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성/선정성/언어의 부적절성/약물/범죄/하여튼 이것저것이 포함된 소설입니다. 이 시리즈가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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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개조
인생은 실험이야.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하나면, 음, 내가 전에 한 번 하도 할 게 없어서 실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 비엔나 봉봉이 듣는 화학 실험 과목이었어. 내가 무슨 생각 하면서 강의실에 갔는지 대충 알겠지? 막 펑펑 터지고! 폭발하고! 끓어 넘치고! 강산이 튀어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쾅! 콰쾅! 꺄아악! 그런 광경을 보고 싶었던 거야. 실험 전에 간단한 교육을 받을 때도 위험할 땐 이렇게 해라, 액체가 묻으면 저렇게 해라 하는 얘기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두근거렸어. 그런데 가운 입고, 장갑에 보안경까지 끼고 실험 딱 시작했는데 어땠는지 알아? 실험 조교가 글쎄 이러더라고? 지금부터 여기다가 A랑 B를 넣고 5분 동안 섞고 B로 씻고 씻고 씻고 C 넣고 2분 섞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C 넣고 4분 동안 무슨 오븐에 넣었다가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또 뭐랑 뭐랑 뭐랑 넣고 또 오븐에 7분 넣고 이렇게 네 번 반복하세요 씨발 말이 되냐 이게! 내가 실험도구란 실험도구는 다 떨어뜨려서 작살낸 게 실수가 아니었다는 건 그 조교도 알겠지만, 기숙사 가자마자 화장품 통을 다 집어던져서 작살낸 건 아마 모를 거야, 응, 모를 거야. 인생은 실험이야. 실험적으로 추출된 지루함의 원액이야.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인생이라는 지루함의 원액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적의 생명체를 만들어내려는 금단의 실험. 실험 책임자는 푸파. 실험 대상은 푸파.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저항할 길 없는 광기에 가까운 충동에 내몰려 오로지 전진’하지 않도록, 푸파가 어떻게든 광기의 물살을 이겨낼 수 있도록 푸파에 의해 이뤄지는 잔혹한 생체실험이야. 실험 방법은 지난번에 했던 그 지루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A도 B도 C랑 오븐 같은 게 빠졌을 뿐. ① 물의 온도를 조절한다, ② 수도꼭지를 돌려 튼다, ③ 손을 가져다댄다, ④ 씻는다. 매번 서로 다른 방법으로. 매번,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오늘 선택한 방법은 라벤더 향 비누로 빈틈없이 세 번 문지르기. ⑤ 충동이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되는 손 씻기 방법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아주 간단한 실험이고, 그 성과도 아주 명쾌하게, 전혀, 없어.
성과가 전혀 없다고.
사실 ‘전혀’라고 하기엔, 딱 손을 씻고 나면 의외로 충동이 사라지는 건 사실이야. 씻으면서 자기암시를 강하게 건다든지,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박박 문지른다든지, 향이 강한 비누를 쓴다든지 하면 효과가 더 좋고. 하지만 애초에 욕구를 참는 데에 초인적인 소질이 있었던 소아성애자 아저씨랑은 달라서 내 충동은 손에 물이 말라가면, 비누 냄새가 희미해져 가면 스멀스멀 고개를 들더란 말이지. 게다가 오래도록 억눌려 있을수록 점점 더 파괴적이 된다고. 폭발하라는 플라스크는 안 폭발하고, 대신 미생물학이나 사회심리학이나 영문학 강의 도중에 쾅! 콰쾅! 그런 판이니 최근 몇 주간의 실험을 통해 내가 얻어낸 거라고는 고작해야 손에 난 크고 작은 상처, 한두 번씩 쓰고 내팽개쳐 둔 비누, 짜증나서 박살낸 샴푸 통이 전부야.
이런 실험을 빙자한 고행으로 영혼을 뒤틀고 있을 땐 뭐라도 자극적인 걸 건드려서 정신에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겠지만, 이걸 어쩌나. 지금 루벤 대학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 것을. 수도사 유령보다도 무서운 2학기 중간고사라는 유령이. 나야 그날그날 끌리는 강의만 멋대로 골라가면서 듣는데다가 걱정할 점수래 봐야 40점 만점짜리 사이코패스 테스트 점수밖에 없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야. 항상 제정신 나간 것처럼(진짜 제정신 나간 내가 보증하는 거니까 틀림없지!) 붕붕 떠 있는 비엔나 봉봉마저도 요즘은 카페에 필기 노트를 가져온다니까. 덕분에 더 이상 지루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 루벤이라는 도시에서는 지금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지루함의 기적이 일어나는 중이지. 손을 씻고 상담을 받고, 커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근육이 끊어지도록 운동을 했다가, 뭘 해도 떨쳐낼 수 없는 무겁고 끈적끈적한 지루함의 침전물이 온 루벤을 뒤덮고 있어.
