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바다와 모래사장을 낀, 태양이 얼굴을 내미는 날 보다 안개가 낀 날이 더 많은 한적한 해변 마을 엘 산토리노(El Santorino).
여행 가이드북에도 짤막하게 언급될 뿐이고, 드문드문 배낭 여행객들만 방문하는 정도인 이 마을은 인접한 바다의 영향으로 안개가 매우 자주, 그리고 짙게 끼는 마을이었는데, 그때문인지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어떤 이야기 하나가 전설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몹시 많이 불고, 안개가 매우 짙게 깔리는 날에는 안개 낀 해변을 거니는 거대한 그림자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물인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그 그림자는 인간이 다가가면 이내 짙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이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
그림자가 별 달리 마을에 피해를 주거나 하는 일도 없고, 이따금 날씨가 매우 나쁠 때만 간간히 시시한 목격담 따위가 전해지는 정도였기에 마을 사람들도 크게 대수롭잖게 생각했으며 가끔은 안개 낀 해변을 거니는 거대한 그림자라는 그 존재 자체를 마을 관광용 판촉물로 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안개 낀 해변을 거니는 그림자는 마을과 함께 자라왔고, 한창 마을이 발전 할 때는 그덕분에 미스터리 스팟으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점차 도회지로 가기위해 마을을 떠나면서 자연히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도 한때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정도로 잊혀져 갔고, 끝내는 엘 산토리노 자체가 유령도시가 되버림과 동시에 이야기의 흔적마저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렸다.
엘 산토리노 라는 이름도 잊혀져갈 무렵. 자신만의 비밀기지인 다락방에서 해변 마을 엘 산토리노에 대한 책을 읽고있던 소녀 클라리사는 바람이 불고 안개가 낀 날에만 보인다는 거대한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 다다르자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물론 창 밖에는 그저 비 오는 잿빛 구름만이 넘실거릴뿐인 음울한 하늘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그곳의 주민이기도 해서 엘 산토리노에 대한 책이 몇권인가 있었기에 클라리사는 그 책들을 몇번이고 반복해 읽고, 때로는 할아버지에게 정말 그런 이야기가 있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소녀에게는 실망스럽게도, 할아버지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고 어렴풋이 떠올리긴 했지만, 그림자를 직접 보았냐는 질문에는 그저 구전으로만 들어봤을뿐 그림자 같은건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을 따름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해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몇년, 장례식 이후 몇년간 굳게 잠겨있던 할아버지의 서재를 청소하기로 마음먹은 클라리사는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열고 불을 켜보았다. 모든 것이 장례식 직후 열지 않겠다고 잠궈버렸던 그 날의 시간 그대로 멈춰진 공간이었다. 정리할 물건들을 찾을 겸 서재를 찬찬히 돌아보던 클라리사의 눈에 띄인건 할아버지의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책 한 권이었다. 손바닥으로 두텁게 쌓인 먼지를 쓸어내리자 보인건 낡고 빛바랜 해변 마을의 사진이 실린 표지, 어린 시절 몇번이고 읽었던 해변 마을 엘 산토리노에 대한 여행 가이드북이었다. 가이드북을 집어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무언가가 툭 떨어졌기에 클라리사는 책을 덮고 그것을 줍기위해 허리를 굽혔다. 페이지에서 떨어진건 자그마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그것도 무언가를 찍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노이즈가 짙게 깔린 회색빛 풍경이었다.
하지만 클라리사는 사진을 보자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찍은 건지 알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득한 과거, 엘 산토리노에서 목격되었다는 거대한 해변 그림자에 대한 사진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째서인지는 자신도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마음으로부터 이 손바닥만한 사진 한 장이 그 그림자를 찍은 사진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클라리사는 조용히 여행 가이드북에 사진을 도로 꽂아두고 원래 있던 자리에 고스란히 놔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서재를 나서며 불을 끄고 문을 잠궈버렸다. 당초의 목적이었던 청소는 아마, 당분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남기며...
서재를 나온 그녀는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물론 처음부터 정한 그대로, 유령도시 엘 산토리노 였다. 그녀가 현재 살고있는 엘 토리오(El Torio)와는 도보로 한시간 정도 떨어진 근처였기에 그녀는 부담없이 느긋하게 걷고 또 걸었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걷기를 한참, 낡고 빛바랜 목재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다. 읽기 힘들 정도로 비바람에 풍화된 글자를 십여분간 간신히 해독해서 읽고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걸 깨달았다. 한때는 활기 넘치던 해변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다 부서져버린 몇채의 집들만이 남은 몰락한 폐허,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이름은 엘 산토리노.
