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금요일 밤의 열기 ②

로크네스 0 2,995
이전 편 링크 : 존재증명 ①  금요일 밤의 열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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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있지, 내가 왜 그렇게 화를 내고, 때려 부수고, 범인을 만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재미를 놓쳤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랬기 때문이 아니었어. 나는 절박했던 거야. 이건 재미있을 텐데. 이건 재미있어야 하는데. 적어도 이것만큼은 정말로 재미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던 거야. 실제로는 그다지 재밌는 일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만 이젠 깨달아버렸어. 강간범이든 뭐든 뒤쫓는 일, 벌써 질려버리고 말았어.
비참하지 않아? 이 순간 나는 가장 비참한 사람일 거야. 만족할 수도 즐거워할 수도 없는 사람이니까. 푸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지 않은 여자아이! 그나마도 다른 모든 지루한 것보다 조금 덜 지루한, 하지만 여전히 지루한 파편들을 찾아서 나는 허우적대고 있어. 인터넷을 켜고, 망가진 마우스 대신 터치패드로 커서를 움직여가면서, 그래, 이미 질려버린 일이라도 끝을 내려고 하고 있었어. 먼 옛날에ㅡ이제는 정말 아득한 옛날만 같은 그 때에 나의 사랑하는 엘 콘도르 파사는 말했지. 모르는 게 있으면 일단 검색해 보면, 뭐든 얻는 게 생긴다고. 스테잉 얼라이브,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 지루한 영 점 몇 초가 흐르고 화면에 떠오른 검색 결과는 이런 지루한 거였어.
“심폐소생술.”
범인이 듣고 있던 노래 두 곡은 전부 심폐소생술에 적합한 박자를 가진 걸로 유명한 노래였어. 성교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피해자 위에 올라타서 몸을 들썩거린 건, 그거였던 거야. 범인은 피해자의 목을 졸라서 기절시킨 뒤에 노래의 박자에 맞춰 심폐소생술을 했어.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지긋지긋한 일이지. 어떤 지긋지긋한 인간이 이런 지긋지긋한 짓을 했담. 계속 장소며 피해자의 타입을 바꿔가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추리가 완성되어갔고, 그건 정말 끔찍하리만치 지루한 결론으로 이어졌어.
 
체념했을 때 시간이 더 빨리 간다는 거 알아?
난 몰랐어. 그런데 그렇더라고. 7월의 네 번째 금요일, 마지막 벨루베니센의 날이 놀랍도록 빨리 다가왔어. 내가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나봐. 토피랑은 아예 연락도 안 하고, 교수도 내가 완전히 맛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도 금요일 밤에 밖에는 나가고. 시체처럼 내가 향한 장소는 루벤의 역대 시장들이 묻힌 묘지였어. 범인은 분명히 여기로 올 거야. 그리고 나는 기다려야 하겠지. 정말 싫다.
기다렸어. 계속.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기억도 안 나. 왜 내가 이걸 기다리고 있지? 재미도 없는데? 그야 물론, 범죄자를 만나는 게 음악 듣는 거보다 덜 지루하기 때문이긴 해. 정말 그것뿐인지 확신은 못 했지만. 지루함이 눈앞을 가려서 칙칙한 묘지가 뿌연 잿빛 안개로밖에 보이지 않을 즈음에 겨우 일이 하나 생겼어. 그러니까 조금 덜 지루한 일인데, 발소리가 들리더니, 목이 뻐근해지고,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야. 아하, 내가 목을 졸리고 있구나. 예상대로네. 너무 예상대로라 별로 당황스럽지도 않았고, 그냥 잠깐 늘어진 척 했다가 힘이 풀리는 틈을 타서 손가락을 꼭 깨물어 줬어. 비명도 예상대로, 목에 약간의 뻐근함과 혀끝에 약간의 쇠 맛만을 남기고 상황 일단 종료긴 한데,
“그래도 제 목을 조르면 어떡해요. 뇌손상이 더 심해지는 건 완전 사양인데.”
피가 꼴사납게 뚝뚝 흐르는 손을 감싸 쥐고 이쪽을 노려보는, 복면을 쓴 남자를 지루하게 바라보면서 내가 말했어. 안녕, 범인 아저씨. 나도 지루할 거고 그쪽도 지루하시겠지만 딱히 덜 지루한 일도 없으니까 잠시만 어울려 주실래요? 범인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내 다음 말이 그 발걸음을 붙잡아놓았지.