신발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그런 지루함을 뚫고,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지루하지 않은 불순물의 파편을 찾아 할 일 없는 오후에 향한 곳은 내가 있는 기숙사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쿨도어의 기숙사. 시험기간이 되면 비엔나 봉봉은 똑같은 앓는 소리를 수십 번씩 반복해가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니까 아예 무시해 두고, 지루하긴 해도 좀 점잖게 지루한 쿨도어나 방해하면서 노는 게 나아. 지금 시험 공부하느라 바쁠 테니까 나가서 밥 먹자 그래야지. 그래, 나도 이런 게 꼬마들이나 할 만한 쩨쩨한 짓인 건 알아. 이딴 짓을 하는 게 뭐가 재밌겠어. 하지만 아무리 약을 먹고 손을 씻고 해도 결국 이런 식으로 조금씩, 사소하고 쩨쩨한 괴롭힘으로나마 내면의 가학성에 자극을 주는 것만큼은 효과가 없단 말씀이야. 이 따위 변명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쿨도어네 기숙사 방문을 가볍게 따고 들어갔는데,
“……안녕.”
우와, 웬 좀비가 하나 있네. 짧은 머리는 완전 부스스하고 눈도 퀭하니, 구겨진 티셔츠만 하나 걸친 쿨도어는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목소리에조차 생기가 하나도 없었어. 에너지 드링크 덕분에 겨우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네. 엉망인 건 사람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는 깔끔하게 치우고 사는 바닥에도 지금은 책이며 볼펜 따위가 내팽개쳐져 있고. 시험이라는 유령하고 싸우는 건 알겠지만, 뭐랄까, 이건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싸운 현장 같은데.
“그거 밟지 마.”
뭐? 뭐 밟지 말라는 거야?
“그 책, 아니, 그쪽 바닥 전부.”
나도 다 때려 부순 다음엔 치우기라도 하는데! 시험 때문에 이렇게 사람이 맛이 가나? 그래도 쿨도어는 비엔나 봉봉보다는 성적도 훨씬 잘 나오는 축에 들고, 별로 시험 때문에 머리 싸매는 기색도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아니, 확실히 시험 때문은 아닌 거 같아. 왜냐면 사람 상태가 이렇거든.
“그거 밟지 마, 밟지 마…….”
진짜 제정신 나간 내가 보증하는데, 평소엔 지루할 정도로 멀쩡한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건 아주 좋은 징조야. 지금부터 재밌게 망가지기 시작할 거라는 명백한 신호거든! 이거 멋진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드는데, 평소엔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쿨도어랑 얘기라도 좀 해 봐야겠어.
“이렇게 해 놓고 살면 룸메이트가 뭐라 안 그래?”
“지니?”
그래, 지니 하민. 특별히 마련된 1인실을 쓰는 나랑은 달라서 쿨도어는 2인 1실을 쓰거든. 지니 하민은 쿨도어보단 조금 더 재밌는 사람이긴 한데, 안타깝게도 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을 쓰지. 덧붙이자면 방 안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살 만한 사람은 아니야. 온 사방에 구강 세정제 냄새를 뿌리고 다니는 결벽증 말기의 쿨도어만큼은 못해도 유난스레 깔끔을 떠는 여자라고.
“결벽증 아니야, 푸파.”
네, 네, 그러시겠죠.
“그리고……, 지니는 여기 없어.”
“시험기간에 집에 갔어? 이야, 용기 있는데.”
“죽었어.”
그거 알아? 아주 가끔 있는 일이긴 한데, 내 예감이 맞을 때도 있다? 한 3년쯤 전인가에 한 번 있었고, 그것만큼 굉장한 건 아니지만 지금도 일단은 맞았어.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야. 손에는 흥분으로 땀이 흐르고, 이래서야, 이래서야 그렇게 열심히 씻은 의미가 없는데!