해변은 마을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있기에 그녀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잡초들을 간신히 해치면서 메인스트리트(라고 생각되는 큰 길)를 걸었다. 어린시절 읽은 책들에는 에쁘장한 집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다 부서져버린지 오래인 목재 더미의 폐허가 메인스트리트 좌우에 을씨년스럽게 늘어선지 오래였다. 그런 살풍경한 모습을 감상하며 걷기를 얼마 후, 최종 목적지인 해변에 도달했다. 날씨는 마침 안개가 짙게 깔리고 바람도 강하게 불고 있다. 포석에 앉아 느긋하게 잿빛 바다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마침내 '그것'이 나타났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이야기 속 그 모습 그대로, 짙은 안개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클라리사가 경외감과 감탄에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자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그것'은 다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려 했다. 다급해진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잠깐만!"이라고 소리치자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놀랍게도 도중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클라리사는 습기를 머금은 모래톱에 발이 빠지는 것도 무시하고 거의 뛰다시피 '그것'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만 자신을 보는 것을 순순히 허락한 '그것'의 정체는 안개를 자신의 보호기재로 삼은 거대한 짐승이었다. 그렇지만 그 짐승은 피와 살로 된 생명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엔진이나 모터라는 이름의 기계심장을 가진 기계도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플라스틱 파이프가 얼기설기 엮어진 거대한 몸에 플라스틱 패트병을 심장으로 삼아 천으로 이루어진 돛을 가진 인공적인 짐승이었다.
플라스틱 파이프의 짐승은 그녀의 다음 말과 행동을 기다리듯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선 채로 돛을 바람의 방향에 따라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바람을 탄 돛의 가볍고도 경쾌한 움직임은, 그 짐승에게 있어서는 호흡이나 다름없었다. 그 호흡을 보며 그녀는 플라스틱 파이프로 이루어진 몸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내 손을 때고 멀찍이 떨어지자 짐승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돛을 쉴새없이 펄럭이며 수많은 플라스틱 파이프로 이루어진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생명체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기에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짐승을 향해 소리쳤다.
"사진 한장만 찍어도 돼?"
짐승은 다시 자리에 멈춰 서서 돛을 흔드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행동을 무언의 대답으로, 동의로 간주한 클라리사는 가져온 카메라로 짐승의 모습을 찍었다. 다시 짐승이 걷기 시작하자 그녀는 "고마워!"라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 인사에 화답하듯 짐승도 돛을 흔들면서 느긋하게 얼마간 그녀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이내 처음에 나타났을 때 처럼 다시 안개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갔다.
"잘가. 또 올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신과 교감해준 짐승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내고, 클라리사는 왔던 길 그대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것', 플라스틱 파이프 짐승의 정체는 당분간 둘만의 비밀로 해야할 것 같았다. 언젠가 또 이곳에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며 클라리사는 어느사이엔가 맑게 개인 푸른 하늘로 얼굴을 비추는 햇살 속에서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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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쓰인 StrandBeest(해변동물)는 네덜란드의 키네틱 아티스트, 테오 얀센(Theo Jansen)이 제작한 일련의 작품들을 총칭합니다. 플라스틱 파이프, 패트병, 종이나 천, 혹은 비닐 돛으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플라스틱 짐승들은 엔진이나 모터의 힘을 일체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연의 힘, 돛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힘으로만 작동합니다. 이를 통해 돛을 좌우로 흔들면서, 수많은 플라스틱 파이프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걷는 그 모습은 마치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복잡하면서도 유기적인, 그리고 굉장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특징입니다. 제작자인 테오 얀센은 자신이 제작한 이들 스트랜드비스트 모두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간주하고, 저마다의 라틴어 동물 학명까지 지어줬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트랜드비스트의 수명은 약 2년 정도라는듯.
그리고 이 글은 물론 그 해변동물에서 모티브를 빌려왔습니다. 여기서는 조금 미스테리어스를 섞어서, (돛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짙은 안개가 끼는 날에만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정체불명의 존재로 묘사하였고, 주인공이 본 진짜 정체는 물론 원형의 그것 그대로인 플라스틱 파이프로 이루어진 생명체로 묘사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