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안샤르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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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30 23:30
노엔이 스스로를 자각했을 때, 부모란 존재는 곁에 없었다. 사람의 애정보다 더 친숙한 건 검의 차가운 기운이었다.
그는 용병단 틈바구니 사이에서 자랐다. 용병들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라는 미명하에 어릴 적부터 아이를 전사로 키웠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칼을 휘두르는 법을 가르쳤고, 다섯 살쯤 돼서는 숫제 위험한 일에 내보내기까지 했다. 다행히 어린아이가 칼을 잡을 줄 안다는 걸 예상하는 자들은 적었다. 가끔 어린아이도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자들은, 좋은 미끼가 사라지는 걸 아까워한 용병들에게 처치되었다.
“고놈 참 운도 좋아. 어째 상처 한 번 없대?”
고참 용병일수록 흉터는 많았다. 그들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거나 오히려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에게 있어 흉터는 노련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살아온 시간이 곧 용병생활인 노엔은 이상할 정도로 몸이 깨끗했다. 그걸 보고 용병들이 신기해 할 때면, 노엔은 한 번 콧방귀를 뀌곤 자기 자리로 사라지곤 했다.
거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다보니 노엔은 또래 아이와 달리 말수도 적고, 어둡고 깊은 눈을 가진 소년으로 자랐다. 아기 때부터 그를 봐 오던 용병은 어른을 능가하는 검술 실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고 쪼그맣던 녀석이 벌써 저렇게 컸어?”
“말도 마라. 웬만한 녀석은 쟤 이기지도 못한다.”
실력이 뛰어난 용병이니 얼굴은 몰라도 이름이 안 알려질 수가 없었다. 노엔은 그것을 귀찮아했다. 어쩌다 이름을 들은 자들이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노엔이 짜낸 대책은 얼굴마저도 복면으로 가려버리는 것이었다. 용병들 중에도 복면을 쓰는 자는 많았으므로.
노엔이 12살이 된 어느 날이었다. 잘 차려입은 사람이 가져온 의뢰를 보고 용병단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이 떠난 후에 그는 의뢰서를 읽고 나서 혀를 찼다.
“루스펜시아를 찾아 달라? 허참.”
“뭐야? 그 계집애 같은 이름은?”
노엔의 한 마디에 용병들 사이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노엔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보자 멈추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이에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뭐야, 너. 검사면서 루스펜시아를 몰라?”
“어쩔 수 없어. 애기잖냐.”
용병들의 대화는 매사가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노엔은 적당히 흘려들었다.
“그게 뭔데. 말해봐.”
“마검이야. 아주 유명한 마검.”
노엔이 눈썹을 으쓱하며 보았다. 설명이 이어졌다.
“뭐 듣기로는 만들어진지 벌써 몇천 년은 지났다던데, 녹도 안 슬고 부러지지도 않는다나? 게다가 아무리 초보라도 그 검을 잡으면 고수가 된다던데.”
“그거 쓸 만하긴 하네. 관리할 필요가 없잖아.”
옆에서 누가 끼어들자 말하던 용병이 눈을 흘겼다. 노엔이 이야기를 재촉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과장이 좀 섞였겠지만 아무튼 그런 검인데, 이게 성질이 좀 까다로워서 주인이 아니면 쓰지도 못한댄다.”
“검에 의지가 있어?”
노엔에게 그 말은 흥미롭게 들렸다. 주인이 아니면 자신을 허락하지도 않는 검이라니. 마치 사람을 연상케 했다. 말도 직접 할 수 있을까?
이야기한 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낸들 알겠어? 직접 본 것도 아닌걸. 솔직히 있다는 이야기는 계속 도는데, 마지막으로 가졌다던 사람은 이미 몇 백년 전의 인간이야. 전설 속의 이야기나 마찬가지라고.”
“흐음…….”
노엔은 단장을 돌아보았다. 단장은 무척 심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웬만한 의뢰는 허허 웃으면서 처리해주던 단장이 왜 저러고 있는 걸까? 노엔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단장. 표정이 왜 그래?”
“응? 아니다. 아니야.”
단장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노엔은 그에게서 한 가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 꼬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도 될까 하는 망설임.
단장은 이상한데서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곤 했다. 노엔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 보낼 거야, 안 보낼 거야? 그거만 말해.”
