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구슬과 밤이 흐르는 곳 - 2

Novelistar 0 2,552
"오빠."
현관 계단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햐르타는 무척이나 가냘팠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부모로부터 나온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나와는 너무도 다른 여동생이다. 조그만 몸에 가냘픈 팔다리, 그리고 정반대의 성격. 햐르타를 보고 있자면 할아배가 말해줬던 유리라는 것이 생각난다. 바깥에서 반대편 바깥이 내다보이는, 투명하고 맑은 물건. 안드라 아저씨는 햐르타를 보고 유리 인형이라고 했다.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어울리는 말이었다. 햐르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앞뒤로 몸을 흔들거리며 물었다. 나는 방금 잡아온 커다란 놈을 손질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별이라는 거 있잖아. 아저씨가 빌려준 책에서 읽었단 말야. 저어기 위에 반짝거리면서 빛나는 자그만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더라."
"응."
"근데 여기서는 왜 별이 안 보여? 책에서는 어디에 가도 밤이 되면 보인다고 했는데……."
나도 본 적 없단다. 인석아. 내게 물어 뭣하니.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글쎄. 구름님이, 읏차. 계셔서 그런거 아닐까?"
아가미 부분에서 칼이 걸려 애를 먹었다. 비늘이 잘 벗겨지지가 않았다. 햐르타는 생선을 손질하며 말한 것에 성의가 없다고 생각한건지, 그 내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단에 굴러다니던 자갈 하나를 집어 저 멀리 던졌다.
"구름님은 말야.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잠시 날아가셨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단 말야."
"오빠는 잘 모르겠다야."
"구름님이 궁금하니?"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디선가 우연히 듣고 있었던지, 아니면 엿듣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안드라 아저씨가 옆구리에 붓과 종이를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햐르타는 안드라 아저씨를 보자마자 잽싸게 튀어나갔다. 왠지는 몰라도 여동생은 아저씨를 잘 따른다. 나는 그와 반대로 내심 못마땅해 했는데, 그게 그냥 여동생과 친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랬다.
"아저씨~" "읏차, 욘석."
아저씨는 햐르타를 안아 올리더니, 어깨 위로 무동을 태우곤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 비늘이 어떻게 되먹었길래 이렇게 단단한거여.
"아저씨, 아저씨. 알려주세요. 왜 저 구름님들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거에요?"
햐르타는 호기심 충만한 눈빛으로 아저씨가 가리킨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점심도 굶어놓고 꽤나 명랑한 목소리였다. 아저씨는 어깨 위에 올라탄 햐르타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날뛰어서 그런지 조금 버거워하며 자세를 다시 잡고는 말했다.
"욘석아, 나도 듣고 있어서 아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마려무나."
"알려주세요~알려주세요~"
아저씨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골랐다. 햐르타에게 옛날 이야기라던가 책을 읽어줄 때면 저렇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나는 드디어 생선의 아가미를 잘라내고서야, 잠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칼을 내려 놓았다. 햐르타는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아저씨의 가슴팍을 살짝씩 때리고 있었다.

"그건 말이다…"





"일어났어?"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서 잠에 깬건지, 잠에 깼는데 햐르타의 목소리가 들린건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뒤척이려던 찰나 몸이 쑤셨다. 바람이 거세게 불려는 참인가보다. 그와 동시에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시야가 흐릿했다. 창가에 햐르타가 흔들의자 위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거죽으로 싸인 커다란 책이 놓여 있었다. 무겁지도 않나. 햐르타는 가냘픈 소녀에서 가냘픈 아가씨로 자라났다. 유리는 차갑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그와 동시에 햐르타는 내게 점점 차가워졌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 차가움이 안에 남아 느껴졌다. 싸늘한 냉대가 아닌, 이야기를 한 이후,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딘가 한 구석에 남는 그런 서느럼이었다. 내가 미안할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지만, 미안했다.