얘기는 대충, 어제 새벽에 쿨도어의 룸메이트인 지니 하민이 여기 기숙사 창문으로 뛰어내린 것으로부터 시작됐어. 유학생 커뮤니티에는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소동이 있었나봐. 경찰이 와서 조사도 하고, 컴퓨터도 가져가고,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사실 조사할 것도 없었대. 당시에 쿨도어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중이었고(이 시점에서 내가 상상했던 스물일곱 가지 달콤한 시나리오가 날아가고 말았어), 기숙사 곳곳의 CCTV나 학생들 증언을 들어 봐도 수상한 사람이 침입한 정황이 없고, 죽은 것도 누가 봐도 자기가 뛰어내려서 죽은 거고, 책상에는 한참 전부터 공부하던 책이 펼쳐져 있었고 지금이 시험기간이니까 뭐 당연한 일이잖아. 시험공부 하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막 집어던지고 난리를 치다 자살한 거지.
“이게 사건 현장이야.”
어떻게 이걸 보존해 둘 생각을 하지. 파편 하나도 안 건드리고 그대로 놔뒀다는 건 좀 과도한데. 편집증 초기증상인가.
“그야 수상한 게 있으니까.”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와, 고개 끄덕. 아무도 안 들어왔고 누가 봐도 뛰어내린 거지만 자살은 아니래. 그럼 범인은 누군데? 시험이라는 이름의 유령?
“그건 몰라.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건, 지니는 절대로……,”
“자살할 애가 아니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 증거를 대라고.”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 좋아해!
“분명히 수상한 게 있었어.”
좋아, 수상한 게 뭐였을까나. 쿨도어의 다 죽어가는 설명에 따르면 최근 들어서 애가 시험하고는 별로 상관없이 불안해하고 그랬대. 말을 걸면 깜짝 놀라고, 누구한테 쫓기는 거 같고. 거기다가 갑자기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하질 않나, 책장에 꽂힌 책을 전부 알파벳순으로 정리하지 않나, 쿨도어한테 농담처럼 이런 말도 했다는 거야. 자기가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 책장을 건드리지 말라고. 잠깐, 자살 전에 심경 변화를 겪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이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내가 보기엔, 지니는 뭔가 말할 수 없는 사건에 얽혔던 거야. 그래서 불안해한 거고. 그 사건이 분명 죽음하고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해.”
와, 그건 좀 아니지! 케네디가 외계인한테 암살당했다는 수준의 음모론 아니야? 쿨하고 재미없게 공부에만 집중할 거 같은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흥미롭게 떨어졌지?
“난 유학생 신분이고, 경찰 발표랑 싸우고 고소를 하고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그럴 힘도 없고. 하지만 내가 뭔가 밝혀낼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렇다면 꼭 밝혀내고 싶어. 하지 못하는 건 포기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숭고한 마음가짐으로 시험공부 틈틈이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이건데, 네, 다음 음모론자. 솔직히 이 사건은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자살이야. 현실은 엑스파일이 아니고 쿨도어는 멀더 요원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음, 자살한 사건 자체는 재미가 전혀 없을지 몰라도 거기에 집착하면서 망가져가는 사람은 그럭저럭 재미가 있잖아? 여기에 하나 더 필요한 게 있다면, 그런 망상적인 믿음을 굳건하게 해 줄 수수께끼의 미소녀뿐이라고.
“내가 도와줄게.”
처음 반응은 이렇지. 예상대로야.
“아니야, 이건 내가 최선을 다할 일이야. 너한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내가 진심인 척 하면서 밀어붙이면 결국엔 다들 마음을 바꾸더라고. 내가 뜻한 대로 이루어지리라, 이렇게.
“……널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랬다간 오티에르 교수님한테 혼날 거야.”
오, 물론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고말고요. 애초부터 위험한 일이란 없었다고. 과학과 이성의 세기에 이런 되도 않는 음모론이라니. 하지만 쿨도어를 망상과 광기의 나락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그 분야 선배인 내가 등을 좀 떠밀어주고, 좀 같이 어울려줄 필요가 있겠지. 아마 몇 시간 정도는 질리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실실 웃는 게 쿨도어한테는 ‘생긋’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날 확 껴안는 거 보니까ㅡ으으, 답답해. 비엔나 봉봉이 껴안는 거랑은 느낌이 완전 다르네.
키가 몇 뼘은 큰 여자가 나를 껴안고 귓가에 고마워고마워 조잘대는 건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후에 일어난 일은 괜찮았어. 쿨도어가 나를 덮치지도 않았고 내가 쿨도어의 혀에 적극적으로 엉겨 붙지도 않았지만(내가 그런 일을 하고 싶은 대상은 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어!), 적어도 룸메이트의 자살로 망가져버린 쿨도어만의 망상의 세계에서 음모론 놀이는 계속할 수 있었거든. 마침 현장도 보존되어 있고 말이야. 쿨도어가 말하길 오늘 밤쯤에는 짐을 챙기러 가족들이 올 거라니까, 그 전까지 놀아 보자고.
