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존재증명 ①

로크네스 0 3,237
구 엔하에 올리던 추리소설 시리즈의 외전격입니다만, 딱히 그걸 알아야만 읽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잔혹한 묘사가 약간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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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증명
 
지루해 죽겠네!
아침 여덟 시부터, 그것도 금요일 아침 여덟 시에 눈을 뜨자마자 지루함을 느낀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야. 사실 일곱 시나 여섯 시 반이나 아홉 시 십이 분이라고 해서 지루해도 괜찮은 건 아니고, 목요일이나 월요일이나 수요일 아침도 그렇고, 물론 새벽이나 저녁이나 점심 먹기 직전도 똑같은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요일 아침 여덟 시부터 지루한 게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럼, 그렇고말고.
그리고 금요일 아침 여덟 시라는 시간에는 특히 나쁜 점이 몇 가지 있어. 첫째로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는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는데, 난 운동을 좋아하고 또 열심히 하는 편이라서 가끔씩 좀 무리하곤 해. 덕분에 다음날 아침엔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싫어지지. 둘째로 아침 여덟 시라는 시간은 어릴 때 엄마가 항상 날 흔들어 깨워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아침식사를 같이 하거나, TV에서 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만화를 보게 하거나, 일요일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교회를 가게 하던 시간이란 말이야. 나는 집에 있지도 않고 날 흔들어 깨울 엄마도 이젠 없는데 도대체 왜 내가 여덟 시에 일어나야 하냐고. 그것도 만화나 교회 목사의 설교보다 두 배는 더 지루한 걸 하기 위해서. 그 ‘두 배는 더 지루한 것’이 내가 금요일 아침 여덟 시를 특히 싫어하는 이유긴 한데, 이걸 말하기 전에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이해 못할 테니까.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루벤 대학이야. 벨기에에서 제일 잘나가는 대학 중 하나고, 어찌나 잘나가는지 이 루벤이라는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지. 정말이지 루벤에서 루벤 대학을 빼고 나면 술집만 쭉 늘어선 낡아빠진 아우드 마크트(옛 광장, 정말 적절한 이름이지), 삐죽삐죽하고 곰팡이냄새 나는 건물들, 이름은 ‘그루트 마크트(큰 광장)’인데 아우드 마크트와는 반대로 일부러 비꼬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콩알만한 광장밖에 안 남는다니까. 옛날엔 여기 수도원이 있었다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반쯤 벗겨진 수도사 유령들이 아직 이 도시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아마 유럽에서 제일 긴 술집 거리라는 아우드 마크트에서 술이라도 퍼마시려고 이승에 남아 있는 거겠지.
이 도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학생이나 수도사 유령들과 달리 나는 아직 미성년자고, 그래서 유럽에서 제일 긴 술집 거리는 나한테는 그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낡은 길일뿐이야. 하지만 이 도시의 모든 것이 낡고 칙칙하고 지긋지긋하니까 특별히 아우드 마크트를 탓할 일은 아니지. 루벤 대학이 세상에 아직 남아있는 대학 중에서 제일 오래 된 가톨릭 대학인 거 알아? 이 말은 즉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대학이라는 소리야. 다른 오래 된 가톨릭 대학들이 다 사라져버린 걸 보면 알 수 있지. 자연도태를 목전에 둔 멸종위기종 같은 대학에서 나는 2년째 살고 있어.
그렇다면 왜 내가, 벨기에 사람도 아니고(한국에서 왔어), 아직 미성년자이고(물론 대학생도 아니야), 게다가 이 도시를 정말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내가 여기에 살고 있는 걸까? 내가 금요일 아침 여덟 시를 싫어하는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과 깊은 관련이 있어.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심리학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이 대학 교수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서고, 그 교수는 나이도 먹고 백내장 수술까지 받아서 눈도 안 좋으면서 매주 금요일 아침 아홉 시 반에 정기 면담 시간을 잡아 놨고, 난 그 면담이 아주 싫어. 세상에서 제일, 제일 지루하거든.
