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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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를 옛날부터 새벽의 거리를 도보로 횡단하는 것을 즐겼다. 특히 내가 기억하는  개의 거리들을 돌이켜 본다.

1. **고등학교에서 남목으로 향하는 s마트 앞의 거리는 항상 붐볐지만, 가끔 기숙사 통금시간을 어기고 나선 새벽에만 있는 청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다. 시간에는 현대중공업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스쿠터들로 붐비고 시끄러운 거리가, 밤이나 새벽이 되면 도심과 학교 사이의 간극에서 사람 없는 천연의 산책로가 되었다. **고등학교 쪽의 대숲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서 나는 쏴하는 소리가 찌든 피로도 씻어내는 아름다운 울림을 들려주었고, 천천히 귀를 기울이면 멀리 해변에서 파도가 부닥치는 소리도 귀에 들릴 했다. 가끔 쥐가 사람 없는 보도를 질주하고는 했는데, 발소리마저도 울리는 무인의 아름다움에 나는 소리 죽이고 기숙사로 혹은 시내로 향하고는 했다.

가끔 비가 오면 대숲의 아름다움이 더해졌는데, 여름철에는 매일같이 그랬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여름을 싫어하고 비가 오면 특히 싫어했지만, 비가 그친 거리를 걸어 내려가거나 올라갈 대숲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은 그야말로 청쾌했다. 이런 아름다움들을 간직한 거리를 왕복하며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견딜 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2. 대학동의 고시촌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은 처음 길을 오를 때는 길고 힘겨웠다. 특히 눈이 얼어붙은 겨울에는 미끄러지는 발걸음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딛어 오르는 행로였다. 오르면 오를수록 망설임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조바심이 부풀어 오르고, 절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그런 길이었다. 그리고 좌우로는 작은 카페와 고시원,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작은 방들에 가득히 자리잡고 있을 사람들과 그들의 슬픔과 고민이 잿빛 콘크리트로 배어 나오는 해서 길을 오르는 나의 걸음도 무거워졌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며, 그런 고민들도 잊혀져 갔다. 무렵에는 내가 타인에게 자랑하지는 못할 자유에 취해 시간들을 고민 없이 흘려 보내는 그런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새벽에 나의 좁은 방에서 -마실 사려 나섰거나, 혹은 피시방을 향했을 것이다.-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밤중에 내린 비로 젖어 있었고, 비와 바람에 엎어진 쓰레기통에서 굴러 나온 비닐, 종이 그리고 그런 것들이 뭉치를 이루어서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원체 관리가 되지 않던 작은 마트의 등불은 깜빡이며 점멸했는데, 시간 까지 내리던 가랑비에 이지러지며 비틀거렸다. 달은 반달이나, 초생달이었을 텐데  구름이 가릴 때마다 빛이 사라지곤 해서 거리는 내가 동안 감추어두었던 초조함과 불안, 울증과 쾌감 또는 전부를 드러내는 듯한 초현실주의적인 아름다움을 보였다. 이후에 번이곤 순간 겪은 일종의 에피파니를 다시 경험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서고는 했다.

3. 창경궁 뒤의 국립서울과학원 앞의 거리는 주로 피시방을 가거나 오는 길에 걷고는 했는데, 거리는 평소에는 굉장히 살풍경한 거리였다. 한쪽에는 회색 담의 살풍경함과 암록색 담쟁이 덩굴이 다른 한쪽에는 빽빽이 지나가는 자동차들로 폐소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학교 부지로 들어가기 위해서 오르는 오르막길 왼편으로는 장례식장과 담배를 입에 양복 입은 사람들이 있어, 죽음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에 마음이 답답해지고는 했다. 친구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도 즈음에 도달하면 말거리도 떨어졌고 주로 게임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느끼는 약간의 죄책감에 말수가 줄어들고 억지로 아무 말이나 했다가 부끄러움을 혹은 후회를 느끼고는 했다.

어느 새벽에 어느 때와 같이 죄책감과 불안으로 얼룩진 자신을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다. 새벽의 거리는 무겁고 건조했다. 입술이 갈라지고 초조함을 느꼈다. 황폐한 골목에 거짓찬란하게 빛나는 할로겐 가로등이 눈을 따갑게 했고, 오르막길은 어느 때보다 가파르고 오르기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길을 오르다 달은 너무나도 투명하게 거울처럼 나의 추함을 비추고 있었는데, 모멸감과 고통이 창이 되어 나를 찔러 슬프게 했다. 좁고 답답한 세계에서 나는 나의 소심함과 게으름과 속좁음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며 잠시 서있다가는 다시 기숙사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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