“글쎄. 솔직히 말해서 이번 의뢰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용병들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단장의 그런 처사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일거리가 부족한 덕에 술집에 가서 날을 지새우거나, 숙소에서 뒹굴 거리는 용병들이 넘쳐났던 것이다. 그 탓에 용병단끼리 싸움이 자주 일어난다며 가게 주인들도 눈살을 찌푸리는 터였다.
단장도 그런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면 가장 먼저 중재하느라 골치를 앓는 사람이 단장인 것이다. 일을 제일 기다린 사람도 단장이었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노엔이 보기에도 이상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아니다, 아니야. 나중에 보자.”
단장은 자신의 방으로 이해력이 제일 좋은 용병 몇을 불러들였다. 노엔도 단장을 보았다.
“이번 임무의 의뢰주가 영 신경이 쓰인다.”
“귀족 나으리들이 제 손에 피 묻히기 싫어하는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한 명이 그렇게 대꾸했으나 단장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하필이면 마스체나 가와 연관이 있단 말이다.”
그 말에 용병들이 입을 다물었다. 마스체나 가는 용병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가문이었다. 손 안대고 코 푸는 것으로는 어느 귀족 가문보다도 으뜸이었지만, 위세는 높은데 보상은 짜서 귀족 가와 정치적으로 엮이기 싫어하는 용병들 사이에선 기피대상이었다. 소문에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단 이유로 용병단을 해산시킨 적도 있다고 했다. 말이 해산이지, 사병을 보내서 뒤집어놨다는 말도 있었다.
“그 마스체나 가가 뭐가 아쉬워서 전설의 마검을 찾는단 말이야?”
“모르겠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거절하고 싶은 이유는…….”
의뢰서 내에 동봉된 지도가 떨어졌다. 단장은 그걸 주워들고 방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대원이 보고 눈이 커졌다.
“뭐야 이거. 지도잖아?”
“지도라고? 아니, 그럼 위치도 다 알면서 우리한테 맡겼단 거야?”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단장이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그래. 이건 지도지. 그것도 현재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지역의 지도다.”
지도에는 위험성을 알리는 빨간 괴수 마크가 찍혀져 있었다. 한 명이 입맛을 다셨다.
“최소한 팔다리 날아가는 건 각오해야 한다는 거구만…….” “그거 뿐만은 아닐 거야.”
노엔의 말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노엔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액수도 비정상적으로 커. 어쩌면 성공해도 뒷치기 당할지도.”
“더러운 놈들.”
단체로 썩은 표정이 된 용병들 덕에 방 분위기는 우중충했다. 노엔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거절도 무리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젠 숫제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내려다보았다.
“단장. 선금 받았지?”
단장은 조금 놀란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보여주었다.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임무를 완수했을 때 받는 금액도 큰데, 거기다가 엄청난 양의 선금이라니. 한명이 금세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입막음용인가.”
“거절해도 목숨이 위험해.”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거절해도, 수락해도 곤란한 임무. 이것이 용병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놈의 검 하나가 뭐라고…….”
한 명이 투덜거렸다. 말은 안 했지만 다른 대원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어쩔 거야?”
“일단은 받아들여야지. 누굴 보낼지가 문제지만.”
이번 단장은 용병치고 성격이 좋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용병단이란 곳은 사람으로 굴러가는 곳이다 보니 사람의 능력이 중요했다. 누구라 할지라도 목숨을 잃는 건 용병단에게 큰 손실이었다. 요즘엔 새로 용병대원이 오는 경우가 줄었기 때문에 더더욱 단장은 사람이 다치는 것을 꺼려했다.
노엔이 입을 열었다.
“나 보내줘.”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미쳤냐?”
“미쳤어. 보내줘.”
상대의 말을 끊어먹고 노엔은 재차 요구했다. 단장도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간신히 단장이 말을 이었다.
“위험한 걸 잘 알면서 왜 그래?”
“그냥. 보고 싶어서.”
뜨악한 표정으로 보는 건 단장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엔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그게 네가 목숨을 거는 이유냐?”
노엔은 말없이 끄덕였다. 노엔이 어릴 때 그나마 보호자 역할을 해 줬던 단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노엔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노엔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터였지만 이럴 때의 그는 생각을 읽기가 힘들었다.
“알았다. 단, 혼자 가진 마라.”
아버지 같은 시선에 노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떼 같네.”