“그런데 확실히 이상한 게 있네.”
나 지금 노는 중이야. 바닥에 널브러진 책이며 부서진 필기구, 책상에 펼쳐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맨 왼쪽 책장에 놓인 네모난 가족사진 액자에는 중간에 가로로 길게 긁힌 자국, 책들은 알파벳순으로 가지런히 꽂혀 있고, 이런 걸 보면서. 절대 멍청한 망상에 휘말린 게 아니고, 단지 놀다 보니까 수상한 게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건 내 전문 분야잖아? 그런데 전문가적 견해로는 이 현장은 아무리 봐도ㅡ
“시험공부가 안 돼서 그런 건 아니야.”
오, 쿨도어 표정 봐. 장난 아니게 기쁜 거 같다. 저런 건 비엔나 봉봉이나 지을 수 있는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현장으로 눈을 돌려서,
“무기가 될 만한 커다란 책하고 필기구. 바닥을 향해서 필사적으로 내던졌어. 어떤 목표를 공격하려고 한 것처럼 보이는데.”
“습격당한 걸까?”
아니에요, 음모론자 아가씨. 바닥을 향해서 내던졌다고요. 비밀 조직에서 온 암살자가 바닥을 기어왔단 말입니까? 오히려 바퀴벌레나 쥐 같은 게 나타나서 과민 반응한 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되는 현장이라고.
“호저일 수도 있겠다.”
이건 또 뭔 소리래.
“아니, 지니가 그거 무서워했거든. 어릴 때 케냐에서 살았는데, 기르던 개가 호저랑 싸우다가 얼굴에 가시가 잔뜩 박혀서 죽는 걸 봤대.”
“비밀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 호저?”
그래, 입을 다물었네. 지루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거면 입을 다물어야지. 그건 그렇고 뭔가 수상한 점이 없는 건 아닌데,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뛰어내린 게 아니라면 지니는 왜 자살한 걸까? 그것도 아주 대놓고 의미심장하게『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읽으면서! 죽기 얼마 전에 쿨도어한테 뭐라고 말했다고? 책장을 정리하지 말라고? 언제?
“죽거나 혹은 사라지기 전에. 그거네.”
“뭔가 알았어, 푸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내용이야. 지킬 박사는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에게 편지를 건네는데, 그 편지 겉에는 자신이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열어보지 말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아마 지니는 자기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 같아. 그래서 자기 룸메이트가 메시지를 눈치 채도록, 자기가 항상 읽는 책을 가지고 암호를 만든 거야. 그렇다면 그 암호의 내용이 뭔지 알 것도 같다. 지킬 박사가 남긴 메시지대로, 소설의 구절대로 ‘왼쪽에 <E>로 표시된 유리장’을 열면 되겠지만 이 책장에 그런 건 없으니까 대신,
“Elementary Classical Analysis. 저 책만 E로 시작하네.”
정말로 무슨 사건이 있었다면, 그래서 지니가 죽기 전에 책장을 정리하면서 자기가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건드리지 말라고 한 거라면, 펼치기만 해도 급성 지루함 중독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맬 것 같은 저 두꺼운 교과서 어딘가에 힌트가 남아있을 거야. 그래, 조심해서 글자만 안 읽으면 돼. 하나, 둘, 셋, 뭐야 이거?
“약병…….”
그래, 쿨도어. 나도 그게 뭔지는 알아. 지킬 박사가 ‘왼쪽에 <E>로 표시된 유리장’에 약을 보관한 것처럼 두꺼운 책을 파내 집어넣어 둔 작고 하얀 플라스틱 약병. 안에 들어있는 건 하얀 알약 열두어 개. 참으로 조잡한 암호인데다가 가리키고 있던 진실도 지루하기 짝이 없네. 쿨도어도 대강은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 설명을 해 주면 반응이 더 재밌겠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불안한 모습, 이상한 행동, 숨겨 둔 약병, 이거 뭐 얘기할 것도 없잖아. 그래, 인생에 약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괜찮지.”
가만히 서서, 멍하니 부들부들 떨면서, 눈앞의 광경과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를 믿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발버둥을 치면서. 그래, 꽤 멋져, 나쁘지 않아. 조금 더 무너져 보라고. 배를 찌르는 건 안 돼도 마음을 찌르는 건 허용이란 말이야. 아마도.
