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석궁수와 모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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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집 이고깽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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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석궁수와 모험왕
 

램프가 돌바닥에 떨어져 내는 달그락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의 째지는 울음소리가 지하실에서 울려 퍼져 나왔다. 엉엉 우는 울음소리는 우아한 목조 가구로 장식된 거실을 넘어 2층으로 타고 올라가, 복도 끝의 큼지막한 문까지 다다랐다. 소리가 도달하고 난 뒤 문 안에서 허둥지둥 사람 움직이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나더니, 이윽고 문이 우악스럽게 발로 차여지며 벌컥 열렸다. 아니, 박살났다고 봐야 할까. 큼지막한 문을 간신히 매달고 있던 두 개의 경첩 중 하나가 방금 전의 일격으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애처롭게 경첩에 매달려 찌걱거리는 문 너머로 큼지막한 버디슈를 꼬나든 고풍스러운 귀족 옷차림의 백발성성한 근육질 노인이 분노에 차 씩씩대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큼지막한 코 위에 쓰여진 어울리지 않는 조그맣고 동그란 안경을 굵직한 손가락을 들어 바로 쓰더니 외쳤다.

"존!!!"

기백이 넘치다 못해 밤중의 어둠까지 쫒아버릴 수준인 노인의 외침에 옆에 있던 2층의 베란다 유리창이 벌벌 떨렸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고, 아까부터 울려퍼지던 아이의 우는 소리만 지하실 쪽에서 들려왔다. 노인은 지하실에서 소리가 들리는걸 알아채고 육중한 다리를 놀려 복도를 달려 나갔다. 거인과 같은 발걸음이 바닥에 내딛어질 때마다 쿵쿵거리며 복도 진열대에 장식된 여러 가지 고대 무구들이 철컥철컥 하며 흔들렸다. 층계를 모두 내려간 노인은 어깨까지 치렁치렁 길러진 윤기 나는 백발의 곱슬머리가 앞을 가리자, 버디슈의 날선 끝으로 대충 등 뒤로 넘겨버리고 지하실로 달려가며 다시 외쳤다.

"존!!!"
"할아버지!"

다행히도, 이번엔 답변이 들려왔다. 잔뜩 울먹이며 끅끅거리는 어린애의 목소리였다. 노인은 거실 식탁에 마침 하나 켜져있던 램프를 홱 집어들고 지하실로 달려들어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누가 감히 이몸의 손자를 건드리려 하느냐!"
"엄마야아아!"

그러나 노인의 함성은 역효과로 아이만 더 놀래킨 꼴이 되버렸다. 노인은 화들짝 놀라 경기하는 아이를 보고 당혹감에 휩싸여, 일단 버디슈를 한쪽 구석에 내팽개치고 돌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안아들어 달랬다. 노인의 눈에 아이의 오른 무릎의 생채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이런이런, 다쳤구나 존. 할애비랑 같이 일단 올라가자꾸나."

아이는 노인의 한 팔에 쏙 안겨서는 노인에게인지, 어둠에게인지 모를 겁에질린 표정으로 계속 울며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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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무릎에 깨끗한 붕대가 감겨진 채, 할아버지의 침대꼍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노인은 따뜻한 물에 꿀을 타다가 건넸다. 아직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는 아이의 머리를 큰 손으로 쓰다듬어 준 노인은 침대 옆의 카펫에 격식없이 책상다리로 크게 털퍽 소리를 내며 앉았다. 그 바람에 책상 위의 필기구가 떨그럭 거렸다. 바닥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눈높이는 큰 침대에 앉아있는 아이의 눈높이보다 한 뼘 정도 높았다. 코 위의 안경을 다시 한 번 치켜올린 노인은 아이에게 물었다.

"존, 지하실에는 왜 간거냐?"

아이는 컵을 받아들고 마실 생각도 안한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대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하 하는 표정으로 손자의 떨리는 손에 든 컵을 조심스레 가져다가 선반에 놓고는, 손자의 팔을 잡아 팔끼리 포개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자, 이렇게. 이렇게 성벽 두르듯 팔을 모아서 감싸거라. 이렇게 하면, 여기 너만의 작은 성역이 만들어진단다."

