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이 약간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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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의 열기
그냥 고백하는 건데, 난 음악이 정말 싫어.
음악이 대단한 감동과 전율을 불러일으키고 삶의 애환과 기쁨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론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제적으로도 아주 잘 알고 있어. 베토벤의 《운명》을 처음 때의 감격, 조성음악 체계를 무너뜨린 것으로 평가받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첫 화음이 불러오는 깨달음, 내가 그런 걸 못 느낄 것 같아? 그래, 솔직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정도는 아니겠지. 어쨌든 느끼는 건 느끼는 거라고. 그러니까 말을 좀 고치자면 나는 음악을 정말 싫어하는 건 아니고, 단지 그냥, 모든 음악이 딱 한 소절로 이루어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야.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기에 세상 모든 음악은 너무 길어. 처음 8초가 딱 좋잖아! 그 다음부터는 그냥, 순수하게 지루해 죽겠어. 바로 지금이 딱 그래.
“일어나, 푸파. 다음 곡 시작해.”
좀 내버려 둬! 비엔나 봉봉이 지루한 클래식에다가 지루한 민속음악까지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애초부터 피해 다녔을 텐데! 솔직히 아까 곡이나 지금 곡이나 똑같잖아! 민속음악 좋다 이거야, 처음 8초는 나도 꽤 재밌게 들었다고. 문제는 그 다음 8초가 이전 8초랑 거의 똑같게 들렸다는 거지.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 이 멍청한 야외 콘서트는 저녁 여덟 시 반에 시작했고, 이제 열 시야. 소름끼칠 정도로 효과적인 고문이지. 내 손톱을 하나하나 뽑았으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지루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7월 금요일 밤마다 열리는 이 문화음악 콘서트-벨루베니센이 눈물 나게 지루한 도시 루벤에서 그나마 재미있는 이벤트라는 건 인정해. 콩알만한 광장에 앉아서 멍청한 음악이나 듣고 앉아 있는 게 그나마 재미있는 이벤트라는 게 루벤의 한계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만 어쩌겠어, 수도사 유령들의 취향이 이런 걸. 도시 사방팔방의 지루한 장소에서 지루한 음악을 연주하면 지루한 사람들이 모여서 지루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4제곱으로 지루한 이벤트의 첫날부터 그럼 왜 나와 있냐고? 내가 나오고 싶었을 리가 없잖아. 이런 걸 지시한 사람이 달리 누구겠어, 내가 더 많은 감정적 경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 아르투아 교수님이시지.
기숙사에 처박혀 있었다고 이것보다 덜 지루하지는 않았을 거고, 그러니까 꼭 벨루베니센에 참여해 보라고 말씀하신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이긴 해. 유학생도 아니고 어디에 정식으로 등록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사람도 없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음악이 지루한 건 지루한 거고, 7월의 금요일을 전부 메스로 잘라 내버리고 싶은 심정인 건 엄연한 사실이란 말이야. 게다가 정말 끔찍한 부분이 뭔지 알아? 나랑 같이 나온 비엔나 봉봉하고 쿨도어가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똑같은 얘기만 한다는 거야.
“하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비엔나 봉봉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어. 처음 들을 땐 좀 새롭더라고. 이 사람이 우울해하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거든. 하지만 2주 동안 내내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봐. 토할 것 같다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래도 좀 나아지지 않겠냐.”
쿨도어는 원래부터 좀 지루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목소리가 착 가라앉으니까 그게 훨씬 심해졌어.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당장 저 입을 뜯어내버리지 않는 건 단순히 저녁식사 후에 약을 제대로 챙겨먹었기 때문이야. 황홀한 분노 대신에 질척한 무력감, 똑같은 밴드가 똑같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나도 알아.
지난번 사건에서 내가 하프의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와,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어색하다) 영혼까지 구하지는 못했어. 완전히 줄이 끊어진 거지. 이 농담은 비엔나 봉봉 앞에서는 하지 않았지만, 이것만큼 적절한 비유가 없다는 건 비엔나 봉봉도 인정해야 할 거야. 전에 문병 갔다가 팔을 물어뜯길 뻔 했던 게 걔거든. 얘기 들어 보니까 집안에서는 어떻게든 유학을 계속 시키려고 했다는데, 공부는커녕 사람들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지경에 놓였으니 어쩌겠어. 곧 한국으로 돌아갈 거래. 시시한 결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구해주기 전에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 에이, 아니다. 그거라고 더 재밌었을 것 같지도 않네. 어쩌겠나, 세상은 결국 지루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음악이 조금 더 밝은 분위기로 바뀌고 쿨도어가 드디어 “하프 스스로 이겨내야 할 일이지.” 하면서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지만, 그래도 지루함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맞다, 푸파. 너 남자친구랑은 왜 같이 안 왔어?”
