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 NOON -4

잉어킹 0 1,988

인물(+고인) 소개

 

 

총잡이- 주인공. 키는 7피트 반, 몸무게는 220파운드. 개조인간 총잡이이다. 지난 이야기에서 지옥에서 돌아온 변신사이보그 트랜스젠더(원래는 카르네)를 처치하고 죽음과 향락, 도박의 도시 데스 베이거스로 향하게 된다.

 

할리- 맥의 애마. 애팔래치아 종. 오토바이로 변신할 수 있으며, 아슬아슬한 장면을 찍기 위한 로켓식 비상탈출장치도 구비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남녀를 초월한, 트럭에서 거대 로봇으로 변신하는 무적의 존재(자칭). 사실은 총잡이가 고자로 만들어버린 카르네이다. 이런 재생괴인들이 그렇듯이 몹시 복잡한 과정을 통해 부활해서 총잡이와 리턴매치를 벌이고 압도하지만, 총잡이의 비열한 꼼수에 걸려들어 대서양 어딘가로 떠내려가 리타이어.

 

칼데라 수장룡- 깊은 호수에 주로 서식하는 생물. 살아있는 화석으로, 오아시스에 살고 있던 마지막 개체 하나가 물을 뜨러 온 총잡이를 습격했다가 머리 없는 시체가 되었다.

 

#1

 

때는 이미 밤이었고, 멀리서 폐허가 된 마을이 보였다. 날이 거의 저물었고,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사막에서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 기수를 돌려 마을 어귀에 접어들자 시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넝마 같은 옷을 걸친, 미라화된 여성의 시체였는데 갑자기 시체가 요란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흠칫 놀라서 총부터 뽑았지만, 시체가 말을 했다. "쏘, 쏘지 마세요! 나는 아직 살아있어요!" 하마터면 진짜로 머리를 날려버릴 뻔했다. 자세히 보니 심하게 피골이 상접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멀쩡한 사람이었다. 보통 이쯤 되면 여자가 총을 뽑아 내 머리에 구멍을 뚫어놓는다던가, 근육 고릴라로 변신해서 내 척추를 접으려 들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총을 다시 홀스터에 넣고 여자에게 말했다.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어? 여긴 어떻게 돼먹은 동네야?"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허공을 주시하고 있던 미라 여자는 갑자기 동공이 눈에 띄게 축소되더니 발작하기 시작했다. "안돼... 너도 죽게 될거야... 으그그부그으극그극... 인디언의 주술이... 갸아아아아악!" 그러더니 여자는 바닥에 쓰러져서 눈을 까뒤집고 전신을 비틀며 경련했다. 나는 급히 말에서 내려서 되는 대로, 가지고 다니던 땀에 절어 있는 손수건 하나를 여자의 입에 물렸다. 한참을 몸을 비틀던 여자가 잠잠해졌다. 나는 정신을 잃은 여자를 할리에 싣다시피 해서 태우고, 오늘 밤 내가 묵을 곳을 찾았다. 

 

 여자의 말 때문인지 풍화되어 가는 마을은 더더욱 음산하고,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만드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서 여자가 안장 위에서 이리로 저리로 흐느적거렸다. 시뻘건 페인트로 집집마다 원주민의 티피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괴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 여자를 제외한 사람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고, 시체조차도 없었다. 뭔가 지독하게 잘못된 곳이었다. 하지만 귀신이 튀어나오건 원주민 주술사가 저주를 걸건 간에, 저 사막에서 노숙하느니 여기서 밤을 보내는 게 나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그나마 깨끗한 폐가를 찾아 안에 들어갔다. 단칸짜리 오두막이었는데, 안에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부숴진 의자니 탁자가 널브러져 있고, 깨진 창문에는 찢어진 커튼이 밤바람을 받아 제멋대로 나부끼고 있었다. 침대도 흙을 다져 만든 바닥에 긴 자국을 남기고, 기괴한 각도로 놓여 있었다. 눕기만 해도 바스라져서 무너져 내릴 것 같고, 시트 위에서 갈색의 무언가가 들척지근한 냄새를 내며 썩어가고 있어 그다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탈 수 있도록, 할리는 집 앞에 묶어뒀다.  나는 여자를 침낭 안에 눕히고, 창가쪽 벽을 등지고 앉아 총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역시 너무 찝찝해서 잠들고 싶지 않았다. 하루만 어떻게 보내면 되겠지. 데스 베이거스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도착하면 비싼 고기를 먹고 싶었다. ......그리고 놈을 찾는 대로 바로 처단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개가 점점 무거워졌다. 몇 번 부질없이 저항하다가, 나는 깊은 잠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뇌리에 떠오른 건, '설마 죽기야 하겠어?'란 무사태평한 생각이었다.


#2

 

할리의 놀라 우는 소리가 내 잠을 깨웠다.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명을 지르자, 놈도 내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물론 썩어버린 성대에서 목소리 같은 게 나올 리가 없었으므로, 놈이 하고 있는 건 그저 기분 나쁜 흉내일 뿐이었다. 마주보며 비명을 지르다가, 지금 꼴이 어떨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으면서 칼을 들어 올리는 놈에게 총알을 한 발 선물해 주었다. 시체의 상반신이 증발해 버리며, 남은 부분들이 흩어져 뒹굴었다. 뒤로 나동그라진 하반신이 이쪽으로 부자연스럽게 기어오기에, 한 발 더 쏴서 완전히 박살을 내 버렸다.