“이번엔 미성년자를 덮쳐요? 네 번 만에 아주 나락까지 떨어지셨네요.”
그리고 조금 더,
“인종은 동양인, 장소는 묘지. 음악은 계속 같은 건가요? 퀸?”
“날 알아?”
오케이, 걸려들었네. 완전히 약자라고 생각했던 여자애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따분하니까 속도를 좀 낼까.
“처음에는 으슥한 골목에서 30대의 라틴계. 다음엔 숲길에서 20대 후반의 백인, 인적이 드문 돌담길에서 20대 초반의 흑인, 그리고 지금은 묘지에서 10대 동양인. 목을 조르는 건 똑같지만 강도가 점점 심해졌어요. 아, 처음에는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를 듣고 있었지만 두 번째 범행부터는 퀸의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로 바뀌었죠. 일반적인 성범죄자와는 다르게 계속 디테일을 바꿔가면서 범행을 저질렀는데, 뭘 하고 있었나요?”
“너 지금 뭐 하는……,”
“자기를 가장 흥분시키는 상황이 뭔지 찾고 있던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나이며 인종이며 장소를 계속 바꾸고 있었던 거지. 이렇게 해 보고, 흥분이 안 되면 저렇게 해 보고, 이걸 바꾸고 저걸 바꾸고. 가만 서 있는 거 보니까 아무래도 정곡을 찔렀나 보네, 당연한 거지만.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더 흥분이 되긴 했을 거예요. 적어도 옷차림만 망쳐놓는 데에서 바지 벗기는 데까지는 나아갔잖아요.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꼴렸던 적은 없었겠지, 아니, 애초에 지금까지 한 번도 만족스럽게 해 본 적이 없죠?”
“아니야!”
“강한 부정은 긍정. 가랑이에 달린 그거 서기는 해요? 하도 안 되니까 도저히 욕구를 분출할 수가 없어서, 궁지에 몰려서 강간까지 시도하고 다닌 거 아닌가요?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지만.”
이 시점에서 범인이 한 번 더 달려들었는데, 마음 같아서야 물론 멋지게 피해서 한 방 먹여주고 싶었지. 근데 나는 신체적으로는 결국 그냥 여자애란 말이야? 이런 난투 상황에서 뭘 할 수 있겠어. 순식간에 땅바닥에 쓰러져서, 위에 올라탄 범인이 목을 조르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꿈틀대는 것밖에.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덜 지루하려면 말을 멈춰서는 안 되고.
“또 이러시네요.”
“입 닥쳐!”
“목 조르는 수법은 바꾸지 않았으니까, 분명히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죠. 제 예상을 말해볼까요? 당신이 조금씩 더 흥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부사항을 옷 갈아입듯 바꿔서 그런 게 아니야. 단순히 당신이 가면 갈수록, 무의식적으로 목을 더 세게 졸라서 그런 거지!”
“이……, 입 다물고 있으랬지!”
“왜 목이 졸려서 축 늘어진 여자를 강간하려고 했지? 왜 점점 심해졌어? 혹시 움직이지 않는 여자가 아니면 흥분할 수 없는 거 아니야? 하필 묘지에 온 이유는? 아마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그래서 일부러 목을 조른 뒤에 심폐소생술까지 해 줬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속일 수는 없는 거야. 나는 시체성애자다,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게 정답이야. 범인은 시체성애자고, 자신이 시체성애자라는 사실을 기를 쓰고 부정하고 싶었던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안쓰러운 부류의 인간이지. 어떤 방법으로도 성욕을 해소할 수 없었고 정상적인 성관계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범인의 억눌린 성적 욕망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그게 한계에 달했을 때 강간을 시도했어.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자기가 시체에 꼴리는 변태라는 것만큼은 부정하고 싶었던 거야. 목을 졸라서 시체처럼 축 늘어지게 만들어 놓지만, 노래까지 준비해서 심폐소생술을 해 주니까 자기는 시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장하고 싶었던 거지.
“근데 전혀 안 먹혔지? 시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흥분이 안 됐지?”
와, 지금 복면 쓰고 있는데도 표정이 어떤지 보이는 거 같다. 강간하지 못하는 강간범이라는 게 저렇게 한심하고 지루한 존재였구나.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지만.