"창문 좀 닫아줄래?"
햐르타는 나와는 정반대로 바람을 좋아했다. 나는 그 바람에서, 한 방울의 피로 알게 된 그 냄새의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싫었다. 열 아홉에 성인식을 하고 나서도 햐르타는 여전히 바람 쐬기를 좋아했다. 바람을 쐬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 했지만, 피 냄새를 알게 된 후에도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른다. 뒤의 경우는 왠지 생각하기 싫었다. 단 하나 바뀐게 있다면, 예전의 그 초롱초롱하던, 바람님이라고 부르며 창가에 앉아 입을 벌리던 그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인형처럼 앉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책을 읽고, 바람에 쪽수가 넘어가도 그저 묵묵히 다시 되넘겨 책을 읽을 뿐이었다. 창문을 닫아달라는 나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햐르타는 가는 양 팔을 벌려 여닫이 창을 하나씩 힘겹게 닫았다. 그리고는 무릎 위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저씨한테 들었어. 산으로 간다면서."
갑자기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났다. 햐르타가 책을 덮고 내 옆, 침대 위에 걸터 앉아 등을 두들겨 줬다. 죄 짓는 것도 아닌데 왜 기침이 나는지 원. 등을 두들겨주며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왠지 더더욱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기침이 멈췄는데도 계속 심술궂게 등을 두들기자 몸을 일으켜 햐르타를 바라봤다.
"너도 알잖아. 가야 한다는 거."
내 말에 햐르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도 알잖아. 되게 위험하다는 거."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햐르타는 살짝 웃으며, 다시 의자로 돌아가 몸을 푹 안긴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할아배가 햐르타더러 읽는 이라고 써놓은 그 쪽지를 아저씨가 보여줬을런지가 궁금하다. 읽는 자이기에 책을 저렇게 좋아하는걸까, 책을 원래부터 좋아하는데 읽는 자인걸까?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 아마 후자겠지. 할아배는 햐르타를 본 적도 없고. 양 손을 머리에 베고 다시 누웠다. 햐르타는 계속 묵묵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아직 반 까막눈이라서 저렇게까지 빨리 읽진 못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여동생이 벌써 성인식을 치뤘다는 게 참 오묘할 따름이었다. 근데 왜 여자애들은 열 다섯에 성인식을 하는 걸까. 아저씨를 만나면 묻고 싶었다.

"괜찮아, 인마. 내가 뭐 그렇게까지 운이 없는 놈도 아니잖아. 잘 될거니까 괜찮아."
왠진 모르지만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건넸다.
"괜찮지 않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잖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하는게 좋다고 봐, 오빠."
얘 또 이런다. 구석에 또다시 싸늘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그와 동시에 살짝 머쓱해졌다.
"뭐, 그, 그럴지도 모르지만 진짜로 괜찮어."

여동생의 옆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내 여동생 치고는 너무도 예쁜 얼굴이다.





벌어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일어나 점점 커져 마침내 대두 되었을 때는 그 누구도 겉잡을 수 없게 된 일이. 섬뜩하고 참혹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거의 모든 걸 집어 삼킨 그것의 위용은 마치 파도와 같을 것이다. 절벽을 향해, 굳건한 절벽을 향해 잡아먹을 듯 달려와 부딪고, 자신의 몸집의 두 배 가량 치솟아오르는 파도. 파도와 같으리라. 땅 위에 서있는 모든 것들을 바다로 밀어내어, 그 것들이 익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서서히 가라앉고, 마침내 바닥에 다다를 즈음 육탈하여 덜그럭거릴 때, 땅 위는 온전히 그 것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으레 음모라는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음모를 믿고, 그 일에 대비하며 살아오던 이들 또한. 그 일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 그 일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안아 추위를 버티며, 이 세상에 그들밖에 갖고 있지 않은 온기를 나누리라. 그렇게 살아가리라. 어느샌가 모르게, 언젠가는 그들이 실패하여 땅에서 몰아내어져 바다로 떨어지며 그들의 먼 조상을 만날지라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온기를 가진 이들로서 칭송받으리라.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별들로부터.

작자 미상, 종말록終末錄 , 7장 116쪽.



「」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를 담은 말이 목구멍을 타고 입술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의 이야기를 담은 이들의 목을 잘라 버린다. 어떤 것인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손에 쥐어보지도, 냄새를 맡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 하나는 장담할 수 있는데, 「」가 이 세상을 삼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의 행동의 의의를 그 누가 알랴.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전승해오는 말들에 의하면, 그저 싫어서라고 한다. 웃기지 않은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강력한지도 모르는 존재가 우리를 마치 우리가 개미 보듯 하는 심정으로, 그저 손에 쥐고 톡 터트려 죽이려고 한다.

「」의 손가락 안에는 작은 점만이 보일 뿐이겠지만, 그 안에는 필연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온기와 가정, 그리고 희망과 구원이 있으리라.
얼마나 우습고도, 무서운 일이랴.

히옌 카이그, 「」, 머릿글







진행을 좀 하려고 했으나 종말록까지 쓰고 날려 먹어서(...)
더 이상 생각이 뻗어나가질 않아 여기서 마칩니다.
하아...백스페이스에 지우기와 뒤로 가기 두 기능을 동시에 넣었을 디자이너, 누구냐 도대체!!

그럼 여기서 이만.

2014 10 25
0354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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