 

방 안을 보니, 침낭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여자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손질하던 총을 대충 챙긴 후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총을 조립하며, 비어있던 약실을 가득 채웠다. 이 마을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런 뒤 문을 박차고 열자 밖에 구역질나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까와 비슷한 시체가 어림잡아 열 구. 그리고 사막에 서식하는 돌연변이 괴물들과 인간을 누덕누덕 기워 만든 무언가가 세 마리에서 네 마리. 누구 솜씨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끔찍하게 조잡한 놈들이었다. 기능이나 실용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든 움직일 수만 있게 만들려고 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멀리서 할 리가 푸르륵거렸지만, 시체들은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놈들은 자기네들끼리 뒤엉켜 무시무시한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더니 문을 걷어차는 소리를 듣자마자 일제히 이쪽을 쳐다봤다. 놈들이 일부는 느릿느릿, 일부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순간 버릇대로 머리를 겨누어 쏘려고 했지만, 산산조각을 내지 않는 이상에야 의미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놈들의 몸 정중앙에 탄두를 선사해 주었다. 총이 네 번 불을 뿜었고, 팔다리와 육편이 나뒹굴었다. 그걸 겨우 피한 키메라 하나가 발톱을 세우고 코앞까지 다가왔다. 오아시스에 살고 있는 변종 물고기를 닮은 놈이었는데, 머리가 두 개였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났는지 썩어버린 비린내가 풍겼다. 하지만 그것도 부질없이 놈의 몸 한가운데에 총구가 틀어박혔고, 곧 물고기 인간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행여 총구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젓갈을 털어내 버리는 동안, 더 많은 그림자들이 폐가에서, 땅 속에서 나타났다. 총구가 반사적으로 놈들을 겨눴다가 흔들렸다. 덕분에 탄환은 애꿎은 땅에 구덩이나 하나 만들었을 뿐이었다. 모래바람이 뺨을 스치는 가운데, 놈들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자기 머리를 오른쪽에 끼고 있는 칠리. 해초 썩어가는 냄새를 여기까지 풍기며 걸어오는 트랜스젠더. 한쪽 팔과 머리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우 건강해 보이는 제인. 그 외에도 마구 풀린 표정으로 기어오는 부모님, 동생, 그리고 새카맣게 탄 마을 사람들까지. 입에서 아무 뜻도 없는 몇 음절인가의 말들이 흘러나와, 바닥에 어두운 얼룩을 만들었다. 그들의 뒤에서 사람이 하나 걸어왔다.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보는 멀쩡한 인간이었다. 원주민이었는데, 옷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거적으로 가린 부분만 제외하고는 온 몸이 문신으로 빼곡히 덮여 있었다.

 

“이 몰락한 마을에 온 걸 환영하네, 총잡이. 내 이름은 제로니모 조라고 하네. 빌리와 유쾌한 친구들 중 한 명이지. 한 때는 여기도 온갖 욕망과 탐욕, 복수가 소용돌이치는 곳이었지. 모두 있지도 않은 금광 때문이었고.”

 

자기 입으로 빌리 쫄따구라고 밝히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줄줄 상황 설명해주는 놈 치고 좋은 의도 가진 놈은 없을 게 뻔하니, 나는 그를 잘 겨누어 쐈다. 반신불수로 만든 다음에 대답을 들어도 늦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총알은 그가 걸친 거적 표면을 미끄러져, 뭐가 그리도 바쁜지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 발 더 쐈지만 마찬가지였다. 거적이 가리지 않은 부분을 겨누어 쏘자, 그 끄트머리가 문어의 손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여 총알을 잡아버렸다.

 

“바보 같은......”

 

“이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담긴 능동형 방탄방검복이지. 총알이나 칼을 충격까지 튕겨내어 착용자에게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해 주고, 사각에서 날아오는 총알은 자네가 본 것처럼 방어해 준다네.”

 

“개소리 집어쳐! 무슨 인디언한테 방탄복 만들 기술이 있다는 거야!”

 

“음? 눈으로 보고서도 못 믿겠나? 선주민의 기술을 너무 무시하는군. 자네들이 동부에 같잖은 배를 타고 오늘 죽네 사네하며 도착했을 때...... 이런. 너무 오래 된 일이라 기억도 나질 않는군. 어디 보자......” 조가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매 순간, 매 초마다 꿈틀거리며 모양이 바뀌었다. “그 때 우리는 달 탐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걸 기념하고 있었군. 아마 발자국이랑 우리 깃발이 아직도 거기 남아 있을 걸세. 자네와 자네의 알량한 문명이 이룩한 모든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은 우리 선주민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네. 달 탐사도, 냉전도, 대통령의 암살도...... 그리고 자네 부모님의 죽음과 복수 역시 마찬가지지.”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놈을 겨눈 채로 쏘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놈이 제일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을 긁고 있었다.

 

“말이 많군.” 좀비들은 대화하는 도중에도 이쪽으로 계속 걸어오고 있었다. 특히 트랜스젠더가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온통 울렸다.

