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소이소스 0 2,807
별 생각 없이 손 가는대로 작성해본 글입니다.
즐겨주신다면 크게 기쁠 듯 합니다.




아주 흔해 빠진 첫사랑 이야기다, 이건. 그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낡아 빠진 안경을 쓴 채 마루에 걸터 앉았다.
따사로운 오후. 발에 슬리퍼를 걸치고 다리를 힘 없이 휘적휘적 젓다가 방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정리 안 된 손톱으로 다릴 북북 긁었다. 시원하군. 허연 각질이 곧 일어나고 금세 붉어졌지만 알게 뭐람. 북북. 흐흐. 바보 같이 웃고 긁기를 그만두고 입에 문 담배 필터를 괜히 질겅질겅 씹으며 시선을 다리에서 앞으로 옮긴다.
노오란 빛 마당이 눈에 들어 오는데 햇볕이 따사로와 곧 맘이 푸근해진다. 노곤해진다. 그 앞으로 물고 있던 담배에선 뭉글뭉글 별 힘 없이 허무하게 흩어진다.
선이 무척 가느다래서 아주 많이 연약한 여자아이 같다. 청순한 그 여자아이는 노란 마당의 아지랑이를 뒤편에 두고 하늘로 승천하듯 사라진다.
고약한 담배 연기 주제에, 내숭은. 그래도 나쁘지 않아. 남들은 고약하다 하고 나도 내 코에다 훅 갖다대면 악할거지만서도 이 담배의 향이 좋다. 어쩐지 구수해서 편안해지는게 조금 어릴때부터 담배냄새를 좋아하곤 했다. 진한 보리차 같은 느낌.
지금도 담배를 빨아 들이지 않으면서 그냥 불 붙이고 입에만 물고 쪽 빨았다가 입 안에 갇혀 우왕좌왕하는 담배 연기를 훅 보낸다. 남들이 보면 담배 필 줄도 모르면서 겉 멋에 피는 겉담배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사실 그거랑 별 차이가 없을진 모르겠지만 구수한 담배 냄새를 즐기는게 그래도 참 좋다. 
겉담배를 한다며 같잖아하던 그 얄미운 자식에게 콧방귀 뀌면서 말하고 싶다. 그래도 나는 이게 좋아, 좋아. 너도. 마당에 훌쭉하게 자라난 해바라기 몇 대를 바라 본다. 그래, 너. 너도 좋아. 노란 빛 마당, 거기에 피어 오른 해바라기… 구수한 담배 냄새…, 그걸 내리 쬐는 햇볕.  몇 주 후면 아주 짜증날 햇볕이겠지만, 좋아. 
지금은 좋아, 그냥. 좋아. 따뜻해. 어쩐지 노란 병아리라도 키우면 딱 좋을 분위기라고 생각해 버릴 만큼 지금 이 따스한 노란 빛이 어쩐지 노곤노곤하게 내 맘을 행복하게 한다. 살랑살랑 바람이라도 불면 간질간질 기분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산들 바람은 없었다. 어쩐지 이렇게 노곤노곤 기분이 좋을때면 얼핏 떠오르는 환상이 있다. 가볍게 흩날리는 짙은 밤색 머리, 그리고 머리칼과 대비를 이루는 하얗고 보드랍던 팔뚝. 웃고 있던 너. 아하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넌. 나와는 달리 키가 굉장히 큰 편이어서 처음 봤을때 키가 큰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다닐 적에도 어지간한 남자애들 보다 키가 훌쩍 커서 정말 순수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돋보였다. 
"저들 키 작은거 그렇게 티 내고 싶나? 왜 자꾸 키 크다면서  놀리는거야."
키가 작은 나는 부럽다기보단 투덜대는 분홍빛 얼굴에 마음이 뺏겼다. 하얀 피부에 부분부분 있는 분홍 빛이,
"자기들 키 작은게 내 탓인가."
손가락을 톡 대면 톡톡하고 번질 것만 같았다. 
