? 아스티라를 안던 팔을 놓고 엔시드는 황급히 우리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졌다.
“뭐……뭐지?”
짚과 건초 더미는 충격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딱 맞게 쌓아놨던 더미들은 무너지고,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의 가운데에는 사람이 있었다.
빛바랜 백금발 머리가 짚과 건초로 뒤엉켜 엉망이 되어 파묻혀 있었다.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듯한 사람은 아무리 봐도 열두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도우미가 밥을 먹다 말고 컹컹 짖으며 우왕좌왕하는 양들을 진정시켰다. 녀석이 밥을 먹던 자리에는 엔시드가 던져준 고기와 뼈의 잔해가 가득했다. 양들이 조용해지자 도우미가 곧장 주인에게 오더니 칭찬해달라며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엔시드는 그럴 수 없었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뇌진탕일수도 있었다. 양 우리의 천장이 부서질 정도였으니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살아남았더라도 무사할 리 없었다. 네가 죽였냐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지. 지금까지의 삶은 무너져버릴지도 몰라…….
엔시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잡생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아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너저분한 짚 무더기를 헤치고 아이를 안아 올렸다. 마치 인형을 안아드는 것처럼 가벼웠다.
바닥에 내려놓고 살폈다.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고 머리엔 혹도 없었다. 그 충격을 받고서도 멀쩡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기도 했다. 적어도 성에 불려가서 범인으로 의심받진 않을 테니까. 아예 번개 때문에 우리가 부서졌다고 신고하면 약간의 보상금도 탈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지붕도 말끔하게 고칠 수 있겠지……. 이런 생각도 들긴 했지만, 어쨌든 아이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안심이 되었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주변 사람이 다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엔시드와 달리 잔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음울해 보이는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적을 보는 시선이었다.
“으음…….”
정신이 든 모양인지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눈을 뜬 아이에게 엔시드가 반갑게 말을 건네려 하자 그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연신 좌우를 둘러보는 모습이 어미 잃은 강아지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엔시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 지을 뻔했다. 잔이 칼만 겨누지 않았다면.
놀란 건 엔시드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에 들어온 것을 보고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은 머리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사이사이로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
“잔! 무슨 짓이야!”
엔시드가 소리쳤다. 아이는 멍한 표정으로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잔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듯 행동했다. 검의 날은 마력이 응집되어 빛났다. 빛이 목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자 아이의 여린 목에서 피가 흘렀다.
뒤늦게 들어온 아스티라가 놀라 입을 막았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어린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검을 겨눌 수가 있단 말인가.
“잔 씨!”
“잔!”
“시끄러워!”
날선 외침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단 태도였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소년은 입이 벌어진 채로 자신의 목을 노리는 사내와 그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분명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 그것만이 현재 파악한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당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어떤 방법을 쓰는 게 최선일까? 이 남자는 자신을 호락호락하게 보내 주진 않을 것이다. 뒤에 선 사람들은 그나마 호의적으로 보였지만 이들도 언제 돌변할지 몰랐다. 하지만 싸우고 싶진 않았다. 충돌 없이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셋을 재우는 것이다. 판단을 끝낸 소년은 마법을 썼다. 아니, 쓰려고 했다.
“말해라. 넌 누구냐.”
소년은 당황했다. 앞의 사내가 한 말에 놀란 게 아니었다. 마법이 발동되지 않았다. 마법을 쓸 때 실패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을 재우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은 마법이었는데, 그 마법이 방해받았다. 어째서? 주변에 마법을 방해할 요인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데?
생각을 더 전개할 새도 없이 검이 더 가까이 접근했다. 소년은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저…… 전. 크, 크리사오르…… 라고 하는데요.”
“그것 말고 네 정체!”
“히익.”
공포를 느끼고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입이 바싹 타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상 도망갈 길이라곤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섣불리 달아나려다간 어깨 위가 다듬어질 것이다. 섬뜩한 기운에 소년은 부르르 떨었다. 목숨이 위협받는 일은 예전에도 자주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력함을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살짝 드러난 녹색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잔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라. 넌 정체가 뭐고 여기 왜 왔지?”