“《스테잉 얼라이브》에서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로 바꾼 이유가 뭔지 스스로는 알겠어? 난 알겠는데. ‘살아 있다’는 노래를 들었으니 도저히 흥분이 안 됐을 거 아냐. 그래서 ‘또 한 사람이 죽는다’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거지. 진짜 안쓰럽지 않아?”
진짜 지루하지 않아? 하, 하, 하! 자기 취향을 부정하는 데 급급해서 강간도 못 하는 강간범! 이런 인간을 찾겠다고 3주 내내 매달렸던 나도 안쓰럽지, 안 그래? 두 번 만에 이 짓이 이렇게까지 질릴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이렇게 재미없어질 줄은 몰랐는데. 이봐,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부류의 범인, 내 기대에 조금이나마 부응해보는 건 어때? 목이라도 계속 조를래?
“네가……,”
계속 말해, 계속 말해.
“네가 뭘 알아!”
이런 얘기 말고. 내가 인생 상담 받아주려고 여기 누워있는 것 같아 보여?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이런 거 말고 더 있겠어?
“그냥 인정하지 그래요? 그럼 훨씬 재밌지 않겠어요? 지금 같은 정신 상태로는 평생 만족하지 못할 텐데, 진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요약하자면 ‘좀 더 재밌는 사람이 돼 봐’라는 거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범인은 이렇게 대답했어.
“넌 날 이해 못해!”
아하, 그래.
“넌 날 이해 못한다고!”
두 번째 말했네.
 
“두 번 말하지 마! 이 세상에 두 번 해서 지루하지 않은 게 얼마나 될 거 같아? 거의, 거의, 거의 없어! 두 번이나, 이해 못한다고 말했어?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가? 널? 이해하지 못해? 넌, 너는 그냥, 그냥 죽이고 박으면 되잖아! 시체에다 박아대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잖아! 네 욕구는 언제든지, 그냥 목만 제대로 조르면 해소할 수 있는 거잖아! 언제든지 재미, 재미, 재미 볼 수 있는 주제에! 할 수 있잖아! 아파? 그게 아파? 재밌지 않아? 보통 그런 아픈 경험은 별로 안 하잖아? 그냥 지긋지긋한 나뭇가지고, 눈에 제대로 찔리지도 않았어! 그래, 피는 나지! 찔렸으니까 피가 나지! 지긋지긋해! 비합리적이야! 이거 하나도 재미없어! 손가락? 손가락이 뭐? 열 개나 있잖아! 열 개! 열 개나 있다고! 비슷비슷하게 생기고 색깔도 똑같은 게 열 개야, 눈도 두 개고 손가락도 열 개! 끔찍해! 물어뜯어도 되잖아.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나도 별로 재미없어. 그래도 정말, 그냥, 노트북 내던지는 것보다 아주 조금 더 재밌을 뿐이란 말이야. 불공평해. 너는 그냥 사람 죽이고 강간하면 언제든지 만족할 수 있는데,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잖아! 왜 그런 건데! 세상은 정말 너무 불공평해! 이건 그냥 불공평해! 날 재밌게 해 달란 말이야! 조금이면 되는데, 조금 더 재밌게만 해 주면 되는데, 그러니까 재밌게 해 줘! 재밌게! 재밌게! 재밌게! 지금 안 하고 있잖아! 정말, 재밌지 않아, 너무 지루해……,”
꼴사납게 울었어. 어느새 널브러진 범인 위에 앉아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그냥 막 울었어. 소름이 돋게 지루한 기분이어서 우는 것밖에, 울기 시작하면 정말 계속 울게 될 것 같아서 얼굴이라도 웃고 있으려고 했지만, 할 수가 없었어. 끈적끈적한 회색 액체로 가득한 우물에 빠졌는데 아무리 해도 나갈 수가 없는 느낌이라, 허우적대고는 있지만 점점 깊이 가라앉는 게 느껴져서, 뭘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그런 끝없이 지루한, 그런 기분. 누가 어디서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데, 비틀비틀 일어나려니까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어. 몸이 무거워.
“거기 있는 거지? 목소리 들었어. 조금만 기다려 줘!”
익숙한 목소리, 지루한 목소리.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누구 목소리인지도 분명해졌어. 생각해 보면 내가 혼자 나와 있을 때 누가 필사적으로 찾아다닐지는 당연한 거지만. 최근 들어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그래서 몸이 잔뜩 달아 있을 사람은 딱 하나지. 내 남자친구. 내 애인. 왜 하필 지금일까, 세상은 정말 너무 불공평하구나. 다급한 발소리, 나는 대답도 안 했는데 비틀비틀 서 있는 내게로 달려와서, 고통스러운 침묵을 잠시 지키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부터 하는 녀석.