"그러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웃으면서 대답하자 이내 너도 웃으며 말을 했다.
"아하하하하 아무튼 있잖아, 그래서 어제 아빠가 회사에서 뭔가 한 건을 하셨대. 그래서 피자를 사준 거 아냐."
"오, 좋았겠네."
"그렇다니까? 우리 아빠, 그런 시켜 먹는 거 되게 싫어해서…. 어제 남동생이 엄청 좋다고 막 난리 법석 피웠잖아."
"그 나이대 남자애니까."
"흠, 그렇긴한데 내 동생은 더 한 거 같아. 아니 네 말대로 남자애라 그런 건지. 좀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애 같을 때가 있다니까, 언제 한번은…."
너는 다른 여자애들 보다 목소리도 좀 더 낮았다. 그치만 그 낮으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명랑하게 떠들 때면 언제나 너를 주시했다. 너의 작은 눈이 말할 때마다 징긋징긋 움직이는 걸 관찰하는게 참 좋았다. 너는 말하면서 내가 그렇게 관찰한단 걸 알았을까, 관찰이라고 말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만 나는 너의 입술을 바라보다 시선을 너의 그 눈으로 옮겨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바보 같이 넋 놓고 바라 본 것이 아니라, 그냥 항상 너와 말 할 때도 너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나의 눈은 너를 좇았다. 나는 그랬다.
너와 함께 학교에서 돌아 와, 네 방에서 함께 책을 읽는 것은 당시 나에게 매일매일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아무 말 없이 옆에 누워 너의 등, 팔에 닿으면서 서로 사락사락 책장을 넘길 땐 맘이 평안해져 곧잘 잠이 오곤 했다. 그렇게 어느 한 쪽이 잠 들면 우린 먼저 잠 든 한명을 슬쩍 바라 본 다음 계속 책장을 넘겼다. 너는 어쨌을지, 나는 너가 잠 들면 나도 넘기던 책을 덮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둘이 한 이불 속에서 서로 닿으며 잔다는 것이 나는 기뻤던 것이다. 그 순간이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거 같았다. 그래, 등을 키지 않고 창문 너머로 오는 노란 햇볕을 받으며 너와 그렇게 지냈다. 집에 갈 시간이 되어 너의 방에 나올 땐 간혹, 정말, 아주 조금이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거 같았다. 사실 그 때 그 감정에 풍덩 빠진다면 눈물이 많은 난 엉엉 울어 버렸을지도 몰라…. 입술을 맞 닿는다든가, 너의 벗은 몸을 보고 싶다든가 그런 구체적인 생각은 조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너와 닿는다면 그 것이 행복했고 그 순간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두근 거렸다. 그러면서도 아주 편안했다. 다른 녀석들이 늘 같이 다니는 우리 둘을 보며 사귀고 있다고, 사귀는 거라고 장난을 치면 그 장난이 싫지 않았다. 그 것이 너무 즐겁고, 더 듣고 싶었다. 그래, 사귀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 우리는 사귀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야, 들었냐. 너가 내 여자친구라는데?"
라고 킬킬 거리며 웃는 내 물음에 너는 잠깐 쿡쿡 웃고 다른 얘기를 했다. 좀 더…, 너가 좀 더 관심 가져주면 좋을 터인데, 그치만, 그걸로 좋았다. 그걸로 좋았다. 이렇게 남들이 여자친구라 하고, 나는 너의 손을 잡을 수 있고, 너가 쿡쿡 거리는 걸 이렇게 옆에서 볼 수 있어서, 그걸로 좋았다. 그걸로 좋았다.
