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을 보내며

잉어킹 0 2,649
 온갖 종말론적인 헛소리-운석, 마야 달력, 르뤼에, 우발적 핵전쟁-에도 불구하고, 12월 31일 저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있었다. 12월 21일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으니,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저 쓸데없는 기대에 불과할 것이다. 퇴식구에는 쇠젓가락의 숲이 서 있었다. 방학이라 직원들은 다 퇴근한 가운데, 몇 명만이 앉아 쓸쓸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이제 입가심이라도 할까 싶어 매점으로 가니, 반겨주는 건 불 꺼진 매점 문과 ‘영업시간: 방학 중 아침 10시-저녁 7시’뿐이었다. 

 “씨팔......” 식당 문을 열고 나오니, 밤공기가 찼다. 당연했다. 여기저기 녹다 만 눈이 깔려 있었으니까. 학교를 에워싸고 있는 산등성이가 가로등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 길로 다시 앉아 졸고, 가스가 차서 시큼한 트림이나 게워내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가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여러분은 정말 알찬 방학을 보내고 있군요. 개뿔이. 자격증을 따는 것도 아니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돈으로 학점을 살 뿐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서 벌써부터 낙제점만 간신히 면할 게 눈에 선히 보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당사자가 내게 낙제점을 두 번이나 준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뱃속에는 기름이, 머릿속에는 안개가 끼고 있었다. 어떻게 걷어낼 수도 없는 짙고 끈적끈적한 안개가. 바람이 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옆에서 젊은 애들 둘이 걸어오다가, 내 쪽을 보더니 뭐가 그리 우스운지 낄낄거렸다. 어쩌면 단순한 피해망상이었을지도 모르고. 나는 자리에 앉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엎어졌다. 엎어질 때는 언제나 10분만 자고 일어나자고 생각하지. 일어날 때는 항상 뱃속에서 시큼한 트림을 게워 올리고, 이용시간 끝났으니 나오라는 방송이 울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뭘 봤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오자 이파리와 함께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도로 양 옆을 보니 양버즘나무들에 아직도 이파리가 매달려 있었다. 뭐가 아쉬워서 아직도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나랑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그만두지 못해서 그저 매달려만 있는 점에서는. 그래서 내가 그렇게 세상이 끝장나버렸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만두지는 못하니까. 

 집에 오니 동생이 제야의 종 타종식을 보고 있었다. 형 왔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쓸모없이 무거운 가방을 집어던지고,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주워먹은 뒤 대충 씻고 자러 갔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핸드폰 화면에는 확인하지 않은 알람이 2개 떠 있었다. 나는 또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집을 나섰다. 여전히 바람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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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허구입니다. 실제 인물, 단체, 기타등등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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