“그…… 그건…….”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이러고 있지도 않을 거다. 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상대를 자극할지도 모르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일을 대답하라니. 기가 막혔다.
“잔! 그만해. 어린애잖아.”
“그래요, 어린아이잖아요.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뭐에요?”
다시 둘이 편을 들어주자 잔이 고개를 돌렸다. 살의를 품은 눈이 보이자 아스티라가 움찔했다.
“엔시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네가 책임질 건가? 아무것도 모르면 나서지 마.”
“그게 무슨…….”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에 아스티라는 할 말을 잃었다. 항상 무심해 보이기만 하던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하다니. 대체 무엇 때문에?
잔이 한참 노려보고 있는 사이 검이 울렸다.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알겠군. 저자는 드래곤이야.」
그 목소리는 잔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들렸다. 다들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드래곤이란 환상의 생물에 불과했다.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보기 힘든 생물. 그러나 드래곤을 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드래곤은 포악한 마수로 소문나 있었으니까. 불을 뿜어서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보물을 뺏어가고, 사람을 납치한다고 알려져 있는 괴물이었으니까. 말조차 통하지 않으며, 죽여야만 후환이 두렵지 않다고 알려진 생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어떻게 사람의 모습으로, 그것도 이 자리에 나타날 수가 있지? 그들은 귀를 의심했다. 자신들 앞에 놓인 아이는 아무리 봐도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소년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드래곤이라니, 말도 안 되는…….”
크리사오르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부정했다. 하지만 자기변호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잔이 소년의 얼굴을 발로 밀어 넘어뜨리고 짓밟았다. 아스티라의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잔은 소년의 목을 노렸다. 칼날이 목 바로 위에서 멈췄다.
“닥쳐! 엔시드를 노리나본데, 어림도 없지. 내 목이 달아나기 전까진 절대 안 돼.”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다시 항변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잔의 발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얼굴이 짓눌리자 고통스러웠지만 비명은 잘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다고 울먹이기만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이 냉혈한에겐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것 같았다.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상황 판단이 더 중요했다. 소년은 이 사내가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엔시드라는 이름은 남자의 것이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노린다는 말을 했으니 예전에 생명의 위협을 겪었을 것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사내는 저 청년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까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거뿐이었다. 빠져 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되고 말 텐데도. 드래곤은 목이 잘린다고 금방 죽진 않지만, 오래도록 붙여놓지 못한다면 드래곤이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다. 더군다나, 마법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장소에서 목이 제대로 붙기나 할까?
죽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는. 할 일이 너무도 많은데…….
그 때 뭔가 후려치는 소리가 들리자 소년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스티라의 ‘아!’ 하는 탄식에 소년이 살짝 눈을 떴다. 뒤통수를 얻어맞았는지 잔이 비틀거리더니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날에 깃들었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소년이 잠시 얼굴에 실린 무게에 표정을 찡그렸다가, 눈을 약간 굴려 둘을 보았다.
엔시드는 화난 표정이었다.
“아니래잖아!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드래곤은 마수일 뿐이야. 지금 처리해야 후환이 없단 말이다.”
“마수고 나발이고 넌 저 눈이 안보여!”
크리사오르는 다시금 멍해졌다. 보통의 사람들은 낯선 자를 경계했다. 어린애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게 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뭔가 달랐다. 크리사오르는 이들이 자신을 마수로 칭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드래곤을 마수라고 칭하는 종족은 단 하나뿐이다. 신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인간. 타 종족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장 축복받은 세계를 선물 받은 인간.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특히나 경계심이 많은 종족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저 인간은 지금 자신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단지 아이라는 이유로.
엔시드는 잔의 발아래서 소년을 꺼내주었다. 흙먼지를 탈탈 털고 뺨을 쓸어주었다.
“어휴. 얘 얼굴 좀 봐. 퉁퉁 부었네.”