“미안해.”
하, 그러시겠지. 뭐가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시겠지.
“내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알아. 내가 잘못한 거지. 만나주지도 않고, 체육관에도 안 오고.”
지루할 정도로 잘 알고 있네.
“걱정했어. 오늘도 네 친구들, 그 유학 온 애들한테 물어봤는데 혼자 나갔다는 거야. 혹시 또 저번처럼 어디 으슥한 데라도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가뜩이나 위험한데. 한참 찾았잖아.”
말이 길어. 벌써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아, 대리석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그러면서 입에는 피 맛이 확 드는데, 아까 얼굴을 맞은 기억은 없네. 지금 씹히는 건 뭐람.
“내가 뭘 잘못했든지, 앞으로 고쳐나갈게. 당장 고치라면 고칠게. 앞으로는 정말로 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는 위험한 일 하지 말아 줘. 이렇게 부탁할게!”
아, 뭔지 알았다. 별로 씹고 있을만한 건 아니라서 땅바닥에 뱉었더니 입가에 피가 주르륵. 까끌까끌하고 질척거리는 손가락 마디가 발치에 툭 떨어지고, 아마 토피는 그게 뭔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은데, 어쩌면 이렇게 하면 더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먼저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토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저쪽 어디 엎어져 있는 남자한테로 다가가서 툭툭 차고. 이미 손은 피투성이고 얼굴도 엉망진창이라서, 죽어가는 사람처럼 끙끙 소리만 내고 있어. 내 부탁이란 이거야.
“이거 처리하는 것 좀 도와 줘.”
필사적으로 기어서 도망치려다가, 손을 밟히니까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남자. 토피는 도와달라는데 뭐 하고 있는ㅡ어라, 없네. 이번에는 발소리가 멀어져갔고. 들리는 건 아직 끝나지 않은, 하지만 오늘로 끝날 벨루베니센의 음악소리 뿐.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약속했으니까. 난 여기 치료받으러 온 거니까, 다시 그 애를 만나야 하니까. 어차피 내가 한 건 어느 정도는 정당방위고, 미성년자가 덮쳐지려고 해서 조금 심하게 대응한 걸 뭐라고 할 사람도 없겠지. 지루하고 불쌍한 남자가 어기적 어기적 기어가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도망가는 걸 보면서, 나는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차가운 회색으로 변하는 걸 느꼈어. 지금 경찰에 신고하면 재밌을까, 아니, 전혀.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잖아. 나는 아마 계속 지루해할 수밖에 없겠지.
한 번 더 울어버릴까, 아니다. 두 번째는 항상 지루한 법이야.
 
추신.
지루함이란 건 정말 쉽게 끝나지 않더라고. 며칠 정도 지나서 다시 비엔나 봉봉이랑 쿨도어랑 만났을 때, 연애 얘기가 또 화제에 나오기에 가능한 한 빨리 “헤어졌어.” 했는데 그게 역효과였어. 도대체 왜 헤어졌는지를 엄청 집요하게 물어보더라. 어떻게 사람이 한 가지 화제에 저렇게까지 매달릴 수 있는 거지? 원래 저게 정상인가? 하기야 내가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그냥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어쨌든 나한테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적절하고, 딱히 거짓말도 아닌 변명이 있잖아.
“내가 강간당할 뻔 했는데, 걔가 안 도와줬거든.”
설마 이 변명이 안 먹히지는 않겠지. 토피는 그야말로 최악의 남자가 된 거잖아. 최악의 남자랑 헤어지는 건 내 연애지식이나 상식에 비추어보더라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이걸로 이 얘기는 끝, 상황 종료, 더 이상의 지루함은 없음. 그렇게 조금 자신 있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비엔나 봉봉이 괜찮냐고 막 호들갑을 떠는 것 정도야 예상대로였지만 어쨌든 내 의사는 확실히 전달됐다고 결론지으려던 찰나였는데, 쿨도어의 대응이 그 결론을 한순간에 박살내버렸어.
“예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너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면 안 돼.”
뭐야? 뭐야 이 얘기?
“맞아, 푸파. 네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면 언제 더 심한 일 당할지 몰라!”