아이의 떨리는 몸이 잦아들더니 아이가 노인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할아버지, 신성 마법도 할 줄 아시는거에요?"
"응?"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손자의 잘못 포갠 팔을 바로잡았다.

"음... 비..비슷한게지. 아무튼, 여긴 네 성역이란다. 이 성역 안에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못해. 이 공간에선 넌 안전하단다. 그렇지, 그렇지, 숨 고르고..."

아이는 잠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긴 했지만 곧이곧대로 따랐다. 곧이어 자신의 팔로 만든 사각의 공간을 보고있으면서 그걸자신을 지켜줄 큰 성벽으로 생각하자, 아이는 신기하게도 겁먹어 떨던 몸이 서서히 떨리지 않는것을 느꼈다. 계속해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숨을 고르자, 아이는 이내 완벽하게 안정을 찾았다. 한번 크게 숨을 내쉬고 아이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며 아까 선반에 놔둔 꿀물을 다시 건네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만든 성역을 조심스레 풀더니 컵을 받아들고 홀짝 마셨다. 적당히 식은 따뜻한 꿀물의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손자의 안정된 모습을 보자, 노인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우리 손주. 이 어두운 시간에 지하에는 왜 갔던게냐?"

아이는 입안에 꿀물을 가득 문 채 할아버지를 잠시 멀뚱히 바라보다가 말을 하기 위해 입에 문 것을 꼴깍 하고 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까먹었어요."

노인과 아이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컵에 든것을 홀짝대는 아이와 당혹감에 절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멍한 노인은 그 자리에서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경직은 자정을 알리는 도시의 시계탑 종소리에 깨졌다. 종소리가 들려오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던 두 사람의 침묵을 아이가 먼저 깼다.

"할아버지."
"왜 그러냐?"

아이는 아까 했던 팔 포개는 동작을 다시 하며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이건 뭐에요?"

손자의 질문에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눈을 뜬 노인은 코 위에 걸친 안경을 빼서 쳐다보며 만지작댔다. 검고 조그마한 동그란 테를 가진 안경에는 안경알이 없었다. 안경알이 있어야 할 곳을 굵은 손가락으로 만지작대던 노인은 입을 열었다.

"내 옛 친구에게 배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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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의 마차 행렬을 따라 걸어가던 덫 사냥꾼이 자기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버디슈를 힘겹게 들고 뒤쳐져 걷던 소년에게 슬쩍 붙어서는 물어왔다.

"쿼럴, 저 괴짜새끼하곤 왜 같이 다니는거냐?"

쿼럴이라 불린 소년이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고는 버디슈를 다른쪽 어깨로 옮겨 들더니 행렬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석궁을 들고 가죽옷 입은 장발의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갸웃댔다. 말을 걸어온 사냥꾼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댔다. 그러자 소년이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대답했다.

"왜긴요? 재밌으니까 같이 다니지."

덫 사냥꾼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옆얼굴을 드러낸 선두의 사내를 보더니 그 코 위에 걸쳐진 이상한 물건을 보고 냉소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네녀석 눈에는 이상한걸 얼굴에 얹고 다니는 놈이 퍽이나도 재밌어 보이겠다."

소년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맞받아쳤다.

"아저씨. 지금 쓸데없이 그 말은 왜 하시는데요?"
"저 새끼가 과거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어."

사냥꾼의 입에서 과거 운운이 나오자, 소년은 대놓고 인상을 쓰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아, 예. 고향에선 강간마로 불리는 덫 사냥꾼 씨-"
"씨발, 그 이야기는 입에도 담지 마. 쨌든, 용병단에 과거 구리지 않은 놈이 어디 없겠냐마는. 저 이상한 새낀 특히 소문이 안좋단 말이다."

소년은 한숨을 툭 쉬고 말했다.

"어떻게 안 좋은데요, 이야기나 들어보죠."
"저놈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문을 열고 왔다는 소문이-"

이야기가 뭔지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듯 소년의 태클이 들어왔다.

"아, 됐어요! 그거라면 신물나게 들었다구요! 그냥 나한테 신경꺼요, 염병할."
"뭐? 이 쥐똥같은 새끼가 어른한테 하는 말버릇좀 보게?"