잔을 흘겨보고선 청년은 소년의 겨드랑이를 잡고 일으켰다. 손이 따뜻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크리사오르에게 있어 오해는 익숙한 일이었다. 누명조차도. 그는 드래곤 사회에서 버려진 존재였었다. 바득바득 기어올라 와 높은 자리를 얻었지만 지금도 그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저 그의 힘과 권위에 잠시 복종하는 것일 뿐. 그마저도 사라진다면 자신을 물고 뜯을 상대는 진저리 날 정도로 많았다. 약한 모습은 사치였다.
하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본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있었다. 얼마 만이었더라. 자신을 그저 ‘한 사람’으로 봐주는 상대를 만난 건. 의심 없이 상대를 바라보는 사람을 만난 건.
울먹거리는 아이를 품에 꼭 안는 엔시드를 보곤 잔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잔이 남을 심하게 경계해.”
잔은 나가버린 지 오래였다. 울음을 그친 크리사오르에게 엔시드가 사과했다. 뒤이어 이어진 설명은 놀라웠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잔은 상처가 덧난 상태로 떠돌아다니다 쓰러진 상태였다. 그런 잔을 구해준 건 엔시드의 부모였다. 다친 곳을 치료해주었고, 갈 곳 없는 잔을 집에 살게 해 주었다. 보답으로 잔은 농사를 도와주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잔은 능숙하진 못해도 쓸 만한 일꾼이 되었다. 어린 엔시드도 잔을 잘 따랐다.
그러나 잔을 끈질기게 추적해 온 자가 있었다. 그들은 잔이 친절을 보답할 기간을 주지 않았다. 잔이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왔을 때, 그들은 엔시드의 부모를 죽이곤 어린 엔시드마저 붙잡은 상태였다. 그러자 잔은 다시는 쥐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검을 뽑아 사람을 죽였다. 충격에 우는 엔시드에게 네가 죽는 날까지 널 지켜주겠노라 맹세했다. 그리고 잔은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잔은 엔시드에게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그를 지키는 기사였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던 아스티라도 이 이야기에 경악하여 입을 가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한 번도 이야기 한 적 없었으니까. 아가씨라면 자신 일처럼 슬퍼했을 테기에.
소년은 고개를 들어 엔시드를 보았다. 엔시드도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이해하기를 바라고 해준 말은 아니었다. 잔의 행동은 분명 심했으니까. 그저 왜 그랬는지 알려주기만 하려는 거였다. 하지만 크리사오르는 다 알았다는 것처럼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네요…….”
“어? 어…… 지금까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못 봤는데.”
“그렇게까지 상대를 위해줄 수 있다는 건 처음 봐서…….”
크리사오르가 볼을 긁적였다. 자신을 두려워하며,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로 그를 이해해주고 위해주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설령 잘못된 방법을 쓴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었으면 했다. 새삼 자신이 정에 굶주려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때 엔시드 옆에 앉아 있던 도우미가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우왓!”
헥헥거리며 침을 발라대는 게 아이가 꽤나 맘에 든 모양이었다. 엔시드가 풋, 웃었다.
“얘는 위험한 사람은 바로 알아보는데 너한텐 안 짖네.”
“아…… 그, 그런가요.”
턱을 살살 쓰다듬어주자 도우미는 좋다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것 봐. 잔의 걱정은 기우였다니까. 엔시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 때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근원지는 아이의 뱃속이었다. 크리사오르는 얼굴이 빨개졌다. 엔시드와 아스티라는 그 모습에 웃고 말았다.
“마침 양꼬치 남은 게 있는데, 먹을래?”
남은 꼬치는 깔끔하게 아이의 뱃속으로 향했다. 엔시드는 배고프면 더 구워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소년은 사양했다. 그의 몸은 효율이 좋아서 인간이 먹는 양 정도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엔시드는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너, 갑자기 여기 떨어졌잖아. 어쩌다 그리 된 건지 알아?”
소년은 고기를 꿀떡 넘기고 청년을 보았다. 궁금증으로 눈이 빛났다. 무심코 사실을 말할 뻔 했으나 소년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려줄 필요까진 없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 그냥 앉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빨려드는 느낌이 났어요. 그리고 정신 차리고 나니까 여기여서…….”