노엔의 짤막한 감상에 다들 동의했다. 끊임없이 마수들이 나타나서 덤벼들었다. 마수가 나오는 관문이라도 있는 듯했다. 그나마 신전 내부에 마수들이 마음대로 침입하지 못해 망정이지 이런 장소라도 없었다면 진작 지쳐서 먹잇감이 됐을지도 몰랐다.
물주머니의 물을 조금 마시고 몸을 일으켰다. 마수가 나오기만 하면 짓찢어줄 기세로 으르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있는 장소에 비밀이 있을 터. 노엔은 그것부터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
노엔이 입을 열자 옆에 있던 대원이 돌아보았다. 활 솜씨로 나름 이름을 날리는 남자였다.
“이곳만 마수가 접근하지 못한다는 거, 수상하지 않아?”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게 대꾸하고 나서 활잡이는 다른 두 대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대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활잡이가 품에서 지도를 꺼내서 바닥에 펼쳤다.
“지금 우리가 이쯤까지 와 있어.”
손으로 짚은 위치를 보니 신전에서도 꽤나 깊숙한 곳이었다. 이미 거의 다 무너진 지 오래인 신전에 신의 힘이 작용해서 라고 생각하는 건 우스웠다. 애초에 그랬다면 이 신전은 무너지지 않았어야 정상이겠지. 무언가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을 터였다.
넷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몇 개의 기둥이 천장을 간신히 받치는 모양새였지만, 신전 안은 꽤 넓었다. 무엇보다 마수가 어디까지 들어올 수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녀야 했다. 그렇게 탐색하려면 꽤나 늦어질 것이다. 넷은 서로 두 명씩 갈라져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여기에 있긴 할까?”
“모르지. 찾으라니까 찾는 거니까.”
노엔의 대답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죽음의 위협을 받는 소년으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긴 노엔 정도의 검술이면 자기 몸 지키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활잡이는 피식 웃었다.
“의심도 없구만.”
“그거보단 우리 몸 지킬 생각부터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소년의 따끔한 일침에 활잡이는 뒤통수에 댔던 깍지를 풀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열심히 할게.”
신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수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수는 다행히 신전 안으론 전혀 들어올 수 없는 듯했지만 검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소득이 없다보니 넷은 허탈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명이 투덜대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용병단에 시시한 마법사라도 고용하는 건데 말이야.”
“그 샌님들이 오려고 하겠냐?”
“말이 그렇단 거지.”
한 명이 면박을 주자 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활잡이는 주변을 계속 둘러보았고, 노엔은 자리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했다. 검을 어디다 뒀기에 숨을만한 곳은 다 찾아봤는데도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혹시 마법적인 시스템이 있는 건 아닐까?
“여기 타일이라도 전부 밟아볼까?”
“그래서 어느 세월에 찾겠어.”
다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노엔은 가만히 있다가 지도를 달라고 했다.
“왜 그래?”
“우리가 여기랑 여기를 돌아 본 건 맞지?”
“그렇지. 그게 왜?”
노엔은 지도를 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기둥이 무너진 터라 확인이 불가능한 곳을 제외하면 제대로 안 살핀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신의 제단. 그나마도 숨길 곳이라곤 없어 보이는 휑한 곳이라 제외한 것이었지만.
“나 여기 갔다와볼게.”
“거긴 이미 들린 곳인데?”
활잡이가 물었다. 노엔은 등 돌려 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노엔은 제단 앞에 와 멈췄다. 사실 수상해 보이는 것은 있었다. 손잡이와 날받이 밖에 없어 검이라곤 할 수 없는 이상한 물건. 주변에 날이 부러진 흔적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러니 설마 그것이 마검일까 생각하여 두고 온 것이었다. 원래 이런 곳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님에도.
그는 그 물건을 집어 들어 살폈다. 자신의 바스타드 소드와 비슷한 길이의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다. 날의 흔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밖의 마수들과 치열하게 싸워서 그런 게 아닐까 노엔은 생각했다. 주변에 해골이 굴러다니는 걸 봐선 더욱 그럴 듯했다. 주인은 모르지만 검으로 장례라도 치러 주면 되겠지.
자신의 짐 사이에 끼워 넣으려는 찰나였다. 목 근처에서 느껴지는 선뜩한 기운에 노엔은 눈만 조금 굴려 상대를 보았다.
“내려놔.” 노엔은 조용히 손에서 그 물건을 떨어뜨렸다. 금속성의 소리가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진즉에 섞여들었으리라 예상했어야 했는데.
