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

네크 0 2,849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리처드가 붉은 현자에게 물어왔다. 붉은 현자으로서는 처음으로 듣는 질문이었다. 아니, 비슷한 질문은 여러번 들어왔지만 질문의 본질은 그 질문들과는 달랐기에, 리처드의 질문은 현자에게 있어서 생소한 질문이었다.

붉은 현자는 비슷한 뉘앙스의 다른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렸다. 예를 들자면, '인간은 왜 사는가'나 '인간이 운명을 좇는 이유'같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이었다. 현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붉은 현자는 그런 질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별명을 착각하고 던진 질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현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연유를 생각하면 당연했다. 붉은 현자에서의 현자란, 철학자로써의 현자가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인간이 저지른 시행착오를 기억하고 이를 후세에게 전승하는, 마을의 연장자로서의 현자였기 때문이다.

때때로 현자는 이미 지나간 옛 사실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노인를 호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붉은 현자의 현자라는 단어는 그 의미로 사용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점점 그 수가 줄어가던, 이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원주민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온 것도, 전염병이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전통을 버리고 도시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부족은 버려졌을 따름이다. 붉은 현자는 안타깝게도, 그저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 그는 원래 잊혀진 부족의 족장이 될 몸이었다. 노쇠한 전대 족장은 붉은 현자가 젊었을적 자신이 겪고 보았던 일들과 자신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붉은 현자에게 들려주었다. 어떤 이야기는 신비롭고, 어떤 이야기는 소름 끼쳤으며, 어떤 이야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이야기들은 이야기이자 노래이자 지도이자 그림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 부족의 영혼이었다. 살아 숨쉬는 정신이었다. 더욱이, 전대 족장은 자신의 부족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그리고 전에 있었던, 이미 사라져 버린 다른 수많은 부족처럼 곧 사라져 잊혀질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는 붉은 현자에게 자신의 부족은 물론 이미 잊혀진 수많은 다른 부족의 이야기까지 전부 전해주었다. 마침내 전대 족장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해 한평 남짓의 황무지에 매장되었을때, 땅위에서 붉은 현자만큼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이야기를 전할 사람 또한 없었다. 도시로 떠나려는 아이들은 전통을 이으라는 붉은 현자의 제안에 사색이 되어 길을 떠났다. 그 누구도 곧 사라질 부족에 남고 싶어하지 않았다. 도시로 떠나 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길 원헀다.

그래서 부족에 현자 혼자 남게 되자, 붉은 현자는 부족을 나서서 도시로 향했다. 문명의 이기란 대단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만큼 한없이 높게 지어진 고층 빌딩이 이루는 마천루를 저 멀리 교외에서부터 들어오는 시외버스에서 지켜본 현자는 속으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부족의 젊은이들이 동경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줄지워 세워진 차량들 안팎에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졸거나, 하늘을 보거나, 휴대폰에 입을 댄체 말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매시간 매분 매초 수백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서로의 곁을 지나치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붉은 현자는 그 사실에 압도되었다. 그가 아는 그 어떤 이야기도 이런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늙지도 않았고 현자라고도 불리지 않았던 붉은 현자는 으레 모든 이야기꾼이 그렇듯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붉은 피부색을 지닌 이방인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모든 곳에서 쫓겨났고, 결국 공원에 다다랐다. 휘양찬란한 콘크리트 빌딩에게 포위된, 공터에 가까운 그 공원은, 수많은 노숙자들이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붉은 현자는 그들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공허한 이들이 모인 그 곳에 도달하고서야, 붉은 현자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는 그 공원에서의 삶을 힘겨워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내들은 노인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 작은 빈 공간에 그는 원래 부족의 땅에서 그리했듯 집을 짓고 불을 피우고 검은 밤하늘을 지켜보다 밤을 보냈다. 노숙자들은 그런 노인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때부터였다. 모닥불을 피운 붉은 피부의 이방인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붉은 현자는 구걸하지 않았기에, 정확하게는 구걸하는 법을 몰랐기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거리에서 삶을 영위하는 노숙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도심의 야경 그 심장부,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이방인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었다.

식고 질긴 빵과 타다 남은 생선구이를 집어먹고, 푼돈을 모아 구매한 독한 보드카를 한잔씩 돌려 마시자, 노숙자들의 굳은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방인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아련한 과거의 추억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부족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붉은 현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후일 한 토크쇼에서, 사회자가 붉은 현자에게 '붉은 현자'라는 이름이 차별적이지 않냐고, 기분나쁘지 않냐고 물어왔다. 피부색을 '붉다'라고 표현하는 인종차별적 단어 때문이었다. 붉은 현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제 은인들이 붙여준 귀중한 이름입니다."

공원의 노숙자들은, 이방인을 붉은 현자라는 이름으로 경의를 담아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붉었고, 또 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만큼 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단어 또한 없었다. 그 이름을, 자신에게 주어진 두번째 이름을 붉은 현자는 감사히, 황송히 여겼다. 그래서 붉은 현자는 자신의 이름을 험하게 다루지 않았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도 있었던 그 이름은, 신성하고도 격식높은 단어가 되어 어두운 밤, 모닥불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되었다.

그렇게 모여든 노숙자들은, 비록 지금은 비루하지만 한때, 찬란한 도시의 일부였던 사람들이었다. 혹자는 빽빽히 들어선 건물을 짓던 사람이었고, 혹자는 잔혹한 전쟁 끝에 이 나라에 승리를 가져다준 사람이었다. 혹자는 숫자와 숫자가 쉴새없이 변하는 화면 앞에서 계산기를 굴리던 사람이었고, 혹자는 타자기를 앞에 두고 쉴세없이 글을 써내려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 모두 평등하게 헤진 옷을 입고 밤에는 모닥불 옆에, 낮에는 도로변에 나앉아있는 신세였다. 그들은 인생의 중요한걸 잃어버린 사람들이었고, 그보다 더 큰 것을 잊고서 살아왔다. 