비엔나 봉봉까지? 지금 내 옷이 문제라는 거야? 피해자한테 성범죄의 책임을 돌리는 게 어디 있어? 호들갑 좀 그만 떨라고 태연하게 굴었더니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비난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충격 받은 척 연기라도 할 걸!
“네 잘못은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래도 너 옷이 좀……, 그런 건 맞아. 스스로도 알지 않아?”
“제대로 가리고 있잖아.”
“속옷 위에 헐렁한 가디건 하나 걸쳤잖아!”
그게 어때서! 난 옷에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지루해질 수 있는 애인데, 그럼 이것보다 더 지루한 옷을 입으란 말이야? 하여튼 머리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다니던 애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버리고 나니까 전반적으로 이상한 태클이 늘었다니깐……. 비엔나 봉봉이랑 쿨도어는 눈을 딱 마주보고 텔레파시로 뭐라도 주고받는 것 같더니 아주 끔찍한 단어를 꺼내고야 말았어.
“안 되겠다, 푸파. 오늘 시간 되지? 같이 쇼핑 가자.”
여기서 잠깐. 내가 쇼핑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말하려면 너무 길어지겠지만, 요점만 말할게ㅡ어릴 때 부모님 손잡고 백화점 돌아다녀 본 기억이 없는 건 아니야. 사실은 그 기억이 지금도 굉장히 생생하게 남아 있지. 어느 정도냐면 가끔씩 악몽도 꾼다? 꿈속에서 내가 백화점에 갇혀 있는데, 어릴 때 갔던 대로 나는 입지도 못하는 옷으로 가득한 백화점인데, 아무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도 1층이 안 나와서 나갈 수가 없는 거야. 아직도 이런 꿈을 꾼다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라니까! 그런데 쇼핑을 가자고! 지난번 이후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교수한테 적당히 각색해서 말은 해 뒀지만, 몸에 무슨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약 복용량도 끝까지 안 늘려주고, 그래서 오늘 쇼핑하러 갔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거야. 굉장한 짓을 벌이고 마지막에는 정신병원에 갇혀버리겠지. 아마 줄 끊어진 하프 옆자리에서, “지루해 죽겠네!”만을 중얼거리면서. 그건 안 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야 해.
“아니, 그것보단,”
“언제 만날까, 푸파?”
안 간다고! 안 간다니까! 그래, 다시는 멍청한 문제로 태클 안 걸리면서, 가능하면 지속적으로 입을 수도 있고 별로 지루하지도 않은 그런 옷을 생각해보자. 그 중에서 백화점까지 안 가도 구할 수 있는 거. 세상에 그 많은 지루한 옷들 중에 뭔가 하나는 조건에 맞는 게 있을 거 아냐, 비엔나 봉봉한테 붙잡혀서 백화점으로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기 전에, 비엔나 봉봉, 비엔나 봉봉 쟤가 전에 비슷한 거 입지 않았나?
“실험 가운!”
와, 저 표정 봐.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나.
“아니, 실험 가운이면 되잖아. 길이도 충분히 되고, 안에 뭐 입었는지 잘 드러나지도 않고.”
그러니까 이게 그렇게 이상한 발상이냐고. 난 입는 데 10초 이상 걸리는 옷도 싫고, 나한테 충분한 자극을 줄 수 없는 패션도 소화할 수가 없다고. 난 이걸로 결정했어.
“어떻게 구하면 되지? 비엔나 봉봉이 구해줄 수 있지 않아? 화학과잖아.”
이 이후로 한 30분(!) 정도 놀랍고도 격렬하고 지루한 토론의 시간이 필요하긴 했어. 비엔나 봉봉의 말에 따르면 그건 패션이 아니라는 거야. 도대체 무슨 편협한 사고방식이람. 결국에는 합리적인 쿨도어의 중재에 따라서 모든 상황이 해결됐지만. 그렇게 해서 쇼핑은 백화점이 아니라 인터넷 실험용품 판매 사이트에서 하게 됐고, 비엔나 봉봉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고,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지루함은 이걸로 끝.
ㅡ바로 다음 주에 실제로 실험 가운을 입고 나타난 나를 보고, 비엔나 봉봉이 사십 분 동안이나 “어린이 과학교실 다니는 애 같아서 귀엽다”고 난리를 쳤지만 그건 다른 종류의 지루함이야. 그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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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파는 쓰면서 굉장히 즐거운 캐릭터였어요. 시끄럽게 재잘대고 통통 튀어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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