활잡이는 여전히 단도를 겨눈 상태였다. 같이 왔던 두 명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살해당했겠지.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전부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마수에게 부상당한 사람도 몇 보였지만, 노엔이 전부 헤쳐 나가긴 무리였다. 노엔은 이를 악물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노엔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런 이런. 꼬마만 남다니. 다들 허접하기 그지없어.”
노엔은 표정을 찡그리며 말한 상대를 보았다. 척 보기에도 비싼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귀족일 터였다. 험한 일 한번 해 보지 않았을 듯한 인상이었지만, 눈에는 비열함이 넘쳤다.
“이건 왜 썼지? 마마라도 걸려서 얼굴이 엉망이 되셨나?”
그렇게 말하며 청년이 노엔의 복면을 뜯어냈다. 노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복면 아래 숨어 있는 얼굴은 앳되고 아름다웠다. 다 자란다면 상당한 미남이 될 터였다. 잘생긴 덕에 얼굴을 기억하기도 쉽다 보니 노엔은 스스로도 흉터를 내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예상과 다른지 귀족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내 평정을 찾곤 노엔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이런 일을 하기엔 아까운 얼굴인데? 그래, 시동으로 쓰면 딱 좋은…….”
귀족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노엔이 그의 손가락을 깨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 귀족은 단단히 화가 난 듯 노엔을 걷어찼다. 노엔은 그대로 맞고 쓰러졌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귀족은 노엔을 몇 대 더 걷어찼다. 신전 내에 퍽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 맞아서 축 늘어진 노엔을 보고 귀족은 식식거리며 부하에게 명령했다.
“저놈은 노예로 팔아버릴 테니 묶어놔. 내일 떠날 준비 하고!”
밤중에 노엔은 눈을 떴다. 팔 다리가 꽁꽁 묶여 있어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근처엔 줄을 끊을 만한 날카로운 돌조차도 없었다. 적어도 도망가지 못하게 수작을 부린 것이겠지. 어차피 바스타드 소드도 수중에 없는 이상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다들 꼬마 한 명쯤 쉽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보초 하나 세우지 않고 잠자는 중이었다. 땔감이 없으니 불을 피울 수도 없긴 했지만 불침번도 없었다. 노엔은 눈을 어둠에 익숙하게 만든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기는 역시 너무 멀었다.
이대로 잡혀가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노엔은 노예가 어떤지 알고 있었다. 용병대원들 중에도 먼 곳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도망쳐 온 자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지만 사람 이하의 취급을 받는 존재들. 그들이 노예였다.
그는 아무 것도 못한 채로 잡혀가고 싶지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살고 싶나?」
갑자기 누군가의 말이 또렷하게 들리자 노엔은 흠칫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일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시하려는데 다시 한 번 남성의 중저음이 들려오자 노엔은 낮게 중얼거렸다.
“누구야.”
「그냥 생각만 해도 돼. 다 들려.」
노엔은 이 말을 하는 대상이 누굴까 생각했다. 상대는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네녀석이 그렇게 찾던 루스펜시아다.」
「마검이라고?」
마검으로 봐줄 만한 물건은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았다. 루스펜시아라고 말한 상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부러진 검이라고 생각했던 것 말이다.」
그게 정말 마검이라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는데? 노엔은 말하는 상대가 어디서 사기를 치나. 라고 느끼기까지 했다. 루스펜시아는 역정을 냈다.
「이 꼬마가 도와주려고 하니까!」
「넌 검인데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야?」
노엔이 비꼬듯이 물었다. 루스펜시아는 그건 아주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나랑 계약하겠다. 라고 말하면 돼.」
노엔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렇게 쉽다고?
「쉬운거 아니거든? 넌 쉬울지 몰라도 난 안 쉬워. 너한테 맞춰줘야 하니까.」
「그 계약인지 뭐시긴지 그걸 왜 나하고 하려고 하는데?」
루스펜시아 쪽에선 잠시 응답이 없었다. 포기한 건가 싶어 노엔이 눈을 감자 잠시 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야 네놈이 나랑 가장 적합하니까 그렇지.」
적합하다라는 말 뒤엔 무언가 숨기는 듯한 꿍꿍이와 으스대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노엔은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힘이 필요하지만 이 녀석과 계약해서 오히려 더 나쁜 일이 생긴다면? 마검 중에는 주인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검도 있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자아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노엔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건 노예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싫어. 너랑 굳이 계약할 이유 없어.」
루스펜시아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어쩐지 굉장히 당황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바로 앞에 있지 않은데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신기한걸. 루스펜시아가 예의 그 당황한 음색으로 말했다.