 
그 지루한 면담을 준비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ㅡ그 전에 잠깐만, 심리학 교수한테 치료를 받는다고 하면, 그것도 한국에서 벨기에까지 왔다고 하면 아주 심각한 병을 앓고 있어서 막 환상이 보인다거나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시트 정리하는 데 30분 정도 걸린다거나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 그런 건 아니야. 벽을 주먹으로 쳐서 자국을 남기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기는 해도 나한테 그런 종류의 문제는 없어. 그러니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불을 적당히 구석에 팽개쳐두고 샤워를 하는 거야. 난 항상 가장 뜨겁거나 가장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 왜냐고? 그나마 덜 지루하잖아! 젠장! 사실 이것도 지루하다고! 샤워기에서 끓는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액체질소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왜 안 그러는 거야? 왜 고작해야 피부가 빨개질 정도로 뜨거운 물이 끝이야? 왜 나를 꽁꽁 얼려버리지 않는 거야? 이 세상은 하나같이 지긋지긋해! 전부 다! 쓸모없는 물건들 같으니!
ㅡ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샤워기를 부숴버렸어. 변상할 필요는 없지만, 계속 이러면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자제해야 하는데 가끔씩 세상은 나를 너무 지루하게 해. 게다가 머리가 길어서 말리는 것도 지루하고, 나머지는, 그래 나머지는 괜찮아. 잠깐이면 되고. 어차피 학교 안에서 돌아다닐 거니까 옷도 대충 입으면 되고. 요즘은 날도 덥고 해서 속옷 위에 헐렁한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다녀……, 이상한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자극적이잖아? 이렇게 다니는 게 덜 지루하다고. 특히나 수녀복으로 몸을 꽁꽁 감싸고 다녀야 할 것 같은 이 루벤이라는 도시에서는.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거울을 보면 눈에 들어오는 건 거울 구석에 남아서 신경을 긁어대는 손톱만한 얼룩ㅡ은 물론 아니고(여러 번 말하지만 내게 그런 종류의 문제는 없으니까), 길고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에 회색 가디건을 걸친 무채색 여자아이가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항상 내가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하더라. 심지어 나를 담당하는 교수도 그렇게 말했어. 부러울 정도로 피부도 좋고 머릿결도 좋다고. 최근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뒤로는 내가 안경을 안 끼는 것까지 부러워하지 뭐야. 한 번은 내가 안경을 끼면 어떤 모습이 될까 싶어서 교수 안경을 한 번 껴 봤는데, 음, “다 좋은데 안경만 없으면 좋겠네!” 싶은 모습이더라고. 눈이 좋아서 다행이야.
이 모든 지루한 과정을 마치고 나면 교수 오피스로 향할 시간. 여름의 햇살은 따사롭고 날씨도 좋지만, 불행히도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충분한 자극이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정말, 정말, 끔찍한 만큼, 지루해. 앞으로 나를 기다리는 면담은 말할 것도 없지. 겉으로는 항상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그건 어릴 때부터 습관이 그렇게 들었을 뿐이고, 그러니까 우리 집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고 있었고 나는 그걸 그대로 배웠을 뿐인데, 실제로는 항상 이런 생각이 들어. 이 세계는 나한테 충분한 즐거움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다들 벌써 눈치챘겠지만, 실은 이 끝없는 지루함이 내가 앓고 있는 병의 가장 중요한 증상이야. 여기에 온 첫날, 나를 담당하게 된 교수가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바로 진단을 내린 그 병이지. 이것 때문에 내가 대단히 갑작스럽게 벨기에에 왔고(그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말할 일이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비밀이야),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자인 스텔라 오티에르 교수의 치료 및 연구대상으로서 루벤대학에 살고 있지. 공짜로 숙소도 주고 밥도 나오고 듣고 싶은 강의가 있으면 청강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나쁜 건 아닌데, 그리고 사실 여기 말고 갈 데도 없긴 한데, 그래도 이 면담만 없었으면 좋겠는데. 오피스에 들어가자마자 역겨울 정도로 무덤덤하고 지루한 분위기가 나를 감싸기 시작했어.
“좋은 아침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푸석푸석한 금발에 깜짝 놀랄 정도로 파란 눈을 가진, 거대한 털북숭이 애벌레를 빗질해 놓은 것같이 생긴 초로의 여교수. 이 사람이 스텔라 오티에르야.
“굿 모닝, 아르투아 교수님!”