소년은 애초에 말을 걸어 화를 자초한 사람이 역으로 말버릇 이야기를 하며 훈계하는것이 배알꼴려 버디슈를 두손으로 꽉 잡고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 자세를 취했다.

"용병단에는 뒤 구린새끼만 있다매? 꼰대한테 욕질하는 애새끼좀 있으면 뭐 어때서?"

덫 사냥꾼은 위협적인 소년의 태도를 보고 자기도 곤봉을 빼들고 왁왁 소리질렀다.

"오오? 이 똘망똘망한 새끼가 이젠 싸워보려고? 그래, 아랫도리에 털도 안난 꼬맹이한텐 매가 약이지! 덤벼 봐 이 개새끼야! 오늘 예의범절이 뭔지 내가 아주 깨깟한 네 똥꾸멍 끝까지 깨닫게 할-"

사냥꾼이 걸쭉한 입담을 채 끝내기도 전에 머리위로 치켜 든 사냥꾼의 곤봉에 석궁의 볼트가 날아와 콱 하고 박혔다.

"거기까지."

책읽는듯한 또박또박하고 뚝뚝끉어지는 말투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왈도, 더 이상 싸움하면. 다음은 머리다."

덫 사냥꾼 왈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머뭇대며 곤봉을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내 곤봉에 박힌 볼트를 부러뜨리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며 소년을 보고 중얼댔다.

"네가 저 괴짜새끼한테 뒷구멍 대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고... 개새끼, 나중에 보자."

소년은 돌아서는 사냥꾼의 뒤통수에 손으로 감자를 탁탁 쳐먹여주고 선두의 석궁수에게 다가가서 같이 행렬을 따라 걸었다. 나란히 걷는 소년과 석궁수를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수군대기만 할뿐, 직접 나서서 뭘 따지거나 묻는 사람은 없었다. 소년은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소문만 믿는 계집애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석궁수는 분명 이상한 유리알같은걸 두눈 앞에 걸친데다 말투가 조금 어눌한건 사실이었지만 겪어보면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이야기 하면서 이국의 노래를 불러주거나 들어본 적 없는 곳의 이야기 등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상단의 마차 행렬이 절벽 옆에 파인 동굴로 들어갔다. 다음 마을로 들어가려면 이 동굴은 꼭 통과해야 하는 통로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볕이 들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데다가 해풍이 이리저리 들어와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낸다는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요즘 이곳에 밴시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이 자주 쓰지 않던 통로기도 했다. 그놈의 소문, 소년은 소문에는 질려있었다. 고로 밴시가 나타날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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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아까까지 기세좋게 휘두르던 버디슈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동굴 안쪽 벽에 딱 달라붙어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밴시가 정말 나타났었다. 한마리도 아니고, 수십마리가. 검을 든 선두의 용병들에게 파고들어서 미쳐버리게 만든 뒤 피아식별 못하고 검을 휘두르게 만들지 않나, 일행들이 들고 있던 횃불들을 모조리 꺼버려서 동굴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뭔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소년의 귓속으로 들어온 것을 마지막으로 동굴안은 정적에 잠겼다. 소년은 떠는 몸을 주체하려 애썼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아까까지 옆에 있던 석궁수는 한차례 소란이 일 때 선두로 달려가더니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의지할 사람도 없는데다 어둠속에는 밴시들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대며 날아다니고 있으니 소년은 까무러칠지경이었다.

"아..아무도... 없어요..?"

소년은 아무에게도 들릴 리 없는 구원요청을 계속해서 중얼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밴시가 콧속을 파고들지 않더라도 알아서 미쳐버릴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차례 중얼거리다가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냉기와 정적과 어둠만이 소년의 살갗에 느껴졌다. 그 때, 우두둑 하며 뭔가 꺾이는 소리가 또 한차례 동굴안에 울렸다. 소년은 그 소름끼치는 소리에 다리가 풀려버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겁먹은 소년이 숫제 소변까지 지려버리기 직전, 따르륵하고 톱니 감아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패액 하고 뭔가가 발사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사소리와 동시에 소년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째지게 들려왔다. 발사된 석궁과 거기에 맞은 밴시의 비명소리. 소년이 아는 석궁수든 다른 석궁수든 누군가 살아서 밴시를 하나 잡은것이었다. 소년은 다시 톱니 감아지는 소리가 들리자 용기를 내어 그 쪽으로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여기요!"