「어, 어째서냐? 이 몸은 아주 훌륭한 검이라고?」
「네가 왜 나랑 계약하고 싶은지 말해. 그 전엔 절대 안 해.」
노엔이 이리 강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루스펜시아는 다시 말이 없었다. 잠시 뒤, 루스펜시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에잇, 망할! 좋아! 넌 이럴 확률이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냐? 몇백년 동안 혼자 있던 곳에 사람이 올 확률! 날 죽지 않고 발견할 확률! 게다가 검사에, 날 사용할 마력도 충분해!」
잔뜩 분기탱천해서 말하는 걸 듣자니 고막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실제로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노엔은 납득했다.
「그래서, 내가 네 주인으로 적합하다?」
「그래! 빌어먹을, 난 이제 나가고 싶다고!」
울분마저 섞여있는 그의 목소리에 노엔은 한숨을 쉬었다.
「계약하면, 날 풀어줄 수 있어?」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
분을 토해내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다시 으스대는 걸 듣자니 노엔은 정말 그럴 힘이 있을까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당장 방법이 없었다. 노엔은 낮게 말했다.
“계약한다.”
처음에는 정말 그 한마디로 계약이 될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효과는 곧이어 나타났다. 루스펜시아가 자신의 앞에 본모습을 드러내자 노엔은 눈이 커졌다.
손잡이에 날받이만 있던, 검이라고 볼 수 없었던 형체에 어느새 검날이 빛의 형태로 나타났다. 밋밋하게만 보였던 손잡이와 날받이도 화려한 장식을 한 채였다. 자신과는 좀 안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노엔은 생각했다. 루스펜시아는 허공에서 가볍게 밧줄을 끊었다. 자유로워진 노엔의 손아귀에 루스펜시아가 들어왔다.
「그럼 잘해보자고. 새로운 주인.」
활잡이는 루스펜시아에게 목이 떨어졌다. 노엔은 자신을 팔아버리겠다고 엄포놓던 귀족을 포함해 전부 목을 따버리고 싶었지만, 정말로 죽을 경우 위태로워지는 건 자신이었기에 묶어두고 빠져나오기만 했다. 굶어죽든지 마수에게 습격당해 죽든지 하는 건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다.
루스펜시아는 과연 마검이라고 불릴 만했다. 빛나는 날은 노엔의 의지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었다. 위급할 때 방어하는 것도 가능했다. 주인인 자신만은 루스펜시아를 아무리 위험하게 휘둘러도 베이지 않았다. 검 본인도 몇 종류의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루스펜시아는 노엔의 검술을 보고 감탄하는 눈치였다.
「꼬마. 생각보다 대단한데?」
“노엔이라고 불러.”
무심하게 노엔이 대답했지만 루스펜시아는 그래도 들뜬 기분이었다. 주인이라서 일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수는 루스펜시아와 합해진 노엔의 실력에 속수무책으로 썰려 나갔다. 진입할 때의 힘들었던 기억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마저 났다.
“다들…… 없어.”
노엔은 여관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사람이 사라진 수준이 아니었다. 피가 튀긴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고, 깨진 술병과 컵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용병단은 공격당했다.
노엔은 조금의 흔적이라도 찾을까 싶어 피가 굳어 끈적거리는 자리를 뒤졌다. 그러나 대원들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 있을 법한 흔적은 아무데도 없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루스펜시아도 곤란하다는 말투로 말을 꺼냈다.
「무리야. 여기서 뭘 찾는단 건.」
노엔은 주먹을 꽉 쥐었다. 위험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습격당했을 줄이야. 차라리 남아서 대원들을 지키는 게 더 좋았을 것을.
루스펜시아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그건 알 수 없어. 네가 있었더라도 살아남았을지.」
“그래도…… 적어도 이런 식으로 헤어지진 않았을 거야.”
평소의 담담하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노엔의 목소리엔 울먹이는 끼가 묻어나왔다.
노엔에게 가족 따윈 없었다. 굳이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라면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단장 정도였을 뿐. 그러나 아무도 없다는 것이 실감나게 느껴지자, 노엔은 얼굴만 아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싶을 지경이었다.
루스펜시아는 모든 걸 잃어버린 소년 옆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