 

“자네 족속들은 우리 동포들을 속이고 고문해서 온갖 기술들을 빼냈지. 자네가 누리고 있는 더러운 문명도 우리의 시체를 주춧돌로 삼고 있다네. 그리고 나서 백인들이 우리에게 던져준 건 좁아터진 보호구역과, 잿빛 미래뿐이었다네. 우리는 엄청난 희생을 치뤘어. 그리고 응당히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있지. 여자 목숨 하나쯤이야 빌리 더 게이키드가 우리에게 약속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는 비록 더러운 백인에 남색가지만-” 그가 손을 젓자,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알록달록한 기둥들이 나타났다. 어릴 적, 인디언 보호구역에 견학 갔을 때 샀던 싸구려 장난감과 섬뜩하게 닮아 있었다. 나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 피했다. 한 차례의 폭발 뒤, 방금까지만 해도 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 몇 개와 약간의 녹은 유리만이 남아 있었다. 모래먼지가 주위를 자욱하게 가렸다. “일이 성공할 경우 내 종족들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네. 자네들에게 빼앗긴, 우리의 정당한 재산을.” 놈이 다시 손짓하자, 땅 속에서 나무로 만든 조각상들이 솟아올랐다. 척 봐도 10마리보다는 많아 보였다. 저마다 오소리니 독수리, 뱀 같은 온갖 동물신의 형상을 했는데, 아까 토템과 조의 문신 이상으로 화려한 문양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자네의 목숨을 거두고, 그를 도우러 가겠네. 선주민 기술력의 정수 앞에 절망하며 천천히 죽어가도록 하게나.” 토템 괴물들과 좀비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몰려왔다. 


#3

 

토템은 계속 날아왔다. 터지는 시간도 날아오는 속도도 제멋대로여서 어떤 건 매가리 없이 날아와서 충돌한 직후에 폭발하질 않나, 어떤 건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는데 불발인지 한참을 박혀 있다가 매운 연기만 피워 올리질 않나. 하지만 하나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끝장이었다. 데스 베이거스고 뭐고 다 끝이다. 거기다 놈이 부리고 있는 괴물 군단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리저리 날아간 토템 덕에, 큰 불이 폐가 대부분을 삼켰다. 그 불에 비쳐, 조가 옛날에 술집이었을 건물 밑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바람에 커다란 간판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벽에 부딪쳐 쿵, 쿵 소리를 냈다.

 

“복수는 허망할 뿐이네. 자네의 그 이기심 덕에 죽어갈 사람들은 어쩔 건가? 자네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지?” 조는 미사일처럼 보이는 걸 날리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머리 위를 토템이 스치고 지나가서, 한참 뒤에 떨어진 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쪽까지 충격파가 퍼지며, 뱃속이 울렸다. 실컷 떠들어대서 내 평상심을 흐트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자네 부모님도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았을 걸세. 그런 것을 모두 용서하고, 다 내려놓고 편해지게. 나는 우리 종족의 부흥을 성취하고, 자네는 안식을 찾고. 얼마나 좋은가?”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손은 이미 놈을 겨누고 있었다. 이 개자식은 몹시 정중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속은 뒷골목에서 서로 부모 욕이나 하면서 낄낄거리는 건달놈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쓰레기에게 보일 인내심은 없었다.

 

“닥쳐, 개자식아!” 총이 순식간에 여섯 번, 불을 뿜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까와 똑같았다. 게다가 놈은 내 쪽을 보고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화염과 파편이 나를 덮쳤다. 방송이 끝난 뒤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처럼, 높은 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시계가 붉게 물들고, 불타는 고통이 전신을 찔렀다. 나는 바닥에서 굴러 몸에 붙은 불을 껐다. 머리카락 탈 때의 냄새를 수십 배 농축한 것 같은 악취와, 살 외의 것이 타는 달큰한 냄새가 섞여 헛구역질이 솟았다. 마지막으로 땅을 크게 차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안돼. 이대로 있다간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진 고기가 되겠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아직 빌리에게 총알도 박아 넣지 못했는데. 제발, 제발......

 

“그리고 복수하러 온 것 치고 그런 도발에 넘어가다니, 자네도 참 무르군.” 몸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간신히 팔과 손가락만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명예로운 죽음을 맞도록 하게. 용감하게 싸웠으니, 전사들의 낙원에 가겠지. 물론 머리와 엉덩이는 빌리가 가져갈테지만.” 시뻘겋게 물든 시야로, 조가 오른손을 허공에 젓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짧은 인생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의 죽음. 그 소름끼치는, 하지만 너무나도 눈부신 미소.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나기만 하면 딱 되는 상황이었건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떠 보니 조는 팔을 몇 번 더 허공에 휘젓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무 여유로워 보여서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너무 쏟아 부은 모양이군. 나중에 다시 주문하면 되겠지.”