따르륵거리는 소리가 잠깐 잦아지더니 소리가 나던 쪽에서 천천히 발걸음이 들려왔다. 소년은 동굴속이 아주 깜깜하긴 했지만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고 단박에 누군지 알아챘다.

"아저씨! 살아계셨네요!"
"쿼럴, 무사하냐? 다행이다."

장발의 석궁수가 특유의 말투로 짧게짧게 대답했다. 소년의 눈에 석궁수의 눈인지 뭣인지 모를것이 녹색으로 빛났기에 왠지 석궁수가 날짐승의 눈을 가진 것처럼 이상하게 보였지만 어두워서 정확히 보지 못했던 데다 석궁수가 소년 옆에 도달하자마자 등을 홱 돌려 다시 어둠속으로 석궁을 겨눴기에 소년은 석궁수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소년에겐 지금 석궁수가 옆에 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허공에 석궁을 겨누던 석궁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볼트를 한 발 쐈다. 뒤이어 밴시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석궁수는 기계적인 몸동작으로 양손으로 석궁의 도르래 손잡이를 빠르게 돌려 톱니와 도르래에 물린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허벅다리의 통에서 볼트를 하나 더 꺼내 허리춤의 작은 가죽 물부대 속에 푹 담근 후 석궁에 장전했다. 소년이 물어왔다.

"성수에요 그거?"
"응."
"준비성도 철저하시네... 그런데 대체 밴시들을 어떻게 보는거에요? 제 눈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

석궁수는 대꾸없이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소년은 그와 전에 이야기하면서 그의 출신지 라던지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소지품에 대한 질문에는 절대 대답하지 않던 석궁수의 태도를 잘 알았기에 방금 질문은 그냥 안한 셈 치고 넘어갔다. 석궁수는 몇차례 더 어둠속을 향해 석궁을 쏴댔고, 그 때마다 밴시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밴시들도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어둠속에서 어떻게 석궁을 쏘는걸까 하고 소년이 다시 의문을 품기 시작할 무렵, 저쪽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우악스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석궁수는 그쪽을 잠시 겨눴지만, 비명소리가 가까워지자 석궁을 내리고 오는 사람을 바라봤다. 소년에 눈에 듬직한 체구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손에 들린 큼지막한 나무 곤봉도.

"사...살려줘! 쏘지 말고!! 으아아아!!"
"머저리."
"병신."

석궁수와 소년이 패닉한 채 다가오는 그 인물에 대해 평하며 짤막하게 중얼댔다. 왈도가 석궁 소리를 들었는지 숨어있다가 이리로 달려왔던 것이었다. 왈도의 울먹거리는 소리가 소년의 귀에 선했다. 얼굴 꼴은 분명 눈물콧물 범벅으로 흉할게 뻔했다. 소년 옆에 파고든 왈도는 몸집에 걸맞지 않게 계속해서 끄윽끄윽 울며 몸을 떨어댔다.

"나..나는 귀..귀신이 제일 싫다고! 제기랄!"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있죠, 이 꼰대야?"

소년이 이젠 거리낌도 없이 막말을 했지만 왈도는 계속해서 새된 비명도 간간히 섞인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허공을 겨누던 석궁수가 지쳤다는 듯 석궁을 내리고 한숨을 크게 쉬더니 얼굴앞에 뭔가를 휙 걷어내어 허리에 걸더니 소년에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 큰 어른놈에게 이걸 써야하나.."

석궁수가 몸을 낮춰 왈도를 툭툭 건드렸다.

"왈도. 왈도."
"왜?! 왜...!!"
"진정하라고."
"난 귀신이 무섭다니까!!"

왈도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석궁수는 허리춤의 물부대의 주둥이를 입에 갖다대고 성수를 입에 머금더니 왈도의 면상에 대고 푸웁 뿌렸다. 갑자기 뿌려진 물에 왈도가 비명지르며 손을 내젓자 석궁수는 내젓는 왈도의 손을 세게 붙잡고선 양 팔을 서로 포갰다. 포개진 팔을 한손으로 잡은 석궁수가 왈도의 뺨을 몇차례 철썩철썩 때렸다.

"왈도. 정신 차려봐."
"으... 으으.. 뭐하는짓이야 이거?"

