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헬스타가 부활할 것이다.
대마법사가 10년 전 예언했을 때는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다. 그의 예언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일하게 제국력 103년의 지진은 거의 맞아 떨어질 뻔 했지만, 그건 그의 제자들이 실험을 하다 난 사고였을 뿐 자연적인 지진하고는 상관없었다. 일찍이 많은 업적을 남긴 그였지만 엉터리 예언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마법사의 예언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고결한 영웅 아시스의 의지였다. 마법사는 예언과 함께 재앙을 막을 방비도 함께 마련했으나 혹시 악한 무리의 개입을 우려하여 선하고 정의로운 영웅의 혈통에게만 알려주었던 것이다.
지금껏 그의 예언을 막기 위해 아시스는 모험을 했다. 많은 동료와 만났고 많은 고난을 이겨냈다. 이제 마왕 헬스타의 부활을 저지하기 최후의 임무를 시작한다. 103년의 지진은 단순히 마법 실험이 아니었다. 아시스는 어떤 물건을 찾기 위해 현자의 안내를 받아 어두운 숲의 깊은 곳까지 도달했다. 그 물건이란 저주받은 갑옷. 고대의 악마가 그 힘을 두려워하여 이곳에 봉인해 버렸다는 무서운 갑옷이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악마의 권속은 자기희생주문으로 아시스를 막으려 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103년 큰 지진이 제국을 멸망시킬 거라는 예언이 실현될 판이었고, 그는 목숨을 걸고 폭발을 막아냈다. 그 결과 희생자는 변소에 앉아 있다 깜짝 놀라 똥통에 떨어진 국왕뿐이었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길은 열렸지만 아시스는 치명상을 입고 회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왕의 부활이 다가오고 있다는 압박감이 그의 회복을 더디게 했다. 마침내 일어선 그는 더 이지체 없이 미궁으로 향했다.
“발밑을 조심하시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현자가 말했다. 현자는 대마법사의 제자로서 아시스의 앞길을 비춰주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아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칠흑같이 어두운 미궁의 계단을 밟아갔다.
“누가 이런 미궁을 만들었을까? 악마인가?”
“그것은 전하는 바가 없소. 항간에는 세상의 더러움을 뭉쳐 악마가 만들었다 하나, 정작 악마도 이곳에 갑옷을 숨길 때는 많은 시험을 통과했다 전하지. 스스로 만들었다면 그럴 일이 있겠소?”
“하지만 이곳엔 사악함이 넘치고 있다. 그저 계단일 뿐인데도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 발밑에서부터 나의 기력을 빼앗아 가는 느낌이다.”
“저길 보시오! 죽음을 부정한 무리들이오!”
현자가 가리킨 곳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체들이 비틀거리고 있다.
“이 마족 놈들! 현자는 내 뒤에 있으라. 내가 저것들을 도륙 내겠어.”
미궁의 도처에 위험이 도사렸다. 죽지 않는 시체들과 피를 빨아먹고 악의 수하가 된 이리떼들, 살 파먹는 벌레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촉수. 구천을 떠도는 망자들마저 이곳을 피해간다는 전설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다……. 더군다나 이 마지막을 넘기지 못해서야 지금까지 해온 고생은 허사가 되고 만다. 용사는 이를 악물었다. 현자의 날카로운 감각은 그를 정확하게 갑옷으로 이끌었다.
“저걸 보시오. 저 절벽 맞은편의 문양을 읽을 수 있겠소?”
아시스는 횃불을 들어 절벽 너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3…… 9…… 그리고 이상한 문양이군. 오른쪽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른쪽 길로 가십시다.”
“이게 대체 무슨 장치들인지 모르겠군. 길을 가르쳐주는 건가?”
“틀리지 않을 것이오. 악마는 갑옷을 봉하긴 하였으나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거라 여겼지. 해서 그 힘에 짓눌리지 않을 강인한 자를 미궁에 보냈다 하오. 이 장치들은 모두 그 힘을 가늠하는 시험 같은 것이지.”
“대체 이 물건이 어느 정도 힘이기에…….”
그 갑옷을 입는 자는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히는 대가로 무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대마법사는 그 갑옷을 입는 자만이 마왕을 막을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시련은 그들을 가로막았지만 의지로 뭉친 두 사람을 진정 막을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미궁의 최심부를 점령했다. 최후의 파수꾼은 끔찍한 악취를 내뿜으며 일행을 공격했지만 현자가 혼신을 다한 억압마법을 펼치고 아시스의 날카로운 찌르기를 연거푸 맞은 괴물은 쓰러졌다. 괴물이 먼지로 변해 사라지자, 그들이 찾는 물건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이것이 바로!”
“맞소. 혼돈을 표현한 듯이 검고 칙칙한 무늬. 틀림없는 저주받은 갑옷이오.”
“하지만 모습은 보통 옷과 같은데.”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외형은 중요치 않소. 어서 착용해 보시오.”
용사는 서둘러 그 갑옷을 걸쳐 보았다. 그러나 전설에서 말하는 거대한 힘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 보이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소?”
“뭘 말인가? 보이는 거라곤 그대와 이 컴컴한 미궁 뿐…… 아, 아니?”
아시스의 표정이 소스라치게 일그러진다. 손을 휘저으며 허공에 대고 소리친다.
“이, 이놈들! 어디서 온 자들이냐? 물러서라!”
“됐군! 무엇이 보이는지 말하시오!”
“붉은 모자를 쓴 자들이다! 귀신 잡는 해병대라 외치며 다가오는군. 그대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그건 갑옷을 걸친 이에게만 보이는 자들이오. ‘선임’이라하지. 그게 나타났다면 성공한 거요.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웠소.”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나를 속였나?”
“속인 적은 없소. 단지 그 갑옷에 걸린 저주를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저주의 이름은 ‘국방의 의무’. 지금부터 당신은 2년 동안 악마들의 노예로 살아가게 될 것이오.”
“이 간사한 마법사 나부랭이야! 마왕이 부활을 획책하는 이때에 나를 배신하다니!”
“어허! 거짓말은 하지 않았대도. 그대에겐 분명 전능한 힘이 생길 것이오. 지금 당장 생기는 게 아닐 뿐이지. 마왕은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 부활할 거요. 그때쯤 당신의 저주가 깊어져 ‘말년병장’이란 상태가 될 것이고 그때는 당신을 거스를 자가 아무도 없게 될 거요. 지옥의 군대가 당신의 것이 되는 거지. 그 힘으로 마왕을 막아주시오.”
불쌍한 용사는 원망의 말을 뱉을 수도 없었다. 늪과도 같은 구멍이 나타나 그를 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시스의 눈에는 시커먼 손들이 그를 잡아당기는 걸로만 보였다. 그 구렁텅이에선 이번 신삥이는 어리버리하구만! 완전 폐급이구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귀를 더럽힌다. 그는 옷을 벗어버리려고 했지만 살같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현자는 비웃듯이 말한다.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 두시오. 그 옷은 한 번 입으면 벗을 수가 없소. 적어도 2년이라니까. 기한을 다 채우면 저절로 떨어질 것이니 용쓰지 마시오.”
용사는 그런 말은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벌써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가 남긴 단말마만이 미궁을 메아리친다. 현자는 차가운 작별을 남겼다.
“그럼 뺑이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