“누구한테 들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겠지. 수상한 조직에서 온 아저씨들이 무서웠을 수도 있지. 그러니 이런 식으로 암호를 만들어서 혹시라도 자기가 어떻게 되면 너한테 진상을 밝히려고 했겠지. 하지만 직접적으로 우리 지니를 죽인 건 뭘까? 목격자도 없고 CCTV에도 안 찍힌 수상한 아저씨들? 그것보다 더 간단한 해석도 있잖아. 흔한 일 아냐? 약에 취해서 하늘나라로 다이빙하는 거?”
표정 좋고! 목소리 좋고!
“입 닥쳐, 푸파!”
동작도 좋고! 그래, 그렇게 팔을 휘둘러보라고! 내가 뺨을 내어주고 있으니까 고막이 터질 정도로 힘껏 때리라고! 왜 평소에는 안 그래? 응? 왜 평소엔 그래 지루하게 구시나? 이렇게 세게 때릴 수 있으시면서! 정말이지 재미없는 인간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단 말이야, 다 수도사 유령들 곁으로 꺼져 버리라고ㅡ
결국 잠깐의 나들이 끝에 남은 것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사건의 여운, 왼쪽 뺨의 얼얼함(솔직히 이렇게 세게 때릴 줄은 몰랐어), 문 밖으로 쫓겨나자마자 다시 어깨를 짓누르고 발을 타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는 질척한 지루함, 그리고 전리품 하나 정도였어. 분명 마지막에 쿨도어가 멋진 표정을 보여주긴 했지만, 하프처럼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귀국한 것도 아니고 그냥 화가 잔뜩 났을 뿐이잖아.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하다고-하기야 내가 뭔가에 만족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겠냐마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방금 얻은 전리품이 중요한 거야. 새하얀 가운 주머니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새하얀 약병 하나. 예전부터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었던 바로 그것.
인생은 실험이야.
담배도 본드도 실험해본 적은 없어. 전혀 재밌을 것 같지 않았거든. 하지만 더 강한 약물이라면, 환각 속의 적을 만들어내고 급기야는 창밖으로 뛰어내리게 만든 그런 종류의 약이라면, 뇌의 활성화되지 않은 부분을 자극해 줄 마법의 약물이라면, 그거야말로 내게 진짜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 시야에 불꽃이 튀고! 전기가 흐르고! 하늘이 수천 가지 색으로 폭발하고 땅이 갈라지고 감각이 극대화되고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고! 환시 환청 환각의 세계라면 혹시 잿빛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몰라! 비틀즈 멤버들이 보았던 걸, 스티브 잡스가 느꼈던 걸 나도 느낄 수 있을 가능성이 있어! 인생은 실험이야. 실험적으로 추출된 지루함의 원액 속에서 지루하지 않은 불순물을 추출해내려는 거의 불가능한 연금술이야. 그리고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은 즉 이론상 가능하다는 소리라고.
그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인생이라는 납덩이와 같은 지루함을 가지고 황금과도 같은 즐거움의 순간을 창조해내려는 금단의 실험. 실험 책임자는 푸파. 실험 대상은 푸파. 지킬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더 젊고 더 가볍고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푸파가 어떻게든 이 지루함의 늪지대에서 즐거움이라는 불길을 피워낼 수 있도록 푸파에 의해 이뤄지는 위험천만한 생체실험이야. 실험 방법은 역시 지난번 실험하고 아주 비슷해. 먼저 약에 취해있는 동안 조금이나마 충동을 억제할 수 있도록 손을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그러고 나서 ① 약병을 연다, ② 손을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③ 조심스럽게 약을 한 알 집어서 입에 넣는다, ④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⑤ 지루해 죽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더라도 손에 물기가 남아있는 한은 어떻게든 정신을 집중할, 수가 있는데, 이론상은, 그래, 심장이 두근거려, 두근, 두근, 나도 뛰어내리거나 하게 될까? 다행히도 이 방 창문에는 따로, 창살이 달려 있어, 아르투아 교수도, 참 극성이지, 두근, 두근, 어라, 입이 바짝 마르고, 온 몸이 따끔 따끔, 따끔, 긴장했나, 긴장했을지도 모르지, 실험할 땐 긴장을 놓으면 안 됩니다 손에 약물이 묻었을 때는 흐르는 물로 씻어냅니다 씻고 씻고 씻고 씻고,몸이 따가워, 눈이 따가워, 빛이 따가워, 시야가, 흐려서 불을 끄려고 일어나려는데 어지러워, 어지러워서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는데, 이번엔, 또 입 안이 마르고, 목이 말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목이, 말라, 몸이, 뜨거워, 더워, 옷을 좀 벗을까,