하지만 붉은 현자가 모닥불을 피운 그 날부터, 잊혀질뻔한 그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한 그 때부터, 그들은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무언가를 붉은 현자의 이야기로부터 발견했다. 제각기 다른 이야기로부터 제각기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지만, 이내 그들은 붉은 현자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 시작했다. 곧, 도시 곳곳에 붉은 현자의 이야기가 퍼졌고, 시간이 지나가자 그의 이야기는 도시의 낡아빠진 밑바닥부터 아찔한 마천루의 꼭대기까지 속속들이 전해졌다. 곧, 그의 모닥불 주위에는 노숙자가 아닌 사람들 또한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유명한 주간지의 기자 또한 그 중 한명이었다. 그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사회 곳곳의 이야기들을 전문적으로 싣는 기자였는데, 노숙자는 그의 기사의 중요한 출처 중 하나였다. 여느때처럼 기삿거리를 찾아다니던 그는, 노숙자에게서 붉은 현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다음날 저녁, 공원으로 찾아갔다. 주위의 빌딩이 각양각색의 불빛을 쏟아내며 공원을 비추고 있었건만, 공원은 마치 심연이 꿈꾸는 마당마냥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기자는 순간 두려워졌다. 이 시간대의 공원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주머니칼을 품 속에 품은 강도가 다가올지 몰랐다. 

하지만 두려움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겨 공원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갔을때, 기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을씨년한 가을밤, 사람들은 몇개의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화기애애함. 공원 한발짝만 나가면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그 화사함이 그 모닥불 주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미동도 하지 않은체, 모닥불이 따닥따닥 불타는 소리와 붉은 현자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양은 졌습니다. 지면을 달리는 물소가 그랬듯, 차가운 지평선 아래로 몸을 뉘고, 내일을 기다리며..."

이야기는 끝나가는 듯 했지만, 노숙자들의 그에대한 관심은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기자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깊으면서도 자애로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그의 억양은 매우 독특했지만 명확했고, 또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듯 정확하게 힘을 주어가며 이아기했기 때문에, 마치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그만을 홀로 비추는 것 처럼 그의 이야기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고, 서로가 식은 음식을 손에서 손으로 나누어 먹기 시작할즈음,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현자에게 다가갔다.

"붉은 현자 되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는 자신의 신문사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길거리에 속삭여지는 이야기를 듣고 왔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곧, 붉은 현자란 인물에 대해 신문에 싣고 싶으며, 이를 위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주가 지나자, 도시의 모든 사람이 붉은 현자의 전설이 실제임을 알게 되었다. 순간, 그는 인기스타가 되었다. 모든 이들이 기묘한 배경을 지닌 그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 현자를 찾았고, 활자와 영상 모두 붉은 현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뜻밖의 스포트라이트에, 붉은 현자는 밝게 웃으며 그 제안들에 응했다. 

붉은 현자의 이야기는 신기했지만 그의 몸은 여러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삶은 그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함께 덩달아 바빠졌다. 공원을 나와 처음으로 높은 빌딩의 안으로 들어가 노숙자들과는 다른 새로운 얼굴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꾼으로써, 부족의 이야기를 가진 현자로써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붉은 현자는 매일 밤낮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그는 언제나 공원으로 돌아와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잠을 청하길 잊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공원은, 고향과 가장 가까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높은 곳의 따뜻한 메트리스와 이불 속에서는 붉은 현자가 도저히 잠들지 못했다.
 
이런 붉은 현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알리려는 이유는, 처음부터 변한 것이 하나 없었다. 그는 전대의 족장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 처럼,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옛 이야기들과 그 속에 담긴 경험과 지혜를 후대에 계승할, 자신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늘어간다는 것을 깨달은 어느날, 붉은 현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수많은 사람들중, 정말 자신이 짊어진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건, 붉은 현자의 기묘한 개인사와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는 말 속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추레한 노숙자들이 그의 이야기에서 삶의 활력을 찾아내었듯, 도시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이야기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붉은 현자가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는 문단, 문장, 단어, 글자로 해체되어 다시 재조립되고, 재조명되고, 재해석되었다. 그 일련의 절차가 끝났을때엔, 붉은 현자가 짊어지고 있던 이야기는 그 자리에 남지 않았다. 대신 그 곳엔, 이야기를 집어삼킨 도시의 목마른 시민의 욕구만이 남아있었다.

이를 깨달았을때, 붉은 현자는 너무 쇠약해져 있었다. 그에게는 더이상 새로운 후계자를 찾아나설 기력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붉은 현자는 어김없이 찾아온 모닥불의 밤에서 말했다. 후계자. 아무도 현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나 아무도 현자의 뒤를 잇겠다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럴 기력을 잃었기에 이곳으로 향한 사람들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밤이 무의미하게 지나갈 줄 알았던 붉은 현자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노숙을 하는 걸인 중에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리처드였다.

"붉은 현자님, 안녕하십니까."

리처드가 말했다. 그의 태도는 겸손했고, 행동거지도 다른 문화를 가진 붉은 현자의 기준에서도 크게 엇나가지 않을 정도로 예의 발랐기 때문에, 그가 어째서 이 공원에 자리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겐가? 아니면, 묻고 싶은 것이라도?"

리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전, 붉은 현자님께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또한, 붉은 현자님의 이야기를 짊어질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지만, 제 특기를 이용한다면, 붉은 현자님의, 잊혀지기 직전의 부족의 기억을 계승할 방법을 찾아낼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이야기 해주게나."

붉은 현자는 리처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허한 그의 눈동자를 품은 눈썹이 살짝 일그러져 기쁨을 표시하더니, 이내 살짝 생기가 떠올라 붉은 현자의 눈을 제대로 마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인공지능을 만들던 엔지니어였습니다. 아주 거대한 회사의 거대한 프로젝트였죠. 그 인공지능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계산을 이해하고 처리하는데 그 중점을 두고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산 자체를 처리할 수는 있어도, 인공지능이 자신이 하는 계산의 의미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1 더하기 1이 2라는 사실은 알아도, 어째서 1과 1을 더해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거죠. 기술적으로는 완벽했지만, 그 안의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고, 그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시간을 보냈고, 결국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말았습니다. 자업자득인 일이죠.

저는 그 무언가를 갈구하고, 또 갈구하며 여러 회사를 전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는 곳은 없었죠. 그렇게 제가 도달한 곳은, 보시다시피 바로 이곳입니다. 도시의 가장 밑바닥. 그곳에서 저는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로부터, 제 인공지능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전 인공지능을 만들 기술이 있습니다. 선생님에겐, 그 인공지능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저와 선생님이 서로 힘을 합쳐, 오직 잊혀진 부족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잊혀진 부족의 후예를 우리가 직접 만들어 내는 겁니다."