하지만 난 항상 ‘오티에르’ 대신 ‘아르투아’라고 바꿔서 불러. 벨기에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때 교수네 집에 갔는데, 냉장고에 ‘STELLA ARTOIS’라는 라벨이 붙은 맥주가 잔뜩 쌓여 있었거든. 내가 그걸 ‘알토이즈’라고 읽으니까 교수가 ‘아르투아’라면서 스텔라 아르투아 맥주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뭐야. 그 이후로 계속 아르투아 교수라고 부르고 있어. 내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부르면 질색하는데, 사실 나도 이 교수가 내 이름 부를 때마다 질색하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원래 영어는 좀 할 줄 알았고 2년쯤 지나니까 네덜란드어나 프랑스어-벨기에의 언어 사정은 짜증날 정도로 복잡해서-도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된 명석한 나와는 달리, 이 교수는 아직도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들을 때마다 조금이지만 거슬린다고. 그래도 아르투아 교수는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심지어 대다수가 한국 유학생인데도 나를 별명으로 부르거든. 처음 여기 왔을 때 p랑 f발음을 잘 구분 못 했다고 ‘푸파’라고 부르는 거야. 그 별명을 많이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더 나은 별명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듣고 있나요? 오늘은 간단한 테스트를 할 예정인데요.”
듣고 있어, 듣고 있다고. 정말이지 번거로운 여자라니깐.
 
아르투아 교수와의 면담 내용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매번 비슷비슷하게 지루해. 본격적인 테스트나 심리검사에 앞서서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심리에 변화는 없었는지를 먼저 물어보지.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그럼요! 진정성이 없고 오만하고 교활하고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학적이고 충동적이고 범죄적인 여자애로서 아주 잘 지냈죠.”
난 나 자신이 어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여전히 만사가 지루하고요?”
그야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게 내 정신상태의 핵심인데. 내가 알기로 이 지루함은 선천적인 뇌의 문제에서 오는 거야. 전에 뇌 사진을 찍어본 적이 있는데, 보통 사람에 비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부위가 활성화가 덜 되어 있다더라. 아마 사진에 찍힌 건 내 평소 상태보다 훨씬 심각했을 거야. 30분 넘게 MRI 기기에 처박혀 있었으니 머리가 돌아버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지루함을 잊기 위해서 계속 자기 자신한테 말을 걸고요?”
바로 지금 하는 것처럼! 들리지? 이렇게 말을 거는 거야. 지루해 죽겠지만 적어도 활기찬 말투로. 꼭 별로 지루하지 않은 것처럼 마음을 몰아가면서. 이렇게라도 안 하면 진짜 지루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가학적인 상상을 하고요? 살인이나 방화, 변태적인 성행위 같은?”
그야 아주 자극적인 게 아니면 날 즐겁게 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든 슬퍼하든 아무래도 좋아. 내가 죽을 정도로 지루한데 법이나 도덕이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잔소리가 눈에나 들어오겠어? 덧붙이자면 상상으로만은 이미 성에 안 찬 지 오래 됐어.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벨기에 역사상 없었던 굉장한 사건을 일으키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지. 나는 선천적 흉악 범죄자야. 대자연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선천적 살인마야.
“말씀드린 대로 약은 잘 먹고 있나요? 오늘 아침엔?”
그야 당연히 잘 먹고 있ㅡ이런, 나 약 먹는 거 깜박했지? 깜박한 거 맞지? 깜박했구나. 교수가 나를 째려보면서 약을 건네줬어. 한 알, 두 알, 세 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약들이 잔뜩.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지루한 걸 못 참고 물건을 부쉈군요. 이번엔 뭐였나요?”
“샤워기요, 샤워기.”
“왜죠?”
“별로 안 뜨겁잖아요.”
건성건성 대답하면서 약을 넘기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이 약은 나를 즐겁게 만들어주지는 못해. 단지 지루할 때 폭력적으로 주변을 때려 부수는 대신 무기력하게 우울해져 있도록 도와주지. 이 약을 먹으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주 잘 느끼게 된다고. 아마 나는 약 먹는 걸 깜박한 게 아닐 거야. 먹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약은 확실히 도움이 돼. 그리고 여기서 받고 있는 치료는 내게 굉장히 큰 도움을 주고 있어.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 약이 유용한 건 물론이고, 지루한 현실 대신에 망상에 빠져 지내다가 결국 망상과 현실을 구분 못 하게 되는 사태를 막으려면 확실히 자주 상담을 받는 게 좋기도 하고. 내겐 꼭 필요한 일이지. 하지만,
“그럼 질문은 이 정도로 하고 테스트로 넘어가도록 하죠.”