그리고 달아나려다 인간에게 붙잡혀서 죽을 뻔했지. 아마 알려진다면 두고두고 좋은 안주거리가 될 것이다. 드래곤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한낱 인간에게 죽을 뻔했단 사실은. 생각할수록 부끄러워서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엔시드에겐 다른 의미로 보였다.
“저런……. 많이 놀랐겠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따뜻했다. 크리사오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화제를 전환한 필요성을 느낀 엔시드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난 드래곤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이야기 더 해줄 수 있어?”
크리사오르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그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드래곤은 마수가 아니다,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 변신한 외모는 본래 나이를 따른다. 원래 사는 세계는 신수계란 곳이다, 사는 곳이 다르니 인간에겐 별 관심이 없다는 등의 설명으로 상대방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엔시드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며 가끔씩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스티라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다. 잔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도 듣고 있다는 것을 크리사오르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소년이 이야기를 끝내자 잔이 불쑥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다. 좀 전의 무례는 사과하지.”
“에……. 어, 아니에요.”
이렇게 시원하게 사과를 받아낼 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크리사오르의 눈은 잠시 동그래졌다. 잔은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엔시드는 씨익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어떡해!”
아스티라는 거의 사라져가는 노을을 보고 당황했다. 엔시드도 그 말에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아무리 말을 잘 탄다고 해도 해가 지기 전에 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이대로라면 늦게 들어온 걸 아버지와 오빠에게 들키고 말 터였다. 크리사오르가 그녀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해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는데, 저 들키면 큰일 나요. 어쩌죠?”
엔시드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이대로라면 추궁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다 자신과 아스티라의 관계가 들켜버린다면…….
크리사오르가 물끄러미 아스티라를 보다가 불쑥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그러세요?”
“말을 아무리 재촉해도 저 성까지 가면 날이 저물어버려…….”
크리사오르는 잠시 망설였다. 마을을 내려다보니 해가 저물어가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불 켜진 곳도 드물었다. 하지만 아직 해가 남아있으니 자신이 본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기겁해서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아스티라가 그걸 보고 기절하지 않으리란 장담도 못 했다. 방법은 마법뿐이었다. 하지만 수면마법도 제대로 시전이 되지 않는 곳에서 워프게이트가 제대로 열릴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윽고 소년은 성 쪽을 바라보았다. 일반 사람이라면 성 안은커녕 실루엣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테지만 드래곤인 그에게 성 내부를 살피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을 확인했다. 어차피 방법은 이것뿐이다. 자신을 믿어보자. 잠시 심호흡을 한 뒤, 크리사오르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지러진 문 사이로 성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
시험 삼아 들어갔다 나와 보니, 정확하게 성 안이었다. 아스티라뿐만 아니라 엔시드와 잔도 문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어보고 신기해했다. 아스티라가 연신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하지만 오래 지속시킬 수가 없어서 얼른 가보셔야 할 거 같아요.”
정말로 소년은 힘들어하는 표정이었다. 아스티라는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나 곧 짧게 엔시드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엔시드는 마법의 힘에 감탄했다가, 문득 중요한 것을 생각해내고 말했다.
“저 지붕도 고칠 수 있어?”
“으음……. 지금이라면 될 것 같아요.”
그 말을 하고 크리사오르는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지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고쳐졌다. 지저분하게 흩어졌던 건초와 짚단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제대로 된 마법사란 사람을 볼 수 없는 이 시골에서 소년이 마법을 능숙하게 쓰는 걸 보고 둘은 그저 입을 벌렸다.
“마법을 쓸 줄 알면 이렇게 쉬운 거였구나…….”
“쉽지는 않아요. 마법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돼서…….”
무슨 말인가 싶어 엔시드가 보았다.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전 다른 종족이라서 이곳에선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어떻게 돌아가?”
“그러게요…….”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근심이 서린 낯빛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힘도 제대로 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돌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엔시드는 턱을 손으로 괴곤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일어나더니 말했다.