석궁수는 왈도가 보는 앞에서 성소의 성직자가 하는 기도 시작 전 손동작을 휘휘 허공에 저었다. 왈도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의 손동작을 따라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석궁수가 포갠 왈도의 양팔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성벽."

이번엔 왈도 얼굴에 묻은 성수를 쓱 훑으며 말했다.

"성수."

석궁수는 다시 한번 기도 손동작을 하며 말했다.

"가호."

성소 주변에 둘러야 하는 성벽과 성소에서 나는 성수, 그리고 성소의 담당 성직자가 매일 하는 가호. 성소에 있어야 할 3개의 요소였다. 소년은 석궁수가 성직도 했었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가 하는 행동만 지켜봤다. 석궁수는 왈도가 포갠 팔 안쪽을 가리키며 왈도에게 조곤조곤 설명했다.

"여긴 이제 성소야. 밴시든 귀신이든 부정한건 절대 못들어와."
"너너..너 무슨 성직도 했었냐?"

왈도가 조금 안정된 목소리로 물어오자, 석궁수는 아주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허리에 걸었던 뭔가를 다시 얼굴에 차고, 다시 석궁을 든 채 허공을 겨눴다. 왈도는 평소에 외지도 않던 기도문을 떠듬떠듬 외우며 슬슬 안정을 찾아갔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이 이 때다 싶어 석궁수에게 질문했다.

"존. 그런건 어디서 배웠어요?"
"North London volunteer cent-"

소년의 갑작스런 질문에 석궁수가 반사적으로 무슨 말인지 모를 언어로 대답하다가 뚝 끉었다. 석궁수가 소년쪽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쿼럴. 그냥 조용히있어."

석궁수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소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소년은 초점없이 섬뜩하게 녹색빛으로 빛나는 석궁수의 눈을 똑똑히 보고 겁에 질려 거기에 더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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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만요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존?"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이야기를 끉고는 곁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잔뜩 부루퉁해진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럼 제 이름이 그 사람 이름에서 따온거에요?!"
"어... 그래, 그렇다마다. 이 할애비에겐 인생에서 아주 큰 가르침을 준 사람이-"
"이름이 완전 이상하잖아요! 친구들한테서 얼마나 놀림받는줄 알아요?!"

할아버지는 그 외자 이름이 역시 기묘하기도 하고 이국적인걸 넘어 이상하기까지 하다는건 인정했지만 생명의 은인이나 인생길에서 인도자가 되어준 사람의 이름을 따다가 자식이나 손자에게 지어주는건 여기서 흔한일이라 대충 아이에게 둘러대려 했다.

"그래도 말이다, 할애비에겐 생명의 은인이기도-"
"제 말은 듣기나 하시는거에요?? 학당에서도 선생님들이 부르기 전에 피식피식 웃으신다고요!!"

노인은 이대로 가다간 타개책이 없다싶어 그냥 껄껄껄 웃으며 손자를 안아다가 조금 세게 품에 안았다. 아이가 우붑우붑거리면서 버둥거렸지만 세계 이곳저곳을 모험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이 들어찬 노익장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할애비 이야기나 계속 듣자꾸나."
"$%^($#^!!#!%!!!"
"존. 그냥 조용히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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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수가 아무리 어둠속을 꿰뚫는 눈을 가졌다고 해도 석궁의 볼트는 유한했다. 그리고 동굴속의 밴시들이 우는 소리는 점점 많아지는 듯 했다. 소년은 이 동굴속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버틴다고 해도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란걸 알고 있었다. 결국은 탈출하지 못하면 밴시에게 영혼을 잡아먹힐것임이 당연했다. 소년은 쪼그려 앉은 몸을 일으켜 석궁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아저씨? 여기서 계속 버티는건 힘들것 같은데요."

소년의 손에 석궁수가 입은 가죽옷의 목덜미가 땀에 축축 절여진것이 느껴졌다. 석궁수는 조용히 눈앞에 쓴 뭔가를 아까처럼 다시 벗더니 허리춤에 차고 소년을 바라봤다.

"여기서 아무리 있어봤자 볕이 들지 않아요. 원군을 기다리기도 이 상태에선 좀 힘들테고..."

석궁수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끄덕였다.