 

“그것 참...... 안됐구만.” 하지만 목숨을 건진 게 무색하게, 조는 거적 밑에서 시위만 없는 활 비슷한 것을 꺼냈다. 아무래도 그의 부족은 물건이라는 물건에는 전부 문양을 새기는 게 취미였는지, 역시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패턴으로 덮여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비록 최고의 패 중 하나가 멍텅구리가 되긴 했지만, 자네를 자네가 지금까지 죽여 왔던 우리 동료들과 비슷한 꼴로 만들 수 있는 무기는 차고 넘친다네. 아무리 자네가 교양 없는 집에서 자라났다고 그래도, 옛날이야기는 들어봤겠지? 백인들이 고작 시꺼먼 쇠막대기 하나로 마법사를 자칭하고 있을 때, 우리는 번개로 나무를 쓰러뜨렸지.” 놈이 떠드는 사이에, 몸은 충격에서 겨우 회복된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이 뭔가 쏘거나 날린다면 움직여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맞으면 적당히 구워져서 숨이 끊어질 걸세. 그래도 필요한 부위는 잘라갈 수 있어야겠지.” 그가 아무것도 없는 ‘시위’를 당기자, 원래 화살촉이 걸려 있었을 부분에 눈부신 빛의 구체가 맺혔다. 구체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그리고 그를 쐈다. 하지만 하나도 맞추지는 못했다. 귀중한 탄두는 여전히 미끄러져 튕겨나가거나, 넝마가 잡아버리거나, 아예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뿐이었다.

 

“것 참 안 맞네......” 나는 한 발 더 겨누어 쐈다.

 

“마지막 발악이군. 이제 보니 자네는 정신상태도 글러먹은 것 뿐만 아니라, 총도 못 쏘는구만. 그런 주제에 총잡이라니? 손을 잘라버리게. 뭐, 어차피 잘라내게 되겠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토템 괴물들의 앞발이니 입에서 흉측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나는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아까 낭비해버린 총알 탓에, 이제 약실에는 탄피만 가득 남아 있었다. “죽도록 하게......이게 무슨......!”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노리던 크고 무거운 간판이 떨어지며 그를 덮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의 공격에 조는 당황한 것 같았고, 시위는 놓았지만 구체는 내 오른쪽으로 10피트쯤 떨어진 곳에 꽂혔다. 실로 작은 번개라도 내리친 것 같은 방전이었다. 조는 간판 밑에 깔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탄피를 쏟고, 스피드로더를 꺼냈다.

 

“자네는 지금쯤 꽤 똑똑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 아이들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네의 몸에서 엉덩이와 머리를 분리해 놓을 걸세!” 토템 괴물들과 좀비들이 이빨과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장전은 애저녁에 끝난 지 오래였다. 놈들은 저마다 무수한 파편이 되어 흩어지거나, 폐품이 되어 바닥에 뒹굴었다. 트랜스젠더의 거대한 몸이 주저앉으며 바닥이 흔들렸다. 이쪽으로 기어오려고 하기에, 나는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장전 타이밍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이 둘 정도 있었지만, 손잡이니 발로 후려쳐서 박살을 내 버렸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다시 탄피를 바닥에 쏟았다. 

 

“유리한 상황에서 꽤 재미있는 말들을 하더군, 인디언.” 나는 장전이 끝난 스피드로더를 옆으로 던졌다. 돌에 부딪치며, 맑은 쇳소리가 났다.

 

“도발도 훌륭한 전술의 일환이지.” 조는 아직도 간판 밑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곧 죽을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싹싹 빌어 봐. 혹시 알아? '조상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집에서 벌벌 기며 서로 OO하고 OO해주는 비겁자'라고 하면 내가 팔다리 정도로-” 잔뜩 일그러진 놈의 얼굴을 기대했지만, 이것도 계획대로라는 것처럼 놈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뒤. 돌아보려고 했지만, 날카로운 것이 갈비뼈 사이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고개만 돌려서 보니,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봤던 여자가 내 몸에서 돋아난 이물을 비틀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휴코코코코콕...... 인형들이 신나게 망가지길래 와 봤더니, 이런 추태를 보이고 있을 줄이야. 그러고서도 빌리 더 게이키드의 최측근이야, 제로니모 조? 처음부터 내게 맡기지 그랬어. 완전히 목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여자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는 씩 웃더니, 힘겹게 간판을 밀어내고 놓쳤던 활을 주웠다. “추태라니 실례군, 보니. 이건 어디까지나 전략적 기만일 뿐이네.” 나는 보니라고 불린 여자를 밀쳤다. 여자는 나를 찌른 녹슨 식칼을 쥔 채로,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고 오히려 앙상한 손을 더 앙상하게 보이게 하는 반지를 잔뜩 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미친 것처럼 웃었다. 나는 옆구리를 봤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찔린 부분은 쉽사리 아물지 않고 있었다.

 

“흐클크헤헤헤헤! 인디언 새끼야, 내가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지? 난 돌메이커야! 빌리 더 게이키드의 가장 충실한 부하이자 합중국 최강의 인형사라고!” 자세히 보니 여자의 손에 끼고 있는 반지에서 수많은 실이 뻗어나와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실. 동시에 뒤쪽에 있던 폐가 하나가 폭발하며, 안에서 추악한 거인이 튀어나왔다. 머리는 없고, 덩치에 비해서도 비정상적으로 큰 손바닥에는 이빨이 가득한 입이 찢어져 있었다. 입은 끊임없이 열렸다 닫히며 썩은 액체를 질질 흘렸다. 자세히 보니 이빨은 모두 인간의 두개골을 갈아서 만든 역겨운 물건이었다. 땅에서도 무언가가 무수히 솟아올랐다. 아까와 같은 조잡한 키메라들. 그리고 그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시체들. 자세히 보니 시체들 중 일부는 보니가 낀 것과 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고, 거기서 또 수많은 실들이 뻗어나와 다른 시체를 조종하고 있었다. 놈들은 차례차례 싸울 태세를 갖췄다.