딸깍,
딸깍 딸깍,
문 쪽에서 소리가 나네. 응, 누구지. 노크하는 것도 아니고, 문고리만 딸깍, 딸깍, 누굴까. 하필 왜 지금일까. 지금 걸리면 좀 곤란한데, 하고 생각했더니 잠깐 정신이 들어서, 그래, 정신 차릴 수 있잖아? 어지럽지만, 어른어른하지만, 그래도 뭐,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생각을 못 하는 것도 아니야. 의외로 기대 이하네. 조금 실망했어, 근데, 딸깍, 딸깍, 저거 도대체 누구지, 누가 나처럼 문이라도 따고 들어오, 나, 에, 에에, 방금 문 열렸거든? 열렸거든? 열렸는데? 그런데 문 연 사람이, 들어온, 사람이, 어라? 왜 여기, 뭐야 뭐야 이거, 이 상황, 저 눈, 나의, 커다랗고 어둡고, 모든 것을, 보는 눈이 흐물흐물 처진, 사랑스러운 머리카락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뒤에 가려서, 왜 여기에, 저 가느다란 팔, 다리, 새하얘, 나의 사랑스러운, 말랐어, 그때처럼, 2년, 달라진 게 없구나, 나를, 뒤틀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저주받은 영혼인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었던 세상에 단 한 사람, 나의 사랑스러운 파파베르 솜니페룸, 아아, 아아아 어째서 여기에!
“잘 지내고 있나 얼굴이라도 보러.”
저 탁한 목소리, 천식 기미가 있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랑스러워, 아아 불꽃이, 전기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나의 이해자, 내 사랑, 나의 사랑스러운 페요테 샐러드, 그래 안아줄게, 그 날처럼, 내가 문을 따고 들어갔던 그 날 너는 침대도 아닌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가볍게 껴안고 놀래 주면서 몇 번이고, 그래, 그 날 나는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함께 있자고, 서로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랑의 대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자고 입을 맞추자고 함께 눕자고 속삭였는지ㅡ
“그런데,”
아, 저 목소리가 내게로, 내 신경을 타고 뇌로,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강렬한 감각이 온 신경계를 지져서 태워버릴 것만 같아, 자, 이리로, 소파가 아닌 침대로, 그런데, ‘그런데’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래, 침대로 오는 건 좋은데, 나를 봐 줘, 침대가, 아니라 약병을, 아니, 약병,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멈췄을 때 거기에 비치는 것은 매트리스 위의 새하얀 약병이고 두근, 두근, 눈이 따가워, 불을 껐어야 하는데, 그 애는 가느다란 거미 같은 손가락으로 약병을 쥔 채, 나를 들여다봐, 따가워, 온 몸이, 뜨거워, 몸이 왜 이렇게 뜨겁지, 입이 말라, 무한하고 지루한 사막을 홀로 걷는 여행자처럼, 그리고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난 표정, 응, 왜 나한테는 웃어주지 않아? 응?
“이 약은 뭐야?”
아, 그 약은, 그래, 나 약 먹었었지. 그래. 정신 차리자. 나는 벨기에에, 루벤에, 왜? 치료를 받으러? 그런데 지금 나, 약에 취해 있지,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얼굴은 나를 보기 위해서 왔고, 나는 약에 취해서 방 안에, 침대에? 어? 어라? 이거 뭐야 이거 무슨 상황이야? 화가 난 거야? 내가, 내가 치료에 집중하지 않아서
“실망했어.”
아,
“정말 실망했어. 너 고작 이 정도였어?”
아아, 그런 말은! 그런 말은, 아파! 몸이 따가워, 심장이, 두근, 찌르는 것처럼 아파, 그렇게 말하지 마! 이거, 그래, 오해야! 나 지금, 약에 취해 있지만 약에 취해 있지 않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은,
“고작 이 정도였냐고. 이렇게나 제 정신이 아니었냐고, 이렇게나 제 정신이 아니었냐고! 대답해! 대답해!”
“그럼 내가 뭐라고 생각했는데?”
안 돼
“내가 사이코 살인마인 거, 몰랐어? 내가 도덕에 대해서 신경이라도 썼어? 내가 기회가 되면 약이라도, 할 거 몰랐어? 날 이해해준 게 아니었어? 그 날, 내가 너희 집에 들어갔을 때, 그래, 불꽃이 타오르고, 그 바비큐 파티 때, 분명히 이해한다고 그래서 나를 여기로 보내는 거라고 말했잖아, 응?”
