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제 : I'm Instrument]Color People

Lester 0 3,500
※ 배경음악 : DJ 오카와리 - Flower Dance(2010)

Color People-색인(色人)들



"나 왔어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밖에서는 바람이 부는 지 문간의 노란빛과 주황빛 낙엽이 얌체같이 그의 발을 따라 집 안까지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문을 닫고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색 중절모부터 벗어서 현관문 옆의 옷걸이에 걸었다. 그 옆으로 카키색 목도리와 회색 코트가 차례로 걸렸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그런 옷차림이 전혀 안 어울릴 만큼 젊었지만, 야윈 얼굴과 수심에 찬 표정을 보면 '전혀'란 표현은 아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슬리퍼를 꺼내 신어서 거의 다 해져 발가락 끝이 보이는 양말을 숨겼다. 그리고는 딱히 수식어가 필요 없을만큼 수수한 갈색 탁자와 의자를 지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왔어요?"
방 안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녀는 짙은 분홍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두툼한 솜이불을 덮은 채 갈색 목재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입은 잠옷의 색이 상아색이다 보니, 그는 여성이 침대에 누운 모습이 언뜻 아이스크림으로 보여서 피식 웃었다. 그걸 들었는지 그녀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웃겨요?"
"아뇨, 제 착각입니다."
그는 붉은색 목재 의자를 갈색 침대로 끌어온 후 그 위에 앉았다. 딴 사람이 보면 삼색 아이스크림에 체리를 얹고 그걸 또 흰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숟가락을 꽂은 모양으로 보였다. 여자가 창 밖을 보며 말했다.
"밖은 어떻던가요?"
"늘 변함 없어요. 멋지고, 휘황찬란하고, 소란스럽죠. 특히 저녁에요."
사실 남자는 지금껏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오는 길이었지만, 그 얘기를 지금 꺼내선 안 된다고 여겼다. 하얀색 셔츠에 회색 넥타이, 그것도 나비넥타이가 인상적인 배불뚝이 사장이 은테 안경을 억지로 밀어올리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지?"
남자가 대답했다.
"당연하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건 몰랐다. 하지만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나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그녀의 집까지 오면서 새로 지었다는, 초록색 차양막이 인상적인 카페와 그녀가 덮은 이불과 똑같은 색의 불빛이 가득한 호텔,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안은 상당히 시끌벅적한 푸른색 벽의 백화점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는 걸어가는 동안 다양한 색깔의 얼굴과 표정, 옷차림을 한 사람들과 부딪치고 튕겨냈다. 하지만 그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지나쳤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우중충한 회색 하늘, 눈이 멀 것만 같은 하얀색 가로등, 그림자처럼 어떤 형태를 띠었다가도 얼른 그 모습을 망가뜨리는 검은색 군중들이 보였다. 그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 그녀가 그를 불렀다.
"참, 오늘은 좀 늦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아니요."
생각에서 깨어난 그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녀 바로 옆에 있는 창문으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드러났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이제 막 바다의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노란색 햇님에겐 안 된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하늘과 바다가 연어색과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해가 바다 위에 남긴 노란색 무늬가 은하수처럼 검은색 수평선에서 창문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이 얘기만큼은 지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 제가 당신을 위해서 선물을 가져왔어요. 뭐일 것 같아요?"
"반지. 저번에 얘기했잖아요."
"아, 그랬던가요?"
남자의 웃음이 일순간 멈췄지만, 그는 다시 도전했다.
"하지만 어떤 반지라고 얘기했던가요?"
"어떤 반지?"
"제가 약속했었죠. 반지에 진짜 보석 박아준다고. 뭐일 것 같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궁금했다. 어떤 보석일까? 빨간색 루비? 파란색 사파이어? 하얀색 다이아몬드?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은근히 기대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다이아몬드?"
"미안하지만, 아니에요."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에겐 다이아몬드를 사줄 돈이 있었다. 허나 그걸 사줄 생각은 없었다. 진품이 턱없이 비싸서도 아니요, 연인이라면 모두 끼고 있을 만큼 흔해빠져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찮은 이유로 결정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뭔지 말해줘요."
"토패즈(황옥)입니다. 초록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상당히 신비스런 빛을 띠고 있어요. 반지 만드는 사람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얻은 거에요. 어지간한 건 단색인데, 그건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 팔을 내밀어요. 제가 끼워줄게요."