 

“알겠네. 사과하지.  그것보다 이 친구가 더 급할 것 같네만.” 건성건성 대답하며, 조는 또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또 다시 폐촌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가득했다.

 

“네가 말 안 해도 할 거야, 인디언 새끼야! 크햐히햐햐햐햐햐! 2라운드 시작이다, 뇌까지 근육으로 된 총잡이!” 돌메이커가 기괴한 왈츠를 추자, 망자의 군단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분명 살아 있는 것들은 아닐 테지만, 놀라울 정도로 악의와 식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의와 식탐은 온전히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옆으로 구르며, 조가 날리는 플라즈마 덩어리를 피했다. 피는 멎질 않았고, 조는 시위를 또 당기고 있었고, 압도적인 수의 적들이 오로지 날 죽이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언제나 이런 식이지. 나는 괴물 놈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4 


폐촌은 완전히 수라장이었다. 뒤에서는 조가 쏘아대는 플라즈마 구체가 날아오고, 앞에서는 기관총이니 활을 든 인형들이 총알이니 화살이니 쏠 수 있는 것은 죄다 쏴갈기고 있었다. 게다가 보니는 약삭빠르게도 내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도망가고 있었다. 그 년에게 총구를 겨누자마자, 커다란 인형이 이쪽으로 그 추악한 입을 마주 겨눴다. 들소라도 한 마리 통째로 삼키고 사레들린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입이 거대한 점액 덩어리를 토했다. 이쪽으로 뛰어들던 인형들 몇은 오물의 파도에 쓸려 뼛조각과 더러운 거죽 일부만 남기고 모조리 녹아버렸다. 피하기는 했지만 좀 튀었는지 오른뺨이 몹시 따가웠다. 이쪽으로 계속 달려드는 인형들을 손잡이로 후려쳐 박살을 내 버리면서 앞으로 계속 달렸다. 머리 위로 괴물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휩쓸고 지나갔다. 조금만 더 늦게 숙였더라면 척추가 거꾸로 접혔겠지. 놈이 팔을 다시 거둬들이기 전에, 나는 옆으로 구르며 놈의 팔을 겨누어 쐈다. 놈의 팔에 큰 구멍 서너 개가 뚫리며 끔찍한 소리와 함께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팔에 인형들이 깔리며 자갈 으깨는 소리가 들렸다. 몇 놈이 더 달려들어, 뒤엉켜서 싸우며 팔이니 다리를 몸에서 분리해 줬다. 놈들이 물어뜯는 바람에 귀가 찢어졌는지,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덩치만 컸구만.” 하지만 의기양양해 하는 것도 잠시, 뺨을 스치고 구체가 지나갔다. 머리카락 타는 냄새와 함께 온 몸이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너편에 있던 집에 강력한 방전과 함께 불이 붙었다. 

“뒤는 보고 다니나?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군!” 조가 외쳤다. 뒤에서 구체가 두 개인가 더 날아왔다. 몹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왔던 탓에, 피할 수는 있었다. 인형들 여럿이 그 자리에서 숯덩이가 되며, 조금이라도 삐끗했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을지 보여줬다. 코끝에서 진한 오존의 냄새가 춤췄다. 나는 보니 쪽으로 뛰었다. 어차피 조는 지금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고, 인형들이라도 쓰러뜨려서 행여 있을 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막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조가 미사일이나 그 비슷한 터무니없는 물건을 더 꺼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는. 

“이리저리 쏙쏙 빠져나가는 것도 거기까지라네! 오랜만에 다뤄보는 거라 잘 안 맞긴 하는데, 보다시피 연사도 가능하지! 쏘다 보면 언젠가는 맞을 거라네!” 이번에는 세 발. 인형 하나가 붙잡고 늘어지려는 탓에, 하마터면 놈의 말대로 될 뻔했다. 인형 놈들이 물고 뜯고 때려대는 통에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형 수는 점점 더 많아졌고, 보니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도망가고 있었다. 달리는 속도도 형편없고 빈틈 투성이였지만, 가로막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달려드는 놈들은 더 많았다. 일일이 총알을 낭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쪽 총을 거꾸로 잡았다. 

“것 참 시끄럽구만.” 나는 놈이 지껄이는 쪽을 향해 몇 번 쐈다. 도자기라도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이게 무슨 짓인가! 이건 120개월 할부로 산 물건인데!” 팔다리 하나 둘쯤은 떨어져나갔으면 했지만, 역시 두르고 있는 물건 덕에 몸에는 별 피해를 주지 못하고 튕겨나간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새끼야! 도와줄 거야 안 도와줄 거야! 네가 부숴먹은 인형은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이놈 죽이고 나면 너한테 전부 이자까지 쳐서 청구할 거야! 알아?” 드디어 인내심이 끊어져 버렸는지, 보니가 소리를 질렀다. 살짝 동정심까지 들 것 같았다.