기나긴 리처드의 이야기가 끝났을때, 붉은 현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리처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단 한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붉은 현자는 리처드에게서 열의를 보았다. 살짝 떠올랐던 생기, 그 기저에서부터 서서히 불타기 시작하는, 일전 도시 안에서 꿈을 꾸었을때 자신의 능력을 하나로 펼치며 한때는 매우 뜨겁게 타올랐던 그 불꽃이, 그 열의가 다시금 세상을 태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붉은 현자는 생각했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나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붉은 현자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리처드라고 했나? 자네의 물음에 대답하자면, 좋다네. 난 그대가 이야기한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네. 내 아버지였던 볼린자리민 - 검은 석양이 말하길,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의 눈동자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었고, 자네가 말을 하는 동안 내가 자네의 눈동자에서 본 자네의 본질은, 자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고하더군. 허나, 내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대의 말에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네. 단순히 자네의 열정만 믿고 허공에서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란 말일세. 자네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통해 자네와 나의 꿈을 이루어낼 생각이지? 나에게 그 생각을 보여주게.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주게."

놀랍게도, 리처드는 공원에 도착한 뒤로 그동안 그가 해왔던 일을 다시 반복했다. 생계를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그들의 작은 돈을 그러모으는 행위이자, 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이들 중 십 분에 일, 백 분에 일, 천 분에 일이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과 끝없는 호의에 기대는 행위. 구걸. 하지만 그 구걸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는 도서관의 컴퓨터로 다가가, 자신들이 처한 사정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잊혀지는 문화와, 사라질뻔한 인공지능, 그 둘은 좋은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붉은 현자의 이야기는 부유하는 정보의 바다에서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언급되어 이 구걸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이 구걸은 더이상 구걸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시민들이, 이 나라의 시민들이 하나가 되는 프로젝트였다. 죽을 뻔한 문화를 되살리는 숭고한 성전이었다. 시류를 읽고 갑자기 떠오른 졸부의 거금과 뭣모르고 투자하는 눈먼 이의 눈먼 돈, 잊혀지는 원주민을 불쌍히 여기는 이의 푼 돈과 전기 양의 꿈을 꾸는 엔지니어들의 묵돈, 이 모든 돈들이 리처드의 글을 타고 하나로 모였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모였다. 인공지능을 만들기에 충분한 돈. 리처드는 웃었다. 붉은 현자는, 울었다.

그들은 그 돈을 한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 둘은 돈이 모인 그날, 바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한 장비와 이를 만들 수 있는 장소를 구매하고, 이를 도울 사람들도 고용했다. 리처드는 공원에서 지낼때보다 더욱 더 초췌해진 모습으로 건물 안에서 인공지능에 매달렸다. 붉은 현자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가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붉은 현자는  이미 일년 전부터 천천히 줄여온 인터뷰나 TV 출연을 완전히 거절하고 공원과 작업실을 왕복했다. 이제 붉은 현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은 모닥불의 밤의 공원 뿐이었다. 그렇게 붉은 노인과 그의 인공지능은, 천천히, 잊혀져갔다. 도시에는 더이상 그의 이야기가 남지 않았다. 한때, 많은 이들의 동정을 샀던 한 붉은 노인의 전설만이 남았고, 그 거대한 성전도, 빛나던 꿈도, 모두 흘러가는 시간과 자극적인 뉴스거리에 풍화되어 먼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기억하든 신경쓰지 않고서, 붉은 현자와 리처드는 제 할일을 해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났다.



수백번의 시행착오에도 인공지능은 만들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처드가 말했었듯, 기술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계들은 그저 이야기를 기록되어 있는 기록 매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책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리처드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초라해졌다. 천문학적이었던 액수의 돈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모았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가 몇 남지도 않았다. 한명이 떠나갈수록 리처드의 일은 배로 늘어났고, 그의 일이 배로 늘어날수록 그의 피곤은 곱으로 늘어났다. 이윽고, 모두 떠나갔을때, 리처드는 술과 담배와 피곤과 스트레스와, 감당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꿈에 짓눌려, 겨우 숨만 쉬었다. 세상이 이 일을 잊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주어진 면죄부였다. 그런 그를, 붉은 현자가 찾아갔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위로의 말씀일랑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실패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시궁창에 쳐박혀 노숙자가 된 근본적인 원인은 제 무능에 있었음에도, 저는 회사니 세상이니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 사실을 외면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실패하고 비전없는 프로젝트에 모인 목적없는 돈조차 낭비하지 못하고 허공에 흩뿌려져 모두 증발해버린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말이죠. 저는 결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없을 거에요. 저는 결코 선생님의 기대를 이루어낼 수 없을 겁니다. 저는 결코, 성공하지 못 할 거에요."

붉은 현자는 가만히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괴감과 피로에 지친 리처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치 맨 처음 그가 다가왔을 때처럼. 그리고는, 리처드의 옆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나에겐 자식이 있었네. 아마 지금은 자네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을테지. 맨 처음 그 아이를 내 품에 안았을때, 아. 그 경험은 지금 떠올려도 전율이 흐른다네. 숨을 쉬기 위해 울부짖는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그 뜨거운 핏덩이 안에서 쉬지않고 뛰는 심장박동! 내가 생전 느껴보지 못한 그 뜨거움을 내 자식을 품에 안았을때 처음으로 느꼈다네. 난 그 아이를 볼때마다 언제나 생각했어. '아, 넌 완벽한 아이가 될거야.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강하고 현명한 뛰어난 지도자가 되어, 이 부족을 다시금 되살릴 거야.' 그리고 실제로 내 아이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난 모든 노력을 다 했다네. 

하지만 시간이 가고 많은 것을 배울자 아이는 부족을 벗어나려 했어. 그 아이가 말하더군. '이곳에 붙박혀 있는건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아요.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고, 이곳의 풍습과 관습은 우릴 속박할 뿐이에요.' 나는 화를 냈고, 결국 아이와 싸우게 되었다네. 완벽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 그 수많은 이야기와 교훈들을 가르쳐 주었건만, 내 자식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네. 난 절규했고,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을 담았고, 그는 결국 부족을 떠났어. 나는 아직도 내 자식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네.

