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In Exams-시험 속에서 죽다
"뭔가, 존. 여태껏 아무런 연락도 없더니만. 아쉬울 때만 찾는 겐가?"
나이가 많은 남자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자 존은 큭큭 웃었다.
"네, 아쉬운 게 있어서 찾았습니다. 우리 관계가 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뻔뻔하군. 것보다 나는 왜 네 전화를 받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끊어버리거나 안 받아도 되는 건데 말야. 나이를 먹으면서 망령이 들었나."
속 보이는 줄 알면서도 존이 늙은 전화상대를 달랬다.
"망령은요, 인정이 많아지신 거죠. 영감님이 자비로워지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계속 떠들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전화 끊기 전에 원하는 걸 이야기해 봐. 어짜피 질문이라고 해봐야 정해져 있겠지만."
"하하, 한 방 먹었네요."
존의 입이 정말로 한 대 맞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그래, 최근에 들어온 일거리 없어요?"
"일거리야 많긴 하지만, 내가 자네랑 거래한 지가 벌써 얼만가. 자네가 어떤 일거리를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없군요?"
존이 착잡한 투로 물었다. 길바닥에 채이는 변호사보다 더 많은 게 범죄자고 범죄자보다 더 많은 게 일반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반인들이 범죄자에게 용건을 부탁하진 않았다. 물론 사회에는 좋은 일이었지만, 존처럼 범죄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겐 대단히 불행(?)한 일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영감이 툴툴댔다.
"말을 하면 끝까지 듣게. 난 일이 없다고 한 적은 없다구. 그러니까 자네 성격에 안 맞는 일이라도 하겠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우리 위대하신 휘태커 씨께서 늙은이의 말 따윈 귀담아듣지 않으려-"
"네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네요."
범죄자라고 해서 예의도 모르는 막되먹은 놈은 아니었다. 이해관계라면 아무리 더러워도 웃는 얼굴로 마주하는 게 이 바닥이었다. 물론 존이 영감님에게 친하게 대하는 건 이해관계라기보다는 오랜 동료 관계여서 그랬다. 어쨌든 영감님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는지 존에게 말했다.
"뭐, 계속 강조하지만 큰 건은 아닌데. 괜찮겠나?"
"지금은 아무 일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친구 딸내미의 운전기사 노릇을 계속하다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들키겠어요."
"아아, 클린트네 딸내미?"
예전에 존이 몇 번 언급한 것과 상관없이 영감님 역시 리넷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프라임 시티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정보원 중 하나이니까. 그리고 존이 몰랐던 사실이지만 사실 클린트는 영감님에게 정보를 넘겨주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클린트는 프라임 시티가 아닌 안젤리카 시티의 경찰이었는데, 경찰측 정보를 유출한다는 건 분명히 용납되지 않을 행동이었으나 법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신속히, 몰래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었다. 존은 직업이 직업인지라 클린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대의명분'을 듣게 되자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경찰은 시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 그런데 말야, 범죄자들 중에는 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녀석들이 존재해. 다들 아는 대로 정치가나 조폭들이 그렇지.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별로 언급이 안 되는 녀석들이 있어. 누군지 알아? 바로 청소년하고 외국인들이야. 뭐 미래의 새싹이니 다문화니 하면서 존중하는 건 다 이해한다구.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 덕분에 걔네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잠깐의 일탈이니 탄압이니 주절댄다고.
동양의 어느 나라 운전사하고 우리나라 운전사하고 사고가 나서 나한테 합의를 봐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이 있었어. 정황을 보니까 동양 사람 잘못이 확실했어. 하지만 그 사람이 고국의 가족이니 뭐니 눈물콧물 다 흘리길래 나는 우리나라 운전사더러 합의를 받아들이라고 했지. 상대방도 관대하게 받아들여줬고.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거야. 2주일 뒤에 신문을 보니까 그 동양 운전사가 또 사고를 냈더라고. 그것도 음주운전. 상대방이 제대로 화났는지 결국 동양 운전사는 큰집에 갔어. 난 거기까진 괜찮았어. 그런데 당시 사건을 맡았던 동료가 동양 운전사가 내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 경찰 말로는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해서 그랬다'라고 전하더라고. 물론 그 친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간단히 씹고 넣었지만. 내가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을 넘길 순 없잖아?"
"그런데, 걔가 왜?"
"지 애비를 닮아서 경찰인지 탐정인지 되겠다고, 제 주변을 들쑤시잖아요. 생각 같아선 그냥 닥치라고 해 주고 싶은데, 친구 딸내미라 그럴 수도 없고."
"동업자라서 그렇겠지."
"저 그렇게까지 쌀쌀맞은 사람 아닙니다?"
영감님이 놀리자 존이 바로잡았다. 영감님이 말했다.
"그렇게 마음 고생을 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말해버리는 건 어떤가? 가끔은 정공법이 특효약이거든."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것보다 일의 내용은 뭐죠?"
"내 정신 좀 봐. 나이를 먹으면 이렇다니까. 큰 문제는 아니야. 자네가 있는 안젤리카 시티의 제5고등학교의 학생이 의뢰한 거라네."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살인청부랍니까?"
"내용을 들으면 더 어이가 없어질걸. 이번에 중간고사를 보는데 자기 반 학생 중에 교사랑 결탁하는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녀석이 있다고, 그 쪽을 조사해 달래."
"…허허, 참."
존은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 일, 할 건가, 말 건가?"
"해야죠.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것보다, 그거 의뢰한 녀석, 혹시 리넷은 아니죠?"
"그러면 자네가 리넷한테 들킬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아, 그렇네요."
문득 리넷이 정말로 사실을 알고 존한테는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성격이라면 그걸 숨기기보단 당당하게 따질 터였다.
"자세한 사항은 자네가 늘 찾아가는 곳에 맡겨 놓겠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존은 클린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리넷은 금세 자기 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존이 윗층에 대고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리넷!"
"왜, 삼촌?"
리넷이 창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존은 다시 집 밖으로 나가서 말했다.
"시내 나가서 친구들 만나고 올 거니까, 집에 있어. 어디 안 나가지?"
"안 나가!"
"약속도 없어?"
"있는데, 나가지 말라며!"
"아냐, 나가도 돼. 삼촌이 시내까지 못 태워다 준다고 얘기하려고 그랬지."
"나도 버스 탈 줄 알아!"
리넷이 손에 든 토끼소녀 인형을 던지려는 시늉을 하자 존은 장난으로 얼른 두 손을 모아서 받으려 했다. 리넷은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집어넣고는 창문을 닫았다. 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차를 빼서 시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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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에서 연재하는 그레이 스트리트(Gray Street)와 같은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소설이라고 얘기를 했던가요? 그레이 스트리트에서의 사건을 여기서도 언급하긴 했는데 여기 분들은 조아라에 잘 안 가시니 모를 수도 있겠네요. 1편에서 '마약전쟁' 운운했던 게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만...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있다면, 여기로 가셔서 에피소드 #4(63~74회)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리넷이 손에 든 토끼소녀...이건 무엇에 대한 언급인지 눈치채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