“당연히 도우러 왔지. 이거 말고도 할부로 산 물건은 많다네......” 조는 거적, 정확히는 고간에 가까운 부분으로 손을 넣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새끼야! 집에 가서 X이나 잡고 잠이나 자! 도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녀는 혀를 찼다. 물론 인형들은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었고, 나는 덩치 큰 놈 하나를 방패로 삼아 총알이니 뼈바늘을 막으면서, 달려드는 놈은 닥치는 대로 후려치고 조각을 내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놈들도 얌전히 쓰러져 줄 생각은 없었는지(정확히는 보니가)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겼다. 

“알겠네.” 그 말을 듣고 조는 만지던 것을 도로 넣어버리고, 아까랑 비슷한 활을 또 꺼냈다. “그럼 적당히 하도록 하지.” 그는 진짜 하기 싫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시위를 또 당겼다. “일은 일이니까 집에 갈 수는 없을 거고.” 

“사이가 참 좋구만.” 뒤에서 날아온 플라즈마 구체가 헛간 비슷한 곳에 꽂히며, 또 큰 불이 번졌다. 조는 아무래도 정말 일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누, 누가 사이가 좋다는 거야! 이 멍청한 새끼가! 빌리가 다 즐기고 나면 네놈 머리는 내가 푹 절여서 장식으로 쓸 테니까!” 인형들이 계속 달려들었다. 나는 이제 바람막이로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놈들에게 집어 던졌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달렸다. 인형들은 계속 달려들었다. 한 열 구 쯤 박살냈을까. 나는 뭘 후려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반지 끼고 있는 인형의 팔을 몸에서 끊어냈다. 그러자 인형들 몇몇이 쓰러졌다. 아예 박살을 내 버리자 더 많은 인형이 쓰러졌다. 나는 보니를 쳐다봤다. 가뜩이나 핏기 없는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나라도 겁을 먹었을 거다. 온 몸은 상처투성이에, 썩어가는 고깃조각을 뒤집어 쓰고 있었으니까. 

“일단 네 년만 손봐주면 되겠군, 보-니.” 

“머, 머, 멍청한 놈! 내가 저런 놈에게 기대라도 하고 있었을 것 같아?” 조가 이쪽을 보고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몸은 나도 지킬 수 있거든!” 보니 주변에 인형들이 스크럼을 짜서 모여들었다. 과연. 제 아무리 내 총알이라도 저건 뚫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잘 보니, 덩치 큰 놈 둘이 각각 기관총을 하나씩 끼고 있었다. “소총이나 기관총은 권총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나를 보니라고 부른 대가는 치러줘야겠다. 달달한 위력을 맛봐라 이......” 나는 보니가 열심히 지껄이는 동안, 손잡이로 기관총 들고 있는 놈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그걸 뺏었다. “저기, 잠깐. 그건 반칙-”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단 말야!” 총구가 지나갈 때마다 인형들은 저마다 팔이니 다리를 잃고 바닥에 엎어지거나, 실이 끊어졌는지 그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보니의 조작과 함께 큰 놈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폐촌 전체가 울렸다. 놈은 내 앞에 멈춰서 발을 치켜들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기관총을 들어 놈의 발목을 후려쳤다. 고목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게 중심을 잃은 거구가 뒤로 넘어갔다.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보니가 조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녀는 커다란 놈을 일으켜 보려는 모양이었지만, 실이 끊어졌는지 계속 움찔거리기만 했다. 조는 뒤쪽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구체는 적당히 내 어깨 위로 스치고 지나가, 엉뚱한 땅에 꽂혔다. 

“전혀 도울 생각 없어 보이는데?” 

"닥쳐!" 인형 서넛이 이쪽으로 뛰었다. 두 놈이 내 몸을 붙잡고 늘어졌다. 한 놈을 쳐서 날려버리고 보니를 겨눴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인형 하나의 머리가 가로로 얇게 베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숙이는 것과 동시에, 옆에 작고 뭉툭한 것이 몇 개 떨어졌다. 바닥에 어두운 얼룩이 방울져 번지고, 모래가 그걸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나는 내 손을 봤다. 두 개 모자랐다. 잘려나간 순간의 고통도 느낄 수 없었을 정도로, 피도 이제야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정도로 예리한 단면이었다. 

"가까이서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네! 하지만 인형 다루는 실은 모두 특제라고! 그 무거운 놈들도 맘대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말야!"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이 뺨과 머리 위를 스쳤다. 챙 옆이 허전했다. 아마 나중에 보면 꽤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 있겠지. 나는 그 정도에서 끝났지만, 나를 붙잡고 있던 인형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섣불리 쐈다간 또 손가락을 잃게 될 거고, 그 때면 아마 맨손으로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이제 알았지? 저 놈 도움 없어도 네놈은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어!” 

나는 스크럼을 짜고 있던 인형들을 쐈다. 보니가 흩뿌려진 육편에 정신이 팔린 사이, 거리를 더 좁힐 수 있었다. 이제 방해물 따위에 관계없이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왔다. 내가 총을 뽑는 속도가 더 빠를지, 아니면 와이어가 내 손가락을 도려내는 속도가 더 빠를지. 확률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정당당하게 게임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판돈은 컸고, 호주머니는 비었으니까. 

