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좋은데 자네만 없었으면 좋겠군 (3)

잉어킹 5 3,175
#3
 
"좆이나 까 잡숴. 유기화학 때문에 사람이나 죽이려는 놈들이랑 담판을 지으러 왔다."

마침내 민혁이 말하자, 맨 앞의 ‘나’가 코웃음 쳤다.
 
"그 시간대의 ‘나’도 수강신청 당시의 나를 죽이고 싶다니 어쩌니 이야기하지 않았나? #1에서 보는 것처럼. 그때 개변이 일어나지 않은 건, 그때의 투표가 과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뒤에 있던 ‘나’들이 킬킬거렸다.
 
"메타픽션적인 발언은 집어치워! 세 놈이나 나를 죽이러 온 주제에 피해자인 양 행세하는 것도 구역질이 난다!"
 
민혁이 말하자, 대변인 ‘나’는 사이코패스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닥쳐! 여기 있는 ‘나’는 전부 그 시간대의 ‘나’의 피해자들이다. 어느 곳의 ‘나’는 유기화학때문에 좌절해 차에 치여 식물인간이 되기도 했고, 또 다른 곳의 ‘나’는 그레이트 올드 원의 컬트에 심취해 대마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별들이 올바른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는 죽지도 못하고, 그 날이 오면 몸을 기꺼이 바쳐야 할 끔찍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지. 어떤 ‘나’는 유기화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서 흔히 나오는 과학적 원리고 뭐고 옆집 바둑이한테나 갖다줘버린 세럼을 주사 받아서 세상을 멸망시킬 재앙이 되었지. 안타깝게도 여기 오지는 못했지만, 세럼을 주사받은 ‘나’는 우주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죽지도 못하고 있다. 모두 그 시간대의 ‘나’의 피해자들이다. 그 시간대의 ‘나’는 우리 모두가 받고 있는 고통에 맞설 수 있을까? 그 각오로? 시험이 세 시간 전인데 롤 랭겜이나 돌려대고 있는 그 각오로?"

대변인 ‘나’가 말했다. 민혁은 그의 말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악의와 원한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꼬리 말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다음 카드를 엎었다. 

"근데 너도 여기 있는 거 보니까 랭겜 돌리기는 한 모양인데." 

"아니야!"

대변인 ‘나’가 외쳤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기세가 좀 약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명분이 차고 넘치면 네가 제일 먼저 장판 뜯고 기어 나왔어도 되는 거 아냐?"

민혁이 말했다. 그의 목줄기를 타고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닥쳐! 그 '나'들은...... 보다 나은 침투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했을 뿐이야!"
 
대변인 ‘나’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 ‘나’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고, 명백히 상황은 대변인 ‘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민혁은 속으로 안도했다. 

"세상에, 대변인은 ‘나’가 맞기는 한 건가? 입도 안 닦고 그런 소리를 해 대다니. 그보다 뒤쪽의 너희들."
 
'나'들이 민혁 쪽을 주목했다. 민혁은 목을 가다듬고 마지막 카드를 엎었다.
 
"니들 혹시 드랍 생각은 해본 적 있었냐."
 
"!!"

‘나’들이 동요하는 게 보였다. 민혁이 생각했던 것처럼, ‘나’들은 민혁만큼이나 똑똑하지 못했던 것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민혁은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부식으로 나온 초코파이 한 박스 다 속에 우겨넣은 다음 행보관한테 변명할 때도 이렇게 떠들어대지는 못했으니까.

"보나마나 저 떠버리가 달콤한 말로 꼬셨겠지. 그런데 사람 죽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한 시간대에서 전부 드랍해 버리면 적어도 유기화학은 안 들어도 되는 거 아냐?"
 
"그러면 한 학기를 더 들어야 하잖아!"

대변인 ‘나’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이런 꼴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아니면 취득학점 취소라도 해보려고 하던가."

"닥쳐! 닥쳐! '나'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다! 저 시간대의 '나'를 죽이고 유기화학에 의해 짓밟힌 우리의 삶을 되찾자!"
 
대변인이 외쳤다. 하지만 '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 셋과 무수히 많은 '나'는 죽지 않았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는 신곡 초중반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야, 이 똥 같은 새끼들아! 어서 가라고! 놈을 가서 찢어 죽여! 니들은 내 말만 들으면 되는 거라고! 우리는 이미 합의했어! 합의했다고!"
 