동시에 아주 지겨운 일이기도 하고,
“오늘 할 테스트는……,”
때로는 있지, 이렇게 치료를 받는 도중에,
“이 그림 보이시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좀이 쑤시는 경우가 있어.
“듣고 있나요?”
치료가 내 충동이 폭발하는 걸 막아 줄지는 몰라도, 지루함을 없애 주지는 못하니까.
“듣고 있나요?”
이 여자 방금 같은 소리 두 번 했어.
한 번만 해도 지겨운데 두 번.
용서 못해.
지금 방 바깥에 아무도 없지? 소리 들을 사람도 없겠지? 책상 위에 펜도 있지? 지금 들어서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고, 위에서 아래까지 전부, 그래도 당장은 안 들키겠지? 적어도 한동안은 전혀 지겹지 않을 수 있을 거야.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걸 전혀 이해 못 하겠지만 나한테는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중요한 중요한 중요한 중요한 중요한 중요한 일이거든요!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능글능글한 여자는 날 잘 이해하고 있는 척하지만, 자기 사지가 불타고 있는 도중에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 그러려면 먼저 펜을 잡고서 순식간에 저 못생긴 안경 아래의 눈알을 푹 하고 그런데 몸에 힘이 없어. 끔찍한 기분이야. 봐, 이래서 약이 필요한 거야. 현대의학 만세지.
현대의학 덕분에 손을 책상 쪽으로 반쯤 뻗은 채 딱딱하게 멈춰서, 멍청하게 생긴 안경 아래서 반짝이는 교수의 수상쩍은 눈초리를 받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야. 특히 내 현재 처지를 고려했을 때는 더더욱.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지만 짧게 말하자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길 내가 이 교수한테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음’ 판정을 받아오기 전까진 만나주지 않겠다는 거야(덧붙이자면 난 지금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는커녕, 교수한테 허락 안 받고 외출할 수 있게 된 지 한 달밖에 안 됐어). 정말 슬픈 일이지 않아? 난 그 사람을 꼭 만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 애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거든. 질적으로 달라. 어떻게 된 거냐면ㅡ아니야, 그 때를 생각하면 너무 두근거려서 안 돼. 교수한테는 비밀로 하고 있는 일이니까 눈치 챌 단서를 주면 곤란하거든. 그러고 보니 그 애를 못 본지도 벌써 2년째인데, 떠나올 때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그랬다간 이 세상은 정말로 정말로 지겨운 곳이 되고 말 거야.
교수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그냥 또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살인충동이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고(항상 있는 일이지) 넘긴 것 같아. 그러더니 친절하게도 테스트는 잠깐 쉬었다가 하자네. 그러더니 갑자기 실실 웃으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하지 뭐야.
“벌써 2년이군요.”
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서 아련한 추억을 느끼는’게 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해. 그게 뭐야?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끔찍할 정도로 지루한 평원 위에 아주 조금 덜 지루했던 순간의 탑들(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괴롭혔을 때, 여동생을 괴롭혔을 때, 엄마랑 아빠를 괴롭혔을 때, 집에 불을 질렀을 때 등등)이 점점이 서 있을 뿐이야. 2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이 빛나는 마천루가 되어 드높이 뻗어 있고 나는 다시 그 마천루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글쎄,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아련한 추억’이라는 게 이거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2년 전에는 치료가 금방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2년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죠.”
난 이틀 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그래도 아직은 젊고 시간도 많잖아요? 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아직 늦지 않았어요.”
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 라고.
만일 내가 사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벨기에로 도피한 살인마라면, 이 깐깐하신 교수께서는 날 경찰에 신고하겠지.
다들 이렇게 말하겠지.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몰라. “오해가 있을 거예요! 그 애가 했을 리가 없어요!”
제발 그러지만은 않기를.
 
어릴 때 얘기를 잠깐 할게.
부모님은 좋으신 분이었어. 아주 좋으신 분이었어. 항상 웃고 계셨지. 완벽한 부모님이셨고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셨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를 하나 들어줄게.
다섯 살 때 자고 있는 여동생 팔다리에 못을 박아서 침대에 고정시켜두고 산 채로 해체한 다음에 불을 질렀을 때도 부모님은 내 탓을 안 했어. 내가 나쁜 짓을 했지만 사실은 착한 애랬어. 내 탓이 아니랬어.