"멍청한 놈! 넌 이미 끝났어! 그 놈들 조져봐야 전혀 소용없다고!" 보니가 지껄이며 와이어를 휘두르려는 순간, 나는 코트를 벗어 던졌다. 날아오던 와이어들이 코트에 걸리며, 엉망진창으로 엉켜 버렸다. 내 총구는 이미 목표를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넓은 동공이 더 크게 벌어져, 검은자위 전체가 시커멓게 보였다. 이 폐촌에 처음 들어와서 봤던 표정과는 다르게, 진짜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이대로 끝나진 않아, 이대로 끝나진 않는다고, 총잡이! 언젠가 반드시......” 내 옆에서, 뒤에서 인형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나는 공이치기를 당겼다.

“‘언젠가’ 따윈 없어.”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한때 보니였던 것은, 총성과 함께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다리 일부만이 흉물스러운 묘비마냥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끌려가서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인형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쓰러졌다. 놈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며 장전하다가, 뒤에서 박수 치는 소리를 들었다. 

“훌륭하군, 훌륭해. 아주 잘 싸웠네, 총잡이. 자네라면 충분히 전사들의 낙원에 갈 수 있겠지.” 조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점점 심해져, 너덜너덜한 뺨이나 팔의 찢어진 상처가 더 쓰라렸다. 출혈은 이제 좀 가라앉은 모양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상처가 잘 아물질 않았다. 

“하! 전사들의 낙원이라니. 동료가 죽게 내버려 둔 놈 입에서 나오는 소리 치고는 제법 입에 발린 소리군.” 

“흠? 그건 그녀가 자초한 거라네. 게다가 그 몸은...... 아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 그녀는 정말 잘 해줬어. 보니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거라네. 빌리를 위해서도, 우리 땅을 다시 되찾는 것을 위해서도. 솔직히 자네, 서 있기도 힘들지?” 그랬다.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피로는 쌓일 대로 쌓였고, 몸 여기저기는 성한 곳이 없었다. 가장 나쁜 것은 왼손가락을 두 개 잃은 거였고. 주워 두기는 했지만, 다시 붙일 수 있을지도 미심쩍었다.

“죽을 준비나 하시지.” 

조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리고 활을 꺼냈다. “누가 누굴 죽인다고? 죽을 준비?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아까처럼 나는 방심 따윈 하지 않는다네. 게다가 여긴 완전히 개활지지. 갑자기 간판이 떨어진다던가, 집이 무너진다던가 해서 꼴사납게 주저앉을 일도 없어.” 조가 시위를 당기려는 것과 동시에, 나는 놈이 들고 있는 것을 겨냥해 쐈다. 이번에도 할부 120개월짜리 물건은 두 번 다시 쓸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버렸다. 플라즈마 구체는 점점 빛을 잃다가, 결국 허공으로 녹아 사라졌다. 

“......내 잔고가......” 조의 얼굴이 갓 꺼낸 빨래처럼 우그러졌다. 

“내가 보기엔 이제 댁은 날 죽여서 빌리에게 가지고 가도, 받은 돈으로 빚이나 메꿔야 할 것 같군.”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는 품 안에서 뭔가를 하나 더 꺼냈다. 내 팔뚝보다도 더 긴 장검이었는데, 날이 섬뜩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날을 한번 휘두르자,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불협화음이 울려 퍼졌다. 검은 곤충의 날개처럼, 수없이 떨리며 도신을 따라 얇은 잔상을 만들어냈다. 겉에 빼곡히 그려져 있던 문양은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 부족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검이라네.” 인디언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뒤에 있던 울타리를 넘으며 조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조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총알을 흘려버렸지만, 놈의 발밑이 미세하게나마 파이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놈은 몇 번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울타리를 철거해 버린 뒤 뛰어왔다. 놀라운 절삭력이었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도망가지 말고, 편하게 죽도록 하게! 그럼 자네도 좋고, 나도 좋을 것 아닌가?” 조가 휘둘러대는 칼날을 피하며, 나는 술집 위로 뛰어 올랐다. 놈은 예상대로 뛰어 올라오지 못했다. 


“가만히 보고 있지만 말고, 한번 뛰어 올라와서 잡아보지 그래.” 

“......대단하군. 하지만 이건 어떨까.” 그는 품 안에서 또 뭔가를 꺼낸 다음, 버튼 비슷해 보이는 것을 눌렀다. 높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내가 올라선 헛간 외벽에 시뻘건 빛의 점이 찍혔다.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건너편 집까지 뛰었다. 잠시 뒤, 하늘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떨어져 방금 서 있던 곳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폭발의 여파가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이딴 걸 지금까지 아끼고 있었다고? 바보 같은!”

“걸리적거리는 게 너무 많아서 말이야. 게다가 굳이 도와주겠다는 거 싫다고 하는데, 내가 뭘 해주겠나.” 그는 또 버튼을 눌렀다. “토템탄도 굴러서 피한 주제에 엄살이 너무 심하지 않나, 자네.” 나는 계속 뛰었다. 어떻게든 빈틈을 잡아내야 했다. 폐촌은 불과 연기가 치솟아 오르며, 묵시록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한 세 채쯤 뛰어 넘었을까. 충분히 뛰지 못했는지, 나는 그대로 폭압에 밀려서 바닥에 메다 꽂혔다. 이제 믿을 건 하나 뿐이었다. 얼마나 때에 맞춰서 올 건지에 따라서 내 목숨줄이 오가겠지. 바닥에서 굴러 붙은 불을 끄고 있으니 조의 질질 끄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통 그을리고 찢어진 채로 일어서며, 건너편을 봤다. 그는 연기를 뚫고 이쪽으로 걸어왔는데, 손에 든 치명적인 무기를 따라 연기가 마치 찢어지는 것처럼 흩어졌다. 조는 쥐고 있던 스위치를 던져버리고, 검을 고쳐 쥐었다.