비엔나 봉봉이 하필, 하필 이렇게 지루한 지금, 하필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을.
남자친구라, 그래, 남자친구.
남자친구 있지. 진짜로 있어. 체육관에서 운동하다 만났고, 체육관이란 데가 다 그렇다시피 땀에 흠뻑 젖어서 호르몬 냄새 풍기면서 “저기, 러닝머신 속도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전부터 봤는데 너무 무리하게 들려고 하는 거 아니야?” “진짜 괜찮아? 진짜?” 뭐 이런 시시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어느 새 가까워졌고, 나도 만사가 지루해서 몸이라도 학대하지 않으면 운동도 제대로 안 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걱정해줘서 고마워” 같은 시시한 대답을 해 주면서 더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 보니까 벌써 일주일째 사귀고 있더라고. 나보다 몇 살 많고, 대학 직원 아들인가 그렇고, 눈은 녹색이고 머리카락은 캠퍼스 안 카페에서 파는 토피넛 라테랑 비슷한 색이어서 ‘토피’라고 불렀더니 쓸데없이 좋아하는 그런 남자애지. 내가 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 알겠지?
소름끼치게 지긋지긋하다고!
그거 알아? 교수가 나한테 다양한 감정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지만 않았어도, 그게 내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말만 안 했어도 토피하고는 말도 안 섞었을 거야. 나한테 말을 두 번 이상 거는 순간에 들고 있던 아령을 머리에다가 집어던져버렸을 거라고. 걔랑 사귀면서, 같이 커피 마시고 얘기하고 커피 마시고 얘기하고 영화 보고 커피 마시고 얘기하는 동안 내가 어떤 지옥을 느꼈는지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어느 정도였냐면, 처음 데이트 하고 나서 바로 교수한테 찾아가서 약 좀 늘려 달라 그랬어. 거절당했지. 기숙사로 돌아가서 바로 눈에 보이는 걸 집어 던졌는데 노트북이더라고. 아주 다행히 금만 좀 가고 작동에는 문제가 없더라.
요점은 내가 아직도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거야. 이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연애랑 똑같다고는 생각 안 해. 비슷하지도 않겠지. 연애란 게 이딴 끔찍한 심리치료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못 해서 안달일 리가 없으니까. 근데 적어도 나한테는 그게 그렇단 말이야. 사랑, 애틋함, 날아갈 듯 가벼운 몸,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쁨, 그 온갖 지루한 표현들이 전혀 가슴에 박히지를 않아. 다양한 감정 경험이 필요하면 뭘 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고는 처절한 지루함뿐인 걸. 물론, 비엔나 봉봉한테는 이렇게만 말했어.
“같이 오긴 아직 좀 어색해서.”
“안 돼, 푸파.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계속 같이 있어야 되는 거야!”
왜 이런 지루한 일에 저렇게 열을 내는 거람? 하기야 이렇게 생각하니까 내 연애전선 꼬락서니가 이토록 참담한 거겠지. 어쩌면 지금은 전문가의 말을 듣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믿을만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보다야.
“아직 연애 초반이잖아. 계속 같이 있을수록 무한히 기뻐질 시기란 말이야. 벨루베니센에서 같이 음악 듣는 것만큼 로맨틱한 것도 없잖아. 이건 기회야, 푸파!”
더 많은 감정을 체험할 기회 말이지. 솔직히 나는 이게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는 꽤 회의적이지만, 그래도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야. 빨리 치료될 수만 있다면,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그 애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작정이니까. 정말이지 내 사랑스러운 러브 미 텐더를 위해서라면 뇌수술을 받으라고 해도 받을 거야. 그러니까 진짜 싫지만, 진짜 지루할 거라는 걸 뼛속까지 이해하고 있지만, 다음 벨루베니센에는 토피랑 같이 와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은 방법이겠다. 그 전에 약 좀 늘려 달라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약 없이는 성립되지도 않는 내 특수한 연애사정에 대한 얘기가 콘서트 끝날 때까지 이어지나 싶었는데, 정말이지 타이밍 좋게 구세주가 등장했어. 항상 말쑥하게 차려입고 안경도 낀 철학 전공의 유학생, 머리도 좋은데다가 친구들보다는 자기 담당교수(라틴음악 가수처럼 생겼고 옷 잘 입는 아줌마)랑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닥터’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이야. 3일 밤을 새서 공부를 해도 말짱한 닥터답지 않게 잔뜩 지친 표정인 게 특히 맘에 들었는데, 덕분에 비엔나 봉봉이 내 복잡다단한 연애 문제에서 관심을 좀 돌렸거든.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어?”