나는 아주 당연하게도 키가 몹시 큰 너보다 키가 작았다. 키 차이가 아주 많이 나서 같이 다니기 조금 민망할 정도였지만, 그 민망함 조차 즐거웠다. 이
게 키가 큰 '너'랑 같이 다닌다고, 우리 둘은 늘 같이 다닌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바보 같은 착각이 들었었다. 너의 조금 아래서 너의 하얀 팔뚝이 움직이고, 동그란 볼살과 이어진 턱선을 보고 있는 건 너무나 당연했고 나는 그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이렇게 우리 둘, 같이 영원히 다닐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마저 품었다. 그 기대는 너무나 당연해서 그 것이 금방 무너졌을 때 나는 정신적으로 몰리고 말았다. 왜, 왜, 왜, 어째서? 나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우린, 아니 너와 나는, 아니 우린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직도 답을 몰랐다. 우리, 아니 너와 나는 변한게 없었는데 변하고 말았다. 나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지내도 그저 너가 눈에 밟혔고, 제발. 이라고 간절히 바랐다. 기도했다. 대상 없이. 있다면 너에게. 나는 그렇게 매일, 매순간을 기도했다. 너와 다시 그렇게 돌아 가고 싶다고.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다른 녀석들이랑 어울리면서 너의 존재를 나에게서 지워 보려 했었다. 완전히 지울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일부만 지워 그냥 우린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렇지만, 그것은 무모했고 조금도 이루어질 수 없어서 나는 결국 잠정적으로 '변했다'란 것을 인정해야 했다. 너에게 아주 큰 용기를 내어,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너무나 잔인하게도 너는 무언가 변했단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내 마음은 더더욱 몰라주었다. 어쩌면 변한 건 단지 나라든가, 모든 것은 내 착각은 아니었나 생각해보아도 그건 아니었다. 정말 나를 숙이고 숙여도 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서로 흘러간 것이었노라…, 지금은 그리 생각한다. 서로 흘러가서 맞닿을 수 없어, 나는 그 것이 고달파, 언제나 나와 함께였던 넌 다른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들이 못내 부럽고, 샘이 나고, 미웠고, 너도 미웠다.
"요즘은 그 키 큰 여자애랑 안 다니네?"
부모님도, 친구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넘겼지만 가슴은 무언가로 후벼 파듯 아팠고, 그 고통이 몸을 관통하는 거 같아 한밤중에 엉엉 울기도 부지기수였다. 이미 그렇게 흘러가버려서, 다시 되돌아갈수 없음을 흘러갈수록 절절히 깨달았기에 아팠다. 나는 용기내어 너를 불러보았지만, 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제발, 이 시류에 흘러 너에게서 묻혀 가는 나를 찾아주어. 아주 간절히 바랐지만, 너는 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나 보다. 여린 면모도 있었지만 역시 강했던 너. 그런 너와는 다르게 난 사실 아주 많이 겁쟁이라서 너는 커녕 아무에게도 내 마음을 전할 수가 없어 괴로움에 잠들기도 했다. 이렇게 담배를 필 때면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가슴이 저린다. 담배 연기를 아주 싫어했던 너, 그렇게 미움 받던 담배 연기를 수 없이 그려 내는 내가 지금 여기 앉아 있다. 몽글몽글 가느다랗고 위태롭게 담배 연기가 눈 앞에서 피어 오른다. 그렇게 싫어하진 말아, 이렇게 위태로워 보이는데. 가엽잖냐? 한다면 너는 필시 나를 비웃으리라. 그래도, 그런 너가 좋다고 나는 전할 수가 없었다. 
"뭐해?"
아주 까만 머리의 그가 내게 물었다.
"엉, 그냥 나와서 담배."
"내가 담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는 뾰로퉁 새침하게 말한다. 너를 좋아했었어.
"날이 따뜻하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옆에 앉아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비벼 끈다. 꽁초는 마당의 쓰레기통에 던지고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니까 구수한 냄새가 잘 어울리잖아."
"구수하긴, 지독해."
너를 좋아했었어. 지금도 좋아해.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미워할거야. 그래도 너는 사랑해."
지금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그래."
이 사람을 사랑해.
"대답이 그거야? 너는…?"
지금은,
"너를 사랑해."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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