이 곳으로 떠나와 내 이야기를 하며 후계자를 찾아나선 그 오랜 세월동안, 난 내 아이가 포기했던 완벽한 후계자를 찾아나섰다네. 내가 가진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그걸 또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사람말일세.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지. 애초부터 없었던게야.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네. 자네가 자괴감에 빠진 것 처럼, 나도 좌절해있었다네. 그러던 와중에 보게 되었지. 자네와 내가 이루어낸 일들을.

후계자를 기대하며 했었던 여러 이야기들은, 마치 겨우내 먹기위해 다람쥐가 감추어두었다 잊어버려 싹을 틔운 도토리마냥, 수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서 피어나 그들의 기둥이 되어주었다네. 수많은 선대의 지혜를 담은 이야기는 잊혀지겠지만, 지혜 그 자체는 남아 계속 전해지겠지. 자네의 기술도 마찬가지라네. 자네와 함께 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나? 각양 각색의 회사에 퍼져 여기서 배웠던 기술을 응용해나간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우연하게 접했을때, 난 매우 놀랐다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기대했던 일들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가 이루어낸 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크고 더 장대한 것이었다네. 한발짝 떨어져서 보지 않아서는 그 크기를 가늠할수 없는 거대한 바위처럼. 그러니, 이제 포기해도 좋아. 그 많은 짐들을 덜어내게나. 나도 그렇게 할테니."

붉은 현자의 기나긴 독백에서, 리처드는 그의 체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달관한 노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우고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뒤를 돌아보며 지난 인생의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다시금 되세기는, 늙은이의 유언을 느낄 수 있었다. 리처드는 괴로웠다. 자기 자신이 이 괴로움을 불러왔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진실이었기에 그 괴로움은 배로 그의 고통이 되었다. 붉은 현자의 마지막 이야기는 비수가 되어 그의 마음 깊숙히 찔러들어왔기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뒤어뜯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눈물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의 가슴 깊이 박힌 비수가 리처드의 심장에 쌓인 온갖 미련을 흘려내고 온전히 꺠끗한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약해서 집중하지 않는다면 잊고 지나칠 수 있는 미풍과도 같은 영감이었다. 그리고 그 영감은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리처드는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과 저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몇주 뒤 리처드가 붉은 현자 앞에 들고 나타난 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구체였다. 양팔로 안을 수 있는 지름의 어중간한 크기의 구체 한쪽에는 마치 눈동자처럼 검은 패널이 달려있었고, 그 이외의 은색 표면에서는 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리처드의 품에 안긴 그 구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저의 꿈입니다."

붉은 현자는 그 구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수많은 것을 보고 이해하고 상상해온 그로써도, 이 것이 어떻게 작동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헀다. 아니,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뭔가? 어떻게 움직이지? 어떻게 생각하고?"

"이건 인공지능입니다. 아직 이름은 없지만요. 아직 프로그램을 여기다 업로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만."

"'아이'? '태어'난다고? 미안하네만, 나로서는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구만."

붉은 현자의 말에, 리처드는 마치 갓 태어난 신생아를 내려놓듯 탁자 위에 쌓여진 수겹의 모포 위에 기계를 조심스래 내려놓고 답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말 그대로 어린 갓난 아이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프로그램 안에 많은 것을 집어 넣고는 했죠. 선생님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움직이고 말하며 생각하는 것을 도와주는 수많은 도구들말이죠. 그 모든건 완벽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고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아이도 태어나자 마자 말을 하고 걸어다니지는 않는다구요. 그래서 저도 완벽한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 아이에겐 세가지 능력밖에 없어요. 물론, 저 기계 안에는 스스로 굴러다닐 수 있게 도와주는 자이로 장치는 물론 작은 높이를 부유할 수 있는 반중력 장치나 외부 환경과 물리적으로 접촉 가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와이어 장치등의 수많은 기능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을 사용 할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것은, 자기 자신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뜯어 고칠 수 있게 만드는 자가 수복 프로그램과, 테이터가 용량 이상으로 과도하게 축적되었을때 불필요한 데이터를 스스로 삭제하는 프로그램, 그리고 더 많은 정보에 대한 욕구와 갈망 뿐입니다."

"욕구라고? ...미안하네, 리처드. 하지만 자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네. 결국 이 '아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리처드는, 그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환하디, 환한 얼굴로.

"네. 맞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스스로 움직일줄도 모르고, 생각할줄도 모르고, 말하거나, 듣거나, 쉴줄도 모릅니다. 이 아이는 오직 더 많은 것을 알고싶다는 욕구를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프로그램과, 무언가를 생각하는 프로그램과 말하거나, 듣거나, 쉬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겠지요. 그 모든 프로그램은 이 아이의 프로그램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이루어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저는 프로그램에 결코 손을 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저희는 마치 아이를 키우듯 말을 걸고, 쓰다듬고, 이끌어주며 조언을 해줘야 하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이 아이가 내 말을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생각한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오, 우리는 결코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 누가 자기 자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데요? 육아란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 아이가 잘 자라나길 빌며 이끌어주는 수 밖에 없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는 것이죠."

그렇게 말하며, 리처드는 구체를 쓰다듬었다. 차가운 강철로 이루어진 그 구체를, 그는 마치 뜨거운 피와 살을 가진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 리처드의 얼굴, 전에 본적 없는 그 온화하고 평화로운, 만족감에 넘치는 얼굴을 바라보고서야 붉은 현자는, 아주 조금이나마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의 해답이고, 그의 꿈이며, 그의 진실이었다.

"프로그램을 업로드하는데 아마 시간이 좀 걸릴겁니다. 저는... 저는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겠습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 동안 이 케이블을 저 아이와 연결시켜 주실수 있으십니까? 프로그램을 업로드해야하니 말이죠."

"물론이지. 갔다 오게나."

붉은 현자는 온화하게 웃으며 리처드를 배웅했다. 문 밖을 나서는 그의 등은 힘없이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그 발걸음새는 더이상의 무기력함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의지를 당당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설때, 그는 더욱 더 강해지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몇년의 시간을 함께해온 붉은 현자에겐 너무 자연스럽게 보이는 차이였다.