닥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대답했어.
“교수님하고 같이 있다가 일을 좀 당해서 경찰서까지 다녀왔거든. 방금 교수님 댁에 모셔다드리고 오는 길이야.”
이 시점에서는 나도 관심을 좀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지. 닥터하고 경찰서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하기야 우리 엄마도 나에 대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 마지막까지 말이야.
“무슨 일 있었는데?”
비엔나 봉봉이 나 대신 지루한 질문을 해 주니까, 닥터는 의자 하나를 끌고 와서 털썩 주저앉았어. 생각보다 긴 이야기인 모양이지. 지루한 얘기겠지만 너무 지루하지 않으면 좋겠는데ㅡ하고 생각한 것도 잠시, 들어 보니까 그렇게까지 지루한 얘긴 아니더라고.
“교수님이랑 펍에서 간단히 한 잔 하고 있었지. 근데 교수님이 화장실 갔다 오신다고 일어나셨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시는 거야. 화장실이 골목 쪽으로 좀 들어가야 있어서 그쪽으로 가 봤는데……,”
“봤는데?”
“교수님은 쓰러져 있고, 누가 그 옆에 서 있더라고.”
와아, 진부하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 교수가 멀쩡히 집에 들어갔단 얘기를 사전에 안 들었으면 훨씬 더 재밌을 뻔 했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그 사람은 도망갔고, 가까이 가서 보는데, 교수님 옷도 흐트러져 있고 정신도 잃으셨고. 다행히 좀 있다가 정신 차리시긴 하셨지만.”
“그, 그거 당한 거?”
잠깐, 비엔나 봉봉. 외국에 오래 살아서 한국말 까먹는 거 이해는 하는데, 나도 강간인 걸 알고 너도 강간인 걸 알고 닥터도 강간인 걸 아는데 뭘 그렇게 지루하게 숨기고 그러냐. 실망스럽게도 닥터는 고개를 저었어. 옷만 조금 벗겨져 있고 강간 흔적은 없었고, 목 졸린 자국이 전부였다더라고. 진짜 흥미로운 건 이 다음이었어.
“경찰서에서 얘기하는데 교수님이 그러시더라. 자기 목을 조르면서 범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노래?”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였대.”
그래, 이런 게 있어야 그나마 좀 재밌지. 70년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여자 목을 조르고 덮치는 강간범. 화석 같은 이 도시에 필요한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니까. 그러고 보니 나 최근에 범죄심리학 강의 들은 적 있는데, 생각보다 훨씬 지루해서 금방 때려치웠지만 조금 써먹어볼 수 있으려나.
“금방 깨어난 걸 보면 목이 심하게 졸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범인은 스스로도 범행을 주저하고 있었겠네. 옷을 벗겨놓고도 우물쭈물했다는 건 그런 죄책감 때문이거나, 아니면 성적인 문제가 있다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ㅡ이렇게 말해놓고 보니까 비엔나 봉봉, 쿨도어, 닥터 셋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더라고. 내가 도대체 몇 번이나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강간범 정도 화제가 아니라면 도저히 내 정신을 자극할 수 없다고. 날 때부터 이랬던 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아니, 바라지도 않는다. 비엔나 봉봉이 괜히 화제를 돌리는 것도 뭐 그러려니 해야겠지. 지긋지긋한 음악은 다시 시작됐지만 내 머릿속에는 한 방울도 흘러들어오지 않았어. 겨우 재밌는 일이 생기려는 참이잖아. 파삭파삭하게 메말라버린 내 안쓰러운 영혼을 적실,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사실 그렇게까지 좋은 기회는 아닐지도 몰라. 왜냐면 그 후로 일주일 내내 범인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거든. 흔적도 없고 목격자도 없고 다른 범행도 없어. 벨루베니센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공연에 쏠리고 주변이 혼잡한 틈을 타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니, 그 정도의 기회가 다시 오지 않으면 아마 섣불리 나서지 않겠지. 예상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지루한 사람일 거라고.
시간이란 대체로 끔찍하리만치 느리게 흘러가지만, 그래도 흘러가기는 한다는 점이 그나마 봐줄만한 부분이지. 7월의 두 번째 금요일, 제 2주차 벨루베니센의 날이 마침내 다가왔어. 아침 상담 때 교수가 나한테 행운을 빌어 주더라고. 강간범 잘 쫓아다니라고 빌어 준 건가? 하고 어리둥절하게 있으니까 교수가 그러더라.