그러니 내가 집에서 키우는 개를 죽이든 옆집 고양이를 죽이든 무슨 영향이라도 있었겠어? 그게 나쁜 짓이라고 말씀이야 하셨지. 그게 나쁜 짓인 걸 내가 모르나. 난 단지 도덕이나 윤리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지루했을 뿐이라고. 덧붙이자면 여동생은 내 지루함을 덜어주기엔 너무 빨리 죽었어.
이 이야기의 요점이 뭔지 알아?
아니, 여동생이 너무 빨리 죽었다는 건 요점이 아니라 오점이지.
이 이야기의 요점이 뭐냐면, 부모님은 내 진짜 모습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야. 부모님한테 나는 선천적인 살인마, 정신 나간 앙팡 테리블이 아니라 “우리 사랑스러운 사과”, “우리 사랑스러운 앵두”, “우리 사랑스러운 강아지”였어. 그들은 내가 지루해 죽어간다는 걸, 그래서 지루함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리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
 
그리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지.
 
그리고 지금, 벨기에까지 왔지만 여전히 내 진짜 모습을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없어. 아르투아 교수는 좀 낫지만, 내가 기껏해야 폭력적인 행위를 좀 하고 고양이나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 교수는 진짜 범죄자를 만나 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들도 있어. 여기 온지 1년째 되던 날에 교수가 나를 한국 유학생 그룹에 소개시켜줬거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나를 ‘푸파’라고 부르는 인간들이 거기에 바글거렸어. 그땐 아직 네덜란드어가 서툴었고 이 근처 지리도 잘 몰라서(아까도 말했지만 외출을 하려면 허락이 필요했거든. 무단으로 외출한 적이야 많았지만 걸리면 곤란하니까)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 중 일부는 내가 무슨 치료를 받고 있는지 알면서도 단지 내가 ‘인형처럼 귀엽게’ 상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한테 괜히 친하게 굴기 시작했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래. 그 사람들은 내가 걸어 다니는 살인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내 인격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모르면서, 어떻게 나랑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겠어?
나는 지루하고 고독하고 끔찍한 영혼이야.
 
면담에 테스트까지 마치고 나서는 바로 기숙사로 돌아와서 외출 준비를 했어. 외출 준비라고 해 봐야 벽을 주먹으로 치는 대신 침대에서 몸부림치면서 온갖 지루함을 쏟아내는 게 전부지만. 오늘은 금요일이고, 일과를 마친 유학생 몇 명하고 같이 와플을 먹으러 가기로 했거든. 잔인한 범죄 다음으로 나를 지루하지 않게 해 주는 건 바로 맛있는 음식이야. 적어도 혀끝에 닿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그다지 잿빛으로 느껴지지만은 않아.
이제 겨우 점심시간인데 와플로 배를 채우자고 약속을 잡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딱 하나밖에 없지. 손을 채 다 씻기도 전에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하나밖에 없고. 머리를 굉장한 분홍색으로 염색하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문을 막 열어젖힌 나를 꼭 껴안으면서 부비부비하는 이 여자의 별명은 비엔나 봉봉. 진짜 이름? 이 사람들은 날 푸파라고 부르는데 왜 나는 이 사람을 비엔나 봉봉이라고 부르면 안 돼? 화학 전공이고, 클래식광이고, 클래식광인 거랑은 어울리지 않게 싸구려 단맛에 목숨을 걸고 사는 비엔나 봉봉.
“비엔나 봉봉.”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푸파!”
난 비엔나 봉봉이 질색하는 표정이 좋아.
비엔나 봉봉은 나를 질질 끌고 자기가 이번에 새로 찾았다는 와플 가게로 향했어. 안트베르펜에서 유명한 가게인데 최근에 여기에 분점을 냈다나봐. 친구들도 먼저 가 있다는데, 점심 먹기도 전에 와플로 배를 채우자는 제안에 어울려 줄만한 친구란 것들도 뻔하지 뭐. 비엔나 봉봉의 온갖 지루하고 잡다하고도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가며 와플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아주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두 사람의 웃는 얼굴이었어.