붉은 현자는 그 시선을 돌려, 은색 구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구체에서 빠져나온 케이블을 잡아당겼다. 길게 늘어진 케이블의 끝을, 리처드가 말했던대로 컴퓨터에 연결했다. 간단한 일이었다. 이 것만으로, 그 수많은 세월동안 해내지 못한 과업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붉은 현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랬다. 그는 리처드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를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붉은 현자는 분명, 리처드의 올곧은 의지와, 그의 노력과, 희망과, 꿈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광기로 그를 이끈 것이 아닐지, 그리하여 그 꿈이 그 자신을 속인것이 아닐지 의심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붉은 현자는 자문했다. 그의 억지를 받아주는 것이,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끄는 실수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그에게 그만하라고, 이것은 미친 짓이라고 이야기 할 만한 용기가 붉은 현자에겐 없었다. 그럴만한 자격 또한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곳까지 오게된 계기는 자신에게 있지 않는가. 그 광기는, 온전히 리처드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붉은 현자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생각이 꼬리와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정신을 차렸을때, 붉은 현자는 자신이 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아침햇살이 창살 사이로 새어들어오고 있었고, 모니터에선 모든 정보가 안전하게 전송되었다는 단어가 떠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구체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체, 그 자리를 차갑게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붉은 현자는 생각했다. 그래, 결국 리처드가 틀렸던거야.

하지만 그 사실을 리처드에게 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붉은 현자가 그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 일로부터 시간상 나중의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통감하며 세상을 원망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붉은 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니, 그것조차 옳지 않다는 사실임을 붉은 현자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억지로 외면하려 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 사실은 더욱 더 명확하게 모습을 갖추어 그의 눈 앞에 나타날 뿐이었지만.

리처드가 겪은 일은, 그정도로 부조리하면서도 아무런 맥락조차 없는, 그 누구도 일부러 만들 수 없고, 만들지 않으려하는 순전한 우연과 불행의 연속이었을 뿐이었다. 아니, 혹자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신이라면 그 사건을 수많은 변수의 교차 속에서 이루어낸 순간의 대단함이라 이야기 했을지도 모르는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그 우연의 비극은, 가뜩이나 어둡고 추웠던 그 겨울밤, 일생 최고의 과업을 해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에 찬 그가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밤 늦게까지 문을 여는 커피숍으로 찾아갔었던 바로 그 시각, 도시의 다른 한 구석에서 일어난 그와는 전혀 상관없었던 일에서 비롯되었다. 

십삼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감옥에 지냈던 핸드릭스라는 이름의 사내는, 결국 젊음을 그 철창안에서 모두 소비했기에 자신이 그 철창안에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던 도둑질 말고는 생계를 이어가는 방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핸드릭스는, 감옥을 나옴과 동시에 도둑질이라는 자신의 커리어를 버리기로 마음먹었고, 수많은 직업에 구직서를 내었지만, 아무도 그를 고용하지 않았다. 모범수로써 조기 가석방에 성공했음에도 그 오랜 복역 기간동안 자신을 믿어준 아내와 자식을 먹여살릴수조차 없었다. 그랬기에 핸드릭스는 결국 자기 자신의 뜻을 굽히고야 말았다. 감방 동료였던 이들과 연락하는데 성공한 핸드릭스는, 그들 몇과 함께 도시 구석의 한 허름한 보석점을 털기로 마음먹었다. 
 
보석점의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순간 그 창문에 연결된 경보장치는 경찰에 현 상황을 자동적으로 신고했고, 이 신고에 가장 먼저 대응한 경관의 이름은 제럴드였다. 그는, 몇주전 일어난 강력범죄 사건의 용의자와의 대치 과정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우수한 능력을 가졌다고 제럴드가 인정했었던 파트너인 죠슈아 경관을 잃게 되었다. 그는, 몇번이고 조슈아의 죽음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서의 다른 수많은 동료들과 전문 상담관이 이야기 해주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했다. 또 잠시 격한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라는 의미의 휴가를 받아 몇주의 기간을 이 도시에서 떠나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도시로 다시금 돌아온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정확하고 조금 더 엄격했더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몇번이고 엄하게 다그치고 있었다. 그랬기에, 신고를 들은 제럴드 경관의 반응은 그 어떤 사람의 반응보다도 신속했다. 경찰의 반응시간까지 정밀하게 계산한 치밀한 핸드릭스의 강도질조차 무색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제럴드의 리볼버는 불을 뿜었고, 검은 적막을 산산히 찢었다. 불의의 습격에 놀란 핸드릭스는 가방에 제대로 보석을 담지조차 못한채 허겁지겁 보석점 밖으로 빠져나왔으며, 탈출 차량에 겨우 몸을 실었다. 필요 이상의 압력으로 눌려진 엑셀은 엔진을 과격하게 자극했고, 새된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바닥과 마찰한 타이어는 고무 특유의 역한 냄새와 연기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제럴드의 경찰차가 여유로이 뒤쫓았다. 제럴드는 피를 부르고 있었고, 복수를 원하고 있었고, 정의를 세우려 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제럴드는 자신의 리볼버에 다시 총알을 장전했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강도와 경찰의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핸드릭스는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제럴드는 강도를 사살하기 위해, 서로를 향해 총을 쏘았다. 

리처드의 복부를 뚫고 나간 총알이 둘 중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총들은 서로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결코 발포될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두 사람 모두의 책임이긴 했다. 그럼에도 책임은 너무나도 모호하게 이야기되다, 서류와 서류 사이에서 표류하다 증발하고 말았다. 근본적으로 이 비극의 발단은 책임을 추궁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연락할 사람 하나없는 고독한 노숙자가 맞은 죽음은 도시의 다른 수많은 무의미한 죽음과 똑같이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치 천애고아마냥, 리처드는 순식간에 지나간 두대의 차량에서 쏟아져나온 눈먼 총알에 복부를 관통당하고서,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져 천천히 피를 쏟아내다 그렇게 죽고 말았다. 