“아무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 고민해봤자 더 나오는 것도 없잖아?”
“네?”
“자. 자. 사양하지 말고. 드래곤도 성장기 때 잠 못 자면 안 큰다며?”
엔시드는 당황한 크리사오르를 뒤에서 떠밀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깔끔히 정리된 침대가 눈앞에 들어왔다. 고민할 것 없어. 일단 한 숨 자고 생각하는 게 어떨까? 라고 말하는 듯했다.
침대는 아늑했지만 바로 잠이 오진 않았다. 크리사오르는 저녁의 일을 생각했다.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간계로 떨어지고, 죽을 뻔하고, 식사 대접받고, 잠자리까지 얻었으니.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겪은 셈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서류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났다. 갑자기 사람이 행방불명되는 사건. 어쩌면 그들도 자신처럼 공간 균열에 휘말려서 사라졌던 게 아니었을까? 다른 종족의 세계로 떨어져서 행방불명 처리된 게 아닐까?
하지만 돌아온 사람이 있으니 방법도 있을 터였다. 드래곤의 성지엔 여러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 있으니, 그 관문만 찾는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계에 와본 적이 없으니 관문이 어디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쯤은 가보는 건데, 라고 속으로 자책했다.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소년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엔시드는 이미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 벌써 일어났네? 잘 잤어?”
“네. 덕분에요.”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는 솥이 소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유혹하는 듯한 냄새였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엔시드가 씨익 웃었다.
“네 밥은 저기 있어.”
“네?”
고개를 돌려보니 푸짐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웬만한 주부 경력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만한 요리 솜씨에 크리사오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매번 이렇게 먹진 않지만 오늘은 손님이 있으니까. 야. 잔! 일어나! 오늘도 수업한다며!”
크리사오르가 자리에 앉았을 때 엔시드는 소리쳐서 잔을 깨웠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로 잔이 일어났다. 졸려서 눈은 덜 떠졌고 잘 때 많이 움직이는지 긴 머리는 부스스했는데, 얼굴엔 어제와 달리 복면이 쓰여 있었다. 설마 저 상태로 잔건가? 크리사오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참. 왜 잘 때도 저걸 안 벗나 몰라. 우리 먼저 먹자.”
“그, 그럼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다 하고 나서 잔은 나갈 준비를 했다. 밥 먹느라 내린 복면도 다시 올라가 있었다. 크리사오르는 수업이라는 말에 궁금증을 갖고 눈치를 보다가 슬쩍 물었다.
“저 그런데…… 무슨 수업을 하시나요?”
“별거 없어. 검술 수업.”
잔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런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에서 검술 수업이라니. 누굴 가르치는 걸지 궁금했다. 엔시드가 대신 옆에서 설명해줬다.
“여기 성주님의 아드님을 가르치고 있어. 꽤 오랫동안 용병 생활을 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검으로 잔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못 봤어.”
“그, 그럼 성으로도 가실 수 있겠네요?”
“응? 성은 왜?”
크리사오르의 눈이 빛나자 엔시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잔도 돌아봤다.
“여기서 책이 제일 많은 곳이라면 분명 성주가 있는 곳일 테니까…….”
“푸하하핫.”
엔시드가 웃음을 터뜨리자 크리사오르는 놀란 토끼눈으로 올려다봤다. 엔시드가 소년의 이마를 쿡 찔렀다.
“마법을 쓸 줄 아는 녀석이 왜 그런 걸 걱정하고 있어? 몰래 갔다 오면 되지.”
“그, 그렇지만 그건 정당한 방법이 아니잖아요.”
소년이 항의하자 엔시드가 짓궂은 표정으로 크리사오르를 내려다봤다.
“쓸데없이 정직한 성격이구나? 마침 널 도와줄 방법이 있는데.”
“이 이게 다 뭐에요?”
어느새 변장한다고 머리를 뒤로 묶고, 몸에 검댕도 묻히고, 옷차림도 시골소년같이 한 크리사오르는 자신의 모습에 어색해하는 표정이었다. 엔시드는 너무 말라서 후줄근해 보이는 소년을 보고 낄낄 웃어댔다.