“그땐 네가 고작 이 정도일 줄은……,”
안 돼 안 돼 그럴 리가
“고작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휙, 하고. 뺨이 얼얼해, 말랐고, 새하얗고, 차가운 손이 왼쪽 뺨에 와 닿는 순간, 오늘 통산 두 번째였고, ‘안 돼 그럴 리가’라는 말로 어떻게든 묶어두려 했던 두려운 상상은 현실이 되었고, 그래, 그랬구나. 너는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이런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저 나를, 사이코 살인마인 나를, 즐거움이 거세당한, 심장이 뛰고 입이 마르고 눈이 따끔거리고 몸이 뜨거운, 어지럽고 눈이 어른거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나를, 아니야, 아니, 그래, 말은 이해한다고 하면서, 넌 탐정이니까, 저 까만 눈으로 모든 걸 담아서 저 안에 감춰진 뇌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렇게 말했으면서,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너도 나를 그저, 지금은 조금 이상하게 굴지만 속은 착한 아이라고, 엄마랑 아빠가 날 그렇게 생각했지, 여동생을 해체했을 때도, 너도 똑같아! 너희 가족을, 바비큐 파티를 보고도, 너도 나를 하나도 이해 못 하는 거였어!
“고작 이 정도일 줄은……,”
두 번째는 참을 수 있어, 내 사랑, 하지만 세 번째는,
너에게까지 이런 말을 쓰려니까 가슴이 아프지만,
말해야 할 때는 말해야 하니까, 응, 그래, 심호흡 하고,
재미없어ㅡ
아아, 나는 자주 화를 내지만, 오늘은 정말로 이렇게나 화가 나는구나! 절망적이야. 절망적으로 화가 나서, 그래, 나 손을 씻었는데, 몸이 뜨거워서 그럴까, 이미 마른 걸까 아니면 내가 느끼지 못하는 걸까, 실험은 실패인 거네. 이걸로는 전혀, 전혀, 그렇게 씻어도 전혀 충동을 주체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몸을 일으켜버려! 눈은 바짝 말라서 따갑고 눈물은 하나도 흐르지 않지만 마음만큼은 이미 눈물로 가득해. 그리고 불길로 가득해. 너는 나한테 마지막 안식처였는데 나를 내쳐버렸잖아? 너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네가 나를 이해해줄 수 없다면, 그래서 내게 더 이상 즐거움을 줄 수 없다면, 나는 내 방식대로 너를 즐기겠어! 바닥에 너는 쓰러져 있고 어느 새 나는 네 배 위에 올라타서, 머리가 어지러워,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나 연약한 너는 약에 취한 채로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어. 그 때도 그랬어. 버둥거려봐야 소용없다고? 잠자코 있어, 어차피 아프긴 똑같이 아플 테니까, 아아, 오늘도 파자마 차림이구나, 그 날처럼, 얇아, 그 아래의 살은, 부드러워, 그만 버둥거리라니까!
“죽이려고? 날 죽이려고? 널 믿었는데, 믿었는데 고작 이런 애였어?”
그리고 그만 말하라니까! 믿었다고? 누가 날 믿으라고 말했는데! 네 잘못이야, 응, 그리고 대가를 치를 시간이야. 자아, 나 주먹질은 별로 소질이 없지만, 그래도 최근엔 운동 꾸준히 했다고?
이 감촉, 부드러운 뺨에 뜨거운 주먹이, 턱을 찌그러뜨릴 기세로 내리 꽂히는 이 감촉.