"그래, 가자."

거기까지 말을 끝낸 석궁수와 소년은 표정을 점점 일그러뜨리면서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그들에겐 짐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왈도. 왈도."

왈도가 여태껏 외던 기도문을 멈추고 물끄러미 시선을 위로 향했다.

"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무기 챙겨."
"싫어! 성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석궁수는 흐으 하고 신음을 흘리며 두 손바닥으로 자기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석궁수는 짜증날 때 저런 제스쳐를 많이 취했었다. 석궁수가 무릎 한쪽을 꿇고 왈도를 바라보며 다시 조곤조곤하게 이야기 했다.

"네가 팔만 안풀면 성역은 그대로야. 움직이는 성역이지. 안그래?"
"성역이 움직인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

왈도가 박박 소리질렀다. 석궁수가 아까 들은것과 비슷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거칠게 몇마디를 중얼거렸다. 소년은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뉘앙스로 보아 욕설이라는 것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석궁수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럼 거기 앉아서 가만히 있어라 이 등신아! 우리가 원군 끌고올 때까지 네가 버티나 보자!"

석궁수는 소년에게 그만 가자는 몸짓을 취하고 허리춤의 물건을 다시 눈 앞에 찼다.

"잘 따라붙어."

석궁수가 뛰기 시작하자, 소년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그들 뒤로 원망과 울음섞인 외침이 뒤따랐다.

"야 이 새끼들아! 날 두고가면 어떡해에에에!!!"

외침이 몇번 이어지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와 비명소리로 변하다가,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석궁수와 소년은 뒤통수가 섬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왈도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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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분을 뛰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달려가는 와중에도 석궁수는 종종 멈춰서서 볼트를 날렸다. 그 때마다 밴시의 끔찍한 비명소리도 이어졌다. 소년은 석궁수에게 수통을 빌려 성수를 버디슈에 묻혔다. 한번 묻혔으니 탈출 전까지는 밴시를 계속해서 베어넘길 수 있을 터였다.

"네 뒤!"

석궁수의 경고에 소년은 몸을 크게 비틀며 버디슈를 휘둘렀다. 후웅 하는 바람가르는 소리와 함께 뭔가 호쾌하게 베이는 손맛이 나무 자루를 통해 느껴졌다. 물론 북풍보다 싸늘하고 소름돋는 밴시의 비명소리도 뒤이었다. 소년은 석궁수의 뒤통수 정도만 아주 약간 보이는게 다였지만 석궁수가 재때 경고를 해주는 덕에 보이지도 않는 밴시를 여럿 베어넘길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수 분을 더 뛰어가자, 앞에 빛이 보였다. 출구였다.

"아저씨! 출구에요, 저기!"

소년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던 석궁수는 그리 눈부신 수준의 빛도 아닌데 약간 신음을 흘리며 손바닥으로 앞을 가렸다. 석궁수는 눈앞에 쓴것을 다시 떼고 빛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뛰는 대형은 아까와 같았지만 방금 전 석궁수가 앞을 가리며 잠깐 뒤쳐져, 소년이 선두가 되었다. 소년이 동굴 출구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뒤어었다.

"아저씨!"

석궁수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동굴바닥에 쓰러진것이 보였다. 소년이 뒤돌아 석궁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석궁수의 뒤에 드리워진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피묻은 나무곤봉, 듬직한 체구, 희번덕 위로 돌아간 섬뜩한 눈. 밴시가 씌인 왈도였다.

"쿼럴! 그냥 나가! 다른 밴시들이 또 따라붙었다!"

소년은 석궁수의 외침에 잠깐 멈칫했지만 버디슈를 튼튼하게 고쳐잡고 석궁수를 끝내버리려는 왈도에게 달려들었다.

"아저씨 건들지 마, 이 더러운 꼰대새끼야!!"