“푸하하핫. 너 진짜 말랐구나. 옷 이렇게 늘어진 거 처음 보는데.”
“으……. 왜 이렇게 해야 해요?”
창피함에 볼이 붉어진 소년을 보고 엔시드는 웃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야 지금 성으로 갈 건데 수상하게 보이면 곤란하잖아.”
그 말에 크리사오르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모습이 더 수상해보이지 않나?
“넌 그대로 가면 분명 사람들한테 추궁당할 거야. 시골에선 낯선 사람을 금방 알아보거든.”
“그치만 이 모습도…….”
청년이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자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엔시드가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곤 씩 웃었다.
“걱정 마. 이건 내가 아는 사람 모습대로 꾸민 거라서 들킬 염려 안 해도 돼.”
“그래도 이건…….”
앞이 제대로 보이는 게 어색한지 소년은 받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엔시드는 아쉬운데, 라고 중얼거리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래. 네 이름은 크리스가 좋겠다.”
“크리스요?”
소년이 올려다보았다. 엔시드가 말을 이었다.
“응. 네 이름은 크리사오르니까 줄여서 크리스. 마침 그 아이 이름도 줄이면 크리스거든.”
크리사오르는 속으로 크리스라는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성에 잠입할 동안은 익숙해져야 할 이름.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기도 했고.
어차피 조용히 들렀다 나오는 방법은 변장밖에 없었다. 납득했는지 소년이 끄덕이자 엔시드가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럼 출발하자.”
성 입구에 병사가 보이자 크리사오르는 긴장했다. 변장만으로 정말 속아 넘어갈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성 밖의 사람들은 엔시드와 크리사오르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을 경비하는 자들은 어떨지 모르니까.
엔시드가 수레를 경비병 앞에서 멈췄다. 경비병이 창으로 입구를 막곤 엔시드를 보았다.
“이번에 수확이 좋은가봐?”
“올해는 양들이 잘 먹어서 그런지 양털이 질이 좋더라고요. 한번 보세요.”
말은 그렇게 해도 경비병들이 양털에 대해서 잘 알리 만무했다. 경비를 하는 입장에서 한번 슥 보기만 할 뿐. 경비병들의 시선이 크리사오르에게로 옮겨갔다.
“얘는 누구지?”
크리사오르는 침을 삼켰다. 엔시드가 그런 크리사오르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참. 거 기억력 너무 나쁜 거 아니에요? 크리스잖아. 크리스. 대장장이네 크리스.”
“그, 그랬던가?”
“가끔 일 도와주는 거 알면서 그러시네.”
엔시드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병사들을 구워삶아버렸다. 병사들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면서도 그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크리사오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엔시드는 일을 끝내고 성 안의 도서관으로 크리사오르를 안내했다. 시골이라 그런지 크진 않았지만 성주의 도서관이라 자료는 나름대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곳곳에 먼지와 거미줄이 쳐진 게 눈에 들어왔다. 관리가 부실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찾는 자료가 있을까 걱정되었다.
엔시드는 크리사오르의 등을 살짝 치면서 그를 들여보냈다.
“원래 첫째 도련님이 계시면 들어오기 힘들지만 지금은 없을 시간이야. 수고해.”
“도련님이 왜요?”
“말도 마. 평민이 손대면 더러워진다나 뭐라나.”
작게 소곤거린 후에 엔시드는 물러났다. 크리사오르는 엔시드가 베푼 호의를 위해서라도 그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빨리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아니고…….”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수십 권의 책을 뒤적거렸지만 눈에 띌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게다가 시얀 지방이라는 곳은 여행기나 지리책, 사건에 관련된 서적은 무척 부족했다. 시골인데다가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다른 곳으로 나가려면 강을 타야만 한다는 게 큰 원인일 듯싶었다. 역시 여길 벗어나서 큰 도시로 가야 하는 걸까. 크리사오르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이젠 얼마 남지도 않았어. 크리사오르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아 먼지가 쌓여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이제 여섯 권. 그마저도 원하는 내용이 없다면 몇 십 년은 묵은 지도를 가지고 무작정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물어뜯고 싶어 하던 드래곤들은 이때다 하고 내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지. 자리에 미련은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소년은 마음이 급했다.