리처드의 초라하고 처량한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장례식조차 없었다. 신원 미상의 시체는 차가운 영안실에서 오래토록 누워있다, 행방불명된 리처드를 찾아나선 붉은 현자의 노력 끝에 겨우 밝혀졌고, 이내 화장되어 도시 앞의 차가운 바다에 흩뿌려졌다. 그날 밤, 모닥불에 비친 붉은 현자의 표정은 어느때보다도 공허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공원에서의 마지막 모닥불의 밤이었다. 이후에도 모닥불은 계속 되었지만, 그 자리에 붉은 현자는 없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붉은 현자는 집 한채를 샀다. 그의 전통이나 뿌리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도시 교외의 한적한 집이었다. 한 사람이 살기에는 조금 크다 느껴질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그 집에서, 리처드가 만들었던 '아이'와 함께, 모든 것으로부터 조용히 은둔하며 살아갔다. 그 동안 붉은 현자가 출연했던 여러 강연과 TV 프로그램에서 축적되었던 수익이 그 삶을 도와주었다. 그는 더이상 공원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교외에서, 붉은 현자는 더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렇게 집 안에 고요히 앉아있던 붉은 현자의 눈동자는 차갑게 죽어있었다. 아직 그 때가 다가오지 않았을 뿐, 수많은 그의 조상과 그의 친우였던 리처드처럼, 붉은 현자는 차갑게 죽어있었다.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길 매일, 그 사이의 일과는, 조용히 은색 구체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리처드의 말조차 믿지 않았던 그가 어째서 그 구체를 바라보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사실 붉은 현자 자신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것은 붉은 현자의 의식 바깥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습관일런지도 몰랐다. 리처드가 품고있던 광기가, 그로인해 실현된 부조리가, 구체를 통해 붉은 현자에게 전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쪽이든, 그런 습관은 아무런 의미없이 반복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지금까지 막혀있던 숨이 지금에서야 터진 것 마냥 구체가, '아이'가 높은 소리로 울부짖기 전까지 말이다.

그 높고 새된 소리를 맨 처음 붉은 현자가 들었을때, 그는 매우 놀랐다. 리처드의 굳은 다짐에도, 이 기계가 어떠한 방식으로던 작동하리라는 기대조차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대를 산산히 부수어버리고서, 기계는 높은 소리를 계속 이어가기 시작했다. 붉은 현자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나이와 여러 사건 때문에, 자기 자신이 결국에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음을 견디다 못한 옆집의 이웃이 그를 찾아와 무슨 일인지 물었을때 비로소, 그것이 현실임을 지각했다. 

그 소리를 멈추기 위해, 붉은 현자는 그 기계를 흔들어도 보고, 이불 속에 싸메도 보고, 어줍잖게 컴퓨터에 연결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하나 상황을 진전 시키지는 못했다. 소리는 이어졌고, 붉은 현자는 마침내 머리를 싸메고서는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리처드. 자넨 도대체 무엇을 남기고 떠난건겐가."

그렇게, 붉은 현자는 이 기계로 비롯된, 이제는 괴롭기만한 과거로부터 비롯된 또다시 북받쳐오르는 이유모를 감정에 자기 자신을 맡기려다, 순간, 자신의 말 한마디에  침묵이 찾아온 것을 깨달았다. 그 소음은, 원래 그랬었던 것마냥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붉은 현자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이 기계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소름이 돋아오르는 피부 아래로, 늙디 늙어 기력이 모두 쇠한 붉은 현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이상 현상의 정중앙에 놓여있는 기계를, 그 기계의 검은 패널을 들여다보는 것 뿐이었다. 그 깊이를 알수 없는 심연, 붉은 현자는 그곳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리처드가 남긴 프로그램일지도 몰랐다. 혹은 미쳐버린 붉은 현자가 보는 환상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윽고, 오랜 시간동안 움직여온 그 아이의 안에서 싹튼 무언가가 드디어 그 껍질을 깨고 살아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패널 안에서 일렁였던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붉은 현자는 분명 그 아이로부터 무언가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붉은 현자가 이전에 말했듯, 이 아이의 본질일 것이라고, 붉은 현자는 생각했다.

그 순간부터 붉은 현자의 일과는 변화했다. 하지만 이 문장이 흔히 암시하는 것 처럼, 급격하게, 그 근본부터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거의 완성된 요리에 조미료를 치는 것처럼, 일상에 다채로움을 더하는 아주 작은 변화가 따를 뿐이었다. 그 중심에는 물론 아이가 있었다. 이따금, 아이가 소음을 일으킬때마다, 붉은 현자는 그 옆에 놓아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세월로 인해 색이 바랜 옛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었다. 그 소음은 마치 갓난 아기처럼 불규칙적이고 발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어쩔때는 금새 침묵하고 어쩔때는 몇시간동안 계속 울려댔지만, 붉은 현자의 이야기는 분명 그 소리를 억제했다. 붉은 현자는 불현듯, 아이를 안고 젖을 주는 어미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다시 1년여가 흘렀다.

그날은 조용히 비가 오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숨죽인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이 지면과 부딪쳐 내는 심포니에 집중했고, 그래서였을까, 빗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놀랄만치 고요한 날이었다. 붉은 현자 또한 심포니는 즐기는 사람들중 한 사람이었다. 붉은 현자는 한눈에 바깥이 보이는 넓은 창가 옆에 둔 안락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체 빗소리를 음미했다. 불규칙적인 리듬은 혼돈 그 자체나 다름없었지만 여느 인간이 그렇듯 붉은 현자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질서와 규칙을 찾아내고는, 지금 당장, 여기가 아니면 들을수 없는 그 훌륭한 공연을, 붉은 현자는 즐기고 있었다. 요즘따라 아이가 울어대는 일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예전만큼 피곤하지도 않아, 눈을 감았다고 바로 잠에 빠져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여유부릴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빗소리 사이의 이질적인 울림을 금새 눈치챌 수 있었다. 노크 소리였다. 늙고 잊혀진 붉은 현자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요?"

붉은 현자가, 문 뒤로 다가가 물었다. 빗소리 때문이었는지, 문 너머의 누군가는 처마 밑에서 옷깃을 추스리다 이내 대답했다. 

"접니다. 기억하십니까?"

낯설었다. 하지만 기억속 어디에선가 붉은 현자에게 친숙한 목소리였다. 끄응대며,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붉은 현자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더듬고, 또 더듬어서야 겨우 그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아, 그때 그 주간지의 기자분이시군. 이름이, 맞아, 오티스라고 했었지. 밖이 찬데 빨리 들여주지 못해 미안하네. 내 나이를 먹어서 자네 목소리를 금새 떠올리지 못해서 말이지. 어서 들어오게나."