“데이트잖니. 예쁘게 꾸미고, 잘 하고 오렴.”
아 젠장, 완전히 잊고 있었네. 원래대로라면 약 복용량을 어떻게든 늘리든가, 아니면 내가 멋대로 몇 알 더 삼키든가 해서 축 늘어진 상태로 나갈 생각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었지. 오늘 데이트에서는 무기력하게 있으면 안 돼. 금요일이잖아? 토피야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훨씬 재밌는 사람이 음악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훨씬 재밌는 짓을 벌일지 모르잖아?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흥분한 상태였고, 그 덕분인지 데이트 자체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 커피 마시고 얘기하고 커피 마시고 얘기하고 음악 듣고 커피 마시고 얘기하고 음악 듣고 얘기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는 거야. 끔찍하리만치 지루했지만, 적어도 끔찍하리만치 끔찍하리만치 지루하지는 않았지. 토피는 안 그래 보이더라. 내 시선이 계속 으슥한 골목으로 향하는 걸 눈치 챈 거겠지. 자기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괜히 말 걸고, 나한테 혹시 화났냐고 물어보고, 안쓰럽게 안절부절못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결정적인 실수까지 했지. 유럽 북서 해안지방의 음악을 간신히 다 듣고 나서, 내가 본격적으로 뒷골목을 쏘다니려고 작별인사를 했을 때 말이야.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게. 요즘 좀 위험하잖아.”
그 날 내내 결국 강간범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잡지 못해서, 혹시 재미가 전부 사라져 버릴까봐 내가 상당히 절박한 상태였다는 걸 고려하면 이건 치명적인 실수였지. 토피 잘못은 아니야. 애초부터 날 이해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걸. 그래서 무시하고 떠나려고 했는데 토피가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하더라고. 정확히 똑같이, 이렇게 말했어.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게.”
그 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두 번째 똑같은 말을 들었을 때의 그 지긋지긋함을, 참을 수 없는 지긋지긋함을, 그로부터 끓어오르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범죄자를 쫓아다니는 건 그나마 재미있는 일이고 기숙사까지 토피랑 걸어가는 건 전혀 그렇지 않지만, 난 지금 치료를 받는 중이니까, 그 애를 만나려면 치료를 마쳐야 하니까, 감정을, 경험을, 젠장,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고, 종이컵은 손 안에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채였어. 이런 무력감 정말 싫어. 이런 무력감을 싫어하는 것도 이젠 지루해. 기숙사까지 가는 길은 터무니없이 길었고, 그나마 내가 기대하고 있던 건 토피랑 헤어진 뒤에 다시 시내로 나가서 온 사방을 뒤지고 다니는 거였는데, 마침 기숙사 앞에서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더라. 두 번째 사건이라고.
“그 맥주집 주인이 당했대.”
그 사람 알아. 20대 후반에 백인. 나잇대도 인종도 바뀌었어. 성범죄자인데 선호하는 피해자가 특별히 없는 건 이상하네.
“어디서? 그쪽 숲길?”
장소도 바뀌었고. 으슥한 곳이면 어디든지 괜찮은 건가. 골목에서 한 번 했으니 숲에서 한 번, 자기 환상 충족보다는 경찰을 따돌리려는 목적으로 꽤나 냉정하게 움직였네.
“아니, 당한 건 아니고. 목이 심하게 졸려서 한참 못 일어났다더라.”
성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 저번하고 같네. 폭력성은 심해졌어. 범인이 점점 과격해지고 있다는 뜻이야.
“이어폰 꽂고 계속 노래 부르고 있었다던데? 퀸 노래, 그,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 흥얼거리고 있었다더라.”
노래도 달라졌어? 인종, 나이, 장소, 폭력의 정도, 노래까지 범행의 세부사항이 전부 달라졌단 말이야? 이건, 이건……, 이상한 일인데, 단순한 성범죄가 아닌데, 조금 더 알고 싶은데, 그러니까 현장을 봤어야 하는데,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게.” 그래, 이것 때문에, 감정을 경험하는 게 중요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구나.
기숙사 건물 앞에 한참 가만히 서 있었어.