그때 엣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엔시드가 손을 휘저으며 나아오고 있었다.
“우와. 먼지 좀 봐. 여기 청소 누가 담당하는 거래?”
“어. 엔시드씨.”
“미안. 역시 밖에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너무 심심하더라고.”
싱긋 웃어주는 엔시드를 보니 괜히 미안해져서 크리사오르는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아냐. 뭘.”
그 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리는 것으로 추측해도 여러 명이었다. 엔시드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리곤 소년을 갑자기 안쪽으로 떠밀었다.
도서관 안쪽엔 벽이 회전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크리사오르의 눈이 커졌다.
“무, 무슨?”
“쉿.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마.”
설마 벌써 들킨 걸까? 크리사오르의 표정이 굳어졌으나 일단은 엔시드를 믿기로 하고 안에 앉아있었다. 귀를 벽에 바짝 붙이니 두꺼운 돌 벽 사이로 밖의 소리가 들렸다.
“네놈은 여기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제가 이번에 꼭 보고 싶은 책이 있어서…….”
짜악. 따귀를 올려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목이 돌아갔을 법한 충격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평민이 어디서 제 주제도 모르고!”
크리사오르는 당장이라도 나가서 엔시드를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나가면 엔시드가 더 곤란해진다는 것도 잘 알았다.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고,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게 분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상대를 매도하는 말들이 들렸고, 크리사오르는 견딜 수 없어 귀를 막아버렸다. 그 폭언이 멈춘 건 시종이 성주에게 가봐야 한다는 전갈을 전하고 나서였다.
밖이 조용해지자 크리사오르는 조심해서 나왔다. 한쪽 뺨이 퉁퉁 부은 엔시드가 크리사오르를 맞아주었다.
“에…… 엔시드씨…….”
“아아. 괜찮아. 얼음찜질 좀 하면 나아.”
아무렇지 않게 씩 웃는 모습이 소년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했다. 소년의 눈가가 촉촉해진 걸 보고 엔시드는 당황했다.
“어엇. 울 건 없는데.”
그러면서도 엔시드는 아이를 감쌌다. 참 여리구나. 청년은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은 자료였지만 엔시드는 기어코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다.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 소년이 책을 건네주었다. 그는 능숙하게 책을 뒤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사건사고를 모아놓은 기록이었다.
“뭐지. 이 지역은?”
“네?”
그 말에 크리사오르가 잽싸게 내려왔다. 뭔가 힌트라도 발견했나 싶어 목을 길게 뺐다.
“아니. 이 지역은 우리 시얀 지방 근방인데. 유독 실종사고가 많이 나서 말이야.”
“정말요?”
크리사오르가 살폈다. 근방이라고 해도 시얀 지방은 꽤나 넓은 편이었기 때문에 엔시드의 집 뒷산을 넘고도 한참을 가야지만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원래 특산물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으나,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수백 명을 넘은 이후로는 아예 성주가 접근 금지를 선포한 상태였다. 그래도 가끔씩 가보겠다고 도전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어쩌면, 관문이 있는 장소가 여기일지도 몰라. 소년이 엔시드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어? 네가 찾던 거야?”
크리사오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밖에 안 있었지만 이제 간다니 어쩐지 아쉬운걸.”
소년에게 짐을 한 아름 싸 주고도 엔시드는 정말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잔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고, 도우미는 꼬리를 쳤다. 마치 인사하는 것 같았다. 크리사오르는 뺨을 긁적였다.
“저, 정말로 감사했어요. 신세 많이 졌어요.”
“아냐. 아냐. 나야말로 오랜만에 다른 곳에서 온 손님 보니까 반가웠어.”