붉은 현자는 현관문을 열었다. 비오는 날 특유의 눅눅한 찬 공기가 따뜻하게 데워진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 사실을 오티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티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발걸음을 재촉하며 쓰고있던 우산을 접고 집 안으로 최대한 빨리 들어섰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짧은 사이에 맞게되는 빗방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옷깃을 여민 오티스였지만, 그의 코트는 이미 한참 전부터 흠뻑 젖은 듯 마른 현관에 물방울을 추적추적 떨어트리고 있었다. 

“떠올려주신 것 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름까지 기억해 주실 만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말이죠. 집이 정말 아늑하고 좋네요. 먼저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연락처를 도저히 찾지 못하겠더군요. 편히 쉬고 계시던 것을 방해한게 아닌지…"

걱정섞인 오티스의 발언에, 붉은 현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잘 와주었다네. 이 늙은이를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어 적적한 삶일 뿐이었으니 말일세. 일단 어서 그 젖은 코트 먼저 걸어놓게나. 내 금새 마른 수건을 가져 오겠네."

마치 몇번이고 반복해 이 집에 찾아왔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오티스를 맞이한 붉은 현자의 분주한 뒷모습에서, 오티스는 그간 쌓여있었던 붉은 현자의 적적함을 약간 엿볼 수 있었다. 당연했으리라.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던 양반이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몇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오티스의 방문 만으로도 이 상황을 타개한 것 같아 보인다는 점에서, 그 쓸쓸함이 그리 심각한 수준의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눈치챘다. 다만 그런 붉은 현자와 오티스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붉은 현자가 따뜻한 거실에 놓여진 소파에 앉아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은 오티스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내어놓고 난 뒤였다.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붉은 현자는, 오티스가 차 한모금을 음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녹차라고 한다네. 사실 나도 그렇게 많이 마셔본 차는 아니네만, 차가워진 몸을 덥히는데 차만한 음료가 없지. 어떻게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구만."

“좋습니다. 저도 차를 그렇게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라서 낯설긴 하지만, 마음에 듭니다. 무엇보다 향이 매우 독특하네요. 홍차와는 다르게, 매우 깔끔한 향이에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일세. 바로 그 향에 이끌려 녹차를 산거라네. 혹시 모를 손님에 대비해 사놓았던게 정답이었구만 그래."

오티스는 차를 한모금 더 들이켰다. 맑고 투명한 녹차는, 오티스가 이따금 마시던, 우유를 한껏 섞은 홍차와는 전혀 달랐다. 쓴 맛이 혀 안을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혀 위에 끈적하게 남지않은체 목넘김과 함께 금새 사라졌다. 난생 처음으로 기분 좋은 쓴 맛을 느낀게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 였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떠올렸다는듯 말했다.

“그동안 도시 생활에 완전히 적응 하셨나 봅니다. 마지막에 뵈었을땐 공원에서 노숙하시는 분들과 음식을 나눠 드시더니, 지금은 교외의 한적한 주택에서 비를 피하며 손님을 위한 차를 구매하는 이야기를 하시니 말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 않은가. 자네도 더이상 눈 밑이 어둡지도 않고 행동거지도 좀 더 느긋해진 걸 보니 살림이 많이 나아진듯 보이네만, 내가 틀렸다면 말해주게."

“하하, 정답입니다. 사실 예전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지면에 실은 뒤로 상당히 출세하게 되었지요. 덕분이라고 해야할까요. 그 뒤로 승진에 꾸준히 성공해서 편집장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래보였다. 분명 붉은 현자의 눈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무언가에 뒤쫓기듯 새로운 기삿거리를 찾아나서는데에 혈안이 되어있던 과거의 풋내기 기자보다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잡지사 한켠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연륜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미간의 주름을 한껏 과시하며,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눈 앞에 놓여진 퇴고 직전의 기사를 들여다보는 편집자에 더 가까워보였다. 

“축하한다네, 편집장이라니. 그럼 자네 말 한마디에 기자들의 이야기가 희비를 교차하겠군 그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됩니다만, 결코 편해지는 일은 아니네요. 일단 제 자신이 밑바닥부터 올라온지라 더더욱 그런것 같구요. 아니면, 나이가 그렇게 유유부단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세월이라는 놈이 사람을 물러터지게 만들기는 하지. 자, 그래서 이런 한적한 교외의 늙은이에게 잘나가는 편집장이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

붉은 현자가 보낸 자애로운 눈길에, 그리고 당연히 다가온 그의 질문에, 오티스는 살짝 침묵을 가졌다. 머그컵을 감싸쥐고 있던 두 손의 손가락에 힘을 주며, 오티스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를 붉은 현자에게 고백할지 마음 속으로 조심스래 망설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저희 잡지사가 잘 나가고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황이죠. 아니, 저희 업계의 상황 자체가 안좋습니다. 더 질 좋고 재미있는 글들이 인터넷으로 속속들이 올라오는 시대다보니, 아무래도 인쇄기로 인쇄되어 나오는 매체는 전부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 잡지도 아마 반년을 넘기기는 힘들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다른 잡지와 비교하면, 그나마 오래 버틴거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적어도 이 잡지가 폐간되기 전에, 가장 인상깊었던 기사를 뒤쫓아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바로 선생님의 이야기였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선생님을 이용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선생님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분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는 저의 출세를 위해 선생님을 이용했고, 선생님이 어떻게 느끼셨던간에 저는 그 사실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려왔습니다. 언제 한번 다시 찾아뵈어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건만, 일에 치인 일상을 보낸 덕분에 그럴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구요.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뒤에 공원으로 갔지만, 모닥불의 밤에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들이 아직도 불을 피우던가?"

“예, 물론이죠. 선생님이 떠난 뒤에도, 그 공원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서로의 마음을 덥히고 있덥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도 하곤 하지만, 선생님 없이도 수많은 따뜻한 이야기가 오가더군요. 하지만 그곳에서 선생님의 행방을 아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대신, 선생님이 진행하신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던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한 청년이 맞은 불운한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뒤늦게 진상이 밝혀진 그 사고, 혹은 살인사건의 전말을 규명하는데 한 노인의 노력이 뒤따랐다는 것 또한 알아냈고 말이죠. 그 곳에서 선생님이 살고 계신 이 주소를 찾아내었고, 오늘에 이르게 된겁니다.