그러다가 천천히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벗어두고, 간단히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 비참한 시간 속에서 그나마 재미있을 수도 있었던 일을 눈앞에서 간단히 놓쳐버렸다는 걸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떠올려버렸다는 걸 깨달았지. 이렇게 지루한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샤워기는 물론이고 마우스, 옷장, 열쇠, 헤드셋, 뭐든 부서질 수 있는 건 다 부서져 있더라고.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재미있는 무언가를 놓쳤다는 기분이 들 때 어떤지 알아? 세상 모든 게 갑자기 역겨워져. 무가치해져. 오직 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정교하게 짜인 고문 시스템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손이 아파. 모든 게 그냥 지루해, 따분해, 지긋지긋해……, 다음 벨루베니센까지 일주일이나 남았어.
일주일. 난 어떻게든 견뎌냈어. 초인적인 노력, 인간 정신의 승리였지. 범인이 그나마 좀 재미있는 양상을 보여줘서, 그나마 그게 좀 재밌을 거 같아서 간신히 희망을 가질 수 있었어. 지금도 내가 어떻게 일주일을 버텼는지 신기할 정도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러갔고 음악의 밤이 돌아왔고. 그래, 토피와도 다시 만났지. 교수가 어떻게든 연애를 지속해보라고 말했거든. 이게 정말 좋은 치료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지난 연애 기간 동안 내 정신은 완전히 망가져가고 있는데ㅡ그 전이라고 멀쩡했던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이번 데이트에서는 상당한 개선점이 있었어. 내가 체육관에도 얼굴을 안 비추고 그러니까 토피가 잔뜩 겁을 집어먹어서는, 이번엔 내가 하자는 대로 하더라고. 음악은 거의 듣지도 않고 루벤의 온갖 으슥한 곳만 찾아다녔지. 정확히 뭘 하려는 건지까지는 말을 안 해줬지만, 아마 토피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옛날 돌담이 그대로 남아있는, 루벤 특유의 시대착오적인 지루함으로 꾹꾹 들어찬 길을 둘이서 걷는 것도 꽤 로맨틱하다고. 내 머릿속에 다른 남자 생각밖에 없다는 걸 알았어야 하는데.
나는 그저 즉흥적으로 제일 으슥해 보이는 길을 골랐을 뿐인데 그게 꽤 운이 좋았더라고. 왜냐면 저 멀리 엎어져서 몸을 들썩이고 있다가, 내 발소리를 듣고 황급히 일어나서 도망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까. 범인은 너무 멀리 있었던 데다가 발도 빨라서 잡을 수도 없었고 어디로 갔는지도 알 방법이 없었지만, 적어도 피해자한테는 접근할 수 있었어. 보아하니 대학생에 흑인. 또 연령과 인종이 달라졌네.
“정신 들어요?”
피해자는 기절해 있었는데 정신은 빨리 차리더라. 폭력성이 약해진 건 아니었어. 목에 자국이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거든. 이번엔 바지가 완전히 벗겨져 있었지만, 옷은 더 벗겼는데도 성관계의 흔적은 없음. 그런데 범인은 도대체 왜 올라타서 몸을 들썩들썩했던 거지? 그리고 또, 그래.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었지.
“노래! 뭔가 노래 흥얼거리지 않았어요?”
대답은 바로 나왔어. 그리고 이건 바뀌지 않았어.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가 범인한테 무슨 의미라도 있는 모양이지.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토피한테 구급차를 부르게 시키고, 위험하다는 토피의 말을 받아들여서 기숙사로 돌아가고 나서, 어라, 왜 이렇게 끝났지? 조금 더 재밌을 줄 알았는데? 나 방금 범인을 만났잖아? 피해자랑 얘기도 했잖아?
설마, 설마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을 나는 최대한 떨쳐내려고 애썼어.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런데 이게 그냥 불길한 상상만은 아니었어.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일이 나한테 다시 일어났다는 생각이 점점 확실해졌던 거야.
그게 뭔지 알아?
그러니까, 지난번 사건이 끝나고 내가 생각한 게 그거였잖아? 다른 사람 범죄를 뒤쫓는 것도 의외로 재밌다고? 그래서 이번에도 뭔가 재밌는 사건이 벌어져서, 계속 범인의 뒤를 따라다니려 하고 실제로 만나기도 하고. 이게 두 번째지. 두 번째. 두 번째라는 게 얼마나 불길한 건지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대체로, 두 번째 반복되는 순간 모든 건 지루해지게 되어 있어.
그리고 이번으로 두 번째, 남의 범죄를 뒤따라 다니는 게 벌써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했던 거야.
난 뭘 위해서 일주일을 버텨왔던 걸까.
이젠, 이젠 더 부술 것도 남아있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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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