"아니, '나'는 모두 평등하게 행동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기로 했지. 모두가 동등한 관계인만큼 문제가 발생하면 거기 책임도 지기로 했고 말이야. 대변인으로 나선 '나'에 의해 몇 명이나 죽었는지 궁금하군."
 
"궁금해 할 필요는 없어! 어서......"

"책임을 져라."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우악스런 손아귀에 의해 군중 속으로 파묻히더니,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젖은 청바지를 찢는 것 같은 구역질나는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그의 머리니 팔다리가 군중들 위로 날아다녔다. 민혁은 그 과정을 보지 못한 것에 감사했다. 그 난장판이 모두 끝나고, 여기저기서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기가 서로 싸우기 직전까지 심각해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그러자 아까 의문을 제기했던 ‘나’가 민혁 쪽으로 걸어왔다.
 
"지금까지 끼친 피해는 정말 미안했다. 더 이상 네게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 약속한다."

‘나’가 말했다. 민혁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보다 나는 댁들 중 세 명이나 넘게 죽였는데 그건 괜찮은 거냐."
 
"'나'들이 죽인 수없이 많은 그 시간대의 '나'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업보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 다른 ‘나’들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우린 모두 속았을 뿐이다."
 
"그렇구만. 너무 잘 해결되어 소름까지 끼칠 정도네."
 
"지금부터 우리는 모두 드랍이나 학점 취소를 하라고 권유하는 쪽으로 활동하려고 한다. 아, 물론 사람을 죽여가면서 강권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민혁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듯, 황급히 덧붙였다.
 
"이제 '나'한테는 볼일 없는 거지?"
 
"아아.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가."
 
"반이라도 해서 내야겠지. 아니면 니들이 찾아오기 전에 드랍이라도 하던가."
 
"그렇군. 행운을 빈다. 나가는 곳은 위쪽이다."
 
민혁은 그렇게 자기 방 장판을 뚫고 나와, 자기 세계로 돌아왔다. 방 안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피 얼룩도, 털북숭이 시체도 없는 완벽하게 깨끗한 상태였다. 돌아와서 확인해 보자, 시계는 다시 가고 있었다. 결국 민혁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반보다 조금 더 한 과제를 들고 등교했다.
 
#E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반쯤 끝난 과제를 들고, 정시에 강의실에 도착한 민혁은 정시에서 10분이 지날 때까지 열리지 않는 강의실과 교수에 의아해했다. 그러다 그는 미적미적 나타난 조교가 스카치테이프로 A4용지를 강의실 문 앞에 붙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오늘 유기화학 강의는 교수 개인 사정으로 휴강합니다.>
 
조교는 왔던 것처럼 미적미적 걸어 사라졌고, 민혁은 조교가 사라진지 30초가 지나서까지도 사태파악이 되질 않아 멀뚱히 서있었다. 그리고는-

"이런 빌어먹을! 누군지는 몰라도 학기 초에 유기화학 넣은 놈을......"
 
민혁의 입 안에서 '죽이고 싶다'가 맴돌았다. 이미 그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겪었으니까. 결국 민혁은 그 날 유기화학을 제외하고는 강의도 없었기에,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돌아가며 가는 길에 디스를 한 갑 샀다. 

그 뒤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당연히 우리가 알 방법은 없을 것이다. 다만 추측을 해보자면 유기화학을 드랍했던지, 아니면 가까스로 낙제는 면했던지,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집에 가서 과제는 마저 했을 것이다. 저녁이 되기 전에 편의점에도 갔을 것이고.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두 번 다시 민혁의 자취방 장판을 뜯고 '나'가 튀어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혁은 그 일로 무심코 내뱉은 말조차도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끝)
==
(행운 체크 -5)를 성공한 주인공. 어찌 마무리는 지었군요. 다른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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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 잉어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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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Nullify
평화적인 해결 참 좋죠.
잉어킹
실생활의 다른 문제도 대부분 저렇게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로크네스
화학실험 레포트 마감 당일까지 랭겜을 뛰어서 다이아를 가고, 레포트를 딱 4분 늦게 써서 냈더니 교수님이 안받아주신 친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비참한 증오의 연쇄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지...이 글이 그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잉어킹
4분 늦었다고 안 받아주시다니......안타깝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리스트
다행히 평화적으로 끝났군요. 말조심하자는 교훈이 떠오르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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