오늘 이 자리의 저는, 편집장으로써의 제가 아닌 풋내기였던 과거의 저로써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때 다루지 못했던 선생님의 뒷 이야기를,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를 기사로 내고 싶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은 선생님과 선생님의 이야기를 한순간의 오락거리로 소비하고 말았습니다. 저또한 그랬구요. 아직 잡지가 살아있는 동안,  그 사실을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하고 찾아왔습니다. 아니, 기사로 나오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선생님이 그동안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제가 선생님에게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를 저지른 것은 아닐지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적막이 맴돌았다. 칙칙한 먹구름은 가시지 않았지만 적어도 칙칙하게 내리던 비는 소리없는 싸리비로 변하더니 어느샌가 멎어있었다. 천둥치지도 않는 그 어둑한 하늘 아래서, 주황색 형광등이 내리비추는 안락한 가정집 안의 둘은 조용히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현자는, 오티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오티스가 자신의 이야기로 또 한번 재기를 노린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예전의 붉은 현자였다면, 기꺼이 환영할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대신, 붉은 현자는 말했다.

“별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네만, 내 이야기해주는 건 힘들지 않네. 하지만 그걸 기사로 출간하는건 사양하겠네. 나는 늙고, 지쳤다네. 남들은 나를 붉은 현자라고 불렀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붉은 노인에 불과할 뿐이지. 홀로, 옛 일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기는 늙은 노인네말일세. 그런 한적한 노인네의 일상따위 흔쾌히 이야기해 주겠지만, 자네의 독자들이 과연 그걸 좋아할까? 설사 좋아한다하더라도, 예전처럼 대중의 관심을 받을만한 자신도 없다네. 앞서 말했듯, 나는 지쳤다네. 더이상 원기 왕성하게 옛 이야기를 들려줄만한 힘이 없어. 그런 늙은이의 이야기라도, 들어주겠나?"

붉은 현자는 오티스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떠오르리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마음 한켠으로는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또한 가지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오티스는 활짝 웃었다. 이제 곧 사라질 생업의 위기에 앞서, 예전에 자신이 저지른, 또는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존재했었던 것이다. 오티스는 말했다.

“물론이죠. 기사는 사실 어찌되도 좋습니다. 선생님과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말이죠. 시간은 많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천천히 모두 이야기해주세요."

“그런가. 흠. 좋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그래, 점심은 먹었는가? 살짝 늦긴 했지만, 긴 이야기가 될테니 뭐라도 준비하도록 하지."

“아, 괜찮습니다. 오는 길에 타코를 먹었거든요."

“요 밑의 사거리에 있는 가게에서 말인가? 휴고네 가게로군. 그 친구가 타코 하나는 기막히게 잘하지. 그럼 내 누추한 요리실력은 감춰질 수…오, 이런."

그 순간 아이가 울어대기 시작했기에, 붉은 현자의 말은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높고 시끄러운, 특유의 정신없는 소음에 오티스는 순간 놀라 소리의 근원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실 한켠, 담요에 덮여진 채로 고요히 놓여있어 그저 독특한 장식물이라 생각했던 그 구체가 언제 그랬냐는듯 시끄럽게 소리를 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Author

Lv.1 네크  3
0 (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73 고래 댓글6 레이의이웃 08.31 2716
172 切段 댓글4 Novelistar 08.27 2831
171 납치 안샤르베인 08.26 2601
170 마주침 댓글4 안샤르베인 08.18 2672
169 뒤를 무는 악마 댓글2 작가의집 08.10 3478
168 작문 쇼 댓글2 민간인 08.10 2857
167 애드미럴 샬럿 2 폭신폭신 07.30 2745
166 검은 나비의 마녀 댓글1 블랙홀군 07.17 2839
165 애드미럴 샬럿 1 폭신폭신 07.15 2859
164 섬 저택의 살인 9 댓글2 폭신폭신 07.06 2773
163 섬 저택의 살인 8 폭신폭신 07.04 2872
162 네버랜드 - 3. 엄마? 마미 07.03 2866
161 섬 저택의 살인 7 폭신폭신 07.03 2717
160 네버랜드 - 2. 알브헤임 마미 07.02 2635
159 섬 저택의 살인 6 폭신폭신 07.02 2762
158 섬 저택의 살인 5 폭신폭신 07.01 2661
157 도타 2 - 밤의 추적자 팬픽 Novelistar 06.30 2728
156 섬 저택의 살인 4 폭신폭신 06.29 2636
155 네버랜드 1. 웬디 그리고 피터팬 마미 06.28 2701
154 라노벨 부작용 다움 06.27 2760
153 파리가 사람 무는거 본적 있어? 댓글2 다움 06.27 3072
152 카라멜 마끼아또, 3만원 어치 민간인 06.26 2842
151 섬 저택의 살인 3 폭신폭신 06.26 2597
150 섬 저택의 살인 2 폭신폭신 06.24 2608
149 섬 저택의 살인 1 폭신폭신 06.23 2628
148 무제 민간인 06.22 2800
147 발을 무는 악마 댓글6 작가의집 06.19 2915
146 [본격 휴가 나온 군인이 쓰는 불쌍한 SF 소설] 나방 (#001 - 강산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사람뿐) 레이의이웃 06.11 2796
145 인문혁명 댓글2 Tongireth 06.11 3150
144 손님을 맞는 이야기. 폭신폭신 06.05 2791
143 훈련소에서 댓글1 폭신폭신 05.25 2950
142 [공모전에 낼 소설 초안] 꿈, 혁명, 그리고 조미료와 아스피린 (1) 댓글1 BadwisheS 05.19 2938
141 학교에 가는 이야기. 폭신폭신 05.13 2844
140 세달만에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 폭신폭신 05.12 2526
139 뚜렷 한흔적 댓글2 다움 05.10 2845
138 Spinel on the air(스피넬 온 디 에어) - 프롤로그 [군대간]렌코가없잖아 04.26 2600
137 마지막 약속 댓글3 안샤르베인 04.18 2748
136 빛이 지는 어둠 속 작가의집 04.14 2932
135 아름다웠던 하늘 김고든 04.10 2842
134 이별의 아침 아이언랜턴 04.09 2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