그리고 꼬집는다는 행위는 대체로 가벼운 애정표현이지만, 어머, 이것도 내 나름의 애정표현이야. 파랗게 멍이 든 팔, 아직오 파자마 입고 있니? 찢어버리고, 다시 멍이 든 가슴, 젖꼭지를 비틀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너는 계속 말하는구나. 날 비난하는구나. 이런 애일 줄은 몰랐다고, 너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하는구나. 그래, 계속 말해. 그 혀가 멀쩡히 붙어있는 동안에는, 주먹에 맞을 때는 빼고.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빨간 핏물과 함께 또르르 굴러 나오고, 그래, 날카로운 물건은 일부러 근처에 두지 않지만 그래도 펜은 있어. 펜을 들었을 때의 네 표정. 흐리게 보이는 네 눈물. 죽이지 말아달라고, 친구 아니냐고, 너는 절대 이런 애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네 혀를 손으로 잡아당겨, 어머, 펜을 꽂아 놓으면 예쁜 피어스 완성! 다른 펜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간호사, 메스, 대신 펜을. 적당히 이쯤 꽂으면, 비난은 비명으로 바뀌고 나는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주먹을, 손가락을, 펜을, 피투성이가 되고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계속 이럴 줄 몰랐다고 중얼대는 너에게, 그래도 아직 배는 하얗고 바지를 벗기면 귀여운 속옷이 있구나. 응. 아직도 화가 나 있다고. 충분히, 손톱을 세운 검지가 허벅지 위를 기어가고, 빨간 자국은 더 깊은, 비밀스러운 곳으로 향하고, 나는 또 펜을 쥐고 있고, 나는 첫 경험을 너와 함께하기로 마음속으로 약속했었는데 너는 어때? 쉿, 선택권은 없어! 아파? 네가 내 마음속에 억지로 들어가서 헤집어놓고 또 멋대로 빠져나온 것처럼, 내 손가락도 내 펜도 똑같은 걸 할 수 있거든! 그래! 그 얼굴! 그 표정! 그 목소리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엔 피가 찰랑찰랑 고여 있었어. 벽에도, 침대에도 튀어서, 이걸 나중에 청소하려면 끝내주게 지겹겠다, 싶을 정도로. 내 아래에는 간신히 할딱이는 작고 빨갛고 마른 아이가, 제발 그만 하라고, 이런 애일 줄 몰랐다고, 그것도 꼬박꼬박 두 번씩 말하고 있었어. 혀가 그렇게 됐는데도 성대를 달싹이면서, 그렇게 당했는데도, 새하얗게 드러난 채 떠는 갈비뼈를 실로폰처럼 쓰다듬으면서 나는 몸의 열기를 생각해. 이렇게나 온 몸이 따끔거리는 건 뭘까, 눈이 따가운 건 뭘까, 아까보다 훨씬 더 눈앞이 흐린 건 뭘까, 심장이 뛰는 건 뭘까, 이렇게나,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 건 뭘까.
그리고, 아아, 고개를 들면 문은 열린 채야. 다들 몰려들어 있어, 물론이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니까. 누구는 토하고, 또 누구는 얼굴을 감싸 쥐고, 저런 애였어? 귀여운 유학생이라고, 인형 같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애였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저렇게나 모여서 나한테 쏘아대는 그런 말들, 고통스러운 말들. 피의 바다 한가운데서 호수괴물처럼 고개를 쳐들고 앉은 내게, 시체 위에 앉은 내게. 그 한가운데서 뛰어나오는, 짧고 부스스한 머리에 키는 큰 여자가,
“푸파!”
그래, 쿨도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이게 진짜 나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옛 친구이자 사랑이었던 어린 여자아이의, 새빨갛게 드러나서 피를 줄줄 흘리는 부끄러운 곳에 펜을 하나 더 꽂는, 이거야말로 진짜 내 모습이야. 아르투아 교수가 말해 줬잖아. 내가 어떤 애인지. 왜 아무도, 아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왜 내가 인형 같다고, 속은 착한 애일 거라고 말하는 거야? 응?
“푸파!”
그래, 달려오고, 날 멈추려고? 하지만 내 뇌는, 날때부터 망가져 있던 내 뇌는 결코 멈추는 일이 없지. 항상 지루해하고 항상 미쳐 돌아가지. 그러니까 나를 껴안는 팔을 할퀴고, 깨물고-안 닿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푸파! 푸파! 외치면서, 그건 내 이름이 아닌데, 아아, 발길과 주먹질과, 악마를, 괴물을 죽이려고, 그래! 날 죽여! 드디어 나를 제대로 봐 주기 시작했구나! 죽여야 할 괴물로, 악마로, 구제할 길 없는 혐오스러운 신의 장난으로! 응, 쿨도어, 왜 그렇게 울고 있어? 더 웃으면서 발길질해도 되는데, 응? 여긴 어디야? 여긴 어디ㅡ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ㅡ
몸이 뜨거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온 몸이 따갑고, 눈도 따끔따끔, 시야는 흐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올려다보고 있는 게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쿨도어의 얼굴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어. 그리고 이 감촉은, 그래, 뺨을 잡고 있는 건 아까 날 때렸던 그 손이구나.
“괜찮아? 정신이 들어?”
여긴 내 방이고, 바닥에 피는 없고, 그 애도……, 없고. 그렇구나, 전부 환상이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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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푸파를 쓰는 건 정말 즐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