그녀가 말없이 팔을 내밀자 그가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잡았다. 상아색 잠옷 밑으로 앙상한 팔이 드러났지만, 그는 거기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는 보관함에서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초록색과 자주색이 혼합된 토패즈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웠다. 그녀는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반지가 말을 하거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걸 세심하게 바라보며 몇 번이고 더듬었다. 마침내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그런 이유만으로 선택했나요?"
"네?"
"말해 주세요. 왜 이걸 골랐는지. 저한텐 이런 보석은 너무 과분해요. 게다가..."
그녀가 순간 말을 멈췄다. 남자도 잠깐 숨을 멈췄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지만, 그 사실에 대해 먼저 알고 있었던 여자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앞을 못 보는데."
그녀의 어조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이걸 골랐나요? 앞을 못 보니까 뭐라도 상관없었단 건가요? 그럼, 이건 이별 선물이라도 되는 건가요? 은근히 비싼 걸 골랐군요. 그냥 유리조각이었어도 속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녀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앞을 못 보는 그녀로서는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보였다. 무지개빛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남자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연기가 굴뚝에서 나와 멀어지는 것처럼 서서히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내가 말해줄게요. 그 보석이 어떤 색이며 반지는 어떤 모양인지, 당신의 옆에서 말해준다구요. 당신의 머리가 무슨 색인지...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당신과 함께 있을 때, 하늘이 무슨 색깔인지!"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러가지 색이 섞여서 정신없는 소용돌이가 서서히 초록색과 자주색으로 변하는 걸 확실히 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반지 낀 손을 찾아 붙잡고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한테 불쌍하단 말만 늘어놓을 거에요. 설령 그런 얘길 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에게 이 세계가 어떤지는 말해도 어떤 '모습'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을 테죠. 그러니, 내가 말해줄게요. 남들이 당신의 반지를 보고 토패즈란 것만 알아챌 때, 나는 그 색깔과 모양을, 내가 당신을 위해 고르고 또 고른 반지임을 말해줄게요. 진짜냐 가짜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번에 자주색이 좋다고 하셨죠? 제가 좋아하는 색은 초록색이에요.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걸로도 안 되나요?"
그녀는 자신의 눈에서 뭔가 흐르는 걸 느꼈다. 보지는 못했지만 눈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다른 손으로 자기 손을 쥔 남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귀찮지 않겠어요? 이 앞을 못 보는 내가, 당신에게 큰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당신이 보는 걸 내가 보지 못해서 답답해 하지 않겠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보이는 게 전부였다면, 밝고 어두운 게 너무 극명해서 재미가 없어졌을 테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 세상의 진정한 색깔을 볼 수 있으리라 믿어요. 그래서 내가 세상에 대해 말해주면, 당신의 의견을 들려줘요. 그래서 나도 진정한 색깔을 알 수 있게 해 줘요. 불가능한가요?"
"...아뇨."
그녀가 눈을 감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 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 어느새 그도 울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그는 잠깐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방 안의 물건들의 색깔이 평소와 다르게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창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 느껴지죠?"
그녀가 창가를 바라봤다.
"네."
"무슨 색인가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름답네요."
"그렇군요."
그도 웃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녀는 현명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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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쓴 게 분명 자랑은 아니요
곡을 15번이나 들으면서 글을 쓴 것도 자랑은 아닙니다.
무슨 칭호가 됐든 평가가 어떻든 상관 없습니다.

그냥 곡에 몰입하면서(물론 어무이가 목욕탕 가신다든가 하는 식으로 방해를 받긴 했지만)
쓰고 싶은 걸 썼더니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아무튼 오늘치 글은 다 쓴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p.s. 토파즈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이 사진을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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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ving this world is not as scary as it sou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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