무거운 버디슈가 크게 곡선을 그리면서 왈도의 허리를 깔끔하게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왈도의 몸통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하체에서 떨어져 나가자, 더 이상 쓸모없어진 육체의 입과 코 속에서 밴시가 튀어나왔다. 밴시는 크게 휘두른 버디슈를 다시 고쳐잡느라 등을 보이고 있는 소년에게 그대로 날아들었다. 소년이 자신에게 달려든 밴시를 봤을 땐 이미 밴시의 혐오스런 푸른 얼굴이 소년의 눈 앞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때, 석궁의 볼트가 날아들어 밴시의 얼굴을 관통하며 소년의 이마를 찢어버렸다. 밴시는 비명지르며 소멸하고, 소년은 비명지르며 이마에 생긴 상처를 감싸쥐고 쓰러졌다. 재차 따르륵따르륵 하고 석궁 도르래 감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아픈 이마를 뒤로 하고 석궁수를 향해 기어갔다. 석궁을 다 감은 석궁수는 어둠속을 겨누며 쓴웃음을 짓더니 자신 옆까지 온 소년에게 중얼거렸다.

"네 녀석한테 런던 구경을 꼭 시켜주고 싶었는데..."
"나중에 나가서 시켜주면 되잖아요?! 어서 일어나봐요!!"

석궁수는 목에서 쉰소리를 내며 파하 웃더니 이제는 두쪽으로 갈라진 왈도의 상체가 들고 있는 스파이크 달린 곤봉을 보며 말했다.

"왈도 저 자식이 자기 덫에 바르는 극약을 곤봉에도 바르는거 잊었냐?"
".....!!"
"자기 일엔 오지게 철저한 덫 사냥꾼 새끼였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죽음선고를 듣자,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석궁수가 한숨을 툭 쉬며 중얼거렸다.

"맛대가리도 없던 피쉬 앤드 칩스가 갑자기 먹고싶군 그래."

석궁수는 소년이 이해 못할 말을 몇마디 좀 더 중얼거리더니, 어깨를 들썩대며 흐끅대는 소년을 잠깐 보고 품속에서 뭔갈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이상한 문자가 씌인 편지봉투였다. 소년이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아들자 석궁수가 입을 열었다.

"뭔가 기대하는것 같은데, 너한테 쓴거 아냐. 내 어머니한테 쓴거지."

석궁수는 자기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우는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석궁수의 눈에 초점이 좀 흐려지는 듯 했다.

"네가 내 런던에 가서 이 편지를 전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윽...!"
"갈께요! 제가 가서 전해드릴게요...!"
"약속할 수 있겠냐?"

소년은 편지를 자기 품속에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궁수는 킥킥 웃으며 소년의 머리위에 손을 턱 얹고 쓱쓱 쓰다듬었다. 동시에 몇마리인지 모를 수많은 밴시의 신음소리가 석궁수 뒤쪽의 어둠속에서 들려왔다. 석궁수가 쓰다듬던 머리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자, 이제 여기서 나가. 당장."

소년은 움직이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무심코 자기 발 앞을 보았다. 석궁수가 평소에 눈 앞에 쓰고다니던 이상한 물건, '안경'이라고 하는건지 뭔지가 유리알이 깨진 채 떨어져 있었다.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주워들고 빛을 향해 뛰었다. 석궁수는 가능한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정든 사람을 보내는건 미련없이. 소년의 인생 철칙이 하나 추가된 날이었다.

-----

"그 이후로.. 그 런던이란곳을 찾아서 이 세상 어느곳인들 안찾아 본 곳이 없었단다. 크나큰 대양도 건너고, 높디 높은 산맥도 넘어다녔지. 이 세계를 한바퀴 돈적도 있단다. 난 그저 런던을 찾고싶을 뿐이었어. 그러나 사람들은 내 의도는 상관하지도 않았지. 사람들은 이 세계 어느 곳이든 내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이 없다면서 나를 모험왕으로 불렀단다. 그리고 얼떨결에 그 칭호덕에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되었지."

아이는 아직 아까의 진압 방식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식의 팅팅 불어있는 얼굴로 노인에게 물었다.

"그럼 러언던인가? 러넌던인가는 결국 찾으셨어요?"

노인은 소년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침대꼍에서 일어나 방의 커튼을 쫙 펼쳤다. 아이도 침대에서 훌쩍 뛰어 내려오더니 창가에 다가섰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시 의회 옆의 크디 큰 종탑을 비추는 아름다운 광경이 보였다. 아이가 창 밑의 도로를 바라봤다. 말 여섯마리가 이끄는 붉은 2층 마차가 슬슬 새벽 운행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노인은 손자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찾았단다."
"그치만 여긴 룬뎁이잖아요."
"내가 이 도시를 계획하기 시작할 때, 이름을 런던이라고 짓자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 이상한 이름은 대체 뭐냐면서 크게 반대했었지."
"네, 이상해요. 제 이름처럼."