하나는 기계로 찍어낸 것 같은 단발에 공부 잘 하게 생긴 안경잡이 여자. 입에서 구강 청정제 냄새를 풍겨서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는 이 사람은, 진짜 이름은 물론 따로 있지만 대단히 지겨운 이름이기 때문에 나는 그냥 ‘쿨도어’라고 불러. 구강청정제 이름을 따서 말이지. 수학을 전공하는데 유학생 그룹 중에서도 제일 성적이 좋은 편이어서, 나도 청강을 하다가 모르는 게 생기면 제일 먼저 쿨도어한테 달려가. 유용한 여자지.
그리고 또 하나는 어깨쯤까지 오는 머리를 옅은 녹색으로 염색한 주근깨 여자. 별명은 하프. 왜냐면 취미로 하프를 켜거든! 여기 오기 전까지 나는 취미로 하프를 켜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니까. 집이 잘 산다고 들었고 유학도 집안에서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서 온 모양인데, 막상 와서는 지금까지 못 놀았던 걸 다 놀겠다는 작정으로 머리까지 물들이고 놀고 있지. 심리학 전공이라서 교수랑도 꽤 가깝고, 그래서 교수가 나한테 제일 먼저 소개시켜준 사람이기도 해. 하프가 자기 친구인 비엔나 봉봉을 소개시켜 주고, 비엔나 봉봉이 또 다른 사람들을 잔뜩, 그런 식으로 해서 나를 둘러싼 절망적으로 지긋지긋한 그룹이 완성된 거야.
“교수님이 뭐라고 하셔? 좀 나아졌대?”
하프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했어.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너무 느려. 머리에 총을 들이대도 저렇게 느리게 말하려나. 이런 짓은 그만둬주세요 강도님, 하면서?
“맞다, 푸파. 비교종교학 청강 어땠냐?”
이렇게 물어보는 건 쿨도어. 항상 공부 얘기지. 비교종교학 강의는 쿨도어의 추천으로 들은 건데, 솔직히 지루했지만 이게 강의 자체가 지루한 건지 아니면 내 뇌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지. 지루한 거랑은 별개로 배워가는 건 많았어. 지난 시간에는 각 종교에서 어떻게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는지에 대해 배웠고, 그 전 시간엔 인간이 성스러운 공간의 중심과 성스러운 시간 속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엘리아데의 신화 이론을 공부했고, 그래, 나한테 책을 읽으라고 하더라. 읽다가 지겨워서 던져버린 것만 수십 번이야. 도서관에서 빌린 거였는데.
“자, 자, 공부 얘기는 그만 하고 와플부터 먹자. 여기 주문이요!”
비엔나 봉봉은 언제나 한결같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루해하는 나 역시 한결같고. 주문한 와플이 도착하자마자 세 여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수다를 떨면서 포크를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사이에 앉아 있긴 했지만 여전히 지루해하고 있었어. 이 사람들은 나를 전혀 이해해주지 못하고, 나도 이 사람들이 어째서 이렇게 즐겁게 웃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를 못하니까. 뭐, 와플은 꽤 괜찮았지만. 라즈베리 소스는 처음이었는데 입맛에 맞더라고.
그래 봐야 라즈베리의 희미한 즐거움은 딱 십오 분 만에 사라졌고 세상은 십오 분 만에 다시 잿빛으로 변했어. 기숙사로 돌아가는 동안 다들 주말 계획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야말로 잿빛 중의 잿빛이었지. 쿨도어는 언제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공부, 비엔나 봉봉은 나를 꾀어내서 무슨 맛집 투어를 가려고 하는데 이름만 들어도 지루할 것 같고, 하프는 지금 바로 짐 싸서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무슨 천주교 성지에 가겠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계획인 거 같아. 여기도 이미 천주교 성지 못지않게 지루한데, 진짜 성지에 가겠다고? 성모 발현으로 유명한 바뇌라는 마을? 주변에 전나무 숲이 아름다워? 세상에, 나는 그런 데 갔다가는 급성 재미 부족으로 쓰러지고 말 거야.
한편 나는 어차피 혼자 있어도 벽을 때려 부수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었으니까, 교수한테 허락 받아서 비엔나 봉봉하고 맛집이나 돌아다니기로 했어. 그게 차라리 재밌겠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하고 같이 밥 먹으러 다니는 건 끔찍한 고문이지만 뭐 어쩌겠어? 어차피 삶이란 곧 고문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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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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