뺨의 통증도 아랑곳 않고 씩 웃어 보이는 엔시드를 보곤 크리사오르는 잠시 망설였다. 감히 또 오겠다는 말을 해도 될까. 또다시 폐를 끼치는 것 아닐까. 잠시 망설이다가 크리사오르는 등을 돌려서 몇 발짝 옮겼다. 집과의 거리도 꽤나 멀어졌을 때였다.
“잘 가!”
돌아보니 엔시드가 팔을 크게 흔들어주고 있었다. 순간 크리사오르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거뒀다. 정신차려보니 이미 말이 입에서 나가고 있었다.
“다음에 올 수 있으면 또 올게요!”
크리사오르도 다시 손을 흔들었다. 날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게 보였다. 석양을 뒤로 하고 소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별 무리 없이 도착한 곳은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계의 숲 너머로 드래곤의 성지에서만 자생하는 풀과 나무가 여럿 보였다. 높고 큰 수풀을 헤치고 나간 곳에는 정말로 관문이 있었다. 인간이 오기엔 꽤나 험한 곳이라 결계를 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왔다가 돌아오지 못한 인간이 많았던 것이겠지, 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소년은 발을 내딛었다. 드래곤 성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이 되어가는 인간계와 달리 신수계는 이제 막 아침 해가 솟아올라 성지를 비추고 있었다. 엔시드의 집에 비해 너무나도 큰 성이 보였다.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자 그동안 수장이 사라졌다고 소동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복도에 거의 쓰러져서 잠을 청하는 부하들도 몇몇 눈에 들어왔다.
크리사오르는 책상에서 날짜를 확인하고 잠시 미소를 지었다. 하루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계산해보니 열 시간 정도였다. 시차가 크지 않다는 건 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단 의미였으니까. 처음엔 우연이었지만 다음엔 제대로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소년은 그 당시엔 이 다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번의 만남이 끝이 아니었다는 걸. 길고도 짧았던 30여 년 만남의 시작에 불과했다는 걸.
엔시드와 난 이렇게 만났어. 솔직히 첫인상이 좋진 않았을 거야. 본의가 아니었대도 우리를 무너뜨렸었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날 따뜻하게 받아들여주고 돌아갈 때도 도와줬지. 훗날 왜 도와줬는지 물어보니 엔시드는 씩 웃기만 했어.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덴 이유가 없다면서. 어떤 친구였는지 더 실감나게 표현해주고 싶지만 내 솜씨로는 이것이 한계네. 다들 긴 이야기 들어주느라 고생했어. 고마워.
- 끝 -
음... 쓰다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소설 쓰시는 분들의 많은 태클 바랍니다.
1. 크리스의 실제 업무 처리 능력 및 그 쪽 세계에 대한 묘사
2. 엔시드가 크리스의 성 탐험을 위해 준비 및 잠입하는 대목을 뻥튀기하면, 엔시드의 사려깊은 면모가 좀 더 부각될 겁니다.
1번은 제 나름대로 수정해서 올려드릴 테니, 2번은 안샤님이 직접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크리스가 첫등장하는 부분을 제 식대로 보강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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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검토하는 중이었다. 찌푸린 미간과 앙다문 입술만 아니었더라면 웬 꼬마가 장난을 치는 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책상의 주인은 매우 앳되어 보였다(소년=앳되다 의미중복). 빗질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아서 산발한 머리카락은 눈까지 가렸고, 춥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껴입은 옷의 소매 밑에선 이상할 정도로 가는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그 이상한 조합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고 처리하는 데까진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소년은 한숨을 쉬고는 방금 읽은 서류에 서명했다.
(중략) "…그나저나 이 사건은 대체 뭐지? 밑도 끝도 없이 행방불명이라니…그것도 곳곳에서….(소위 '포탈'이 곳곳에 위치해 있음을 뜻함)" 소년은 일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주변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라도 감지할 수 있는 불안한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소년의 주변에 생겼던 균열이 그를 뒤덮었다. 동시에 종이더미가 균형을 잃고 와르르 쓰러지면서 그 균열을 감췄다. 종이더미 사이로 바닥이 드러났지만 책상의 주인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