노인은 껄껄 웃으며 손자를 쓰다듬는 손에 약간 힘을 줬다. 아이가 머리에 느껴지는 압력에 끄응 하며 또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머리에서 손을 치우더니 손자를 안아들고 방 밖으로 향했다.

"자 이제 네 방에 가서 자자꾸나. 밤이 너무 늦었지?"
"아 참...!"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뭔가 알아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제가 왜 지하실에 들어갔었는지 기억났어요!"
"호오, 그래. 왜 들어갔었니?"
"애들이 그러는데 할아버지 지하실에는 밴시가 나오는 지옥문이 있댔거든요.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내려갔었어요."

노인의 미간에 갑자기 깊은 주름이 잡혔지만, 노인은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하하하! 모험왕 할아비를 둔 네가 질투가 났었나 보구나! 그런건 없단다 우리 손주."
"진짜죠?"
"그럼."

어느 새 둘은 손자가 잠깐 묵고있던 손님용 방에 들어섰다. 노인은 안고있던 손자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내일이면 엄마랑 아빠가 다시 이곳에 오실테지?"
"네에."
"할아비와는 그럼 잠시 작별이겠구나."

아이의 얼굴에 시무룩한 얼굴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다음에 학당이 다시 방학하면 올텐데요 뭘."
"그 때 할애비가 여기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어서 말이다."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모험을 떠나시는거에요?"
"그래, 떠날거란다. 이 할애비는 한곳에 틀어박히는 성격이 아니거든."
"이번에도 커-어다란 모험이죠?"

노인은 가슴팍을 주먹으로 쿵쿵 치며 과장된 모습으로 포즈를 잡았다.

"암! 대 모험이 될거란다!"
"어디로 가실건데요?"

노인은 안경 쓴 눈 한쪽을 감으며 검지손가락을 코 앞에 세웠다. 안경 위 이마에 난 큰 흉터가 아이의 눈에 띄었다.

"그건 비밀이란다."
"에에...!"
"그럼 잘 자렴!"

노인이 재빨리 손님 방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발걸음을 쿵쿵 울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노인은 지하실에 서 있었다. 자신의 오랜 벗인 버디슈를 오른손에 들고, 모험할 때 동거동락했던 중갑과 큰 등짐을 멘 위엄있는 자태로. 노인은 왼손에 든 누렇게 변색된 편지봉투를 바라봤다. 알 수 없는 문자. 이 세계 어느곳을 뒤져보아도 그런 문자를 볼 수는 없었다. 이 땅을 한바퀴 도는 모험을 끝냈을 때, 노인은 결심했다. 소문을 한 번 믿어보자고.

"저놈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문을 열고 왔다는 소문이-"

왈도의 가증스런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선했다. 노인은 자신 앞의 베일에 싸여진 큰 물체를 바라봤다. 왼손에 든 편지를 등짐에 다시 넣은 노인은 큰 물체를 가리던 베일을 벗겨내렸다. 위협적인 장식들이 이리저리 새겨진 흉측한 아치형 문. 노인이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문 앞에 대고 쓱 긁자, 부싯돌에서 불똥이 튀며 그 문에 닿았다. 그 불똥은 갑자기 큰 푸른 빛을 내며 타오르다가 아치 문을 가득 채우며 푸른 불꽃의 문을 만들어냈다. 이 문은 노인의 마지막 모험에서 찾아낸 유적에서 비밀리에 발굴해다가 자신의 지하실에 놓은 것 이었다. 지옥문. 전설로 전해내려오는 이 문은 그렇게 불렸다. 그 문은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과 통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 그 문에 들어간 사람들 중 다시 나온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저 그곳 안을 지옥으로 치부하며 역사속 깊은곳에 묻어두었다.

노인은 그 문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문은 불처럼 생겼지만 뜨겁지 않았다. 문 속으로 몸을 전부 던지기 전에, 노인은 지하실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런던에 다녀올게, 존."

노인은 푸른 불꽃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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