나는 놈의 발 밑,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정중앙을 노려 쐈다. 조가 걸치고 있는 그 성가신 거적이 충격을 흘려버리기 전에, 제대로 충격을 흘릴 수 있는 자세를 잡기 전에 한 발을 정확히 같은 위치에 꽂아 넣었다. 조는 계속 걸어왔다. 그는 그 소름끼치는 장검을 들고 계속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세 발, 네 발, 다섯 발. 마지막 총성과 함께 놈이 크게 밀려났다. 최대한 빨리 다른 쪽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지만, 들리는 건 익숙한 ‘짤깍’ 소리뿐이었다. 밀려난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는 이제 한 번만 크게 뛰면 닿을 법한 거리에 다가와 있었다. 

“안 굴러가는 머리로 이걸 뚫을 방법을 찾아낸 건 칭찬해 주겠네.” 그의 입가에서 짙은 빛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발 밑의 패인 자국이랑, 간판이 힌트를 줬지. 그 거적이 일정 이상의,  정확히는 큰 간판의 낙하 이상은 충격량은 받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탄을 받을 때마다 바닥에 부자연스럽게 패인 자국이 생기는 걸로 봐서 충격을 그쪽으로 흘린다고 생각했지. 자세가 흐트러지면 그만큼 네놈이 받는 충격은 더 심해질 거고 말이야.”

“다 맞췄네. 하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이야기라네. 서부극 보면 죽기 직전의 나쁜놈이 주절주절주절 지껄이지 않나? 자네는 지금 그거라네. 마지막 한 발만 더 박아 넣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정말 유감이네. 총잡이, 복수라는 건 그만큼 허망한 것이라네.” 조는 칼을 고쳐 잡았다. 폐촌 전체의 공기가 공명하는 것 같은 진동과 함께,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조상들은 복수 같은 것보다 더 큰 목표를 가진 자를 도우신다네. 지금처럼 말야. 그래도 자네는 훌륭하게 싸웠으니, 전사들의 낙원에 가길 비네.” 이제 걸어볼 건 하나뿐이었다. 

“아니, 네가 말이지. 할리이이이이잇!” 연기를 헤치고, 뒤에서 할리가 튀어나왔다. 


“말이 뭘 어쨌다고? 드디어 돌아버린 모양이군. 하지만 괜찮네. 자네는 이제 쓸 만한 머리도, 엉덩이도 필요 없는 곳으로 가게 될 테니까.” 조는 뒤를 힐끗 보고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조가 칼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게 그의 가장 큰 실수였다. 나는 조에게 달려들어 그의 발을 땅에서 떼 놓았다. 동시에 할리의 몸 양 옆이 열리며, 기관포가 한 정씩 튀어나왔다. 옆구리에 날카로운 것이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끝난 뒤였다. 그는 기관포의 치명적인 운율에 춤췄다. 탄피도 떨어지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초연과 침묵이 폐촌을 점령했다. 입고 있는 옷과, 몸에 어지럽게 파인 문신이 온통 뻘겋게 물드는 가운데 조는 내게 꽂은 칼을 뽑으려다가, 결국 축 늘어졌다. 검은 조가 손을 놓은 뒤에도 내 상처를 한참 벌려놓다가, 멈춰서 더 이상 진동하지 않았다.


“자네가 이겼네, 총잡이. 이걸로 선주민의 땅도, 동포의 자유도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군......” 그렇게 총알을 맞았는데도, 아직까지도 그의 몸속에서 뭔가가 목숨줄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조가 기침을 하자, 바닥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네의 사적인 복수가 우리의 희망을 목 졸라 죽였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렇게 해서 자네에게 무엇이 남나?”

“살아갈 이유와 의지.” 나는 장전을 마치고, 그를 붙잡은 채로 총을 겨눴다. 

“끝나고 나면 뭘 할 거지? 이제 모든 걸 다 끝맺었다는 허탈감에 사로잡혀서 자살이라도 할 텐가? 딱하군. 딱해, 총잡이. 전사들의 낙원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겠네.”

“아니, 거긴 네놈 혼자 가라.”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허리 위로 그의 몸이 산산이 흩어져 날아가며, 모래에 흩뿌려졌다. 긴 밤이 끝났고,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폐촌을 전부 집어삼킨 불과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로니모 조가 남긴 거적을 찢어 칼 맞은 곳을 지혈하고, 나는 할리 위에 올라탔다. 온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피를 양동이 하나 정도로 흘렸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빌리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길에서 죽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제발, 어딘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는, 제발. 한참을 길 위를 느릿느릿 걷는 할리와 내 앞에, 신기루인지 뭔지 모를 광경이 펼쳐졌다. 어디 공간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난립한 마천루. 가장 정신 나간 사람의 머릿속에서나 나올 법한 기괴한 호텔과 카지노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와 대비되는 풍성한 초록빛. 저 앞에 도로 표지판이 기다란 철주 위에 걸려 있었다.  <데스 베이거스, 2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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